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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꺼윽. 끄흐으······."

우렁찬 트림소리와 함께 늘어지는 불사의 악마.

"더, 더 이상은 못 먹어······."

악마는 볼록 튀어나온 작은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눈꺼풀을 스르르 떨궜다.

그 뒷덜미를 잡고 있던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박살난 뼛조각들을 발로 툭툭 차봤다.

수호자의 육신은 강력했다. 뼈의 강도만 해도 어지간한 강철보다 단단할 정도.

거기다 댈런의 일검에 머리뼈가 두 쪽이 나고도, 놈은 죽지 않은 채 끝없이 움직이며 저주를 쏘아댔다.

결국 뼈 마디를 토막치다시피 하고서야 수호자의 움직임은 가까스로 멎었다.

'물론 영역의 힘을 사용했다면 더 금방 끝났겠지만.'

유적 깊은 곳의 묘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이런 좁은 곳에서 뇌격을 사용했다가는, 자칫 그 여파로 영혼 단지가 파괴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갑주격투에서 비롯한 화염 갑주를 사용하자니, 저주술사를 상대하는데 성검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위장이, 위장이 터질 것 같아······."

"엄살 그만 부려라."

댈런은 악마를 든 채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에는 신비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마력의 일종이지만, 순수한 상태의 마력 바람과는 다른 종류의 기운.

빛나는 흰 구름처럼 보이는 기운은 제단에서 올라와 영혼 단지의 입구로 빨려들어가고선, 다시 단지의 밑동을 타고 제단으로 스며들며 순환했다.

'영혼을 어떻게 가공한 거군.'

영역의 힘을 빌리자 대충 어떤 기운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제단과 단지를 순환하는 기운은, 수백 명분의 영혼을 어찌저찌 조합해 만든 하나의 영혼이자 마력.

다만 어떻게 그걸 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아마 영혼 제단술의 결과물이겠지. 그 정도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댈런은 악마를 제단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단지에 처박았다.

"이, 이게 뭐―으커업!"

단지가 박살나며 제단 위에서 희뿌연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온다.

댈런은 몇 발짝 물러났다. 흰 구름이 수백 조각으로 흩어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흩어져가던 구름 조각들이 덜컥 멈췄다.

마치 악마를 지그시 바라보는 듯한 흰 기운. 이내 수백 조각의 흰 기운들이 악마를 덮쳤다.

"으어, 이게 뭐야! 으어어어!"

악마는 제단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런다고 흰 구름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놈은 흰 구름에 둘러싸인 채, 온몸으로 그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댈런은 몰랐지만, 이건 조각난 영혼들이 안식처 삼을 그릇을 갈망하며 스스로를 내던지는 현상이었다.

물론 할만의 사슬로 영혼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도 악마의 힘이 점점 커져감은 느낄 수 있었다.

댈런은 악마가 발광하게 내버려두고 시체를 회수했다.

[악마와 술래잡기를 한 용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2, 감각 +1, 레레도나라의 비검(B), 탐색자의 좌안 파편]

빛무리를 흡수하던 손이 움찔 떨렸다.

"···B급?"

성소 전투(1)

뿌드드득―

폭증한 신체 능력에 육신이 요동한다. 기분 좋은 떨림 속, 고양감을 한껏 느껴내며 댈런은 상태창을 열었다.

――――――――

이름 : 댈런

레벨 : 14

[근력 : 33] [기량 : 23] [체력 : 28]

[감각 : 21] [지능 : 22] [마력 : 20]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

"오."

보상이 짭짤했다. 아니, 짭짤한 수준이 아니었다.

시체 하나에서 능력치 네 개와 아이템, 거기다 B등급 스킬까지 나오다니.

보통 높은 등급 스킬이 나오면 능력치를 조금 주곤 했기에, 이건 여지껏 본 적 없는 수준의 보상이었다.

특히나 B등급 스킬은 게임 설정상으로도 '신비'라고 분류되는 등급의 경계선.

불의 비를 내리고 악마의 육신마저 헤집는 검술보다도 상위에 있는,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덧씌워버리는 영역과도 비슷한 개념이었다.

'이건 수련이 꽤 많이 필요하겠군.'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큰 힘일수록 다루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한 일.

자격도 자격이지만, 노력 역시 몇 배는 들어가야 할 테였다.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는 체력에 투자했다. 이로써 그의 체력 수치는 29.

근력이 영역에 본격적으로 접목되기 시작한 건, 그 수치가 30에 도달해서 영역을 이뤄낸 직후였다.

체력도 머지않아 도달할 것 같으니, 영역에 접목시켜 사용할 방도를 슬슬 생각해볼 시기였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영역의 주인인 내 심상이니까.'

댈런은 알고 있었다.

상태창의 숫자와 알파벳 등급으로 표기되지 않는, 살아 숨 쉬는 이 세계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영역의 힘.

그 힘을 사용하고 개척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지난 수백 회차에서 극복하지 못한 종말.

모니터 너머에서 수천 시간이 넘어가는 그 끝없는 실패를 극복할 진짜 열쇠는.

어쩌면 단순한 숫자와 등급 놀이를 할 뿐인 추가 능력치나 계승자 옵션에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의 심상 너머, 가능성을 실체화하는 환상세계 속 영역의 힘.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바꿔낸 과거와 현재를 토양 삼아, 싹을 틔우고 꽃 피워내는 중인 미래의 가능성들.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을 일으켜내고, 죽어 스러졌어야 할 이들의 미래를 부활시키는 그 가능성의 힘이야말로.

악신들의 멱을 딸 칼날로 벼려질 원석이라고, 댈런의 직감은 어렴풋하게나마 말하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지.'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그는 악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는 제단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댈런은 성검 끝으로 놈을 쿡쿡 찔렀다.

"으악! 캭! 아픕니다, 주인님!"

"다 처먹었으면 일어날 생각을 해야지. 안 그러냐?"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

악마가 잽싸게 무릎을 꿇고 빌어댔다. 그러고보니 놈은 영혼을 흡수하며 덩치가 꽤 크져 있었다.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사람 두 배 크기까지 커진 놈의 몸뚱이. 무릎을 꿇었음에도 댈런보다 살짝 높은 체고였다.

고개를 조금 들어올려 놈을 응시하던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다시 줄여."

"예, 예?"

"크기 줄이라고. 못하냐?"

악마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말 한 마디를 어쩜 저렇게 기분 더러워지게 할 수 있는지.

힘을 좀 회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미친 척하고 덤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할만의 사슬은 타락했음에도 강력한 성물.

그 힘에 저항하려면 못해도 상급 악마, 그중에도 악신의 직속쯤은 되어야 간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애당초 주인놈은 지금보다 몇 배나 컸을 적에도 자신을 일방적으로 두들겨패지 않았던가?

몸 주위에 흐르는 기세를 봤을 때, 주인놈의 무력은 심지어 그때보다도 더 강해져 있었다. 이거 진짜 인간 맞나? 내가 아는 인간은 이런 생물이 아닌데?

"눈 굴리는 거 봐라. 명령이다. 몸뚱이 접어."

"아, 아니 저는···꾸에엡! 꾸겍!"

할만의 사슬이 반짝 빛났다. 악마는 즉시 차곡차곡 접혀, 다시금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대충 무릎쯤 오는 체고와 몽실몽실한 떡덩이 같은 몸체.

댈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 크기가 팰 때도 손맛이 좋지.

"······."

그 눈빛을 읽었는지, 곧바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까는 악마였다.

"교육은 천천히 하자고.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댈런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 위에서 투명한 유리공처럼 생긴 물건이 둥실 떠올랐다. 푸른 금속 재질의 화살표 모양 바늘이 들어간 유리 구체였다.

바늘이 이리저리 휙휙 가리키는 방향을 바꾸는 게, 마치 자석 위에 올라간 나침판 같은 외견.

'탐색자의 좌안 파편.'

두 번째로 나온 아이템 보상을 보며, 댈런은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강력한 시체일수록 아이템을 줄 확률이 높은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보상을 볼 때, 허접한 강철검 같은 아이템은 애초부터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고.

이번에 나온 탐색자의 좌안 파편 역시, 강력한 아이템이자 유물의 한 종류였다.

마음속으로 원하는 대상을 그리면, 그 대상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 능력.

유리공 안에서 팽팽 도는 화살표는, 유물이 작동하는 순간부터 대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리켜 주었다.

대상이 어디 있든지 상관없었다. 지금처럼 땅 아래에 있던, 아니면 바닷속이나 하늘 위를 떠다니건 간에.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지만 않다면, 유물의 추적을 피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제한 조건도 하나뿐이지. 그 대상을 이미 한 번 만나봤어야 한다는 거.'

거기다 한 번 발동한 능력은 대상에게 물리적으로 접촉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로 빽빽한 광장이라도, 심지어 그 수천 명이 모두 가면 무도회에 참석한 상황이라 해도 목표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

추적 능력을 지닌 마법 물건 중에서, 탐색자의 좌안 파편은 못해도 한 손 안에 꼽는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애당초 상대의 동의도, 어떤 사전 준비도 필요 없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능력이었으니까.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아이템이기도 하지.'

댈런이 아는 건 묘실까지 오는 길뿐이었다.

고고학자의 유언대로 군데군데 새겨져 있는 표식만 따라가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가는 길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가 배운 건 묘실을 의미하는 표식뿐이었으니까.

모래바람 왕조의 문자는 다 지렁이 베베 꼬아놓은 듯한 상형문자였다. 당연하게도 댈런은 이에 까막눈이었고,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설령 출구를 가리키는 표식이 있다 하더라도, 읽고 따라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잘못하면 미아가 될 뻔했군.'

지하 유적은 성기사단의 땅 전역에 걸쳐 건설되어 있었다.

복잡하고 광대함으로 치자면 미궁도시의 하수도에도 전혀 꿀리지 않을 지경.

하수도는 물 흐르는 곳이니까 설계를 대충 예측할 수라도 있지, 여긴 그런 편법을 사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오랜만에 운이 따라줬다고 느끼며, 댈런은 유리구에 마력을 조금 불어넣었다.

우웅―

유리구가 작게 울었다. 곧이어 그 안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댈런은 침착하게 루시아를 떠올렸다.

금발에 푸른 눈의 수습기사.

먼 미래에 악마 살해자라 불릴 기사단의 심문관.

요리를 잘 하고, 최근에 멀미가 좀 줄었으며, 인간을 향한 복잡한 생각과 감정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영웅.

파르르르···.

생각을 이어갈수록, 이미지를 구체화할수록 팽팽 돌던 바늘이 부르르 떨며 속도를 줄인다.

바늘은 이내 움직임을 뚝 멈추더니, 천천히 돌아 한 방향을 가리켰다.

대충 대각선 위쪽을 향하는 방향.

댈런은 제단 위 악마의 등짝을 퍽 쳤다.

"가자."

수호자를 죽였으니 함정의 작동은 멈췄을 터. 너무 서두르지는 않아도 되었다.

전생에서도 자신이 길치는 아니라고 자부하던 그였다. 이런 미로 같은 유적이라도 하루이틀이면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악마와 함께 묘실을 나가던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손을 뻗었다.

우웅―

그러자 구석에 내팽겨쳐져있던 손도끼가 작게 울음을 토하고.

패래래랙―!

마치 줄에 묶은 듯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댈런은 등을 돌려 묘실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

"씨발 왜 작동을 안 하는 겁니까!"

루시아가 열불을 냈다. 그녀는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카가각!

검과 검이 얽히며 간결하면서도 복잡하게 그려내는 곡선.

그 춤사위 끝에서 힘을 주어 밀어내며, 그녀는 방패를 올려쳐 상대방의 턱을 가격했다.

떠엉!

"컥···!"

공중에 붕 떴다가 털썩 쓰러지는 특임대 성기사. 놈의 뒤쪽 흙벽에 뚫렸던 구멍이 순식간에 스르르 수복됐다.

그러나 곧 다른 방향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무너진 흙벽의 틈 사이로 특임대 성기사가 비집고 들어왔다.

루시아는 곧장 내달렸다. 그녀의 등 뒤로 성기사 울스턴이 외쳤다.

"이, 이거 작동 자체는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 새끼들이 아직도 훼까닥 돌아있는 거냐고!"

"저주의 핵이 예상보다 더 강력합니다. 이런 휴대용 장비로는 해제가 쉽지 않아요!"

쐐애액―!

무슨 발리스타 소리가 같은 게 울렸다. 아니, 진짜 그 소리가 맞았다.

이 미터가 넘어가는 거구의 성기사가, 손에 자기 몸만 한 거대한 작살총을 들고 마법사들을 향해 쏘아낸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든 해야지! 당신들 기술자라며!"

신성 문신을 한계까지 쥐어짜 작살을 흘려낸 루시아가 소리쳤다. 기술자라는 성기사 형제는 별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저 짧은 단검 모양의 장치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어둑한 수정 형태의 핵에다가 계속해서 꽂았다 뺐다를 반복할 뿐.

'씨발.'

루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었다.

댈런이 무너지는 천장을 향해 몸을 내던진 뒤, 두어 시간만에 모든 함정의 작동이 멈췄으니까.

댈런이 뭔가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말인즉 그가 살아있을 확률 역시 높다는 소리였고.

다만 그의 합류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번 작전은 시간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이 병력을 이끌고 성벽을 가볍게 공격하며 이목을 끄는 사이, 성소의 무기고 심부에 있다는 저주의 핵을 해제하는 게 이 작전의 골자.

어디까지나 기사단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게 작전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려면 공성전이 심화되기 전에 하루빨리 저주의 핵을 해제해야만 했다.

'빠르게 정리하고 구조대를 꾸려서 유적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왜 이 따위로 상황이 흘러가는 거냐고!'

쾅―!

거한이 휘두르는 통짜 금속 작살총을 방패로 흘려낸 뒤, 발끝을 내뻗어 놈의 고간을 찍어차버린다.

"끄헉!"

중요한 부위를 보호하던 갑옷이 우그러지며, 가죽 부츠 너머로 느껴지는 뭔가 으직 하고 깨지는 감촉.

