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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팬다, 안 팬다, 팬다. (2)

도발적인 발언에 케인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가 이제 진짜로 미쳤구나? 울면서 내 신발을 핥을 준비나 해라."

두 사람은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투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연무장으로 몰려왔다.

성질 더러운 대공자가 얻어터지게 생겼다니,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온 것이다.

근무가 없는 기사들까지 몇 명 찾아왔다. 그중에 술에 취한 기사를 본 지셀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스코반도 왔네.'

코가 벌게진 채 비틀거리며 나타난 기사는 스코반이었다.

그는 토벌대에서 지셀이 어떻게 활약했는지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영지의 후계자에게 잘 보이려 모든 공을 몰아준 게 아니냐고 비난을 받았다.

어느새 그는 대공자에게 일찍부터 아첨을 떠는 간신 같은 기사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붙은 칭호가 '거짓말쟁이 기사', '명예를 버린 기사' 따위였다.

그때부터 스코반은 술에 취해 살았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고 기사로서 명예까지 잃었으니, 모든 의욕을 잃고 술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을 다 알고 있는 지셀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명예스러운 칭호 같은 건 곧 사라질 거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스코반.'

지셀과 케인은 바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기를 기다렸다.

결투를 벌일 때는 구경할 사람들이 모일 시간을 주는 게 관례였다.

놀거리가 부족한 페르디움에서는 이런 결투도 놓칠 수 없는 이벤트이자 유희였으니까.

적당히 사람들이 모이자 기사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자, 다들 충분히 모인 거 같으니 시작하자고."

사람들은 각자 누가 이길 것 같은지 돈을 걸기 시작했다. 문제라면 모두 케인에게 걸었다는 점이다.

"이러면 내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결과가 뻔하니까 어쩔 수 없어."

"차라리 내기 내용을 바꾸는 게 어때?"

"대공자님이 언제까지 버티는지로 하자."

그런 웅성거림을 듣고 케인이 거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누가 이길지는 확실했다.

"그러면 방법을 바꾸자. 기준은...."

"잠깐."

기사가 규칙을 바꾸려 할 때, 누군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제지했다.

"스코반?"

스코반은 귀찮다는 듯 대답도 안 하고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품을 뒤져 돈이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투욱!

묵직하게 떨어지는 돈주머니를 잡은 기사가 묘하게 비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너 설마?"

스코반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이를 갈며 말했다.

"대공자님한테 내 전 재산 다 건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기사는 스코반의 말에 화색을 지었다.

"좋아. 그래, 이래야 내기가 성립하지. 그런데 금액이 조금 아쉽네."

아무리 스코반이 전 재산을 긁어 왔어도, 가난한 영지의 기사가 봉급을 받아 봐야 얼마나 받겠는가?

게다가 그마저도 요새 술값으로 죄다 쓰고 있으니 돈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이, 대공자님한테 더 걸 사람 없어?"

나머지 사람들이 죄다 케인에게 걸었으니, 이겨도 스코반 한 사람이 낸 돈을 여럿이 나눠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건 돈에 비하면 스코반이 건 돈은 적지 않았지만, 모두가 나눠 먹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쩝, 아쉽지만 이대로 진행해야겠네. 그러면...."

그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며 엘레나가 하녀들과 함께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기사 앞에 선 뒤, 돈주머니를 탁자 위에 우아하게 올려놓았다.

"나도 걸 거야."

기사는 눈 밑에 잔뜩 그늘이 진 엘레나를 보고 잠깐 움찔하더니 확인차 물었다.

"정확히 누구에게 거시는지요?"

"우리 엄마 아들한테."

"알겠습니다."

기사는 희희낙락하며 돈을 챙겼다.

페르디움이 가난하다 보니 엘레나도 품위 유지비를 별로 많이 받지 못한다.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라, 스코반이 건 돈과 합하니 다들 만족할 만한 금액이 되었다.

하녀들이 마련한 의자에 앉은 엘레나는 문득 스코반과 눈이 마주쳤다.

동병상련이라고,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알 수 있었다.

엘레나도 스코반처럼 지셀에게 공을 밀어 주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게 너무 답답해서 요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가씨, 억울합니다.'

'저도 억울해서 미칠 거 같아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눈빛으로 대화하는 사이, 드디어 결투가 시작되었다.

지셀은 검을 휘휘 허공에 흔들다 케인을 겨누었다.

"와 봐라."

"뭐?"

"싸우자며? 와 봐. 아무리 그래도 고수가 하수한테 먼저 덤벼드는 건 양아치 짓이지."

"이 새끼가!"

케인이 검을 치켜들고 미친 듯이 돌진해 왔다.

지셀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덩치도 우람해서, 둘의 결투 모습은 마치 투우처럼 보였다.

카앙!

두 사람의 검이 강하게 맞부딪쳤다.

케인은 지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힘을 한껏 끌어올렸다.

'병신으로 만들어 줄 테다.'

감히 지셀 주제에 갑자기 자신에게 대들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소문처럼 이 새끼가 진짜 미쳐 버린 게 틀림없었다.

'미친놈한테는 매가 약이지.'

케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때려서 말을 안 듣는 놈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문제라면 상대방도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란 것이다.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면 힘이 부족한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지.'

지셀은 검을 맞대며 케인을 평가했다.

'역시, 근력은 제법이란 말이지. 덩치도 좋으니 맷집도 좋을 테고. 이 정도면 뒷일 걱정 안 하고 적당히 패도 되겠어. 욕도 잘하니까 산적이 되었어도 잘했을 텐데 조금 아쉽군.'

어찌나 잘 먹고 자랐는지 덩치며 힘은 또래를 훨씬 뛰어넘었다.

아마 순수한 근력만 따지면 어지간한 정식 기사들도 케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디 검술은 어떤지 한번 볼까?'

카아앙! 카앙!

두 사람의 검이 쉬지 않고 빠르게 부딪혔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검을 다루는 지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를 직접 상대하는 케인 또한 경악하고 말았다.

'뭐, 뭐야!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어!'

분명 예전에 대련했을 때 지셀은 단 한 수도 제대로 막아 내기 버거워했다.

지금도 여전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싸워 보니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막거나 피한다.

케인이 끙끙대며 검을 휘두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지셀의 선전에 감탄을 토해 냈다.

"대공자님 실력이 많이 늘었잖아!"

"케인 공자님이 약한 게 아닐까?"

"보기에는 두 분 다 화려해 보이는데?"

"원래 실력 없는 것들이 더 요란하게 싸우는 법이라고."

구경꾼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은 케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지셀을 단번에 박살 내려 했는데 오히려 한 대도 못 맞추고 있었다.

'이익! 왜 안 맞는 거야!'

그의 속이 답답함에 타들어 갈 즈음, 지셀이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조금 더 재미있게 해 볼까?"

"뭐?"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철컥.

지셀은 그대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맨손으로 할게.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이 정도는 양보해야 재미있겠는걸?"

'그리고 그냥 때려야 손맛이 살지.'

갑작스러운 도발에 케인이 얼굴을 붉혔다.

"이, 이 새끼가!"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양손을 들고 환호를 유도했다.

"으하하하! 재미있다!"

"와! 대공자님 실력이 많이 늘었어!"

"아무나 이겨라!"

기사나 귀족들의 결투는 어딘가 엄숙하고 진지하다.

그런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지만, 그래도 지금 지셀처럼 쇼맨십을 보여 주는 편이 구경꾼들에게는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이기면 여기 있는 모두에게 술과 고기를 사도록 하지!"

"와아아! 화끈하다!"

"대공자님 이겨라!"

"역시 페르디움의 계승자다!"

돈은 없지만 일단 지르고 본다.

이게 용병으로서 살아온 지셀의 방식이었다.

실제로 용병들의 결투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귀족들이 보기에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런 게 더 즐거운 법이다.

관중들이 환호하자 케인은 이를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신성한 결투에서 이딴 짓을!"

순식간에 주변 분위기가 시장통처럼 변해 버렸다. 마치 자신이 구경거리에 불과한 검투 노예라도 된 기분이었다.

당황하는 케인에게 지셀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봐야 싸움질인데 신성은 무슨 신성. 혹시 뭐 신전 쪽에서 돈이라도 받았냐? 갑자기 왜 어울리지도 않는 개소리야."

"네놈 새끼는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없냐!"

"응, 없어. 계속 입으로만 싸울 거야? 이것도 무서우면 손가락 하나만 써서 싸워 줄 수도 있는데."

지셀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내뱉는 말에 주변 사람들은 웃기 바빴다.

귀족이라기보다는 시정잡배들 같은 싸움에 친근감을 느낀 것이다.

"와하하하!"

"대공자님 성격이 변한 거 같은데?"

"그래도 구경하는 맛은 있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한심한 지셀의 모습이 잠시나마 사라졌다.

오히려 그가 앞으로 무얼 더 보여 줄지 기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환호와 지셀의 도발에 케인은 이성을 잃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네놈,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아, 그러지 말라는데도 계속 입으로만 싸우네."

파앙!

지셀은 쏘아지듯 케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퍼억!

"크헉!"

케인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격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다.

손바닥으로 맞았을 뿐인데 골이 흔들릴 정도로 아팠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황소처럼 큰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지셀에게 덤벼들었다.

"이 건방진 새끼야!"

하지만 지셀은 가볍게 피해 내고 곧바로 케인의 온몸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퍼억!

"으억! 이 새끼가!"

퍼억!

"이 망할 놈... 아악!"

퍼억!

"네놈, 감히... 크엑!"

퍼억!

"자, 잠깐!"

퍼억!

케인은 지셀에게 반격하기는커녕, 욕도 제대로 못 하고 얻어맞을 뿐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 감탄하는 빛이 떠올랐다.

"대공자님 움직임이...."

"와, 정말 멋있다."

"원래 저런 실력이었어?"

지셀의 움직임은 때로는 우아하고, 때로는 아름다웠으며 또 격렬했다.

그 화려한 몸놀림에 구경하던 기사들마저 충격에 빠졌다.

지셀이 보이는 동작 하나하나에서 뛰어난 묘리가 묻어났다. 절대 대공자의 나이에 이룰 수 없는 경지였다.

스스로와 비교한다고 해도 감히 내가 더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다.

"와아아아!"

"대공자님 최고입니다!"

"너무 멋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러 댔다.

