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8

184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1)

거의 포박당한 채로 끌려온 케인은 요 며칠 동안 지옥 훈련을 경험했다.

지셀이 아주 신이 나서 굴렸기 때문이다.

반항해도 소용없었다. 정당하고 거대한 폭력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같이 훈련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전장까지 끌고 갈 듯한 기세에 클로드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영지의 후계자를 저렇게 일반병으로 삼아 끌고 가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잘라 말했다.

"내 돈을 갚지 않은 죄는 무척 크다. 그런 거 제대로 안 받아 내면 호구 되는 거야. 돈이 없으면 다른 걸로 갚아야지."

"만약 전쟁에서 죽기라도 하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겁니다."

"괜찮아, 저놈은 쉽게 안 죽어."

"왜요? 뭐 숨겨진 능력 같은 게 있습니까?"

"감히 내 돈을 떼먹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건 운이 대단한 놈이라는 뜻이지. 그런 놈이 이 정도 전쟁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 그건 말이 안 돼."

"...아, 네."

혀를 몇 번 찬 클로드는 말리기를 포기했다. 역시 영주 놈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왕 하는 거 확실히 박살 내고 오십쇼. 다들 깜짝 놀랄 정도여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 확실하게 쓸어 버릴 테니까. 그게 내 전문이거든. 내 승률 100%인 거 알지?"

"그럼요, 1전 1승이요. 2전 2승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 미친 작전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부디 몸조심하시길."

클로드는 처음 전략 회의 때 지셀의 작전을 듣고 기겁을 했다. 하지만 성공할 수만 있다면 가장 적은 피해로 승리할 방법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그 작전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오직 이번 전쟁에서만 쓸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작전이 실패하면.... 영주는 반드시 죽겠지.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너무 위험한데.'

클로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미 말릴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준비할 때도 말리지 못했는데 출정할 준비까지 마친 지금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제발 승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걱정하는 클로드와 다르게, 지셀은 기사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 나간다는데도 다들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간의 지옥 훈련 덕분인지 다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상은 독이 바짝 올라 화풀이할 곳을 찾는 표정들이었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맞으니까.

지셀은 그런 표정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주 좋아. 이번 전쟁이 끝나고 장비까지 바꿔 주면 더 좋아지겠어.

'현재 기사들은 블러드 퓌톤의 가죽으로 만든 언더 아머를 갑옷 안에 착용하고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병사들에게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무장들까지 생각한 대로 바꾸면 더 강력해질 게 분명했다.

각 부대의 출정 준비가 끝나자 길리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준비 완료됐습니다."

"좋아, 이제 슬슬 출발을...."

간단한 출정식이 끝나고 출발하려고 할 때, 한쪽 구석이 시끌시끌해지더니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바로 드워프들과 마법사들이었다.

갈바릭은 울 거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영주! 우리도 전쟁에 나가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다 만들었잖아! 돌격대 안 하기로 했잖아!"

옆에 있는 알포이는 대놓고 울면서 외쳤다.

"우리도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전쟁 나가기 싫다고! 그냥 집 지키고 있으면 안 될까?"

울부짖는 그들을 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안 돼. 이번 작전에 너희들이 꼭 필요하거든. 돌격대는 안 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

갈바릭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급한 거 끝나면 휴가 주기로 했잖아! 우리는 지금부터 휴가라고! 이 거짓말쟁이!"

"무슨 소리야? 날짜는 아직 안 정했잖아?"

"...."

"난 거짓말은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휴가는 전쟁 끝나고 나서야. 아무리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지."

갈바릭은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 급하게 자리를 피하느라 휴가 날짜를 안 정하긴 했다.

그냥 막연하게 급한 거 끝나면 되는 줄 알았다. 확실하게 날짜를 안 받아 놓은 자신들의 실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그런데 펜리스에서, 아니 루타니아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막 나가는 인간일 영주가 '절차' 따위 소리를 하니 혈압이 올라 죽을 거 같았다.

"으아아아! 파업이다! 파업! 안 가! 못가!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라!"

"우리 마법사들도 절대 안 가! 노예도 인권이 있다!"

드워프들과 마법사들이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지셀은 고갯짓 한 번에 전부 치워 버렸다.

"끌고 가라."

"우아아악! 싫어어어어어!"

길리언에게 끌려간 그들은 죽을상을 짓고 있는 케인의 뒤에 배치됐다.

정말로 모든 준비가 끝나자 지셀의 양옆으로 길리언과 카오르가 붙었다.

그리고 뒤에는 유일하게 검은 로브를 둘러 입은 벨린다가 자리했다.

지셀은 그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출발하지."

클로드의 옆에 서 있던 퍼거스가 지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도련님, 꼭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정말 제가 안 가도 되겠습니까?"

걱정 가득한 퍼거스의 얼굴을 보고는 지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제발 집에서 잘 쉬고 있어. 나 따라오면 심장에 무리가 간다고."

퍼거스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카오르가 끼어들었다.

"어이, 최고 영감님. 아무런 걱정 할 필요가 없어. 나는 지금 무척 강.해.졌.거.든."