거구의 특임대 성기사는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고꾸라졌다.

앞으로 남자 구실은 제대로 못하겠지만,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루시아는 혀를 짧게 차고 다시 땅을 박찼다.

작전이 위기를 맞은 건 고작 몇 시간 전 일이었다.

나흘에 걸쳐 유적을 통과하고, 성소의 무기고에 잠입하기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두 마법사와 힘을 합쳐 경비를 서던 특임대 몇을 무력화시키고, 심부의 검은 수정에 저주의 핵을 해제하는 유물을 꽂아넣은 순간.

유물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퍽 하고 작동을 멈추지만 않았어도, 작전은 마지막까지 순조로웠을 것이다.

성기사인 동시에 기술자인 울스턴과 헤스턴이 곧바로 유물의 수리에 들어갔지만, 그들의 말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부단장 휘하의 병력들은 이변을 눈치채고 무기고로 들이닥쳤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이 상황.

"더러운 단장의 개 따위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오느냐!"

까강!

검끝이 몇 갈래로 갈라진 검으로 흙벽을 부수고 들어와, 루시아와 검을 얽는 특임대 기사.

그나마 엘가이아 마탑의 두 마법사가 전력을 다해내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토벽을 구축해냈기에, 지금까지는 그걸 뚫고 들어오는 놈들만 상대하면 됐다.

"아직입니까!"

또 한 명의 특임대를 무력화시킨 루시아가 소리쳤다.

식은땀을 흘리는 청년 마법사를 보아하니, 가까스로 유지되던 균형의 붕괴는 머지않은 기정사실이었다.

"···물러나게!"

그때 원로 마법사가 눈을 부릅떴다.

황급히 맺는 수인, 우르르 무너지는 토벽.

"엘르 로트!"

그 너머에서 번쩍 하고 날아드는 푸른 검광이, 돌바닥을 부수며 올라온 거대한 종유석들에 가로막혀 폭발했다.

"크으···!"

침음을 흘리며 다시금 수인을 준비하는 펠버 발렌티노.

번쩍―!

그러나 수인을 채 맺기도 전에, 흙먼지를 뚫고 재차 날아온 검광이 노인을 강타한다.

콰장창!

방패와 창이 줄지어 세워져 있던 무기고 구석으로 날아가버리는 노인의 몸.

"스승님!"

제자의 외침과 부스스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검에 푸른 검기를 둘러낸 성기사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에버로크!"

루시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부단장, 에버로크 글라스덴은 푸른 기운으로 번뜩이는 눈을 둥글게 말았다.

"루시아 경. 내가 경에게 상급자의 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된다고 가르쳤나?"

"헛소리 하지 말아라. 기사단의 배신자 새끼가!"

"심문관이 되어서도 어릴 적 버릇은 고치지 못한 모양이군. 단장의 안배는 거기까지라는 소리겠지."

부단장이 웃었다. 입꼬리는 한쪽만 올라간 채, 큰 소리 없이 웃는 웃음이었다.

루시아는 넝마가 다 된 방패를 치켜들었다. 왼손의 방패는 정면으로. 오른손의 검은 그 위에 비스듬히 뉘여서.

검에 맺힌 백색 불꽃과, 은은하게 가라앉은 신성 문신의 빛을 보며 부단장은 입가를 살짝 굳혔다.

"호오. 제 손으로 아끼던 전우의 목을 벤 결의가 보이는군. 할만의 사슬에 휘감겨 있던가?"

"···그걸 네가 어떻게?"

"악마 골라캅은 꽤 기대할 만한 장기말이었지. 놈에게 힘을 좀 더해주기 위해, 애송이 기사 하나를 골라 성검을 쥐어보냈건만."

이런 반푼이 수습기사에게 죽어버릴 줄이야.

비릿한 어조로 덧붙이는 부단장의 중얼거림 앞에서, 루시아는 더 이상 이성의 끈을 붙잡을 수 없었다.

콰득!

발밑의 돌바닥이 깨져나간다. 검에 맺힌 백염이 검신을 완전히 집어삼키며 타올랐다.

불꽃처럼 넘실거리는 안광을 내뿜으며, 루시아의 신형이 쏘아지려는 순간이었다.

꽈릉······.

난데없는 천둥 소리.

그녀의 발이 멈칫했다.

꽈르릉···.

이내 그 소리가 좀 더 커지고, 부단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심문관 루시아가 고작 천둥 따위에 겁 먹은 건가?"

"···아니."

루시아가 검을 서서히 내렸다.

당장에 쏘아질 것 같던 공세를, 굳건한 방어로 전환하는 자세.

방금까지의 도발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는 부단장을 향해 여유롭게 웃어주었다.

"이건 그냥 천둥이 아니거든."

우르르릉―

발밑이 요동쳤다. 루시아는 뒤로 물러나며 방패를 추켜올렸다.

피를 흘리는 스승을 수습해온 토미 발렌티노와, 두 형제 성기사까지 고개를 돌린 가운데.

꽈릉―!

마치 부푼 반죽이 터지듯 그들과 부단장 사이의 땅이 폭발하며, 섬광과 우렛소리가 그 안에서 용솟음쳤다.

꽈광!

그 폭발 안에서부터 솟구쳐 무기고의 천장을 뚫어버린 누군가의 신형.

천장에 난 구멍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보고 토미가 소리쳤다.

"댈런 님!"

"이런. 한 층 더 올라와버렸군."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툭 하고 바닥에 착지하는 전사.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그는, 루시아를 발견하고 손을 슬슬 흔들었다.

"좀 늦었소."

"···아뇨. 딱 좋은 시점에 오셨습니다."

루시아가 웃었다. 그때 푸른 검광이 댈런을 덮쳤다.

꽈광!

그는 펠버와 달랐다. 검기라 해서 당해줄 이유가 없었다.

덮쳐오는 순간 뒤돌아 검을 휘두르자, 푸른 검신과 검광이 만나 부채꼴 형태로 폭발했다.

강력한 두 힘이 충돌하며, 그 여파로 흙먼지가 부스스 일어난다.

댈런은 왼손으로 휘휘 먼지를 몰아냈다. 그가 말했다.

"대사 중에 선빵 치는 거 비매너인 거 모르냐?"

"···무슨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을 것 같은 저열한 언어로구나. 야만인 따위가 성검을 탐내다니. 말세로구나."

세종대왕님 살아계셨으면 넌 거열형이다 새꺄. 쓸데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댈런은 보라는 듯이 성검을 두 손으로 쥐고,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스으으···.

어깨에서부터 소용돌이쳐 검신을 덮어가는 기운.

꿈틀거리는 부단장의 푸른 눈동자 앞에서,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꼬우면 가져가 보시던가."

성소 전투(2)

'야.'

댈런이 악마를 불렀다.

[옙, 주인님!]

'저런 것도 먹어치울 수 있냐?'

[저런 것이라면···? 아아.]

부단장과 대치중인 상황. 친절한 설명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영혼이 연결된 아르보르는 그의 의도를 금방 알아들었다.

댈런이 가리킨 건 등 뒤의 검은 수정. 두 성기사가 지금도 어떻게든 해제하려고 애쓰는 중인 저주의 핵이었다.

아공간에 숨은 악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능은 합니다.]

'그래? 잘 됐군.'

부단장을 쓰러뜨린다고 싸움이 끝나는 게 아니다.

저주의 핵이 건재한 이상, 특임대와 성전사들의 세뇌는 풀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가 패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수백에 달하는 특임대 성기사와 성전사들의 전력이 강력하긴 했음에도.

댈런은 이미 인간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초인이었고, 거기다 성벽 바깥에는 성기사단의 단장이 이끄는 증원군까지 있었으니까.

다만 그 싸움에서 기사단이 입게 될 피해와, 그 피해로 말미암아 멸망에 한 발짝 가까워질 미래를 피하고자 노력할 뿐이었다.

[다만 저 핵에는 몇 종류의 마력들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며칠 전에 얻었던 힘을 죄다 써야 하는지라······.]

'처먹었으면 일해야지. 내가 놈에게 덤벼드는 즉시 저걸 먹어치워라.'

[······.]

악마는 불편한 침음을 흘렸다. 댈런은 별 말 없이 다시 눈앞에 집중했다.

까라고 했으니 깔 것이다. 그게 성물의 능력이었으니까.

"아주 오만방자하구나, 전사. 신께서 굽어보신다한들, 너 같은 비천한 야만 혈통에 구원이 임할 거라 생각하느냐?"

부단장이 검을 들어올렸다. 수정처럼 반투명한 검에는 푸른 기운이 맺혀 번뜩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쟁의 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건 처음 알았군.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단 나부랭이거나. 후자가 더 설득력 있는데."

댈런은 조소를 머금은 채 오른발을 살짝 뒤로 뺐다.

왼발은 약간 비스듬하게. 오른발은 조금 더 체중을 실어서.

검을 잡은 두 손은 명치께 높이로 내밀고, 그 끝이 상대의 머리를 향한다.

어떤 검술의 묘리를 따른다기보다, 스킬과 경험이 쌓여가며 체화된 자세가 자연스레 잡아졌다.

부단장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띄었다. 놈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호오. 나름 검술의 맛 정도는 봤다는 건가. 그렇다면···."

쾅―!

왼발에 이동한 무게중심이, 순식간에 초인적인 각력으로 변화하며 돌바닥을 으깨버린다.

강력한 쇠뇌에서 날아간 화살의 빠르기로 쏘아진 댈런의 신형.

"···흡!"

절묘한 타이밍에 말이 끊기며, 호흡이 흐트러진 부단장이 가까스로 검을 들어올린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성검을 내리그었다. 동시에 악마가 아공간에서 벗어나 저주의 핵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저건 무슨!"

장정의 두 배만 한 악마가 저주의 핵을 덮치는 광경을 보며, 부단장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든 순간.

콰아아―!

성검의 궤적을 따라 휘몰아치는 폭풍이, 그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

검과 검이 얽힌다.

현란한 기술로 급소를 노리고, 그걸 힘으로 찍어누르며, 그 힘의 미묘한 균형을 흐트려 흘려내고, 흘러가는 검끝을 회수하는 대신 폼멜로 찍어버리는 공방의 연속.

한 순간에도 십수 차례의 검격이 교환되며, 서로의 목덜미와 머리, 심장, 손발목을 노리고 첨예한 다툼을 이어나간다.

그건 단순히 빠르기나 힘을 겨루는 게 아니었다.

검을 다루는 경험과 임기응변을 자아낼 기민함, 그리고 상대의 다음 검끝과 발의 위치마저 예측해내는 두뇌의 싸움이었다.

쩌저저정! 꽈광―!

쉬지 않고 이어진 열한 번의 격검.

그 끝에 얽혀낸 검로를 떨쳐내며, 댈런이 발을 뻗어 지면을 내리찍었다.

콰르르―!

진각의 순간 화염의 갑주가 가죽 부츠와 정강이의 각반 위를 둘러싼다.

그 내딛음에 일대의 돌바닥이 산산조각나는 것과 동시, 부서진 석재의 틈새마다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흐읍!"

균형의 붕괴와 솟아오르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단장은 자리를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댈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약 스킬로 지면을 다시 한 번 박살내면서 놈을 따라잡아, 우렛소리를 토해내는 검격을 흩뿌려낸다.

섬광이 번쩍이고 뇌성이 무기고를 진동시키는 순간, 성소의 지붕을 부수고 떨어지는 한 줄기 벼락.

「뇌격」.

꽈르르릉―!

순간적으로 무기고를 가득 메운 빛이 사그라들고.

땅에 착지한 댈런은 곧바로 자세를 잡고 상대의 기척을 쫓았다.

시각보다 먼저 잡아낸 감각에 따라, 섬광이 지나간 자리를 가리키는 검끝 너머.

"···크윽."

놀랍게도 부단장 에버로크는 여전히 댈런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어떻게 야만인 따위가···신의 번개를······."

물론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새까맣게 탄 갑옷과 피부.

한쪽 눈은 섬광에 직격당했는지 감은 눈꺼풀 아래로 진물이 흘렀고, 화상을 입어 벗겨진 환부에서는 지독한 탄내가 올라온다.

갑주와 살이 터져나간 옆구리에서는, 반쯤 부러진 갈비뼈가 간신히 흘려내리는 내장을 붙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치명상을 입은 상태.

하지만 댈런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거기다 내 성검의 능력까지 알고 있군."

스아아아······.

부단장이 말을 맺자마자, 놈의 검이 빛을 머금으며 몸의 모든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해낸다.

콰과곽! 까각!

동시에 그 주변에 맺힌 푸른 오오라가 위협적으로 성소의 돌바닥을 긁어대는 모습.

댈런은 형형하게 빛을 흩뿌리는 부단장의 검을 바라봤다.

'세 번째 성검, 누미스라크.'

사용자가 부상을 입은 순간, 그 어떤 치명상이든지 급속도로 회복해내는 기적.

그리고 그 상처에 비례하는 파괴력의 오오라로, 회복의 순간을 방해하는 적을 공격하는 능력을 가진 강력한 성검이었다.

"봤느냐?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야만인. 네 검이 아무리 내 살을 찢어놓아도, 신의 은총은 그 모든 상처를 씻어주시지. 나는 결코 죽지 않아."

부단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성검을 휘휘 돌렸다.

"어디 목이 잘려도 재생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댈런은 성큼 발을 내딛었다. 부단장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댈런은 그걸 보고 픽 웃었다. 당연히 쫄리겠지. 여유를 가장했지만, 놈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검의 어마어마한 회복 능력 덕분에, 겉으로만 멀쩡해 보일 뿐,

뇌격의 여파는 그의 내부를 지금도 갉아먹으며, 몸이 삐그덕거리게 만들고 있을 테니까.

'최하급이라지만 악마의 재생마저도 무마시켰는데, 완전히 다루지도 못하는 성검으로 이겨내는 건 불가능하지.'

"사, 사라졌다!"

"악마는! 악마 놈은 어디있지! 같이 사라진 건가!"

저 뒤에서 성기사 형제의 호들갑이 들려왔다. 때마침 아르보르도 저주의 핵을 전부 먹어치운 것이다.

