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1)
로이스가 종소리를 들은 것은 막 리아의 집으로 공간 이동을 펼쳤을 때였다.
땡땡땡-.
격한 타격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에 로이스는 기감을 펼쳤다.
곧 마을 곳곳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을 밖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기운.
"어?"
로이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불규칙하게 날뛰는 기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몬스터였다.
그것도 중소형의 약한 몬스터가 아닌 최상위에 군림하는 몬스터가 말이다.
거기에 이토록 짙은 기운을 풍기는 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로이스는 몬스터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우거인가?'
갖가지 몬스터가 모여 사는 녹치 산맥에서도 오우거는 최상위 줄에 놓인 몬스터였다.
땡땡땡-.
여전히 울려 대는 타종 소리에 로이스가 시선을 돌렸다.
"이건 피신하는 경고 소리였군."
다 자란 성체 오우거는 그 크기만 4m를 넘긴다.
거기에 몬스터, 동식물, 심지어 인간까지 잡아먹는 잡식성의 대식가.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 두꺼운 거죽과 아름드리나무를 가볍게 부러뜨리는 괴력.
일반인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오우거를 상대하려면 2티어급 강자 둘은 있어야 하리라.
그런 오우거의 등장에 로이스는 턱을 쓸었다.
'이 근방의 오우거가 남아 있었나?'
산맥을 돌며 오우거를 비롯한 대형 몬스터에게 자신이 만든 성법을 실험한 로이스.
덕분에 녹치 산맥에 자리한 몬스터 중 로이스에게 두들겨 맞지 않은 몬스터는 거의 없었고, 그중에서도 오우거는 내구성 좋은 샌드백이었다.
보통의 몬스터가 한두 방에 골로 가면 오우거는 몇 방은 버티니, 한때 로이스는 오우거, 트롤만 집중적으로 찾아다니며 두들겼었다.
때문에 골병으로 죽은 오우거가 적어도 수십은 되리라.
'뭐, 한동안 놔 뒀으니 개체 수가 늘어났을지도.'
마지막으로 오우거를 잡아 족친 게 40년 전쯤이던가.
그 정도면 오우거들도 제법 번식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오우거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고 리아의 집 안으로 들어선 로이스.
그를 붉은 머리 남매가 반겨 주었다.
"선생님!"
"선생님!"
로이스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타니아와 켄드릭.
녀석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했다.
타니아는 이미 눈물을 흘린 건지 눈가가 촉촉했고, 그나마 오빠라고 켄드릭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아이들의 반응에 로이스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오우거가...."
켄드릭의 얼굴에 공포심이 가득했다.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어른들에게 들은 오우거에 대한 일화를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켄드릭이 말을 잘 못 하는 사이 로이스에게 안긴 타니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랑… 엄마가...."
타니아의 이야기에 그제야 로이스는 집에 리아와 아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엄마 아빠 어디 갔냐?"
"엄마가 산나물을 캔다고 나갔는데… 오우거가… 그래서 아빠가...."
켄드릭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로이스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이런...."
아무래도 리아가 밖에 나물을 뜯으러 간 사이 오우거가 쳐들어왔고, 아이들의 아빠는 그런 아내를 구하기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그때 로이스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원작에서 켄드릭과 여동생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둘이 살아왔다고 했다.
거기에 두 남매가 살아가다가 광룡에게 변을 당하는 마을은 현재의 마을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사실과 현재 상황.
두 가지가 조합되니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오늘 오우거에게 부모를 잃고 이 마을 역시 없어지는 거였나...."
그렇게 어린 시절 살던 마을에서 벗어나 나중에 광룡에게 사라지는 마을로 이주하는 게 켄드릭의 유년 시절일 듯싶었다.
"흠...."
로이스는 불안에 떨고 있는 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거....'
로이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기회인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스승의 위엄을 어찌 세워야 하는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판이 깔린 것이다.
'일석이조네.'
훗날 엘비스가 나타나 켄드릭을 찾는다 쳐도 그라면 켄드릭이 이주한 후에 살아갔던 마을을 중점적으로 찾아볼 것이다.
만약 애초에 켄드릭이 이 마을을 떠나가지 않게 만든다면?
'엘비스 녀석이 꽤 고생하겠지.'
속으로 미소를 지은 로이스가 켄드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아."
"선생님...?"
켄드릭이 머뭇거리자 로이스가 재촉했다.
"빨리 잡아. 네 엄마 아빠 구하러 가게."
"...?!"
엄마 아빠를 구한다는 소리에 켄드릭의 표정이 변했다.
녀석이 후다닥 로이스의 손을 잡고.
츠팟!
켄드릭, 타니아, 로이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시간을 되돌려, 로이스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
사색이 된 리아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악...."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리아가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즉-.
한쪽의 숲의 나무가 그대로 부러져 나가며 나타난 황갈색의 거대한 동체.
크르르-.
낮게 깔리는 목울대 소리와 함께 내뱉어지는 숨결에 십여 미터가 떨어져 있음에도 짙은 노린내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크륵-.
우람한 육체를 지닌 오우거를 보며 리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아...."
작은 신음을 내뱉었던 그녀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근처의 숲으로 산나물을 뜯기 위해 마을을 나섰던 리아.
마을 인근은 주기적으로 사냥꾼들이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었기에 비교적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별 경각심 없이 움직였었는데....
'어째서… 오우거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산 깊숙이 사는 오우거가 마을 근처까지 내려온 것은 말이다.
리아는 거칠게 뛰는 심장에 빨리는 호흡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그리고 오우거를 살폈다.
크르르-.
낮은 울음 소리를 내는 오우거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녀석의 눈에는 누런 진물이 번졌고, 새하얗게 백탁이 끼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숲에서 오우거를 마주한 상황에서 리아 같은 아낙네가 살아남을 일이 얼마나 될까.
이미 진즉에 오우거의 한 끼 식사로 전락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오우거의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앞을 못 보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들었어야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리아에게는 좋은 상황이었다.
'이제 어쩌지?'
이를 악문 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마을의 울타리가 쳐진 곳.
이대로 산 중턱을 내려가 달려간다면 바로 마을이 나온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뛰어서 몇 분이면 도착하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리아의 얼굴을 밝지 못했다.
'만약 마을로 오우거가 들이닥친다면....'
아무리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한 오우거라지만, 그래도 산중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였다.
60가구가 겨우 넘어가는 마을이 오우거를 어찌 상대할까.
이대로 마을에 오우거가 들이닥치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거기에 마을에는....
'켄드릭과 타니아가....'
마을의 안위도 안위지만, 어미인 그녀에게 자식들의 안위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다.
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킁킁-.
보이지 않는 탓에 코를 킁킁거리던 오우거가 리아 쪽으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
점점 다가오는 선택의 시간.
마침내 결단을 내린 리아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달려 나가는 방향은 마을과 반대였다.
리아는 아이들이 있는 마을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리아가 뜀박질을 시작 소리를 들은 오우거가 괴성을 내질렀다.
-크워어!
놈이 리아의 뒤를 쫓아 움직였다.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
커다란 덩치만큼 넓은 보폭 탓에 순식간에 리아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문제는 숲이 놈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무에 가로막혀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오우거.
덕분에 리아는 쉽게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우거는 오우거였다.
-크아아!
분노가 가득한 거친 괴성을 내지른 오우거가 막아서는 나무들을 그대로 들이박으며 내달렸다.
이에 굵은 나무들이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언제라도 리아를 낚아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위태로운 추격전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때.
"리아아아!"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아와 오우거의 움직임이 모두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에 리아가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론!'
저 멀리, 마을 방향에서 아론이 달려오고 있었다.
'안 돼!'
남편이 자신을 위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4티어급 무사 하나가 더해진다고 오우거를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히려 희생자를 더 늘릴 뿐.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아론이 오우거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툭-.
짐승과 오크, 고블린 같은 소형의 몬스터에게는 위협적인 화살이었지만, 오우거의 두꺼운 거죽을 뚫지는 못했다.
다만 오우거의 신경을 분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오우거가 멈칫한 사이 아론이 소리쳤다.
"리아! 도망쳐!"
