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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론과 염원의 탑은 지금껏 공생해 온 관계이지 않습니까? 만약 염원의 탑에서 저희 왕국의 체면을 생각해 한발 물러나 주신다면, 저희 왕가가 염원의 탑에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 선을 넘게 된다면… 저희 왕가도 더는 중재를 해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는 바로 왕과 귀족들이다.

한데, 아무리 성탑이라고는 하나 아무런 직위도 없는 평민들이 귀족을, 그것도 한 지역의 영주를 잡아들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은 법.

왕가와 귀족들은 이와 같은 일이 '선례'로 남게 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만약 염원의 탑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중재의 형태가 아니라 왕가의 병력이 움직여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을 잡아 죽였을지도 몰랐다.

사실상 왕가가 너희를 보호해 줄 거라는 듯한 말도 결국은 더는 일을 키우지 말라는 경고에 불과했다.

이에 로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과? 중재?"

"그렇습니다."

"우리 탑을 노린 적에게 사과하고 물러나라? 탑의 자존심을 버리고 얻는 게 고작 왕가의 비호?"

로이스의 얼굴에 조소가 스쳤다.

이에 하이델 공작 역시 조소로 마주했다.

"고작 왕가의 비호라… 글쎄요."

"...."

"현재 염원의 탑 사정상 이게 과연 '고작'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리 말한 하이델이 옆을 바라보았다.

"이분은 머나먼 겨울 대륙, 도미넌트 제국에서 오신 다니어스 공작님이십니다."

"오? 도미넌트 제국?"

어떤 놈이기에 자신을 보고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도미넌트 제국 놈이었다니.

세상 참 좁다고 생각하는 로이스였다.

한편, 그런 로이스의 반응을 도미넌트 제국의 위상에 놀란 것이라고 착각한 하이델이 살짝 거만한 투로 말했다.

"이분이 왜 오셨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하, 당연히 모르시겠죠."

하이델이 다니어스를 흘끗거렸지만, 이미 공황 상태에 접어든 다니어스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협상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는 것으로 착각한 하이델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 도미넌트 제국에서 귀 탑에서 판매한 초월기가 이상 반응을 일으키며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두 기체가 아닌 제국에서 보유한 대다수 초월기에서 말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애초에 우리 탑이 만든 초월기에 불량품 따위가 있을 수도 없을 터인데, 그 많은 초월기가 작동하지 않다니!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마이스터 해럴드가 화를 냈지만, 하이델은 오히려 그런 반응을 즐기듯 말했다.

"거짓이라니요. 저희 왕가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보냈지만, 제국의 주장은 틀림없었습니다. 무려 2천 대가 넘는 초월기가 전부 같은 증상으로 고철이 되어 있더군요. 이에 도미넌트 제국은 염원의 탑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아, 참고로 제가 염원의 탑을 찾은 두 번째 이유는… 오늘 이 자리에서 도미넌트 제국이 원하는 피해 보상안에 대해 염원의 탑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이델의 이야기에 로이스가 볼을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음… 이게 이렇게 되네?'

겨울 대륙에서 갈긴 EMP 몇 방이 바다를 넘어 태풍으로 변해 가을 대륙에 상륙한 것이다.

250화. 너, 나 알지? (4)

로이스가 잠잠히 있자, 거들먹거리는 하이델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겨울 대륙에서 고장 난 초월기 한 대를 회수해 왔으니 얼마든지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한데, 원인 파악이 쉽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 궁정 성탑 소속 기술 법사들도 염원의 탑 출신이라 실력 좋은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더군요."

"흥! 고작 그딴 놈들이랑 우리를 비교...."

"조용."

"...."

발작하려는 해럴드를 침묵시킨 로이스가 하이델을 보며 물었다.

"뭐, 좋아. 근데 고장이 났다고 쳐도 문제가 생겼으면 우리한테 와서 알려야지 그걸 왜 멜데니크 왕가에 가서 알렸대? 그리고 멜데니크 왕가는 왜 지금까지 그걸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고?"

그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하이델이 웃으며 답했다.

"무려 2천 대의 초월기가 이상 현상을 보이며 작동하지 않아 제국에서 인적은 물론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

"워낙 피해 보상금으로 예상되는 액수가 크다 보니 제국 측에서 자문을 요청했고, 저희 왕가는 이를 위해 조사를 하느라 전달이 조금 늦어졌을 뿐입니다. 정확한 피해 보상금을 정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가 필요한 법이지 않겠습니까?"

하이델이 그리 말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 말을 믿는 염원의 탑 사람들은 없었다.

도미넌트 제국 정도라면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염원의 탑에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국이 멜데니크 왕가에 먼저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로이스는 대략이나마 저들의 거래가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세금이겠네.'

현재 도미넌트 제국에게 시급한 것은 골드도 골드지만 당장의 국방력을 유지하기 위한 초월기였다.

때문에 도미넌트 제국은 골드와 함께 즉시 운용 가능한 초월기를 보상으로 요구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수의 초월기를 말이다.

하지만 자국 내에서 수입, 수출, 유통되는 모든 물자에 세금을 부과하는 멜데니크 왕국에서 이 좋은 기회를 지켜만 보겠는가.

아마 엄청난 세금이 부과될 것이다.

'개도 제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바다 저편에 있는 도미넌트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겠지.'

반대로 도미넌트 제국은 초월기를 받기 위해 어떻게든 멜데니크 왕국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멜데니크 왕국이 작정하고 막으면 초월기는 바다를 넘어오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보자… 그럼 도미넌트 제국은 뭘 줬을까?'

만약 도미넌트 제국이 세금 감면을 약속받았다면 그 대가로 멜데니크 왕가는 무얼 얻었을지.

로이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어진 하이델의 이야기에서 로이스의 궁금증이 단번에 풀렸다.

"아마 이번 피해 보상금은 염원의 탑에도 꽤 부담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 '고작'인 왕가의 비호가 함께한다면 제법 괜찮은 절충안이 나올 듯싶습니다만?"

로이스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던 하이델 공작.

그가 쥔 무기가 바로 이것임을.

하이델 공작의 말 한마디에 보상 금액이 크게 달라질 것임을 말이다.

'협상권을 줬다라.'

도미넌트 제국을 대신해 협상권을 쥔 멜데니크 왕국.

어쩌면 그들은 이 짜고 치는 판을 통해 염원의 탑에 목줄을 채우려 할지 몰랐다.

아니, 로이스의 직감상 분명 그럴 것이 확실했다.

가장 부유한 성탑의 목줄을 쥔 주인.

그것만큼 매력적인 게 또 어디 있을까?

"탑주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하이델 공작은 소파의 등에 기대었다.

마치 내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 로이스를 바라보며.

이에 로이스도 웃었다.

매우 살벌하게 말이다.

"…재밌네."

참으로 재밌었다.

자신이 '갑'이라고 생각하는 저 얼굴이 이제 어찌 바뀔지.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식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아, 일단 그 전에 말야."

로이스의 시선이 하이델 공작의 옆, 여전히 얼어붙은 다니어스 공작에게 닿았다.

자신에게 향한 싸늘한 눈초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다니어스.

그의 귓속으로 로이스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대답 안 하냐?"

"…예?"

"내가 아까 물어봤잖아."

"예?"

"너, 나 알지?"

"...?!"

"주둥이가 막혔어? 내가 시원하게 뚫어 줄까?"

그 살벌한 협박에 다니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 물론입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다니어스 공작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모른다고 하는 순간 자신의 얼굴에 입이 하나 더 생길지 몰랐다.

물론 그게 얼굴에 생긴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교주라면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에 입을 만들어 줄지도 모르는 작자였다.

'저 괴물 같은 작자가 여긴 어떻게?!'

아직도 그날의 광경이 잊히지 않았다.

태양조차 갈라 버리던 전신교 교주의 신위.

그리고 제국의 목에 채워진 천문학적 금액의 빚, 그 목줄의 주인.

재상인 다니어스 공작에게 로이스는 사신보다도 더 두려운 이였다.

그런데 하필, 염원의 탑주를 만나러 온 자리에 전신교의 교주가 왜 튀어나오냔 말이다.

심지어 그 교주가 탑주란다.

'끝났다… 다 끝났어.'

차마 교주와 협상을 할 용기가 다니어스에게는 없었다.

아니, 제국의 그 누구를 데려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편, 다니어스의 그 같은 반응에 좌중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염원의 탑의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당혹스러워하는 이는 역시나 하이델 공작이었다.

"지금 무슨...?!"

당황으로 가득한 하이델 공작의 물음에 다니어스 공작은 눈으로 심한 욕을 날렸다.

'닥쳐! 조용히 해!'

이를 느낀 하이델 공작이 황당함에 입을 다물자 로이스가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 이름이 뭐라고?"

"다, 다니어스입니다!"

"아, 그래 다니어스. 황제는 잘 지내냐?"