아공간으로 복귀한 놈이 비실거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주인님, 명령···완수······.]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기절해버린 악마.

곧이어 세뇌가 풀리며 의식에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은 특임대와 성전사들이 풀썩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 이···!"

"저도 돕겠습니다."

당황한 부단장의 목소리. 이제 전황은 명백히 뒤집어졌다.

세뇌당한 기사들이 쓰러지자, 그들을 견제하던 루시아도 댈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이런······."

부단장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놈은 계속해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댈런은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참으로 어리석고 하찮구나. 청린께서 힘을 빌려주셨음에도, 한낱 인간에게 패배해 빌빌거리는 모습이라니.]

물러나던 부단장의 등 뒤.

두건를 깊게 뒤집어쓴 누군가가, 겁에 질린 뒷걸음질을 턱 막아세웠다.

***

누구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두건 쓴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정확히는 그 입을 열어 첫 마디를 내뱉기 전까지도.

그야말로 갑자기 등장한 존재는, 부단장의 등에 얇고 가는 손을 무심하게 얹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린께서 마녀를 통해 에낙사구스와 거래를 맺지 않으셨더라면, 네 하찮은 목숨 따위를 구하러 올 릴도 없었을 것이거늘.]

"누, 누구···."

부단장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반쯤 튼 순간, 기이한 마력이 일렁이며 그의 몸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사라진 존재감.

순식간에 벌어진 기현상에 루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네놈은 누구냐!"

[쯧. 하찮은 벌레 같으니.]

두건 쓴 존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놈은 루시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난장판이 된 무기고와, 세뇌가 풀린 채 비척이며 일어나는 성기사들을 둘러봤다.

여전히 희미한 그 존재감.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루시아가, 검신에 흰 불꽃을 타올렸다.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성기사단의 영토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를 묻겠다."

"아니. 물러나시오."

그녀를 막아선 건 댈런이었다.

"이건 아직 그쪽이 상대할 수 없소."

부드럽게 어깨를 잡아당기는 두껍고 큰 손.

그 손길에 머뭇거리며 물러난 루시아의 앞으로, 댈런은 성검을 앞세우며 성큼 나섰다.

그는 알고 있었다.

두건 쓴 존재가 누구인지,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도.

놈이 그야말로 갑자기 나타난 존재였고, 이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 등장하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푸른 비늘 아룡에게 먹힌 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머리 위에 떠오른 반투명한 글자들은, 놈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었으니까.

'아룡.'

진짜 용은 아니다.

신비 그 자체인 생물이자, 날갯짓 하나만으로 불과 번개를 불러오는 존재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열화된 종족.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런 자신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서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누군가를 지켜줄 여유 없이,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흠.]

댈런을 본 놈이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두건 아래의 세로로 죽 찢어진 눈동자가 옅은 마력광을 흘렸다.

[다시 보니 넌 벌레 치고는 좀 크군.]

놈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 크기 전에 밟아두어야겠지.]

공기가 반전됐다. 없는 듯 희미하던 존재감이 뚜렷해진다.

넉넉한 소매 아래로 엿보이던 비쩍 마른 손이, 거대한 비늘과 발톱 달린 앞발로 변하고.

평범한 두건 달린 로브로 보였던 것이 마치 착시였던 듯 팽팽한 피막이 되어 있었다.

존재감 자체가 공포가 되어 성소 안을 덮친다.

세뇌가 풀려 쓰러졌다가 막 일어난 특임대 성기사들이, 다시금 비틀거리며 의식을 잃고 무너졌다.

"크읏···."

루시아마저 신성력으로 타오르는 눈을 찡그리고 몇 걸음 물러나는 존재감.

포식자와 피식자를 가르는 그 뚜렷한 격차 앞에서, 댈런은 호승심 가득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벌써 드래곤 슬레이어 타이틀을 딸 생각은 없었는데."

[···뭐라?]

용이 반문했다. 놈은 천장에 닿은 머리를 천천히 아래로 숙였다.

번뜩이는 노란 눈. 그 뒤에 일렁이는 용 특유의 타는 듯한 마력.

댈런은 거기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심장에서 맥동하는 용혈의 인자는, 비록 일부임에도 놈을 상회하는 존재의 흔적이었기에.

"마침 백 퍼센트 찍은 스킬이 하나 더 생겼거든. 너 정도면 딱 적당한 시험 상대일 것 같아서."

[못 알아듣겠군. 그런 저열한 언어 따위···.]

용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꽈릉―!

우렛소리와 함께 머리를 쪼갤 듯, 작은 손도끼가 거대한 섬광이 되어 날아오고.

떠어어엉!

그 섬광 너머.

세로로 찢어져 번들거리는 노란 눈에, 지면이 폭삭 내려앉으며 날아오르는 전사의 신형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성소 전투(3)

"단장님, 본단에서 보낸 공성 병기가 도착했습니다. 갈고리와 사다리도 재보급이 완료됐습니다."

참모가 사무적인 어조로 보고했다.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들은?"

"특임대의 유물에 당한 성기사 두 명을 제외하면 전원 회복했습니다."

"그 두 기사는 신의 곁으로 갔는가?"

"···송구하옵게도, 그렇습니다."

참모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거의 흐릿한 눈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

그러나 떄론 말 없이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사상자들 중 직속 부하들이 몇 있었지.'

몇 시간 전 성벽 앞에서의 접전 말미에 보고받은 사실을 떠올리며, 에드거는 손을 들어 참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다음 공격을 두 시간 미루도록 하지. 부상에서 회복한 전사들이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주게나. 나머지 병력은 포위망을 더욱 철저하게 사수하도록."

"예."

참모가 물러갔다. 멀어지는 발소리.

그 발소리에서 시선을 돌린 에드거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봄이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햇살이 따뜻했다.

그리고 따스함이 내리쬐는 지면에는, 진득한 피와 차가운 쇠붙이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신의 뜻 아래 하나로 뭉쳐야 마땅할 성기사단에서 벌어진, 부단장의 계략으로 말미암은 전쟁.

'내전.'

참혹한 단어가 입 안에서 씁쓸함으로 굴렀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때에.'

에드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시력을 잃은 대신 그가 얻은 건 예지안뿐만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배는 섬세해져서, 마치 몇 개의 눈을 더 얻은 듯한 감각과 육감.

그리고 그 감각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혹은 예지안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떠오르기 시작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예감들.

사실 세간에 그의 예지 능력이라고 알려진 것들 중, 대부분은 신의 직접적인 계시가 아니라 그 예감의 산물이었다.

평온함이나 불안감, 혹은 기대감의 형태로 다가오는 두루뭉술한 예감.

그러나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 또한 신께서 주신 선물일 테니.'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몇 년쯤 전.

그의 예감은 희미한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렷하지는 않지만, 잊을 만 하면 자꾸만 감각의 끄트머리를 간질거리는 미묘한 불안감의 형태로.

거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불안감의 형태는 점점 뚜렷해져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이틀에 하루는 악몽까지 꿀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마물의 공세가 균열을 침범하는 꿈.'

꿈 속에서 성기사단의 본단은 무너졌다.

끝까지 항전하던 기사단은 참혹하게 유린되고, 천혜의 요새이자 우리인 이 땅은 검게 불탄 폐허가 되었다.

어떻게든 그 결말에 도달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명의 성기사, 아니 성전사마저도 소중했다.

기사단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내전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에드거가 반란군을 쓸어버리는 대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 기사단의 전력을 온존하고자 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어라? 방금 저거 봤나? 내가 잘못 본 건가?"

"아, 아닙니다! 분명히···."

그때 희미한 웅성임이 들렸다. 아군의 전열 곳곳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작은 소란이었다.

에드거는 상념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에드거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단장님! 성벽 위의 반란군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참모가 소리쳤다. 에드거는 되묻지 않았다.

그는 가리워진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단숨에 흩뿌려내 한계까지 넓혔다.

순식간에 성소의 성벽과 그 너머까지 뻗어나가는 감각의 범위.

눈 주변에 새겨진 신성문신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며, 끝없는 정보의 홍수를 소화시키기 시작한다.

"성공했군."

에드거는 미소 지었다.

성소를 철통 같이 지키던 특임대 대원들이 우르르 쓰러지고 있었다.

저주의 핵이 사라지면서, 그 세뇌가 풀린 반동으로 잠시 의식을 잃는 것.

기사단장의 웃음을 본 참모는 곧바로 말했다.

"전 병력 곧바로 진입시키겠습니다."

"···잠깐."

에드거가 참모를 붙잡았다. 그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범람하는 자극들 속에서, 희미한 존재감이 기시감을 간질인다.

빈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존재감. 그리고 이내 사라지는 부단장 에버로크의 기척.

"···이런."

한평생 균열의 마물들과 싸워온 에드거는 알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감각에도 흐릿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의 주인이 누구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저 공간 전이 마법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를.

"대(對) 고위 마물 진형을 취하라."

에드거가 말했다. 참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마물이라니? 그것도 고위 마물?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오랜 훈련과 경험은 그 판단들을 순식간에 일축했다.

전시에 기사단장의 판단은 절대적.

참모가 소리쳤다.

"대 고위 마물 진형을 취하라!"

"대 고위 마물 진형이다! 중대 위치로!"

"위치로!"

"위치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성기사와 성전사들.

공성전을 위해 구축되었던 포위망이, 순식간에 십수 개의 무리로 쪼개져 각기 진형을 갖춰갔다.

부산스레 몸을 움직이는 기사와 전사들의 뒤에서, 에드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의 희뿌연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쫓는 듯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자락이 성벽을 넘어, 성소의 높게 솟은 지붕에 닿은 순간.

콰아아앙―!

성소의 지붕이 폭발하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

필멸자의 영혼을 울리는 표효가 일대에 몰아친다.

긴 울부짖음과 함께 회색빛 잔해와 먼지들을 뚫고 올라온 건, 몸길이가 10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푸른 비늘의 거체.

봄철의 따사로운 햇살에 맞서 시리게 번뜩이며, 날카로운 기세를 줄줄이 흘리는 거대한 용이었다.

"아룡이다―!"

"공성 병기를 장전해라!"

용을 본 성기사단이 민첩하게 대응했다.

마차 크기의 발리스타 시위가 당겨지고, 신성력이 깃든 투석구가 천천히 굴려 옮겨졌다.

공성 병기라고 끌어오긴 했으나, 사실 이 병기들의 주 용도는 거대한 마물을 사냥하는 것.

신성력으로 유도되는 거대한 투석구와 은박을 입혀 신성한 기름을 바른 발리스타는 거인과 아룡, 골렘을 상대로도 유효한 무기였다.

"······."

한편 에드거는 성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희뿌연 눈은 아직까지도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이미 지붕 위 하늘로 솟아오른 아룡이 아니라, 아직까지 흙먼지 구름을 향해 있는 시선.

잃어버린 시력보다도 더 예민한 그의 나머지 감각들과 그 감각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육감은, 먼지 구름 속의 뚜렷한 기척을 인식하고 있었다.

푸확―!

먼지 구름을 뚫고 무언가가 솟구친다.

먼젓번 용의 거체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신형.

공중에 비산하는 지붕의 잔해를 박차고, 용을 향해 도약하는 전사의 손에는 푸른 성검이 들려 있었다.

'신께서 주목하시는 전사, 댈런.'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명확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에드거는 다시 한 번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저 존재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결코 잊을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예지안의 계시를 따라 루시아 일행을 찾아간 날, 숲에서 특임대 한 소대를 홀로 처리한 전사와 마주친 순간.

몇 년째 그의 내면을 간질이던 불안감이, 순간이나마 눈 녹듯이 사라졌던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 에드거는 직감했다.

오랫동안 예견해왔던 종말의 악몽은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까운 미래이며.

신께서 주목하시는 이 전사야말로, 그 종말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스르릉―

기사단장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참모에게 지휘를 맡기고 진형 사이를 걸어나갔다.

장전 중인 투석기와 발리스타를 물 흐르듯 지나친 그의 발걸음 뒤.

새하얀 검신을 뒤덮은 백색 화염이, 물방울처럼 지면에 점점이 떨어지며 첫 번째 성검의 주인이 검을 들었음을 알렸다.

***

'오만하고 겁 많은 파충류들.'

비록 모니터 너머의 경험이긴 하지만, 용족과 수없이 싸워본 댈런이 내린 아룡의 정의였다.

놈들은 진룡이나 고룡처럼 필멸자를 초월한, 때로는 신에 필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신비에 한 발 걸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피륙에 의존해 살아가는 족속.

다만 진룡이나 고룡의 하수인으로 부려지면서 눈만 한참 높아져, 인간을 비롯한 필멸의 존재들을 벌레 보듯이 보는 게 놈들의 습성이었다.

정작 그 필멸의 존재들에게 수없이 사냥당해, 용 사냥꾼이라는 말이 세간에도 알려지게 만든 주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콰과과과―!

검끝에서 터져나온 폭풍이 허공을 가른다.

거대한 몸체를 기민하게 움직인 용이, 아슬아슬하게 그 폭풍을 피해내며 날개를 활짝 폈다.

놈의 노란 눈동자가 빛난다. 주문의 전조였다.

[――!]

날카로운 이빨 가득한 주둥이가 열리며 알아듣지 못할 괴이한 언어를 내뱉자, 거대한 힘의 파동이 그 머리 앞에서부터 쏘아졌다.

뻐어어엉!

보이지 않는 힘이 댈런의 몸을 강타했다. 평범한 사람은 단번에 곤죽이 되었을 충격량과 압박이었다.

댈런은 숨을 한 번 몰아쉰 것만으로 충격을 떨쳐내고선, 공중에서 몸을 휙 돌려 자세를 바로잡았다.

휘이이―

발밑에는 아무 것도 없다.

비산하는 지붕 파편들을 밟아가며 도약한 이곳은, 지면에서 수십 미터나 떨어진 상공.

떨어지면 부상도 부상이거니와, 하늘을 나는 용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주제에 맞게 땅을 기어라, 버러지 같은 놈!]

