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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할루멘타 (5)

할루멘타의 어느 깊은 땅굴.

그것이 원통처럼 길고 거대한 아가리를 지상으로 쭉 뻗었다. 몸체에 박힌 수백의 눈들이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사방을 훑었다.

그것의 주위로 날아든 새들이 말을 전하듯 시끄럽게 지저귀며 주위를 멤돌았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빠르게 진화하며 특히나 뛰어난 지성을 가지게 된 그 괴물은, 자신의 종속들을 죽이고 다니는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했다.

아주 작디 작은 벌레 넷.

괴물은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외부에서 흘러들어오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생물들.

어떤 것은 제 덩치에 맞게 나약하기 그지없다가도, 또 어떤 것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기도 했다.

특히나 최근에 이 땅을 휩쓸고 다녔던 붉은 벌레는 그야말로 재앙과 다름없었다.

그 붉은 벌레에 대항해서 괴물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이 안식처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것뿐이었다. 벌레가 종속들을 마음껏 학살하다가 만족하고 떠나가기를 기다리며.

그오오.

그때의 화풀이를 하기엔 마침 적절한 먹잇감들이었다.

그것이 지상으로 거체를 일으켰다. 낮고 무거운 포효를 내뿜어 일대에 위치한 모든 종속들을 불렀다.

이윽고 사방의 지평선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물결들이 몰려왔다.

***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정신을 차린 뒤에도 아셸은 현실감이 마저 돌아오지 않았는지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몇 분 지나고 나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전히 평소처럼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앞으로는 주의해라."

나는 식물 줄기 한쪽에 얽혀서 죽어있는 말들을 슬쩍 바라봤다.

아셸과 함께 덩달아 끌려갔다가 죽은 것이었다.

그녀가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쟤들도 꽤 오래 함께한 말들인데. 짧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내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두 사람도 정신을 차렸다.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희가 언제 쓰러진 건가요?"

나는 축 늘어진 식물 줄기를 가리켰다.

그녀가 상황을 이해한 듯 탄성을 뱉었다. 그리곤 내 옆에 서있는 아셸을 발견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동료는 무사히 구하셨군요? 다행이네요."

반면 남자는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몸 상태를 확인하듯 살펴보다가 일어났다.

인지도 못한 채 당해서 쓰러졌으면 저게 보통 반응이었다. 여자 쪽이 이상한 거지.

아셸이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자들이다. 모험가라고 하더군."

"아······."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찾고 있다는 몬스터에 대해서 말해봐라. 아는 게 있다면 알려주지."

내게 원하는 게 있기도 하니 돕겠다고 쫓아온 것일 터다.

어쨌든 두 사람 덕분에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얻고 추적에 시간을 훨씬 단축한 건 사실이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물론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알고 있는 몬스터면 기억나는 출몰 지역이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끼이익!

그때 하늘에서 날고 있던 새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나는 슬쩍 놈들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자꾸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예, 저희가 찾고 있는 건 생김새가 두꺼비와 닮은 몬스터인데······."

여자가 나서서 찾고 있다는 몬스터에 대해서 설명했다.

두꺼비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데빌 토드?'

시커먼 전신에, 3갈래로 갈라진 혀를 가진 거대 독두꺼비. 레벨은 아마 70에 가까웠던가?

할루멘타에서 두꺼비형 몬스터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놈밖에 없었다.

"······온몸이 새카맣고 혀가 여러 개로 갈라진 놈이었어요. 어, 그리고 또 독을······."

"어떤 몬스터인지 알 것 같군."

내 말에 여자보다도 남자가 더 격하게 반응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서 다급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전에, 놈은 왜 찾고 있는 건지부터 물어도 되겠나?"

이유를 묻는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단순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데빌 토드. 할루멘타의 네임드 보스 중에선 최약체에 속하는 몬스터지만 그래도 일단 보스다.

게임에서도 유저의 독 저항력은 대부분 무시할 만큼 강력한 극독 공격을 하던 성가신 놈이었다.

아무리 남자의 레벨이 높더라도 놈을 상대하다 까딱 방심이라도 했다간 한 번에 골로 갈 것이었다.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그저 놈을 죽이기 위해서요."

"어째서?"

"놈이 내 동생을 죽였으니까."

아······ 복수인가?

더없이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였다.

근데 동생은 뭘 하는 사람이었길래 이런 마경을 돌아다니다가 죽은 거지?

그 의문은 이어진 여자의 말에 풀렸다.

"제 동료이기도 했죠."

"동료?"

"네. 다섯이서 마경이든 어디든 대륙 곳곳을 탐험했었어요. 녀석이 죽은 뒤로는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창 마경을 돌아다니고 어쩌고 했었지.

남자에 비해 레벨이 낮을 뿐이지 여자도 결코 낮은 수준의 마법사는 아니었다.

59레벨이면 어지간한 대귀족가에서도 한자리 꿰찰 수 있는 실력이니까. 모험가 기준에선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또 마경을 함부로 돌아다닐 정도는 아닌데.'

내 눈빛에서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여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워낙에 합이 잘 맞던 녀석들이라, 강한 몬스터를 마주쳐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었어요. 근데 그게 몇 번 반복되면서 자신감이 되고, 자신감이 쌓여서 자만이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뒷말은 굳이 잇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데빌 토드를 마주쳐서 끝내 그는 죽고 나머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푹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남자를 쳐다봤다.

"그렇게 반 년이 흘렀는데, 갑자기 녀석의 형이라면서 이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동생의 복수를 하려니까 할루멘타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그래서 어찌어찌하다가 결국 이곳까지 함께 오게 된 거예요."

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더 궁금한 건 그의 정체였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모험가인 것 같지는 않고, 평범한 신분은 아닐 텐데.

"아, 그리고 이 사람은 바르카토의 레인저 출신이었다고 해요."

······바르카토?

여자가 남자의 정체를 대신 밝혔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바르카토라면 세인테아의 남부 국경을 수호하는 레인저 집단의 최정예 전력 아닌가. 어쩐지 보통 레벨이 아니더라니.

남자가 멋대로 정체를 말한 게 못마땅한 듯 여자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내게 재촉하듯 말했다.

"이제 그 몬스터에 대해 아는 정보를 말해주시오."

뭐, 복수라는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어떻게 말리거나 설득할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나마 놈이 출몰할 확률이 높은 지형이나 환경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 정확한 건 아니야. 그거라도 괜찮다면 알려주지."

"뭐든 상관없소. 알려주시오."

나는 그에게 데빌 토드가 서식할 만한 장소의 특징, 그리고 아예 지역을 직접 몇 군데 짚어주었다.

뭣 하면 기억나는 공격 패턴까지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게임과 현실이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역효과만 날까봐 그건 관두기로 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남자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오?"

그저 마주친 정도로는 알 수 있는 지식도 아니고 의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자유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침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감사하오."

이것으로 서로에게 볼일은 끝이었다.

숲은 빠져나가야 했기에 그때까지만 마저 동행하기로 했다.

원래 말이 지고 다녔던 짐들은 아셸이 모두 짊어졌다.

숲길을 걷다가 여자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저는 체르시라고 해요."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남자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켈립이오."

어차피 곧 헤어질 텐데 이제와서 굳이 이름을 주고받나 싶었다.

"론이다. 이쪽은 아셸."

체르시가 다시 물었다.

"론 경이셨군요. 여쭙기가 조심스러워서 이제야 여쭙는 건데, 경께선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모험가라고 했었는데."

그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건 아무리 봐도 진짜 신분이 아니시지 않나요? 옆에 분도 지금 보니까 동료가 아니라 호위기사······."

내 대답이 없자 그녀도 더 묻지 않고 다른 질문들을 했다.

"그러면 아까 전에 마주쳤던 곰은 대체 어떻게 죽이신 건지 알려주세요, 네? 마력이 아예 안 느껴졌는데 마법은 아니죠?"

모험가라 그런가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눈치를 보면서도 물어보고 싶은 건 다 물어본다.

전부 대답하기가 애매했기에 그냥 적당히 무시했다.

그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새들이 저희 머리 위를 빙빙 도는 것 같네요. 기분 탓인가?"

나도 계속 거슬렸던 것이기에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부터 어디론가 왔다거리면서 머리 위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새들. 왜 저럴까.

거의 숲 밖으로 빠져나왔을 즈음이었다.

초감각으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

아니, 희미한 건 단지 거리 때문이었다.

멀리서부터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그것은 아주 방대한 머릿수의 무리였다.

이내 땅의 진동까지 미세하게 느껴지며 다른 세 사람도 이상함을 인지했다.

"어······ 뭐죠? 땅이 진동하는데?"

그리고 이윽고 숲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전방의 대지로 지평선을 따라서 펼쳐져있는 검고 거대한 선을.

그것은 이곳 할루멘타 마경의 수많은 괴물들로 이루어진 몬스터 대군이었다.

"······."

순간 저게 대체 뭔가 싶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니······ 진짜 저게 뭐야?

"······꿈인가?"

체르시가 넋을 놓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옆에서 아셸과 켈립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몬스터들 사이에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었다.

아주 거대하고, 몸체 한가운데에 길고 두꺼운 촉수 같은 게 달려있는······ 그보다 괴상한 생김새는 둘째치고.

[Lv. 91]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놈의 레벨이었다.

91레벨.

권성과 동일한, 그리고 전에 루터스 산맥에서 만났던 벨르바고라보다도 1레벨이 더 높은 괴물.

'······아.'

나는 놈의 레벨을 확인하고서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저놈이었음을.

마경을 돌아다니면서 이해하기 힘든 몬스터 무리를 자주 조우했던 것도,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거슬렸던 새들도, 지금 눈앞에 펼쳐져있는 몬스터 군단도, 전부 놈의 소행이었음을.

'지배 능력.'

다른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는 능력.

현재 시점에서의 할루멘타에는 아무래도 지배 계열의 능력을 가진 네임드 보스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뭔 미친 물량이야.'

놈이 거대한 촉수를 꿈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뻗었다.

촉수의 끝에서 곧 빛이 모여들더니 거대한 자색빛의 광구가 생성되었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섬뜩한 마력의 기운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부동 장막을 최대한 넓게 펼쳤다.

번쩍!

시야가 완전히 빛으로 물들었다.

놈이 쏘아낸 마력포가 장막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었다.

빛이 가시고 다시 돌아온 시야에 보인 건 폐허가 된 주위였다. 등 뒤로 나무들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장막에 막힌 부분만 멀쩡하고 숲 한가운데가 지워진 듯 뻥 뚫려있었다.

"······무슨 정신 나간."

상황을 파악한 켈립이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넋을 놓고 있던 체르시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 방금 막아주신 건가요?"

나는 대답 없이 저멀리 있는 놈을 빤히 응시했다.

방금의 일격이 아무래도 총공격의 신호였나 보다.

몬스터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이쪽을 향해서 해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도, 도망가죠! 빨리요!"

체르시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켈립은 왜 가만히 있냐는 듯 날 쳐다봤다.

"론 님."

아셸도 드물게 다급한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일천의 머릿수가 넘는 마경의 몬스터 대군단. 저것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가는 뼛조각 하나 남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경우라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 눈에는 저것들 전부가 죽으려고 뛰어드는 불나방 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앞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스으으.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하늘 높이 떠올라 뭉쳐지며 구체를 만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혈술을 펼쳐 피를 뽑아냈다.

점점 크기가 불어나는 시뻘건 혈구는 이내 내 몸통만큼이나 거대해졌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 압축한 뒤, 그대로 전방을 향해 전력으로 폭발시켰다.

퍼어엉!

허공에서 터진 무수한 핏방울들이 대지를 뒤덮은 괴물들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내렸다.

할루멘타 (6)

한순간 전방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쏟아지는 핏물 세례에 그렇게 된 것이다.

작고 가늘은 핏방울들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뒤덮었다.

그리고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돌진해오던 몬스터들의 전열이 우르르 무너졌다. 서로 걸리고, 엉키고, 쓰러지고, 거칠게 지면을 뒹굴고 미끄러졌다. 자욱한 흙먼지가 퍼졌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단 몇십 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

아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살아서 움직이는 몬스터는 없었다. 무더기로 겹겹이 쌓인 시체들의 언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든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였기에.

'이건 대체······.'

도대체 이건 어떤 종류의 힘이란 말인가?

지금껏 7군주의 능력은 바로 곁에서 제법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만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셸은 시선을 돌려 멍하니 7군주를 바라봤다.

손을 거둔 그는 무심한 눈으로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체들 너머, 촉수를 꿈틀거리며 다급히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마치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하찮다는 듯한 웃음을 흘린 7군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는 저멀리 떨어진 허공에 있었다.

***

완전한 전멸.

저리 무식하게 떼거지로 몰려왔을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

다만 아셸이나 다른 두 사람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지만.

어째서 몬스터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인지, 내 능력을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시선으로는 눈앞에 대학살 현장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저 약아빠진 새끼 보게.'

나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대장 몬스터 놈을 바라봤다. 부하들이 전부 죽자마자 바로 줄행랑인가?

나는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쳐 놈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으으!

놈이 다급한 기색으로 또다시 촉수에서 마력구를 뭉쳐냈다. 이번엔 광선처럼 쏘지 않고 통째로 던졌다.

나는 공중에서 부동 장막을 펼쳤다.

장막과 충돌한 광구가 그대로 폭발했다. 가공할 위력이었으나 장막의 방어력을 뚫기엔 어림도 없었다.

섬광이 가시자마자 곧바로 혈술을 펼쳐 길쭉한 가시 형태로 만들어냈다.

아직 거리가 멀지만 피를 맞출 정도까지는 가까워진 상태였다.

허공을 가르고 쏘아진 핏물이 놈의 거대한 몸체에 적중했다.

쿠우웅!

요란스런 굉음과 함께 쓰러진 놈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나는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주위는 몬스터들의 시체 밭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잠시 둘러보고 있다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이만한 몬스터 군단을 학살하고도 경험치 하나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새삼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죽인 놈들이 얼마인데, 만약 레벨업이 가능했으면 지금쯤 몇 레벨이었을까.

다시 공간 도약을 해서 쓰러진 대장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나저나 이런 놈이 왜 몇 년 뒤에는 할루멘타에 네임드 보스로 없었을까.

떠오르는 이유야 많았다. 더 강한 몬스터에게 당했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온 초인에게 죽었거나.

특히 광랑이 마경으로 사냥을 많이 다니기도 하니 어쩌면 그녀에게 걸려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내 내가 있는 곳으로 아셸이 달려왔다.

다른 두 사람도 어느새 근처로 와있었다.

몬스터들의 시체 사이에서 무언가를 빤히 살펴보고 있길래 뭘 보고 있나 했는데, 거대한 두꺼비 몬스터의 시체였다.

'······어.'

잠깐만, 저거 설마?

나는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서 같이 몬스터의 시체를 바라봤다.