지셀의 주먹질이 화려해질수록 그걸 보는 사람들은 속이 뻥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케인이 얻어맞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툭하면 놀러 와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분위기가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넘어온 걸 느끼고, 지셀은 마지막 쐐기를 박기로 했다.

그는 온몸이 퉁퉁 부어 울기 직전인 케인을 보고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야."

"...?"

"이 꽉 깨물어라. 잘못하면 혀 잘린다."

콰아앙!

지셀의 주먹이 케인의 배에 꽂히는 순간,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전부 깜짝 놀라 물러설 정도였다.

콰콰콰쾅!

케인은 엄청난 속도로 연무장의 끝까지 날아가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가 쓰러진 뒤 드러난 벽에는 그때까지 없었던 금이 나 있었다.

주먹질 단 한 번으로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 광경을 본 기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저게 어떻게?"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사실 지셀은 주먹에 아주 빠르게 마나를 불어넣었다가 회수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눈에는 지셀이 마나도 없이 엄청난 힘을 낸 것처럼 보였다.

마스터 수준이 아니고서야 그 정도로 마나를 세밀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와아아! 끝났다!"

"대공자님이 이겼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대공자님이 결투를 이기다니!"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지셀에게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 끝낼 정도로 마음씨가 자비로웠다면 애초에 거친 용병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안 죽었네. 항복도 안 하고. 이러면 계속해야 하잖아."

지셀은 쓰러진 케인에게 다가갔다.

땅바닥에서 빌빌대던 케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만... 하, 항...."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하, 항...."

"안 들린다고."

케인이 항복을 선언하려는 순간, 그의 인중에 지셀의 주먹이 꽂혔다.

퍼억!

12화 팬다, 안 팬다, 팬다. (3)

"케에엑!"

케인이 입을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뭐지? 왜 이렇게 싸움을 잘해? 원래 잘했나? 아니지, 그런 거면 지금까지 나한테 얻어터졌을 리가 없잖아!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지셀이 무지막지한 구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주먹다짐이 이어질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어 갔다.

앞서는 지셀의 화려한 움직임에 감탄했다면, 이제는 너무 과격한 구타에 케인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저러다 죽는 거 아냐?"

"말려야 할 거 같은데?"

구경꾼들이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껙, 케엑... 제발... 멈... 춰...."

쉴 새 없이 얻어터지던 케인이 겨우겨우 입을 열었지만, 지셀은 멈추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어설프게 끝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적은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용병왕 시절부터 지켜 온 그의 철칙이었다.

"공자님, 그만하십시오!"

보다 못한 케인의 호위 기사가 달려와 지셀의 앞을 막았다.

챙!

그 순간, 언제 뽑아 들었는지 지셀의 검 끝이 호위 기사의 목울대에 닿았다.

지셀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다니, 네가 주인 대신 나를 상대할 건가?"

케인이 이기고 있었다면 호위 기사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지셀을 방치했을 것이다.

결투라는 건 항상, 내가 이기고 있을 때만 신성한 법이다.

호위 기사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 이미 승부는 났습니다. 제발 손을 멈춰 주십시오."

과연 케인은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셀은 그를 흘긋 내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이 정도도 못 버티고 말이야. 요즘 것들은 나약해 빠졌다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그러고는 호위 기사를 돌아보며 차갑게 고했다.

"나한테 빌려 간 돈은 언제 갚을 거냐?"

"고, 공자님도 그 정도로 큰돈은 당장 수중에 없습니다.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이, 이번 달 내로 보내도록 보고하겠습니다."

실제로 케인이 뜯어 간 돈은 백 골드가 되지 않았다. 더 뜯고 싶어도 지셀이 돈이 없어서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자네 뭐네 하면서 천 골드를 내놓으란다.

기사는 억울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따지고 들면 저 망나니 놈이 정말 케인을 죽여 버릴 거 같았다.

하지만 지셀의 요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해라. 그 정도 여비는 가지고 왔겠지? 천 골드에서 빼는 거 아니야. 그건 본래 갚아야 할 돈이고, 이건 결투에서 진 값이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기면 네가 산다며! 왜 우리가 사야 하냐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호위 기사에게 지셀이 빈정거렸다.

"뭐 해? 대답 안 해? 싫어? 혹시 아까워서 그러냐? 지금까지 우리 영지 사람들 괴롭혔으면 양심상 먼저 나서서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영지 사람들을 같이 괴롭힌 놈이 정의의 사도인 양 이런 말을 하니까 더 열이 뻗친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는 기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놈이 승부를 인정한 거니 책임지고 확실히 마무리해."

지셀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케인의 뒷덜미를 잡았다.

케인은 결투가 끝난 줄도 모르고 혼미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사, 살려 줘...."

그러자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죽여. 너를 왜 죽이니? 넌 내 돈 갚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알았어?"

"으... 악... 마...."

"악마는 무슨. 이 정도에 끝낸 걸 다행으로 알아라. 교육 차원에서 봐준 거야. 어이, 데리고 가서 치료해."

호위 기사는 케인을 잽싸게 업고 바로 연무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긴장감에 숨죽이고 있다가, 케인이 나가자 다시 하나둘씩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멋진 결투를 보여 준 대공자에게 감탄했고, 보기 싫은 케인을 박살 낸 것도 속이 시원했다.

"와! 대공자님 최고다!"

"저렇게 강하실 줄은 몰랐어!"

"술과 고기다! 새로운 축제다!"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스코반을 돌아보았다.

"진짜였다고?"

"스코반 너...."

스코반은 남은 술을 모두 털어 마시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엘레나도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와아아아아!"

지셀이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까지도 사람들은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지셀은 스코반과 눈이 마주쳤다.

스코반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술병을 들어 올렸다.

지셀도 씨익 웃으며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봐, 내 말 맞았지?"

엘레나는 옆에 있는 하녀에게 속삭이고는 황급히 지셀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오빠! 잠깐만!"

그녀는 잽싸게 뛰어가 지셀에게 팔짱을 꼈다.

축제 날 있었던 사건 뒤로, 엘레나는 이렇게 지셀을 전보다 훨씬 거리낌 없이 대하곤 했다.

"오빠, 그 큰돈을 어디에 쓰려고 결투에 내건 거야?"

엘레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셀을 올려다보았다. 침울하던 이전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워낙 가난한 영지라 엘레나도 또래에 비해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무도회나 연회에서 다른 영지의 영애들을 보고 부러움에 고개를 숙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셀에게 큰돈이 생기니 은근히 기대감이 들 만도 했다.

"쓸데가 있어."

지셀이 가볍게 웃으며 팔을 빼려 했지만, 또 빠지지 않았다.

"아니, 너 진짜 운동하니? 뭔 힘이 이렇게 세."

"아이, 말 돌리지 말고! 내가 맞혀 볼까? 아멜리아 언니 선물 사 주려는 거지? 오빠 항상 그 언니한테 잘 보이려고 애썼잖아."

"뭐?"

"오빠 약혼자 말이야. 곧 그 언니 생일이니까 선물 사 주려는 거 아냐? 엄청 비싼 보석 같은 거! 이왕 사는 거 나도 하나 사 주면 안 돼?"

지셀은 머리를 세게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아멜리아는 레이폴드 백작가의 영애였다.

페르디움이 변경을 지키는 대신 북부 영주들이 페르디움을 지원해 주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긴 하지만, 레이폴드는 그 이상으로 페르디움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멜리아와 지셀의 약혼도 두 가문의 동맹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생에는 지셀이 가출하자 약혼도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레이폴드 쪽에서도 약혼한 내내 지셀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 파혼하게 되어 엄청나게 기뻐했을 것이다.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어!'

지셀은 화색을 띠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그가 원하는 사업을 시작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골치 아팠는데, 아멜리아의 이름을 듣자 번뜩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돈 벌 방법이 없으면 있는 사람한테 받아 오면 되잖아!'

산적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만, 상대가 아멜리아니까 괜찮다.

'그 배신자한테 한번 제대로 뜯어내야겠군.'

용병왕 시절 지셀은 왕국을 공격하기 전, 가문이 망한 이유를 꼼꼼하게 알아보았다.

시간이 오래 흘러 지워지거나 왜곡된 것이 많아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큰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레이폴드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우리 영지를 돈으로 괴롭혔다지.'

다른 영지가 페르디움을 힘으로 괴롭혔다면, 레이폴드 영지는 갑자기 지원을 끊는 방식으로 괴롭혔다.

페르디움 측에서도 어떻게든 위기를 돌파해 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레이폴드가 가장 열심히 방해했다.

'모두 아멜리아의 지시였지.'

아멜리아는 훗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레이폴드 백작의 자리에 오른다.

내막을 알게 된 지셀은 레이폴드 영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그 원흉인 아멜리아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그녀는 일 년 전쟁이 이어지는 내내 끊임없이 지셀을 괴롭혔다.

잡아 죽이려고 해도 교활하게 잘 도망쳐 다니니 지셀도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쓸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저 공격에 대비하고 적을 박살 낼 생각밖에 없었는데, 생각을 조금 달리해야 할 것 같다.

아직 레이폴드 영지는 공식적으로 적도 아니고, 공격할 명분도 없었다.

그렇다면 완전한 적이 되기 전에, 최대한 뜯어낼 수 있는 건 뜯어내는 편이 이득이었다.

"엘레나."

"왜?"

엘레나의 눈망울이 기대감으로 초롱초롱했다. 지셀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선물 정도는 줘야겠네.'

한동안 침울해하던 엘레나가 겨우 괜찮아졌으니 기분 전환 정도는 시켜 줘도 될 거 같았다.

잊고 있던 아멜리아를 상기시켜 준 게 고맙기도 하고.

"갖고 싶은 옷과 장신구를 골라 봐라."

"진짜? 얼마까지?"

"5골드."

"애걔...."

"싫으면 관두고."

"아니야! 아니야! 알았어. 고마워, 오빠!"

엘레나는 그의 마음이 바뀔까 얼른 표정을 바꾸고 아양을 떨었다.

지셀은 쓴웃음을 지으며 엘레나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방금 떠오른 생각이 흐려지기 전에 급하게 벨린다를 찾았다.

"벨린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시지?"

"영주님이요? 아가씨 일을 전달받자마자 철군을 준비하신다고 생각하면... 일주일 정도는 더 걸리실 거 같네요."