제법 강한 건 알겠지만 이놈은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퍼거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자네만 믿겠네. 우리 도련님 좀 꼭 잘 좀 지켜 주시게."

"크으, 나만 믿으라고."

지셀에게 새로운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배운 카오르는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벨린다는 그런 카오르를 보고는 혀를 몇 번 차더니 퍼거스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말했다.

"영감님, 식사 제때 하시고요. 약 꼭 챙겨 드시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실력 알잖아요?"

"그럼, 그럼. 내 집사장 실력은 잘 알지. 집사장도 꼭 몸조심하고."

퍼거스는 길리언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몇 번이나 무사히 돌아오라는 당부를 남겼다.

유독 걱정이 많은 퍼거스의 배웅까지 끝나고 나서야 지셀을 필두로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주가 직접 출정한다는 소식에 영지민들도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걱정이 가득했다.

점점 영지가 좋아지고 있는데 갑자기 전쟁을 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영주가 직접 출정한다고? 혹시나 영주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의 행복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정말 괜찮으시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병사로 지원할 걸 그랬어."

"영주님이 공사가 끝나면 모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벌써 전쟁이 일어날 줄이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이곳의 영주가 페르디움을 치러 갈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는 영주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가서 죽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군대가 출정하는 것도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영주는 다르다. 사람들의 희망이자 모두를 책임지는 기둥이었다.

그때, 감정이 격해진 몇몇 사람들이 외쳤다.

"영주님!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기사님과 병사님들도 몸조심하세요!"

"여신이시여, 펜리스에 축복을!"

몇 사람이 시작한 외침은 곧 줄줄이 이어져 영지를 가득 메우는 함성이 되었다.

진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걱정과 응원이다. 이런 걸 처음 받아 보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 뿌듯해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지셀 또한 사람들에게 살짝 손을 들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와아아아! 꼭 승리하십시오!"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성 밖으로 나온 지셀은 말고삐를 틀어쥐며 말했다.

"전군,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적들이 제대로 준비하기 전에 몰아쳐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기가 올라간 기사들과 병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히이이잉!

지셀이 탄 말이 울부짖는 것을 신호로.

펜리스군은 카발디 백작령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 * *

카발디 백작도 펜리스에 식량이 쌓였다는 소문은 진작에 들었다.

자신의 영지도 식량 부족으로 상황이 무척 어려워진 상황인지라, 그 소문에 혹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카발디 백작은 침중한 표정으로 가신들과 현 사태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데스몬드 백작이 뭐라 하던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현재 내부 수습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공작가는?"

"최대한 빨리 식량을 보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언제까지!"

카발디 백작이 버럭 외치며 의자를 내리쳤다.

지금도 영지민들이 숨겨 둔 식량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병사들을 먹이고 있었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카발디 영지민들은 철광산에서 극심한 강제 노동에 시달리느라 불만이 가득하다.

카발디 백작은 그런 사람들이 들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군대로,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군대마저도 굶게 생겼으니, 이대로는 위험했다.

언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대까지 자신에게 등을 돌리면 정말로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펜리스에 식량이 많다고 들었다. 거기를 칠 방법이 없나?"

카발디 백작의 말에 가신들이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전쟁을 할 만한 식량이 없습니다. 보급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병사들도 굶고 있어서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공작가에서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상태가 아닙니까?"

"지금 움직이면 친왕파에게 빌미를 주게 됩니다. 지금은 사태를 수습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카발디 백작은 입술만 깨물었다.

가신들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점이 없었다. 지금 움직이면 친왕파와 공작파 양쪽 다 같이 죽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싸우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승리를 해도 상처뿐인 승리일 뿐이다. 다른 영주들이 호응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카발디 백작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철을 주고 펜리스에서 식량을 얻어 와라."

그의 결정에 가신들은 우려를 표했다.

"펜리스 남작은 친왕파입니다. 철을 제공하면 공작가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공작가와 데스몬드 백작이 지원을 약속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는 게...."

부정적인 반응에 카발디 백작은 이를 갈며 말했다.

"대체 자네들은 누구의 가신인가! 군량미마저 다 떨어져 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이지? 거래가 싫으면 자네들의 재산부터 전부 압수할까?"

카발디 백작의 분노에 가신들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카발디 백작령이 북부 최대의 철 생산지이다 보니, 공작가 파벌 내에서 카발디 백작의 입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식량을 지원해 줘야 할 데스몬드는 갑자기지원을 끊어 버렸다.

넘치던 여유분을 이미 지셀에게 다 팔아 버려 그쪽도 버티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지만, 그걸 모르는 카발디 쪽에서는 버려졌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에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워낙 피해를 본 곳이 많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말았다.

눈치 빠른 카발디 백작은 금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정치적 감각이 제법 좋은 편에 속했다.

"잘 생각해 봐라. 아무리 우리가 날고 기어봤자 공작가 입장에서는 북부의 촌놈일 뿐이야. 철광산은 우리 영지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말에 가신들은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카발디 백작령이 무시할 만한 곳은 아니지만, 공작가 입장에서는 카발디 영지보다 더 중요한 곳들이 많았다.