"아론!"
앞뒤로 들려오는 인간들의 목소리에 오우거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뒤로 몸을 돌렸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울리는 인간들의 목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는 모습.
-크르륵.
불편한 심기를 담아 낮은 울음을 토해 낸 오우거가 인근의 나무를 뽑아 아론이 있는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콰득-.
다행히 그 공격에 아론은 무사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땡땡땡-.
뒤늦게 마을에서 울리는 경고 종소리에 오우거의 고개가 또 한 번 돌아갔다.
이를 본 리아가 소리쳤다.
"안 돼! 마을에는… 아이들이!"
평소 몬스터의 습격에 알림이 되었던 타종 소리가 지금은 되레 마을에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리아는 어떻게든 오우거의 시선을 끌어 보고자 애를 썼다.
또한,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아론도 필사적으로 오우거의 관심을 끌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무의미했다.
땡땡땡-.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목표로 삼을 오우거가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이를 본 아론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놈을 데리고 마을에서 멀어져야 한다!'
오늘 여기서 자신이 죽더라도 말이다.
아론은 다급하게 리아에게 달려갔다.
"아론… 오우거가 마을로...."
"시간이 없으니까 잘 들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놈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게. 그러니까 너는 마을로 가서 타종을 멈춰."
"아론...."
자신이 그러했듯 스스로 미끼가 되려는 아론의 말에 리아는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게 감상을 주고받을 시간은 없었고, 아론과 리아는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인사였다.
그렇게 아론이 오우거에게, 리아는 오우거를 우회해 마을로 향하려는 찰나.
츠팟!
허공에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아빠!"
"엄마!"
낯익은 부름에 아론과 리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켄드릭! 타니아!"
"아...!"
그들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자식들과 로이스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로이스의 발이 지면에 닿고.
"로, 로이스 오빠?"
"무사했네."
"여, 여길 어떻게?"
"자세한 거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로이스는 안고 있던 타니아와 켄드릭을 부모에게 넘겼다.
얼떨결에 아이들을 받아 든 두 사람.
아이들이 전해 주는 온기에 조금 전 들었던 걱정과 불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렇게 아이들을 부모에게 전한 로이스가 오우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이스 오빠!"
"선생님!"
당황한 리아와 켄드릭이 소리쳐 보았지만, 로이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네 사람의 귀로 로이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거기서 잘 보고 있어."
마치 소풍을 나가는 듯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저은 로이스.
그는 막 마을 울타리에 닿은 오우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보여주자고.'
높고도 높은 스승의 위엄을 말이다.
151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2)
다급한 상황과는 달리 로이스의 행동에서 조급함은 없었다.
그는 웃으며 오우거를 바라보았다.
'이건 운명이 만들어 준 기회다.'
마치 제자들에게 스승의 존엄성을 보이라는 듯 발생한 사건.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로이스가 놓칠 리 있겠는가.
그는 안 그래도 숨겨 놓고 있던 드래곤의 기운을 더욱더 꼭꼭 숨겼다.
혹여라도 오우거가 자신을 눈치채고 도망치지 못하게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던 로이스.
오우거가 막 하나의 울타리를 밟아 으스러뜨렸을 때,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츠팟!
허공을 뛰어넘어 로이스가 나타난 곳은 다름 아닌 오우거의 정면이었다.
거침없이 마을로 밀고 들던 오우거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간을 보고 멈칫거렸다.
-크릉?
오우거의 눈에 당황이 서렸다.
분명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놈은 눈앞의 인간에게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아무리 로이스가 드래곤의 기운을 지워 냈다고는 하나, 강자로서의 격마저 지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은연중에 풍기는 로이스의 격이 오우거가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몬스터와 로이스 사이에 대치가 이어졌다.
오우거를 본 순간 로이스는 놈이 어째서 이런 마을까지 내려온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늙은 놈이네.'
한동안 오우거를 많이 두들겨 봐서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말이다.
진물이 번진 두 눈과 쭈글쭈글해 보이는 피부.
근육이 빠져 여타 오우거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몸체까지.
마을까지 내려온 오우거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개체였다.
'영역 싸움에서 밀린 모양이군.'
오우거는 무리 짓지 않고 일정 영역에서 홀로 생활하는 몬스터였다.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그 안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습성을 가진 오우거가 영역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새로운 젊고 강한 개체에게 내쫓김을 당했을 때뿐.
성체로 자라난 지 얼마 안 되어 영역이 없는 젊은 오우거들에게 죽을 날이 머지않은 오우거의 영역은 노리기 좋은 보금자리였다.
그렇게 영역을 빼앗긴 늙은 오우거들은 보다 쉽게 먹이를 찾기 위해 산 밑자락으로 내려오고는 했다.
지금도 그와 같은 상황이리라.
로이스는 머뭇거리는 오우거를 보며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이번 일을 처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어린 제자들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남기는 거였다.
'보자… 뭐로 할까?'
로이스는 어찌해야 이 숙제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러고 보니… 집과 은화성이 아닌 곳에서 용법(龍法)을 펼치는 거는 처음인가?'
지난 세월, 영웅왕의 유산을 얻고 끊임없이 수련한 로이스.
그 결과.
공간 속성 탑티어.
시간 속성 탑티어.
힘 속성 탑티어.
정신 속성 탑티어.
그는 보유한 4개의 속성 모두를 탑티어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직 성룡이 되지도 못한 헤츨링이 보유한 모든 속성을 탑티어까지 끌어올렸으니 은화성에서 또 한 번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로이스가 탑티어에 오른 것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른 일이었다.
바로 그가 수련하며 만들어낸 새로운 체계의 기예가 고룡들 사이에 큰 화젯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일인고?'
'흠… 재밌구나, 재밌어.'
'허허… 이런 걸 헤츨링이 만들어 냈다니.'
'크헐헐! 역시 내 손자다!'
'역시 우리 아들!'
무인도에서 영웅왕의 무법을 통해 자신만의 기예 체계의 기틀을 잡았던 로이스.
지난 세월, 로이스는 이를 보강하고 다듬었다.
또한, 정신파 변환 물질을 통해 알아낸 각 속성 간의 연동까지 섞어 내니 제법 그럴싸한 작품이 나왔다.
그렇게 완성된 기예는 기존의 체계와 완전히 달랐다.
성법과 무법의 경계가 사라졌으며, 동시에 성법이자 무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로이스는 자신이 만든 체계에 드래곤을 위한 기예, '용법'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 탄생한 용법이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려 하고 있었다.
'세상에 용법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인데 밋밋하게 끝낼 수는 없지.'
미소를 띤 로이스가 움직였다.
저벅-.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딘 로이스.
그러자 오우거가 뒤로 물러섰다.
저벅-.
다시금 한발 앞으로 나아간 로이스.
그에 맞춰 물러서는 오우거.
이를 보며 로이스가 인상을 썼다.
"어쭈?"
오우거가 저 나이만큼 살아남았다는 것은 수많은 경쟁자를 이기고 지금까지 존재했다는 거였다.
노련하고, 또한 그만큼 생존 본능이 뛰어나다는 소리.
로이스가 오우거를 보며 피식거렸다.
"아니지. 네가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맞상대해 줄 놈이 저리 나오면 박수 소리가 나겠는가.
"네가 안 오면...."
로이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간다."
로이스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돌진해 들었다.
* * *
[거기서 잘 보고 있어.]
스승은 그 말을 남기고 괴물을 향해 걸어 나갔다.
켄드릭과 타니아는 부모의 품에 안겨 나아가는 스승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선생님?'
켄드릭도 타니아도 잘 알고 있었다.
오우거란 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괴물을 향해 걸어가는 스승의 발걸음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가볍기 그지없었다.
한껏 긴장해 스승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 순간.
츠팟!
로이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곧이어 괴물의 앞을 막아선 로이스의 모습을 본 아이들과 부모.
리아와 아론은 마른침을 집어삼켰고 아이들은 긴장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그들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
마을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던 오우거가 멈춰 섰다.
자신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디작은 인간을 앞에 두고, 마치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듯 오우거가 멈춰 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경악스러운 상황.
놀란 리아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우거가… 피하고 있어...?."
