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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1만 5천 오크 군세의 침략.

이는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압도적인 숫자. 인간을 넘어선 우월한 신체 능력으로 그들은 인류의 개척지인 퀴리를 밀어붙였다.

1만이 넘는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몬스터 중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오크, 그것도 군 훈련을 받은 오크의 공격에 퀴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터였다.

분명, 그 속에 있는 12만에 이르는 시민들은 짙은 안개에 먹혀들고, 녹색 아인들에게 학살당해 먹이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운명을 벗어나게 되었으니.

혜성처럼 등장한 [퀴리의 구원자] 덕분이었다.

롬 왕국의 근위 기사이자 대공가의 적녀인 샬럿 엘스포드를 구출.

그리고 수천의 오크 군세를 돌파.

퀴리의 장벽을 뛰어넘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퀴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화력이 뿜어져 나왔고, [퀴리의 구원자]의 지휘 아래에 도심에 침입한 오크 떼도 격파되었다.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피난을.

하지만, [퀴리의 구원자]의 예언대로 외문이 뚫렸고 또한 만약을 대비해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퀴리의 구원자]는 스스로 오크 군세.

그리고 마인을 막아 세웠다.

장렬한 전투.

끝내 그는 마족으로 각성한 괴물과 함께 전장에서 숭고한 희생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희생 덕분에, 무려 7만 8,000명이라는 피난민이 리바이트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영웅담이 슈하림 제국에 퍼져 나갔다.

리바이트의 피난민 구역에 천막이 지어지고, 7만 명이 생활할 임시 터전이 만들어졌다.

아무래도 좁은 땅덩어리지만, [퀴리의 구원자] 덕분에 살아남은 것은 사실이고, 난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리바이트의 북부, 상가 지역 너머 피난민들이 모여든 구역 가운데에 동상과 함께 퀴리 영지에서 전사한 자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전사자 이름이 촘촘하게 새겨지고 그 비석 위로 [퀴리의 구원자 아몬]의 동상이 우뚝 세워졌다.

'세한 퀴리' 백작과 함께 등을 진 채 늠름하게 서 있는 낡은 갑옷의 기사 '아몬'의 동상.

드워프와 마법사들이 공들여 세운 그 비석을, 샬럿이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몸에서 느껴지는 흐느낌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몬이라는 고결한 기사는 자신에게 빚만 남긴 채 이 세상을 떠났다.

퀴리 영지가 점령당한 지 일주일.

그의 시신을 찾고자 다시 그 선로를 찾아갔지만, 그 일대는 커다란 구덩이만 있을 뿐.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빛기둥과 함께 소멸했으리라.

'내가 약했기 때문에….'

샬럿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샬럿 님."

샬럿은 뒤를 돌아봤다.

직스가 있었다. 그는 휠체어를 탄 채, 손에는 검 대신 목발을 들고 있었다.

그를 보좌하듯 에인헤르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상태였다.

퀴리 영지의 전쟁은 참혹했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수많은 참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희생마저 있었다.

그리고 샬럿은 전신에 깊은 상처와 함께 왼쪽 눈이 멀어 버렸다.

직스는 다리뼈가 으스러져, 더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리바이트 영지의 최고 의료인, 네크로맨서 스웨인 원장의 의견이었다.

그의 의견이 틀릴 리는 없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의 부름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이틀 내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퀴리 영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녀와 직스는 황도에 초대받았다.

대 마도 제국, 슈하림의 위대한 지배자.

황제의 부름에 응해, 그들에게 훈장을 하사받기 위해서였다.

샬럿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따위 훈장이 뭐라고, 훈장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건만!

하지만 아무리 불만을 토해 내도, 이미 바꿀 수 없는 결과였다.

"다시 올게요."

그의 유해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 그의 영혼이 이 비석에 있을 리 없었다.

유품도 없으니, 그의 영혼이 이곳에 정착할 리 없겠지.

하지만 이름뿐이라도, 그렇게 사죄를 해야 샬럿은 비로소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강해질 거야.'

다시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그 누구보다도.'

샬럿은 결의를 다진 채 걸음을 옮겼다.

***

각자 전쟁을 겪은 뒤, 그들의 성향과 결심이 달라졌다.

그중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한때는 평민들이 부러워하는 귀족의 삶을 사는 자작가의 도련님이었고, 아카데미에서는 콧대 높은 건방지고 철없는 도련님이었다.

남들을 깔보며 하찮게 여기던 이.

셀롬 아스톤.

그 또한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저지른 악행에 심판을 받은 듯 나락에 빠졌고, 그의 신분 또한 노예보다 한 단계 높은 농노가 되었다.

그는 퀴리 영지의 영주 소유의 도구가 되었으며, 미개척지의 벌목꾼이 되었다가 전쟁 병사가 되었다.

그리고 한 모험가, 아몬에게 구해졌다.

또한.

"셀롬 아스톤. 그대의 공로를 슈하림 황가에서…."

셀롬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난민 캠프에서 조금 떨어진 곳, 빈민가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넓은 홀에 우뚝 세워진 기사 동상이 보였다.

[퀴리의 구원자 아몬]. 자신을 구해 준 방랑 기사 같은 인물이었다.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어렸을 때 동경했던 어머니가 들려준 동화 속 이야기의 용사와 흡사했다.

그때의 생생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오크의 무기를 튕겨 내고, 단 한 손으로 오크의 복부를 꿰뚫어 날려 버리는 그 위풍당당함.

-가라.

그 짧고 굵은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이를 인정하며, 그대에게 귀속된 농노가 아닌, 슈하림 제국의 자유민으로서 평민 신분을 하사…."

그리고 셀롬은 그때 생존해 아버지를 구하고.

또한 수만 명에 이르는 이들을 구하는 공을 세우게 되었다.

단지 라이트 마법으로 미개척지 숲속을 인도하는 역할이었지만.

[퀴리의 구원자 아몬]과 비교해 보잘것없는 행동이었지만.

-아저씨, 고마워요!

한 아이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고맙네! 자네 덕분에 살았어!

기사들에게 인정받았으며.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수많은 난민이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야!

셀롬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러면 저흰 뭘 먹고 삽니까!

-아, 아이구, 셀롬 도련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해야지요. 물론입니다. 하, 하하!

-빌어먹을 새끼야! 니가 사람이야? 어! 사람이냐고!

여태껏 그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시선과는 다른, 동경과 존경이 담긴 눈빛들.

어렸을 때 봐 왔던 원망이 담긴 눈빛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그 눈빛들에 셀롬은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메스껍다. 구역질이 났다.

익숙하지 않은 시선 속에 셀롬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솟구쳤다.

그들의 동경과 감사는 자신이 아닌, 퀴리의 구원자가 받아야 마땅한데!

황가에서 내려진 공문을 읽던 기사는 흠칫 놀라며 셀롬을 바라봤다. 그리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공문을 다 읽고는 눈물을 흘리는 셀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그대는 퀴리를 구한 영웅 중 하나이니."

셀롬은 울음을 터트렸다.

***

"음…. 아서 군은 오늘도 무단결석이로군. 성실한 아이인 줄 알았건만…."

마법학과 교수 링컨이 아쉽다는 음성을 내뱉었다.

"...."

카를라는 강의실 좌석에 앉아 눈을 깜빡거렸다.

기초 마법학 강의가 시작되었음에도, 그녀의 귓가에 교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강의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흐응~, 아서는 오늘은 쉬나 보네? 의외로 불성실한 사람인가?"

옆자리, 클래스 메이트인 프리다가 장난스레 말했다.

다만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감정을 알려 주는 듯 긴 엘프의 귀가 축 늘어졌다.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하긴, 요즘 뒤숭숭했으니까. 근데 그 사람도 그런 거에 신경 쓰는 걸까?"

외로운 사람의 특징일까?

프리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 음성은 카를라의 귓가에 닿았다.

'불성실?'

카를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아서 황자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매번 아침 운동을 나오고, 틈틈이 책을 읽고, 조수로서 책임감 있게 교수님을 보좌했다.

또한 요리를 즐기며, 화장실-지하수로- 청소 또한 직접 하는 인물이었다.

카를라가 봐 온 성실함의 표본인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이 아무런 사유 없이 무단결석을 할 리 없었다.

-카를라, 혹시 아몬이라는 자에 대해 아느냐? 세한 퀴리 백작님께서 나에게 묻더구나.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너를 통해 편지를 썼다고 하더구나.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 내용이었다.

아마도 오크의 군세가 퀴리 영지에 침략하기 전 보냈던 편지 같았다.

그리고 그 편지 속에서는 '아몬'이라는 낯선 인물에 대해 언급되어 있었다.

'아몬?'

그게 누굴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카를라 그리치. 당신의 그림자 기사, '아몬'이 퀴리 영지에서….

그리고 일주일 전, 샬럿 엘스포드.

기사학과 3학년 선배님이 찾아와 세한 퀴리 백작의 숭고한 희생 소식을 전해 주었다.

또한 아몬이라는 자에 대해서도.

하지만 카를라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아몬'이라는 자는 없었다.

카를라는 습관처럼 엄지를 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도대체 어머니와 샬럿 선배님은 왜 자신에게 '아몬'이라는 이름 모를 인물에 관해 묻는 거지?

그러다 문득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너를 통해 편지를 썼다고 하더구나.

카를라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방금 강의를 하기 전 교수님이 한 말.

-음…. 아서 군은 무단결석이로군.

샬럿이 한 말.

-'아몬'이 퀴리 영지에서….

그리고 오크의 침공 소식이 전해진 이후, 아서가 자신에게 했던 말.

-카를라, 휘장을 빌려줘.

"아!"

그녀의 머릿속에 작은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카를라는 검지를 물던 입을 벌렸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몬은?

아서 님은?

아몬 = 아서?

카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로 마나 배열…. 응? 카를라 그리치 양? 무슨 일이지? 질문이라도 있나?"

카를라가 멍하니 서 있다가 마법 강의 중인 링컨 교수를 쳐다봤다.

"아…. 그게…."

"그래, 뭔가?"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볼… 일을…."

"...."

링컨 교수가 입을 다물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 갔다 오거라."

카를라는 조용히 강의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복도를 질주했다.

'안 돼-!'

카를라의 눈이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샬럿 선배님이 아몬이라는 자가 전사했다고 했다.

아몬이 마족으로 각성한 괴물을 막았다고.

만약 아몬이 아서 황자님이라면?

카를라는 이를 악물며 아카데미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향한 곳은 아서가 있는 자택이었다.

조수 일을 하다 보니, 그가 사는 곳 또한 알 수 있었다.

카를라는 급히 문을 두들겼다.

"아서 님! 아서 님!"

쿵쿵-!

하지만 반응이 없다.

카를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진짜로…!

카를라는 겁에 질려 양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아버지, 세한 퀴리 백작, 그리고 이제는 아서 황자님까지.

자신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마치 저주처럼.

공포와 불안이 그녀의 이성을 잠식시켰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안 돼. 안-!"

"…카를라 그리치?"

카를라는 멈칫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장신의 사내가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

그 안엔 파와 양파, 감자와 온갖 채소, 그리고 큼직한 닭고기가 들어 있었다.

아서 아난시아.

그가 놀란 눈빛으로 카를라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아서 니이이이임~!!"

카를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

"저기….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카를라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서는 걱정해 물었지만, 카를라 그리치는 그에 따른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길 잃은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카를라는 안정을 되찾았다.

눈물을 닦아 내고 간소하기 짝이 없는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정면을 주시했다.

앞치마를 두른 채 냄비에 무언가를 끓이는 아서가 보였다.

'어? 어?'

진정이 되자, 카를라는 혼란이 찾아왔다. 아리송한 머리를 이해하고자 이마를 짚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서 님은…. 오늘 강의에…."

"응? 아, 미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말이지. 아카데미에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좀처럼 쉽지 않더라고."

"오늘…. 어디 갔다 오신 건가요?"

"시장을 보고 왔지. 몸살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면역력이 약해져서인지 감기에 걸렸지 뭐야. 집에는 먹을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며 시장을 갔다 왔어."

"많이 피곤하실 텐데 제가 요리를…."

말을 하던 카를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

귀족 영애로서 배우는 교양 과목에도 요리는 없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은 할 힘이 남아 있으니까."

"...."

카를라는 한동안 아서를 쳐다봤다.

자신을 구해 줬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의 뒷모습.

참으로 가정적인 남자다.

하지만 전투 때 그의 압도적인 힘을 봤던 카를라는, 이번 사건인 퀴리 영지에 관해서도 그가 연관된 건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어머니, 샬럿, 세한까지 모두가 '아몬'을 언급했고, 그 연결점의 중심에는 아서가 있었다.

카를라는 용기를 내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서 님."

"응?"

아서는 뒤를 돌아 카를라를 쳐다봤다.

카를라는 조심스러운 초식 동물처럼 아서의 눈치를 살폈다.

"아몬…이라는 사람."

그리고 힐끗 아서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아서 님이신가요?"

제34화

아서가 리바이트 영지의 자택으로 돌아온 건 이틀 전이었다.

쌓이고 누적된 피로로 꼬박 이틀 동안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아침이었다.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북부 시장에 들렀던 그는 덤으로 드워프의 무기점을 찾았다.

-자네, 살아 있었나?

[깡깡! 어서 오게나~!!]라는 무기점의 주인. 드워프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눈앞에 서 있는 아서를 쳐다봤다.

-그것도 사지 멀쩡히 돌아다니며 시장을 보고 온 겐가? 그전에 자네가 그 퀴리의 구원자일 줄이야! 그럼 그대의 이름은 아몬이겠군.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자네 무구를 만든 게 나라네. 내가 만든 무구를 몰라볼 리가 있나?

무구? 무구와 자신이 아몬인 거랑 무슨 상관일까?

-아…. 음…. 자네는 모르나 보군.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무슨 소식을 말하는 것일까?

-자네, 무덤이 만들어졌네.

-...?

-빈민가와 난민 캠프 중앙에 동상과 함께 전사자들의 비석이 세워졌지. 그곳에 자네의 이름 또한 새겨져 있었네.

-…착각 아닙니까?

-착각? 자네 무구를 만든 게 나야. 동상에 만들어진 무구의 생김새가 완전 판박이더군! 특히 자네에게 준 대검이 흔히 쓰이는 줄 아나?

-....

-그…. 뭣이냐. 자네, 악령이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허, 그럼 생사람을 저승으로 보낸 셈이로군. 어쨌든 다시 찾아왔다는 건 무구를 구하고 싶은 거겠지? 급한 게 아니면 내 새로 맞춰 주지! 자네 덕분에 내 지인도 살았으니까. 퀴리에는 내 단골 상인이 있었거든. 그가 난민 대열에 있었지. 이것도 인연이겠다, 인건비는 받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주문부터 넣고 가죠. 필요한 건 투구와 갑옷, 로프, 그리고 창과….

통 큰 제안이었다.

드워프의 말을 들은 아서는 자리를 옮겼고, 난민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사자 명단과 함께 우뚝 세워진 동상.

프랑스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연상케 하는 동상이다.

왼손에는 [영광의 깃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대검을 쥔 낡은 갑옷과 망토를 두른 사내의 늠름한 모습.

그 동상 아래의 비석에는 [퀴리의 구원자 아몬. 편안한 안식을 취하다.]라는 찝찝하기 짝이 없는 문구가 적혀 있다.

…누구?

멀쩡히 살아 있던 아서는, 자신의 유해 없는 무덤을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아몬…. 이라는 사람."

"...."

"혹시 아서 님이신가요?"

카를라 그리치.

퀴리에 없던 그녀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아서는 혼란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퀴리 때의 피로에 휴식이 필요하건만.

리바이트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세한 백작이 그녀에게 말한 걸까?'

아니, 그렇담 퀴리 침공 전에 그녀가 물었겠지.

그것도 '아몬이 아서 님이세요?'가 아닌 '아몬이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카를라가 이렇게 '아몬이 아서 님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아몬이라는 것을 거의 확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안 걸까?

샬럿이나 직스야 '아몬'을 만났지만, 카를라는 만나 보지도 못한 상태이거늘.

아서는 의아함에 카를라를 쳐다봤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카를라의 눈빛에 아서는 난민 캠프에 있는 동상을 떠올렸다.

'아, 그런 거군.'

아서는 쓰게 웃었다.

카를라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알았는지는 몰라도, 아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전사자 명단'을 봤을 것이다.

울음을 터트린 것도 자신을 걱정해서겠지.

'하하!'

아서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카를라와 함께 조수로서 역할을 성실히 해 온 만큼, 아카데미에 있을 때마다 그녀와 함께했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걱정해 찾아왔고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나라는 인물이 카를라 그리치라는 이 소녀에게서 인정을 받았다는 거겠지.

하지만.

"...."

아서는 미소를 지은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몬'이라는 신분은 자신이 움직이기 위한 제2신분이다.

그걸 카를라에게 말해서 좋을 게 없다. 물론 카를라가 자신이 '황자'라는 걸 '모르고' 있을 테니까. 알려 줘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황가의 형제들에게 이야기가 셀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는 게 좋다.

'나는 이 아이를 신뢰하지 않는 거로군.'

이 소녀는 자신을 신뢰했지만, 자신은 오히려 거리를 벌리고 경계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면 이 소녀는 매우 섭섭해하겠지.

그렇기에 '아니다'란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토록 자신을 걱정해 자택까지 찾아와 울음을 터트린 아이에게 거짓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

아서는 침묵했고, 카를라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카를라는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를 했다.

'아몬이 누구인가요?'라고 질문을 해야 했건만. 혼란스러운 머리는 '아몬=아서' 인식이 강해 그렇게 질문하고 말았다.

그가 '아니다'라고 하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침묵했다는 건 긍정을 뜻했고 부정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서가 '황자'임을 '알고 있는' 카를라로서는, 그가 무언가를 위해 숨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히 황가에서의 '망나니'와는 다른 소문이 있는 만큼, 깊은 뜻이 있는 거겠지.

그런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카를라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기쁨을 느꼈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 때,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매번."

아서는 카를라를 쳐다봤다.

눈물을 흘려 퉁퉁 부었던 눈이 다시 이채롭게 반짝였다.

습기가 찬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만 하네요."

"...?"

"들었어요. 죽은 마족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

자신의 아버지, 로한 그로치.

그는 미개척지에서 퀴리 영지를(퀴리 영지에서) 괴물 같은 존재에게 습격당했다.

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그저 유품만을 무덤 속에 파묻어야 했다.

앞으로도 그 시신은 찾지 못하겠지.

하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원한을, 눈앞에 있는 이 사내가 풀어 준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감사해요."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서는 쓰게 웃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답도 해 줄 수 없었으니까. 그저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주는 게 전부였다.

그때, 냄비에서 물이 흘러넘쳤다.

"아! 아서 님. 수프! 수프!"

"...!"

아서는 급히 냄비를 들어 올렸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고소한 냄새가 나네요? 도대체 어떤 요리죠?"

카를라가 퉁퉁 부은 눈가로 미소 짓고 있다.

스스로 말을 돌리며 분위기 전환을 하는 것에 아서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도 아서가 난처해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아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삼계탕이야."

몸보신에 이보다 좋은 것도 없었다.

***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햇볕이 내리쬐는 화창한 아침.

"카를라 아가씨. 아침입니다."

카를라는 4명이 뒹굴어도 될 듯한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하녀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맞이했다.

카를라가 몽롱한 상태로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고, 하녀들은 잠에서 덜 깬 그녀의 아침 단장을 준비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가지고 와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씻겼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빗으로 부드럽게 빗기고,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아직도 몽롱한 카를라가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지만, 그게 일상인 양, 하녀들은 정성껏 그녀를 돌봤다.

잠옷을 벗기고 아카데미 제복을 입힐 때가 되면, 카를라는 두 눈을 번뜩 뜨며 제정신을 차렸다.

"아, 나 지금까지 잔 거야?"

카를라의 질문에 하녀들은 웃을 뿐이었다.

"아…. 운동…!"

아침 운동을 잊고 말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한 백작의 희생에 대한 카를라의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갔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지만, 계속 끙끙 앓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생일 때마다 세한 백작이 보내 준 봉제 인형이 쌓인 서재를 바라보았다가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가씨."

"아! 혹시 나중에 요리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네? 그야…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하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카를라는 리바이트 아카데미로 향했다.

금일, 아서와 함께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같은 동료이자 친구로서,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에인헤르, 이들은 황제 폐하의 산하에 있는 군대다. 타 영지에 배속된 영주들은 그들을 '임시'로 지휘할 권한이 있지. 즉, 영주들이 에인헤르를 지휘하며 반란을 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거다."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말을 이어 갔다.

"이 중에서도 [군사학과] 지망생이 있을 거다. 4년제인 [기사학과], [마법학과], [보조학과]와 달리 [군사학과]는 2년제로 실행되며, 2학년 군사학과를 졸업하면 에인헤르로 군 복무를 지게 될 거다."