황제? 내가 알고 있는 그 황제?

…라는 생각이 좌중의 얼굴에서 읽혔다.

거대 제국의 주인을 마치 동네 옆집 총각 부르듯이 대하는 로이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다니어스의 반응이었다.

"무, 물론입니다! 잘 계십니다!"

로이스의 태도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다니어스 공작의 반응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럼, 잘 있어야 할 거야. 황제와 그 자식새끼들에게 터럭만큼의 문제라도 생기면… 그 뒷감당은 너희가 해야 할 테니까."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의 건강은 저희가 늘 최우선으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아,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초월기 문제로 가을 대륙까지 왔다고?"

"그렇습니다!"

"그 문제는 내가 우리 애들 몇몇 파견해 주마. 멜데니크 왕가의 돌팔이들과는 다르게 우리 애들이 고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너희가 본 손해는… 한 달 치 이자 까 주는 거로 협의 보자. 이의 있냐?"

물론 이의 따위가 있을 리가 있겠는가.

당장 빈손으로 돌아가도 모두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위로해 줄 판이었다.

그런데 무려 한 달 치 이자 탕감이란다.

제국의 빚이 어디 한두 푼이던가.

그 한 달 이자를 안 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제국으로서는 충분한 이득이었다.

다니어스로서는 이의의 '이' 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로이스의 마음이 변하랴 잽싸게 고개를 끄덕일 뿐.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없고말고요!"

"단."

"예?"

"일주일 준다. 일주일 뒤에도 네 발이 가을 대륙에 붙어 있다면 오늘 한 얘기는 없던 게 될 거야."

"컥?!"

"뭐 해?"

"예, 예?"

"안 가? 지금 네가 여기 한가롭게 앉아 있을 시간 있어?"

지금 당장 짐을 꾸려서 떠난다고 해도 배편을 구해 겨울 대륙으로 떠나기엔 상당히 촉박한 시간이었다.

이를 깨달은 다니어스가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잘 가라. 배웅은 안 한다."

로이스가 멀어져 가는 다니어스의 등 뒤에 대고 손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그사이 로이스가 시선을 틀어 하이델을 바라보았다.

"네가 찾아온 두 번째 이유가 무슨 피해 보상안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왔다고 했나?"

"...."

"그런데 이걸 어쩌나?"

"...."

"이야기 들을 사람이 방금 가 버렸네?"

로이스의 이죽거림에 하이델 공작이 정신을 차렸다.

"이, 이 무슨?!"

"그럼 이제 첫 번째 이유를 다시 이야기해 볼까? 뭐라고 했더라? 왕가에서 중재할 테니 사과를 하라고?"

"...."

"사과?"

로이스의 미소가 서늘하게 변했다.

"지금 숨어 있는 후작가 놈들 모가지를 선물로 가지고 와도 모자랄 판에… 우리 보고 사과를 해라?"

"타, 탑주님, 진정하시고...."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는 하이델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라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를 무시한 채, 로이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아까 또 뭐랬더라? 사이론과 우리가 공생하는 관계라고?"

"...."

"개소리도 그 정도면 아주 창의성 있네. 공생? 웃기지 마. 지도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시골 촌구석을 지금의 사이론으로 만든 건 우리 염원의 탑이다. 이게 어딜 봐서 공생이냐? 사이론이 우리 염원의 탑에 기생하고 있던 거지. 안 그러냐?"

로이스의 물음에 염원의 탑 일동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더글라스와 에리카의 반응이 격정적이었다.

"아무렴요!"

"허허, 그렇고말굽쇼! 길바닥에 소똥 굴러다니던 사이론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우리 덕입니다! 지금까지 사이론 영주가 뭘 했습니까? 우리가 만들어 준 부로 제 배나 채웠지!"

지금 당장 밖에 나가 사이론 영지민을 붙잡고 현재의 성세를 만들어 낸 게 어디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염원의 탑이라 답할 것이다.

더글라스와 에리카, 플로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사의 산증인들이 하는 말에 하이델은 식은땀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하이델의 상체가 앞으로 살짝 튀어나왔다.

그에게서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거만함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다.

지금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운 것은 당황과 황당함, 그리고 현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하이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물론 현재의 사이론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도움이 컸다는 것은 저 역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염원의 탑의 모든 기반이 자리한 곳이 사이론이며 멜데니크 왕국이란 것을 잊지 말아 주십쇼."

"그래서?"

"이 왕국에서 괜히 귀족들과… 왕가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너, 지금 우리 협박하냐?"

"협박이라니요. 저는 그저 염원의 탑의 앞날이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사과 안 하면 못살게 굴려고?"

"...."

하이델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이 로이스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또한, 하이델은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무언의 압박을 넣는 중이었다.

그의 그런 행동은 한 가지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염원의 탑이 수백 년간 쌓아 올린 기반이 멜데니크 왕국에 있는 이상 아무리 염원의 탑이어도 괜히 왕국 전체와 척을 지진 않을 거란 생각.

하지만 그것은 로이스를 몰라도 너무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하이델을 보며 로이스가 툭- 하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랄하고 있네."

"탑주… 말이 심하십니다."

하이델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다음 이어진 로이스의 말에 다급히 변했다.

"얘들아, 짐 싸라. 우리 이사 가야겠다."

"네? 이사요?"

에리카가 그리 되묻자 로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나랏놈들이 대놓고 장사 못 하게 방해하겠다는데 기분 더러워서 여기서 장사하겠냐? 나가라고 등 떠미는데 나가 줘야지."

로이스의 말에 에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요?"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거 같냐?"

"그건 아니지만… 여기에 초월기 생산 시설이 있는데요? 그거 다시 깔려면 돈 많이 들 텐데...."

"그걸 왜 우리가 걱정해?"

"그럼요?"

"당장 가을 대륙… 아니, 전 세계에 연락 돌려. 우리 염원의 탑이 이사 간다고. 이사비 가장 빵빵하게 지원해 준다고 약속하는 곳에 정착할 거라고."

"아...!"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한 5, 6년 초월기 못 만든다고 우리가 망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이참에 이사 가서 더 큰 시설로 만들자고."

"와! 그거 좋네요!"

로이스와 에리카의 대화에 하이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안 돼!'

아무래도 탑주는 진심인 듯싶었다.

또한, 이게 얼마나 멜데니크 왕국에 있어 큰 손해인지 곧바로 체감됐다.

현시대, 국력을 좌지우지하는 초월기.

그리고 어디보다 고품질의 초월기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염원의 탑.

멜데니크 왕국이 지금의 성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염원의 탑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번에 도미넌트 제국에게서 협상권을 얻어 낸 것도 바로 염원의 탑을 영원히 왕국에 묶어 두고 제어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한데, 만약 그런 염원의 탑이 이사를 간다는 소문이 돈다?

그렇다면 골드를 싸 들고 제발 와 달라며 매달릴 나라가 한둘이 아닐 터.

하이델 공작의 얼굴에서 시시각각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런 그를 보며 로이스가 조소를 보냈다.

"욕심에 눈이 먼 머저리가 황금 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법이지."

그 말을 내뱉은 로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글라스, 손님 나가면 방에 소금 뿌려라."

"소금은 왜 뿌립니까?"

"원래 부정한 것들 왔다 가면 소금 뿌려서 씻어 내는 거야. 부정 타지 말라고."

"아, 그렇습니까? 제가 아주 구석구석 뿌려 놓겠습니다! 크헐헐!"

유쾌한 더글라스의 웃음을 뒤로하고 로이스가 방문으로 향했다.

"타, 탑주님! 탑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하이델이 파리한 얼굴로 다급히 일어나 손을 뻗어 보았지만, 로이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을 빠져나갔다.

"타, 탑주니이임!"

하이델의 절규 속에 더글라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럴드야."

"예, 스승님."

"가서 소금 가져와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크헐헐!"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해럴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251화. 오빠? (1)

자신만만하게 염원의 탑을 찾아갔던 하이델 공작.

하지만 들어갈 때와는 달리 그는 염원의 탑 제자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나와야 했다.

"탑주님! 탑주님과 다시 이야기하게 해주십쇼!"

그의 곁에는 왕실에서 파견된 호위 무사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접객실에서 벌어진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호위해야 하는 이가 질질 끌려감에도 염원의 탑을 더 자극할 수 없었기에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쿵-.

탑 밖으로 밀려난 하이델 공작은 굳게 닫혀 버린 문을 보며 허망한 눈빛을 해 보였다.

재상이자 공작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푸대접이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최악의 상황이었다.

염원의 탑을 옭아매기 위해 준비했던 패는 무용지물이 됐고 오히려 그들을 자극해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염원의 탑을 저들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다.

다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하이델 공작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

끼익-.

정문이 살짝 열렸다.

이에 하이델 공작의 안색이 환해졌다.

어쩌면 탑주가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 너머에 등장한 것은 마이스터 델피나였다.

