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40-150

140화 가을날 정한 길 (2)

제국 동남쪽에 위치한 아스텔 마을.

어쩐 일인지 마을 주민들이 한곳에 모여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린 저녁 하늘과 함께 드리운 노을.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그런 하늘에서 새하얀 점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저건가...?"

모두의 시선이 그 점을 향하고.

그 빛이 점점 커지며 형체가 눈에 들어오자 환호하기 시작하는 주민들.

"오, 오셨다!"

"정말 오셨어!"

새하얗고 날개 달린 말이 내뿜는 은은한 빛과 더불어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정체야 두말할 것도 없이 히오였다.

"성자께서 오셨다!"

"와아아아!"

"성자! 성자! 성자!"

"저희 마을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세요!"

두 달 전에 발생한 게이트의 붕괴 사태.

게이트 주변에 상시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과 성의 병력들로 인해 간신히 막아 내기는 했으나 이상하게 그 이후로 열병을 앓는 이들이 늘었다.

영주성의 의원이 직접 증상을 조사하여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크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무지 낫지를 않으니 불안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소문은 여신의 사도, 성자라 불리는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

성자께서 빛을 내는 말을 타고 다니며 피해 지역에 축복을 내린다고.

그 축복 이후에는 아픈 것이 싹 낫는다는 소문.

그렇기에 이토록 열렬하게 환호하는 것이다.

"...부담스럽다니까."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히오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땅에 내려가지도 않고 마을 중앙 상공에서 멈춘 뒤, 스킬을 시전한다.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머리 위, 하늘이 열리고 쏟아지는 금빛 여신의 손길.

"아아, 정말...."

"기적이다. 기적이야!"

"검은 날개의 성자시여...!"

사람들은 성스러운 여신의 형상과 따스한 신성에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린다.

소문만 익히 들었지, 그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목도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장엄하고 생각 이상의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널리 번져가던 따스함이 점차 희미해지고 포근함이 옅어진다.

그것을 느꼈기에 슬그머니 눈을 떠 보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금빛 여신의 손길도, 그 중심에 있던 새하얀 성자의 존재도.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어느샌가 없어지고난 후였다.

하지만 꿈이나 신기루는 결코 아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보면 열병 따위 씻은 듯 사라진 아이들이 멀쩡하게도 뛰어놀고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이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번 하늘 위 오롯이 떠 있던 성자의 모습이 새겨지는 것이었다.

* * *

「'여신의 사도'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여신의 사도'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여신의 사도'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명성 증가로 1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1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1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1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아스텔 마을 주민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성 증가로 5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게이트가 발생했던 근처 마을을 팬텀 스티드를 타고 날아다니며 정화한 것도 벌써 한 달 가량.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화려한 이펙트와 성자니, 사도니 하는 그런 헛소문이 합쳐져 명성 포인트가 엄청난 속도로 늘었다.

그렇다는 말은, 부족한 스탯을 만족스럽게 채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스탯창."

[이름 : zl존☆천마★]

[근력 : 100]

[민첩 : 100]

[체력 : 100]

[마력 : 550 (+45)]

[영력 : 50]

[신성력 : 390]

[주 특성 : 마력 감응의 천재]

[부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보조 특성 : 모든 게 두 배!]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01 / 1000)]

[특성 : 유령의 눈]

[특성 : 영체화]

[스킬 : 뇌제(雷帝)]

[스킬 : 청염(靑炎)]

[스킬 : 사신(死神) 소환]

[스킬 : 천상(天上)]

...

['하늘섬을 부숴 버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신의 사자'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대마법사'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용에 맞선 자'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여신의 사도'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검은 날개의 성자'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명성은 기반이 제대로 마련되기만 한다면 눈덩이 굴러가듯 계속 덩치를 불려가니.

지금 성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랬고 이전에 수호 기사에 관한 소문이 그러했다.

큰 사건을 중심으로 관련된 소문이 크게 퍼지며 포인트가 계속 굴러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까지는 예상했으나 히오가 예상치 못한 것은 바깥 세상.

듣기로 바깥 세상, 즉 지구에서 퍼지는 소문은 단기간에 확 늘지만, 그만큼 단기간에 빠르게 죽는다고 한다.

엄청난 속도로 오르는 명성을 체험하기도 했으니 그만큼 빠르게 소문이 사그라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아직도 바깥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꾸준하게 퍼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소문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 퍼지며 포인트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뭐, 이유는 확실하게 모르겠다만, 어쨌든 히오에게 좋은 일이었다.

"이걸로 제국은 얼추 돌아본 셈인가?"

- 그런 것 같네. 참 이 짓도 할 게 못 되는구먼.

이곳 아스텔 마을을 마지막으로 제국 내에 보고받은 게이트 발생지는 모두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게이트가 제국에 몰려 생겨나기에 상당히 오래 걸렸으나 결국 모든 지역의 정화에 성공한 셈이다.

히베루니아와 다른 왕국은 게이트의 개수가 적기도 하거니와 성녀 이리나를 비롯한 리퓨에의 고위 사제들이 직접 나서 정화하고 있다고 하니 괜찮을 테고.

아릴레이야 역시 마탑 포탈을 이용해 이동한 히오가 직접 어비스 기운을 소멸시켰다.

"스탯을 올려서 다행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오래 걸렸을 거야."

한 달 사이에 신성력을 대폭 올리고 나머지 기본 스탯 또한 균등하게 올려놓았기에 가능했던 일.

그러지 않았다면 모자란 신성력과 체력에 허덕였을 터였다.

- 어서 마탑으로 돌아가지. 아직 할 일이 많아.

허나 간신히 큰 문제 하나를 해결했을 뿐.

아직도 할 일은 많았다.

5서클의 마법을 추가로 몇 개 더 익히기는 했으나, 정화 작업과 병행하느라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네크로맨시나 다른 특수 학파의 마법은 건드리지도 못했고 푸르넬이 선정한 마법서 중 속성 마법 몇 개만 간신히 익혔다.

그러니 다시 마탑으로 돌아가 마법에 집중할 시간인 것이다.

다시금 게이트가 나타나고 53층이 열리기 전까지.

부지런히 나아가기 위해 히오를 태운 팬텀 스티드가 어둑해진 하늘을 가르며 남쪽으로 향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법사의 집은 베르덴 남부 지역 독립 거점. 히오의 첫 번째 스승이 고이 잠들어 있는 조용한 산골.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이었다.

* * *

사박사박- 길게 자란 잡초따위가 바짓가랑이를 스치는 소리와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의 울음 정도가 소음의 전부인 이곳은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

멀지 않은 곳에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던 코볼트의 영역마저도 지워졌기에 오가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산골.

무덤 앞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은 그 예쁜 꽃잎을 떨군 채 겨울잠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다시 피어나 봄바람과 함께 살랑일 테다.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 주던 올해의 봄날처럼 말이다.

히오는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무덤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네요. 스승님."

대답은 없었다.

대신 풀벌레가 더욱더 목청 높여 찌르르 울어 댈 뿐이었다.

"여기서 나설 때만 해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은 게 바뀌었네요."

문양의 완전한 의미도, 그것을 새기는 법도 몰라서 무작정 심장에 새겨 넣으며 완성했던 1서클.

그랬던 자신이 어느새 5서클 마도사의 경지에 올라 다시 돌아왔다.

"곁에 계셨다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그게 참 아쉬워요."

일 년 간 쉬지 않고 나아가긴 했으나, 분명 여유도 있었다.

한데 단 한 번도 무덤을 찾지 않았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가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포탈 타고 이동하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찾지 않은 것은, 글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바깥은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여기는 그대로네요. 조용하고 편안하고."

무덤 옆에 놓인 울퉁불퉁한 비석과 그 위에 새겨진 삐뚤빼뚤한 글씨체.

- 위대한 대마법사. 베르가 파블렌코.

그것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던 히오가 할 수 있었던 최선으로 만들었던 비석.

이제는 이보다 훨씬 크고 반듯하게, 화려하게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게. 번듯하게 만든다고 하여도 당시에 저것을 새기며 참았던 울분과 마법을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이니.

"역시 와 보길 잘했어."

마치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다.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갈길이 멀었음이 느껴지지 않은가.

베르가와의 약속을 지키기에는 멀어도 한참 멀었으니 말이다.

그날의 다짐.

거짓된 푸른 불꽃을 선보이며 했던 그날의 약속.

궁극의 마법을 반드시 완성시켜 보이겠다던 당찬 포부와 함께 흐르던 베르가의 눈물.

그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다시금 가슴에 새겨진다.

"그래도 하나뿐인 제자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실 테니...."

내려 놓았던 지팡이를 쥐고 모자를 다시 머리에 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오.

이전처럼 거짓된 스킬이 아니라 진정한 마법을, 그 위력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못내 미안했다.

신경이 쓰였다.

베르가의 마지막을 거짓으로 장식한 것 같아서.

그에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떠나 버린 것이 미련이 되었고 마음에 남아 있었다.

스킬로 만든 거짓이 아니라 진짜 마법의 위대함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등을 돌려 무덤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며 마력을 움직인다.

심장을 중심으로 고요히 회전하던 문양에 하나둘씩 빛이 밝혀지고 그것이 한데 모여 일으키는 기적과도 같은 힘.

지팡이를 쭉 들어올려 높은 하늘을 가리키면 그 끝에서 붉디붉은 빛이 모여든다.

그것이 두 번째로 익힌 5서클의 마법.

"파이어 필라."

지팡이의 끝에서 쏘아져 나간 붉은빛이 허공에 거대한 두 개의 마법진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치솟는 거대한 불의 기둥.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그것은 크고 위압적이었지만....

고작 이것으로는 모자라다.

"파이어 필라."

파아악- 쏘아지는 수갈래의 붉은빛.

그려지는 여덟 개의 마법진.

그 사이로 타오르는 네 개의 거대한 불기둥.

역시 부족하다.

"파이어 필라."

쏘아지는 수십 갈래의 붉은 빛.

그려지는 스무 개의 마법진.

타오르는 열 개의 불기둥.

거대한 열다섯 개의 불기둥은 곧 하늘을 장악하며 그 화려한 폭력성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럼에도 끝이 아니었다.

마력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인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마력.

몇 개의 문양에 빛이 꺼지고 다른 문양에 차례대로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곧바로.

"익스플로전."

허공을 수놓는 폭발의 세례.

콰아앙-!

여전히 타오르는 불의 기둥 사이사이로 터져 나오는 거대한 폭발.

콰아앙-!

콰아아앙-!

종말이라도 닥친 것처럼 거대한 폭발이 허공을 수놓았지만, 이걸로도 모자라다는 듯 다시금 마력의 방향을 비튼다.

익힌 모든 마법을 한계까지 펼치기라도 할 것처럼 쉬지 않고 세 번째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절반에 가까운 문양이 빛을 잃고 그 정반대편의 문양에 빛이 들어온다.

초고온의 두 가지 화염 속성 마법을 보여 주었으니 이번에는 정반대, 극한(極寒)의 마법.

지팡이의 끝에 옅은 하늘빛이 모여들고 지팡이가 작게 진동한다.

그 빛이 점차 진해짐에 따라 터질 듯 모여드는 빛. 그것이 한계까지 모여들었을 때 비로소 뿜어져 나오는 것.

"레이 오브 프로스트."

그것은 초저온 서리의 광선이었다.

콰아아아아-

서서히 꺼져 가는 불의 기둥 위로, 그 옆으로 히오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그대로 뿜어져 나오는 혹한의 광선.

닿는 모든 것을 얼릴 서리의 빛.

일 분 가량 자유로이 허공에 뿜어지던 그것이 시들해지면 역시 쉬지도 않고 다음 마법이 완성된다.

"윈드 블레이드."

바람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칼날.

기감이 예민한 자가 아니라면 느끼기도 어려운 보이지 않는 검.

바람의 검이 애꿎은 허공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이는 아무런 질서도, 규칙도 없는 마법의 향연.

허나 그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막대하기에 외려 아름다운 무질서의 예술.

불의 기둥, 파이어 필라.

강력한 범위 폭발, 익스플러전.

초저온 서리의 광선, 레이 오브 프로스트.

바람의 검, 윈드 블레이드.

이 네 가지가 한 달의 시간 동안 익힌 5서클 마법이었다.

블링크를 제외한 모든 속성 마법을 베르가 파블렌코의 무덤 앞에서 펼쳤다. 스킬이 아닌, 마법 본연의 힘으로 마력이 닿는데까지 힘껏 펼쳐 보인 것이다.

마치 베르가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한계까지 마력을 쏟으면서 말이다.

혹여나...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마법에 대한 열망 그 자체인 베르가의 혼이 여지껏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미련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혼은 떠나지 않고 자신의 육이 있는 장소를 배회한다고 하니.

끝끝내 온전한 마법을 펼칠 수 없었던 베르가의 미련은 오죽하겠느냐는 말이다.

자신이 여태 무덤을 찾아오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을 수도 있겠다.

궁극의 마법을 완성시키겠다 큰소리 떵떵 쳐 놓고는 마법은커녕 여태 스킬에만 의존하고 있었기에.

그런 모습에 혹, 남아 있을 베르가가 실망할까 그것이 두려워 저도 모르게 피해 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한 명의 어엿한 마도사로서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마법사가 되었으니까.

"...후."

모든 마법을 허공에 쏟아 낸 히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변함없이 언제나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덤 하나.

베르가의 영혼이 떠나지 않고 있다면 이런 자신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대견하다고.

정말이지 고생 많았다고.

기억 속 웃는 모습 그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약간의 기분 좋은 긴장감과 함께 히오는 유령의 눈을 발동한다.

그것에는 기대 또한 담겨 있었다.

그동안 미련이 남아 떠나지 못하던 혼의 모습을 수없이 보았지 않았던가.

베르가의 삶은 마법 그 자체.

하지만 마법의 끝은커녕 제대로된 시작조차 하지 못했으니 필히 혼이 남아 있을 테고 곧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히오는 그리 생각했다.

「특성 - '유령의 눈'이 발동됩니다.」

하지만.

"...하여튼."

눈을 잿빛으로 바꾸었음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묵묵한 무덤 하나.

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산골짜기 무덤 하나.

마법을 그렇게나 열망했음에도 베르가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떠나간 것이다.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글쎄.

"미련한 영감탱이."

하나뿐인 제자의 마지막 다짐을 굳게 믿어 버린 까닭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아니더라도 미련한 제자가 분명 마법을 완성시키리라, 훌륭한 마법사가 되리라 그리 확신해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쉬지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여신의 사도, 성자. 그런 허울뿐인 말에 신경 쓸 시간 따위 없다는 말이었다.

지금보다도 더 노력해도 마법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

궁극의 마법을 완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더... 더 노력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선 채 무덤을 바라보는 히오의 마음 속에 그날의 약속이 다시금 새겨진다.

주위는 풀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141화 가을날 정한 길 (3)

황궁 소속 기사, 즉 황제를 주군으로 모시는 황궁의 기사들의 숫자만 어림잡아도 천 명에 육박한다.

왜 제국이 대륙의 패자이며 초강대국인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숫자.

스킬 사용자를 포함한 기타 특수한 부대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해도 대단한 숫자였다.

허나 황궁 소속 기사라고 해서 모두가 황궁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주력 기사단인 몇몇을 제하고는 수도와 수도 인근을 수호하고 그 지역을 도맡아 관리하는 것이다.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황궁의 상주 인원만 천 명이 넘었으니 전시 상황이 아니고서야 황궁 기사단 전원이 황궁에 집결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지금 황궁에는 그토록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모든 황궁 기사단에 소집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사실 황궁에 머무는 나 같은 기사야 말로 진정한 황제 폐하의 기사라고 할 수 있지. 이런 집합 명령이 당황스럽겠지만, 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황실 제3기사단의 일원인 도르만의 말에 클레어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인다.

"그렇군요."

실습을 위해 황궁에 온 지 이틀 차에 떨어진 소집 명령이었다.

도르만은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이유로 첫날부터 클레어에게 붙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설명해 주기는 했는데 대화의 많은 부분에 허세가 끼어 있다.

소위 말하는 찝쩍거림인 것이다.

"하핫.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이번 달만 벌써 네 번째 소집이거든. 뭐, 나한테는 익숙한 일이야."

"네 번째요? 전시 상황이 아니고서야 황궁 소속 기사단 전원이 모일 일은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주위는 자신의 위치를 찾고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깃발 아래에 모이기 위해 움직이는 기사들로 북적였다.

이다지도 많은 이가 전부 기사였다.

그것도 전원이 엘리트라 불리우는, 그렇게나 들기 힘들다는 황궁 소속의 기사들.

그런 이들이 넓은 대사궁의 입구 앞에 모여 차례대로 도열하고 있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 클레어의 질문에 도르만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사내답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클레어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물론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린 클레어가 그걸 슬쩍 피해 버렸지만 말이다.

"하하핫! 그러니까 우리 같은 정예 기사단 전원이 모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네 번이나 있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하핫! 아주 높으신 분들이 하는 중요한 회의지."

"무슨 회의인데요?"

"...하핫핫! 그, 그건 기밀이라 함부로 유출해선 안 되는 그런...."

"저희도 회의에 참석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

"그런데 왜 회의 한 번할 때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모이는 거예요?"

"음, 그게...."

질문이 이어질수록 답하는 도로만의 목소리에서 점점 자신감이 사라진다.

사실 그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까닭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회의라고 해도 황궁 기사단 전원이 소집된 적은 없었다.

한데 이번 달만 벌써 네 번째가 아니던가.

그사이에 알아낸 것이라고는 무슨 원정대에 관련한 회의라는 것과 원정대의 사령관이었던 검성이 직접 참여하는 회의라는 것.

과정에서 상대방과 어떤 무력적인 시위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었다.

바로 어제 클레어를 만난 직후, 직감했지 않았나.

'아, 이 여자구나.'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보기 드문 미인.

거기에 같은 아카데미 출신.

이건 자신의 혼인을 위해 신께서 보내 주신 천사였다.