로이스가 걸음을 내디디니 오우거가 뒷걸음질 쳤다.
두려울 것 없이 날뛰던 그 오우거가 말이다.
일반인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앞으로 내딛는 로이스와 물러서는 오우거.
둘의 대치가 잠시 잠깐 이어졌다.
그러던 순간, 로이스의 몸이 사라졌다.
"어, 없어졌어?!"
너무도 빠른 돌진이었기에 지켜보는 이들은 마치 로이스의 모습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 것이다.
츠팟!
다시금 로이스가 나타난 곳은 오우거의 코앞.
이에 놀란 오우거가 공포에 질린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아름드리나무조차 일격에 박살 내 버리는 괴력이 담긴 주먹질이었다.
"아!"
"선생님!"
아이들이 놀라 소리쳤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로이스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금방이라도 오우거의 주먹질에 피 곤죽이 되어 버릴 거라 여겼다.
하지만.
크워어어-.
괴성을 내지르는 오우거의 주먹질 속에서 로이스는 무사했다.
아직 제대로 안목이 갖춰지지 않은 아이들의 눈에는 로이스가 오우거의 주먹에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련한 세월만큼 안목이 쌓인 아론은 저것이 얼마나 고도의 몸놀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전부… 전부 피해 내고 있다!'
그것은 극도의 절제된 간격 안에 모든 것을 예측하고 행해지는 몸놀림이었다.
아마도 로이스란 선생은 오우거의 공격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고 있으리라.
정확히 무슨 원리로,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는 몰랐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크아아!
맞지 않는 공격에 오우거는 더 겁에 질려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쳐 가는 것은 놈뿐이었다.
오우거의 공격이 한동안 이어지던 그 순간.
"저, 저게… 무슨?!"
아론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은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로이스의 몸이 솟구치며 사뿐히 오우거의 주먹 위에 올라선 것이다.
그 뒤로도 오우거의 주먹질이 계속될 때마다 로이스는 주먹을 옮겨 탔다.
마치 곡예를 보는 듯한 모습.
아론은 혀를 내둘렀다.
'1티어의 무사는 전부 이런 건가?'
2티어급 강자 둘이 있어야 잡을 수 있다는 오우거를 가지고 노는 듯한 로이스의 모습은 경외 그 자체였다.
그렇게 요리조리 주먹을 타고 움직이던 로이스가 오우거의 어깨에 올라 가볍게 발을 굴렀다.
떨어진 낙엽을 밟듯 가벼운 발놀림.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쿵-.
거친 소리와 함께 오우거가 무릎 꿇었다.
-크아아.
전신을 짓누르는 힘에 대항하듯 괴성을 내지르는 오우거.
그드득-.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놈의 육신이 비명을 내질렀고,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럼에도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오우거의 머리는 점차 아래로 향했고.
쿵-.
결국, 오우거의 몸이 지면에 바짝 밀착됐다.
사지가 꿇리고 배가 땅에 닿았으며 머리마저 지면에 처박혔다.
오체투지(五體投地).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오우거가 로이스에게 극도의 공경을 보이는 듯 보였다.
엎드린 오우거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로이스가 서서히 움직였다.
저벅-.
한 발짝 오우거에게 가까워진 그가 중얼거렸다.
"고생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장단에 맞춰 놀아 준 놈에게 전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였다.
그리고 주변 공간이 일렁였다.
발현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발동된 성법.
투곽-.
우그러드는 공간 속에 오우거의 육신이 작게 압축되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작은 공의 형체로 변해 가는 오우거의 육신.
4m에 달하던 괴물이 작디작게 변해 가는 모습은 기괴함 그 자체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툭-.
로이스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주먹만 한 크기의 황갈색 구체를 내려다보았다.
무심함이 가득한 시선 속에 로이스는 가볍게 발을 들어 이를 밟았다.
파즉-.
황색 구체가 먼지가 되어 흩날렸고, 로이스의 주변을 맴돌다 바람에 날아갔다.
이후 정적이 감돌았다.
오우거의 괴성도.
마을에서 울리던 타종 소리도.
로이스를 바라보던 리아 일가족의 경악성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모두가 한 존재만을 바라보았다.
타종하던 종지기, 리아와 그 일가족도 모두 할 말을 잃고 오로지 하얀 머리를 한 소년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 로이스가 움직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넋 나간 일가족이 있는 곳.
불과 몇 분 전, 오우거를 향해 걸어갔던 산책같이 여유로운 걸음 그대로, 다시금 켄드릭과 타니아 앞에 선 로이스.
그가 멍하니 동공이 풀려 버린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잘 봤지? 이게 앞으로 너희가 배울 거다."
그때의 시간은 정오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지만, 아이들은 로이스의 등 뒤에 마치 서광이 비치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 무엇보다 환하게.
"아...."
"와...."
아이들의 뇌리에 스승의 모습이 깊게 각인되었다.
그날.
만약 로이스가 아니었다면 일생 최악의 순간으로 기억될, 바로 그날이 켄드릭과 타니아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재탄생했다.
"선생님...."
로이스를 바라보는 켄드릭의 눈에 짙은 공경과 경외심이 자리했고.
"와...."
리아의 품에 안겨 있던 타니아의 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났다.
유리처럼 맑고 맑은 타니아의 두 눈 속에 로이스의 모습이 깊이 담기는 순간이었다.
152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3)
그날.
로이스가 위기에 처한 부모님을 구하고 스승의 하늘 같은 위엄을 드러낸 날로부터 아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 변화는 켄드릭부터 시작됐다.
지금껏, 로이스의 교육에 약간은 긴가민가하던 켄드릭.
"그렇게 하는 거다."
"네!"
"알아들은 거지?"
"네!"
"…이해한 거 맞아?"
"네!"
녀석은 로이스의 질문에 오로지 '네!'로만 답했다.
로이스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듯한 모습.
'옳지 옳지! 이거지!'
딱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자 로이스는 흐뭇해했다.
하지만 모든 결과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선생님 같이 가요!"
그날 이후 로이스만 보면 쫄쫄쫄 쫓아다니는 타니아가 문제였다.
녀석이 얼마나 로이스에게 의존하던지 제 부모보다 로이스와 함께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지금도 재잘거리며 자신의 다리에 척-하니 달라붙은 타니아를 보며 로이스는 볼을 긁적였다.
'…약빨이 좀 과하게 먹혔나?'
꼬맹이답지 않게 열망이 가득한 저 눈빛을 봐라.
떼 놓고 어디로라도 갈라치면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쪼르르 달려오는 게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 같아 보였다.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스승을 의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로이스에게 절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제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칠 무법 이론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지금까지는 간단하게 속성력에 관해 알려 줬지만, 이제부터는 고급의 무법 이론을 알려 줘야 한다.
로이스는 영웅왕의 무법까지도 알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금 과하게 자신을 의지하는 아이들이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절대 나쁘지 않았다.
'열심히 죽 쒀서 개 줄 필요는 없지.'
자신이 열심히 가르쳤는데 엄한 놈이 데려간다?
로이스가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이제는 때가 됐다고 여긴 로이스는 아이들에게 차츰 무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복병이 발생했으니.
"정말 그걸로 하겠다고...?"
"네!"
아이들의 원하는 병장기에 맞게 무법을 전해 주려던 로이스.
켄드릭은 원작에서처럼 검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검술을 수련하는 것을 보고 자란 영향이 큰 듯싶었다.
한데 문제는 타니아였다.
"흠...."
로이스는 당당히 맨손으로 선 타니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꼬마 숙녀.
놀랍게도 녀석은 맨손 격투술을 선택했다.
로이스가 타니아를 보며 물었다.
"맨손 격투술은 무기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려운 일이야. 감당할 수 있겠어?"
"네!"
"이건 네 선택이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어."
고작 8살짜리 아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냉혹하다 싶었지만, 타니아는 그마저도 좋은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후회 안 해요! 저도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아무래도 자신이 오우거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게 녀석에게는 크게 인상 깊었나 보다.
제자의 선택에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병장기 선택이 끝난 그날부터 로이스는 아이들에게 무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덤으로....