데빌 토드. 두 사람이 복수를 위해 찾고 있었다는 몬스터.

아무래도 이놈도 지배에 걸려서 몬스터 무리 사이에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일이 또 이렇게 되네.

"······이놈이 맞아요. 죽었네요."

체르시가 중얼거렸다.

켈립은 대답 없이 놈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허무함을 포함해서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조금 무안한 채로 서있는데, 그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려서 말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감사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시도 어딘가 시원섭섭한 얼굴로 데빌 토드의 시체를 쳐다봤다.

다소 허무하긴 하겠지만 이걸로 깔끔하게 마경을 떠나는 게 그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었다.

서걱.

다시 이리저리 시체를 살펴보던 켈립이 놈의 발가락 끝부분을 조금 베어내더니, 그것을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저걸 왜 챙기나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뭐, 동생의 원수라니 묘에라도 가져가려는 걸 수도 있지.

어쨌든 이걸로 전부 끝이었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진작 끝났었지만 아셸이 실종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이번에도 참 이것저것 일이 많았다. 정작 얻어야 할 신비는 못 얻었는데.

***

체르시와 켈립, 두 사람도 목적을 이뤘기에 더 마경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방향이 같으니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동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헬루멘타를 빠져나온 뒤 작별을 나눴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론 경! 그리고 아셸 경도! 정말로 감사했어요!"

체르시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고, 켈립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지막으로 짧은 감사를 전했다.

나와 아셸은 다시 둘이 되서 이동했다.

말을 잃어버린 탓에 올 때와는 다르게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초재생 덕분에 체력이야 남아돌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이동하며 긴 시간이 흐른 끝에 바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가장 처음 출발했던 도시로 돌아왔다.

히히힝!

달리는 마차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 창밖 경치를 구경했다.

이것으로 신비 찾기 여정도 끝이다. 이제 7군주령으로 돌아갈 때였다.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계획대로 얻었기에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신비는······ 역시 아쉽네.'

나는 끝내 할루멘타에서 얻지 못한 마지막 신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조건이 맞는 타인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비.

한마디로 빙의 능력이다.

다만,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버린 자신의 육체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패널티는 있었지만.

나한테 있어선 별 쓸모도 없을 그 신비를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 신비를 통해 미래에 거대한 재해를 일으킬 빌런이 하나 존재했으니까.

나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를 전부 클리어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큰 문제들을 일으킬 주요 빌런들의 존재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빌런들과 다르게 '놈'은 성가시게도 그 빙의 능력으로 자신의 망가진 몸을 바꿔버린 놈이었다.

때문에 그 전에는 어떤 몸이었는지, 또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유일하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비를 미리 선점해서 아예 문제를 원천차단시키려고 했었던 건데······.

'어쩔 수 없지.'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털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나.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앞으로도 계속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

마차는 달리고 달려 1군주령, 3군주령을 거쳐 6군주령까지 도착했다.

1군주령에서 대군주령을 관통해 바로 7군주령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발킬로프에 대한 소식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3군주령을 거쳤다.

"후우······."

그렇게 해서 현재 위치는 6군주령의 수도인 마헤아.

나는 여관 방의 창틀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음 군주 회의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남았다. 군주성으로 돌아가고 나면 뭐부터 해야 되나 고민 중이었다.

세인테아로 넘어갈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까진 촉박하고, 이제 다음 회의까지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기에.

그때 거리에서 소란이 일었다.

나는 고개를 내렸다.

웬 남자가 한 어린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서 윽박을 질러대고 있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걸 잡은 모양이었다. 주위의 행인들이 힐끔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어이, 무슨 일이야?"

그때 무장한 병사 둘이 그들을 향해서 다가왔다.

소년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가 조금 움츠러든 기색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더니 소년을 쳐다봤다.

"어이구, 소매치기라고? 비켜보쇼. 이런 몹쓸 버러지한테 그리 말로만 해서 되겠나?"

그리고는 남자를 밀치더니 갑자기 창대를 휘둘러 소년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병사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쓰러진 소년을 가차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악, 아악······!"

병사의 발길질에 밟힌 소년의 팔에서 우득 소리가 났다. 소년이 더 큰 비명을 내질렀다.

지나치게 가혹한 손속에 오히려 소매치기를 당한 남자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봤다.

주위 행인들도 다들 쉬쉬하며 병사들을 피해서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도 저렇게 썩어버리는 법이다.

폭왕이 다스리고 있는 이곳 6군주령의 치안이란 대체로 저런 꼬라지였다.

뒷골목의 양아치마냥 여행객들의 돈을 털거나, 처벌을 가장해 폭력을 행사하며 즐긴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그랬었지.

그렇게 병사들은 몇 분 가량을 실컷 소년을 짓밟고 난 뒤에야 떠나갔다.

"으, 으으······."

온몸이 흙먼지에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바닥을 꿈틀거렸다. 물론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걸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니, 그때 한 지나가던 노인이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난쟁이처럼 작달막한 체구에 주황색의 수염이 성성한 노인.

그가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혀를 차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그의 부러진 팔에 꼴꼴 붓기 시작했다. 포션이었다.

그렇게 노인은 소년을 치료해주고서 곧장 다시 가던 길을 가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등에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

그 일련의 광경을 조금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이 세계에서 포션은 질이 낮은 하품이라도 귀하다. 그런 포션을 남에게 선뜻 베풀어줄 수 사람이란 보기 드문 선인이었다.

멀어져가던 노인은 이내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거리 구경을 관두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번뜩하고 무언가가 스쳤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튕기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그 노인, 설마?

개성이 강한 외모였기에 나는 이내 곧바로 노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 사람이 왜 이 도시에 있지?'

지금 시점에서의 그는 6군주령의 수도에 있었단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거물의 발견이었다.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가, 서둘러 방 한쪽에 걸려있던 로브를 뒤집어쓰고 여관 밖으로 나섰다. 아셸을 놔두고 혼자서.

나는 거리로 나서서 노인이 들어갔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어진 길로 쭉 이동하니, 이내 저멀리 있는 포션 가게의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인가 싶어 다가가려는데 옆쪽으로 난 샛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잠깐 멈춰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거리에서 봤던 병사 두 놈이 나를 향해 건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리프리곤 (1)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병사들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러더니 곧 능청스레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 뭐야? 수상한데? 대낮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이런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나?"

······뭐라는 거야?

로브 후드 좀 올렸다고 수상하다니,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지금 삥뜯는 거여?'

다른 군주령에 비해서 특히나 여러모로 막장인 6군주령이었다.

치안을 유지해야 할 병사들이 행인들의 돈주머니를 터는 것쯤은 이곳에선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병사 중 한 놈이 야비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손을 흔들거렸다. 다른 한 놈은 조금 떨어진 뒤에서 위협하듯 창을 까닥거렸다.

"조용히 지나가고 싶으면 성의 좀 보이지 그래. 아니면 어디 몇 군데 얻어맞고 우리랑 함께 가든가."

그냥 대놓고 하는 강도질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이 쪼개고 있네? 지금 장난 같냐?"

놈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무시하고서 위쪽을 둘러봤다.

내 능력에는 중간이 없어서 죽일 게 아니라면 이것들을 적당히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마경에서 몬스터들을 그렇게 학살하고 다녔으면서 20레벨도 안되는 병사 두 놈 제압하지 못하는 처지가 레전드네.

아무리 그래도 죽이긴 그렇고, 대충 공간 도약으로 건물 위로 올라가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이."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막 향하려던 포션 상점에서 나온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메고 있는, 얼굴에 사선으로 길쭉한 칼자국이 난 단발의 여인. 한 손에는 막 구매해서 나온 것인지 포션 한 병이 들려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병사들이 어째서인지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그녀가 그런 놈들과 나를 한 번 번갈아 보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병신들아."

병사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에 한 놈이 욱한 표정으로 뭐라 입을 열려고 했으나, 동료가 다급히 말렸다.

"야, 야······ 가자."

두 놈은 여인을 노려보는 것밖에 못한 채 이내 도망치듯 옆쪽의 샛길로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기껏해야 노예 나부랭이인 년이 건방지게······."

······노예?

나는 말 한마디로 병사들을 쫓아내버린 여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옆을 지나쳐서 가던 길을 마저 가버렸다. 뭐지?

일단 도와준 것 같은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홱 가버리니 좀 황당하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신경 끄고 나도 마저 갈 길을 갔다. 그녀가 나온 포션 상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간판이 걸린 낡은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밖에서 본 외관처럼 낡았지만 깔끔히 정돈된 분위기였다. 다만 냄새는 뭔가 이것저것 섞인 매캐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는 갖가지 색의 포션들. 알키마스 공방에서 봤던 풍경이 떠오른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이내 구석에 있던 진열대 안쪽에서 노인이 걸어나왔다. 찾고 있던 노인이었다.

'제대로 맞게 찾아왔네.'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계산대의 의자로 다가가서 털썩 앉으며 말했다.

"못 보던 손님이군. 어떤 포션을 구매하려고 오셨나?"

나는 잠시 고민하고 대답했다.

"일단 좀 둘러보고."

"편한대로 하시게."

노인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책상 위에 있던 담뱃대를 집어들었다.

서랍에서 잎파리를 꺼내 채워서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고 뻑뻑 피워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노인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의 포션들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둘러보겠다고 한 건, 그와 어떻게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하나 신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연금술사 굴피로.'

현시대의 대륙에서 가장 명망 높은 대연금술사 중 하나.

그리고 무려 엘릭서, '디페리의 성혈'을 제작해낸 인물.

그것이 바로 노인의 정체였다.

그가 어째서 이런 인적 드문 골목에서 낡은 포션 상점이나 운영하고 있는지는, 현시점에서의 그의 처지가 어떨지 알기에 대충 예상이 됐지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른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뿜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장, 이 가게는 얼마나 운영했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거 젊은 놈이 말을······ 이제 대충 1년 정도 됐지, 왜?"

1년이라.

나는 다시 물었다.

"주인장은 이름이 뭔가?"

"내 이름? 플레온. 그건 알아서 어디에 쓰시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명이 아닌 진짜 이름을 묻는 것이다."

그 말에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노인이 풍기고 있던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대신 위압감으로 채워졌다.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정색한 채 나를 쳐다봤다.

"누구냐, 네놈은?"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7군주."

"······뭐?"

노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위협할 생각은 없다. 잠시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뿐이다, 연금술사 굴피로."

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가게 창밖을 슬쩍 쳐다봤다. 그 모습에 말을 덧붙였다.

"혼자서 왔다."

"······정말 당신이 7군주요? 이번에 새로 즉위했다는?"

"그래."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아니라면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하는 미치광이인 거겠지. 조금안 알아봐도 드러날 사실을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노인, 굴피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는 물어봐야 의미도 없겠지. 이유가 뭐요?"

왜 자신을 찾아왔냐고 묻는 것이었다.

"엘릭서라도 만들어달라고 할 셈이면 관두시오. 이제는 못 만드니까."

"아니다."

"아니면 영입을 할 생각이신가? 날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소용없으니까 그것도 관두시고."

"그 또한 아니다."

무려 엘릭서로 인정받을 정도의 신약을 제작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당연히 영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나는 딱히 그것을 목적으로 이 사람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대연금술사 굴피로.

그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아군 진영에 중요한 때에 한 번 큰 도움을 주는 강력한 조력자로서 등장했었다.

아까 길거리에서 소년을 돕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선인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굳이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더라도, 그의 신변이 위험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면 보호해주는 게 좋았다.

왜냐면 지금 그는 아마······.

"세인테아의 눈을 피해서 칼데릭까지 온 거겠지."

굴피로가 쯧 혀를 찼다.

"뒷조사야 이미 다 했을 거면서 뭘 물으시나?"

그는 본래 세인테아 진영에 속해있던 인물이었다.

세인테아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세 높은 마법사 집단인 마탑.

본래 그곳에 속해있던 연금술사인 그는 어떠한 이유로 마탑과 황실에 배신을 당했다. 엘릭서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리고 목숨만 건져 겨우겨우 추적에서 벗어난 그는, 몇 년 뒤 미래에선 이곳 칼데릭이 아니라 남대륙의 땅에 있었다.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굳이 6군주령의 수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성향상이나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나, 이곳 마헤아는 자리를 잡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폭왕의 군주성이 떡하니 있고 매일마다 '노예 검투'까지 벌여대는 도시였으니까.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소. 안 그래도 가능하면 바로 뜰 생각이오."

"그럼 7군주령의 수도로 오면 되겠군."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굴피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영입할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소?"

"영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다스리는 땅으로 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나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굴피로. 그저 세인테아의 추적으로부터 그대의 신변을 완전히 보호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군주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해주겠다니.

그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전부 사실인데.

"일단 이것부터 알아둬라, 굴피로."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굴피로쯤 되는 인물에게 어설픈 이유를 갖다붙이기는 통하지 않을 테니.

"그대는 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 중 한 명이다. 그런 인물이 세인테아에 등을 돌리고 칼데릭에 왔는데, 이 땅에 머물고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이득이지. 칼데릭이 너의 안위를 챙기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도?"

"그래, 생각이야 나중에도 얼마든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호감 사기라고 여겨도 좋다."

나는 굴피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사소한 빚 하나 때문에 유저 일행을 끝까지 도와줬었다.

한마디로 뭘 받기만 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를 곁에 두고서 지속적으로 호감도를 쌓으면 언젠간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호감 사기라, 허."

굴피로가 헛웃음을 흘렸다.

"칼데릭의 군주나 되시는 지고한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도 단순히 대륙적인 명성만으로는 군주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단지 일신의 무력이 부족한 연금술사기에 이렇게 세인테아의 눈을 피해 숨어서 사는 신세가 된 것이지.

"이거 좀 마저 펴도 되겠소?"

굴피로가 내려놓은 담뱃대를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잠시 연기만 뻑뻑 피워대더니, 곧 입을 열었다.

"대군주도 내 존재를 알고 있소?"

"아니."

"그러면 6군주는?"

"그 역시 모른다."

그에 굴피로가 어째서인지 작게 침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만약 7군주령으로 가면 설마 군주성에서 머물러야 되는 것이오?"

"거처야 원하는 곳으로 얼마든 마련해주지."

순간 머릿속에 알키마스 공방이 떠올랐다.

굴피로와 그녀를 은근히 접촉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스칼릿은 재능 있는 연금술사고, 그런 그녀가 굴피로에게 조금이라도 연금술을 배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니까.

다시 생각에 잠긴 듯 굴피로는 말없이 한참을 담배만 태웠다.

그리고는 몇 분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7군주 그대의 말대로 엔록으로 가지. 어차피 거절해도 내 주위에 눈은 계속 붙여둘 것 아니오."

······음,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내 제안을 수락한 데에 그것까지도 고려한 듯했으니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잘 생각했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리프리곤 (2)

······조건?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연금술 연구에 필요한 재료라도 구해달라고 하려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사람 한 명을 좀 구해줬으면 하오."