만난 지 1분도 되지 않아 행복한 미래까지 계획한 것이다.

'듬직한 아들 둘에 토끼처럼 귀여운 딸 둘. 그리고 첫째는... 우리 둘 이름을 합쳐서 클로만이 좋겠어. 그럼 둘째는 크로만, 셋째는 살로만....'

그러니 자신이 아는 바를 최대한 쥐어짜 내서 전달해 주었다.

선배로서, 남자로서 모르는 게 있다는 건 영 멋이 살지 않았고 어제부터 줄곧 무덤덤하던 클레어가 처음으로 강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회의 상대가 같은 원정대 출신인데 아, 원정대가 뭐냐면은 그 몬스터가 튀어나왔던 이상한 문으로 직접 들어가 근원을 물리친 자들인데 아, 물론 오빠에게도 제의가 왔었지만, 워낙 바빠서 어쩔 수 없이 오빠가 거절했어. 아, 내가 더 나이 많으니 오빠라고 편하게 불러도 돼. 아무튼, 그래서 이번 회의가 말이야 사실...."

쓸데없는 소리 절반 정도 떼어 내고, 남은 절반 중에서 또 헛소리를 반절 떼어 내고 나면 어느 정도 진실이 들려온다.

클레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

그 검은색 게이트로 직접 들어갔다는 원정대라는 부대와 이번 회의에 검성 비탈리아누스가 직접 참여한다는 말이었다.

"아? 비탈리아누스 님? 하하핫! 너도 역시 비탈리아누스 님을 존경하나보구나. 뭐, 대단하시긴 하지. 오빠는 황궁에서 거의 매일 봐서 이젠 익숙해졌지만 말이야. 뭣하면 오빠가 비탈리아누스 님께 말씀드려서...."

그렇게 도르만이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을 때 기어이 호통이 들려왔다.

"도르만! 이 멍청한 자식아! 뭘 얼타고 있나! 빨리 이쪽으로 안 와?"

도르만이 속한 부대의 부분대장이었다.

"아, 부분대장님. 그게 아니라 실습생이 궁금한 게 있다고 해서...."

"얼빵한 새끼야!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입 닫고 똑바로 서!"

"네, 넵!"

기합이 바짝 든 도르만이 자리를 찾아갔고 클레어 또한 얼떨결에 그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도르만이 좀 얼빵해 보이긴 해도 황궁 소속으로 무려 6년이나 있었던 엘리트 기사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인 것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6년이나 황궁 소속 기사로 지냈음에도 아직 가장 밑바닥인 것이다.

도르만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리라.

대부분의 이가 비슷할 터였다.

그만큼 황궁은 거대하고 인재는 넘쳐흘렀으니.

'...역시.'

역시 이렇게해서는 안 된다.

남들과 같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서는 결국 이런 절차를 똑같이 밟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가장 높은 곳, 단순히 그를 볼 수 있는 곳에 서는 것에도 6년, 7년, 10년이 부족하리라.

그래서야 어느 세월에 같은 것을 보고, 곁에 서겠는가.

더 과감하고 확실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이 됐다. 움직이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 대사궁의 앞이 일절 소음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천 명에 가까운 기사가 모였음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었으니 가히 황궁 기사단이라 할 만한 모습이었다.

가장 선두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긴장감.

클레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회의 한 번에 왜 이토록 많은 기사가, 강하기로 유명한 황궁 기사단이 전원 소집되어야 했는지.

선두의 선임 기사들은 대체 무엇에 저토록 긴장하고, 무엇을 저토록 경계하고 있는 건지.

아는 게 없으니 이유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타국의 중요 사신들을 맞이하는 궁, 대사궁.

기사들이 도열한 채 길을 터 놓고 있는 대사궁으로 입궁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일련의 무리.

기사단을 상징하는 깃발이 높게 나부끼는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나치며 입구를 향해 다가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의 얼굴이 무척이나 낯이 익은 것이 그 이유였다.

'...교수님?'

워낙에 바빠 근 몇 달간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던 시르베르트 교수.

히오의 소개로 자신을 이메니아에 직접 데리고 온 사람이며, 세간에는 염동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

그런 시르베르트가 무수히 많은 기사의 경계를 받으며 수십 명의 사람과 함께 입궁하는 것이다.

그제서야 문득 떠오르는 소문.

원정대, 시르베르트, 검은 날개의 성자 등 갖가지 단어가 조합되며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시르베르트와의 첫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다.

히오의 한마디에 대규모 공간 이동을 통해 자신을 직접 찾아왔지 않았던가.

그 이후에도 히오와 긴밀한 모습을 자주 보였지 않았던가.

'뭔가 있어.'

강한 직감이 든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회의, 원정대.

이건 거대한 흐름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히오 파블렌코, 검성 비탈리아누스, 시르베르트 등의 거물들이 아주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는 커다란 강줄기.

이곳에 모인 수많은 정예 기사를 모두 합쳐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의 흐름.

그리고 그 근처까지 우연찮게 도달한 자신.

이건 어쩌면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이 이끄는 대로 편승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은 아득히 먼 뒤편에 머물며 두 다리가 찢어져라 달리는 수밖에 없을 테니.

'...반드시.'

불을 담은 클레어의 적안이 아득하게 서 있는 대사궁, 그 높은 궁궐의 안쪽을 향한다.

* * *

이곳 세상의 주민들은 모두 타고난 스킬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발현해 내느냐, 죽을 때까지 발현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

자신의 스킬을 알아내고 발현했다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닐 수도 있다.

한 가지의 스킬을 발현하고 그것만 죽어라 단련하지만, 사실 타고난 스킬이 몇 개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대개 한 가지가 끝이었으나, 둘 혹은 셋, 넷까지도 존재할 수 있는 게 스킬이란 것이었으니.

둘 이상의 스킬을 사용하는 이를 다중 스킬 사용자라 부른다. 일반 스킬 사용자보다 조금 더 특수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킬이 많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특성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만 특성과 연계하여 스킬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스킬을 매우 강한 경지까지 진화시킨 사람, 빙의자의 기준으로 보자면 상위 스킬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이곳에서는 '깨우친 자'라고 부르며 경외감을 표한다.

상위 스킬이란 매우 빠르게 강해지는 빙의자들조차도 3년간 고작 한두 개 올리는 게 전부일 정도로 얻기 어려운 것이다.

시르베르트의 '염동'이나 아이라이츠의 '매혹' 등, 상위 스킬로 들어서면 그 하나의 힘과 변수가 막대하기에 그리 불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특성자'란 무엇인가.

이는 검과 스킬을 동시에 사용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단순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특성자라 불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러를 검밖으로 뽑아낼 수 있는 경지, 못해도 4위계 이상의 기사가 일정 수준 이상의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경우, 그런 사람을 특성자라 부르며 깨우친 자와 더불어 고위 전력으로 평가 받는다.

오러를 다스리는 기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한 무기이자 전략의 핵심이다.

한데 그런 기사가 중위 등급 이상의 스킬까지 함께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는 전장의 재앙이자 적에게는 끔찍한 악몽과도 다름없는 것.

그런 만큼 특성자는 그리 흔치 않았고 로열 나이트 데이먼 리에프테나 전 2기사단장이자 빙의자, 안티푸스 프라만 정도가 최상위 특성자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만큼은 그런 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장소였다.

다중 스킬 사용자, 깨우친 자, 초인을 목전에 둔 기사 그리고 특성자들 마저도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곳이었으니.

"어비스 게이트는 마경(魔境)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표합니다. 제국은 대륙의 패권국으로서 모든 국가에게 마경으로의 출입을 금할 것을 알리고 위기시 협조를 구합니다. 모험가 길드와 제국은 하나의 원정대로 공략에 임합니다. 공식적인 사령관은 비탈리아누스 마헬로 임명하나, 독립된 단체로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여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상, 이견 있으십니까."

52층의 원정대로 참여했던 빙의자들과 제국의 최정예 인물들이 모인 회의장.

가장 상석에는 실비아 베르덴이 제국 황제의 위엄을 뽐내며 앉아 있었고 그녀의 바로 뒤에는 데스 나이트, 테오르도가 검은색의 오라를 아지랑이처럼 흘려 내며 서 있었다.

그럼에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실비아를 중심으로 양옆에 앉은 이가 비탈리아누스 마헬과 안티푸스 프라만이었으니.

그들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앉아 있는 이 중, 누구 하나 만만한 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종료하겠습니다."

어비스 게이트는 대륙에 나타난 마경(魔境)으로 공표될 테고 그것을 멸하는 원정대가 공식적으로 알려질 것이다.

빙의자들과 제국은 우선 힘을 합쳐 함께 움직이되 각각의 우두머리는 따로 두어 개별적인 작전을 벌인다.

제국은 빙의자를 믿지 못하고 빙의자들은 제국의 명령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 싫었으니 자연스레 도출된 결과였다.

그 외에도 세부적인 사항들을 논한 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가 끝이 났다.

가장 먼저 실비아와 테오르도가 회의장을 나서고 그 뒤를 이어 나머지 인원들이 궁을 벗어날 때까지도 비탈리아누스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곧 있을 공략 때 뵙죠."

결국 마지막 한 명까지 회의장을 벗어나면, 비로소 비탈리아누스 혼자 남은 것이다.

온갖 신경전과 보이지 않는 기운이 오가던 넓은 회의장에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그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앉아 있던 비탈리아누스가 품에 손을 넣어 종이 하나를 꺼내든다.

그가 홀로 남아 사색에 잠긴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이것의 영향이 제법 컸다.

- 2기사단장 임명에 관한 건.

본디 안티푸스 프라만이 맡고 있던 2기사단장이 공석이 되어 버렸으니.

물론 이는 예정된 일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자들이 있다는 걸 마법사에게 들었을 때, 그 명단을 실비아로부터 직접 건네받고 거기에 안티푸스의 이름이 적혀 있던 순간부터 대비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공석이 된 기사단장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재가 열 명의 로열 나이츠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 그가 로열 나이츠를 떠나 2기사단의 새로운 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로열 나이츠는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특별한 권력이나 직책이 없으나, 오로지 황제의 명만을 따르는 직속 기사단이기에 황제 외의 다른 모든 외압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명예로운 일원.

한데 남은 인원은 이제 다섯뿐이다.

2기사단장의 임명으로 빠져 버린 한 명을 포함해 총 열 명 중 다섯 명이 로열 나이츠를 떠난 것이었다.

대륙 최강의 집단이라 하기에는 제법 초라한 숫자.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있지만... 어찌 됐건 이는 확정된 사실.

"계속해서 변하는구나."

시대가, 주변이 계속해서 변하고 비탈리아누스 자신 역시도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제법 시린 바람이 분다.

"일어나야겠군."

생각이 너무 길었음인가. 어느새 주위로 잡히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휘황하게 떠오른 달을 벗삼아 바깥으로 나선다.

여러 생각이 겹치는 밤이다. 아마 잠에 들기는 어려우리라.

뭐, 크게 상관은 없었다. 며칠 밤을 새우더라도 멀쩡한 육체와 정신을 지녔으니.

늙지 않아 아직도 살아 있는 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바깥은 완연한 밤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늦가을의 쌀쌀한 밤.

홀로 한 사색이 제법 길었는지 북적이며 요란 떨던 기사들도 모두 흩어지고 인적 없는 곳.

그런 궁앞을 천천히 걷는다.

"날씨가 꽤 쌀쌀해."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자신의 고향에서는 어찌 겨울을 나는지 신나게 이야기하던 옛 친구가 떠오르는 계절이 온다.

대륙 최악의 악당, 아타올프.

조국에게 비난받고 제국에게 조롱당하던 자신의 옛 친우.

유일하게 기대던 가족마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을 때, 그때 느꼈을 시린 바람을 아주 조금이나마 겪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고독하고 쓸쓸한 계절이지 않나."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다시 재회한 친구의 핏기 없는 주검 앞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들끓지도 않았다. 차게 식은 가슴에는 이전처럼 뜨겁게 타오를 연료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공허함이 섞여 들어올 뿐이었다.

"겨울이 오겠어."

겨울이 온다.

밤은 길고 어두우며 바람은 차갑고 시린, 그런 계절이 온다는 말이다.

"알고 있느냐."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맑은 밤하늘을 향한다.

"겨울밤은 별이 가장 밝게 보이는 계절이기도 하단다."

겨울밤 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밝게 빛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비탈리아누스는 시선을 내리고 천천히 몸을 돌린다.

자신이 궁에서 나온 순간부터 느껴지던 강렬한 존재감.

그는 더이상 가질 수 없는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

그의 시야에 담기기 시작하는, 마치 여름과도 같은 소녀.

"마음에 불을 품은 아이야."

그의 공허한 금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적색의 소녀.

"너는 무엇을 그토록 열망하고 있느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밤.

겨울을 앞둔 시점이었다.

142화 가을날 정한 길 (4)

베르가의 무덤을 떠나 다시 돌아온 마탑.

수련은 계속되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익힌 마법은 총 다섯 개.

다른 특수 마법은 건들지 않은 채 푸르넬이 추천해 준 원소 마법으로만 골라 익힌 것이다.

블링크를 시작으로 불의 기둥을 만들어 내는 파이어 필라.

초저온 서리 광선을 뿜어내는 레이 오브 프로스트.

바람의 검을 만들어 내는 윈드 블레이드와 목표한 지점에 폭발을 일으키는 익스플로전까지.

- 같은 속성의 원소 마법이라고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 말게. 익스플로전과 파이어 필라가 같은 화 속성으로 분류되지만, 겹치는 문양이 많지 않듯이 플레어나 파이어 월 같은 마법도 마찬가지라네.

같은 화염 속성이라도 어떻게 발현하느냐에 따라 활용 방식이 달라진다.

가령 익스플로전 같은 경우에는 기습적인 폭발에 의미가 있다.

가리킨 방향에 압축과 점화 그리고 팽창으로 빠르게 이루어지는 폭발. 거기에 범위 또한 넓은 편이니 예지에 가까운 예측이 아니고서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불의 기둥, 파이어 필라 같은 경우에는 가열과 확장의 문양이 주를 이룬다.

갈수록 뜨거워지고 크기를 키워가는 불기둥은 적의 입장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대항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으리라.

기습과는 거리가 멀고, 대놓고 전장에서 적을 압도하는 화려한 마법이 파이어 필라였다.

그렇게 같은 화 속성임에도 쓰임새가 달랐고 활용도가 달랐다. 그것은 다른 원소도 마찬가지겠으나, 화염 속성만의 차별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그 위력.

푸르넬이 화염 관련 마법을 유독 많이 추천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플레어, 초고온 불의 광선이라네. 같은 광선 형태라고 레이 오브 프로스트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게야. 그보다 난이도가 더 높다고 생각하면 돼. 폭발을 압축에 담고 목표를 지정해야 하니 말이야. 서리의 광선과 같은 점은 유지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대부분이 광역 범위를 자랑하는 화염 속성 마법이지만, 플레어는 불의 힘을 한 점에 극도로 압축한 단일 대상 마법이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지라네. 그걸 명심하고.

플레어의 장점은 시전자의 마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그 뜨거운 광선을 쏘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마력이 충분해도 마법을 계속 유지하는 집중력은 별개의 문제이긴 했지만, 이론상으로는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끊이지 않는 공포의 선인 셈이다.

- 한번 해보게나.

왼손에는 플레어의 마법서를 펼친 채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들고 정면을 조준한다.

눈은 마법서의 공식을 훑으며 속으로는 그대로 문양에 마력을 불어넣는다.

다섯 개의 고리에 실리는 마력. 가장 안쪽, 1서클의 고리가 느릿하게 돌아가고 그 위쪽의 2서클 고리는 반대 방향으로 조금 더 빠르게 회전한다.

세 번째 고리는 그것과 또 반대의 방향으로 조금 더 빠르게, 네 번째 고리 역시 그런 법칙을 따랐으니 기어이 마지막 다섯 번째 고리에 이르러서는 맹렬하게 회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클을 움직였다면 이제 문양을 건드릴 차례다.

별처럼 퍼진 수백 개의 문양. 바깥의 고리로 갈수록 회전이 빠르고 문양의 개수가 많다.

서클이 넓어지는 만큼 포함되는 문양 역시 많은 것이다.

그러니 바깥의 문양, 즉 고서클의 문양은 작고 가볍다.

반면에 안쪽 고리에 담긴 문양은 크고 무거웠다. 시작의 문양이니 중심을 잡고 기초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1서클과 2서클의 문양이었고 그것이 존재하기에 바깥의 고리가 빠르고 강하게 회전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마법의 묘리였다.

5서클의 마법은 기초 문양과 그것에서 더 세분화된 모든 고리의 문양이 필요하다.

처음이니 신중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히오의 마력.

가장 안쪽의 무거운 문양부터 차례대로 건드린다.

총 51개의 화염 문양 중 점화와 가열에 관련된 17개의 문양에 차례대로 마력이 부여되고 3개의 폭발 문양에 힘을 강하게 싣는다.

압축과 그것을 보조하는 33개의 문양에 빛이 들어오고 조준과 유지를 위한 8개의 문양을 거쳐 시전자의 보호를 위한 마지막 문양까지 빛이 들어온다면 그 모든 힘이 마력의 인도에 따라 한데 뭉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음...."

막대한 힘을 품은 지팡이가 크게 흔들린다.

그 커다란 진동에 히오의 오른팔도 함께 떨려 왔으니.

정면을 겨누고 있으나 이래서야 목표물을 정확히 맞출 리가 없을 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 ...끝까지 집중하게.

이미 실패는 확정된 사실.

그럼에도 집중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발현해 내야 한다.

그래야지만 잘못된 지점을 유추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불완전한 힘의 덩어리를 기어이 지팡이의 끄트머리로 인도했고.

"이런...."

금방이라도 터질 듯 환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화염의 빛.

높아지는 온도. 훅 불어오는 뜨거운 공기.

