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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2)

전생의 정보를 이용해 최대한 대비했지만 모든 게 완벽하게 생각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살면서 도망간 적이 없던 것도 아니다. 도망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큰 것도 아니다.

필요하다면 도망갔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 또한 전략의 일환이다.

자신이 죽는다면 가문과 영지는 결국 전생과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 암울한 상황이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굳이 마수의 숲까지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절대로 이곳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페르디움의 미래를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니까.

'하지만....'

도망가면 안 되는 때가 있다.

다음 기회가 없을 때 도망간다면 그 뒤로 남은 것은 내리막길뿐이다.

영지의 사정, 자신의 힘, 외부의 위협,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고려해도 지금 목적지까지 가는 게 최선이자 유일한 돌파구였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가문과 영지는 전생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지셀은 눈을 뜨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얼굴들을.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살리며 목적을 이루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전혀 없다.

전생에서도 수많은 동료와 수하들을 잃으며 전진했다.

'하지만.... 그게 여기서 전부 죽어도 괜찮다는 핑계는 안 되지.'

지셀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용병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이 병신들아! 이제 끝났어! 고용주도 방법이 없는 거라고! 도망 안 가고 뭐 하는 건데!"

튀어나온 남자는 마누스였다.

마누스는 연신 뒷걸음질하며 외쳤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한다고! 다 같이 죽을 필요 없어! 저걸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한꺼번에 사방으로 흩어지면 몇 명은 살아남을 수 있어!"

용병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마누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크게 외쳤다.

다 같이 흩어지며 도망가야 자신이 살 확률이 더 높아진다.

"빨리 도망가자고! 귀족의 미친 놀음에 우리까지 목숨을 걸 필요 없어! 애초에 이따위 숲에 들어오는 게 비정상이었다고!"

그때 카오르가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휘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쪽팔린 새끼. 도망가기 전에 저 새끼는 죽이고 가야겠네."

카오르가 무기를 던져 마누스를 죽이려고 할 때, 지셀이 손을 들며 제지했다.

"됐어. 그럴 필요 없다."

지셀은 바로 마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뭐? 뭐요? 그냥 가라고?"

마누스는 당황했다.

보통 이런 경우 고용주는 자신을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이었다.

게다가 도망가는 자는 직접 죽이겠다고 엄포까지 놓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 선뜻 보내 주다니.

놀란 마음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지셀은 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도망갈 사람은 가도 좋다."

담담한 말에 용병들이 모두 당황했다.

도망가라니, 그렇다면 고용주는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용주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툭 내뱉었다.

"나는 여기서 저놈을 잡을 거다."

"도련님!"

"공자님!"

벨린다와 길리언이 잔뜩 화가 나서 지셀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반드시 이번 일은 성공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게 끝장날 테니까.

가장 신이 난 건 역시 마누스였다.

그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용병들에게 손짓했다.

"뭐 해! 고용주가 도망가라잖아! 빨리들 가자고!"

하지만 용병들은 지셀과 마누스를 번갈아 볼 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앞장서서 싸우며 용병들을 구해 준 지셀이었다.

그런 그가 혼자서라도 싸우겠다고 하는데 쉽게 도망갈 수가 없었다.

뭉그적거리는 용병들을 보며 마누스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외쳤다.

"빨리 오라고! 여기서 다 죽을 셈이야? 뭐 하냐고!"

재촉하는 마누스와 담담한 지셀을 번갈아 보던 토란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저놈만 뚫으면 정말 끝나는 겁니까?"

"그래, 목적지는 코앞이다."

확고한 대답에 토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답했다.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토란!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했어!"

마누스가 소리치자 고든이 그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는 이대로 도망가면 아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근손실이 올 거야. 마음이 계속 불편할 테니까."

"뭐?"

"그러니까 안 간다고!"

"이 무식한 놈아! 너도 미쳤냐?"

그때 여기저기서 용병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대로 가면 쪽팔려서 용병 짓 못 하지."

"지금까지 고용주 덕분에 목숨 건졌는데 그냥 도망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병신은 너다, 마누스! 갈 거면 너나 가라!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너 고용주한테 치료도 받았잖아!"

"고용주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싸워 보자고!"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지셀이 눈을 크게 뜨고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들의 얼굴에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함께 싸워 보겠다는 결의만이 남아 있었다.

지셀은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이길 수 없을 거 같은, 불리한 전투를 앞둔 때마다 봤던 표정.

'이건 마치....'

전생에 함께했던, 그의 수하들이 보여 주던 모습이었다.

비록 용병들의 실력은 그때보다 한참 부족하지만, 각오만은 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지셀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오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얼굴 한가득 띄우고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놈들이 맞나?'

위험한 일을 즐겨 다른 지역까지 휩쓸고 다니는 켈베로스 용병단과 달리, 짐바르 영지에 머무는 용병들은 항상 빈둥거릴 뿐 위험한 임무에 덤벼드는 적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지셀을 따라다니더니 이 며칠 사이에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정말 놀랍군. 제대로 휘어잡았어.'

카오르는 새삼스레 지셀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탄했다.

길리언 또한 용병단장 출신이니만큼, 지금 벌어진 상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벨린다는 이 바보 같은 짓거리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도련님, 잘됐어요. 용병들을 다 앞으로 내보내고 도련님은 빨리 몸을 빼세요."

지셀은 벨린다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허리에 찬 검집을 풀어내 바닥에 버렸다.

"공자님! 좀!"

검집을 버린다는 건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운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보고 벨린다는 성난 표정을 지었지만, 카오르는 피식 웃었다.

"겁 없는 건 정말 마음에 든단 말이지. 왕년의 나를 보는 거 같아."

지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전생에 지셀이 이끄는 용병단이 가장 많이 맡은 의뢰는 바로 몬스터 사냥이었다.

대륙을 휩쓴 괴수들은 블러드 퓌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비록 신체 능력도, 용병들의 실력도 그때보다 부족하지만, 그가 쌓은 경험으로 그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싸워 보자."

지셀이 한마디를 내뱉자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들고 전열을 정비했다.

"아아, 늙는다. 늙어.... 주름이 늘어나면 전부 다 도련님 탓이에요."

벨린다는 체념한 듯 축 늘어져 중얼거렸다.

"이 멍청한 놈들! 너희는 다 뒤질 거다!"

마누스는 악에 받친 말을 던지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블러드 퓌톤이 천천히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은 즐거운 듯 괴성을 지르며 용병들을 향해 그 큰 입을 벌렸다.

"산개!"

지셀의 외침과 동시에 용병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콰아아앙!

입을 벌린 채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블러드 퓌톤은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카아아악!

분노한 블러드 퓌톤은 곧 가장 가까이 있는 용병을 향해 입을 들이밀었다.

용병 하나가 다시 잡아먹히기 직전, 지셀이 번쩍 뛰어올라 블러드 퓌톤의 머리를 검으로 그으며 소리쳤다.

"길리언, 카오르는 나와 함께 머리 쪽의 시선을 끈다! 벨린다는 우리를 엄호해! 나머지는 그 틈을 이용해 몸통을 공격해라!"

블러드 퓌톤의 머리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평범한 공격은 통하지 않지만 마나가 담긴 무기에는 작은 상처라도 입은 것이다.

"카아아아아!"

제 몸에 상처가 난 것을 안 블러드 퓌톤은 분노로 가득 찬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비늘보다 더 붉은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상처를 낸 인간을 용서 못 한다는 듯, 뱀은 곧 거대한 입을 벌린 채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콰아아아앙!

지셀은 재빠르게 몸을 굴려 피했다.

블러드 퓌톤의 머리가 다시 땅에 처박히며 먼지를 뿜어내었다.

그사이 다가온 길리언이 도끼에 마나를 가득 담아 블러드 퓌톤의 머리를 강하게 찍었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블러드 퓌톤의 거대한 머리가 들썩였다.

마나의 양으로만 따지면 길리언이 일행 중 가장 강했다.

그만큼 큰 파괴력에 블러드 퓌톤도 꽤 타격을 입은 듯했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이 다시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상처 자국이 확실히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깊지는 않았고, 오히려 블러드 퓌톤의 분노만 더 돋우었을 뿐이다.

휘이익!

거대한 머리가 길리언을 향해 날아들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통에 미처 피하지 못한 길리언은 마나를 잔뜩 뿜어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제 앞을 막았다.

콰아앙!

"크윽!"

방패가 찌그러지며 길리언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사이 카오르가 블러드 퓌톤의 뒤에 다가가 검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빨리 붙어!"

그그극!

카오르의 검이 뱀의 몸통에 깊숙하게 꽂히자 블러드 퓌톤이 몸을 뒤틀며 그를 공격했다.

"쳇!"

카오르가 검을 놓고 몸을 굴려 피하는 사이, 용병들은 블러드 퓌톤의 몸에 붙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아앙! 카앙!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무기를 휘두르고 찔러도 단단한 비늘은 모든 공격을 막아 내었다.

무기에 마나를 충분히 싣지 않으면 강철과도 같은 비늘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셀과 길리언, 카오르가 번갈아 가며 블러드 퓌톤의 몸 곳곳에 작은 상처를 냈다.

"벨린다! 시선을 끌면서 상처들을 공격해! 기회가 되면 눈을 노려!"

"알겠어요! 아휴, 속상해!"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수많은 단검을 쏘아 내 블러드 퓌톤의 상처에 꽂아 넣었다.

벨린다가 정교하게 다루는 단검은 다른 사람들이 낸 작은 상처들을 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벨린다는 상처를 벌리면서도 계속 블러드 퓌톤의 눈을 노려 공격했다.

협공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블러드 퓌톤은 귀찮은 듯 연신 머리를 흔들어 댔다.

지셀을 비롯한 인물들에게 시선이 쏠려 용병들을 노린 공격도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이야! 상처를 공격해!"

그 틈을 타 용병들이 뱀의 몸에 난 상처에 검을 찔러 넣었지만, 블러드 퓌톤은 근육까지 단단한 탓에 제대로 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아아아아!

벌레 같은 인간들이 달라붙는 게 거슬린 듯 블러드 퓌톤이 괴성을 지르며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콰아아앙!

"커억!"

"으아악!"

꼬리 근처에 달라붙어 있던 용병들이 모두 튕겨 나갔다.

뱀이 꼬리로 쓰러진 용병들을 찍어 내리려 할 때였다.

지셀이 머리 쪽으로 달려들어 다시 블러드 퓌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모두 둔기를 들어라! 안이 물러질 때까지 두들겨!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벌려야 한다! 길리언, 카오르! 다시 시선을 끌어! 벨린다는 계속 엄호해!"

지셀의 말을 듣고 용병들이 눈을 크게 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메이스! 메이스 어디 있어!"

"남는 거 하나 줘!"

"없으면 수레에서 가져와! 다 달라붙어!"

곧 용병들이 무기를 둔기로 바꿔 들고 뱀의 몸통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블러드 퓌톤의 비늘을 내리쳤다.

40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3)

콰앙! 콰앙! 콰앙!

용병들이 뱀의 몸통에 달라붙어 연신 둔기를 두들겨 대자, 블러드 퓌톤이 사방으로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에 얻어맞은 용병들은 단숨에 날아가 버렸지만, 다른 용병이 그 빈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공격을 이어 갔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이 연신 분노에 찬 괴성을 질러 댔다.

머리 쪽에서는 지셀과 길리언, 카오르가 상처를 입히며 주의를 끌고, 꼬리와 몸쪽에는 용병들이 달라붙어 둔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상처를 헤집는 날카로운 단검이 중간중간 눈까지 노리고 날아오니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파리 떼가 주변에서 계속 달라붙으면 누구라도 짜증이 나는 법.

블러드 퓌톤은 더욱더 발광하며 몸을 뒤틀었다.

콰아아앙!

꼬리가 땅바닥을 내리찍을 때마다 용병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이를 악물고 공격을 이어 나갔다.

어떻게든 이 괴물을 없애겠다고 다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길리언! 꼬리 쪽으로 가 용병들을 도와라!"

지셀은 노련하게 뱀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용병들 쪽 상황까지 확인하며 지시를 내렸다.

블러드 퓌톤의 몸에 상처가 늘어갈수록, 꼬리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느려져 갔다.

길리언이 용병들 쪽에 합류하여 공격하니 비늘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한참을 공격한 끝에, 드디어 약간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그극!

"깨, 깨진다!"

한 용병이 외치자 길리언이 도끼에 마나를 가득 담으며 외쳤다.

"비켜 봐!"

콰아아앙!

도끼가 뱀의 몸체에 꽂히며 도끼날이 절반 이상이나 들어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상처.

블러드 퓌톤의 피부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용병들은 희망을 품었다.

"여기! 여기 찔러 넣어!"

용병들은 상처 난 곳을 마구 두들기며 검과 창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에는 들어가지 않던 무기들이, 이번에는 훨씬 수월하게 들어갔다.

내부에 쌓인 충격으로 근육이 물러져 있던 탓이다.

카아아아악!