"······사람?"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악티폴의 노예 검투에 대해 아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모를 리가 있나.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굴피로가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도시에 정착했을 즈음부터 꽤 친하게 지낸 자가 하나 있소. 작은 과일 노점상을 운영하던 밴이라는 젊은 놈인데, 최근에 얼굴 비추는 일이 없어서 알아보니 도시의 대부업자들한테 빚을 못 갚고 끌러갔다더군."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이미 악티폴 쪽에 노예로 팔려서 경기에 출전하게 될 것 같다고 하던데, 7군주께서 그놈을 구해줬으면 하오. 부탁드리겠소."

방금 전보다 좀 더 정중해진 말투로 부탁하는 그였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갚아야 할 빚이 좀 큰가?"

"이자를 얼마나 붙여먹은 건지 30골드가 넘었다더군. 악티폴을 찾아가보니 놈들은 몸값을 거기서 또 배로 부르고 있고. 그래서 제대로 된 포션이라도 하나 제작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소. 내가 지금 재산이랄 게 거의 없는 빈털털이 처지라."

이게 무슨 말인가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가 이내 이해했다.

상품의 포션을 제작해서 그 잡혀갔다는 남자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려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찾아온 거고.

'······조금만 늦었으면 곤란할 뻔했잖아?'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내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굴피로를 찾아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지금은 그냥 적당한 포션들이나 만들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가 정말 제대로 된 포션을 제작해서 판매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이 수도의 권력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정체까지 탄로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멀지 않은 미래에 이곳에 계속 남아있지 않고 남대륙으로 이동했던 것도 어쩌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어려울 건 없는 일인데.'

주머니에 썩어나는 게 돈이었다. 몇십 골드쯤이야 푼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돈으로 안 되는 일이라고 해도 권력으로 얼마든 해결할 수 있었고.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알겠다. 바로 데려오도록 하지."

"고맙소."

나는 일단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뒤, 대화를 마무리하고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

폭왕이 다스리는 6군주령.

특히 수도인 마헤아는 그의 악명답게 여러가지 패악과 부패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하나를 꼽자면 바로 노예 검투였다.

'저기군.'

여관으로 돌아간 뒤, 아셸과 함께 곧장 다시 밖으로 나서서 향한 곳은 도시의 서쪽이었다.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대로와 건물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져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악티폴.

마치 콜로세움처럼 생긴 저 거대한 경기장을 부르는 이름이다.

무장한 노예 검투사들이 출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오로지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죽음의 경기.

주위에는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악티폴 안으로 출입하고 있는 많은 행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지 경기장 안에서는 관중들의 시끄러운 환성과 야유가 뒤섞여 울려퍼지고 있었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게임에서도 악티폴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특히 그 스토리가 어두웠었다.

그렇기에 저 안에서 지금 얼마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안 봐도 훤히 보였다.

목숨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운 세계였고, 특히 이 마헤아 시는 더더욱 그렇다.

저들에게 있어 노예들의 처절한 사투는 그저 한순간의 여흥일 뿐이고, 도박으로 한탕 크게 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나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경기장이 아니라 그 옆에 붙은 노예 수감소 건물이었다.

굴피로가 말했던 대로면 그 밴이라는 남자는 지금쯤 저곳에 갇혀있을 테니까.

'일단 돈으로 해결을 봐보고.'

좀 염려되는 건 저쪽에서 자꾸 몸값을 올려치려 하거나, 아예 강짜를 부리며 안 팔겠다고 나오는 경우인데.

그럴 경우에는 그냥 권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긴 했지만 이게 또 애매했다.

내가 7군주라고 정체를 밝히면 당연히 군주성에 있을 폭왕의 귀에도 순식간에 들어갈 테니까.

내가 이 도시에 있다는 게 놈에게 알려지는 건 웬만해서 피하고 싶었다. 혹시 날 만나겠다고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니.

지금 이렇게 로브까지 입고 다니는 이유도 혹시나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런 것이었다. 7군주령과 바로 이웃한 6군주령이었으니까.

'폭왕 발테거.'

나는 잠시 놈에 대해 떠올렸다.

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주 많으면서도 하나같이 간단했다.

쓰레기, 말종, 폭군, 악마, 괴물, 그리고 밖에도 기타 등등······.

놈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대로만 행동하며, 타인의 고통을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즐기는 최악의 흡혈귀다. 노예 검투장 악티폴이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이 라사 세계관에는 수많은 빌런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 가장 원초적으로 역겹고 추악한 놈을 꼽으라면 그건 폭왕이었다.

"······."

그러고 보니, 놈에 대해 생각하니 문득 또 다른 인물 하나가 떠오른다.

사실 폭왕은 다른 군주들보다 여러모로 주의를 기울여 지켜봐야 할 놈이기도 했다.

그냥 단순한 쓰레기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놈의 정도를 한참 벗어난 악인이긴 해도 어쨌든 같은 군주로 있는 이상 딱히 나에게 해가 될 건 없었으니까.

단지 이유는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 다른 중요한 인물 하나와 아주 깊이 엮여있었기 때문이다.

'살귀 리프리곤.'

7군주좌의 본 주인.

지금은 어쩌다 내가 차지하게 된 7군주좌에 본래 앉았어야 할 인물.

게임 플레이 시점에서, 그러니까 몇 년 뒤 시점에서의 칼데릭의 7군주는 바로 그였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왜냐면 게임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는 나온 게 아예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군주씩이나 되는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녔기에 얼굴조차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리프리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 남성이라는 것, 한마디로 종족과 성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폭왕에 대해 엄청난 복수심과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심지어 메인 스토리에서도 세인테아 테러 에피소드 중 폭왕을 무참히 살해한 뒤 허망하게 자폭해버렸기에, 그에 대한 자그마한 뒷배경조차 하나 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유저들 사이에서도 라사 최대의 미스테리 중 하나로 꼽혔었지.'

따로 배경 스토리도 안 풀 놈은 대체 왜 군주로 만들어놓은 거냐고 운영진 욕도 엄청 했었고.

혹시 리프리곤과 관련된 히든 피스라도 숨겨져있는 건가 찾아다닌 유저들도 한가득이었지만 결국 발견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리프리곤뿐이 아니더라도,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는 이런저런 시원찮게 풀리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기에 유저들의 원성을 많이 사긴 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폭왕은 앞으로 계속 신경을 써야 될 놈이기는 했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는 리프리곤의 존재 때문에.

그 정체 모를 괴물이 미래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 신상 파악은 가능하면 해두는 게 이로운 것이 당연했다.

'일단은 굴피로부터 데려가는 일에 집중하고.'

잡생각을 마치고 다시 해야 할 일로 신경을 돌렸다.

수감소 건물로 향하는데 근처에서 고함이 울려퍼졌다.

"······어, 저거 저놈!"

경기장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던 한 병사 무리였다.

병사들 중 하나가 날 가리키며 소리치더니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또 뭔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자세히 보니 아까 전에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놈들이었다.

"뭐야? 뭔 일인데?"

"아니, 아까 골목에서 마주친 놈인데······."

한 놈이 동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한 놈은 띠꺼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내 앞에 섰다.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아까는 잘도 그렇게 빠져나갔지?"

······아, 바쁜데 짜증나게 구네.

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에 아셸이 나서서 놈의 팔목을 덥썩 붙잡았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놈이 붙잡힌 팔목을 빼내려고 발버둥쳤지만 될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치워라."

그에 아셸이 가볍게 옆으로 밀어버리자 놈이 한순간 붕 떴다가 비명을 내지르며 요란스레 땅바닥을 굴렀다.

다른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창을 치켜들었다.

어째 판에 박힌 삼류 빌런 같은 모습들에 괜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이것들 진짜 뭐 하냐?

"가, 감히 병사를 공격······."

"무슨 소란들이냐!"

그때 또 여기로 다가오는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경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온 그가 병사들을 둘러보고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병사를 공격한 걸로 보이는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나는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마헤아에서 감히 군권에 저항한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기사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검을 뽑아들었다.

"두 연놈 모두 순순히 투항하고 따라오도록. 아니면 바로 즉결 처형하겠다."

얼씨구······.

진짜 이 도시가 아주 개판이긴 하구나 싶었다.

살기까지 뿜어내는 게 놈은 말에 따르지 않으면 진심으로 죽일 생각인 듯 싶었다.

소란에 주위에 인파가 조금 몰려들었다.

방금 아셸에게 던져져서 날아간 놈은 기사의 눈치를 보며 우리를 향해 꼴 좋다는 듯 조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 병신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순간 미간을 좁힌 채 옆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기운 하나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곧 경기장 입구로 이어지는 길에 모습을 드러낸 건 두 남녀의 모습이었다.

흑발에 적안을 지닌 거구의 남자, 그리고 그 뒤쪽에 붙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여인.

[Lv. 94]

나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썅, 마주치기 싫었는데 하필······.

"······!"

일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의 등장에 경기장 주위를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한테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검을 떨어뜨리고서 허겁지겁 무릎을 꿇은 뒤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6군주 폭왕.

모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나와 아셸뿐이었다.

"미, 미친놈. 뭘 하는 거냐? 6군주님이시다! 어서 무릎을 꿇어!"

나를 힐끗 올려다본 기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외쳤다.

나는 무시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폭왕을 빤히 응시했다.

이내 바로 근처까지 가까이 다가온 놈이 걸음을 멈춰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폭왕이 씨익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깜짝 놀랐군. 6군주령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7군주?"

리프리곤 (3)

자그마한 딸꾹질 소리가 울렸다.

내 옆쪽에서 바짝 엎드리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폭왕의 발언에 그의 곁에 있던 수행원이 화들짝 놀란 기색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아셸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그래? 수도에 직접 걸음할 거였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나. 그럼 아주 성대히 맞이했을 텐데 말이야."

놈은 마치 오랜 벗이라도 대하듯 친근한 투로 말했다.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다행히 자세히 안 묻는 건가.

폭왕이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옆쪽의 기사와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뭔가 실랑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들의 몸이 덜덜 떨렸다.

나를 향해 엉거주춤 몸을 돌린 기사가 바닥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쿵 박았다. 그리곤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대며 말했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무지함에 감히 위대하신 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때 폭왕이 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눈웃음을 지은 채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래그래, 어쩐지. 웬 벌레들이 7군주 자네한테 무기를 들이밀고 있길래, 나는 또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지 뭐야."

쫘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기사의 몸이 몇 갈래로 분리되었다.

이어서 뒤쪽에 엎드린 병사들까지도 전신이 무참히 찢겨나갔다.

시뻘건 선혈이 흩뿌리고 시체 조각들이 바닥을 뒹군다. 그 광경에 아셸이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내 대신 사과하지, 7군주. 귀한 손님에게 실례가 많았어."

마치 벌레라도 내쫓듯 폭왕이 휘두른 손짓에 여섯은 그렇게 갈기갈기 찢긴 고깃덩이로 변모했다.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거두는 놈을 바라봤다.

'미친놈······.'

원래 이런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진짜 또라이 새끼가 따로 없었다.

거리 한편에 한순간에 일어난 참극.

하지만 주위에선 터져나오는 비명 하나 없다. 엎드려있던 행인들 중 몇몇은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숨소리라도 내면 지금 널브러진 주검들과 똑같은 꼴이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으, 우으······."

그때 한쪽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한 어린아이가 입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모친으로 보이는 여인이 하얗게 질렸다. 그 작은 입을 틀어막고서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더 지켜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는 폭왕을 말로 붙잡았다.

"사과는 받는 걸로 치고 이쪽도 부탁 하나 하지, 6군주."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린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무슨?"

"저 수감소에 있는 노예 한 명을 데려가고 싶은데."

아······ 이놈한테 내 목적을 꺼내기는 별로 안 내켰는데.

다급하게 관심 돌릴 이야기를 찾다 보니 이게 튀어나왔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놈에게 부탁해서 후딱 데리고 빠져나가야겠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들어주겠지.

놈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호, 노예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였나? 어떤 놈을 찾는 거지? 왜 찾는 건데?"

놈이 이 일에 깊게 흥미를 가지는 건 좋지 않다.

나는 물음을 무시하고서 무심함을 가장한 채 물었다.

"들어줄 건가?"

그에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놈이, 이내 킬킬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누구의 부탁인데. 그깟 노예야 한 놈이든 백 놈이든 원하는 대로 데려가라고. 대신에 나도 부탁 하나만 하지."

뭐?

놈이 내 어깨 너머로 경기장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거든. 잠깐 시간 좀 내서 나와 함께 구경 좀 하자고. 어때? 그 정도는 괜찮겠지?"

"······."

나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또 갑자기 뭔 개소리야?

***

폭왕의 행차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악티폴 안으로 들어가자 높은 간부로 보이는 이들이 허겁지겁 몰려와서 놈을 모셨다.

현대의 축구장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

관중석은 바깥에서 들렸던 소리처럼 수많은 사람들로 빽빽히 채워져있다.

나는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황제나 앉을 법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폭왕은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쩌다 보니 잠시 이놈과 함께 어울려서 경기를 관람해야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에 대해 파악하고 싶은 건지, 친분을 쌓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변덕인 건지.

최대한 마찰 없이 노예만 빼가야 하니 별 수 없이 거절하지 않고 수락은 했다만, 참 성가시고 불편한 자리였다.

"입은 안 허전한가, 7군주?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구경하면 될 텐데 말이야."

술은 개뿔이.

나는 욕을 퍼붓고 싶은 걸 참으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필요 없다."

"큭큭, 그래. 곧 경기가 재개할 모양이니 즐겁게 감상하자고."

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하들이 대령해온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황금색 잔에 한가득 담긴, 각설탕처럼 생긴 붉은색 큐브.

힐끗 쳐다보자 놈이 큐브 하나를 더 집어들어서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으며 말했다.

"아아, 이거? 피로 만든 간식이다. 신신한 피도 좋지만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굳힌 피도 나름 맛이 각별하거든."

······하여튼 역겹네.

폭왕은 최악의 흡혈귀답게 한시도 쉬지 않고 피를 갈구하는 놈이었다.

게임에서도 고작 놈의 식사 때문에 매년 마헤아에선 수백의 생명들이 희생된다고 했던가.

와아아아!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경기가 시작되려는지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경기장 끝쪽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철문이 굉음과 함께 올라가더니, 각각 노예 검투사가 걸어나왔다.

검과 방패로 무장한 인간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제 몸집만 한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수인 남자였다.

- 벌써 10경기째 압도적인 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괴물 신인, 오그! 그리고 그 상대는 3계의 수문장, 가테리!

확성 마법 같은 거라도 사용했는지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곧바로 결투가 시작됐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수인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먼저 돌진했다.

그에 인간 남자도 몸을 옆으로 빼내며 방패로 능숙하게 상대의 공격을 흘렸다.