미친 듯이 진동하는 지팡이.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마법서까지 옆으로 집어던지고 지팡이를 있는 힘껏 움켜쥔 두 손.

그러다 결국 그 모든 것이 한계에 달했을 때.

콰아아앙-!

마탑의 105층, 임시 훈련장 전체를 뒤덮는 환한 빛과 함께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끄악!"

고서클의 마법으로 갈수록 위력은 위대해지지 않은가.

그말인즉 마법의 실패에 대한 리스크도 그만큼 커진다는 말이다.

그 근원지가 지팡이 끝이었던 만큼 히오가 뒤로 나자빠진 것은 당연한 일.

그래도 입고 있는 로브와 모자가 마법 저항이 뛰어나고 이전의 수많은 실패 경험으로 미리 실드 마법을 발동해 놓은 상태였기에 큰 부상은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겉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말이다.

폭발의 연기는 마탑의 훌륭한 시스템 덕에 금방 걷히고 그로 인해 꼴사나운 히오의 모습이 드러난다.

대자로 뻗어 드러누운 채 검게 그을려 곱슬해진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히오.

"...인생. 쉬운 게 없네"

마법사의 길이란, 이다지도 고된 것이다.

* * *

"로열 나이츠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마음에 불꽃이 가득한 소녀의 첫마디였다.

"허허."

그에 비탈리아누스는 웃음 터트렸다.

소녀의 말이 웃겨서가 아니었다.

그 허황된 목표가 우스워서도 아니었다.

진지한 태도를 비웃은 것 역시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흘러나온 헛웃음 또한 아니었다.

그럼에도 웃음을 터트린 이유는 무엇에서였는가.

로열 나이츠.

선황제가 계획하고 비탈리아누스가 행동해 만들어 낸 집단.

세간에 알려지기로 로열 나이츠는 선황제를 위해 검성이 직접 창단한, 오직 황제만을 위한 기사단으로서 아름답게 포장되었으나 그 실상은 조금 다르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던 것이다.

비탈리아누스 마헬이라는 이름을 이용해 강한 기사들을 끌어모으고 명예라는 허울을 이용해 고위 귀족 자제들을 휘하에 두기 위한 수단. 무력을 통한 정치적 압박.

그것이 대륙 최강의 기사단으로 알려진 로열 나이츠의 창단 배경이었다.

허나 그 의미는 이제 와서 무색해졌다.

황권의 강화니, 고위 귀족의 견제니,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베르덴의 여제, 실비아 베르덴은 이미 모든 귀족을 완벽하게 장악했으니.

전무후무한 능력으로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황제로 기록될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역사상 가장 두려운 폭군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이기도 했으나, 걱정은 들지 않는다.

비탈리아누스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초인.

의념을 자유로이 다루는 8위계의 위대한 기사.

가까운 이의 성정 정도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심으로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과 거짓 없는 맑은 영혼 정도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제국은 황제파 귀족파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완벽한 통합을 이룬 채 매끄럽게 나아가니 제국은 갈수록 강대해질 것이고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밝을 터였다.

물론 그럴수록 로열 나이츠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겠지만 말이다.

정치적 압박과 고위 귀족들의 견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로열 나이츠 중 고위 귀족 가문 출신 세 명을 가문으로 돌려보냈다.

어비스 52층을 겪어 보고 내린 판단이었다.

나름 강한 축에 속하기는 했으나 앞으로 있을 전장에서 살아남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들의 명예를 생각해 로열 나이츠에 이름은 계속 올라가 있을 것이나 실제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공석이 된 2기사단장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 한 명이 로열 나이츠를 나갔다.

일이 그렇게 되자 다른 한 명 또한 함께 이동할 것을 희망했고 허락해 주었다.

그리하여 다섯이 남게 된 것이다.

고작 다섯이다.

이를 과연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이라 할 수 있겠나.

황제는 로열 나이츠의 도움을 크게 필요치도 않는데 과연 가장 명예로운 기사단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강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로열 나이츠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지위도, 권력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차라리 기사단을 폐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 능력을 마음껏 뽐내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직전까지 비탈리아누스가 품고 있던 고뇌였다.

"...반드시 로열 나이츠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웃었다.

"허허...."

소녀의 진심어린 말이.

긴장해 잔뜩 굳은 어깨가, 떨려오는 손끝이.

그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비탈리아누스의 고뇌를 날려 버렸기에.

"하하하!"

그래서 웃었다.

길었던 고민에 대한 해답은 너무도 쉬웠으니 말이다.

정치적으로 필요가 없으면 어떠한가. 황제에게 크게 필요치 않으면 어떠한가.

가장 강하지 않으면 어떠하고 가장 명예롭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지켜야 할 사람은 여전히 많고 상대해야 할 적은 명백하게 존재했다.

여전히 많은 이가 로열 나이츠를 보며 희망을 품고 향상심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신은 그것을 위하면 될 뿐인 문제였다.

그 모든 것을 눈앞의 소녀의 한마디로 깨달은 것이었으니.

비탈리아누스는 웃음을 멈추고 소녀를 바라본다.

화려한 적색 머리칼에 보석같은 적안.

그의 눈에는 아직 어린 소녀.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법한, 개화하는 예쁜 여름꽃.

설마 비탈리아누스가 웃음을 터트릴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한 표정과 더욱더 긴장하여 굳은 몸.

그런 와중에도 곧은 눈빛.

"마음에 불꽃이 가득하구나."

마음에 품은 불은 소녀의 열망이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강렬하게 바라는 마음.

로열 나이츠에 들어와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이다.

무력은 굳이 볼 것도 없으리라.

약하다.

남은 로열 나이츠 중 아무나 데려와도 몇 초도 버티지 못할 테지.

허나 그러면 뭐 어떤가.

많은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지 않나.

강한 직감이 든다.

소녀의 불꽃이 많은 것을 바꿔 놓을 것이라는 직감.

로열 나이츠, 그리고 어쩌면 비탈리아누스 자신까지도.

무엇을 목표로 그리 자신을 불태우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것이 황제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저런 열망은 생각보다 더 거대한 힘이어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겪어 보았기에.

그것은 자신 역시도 가져 보았던 커다란 불꽃이었으니까.

소녀의 모습은, 언젠가 가장 높은 곳에 설 것이라는 젊은 날의 자신과 무척이나 닮았으니 말이다.

물론 자신의 불꽃은 어느샌가 꺼지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이제 공허함뿐이지만.

타오르는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오고 그 마저도 지나면 결국 겨울이 찾아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으나, 이 소녀는 다른 길을 걷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소녀는 여름이었다.

목표가 있고 이룰 것이 남았으며 열정으로 크게 타오른다.

"아이야."

자신은 겨울이었다.

눈부신 영광은 과거가 되었고 그것을 함께했던 이는 모두 죽어 버린 겨울.

가장 소중했던 친우의 주검 앞에서도 울지 못하는 겨울.

마음까지도 꽁꽁 얼어 버린 삶의 끝자락, 겨울.

"마음을 굳게 먹거라."

그런 여름과 그런 겨울이 만났다.

그리하여 과연 봄을 이뤄 낼 수 있을까.

비록 자신의 봄은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쓸쓸한 겨울로서 그 끝을 맞이하겠지만.

그것이 소녀를 봄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 나쁘지 않은 결말일 것이다.

* * *

"인사들 나누거라. 신입이다."

비탈리아누스의 한마디에 모든 절차는 생략되었다.

그날 이후 로열 나이츠의 공식 인원에 한 명이 추가되었으니.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닷!"

가을밤에 이루어진 작은 기적이었다.

143화 가을날 정한 길 (5)

밤이 깊었지만, 잠이 올 턱이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지도 벌써 몇 시간째였는데 아직도 눈이 말똥말똥한 것이다.

고급스러운 침대, 부드러운 이불.

그리고 로열 나이츠의 제복은 곱게 접혀져 품에 꼭 안은 채였다.

'...내가 정말 로열 나이츠?'

결국 몸을 옆으로 돌려 협탁에 놓인 패를 다시 한번 들어올린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작은 패는 로열 나이츠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패.

황금 사자가 새겨진 로열 나이츠의 상징이었다.

"헤헤...."

볼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난다.

히오나 시르베르트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로열 나이츠의 입단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지독히도 운이 좋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늦은 시간에 홀로 있는 비탈리아누스를 만난 것부터가 기적이었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덜컥 승낙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별다른 시험이나 증명을 거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자신의 무엇을 보고 로열 나이츠라는 최고의 기사단에 들인 것인지... 는 제쳐 두고, 우선 기분이 몹시도 좋았다.

정말로 머지않은 것 같았기에.

먼 발치에서 그저 소문으로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 있는 장소.

그 주된 무대에 비로소 발을 들인 것 같았으니까.

오늘 하루는 정신 없이 지나갔다.

제복과 훈련복 등 단원복을 지급받고 모든 장비와 보조 무기를 로열 나이츠 전용으로 교체했다.

아카데미 것도 나름 괜찮았지만,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부가 고급품.

그렇게 장비를 교체하고 나서 단원들, 그러니까 기사단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규칙 등을 전해 들었다.

기사단 내의 규칙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이 황궁에서 지켜야할 수칙 같은 것이었고 기사단 내의 자체 규범은 까다롭지 않았다.

오직 황제의 명만을 최우선으로 수행하기에 어떤 임무를 맡을지 쉬이 예상할 수 없고,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의외로 품위나 몸가짐 등에 신경을 써야 했다.

'황제의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만큼 그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 노력해야 할 테다.

자신을 믿고 데려와 준 검성 비탈리아누스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또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도.

'선배들도 엄청 강했지.'

한 명 한 명의 무력이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직접 겨뤄 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어도 강자 특유의 여유와 로열 나이츠의 품격이 느껴졌었다.

'나도 곧....'

자신도 그들의 여유와 품위를 배워서 한 명의 당당한 로열 나이츠가 되리라.

그렇게될 때쯤이면 분명 히오의 옆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빨리 자야지."

얼른 자고 얼른 일어나서 새벽부터 훈련장에 나갈 생각이다.

그 정도의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기분좋게 콩닥대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러니 다시 몸을 바로 누우며 눈을 감는다.

황금색의 패와 로열 나이츠의 제복을 품에 꼭 안은 채로.

* * *

클레어는 결국 몇 시간도 자지 못하고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컨디션은 최상이다.

그렇기에 재빨리 새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전용 훈련장을 향해 나섰다.

통풍이 잘되는 부드러운 옷감의 하얀 도복.

몸에 꼭 맞는 사이즈에 팔다리의 통이 넉넉해서 입지 않은 것처럼 편안했다.

등에는 커다랗게 황금 사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클레어의 붉은 머리칼.

힘찬 발걸음.

쌀쌀한 새벽 공기와 함께 도착한 훈련장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어, 신입!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적응될 때까지는 좀 쉬지."

가장 먼저 클레어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은 로열 나이트, 데이먼 리에프테.

이 갈색 머리카락에 장난끼 가득한 얼굴은 이전부터 클레어와 안면이 있었다.

흑아의 이메니아 습격 당시에 검성의 뒤를 쫓아가던 로열 나이츠와 클레어가 잠시 만났지 않았던가.

그때 길을 물어본 것이 데이먼이었고 그날의 짧디짧은 인연이 이렇게 이어진 것이다.

"아닙니다! 저도 열심히 훈련해서 선배님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그래, 든든하네! 단장님이 왜 너를 데려오셨는지 알겠어."

훈련장에는 데이먼뿐만 아니라 맬리사와 마티스 등 다섯 명의 로열 나이츠가 모두 와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클레어가 가장 늦게 나온 셈이다.

다만 나머지는 클레어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맬리사 정도만이 클레어의 당찬 말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선배님들! 엄청 강하시면서도 이렇게 일찍부터 훈련하시다니... 존경합니다!"

"아, 이게 우리 임무거든."

"예? 임무 말입니까?"

"그래. 당분간 다른 임무를 수행할 일은 없을 거야. 그저 더 강해지는 것.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임무이자 최선이거든."

데이먼의 말에 클레어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훈련하는 것이 임무라니? 로열 나이츠의 임무라고 한다면 좀 더 무게감 있고 엄청 중요한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어떤 일과를 보내게 될지 들은 것이 없었다.

그런 클레어의 표정을 읽었는지 데이먼이 옅은 미소를 짓는다.

"강해지겠다는 그 열정, 절대 잃어서는 안 돼.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넵!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좋아. 이미 몇 놈의 마음이 꺾여 버려서 기사단을 나갔거든. 그래서 지금 다섯 명뿐인 거고. 아 너 왔으니 여섯이구나?"

그말은 클레어에게 제법 충격이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사람이 너무 적어 보인다 했는데 로열 나이츠를 나갔다니... 대체 왜?

로열 나이츠란 모두가 동경하고 존경하는 가장 명예로운 기사단. 제국에서 가장 권위있고 강한 무력 집단.

한데 그런 기사단을 스스로 나갈 이유가 무엇에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클레어의 표정에서 잔뜩 드러났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에 데이먼의 얼굴 위로 조금의 씁쓸함이 스쳐 지나간다.

"벽을 만난 거지. 무서움이라고는 없던 녀석들이 진짜 벽을 만나고 포기해 버린 거야."

기사단을 떠난 녀석들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이 앞으로는 진짜 괴물들의 전쟁터.

여기서 과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였으니.

다만 남은 이들은 그럼에도 부딪쳐 보겠다 결론 내린 것이고 떠나간 이들은 차라리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하겠다라 결론 내린 것뿐이다.

그러니 씁쓸하긴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로열 나이츠가 가장 강한 거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곧 클레어의 순진무구한 말에 그런 씁쓸함도 날아가 버리고 만다.

"하하하! 나도 한때는 내가 강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해.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더라고. 그리고 그런 하늘조차도 경계하는 괴물이 있고."

"그래도 선배님께서도 엄청 강하십니다!"

"...그래. 힘이 난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가지고 놀던 안티푸스 프라만.

수천 수만의 몬스터가 깔린 지옥을 한낱 관광지로 만들어 버린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기가 눌릴 정도의 존재감을 지녔던 데스 나이트를 여유롭게 밀어붙이던 비탈리아누스 마헬.

과연 그뿐일까.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그에 못지않은 강자들이 숨어 있을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이 앞으로는 이제 그런 천외천들의 무대.

그런 이들조차 지극히 경계하는 위험천만한 전장.

"그러니 너도 지금은 다른 생각 말고 강해지는 것에만 집중해. 어차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곧 알게 될 거야. 뭐, 너도 데려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네!"

데이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기에 클레어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검은 날개의 성자나 원정대.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검은색의 게이트 속. 아마 그곳을 말하는 것이리라.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로열 나이츠로 이미 명성이 드높은 데이먼이 저렇게까지 말할까.

"그래, 검은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나?"

뭐가 어찌됐건 지금은 데이먼의 말대로 훈련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야 했으니. 로열 나이츠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단검술을 배웠습니다!"

허리춤에 찬 새 단검을 호기롭게 뽑으며 말하는 클레어.

데이먼은 씨익 웃으며 옆에 놓인 짧은 목검을 들어올린다.

"좋아. 그건 내가 조금 봐주지. 스킬 관련해서는 저기 애써 관심 없는 척하고 있는 파란머리 여자 있지? 맬리사가 전문이니까 저기 가서 물어봐."

"넵! 감사합니다!"

그런 데이먼의 말에 아닌 척 귀를 쫑긋거리던 맬리사가 고개를 홱 돌려 노려봤지만, 데이먼은 이미 클레어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으니.

"음... 나쁘진 않은데 너무 형식적이네. 실전 경험이 없는 게 티가 나."

"넵!"

그렇게 훈련에 여념이 없던 그들이 비탈리아누스의 부름을 받은 것은 바로 당일날 오후였다.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짐작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리라.

슬슬 때가 되었으니까.

더욱더 깊은 심연.

어비스 53층이 열릴 때가 말이다.

* * *

어두컴컴한 집 안.

조용한 실내에서 아이라이츠는 혼자 히죽 웃는다.

"히히."

손에는 나무 표찰이 들린 채였다.

〔아이라이츠와 히오의 신혼집♥〕

이번이 무려 네 번째 시도.

현관을 시작으로 그 옆 벽면, 문 뒤, 천장 등에 몰래 매달거나 붙였는데 그럴 때마다 히오가 귀신같이 찾아와서는 동강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이라이츠가 어디 그 정도에 기가 죽을쏘냐.

바로 다시 표찰을 만들어 붙일 곳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1층으로 내려와 집안을 둘러보는데.

"응?"

방문 하나가 살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

"히오?"

히오의 방이었다.

마법을 연구한다며 지하로 내려가 밥먹을 때 말고는 올라오지 않고 잠도 지하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던 히오가 오랜만에 방에서 자려는 모양이었다.

"히히."

자연스레 아이라이츠의 발뒤꿈치가 들린다.

살금살금 방문 앞으로 다가가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머리를 빼꼼 집어넣어보면 보이는 것이다.

세상 곤히 잠든 히오의 모습이.

"헙!"

아이라이츠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너무 귀엽잖아...!"

정말로 보기 힘든 귀한 모습이었다.

곤히 잠든 히오의 모습이라니.

이건 어쩌면 다신 없을 기회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 아이라이츠는 재빨리 포인트 상점을 열고 영상석을 구매했다.

그것도 무려 최상급으로 구매한 뒤 방으로 들어가 잠든 히오의 얼굴을 담는다.

왼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은 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눈빛으로.

그렇게나 활발히 움직였음에도 들리는 소음과 퍼지는 기척은 거의 없었다.

작정하고 움직인 엘프의 몸은 그런 것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침대 옆에 앉아 히오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라이츠의 손에서 영상석이 점점 내려간다.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고 히오는 잠든 상태라고 하지만, 그가 이 정도에 반응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아직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한계까지 몰려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지칠대로 지쳐 어렵사리 택한 잠자리가 아니겠냐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포인트를 탈탈 털어 구매한 영상석을 그냥 품에 집어 넣어 버린다.

"...히오."