"...."

"너희 성적을 잘 유지하는 게 좋을 거다. 성적에 따라 에인헤르의 계급도, 발령될 영지도 달라니까. 이제 곧 '중간고사'이기도 하니."

"...."

카를라는 손에 쥐고 있던 필기구를 떨어뜨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간고사' 기간이 시작되었다.

***

아서는 눈을 깜빡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초록빛 잔디들이 바닥에 깔렸다. 풍성하게 자란 풀잎들이 나른하게 흔들렸다.

분명 천장이 유리로 되어 바람이 통할 곳이 없건만.

이 '정원'과 같은 '도서관'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듯했다.

바위로 된 계단을 따라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짙은 풀잎 냄새가 풍겨 왔다.

층층이 나무줄기로 된 다리가 놓여 있고.

도마뱀 모양의 불의 정령이 바위 위에서 혀를 날름거린다.

참새를 형성화한 바람의 정령이 호기심 담긴 눈빛으로 아서를 내려다봤다.

물고기 모양의 물의 정령은 물가를 헤엄치고, 거북이 모습을 한 대지의 정령은 길게 하품을 한다.

우뚝 솟은 나무들 사이로,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한 서재들.

이게 과연 건물 내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궁전과 같은 리바이트 아카데미, 그 중앙에 있는 마탑, '위그드라실 도서관'.

63층이라는 거대한 높이를 자랑하는 그 건물은, 그 내부 또한 웬만한 대귀족의 저택보다도 훨씬 넓었다.

'마나가 상당하다.'

정령들이 지내는 곳이라 그런 것일까?

맑고 순수한 마나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마나 컨트롤 훈련을 한다면 상당한 성장을 이룰 터였다.

아서는 걸음을 옮겼다.

층층이 올라갈 때마다 기후와 온도가 바뀌었다.

얼음의 정령이 사는 곳은 강가에 살얼음이 떠 있고 눈보라가 쳤다.

불꽃의 정령이 있는 곳은 사막처럼 건조하고 땅이 메말라 있었다.

다양한 기후를 겪으며 발걸음을 옮긴 그는 맨 꼭대기 층.

63층에 도달했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정원 같은 곳이었다.

또한 그곳에는 엘프의 왕국 엘리니아의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얻어 기른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있다.

마치 하늘 정원처럼, 나무뿌리를 지탱한 채 떠 있는 작은 섬 위에 30m가량의 작은 위그드라실을 그늘 삼아 정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총장님."

리바이트의 영주이자 아카데미의 총장.

7서클 대마법사, 프롤론 리바이트.

쭈글쭈글한 주름진 얼굴을 가진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골치 아픈 일거리들을 떠맡아 고민 중이라는 게 훤히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님. 음, 분명 피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소리는 했습니다."

총장 프롤론이 존대를 했다.

이는 '아서 아난시아'가 아닌 '아서 슈하림', 황자에게 하는 물음일 것이다.

"하지만…."

프롤론은 눈 근육을 꿈틀거렸다.

"7만. 정확히는 7만 8,075명이나 되는 피난민일 줄은 몰랐습니다."

"...."

"그것에 대해 의논하고자 합니다."

프롤론은 아서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저는 확신했습니다. 아서 전하.'

망나니라 소문났던 인물.

그가 피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물었을 때, 프롤론은 기껏해야 수천 명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7만이다.

망나니 황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7만의 피난민을 살려,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문으로는 '퀴리의 구원자'를 필두로, 세한과 샬럿이 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눈앞에 있는 4황자 아서가 '퀴리의 구원자'와 연관된 인물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몬.

퀴리 사건의 중심인물.

그가 카를라의 그림자 수호 기사라는 정보를 샬럿에게 이미 들은 뒤였다.

'하지만 아니다.'

이런 데에서는 둔한 샬럿이 무언가 큰 착각을 한 게 분명했다.

아몬이라는 자가 그리치 가문의 그림자 수호 기사?

절대로 아니다!

결국 프롤론은 한 가지 사실에 도달했다.

'아몬이라는 자.'

그래, 아몬이라는 자의 정체는…!

'4황자, 아서 슈하림. 그의 그림자 수호 기사다!'

제35화

"아나, 이것들 바보 아냐? 둔한 것도 정도껏 이어야지! 눈치라곤 털끝만큼도 없어요! 착각도 이런 착각을 하고 앉아 있냐!"

안전모를 쓴 인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리바이트의 북부, 지하수로의 공사 현장.

"너희가 작업자지, 관리자인 내가 일하리? 빨리빨리 손 안 움직여? 굼벵이가 너희보단 빠르겠다!"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고블린들의 시체가 들끓는 그곳에서 인부들은 시체 정리를 포함하여 무너져 내린 지하수로 공사마저 해야 했다.

"이 고블린, 얼어서 들러붙었습니다!"

"그럼 뜨거운 물을 부어! 태우지는 마. 가죽에 상처가 생기니까! 젠장, 겨울이라서 다행이지, 여름이었으면 썩어서 악취가 돌 거야. 전염병마저 돌았겠지."

이 세계의 계절은 변덕스럽다. 그중 겨울은 가장 길며 냉혹한 시기였다.

12월부터 5월까지 슈하림 제국은 눈 덮인 세상이 되고, 6월에서 8월까지 따뜻한 봄이, 9월 한 달 정도는 땅이 이글거릴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더위가 시작된다.

그리고 10월부터 11월까지 잠깐의 가을을 끝으로 다시 겨울이 시작된다.

따뜻한 시기가 거의 없기에, 인류가 개척지를 만드는 데 큰 어려움 겪는 이유도 이러했다.

"왜 갑자기 작업을 시작한 겁니까?"

"몰라서 묻냐? 당연히 봄이 되면 다 썩어 문드러지니까 그렇지! 너희는 파리랑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썩은 시체에서 작업할래? 아니면 지금 할래?"

인부들은 고블린 시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지금이 좋겠죠."

"그래! 그러니 지금 해! 이 고블린이 얼마짜린데! 가죽은 질겨서 가죽 주머니나 옷을 만드는 데 쓰이고, 발톱은 약재로, 내장과 눈, 뇌는 마법 재료로 쓰인다고. 게다가 고기는 대형 몬스터 미끼용으로도 쓰이니 버릴 곳이 없어. 그러니 잘 챙기도록. 냉동되었으니 신선도도 올라갔겠다, 지금이 딱 좋을 때야!"

"그렇게 값이 나갑니까? 고블린이?"

"아니, 버릴 곳은 없지만 다 싼 값에 팔려. 비싸게 팔렸다면 씨가 남아돌지 않았겠지. 모험가나 용병이 너도나도 사냥했을 테니까."

"...."

"애초에 해체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 상해서 버려야 하니까. 효율이 떨어지지."

"시체들은 어디로 옮겨집니까?"

"그야…."

관리자는 혀를 내둘렀다.

"아카데미에 가지. 해부 실습용으로 쓰인다고 하더군."

"…거기 생도들도 고생하겠네요."

관리자는 안전모를 고쳐 잡고 말했다.

"어쨌든 작업을 끝내. 보수 공사도…."

"과, 관리자님!"

인부 중 하나가 관리자를 불렀다.

관리자는 고개를 돌려 인부를 쳐다봤다.

인부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두운 지하 속에서 랜턴이 없음에도, 지하수로의 부서진 땅속으로 청록색의 영롱한 빛이 인부들의 주변을 밝혔다.

"뭐야? 비켜 봐!"

관리자는 인부들을 밀어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냐, 이건…!"

지하수로의 무너진 구덩이, 그 속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와 함께 푸른 빛의 거대한 수정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맙소사!"

마도구를 만들 수 있는 '마석'.

그것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최대 규모의 '마광 지대'.

아서가 샀던 땅 밑의 '황금 동산'이었다.

그리고.

「끼히히히히히-!」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관리자와 인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뒷걸음질 치며 식은땀을 흘렸다.

익숙한 목소리.

'고블린'의 목소리였다.

***

퀴리 사건으로 프롤론은 아서가 '차기 황위 계승자'라는 희미한 가능성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눈앞에 있는 아서 슈하림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선 이와 같은 연결점은 이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러웠다.

'아몬이라는 자는 마족마저 상대할 힘을 가진 실력자.'

그런 실력자가 아서의 한마디에 움직여 퀴리를 보호하고자 나선 것이다.

프롤론 자신이 아서에게 '피난민을 받겠다'라고 말한 직후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난민에 대한 의견 말입니까?"

"네."

프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는 이가 없다면 아서에게 존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대가 황자라는 점도 있지만, 다음 대의 황제라면 자신이 섬겨야 할 군주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결코 자신이 하대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입단속은 이미 해 놨다.'

오크들의 퀴리 침공 때 시작된 회의에서.

직스와 아서가 나간 직후. 프롤론은 교수들에게 경고를 했다.

-지금 들은 내용은 못 들었던 거로 해야 할 게야. 아니면 그대들은 모가지가 사라질 거라네.

-....

-아, 내가 말한 건 단순히 옷을 벗는 게 아닌.

프롤론은 검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교수진들을 노려봤다.

-진짜 목이 사라지는 마법을 보게 될 게야. 자네들뿐만 아니라, 자네들이 속한 가문 역시. 나에겐 그러한 힘이 있고, 그러한 나에게 반항하지 않기를 바라네. 알겠는가?

교수들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겁쟁이들.

회의실에 모인 대부분이 그러했다.

자신의 경고는 먹혀들었을 테니, 자신과 아서에 대한 이야기는 외부로 알려질 리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피난민 생존'에 아서가 연관되었다는 건 황실 측, 황제의 귀에는 들어가겠지만, 최소한 황가의 '형제들'에게는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다.

이는 직스와의 대련도 포함된 이야기였다.

'최대한 입을 막았다만,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생도들의 시선도 있고, 아서의 정체와 힘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프롤론은 시선을 아서에게로 옮겼고 눈을 깜빡거렸다.

'아, 생각이 딴 데로 샜군.'

지금은 피난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다.

"문제라면…. 많지요. 상당히."

현재 리바이트 영지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다.

슈하림의 긴 겨울이 그 끝을 향하고 있지만, 아직도 냉혹한 혹한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장구류도, 식량도, 아무런 자금도 준비되지 않은 채 그 수많은 난민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는 곧 리바이트 영지에도 크나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처음에야 난민들의 생존을 반기던 영지민들도, 서서히 그들을 업신여기고 차별을 시작할 것이며, 빈민가에도 난민에 대한 암묵적 계급이 형성될 것이다.

돈도, 식량도 없이, 무작정 피난에 오른 이들은 결국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이다.

금품을 갈취하거나, 몸을 팔거나, 혹은 약에 손을 대거나 납치, 협박 등등.

어쩌면 북부의 빈민가에 침식되어 대규모 범죄자의 소굴이 탄생할지도 몰랐다.

'만약 제어조차 하지 못한다면.'

7만 8,00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폭도가 생겨날 수도 있다.

프롤론은 아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무래도 7만의 난민이 생긴 만큼, 리바이트 영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여유로운 삶을 누리던 자들이 조금씩 양보한다면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겠지만, 원래 누리던 권리를 침범당하는 인간들은 불만을 토해 낼 수밖에 없다.

이는 프롤론으로서도 피하고 싶은 결과였다.

"그러니까 총장님 말은 땅과 자금이 문제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프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급한 건 땅과 자금이다.

난민들이 지낼 땅과 건축물이 필요했다.

겨울도 겨울이지만, 난민들에게 여름의 잔혹한 더위를 버텨 낼 체력이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자금이 있어야 땅도, 식량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슈하림 황가에 지원금을 요청해 주실 수 있는지요?"

황제 계승권을 가진 아서라면, 그 영향력은 막강할 터.

7만의 난민 문제 정도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프롤론은 판단했다.

"그건 무리입니다. 저에겐 황가를 움직일 힘이 없으니까요."

"...."

프롤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황가의 형제들이 아직도 아서를 짓누르고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슈하림의 황제가 아서에게 후계자로서 어떤 조건을 내건 걸지도 모른다.

'이거, 일이 복잡하군.'

프롤론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뭐 자금과 땅이라면 해결 방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아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의 아이템 창에는 워로드 때 모은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과 보석들이 담겨 있으니까.

7만의 난민을 돌볼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다만, 그걸 따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북부의 지하수로."

"...?"

"지금 보수 공사 중이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프롤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걸 묻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아서의 알 수 없는 행적이 떠올랐다.

미개척지 체험 때, 괴한 2명의 습격 사건 이후, 아서는 특이한 행보를 보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북부, 빈민가.

대규모 땅을 산 것이다.

덕분에 프롤론은 골치 아팠던 빈민가 관리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아서가 대규모 땅을 매입함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프롤론에게 땅에 대한 세금을 내야 했으며,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모두 그의 책임이 되었다.

물론, 그 세금은 다시 슈하림 황실로 향하겠지만,

어쨌든 아서에게는 좋을 게 없었다.

왜 그러한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던 참이건만.

"그런가요? 상당히 소식이 늦나 봅니다."

"아서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는 이해가 잘…."

아서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재 곳곳에 꽂혀 있는 책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 이번 사건의 해결 방안이 나올 겁니다."

"네?"

"게다가…."

아서가 책을 뽑아 펼친 뒤 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매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은 리바이트 영지에 악영향만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

"7만 8,000명의 노동력이 생긴 셈이니까요. 피난민도 언제까지 빌붙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북부의 빈민가 지하수로에는 그걸 해결해 줄 것이 잠들어 있죠."

프롤론의 눈이 커졌다.

맞는 말이다. 난민들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돈을 벌 곳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아서는 북부의 지하수로에 그것을 해결해 줄 실마리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북부의 빈민가의 지하수로를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럼 땅은…. 난민들이 지낼 땅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받아들이기엔 리바이트의 토지가 너무나도 작습니다."

"프롤론 총장님이라면 권한이 있겠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번이 기회입니다."

책에서 시선을 뗀 아서가 고개를 틀어 프롤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리바이트에 있는 미개척지."

"...."

"그 땅을 정복해 늘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

***

프롤론은 위그드라실 도서관이 있는 마탑을 나왔다.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솟구친 거대한 탑을 올려다본 프롤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다.

망나니라고 소문났지만, 사실상 4년간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한 실력자. 그리고 황태자 루시안조차 위협할 수 있는 황제가 인정한 황위 계승자.

마법 실력은 공식적으로 3서클. 하지만 그것도 위장이겠지.

자신의 눈마저 속일 정도로 고도의 마나 컨트롤을 가진 자다.

그런 그가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퀴리 영지의 피난민들을 살려냈고, 또한 지금은 그들 모두 구해 낼 수 있다고 한다.

'북부의 빈민가라고 했던가?'

프롤론은 집무실에 돌아가 영지 현황을 살폈다.

그리고 북부의 상업 단지 위에 있는 빈민가 지역의 보고서를 살폈다.

프롤론이 가장 골치 아파했던 지역이었다.

세금이란 세금은 그곳으로 새어 나갔음에도 역병이 돌고, 범죄가 들끓으며, 고블린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아서 전하가 북부의 지하수로를 조사하라고 했던….'

프롤론의 눈이 커졌다.

지하수로에 골칫거리인 고블린들이 씨가 말랐다는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걸 행한 인물은 '아몬'.

'아서 전하의 그림자 수호 기사!'

설마 아서 전하의 명령에 따라 지하수로의 고블린 떼를 토벌한 건가?

단순한 모험가가 한 짓이 아니라고?

'퀴리 영지가 침략받기 전에 해결했군.'

고블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또한 지하수로가 망가졌다는 보고를 들어, 상세히 살피지 않고 시체를 회수하고 보수 공사를 진행하라고 간단하게 명령만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보고서를 훑어보자 뜻밖에도 상당히 큰 규모의 고블린 토벌이 이루어진 걸 알 수 있었다.

'고블린이 죽은 수만 해도 최소 250여 마리가 넘는 건가?'

반나절 동안, 아몬이라는 모험가가 지하수로를 돌아다녔고 고블린을 사냥했다고 한다.

'상당한 실력자라는 소리를 들었다만.'

퀴리에서 마족을 상대하다 전사하였다는 소리는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그때,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수정구의 빛이 밝아졌다.

프롤론은 고개를 틀어 통신용 수정구를 바라봤다.

마나를 이용한 전화보단 먼 거리, 타 영지와의 연락은 힘들지만, 영지 내에서의 연락은 그나마 주고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마석'으로 만들기에 그 가격이 어처구니없이 비싼 게 문제였다.

군에 지급되기만 할 뿐, 상업성으로는 사용되는 일이 없었다.

〔고, 공작 각하!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지금은 바쁘네. 나중에 연락하게."

〔하, 하지만….〕

프롤론이 연락을 무시한 채 북부의 보고서를 읽을 때였다.

〔북부의 지하수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급한 것이라 보고를…!〕

프롤론은 흠칫했다. 고개를 돌려 수정구를 쳐다봤다.

"북부의 지하수로?"

〔네! 놀라지 마십시오! 마광 지대입니다!〕

프롤론은 보고 있던 보고서를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엄청난 매장량입니다! 측정된 것만으로도 그 크기가 빈민가 지역을 충분히 둘러쌀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 깊이 또한 어찌나 깊던지…! 들어가지 않는 한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역대급 마광산 지대…! 이, 이걸 개발하면 리바이트 영지는 황도와 맞먹는 성장을…!〕

수정구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대로 프롤론은 소름이 끼쳤다. 아니,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에 잠식되어 두려움마저 밀려왔다.

〔그, 그런데 고블린 굴이 있는 모양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규모가 적은 만큼 지금 당장 토벌대를 구성해….〕

프롤론은 보고자의 음성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퀴리 영지의 침공 전, 아몬이라는 모험가가 지하 수로의 고블린 토벌했고 그 뒤에 지하 수로가 붕괴되었다.

그 이후 오크들의 퀴리 영지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아몬이라는 자가 자신을 희생해 마족을 막았고.

7만 8,000명의 피난민이 리바이트 영지에 도착했다.

그에 맞춰 지하수로 보수 공사에 들어간 인부들이 마광 지대를 발견했으니….

이는 약 8만 명의 난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모든 게 소름 끼치도록 맞아떨어졌다.

아서는 이 모든 걸 예지하고 있었다.

제36화

"역사가 너무 어려워요~"

스킬북을 읽으며 아카데미 복도를 걷던 아서는 고개를 돌렸고, 나란히 걷는 카를라가 머리를 부여잡고 붕붕 흔드는 게 보였다.

"시험 과목만 14개예요. 그걸 어떻게 다 외워요?"

그중 절반은 실기이니 외울 필요가 없다.

다만, 카를라가 걱정하는 건 아마도 필기시험일 것이다.

카를라는 어깨에 걸친 크로스백에서 역사책을 꺼내 읽었다. 그러나 머리 회전이 되지 않는지 그녀의 정수리 위로 열기가 솟아올랐다.

"아! 죄, 죄송해요! 업무 중에…."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상관은 없었다. 성실한 카를라가 이토록 초조해한다는 건 그만큼 필기에 자신이 없다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은 사실상 조수로서의 모든 업무가 끝났다.

자택으로 돌아가 쉬는 일만 남았고, 카를라는 마지막 뒷정리를 위해 아서를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무턱대고 외우기보단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는 게 좋아."

"다양한 방법이요?"

카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서를 올려다봤다.

"예를 들면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인물을 대입해 보거나, 혹은 스토리를 연결해 낸다거나, 음을 넣어 노래를 부른다거나?"

"이미지요?"

"그래, 예를 들면."

아서가 고개를 내밀며 카를라의 역사책을 살폈다.

카를라는 멈칫 놀라며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가, 가까워!'

아서가 책의 내용을 읽었다.

"802년, 카르라 후작은 미개척지 탐험을 통해, 처음으로 슈른 왕국의 여제와 접촉하게 되었다. 외교적 관점에서 그 둘은 적대 관계였으나, 점차 서로 간의 문화를 공유하며 이해관계를 높여 정략혼을 통해 동맹 국가로서의 틀을 성립하게 되었다."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면, 카르라 후작을 너 자신이라고 생각해 봐. 마침 이름도 비슷하네."

카를라는 역사 속 인물을 떠올렸다.

책에 있는 초상화를 보니 수염이 있는 40대 중년 사내다.

그런 그를 자신과 대입하라니?

"그리고 스토리를 써 나가는 거지. 카를라 너는 미개척지 탐험 중이야. 그때, 처음으로 슈른 왕국의 여제와 접촉하게 되지. 여제의 인물을 아무 인물이나 떠올려 봐."

카를라는 손가락으로 턱을 짚은 채 상상했다.

슈른 왕국의 여제…. 그러니까…. 비슷한 이름으로 슈하림 제국? 그리고 여제는 고귀한 신분이니까…. 황자님. 아서를 떠올렸다.