그녀는 마치 구세주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는 하이델 공작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탑주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호, 혹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탑주님의 전언이니 혹여라도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아, 아무렴요! 탑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험흠."

하이델 공작의 기대 어린 눈빛에 델피나가 옅게 헛기침을 했다.

곧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굵직한 목소리.

"이 시간 이후로 다시는 보지 말자. 앞으로 할 말 있으면 너희 같은 놈 보내지 말고 국왕보고 직접 오라고 해. 와서 정중하게 사. 죄. 하라고. 그럼 이야기 정도는 나눠 줄 테니까."

"...?!"

하이델 공작의 입이 떡 벌어졌고, 왕실 호위 무사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그런 반응 따위는 무섭지도 않다는 듯 델피나는 할 말만 쏙 하고 탑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밖으로 쫓겨난 이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고.

"…이제 어쩌실 작정입니까."

호위 무사의 물음에 하이델은 맥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돌아가세."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이델과 왕실 호위 무사들이 발걸음을 돌렸다.

한편,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로이스와 염원의 탑 일동.

플로리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탑을 옮기실 생각이십니까?"

"반반."

"네?"

"마음 같아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 버리고 싶지만, 다른 곳에 정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깝잖아."

"…그렇기는 하죠."

"그리고 덱스터 할배 때부터 살아온 고향을 떠난다는 것도 찝찝하고. 그래서 반반이야. 떠날 생각 반, 남을 생각 반."

"아...."

그 말은 다시 말해 여차해서는 정말로 이사를 가 버리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멀어져 가는 하이델 일당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로이스가 몸을 틀었다.

그는 그랜드 마이스터와 마이스터들을 보며 말했다.

"잘 들어. 우리가 쌓아 올린 지식과 기술이 있는 한 이깟 기반 따위는 얼마든지 포기하고 새로 쌓을 수 있다."

"...."

"하지만 염원의 탑이란 이름이 가진 가치가 무너지면 다시 쌓을 수 없어. 귀족들이 왜 그렇게 명예에 집착할까. 한번 떨어진 명예는 쉽게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염원의 탑은 최강의 탑이 될 거다. 만약 이를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난 그게 무엇이 되었든 치워 버릴 거고.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마이스터들이 로이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더글라스.

"허허, 탑주님이 이끄시는 염원의 탑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래도 탑주님이 오셔 아무런 걱정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더글라스.

아련한 그의 음성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뭐래? 누구 마음대로 죽어?"

"…예?"

"받아."

그리 되묻는 더글라스의 앞으로 병 하나가 날아왔다.

턱-.

자연스럽게 더글라스의 손에 안착한 검붉은 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

"이게 뭡니까?"

"엘릭서."

"오! 이게 엘릭서군요! 허허, 살면서 엘릭서를 보게 될… 잠깐… 에, 에, 엘릭서?!"

손에 든 병을 놓칠 뻔할 정도로 놀란 더글라스.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에, 엘릭서?!"

"그게 실존하는 거였어?!"

세상에는 갖가지 약이 존재하지만, 그중 최고로 치는 영약이 바로 엘릭서였다.

복용자를 불로불사로 만들어 준다는 전설 속의 영약.

실존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약이었지만, 그런 엘릭서는 어느 드래곤의 레어에 가더라도 수십, 수백 개씩 쌓여 있는 처치 곤란한 재고 품목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릭서의 주재료가 바로 드래곤의 혈액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입장에서는 피 좀 뽑아다가 만들면 되는 일이니, 드래곤들 사이에서 '소싯적 엘릭서 안 만들어 본 드래곤은 드래곤도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

물론 드래곤의 피 자체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구할 수 없는 물질이니 인간계에서 엘릭서가 전설의 명약 취급받는 것은 당연했다.

꿀꺽-.

달달달- 떨며 침을 삼키는 더글라스를 보고 로이스가 미소를 보냈다.

"그거 막 전설처럼 대단한 건 아냐."

"…그럼요?"

"에이, 불로불사하게 해 주는 영약이 어딨냐? 그냥 노화 속도를 늦춰 주고 수명을 늘려주는 효능이 과장되게 퍼진 거야. 그거 한 병이면 고작 100년 정도 더 살걸? 약빨 잘 받으면 150년도 가능하고."

좌중의 시선에 어이없음이 번져 나갔다.

노화 속도 저하, 수명 연장.

부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효능이 아니던가.

좌중의 시선이 더글라스의 손에 들린 엘릭서에 꽂혀 들었다.

그때 로이스가 말했다.

"뭐 해?"

"예?"

"안 마시냐?"

"허허, 이… 귀, 귀한 걸 제가 어찌 마시겠습니까."

"괜찮아. 나 그거 많아."

"그, 그래도...."

"더글라스."

"예...."

"잔머리 굴리지 마라."

더글라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곧 이어지는 로이스의 스산한 목소리.

"마이스터 중에 불량한 놈들 쳐내서 가뜩이나 인력 딸리는 마당에… 누구 마음대로 죽어서 쉬겠다는 거야?"

그만 일하고 싶다던 황희 정승의 사직을 세종대왕께서 연달아 퇴짜를 놓으면서 끝까지 부려 먹었다지?

로이스도 더글라스를 쉬이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네가 일 안 하면 누가 해? 내가 하리?"

"...."

"나 엘릭서 많다. 건강 안 좋아지면 말해. 몇 병 더 챙겨 줄게."

그제야 더글라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건 엘릭서가 아니었다.

이건....

'도, 독약이다!'

먹는 순간 쉼 없이 일만 해야 하는 무한 굴레에 빠져 버리는 무시무시한 독.

더글라스가 주춤주춤 로이스에게서 멀어졌다.

그 순간, 그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으니.

"어디 가?"

"새, 새대가리?"

에리카가 음흉한 눈빛으로 더글라스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뭐 하세요? 안 드시고."

플로리아가 기쁜 얼굴로 직접 엘릭서의 병뚜껑을 따서 더글라스의 입에 가져다 댔다.

"우읍! 놔! 놔라! 놓으란 말이다!"

"어허, 가만히 있어. 이 귀한 엘릭서를 흘릴 수는 없잖아?"

"아~ 하세요. 아~."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는 셋을 뒤로하고 로이스는 마이스터들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너희가 해 줄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사이론에 소문을 퍼뜨려."

"어떤 소문 말입니까."

"오늘 있었던 일."

"예? 그건 왜...?"

"왜긴, 성난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해 주려는 거지."

그리 말하는 로이스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 * *

그날 오후.

안 그래도 어수선한 분위기의 사이론에 한 가지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염원의 탑이 사이론을 떠난다고 한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소문은 영지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영지민들이 둘 이상 모이면 어김없이 염원의 탑 이주 소식이 흘러나왔다.

"에이, 정말로 염원의 탑이 떠나는 거는 아니겠지?"

"글쎄… 어쩌면 정말인지도 모르네. 이번에 보니 탑주님 성격이 불같더만."

"염원의 탑이 사이론에 뿌리내린 지 벌써 수백 년일세. 그 기반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얘기 못 들었나? 아까 낮에 왕국에서 사람이 나와서 염원의 탑을 협박했다지 않나?"

"협박? 무슨 협박?"

"당장 사이론 영주랑 그 아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장사 못 하게 한다고 말일세. 나 같아도 더러워서 다른 곳으로 가겠네. 쯧쯧."

"뭣이? 그게 참말인가?"

"알지? 내 동생의 친구 놈의 조카가 염원의 탑 도제인 거. 그 녀석 말로는 참말이라더구만."

"허, 이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왜 가만있는 염원의 탑을 그리도 못살게 구는지...."

"내 말이 그 말일세, 사이론 영주 놈이나 다른 귀족 놈들이나. 막말로 제 놈들이 우리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한데, 염원의 탑을 봐 봐! 아닌 말로 이 사이론이 누구 때문에 먹고사는데!"

"그렇지!"

사이론의 영지민들은 염원의 탑에서 들려온 이주 소식에 불안에 떨었다.

사이론이 초월기의 성지라 불리지만 이는 다시 말해 초월기가 빠지면 아무것도 없는 도시라는 뜻이었다.

만약 염원의 탑이 빠져나가고 그들을 따라 다른 공방들마저 이주한다?

당장 염원의 탑과 공방을 찾는 영지의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 먹고 사는 영지민들의 수입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거기다 공방의 관계자들마저 다 떠나면 인구는 터무니없이 줄어들 것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 염원의 탑의 이주는 사이론 영지민들에게 생계와 직결된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영지민들의 불안을 기폭시키는 일이 벌어졌으니.

"그,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옆집 총각이 염원의 탑 도제인데 이번에 짐을 바리바리 싸더라니까? 내 물어보니까 탑주님 명령으로 이사 갈 준비 미리미리 해 두는 거라고 했어! 들어 보니 다른 집에 사는 그 도제도 똑같이 짐을 쌌다더구만!"