조심스레 쓸어 올려 보는 히오의 머리카락은 이전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는 상처가 얼굴과 몸 곳곳에 나 있었다.

마법 때문이리라.

무슨 신성 마법이니 뭐니를 연구할 때부터 쾅쾅 시도 때도 없이 터지던 폭발음을 기억하고 있다.

에이 실패했네. 라며 멋쩍게 웃고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도전하는 모습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동경하고 동시에 두려워하는 지존 천마라는 사람은 사실 지독한 노력가임을.

잠조차 거의 자지 않으며 종일 연구하고.

제 몸을 던져 가며 연습하고 도전하기에 모두의 희망으로서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임을.

세상 모두는 몰라도 자신은 이제 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것이냐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보나마나 뭐 스스로가 만든 사소한 약속 따위겠지.

그런 사소함으로 언제나 위대함을 만들던 사내였으니까.

"...도와주고 싶은데."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내려와 히오의 뺨을 쓸어내린다.

제법 푸석했다.

아이라이츠는 강하다.

기존의 스킬 '매혹'과 더불어 새로 얻은 석화의 능력, 그리고 한계치보다 더 높아진 육체의 스탯과 빙의자가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으니.

안티푸스 같은 괴물놈 정도만 제외한다면 아이라이츠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로 그녀는 강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히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계속 그렇지 않은가.

무슨 도움이 됐던가.

히베루니아에서, 어비스 52층에서 무얼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언제나처럼 히오가 모든 것을 해결했다.

이대로는 안 되고, 이래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강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명성 포인트를 얻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매혹을 활용하는 것이다.

허나 히오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 자신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무엇이 남았는가.

"시스템을 이용해 강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라...."

히오가 해 주었던 말이다.

시스템을 이용해 명성 포인트를 얻고, 그것으로 스킬을 진화하며 강해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본인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안티푸스는 검을 택했다.

히오는 마법을 택했다.

하지만 자신이 마법을 익힐 수는 없다.

호기심에 히오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었다가 재능의 한계를 느꼈지 않았던가.

마력을 움직여서 뭐 어쩌고 저쩌고....

장담컨대 히오의 경지까지 가려면 수십 년도 넘게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검을 익힐 수도 없다.

스탯의 영향으로 체력, 민첩, 근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일평생 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자신이 검을 배운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오러를 다루고 기사 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아이라이츠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

스킬.

이곳 주민들은 시스템의 도움 없이 스스로 스킬을 성장시킨다.

그 원리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었다.

명성 포인트만 있으면 딸깍- 진화가 가능했으니까.

'명성 포인트 없이 매혹 스킬을 최상위로 진화시킨다면....'

그 원리와 활용법에 실마리를 찾는다면 히오에게 도움될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영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아이라이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스킬을 잘 다루던 한 사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스킬을 다루고 활용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많았으니 말이다.

한낱 스킬인 검은 안개와 완벽하게 동화하여 검은 안개 그 자체였던 이, 아타올프.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결국 히오도 잡지 못했을 것이라 말했던 세계관 최강자.

그처럼만 될 수 있다면...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히오도 날 다시 보겠지."

어쩌면 자신의 대단한 모습에 히오가 반해 버릴지도 몰랐다.

"히히히."

공포의 검은 안개를 자유로이 부리던 아타올프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선홍빛 기운을 마구마구 뿌리고, 적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그에 히오는 환호성을 터트리다가 결국 뒤에서 와락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고백을....

"꺅!"

작게 비명을 지르며 제 볼을 감싸 쥔 아이라이츠가 부끄러워하며 잠든 히오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품에 깊이 몸을 파묻는다.

"히오...."

오랜만에 안긴 품은 언제나처럼 따스했다.

평생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말이다.

144화 무한의 층 (1)

"길드 측에서 연락이 왔다."

무겁게 열리는 검성 비탈리아누스의 입.

전해지는 내용에 일대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모인 모두의 표정에 떠오르는 것은 비장함.

"선발대를 보냈고 공략의 유형까지 파악했다더군."

새로운 게이트가 다시 세상 곳곳에 나타났다.

53층이 열린 것이다. 기다리고 있던 제국은 즉시 움직여 발견되는 모든 게이트의 통제에 나섰고 빙의자들 역시 발빠르게 움직여 선발대를 보낸 것이었다.

층의 유형을 파악하는 선발대는 빙의자 측에서 모두 담당하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로그아웃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었으니까.

퇴로를 확보하고 정찰 병력과 호위 병력을 나누는 등, 제국 측이 선발대를 보내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반면, 빙의자들은 몇 사람이 들어가 유형만 파악하고 로그아웃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알아낸 유형.

길드측에서 전해 온 그 내용은.

"무한의 층, 혹은 각고의 층. 이번 마경에 붙여진 이름이다."

각고의 층, 또 달리 부르기를 무한의 층.

"자세한 건 다시 만나 이야기해 보겠으나, 확실한 것은 이번에도 막강한 무력이 필요하다는 점이지. 그러니 로열 나이츠 전원 이번 공략에 투입된다."

"전원이라 하심은... 신입도 포함입니까?"

데이먼의 물음에 클레어에게 향하는 비탈리아누스의 시선.

바짝 긴장하여 차렷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붉은 눈동자에는 첫 만남 때보다도 더욱 거대한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각고의 층, 무한의 층, 길드니 공략이니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대략적인 느낌은 알기에.

로열 나이츠마저 긴장하고 검성 또한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 달리 있겠는가.

모든 의문과 신비가 그곳에 있을 것이며 모든 사건의 근원이 그곳일 터였다. 그리고 그런 곳이라면 반드시 그 또한 있겠지.

그렇기에 클레어의 의지는 두려움을 태우고 긴장마저 불사르며 덩치를 키워 가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비탈리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말했지 않느냐. 로열 나이츠 전원, 이번 공략에 투입된다."

크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큰 리스크를 감수할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로열 나이츠를 떠난 이들은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었고 클레어는 당장 어제 들어왔음에도 이미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데이먼, 자네가 주의할 점을 책임지고 알려 주게. 출정은 바로 내일 아침이니 그 전까지 푹 쉬어 두고."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클레어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흥분과 긴장이 워낙에 컸을 뿐, 두려운 마음 역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몇 달 전, 이메니아를 습격했던 끔찍한 몬스터 무리.

그런 것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넘쳐난다는 그 근원지에, 마경이라 불리게 될 그곳에 직접 발을 들이고 그 모든 놈을 소탕해야 한다니.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는가.

비탈리아누스의 집무실을 벗어난 뒤에도 그런 긴장은 유지되었다.

황궁 전체의 분위기가 짙은 긴장감에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그런 긴장감.

평범하게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다면 여지껏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몰랐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런 폭풍전야의 고요함, 어수선한 분위기, 막대한 긴장감 속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마경에 들어간다면 무엇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는 거야."

"정신을 단단히...."

"그래. 흐르는 기운에 저주가 가득하거든. 우리가 갔을 때는 그리 극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절대 정신을 놓으면 안 돼."

"넵!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마경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데이먼을 통해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기괴했다.

도대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인 것이다.

하늘 끝까지 닿은 거대한 성이 있고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뚫고 그 성의 꼭대기로 향했단다.

그렇게 오른 곳에서 검성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를 잡고 공략을 마쳤다니.

이야기만 들어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번에 가게될 곳은 53층이란 곳인데 그렇게 층마다 각기 다른 유형이 존재하고 거기에 맞는 방식대로 공략을 하는 거야. 아까 들었지? 이번 층의 유형은 각고의 층이라고. 그런 방식인 거야."

"그럼... 여태 이런 것을 52번이나 했다는 뜻입니까?"

"뭐, 그렇지."

"대체 누가... 아."

물으려다 말고 깨달았다는 듯 작게 탄식하는 클레어.

누군지야 뻔하지 않은가. 떠오르는 이름은 언제나처럼 한 명뿐이었으니.

도대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찌 그렇게 항상 바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목표이자 우상.

그가 싸워 왔으리라.

홀로 외롭게도. 무려 오십하고도 두 번이나 말이다.

"어쨌든 자잘한 것들은 다른 기사단에 맡기고 우리가 마경에 들어가서 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뿐이야."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기사단, 로열 나이츠.

층에 들어간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비탈리아누스 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것."

검성의 명령을 가장 최우선으로 수행하고 그를 가장 가까운 곁에서 보좌하는 것이, 반드시 행해야 할 임무.

그리고 그와 별개로 주의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아까 말했듯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정신을 부여잡아야 해.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그 정도로 무서운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겁니까?"

"아니, 뭐 꼭 무서운 일이라기 보다는 뭐랄까... 가끔 놀라서 나도 모르게 어벙해질 때가 있거든. 특히 조심해야 할 건...."

특히나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는 것은 마경의 몬스터도 그 음산한 분위기도 아닌.

"수호 기사님을 조심해."

황제의 수호 기사이자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언데드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헹가래를 받는 남자.

몬스터의 등에 타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여유롭게 주위 좀 둘러보며 이동하자는 남자.

그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자칫하다가는 어비스 기운에 침잠될 수도 있었으니.

그런 데이먼의 진중한 충고에.

"...예?"

클레어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히오의 눈이 서서히 떠진다.

"으하암...."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쭉 켜면 정신이 금방 말똥해진다.

"...개운하네?"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개운하다.

오랜만의 숙면이었던 까닭일까.

5서클에 오른 뒤로 편안한 잠자리는 고수하고 제대로 숙면을 취한 적도 없었다.

마탑에서 이틀 내지는 삼 일 밤낮을 새고 기절하듯 잠에 들거나 저도 모르게 꾸벅 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이렇게 방으로 올라와 각 잡고 숙면을 취한 것은 무척 오랜만인 것이다.

그 정도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플레어'까지 익힐 수 있었다.

여기서 익혔다는 말은 단순 한 번 시전에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숙련됐다는 의미이다.

복잡한 과정을 몸에 익을 정도로 훈련해 언제든 바로 마법을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습했다는 뜻이었다.

이 역시 마력 감응의 천재 x2 재능과 노력이 합쳐졌기에 가능한 일.

이로써 5서클 마법은 총 여섯 개가 완성되었다.

블링크를 제외한 무려 다섯 개가 전부 공격 마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 시작했으니 모든 마법을 익힐 때까지 마탑에 박혀 있고 싶었는데, 플레어까지만 익히고 나온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하나뿐.

슬슬 새로운 어비스가 열릴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 층은 네크로폴리스가 그 배경이었기에 쉬이 공략할 수 있었으나, 이번 층에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50층처럼 미궁이 갑자기 나올 수도 있고 51층처럼 로그아웃이 되지 않는 변수가 언제 발생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컨디션을 관리해야 했다.

공략하러 가서 졸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자고 일어났는데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가볍다.

자잘하게 남아 있던 통증이나 찌뿌둥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자는 사이 무슨 마사지라도 받은 것처럼 개운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잘 자는 게 중요한 건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방을 나오면 앞치마를 곱게 두른 아이라이츠와 고소한 음식 냄새가 히오를 반겨 준다.

아이라이츠는 의외로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임에도 혼자 식재료를 구해 곧잘 요리했다.

특히나 이곳 신성 마법사의 집이 새로 지어지고난 뒤에는 전업 주부가 되겠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아예 취미가 되어 버렸는지 나날이 요리 솜씨가 늘고 있었다.

"헤헤헤."

아침부터 히오의 얼굴을 보더니 수상쩍게 웃는 아이라이츠.

저 작은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추측하는 것은 진작 포기했기에 대충 인사하고 지나쳐 식탁에 앉는다.

뭐, 또 어딘가에 몰래 신혼집이니 뭐니 이상한 팻말이나 달아 놨을 테다.

"오, 맛있겠는데?"

"그치!"

고소한 향기의 정체는 고기였다.

두툼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살 위로 이름 모를 소스가 얹혀져 있고 그 주위로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꽃까지 플레이팅되어 있는 요리.

눈 뜨자마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요리.

하지만 히오는 익숙하게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집어 넣는다.

부드럽게 씹히는 촉감과 동시에 터져 나와 입안을 가득 메우는 육즙.

"맛있어?"

"...최고야."

이건 뭐, 각성을 요리 실력으로 한 것인지, 어릴 때부터 혼자 요리를 많이 했던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세상에서 다른 식재료로 이런 맛을 낸다는 건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었다.

"헤헤헤헤. 이게 노뇸 사슴 고기인데 잘 감싸서 오랜 시간 찐 다음에 구우면 육즙도 보존되고 엄청 부드러워지거든. 그 위에 간버섯이랑 래터 소스를 섞어서 만든 특제 소스를 뿌렸는데 이렇게 먹으면 체력 증진에 좋다는 소문도 있고 또 노뇸 사슴 고기가 사실 정력에 좋다는...."

그렇게 아이라이츠는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히오는 그 요리 실력을 칭찬하면서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집 안이 아닌 바깥쪽. 그리고 이 평범한 주택까지 구태여 찾아올 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으니.

주위에 들릴세라 문틈을 통해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성자님 계십니까? 저 프레드릭입니다."

교단에서 히오를 찾아온 것이다.

그 목적이야 뻔한 것이기에 아이라이츠의 표정이 언제 밝았었냐는 듯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히오는 식사 마저 해. 내가 나가볼게."

"표정 밝게 하고 나가야지? 프레드릭은 착한 사제님이야."

"응!"

히오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띤 아이라이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향한다.

열두 겹으로 잠긴 자물쇠를 모두 풀고 문을 살며시 연다.

현관문의 맨 위에는 〔히오와 아이라이츠의 신혼집♥〕 표찰이 대놓고 걸려 있는 채였다.

그것을 애써 못본 체한 프레드릭이 밝게 웃으며 아이라이츠에게 인사한다.

"오랜만입니다. 아이라이츠 형제님."

아이라이츠 역시 화사한 미소로 답한다.

"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어쩐 일로?"

"아, 혹시 안에 성자님 계십니까? 좀 급한 일이라...."

"이런, 어쩌죠? 히오는 지금 없는데. 아마 돌아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했거든요."

"예? 하지만 분명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었는데...."

"...저런, 사제님도 나이를 먹어서 귀가 좋지 않으신가 보네요. 그 정도 되셨으면 그냥 집에서 나오지 마시고 쉬시지 왜 굳이 찾아오셔서는... 안타까워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입가에 손을 가볍게 올리며 말하는 아이라이츠.

하지만 애석하게도 프레드릭은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수행이 깊은 사제였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 안에 잠시만 확인하겠습니다. 형제님."

"형제요? 제가 왜 그쪽하고 형제죠?"

"...말 돌리지 마시구요. 성자님! 계십니까? 저 프레드릭입니다!"

"야."

"예?"

"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예에?"

어느샌가 싸늘해진 아이라이츠의 표정.

깊게 가라앉은 예쁜 눈동자에 선홍빛이 번뜩이지만.

딱콩!

"...아얏."

결국 현관까지 나온 히오에게 딱콩을 얻어맞고 입을 삐죽이며 옆으로 비켜서고야 만다.

"아, 성자님. 역시 계셨군요. 꼭 전달해야 하는 내용이라 이리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프레드릭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역시나.

"다음 층이 열렸습니다."

히오를 움직이게 하는 소식이었다.

* * *

"이번 공략은 쉬어."

라고 히오가 아이라이츠에게 말했으나, 별 기대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다.

히오와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라이츠가 아니던가.

그런 아이라이츠였으니 소식을 가지고 찾아온 프레드릭에게 전혀 통하지 않을 거짓말까지 하며 쫓아 보내려 한 것이고.

그렇기에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떻게든 따라가겠다고 할 줄 알았지만.

"응. 알겠어."

"그래, 그럼 이번에도 사제님들이랑 같이 이동해서... 응? 알겠다고?"

예상 밖으로 아이라이츠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이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다.

"어... 그래?"

"왜? 내가 막상 안 간다고 하니까 섭섭하구나! 그렇지?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거야. 잘 생각했어. 왕복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니 집에서 쉬고 있어."

히베루니아와 제국은 인접한 국가라고는 하지만, 수도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가까울 리 있겠는가.

히오야 포탈을 이용해 순식간에 이동 가능하고 팬텀 스티드도 있으니 괜찮다 쳐도 아이라이츠에게는 그런 이동 수단이 없으니 쉽지 않은 것이다.

허나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아이라이츠.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가 봤자 이번에도 도움되지 못할 게 뻔하니까."

며칠이 됐든, 몇 달이 됐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런 것 따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점점 뒤쳐져 결국 쓸모가 없어지는 자신.

그게 가장 문제였다.

"나도 너처럼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할 거야. 그러니까 다녀오면 내게도 마법 가르쳐 줘."

"마법을? 저번에는 못하겠다고 금방 도망가 버리더니."

"물론 히오처럼 깊게 배우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불가능하겠지만, 네가 말한 고리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겠어?"

"...고리 하나. 그럼 1서클이라...."

스킬을 사용할 때도 마력이 필요하다.

그말인즉, 스킬 사용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력을 다루고 있는 셈이었다.

이 세계 사람들이야 저주와도 같은 법칙에 의해 영영 마법을 상실했다지만, 아이라이츠는 그런 법칙에서 벗어난 혼이었으니 마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그녀는 본디 자신의 스킬을 상당히 잘 다루는 편이었고.

"그건 마력 다루는 감만 잡으면 되니까... 너한테는 그리 어렵지 않겠네."

히오의 대답에 밝아지는 아이라이츠의 표정.

"응! 내 목표는 거기까지야. 서클 하나만 있으면 포탈도 이용할 수 있고 너랑 같이 마법사의 탑인가 뭔가 하는 곳에도 갈 수 있으니까!"

"그건 확실히... 나쁘지 않겠어."

마탑의 포탈은 오직 마법사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전유물이자 힘이었으니.

불완전한 1서클.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껍데기뿐인 서클을 만들어 낸 프레이야도 포탈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1서클에 오른다면 아이라이츠 또한 당연히 포탈을 이용할 수 있을 터.