"서로 적대 관계였으나."

아서와 카를라가 으르렁거리는 이미지.

"문화를 공유하고."

서로에 대해 하하 호호 웃으며 알아가고.

"정략혼을 하게 되지."

식을 올려 결혼하게 된다.

카를라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돼요."

"그래? 그럼 노래 부르는 식으로, 802년~♩, 카르마 후작은~ ♪ 모험을 떠났네~ ♫"

"…아서 님은 저를 애 취급하시는 건가요?"

"이게 의외로 암기하기 쉽거든. 지루하지도 않고."

마치 10살짜리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실제로 초등학생 학원 교사였던 아서로서는 카를라처럼 투덜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었다.

카를라는 입을 삐죽이더니, 아서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802년~♩, 카르마 후작은~ ♪"

잘 따라오는 카를라의 행동에 아서가 눈웃음을 지을 때였다.

투명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아서는 고개를 돌렸고, 낯익은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샬럿 엘스포드.

직스 라인하르트.

반가운 두 얼굴이었지만, 그 두 사람을 본 아서는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참혹한 몰골 때문이다.

한쪽 손에 깁스를 하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샬럿.

휠체어를 탄 채 에인헤르의 보조를 받고 있는 직스.

샬럿은 복도를 지나가며 힐끗 아서와 카를라를 향해 눈짓을 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너무나도 차갑고 냉혹한 눈빛을 보낼 뿐. 무관심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반가워. 아서. 그리고 카를라. 그럼."

직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얼굴에 그림자가 진 직스 역시 표정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

아서는 굳어진 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변 생도들이 숙덕거림이 들려왔다.

-저 두 분이 퀴리 전선에 있었다며?

-마족을 상대했대!

-역시 샬럿 님이셔! 저 늠름한 모습을 봐! 지금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황도로 간다는데?

-그런데…. 두 분 다 안타까워. 눈과 다리를 잃으셨으니까.

말소리를 엿들은 아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소리일까? 저런 상처쯤은 포션 치료로…?

아서는 멈칫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감쌌다. 그리고 이질적인 느낌을 깨달았다.

짧지만 이 세상에 살아오며, 전장에서 '불구'가 된 자들을 보았다.

분명 그들에게 포션 치료를 사용하는 장면을 봤음에도, 그들의 상처 치료는 더디기만 했다.

이는 게임과는 전혀 달랐다.

'이 세계의 포션이 게임상의 효능보다 더 뒤처진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포션의 효능은 아서가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그 대상자는.

"…저, 저기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카를라 그리치다.

아서는 카를라를 쳐다봤다.

그녀에겐 아무런 흉터가 없다. 부서지고 박살 난 뼈마저 완벽히 수복되지 않았던가.

아서가 알고 있는 포션 효능은 신의 피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그 어떤 상처도 치료해 준다.

저주나 특정 스킬 효과로 인한 상처만 아니라면 말이다.

"저 두 사람, 포션 치료는…?"

아서의 말에 카를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 거예요. 부서진 뼛조각을 맞추고 신경을 이어 붙이는 대수술마저 했대요. 다만… 손상이 너무 심해서… 그래서…."

"...."

샬럿은 한쪽 눈을 잃고, 직스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알 수 있었다.

NPC들. 이 세계의 주민이 만든 포션은 아서가 가진 '게임 포션'과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그럼 의문이 생긴다.

아서가 '포션을 제작'해야 그 효능이 제대로 발휘되는 것인가, 아니면 아서가 '포션을 줘야' 그 효능이 제대로 발휘되는 것인가이다.

'실험해 봐야 되겠지.'

아서는 턱을 짚었다.

그렇담 자신의 포션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냐에 대해 먼저 알아야 했다.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점이다. 여태껏 아무 생각 없이 아이템을 사용했지만, '게임상' 아이템과 '현실화'된 아이템은 서로 다른 작용이 일어났다.

'신화급 아이템인 [뮬라임]만 봐도 그래. 단지 쥐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부작용이 작용했다.'

이는 게임상에 없던 부작용이다.

'너무 간과했다.'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모른다.

'그럼 지금 알아야 하는 건….'

살아남기 위해서, 전력 보강으로 아이템을 조율하여 사용하고 보다 극대화한 활용법을 익히는 거다.

'잠깐 그럼….'

아서의 눈이 커졌다.

'치료 마법은?'

게임상의 치료 마법.

팔이 잘리고, 다리가 떨어져도, 치료 마법은 그 상처들을 회복했다.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기적' 그 자체를 행사하는 [성자]와 같을 것이다.

'허…. 이거 참.'

힘의 성장에 집중하려 했더니, 이제는 마법에 욕심이 생긴다.

게임상의 마법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기적'이 될 테니까.

마법 스킬북을 습득하고, 그 스킬 숙련도를 끝까지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겁나 노가다를 해야 한다는 거군.'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늘어났다.

아서는 곰곰이 생각하며 샬럿과 직스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카를라."

"네?"

"너의 이름, 다시 빌려줄 수 있을까?"

카를라는 아서를 올려다봤다.

"그 대가로 훈련 시켜 주마."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아서는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우뚝 섰다.

리바이트 정문 앞에 프롤론 총장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불안, 공포, 또한 신비로움과 호기심.

전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채 아서를 직시하고 있다.

"아서 군."

생도들이 귀가하는 길에 총장 프롤론을 보곤 인사했다.

보는 눈이 있던 터라 프롤론은 말을 낮췄다.

프롤론은 학생들에게 가볍게 손을 올리며 인사를 받아 주었지만, 눈빛은 계속해서 아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가 말한 북부의 지하수로."

"네."

"…마광 지대라는 걸 알았나?"

"그렇습니까?"

프롤론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소를 지은 채 뻔뻔함을 자아내는 아서가 괴물처럼 보였다.

"그…. 지역에 고블린 굴이 나왔다네."

"…그렇습니까?"

이번엔 진심이 묻어난 목소리였다.

아서도 설마 그곳에 고블린 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게임에서 '랜덤'으로 발견되는 '던전'이 생긴 걸까?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네. 토벌은 이루어질 것이며, 그곳에 있는 마광산 지대 소유자는 아마도…."

아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지칭했다.

"저겠군요."

"...."

아서가 넘보지 못할 강력한 힘을 가진 프롤론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앞에 서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저 미소를 봐라. '악의'가 미소로 표현된다면 저리되지 않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황태자 루시안도 저토록 잔혹한 미소를 짓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땅의 대부분은 아서, 자네와 황태자 루시안 전하의 것이 되겠지. 그 매장지의 소유 또한 자네 것이 될 게야."

지하수로에 매장된 마광 지대.

프롤론이 '그 땅은 나의 영토다'라며 떼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평민'이나 '귀족'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일 것이다.

황자의 '소유'가 된 지금. 프롤론은 아서와 루시안에게 그 땅에 대한 권한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저 영주로서의 약간의 권리만을 내세울 수 있겠지.

하지만 두 황자의 권한을, 그 뒤에 있는 황제의 지배력을 반할 만큼 프롤론은 어리석지 않았다.

프롤론은 조용히 음을 땠다.

"그 매장지를 개발하는데…."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고, 그 노동력은 난민들로 이뤄지게 되겠죠."

"...."

어느 순간 아서가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또한 미개척지를 늘리게 된다면 리바이트 영지의 장벽 또한 늘려야 하니, 그 노동력이 필요하겠지요. 7만 8,000명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아이와 여자라네. 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아."

7만 8,000명의 난민.

남자들은 군에 차출되어 죽고, 노인들은 행군을 버티지 못해 죽었다.

발바닥이 터지고, 다리가 꺾일 정도로 필사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하며 도망친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난민 캠프 옆의 빈민가는 땅만 넓은 쓰레기 부지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마광 지대가 나온 만큼 개발해야 합니다. 그곳을 깨끗이 정리해야겠지요. 범죄 조직을 쓸어버리고, 빈민촌에 있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노동력이라면 있었다.

난민 캠프가 아닌 빈민가에 살던 이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될까?

"너무 비이성적이네."

아서의 말은 꿈과 환상이 버무려진 망상과도 같았다.

그의 말은 마치 '게임'처럼 너무나도 가벼웠다.

"하지만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희망의 동아줄은 될 겁니다."

"...."

"작은 희망의 빛을 좇으며 미개척지에서 이곳까지 횡단해 온 난민들입니다. 이제 와서 그렇게 가볍게 삶을 포기할 것이라 보십니까?"

프롤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발악할 것이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살기 원할 겁니다. 그리고 바라겠죠. 새로운 삶을. 새로운 가정을. 새로운 기회를."

프롤론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방치한 빈민가다. 그곳의 지하수로에서 고블린들이 튀어나와 사람을 납치하고 역병이 돌아도, 프롤론은 철장을 치고 그들을 철저히 격리하며 '외면'할 뿐이었다.

새로 생긴 난민 캠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는 절망의 늪에 빠진 그들에게 지푸라기도 쥐어 잡을 희망을 주겠다고 한다.

프롤론은 침묵했다.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서가 제시한 방법만이 최선이었다.

난민 캠프가 제2의 빈민가가 되고, 빈민가 세력이 커져, 그들의 불평, 불만이 폭력으로 바뀐다면.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7만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폭동은 리바이트를 전체를 피폐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인원이었다.

"알겠네."

퀴리 때처럼, 프롤론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저번처럼 무작정 의견만 따르진 않을 것이다. 이번엔 자신 또한 움직여야 했다.

'황제 폐하께 미개척지 정복에 대한 뜻을 밝힌다.'

리바이트의 영지를 넓힌다.

그리고 7만 8,000명의 난민에게는 새로운 보금자리와 삶을 선사한다.

이는 프롤론의 세력권이 넓어진다는 걸 뜻했다.

타 귀족들의 반발을 사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어차피 프롤론은 그들의 눈치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고블린 굴 토벌을 지시하겠네. 그래도 되겠나?"

아서는 턱을 짚었다.

"아니요."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또 다른 기회였다.

어차피 고블린들은 쓸어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게 던전이라면 고블린들을 지배하는 고블린 로드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서는 힐끗 프롤론을 쳐다봤다.

"혹시 1학년 중간고사 실기, 정해진 게 있습니까?"

"…아직이라네. 이론 시험은 대부분 끝났지만, 실기 시험은 준비 중이라네."

"그럼 이번 중간고사."

아서는 프롤론에게 제안했다.

"고블린 던전 공략으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37화

리바이트의 동부, 미개척지.

안개 낀 숲속.

재빠른 무언가가 매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긴 천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녀린 발이 나뭇가지를 밟았지만, 나무 사이를 이동할 때마다 작은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엘프의 특성인 '조용한 발걸음'이다.

숲에 있는 한, 숲의 가호 아래 웬만한 소리나, 기척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후우…!"

프리다는 숨을 들이켜며 풀숲에 숨었다.

기척을 최대한 줄이고 고개를 들었다.

'찾았다!'

프리다는 눈을 부릅떴다.

흙투성이가 된 그녀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고기!'

그녀의 군용 백팩에는 풀잎만이 가득히 담겨 있다.

미노 스테이크를 먹고 난 후, 몇 주간 단 한 번도 육식하지 못했다.

먹은 식량이라곤 자신이 직접 미개척지에서 몰래 채집한 풀떼기뿐.

동부의 미개척지는 불고양이만 가득할 뿐이라, 고기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불고양이를 잡아먹어도 되겠지만, 그러기엔 먹지 못할 만큼의 비린내가 났다.

게다가.

'손질을 할 줄 모르겠어.'

그 작은 불고양이 가죽을 마구잡이로 뜯어내니 당연히 고기가 상할 수밖에 없다.

특히 마수를 손질할 때는, 까닥 잘못하면 독기가 고기에 스며들기에 복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프리다 역시 며칠간 식중독에 걸려 끙끙 앓았던 경험이 있었다.

어느덧 프리다는 동부의 9급 미개척지를 넘어 8급 미개척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사슴 한 마리가 보였다.

'그래, 사슴!'

덩치가 크다.

손질을 잘 못 해도 그 속에 있는 고기는 분명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불고양이와 달리 귀여운 생김새와도 거리가 멀어 거부감도 덜하겠지.

'그런데…. 사슴이 뭐 저리 우락부락해?'

평범한 사슴은 아니다.

거대했다.

아니, 집채만 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몸길이는 6m. 어깨너비만 해도 3m는 훌쩍 넘고, 체격만 해도 5m 정도로 트롤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털가죽이 있어야 할 등판에 암석이 가득했다.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뿔 역시 커다란 돌덩이처럼 보였다.

그러한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발달된 우락부락한 근육까지.

저 허벅지만 해도 프리다의 몸통보다 굵다.

돌부리 사슴.

단단한 암석 가죽을 두른 마수였다.

'사, 사냥할 수 있을까?'

프리다는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엘프의 왕국, 엘리니아에서 가져온 세계수의 뿌리로 만든 완드다.

마나를 주입하면 뿌리의 크기를 들쑥날쑥하게 조절할 수 있으며, 탄성을 만들어 뿌리 끝을 연결해 활로도 사용할 수 있다.

프리다는 직접 돌을 갈아 만든 돌화살을 들었다.

평범한 강철 화살조차 튕겨 낼 것 같은 저 우람한 체격에 돌화살은 먹혀들지 않겠지.

'하지만 눈을 노리는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닉이 알아서 해 주겠지!'

그때, 프리다 옆에 물방울들이 모여들었다.

물갈퀴를 가진 소녀의 모습을 한 물의 정령.

프리다는 그 물의 정령을 '닉'이라 불렀다.

「웅! 웅!」

물의 정령이 프리다의 머리카락을 끙끙거리며 잡아당겼다. 고개를 획획 흔들며 기겁하는 표정이 '야이 미친! 저건 무리야!'라고 대변해 주는 거 같다.

"괜찮아. 닉! 저건 잡을 수 있어. 나는 너를 믿어!"

프리다는 눈을 부릅떴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느새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저런 것도 못 잡으면 복수는커녕, 언니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해."

프리다는 돌화살을 활시위에 끼웠다.

"닉, 너만 믿는다! 나 한다? 한다니까!"

물의 정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주인을 만나 가지고….'라는 한탄 섞인 반응이다.

물의 정령이 돌화살을 감싸자 프리다가 화살을 쐈다.

콰직-!

엘프의 특성 '초인적 활 재주'.

그 덕에 화살은 정확히 '돌부리 사슴'의 눈에 명중했다.

「쿠오오오오오오-!」

'돌부리 사슴'이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눈에 박힌 화살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물의 정령, 닉이 '돌부리 사슴'의 눈 안을 휘젓고 다녔다.

그 탓에 '돌뿌리 사슴'의 눈과 코, 입과 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며 사슴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기도를 막아 질식시키기 시작했다.

'돌부리 사슴'이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프리다는 환호했다.

'잘했어. 닉! 너는 내 최고의 정령…!"

'돌부리 사슴'의 눈이 번뜩였다.

「쿠오오오오오―!」

'돌부리 사슴'의 머리가 하늘 높이 올려지더니, 있는 힘껏 땅바닥에 내려찍었다.

콰콰쾅━!

주변 대지가 터져 풍압이 휘몰아친다.

눈에 박힌 화살은 산산이 부서졌고, 그 속에 잠식해 있던 물의 정령마저 물리적 충격으로 튕겨 나왔다.

손바닥만 한 물의 정령 닉이 고개를 저으며 어리둥절했다.

닉이 고개를 들자,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돌부리 사슴'의 얼굴.

거친 숨을 내쉬며 분노한 듯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웅!」

물의 정령이 흠칫 기겁할 때.

콰직-!

'돌부리 사슴'의 발굽이 닉을 뭉개 버렸다.

물방울이 사방에 퍼졌다가, 다시 모여들며 프리다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숨어 부르르 떨었다.

"어?"

'돌부리 사슴'이 고개를 든다.

프리다를 향해 한쪽 눈알을 부라리며 '니가 그랬냐?'란 일그러진 표정 짓고 있다.

그리곤 달려들 준비를 하듯 발굽으로 땅을 짓밟으며 굴렸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프리다를 향해 똑바로 직시했다.

'망했-!'

"여기 있었군."

'돌부리 사슴'이 멈칫하며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프리다의 긴 귀 또한 쫑긋 올라갔다.

정확한 발음을 가진 발성.

프리다가 잘 아는 목소리였다.

짙은 안개를 가르며 걸어 나온 이는 한 사내였다.

찰랑거리는 긴 밤갈색 머리카락. 온화한 듯한 황적색 눈은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돌부리 사슴'을 직시하고 있었다.

단순한 긴 가죽 코트를 입고, 심지어 맨손인 사내를 보며 프리다는 기겁하고 말았다.

'안 돼!'

마법학 동급생 아서 아난시아!

그가 무방비한 상태로 '돌부리 사슴' 앞에 등장한 것이다.

'위험해! 왜 아서가 여기 있는 건데?!'

아서는 마법사다.

마법 시동을 걸 때까지 방어해 줄 전위가 없다면, 분명 손쉽게 당할 것이다.

프리다는 급히 돌화살을 준비했다.

"닉, 다시 한번!"

물의 정령이 겁에 질려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부탁이야! 저 사람 다칠 수도 있어! 응? 다음에 탄산수 사 줄게!"

프리다의 애원에 물의 정령은 불만이 담긴 표정으로 돌화살에 깃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쿠오오오오오오오-!」

'돌부리 사슴'이 포효하며 몸을 날렸다.

콰콰콰쾅-!

대지를 짓밟고 폭풍처럼 나아갔다. 주변에 있는 나무들마저 쓰러뜨리고 부수며 아서에게 돌진했다.

"안 돼!"

프리다가 돌화살을 날렸다.

노린 곳은 남은 한쪽 눈.

하지만 '돌부리 사슴'은 매우 영리했다. 암석으로 된 눈꺼풀로 눈을 감는 것으로 돌화살을 튕겨 냈다.

'틀렸어!'

'돌부리 사슴'이 아서에게 거대한 돌부리 뿔을 휘둘렀다.

프리다가 아서를 향해 소리쳤다.

"아서, 도망-!"

아서가 손아귀를 뻗어 돌부리 뿔을 잡았다.

쿵-!

눈을 감고 있던 '돌부리 사슴'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머리를 휘젓던 자신의 목이 아프다. 마치 '무언가'에 잡혀 멈춘 듯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고자 두꺼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돌부리 사슴'은 볼 수 있었다.

「....」

왼손으로 뿔을 잡고, 오른손으로 손날을 새운 남자.

그의 안광이 번뜩이며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오는 것을.

…뭔가 잘못된-!

콰직-!

내려 찍힌 손날에 '돌부리 사슴'의 머리통이 깨지고 그 충격으로 뿔마저 부서져 버렸다.

쿵-!

이윽고 사슴의 머리가 그대로 땅에 처박히고 목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몸뚱이는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허공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

「....」

프리다와 물의 정령은 입을 다물었다.

"아, 이런."

아서는 손목을 풀며 인상을 찌푸렸다.

"죽었네?"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섬뜩하기까지 했다.

마치 살려 두려고 한 듯한 말투가 아닌가?!

아서가 고개를 돌리자 프리다와 눈이 마주쳤다.

"히, 히끅!"

「…웅!」

마수의 피가 튀겨 피범벅이 된 아서.

그 모습에 프리다와 물의 정령이 귀엽게 딸꾹질했다.

"프리다?"

아서가 의아한 투로 말했다.

"여기엔 무슨 일이야?"

***

"프리다가 있을 줄은 몰랐네. 근데 이곳은 금지 구역이야."

아서가 마수의 머리통을 들어 이곳저곳을 살폈다.

머리통만 해도 뿔 때문에 수백 킬로짜리거늘, 너무나도 가볍게 들었다.

"생도가 함부로 들어오면 징계 위원회가 열리는 건 알고 있는 거야? 잘못하면 정학 처리될 수도 있어."

몸통만 해도 수백 킬로그램을 넘어, 톤에 이를 거 같건만.

아서는 그걸 쇠사슬에 감아 거대한 나무 위로 매달아 끌어당겼다.

쇠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냈고, '돌부리 사슴'의 몸통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너무나도 가뿐히 매달고 있는 모습에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먹은 솜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

모닥불 앞에 담요를 덮고 앉은 프리다는 넋이 나간 채 아서의 행동을 쭉 지켜봤다.

혀를 내민 채 머리가 깨져 죽은 '돌부리 사슴'의 목을 향해, 아서는 단검을 푹 찔러 핏물을 뺐다.

또한 털가죽이 상했는지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모험가 일을 했다고는 들었지만.'

저렇게 능숙하게 해체하다니?

게다가 전투력 또한 굉장했다.

'돌부리 사슴'은 8급 미개척 지역에서 상당한 위험종이다.

눈앞에 잡은 녀석의 큰 체구를 보니 아마도 이 지역을 다스리는 놈이었겠지.