"충분하군. 갔다 와도 되겠어."

"어디를요?"

"레이폴드 영지."

벨린다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곧 아멜리아 아가씨의 생일이네요. 어차피 연회를 열 텐데 벌써 가 보시게요?"

"뭐....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아멜리아는 만나 볼 생각이야. 겸사겸사 볼일도 있고."

"어휴, 아멜리아 아가씨가 그렇게 좋으세요? 로맨틱하시긴."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말을 이어 봐야 놀림만 당할 것 같았다.

"아무튼 갔다 올게. 그렇게 알고 있어."

바로 성을 나가려고 준비하는 지셀을 보고 벨린다가 의아해했다.

"아니, 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시간이 촉박하니까. 아버지 돌아오시기 전에 다녀와야 해. 아버지랑 할 얘기가 있거든."

대충 둘러대며 방을 나서는 그를 벨린다가 급히 잡았다.

"그럼 누구랑 가시게요? 설마 혼자 가세요?"

"당연하지.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금방 도착할 테니, 혼자 가도 괜찮아."

"그러시면 안 되죠. 요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혼자 다니려고 하세요."

"괜찮아.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

"그래도 안 돼요. 제가 같이 갈게요."

"벨린다가?"

"네, 그래도 레이폴드 백작가에 가는 건데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셔야죠. 호위도 몇 명 준비할게요."

"흠... 알겠어."

구색은 갖춰야 한다는 벨린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전생의 자신이야 워낙 강했으니 혼자 다녀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현저히 약한 상태다.

호위를 둘 수 있는데 굳이 안 둘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 지금은 전생의 내가 아니지.'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적진으로 갈 뻔했다는 생각에 지셀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한동안은 전생과 현생의 괴리감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잠시 기다리자 벨린다가 검은 로브를 몸에 두르고 나타났다.

일하기 편한 옷이 최고라면서 언제나 비슷하게 입고 다니던 그녀가 다른 복장을 한 걸 보니 나름 신선했다.

"가시죠."

"그렇게 가리니까 다른 사람처럼 보이네."

"안에는 똑같이 입고 있는걸요?"

벨린다가 로브 자락을 확 펼쳤다.

안에 입은 옷은 평소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로브 안쪽에는 단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지셀은 그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굳이 호위를 더 데려갈 필요 없이 벨린다 하나로도 충분한 거 아냐?'

지셀의 가정 교사이자 하녀장인 벨린다는 그 정체가 불분명했다.

벨린다가 페르디움에 들어왔을 때, 몇몇 기사들이 그녀를 건드린 적이 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젊은 하녀라고 만만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적대던 기사들이 다음 날부터 벨린다를 슬슬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성내에는 벨린다가 사실 기사들을 다 때려눕힐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 뒤로는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말이지.'

전생에도 얘기는 들었지만 믿지 않았는데, 확실히 지금 보니 어지간한 기사는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기도가 느껴졌다.

그런 실력자가 어째서 변경 영지에서 하녀로 지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페르디움에 시집올 때, 하녀로서 같이 왔다는 사실 외에는 밝혀진 게 없었다.

"똑바로 걸쳐. 말 위에서 험하게 달릴 건데 조심해야지."

지셀은 벨린다의 로브를 단단하게 여며 주었다.

벨린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매사에 짜증만 내던 지셀이 변한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우리 도련님이 갑자기 이렇게 의젓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역시 한때의 방황이었던 거야. 지금도 가끔 이상하지만, 예전보다는 낫지.'

지셀은 행동과 말투만 달라진 게 아니라, 케인을 때려잡을 정도로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셀을 보살펴 온 벨린다로서는 너무나 기꺼운 일이었다.

'신경질적이었던 것도 남몰래 수련하느라 힘들어서 그랬을 거야. 이게 다 내가 잘 가르친 덕이지.'

실상 지셀이 그녀에게 배운 건 괴상한 잡기와 이상한 상식뿐이었지만, 벨린다는 문제를 깨닫지 못했다.

명색이 가정 교사인 벨린다는 사실 누굴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었다. 사고방식이 독특하기도 했고.

그동안 벨린다가 해 온 일은 교사라기보다는 유모의 일에 가까웠다.

"준비 다 됐으면 가자."

"퍼거스 경도 부를까요? 그래도 전속 호위 기사인데."

"됐어. 빨리 달리면 영감님 심장에 무리 간다. 엊그제는 나하고 얘기하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알겠어요. 출발하시죠."

지셀과 벨린다, 그리고 호위를 맡은 기사 네 명이 빠르게 성을 빠져나갔다.

13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1)

레이폴드로 향하는 길에 벨린다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선물은 안 사요? 이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뭐, 꽃이나 한 송이 사 가지."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걸로 되겠어요?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요."

"상관없어. 잘 보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흐음...."

지셀은 진심이었다.

전생에 아무것도 모를 때는 예쁜 아멜리아가 마음에 들어 잘 보이려고 늘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래의 적이 될 게 뻔한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그녀와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번에는 그 돈지랄을 못 하게 해 주마.'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말짱 헛것이다.

전쟁에는 막대한 돈과 물자가 소모된다.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없다면 군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전생에 왕국의 끊임없는 물량 공세를 상대하며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병사들을 제대로 먹이고 무장시킬 돈도 없어서야 뭘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해.'

과거로 돌아온 건 좋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 시기는에 델파인 공작가가 이미 대부분의 영지에 손을 쓰고, 북부에 본격적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하는 때였다.

엘레나를 죽이는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지셀은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눌렀다.

'아멜리아,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두둑하게 내놔야 할 거다.'

그를 태운 말이 쉬지 않고 레이폴드 영지를 향해 달렸다.

아멜리아에게서 얼마를 뜯어낼까 상상하니, 불안감에 무겁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 * *

일행은 무사히 레이폴드 성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말을 달리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썼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곧바로 성의 정문을 향해 가는 지셀을 벨린다가 붙잡았다.

"아니, 씻지도 않고 가요? 지금 먼지투성이에 이렇게 더러운데? 아멜리아 아가씨가 싫어할 거예요."

"잘 보일 필요 없다니까."

"허,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하셨을까?"

벨린다는 어리둥절해서 앞서가는 지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아멜리아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던 지셀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쁜 남자 느낌으로 가시려고요? 이건 그냥 더러운 남자인데...."

"됐다니까. 뭐, 그래도 오랜만에 왔으니 방문 선물은 사 갈까."

지셀은 상점가에서 산 꽃다발 하나만 달랑 들고 레이폴드 성으로 향했다.

"멈추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경비병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셀을 제지했다.

수행 인원도 적고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어 귀족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바로 벨린다가 앞으로 나섰다.

평소 장난기 있는 모습과 다르게 진중하고 절도 있는 태도였다.

"페르디움 영지의 대공자 지셀 님이십니다. 약혼녀인 아멜리아 공녀님을 만나러 왔으니 전해 주세요."

수행원이 있을 때 귀족은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지셀은 일단 벨린다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지, 지셀 공자님이요?"

경비병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아멜리아의 약혼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모습에 벨린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 하세요, 어서 안에 전하지 않고."

"아, 알겠습니다."

경비병 중 하나가 돌아서서 성안으로 들어가며 소리 없이 욕을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병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나왔다.

"저기... 아가씨께서 현재 몸이 좋지 않으니 죄송하지만 이대로 돌아가시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린다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대공자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만나 보지도 않고, 숙소를 내주지도 않고 이대로 돌아가라고요? 우리 페르디움 영지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요?"

경비병은 우물우물 답했다. 솔직히 우습게 보는 건 맞지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가...."

"이봐요!"

벨린다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자, 경비병이 희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지? 옷차림은 그냥 하녀인데 분위기가... 비밀 호위 같은 건가?'

쏟아져 오는 압박감에 경비병이 몸을 떨었다. 지셀이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그만, 벨린다."

"하지만, 도련님...."

"괜찮아. 이제 내가 얘기하지."

지셀은 벨린다를 물린 뒤 경비병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상단에 관해 상의할 게 있다고 전해라. 이대로 돌아간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거든."

"네, 네.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도망치듯 도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헐레벌떡 뛰어나온 경비병이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바뀐 대응에 벨린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기에 저렇게 순순히 마음을 바꿨는지 궁금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벨린다에게 속삭였다.

"내가 좋은가 봐. 어휴, 이놈의 인기란."

"어머, 갑자기 웬 자신감이에요?"

벨린다는 갈수록 능글맞아진다며 지셀을 타박했다. 그래도 온종일 성질을 부리던 예전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일행은 화려한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지셀은 접견실까지 오는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와, 역시 부자네. 오길 잘했어. 발전 기금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레이폴드 성은 투박한 페르디움 성과 다르게 사방이 매우 비싼 자재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확실히 돈이 많은 영지다웠다.

벨린다와 기사들은 옆방에서 대기하고, 지셀 혼자 아멜리아를 기다렸다.

'늦는군. 뭐, 내 말 때문에 생각이 무척 복잡하겠지.'

아멜리아는 상당히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셀이 찻잔을 비우고도 한참을 기다리다 지루함을 느낄 즈음, 접견실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탐스럽게 흘러내렸다. 살짝 내리깐 눈과 치켜든 턱이 오만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지셀의 약혼녀, 아멜리아 레이폴드였다.

냐앙.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녀를 뒤따라 들어왔다.

푸른빛이 감도는 짧은 회색 털에 유연한 체형이 돋보이는, '바스테트'라고 불리는 고양이다.

주인인 아멜리아를 닮았는지 표정에서부터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우아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랜만이야, 아멜리아. 나 보고 싶었어? 저 고양이도 오랜만이네. 이름이 뭐였더라?"

능청스러운 인사에 아멜리아는 대답 없이 눈썹만 치켜올렸다.

'지가 뭐라고 내 이름을 막 부르고 난리야? 보고 싶었냐고? 변방이나 지키는 한심한 놈 주제에.... 미친 거 아냐?'

처음 지셀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멜리아는 코웃음 치며 돌려보내라고 했다.

멋대로 찾아와 만나 달란다고 만나 줄 필요도 없고, 지셀같이 덜떨어진 놈은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절대 만나 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지셀이 전해 온 한마디에 결국 성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아멜리아가 상단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단순히 상단 하나를 만들었다 정도가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속으로 불안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곧 생일이지? 이건 선물이야."