공작가 쪽에서 도와주지 않는데, 이쪽만 의리를 지키겠다고 굶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카발디 백작도 악독하기로는 북부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영주다.

강력한 무장병들을 보유한 덕에 다른 영주들보다야 안전한 편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병사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훨씬 더 위험해진다.

"어쨌든 데스몬드를 뒤에서 받치고 있는 건 우리다. 그야 그놈과 거래하면 불쾌해하기야 하겠지만, 거래 몇 번 한 걸 가지고 우리를 쳐 낼 수는 없어."

데스몬드가 북부의 영주들을 회유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친 곳이 카발디 백작령이었다.

그만큼 이곳이 전략상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쥔 패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카발디 백작은 대세를 보고 빠르게 공작가에 붙었다.

그만큼 복잡한 정치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는, 이번만큼은 공작가와 데스몬드 백작도 어쩔 수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들이 용납할 수 있는 선을 지킬 자신도 있었다.

"펜리스 남작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지금 철광석을 조금 준다고 해서 변할 건 없어. 군사력도 약하니 문제없을 거다."

가신들은 일리가 있다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펜리스 남작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약간의 철을 주고 식량을 얻어 오는 정도로는 별다른 문제가 될 거 같지 않았다.

파벌이 달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서로 거래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원수가 아닌 이상 아예 모른 척 지내지는 않는다.

그저 철이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공작가에서 예민하게 통제할 뿐이었다.

한 가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펜리스 남작이 유리한 입장이니 가격을 너무 후려치지 않을까요? 저희가 그간 그쪽에 철의 공급을 거의 막았으니까요."

"앞으로 철 공급을 조금 풀어 주겠다고 약속해라. 대신 건방지게 굴면 아예 공급을 안 해 주겠다고 협박도 조금 곁들여. 그놈도 우리가 아니면 방법이 없을 거다."

"알겠습니다. 적당히 밀고 당기면 결국 저희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생각이 있는 놈이면 이 기회를 통해 우리한테 잘 보이려고 하겠지. 앞으로 철을 제값에 구하고 싶으면 말이야."

카발디 백작과 가신들은 지셀이 자신들의 제안을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북부 지역에서 철의 생산과 유통은 거의 카발디 백작이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펜리스는 그간 철을 쉽게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식량 가격이 폭등했지만, 사태만 수습되면 철의 가격이 더 비싸진다.

식량을 빌미로 까불었다가는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당장 출발해라. 데스몬드 백작의 귀에 들어가면 괜히 피곤해진다."

카발디 백작의 명에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려 할 때였다.

대전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한 기사가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외쳤다.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식에 카발디 백작과 가신들은 눈만 껌뻑거렸다.

선전 포고도, 전쟁의 징후도 없었다. 경계 요새에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무슨 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걱정이 되는 건 반란뿐이다.

카발디 백작이 석상처럼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무슨 말이냐? 똑바로 말해 봐라. 반란이라도 일어났다는 말이냐?"

기사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셀 페르디움.... 아니, 펜리스 남작의 군대가 우리 성 앞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185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2)

카발디 백작은 제 귀가 잘못되었는지 잠시 의심했다.

지금 막 그놈과 식량 거래를 하자고 결정한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놈이 쳐들어왔다고?

도저히 믿기 어려워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펜리스 남작? 그놈이 왜?"

"...모르겠습니다."

"그놈이 왜! 감히! 그까짓 놈이 내 영토에 군대를 끌고 왔다고!"

당혹감에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자신은 곧 대영주의 자리에 오르게 될 북부의 강자다.

풍부한 철 생산량과 발전된 제련 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무장병들을 운용하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뒷배는 바로 왕국 최고의 권력자인 델파인 공작이다.

그런 카발디 백작을 노리고 군대를 끌고 왔다는 것이다. 고작 변경이나 지키는 거지 같은 페르디움 놈이, 심지어 백작도 아닌 그 자식새끼가!

"도대체 경계 요새에서는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적이 이곳에 올 때까지 소식 하나 전하지 못하고!"

카발디 백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감히 카발디를 치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다 보니, 요새에 머무는 병력도 감시병 몇 명뿐이었다. 상대가 작정하고 기습을 했다면 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요새가 점령당한 것도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지만, 가신들은 뻔히 알면서도 입 밖으로 진실을 내뱉지 못했다.

"그 건방진 놈의 낯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카발디 백작은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당황하던 가신들이 뒤따라가며 말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펜리스 남작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명분은 충분합니다."

"보급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바로 군대를 끌고 나가 밀어 버리면 됩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 상황입니다. 친왕파와 공작가도 우리 탓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카발디 백작도 가신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참에 당장 쓸어 버리고 펜리스까지 점령한다. 지금 영지의 최대 가용 병력은?"

"기사 42명, 무장병은 전부 끌어모으면 1천8백 명입니다. 전역에서 징집병을 소집하면 3천 명 이상도 모을 수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무장병으로만 승부를 봐야 합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군."

"그렇습니다. 가난하기로 유명하고, 크기도 작은 남작령일 뿐입니다. 병사를 끌어모아 봐야 500명이 채 되지 않을 겁니다."