그런 '돌부리 사슴'의 머리를 맨손으로 깨부순 것이다.

'마법사 맞아? 전혀 아닌데!?'

프리다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니 아서가 직스라는 선배와 대련했다는 소문이 교내에 퍼지긴 했다.

비록 그가 패배했다지만, 직스 선배가 고전했다고…. 아니, 오히려 아서가 농락하며 봐줬다고 하는 소문도 들었더랬다.

'그러고 보니 기사로서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지?'

강의 때 교탁을 손가락으로 으스러뜨렸던 것이 떠올랐다.

"아서는 몇 성이야?"

마법사는 '서클'.

마나를 사용하는 전사 계열은 '성'이라는 개념으로 나누어진다.

마법사는 1서클부터 시작하여 7서클까지, 그다음 궁극의 경지라는 워마스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사 계열은 1성부터 시작하여 7성, 그다음이 워로드라는 경지로 이루어져 있다.

성직자의 경우도 서클로 사용하고 그다음은 메시아.

그 밖에 여러 직업군도 단계별로 나뉘어 있다.

아서는 고개를 들어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음…. 나에게는 '성'으로 따지는 건 무의미해."

"무의미하다니?"

"마법사와 달리, 전사 계열의 그건 그저 마나의 양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아서가 마수의 피를 빼내며 양동이에 채웠다.

'게임상 NPC의 기준과 플레이어의 기준은 많이 다르니까.'

게임 설정상 전사 계열의 NPC들은 '성'을 사용했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무의미했다.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강함은 스탯과 특성, 컨트롤로 칭해지는 '전투 퀄리티'로 결정되니까.

전사 계열의 '성'은 존재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나 공간을 채우는 용도로 쓸 뿐이었다.

'가르쳐 주기 싫다는 걸까?'

프리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 삐졌어!'라는 표정에 물의 정령이 프리다의 정수리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아서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 금지 구역이라며?"

"허락만 있으면 올 수 있어. 그리고 온 이유는 포션 테스트를 위해서지."

"…포션 테스트?"

프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말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카를라의 훈련 상대를 찾고 있었어."

"훈련 상대?"

"그녀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

카를라에게 '가문의 이름'을 빌리는 대신, 아서는 그녀에게 '훈련'을 시켜 주기로 했다.

전투 재능과 마법적 재능이 압도적인 생도다. 실제 게임상 '슈하림의 반란' 퀘스트에서 '보스몹 4황자 아서'를 호위하는 중간 보스 '불꽃과 복수의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카를라를 잘 키운다면 그보다 더 성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제 게임이 아닌 현실이잖아?'

게임 스토리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주요 메인 퀘스트를 하다 보면 귀에 들리는 소식이 간혹 있다.

퀴리 영지 사태 이후, 본격적인 게임의 서막이 시작된다.

미개척지의 마수와 몬스터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그 성향은 더욱 포악해진다.

몬스터의 대규모 침공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그에 수많은 영지가 함락될 것이다.

불안감에 젖어 든 영지민들 사이에 사이비가 창궐하면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며.

그 사이비들을 마족 숭배자들이 흡수해 세력을 키워 여러 방면에서 마족 소환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슈하림 제국은 혼돈에 빠지게 되고 결국 분열이 시작될 것이다.

그중.

'이 몸뚱이도 제국에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지.'

'4황자 아서'가 반란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아, 카를라가 4황자의 편에 드는 이유가 있는 걸까?'

'불꽃과 복수의 여인(카를라)'는 어쩌면 아카데미에서 '4황자 아서'와 연이 닿음으로, 반란 세력에 합세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아서가 빙의하기 전에도 4황자는 아카데미에 갈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지나?'

참으로 기묘했다.

"헤에~ 아서. 그 카를라라는 애를 상당히 아끼나 봐? 학업보단 연애라는 거야? 너무 불건전한 거 아니야?"

프리다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고, 아서는 허리를 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마수를 올려다봤다.

"애를 건드려서 뭘 하겠어?"

"애는 무슨…. 같은 20살이면서."

마치 자기가 들은 듯 서운해하는 프리다였다.

"네 말대로 학업에 신경 써야 해. 연애는 무슨."

프리다는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거짓말.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프리다는 자기 목에 두른 불고양이 머플러를 만지작거렸다.

덕분에 이 추위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프리다는 조용히 아서를 쳐다봤다.

안개 낀 고요한 숲속.

풀 내음이 코를 자극하고, 풀벌레의 작은 노랫소리, 장작 타는 소리, 그리고 아서가 묵묵히 마수를 손질하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청력을 더욱 기울이자 아서의 소리가 선명해졌다.

코트 자락이 쓸리는 소리, 숨소리, 근육이 이완되는 소리. 그리고 안정감 있는 심장 소리….

'모든 소리가 매력적이야.'

조용한 클래식 음악처럼 감상하던 프리다는 살며시 눈을 뜨며 아서를 쳐다봤다.

"저기 말이야."

"...?"

프리다의 말에 아서는 그녀를 쳐다봤다.

"나에겐 뭐 가르쳐 줄 거 없어?"

제38화

리바이트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금'이었다.

난민을 받은 터라, 그들의 캠프에 지급할 식량, 모포, 마광 지대를 개발할 비용까지.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또한 프롤론은 황제의 승낙 아래에 에인헤르와 군을 징집, 미개척지 정복을 할 예정이었다.

징집이야 황제 폐하의 이름 아래에 움직일 수 있다지만, 개척에 필요한 장비와 보급품은 리바이트에서 직접 마련해야 했다.

모든 면에서 돈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영지 개발과 미개척지 정복에는 귀족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프롤론의 영향력이 있다곤 해도, 그는 '대개척지 혁명' 때 참전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귀족들은 그가 세력을 키우는 데 많은 반대를 했었다.

일반적이라면 분명 여러 마찰이 일어날 터.

하지만 그러한 문제점도 해결점이 생겼다.

"...."

프롤론은 시작의 거리, 열차역 앞에 서 있었다.

열차가 도착해 내리는 이들을 바라봤다.

"이곳인가?"

"그런가 봅니다."

"이번 마광 지대 개발 기획에는 우리 가문이 어떻게든 참여해야 합니다!"

고풍스러운 옷차림의 귀족과 귀부인들.

슈하림의 중앙 귀족들이다. 그들 중 자신을 경계하며 배척하려 했던 귀족 가문 또한 있었다.

그들은 아니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프롤론을 보자 표정을 바꾸었다.

억지 미소를 짓는 것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겁쟁이', '허울뿐인 마법사'라 손가락질하던 놈들이 마광 지대라는 이익 앞에 이제는 자신에게 아첨하는 모습이라니.

프롤론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오! 드디어!"

"대규모 마광 지대라고 하더군!"

"하핫! 긴장되는군! 아이언 킹덤에 있던 마광산 보다도 더 규모가 큰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야말로 이 영지는 대규모 '개발지'가 되겠군."

또 다른 이들은 근육질의 난쟁이들.

대장간의 요정이라고 불리는 드워프들이었다.

또한.

"…땅딸보들까지 나선 건가?"

"개발지를 뺏기면 안 됩니다."

"저희 역시 마도구를 제작해야 하니…."

그리고 엘리니아의 숲의 요정들, 엘프들까지.

프롤론은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바라봤다.

'이건…. 예상 못 했군.'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아서가 왜 고블린 굴 토벌을 미뤘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급하게 개발할 필요 없었다. 개발은 자신이나 아서가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필요한 자금은 슈하림의 귀족들이 대신 낼 것이고.

개발은 대장간의 요정인 드워프들이 할 것이다.

마법 아이템 제작은 엘프들의 연금술이 제힘을 발휘하겠지.

'무섭군.'

아서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은 채 마광 지대를 개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내었다.

어차피 개발해도 그 마광석을 채굴, 가공, 제작 및 운반하는 데 리바이트 영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럴 바에 차라리 타 귀족의 힘을 빌리고, 이종족들의 전문 기술을 빌리는 게 좋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중재자 역할을.

"어서 오십시오. 리바이트 영지에! 환영하오!"

프롤론, 자신이 하면 된다.

공작의 신분적 위치, 그의 영향력.

이 두 가지면 그 누구도 자신을 등쳐먹으려 하지 않겠지.

아서는 이것까지 계산했으리라.

과연, 황제 폐하의 후계자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프롤론은 미소를 지었다.

'슈하림의 영광을 위해…!'

슈하림 황가와 그 핏줄에 영광이 있나니!

프롤론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귀족과 이종족 무리에게 다가갔다.

***

'가르쳐 달라고?'

아서는 돌부리 사슴의 해체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동급생이 무언가 배우기 위해 가르쳐 달라는 데 무시하기에도 애매했다.

무엇보다 상대는 프리다다.

전설급 NPC이며, 후에 세상의 파멸이 찾아올 시 수많은 사람을 구해 낼 수 있는 영웅이기도 했다.

가만히 둬도 그 폭풍 같은 성장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장의 시간 동안, 그녀가 구하지 못하는 이들도 상당할 것이다.

프리다 역시, 인간과는 거리를 두는 성격 같았지만, 알고 보면 위험에 처한 자를 구하지 못해 자책감을 느끼는, 정말로 올곧은 성향을 지닌 하프 엘프였다.

프리다가 말했다.

"물론 공짜로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니야. 원하는 게 따로 있으면 줄게. 예를 들면…. 약초라든가?"

아서는 곰곰이 생각했다.

"약초?"

"그래. 원하는 약초라도 있어?"

약초라….

아서는 힐끗 프리다를 쳐다봤다.

'못 가르쳐 줄 건 없지.'

마침 필요한 약초들이 있었다.

이는 아서가 구분하기 힘들 약초들이다. 적어도 엘프인 프리다라면 손쉽게 구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카를라에게도 대가를 받고 가르쳐 주는 만큼, 프리다에겐 그냥 알려 주는 것만으로는 불공평하겠지.

"좋아. 그럼 '로코로코 열매'를 찾아줬으면 해."

"뭐?"

"나중에 어떻게 생겼는지 가르쳐 줄게."

그리고 테스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돌부리 사슴을 모두 해체한 아서는 아이템 창에서 '스킬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는 아서가 직접 제작한 스킬북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한 땀 한 땀 책에 작성해 낸 [기초 해부학].

플레이어가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스킬이자 숙련도에 따라, 사체의 해체에 있어 가죽과 이빨 등을 상하지 않게, 오히려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분해 가공할 수 있는 스킬이다.

아서가 프리다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읽어 볼래?"

장작불 앞에 앉아 있던 프리다는 아서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책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이내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부학이야?"

"그래."

'게임 때처럼 읽자마자 습득되는 건 아닌 건가?'

아서는 테스트로 게임 시스템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 보기로 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의 힘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도, 반대로 폭발적인 힘을 가질 수도 있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읽어 봐."

"...?"

"그리고 중간고사 이후 감상평을 알려 줘."

"감상평을? 왜?"

"내가 직접 작성한 거야."

"너가?"

"그래, 그리고 그 결과를 알려 줘."

"...."

프리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왜?'라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이윽고 아서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

프리다는 미소 짓고 책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꼬리를 흘리며 아서를 힐끗 쳐다봤다.

이 해부학책은 미끼다.

자신과 교류하고 싶어, 그 밑밥을 쳐 놓는 것이리라.

자신과의 접점을 높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있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평온하다. 자신이 '가르쳐 달라'라는 말에 움찔하고 멈칫하며, 아주 살짝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는 했다.

그러나 들뜸, 설렘과는 상당히 다른, '기대감'에 가까웠다.

자신에 대한 기대감.

나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는 거겠지.

프리다는 쿡쿡 웃었다. 아서를 귀엽다는 듯 올려다보며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겨우 이걸로 퉁치는 거야?"

"물론 아니야. 그건 참고용으로 지급한 거야.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 줄 건 하나야."

아서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스킬들을 훑어봤다.

[판타지 월드]는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다.

그 중 아서는 [워리어]의 직업군.

하지만 꼭 그 직업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직업군의 스킬과 무기 등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마법사지만 궁술 스킬과 활을 이용하는 자들이 있고.

워리어지만 화기 스킬과 머스킷을 이용하는 자들도 있다.

만렙이 되고, 할 일이 없으면 다양한 분야의 직업군을 가져 다양한 스킬을 익히고, 그 분야를 파고들 수 있다.

물론 '직업'에 대한 보너스 스탯, 숙련도에 따른 경험치 등등.

본 직업에 비해 그 경험치와 레벨을 올리기엔 2배 이상으로 힘들다.

전사 계열의 최정점. 워로드가 되고 난 후.

아서가 기분 전환상 한 서브 퀘스트를 통해 얻은 스킬과 특성이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는 야금술도 있고, 사격술도 있으며, 또한.

"프리다."

프리다는 아서를 올려다봤다.

"내 기척을 쫓을 수 있으면 쫓아 봐."

"뭐?"

"엘프니까 가능하지?"

"...?"

"내가 가르쳐 줄 건 기척을 죽이는 법과 기척을 느끼는 법이야. 그중 후자를 가르쳐 주마."

어쌔신의 은신과 은신 감지 등이 있다.

"응? 아, 아하하…! 농담이지? 나 하프긴 해도, 엘프 사이에서도 '천재'라고 불렸어."

깨끗한 척, 고상한 척, 잘난 척, 도도한 척하는 귀쟁이들과 자신은 달랐다.

압도적인 천재성.

어떤 엘프는 프리다를 보고 '괴물'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마법사의 인기척 따위를 못 느낄 리 없지 않은가?

프리다가 진심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만약 내 기척을 느낄 수 있다면, 일주일 치 식당 식권을 사 주마."

프리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농담 아니지?"

"물론."

프리다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섰다.

"그래, 해 봐."

프리다는 팔짱을 꼈다. 옆에서 물의 정령이 아서를 비웃는 듯 '풋!'하며 코웃음을 친다.

물의 정령도 프리다의 감각을 믿고 있다.

당연했다.

프리다가 청력을 집중하여 감각을 극대화하면 상대의 심장 소리마저 들을 수 있다.

감정을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2m 내에 상대가 말하는 말소리의 음과 심장의 반응을 보며 약간이나마 유추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프리다는 자신의 청력을 믿었고, 그걸 과시하듯 고개를 치켜들며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서가 뒤로 물러섰다.

사락, 사락 그의 풀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평온한 심장 소리도 같이 멀어졌다.

"1분 이내에 나의 기척을 감지해. 상대가 악의를 가졌다면, 기척을 숨긴 1분도 상당히 위험할 거야."

그의 호흡 소리가 들리고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으니까 빨리해 봐."

팔짱을 낀 채 손바닥을 휘젓는 프리다를 보며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제자리에서 뛰자 살짝 허공에 뜬다.

"그래, 그럼…."

아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이듯 말했다.

"시작."

그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

풀잎이 흔들린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마치 '소리가 사라진 듯한' 침묵.

프리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아서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소리가 없었다.

심장 소리도, 바람에 휘날리며 사락거리는 옷 소리도.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밟고 있는 풀잎의 발소리도.

"...!"

눈앞에 아서가 있건만, 그는 희미해지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프리다는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 꿈일까? 혹은 환영 마법? 아니면 유령에게 홀린 걸까?

간혹 미개척지에서 꿈과 환영을 보이는 몽마 형태의 마수나 몬스터들이 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돌부리 사슴의 해체된 일부 몸통에서는 여전히 '뚝뚝'하고 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청각이 마비된 게 아니다.

숲의 소리는 아직도 들리고 있다.

프리다는 손을 들어 깨물었다.

이 자국이 남을 정도로 꽈직 깨물자, 뽀얀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고통은 있어. 꿈이 아니야.'

몽마 형태의 마법도 아니다.

정말로 아서는 '기척을 죽였다'.

"이는 겨우 삼류 수준의 암살자 기술이야."

숲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프리다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은 공허할 뿐이다.

"나 또한 그렇게 깊게 파고들지 않았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역시 없다.

"그런 나의 기척조차 잡지 못한다면…."

프리다의 하얀 목에 뾰족한 나뭇가지가 푹 하고 찔러 들어왔다.

"...!"

프리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경직된 몸으로 눈동자만을 옆으로 굴렸다.

아서가 프리다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프리다, 너는 죽게 될 거야."

귓가에 들려오는 발성음은 보통이라면 기분이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프리다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서는 평범한 인기척을 넘어,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수십 미터는 될 듯한 시커먼 거인이 프리다의 어깨를 짓누르고 뾰족한 손가락으로 목을 겨냥한 듯한 감각이다.

프리다가 경직되어 있기를 잠시.

어깨를 잡은 손의 따뜻한 온기.

그리고 평온한 심장 소리에 프리다는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아서의 존재감 역시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을 조절할 줄도 알고 훌륭해. 과연, 프리다야."

아서는 뒤로 물러섰다.

프리다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속이 뒤틀릴 거 같아 입을 틀어막고 힘겹게 아서를 쳐다봤다.

"아까…. 그건 뭐야?"

"살기야."

"...."

"살기를 담은 일격은 치명상을 입힐 수 있지. 프로 중 초일류급은 완전히 기척을 죽일 수도 있어. 그리고 대상자에게 일격을 날릴 때, 그 무기에 살의를 축소 압축하여 찔러 내지. 그 후엔 살기를 폭발시켜 버리고."

"…살의를 담는다고?"

암살자면 오히려 살기를 죽여야 하지 않는가?

"초일류는 '목표물'이나 그 근처에 있는 자들이 '살의'를 느끼기도 전, 이미 작업을 끝낸 상태일 거다. 살의는 매우 치명적이지만 '암살이 끝난 후'에나 드러나게 되지. 이미 그때는 암살자가 그 자리에 없겠지만. 일종에 시간폭탄을 장착하고 자리를 벗어나는 형태라고 보면 돼."

"...."

이는 커뮤니티의 암살자 계열의 만렙 유저와 멀티 플레이를 하며 아서가 느꼈던 점이다.

유용해 보이기에 자문을 구하고 익히긴 했지만, 숙련도가 낮은 편이라 그리 애용하지는 않았다.

아서는 뒤로 물러섰다.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괜찮냐?"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프리다는 살결이 떨려 왔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아서가 장난스레 목에 나뭇가지를 살짝 갖다 댄 순간, 정말로 목이 관통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프리다는 물기가 젖은 눈으로 아서를 올려다봤다.

"그…. 기척을 죽이는 거 마법이야? 아니지? 애초에 아서, 너 정말로 마법사가 맞아?"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이 세계의 주민이라면 은신 스킬 또한 마법과 같을 것이다.

시스템의 축복인 셈이다.

플레이어의 특권으로 NPC보다 더욱더 기척과 소리를 죽일 수 있어, NPC 감각으로는 플레이어를 더욱 인식하기 힘들었다.

마치 잠입 게임에서 머리 나쁜 인공지능 옆에 플레이어가 우뚝 서 있음에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거처럼.

"...."

프리다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예전, 2인의 괴한 사건을 떠올렸다.

셀롬 아스톤이라는 생도가 고용한 2명의 괴한이 침입한 사건.

그때, 프리다는 기묘한 기척을 느꼈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의 기척만을 감지했을 뿐. 그 이상은 무리였다.

만약 그 악인들이 카를라 그리치가 아닌, 만약 자신을 노렸다면?

꼼짝없이 당했으리라.

천재라고 자만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이래서 무슨 복수를 하겠다고…!

"힘들면 포기해도 돼. 급한 건 아니고, 너라면 천천히 배울 수도 있을-."

"이것도 중간고사 전까지 익히면 되는 거지?"

프리다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서를 노려봤다.

"중간고사 전에?"

후가 아니라?

"그래, 중간고사 전에! 만약 중간고사까지 아서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면 내가 식권 일주일 치 사 줄게. 어때?"

"...."

중간고사까지 이 주일이다.

그 짧은 시간까지 자신의 기척을 감지하겠다고?

아무리 전설급 NPC라지만….

"무리-."

"무리가 아니야. 나는 천재거든."

프리다는 자기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펴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당당해 보였지만, 얼굴에 초조함이 담겨 있다.

그녀 자신도 확실치 않다는 거겠지.

아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성과를 낸다면, 내가 식권 일주일 치를 더 줄게."

"정말?"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또한 아서가 알아볼 '테스트'다.

플레이어가 NPC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면, 그 숙련도가 얼마나 빠르게 올라갈지에 대한 의문.

그 해소점을.

아서는 프리다, 카를라에게서 찾을 생각이었다.

....

..

.

중간고사까지 앞으로 14일.

제39화

나이가 들면 감성적으로 바뀐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프롤론의 감정이 딱 그러했다.

"...."

아니, 그 말을 취소한다. 감성적이기보단 그저 '탐욕적'으로 바뀌는 거다.

프롤론은 자기 손에 들린 서류들을 훑어봤다.

정확히는 서류 가장 밑에 있는 숫자.

