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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15화. 왜 그러세요

카티야의 세계는 언제나 두 가지 색깔로 나뉜다.

검은색과 하얀색.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녀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오로지 그런 두 가지 색깔로만 나뉘기 때문이다.

전신을 강제로 수호하는 신성 때문에 모든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과정 중 하나라고 했던가.

더위, 추위, 공기의 흐름, 옷의 감촉, 미각, 후각....

처음부터 그런 걸 아예 몰랐으면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서원을 바친 뒤로. 그런 감각을 '빼앗긴' 것이라서,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몸. 망가진 모든 감각 중에서 유이하게 멀쩡한 것은 눈과 귀뿐.

그나마도 결국 그녀의 몸에 똬리를 틀고 있는 신성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했을 때 얼마만큼 절망했는진, 한참 전의 일인데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

죽은 것은 검은색으로 보였다. 살아있는 것은 하얀색으로 보였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은 항상 회색이었다.

죽지 못해 살아있는 인간.

흰색과 검은색으로 양분된 세계에서, 그녀 홀로만 오롯이 그런 상태였다. 마치, 세상에서 따로 격리된 것처럼.

지독할 정도로 따분했다.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바로 방금 전까지는, 그러했다.

"이런, 미친-!"

옆쪽으로 사자심의 비명이 들린다.

시신경에 들러붙을 정도로 새하얀 궤적을 담긴 총탄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이윽고 그게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순간.

'아파.'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그런 '감각' 또한 찾아든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낸 적이 없는, 몸에 자리 잡은 신성이 외부의 힘에 '밀려서' 억제되는 그 순간.

몸의 감각 또한 재생된다.

아주 찰나의 순간. 심장이 꿰뚫린 그 짧은 순간이지만.

세계에, 색이 재생되었다.

형형색색.

일생 절대로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검은 밤하늘. 창백한 빛을 뿌리는 달. 사람들의 표정. 얼굴. 공기. 흩뿌려지는 주변의 피.

흑백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세계.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것은.

초연이 피어오르는 리볼버를 들고,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에이든 켈러메인이란 남자다.

"-"

흘러서, 녹아, 늘러붙듯이, 그 모습이 카티야의 눈꺼풀 아래에 담겼다.

그녀 또한, 눈을 깜빡일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그걸 똑똑히 자신의 시야에 잡아두었다.

신체에 깃든 신성이 없어지며, 그녀의 몸 또한 서있을 힘을 잃고 무너져내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계속해서.

의식이 나가서, 전부 다 껌껌해지기 전까지.

카티야는 계속 그 남자를 시야에 담아두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뒤처리는 언제나 그렇듯 대단히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잔당들 단속 - 밀수된 무기 압류 - 의식을 잃고 쓰러진 카티야의 구금이라는 업무를 전부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몇 시간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런 깔끔한 뒤처리에도 불구하고 영 기분이 뭐한 인간도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경우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노려보는 에이든일 것이다.

아무튼 죽은 사람도 없고, 노엘도 멀쩡하고, 에이든 본인도 다친 곳도 없이 다 마무리된 건 좋은데.

엄밀히 따지면, 에이든에게 있어선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Skill Info

◆ 법력: 구원자의 맹세

※ 고유 – 해당 캐릭터만이 이 스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제: 세계를 구한다.

상승의 신 우르간에게 바쳐진 유일한 맹세입니다. 바친 맹세와 관련된 행동을 할 때 유의미하게 위력이 증가합니다.

- Quest Info

◈ 제1막, < 제도 균열 >

- 메인 시나리오의 중요 인물들과 긴말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 당신의 존재가 시나리오에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당신을 기준으로 시나리오가 새로 재편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에이든이 실소를 흘렸다.

절대 할 생각 없는 일이었는데, 결국 해버렸다.

물론 여기까지 왔으면, 딱히 후회하진 않는다.

'주인공이 없으면, 어차피 다 죽잖아.'

그 녀석이 없는 이상.

세계의 미래를 알고, 그걸 '대비'할 수 있는 건 에이든뿐이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없을 때 닥쳐올 미래에 휩쓸릴 사람은, 에이든 본인과 그의 가족까지 같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가 짝 소리 나도록 볼을 후려치고 심호흡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진 이상,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건 당연지사다.

무엇보다.

'원작대로 따라가는 게 하나도 없었지.'

주인공이 없는 것부터가 그렇고.

느닷없는 카티야의 등장도 그렇고, 무기 밀수를 주도하는 인간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도 그렇고, 황제와 제2 황자의 사이가 안 좋은 것도 그렇고.

원작의 시나리오가 굴러가는 '틀'은 그가 아는 것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그 세부 사항을 채우고 있는 디테일들이 기억하는 것과 천양지차다.

그러니, 당장 필요한 건.

톱니바퀴가 어긋나 있는 이 실제 세계와 그가 알고 있는 원작 세계와의 간극을 따라잡는 거다.

그래야, 본격적인 '1막'이 열릴 때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대략적인 진행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 에피소드의 '진행'과 관련된 인물은 하나하나 뜯어봐야겠지.

♠ Main Quest

◈ 제1막, < 제도 균열 >

곧 1장이 진행됩니다!

에이든이 눈앞에 떠오른 창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1장이면....'

제도의 '유령 기사' 소동일 것이다.

무기 밀수와 관련된 조직이 제도 안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강제로 발생시키는 사건.

매일 밤, 일정 시간마다 느닷없이 시내에 갑주를 입고 돌아다니는 유령 기사가 출몰하여 시민들이 밤마다 공포에 질리는 상황.

그 유령 기사를 토벌하여 시민들의 평화를 지켜주는 게 주인공의 역할이던가.

원작 기준으로는 딱 이때쯤 해서 주인공이 노엘과 엮이면서 본격적으로 시나리오가 시작되는 느낌이었지.

"...."

물론, 에이든 자신은 그런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고 노엘의 가짜 남편 자리를 꿰차고 있긴 하지만.

"아, 에이든 씨."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방 안으로 지친 기색의 노엘이 터덜터덜 걸어들어왔다.

어지간해선 이 사람이 이런 기색을 보일 일도 없을 텐데, 정리해야 하는 일의 규모가 규모다 보니 그럴 테다.

타국의 왕족이 그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닌 걸 단신으로 수습해야 했을 테니, 어느 정도의 격무에 시달렸을지 짐작도 안 간다.

"왕녀님의 상태는 좀 어떤가요."

"생각보다 얌전히 협조하고 있습니다."

노엘이 한숨과 함께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애초에 피해자도 없으니 괜스레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말고 당장은 서로 조용히 있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요."

"그런가요."

"다행이긴 하죠.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만."

이전의 다니엘 왕자 때도 그랬지만, 왕족의 권위라는 건 상상을 초월한다.

솔직히 말해서.

두 번 다 정당방위에 가까웠지만, 성황국 왕족에게 두 명이나 해를 입힌 에이든의 신병에 어떤 종류의 위협이 가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단 소리다.

그걸 서로 조용히 묻자는 쪽이면, 아무튼 그로서도 별로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관련된 사안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성황국에서 추가적인 사절단을 파견한다고 했습니다."

"사절단이요?"

"카티야 왕녀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신성을 다루는 에이든 씨의 신병 관련된 문제는 아직 해결이 안 됐으니까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이번엔 정식 절차를 밟아서, 대규모로 보낸다 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성황국 안에서도 제법 고위직에 앉아있는 인간이 넘어온다는 이야기다.

에이든 하나를 보기 위해, 처음에는 왕녀를 보내고. 그 이후엔 그런 사람까지 온다라....

"...."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기가 돌아갔다.

성황국 안의 고위 인사가 어느 쪽이 있는진 이미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훗날 그런 사람이 사절단으로 온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잘됐네요."

"예?"

에이든이 이를 부득 갈면서 답했다.

"그쪽에서 진 빚은 다 받아내 둘 거니까요."

아무튼 자신은 성황국 왕족에 연속으로 두 번이나 시비가 걸린 입장이다. 여기까지 온다면 그로서도 그쪽에 뭔가를 뜯어내지 않고선 수지가 안 맞지.

그 모습을 본 노엘의 입꼬리도 슬쩍 비틀렸다.

"꾸미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있죠. 분명히."

"...그건 제법 기대되는군요."

오기만 해 봐라.

아주 재미있는 꼴을 겪게 만들어 줄 예정이다.

그런 다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자니, 노엘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장 난동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어 주는 조건으로 카티야 왕녀가 조건을 내걸긴 했습니다만."

...난동을 부리지 않는 데 조건까지 거는 걸 보면 참 그쪽도 그쪽이다 싶지만.

일단 들어보기는 해야 할 것이다.

"조건이요?"

에이든이 황망하게 반문하자, 노엘이 볼을 긁적거렸다.

본인도 당황스럽다는 의사의 표출일 것이다.

"...에이든 씨와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꼭 한번 와달라는군요."

에이든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앞을 바라보았다.

카티야가 제도 사령부 지하의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단 소리를 들었을 땐 조금 살벌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당장 그의 앞에서,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뒹굴거리고 있는 카티야의 모습은 그런 예상을 곧바로 접어도 상관 없을 모습이다.

이전에 선보인 그 난폭함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흡사 게으른 고양이 같다....

"생각보다는... 자유로워 보이네요?"

