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6

긴급 소집 (1)

소년, 리곤이 깨어난 건 한나절이 지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으음······ 누나?"

낮에도 한참을 울었던 리프는 동생이 깨어나자 또다시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그런 그녀를 안고서 달랬다.

경기장에서의 기억은 없는지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그에게 진정한 리프가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줬다.

인상을 일그러트렸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가지각색의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모두 들은 그는 가장 먼저 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 어······."

"론이다."

"아, 론 님. 누님과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정말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벗어나려던 리곤이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다가,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움직이지 마. 빨리 다시 누워."

리프가 그런 그를 다급히 도로 뉘였다.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려면 아직 멀었다. 비단 이번 폭주뿐 아니라 원래부터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었으니."

굴피로가 혀를 차며 거들어 말했다.

"수중에 있는 것 중에 가장 효력이 좋은 포션을 사용하긴 했다만, 그래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하거라."

"네······ 플레온 영감님도 정말 감사합니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고, 이야기의 주제는 다시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이 아이들의 처우는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굴피로의 물음에 나는 남매를 바라봤다.

일단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야 뭐······ 생각할 것도 없이 심각했다.

군주의 사망은 칼데릭 전체가 뒤집어질 대사건, 하물며 그를 죽인 상대는 다른 진영의 인물도 아니고 같은 군주다.

게임 속 설정에서, 군주가 군주의 손에 죽은 경우는 칼데릭의 역사에 단 2번 존재했을 것이다.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그리고 그 참사를 벌인 두 군주는 모두 숙청당했다.

한 명은 긴급 소집으로 군주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다른 한 명은 일을 벌이고 그대로 도주했다가 끝내 대군주에게 붙잡혀 그녀의 손에 직접.

이건 내게 제시된 갈림길이기도 했다.

'7군주령으로 돌아가거나, 튀거나.'

하지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후자는 선택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로 칼데릭 전체를,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으니까.

추적이야 둘째치더라도, 그래서야 앞으로 있을 수많은 난관들을 계획했던 대로 과연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무책임하고.'

내가 이대로 튀어버리면 나와 관련이 있는 남겨진 사람들은 당연히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7군주령의 수도에만 하더라도 알키마스 공방이 있었다. 대군주가 그들을 어떻게 하려고 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7군주령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이대로 7군주령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곧바로 긴급 소집이 걸릴 것이다.

긴급 소집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바로 지금과 같은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군주의 권한으로 모든 군주들을 소집하는 것.

그리고 나 역시도 반쯤 죄인 신세로 소집에 응해야만 하게 되겠지.

'그래도 가는 수밖에.'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죽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둔 것이 없진 않았다.

일단 순순히 소집에 응하고, 대군주와 대화를 한다.

이 위기는 거기서 해결을 보고 매듭을 짓는 게 적어도 내 판단으로의 최선이었다.

나는 일단 남매에게 간단히 설명부터 해주었다. 그들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할 것이기에.

내가 칼데릭의 7군주인 것, 6군주 폭왕이 죽은 것, 그리고 대충 앞으로 벌어질 일들.

스케일이 너무 크게 느껴졌는지 리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입을 헤 벌렸고, 리프는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 너희도 나와 함께 7군주령으로 이동한다."

지금 내 처지가 위태롭다고 해도, 그래도 당장은 내 곁에 있는 것이 두 사람에게도 그나마 가장 안전할 것이었다.

아셸과 함께 이들을 따로 빼돌리는 것도 생각하긴 했으나······ 어차피 긴급 소집에서 일이 틀어지면 다 소용없는 짓일 테니까.

다행히 두 사람은 내 말에 반감을 드러내거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엇을 원하시든 말씀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리프가 그렇게 말했고, 리곤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리곤을 빤히 응시했다.

하여튼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처음 그녀의 이름이 리프라는 걸 알았을 때 순간 리프리곤을 떠올리긴 했었지만,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었다. 관련을 지을 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동생이,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소년이 바로 그 리프리곤이었다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잘 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결국 그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른 원인은 이거였나?

미래에 타락하여 리프리곤이 될 소년을 구하고 확보하는 것.

······아, 모르겠다. 이 문제는 어차피 더 고민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프에게 말했다.

"일단 둘 모두 식사부터 해라."

리곤은 물론이고 아까부터 깨어있던 리프도 동생만 지켜보느라 뭐 하나 먹지 않고 있었다.

바로스에게 시켜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리프는 또 자신의 몫은 제쳐두고 리곤에게 먼저 수프를 떠먹여주려고 했다. 참 끔찍한 동생 사랑이었다.

결국 리곤이 수프 그릇을 뺏어들어 직접 떠먹기 시작한 다음에야, 그녀도 자신의 식사를 했다.

방 밖의 테이블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굴피로가 물었다.

"출발은 언제 할 것이오?"

"리곤의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럼 너무 늦어질 텐데······ 서둘러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서둘러봐야 바뀔 건 없었으니 아무렴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상점에 머무르는 동안 바깥에서 간간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동안 리곤의 상태는 혼자서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빠르게 회복되었다.

여전히 몸은 수척했지만 막 깨어났을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혈색 역시 좋아졌다.

'슬슬 이동해야겠군.'

이제 7군주령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

7군주령 엔록의 수도 버크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마차는 군주성에 도착했다.

반 년도 넘는 시간 만에 돌아온 군주성이었지만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머물렀던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었으니까.

성의 정문에서 가장 먼저 날 맞이한 건 집사장인 플로토였다.

항상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었던 그는 어딘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정렬하고 서있는 기사들의 분위기 역시 그러했는데, 그 이유는 뻔했다.

"성에 누가 찾아왔었나?"

"······예, 대군주성의 기사들이 바로 얼마 전에 방문했었습니다."

이미 대군주령과 이곳까지는 소식이 싹 다 닿은 모양이었다.

대응이 빠르다 여길 것도 없었다.

내가 서둘러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대군주 측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에 시간은 충분했을 테니.

나는 굴피로와 리프 남매도 성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저쪽에서 반응을 보일 테니 내가 뭘 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에 성 주위의 멀리 떨어진 곳에선 꾸준히 이쪽을 지켜보는 눈들이 느껴졌다.

대군주성 측에서 보낸 감시자일 건 뻔했기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내가 성에서 떠날 수도 있으니 지켜보는 거겠지.

그렇게 대략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끼이익!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 저편에서 성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3개의 거대한 비행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와이번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탄 사람들은······.

'이제야 왔네.'

나는 방 밖으로 나서서 문 앞에 있던 아셸에게 말했다.

"남매와 굴피로를 데리고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고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오면, 내가 말했던 대로 행동하도록."

그녀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으나,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남겨두고 아래층의 중앙홀로 내려갔다.

바깥의 수선한 분위기 속에 곧 집사장이 다가와서 내게 말을 전해왔다.

"대군주님의 전령을 전하기 위해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이내 홀에 모습을 드러낸 건 세 인물이었다.

드워프와 로브의 남자, 그리고 기사.

나는 그들과 마주 보고 서서 차례로 바라봤다.

중앙홀에 더없이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Lv. 96]

[Lv. 89]

둘은 아는 얼굴이었다.

1군주 신퇴와 참모장 데이폰.

[Lv. 95]

그리고 오른쪽에 서있는 흑갑의 기사는 레벨로 보아서 아마······.

'흑린의 단장이군.'

흑린의 기사단장, 크라디엘.

참모장이 대군주의 왼팔이라면, 그는 대군주의 오른팔이자 가장 강력한 검이었다.

흑린의 기사들은 군주들과 달리 대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오로지 그녀의 명령만을 따랐으니까.

"대군주가 긴급 소집을 선언했네, 7군주."

은은한 오색빛 광채를 뿜어내는 갑옷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신퇴가, 가장 먼저 입을 뗐다.

"이유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사실 확인부터 하겠네. 마헤아 시에서 6군주와 전투를 벌이고, 끝내 그를 죽인 이가 7군주 그대가 맞는가?"

부정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어째서 6군주를 죽였지?"

"그건 굳이 지금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

"······그 말은, 소집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신퇴가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그의 갑옷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역장이 일렁거렸다.

흑린의 단장 역시 검자루에 올리고 있던 손을 슬며시 쥐었다.

싸늘하면서도 숨 막히는 긴장감이 홀에 감돌았다.

나는 그들과 가만히 마주하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애초에 그럴 생각이 아니면 군주성으로 돌아왔을 리가 있나.

그리고 그것은 세 사람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참모장이 나서서 말했다.

"악티폴의 경기에서 한 인간 남매를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그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이동하는 건 나뿐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신퇴를 돌아봤고, 신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바로 대군주성으로 이동하지."

다른 군주들도 지금쯤 전부 모였으려나?

그게 궁금했지만 어차피 이제 곧 알게 될 것이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나는 참모장을 바라봤다.

성으로 귀환하는 건 그의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이동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짐작대로 그가 나섰다.

"제 곁으로 와주십시오. 텔레포트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세 사람의 곁으로 저벅저벅 다가가서 섰다.

곧 거대한 마력의 유동과 함께 주위 시야가 일그러졌다.

긴급 소집 (2)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펼쳐진 건 어두운 공동이었다.

사방에 박혀있는 마석들과 발밑의 마법진,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로브의 마법사들.

호송선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대군주성에 발을 들였을 때의 그 풍경이었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처음 대군주성에 왔을 때와 조금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온 것만 같은 그 기분.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다르지 않았다.

이 긴급 소집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오늘 이곳은 내 처형장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다만 그때와 달리 마음은 평온한 건 이 세계에 그만큼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한 오기 전에 충분한 각오를 했기 때문이리라.

군주로서 근엄함을 연기하는 것도 계속 하다 보니 이제 내면까지도 조금은 동화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스름한 복도를 걸어 이내 기사들이 정렬하고 서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전부 흑린의 단장과 같은 칠흑의 갑주를 입고 있는 데다가, 레벨들도 80이 넘는다. 전원이 흑린의 기사인 듯했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건 거대한 문.

우리는 기사들을 지나쳐 걸어 회의장의 입구 바로 앞에 섰다.

'······음.'

문 너머로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들이 느껴졌다.

그에 나는 안에 군주들이 전원 모여있음을 확신했으며, 동시에 깨달았다.

만약 일이 계획대로 안 풀린다면 정말로 살아나갈 방법이 없을 것임을.

"이번 소집은 7군주 그대가 6군주를 죽인 것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열린 자리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슬쩍 돌아봤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군주의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

"······."

"부디 순순히 자네의 진심을 밝히고 대군주를 설득할 수 있길 바라지. 나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선 완만한 해결을 바라고 있네."

1군주 신퇴는 아홉 군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다면 특별한 존재였다.

우선 군주들 중 가장 레벨이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 칼데릭의 건국부터 군주로서 자리를 지켜온 최초의 군주였으니까.

그만큼 그는 칼데릭의 가장 거대한 기둥과 다름이 없으며, 또한 누구보다 진심으로 칼데릭의 평화를 생각하는 이였다.

아마 그 역시도 나만큼이나 이번 일로 인해 더 이상의 충돌을 빚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직접 희의장의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

문이 열리고 회의장 안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원탁,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군주들.

그들의 시선은 이미 전부 이쪽으로 모여있었다.

"······."

지금 내 옆 서있는 1군주 신퇴부터, 이전의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4군주 망자왕과 9군주 거왕까지.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라서 몇 명쯤은 불참했을 법도 한데 정말로 군주 전원이 모였다.

나는 특히나 자리 한편을 혼자서 전부 채우고 있는 9군주의 모습을 바라봤다.

키가 적어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어마무시한 덩치의 거인. 희소 종족 중 하나인 거인족이다.

그는 다른 군주들과 달리 홀로 몸집에 맞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서 침착한 눈으로 내가 서있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특별히 적의나 살의를 뿜어내는 이는 없으나, 거대한 압력이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왜냐면 자리에 앉아있는 군주들 전원이 제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기에.

"어서 와, 7군주."

원탁의 상석에 앉아있던 대군주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전에 봤던 것과 같은 검은 드레스 복장이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적의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웃음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야?"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던 광랑도 자세를 바로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내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신퇴도 자신의 자리에 앉고, 참모장과 흑린 단장은 대군주가 앉아있는 뒤쪽으로 다가가서 섰다.

잠시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곧 대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 시작해볼까?"

그녀가 빈 6군주의 자리를 가리켰다.

"긴급 소집을 선언한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6군주의 죽음 때문이야. 그리고 그를 죽인 게 바로 얼마 전에 즉위한 7군주고."

다시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방금 말한 사실에 대해서 정정할 부분이 있어?"

"없다."

이 또한 형식적인 확인이었다.

내 대답에 대군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좋아, 우선 내가 파악한 정황은 이래. 6군주가 주최한 검투 경기에서 7군주가 갑작스레 난입했고, 경기 중인 노예 검투사를 거둬가겠다고 6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선언, 그리고 그에 분노한 6군주와 충돌이 일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6군주를 죽였다."

"······."

"어때, 7군주. 이에 대해서도 뭐라도 정정할 부분이 있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단 선공은 6군주 쪽에서 했다."

"아,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거야 중요한 사실이 아니잖아?"

대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군주 뇌후가 끼어들어서 말을 보탰다.

"선공은 6군주가 했다고 해도 먼저 6군주의 행사에 개입한 건 7군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의 발단 역시 분명히 그에게 있습니다."

나는 슬쩍 뇌후를 바라봤다.

전에 회의에서 시비가 붙었던 게 아직도 앙금이 있는지, 왜인지 유독 적극적으로 보이는 그녀였다.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그리고 7군주, 대답해줄 수 있겠어? 6군주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도 6군주를 죽일 의지가 아예 없었는지 말이야."

"······."

본질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듯했다.

세인테아의 용사 또한 가지고 있는 능력이기도 한,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보는 능력.

대군주에게 그 능력이 있는 이상 이 자리에서 어설프게 입을 놀리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니까.

6군주가 선공하기 전에 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냐고?

아예 없었다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때 나는 이미 결심을 마친 상태였었으니까.

놈에게서 광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캐내지 못하면, 놈을 죽여서라도 리프 남매를 살려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말이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

대군주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전투가 너무 격해진 끝에 어쩔 수 없이 죽인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6군주를 죽인 거라는 거겠지?"

"그렇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놈을 죽인 건 놈의 육체 능력을 대부분 빼앗은 뒤 제압하고 난 다음이었으니.

그런 내 대답에 군주들이 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신퇴와 뇌후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고, 광랑이나 흑해 여제는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것처럼 묘한 웃음을 지었으며, 나머지 군주들은 별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분명히 했으니, 이제 이유를 들어봐야겠지."

대군주가 어느새 웃음이 가신 얼굴로 이어 물었다.

"7군주, 어째서 6군주를 죽인 거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6군주를 죽인 이유.

이 소집은 결국 내게서 그 이유를 듣고,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나를 처형하기 위해서 열린 자리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문답이 바로 내 생사를 가를 결정적인 문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합당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지.'

당연했다.

이들에게 있어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을, 두 명의 인간.

고작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6군주를 죽여버렸다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물론 거기에도 이유라면 있었다.

남매 중 남자 쪽이 미래에 6군주를 죽일 인물이었다는 것, 어차피 개입하지 않았어도 놈은 머지않은 미래 죽었을 거라는 것.

하지만 당연히 이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 대군주라면 내 터무니없는 예지가 정말로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일이 복잡하게 꼬인다. 리곤의 존재를 대놓고 대군주에게 드러내면 또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너는 대신 칼데릭의 군주가······.]

······간신히 지옥에서 탈출한 그들 남매를 다시금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여기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지자고 내가 가진 패들을 다 대군주에게 꺼내놓는 건,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하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생각이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응?"

대군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곳에서 6군주를 죽이는 게, 적어도 내 판단에서는 최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칼데릭의 미래에 덜 해로운."

이것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었다.

어차피 미래에 죽었을 6군주가 좀 더 일찍이 죽었을 뿐이다. 그리고 미래에 살귀가 될 리곤은 타락하지 않았다.

이게 칼데릭에게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손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대군주가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6군주의 존재가 칼데릭에 해악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침묵하지고 있지만 말고 왜 그렇게 판단한 건지 이유를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7군주."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어떻게든 리곤의 존재를 드러내야만 했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대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이유를 모르면 아무런 판단을 할 수가 없다고.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더 들어볼 게 있겠습니까?"

뇌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군주가 군주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냥 넘어간다면 칼데릭의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릴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얼마나 합당하든, 여기서 당장 7군주를 처형해 흔들린 질서를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그에 광랑도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6군주 존나 싫어했잖아. 솔직히 저번 회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뒤끝 부리는 것도 있지?"

"······지금 상황에 장난이 나옵니까?"

"봐봐, 찔렸구만."

그녀가 킥킥 웃으며 옆쪽에 세워뒀던 검을 집어들었다.

