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탈리와 데일은 새벽같이 여관을 나섰다.
반죽을 준비하는 제빵사, 분주히 의뢰에 나서는 용병,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을 진열하는 잡상인들.
도시는 하루를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탈리는 짧은 다리를 분주히 움직이며 그 사이를 요령 좋게 헤집고 지나갔다.
데일은 그냥 걸었다.
그러면 주위에서 알아서 비켜주었다.
나탈리는 레온과 닮아 매우 수다스러웠다.
그녀는 걸으면서도 쉼 없이 재잘거렸다. 주로 대화 주제는 레온이었다.
"정말이지. 레온은 한 곳에 꽂히면 정신이 팔려서 주위도 안 본다니까요? 분명 또 그놈의 학교를 생각하느라 주위에 도둑들이 온 것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군."
"이번에 레온을 보면 한소리 따끔하게 해야겠어요. 정말.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는지."
한숨을 푹 쉬며 툴툴거렸지만, 그 안에 레온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데일은 묵묵히 나탈리의 말을 들어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길 한참.
나탈리가 걸음을 멈추고는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가."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난 너 따라가고 있었는데."
"저도 기사님을 따라가고 있었는데요?"
"?"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의 시간만 멈춰버렸다.
어색한 얼굴을 한 나탈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일단 도둑 길드에 찾아가 보면 되겠지."
"하지만 도둑 길드가 한 두 개가 아니에요. 이름 있는 조직만 세 개에, 소규모 조직은 훨씬 많다고요."
설마 도둑이 그렇게 인기 있는 직업일 줄이야.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당장 데일이 게임으로 이 세상을 접했을 때도, 몬스터나 악마와 싸우는 횟수보다는 강도들이랑 싸우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둘은 다시 고심에 빠졌다.
만약 도둑 길드에 잡혀간 게 사실이라면, 일단 어느 길드인지부터 찾아야 한다.
'장물아비들과 반목하고 있는 조직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데일이 말했다.
"장물아비들이라면 뭐라도 알고 있겠군."
"예? 아, 그렇겠네요."
"레온이 함께 일했던 장물아비에게 안내해라. 위치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목적지가 정해지자 나탈리는 잽싸게 이동했다.
데일은 그런 나탈리를 놓치지 않게 성큼성큼 걸어야 했다.
동문을 통해 성을 나선 나탈리가 빈민가의 거리를 능숙하게 이동했다.
'동쪽 거리는 생각보다 번화한데.'
빈민가의 규모는 작지 않다.
악마에게 여러 국가가 멸망하고, 그 피난민들은 아레네로 몰려들었다.
당연하지만 모두가 성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일부 귀족이나 능력 있는 평민들은 성안에 들어왔지만, 대부분은 성 밖에 정착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고 모인 지금, 빈민가에 사는 인구는 성안에 살아가는 인구와 비슷하다.
사람이 몰리면 돈도 몰리기 마련.
빈민가에도 열악한 거리가 있는가 하면, 제법 그럴듯하게 번화한 곳도 있었다.
이곳이 그랬다.
동쪽에 조성된 상업 거리는 나름대로 질서와 치안이 유지되는 곳이었다.
거리를 따라 멀끔한 간판을 단 가게가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었다.
'멀쩡해보이는 외관과 달리, 대부분은 불법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만.'
당장 이들이 찾아가는 장물아비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단순히 장물을 사고팔기만 하는 중계인이 아니다. 그러면 이윤이 얼마 남지 않는다.
가장 벌이가 짭짭한 장사는 직접 장물을 '만드는' 것.
무고한 사람을 죽여 장비를 빼앗으면, 그게 장물 아니겠는가?
"아. 도착했어요."
나탈리가 멈춘 곳은 지붕이 초록색인 2층 건물 앞이었다.
데일은 이제 그 간판의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토모 상회]
데일이 물었다.
"여기인가?"
"예. 레온이 반쯤 출근하다시피 하는 가게예요."
언뜻 보면 무기와 방어구부터, 생필품이나 고서까지 모두 취급하는 잡화점이었다.
데일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신사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귀족적인 예법이었는데, 단순히 귀족을 흉내 낸 느낌은 아니었다.
'원래 귀족을 섬기던 사람인가?'
노신사에게서 느껴지는 기품에 나탈리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반면, 데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데일이 다가오자 노신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기사께서 찾아오시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조금 비꼬는듯한 어조였다.
데일이 물었다.
"나를 아시오?"
"물론이지요. 적어도 빈민가에서 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매번 아이들에게 먹을 걸 나눠주시지 않습니까."
"음."
별것 아닌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소문이 퍼질 일이었던 걸까.
노신사가 물었다.
"저희 가게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물건을 보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데일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레온이 이곳과 자주 거래했다고 들었소."
"아, 레온 말입니까? 확실히. 노움치고는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청년이었죠. 그래서요?"
"녀석이 얼마 전에 실종됐소. 혹시 아는 거 없소?"
노신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 오른손으로 수염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걸 왜 우리한테 묻는지는 둘째치고. 대체 왜 그걸 당신에게 알려줘야 하는 거죠?"
꽤나 적대적인 태도다.
역시 데일이 이교도라서일까.
'그냥 좋게 넘어가는 법이 없군.'
어쨌든, 뭔가 알고 있긴 한 모양이다. 데일은 나탈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쳤다.
"나가 있어라."
"예? 아, 예."
나탈리가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쿵. 다시 문이 닫혔다.
그 모습을 노신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뭡니까."
데일은 잠시 대답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장물을 다루는 가게답게 공기에 은은하게 피 냄새가 섞여 있다. 그 냄새가 데일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데일이 덤덤히 말했다.
"아무래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데일과 노신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노신사는 투구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빛을 보며 주춤했다.
데일이 말했다.
"처맞고 싶지 않으면 아는 거 다 불으시오."
빈민가
* * *
데일의 위협에 잠시 주춤했던 노신사가 이내 다시 뻣뻣이 고개를 들었다.
"대화가 안 통하니 바로 협박입니까? 이래서 이교도들이란....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썩 꺼지세요."
노신사는 도리어 고압적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은 생각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데일의 경험상, 사람이 재수 없게 나올 때는 셋 중 하나에 해당한다.
믿는 구석이 있거나.
상대가 만만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머저리이거나.
데일이 보기에 노신사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단련의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정정한 노인일 뿐이다.
그럼 흑기사인 자신에게 왜 이렇게 뻗대는 걸까.
문득. 노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빈민가에서 데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아이들에게 먹을 걸 나눠주지 않냐고.
그 소문이 대충 어떻게 퍼졌는지는 짐작이 간다.
'아마 멍청한 호구라고 생각하겠지.'
이 척박한 세계에서 대가 없는 선행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얕잡아보고, 털어먹을 호구로 보게 되는 것이다.
흑기사답지 않은 흑기사.
선행을 보였기에 무시당한다면 답은 하나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것.
본능적으로 검을 뽑으려던 데일은 그만두었다. 살육을 벌이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온 건 아니니.
대신 노신사에게 말했다.
"무기가 있다면 빨리 꺼내시고, 부를 사람 있으면 부르시오. 뭐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고개에 빳빳이 힘주는 것 아니오?"
"아. 참으로 명예로우시군. 그렇다면 바라시는 대로."
비아냥댄 노신사는 품에서 은색 종을 꺼냈다. 그리고 손목을 가볍게 튕겨, 기품 있게 두 번 흔들었다.
땡땡.
청명한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곧이어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장정 여럿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들은 나름 메이스나 철판을 덧댄 누비 갑옷, 뾰족한 단검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데일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데일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노신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게 다는 아니겠지?"
"흥. 당신 하나에게는 충분하죠."
"아닌 것 같은데."
노신사는 대답 대신 외쳤다.
"모두 공격!"
"우와아아!"
장정들이 함성을 지르며 우다다 달려들었다.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에서, 데일은 이 장정들이 나름 전투 경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 몇쯤은 죽여본 적이 있는 전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데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퍽!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장정이 건틀릿에 얻어맞아 저 멀리 날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장정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그대로 달려들려던 장정들은 우뚝 멈춰섰다.
데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죽지는 않았다."
장정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혹시 상대를 잘못 건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 눈빛에 드러났다.
그들이 가만히 있자, 노신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냐! 눈치만 보지 말고 얼른 밥값을 해!"
그제야 장정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내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래! 쫄지 말라고! 기사면 뭐. 배때지에 칼이 안 들어가?"
데일은 고개를 내려 배때지를 확인했다.
단단한 갑옷이 보였다. 사내도 데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어. 음."
말을 꺼낸 본인도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한다는 듯.
외마디 기합과 함께 용감히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퍽!
앞서 날아간 사내와 마찬가지로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뒤로 장정들은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래서 데일은 직접 가주었다.
거리를 접근했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면 어김없이 또 하나의 사내가 바닥에 누웠다.
죽이지는 않았다.
데일은 전투 경험이 풍부하다. 어딜 어떻게 때려야 무력화가 되는지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데일이 사내들을 모두 때려눕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남짓.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손장난 정도였다.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노신사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설마 데일이 진짜로 이리 대담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가?
똥개도 자기 집에서 반은 먹어준다 했다.
데일이 이렇게 대놓고 공격한다면 그건 비단 자신들에게 싸움을 건 것만이 아니다.
토모 상회에서 아군으로 삼은 모든 빈민가의 세력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귀찮은 짓을 벌일 리 없다. 그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그보다 왜 이렇게 무력해.'
패배는 그렇다 치고. 싸움이 이 정도로 일방적일 줄은 몰랐다.
나름 든든히 먹여주고 혹독한 훈련을 시켜 키워낸 이들이 이리 허무하게 당하다니.
하지만 노신사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드센 마음의 사람이었다.
"가, 감히 이 대낮에 우리를 공격해! 어? 우리가 누구랑 연결되어 있는지 아나?"
"누구랑 연결되어 있는데."
"다른 암상인들이! 빈민가의 동맹 조직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데일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신사의 말은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대신 데일은 노신사에게 거리를 좁혀 얼굴을 마주했다.
바로 앞에서 시선이 마주하자, 드세던 노신사도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흑기사가 내뿜는 스산한 기운이 공포를 자극했다.
데일은 노신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노인은 때리고 싶지 않소."
그는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예의 바른 사내였다.
"그러니 어서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말하.... 아니. 그냥 이 가게의 주인에게 안내하시오. 그편이 더 확실하겠지."
"으. 으으."
"싫소?"
데일이 뚫어져라 쳐다보자, 결국 노신사의 드센 마음도 꺾였다. 그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 위를 올라갔다.
데일도 그 뒤를 따르며, 노신사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기품이 있군.'
노신사의 걸음걸이는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무척 품위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쌓아 올린 습관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신사가 섬기는 주인이 제법 높은 신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노신사는 2층으로 올라가 어느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주인님. 주인님을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손님은 아니군그래. 방금 들린 소란도 그 손님이 일으킨 건가?"
"그, 예. 그렇습니다."
"들어오게 하게."
허락이 떨어지자 노신사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데일은 성큼 안으로 들어갔고, 노신사는 밖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을 닫았다.
데일은 우선 습관처럼 주위를 살폈다.
'평범하군.'
안은 단순한 구조의 집무실이었다.
중앙에 탁상이 있었고, 3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이었는데, 그 안에 꽂혀 있는 책에는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다.
적어도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책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장물아비의 방이라 좀 더 신비로운 물건들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검소하고 평범했다.
솔직히. 조금 실망이었다.
데일이 한 발짝 앞으로 더 다가갔다.
몸이 날씬하고 눈동자가 녹색인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이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오셨군. 반갑네. 토모 가문의 아이렉이라고 하네."
예상외로 정중한 태도에 데일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데일이오. 그쪽은 귀족이오?"
가문 명을 말하는 인사법.
눈앞의 사내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가문에 소속되어있다는 뜻이었다.
데일의 질문에 아이렉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기한 눈치군. 하지만 빈민가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네. 노예부터 몰락한 왕국의 왕족까지 가지각색이지."
눈앞의 아이렉은 멸망한 국가의 귀족일 것이다.
노신사는 가문의 집사쯤 되었을 것이고.
데일이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귀족이면 이런 곳이 아니라 상위 구역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니오?"
아이렉은 자주 들어본 질문인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경이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네. 상위 구역으로 가는 게 어디 공짜겠나? 당연히 대가를 지불하고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 하네. 그러다 쓸모가 없어지면.... 누구나 쓸모 있어 지는 곳으로 보내버리는 거지. 그럴 바에는 조금 더러워도 이곳에 있는 게 나아."
누구나 쓸모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동쪽 멀리에 있는 악마와의 최전선이다.
가장 무능력한 이도, 하다못해 화살 받이로라도 쓸 수 있으니까.
아이렉이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우선 사과를 하고 싶군."
"사과 말이오?"
"내 아랫사람들이 실수한 것 같아서."
데일은 투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아직 모르지 않소?"
"부하들과 싸움이 일어났고 그대가 이겼지. 이유야 어찌 됐든, 졌다면 우리 잘못인 거네."
"음."
이긴 쪽이 무조건 옳다는 건가? 이건 이것대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다.
데일이 무슨 반응을 할지 고민하고 있자, 아이렉이 물었다.
"나야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지만, 경은 무언가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닌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떤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데일은 사양하지 않고, 이곳에 온 이유를 꺼냈다.
"레온이라는 노움을 아시오? 당신과 같이 일했던 거로 알고 있는데."
아이렉은 잠깐 기억을 더듬다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르고 빠릿빠릿하던 친구였지. 그 친구가 왜?"
"레온이 실종되었소. 범인이 누군지 짐작되시오?"
"음. 그렇군. 그것참 큰일.... 잠깐. 겨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거라고?"
아이렉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데일을 쳐다봤다.