카발디 백작과 가신들의 대화를 들은 기사는 당황하며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존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카발디 백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상대를 쓸어 버리고 펜리스까지 점령할 생각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생각보다 쉽게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겠군."

만약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왔다 해도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기분 좋게 나간 그들은 성 밖의 상황을 보자마자 당황해 걸음을 멈추었다.

카발디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뭐냐.... 저 병력은."

많다. 얼핏 봐도 3천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온 병사들도 아니었다. 곳곳에서 휘날리는 깃발은 펜리스의 것이 확실했다.

이쪽이 압도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오히려 상대의 병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저게 뭐냐! 저 애송이의 병력이 왜 저렇게 많냐는 말이다!"

"...."

카발디 백작의 외침에도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일개 남작령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치고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 이, 이주민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징집병을 잔뜩 끌고 온 게 아닐까요?"

"보, 보십시오! 대부분이 보병들입니다! 징집병인 게 분명합니다. 상태가 형편없을 겁니다."

"그래도 기마병이 300은 넘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정보가 부족한 이들은 그저 눈앞의 상황만 보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카발디 백작은 손톱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된 거지? 공작가에서는 분명 몸을 사리라고 했었는데. 친왕파에서 손을 쓴 거라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 아니면 양측 사이에 무슨 협상이 있었던 건가?'

제대로 된 선전 포고도 없었고, 페르디움 쪽과는 공식적으로 시비가 붙었던 일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왜 공격받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애송이가 거느릴 수 있는 병력이 아니야. 친왕파에서 지원해 준 건가?'

아직 지셀이 다른 영지와 거래해서 식량과 병사를 맞바꾸었다는 정보는 제대로 퍼지지 않았다.

지셀이 시간제한을 두고 빠르게 움직인 것도 그 소문이 퍼지기 전에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애초부터 모든 걸 준비해 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이렇게 클 수밖에 없었다.

카발디 백작이 손톱만 깨물며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 상대 쪽 진영에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여유롭게 다가왔다.

지셀과 길리언이었다.

그들은 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잠시 숨을 고른 지셀이 카발디 백작을 항해 크게 외쳤다.

"어이! 데스몬드 백작 따까리!"

마나를 머금은 지셀의 말은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잘 들렸다.

지셀의 도발을 들은 카발디 백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저 새끼가! 감히!"

천박한 말투도 문제이지만, 말의 내용 자체도 도무지 참고 들어 주기 힘들었다.

자신과 데스몬드 백작은 같은 위계에 있는 귀족이다. 하지만 데스몬드 백작은 은근히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부리곤 했다.

아무리 부탁으로 포장하더라도 그 지저분한 속내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지금도 보라. 그간 철을 실컷 뜯어간 주제에 상황이 어려워지자 바로 식량 지원을 멈춰 버렸다.

지셀의 말은 카발디 백작의 속에서 자라나고 있던 열등감을 자극했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데스몬드 백작과 자신과의 관계를 저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머리에 열이 뻗친 것이다.

"당장! 당장 성문을 열어라! 내가 직접 군대를 끌고 나가서 저놈의 목을 쳐 버리겠다!"

옆에 있던 가신들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안 됩니다! 정면으로 맞붙으면 피해가 큽니다! 적의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이, 일단 왜 왔는지 얘기나 들어 보시지요. 무슨 오해가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 이이익!"

카발디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신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왜 왔는지는 알아야 공작가에도 할 말이 있었다.

카발디 백작이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말을 옆에 있는 기사가 크게 외쳐 전달했다.

"펜리스 남작! 도대체 무슨 일로 이곳까지 군대를 끌고 왔느냐! 이렇게 갑작스럽게 군대를 끌고오다니, 가난하게 살다 귀족의 명예도 잃어버린 것이냐! 그렇게 전쟁을 하고 싶다면 돌아가서 제대로 된 명분을 준비하고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한 뒤에 다시 오거라!"

한 마디로 지금은 싸우기 싫으니 나중에 다시 오라는 뜻이었다. 그래야 그사이에 뭐든 준비를 할 거 아닌가?

"이유도 없이 우리 영지를 공격한다면 공작가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파멸을 피하고 싶다면 당장 물러가라!"

공작가의 이름도 살짝 팔아서 겁도 줘 봤다.

성벽 위에서 기사가 외치는 말을 듣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선전 포고라.... 그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지셀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길리언이 활과 화살을 건네주었다.

화살에는 하나의 서신이 묶여 있었다.

기습적으로 쳐들어오긴 했지만, 친왕파와 공작가에서 대놓고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면 최소한의 명분은 필요했다.

이제 이걸 적당히 전달만 하면 된다.끼이익.지셀이 활의 시위를 크게 당겼다.

카발디 백작의 호위 기사들은 이미 지셀이 활을 받았을 때부터 움직인 상태였다.

그들은 백작의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순간, 지셀은 방향을 바꿔 성벽에서 말을 전달하던 기사를 향해 활을 쏘았다.

파아악!

"커억!"