블러드 퓌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흔들었다.

그 통에 깔리거나 치인 용병들은 뼈가 부러지고 죽어 나갔다.

분명 블러드 퓌톤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느려졌지만, 그 크기에서 오는 파괴력은 여전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셀은 블러드 퓌톤의 이빨을 피하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나마 상처를 낼 수 있는 자들도 전투 초반부터 마나를 아끼지 않고 써 댄 통에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결국 지친 자신들이 먼저 전멸하느냐 아니면 블러드 퓌톤이 먼저 쓰러지느냐의 싸움이었다.

콰아앙! 콰앙!

"으아아아악!"

그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용병들의 비명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고 있어도 이대로 가다가는 용병들이 먼저 전멸할 판이었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자신들이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때, 블러드 퓌톤이 눈을 시뻘겋게 빛내며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부웅!

콰아아앙!

얻어맞은 몇몇 용병들이 날아가고 그 틈을 타 블러드 퓌톤이 빠르게 몸을 빼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블러드 퓌톤이 용병들과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자, 용병들이 희망에 찬 말을 내뱉었다.

"뭐, 뭐야? 설마 도망가는 거야?"

"이대로 끝나는 건가?"

"일단 뒤로 이동해! 부상자들 뒤로 빼!"

용병들도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으며 웅성거렸다.

이대로 블러드 퓌톤이 물러간다면 가장 좋은 결과였다.

강력한 마나 블레이드나 고서클 마법이 아니면 상처조차 낼 수 없다는 비늘을 깨고 무기를 꽂아 넣었다.

일행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과였지만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모두 죽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잘 싸웠지만, 결국 이들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무, 무승부로 하면 안 되나?"

고든이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사아아악.

몸을 뺀 블러드 퓌톤은 일행들을 노려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깨지고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비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도 단숨에 몸을 감아 으깨 버리는 블러드 퓌톤에게 이 정도 피해를 준 것만으로도 놀라울 일이다.

벨린다는 그 틈을 타 다시 지셀에게 물었다.

"도련님, 이제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들지 않나요?"

"아직은."

"그렇죠. 도련님은 한번 말해서 들은 적이 없죠. 가끔 보면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다니까요."

"그래? 나 정도면 꽤 말을 잘 듣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벨린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리언은 용병들을 둘러보더니 지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공자님,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쪽이 먼저 전멸할 거 같습니다. 지금 방식이 정석적인 상대법이긴 합니다만, 계속하기에는 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맞아. 하지만 지금 전력으로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잖아. 최대한 현재 상황을 유지하면서 마나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기회를 노려야 해."

"역시 눈을 노려야 할 거 같습니다."

블러드 퓌톤은 흔하지는 않지만, 마수의 숲이 아닌 다른 지역에도 서식하는 몬스터다.

그렇기에 단단한 비늘에 보호되지 않는 눈이 약점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눈을 노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블러드 퓌톤의 공격을 피하며 눈 근처로 접근해야 하고, 접근해 공격하더라도 순식간에 눈꺼풀을 덮어 보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혼란한 틈을 타 눈을 공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장은 그 수밖에 없는 거 같군. 지금까지처럼 벨린다가 기회를 노려 봐."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어라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블러드 퓌톤이 천천히 일행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상처 때문인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블러드 퓌톤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카아아아!

"온다!"

"아까처럼만 해! 상처를 잘 노려서 쑤셔 넣자고!"

"누가 먼저 죽나 보자!"

블러드 퓌톤이 빠르게 다가오자 용병들은 전처럼 대열을 짜고 방금 낸 상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 가까이 다가온 블러드 퓌톤은 마치 망치를 내리치듯 용병들을 하나하나 머리로 찍어 댔다.

콰앙!

"으아아악!"

콰앙! 콰앙!

용병들이 다가가려 하면 잽싸게 몸을 빼며 다시 머리를 내려찍는다.

한 번 내려찍을 때마다 용병 하나가 몸이 박살 나며 핏물로 변해 버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들을 견제하며 하나씩 각개 격파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 물러나!"

용병들이 기겁하며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사아아악!

블러드 퓌톤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날름거렸다.

일행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블러드 퓌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전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도무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아아악!

블러드 퓌톤이 다시 몸을 꿈틀거리며 다가오자, 용병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 지셀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외쳤다.

"용병들은 뒤에서 대기하며 기회가 나면 붙어라! 길리언, 카오르, 벨린다는 아까처럼 상대해!"

용병들은 잽싸게 뒤로 물러나, 첫 전투 때처럼 네 사람이 싸우는 모습만 구경하게 되었다.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실력이 안 따라 주니 어쩔 수 없었다.

콰앙! 콰앙!

네 사람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블러드 퓌톤의 공격을 피하며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블러드 퓌톤도 움직임이 신중해져서 처음처럼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처를 낸다고 하더라도 얕은 상처뿐이니 피해를 제대로 줄 수가 없었다.

콰앙! 콰앙!

시간이 흐를수록 네 사람은 점점 마나가 떨어지고 지쳐 피하기에만 급급해졌다.

보다 못한 카오르가 크게 외치며 블러드 퓌톤의 머리 쪽에 가까이 다가갔다.

"시발! 내가 미끼가 될 테니 눈을 노려!"

카오르가 범위에 들어오자 블러드 퓌톤은 집요하게 머리로 그를 노리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이 몸에 상처를 내도 무시했다.

콰앙! 콰앙!

엄청난 위압감과 속도에 질려 카오르는 차마 검을 휘두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피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벨린다가 찰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콰앙!

블러드 퓌톤의 머리가 땅에 박히고, 카오르가 가까스로 피한 그 순간.

"죽어!"

벨린다의 단검이 블러드 퓌톤의 큰 눈을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남은 마나를 단검에 모두 담았다.

여기서 유의미한 상처를 내지 못하면 꼼짝없이 모두 죽을 테니까.

그런데 그 순간, 벨린다는 블러드 퓌톤과 눈을 마주쳤다.

뱀이 마치 그녀를 비웃고 있는 듯 보였다.

"설마...."

타앙!

마나가 가득 담긴 단검은 블러드 퓌톤의 안구에 부딪혀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말도 안 돼!"

마수의 숲에 살고 있는 블러드 퓌톤은 그들이 아는 블러드 퓌톤과 달랐다.

안구 겉면이 오히려 비늘보다 더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블러드 퓌톤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알려진 눈까지 이렇게 단단하다면, 약점이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모두가 경악하는 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미 카오르는 블러드 퓌톤이 노린 자리로 몰려 있었다.

휘이익!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던 꼬리가 카오르를 향해 휘둘러졌다.

영악하게도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지금까지 꼬리를 쓰지 않고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안 돼!"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블러드 퓌톤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미끼였다.

카아아아!

그 순간, 블러드 퓌톤의 머리가 기묘하게 꺾이며 다가오는 지셀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내리꽂혔다.

꼬리의 움직임마저 몸을 틀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었다.

이미 블러드 퓌톤에게 다가가고 있던 지셀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코어 세 개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공격을 버티려는 순간이었다.

"도련님!"

갑자기 나타난 벨린다가 지셀을 강하게 밀쳐 냈다.

콰아아앙!

"벨린다!"

옆으로 나동그라진 지셀이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쿠우웅!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간 벨린다는 나무에 부딪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왈칵 피를 토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부딪치는 와중에도 몸을 틀어 충격을 최소화한 것이다.

"으, 으... 도망가라고.... 멍청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빨리 영지로 돌아가서 반성하고 감옥에 들어가.... 하여튼 저 새끼는 한번 말해서 들은 적이 없어...."

쓰러진 벨린다가 연신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카오르! 벨린다를 구해!"

지셀이 다급하게 외치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카오르가 벨린다를 업고 뒤로 빠졌다.

사아아악!

블러드 퓌톤은 만족스러운 듯 혀를 날름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 목표로 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단검을 휘두르며 거슬리게 하던 먹잇감을 무력화시켰으니 기분이 좋아질 만했다.

그러나 지셀은 몬스터 따위에게 장난감 취급 당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블러드 퓌톤을 노려보다가 길리언에게 말했다.

"길리언, 너는 몸 쪽으로 가서 상처를 마저 키워라. 기회가 되면 용병들과 함께 공격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머리를 혼자서 상대하시겠다는 뜻입니까?"

41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4)

"그래. 그동안 몸통과 꼬리 쪽에 상처를 더 내도록 해."

"무리입니다. 눈도 약점이 아닌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망을...."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러드 퓌톤이 길리언을 공격했다.

콰아앙!

가까스로 피한 길리언에게 지셀이 다시 외쳤다.

"어서! 일단 상처를 키워라! 혼자 있어야 나만 노릴 것이다!"

길리언은 어쩔 수 없이 뒤쪽으로 빠졌다.

그러자 블러드 퓌톤이 눈을 빛내며 지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의 거대한 머리가 지셀에게 쏘아져 나갔다.

몸과 꼬리를 공격하는 길리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꼬리를 때때로 흔들어 견제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눈앞에서 알짱거리며 자신을 괴롭혔던 지셀을 단숨에 죽이려는 듯, 블러드 퓌톤은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콰앙! 콰아앙!

지셀은 블러드 퓌톤의 공격을 피하며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렸다.

약점이라는 눈에도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이상, 현재 전력으로는 블러드 퓌톤을 쓰러뜨리기가 불가능했다.

만약 지셀이 전생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단숨에 비늘과 몸통을 벨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경지.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을 써야 했다.

비록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말이다.

'웬만하면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콰앙! 콰앙!

카아아아아!

지셀은 공격을 아예 시도하지도 않고 오직 피하는 것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가 부족하다 보니 낼 수 있는 속도에 한계는 있지만, 그의 기술은 마스터를 뛰어넘을 정도로 극에 이르렀다.

수십 번을 공격해도 지셀이 절묘하게 피하기를 반복하니 블러드 퓌톤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결국 그 본성은 몬스터에 불과하다.

'와라.'

지셀은 마치 약 올리듯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블러드 퓌톤을 도발했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이 거대한 입을 벌린 채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몬스터 특유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지셀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피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신중한 눈으로 벌어진 입 안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뒤로 빠져 있던 카오르가 지셀의 행동을 보며 놀라 외쳤다.

"이, 이 미친! 진짜 미친놈이었잖아!"

가물거리는 눈으로 힘겹게 전황을 지켜보던 벨린다도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제발 그냥 도망가라고요...."

"공자님! 안 됩니다!"

길리언이 기겁해서 외친 그 순간.

지셀은 다가오는 블러드 퓌톤의 입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지셀은 피부로 느껴지는 독기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예상대로 블러드 퓌톤의 입 안은 겉가죽과 달리 부드러운 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공격이 먹히겠어.'

하지만 공격이 통한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블러드 퓌톤의 이빨에서 새어 나오는 독 때문에 지금도 지셀의 옷이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 독은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도 단번에 죽일 정도로 강력하다.

그렇기에 블러드 퓌톤이 악명 높은 마수의 숲에서도 다른 몬스터를 누르고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나로 잠깐은 독을 막을 수 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최대한 빨리 놈을 죽이고 빠져나가야 했다.

지셀이 두 번째, 세 번째 마나 코어를 활성화하자 그의 전신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블러드 퓌톤이 혀와 목의 근육을 움직여 지셀을 삼키려 했다.

"크읏!"

목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지셀은 마나를 검 끝에 집중시켜 블러드 퓌톤의 입천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우욱!

크아아아아아아!

갑작스러운 고통에 블러드 퓌톤이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러 댔다.

지셀이 뛰어들자마자 뱀의 머리를 공격하며 블러드 퓌톤을 유인하던 길리언은, 블러드 퓌톤이 몸을 비틀고 꼬리를 마구 흔들며 요동치자 일단 뒤로 물러섰다.

블러드 퓌톤이 고개를 들고 있어 입 안이 보이질 않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설사 지셀이 죽더라도 블러드 퓌톤을 죽여야 자신들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다.

길리언은 블러드 퓌톤의 몸을 타고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발광하는 이때가 기회라 생각한 것이다.

"이놈! 공자님을 뱉어 내라!"

콰앙! 콰앙!

길리언이 마나를 잔뜩 머금은 도끼로 블러드 퓌톤의 머리를 연신 찍어 댔다.

블러드 퓌톤의 머리 비늘이 조금씩 깨지고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입 안에 들어간 지셀에 온 신경이 쏠린 블러드 퓌톤은 길리언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아예 자리를 잡고 수차례 타격하는 데에는 블러드 퓌톤의 단단한 비늘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카아악!

블러드 퓌톤은 머리를 뒤로 뉘며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에 붙은 길리언을 땅바닥에 처박을 셈이었다.

콰아아아앙!

땅이 파일 정도로 뱀의 머리가 땅에 강하게 부딪혔지만, 길리언은 충돌 직전에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셀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었다.

위아래가 뒤집히면서, 입천장에 꽂아 넣었던 검에 힘을 주기 쉬운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지셀은 블러드 퓌톤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자세를 고정하고 모든 마나를 폭발시켰다.