고작 노움 하나 사라졌다고, 자신과 마찰이 있을 각오로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 아닌가.
데일은 아이렉이 뭔가 또 잡소리를 할 것 같아서 선수를 쳤다.
"아는 것만 말해주시오."
"으음. 최근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도적 길드가 하나 있긴 하네. 아마 그곳이 유력하지 않나 싶네만."
"그곳이 어디인지 말해주시오."
"검은 뱀 형제단."
아이렉은 검은 뱀 형제단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와 위치 따위를 알려주었다.
그 순순한 태도에 데일은 순간 고민했다.
'은근슬쩍 자기 경쟁자 이름을 댄 건 아니겠지?'
데일을 이용해 마음에 안 드는 조직에 피해를 주려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지워버렸다.
만약 그렇다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아이렉에게 대가를 받아내면 될 뿐이다.
"그럼 이만."
원하던 정보를 모두 들은 데일은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아이렉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노움 하나 때문에 이곳에 쳐들어온 것이었다고?"
밖에서 대기하던 노신사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저 이교도가 해를 끼치지는 않았습니까?"
"어. 그래. 생각보다 말이 통하더군. 정말 반송장이 맞나 싶을 정도일세."
"그렇습니까?"
아이렉은 재밌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이 갑작스러운 손님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보기 드문 주인의 모습에 노신사가 눈치만 살폈다.
그런 노신사에게 아이렉이 지시했다.
"세바스. 저 데일이라는 기사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조사해봐."
"아! 역시 복수를 생각하고 계시군요!"
"복수?"
"그, 우리 부하들을 때려눕혔지 않습니까."
아이렉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복수는 무슨. 자네는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렇게 날 모르나. 내가 그런 이익도 없는 행동을 왜 하겠나. 얻어맞은 부하들은 약 좀 발라주고, 다음부턴 좀 더 혹독하게 훈련 시키기나 해."
"그렇다면 조사는 왜...."
"앞으로 더욱 유명해질 기사님께 미리 침을 좀 발라둘 수 있으면 좋지 않겠나?"
노신사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토 달지 않고, 아이렉의 판단을 따랐다.
악마에게 멸망한 왕국에서 살아남아 지금 이 순간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아이렉의 판단 덕분이었으니.
* * *
나탈리는 상회의 문밖에서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데일이 나오자 그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나탈리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어떤가요? 뭐 알아낸 것 있나요?"
"대충은. 서쪽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음. 여기서 완전히 반대편이네요. 그럼 어서 가요! 레온이 애타게 기다릴 거예요!"
나탈리는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레온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이 굴었다.
하지만 레온의 살아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데일은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말해야 할까 하다, 나탈리의 표정을 보았다.
'나탈리도 아는군.'
나탈리는 바보가 아니다.
외양은 어려 보여도 엄연히 성인이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하지만 억지로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나탈리는 애써 맑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레온이 돌아오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어요. 정말. 이렇게 사람 걱정하게 하고."
"그래."
"맨날 종이랑 책만 들여다보고 말이죠. 기사님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하지 않아요? 나도 좀 봐달라 고 해야겠어요."
"그래."
"이참에 결혼식도 빨리 올려야겠어요. 부를 가족도 친구도 딱히 없으니 쓸쓸한 결혼식이 될 것 같지만.... 아! 혹시 기사님도 와주실 수 있나요? 그럼 엄청 기쁠 텐데요."
잠시 자리에 멈춰섰던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와아! 진짜요?"
불안을 잊기 위해 숨 없이 재잘대던 나탈리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둘은 그렇게 이레네의 외곽으로 돌아가, 서쪽 거리로 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그다음에는 서쪽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조직을 찾아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데일은 길치였고, 빈민가의 서쪽은 뒷골목이 많아 지리가 매우 복잡했으며, 검은 뱀 형제단은 꼭꼭 숨은 것처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늦은 밤이 되면서 둘은 수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요."
"나 혼자서 계속 수색해도 괜찮다."
"안돼요. 기사님 혼자 다니면 이곳에서 길을 잃고 영원히 헤맬지도 몰라요."
데일은 반박하지 못했다.
나탈리는 맑게 웃은 뒤, 데일의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
"이렇게 도와주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노움이라고 다 무시하는데 데일 경은 그렇지 않잖아요. 레온도 엄청 고마워했어요."
"별 거 아니다."
"...꼭 보답할게요. 가진 건 별로 없지만요."
데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나탈리는 다시 웃었다.
데일은 고요한 빈민가의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수색하는 것으로 하고, 여관으로 다시 돌아가지."
"아! 저는 그럼 잠시 집에 들렀다 갈게요. 챙겨야 할 물건이 있어서요."
"같이 가겠다."
나탈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잠깐 들렸다가 바로 올 거예요."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 집인데요 뭘."
데일은 그런 나탈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나탈리는 이미 저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나탈리는 달리는 와중에 고개를 돌려 팔을 휙휙 흔들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금방 갔다 올게요!"
데일은 허공을 움켜쥔 손을 다시 되돌렸다.
그러고는 나탈리의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형제단
* * *
데일은 여관 1층에서 나탈리를 기다렸다. 나탈리는 밤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온 건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데일은 코를 자극하는 피 냄새에 여관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 나탈리가 누워 있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
숨은 쉬지 않았다. 몸은 싸늘하다.
얼굴을 젖혀 보니 표정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함께 나온 카일라가 그 모습에 입을 틀어막았다.
"세, 세상에...."
이건 데일을 향한 노골적이면서도 잔인한 경고였다.
피 보기 싫으면 더 들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
데일은 말없이 나탈리를 내려다 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랄한 미소를 짓던.
겁이 많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용감히 찾으러 다니던 여인을. 속은 현숙하지만, 겉모습은 영락없이 아이 같던 노움을 내려다보았다.
아이.
그래, 데일에게 레온과 나탈리는 언제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싸늘하게 되돌아왔다. 데일처럼 심장이 뛰지 않는다.
누구에게든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놈들은 그 선을 넘었다.
"...."
데일은 문득, 나탈리가 한쪽 주먹을 꼭 쥐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데일은 조심스레 나탈리의 주먹을 폈다.
그 안에 있는 건 깃펜이다.
나탈리는 데일이 깃펜을 부러트려, 공부를 못한다는 얘기를 엿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 나름의 보답을 하고자 이렇게....
데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카일라가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데일 경?"
"카일라. 나탈리를 교단에 데려가줄 수 있겠나? 돈을 줄 테니 필요하다면 도와줄 사람을 불러라."
카일라는 억지로 밝게 말했다.
"괘, 괜찮아요! 제가 잘 데려다줄게요."
"부탁한다."
"그. 데일 경도 함께 가시면...."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미안하다."
카일라는 굳었다.
지금 미안하다고 말한 것인가?
이 기사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데일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카일라는 뭐라 다 말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결국 데일을 붙잡지 못했다.
"...몸 조심하세요."
할 수 있는 건 안전을 기원하는 말뿐.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데일은 전신의 감각을 일깨웠다. 능력의 강화로 감각이 예민해진 참이다.
데일은 바닥에 남은 미약한 피 냄새를 감지해냈다.
놈들은 대담하게도 성 밖에서 이곳까지 시체를 끌고 들어왔다.
대체 성문은 어떻게 통과한 걸까. 경비병을 매수하기라도 한 걸까?
상관없다. 데일은 그저 흔적이 끊기지 않았음에 감사할 뿐이다.
이 흔적을 찾아가면 결국에는 놈들에게 닿을 테니.
데일은 서문을 나가 구불구불한 골목에 발을 들였다.
이 지역은 사방에서 피, 오물, 쓰레기 냄새 따위가 난다. 시궁창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지역.
다행히 그런 곳을 오래 헤맬 필요는 없었다.
"이봐. 기사 나으리. 그 정도 경고했으면 알아서 몸을 사리셔야지."
골목 골목에서 험상궂은 연놈들이 튀어나와 데일을 넓게 포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데일은 일부러 포위하게 내버려 두었다.
데일은 사슬 갑옷과 투구를 꼼꼼히 차려입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뒷골목 건달치고는 무장 상태가 훌륭했다.
데일이 물었다.
"너희들이 나탈리를 죽였나."
"나탈리? 아. 그 노움 말하는 건가?"
사내가 피식 웃더니,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그러게 적당히 하셨어야지. 왜 내 사업을 방해하고 죄 없는 우리 애들을 쥐어 패고 그랬어."
"너희 애?"
"설마 기억 안 나는 거야? 취한 노새 여관에서 크게 한바탕 했다며."
데일은 기억을 더듬다,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다.
"지미.... 지미 패거리?"
"그래. 지미 패거리의 지미가 바로 나다."
"도적 길드의 똘마니였군."
"흐흐. 똘마니라는 표현은 좀 그렇군. 사업 동료라고 해주지 않겠어?"
지미가 재수 없게 웃었다. 그러자
다른 패거리도 따라 웃었다. 웃지 않는 놈들도 있었는데, 놈들은 검은 뱀 형제단의 일원으로 보였다.
데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차가운 심장 속에서 요동치는 이 느낌은 뭘까.
나탈리와 레온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아니. 그들의 죽음은 데일의 탓이 아니다.
온전히 인간이었을 적에는 스스로를 자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분노.'
그래 분노. 데일은 지금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눈앞에는 이 분노를 풀 상대들이 있었다.
데일은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드물게도. 마음속 의견이 일치했다.
전부 죽여.
그들이 벌인 짓을 그대로 갚아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데일이 검을 뽑았다.
잠시 인간 흉내를 그만둘 때다.
* * *
이레네는 급하게 세워진 도시다.
악마에게 맞서기 위해 그 방어력만큼은 발군이지만, 행정적 체계나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았다.
더불어 이레네의 규모는 너무나 거대하다. 전성기 제국의 수도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다스리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설상가상으로 동부 전선에서는 악마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황제는 전쟁이 잘 수행되도록, 물자와 인력을 차질 없이 보급해주어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틈틈이 전선의 장군들을 견제해야 한다.
지금의 전쟁에는 너무나 많은 힘이 쏠리고 있다. 인류의 명운을 건 전쟁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이후다.
반쯤 우스갯소리로, 황제가 보유한 병사보다 전선의 장군 하나하나가 부리는 병사가 더 많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이 끝나면 장군들이 순순히 군대를 해산할까?
수십 년 이어진 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 군인들을?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나 전선의 분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도시 운영과 전선 보급, 그리고 사령관들의 견제까지.
아무리 초인적인 황제라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업무다.
그래서 황제는 도시를 구역별로 나누었고, 구역의 운영을 다른 이들에게 위임했다.
2, 3구역은 믿을만한 귀족에게. 외곽구역은 평의회를 세워 통치를 맡겼다.
외곽구역에서 영향력 있는 7명으로 구성된 평의회.
재판과 상업, 징수와 치안 유지를 모두 담당하는 평의회의 위상은 적어도 외곽구역에서는 드높기 그지없다.
그런 평의회의 높으신 분들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회의를 주최한 가란드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준비한 보고서는 이미 읽어보셨겠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이레네의 인근에서 악마의 하수인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았을 이름입니다. 아르구르의 하수인, 하시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더 설명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 가란드가 이어 말했다.
"다행히 저희 길드 소속 용병이 하시나를 처단하는 데에 성공해 더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가란드의 말을 끊었다.
"말을 정정해주시지요. 그는 엄연히 저희 쪽 사람입니다. 용병 길드와는 잠시 같이하는 것뿐이지요. 그를 용병이라 소개하는 건 큰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밤의 신전의 사제장. 에리얼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다.
가란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불쾌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습니다. 단지, 서류상으로는 데일 경이 용병 길드에 등록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어쨌건 이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니 주제를 되돌리겠습니다."
가란드가 어물쩍 넘어갔지만 에리얼도 더 따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이레네 주위에 악마의 하수인이 나타난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선의 상황이 안 좋아 방어선에 구멍이 뚫렸고, 그 틈으로 악마의 하수인이 들어왔다. 아니면...."
"전선에서 일부러 악마의 하수인을 통과시켰거나!"
말을 가로챈 건 외곽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장이다.
험상궂은 얼굴의 드워프는 책상을 탕! 내려치며 외쳤다.
"전선의 장군 중 하나가 악마와 결탁하고 황제 폐하를 배신한 것이오! 아니. 꼭 하나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 어쩌면 장군들이 모두 악마에게 넘어갔을 수도 있소!"
"지나친 비약이에요."
아름답게 웨이브 진 녹빛 머리를 한 여인이 경비대장을 제지했다.
그녀는 외곽구역 상인 길드의 수장이었다.
"악마의 하수인들은 재주가 많죠. 작정하고 잠입하려 하면,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경비대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 장군들이 그렇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소?"
"무슨 소리시죠?"
상인 길드장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경비대장은 다시 한번 책상을 내리쳤다.
"시치미 떼긴! 그대가 전방에 물자를 보급할 때, 장군들에게 이것저것 받아먹는다는 건 뒷골목 똥개도 알고 있소!"
"...대답할 가치도 없는 모함에 천박한 말투. 이래서 땅딸보들이란."
"뭐?! 뭐라고 했소! 다시 말해보시오!"
이내 두 사람은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란드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최 이놈의 회의는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본 적이 없군.'
개성 있는 자들의 모임이니, 얘기가 회의 주제에서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동등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강제로 입을 닥치라고 명령할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또 다른 싸움이 될 뿐이다.
이렇게 되자 다른 이들도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악마 하수인을 처치한 용병이 그 화제의 흑기사 아닙니까? 전 오히려 그쪽에 흥미가 가는군요."
외곽구역의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조피스 가문의 가주가 그렇게 운을 뗐다.
에리얼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예. 데일 경은 우리 신전의 자랑입니다. 밤의 여신님의 위엄을 온 세상에 떨쳐주실 분이지요."