그렇게 잠시 동안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으나, 나는 어느 쪽이 더 승리할 확률이 높은지 쉽게 알 수 있었다.

[Lv. 26]

[Lv. 23]

왜냐면 검과 방패를 든 인간 쪽이 레벨이 더 높았으니까.

결과는 곧 레벨의 차이대로 나왔다.

거칠게 몰아치는 공격을 노련하게 계속 방어만 하고 있던 그가, 한순간 빈틈을 노려 수인의 옆구리를 베었다.

잇따라 몰아치는 공격에 팔과 다리까지 연달아 베인 수인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악티폴의 검투는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만 끝나는 경기다.

그래서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는 이대로 남자가 수인을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경기를 끝내지 않고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수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그의 눈에 들이밀었다.

"······끄아악!"

단검에 두 눈을 뽑힌 수인이 피눈물을 쏟아내며 바닥을 굴렀다. 관중들이 환호했다.

남자는 관중석에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수인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곧 수인이 떨어뜨린 무기를 더듬더듬 집어들고서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공격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관중석에서 연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실컷 수인을 농락하던 남자는 분위기가 식어갈 즈음에 끝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봤다. 속으로는 인상을 한가득 찌푸린 채.

'지랄맞네, 참······.'

악티폴의 검투.

게임에서도 관련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이 경기가 이딴 식이라는 건 물론 알고 있었다.

상대를 무조건 모두 죽여야만 경기가 끝나고, 그 과정에 규칙 따윈 아무것도 없다. 고문을 하든 뭘 하든 상대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더 높은 퍼포먼스를 관중들에게 보이기 위해 상대를 최대한 잔혹하고, 자극적으로 죽이는 노예들도 많았다. 그래야 자신의 몸값을 더욱 높일 수 있었으니.

악티폴에서 일정 등급 이상의 노예는 수감소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고 재산도 축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부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필사적이게 되는 것이었다.

이어진 경기들은 1대1 결투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이 있었다.

한쪽이 전부 죽을 때까지 싸우는 단체전이라거나, 포획한 몬스터를 풀어놓아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하기도 했다.

단체전에서는 한 사람을 남겨놓고 여럿이 남은 쪽이 사방에서 농락하듯 쫓아다니다가 무참히 죽여버렸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경기에서는 노예들보다 몇 배는 더 덩치가 큰 대호가 나왔는데, 결국 상대하는 노예들은 전부 다 죽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일련의 경기들을 보며 내가 느낀 기분은······ 그저 더러움밖에 없었다.

이딴 게 즐거운가?

어떻게 사람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걸 보면서 이리도 열광할 수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옆에 앉은 폭왕을 돌아보니 놈은 따분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럴 거면 나는 왜 끌어들여서 경기를 보자 한 거야?

- 자, 그럼 다음 경기는 모두가 기다리시던 5계의 경기입니다!

사회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악티폴의 검투사 등급에 대해 상기했다.

가장 낮은 1계부터 시작해서 5계까지, 그리고 가장 위에는 챔피언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5계의 경기면 챔피언전을 제외하고서 악티폴에서 가장 강한 검투사들이 맞붙는 경기였다.

- 먼저 수문장 루톤을 꺾고 이번에 새로 5계로 승급한 검투사, 철격의 폴!"

이전의 경기들보다 훨씬 커진 함성과 함께, 경기장으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머리통만 한 쇠구가 달린 거대한 철퇴를 무기로 들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상대는 벌써 5계에서 반 년을 넘게 살아남고 있는! 챔피언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강의 검투사, 투귀 리프!

이어서 그 반대편의 철문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검을 들고 있는 단발의 여인.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왜냐면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으니까.

전에 골목에서 마주쳤던, 병사들을 쫓아내줬던 바로 그 여자였다.

"흐."

그때 지금까지 감흥 없는 표정만 짓고 있던 폭왕이 어째서인지 눈을 빛내며 웃음을 흘렸다.

관중석의 관중들이 흥분에 가득 차서 두 검투사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리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리프리곤 (4)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함성 속,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쥔 검을 늘어트리고 섰다.

무장이라고는 지금껏 나온 노예들처럼 방어구 하나 없이 무기가 전부다. 반대편에 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철퇴를 붕붕 휘두르며 그녀를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마치 투지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나?"

폭왕이 내게 물었다. 묘하게 들뜬 듯한 목소리.

지금껏 쓸데없는 말들만 지껄이다가 처음으로 경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여자 쪽이 이기겠지."

놈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웃음을 흘렸다.

"바로 단언하는군? 확신할 수 있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Lv. 43]

[Lv. 42]

확신까지는 아니었다.

40레벨대에서의 1레벨이 그렇게까지 큰 격차는 아니니까.

여자 쪽이 이길 확률이 높은 건 맞지만 변수가 일어나긴 충분한 차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왠지 그 변수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네.

이건 그냥 직감이었다.

나는 마주 보고 서있는 두 검투사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 자, 그럼······ 경기 시작!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남자가 돌리고 있던 철퇴를 곧장 여인을 향해 쏘아냈다.

여인이 몸을 틀어 피하며 접근했다. 그에 남자가 능숙하게 철퇴를 거둬들이며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그는 거리를 좀처럼 내주지 않았다. 뒤로 몸을 빼내며 육중한 철퇴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철구에 붙은 가시가 여인의 몸 이곳저곳을 스치고 피가 튀어올랐다.

그녀는 몰아치는 공격을 한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계속해서 상대에게 몸을 붙이려 들었다. 한 대쯤은 맞아도 상관없다는 듯, 야수처럼 과감하고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쥐새끼 같은 년이······!"

기세에서 밀린 쪽은 남자였다.

그가 다급히 철퇴를 짧게 잡고서 강하게 내리쳤다.

여인의 순간 낮게 자세를 낮췄다. 공격을 피하며 철구와 이어진 사슬에 검을 한 차례 휘감고서, 확 당겨버렸다.

남자가 철퇴를 놓쳤다. 그녀 역시 사슬에 얽힌 검을 그대로 내던져버리고서 허리춤의 다른 검을 뽑아들며 돌진했다.

다급히 검을 뽑아든 남자도 여인의 공격에 응수했다.

잠시 동안 검투가 이어졌다. 검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명백히 실력이 위인 쪽은 여인이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검격에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어만 하기 급급했다.

촤아악!

그리고 어느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그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사, 살려줘! 제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시간도 없이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에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이 있어! 내가 없으면 걔들은 전부 죽는다고! 제발······!"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붕 떠오른 남자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여인이 무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남자의 시체에도, 관중들에게도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바로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여지껏 싱겁게 끝난 시합들에는 야유만 퍼붓던 관중들이었기에 역시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만큼 환호성도 컸다.

"하하! 역시 리프 저 년이 최고라니까!"

"최고긴 뭐가 최고야? 저건 예전에 한창 밑바닥에서 구를 때가 재밌었지, 요즘은 이따위로 다 싱겁게만 끝내고 말이야."

"그나저나 5계에서는 이제 아예 상대가 없겠는데? 곧 챔피언한테도 도전하지 않겠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챔피언한테는 아직 안 되지······."

귓가에 들려오는 관중들의 대화 소리.

폭왕이 능청스레 감탄하듯 말했다.

"이거 자네 말대로 됐군."

"······."

놈은 경기장 밖으로 퇴장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게 물었다.

"어때, 7군주. 경기는 즐거웠나?"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게 재밌나?"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놈이 클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글쎄, 제법?"

"······."

"벌레들 싸움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법이거든. 저런 하찮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고, 물어뜯고, 끝내 절망하고. 가끔씩 구경하면 가벼운 여흥 정도는 된다고······ 뭐,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구만. 큭큭."

다른 군주들도 다 그렇더라고.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 놈이 쩍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몇 경기 더 남은 모양인데, 계속 관전하겠나?"

이제 볼 건 다 봤다는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저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그만 끝낼까. 찾는다는 노예는 이놈한테 안내받으면 돼."

그렇게 말하며 놈이 가리킨 이는 뒤쪽에 서있던 수하들 중 한 명이었다. 덥수룩한 장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수인 남자.

"만나서 즐거웠어, 7군주. 나는 먼저 가보겠네."

놈은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수하들이 따라붙었다.

나는 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홀로 자리에 남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수감소장인 길로크입니다. 수감소에 있는 노예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곧바로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래를 힐끗 내려다봤다.

여인의 모습은 어느새 출구 바깥으로 사라져있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열기 속에 경기장에는 핏물과 시체 한 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

길로크는 자신이 찾고 있는 노예를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직접 수감소로 이동했다.

이것저것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가득 풍기는 복도.

노예들이 갇혀있는 철창을 지나치며 앞장서서 걷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마지막으로 본 경기에 출전했던 여자, 이름이 리프라고 했던가?"

길로크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6군주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다른 경기들엔 관심도 없던 폭왕이 유일하게 그녀의 경기에만 흥미를 드러낸 것처럼 보였으니까.

경기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전 경기들보다 수준이 높긴 했어도 기껏해야 40레벨대의 대결, 놈이 보기에는 어차피 전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그렇다면 경기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 자체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예상이 맞는지 그가 조금 굳은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꺼내기가 곤란한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그럼 말해보도록."

재촉하자 곧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친동생이 6군주님의 혈술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중독?"

그 말에 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6군주의 혈술, 중독.

'······광혈병을 말하는 거군.'

6군주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혈술은 놈의 성향답게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놈의 혈술은 기본으로 육체 능력을 증폭시키는 능력이다.

하지만 혈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폭주 상태에 돌입하면 몸에서 혈무를 뿜어내는데, 문제는 그 안개에 접촉한 대상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신에 피가 들끓어 스스로의 생명력을 불태우며 말이다.

이것이 병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폭주가 끝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도 놈의 혈기가 계속해서 몸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재앙인 놈이지.'

놈이 최악의 흡혈귀라 불리는 데에는 단순히 악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 능력의 존재도 큰 몫을 했다.

게임에서도 놈의 그런 능력 때문에 과거에 멸망한 도시나 마을이 몇몇 있다는 설정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마력이 있거나 정신의 격이 높다면 저항이 가능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민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챔피언을 차지한 검투사에게는 6군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녀는 악티폴의 검투사가 된 겁니다."

"······."

짧은 설명이지만 의문을 모두 해결하기에는 충분했다.

광혈병에 걸린 동생, 그리고 챔피언이 되면 6군주에게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챔피언이 되서 동생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기 위해 검투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현재 챔피언은 누구지?"

"저입니다."

······뭐?

내가 쳐다보자 길로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현 악티폴의 챔피언입니다."

"······아까는 이곳의 수감소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소원으로 노예 수감소를 관리하고 싶다고 간청드렸기에 수감소장의 직위도 함께 겸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 건가.

나는 살짝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왜 하필 수감소장이지? 훨씬 더 좋은 자리들이 있을 텐데."

소원이라고 해도 당연히 한계는 있겠지만, 그래도 평생 놀고먹으며 살 재산을 얻거나 군주성의 기사 직위 정도는 꿰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임에서도 6군주성에 악티폴의 챔피언 출신인 기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달리 원하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고, 함께 생활했던 노예들의 형편이나 조금이라도 좋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수감소장이 되었습니다."

"······."

의외의 이유라서 나는 조금 놀랐다.

6군주령 온데간데서 삶이 시궁창에 처박힌 인간들이 전부 모이는 장소.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경기가 매일마다 치뤄지는데 동료애 따위가 생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노예들의 형편을 봐주려고 소원으로 수감소장이 됐다니.

이 길로크라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대충 파악하기엔 충분한 대목이었다.

나는 그와 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리프라는 여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챔피언이 되려고 한다고······.'

[Lv. 48]

마음 한편에 찝찝함이 느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길로크의 레벨이 그녀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길로크를 꺾고 챔피언이 된다고 해도······ 내가 알기로 광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병의 근원이 되는 혈왕이 죽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광혈병에 걸리고 살아남은 이 역시 아무도 없었고.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나는 굴피로의 부탁대로 밴이라는 남자만 데리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걸로 6군주령에도, 악티폴에도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곧 길로크가 어느 철창 앞에서 멈춰섰다.

어두운 철창 안에 여러 노예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다.

"문을 열어라."

"예."

끼기긱.

길로크의 명령에 경비병이 철창의 문을 열었다.

그가 구석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 쭈그려있던 젊은 남자를 가리켰다.

"저 자가 밴입니다."

지목당한 밴이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끌려와서 꽤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피딱지와 멍이 한가득이었다.

"과일 가게를 운영하던 밴이냐?"

"······예, 예? 맞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나와라. 풀어주마."

***

경기장의 외곽 복도.

막 수감소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길로크는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인을 보고 멈춰섰다.

그러나 여인은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쳐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길로크가 입을 열었다.

"동생의 상태는 괜찮나?"

우뚝.

그제야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길로크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길로크는 입을 우물거리며 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챔피언 자리에 도전하지 마라, 리프."

"······."

"너는 날 이기지 못해.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6군주는 분명······."

"닥쳐."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말을 끊은 리프가 도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로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엿 같군, 정말."

리프리곤 (5)

수감소에서 밴을 빼내 곧장 포션 상점으로 데리고 갔다.

혹시나 폭왕이 눈을 붙이려고 들진 않을까 초감각을 최대로 펼친 채 이동했으나, 딱히 따라붙는 이는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감사합니다, 플레온 씨! 정말로 감사합니다!"

"전부 이쪽의 나으리 덕분이지, 뭘. 나한테 감사할 게 있나."

그렇게 상점에 도착하고, 그는 나와 굴피로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플레온이 누군가 싶었지만 그의 가명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제 바로 떠날 건가?"

내 물음에 굴피로가 상점 내부를 슥 둘러보며 대답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겠소? 대부분은 버리고 가긴 할 거지만,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아서."

음, 하긴.

짐을 정리하고 챙기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할 듯했다.

계속 폭왕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어서 좋을 건 없었지만 며칠쯤이야 상관없겠지.

"아무튼 밴을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하오. 이건 빚으로 여기고 마음에 남겨두겠소."

굴피로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밴을 구해준 건 그가 나를 따라서 7군주령으로 향하는 일에 대한 조건이었기에 빚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조차도 빚으로 치고 나중에 갚을 모양이었다. 내게 있어선 좋은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준비가 끝날 때까지 내 호위를 이곳에 붙여두지."

나는 아셸을 쳐다보며 말했다.

폭왕은 딱히 내가 마헤아에서 뭘 하는 건지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떠날 때까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굴피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소. 나도 내 한 몸 지킬 힘 정도는 있으니."

[Lv. 56]

나는 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물론 굴피로의 레벨은 상당했다.

그가 비록 전투와 거리가 먼 연금술사이긴 해도, 대륙적인 명성을 지닌 만큼 보통의 연금술사는 아니었으니까.

마법의 수준도 상당한 걸로 알고 있기에 웬만해서야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정리가 얼마나 걸리겠나?"