"그래도 나도 2군주 의견엔 찬성이야. 죽인 이유야 뭐가 됐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런 일을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다간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

"맞아요, 대군주님. 보니까 적극적으로 해명할 생각도 없는 듯한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죽이죠."

흑해 여제도 끼어들어 피막 날개를 파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대군주를 바라봤다.

"7군주, 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녀가 무언가 흥이 팍 식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득이든 뭐든 내 마음을 바꿀 말을 해봐. 아니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야."

그 말투는 마치, 군주들의 말대로 무슨 이유를 댔든지 처음부터 나를 처형할 생각이었다는 투였다.

나는 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었다.

대군주는 종잡을 수 없지만 합리적인 인물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건, 그녀가 어떤 일에 대해서 자존심 따위를 세우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녀가 날 처형하기로 결정한 건 오로지 그게 칼데릭에 더 이득이기에 그런 것이다.

네가 감히 철칙을 깨고 군주를 죽여? 따위의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말이다.

아무리 날 뛰어난 인재로 판단했다고 해도 나는 이제 막 군좌에 앉은, 사실상 아직 신뢰가 더없이 부족한 인물.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칼데릭의 근본적인 질서를 뒤흔든 불안 요소를 계속해서 남겨두고 감수할 만큼의 메리트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를 살리는 것에 이득이 없다면, 반대로 죽이는 것에 감수해야 할 피해를 각인시켜주기로.

원탁에 둘러앉은 군주들이 서서히 전의를 일으키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서 입을 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겠지."

이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내가 많은 능력들을 얻었다고 해도, 대군주를 포함한 모든 군주들의 합공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명심해라."

여기서 방어막 계열의 능력이 없는 군주는 5군주 광랑과 9군주 거왕, 그리고 8군주 흑해 여제······.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칠 수 있는 횟수는 3번, 그리고 혈술.

회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만약 혈술을 펼쳐 사방으로 피를 터뜨린다면 군주들이 얼마나 고스란히 그에 맞아줄까?

알 수 없다. 어쩌면 한 명도 맞히지 못할 수도 있고, 방심 때문에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이 맞힐 수도 있다.

즉,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수도, 반대로 군주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이곳에 자리한 절반."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허세이되 허세가 아닌,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서 오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그리고 대군주는 그를 알 것이다.

"나를 죽일 생각이면, 너희도 절반 이상은 죽을 각오를 하도록."

긴급 소집 (3)

회의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주 차갑고, 숨 막히는 정적이.

군주들의 시선이 전부 모인 가운데, 나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가장한 채 대군주에게 말했다.

"한번 확인해보겠나, 대군주?"

"······."

그녀가 소름 끼칠 정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대군주와 아홉 군주, 그리고 흑린의 단장에 참모장까지.

만약 용사가 없다면, 다른 병력 없이 그들만으로도 세인테아를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을 재앙적인 전력.

나는 지금 그들의 전면에 대고서 말한 것이다.

나 혼자 싸워도 너희 중 절반은 저승길 길동무로 데려갈 수 있다고.

군주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1군주 신퇴와 3군주 천궁, 그리고 4군주 망자왕은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5군주 광랑은 입꼬리를 올렸으며, 8군주 흑해 여제와 9군주 거왕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만하군."

거왕이 제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래, 그래. 이거지. 이 느낌이지······."

광랑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흥분과 열기가 가득 섞인 숨결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정신이 나간 인간이군요."

그리고 황당함과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건 2군주 뇌후였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날 노려보는 게 저번 회의에서 봤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딴 같잖은 허풍이 진심으로 통할 거라 생각했다면,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습니다."

뇌후의 전신을 휘감고서 푸른색의 스파크가 파직거렸다.

그때 갑자기 대군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주들이 시선을 돌려 배까지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를 바라봤다.

곧 천천히 웃음을 멈춘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새 다시 입가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걸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구나, 7군주?"

그런 대군주의 말에 뇌후가 움찔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진심으로 나와 군주들 전원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9군주의 말마따나 오만일까, 아니면 정말 사실일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면, 상대가 알아서 생각하게 두도록 무게나 잡고 있는다.

적어도 지금까진 잘 풀리지 않은 적이 없던 훌륭한 의사소통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대군주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저 오만함에 가득 찌든 인간의 주제 모르는 망언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판단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대군주는 아직 내 능력에 대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폭왕까지 죽이며 나는 내 강함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때문에 대군주는 미지의 장막 속에 숨은 나를 판단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전투를 벌였다가 내 엄포대로 군주들 중 절반 이상이 죽어나간다면?

그건 단순히 전력이 반토막 나는 게 아니라 칼데릭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정말 그런 대참사가 발생하면 칼데릭의 가장 큰 대적자인 세인테아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을 테니까.

······솔직히 한편으론 지금 내가 완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았다.

먼저 철칙을 깨놓고 날 죽일 거면 니들도 다 뒈질 각오를 하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많이 뻔뻔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뻔뻔한 억지라도 이런 협박을 안 했으면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내 방금의 발언을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것, 그래서 처형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도박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그거면 일단 1차적인 목적은 달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군주를 보면 충분히 내 그런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한 발자국 물러서야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안 됐다.

나는 타이밍을 재며 다시 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잠깐 처형 개시에 제동을 걸긴 했어도 그뿐이다.

어쨌든 이대로면 대군주의 결정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칼데릭의 정점에 선 지배자들.

좀 전의 뇌후의 말마따나 이런 협박에 물러날 이들이 아니다.

위신은 둘째치고, 내가 이런 말을 꺼낸 순간부터 나를 살려둔다고 해도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대형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간다면 결국 대군주는 날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처형을 결정할 확률이 높았다.

아직 분위기가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때, 이 상황을 유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여전히 변함은 없다. 6군주를 거기서 죽이는 것이 칼데릭에 있어서도 이득이었다는 걸."

"······."

"하지만 그 행동이 칼데릭의 질서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대군주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 맹세하지. 앞으로 다시 이번과 같은 일이 반복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물론 내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다.

폭왕이야 이런저런 상황이 우연히 겹치고 겹쳐서 결국 죽이게 된 거고, 사실상 내가 또 군주들과 대적할 일이 뭐가 있겠나?

"흐응······."

대군주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몇몇 군주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기색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이번 소집을 조용히 넘기자고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하겠지.

대군주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7군주. 6군주를 죽인 일이 네가 구했다는 인간 남매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었어?"

"······."

"그래, 그런가 보네. 알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군주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금 흥미가 솟은 듯한 즐거운 얼굴로 군주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군주들의 의견은 어때? 7군주가 다시 이런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건 진심인 것 같은데."

뇌후가 바로 항의하고 나섰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철칙을 깼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대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의견이 좀 갈릴 것 같으니 찬반으로 가보자고. 2군주는 처형에 찬성인 걸로 하고, 다른 군주들은?"

그에 흑해 여제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저도 찬성이에요, 대군주님. 저 인간 너무 뻔뻔해서 재수가 없네요."

"아, 나도 찬성."

광랑도 곧바로 거들었다.

아까부터 검자루를 꽉 쥐고 있는 게 이미 싸울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1군주는?"

대군주의 물음에 신퇴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본장은 대군주의 뜻에 따르겠소."

그녀의 시선이 다음으로 3군주 천궁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귀찮음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대군주가 하자는 대로."

이제 남은 사람은 4군주 망자왕과 9군주 거왕뿐이었다.

나를 슬쩍 바라본 망자왕이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말했다.

"나는 처형에 반대하겠네."

그에 다른 군주들이 의외라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뭐야, 4군주. 네 성격이면 당연히 찬성할 줄 알았는데? 설마 쫄았냐?"

광랑의 말에 망자왕은 그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나도 설마 그가 반대를 할 줄은 몰랐기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망자왕은 신퇴나 뇌후와 더불어 질서의 유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였으니까.

'······설마 저번에 빚 남겨뒀던 거 갚는다고 반대하는 건가?'

아무튼 이제 남은 사람은 9군주 거왕뿐이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그가 이내 눈을 뜨고서 말했다.

"······나도 대군주의 뜻에 따르겠다."

그에 뇌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찬성 셋에 반대 하나, 그러나 3명이 대군주에게 결정을 맡겼으므로 대군주가 4표를 가진 셈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대군주의 결정에 따라서 내 처우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자, 그럼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네?"

대군주가 대충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며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그녀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내 처형을 결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는 추하게라도 살아남아야지.'

당연히 순순히 목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그녀가 흥미를 가질 만한 미래 정보로 딜을 걸든 뭘 하든, 정말 가진 패를 다 꺼내서라도 살아남는 수밖에.

그래도 결국 전투가 벌어지면 나도 혼자 뒈지긴 억울하니 최대한 많이 길동무로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꽤나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7군주, 나는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은 져야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군주가 군주를 죽인 일이잖아? 고작 말 몇 마디로 넘어가는 건 아니지."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니까 내 부탁을 3개만 들어줬으면 해."

"······?"

"물론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 충분히 합리적인 부탁을 할 거니까 걱정 말고. 우선은 얼마 뒤에 있을 중립국 회의부터."

중립국 회의?

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얼마 뒤에 세인테아 쪽이랑 중립국에서 회담이 있거든. 그때 나와 동행해서 같이 가줬으면 해. 이걸로 횟수 하나는 치고 나머지 2개는 나중으로 남겨두는 거야. 어때?"

나는 잠시 그녀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3개의 부탁, 어차피 군주들은 누리는 권한만큼 대군주의 명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매번 군주 회의에서 대군주의 결정에 따라서 각자 군주들이 할 일이 정해지는 거고.

물론 그에 명분이 부족하다면 군주들도 얼마든지 대군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거절 권한이 없는 명령권인 거군.'

하지만 뭐,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는 걸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거기다 한 번은 세인테아와의 회담에 함께 동행하는 걸로 까겠다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다.

뜬금없이 나를 세인테아의 회담에 왜 데려가고 싶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대군주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지만, 어차피 내가 제안을 거부할 처지도 아니고.

"받아들이지."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대군주가 싱긋 웃었다.

"좋아, 그럼 이걸로 끝. 7군주의 처형은 없는 걸로."

대군주의 선언에 광랑이 김빠진 얼굴로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씁, 간만에 좀 싸워보나 싶었더니······."

흑해 여제도 언짢음이 팍팍 드러나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이번 위기도 결국 무사히 잘 넘겼다.

어쨌든 이제 이대로 다 끝나는 건가 싶었을 때, 갑자기 고함이 울려퍼졌다.

"······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뇌후가 씩씩거리며 날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긴급 소집 (4)

"다들 이대로 넘어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뇌후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군주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미 결정이 난 사안 아닌가. 그리고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기로 했고."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군주가 군주의 손에 살해를 당했습니다! 죽음으로밖에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중죄 중의 중죄란 말입니다!"

"아, 저거 또 오버하고 앉았네."

광랑이 쯧쯧 혀를 찼다.

참모장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군주끼리 전투가 벌어졌거나, 혹은 군주가 군주를 살해했을 시, 소집을 통해 대군주의 권한으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헌령에 제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반드시 처형이 집행되어야만 하는 사안은 아닙니다, 2군주님."

뇌후가 홱 시선을 돌려 참모장을 노려봤다가, 대군주를 바라봤다.

항의가 가득 담긴 그녀의 시선에도 대군주는 말없이 입가에 웃음만 걸고 있을 뿐이었다.

뇌후가 입술을 짓씹고는 말했다.

"이제 막 군좌에 앉은 이가 벌써부터 이런 혼란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쉬이 넘어갔다간······."

"이리 열성적으로 칼데릭의 미래를 생각해줘서 고맙네, 2군주."

"······."

"그래도 나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수결로 결정한 사안이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조곤조곤 타이르는 듯한 대군주의 목소리에는 감히 항거하기 힘든 압력이 서려있었다.

"그래요, 2군주. 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별 수 있겠어요? 꼬맹이가 떼쓰는 것도 아니고, 결정에 따라야죠."

비꼬는 듯한 흑해 여제의 말투에 광랑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이, 전에 군주 회의에서도 광랑이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두 사람이 왜 뇌후를 그렇게 부르며 놀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날 제외하고 군주들 중 가장 최근에 군주가 된 인물인 데다가, 살아온 세월도 가장 어렸으니까.

자기도 군좌에 앉은 지 고작 몇 년밖에 안됐으면서 나더러 방금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우습게 들릴 만도 하겠지.

뭐, 그래도 그녀의 가문만큼은 칼데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이······!"

발작적으로 그런 둘을 노려보던 뇌후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내쉬었다. 폭발하려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내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나를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허락해주십시오, 대군주."

"응?"

"7군주와의 정식 결투를 원합니다. 감히 아까와 같은 망언을 지껄일 만한 실력이 정말로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그에 나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또냐?'

저번 회의에서도 그 지랄을 하더니, 이번에도 또 이러고 있었다.

아니, 그냥 좀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나. 왜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진짜 저번에 붙었던 시비 때문에 아직도 뒤끝이 남아있나?

"음, 결투 말이지······."

대군주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나와 뇌후를 번갈아 봤다.

"뭐, 그래. 정 그리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는데······."

그러다 히죽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때, 7군주? 아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조금은 7군주의 실력이 직접 보고 싶어졌는데."

"······."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외통수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저번에야 입을 털어서 어떻게든 적당히 넘어갔지만, 이번엔 대군주도 마침 잘 됐다는 듯 빠져나가게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 막 처형 위기를 넘겼기에 지금의 나는 발언권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오, 그러면 나도! 나도 7군주랑 한판 붙을래!"

대군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광랑도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제발 좀 닥쳐줬으면.

나는 더 상황이 막장으로 흘러가기 전에 머리를 굴려 해결책을 짜냈다.

여기서 결투라는 건 당연히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닌 제압하는 결투었다. 즉, 즉살을 사용할 수 없는 내게는 승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폭왕을 상대할 때야 놈이 마침 흡혈귀라 운 좋게도 가스칼리드의 혈술까지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부동 장막으로 방어하고 공간 도약으로 회피하는 게 전부······.

'······아.'

그래, 그러면 되잖아?

"이렇게 하지."

나는 뇌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적당한 제압에 별 소질이 없다. 6군주까지 죽인 마당에 또 다른 군주를 죽이면 내 처지만 곤란해지지."

"하! 설마 또 그따위 핑계로 결투를 회피하겠다는 건 아니겠······."

"그러니 방어만 하겠다."

"······뭐라고요?"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공격에 방어만 하겠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잠시 멈칫한 뇌후가, 이내 살기를 폭사했다.

"날 모욕하는 것도 정도껏 하세요, 7군주. 이제 그 오만함이 경멸스러울 지경이니. 내 공격에 제자리에서 방어만 하겠다고?"

"그래."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2군주 뇌후, 천둥의 정령술사. 군주들 중 파괴력 하나만큼은 제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지."

"······."

"3번의 공격을 모두 완전히 막아내면 내 승리, 그렇지 못하면 네 승리다. 이 조건이면 결투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대군주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뇌후는 귀까지 부르르 떨며 분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Lv. 95]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 대륙에 존재하는 엘프들 중 거의 최강에 가까운 정령술사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나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막기만 하겠다 선언한 것이고.

특히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성격이면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고 느끼고 있지 않을까.

"······좋습니다."

이내 뇌후가 흉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결투를 진행하는 대신, 조건을 더 추가하죠. 만약 7군주 당신이 패배한다면, 당신의 오만한 언행에 대해서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십시오."

"그러지."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쯧, 그딴 게 뭐 결투라고 재미없게······."

방금까지 활기가 넘치던 광랑도 흥이 죽었는지 다행히 알아서 물러나줬다.

대군주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 그럼 7군주와 2군주가 방금의 조건대로 결투를 벌이겠다는 거지? 바로 적당한 장소로 이동하자고."

***

회의장에서 나서서 이동한 곳은 대군주성 한편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언뜻 봐도 직경이 몇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나와 뇌후는 그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섰고, 다른 군주들은 관전하기 위해 주위에 섰다.

파지직.

뇌후의 전신에 푸른색의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질질 끌 것도 없이 바로 결투를 시작할 마음이 한가득인 기색.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건을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7군주."

조금은 비웃음이 섞인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 없이 팔짱을 꼈다.

경멸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린 그녀가 더욱 기운을 거세게 일으켰다.

츠츠츠.

이내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독수리와 같은 푸른빛의 형상이 나타났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계약한 수많은 천둥의 정령들 중 하나인 코고스.

'대충 중간급 정도 되는 놈이었나.'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올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점점 그녀의 주위를 휘감은 뇌기가 강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여유롭게 부동 장막을 펼쳤다.

빠지지직!

한 차례 날갯짓을 한 독수리 정령이 강대한 뇌기를 휘감은 채 그대로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뇌기가 폭발하고, 한순간 시야가 새파란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뇌기는 장막에 완벽히 막혀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허무히 소멸했다.

나는 장막을 거두고서 뇌후를 바라봤다.

손을 거둔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콰르릉!

사나운 천둥소리와 함께 다음으로 나타난 형상은······ 페가수스?