가주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 기사에 대해서는 워낙 믿기 힘든 소문들이 많더군요. 사라진 성녀를 대신할 유망주와 함께 다닌다는 말도 있고요. 진짜입니까?"
가주는 조용히 듣고 있던 빛의 교단의 주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주교는 별로 대꾸하기 싫다는 듯. 눈마저 꾹 감아버렸다.
에리얼도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입꼬리를 내렸고, 가주는 머쓱하게 허허 웃었다.
말을 받은 건 대장장이 길드의 대표였다. 그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흑기사? 흑기사가 전선도 아니고 도시에 있다고?"
가란드가 경악했다.
"맙소사. 어디 갇혀 있다가 지냈습니까?"
"그야 대장장이는 자기 공방에 갇혀 지내지. 내 나이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아야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가란드는 설명했다.
"데일 경이라고. 요즘 활약하고 있는 흑기사가 한 분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하고, 특별한 분이시죠."
"특별해? 그래 봤자 반송장에, 살육 기계 아닌가?"
살육 기계.
그야말로 흑기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어였다.
이성을 잃고 아군조차 연료로 사용하며 오로지 살육만을 반복하는 괴물.
그들은 도저히 같은 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족속이었다.
그렇기에 데일은 특별하다.
강력한 무력을 지녔지만, 이성을 잃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가란드가 설명했다.
"데일 경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주점에서 난동을 부린 적이 있지만, 사망자는 하나도 없더군요."
말싸움을 벌이던 경비대장과 상인 길드장도 어느새 가란드의 말에 경청했다.
가란드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 언데드인 그에게 살인은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몹시 굶주린 상태에서 맛있는 음식을 보면 누구나 그 유혹을 참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경은 참아냈지요. 대단한 자제심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이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통제가 가능한 강력한 무력이라니.
모두가 눈독 들일 만한 인재 아닌가?
동시에 의문이기도 했다. 왜 가란드는 이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걸까.
"어쨌거나 데일 경은 특별합니다. 지금껏 마구잡이로 살인을 일삼던 다른 흑기사와는 다르게...."
그때. 가란드의 부하가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했다.
다른 평의원의 부하들도 각각 찾아와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대장장이 길드 대표가 말했다.
"음. 그 흑기사께서 사람 여럿 죽이고 있다는데?"
형제단
* * *
우르릉.
하늘이 한차례 으르렁거린 뒤, 이내 지상을 향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데일의 투구에 떨어져 그대로 눈구멍 아래에 맺힌 뒤, 표면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치 투구가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한 모양새다.
사위가 어두워졌다.
짙은 먹구름이 태양을 철저히 가렸다. 투구의 눈구멍 속에서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포위하고 있는 도적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도 음산한 기운을 내뿜던 저 흑기사는 이제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갑작스레 달라진 분위기에 그들은 굳어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든 게 아닐까 하고.
데일은 검을 쥐었다.
검 끝을 하늘로 곧게 세웠다.
날카로운 흑색 롱소드는 떨어지는 빗방울마저도 부드럽게 갈라버렸다.
데일은 멍청히 서 있는 지미에게 고개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지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발작하듯이 외쳤다.
"조, 조져!"
다음 순간. 공기 가르는 소리와 함께 볼트 여러 대가 날아들었다.
지붕 위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쇠뇌수가 쏘아낸 볼트다.
데일은 땅을 박찼다.
큰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놀랄 만큼 신속한 기동이다.
볼트가 데일이 사라지고 없는 땅을 향해 후두둑 박혔다.
도적들은 시야에서 데일을 놓쳤다. 다시 그를 포착했을 때. 데일은 이미 가장 가까운 도적의 앞에 서 있었다.
부웅!
데일은 검을 휘둘렀다.
도적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한 반자 늦게 주위에 피가 튀었다. 피는 데일의 갑옷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이 개새끼가 마틴을!"
"으아아아!"
근처에 있던 다른 도적들은 동료의 죽음에 분노했다. 단창을 꼬나쥐고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데일은 주먹을 뻗었다. 이전처럼 기절시키기 위해 힘을 뺀 주먹이 아니다.
죽일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한 주먹이다.
우드득!
건틀릿에 얻어맞은 도적의 얼굴 뼈가 움푹 들어갔다. 당연히 즉사다. 데일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곧장 옆으로 검을 내질러 다른 도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나쁘지 않군.'
스스로를 옭아매던 것들을 벗어던지고,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
자유 혹은 해방감.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데일은 죽은 도적의 가슴에 건틀릿을 박아넣어 그 생기를 흡수했다.
이 역시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멈춰버린 심장의 공허함이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기분이다.
그때. 데일의 등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퉁! 퉁퉁!
볼트 서너 대가 갑옷을 맞고 튕겨 나갔다.
그 충격이 제법 크다.
상당히 질 좋은 쇠뇌를 쓰는 모양이다. 볼트에 맞은 데일의 균형의 조금 흔들렸다.
지미가 화색을 띠며 외쳤다.
"머, 먹힌다! 계속 볼트를 쏴!"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이미 쇠뇌수들은 다음 볼트를 장전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전문적이다. 도저히 뒷골목 도적 나부랭이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적이라기보다는....
'군인?'
정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또다시 볼트가 날아왔다.
데일은 근처에 있던 도적의 뒷덜미를 붙잡아 앞에 세웠다.
"끄아아악!"
도적의 몸에 볼트가 후두둑 박혔다.
졸지에 과녁이 되어버린 도적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귀에 거슬리는 비명이었다.
데일은 놈의 머리를 내리쳐 더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단창을 뺏어서 지붕 위를 향해 힘껏 던졌다.
쇠뇌수를 보호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방패수가 급하게 방패를 들어 올렸다.
꽝!
맹렬하게 날아간 단창은 그대로 나무 방패를 꿰뚫고, 방패수의 목에 틀어박혔다.
뒤에서 장전을 준비하던 쇠뇌수가 경악했다.
"무슨 시발."
곧이어 쇠뇌수는 급하게 고개를 내려야 했다.
빠르게 날아온 단검이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쯧."
데일은 혀를 찼다.
빗나간 건 아쉽지만 상관없다. 방패수가 없으니 이제 쇠뇌수들은 함부로 고개를 내밀지 못할 거다.
데일은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된다. 살육.
검이 번뜩였고, 어김없이 도적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도적들의 저항은 조금도 의미가 없었다.
마치 늑대가 양 떼를 사냥하듯. 데일은 쉽게도 그들을 죽였다.
결국. 보다 못한 지미가 롱소드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이 개새끼가!"
데일은 무심한 눈으로 지미가 달려오는 걸 지켜봤다.
뒷골목 건달치고는 자세에 제법 기본기가 잡혀 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데일은 주먹을 휘둘러 지미의 가슴을 후려쳤다.
쿵!
판금을 덧댄 사슬 갑옷도 소용이 없었다. 건틀렛에 얻어맞은 판금이 그대로 찌그러졌다.
벽에 처박힌 지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녀석은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자, 잠깐...."
기다려 줄 이유는 없다.
쾅!
데일은 지미의 머리에 주먹을 휘둘렀다. 벽이 조금 무너지며 그 안에 지미의 머리가 파고들었다.
지미는 다시는 입을 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
무리를 이끌던 지미가 쓰러지자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도적들이 더 달려들지 않자 데일은 주위를 살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는 흑기사의 모습에 도적들은 공포를 느꼈다.
"괴, 괴물."
"절대. 절대 못 이겨."
지미가 죽은 순간부터 이미 사기는 바닥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뒷골목 건달들이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그들은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내버려 둘 데일이 아니다.
데일은 성큼성큼 땅을 달려 그들을 앞질렀다.
데일이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자 도적은 무기를 떨어트리고 손을 번쩍 들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할 테니 목숨만.... 컥!"
검에 찔린 도적의 몸이 거꾸러졌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깨달았다.
항복을 하든.
무릎을 꿇고 싹싹 빌든 이 흑기사는 기어코 자신들을 죽이리라고.
몇몇 도적은 울부짖으며 도망쳤다. 그들부터 데일의 우선 목표가 되어 죽었다.
남은 이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데일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순서였던 도적은 나이가 있는 중년이었다. 그는 데일을 원망스레 노려보며 말했다.
"항복하고 자비를 구걸하는 사람을 죽여? 네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책임지던 가족이 있었다. 이제 그 가족들은 다 굶어 죽거나, 그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겠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나?"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던 데일도 멈췄다.
이 뻔뻔한 사내에게 무어라 대답해줄까.
노움 부부 역시 죽기 전에 자비를 구걸했을 것임을. 둘에게도 가족이 있었음을 말할까?
아니면, 남을 죽이려거든 당연히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정론을 말해줄까?
머리가 복잡하다.
애초에 말한다고 이해할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데일은 짧게 대꾸했다.
"어쩌라고."
중년 도적이 눈을 부릅떴다.
"이 개 같은 새끼가...."
하지만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 머리가 몸과 분리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데일은 중년의 생기마저 흡수했다.
시체는 모든 생기를 빨려, 마치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렸다.
이제 지상에 살아있는 적은 없었다.
일찌감치 멀리 있던 검은 뱀 형제단원 몇몇은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들이 남긴 피 냄새를 추적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이들이 있다.
'지붕 위의 쇠뇌수들.'
저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데일은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우선 주위 시체에서 생기를 거두었다.
생기를 흡수하는 김에 기억도 같이 뽑아냈다.
시답잖은 기억들이 데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게 다가 아니군.'
아직 검은 뱀 형제단의 우두머리가 살아있다.
게다가 놈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듯하다.
당장 지붕 위에 있는 저 쇠뇌수들은 어디서 쉽게 볼 수 없는 전력이지 않은가.
'도망치기 전에 빨리 가야겠어.'
일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오늘, 데일은 검은 뱀 형제단을 전멸시킬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일을 벌였다.
탓!
데일은 힘껏 뛰어올라 근처 벽에 붙었다. 그러고는 벽에 건틀릿을 박아 넣어 벽을 타고 올랐다.
지붕 위에 올라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왔군."
대기하고 있던 드워프 쇠뇌수들이 중얼거렸다.
숫자는 셋. 데일의 투창에 죽은 녀석까지 해서 넷이서 한 팀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들은 쇠뇌 대신, 커다란 양날 도끼를 들고 데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드워프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일절 없었다. 숱한 사선을 넘어온 베테랑들이라는 게 보였다.
데일은 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빗물이 도망친 놈들에게서 피 냄새를 지우기 전에, 추격해야 한다.
데일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데일을 보며 드워프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시발. 이런 놈을 상대하는 줄 알았으면 돈을 더 받았어야 하는데."
조금 후. 시체 세 구가 더 생겼다. 그들에게서도 생기를 거둔 데일은 머지않아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미라같이 바짝 마른 시체들과 그들이 입고 있던 장비. 그리고 온 사방에 낭자한 피뿐이다.
그제야 숨을 죽이고 있던 빈민가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주위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떨어진 도적들의 장비를 챙겨 사라졌다.
몇몇 책임감 있는 이들은 전염병을 우려해 시체를 태웠다.
이제 주위에 남은 건 핏자국뿐.
하지만 내리는 비가 거세다. 빗방울이 굵다.
빗물이 핏자국을 금방 씻어주리라.
* * *
검은 뱀 형제단은 나름 오래된 조직이다.
제국의 탄생부터 그 역사를 함께 했고, 한때는 제국 수도의 밤거리를 지배할 정도로 번영했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조직은 악마의 침공과 함께 몰락해버렸다.
수도를 잃은 황제는 패배의 책임을 물을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표적이 된 게 바로 도둑 길드들이다.
그리고 검은 뱀 형제단은 도둑 길드의 수장쯤으로 여겨지는 조직.
황제는 형제단의 두목을 목매달아 분노한 시민들을 달랬다.
형제단의 현 두목인 아바프에게는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광장에서 목이 매달린 부친과 그를 향해 욕설을 뱉고 돌을 던지던 군중을.
아바프는 그 굴욕적인 날을 잊지 못한다.
"이봐요. 아바프씨. 회의 중에 한눈을 파시면 어떡하나요?"
아바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오."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린 청년이 경박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정말. 제대로 해주세요. 그래가지고 황제의 목을 매달 수 있겠어요?"
"...!"
아바프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청년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또 또 조금 긁었다고 그렇게 노려보고. 제가 아는 검은 뱀 형제단은 원래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드는 도둑들인데, 지금은 영 실망스럽네요. 협력할 대상을 잘못 정한 걸까요?"
아바프는 이를 뿌득 갈았다. 손은 본능적으로 품속의 단검을 찾았다.
청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뽑으시게요?"
눈을 질끈 감은 아바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군을 찌르는 머저리는 아니오."
"아. 아쉽네요. 저, 아바프의 몸이 갖고 싶었거든요. 먼저 칼을 뽑아주면 저도 마음 편히 행동할 텐데.... 어쨌건, 아바프도 몸 조심해주세요. 언젠가 꼭 아바프의 시체를 다뤄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으니까요."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진심인데...."
청년은 상처받은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걸 보는 아바프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 미치광이랑은 둘만 있는 건 역시 할 짓이 못 된다.
'이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
흑기사 하나를 죽이러 갔던 병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바프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다 당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지미 패거리는 그렇다 치고. 직접 키운 부하들이 열이 넘으며, 청년을 통해 거금을 주고 계약한 베테랑 쇠뇌수들. 그리고 청년이 부리는 시체 병사까지.
아무리 흑기사가 강하다 해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병력이다.
게다가 일전에 지미에게 들었던 얘기가 있다.
주점에서 지미 패거리와 흑기사가 싸워,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흑기사가 일부러 살인을 주저하지는 않았을 테니, 이는 흑기사의 실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근데 왜 아무 소식이....'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바프의 부하였다.