갑작스러운 공격에 가슴이 뚫린 기사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화살은 정확히 반만 박혔다. 딱 그렇게 되도록 지셀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쓰러진 기사에게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지셀이 활을 뒤로 휙 던지며 웃었다.

"이게 내 선전 포고 방식이다."

* * *

수도의 친왕파 귀족들은 연일 모여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했다.

브랜포드 후작가와 에일즈버 백작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식량을 필요한 만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쌓아 둔 것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빠르게 소모되고 있으니 걱정만 토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후 위기는 사실이다!"

시끄럽게 떠들고는 있지만, 누구도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뭄의 피해는 왕국 전역을 강타했다.

"그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소!"

쉬지 않고 떠들던 귀족들은 브랜포드 후작의 호통에 모두 입을 닫았다.

지금 이들은 모두 브랜포드 후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엄청난 식량을 쌓아 뒀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보니, 그에게 잘 보여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지셀의 경고를 듣자마자 식량을 쌓아 뒀던 에일즈버 백작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어휴, 마누라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음부터는 무조건 마누라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메리엘은 남편의 반대를 무시하고 엄청난 식량을 구매했다.

덕분에 친왕파 내 다른 파벌의 대표들에 비해 한 끗발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던 에일즈버 백작은, 현재 브랜포드 후작 다음가는 권위를 얻게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잘된 일일 수 있소."

왕국군의 총사령관인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흠, 어째서요? 다들 굶고 있고 상황이 심각한데 뭐가 잘됐단 말이오?"

"공작가를 따르고 있는 귀족들도 굶고 있으니까."

"...?"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왜 공작가를 견제해 왔소? 언제 공작가가 내전을 일으킬까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 아니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작가라도 내전을 일으킬 수 없지. 그쪽도 사태를 수습해야 하니까."

"으음...."

"만약 우리 쪽에서 식량을 쌓아 두지 않았다면 공작가는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였을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 말에 귀족들은 아무런 반론도 내지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의 말대로, 만약 왕실 쪽에 식량이 부족했다면 공작가에서는 분명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전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과 왕실, 에일즈버 백작까지 대량의 식량을 쌓아 두었으니 공작가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 움직여서 서로 큰 피해를 볼 바에는 조금이라도 빠르게 같은 편을 추스르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지셀이 의도한 대로였다. 전생과는 다르게 공작가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억제된 것이다.

방어하는 처지인 친왕파에서는 차라리 지금 같은 상황이 훨씬 나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영원한 소강상태지, 확실하게 결판을 내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을 향해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이 상황이 언제까지고 유지될 리는 없소. 어느 쪽이 먼저 사태를 먼저 수습하느냐에 달려 있지. 공작가는 분명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우리를 압박하려 할 것이오."

귀족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렸다.

어느 쪽이든 사태를 먼저 수습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말은, 브랜포드 후작 또한 친왕파 귀족들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역시나 브랜포드 후작은 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왕실의 비축분뿐 아니라, 나와 에일즈버 백작이 비축해 두었던 식량도 일부 지원해 주겠소이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을 것이오."

"오오!"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

"후작님과 백작님이 큰 결단을 내리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량이야말로 군대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지원받은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은 천한 자들의 삶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안도하는 귀족들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은 조금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펜리스 남작의 말대로 식량을 미리 준비하지 그랬소이까."

"끄응...."

그 말에는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그걸 믿고 준비한 브랜포드 후작과 메리엘이 이상한 거였다.

귀족들은 말이 나온 김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펜리스 남작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입니까?"

"무슨 점성술로 천문을 읽는다는 소문도 있더이다."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중에 하나가 운 좋게 걸린 거지요."

가장 불쾌함을 내비친 건 당연히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었다.

점 보는 것도, 미신도 아주 좋아하는 그는, 지셀이 날씨를 예측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상한 사술을 쓴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크흠! 그놈은 분명 흑마법사거나 마녀를 곁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하외다! 당장 잡아서 오리와 무게가 같은지 저울에 달아 봐야 해! 흑마법을 익혔다면 그놈은 오리와 무게가 같을 것이오!"

"...."

정작 그 말을 하는 본인이 더 흑마법사 같다는 점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 무식한 인간하고는 대화해 봐야 말이 안 통한다.

그나마 명문가 출신이고 군사학에 제법 조예가 있다고 알려져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도 그의 말 중 딱 한 가지는 공감했다. 지셀이 대체 무슨 능력을 지닌 건지 의심스러웠다. 단순히 날씨가 더워서 가뭄이 올 거라고 예측했다 믿기는 어려웠다.

'그거야 천천히 더 알아 가면 되겠지. 어쨌든 그놈하고 로잘린 덕분에 겨우 위기를 넘기게 되겠군.'

두 사람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안색이 거무죽죽한 귀족들을 둘러보며 내심 흡족해했다.

'흐음.... 이 기회에 우리 집안에 직접 들이는 것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겠어. 로잘린하고 잘 어울릴 거 같기도 한데.'

지셀이 듣는다면 기겁할 생각이었지만, 후작을 잘 아는 로잘린마저도 그의 머릿속을 훔쳐보지는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자꾸 옆길로 새는 사고의 흐름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귀족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건넸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당분간은 공작파의 귀족들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해 주시오. 혹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피하는 게 좋을 것이오."