"나도 들었네, 거기다 그 뭐시냐… 저기 콘네라 왕국인가 하는 곳에서 염원의 탑에 자기네 나라로 제발 와 달라고 그렇게 사정을 하고 돌아갔다고!"

"사이론을 떠난다는 게 진짜였나 보네."

사이론에 염원의 탑 관계자들이 많은 만큼 그들이 보이는 행동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이에 더는 안 되겠다고 여긴 영지민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러다 정말 염원의 탑이 나가면 우리는 다 죽는 겁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요!"

"뭘 어떻게 막는답니까?"

"사이론 영주 일가 놈들이 어딘가 숨어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잡아다 주는 거는 어떻겠습니까?"

"그, 그래도 되는 거요? 그래도 영주인데...."

"영주는 튀겨 죽일, 무슨 놈의 영주! 이 사달이 난 게 다 그놈들 때문인데!"

"옳소! 그 새끼들 잡아다 주면 탑주님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 주시지 않겠소?"

"퉷, 귀족들 때문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실제로 영주 일가를 찾기 위해 영지를 뒤지고 다니는 이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나날이 영주와 왕국을 향한 불만이 사이론에서 커져 나갔다.

그리고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하이델 공작의 얼굴은 점점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이대론 안 된다....'

민심이 결국 왕국과 왕가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지금은 비록 사이론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이 불신이 인근 영지로까지 퍼져 나가지 말란 보장은 없었다.

또한, 민심도 민심이지만 더 큰 문제는 염원의 탑에 들락거리는 다른 국가의 사절들이었다.

지금까지 공작이 확인한 국가만 해도 네 곳.

시간이 지나면 더욱더 늘어날 것은 자명했다.

만약 정말로 염원의 탑이 다른 국가로 이주한다면 멜데니크 왕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결단이 필요했다.

"당장 비공정을 준비하게… 왕궁으로 가서 전하를 뵈어야겠네."

그렇게 그날, 하이델 공작과 왕실 호위 무사들이 사이론을 떠났고, 며칠이 흐르지 않아 되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많은 호위 무사들을 대동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백마에 올라탄 젊은 사내가 있었으니.

긴 행렬이 염원의 탑 정문에 도착하자 하이델 공작이 소리쳤다.

"가서 탑주께 전해라. 멜데니크 왕국 제1왕위 계승자, 라크로니아 멜데니크 저하께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오셨다고."

무려 왕자의 행차에 놀란 경비가 쪼르르 탑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밖으로 나온 이는 더글라스였다.

불과 며칠 사이 놀랍도록 생기가 충만해진 그가 말했다.

"탑주님께서 그쪽과는 할 말 없다고 전하랍니다."

"...."

무려 왕자가 왔음에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할 줄은 몰랐기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이를 아득 깨문 왕자가 나서서 말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우리 왕가는 큰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바,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염원의 탑이 원하는 모든 요구 조건을 수용할 생각이네. 국왕 전하께서 내게 전권을 위임하셨으니… 탑주와의 자리를 만들어 주게."

굴욕적이다 싶을 정도인 멜데니크 왕가의 선언.

이를 창가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로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승자의 미소가 말이다.

"들어오라고 해."

그 한마디에 굳게 닫혀 있던 염원의 탑 정문이 열렸다.

마침내 염원의 탑으로 들어섰던 멜데니크 왕국의 행렬.

그들은 1시간이 지나 다시금 탑을 빠져나왔다.

하나같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이다.

그리고 이날을 라크로니아 왕자는 자신의 생에 있어 가장 굴욕적이었던 하루라고 기억하게 되었다.

분노 가득한 멜데니크 왕가의 인물들은 입술을 깨물며 사이론을 떠나갔고....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252화. 오빠? (2)

너른 회의장.

"흠...."

낮게 깔린 신음과도 같은 소리에 마이스터들이 움찔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회의장의 상석에 앉은 로이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로이스의 손에 들린 작은 수첩에서 말이다.

저 작은 수첩에 적힌 내용으로 인해 지난 시간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또한 자신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사락- 사락-.

조용히 넘어가는 종이의 소리가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니.

마이스터들은 치를 떨었다.

그렇게 두려운 시간이 흐르고.

"뭐, 이 정도면 거의 다 처리했네."

"휴우...."

로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좋아,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

마이스터들의 눈빛이 다시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두 달 전, 갑자기 나타난 탑주로 인해 탑의 썩은 부분이 도려져 나갔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부분이 비어 버리게 되었고 로이스는 이 부분을 싹 뜯어고쳤다.

그로 인해 기존의 편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총 7개의 부서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신제품 연구부.

품질 관리부.

기술 관리부.

생산 관리부.

영업 관리부.

재정 관리부.

보안 관리부.

앞으로 염원의 탑을 최강으로 만들어 갈 핵심 부서들.

그 수장으로 피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마이스터들이 낙점됐다.

그리고 월말마다 이렇게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탑주에게 보고하는 자리가 마련됐으니.

'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길....'

'제발...!'

탑의 번영과 안녕을 위하는 자리였지만, 돌아오는 월말은 마이스터들에게 공포나 다름없었다.

지난 월말 회의에서 안드레스가 잘못된 보고로 쌍코피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고 시작해."

지엄한 로이스의 명령에 월말 상황 보고가 시작됐다.

그 첫 번째는 로이스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부서, 재정 관리부의 부서장을 맡은 로나였다.

"그럼… 재정 관리부의 월말 결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해봐."

"우선, 앞서 진행했던 사이론 후작 일가의 재산 처리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총자산은...."

로나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매우 놀라웠다.

사이론 후작가의 자산을 모두 처분하고 염원의 탑으로 귀속시켰다는 이야기.

다른 이들이 들었으면 경악했을 법한 일이었지만, 이는 멜데니크 왕가에게 로이스가 요구한 조건 중 일부에 불과했다.

사이론 후작가의 재산 몰수.

후작 일가족의 생사여탈권.

이는 로이스의 관점에서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로이스가 멜데니크 왕가에 요구한 것이 이것뿐일 리 있겠는가.

로나의 보고를 듣던 로이스가 불쑥 물었다.

"잘하고 있네. 영지민들의 반응은 어떻지? 영지의 주인이 바뀐 상황에 대한 불만은?"

그 물음에 로나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세상 더할 나위 없이 좋아들 하고 있습니다. 불만 따위가 있을 리 없지요."

로이스가 왕가에 바란 또 한 가지.

그건 바로 사이론 영지에 대한 처분이었다.

기존의 영주였던 사이론 후작 일가가 몰락하면서 사이론 영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중앙 귀족이 내려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로이스는 사이론 영지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멜데니크의 왕자도 이를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군소리 없이 사이론을 염원의 탑에 넘겼다.

대대로 사이론을 다스려 온 후작가로서는 터무니없는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염원의 탑은 일개 성탑에서 영지를 지닌 거대한 집단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염원의 탑주는 사이론 영지를 책임지는 후작의 작위까지 약속받았다.

그것도 단승 귀족이 아닌 작위 계승권을 가진 세습 귀족으로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해 누구든 염원의 탑주가 된다면 후작이 될 수 있다는 소리.

그 같은 소식이 사이론 전역으로 퍼져 나가자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염원의 탑주님이 이제부터 우리 영주님이시란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염원의 탑이 사이론에 남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크게 안도했다.

곧이어 염원의 탑주가 3년 동안 세금을 절반만 받겠다고 선언하였기에 염원의 탑주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려 3년간의 세금 감면 혜택.

사이론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의 양이 절반이나 줄어드는 일을 로이스가 어찌 허락했나 싶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 단적인 예는 곧 이어진 로이스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때, 더글라스? 신제품은 잘 만들어지고 있냐? 잘 알지? 30년이다. 세금 면제가 있는 30년 동안 최대한 뽕을 뽑아야 해."

영지민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소리.

그랬다.

사이론 영지와 작위를 얻어 냈지만, 로이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멜데니크 왕국에 세금 면제를 요구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50년간 말이다.

멜데니크의 왕자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는 것도 당연지사.

한참이나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안 들어줄 거면 때려치우라는 로이스의 배짱에 결국 왕자는 세금 면제 혜택을 30년으로 줄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양 어금니가 나갈 절도로 이를 박박 갈며 말이다.

무려 30년의 세금 면제.

그로 인해 없어서 못 판다는 초월기를 생산해서 내는 수익 전부가 염원의 탑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액수가 어느 정도일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저 천문학적인 액수일 것이라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

3년간 영지 세금의 절반만 받겠다?

그건 새롭게 부임한 영주로서 로이스가 대충 민심 좀 얻겠다고 생색을 낸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세금이 줄어들며 수익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에 최근부터 로이스는 신제품 연구부를 닦달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30년간 바짝 돈을 벌어 보겠다고 말이다.