아바프는 그제야 안도하며 핀잔을 주었다.
"한심한 놈들. 왜 이렇게 늦었지?"
그러나 부하는 대답 대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아바프에게 외쳤다.
"헉! 헉! 사, 살려. 괴, 괴물이...."
아바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늘 침착해 냉혈한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부하가 이렇게 평정을 잃다니?
"말 더듬지 말고, 천천히 말해."
"도망. 도망쳐야....
그때.
문밖에서 날아온 단검이 부하의 뒤통수에 틀어박혔다. 흰자위를 드러낸 부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이어서 흑색 갑옷을 온통 피로 물들인 기사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의 고개가 아바프에게 돌아갔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건 뭔...."
아바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의 부친이 매달린 그 날 느꼈던 감정. 그 감정이 아바프에게 다시 찾아왔다.
아바프는 죽음을 느꼈다.
형제단
* * *
데일은 죽은 도적의 머리에서 단검을 빼내며 물었다.
"네가 이놈들 두목인가?"
아바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상대가 자기가 처리하라고 지시했던 흑기사임을.
그 흑기사가 도리어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한 숫자를....'
설마 싸그리 당할 줄이야.
어디서 계산이 잘못된 것일까?
데일의 시선과 마주친 아바프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한 조직의 수장답게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그래. 내가 검은 뱀 형제단의 푸른 독사. 아바프다."
'푸른 독사?'
아바프의 머리는 푸른 바다색이었다. 참으로 직관적인 별명이 아닌가 싶었다.
데일은 이번에는 아바프의 옆에 있는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금빛 자수가 새겨진 검은 로브를 걸친 청년이었는데, 황금빛 눈동자에는 왜인지 데일에 대한 호의가 가득했다.
눈이 마주치자 청년이 다짜고짜 다가와 데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무 갑작스럽고, 무해한 움직임이라 데일은 반응하지 못했다.
청년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명성이 드높은 데일 경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 감격스러운데요? 재수 없는 교단 놈들의 신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가슴이 통쾌하던지! 아,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얄의 아들 하킴입니다. 딱 봐도 흑마법사인 게 눈에 보이죠?"
'뭐야 이 새끼.'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수다는 그렇다 치고. 태도가 너무 친근하다.
'쑥대밭이니 뭐니. 에리얼이 하던 얘기랑 비슷하군.'
터무니없는 소문이 이래저래 많이 퍼진듯했다.
데일은 이 나사 빠진 청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도 저놈이랑 한패인가?"
"예?"
하킴은 아바프를 슬쩍 쳐다본 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지금은 그렇죠?"
"알았다."
철퍽!
데일은 그대로 하킴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법사가 굳이 거리를 좁혀주었는데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하킴의 머리는 간단히 뭉개져 버렸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다음 순간이다. 머리가 으깨진 하킴의 몸이 스르륵 녹아내리더니, 끈적한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동시에 아지트의 뒷문이 벌컥 열리며 또 다른 하킴이 들어왔다.
"하하하! 듣던 대로 화끈하시군요! 역시 남자다우십니다! 이 하킴, 데일 경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런 하킴의 모습에 아바프가 당황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데일은 하킴의 수법을 꿰뚫어 봤다.
'고기 인형 주문.'
예비 육체를 만들어내 본체 대신 조종하는 흑마법이다.
몸이 약한 흑마법사에게는 참으로 유용한 마법이고,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엿 같은 주문이다.
"네크로맨서였나?"
하킨이 화색을 띠었다.
"어? 방금 그것만으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흑마법에도 조예가 있으신가요? 역시 데일 경이십니...!"
푹! 빠르게 날아온 단검이 하킴의 얼굴 한가운데에 박혔다.
이번에도 하킴의 몸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리고 뒷문이 열리며 다시 하킴이 들어섰다.
하킴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데일 경? 화끈하신 건 좋지만, 대화를 좀 하면 안 될까요?"
데일은 대답 대신 롱소드를 굳게 쥐었다. 쓴웃음을 지은 하킴이 중얼거렸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죠. 일단 팔다리를 자르면 대화할 수 있겠죠?"
하킴이 슬쩍 뒷걸음질해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자 우르르하는 발소리와 함께 앞문과 뒷문으로 무언가가 뛰어들어왔다.
"우어어."
"우으."
언뜻 보면 사람이다.
엘프, 드워프, 인간, 그 조합도 다양하다.
하지만 하나 같이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몸에서는 지독한 썩은 내가 난다.
망자들이었다.
'살아있는 시체 주문.'
시체 병사들을 보며 아바프가 외쳤다.
"잠깐! 이게 다 뭐요! 내 부하들이 저 흑기사와 싸울 때, 시체 병사도 함께 싸우게 한 것 아니었소? 근데 이것들은 다 뭐요!"
아바프는 당연히 하킴이 시체 병사를 보내 자기 부하와 함께 싸울 줄 알았다.
그렇기에 승리를 확신한 것이고.
하지만 지금 이만한 숫자의 시체 병사가 여기에 있다는 건....
"설마 나를 속인 것이오!"
"응? 그랬었나?"
머리를 긁적이던 하킴이 쾌활하게 말했다.
"뭐 그런 거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사람 머쓱하게. 부하야 또 모으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 무슨...."
"그것보다 자, 싸워봅시다!"
하킴이 그리 외치자, 대기하고 있던 시체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데일은 벼락처럼 롱소드를 휘둘렀다. 한번 검광이 번뜩이자, 시체 셋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목을 잃은 시체 병사는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오오? 목이 잘린다고 멈출 친구들이 아닌데.... 그 검! 특별한 힘이 담겨 있군요!"
데일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킴이 무안하게 중얼거렸다.
"나 누구랑 대화하니?"
데일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시체 병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앞문과 뒷문으로 시체 병사들이 끝없이 들어왔다.
그들은 어떻게든 데일을 붙잡아 두기 위해 육탄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시체 병사들에게 데일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데일은 끝없는 싸움에도 지치지 않았으며, 시체 병사들의 이빨과 손톱은 단단한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 했다.
언데드에도 격이 있었다.
하킴이 들뜬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연 소문 그대로입니다. 멋있군요! 하지만 영 좋지 않은데.... 아바프. 잠시만 데일 경을 붙잡아 두세요."
"뭐요?"
"제가 주문을 쓸 시간을 벌라고요."
"알았소...."
아바프는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킴이 마음에는 안 들어도 일단은 손을 잡아야 한다.
아바프는 시체 병사들 사이에 은밀히 숨어들었다.
시체 병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지만, 아바프는 아무리 좁은 틈이라도 숨어들 수 있었다.
기척을 지운 아바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영 빈틈이 안 보이는군.'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저 기사에게는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투구에 뚫린 눈구멍 정도.
'시간만 끌자.'
시간을 벌면, 나머지는 하킴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하킴은 전장에서도 오래 살아 남아온 전쟁 마법사였고, 전장에는 데일보다 끔찍한 존재들이 득실거린다.
분명 데일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이 있으리라.
탓!
기회를 엿보던 하킴이 시체 병사를 밟고 탄력적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손에 든 단검을 투구의 눈구멍에 정확히 겨냥했다. 칼날이 뱀처럼 구불구불한 단검이었다.
이전보다 민감해진 데일의 감각이 그 기습을 알아챘다.
검에서 왼손을 떼 앞으로 뻗었다. 그대로 아바프의 팔을 쥐려 했다.
아바프의 반응은 재빨랐다.
미련 없이 단검을 놓은 아바프는 데일의 단단한 팔에 양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마치 뼈가 없는 동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여 팔에 찰싹 달라붙는 게 아닌가.
'체술?'
데일도 이런 기묘한 움직임은 처음이었다.
조직 내에 전해져 오는 특별한 비전인 듯하다.
데일은 팔에 매달린 아바프에게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뱀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해낸 아바프가 외쳤다.
"어, 언제 완성되는 것이오!"
"하하! 기다리셨습니다!"
웃음을 터트린 하킴이 손뼉을 짝! 하고 부딪쳤다. 주위에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데일은 생각했다.
과연 하킴은 무슨 주문을 준비하는 걸까.
머릿속에 네크로맨서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마법 목록이 스르륵 지나갔다.
동시에 시선은 쉬지 않고 주위를 관찰했다.
사방에는 시체 병사가.
바닥에는 자신에게 머리가 쪼개져 평범한 시체가 되어버린 시체 병사들이 한가득.
데일의 머릿속에 정답이 도출되었다.
'시체 폭발.'
마법을 간파한 데일은 곧바로 밖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키가 작은 시체 병사 하나가 그런 데일을 막았다.
익숙한 생김새의 노움.
"...."
레온이었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 다음 순간.
시체 병사를 포함한 시체들이 일제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어서 마력이 터져나가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쾅!
돌로 지어진 아지트가 순식간에 날아갈 정도의 성대한 폭발이었다.
시체 폭발은 범위 내의 시체 수에 그 위력이 비례하므로, 아무리 데일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터.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하킴은 돌연, 감탄을 흘렸다.
"어라? 이렇게까지 몸이 단단하다고? 제가 알던 다른 흑기사들과 비교해도 이건 놀라울 정도...."
흙먼지를 뚫고 데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바프의 몸을 방패 삼아 폭발을 헤쳐나온 데일의 몸은 엉망이었다.
갑옷은 강한 충격에 이곳저곳이 찌그러졌고, 투구는 어디론가 날아가 그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데일은 오른팔에 안은 레온을 놓지 않았다.
하킴은 애써 농담을 던져보았다.
"그 노움 시체가 맘에 드셨나요? 괜찮다면 데일 경이 가지셔도 됩니다."
"...."
우득!
데일이 하킴을 걷어차자, 하킴은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하킴의 몸이 녹아내렸다.
데일은 레온을 바닥에 내려놓고 정신을 집중했다.
'고기 인형의 범위는 넓지 않아. 근처에 있을 거다.'
하킴은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놈이다. 데일은 감각을 일깨워 그 냄새를 추적했다.
예민해진 감각은 머지않아 하킴의 기척을 발견했다.
데일은 그곳으로 향했다.
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 쥐죽은 듯 가만히 있던 하킴이 머쓱하게 물었다.
"어라? 어떻게 찾으셨지?"
주먹을 내리치자 하킴이 녹아내렸다.
데일은 그런 식으로 하킴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남아있던 다섯 개의 고기 인형을 모두 처치하고서야, 하킴의 본체에 이를 수 있었다.
하킴은 죽음을 앞두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에 흥미를 빛냈다.
"아무래도 제가 데일 경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요.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아주 인상적이에요!"
데일은 대답 없이 검을 들었다.
하킴이 웃으며 물었다.
"저 말이죠. 아직은 죽고 싶지 않은데, 혹시 협상할 여지가 있을까요? 아, 이건 어때요. 제 뒤에 누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과연 누가 저를 이곳으로 보내, 도시를 불태우고 싶어하는 도적과 손을 잡게 했을까요?"
데일은 끝까지 나불대는 이 사내가 짜증이 나, 툭 내뱉었다.
"안 궁금해."
"아. 드디어 대답해주시네요! 전 또 데일 경이 저한테 화가 나서 대화도 안 해주는 줄 알고 걱정...."
서걱!
데일은 검을 휘둘렀다. 하킴의 머리가 데구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 몸이 녹아내리는 일은 없었다. 하킴은 완전히 죽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끄럽게 재잘대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리를 웅웅 울렸다.
'정신 나간 새끼.'
밤의 여신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하킴 같은 인간이 많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배척받는 건 단순히 이교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데일은 하킴과 아바프의 생명을 거두었다. 별달리 쓸모 있는 기억을 얻지는 못했다.
아바프에게서는 광장에서 처형당하는 부친의 모습이.
하킴에게서는 노예로서 인체 실험을 당하는 기억이 보였을 뿐이다.
감흥은 없었다.
사연 없는 인간은 없고, 핑계 없는 무덤 역시 없는 법이다.
데일은 내려놓았던 레온을 다시 양손으로 붙잡아 올렸다. 고통으로 부릅떠진 그 눈을 조용히 감겨주었다.
데일은 나직이 말했다.
"돌아가자."
여전히 비가 거세다.
데일은 머리에 흐르는 빗방울을 맞으며 무심하게 걸었다.
데일은 오늘, 다시 한번 사람에게 실망했다. 구태여 이 인간성이라는 것을 지켜야 하는 의구심은 덤이다.
'개자식들이 너무 많군.'
이 일이 데일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또, 데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떻게 바뀔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있다.
오늘 이후로, 그 누구도 데일을 우습게 보지 않을 것이다.
* * *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검은 갑옷의 기사가 멀어져 간다.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건물 지붕 위의 한 공간이 마치 커튼이 걷히듯 양옆으로 밀려났다.
기묘하게 왜곡된 공간 속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특징 없는 노인.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건 그의 손에 들린 큼지막한 수정구다.
수정구 속에는 푸른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눈동자는 데일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인은 눈동자가 데일을 더 잘 볼 수 있게 앙상한 팔을 하늘 높이 들어야 했다.
마침내 데일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어."
노인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혼잣말이었다.
수정구 속 인물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가워요. 나의 친우. 나의 가족. 나의 사랑. 나의 주인. 금방 만나러 갈게요."
말을 끝낸 직후. 다시 공간이 커튼처럼 걷히며 노인의 모습을 가렸다.
그리고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노인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두 명의 드워프
* * *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의외로 하켄이었다.
"어어, 데일 경! 얘기는 들었습니다! 도둑놈들이랑 한바탕 했다면서요!"
하켄은 여관 문을 열며 다짜고짜 그리 외쳤다.
테이블을 닦고 있던 카일라는 데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구예요?"
"용병."