귀족들도 모두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비가 붙으면 서로 죽자는 얘기밖에 안 되지요."

"다른 이들에게도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설마 그 정도로 생각 없이 시비를 걸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쟁이라도 나면 다 같이 죽자는 건데요."

"그럼요,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우리 쪽에 없습니다. 하하하하!"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었다.

이들은 그저 조용히 이 사태가 넘어가기만을 바랐다. 이번 위기만 성공적으로 넘기면 공작가와 대등하게 맞설 수도 있다는 희망도 품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를 깨고, 후작가의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회의장으로 난입했다.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는 찰나, 기사의 입이 열렸다.

"펜리스 남작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보고에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186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3)

브랜포드 후작은 잠깐 침묵하다 되물었다.

"전쟁이라고? 어느 곳과?"

"공작파의 카발디 백작입니다."

다시 입을 다물었던 브랜포드 후작은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카발디 백작이 식량을 얻으려고 펜리스를 쳤다는 말인가?"

"...."

분명 펜리스 남작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애써 현실을 회피하는 후작에게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급하게 작성한 보고서를 건넬 뿐이었다.

이미 전쟁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다. 북부의 여러 상단과 정보원들 덕분에 소식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브랜포드 후작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지금은 공작가든, 친왕파든 양쪽 다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싸워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내전이 벌어진다면 서로가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귀족들에게 당부한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이미 전쟁을 일으켰다니. 그 정신 나간 놈이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언제나 품격 있게 살아온 브랜포드 후작은 난생처음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이 미치광이 새끼가...."

"네?"

"아니, 아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마를 짚었다. 그놈 소식만 들으면 두통이 몰려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의장에 있는 귀족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펜리스 남작이 전쟁을 일으키다니요! 그것도 공작파를 상대로!"

"그러니까 그런 놈을 밀어주면 안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라니, 그거 완전히 미친놈 아닙니까?"

"당장 잡아서 오리와 무게가 같은지 확인을 해야 한다니까!"

회의장은 귀족들의 고함으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고민을 했다.

살면서 이 정도로 곤란에 빠진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놈은 정말 그저 미친놈이었을 뿐인가?'

겁 없고 웃기는 놈이란 건 진작 알았지만, 그래도 뭔가 감추고 있다고 여겼다.

이번 가뭄도 지셀 덕분에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건 면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하는 짓을 보면 미쳐도 이리 미친놈일 수가 없었다.

다른 귀족도 아니고 공작파의 귀족을 건들다니. 지금은 어떻게든 내전을 억제해야 할 때인데, 그런 정세도 보지 못한단 말인가?

후작이 고민하는 사이 회의장의 귀족들은 더욱더 과격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펜리스 남작을 파벌에서 축출하고 손을 떼야 합니다!"

"절대 우리의 뜻이 아니라고 공작가에 해명을 합시다!"

"궁내부 장관님은 후견인을 철회하십시오! 그놈이 죽든 말든 상관하면 안 됩니다!"

"그 새끼는 흑마법사가 분명해! 당장 잡아 와서 확인해 보자고!"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솔직히 누가 뭐라 하는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속이 끓어오른다.

'여기서 한발 물러나야 하는가.'

이번 일에서 손을 떼는 건 어렵지 않다. 굴욕적이지만 공작가에 충분한 보상을 하고 지셀을 포기하면 끝나는 일이다.

지셀은 공작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아마 페르디움도 엮여서 같이 망하겠지만 그 이상 일이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화장품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후작가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후작의 권위도 크게 추락할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역시 버려야 하는가.'

그 순간,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북부 대표로 저를 내세워 주십시오.

― 데스몬드 백작은 의심스러운 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자를 적으로 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발디 백작은 북부 최대의 철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데스몬드와 거래를 자주 하고 있지.'

'데스몬드는 공작가와 한패일 수 있다.'

뭔가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셀이 아무 생각 없이 전쟁을 일으킨 거 같지는 않았다.

'북부의 영향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만약 지셀을 포기한다면 친왕파는 다시는 북부에 발을 들일 수가 없게 된다.

처음이 어렵지, 하나씩 양보하다 보면 결국 모든 곳에서 영향력을 잃고 밀리게 될 것이다.

지셀을 포기하는 건 북부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외통수였다.

'이놈.... 설마 이것까지 예상하고 나를 후견인으로 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지셀은 정말 죽일 놈이다. 애초에 후견인을 요청했을 때부터 사고 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뜻이다.

괘씸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막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공작가의 개입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두 영지 간의 명분 있는 싸움으로 포장하고 양쪽 다 거리를 두게 해야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지금은 자신이 나서서 수습해야 할 때였다.

결심이 서자 브랜포드 후작은 눈을 뜨고 천천히 말했다.

"펜리스 남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다가 우리 다 죽습니다!"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귀족들의 아우성에도 브랜포드 후작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싸늘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공작가와 싸우기가 무서워 같은 편을 내치겠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면 다음에는 무엇을 양보할 거지? 펜리스 남작을 버리면 우리한테 뭐가 남지? 앞으로 우리를 믿고 따를 자가 남아 있을 거 같나?"