용이 전성으로 외친다. 댈런은 가만히 눈을 반개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와 그에 따라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면의 시선이 추락의 찰나 사이에 심상 너머를 인지해낸다.

두근. 두근. 쿠르릉······.

맥동하는 산능성, 붉게 물든 하늘, 끊이지 않는 뇌성과 그 아래 드문드문 날아다니는 쇳조각들.

어느덧 온갖 기이한 지형들이 자리잡은, 눈 덮인 설산의 한 구석으로 그의 시선이 향했다.

콰르륵! 쿠르르르!

그곳은 거꾸로 떨어지는 돌과 모래의 폭포였다.

절벽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크고 작은 돌조각과 자갈들.

마치 현대 지구의 트럼펠린에 튕기듯, 허공에서 퉁퉁 튀어오르며 하늘로 솟구친다.

[도약(E)]

- 한 번의 발디딤으로 몸을 높게 띄워올리는 기술.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 힘과 기교의 총체적인 응용이 담겨있다.

- 숙련도 100%

심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킬의 정보가 떠오른다.

이곳은 오래 전 은가면 암살자를 죽이고 얻은 스킬로부터 비롯된 지형.

몇 달 동안 그의 기동력의 큰 부분을 맡았던 도약 스킬이, 지하 유적을 죄다 부수고 올라오며 마침내 숙련도 백 퍼센트를 달성한 것이다.

퉁― 투투퉁―

튀어오르는 바위들. 그 아래 허공에서 일어나는 파문.

어릴 적부터 판타지며 무협을 즐겨 보던 댈런의 심상은, 무언가를 딛고 뛰어오른다는 개념을 비단 땅바닥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거꾸로 쏟아지는 바위의 폭포는, 그 끝에 빚어진 가능성의 확장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스읍―"

시선을 현실로 옮긴 채 들이쉬는 호흡. 척추부터 허벅지를 지나, 발끝까지 정신을 집중한다.

마치 처음 도약 스킬을 사용했을 때처럼, 과하지 않게 딱 필요한 힘만을 담아냈다.

발밑은 빈 허공.

그럼에도 딛고자 한다면 불가능은 없다.

공기 그 자체가 발판이며, 이 세상에 흐르는 마력의 바람이 단단한 바닥이 되어 주었으니.

필요한 건 초인적인 근력과 기교, 마력 감응력과 숙련도로 예표되는 경험.

그리고 그 모든 걸 담아내는 심상의 그릇뿐.

우웅―

까마득한 창공 한가운데.

댈런의 발밑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공기중의 마력이 뒤틀리며 기이한 흐름을 맺어냈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마력의 바람이, 둥글게 닫힌 흐름을 만들어내며 마치 단단한 지면과도 같은 형태로 빚어지고.

바닥을 부수고 나무를 쪼개며 몸을 밀어냈던 도약 스킬이, 발끝으로 그 마력의 발판을 밀어내며 발현되었다.

그리고.

꽈아앙―!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쏘아진다.

주문의 여력을 단숨에 떨쳐내고 날아오르는 그를 보며, 용의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놈이 전성을 내뱉으며 아가리를 쩍 벌렸다. 살짝 보이는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용의 숨결.'

숨결에 담긴 마력과 살기를 느낀 피부 위, 찌르르 하는 감각이 감돌며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당연했다. 저 주둥이에서 쏘아지는 숨결은 강철보다 단단한 댈런의 육신이라도 녹여버리기에 충분한 위력이었으니.

하지만 댈런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고로 용의 숨결은 멀리 떨어질수록 위협적인 법이다.

오래된 용 사냥꾼들의 격언에도, 용이 숨결을 내뿜을 때가 가장 위험한 상황인 동시에 절호의 공격 기회라 하지 않던가.

'그건 모니터 너머에서 아룡족 보스몹을 공략할 때도 마찬가지였지.'

과거를 회상한 댈런은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숨결을 처음 마주했을 때가 기억났다.

빈약한 캐릭터로는 도저히 공략할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철옹성에 들이받는 듯했던 기분.

그러나 익숙해진 이후에는 변칙적인 발톱이나 주문 패턴이 더 귀찮을 뿐, 용이 숨결을 모아내는 순간만 기다렸다가 목을 잘라버리지 않았던가.

스읍―

기억을 흩어내며 길게 숨을 들이쉰다.

호흡과 함께 사지 말단까지 뻗어나가는 새로운 힘.

꽈과광―!

발밑에서 일대의 마력이 뒤틀리고, 허공을 연이어 디뎌낸 발걸음마다 후폭풍이 터져나간다.

도약의 그 반동으로 얻어낸 가속은, 이내 소리의 속도에 가까워졌다.

지상에서 올려다보기에 댈런의 몸은 거의 희끗한 음영처럼 보일 정도.

그리고 용의 아가리에서 숨결이 토해질 준비를 마쳤을 즈음, 댈런의 몸은 어느새 용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감히···!]

반사적으로 휘두르는 거대한 앞발에 성검을 마주 가져다댄다.

팔과 어깨를 짓누르는 강렬한 압박 너머로, 단단한 비늘과 질긴 가죽이 갈라지는 손맛이 느껴진다.

콰가각!

허둥지둥 휘저어대는 앞발을 성검을 두 번 휘둘러 흘려내고, 다시 한 번 발밑에 마력을 모아 허공을 도약.

꽈앙―!

단숨에 주둥이 바로 밑까지 도달한 댈런은, 용의 발톱을 받아낸 끝에 증기를 뿜어대는 오른팔 대신 왼손을 들어올렸다.

화륵!

단단한 주먹을 감싸는 화염의 갑주.

원래부터도 곰 앞발 같았던 손은 화염에 덮이며 두 배쯤 커졌고.

쾅!

거인의 힘을 넘어서는 근력으로, 반쯤 벌어진 용의 주둥이를 아래턱에서부터 올려쳐 닫아버린다.

[크어어―!]

전성으로 비명이 토해진다. 닫힌 주둥이 사이로 숨결의 일부가 피식거리며 새어나왔다.

그 주둥이가 다시 벌어지기 전에, 댈런의 손을 감싼 화염의 갑주가 순간 일렁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모래바람 왕조의 묘실을 뚫어낸 화염의 폭풍이, 마치 용의 숨결처럼 부채꼴로 뻗어나가 아룡의 푸른 비늘을 덮쳐들었다.

성소 전투(4)

푸른 비늘 아룡, 옥시키루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옳았으리라.

용족은 공기에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직접 관측할 수 있는 족속. 아룡이라 해도 그 능력은 여전했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인간 전사의 영역에서 토해지는 심상이 얼마나 강렬하게 마력을 동조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뒤틀린 마력의 흐름이 현실의 법칙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지까지도.

'···용 사냥꾼.'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

동족을 사냥하는 필멸자 사냥꾼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대놓고 코웃음 쳤었다.

어지간히 덜떨어진 반푼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필멸자 따위에게 사냥당할 수 있는가.

심지어 용 사냥꾼의 반수 이상은 그나마 장수종인 엘프나 드워프도 아닌, 단명하는 인간이라 들었다.

그런 단명종에게 죽임당할 정도로 저열한 개체라면, 동족으로 취급할 필요도 없다는 게 옥시키루스의 생각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꽈르릉―!

전사의 팔이 흐릿해진다. 동시에 허리춤에 메어져 있던 강철검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 전사의 손을 떠난 강철검은,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해 마치 빛의 작살처럼 옥시키루스를 향해 쏘아졌다.

원래라면 그의 비늘 한 장조차 뚫지 못할 쇠붙이.

그러나 우렛소리와 함께 덮쳐드는 섬광은, 그의 비늘을 박살내고 가죽과 그 아래 내장까지 찢어발기기 충분한 위력이었다.

[――!]

짧게 내지르는 주문의 표효. 옥시키루스는 날개에 모든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날개 밑에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의 공기를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이고 분출했다.

덮쳐드는 섬광을 피해내기 위한, 곡예에 가까운 급격한 방향 전환.

콰르르릉―!

오른 날개를 스쳐 지나간 빛줄기가 성소의 내벽에 직격하며, 두꺼운 성벽의 일부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크으으!]

마력을 사용하자 골이 저릿하게 울린다. 옥시키루스는 눈을 한껏 찌푸렸다.

놈의 화염 휘감은 주먹에 맞은 지 벌써 몇 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부상이 회복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는 용. 어지간한 중상을 입고도 상처라 여기지 않는다.

화염에 휩쓸린 머리의 뼈와 가죽은 순식간에 재생됐다. 그러나 뇌만큼은 이상하게도 재생이 더뎠다.

마치 용의 피가 뇌를 재생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잔재한 열기가 그걸 막는 듯한 느낌.

날개를 받쳐주던 마력을 잃고 땅에 추락해, 기사단의 성소 안에서 지저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

힘을 쥐어짜 전성을 토해낸다. 원래라면 숨 쉬듯 쓸 수 있던 주문들이, 그 전성으로 가까스로 빚어진다.

허공에 푸른 결정이 모여들어 포탄처럼 쏘아지고, 보이지 않는 힘이 일대를 휩쓸며 전사의 운신을 방해한다.

성검을 들고 달려들던 전사가 일순 주춤했다. 검을 휘둘러 결정 마탄들을 막아내는 전사.

쩌저정! 콰가가각!

폭발하는 결정들로 벌어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옥시키루스는 심장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두근.

거대한 심장이 맥동한다. 심장에 잠재된 권능이 마력의 파도에 깨어났다.

피 한 방울마다 신비의 힘이 서린 진룡과는 달리, 아룡은 피가 모여드는 심장만이 신비의 산물.

그리고 그 심장이 품은 능력은, 용 객체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특별한 권능이었다.

평소의 옥시키루스라면 한낱 인간을 상대로 결코 용심장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 싸움 앞에서, 그 케케묵은 생각은 금세 바뀌었다.

그는 용.

모든 필멸자의 머리 위에 있는 존재.

한낱 먹잇감일 뿐인 인간 따위에게, 이대로 사냥당하는 건 포식자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찮은 필멸자 주제에!]

구우우웅―

심장의 힘이 깨어나며 주변의 마력이 진동한다.

존재감만으로도 필멸자의 심장을 옥죄는 용의 기세가 순식간에 흩어져 희미해졌다.

때마침 결정 마탄을 떨쳐낸 전사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달려든 순간.

팟―

옥시키루스의 거체는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겼다.'

그는 생각했다.

다른 결과는 불가능했다.

스스로의 실체를 반쯤 허상화시키고, 공간을 접어 그 틈 사이를 유영하는 능력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거머쥔 권능.

허공을 박차고 날아들며, 검 한 자루로 벼락과 우렛소리를 불러내는 필멸자의 기예는 물론 인상적이었으나.

'그래봐야 단명종의 발악. 용심장의 권능에 비할 수는 없지.'

공간을 뛰어넘어 등 뒤를 점한다.

전사의 검은 자신이 사라진 자리를 갈라내고 있었다.

옥시카루스는 가볍게 앞발을 휘둘렀다.

그의 입장에서 가볍다지만, 인간의 성벽도 충분히 무너뜨릴 위력의 공격.

그가 길다란 주둥이 끝자락을 씰룩이며, 핏덩이가 될 전사의 육신을 상상한 찰나.

쐐애애애―!

순간적으로 두 배쯤 빠르게 움직인 전사의 검끝이, 기이한 검로를 그려내며 자신의 앞발을 막아섰다.

[···무슨?]

꽈르릉!

소리의 벽을 돌파하며 터져나오는 천둥 소리와, 앞발의 비늘을 찢어발기는 검신의 소용돌이.

옥시키루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곧장 다시금 공간을 뛰어넘는 찰나.

그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전사의 웃음을 비췄다.

놈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했다고 벌써 2페이즈냐."

***

갑지기 사그라드는 용의 존재감. 눈앞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놈의 거체.

그 초현실적인 광경을 마주하자마자 곤두선 육감이, 찌릿거리며 등 뒤에서 닥쳐오는 위협을 예고하고.

내리치던 검로를 아주 조금 비틀어내며, 그 검속을 배가시켜 덮쳐오는 앞발을 후려친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근력만으로 음속의 벽을 돌파한 건, 이미 옛적 은가면 사도였던 텔리아 상단주를 상대할 때 성공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지.'

시간을 길게 늘어뜨린 감각 속, 댈런은 차분히 판단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푸른 비늘 아룡 옥시키루스의 전투 페이즈는 총 두 개.

비행 상태에서 마법과 브레스를 난사하며, 압도적인 화력으로 몰아붙이는 게 첫 번째 페이즈였고.

생명력이 일정 이하로 떨어졌을 때, 용심장의 권능을 사용해 쉼 없는 공간 전이와 자잘한 주문으로 빈틈을 내보이지 않는 게 두 번째 페이즈였다.

팟.

검을 휘두르자 다시금 사라지는 거체.

사방으로 뻗어난 감각이 놈의 기척을 찾기 시작했다.

높은 지능 수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선점할 만한 유리한 장소를 분석해낸다.

스륵―

그리고 찰나의 순간 감지해낸 기척은, 거대한 몸에 비해서 한없이 세미한 소리.

마치 얇은 풀이 흔들리는 듯한 미세한 소음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푸른 비늘로 빼곡하게 덮인 거대한 꼬리가 집이라도 부술 기세로 눈앞을 덮쳐든다.

쐐애애―

심상을 끌어낼 여유는 없다. 주어진 찰나의 시간은 검을 휘두르는 데에도 아슬아슬했으니.

온 힘을 쏟아 뒤틀어낸 검로가, 다시 한 번 음속의 벽을 돌파하며 굉음을 토해낸다.

꽈아앙!

비늘이 쪼개진다. 가죽이 갈라졌다. 그 아래의 질긴 근육질이 찢겨나가며 손에 강한 저항감을 되돌렸다.

손과 어깨, 팔까지 타고 올라오는 무식한 질량.

그 질량의 파도를 역으로 밀어붙여, 두터운 꼬리를 잘라내려는 찰나.

팟.

다시금 놈의 기척이 사라진다.