하켄은 성큼성큼 다가와 카일라에게 주문했다.
"맥주 한잔. 아, 물론 데일 경이 사시는 거다."
그 놀라우리만치 뻔뻔한 모습에 헛웃음을 지은 데일이 물었다.
"너무 당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 군."
"에이, 저희 사이에 술 한 두잔 정도는 사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 요즘 지갑 사정이 쪼들려서 그런데 한 번만 봐주세요."
"가란드한테 많이 받았을 텐데?"
악마 하수인을 처치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길드에서 포상금이 넉넉히 나왔을 터.
하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시잖아요. 용병일 하다 보면 돈 나갈 일이 참 많다 보니...."
용병이 돈을 어디서 탕진할지는 뻔했다. 술을 퍼마셨거나 도박을 하거나 아니면....
데일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창관은 적당히 드나드는 게 좋을 거다. 돈도 돈이지만, 병에 걸릴 수 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카일라가 경멸의 표정을 보내자 하켄이 황급히 부인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 하켄을 뭐로 보시고! 저 요즘은 그렇게 자주 안 갑니다."
예전에는 자주 갔다는 소리다.
민망해진 하켄은 카일라가 내온 맥주를 쭉 들이켰다.
"크으으. 근데 맛이 영 별로네. 다른 주점 가면 이거보다 훨씬 괜찮은 맥주가 있는데."
"맛없어서 죄송하게 됐네요!"
카일라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데일에게 소곤거렸다.
"근데 이 집은 여급이 엄청 당돌하네요."
"여급이 아니라 주인이다."
"엑. 그런가요?"
하켄이 새삼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자, 카일라가 찌릿 노려보았다.
데일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서. 왜 온 거야."
"예? 아니, 뭐. 우리 사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찾아오고 그런 사이인가요? 서운하네요 데일 경."
데일이 조용히 주먹을 들자, 깨갱한 하켄이 실실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도적 길드 하나를 완전히 털어버렸다면서요? 왜 그런 거예요? 지금 다들 그 얘기로 난리예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겨우 도적 길드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일만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데일 경이 뭘 모르시네요. 검은 뱀 형제단은 제국만큼이나 역사가 긴 조직이라고요. 비록 지금은 이빨이 다 빠졌어도, 얽혀 있는 세력도 많고 나름 저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이었죠. 그런 곳을 하루아침에 청소해버렸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요."
"음. 그렇군."
그런 조직인 줄은 몰랐다.
그 두목이 나름 독특한 기술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데일에게는 딱히 위협적이지 못 했다.
하켄이 눈동자에 흥미를 빛내며 말했다.
"다들 난리예요. 쓰레기 도적놈들한테 정의의 철퇴를 내렸다니, 흑기사가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느니, 뒷골목 전쟁의 시작이라느니. 그래서. 다짜고짜 그놈들을 작살낸 이유가 뭡니까? 용병 의뢰는 아니었을 거 아닙니까."
데일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런 학살을 벌인 이유에 갖다 댈 그럴듯한 변명은 여럿 있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었다."
"음. 그게 다입니까?"
"그게 다다."
잠시 멍하니 있던 하켄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역시 데일 경이십니다! 아주 화끈해요."
데일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흥이 오른 하켄은 은근슬쩍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데일은 모른척해 주었다.
맥주를 쭉 들이켠 하켄이 말했다.
"아무튼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뭐가."
"이제 사람들이 데일 경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여기저기서 데일 경을 찬양하는데 제가 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수십 명을 죽였는데 오히려 찬양해준 다라....
묘한 기분이다.
데일은 이럴 때마다 도덕 기준이 많이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실감하곤 한다.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졌다는 고독함.
데일은 물이 든 잔 속에 흐릿하게 비친 자기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물이 일렁일 때마다 데일의 모습도 이리저리 찌그러졌다.
촤악!
데일은 잔 속의 물을 바닥에 쏟아, 그 안에 비친 자신을 지워버렸다.
별로 궁상이나 떨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뭐, 나쁘지 않겠지.'
어쨌든 이번 일에 대해 사람들은 비교적 좋게 평가해주는 모양이다.
그를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질까?
취한 하켄이 데일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데일 경. 도시에서는 웬만하면 투구 좀 벗고 다니세요. 기껏 잘생긴 얼굴이 있으면 써먹어야지!"
"뭐?"
"맨날 투구만 눌러쓰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기겁해서 피하는 거 아닙니까. 이번에는 투구를 벗고 다녔다면서요? 그러니 사람들이 보는 눈도 달라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몸에 입은 타격이 커 투구를 완전히 재생하지 못한 상태로 도시에 들어섰다.
하켄의 주장에 엿듣고 있던 카일라도 작은 목소리로 '옳소옳소' 외쳐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찬양을 했다는 게....
'설마 외모 때문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영 묘할 것 같았다.
데일은 카일라에게 맥주를 갖다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쭉 들이켰다.
이젠 맛을 느낄 수도, 취할 수도 없는 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술 한잔이 고팠다.
* * *
다음날 데일은 가란드에게 간단히 사건에 대해 보고했다.
의뢰가 아닌 만큼 딱히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지금 데일은 용병 길드 소속이니만큼 최대한 협조할 생각이었다.
가란드는 심각한 얼굴로 데일이 말해준 일들을 종이에 적었다.
"그렇군요. 전쟁 마법사로 보이는 네크로맨서에 베테랑 쇠뇌수들이 함께...."
눈매를 꾹꾹 누른 가란드가 중얼거렸다.
"아바프는 예전부터 욕심이 많은 친구였죠. 그는 늘 조직을 키워 성벽 안에 자리 잡고 싶어 했습니다."
데일은 카일라의 여관을 차지하려던 지미 패거리를 떠올렸다.
"그냥 성안에 건물을 사면 되는 거 아니오? 그 정도 돈은 있었을 텐데."
"자리 잡고 싶다는 건 단순히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시 내에 세력을 키워 평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죠."
7인의 평의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평의원들은 이 외곽 구역의 실세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좌석을 차지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평의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건 다른 평의원을 밀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평의원을 밀어낸다는 건...."
"전쟁을 벌인다는 뜻이군."
"예. 그렇습니다. 아바프가 평의원이 되어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아바프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 꿈에 비해서 능력이 한참 부족한 사내였다.
그래서 아바프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외부와 손을 잡았다.
"전쟁 마법사까지 보냈으니, 지금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전선의 장군들과 관계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아무리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하나, 주요 전력들을 은근슬쩍 후방으로 보내다니.
악마들이 언제고 다시 진격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악마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가?'
데일이 물었다.
"장군들의 목적은 무엇이오?"
가란드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정말로 이쪽을 향해 전쟁을 준비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황제 폐하께 항의의 뜻으로 무력 시위를 벌이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피해를 보는 건 그 사이에 끼인 우리란 점이 억울할 따름이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외곽 구역에 가장 먼저 피해가 생긴다.
그러면 평의회가 머리를 모아 일을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애초에 그걸 위해서 구역을 분리한 것이기도 하고.
가란드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쓸어 넘기다, 데일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한동안은 꽤 혼란한 시국이 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몸값이 치솟는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말해주시오."
"신뢰와 실력을 모두 갖춘 용병입니다. 바로 데일 경처럼요."
혼란할수록 무력은 빛을 발하며, 신뢰는 더더욱 큰 값어치를 가진다.
"혼자서 조직 하나를 궤멸시키다니. 이번 일로 데일 경의 무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증명되었죠. 특히 데일 경은 도시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아직 얽혀 있지 않잖습니까? 그러니 더 탐을 낼 수밖에요."
"너무 고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소만."
아바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앞으로 두고 보시죠. 데일 경은 금방 저 위로 올라갈 겁니다. 그때는 부디 저, 가란드를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호들갑을 떠는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말하는 걸까.
데일은 덤덤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 * *
그날 저녁. 여관으로 들어온 데일은 당황했다.
여관 안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다.
분주히 움직이던 카일라가 데일을 반갑게 맞았다.
"아, 오셨어요? 왜 그러세요. 엄청 놀란 표정이시네."
"이상하군. 대체 왜 손님이 있지?"
"여관에 손님이 있는 게 당연하죠! 여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톡 쏘아붙인 카일라가 다시 맥주잔을 이리저리 나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데일은 여기 모인 이들이 일반적인 손님이 아님을 알아챘다.
'하켄도 인정할 정도로 맛없는 맥주를 돈 내고 먹는다? 이상하군.'
데일이 자리에 앉자 가게 안이 손님들은 데일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저게 그...."
"확실히 멀쩡해 보이긴 하는데."
"좀 더 지켜봐야겠어."
"근데 이 집 맥주 맛이 좀 이상하지 않아?"
가란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 세력에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저들은 데일을 가늠해보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불과 하루아침에 이렇게 큰 관심을 끌게 된다니.
은밀한 시선에 귀찮아진 데일은 이들을 쫓아내려다가, 행복한 얼굴로 일하는 카일라를 보고는 그만두었다.
모름지기 가게에는 손님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파리만 날리는 꼴은 보기 좋지 않다.
데일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방으로 바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저 염탐꾼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가게가 또다시 텅텅 비면 카일라는 잔뜩 실망하겠지.
데일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대충 분위기를 잡고 앉아 있으면, 섣불리 다가오는 놈들도 없을 거다.
하지만 예상이 깨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다가와 데일의 이름을 불렀다.
"데일 경."
익숙한 목소리다.
데일은 시선만 들어 눈앞의 상대를 확인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땅딸보.
데일이 악마 하수인에게서 구출해냈던 드워프, 발튼이다.
발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무 늦게 찾아와 미안하오. 요양하느라 한동안 밖에 나가질 못했소."
"몸은 좀 괜찮나?"
"보다시피 팔팔하오."
발튼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팔뚝에 단단한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다행이군. 그래서. 왜 찾아온 거지?"
"왜 찾아오긴! 그때 은혜를 갚는다 하지 않았소!"
"은혜?"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발튼은 의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원하시오. 무기, 아니면 도구?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전에 말했듯, 나는 뛰어난 기술자인 동시에 대장장이요.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드리겠소."
자부심 가득한 말에 곰곰이 고민하던 데일이 물었다.
"대장장이면서 기술자라 했지?"
"그렇소."
"그렇다면 나를 개조할 수 있나?"
데일의 말을 듣고 발튼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뭘 개조하라고?"
두 명의 드워프
* * *
발튼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미안하지만 데일 경. 다시 말해주시겠소?"
"이 갑옷을 개조해달라고 말했다."
데일은 팔 쪽의 갑옷을 툭툭 두드렸다.
물론, 갑옷의 개조는 밤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건틀릿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한다든가 갑옷 이곳저곳에 가시를 솟아나게 하든가.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그만큼 부작용도 있지만.'
전투에 좀 더 적합하도록 갑옷을 변형시킨다면, 일상생활에 불편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건틀릿을 날카롭게 만들면, 그만큼 펜을 쥐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발튼이 도와준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데일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단어를 잘못 선택한 것 같군. 난 이 갑옷에다 파츠.... 그러니까 탈부착이 가능한 기구나 무기를 추가하고 싶다."
"으음."
파츠? 기구? 무기?
앞의 단어는 그 의미조차 모를 요상한 언어였고, 뒤의 단어들은 뜻만 알 뿐, 데일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발튼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소."
"예를 들어 난 이 팔뚝에 칼날을 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옆에서 달려드는 적을 그대로 벨 수 있게끔."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한 발튼이 대답했다.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오."
"하지만 그런 걸 항상 달고 다니면 평상시에는 불편할 거다. 자칫 지나가는 행인들을 벨 수도 있고."
"그것도 맞는 말이오."
"그러니 필요할 때 끼었다가 뺄 수 있게 만들어야겠지."
"완전히 이해했소."
이제야 데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힌다.
발튼은 속에 얹힌 게 쑥 내려간 사람처럼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소. 보통 사람에게는 칼날의 무게가 문제가 되겠지만, 데일 경에게는 아무런 상관없지 않소."
"그래."
"그러면, 팔뚝에 붙일 칼날을 만들면 되겠소?"
"아니. 그건 당장 급한 게 아니다."
발튼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눈앞의 은인은 생각 외로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듯했다.
데일이 물었다.
"발튼. 화약은 다룰 줄 아나?"
"내 전공은 태엽과 용수철 쪽이지만, 뭐. 어느 정도 만질 줄은 안다오. 화약으로 무엇을 원하시오."
"순간적으로 화약을 폭발시켜, 그 충격으로 신체에 추진력을 주는 장치.... 라고 하면 이해하겠나?"
잠깐 생각을 굴려보던 발튼이 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마치 대포가 포탄을 쏘아 보내듯, 화약이 폭발하면서 데일 경을 밀어주길 원하는 것이오?"
"정확하다."
"제정신이오?!"
발튼이 책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 큰 목소리에 은근히 엿듣고 있던 염탐꾼들은 일제히 몸을 움찔했다.
저 흑기사에게 큰 소리를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발튼은 지금,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화약이 폭발했다가는 그 충격이 고스란히 데일 경에게 갈 텐데, 아무리 데일 경이라도 무사하기 어렵소!"
"괜찮다. 죽지 않을 정도만 되면 돼."
"맙소사. 너무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거 아니오?"
정확한 지적이었다.
데일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신체가 자기 몸이라는 인식이 약하고, 마치 기계나 제삼자의 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함부로 굴리면 뭐 어떠한가?
생기만 흡수해줘도 금방 멀쩡히 고쳐질 텐데.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데일은 몸을 막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발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만들 수 없소. 다른 무엇보다, 화약은 다루기 너무 까다롭소. 습기를 머금으면 쓸모없어지고, 불에 닿으면 폭발해버리지. 게다가 가격도 쓸데없이 비싸니, 아무리 생각해도 쓸 만한 물건이 나올 것 같지 않소. 차라리 그런 효과를 원하면 룬 마법 쪽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소?"