카티야의 성격을 생각하면 진짜로 온갖 수단을 다해서 구속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방 안에 갇혀있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별다른 제약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 그의 말에, 노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하긴 했습니다."

"그런가요?"

"에이든 씨를 데려오겠다고 하자마자 저렇게 얌전해진 겁니다."

"...."

그렇게나 괴물같이 날뛰던 왕녀가 고작 그와의 면담 하나에 저렇게까지 얌전해진다는 건 조금 놀랍긴 하지만.

에이든은 뭐라고 당황을 표출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니까.

-Quest Info

◈ 인생은 아름다워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이 당신에게서 애타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세요!

★ 대상에게 '통증'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사건에 슬기롭게 대처하셨습니다. 인물과 대화하여 보상을 수령하세요.

이전에, 퀘스트를 받을 때부터 저 여자와 전보다 깊게 엮일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무 감각도 못 느끼던 인간한테 통증이란 '자극'을 준 시점에서 관심을 못 끌 수가 없다.

'보상이란 게 뭔진 모르겠지만....'

적혀있던 내용으로는, 운명의 길쌈꾼의 적용 방식이 변화한다곤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가 취한 행동 때문에 카티야와 그 사이의 '관계성'이 변한다는 의미겠지.

그게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미지수지만.

'...너무 안 좋은 거만 아니었으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녀에게 감각을 느끼게 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시점에서 그에게 해를 끼치는 형태로 돌아오진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른다.

카티야만큼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은 또 찾아보기 힘드니까.

혹시라도 그에게 어떤 억하심정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아."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유치장 코앞까지 다가온 에이든을 발견한 카티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왔구나!"

활기차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들은 에이든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라, 카티야의 얼굴 위에 걸려 있는 것은 근육 전체를 다 사용해서 짓는 것 같은 잡티 하나 없을 웃음이다.

마치 오랫동안 못 보던 주인을 만난 애완동물 같은 기색이다.

"...."

뭐냐, 이거.

흡사 거대한 공룡이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괴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있잖아, 내가 여러모로 생각해 봤는데!"

에이든이 몸을 굳히고 있는 사이에도, 카티야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 성황국으로 안 돌아가려고!"

"...."

에이든이 얼빠진 얼굴로 노엘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아예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그쪽의 반응을 보니 금시초문인 건 이쪽도 똑같아 보였다.

"...."

아니.

그런 일을 어떻게 할 건지, 무슨 일을 할 건지, 진짜로 가능하기는 한 건지는 다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이것부터 물어봐야 할 것이다.

"...왜...?"

간신히 그런 질문을 쥐어 짜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잖아."

말 그대로.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기색으로.

카티야가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 있는데, 그쪽으로 왜 돌아가?"

"...."

어쩐지 소름마저 끼치는 그런 문장과 함께.

에이든의 눈앞으로, 문득 창이 하나 떠올랐다.

-Quest Info

◈ 인생은 아름다워

- 관련 퀘스트를 해결합니다.

- '카티야'에 대한 '운명의 길쌈꾼'의 적용 방식이 달라집니다!

- 유대 형태가 '집착'으로 변경됩니다!

- 대상은 앞으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크게 신경 쓸 것이며, 정신 상태 전반에 있어 당신과 맺는 관계에 대한 중요도가 대단히 높아집니다.

- 복사 가능한 스킬들이 추가로 개방됩니다!

...어.

뭐라고?

16화. 만찬회

운명의 길쌈꾼에서 유대 형태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그것 이상으로 에이든에게 충격을 준 건 다른 부분이었다.

- 복사 가능한 스킬들이 추가로 개방됩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문구다.

이전에도 카티야의 스킬 목록을 몇 번 들여다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말을 듣고 다시 살펴 본 그녀의 스킬 목록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얼씨구.'

그걸 죽죽 내리는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단순히 스킬들이 추가된다길래 그게 뭔가 해서 봤을 뿐인데.

'...모든 클래스가 다 있는데?'

게임 안에서도 주연 등장인물들은 모두 제각각 다른 루트로 성장하고, 그에 따라 걷게 되는 길도 다르다.

노엘이나 카티야나, 지금 보이는 기절초풍할 무력도 따지고 보면 시작점에 머무른 인간들이라고 봐야 한단 소리지. 메인 시나리오가 지나면 지날수록, 이 사람들이 어느 분야를 선택하냐에 따라서 각각 그 '전공'이 달라진다.

노엘을 예로 들자면, 검술 특화나 신체 강화 특화, 또는 마법을 추가로 익혀 마검사 특화로 가는 분류가 있는 느낌이지.

하지만, 지금 그 목록에 추가된 스킬들은 그 모든 전공을 총망라하고 있지 않은가.

'원래 전공이 정해지면 다른 것 못 배우는데....'

에이든이 가지고 있는 운명의 길쌈꾼도, 아무튼 대상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만 복사해 올 수 있는데.

지금은 유대 관계가 바뀐 것만으로 복사해 올 수 있는 스킬 풀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느낌.

마치.

이 인간들의 '미래'를 통째로 복사해 올 수 있는, 그런-

"저하, 그러니까."

"안 돌아간다고."

"...."

"그보다, 부관 자리 내놔."

그런 상념을 이어갈 새도 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코앞에서 떨어졌다.

성황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기절초풍할 선언도 모자라서, 카티야에게서 이어지는 말은 노엘이 스스로의 목을 부여잡게 할 만한 요구였다.

공적인 행사에 항상 대동하게 되는 '부관'의 위치가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카티야의 요구는 그야말로 집요했다.

덕분에, 꽤 곤란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치라기 하기도 뭐한 게, 무슨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카티야를 노엘이 애타게 설득하는 것뿐이었지만.

"한 나라의 왕족이 타국에서 그리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저하. 관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부관."

"-그러니까 계속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국이 곤란해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성황국에 계신 법황 성화의 처지도 난처해지는-"

"부관."

"...."

"부관."

"...참으세요."

마지막 문장은 검집에 슬금슬금 손을 뻗으려는 노엘을 보고 에이든이 꺼낸 말이었다.

어차피 안 죽는 인간이니 진짜로 벨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심이 섞인 동작이다....

'...얼마 전까지 죽자 살자 치고받은 거에 비하면 좀 낫긴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애교다.

그래도 노엘이 성격이 정말 좋아서 다행이다.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 인간을 지금은 큰 뒤끝 없이 대하다니.

"애초에, 지금 상황 자체가 조금 이상하다니까?"

그런 노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티야가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받치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제부터 곧 부부 관계로 온갖 공식 행사에 나가게 될 텐데. 부관도 없으면 그런 일정들을 어떻게 소화하려고 했는데?"

"...."

그렇긴 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노엘이 부관을 정해준다고 해놓고서 뛰어난 사람을 뽑겠다고 미뤄놓지 않았던가.

"이상하잖아. 사용인은 자신의 격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야. 네 신분쯤 되면 오히려 없는 게 눈총을 사는 수준인데."

"그게 그 정도인가요?"

"...사교계 상식인걸. 사자심, 남편을 대체 어떻게 대하는 거야?"

세상에.

이 인간 입에서 상식이란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꼴도 그렇지만, 노엘이 거기에 맞춰 면목 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는 것도 기괴한 꼴이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가기 전에는 호위나 기타 잡스러운 일이야 제가 좀 거들면 되니까요. 기준에 맞출 만한 사람을 아직 못 찾았을 뿐입니다."

"뭐, 사정이야 어찌 됐건. 그걸 굳이 안 데리고 다니면 주변에서 좋은 시선 받기는 힘들단 이야기지."

카티야가 볼을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자리에 혼자 맨몸으로 덜렁 나가게 하는 건 너와 남편의 평판을 동시에 깎아 먹는 짓이야. 모르지도 않을 것 아니야?"

그 말에는 별로 반박할 거리가 없었는지, 노엘도 입술을 오므리며 침묵했다.

"...되도록 그런 자리에 에이든 씨를 안 데리고 나가면 될 일입니다."

"사교계에 남편 될 사람도 안 끌고 나가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부부 사이에 대한 억측이 미친 듯이 돌아다닐걸?"

"그건 제가 알아서 감당할 일입니다. 에이든 씨가 굳이 큰일에 얽히는 건 본인도, 저도 원하지 않으니까요."

...아니.

에이든이 거의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완강하게 말을 이어가는 노엘을 바라보았다.

"당신한테 그렇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진 않은데요."

새삼 생각하는 건데, 이 사람 가끔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은 노엘의 눈매가 둥그스름하게 휘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네? 하지만...."

"그런 건 그냥 같이 나가면 되잖아요. 애초에 그럴 때 곤란하지 않으시려고 저랑 결혼하신다는 것 아니었어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럼 써먹으셔야죠. 저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록 시작은 반쯤 납치에 가깝게 됐다지만, 아무튼 이 사람이 성심성의껏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건 매번 피부로 체감이 될 정도다.

돈도 그렇고, 편의도 그렇고, 이 사람은 에이든 자신에게 '계약된 사항' 이외에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지.

거기에 뭔가를 돌려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공식적으로 남편 자리가 공석이면 이래저래 곤란한 일들이 생기니까 에이든을 '고용'한 것이 이유라고 들었는데.

"...어."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노엘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뭐라고 할지 한참이나 고민하는 기색이다.

"감사...합니다."