지셀이 꽃다발을 건네자, 아멜리아의 얼굴에 경멸하는 빛이 스쳤다.

'지금 저딴 걸 선물이라고 가져온 거야? 감히 나, 아멜리아 레이폴드에게?'

저런 선물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다. 누구도 자신에게 저런 허접한 선물을 건넨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선물의 가치를 따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주는 사람이 지셀이라 그냥 꼴 보기가 싫었다.

냐앙!

바스테트마저 아주 불쾌하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아멜리아는 우아하게 걸어가 지셀이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아름다운 꽃이군요. 하지만 이런 건 금세 시들고 말지요.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겠네요."

아멜리아는 꽃다발을 접견실 구석으로 휙 던져 버렸다.

선물한 상대가 치욕스럽게 느낄 행동이었다. 그 상대가 명예에 목숨 거는 귀족이라면 더욱.

본래라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이고, 하지도 않을 대응이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일부러 보란 듯이 꽃다발을 내던졌다.

지셀을 흥분시켜 실수를 유발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는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앉아 있던 소파에 등을 기대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우리 영지가 돈이 없어서 비싼 선물은 못 해 줘. 선물은 마음이 중요하지! 마음이!"

얼굴빛 하나 안 바뀌고 능청을 떠는 태도에 아멜리아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영지가 가난하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은 아니잖아요. 수치스럽지도 않나요? 그리고 마음을 표현하려면 선물의 가치 역시 중요하답니다. 진심은 쓰레기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죠."

아멜리아는 어떻게든 지셀을 격동시키려 심한 말을 내뱉었다.

평소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장 아멜리아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떠보려면 감정적으로라도 흔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셀은 대놓고 모욕을 당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지.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는 거라면 모를까. 나도 산적단 같은 걸 만들어 볼까 잠깐 고민한 적이 있는데, 역시 남부끄러운 짓은 안 하기로 했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멜리아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말투며 행동이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외치는 듯했다.

'예전과는 태도가 달라. 이렇게 기묘한 자신감을 내보인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셀은 자신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 앞에 서면 항상 부끄러워하고, 감히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잘 보이려고 하기는커녕,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지셀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니 오히려 경계심이 치솟았다.

"뭐, 좋아요.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죠? 본론만 빠르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요."

"얘기가 빨라서 좋군. 돈이 좀 필요해. 내가 지금 좀 어려운 상황이거든."

지셀이 윙크하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예상조차 못 했던 발언에 아멜리아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렇게 당당하고 건방지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 고작 그런 이유로 절 찾아왔나요? 약혼녀에게 돈을 빌려 달라니, 공자님은 자존심도 없나 보군요."

그러자 지셀이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돈을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그럼 뭐죠?"

지셀이 허리를 살짝 굽혀 아멜리아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냥 달라는 거지.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

"해 줄 거지?"

지셀의 말을 들으며 아멜리아는 진지하게 결심했다.

이놈이랑은 오늘 당장 파혼해야겠다고.

14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2)

아멜리아는 기가 찼다.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니, 감히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은 지셀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우리 사이'라니?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

그녀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할 말은 해야겠군요. 레이폴드는 거지 같은 페르디움에 이미 많은 지원을 하고 있어요."

"거지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들으면 섭섭해하시겠어. 시아버지 될 사람한테 거지라니."

"다짜고짜 찾아와서 돈을 달라는 게 구걸이 아니면 뭔가요? 이것도 페르디움 백작님의 뜻인가요?"

아멜리아의 말에 지셀은 다리까지 꼬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가 북부를 틀어막지 않으면 왕국은 상당히 피곤해지겠지.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을 우리가 나서서 해 주고 있는 거야. 너희는 그런 우리를 지원하는 거고. 그건 거래지, 구걸이라고 하지 않잖아?"

그의 말은 정론이었다.

누군가는 북방의 야만인들을 막아야 한다. 그게 페르디움이 척박한 변경에서 허구한 날 전쟁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페르디움이 대신 싸워 주고 있으니, 그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왕실과 다른 영지들이 나누어 부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말에 아멜리아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공자님이 야만인과 싸우고 있나요? 북방을 막는 건 페르디움 백작님이고 제 아버지는 이미 페르디움에 넘치도록 지원하고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이폴드는 이미 페르디움에 많은 지원금을 보내고 있었다.

지셀이 그걸 따지면서 돈을 달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흠, 지금 당장은 내가 막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그쪽이 나한테 돈을 주는 게 딱히 틀린 것도 아니야."

"무슨 미래요?"

아멜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지셀은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리며 답했다. 그의 눈에는 웃음기 한 점 없었다.

"미래에는 내가 페르디움을 물려받을 테니까. 그러면 미래의 레이폴드 백작이 될 그쪽이 나한테 지원해 주는 건 당연하잖아. 그걸 미리 좀 받아 가겠다는 말이지."

"...!"

아멜리아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누군가 들으면 목이 날아갈 만한 발언이었다.

이게 지금 뭘 알고 던지는 건지, 아니면 원래 미친놈이라 그냥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아멜리아가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공자님...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랍니다. 저는 여자고 레이폴드의 후계자도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레이폴드 백작이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 그런 자리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차피 저는 페르디움으로 시집갈 몸이 아닌가요? 누가 들으면 비웃겠어요."

"나랑 결혼 안 할 거잖아?"

"...."

아멜리아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너 같은 망나니하고 결혼하겠어!'

선대에 맺었던 약속만 아니라면, 지셀 따위는 감히 아멜리아와 약혼하기는커녕 마주 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멜리아의 표정을 본 지셀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여기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쪽이 백작 자리에 관심이 있건 없건 사실 신경 안 써. 난 돈만 받아 가면 돼."

"당신에게 돈을 줄 이유도 없지만, 애초에 제게는 그만한 돈도 없어요. 뭘 보고 제게 돈을 달라는 거죠?"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악티움 상단 잘 크고 있잖아? 돈 많잖아?"

악티움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셀을 노려보는 눈에서 살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분노로 동요를 감추었을 뿐,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마음속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긴가민가했는데, 방금 그 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지셀은 그녀의 약점과 야망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표면적으로는 악티움 상단과 어떤 연관도 없다.

현재 상단의 주인도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고, 일부러 그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셀은 콕 집어 악티움 상단을 거론했다. 대체 지셀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셀은 여유롭다 못해 평온한 얼굴로 덧붙였다.

"길게 말 안 할게. 소문내지 않을 테니 1만 골드를 내놔. 그 정도면 저렴하잖아? 나를 못 믿겠으면 돈의 무게를 믿으라고."

그녀는 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비밀이 들키면, 아멜리아는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어쩌면 목숨까지도 말이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지셀도 그걸 잘 알기에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아직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겠지. 이 협박이 통하는 것도 지금뿐이야.'

아멜리아 레이폴드.

상냥하고 우아한 성품과 높은 학식으로 유명한,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 여자.

그리고 훗날 다른 귀족들에게 '북부의 마녀'라 불리는 악녀 중의 악녀.

지셀의 전생에 그녀는 아버지인 레이폴드 백작을 탑에 감금하고 이복형제들을 모두 죽인 뒤, 가문과 영지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델파인 공작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가 백작위를 차지하는 데 가장 큰 기반이 되어 준 것은 악티움 상단이었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병을 키워 낸 악티움은, 단순한 상단이 아니라 재력과 무력을 모두 갖춘 집단이었다.

'다른 단체도 여럿 거느렸던 모양이지만... 역시 악티움 상단이 가장 규모가 컸어.'

백작위를 차지하고 악티움을 거대 상단으로 키워낸 뒤, 아멜리아의 칼끝은 페르디움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

'지금은 세력을 숨기는 데만도 벅찬 상태일 거다.'

레이폴드 백작은 자식이 많았다.

자식들 사이에 나이나 역량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아, 후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그녀가 야심을 품고 몰래 세력을 키우는 사실이 탄로 난다면 형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갈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망나니 놈 따위가 대체 어떻게... 설마 델파인 공작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아는 건가?'

그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폴드 백작은 델파인 공작가에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델파인 공작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자금과 병력까지 지원받고 있다는 걸 알면 백작도 딸과 연을 끊을 것이다.

'지금은 의혹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되는 상황이야.'

물론 지셀에게 뚜렷한 증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지셀이 꺼낸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게 되면 위험해진다.

어쩌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델파인 공작가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 요소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님."

"왜?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돈 줄 거야?"

"공자님은 선을 너무 많이 넘으셨어요. 아쉽지만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요."

"벌써? 돈도 안 받았는데?"

아멜리아는 지셀의 말을 무시한 채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처리해."

그 한마디에, 큰 책장이 있던 벽이 뒤집히며 검을 든 사내가 걸어 나왔다.

하지만 지셀은 놀란 기색 없이 피식 웃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영지전이 벌어질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페르디움 백작님을 믿으셨나 본데, 안됐지만 그분은 여기 안 계세요. 공자님과 일행들은 여기에 온 적이 없는 걸로 처리될 겁니다."

"냉정하기는. 그래, 뭐... 그런 여자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

지셀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히 일어나 검을 뽑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코웃음만 쳤다. 지셀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건 근방에서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턱을 쳐들고 우아하게 명령했다.

"빨리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가자, 바스테트."

냐앙.

그녀는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지셀과 같이 온 일행들도 죽이라 명할 셈이었다.

카아앙!

뒤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 번.

"커억!"

그리고 짧은 비명이 한 번 울려 퍼졌다.

아멜리아는 덜컥 표정을 굳히고 걸음을 멈췄다.

그 비명이 지셀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돌아본 곳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쓰러진 남자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의 카펫을 적셔 갔다.

"숨겨 놓은 패치고는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돈도 많으면서 실력 좋은 사람 좀 쓰지 그랬어."

남자 옆에서는 지셀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었다.

"대, 대체 당신이 어떻게...."

죽은 남자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지셀 같은 애송이는 한 수에 제압하고도 남는다.

그런 사람이 지셀 따위에게 당해 쓰러져 있다니. 아멜리아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콰앙!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문 앞을 지키던 기사 두 명이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왔다.

"헉!"

그들은 시체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는 지셀을 발견하고는 놀라, 바로 검을 뽑아 들고 포위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아멜리아가 크게 외쳤다.