"...그런가."
"그렇소."
"알겠다.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군. 그럼 원래대로 탈부착 칼날이나 만들어라."
데일이 조금 실망한 기색을 비치고 순순히 수긍했다.
그제야 발튼은 아차했다.
뭐든 만들어주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이대로면 그의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에 상처가 날 판이었다.
그래서 발튼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군. 여기 맥주 한 잔 주시오!"
"네, 여깄습니다!"
카일라가 싹싹한 태도로 맥주를 내오자, 발튼은 그대로 한입에 들이켰다.
잔을 비운 발튼은 그 맥주 맛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데일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해주시오. 왜 몸통에 화약 주머니를 달면서까지 추진력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오? 데일 경은 이미 충분히 빠르지 않소?"
"그건.... 그렇지."
그렇게까지 해서 추진력을 얻으려는 이유?
그 이유야 명확하다.
'멀리 있는 상대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것.'
그렇다면 그 멀리 있는 상대와 거리를 좁혀야 하는 이유는....
데일은 정답을 떠올렸다.
"나는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할 수단이 적다. 이런 식으로 무기를 던지는 건 좋지만...."
데일은 품 안에 단검을 꺼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던졌다.
퉁!
발튼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단검은 어느새 주점 벽에 박혀 있었다.
단검 끝에는 웬 벌레가 꿰뚫려 있었다.
"오오."
발튼은 훌륭한 솜씨에 감탄을 흘렸다. 반면, 카일라는 이쪽을 찌릿 노려보았다.
데일은 그 시선을 모른채하며 말했다.
"한 번 무기를 던지면 싸움이 끝날 때까지 회수할 수 없다. 무기가 다 떨어지면 나는 무력하게 얻어맞아야 하지."
투척 솜씨에 놀라워하던 발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누가 데일 경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길 수 있겠소. 대부분의 화살은 갑옷에 닿자마자 튕겨 나갈 텐데 말이오."
"적들을 얕보지 마라 발튼."
데일이 보기 드물게 정색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차갑던 표정이 더더욱 무기질적으로 굳었다.
"어, 음. 내가 뭔가 실수한 것이오?"
데일은 더욱 표정을 굳히며 설명했다.
"예를 들어 주지. 네가 어느 숲길을 걷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서고, 바닥에는 낙엽들이 잔뜩 깔린 그런 숲이지. 주위에는 새 울음소리 하나 안 들린다. 너는 혼자고, 길을 잃었다."
"...묘하게 구체적인 예시 같소."
데일은 이어 설명했다.
"그런데 저 멀리 나무들 사이에서 갑자기 화살 세례가 날아오는 거다. 화살 하나하나에는 포탄처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잔뜩 성난 귀쟁이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 그냥 귀쟁이도 아니고, 고산에 사는 허여멀건한...."
"하이 엘프 말이군."
"그래. 그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지?"
"으음. 확실히 곤란하긴 하오."
발튼은 데일의 예시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예를 들어주지."
"아니 그럴 것까지는...."
"너는 어느 숲길을 걷고 있다. 길을 잃었지."
"또 말이오?"
"거기서 너는 하얀 귀쟁이들을 마주쳤다. 하얀 귀쟁이들은 저 멀리서 천둥 정령으로 너를 노리고...."
듣다 못 한 발튼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만! 충분히 이해했으니 그만 설명해도 괜찮소."
"아직 들려줄 예시가 몇 가지 더 남았는데."
발튼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그 예시들도 모두 하이엘프 얘기요?"
"정확하다."
"으음."
미묘한 얼굴로 콧잔등을 긁은 발튼이 말했다.
"일단 데일 경이 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소. 방금 들려준 얘기들, 모두 직접 겪은 일이오?"
데일은 어깨만 으쓱였다. 상상에 맡기겠다는 태도다.
'끄응.'
신음을 삼킨 발튼은 생각을 정리했다.
어딘가 이상한 대화였지만, 그래도 데일이 무얼 필요로 하는지 가닥이 잡혔다.
"멀리 있는 엘프들을 상대할 정도의 무기가 필요하고, 일회성은 안 되며, 또 너무 무겁지 않은 무기가 필요한 것이오?"
"움직임에 방해도 안 주었으면 좋겠다."
"으음. 잘 알겠소. 확실히. 그런 게 있으면 편리하긴 할 것 같소."
고개를 주억거리던 발튼이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어떻게 만들면 되겠소?"
아니. 애초에 그런 마법 같은 물건이 있기는 할까?
둘은 서로를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데일은 이내 생각을 깔끔히 털어냈다.
그리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듯, 무책임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나는 기술자가 아니니까."
"...."
"못하겠으면 처음엘 말했던 탈부착 칼날을...."
"아니아니아니. 이 발튼. 기술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소. 한번 내뱉은 말을 어길 수는 없소. 되든 안 되든 최대한 노력해보겠소."
의외로 발튼은 물러서지 않고 의욕을 보였다.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기세였다.
그 모습에서 데일은 한 가지를 배웠다.
'드워프들은 자존심을 긁어주면 쉽게 꼬드길 수 있군.'
발튼이 과연 어떤 장비를 만들어낼까. 과연 쓸만한 게 나오긴 할까?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데일은 손해 볼 게 없다는 점이다.
"이거, 오랜만에 어려운 과제를 받으니 피가 끓는군. 바로 오늘 밤에라도 시작해야겠소."
"비싼 재료가 필요하면 말해라. 최대한 지원해줄 터이니."
"알겠소. 맡겨만 주시오!"
쾌활하게 답한 발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곧장 밖으로 사라졌다.
짧은 다리치고는 제법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발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이 얘기 말고도 하려는 이야기가 있었소."
데일이 무표정하게 다음 말을 재촉하자, 발튼이 어색하게 수염을 비비 꼬며 말했다.
"그. 은혜를 갚으러 와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좀 민망하긴 한데.... 혹시 내 숙부를 만나주시겠소?"
"숙부? 그게 누군데."
"성함은 카달인데, 직위를 말하자면...."
발튼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외곽구역의 경비대장이오."
그리고 경비대장은 평의회의 일원이기도 하다.
* * *
지명 의뢰.
드디어 데일을 콕 집어 의뢰를 맡기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는 데일이 용병으로서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력과 실적이 입증된 용병은 대부분 지명을 통해 의뢰를 받으니 말이다.
인기 있는 용병은 그 예약이 1년 단위로 전부 채워진 이들도 있었다.
'가란드의 말이 맞았군.'
데일을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정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그 무엇보다 무력이 절실한 법이니.
다음 날 아침, 데일은 발튼과 함께 여관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름 장마의 시작이다.
이 비가 그치면, 이제 무더운 더위가 찾아올 것이다.
흘러내린 빗물은 도로 양옆의 배수로를 타고 흘렀다.
기분 탓일까? 왜인지 발튼도 배수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이쪽이 경비대 건물 방향인가?"
우비를 입은 발튼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빗물에 축축해진 앞머리가 자꾸만 눈을 찔러댔다.
"아니오. 지금 숙부께서는 밖에서 근무 중이오."
"이런 날씨에 야외근무라니, 경비대장도 할 게 못 되는군."
"하하. 차라리 야외면 낫지, 그보다 더 끔찍한 곳에서 일하고 있소."
"끔찍한 곳?"
데일은 그 의문에 대한 정답을 곧 얻을 수 있었다.
발튼이 배수로를 따라 걸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둘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건 이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
지하수로의 입구였다.
지하수로의 입구는 마치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 아가리로 빗물이 강처럼 흘러들었다.
수로의 입구 앞에는 경비병들이 피로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나 같이 삶에 지친 표정들이었다.
발튼이 다가오자 경비병 몇이 흘끔 쳐다보았다. 얼굴을 알아본 선임 경비병이 일어나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소. 경비 대장님은?"
"대장은 금방 올 겁니다."
"상황은 좀 어떻소."
"비가 많이 내려 저 아래 상황이 영 좋지 않습니다. 최소 며칠은 더 고생해야 할 것 같은데.... 뭐, 자세한 건 대장께 직접 들으십쇼."
발튼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데일에게 돌아왔다.
경비병들은 그런 데일에게 호기심을 빛냈지만, 이내 그 흥미를 꺼트렸다.
남에게 신경 쓰기에는 날씨가 너무 지랄 맞았다.
잠시 뒤.
선임 경비병의 말대로 경비대장이 지하수로에서 올라왔다.
오물을 잔뜩 뒤집어쓴 드워프의 모습은 얼핏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단단한 허리에 근육이 꽉 들어찬 팔다리.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전투 도끼와 그보다 더 번들거리는 눈빛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이 사내를 우습게 보지는 못하리라.
경비대장 카달은 고개를 젖혀 쏟아지는 비를 잠시 즐겼다.
비가 오물을 씻어내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섞인 갈색 머리가 본래의 색깔을 되찾았다.
얼추 몸이 깨끗해지자 그는 이쪽을 향해 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튼! 내 조카! 아침부터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다!!"
"숙부. 목청은 좀 낮춰도 좋아요."
"무슨 한심한 소리를 하는 게냐! 자고로 훌륭한 대장장이와 전사들은 목소리가 큰 법이야!"
발튼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옆에 있던 경비병들은 익숙한 듯이 귀를 손으로 막았다.
카달은 데일을 살폈다. 눈동자는 흥미로 빛냈다.
그는 단단한 팔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그쪽이 데일 경이군. 나는 바크만의 아들, 카달이다."
"데일이오."
"내 조카를 구해줘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지."
"이미 당신 조카가 은혜를 갚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래? 그러면 신경끄도록 하지!"
"...."
의례적인 겸양의 말도 없이, 카달은 화끈하게 말했다.
이 짧은 대화에서도 데일은 카달이 어떤 사람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허례보다는 실리를.
카달은 그런 사람이었다.
'일단 정치랑은 거리가 멀겠군.'
데일은 카달의 억센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 느껴지는 악력에 만족했는지 씩 한번 웃어준 카달이 말했다.
"자. 비도 오고 기분도 개 같은데,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겠나?"
"설명해주시오."
"어떤 개새끼가 지하수로에 악어 떼를 풀었다. 능력도 좋지. 대체 어디서 악어를 가져온 거야."
"악어?"
이레네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도시고, 당연히 하수 시설 역시 세련된 편이다.
다른 수천 년 된 도시의 지하처럼 마굴이 펼쳐져 있지 않다는 소리다.
기껏해야 고블린이나 몇 마리 살까?
그런 곳에 악어가 풀리면, 확실히 문제가 생길만했다.
특히 지금처럼 비가 내려 수위가 올라갔다면 더더욱.
카달이 말했다.
"자. 이쯤 말했으니 내가 무얼 부탁할지 예상하겠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악어를 사냥해보겠소. 수영은 자신 없지만."
"뭐? 무슨 소리인가. 그건 내 일이고."
킁! 하고 코를 푼 뒤, 맨손으로 코를 훔친 카달이 말했다.
"그쪽은 악어를 푼 그 시발 새끼를 잡으러 가 줘야겠어."
추격
* * *
살인 청부 혹은 납치 의뢰.
의외로 용병들이 자주 수행하는 유형의 의뢰로, 그 대상은 돈 떼어먹고 야반도주한 빚쟁이부터 사랑의 도피를 떠난 불륜 남녀까지 다양하다.
물론, 용병 길드는 기준 없이 살인 청부 의뢰를 허가하지 않는다.
현상금이 올라갈 정도의 흉악범. 혹은 지금처럼 그냥 내버려 두면 위험한 인물에 한해 청부 살인을 허가한다.
카달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위험한 년이다. 동물을 부리는 요상한 주문을 사용하는데, 그년을 잡으려다 경비병 셋이 죽고 다섯이 다쳤다. 그리고 기어코 도시를 탈출했지."
그때가 생각났는지, 카달은 이를 으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녀석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다. 표정이 그래.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수로에 악어를 푸는 것보다 더 끔찍한 짓을 벌이겠지. 그러니 이번에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얘기를 들으니, 최근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인물 중 하나인 듯싶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전문이 아니오."
그냥 싸우는 거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도망치는 상대의 흔적을 쫓아 추격하는 건 영 자신 없었다.
카달은 손을 휘저었다.
"걱정 마. 이미 전문가에게 부탁했으니. 놈이 추격하면 데일 경은 싸우기만 하면 돼."
"그렇다면야."
"사로잡으면 더욱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라면 너무 염치없는 거겠지. 부디, 죽은 내 부하들이 편히 눈 감을 수 있게 복수해줘."
말을 마친 카달이 어서 가보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런 의뢰의 특성상 시간이 지체될수록 성공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데일은 용병 길드를 향해 성큼성큼 이동했다. 그 옆에서 따라 걷던 발튼이 말을 걸었다.
"은혜를 갚으러 왔는데, 이렇게 부탁을 또 하게 돼서 죄송하오."
"아니. 오히려 내가 고맙다."
카달은 이미 전문가를 수배해놓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일부러 데일을 그 의뢰에 끼워주었다.
'경비 대장의 지명 의뢰를 수행했다는 실적이 나에게 생기겠지.'
이는 사실상 경비대장이 데일을 신뢰한다고 공언한 것과 다름없다.
흑기사를 선뜻 믿기는 힘들어도, 도시에서 영향력 있는 경비대장의 안목은 믿을 수 있다.
이번 의뢰만 성공시키면, 데일은 적지 않은 걸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조카를 살려준 빚은 신경 끄겠다고 하더니, 솔직하지 못하군.'
중간에 발튼과 헤어진 데일은 용병 길드 사무소로 향했다.
실내로 들어서자 이미 가란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데일 경. 카달 씨를 만나고 오는 길이시죠?"
"그렇소."