등에 한 쌍의 날개와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린 말이었다.

'저게 이름이 레퀴사크론이었나.'

2군주가 부리고 있는 정령들은 그녀의 레벨만큼이나 워낙 많았기에, 이름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놈이 뇌후가 부리는 정령들 중에서 거의 최상위 정령에 가까운 놈이라는 건 알았다.

놈의 등장에 그녀의 주위에 퍼진 뇌기가 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뇌기에 파묻혀서 이제 뇌후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자신만만한 미소가 보일 뿐이었다.

파츠츠츠!

놈의 이마에 달린 뿔 끝에 뇌기가 구의 형태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서 다시 한 번 부동 장막을 펼쳤다.

곧 거대하게 뭉쳐진 구체에서 섬광이 터짐과 동시에 가공할 뇌기가 몰아쳤다.

시야가 좀 전보다 훨씬 강한 빛으로 물들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피해를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슈우우우.

나는 장막을 거두고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전력은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인가.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뇌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도 이번엔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음에도 아직 내 옷자국 하나 그을리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한 번 남았다."

내 말에 그녀가 이를 까득 깨물었다.

"······혀를 놀릴 만한 실력이 최소한 없지는 않았군요."

그녀의 머리칼이 서서히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방금 전 두 정령과는 비교조차 안될 강대한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꽈르르릉!

어찌나 뇌기가 강한지 사방이 전부 푸른빛으로 뒤덮여, 결계에 갇힌 것처럼 주변이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됐을 정도.

나는 온몸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허공에 나타난 거신과 같은 인간형 정령을 멍하니 응시했다.

'결국 저걸 꺼내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최강의 천둥 정령인 라크시아.

그 거신의 양손에 서서히 가공할 뇌기가 뭉쳐지더니, 곧 길쭉한 창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거신은 그 거대한 창을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찍으려는 듯 창대를 역수로 쥐고 겨누었다.

게임에서도 뇌후의 궁극기였던 바로 그 기술.

'잠깐만, 이거······.'

나는 부동 장막을 펼치면서도 섬짓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못 막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내가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내건 승부였다.

아무리 강력한들 게임에서도 무적 방어기였던 부동 장막을 뚫을 수 있는 공격은 없었으니까.

······근데 실제로 직접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뇌후의 궁극기 역시 게임에서는 고정 피해를 입히는 즉사기에 가까운 공격이었었기에, 더더욱 쫄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부동 장막이 뚫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마음에 솟아오른 것이었다.

"어디, 이것도 피하지 않고 막아봐라!"

뇌후가 그렇게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결국 나는 본능에 가깝게 장막을 거두고 혈술을 사용했다.

핏방울이 막 창을 내려꽂으려는 라크시아를 향해 날아갔고, 형체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타버려 사라졌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렇게 핏방울과 함께 라크시아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뇌기도.

"······어?"

막 기세 좋게 공격을 날리려던 뇌후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긴급 소집 (5)

뇌후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레 겁먹어서 나도 모르게 즉살을 사용해버렸다.

하지만 잘한 일인 것 같았다.

누가 알아, 혹시나 진짜 장막이 뚫렸으면 가루 하나 안 남고 그대로 소멸했을 텐데.

'그나저나 정령한테도 통하긴 하는구나.'

한편으로는 더 강력한 확신도 얻었다.

영혼이든 뭐든, 그냥 넓은 의미로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대상이면 즉살은 대체로 다 통할 거라는 걸.

사방을 자욱하게 가렸던 뇌기가 걷히고, 결투를 관전하고 있던 군주들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멀쩡하기 그지없는 내 모습을 보고서 놀란 듯한 기색들이었다.

나는 다시 뇌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방금 전보다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저래?'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뭐, 갑자기 소환한 정령이 소멸했으니 당황스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어째 너무 평정을 잃은 것 같은······.

[Lv. 90]

······?

나는 뇌후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확인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95레벨이었던 그녀의 레벨이 90레벨까지 확 하락해있었다.

대체 뭔 일어난 건가 싶다가, 이내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서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설마 정령이 완전히 소멸해서?'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즉살에 당해 소멸했으니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즉, 그녀가 다시 라크시아를 소환하는 건 영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미 소멸해버린 정령을 어떻게 불러오겠나.

가지고 있던 가장 거대한 힘 중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그에 따라 그녀의 레벨 역시 그만큼 하락한 것이고.

'와, 잠깐만.'

나는 그제야 내가 좀 엄청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뇌후의 힘을 무려 5레벨만큼이나 영구적으로 깎아버렸다는 거잖아?

그것도 보통 5레벨이 아니라 90레벨대에서의 5레벨이면 정말 어마무시한 값이다.

의도치 않은 대참사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와 눈을 마주친 뇌후가 움찔 놀랐다.

"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그때 대군주와 다른 군주들이 주위로 다가왔다.

그에 뇌후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군주가 나와 그녀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서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7군주가 이긴 것 같네. 2군주, 승부를 인정하겠어?"

대군주의 말에도 뇌후는 대답 없이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말을 걸려 했다.

"2군주, 정령······."

그녀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인정해요! 제 패배를 인정한다고요!"

"······."

"7군주······ 당신의 승리라고요."

그 반응에 다른 군주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뇌후를 바라봤다.

그녀는 패닉에 빠진 눈으로 나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도망가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거 왜 저래? 쪽팔려서 튀는 거야?"

광랑이 중얼거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큰일났네, 쟤.'

솔직히 2군주가 힘을 잃든 말든 내 알 바야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벌인 짓이니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90레벨이면 군주는 고사하고, 세인테아의 오성과 비교해도 그 언저리 수준까지 약해졌다는 게 아닌가?

지금 저렇게 황급히 도망가는 것도 대군주와 다른 군주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리라.

'음······.'

뭐, 별 수 있나?

조금, 아니, 좀 많이 미안하긴 했지만 내가 뭘 어떻게 책임질 방법은 없었다.

이미 소멸해버린 정령을 무슨 수로 되돌리겠나. 내 능력은 죽이는 것뿐이지, 도로 살리는 능력은 없는데.

'미안.'

속으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곧바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아니, 그러게 누가 싸움을 걸랬나?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내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니잖······.

"정말로 대단하군."

그때 갑자기 내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리자 거왕이 눈을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가 감탄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2군주의 라크시아는 나도 이전에 한번 온몸으로 부딪혀본 적이 있어서 알지. 뼛속까지 태워버리는 듯한 그 가공할 뇌기."

"······."

"그 일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고스란히 받아내다니, 진심으로 감탄했다. 7군주 그대는 들은 대로 뛰어난 전사군."

······뛰어난 전사?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진중한 얼굴로 찬사를 내뱉는 거왕을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덩치만큼이나 무게를 잡고 있더니, 갑자기 뭔가 싶었다.

'뭐······ 거왕 성격이 그런 쪽이긴 했나.'

전형적인 전사 캐릭터.

게임에서도 거왕은 자신이 인정한 뛰어난 전사에겐 일방적인 호의를 보이곤 했었다. 설령 그게 다른 진영의 인물이더라도.

여기서 뛰어난 전사라 함은 어떤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로지 정면에서 맞부딪히는 그런 걸 뜻했다. 좋게 말하면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한. 그렇다고 거왕이 뇌까지 근육인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걸로 소집은 종료지?"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광랑이 몸을 돌렸다.

"잔뜩 기대하고 왔더니 이것도 저것도 죄다 싱겁게 끝나고, 나도 그만 돌아가련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녀가 아, 하며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7군주, 너 전에 내 군주령에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

"그거 있잖아, 빌페크 시라고 했었나? 아무튼 어디 시장 놈이랑 말이야."

······아, 그거.

테이르를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미쳐 날뛰었던 그 귀족 영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어떻게 됐나.

광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집사장한테 듣기로는 너한테 별 지랄을 다했다던데, 그래서 대충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거든. 뭐 다른 거 원하는 거라도 있냐?"

"······알아서 해라."

뭘 어쩌든 별 관심도 없었다.

광랑이 픽 웃고는 손을 휘휘 저으며 도로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이대로 해산할까. 다음 회의 때 다들 다시 보자고."

대군주도 손뼉을 짝짝 치며 소집의 종료를 알렸다.

"아~, 그나저나 곤란하네. 이번 빈자리는 또 언제쯤에 채워지려나······."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본성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내 다른 군주들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아까까지의 심각했던 분위기치고는 꽤나 싱거운 끝이었다.

"7군주, 언제든 9군주령에 방문하면 환영하겠다."

거왕은 그 말을 남기고 쿵쿵 육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7군주, 6군주는 얼마나 강했던가요?"

흑해 여제는 떠나기 전에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참 밥맛없던 흡혈귀라, 예전부터 으적으적 씹어서 삼켜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거든요."

"······."

"근데 이제 당신도 좀 밥맛이 없어지려고 하네요. 이번엔 그냥 이렇게 넘어가게 됐지만, 앞으로는 주의하자고요. 후후······."

나는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천궁은······?'

전에 3군주령에서 벌였던 발킬로프 건으로 나한테 뭐라도 말을 걸지 않으려나 했는데, 이미 진작 떠나가고 없었다.

다들 떠나가고 이제 자리에 남은 건 1군주 신퇴와 4군주 망자왕뿐이었다.

신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전부 완만히 해결된 것 같아 다행이군."

······완만히가 맞나?

뭐, 과정은 제쳐두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기는 했다. 적어도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으니.

'근데 무슨 용건이야.'

여태 기다리고 있던 걸 보니 다른 용건이라도 있나 싶었다.

이어서 신퇴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이전에 대군주령 변경의 루터스 대산맥에서 7군주 그대가 처치했던 거대한 뱀 몬스터, 기억하는가?"

벨르바고라?

그걸 이 드워프가 어떻게 알고 있나 싶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대가 시장에게 사체를 그냥 맡기고 갔길래, 그 비늘을 내가 좀 가져다가 썼었네. 아주 훌륭하더군. 감사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서 말이네."

아······ 그랬나?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장장이인 그에게 그만한 몬스터의 비늘이야 좋은 재료이긴 했을 터였다.

"혹여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1군주령으로 찾아오게. 그럼······."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는 듯 신퇴도 인사를 건네고서 곧바로 떠나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망자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도 용건이 있는 듯 다른 군주들이 모두 떠나가기를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망자왕이 말했다.

"자네에게 전에 건네받은 권성의 시체, 언데드로 되살리는 게 불가능하더군. 혼이 완전히 소멸해서 말이야."

뭐?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망자의 몸에는 영혼의 잔재가 남아. 언데드 마법은 기본적으로 그 혼을 붙잡아 종속시키는 것부터 시작하는 마법이네. 한데 7군주 그대가 죽인 권성의 시체엔 자그마한 잔재 하나 남아있지 않고 영혼이 깔끔히 소멸했더군."

"······."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소멸해?'

즉살에 죽은 권성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한다.

그럼 설마, 즉살은 대상의 영혼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었던 건가? 그래서 영체에도 상관없이 잘 통한 거고?

'아니, 잠깐만······.'

그럼 그때 던전에서 죽였던 가디언은 뭘까. 가디언한테도 영혼이 있나?

나는 망자왕에게 물었다.

"4군주, 고대의 골렘에 대해서 알고 있나?"

내 뜬금없는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골렘을 제작하는 마법도 영혼과 관련된 마법인가?"

"음, 더미 마법 말인가? 그쪽은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걸로 알고 있네."

"······."

"그건 다른 대상에게서 수확한 영혼의 잔재를 인형의 몸체에 주입하는 마법이지. 이미 죽은 것이든, 애초에 살아있던 적이 없는 것이든, 뭐든 움직이게 만드려면 마력뿐만 아니라 영혼의 잔재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어쨌든 마법 골렘에도 영혼이 들어있기는 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진짜 맞는 것 같은데.'

즉살의 본질이 대상의 영혼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라면, 지금까지 죽인 대상들과도 전부 다 들어맞는다.

능력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지만 안다고 뭐가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 사실이었다. 그냥 그런 거였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언데드한테는 아직 사용해본 적이 없는데, 얘 말대로면 언데드한테도 상관없이 잘 통하겠네.

"그래서, 그에 대해 따지고 싶은 건가?"

내 물음에 망자왕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단지 그대가 한 일이 맞나 궁금해서 물은 것이네.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군."

호기심은 해결했다는 듯 망자왕도 몸을 돌렸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도록 하지. 회담은 잘 다녀오고 다음 회의에서 보세, 7군주."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었기에 그를 붙잡고 물었다.

"처형에는 어째서 반대했었나?"

이제 보니 빚을 갚으려고 그런 것도 아닌 듯한데.

망자왕이 날 돌아보고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저 개인적인 판단이었네. 전투를 벌였다간 왠지 그대의 협박이 정말로 실현될 것 같아서 말이지."

"······."

"하지만 그에 대한 악감정은 없네. 나는 7군주 그대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길 원하니까 말이야."

나는 그런 망자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6군주의 시체는 아마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을 거다."

"······음?"

폭왕은 즉살로 죽이지 않았으니 영혼의 잔재라는 게 제대로 남아있을 것이었다.

내 말에 망자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고맙네. 아주 좋은 재료가 하나 생겼군. 대군주에게 말해봐야겠어."

나는 떠나가는 망자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나도 몸을 돌렸다.

'후우······.'

처형 재판에, 결투에, 심신이 피곤했다.

그만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짧은 여유 (1)

무사히 군주성으로 귀환했다.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지만 아셸과 리프는 이때까지 깨어있었는지, 집사장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나와서 날 맞이했다.

"다행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아셸이 진심으로 안도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치고는 굉장히 격한 반응이었기에 의외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퇴에 흑린 단장에 우르르 몰려와서 날 끌고 갔었으니.

옆에 있는 리프도 우물쭈물 서있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괜찮다."

결국 전부 내 선택으로 벌어진 일일 뿐이니 리프 남매를 탓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물론 후회도 없었고.

뭐, 진짜로 죽을 위기에 놓였으면 후회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 잘 풀렸으니까. 중요한 건 결과 아니겠는가.

성으로 들어가자 굴피로와 뒤늦게 일어났는지 얼굴을 비추었다.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이오, 7군주.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소."

나는 그들에게 별 문제 없이 전부 잘 해결됐다고 적당히 말해주었다.

군주를 죽여놓고 어떻게 별 문제가 없는 건지 굴피로는 몹시 궁금해하는 기색이었지만, 굳이 과정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부터 던지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며 생각했다.

'뭔가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는 기분이네.'

대군주의 말대로 중립국에서 열리는 회담에 동행하는 건 대략 1달 뒤.

6군주 문제도 무사히 매듭지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다음 목표를 위해서는 세인테아로 향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애매했으니까.

신비들을 얻고 스펙업을 하며, 이제 신변의 안전과 군주로서의 포지션은 어느 정도 안정됐다.

이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한 1차적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여전히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이었지만, 그건 마력이라도 쌓지 않는 이상 어차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용사, 그리고 계승자······.'

나는 포크로 집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다음 목표에 대해 생각했다.

게임의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

앞으로 세인테아에서 해야 하는 일들은 바로 그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이 세계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굉장히 거창하다 싶지만 진짜로 거창한 게 맞았다.

왜냐면 무려 마왕에 부활을 저지할 성검의 다음 계승자를 찾아내고, 그녀를 현 용사와 무사히 접촉시켜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무조건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니면 세상이 멸망할 텐데 피한다고 뭘 어쩌겠어.'

일단 세상이 멀쩡해야 나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실제로 라사를 플레이하며 진행되는 큰 줄기의 스토리가 바로 그거였였다. 용사 계승자와 함께하는 천방지축 모험.

지금의 내게는 시스템이나 형편 좋은 가이드 라인 따윈 없기에 그걸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고.

대략적인 맥락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갈 길이 태산이다, 진짜.'

어차피 일단 계승자와 용사부터 만나고 봐야 할 일이기에 당장의 고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알게 모르게 어떤 나비효과를 미쳤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찾기는 해야겠지만.

나는 상념을 마치고 다시 눈앞의 스테이크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근처에 서있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1군주 일행이 타고 왔던 와이번은 아직 성에 있나?"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알아서 돌아갔습니다."

······알아서 돌아가?

순간 고개가 갸웃했지만 뭐 이상할 건 없다 싶었다.

와이번은 영수라 불릴 만큼 굉장히 영리한 생물이었으니 말이다.

'와이번이라······.'

그나저나 와이번 같은 게 하나 있으면 좋긴 할 텐데.

군주들 몇몇이 타고 다니는 걸 보니 문득 필요성이 느껴지기는 했다. 이곳저곳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신비들도 얻었으니 타고 다니다가 까딱 떨어져서 죽을 걱정도 없고 말이다.

와이번은 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비행 수단이자,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평범한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고, 날쌔며, 영리한 아룡종.

하지만 워낙 희소하기도 하고, 포획이나 사육은 불가능에 가까운 데다가, 놈들 고유의 그 '까다로운 특성'상 실제로 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와이번을 구하고 싶으면 내가 직접 놈들의 서식지로 찾아가야만 할 텐데······.