"...."

귀족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브랜포드 후작의 말대로, 결국 적이 무서워서 아군을 내치는 꼴이다. 아무리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지셀을 쳐 내면 눈치를 보던 귀족들도 하나둘씩 빠져나갈 것이다.

내치고 싶어도 내칠 수 없는 상황이다. 펜리스 남작은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절묘한 자리에서 전쟁을 걸었다.

불안해하는 귀족들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이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친왕파의 개입은 불허하겠소. 공작가의 개입은 내가 막을 것이오. 펜리스와 카발디는 적합한 명분으로 싸우는 것이오. 펜리스 남작이 패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보고서에는 억지에 가까운, 하지만 나름대로 논리적인 명분이 적혀 있었다.

그걸 토대로 파벌 싸움이 아닌, 개인 간의 원한으로 치부하면 공작파를 막을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브랜포드 후작이 직접 처리하겠다 나섰으니 모든 귀족이 불만을 내뱉지 못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 브랜포드 후작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 자를 빼고 말이다.

모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브랜포드 후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애송이를 감싸 주겠다는 건가? 우리가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는데?"

"왕국군의 총사령관께서 공작가가 무서워 발을 빼겠다는 소리로 들어도 되겠소이까?"

브랜포드 후작의 도발에 모리스는 입술을 몇 번 씰룩이더니,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공작가를 쓸어 버리고 난 뒤에, 그 애송이 새끼가 살아 있다면 오리와 무게가 같은지 내가 반드시 확인할 거야. 그리고 직접 목을 쳐 주지."

"그때가 되면 마음대로 하시오."

"혹시 모르니 군대를 준비하도록 하지."

모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휭하니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그를 따르는 같은 계파의 귀족들도 자리를 떠났다.

회의가 끝났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바로 다음 날,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피곤한 기색을 간신히 감추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포우드 백작."

포우드 백작은 공작가를 따르는 귀족 중에서도 주로 중요한 외교적 업무를 전담하는 자였다.

라울이 공작가의 머리라면 포우드 백작은 공작가의 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한 인물을 보냈다는 건 공작가에서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적당히 인사를 건넨 포우드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펜리스 남작이 공작파의 귀족을 공격했습니다. 이걸 친왕파 전체의 뜻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포우드 백작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왔다. 친왕파의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제프 자작은 그 애송이 놈의 돌발행동이라고 보고 있다. 친왕파는 지금 누구보다 내전을 피하고 싶어 하니까.'

'절름발이의 악마' 라울은 지셀을 만난 적이 있다. 직접 대화를 나눠 본 뒤 그는 지셀을 두고 젊은 혈기에 미쳐 날뛰는 놈이라 판단했다.

그런 자들은 제멋대로 굴다가 반드시 실수를 한다. 역시 라울의 예상대로 지셀은 전쟁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는 기회가 온 김에 친왕파가 지셀에게서 손을 떼게 하고 페르디움과 펜리스를 쓸어 버리려고 결심했다.

수도에 머물고 있던 포우드 백작은 바로 그걸 위해 곧장 브랜포드 후작을 찾아온 것이다.

'두둑한 보상도 받아 내고 말이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포우드 백작을 향해, 브랜포드 후작이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허락했소이다."

"역시 그러셨군요! 그놈이 멋대로....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사람이 허락했다고 했소이다."

포우드 백작은 당황해서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라울의 예측은 빗나간 적이 없기에 이런 상황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브랜포드 후작이 허락을 했다고? 미친 건가?'

지금껏 친왕파가 내세웠던 전략은 단순했다. 숨길 것도 없었다. 정말로 내전이 일어나지 않게 억누르는 게 전부였으니까.

거기다 브랜포드 후작은 냉철한 정치가다. 직감으로 하는 일을 혐오하며 오직 현실적인 면만 보고 판단한다.

같은 편이라도 방해가 되면 치워 버리는 그가 후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애송이의 편을 들 리가 없었다.

포우드 백작은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힘든 시기에 전쟁을 허락했다는 말씀입니까!"

"펜리스 남작과 카발디 백작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소이다. 적합한 명분이었소. 공작가에도 이미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걸 허락했다는 건 결국 내전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내전이라니? 설마 포우드 백작도 반역을 꿈꾸고 있는 게요?"

브랜포드 후작의 서늘한 눈빛을 받고 포우드 백작이 움찔했다.

아무리 그가 공작가를 등에 업고 있더라도 상대는 공작에 못지않은 왕국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 그런 뜻이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카발디 백작은 우리 쪽 사람입니다. 저희로서도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가하오. 개인적인 원한에 공작가가 개입할 명분은 없소. 우리도 개입할 명분이 없기에 지켜보고 있는 것이오. 만약 공작가가 개입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단호한 대답에 포우드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도무지 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지? 그 애송이가 뭐라고 이렇게 편을 들어 주는 거지? 내전까지 불사하겠다고? 고작 북부의 애송이일 뿐인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브랜포드 후작의 의중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포우드 백작은 다시 강하게 도발을 했다.