"좋은 기회입니다! 도시 경비대와 적절한 관계를 맺어두면, 이래저래 편해지니까요."
가란드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런 가란드를 데일은 묘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게임을 통해 접한 가란드는 그렇게 이타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용병처럼 자기 이익에 충실히 따르곤 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의 모습과 괴리감이 있을 뿐.
시간이 가란드를 바꾼 걸까? 아니면 가란드가 데일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걸까.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가란드는 데일을 데리고 서둘러 이동했다.
그의 걸음이 조급했다.
"촌각을 다투는 문제입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내두었습니다."
가란드가 멈춰선 곳에는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한쪽은 익숙한 얼굴이다.
하켄이 뭣도 모르는 어벙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데일을 보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 데일 경도 함께입니까? 이번 의뢰도 날로 먹.... 안전하게 할 수 있겠네요!"
하켄의 합류는 놀라운 일은 아니다. 쓸만한 방패수는 어느 조합에 넣어도 제 역할을 하니 말이다.
눈길을 끄는 건 하켄의 옆에 선 키가 멀대같이 큰 사내다.
가란드가 소개했다.
"이쪽은 마젤. 현상금 사냥꾼 겸 동패 용병입니다. 추적술의 달인입니다."
데일과 마젤이 악수를 나눴다.
"데일이다."
"...."
마젤은 말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얼굴 절반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런 외모가 특유의 과묵함과 조화되어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표정 또한 무표정이라 데일을 환영하는지, 경계하는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건 데일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사가 끝나자 가란드가 일행을 재촉했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 표적이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젤이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멍하니 있던 하켄과 데일도 그 뒤를 황급히 뒤따랐다.
하켄이 잠이 덜 깼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에 중얼거렸다.
"이런 의뢰는 오랜만인데. 그래도 뭐, 데일 경이랑 마젤 저 양반이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네요."
데일이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마젤요? 이쪽 업계에서는 유명하죠. '추적자 마젤'. 4등급 사냥꾼이자 동패 용병, 그리고 수많은 현상수배범을 잡아들인 경험 많은 현상금 사냥꾼. 그에게 한번 추적당해 무사히 도망친 놈은 단 한 명밖에 없어요."
"그게 누군데."
"누구긴요. 저 얼굴에 커다란 흉터를 만들어낸 사람이죠."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저도 잘.... 그냥 동료 용병들이 떠드는 걸 주워들은 거라."
별로 신뢰성 있는 얘기는 아니라는 소리지만.... 어쨌든 실력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4등급 사냥꾼.
비록 사냥꾼은 전투보다는 추적과 정찰, 척후에 특화된 직업이지만 그래도 4등급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적지 않은 경험과 노력을 쌓아왔다는 증거이니.
'제법 실력 있는 놈이군.'
앞서가던 마젤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가라앉은 눈이 하켄과 데일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짧게 말했다.
"...준비할 게 있다면 지금 하시오."
하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데일을 기다리며 준비는 끝난 참이다.
데일은 신전을 들를까 잠시 고민했다. 저번 흑마법사와의 싸움 이후, 아직 신전을 찾아가지 않았다.
고민하던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급하니 굳이 들를 필요는 없겠지.'
둘 다 괜찮다는 의사를 보이자,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린 마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그마한 옷조각이었는데,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옷조각을 코에 갖다 대 두어 차례 킁킁댄 뒤, 다시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켄이 신기한 듯이 말했다.
"저거. 우리가 쫓는 놈의 옷조각 맞죠? 설마 진짜로 냄새를 쫓을 줄이야. 개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재주가 아니다."
사냥꾼이 배울 수 있는 기술, 사냥감 지정.
한번 목표로 정한 상대의 흔적을 감지하는 건 물론, 사냥감을 사냥할 때 전투력 역시 증가시켜 주는 기술이다.
한 번에 한 대상밖에 지정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젤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남문을 나가 빈민가를 빠르게 지나쳤다.
비가 워낙 거세게 내리는 터라 빈민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조용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하켄이 일부러 마젤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형씨. 그놈.... 아니. 그년인가? 어쨌든 지금 어느 정도 떨어져 있습니까."
과묵한 마젤은 짧게 답했다.
"...하루 반."
"그거 다행이네. 듣기로는 경비대에서 놈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는데, 금방 따라잡겠네요?"
마젤은 고개를 저었다.
하켄은 다음 설명을 기다렸지만, 마젤을 말없이 흔적을 찾는 데에 집중했다.
무안하게 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말했다.
"거 과묵한 양반이네. 사람이 대화를 나눌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데일 경?"
"너는 좀 과묵해지는 법을 배워라."
"엑. 이래 봬도 저, 우리 마을에서는 과묵한 하켄이라 불렸습니다. 아, 제가 우리 마을 얘기한 적 있습니까? 남쪽에 있는 늪지대 근처 마을인데...."
데일은 하켄의 시답잖은 말을 무시하고 마젤의 뒤를 따랐다.
가도를 따라 계속 걷던 마젤은 어느 지점에서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 걷던 놈이 일부러 숲에 들어왔군.'
아무래도 지금 쫓고 있는 사냥감이 말을 타고 다가올 추격자를 의식한 듯하다.
'영리한 놈이야.'
좋은 소식은 아니다.
사냥감이 영리할수록, 추적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니.
'게다가 능력도 뛰어나다.'
동물을 조종하는 데다가, 경비병의 추격을 피해 도시 밖으로 도망칠 정도의 실력.
전자는 그러려니 해도 후자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중이떠중이 마법사라면 이미 카달의 도끼에 허리가 반토막이 났을 것이다.
'어쩌면 이전에 상대했던 네크로맨서랑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수준일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카달이 그토록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 영리한 놈들은 보통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일을 꾸미기 마련이다.
지금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죽여둬야 후환이 없다.
일행은 흔적을 쫓아 비에 젖은 숲길을 이동했다. 그러길 한참. 갑자기 마젤이 제자리에 멈췄다.
맨 뒤에서 따라오던 하켄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그렇게 우뚝 멈춰 서고. 하하, 뭐 곰이라도 나타났어요?"
마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을 가리켰다.
나무 사이로 커다란 흑곰이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당황한 하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한 말인데."
데일이 핀잔을 주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입을 조심해라."
반면. 마젤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어느새 손에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이. 왼손가락에는 화살 두 대가 끼어 있었다.
마젤이 말했다.
"이 곰. 흔적도 안 남기고 이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소."
"평범한 곰은 아니라는 거군."
"마법사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소."
추격자를 대비해 도주로에 맹수를 준비시켜 놓다니.
귀찮게 구는 적이었다.
마젤은 시위에 화살을 메기며 말했다.
"그냥 곰이 아닐 수도 있소. 둘이 앞에서 상대해주시오. 내가 지원 사격을 해주겠소."
"그럴 필요 없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지."
"?"
"데일 경?"
데일은 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켄과 마젤은 그런 데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흑곰은 그런 데일을 향해 낮게 울부짖었다.
무슨 마법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잔뜩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흑곰이 데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돌진이었다.
데일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흑곰을 응시하다.... 힘껏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양 손가락의 깍지를 끼었고.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향해 깍지 낀 주먹을 내리쳤다.
우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흑곰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저 옆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즉사였다.
"아니, 무슨 곰을 일격에 죽여."
"...!"
지켜보던 마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젤을 잘 아는 이들이었다면 그 모습에 신기해했을 것이다.
마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놀라지 않으며, 그 놀라움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더욱 드물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켄은 껄껄 웃었다.
"하하. 역시 데일 경이십니다. 곰을 이렇게 깔끔하게 잡다니. 이거 가죽 벗기면 값이 꽤 나가겠는데요?"
"시간이 없다."
"뭐, 그건 그렇지만요. 그럼 다시 출발할까요?"
멍하니 있던 마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데일을 쳐다보더니,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젤. 폴의 아들 마젤이오."
자기소개는 이미 하지 않았던가?
데일은 의아해했지만, 마젤은 데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이 영리한 사냥감을 쫓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다.
* * *
"헉. 헉헉."
회색 망토를 몸에 걸친 여인이 다급히 숲길을 달렸다.
그녀가 입은 하얀 셔츠의 옆구리는 이미 피로 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카달에게 당한 상처다.
어서 빨리 치유해야 한다.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인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추격자가 온다. 멈추면 안 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피 냄새를 너무 풍긴 탓일까? 수풀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큼직한 덩치를 가진 늑대 무리가 그녀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쯧. 다이어 울프인가."
짧게 혀를 찬 그녀는 등에 맨 지팡이를 꺼냈다. 오래된 나무를 꺾어 만든 듯한 지팡이였다.
여인은 오른손으로 지팡이의 매끄러운 몸을 한차례 어루만졌다.
그러자 여인의 눈이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늑대의 눈도 마주 번뜩였다.
"크르르르...."
늑대는 괴로운 듯. 바닥을 굴렀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리를 쩍 벌렸고, 그대로 가장 가까이 있던 동료 늑대의 목을 물어뜯었다.
"켕!"
당황한 동료 늑대는 뭣도 모르고 바닥에 쓰러져 낑낑거리며 발버둥 쳤다.
다른 늑대들이 달려들어 늑대를 떼어놓았다. 목덜미에 상처 입은 늑대가 다급히 저 멀리 물러났다.
그때였다.
여인의 눈이 연이어 번뜩였다.
그럴 때마다 더 많은 늑대가 동료 늑대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결국, 처음에 가까스로 도망친 한 놈을 제외하면 십수 마리의 늑대는 모두 죽거나 그녀의 하수인이 되었다.
지팡이의 힘을 사용한 여인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후우."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 없는 힘은 아니었다. 여인은 극심한 공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배고파.'
사냥. 사냥을 해서 먹이를 찾아야 했다.
여인은 하늘에 대고 코를 킁킁댔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를 포착했다.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달렸다.
이윽고 여인은 냄새의 진원지를 발견했다.
그곳은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지팡이를 든 여자는 늑대 무리를 이끌고 마을로 향했다.
추격
* * *
누군가를 추격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고된 일이다.
사냥감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기 마련이고,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린다.
살아남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두 쥐어 짜내는 것이다.
그런 사냥감을 끈질기게 쫓는 건 체력과 집중력을 모두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하켄은 숨을 헉헉 들이쉬며 말했다.
"역시, 사제를 안 데려오길 잘했네요. 사제 양반이었으면 이미 지쳐서 나가떨어졌겠는데요."
"그랬겠지."
지친 건 하켄과 마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빗속에서 숲길을 계속 헤매는 건, 경험 많은 현상금 사냥꾼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중에서 지치지 않은 건 오직 데일뿐이었다.
데일은 마젤과 하켄을 보며 말했다.
"밤이다.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류의 싸움은 단거리 경주보다는 마라톤에 더 가깝다.
사냥감이든 사냥꾼이든,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무리하게 속도를 낼 필요는 없다. 체력 분배는 필수다.
마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야영 준비를 하겠소."
"잠깐 잠깐."
하켄이 끼어들었다. 그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마젤에게 지도를 내밀었다.
"지금 우리 있는 곳이 대충 이 근처 맞죠?"
마젤은 지도를 살피며 말없이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하켄이 씨익 웃었다.
"아. 그럼 야영할 필요 없어요. 지도에는 안 나와 있지만, 이 부근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거든요."
"어떻게 아는 거지?"
"이쪽이 제 고향 가는 방향이거든요. 고향이랑 이삼일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 몇 번 교류해본 적이 있어요."
나쁘지 않은 소식이다.
하켄이 이 주위 지리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소리니까.
'어쩌면 가란드가 이것까지 고려해서 하켄을 팀에 집어넣은 걸 수도 있고.'
데일이 말했다.
"그럼 그 마을로 안내해라."
"예. 작은 마을이라 여관도 없지만, 돈만 내면 비를 피할 지붕은 내어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행은 흠뻑 젖은 몸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데일 역시 투구를 투둑투둑 때리는 빗방울에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하켄이 방향을 가늠하더니, 이내 조심스레 앞장섰다.
아무리 익숙한 지리라 해도 적이 어떤 함정을 설치해두었을지 모른다.
앞서서 마주쳤던 흑곰 같은 맹수를 맞닥뜨릴 수도 있고.
그때. 앞서가던 하켄의 어깨를 마젤이 잡았다.
"...잠깐."
"으잉?"
마젤은 멈춰 서서 바닥을 살폈다. 빗물에 다 지워져 이미 희미해졌지만, 뛰어난 사냥꾼의 감각은 사냥감의 흔적을 찾아냈다.
마젤은 하켄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놈이 가는 곳과 방향이 겹친다."
"오, 그거 잘됐.... 잠깐. 그 말은?"
마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감 역시 마을로 갔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쫓는 여인은 도시에 악어를 풀어놓을 정도의 미친놈이다.
마을 사람들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당황한 하켄이 걸음을 서둘렀다.
머지않아 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껏해야 20여 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눈에 띄는 점은 마을의 그 어느 집에서도 빛이 새어 나오거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초여름이라 하나, 계속된 비로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말이다.
"...."
데일은 말없이 검을 뽑았다.
민감한 감각이 젖은 공기에 섞인 피 냄새를 포착해냈다.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킨 하켄도 방패를 들어 몸에 밀착했다.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다.
데일과 하켄이 앞장서서 마을로 다가갔다. 마젤은 화살을 시위에 걸며 주위를 경계했다.
데일은 하켄은 가장 가까운 집의 외벽에 붙었다.
데일은 하켄에게 한차례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고민 없이 문을 힘껏 걷어찼다.
꽝!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쉽게도 박살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괴력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하켄과 데일은 실내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이런 씨발...."
"...."
집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가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문제는 그 시체의 상태다.