'그것도 일단 회담부터 다녀오고 나서 생각해봐야겠네.'

마찬가지로 시간이 애매해서 이동할 겨를이 없었으니 말이다.

달그락.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남은 시간 동안은 성에 눌러앉아서 푹 쉴 생각이었다.

그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고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

휴식이라고 해도 생활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낼 뿐.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굴피로와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리곤의 상태도 간간이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계속 성에서 지낼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그렇소. 이렇게 사람 많고 넓은 공간은 영 나한테 맞지가 않아서 말이오. 리곤만 완전히 회복되면 바로 나가겠소."

나는 굴피로에게 슬쩍 말했다.

"혹시 제자 같은 걸 둘 생각은 없나?"

그가 뭔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제자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소만.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별 건 아니고, 내가 아는 연금술사 중 재능이 뛰어난 젊은 연금술사가 있어서 말이지."

다행히 굴피로는 관심이 끌린 듯한 기색이었다.

"누구요? 이 도시에 있는 연금술사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에 있는 알키마스라는 공방의 주인이다.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한번 찾아가봤으면 좋겠군."

"음······ 알겠소이다. 7군주께서 그렇게 말하니 조금 호기심이 생기긴 하는구려."

그렇게 굴피로에게도 스칼릿에 대해서 말을 해두었다.

기왕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사제지간으로 좋게 진전되길 바라면서.

한 번은 그냥 성안을 혼자 산책하며 돌아다니다가 의외의 광경을 마주하기도 했다.

야외 연무장 구석에서 병사들 몇몇이 모여서 체스를 두고 있던 것이다. 한쪽에 동화 몇 닢을 쌓아두고.

"······응? 헉!"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허겁지겁 일어나서 경례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하며 체스판을 빤히 내려다봤다. 기사도 아니고 병사들이 체스를 다 두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둬봐라."

"예? 예, 옛!"

어떻게 두나 좀 구경하려고 했더니, 병사들은 손을 덜덜 떨며 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돈이 아니라 목숨이 내걸린 듯.

결국 나는 그들을 놔주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체스라······.'

뭐, 이 세계에서 보드게임이라 해봐야 체스가 고작이긴 하겠지.

괜히 흥미가 솟아오른 나는 집사장에게 시켜서 체스판과 말을 준비하게 했다.

사실 나도 체스는 꽤 둘 줄 알았다.

이것저것 뭐든 안 좋아하는 게 없는 동생의 다양한 취미에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려줬었으니까.

체스를 함께 둘 상대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셸이었다.

"······."

내 부름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아셸이 테이블 위의 체스판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짓을 했다.

"체스를 둘 줄 아나?"

"예, 알긴 압니다만······."

아셸은 뜬금없이 웬 체스인가 싶은 기색이다가도 어쨌든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말하기로 대군주성에서 견습 기사로 있을 때 동기들에게 배워서 몇 번 둬봤다고 했다.

'초보라는 거군.'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맞수가 아니라 초보와 두는 것도 슬슬 가르치면서 두는 맛이 있었으니까.

"가볍게 즐기자고 두는 거니 부담은 갖지 마라.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줄 테니."

"예······."

아셸이 어째서인지 묘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흰말을 주고서 흑말을 가져갔다.

아셸이 먼저 말을 움직이며 게임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

나는 멍하니 체스판을 바라봤다. 아셸의 말들에 완전히 갇혀버린 내 킹을.

뭔가 하나둘씩 꼬이는가 싶더니 전세가 기울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뭐지?'

왜 잘 두지?

별로 안 둬봤다면서 이게 뭔데.

내가 장고 끝에 말을 움직이자마자 아셸이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체크메이트입니다."

"······."

나는 굳은 얼굴로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졌군."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게임 시작하기 전에 잘 모르면 가르쳐주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이건 뭐 아주 시원하게 처발렸기 때문이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내 눈치를 보고서 아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내게는 수치심만 더 자극될 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정말로 몇 달밖에 안 둬본 게 맞나?"

"예."

아셸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 성격에 굳이 이런 거에 거짓말을 할 리도 없다.

그럼 진짜로 이게 고작 몇 달밖에 안 둬본 사람 실력이라고?

'천재인가?'

아셸이 체스를 잘 둔다는 정보는 게임에서도 나온 적 없는 사실이었다.

얘는 몸 쓰는 일 말고는 다른 것들은 별로 못하는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내심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어쨌든 고작 한 판으로 상대와의 레벨 차이를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한 판 더 두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2번째 판은 처음 판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패배했다.

곧장 3번째 판이 이어졌다.

***

"······."

아셸은 반대편에서 신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7군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서 입술을 슬쩍 깨물고서 참았다.

평소에도 그가 이 정도로 집중한 모습은 별로 본 적 없었는데, 고작 체스에 정말 진심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참 알 수 없는 분이야.'

이 사람의 목적은 뭘까, 그리고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처음에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은 이제 와선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적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신을 가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작 면식 하나 없는 남매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군주와 척을 지고, 대군주성으로 끌려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서 평소처럼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셸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의 어깨에 지금 얼마나 무거운 짐들이 얹혀있을지를.

어쩌면 지금 이렇게 의미 없이 체스를 두는 것도 근래 무거워진 주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어쩔 때는 한없이 냉정하지만 어쩔 때는 그 속에 깃든 선의와 친절함이 분명히 느껴지는, 그런 7군주의 면모가 좋았다.

'······.'

좋았다?

아셸은 자기가 생각하고서 움찔 놀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고개를 드니, 장고 끝에 수를 마친 7군주가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차례다."

"아, 예."

아셸은 곧바로 말을 움직였다.

"체크메이트입니다."

"아."

짧은 여유 (2)

리프 남매는 성에서 지내면서도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았다.

그들의 처지상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특히 리프는 그 정도가 심했다.

집사장의 보고로는 시중을 드는 하녀에게 잡일이든 뭐든 괜찮으니 뭐라도 자기가 할 일을 달라고 했다고.

"내가 보기에는 동생 때문에 많이 불안해하는 기색이었소."

굴피로가 혀를 차며 말했다.

"평소에도 몇 번씩은 동생의 광혈병이 완전히 치료된 게 맞냐고 내게 묻고 있소, 거의 강박에 가깝게."

"음······."

"아마 언제든 또 병이 발발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계속 7군주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싶소."

그런 건가?

폭왕이 죽으며 리곤이 앓고 있던 광혈병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재발될 턱이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이미 충분히 설명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이해를 해도 굴피로의 말마따나 강박의 영역에 가까운 불안일 것이었다.

지난 몇 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러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둘의 처우에 대해서는 아직 딱히 확실히 생각한 게 없다.

그야 당연했다. 나도 특별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그들을 구한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리프의 걱정대로 그들을 쫓아낼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리곤이 미래의 살귀 리프리곤이라는 걸 알았으니 웬만해선 쭉 계속 곁에 두고 싶었지.

그리고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니 잘된 일이었지만······.

'한번 제대로 키워봐야 되나?'

두 사람 모두 재능이라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리프 쪽은 평범한 일반인에서 고작 몇 년만에 40레벨 수준까지 강해졌다고 하니까. 말할 것도 없이 천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히나 리곤 쪽은······.

'적어도 앞으로 5년 안에 칼데릭의 군주가 됐던 녀석이지.'

저번에 스쳐갔던 기억 속에서 대군주가 마족과 계약이니 뭐니 했던 걸로 봐서, 아마 마족의 힘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비정상적인 성장이었다.

지금의 평범한 수준에서 고작 몇 년만에 군주급 강자가 됐다는 건데······ 진짜 뭔 불세출의 천재라도 되나?

"리곤도 이제 다 회복됐다고 했었지."

"그렇소."

몇 년이나 광혈병에 좀먹힌 탓에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었다고 하지만, 굴피로의 활약으로 회복은 굉장히 빨리 되었다.

나야 그가 말하는 대로 포션의 재료만 조달해주면 됐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재능이 있는 원석들이라면 계속 놀려두고만 있는 것도 아깝긴 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성에서 계속 머무르는 건 자기들도 불편해하는 것 같다니 뭐.

다음날, 나는 곧바로 리프 남매와 아셸을 불렀다.

"굴피로는 이제 곧 성에서 나갈 것이다. 너희 둘은 계속 이곳에서 지내고 싶으냐?"

남매에게 묻자 리프가 우물쭈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송구하지만 허락만 해주신다면······ 시키실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군주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셸."

"예."

"한번 두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쳐봐라."

그에 아셸도, 리프도 깜짝 놀랐다.

"······제가 이들을 말입니까?"

"그래. 혹시 내키지 않나?"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셸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검술을 가르쳐보라는 요구가 아셸에겐 꽤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성에 기사들이야 넘치도록 많았지만 그중에 가장 강한 기사는 당연히도 아셸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녀에게 시켜보려고 한 건데······.

"너희는 어떠냐."

나는 남매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리곤이 의욕이 충만한 기색으로 냉큼 대답했다.

"당연히 좋습니다! 가르쳐주시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 배울게요!"

리프는 침음을 흘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희가 너무 과분한 은혜들을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이왕이면 제대로 검술을 배워 기사로서 성에 남아있는 게 좋지 않겠나?"

"······예?"

그 말에 리프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둘 모두 배울 마음이 있다면 열심히 배워보도록. 아셸은 이곳 7군주령에선 가장 강한 전사다."

내 칭찬에 아셸이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껏 누굴 가르치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괜찮다. 일단 한번 가르쳐보도록."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성에 있는 다른 검술 교관들에게 시키든가 하면 되니까.

그렇게 당장 내 눈앞에서 아셸의 지도가 시작되었다. 나는 한편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일단 아셸은 둘을 나란히 앉히고서 리프부터 등에 손을 얹었다.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을 보니 내부에 마력을 흘리는 모양이었다.

마력 연공 같은 것에 대해선 1도 모르는 나는 수준 파악을 하려는 건가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이내 리프의 등에서 손을 뗀 아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연공을 배운 지 3년 정도 됐다고 했었지?"

"예."

"이만한 마력을 그 짧은 시간에 안정적으로 잘 쌓았구나."

역시 리프의 재능은 생각했던 대로 뛰어난 모양이다.

다음으로 아셸이 리곤의 등에 손을 얹고 마력을 흘렸다. 그리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미 마력로가 뚫려있는데, 예전에 연공을 배운 적이 있었니?"

"아, 네. 병에 걸리기 전에 검술하고 마법을 조금씩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배운 적이 있었다고?'

리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아예 없길래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럼 애초에 마력이 있는데 광혈병에는 왜 걸렸던 건가 싶었다. 쌓은 마력이 너무 미약해서 그랬나?

"저기, 아셸 경."

리곤이 갑자기 아셸을 불렀다.

"제 몸으로 흘리고 계신 마력, 이거 그냥 제가 움직여도 될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어?"

그리고는 눈을 감더니 집중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그에 아셸의 인상에 의아함이 퍼지더니 곧 경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른 채 멀뚱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만, 리곤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는 마력의 흐름이 약간 달라졌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잠시 뒤에 리곤은 좀 전보다 훨씬 상쾌한 얼굴로 눈을 떴고, 아셸은 멍하니 등에서 손을 뗐다.

"어떠냐."

나는 그 반응의 이유가 궁금해서 슬며시 물었다.

그녀가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는 리곤을 괴물 보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친화력입니다. 아무리 체내로 들어왔다고 해도, 제 것도 아닌 마력을 그리 자유롭게······."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리곤을 바라봤다.

뭔 말인지 잘 알아듣진 못하겠어도 아셸이 이렇게 놀랄 정도면 어마무시한 재능인 듯했다.

'역시 보통 천재가 아닌가 보네.'

진짜 잘만 키워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메인 스토리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도 않았지만 그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면 말이다.

일단 연무장으로 이동해서 아셸에게 본격적인 지도를 계속해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군주님."

모습을 비춘 집사장이 보고했다.

"2군주님께서 성에 방문하셨습니다."

"······?"

2군주? 갑자기?

***

나는 일단 세 사람을 놔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성의 홀로 들어온 뇌후는 어딘가 상당히 초췌한 기색이었다. 며칠 잠은 못 잔 사람처럼.

"무슨 용건이지?"

그녀가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죠."

"찾아온 용건부터 말해라."

"저번 결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요. 됐습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역시 그것 때문에 찾아왔나 싶었다.

"따라와라."

내 방으로 이동해서 뇌후와 테이블에 마주 보고서 앉았다.

"이제 이야기해라."

"······."

그녀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사나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며 일방적인 적의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내려앉은 침묵 속에 나는 기다리기 지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정령에 대한 문제로 온 거겠지."

"······!"

그녀가 이를 까득 깨물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왜 내 정령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버린 거죠? 아니, 존재감조차 더 이상 아예 느껴지지 않게 됐다고요!"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야 소멸했으니까."

"······뭐라고?"

"네가 가진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는 완전히 소멸했다는 거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질 않으니 존재감이 느껴질 리가."

숨길 것도 없었기에 면전에 대고 팩트를 말해주었다.

뇌후가 완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날 바라봤다.

나는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며 생각했다.

엘프의 종족 특질인 정령술.

정령이라는 건 엘프와 완전히 별개의 자연적인 존재다.

하지만 오로지 엘프만이 정령과 계약하고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게 가능하기에, 엘프의 종족 특질로 불리는 것이었다.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강하게 타고난 엘프는 그만큼 많고 강한 정령들과 계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령술이라는 건 선천적으로 타고나야만 하는 재능의 영역.

그리고 뇌후는 이 대륙에서 그 축복을 가장 강하게 받은 엘프 중 하나였다.

그래서 라크시아쯤 되는 대정령과 계약할 수 있었던 것이고, 칼데릭의 군주도 될 수 있었던 것이지.

'근데 이제 그 대정령이 없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강의 전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레벨을 바라보며 약간의 숙연함을 느꼈다.

그녀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곧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소, 소멸했다고? 라크시아가······?"

"그래."

"······왜? 어째서?"

"그야 내가 소멸시켰으니까."

그녀의 얼굴에 불신감과 깊은 절망감이 차올랐다.

"우,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요. 라크시아가 소멸했을 리가······."

현실을 부정하며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딱 끊어서 말했다.

"되살릴 방법은 없다. 미련을 버리고 깔끔하게 포기해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어진 건 분노였다.

뇌후는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나는 조금 황당해졌다.

'저거 우냐?'

그녀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7군주 당신, 죽여버릴 거야. 진짜로 죽여버리겠어."

"······."

"반드시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어떻게든지!"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부터 좋은 관계야 아니었지만 어째 이번 일로 그녀와는 완전히 척을 진 것 같았다. 뭐, 그럴 만했지만······.

'······그럼 굳이 좋게 갈 필요도 없나?'

나는 군주들과도 웬만하면 모두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진 군주가 있다면 차라리 확실히 우위를 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혹여 후에 걸림돌이 될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싸움도 지가 먼저 걸어놓고 저러는 꼴이 짜증나기도 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겠지."

내 말에 뇌후가 멈칫했다.

"대정령을 잃고 힘이 많이 약해진 것 같은데, 그걸 대군주가 알아도 계속 군주위를 유지할 수 있겠나?"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좀 전보다 훨씬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다, 당신······."

협박이라는 걸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수치심과 분노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얼굴로, 그녀가 전신에서 뇌기를 뿜어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다른 정령들까지 전부 잃어도 상관없다면 공격해도 좋다."

"······."

그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서히 뇌기를 도로 가라앉혔다.

나는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다시 와서 앉아라."

짧은 여유 (3)

제자리에 굳은 듯 우두커니 서서 날 노려보기만 하는 뇌후.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차마 내 말대로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앉기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시 말했다.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나가도 상관없다."

"······."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군주 자리를 걸고 넘어지는 협박은 아찔한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이를 부서져라 까드득 갈며 천천히 자리로 되돌아와서 앉았다.

"당신······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그런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할 말을 궁리했다. 딱히 다음 말을 생각하고 부른 건 아니었기에.

어쩔까. 여기서 좀 더 몰아붙여볼까, 아니면······.

"대군주께서 사실을 알면, 당신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사이 뇌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역협박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6군주까지 죽여놓고서 파렴치하게 같은 군주의 전력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았습니까. 대군주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당신도 결코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물론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군주는 칼데릭 최대의 전력이고, 6군주처럼 죽이지 않았다고 한들 그 중대한 전력을 깎아먹은 것도 죄라면 죄였으니.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대군주가 내게 아예 아무런 책임도 물으려 하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봤자지.'

애초에 이건 서로에게 걸린 리스크의 무게가 전혀 맞지 않는 문제였다.

나와 달리 지금 뇌후는 가당치도 않은 협박에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절박한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당장 대군주에게 사실을 알리러 가볼까."