"자,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의 아버지인 아론까지 떠맡게 됐다.
정확히는 아론의 수련 겸 애들의 실전 교본으로 로이스와 대련을 하는 일이었다.
로이스는 바짝 얼어 있는 아론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애들 보는 앞이라고 봐주고 그런 거 없다."
"네, 알겠습니다! 봐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1티어급의 무사와 대련.
그것만으로도 아론에게는 크나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로 인해 막힌 벽을 뚫을 수 있을 거라고.
비록 애들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위엄이 조금 깎이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사였으니 말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그리 말한 로이스가 손을 까닥였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이에 아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그의 진검이 뽑혀 나오고.
"…갑니다!"
거친 외침과 함께 아론은 전력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매일같이 수천 번의 훈련으로 단련된 깔끔한 동작이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꽤 위협적이었지만, 로이스에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동작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틀어 검을 피해 낸 로이스가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잘 봐 둬, 대련을 지켜보는 것 역시 하나의 교육이니까."
"네!"
아이들의 당찬 답변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론의 검도 계속해서 로이스를 노렸다.
로이스는 이를 가볍게 회피하며 그럴 때마다 하나씩 아론의 문제점을 이야기해 줬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훙-.
"거기서는 발의 방향을 바꿨어야지."
훙-.
"검을 쥔 손을 유연하게 잡아!"
최소한의 동작으로 자신의 공격을 피해 내는 로이스의 모습에 아론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물론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어진 로이스의 일침.
"네 공격은 너무 정직해."
툭!
로이스의 손이 아론의 검을 가볍게 쳐 냈다.
"억!"
별거 아닌 공격에 급격하게 몸을 휘청거리는 아론.
"때론 변화를 좀 주란 말야!"
그 말과 함께 로이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정직하게."
퍽-.
"'나 머리 노립니다!', '팔 노립니다!', '다리 노립니다!' 하고 날아드는 검을."
퍽-.
"누가 맞아 주냐고!"
퍽-.
정확하게 세 방이었다.
얼굴, 팔, 다리에 주먹을 맞고 그대로 쓰러져 버린 아론.
로이스가 바닥을 뒹구는 아론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다시."
"네!"
아론은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 다시 로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론의 공격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지만, 그렇다고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으어어억...."
명치에 주먹이 꽂힌 아론이 풀썩 쓰러졌다.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아론과는 달리 로이스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쓰러진 아론을 뒤로하고 로이스가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잘 봤지? 너무 정직한 공격은 상대에게 쉽게 읽히는 법이야. 잘 기억해 둬."
"네!"
"명심하겠습니다!"
타니아와 켄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식사하세요!"
마당 뒤편에 울리는 목소리에 로이스가 움직였다.
"먹고 하자."
로이스가 몸을 돌리자 아이들이 아론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켄드릭이 아버지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 주며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건 아버지가 약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너무 강하신 거니까요."
"...."
현실의 비정함이 잔뜩 첨가된 켄드릭의 위로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타니아의 목소리.
"맞아. 아빠가 약한 거 아냐. 우리 선생님이 엄청 쎈 거지! 아마 아빠가 백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선생님 털끝 하나 못 건드릴걸?"
"...."
"아앗! 선생님 같이 가요!"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타니아는 멀어지는 로이스를 쫓아 쪼르르 달려 나갔다.
"그럼 씻고 오세요."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가는 켄드릭까지.
아론은 멀어지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아...."
아이들 앞에서 대련을 통해 무참히 두들겨 맞은 것은 별로 상관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먼저 원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로이스는 가르침까지 내려 가며 대련을 해 줬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
그건 아이들이 자신보다 선생님을 더 존경하는 데에서 오는 섭섭함이었다.
'어흑....'
아론은 벌써 현실을 깨달은 아이들이… 너무 일찍 커 버린 게 아닌가 싶어 서운할 뿐이었다.
* * *
그날 이후로도 로이스와 아론의 대련은 계속됐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상황이 변했다.
아이들이 서서히 무법을 익히면서 아론은 로이스가 아닌 아이들의 상대를 해야 했다.
"핫!"
"합!"
아론은 자신을 몰아치는 아들딸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처음에는 어린 자식들을 상대하는데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자신이 검을 잡아 온 세월이 얼마던가.
저 아이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잡아 왔었다.
그러니 어린 자식들과 대련하면 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루하루, 아이들과의 대련이 이어질수록 달라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상대해도 10분이면 끝나던 대련이 다음 날에는 한 시간, 그다음 날에는 두 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아론이 끌어올리는 속성력의 힘 또한 높아졌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을 때.
'말도 안 되는!'
두 아이를 상대하는 아론은 전력을 다하면서도 겨우 비등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합!"
이제 10살인 켄드릭이 제 몸만 한 목검을 휘두르며 아론을 위협했고.
"핫!"
작은 주먹을 쥔 타니아는 아론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자식들의 공격이 얼마나 매섭고 날카롭던지 아론은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실전 같은 격렬한 대련이 한동안 이어지고.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저 어땠어요!"
아버지에게 살포시 인사를 하는 켄드릭과 달리 아빠는 무시한 채 쪼르르 로이스에게 달려가는 타니아.
이를 지켜보는 아론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자신의 자식이지만 정말이지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걸 어쩌나....'
비록 오늘은 어찌어찌 버텨 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이었다.
'내일이면… 어쩌면....'
자신이 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며칠이 지나면 둘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한 명씩을 상대할 테고, 다시 시간이 흐르면 어쩌면 어린 자식 하나를 감당해 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것도 얼마 못 가 말이다.
이에 아론은 절규했다.
'안 돼!'
자신이 검을 잡아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겨우 석 달 수련한 아이들에게 따라잡힌단 말인가?
이것은 아버지로서도, 그리고 한 명의 무사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로서의 집념이 기적을 만들어 냈다.
"아...."
아론은 순간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아지경에 들어갔다.
"선생님… 아빠가?"
"쉿!"
로이스가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서 아론을 가만히 지켜보는 로이스.
"…때가 되긴 했지."
아론이 겪고 있는 것은 막혔던 벽이 뚫리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현상이었다.
그간 수없이 대련하며 슬슬 막힌 벽을 뚫을 때가 되었다고 여기긴 했다.
한 단계 진보하는 아론을 지켜보는 로이스는 미소 지었다.
'이번에 3티어에 오르면 한동안은 더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도 오래지 않아 아이들에게 따라잡힐 것이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수련하라고.'
로이스는 웃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렇게 그날, 아론은 3티어에 올랐다.
이후 그는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수련을 쌓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3개월 뒤 아론은 어린 자식들의 협공에 패배하고 만다.
이후 2대 1 대련이 아닌 1대 1 대련으로 전환.
다시 3개월 뒤 아론은 타니아에게 졌으며, 다시 며칠 뒤 켄드릭에게까지 패배한다.
정말 괴물 같은 아이들의 성장 속도.
아론은 아버지로서 자신이 가르칠 게 없다는 사실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그래도 로이스 님이 계시니 다행이구나.'
비록 자신이 가르칠 것은 없지만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선생이 있지 않은가.
아론의 말마따나 아이들은 로이스의 지도하에 더욱더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켄드릭이 12살, 타니아가 10살이 된 해.
"선생님?"
로이스는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따스한 봄 햇살 속에 눈을 뜬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때가 됐구나.'
2차 수면기가 도래했음을 말이다.
153화. 2차 수면기 (1)
현재 로이스의 나이 489살.
안 그래도 슬슬 2차 수면기가 다가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였다.
솔직히 로이스는 좀 늦은 편이기는 했다.
쌍둥이는 이미 2년 전 수면기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언제쯤 징조가 나타나나 싶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네.'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로이스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
아마 한동안은 이 녀석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로이스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너희가 해야 할 공부를 알려 주겠다."
"엉?… 그럼 지금까지 저희가 한 건 뭔데요?"
툴툴거리는 켄드릭을 보며 로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의 자식이?'
로이스에게 교육을 받으며 켄드릭은 변했다.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이던 아이는 이제 없었다.
어린 나이에 현실을 깨달은 염세주의자만 있을 뿐.