시체는 마치 맹수에게 물어뜯긴 듯,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마젤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빨 자국을 보니 늑대에게 물어 뜯겼소. 아무래도 그 마법사가 지금은 늑대를 몇 마리 부리는 모양이오."
셋은 나머지 집들도 살펴보았지만, 처음 집과 똑같은 광경만 펼쳐져 있을 뿐이다.
마구 뜯어먹힌 시체들.
생존자는 없었다.
마지막 집에서 흔적을 발견한 마젤이 말했다.
"여기서 잠시 머물렀군. 피가 조금 떨어져 있는 거로 보아 붕대로 상처를 감은 것 같소. 밥도 먹은 것 같고. 마을의 어떤 집에서도 식량이 없었으니, 전부 마법사가 먹었을 거요. 아니면 늑대 먹이로 줬거나."
이런 상황이지만 마젤은 냉정했다.
조금의 단서로도 꼼꼼히 상황을 분석해냈다.
어쩌면 사냥꾼보다는 탐정에 어울릴 사람이라고. 데일은 생각했다.
반대로 하켄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으니, 그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마젤은 마지막으로 사냥감이 도망친 방향을 살폈다.
"남서쪽. 여기서 남서쪽으로 갔소. 남서쪽이라면.... 늪지대군. 아마 늪지대로 도망쳐 추격을 피하려는 것 같소."
늪지대와 밀림.
추격을 뿌리치기에 그보다 적절한 장소는 없다.
아무리 용감한 사냥꾼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늪지대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니.
'지하수로에 푼 악어를 어디서 가져왔나 했더니. 늪지대였나.'
그 먼 거리에서 도시까지 악어를 데려올 정도라니. 대단한 집념이다.
대체 얼마나 도시를 미워하는 걸까?
어쨌거나 마을 하나 정도는 쉽게도 쓸어버리는 마법사다. 이대로 놓쳤다가는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없다.
"그럼...."
이후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데일은 입을 다물었다. 하켄의 낌새가 무언가 이상했다.
하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도를 부여잡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왜 그러나."
"이, 이 늪지대. 옆에 있는 마을. 보, 보이십니까?"
"그래. 근데 마을이 왜."
"여기.... 제, 제 고향인데요."
"...."
하켄의 그 말에 무심하던 마젤도 빠르게 시선을 지도로 향했다.
사냥감이 지금까지 나아간 경로.
그리고 목적지인 늪지대에 줄을 그으니, 정확히 걸리는 마을이 하나 있으니.
그곳이 바로 하켄의 고향이었다.
과연 짐승 떼를 몰고 다니는 그 마법사가 하켄의 고향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그 답은 이미 주위에 있다.
데일은 널브러진 시신과 고요에 둘러싸인 마을을 둘러보았다.
하켄의 고향 마을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하켄도 잘 알았다.
하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얼른 쫓아야 합니다. 그 새끼가 우리 마을을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마젤이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휴식을 취할 때요. 무리해서 이동해봤자, 쉬고 제대로 된 상태로 쫓는 것만 못하오."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하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내 일 아니라 이거지? 그쪽이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
"진정해라 하켄."
"지금 진정하게 생겼...."
데일은 하켄의 어깨를 잡았다.
버럭 화를 내려던 고개를 들어 데일을 보았다. 데일이 하켄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정이 안 돼도 진정해야죠. 예."
하켄은 진정했다.
이 흑기사가 풍기는 섬뜩함은 집 나간 이성을 곧바로 되찾아주는 힘이 있었다.
풀이 죽은 하켄은 마젤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당신 탓이 아닌데, 화풀이를 해 버렸어요."
"...이해하오."
셋은 그나마 시체가 적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가구를 부숴 불을 피우고, 젖은 몸과 옷을 말렸다.
하켄은 우울한 얼굴로 화로의 불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개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데일도 투구를 벗고 갑옷에 묻은 물기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녹이 슬 일은 없지만,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마젤은 활의 시위에 혹시 상한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축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곳에 그걸 신경 쓰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 시간에 흐른 뒤.
마음을 추스른 하켄이 지도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마을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데일과 마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쉬이 확답할 수 없는 문제다.
쫓고 있는 여인은 지금 상처 입었다.
도망치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고, 일행과의 거리도 분명히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여인이 마을에 닿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둘의 침묵에 하켄이 초조하게 말했다.
"이, 이대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속도를 높일 방법을 찾아야 해요."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
"지름길. 지름길을 이용하는 겁니다!"
하켄은 지도를 활짝 펼쳤다.
그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이곳저곳을 짚으며 설명했다.
"그 녀석도 늪지대까지 일직선으로는 못갈 겁니다. 중간에 지형이 지랄 맞은 곳도 있고, 위험한 곳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위험지대를 지나쳐서 앞지르자?"
"그, 그렇죠. 그렇게 해서 미리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어떤가요?"
하켄이 절박한 눈으로 마젤과 데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젤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 잊은 것 같으니 말하겠소. 우리가 받은 의뢰는 마법사를 추적 후, 사살이나 생포하는 것이오. 마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켄은 입을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냐는 표정이다.
그러나 마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녀석이 갑자기 진로를 틀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려고 그러오. 우리가 다른 길로 앞지른다면, 마법사의 흔적을 잃어버릴 텐데."
"그, 그건."
반박하기 어려운 정론이었다.
괜히 다른 길로 갔다 마법사의 흔적을 놓쳐, 혹 놓치기라도 한다면? 더 끔찍한 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마젤은 차분히 근거를 들며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포기하라고.
하켄의 사정은 딱하다.
하지만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는 건 마젤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베테랑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거다.
하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손만 덜덜 떨었다.
그 역시 지금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하켄은 이제 거의 울먹거리는 얼굴로 데일을 보았다.
"데, 데일 경은 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마젤의 의견이 옳은 것 같은데."
"아...."
좌절한 하켄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켄은 무릎을 기어 다가와 데일의 손을 꼭 붙잡았다.
"도와주십시오 데일 경!"
절박한 목소리다.
"데일 경. 압니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 부탁을 하는지. 저 우습게 보일 거 압니다. 이레네로 올 때 쓸모없는 사람들을 버리자고 하던 놈이, 이제 와서 도와달라니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데일이 탄 마차가 오드아이의 습격을 받고 위험에 처했을 때.
하켄은 쓸모도 없는 생존자들을 데리고 오는 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 놓고는 이제 마을 사람들을 살려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데일에게 관련이 없기는 마차 승객이나, 마을 사람이나 똑같은 데 말이다.
누군가는 그런 하켄을 비웃을 거다. 꼴 좋다고. 뿌린 대로 거뒀다고 말할 거다.
하지만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사람이 원래 그렇지.'
관계 없는 타인에게는 한없이 무관심하지만,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따뜻해질 수 있는.
그런 양면성을 지닌 게 바로 사람이다.
"부탁입니다. 도와주세요 데일 경! 도와만 주신다면 이 은혜,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평생 하인으로 살아도 좋으니까요. 가족들을 지킬 수 있게...."
애원하던 하켄은 뒤로 갈수록 흐느끼더니, 마지막에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족이라....'
데일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조부와 어린 동생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반언데드가 된 지금도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소중한 이들.
하켄에게는 가족이 어떤 의미일까. 데일과 비슷할까?
데일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평생 은혜를 갚겠다는 말. 밤의 여신을 따르는 신도들은 계약에 철저하다."
"엇...! 무, 물론입니다."
하켄은 제법 쓸만한 방패수다. 빚을 지워둬서 손해 볼 일은 없다.
데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도와주겠다."
"데일 경!"
"!"
하켄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옆에서 듣던 마젤도 매우 놀랐다.
오늘 만 두 번이나 놀랐으니, 마젤의 인생에서도 몇 없는 특이한 날이라 할 수 있다.
마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특이한 흑기사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하켄은 데일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눈물까지 흘릴 기세라, 데일은 냉정히 손을 뿌리쳤다.
"이제 그만 징징거려라. 듣기 싫으니까."
"어, 음. 네."
차가운 태도에 잠깐 서운한 얼굴을 한 하켄이 다시 표정을 풀었다.
어쨌거나 데일이 도와준다는 게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고마웠다.
물론, 오늘의 은혜는 훗날 몇 배로 갚아야 하겠지만....
하켄이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지도를 살폈다.
목표가 바뀐 만큼 계획도 다시 세워야 했다.
'이 부분을 앞질러서 미리 마을에 가 있는 다라.'
하켄이 가리킨 지름길은 다름 아닌 산이었다.
확실히, 산을 빙 둘러가는 것보다는 직접 가로지르는 게 시간이 훨씬 단축될 듯하다.
'근데 그건 마법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용하지 않는 길이라면, 이유가 있을 거다. 데일이 물었다.
"하켄. 근데 여기에 뭐가 있길래 피하려는 거지? 몬스터라도 있나?"
고개를 끄덕인 하켄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거인입니다!"
데일과 마젤은 동시에 하켄을 노려보았다.
추격
* * *
거인.
인간과 생김새는 비슷하나 그 신장이 족히 두 배는 큰 괴물들.
타고난 괴력은 물론이고 나름대로 지능도 있어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다.
하지만 괴력과 지능은 거인의 가장 큰 무서운 점이 아니다.
이 세상에 똑똑하고 강한 괴물은 널리고 널렸다.
거인들이 골치 아픈 점은 따로 있다.
절대 원한을 잊지 않는다는 것.
어찌어찌 거인을 사냥한다 해도, 그 동료나 가족들은 대를 이어 원한을 기억하며, 복수에 성공할 때까지 잊지 않는다.
망나니 왕자가 거인을 잘못 건드렸다가, 몇 세대 뒤에 왕국이 멸망한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 너무나 유명하다.
그렇기에 거인의 영역이 있으면 그냥 피해 가는 게 상책이다.
맞닥뜨렸다가 싸우는 것도 골치 아프고, 싸우다 죽여버리면 더욱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무감정하던 마젤의 눈이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곳에 거인이 있다는 걸 먼저 말했어야 하지 않소."
"그, 하, 하하. 음. 면목이 없습니다."
하켄은 변명도 못 하고, 그저 눈알만 또르르 굴렸다. 이제 와 데일이 결정을 번복할까 걱정되는 탓이다.
데일은 생각에 잠겼다.
'도시에서 남쪽 산에 있는 거인 가족. 그래. 게임에서도 몇 번 마주쳤었지.'
사전 정보 없이 잘못 들렀다가는 끔찍하게 살해당할 수 있는 지역이라 기억에 남는다.
다만, 거인은 소문처럼 그렇게 흉악하기만 한 이들은 아니다.
"거인의 영역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그게 뭡니까."
하켄이 화색을 띠며 물었다.
마젤도 꽤나 궁금한지,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데일이 설명했다.
"첫 번째 방법은 통행세를 내는 거다."
"토, 통행세 말입니까? 돈 같은 걸 내면 됩니까?"
"아니. 거인에게는 소나 양 같은 가축을 통째로 바쳐야 한다."
거인은 식성이 좋다. 그리고 고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직접 가축을 기르기도 하지만, 고기는 언제나 부족하다.
하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 양이라.... 가격이 꽤 나가겠지만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낼 수 있습니다!"
"그 가축을 지금 어떻게 구할 생각이오."
마젤의 지적에 하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음. 근처 마을에서...."
"그러면 또 시간이 끌릴 것인데, 그건 마법사를 앞지른다는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 아니오?"
마젤의 말이 옳았다.
어느 세월에 통행료로 사용할 가축을 구하겠는가. 심지어 그 가축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도 일이었다.
하켄이 다시 데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있다. 거인과 내기를 하는 거다."
"내기. 말입니까?"
"거인과 승부를 걸어 이기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내기라니...."
잠시 내기에 대해 생각하던 하켄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내기에서 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데일은 곧바로 답했다.
"죽는다. 바로 잡아먹히거나, 노예로 부려지다가 잡아먹히거나."
"엑."
하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인들과 내기를 벌여 이기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데일은 거인을 상대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난 이미 몇 번이고 거인과 내기를 이긴 적이 있다."
"그, 그게 진짜입니까?"
"그래."
그제야 하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에 마젤은 내색하지는 않을 뿐, 속으로 감탄했다.
'놀랍군. 거인에 대한 정보는 나도 잘 모르는데.'
특기는 추적이라 하나, 그 역시 업계에서 잔뼈 굵은 용병이다.
그런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데일이 알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신이 난 하켄이 말했다.
"그러면 정해졌네요. 거인의 영역으로 마법사를 앞지릅시다."
"그러면 나는 이대로 계속 추적하겠소. 마법사가 중간에 경로를 틀 수도 있으니 말이오."
"혼자서 괜찮겠나?"
데일이 묻자 마젤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마치 난생처음 웃어보는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였다.
"나는 원래 혼자 일하오. 카달이나 가란드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혼자 일했을 거요."
"싸움에 자신 있나 보군. 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싸움엔 자신 없소. 하지만 이건 싸움이 아니라 사냥이지 않소?"
대단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이 사냥꾼에게는 그 자신감에 걸맞은 실력이 있을 것이다.
마젤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가란드에게 모두 보고할 것이오."
"알았다. 만약 너 혼자서 마법사를 사냥한다면, 우리 몫의 의뢰비까지 다 네게 주겠다."
"사양하지 않겠소."
지금 하켄과 데일의 행동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같은 팀원인 마젤의 의사를 무시했으며, 자칫 의뢰를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마젤은 둘이 무슨 일을 하든 묵묵히 자기 역할을 했다.
질질 짜는 하켄을 보면서도 늘 이성적이게 판단했고, 옳은 건 옳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자칫 남들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지만, 마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데일은 그 점을 높이 샀다.
'나중에 같이 일해도 나쁘지 않겠군.'
계획이 정해지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하켄은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감았고, 마젤과 데일은 무기를 손질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숨 막히는 침묵은 아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