"일주일이면 충분하오."

"그럼 그때 다시 찾아오지."

굴피로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가게를 나섰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멀리서 상점을 계속 지켜봐라. 수상한 것이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

아셸이 슬쩍 가게를 돌아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이 정도 안전 장치는 해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셸은 남겨두고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나온 포션 상점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곧 다시 몸을 돌렸다.

***

"미안하지만 아직 들어온 정보가 없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편에 앉은 리프는 그런 그를 말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광혈병이야. 그 생존자를 찾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아나?"

"······."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일이네. 그래도 의뢰를 취소하겠다면 별 수 없지만······."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남자가 싱긋 웃으며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인력을 좀 더 동원해서 조사 지역을 넓혀보도록 하지. 다음에 찾아올 땐 반드시 좋은 소식을 준비해놓고 있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홱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남자의 뒤에 서있던 수하가 슬며시 물었다.

"정말 조사 인력을 더 늘리실 겁니까?"

"미쳤나?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을 그딴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게."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광혈병 생존자라니, 찾아봐야 애초에 있을 리가 없지. 만에 하나 있다고 해도 치료법을 알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고."

"그런데도 벌써 반 년째 아닙니까? 이쯤 되면 의뢰를 취소할 법도 한데 끈질기네요."

"저년도 속으로는 알고 있을걸?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끝내 지푸라기를 못 놓아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남자가 킥킥 조소를 터뜨렸다.

"뭐, 우리야 계속 적당히 시늉이나 하면서 의뢰금만 받아먹으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정보 길드 건물에서 나온 리프는 길거리를 걸었다.

주위에서 힐끗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다음으로 향한 목적지는 포션 상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계산대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굴피로가 그녀를 쳐다봤다.

"왔느냐?"

그는 익숙한 듯 서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포션 한 병을 꺼내들었다.

포션을 챙겨든 리프가 은화 몇 닢을 꺼내서 올려놨다. 그리고 한마디 대화 없이 도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굴피로가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빼고 말했다.

"난 이제 곧 마헤아에서 떠날 거다. 아마 일주일 뒤쯤에."

"······?!"

그 말에 그녀가 다급히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라. 포션의 제작법은 푸른 이슬 상점의 마릭 영감한테 맡겨놨으니까. 이제 그쪽에서 제작을 받으면 된다."

"······갑자기 왜 떠나는 건데요?"

"좀 그럴 사정이 생겨서 말이다."

그녀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쯧."

작게 혀를 찬 굴피로가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안타깝다는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며.

***

퍼억.

길거리를 걷고 있는 리프의 머리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 중년 남성이 붉어진 눈시울로 씩씩거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 새끼야! 네가 내 아들을 죽였어! 누구인지 기억하고나 있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중년을 다급히 말렸다.

리프는 무표정하게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가던 걸음을 옮겼다.

소란에 행인들이 몰렸다. 몇몇 이들의 적의 가득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사방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질긴 년, 그렇게 많이 처죽이고서 지는 언제까지 살아남으려고······."

악티폴의 노예 검투.

그 죽음의 경기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만큼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

또한, 그만큼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기도 했다.

노예 검투사 중에는 그녀처럼 이 도시에 혈육을 두고 있는 이들 역시 많았으니까.

리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손에 들고 있던 포션을 품으로 끌어당겨 꼭 쥐고서, 계속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한 여인이 현관으로 나와서 그녀를 반겼다.

"아, 오셨어요?"

여인은 동생의 간병인이었다.

집에는 경비원과 간병인을 한 명씩 두고 있었다.

3계 이상의 검투사들은 경기 때 외에는 도시 내에서 자유롭게 일상을 지낼 수 있고, 손에 쥐어지는 돈도 많았다. 5계에서도 최상위 검투사인 리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막 식사를 마치셨어요."

"오늘 상태는?"

"그, 몇 시간 전에 각혈을 몇 번 하시기는 했는데······ 지금은 다시 안정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에 리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녀와 똑같이 잿빛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소년.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방으로 들어온 리프를 보고 활짝 웃었다.

"어서와, 누나."

리프도 옅게 미소 지으며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몸은 어때."

"괜찮아. 말했잖아?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잠시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소년이 떠들고 리프가 듣는 쪽이었다.

두 자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 검투 경기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리프가 건넨 포션을 받아든 소년이 한 모금 마시고서 웩 소리를 냈다.

"항상 먹는 거지만 끔찍한 맛이네. 좀 더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는 없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다 마셔."

소년은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계속 포션을 마셨다.

걷힌 소매로 소년의 팔이 드러났다.

앙상하고 창백한,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울룩불룩 솟아난 검붉은 핏줄.

그것을 바라보는 리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런데 누나."

포션을 전부 마신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리프는 빈 병을 들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이 나올지야 뻔했기 때문에.

"피곤하겠다. 그만 쉬어."

"아니, 나 안 피곤······ 읍."

소년이 갑작스레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숙였다.

리프는 깜짝 놀라서 병을 내던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쿨럭, 컥!"

격한 기침과 함께 소년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올리아!"

리프는 다급히 간병인을 불렀다.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온 여인이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몸을 반쯤 눕히고 진정시키며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간신히 상태가 다시 안정되고 그녀가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이대로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

리프는 심란한 눈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간병인을 남겨두고 방에서 나왔다.

철컥.

방문을 닫은 그녀는 옆쪽의 벽에 턱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내려앉았다.

6군주령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들 자매가 살던 본래의 터전이었다.

그녀의 동생은 마을에서 천재라 불렸었다.

마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며 검술 교관을 하던 방랑기사 백 씨도, 자신이 마탑 출신의 마법사라고 허구한 날 자랑하던 마법사 다키오 영감도 동생이 세상에 다시 없을 불세출의 천재라고 했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리프도 그들의 말이 괜한 추켜세우기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왜냐면 검술과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검으로 큰 나무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불덩이를 날리며 짐승을 사냥하던 동생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나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동생은 천재였다.

그런 동생에게 있어서 시골 마을의 울타리는 너무도 좁아 보였다.

그래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방랑기사 백 씨가 아는 인맥으로 수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동생이 떠나기 전날 밤 큰 잔치를 열었다.

마을의 주민들이 다같이 모여서 기쁨과 슬픔을 머금고 동생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줬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늦은 밤이었다.

마을의 한쪽 하늘이 갑작스레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귀가 찡하고, 폭풍이 몰아쳤다. 정신을 차린 뒤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너진 건물들과, 마을 사람들의 시체.

자욱한 피 안개가 마을 전체를 덮었다. 주민들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그 뒤의 기억은 없었다.

그저 덜덜 떨면서도 그녀를 껴안은 채 손에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던 동생과, 온몸에 차올랐던 알 수 없는 기운만이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다.

정신을 차린 다음 가장 먼저 보인 건 곁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동생이었다.

일대가 폐허였다. 살아있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도, 친인척도, 친구들도.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잔혹한 현실이었다.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동생과 간신히 수도로 이동했다.

행인들이 떠드는 소리에 마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알 수 있었다.

군주성에 세인테아의 간첩이 숨어있었다고 한다. 성의 관리들을 학살하고 도주한 그를 6군주가 직접 쫓아서 참했다고 했다.

그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가 바로 그녀의 마을 근처였다.

동생이 걸린 병은 광혈병이라는 것이었다. 6군주의 혈술에 접촉한 대상이 걸리는 죽음의 병.

마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저항할 수 있지만, 왜인지 동생은 광혈병에 걸렸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지옥 속에서 몸을 채웠던 알 수 없는 기운이 무엇이었는지를.

동생이 자신의 마력을 그녀에게 모두 흘려넣고 그 끔찍한 피 안개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것임을.

마을은 멸망하고, 가족은 전부 죽고, 유일하게 남은 동생은 시한부가 됐다. 한순간에 시궁창으로 처박힌 삶.

수도에서 악티폴이라는 노예 검투가 매일마다 열린다는 걸 알게 됐다. 챔피언이 되면 6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 산지옥으로 직접 걸어들어가 검투사가 되었다.

지난 3년간 죽을 고비가 수백 번은 있었지만, 끝내 살아남았다.

5계의 검투사는 원하면 언제든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 이제 그토록 염원했던 목표는 바로 코앞이었다.

"······."

다시 차갑게 표정을 굳힌 리프가 벽에서 머리를 뗐다.

싸운다. 승리한다. 살아남는다. 그리고 동생의 병을 고친다.

그 일념만으로 버틴 지옥 같은 3년이었다.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칼에 피를 묻힐 수 있다. 죽인 시체들로 산을 쌓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거리낄 건 없었고, 죽음 또한 두렵지 않았다.

단지 두려운 것은 하나였다.

만약 챔피언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한다면 홀로 남게 될 동생.

그것이 이제 단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까지 그녀를 망설이게 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도 머리도 전부 피곤했다. 쉬고 싶었다.

리프리곤 (6)

마헤아에 본진을 두고 있는 거대 정보 조직, 놀헤이브. 수장 데르산의 업무실.

"무슨 일이냐? 헐레벌떡 와가지고."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씹고 있던 데르산이 남자를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어딘가 다급한 기색으로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형님, 내가 엄청난 걸 알아낸 것 같소."

"······뭐? 뜬금없이 뭔 개소리냐."

"농담 아니니까 일어나서 제대로 들어보시오. 도시 동쪽의 1번가 골목에 있는 무명의 포션 상점을 아시오?"

데르산은 이놈이 뜬금없이 뭔 소리를 하나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름 없는 포션 상점? 몰라. 왜."

"그곳에 플레온이라는 노인이 주인으로 있는데 말이오, 내가 어쩌다 그 양반의 행적에 대해서도 좀 파고들게 됐는데······."

남자가 책상에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데르산은 그것을 집어들고서 슥 훑어봤다.

귀찮음 섞인 얼굴로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이나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이거 진짜냐?"

"그럼 거짓이겠소?"

남자가 조사한 내용들은 이러했다.

몇 달 전, 작은 여관을 운영하는 호든이라는 인물이 회복하기 힘든 난치병에 걸린 것.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뛰어난 마법사에게 거액을 갖다바쳐야나 치료할 수 있는 병을 그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완치했다는 것.

다른 것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호기심에 그에 대한 조사를 가볍게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자가 바로 무명 상점의 주인인 플레온이었다.

여러 정황들을 통해 그의 병을 치료해준 것이 플레온이라 판단한 남자는 이번엔 플레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1년 전 마헤아 시에 자리를 잡은 인물.

사실 그와 관련된 눈에 띄는 정보는 별달리 없었고, 순간의 호기심과 변덕으로 시작했던 조사는 거기서 접어도 무방했다.

그때 남자가 하나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떠올렸던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왜냐면 근래에 대륙을 떠들석하게 했던 세인테아의 대연금술사, 굴피로의 실종 시기 역시 약 1년 전이었으니까.

얼마든지 우연일 수 있는 시기의 맞물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설마 하면서도 계속해서 플레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그 터무니없는 가정에 확신을 더해주는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 가장 확정적인 것은 굴피로의 외관에 대한 정보였다.

녹색의 수염과 머리칼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굴피로와 달리 플레온의 외관은 주황색 머리칼과 수염이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그것이 염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도시에 찾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수염과 머리칼이 녹색이었다는 증언을 안면이 있는 몇몇 사람에게서 캐냈으니.

누군가의 눈에 띄는 걸 피하려는 게 아니려는 이상, 난치병을 고칠 만큼 실력이 뛰어난 연금술사가 그런 작은 포션 가게나 운영하면서 외관까지 바꾼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남자는 플레온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세인테아에서 도주해온 대연금술사 굴피로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

데르산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종이를 반복해서 훑었다.

한참이나 아무 반응이 없자 남자가 조금 답답한 듯 말했다.

"정황적인 증거뿐이라도 이건 거의 100퍼센트요, 형님."

"······그래, 그렇군."

"고민할 것도 없지 않소? 6군주님께 어서 보고를 올립시다."

남자의 말에 데르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둘은 6군주 폭왕과 같은 레오셀 산맥 출신의 뱀파이어다.

그가 부족을 학살해 멸망시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를 따랐던 부족원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폭왕의 후광에 기대어 6군주령 제일의 정보 조직을 키워낼 수 있었으나, 그도 요즘은 과거의 영광이었다.

폭왕의 관심이 점점 시들해지며 신경에 거슬리는 경쟁 조직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군주성의 관리들까지 슬슬 눈치를 보며 은근히 조직을 이리저리 찔러대고 있는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너뿐이냐?"

데르산의 물음에 남자가 뭘 당연할 걸 묻느냐는 듯 대꾸했다.

"그렇지, 조사야 수하들이 했지만 내가 다 끼워맞춘 거니까······."

말을 잇던 남자가 퍼뜩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데르산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잠······."

화아악!

허공에 피어오른 핏빛의 화염이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이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방금까지 남자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데르산이 혀를 찼다.

"멍청한 놈아, 6군주 그놈이 아직 우리에게 남은 관심이 있는 것 같더냐?"

갈수록 궤를 벗어난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 놈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향의 일족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예전이면 몰라도 더 이상 폭왕에게 무언가를 갖다바쳐서 얻을 수 있는 콩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르산은 그를 잘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몇십 년을 함께한 의동생을 죽여버린 데르산은 조금의 안타깝다는 기색만 내비치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릭서를 제작한 세인테아 출신의 대연금술사.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는 직접 찾아가보는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은 남자뿐이라고 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눈치를 챈 다른 조직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둘러야 할 것이었다.

"굴피로······."

그의 두 눈이 흥분과 탐욕이 번뜩였다.

***

늦은 밤,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굴피로는 때 늦은 손님을 맞이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리프를 보며 그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그녀가 어수선한 가게 내부를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떠나기 전에 동생의 상태를 한 번만 더 살펴봐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굴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 않느냐? 더 봐도 달라질 건 없다고."

굴피로 역시 리프의 사정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마헤아 시에서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이를 더 찾아보기가 힘드니까.

애초에 그녀의 동생에게 맞는 포션을 제작해서 지금까지 제공해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처음 그녀가 가게에 찾아왔던 게 반 년 전이었던가?

그녀의 사정을 들은 굴피로는 직접 집으로까지 찾아가 그녀의 동생의 상태를 직접 살폈었다.

광혈병의 혈기는 마력과는 완전히 상극인 힘을 지닌 기운이었다.

애초에 마력을 가진 대상은 중독되지 않지만, 이미 한 번 중독된 대상에게 있어서는 마력이 치명적인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마력이 아예 들어가지 않은 포션을 제작하여 동생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 포션을 제작해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요즘 가게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난 것만 봐도 포션의 약효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이상 결국 그녀의 동생은 죽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광혈병, 6군주 폭왕의 고유한 혈술에 접촉한 이들이 겪는다는 불치의 병.

그것은 대연금술사인 굴피로에게 있어서도 어떻게 치료할 방도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리프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돌아가거라."