그건 앞으로의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드넓은 대륙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강한 능력자가 한 명 더 생긴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좋아. 이번 공략 끝나고 돌아오면 알려 줄게."

그런 약속과 함께 등을 돌린다.

지하실의 문을 열고 신성 마법사의 흔적이 고스란이 남아 있는 지하에서 더욱 깊이, 4층까지 향한다면 익숙한 포탈이 드러난다.

그곳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불어넣었으니.

「이메니아 마법 대학(1) - '마법사의 집'으로 이동합니다.」

행동에 망설임은 조금도 없었다.

145화 무한의 층 (2)

본격적인 전쟁 준비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물자와 보급품이 쌓인다.

다만 그 양이 막대하지는 않았고 대신에 질이 무척 뛰어났다. 최정예 부대만 입장하는 까닭이었다.

날이 밝아올수록 준비를 갖춘 기사단들이 모여들고 집결지는 곧 사람으로 가득차게 된다.

황실 정예 기사단, 게일 아인시델이 이끄는 제1기사단과 로열 나이트 출신 쿠르투아 베네커가 이끄는 제2기사단.

깨우친 자 아라투스 뮤엘이 이끄는 순수 스킬 사용자 부대 레리안트 기사단.

원거리 요격 부대, 지원 부대, 보급 부대 등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부대.

마지막으로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이 이끄는 최고의 기사단, 로열 나이츠까지.

전쟁을 치르러 간다기에는 조촐한 인원이었으나 그들 한 명 한 명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였다.

보급과 지원을 담당하는 이들마저도 전원이 기사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그런 정예 전력만 이백여 명이 모인 것이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으나 끝이 아니었다.

"길드 측 인원들이 도착했습니다."

집결지에 들어서는 일련의 무리들은 그 숫자만 대략 70명 정도가 되어 보였는데 그들이 바로 앞서 계속 언급됐던 길드 측 사람들.

모험가 길드라고 부르는 것을 듣긴 했지만, 거기에 대체 왜 시르베르트가 포함되어 있는지.

또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어찌 저렇게도 막강한 것인지 클레어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빙의자라는 것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기에 클레어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대부분 사람 역시 알지 못했다.

단지 저들이, 마경(魔境)이라 부르기 시작한 공간의 전문가들이고 이 사태를 예견하여 수년 전부터 대비해 온 강자들이라는 것.

그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악을 물리치고 이 대륙에 평화를 가져올 자랑스러운 원정대로서...."

날은 완전히 밝아왔다. 절차를 최소화한 출정식이 시작되고 황제 실비아 베르덴은 직접 단상에 올라 격문을 읽는다.

그것이 끝남과 동시에 출정이 시작되었다.

목표한 게이트는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지역.

일대는 이미 완벽하게 통제되었고 가는 길에 모인 시민들은 원정대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내 온다.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경의 존재와 그것을 막는 원정대의 출범이.

그 출정이 오늘 아침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마경으로 향하는 첫 공식 원정대.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될 첫걸음이었다.

* * *

"53층의 유형은 각고의 층과 무한의 층입니다."

어비스 게이트 앞.

그에 진입하기 전 시작된 브리핑은 길드의 주도하에 이뤄지고 있었다.

"간략하게 전달드렸습니다만, 한 번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검게 일렁이는 게이트의 앞, 음산한 기운이 원정대를 감싸 오는 만큼 일대는 고요했다.

게이트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이 통채로 통제되었으니 고요한 긴장감과 함께 길드 측 인물의 설명만이 울려 퍼진다.

가장 앞에는 비탈리아누스와 각 기사단의 단장, 그리고 맞은편에는 길드의 주축 인원들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층에 들어서면 좌측과 우측에 거대한 게이트가 하나씩 더 보일 겁니다. 주의하셔야 할 것은 절대 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한의 층 공간은 크게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무한의 공간 한 곳과 각고의 공간 두 곳.

"좌우에 있는 거대 게이트가 각고의 공간, 그 외의 나머지 모든 곳이 무한의 공간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층의 공략법은 복잡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선 각고의 공간에 들어갈 두 사람을 정한다.

한 게이트당 반드시 한 사람씩 들어가야 하며 그것을 어겼을 시 공략은 그대로 실패.

정해진 이들이 각각 각고의 공간에 들어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무한의 공간에 어비스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다.

들어간 두 사람이 모든 시련을 뚫고 각고하여 공간에서 나올 때까지, 무한의 공간에 있는 이들은 말 그대로 무한히 버텨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붙은 이름이 각고의 층, 무한의 층.

"듣기에 따라서 무척이나 까다로워 보이긴 하나, 여기 모인 전력이라면 큰 피해 없이 공략이 가능할 것이라 저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한의 층은 게임이던 시절에 가장 많이 공략 실패가 일어난 층 중 하나이다.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단합.

가장 중요한 것이 단합인데 게임 속에서 그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륙에 나타난 어비스 게이트는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어비스 게이트를 통해 온갖 사람들이 진입했고, 그럴수록 무한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숫자는 늘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일정 숫자를 넘어서면 각고의 공간 성공 여부와 별개로 공간이 부서지며 공략이 실패되었으니.

어찌보면 각고의 공간도, 무한의 공간도 모두 인원 제한이 걸려 있는 층인 셈.

악명을 원하는 이들은 일부러 각고의 공간에 들어가 실패하기도 하였으니 얼마나 상황이 개판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부분의 게이트는 제국과 각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모인 인원은 소수 정예.

"그러니 각고의 공간에 들어가는 두 사람만 잘해 준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거기까지 설명이 이어졌을 때 누군가 손을 살짝 들어올리며 물었다.

제1기사단장, 게일 아인시델이었다.

"무한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수준은? 이전 정복의 층과 비교하면 어떻지?"

"그것들 보다는 강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고작 삼백 명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들어가는 만큼, 웨이브 한 번에 밀려오는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각고의 공간에 들어간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 그런 웨이브가 반복된다는 말이군."

"예. 무한하게요. 그러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각 웨이브당 쏟아지는 몬스터를 계속해서 소멸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종내에는 감당할 수 없게 될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테다.

게임 속의 경험상 무한의 층은 단합이 되지 않아서 어려웠지,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것은 크게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각고의 공간에 들어가는 이가 가장 중요하겠어."

공략 성공 조건은 각고의 공간에 들어간 이가 모든 시련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나올 것.

그리고 그때까지 쌓인 모든 몬스터를 소멸시킬 것.

그 두 가지가 이루어지면 공략은 성공한다. 두 사람이 시련을 극복하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에 따라서 난이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자칫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무한의 층과 관계없이 공략이 실패할 수도 있었으니 가장 중요한 임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러니 각고의 공간에는 저희 측에서 두 사람이 나가겠습니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력과 경험, 이 두 가지가 중요했는데 제국 측에서는 무력은 충분하나 각고의 공간을 경험해 본 이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제법 합당한 의견이라고 길드 측 이들은 생각했으나.

"불가하네."

비탈리아누스에게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제국의 명운이 걸린 힘든 임무를 어찌 그대들에게만 맡길 수 있겠나. 인재는 우리쪽에도 많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 말은 제국 측에서 두 사람을 뽑겠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말도 안 됩니다. 제국 측에는 경험자가 없지 않습니까."

"정보야 그대들이 알려 줄 게 아닌가."

"말로 듣는 것과 직접 겪어 본 것의 차이는 극심합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것참 이상하군."

비탈리아누스의 금안은 언제나처럼 고요했지만, 그것을 직접 마주한다면 몸이 떨릴 수밖에 없는 포식자의 눈.

"내 알기로 그대들 역시 직접적인 경험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 그건...."

그 눈빛을 직접 마주하기가 어려웠기에 말을 이어가던 길드 측 각성자는 결국 포식자의 눈을 피해 버린다.

대체 비탈리아누스가 어디까지 아는 것인지,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고작 게임뿐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인지 그저 넘겨 짚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만큼 각고의 공간은 중요하고 그들에게는 안티푸스와 다프네라는 아주 믿음직한 카드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세계의 위기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판단한 것뿐입니다."

"진심으로 걱정하여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러니 눈은 피할지언정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예. 저희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대륙은 진작에 어비스...."

"그럼 51층에서는 무엇이 그리 두려워 도망쳤었는가?"

허나 이번만큼은 도저히 말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위기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이들이. 그 막중한 책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이들이! 도망가면 세상이 어찌 될 것을 알면서도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 도망갔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게 하나 없는 진실이었으니.

물론 억울하다.

이전 52층을 돌파했던 50인의 빙의자와 그 이후로 다시 합류한 20인의 빙의자. 총 칠십여 명의 각성자는 51층에서 끝까지 남아 항전했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공략이 실패하면 그들의 세상 또한 위기에 봉착하니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말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그리 두려웠다면 차라리 내게, 제국에 알리기라도 했어야지. 그러지 않은 것은 자네들의 욕심이고 오만이며 그로 인한 참사가 아니었던가."

더 큰 진실에 짓눌린 것이 그 이유였다.

한 번의 공략 실패.

그로 인해 대체 얼만큼의 피해를 입었던가. 무고한 이들이 몇 명이나 죽어 나갔던가.

"그런 자네들의 무엇을 믿고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는가. 대답해 보게."

과욕, 오만. 그로 인한 참사.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모인 빙의자들만 칠십여 명.

한데 51층 당시는 이것의 몇 배, 수백 명이 있었으니 실패할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말문이 막혔고 비탈리아누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탈리아누스는 좌중을 둘러본다.

각고의 공간에 들일 두 명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처음 호명된 것은 역시 제1기사단의 장.

"게일, 네게 맡기마."

게일 아인시델이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영광입니다. 목숨 바쳐 완수해 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바로 근처의 로열 나이츠를 향한다.

각양각색의 여섯 인물 중 그의 선택은.

"맬리사. 할 수 있겠느냐."

밝은 파란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인, 깨우친 자 맬리사.

비탈리아누스의 물음에 그녀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맡겨 주세요."

비탈리아누스의 선택은 빨랐고 돌아온 대답 역시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빙의자들과 달리 몇 번이고 목숨 건 전장을 경험해 본 이들의 각오란 그런 것이었으니.

그렇게 비탈리아누스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려는 순간.

"조약 내용을 기억할 텐데, 비탈리아누스 마헬."

말문이 막혀 버린 이를 대신해 길드 측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으니.

"...그래, 자네가 있었지."

안티푸스였다.

"네가 공식적인 사령관이기는 하지만, 길드에는 네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황궁을 나섰다고 말이 많이 짧아졌군 자네."

"내 정체 정도야 진작 알고 있었을 테니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지."

필요에 의해 함께 행동하고는 있지만, 제국은 길드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그렇다고 길드가 제국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안티푸스의 입장에서도 각고의 공간에 들어갈 두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공략에 실패하면 개판이되는 것은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기에.

"게일과 맬리사. 이 둘로는 불안하다. 무력도 무력이거니와 경험도 없지."

"자네가 지금 얼마만큼의 무례를 범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세상이 심연에 잠겨 허우적거리기 전에, 나는 냉정한 사실을 말할 뿐이다."

"아인시델 가문은 수백 년을 이어 온 검술 명가. 자네는 지금 황궁 최정예 기사단의 단장과 로열 나이츠 창립 멤버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군."

"어비스 게이트, 마경의 경험을 말하는 거다."

"이 역시도 전장의 일환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이지."

"아니, 다르다."

"어찌 확신하는가."

"직접 겪어 봤으니까."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비탈리아누스와 안티푸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서서히 긴장감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만일 끝까지 조금의 양보도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이들 중에서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는 이들도 있었으니, 두 갈래로 나뉜 긴장이 서로를 주시하며 더욱 크기를 키워가는 것이다.

"경험이 없는 데다가 무력 또한 애매하지. 그러니 각고의 공간은 나와 다프네가 간다."

"오만하군. 안티푸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뭣하면 로열 나이츠 대인전 최강이라는 그쪽 애송이에게 물어봐도 될 텐데."

안티푸스의 시선이 비탈리아누스를 지나쳐 그 뒤쪽을 향한다.

검 손잡이를 으스러지라 꽉 쥔 채 이를 빠득 갈고 있는 사내 데이먼 리에프테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가 황궁을 나서며 데이먼을 철저하게 무너트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것을 콕 집어서 로열 나이츠 전체의 무력을 의심하는 그런 말이었다.

데이먼의 몸에서 막대한 오라가 뿜어져 나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안티푸스...!"

패배는 인정할 수 있다.

안티푸스는 자신보다 뚜렷하게 강했으니까.

하지만 감히 로열 나이츠 전체를 폄하하다니.

검으로 별의 칭호를 얻은 위대한 검성께 작은 존경조차 표하지 않는 태도라니.

한때는 그래도 황궁에 몸담았던 기사로서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데이먼은 이해를 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분노했다.

빠득- 이가 갈리며 손에 쥔 검은 당장이라도 출수할 듯 잔뜩 힘이 들어갔으나.

"서, 서, 선배님... 차, 참으셔야 하, 할 것 같은데에... 욥."

바로 옆에서 들리는 하찮은 바들거림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탁 풀려 버리고 마는 것이다.

"후우...."

깊은 심호흡과 함께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면 부동 자세로 있는 힘껏 긴장한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신입의 모습이 보인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팽팽해진 긴장감에.

안티푸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곳곳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기사들의 살기에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굳어 버린 애꿏은 신입.

경험도 거의 없는데 하루아침에 로열 나이츠가 되어 버렸고, 그걸로도 모자라 이틀만에 가장 위험한 전장에 오게 된 소녀가 아닌가.

그것이 퍽 우습기도 하고 또 맞는 말이기도 해서 데어먼은 한숨과 함께 검 손잡에서 손을 떼고야 만다.

"쯧."

그에 짧게 혀를 차는 안티푸스.

여기서 데이먼이 덤벼들었다면 분명 그 과정은 복잡하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겠지만, 어쨌든 결과는 자신의 뜻대로 이끌 자신이 있었는데 아쉽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내 의견은 변함 없다. 비탈리아누스. 위대한 검성께서 직접 각고의 공간으로 가는 게 아니라면 나머지는 믿을 수 없고 나와 다프네가 들어갈 것이다."

이 역시 제국 측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비탈리아누스는 원정대 자체를 책임지는 사령관이었기에 자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

단호한 거절과 함께 원정대의 사령관으로서 명하는 것이었다.

"나의 생각 또한 변함 없다네. 나 역시 자네들의 무력도, 경험도 알지 못하지. 아는 것이라고는 자네들이 의외로 겁이 많다는 것 정도. 그러니 믿을 수 없어. 각고의 공간에는 게일과 맬리사가 들어간다."

"우리의 경험과 무력을 의심한다? 오십의 인원으로 정복의 층 꼭대기까지 오른 우리를?"

"그런가. 당시에 자네들이 너무 늦게 도착해서 잘 못 봤다네. 아, 행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건 기억나는군."

"...그저 과묵한 기사인 줄 알았건만, 제법 짜증나게 할 줄도 아는군."

"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지."

기어이 안티푸스의 등에 묶인 대검의 끈이 풀린다.

이윽고 그것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안티푸스.

"그럼 내가 어떡하면 되겠나. 무력은 당장이라도 증명할 수 있는데."

비탈리아누스는 여전히 덤덤한 눈으로 그와 그의 대검을 직시한다.

황금 사자의 눈이 낮게 번뜩이며 확실한 경고를 전하는 것이다.

"그건 함부로 겨누지 말게. 나를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내게 검을 겨눈 자에게까지 자애롭지는 않아."

"그것 참 기대되는군."

그 오만한 대답에 제국 모든 기사의 검이 일거에 뽑혀 나왔다.

번뜩이는 예기만큼이나 날 선 기세.

"이거... 어떡합니까. 이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잖아요."

그에 당황한 것은 길드 측 인원, 즉 빙의자들이었다.

이는 오롯이 안티푸스의 독단적인 행동.

물론 각고의 공간이 중요하기는 하나 제국과 이렇게 반목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조율해서 한 자리씩 나눠 하면 충분했는데... 안티푸스의 어떤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에게 다른 계획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고."

여기서 안티푸스 행동을 부정하고 제국의 편을 든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수.

이도저도 되지 않는 최악의 결과에다가 오합지졸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칠십여 명의 빙의자도 전부 기세를 끌어올린다.

가히 대륙에서 손꼽히는 최고위 전력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내뿜는 기운에 현장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고.

"마지막으로 말하지."

이어지는 것은 마지막 기회와도 같은 대화.

"각고의 공간에는 게일과 맬리사가 들어간다."

"불가하다. 나와 다프네가 들어간다."

허나 결국 최후의 최후까지 양보란 없었으니.

숨을 조여 오는 긴장감. 누구 하나 까딱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은 분명 막대한 무력의 충돌.

보이지 않는 칼날이 폐부를 찌르는 것만 같다.

영문도 모른 채, 클레어의 손이 덜덜 떨려온다.

기세를 내뿜기 시작하는 위대한 검성의 존재감.

그를 받치는 고위계 기사 백여 명이 내뿜는 기운.

그리고 그에 물러나지 않고 맞서는 안티푸스의 존재감 또한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그 중심과 마찬가지인 곳에서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정말로 싸우는 것인지.

사람을 향해 스킬을 써 본 것이라고는 아카데미 가기 전, 용병 나부랭이들에게 써 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 상대해야 하는 것은 고위계 기사들마저 경계하는 이들에다가 검성마저 눈 아래로 두는 듯, 막 나가는 무서운 사람.

그토록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클레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천천히 검을 향해 뻗어지는 검성의 손을.

기어이 비탈리아누스가 검을 쥐고 그것을 뽑는 순간 사태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

그건 정말 싫은데.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데 자신에게는 그런 힘도, 능력도, 담력 또한 없었다.

옆을 둘러보면 데이먼이나 맬리사 또한 강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어떻게든 싸울 생각인 것처럼 보였으니.

'어, 어떡하지...?'