세 개의 코어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며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검을 통해 블러드 퓌톤의 머리로 폭발하듯이 쏟아져 나갔다.

콰콰콰콰콰쾅!

카아아아아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은 다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벌떡 세웠다.

하지만 지셀은 입천장에 매달린 채 끝까지 모든 마나를 쏟아 넣었다.

카아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이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온몸을 꿈틀대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용병들과 함께 잽싸게 뒤로 물러나 블러드 퓌톤을 바라보았다.

블러드 퓌톤은 고통스러운 듯 스스로 몸을 땅바닥에 연신 던지며 굴렀다.

콰아앙! 콰아앙!

입 안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블러드 퓌톤의 모든 이빨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독이 입 안의 모든 것을 녹일 듯이 뿜어져 나왔다.

지셀은 마나를 몸에 둘러 독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냈다.

치이이이이익!

마나와 접촉한 독이 끊임없이 증기를 내며 타올랐다.

"크으으으읏!"

이제는 지셀과 블러드 퓌톤,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의 대결이었다.

카아아아아악!

급기야 블러드 퓌톤은 제 머리를 사정없이 땅에 찧어 대기 시작했다.

입 안에 붙은 지셀을 떨어트리려는 것이다.

콰아앙! 콰아앙!

하지만 부드러운 입천장에 검을 단단히 박아 넣은 지셀은 아무리 흔들려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죽기를 각오한 듯, 마나를 전부 짜내고 있었다.

"크으으읏!"

지셀의 입가에서 가느다랗게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세 개의 코어가 모두 돌아가기 시작하자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몸이 버티지 못했다.

치이이이익!

시커먼 독연 사이에서 지셀이 일으키는 검붉은 아지랑이가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의 입에서 그동안 몇 번이나 봤던 검붉은 연기가 나오자, 용병들은 긴장해 표정을 굳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용주가 벌이는 저 미친 짓이 제발 성공하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크으으윽!"

세 개의 코어가 모두 폭발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근육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세하게나마 블러드 퓌톤의 독 기운이 몸 안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손이 떨려 오고, 온몸을 칼로 난자하는 듯한 고통이 그를 덮쳐 왔다.

얼굴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갔다.

평소보다 몇 배나 강력한 마나를 뿜어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드드득!

근육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은 뼈였다.

가속화된 코어를 견디지 못한 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에도 지셀은 멈추지 않았다.

수명까지 뽑아 쓸 기세로 모든 마나를 폭발시킬 뿐이었다.

아마 조금만 더 지나면 독에 당하기도 전에 몸이 완전히 부서져 버릴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지셀은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끝이다.'

검에 몸을 맡길 때부터 편한 삶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삶은 요원할 것이다.

그저 항상,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카아아악!

곧이어 블러드 퓌톤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다.

땅에는 더 이상 부딪치지도 않고 비틀거리며 몸을 흔들 뿐이었다.

지셀은 이제 밖으로 빠져나가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이대로 있다가 정신을 잃으면 몸이 블러드 퓌톤의 목으로 넘어가거나 독에 녹아 버릴 것이다.

휘청거리던 블러드 퓌톤이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마자, 지셀은 검에서 손을 떼고 마지막 힘을 다해 입 밖으로 몸을 날렸다.

쿵!

지셀은 바닥에 튕기듯이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몸을 움직일 힘이 없어 자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공자님!"

길리언이 그런 지셀을 향해 달려와 부축하려 했다.

치이이익!

"크윽!"

그의 몸을 잡은 길리언의 손이 순식간에 화상을 입었다.

블러드 퓌톤의 독이 마나와 함께 타오르며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길리언은 손에 모든 마나를 집중시켜 겨우 지셀을 뒤로 옮길 수 있었다.

땅에 눕힌 지셀의 몸에서는 계속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열기를 감당하지 못한 용병들이 옆으로 냉큼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지셀은 그런 상태에서도, 가물거리는 눈으로 블러드 퓌톤을 바라보았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독 어린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막아!"

"고용주를 지켜라!"

"다가오지 못하게 해!"

용병들이 다시 무기를 치켜들며 지셀과 블러드 퓌톤 사이를 가로막았다.

카아아아아....

처음과는 달리 블러드 퓌톤의 움직임이 매우 느렸다.

"쳐라!"

길리언의 외침에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 나가려던 찰나였다.

쿠웅!

일행 바로 앞까지 다가온 블러드 퓌톤이 그 몸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주, 죽었나?"

"아니, 아직 살아 있어!"

"지금 죽이자!"

카오르 또한 다시 검을 들고 외쳤다.

"독을 뿜어내니까 머리는 피해! 몸통을 아예 갈아 버리자고!"

블러드 퓌톤은 누운 채로 혀를 날름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정말 끈질긴 생명력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겁을 먹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용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가 블러드 퓌톤의 상처에 무기를 연신 꽂아 넣었다.

블러드 퓌톤은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쓰러져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셀은 힘겨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행이군.... 이제 끝났어...."

용병들은 온 힘을 다해 블러드 퓌톤을 공격했다.

콰악! 콰직!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던 블러드 퓌톤은 결국 모든 상처가 찢어지고 걸레짝처럼 변했다.

사아아아아....

피가 터져 나오고, 상처가 쪼개지고 짓물러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지셀을 노려보던 블러드 퓌톤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타고난 강력함으로 적수가 없었던 이 지역의 절대자는.

"카아아아...."

결국 마지막 비명을 내뱉으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42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5)

공포에 사로잡힌 용병들은 블러드 퓌톤이 죽었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이제 죽었다!"

길리언이 몇 번이나 외치고 나서야 용병들은 무기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해 붉은 노을이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백 개의 무기가 꽂힌 채 쓰러져 있는 거대한 뱀의 사체는, 노을빛을 받아 더욱더 어둡고 붉게 보였다.

그 장엄한 광경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블러드 퓌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용병들은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 하하.... 이겼다.... 이겼다고!"

한 용병의 탄성을 필두로 모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잡았다! 이 괴물을 잡았어!"

"으하하하! 정말 이놈이 죽었어!"

절대 이길 수 없을 거 같았던 몬스터를 자신들이 죽였다.

아니, 이건 그들의 고용주가 혼자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용주는 괜찮나?"

"가 보자!"

용병들이 우르르 지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셀은 누운 채 살짝 손만 들고 힘겹게 말했다.

"어.... 다들... 고생했다...."

그 모습에 용병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살았다! 고용주가 살아 있어!"

"와아아!"

이길 수 없는 적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기쁨에 용병들의 환호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지셀이 대단한 활약을 보여 준 점도 그들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으하하하, 지셀 용병단 만세다!"

"지금은 그냥 지셀 용병단으로 하자고!"

용병들이 신나게 지셀의 이름을 연호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웃고 떠드는 용병들을 보며 지셀은 옅게 미소 지었다.

"단순한 놈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지셀은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떴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길리언이 놀라며 말했다.

"공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지셀은 누운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벨린다는?"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안정을 위해 약초를 먹고 잠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병들 피해는?"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전멸했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공자님,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공자님이 죽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길리언은 답답한 듯 그를 다그쳤다.

차라리 용병들이 다 죽을지언정 시간을 들여서 잡아야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고용주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겠어. 길리언도 점점 벨린다를 닮아 가는군."

지셀이 농담을 건네자 길리언이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카오르가 다가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살면서 미친 짓 하는 인간을 많이 봤지만, 공자님만큼 미친 사람은 처음입니다. 저 괴물을 그런 식으로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자꾸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

지셀은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곧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으윽!"

"이런, 조심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상처가 심합니다."

길리언이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지셀이 천천히 제 몸을 살펴보았다. 온몸에 붕대가 빠짐없이 감겨 있었다.

아직도 전신이 저릿저릿한 걸 보니, 들어온 독이 다 빠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 안의 나쁜 기운이야 마나를 운용해 뽑아내면 되겠지만, 망가진 뼈와 근육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았다.

이번 생에 이 정도로 마나를 쓴 건 처음이었다.

지금 몸 상태로는 짧은 시간만 써도 버티기 어려운 기술을,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 사용했으니....

몸이 완전히 엉망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셀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블러드 퓌톤을 잡은 건 해가 질 즈음이었는데,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절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지셀이 깨어난 걸 확인한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장이 드디어 깨어났다!"

"대장, 괜찮수?"

"오오, 믿고 있었다고!"

용병들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지셀 주변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지셀은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가득했다.

그리고 눈빛에서 느껴지는 신뢰감.

목숨을 거는 전투를 거듭하며 지셀과 이들의 유대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해졌다.

비록 계약으로 시작한 관계지만, 이제는 목숨을 걸고 함께하는 사이로 변한 것이다.

'옛날 생각 나네.'

지셀은 왠지 그리운 기분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루를 더 쉴 테니 충분히 쉬고 부상을 살펴라. 몬스터들은 이제 나타나지 않을 거야."

용병들은 긴가민가했지만, 지셀을 믿고 편히 휴식을 취했다.

놀랍게도 정말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들은 체력을 충분히 회복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얼마간 움직인 후, 주변을 둘러본 지셀이 용병들에게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 앞이다."

용병들은 기대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돈이 되는 게 있을까?"

"금이나 은 같은 걸 수도 있어."

"어쨌든 결국 도착하긴 하는군."

설레는 마음으로 다들 마지막 목표를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광경에, 모두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건...."

"이거 실화야?"

"어, 엄청나잖아!"

용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길리언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지셀을 돌아보았다.

"고, 공자님. 정말, 정말 돈이 되는 게 있었군요. 이, 이건...."

떠듬거리는 길리언을 마주 보고 지셀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아주 비싼 물건이지."

그들의 눈앞에는 돌에 붙어 푸른 빛을 내뿜는 수정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각 하나하나가 내는 빛은 희미하지만, 무수히 많은 조각이 모이니 어둠으로 가득 찬 숲도 환했다.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수정은 온 세상을 통틀어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룬스톤이라 불리는 광물이다.

룬스톤은 마력을 품고 있어, 마법 도구나 결계 등을 만들 때 사용된다. 마법사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채취할 수 있는 곳도 적고, 그 양도 극히 적다 보니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런 룬스톤이 이곳에는 돌멩이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우와아아아!"

"엄청나다! 이게 죄다 룬스톤이야!"

"이, 이게 얼마야 도대체?"

용병들이 흥분하며 날뛰었다. 지셀 또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생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구나.'

기록만 읽고 막연하게 상상한 것과 직접 본 것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진 룬스톤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을 잊을 만큼 기쁨이 차올랐다.

용병들은 떠들다가 뒤늦게 놀라서 지셀을 돌아보았다.

"정말 돈이 되는 게 있었잖아?"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우리가 한 게 정말 미친 짓이 아니었다고!"

용병들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룬스톤이 가득 깔린 이 엄청난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제정신을 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셀이 용병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 고생했다. 너희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용병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 또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싸움을 치러 왔다.

그 모진 고통을 이겨 내며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다시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무사히 도착했으니 추가 수당을 지급하겠다. 기존 의뢰비의 세 배를 주지. 죽은 자들도 그 유가족에게 같은 위로금을 보내 주겠다."

"와아아아! 화끈하다!"

"역시 돈 자랑은 대장님이 최고다!"

"완전 대박이야! 대박!"

용병들은 무기까지 집어 던지며 신나게 외쳤다.

엄청나게 고생하고,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도착한 곳이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쁜데 수당이 세 배로 늘어났다.

확실히 그들의 대장은 쓸 때는 통쾌하게 쓰고 자신들을 다룰 줄 알았다.

그때 길리언이 지셀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공자님, 이미 많은 보수를 지급했습니다. 굳이 돈을 더 줄 필요가 있습니까? 죽은 자들의 가족한테까지 지급하려면 돈이 많이 들 겁니다."

세상에 고용된 용병이 죽었다고 그 가족한테 위로금까지 보내는 고용주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용병들이 받는 보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수당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일단 돈을 받았으면 죽든 살든 그걸로 끝이다.

가끔 일이 성공해서 보너스를 주는 고용주도 있긴 하지만, 수당의 세 배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괜찮아. 안 쓸 거면 모르겠지만 쓸 거면 확실히 쓰는 게 낫지. 그동안 목숨 걸고 고생한 이들에게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하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길리언은 말없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까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돈이 아깝지 않은가?'

그간 길리언이 본 지셀은 귀족치고는 검소한 편이었다.

보통 지셀 또래의 젊은 귀족들은 허영심 때문에 엄청나게 돈을 쓰는 편인데, 지셀은 단 한 번도 사치를 부린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영지가 가난하니 어쩔 수 없이 아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동안 본 바로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셀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아끼지 않고 써 댔다.

'다른 건 몰라도 공자님의 그릇은 정말 범상치가 않구나.'

길리언도 용병단을 이끌어 봤기에, 지셀처럼 후하게 보상해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제 어린 주군은 돈 따위에 구속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인 모양이라며, 길리언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강력한 안정 약초를 먹고 잠들었던 벨린다도 깨어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아.... 정말 룬스톤이 저렇게나 많이.... 정말 성공하셨네요.... 말도 안 돼...."