"…미치겠군."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게 공이 몇 개인가!?

이 정도 골드면 열차로 아예 수송해야 할 판이다.

나중에 열차가 털리는 불상사마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올 정도.

아니, 그전에 이 정도의 골드들을 보관할 장소가 이 영지에 있던가?

자신의 비밀 금고에도 다 들어가지 않을 양이다.

"이, 일단…. 금화를 백금화로 바꾸고…. 백금화로도 안 되면…. 제국 황실 수표로…."

4일.

단 4일 만에 리바이트 영지의 2년 치 운영비가 체결되었다.

서류상의 계약이지만,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또한 내일이든, 모레든. 어쩌면 한 달이 지나도 '마광 지대 개발권'에 대한 참여 의사를 밝히는 슈하림의 귀족들이.

아니, 소식을 들은 다른 왕국의 귀족들마저 찾아올 것이다.

'할 수 있다!'

자금이 있다면 빈민가뿐만 아니라 난민 문제마저 해결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그리고 '개척지 대혁명' 때 참전하지 못한 치욕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명으로 이끄는 자신의 군대가 미개척지를 개척할 수도 있다.

리바이트 안에만 있다면 프롤론 자신은 얼마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속박].

방대한 지식에 비해 그 어떤 마나조차 가질 수 없었던 프롤론은, 자신의 영혼을 영지에 구속하는 대가로 마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마법을 사용할 기회가 생겼다.

프롤론은 전율했다.

이제 서류들을 정리했다.

전쟁! 정복! 정벌!

이 멀고도 먼 단어가 이토록 바라던 용어였다니?!

"이제 남은 건."

군사 징집, 훈련, 그리고 장비와 보급을 구하는 것.

이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요청만 한다면 귀족들은 너도나도 지급하려 할 뿐만 아니라, 개인 사병마저 빌려주겠지.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에게 조금이라도 멋대로 설치고 다닐 수 있게끔 명분 따위는 절대로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리바이트에도 황제 폐하 산하에 있는 에인헤르들이 있고, 자신의 개인 사병들도 있다.

또한, 미개척지의 몬스터로 인해 땅을 잃은 난민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땅을, 자금을,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면 일어서게 될 것이다.

'미치겠군.'

너무 이상적이다.

어느새 아서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그에게 영향을 받는 걸까?

마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세뇌나 현혹 계열의 마법이 자신의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거 같다.

이게 황제가 될 자의 매력이겠지.

프롤론은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라, 미개척지여.'

프롤론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내가 다 쓸어 주마!'

이제, 슈하림 황제의 인장 찍힌 명령서만 도착한다면.

리바이트의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될 것이다.

***

"네?"

카를라 그리치는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그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지금 팔굽혀펴기를 하는 도중이었다.

다만 그녀의 등 위로 커다란 머리통을 짊어지고 있어서 이질적으로 보였다.

돌부리 사슴이라는 마수의 머리통이다.

수백 킬로그램이 넘는 그걸 등에 멘 채 마나를 이용, 수백 번의 팔굽혀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근력의 순수함이 아닌, 마나를 이용해 근력을 증폭시켜 사용하라는 아서의 가르침이 있었다.

근육의 압축화로 더욱 견고하고 단단한 근육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근육 트레이닝을 마칠 때쯤.

아서가 [서클과 성의 마나 컨트롤 기초학]이라는 책을 읽다가 카를라를 보며 말했다.

"마법을 익혀 보라고."

"…마, 마법을요? 하, 하지만 저는 그런 재능이…."

"괜찮아. 마법서를 일단 주마. 입문서이니 훑어봐."

아서가 읽던 마법서를 내밀었다.

카를라는 손에 있는 먼지를 털고는 마법서를 받았다.

"그리고 대련을 좀 하자."

"…대련이요?"

"실전 경험이 중요하거든. 처음엔 그놈을 상대로 경험치를 올릴까 했는데, 힘 조절에 실패해서 말이지."

아서가 손가락으로 카를라가 짊어진, 혀가 축 늘어진 돌부리 사슴의 머리통을 가리켰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직도 썩지 않고 있다.

실전 경험?

…진짜 훈련!

카를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등에 짊어졌던 돌머리 사슴의 머리통을 내렸다.

쿵!

연무장 땅이 크게 울렸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근육 트레이닝만 며칠째 하고 있었던 터라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진짜 가르침을 주겠다는 거 아니겠는가?

괴력 원숭이를 때려눕힌 그 힘을…!

"과제를 줄게."

"과제요?"

"중간고사 전까지. 그 마법서를 익혀. 그 결과를 성적으로 증명해 봐. 그리고."

아서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내가 가르쳐 줄 건 말 그대로 전투 방법이야. 내가 손가락 네 개를 사용하게 해 봐."

"네?"

"나는 너와 대련을 할 때,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왼손을 쓰지도 않을 거야. 마나도 사용하지 않을게. 단지 오른손 손가락 세 개. 그걸로 너를 제압하겠어. 너는 날 단 한 대라도 때리면 이기는 거야. 어때?"

"...."

카를라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실룩거렸다.

저건…. 무슨 뜻일까? 자신을 배려하는 걸까? 그보다는 오히려…. 얕보는….

의외로 기분…. 좀 나쁠지도?

물론 아서는 모험가에 군 출신이라고 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해도 가문에서는 나름 천재라고 불린 카를라다.

그런 천재가 성실히 단련해 힘을 키웠다.

자만하지도 않았고, 결코 자신이 강하다고 맹신하지도 않았다.

노력하는 천재.

모든 이들이 카를라를 그렇게 불렀다.

그런 자신을 '마법사'가 손가락 세 개로 상대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하, 하지만 아서 님. 그러다가 크게 다칠 수도…."

"식권 내기를 할까? 실패 시 일주일 치 식권 내기 어때?"

"…저 식권은 많아요."

우물쭈물하며 거절할 의사를 밝히는 카를라다.

차마 황자를 때려눕힐 수는 없으니까.

계속 머뭇거리는 카를라의 태도에 아서는 답답함을 느꼈다.

너무 선의적 성향을 가진 카를라에겐 단순한 말로는 통하지 않겠지.

'할 수 없군.'

아서는 한숨을 내쉬며 [악의] 특성에 기대기로 했다.

순간, 아서는 카를라를 노려봤다.

"뭐야, 카를라. 설마 겁먹은 거야?"

"네?"

"아니면 그리치 가문은 마법사를 상대하지 못할 만큼 쫄보들의 집단인가?"

카를라의 한동안 넋이 나갔다.

아서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다.

잠시 뒤, 그 뜻을 이해하곤 카를라의 표정이 사라졌다.

가슴 속 깊이, 꿈틀거리는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구겼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가문을 모욕하는 것만큼은 용서 못 하는 카를라였다.

그리치 가문. 이 가문은 아버지가 세운 그 모든 것이니까.

그걸 부정하는 건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은근히 도발하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아서 황자.

…어쩔 땐 이 황자님의 [악의]가 느껴진다.

어떨 때는 [골목 깡패]가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거…. 상당히 효과 있네?'

카를라의 표정을 보며 아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특성에 감당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나는 마법사다. 카를라. 전투 계열에 약간의 재능만 있을 뿐이야."

"...."

"세상은 넓어. 그리고 나와 동등한 실력자들은 넘쳐난다."

게임 속에서의 이야기지만.

아서는 카를라를 보며 말했다.

"그런 나조차 뛰어넘지 못한다면, 너는 겨우 졸업장만 따가는 귀족 영애에 지나지 않을 거다. 그래, 그것도 좋겠군. 단지 '졸업장'만 따 온 자랑스러운 딸을 너희 가족들은 반기겠지. 마법사에게 지는 그리치 가문. 아주 명예롭고 좋군."

"그 말…. 취소해 주세요."

카를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력을 다해 덤벼. 만약 내가 손가락 네 개를 사용하게 된다면."

아서가 황적색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 취소하고 사과하마."

"…후회하지 마세요."

카를라는 주먹을 움켜쥐며 자세를 취했다.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숙여 아서를 노려봤다.

심호흡하며 단전에 마나를 모았다.

마나가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며 혈관을 타고 전신에 퍼져 나갔다.

카를라의 몸에서 붉은색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화 속성의 마나.

그에 반응하듯 혹한기에 꽁꽁 얼었던 땅이 점차 녹아 이글거린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아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를라를 쳐다봤다.

'…마나 폭주가 심해.'

카를라는 신체적 능력은 초인에 이른다. 마법적 재능도 있다.

다만, 마나를 다루는 데 감성적이다.

그녀를 짓누르는 심리적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그래도 우선 테스트해 보자.'

아서는 이 아카데미 생도들로 실험을 진행 중이다.

개인 교습을 하는 생도들은 어떠한 성장을 이루는지 알아보는 실험.

그렇기에 아서는 프리다에게 두 가지 과제를 주었다.

하나는 아서가 직접 작성한 '해부학' 스킬북을 주며 '교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움을 익히게 했다.

또 다른 하나는 '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실전'을 통한 직접적인 배움이다.

플레이어인 아서와 각각 연결점이 있고, 그 연결점을 통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는 실험이다.

그리고 눈앞.

카를라에게도 두 가지를 행할 것이다.

'교습과 실전.'

카를라는 이론에 약하다.

천부적인 마법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지능'이, 그녀의 이해력이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그 '지식'을 아서의 스킬북이 보조해 주며, '강제로 익힐 수' 있다면?

'내가 스킬북을 읽고 마법 지식이 머릿속에 주입된 것처럼.'

카를라 단점을 보완하는 마법적 지식을 강제로 심을 수 있는지에 따른 실험.

그리고 교습과 실전을 동시에 하며 시너지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다.

'…이거 따지고 보면 생체실험인가?'

이거 진짜 나…. 악당 아닐까?

아니, 어쩌면 망나니 '아서'보다 더한 악질일지도 모른다.

워로드와 망나니 아서의 특성, 그리고 게임의 인식.

이 모든 게 적용되며 아서의 가치관과 태도를 바꾸는 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지금은 도덕과 윤리를 따질 때가 아니다.

이제 곧 이 대륙에 혼돈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며, 수많은 전쟁과 기근이 시작될 것이다.

그걸 막고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방관할 수는 없다.

아서는 카를라를 보았다.

그녀의 올곧은 눈빛이 분노하여 아서를 노려본다.

폭주하는 마나. 그걸 이를 악물며 견뎌내며 아서를 노려본다.

'그러고 보니 저건 권사라기보단….'

"갑니다!"

카를라가 몸을 튕겨 냈다.

콰콰쾅-!

바닥이 움푹 파이며 붉은 오라를 뿜어냈다.

열기로 가득한 일격이 아서의 복부를 향해 휘둘러졌다.

'…버서커 같군.'

쾅-!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의 바닥을 검게 그을렸다.

카를라가 멈칫했다.

'앗!'

힘 조절에 실패했다!

아서 황자님은 분명 마나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맨몸으로 이러한 주먹을 막을 수는 없-.

"...."

카를라의 눈이 커졌다.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주먹이 떨리고 있다. 그런 주먹을 아무런 미동조차 없이 손가락 세 개가 가로막고 있다.

카를라는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아서 슈하림.

그 차가운 눈빛에 카를라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다음 공격을 시도했다.

주먹을 거두고 몸을 회전시켰다.

허리와 골반을 이용해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아서는 손가락 세 개를 휘둘러 카를라의 돌려차기를 튕겨 냈다.

"윽-!"

다리에 찌릿하며 쥐가 났다.

마치 메이스에 후려 맞은 듯한 고통이다.

'의외로…. 성장 속도가 빨라.'

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를라를 관찰했다.

자신이 시키는 트레이닝으로 카를라의 힘 스탯이 영구적으로 올라가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현실에서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혹은 근력 운동을 하지 않을 경우, 근력이 줄어든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 내에서 힘을 키울 경우 '영구적'인 '지속 효과'가 있다.

이는 아서가 카를라에게 가르치는 '도중'에 생기는 건지, 아니면 카를라 본인이 아서와 만나며 생긴 연결고리로, 아서 없이 훈련을 통해서도 '영구적'으로 증가하는 것인지도 알아봐야 할 것이다.

'나와의 접촉 때문인가?'

아서는 파티창을 켰다.

그곳에는 자신이 관리하는 프리다와 카를라의 '파티 목록'이 작성되어 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NPC를 키울 수 있고, 그 NPC들은 다른 NPC들에 비해 여러 혜택을 받는다.

적대 세력의 공격 받는 데미지 일부가 줄어들거나, 스탯이 증가하거나, 혹은 성장 속도가 빠르거나.

'이 파티 목록이 생기는 이유도 알겠군.'

퀴리 영지 때와 같다.

자신의 '휘하'에 놓인 이들과 자동으로 파티가 맺어진다.

아서가 몬스터를 사냥하면 경험치는 고스란히 아서가 가지게 되겠지만.

NPC들이 사냥할 경우, 그 경험치의 일부는 아서가 가져간다.

그럼에도 NPC의 성장이 다른 NPC보다 더욱 빨라진다.

다만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재밌어.'

이거…. 힘을 키우기보단 다른 이들을 육성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잠깐 딴생각을 해서일까?

방심하고 말았다.

카를라의 주먹이 어느 순간 아서의 앞면에 도달했다.

"...!"

이런…?

아서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로 카를라의 복부를 후려쳤다.

쿵-!

카를라의 등 뒤로 풍압이 터져 나갔다.

'맙소사! 힘 조절을 못 했다…!'

카를라는 총알처럼 튕겨 나가 벽에 꽂혀 버렸다.

"카를라! 괜찮아…?"

"쿨럭…! 우욱…!"

카를라가 배를 부여잡고 토를 해 댔다.

눈물마저 글썽거린다.

이런, 심했다.

카를라를 상대로 힘 조절을 실패하다니?

아서는 급히 포션을 꺼내 들고는 아차했다.

지금 포션 사용은 최대한 신중히 해야 한다.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아마도 대륙 전체가 떠들썩하겠지.

사용도 비밀리에 사용해야 한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지킬 힘과 영향력이 생길 때까지.

그때.

"대단해."

"...?"

카를라가 고개를 들어 아서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가는 젖어 있었지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서 님! 진짜 마법사 맞아요?! 어, 어떻게 마나도 없이 그런 위력을…!"

"...."

"주, 중간고사까지라고 했죠? 쿨럭!"

카를라는 손등으로 입을 닦아 냈다. 고결한 의지가 담긴 비취색 눈동자가 아서를 쳐다봤다.

"그때까지 아서 님께 트레이닝 받으면 네 손가락도 사용 가능한가요?"

"…너 하기에 따라 다르지."

"알았어요!"

카를라가 주먹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아서는 씁쓸하게 웃었다.

참으로 순수하기 짝이 없는 아가씨다.

이런 아이를 상대로 실험이나 하고 있다니, 양심이 쿡쿡 쑤셔 온다.

"카를라."

"네! 아서 님!"

"식권 일주일 치."

"네에에에?!"

그건 그거고. 일단 약속이었으니 식권 일주일 치는 받아야겠다.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중간고사까지 앞으로 10일.

제40화

"…뭐야? 이거?"

프리다는 기숙사에서 아서가 준 [기초 해부학]이라는 서적을 읽고 있다.

필체가 강의 발표한 내용을 아서가 칠판에 적는 것처럼 정갈하고 유려한 글씨체였다.

그 말은 아서가 정성을 다해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 책을 집필했다는 거겠지.

상당히 놀라웠다.

나이도 젊은데 지필 능력도 갖추고 있는 걸까? 게다가 해부학의 섬세함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마치 직접 절단면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도 정교하고 생생하게 그려 놀라울 정도다.

'아서, 그 인간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못 하는 게 뭐가 있을까?

아서를 떠올린 프리다는 손등으로 뺨을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뭐 가르쳐 줄 건 없어?'라고 물었을 때, 아서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이 책을 내밀었다.

아마도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둔 거겠지.

'그 정도로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까?'

분명히 이 서적을 만드느라 밤낮을 지새웠겠지? 중간고사 기간에 끙끙거렸을 그를 생각하니 귀엽기 짝이 없었다.

흐응, 그래 봤자야. 나는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고, 내키지도 않아. 뭐, 노력이 가상하니 밥 정도는 같이 먹어 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식권 내기도 자신을 만나기 위한 빌미에 지나지 않으리라.

'솔직한 건지, 그렇지 못한 건지. 참 귀엽다니까.'

겨울이라 그런 걸까?

그녀의 뺨에 온기가 차올랐고, 길게 뻗은 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프리다는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그것과 별개로.

'…이 책 이상해.'

프리다는 살며시 눈을 뜨며 책을 바라봤다.

책을 읽고 있는 것일 뿐이건만, 기묘하게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암기엔 자신 있던 프리다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느낌이었다.

책의 내용이 암기되고, 분석되고, 해석되면서 바로 이해가 되었다.

실제로 해부를 해 본 적 있다고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다.

마치 '마법'처럼 한 번 읽은 내용이 본능적으로 '기록'된다.

그걸, 프리다는 정확히 눈치채지 못한 채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용이 너무 단순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그런가?'

이대로라면 중간고사 성적도 잘 나오겠네.

2학기 장학금은 가볍게 따낼 수 있을 터.

프리다는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자연스레' 읽어 나갔다.

그것이 변화의 징조라는 걸 모른 채.

***

"나 천잰가 봐!"

카를라에게 있어 시험 기간에는 불면증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책을 펼친다.

글을 본다.

머리를 박고 잠든다.

이 세 가지 과정이 10번 중 9번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났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서클과 성의 마나 컨트롤 기초학]

아서가 준 책을 읽고 있던 그녀가 눈을 빛냈다.

'내가 암기하고 있어!'

세상에….

'내가 이해하고 있어!'

맙소사…!

'나 천재일지도?!'

이건 기적일지도…!

한 번 본 내용이 머릿속에 담겼다. 이건 기적이다.

아니, 어쩌면 공부에 대한 재능이 뒤늦게 발휘된 건지도 모른다!

동생들에게 '빡대가리!'라든가 '돌머리!'라든가, '멍청이!'라든가.

온갖 명칭으로 불린 바보 누나였지만.

아버지를 닮아 육체파였던 그녀가 마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 난 엄마를 닮은 거였어!'

카를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밤샘 공부하는 거야!'

이 기세라면 필기시험도 문제없으리라!

카를라는 아서가 준 책을 밤새워 공부했고, 그 기세를 몰아 다른 교수들의 과목도 봤다.

'집중할 수 있을 거야!'

다른 과목의 책을 펼친다.

글을 본다.

1분.

이상하게 눈이 침침하고 흐릿하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3분.

글자가 너무 빡빡해, 라며 불만을 토해 냈다.

지루함과 나른함에 길게 하품을 했다.

5분.

꾸벅거리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10분.

책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었다.

***

프리다와 카를라는 아서에게 받은 '스킬북'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매일 같이 훈련에 임했다.

안개 낀 9급 미개척지에서의 프리다 훈련.

"프리다. 기척은 동물들도 줄일 수 있어. 기척 말고 다른 감각을 느껴 봐."

아서의 조언에 프리다는 다른 감각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녀가 의지하는 건 청각이었다. 엘프는 소리에 민감하며 예민하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잠깐만, 아서."

프리다는 아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고 손가락에 코를 대며 킁킁거렸다.

아서는 멈칫했다.

"…무슨 냄새가 나. 탄 냄새랑 술 냄새네?"

엘프가 청각 다음으로 예민한 감각은 코, 그다음 눈이다.

은근히 머리를 혼미하게 만드는 냄새에 프리다는 고개를 기울이곤 기묘한 눈길로 아서를 올려다봤다.

아서는 시선을 피했다.

"…끊으려 노력 중이긴 하다만."

"그래…? 의외로 중독성 있는 냄샌데."

프리다가 다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를 좋아하는 거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서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가?"

"그래."

아서는 씁쓸하게 웃었다.

[알코올 중독]과 [담배 중독] 특성을 없애려 노력 중이었다.

게으름 특성이 사라졌음에도, 이 두 가지는 끊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럼에도 줄이려 노력 중이다.

"…좋아. 프리다. 다시 한번 해 봐."

아서는 말을 돌렸다.

아서가 기척을 줄이며 안개 속에 스며들었고, 프리다는 청각이 아닌 냄새를 추격했지만.

'냄새가 사라졌다?'

놀란 눈을 할 때, 그녀의 목에 다시 나뭇가지가 닿았다.

"좋은 시도였어. 하지만 소리도 죽일 수 있는데 냄새도 못 죽일까? 소리는 자의로, 냄새는 약초로 죽일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생각하렴."

정답은 알려 주지 않았기에 프리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아카데미 연무장에서의 카를라 훈련.

쿵-!

쿠쿠쿠쿠쿵-!

카를라가 주먹을 휘두르고 허리를 이용해 발로 걷어찼다.