"죽여! 당장 저놈을 죽여!"

"고, 공자님을 말입니까?"

"빨리! 누가 오기 전에 빨리 죽이란 말이야!"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지셀에게 다가갔다.

타 영지의 후계자를 죽이면 일어날 후폭풍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명령을 무시했다간 당장 자신들이 죽을 것이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기사님들. 더 움직이시면 아가씨가 위험해져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벨린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아멜리아의 목에 단검을 들이민 채 서 있었다.

그 뒤에서는 그녀와 같이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문 앞을 막아섰다.

"사랑싸움이라기엔 좀 과격한데요,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벨린다가 지셀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는 별거 아니란 듯이 답했다.

"그냥 조금 의견 차이가 있었어. 여자 마음은 참 어렵단 말이지."

"젊을 때는 다들 그래요. 서로 양보할 줄 모르거든요."

"그래도 이제는 대화가 좀 통할 거 같아. 그렇지, 아멜리아?"

지셀이 아멜리아에게 다가섰지만, 기사들은 벨린다가 그녀에게 상처라도 입힐까 봐 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분노로 가득 찬 아멜리아의 눈을 보고 지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줬으면 좋았잖아. 너한테는 푼돈일 텐데. 왜 굳이 상황을 험악하게 만들어?"

"당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차피 지셀도 아멜리아가 쉽게 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대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서 재미있기도 했다.

지셀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안타까운 소식 하나 알려 줄게. 이제 2만 골드로 올랐어. 아멜리아."

15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3)

캬아악!

그때, 바스테트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번쩍 뛰어올라 지셀을 노렸다.

하지만 그는 슬쩍 고개를 젖혀 피해 버렸다.

고양이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삑 하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났다.

지셀이 고개를 까닥이며 웃었다.

"웃기는 고양이네. 잘 좀 챙겨. 동물은 해치고 싶지 않거든."

바스테트는 털을 바짝 세우고 지셀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 모습이 꼭 제 주인 같아서 지셀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 호위 단장 말이야. 이름이 베르나프였나? 사이가 참 좋은 것 같던데."

지셀은 아멜리아가 레이폴드 백작 자리에 오른 뒤, 호위 기사인 베르나프와 결혼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대충 아는 대로 던진 말이었지만 아멜리아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말았다.

'설마... 지금 호위 기사랑 가깝다고 질투하는 거야?'

세상에 이런 한심한 놈이 있나!

베르나프와 특별히 가까운 건 사실이었다. 순박한 촌놈이었던 그를 직접 거둬들이고 지금까지 키워온 사람이 자신이니까.

제법 재능이 있고 괜찮은 남자여서 나름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절대로 지셀이 의심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생각을 이어 가던 아멜리아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 미친놈이 쓸데없는 소문을 내면 어떡하지....'

약혼자를 두고 호위 기사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면 두고두고 가문의 망신이 될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이놈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장작에 불을 지피는 격이지.'

아멜리아가 베르나프를 총애한다는 건 영지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디서 얼굴만 잘생긴 놈을 주워와서 호위 기사단의 단장까지 맡겼다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르나프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지금 악티움 상단의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문제까지 터지면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마른침만 삼키며 한동안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상단의 일도 그렇고... 제 뒷조사를 하고 다닌 건가요?"

어쩌면 지셀이 자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뒤를 캐고 다닌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신과 베르나프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걸 알게 되어서, 복수심으로 돈이라도 뜯어내려는 거라고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저 명예도 모르는 놈이라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지셀에게서는 질투심은커녕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냥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우연히 들었지."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적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기초 중에서도 기초 전략이다.

아마 그녀는 지셀이 어떻게 비밀을 알게 된 건지 추적하느라 한동안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하지만 파 봤자 뭐가 나올 리가 없다. 설마 미래에 살던 사람이 죽었다가 되살아나 과거로 왔다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자, 어떻게 할 거야? 돈 줄 거야, 말 거야? 나 급하다고."

아멜리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 이러고도 당신과 페르디움이 무사할 거 같아? 어디서 헛소문을 주워듣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협박으로...."

하지만 그녀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지셀에게서 갑자기 끔찍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봐. 우리 영지가 무사할 거 같냐고?"

가문과 영지가 멸망한 건 지셀을 평생 괴롭히던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그 주범 중의 하나. 그런 사람 입에서 저따위 협박이 나오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급변한 지셀의 기세에 벨린다를 비롯한 주변의 호위 기사들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아멜리아는 정면에서 지셀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협박은 말로 하는 게 아니야, 아멜리아."

가문을 뛰쳐나온 이후, 지셀은 평생 사선에서 타인을 베어 넘기며 살아왔다.

그중에는 이름난 기사들과 지체 높은 귀족은 물론 수많은 강자들이 있었다.

지셀이 죽인 이들의 시체로 성이라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중 아멜리아 같은 이들이 없었을까.

아직 세력을 제대로 구축하지도 못한 아멜리아의 험한 소리 따위는, 고양이가 할퀴는 것만도 못했다.

"지금껏 나한테 덤빈 놈들이 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저 고양이 빼고 말이야. 그놈들은 모두...."

지셀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놈들도 모두 멀쩡히 잘 살아 있을 게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지셀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건강하게 잘들 있겠지. 아직은."

"...뭐?"

"그놈들 제법 강한 놈들이라."

아멜리아는 물론,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던 지셀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쩔 거냐고."

지셀은 델파인 공작가의 이름까지 꺼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도 위험한데, 굳이 배후까지 들먹여서 더 큰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감고 말았다.

설마 싶지만, 저 여유로운 태도를 보니 지셀이 무언가 더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지셀 일행을 전부 죽이려면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과 저 기사들까지 모두 처리하려다 보면 소란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럼 결국 자신이 의심받을 가능성도 커진다.

'일단은 성에서 내보내자. 아버지와 오빠들이 모르게 해야 해.'

결정을 내린 그녀는 눈을 뜨고 씹듯이 내뱉었다.

"...2만 골드, 드리지요. 당장 가지고 꺼져 주세요."

"좋아. 역시 화끈하다니까."

"닥쳐요. 파혼 절차도 바로 진행될 거예요."

"그래, 그건 뭐 편한 대로 해."

지셀은 흔쾌히 동의했다. 거금을 받았는데 파혼 정도야.

아멜리아가 그를 잠시 바라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많이 변했군요."

"날 변하게 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너야."

아멜리아는 지셀이 달라진 이유를 꿈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원한 어린 목소리가 지셀의 걸음을 붙잡았다.

"당신 따위가 변해 봤자 뭐가 달라질 것 같나요? 고작 질투심과 돈 때문에 스스로 위험에 빠지다니. 여전히 어리석군요."

"멋대로 생각해."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기대하지."

아멜리아는 이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 지셀의 입을 막기 위해 온갖 수작을 걸어 올 것이다.

그래도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2만 골드라면 당장 필요한 초기 자금 정도는 될 테니까.

'아멜리아, 이번에는 반드시 목을 베어 주마. 전생처럼 도망 다닐 생각은 하지 마라.'

접견실을 나서는 지셀의 표정은 아멜리아 못지않게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형식적이나마 약혼으로 묶여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지셀 일행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아멜리아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지셀 페르디움! 감히 나를 협박해?"

그런 남자한테 협박을 당하고 돈까지 뜯기다니! 태어나서 이런 굴욕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입을 막아야 하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델파인 공작은 무서운 자다. 그들 사이에 맺은 밀약에 관해 소문이 퍼진다면 바로 꼬리를 자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미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안 돼."

델파인 공작가의 음모는 벌써 진행되고 있었다.

페르디움 영지처럼 안에서 뒤집을 수 없다면 밖에서 공격하고, 레이폴드 영지처럼 가능성이 보이는 곳은 투자해서 손안에 넣는다.

그들은 자기편이 아닌 모든 영지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역시 죽여 버려야겠어."

망설임이나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여차하면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죽여야 한다. 귀족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우선 죽이고 나서, 명분이 필요하다면 그때 적당히 만들어 붙인다.'

지셀을 죽인 게 자신이라는 의혹을 사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상단 문제를 입막음하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베르나프! 베르나프를 불러와! 당장!"

결단을 내린 아멜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금발에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베르나프!"

냐앙!

분노한 아멜리아와 바스테트를 본 베르나프가 흠칫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셀을 죽여. 그놈이 내 비밀을 알고 있어."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가 뭘 알고 있다는 겁니까?"

자초지종을 들은 베르나프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뭔가 일을 벌일 능력은 없는 한심한 사람이에요. 그저 돈을 뜯어내려고 왔을 테죠."

"하지만 그놈이 입을 가볍게 놀리면 일을 망칠 수도 있어.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라고."

"돈을 먹었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겁니다. 오히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돈을 더 받으러 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셀은 더 이상 그녀를 찾아올 생각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그가 돈을 더 뜯으러 올 수도 있다 생각했다.

지셀을 명예도 없이 약혼녀를 협박하는 소인배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지셀이 그 돈을 어디에 쓸 생각인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도박이나 유흥으로 날리겠거니, 잘해 봐야 거지 같은 영지에 조금 보태 주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지셀이 쌓아 온 망나니 이미지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달라진 모습을 봤다지만, 편견이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아멜리아는 책장에서 지도를 꺼내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여기에서 죽여. 여기라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야. 돈도 다시 찾아와."

아멜리아가 가리킨 장소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였다.

레이폴드 성에서 페르디움 영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좁은 길이니 진을 치고 있다가 기습하면, 몇 명 되지도 않는 지셀 일행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셀 공자가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산적이나 몬스터에게 당한 것처럼 조작하면?"

"만약 저희가 공격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페르디움 백작의 분노를 살 겁니다. 지금 페르디움과 영지전이 벌어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나한테 준 굴욕도 굴욕이지만 위험 요소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영지의 기사를 쓸 수는 없습니다."

"용병이든 암살자든, 그동안 투자한 놈들이 있잖아. 그놈들이라도 보내."

결국 베르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들키면 위험하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면 위험할 일도 없다.

어차피 페르디움 영지 내에서도 겉도는 지셀이니 사람들의 관심도 크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단히 준비시켜 보내겠습니다."

아멜리아가 냉정한 눈빛으로 베르나프를 바라보았다.