고통 때문에 입술이 갈라지고 초췌해진 그녀가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다.

지셀은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벨린다 덕분이지. 그때 몸으로 막아 주지 않았으면 아마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생각보다 몸도 단단한데?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벨린다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답했다.

"하, 다음부터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더럽게 냄새나는 괴물 입에는 왜 들어간대...."

"그래, 그래. 어쨌든 다 해결됐으니 이제 마음 놓아도 돼. 돌아가면 바로 치료부터 하자고. 충격 때문에 마나가 역류해서 내부가 완전히 진탕 된 거 같아. 그나마 장기가 안 터져서 다행이야."

벨린다는 한참을 쉬었는데도 여전히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강력한 충격을 받고서도 목숨을 건졌지만, 그 대가로 내부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나 흐름이 망가진 데에는 포션과 약초도 큰 효과가 없었다. 흐름이 안정될 때까지 쉬는 것이 최선이었다.

"흥... 제가 잘 피한 거죠.... 갑작스러워서 그랬지, 평소 같았으면 안 맞았을걸요...."

몸져누운 채로도 여전히 자부심 넘치는 그녀에게 지셀은 웃으며 모포를 덮어 주었다.

만약 벨린다를 영지에 두고 왔다면 길을 내는 일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벨린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알았어. 이제 푹 쉬어. 곧 돌아갈 테니까 조금 더 자도록 해."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눈을 감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육포 그냥 먹지 말고... 양념 꺼내서... 수프 끓여 먹어요...."

"알겠어, 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쉬어."

지셀이 타박하자 그녀는 흐릿하게 웃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벨린다가 잠든 걸 확인하고 지셀은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럼 돈 복사를 시작하자."

43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1)

"그렇지! 이게 돈 복사지."

"이거 하나하나가 금괴나 마찬가지라고."

"대장이 이제 북부 최고의 부자가 되는 건가?"

용병들은 신이 나서 한마디씩 하며 채광을 시작했다.

채광이라고 해 봐야 돌을 박살 내어 적당한 크기가 되면 수레에 싣는 것뿐이니 둔기 몇 개만 있어도 충분했다.

세부적인 가공은 영지에서 할 테니 용병들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몇몇 용병들이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야야, 이거 좀 주워 가자."

"그래, 이거 아주 작은 것도 엄청 비싸다고."

"부스러기만 좀 챙기면 모를 거야."

이런 일을 할 때 고용주가 모르게 조금씩 빼돌리는 건 용병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세 배의 보수도 좋고 자신들을 잘 챙겨 주는 것도 고맙지만, 물건을 빼돌리는 건 그와 별개 문제로... 몸에 밴 당연한 습성이자 관행 같은 거였다.

그때 고든이 모두에게 들리게 아주 큰 소리로 당당히 외쳤다.

"난 안 주워 가! 보수 세 배로 충분하다고!"

"이, 이 새끼가?"

"쉿! 조용히 해! 너도 가져가면 좋잖아!"

다른 용병들이 당황하며 외치자 고든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다시 외쳤다.

"나는 돈 같은 거 전혀 관심 없어!"

용병들은 과할 정도로 크게 외치는 고든을 미친놈 보듯 흘기며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을 감탄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지셀이 길리언에게 속삭였다.

"저런 애를 조심해야 해. 돈에 관심 없다고 하는 용병들이 더 환장하더라고. 돈에 관심이 없으면 애초에 용병 일을 안 하겠지."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용병들에게 경고했다.

"만약에 부스러기 하나라도 가져간 게 밝혀지면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계약 위반이니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은 없겠지? 쓸데없는 욕심은 부리지 마라."

길리언이 으르렁거리자 용병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작업을 하면서 작은 룬스톤 한두 조각 정도 몰래 챙겨 볼까 했는데, 저렇게 강경하게 나오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든이 갑자기 바지 속에 손을 넣고 몇 번 주물럭거리더니, 룬스톤 조각을 몇 개 꺼내 바닥에 툭 던져 버렸다.

"이 새끼가?"

"뭐야? 언제 챙겼어!"

"야, 이 미친놈아!"

용병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욕하자, 고든은 코를 몇 번 훔치더니 쌩하게 자리를 피해 버렸다.

어이가 없어 눈만 깜박거리는 길리언에게 지셀이 다시 속삭였다.

"내 말 맞지? 크큭."

"...그렇군요."

길리언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용병들에게 강조했다.

"목숨이 아깝다면 부스러기 하나도 빼 먹지 말고 모두 싣도록 해라."

단호한 어조에 용병들은 연신 입맛만 다셨다.

그동안 길리언의 실력은 충분히 봐 왔으니 함부로 덤비거나 반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용병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 나갔다.

살아남은 것도 감격스러운데 엄청난 보수까지 받을 예정이니, 부가 수입이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았다.

"자자, 빨리 담자고."

"붙어 있는 돌을 최대한 깨서 털어. 많이 담아야지."

용병들이 떠들면서도 열심히 작업하자 수레에는 금세 룬스톤이 가득 담겼다.

지셀은 수레가 차는 걸 지켜보다가 용병들에게 몇 대는 비워 두라 지시했다.

"아니, 왜요?"

"많이 가져갈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용병들이 질문하자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퓌톤의 시체를 가져갈 거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용병들은 의아해했다.

"그걸 왜 가져갑니까? 가져가서 드시려고요?"

"저 큰 거를 어떻게 가져갈 생각이십니까?"

룬스톤으로 수레를 채우면 벌어들일 돈이 얼마인데, 그걸 마다하고 시체부터 가져가겠다는 지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수레 몇 대에는 디루스 엔트의 내피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였으니, 블러드 퓌톤의 시체까지 실으려면 룬스톤은 얼마 싣지 못할 터였다.

"블러드 퓌톤의 시체가 있으면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을 거다. 앞으로 도로를 만들 때도 그 피와 고기를 주위에 뿌릴 생각이야. 그러면 길을 내고서도 몇 달은 안전하겠지."

용병들이 눈을 끔뻑이자 지셀은 조금 더 풀어 설명해 주었다.

"몬스터들이 접근을 안 하니 우리가 돌아갈 때도 안전하다는 얘기다. 가죽과 껍질도 방어구를 만들 수 있고, 독은 무기에 발라서 쓸 수 있을 테니까. 시체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

용병들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우리 대장은 나이도 젊은데 가끔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같단 말이지."

"그러게, 저런 건 생각도 못 했네."

몬스터는 다른 개체의 냄새에 민감하다.

블러드 퓌톤처럼 강력한 몬스터의 체취가 느껴진다면 근처에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수레를 전부 써도 룬스톤을 모두 실을 수는 없었다.

남은 룬스톤을 안전히 가져오려면 이번에 블러드 퓌톤의 시체를 처리하는 게 나았다.

용병들은 수레 몇 대에 룬스톤을 가득 채우고, 이번에는 블러드 퓌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칼이 들어갈 수 있게 길리언과 카오르가 공간을 만들어라."

지셀도 현재 몸이 정상이 아니라 제대로 마나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길리언과 카오르가 마나를 이용해 끙끙대며 뱀의 비늘을 걷어 냈다.

어느 정도 틈이 생기면 용병들이 달려들어 열심히 사체를 잘라 냈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크고 단단해 자르는 데만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룬스톤을 채굴하고 블러드 퓌톤의 시체를 잘랐을 뿐인데 벌써 저녁이 다가온 것이다.

"작업을 마치면 여기서 쉬고 내일 돌아간다."

지셀의 말에 용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용병들은 블러드 퓌톤의 사체를 토막 낸 뒤, 수레에 가득 싣고 줄로 단단히 묶었다.

덩치가 워낙 크니 전부 가져가는 건 엄두도 못 냈다. 수레에 실은 양은 사체의 절반도 못 되었다.

하지만 지셀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고 작업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조만간 다시 와서 나머지 시체도 챙길 생각이었다.

잠시 후 수레가 꽉 차자 용병들은 손을 번쩍 들며 환호를 내질렀다.

"으아아, 다 했다!"

"더 이상 실을 수도 없어."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모든 작업이 끝나고 용병들은 오랜만에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경계를 서고는 있지만, 블러드 퓌톤의 시체 때문인지 이번에도 몬스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날이 밝자 용병들은 길을 마저 내고, 열심히 수레를 끌며 이동했다.

말이 없으니 인간이 직접 손으로 밀고 끌어야 해서 이동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룬스톤도 돌에 붙은 채로 실었고, 블러드 퓌톤의 시체도 그 크기와 무게가 만만치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워낙 짐을 높이 쌓아서 천으로 덮어 가려도 아래쪽은 훤히 보이는 상태였다.

"끄응, 말 대신 수레 끄는 짓은 처음 해 보는군."

"짐 옮기는 게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거 같아."

"어느 정도 길을 냈으니 이제 인부들이 올 수 있겠지."

돌아가는 건 즐겁지만 종일 무거운 수레를 끌고 움직이다 보니 작은 불평불만들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편했다. 오면서 길을 내 두기도 했고, 블러드 퓌톤의 시체 때문에 몬스터들도 습격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느릿느릿하게 가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일행들은 그들이 남긴 익숙한 흔적들을 확인하고 숲의 끝자락에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어이, 거의 다 왔어."

"오늘 밤은 정말 편하게 쉬겠구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그렇게 다들 마지막 힘을 짜내며 이동하고 있을 때, 숲 바깥쪽에서부터 한 무리가 일행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뒤 지셀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영지의 병사들이군."

페르디움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이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지셀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가장 앞에 선 기사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마중을 나온 거 같지는 않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살아 계셨군요. 대공자님을 찾으러 움직이던 중이었습니다. 알기 쉽게 길을 내셨더군요."

지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찾을 필요 없어. 걱정시켜서 미안하군."

기사는 무거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대공자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기사의 말에 용병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지셀이 영주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마수의 숲에 들어왔다는 사정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셀과 길리언은 이렇게 될 걸 예상했기에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기사는 조금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영주님의 명입니다. 순순히 따라오셔야 안 다칠 겁니다."

협박이 다분히 섞인 말에 지셀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 지금 좀 바쁜데. 몸도 아프고 말이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군요. 그렇다면 강제로 끌고 가야겠습니다."

스르릉.

기사는 경멸의 눈빛을 보이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권한도 받았겠다, 반항하도록 유도하고 그 핑계로 흠씬 두들겨 팰 생각도 있었다.

'넌 대공자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나한테 죽었다. 운 좋게도 마수의 숲에서 살아남았구나. 제발 반항해라.'

평소에도 지셀을 고깝게 보던 기사는 천천히 검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어디 평소처럼 반항이라도 좀 해 보시지요. 제가 따끔하게 혼내 드리겠습니다. 다리를 좀 분질러 드릴까요? 아니면 팔?"

대공자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무례한 발언이었다. 일부러 지셀을 도발하는 것이었다.

'곤죽으로 만들어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해 주마.'

기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순간.

챙! 차앙!

모든 용병이 갑자기 무기를 뽑아 들며 기사와 병사들을 포위했다.

"이, 이놈들이?"

기사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용병들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내뿜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긴 용병들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했다.

감당 못 할 기운이 몰려오자 병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네, 네놈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기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영주의 명으로 움직인다고 하면 용병들 따위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나는 게 정상이었다.

그렇기에 기사도 지셀의 주변에 있는 용병들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시했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줄이야.

"나는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기사다!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으냐!"

기사가 검으로 사방을 겨누며 소리쳤다.

하지만 기사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흐, 그거야 영지 내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초입이지만 어쨌든 여기는 마수의 숲이라고."

"우리가 죽였다는 증거 있어? 아마 무서워서 너희들 찾으러 오지도 않을걸?"

"대충 숲 여기저기에 시체를 버려두면 알아서 몬스터들이 집어 갈 거야. 너희 시체도 못 찾을 거다."

험악한 말에 기사는 당황해서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나를 사용할 수 있더라도 이 정도 숫자의 용병들을 당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기세가 흉악한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대, 대공자님!"

결국 기사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지셀을 불렀다.

하지만 지셀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용병들은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

"흐흐,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자."

"그래, 싹 쓸어 버리면 아무도 모르겠지."

"쉽게 쉽게 가자고. 안 걸리면 그만이지."

"힘들게 길을 냈는데 편하게 쓰려고 하네?"

용병들의 기세에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심으로 이곳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을 전부 죽일 생각인 것이다.

살기를 느낀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미, 미쳤어. 이 새끼들 다 미친놈들이야.'

아무리 막 나가는 놈들이라 해도 영주의 명을 받고 온 기사를 죽이려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이놈들은 대공자를 닮았는지 하나같이 맛이 간 놈들이었다.

기사는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굴렸다.

남은 용병은 고작 오십여 명.

기사가 데리고 온 병사들과 비슷한 숫자지만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 지원을 요청해야....'