그럴 때마다 아서는 제자리에서 손가락 세 개로 정권과 발차기를 튕겨 냈다.

강렬한 공방이 계속된다.

빠르고 매섭다. 묵직한 한 방 한 방이기에 만약 잘못 막다가는 치명타가 터지는 순간 아서조차 상당한 데미지를 입을 터였다.

화 속성이라 위력 또한 상당했다.

아서의 손가락이 카를라의 얼굴, 정확히는 이마에 접근했다.

"...?!"

카를라가 아차한 순간, 아서는 손가락을 구부리곤 튕겨 냈다.

일명 딱밤.

쾅-!

"...!"

이마가 터질 듯한 충격에 카를라는 연무장을 굴렀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세상에…! 저런 딱밤이 세상에 어딨어?!

카를라는 눈이 핑핑 도는 걸 느꼈다.

"카를라, 폭주가 상당하구나. 마나 컨트롤이 너무 미흡해. 내가 준 마법서는 읽고 있는 거니?"

"네? 아, 네. 물론이죠! 아직 다 읽으려면 멀었지만요…."

카를라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 멀었구나…."

아서는 턱을 짚고는 생각에 빠졌다. 그리곤 카를라를 힐끗 쳐다봤다.

"카를라."

"네?"

"너는 버서커 체질인 것 같네."

"...?"

버서커?

그…. 광전사?

막 때려 부수고, 이성을 잃고 날뛰며 적군 아군 구분이 없는 그런…?

카를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런…?"

"그것도 아니면."

아서는 카를라를 쳐다보며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마권사가 되어 보는 게 어떻겠어?"

카를라는 어벙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

아서는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학업에도 충실하고 조수 일도 빈틈없이 해냈다.

그런 아서에게 '공부를 가르쳐 줘!'라는 동급생들의 부탁도 있었다.

아서를 시기하고 비웃던 이들마저 중간고사 기간이 되니 초조해진 것이다.

시간을 들여, 개개인에게 가르침을 전수해 주는 건 손해에 가깝다.

하지만 아서는 정중히 배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순순히 응해 주었다.

그들의 자기소개를 듣고, 그들의 특성에 따라 육성했다.

그리고 특성에 맞지 않는 반대되는 재능이라 하더라도 배움에 뜻이 있다면 또한 들어주었다.

아서는 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놓칠 순 없었다.

똑같은 환경에 범재의 재능을 가진 자들에게 향하는 가르침.

전혀 다른 환경에서 천재적 재능을 넘어, 초인에 달하는 재능을 가진 자들에게 향하는 가르침.

아카데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과도 같았다.

"[모범적인 교육자] 특성이 생성되었습니다."

[모범적인 교육자]

모범적인 교육 과정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가르치는 대상의 성장률 1.2배 가속. 특성과 직업군에 맞는 가르침의 경우 1.5배 성장률 가속.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모범적인 교육자라니? 동기인 생도들로 하여금 실험체로 쓰고 있는데?

"[악의] 특성이 증가하였습니다."

[악의]

악의적인 성향을 가진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난다.

모든 능력 1.3% 증폭. 신념 혹은 올곧음을 가진 자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 일시적으로 8% 증폭.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건가?

아서는 혀를 찼다.

[악의]를 없애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중간고사까지 앞으로 3일.

아서는 눈을 부릅떴다.

"찾…았다."

프리다가 아서의 나뭇가지를 움켜쥔 채 고개를 내밀었다.

키 차이 때문에 발꿈치까지 들어 올린 그녀는 아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서, 내기했었지? 식권 내기! 그러니까…."

아서는 힐끔 주변을 살폈다.

묘하게 습기가 차 있다. 온몸에 축축하게 젖은 듯한 감각.

그렇군.

'물의 정령을 이용한 건가?'

수(水) 속성의 프리다다. 물의 정령을 이용.

주변 습도를 올리고 마나를 퍼트려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런 수분을 거미줄처럼 엮어 마나로 연결.

자신의 또 다른 감각으로 만들어 냈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신을 중심으로 2m 정도의 좁은 간격.

하지만 나중에 보다 더 성장한다면 간격을 늘리거나 혹은 자신의 기척도 죽이는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하다. 프리다."

아서는 프리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역시 너는 천재야."

아서의 칭찬에 프리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긴 귀 또한 쫑긋 올라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응!"

...

..

.

쾅-!

아서는 카를라의 정권을 막아 냈다. 폭발과 함께 전신에 화염이 몰아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화염이 작렬하며 주변을 태웠다.

아서는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사용한 손가락은 4개.

시선을 올려 카를라를 쳐다봤다.

땀마저 증발시키며 거친 호흡을 유지 중인 카를라 그리치.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 아서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건지 주먹을 회수하고 몸을 회전하며 돌려 차기를 했다.

쾅-! 쾅-!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묘하게도 마나 컨트롤은 전보다 상당히 정교해졌다.

"그만해. 카를라."

카를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는다.

이미 전투에 빠진 터라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거겠지.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몰입]과 [전투 집중력]의 특성이 카를라에게 생겼다.

하지만 이게 변질되면 정말로 버서커가 되겠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레벨 100대에 각성, 전직하는 구도로 간다면 카를라에게 있어 버서커가 제격일 것이다.

탱커이자 딜러.

상당히 유용한 포지션이다. 물론 광역기로 아군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미흡함마저 성장시키면 그만이다.

아서는 자리에서 움직였다.

지면에서 발을 떼고 앞으로 다가가 카를라의 주먹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카를라의 얼굴 정면에 대고 말했다.

"그만해. 카를라."

"...!"

그제야 카를라가 제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움찔 놀라며 굳어졌다.

아서가 자기 이마를 맞대며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숨결마저 느껴졌다.

덕분에 열이 화끈 올라갔다.

아무래도 화 속성에 마나 폭주로 몸에 열기가 화끈 올라간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의 상황이라니…!

눈이 핑핑 돌 때, 아서는 그녀와의 거리를 벌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리 위에 올리며 한마디 했다.

"훌륭해. 카를라 그리치."

"네?"

"잘했어."

카를라가 흠칫 놀라 아서의 다리를 바라봤다.

움직였다? 아서 님이? 그러고 보니 희미한 기억 속에서 아서 님이 4개의 손가락을 쓴 거 같았다.

"저, 저…. 아서 님을 이긴 건가요?"

"그래."

"...!"

카를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서가 사과하자 카를라가 놀란 나머지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네? 가, 갑자기…?!"

"네 가문을 모욕했던 점. 사과하마."

"아…."

카를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실, 잊고 있었다.

하지만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서는 얼마나 자신을 상처 입혔을까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했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성장'을 돕기 위해서겠지.

분명 본심이 아니었으리라.

카를라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감사하고 싶었다.

자신의 마나 컨트롤은 미숙하다. 아마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녀를 옭아매기 때문이겠지.

"괜찮아요. 오히려…."

그리고 그 족쇄의 쇠사슬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얼마나 강하게 옭아맸는지 성장하는 그녀를 점차 옥죄어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걸, 아서가 조금이나마 틀게 해 주었다.

카를라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감사해요. 아서 님."

당신 덕에 저는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41화

아서는 발걸음을 옮겼다.

'유의미한 실험이었다.'

범재의 경우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특성 중에는 '노력가'도 있지만, '게으름'의 특성을 타고난 자도 있다.

그 결과는 장기적으로, 하지만 석 달 내에는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프리다와 카를라는 다르다.'

그 둘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자신에게 배움을 받자 그들은 천재를 넘어 초인적 재능에 도달했다.

이는 플레이어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서가는 성장세다.

'나도 열심히 해야겠는 걸?'

북부의 빈민가에 위치한 지하수로에 들어간 후, 에인헤르들이 지키고 있는 지하수로의 움푹 파인 동굴을 볼 수 있었다.

고블린 굴. 던전이었다.

"음, 오늘도 왔군."

고블린 굴을 지키던 에인헤르들이 아서를 맞이했다.

프롤론에게 중간고사 시험을 제안한 후, 아서는 수시로 점검차 이곳에 찾아왔었다.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들어갈 건가? 조수라 힘들겠군. 중간고사 준비도 해야 하는데 교수님들의 시험 보조마저 해야 하니…. 게다가 위험할 텐데."

"보너스 점수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잠깐 입구 근처만 어슬렁거리는 거니까요. 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조심해. 고블린들은 영악하니까. 아니면 호위해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서는 미로와 같은 고블린 굴을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 깊숙이 들어갔고, 한 장소에 도달했다.

동굴 속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홀.

그곳에 마광석으로 만든 옥좌가 놓여 있고, 그 위엔 고블린 하나가 앉아 있다.

아니, 고블린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키는 2m 20cm.

마치 두꺼비 같은 뚱뚱한 체구를 가졌다. 손에는 자신의 동족들을 죽여 만든 두개골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던전의 보스몹.

고블린 로드.

그리고 그 좌우로는 키가 190은 될 거 같은, 허리가 굽고 마광석으로 만든 둔기를 든 홉고블린들이 있다.

「네, 네놈! 또 찾아온 게냐! 가, 감히 우리의 왕국을 어지럽히러 오다니!」

고블린 로드가 벌벌 떨며 물었다.

그는 아서와 몇 번이나 충돌하며 얻어 터졌던 경험이 있었다.

매번 올 때마다 두들겨 맞은 고블린 로드는 당연 아서를 보며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실험이다."

프리다와 카를라의 성장이 예상을 초월했다.

이따위 던전은 순식간에 클리어되겠지.

그래선 그 두 사람에겐 큰 자극이 되지 않는다.

미로와 같은 이 던전 속에서 그 두 사람이 로드가 있는 이곳까지 도달하고.

이 로드를 사냥했으면 했다.

물론, 로드 또한 그 두 사람의 힘이라면 충분히 잡겠지.

하지만.

"몬스터를 성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아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몬스터를 가축으로 길들이고 성장시킨 후 잡아 경험치를 챙긴다.

게임상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고블린 로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3일밖에 안 남았지만."

아서는 걸음을 옮겼다.

"학습 능력을 갖춘 놈이 죽을 위기까지 처하면 알아서 성장하겠지."

아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3일 벼락치기라도 좋은 성적은 내야 하지 않겠어? 고블린 생도."

「...! 주, 죽여!」

홉고블린들이 아서에게 달려들었고.

아서는 [악의]로 그들을 '교육'시켰다.

***

시간이 흘렀다.

리바이트 교수진과 총장 프롤론은 상당히 바빴다.

리바이트에 들어온 난민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중간고사마저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쳐 과로로 쓰러지는 교수진도 생겨났다.

그렇다고 시험 퀼리티를 낮출 순 없었다.

-시험을 대충 치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만약 조금이라도 어영부영하다간 옷을 벗게 될 게야. 또한 내 이름 하에 다시는 교육계에 발을 들이 내밀지 못하게 될 거니 명심하게.

교수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말한 프롤론이었기에, 그 누구도 대충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준비한 시험 과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과목별로 실험이 이루어졌다.

"해부학 시험준비는 잘했겠지? 시작해라."

눈 그늘이 생겨난 교수의 말에 생도들은 시험을 치렀다.

하프 엘프, 프리다는 해부학 필기를 바라봤다.

'…알 수 있어.'

단 한 권이건만. 기초적인 지식이 대부분 머릿속에 새겨진 상태였다.

프리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 시험. 만점을 기대할 만하였다.

"마법 기초학이다. 만약 시험 도중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을 허락하마."

탈모를 걱정하는 마법 기초학 노교수가 머리를 톡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카를라는 문제집을 보며 눈을 빛냈다.

'뭐야! 보기만 해도 답을 알겠어. 나 진짜 천재가 되어 버린 걸까?!'

아서가 준 마법서를 익힌 카를라는 자신만만하게 펜을 굴렸다.

그렇게 이틀간 시험이 이루어지고, 중간고사.

'던전 체험'을 치를 시기가 찾아왔다.

***

아서는 지하수로의 던전 입구에 서 있었다.

에인헤르들이 일일이 생도들과 동행해 던전 속으로 들어갔다.

중간고사.

고블린 사냥.

채점 방법은 간단했다.

고블린 1마리당 5점.

홉고블린은 1마리당 15점.

조별로 팀을 짤 경우 점수를 비례해 나눈다.

30점 만점이므로 개인일 경우 고블린 6마리나 홉고블린 2마리만 잡아도 만점이다.

그리고 특별 점수.

고블린 로드 50점 및 3개월간 기숙사비 면제. 기숙사에 머물지 않을 경우 현물로 주어지며, 2개월간의 식권 증정 등이 있다.

이는 다른 과목에서 떨어진 점수를 메우고 장학금, 아카데미 이용 시설에 대한 편의성 제공을 위한 점수이기도 했다.

만약 위험이 있을 경우, 에인헤르들이 개입해 지켜 줄 것이다.

생도들을 체크하고 있던 에인헤르들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카데미에서 준 방어구와 무기를 거머쥔 아카데미 생도 5명을 볼 수 있었다.

"너희가 마지막이구나."

아서 아난시아. 프리다. 카를라 그리치.

그리고 남은 생도 2명.

프리다는 물의 정령사. 카를라는 근접 격투가. 아서 아난시아는 마법사.

남은 2명의 생도들은 보조학과 소속의 성직자와 기사학과의 전사 계열의 생도였다.

마지막 남은 생도들치곤 밸런스가 너무나도 절묘했다.

에인헤르들은 매우 만족했다.

이러한 밸런스는 안전과 직결되니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개인으로 할 거니, 팀으로 할 거니?"

카를라와 프리다가 서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팀으로요."

"개인으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봤다.

그 둘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이니 팀으로 하겠습니다."

미로와 같이 엉켜 있는 던전 속이다.

지금쯤 고블린 대부분은 생도들에 의해 토벌당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던전의 가장 깊은 곳.

옥좌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고블린 로드. 그리고 홉고블린들뿐이었다.

남은 곳은 다 폐쇄된 상태.

아서가 총장 프롤론에게 부탁해 일부러 그렇게 기획한 것이었다.

아서가 그렇게 말하자,

"할 수 없지."

"같이 들어갈게요."

프리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카를라는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남은 생도 2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던전 입구에 들어섰다.

에인헤르들도 뒤를 따랐다.

생도들의 안전과 점수를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실험 테스트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두 눈으로 관찰할 때다.

***

'억울하다!'

고블린 로드는 눈을 부릅떴다.

얼굴 곳곳이 피가 터져 나오고, 뼈마디마다 부서져 비명을 질렀다.

그런 소리마저 시끄럽다며 발로 머리를 밟아 땅에 파묻게 했다.

절망 속에서 피를 흘리던 고블린 로드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자신을 짓밟고 내려다보는 인간을 바라봤다.

빛의 광물들을 등진 채, 그늘진 얼굴 사이로 황적색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살기와 살의가 가득한 눈빛.

'괴물…! 괴물…!'

그 인간은 맨손으로 고블린들을 도륙했다.

손가락만으로 터트려 죽이고, 찢어 죽이고….

그리고 3일간 자신을 찾아와 두들겨 팼다.

압도적인 힘 앞에 호위를 맡은 홉고블린들조차 그 인간의 눈치를 살폈다.

달려드는 척을 할 뿐이다. 로드의 명을 어길 순 없으니까.

그리고 가볍게 쓰러졌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저 인간을 두려워했다.

잔꾀를 가진 놈들이 '어떻게 해야 덜 맞을까?'를 학습한 것이다.

'빌어먹을…!'

덕분에 얻어맞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그 존재는 자신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가차 없이 '생체 실험'을 행했다.

상처를 주고 포션으로 치료한다.

그리고 다시 상처를 주고 포션을 주기를 반복했다.

'포션의 효력을 보겠다'라는 실험 때문에.

그 밖에도 '몬스터를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다며 온갖 실험이 행해졌다.

고통 속에서 고블린 로드는 공포와 두려움에 미칠 거 같았다. 그러면서도 복수를 갈망했다.

저 인간을 죽이고 말겠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선 살아야 했다.

「사, 살려 줘…!」

결국, 비참하게 인간 따위에게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

고블린의 왕이 고개를 숙이며,

「제발…! 제발…!」

목숨을 구걸했다.

고개를 숙이라면 숙이겠다. 발을 핥으라면 하겠다.

하지만 이건 잠시다. 그가 방심하여 등을 보이는 순간, 칼을 꽂을 그 날을 위해 놈에게 순종할 것이다.

그렇게 복수를 다짐하며 연기했다.

하지만.

-아니, 너희는 살아남지 못해.

놈은 사형선고를 내렸다.

-난 너희를 죽일 거다.

홉고블린들이 무릎 꿇고 머리를 감싸며 두려움에 떨었다.

저 냉혹한 한마디는 진심일 것이다.

-단, 기회를 주마.

그 존재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매섭고, 광기가 넘치는 눈빛.

그 [악의]에 고블린 로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 같았다.

-네놈에게 두 여인이 찾아올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던 고블린 로드는 고개를 들었다.

넓은 던전의 홀.

고블린 왕의 대전.

마광석들이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마나와 마력을 뿜어내고 있다.

이 대전은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자신의 영역이었다.

그런 그곳에 침입하려는 악랄한 인간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고블린 로드의 손에 달린 마광석으로 만든 수정구에 던전 안을 휘젓고 다니는 이들이 보였다.

엉성해 보이는 세 명의 인간과 그 뒤에 있는 두 명의 여인.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와 물결과 같은 천청색 머리를 가진 하프 엘프.

-그 둘을 제압해 봐. 그럼 네놈에게 자유를 주지.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고블린 로드의 두툼한 볼살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지독하리만큼, 무서운 미소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은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고블린 로드는 이를 악물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입을 버려 포효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저 두 여자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다!'

***

던전, 고블린 굴.

이는 8급 미개척지와 맞먹는 등급이다.

고블린은 약한 몬스터였지만, 지능이 뛰어난 편이며, 악랄하고, 함정과 속임수를 쓰는 놈들이었다.

무엇보다 기척과 소리, 자기 분비물로 던전에 악취를 유발해 자신들의 냄새마저 소멸시키는 주특기를 가졌다.

귀한 귀족 집 자제들이 대부분인 아카데미에서는 이러한 '지능'을 가진 몬스터를 상대하는 걸 꺼리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실전이라니?

자제들이 조금만 다쳐도 고위 귀족들의 항의가 빗발치건만.

그들의 비호 아래에 있고 싶어 하는 교수들로서는 '던전 체험'은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는가?

당연, 그런 교수들을 한 마디로 다물게 한 건 프롤론이었다.

그리고 '던전 체험' 시험은 일사천리로 통과되었고.

1학년 생도 전원이 이 던전을 체험했다.

'덕분에 성장 폭을 볼 수 있었다.'

아서는 카를라와 프리다 뒤에서 던전 속을 걷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눈앞에는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2명의 생도들이 있다.

그들을 바라보던 아서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보다 특성 효과가 엄청나군.'

자신이 가르쳤던 동기들의 남다른 성장이 보였다.

저번 9등급 미개척지 체험과 비교하자면 상당한 성장 폭을 보여 주고 있는 상태.

매우 만족스러운 실험 결과였다.

'평범한 NPC들도 내가 가르치면 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다는 거겠지.'

플레이어에게 귀속된 NPC들에게 주어지는 경험치 특성이다.

적어도 일반 재능을 가진 NPC에 비해 빠른 성장률을 나타내리라.

[모범적 교육자]의 특성마저 합하면 거의 경험치 2배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천재를 넘어선 NPC들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프리다와 카를라.

가장 기대 중인 이 두 사람의 성장을,

아서는 두 눈으로 목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끼에에에에엑!」

얼마 가지 않아 고블린과 마주했다.

제42화

"으, 으아아아악! 고, 고블린이야!"

3명의 앳된 청년과 2명의 여인이 던전 속 동굴을 탐험 중이었다.

그러는 중 고블린들이 튀어나와 대치했다.

겁에 질린 고블린들.

150도 되지 않는, 드워프와 비등비등한 키지만, 그 가느다란 체구는 근력을 내기엔 앙상했다.

그럼에도 익살스러운 표정과 뾰족한 이빨. 악에 물든 살의는 경험이 없는 생도들을 위축시키기엔 충분했다.

"야, 이제 어떻게 하냐? 그냥 도, 도망칠까?"

"뭐, 뭘 도망쳐! 막아 봐! 기도문을 외워 치료해 줄 테니까!"

근접 전사 포지션인 남자 생도가 비명을 질렀고, 성직자 생도가 그런 전사를 앞으로 밀어냈다.

"염병! 너는 뒤에 숨고 나보고 싸우라고? 나도 무섭…."

이윽고 전사 계열의 생도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영웅의 가문, 그리치 가의 여식 카를라 그리치.

그 옆에 엘리니아 소속, 하프 엘프 프리다.