"정녕 힘으로 해결하실 생각입니까? 자신 있으신 겁니까? 각하께서 식량을 충분히 쌓아 두신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피해를 감수하고 움직이면 어느 쪽이 유리할지는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사람을 협박하는 것이오? 백작."

가뜩이나 지셀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던 브랜포드 후작이 포우드 백작의 건방진 발언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원래 브랜포드 후작은 감정 변화가 이렇게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셀과 엮인 뒤로는 성질이 자꾸 더러워졌다.

지금도 그렇다. 편들어 주고 싶어서 들어 주는 게 아니다. 그놈이 자기 편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으니 시도 때도 없이 화가 치밀고 폭발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차가운 표정으로 포우드 백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입만 따로 떼어 공작에게 보내면 내 뜻이 확실히 전달되겠군."

서늘한 기세에 포우드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정말 내전을 결심했다면 여기서 바로 자신의 목을 칠 수도 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가... 잠시 흥분하여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받아들이지. 그대도 예전 같지 않구려. 아주 둔해졌어."

포우드 백작은 입술을 깨물며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작정하고 친왕파가 지셀을 비호한다면 공작가 측에서 막을 방법은 없다.

친왕파와 같이 끼어들든가 아예 모른 척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뿐이었다.

'으으, 어차피 쓸어 버릴 놈들이지만 이런 시기에 움직일 줄이야. 도대체 어떤 놈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이지?'

방어적인 태세로 일관하던 왕실과 친왕파가 이렇게 갑자기 움직일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모두가 고통받고 있는 이 시기에 말이다.어떤 계획인지, 함정이 있는 건지, 무엇을 노리고 움직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친왕파도 가뭄으로 큰 피해를 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움직일 수가 있는 거지? 우리가 움직이기를 유도하는 건가?'

만약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거라면 사태를 관망해야만 했다.

'하지만 카발디 백작이 패하면 곤란해진다.'

북부 최대의 철 생산지인 카발디 백작령은 공작가에게도 중요한 곳이었다.

더 급한 곳이 있어 지원을 조금 뒤로 미뤘을 뿐인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터져 버렸다.

'젠장, 그 애송이가 식량을 빌미로 그만한 병력을 끌어모았을 줄이야.'

평소였다면 그냥 코웃음 치고 무시했을 것이다. 카발디 백작이 운용하는 무장병들은 강력하기로 북부에서 손꼽혔으니까. 펜리스 따위가 덤벼 봤자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 카발디 백작에겐 식량이 없다. 그저 포위만 당해도 죄다 굶어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포우드 백작은 브랜포드 후작에게 물었다.

"친왕파도 중립을 지키고 끼어들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까?"

"그쪽도 끼어들지 않는다면."

"알겠습니다. 각하의 뜻을 전하고 저희도 중립을 지키도록 말을 올리겠습니다."

"그리하시오."

몸을 돌린 포우드 백작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잔인한 눈빛을 띠었다.

'데스몬드 백작이 움직이면 되겠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데스몬드 백작은 계속 중립인 척해 왔다.

데스몬드 백작은 똑똑한 자다. 공작가에서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일 게 분명했다.

어차피 정치 관계란 복잡한 법이니, 적당한 명분이야 전쟁에 승리한 뒤 억지로 만들어도 충분하다.

'그러면 피해를 보고 싶지 않은 친왕파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대전을 벗어나는 포우드 백작의 뒤로, 브랜포드 후작의 나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경고를 잊지 마시오, 백작. 친왕파와 공작파 어느 곳에서도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오."

잠깐 멈칫한 포우드 백작은 다시 몸을 돌려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를 말씀입니까. 저희는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포우드 백작은 자리를 완전히 떠났다.

포우드 백작이 떠난 뒤에도 브랜포드 후작은 눈을 감고 계속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지셀의 말.

― 데스몬드 백작은 의심스러운 자입니다.

만약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이 정말 공작가의 하수인이라면, 카발디 백작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펜리스의 뒤를 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펜리스를 비롯한 페르디움은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뒤는 뻔하다. 북부가 완전히 공작가의 손에 넘어간다면 친왕파는 더 수세에 몰리게 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북부의 다른 영지를 믿고 밀어줄 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놈이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패해도 북부를 잃고, 손을 떼도 북부를 잃는구나.'

가뭄 때문에 소강상태가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겁 없이 날뛰는 놈 하나 때문에 상황이 이전보다 더 복잡해져 버렸다.

'역시 내전은 피할 수 없는가.'

한숨을 내쉰 브랜포드 후작은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

"네."

"맥쿼리 후작에게 도렌 자작의 북부 2군단을 데스몬드 백작령 인근으로 움직인 뒤, 그곳을 감시하라고 전해라."

"그 말씀은...."

"우선은 감시와 저지를 목표로 삼아라. 하나 만약 데스몬드 백작의 군대가 펜리스 남작을 공격한다면...."

잠깐 침묵하던 브랜포드 후작은 곧 스산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곧바로 데스몬드를 치라고 전해라."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