베르나프는 한심한 지셀 따위와는 달리 제법 능력이 있었다.

그가 움직인다면 지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소문나기 전에 확실히 처리해."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가 봐."

"... 얼른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베르나프는 아멜리아에게는 보이지 않게 표정을 찡그렸다. 지셀 때문에 당분간은 상당히 피곤해질 거 같았다.

'하아, 그놈은 왜 이렇게 귀찮은 일을 벌여서 ....'

아멜리아의 얼굴만 보고 살고 싶은데,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도 파혼이 앞당겨졌으니 나한테는 좋은 일인가?'

베르나프는 아쉬운 눈길로 아멜리아를 훔쳐보다 방을 나섰다.

지셀이고 뭐고, 얼른 처리하고 다시 아멜리아 곁에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16화 변수가 필요해. (1)

"페르디움 쪽은 실패했습니다."

"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수하의 보고를 듣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이름은 해럴드 데스몬드.

데스몬드 백작령의 주인이자, 델파인 공작의 밑에서 북부의 전복을 꾀하고 있는 자였다.

"디갈드 영지랑 영지전을 붙이려고 했었지. 그걸 실패했다고?"

"그렇습니다."

"호위 기사까지 포섭했는데도 실패했다니. 기사단장에게 걸린 건가?"

페르디움은 돈도 없고, 인물도 없는 영지였지만 그나마 페르디움 백작과 기사단장인 란돌프는 높이 쳐 줄 만했다.

해럴드의 물음에 부관은 조금 난감한 듯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기사단장은 페르디움 백작과 함께 출정을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부관은 해럴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는 호위 기사 둘이 영애를 납치하려다 걸려서 페르디움 대공자에게 죽었답니다. 프랑크는 행방불명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페르디움 대공자... 그 사고뭉치 망나니? 그놈이 정식 기사를 이겼다고? 설마 프랑크도 그놈한테 당한 건가?"

"지셀은 그 정도 실력이 없습니다. 아마... 호위 기사 둘이 서로 백작 영애를 차지하려다가 상잔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해럴드는 곧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걸 보고라고 하는 건가. 아마? 예상? 그깟 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파악을 못 한단 말이야?"

말이 이어질수록 해럴드의 온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현장이 완전히 불타 버려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벌벌 떠는 부관을 바라보던 해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주와 기사단장은 출정 나가서 없고, 기사와 병사도 적은 영지다. 그런 곳에 프랑크를 보내고, 호위 기사들까지 포섭했지. 그랬는데도 겨우 여자애 하나를 못 죽여?"

해럴드가 짜증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서는 정작 한다는 말이, 그 한심한 페르디움 대공자가 기사를 죽였다더라? 언제부터 내 부관이 그런 정보 하나 똑바로 못 알아 오는 쓸모없는 놈이었지?"

부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그런 쉬운 일도 실패한 주제에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해럴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 우스운 소문대로 페르디움의 대공자가 뜻밖의 변수일 가능성은 지극히 적었다.

그렇다면 저 부관의 능력이 기대 이하이거나... 일을 대충 진행한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그런 수하는 필요 없다.

딸랑, 딸랑.

해럴드가 책상 위에 있는 종을 집어 두어 번 흔들자 기사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창백해진 부관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처리해라."

"사, 살려 주십시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제발! 으아아아!"

부관이 끌려 나가며 발악했지만, 해럴드는 신경 쓰지 않고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레이폴드 쪽에 신경 쓰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페르디움 따위가 거슬리게 하다니."

해럴드는 지금 아멜리아의 반란 계획에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레이폴드 백작은 조용히 식량을 비축하고 병력을 늘리는 중이었다.

'그쪽이 더 힘을 키우기 전에 아멜리아가 성공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페르디움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문득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어 해럴드는 미간을 좁혔다.

"지셀 페르디움...."

지금까지는 안중에도 없었던 인물이라 더 거슬렸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더 보내야겠군."

결국 고민 끝에 해럴드는 페르디움 영지에 첩자들을 더 투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도련님, 도대체 무슨 일이었어요?"

"뭐 그냥 사랑싸움이지. 아멜리아가 날 너무 사랑하나 봐. 이놈의 인기란."

벨린다가 거만한 표정을 짓는 지셀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아멜리아 아가씨한테 돈은 왜 달라고 한 거예요?"

"돈을 써야 할 일이 좀 있는데, 주위에 돈이 많은 사람이 아멜리아밖에 없었어."

"아하, 그래서 돈 많은 약혼녀한테 돈을 뜯어 왔다?"

벨린다가 미친놈 보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흘겨보았다. 그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허, 나 그런 남자 아니야. 다 이유가 있다니까."

"대체 무슨 이유인데요?"

"전생에 아멜리아가 나를 많이 괴롭혔거든. 그 빚을 지금 받는 거지. 이를테면 보상금이랄까."

"...."

진실이지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정말 말 안 해 주실 거예요?"

"아니, 진짜라니까?"

레이폴드 성을 나서는 동안 벨린다는 내내 지셀을 추궁했다.

하지만 벨린다가 아무리 닦달해도 지셀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말한들 믿겠냐고.'

미래에 아멜리아가 페르디움의 적이 될 거라고 얘기해 봐야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아멜리아의 치부를 알려 그녀의 계획을 망쳐 버리기도 곤란했다.

그랬다가는 델파인 공작가에서는 바로 그녀를 버리고 다른 장기 말을 찾을 것이고, 지셀로서는 대비하기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진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이용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벨린다는 역시나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네, 그렇다고 해 두죠. 그나저나 그렇게 돈을 뜯어 와도 괜찮은 거예요? 레이폴드 백작님이 알게 되면 문제가 생길 텐데요."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아멜리아는 절대 말 못 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으음, 지금은 비밀. 나중에 알려 줄게. 어쨌든 슬슬 다음 일을 해 보자고."

벨린다는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일이요? 바로 돌아가지 않으시고요?"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벨린다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귀족들의 음험한 행동 방식에 관해서는 잘 안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 그들에게 칼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사람을 보낼 수도 있겠네요."

"그래, 대비해야지."

전생에 이미 아멜리아를 겪을 대로 겪은 덕분에, 지셀은 그녀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성격에, 절대 그들이 이대로 멀쩡히 돌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 쪽에도 변수가 필요해. 아멜리아에게 살짝 혼란을 줘야겠어."

"변수요?"

"우리와 함께할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힘이 될 사람."

"그게 누군데요? 아는 사람이 있어요?"

"일단... 이곳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해."

벨린다는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요?"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일단 찾아보고 없으면, 그때 다른 다음 방법을 생각해 보자."

"정말, 무슨 생각인 건지....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이 뭔데요?"

"길리언."

지셀은 일행들과 함께 길리언이란 자를 찾아 여러 곳을 돌며 수소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 한 명이 그의 소재를 찾아왔다.

"역시 이 근처에 있었군. 가 보자."

지셀은 마음이 다급해져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길리언은 그가 타국에서 용병 생활을 할 때 소문으로만 전해 들은 인물이었다.

듣기로는 한동안 레이폴드에서 지내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다행히 아직 죽기 전이군.'

그가 자살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성 외곽에 있는 허름한 집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네.'

집은 곧 무너질 것처럼 허름했다. 위치만 동떨어져 있다 뿐이지, 성 반대쪽 빈민가에 있는 집들과 그리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계십니까!"

수행 기사가 큰 소리로 외치며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한 남자가 나왔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이 눈에 띄었다.

관리를 안 하는지 머리와 수염은 제멋대로 자라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눈은 퀭해서 썩은 생선의 눈처럼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에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이 보기에 길리언은 폐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이런 사람을 그렇게 열심히 찾은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람에게는 기세라는 게 있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일반인이라도, 보는 순간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길리언은.... 퀴퀴하게 풍기는 술 냄새는 그렇다 쳐도, 뻗어 오는 기도가 시장통의 건달만도 못했다.

벨린다는 길리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지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냥 짐꾼으로 쓸 생각인가? 그럴 거면 노예나 하인을 구하는 게 더 나을 텐데.'

체격과 근육이 좀 쓸 만해 보이기는 하지만, 피곤함에 찌든 표정과 축 처진 어깨를 보면 짐꾼 일도 할 수는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다른 일행이 의구심과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을 때, 지셀만이 웃었다.

"길리언, 당신을 만나러 왔다."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길리언은 지셀이 나이가 어려 보여도 일단은 존대하며 정중하게 대했다.

옷차림도 평민들과는 다르고 수행하는 기사들과 하녀까지 있으니, 한눈에 귀족임을 알아본 것이다.

"지금 꽤 힘든 상황이지? 내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

지셀의 말에 길리언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젊은 귀족 나리가 심심하신 모양이군. 그런 겉멋은 다른 곳에서나 부리시오."

그의 말에서는 신경질적인 날카로움과 비웃음이 묻어 나왔다.

말 한마디로 태도가 휙 변하는 예민한 성정에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지셀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

"됐으니 그냥 돌아가시오. 그러잖아도 피곤한 삶이라 애송이 도련님 장단에 맞춰 놀아 줄 여유는 없소."

길리언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평민이 감히 귀족에게 범해서는 안 될 무례였다.

수행 기사 하나가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상당히 무례한 놈이로구나."

길리언은 잠시 몸을 돌려 기사의 검을 노려보더니, 큭큭 웃으며 제 심장을 가리켰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그럴 강단은 있나? 여기가 심장이니까 제대로 한번 찔러 봐."

"이놈이!"

수행 기사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지만, 차마 검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겁을 먹거나 덤벼 오지도 않고 그냥 죽이라는 태도에 되레 찔끔한 것이다.

지셀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에이, 서로 초면인데 다들 그리 험악하게 굴지 말고. 길리언, 난 정말로 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

길리언은 퀭한 눈으로 지셀을 돌아보았다.

낙천적으로 보일 만큼 밝은 표정. 그 눈에는 올곧은 자신감이 들어차 있었다.

'이상한 귀족이로군.'

귀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권위를 따지지 않는 태도를 보니 옛 지인들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들어오시오."

길리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바로 코부터 막고 말았다. 벨린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하아, 거지 소굴이 따로 없네.'

얼마나 청소를 안 했는지 곳곳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볕이 안 드는 방구석에는 곰팡이까지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집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온갖 무기들이었다.

'대장장이인가?'