그런 로이스의 등쌀에 더글라스와 해럴드는 밤낮으로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만큼 결과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더글라스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그… 아까 드린 초안 보셨습니까?"

"봤지."

"어떠셨습니까?"

"쓰레기던데?"

"어… 음… 아, 네...."

더글라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늘 이런 식이었다.

고심하여 신제품 초안을 만들어 제출하면 로이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이딴 쓰레기를 돈 받고 팔라고? 너 같으면 사겠냐!'

…였다.

그렇게 퇴짜를 맞은 신제품만 해도 벌써 십수 가지.

'끄응… 이것도 아니면 앞으로 뭘 만들어 와야 하나.'

영감이 무한대로 샘솟으면 좋으련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하늘처럼 높은 로이스의 눈을 만족시키는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전전긍긍하는 더글라스와 해럴드를 보고 로이스가 혀를 찼다.

"대체 뭘 고민해? 그렇게 내놓을 물건이 없어?"

슬쩍 눈치를 보던 해럴드가 은근슬쩍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저… 그런데 굳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생산해 내놓고 있는 초월기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물론 돌아오는 답변은 핀잔이었다.

"쯧, 멍청하긴. 우리 탑의 초월기가 다른 곳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성능인 건 분명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언제까지 그게 유지될 거라고 보냐?"

"...."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길을 따라오는 놈들은 그보다 더 쉽게 우리 위치까지 도달할 거다."

"...."

"후발 주자들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기술력을 늘려 나가고 새로운 제품으로 세상의 유행을 선도해야 하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그래서 뭔가 혁신적인 물건 없냐고? 2급 초월기에 집게 팔을 달아 놓은 쓰레기 말고!"

"크흠!"

초월기에 집게 팔을 달았던 해럴드가 얼굴이 붉어져 헛기침을 흘렸다.

"에라이, 쯧."

결국, 아무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던 로이스.

"어?"

그의 뇌리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맞아! 그럼 되겠네! 왜 진즉 이걸 생각 못 했지?"

"네? 뭘 말입니까?"

"1급 초월기를 만들어 팔면 되잖아?"

"...."

로이스의 해맑은 이야기에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더글라스가 입을 열었다.

"저… 탑주님."

"왜."

"그게… 1급 초월기는 없습니다."

"뭔 소리야?"

"기술적인 한계로 1급 초월기는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러면 급수를 나눌 때 왜 1급을 남겨 둔 건데?"

"그야 언젠가는 1급 초월기를 만들지도 모르니 따로 남겨 둔 것이죠. 하지만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제작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어떻게 불가능한 건지."

"음… 예전에 1급 초월기라 부를 만한 시제품을 만들어 낸 적이 있었습니다. 저와 플로리아, 에리카… 그리고 빅터가 힘을 모아 만들어 냈죠. 사실상 그 초월기에 저희 넷의 일생의 연구가 녹아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단 들어가는 재료가 어지간한 2급 초월기 수십 대를 만들 분량입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만들어 내기는 했는데 문제는… 초월기의 본체만 만들어 낸 것이지 실제로 작동은 시키지 못했습니다."

"왜?"

"동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습니다. 저희 계산으로는 이론상의 1급 초월기를 구동시키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없었기에… 1급 초월기 생산은 잠정 중단됐습니다."

"동력? 필요 동력이 대충 얼마인데."

"이론상으로 2급 초월기 30대를 동시에 작동시킬 정도의 동력장치가 필요합니다."

더글라스의 이야기에 마이스터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들 역시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1급 초월기 제작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2급 초월기 30대를 동시에 작동시킬 만한 동력장치라니.

어째서 더글라스가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1급 초월기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설득의 대상인 로이스의 반응은 달랐다.

"고작? 난 또 뭐라고."

"고작이 아니라 그 정도의 동력장치를 만들어 낼 기술이… 어?"

상황을 설명하던 더글라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얼굴.

그 결과 더글라스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 그렇지요! 탑주님이 계셨지요!"

초월기를 움직일 동력장치의 기술적 한계로 1급 초월기 제작은 무산됐다.

하지만 그건 로이스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현대 초월기 동력장치의 모태를 창시해 낸 존재.

그가 눈앞에 떡하니 있지 않은가.

그런 더글라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로이스가 웃으며 아공간을 뒤적거렸다.

"보자… 어디 있더라."

잠시 뒤, 그의 품에서 나온 널찍한 종이.

"받아."

"이, 이건."

"설계 도면 처음 봐?"

"...."

꿀꺽-.

더글라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활짝 도면을 펼치니 그 안에 복잡한 모양의 그림이 드러났다.

지금 회의장에 자리한 이들이 기술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 한가락 한다는 이들이었지만, 그런 그들도 도면의 세세함과 정교함, 그리고 난해함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나마 더글라스 정도는 되어야 알아볼 눈이 있을 뿐.

물론 그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한참이나 도면을 살피던 더글라스가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거… 기, 기존 2급 초월기의 출력의 30배가 넘을 거 같습니다만?"

"그래도 제법 보는 눈이 생겼네? 내 계산으로는 아마 2급 초월기보다 32배 정도 더 높을걸?"

"32배?!"

"뭘 놀라? 그거 폐기 처분 한 구형 동력장치인데."

"이, 이게 말입니까?"

"어, 한 50년 전쯤에 만든 물건이었을걸?"

더글라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하나같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향해 로이스가 물었다.

"그거면 1급 초월기 만들 수 있지?"

"추, 충분합니다! 아니, 차고 넘칩니다!"

"알아 차고 넘치는 거. 그러니까 성능 줄여서 만들어."

"예?"

자꾸만 되돌아오는 물음에 로이스가 살짝 짜증을 냈다.

"한철 장사하고 말래? 처음에는 성능 줄여서 2급 초월기 2배 기준으로 1급 초월기를 출시해. 그 뒤로 차차 성능 올리면서 가격도 같이 올려서 팔고. 대충 그렇게 30년 우려먹다가 마지막에 진짜 1급 초월기 출시해."

장사 수단도 수단이기는 했지만, 이론상 1급 초월기는 2급 초월기 수십 대에 준하는 초월기였고, 조종사만 잘 만난다면 탑티어급 실력자와 동수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기체를 대책 없이 막 생산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뭐, 1급 초월기를 찍어 내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현재 탑의 기술력으로는 완전한 1급 초월기를 만드는 데 10년에 한 대가 최대일지 몰랐다.

아직 1급 초월기 양산은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성능 낮추는 것도 내가 알려 줘야 하냐?"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1급 초월기 형태 나오면 나한테 알리고… 에리카."

"네!"

"넌 여기저기 소식 돌려, 우리 염원의 탑에서 1급 초월기 제작에 들어갔다고."

"알겠습니다!"

아마 이 소식이 전해지면 가을 대륙이… 아니, 전 세계가 들썩일 것이다.

영업 관리부를 맡은 에리카와 파울라.

둘이 신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그 뒤로도 회의실에서 보고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탑의 배신자와 후작 가문의 사람들이 강제 노역 현장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마지막으로 보고는 끝이 났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는가 싶었던 그때.

로이스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지?"

"네?"

"초월학관 개학."

"아! 네! 저… 그런데 말이에요, 탑주님."

에리카가 살짝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왜."

"정말 학관에 마이스터를 안 보내셔도 괜찮을까요?"

이번에 염원의 탑이 대격변을 맞이하면서 초월학관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그와 함께 여러 문제점도 발생했는데, 그중 하나가 안 그래도 마이스터 수가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초월학관 교수로 보낼 인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에리카의 걱정에 로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1급 도제나 보내. 내가 다녀 보니까 학생들 가르치는 데 마이스터를 보내는 건 심각한 인력 낭비더라."

무려 학생 신분으로 초월학관에 다녔던 탑주의 증언이자 명령이었다.

누가 이를 거부할까.

그렇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로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옆에 놓아둔 봉투를 챙겨 드는 로이스를 보고 더글라스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초월학관."

"네? 갑자기 거긴 왜 가십니까?"

모두가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내니 로이스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만날 사람들도 있고, 전해줄 물건도 있고 말야."

"...?"

"그리고 겸사겸사… 처리할 일도 있고."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로이스.

그 뒷모습을 보며 파울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뭘 처리하신다는 거지...."

그간 염원의 탑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이제는 '처리'라는 말만 들어도 자동으로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

특히 그 '처리'란 단어를 입에 담은 이가 로이스였기에 파울라의 오한은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253화. 오빠 (3)

시간을 거슬러 방학이 시작되기 전, 초월학관.

"하아...."

빨래터에 앉아 라비나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우우...."

우울해하는 라비나.

사람에게는 각자의 영역에 맞는 재능이란 게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라비나의 메이드로서 적성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한 굴레처럼 반복되는 실수의 연속.

또다시 빨랫감을 걸레짝으로 만든 그녀는 화장실 청소로 쫓겨날 위기에서 하녀장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라비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런 일에 재능이 없음을.