'…교육이 너무 잘돼도 문제네.'
원작의 검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현재의 켄드릭에 로이스는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지금의 저놈을 만든 게 자신이니....
뭐, 그게 나쁘다는 거는 아니었다.
딱 자신이 원하는 그런 성격이 형성됐으니 말이다.
'어디 가서 호구 노릇 하지만 않으면 되지.'
물론 그건 그거고.
'어딜 감히 하늘 같은 스승님께 툴툴거려!'
훈계보다 빠른 주먹이 켄드릭에게 날아갔다.
딱!
"악!"
이마를 부여잡은 켄드릭이 바닥을 나뒹굴자 로이스가 팔짱을 꼈다.
"이놈의 자식이 선생님한테."
"우씨...."
딱-.
"악!"
또 툴툴거리다가 맞은 데를 다시 얻어맞은 켄드릭.
녀석의 이마가 벌에 쏘인 듯 불룩하게 튀어 올랐다.
아릿한 고통에 켄드릭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씨....'
속으로 끙끙 앓았지만, 켄드릭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니, 못 한 것이다.
지난 세월 로이스와 함께하며 깨달은 게 적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이 말보다 주먹이 빠르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 더 대들어 봤자 본전도 못 건지는 건 자신이리라.
그렇게 켄드릭이 꽁해 있는 사이 들려온 목소리.
"그러게 누가 선생님께 대들래? 오빠가 잘못했네!"
"너...."
켄드릭은 로이스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여동생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켄드릭에게는 딱 로이스가 시어머니요, 타니아가 시누이였다.
'저게 진짜....'
'흥!'
타니아와 켄드릭은 로이스를 가운데 두고 눈싸움을 벌였다.
그사이에서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알려 주는 건 내 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눈싸움을 멈췄다.
녀석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비, 비전요?"
"정말요?"
오우거의 습격이 있던 그날, 뇌리 깊숙이 각인된 로이스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있어 선망 그 자체였다.
언젠가는 스승에게 닿기를 염원하였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 결과 지금은 아버지인 아론을 뛰어넘었지만, 이로 인해 아이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로이스 선생님의 경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매일 계속되는 수련과 대련.
그럼에도 스승인 로이스의 경지가 조금도 가늠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스승님의 발끝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이스가 자신의 비전을 언급하니 어찌 흥분이 안 되겠는가.
"왜, 배우기 싫어?"
"아뇨!"
켄드릭이 펄쩍 날뛰었다.
옆에 있는 타니아는 볼살이 떨릴 정도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음흉한 눈빛을 한 로이스.
"아, 나는 요새 하도 스승한테 툴툴거리는 놈이 있기에 배우기 싫어하는 줄."
"대체 어떤 놈인가요! 그런 은혜도 모르는 놈이!"
켄드릭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외쳤다.
타니아는 그런 켄드릭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뭐 해! 얼른 선생님께 무릎 꿇고 빌지 않고!"
그 말에 켄드릭이 재빨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툴툴거리지 않겠습니다!"
"...."
로이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다시금 볼을 긁적였다.
'음… 애들이… 너무 잘 컸네.'
이게 어딜 봐서 12살, 10살짜리 애들의 대화란 말인가.
능청도 능청이지만, 처세술이 남달랐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르침을 잘 습득한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로이스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냐, 앞으로 선생님 말씀에 토 달지 말거라."
"넵!"
"저는 원래 선생님 말씀 잘 들었으니까, 저는 가르쳐 주실 거죠? 오빠는 안 가르쳐 주셔도 돼요!"
"야!"
"왜! 뭐!"
누가 현실 남매 아니랄까 봐 또 티격태격거리는 아이들을 진정시킨 로이스.
두 남매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 속에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알려 줄 비전의 이름은 마나 하트라는 거다."
"마나 하트...."
켄드릭과 타니아는 '마나 하트'라는 명칭을 곱씹다가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이게 그거죠?! 선생님이 오우거 때려잡을 때, 우리가 배울 거라고 했던 거! 그거 배우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어요?"
"선생님이 하신 걸 우리도 할 수 있어요? 막 휙휙 나타나고! 그럴 수 있는 거예요?"
제자들의 물음에 로이스는 살짝 움찔거렸다.
일전, 오우거 사건 때 로이스가 한 '앞으로 너희가 배울 거'는 그냥 '대충' 마나 하트를 말한 거였는데....
아무래도 녀석들이 오해한 듯싶었다.
'애초에 속성도 다르고… 속성이 같다고 해도 나처럼 할 수는 없을 텐데?'
용법이란 드래곤만을 위한 기예이니 말이다.
물론 로이스가 녀석들의 오해를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그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아마도? 노력하면 될걸?"
안 되면 내 탓 아니다.
너희 노력이 부족한 거지.
로이스는 책임을 제자들에게 떠넘겨 버렸다.
"얼른! 얼른 알려 주세요!"
"저도요!"
"음… 그러자."
로이스가 제자들을 앉혀 두고 마나 하트에 대한 강론을 시작했다.
그렇게 2차 수면기가 머지않은 어느 날.
원작에서 검성 켄드릭을 있게 만든 영웅왕 무법의 전반부'만'이 원주인에게 돌아갔다.
* * *
로이스가 영웅왕의 무법 전반부를 아이들에게 전한 후로 며칠 동안, 켄드릭과 타니아는 마나 하트 수련법에 푹 빠져 살았다.
기존의 무법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신세계에 아이들은 환희했으며 이를 알려 준 로이스에 대한 존경심이 나날이 상승했다.
그러나 새로운 공부에 기뻐하던 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리아의 가족들을 불러 놓고 갑작스럽게 한동안 보지 못할 거라는 말을 전한 로이스.
"떠, 떠나신다고요?"
켄드릭의 물음에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있지.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
졸음이 밀려드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2차 수면기가 진짜 머지않았다는 징조였다.
2차 수면기에 들어가면 마을에 오지 못할 것이기에 꺼낸 말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소식에 두 제자는 매우 놀란 듯 보였다.
반면 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언제나 바람처럼 와서 머물다 가는 존재.
요 몇 년간 그가 아이들을 맡아 가르침을 준 것만 해도 리아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다.
리아가 로이스를 보며 물었다.
"늘 그랬듯… 또 돌아오실 거죠?"
"응."
로이스의 짧은 답변에 리아와 아론, 켄드릭은 안도했다.
하지만 전혀 안도하지 못한 존재가 있었으니.
"어, 언제 오시는데요?"
특히 로이스를 누구보다 따랐기에 충격이 큰 듯 보이는 타니아.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물었다.
간절함이 가득한 질문에 로이스가 짧게 답했다.
"글쎄? 한 십 년 정도 되겠네. 더 걸릴 수도 있고."
너무도 담담한 로이스의 말에 타니아가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지었다.
훌쩍거리던 타니아가 돌연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손을 옹골지게 말아 쥔 녀석이 로이스를 불렀다.
"선생님!"
"왜."
"저 선생님한테 시집갈래요!"
난데없는 타니아의 선전포고에 켄드릭과 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으며 아론은 어린 딸아이의 고백에 입을 떡 벌렸다.
반면 로이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왜 웃어요! 저 진심이란 말이에요!"
어린 타니아의 얼굴 위로 과거 앞니가 빠져 고백하던 리아의 모습이 투영됐다.
로이스가 킥킥거리며 리아에게 말했다.
"얘, 네 딸 맞네."
"진짜...."
리아가 로이스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런 로이스와 리아의 반응에 볼이 불룩해진 타니아가 다시 한번 외쳤다.
"저 선생님한테 시집갈 거예요!"
"안돼."
"왜, 왜요?"
"난 어린애 안 좋아해."
"그, 그럼 저도 선생님한테 오빠라고 부를래요."
"안 돼."
"또 왜요!"
"족보 꼬여."
리아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는데 그 딸내미도 자신을 오빠라고 부른다?
'이런 걸 보고 개족보라고 하는 거지?'
로이스의 철벽같은 방어에 조숙한 꼬마 숙녀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선생님 바보!"
대성통곡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타니아를 보며 리아가 키득키득했다.