"...."

마치 자신을 향한 호의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는 반응에, 에이든의 말문도 그대로 틀어막혔다.

사실 호의도 아니고 당연한 건데, 그것도 조금 불편해하는 모습이 기가 찬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성격이 된 거야?'

이 정도 능력에,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인간이 이 정도로 자존감이 낮을 수가 있나. 신기할 따름이다.

그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당장 왕녀님이 부관 노릇을 하는 게 탐탁지 않으면 그냥 아무나 일단 사용인으로 붙이고 그 자리에 나가면 되는 일 아닌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런 말에는 두 쪽 모두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버린다.

"부관은 거의 항상 본인과 밀착해 있는 대상입니다. 아무리 검증에 검증을 거쳐도 모자람이 없죠. 괜히 지금까지 아무도 뽑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귀빈 암살에 가장 용이한 직종이 요리사, 재단사, 그리고 비서나 부관이라고?"

"...."

이 둘이 처음으로 죽이 맞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동시에 일축할 정도면 정말 위험하다는 것도 얼추 알겠고.

"...아무나 대충 부관으로 앉히는 건 안 된단 이야기죠."

"그러니까, 내가 해준다잖아. 뭘 고민하고 있어?"

카티야의 말에, 노엘이 다시 눈을 그쪽으로 샐쭉하게 흘겼다.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애초에 황궁 정기 만찬도 이제 곧 있을 텐데. 다른 자리는 몰라도 그 자리에는 어차피 나가야 하잖아?"

"그렇다고 해도 저하가 에이든 씨의 부관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아뇨."

노엘이 이어가려던 문장을 에이든이 중간에 끊고 들어갔다.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겨 보는 모습이다.

"그거,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노엘이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기색으로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왕족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면, 속이면 되잖아요."

"예?"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다 방법이 있죠. 하다못해 얼굴만 가려도 되는 것 아닙니까."

"오- 말이 좀 통하네."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카티야와 상반되게, 노엘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힘겹게 말을 꺼내 들었다.

"...에이든 씨, 뭔가 이전이랑은 태도가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

"아뇨. 사람들한테 '좋은 인상'을 남겨줄 필요가 있단 말이죠."

"...예?"

"처음으로 같이 나가는 행사인데,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노엘이 눈을 크게 뜨고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다.

척 봐도 귀찮기 짝이 없는 인간을, 지금까지 전력으로 귀찮은 걸 피해 다니던 그가 오히려 환영하는 꼴 아닌가.

하지만, 에이든으로서도 방금 나온 걸 흘려들을 수가 없는 입장이다.

다른 공식 행사면 몰라도, 방금 카티야가 꺼내든 일정은 무시할 수가 없었으니까.

'황궁 정기 만찬이면....'

원래 게임 안에서는 그저 '이런 행사가 있다'라고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지만, 그런 세부 사항을 파고들면 중요도가 꽤 올라간다.

황실의 일원들과 세력 있는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유력자들까지 심심찮게 얼굴을 비추는 행사니까.

메인 시나리오의 중점이 되는 인물들이 얼굴을 비칠 일이 대단히 높은 곳이라 그거지.

왜냐하면.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오직 당신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메인 스토리의 중요 인물들과 유대를 쌓음으로써 새로운 보상을 얻으세요!

...곧, 이걸 아주 잘 쓸 수 있다는 말이니까.

이전과 다르게 메인 시나리오에도 적극 개입할 필요성이 생긴 이상, 좋은 능력을 한시라도 빨리 수집하는 건 이전과 비교해도 중요성이 더 오른 상황이다.

가장 먼저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도 이미 알고 있고.

'무녀. 그리고 황자.'

부족 연합에서 넘어왔을 우르간의 무녀.

그리고, 제국의 적통 황위계승자. ...그리고 노엘 경에게 달라붙는 구혼자. 에이든이 이 자리에 있게 된 원인.

메인 시나리오 안에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굵직한 인간들이다.

"...에이든 씨."

노엘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에이든 씨의 능력을 믿고,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도 기쁩니다만. 귀족들의 사교계는 여러 의미에서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아주 사소한 걸로도 꼬투리를 잡힐 수 있는 곳이니 한번 재고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꼬투리를 잡히는 거라면, 어느 쪽을 말씀하시는 거죠?"

"예법이나, 관습이나, 그밖에 미세한 눈치와 몸짓만으로도 깎아내리려고 드는 게 전통 같은 곳입니다. 한 번도 그런 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 좋은 경험을 하긴 힘들겠죠."

"...."

씹어서 뱉듯이 말하는 노엘의 모습에, 에이든이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이 단번에 이렇게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대상은 흔치 않다.

뭐라고 해야 하나.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혹 안 좋은 경험이라도 있으신가요?"

"...괜찮은 기억이 있다고는 못 하겠군요."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노엘의 대답에, 에이든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 사람 특성상 뒷공작이나 미묘한 인간관계, 정치 등등이랑은 아예 담을 쌓고 살았을 느낌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러면 제가 기 좀 살려드릴게요."

"...예?"

"아무도 무시 못 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한 번 그가 노엘에게도 도움이 되어줄 차례다.

'이 사람하고는 어차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야지.'

...사람을 스킬 자판기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과의 '관계'는 앞으로 에이든의 생존에서도 핵심이 되어줄 커다란 축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건 결코 나쁜 투자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예법? 관습? 눈치?

폭력과 폭력이 부딪히는 장소면 몰라도, 그런 것들이 '무기'가 되는 곳이라면 에이든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다.

애초에 그가 밥벌이를 하던 수단이 뭐였던가.

'거기에....'

그는 그런 자신의 재주에 날개를 달아줄 능력을 하나 알고 있었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

.

.

『 라이오넬 13세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황제에게서 받아온 복사권.

이걸 쓸 차례였다.

[ '특수스킬: 황실 혈통'을 복사합니다. ]

늘 바람 잘 날 없는 사교계에서는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서 떠돌아다니기 마련이다.

하물며, 황실의 만찬회만큼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커다란 행사라면 더욱 그렇고.

어딘가의 귀족 영애가 누구를 찼다더라, 어디쯤의 대귀족이 바람이 났다더라....

그런 가십거리가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지는 뒷소문의 허브 같은 곳이 이런 장소지만, 오늘의 만찬회는 그런 곳을 유난히 뜨겁게 달구는 화제가 한 가지 있었다.

"황자께서 오늘 만찬회에 참석하신다고 하네요?"

"그 용안을 한 번 더 뵐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이 틀림없어요!"

사교계에서 뭇 선망을 받는 남자는 여러 가지 타입이 있지만, 황자만큼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신분, 능력, 외모, 심지어는 아직 나이도 대단히 젊은 축에 황실 안에서의 입지 또한 대단히 탄탄하다.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그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화사한 웃음과 함께 좋은 분위기가 도란도란 돌았다.

"아, 재미있는 일이라면 한 가지 더 있네요."

"네? 무엇인가요?"

"그 '사자심'께서도 오늘 반려를 동반하여 참석하신다던가요."

"...아, 그런가요?"

아까 와는 정반대로, 미묘한 분위기가 테이블에 감돌았다.

"사자심... 대단한 기사죠."

"그럼요."

말이야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각자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건 비웃음, 그리고 미묘한 불쾌함이다.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그 나이에, 그 정도 입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다졌다는 건 어떻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랑이 정말 있긴 했나 보군요. 결혼했다곤 들었는데, 헛소문인 줄 알았지 뭐예요."

"그런 과격한 여자를 누가 좋아해 줄까- 했는데, 다행히 취향이 특이한 남자도 있긴 한가 보네요."

복잡한 정치 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는 귀족 영애들에게 나라를 대표하는 기사인 사자심에 대해서는 별로 존중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다.

대륙 전체가 진창이 되어 싸운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별로 와닿지 않기도 하고.

그만한 입지를 다졌음에도, 사교계에서는 항상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며,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열지 않는 태도 덕분에 '건방지다'라는 인식이 아주 확고하게 박힌 인간이기도 했다.

노엘 입장에서는 그저 어느 파벌에게도 휩쓸리고 싶지 않아 중립을 지켰을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알 바가 아니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마나 잘난 남편인지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요. 제까짓 게 뭐라고 황자님의 구혼을 그렇게나 거절했는지-"

저도 모르게 본심을 입에 담은 영애가,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총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직접 꺼내놓는 건 너무 눈에 띄는 일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뭐라고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까진 없는 것을 보니, 의견 자체에는 모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감히' 그들은 범접할 수도 없는 황자의 구혼을 그렇게나 거절한다는 건, 그들 입장에선 영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었으니.

"제도사령부의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경이 입장하십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당사자가 직접 행차하는 모양이다.

영애들이 모두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거만한 시선으로 입구로 걸어들어오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무감정한 얼굴 그대로 회장 안으로 뚜벅뚜벅 입장하는 사자심이다.

"...또 제복인가요?"

"고리타분하긴. 옷 고르는 감각이 없다는 건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요."

기본적인 드레스 코드조차 맞출 생각이 없다니, 역시 건방진 인간이다.

그런 감상을 공유한 영애들이 이내 그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사자심과 함께 단란하게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신랑의 모습은.

"...."

"...."

"...."

방금 전까지 한심하다는 듯 사자심을 씹어대던 영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모두 일순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눈 높을 만하네.