둘 다 아카데미에서 지급해 준 가죽을 덧댄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카를라는 손에 판금이 박힌 장갑을, 프리다는 등에 화살집과 늘 가지고 다니는 나무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두 여인이 후방에 배치된 상태에서 멀뚱히 앞에 걷는 두 남자 생도들을 바라봤다.

카를라.

발랄하면서도 내성적인 부분이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이였고.

프리다.

도도하면서도 자존심이 높고 경계심이 강한 이였다.

아카데미에서 이 둘은 꽤 유명했다.

실력 면에서도 그렇지만, 2, 3학년 선배들도 눈여겨볼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제 싸늘한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

상큼한 봄날에, 꽃이 핀 교내에서 텁텁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끼리 하하 호호 다닐 것인가?

아니면 상큼하고 발랄한, 그러면서도 새침데기처럼 도도한 여자 친구와 함께 화기애애한 교내 생활을 할 것인가?

순간, 망설임이 사라졌다.

"…와라!"

두려움이 줄어들며 전사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전사의 영향 탓일까?

"고블린…. 생각보다 별거 아니겠지. 두 분은 뒤에 계세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성직자도 갑자기 지팡이를 들고, 성경책을 펼치며 고개를 치켜든다.

두 남자 생도들을 바라보며 카를라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프리다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다는 물의 정령, 닉을 사용하여 주변에 기체를 뿌려 기척을 감지했다.

좁은 동굴이다 보니, 입구 쪽으로 길게 퍼트리는 게 가능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저번보다 성장한 4m의 탐지 능력을 발휘했고. 그녀는 순간 동굴 속에서 기척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인기척을 죽인 채 바위틈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이들.

에인헤르들이다.

거리를 두고 안전을 도모하며 점수를 체크 중이었다.

프리다는 힐끗 후방에 있는 아서를 쳐다봤다.

그는 그 어떠한 마법 준비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지그시 쳐다볼 뿐이다.

프리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가, 가자!"

전사와 성직자가 고블린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두 세력이 겁에 질려 거리를 간보던 중 전사가 먼저 공격했고, 고블린은 뒤로 물러나나 싶더니, 곧 옆에 있던 고블린들과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정면만 보던 전사는 마광석으로 만든 곤봉에 옆구리와 다리를 얻어맞았다.

"으아아악! 이, 이게!"

전사가 방패를 옆으로 휘둘렀지만, 이윽고 정면이 비어 버렸다.

고블린이 앞으로 나아가 창으로 전사를 찔렀다.

콰직-!

고블린의 동작이 늦었기에,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어깨를 관통당했다.

이는 치명상이었다.

"이, 이것들이! 힐!"

뒤에서 기도문을 외운 성직자가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전사의 몸에 빛이 깃들며 상처가 서서히 치료된다.

그때 고블린들이 기름이 담긴 주머니와 횃불을 던졌다.

화염이 좁은 동굴을 가득 메우며 퍼져 나갔다.

"미, 미친! 어이, 치료 마법…!"

당연히 전위에 있던 전사 또한 화염에 휩싸여 불이 붙었다.

"으아악!"

"어? 어?! 히, 힐!"

뒤에서 기도문을 읊던 성직자가 다시금 치료를 행했지만.

「끼에에에에엑!」

때를 보던 고블린이 불꽃 속에서 뛰쳐나와 곤봉으로 성직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콰직-!

머리에 피가 튀기며 성직자가 쓰러졌다.

"론!"

"으악! 아파, 젠장! 막아 봐! 기사잖아!"

"빌어먹을, 멍청한 성직자 같으니! 네가 먼저 치료해 줘야지. 다리에 불이 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잖아…!"

방패를 든 전사가 고블린을 밀쳐 냈다.

"…마법사. 너 뭐 해? 안 돕고!"

전사와 성직자가 아서를 질책했다.

아서는 그저 지켜만 봤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파티를 짰으니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고블린들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결국 전사는 방패를 휘두르며 고블린을 밀쳐 냈고, 성직자는 바닥을 기며 울기 시작했다.

"…개판이네."

아서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설마 이 정도로 수준이 낮을 줄이야.

말 그대로 개판이다.

전위, 중위, 후위.

이렇게 대열을 짠 후 던전에 들어온 게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전사, 마법사, 성직자, 격투가, 그리고 정령사 겸 궁사다.

황금과도 같은 밸런스의 포지션.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한 파워를 발휘했어야 했다. 그런데 전위에 서야 할 카를라를 자기들 멋대로 후위에 배속시키고.

전사와 성직자가 대열을 망가뜨리고 전위에 돌격.

참으로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경계심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흥분해 틈을 주고 말다니.

뻔하다. 프리다와 카를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런 거겠지.

아무리 이성에 관심 있는 나이라지만, 목숨이 오가는 던전 안이거늘.

최악. 그 자체였다.

카를라와 프리다, 샬럿, 직스를 봐 온 터라 눈이 높아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아서만 하는 게 아니었다.

프리다는 혀를 찼다.

'뭣들 하는 거야?'

프리다는 불쾌감이 솟아올랐다.

어찌어찌해 고블린 몇 마리를 사냥한 듯했지만, 단지 고블린을 잡는 것만으로는 좋은 점수를 얻을 수는 없다.

시험 감독관은 몰래 뒤에 숨어서 포지션과 대응을 지켜보고 점수를 내릴 것이다.

고블린을 많이 잡는다고 한들 걸리는 감점 요인이 많다.

어쩌면 점수는 최하점을 받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천재인 자신의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다.

돈이 없는 프리다로서는 장학금을 따야 다음 2학기도 무사히 보낼 수 있다.

게다가 아서가 지켜보고 있다.

그토록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에게 꼴사나운 모습과 최악의 마이너스 낙제점이 나오도록 가만히 지켜보라고?

프리다가 지팡이를 움켜쥐고 나서려는 그때.

쿵-!

프리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시야 사이로 찰랑이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프리다의 옆을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너무나도 묵직한 발소리가 동굴 속에 메아리쳤다.

단지 비좁은 동굴 속이라 소리가 울린 것도 있지만, 바닥에 족적을 남긴 걸 보면 어처구니없는 힘이 작용한 것이리라.

질주, 그리고 벽을 밟은 도약.

흐트러지는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카를라의 매서운 눈빛이 내비쳤다.

주먹을 움켜쥐고 고블린들의 후위에 착지했다.

「...!」

고블린들이 멈칫 놀라며 카를라에게 뛰어들었다.

카를라가 발을 굴리며 몸을 회전했다.

붉은 오라가 뿜어졌고, 그 오라는 불꽃이 되어 고블린들을 튕겨 냈다.

불꽃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먹은 고블린의 머리를 터트리고 발은 복부를 걷어찼다.

쾅-!

한 방 한 방을 때릴 때마다 폭발적인 위력을 냈다.

광기에 물든 그 매서운 눈빛에 전사와 성직자는 움찔하고 말았다.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가녀리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던 그리치 가의 여식.

하지만 역시 영웅의 딸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어처구니없는 실력으로 고블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다만.

화르르륵-!

불꽃이 아군마저 태워 버릴 듯 번져 나간 게 문제였지만.

"으아악!"

전사와 성직자가 기겁했다.

아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카를라는 미흡한 점이 많다.

하지만.

'그 미숙함을 채워 줄 동료가 있다면야.'

아서는 프리다를 쳐다봤다.

프리다는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닉-!"

물의 정령, 닉이 소환되고 동굴 속에 습도가 높아졌다.

이윽고 물방울 덩어리들이 생기고 뭉쳐지더니, 곧 파도를 만들어 내 좁은 통로를 메우고 밀어냈다.

"으아악!"

전사와 성직자 역시 파도에 휘말렸지만, 그로 인해 몸에 붙은 불이 꺼졌다.

체구가 작고 지친 고블린들은 파도에 휩쓸려 밀려 나가 바위에 부딪혔고, 물은 어느새 발목까지 줄어들어 흘렀다.

"…맙소사."

전위에서 난장판을 만들던 두 명의 생도가 프리다와 카를라를 쳐다봤다.

압도적인 실력이다.

적어도 2학년 선배와 맞먹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앗!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뭣대로 전위로 와서…! 포, 포지션을 지키려 했지만, 위험해 보여서…."

덤벙이처럼 '에헤헤' 웃는 카를라.

"…멍청하게 있지 말고 일어나. 잡은 건 겨우 고블린 6마리밖에 되지 않아. 점수를 다섯이서 나눠도 최하점이라고. 꼴등이 되고 싶어?"

고개를 치켜들며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부드럽게 손을 내밀며 챙겨 주는 프리다.

그 두 사람을 보며.

'…멋지다. 천사 같아.'

'…이게 첫사랑?'

두 생도는 반하고 말았다.

***

아서는 그들을 지켜봤다.

'훌륭해!'

카를라는 위력을 조절할 줄 몰랐지만, 마나 폭주로 쉽게 지치지는 않았다.

스킬북으로 익힌 마나 기초학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프리다의 경우 애초에 정령에 대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령으로 기척을 느끼는 훈련을 통해, 공기 중에 분포된 수분을 모아 물을 형성하여 보다 효율적인 마법을 발휘했다.

둘 다 천재를 넘어 초인 수준에 이르렀다.

'재밌어.'

동료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아서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성과를 볼 때다.

다섯 생도는 고블린을 차근차근 격퇴해 나갔다.

이윽고 통로의 끝, 고블린 로드가 있는 던전의 홀에 도착했다.

마석으로 만든 커다란 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아서와 프리다, 카를라가 고개를 들었다.

웅장함이 느껴지는 고블린 왕의 대전.

마광석을 다듬어 좌우로 기둥을 만들고, 곳곳에는 홉고블린들이 배치되어 있다.

옥좌에 앉아 있는 고블린 로드가 고개를 들어 카를라와 프리다를 노려봤다.

두툼한 볼살과 우람한 덩치.

2m 20cm가 넘는 체구에 뒤뚱거릴 것 같은 모습이다.

고블린 두개골로 만든 뼈 지팡이를 든 고블린 로드가 입을 벌렸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눈에 깃든 광기.

증오와 분노, 미움과 원망. 그리고 갈망.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여 살의가 되어 포효 속에 묻어났다.

순간 아서를 제외한 생도 네 명은 온몸이 짓눌러지는 압박감을 느꼈다.

고블린 로드의 외침에 대기에 분포된 마나가 진동한다.

프리다와 카를라는 그 기세에 위축되었다.

「네놈들, 죽여 버리겠다-!」

고블린 로드가 손가락으로 두 여인을 가리켰다.

고개를 기울이며 충혈된 눈으로 목이 터지라 외쳤다.

「네놈들을 죽여, 나는 자유를 얻겠다-!」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저 고블린 로드, 손 봤던 성과가 있었다.

저번에 만났던 것보다 더욱 강해져 그들을 압박하고 있다.

'나도 긴장해야겠어.'

만약을 위해 자신이 같이 있는 거다.

카를라와 프리다가 위험해진다면, 곧바로 뛰어들어 고블린 로드를 죽일 생각이었다.

프리다는 마른침을 삼켰고, 카를라는 겁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뭘까? 이유가 뭐길래 자신들에게 저토록 살기를 뿜어내는 걸까?

게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열을 갖춰라! 살고 싶다면 인간 놈들을 죽여-!」

홉고블린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던전에 보았던 야생 고블린과는 확연히 달랐다.

190 정도의 긴 체구와 툭 튀어나온 아랫배. 온몸을 광석과 가죽으로 덧댄 갑옷을 입고, 돌 방패와 돌창 등을 들고 있다.

홉고블린들은 고블린 로드를 지키고자 방패 대형을 짜며 둘러쌌다.

고블린 로드가 지팡이를 들었다.

「위대한 나의 분노를 체감하거라. 인간들이여-!」

고블린 로드의 지팡이에 마나가 모여들고,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호, 홉고블린들이야! 게다가 10마리는 되어 보이는데?!"

"미친…! 교수들은 뭐 하는 거야? 시험 난이도 조절을 왜 이딴 식으로…!"

아서는 전사와 성직자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저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이 무대는 천재 두 명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한 무대다.

물론, 성장에 있어 저 전사와 성직자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사방에 불꽃이 휘몰아치고 불덩이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다섯 생도에게 날아갔다.

제43화

"오, 온다! 파, 파이어 볼이야!"

2서클 마법. 파이어 볼이다.

아무런 주문 없이 2서클 마법이 날아오자 전사가 당황해 소리쳤다.

급히 방패를 들어 불덩이를 막아 냈다.

쾅-!

폭발과 함께 전사가 튕겨 나갔다.

주변에 화염이 퍼져 바닥에 불이 붙었다.

"맙소사, 무영창? 고블린 따위가 무영창을 할 줄 아는 거야?"

전사의 외침에 성직자가 말했다.

"저놈, 미리 영창을 저장한 거야!"

"그럼 너도 그러면 되겠네!"

"저런 건 3서클이나 돼야 할 수 있다고! 미쳤어. 고블린 따위가 어떻게 3서클이나 될 수 있는 건데!"

아니, 그전에 저거 고블린이 맞아?! 오크보다 더 우람한 게 세 보이잖아…! 대부분 지방 덩어리 같지만.

"…저부터 갈게요!"

카를라가 다리를 굽히며 스프링처럼 튕겨 나갔다.

두 명의 생도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 빠른 속도로 홉고블린들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나를 이용, 주먹에 감싼다.

붉은 오라가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자 고블린 로드를 지키고 있는 가디언들, 홉고블린들이 방패를 들었다.

「온다!」

「막아!」

카를라가 발을 미끄러뜨리며 주먹을 뒤로 젖힌다. 허리를 이용해 반동을 주어 주먹을 내질렀다.

강렬한 불꽃이 담긴 일격.

그 파괴력은 아서가 손가락 4개로 막을 정도였다.

-막아 봐라. 애송이들.

홉고블린들은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깃든 공포스러운 음성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략했던 사내.

'학습' 능력을 시험하겠다고 했던 그 사내가 가르쳐 준 게 있었다.

-막아. 아니면 너흰 죽는다.

「겹치기!」

홉고블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고블린에 비해 근력이 무려 8배에 달하는 홉고블린들이다.

그들이 방패를 겹치고, 뒤에서 몸을 기대어 앞을 지지해 주기 시작했다.

아서가 가르쳐 준 '방패 대형'.

카를라의 주먹이 돌 방패와 충돌했다.

쾅-!

화르르륵-!

우지끈-!

돌 방패 정면이 부서졌다. 화염이 뒤덮은 폭발!

더불어 홉고블린들이 디디고 있던 발이 뒤로 밀려 나갔다.

「끼, 끼에에에엑!」

정면에 있던 홉고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팔이 으스러질 듯한 충격에 괴성을 지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면에 있는 홉고블린은 정말로 팔이 부서졌으리라!

하지만 막아 냈다.

"…어?"

카를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홉고블린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카를라였다.

-누나, 고블린은 몬스터 중에서도 최약체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돌머리라도 누나는 육체파니까 괜찮을 거야!

동생들이 중간고사 응원을 담아 보낸 편지 속 내용.

그 내용대로 고블린들은 몬스터의 3대 최약체로 통한다.

고블린, 슬라임, 레트맨.

카를라 또한 이렇게 3종류의 몬스터들을 나약한 존재로 알고 있었다.

고블린의 진화체인 홉고블린이라고 해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드를 지키는 홉고블린들은 보다 강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설마 자신의 일격을 막아 낼 정도일 줄이야!

그럼 다른 몬스터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지금이다!」

서로의 몸을 뒤에서 받쳐 주던 홉고블린들이 좌우로 나뉘어 카를라에게 달려들었다.

서로 동시에 돌창을 찌르고, 마광석으로 된 둔기를 휘둘렀다.

"...!"

'아차!'

공격에만 신경 썼지, 방어에는 약한 카를라였다.

이런 연계라니?

게다가 어쩐지 전투 경험이 많은 듯한 움직임이다.

동시에 양쪽에서 돌창과 곤봉이 날아오니 카를라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좌측을 막자니 우측이 비고, 우측을 막자니 좌측이 비게 된다.

"어…? 어…?!"

그때 좌측에서 공격하던 홉고블린의 눈에 화살이 꽂혔다.

눈에서는 피가 아닌 물이 뿜어져 나왔다.

물의 정령이 홉고블린의 체내에서 휘젓고 다녔고, 결국 고블린은 쓰러졌다.

또 다른 홉고블린에게는 매직 미사일이 충돌했다.

프리다가 활을 쏘고, 아서가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뭣들 하는 거야? 이 멍청이들아! 구경만 할 거야?"

프리다가 다시 활을 당기고는 넋이 나간 두 명, 전사와 성직자에게 외쳤다.

그제야 전사와 성직자는 제정신을 차리며 제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합류하여 다섯이서 포지션에 맞게 대응하자, 그로 인해 생겨나는 시너지 효과로 빠르게 홉고블린들을 정리해 나갔다.

고블린 로드가 겁에 질려 주춤하는 게 보였다.

아서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심하군. 그렇게 학습시켰음에도.'

아무리 황금 밸런스가 갖춰진 파티원들이라지만.

고블린 로드가 두려움에 마법을 쓰는 걸 주춤하고 있다. 분명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중이겠지.

등을 보인 고블린은 함정이 없는 한 사냥하기 쉽다.

과연, 그토록 학습시켜도 고블린의 습성은 버리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이대로 겁에 질려 사냥당한다면 무대를 준비한 보람이 없어진다.

아서는 기척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고블린 로드에게 살의를 뿜어냈다.

고블린 로드가 멈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후위에 있는 아서를 쳐다봤다.

아서가 입 모양으로 벙끗거렸다.

-제압해라. 아니면.

소름이 끼치도록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네놈은 죽지도 살지도 못할 실험체가 될 거다.

「...!」

고블린 로드는 굳어졌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실험체?

저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저 인간의 '포션'은 특별했다. 죽어 가던 자도 살리는 불사의 영약처럼, 마치 신의 피처럼.

그 모든 상처를 회복시켰다.

마법 지식이 있는 고블린 로드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상식을 벗어난 시점에서 미지의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저놈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회복하고, 다시 고문당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

고블린 로드가 괴성을 지르며 지팡이를 땅에 내려찍었다.

「위대한 녹색 고블린의 힘을 보여 주마!」

고블린 로드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아서를 제외한 네 명의 생도가 멈칫했다. 커다란 곤봉과 같은 뼈 지팡이를 가진 로드가 2m가 넘는 우람한 몸집을 일으키니 그 위압감은 상당했다.

"저, 저놈도 합류하려는 걸까?"

"도망치자! 점수는 낙제점을 받지 않을 만큼 받았으니,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

사기가 떨어진 전사와 성직자가 차례로 말했다.

홉고블린들은 로드가 직접 나서자 사기가 올라가 환호성을 지르며 더욱 악착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순간 프리다가 이를 악물었다.

덩치가 큰 고블린 로드를 올려다보며 화살을 당겼다.

"…전사. 성직자. 아서! 셋은 홉고블린을 맡아!"

아서라면 고블린 로드를 상대할 수 있겠지만, 홉고블린들이 많았다.

칠칠치 못한 전사와 성직자에게 맡기기엔 불안했다.

"카를…. 뭐였지?"

프리다가 카를라를 보며 말하자, 카를라는 움찔 놀라며 프리다를 쳐다봤다.

"카, 카를라 그리치예요!"

"그래, 카카를라 그리치."

"카를라 그리치!"

카를라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번에 식당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기에 상당히 친해진 줄 알았더니. 설마 자신의 이름도 모를 줄이야.

"어쨌든 너랑 내가 저놈을 상대해야겠어."

카를라가 고블린 로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 로드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렇담.

'근접에 약하다!'

마법사일 게 뻔했다.

카를라는 뛰쳐나갔다. 이미 대열이 망가진 홉고블린들은 생도 세 명을 막는 데 급급했다.

지금 비어 있는 틈을 파고들어 제압하면…!

「어리석긴!」

고블린 로드가 뼈 지팡이를 휘둘렀다.

쿵-!

카를라의 주먹과 뼈 지팡이가 서로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카를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블린의 왕이 마법만 사용할 줄 아느냐?!」

무엇보다 고블린 로드는 3일간 아서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포션 치료를 받으며 성장했다. 근접 전투에 대한 경험은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고블린 로드는 카를라를 근접으로 상대하며 마법을 영창했다.

주변에 붉은 마력이 모이더니 불꽃 덩어리를 소환해 쏟아냈다.

카를라는 양손을 펼쳐 불꽃 덩어리를 움켜잡고 압박해 터트렸다.

프리다의 근처로 불꽃들이 튀기자, 프리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멍청이…!'

물의 정령 닉이 프리다의 전신에 물을 뿌려 축축하게 젖게 만들었다.

아서가 준 불고양이 머플러가 불에 대한 내성을 키워 주어 다행이었다.

'전위면서 후위를 지킬 생각 따윈 없잖아!'