하지만 용병들이 이미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병사 하나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모두 바짝 붙어 있는 상태였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풍기는 기세도 그렇고, 자리를 잡은 것만 봐도 한두 번 싸워 본 놈들이 아니었다.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낀 기사는 지셀을 바라보며 악을 썼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용병들을 물리십시오!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기사를 죽이려 하다니! 미쳤습니까?"

그때 구경만 하고 있던 길리언이 도끼를 들고 다가갔다.

"가만 보니 정말 주둥이에 예의가 없는 놈이구나."

차가운 그의 눈빛을 보고 기사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죽는다면 정말 시체도 찾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털썩.

"대공자님, 살려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44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2)

부웅!

무릎을 꿇은 기사의 목에 길리언의 도끼가 내리꽂혔다.

기사의 목이 도끼에 잘리기 직전.

"잠깐."

지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끼가 멈추었다.

뚝, 뚝....

도끼는 목 앞에서 정확히 멈췄지만, 살짝 베인 목덜미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헉, 허억!"

기사는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심호흡을 해 댔다.

'미, 미친놈들!'

지셀이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면 제 목은 정말로 잘리고 말았을 것이다.

목을 타고 내려와 바닥을 적시는 자신의 피를 보며 기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도대체....'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공자는 비록 짜증 나는 사고뭉치였지만, 전혀 무섭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섭다.'

주변을 가득 메울 정도로 느껴지는 강렬한 지배력.

이곳에 있는 용병들이 그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공자는 성품도 실력도 부족해 한낱 병사조차도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말단 병사들에게도 은근히 무시당하고 경멸받던 대공자가 아니었는가.

저 거친 용병들이 목숨을 불사할 정도로 그를 따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벅저벅.

그사이 지셀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어붙어 있던 병사들은 지셀이 다가오자 모두 무기를 집어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평소에 대공자를 우습게 봤던 자들도 지금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거, 내가 멈추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했네. 많이 놀랐어?"

지셀은 웃으며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평화주의자인데 우리 애들이 고생을 많이 해서 좀 거칠어. 그러니까 앞으로 사이좋게 지냈으면 해."

"네.... 넵."

요컨대 함부로 시비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앞으로도 다른 이들과 수많이 충돌할 테지만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쨌든 아버지가 부르니 자식 된 도리로 가 봐야겠지. 묶을 건가? 나는 묶이는 걸 좋아하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지셀이 팔을 내밀며 묻자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온몸을 꽁꽁 묶어서 굴욕적으로 끌고 가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용병들이 언제 덤벼들지 몰라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좋아, 취향이 맞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도착하는 대로 용병들이 휴식할 곳을 마련해 줘. 그리고 벨린다가 내상을 심하게 입었으니 치료할 준비를 하도록."

기사는 잠들어 있는 벨린다와 꼬질꼬질한 용병들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기사가 손짓하자 병사 몇 명이 달려와 벨린다가 타고 있는 수레를 우선 끌고 갔다.

곧 기사가 앞서고 병사들이 지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용병들은 건들거리며 뒤를 따랐지만, 처음 보였던 날카로운 기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지셀과 용병들이 숲을 나오자 인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그들도 병사들을 통해 영주가 대공자를 잡아오라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사를 따라가는 지셀을 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대공자님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영주님이 마수의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대. 그런데 대공자님이 멋대로 들어갔다나?"

"사람도 엄청 줄었어. 절반도 안 남았는데?"

"죄다 죽었나 보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숲을 개척하겠다는 건지."

"저기 실은 건 돌인가? 몬스터 시체도 있는 거 같긴 한데.... 고작 저런 거 얻으려고 들어간 거야?"

갈수록 구경하려는 인파가 늘어나고, 다들 지셀과 용병들을 보며 한마디씩 하기 바빴다.

그럴 만도 했다. 용병들은 숲에 들어가기 전보다 수가 많이 줄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죄다 피투성이에 부상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영주의 명으로 잡혀가니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지셀이 벌을 단단히 받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셀은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흐음, 경비대 중에 스코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지? 휴가라도 간 거야?"

"...영주님에게 거짓 보고를 한 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만간 기사 자격도 박탈당할 것입니다."

"아하, 그거참 안타까운 일이군. 휴가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벌을 받은 모양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지셀을 보고 기사는 입술만 씰룩거렸다.

스코반은 지셀과 용병들의 행방을 거짓으로 보고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애초에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셀 일행이 시간을 벌긴 했지만,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터였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와 함께 바로 성으로 향했다.

꾀죄죄하고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그는 보무당당히 대전으로 향했다.

길리언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지셀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쿠웅!

대전에 들어가자 가신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겨우 목숨만 붙어 도망쳐 온 패잔병 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지셀의 인사에도 즈발터는 대답하지 않고 사나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지셀을 노려보던 즈발터는 낮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마수의 숲 개척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대답에 몇몇 가신들이 나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영주님의 명을 무시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이 짧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몬스터라도 튀어나왔으면 어쩌려고 그런 겁니까?"

"게다가 기사를 회유하여 거짓으로 보고하게 하다니!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가신들이 지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즈발터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내 명을 어긴 건 그 죄를 묻고 합당한 벌을 내리면 될 일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렇게 잡아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즈발터는 분노를 꾹꾹 누른 채 지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너는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냐."

지셀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겼다.

마수의 숲 일에 대해 묻는 어감이 아니었다.

그건 벌을 내리면 된다고 했으니 다른 일을 묻는 것이 분명했다.

지셀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고가 있었나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태평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호메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며칠 전 레이폴드 영지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페르디움 영지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겠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바로 대공자님 때문에!"

지셀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한 뒤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랍니까?"

"대공자님이 아멜리아 공녀님을 찾아가서 영지 지원 명목으로 2만 골드를 뜯어갔다고 하더군요. 레이폴드 백작이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해 파혼과 동시에 지원을 끊기로 했습니다. 대공자님이 미리 받아 갔다면서요!"

호메른이 열을 냈다. 지셀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가 몰래 상단을 키우고 있다는 건 아직 밝혀지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도 지셀의 입을 막으려 2만 골드를 순순히 내어 준 것이 아니었는가.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이 일을 공론화시켰다는 건, 이제 소문이 나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아멜리아, 역시 만만치 않은 여자군.'

지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짧은 시간에 아멜리아는 분명 소문 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조치를 전부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지셀을 엿 먹이기 위해 그 일을 이용한 것이다.

레이폴드 영지에서도 지원을 끊을 명분이 생겼으니 아멜리아가 던져 준 떡밥을 모른 척할 리가 없었다.

지셀이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기자 호메른이 더욱더 열을 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말을 좀 해 보세요! 대공자님은 지금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재무관인 알버트가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

"지원을 줄였다 해도 레이폴드 영지는 가장 많이 지원해 주는 곳입니다. 그쪽 지원이 끊기면 당장 영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지셀이 말이 없자 란돌프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 망할 놈의 새끼! 형님! 오늘은 말리지 마십쇼! 내 저놈의 허리를 반대로 접어 버려야겠습니다! 감옥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오늘 여기서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습니다!"

뛰쳐나가려는 란돌프를 다른 가신들과 병사들이 겨우 붙잡아 막았다.

하지만 험악한 분위기에 가신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이건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다른 자였다면 극형에 처할 겁니다!"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면서 영지를 살리겠다는 핑계를 대더니, 오히려 영지를 망하게 한 거 아닙니까!"

가신들은 흥분해서 말을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 이들에게는 지셀이 멋대로 마수의 숲에 들어가서 영지가 위험할 뻔했던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몬스터도 튀어나오지 않았고, 지셀도 살아 돌아왔으니 벌을 주고 감옥에 가둬 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폴드의 지원이 끊긴 건 지셀에게 벌을 내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궁핍하고 힘든 영지를 관리하느라 노심초사하던 그들이니, 지금은 환장할 지경일 것이다.

'하여튼 아멜리아 걔는 돈으로 사람 말리는 짓은 무지 잘한다니까. 어휴, 독한 것. 어휴, 무서운 것.'

지셀은 속으로 혀를 차며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불안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영지를 꾸려가야 할지 걱정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호메른은 무덤덤한 지셀의 표정을 보며 머리가 띵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도 이해 못 하는 표정이구나! 이 멍청한 새끼!'

마수의 숲에 멋대로 들어간 것도 그저 평소처럼 사고를 친 거라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사고를 친 건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신들이 화를 내는 상황에도 재무관인 알버트는 냉정해지려 노력하며 계산을 이어 갔다.

2만 골드 중 남은 돈이라도 어떻게든 회수해야 했다.

앞으로 어찌할지 방법을 찾을 동안 버티려면 그 돈이라도 필요했다.

"대공자님, 2만 골드에서 얼마나 남았습니까?"

살얼음 같은 알버트의 물음에 지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용병과 인부들 고용비, 주둔지 자잿값과 식량값으로 거의 다 사용했습니다."

"그 큰돈을... 벌써 다 썼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손이 좀 커서요. 하하하."

"으으윽! 저 새끼... 당장 가둬 버려!"

평소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던 알버트마저 울화가 터져 비틀거렸다.

이제 이 영지는 끝이다.

병력을 유지할 비용이 없으니 야만인들의 공세를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목숨이 아까우면 영지를 떠나 도망이라도 가야 할 판이었다.

호메른은 급하게 즈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주님! 당장 저 새끼를... 아니, 대공자를 레이폴드 영지로 압송해 사과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저 새끼, 저거 사람 새끼 아닙니다! 개자식입니다! 아, 영주님 죄송합니다. 영주님이 개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가신들은 도무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약혼녀에게서 돈을 뜯어 왔는데, 그게 영지 지원금을 미리 받아 온 거란다.

그 돈을 제 하고 싶은 일에 쓰겠다고 죄다 사용해 버렸다.

가신들이 보기에는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지셀의 기행이 이제는 선을 넘어 버렸다.

즈발터는 말없이 가신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지셀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게 다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돈을 받아온 건...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변명이 통할 것 같지는 않군요."

아들의 대답에 즈발터는 눈을 질끈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목을 베어 버릴 정도의 중죄였다.

'조금 더 엄하게 키우고 일찍 바로잡아 줬어야 했는데. 내가 진짜 개다. 개.'

언제나 성을 비우고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식들에게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 결과는 수습하기 힘들 정도의 큰 사고로 돌아왔다.

즈발터가 그렇게 아들에 대한 실망과 후회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호메른이 나서서 외쳤다.

"너는 이제 대공자가 아니라 죄인이다! 당장 무릎을 꿇어라!"

지셀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무릎이 안 좋아서 그건 힘들겠습니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큰 잘못까진 아니지 않아요?"

"으아아아! 이 천하의 쌍놈아! 정말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이냐!"

"제가 한 일인데 모를 리가요."

"알면서도 지금 그렇게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어억, 목이야!"

호메른이 혈압으로 쓰러지기 직전, 지셀은 손가락을 튕기며 문밖을 향해 외쳤다.

"가져와라!"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길리언이 큰 궤짝을 하나 들고 왔다.

쿵!

사람 몸보다 큰 궤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놓였다.

지셀은 궤짝 위에 손을 얹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보세요. 투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상자 뚜껑을 홱 열어젖혔다.

찬란한 푸른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45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3)

지셀의 말에 란돌프는 크게 성을 내며 외쳤다.

"투자? 투우자아? 네가 투자가 뭔지 알기는 해? 맨날 밥 먹고 똥이나 쌀 줄 알지! 이제 아무도 나 말리지 마! 내가 오늘 반드시 저놈을 죽여.... 와, 그게 뭡니까? 대공자님!"

란돌프가 지셀에게 달려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적으로 퍼져 가는 빛에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궤짝 안을 살펴보았다.

"어, 저, 저건...."

"설마...."

궤짝 안에 돌무더기처럼 섞여 있는 광석들을 본 가신들의 표정이 점점 기이하게 변해 갔다.

길리언이 지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대전 밖으로 나갔지만, 가신들은 그가 나가는 걸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궤짝 안의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모두를 감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즈발터가 더듬거리며 힘겹게 내뱉었다.

"이, 이게 무엇이냐?"

무엇인지 알면서도 제 눈을 믿지 못하고 확인하는 즈발터의 말에 지셀이 웃으며 답했다.

"룬스톤입니다. 마수의 숲에서 찾아낸 겁니다."

"저, 정말이냐?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숲을 전부 뒤져 가며 개척한 게 아니니까요. 자원이 있는 곳을 탐색한 뒤 바로 그곳까지 돌파해 길을 뚫었습니다. 이제 길을 다지고 목책을 쌓아 꾸준히 채취할 예정입니다."

즈발터는 지셀의 말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룬스톤이 더 있다는 말이냐?"

"네, 아주 많습니다. 이건 그중 일부일 뿐입니다."