그에 뇌후가 기겁하며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상황이 누구에게 불리한 건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뾰족한 귀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 날 노려봤다. 이제는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이, 이 비열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내 정령을 소멸시킨 것이겠지. 당신은 명예도 긍지도 없습니까? 그래고 군주라는 자가 이렇게 치졸하고 더러운 협박을!"

갑자기 뭔 또 명예 타령이래.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글쎄, 결투에 패배한 다음에 꼴사납게 찾아와 진상이나 부리고 있는 누구만 할까."

"······지, 진상?"

"이미 결론이 난 문제에 꼬투리를 걸고 넘어진 게 누구였지? 결투를 먼저 제안한 건 또 누구였고."

"······."

"심지어 그 일격은 정말로 날 죽일 생각으로 날린 일격이었지.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남탓만 하고 있을 건가? 이제야 다른 군주들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가는군. 정말로 꼬맹이가 떼쓰는 거나 다름이 없어."

신랄하게 말을 쏟아내자 그녀가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우, 웃기지 마. 당신이 뭘 안다고······ 어쨌든 당신이 죽인 건 죽인 거잖아······."

더듬더듬 목소리를 뱉어내지만 방금 말들이 가슴에 제대로 꽂힌 듯 영혼이 없다.

그녀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2군주."

"······."

"앞으로 내 앞에서 아까 같은 같잖은 위협이나 협박은 하지 마라. 그런 거슬리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말고."

그녀는 분함과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여전히 날 노려봤다.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보군."

하지만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곧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마지막 자존심인 듯했지만 처량해보일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분한지 꽉 깨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짜 개빡쳤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힘도 크게 잃은 마당에 그걸 빌미로 잡혀 협박까지 당하고 있으니.

군주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이런 치욕을 겪은 일이 언제 또 있었겠는가.

일단 누가 위에 있는지 위치 차이를 확실히 새겨주긴 했지만 이래서야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한풀이 꺾였어도 나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점점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

그냥 나중에 생각하고 대충 넘어갈 걸 괜히 붙잡았나도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듭은 제대로 지어야겠지.

방법은 대충 2가지가 있는 듯했다.

하나는 정말 완전히 몰아붙여서 아예 고개도 처들지 못하게 하는 것.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힘들겠고.'

군주위가 강력한 협박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목숨줄을 잡은 것도 아니다.

너무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간 그녀의 자존심 강한 성격상 그냥 터져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나게 채찍질을 했으니 이제 당근을 주는 것.

마침 문득 생각난 게 있기는 했다.

정령이라는 건 엘프의 종족 특질과는 별개로 자연적인 존재이기에 그들의 정령술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도 정령은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 혹은 스토리상의 조력자나 적으로서 정령은 간혹 등장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뇌후가 다루는 천둥의 정령들 역시 등장한 적이 있었고, 라크시아만큼 강한 대정령 또한 있었다.

그거라면 만약 그녀가 직접 찾아가서 그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한다면 이전의 힘을 되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솔직히 그놈이 계약이 가능한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왜냐면 놈은 게임에서도 처치해야 할 보스로 등장했던 만큼, 누군가와 계약 따위를 맺을 순한 정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놈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당근으로 휘두르기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할 것이었다.

"나는 라크시아만큼이나 강한 천둥의 대정령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내 말에 분을 씹어삼키고 있던 뇌후가 흠칫 놀라서 돌아봤다.

"······뭐라고요?"

"네가 계속 그런 태도를 고수하겠다면 대화는 이만 여기서 마치지. 돌아가라."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내 태도가 어떻다는 건데요! 계속 말해봐요."

그러면서 방금까지 은근히 뿜어내고 있던 살기는 싹 거두는 꼴이 가관이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네가 다뤘던 라크시아 못지않게 강한 천둥 정령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녀의 눈이 부릅 크게 떠졌다.

"그리고 그것을 네게 알려줄 생각도 없지는 않았었지."

"거, 거짓말.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않으면 된다."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쉬운 건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적의만 뿜어내는 상대에게 굳이 그런 친절을 베풀 필요가 있겠나? 어떻게 생각하지?"

"······."

"대답해라, 2군주. 아니면 이야기는 이만 여기서 마치든가."

그녀가 반신반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잠시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하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서 말했다.

"미안······ 해요. 내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었습니다."

그 사과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한순간에 이렇게 저자세가 되는 걸 보니 정말 정령이 중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순간 호기심이 솟아올랐지만, 생각으로만 하고 참았다.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그 정령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고작 사과 한 번으로 되겠나?"

"······읏."

그녀의 인상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럼, 결국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정말 당신은······."

"아니, 네게 딱히 바라는 건 없다."

나는 말을 끊고서 말했다.

"단지 이만한 정보를 그냥 넘겨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반대로 생각해봐라, 그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지?"

"······."

"그러니 앞으로 좀 지켜볼 생각이다."

2군주 뇌후.

비록 힘을 크게 잃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90레벨, 충분히 거대한 전력이다.

이렇게 미끼를 걸어두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손쉽게 빌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내 말이 알아서 기라는 의미로 들렸는지 뇌후는 또다시 사나운 얼굴이 됐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았다.

하지만 뭘 어쩌겠나?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정령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데.

"날 그렇게 기만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아니, 애초에 거짓말이었다면······."

나는 말을 끊고 말했다.

"정 그렇다면 그 부분은 맹세하지.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

"설마 이것마저도 기만이라고 날 모욕하지는 않겠지, 2군주?"

칼데릭의 군주위는 대군주의 임명으로만 정해지는 만큼 혈족의 계승 따위는 없다.

세인테아에서 백성들이 황족의 피를 신성하다 믿고 그들의 군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칼데릭에서 역시 군주는 감히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지고한 존재로서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도 군주들 중 몇몇은 혈족이나 일족으로 거대한 가문을 이루고 있기도 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뇌후의 케리온느 가문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칼데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출신인 만큼, 그에 대한 자존감과 권위 의식이 누구보다 드높은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같은 군주인 내가 이렇게 이름과 명예를 걸어버린다고 말하면, 그건 그녀에게 있어 결코 어겨질 수 없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거였다.

물론 명예고 자시고 후에 일이 수틀린다면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요. 당신의 말을 믿죠."

뇌후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럼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지."

나는 살짝 물러나는 말을 해주었다.

"지금이야 말하는데, 네 정령을 소멸시킨 건 나로서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면 위협적이었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으니까."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웬만하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으니까.

"······그만 가보겠어요."

그녀는 허탈함과 이런저런 감정들이 섞인 듯한 복잡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힘이 빠져서 축 늘어져 보이는 걸음걸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쟤를 써먹을 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힘은 좀 잃었다고 해도 뇌후는 얼마든지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필요할 때 힘을 빌릴 수 있게 됐으니 좀 고민을 해봐야······.

'······아.'

그때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와이번.

놈들은 희귀하기 그지없는 아룡종인 만큼 대륙에서도 서식하는 장소가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칼데릭에서 서쪽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글라이드 대산맥이었다.

평범하게 이동한다면 도착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약 와이번을 타고 이동한다면?

"이봐, 2군주."

나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가 또 뭐냐는 듯 걸음을 멈추고서 돌아봤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와이번을 타고 왔지?"

"······그런데, 왜요?"

"여기서부터 와이번을 타고 글라이드 산맥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그녀가 뭔 뜬금없는 걸 묻느냐는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적어도 닷새 안에는 도착하겠죠. 갑자기 그건 왜 묻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이동하지."

"······뭐라고요?"

그녀가 두 눈을 깜박였다.

회담까지 남은 시간은 약 1달.

그 전에 다녀오기에는 충분했다.

와이번 (1)

"잠깐만."

뇌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내 와이번으로 7군주 당신을 글라이드 산맥까지 데려가라는 겁니까?"

"그래."

"내가 어째서······!"

그녀는 항의를 하려다가 곧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바로 방금 전 대화한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 정령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는 말.

"산맥까지 데려다주면······ 그 정령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건가요?"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지. 고작 이 정도 도움이 정보의 가치와 무게가 맞는다고 생각하나?"

뇌후의 힘을 빌릴 기회를 고작 와이번 왕복 한 번으로 퉁칠 생각은 없었다.

언제 한 번 크게 써먹기 전까지는 이런 자잘한 도움들은 최대한 많이 받아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보를 미끼로 걸고 있는 이상 그녀는 사소한 부탁쯤은 거절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올 생각이었군요? 언젠가 한 번 큰 도움을 받기 전까지 날 계속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고?"

"······."

어라.

그런데 단번에 간파당해버렸다. 그래도 역시 군주는 군주인 모양.

하지만 뭐 눈치챈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뇌후에게 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거절할 건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눈을 감고서 깊은 한숨을 내쉰 뇌후가 물었다.

"난데없이 그곳에는 왜 가겠다는 거죠?"

"와이번을 잡으러 간다."

"굳이 내게 데려가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편이 빠르니까."

원래 글라이드 산맥에는 회담에 다녀온 다음 갈 생각이었다. 남은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 다녀올 수 있다면 당장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담까지는 푹 쉬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솔직히 며칠 쉬고 나니 벌써부터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진 참이기도 했고.

전부 결과적으로는 목숨이 걸린 문제라 그런가, 아니면 얼마 전까지 너무 열심히 신비를 찾고 다녀서 관성이 붙은 건가.

내가 원래 이런 부지런한 성격은 절대로 아니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니 준비하고 있어라, 2군주."

뭐, 할 일이 태산인데 살아남으려면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이기는 해야지.

요 며칠 동안 짧게나마 만끽했던 여유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

"글라이드 산맥이라면······?"

"와이번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뇌후와 대화하는 사이, 위층에서 계속 리프 남매를 살피고 있던 아셸이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갑자기 와이번들의 서식지로 향하겠다는 내 말 때문이었다.

"와아······."

한쪽에서 명상이라도 하는 듯 정좌를 하고 있던 리곤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와이번이라는 말에 관심이 쏠린 모양. 하지만 물론 데려갈 수는 없었다.

집사장에게 시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성안에 위치한 공터에 뇌후와 한 푸른색 갑주를 걸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각각 서있는 거대한 2마리의 생물체, 와이번.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위기사도 함께 왔었나?'

[Lv. 83]

레벨도 아셸보다 무려 2레벨이나 높은 강자였다. 거기다 와이번까지 타고 다니는 모양.

뇌후의 가문이야 워낙 거대한 가문이니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크네.'

[Lv. 67]

[Lv. 62]

가까이서 보니 와이번의 크기는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레벨들도 상당했다.

더 레벨이 높은 뇌후의 와이번은 그녀와 상반되게 붉은색이었고, 호위의 와이번은 초록색이었다.

뇌후는 나를 보고 멀리서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채였다.

그르르.

그러자 그녀의 와이번 역시 내게 적의를 드러내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주인의 감정을 읽고 나를 적으로 인식이라도 한 건가? 똑똑하다.

뇌후가 와이번의 목 아래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얌전하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딴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생각해보니 더 분노가 올라왔는지 목소리가 사나웠다.

군주를 뭔 배달부 비슷하게 써먹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2명씩 타고 가면 되겠군."

원래 아셸까지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와이번도 2마리니 상관없을 듯했다.

그런데 뇌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2명씩? 지금 내 와이번에도 사람을 태우겠다는 말인가요?"

"안 보이나?"

나는 날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온 아셸을 가리켰다.

뇌후가 아셸을 바라보고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때 뇌후의 호위기사가 나서서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7군주님, 두 분 모두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와이번을 쳐다봤다.

3명이 함께 타도 상관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그래도 둘씩 타는 게 낫지 않나?

다시 뇌후를 쳐다보니 그녀는 완전히 질색하고 있다가 안도한 기색이었다.

자기 와이번에 다른 사람을 태우기가 싫은 건가,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랑 함께 타는 게 싫은 건가.

그녀라면 격이 떨어진다 생각해서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혹시 성에 3인용 안장이 있습니까? 있다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호위기사의 물음에 곁에 서있던 집사장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말렸다.

"됐다. 그냥 나 혼자서 가지."

굳이 아셸까지 동행시킬 필요는 없긴 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보름 안으로는 돌아올 테니, 그동안 남매를 잘 지도하며 기다리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호위기사의 안장은 원래부터 2인용이었기에 안장을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지금처럼 손님을 태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2인 안장을 타고 다니는 듯했다.

"쉬이, 착하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와이번을 호위기사가 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이게 바로 와이번을 가축처럼 사육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였다.

워낙에 강하고 사나워서 포획부터가 매우 어렵지만, 와이번은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지금껏 많은 이들이 와이번을 길들이려고 들었다가 시작부터 실패한 이유가 하나같이 똑같기도 했다.

포획해서 가둬놓으니 굶어 죽을 때까지 먹이를 먹지도 않거나, 그냥 스스로 자해해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과 동승하는 게 아니면 다른 와이번을 빌려타는 것도 불가능하지.'

와이번을 진정시킨 호위기사가 먼저 놈의 등 위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뒤쪽에 올라탔다.

갑자기 내가 뒤에 나타나자 그녀가 흠칫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라며 도로 손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말을 안 했군."

이 세계에서 순간이동이 흔한 능력도 아니고, 갑자기 등뒤를 무방비하게 잡히면 놀랄 만도 했다.

어쨌든 대충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아셸이 아래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펄럭!

뇌후가 탄 와이번이 먼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주위에 돌풍이 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안장 앞쪽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쥐었다.

곧 내가 탄 와이번도 뇌후의 와이번을 따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떠오르자마자 순식간에 가속이 붙더니 와이번은 가공할 속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보이는 군주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서 점처럼 보였다.

'으음.'

간만에 놀이기구 타는 기분을 만끽하며 쥐고 있는 손잡이와 허벅지에 더 힘을 불어넣었다. 놓쳤다간 바로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서도 놀이기구를 즐겁게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닷새는 이동해야 한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판타지 만화나 영화에서 보면 그렇다. 평범한 사람도 와이번이나 그리폰 같은 걸 편하게 잘도 타고 다니지 않는가?

실제로 겪으니 역시 허구는 허구일 뿐이었다.

정면에서 쉬지 않고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갯짓 한 번 할 때마다 위태롭게 덜컹거리는 균형에.

날짐승에 탄다는 건 말이나 마차 따위와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호위기사는 내가 빙의한 이 몸이 멀미를 거의 하지 않는 체질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니면 진작 그녀의 등에 토했을 테니.

와이번을 구한다면 이 정도 속도의 비행은 어차피 적응해야 될 문제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비행을 즐기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다고 정말 즐거워지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의 적응은 금방 되었다.

여전히 승차감이 편히 느껴지지는 않았어도 경치를 구경하는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오······.'

나는 아래로 펼쳐진 푸르른 산봉우리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도라도 살피면서 어디쯤 지나고 있는 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빈손이 없기에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와이번은 지치지도 않는지 줄곧 한나절은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비행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고 해가 슬슬 질 때가 되서야 지상으로 내려섰다.

"여기가 어디쯤까지 온 거지?"

"대략 이쯤입니다."

호위기사가 지도의 한곳을 가리키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도로 집어넣었다.

마차를 타면 족히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리를 고작 한나절만에 왔다.

날아다니다 보니 지형의 제약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저녁 식사의 준비는 호위기사가 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와이번의 등에 달린 짐자루에서 식기들을 꺼내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는 달리 맡을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의 몫이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83레벨이나 되는 초인한테 고작 요리나 시키고 있었으니까.

'기사가 아니라 뭔 하인이야?'

한쪽에서 와이번의 옆구리에 기대 앉아있던 뇌후가 입을 열었다.

"비올라······."

그러다가 내 눈치를 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슬며시 호위기사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그러나 초감각 때문에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저녁 뭘로 할 거야?"

"치즈 스튜입니다."

"스튜는 질렸어. 고기 구워줘."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로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나는 더 어이가 없어져서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격식 없이 말 건네는 투를 보니 그냥 평범한 주종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뇌후가 군주가 되기 전까지는 가문의 귀한 영애이긴 했을 테니, 뭐······.

내 시선을 의식한 뇌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계속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호위기사는 순식간에 고기를 구울 틀을 설치하고, 훈제된 고기를 꺼내 불에 한 번 더 굽기 시작했다.

이내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다 구워지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에 뇌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

"와이번을 구하겠다고 했었죠."

"그래."

"7군주 당신은 얼마 뒤에 회담에 가야 하잖아요. 그 안에 구할 수나 있겠어요?"

그녀가 조금은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건 말 따위를 길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으니까.

오로지 운이라면 운, 와이번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어느 한 마리라도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와이번 (2)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내 말에 뇌후가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와이번.

이놈의 까다로운 특성은 물론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었기에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와이번을 얻는 퀘스트는 몇몇 유저들의 키보드를 부숴먹게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었으니까.

심지어 뭔 히든이나 특별 퀘스트도 아니고, 그냥 스토리를 거쳐가면서 탈것을 얻기 위해 당연히 클리어해야 하는 퀘스트였는데도 말이다.

한창 라사에 미쳐서 하루에 자는 시간만 빼고 종일 플레이했을 적의 나도 꼬박 사흘은 밤새워 겨우 얻었을 정도니 오죽할까.