지금까지 저런 남자를 신랑으로 맞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었다면.

겉모습을 놓고 봤을 땐, 충분히 그런 평가가 내려질 만하다.

조각 같은 미남이라거나 척 봐도 명품인 물건을 온몸에 두른 대부호는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으로는 이런 반응이 나오기가 힘들지. 그런 사람은 사교계에 널리고 널렸다.

오히려.

사자심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원래대로라면 그런 인간 축에도 못 끼고 이런 곳에 무슨 무지렁이가 나오냐며 비웃음을 살 쪽에 가깝다.

하지만.

방금 화두에 올라던 황자에게서나 보이는, 그런 '아우라'가.

황실의 일원들에게서나 느껴지는 '기품'이 느껴진다.

척 보아도 이 남자가 범인 축에 낄 사람이 아니라는 분위기를 내뿜는다.

"처, 첫인상은, 제법 봐줄 만하네요."

"흐, 흐음."

누군가 헛기침과 함께 그런 말을 꺼내놓자, 다들 마지못해 동의하는 콧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직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겉으로 봤을 때 기품이 높아보인다고 결코 그게 격이 높은 남편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된 능력이나 혈통이 없다면, 그건 빛 좋은 개살구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각자가 떠올리는 사이, 회장의 경비가 입장하려던 그들을 저지했다.

"옆에 계신 분의 신원은...?"

사자심의 호위는 익히 그 부관으로 알려진 스텔라 경이지만, 그 옆에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를 포함한 '전신 갑주'를 뒤집어쓴 인간은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인간이다.

그에 따른 제지겠지만.

"부관."

사자심의 반려로부터 그런 목소리가 짧게 흘러나오자, 이내 아무도 반박을 할 수 없는 그 '신원 증명'이 갑주의 인물에게서 피어올랐다.

무채색의 불꽃. 작지만, 아무도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이능'.

신성을 다루는 이들은 두 부류다. 왕족, 그리고 그들과 서원으로 묶인 팔라딘.

설마 왕족일 리는 없으니, 저기 서 있는 건 팔라딘이렸다.

그리고, 그런 결론이 떨어지자마자.

회장 안으로, 아까 전과 비교해서 확연하게 조용한 침묵이 떨어졌다.

지금 근처 테이블의 영애들뿐만 아니라, 회장 안에서도 이 모습을 주의 깊게 보던 이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시, 신성...."

"성황국의 팔라딘이 부관으로 붙어있는 건가요...?"

팔라딘이라고 함은 성황국 왕족의 호위에나 쓰이는 최중요 인력이다. 성황국 최강의 무력 집단.

그런 걸 '부관'으로 쓰고 있다는 건, 적어도 저 남자는 성황국의 왕족에 준하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남자라는 걸 분명하게 증명하는 바다.

어지간한 대귀족조차 누리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호사겠지.

"...."

"...."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아마, 방금 그것만으로 모두에게 확실히 각인되었으리라.

저기 있는 저 남자는, 어쩌면.

지금 이 회장 안에서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남자라는 걸.

-Skill Info

◆ 고유 능력: 황실 혈통

고귀한 피를 타고난 황가의 일원들은 자체적으로 군중을 사로잡는 타고난 카리스마를 발휘합니다. 다수의 눈에 띌 때 '매력도'가 폭증합니다.

또한, 일부 정신 간섭에 자동으로 저항하며, 해당 효과가 발동 중일 때 일부 '행동'이 자동으로 발생합니다.

...역시.

이걸 복사해 오기 잘했다.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에 떠오른 창을 바라보았다.

-System Message

[ 해당 장소에 있는 인간의 대다수가 당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

[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가 많습니다. ]

[ '운명의 길쌈꾼'을 사용하기에 최적의 조건입니다! ]

...그렇지.

그런 메시지를 본 에이든이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이렇게 공들여서 이것저것 꾸미고 오길 잘했다. 카티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성공한 것 같고.

'남은 건....'

이 회장 안에 있는 '중요 인물'들에게서 최대한 스킬을 긁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서 걸어가는 에이든의 모습 뒤로, 휙- 하는 휘파람이 따라붙었다.

전신 갑주를 뒤집어쓰고 있는 카티야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안쪽으로 공명하듯이 울려 퍼졌다.

"기 살려주겠다더니, 아주 물 만난 고기잖아."

그런 목소리가, 노엘 쪽으로 속삭이듯 떨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 싸운 것에 앙금이 아직 남아있기라도 한 건지, 노엘을 놀려먹으려는 의도가 아주 그득그득 들어있다.

"...."

옆쪽에서 그 말을 들은 노엘이 말없이 모자를 푹 눌러썼다.

지금 그녀의 표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렷다.

귀로 열이 올라와 있는 걸 보니 어떤 얼굴인지는 알만 하겠지.

"괜찮은 남편 뒀다고 이제 소문이 파다하겠는걸? 이제 사교계 어딜 가도 무시당할 일을 절대 없겠어, 사자심."

"...시끄럽습니다."

17화. 만찬회 (2)

"...경."

그녀와 함께 동석해 있는 스텔라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분, 분명히 귀족 사회에는 연고가 없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알기로도 그래."

노엘이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그렇게 답했다.

"그 항상 근엄하신 영웅의 남편이라길래 비슷한 사람인가 했더니, 잘 풀린 젊은이구만. 언제 내 저택으로 오게. 잘 대접해 주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작님. 아, 중장님도 나중에 함께 가시는 걸로-"

눈앞에는, 사교적인 미소와 함께 여러 명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에이든의 모습이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면서, 오히려 분위기를 리드하고 있는 모습은 이런 종류의 자리가 대단히 익숙하다는 분위기다.

마치 이쪽이 '본업'에 가깝다는 듯이.

그의 주변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외국의 중요 인원을 부관으로 부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처음에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던 이들도, 에이든과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그 경계심을 풀고 점점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 아닌가.

물론 원래도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한 직업일 게 분명한 사기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거 거짓말 아니었어?'

노엘이 볼을 긁적거리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저 남자가 '싸움' 관련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게 몇 번이지도 모르겠다. 그런 짓은 어렸을 때부터 이능 운용과 전투 관련으로 무시무시한 수준의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경지인 것도 분명하고.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런 '사람을 대하는' 자리를 어려워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 본 경험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

노엘 본인처럼.

그녀는 항상 이런 자리가 어려웠으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재주겠지.

'에이든 씨는,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녀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괜스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중앙정보부에 맡겨두길 잘했지.'

문제는, 이쯤 오면 대체 저 사람이 원래 뭐 하던 사람인지는 더더욱 오리무중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일전에 그쪽에 맡겨둔 에이든의 '신상 명세서'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 남자가 누군지 그녀로서는 짐작도 못 했을 테니까.

"그래, 사자심과의 결혼 생활은 어떤가?"

"저에겐 너무 과분한 반려라 생각합니다. 늘 덕을 보면서 살고 있죠."

...일전에 말한 '기 안 죽게 해주겠다'라는 말을 이 악물고 지키겠다는 듯 저런 말을 연발하고 다니는 건 조금 어떨까 싶지만.

그녀가 한숨과 함께 샴페인이 담긴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저런 낯 뜨거운 소리를 실시간으로 말하고 다니는 걸 구경하고 다니려면 이성을 조금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 잔 더 필요하십니까?"

"아, 부탁드립-"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문장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의 혈관으로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달렸다.

"만찬은 잘 즐기고 계십니까. 노엘 경."

"...."

"직접 보는 건 마도 왕국과의 전투 이후로 처음이던가요.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시군요."

"...."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말을 이어가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건, 평소 노엘이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을 실책이다.

하지만.

-상대가 이 사람이라면.

예의 바른 목소리. 정중한 태도. 행동거지 전체에 녹아있는 기품과 격식.

범접하기도 힘들 만큼 고결한 아우라를 주변으로 뿜어내는 사람이지만.

노엘에게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다.

당장 이어 꺼내든 말만 봐도.

"괜찮은 '대역'을 찾지 않았습니까. 가짜로라도 신랑이라고 내세우기에 모자라진 않겠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로 찌르듯이 그녀의 내부를 파고 들어온다.

"제 청혼이 그렇게나 거북하셨습니까? 조금 상처인데요."

장난스레 그리 말하는 상대에게, 그녀가 간신히 그의 '호칭'을 불렀다.

어쩐지, 두려움마저 섞인 목소리였다.

"...황자님."

황자.

그녀의 '남편 후보'가, 싱긋 미소 지었다.

-System Message

[ '스킬: 운명의 길쌈꾼'이 순조롭게 작동합니다. ]

[ 상대방으로부터 얻는 '유대 관계'와 연동하여 보상이 지급됩니다. ]

[ '라니스터 남작'이 당신에게 호의를 비칩니다. ]

[ '클린스만 자작'이 당신에게 호의를 바칩니다. ]

[ '셰퍼드 중령'이 당신에게 호의를....]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에이든이 연신 옆으로 갱신되고 있는 시스템창을 바라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서서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고만 있는데 그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설치해 둔 통발에 그냥 계속 물고기가 걸리는 것처럼.

첫인상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다.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박아둔 덕분에 적당하게 대화만 이어가는데도 사람들이 멋대로 호의를 가지지 않는가.

'미리 꾸미고 오길 잘했다...!'