그렇게 우왕좌왕 클레어가 혼란함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쯧쯧. 개판이네 개판이야."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늘 위에서부터 전해져 온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뭐 별것도 아닌 걸로 다투고 있나."

만날 거라 잔뜩 기대하기는 했지만, 설마 지금 나타날 줄은 몰랐던 그런 목소리.

그에 클레어의 두 눈이 하늘을 향한다.

아마 클레어뿐만 아니라 자리의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으리라.

보이는 것은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날개 달린 새하얀 말. 신수.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내의 왼손은 지팡이를, 오른손으로는 모자를 고쳐잡고 있었으니.

"각고의 공간에는 내가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칼날과도 같은 기세가 난무하는 그 한복판에 여유롭게 내려서는 사내.

그가 땅에 발을 딛고, 좌중을 둘러보며 하는 말에.

"불만 있는 사람?"

어느 누구 하나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146화 무한의 층 (3)

"...뭐 해?"

데이먼 리에프테는 지금 무척이나 황당해하는 중이다.

갑자기 자신의 바로 뒤에 숨어 버린 신입 녀석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이먼의 뒤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클레어.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그냥... 이러고 잠시 있으면 안 될까요?"

"...그래. 마음대로 해라."

데이먼이 호리호리한 체형이기는 했으나 그건 기사치고 그런 것이지 작정하고 뒤로 숨은 클레어 정도야 데이먼의 덩치에 완벽하게 가려진다.

그래서 무엇을 피해 클레어가 데이먼의 뒤로 숨었느냐 하면.

"설마 수호 기사님 때문에?"

"엑!"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 때문이었다.

그가 등장한 이후 헛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데이먼의 뒤로 후다닥 숨어 버렸으니 모른 척하기도 힘든 것이다.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데이먼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언제 부딪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속에서 그런 긴장감을 단박에 깨부수며 나타난 사내.

그는 비탈리아누스와 안티푸스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덕분에 무력 충돌까지는 안 갔네."

물론 안티푸스가 행한 말투나 검성에게 저지른 무례 따위를 생각해 보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싶다.

저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한낱 길드 따위가 제국의 최고 기사단과 맞먹으려 드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백이면 백 전부 이길 자신도 있었다.

허나 진정 비탈리아누스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그런 짧은 생각이야말로 지양해야 할 사항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원정대를 성공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이번 원정에는 무척이나 많은 것이 걸려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저들이 저리 나오는데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한번 물러나면 계속해서 주도권을 뺏긴 채 끌려다녀야 했으니 저리도 강경하게 나온 것일 테다.

그러니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서는 각 세력의 대표 격 인물이면서도 철저히 중립적인 제3자가 필요했다.

그런 인물이란 사실 히오 파블렌코가 유일하다시피 했고.

"수호 기사님이 제때 등장하지 않았다면 마경에 들어가기도 전에 큰 싸움이 일어날 뻔했어."

"...다행이네요."

데이먼의 옷깃을 조심스레 잡은 채 뒤에 숨어 있던 클레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하면 가장 앞에선 검성, 안티푸스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히오의 모습이 보인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제국과 길드의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렇게나 서로 믿지 못하면서 왜 함께 또 공략을 하러 들어가는 건지.

그리고 자신은 왜 히오를 보자마자 숨어 버린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그냥 뭐랄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로열 나이츠가 되긴 했으나, 사실 그냥 운으로 들어온 것이지 않나.

당당하고 멋있는 다른 로열 나이츠들과 달리 아직 어리숙하고 한참이나 모자라지 않은가.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게 부끄러웠고 자신도 모르게 바로 숨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고개만 빼꼼 내민 클레어가 넋을 놓고 히오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돌연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히오.

서로 조율하여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이다.

"자, 그럼 결론이 나왔군."

"익!"

"...음?"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의 결과를 말해 주려는데 갑자기 웬 익룡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의아해하던 히오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고 그 자리에는 데이먼이 당황하며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데이먼? 무슨 할 말이라도?"

"아, 아닙니다. 딸꾹질이 나와서 그만...."

"저런, 너무 긴장하지는 말게."

"...예."

어쩐지 상당히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히오가 그런 것까지 깊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각고의 공간에는 나와 안티푸스 프라만이 들어가기로 했다."

이것이 비탈리아누스와 안티푸스, 두 세력의 대표와 이야기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었다.

각고의 공간.

그럴싸하게 지어진 이름과는 달리 게임 속에서는 '각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지 않았었다.

앞서 말했듯 단합이 되지 않았기에, 인원수를 맞출 수 없었기에 어려웠던 거지 단합만 된다면 그 난이도는 다른 유형에 비해서 무척 쉬운 것이었으니.

"나머지는 전부 계획 그대로. 무한의 공간에서 잘 버텨 주면 된다."

허나 그것은 게임 속 이야기.

지금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기에 하나는 히오 본인이 직접, 다른 하나는 안티푸스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게임 속과 무엇이 다르고 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빙의자 쪽이 더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안티푸스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뭐, 녀석도 나랑 친해지고 싶나 보군.'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넘겼다.

그게 아니면 그토록 뜨거운 열기를 담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우선 지금은 공략에 집중하고, 공략이 끝나고 나면 살갑게 말이나 걸어 봐야겠다.

녀석의 바람대로 분명 친해질 기회가 있을 테니까.

"조금 지체됐으니 이제 진입하지."

히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입 준비를 명하는 비탈리아누스.

그의 말대로 계획보다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됐다.

무한의 층이 앞선 미궁의 층처럼 시간에 쫓기는 층은 아니더라도 만일의 상황이란 것이 있으니 공략은 늘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각고의 공간에 예상과 다른 어떤 시련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진입한다!"

빠르게 번진 명령에 움직이는 기사들.

긴장감이 재차 번질 새도 없었다.

준비되는 즉시 선두부터 바로 진입을 시작했으니.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 속으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발을 집어넣었으니.

"너무 긴장하지마. 수호 기사님까지 합류했으니 우린 반드시 공략에 성공할 거야."

데이먼과 클레어 역시 검게 일렁이는 게이트, 그 너머로 발을 들인다.

"...네!"

비로소 53층의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 * *

찰나간 들이닥친 어둠. 시야는 금방 복구되었다.

오전의 태양이 한참 떠오르고 있던 세상이 아닌 심연에 잠긴 공간.

어비스 53층, 무한의 층이었다.

들어섬과 동시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양쪽으로 자리잡은 거대한 게이트. 어비스 게이트 속의 또다른 게이트.

"저게 각고의 공간...."

저곳에 히오와 안티푸스가 나누어져 각각 들어가는 것이다.

"넋 놓지 말고 빨리 움직여! 진영을 갖추어라!"

낯선 공간과 음산한 분위기.

사방에 짙게 깔린 어둠에 정신 팔린 것도 잠시, 경험 많은 정예 기사단답게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리 정해 놓은 진을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히오와 안티푸스가 각고의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사방에서 몬스터가 밀려들어올 테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오래 버틸 수 있는 진을 준비해 온 것이다.

"욕심 부리지 말고 조금이라도 무리다 싶으면 재빨리 물러서야 한다! 일개 조당 삼 인씩 쉬지 않고 말을 맞춰야 함을 명심해라!"

능력과 개개인의 특성을 위주로 고심하여 묶은 세 명이서 한 조가 되어 맡은 구역을 지켜 낸다.

그렇게 묶인 조가 대략 육십여 개의 조. 전체가 둥근 원을 형성한 채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으며 무한한 물결을 막아 내는 것.

말살이 아닌 버티기가 목적이었기에 택한 전략이었다.

"길드는 이쪽으로!"

다프네의 외침에 빙의자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한다.

몇몇 특이한 능력을 제외한다면 빙의자들 대부분이 원거리 계열의 스킬 사용자.

한 명 한 명이 전부 이곳 세상의 기준으로 '깨우친 자'라 불릴 정도의 스킬을 사용하는 이들이었으니, 그들은 기사들이 만든 거대한 원 안에 퍼져서 진영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안티푸스는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맡기로 한 오른쪽의 게이트, 각고의 공간을 향해 간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면, 히오 파블렌코 역시 왼쪽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존 천마.'

지난번 만남에서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경고를 잊지 않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오만한 경고를, 감히 하늘을 넘보지 말라던 그 광오한 표정을.

너는 아직 멀었다는 듯,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으로 경고하던 그날은 안티푸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오늘 비탈리아누스에게 유난히 감정적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까.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간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나, 당장 있을 공략을 보나 좋은 일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다소 감정적으로 나가 버렸다.

어쩌면 대륙 최강의 기사이자 영웅이라 평가받는 검성에게 지존 천마의 모습을 투영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만이라도 반드시....'

이래서는 안 된다.

이것 자체가 본인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 이 이상으로 흔들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승리.

때마침 각고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지존 천마와 자신 둘뿐이었으니 이 또한 승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승부라면 역시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 마련이고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승리였다.

물론 각고의 공간에서 먼저 나온다고 해서 승자, 늦었다고 해서 패자라고 누가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 정도로 어디 내세울 수 없다는 것쯤이야 잘 알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내면에 벽처럼 굳게 자리 잡아 버린 지존 천마라는 이름.

벽이란,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깨부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것은 작은 틈을 만드는 것.

아주 사소한 승리부터 시작해 점점 그 틈을 키워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하여 결국 그 벽을 무너트리고 자신이 그 위에 우뚝 서는 것.

그것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히오 파블렌코."

부르는 목소리에 지존 천마의 시선이 안티푸스에게 향한다.

두 사람 모두 각각의 게이트 앞에 선 채였다.

"안티푸스. 준비는 됐나?"

"...그래."

대답을 들은 히오의 시선이 이번에는 뒤쪽을 향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에 벌써 모든 진영을 갖추고 검을 꽉 쥐고 있는 기사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사령관 비탈리아누스까지 모두가 히오와 안티푸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겠다."

히오의 걸음이 움직인다.

그에 안티푸스의 걸음 역시 함께 움직인다.

높게 우뚝 선 게이트를 향해 들어서는 한 걸음.

"무운을 빌지."

그말을 끝으로 또다시 시야가 아득해진다.

몸의 절반이 게이트를 넘어선 것이다.

'...반드시 이긴다.'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은 승리.

혼자만의 만족일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또 한 번 굳게 다짐하며 각고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완전히 게이트 속, 각고의 공간에 들어서고 나니, 완연한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메시지 하나.

「각고의 공간에 진입하였습니다.」

「'지배자, 안티푸스 프라만'의 진입을 확인했습니다.」

「시련 - '화염의 공포'가 시작됩니다.」

주변을 살피고 여유롭게 상황을 파악할 틈 따위는 없었다.

시야가 돌아옴과 동시에 보인 것은 사방에 가득한 불.

안티푸스의 발밑은 물론이고 보이는 모든 곳이 불바다와 마찬가지였으니.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재차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안티푸스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인다.

「화염의 두려움을 인내하고 극복하십시오.」

두려움을 극복하라니.

마치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있기라도 한듯한 시련 내용이 아닌가.

"끄으윽... 큭큭큭."

그러니 고통에 침음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조금의 확신이 생긴 탓이었다.

정말로 지존 천마보다 먼저 각고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처음으로 그보다 앞설 수 있겠다는 희열.

...물론.

"끄으으아아악!"

온몸이 불에 지져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것이었다.

* * *

어둠에 잠기는 시야.

「각고의 공간에 진입하였습니다.」

「'개척자, 히오 파블렌코'의 진입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메시지와 함께 환해지는 시야.

이곳은 분명 어둑하고 음산한 어비스의 53층이었다.

허나 이상할 정도로 환하게 밝아져 오는 시야에 눈을 떠보니.

"하하하하! 자, 건배하세나!"

보이는 것은 어둑한 어비스의 공간이 아니라 밝고 화려한 귀족의 연회장이 아닌가.

"자자, 뭣들 하나? 어서 잔을 들어 올리세!"

모두가 즐겁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린다.

그에 히오 역시 얼떨결에 손을 들어올렸는데 손에는 이미 잔이 들린 채였고 그 안에는 레드 와인이 찰랑이고 있었다.

"위대한 마법사를 위하여!"

"위하여!"

영문 모를 건배사를 외치며 술을 쭉 들이켜는 이들.

"...위하여?"

히오 또한 그 분위기에 술잔을 쭉 들이켜고야 만다.

꼴깍이며 목울대를 넘어가는 와인.

그 맛이 어떠했냐고 묻는다면.

"으엑."

더럽게 썼다.

「시련 - '못난 왕의 신념'이 시작됩니다.」

147화 못난 왕의 신념 (1)

이곳 세계의 귀족 정도는 아니겠지만, 히오 또한 연회장에 와 본 경험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황실 연회를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고 귀족의 연회까지 가 본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각고의 공간에서 시련이랍시고 냅다 연회장에 와 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나.

넓은 홀, 높은 천장 아래 마련된 음식과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리는 사람들.

사방을 둘러싼 벽은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장 처음 떠올린 것은 역시 환각 혹은 환상.

다행히 지팡이와 모자 등 장비는 그대로였기에 마력을 일으켜 캔슬레이션 마법을 몰래 시전해 본다.

마력적 효과가 작용하고 있다면 그 흐름을 끊어 내어 취소할 수 있게 만드는 마법, 캔슬레이션.

하지만.

'마법은... 아니고.'

전혀 걸리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캔슬레이션으로 취소될 마법이었으면 진작 히오의 기감에 잡혔으리라.

적어도 마력을 통해서 히오의 정신을 헤집어 놓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즉, 이 전체가 현실과 다름 없는 현상.

당연하게도 게임 속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게임 속에서 각고의 공간이란, 그저 공략대 중 스탯이 가장 좋은 이가 들어가면 될 뿐인 공간.

몰려오는 몬스터를 혼자 힘으로 계속 때려잡다보면 성공하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었으니까.

"하하하! 파블렌코 공! 이번에도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공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을 깊게 이어갈 시간은 없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이 콧수염 기사를 시작으로 주위의 모두가 히오를 보며 웃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이 연회의 주인공이 자신인 듯했다.

마치 히오를 잘 아는 것처럼 이름을 외치는 이들.

"대단했습니다!"

"존경합니다. 파블렌코 공!"

"위대한 파블렌코를 위하여!"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심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저들끼리 신나게 칭찬하더니 다시 저들끼리 신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린 까닭이었다.

"위하여!"

분위기가 꼭 사내들끼리 모인 회식 자리 같았다.

실제로 잔을 들고 있는 대다수가 사내. 그것도 전원이 기사 출신인지 느껴지는 기세나 근육으로 인해 꽉 끼는 제복 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티가 났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넓은 홀에서 펼쳐지는 연회였건만, 부실했다.

은은하게 울리며 흥을 돋우는 악단의 연주도 없었고 연회라기에 차려진 음식은 보잘것없었으며 오가는 시종, 시녀들의 숫자조차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

"하하하! 기쁜 날입니다!"

그럼에도 진심 어린 기쁨과 웃음만큼은 그 어느 연회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공께서 버티고 계시니 든든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승리는 역전의 대승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하하하! 이것 참 부럽습니다. 파블렌코 공!"

줄줄이 말을 걸어오는 우락부락한 사내들.

히오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에 든 술잔을 홀짝였다.

더럽게 맛없는 와인.

이거라도 마시는 척해야지 상황을 파악하고 무어라 대답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히오의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은 곧 잦아들었으니.

"레오란트 리안 드 바스테리온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왕이 행차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왁자지껄 떠들던 연회장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

어쩐지 조금 불편한 적막이었다.

* * *

"크흠!"

홀의 2층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낸 왕이 목청을 가다듬는다.

한껏 조용해진 연회장.

모두의 시선이 왕을 향한다.

"기쁜 날이니 오늘 만큼은 마음껏 즐기시게."

곧 터져나오는 조용한 박수.

환호는 없었다. 몇몇이 망극하다는 말을 내뱉기도 했으나, 글쎄.

진심이 아니었기에 딱히 와닿지도 않았다.

괜스레 어색해진 분위기.

왕의 등장과 동시에 웅장하고 힘차게 연주해야 할 악단이 없어서 더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의 승리는 우리 바스테리온, 더 나아가 전 대륙에...."

그것을 왕 역시 느꼈음인가.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빠지고 시선 또한 갈 곳을 잃었는지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 모습은 히오가 또렷하게 느낄 정도로 볼품없었으니 여기 모인 기사들은 오죽했겠는가.

군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없음은 물론이고 스스로 주눅 들어 버리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와 표정.

"밝은 미래를... 위해 아니, 위하는 과정이자...."

마치 국어책을 읽는 듯한 말투.

외워온 격문을 잊어버렸는지 말을 떠듬떠듬 간신히 이어 갔다.

"...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또...."

너무도 조용한 연회장에 홀로 울리는 왕의 목소리.

그것이 길고 어설프게 이어질수록 분위기는 이상해져 갔고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왕의 얼굴 역시 점차 붉어져 간다.

결국 주위의 기사들이 고개를 푹 떨굴 정도가 되어서야.

"아무튼... 연회 잘 즐기시고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왕은 하던 말을 대충 마무리 짓고 도망치듯 빠르게 2층 테라스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회장에 내리앉은 침묵은 얼마간 유지되었고.

잠시후 기사들이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나서야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하하... 술이 참 맛있군요."

"너무 달아서 입에 맞지 않을 지경입니다. 허허...."

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다른 주제로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모습.

그런 와중에 여태 잠자코 있던 푸르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 그렇군... 벽에 걸린 저 문양, 어쩐지 눈에 익다 했더니 바스테리온 왕가의 문양이었어.

'바스테리온?'

- 모르는가? 과거 기사의 왕국으로 아주 유명했었다네. 전성기에는 제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지.

'제국과 비견될 정도로 강국이었다고? 여기가?'

왕까지 직접 나섰음에도 제국의 시골 귀족 파티만도 못한 부실한 연회.

음식은 부족했고 술은 싸구려였으며 잔잔한 음악마저도 없는 이곳이 정녕 그런 강대국의 연회란 말인가.