'솔직히 허탕만 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긴 한데.'

그럼에도 애매하게 남은 시간 동안 빈둥거리고만 있기 아까워 찾아가고 있는 거긴 했지만, 사실 이유 하나가 더 있었다.

게임에서 내가 획득했었던 와이번.

몇십 분은 고민해서 '띠용'이라는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을 붙어줬던 그 녀석.

녀석이 서식했던 장소가 마침 공교롭게도글라이드 현재 향하는 목적지인 글라이드 산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 찾아가도 같은 장소에 그놈 둥지가 있으려나?'

호기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놈이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도 다른 네임드 NPC나 몬스터들처럼 멀쩡히 존재할지, 그리고 나와 마주친다면 날 주인으로 인정할지.

그래도 이왕 와이번을 얻는다면 게임에서도 함께했던 녀석을 얻고 싶긴 했으니 말이다.

"하나만 묻죠, 7군주."

그때 뇌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군주를 죽인 진의가 대체 무엇이죠?"

타오르는 모닥불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집에서 이미 말했을 텐데."

"누가 그걸 묻는 건가요? 당신의 그 잘난 최선의 판단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것이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하,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대군주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죠. 그래서 당신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결정하신 모양이지만, 나는 절대로 당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야 어련하실까.

나는 그녀에게 역으로 물었다.

"너는 첫 군주회의 때부터 계속 내게 반감을 드러냈었지.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능력도 신원도 확실치 않은 외부인을 지고한 군좌에 다짜고짜 앉히다니, 아무리 대군주의 결정이라 해도 거기에 순순히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결국 당신은 6군주까지 죽이며 질서에 큰 혼란을 일으켰죠. 그러니 나는 여전히 내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당신의 알 수 없는 괴이한 능력 때문에 라크시아를 잃긴 했지만······."

말하다가 또 화가 끓는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잇는다.

"다른 군주들이야 어떤지 몰라도 난 진심으로 칼데릭의 안정을 원합니다. 물론 오늘 당신에게 다짜고짜 찾아가서 그런 식으로 막말을 퍼붓고 따진 건 실책이었어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증오를 빼놓고 봐도, 당신은 칼데릭에 있어 불안하기 그지없는 요소라는 말입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뇌후는 확실히 아까 성에서와 달리 냉정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선악의 성향을 떠나서, 게임에서도 그녀는 진심으로 칼데릭의 평화를 바라는 인물로 나오긴 했었으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이 워낙 상식 밖인 거지, 뇌후가 특별히 깐깐하거나 까다로운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보다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군주가 될 수나 있었겠나?

"말했다시피 내게는 아무런 꿍꿍이도 없다."

뇌후가 바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걸 신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

***

날이 밝고 이동은 계속되었다.

글라이드 산맥에 도착하기까지는 뇌후가 말했던 대로 정확히 닷새가 좀 안되게 걸렸다.

'오.'

글라이드 산맥은 지나치며 봤던 다른 산맥들보다 독특한 경관이었다.

특히나 다른 산맥들보다 자잘하게 솟아난 봉우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고 나는 곧 열심히 눈을 굴렸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녀석의 둥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와이번은 무리 생활을 하지 않고 철저히 단독 생활을 하는 생물이라 했다.

그런 놈들의 거처를 둥지라고 하는데 보통은 동굴 같은 장소였다.

지금 내가 찾아야 할 띠용이의 둥지도 꽤 큰 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위치가 분명 그 암벽의 한가운데였었지.

키아악!

그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괴성과 함께 아래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거대한 화이트 와이번이 이쪽을 향해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오.'

벌써부터 마주한 와이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놈은 우리를 공격할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뇌후의 와이번과 호위기사의 와이번도 포효를 내뱉었다.

아예 육탄 박치기를 할 생각인 듯 돌진해오는 놈에게 호위기사가 마력을 일으키더니 팔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그러자 넓게 파진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놈을 강타했다.

놈은 중심을 잃고 잠시 허공에서 휘청거리다가 곧 방향을 돌려서 황급히 도망가버렸다.

'허.'

나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 빠른 태세 전환을 바라봤다.

와이번은 기본적으로 사납고 포악하지만 영리한 만큼 눈치도 빨랐다.

공격을 맞자마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라고 판단하고 내뺀 것이리라.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광할하게 펼쳐진 산맥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녀석의 둥지가 위치한 곳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특히 산맥에서도 굉장히 눈에 띄고 이질적인 지형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크고 평평한 암벽.'

마치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생긴 그런 암벽 지형이 이 산맥에는 존재했다.

그리고 둥지가 위치한 곳은 바로 그 근처였다.

아마 이렇게 위에서 날아다니면서 보면 멀리서부터 한눈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서 호위기사에게 물었다.

"나무 그루터기처럼 생긴 거대한 암벽을 알고 있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럼 별 수 없지.

나는 다시 말했다.

"방금 말한 지형을 찾을 때까지 산맥을 크게 돌아보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와이번을 타고 신비를 찾을 때도 지겹게 했던 장소 찾기가 시작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훨씬 빠르고 편할 것이라는 점이었지만.

둥지를 찾는 와중에도 각양각색의 와이번들이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다.

대부분은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지만, 몇몇은 아까의 화이트 와이번처럼 덤벼들기도 했다. 그런 놈들은 마찬가지로 호위기사가 전부 쫓아냈다.

게임에서 와이번은 비늘의 색에 따라서 총 5종류로 구분됐었다.

그린, 블루, 레드, 화이트, 그리고 블랙 와이번.

단지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놈들은 명백히 다른 특징이 있었다.

개체에 따라서 다 다르긴 하지만, 그린에서 블랙으로 갈수록 평균적으로 훨씬 몸집이 크고 강하며 성질도 더러웠다. 또한 희귀했고.

그래서 게임에서도 블랙이 와이번 중에는 능력치가 가장 뛰어났지만, 그만큼 찾고 길들이는 난이도도 가장 높았었다.

내가 게임에서 타고 다녔던 띠용이 역시 블랙 와이번이었다.

색에 따른 능력치 차이가 게임 내에서는 그렇게 유의미할 정도로 크진 않았었지만, 이왕이면 최고의 와이번을 타고 다니고 싶었기에 참 고생해서 잡았었지.

"······7군주! 와이번을 잡겠다면서요?"

우리가 착륙할 생각 없이 계속 날아다니고만 있자 옆에서 날고 있는 뇌후가 소리쳐 물었다.

"찾는 장소가 있으시다고 합니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호위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뇌후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날 흘겨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저게 말씀하신 장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탐색을 시작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곧 그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 한가운데에 홀로 주위에 어우러지지 않게 위치해있는 거대한 바위 암벽.

그 테두리를 따라서 천천히 비행하며, 나는 초감각으로 시야를 최대로 강화시켜 암벽면을 샅샅이 훑었다.

'······찾았다.'

그리고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암벽의 정확히 한가운데 높이에 위치한 큼지막한 동굴 하나가.

"저기로 내려가지."

내 요구대로 호위기사는 그 굴의 입구에 착륙했다.

뒤따라 착지한 뇌후도 굴을 의아한 눈으로 둘러봤다.

"······아는 장소인가요? 대체 뭘 하려고 이런 곳에 찾아온 건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기대감을 품은 채 굴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왜냐면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통로는 짧았고, 곧 시야에 나타난 건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누워있는 검고 거대한 생물체였다.

"······블랙 와이번이군요."

뇌후와 호위기사도 와이번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크르릉.

나는 동굴이 떠나가라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와이번을 빤히 쳐다봤다.

'······얘가 띠용이 맞나?'

뭐, 아마 맞겠지?

솔직히 외관으로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왜냐면 게임에서 와이번마다 각각 외관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당연히 다 통일됐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굴에서 둥지를 짓고 있는 블랙 와이번이라면 녀석 외에는 없을 것이었다.

"······."

잠시 그렇게 묘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니, 이내 코골이가 멈추고 녀석이 눈을 떴다.

그리곤 쩍 하품을 하더니 길게 쭉 찢어진 동공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뒤에서 뇌후가 약간의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 와이번을 길들인 사람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는 걸 아나요? 보나마나 실패하겠죠."

녀석이 천천히 다가오는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만 있더니, 이내 그 거체를 일으켰다.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공격부터 날려올 게 뻔했기에 방어할 준비를 했다.

나와 녀석의 거리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좁혀졌다. 그리고······.

그르릉.

"······?"

녀석이 순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먼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 품에 억지로 거대한 머리를 파묻으려 드는 놈을 나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쓰다듬었다.

'얘 뭐지?'

아무래도 바로 주인으로 인정받은 듯했다.

그래도 내가 알기로 처음부터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그것도 성질 더러운 블랙 와이번이 말이다.

"어······."

그 광경에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뇌후도 당황스러움이 섞인 얼떨떨한 탄성을 뱉었다.

나는 생판 처음 본 내게 더없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녀석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내가 게임 속에서 타고 다녔던 와이번 띠용이가 분명히 맞다고.

'반갑다, 야.'

나는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계속 나한테 머리를 들이미는 녀석의 목 부근을 열심히 쓰다듬어주며.

이걸로 와이번은 성공적으로 얻었다.

와이번 (3)

내가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띠용이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뒤를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날갯짓으로 통로 벽면을 긁어대며 내게 치대려고 했기에, 좀 부담스러웠다.

만난 지 이제 10분도 안됐는데 누가 보면 10년은 된 줄 알겠네.

"······별종이로군요."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뇌후가 말했다.

"혹시 그것도 7군주 당신의 능력입니까? 몬스터의 정신을 지배해서 조종한다거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와이번이 처음부터 이리 사람을 잘 따르는 게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나도 녀석이 나를 이렇게나 잘 따르는 이유가 뭔지는 몰랐다.

설마 정말 게임에서도 함께했던 것 때문에 날 주인으로 인정하기라도 한 걸까.

좋은 게 좋은 거긴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당신뿐 아니라 그냥 아무나 잘 따르는 와이번인 건 아닌지······."

뇌후가 그렇게 말하며 띠용이에게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자 그르렁거리고 있던 녀석이 순식간에 험악한 기세로 돌변하더니 포효를 터뜨렸다.

키아악!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도로 물러섰다.

바로 옆에 있던 나도 고막에 타격을 입었기에 녀석의 목을 툭 쳤다. 이 자식이 안 그래도 동굴이라 울리는데.

[Lv. 70]

띠용이의 레벨은 무려 70으로,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이나 여기까지 오며 마주했던 모든 와이번들보다도 높았다.

게임에서는 시스템 제약상 타고 날아다니는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전투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70레벨이면 아주 막강한 전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강한 전투 부대도 혼자서 신나게 날뛰며 학살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와이번 비늘이 특히나 마력에 대한 저항력도 높은 설정이었던가.'

이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절벽에 서서 제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들이 띠용이를 보고 경계하듯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몸집은 녀석들보다 블랙 와이번인 띠용이가 눈에 띄게 더 컸다.

녀석들의 적대에도 띠용이는 짧게 숨을 내뱉고는 무시하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얘 지금 설마 코웃음 친 거냐?

"아무튼 이걸로 볼일은 끝이겠죠?"

뇌후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였던 와이번을 바로 얻었으니 이 산맥에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 둘과 계속 함께할 이유도 없었고.

"여기서 바로 헤어지지."

"듣던 중 정말 반가운 소리네요."

그때 호위기사가 입을 열었다.

"안장이 필요하시면 일단 제 안장을 드리겠습니다."

그에 나는 속으로 반색했다.

그렇지 않아도 안장도 없이 불편해서 저걸 어떻게 타고 돌아가나 싶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그래도 되겠나?"

"예."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야 숙련자니까 나보다야 덜 불편할 것 아닌가.

굳이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의 친절함을 받기로 했다.

물론 대화를 듣고 있는 뇌후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녀와 날 쳐다봤지만.

크르릉!

그때 와이번들이 거친 울음소리를 뱉었다.

뭔가 싶어 시선을 돌리니 슬금슬금 뇌후의 와이번에게로 다가간 띠용이가 녀석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

"저 미물이······."

뇌후가 황당함과 분노가 섞인 얼굴로 뇌기를 뿜어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띠용이가 다급히 내 뒤에 달려와서 숨었다.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녀석을 바라봤다.

'뭐 하냐, 너?'

이놈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여러모로 보통 와이번과는 거리가 참 먼 듯했다.

어쨌든 호위기사에게 안장을 받은 나는 녀석에게 착용시켰다.

물론 내가 하는 법은 몰랐기에 그녀가 대신 해주었다.

"가만히 있어라, 띠용아."

안장이 불편한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손길이 싫은 건지 녀석이 몸부림치려고 했지만, 내가 쓰다듬으며 말하자 이내 얌전해졌다.

영리해서 그런지 의사소통도 어느 정도는 수월하게 되는 듯했다.

"······띠용? 벌써 이름을 붙이기라도 한 건가요? 특이한 어감이군요."

갑작스러운 뇌후의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릴 뻔했다.

대륙공용어가 아닌 한국어라 무슨 의미인지 모를 뿐이지만, 너무 태연하게 저 이름을 남이 입에 담으니까 왠지 모르게 웃겼던 것이다.

'아이씨, 훅 들어오네.'

어쨌든 안장의 착용이 전부 끝나고 나는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녀석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뇌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회의에서 보지, 2군주."

"······그러죠.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일에 날 이용할 생각 말아요."

호위기사에게도 말했다.

"안장은 고맙다. 성에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주도록 하지."

"예. 그럼 살펴가십시오, 7군주님."

펄럭!

두 사람이 먼저 날아오르고, 나는 빠르게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녀석의 목을 툭 두드렸다.

"우리도 가자. 저쪽으로."

힘차게 포효한 녀석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서 7군주령으로 향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함께할 녀석이니, 이동하는 동안에도 나는 녀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세심히 관찰했다.

크르릉!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있다면 어마무시한 식성.

나는 어디선가 거대한 늑대 몇 마리를 잡아와 뼈째로 거칠게 뜯어먹고 있는 띠용이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녀석은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알아서 사냥을 해다가 자신의 식사를 마련했다.

근데 무슨 한끼로 먹는 고기의 양이 제 몸집의 3분의 1은 될 정도로 엄청났다.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은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식습관 같은 것 외에 다른 행동들을 분석하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왜냐면 녀석은 내가 뭘 하든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너무도 잘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얘 설마 그냥 내 말을 알아듣나?'

굳이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녀석과의 의사소통이 너무나 잘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훈련도 하나 안 시킨 녀석과 이렇게까지 소통이 수월하게 될 리가 없으니까.

식사도 하고 잠시 쉬고 있던 중, 나는 웅크려있던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일어서라."

그러자 녀석이 벌떡 일어섰다.

"앉아라."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굴러라."

크릉?

이번엔 좀 당황하는가 싶더니 날개를 움츠리고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녀석을 쓰다듬어주었다.

'진짜 다 알아듣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애초에 판타지 세계니까 새삼 이런 거에 신기해할 것도 없긴 했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어주었다.

어쨌든 내 말을 잘 들어도 너무 잘 들었기에 앞으로도 별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듯했다.

시간이 흘러 군주성에 도착했다.

성벽을 넘은 나는 아래로 몰려드는 기사들을 보며 착지할 장소를 찾았다.

'아, 습격으로 오해했나?'

검까지 뽑아들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나는 착지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내 와이번을 성의 기사들은 지금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거리가 가까워지자 누가 등에 타고 있는 나를 알아봤는지 소리치며 동료들을 말렸다.

그제야 기사들은 당황하며 검을 황급히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군주님! 잠시 적의 습격으로 착각했습니다!"

"괜찮으니 일들 보도록."

와이번에서 내린 나는 기사들을 해산하게 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이내 집사장이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군주님."

조금 놀란 듯한 집사장의 시선이 띠용이에게 닿았다.

나는 녀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녀석을 둘 만한 공간이 성에 있나?"

"예, 물론 있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집사장을 따라서 이동한 곳은 성 한쪽에 위치한 거대한 철제 울타리와 지붕으로 둘러싸인 우리였다.

우리라기보다도 굉장히 넓어서 그냥 공터에 가까웠지만.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띠용이도 바로 뒤따라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둘러보는 모습이 앞으로 자기가 지낼 공간이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와이번을 관리할 전속 하인들을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몇 사람을 데려왔다.

낯선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주위로 다가오자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하인들이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가만히 있어라."

나는 녀석을 진정시키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네가 이곳에 적응하는 데에 도와줄 사람들이다. 절대로 공격하거나 적의를 드러내지 마라. 알겠느냐?"

그르릉.

녀석이 알아들은 듯 곧장 도로 온순해졌다.

그렇게 녀석은 하인들에게 맡긴 뒤 나는 건물로 들어갔다.

'아셸은 어디에 있지?'

진작 나와봤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직까지 모습을 안 비추고 있었다. 나오면 띠용이 좀 자랑하려 했더니.