즈발터는 당혹감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호메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렇죠? 대공자님 그런 사람 아니잖습니까! 어디서 훔쳐 온 거 아닙니까? 아니면 2만 골드로 사 와서 거짓말하는 거죠? 빨리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밖에 있는 수레에 잔뜩 실려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지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가져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룬스톤을 더 가져오는지 확인해 보면 될 일이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거 모르십니까?"

털썩.

즈발터는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이 해 온 일에 도무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재무관인 알버트는 눈만 끔뻑거리며 눈앞에 있는 룬스톤을 바라보았다.

정말 룬스톤이 그렇게나 많다면 레이폴드 영지에서 지원을 끊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알버트는 바로 궤짝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더니 룬스톤을 만져 보았다.

"지, 진짜 룬스톤이 이렇게나.... 이, 이걸 다 팔면 얼마야 도대체...."

"우, 우리도 봅시다!"

가신들이 모두 달려가 궤짝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들은 연신 룬스톤을 만져 보며 감탄을 내뱉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지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멜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엄청난 곤경에 빠졌겠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마수의 숲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손발이 꽁꽁 묶일 뻔했다.

아멜리아에게서 뜯어낸 돈을 뺏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룬스톤도 찾지 못하게 되어 버렸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결과가 뒤바뀐 것이다.

'역시 똑똑한 여자야.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이제 시작인 건가?'

그녀가 여기서 멈출 리는 없었다.

이번 일은 그저 지셀을 곤란하게 하고 움직임을 묶기 위해 행한 일.

그를 무시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셀이 룬스톤을 얻은 걸 알게 되면 분명 다시 방해하고 수작질을 부려 올 테지.

'아멜리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델파인 공작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 또한 엘레나를 죽이는 일에 실패했으니까.

지금은 다른 영지들을 약화시키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룬스톤의 존재가 밝혀지면 모든 시선은 이곳에 집중될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대비해 둬야 했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이번에는 빨리 움직인 덕에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아멜리아도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다.

그가 움직이는 동안 적들도 움직이고 있다.

지셀은 딴생각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궤짝을 휙 닫아 버렸다.

"자자, 구경은 이제 끝났습니다. 계속 보면 닳아요. 흐흐흐."

사기꾼 약장수 같은 천박한 말투였지만 가신들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며 지셀이 여유가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저를 압송해서 레이폴드로 끌고 간다는 얘기였던가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지셀이 저질러 버렸다.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니. 당연히 실패할 거라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공자가 멋대로 용병들을 끌고 들어가더니 진짜로 성공해 버렸다.

역대 페르디움 영주들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그 무능한 망나니 지셀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뚝딱 해치운 것이다.

고작 며칠 만에 이런 성과를 내다니.

행동도, 그 결과도 자신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평소에 그렇게 무시하던 대공자가 한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가신들은 떠듬떠듬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크흠, 흠흠. 대공자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걸...."

"허허, 이럴 수가! 정말 마수의 숲에 룬스톤이 있었다니."

"이, 이게 어째서 마수의 숲에...."

이렇게 되면 레이폴드 영지에서 깽판을 치고 온 것도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 판이었다.

언제나 그들이 생색내는 걸 받아 주며 비위를 맞춰 줘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가신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호메른은 옆에 있는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바로 병사들을 끌고 오라는 신호였다.

지셀을 잡으려는 건 아니었다.

지은 죄는 이번 공으로 상쇄하고, 압박을 가해 룬스톤과 권한을 뺏어 올 속셈이었다.

닳고 닳은 귀족들의 정치판에서 살아온 그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끼익.

"뭐, 뭐야!"

"대공자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전의 문이 열리자 가신들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대전 앞에서는 무장한 용병들이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란돌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을 느꼈지만, 당연히 병사들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용병들이 모여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호메른도 이를 갈며 외쳤다.

"대공자님! 이곳까지 병력을 끌고 오다니, 미쳤습니까? 지금 반란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지셀은 과장되게 놀란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반란이라뇨! 모두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저를 호위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호메른 이상으로 닳고 닳은 지셀은 이미 그가 보일 반응을 예상하고, 길리언을 시켜 용병들을 데려다 두었다.

물론 영지의 가신들은 적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영지를 위한 일이라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지셀에게 검을 들이밀 것이다.

그게 바로 이 시대에 영지를 운영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이다.

페르디움에 충성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셀은 이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지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무력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자신을 건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즈발터는 오히려 흥미 어린 눈빛을 내보일 뿐이었다.

'허어, 지셀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단 말인가?'

룬스톤을 구해 온 것보다 지금 행동이 더 놀라웠다.

언제나 심약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아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영주님! 아무리 대공자라도 이런 무례한 행동을 용납하면 안 됩니다!"

"형님! 제가 저 무엄한 놈들을 다 쓸어 버리겠습니다!"

호메른과 란돌프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즈발터는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됐다. 병력도, 룬스톤도 제가 얻어 온 것이라 제 것이라는데 어쩌겠나."

"영주님!"

"형님!"

호메른과 란돌프가 당황해서 반발했지만, 즈발터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셀은 언젠가 영지를 물려받을 후계자다.

이전에는 자신이 죽고 지셀이 영지를 물려받으면 필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 거라는 확신으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설치는 게 낫지, 빌빌대는 것보다야.'

오히려 내심으로는 지셀이 가신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했다는 게 기껍기도 했다.

'저놈에게도 북방의 늑대다운 모습이 있었구나.'

그래도 아들이 아주 구제 불능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자 좀 흐뭇하기도 했다.

결국 즈발터는 이번 일을 그냥 넘기기로 했다.

괜히 압박했다가 아들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까 봐 무서웠다.

정말로 선을 넘으면 그때 가서 버릇을 고쳐 주면 될 일이었다.

"용병들이 이렇게까지 너를 따른다니 신기한 일이긴 하구나. 이번에는 넘어가마. 하지만 다음에 또 명을 어긴다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즈발터가 너그러이 용서하자 지셀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지셀도 아무 생각 없이 무력시위를 벌인 건 아니었다.

제 아버지의 성정을 알기에 시도한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까지 버린 채 전장에서만 지내는 남자가 어디 평범하겠는가?

고리타분하게 자신의 권력만 붙잡고 있는 기존의 영주들과는 다르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정쩡해진 분위기 속에서 재무관인 알버트는 머리를 굴려 앞일을 계획했다.

'어떻게든 룬스톤을 받아야 한다.'

가신들은 모두 반대했던 일이고 개척도 대공자 혼자서 성공시켰기에 영지에서 소유권을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어떻게든 강제로 뺏어가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지셀은 영지의 후계자며 가문의 적장자다.

결국 언젠가는 영지의 주인이 될 사람.

여기서 부딪쳤다간 장기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클 거다.

차라리 살살 구슬려서 돈을 받아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싸워서 좋을 건 없지.'

이백여 명에 가까운 용병들을 끌고 갔다고 하는데 돌아온 건 오십여 명이 조금 넘었다.

대부분이 죽고 저 정도가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백 명이 넘게 죽을 만큼 위험한 숲에서 살아남은 용병들이 만만한 실력일 리가 없었다.

그런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저 꼴통이 순순히 돈을 뺏길 리도 없었다.

알버트의 계획은 간단했다.

어차피 대공자의 돈을 뺏을 수 없다면 적당한 명분을 통해 지분을 나눠 받는 것.

생각을 마친 알버트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흠, 어쨌든 일이 성공한 걸 축하드립니다. 그래도 대공자님이 받아 온 2만 골드는 원래 영지의 돈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원이 끊겼고 그 돈으로 개척을 시작했으니 영지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알버트의 말에 가신들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도를 해야 성공할 수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그 2만 골드가 있었기에 개척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상대는 남의 돈은 뺏어도 자기 돈은 그냥 내준 적이 없는 용병왕이었다.

"흠."

지셀은 여유롭게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다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것참 흥미로운 의견이군요. 일리 있습니다. 참으로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 그렇죠? 그러니 영지에 적어도 40퍼센트... 아니, 30퍼센트의 지분은 주셔야...."

"2만 골드 드리면 되죠?"

"네?"

알버트의 반문에 지셀은 윙크하며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2만 골드, 돌려드린다니까요. 이자도 쳐 드릴게."

46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4)

가신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저, 저기 대공자님. 이미 대공자님 때문에 레이폴드와 관계가 어긋나서 그걸로는 조금 영지의 상황이 힘든...."

"그래서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부족하다.

페르디움에는 일시금보다 꾸준하게 들어오는 돈이 중요했다.

이곳에는 돈을 벌어들일 수단이 없었으니까.

네 탓이라고 화내며 돈을 달라고 하기도 난감했다.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지셀이니 완전히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우, 우리도 개척을 시작해야 하나?'

호메른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룬스톤은 이미 지셀이 확보했고, 다른 자원을 찾으려면 예전과 똑같은 결론이 날 뿐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손해를 볼 각오로 움직여야 했다.

'젠장! 어쩌다 저런 귀한 자원이 저놈 손에! 뺏을 방법이 없잖아!'

마수의 숲은 엄밀히 말하자면 페르디움의 영토가 아니다.

그저 영지와 붙어 있기에 관습적으로 인정되는 영토일 뿐이었다.

그러니 강제로 뺏는 것 말고는 지셀이 가진 룬스톤을 확보할 방법이 없었다.

다들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지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흐음, 다들 조금 곤란하신 모양이군요. 대공자로서 영지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죠."

능글능글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가신들은 살짝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즈발터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아들의 말에 빠져들었다.

지셀은 모두의 반응에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룬스톤을 구해 온 것도 영지를 위해서였습니다. 레이폴드에서 빠진 만큼은 제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지셀의 말에 가신들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쓰겠다고 난리를 치면 진짜 싸워서라도 뺏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주겠다니 일단은 한시름 놓은 것이다.

"단, 조건이 몇 개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가신들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성격 더러운 대공자가 대체 무슨 조건을 내밀지 무서워질 정도였다.

"경비대의 스코반이 안 보이더군요. 듣기로는 감옥에 갇혔다던데, 맞습니까?"

그러자 호메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께 거짓 보고를 한 죄로 감옥에 가뒀습니다. 기사 자격도 박탈할 예정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거짓을 말하는 건 큰 죄입니다, 죄. 크흠흠!"

호메른의 목소리는 확실히 전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지셀과 밀고 당기기를 해 봤자 손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서는 스코반이 잡혀간 건 너 때문이라는 어조가 은근히 묻어 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지셀은 손가락을 하나 들고 말했다.

"첫 번째로, 스코반을 풀어 주시지요. 제가 강제로 시킨 일이니,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억울해서 죽고 싶을 겁니다."

"으음...."

가신들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에게 거짓을 고한 죄를 용서하는 건 영주의 권위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핑곗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영지 운영에 비하면 작은 문제이니 딱히 반대 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지셀은 가신들이 별다른 말이 없자 계속 말을 이었다.

"둘째, 주둔지 건설은 이제 공식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인부들과 병력이 머물러야 하니까요."

이번에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라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마수의 숲은 지금까지처럼 접근 금지입니다. 괜히 쓸데없는 욕심으로 영지에서 희생자가 나오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순간 가신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나쁜 놈! 혼자 다 먹겠다는 거잖아!'

'우리는 왜 못 들어가는데!'

'너는 들어가지 말랬는데 들어갔잖아!'

물론 속으로만 불만을 내뱉고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다들 별말 없이 가만히 있자 지셀은 마지막 조건을 꺼냈다.

"마지막, 용병들을 비롯한 경비 병력은 앞으로 영지와 상관없이 제가 알아서 충원해 움직이겠습니다. 영지 내에서 병력을 움직일 때마다 간섭이 들어오면 곤란하니 그 정도 권한은 받아야겠습니다."

가신들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금 지셀은, 앞으로도 영지 내에서 사병들을 거느리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대공자가 사병을 가지려고 한다니....'

'돈을 쥐더니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구나!'

'저 사고뭉치가 병력을 이끈다고?'

가신들은 벌써 등골이 오싹해졌다.

갈수록 기행이 심해지는 대공자가 병력까지 이끌게 된다면 얼마나 더 큰 사고를 칠지 모른다.

지금도 그가 거느린 용병들 때문에 건드리기가 어려워졌지 않은가.

"저, 대공자님. 다른 건 몰라도 따로 병력을 이끄는 건...."

한 가신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지만, 지셀은 뚱하게 답했다.

"그러면 뭐 다 없던 일로 하죠. 저 이만 나갈까요?"

"저는 찬성한다는 뜻입니다. 찬성하고말고요."

가신은 바로 꼬리를 말고 자리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저는 또 반대하는 줄 알고 조금 상처받을 뻔했네요. 저 소심한 거 아시죠? 그냥 나갈 뻔했네."

'니미럴,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잖아!'

은근한 협박에 가신들은 속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혹시 반대하시는 분?"

지셀이 손을 살짝 들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었지만, 대공자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잠깐 기다린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가신들은 제 의견에 모두 찬성하는 거 같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려 주시지요."

왠지 그 웃음이 사악해 보였다. 즈발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변했구나.'