- 나도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네만, 여기가 바스테리온인 것은 확실해. 아까 그 어리숙한 왕도 그랬지 않은가. 바스테리온이라고.

'바스테리온, 바스테리온이라....'

- 처음 듣는가?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에 전혀 없는 이름인데.'

현존하는 국가는 물론, 과거의 국가까지 역사책을 통해 찾아봤을 정도로 히오는 이 세계에 진심이었다.

그러니 단언할 수 있겠다.

바스테리온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느 역사서에서도 한 번의 언급조차 없던 것이다.

- 이상하군. 기사의 왕국은 그리 쉽게 잊혀질 게 아닐 텐데 말이야.

푸르넬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파블렌코 공. 혼자 그러고 계시지 마시고 함께 이야기나 나눕시다!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기사들이 다시 모여들며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야 했다.

"그러시죠."

히오가 다가가니 이미 많은 사내, 그러니까 기사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왕의 퇴장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들 사이에 젊은 여성들이 섞여 있다는 점.

그런 여인들은 분명 몇 명뿐이었으나, 히오가 무리에 합류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오늘의 주인공 파블렌코 공께서 오셨군!"

"어머, 그러면 이분이 그 유명하신 마법사님?"

"하하하! 안젤리, 뭐 하느냐! 어서 와서 인사드리거라!"

나이가 제법 있는 기사들이 가문의 여식들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각양각색의 여인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저는 안젤리 로르텔이라고...."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저는 발란트 가문의...."

"여기! 우리 가문의 둘째라네. 어떤가? 참으로 곱지 않은가?"

귀족들의 연회란 각 가문의 여러가지를 보여 줄 수 있는 자리이다.

하물며 왕성에서 직접열리는 연회가 아니던가.

그것은 어떤 사정으로 초라해진 왕국의 연회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으니.

"어쩜 듣던 것보다 훨씬 멋있으세요. 파블렌코 님."

당연하게도 젊은 여인들의 옷차림은 상당히 뇌쇄적이었고 코끝을 찌르는 향기는 제법 아찔하다.

히오의 주위에는 어느새 그런 여인들로 가득차 둘러싸인 것이다.

"허허... 좋을 때구먼. 좋을 때야."

가문의 여식을 히오의 주위에 배치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흐뭇하게 웃으며 한 발 물러났고.

아직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든 파고들라며 눈치 주기에 바빴다.

"그런데 듣기로 파블렌코 공께서는 혼인을 했다고...."

"뭐 어떤가. 그냥 이야기만 나누어 보라는 걸세. 이야기만. 허허허."

그런 상황 속에서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히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시선을 어디에 두기에도 민망해서 애먼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는 채였다.

"그... 여쭤볼 게 있는데...."

"어머? 제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마법사님."

"너무 부담스러우시면 저랑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겠어요? 편안히 답해 드릴게요."

괜히 정보를 얻어 보고자 말문을 열었다가 더욱더 밀착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을 정도로 사방에서 다가왔기에 히오의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그대로 꼼짝없이 굳어 버렸다.

물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굳이 이 애매모호한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보자면.

"어머. 귀여우셔라."

"볼 한 번만 꼬집어봐도 돼요?"

"어쩜 피부도 이렇게 좋으실까?"

달다.

"하, 하하하... 예 뭐 정 그러시면 여기 왼쪽 뺨이라도 살짝...."

음악 하나 없는 연회의 밤은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 * *

「시련 - '화염의 공포'가 종료됩니다.」

"허억... 허어억...."

메시지와 함께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리는 안티푸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의 팔다리를 비롯한 몸통.

다행히 멀쩡했다.

온몸이 불에 뒤덮인 채 작열하던 직전까지의 고통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너무도 멀쩡한 것이다.

"...끄흑."

물론 뇌리에 똑똑히 새겨진 고통은 아직도 남아 있어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었으나, 어찌 됐건 결국 해낸 것이다.

이 끔찍하기 그지없는 시련을 극복해 냈다는 말이다.

"끄흐흐흐."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만큼이나 힘들었던 까닭이다.

게임 속 각고의 공간과 어느 정도 다를 것임을 예상은 했다.

허나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뜨겁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몇 시간을 버틴 것인지.

시련을 빙자한 고문에 가깝지 않나.

지옥처럼 고통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초 단위로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기어이 극복해 내었고 시련은 끝이 났으니.

안티푸스는 확신하는 것이다.

"흐흐...."

승리했다고.

제아무리 지존 천마라 할지라도 이런 종류의 시련임은 예상치 못했을 거고 지옥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포기했거나.

혹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도 시련에 고통받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누웠던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며 승리의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간신히 일으킨 몸. 두 팔은 하늘 위로 쭉 뻗음과 동시에 광소하며 내뱉는 환희의 외침.

"내가... 내가 이겼다! 지존 천마! 으하하하!"

그리고 그런 안티푸스의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하나.

「시련 - '혹한의 공포'가 시작됩니다.」

"...응?"

시련은 화염의 시련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그 끔찍한 고통과 난이도 덕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공략을 성공했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 않나.

그렇다는 말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이 남았는지 예상키 어럽다는 말이었으니.

"...."

힘차게 뻗은 두 팔은 그대로 굳어 버렸고 환희에 젖었던 표정에는 당혹이 깃든다.

그리고 무어라 항변할 새도 없이 두 팔에, 피부에, 모공 하나하나에 서리기 시작하는 것은 차디찬 성에.

혹한의 얼음꽃이 안티푸스의 몸을 거름 삼아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환호하던 자세 그대로 발끝과 손끝부터 몸 전체가 얼어붙는 것이다.

「혹한의 두려움을 인내하고 극복하십시오.」

그렇게 얼어붙어 가는 안티푸스의 몸 주위로 짙게 번져 나가는 극한의 냉기.

극열의 고통과 비슷하지만, 정반대에 선 끔찍한 고통.

팔과 다리, 몸통과 목을 지나 기어이 모든 신체 부위가 얼음으로 뒤덮이기 직전.

잘 떼어지지 않는, 성에 낀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은 안티푸스의 마지막 말은.

"...X발."

진심이 가득 담긴 욕설이었다.

148화 못난 왕의 신념 (2)

아침이 밝았다.

한창 무르익다 못해 뜨겁기까지 하던 전날의 연회.

수많은 숙녀에게 둘러싸여 헤벌레하던 히오는 어떻게 되고 뜬금없이 아침이 밝았느냐 하면은....

"...?"

그건 히오도 몰랐다.

그냥 문득 아침이 밝은 것이다.

"이건... 무슨 현상이지?"

- 글쎄. 나도 처음 보는 종류로군. 눈을 속이는 느낌도 아니고....

달콤한 체취와 향기에 정신 못 차리고 헤실헤실거리던 와중 모든 것이 점차 흐려졌다.

초점을 잡지 못하는 시야처럼 풍경과 인물 모두가 흐릿해진 것이었다.

그렇게 흐린 기억과도 같이 흐물흐물해진 풍경이 점차 변하더니 다시 또렷해진 것이 바로 지금.

넓은 방에 홀로 덩그러니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옆에 놓인 침구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고 히오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그것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거울 속에 서 있는 사람은 확실히 히오 본인이었다.

테트라디아 모자와 로브, 키보다 조금 더 큰 지팡이까지 쥔 채로 서 있는 모습.

"하루가 지난 건가?"

- 그럴 수도 있고, 며칠이 지났을 수도 있겠어.

연회를 통해 얻은 정보는 제법 있었다.

우선 이곳이 역사에서 잊혀진 왕국, 바스테리온이라는 것.

바스테리온은 기사의 왕국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국력이 강한 나라였는데 어째선지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이곳에서 자신은 유일한 마법사이며 어떤 싸움에서 큰 승리를 안겨 주었다는 것.

그리하여 연회장의 모든 인물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곳의 왕은 모두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정도가 짧은 시간 동안 알아낸 정보였다.

꽤 많은 것을 알아내기는 했으나, 아직도 부족하다.

알아야할 절대적인 정보량에 비한다면 모르는 것투성이었다.

바스테리온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푸르넬은 알지만,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고대의 왕국, 바스테리온.

그것만으로도 답은 뻔히 나오는 것이다.

"...심연."

심연. 어비스.

지금의 전쟁과는 많은 것이 달랐을 천 년 전의 전쟁.

어쩌면 자신은 그 현장에, 당시의 기억 속에 들어와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똑똑- 노크와 함께 누군가 히오를 불렀다.

"파블렌코 님, 회의장으로 모시겠습니다."

"...회의라."

중요치 않은 기억은 건너뛰고 바로 회의로 가려는 모양.

"가지."

알아낼 만한 것이 많을 것임은 분명했다.

* * *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연회장에서 본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만 연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터질 듯 몸에 꽉 끼는 제복이 아니라 갑옷을 걸치고 허리에 검을 찬 채로 회의에 임한다는 것.

가히 기사의 왕국이라는 이명다운 모습이었다.

상석에는 왕이 앉아 있었다.

대궐 같은 의자에 화려한 용포를 걸치고 앉아 있음에도 어쩐지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러니 자연스레 왕을 배제한 채 기사들끼리 열띤 회의를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왕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런 기사들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퀴아토마저도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이젠 정말 뒤가 없어요!"

"그렇다고 먼저 나가자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가능성을 봅시다 우리. 가능성을."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상대는 괴이. 성벽을 끼고 싸운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왕성에는 수많은 백성, 우리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괴이가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나서야 함을 왜 모르십니까."

"베르덴에서 지원은요."

"제국도 연락이 잘 닿지 않습니다. 정신이 없는 모양이에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제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입니다."

연회장에서 짐작했듯이 무척이나 좋지 않은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한 번의 승리로 그렇게나 기뻐했던 것이겠지.

여태 불안한 눈초리로 상황만을 살피던 왕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위대한 마법사가 있지 않소."

왕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잠자코 있던 히오를 향한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입을 열지는 못한다.

히오는 엄연한 외부인.

이미 큰 도움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상황에서 어찌 다시 한번 자신들을 위해 싸워달라 쉬이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기사도 아닌 마법사에게 말이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기사들을 대신해서 왕이 직접 입을 열었다.

히오를 바라보며 제법 간절한 눈빛으로, 절박함을 최대로 담아 전하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

"그러니 파블렌코 공. 우리의 도망을 도와줄 수는 없겠소."

비굴하게 청하는 도움은 도망을 위한 것.

아무리 상대가 무섭다할지라도 왕으로서 신하들의 앞에서 할 말은, 보일 모습은 아니었으니.

정말이지 못난 왕의 표본이었다.

"그게 무슨...!"

"전하!"

역시나 거의 모든 기사가 경악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파격적인 발언.

하지만 왕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이대로가면 희망은 없소! 위대한 마법사라면 가능하지 않소이까!"

"전하!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바스테리온의 근간을 흔드는 것입니다!"

"잠시 물러남은 있어도 도망이라니요. 전하!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평범한 귀족들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스스로를 기사라 자처하는 이들. 그것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

반면에 왕의 체구는 왜소했고 담대함 역시 그것과 비례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격렬한 반응에 주춤 말끝을 흐리는 바스테리온의 왕.

"그, 그래도... 경들 역시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고 있지 않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하! 선왕께서 어찌 순국하시었는지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결코 아니될 말입니다! 전하!"

"선왕과 대군의 유언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전하!"

뭐, 상황을 잘 모르는 히오가 봐도 왕의 발언은 문제가 많았다.

어찌 싸울 것인지 한창 회의하고 있는 가운데 뜬금없이 도망을 입에 담았지 않나. 그것도 가장 높은 곳에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왕이 말이다.

전쟁을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도망을 도와달라니.

긍지 높은 기사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왕이었던 만큼 반발의 정도가 더욱 심한 것이다.

"그, 그렇소이까...."

그러니 왕은 결국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다시 쭈굴해져 버린다.

"우선은 알겠으니 회의를 이어 가 보시구려."

그렇게 쭈굴해진 채 내뱉는 애매한 말조차 강경한 기사들은 허용치 않았다.

"우선이라 넘어갈 것이 아닙니다! 전하! 왕궁을 내버리고 도망이라니 결코 있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으시옵소서! 전하!"

"아, 알겠다고 했지 않소이까. 어서 회의나 이어 갑시다."

유약한 왕은 굳센 기사들 사이에서 제 의견조차 제대로 피력하지 못한다.

기사의 왕국을 이끄는 자리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참으로 못난 왕이었다.

왕의 말을 끝으로 잠시간 내려앉은 정적.

그 속에서 입을 연 것은 한 명의 늙은 기사였다.

"파블렌코 공."

길게 늘어트린 수염과 머리까지 전부 새하얗게 센 노장.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히오를 바라보며 말한다.

"염치없지만, 우리를 조금만 더 도와주시오."

조금만 더 도와 달라고 말이다.

그것은 왕의 의견에 완전히 반하는 부탁.

전혀 다른 태도.

조심스러우나, 비굴하지는 않다.

눈빛은 당당했고 몸짓은 정중하다.

그가 나서자 다른 기사들 역시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중한 몸가짐과 굳건한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듯 많은 기사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왕과는 다르게 말이다.

"파블렌코 공... 부디 조금만 더 남아 줄 수는 없겠습니까."

"무리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전 대륙에 소문을 내도 괜찮습니다. 후안무치한 저희를 명예도 모르는 기사라 부르셔도 좋으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의 내용을 듣자하니 이미 수도 인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심연에 함락당했거나 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절박한 것이리라.

왕성 내에는 그들의 가족이, 수많은 백성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렇기에 이토록 간절한 것일 테다.

이들에게 히오의 존재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 없을 터였으니.

"...알겠습니다."

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련의 끝을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으며 이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의 어비스는 게이트의 형태로, 이미 오래전 혼이 잠식당한 이들을 몬스터 삼아서 서서히 침략해 들어오고 있다.

허면 천 년 전의 어비스는 어떤 형태로 이들을 덮쳐 들어왔을 것인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였으니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물론 이를 알 리 없는 기사들은 감격하며 고개를 숙여 온다.

"...파블렌코 공!"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

"가히 대륙의 위대한 영웅이자 현자라 불리실 만한 분이십니다!"

"죽어서도 오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다소 격한 표현이 몇몇 섞여 있긴 했으나, 그 뜻은 결국 하나.

왕국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참전하기로 결정한 마법사.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고개 숙이며 깊은 감사를 전하는 기사들.

그러한 감동적인 상황 속에서.

"...."

오직 왕만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음한다.

* * *

히오의 결정과 동시에 다시 한번 장면은 뒤바뀌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흔들리며 변화하는 배경.

그것이 완전히 바뀌었을 때.

"우와아아아아!"

히오가 선 곳은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결코 물러서지 마라!"

"뒤는 우리의 고향이다! 가족의 목숨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라!"

함성이 비명처럼 울려 퍼지고 비명이 함성처럼 들려오는 곳.

히오는 그런 전장을 빠르게 둘러본다.

"이게... 최초의 어비스 전쟁."

온통 검다.

마치 게임 속 아타올프의 등장씬을 떠올리게 하는 어둑한 전장.

허나 그것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이유는,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 정도로 진한 심연의 기운 탓이리라.

왕국의 모든 병사가 성벽을 등진 채 검디검은 기운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런 기운 속에서 정체불명의 것들을 상대로 검과 창을 맹렬히 휘두르는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들과 같은 갑옷을 걸치고 같은 검을 든 채 온몸이 뒤틀린 존재들.

그것들이 저 멀리서부터 시커먼 어비스 기운과 함께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 어비스 몬스터 최초의 형태라고 볼 수 있겠구먼.

정체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어비스 몬스터야 인간적인 외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지만, 지금 몰려오는 저것들은 달려오면서도 그 형태가 변화하고 있었으니.

아직도 인간 시절의 옷이나 갑옷 따위가 여실히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저렇게 심연에 침잠한 이들이 시간이 지나 형태가 완전히 일그러진 몬스터가 되어 버린 것이리라.

- 그뿐만이 아니야. 다른 것들도 있네.

고개를 살짝 들어 그런 것들의 위쪽을 바라보면 푸르넬의 말처럼 다른 존재들이 보인다.

그것은 검은 안개처럼 온 하늘을 장악하며 다가오던 어비스 기운 그 자체.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개처럼 넓고 얕게 흩어진 것이 아닌, 조금씩 조금씩 뭉쳐 덩어리를 형성한 채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하나하나에 막대한 심연의 기운을 담은 채 다가오는 그 기괴한 덩어리.

"저게 진짜 최초의 어비스 몬스터겠군."

저것을 과연 생명체라 부를 수 있을까.

그저 짙은 심연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까다로운 것이었다.

그러한 기운 덩어리가 병사 하나를 덮쳐 들어간다.

"으아아악!"

겁에 질릴대로 질린 병사는 발악하듯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보지만, 아무런 기운이 실리지 않은 검은 그저 허망히 덩어리를 지나쳐 갈 뿐이었다.

"아, 안 돼! 제발...!"

그가 그토록 절망하는 것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본 까닭일 터였다.

덩어리에 덮쳐진 자신의 동료가 어떤 형태로 변해 버렸는지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그렇기에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해 보지만.

"...."

그 눈자위가 완전한 심연에 물드는 데에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크아아악!"

그렇게 새로운 어비스 몬스터 한 마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수많은 고대의 국가가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한 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끔찍하군."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허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것도 분명했다.

그러니 히오는 곧바로 지팡이를 들어올린다.

그저 무기력하게 쓸려 나갈 뿐인,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는 무자비한 학살을 멈추기 위해.

그 끔찍한 현상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펼치는 스킬은 천상.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아직 검게 변하지 않은 푸른 하늘이 열리고 금빛 광휘가 쏟아져 내려온다.

히오를 중심으로 여신의 손길이 전장을 가득 뒤덮어가기 시작했으니.

"이, 이건...."

지옥이나 다름없던 곳에 찾아온 금빛의 기적.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한 듯 격렬한 전장의 흐름이 일순간 멎는다.