그것도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절대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대로는 안 돼!'

라비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마 자신의 재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수습 메이드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녀는 고심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런 고민이 이어지던 와중.

갸릉갸릉-.

따사로운 오전의 햇살 아래 잔디 위를 뒹구는 나비의 모습이 라비나의 시야에 잡혀 들었다.

라비나는 그런 나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넌 좋겠다....'

아무런 고민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나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저리 뒹굴뒹굴하는 녀석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존재가 아닐까?

그렇게 나비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라비나의 뇌리로 깨달음의 번개가 번뜩였다.

"어?! 그래! 영수가 있잖아!"

대체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라비나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내가 못하면… 영수한테 시키면 되잖아?!"

비록 살림에 대한 재능이 없을 뿐이지 자신에게는 그 누구나 부러워하던 재능이 있었다.

바로 영수와 계약을 맺고 그들을 부리는 재능.

왜 굳이 자신이 빨래하고, 청소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을 대신해 그 일을 해 줄 존재가 있는데.

당장 그녀의 머릿속으로 메이드 일에 적합한 영수 몇 마리가 떠올랐다.

비록 지금은 계약된 영수가 없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찾아서 계약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는 모든 영수의 위에 군림하는 최강의 환수가 있지 않은가.

라비나가 펄쩍 뛰어올라 나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비, 나비! 나 좀 도와줘!"

-큥?

대(大)자로 발라당 누워 고개만 살짝 치켜든 나비.

-큥큥.

녀석이 귀찮다는 듯 앞발을 휘휘 내저었다.

평소였다면 눈치를 보고 물러났을 라비나였지만, 이미 절박함에 눈이 돌아간 그녀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미안! 이번만 좀 도와줘!"

라비나가 나비를 옆구리에 껴들고.

-큐웅?!

그대로 초월학관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초월학관 고용인들 사이에 길이길이 역사로 기억될, 사상 최강 메이드 탄생의 전초였다.

* * *

오랜 방학 끝에 초월학관으로 되돌아온 학생들.

하지만 그들은 개강의 설렘을 맞이했다기에는 어딘가 어수선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크게 변화한 것은 없었지만, 학관의 분위기가 무언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학관 내에 돌고 있는 소문 때문이었다.

"들었어?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이 돌아왔대."

"그랜드 마이스터님들뿐만 아니라 탑주님도 돌아왔다던데?"

"맞아! 나도 들었어. 그 탑주가 사이론 영지를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소문으로는 그 탑주님이 우리 학관 학생이었다는데?"

"응? 무슨 개소리야? 탑주가 학생?"

"맞아. 내가 듣기로는 하얀 백발의 노인이라는데?"

학생들이 학관을 비운 사이 사이론에서 벌어진 일이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시 학관에 남아 있던 학생의 증언.

또는, 탑주에 관한 고급 정보라고, 자신의 가문에서 알아 온 정보라고 떠드는 학생의 이야기.

진실과 거짓, 과장된 소문이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여 나중에 가서는 로이스가 삼두육비의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학생들이 그랜드 마이스터와 탑주에 관한 이야기로 쉼 없이 떠드는 중 개학식을 맞이했다.

하급반, 중급반, 상급반.

분반별로 대강당에 모여든 학생들.

곧이어 개학식이 시작되고 앞으로 쭉 늘어서는 교수진을 본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뭐야? 마이스터님들이 안 계시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마이스터들이 두문불출한다고 해도 그간 개학식에만큼은 참석했다.

그런데 오늘의 개학식에는 그 어떤 마이스터도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학생들의 술렁거림은 한 여인이 단상 위로 올라서며 멎었다.

"누, 누구야?"

"맙소사...."

인세를 벗어난 듯 보이는 단아함과 아름다움.

조교와 교수직을 맡은 도제들이 공손하게 뒤로 물러서며 단상에 올라서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다.

잠시 뒤, 단상에 선 미인, 플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다들 즐거운 방학을 보내고 오셨나요? 오랜만에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 나서게 되니 상당히 떨리네요."

플로리아가 학생들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로 초월학관의 학장을 맡게 된 플로리아라고 합니다. 세간에서는 이 못난 저를 그랜드 마이스터라고 불러 주더군요."

"...?!"

플로리아의 이야기에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모든 초월학관의 관계자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거짓으로 자신을 그랜드 마이스터라 말하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다시 말해 저 아름다운 여인이 진짜 그랜드 마이스터라는 소리였다.

자신들이 다니는 초월학관에 초월기 종사자들에게 우상처럼 떠받들어지는 그랜드 마이스터가 나타났으니 학생들이 놀랄 만도 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플로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탑주님… 이게 맞는 걸까요?'

그녀가 초월학관의 학장을 맡게 된 건 전적으로 로이스 때문이었다.

염원의 탑의 비리를 캐내면서 자연스럽게 학관과 연관된 이들까지 고구마 캐듯 줄기줄기 엮여 나와 결국 학장에까지 도달한 것.

이에 로이스가 학장을 가차 없이 잘라 내자 그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빈 학장의 자리에 로이스는 플로리아를 앉혔다.

처음 플로리아는 그런 로이스의 지시를 거부했었다.

그녀가 손수 가르쳤던 에일리오는 스승을 죽이려 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또한, 죄수들에게 죽음은 편안한 형벌이라며 강제 노역형이 떨어지자 그녀의 하나뿐이었던 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높았던 곳에 도달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이의 비참하고 쓸쓸한 최후.

그리고 제자의 배신과 죽음.

연이어진 충격에 넋이 나갔던 그녀에게 내려진 로이스의 지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전…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어요. 에일리오를 그리 키운 제가 어찌....'

'그러니까 너한테 맡기는 거다.'

'예?'

'앞으로 에일리오 같은 녀석이 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네가 아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해.'

'하지만....'

'한 번 실패를 겪었으니 앞으로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잘 알겠지. 어떻게 해야 제자들이 어긋난 길로 빠지지 않을지 말야.'

'....'

'그러니 잘 키워 봐.'

그 뒤로도 이어진 로이스의 설득에 플로리아는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렇게 로이스와의 대화를 상기해 낸 플로리아는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도 알고 계신 분도, 혹은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번 방학 동안 우리 염원의 탑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이곳 초월학관에도...."

플로리아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져 나갔다.

향후 염원의 탑과 초월학관의 비전.

학생들은 플로리아의 말을 한 글자도 흘리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그렇게 플로리아의 연설이 끝나고.

"…앞으로 여러분의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며 플로리아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그녀의 연설이 끝나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그녀가 단상에서 물러나고 각 학과, 분반별로 새롭게 온 교수와 조교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바.

"어이."

그는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살짝 굳은 얼굴의 뷘이 있었다.

그는 시바와 그 주변을 보며 물었다.

"이봐, 평민."

"…무슨 일이시죠?"

"네놈과 붙어 다니던 그놈은 어디 갔냐?"

뷘의 물음에 시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랑 같이 붙어 다니던 놈요?"

"뭘 이제 와서 모른 척이지? 로이스 놈 말이다."

"...."

시바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저, 혹시 말입니다."

"...?"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아닙니다. 못 들으셨으면 그냥 모르는 게 나을지도."

그게 본인의 정신 건강에 이로울 테니 말입니다.

…라는 뒷말은 애써 참아 낸 시바였다.

무언가 미심쩍은 시바의 반응에 뷘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이 천한 놈이...."

"...."

"그깟 놈과 어울려 다니더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음...."

"앞으로 처신 잘해야 할 거다. 내가 지켜볼 테니까. 아, 그리고 로이스 새끼 보면 전해."

"뭘요?"

"잘난 체하며 콧대 세우는 것도 지금까지라고. 이번 학기부터는 달라질 거라고 말이다."

"아, 예.... 뭐, 제가 그분께 그 말을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시바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반응에 뷘의 인상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이 새끼가...."

만약 개학식만 아니었다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안 전해도 된다. 다 들었으니까."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시바와 뷘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니, 그건 근처에 서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언제 온 거지?!'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난 로이스.

그를 본 시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타, 탑주님!"

자신이 내지른 소리에 놀라 시바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강당을 쩌렁쩌렁 울린 뒤였다.

특히나 한창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던 '탑주'라는 명칭은 좌중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탑주? 어디서 탑주님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디야? 어디?!"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어나고.

로이스의 방문은 즉흥적이었기에 학관 관계자들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로이스의 모습에 플로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개학식을 순식간에 엉망으로 만든 로이스는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을 끔벅이는 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네 당당한 포부 아주 잘 들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

"우리 앞으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뭐?"

뷘이 그리 되물었을 때, 이미 로이스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단상 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면 어떻게 해요."

"아, 내가 깜빡한 게 있지 뭐야."

"네?"

그 물음에 로이스가 씨익 웃으며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에게 꽂히는 수백 쌍의 눈동자를 보며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반갑다, 친구들. 염원의 탑주 로이스다."