의아한 마음으로 성의 홀에 들어가니 어째서인지 아래층에서 몰아치고 있는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

이건 아셸의 마력인데?

평소에도 맨날 느끼던 것이니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아래층의 위치한 연무장으로 곧장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리프 남매와 그 앞에 눈을 감은 채 서있는 아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종족 특질까지 사용해서 전신을 하얗게 물들인 채 있었는데, 은은한 순백색의 마력 아지랑이가 마치 불꽃처럼 넘실거리며 그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게 뭔 상황인가 하니 리프 남매가 날 발견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냐?"

내 물음에 리프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셸 경께서 리곤을 상대해주시다가 갑자기 우뚝 멈추시더니, 눈을 감으시고 이렇게······."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쥐고 있는 리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있는 아셸을 바라보다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설마······.'

무슨 깨달음이라도 온 건가?

리프의 말만 들어보면 리곤과 대련을 해주다 뭐 갑작스런 깨달음 같은 게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일단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스으으.

곧 몰아치던 마력이 그녀의 몸으로 순식간에 갈무리되었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Lv. 82]

······다름이 아니라 머리 위에 떠있는 아셸의 레벨이 상승한 것이다.

다시 평상시 상태로 돌아와 천천히 눈을 뜬 아셸이 만족감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한쪽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론 님, 언제부터······."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층 더 성장했구나."

그에 당황하고 있던 아셸이 슬며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진짜 갑자기 웬 뜬금없는 레벨업이야?

암영 프레온 (1)

상황이 마무리되고 아셸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설명했다.

"리곤의 검술 지도를 해주는 와중에 갑작스레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검술 지도 중에 깨달음이 찾아와?

그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자유 대련을 하며 리곤의 검을 받아주고 있던 중, 바로 얼마 전에 가르쳐줬던 마력 연공과 검술을 순식간에 자신의 식대로 응용해서 펼치는 리곤의 모습에 한순간 번뜩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남을 가르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배움도 있다지만, 설마 그렇다고 리곤을 가르치다가 아셸이 레벨업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렇다고 아셸만 성장한 건 아니었다.

나는 이제야 리곤의 레벨을 확인하고서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Lv. 21]

21레벨.

11레벨도 아니고 21레벨이다.

쟤가 분명······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고작 3레벨이 아니었었나?

망가졌던 마력로만 간신히 회복해서 아무것도 쌓인 게 없는 백지 상태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고작 보름도 안되는 시간 만에 무려 20레벨에 가까운 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에 나는 속으로 한 박자 늦게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건 진짜 뭐······.'

완전히 정신 나간 재능이지 않은가?

이 정도 천재성이니까 가르치는 아셸도 덩달아 깨달음이 찾아올 수 있었던 건가?

"그······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아셸 경."

리프가 더듬더듬 어색하게 말했다.

뭐라도 말해야 되나 할 말을 생각하다가 겨우 내뱉은 기색이었다.

"고맙다."

아셸이 옅게 웃으며 리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게도 정말로 고맙다. 덕분에 오랫동안 막혀있던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것 같아."

"아, 네. 경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정말 기쁩니다."

리곤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 그런데 괜찮으시면 대련을 계속 이어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응? 아······ 알겠다."

아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검을 들어올렸다.

리곤도 순식간에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더니 자세를 잡았다.

나는 약간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승부가 아닌 가르침이 목적인 대련이긴 하지만, 아셸에게 깨달음을 찾아오게 한 리곤의 검술에 궁금증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앗!

리곤이 발을 구르고, 검날이 빠르게 아셸의 목을 노렸다.

레벨 차이야 워낙 아득하니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진검 대련인데 급소를 노리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셸이 그렇게 하라고 했나?'

아셸은 평온한 얼굴로 검격을 가볍게 튕겨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도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며 전부 제자리에서 막았다. 굉장히 빠른 템포의 공방이 이어졌다.

상단부터 하단까지, 리곤은 모든 부위를 다양하게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가끔씩 자루를 역수로 쥐기도 하고, 몸을 유연하게 꺾어 기이한 각도에서 기습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검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리곤이 펼치는 검술에 명백히 와닿는 느낌은 있었다.

'엄청 자유롭네.'

커다란 틀은 있지만 그 안에 체계는 하나도 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은 조잡함 따위가 아니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 훨씬 가깝게 느끼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검뿐만이 아니었다.

리곤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 그 역시도 리곤의 움직임에 따라 몸 안에서 아주 자유롭게 활개를 치고 있었다.

아셸이 전투를 할 때는 저런 식으로 마력을 운용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허.'

[Lv. 22]

그보다 전투 중에 또 레벨이 올랐다. 이건 뭐 싸우면서 강해지고 있네.

리곤은 한껏 고양감이 치솟은 얼굴로 점점 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계속 공격을 받아주며 간간이 적당한 반격을 날리던 아셸이, 어느 순간 리곤의 검을 아래로 흘리고 바닥에 눌러 고정시켰다.

"아······."

리곤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셸도 조금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공방이 격화될수록 본능에 가깝게 검을 휘두르고 있다."

"아, 죄송해요. 흥분하면 자꾸 주체가 되지 않아서······."

"나쁘다는 뜻이 아니야. 그 본능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제어하라는 거지. 그러니까 리곤, 너는······."

아셸은 잠시 방금의 대련에 대해 이런저런 점들을 짚어주며 리곤에게 조언해주었다. 리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자."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

리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리프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두 남매가 먼저 나가고 나와 아셸은 잠시 연무장에 둘이 남았다.

나는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도 잘 가르치고 있는 것 같구나."

"아, 예······ 제가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뛰어나서 그렇습니다."

"특히 리곤이 말이지."

내 말에 아셸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무재가 정말 뛰어납니다. 빈말이 아니라 불세출의 천재란 게 있으면 아마 저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고평가인가.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돌아서 물었다.

"아셸, 너와 비교하면 어떻지?"

"예? 물론 저보다도 훨씬 뛰어납니다."

아셸은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잘라서 말했다.

음, 얘가 이런 거에 자존심 세울 성격은 아니긴 하지.

대화가 끊기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아셸이 이제야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뱉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돌아오셨는데 마중을 나가지 못해서······."

"괜찮다."

"와이번은 얻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보러 가보겠나?"

그렇게 잠깐 아셸에게도 띠용이를 구경시켜주었다.

***

군주성으로 돌아오고서 1주일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아셸의 검술 지도를 구경하기도 하고, 띠용이와 놀아도 주고, 중립국 정세에 대해 알아보기도 하며 회담 날짜가 오길 기다렸다.

"기사 시험?"

나는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돌려 집사장을 쳐다봤다.

"예. 새로운 견습 기사들을 뽑고, 또 기존의 견습 기사들 중 정식 기사로 승급할 이들도 뽑는 시험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왜?"

"다름이 아니라, 혹 리프 남매도 시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지 의중을 여쭙고자······."

아, 그 얘기인가.

집사장도 내가 여러모로 리프 남매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시험이라.'

기사 작위야 언제든 내 마음대로 두 사람에게 내려주면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마침 시험 같은 정식 의례가 있다면 그쪽을 거치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리프는 지금 바로 정식 기사가 되어도 충분한 수준이니까.

'그리고 좀 궁금하기도 하네.'

성에서 계속 생활하긴 했지만 기사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시험이 어떤 식인지도 구경할 겸 리프를 시험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참가하겠습니다!"

그녀를 불러 의사를 묻자 예상대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옆에 있는 리곤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리곤의 레벨로는 견습 기사는 될 수 있어도 아직 정식 기사가 되기엔 조금 부족했다.

물론 지금의 성장세로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순식간에 그만한 수준까지 도달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기사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시험을 관전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철혈 기사단의 단장이 정말 감격한 듯한 얼굴로 경례했다. 얘 이름이 아킨이었던가.

거대한 야외 연무장에 질서정연하게 모여있는 엄청난 수의 기사들.

현재 나는 아셸과 함께 한쪽에 마련된 단사 위에서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프 역시 무장을 하고 그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 보였다.

"군주님께서 경들의 결투를 지켜보시고자 직접 이곳에 걸음하셨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여······."

기사단장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시험은 질질 끌 것 없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우선은 정식 기사로 승급하는 견습 기사들의 시험부터였다. 30레벨대가 대부분인 기사들.

시험의 형식은 군주성의 최정예인 철혈 기사단원과 결투를 펼쳐서 일정 시간 이상 버티면 통과하는 식이었다.

그 시간은 고작 3분에 불과했음에도 버티지 못하고 금세 떨어져나가는 기사들의 절반 이상이었다.

'음······.'

나는 조금 따분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좀 빡세 보이긴 하네······ 그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나도 내가 뭘 기대하고 시험을 구경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직접 보니 생각보다 썩 재미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프의 차례도 왔다.

그녀의 상대인 기사단원은 50레벨 중반의 엘프 기사였는데, 검이 아니라 창을 무기로 들고 있었다.

쐐액!

결투가 시작하자마자 안면을 노리고 찔러오는 창날을 리프는 고개를 틀어 피했다.

그녀는 리치 차이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막아내며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악티폴의 경기 때도 봤듯 목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과감한 움직임. 그에 공격을 퍼붓던 단원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카앙! 카카캉!

물론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현격했기에 끝내 거리가 좁혀지는 일은 없었다.

아셸은 갈수록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에 방어만 하기 급급하다가 3분의 시간이 끝났다.

다른 기사들보다 훨씬 치열한 공방을 펼쳤음에도 검을 거두는 리프의 얼굴엔 아쉬움이 감돌았다.

"자네는 목숨이 10개라도 되는가?"

결투가 끝나고 상대를 했던 단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까딱 방심했다간 나도 당할 것 같아서 조금 더 열을 올렸네. 그 젊은 나이에 대단한 성취야.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와아아!

지금껏 없었던 찬사에 주위에 서있던 기사들에게서 짧게 함성이 터졌다.

나도 슬며시 웃으며 칭찬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

나는 퍼뜩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한쪽, 기사들과 동떨어진 곳에 서서 시험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행정관들.

[Lv. 67]

그 가운데 굉장히 비정상적인 레벨을 하고 있는 행정관 하나.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 갈색 머리칼의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게 뭐야?'

그건 명백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야 고작 행정관이 무려 70에 가까운 레벨을 하고 있었으니까.

"집사장."

"예, 군주님."

"저기 저 여자는 뭐지?"

옆쪽에 서있던 집사장이 내 시선이 닿아있는 곳을 보고 대답했다.

"몇 달 전에 새로 임명된 케이트라는 신입 행정관입니다."

······몇 달 전?

자연스레 사고가 흘러갔다. 첩자.

저만한 실력을 굳이 숨기고 있는 이라면 그런 경우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67이나 되는 레벨의 첩자면 대체 어느 세력에서······.

"······!"

이내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67레벨의 갈색 머리칼 여인, 첩자.

이 키워드와 일치하는 캐릭터가 정확히 퍼뜩하고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친, 설마 저거······.'

나는 경악스러움과 황당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확인하지? 따로 조용히 불러내야 되나?

하지만 저 행정관이 정말로 그녀라면 따로 불러내려 했다간 바로 눈치 빠르게 튀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잠깐만 있어봐, 생각을······.

'아.'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종이에 펜을 끄적이고 있던 그녀가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계속 응시했다.

그러고 있자 이내 수선했던 분위기가 가시고 기사들도 하나둘씩 내 시선이 닿아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자연스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집중되었다.

내 곁에 서있던 아셸이나 기사단장도 의아한 기색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이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몇 초 동안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었다.

"······."

연무장에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판단을 마친 나는 그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첩자다. 잡아라."

암영 프레온 (2)

세인테아의 수도, 켈리아로드.

로브를 걸친 한 남성이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다.

남성은 이내 벽면에 그려진 희미한 문양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라."

스으으.

그러자 남성의 뒤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기척 하나 없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남자와 마찬가지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장신의 여인이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반월을 올려다본 그녀가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다.

"황실의 의뢰를 받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슬리안 공."

그녀가 입을 열고 나서야 존재를 알아챈 남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불쾌함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암영.

대륙에서 여인을 부르는 이름은 많고도 다양했지만,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림자처럼 어둡고, 잡히지 않으며, 어둠 속에선 어느샌가 모습을 감춰버리는 이명 그대로와 같은 존재.

"그래서, 이번 의뢰는 뭘까요? 암살 의뢰는 여전히 받지 않고 있으니 그쪽이 목적이면 그대로 돌아가주시면 된답니다."

남자는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가 거슬렸지만 이곳까지 걸음한 목적에 집중했다.

"칼데릭의 7군주에 관한 것이다."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건 정보다. 7군주의 성에 잠입을 하든 어쩌든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면 된다."

"흐응, 정보 수집이었나요. 그것도 이번에 새로이 즉위한 군주에 관한 정보라······."

그녀가 씩 미소를 지었다.

"권성도 그의 손에 죽었다고 하죠? 세인테아 출신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던데 말이에요."

그에 남자의 인상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소문 같은 게 나돌 리 없다. 권성이 새로운 7군주의 손에 죽었다는 건 아직 세인테아의 고위층들만 짐작 식으로 아는 사실.

여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능청스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거대 정보 단체와도 맞먹을 정도의 정보력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녀였으니.

"아하하, 죄송해요. 아무튼 그런 의뢰라면 이번엔 값을 좀 많이 지불하셔야겠는걸요? 무얼 챙겨오셨을까요?"

남자가 아무런 대답 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어서 여인을 향해 던졌다. 돈주머니.

그 안에는 무려 10닢이 넘는 백금화가 들어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여인이 휘파람을 불고는 돈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했다.

의뢰를 수행하지 않고 그냥 들고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마무시한 금액의 선수금.

하지만 돈을 건넨 남자는 그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금액에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고 황실과 척을 지려고 할 리 없었으니.

"그럼 먼저 가볼게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1년 내로는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뵙도록 하죠."

여인이 벽면에 그려진 문양을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 지웠다.

스르륵.

다시 한 번 좀 전과 같은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여인의 모습은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쳐다보고 있던 남자도 이내 걸음을 옮겨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의 은밀한 접선은 하늘에 떠오른 달만을 목격자로 남긴 채 끝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칼데릭.

"케이트, 종이랑 펜 챙겨서 따라나와라."

"예? 종이하고 펜은 갑자기 왜?"

"오늘 기사 시험 있잖냐. 그거 기록 담당한 레피 씨가 몸살 앓고 누워서 너랑 내가 해야겠다. 잔말 말고 빨리 나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여인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욕을 뱉으며.

'아이씨, 귀찮게.'

이전에 골목에서 봤을 때와 완전히 다른 외모를 하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바로 암영이었다.

7군주령 엔록으로 와서 이곳 군주성에 들어온 지도 몇 개월.

온갖 재주가 많은 그녀에게 행정관 신분으로 성에 잠입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헉······ 군주님께서 직접 나오셨잖아?"

상관을 뒤따라서 이동한 연무장에는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모여있었고, 심지어 7군주까지 나와있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상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인은 7군주가 앉아있는 단상을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7군주······.'

성에서 지낸 지도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 7군주에 대해서 얻은 큰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면 그는 성에 있는 것보다 바깥을 나도는 시간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방랑벽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아낸 건 단지 종족, 성별, 외모적 특징, 그리고 성의 관리들에게 딱히 위세를 부리지 않는 유한 성격이라는 것 정도일까.

그리고 최근에 6군주를 죽이며 군주들의 긴급 소집까지 열린 엄청난 대사건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리 그녀라도 깊게 파고드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멀쩡히 살아돌아온 걸까. 분명히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래서 근래에는 7군주가 6군주를 죽인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리프 남매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최근엔 그의 호위이자 굉장한 실력자로 짐작되는 아셸이 직접 도맡아 남매에게 검술 지도까지 하고 있었다.

7군주가 그들 남매에게 명백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었고, 당연히 무언가 있다는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성에서 머물며 더 캐낼 건 없으니 조만간 6군주령의 수도로 향해 그들 남매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그녀는 신경은 7군주에게 기울인 채 결과를 기록했다.

그중에는 리프도 있었는데 그녀는 다른 견습기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어렵지 않게 시험을 통과했다.

슬슬 그렇게 시험이 끝나갈 즈음 그녀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어째서인지 7군주가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뭐지?

순간 의아함과 영문 모를 불길함이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일단 깜짝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척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자니 서서히 주위의 소란이 멎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주위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모여있었다.

"······."

무언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인지한 그녀는 미약하게 굳은 얼굴로 7군주를 바라봤다.

그가 이쪽을 가리키고서 입을 열었다.

"첩자다. 잡아라."

***

촤앙!

철혈 기사단의 단원들이 내 말과 동시에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고, 다른 기사들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양옆에 서있는 아셸과 철혈 기사단장도 굳은 얼굴로 검을 든 채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곧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사들 전원이 그녀에게 검을 겨눈 상황이 되었다.

"어, 어어? 헉!"