"쯧."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모니터 너머에서도 생각했지만, 옥시키루스의 공간 전이 능력은 이래서 짜증났다.

전조가 없다시피 한 공격. 사각을 파고드는 육탄전에 이쪽의 역량을 제대로 낼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작 어렵사리 성공해낸 반격은 제대로 피해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공격이 끝까지 먹히기 전에 놈이 다시금 공간을 뛰어넘어 버리니까.

아룡의 재생 능력이라면 어지간한 하급 악마쯤은 되는 만큼, 그 정도 상처야 수 초도 지나지 않아 회복해내겠지.

"시발 도마뱀 새끼."

콰직!

[크아악!]

덮쳐오는 주둥이를 폼멜로 찍어, 사람 상반신만 한 이빨 한 개를 부러뜨려버린 그가 중얼거렸다.

[크어어어―!]

또 한 번 사라지는 용의 거체.

그나마 놈의 머리통을 화염 갑주로 두들겨 주문을 봉쇄했기에 다행이었다.

이런 상황에 놈이 특기인 결정 주문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면, 전황은 누가 봐도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을 테니까.

물론 이 상태가 영영 지속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화염 갑주의 열기가 놈의 두개골 안쪽에 침투해 재생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용혈의 재생력도 제 역량을 다해낼 테였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놈이 두뇌를 회복하고 나면, 그에게도 위협적인 주문들을 숨 쉬듯 쉽게 사용하게 되겠지.

그러나 댈런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그의 초인적인 감각은, 좀 전부터 이쪽으로 달려오는 기척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 같은 놈! 죽어라!]

악다구니를 쓴 용이 힘을 쥐어짜 주문을 완성해낸다. 놈의 머리 위에 결정 마탄 서너 개가 모여들었다.

충돌하는 순간 폭발하며, 날카로운 결정 조각으로 살을 찢어놓는 주문.

놈의 노림수는 명확했다.

댈런이 마탄에 대처하는 사이, 그의 뒤를 점하고 공격할 심산.

그 공격에 대처하자니 마탄의 폭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마탄을 막거나 피하면 용의 앞발에 몸이 갈갈이 찢길 테였다.

그야말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전략.

승리를 확신한 듯 기세등등한 노란 눈을 보며, 댈런은 여유롭게 씩 웃었다.

그가 말했다.

"때맞춰 오셨군. 도마뱀 구이 드셔보셨소?"

"젊을 적에 먹어봤습니다. 꼬리 부위가 특히 맛있다는 거 아시는지요?"

웃음기 잔잔하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옥시키루스는 고개를 휙 돌렸다.

용의 등 뒤, 성소의 반쯤 무너진 성벽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필멸자. 하지만 그 기세는 아룡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인 인간.

빈 왼소매는 바람에 나풀거리고, 흐릿한 시선이 용과 댈런이 선 공터를 내려다본다.

백색 검에는 그 검보다도 더 희게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끈적한 기름처럼 얽힌 채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기사단의 노괴···!]

본능적인 두려움이 용의 심장을 죄어온다. 용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미궁의 악마들이 균열을 쉽사리 넘보지 못하는 이유이자, 그의 주군인 청린마저도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초인.

같은 주군의 휘하에 있던 푸른 비늘의 동족을, 지난 이백 년간 무려 셋이나 살해한 학살자라는 것을.

"댈런 같은 신성이 용살자의 영예를 가질 기회를 빼앗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이 도마뱀을 떨어뜨린 건 어디까지나 당신이시니까요. 저는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약간의 도움만 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 에드거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용살자의 영예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저거 경험치 스틸 안 하겠다는 소리지?

"마음에 드는군."

대답을 듣자 검을 들어올리는 손길. 초점 없는 푸른 눈동자 한가운데, 흰 불꽃이 넘실거린다.

근육질의 오른팔에 빼곡하게 새겨진 신성 문신이 빛을 발했다.

전신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신성력과, 그 주위로 일그러지는 마력의 흐름.

스으으으―

어깨 위로 내뻗은 검신을 타고, 액체 같은 백색 불길이 하늘을 향해 스며들어간다.

검끝에서 흘러나와 화창한 봄철의 청명한 하늘 위로 퍼져나가는 작은 불꽃 방울들.

마치 공원의 분수를 느리게 재생시키는 것만 같은 광경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콰직!

하늘에 금이 간다.

그 순간 푸른 비늘 아룡, 옥시키루스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공간을 넘어가는 게 불가능해지고, 스스로의 기척을 공간의 틈 사이에 감춰낼 수도 없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새겨진 힘은 그대로이되, 그 힘이 현실로 뻗어나가는 게 뭔가에 막혀 봉쇄된 감각.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용이 울부짖었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역시 기사단장이군.'

에드거 라인하르트.

이 땅에서 악마에게 유혹당하거나 의지가 꺾일 여지 없이, 드물게 온전히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NPC 중 하나.

이백 년 이상 성기사단을 이끌어온 이 초인이, 이미 지난한 시간 이전에 영역을 이뤄낸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킬의 형태가 아니기에 플레이어는 습득할 수 없는, 그의 심상에서 기반한 영역의 힘.

그 힘 중의 하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엽마구속진(獵魔拘束陣)」'

치명상을 입은 악마가, 지옥문을 열고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해 빚어낸 기술.

신성력과 심상의 힘으로 거대한 결계를 구축해, 그 안에서의 공간 전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능력이었다.

저벅.

댈런은 성큼 걸어나섰다.

다 차려진 밥상.

잘 지어서 반찬과 함께 밥숟가락에 올려주기까지 한 걸, 씹어 삼키지도 못한다면 말이 안 되겠지.

[――!]

다가오는 전사를 본 용이 전성을 쥐어짠다. 토해내듯이 내뱉은 주문에 다시 한 번 결정의 구체들이 만들어졌다.

이제 거의 열 가까이가 되어, 눈앞의 적을 향해 쏘아지는 결정 마탄들.

댈런은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갈 뿐이었다.

스릉! 핑―

그 사이.

허리춤에서 스스로 뽑혀나온 단검이, 현란한 검로를 그리며 마탄들을 쳐낸다.

그저 맞닿았을 뿐임에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드는 결정 마탄들.

B등급 스킬 레레도나라의 비검과, 마법에 한해 천적이나 다름없는 암월의 주문살해자가 함께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콰직!

눈 깜짝할 사이에 마탄을 죄다 소멸시키고, 용의 날개 피막을 꿰뚫고 날아오른 단검.

[크어어어!]

순간적으로나마 주문이 꼬여버린 용은, 다급하게 최후의 수단을 써야만 했다.

[녹아버려라, 버러지 같은 것!]

벌린 아가리 안쪽.

목구멍에서부터 일렁이는 푸른 기운.

용의 숨결을 눈앞에 둔 댈런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꽈앙―!

자리를 박찬 그의 신형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용을 향해 날아든다.

화륵!

토해지는 숨결을 정면으로 맞이하며, 전신에 화염의 갑주를 둘러내는 댈런.

숨결을 피하지 않은 건, 어쩌면 강력한 육신에서 비롯된 호승심 때문일까.

혹은 초인이라면 으레 가지게 되는,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오래 전 모니터 너머에서 온갖 스킬과 수치들을 분석하고 시험해보던 아저씨의 습관이, 세계를 건너온 지금까지도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관 없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건 이 숨결을 뚫고, 용의 머리를 잘라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전의.

그리고 그에게 아가리를 들이미는 종말 역시,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였으니.

쿠과과과―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회오리가 검신을 뒤덮고, 그대로 용의 숨결을 정면에서부터 갈라낸다.

힘과 힘이 충돌하는 여파가, 어마어마한 물리적인 충격으로 주변 일대를 휩쓴다.

[크윽···!]

일순 휘청거리는 용의 머리. 댈런이 받은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피부와 근육을 찢어발기는 숨결의 여파와, 그의 전진을 방해하는 압력.

치이이이···!

그러나 줄기줄기 증기를 흘리면서도 발끝에 마력을 모아내 허공을 연신 걷어차고, 검끝의 회오리를 더 거칠게 몰아치며 나아간다.

꽈과과광―!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수 초.

그 끝에 숨결을 갈라낸 성검이, 용의 주둥이를 아래에서 위로 단박에 쪼개버리고.

[아, 아니···커어···!]

머리가 두 쪽이 난 채, 고통스런 전음을 흘리는 용을 향해서.

쿠르릉······.

언제 몰려들었는지 봄철 태양을 가려버린 먹구름으로부터, 거대한 한 줄기 벼락이 내리쳤다.

번쩍―!

성검이 내리긋는 결을 따라.

하늘에서 땅을 향해 내리꽂는 한 줄기 빛의 선.

신이 구름 위에서 그어내린 칼날과도 같은 궤적의 끝에서.

용의 목이 잘렸다.

추적(1)

"커헉!"

에버로크는 가까스로 숨을 토했다. 그는 컥컥 기침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친 돌바닥. 어둡고 차가운 공간. 손으로 주변을 더듬던 그는 신성 문신을 사용해 감각을 끌어올렸다.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깃들고, 칠흑 같은 어둠이 조금이나마 밝아져 보였다.

"···동굴인가."

군데군데 돋아난 종유석과 석순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천장이 수십 미터 높이인 거대한 동굴이었다.

"여긴 어디지?"

갑자기 동굴이라니. 에버로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성검 든 야만인과 싸우던 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치열한 공방 끝, 놈의 강력한 일격을 맞고 그는 부상당했었다.

다행히 성검의 능력으로 그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낸 찰나, 등 뒤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한.

'그놈이 날 여기로 날려버렸다.'

반사적으로 신성력을 끌어모아 저항했지만, 강력한 힘 앞에서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에버로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신성 문신으로 시야를 밝혔음에도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거대한 동굴은 그 크기 만큼이나 깊이도 깊은지,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뒤덮여 있었다.

"흐흐, 이제는 이런 어둠마저 이겨낼 수 없는 건가."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온다.

전성기 때는 악마의 주문이 빚어낸 어둠도 꿰뚫어보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동굴의 어둠에도 눈이 멀어버리는 신세.

소실된 신성력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흐, 흐흐."

언제부터였을까.

기사단장 다음 가던 그의 신성력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던 건.

성물을 대가로 재의 마녀와 처음 거래를 맺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기사단의 규율을 어기고 사교도들에게 별점을 배웠을 때였을까.

그 시작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특정 사건을 겪을 때마다, 그의 신성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가는 것을 말이다.

성기사 바렛에게 성검을 쥐어주고 골라캅에게 죽도록 유도했을 때, 그는 신성 문신 중 특별한 비의에 해당하는 몇 개를 사용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특임대와 성전사들을 세뇌해 반란을 일으키자, 성검의 능력 중 절반 가까이가 봉인되어버렸다.

마치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며, 신이 직접 내리는 경고와도 같은 현상들.

하지만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에버로크는 길을 돌이킬 수 없었다.

"흐흐,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신을 버린 게 아니라, 신이 나를 버린 것을.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에버로크는 고개를 휘휘 저어댔다. 반쯤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며 쥐었다 폈다 하는 손아귀.

성검 든 야만인 전사와의 격전 이후, 그의 신성력은 전에 없을 정도로 소실되었다.

이제 성검을 제외한 역량은 고위 성기사 수준밖에 되지 않을 지경.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성검의 주인 자격마저도 빼앗길 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쓰잘데기 없는 장기말이로구나.]

쿵.

나직한 발소리가 동굴 벽면을 울린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님에도, 공기를 짓누르는 기세.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려는 턱을 억지로 악물고서, 에버로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너를 구하기 위해 옥시키루스가 죽었다.]

다시 한 번 동굴을 울리는 전성.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한 에버로크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상대방의 체구는 자신보다 작았다. 기껏해야 성인 여성의 평균 키 정도 될까.

길게 늘어뜨린 탁한 청백색 머리칼과, 가늘고 긴 팔다리에 창백하다시피 한 미형의 얼굴.

그러나 세로 길게 찢어져 번뜩이는 노란 눈은, 그 가녀린 몸이 그녀의 본신이 아님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비루한 장기말 하나와 맞바꾸기엔 아까운 녀석이었지. 마녀를 통해 에낙사구스와 맺은 계약만 아니었더라도, 그가 너를 구하러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처, 청린용. 테데라 리울라크···."

[언제 내 이름을 입에 담아도 된다 허락했지?]

구우우우―

반전되는 분위기.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살기로 전환되어 피부를 찌른다.

마력 한 줌 움직이지 않았으나, 의지만으로 생명체를 압사시킬 존재의 격.

"흡···!"

에버로크는 황급히 성검을 세워들고선, 청백색의 신성력을 몸 주위에 둘렀다.

그럼에도 그는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눈과 입, 귀와 코에서 검게 죽은 핏불기가 흘러내린다.

그걸 본 여인이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중얼거렸다.

[흠. 다 낡아빠진 신의 종복치곤 꽤 괜찮은 기개로구나.]

"커허억! 컥···흐으······."

[인정하지. 이번에는 마녀의 안목이 썩 나쁘지 않았구나. 하긴 그 정도 능력이 되니 죽음에서 살아 돌아올 기회를 얻었겠지.]

전신을 짓누르던 살기가 사라졌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존재감은 어디로 간 것인지, 처음 동굴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고요해진 공기.

[이제 가거라. 나는 알을 품어야 할 시간이니. 계약대로 네게는 비루한 옛 힘을 버리고 새 힘을 얻을 기회를 주겠다. 내 종자들이 너를 안내해줄 것이야.]

여인은 등을 돌렸다. 그녀는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을 향해, 에버로크는 비릿한 혈향 섞인 숨을 토해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마녀···라펠리가 살아 있었습니까?"

[음?]

여인이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감정 없는 눈으로 성기사를 쳐다봤다.

[죽었다.]

"···역시."

[하지만 에낙사구스가 지옥으로 떨어지던 그 영혼을 받아갔지.]

바닥을 응시하던 성기사의 눈이 거칠게 요동했다. 여인은 슬며시 웃었다.