"······."

리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양손에 주먹을 꽉 쥔 채 굴피로를 반쯤 노려보고 있다가, 이내 체념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가게 밖으로 도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먼저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손님에게로 옮겨졌다.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

그가 굴피로와 리프를 한 차례 번갈아 보고서 입을 열었다.

"구매하고 싶은 포션이 있는데······."

굴피로의 안색이 미약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애초에 평범한 손님이 찾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말해보시게. 혹시 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아니, 그건 아니오."

남자가 후드를 걷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구매하고 싶은 물건은 엘릭서요, 대연금술사 굴피로."

"······!"

굴피로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남자, 데르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맞군."

"······네놈은 누구냐?"

데르산은 대답 없이 리프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에 굴피로는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펼쳤다.

콰아앙!

허공에서 혈기와 마력이 충돌했다.

굴피로의 방어 덕분에 직격당하지는 않았으나, 그 충격에 리프는 가게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컥······!"

굴피로가 곧바로 다음 마법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순식간에 지척까지 접근한 데르산이 어느새 뽑아든 단검을 목에 겨누고 있었다.

"······."

굴피로는 그런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내렸다.

데르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시오."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아, 그건 오해 마시고. 난 당신에게는 전혀 적의가 없소. 단지 대화에 방해되는 방해꾼부터 치우려는 참이었는데······ 혹시 저 여자가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데르산이 빈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깨달은 듯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너는 악티폴의 노예 검투사 년이 아니냐? 리프였던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리프가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뭐, 아무튼 일단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데르산이 다시 굴피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오, 굴피로. 당신이 제작한 엘릭서인 디페리의 성혈, 어디에 있소?"

굴피로가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건 나에게 없다."

"수중에 없다고 해도 당연히 레시피는 가지고 있겠지. 그걸 내게 넘기시오."

"미친놈, 고작 목에 칼 한 자루 밀고 협박한다고 내가 네 말대로 따를 것 같더냐?"

데르산이 손에 시뻘건 불꽃을 피워내서 리프를 향해 겨누었다. 그에 굴피로가 침음을 흘렸다.

데르산이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군. 저 검투사 년과 꽤나 각별한 사이셨나 보오?"

"······."

"얌전히 엘릭서의 레시피를 가지고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것부터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릴 테······."

그 순간이었다.

창가에서 섬전처럼 쏘아져온 푸른 검기가 그대로 데르산을 덮쳤다.

"······!"

다급히 몸을 비틀어 간신히 방어한 그가 가게 한쪽으로 튕겨나갔다.

바로 이어서 신형 하나가 창문 사이로 날아들어와 가게 한쪽에 착지했다.

검을 들고 있는 여인, 아셸이 싸늘한 눈으로 비틀거리는 데르산을 응시했다.

굴피로가 놀란 눈으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자네······?"

이어서 가게 문이 열리며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혹시 모른다고."

저벅저벅 걸어들어온 남자가 난장판이 된 가게 내부를 슥 둘러봤다.

그리곤 더없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데르산에게 시선을 멈췄다.

남자, 7군주가 입을 열었다.

"넌 뭐냐, 흡혈귀."

리프리곤 (7)

늦은 밤, 여관에서 나와 거리를 걸으며 가벼운 산책을 했다.

아셸은 지금도 굴피로의 상점을 지켜보고 있기에 나 혼자였다.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긴 하지만 과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세인테아 측의 추적자든, 아니면 폭왕이 보낸 끄나풀이든, 남은 시간 동안 어느 쪽이 굴피로에게 접근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번에 가이탄 호에서도 내가 떠나자마자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 해린족을 습격해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었던가?

"이건 얼마지?"

"동화 한 닢입니다, 나으리."

나는 야시장이 열린 밤거리에서 먹을 만한 간식을 구매했다.

나온 김에 아셸에게도 좀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몫까지 챙겼다.

그리고 포션 상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초감각에 미약한 기운의 충돌이 걸렸다.

"······?"

나는 인상을 굳힌 채 서둘러 포션 상점을 향해서 뛰었다.

행인들의 눈을 피해 공간 도약까지 사용하며 상점에 도달하자 보인 풍경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난장판이 된 내부와 검을 쥐고 서있는 아셸.

'휴우······.'

대체 무슨 난리야?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싶어 뛰던 걸음을 멈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 등장이 갑작스러웠는지 아셸과 굴피로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혹시 모른다고."

굴피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과 여인.

나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프?

'쟤는 왜 또 여기에 있어?'

그녀 역시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아셸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Lv. 63]

침입자로 보이는 쪽은 남자였다. 외관으로 보아 뱀파이어였다.

설마 정말로 폭왕 쪽에서 보낸 놈인가?

"넌 뭐냐, 흡혈귀."

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묵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던 놈이 기습적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 시뻘건 핏빛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곧바로 가스칼리드의 혈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불꽃이 사그러들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뭐, 뭣?"

놈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놈에게서 강탈한 혈술을 펼쳐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폭발하듯 터진 혈화가 놈을 뒤덮었다.

놈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폭발에 통째로 뜯겨나간 한쪽 팔을 붙잡고서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대충 이런 능력이군.

가스칼리드의 혈술은 뱀파이어를 상대로는 정말 완전한 카운터나 다름없었다.

나는 쓰러진 놈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6군주가 보냈나?"

그렇게 물으며 손에 다시금 혈화를 피어올리자, 놈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6군주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뭐냐."

"그, 그것이······."

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마헤아 시에는 6군주와 같은 고향 출신의 뱀파이어들이 꽤 있었던가?

몇몇은 군주성에도 있고, 몇몇은 따로 조직들을 창설해서 열심히 6군주의 발을 핥아주고도 있고······ 아.

'설마 그쪽인가?'

6군주령 제일의 정보 조직인 놀헤이브.

왠지 모르게 정보 조직 쪽과 관련된 놈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떠보듯 물었다.

"놀헤이브냐?"

"······!"

순간 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고 굴피로에게 물었다.

"이놈이 정체를 알고 찾아온 건가?"

"······그렇소. 대체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면 지금부터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다시 놈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대답에 뜸을 들이면 죽이겠다. 어떻게 굴피로의 존재를 알았지?"

내가 불꽃을 더 크게 피어내자 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저 우연입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이어진 놈의 설명은 이러했다.

대연금술사 굴피로와 그가 도시에 도착한 시기가 겹친 것, 한 난치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준 것, 그리고 외관에 대한 것까지.

설명을 모두 들은 나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굴피로를 돌아봤다.

그 역시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들켰다고? 허······."

어쨌든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만약 정말로 폭왕 쪽에서 보낸 거였다면 괜히 또 놈과 얽혀서 일이 성가셔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엘릭서를 탐내서 상점을 습격했다는 거군."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놈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굴피로의 정체까지 알게 된 놈이니 자비를 베풀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제 최후를 예감했는지 놈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놈의 전신이 화염에 뒤덮였다.

거칠게 넘실거리던 불꽃은 순식간에 놈을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허어, 참······."

탄식을 흘리고 있던 굴피로가 나와 아셸에게 말했다.

"고맙소. 두 분 덕분에 살았소. 하마터면 정말로 큰일날 뻔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아있는 한 사람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여인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쟤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자세한 상황이 궁금해서 굴피로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것이오? 마치 그 뱀파이어의 능력을 빼앗은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놈의 혈술을 빼앗은 게 맞다."

"호오······ 그런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오? 마법일 리는 없고, 설마 신비인가?"

굳이 자세히 대답해주진 않았다.

"혀, 혈술을 빼앗아?"

그때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시 시선을 옮기니, 그녀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혈술을 빼앗을 수가 있다고? 정말?"

"······그래, 그런데 왜."

나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그녀가 난데없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제발 도와주세요, 나으리. 제, 제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어요."

"······."

"혈술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이면 그 병도 고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 거죠? 그러니 제발······."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절박하게 애원하는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내 시선을 무슨 의미로 이해한 건지 그녀는 아예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요, 나으리······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가진 재산도 전부 바치겠습니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제발 제 동생만······."

"이봐."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는 네 동생의 병을 고쳐줄 수 없다."

"······."

"이건 혈술 자체를 빼앗는 것이지, 혈술의 능력에 중독된 누구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광혈병은 오로지 폭왕의 목숨이 끊어져야만 세상에서 사라지는 병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설령 내가 폭왕의 혈술을 빼앗는다고 해도 이미 광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줄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애초에 놈에게 있어서도 자의로 제어가 가능한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날 허망히 올려다봤다.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녀가 이번엔 굴피로에게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에, 엘릭서. 엘릭서라면? 엘릭서라면 내 동생을 치료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네? 플레온 영감님······."

"치료할 수 없다."

굴피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광혈병이 어떤 병인지 말했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마력이 포함된 포션이라면 맹독만 될 뿐이다. 그게 설령 엘릭서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울분과 억울함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왜,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엘릭서잖아!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신약이잖아! 근데 왜!"

"······."

"왜 그깟 병 하나를 못 고친다는 거냐고, 씨발······ 왜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 건데······ 왜······."

그녀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위태로운 걸음으로 가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도 굴피로도, 아셸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거리를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온 리프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다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간병인 여인이 피를 토하며 발작하는 소년을 온몸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검붉은 핏줄이 터질 듯 솟아나있었다.

"꺼르륵······!"

리프는 간병인과 함께 한참을 씨름해 간신히 소년을 진정시켰다.

날이 다 밝았을 즈음에나 의원을 불러와서 상태를 살폈다.

소년의 몸을 진찰한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계가 왔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고."

"······."

의원도 간병인도 내보내고, 리프는 방에 홀로 남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동생을 내려다봤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녀는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이른 아침부터 악티폴의 경기장에는 거대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평소에도 경기 때면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였으나, 오늘은 특히나 그 정도가 심했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바로 오늘 악티폴에서 열리는 경기는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경기였으니까.

챔피언전, 좀처럼 관전하기 힘든 그 빅매치를 보기 위해 모든 관중들이 기대를 품고 몰려든 것이었다.

"기어코 챔피언에게 도전을 했구만. 오늘 드디어 리프 그 년의 목이 날아가는 꼴을 볼 수 있는 건가?"

"하하, 그거야 모를 일이지. 절대로 못 이길 거라고 예상했던 시합들도 전부 역전해서 지금껏 살아남은 독한 년인데."

"그것도 그렇긴 하지. 그래서 자네는 리프 쪽에 걸 건가?"

"아니, 그래도 돈은 챔피언한테 걸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길로크를 꺾기엔 아직 역부족이지 않겠나."

"뭐? 하하!"

지금껏 10번도 넘는 방어전에서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철벽의 챔피언, 길로크.

그에 도전하는 건 지난 몇 년 동안 누구보다도 빠르게 5계의 검투사 자리까지 올라온 리프.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관중석에는 벌써 흥분과 열기가 가득했다.

몰이꾼들이 도박에 돈을 걸라고 사람들을 재촉하고, 서로가 목소리를 높여 경기의 결과에 대해 예측했다.

"그런데 어째 좀 서둘러서 챔피언 자리에 도전한 느낌이란 말이지."

"그거 아니겠어?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잖아. 슬슬 더 끌고 있을 수도 없이 위태로운 모양이지."

"오, 그런가? 그럼 이번에 패배하면 동생까지도 바로 누이를 뒤따라서 죽겠구만, 큭큭."

악티폴의 검투사 중에서도 가장 유명인사인 리프의 사정에 대해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광혈병에 걸린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서 챔피언이 되려고 하는 것.

물론 그런 리프를 동정하는 관중은 누구도 없었다.

그 간절함조차 그들에게 있어선 그녀의 마지막 최후를 더욱 비참하게 장식해줄 흥미진진한 배경이었을 뿐이니.

대기실에서 리프는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꽉 쥔 주먹을 내려다봤다.

마음은 이상하게도 차분했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

그래, 새삼 무얼 기대했던 건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기댈 곳 따윈 어디에도 없었는데.

누군가의 동정도, 도움도 필요 없다. 그딴 걸 기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악티폴에 들어왔던 그날, 필사적으로 첫 경기에서 승리했던 그날 다짐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챔피언이 되어 동생을 치료하고야 말겠다고······.

"나와라. 입장할 시간이다."

이제 그 마지막이 다가왔을 뿐이다.

대기실로 들어온 병사의 말에 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활짝 열린 철창을 통과하자 보인 건 푸른 하늘, 그리고 사방에 들어찬 관중들.

와아아아!

기대감과 흥분에 찬 역겨운 함성들이 울렸다.

리프는 고개를 들었다.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는 6군주의 모습이 보였다.

- ······다음으로 현 챔피언, 길로크가 입장합니다!

다시 시선을 내려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반대편의 철창을 응시했다.

경기장으로 걸어나오는 길로크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살의로 가득 찼다.

리프리곤 (8)

길로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옷을 챙겨 입었다.

허리춤에 메인 검을 뽑아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도로 검집에 집어넣고 벨트를 꽉 고정했다.

철컥.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한 여인이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

"음."

"자, 여기. 레몬하고 설탕하고 섞은 에이드예요. 쭉 들이키세요."

길로크는 여인이 건넨 음료를 단숨에 들이키고 빈 컵을 넘겼다.

"그럼 다녀오세요."

현관으로 나선 그는 자신을 배웅하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밝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얼굴 한편엔 숨길 수 없는 미약한 어두움이 깃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경기 때면 매번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그늘이 짙은 느낌이었다.

여인은 길로크의 아내였다.

노예상에게 억울하게 붙잡혀 수감소까지 끌려왔던 그녀를 길로크가 구해줬던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길로크는 새삼 생각했다.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고.

평생을 검이나 휘두르다 쓸쓸히 죽게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을 만났으니.

"걱정 마, 엘리. 이기고 돌아올 테니."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춰주고서 길로크는 저택을 나섰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악티폴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대기실로 이동했다.

"시간이 다 됐소."

어두운 복도를 걸어 경기장으로 나서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길로크는 관중석을 한 차례 둘러보고서 앞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대편의 철창에서 먼저 나와 서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리프.'

이쪽을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챔피언전.

지금껏 수많은 도전자들을 꺾어왔지만, 이번 경기는 길로크에게 있어서도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처음 리프의 경기를 봤던 건 대충 3년쯤 전이었던가.

당시는 길로크가 막 새로운 챔피언이 되었을 즈음의 시기였다.

아직 여인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여린 소녀가 한 자루 검을 쥐고 경기장에 섰다.

상대는 그 배는 되는 덩치의 사내였다. 누가 봐도 애초에 성립될 것 같지 않던 경기.

모두의 예상대로 리프는 손쉽게 제압당했고, 사내는 그런 그녀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덮치려 들었다.

악티폴에선 상대 검투사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게 퍼포먼스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살아남은 쪽은 리프였다.

길로크는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것만 같았다.