큰 체격이나 집안 곳곳에 널린 무기들을 보면 꽤 그럴듯한 추리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 굳이 대장장이를 수소문해 가며 찾을 필요가 없다.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했다, 앞으로 어쩔 거다, 왜 말을 안 해 주시는 거야.'

벨린다는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지셀이 자세한 얘기를 안 해 주니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이쪽이오."

그들은 길리언을 따라 작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엘레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수척한 얼굴을 내비치며 잠들어 있었다.

"내 딸이오."

길리언의 딸을 본 벨린다와 기사들이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빛바랜 갈색 머리카락은 만지면 바스러질 정도로 푸석해져 있었고, 입술은 죄다 갈라져 터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시체에 가까운 모습.

침대보 곳곳에 묻어 있는 핏자국들과 빠진 손톱이, 소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소녀의 얼굴과 몸 곳곳에 보이는 붉은 반점이었다.

벨린다는 자신도 모르게 지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도련님!"

지셀은 천천히 벨린다의 손을 잡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

"도련님, 물러나세요. 도련님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왜 길리언이 저런 상태인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불치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딸, 그들을 경멸하거나 피하려는 사람들의 태도, 보이지 않는 희망.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딸과 함께 그도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벨린다의 행동을 보고 길리언이 흐린 웃음을 토해 내었다.

"도와준다더니 내 딸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찾아온 것이오?"

"아니,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내 딸은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소."

"세간에 알려진 치료법이 없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지."

당연한 듯 내뱉는 어조에 길리언이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 건가? 무슨 의도로 나한테...."

벨린다가 길리언의 말을 끊으며 지셀의 앞을 막았다.

"공자님, 그만 물러나세요!"

목소리가 컸다. 그녀가 공자님이란 호칭을 썼다는 건 정말로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셀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괜찮아, 저건 전염병이 아니야. 이미 헛소문이라고 밝혀졌잖아?"

"그래도 물러나세요!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아니, 전염병이 아니라니까."

벨린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셀이 무엇을 믿고 저리도 자신만만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더 놀라웠다.

"나는 저 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치료법을 아는 건 세상에 오직 나뿐이지."

17화 변수가 필요해. (2)

"뭐라고요?"

벨린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에도, 소녀의 온몸에 난 붉은 반점은 마치 꽃잎처럼 피어올랐다가 서서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반점은 완전히 부어올라 고름이 새어 나오고, 어떤 반점은 그저 점멸하듯 생겼다 없어지곤 했다.

벨린다는 길리언의 딸을 잠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이 병은 분명히 '영원의 형벌'이에요."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의 형벌'은 신성력으로도 완치되지 않는 지독한 병이다.

그렇기에 성직자들은 이 병을 두고 전생에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받는 형벌이라 주장했다.

그 말이 떠오르자 지셀은 무심결에 혀를 찼다.

"하여튼 그쪽은 영 마음에 안 들어. 성녀랑 같이 나한테 매일 잔소리나 꼬장꼬장하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지셀은 잽싸게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건 그냥 단순한 병일 뿐이야. 신이 내린 형벌도, 태어날 때부터 매인 족쇄도 아니야.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벨린다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치료하지 못하는 걸 도대체 공자님이 어떻게 치료한다는 거예요? 이 병에는 신성력도 듣지 않는데."

신성력을 이용하면 대개의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이 병만은 예외였다.

신성력을 쏟아부으면 잠깐은 병세가 호전되는 듯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발하여 쓰러지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잠시 병을 억제할 뿐이야.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고. 애초에 보통 사람들은 신성력 치료를 계속 받기도 힘들어."

신전에서는 아주 가끔, 대대적으로 구호 활동을 할 때 외에는 쉽게 신성력을 베풀지 않았다.

귀족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재산을 전부 써 버렸겠군."

길리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과거에는 꽤 큰 돈을 벌었지만 오랜 병간호로 모든 가산을 소진했다.

딸을 치료하기 위해 전 재산을 아낌없이 썼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이만 떠나도록 해요. 도련님이 더 이상 여기 계실 이유는 없어요."

벨린다는 그저 지셀이 소녀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전염된다는 소문은 거짓이라지만, 마음이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피하기 바빴다.

재수 없게 걸렸다간 평생을 고생해야 하는 병인데, 아무리 헛소문이더라도 불안을 감수하며 굳이 환자와 가까이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 반드시 치료해야겠어.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벨린다가 말리는 이유도 이해하지만, 기껏 찾은 사람을 두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바로 길리언을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운 좋게 시기가 아슬아슬하게 맞았다.

길리언의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딸의 죽음에 상심한 길리언도 모든 걸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길리언을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직접 치료하시겠다고요?"

"지금 이 병의 치료법을 아는 건 나뿐이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겠지?"

그 말에 벨린다는 두 손을 들고, 말리기를 포기했다.

지셀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 한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벨린다조차도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구는 지셀의 모습을 보고 길리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면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길리언에게는 그 말을 믿고 따르거나, 믿지 않고 부정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길리언의 딸이 크게 몸을 떨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아아, 으으윽...."

"레이첼!"

길리언이 다급하게 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영원의 형벌'은 시도 때도 없이 엄청난 고열과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불러온다.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차마 듣고 있기 힘들어,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셀과 엮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병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고통에 하도 침대보를 잡아 뜯으니, 그녀의 손톱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 피고름이 맺혀 있었다.

침대보에 거멓게 말라붙은 핏자국들은 레이첼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입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자 길리언은 급하게 레이첼의 상체를 세워 피를 빼 주었다. 누워 있는 채로 피를 토하다가는 기도가 막혀 질식할 수 있었다.

"으아아, 아아아악!"

"레이첼, 레이첼... 괜찮다, 괜찮아...."

피거품을 내뿜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레이첼과 그에 못지않게 괴로워하는 길리언.

어쩔 줄 몰라 그저 딸을 안고 벌벌 떠는 그의 모습을 보며 벨린다는 이를 악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영원의 형벌'은 처음부터 레이첼처럼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병이 아니다.

그저 몸에 붉은 반점 한두 개가 나타나고, 가볍게 열이 오를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져 종국에는 신성력조차 아예 듣지 않고, 처절한 고통만 남게 되는 것이다.

레이첼의 상태를 보니 이미 그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으, 아아, 아, 아빠... 나, 나 너무 아파... 아아악... 죽고 싶어... 아빠, 아빠 제발...!"

"레이첼, 레이첼...."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껴안고, 길리언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눈을 가득 채운 것은 이 지옥 같은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뿐이었다.

'괴롭다.'

'이제 나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구나.'

'같이 죽자.'

'미안하다, 레이첼.'

언제나 상상만으로 끝나고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일.

하지만 이제 끝이 다가옴을 직감한 길리언의 눈빛이 까맣게 죽어 갔다. 삶을 포기하는 자의 마지막 눈빛이 바로 저러하리라.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은 차마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몸을 완전히 돌렸다.

오직 지셀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든 비극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레이첼의 발작이 조금씩 잦아들 즈음, 지셀이 입을 열었다.

"벨린다."

"네, 네?"

훌쩍거리던 벨린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는 지셀의 손짓에 따라 가까이 다가왔다.

"발작이 멈추면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겠어. 필요한 약재를 적어 줄 테니 빠짐없이 사 와."

지셀은 잠시 레이첼을 보며 기억을 더듬다, 곧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벨린다는 종이를 건네받고 깜짝 놀랐다.

"요정의 축복을 사 오라고요?"

"그래."

요정의 축복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꽃이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가 아니면 함부로 구경도 못 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아니, 공자님. 도대체 왜 그렇게 비싼 걸...."

"그게 가장 중요한 재료니까. 시간이 없어. 언제 또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약을 만드는 게 좋다고."

벨린다는 어쩔 수 없이 약재들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수행 기사들 또한 지셀의 명에 따라 약을 만드는 도구들을 준비했다.

겨우 발작이 멈춘 딸을 잠재운 길리언은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는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지셀이 무슨 짓을 하든 말릴 기력이 없었다.

벨린다가 약재를 사 들고 돌아오자 지셀은 바로 약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불치병이지만 미래에는 치료법이 발견되지.'

워낙 화제였던지라 지셀도 그 치료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재료가 쓰인다는 게 문제일 뿐, 배합 비율도 세심하게 맞출 필요 없고 조제법 자체도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약학을 배운 적이 없는 지셀도 어설프게나마 약제사 흉내를 낼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지셀은 기억하는 배합법에 맞춰 정성스럽게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행들도 그가 정말 약을 만들 수 있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솔직히 믿을 수 없었지만, 레이첼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약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길리언은 진지하게 약을 만드는 지셀을 무기력하게 쳐다가 물었다.

"나는 공자님을 오늘 처음 만났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그는 왜 지셀이 갑자기 딸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달려드는지, 비싼 재료를 사다가 직접 약까지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길리언을 보지도 않고 약을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병을 고쳐 주겠다니까? 아픈 사람 고치는 데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

사기꾼이나 할 것 같은 말이었다.

아니, 사기꾼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작은 희망에라도 기대고 싶은 게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체념을 비웃듯, 다시금 희망이 마음속에 싹텄다.

하지만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면 그만큼 절망도 커진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길리언은 희망을 꺾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키우지도 못한 채 그저 떨리는 눈으로 지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 됐다."

작은 플라스크에 담긴 보랏빛 액체는 마치 자수정을 녹인 듯 보였다.

지셀은 약병을 한 손에 들고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그는 의식을 잃은 레이첼의 목을 받쳐 들고 입 안으로 조심스럽게 약을 흘려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곧 실망한 표정을 내비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나까지 걱정되니까 벌써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조금 기다려. 마법도 아니고, 먹자마자 낫겠어?"

지셀은 레이첼이 누운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아 팔짱을 꼈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 곁에서 지루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헉!"

몇 시간 뒤, 지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벨린다가 누군가의 외침에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적이야?"

수행 기사들이 경악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거... 진짜야?"

길리언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약이... 진짜로...."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효과가 있네.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벨린다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레이첼의 얼굴과 몸에 난 반점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신성력을 쓸 때는 반점들의 색이 옅어지기는 해도, 이렇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레이첼의 몸에는 피딱지만 남아 있을 뿐, 군데군데 있던 반점들이 확실히 사라져 있었다.