어쩜 저런 무식한 격투가가 다 있단 말인가?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았었어.'

돈이 부족했던 프리다가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교수의 조수 자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를 점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아서와 함께 귀족 영애인 카를라가 차지했고, 매번 생도들 사이에서 보이는 '가면 쓴 가식적인 미소'는 그녀를 상당히 거슬리게 했다.

프리다는 저런 인간을 가장 싫어했다.

자신이 속했던 가문. 엘스포드 가문의 '아버지'와 닮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불평을 따질 때가 아니다.

프리다는 화살을 활에 걸치며 당겼다.

"닉-!"

물의 정령이 화살에 깃든다.

"최대 출력으로 부탁해. 나중에 장학금 타면 탄산수 사 줄 테니까!"

「웅!」

화살 끝에 물의 입자가 소용돌이치더니 마나가 모여들며 폭주했다.

'아서가 말했어.'

프리다는 고블린 로드를 죽일 듯 노려봤다.

'살의를 담으라고…!'

-애야. 어머니는 괜찮으냐?

프리다는 떠올렸다. 10년 전.

지하 감옥. 쓰러져 숨을 고르는 어머니를 찾아온 중년 사내.

-내가 치료사를 보내마.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가식적인 미소.

딸인 자신에게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은 아버지.

프리다는 이를 바득 깨물었다.

엘스포드 가문의 당주를 떠올린 프리다는 화살에 살의를 담았다.

마나와 살의가 공명하며 화살의 예리함은 극에 달했다.

마나의 기운에 고블린 로드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안 돼!」

고블린 로드가 프리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카를라가 앞을 막아섰다.

「비, 비켜 작은 것아! 나중에 상대할 테니까, 비켜!」

하지만 카를라는 집요하게 고블린 로드의 앞을 막았다.

프리다를 지켜보고 있던 아서는 놀란 눈빛을 내비쳤다.

'저 녀석…'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전설급 영웅다워!'

천재를 넘어선 천재.

프리다가 화살에 살의를 담았다. 그리고 한 마디 내뱉었다.

"죽어."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의 청명한 소리.

그리고 대기를 꿰뚫는 파공음.

대기를 찢어발기는 물줄기를 뿜으며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고블린 로드의 가슴을 꿰뚫었다.

「...!」

고블린 로드는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가슴을 중심으로 물줄기가 칼날 형태를 이루며 회전했다.

「크아아아악!」

고블린 로드의 몸은 그대로 분쇄되었고 물과 핏물이 섞여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펑-!

고블린 로드의 상체가 폭발했다.

카를라는 움찔했다. 자신의 머리 위로 걸쭉한 핏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카를라는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너, 너무해…!"

카를라는 프리다에게 원망 섞인 표정을 보였지만.

프리다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저 땀을 흘린 채 거칠게 호흡할 뿐이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듯 개운했다.

실제로 프리다는 시원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껏 쌓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해소한 듯한 느낌이다.

짝-! 짝-! 짝-!

박수 소리에 프리다는 고개를 돌렸다.

아서가 손뼉을 치고 있었다.

홉고블린들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아서는 거짓이 없는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입을 뻐금거렸다.

-굉장했어. 프리다.

진실된 칭찬.

프리다는 가슴 속에서 뭉클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성장했다는 기쁨. 진실로 인정받았다는 느낌.

그리고….

프리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서!"

두 손가락을 치켜세워 브이 자를 보이더니 아서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나 천재라고 했지?"

아서가 있다면, 자신은 성장할 수 있다.

프리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

"위대한 룬과 마법의 축복이 있나니…! 롬 왕국의 대공가, 샬럿 엘스포드 공녀님을 만나 뵙게 되어 실로 영광이옵니다!"

마법의 대제국, 슈하림 수도.

황궁의 앞에서 기사들이 도열해 있다.

그런 기사들 사이에서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영웅을 칭송했다.

이번 황궁에 초대받은 이는 두 명.

샬럿 엘스포드와 직스 라인하르트였다.

직스는 긴장한 상태였다.

고개를 치켜들어야지만 그 끝이 보일까 말까 한, 마치 구름을 뚫을 듯한 거대한 황궁.

드워프들의 건축 능력과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세운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올려다보며 넋이 나갔다.

위엄과 장엄함, 그리고 아름다운 예술마저 느껴지는 이 황궁에는 어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자, 가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녀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이며 직스의 휠체어를 잡고 끌었다.

직스는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 황궁에 근무하는 시녀와 하녀들은 그 직위가 남다르다.

하녀들은 이름난 상인, 혹은 평민이지만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자들의 딸들이며.

시녀들은 귀족가의 영애들로 교양과 예법, 소양을 배우기 위해 황궁에서 근무했다.

그래서 청소나 빨래, 요리 등의 잡다한 업무는 하녀들이 하지만.

귀족과 황족의 보좌업무, 귀부인과 황족의 말동무 등은 시녀들이 맡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떻게 보면 시녀 중에는 직스보다도 훨씬 더 고귀하며 직책 높은 이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 이거 긴장되는데요? 황제 폐하의 훈장을 받는다는 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부담이…."

"...."

말을 하는 직스의 옆에 휠체어에 맞게 보폭을 맞춰 걷는 샬럿이 있었다.

하지만 샬럿은 말이 없었다. 그저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한,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항상 생명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듯한 맑은 자색 눈빛 또한 지금은 그늘져 탁한 색을 띠고 있다.

감정이 죽은 거겠지.

직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차갑고 냉정하다. 마치 '얼음 공주'을 연상케 하는 듯한 모습이다.

자기가 나약해 칭송받아야 할 영웅 '아몬'이 전사한 것에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샬럿 님.'

그녀를 짝사랑하는 직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23살의 나이에, 그녀의 몸과 얼굴에는 심한 흉터가 자리 잡았다.

왼쪽 눈은 손실, 왼쪽 뺨과 온몸에는 자잘한 화상 자국. 그리고 오른손은 손가락 두 개만 형태가 유지될 뿐, 신경은 이미 죽어 있었다.

한창 기사로서 창창한 나이이거늘. 그런 그녀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나도 크나큰 상처를 받고 말았다.

'나 또한 약했기에….'

직스는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했다.

그때, 시녀 하나가 샬럿에게 다가왔다.

"아, 죄송합니다. 샬럿 엘스포드 공녀님. 지금 전해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그리치 가문에서 보낸 서신과 물건입니다. 받아 보시겠습니까?"

샬럿은 눈앞에 있는 시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손에는 그리치 가문의 문장이 찍힌 편지 하나. 그리고 붉은색 액체가 담긴 포션 두 개가 있다.

"...."

샬럿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었다.

포션은 내버려 둔 채 편지만을 들어 올린 그녀는 천천히 편지를 뜯어 안에 든 서신을 꺼낼 뿐이었다.

그리치 가문에서 보낸 위로의 포션이라고 해 봤자, 이미 신경이 죽어 버린 눈과 손가락, 화상 등을 치료하지 못한다.

그저 마음이 담긴 서신만으로도 충분….

[몸은 어떠한가? 샬럿 엘스포드.]

샬럿의 얼굴이 굳어졌다.

편지에 담긴 내용.

딱딱한 문체의 인사말.

그리치 가문의 카를라나 그녀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가 아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샬럿은 천천히 그리운 모습을 떠올렸다.

전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모험가.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대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지. 그 엘릭서 포션을 사용해라. 단, 엘릭서 포션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언급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점차 그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저 기연을 만났다고만 해 다오. 그대를 믿고 주는 선물이니, 부탁하지.]

자신과 함께 전장에서 싸운 전우.

장작불 앞에서 자신을 마주하던 수호 기사.

[이야기가 길었다. 훈장을 받는다지?]

자신을 구해 주고 수많은 이들을 살린 영웅이.

[축하한다. 그럼 잘 지내도록.]

별다른 내용이 없는, 어쩌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안부 인사의 편지를 보내 왔다.

샬럿의 떨리는 눈동자가 편지의 마지막, 보낸 이를 바라봤다.

[그대의 친우, 아몬.]

퀴리의 구원자 아몬.

탁하게 죽어 있던 샬럿의 눈빛이, 생생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제44화

샬럿은 퀴리 사태 이후, 잠을 잘 때마다 기묘한 꿈을 꾸었다.

안개 낀 추운 날의 숲속.

타는 장작 앞에 앉아 있는 자신에게 부드러운 모포를 감싸 주는 이.

그리고 잠든 자신에게 포션으로 정성스레 치료해 주는 이.

아몬.

아주 고요하고 정적이 깃든 그 그리운 꿈이 너무나도 즐겁고 반가웠다.

하지만 그 꿈에서 깨어난 순간.

샬럿은 공허함을 느꼈다.

어둠뿐인 방 안을 둘러보며, 허망함을 느끼고, 울음을 터트리고.

다시 잠들며 그 꿈을 그리워했다.

그날 이후,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다. 향긋한 꽃냄새와 향수의 달콤한 향도 맡을 수 없었으며,

취미로 배운 음악을 연주해도 아름다운 음색을 느끼지 못했다.

꽃과 예술품을 봐도 흑백의 노이즈가 낀 배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왼쪽 눈은 손실되었지만, 오른쪽 눈은 정상입니다. 미각도, 후각도, 청각도 손실된 부분이 없습니다. 이건…. 정신적인 트라우마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저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극복하셔야 합니다.

의료계의 최고 권위자, 스웨인 원장의 말이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샬럿 공녀님은 너무 마음이 여리십니다. 자책감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쉽게 망가질 겁니다.

그날 이후, 샬럿은 삶의 즐거움을 잊게 되었다.

그저 '제국의 수호자'로서의 신념만을 지닌 텅 빈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부름과 훈장을 받을 수 있다는 명예로움조차 희열을 느끼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황궁에 오는 데 귀찮음을 느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아."

[그대의 친우, 아몬.]

또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노이즈가 낀 무채색이던 배경이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비되었던 코에 시녀들의 향긋한 향수 냄새가 와 닿았고, 고요한 정적을 깨고 도열한 기사들의 숨소리와 갑옷 소리마저 아름답게 들려왔다.

입에서 쓴맛이 났다. 하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미각이었다.

또르륵….

"...!"

시녀와 직스, 도열해 있는 기사들이 경직되어 굳어졌다.

샬럿의 눈가에서 이슬이 흘러내렸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직스가 굳어진 채 샬럿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편지를 바라봤다.

그리치 가문에서 보낸 편지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길래?

-아몬은 그리치 가문의 그림자 수호 기사입니다.

샬럿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직스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치 가문에서 보낸 포션과 편지.

형식상 보낸 위로의 편지와 선물로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 위로는 허울뿐일지도 모른다. 당연했다. 가문을 지키는 소중한 그림자 수호 기사를 죽게 했다고 생각되는 샬럿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다.

회복도 되지 않는 포션을 줌으로써, 가문의 분노를 돌려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샬럿은 기사의 제국이라 불렸던 롬 왕국, 왕가의 피가 섞인 대공가의 공녀다.

50년 전, 마법의 제국 슈하림과의 전쟁에 패해, 몰락해 종속된 롬.

따지고 보면 타국 사람이었다.

그녀가 속한 엘스포드 대공가와 본래부터 슈하림 황가를 섬기는 그리치 후작가는 결코 좋은 사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 엘스포드 가문의 소속인 샬럿이 그리치의 그림자 수호 기사를 빼앗아 간 것과 마찬가지니.

샬럿을 원수 보듯 할지도 몰랐다.

직스는 샬럿의 손에 들린 편지의 인장을 바라봤다.

장미 한 송이의 인장.

이는 카를라가 보냈음을 뜻했다.

장미 한 송이는 그 가문 자식을.

두 송이는 가문의 당주.

세 송이는 그리치 가문 전체를 의미했으니 말이다.

"설마 카를라가…?"

직스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렇게 보지 않았건만, 아무리 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이런 식의 보복이라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직스가 말을 할 때.

샬럿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턱 끝으로 가 떨어져 내렸다.

넋이 나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야겠습니다."

"네?"

가다니? 어딜?

시녀들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이제 곧 위대한 황제 폐하의 훈장 수여식이 있건만…!

"…카를라를 만나야겠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사과를…!"

'아몬을 만나 사과를…!'

그때, 구해 주지 못했다고.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아 주지 못했다고.

사과해야 했다.

샬럿의 말에 직스의 표정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카를라가 모욕적인 편지를 보낸 게 맞았다!

"샬럿 님. 도대체 무슨 내용…!"

말을 하기도 전, 샬럿이 시녀가 준 포션 두 개를 빼앗듯 거머쥐며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황궁의 입구로 향하자, 기사들이 막아섰다.

전신 갑옷과 망토를 두른 육중한 기사들.

그들이 위압감을 뿜어내며 샬럿의 길을 막아 세웠다.

"안 됩니다. 이제 곧 황제 폐하의 훈장 수여식이…."

샬럿이 고개를 들어 기사들을 올려다봤다.

"비켜."

기사들이 멈칫 놀라며 굳어졌다.

냉기가 흐르는 한마디. 그리고 주변으로 서리가 끼기 시작하며 기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

기사들이 투구 속에서 놀란 눈빛을 내비쳤다.

샬럿은 얼어붙은 기사들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샬럿 엘스포드 공녀님."

발걸음을 옮기던 샬럿은 힐끗 뒤를 쳐다봤다.

"오랜만이군."

밤갈색 머리와 황적색 눈을 한 30대 초반의 사내.

슈하림 제국의 황위 계승권 서열 1위.

"급한 게 아니라면."

루시안 슈하림.

"차라도 한잔하지."

그가 샬럿을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

"던전도 클리어되었으니, 이제 곧 개발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서 황자님."

중간고사가 무사히 끝난 다음 날.

아서는 북부의 빈민가 앞에 있었다.

그의 옆에는 프롤론이 서 있었다.

판자와 천, 신문지로 만들어진 허술한 집들이 있다.

인부들이 그런 건물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이 망치로 때려 부수면, 엘프들이 정령을 소환해 주변을 쓸어버린다.

마법사들 수십 명과 연금술사들은 골렘을 소환, 조종하여 잔해들을 치웠다.

그 모습을 프롤론의 옆에서, 아서가 긴 막대 과자를 씹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프롤론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뭘 먹고 계십니까?"

"막대 과자입니다. 담배를 끊으려 하니 입이 심심해서요."

"끊으시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의외로 중독성 있는 냄샌데.

프리다를 떠올린 아서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돌렸다.

"저곳에 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청소해야 한다고. 치우기 귀찮아 방치했던 범법자들은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죄에 따라 그들을 농노, 혹은 노예로 만들 예정입니다. 덕분에 노동력은 더 늘었지요."

프롤론은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아서가 막대 과자를 주자, 프롤론 또한 과자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개척지를 발전시킬 벌목꾼이 되겠지요."

"그 밖의 부랑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설마 강제로 쫓아내시진 않았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감히 황자님 앞에서 슈하림의 백성들을 내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내버려 두었다곤 하나, 그들 역시 저의 영지민들입니다. 어차피 개발도 해야 하니 이왕이면 여론도 좋게 굴러가는 게 좋겠지요. 그래서…. 미화 좀 덧붙였지요."

여론에 따라 병사 징집에 대한 명분도 생긴다.

미개척지 개발에 있어서 미화된 여론은 타 영지의 지원을 받기에도 좋다.

"자금을 지원하고 새로운 보금자리와 집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몸이 불편한 자에게는 무료로 치료를 해 주기로 했지요. 이를 대대적으로 선언했고,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땅을 빼앗는다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요?"

땅은 아서의 것이 되었지만, 빈민촌에 수십 년을 살던 이들은 자신의 땅이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야 반대도 많았습니다. 귀족들의 허울뿐인 거짓말을 믿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다만."

프롤론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한 즉시 생활 지원금을 손에 쥐여 준다면, 안 넘어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부랑자들이라고 해서 빈민촌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었다.

지하에서는 밤마다 고블린이 올라오고, 길거리에는 시체가 있어 역병이 돌고.

골목마다 마약상과 인신매매범, 범죄자들이 판을 치는 곳.

하루에 억울하게 수십 명이 죽어 나가도 수사 따윈 없는 곳.

그런 곳을 갈망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없다.

생활 지원금에 소정의 자금을 주고, 치료뿐만 아니라 살 곳마저 준다.

그걸 영지 전체에 프롤론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그 즉시 행한다면, 신뢰하지 않던 부랑자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에게 소정의 자금과 식량, 임시 텐트와 의료 지원이 행해졌다.

또한 에인헤르들이 마찰이 없도록 수시로 순찰을 돌며 치안 안정을 도모했다.

간혹 '이 땅은 내 땅이오!'라며, 좀 더 나은 보상을 받으려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럼 생활 지원비와 거주지는 없다. 이 영지 내에서 나가 줘야겠다.

본보기로 실제로 추방하니, 더는 떼를 쓰는 이들도 없었다.

추방당한 이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타 영지의 빈민가에서 생활하게 될 터였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마광 지대 덕분이다.

마광 지대를 확보하고자, 귀족들과 이종족들이 대규모 지원을 해 준 것이다.

게다가.

-프롤론 공작님? 저희 황가에서도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는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황가의 보고를 열어 자금과, 황제 폐하의 부름에 따라 에인헤르 500명을 지원 병력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황태자 루시안의 지원 또한 있었다.

당연하겠지.

지금쯤 황태자 루시안은 싱글벙글할 것이다.

장난삼아 투자했던 땅 일부가, 크기에 따라 황금의 배가 되는 자산이 되어 되돌아오게 생겼다.

개발에 앞장선다면 루시안의 개인 자금이 생기는 셈이다.

'듣기론 아서 황자님이 귀띔을 해 주어 루시안 황태자께서 사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만.'

설마 황태자 루시안의 지원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프롤론은 웃음을 흘렸다.

바로 옆에 있는 사내가 리바이트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일 처리가 좋습니다. 프롤론 공작님."

"과찬이십니다. 아서 황자님."

"...."

막대 과자를 씹던 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부족한 감이 있어. 이참에 그냥 대대적으로 사업을 확대시킬까?'

아쉬움을 느끼던 아서에게 프롤론이 말했다.

"게다가 황자님이 맡으신 동기 생도들의 성적이 좋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그야 모르죠. 중간고사 결과는 나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생도들의 육성에도 재미가 들린 차였다.

초인적인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을 육성하는 게 이토록 재밌다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이들도 키워 보고 싶어졌다.

'그래, 예를 들면….'

이 대륙에 숨겨진 인재들.

아서가 [판타지 월드]에서 만났던 뛰어난 능력을 갖춘 NPC들.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몇 없긴 하지만.'

NPC와 파티를 이루기보단, 솔로 플레이를 더 선호했던 아서는 기억에 몇 없는 이들을 키워 보기로 했다.

시골 경비병으로 수십 마리의 마수를 막아 낸 천재 창술사 우고.

신성 교단의 보호 아래 그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빛의 성녀 아리스.

한때 마족 숭배자였지만, 지금은 의료계의 최고 권위자가 된 네크로맨서 스웨인.

그 밖의 인물들.

덤으로 그들 중 누군가를 교수로 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카데미를 발전시키고, 군을 육성하는 데 있어 더욱 발전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마족들의 침략에 보다 더 대처할 수 있겠지.

어차피 이번 마광 지대 개발로 슈하림의 군사적 무기 개발 또한 진보될 것이다.

"프롤론 공작님."

프롤론이 힐끗 아서를 쳐다봤다.

"이왕 사업할 거 크게 확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크게라고 하시면?"

"어차피 리바이트 영지는 영지 전체가 '아카데미'가 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형태일 뿐, 결국 아카데미 시설 내에서만 교육이 진행됩니다. 차라리 이 영지 자체를 진짜 교육 시설로 바꾸시지요."

"그게 가능합니까?"

"개발할 자금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서는 프롤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서의 모습에 프롤론은 기대감을 가졌다.

"우수한 교수들을 뽑고, 인재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인재 육성에 더더욱 힘쓰도록 하죠."

사람의 욕심과 탐욕에는 끝이 없다.

아서는 [판타지 월드]에서 못 해 본 것들을 부캐인 이 몸뚱이로 해 보고 싶었다.

"오호!"

프롤론이 눈을 빛냈다.

자신의 꿈과 같은 이야기가 아서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럼, 혹시 추천해 주실 인재들이 있습니까?"

아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우수한 인재들이, 이 머릿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럼 계획은 내년을 목표로 하도록 하지요. 내년 신입생들을 선별하고, 새 교수들을 뽑는 겁니다. 제가 따로 추천서를 그들에게 보내겠습니다."

[판타지 월드]에서 만난 인연들.

정의롭고, 올곧으며, 우수한 인재들.

신분의 차이로, 환경적 요인으로 재능을 썩혀 두는 이들.

그들 모두.

"이곳, 리바이트에서 육성하도록 하지요."

이곳 리바이트로 불러들일 것이다.

제4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