히오의 바람대로 참혹한 학살도, 절망도 여신의 손길 아래에 멈춰 버린 것이다.

하지만.

"끄, 끄아아악!"

심연은 진득했다.

일반적인 공략 게이트에서 느낄 수 있는 어비스 기운 정도가 아니다.

다프네와 함께 끌려갔던 심연의 공간.

그곳에 가득하던 기운과 비슷했다.

말 그대로 심연 그 자체가 침공해 온 것이다.

그러니 천상의 신성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완전한 소멸은 이뤄지지 않았다.

"크어어어!"

심연에 물든 이들은 제 몸이 불타오름에도 아랑곳 않고 검과 창, 팔과 다리를 휘두르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심연이 뭉친 덩어리는 천상을 뚫고 들어와 병사들의 몸을, 기사들의 머리 위를 뒤덮는다.

그 속도가 확연히 느려지기는 했으나, 끝없이 짙은 그 기운을 천상만으로 막아 낸다는 것은 요원해 보였으니.

전장은 넓다.

천상을 한곳에 집중하여 막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 넓은 범위를 모두 막기에는 히오의 신성과 마력이 버텨 주지 못할 터.

빠르게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그런 히오의 눈에 들어온 모습 하나.

"저주받은 괴이여!"

그것은 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149화 못난 왕의 신념 (3)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늙은 기사.

회의장에서 기사의 대표로 히오에게 도움을 청하던 그자였다.

검에는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가오는 심연의 덩어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버렸으니.

그걸 확인한 히오의 눈빛이 번뜩이는 것이다.

'오러가... 통한다.'

심연의 기운 그 자체로 이루어진 덩어리에 오러가 통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동강났다고 해서 심연의 덩어리가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 마법을 써 보게나.

히오에게는 마법이 있지 않은가.

오러가 통한다는 말은 그와 비슷한 기(氣)의 일종인 마력 또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당연하게도 오러보다 마력으로 만들어내는 마법이 훨씬 더 폭넓게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히오는 재차 지팡이를 겨누고 마력을 움직인다.

목표한 마법은 5서클의 익스플로전.

목표한 지점은 검게 몰려 들어오는 심연의 한가운데.

빠르게 가열된 문양이 그 힘을 한데 모아 지팡이를 통해 뿜어져 나왔으니.

콰아아아앙-!

곧 막대한 소음과 함께 허공의 한점이 폭발한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통한다."

- 먹히는군.

익스플로전의 범위 내에 있던 덩어리들이 마력의 폭발과 함께 터져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곧바로 다른 덩어리들이 채워 버리긴 했지만, 통한 것은 확실했다.

마법으로 심연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연코 하나뿐이었으니.

히오는 즉시 천상을 취소하고 다른 스킬을 준비한다.

짙은 심연이 몰려오는 전장에 한층 더 깊게 내려앉는 어둠.

휘둘러지는 지팡이.

동시에 발동되는 스킬.

「스킬 - '사신(死神)소환'이 발동됩니다.」

「죽음을 관장하는 인외의 존재가 현현합니다.」

「모든 스킬이 12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히오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어둠.

그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

"낑낑아."

섬뜩한 두 눈이 히오를 내려다본다.

"저들의 마력을 가져와."

붉은 낫이 번쩍 들어올려진다.

정면에서 하늘마저 까맣게 물들이며 몰려오는 검은 해일.

그에 맞서 낫을 치켜세우는 거대한 사신.

"미약한 생명력을, 남은 체력을, 취할 수 있는 모든 기운을 취해 내게 마력으로 전달해."

히오가 말했으니 사신은 행할 것이다.

심연의 기운 자체를 취할 수는 없겠으나, 그 아래에는 그것에 물든 것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 전까지는 살아 있었을 병사들, 평범한 마을의 아낙네 혹은 그 마을의 이장, 어쩌면 제법 강했을 기사까지.

온몸이 뒤틀리고 변하는 와중에도 이곳을 향해 짓쳐들고 있는 그 수많은 존재에게서 갖가지 기운을 뽑아내 전달해 줄 터였다.

그러니 히오 또한 지팡이를 높게 들어올린다.

셀 수 없이 많은 적.

그들로부터 취할 무한에 가까운 마력.

5서클의 네크로맨시는 아직 익히지 못했으니, 발현할 수 있는 네크로맨시 중 가장 강력한 마법.

그것은 지옥에 존재하는 용암의 벌레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서먼 라바."

몰려드는 어둠 한가운데에 문득 떨어져내리는 붉은 덩어리.

- 키아아악!

그 성질 나쁜 지렁이는 온몸에서 용암을 내뿜으며 주변을 닥치는 대로 부숴 버렸으니.

4서클의 네크로맨시 중에서 소환자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악명 높은 소환 마법.

물론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본 스피어."

마력을 잔뜩 머금은 뼈의 창 다섯 자루가 정면을 향해 쏘아져 간다.

목표조차 제대로 설정하지 않은 채 그저 빠르게 날아갈 뿐인 본 스피어.

이 거대한 뼈의 창은, 머금은 마력이 다할 때까지 심연이든 몬스터든 가리지 않고 꿰뚫으며 나아갈 것이었다.

"익스플로전."

심연의 진영 한가운데 다시 한번 일어나는 넓은 폭발.

"파이어 필라."

심연을 불사르는 불의 기둥.

"어스 브레이크."

진격을 늦추는 땅의 울림.

"레이 오브 프로스트."

"윈드 블레이드."

"플레어."

서리의 광선과 화염의 광선이 번갈아 뿜어지며 전장을 휘젓고.

바람의 칼날은 하늘 위에서 새카만 덩어리를 도륙한다.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사신의 낫이 허공을 한 번 휘저으면 그 끝에 막대한 기운이 따라왔으니.

그것이 곧 마력이 되어 히오의 몸에 넘쳐흘렀으니 말이다.

그러니 섬세한 마력 조절 따위는 과감하게 배제한다.

마력을 과하게 쏟아부어 마법의 범위를 넓히고 속도를 높혔으며 위력을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전장에 드리우는 것은.

꽈아아아앙-!

하늘 끝까지 솟은 불의 기둥. 백여 개의 파이어 필라가 합쳐져 이뤄 내는 거대한 불의 장막.

콰아아앙-!

무한한 마력으로 무한히 폭발하는 익스플로전.

수십 개의 윈드 블레이드는 칼날비가 되어 적들에게 쏟아져 내렸고 몰아치는 바람은 태풍과도 같다.

죽음의 사신이 텅 빈 허공에 붉은 낫을 휘두른다.

그 아래에서는 지팡이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마치 죽음을 거두어들이듯 저 먼 곳을 내다보며 휘둘러지는 낫.

그 아래에서 춤을 추듯 쉬지 않고 움직이는 지팡이.

어둠이 몰려오던 심연의 진영에는 불꽃이, 얼음이, 폭발이, 바람이, 지진이 종잡을 수도 없이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으니.

"하, 할 수 있다!"

절망하던 병사들은, 기사들은 검을 높게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새로이 차오르는 희망에 눈물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검을 들어라! 죽을 힘을 다해 휘둘러라!"

터지는 폭발, 솟아오르는 화염.

몰아치는 바람, 흔들리는 대지와 뿜어지는 서리.

이는 빛이었다.

"지켜 낼 수 있다!"

절망의 심연 속에서 피어나는 밝은 빛.

몰려드는 어둠으로부터 고향을, 소중한 이들을 지켜 낼 수 있다는 희망.

그러니 설사 이곳에서 죽을지언정.

"결코 물러서지 말아라!"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바스테리온이여!"

그것이 기사의 왕국, 바스테리온.

죽음 앞에서야 빛을 발하는 그들의 신념.

"위대한 마법사께서 함께하신다!"

전장을 압도하는 붉은 눈의 사신.

그 아래에서 춤을 추는 위대한 마법사가 함께하였으니.

몇 시간이나 더 이어진 전쟁이 결국 승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었다.

본래의 역사에서는 어떠했을지 알 길이 없는 승리.

이것이 단 한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기적일지.

아니면 헛된 발버둥의 연장선일지.

"와아아아!"

역시 아직은 알 길이 없었다.

* * *

"결코 물러서지 말아라!"

한 기사의 쩌렁쩌렁한 외침.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는 순간 끝이다!"

그토록 큰 목소리였음에도 이목이 집중되지는 않았다.

온 사방에서 몬스터가 들이닥치는 까닭이었다.

"삼 조! 교대한다!"

이곳은 어비스 몬스터가 끝없이 들이닥치는 무한의 공간.

"이십칠 조도 교대한다!"

그곳에서 제국의 기사들과 빙의자들이 온힘을 다해 몬스터를 막아 내고 있었다.

로열 나이츠 소속인 데이먼 역시 마찬가지.

"하아... 진짜 더럽게 끈덕지네."

질린 듯한 표정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바라보는 데이먼.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놈들이다.

일정 시간마다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사방에서 달려드는데 데이먼의 말대로 끈덕지기 그지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온몸을 다 사용해서 덤벼드는데, 경험많은 기사들조차 기가 질릴 정도였으니.

"불평할 시간 있으면 교대할 준비나 해."

"…벌써?"

물론 그렇다고 물러나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나.

절박하기로 따지자면 자신들이 더 절박했으니 말이다.

"뒤로 빠진다. 데이먼 들어와."

"자, 잠깐 아직 회복이... 에라이!"

엄살 피우는 데이먼의 말을 무시하고 뒤로 훌쩍 물러나는 맬리사.

그에 데이먼이 혀를 끌끌 차며 그 자리를 바로 채운다.

이런 방식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버텨 온 것이다.

각고의 공간에 들어간 두 명이 시련을 극복하고 나올 때까지 무한히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 내야 했으니.

가히 무한의 공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곳이었다.

"이봐 신입."

뒤로 물러난 맬리사의 시선은 바로 옆에 있는 로열 나이츠의 막내, 클레어를 향했다.

"네, 넵! 맬리사 선배님!"

화염 계열의 원거리 스킬 사용자로서, 기사들이 만든 원 안에서 그 진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맡은 클레어.

다만 깨우친 자 맬리사가 보기에는 어설픈 것 투성이었다.

"네가 활약할 수 있을 만한 전장이 아니야. 너 하나 없다고 무너질 나약한 이들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괜히 뭐라도 해보겠다며 나서지 말라는 말이었다.

"...네."

"너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지금은 그냥 느끼기만 해. 전쟁의 느낌을, 저들이 내는 진득한 살기와 그걸 받아 내야만 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그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기합과 함께, 있는 힘껏 무기를 내지르는 기사들.

마찬가지로 온힘을 다해 기사들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들.

창에 찔려도, 검에 베여도 전혀 아랑곳 않는 그것들의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맬리사 선배님."

"말해."

"저 몬스터들은 왜 저렇게까지 처절하게 달려드는 걸까요."

"...처절하게라."

그에 맬리사의 시선도 정면의 어비스 몬스터들을 향한다.

계속해서 쌓여 가다가 이제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이 가득 쌓여 버린 몬스터.

시커멓고 괴상하게 뒤틀린 형태의 어비스 몬스터.

"글쎄, 저것들도 살고 싶나 보지."

저런 저주받은 존재들도 살고 싶은 것이겠지.

맬리사는 그리 답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고작 저런 것들에게 네가 기가 눌려서는 어쩌겠다는 거야. 네 마음이 네가 펼치는 스킬에도 고스란히 담기니 너는 마음가짐부터 바꿀 필요가 있어."

"마음가짐을...."

"그래. 특히나 화염은 더더욱 그렇지. 네 안에 가득한 불을 너의 스킬에도 이어 담아 보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맬리사의 조언을 곱씹던 클레어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해보겠습니다!"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한결 부드럽게 펼쳐지는 클레어의 스킬.

맬리사는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싸늘했지만, 눈빛에는 많은 생각을 담은 채 우뚝 선 두 개의 게이트를 바라보는 것이다.

'각고의 공간....'

저 커다란 게이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임은 분명할 터였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

허나 더 힘을 내주어야 한다.

맬리사가 판단하기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버티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쌓여 가는 몬스터가 문제였다.

지금 이루고 있는 진형은 순전히 버티기 위한 용도이지 몬스터의 숫자를 줄이는 것에는 효과가 썩 좋지 않았으니.

무한의 공간에 쌓여 가는 몬스터가 아직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일 때, 히오와 안티푸스 두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남은 힘을 일거에 쥐어짜 내며 모든 몬스터를 죽일 수 있을 테다.

각고의 공간을 클리어하고 무한의 공간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잡아야지만 비로소 공략은 끝이 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맬리사! 교대!"

물론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빨리! 진짜 이놈들 더럽게 끈덕지다고!"

또다시 엄살 피우기 시작하는 데이먼과 교대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맬리사.

그녀의 주위 온도가 싸늘히 내려간다.

움직이는 한 걸음에 사뿐히 내려앉는 눈송이 하나.

떼는 두 걸음 밑에는 어느새 눈이 소복하게 밟혀 오고.

양손에는 각각 한 자루의 검이 들린 채였다.

"맬리사!"

왼손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의 검이.

오른손에는 새하얗고 부드러운 눈의 검이.

* * *

모든 심연을 물리친 이후, 장면은 다시 넘어간다.

사신은 작고 귀여운 형태, 이른바 낑낑이의 형태로 돌아온 뒤였고 주변은 눈물과 환희가 공존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밤이 찾아온 바스테리온의 왕성이었다.

'...피곤하네.'

- 그럴만도 하지.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마법을 이어 갔으니. 다른 마법사였다면 뇌가 녹아 버렸을 걸세.

'마력 통로도 지팡이도 버티지 못했겠지. 나니까 가능했던 거야.'

- ...맞는 말이긴 한데 묘하게 기분나쁘군.

체력이나 마력은 여전히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무척 피로했다.

상대하는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힘을 가져다주는 낑낑이 덕에 무한히 보충되는 마력을 경험했지만,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이제 좀 쉬고 싶은데 이 눈치 없는 낑낑이가 계속 마력을 퍼다 주었으니 반사적으로 마법을 계속 펼친 것이다.

그러니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지만, 쉴 수는 없었다.

"파블렌코 공."

히오의 바로 맞은편에 바스테리온의 왕이 앉아 있는 탓이었다.

주위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히오와 왕만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방.

"말씀을 편히 하시지요. 전하. 바스테리온의 지배자가 아니십니까."

그런 히오의 말에 왕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공은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는 나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 아니오."

그러더니 다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표정을 바꾼다.

일전에 회의장에서 본 것과도 비슷한 얼굴.

간절하고도 절박한 표정.

"그러니 파블렌코 공."

그것으로 다시 내뱉는 말은.

"이제 그만하고 도망갑시다."

못난 말이었다.

기껏 승리하였고 희망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는데 지치지도 않고 다시 도망을 부탁하다니.

어찌하여 이토록 겁이 많은 것일까.

아니, 그전에 전 대륙이 심연과 싸우고 있는 이 마당에 대체 어디로 도망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왕의 입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테트라디아로 함께 가면 되지 않겠소!"

마법사의 탑이 있는 고대 마법의 도시, 테트라디아.

그곳으로 도망가자는 말이었다.

참으로 우습다.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도망갈 궁리 끝에 떠올린 것이 테트라디아인가.

그곳은 정녕 안전할 것이라 믿는 건지.

물론 못난 왕의 모습과는 별개로 히오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

자신은 지금 과거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일 뿐이었으니.

각고의 공간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왕은 비통해하며 외친다.

"파블렌코 공! 그대라면 가능하지 않소이까! 제발... 제발!"

그런 모습과 비통한 외침에 다시 한번 의문이 드는 것이다.

왕은 어찌 이토록 절박하게 도망을 부탁하는 것일까.

단지 두려워서? 목숨이 아까웠으니?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위대한 파블렌코. 제발... 제발 내 이리 부탁하겠소."

왕은 어찌 히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일까.

단지 마법 실력이 뛰어나기에? 무한한 마력으로 심연의 침공을 막아 내어서?

아니, 역시 아니었다.

고작 그것이라기에는 너무도 강한 확신이었다.

당신이라면 이런 것쯤 당연하게도 할 수 있지 않냐는 확신의 눈빛. 그렇기에 더욱 절박해지는 눈빛.

그것을 마주하고 있자니 옅었던 위화감이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다.

가장 처음, 시련 속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던 작은 위화감.

연회장에서, 회의장에서,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끊이지 않던 그 위화감.

그것은 모두의 시선이었다.

히오를 바라보던 시선.

마치 히오를 잘 아는 듯 처음부터 파블렌코 공이라며 불렀었지 않나.

시련 속이었으니,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억 속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 히오를 바라보고 있지만, 히오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모두의 시선.

파블렌코라 부르지만, 그 누구도 '히오 파블렌코'라 부른 적은 없었다.

왕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늙은 기사도, 가장 지위 높은 귀족도, 심지어 왕마저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그대라면... 당신이라면 우리의 도망을 도와주는 것쯤이야 쉽지 않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다면, 그 이후에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

더이상은 추측이 아닌 사실.

연회장에서, 회의장에서, 전장에서.

심지어 왕의 집무실인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곳의 인물들 중 그 누구도 히오를 온전히 바라보는 이가 없었다.

히오가 아닌 다른 존재를 보고, 그를 칭송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하나뿐이리라.

"당신은 위대한 파블렌코가의 가주."

어비스 53층 각고의 공간.

[시련 - 못난 왕의 신념]

이곳은 단순히 과거의 장면을 보여 주고 겪게 하는 시련이 아니었다.

"테트라디아의 가장 높은 곳에 사는 마법사!"

이것은 천 년 전, 전쟁 당시 가장 위대했던 자의 기억.

그 괴로운 역사 속에서 가장 대단했었을 한 마법사의 기억.

"아벨라르 파블렌코이지 않소!"

테트라디아의 마탑주.

아벨라르 파블렌코의 기억 속이었다.

150화 못난 왕의 신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