'황실 혈통'의 스킬 효과와 카티야를 부관으로 대동한 효과를 보는 것일 테다.

에이든 본인이 뭐 있는 사람인가. 그냥 평범하게 살던 사람인데.

그때그때 화제에 맞춘 화술이나 대상의 상태나 감정을 살펴 적당한 말을 건네는 사교술이야 그의 능력이라지만, 그걸 써먹을 수 있는 '무대'를 깔아주는 건 스킬과 인선 덕분이겠지.

그래도,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보상'의 형태가 지금까지 날아왔던 거랑은 미묘하게 다른 점일 것이다.

-System Message

[ 대상들의 시나리오 중요도가 낮습니다. 복사할 수 있는 스킬의 개수가 대단히 적습니다. ]

[ 운명의 길쌈꾼이 '포인트'로 치환됩니다. 일정 수준의 포인트가 누적되면 '포인트 상점'이 개방됩니다! ]

...포인트 상점이라.

이건 또 뭐 하는 기능인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근거라면.

'꽤 많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못해도 수십 명이랑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상점이란 건 아직도 열리질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것들을 쟁여놨으니 그런 것일 테다.

'그래도, 슬슬 만날 때가 됐는데?'

목표로 삼은 사람은 아직 안 보인다. 두 명 중 하나는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다행히, 그런 생각을 더 깊게 팔 필요는 없어보였다.

익숙한 얼굴 하나가 옆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니.

"아, 에이든 경."

"족장님?"

용 사냥꾼, 두나단 우`잘.

교류 때문에 제국에 아직 체류 중이라 듣긴 했는데, 만찬회에도 참석한 모양이지.

하지만, 에이든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두나단의 옆에서 뚜방뚜방 발맞춰 걷는 아담한 사이즈의 여자였다.

"이쪽은...?"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에이든은 대충 이쪽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 만찬회에 참석한 '이유' 중 하나가 이쪽이니까.

"내 장녀일세. 라니아 아'샨."

그런 말에, 여성이 고개를 쓱 올려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라니아라는 여잔, 에이든에게 참으로 신선한 인상이었다.

미녀다. 미녀긴 한데.

풍성한 분홍색 머리, 눈 한쪽을 가로지르는 안대, 헐겁게 걸쳐둔 부족 연합의 전통 의상, 쇄골을 타고 목까지 새겨져 있는 문신, 세상만사 다 귀찮은 표정, 입에 시니컬하게 물려있는 담배.

거기에 더해서.

"안녕."

손가락만 까딱하는 제스쳐와 반말로 날아오는 인사.

"...."

신을 모시는 사제라고 할 이미지는 아니다. 도저히.

하지만, 에이든은 딱히 그런 것에 신경을 기울이는 편은 아니었다.

"우르간의 사제들은 우르간 본인의 신격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존칭을 붙이지 않거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결례니, 양해를 좀 부탁하지."

"예, 괜찮습니다."

두나단이 변명하듯이 말한 건 게임 안에서도 이미 있는 설정이다.

애초에, 우르간의 무녀가 부족 연합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따지기만 해도 에이든한테 반말을 써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위치다.

모든 신격은 자신의 의지를 대행할 대리인을 하나씩 두고 있고, 부족 연합 안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무녀다.

모시는 신에 직통으로 꽂히는 '통화 회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투력으로도, 상징성으로도 이능을 다루는 초인 중에서도 대단히 윗줄에 놓일 인간이다.

연합의 대족장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인간이겠지. 어쩌면 옆에 서 있는 족장인 두나단보다 더 가치가 높을 수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니아 씨."

그런 인사를 건넸지만.

상대방한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라니아가, 말 없이 에이든을 쭉 바라보았다.

계속.

계속해서.

그녀를 소개한 두나단이 당황할 때까지.

이윽고.

-System Message

▶ '선화륜', 라니아 아`샨과 접촉합니다.

▶ 스토리 중요 대상입니다.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주냐에 따라 시나리오에 다소 변동이 생깁니다!

▶ 대상과의 유대 단계가 1단계로 향상됩니다!

▶ 스킬 '운명의 길쌈꾼'과 연동됩니다!

…그렇지.

에이든이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보자마자 이렇게 흥미를 가질 줄 알았다.

라니아라는 사람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다른 놈도 아니고 주인공의 업을 뒤집어 쓴 상태인데.'

그가 얼마 전에 떠안은 '구원자의 맹세'는, 우르간의 무녀 입장에서 봤을 때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금제다.

"너 있잖아. 좀 재밌네."

그런 말과 함께, 라니아의 얼굴에서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쪽의 눈동자가 '갈라졌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색깔이 일순 그 눈동자에 깃든다. 만화경처럼, 나선을 그리며 격렬하게 회전하는 그 색깔은, 에이든의 '내부'를 바라보듯이 꼿꼿하게 그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예?"

"솔직하게 말할게, 그냥."

"...."

그 자유분방함에 입을 다물고 있자니, 라니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에이든으로서도 무슨 말을 듣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미 예상하던 반응은 있었으니까.

"너한테 좀 끔찍한 게 들러붙었는데."

…느닷없이 이런 말을 듣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라니아가 여전히 복잡한 빛을 띠고 있는 자신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네가 다루는 이능의 원천 말이야. 신안(神眼)으로도 안 보여서. 신격을 빌린 눈으로도 이능의 원천이 안 보이는 건, 두 가지밖에 없거든."

"...예?"

"첫째는 나와 비슷하게 신격과 직접 소통할 수단을 가진 인간. 당연히 비슷한 힘을 품고 있으니 검출할 수가 없지. 상쇄되니까. 그런 거면 차라리 나은 편인데."

에이든이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라니아가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말을 이었다.

"너, 모시는 신 없지?"

"...."

"사제는 아닐 것 아니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두 번째네."

라니아가 빙긋 웃으면서 에이든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마치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힘내라."

"저기, 갑자기 무슨...?"

"잘 알려지진 않았는데. 있긴 있거든. 이능을 내리는 천상의 '신'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존재가."

느닷없이.

그런 말이 떨어졌다.

"너는, 그쪽에 '내 것'이라고 점지당한 거야. 네가 지금 다루는 힘은 거기서 나오는 거고."

"...예?"

"스스로 떠안은 업 때문에 이제 거기서 도망칠 수도 없게 됐구나. 가엽게도."

라니아가 가볍게 손으로 에이든의 볼을 쓸어내렸다.

애처롭다는 듯이. 동정심을 표하듯이.

"...."

지금 이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문장이 절로 떠오르지만.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냥 이능을 다루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는, 조금 더 근원적인.

다른 사람의 스킬을 마음대로 복사 해오고, 여러 개의 이능을 제한도, 제약도 없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에이든의 '특이성'의 근원을 얘기하는 느낌이다.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서 생기는 영향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러니까, 힘내라."

라니아가 씩 웃으면서 다시금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너, 앞으로 고생깨나 할 거야."

"...."

"목숨 붙어 있으면 나중에 또 보자고. 그때는 나도 뭐라도 도와줄 테니까."

에이든이 멍하니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라니아가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반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마치, 할 말은 이거면 끝이라는 듯이.

"...딸아이가 좀 특이하긴 하지."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두나단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신격과 소통하는 이들은 범상치 않은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네. 아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우리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런 것 같긴 합니다."

에이든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두나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스킬은 얻었으니까 일단 됐나.'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듣긴 했는데.

일단, 아무튼 저쪽의 호감을 사서 스킬을 한 개 복사할 수 있게 되기는 했다.

'우르간의 사제라면....'

조만간 당장 써야 하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대상이다.

일이 안 풀렸으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호감도를 올렸어야 하는 대상인데, 쉽게 풀렸으니 오히려 좋다 생각해야겠지.

"그런데, 일행은 어디에 두고 이렇게 계속 혼자 돌아다니는 건가?"

"부관은 바깥에 잠시 내보내 두었죠."

"...왜?"

...가만히 뒀다간 사고 칠 것 같아서.

하도 많은 사람이 말을 걸다 보니 이상한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는데, 카티야는 성격을 생각하면 수틀렸을 때 누군가의 턱주가리를 신성으로 돌려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다.

그런 대형 사고를 치느니 잠깐 떨어트려 놓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요."

"...뭐, 사정이 있겠지. 그럼 노엘 경은?"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누군가와 같이 있다.

"아, 황자하고 같이 있는 모양이군. 딱히 경이 내버려 뒀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겠어."

"말이 좀 이상한데요."

"황자라면 제국의 보물이지 않은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건 사자심에게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죠."

에이든이 실소를 흘리며 수긍했다.

황자의 게임 속 모습을 생각하면, 그쪽은 존경받아 마땅한 인간이긴 했다.

'성인군자'라는 말을 의인화시킨 사람이랄까. 메인 시나리오 제1막, '제도 균열' 진행 중에도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불사르던 인간이다.

물론, 그건 그거고.

저 사람이 저기에 있다는 건, 기회가 틀림없었다.

아무튼 만찬회에 참석한 '메인 목표'는 저 사람이다. 스킬을 뜯어낼 절호의 기회인 건 틀림없다.

"그래도, 가서 훼방 놓긴 해야겠습니다. 제 아내 아닙니까."

"음. 잘하고 오게."

두나단과 그런 헛소리를 주고받으며, 에이든이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이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치고 올라온 건, 노엘이 표정이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어라?'