"왜요? 저는 좋은데? 그렇게 되면 로이스 오빠가 제 사위 되는 거잖아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로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켄드릭의 머리를 작게 토닥이며 말했다.
"동생 잘 챙기고 수련 열심히 해라. 나중에 와서 검사한다."
"…네."
그간 툴툴거리기는 했어도 누구보다 로이스를 믿고 따르던 켄드릭.
녀석이 살짝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간다."
손을 휘휘 내저은 로이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함께했던 것이 믿겨 지지 않을 만큼 그는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리아는 멍하니 로이스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너희 선생님은 바람 같은 분이셔. 선생님 말씀처럼 잘 수련하고 있다 보면 금방 돌아오실 거야."
"네."
켄드릭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아가 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못됐다니까.'
모녀가 같은 사람에게 똑같이 차이다니.
때문에 누구보다 타니아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리아였다.
딸보다 먼저 차여 봤으니 말이다.
그녀는 울며 뛰쳐나간 딸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 * *
리아 부부, 그리고 두 제자와 인사를 끝낸 그날부터 로이스는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지하 벙커이자 수면방의 법진을 살폈다.
특히 수면방의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큐브를 그 무엇보다도 세심하게 점검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졸음이 몰려와 정신이 멍한 가운데 로이스는 큐브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로이스는 억지로 잠을 참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되나?"
지난 세월, 이 순간을 위해 쉼 없이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생긴 불안감.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무인도에서 심해의 군주가 나타난 이후 억지력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쌓이고 쌓인 억지력이 이번에는 또 어떤 죽음을 불러올지....
'조금 무섭긴 하네.'
원작에서 진짜 로이스가 죽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니만큼 걱정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로이스가 졸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찰나.
"로이이이!"
지하 벙커 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의 목소리에 로이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빠 왔다!"
지하 벙커의 입구에서 제네로커와 발렌티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로이스의 앞으로 쪼르르 걸어온 두 부부.
로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 여긴 어떻게? 지금 은화성에 계셔야 하잖아요?"
"우리 아들 수면기에 들어간다고 해서 20년짜리 휴가 내고 왔지!"
"…무슨 휴가가 20년이나? 그래도 돼요?"
"알게 뭐냐. 안 주면 원로직 때려치운다고 하니까 주더라. 그러니 걱정 마."
로이스는 어이없다는 듯 제네로커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눈에 고마움이 자리 잡았다.
'…나 때문인가?'
지난 1차 수면기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 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제네로커 역시 자신을 위협하는 억지력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그가 또다시 아들이 위험에 노출되는데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있겠는가.
로이스의 눈에 자리한 고마움을 읽은 제네로커가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자고 나와. 앞으로는 그렇게 자고 싶어도 못 자니까."
"…네."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이런 게 부모님이구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가족 말이다.
자신을 향한 따뜻한 두 시선에 로이스가 걸음을 옮겼다.
곧 자신이 만들어 낸 큐브로 다가간 로이스.
그가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 살짝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아들 잘 자!"
"좋은 꿈 꾸렴!"
제네로커와 발렌티나가 마주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굿나잇 인사를 받은 로이스가 큐브로 발을 들여놓자, 마치 그의 육신이 물속에 잠기듯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인간이 아닌 현룡화가 되어 큐브에 자리 잡은 로이스.
'졸리네....'
든든한 부모님 덕에 마음이 안정을 찾으니 지금까지 불안감에 참고 있던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끔뻑끔뻑거리는 로이스의 눈.
곧 눈꺼풀이 내려오며 자신을 향해 서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로이스에게 암전이 찾아 들었다.
2차 수면기의 시작이었다.
154화. 2차 수면기 (2)
잠든 로이스를 바라보는 제네로커와 발렌티나.
둘은 큐브 안에 잠든 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평소에는 쌀쌀맞은 녀석이 자는 모습은 순하디순하네."
"우리 아들 참 예쁘지?"
이제는 제법 커서 17m에 달하는 크기의 로이스였지만,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작디작은 어린 드래곤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로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두 부부.
그때 발렌티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정말로… 당신이 말한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대체 왜...."
제네로커에게 듣기도 하고, 그가 쓴 육아 일기장을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로이스가 1차 수면기 때 겪은 일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어린 아들을 해하려는 미지의 힘이라니.
발렌티나의 가슴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굳은 얼굴의 발렌티나를 보며 제네로커가 담담히 말했다.
"로이스의 운명이 그렇다잖아."
"아무리 그래도!"
발렌티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로이스가 전무후무한 엄청난 재능을 타고난 것을 말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뛸 듯이 기뻤지만, 로이스가 겪고 있는 일을 알고는 마음이 변했다.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텐데.'
발렌티나의 안타까운 속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제네로커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우리 아들은 강하잖아? 그런 위험에 매번 노출됐는데도 우리한테 도움 한 번 청하지 않고 모두 홀로 이겨 냈고 말야."
로이스는 당면한 시련을 알아서 척척 해결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대견한 일이었지만, 모든 것을 홀로 지고 가려는 거 같아 제네로커와 발렌티나는 못내 섭섭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부모 노릇 좀 해 봐야지. 우리 아이가 운명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자고."
"…응. 알았어."
발렌티나가 제네로커의 가슴에 어깨를 기댔다.
그렇게 따뜻한 부모의 시선 속에 로이스는 점점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 *
녹치 산맥 전역에는 수많은 은자가 살아가고 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산속에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만큼 기본적인 무력을 갖춘 은자들.
그들 중 누군가는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산에 들어왔거나, 혹은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오로지 개인의 목표를 위해 수련에 매진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녹치 산맥의 중턱,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도 한 명의 은자가 있었으니.
훙- 훙-.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에서 검술 수련에 열중인 사내.
롱소드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그의 육신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탄탄했다.
하지만 육신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의 실제 나이였다.
사내의 나이는 올해로 136세.
하지만 외관상으로 보면 이제 고작 오십 중반을 넘긴 것으로 보였다.
훙- 훙-.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고된 수련은 한동안 이어졌다.
잠시 뒤.
"후우...."
검을 거둔 사내의 전신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숨을 갈무리한 그는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는 숲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인가....'
사내의 가슴속에 조바심이 일었다.
'대체 언제쯤… 이 벽을 뚫을 수 있을지.'
사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의 이름은 브레드 리온.
하워드 제국의 후작 가문 중 하나인 리온 가의 전전대 가주였다.
그는 약 80년 전, 봄 대륙에서 광풍의 브레드라 불릴 정도로 이름 높은 무사였으며, 수많은 전장에서 쌓은 공으로 백작가였던 가문을 후작가로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70세의 나이에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했고, 100세의 나이에 가문을 떠나 녹치 산맥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난 브레드의 목표는 단 한 가지.
1티어에서 막혀 있던 벽을 허물고 탑티어에 오르는 것.
그렇게 36년이나 산속에서 생활하며 수련에 힘썼지만, 여전히 탑티어의 벽은 멀게만 느껴졌다.
'내 재능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브레드의 가슴속에 허망함이 깃들었다.
1티어의 경지에 오르고 육체가 재구성되며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덕분에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텨 왔다.
하지만 늘어난 수명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탑티어에 올라 또 한 번 육체의 재구성을 거치지 않는다면 수년 내에 주어진 수명이 끝나리라.
'아쉽구나. 아쉬워....'
보통 인간의 2배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미련이 남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자신의 한계를 체감한 것에서 오는 답답함이 브레드를 조여 왔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여겼고 주위에서도 그를 천재라 칭송했다.
한데, 그런 자신이 탑티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가슴속에 차올랐던 답답함은 곧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될 리 없다...."
그리고 이는 탐욕이 되었다.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야 한다.'
한계에 가까워진 수명을 늘리고 탑티어에 도달할 방법.
"그게 무슨 수가 되었든 간에...."
머릿속이 탐욕으로 가득 찬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정보가 있었다.
녹치 산맥에 자리한 은자들 사이에 은연중에 퍼진 소문.
[대지의 왼쪽 송곳니 근처, 정순한 마나가 모여드는 땅이 있다.]