미색의 얼굴임에도, 아름답다기보단 잔혹하다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는 버무리고 장난질치는 걸 좋아하니, 마녀의 영혼 역시 솥구덩이에서 뭔가 새로운 걸로 만들어지겠구나.]

아하하하.

여인의 모습이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작은 웃음만이 남아 동굴에 메아리쳤다.

***

치이이이······.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수증기와 함께 비강에 쌓인 핏물이 쫙 뿜어져나왔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증기를 보며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슨 증기기관차 토*스인가? 아니면 쿠*밥솥?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거리고 있자니, 증기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천천히 검을 꽂아넣고 내미는 오른손.

반쯤 녹았다 굳은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댈런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보시다시피."

씩 웃으며 건넨 대답에 증기가 후욱 뿜어진다. 기사단장 에드거는 그걸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바라봤다기보단 감각으로 느꼈다 표현하는 게 맞을 테였다. 기사단장의 푸른 눈은 초점이 없었으니까.

"용의 피라니. 나름 오래 살았다 생각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특히나 화룡의 피는 인간이 받아들이기 가장 어렵다고 알려져 있죠."

그런가? 이런 류의 설정에는 약한 댈런은 턱을 긁적일 뿐이었다.

그동안 에드거는 목이 잘린 용 시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왈칵이며 피를 뿜어대는 목의 단면. 부릅뜬 채 굳어버린 노란 눈동자.

성소 안에서 모든 이를 압도하던 존재감은 어디 가고, 뜨뜻한 김을 피워내는 용의 모습을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의뢰를 완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살자 댈런."

체력을 많이 소진하셨을 테니 잠시 쉬십시오. 그렇게 덧붙인 에드거는 곧 자리를 떴다.

제 3성소는 개판 오분전이었다.

반역을 저질렀던 특임대는 세뇌가 풀리며 혼란에 빠졌고, 특임대가 무력화된 틈을 타 진입해버린 기사단 병력에 의해 그 혼란과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데없이 등장한 용에 의해, 성소의 서쪽 성벽 주변은 그야말로 박살이 난 상태.

반역의 주체인 부단장은 아예 자취조차 감춰버렸으니, 기사단장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

스릉―

에드거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고 난 뒤.

댈런은 땅바닥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선 용의 머리 곁에 널브러진, 갈기갈기 찢겨 속이 다 드러난 잿빛 시체에 손을 내밀었다.

[푸른 비늘 아룡에게 먹힌 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1, 마력 +1]

시체를 회수할 때마다 전신에 충만하게 깃드는 고양감.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능력의 증가가 느껴진다는 건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잠시 그 고양감을 음미한 댈런은, 이내 성검을 들고 용의 몸통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는 머지않아 그 가슴팍 깊은 곳에서 사람 상반신만 한 결정을 꺼내들었다.

두근. 두근.

몸에서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느리게 맥동하는 결정 덩어리.

아룡의 육신 중 유일하게 신비의 산물인 부위, 용의 심장이었다.

'잃어버리면 죽을 줄 알아라.'

[켁! 갑자기 어디서 날개 달린 도마뱀 심장을 가져오셔서···!]

아르보르의 아공간에 용심장을 던져놓은 댈런은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 저주의 핵을 소멸시키고 뻗어있던 악마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넵.]

***

댈런은 곧장 성소 안쪽으로 향했다.

성소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상자를 수습하는 기사단원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댈런의 덩치와 이곳에 몇 없는 외부인이라는 점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만 외부인이 기사단의 주요 무기고인 성소 안을 활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단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용기와 힘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히려 열에 한둘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하늘에서 용에 맞서 벌이던 싸움은 대부분의 기사단원들이 목격한 바.

하늘을 날며 용을 추락시킨 전사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해도, 그가 들고 있던 푸른 검신의 성검은 다들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단의 무기고를 털던 도둑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댈런이 찾아간 곳은, 성소 안의 수많은 무기고 중 하나의 저 안쪽 구석.

단검으로 등을 몇 번이나 찔려 죽은 시체가, 잿빛 음영의 형태로 거기 남아있었다.

[성기사단의 무기고를 털던 도둑의 시체]

- 성기사단의 성물을 탐낸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도둑의 시체다. 모래바람 왕조의 지하 유적을 통해 무기고에 잠입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탈출 직전에 동료 도둑에게 맹독 바른 단검으로 등을 찔렸다. '성물로 세계를 구해야 한다니. 도둑 주제에 대의를 외치는 너 같은 새끼랑은 오래 붙어먹을 수 없어.' 단검에 묻은 맹독으로 죽어가는 도둑에게, 배신한 동료가 마지막으로 속삭인 말이었다.

"쯧."

[성기사단의 무기고를 털던 도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작은 노파 올가의 투명 망토]

그렇게 성소의 시체까지 회수한 그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니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체력 수치가 어느 이상 다다른 뒤에는 느껴본 적 없는 탈력감.

근 며칠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몇 번의 치열한 전투를 거쳤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기사단 특임대의 습격을 받은 뒤, 바로 작전에 투입되어 지하 유적 자체와 맞서 싸우고.

묘실의 수호자를 쓰러뜨리자마자 한참을 길을 찾아 헤멘 끝에, 결국 유적의 천장을 죄다 부수고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 고생 끝에 일행에 합류하고서도 끝이 아니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 에버로크와 검을 맞대고, 끝내 푸른 비늘 아룡 옥시키루스의 목을 자르기까지 했으니.

'이러고도 안 지치면 사람이 아니겠군.'

댈런은 실소를 머금은 채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나저나 용살자라.'

나쁘지 않은 이명이었다. 피식 웃으며 그 단어를 되뇌이던 중, 문득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머나먼 대륙 중앙의 미궁도시. 청동 구역의 외곽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정보상.

마력석으로 운치 있는 분위기를 빚어내는 술집과, 그 뒷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은한 차향 가득한 사무실에서 나눴던 이야기.

'말만 들으면 무슨 용이라도 사냥할 전사라니까.'

납치당한 원로 마법사의 제자를 구하는 지명 의뢰를 받고서, 퀴퀴한 산책 한 번 하고 오겠다는 그를 보며 시에나가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물론 당시의 댈런 자신마저도, 몇 달이 지나 그 농담이 진짜가 될 줄은 몰랐었지.

고작 몇 달만에 얻어낸 용살자라는 이명은, 지난 시간들의 무게를 새삼 실감나게 했다.

그 시간들 속, 종말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줄다리기가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도.

'이번 의뢰가 끝나고 나면 미궁도시로 돌아가야겠군. 전략을 조금 확장시켜야겠어.'

종말의 추격은 치열하고도 집요했다.

추가 능력치와 계승자 옵션도 모자라, 가능성을 실체화하는 영역의 힘까지 얻었음에도 그 추격은 때때로 위협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위협에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에게 이빨을 들이미는 종말의 하수인들은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날 테니까.

다만 그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몸뚱이가 하나뿐인만큼, 그가 없는 곳에서도 종말을 저지할 세력이 필요했다.

'팔시온으로 돌아가면 시에나와 이야기해봐야겠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전략과 계획의 방향을 하나씩 세워나가며, 댈런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항거할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다행히 이곳은 기사단의 성소였다.

반란군의 세뇌는 풀렸고, 단장이 이끄는 기사단의 병력은 금방 그 혼란을 정리할 테였다.

무기고를 점검하다보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겠지. 눈을 뜨면 침대로 옮겨져 있을 것이다.

그의 제어를 떠난 의식의 흐름 속, 어느새 루시아가 요리한 용 꼬리에까지 생각이 닿을 즈음. 댈런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눈을 뜨자마자 듣게 된 것은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가 부단장에 의해 도난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추적(2)

찌익―

부드럽게 찢어지는 살결. 육즙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고기와 양념의 풍성한 향취를 토해냈다.

큼직하게 뜯어낸 고깃덩이를 한 입에 넣고 씹는 순간, 입 안에서 부드럽게 터지는 풍미.

어린아이도 나이프 없이 뜯을 정도로 부드러운 육질은, 그러면서도 미묘한 쫀득함이 베여있어 씹는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음."

댈런은 눈을 감았다. 진정한 진미를 먹었을 때는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맛있군."

어느새 입안에서 녹듯이 사라져버린 고기를 삼키고, 그는 테이블 위에 큼직하게 잘려 올라온 용 꼬리에 다시 손을 뻗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반면 정작 찬사를 받아 마땅할 요리사 본인은,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루시아는 못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 만에 드시는 음식인데, 죽이나 스튜부터 드셔야 하지 않을지···."

"고기가 마치 죽처럼 부드럽군. 그러면 된 거 아니겠소."

댈런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본인의 접시로 가져갔다.

그는 이미 앉은 자리에서 용 꼬리 고기 10인분 이상을 먹어치운 상태였다. 곁들인 포도주 두 병 반은 덤이었고.

"내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그것 참···사령술사들이나 할 법한 소리군요."

"숙성 중이라던 뒷다리는 언제 개시하실 생각이오?"

뜬금없는 소리로 화제를 돌린 댈런은, 주먹만 하게 뜯어낸 고기를 다시 입에 넣었다.

좍 터지는 육즙 사이로 은은하게 감도는 향신료와 포도주의 향미. 부드럽게 혀와 입천장에서 녹아내리는 육질.

난 이걸 먹기 위해 이 땅에 떨어진 거야. 투쁠 한우 저리 가라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맛이었다.

고기를 깨작이던 루시아의 눈빛이 미묘하게 싸늘해졌다.

"···이 정도면 눈앞의 고기가 에버로크의 행방보다 더 중요하다 해도 믿겠군요."

"음, 큼큼. 그건 아니지."

입안에 남은 걸 씹어 삼킨 댈런은 포도주로 입을 헹궜다. 진미를 계속 먹고자 한다면 요리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정리해보자면, 에버로크 글라스덴이 반란을 도모하면서 기사단의 중요한 보물을 훔쳐갔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 보물이라는 게 대체 뭐기에 그러시오?"

댈런은 손수건으로 입을 슥슥 닦고 물었다.

에버로크의 행방 자체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놈은 옥시키루스의 권능으로 공간을 뛰어넘었으니까.

보나마나 목 잘린 아룡의 주군이자, 균열 깊은 곳에 도사리는 늙은 진룡인 청린의 굴로 향했으리라.

다만 놈이 가져간 기사단의 보물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 에버로크가 반란을 일으키고 나면, 주인 없는 성검을 죄다 훔쳐가곤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놈이 일으킨 반란은 성검을 강탈할 틈도 없이 제압되었으니까.

댈런과 싸우면서 사용한 성검 한 자루야 같이 사라졌을 테지만, 그 정도로 루시아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 리는 없고.

'아니, 성검 한 자루만 해도 큰 일이기는 한 건가?'

생각해보면 자신이 본단까지 온 것도 결국 성검을 운반하는 의뢰를 받아서였다. 그것도 원래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힘을 죄다 잃어버린 성검.

고민을 이어가려던 찰나 루시아가 정답을 말해주었다.

"일단 기사단 내에서도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비밀에 부쳐진 사안입니다만, 에버로크와 함께 균열의 방벽 열쇠가 사라진 걸 확인했습니다."

그건 큰일인데. 댈런은 입으로 가져가던 고기 한 점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성기사단이 지키는 균열은, 미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이었다.

그리고 보통 계곡이라 하면 두 절벽을 옆에 두고, 머리 위 하늘이 뚫려있는 지형.

기사단이 몇 개의 요새로 균열의 입구를 막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것뿐이라면 마물들이 지상으로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날개 달린 마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날개가 없는 마물들도 절벽에 발톱을 박고 올라오면 될 테니까.

'그걸 막아주는 게 균열의 방벽.'

천 년도 더 전, 성기사단이 탄생했을 무렵.

악마들을 균열로 몰아넣은 대전쟁 이후, 초월자들은 균열을 틀어막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을 세웠다.

성기사단의 탄생과 본단 일대를 두른 장벽 산맥 역시 그 대책들 중 하나.

그리고 균열의 방벽은, 마물들이 머리 위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계곡 위쪽을 덮어놓은 보이지 않는 마력의 벽이었다.

"다행히 제 3성소에 보관되어있던 열쇠는 하나뿐이었습니다. 방벽을 약화시킬 순 있어도, 아예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거 다행이군."

"그마저도 원래는 단장의 권한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물건이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적잖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변절자의 손에 남아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루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반 남은 포도주 병을 슬슬 흔들며 말했다.

"도와주겠소."

"···예?"

"도와달라 말하려던 거 아니었소?"

"아닙니다. 아니 맞긴 합니다만. 그게···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번번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루시아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댈런은 낮게 웃고서 포도주를 병째 들이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풍부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도수보다는 상큼달달한 맛과 향이 부각된 술이었다.

성기사단의 본단이 있는 이 지역은 포도와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정작 주조공 본인들이 기사단의 일원이거나 그 친척들이기에, 술을 그렇게까지 즐기지 않는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었지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용병이오."

빈 병을 내려놓은 댈런이 입을 열었다.

"충분한 대가가 있다면 어디든 가는 사람이지."

"하지만 용살자가 용병으로 고용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루시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고용하고는 싶은데, 단가를 얼마로 매겨야 할 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이 소리지?

사실 댈런의 입장에서도 애매한 문제이긴 했다.

말로는 대가를 받고 움직인다고 했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가는 의뢰주가 내거는 금화가 아니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그의 초점은 돈보다는 여정에서 회수할 시체의 능력들, 그리고 종말의 술수에 훼방을 놓는 여정 그 자체에 맞춰져 있었다.

물론 그건 궤짝 단위의 금화가 아공간에 있으니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인 것도 맞았다.

'그렇다고 신성 문신이나 금화를 몇 줌 더 달라고 하기에는, 내 쪽이 수지가 안 맞는 장사고.'

자고로 몸값은 올릴 수 있을 때 올려두는 게 좋았다.

거기다 에버로크를 추적하려면 균열 안쪽, 그것도 성기사단의 방어선 너머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할 상황.

마물들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니, 이 정도 난이도의 의뢰라면 성물을 뜯어내도 할 말이 없으리라.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그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보상은 세 가지를 요구하겠소."