여인의 옆에 서있던 다른 행정관은 얼빠진 얼굴로 서있다가 기겁하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완전히 낭패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잠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

그녀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계시나요? 제가 오늘 먹은 점심 메뉴가 뭔지?"

"······."

하지만 이어진 말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헛소리였다.

그에 기사들도 이게 갑자기 뭔 개소리인가 싶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 여자 맞네.'

저건 그냥 한순간이라도 기사들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건······.

화아아악!

갑작스레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안개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음에도 아예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칠흑의 안개가.

"······첩자가 도주한다! 잡아라!"

누군가 소리쳤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기사들은 그 안에서 우왕좌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아셸과 철혈 기사단장이 곧바로 연무장으로 뛰어들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두 갈래의 거대한 검풍이 안개를 갈라버리고 시야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온데간데 없었다.

아셸조차 도주한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미간을 좁힌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나는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곧 감각에 걸려들었다. 모습을 감춘 채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기척 하나가.

'더럽게 빠르네.'

나는 곧바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 사용해서 연무장 한쪽 허공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부동 장막을 펼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고, 내 장막에 가로막혀 충돌한 그녀는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껙······."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목에 검날이 겨누어졌다.

어느새 따라붙은 아셸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이어서 몰려든 기사들도 주위를 완전히 에워싸고서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녀가 조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굴하게 웃으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하, 항복. 항복이요."

바닥에 착지한 나는 마무리된 상황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은 무시하며.

'암영······.'

그래서, 이 여자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

상황을 정리하고서 나는 아셸과 함께 여인을 내 방까지 끌고 왔다.

반대편 자리에 앉히고서 나는 가만히 그녀와 마주 앉았다.

연신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했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리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암영."

"······."

"몸을 숨기는 그 신비도 사용해봤자 소용없다. 다시 도주를 시도하면 그때는 바로 목을 벨 테니 단념하도록."

검은 안개 속에서 아셸조차 그녀를 잡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은신의 신비 때문이었다.

나야 초감각이 있어서 어떻게든 몸을 숨기고 도망치는 걸 캐치할 수 있었지만.

정체와 능력까지 단번에 간파당했는 줄은 몰랐는지,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뭐 이런 괴물한테 걸려서······."

이제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가장 먼저 물었다.

"누가 보냈지?"

암영 프레온.

이 대륙에서 가장 신출귀몰한 존재를 꼽으라면 반드시 한 손에는 꼽을 수 있을 인물.

대륙 최고의 정보원이자 도둑이기도 한 그녀는 지금과 같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첩자 활동도 밥 먹듯 하곤 했다.

그녀 정도 되는 인물을 부릴 수 있는 세력이야 어차피 몇 곳 있지도 않으니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녀가 반쯤 체념한 기색으로 물었다.

"말하면 살려주실 건가요?"

"일단 말해라."

"원하신다면 전부 불 수야 있는데, 그 전에 저를 어떻게 하실 건지부터 알고 싶은데요. 그 전에는 죽어도 입을 안 열 겁니다."

"그럼 죽어야지. 아셸."

내 말에 옆에 서있던 아셸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이 바로 열렸다.

"······세인테아 황실이요."

암영 프레온 (3)

역시 세인테아 쪽이었나.

칼데릭에, 그것도 군주성에 직접 첩자를 들여놓을 생각을 할 세력은 그쪽 말고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암영은 황실의 의뢰를 여러 차례 수행하며 그쪽과 줄이 꽤 긴밀하게 닿아있는 인물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성에 잠입한 목적은?"

"7군주님에 대한 정보 수집이요."

"황실이 어째서 그런 의뢰를 요청했지?"

"저야 보수만 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거라 자세한 이유는 몰라요. 그런데 뭐······ 알려진 정보 하나 없이 베일에 쌓인 사람이 칼데릭의 새로운 군주가 됐는데, 당연히 세인테아에서도 한번 조사해볼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뭐, 그렇긴 하지.

암영에게까지 의뢰를 요청해가며 7군주성에 첩자를 들였는데, 목적이 나에 대한 것 말고는 달리 뭐가 있겠는가?

나는 더 캐묻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불안 섞인 얼굴로 그런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배후가 세인테아라는 것은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칼데릭이든 세인테아든 서로 진영에 쉬지 않고 첩자들을 심어놓는 거야 일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군주성에까지 첩자가 잠입한 건 꽤 심각한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딱히 성의 경계 태만을 탓해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었다. 왜냐면 상대가 암영이니까.

"저, 군주님. 제가 말씀을 조금 드려도 될까요?"

그때 그녀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한눈에 알아보신 걸로 보아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저에 대해서 이것저것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됩니다만, 저는 어느 세력에도 속해있거나 얽혀있지 않습니다."

"······."

"이번 일도 정말 철저히 사무적으로 황실의 의뢰를 받아든 것뿐이지 개인적인 의도 따윈 추호도 없었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걸려버린 이상에야 할 말이 뭐가 있겠냐만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혀가 길어지기에 말을 끊었다.

"조만간 중립국 회담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곳에서 제가 황실의 의뢰를 받고 군주성에서 첩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전부 자백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제 목숨에 조금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 한다면······."

그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중립국 회담에는 세인테아 측에서도 황제가 직접 참여하니, 그들을 대놓고 쥐어짤 강력할 명분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참나······.'

암영의 대충 이런 성격의 캐릭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그러니까 이렇게 의뢰주를 팔아넘기는 데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것이고.

뻐기는 건 안 통하겠다 싶었는지 어떻게든 당장 목숨부터 연명하고 보자 판단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그닥 끌리는 내용이 아니었다.

왜냐면 내가 세인테아를 압박한다고 해서 딱히 얻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내 다음 목표에 도움이 될 것도 하등 없고.

난 지금 다른 무엇보다도 암영,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되나.'

첩자질이야 당장 목이 떨어져도 차고 넘칠 죄목이긴 했지만, 일단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야 이만한 인재를 그냥 처형해버리는 건 아까웠으니까.

뛰어난 정보 수집과 추적 능력에, 67이라는 레벨만큼 상당한 전투력에, 대륙에서 그녀만큼 발이 빠르고 온갖 다양한 재주에 능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게임 스토리에서 딱히 조력자 역할을 한 적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빌런 짓을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마침 슬슬 뛰어난 정보원이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여태까지는 신비 찾기에 집중했었지만 이제 앞으로의 목표는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것이다.

미래에 발생한 사건들, 내 게임 지식으로도 해결이 부족한 몇몇 중대한 사항들에 대해선 정보 조사가 필요했다.

단지 문제는 그녀가 내가 밑에 두고 다룰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어디 가서 정보라도 수집하라고 풀어놓으면 그대로 도주해서 종적을 감춰버릴 테니 말이다.

'문제는 잡아두고 다룰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다는 건데.'

어디 정보라도 수집하라고 풀어놓으면 그대로 도주해서 종적을 감춰버릴 테니 말이다. 아니면 뒷통수를 맞거나.

그 이름이나 이명이 전 대륙에 널리 퍼져있는 자들은 괜히 그만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어중간한 협박이나 약점 잡기로 부려먹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말만 하면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저자세로 나오고 있지만, 전부 어떻게든 살아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겠지.

'······아.'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 있어 더없이 유용할.

"일단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말 앞에 '일단'이 붙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불안감은 정확히 맞았다.

"낙인 반지."

"······예?"

"네가 가지고 있는 고대의 유물 말이다. 당연히 지금 가지고 있겠지. 꺼내라."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한순간일 뿐이었고 곧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낙인 반지······? 고대 유물? 죄송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참 대단한 연기력이다 싶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물건의 존재를 입에 담았는데도 이런 반응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소용없다, 그렇게 잡아떼도. 내가 어떻게 이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

"아셸, 내가 셋을 세기 전에 이 여자가 아무것도 꺼내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

아셸이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하나."

나는 팔짱을 낀 채 나지막하게 카운트를 뱉었다.

그리고 둘을 세기 전에 그녀의 입이 다시 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스러운 시선이 함께.

"······대체 뭐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유물에 대해서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어서 꺼내기나 해라."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는 현재는 실전된 온갖 종류의 마법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낙인 반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무슨 수로도 지울 수 없는 마력 낙인을 남길 수 있는 고대의 유물.

그리고 반지의 소유자는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낙인이 찍힌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암영이 그 유물의 능력을 활용하는 건 게임에서 나온 적이 있었기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더없이 굳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내가 낙인 반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둘째치고, 이 타이밍에 그걸 꺼내라는 이유를 그녀도 짐작 못할 리는 없었으니.

"자꾸 경고하기도 지치는군. 그냥 이대로 죽겠느냐?"

"······."

하지만 결국에는 거의 울상이 돼서 로브 품에서 반지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꺼낸 반지를 받아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때가 낀 낡은 은반지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육각형의 문양이 하나 작게 새겨져있었다.

"자."

아셸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나는 마력이 없기에 유물의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가 없었다.

"마력을 주입하면 유물의 능력이 활성화될 거다. 한번 해봐라."

"아, 예."

아셸은 왜 굳이 자신에게 시키는지 의아한 기색이면서도,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내 말대로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반지에 새겨진 육각형 문양에서 자색의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나왔다.

나는 암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에 찍겠나?"

"······손목이요."

그녀가 한쪽 팔을 힘없이 내밀었다. 반쯤 해탈한 얼굴이었다.

아셸이 엉거주춤 빛이 뿜어져나오는 반지를 가져가서 그녀의 손목에 도장처럼 찍었다. 그러자 반지의 문양대로 자색의 육각형 문양이 새겨졌다.

나는 다시 아셸에게서 반지를 받아들고서 살펴봤다.

반지에서 얇고 희미한 빛살이 뿜어져나와 정확히 그녀가 있는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반지를 챙겼다.

이제 그녀가 어디에, 얼마나 멀리 있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이제 평생을 내게서 도망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방금 찍은 마력 낙인은 또 다른 대상에게 사용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녀에게 남아있을 테니까.

멍하니 손목의 낙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침울해하지 마라. 시키는 일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널 죽이지 않겠다 맹세하지. 그리고 반지도 다시 돌려주고."

그녀가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기야 한가요. 원하시는 게 뭔데요?"

"정보 수집이다."

가장 먼저 시킬 생각인 건 세인테아 제국의 수도 테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전에 할루멘타에서 선점하는 데에 실패했던 빙의의 신비. 그 신비를 얻은 빌런이 일으킬 끔찍한 재앙.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사건들 중 피해의 단위가 가장 큰 재해였기에 그것부터 조사시킬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아주 뛰어난 정보원 한 명을 얻었다.

***

그녀는 내 요구에 따라서 곧바로 조사를 위해 세인테아로 떠났다.

뇌후도 그렇고 왠지 요즘 들어서 여기저기 협박을 많이 하고 다니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도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 내 나름대로의 노력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는데.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리프는 정식으로 군주성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리곤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 26레벨에 도달했다. 아셸은 자신의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그런 두 남매를 계속 열심히 가르쳤다.

언제나와 같이 방에 박혀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대군주성으로부터의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사흘 뒤에 출발인가.'

이제 슬슬 회담을 위해 중립국으로 이동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준비를 마친 뒤 띠용이를 타고 대군주성으로 날아갈 준비를 했다.

"너는 성에 남아서 계속 남매의 지도에 집중하면 된다."

리곤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이번에도 굳이 아셸은 데려가지 않고 성에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지만······.

"······저도 데려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조금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가 내 명령과 반대해서 스스로의 뜻을 주장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세인테아 때문인가?'

이번 회담은 두 중립국 사이의 갈등을 논의함과 동시에, 세인테아의 황족들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자리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겠다. 그럼 동행하지."

그렇게 나는 아셸을 데리고 띠용이가 있는 우리로 향했다.

이미 하인들에게 시켜서 안장은 모두 착용시킨 상태였다.

그르릉.

여전히 머리를 들이밀며 치대는 녀석의 목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아셸과 함께 등 위에 올랐다.

녀석은 다른 사람이 같이 탄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몇 번 칭얼거리듯 몸을 흔들고는 더 난리를 치진 않았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군주님."

"그래."

언제나처럼 집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띠용이를 툭툭 두드렸다.

녀석이 힘찬 포효와 함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중립국 회담 (1)

세인테아 제국 연합.

세인테아 제국을 중심으로 뭉친 여러 인간 중심 국가들의 연합이자, 라사 세계관의 메인 스토리 줄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세력.

칼데릭은 세인테아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다.

두 세력 사이의 중간 지대에는 여러 중립국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립이라고는 해도 말뿐이지, 마족 침공 이후로는 세인테아에 흡수되다시피 한 국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도 실질적으로 중립의 진영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는 둘뿐이었다.

어스힐 왕국과 카숄 왕국.

칼데릭과 세인테아, 두 거대 세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두 국가.

전체 국력이 칼데릭의 군주령 하나만도 못한 두 약소국이 지금까지 중립의 진영에 남아있을 수 있던 것에는 여러 정치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어스힐에서 열리는 이번 중립국 회담은 칼데릭과 세인테아, 그리고 그런 중립국의 왕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다 왔네.'

띠용이를 타고 빠르게 대군주령까지 날아온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대군주성을 바라봤다.

고도를 낮춰 성의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자 이미 나와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대군주와 참모장이었다.

띠용이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들의 바로 앞에 착륙했다.

내가 먼저 공간 도약으로 내려서고, 뒤따라 내려선 아셸이 대군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왔어, 7군주?"

대군주는 언제나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가 묘한 눈빛으로 아셸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곧 띠용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이채를 띠며.

"글라이드 산맥으로 와이번을 구하러 갔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블랙 와이번이네? 7군주랑 똑같이 눈동자도 황금색이고."

대군주가 빤히 쳐다보자 띠용이는 왜인지 꺼리는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반응에 그녀가 싱긋 웃고는 도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7군주, 듣기로는 2군주의 와이번을 타고 함께 갔었다고 하던데 말이야. 저번 소집에서는 2군주가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그새 어떻게 친해지기라도 한 거야? 하하."

······그것까지 다 알고 있었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출발은 언제지?"

"음, 글쎄? 7군주만 상관없으면 지금 바로 출발할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녀의 복장을 바라봤다.

여태껏 볼 때마다 그랬듯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저대로 이동하겠다는 건가?

이제부터 중립국으로 향하는 건데, 회담이 아니라 어디 마실이라도 나가는 듯한 분위기에 조금 황당해졌다.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이 아니라 그래도 제대로 된 행렬을 차려서 이동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건 넷뿐인가?"

"아니. 참모장은 남아있을 거니까 셋이 되겠네."

"행렬을 차려서 이동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대군주가 픽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고 번거롭잖아. 이 내가 직접 걸음하는데 달리 뭐가 또 필요하다고?"

상당히 오만하게 들렸지만 틀린 건 없는 말이긴 했다.

어쨌든 그렇게 대군주성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중립국으로 이동하는 게 결정되었다.

대군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와이번을 데리고 왔는데, 띠용이와 같은 블랙 와이번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나는 대군주에게 물었다.

"회담에 굳이 날 동행시키려는 이유가 따로 있나?"

내 물음에 그녀는 묘한 웃음만 지어 보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여튼 속을 알 수가 없네.

"자, 어쨌든 그럼 출발해볼까?"

대군주의 주위에 어둠이 일렁이더니 그녀의 차림이 바뀌었다.

방금 전의 드레스보다는 단촐하고 적당히 화려한 느낌의 의복으로.

복장을 바꾼 그녀가 사뿐히 떠올라 와이번의 등에 올랐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약간의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군주도 와이번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와이번을 탄다는 것 자체가 그냥 조금 묘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종족이 종족이었으니까.

크오오!

대군주의 와이번이 힘차게 포효하고는 먼저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띠용이의 등에 탄 나와 아셸도 곧 뒤를 따라서 출발했다.

중립국까지의 거리는 군주령과 군주령 사이의 거리보다 조금 더 먼 정도였기에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번의 중립국 회담은 어스힐 왕국에서 열리는 회담이었다.

서로의 연대와 협력을 위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3년을 주기로 중립국들에서 돌아가며 열리는 대회담.

칼데릭과 세인테아, 그리고 중립국의 왕족들까지 모두 모여 대륙의 미래에 대해서 평화롭게 논의하는 자리.

······물론 그런 것들이야 당연히 듣기 좋게 내건 이유일 뿐이고, 결국은 세력 다툼이었다.

특히나 돌아가는 정세를 보면 이번 회담은 단순한 신경전 정도로 끝나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마 카숄 왕국에서 본격적으로 어스힐 왕국과의 전쟁 명분을 바로 이번 회담에서 선포하려는 생각인 듯했으니까.

그것이 내가 이번 회담에 별 고민 없이 순순히 대군주를 따라서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스힐 왕국······.'

나는 이전에 5군주령에서 만났던 한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테이르 바몬, 어스힐 왕가의 핏줄을 이은 둘째 왕자.

만약 그가 내 말대로 왕성으로 돌아왔다면 아마 이번 회담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