레이폴드에서 항의가 들어왔을 때는 결국 대형 사고를 쳐 버렸구나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과감한 행동력으로 그 모든 잘못을 상쇄시킬 만한 공을 세웠다.

물론 아직은 완전히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일도 사실 운이 좋았으리라.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고 검토했었던가.

즈발터도 위험성과 효율을 따져 본 바가 있어 잘 알았다.

자원을 이렇게 빨리 발견한 건 천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그래도 엄청난 일을 해낸 건 맞지만....'

즈발터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성공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일이 안전하게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엄청난 재력을 손에 쥐더라도 단명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아들은 영지와 가문의 후계자였다.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었다.

막을 거라면 지금부터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막아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겨우 달라지기 시작한 아들의 가능성을 짓밟고 싶지도 않았다.

'과한 부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들어줄 만한 것도 아니다.'

결국 지셀을 믿어 주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 잠깐 달라진 모습만 보고 온전히 믿기에는 그동안 행실이 너무 개판이었다.

그렇다고 안 믿고 강제로 압박한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흐를 수도 있다.

지금도 지셀은 병력을 끌고 와서는 아버지와 가신들에게 과한 조건을 내밀고 있다.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왔다는 뜻이다.

'내 아들이 저런 성정이었나?'

즈발터는 제 아들을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지셀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다는 듯 당당하게 서 있었다.

즈발터는 모르지만, 사실 지셀은 지금도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일을 부드럽게 풀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용병왕 시절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하고 과격하게 굴곤 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즈발터는 결국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좋다.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어디 한번 마음껏 해 봐라."

"영주님!"

"형님!"

모든 가신이 놀라서 즈발터를 바라보았다.

설마 모든 조건을 흔쾌히 수락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놀란 가신들을 둘러보며 즈발터가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이왕 권한을 줄 거면 확실하게 주고 믿어 보는 게 낫겠지. 어설프게 줄 거면 안 주느니만 못하다."

지셀이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즈발터가 강렬한 기세를 쏘아 내며 말을 이었다.

"단, 영지에 피해를 주거나 북방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된다면... 네가 가진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탑에 감금할 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절대 잊지 말아라."

그 정도의 권한을 쥐면 책임도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즈발터도 확실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기대와 영주로서의 우려가 섞인 그 말에, 지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염려 놓으시지요."

"나머지 돈은 어디에 쓸 생각이냐?"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급한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영지를 위해서도 쓸 생각입니다."

급한 일이라.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영지 상황보다 급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즈발터는 더 묻지 않았다.

"알겠다. 알아서 잘하겠지. 믿어 보겠다."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말투가 되었지만, 그 속에는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 듬뿍 실려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큰일을 한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기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가신들만 난감해졌다.

특히 호메른과 란돌프, 알버트는 지셀을 잔뜩 몰아붙였으니 다른 가신들보다 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호메른은 머리에 김이 날 정도로 눈을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젠장, 큰일이다. 이제 저 사고뭉치한테 잡혀 살아야 하는구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지셀이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반대한 사람이 호메른이었다.

차라리 그때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지원해 줬다면 지분을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아쉬웠다.

'아니, 진짜 멋대로 가서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말이 안 되잖아!'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대공자가 저런 행동력을 보여 주고 진짜로 성공시킬 줄이야 누가 예상했겠는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처지가 바뀌었으니 예전처럼 뻣뻣하게 굴 수는 없었다.

호메른은 갑자기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어휴, 정말 장합니다. 장해요. 대공자님 한 분이 레이폴드 영지와 맞먹는다는 뜻 아닙니까? 정말 잘 컸어요. 벨린다가 참 잘 가르친 거 같습니다. 하하하."

진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담기지 않은 호메른의 말을 뒤로 흘리며 알버트가 나섰다.

"대공자님이 평소에 돈 개념이 철저하다는 건 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원금에 관련해서는 앞으로 저랑 얘기를 나누시죠. 당장 급하게 쓸 곳이 많아서.... 크흠흠!"

란돌프는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트린 채였지만,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쏟아 냈다.

"대공자님이 과감한 행동력으로 언젠가는 큰 성과를 거둘 거라... 당연히 믿었습니다! 영지에 병력이 부족한 건 아시죠? 아무렴 병력이 든든해야 영지를 지킬 수 있는 법이죠. 하하하. 저 밖에 있는 놈들 참...."

안면을 싹 바꾸고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세 사람을 보고 지셀이 살짝 거리를 두며 웃었다.

"세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넉넉히 챙겨 드릴 테니 영지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제야 세 사람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진심이야 어쨌든 간에 챙겨 준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애송이한테 완전히 당한 기분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당장 힘이 있는 쪽은 지셀이었으니 별수 없었다.

그냥 체면 불고하고 친한 척하는 수밖에.

호메른은 대표로 지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아휴, 우리 영지에 참 큰 복이 내렸어요. 큰 복이."

지셀은 호메른에게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고, 즈발터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영지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처럼 북방을 방비하는 데에만 전념하실 수 있도록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허, 네놈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즈발터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과는 다르게 부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그는 지셀의 말을 진담으로 듣지는 않았다.

그저 인사치레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몸을 돌려 나가는 지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생각한 대로 되었다. 이제 다음을 준비할 차례야.'

영지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급한 일.

이제 전쟁을 대비할 차례였다.

47화 지금 좀 위험해. (1)

감옥에 갇힌 스코반은 벽에 기댄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아우,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대공자가 검술 실력이 뛰어나도 마수의 숲에 들어가 살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에 영지에서 개척에 나섰을 테니까.

그런데 대공자가 하도 당당하게 구니 자신도 모르게 믿어 버리고 말았다.

"믿을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

그가 거짓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대공자를 쫓는 병력은 한발 늦게 움직이게 되었다.

대공자도 그걸 노리고 부탁한 거겠지만.... 그 대가로 스코반은 이렇게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경비대장님 때문에 저도 이게 뭡니까. 하아...."

스코반 옆에 앉아 있던 잘생긴 리카르도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 억울하게도 스코반의 부관이라는 이유로 같이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크흠, 미안해. 그래도 곧 풀려날 거야."

워낙 사람이 귀하다 보니, 페르디움 영지에서는 웬만큼 큰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기사나 병사들을 강하게 처벌하지 않는다.

엄하게 처벌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적당히 벌을 주고 노동력을 유지하는 편이 영지에 이롭기 때문이다.

"참 내, 풀려나면 뭐 합니까? 대장님은 기사 자격을 박탈당할 테고, 저는 노역 형을 받을 거라고요."

게으른 리카르도에게 노역 형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도 일이 잘 풀렸을 때 얘기지, 대공자님이 숲에서 죽으면 그렇게 쉽게 안 끝날걸요? 우리도 꼼짝없이 죽는 거라고요."

"크흠흠, 설마 대공자님이 죽지는 않았겠지? 가만 보면 지금까지 사고 치고도 운이 꽤 좋아서 잘 넘어갔잖아. 쉽게 죽을 운이 아니라고."

만약 대공자가 죽었다면, 스코반은 거짓 보고로 인해 대공자가 죽었다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영주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 모르죠. 뒤쫓아 간 사람들이 대공자님을 무사히 구출해 오기나 빌자고요."

리카르도가 혀를 차며 답했다.

스코반도 답답해진 마음을 풀 길이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한참을 한숨만 내쉬던 리카르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경비대장님은 풀려나면 뭐 하실 겁니까?"

"음... 그냥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까? 여기서 기사 해 봤자 돈도 못 벌고 힘들기만 하고 피곤한데."

"고향이 어딘데요?"

스코반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고향이 여기야. 페르디움."

리카르도는 대놓고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참 잘도 농사짓게 내버려 두겠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도 부족한 영지인데. 병사로 몇 년 구르면 다시 기사 시켜 주겠죠."

"에휴, 그냥 대대로 페르디움에서 살아왔으니 계속 지냈는데 말이지. 솔직히 지겹다, 지겨워. 결혼도 못 하고 모은 돈도 없고."

리카르도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결혼 그게 뭐 어렵다고요. 돈 없어도 하는 게 결혼인데. 전 오히려 여자들끼리 싸울까 봐 결혼 못 하겠던데요."

스코반은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도를 돌아본 스코반이 곧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재수 없는 놈."

잘생긴 리카르도에게 결혼은 정말 쉬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 내가 저 얼굴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저놈은 열심히 살지도 않잖아?'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지만, 리카르도는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친목회까지 결성해서는 자주 이것저것 챙겨 주기 때문이다.

스코반은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고, 뼈를 깎는 고행을 통해 겨우 기사가 됐다.

하지만 저 리카르도 놈은 아무것도 안 해도 먹고살 정도였다.

외모도 재능이라면, 정말 축복받은 재능이었다.

스코반이 괜히 질투가 나서 리카르도의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길까 고민하고 있을 때, 감옥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응? 무슨 일이지?"

스코반이 창살에 바짝 얼굴을 붙이자 리카르도도 그를 따라 했다.

감옥 입구를 지키던 병사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은 곧 두 사람이 갇힌 옥방 쪽으로 다가왔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스코반과 리카르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 대공자님!"

"대공자님, 살아 계셨군요!"

지셀은 창살 앞에 서서 반갑다는 듯 손을 까딱이며 웃었다.

"거짓말쟁이 스코반! 잘 지냈어? 리카르도 너는 감옥에서도 얼굴에 빛이 나는구나. 잘생긴 게 죄라면 넌 감금 정도가 아니라 바로 사형이었을 텐데. 하하하하."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스코반과 리카르도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이제 대공자를 죽게 했다고 처벌될 일은 없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안심했지만, 지셀은 그들을 감옥에 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감옥 입구에서부터 저를 따라온 병사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어이, 여기 열어."

"네?"

감옥을 지키던 병사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는 두 사람을 풀어 주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괜찮아. 이미 다 허락받았어. 나 믿지?"

"하지만...."

병사는 움직이지 못했다.

대공자가 거짓말을 하며 사고를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믿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스코반과 리카르도도, 지셀 때문에 거짓말을 하다가 붙잡힌 게 아닌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를 보며 지셀은 헛웃음을 지었다.

"와, 너무하네. 신용불량자 취급이냐."

지셀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길리언이 나섰다.

콰지직!

길리언은 아예 잠금장치를 손으로 잡고 박살을 내 버렸다.

하지만 문이 열렸어도 스코반과 리카르도는 함부로 나오지 못했다.

스코반이 마나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는데 가만히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말 탈옥하면 일이 더 커지니까.

"괜찮다니까? 어서 나와. 전부 사면이다."

지셀이 재촉하자 스코반과 리카로드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옥방에서 나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풀려나는 겁니까?"

"그래, 두 사람 다 원래 업무로 복귀하면 된다."

지셀은 두 사람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는 품에서 주머니 두 개를 꺼냈다.

"자, 받아라."

두 사람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가득 차 있었다.

"이, 이걸 왜?"

"저, 정말 주시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돈지랄에 두 사람이 놀랐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덕분에 마수의 숲에 방해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으니 그 보상이다. 일을 잘하면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한 이치지."

지셀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충성심 하나로만 수하를 부리지 않는다.

용병으로서의 정체성에 기인하는 바가 가장 크지만, 어쨌든 그는 성공한 일에 확실한 보상을 줘야 충성이 따라온다고 믿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스코반과 리카르도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무 탈 없이 풀려난 것도 기쁜데, 이렇게 큰돈까지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또 보자고. 필요할 때 다시 부르도록 하지."

"예,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살펴 가십시오!"

두 사람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극진한 인사를 올렸다.

역시 돈 잘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지. 지셀은 속으로 낄낄대며 감옥을 나섰다.

감옥 문을 부순 걸 알면 호메른이 좀 잔소리를 하겠지만.... 그러니까 말로 할 때 진작 열었어야지.

지셀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금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스코반이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이거 액수가 꽤 많은데? 너 어디에다 쓸 거냐?"

리카르도는 잠시 생각하다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동안 매일 얻어먹기만 했으니 친목회원들 불러서 파티라도 할까 하고요. 저도 보답은 해야죠. 이 정도면 아주 끝내주게 놀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안 모으고?"

"모아서 뭐 해요. 나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친목회에 달라고 하면 돼요."

"...재수 없는 놈."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느끼며 스코반은 연신 입술을 씰룩거렸다.

스코반이 기쁨과 좌절을 동시에 느끼던 그때, 지셀은 병상에 누운 벨린다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지만, 그녀는 지셀이 찾아오자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아직도 안 씻었어요? 몸은 좀 어때요?"

지셀은 그녀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벨린다부터 빨리 회복해."

벨린다는 현재 마나가 역류해 몸을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계 이상으로 마나를 끌어올려 블러드 퓌톤의 공격을 막았지만, 완전히 충격을 완화하지는 못했다.

부상 자체도 심각하지만, 급작스럽게 끌어올린 마나가 충격을 받은 탓에 엉망으로 꼬여 버린 게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나가 안정될 때까지 쉬는 수밖에 없었다.

"밥은 먹었어요? 영주님은 뭐라고 하셔요?"