***

의뢰는 수락했지만,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옥시키루스는 에버로크를 균열 안, 진룡 청린의 굴로 피신시켰을 게 분명했다.

탐색자의 좌안 파편으로 놈을 추적해본 결과, 과연 그 방향은 균열 안쪽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균열 안, 그것도 기사단의 방어선 너머로 들어가는 건 미궁의 깊은 곳에 발을 디디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들어가고자 하는 건 댈런이나 기사단 측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푹 쉬고 일어난 뒤, 댈런은 가장 먼저 기사단장 에드거를 찾아갔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신성 문신을 받기 위해서.

그가 받을 신성 문신은 총 셋이었다.

의뢰 보수로 두 개. 그리고 새로이 맡은 의뢰의 보수 겸 선수금이 하나.

한 번 문신을 새기면 사흘은 다른 문신을 새길 수 없었기에, 댈런은 대략 열흘에 걸쳐 시술을 받았다.

그 결과 그의 왼팔에는 총 세 개의 신성 문신이 새겨지게 되었다.

개중 둘은 어깨의 저주막이의 인장 바로 아래에 위치했고, 나머지 하나는 왼쪽 손등 위에 자리잡았다.

"다 끝났습니다. 앞서 어깨에 새겨드린 두 신성 문신과 마찬가지로, 며칠 안 가서 피부와 동화될 겁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시술로 손등에 마지막 문신을 새겨낸 뒤, 에드거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신성 문신을 다루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신성력만이 아니라 오랜 수련 역시 필요합니다. 신이 내리시는 힘을 가볍게 보지 마시길."

"알겠소."

에드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통증이 있으면 먹으라며, 새끼손톱만 한 환약 몇 개를 챙겨주고 방을 나섰다.

에버로크의 반란이 진압된 지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났지만, 성기사단 곳곳에는 내전으로 인한 혼란이 잔재해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신성 문신을 새길 때가 아니면, 이번 내전의 최대 공로자인 댈런조차 그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저나 신성력이라.'

댈런은 침대에 걸터앉아 턱을 긁적였다. 사실 기사단의 본단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균열 안의 시체를 회수해 신성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신성력 없이는 신성 문신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성검의 능력 역시 일부만 다룰 수 있었다.

어찌됐건 이번 의뢰 때문에라도 균열에 들어가게 됐으니, 겸사겸사 시체를 회수할 기회로 삼으면 되겠지.

치이이······.

댈런은 손등을 덮은 천을 걷어내고 거울 앞에 섰다. 왼쪽 손등은 끊임없이 증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상처를 회복하려는 용의 재생력과, 신성 문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신성력이 서로 반발하는 것.

다행히 에드거는 역사적으로 용의 피를 품은 인간들 중에도, 신성 문신을 성공적으로 받은 사례가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어깨에 새긴 두 문신이 잘 자리잡은 걸 보면 맞는 말인 듯했다.

하나는 완전히 피부와 동화되고 하나는 이제 흐릿한 흔적만 남았으나, 댈런의 내면은 어깨에서부터 연결된 미묘한 힘의 고리를 감지해내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받기는 했지만, 이번 의뢰에서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이번에 받은 신성 문신은 능력치를 올려주는 종류가 아니었다.

깊게 고민해본 결과 굳이 신성 문신이 아니더라도, 능력치를 올릴 방법은 많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댈런은 레벨업이나 시체 회수로 얻기는 힘든 종류의 능력을 택했다.

'먼 미래를 생각하긴 했지만, 균열에서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 의미도 있긴 했으니까.'

댈런은 왼팔 소매를 걷어내리며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

이름 : 댈런

레벨 : 15

[근력 : 34] [기량 : 25] [체력 : 30]

[감각 : 21] [지능 : 22] [마력 : 21]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

어느새 15에 도달한 레벨.

체력 수치는 용을 잡고 레벨업을 하며 올려, 마침내 두 번째로 30을 달성한 상태였다.

혹시나 저번처럼 몸이 터질 뻔하거나 하는 걸 대비해서, 댈런은 푹 쉰 다음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에서 능력치를 배분했다.

다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큰 변화는 없었다.

그저 숨이 좀 더 맑아진 것과, 몸이 눈에 띄게 가벼워진 느낌 정도.

'그리고 심장 박동이···뭔가 더 깊어진 느낌이다.'

곧바로 어떤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건, 아직 뚜렷한 심상이 댈런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용혈의 인자를 품고 맥동하는 심장은, 그 심상의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을 여지가 분명히 있었고.

[용혈의 재생 인자(C)]

- 용족의 피가 품은 수많은 특수 인자들 중, 재생 인자를 뽑아 인간에게 적용시킨 결과물. 불가해한 재생력은 용혈의 특성 중에도 가장 저급한 부류이지만, 필멸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소망하는 이능이기도 하다.

- 숙련도 90%

용혈의 재생 인자는 벌써 숙련도 90퍼센트에 육박해 있었다.

처음 획득한 C등급 스킬인 만큼, 동급의 다른 스킬들에 비해 압도적인 숙련도였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처음 백 퍼센트에 도달할 예정인 C등급 스킬.

영역의 힘이 가능성을 실체화하는 것이라면, 굳이 스킬이나 능력치의 분류에 얽메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경계에 다다른 두 힘을 놓고 깊은 상념에 빠진 댈런은, 여느 떄와 같이 자연스럽게 심상 너머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

일주일이 더 지났다. 단장과 성기사들의 노력 덕분에, 기사단은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댈런은 마침내 균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에버로크를 추적해 사로잡고, 그에게서 성검과 균열의 방벽 열쇠를 되찾는 건 기사단 입장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

그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기사단은 특별한 팀을 꾸렸다.

심문관들과 고위 성기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댈런과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 그리고 그의 제자가 함께하는 파티.

말 위에 앉아 균열 안으로 떠나며,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이 역시 이번에 의뢰를 맡으며 요구한 보상들 중 하나.

도끼날을 따라 흐릿하게 파형 무늬가 새겨진 이 손도끼는, 기사단의 무기고에 보관되어있던 성물 중 하나였다.

도끼머리에 올렸던 손을 자연스레 뒤로 빼, 가죽 주머니에 담긴 육포를 꺼내 질겅이는 댈런에게 고위 성기사 중 하나가 다가왔다.

반쯤 새서 회색 빛깔을 띄는 수염과,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한 기세가 느껴지는 눈빛.

명목상으로나마 일행의 리더이기도 한 중년의 사내는, 반백 년간 신의 검으로 살아왔다는 고위 성기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추적(3)

"미궁에 내려가신 경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년 성기사가 말했다. 댈런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명목상으로나마 일행의 리더인 그가 다가오기에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그냥 말 붙이러 온 모양이었다.

"아, 혹시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실 수 있으시겠군요. 고위 기사 마우그입니다."

"댈런이오."

"용살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루시아 경이 그러더군요. 댈런 경께서 미궁에 내려가자마자, 홀로 수천에 달하는 놀 거주지를 초토화시키셨다고."

"혼자는 아니었소. 루시아 본인도 함께했으니."

댈런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말을 받았다. 루시아가 숙성시킨 용 뒷다리살로 만든 육포였다.

오랜 시간 댈런과 함께해온 그녀는, 이번 의뢰에는 동참하지 않고 본단에 남기로 했다.

자신의 역량 부족이 댈런의 발목을 자꾸 잡는다나. 지난 몇 달간 충분히 실전을 경험했으니, 한동안은 본단에 남아 수련에 집중하겠다는 선택이었다.

거기에는 갓 성기사단에 훈련생으로 입단한 파른의 지도를 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성검을 회수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헌도를 인정받아, 루시아는 얼마 전 정식 성기사로 승급한 바.

그리고 정식 기사부터는 훈련생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시기가 적절하게 맞물린 셈이었다.

"물론 루시아 경도 미래가 기대되는 후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전략은 댈런 경의 깊은 통찰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정찰대를 궤멸시킨 후, 갑각늑대의 귀소본능을 이용해 거주지를 기습하셨다더군요."

마우그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댈런은 말없이 턱을 긁적였다. 이런 안면 없는 사이의 아부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그였다.

마우그는 그러고도 한동안 댈런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악마 골라캅을 소멸시키고 성검을 회수한 것이며, 재의 마녀를 쓰러뜨린 후 숲의 만드레이크를 불태워버린 일까지.

아마 새로이 탄생한 성검의 주인과 친분을 다지고 싶어, 지난 보름 사이에 열심히 알아보고 다녔으리라.

어째서인지 이 중년 성기사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루시아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크흠."

다만 어느 상인을 떠올리게 하는 마우그의 수다에도 한계는 있었다.

두어 시간 떠들고 나자 얼굴에 금칠할 소재가 다 떨어지기도 했고, 정작 당사자의 반응이 시큰둥했던 이유도 컸다.

그리고 그가 입을 다물고 나자 일행 사이에 별 말이 오가지 않았다.

제 3성소에서의 전투 이후 펠버는 어째서인지 극도로 말이 없어졌다. 토미 역시 제 스승이 침묵하니 비슷한 태도를 보일 따름이었고.

심문관이나 고위 기사들이 이따금씩 나누는 잡담을 제외하면, 미묘한 어색함이 옅게나마 깔린 침묵.

한동안 동일한 일행과 여행해온 댈런의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위기였다.

다그닥. 다그닥.

일행은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았다.

계곡의 깊이가 깊어지면서 양쪽 절벽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처음에는 마차 대여섯 대가 나란히 지나가기도 아슬아슬하던 너비는, 어느새 백여 미터에 가까워져 있었다.

'에스트라 강까지는 별다른 변화 없이 이렇게 계속 넓어지지.'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봤던 균열 깊은 곳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수 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떨어진, 십수 킬로미터 높이의 까마득한 절벽.

깊어질수록 절벽에 뚫린 수많은 동굴에서는 용암과 유독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미궁에서나 볼 법한 기이한 지형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심부에 다다르면 수 킬로미터 너비의 내리막길은 결국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미로처럼 얽혀들며, 미궁으로 내려가는 통로이자 미궁 그 자체의 일부로 변하게 된다.

'그 마경의 경계를 가르는 게 에스트라 강 하류.'

제국과 노리아 왕국의 국경선을 나타내는 에스트라 강의 끝자락은 균열에 닿아 있었다.

십수 킬로미터 높이에서 폭포로 떨어져 균열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며, 마물과 인간의 영역을 가르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되는 에스트라 강 하류.

일행의 일차 목적지는 그 드넓은 강 이쪽에 지어진, 본단 다음으로 거대한 기사단의 방어 거점.

'에스트라 요새'였다.

***

닷새 동안 일행은 두 개의 요새를 거쳤다.

기사단이 균열 안에 지어올린 요새는 총 네 개.

최전방 방어선인 에스트라 요새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중간 거점이자 보급고 역할이었다.

그렇게 닷새째 저녁.

세 번째 요새에 도착한 일행은 짐을 풀고 회의실에 모였다.

"이틀 뒤면 제 1 방어선, 에스트라 요새에 도착합니다."

마우그가 운을 띄웠다.

"아무래도 에스트라 요새에 도착한 뒤부터는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테니, 미리 이번 임무의 세부 전략을 되짚도록 하겠습니다."

촤륵.

마우그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기사단의 본단과 균열의 대략적인 모양새가 그려진 지도였다.

"배반자 에버로크가 숨었으리라 추정되는 곳은 이쪽입니다. 아직 기사단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마물의 영역이죠."

가죽장갑 낀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에스트라 강 건너편, 악마의 계곡이라 불리는 기사단의 영역 밖 마경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한 줄기로 쭉 이어져온 강 이쪽과는 달리, 악마의 계곡은 크고 작은 계곡 수십 갈래가 배배 꼬이고 뒤섞인 지형입니다. 누굴 추적하기는커녕 길이라도 잃지 않으면 다행인 곳이죠."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용병으로 참가하신 분들께서 저희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실 겁니다. 마우그는 덧붙였다.

"먼저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이신 펠버 경께서는 땅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지셨다 들었습니다."

"···인간과 달리 대지는 망각하지 않지. 에버로크가 발을 디뎠던 곳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놈이 거기서부터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낼 수 있네."

펠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정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지라, 간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확답을 들은 마우그는 이번에는 눈길을 돌려 댈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댈런 경께서는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유물을 가지고 계시다죠."

"여기 있소."

댈런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유리 구체를 꺼내들었다.

유리 구체 안의 푸른색 금속 화살표는, 이미 보름 전부터 미동도 없이 한 방향을 꼿꼿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탐색자의 좌안 파편이로군. 이젠 몇 남지 않았다 들었는데."

펠버가 흥미로운 눈길로 유리 구체를 바라봤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물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마우그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럼 추적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을 다시 확인했으니, 세부 작전을 논의하겠습니다."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마물의 계곡에 진입한 이후 기본적인 진형은 어떻게 할 것인지. 필요할 경우 조는 어떻게 나눌 것인지.

그밖에도 퇴각로를 확보할 방안이나, 최악의 상황에서 현지 보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자잘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런 자리는 오랜만이군.'

댈런은 테이블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미궁도시에서 역행의 사도들과 싸울 적, 비슷한 모습의 지휘관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더랬다.

다만 워낙 개판 오 분 전이어서 그가 직접 작전을 이끌어야 했던 당시와는 다르게, 베테랑 성기사들은 그의 개입 없이도 알아서 작전의 골자와 세부적인 사항들을 척척 결정해나갔다.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 자부하는 댈런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탄탄한 계획.

그 어떤 변수가 터진다 해도, 작전에 참가한 이들의 목숨 하나만큼은 살려서 돌아올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회의에서 한 발짝 물러난 채, 조언을 구하는 질문에만 대답해주기를 얼마나 했을까.

댈런은 불현듯 느껴지는 어떤 경각심에 고개를 돌렸다.

'···흠.'

아주 미세한, 그러나 쉬이 무시하기는 꺼림칙한 직감의 경고.

댈런은 잠시 눈을 감고 감각을 넓혀냈다.

발밑의 진동과 벽 사이의 수도관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물소리.