몸 위에 올라탄 사내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목을 섬전처럼 물어뜯었던 리프의 모습을.

기겁하며 단검을 뽑아든 그가 옆구리를 연신 찔러도 놓지 않고, 기어코 아득바득 버티던 지독한 독기를.

사내의 몸이 축 늘어져 더 움직이지 않게 된 뒤에도 리프는 그의 목을 물고서 놓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후에도 계속.

"······."

길로크는 슬쩍 고개를 돌려 경기장의 위쪽을 올려다봤다.

또한 잊지 못했다.

그 경기를 모두 지켜본 6군주의 입가에 걸렸던, 섬뜩하고 악의 가득한 미소를.

'저 계집,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죽지 않게 치료해서 살려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싸우는 법도 가르쳐보고.'

그 명령대로 길로크는 리프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쳤다. 마력을 쌓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 몸을 움직이는 법······.

물론 리프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뭐라도,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만 했으니까.

그저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외에 감정의 교류는 일절 없었다.

분명 길로크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지만 둘은 사제 사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관계였다.

그녀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강해졌다. 워낙 필사적이기도 했지만 본래 전투에 타고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리고 시간은 흘러 순식간에 5계의 검투사가 되었고, 이제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하기 위해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이렇게 됐군, 결국은······.'

길로크는 짧은 상념을 마쳤다.

예전이었다면,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가던 때였다면 이 경기를 그냥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구해야만 하는 동생이 있듯, 그에게도 지켜야 하는 행복이 있었으니.

- ······모두가 기다리시던 챔피언전! 그 대망의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리프가 먼저 몸을 날렸다.

사납게 돌진해오는 그녀를 보며 길로크는 차분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카앙!

두 검투사의 검이 맞붙었다.

길로크가 리프의 검을 강하게 튕겨냈다. 그녀는 허리를 꺾어 이어진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곧바로 다시 검을 휘둘러 하단을 노렸으나 간단히 막혔다.

푸른 검기에 휩싸인 두 검날이 연신 부딪히고 엉켰다. 어지러운 공방이 오고 갔다.

주로 공격하는 쪽은 리프였다. 그녀는 광인처럼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듯 미친 듯이 길로크를 몰아붙였다.

길로크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몰아치는 공격을 전부 피하고, 막아냈다.

리프의 모습은 반쯤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길로크는 알았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차가운 냉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수한 실력만으로 부딪히면 길로크를 이길 수 없다는 건 그에게 검을 배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심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다.

먼저 틈을 드러내 상대의 틈을 찾는 것, 아주 작은 방심이라도 좋으니 그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검날을 쑤셔넣는 것, 그것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나마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길로크는 당연하게도 그런 그녀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함부로 방심 같은 걸 하는 인간이었다면 지금까지 챔피언 자리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지도 못했으리라.

퍼억!

길로크의 발차기가 리프의 복부에 꽂혔다.

리프는 헛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의 겨를도 주지 않고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선다는 듯 길로크는 매섭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리프는 연신 뒤로 물러서기만 하며 방어하기 급급했다.

온몸에 잔상처가 점점 늘어간다. 순식간에 뒤집힌 양상은 다시 역전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리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어떻게든 넘어간 기세를 되찾으려고 발악했다.

어느 순간, 길로크의 검이 섬전처럼 그녀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끅······!"

길로크는 잠시 검을 거두고서 휘청거리는 그녀를 비정히 응시했다.

만약 리프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더라면 언젠간 분명 길로크를 꺾고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둘 사이에는 넘기 힘든 근본적인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피가 쏟아져나오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리프가 곧장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의 안광이 형형히 번뜩였다.

여전히 투지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뿐이었다.

길로크도 재차 검을 치켜들고 자세를 잡았다. 더 끌지 않고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설령, 네가 챔피언이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의 동생은 처음부터 살릴 수 없는 목숨이었다.

길로크는 그것을 확신했다.

6군주 폭왕, 그 악마가 얼마나 치가 떨리도록 악랄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게 그녀에게는 차라리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그가 입을 열고 작게 중얼거렸다.

"네 동생의 마지막은 내가 곁에서 배웅해주마."

리프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길로크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촤아악!

길로크의 검격이 그녀의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갔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간신히 막기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중상까지 입은 마당에 더 이상의 결투는 성사되지 않았다.

"크아아아!"

리프는 처절하게 포효하며 악에 받쳐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길로크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

바닥에 시뻘건 선혈이 낭자했다.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리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급소만큼은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길로크는 그만 끝을 내려고 했다.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옆구리를 베어오는 이 검격을 튕겨낸 후, 그대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속에서 치솟아오르는 구역감과 함께, 길로크는 한순간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공격을 막지 못했다. 리프의 검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의 몸이 휘청였다.

리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필사적으로 찌른 검이 그의 심장을 노렸다.

"······!"

길로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관통한 검날을 내려다봤다.

몸이 무겁고 차가웠다. 마치 독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그것은 단지 지금 심장을 꿰뚫은 검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대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나오기 전, 아내가 건네주었던 음료.

길로크는 간신히 고개를 틀어 경기장의 가장 위쪽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6군주의 모습을.

'······아.'

그제야 길로크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전부 정해진 결과였음을.

그는 허망한 눈으로 리프를 바라봤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그녀는 필사적으로 검자루를 쥔 채 버티고 서있었다.

'결국 너나, 나나 끝까지······.'

저 악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 죽는구나.

검이 뽑히고, 길로크의 몸이 허물어졌다.

***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프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길로크를 바라봤다.

'······이겼어.'

이겼다.

길로크를 죽였다. 챔피언을 쓰러뜨렸다.

속에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치솟았다. 기쁨과 슬픔, 성취감과 죄책감 따위의 상반된 것들이 덩어리처럼 뒤섞였다.

리프는 입술을 꽉 짓씹고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관중석에서는 자그마한 환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관중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곧 폭왕이 자리해있는 바로 아래까지 이동한 리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갈라지는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제가 이제 악티폴의 챔피언입니다!"

고요한 정적 속, 폭왕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래······."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조용하지만 거대한 음성이 경기장 전체에 선명히 울려퍼졌다.

"어디 소원을 말해봐라."

"제 동생!"

리프는 차오르는 격정에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가, 다시 외쳤다.

"위대하신 6군주님께 간청드립니다! 부디 동생의 광혈병을 치료해주십시오! 소원은 오직 그것 하나뿐입니다!"

폭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동생의 병을 고쳐달라고?"

"······."

"혈육에 대한 정이 참 갸륵하구나. 좋다, 네 바람대로 동생을 치료해주도록 하마."

리프의 얼굴에 환희가 차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 전에, 아직 남은 게 있다."

"······예?"

그녀가 멍하니 폭왕을 올려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건 마치, 지금까지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낸 달콤한 과실을 막 따낼 순간을 맞이한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폭왕이 경기장 한편에 있는 사회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길을 받은 사회자가 곧바로 외쳤다.

- ······자, 그럼! 몇 년 만의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 경기가, 지금 바로 이어서 시작됩니다!

그에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본래 챔피언전에 그런 이벤트 경기 같은 건 여지껏 없었으니까.

쿠르르르.

경기장 한쪽에 위치한 철창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은 검투사가 아닌 포획한 몬스터가 나오는 문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프의 표정이 서서히 알 수 없게 일그러졌다.

문에서 걸어나온 건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건, 전신이 검붉게 물들어 완전히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

"아, 아······."

리프는 그런 소년을, 동생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신음을 뱉었다.

크르르.

소년이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노려봤다.

제 누이가 아닌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적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동생의 병은 얼마든지 고쳐주마. 고쳐주고말고. 물론 그 전에 남은 경기부터 끝내야겠지?"

폭왕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있는 리프를 보며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 뭘 하고 있는 거냐? 어서 저 괴물을 죽이지 않고."

이성을 잃고 폭주한 소년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나는 경기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참극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챔피언전을 관전하러 온 건, 도시를 떠나기 전에 그냥 결과만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점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이 걸렸기에.

하지만 경기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군.'

나는 저멀리 경기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혈왕을 노려봤다.

동생에게 일부러 더 혈기를 주입해서 광혈병을 폭주시킨 건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폭왕, 놈의 악의는 상상을 가볍게 초월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이거나, 아니면 동생의 손에 죽어야만 했다. 악티폴의 경기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었으니까.

옆에 있는 아셸도 참담하게 굳은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관중들은 방금 전 길로크와의 경기보다 더욱 흥분에 차서 환호하고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 없다.

애초에 광혈병은 폭왕이 죽어야만 사라지는 병.

저 자매를 구하자고 폭왕과 적대하고 놈을 죽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군주가 같은 군주를 죽이는 건 칼데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절대적인 철칙이 있기에 각자 다른 성향의 군주들이 서로에게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것이고, 칼데릭의 질서와 체계가 몇백 년의 세월 동안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더 이곳에 있기도 역겨웠기에 그만 경기장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

순간 밀려드는 엄청난 두통에 나는 이마를 잡고 휘청였다.

아셸이 놀라서 나를 붙잡았다.

"······론 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그런 그녀를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시감? 데자뷰?

마치 언젠가 한 번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은 기이한 감각.

[전부, 전부 죽여버리겠다!]

죽은 여인, 리프의 시체를 붙잡고 울부짖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스쳤다.

[너, 마족이랑 계약했구나? 아아, 좀처럼 보기 힘든 자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깝게 됐네.]

시간이 흘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해버린 소년과, 그런 그를 제압하고 앞에 서있는 대군주의 모습이 스쳤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대신 너는 칼데릭의 7군주가 되는 거야. 딱 5년이면 돼. 그 뒤에는 네가 뭘 하든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어느 도시.

타오르는 열화 속에서,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대학살을 벌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스쳤다.

"······."

이내 두통이 가시고, 더 이상 스쳐가는 기억 따윈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제 누이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소년을 멍하니 응시했다.

***

리프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소년은 마치 맹수처럼 달려들며 그녀를 붙잡고 물어뜯으려 했다.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괴력이었다.

그에 대항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검을 휘둘러 반격할 수도 없고, 그저 공격을 쳐내는 게 고작이었다.

크아악!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지독한 살의에 찬 괴성뿐.

울려퍼지는 관중들의 함성 속에 리프는 그렇게 한참을 동생과 씨름했다. 그러나 진작 한계에 달했던 몸이었다.

"으······!"

리프는 자신을 깔아뭉갠 채 이빨을 들이미는 소년의 얼굴을 간신히 붙잡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을 물어뜯기 위해 미친 듯이 발악하는 동생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이보다 끔찍한 악몽이 또 있을까.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졌다.

꿈이라면 깨고, 현실이라면 그냥 이대로 다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힘이 다한 건 소년 쪽이었다.

소년의 몸이 옆으로 털썩 넘어갔다. 기운이 다해 폭주가 끝난 것이었다.

리프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을 입가에 건 채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끝을 내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수북한 상처 때문이 아니라, 저 악마들의 함성 때문에.

리프는 풀린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고, 쓰러진 소년이 아닌 자신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 댔다. 그들의 바람대로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그 순간이었다.

텁.

검을 쥔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리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서있었다.

방금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함성들은 어디에도 없고, 경기장에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허?"

즐겁게 웃고 있던 폭왕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쓰러진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 7군주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경기를 끝내라, 6군주."

리프리곤 (9)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사방에 집중된 이목 속에 소년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대체 뭐였지, 그건?

소년의 외모는 스쳐간 기억 속에서 본 그의 모습과 분명히 똑같았다.

경기에 난입한 건 그저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여기서 이들 남매를 이렇게 죽게 둬선 안 된다는 직감······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런 직감이 솟아올랐기에.

"······."

그러고 보니 이번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한 번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언제였더라?

미간을 좁힌 채 기억을 더듬다 이내 떠올릴 수 있었다.

혼돈의 상자를 융합하고 처음 게임에 빙의했던 순간.

그때, 세상이 뒤집어지는 어지러움과 함께 흐릿하게 울렸던 알 수 없는 목소리.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그거다.

분명히 그때 느꼈던 것과 똑같다.

마치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언젠가 일어났을 수도 있는 미래를 엿본 듯한 감각.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일단 뒤로 미뤘다.

얼추 동요가 가시고 이성이 돌아오고 나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파악이 됐다.

나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손을 떼고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더없이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들여서 만든 쇼를 끼어들어 망쳐버렸으니 제대로 빡친 모양.

일단 나서기는 했는데 놈과 대놓고 대치한 꼴이 된 것이다. 심지어 이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어째야 되나, 이제?

뒤늦게 후회가 차올랐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관성과,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는 찝찝한 기시감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인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경기를 끝내라, 6군주."

경기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관중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나와 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격노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놈도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자는 거냐, 7군주?"

······나도 몰라, 씨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지금 득 하나 될 것 없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얼굴 몇 번 본 게 고작인 남매 하나 살리자고 다른 군주의 행사를 망쳐버렸으니.

그러나 이내 결정을 확고히 굳혔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저지르기로.

'얘네들은 살려서 데리고 나간다.'

방금 내게 일어난 이 알 수 없는 현상과 뭔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마냥 죽게 두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만히 폭왕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가 말했다.

"이 둘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뭐라고?"

놈은 이제 화가 끓어오르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광혈병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해라."

"······."

"치료법을 알려주고, 이 둘의 신변을 내게 넘긴다면 이번 건 빚으로 남겨두고 나중에 갚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광혈병의 치료법은 폭왕이 죽는 것밖에 없지만, 혹시나 놈이라면 다른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게 제안이 아니라 그냥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만에 하나라도 완만하게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그쪽 길을 선택해야 했으니까.

"하, 흐핫······."

하지만 역시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놈이 실소를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쳐들고 쩌렁쩌렁하게 웃다가 서서히 소리가 그쳤다.

다시 고개를 내린 놈이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입을 뗐다.

"정신이 나갔군. 감히 내 행사를 망치고 지껄인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콰아아앙!

거대한 기운의 폭발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초감각으로 아슬아슬하게 반응하여 펼친 부동장막을 거두고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짐승이 할퀸 듯한 3갈래의 거대한 자국이 경기장을 반으로 나누고 새겨진 채였다.

사방에서 비명과 소란이 일었다. 공격에 휘말린 관중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간 것이 보였다. 혼란과 공포에 빠진 채 도망가는 사람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폭왕은 주위 공기가 붉게 물든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론 님."

아래로 내려와 곁에 선 아셸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여전히 넋을 놓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리프와, 쓰러진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을 데리고서 멀리 물러나라."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셸이 곧바로 두 남매를 양팔에 안고서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아니지. 정말로 아니야, 7군주. 지금 선을 굉장히 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곳이 6군주령이면 내 방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는 거야. 반대로 내가 7군주령에 방문했어도 너의 방식을 존중했을 거고. 한데도 내가 직접 공들여 차린 경기를, 내 눈앞에서 망쳐버려? 설령 대군주라 해도 이딴 식으로 날 무시할 수는 없다!"