그런 상황에서도 벨린다는 지셀에게 잔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영주의 명을 어겼다며 끌려갔으니 혹시나 벌이라도 받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다 잘 해결됐어. 걱정하지 마."

여유 있게 웃는 지셀을 보고 벨린다는 그제야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용병들까지 끌고 가 무력시위를 한 걸 알면 까무러칠 거다.

지셀은 잠깐이라도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는 잠시 벨린다의 몸을 살펴보다 곧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빨리 회복할 수 있게 좀 도와줄게."

"네? 도련님이 뭘 어떻게 도와요?"

벨린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고는 자신의 마나를 벨린다의 몸에 훅 밀어 넣었다.

"갑자기 무슨.... 하지 마요. 위험하다고요."

"괜찮아, 괜찮아."

이질적인 마나가 들어오니 그녀의 몸 안에 있던 마나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벨린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잘 움직이지 않는 마나를 최대한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마나 충돌이 일어나면 지셀도 다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그사이 지셀의 마나는 요동치는 벨린다의 마나를 살며시 감싸며 누르기 시작했다.

지셀도 어느새 엄청나게 땀을 흘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길리언은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나 누군가 건드린다면 지셀과 벨린다 모두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치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지셀의 몸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허공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벨린다의 안색도 눈에 띄게 편해져 갔다.

놀랍게도 지셀이 역류하는 마나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이게 도대체? 도련님이 어떻게...."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홍조까지 띤 벨린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떠듬거렸다.

제 몸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셀의 마나 운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했다.

이 정도로 마나를 다루려면 어지간한 경지로는 불가능했다.

지셀은 조심스럽게 마나를 회수하며 손을 뗐다.

"휴, 잘됐네. 며칠 쉬면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속 좀 편해졌지?"

벨린다는 복잡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익히고 있는 건 가문의 마나 연공법이 아니죠?"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붉은 기운을 내뿜지 않는다.

마나의 빛뿐만이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도 달랐다.

거칠지만 안정적인 페르디움의 것과 달리, 지셀의 마나는 살기가 짙었다.

어떤 연공법을 익혔냐에 따라 마나의 성질이 다른 건 당연하지만, 페르디움 것이 아닌 연공법을 대체 어디에서 익힌 건지 벨린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성장 속도나 섬세한 마나 운용 기술은 분명 그가 익힌 연공법 덕분이리라.

지셀은 턱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으음, 내가 만들었는데. 정확히는 가문의 것을 뜯어고친 거지. 나한테 딱 맞게."

"하아, 이것도 말해 주기 싫은 거예요? 그럼 그냥 싫다고 하세요."

마나 연공법을 개량해서 자기한테 맞췄다니, 어지간한 천재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다.

마나 연공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발전된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나 연공법이 그렇게 손대기 쉬운 거였으면, 연공법을 쥔 가문이나 단체에서 극비로 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벨린다도 가르쳐 줄게. 지금 익히고 있는 것도 조금 더 손봐 주고. 그러면 믿겠지?"

"아이고, 됐네요. 제가 익히고 있는 것도 쓸 만하다고요."

"알겠어. 몸조리 잘해서 얼른 일어나라고. 또 바쁘게 움직일 거니까."

"그렇네요. 이제 돈도 많겠다, 돈 걱정 없이 놀아 보는 것도 괜찮겠죠."

벨린다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잠깐 쉬고 바로 다시 나가 봐야 해."

"네? 어딜 나가요? 아, 룬스톤 팔러요?"

"그것도 그렇지만.... 준비해야 할 게 있어. 시간은 언제나 촉박하니 빨리 움직여야지."

벨린다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물었다.

"마수의 숲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뭐가 그렇게 급해요? 또 뭘 하려고요? 뭔지 모르겠지만 이제 안 하면 안 돼요?"

"나도 솔직히 쉬고 싶지. 그런데 상황이 좀 안 좋아서 그래."

"도대체 무슨 상황인데요? 말해 봐요."

벨린다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가득 섞여 있었다. 지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영지가 지금 아주 위험하거든."

48화 지금 좀 위험해. (2)

"영지가 위험하다고요? 왜요?"

벨린다는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다.

영지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돈 문제는 룬스톤을 발견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됐다.

그 돈만 잘 써도 다른 영지 못지않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도련님이 돈만 마구 날리지 않으면 위험할 게 뭐가 있겠어요? 평생 써도 모자라지 않을 거 같은데요."

영지가 위험하다면 실상 제일 큰 위험 요소는 눈앞의 지셀이다.

본래도 이것저것 사고를 치고 다니던 사람이 엄청난 돈까지 쥐었으니, 더 큰 사고를 치게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런 사람 입에서 영지가 위험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사고 칠 거라고 예고하는 건가?

"흐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방안의 모든 하녀와 병사들을 물리고 벨린다와 길리언만 남겨 두었다.

이대로 두면 그들은 앞으로도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지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일단 따라 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해 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쯤에서 어느 정도는 설명해 줘야 했다.

미래에서 돌아왔다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 빤하니,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설명할 생각이었다.

"룬스톤을 얻었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획득한 룬스톤이면 이 영지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도 그걸 바라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바라던 일은 맞지. 하지만 그게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야."

"왜 좋은 일이 아니에요?"

벨린다과 길리언은 지셀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재원이 생겼는데 그게 도대체 왜 좋은 일이 아니란 말인가?

지셀은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우리를 감시하는 놈들이 있어."

"네?"

길리언은 지셀이 망상증 같은 병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감시한다는 말인가?

그때 벨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멜리아 아가씨요? 돈 뺏어 온 거 때문에 그러는 거죠? 그냥 적당히 보상해 주고 화해하면 되는 문제 아니에요?"

길리언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암살자들이 찾아왔을 때 처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놈들이야."

"전부터 우리를 감시했다고요?"

"도대체 누가...."

두 사람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말을 이었다.

"이건 아버지와 가신들도 모르는 일이야. 오직 나와 내 동생 엘레나만이 아는 일이지. 누군가 우리 영지를 노리고 있어."

지셀은 엘레나가 습격당했던 일, 디갈드 공자의 시체를 발견한 일 등을 설명했다.

누명을 써서 영지전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려고 프랑크와 디갈드 공자의 시체를 없앴다는 말까지.

지셀이 설명을 이어 갈수록 벨린다와 길리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셀이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다급하게 움직이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됐다.

길리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공자님, 이 영지는... 죄송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차지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점령하면 야만인들과 싸워야 하니 손해입니다. 다른 영지와 싸움을 붙여서 약화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당연히 지금은 룬스톤이...."

길리언은 말을 하면서 문제를 깨달았다.

빈약한 군사력, 가난한 영지, 언제나 지쳐 있는 영지민들. 그래도 끝없이 싸워야만 하는 위치.

분명 페르디움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무엇보다 가치가 높은 자원이 발견됐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는 빤하다.

누군가가 가진 것을 빼앗고 싶을 때, 고래로부터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벨린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신 대답했다.

"저, 전쟁?"

그녀는 자신이 내뱉고 난 뒤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룬스톤이 이제 발견됐는데 적들이 알 리가 없잖아요?"

앞뒤가 안 맞는다.

룬스톤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적들은 진작에 여기를 쓸어 버렸을 것이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우리를 노렸던 건 룬스톤 때문은 아닐 거야. 그게 있다고 확신했다면 이미 쳐들어왔을 테니까. 분명 이곳을 노리는 이유는 따로 있겠지."

지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룬스톤이 발견된 이상, 그놈들도 곧 이곳을 노리고 올 거야. 내가 전쟁을 앞당긴 셈이지.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지만."

길리언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의 전 약혼자가 암살자를 보내는 것도 만만치가 않은데, 정체도 모르는 적이 영지를 노리고 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혹시 짐작 가는 배후가 있으십니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흑막이 델파인 공작이라 확신하고 있지만, 아직 드러난 증거는 없었다.

전생의 아이던을 비롯한 정체불명의 타국 사람들까지 엮여 있기에 지금 말해 봤자 소용없기도 했다.

"아직은 정확히 모르지만 계속 엮이다 보면 정체가 드러나겠지. 그래서 되도록 빨리 대비해 두려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벨린다는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멍이 난 듯했던 쟈말과 필립의 이야기가 이제야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예전이라면 믿기 힘들었겠지만, 이미 지셀의 실력을 마수의 숲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지셀이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길리언은 지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영주님에게 말하고 같이 방안을 찾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아직은 아니야. 가신 중에서도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이미 엘레나의 호위 기사들까지 배신한 판이니까. 가신들이 아니라도 분명 첩자가 득실거릴 거야."

"룬스톤을 얻었다는 소식도 금방 퍼져 나가겠군요."

"맞아. 최대한 적들이 알기 전에 룬스톤을 판매하고 대비해야 해."

지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아멜리아는 룬스톤과 상관없이 나를 계속 노릴 거야. 생각보다 집요한 여자거든."

"룬스톤을 확보한 걸 알게 되면 적들은 분명 바로 움직일 겁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혹시 모를 전쟁을 준비해야 해. 왜 쉴 시간이 없는지는 이제 알겠지?"

길리언이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다른 영지라면, 전쟁을 준비하고 진격하는 데 두세 달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 페르디움에서 대응할 전력을 키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텐데요."

지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면 페르디움의 군사력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올 것이다. 이쪽 전력을 손금 보듯 꿰고 있을 테니까.

그들을 상대하려면 병사를 늘리고 장비를 바꾸는 게 최선이지만, 지금부터 돈을 마련하고 준비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길리언은 그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쓸 만한 병력을 키우고 장비를 갖추려면 적어도 일 년에서 최소한 육 개월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것도 겨우 기본 훈련이나 마치는 정도입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벨린다는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전쟁이 일어날 테니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죠?"

"뭐,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아휴, 뭐 머리 아프게 그렇게 길게 말해요. 그러면 저도 같이 움직여요."

"응? 벨린다는 쉬어야지. 아직 몸도 안 좋은데 뭐 하러 같이 움직여."

"영지가 위험하다는데 같이 준비해야죠. 전쟁 같은 건 별 관심 없지만, 어차피 대장 목만 똑 따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저 그런 거 잘해요."

자신만만한 벨린다의 말에 지셀이 장난 반, 감탄 반 섞인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거참,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어쨌든 몸부터 회복하라고."

"도련님 덕분에 훨씬 편해졌어요. 이 상태면 금방 회복될 거 같은데요? 도련님도 지금 멀쩡히 움직이잖.... 잠깐, 그러고 보니까... 어떻게 벌써 그렇게 움직이는 거예요? 아까 마나를 쓴 것도 그렇고."

"어? 그러네?"

벨린다가 지적하자 지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얼굴을 굳혔다.

몸이 괜찮으니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마나도 쓰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굉장히 이상했다.

분명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첫날에는 아예 기절해서 움직이지도 못했고, 이튿날에는 몸만 겨우 움직였을 뿐, 마나는 사용하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블러드 퓌톤의 시체를 길리언과 카오르가 썰었던 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몸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마나도 부담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최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움직일 수는 있는 상태였다.

상식적으로 사흘 만에 이렇게까지 몸이 회복될 수는 없었다.

벨린다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것도 도련님이 익힌 연공법하고 관계가 있는 거예요? 엄청난 회복력이네요."

길리언도 궁금하다는 듯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도 부상 정도에 비해 너무 빨리 회복된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마나 연공법의 효과가 아니었다.

마나가 강대하면 당연히 육체의 회복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만, 아직 그 정도로 마나를 쌓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연공법은 회복보다는 극단적인 파괴에 최적화되어 있다.

"확실히 이상하군."

바로 잡혀가 아버지를 만나느라 의식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보름은 정양해야 하는 부상이었다.

뼈에 금이 가고 근육이 찢어졌으며 소량이지만 블러드 퓌톤의 강력한 독에 중독되었으니, 일찍 낫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근육은 벌써 거의 붙은 거 같은데?"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치유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그저 몸이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였다.

뼈와 근육이 이미 거의 붙었다는 증거다.

독의 기운도 어느새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나도 정말 모르겠네. 오늘은 일단 쉬면서 몸 상태를 점검해 봐야겠어."

벨린다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워낙 어물쩍대며 숨겨 온 게 많다 보니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뭐, 일단 알겠어요. 도련님도 쉬시겠다니 잘됐네요. 몸이 괜찮아지면 같이 움직이자고요."

"그래, 상태 보고 같이 움직이든지 할 테니까 몸조리부터 잘해."

지셀이 길리언과 함께 나가려 할 때, 벨린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맞아, 기초만 훈련해도 최소 육 개월은 걸린다면서요.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이미 늦은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지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준비할 수 있는 전력이 있어."

"그게 뭔데요? 또 용병 모으시게요?"

확실히 바로 준비할 수 있는 전력은 용병밖에 없다.

지셀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용병들도 당연히 충원해야지. 하지만 아무도 쓸 수 없는 괜찮은 전력이 따로 있어."

49화 지금 좀 위험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