이전 플로리아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 보다 더 큰 파장이 일어났다.

로이스는 학관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기에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쟤, 기술 하급반의 그 녀석이잖아?"

"봐! 내 말이 맞잖아! 탑주님이 우리 같은 학생이었다니까! 노인이 아니라!"

또한, 로이스의 소개에 뷘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녀석이 탑주라니!

시바의 외침에도 녀석이 헛소리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뷘은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했다.

한편, 웅성거리는 소리에 살짝 인상을 쓴 로이스.

"모두 조용."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마나와 미약한 드래곤 피어가 섞인 그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심기가 약한 이는 딸꾹질을 할 정도.

그렇게 조용해진 장내를 슥- 훑어본 로이스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254화. 오빠? (4)

로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우로 밀착."

난데없는 명령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워 올린 학생들.

곧바로 로이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안 들리냐? 우로 밀착!"

그제야 학생들이 정신을 차리고 강당의 우측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로이스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학생은 좌측으로 빠진다."

그리 말한 로이스가 뒤쪽의 도제 한 명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간 탑주의 성정이 어떠한지 충분히 봐 왔던 도제는 화다닥 튀어나왔다.

"여기 적힌 이름 큰 목소리로 불러."

"네!"

그는 로이스가 넘겨준 명단을 받아 들고 큰 목소리로 외쳐 나갔다.

"먼저… 샘 카르틴."

도제의 호명에 쭈뼛쭈뼛 한 학생이 좌측으로 빠졌다.

이후 도제의 호명은 계속됐고 약 15분 정도가 흘러 호명이 끝이 났다.

"수고했다."

"가,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은 도제가 물러나고, 로이스가 좌측에 선 학생들을 보았다.

좌측에 빠진 학생들의 수는 정확히 57명.

따로 호명된 이들이 어리둥절해할 때 재차 로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불린 학생들은 자기를 왜 불렀는지 궁금하겠지?"

좌측 학생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왼쪽에 모인 학생분들이야말로 아주 대단하고 귀하신 분들이니까."

로이스의 말에 좌측에 모인 학생들의 얼굴이 화색으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좌측으로 몰린 학생들의 면면은 제법 힘 좀 쓴다는 집안의 자제들이었으니 말이다.

자신들에게 무슨 특별 대우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이들.

하지만 이어진 이야기에 그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어 갔다.

"어찌나 대단하시던지 우리 염원의 탑과 초월학관을 물로 본 모양이야."

"...?!"

"부정 입학부터 시작해서 교수 및 조교에게 뇌물, 성적 조작 등등등."

좌측의 학생들이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며 판결이 내려진 뒤였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이 굳이 우리 학관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고로… 너흰 퇴학이다."

화들짝 놀란 학생들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하게 변했고, 그 무리 속에는 당연히 뷘도 섞여 있었다.

* * *

초월학관의 학장실.

달그락-.

가볍게 찻잔이 오가고 여유롭게 찻물을 들이켜는 로이스를 보며 플로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왜? 재밌잖아."

"…참 재밌네요."

이번 로이스의 퇴학 통보는 플로리아도 들은 게 없던 이야기였다.

무려 57명에게 퇴학 조치가 내려진 상황.

그 결정에 학생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고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졌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플로리아를 보며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뭐가 문제야? 어차피 퇴학시킬 놈들 퇴학시킨 것뿐인데."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넌 너무 신중해. 그리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지."

"...."

"때로는 과감해질 필요도 있어."

"…그런가요?"

물론 탑주님처럼 너무 과감해도 안 되겠지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플로리아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이 약간의 담소를 나누는 사이.

똑똑-.

"탑주님, 말씀하신 학생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로이스의 허락이 떨어지고 조교가 두 명의 학생을 데리고 학장실로 들어왔다.

그 두 학생은 다름 아닌 시바와 시에라였다.

"그럼 전 이만...."

둘을 데려온 조교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학장실을 빠져나갔다.

넷만이 남게 된 학장실.

로이스에게 불려온 시에라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불과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자신의 기술반 파트너였지만, 이제는 쳐다도 볼 수 없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린 존재.

아직 그를 대하는 것이 너무도 어색한 시에라가 우물쭈물할 때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카시어스 가문… 생각보다 유명하던데."

"...."

"5대 전까지만 해도 공작 가문이었으나 쇠락에 쇠락을 반복하다가 남작위까지 몰락. 이제는 그마저도 유지하지 못해 가문의 모든 게 팔려 버린 비운의 가문이더라."

"...."

"카시어스 가문의 부채를 모두 사들인 게 바로 사이론 후작가였지. 맞냐?"

"…맞습니다. 정확히는 겨우 붙어 있는 저희 가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게 사이론 후작가였습니다."

"놈들이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고?"

"글쎄요. 저도 아직 그게 의문입니다. 사이론 후작가 같은 거대 귀족이 왜 저희같이 다 망해 가는 가문에게 손을 뻗었는지...."

"간단해. 너희 가문의 핏줄을 타고 올라가면 왕가의 핏줄에 닿으니까."

"…네?"

"6대 전 카시어스 공작의 부인은 당시 국왕이었던 이와 불륜을 저질러 아들을 낳았다. 물론 당대 카시어스 공작은 이 사실을 몰랐고."

"...?!"

"그렇게 태어난 이가 바로 마지막 카시어스 공작이었지."

"그, 그럴 리가… 저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한 나라의 국왕과 공작의 부인이 통정해 아이를 낳았다는 게 알려지면 좋을 리가 있을까?"

"...."

"성세를 유지하던 카시어스 공작 가문이 급격하게 쇠락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마지막 카시어스 공작의 형님 되는 이… 훗날 멜데니크 국왕이 되는 놈이 이복동생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아...."

"비밀리에 전해지던 왕가의 비사를 접한 사이론 후작은 그런 이유로 너희 가문을 손에 넣은 거다. 너와 자신의 후계자를 혼인시키기 위해.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핏줄에 왕가의 혈통이 섞이게 되고…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니까. 사이론 후작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니 확실할 거다."

"...?!"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추악한 진실.

결국, 자신은 사이론 후작의 탐욕을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시에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시에라의 앞으로 로이스가 봉투를 내밀었다.

"받아."

"이게… 뭡니까?"

"사이론 후작가의 모든 재산이 염원의 탑에 귀속되면서 너희 가문이 졌던 부채 또한 우리 게 됐다. 네 손에 들린 건 그걸 증명하는 서류고."

"...?!"

시에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왜?"

"난 너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줄 거다. 첫째, 지금 당장 그걸 찢어 버리고 자유의 몸이 되는 거."

"...."

"둘째, 초월학관을 졸업하고 염원의 탑에 들어와 그 빚을 갚아 나가는 거."

시에라의 눈이 떨렸다.

원래였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서류를 찢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네가 마음에 들어서."

"…예?"

"네 재능도, 독기도. 제법 마음에 들더라고. 우리 염원의 탑은 언제든 인재를 환영하거든."

"...."

"그리고 나의 염원의 탑이 네 염원의 토대가 되어 줄 거다."

시에라의 얼굴에 갈등의 빚이 스쳐 지나갔다.

서류를 찢으면 그간 자신을 괴롭히던 과거로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류를 남겨 놓으면 비록 빚은 그대로지만, 자신에게 소속이 생기게 되는 거다.

'염원의 탑'이란 거대한 울타리가 말이다.

그 어떤 선택을 해도 자신에게 너무도 유리한 조건.

이에 시에라는 한 가지를 물었다.

"탑주님."

"왜."

"만약 제가 염원의 탑에 들어간다면… 저번에 제게 잘 보고 배우라고 하셨던 거… 그거, 다시 보여 주실 수 있으세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실전 평가 당일.

로이스가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초월기 조종술.

그것은 그녀가 도달해야 할 목표이자 이정표가 되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에라의 시선에 로이스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얼마든지."

그 대답에 시에라는 서류를 로이스에게 돌려주었다.

"제가 빚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서요."

"그거 참 마음에 드는 성격이네."

시에라의 미소에 로이스도 미소로 답했다.

'시에라 정도면 제법 싹수가 있는 인재지.'

쌍둥이와 불꽃 남매에 가려져서 그렇지 시에라의 재능은 인간의 영역에서 최고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런 인재가 눈앞에 있는데 침이라도 발라 둬야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로 빚 문서 하나로 시에라를 염원의 탑에 묶어 둘 수 있게 되었으니 로이스로서는 매우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훌륭한 인재를 선점한 로이스.

그가 이번에도 또 다른 인재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야."

"네?"

로이스와 시에라의 대화를 멀뚱멀뚱 듣고 있던 시바.

그의 앞으로 한 장의 종이가 날아들었다.

"이거 뭔가요?"

"초월학관 졸업 후 염원의 탑에서 일하겠다는 서약서."

"...."