구구절절 틀린 건 없는 말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놈이 벌이고 있는 게 끔찍한 악행이란 사실을 미뤄두고, 군주 대 군주의 입장으로만 봤을 때.

"내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남매를 도로 데려와라, 7군주. 그리고 내 눈앞에서 네 손으로 직접 죽여라. 그러면 이번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가지."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고 머릿속으로 가늠해봤다.

94레벨의 혈왕.

고유 혈술은 육체 능력 증폭, 순수한 육체파에 가까운 초인. 그리고 방어막 따위의 능력은 없다.

······대충 할 만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말했다.

"광혈병의 치료법을 말해라."

놈은 내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비튼 놈의 전신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권왕을 일격에 죽였다고 했었지? 어디 그 실력 좀 직접 보자고."

퍼어엉!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놈의 신형이 내 눈앞까지 도달했다.

나는 재차 부동 장막을 펼쳐서 주먹을 막았다. 주위 지반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허공에 바위들이 비산했다.

이전에 오크킹의 일격을 막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이다.

경기장 반대편으로 순간이동한 뒤 혈술을 펼쳐 허공에 핏방울들을 띄워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놈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혈술?"

뱀파이어도 아닌데 혈술은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

그 의문에 굳이 답해줄 이유는 없었다. 놈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나를 향해서 돌진했다.

놈은 다행히도 내 주위에 떠있는 핏방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접근해와서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은 다시금 장막에 막혔고, 놈의 육체는 내 핏방울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나는 다시 허공으로 순간이동했다. 아래에서 곧장 용오름처럼 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솟아올랐고, 그 역시 장막에 막혔다.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나는 공간 도약과 부동 장막을 적절히 섞어 사용해 도망치고 방어했으며, 놈은 그런 나를 계속해서 쫓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폭왕은 기본적으로 광랑과 같은 육체파 초인에 속하지만, 놈은 순수하게 육체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혈술까지 사용했다.

놈의 권격이나 혈기가 한 번 몰아칠 때마다 충격에 경기장 한편이 무너져내렸다. 아직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관중들은 그대로 떼죽음을 당했다.

점점 몰아치는 공격이 빠르고 강해짐에 따라 놈의 몸에서 자욱한 피 안개가 뿜어져나왔고, 어느새 일대를 뒤덮었다.

"······!"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순간이동을 하자마자 날아든 놈의 혈술을 간신히 막았다.

슬슬 공격에 반응하는 데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최대로 끌어올린 초감각도 94레벨 초인의 속도에 반응하기에는 좀 부족한 모양이었다.

부동 장막이나 공간 도약이 발동에 조금이라도 딜레이가 있는 능력이었다면 진작에 몸이 찢겨나갔을 것이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도망만 칠 거냐!"

놈이 부동장막을 펼친 채 공중에 떠있는 나를 바라보며 기세등등하게 포효했다.

내가 저 괴물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은 방어와 도주밖에 없다. 죽일 게 아니라면.

그래서 안전장치로 공방 와중에 틈틈히 혈술을 펼쳐 놈에게 내 피를 묻혀둔 것이었다.

공격을 막는 데에 한계가 오면 그냥 즉살로 죽여버려야 했으니까.

애초에 믿는 구석이 없었으면 저 괴물 놈과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즉살 말고도 믿고 있는 건 하나 더 있었다.

전투가 시작됐을 때부터 놈에게 발동해둔 가스칼리드의 혈술.

가스칼리드의 생전 레벨은 95, 그리고 폭왕의 레벨은 94였다.

아직까지는 전혀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에 레벨 차이가 너무 미미해서 통하지 않나 싶었지만······.

'······왔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내 육체에 서서히 힘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부동 장막만 펼친 채 제자리에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내 바로 아래에서 연신 혈술을 퍼붓던 폭왕의 기세가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슬슬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놈도 공격을 멈추고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와중에도 내 몸에 흘러들어오는 기운은 시시각각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지면으로 내려와 폭왕과 마주 보고 섰다.

당황하고 있던 놈이 내게 물었다.

"이 빌어먹을······ 무슨 술수를 부린 거냐?"

"글쎄."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놈이 거칠게 포효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더 이상 좀 전만큼 강력하지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지도 않았다.

나는 여유롭게 놈의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발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Lv. 90]

[Lv. 89]

[Lv. 88]

.

.

.

재밌는 건 놈의 레벨 정보도 힘을 빼앗김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레벨의 기준이 그 대상의 현 시점에서의 힘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놈의 레벨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내려가 이제는 아셸보다도 한참 낮아지게 되었을 때.

[Lv. 70]

"이 인간 놈이! 내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아아아!"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부짖었다.

나는 내 육체를 가득 채운 미증유의 힘을 느끼며, 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놈이 창백하게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

놈이 꼴사납게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쥐었다 펴고 있다가, 발을 굴렀다.

콰아앙!

한 번의 발구름에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은 다급히 팔을 올려 방어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아무리 몸으로 치고받는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초짜라도, 이미 놈과 나 사이의 육체 능력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겼다.

쩌어어엉!

내 주먹에 얻어맞은 놈이 그대로 날아가서 무너진 경기장의 잔해에 처박혔다.

나는 조금 얼얼한 손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었다. 리프의 검이었다.

"끄으으······."

정신을 못 차린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놈에게 다가가서, 목에 검날을 가져갔다.

"광혈병의 치료법은?"

이런 식으로 패배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놈이, 이내 실성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딴 건 없다."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없어, 이 개 같은 새끼야! 없다고! 네가 뭔 지랄을 해봐야 그 애새끼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단 말이다!"

"······."

"그딴 웃기지도 않은 협박은 집어치워라. 어디 다음 군주 회의에서 두고보자고. 이번 일은 명백히 네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내가 직접 대군주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건가?

놈을 제압한 것도 헛수고고, 결국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놈도 서서히 지껄이던 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뭐?"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 네가 죽으면 된다. 그럼 이 대륙에서 광혈병은 완전히 사라질 테니."

놈이 멍청하게 날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죽으면 광혈병이 낫는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글쎄."

게임에서는 그랬으니까.

어차피 설명해봐야 놈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나는 놈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놈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정말 날 죽이겠다고? 군주가 군주를?"

"······."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칼데릭을 적으로 돌릴 셈이냐? 대군주가 네 목숨을 직접 거두려 들 거다! 그깟 애새끼들 하나 때문에 지금 날 죽이겠단······!"

촤아악!

검날이 내리쳐졌고,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야 죽은 놈이 걱정할 건 아니지."

리프리곤 (10)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에 허물어진다.

칼데릭의 군주나 되는 이의 최후치고는 초라한 꼴이었다.

놈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부러진 검을 바닥에 던졌다. 목을 벰과 동시에 검날도 충격을 못 견디고 부러졌다.

'음.'

나는 전신에 치미는 가벼운 탈력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육체를 채우고 있던 거대한 힘이 증발하듯 전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폭왕이 죽으니 놈에게서 빼앗은 혈술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본 주인이 죽었다고 강탈한 능력을 영구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

'뭐, 하긴······ 그게 되면 사기지.'

영구 강탈이 가능하면 생전의 가스칼리드도 동족이란 동족은 죄다 학살하며 혈술을 흡수하고 다녔지 않았으려나.

나는 잡생각을 하다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욱했던 혈무는 걷히고, 완전히 폐허가 된 경기장 한쪽의 떨어진 곳에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셸과 리프였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들고 있는 소년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하지만 좀 전까지 그의 몸에 감돌고 있던 검붉은 색이나 울룩불룩 징그럽게 튀어나왔던 핏줄은 더 이상 없었다.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리프는 피를 그렇게 흘리고도 용케도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내가 소년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의 시선도 자신의 동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동생의 광혈병은 나은 모양이다."

"······."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 리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눈에 초점이 풀리더니 휘청거리며 몸이 넘어갔다. 결국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아셸이 재빨리 쓰러지는 그녀를 빈손으로 받아들었다.

남매 모두 한없이 호흡과 맥박이 미약했지만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스칼릿도 다 사용해서 수중에 있는 포션이 없었기에 서둘러 굴피로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가자. 치료부터 서둘러야겠군."

"예······."

아셸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 저편으로 향했다. 폭왕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는 곳으로.

그녀도 설마 내가 폭왕을 죽이기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표정에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들 남매를 죽이든가, 폭왕을 죽이든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고 나는 놈을 죽이고 남매를 살리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쓰읍······.'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제대로 정신 나간 짓을 벌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후련했다. 아까 경기에 난입할 때까지만 해도 치밀었던 후회 또한 없었다.

나 스스로도 대체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올바른 선택이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머릿속의 이성은 여전히 날 미친 새끼라고 욕하고, 앞으로의 뒷감당은 어쩔 거냐며 다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정말 뒷일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저지른 건 아니었다.

일단 남매의 치료가 우선이었기에, 고민은 나중에 하고 어서 포션 상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

그때 한쪽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기척이 가까워졌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 나는 그들이 군주성 소속의 기사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6군주성 직속의 기사단이면 아마도 암혼 기사단이었던가?

성에 있던 기사들이 죄다 몰려오기라도 했는지 그 수는 언뜻 봐도 백은 가볍게 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난리가 났으니 당연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으로 무너진 잔해와 시체들을 넘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Lv. 72]

이내 우리를 발견한 그들이 흠칫 놀라며 멈춰섰다.

가장 선두에 있는 단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7군주님이십니까?"

아무래도 6군주와 내가 싸움이 붙었다는 것까지는 파악하고 서둘러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했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폭왕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나는 그들이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물러서라."

폭왕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기사들은 날 막아서지 못했다.

그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허겁지겁 앞길에서 물러날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군주가 살해당했다고 해도 막아설 엄두가 날 리 없었다.

나는 기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서 걸어갔고, 아셸이 남매를 양손에 짊어진 채 뒤를 따라왔다.

우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기사들은 한참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

악티폴에서 나온 뒤, 곧바로 굴피로가 있는 포션 상점으로 이동했다.

어째서인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서 화색했다.

"7군주! 무사하셨군."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급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오? 악티폴이 있는 쪽에서 난리가 났길래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그대와 6군주가 맞붙었다 하던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

아, 벌써 도시 전체에 소란이 다 퍼진 건가.

그가 아셸이 들고 있는 남매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들을 구하느라 6군주와 충돌한 것이오?"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별 일은 아니다. 잘 해결됐으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6군주가 순순히 이들을 내어줬소?"

"내어줄 수밖에 없지. 죽었으니까."

"······?!"

굴피로가 경악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 죽였다고? 6군주를?"

"일단 들어가서 이들부터 치료하지."

"아, 그, 그렇지. 어서 들어오시오."

이내 그도 서둘러서 만신창이가 된 남매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가게 안쪽에 있는 침상에 두 사람을 눕히고서 잠시 상태를 살피더니, 곧장 포션 몇 개를 가지고서 돌아왔다.

"어떤가?"

"일단 리프는 목숨에 지장은 없소. 출혈이 심하긴 해도 외상만 회복시키면 되니. 동생 쪽이 광혈병 때문에 효과 좋은 포션을 못 사용해서 문제지만, 어떻게든 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광혈병이라면 완전히 나았으니, 마력이 담긴 포션을 사용해도 된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굴피로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소년에게로 턱짓했다.

그에 다시 한 번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던 그가 천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어떻게?"

잠시 나와 소년을 번갈아 보던 그가, 일단은 치료가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는 다른 포션을 더 가져왔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먼저 포션을 먹이고 몸에 부은 뒤, 이어서 리프도 치료했다.

나와 아셸은 방 한쪽에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내 치료가 끝났는지 굴피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리프는 잠깐 사이에 전신에 가득했던 검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어 있었고, 창백했던 동생 쪽의 혈색에도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과연 대연금술사가 제작한 포션다운 효과였다.

"이제 말씀해보시오. 대체 광혈병을 어떻게 치료한 것이오?"

굴피로의 물음에, 나는 나란히 누워있는 남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6군주를 죽였더니 곧바로 낫더군. 광혈병은 놈이 죽어야 사라지는 병이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고 죽인 것이기에 말이 반대이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굴피로가 작게 탄식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리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위에 서있는 우리를 둘러봤다.

굴피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일어났느냐?"

"······여기는?"

"포션 상점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내 옆에 누워있는 소년을 발견한 그녀가 다급히 그의 상태를 살피려고 했다.

"괜찮다. 너도 동생도 전부 치료했으니 안심해라."

"아, 아니. 광혈병, 광혈병이······."

"그래, 네 동생의 몸에 있던 혈기도 완전히 사라졌더구나. 광혈병은 6군주를 죽여야 낫는 병이었던 모양이야."

굴피로의 말에 그녀가 넋이 나간 탄성을 흘리다가,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곧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으, 으으······."

동생의 몸 이곳저곳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다가 아예 품으로 끌어 안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녀는 한참을 목놓아서 엉엉 울었다.

***

나와 아셸은 여관에 있는 바로스까지 불러와서 굴피로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는 상점에 있는 식재료로 바로스가 간단하게 차렸다.

"쯧쯔, 저러다 얼굴에 구멍 나겠군."

아직도 방 안에서 침상 옆에 앉아 누워있는 동생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리프를 보며, 굴피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녀의 몫으로도 수프를 가져다줬지만 다 식을 때까지 먹지 않고 놔두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싶었다.

동생 하나 구하자고 악티폴에서 몇 년을 구르다 이제야 겨우 그 염원을 이뤄낸 것이었으니까.

"한데 괜찮겠소? 군주를 죽였는데······."

굴피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없지. 그대는 7군주령으로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 문제는 둘째치고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으시냔 말이오. 그걸 알아야 나도 뭘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겠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가 군주를 죽였으니 대군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안다. 그에 대해서는 대충 생각해뒀다.

내 반응에 굴피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뭐, 생각이 있다면 이제 와서 나도 빠질 생각은 없소이다. 7군주령으로 함께 갈 것이오."

"그래······."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보다도 아까 경기장에서 스쳐갔던 기억을 되새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스쳐간, 이제는 흐릿해져서 잘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마지막에 스쳐간 기억에서 대학살을 벌이던 그의 모습이었지만······.

[너, 마족이랑 계악했구나? 아아, 좀처럼 보기 힘든 자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깝게 됐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대신 너는 칼데릭의 군주가······.]

"······!"

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대군주에게 제압당한 소년, 그런 그에게 제안을 하고 있던 대군주.

나는 다급히 방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남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굴피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소년의 이름이 뭐지?"

굴피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셨소? 리곤이오."

"······."

나는 침상에 누워있는 소년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스쳐간 기억 속의 그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프, 리곤······.'

살귀 리프리곤.

폭왕에게 혈육을 잃고, 제 누이의 이름까지 뒤집어쓴 살육에 미친 복수귀가 바로 그였음을.

긴급 소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