노엘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

꽉 쥐고 있는 손은 어찌나 힘을 세게 줬는지 피가 안 통할 정도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데다가, 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무엇을 나타내는진 명백하다.

이 여자는, 지금.

명백하게 '좋은 사람'이어야 할 황자를.

무서워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에이든이 알아차리는 사이, 아직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황자가 꺼내든 말이 귓가에 꽂힌다.

"-아니면, '도살자'에게는 너무 힘든 요구입니까?"

괴상함은, 거기서 더욱 증폭되었다.

말투야 여전히 친절하고, 태도도 예의 바르지만.

에이든은 분명히 읽어낼 수 있었다.

번들거리고, 끈적하고, 진흙밭의 진창과도 같이 거무튀튀한 감정을.

이 남자는, 노엘에게 분명히 '악의'를 드러내고 있다.

"-"

그런 사실에, 에이든이 잠시 몸을 뻣뻣하게 굳히는 사이.

인기척을 알아차린 황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어, 마치 사람의 '인격'이 바뀌듯이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걸린다.

그 표정에서.

아까 전까지 노엘에게 보이던 악의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그가 아는 황자의 모습이다.

좋은 사람. 인격적으로 완벽한.

"아, 노엘 경의 신랑분."

따뜻한 목소리로, 황자가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잘 오셨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분명히.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황자는 에이든과 1:1 대담을 원한다고 의사를 타진한 상황이었다.

만찬회장의 바깥쪽에는 따로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진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이야기하자면서.

시끌시끌한 회장 바깥으로 나와 그런 곳에 앉아있으니, 마치 세상과 격리된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도 마치 혼자 별세계에 있는 것 같은 남자가 있다.

건너편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황자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황실 혈통] 스킬이 켜져 있는 자신을 남이 바라보는 시선이 이것과 비슷하겠지.

"...."

물론. 그것과 별개로.

에이든이 원작 안에 있는 지식들이 실제론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야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가장 큰 것이라면 주인공이 없는 것이다. 따라올 수 있는 게 없지.

하지만, 그다음으로 큰 게 무엇인지 꼽으라면.

에이든은 주저 없이 눈앞에 있는 인간을 꼽을 것이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그가 건너편에 말없이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있다. 선량함, 티 없는 순수함, 따뜻함, 부드러움.

하지만.

그런 것들이 묘하게 변질되어 있는 느낌은, 받기 싫어도 받게 된다.

그 느낌의 간극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건, 서늘한 수준의 '합리성'이고.

원작의 성인군자가 아니라, 지금은 백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철혈군주의 느낌에 가깝다.

"에이든 켈러메인 씨, 맞습니까?"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황자로부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에이든이 조금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확대해석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에이든을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이 사람만이 '경'이란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에이든이 이미 기사도 뭣도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확실히, 신기하긴 하네요."

다시금, 말이 이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황가의 일원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어합니다. 억지로 그런 혈통을 억누르고 다니시는 황제 폐하 정도를 제외하면 그 앞에 휘둘리지 않는 이들은 대단히 드물지요."

"...."

"특히, 당신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더욱 드물고. 듣던 풍문대로 재밌는 분이지 않습니까."

...조금 전 느낀 것은 결코 확대해석이 아닌 모양이다.

이 남자, 에이든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고 있는 눈치다. 분명히.

"-원하시는 게 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만찬회장에서 1:1로 대화를 하자면서 테라스 바깥으로 끌고 나은 것에 일단 응하긴 했는데, 이야기의 흐름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가슴이 꽉 막히는 감각이라 해야 하나.

"원하는 거라... 예. 있긴 합니다."

"듣고 있습니다, 저하."

그런 요구에, 황자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자심과 파혼하시죠."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대가로, 에이든 씨가 원하시는 건 제가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흘러나왔다.

18화. 황자

"...경. 괜찮으십니까?"

스텔라가 걱정스레 그리 질문했다.

노엘의 얼굴은, 아까 전부터 시퍼렇게 질려 있으니 나오는 말일 것이다.

같이 전장에 설 때도 이 정도로 동요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아까 전에 황자가 에이든을 데려간 뒤로는 쭉 이 상태다.

"편찮으시면 잠시 휴식하시지요. 주변에는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그러면. 잠깐 다녀올게."

그렇게 말한 노엘이 힘겹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 바깥으로 잠시 걸어 나온다. 시끌거리고 화려한 장소 바깥으로는, 서늘한 밤공기가 그녀의 머리칼을 사락거리며 흩어놓았다.

"...."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바라본 노엘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초인의 감각 기관을 가진 그녀에게는, 암시야를 뚫고 그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게 보였으니까.

에이든 씨. 그리고 황자.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녀가 깊숙하게 심호흡했다.

'끼어들, 권리는.'

없다.

설사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황자의 행동을 제지할 권리는 없다.

그녀가 황자와 어떤 '과거'로 얽혀있는지 생각한다면. 그건 당연한 문제다. 괜히 에이든을 순순히 보내준 게 아니지.

그녀가 몸을 돌려 저 건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려 시도했다. 노엘 본인의 청력이라면 이 거리에서도 저기서 말하는 대화가 전부 들릴 테니.

"사자심과 파혼하시죠."

...그런 말이 들리지만 않았어도 그리했을 터이다.

"그 대가로, 에이든 씨가 원하시는 건 제가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

노엘이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저도 모르게 에이든의 얼굴을 살핀다.

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기색부터 바로 살폈는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쪽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표정하게 황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을 알 수가 없는 모습으로.

"...왜 그런 걸 요구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에이든이 탁한 목소리로 꺼내든 질문에, 황자가 깍지를 껴서 턱 아래로 받쳤다.

"천명(天明)이 오고 있습니다, 에이든 씨. 곧 제도 안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날 거예요."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여전히 얼굴에 잔잔히 걸려 있었다.

"당신같이 선량한 시민이 그런 악독한 사람 옆에 있다가, 그런 일에 휘말리는 걸 원하지 않을 뿐입니다."

"노엘 경이 악독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 그럼요. 당연하죠."

이어.

뱀의 혀가 똬리를 틀듯이.

"사정을 설명하면 좀 길긴 한데, 간단하게 말해서...."

황자의 목소리가 노엘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 여자가 제 미래를 망쳐놨거든요."

일순.

"사자심이라고 알려진 그 여자는. 겁쟁이에, 배신자에, 실패자에, 살인자에, 도망자입니다. 본인도 부정하지 못할 테죠."

노엘의 숨이 멎었다.

"그만하면 악독하다 부를 이유로는 적당하지 않나요?"

"...."

"그런 여자 곁에서 당신을 떨어트려 놓는 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에이든 켈러메인.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도."

황자가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엮이면 큰 화를 당하기 마련이죠. 당신은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맡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화를 드리고 싶다는 뜻이죠."

에이든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그와 그리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노엘이 보기에도, 그건 틀림없이 '의표'를 찔린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황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서 좀 쉬시라는 거죠. 어려운 일들은 대단한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죽을 위험들에서도 좀 떨어지고."

확신이 담긴 말이 연이어 떨어졌다.

에이든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이. 담담하게 사실을 토로하듯이.

애초에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떠맡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듯이.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거기서 끝나지도 않았다는 듯, 황자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에이든이 '진짜로' 원하는 걸 반드시 주겠다는 듯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의 가족들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

"황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주신 카르바에게 맹약이라도 맺겠습니다. 저는 제가 한 말은 지키거든요."

"...."

"당신한테 그런... '가혹한' 운명을 떠넘긴 여자는 저한테 던져버리시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란 말입니다."

노엘이 피가 나오도록 손을 움켜쥐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에이든 켈러메인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은, 그가 그녀와 만나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녀 '때문에' 시작된 일들이다.

"...."

그녀가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런 말까지 쭉 들었으면, 에이든에게 흘러나올 대답이 뭔지는 뻔했다.

그리고.

'거부 반응'이 올라오고 있었다.

'...왜지?'

본인이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와 그는,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다. 서로를 감정적으로 지탱해 줄 계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황자가 저런 식으로 제안한 것을 에이든이 받아들인다면, 다른 이를 찾아서 어떻게든 채워 넣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서로에게 부여하지 않은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아.'

저 남자가 거절의 말을 꺼내 드는 걸, 듣고 싶지 않다.

본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떠서 움직이고 싶었지만, 다리는 거기에 못 박힌 듯이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에이든이 가만히 입을 열자, 노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황자님."

-하지만.

"제 약혼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으십니다."

이어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녀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노엘의 눈이 더없이 크게 떠졌다.

테이블 위로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직계 황족에게 폭언을 터트린 직후라면 이런 분위기는 당연한 일이겠지.

"...아직 모르시는 모양인데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잠시간 침묵을 이어가던 황자가 별다른 분위기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대외적인 평판이 좋기는 하죠. 그런 식으로 황실과 군부에서 '꾸며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프로파간다가 섞여 있겠죠. 전쟁 도중에 끔찍한 일도 많았을 거고. 노엘 경이 새하얗게 결백하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습니다."

"...."

"저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노엘 경이 비춰지는 것과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에이든이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침착하지만, 단호하게.

그런 말을 떨어트린다.

"파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확실히, 지금 황자가 꺼내든 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외긴 하다.