"응, 무임금으로 5년간 일하겠다는 서약서."

"아니, 왜요!"

시바가 버럭 소리쳤다.

"왜긴, 내 마음이지."

"시에라 양은 빚 까 주는 조건이라지만, 그래도 저는 월급을 주셔야죠! 원래 노동에는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예전이었다면 염원의 탑에 들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을 리 없었다.

자신이 가고 싶다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로이스 밑에서 몇 개월 굴러먹은 시바는 염원의 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이 되었는지 절실히 알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험난한 가시밭길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리라.

"전 못 갑니다! 아니, 안 갑니다!"

"그래?"

시바가 억울하다는 듯 바락바락 소리치자 로이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시바에게 던졌다.

"이게 뭡니까… 어… 어라?"

로이스가 던진 것은 다름 아닌 반지였다.

그것도 번트가의 문장이 버젓이 새겨진 반지 말이다.

시바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이, 이걸 로이스 님이 어떻게?"

"예전에 말이야, 캐리 번트라는 놈이 그걸 주면서 그러더라고."

"...?!"

번트가의 후손인 시바가 가문을 가장 부흥하게 한 선조인 캐리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반지 가져오면 뭐든 필요한 걸 들어주겠다고 말이지… 그래서 그거 들고 번트가를 찾아갔는데… 쫄딱 망했네?"

"어… 음...."

"그 후손은 너란 놈뿐이고? 혹시 너 말고 다른 후손 있냐?"

"아, 아뇨."

"그러니까 네가 몸으로 때워. 5년만."

"하, 하지만 저희 가문은 이제 망했고...."

"아, 망했으니까 선조의 약속 같은 거는 개똥으로 취급해도 된다?"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몰아치는 로이스의 비아냥과 손안의 반지가 시바의 혼을 쏙 빼놓았다.

'로이스 님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캐리 선조와 알고 있는 사이였다니?! …아, 그래서 설마...?'

시바는 그제야 어째서 로이스가 캐리 번트와 루시아 번트의 초상화를 사들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로이스의 마수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없음도 말이다.

시바가 초조함과 우울함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도 무임금은 너무 심한데… 조금이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너 하는 거 봐서."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바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서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한 명의 인재가 염원의 탑에 제 발로 들어갔고, 다른 한 명의 인재가 멱살이 잡혀 끌려 들어갔다.

* * *

그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웅- 웅-.

한동안 울린 적이 없던 통신석이 신호를 보내 왔다.

"응?"

아공간에서 통신석을 꺼내 든 로이스가 눈을 끔벅였다.

"어머니, 아버지네?"

정말로 오랜만에 부모님께 걸려온 연락.

'아, 종종 연락드릴 걸 그랬나?'

그간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반성하며 로이스가 통신을 연결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아들!]

활기찬 제네로커의 음성에 로이스도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네, 저예요."

하지만 그 반가움은 곧바로 이어진 목소리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아들! 동생 생겼다!]

255화. 오빠? (5)

로이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벼 팠다.

'내가 좀 피곤한가?'

지난 2년, 자신답지 않게 제법 많은 일을 처리하긴 했었다.

손에 넣은 사이론 영지부터 염원의 탑까지.

밑에 아이들에게 일거리를 떠넘겼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일들이 산재했다.

원래 그런 일에 잘 나서지는 않지만, 나름 영지와 탑을 키워 나가는 재미가 있어 열심히 했었다.

남들이 보면 놀랄 정도로 말이다.

'…진짜 피곤한가?'

하지만 드래곤인 자신이 피곤할 리 있겠는가.

그런데 왜 이상한 환청이 들린단 말인가.

로이스가 현실을 부정하며 통신석에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우리 아들 동생 생겼다고 했지!]

아무래도 환청이 아닌 듯싶었다.

"진짜요...?"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 로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똑똑-.

"탑주님, 더글라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신제품 초안을 든 더글라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탑주님?"

펄럭-.

바람에 휘날리는 새하얀 커튼만이 더글라스를 반겨 주었다.

* * *

3년하고도 10개월 정도.

로이스가 독립을 선언하고 겨울 대륙과 가을 대륙을 들쑤시고 다닌 시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제네로커의 레어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추는 평화로운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부모님.

"어무니… 아부지?"

"오! 아들 왔어?"

자신을 보고 환하게 손을 흔드는 아버지 제네로커.

"로이스 왔니?"

인자하고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 발렌티나.

모든 게 자신이 떠나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

바로 어머니 발렌티나의 품에 안겨 있는 새하얀 한 무언가.

-삑?

하얀 비늘을 가진 작은 아기 드래곤의 하늘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로이스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고가 마비된 로이스가 떠듬떠듬 물었다.

"그… 그러니까, 쟤가… 제 동생이란 거예요?"

"그렇지!"

제네로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향해 로이스가 황당함을 담아 소리쳤다.

"동생 생겼다면서요!"

"응? 그치? 보렴, 생겼잖니?"

"아니, 아니… 그러니까 임신하셨다는 게 아니라… 아예 낳았다는 거였어요?!"

보통 동생 생겼다고 말하면 임신을 했을 때 말하는 거잖아?!

왜 그걸 낳아 놓고 말하는 건데!

로이스의 외침에 제네로커가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선 발렌티나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우리도 이게 이렇게 될 줄 몰라서… 임신했을 때 말하는 걸 깜빡했지 뭐니."

"…그게 깜빡할 일입니까?"

"그게… 그렇게 됐다. 하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긴 했지...."

발렌티나도 쑥스럽다는 듯 살포시 고개를 내리 떨궜다.

이에 로이스가 물었다.

"…원래 두 분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 보자고 하신 거 아니셨어요?!"

아주 오래전.

로이스에게 제네로커는 동생 계획이 없다고 말했었다.

오로지 너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겠다고 말이다.

그런 로이스의 물음에 제네로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랬었는데… 널 키우다 보니까 하나쯤 더 낳아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고, 널 떠나보내고 나서 마음이 휑한 게… 영 적적해서 말이다."

"…그냥 계획에 없었다고 해. 뭘 그렇게 말하고 있어."

"크흠!"

발렌티나가 곱게 눈을 흘기자 제네로커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흘렸다.

그사이 발렌티나가 로이스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밀었다.

"한번 안아 보렴."

"아...."

"네 동생이란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발렌티나.

그리고 그녀의 손에 대롱대롱 들린 작디작은 헤츨링.

로이스가 너무도 여린 동생을 어찌 받아야 할지 몰라 멈칫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늘색의 투명한 눈동자에 홀린 듯 손을 뻗어 헤츨링을 받아 들었다.

-삑?

작은 아이는 낯선 이의 손길에 잠시 당황해 짧은 팔다리를 파닥거렸다.

이에 발렌티나가 아이의 머리를 살살 긁어 주었다.

"아리아나, 네 오빠란다."

"이름이… 아리아나예요? 여자아이?"

발렌티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스가 아리아나를 얼굴까지 끌어 올려 눈을 맞췄다.

-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리아나.

작은 여동생의 모습은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꼭 빼닮아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로이스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아리아나가 빵끗 미소 지었다.

-삐잇!

해맑은 미소가 어찌나 귀엽던지 로이스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가 아리아나를 품에 살포시 안으며 질문을 던졌다.

"아직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알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나 보네요."

"어제 깨어났단다."

"어제요?!"

그리 되묻던 로이스가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알에서 깨어날 당시 자신을 안아 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제네로커였다.

그때 이미 발렌티나는 깊은 수면기에 들어가 있었다.

산후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얼굴이....'

처음에는 당황 때문에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발렌티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괜찮으신 거죠...?"

로이스의 걱정 가득한 물음에 발렌티나가 웃으며 답했다.

"아직은 괜찮아."

"어째서 수면기에 들어가지 않으신 거예요?"

그 물음에 답을 준 것은 제네로커였다.

"그건 이 아빠 때문이다."

"...?"

"아빠가 원로원의 일로 아리아나의 알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네 엄마가 그동안 아리아나의 알을 지켰지."

"…쌍둥이네 아주머니께라도 부탁하시지."

"그건 네 엄마가 싫다고 하더구나. 아리아나를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게."

"아...."

"그래서 네 엄마가 힘든 걸 참아 가며 아리아나의 알을 지켰고 이렇게 무사히 깨어났지만… 이제는 한계란다. 당장 오늘에라도 수면기에 들어가야 해."

그 말에 발렌티나가 말을 덧붙였다.

"꼭 그렇기 때문만은 아냐. 이렇게 우리 아들 얼굴도 보면서 동생을 안겨 주고 싶었거든. 아유, 내 자식들이지만 어쩜 이리 예쁜지."

아들의 품에 안겨 있는 막내 딸아이.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 닮은 두 아이를 보며 발렌티나가 너무도 행복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제네로커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지 옆에서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로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자신의 부모님들은 정말이지 찰떡궁합을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