정순한 마나가 모여드는 땅은 속성력을 수련하는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수련하면 같은 시간 대비 몇 배에 달하는 효율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데, 그런 장소가 있음에도 은자들이 그 땅을 곁에 두고도 지켜만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이 금지(禁地)라 불리기 때문이었다.
[금지에 발을 들여놓는 자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리라.]
누가 처음 이를 전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소문을 녹치 산맥 인근 은자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고, 오랜 시간 금지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끊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정보를 떠올린 브레드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정순한 마나가 모여드는 땅이라....'
이대로 계속 수련을 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고민하던 브레드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어차피 탑티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수년 내에 바스러질 몸이다....'
그럴 바에는 소문을 믿고 발악이라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 결심한 브레드가 몸을 돌려 한 발 내디뎠고.
저벅-.
곧 그의 몸이 쏘아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
그 끝에 제네로커의 레어가 놓여 있었다.
탐욕에 눈이 먼 인간 하나가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았던 금지를 찾아 떠났다.
이는 로이스가 잠든 지 10년이 흐른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
"아들...."
발렌티나는 고이 잠든 로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1년만 더 채우면 로이스의 2차 수면기가 끝난다.
지난 10년간 염려했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기에 발렌티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얼른 일어나렴."
발렌티나는 아들을 감싸고 있는 큐브를 쓸어내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렇게 발렌티나가 떠나 가고, 로이스의 수면방은 이내 정적에 휘감겼다.
* * *
한 사내가 빠른 속도로 산을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타닥-.
거침없이 산을 타고 오르던 브레드의 신형이 멈칫했다.
허리를 곧추세운 그는 높게 솟은 대지의 왼쪽 송곳니를 바라보았다.
뾰족한 봉우리의 옆쪽, 평평한 어금니를 닮은 분지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저기다.'
브레드는 처음 보는 금지의 풍경에 의아해했다.
'정말로 저곳이 금지란 말인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 보이는 저 땅이 은자들 사이에 금지로 통하는 장소였다.
의문을 뒤로한 채, 브레드는 천천히 금지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없는 건가?"
사방이 훤히 뚫린 분지는 휑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도무지 이런 곳이 왜 금지로 불리는지 알 수 없었다.
브레드는 한동안 분지 주변을 배회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위화감은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잘못 찾아온 건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주변을 둘러보던 브레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없다.'
근처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브레드는 곧장 분지 한쪽에 정좌했다.
그러고는 곧장 속성력 호흡법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잠시 뒤.
"후우...."
길게 숨을 갈무리하는 브레드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어째서...?"
정순한 마나가 모인다고 알려진 금지.
하지만 브레드가 느끼기에 이곳은 다른 곳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혹여 잘못 느낀 게 아닐까 싶어 브레드는 계속해서 호흡법을 이어 나갔다.
그 결과 브레드는 자신이 잘못 느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금지의 소문은 허황된 것이었나?"
브레드는 탄식했다.
탑티어에 대한 간절한 열망.
때문에 목숨 걸고 절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금지까지 찾았다.
하지만 금지의 실체는 소문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젠장."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브레드가 몸을 일으켰다.
막 그가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강한 바람이 분지 일대를 휘몰아치며 지나갔다.
단순한 바람이었지만, 그것이 브레드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응?"
브레드가 다루는 속성력은 풍(風).
그렇기에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분지에 불어닥친 바람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눈에 의아함이 자리했다.
'바람이… 사라졌다?'
바람에도 흐름이란 게 있었다.
하지만 분지에 분 바람은 일정 지점에서 그 흐름이 끊겼다.
바람의 흐름이 끊긴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던 브레드가 손을 내저었다.
휘익-.
그의 손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나아가고, 이내 같은 지점에서 그 흐름이 사라졌다.
이를 본 브레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무언가 있다!'
자신이 발견한 특이점을 유심히 살피는 브레드.
'평범한 절벽인데....'
바람이 사라진 곳은 분지의 가장자리, 절벽 지대였다.
이상 현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냥 그대로 떠났을 정도로 특색이 없는 장소.
그곳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결심했다.
'내려가 본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1티어에 오른 그에게 이 정도 절벽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결심을 내리기 무섭게 그가 절벽으로 몸을 내던졌다.
몸이 밑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든 순간.
탁-.
브레드의 발이 땅에 닿았다.
"헙!"
그가 기함을 토해 내는 사이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이, 이게 무슨?!"
놀란 브레드는 검을 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옅은 빛이 깔린 통로뿐.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브레드는 검을 내렸다.
제법 상황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을 때, 그는 다른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슨 마나가?!"
사방에 퍼진 마나의 밀도가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 어찌나 정순하던지 폐부까지 시원해질 정도였다.
대번 브레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변을 살피며 그는 천천히 통로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살짝 경사진 통로를 내려가며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려갈수록 마나가 더욱 정순해진다!'
순도 높은 마나에 홀린 듯 브레드는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그의 앞에 거대한 석문이 나타났다.
웅장함을 자랑하는 석문에 작은 경고판이 붙어 있었으니.
* * *
외부인 출입 금지!
잡상인 출입 금지!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들어와 보시오!
* * *
브레드는 수백 년은 된 듯한 경고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던전인가...?'
간혹 고대 법사들이 만들어 낸 던전이 발견되고는 했다.
비록 외부인, 잡상인 출입 금지라는 문구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곳도 던전이 아닐까 싶었다.
이에 브레드는 희열했다.
'금지의 전설은 실존하는 거였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이 석문 너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
만약 이곳이 법사의 던전이라면 보물에 가까운 연구물, 또는 고대의 영약 등이 있을지 몰랐다.
혹여 그러한 부산물들이 없다 쳐도 브레드는 저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초입에서조차 이 정도 순도를 지닌 마나가 분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저 안은 얼마나 높은 순도의 마나가 모여 있단 말인가?'
그런 장소를 자신의 수련터로 삼을 수만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빠르게 결심을 굳힌 브레드는 경고를 무시하고 석문을 밀었다.
155화. 2차 수면기 (3)
스르륵-.
부드럽게 밀려난 석문 뒤로 드러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브레드는 석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순간.
쿵-.
열렸던 석문이 그대로 닫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삐용 삐용-.
괴상한 소음과 함께 석문이 변했다.
분명 돌 재질의 문이었건만 돌연 색이 바뀌며 금속의 광택을 띤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브레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무튀튀한 금속 문을 발견한 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일반적인 금속이 아니다.'
브레드는 즉시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그의 검에 하늘색 수정 칼날이 생겨났다.
모든 것을 베어 내는 1티어 무사의 궁극기 영성검.
눈빛을 굳힌 브레드가 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 속에서 브레드는 너무도 멀쩡한 문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무슨!"
영성검으로 베었는데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문이라니!
그는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쾅- 쾅-.
거대한 폭음이 울렸지만, 금속 문은 베이지 않았다.
다만 브레드의 공격이 닿을 때마다 금속 문에서 광채가 일렁일 뿐.
한참 동안 시도한 끝에 브레드는 단념했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쉽지 않겠구나.'
그의 뇌리로 금지에서 살아 돌아온 이가 없다는 소문이 스쳐 지나갔다.
두려움이 일어났지만, 이내 금세 탐욕에 잡아먹혔다.
'나는 반드시… 이곳을 손에 넣어야 한다.'
던전 개척을 통해 탑티어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 정도 난관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진 브레드가 내려가는 계단으로 막 발을 내디뎠을 때.
브레드의 앞에 희뿌연 빛이 치솟았다.
놀란 그가 검을 치켜들었다.
"누구냐!"
쩌렁쩌렁 울리는 브레드의 당황한 목소리.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글씨였다.
[어쭈?]
짧게 떠오른 문자.
곧이어 한 문장이 추가됐다.
[들어왔다 이거지?]
연이어 떠오른 문자에서 브레드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문자인데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달까?
화가 난 거 같으면서도 기쁜, 그런 이상한 목소리가 말이다.
브레드가 유심히 글자를 살펴볼 때, 추가로 문자가 떠올랐다.
[분명 외부인과 잡상인 출입 금지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도 들어왔다고?]