뭔가 과거에 또 노엘과 안 좋게 엮인 연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뚜렷하게 보일 정도의 적의를 품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런 어둡고, 커다란 일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는 절대 이 결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Quest Info

▶ 해당 항목에 표기된 사건들은 실패 시 막대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절대로 포기 못 하는 이유가 여기에 아주 또박또박 설명되어 박혀 있었으니까.

'이 새끼가 누구 죽일 일 있나...!'

무슨 일이 있어도 노엘과의 관계는 포기 못 한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이어가는 것 말곤 답이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잔뜩 마주하시게 될 텐데요."

잔뜩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말하는 황자의 모습에, 에이든이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니, 뭐라고 하는진 다 알겠는데....

'파혼하면 난 당장 죽는다니까...!'

그런 절박함을, 여유로운 미소로 치환하여 어떻게든 받아친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즉답으로 흘러나온 대답에, 황자가 잠시 침묵했다.

에이든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재보는 느낌이다.

"...생각 똑바로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황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자신과도 적대적인 관계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경고하는 거겠지만.

'어쩌라고...!'

당장 죽는 것보단 낫지, 임마...!

"상관없습니다."

여기까지 막힘없이 내놓자, 황자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그냥 계약으로 노엘 경과 묶인 사이일 텐데요."

이유가 뭐가 있어,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걸 설명하는 의미가 없다. 뭘 말해도 계속 이렇게 끈적거릴 것 같으니.

그러니, 머리를 굴려보자.

당장 황자가 그에게 파혼을 요구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양자 간의 사이를 앞으로도 계속 방해하는 짓만큼은 막아야 한다. 귀찮고, 대단히 성가시다.

그럼 그걸 단번에 막아낼 가장 좋은 명목 상의 구실은, 그러니까....

'아.'

하나 있긴 있다.

해결책은 안 될지라도, 그를 '설득'하겠다고 황자가 비집고 들어올 시도를 원천 차단할 명목은.

"저."

에이든이 활짝 웃었다.

추호의 거짓 없는 진심이라는 듯.

"그 사람 좋아합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꺼내놓는다.

본업이 사기꾼인 남자다운 당당함이었다.

"...."

황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처음으로 벗겨졌다.

설마하니 이런 답변은 상상조차 못 했다는 기색으로.

"...좋아한다구요?"

"예."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황세자를 적대하겠다? 제국의 지배자가 될 인간을?"

"예."

침묵이 떨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무겁고, 적막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한참.

"하."

그런 짧은 날숨과 함께.

"하-하하하핫-!"

이윽고, 대폭소가 이어졌다.

-System Message

▶ '찬탈자', 아르덴 브림스톤 라이오넬과 접촉합니다.

▶ [악의] 단계가 1단계 상승합니다!

▶ '운명의 길쌈꾼'의 새로운 기능이 개방됩니다.

▶ 대상으로부터 '변이된 스킬'을 복사해 옵니다!

"...?"

이어서 떠오르는 시스템창에, 에이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전 처음 보는 창이다. 이전까지는 호감도가 올라가면서 스킬을 복사해 왔는데, 악의 단계니, 변이된 스킬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을 마저 끝마칠 새도 없이.

다른 창 하나가 또 이어 떠올랐다.

-System Message

▶ 대상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의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 호감도의 증가폭이 대단히 높습니다!

▶ 유대 단계가 3단계에서 5단계로 폭등합니다.

▶ 스킬 복사 횟수가 2회 추가됩니다!

▶ 쌓인 유대 관계가 충분히 높습니다. '운명의 길쌈꾼'의 적용 방식이 곧 변화됩니다!

▶ 메인 퀘스트에 관련 내용이 곧 추가됩니다!

▶ 퀘스트 '위장 결혼'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됩니다!

"...."

이 사람은 또 왜...?

19화. 영체

"...당신, 진짜 걸작이네요."

건너편에서 한참이나 폭소를 쏟아내던 황자가,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그런 말을 떨어트렸다.

"노엘 경도 진짜로 해괴한 사람을 데리고 오셨네요. 이런 인간은 저도 예상치도 못했는데."

"...?"

솔직히, 반쯤 시비 거는 반응이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유하게 돌아오지 않는가.

설마 아직도 뭐라고 더 제안할 생각인가- 싶어서 입을 열려고 하니.

마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황자가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저도 뭐라고 더 제안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계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

시원스러울 정도로 단호하게 떨어지는 포기에 에이든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렇잖아요. 좋아해서 붙어있다는데 억지로 떨어트리기도 뭐하고."

"...."

"다만."

황자가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거기서 나오는 '위험' 정도야, 스스로 감수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목소리야 잔잔하고, 언제나처럼 예의 발랐지만.

"나중에 또 봅시다, 에이든 씨."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자가 남긴 문장 안쪽에 깃들어 있는 건.

등골이 꽝꽝 얼어붙을 정도로 서늘한 냉기다.

"저희, 분명히 또 만날 것 같아요."

...그건.

에이든도 깊이 동감할 만한 사실이었다.

"에이든 씨."

"예?"

"노엘 경의 상태가 좀 이상하십니다. 혹 아시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

만찬회장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스텔라가 던지는 질문에, 에이든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상태가 이상하다니, 어떤 식으로...?"

"영혼이라도 빠져나가신 것처럼 제정신을 못 차리시더니, 갑자기 몸이 편찮으시다면서 군부 청사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공식 행사에서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던 분인데...."

"...."

"이상할 정도로 안색이 붉으셨던 모습을 보면 거짓말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갑자기 편찮으실 분이 아닌데요."

...어쩐지 아까부터 모습이 아예 안 보이더라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연이어 떨구는 스텔라의 모습에, 에이든이 미묘한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짐작 가는 바라.

-System 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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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쌓인 유대 관계가 충분히 높습니다. '운명의 길쌈꾼'의 적용 방식이 곧 변화됩니다!

▶ 메인 퀘스트에 관련 내용이 곧 추가됩니다!

▶ 퀘스트 '위장 결혼'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됩니다!

있다.

있긴 있는데.

"...글쎄요. 저도 잘."

당장은 그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방금 그 자리에서 나눴던 대화를 노엘 경이 듣고 있었다면, 호감도가 오르는 것 자체는 이해할 만하다.

황자 상대로 열심히 편을 들기도 했고, 끝자락에는....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데, 솔직히.'

그렇게 공개적으로 고백 비슷한 말을 때려버렸다고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노엘 쪽에도 어떻게든 나중에 잘 둘러대면 될 일이고. 진짜로 오해했다가는 곤란하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아주 곤란한 일까진 아니다. 결국 복사권 두 장을 얻은 건 사실이니까.

'이득이라면 이득인데.'

이번만큼은 딱히 의도하고 저지른 게 아니라서 영 불편하다. 점점 더 그쪽이랑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고.

'위험하다고.'

...자신이 모순된 상태라는 건 알고 있다.

현재 그의 상황이라면 살아남기 위해서 스킬이라면 닥치는 대로 가져와야 하고, 노엘 경은 그런 짓을 해야 할 목록 바깥에 두기엔 너무 강력한 인간이다.

능력을 떼놓고 보더라도, 당장 그녀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목숨을 좌우하는 핵심축 중 하나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호감도는 그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인 사항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만약 노엘과 정말 인간적으로 깊은 사이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이 아프다.

노엘이 싫다거나 그녀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역으로 '너무 중요해서' 그렇다.

'메인 캐릭터들은 전부 다 조심해야지.'

이전과 해야 할 일은 비슷하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호감도를 올리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주인공도 없는 상황에서, 에이든은 메인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그들과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사이다.

혹시라도 그렇게 사이가 정말 가까워졌다가, 무슨 실수를 해서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원래 높이 떠오를수록 낙차가 큰 법이다. 한번 가까워진 관계에서 깊게 깨진다면 그 관계를 복구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사이가 '가까울수록' 서로 상처 주기 쉬운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렇다.

그리고 에이든은, 적어도 세상 누구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경각심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 모두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

그래도.

그건 나중에 고민하자.

당장은 달리 신경 써야 할 일이 있기 마련이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아르덴 브림스톤 라이오넬

- 악의: 1단계

- 스킬 1개를 모방할 수 있습니다.

※ '유대 관계'를 쌓는 게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스킬의 효과가 원본과 변경됩니다!

방금 전 황자에게서 뜯어온 스킬 복사권이지만, 그 작용 기전은 지금까지 그가 써온 것들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복사가 아니라 '모방'이라고 적혀있는 것부터가 그러하고, 실제로 스킬 창을 열어서 내부 효과를 살피면 그런 느낌은 더욱 극대화된다.

'성능이 엄청 깎여있네.'

원래 황자가 들고 있는 스킬과 비교하면 하나같이 다 저열한 성능뿐이다.

위력이든 적용이 가능한 범위든 하나같이 다 약화되어 있고, 몇몇 개 스킬은 아예 모방조차 불가능하다는 듯 붉은색으로 빗금이 그어져 있다.

하지만, 특기할 만한 점은.

▶ 대상의 '악의' 단계가 낮습니다.

▶ 현재 '모방'만 가능합니다.

▶ 악의 단계를 올려 '반발', '여과', '봉인' 등의 추가 기능을 개방하세요!

호감을 통해 복사해 오는 스킬에 비해서, 뭔가 추가적인 유틸리티가 잔뜩 붙어있다는 느낌.