벨린다는 지셀 옆에 바짝 붙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치료가 된 거예요? 확실해요?"

길리언 또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지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효과가 나타나다니. 기적 같은 상황에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한 번에 완치되는 건 아니지만 많이 나아졌을 거야.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돈을 줄 테니 사제를 불러와라."

수행 기사 한 명이 지셀에게 돈을 받아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그도 정말 치료가 된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후, 후덕하게 살이 찐 사제 하나가 기사를 따라 거만하게 걸어왔다.

그는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막고 인상을 썼다.

"어허, 여신께서는 청결한 걸 좋아하시는데... 쓰레기장도 이런 쓰레기장이 없군. 현세의 지옥이로다. 이런 지옥에 살고 있는 그대들은 악마인가?"

사람들은 모두 사제의 말을 무시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어린놈이 싸가지 없이 어디서 손짓으로 오라 가라야.'

사제는 속으로 불만을 품었지만, 돈을 두둑하게 받아서 겉으로는 뭐라 하지 못했다.

"흠흠, 병자를 봐야 한다는데 그게 누구요? 제법 신실한 성의를 보였기에 오긴 했지만, 공무가 바빠 오래 있지는 못하오."

사제의 말에 지셀이 고갯짓을 까닥하며 레이첼을 가리켰다.

"이런 싸가지 없... 이 소녀는?"

사제는 레이첼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도 신전에서 몇 번 레이첼을 치료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허허, 이 병은 신성력으로 완치시킬 수 없소.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직도 포기를 못 한 것이오? 신성력은 그저 병을 억제하는.... 아니, 잠깐. 당신들 무슨 짓을 한 거야?"

18화 변수가 필요해. (3)

레이첼을 살펴보던 사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앓는 병은 시간이 갈수록 신성력에 저항하며 병세가 악화되다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이었다.

한데 지금 보니 레이첼은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제는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레이첼에게 잽싸게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오, 여신이시여!"

그는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신성력을 주입할 때마다 병 기운이 크게 반발해서 치료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몇 번 레이첼을 치료해 본 적 있는 그는 신성력에 저항하는 병의 기운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레이첼의 몸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신성력을 거부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레이첼의 몸에 신성력을 주입한 사제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지만... 병이 호전된 것 같소. 이건 기적이다! 여신이 기적을 내리신 거야! 오, 자애로운 여신이시여! 악마의 소굴에 이런 축복을 내리시다니!"

사제가 호들갑을 떨며 여신에 대한 찬양을 시작했다. 요는 레이첼의 죄를 여신께서 용서하시고 병이 낫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거였다.

오래 있지 못한다던 사제는 쉬지 않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기도문을 읊어 댔다.

아예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지셀이 기사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집에 보내라."

다리에 힘을 주며 기적을 더 접해야 한다고 버티는 사제를, 기사들이 억지로 끌어 내보냈다.

길리언은 흥분해 떠드는 사제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확신했다. 정말 딸의 병이 치료된 것이다.

심장이 마구 뛰고 다리가 떨려, 도저히 제정신으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아, 아아... 아아, 레이첼...."

병세가 완화되며 고통도 많이 사라졌는지, 잠든 레이첼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몇 년 만에 보는 딸의 평온한 모습에 길리언은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인가.

이 웃음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가.

이건 기적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한참 눈물을 흘리던 그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간절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 제 딸의 병이 나을 수 있는 겁니까?"

"아마 한두 달 정도 약을 계속 먹으면 완치될 거야."

"어, 어떻게 불치병을.... 신성력으로도 치료를 못 했는데."

"신성력은 몸의 활력을 돋우고 재생력을 강화해 주는 것뿐이다. 그 힘으로 병을 이겨 내는 거지. 그래서 의외로 못 고치는 병이 많은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지셀이 거만하게 답했다.

길리언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고친 사람이 그렇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멍하니 지셀을 바라보던 길리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무엇을,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게 있으니 저를 찾아오셨을 터."

"뭘 줄 수 있지?"

"제게 남은 건 이 쓸모없는 몸뚱이밖에 없습니다. 개가 되라 하시면 개가 되고 노예가 되라 하시면 노예가 되겠습니다."

길리언은 진심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지셀이 무엇을 원하든 내줄 생각이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나는 단지 과거의, 본래의 네가 필요할 뿐이야."

잠시 멈칫한 길리언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거절하면 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거절해도 딸은 치료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돈도... 딱히 받을 생각은 없는데."

길리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호의를 베풀겠다니.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듯이.

길리언의 생각을 눈치챈 듯, 지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못 믿겠어? 내게는 별거 아닌 일이야. 네가 생각하는 만큼 큰일이 아니라는 거지. 이 정도 베푸는 건 어렵지 않다."

지셀의 말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었고, 일면식도 없는 길리언을 찾아왔다.

수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거절하면 아쉽기야 하겠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취미는 없거든. 싫다는데 어쩌겠어."

길리언은 한참 동안 지셀을 바라보았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른스러운 여유가 보인다. 그 눈빛에서는 오롯한 신념이 묻어났다.

'대체 무엇을 꿈꾸는 자인가?'

길리언은 이내 눈빛을 단단히 굳히고는 크게 심호흡한 뒤 단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투둑.

그러고는 어깨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쥐고 단번에 잘라 냈다.

굽어 있던 어깨와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자 몸은 더 건장해 보였다. 죽어 있던 눈빛은 이글거리는 불처럼 형형하게 타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 강렬한 기세에 깜짝 놀란 수행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 자루를 쥐었다.

벨린다도 눈을 가늘게 뜨고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혹시나 약을 더 얻으려 지셀을 협박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수행 기사들은 지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길리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길리언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지셀과 눈을 마주쳤다.

지셀보다 그의 키가 두 뼘 정도는 더 큰 탓에, 그가 지셀을 내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평범한 자세인데도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길리언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지금 여기 있는 사람 말고 같이 왔거나, 찾아올 사람이 더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전부야. 만나야 할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없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벨린다가 천천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일행이 몇 명인지, 만날 사람이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갑자기 달라진 기세 때문인지 협박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길리언은 벨린다가 자신을 경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에게 물었다.

"혹시 공자님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까?"

지셀이 알 만하다는 듯 픽 웃었다.

"원한을 품은 사람이야 있지. 앞으로도 더 많아질 테고."

그 답을 듣자마자, 길리언은 대뜸 구석에 있던 작살 하나를 들어 긴 밧줄 끝에 묶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방을 나가 문을 향해 작살을 강하게 집어 던졌다.

콰아앙!

창은 문을 뚫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곧 길리언이 마나를 뿜어내며 밧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박살 난 문 너머에서 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작살이 어깨에 꽂힌 채 끌려 들어왔다.

"크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보며 지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꼬리가 붙어 있었네?"

순식간에 끌려 들어온 남자는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길리언을 올려다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던 사람을, 죽지 않도록 절묘하게 어깨만 뚫어 끌어오다니.

놀라운 투척술에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길리언이 보여 준 건 마나뿐만 아니라 근육의 움직임까지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가능한 기예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움켜쥔 채 지셀의 앞으로 끌고 갔다.

지셀이 남자를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누가 보냈지?"

"나, 나는...."

남자는 덜덜 떨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골라낸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행인들처럼 지나가는 척하며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자신을 노려 공격해 오다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남자의 품을 벨린다가 나서서 급하게 뒤졌다.

하지만 나온 건 독을 바른 단검과 여러 암기뿐, 딱히 신분을 알 만한 단서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길리언이 묻자, 지셀은 잠시 생각하다 남자를 돌아보았다.

"순순히 말할 생각은 없는 거지?"

"...."

남자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지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군. 그냥 쉽게 가면 서로 좋았을 텐데. 오늘처럼 좋은 날에는 손을 쓰고 싶지 않았거든."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가벼운 것이라도 나름대로 이유가 필요했다. 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이건 지셀이 용병왕 시절부터 지켜 온 행동 원칙이었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지셀은 길리언에게 말했다.

"누가 보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거 같다. 그 외에는 딱히 궁금한 게 없으니,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잘 보내 드리는 게 좋겠네."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남자를 끌고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우드득.

문 너머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한 차례 들리더니, 이내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 곧 길리언이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수행 기사들은 재차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길리언의 단호함에 기가 질렸다.

'저런 인물이었나?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가 있지?'

'손속에 망설임이 없다. 공자님이 위험한 사람을 거두러 왔구나.'

길리언은 처음 봤을 때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힘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지셀이 그를 보며 말했다.

"행동을 보니 마음을 정한 거 같군."

길리언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후회하지 않겠어?"

"이미 평생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공자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단호한 어조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지셀은 손수 그를 일으켜 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든든하군. 레이첼은 영지에서 보살펴 줄 거야. 남은 치료도 당연히 봐줄 거고."

"감사합니다."

지셀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어떻게 저렇게 딱 짚어서 끌고 올 수가 있지? 우리 기사들도 몰랐는데 말이야."

그 말에 벨린다와 기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들도 집 밖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파악했지만, 그 사람들이 적인지 아닌지까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이라고 해도 다니는 사람이 조금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길리언은 그 남자가 수상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잡아냈다.

"아니, 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거든요? 치료 구경하느라 그런 거라고요!"

벨린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지셀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나도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벨린다가 길길이 날뛰는 사이, 길리언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제가 그동안 집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눈치채기 쉽거든요."

자존심이 상한 벨린다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래도 혹시 실수하거나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인데."

"그보다 공자님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아니라는 게 확인되면 그때 수습해도 된다."

길리언이 묵묵히 대답했다.

벨린다를 비롯한 수행 기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수행 기사들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없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모시는 사람의 명예에 흠이 되기 때문이다.

실수가 아니라는 게 밝혀져도 한번 떨어진 명예는 회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길리언은 방금 죽인 남자가 정말 손님이거나 애먼 사람이었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쳇, 도련님을 보살피는 건 내 일이라고.'

왠지 지셀을 뺏긴 듯한 기분이 들어 벨린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길리언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그는 아픈 딸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절망하다 죽기 직전의 폐인이 되었다.

그런 딸을 지셀이 살려 줬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아마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이야.'

기세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저런 인물은 분명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쌍으로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네.'

벨린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셀은 길리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길리언은 고개를 숙였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셀이 준비한 변수, 길리언이 일행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19화 변수가 필요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