[후환이 두렵지 않아?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무릎 꿇고 '잘못했습니다!'를 100번 외쳐.]
[그러면 문을 열어 주지.]
순식간에 이어지는 문자에서 브레드는 오만함을 느꼈다.
그것이 브레드의 심사를 건드렸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브레드를 우습게 봤다는 거냐?'
자신이 누구던가.
광풍의 브레드였다.
브레드는 이 오만한 던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다시금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다시 떠오른 문자.
[오? 패기 좋네?]
[지금 그거로 너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는 날아간 거야. 멍청아.]
비웃음이 담긴 문자에 브레드가 인상을 썼다.
[환영한다. 웰컴 투 헬!]
브레드는 문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이 허공을 가르며 문자가 그대로 흩어지는 것을 본 브레드는 심호흡했다.
후욱-.
'진정해라. 이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를 상황에서 불필요한 감정은 독이다.'
백전노장답게 '누군지 모를 존재의 도발'을 가볍게 넘긴 브레드.
그는 살짝 누그러진 긴장을 다시 끌어올리며 육신과 정신을 벼렸다.
그때 불현듯 그의 뇌리에 스친 생각.
'그런데 웰컴 투 헬이 무슨 뜻이지?'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더는 막아서는 것이 없자 브레드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 지옥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삐용 삐용-.
로이스가 설치한 문이 내는 경고음을 들으며 발렌티나는 침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어찌."
기본적으로 제네로커의 레어 근처에는 인식 방해 결계가 걸려 있었다.
그것도 꽤 고등한 결계가 말이다.
이를 믿고 있던 발렌티나는 실로 오랜만에 인간이 레어 주변에 나타났어도 곧 되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치고는 제법 강하지만, 결계를 파훼할 정도의 실력은 없어 보이네.'
발렌티나의 예상대로 인간은 금방 떠날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별일은 없겠거니 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발렌티나의 머릿속으로 고이 잠든 아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운명의 시기를 받는 아이.
그렇기에 언제나 죽음을 곁에 달고 사는 자신의 가여운 아들.
1차 수면기 때 아들이 겪은 일을 떠올린 발렌티나는 되돌리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발렌티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떠날 듯 보이던 인간이 돌연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
그러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결계의 허점을 파악한 게 아닌가.
잠시 뒤, 인간은 결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것도 하필 로이스의 수면방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말이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발렌티나의 등 뒤로 쭈뼛 소름이 솟아올랐다.
만약 자신이 로이스가 1차 수면기 때 겪은 일을 몰랐다면.
그로 인해 방심하고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면.
분명 저 인간으로 인해 로이스 신변에 문제가 생겼으리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면....'
과연 그 죄책감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렌티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때, 얼어붙어 있는 발렌티나의 곁에서 어둠이 불쑥 치솟았다.
검은 덩어리는 이내 제네로커의 형상으로 변했다.
침입자를 느끼고 온 그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브레드를 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침입자지?"
"응...."
발렌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네로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인간이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그런 남편의 의문에 발렌티나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를 들은 제네로커가 혀를 찼다.
"이 결계에 그런 허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결계를 다시 손봐야 할 듯싶었다.
그렇게 중얼거린 제네로커의 눈에 파리한 아내의 낯빛이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살짝 우물쭈물한 발렌티나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를 들은 제네로커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난 또 뭐라고.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괴로워하고 그래?"
"하지만...."
"설령 당신이 인간의 침입을 놓쳤다고 해도 내가 알아차렸을 거야. 그리고...."
제네로커의 시선이 브레드가 내려가는 공간에 닿았다.
"그동안 봐서 알잖아? 저기가 어떤 곳인지."
제네로커의 이야기에 발렌티나가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발렌티나 역시 알고 있었다.
지난 세월 로이스가 저 지하 공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만약 자신과 제네로커가 침입자의 존재를 몰랐다 쳐도, 저 인간은 로이스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리라.
아내의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처럼 보이자 제네로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켜는 보자고."
"응."
지금부터 그들이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과연 침입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지 확인하는 일 말이다.
* * *
브레드의 시련은 사라진 줄 알았던 문자가 다시 뜨면서 시작됐다.
[로이스와 함께하는 쇼타임!]
[1단계 START!]
[미션: 조금 따끔할 거야!]
새로 떠오른 문자 중 절반 이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브레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자가 사라지기 무섭게 사방팔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스악-.
벽, 천장, 심지어 계단에서도.
한 무더기의 화살이 브레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에 눈빛을 굳힌 그가 검을 휘두르며 빠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훙-.
브레드가 끌어올린 속성력으로 거친 바람이 발생하자 화살이 그의 몸에 닿지 못하고 휘어졌다.
그렇게 수십 미터를 돌파하여 내려간 순간.
[오? 제법 하네?]
[그럼 난이도를 조금 올려 볼까?]
[2단계 START!]
[미션: 불꽃 트위스트!]
새로운 글자가 떠오르기 무섭게 계단이 떨려 왔다.
드르르-.
철컥철컥-.
금세 계단의 턱이 밑으로 꺼지며 급경사가 발생했고.
치이이-.
경사의 틈에서 갈색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미끄러워진 경사면에 브레드는 당황했다.
'이건?!'
코를 찌르는 냄새.
'기름이다!'
안 그래도 급격해진 경사인데 기름까지 칠해지니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쉭- 쉭- 쉭-.
잠시 멈췄던 화살이 또다시 쏟아지기 시작했고, 경사면 곳곳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살짝 긴장한 브레드는 미끄러져 나가며 함정을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2단계를 돌파할 듯 보이는 찰나.
또다시 불쑥 치솟은 글자판.
[퐈이어!]
브레드의 앞에 글자가 생기기 무섭게 경사면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는 사방의 기름으로 옮겨붙어 삽시간에 브레드를 잡아먹었다.
"헙!"
가공할 만한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 왔고 식은땀이 줄줄이 흘렀다.
거기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칼날.
정신없는 함정 발동에 브레드의 몸놀림은 더욱 격해졌고 어쩌다가 한두 개의 칼이 그의 몸을 스쳤다.
화르륵-.
슈스스-.
함정은 계속해서 발동했지만, 정작 브레드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없었다.
브레드가 빠르게 경사면을 내려가던 그 순간.
[아직 살아 있지?]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3단계 START!]
[미션: 망할 쌍둥이!]
글자판이 사라지자 벽과 바닥에서 물이 솟구쳤다.
'이건 또 뭐야?'
쏟아진 물에 불길이 사그라지자 브레드는 의아해했다.
'기껏 만들어 놓은 함정을 스스로 없애다니?'
그가 그런 의문을 품은 사이 솟구친 물은 어느새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의문을 뒤로하고 브레드는 달려 나갔다.
'이번에 또 뭐가 나올지는 몰라도… 이곳만 벗어나면 된다!'
양옆이 막힌 경사진 복도만 벗어나면 큰 위험은 없을 거라 여긴 브레드.
그는 더욱더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런 브레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글자판이 또 떠올랐다.
[가랏! 뇌전쌍둥몬!]
글자판이 뜨기 무섭게 브레드는 섬뜩한 소리를 들었다.
파직-.
"서, 설마?!"
귓가에 맴돈 소리에 그가 속성력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사방에서 뇌전이 빗발쳤다.
파지지직-.
"크아아악!"
비록 속성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고는 하나 사방을 가득 채운 뇌전 속에 온전할 수는 없었다.
'여, 여길 벗어나야 해!'
브레드는 이를 악물고 전진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이 밀려드는 상황.
그럼에도 브레드는 악착같이 전진했다.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계단 통로를 벗어난 브레드가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크헙...."
좁은 통로에서 벌어진 전기 지짐에 어지간한 존재라면 일찌감치 전기 통구이가 되었겠지만, 1티어에 오른 브레드는 이마저도 버텨 냈다.
제법 고통스러워하고 여기저기 화상을 입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쿨럭!"
거칠게 숨을 몰아쉰 브레드는 기침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여긴...?'
계단의 끝에 나타난 것은 굉장히 넓은 공터였다.
못해도 수백 평은 되어 보임 직한 공간.
브레드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김없이 글자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