스킬의 원본 위력대로는 못 써먹는 대신, 에이든 본인이 이 스킬 자체에 뭔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다.

자세한 건 악의 단계를 올리고 나서야 알 수 있겠지.

'그보다, 조건 이름이 악의라는 건....'

...이 사람이 에이든 본인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할 수 있는 스킬 개수가 늘어난다는 건가?

"...."

아무리 그래도 그건 발동 조건이 너무 어지럽다.

굳이 남에게서 악의를 사야 한다니.

에이든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십니까?"

"예. 만날 사람은 다 만났으니."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지금부터 가장 골 아픈 사람하고 만나야 한다.

만찬회장 바깥으로 나와 조금 걷자, 분수대에 걸터앉아 졸리다는 듯이 턱을 괴고 있는 전신 중갑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사실 기사도 뭣도 아니지만.

"지-루-해-"

그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카티야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곧바로 그런 소리를 꺼내 들었다.

"뭐야, 이게. 하나도 재미없어. 어디 커다란 사건 같은 거 없어?"

"...무슨 커다란 사건 말입니까."

"왜, 뭐든 좋으니까 걸리면 혼날 짓."

"...."

"누구 하나 패든가, 태우든가, 죽이든가, 뭐 그런 거 없어?"

"...."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공적인 행사에 나가면 빈축을 살 거라며 부관을 하겠다고 떼 쓰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다.

"부관 하시겠다고 떼쓴 건 본인 아닙니까. 직무에 충실하셔야죠."

"그건 '같이 시간을 보낼 때' 기준이지. 잊었어? 나 너랑 오랫동안 붙어있으려고 부관했다니까?"

"...."

아무렇지도 않게 남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역시 카티야답다.

에이든이 두통이 엄습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받았다.

"그럼, 같이 재미있는 일 하러 갈까요. 만찬회는 이제 됐으니까."

"그래? 뭐 하러 갈 건데?"

에이든이 슬쩍 고개를 돌려 만찬이 이뤄지고 있는 건물 근처를 쓱 훑어보았다.

만찬회는 아무튼 황궁 안에서 열리는 행사고, 이 넓디넓은 건물 안에는 수많은 역사와 비밀이 쌓인 공간들이 널려있다.

에이든이 노리는 곳도 그중 하나고.

다만, 그 겉모습으로 보이는 일이, 뭐라고 해야 할까.

흠.

에이든이 턱을 긁적거리며 그가 지금부터 할 짓을 조금 온건하게 표현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결국 어떻게 말해도 똑같다는 걸 깨달아서 그냥 말했지만.

"도굴이요."

"...오."

"명예의 전당?"

에이든의 부탁에 따라, 그를 데리고 이곳으로 '침투'한 카티야가 그런 말을 꺼내놓았다.

이 장소가 어디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눈치다.

"진짜 무덤이잖아.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도굴이었어?"

위인을 기리는 풍습이야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고, 그건 제국도 마찬가지다.

위인들 관련된 물건과 그 업적을 기리는 공간이 바로 이곳, 명예의 전당이다.

엄밀히 말하면 박물관이라 해야겠지만, 진짜 무덤이라는 카티야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가능하면 위인의 '유해'까지도 보존해놓은 곳이니까.

그런 장소에 신기함을 느낀 건지, 카티야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뒤에서 얌전히 그녀를 따라오던 에이든은 식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진짜 괴물이긴 하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궁 안은 어디를 가도 최고 수준의 보안을 자랑하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 에이든까지 데리고 휙휙 뛰어다니며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하는 모습은 이게 어딘가의 왕족인지 전문적으로 길러진 침투 공작원인지 헷갈릴 정도다.

감추고 있는 재주가 한두 개가 아닌 느낌.

"...왕녀님. 이전에 노엘 경하고 싸울 땐, 제대로 안 싸우셨죠?"

"응? 그건 애초에 싸운 것도 아닌데?"

"...."

새삼, 그가 어느 정도의 괴물을 부관으로 두고 있는지 실감이 된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명예의 전당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런데, 도굴이라고 하면 여기서 뭔가 훔쳐 간다는 거지? 뭘 훔치려는 거야? 무기? 비급? 방어구? 여기 있는 거면 뭘 가져가도 다 상등품은 될 것 같은데?"

'혼날 만한 짓'을 해서 두근거린다는 기색으로 질문이 떨어진다. 기분 탓인지 눈까지 반짝거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에이든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을 답변이 준비된 상태였다.

"...위인 본인이요."

"뭐?"

카티야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뭐라고 설명하는 대신 에이든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에 말했듯, 이 공간 안에는 보존된 유해도 몇 가지 존재한다.

그리고 에이든이 멈춰선 건 그렇게 보존된 유해 중에서도 아주 상태가 괜찮은 존재 바로 앞이었다.

영(靈)은 육(肉)에 깃들고, 그렇다면 이렇게 상태가 좋을수록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짓의 성공 확률도 높다.

"...여명의 기사?"

에이든이 멈춰선 보존함이 뭔지 확인한 카티야가 그 이름을 꺼내 들었다.

"알고 계십니까? 제국 쪽 위인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최초의 기사'는 아직도 예술가들의 단골 소재라고?"

수많은 무훈과 전공, 그리고 무용담을 쌓아올린 제국의 영웅.

이름 없는 골짜기의 정복자, 하늘의 첨탑을 무너트린 패자(霸者), 일기당천, 최초이자 최강, 여신 카르바의 가장 충직한 종복.

기의 사용법과 연공법을 가장 최초로 발견해 낸 사람이기도 하다. 노엘 경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아무도 넘지 못한, 가장 순결한 상태의 기를 다루는 기사.

"성황국에서도 여명의 기사는 엄청나게 쳐준다고. 대륙에서 그쪽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그렇겠지.

실제로 그런 평판을 살만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이든이 알고 있는 게임 안에서의 설정만 생각해도 여명의 기사가 남긴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한 수준의 영웅적인 것들뿐이다.

하지만, 에이든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한 가지 정정할 게 있는데."

에이든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아니에요."

"...."

참으로 드물게도, 카티야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설마하니 제국민 입에서 본인들의 우상을 깔아뭉개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단 기색이다.

"...음, 어, 그래? 그래도 제국측에서 영웅으로 모시는 사람은 맞잖아?"

"과거 사람이니까 미화시켜 주는 거죠. 사실 뭣도 없어요, 이 사람."

"...."

"제 개인적인 의심이기는 한데, 그 업적이란 것도 좀 조작됐을 수도 있거든요."

"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카티야의 반응에 뭐라 답하는 대신, 에이든이 말없이 창을 조작했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아마 슬슬 '반응'이 나올 확률이 높으니까.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 라니아 아`샨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려는 것은, 일전에 라니아에게서 받아온 스킬 복사권이다.

미리 봐 둔 스킬 하나를 그대로 복사한다.

[ '영적 감응' 스킬을 복사합니다! ]

< 복사된 스킬 >

◆ 영적 감응

신격에 닿은 이들은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고, 대화하고, 접촉할 수 있습니다. 영적 존재를 감지해 내는 감각이 개방됩니다.

그리고 그런 스킬을 복사하자마자, 시야 근처로 미묘한 '기운'들이 포착된다.

방금 그가 말한 것을 듣고, 여명의 기사의 유해 근처로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아마 그한테만 보이는 거겠지.

역시, 이 자리에 있는 모양이다. 유해가 멀쩡하게 보존되어 있고, 이 정도로 '강한 영혼'은 그리 쉽게 소멸하지도 않으니까.

'...강령술이란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야.'

사자와 생자가 대면하는 건, 당연하지만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원래대로는 극동에서 어마어마한 실력의 주술사나 초빙해야 겨우 가능한 일이지만, 특수한 조건이 맞으면 에이든 같은 뭣도 없는 인간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죽어서도 도저히 참지 못할 말을 들으면 그 영혼이 일시적으로 돌아오는 경우라거나.

여명의 기사 같은 경우도 비슷한 케이스다.

이 인간.

세운 업적은 진짜 눈 돌아가게 휘황찬란 하긴 한데, 개인적인 성격이.

"쫌생이."

에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만 있으면 나와서 반박해 보시든가."

그 말을 듣자마자, 보존함 안에 있는 연기가 진동하는 정도가 더욱 거세지고, 이윽고 주변에 '물리적'으로 뭔가 영향이 생기기 시작한다.

"...뭐야?"

카티야도 그렇게 당황할 정도로 바람이 불고, 주변의 사물이 흔들리고, 피부가 찌릿거린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할 것이다. 그저 '존재감'만으로 이런 현상을 일으키다니.

이 안에 있는 '혼령'이 얼마나 강한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지.

일명, 게임 유저들이 부르길.

'세계에서 가장 강한 소인배' 되시겠다.

그렇게 뛰어난 능력이랑은 별개로, 남이 자길 욕하는 건 죽어도 참지 못하는 극도의 밴댕이 소갈딱지.

요컨대.

죽은 상태로도, 에이든의 하는 말은 화딱지가 치밀어 올라서 못 참을 성격이란 뜻이다.

[-뭐라고 했냐, 임마-!]

...그렇지.

격노한 영체가 유해 안쪽에서 튀어나오는 걸 확인하자마자, 에이든이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20화. 영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