돌틈 사이로 스며드는 복잡하고 다양한 냄새들.

마력의 바람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변화들이 신경을 타고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 자극들을 버무리고 뒤섞은 두뇌가 내놓은 결과는, 이전보다 좀 더 또렷해진 경고였다.

이제는 정말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감각과 지능, 마력 수치의 연합은 이미 단순한 오감의 혼합이라는 틀을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톡. 톡.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끝만으로 떠들썩하던 회의장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은, 한평생 스스로를 갉고닦아온 전사이거나 마법사.

그 작은 손짓으로부터 시작된 미세한 공기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이는 없었다.

댈런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머지 계획은 조금 있다가 짜야 할 것 같소."

쾅!

그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로 들이닥친 성기사.

요새에 주둔하는 성기사들 중에도 꽤 직급이 높은 그는,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했다.

"회의를 방해해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성벽 위로 올라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명목적으로 일행의 책임자인 마우그가 물었다. 성기사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수천에 달하는 놀 대군이 이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

성벽 위.

제 2 방어선이라 불리는 이곳 성벽의 길이는, 말 그대로 방어선인만큼 계곡의 너비 그 자체와 일치했다.

어림잡아 삼 킬로미터 남짓 되는 드넓은 길이의 성벽.

허나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기껏해야 일천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마저도 대다수는 신성 문신의 힘을 다루는 성기사가 아닌 평범한 성전사들.

'주 방어선이 아닌, 보급고 역할의 요새니까 어쩔 수 없지. 성기사단이라고 병력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성벽을 따라 듬성듬성 늘어선 병력을 바라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기사단의 방어선 중 하나인만큼, 요새의 시설 자체는 설령 악마가 이끄는 군세가 쳐들어온다 해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단단히 방비된 시설만으로 부족한 병력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발리스타의 화살과 신성력 덧입힌 투석구가 풍족하다 해도, 정작 그걸 운용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큰 의미는 없었으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우그가 물었다. 그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놀 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은 짧게 답해주었다.

"감이오."

"대단하시오. 감으로 이천이나 되는 놀 군대를 예견하시다니. 아니, 삼천쯤 되려나."

"오천이 좀 넘는군."

댈런의 정정에 마우그는 한껏 눈을 찌푸리며 신성 문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저 어둠을 뚫고 그게 다 보이시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균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해는 빠르게 저물었다. 이곳 제 2 방어선쯤 되면 이른 저녁만 되어도 어두컴컴해질 정도.

거기다 양쪽으로 까마득하게 솟은 절벽은 달과 별의 빛마저도 대부분 가로막았기에, 같은 밤이라도 지상보다 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물론 댈런에게는 의미 없는 어둠이었지만.

"갑각늑대 기병 몇이 먼저 달려오는군. 푸른 깃발을 들고 있소."

"푸른 깃발? 청린의 군세요. 놈들이 사절을 보낸다!"

마우그가 소리쳤다.

그러자 요새의 지휘관이 뭐라뭐라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선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구르릉. 기기기긱.

도르래 달린 장치로 사선을 조정하는 몇몇 발리스타. 이미 장전된 대형 화살이 어둠 속에서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발짐승의 거친 발소리와 함께 놀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자신만만하게 성벽 밖에 피워놓은 화로들의 범위 안쪽까지 들어왔다.

끼익.

자연스럽게 시위를 당기는 궁수들. 쇠뇌를 든 사수들 역시 놀 기수들과 갑각늑대의 머리를 겨눴다.

팽팽한 긴장감 속.

기병들 사이에서 거대한 체구의 놀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놈이 주둥이를 열었다.

"으르릉! 성벽! 버리고 가라!"

오, 이놈도 말 할 줄 아는군.

미궁 속에서 한 판 붙었던 놀 전사장을 떠올리며,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저 개대가리들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백이면 백 초월적인 존재에게 힘을 하사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보통은 고위 악마나 악신들 중 하나. 지금 같은 경우에는 진룡에게 힘을 받았겠군.'

진룡쯤 되면 악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악마에게는 충분히 비벼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균열 심부의 지배자 중 하나인 청린이 옛 상처로 힘을 많이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중급 악마 정도의 급은 될 터.

어쨌든 저 놀이 청린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았다는 건, 진룡이 이 대대적인 침공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귀찮게 됐는데.'

사실 부단장 에버로크가 때 아닌 반란을 일으키고, 청린의 둥지로 도피하게 되면서 혹시나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긴 했었다.

그 상황이라는 게 바로 어미용, 청린이 직접 기사단을 침공하는 것.

문제라면 일반적인 보스몹들과는 달리, 수백 번의 플레이 중에서도 댈런이 청린을 직접 본 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것이었다.

'게임에서는 죽을 때까지 기사단을 침공한 적이 없었는데.'

사실 청린의 존재는 일종의 배경 설정과도 같았다.

성기사단과 오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고, 그러면서도 후대에 있을 침공을 위해 강력한 세력을 키워왔다는 식의 설정.

청린은 게임이 중반부에 치닫기도 전에 오랜 부상의 여파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어미의 힘과 세력을 이어받은 유일한 자식이, 후반부의 강력한 보스몹들 중 하나로 등장하게 되고.

'놈한테 잡아먹힌 시체들 중에···그 캐릭터도 있었지.'

최후반부의 초입까지 버틴, 댈런의 수백 회차 중에도 그리 많지 않은 결실들 중 하나.

"항복! 그러면 팔다리만 먹겠다! 으르르! 몸통이랑 머리는! 살려주겠다!"

한편 그가 청린의 자식에게 먹힌 캐릭터를 떠올리는 사이, 놀 대장은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기사단을 협박하고 있었다.

물론 기사단이 그런 협박에 굴할 이들은 아니었다. 지휘관이 나직하게 말했다.

"궁수. 저 놈을 죽여라. 마물과의 협상은 없다."

만천화우滿天火雨(1)

"궁수 1조, 발리스타 1조! 사격 개시! 기타 인원 대기!"

펄럭―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수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반짝이는 도료를 발라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잘 보이는 깃발.

성벽 위에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기수들은, 미리 약속된 움직임으로 깃발을 흔들어 기나긴 성벽 끝까지 신속하게 명령을 전달했다.

기기긱―

곧장 다시 조준되는 발리스타의 사선.

그리고 그보다 빠르게 정렬을 마친 궁수들의 활에서, 은박을 입힌 화살이 쏘아졌다.

피피피핑―

어둠 속.

쏘아진 화살들이 은색 선이 되어 어둠 속을 수놓는다.

시위가 놓아진 순간 날카롭게 감각이 돋아나고,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댈런은 볼 수 있었다.

횃불과 화로의 불그스름한 빛만이 주변을 밝히는 가운데, 사선의 교차점에 선 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것을.

그 일그러짐은 당혹감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비웃음에서 말미암은 표정이었다.

까가가가강!

놀의 팔이 순간 흐릿해졌다. 동시에 화살들이 튕겨나간다.

어둠 속을 수놓았던 은빛 선들은, 투박한 창대와 창날에 막혀 그 끝이 굴절되거나 꺾여 떨어졌다.

한낱 놀의 손아귀에서 펼쳐졌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기예.

기리릭― 철컹!

그리고 때마침 조준선 정렬을 마친 발리스타에서, 대형 화살이 쏘아졌다.

놀 대장은 이번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휘둘러진 창끝이 제 머리통만 한 화살촉에 닿는 순간, 놈의 이마에서 어떤 기이한 문자가 빛을 발했다.

우웅―

순식간에 놀 대장을 감싸는 푸른 방어막.

궤도가 비틀어진 거대 화살은, 그 반투명한 푸른 방어막에 막혀 놀의 털끝조차 스치지 못하고 빗겨나갔다.

콰가가각!

거대 화살이 지면을 긁고 지나간다.

단신으로 공성 병기를 막아내는 모습에, 성벽 위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놀 대장은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피부에 소름이 오도독 돋게 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게 만드는 울음소리였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그르렁거림에, 신성력이 거의 없는 성전사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궁수들은 뭘 하나! 적은 놀이다! 적장만 쓰러뜨리면 그만이다! 전원 조준!"

지휘관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활을 든 성전사들이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작게 떨리는 손아귀. 가까스로 당겨내는 활시위.

몇몇은 긴장한 나머지 화살을 떨어뜨리고, 멋모르고 시위를 놓쳐 힘없이 성벽 아래로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놀 대장은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놈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적의 사기를 꺾을 기회이리라.

놈은 길쭉한 주둥이를 벌려 다시금 외쳤다.

"으릉! 항복! 산다! 저항! 죽는···"

패래랙― 쨍그랑!

그 순간이었다.

빛의 원반이 어둠을 갈랐다.

좀 전에 쏘아진 발리스타의 배는 되는 속도로 날아간 원반은,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보호막을 깨뜨리고 놀 대장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컹···!"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넘어가는 놀 대장.

힘 없이 갑각늑대 위에서 미끄러지는 놈을 보며 댈런은 픽 웃었다.

경험치도 별로 안 주는 새끼가 말만 많았군.

"······."

"······."

도끼질 한 번에 방금까지의 압박감이 한순간에 씻겨나가고, 기묘한 침묵이 성벽 위와 놀 기병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지휘관을 돌아봤다. 그가 말했다.

"안 쏘시오?"

***

"···전원 발사!"

지휘관이 소리치쳤다. 깃발이 어둠을 가른다.

그 즉시 화살이 쏘아졌다. 활에서, 쇠뇌에서, 그리고 발리스타에서도.

쐐애애애―!

굵고 얇은 은빛 선들이 허공을 수놓는 가운데, 놀 대장과 함께 왔던 기병들은 황급히 늑대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깨갱! 깨개갱!

등판에 활대를 꽂고 하나둘씩 쓰러지는 놀 기병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갑각늑대의 가죽은 쇠뇌 화살 정도는 되어야 뚫을 수 있는 단단한 갑주였고, 놀 기병들 역시 무겁지만 튼튼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서른 남짓 되던 호위 기병들 중, 화살비에 쓰러진 건 반 남짓뿐이었다.

나머지 놀 기병들은 순식간에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도망쳤다.

그때였다.

콰직!

놀 대장의 미간에 박혔던 도끼가, 스스로 두개골을 쪼개고 뽑혀나온 것은.

우웅···.

파르르 떨며 허공에서 멈춰선 도끼.

군데군데 깔린 화롯불 사이, 불그스름하게 번쩍이는 도끼날의 물결 무늬를 응시하며.

"레니아― 바사크."

댈런은 나직하게 주문을 외었다.

파직!

주문과 함께 들어올린 손.

그 펼친 손바닥 안쪽에서, 새파란 전격의 가닥들이 손가락을 타고 형형이 일어난다.

전격의 가닥들은 이내 저 멀리 떨어진 도끼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날을 따라 음각된 물결 무늬에서부터 시작되어, 순식간에 도끼날 표면을 덮어버리는 푸른 스파크들.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가진 진가는, 단순히 손을 대지 않고 날붙이를 움직일 수 있는 게 끝이 아니지.'

단순한 비검술이라면 B등급을 받지 못했을 테다.

레레도나라의 비검은 천 년도 더 전, 이름난 엘프 검사가 창시해낸 검술.

검사인 동시에 뛰어난 마법사였던 그녀는, 어느 날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고 한다.

자신의 손끝에서 쏟아내는 화염과 번개를, 검에 덧입혀 휘두를 방법은 없을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주문을 입힌 병기로 원거리에서 적을 격살할 수는 없을지.

'그리고 그녀가 수십 년에 달하는 연구와 정진 끝에 개발해낸 검술이, 바로 레레도나라의 비검.'

의지만으로 날붙이를 제어하고 움직여낼 수 있는 비검임과 더불어.

그렇게 날아다니는 무기에, 스스로의 주문을 덧입힐 수 있는 마검사에게 특화된 스킬.

처음으로 얻어낸 B등급 스킬에 대해 짧은 소고를 마친 댈런은, 번뜩이는 전격을 향해 좀 더 의지를 불어넣었다.

마침 의뢰 보수로 그가 고른 손도끼의 능력은,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가진 힘과 딱 어울렸다.

성검만큼은 아니라도 어지간한 성유물 수준으로 단단한 내구도.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힘을 거의 배 가까이 증폭시키는 능력까지.

파지지지직―

쏘아지는 번개 주문이 새파란 전격의 그물이 되어, 도끼 전체를 집어삼키며 하나의 전격 덩어리로 만들어갈 즈음.

댈런은 손끝을 까딱 움직였다.

콰지지지―

손도끼가 쏘아졌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시위에 걸렸다 발사된 듯한 모양새였다.

그 속도와 회전력에 의해 마치 푸른 빛을 두른 원반처럼 보이게 된 손도끼는, 화살비에서 살아남은 놀 기병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쇠뇌에서 쏘아낸 화살 이상.

도주하는 행렬의 후미까지 닿는 건 한순간이었다.

츠각!

한 놈의 머리가 떨어진다.

댈런은 손을 다시 까딱였다.

촤악!

다른 놈의 옆구리를 길게 갈라낸 도끼가, 뿜어지는 전격으로 그 안의 내장을 다 태워버리며 다음 희생자를 물색했다.

스각! 콰직! 지지직!

살아있는 것처럼 기병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새파란 원반.

형형하게 뿜어지는 전격과 희생자들이 쏟아내는 핏줄기가, 손도끼가 스치고 지나간 궤적을 따라 길게 뒤섞였다.

그건 마치 검푸른 뱀이 어둠 속을 훑고 지나가며, 날카로운 이빨로 기병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독사가 열 남짓 되는 놀들을 죽이는 데까지는,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깨갱―!

마지막 먹잇감이 날카로운 이빨에서 뿜어지는 전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댈런은 아직까지도 푸른 전격이 남아 파직거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피에 취한 듯 적들의 숨통을 끊어놓던 도끼가, 그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반전해 돌아왔다.

패래래래랙― 착!

주인의 손아귀에 빨려들어가듯 안착하는 손도끼.

"······."

성벽 위의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댈런을 돌아봤다.

그건 성전사들뿐 아니라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도끼에 붙은 살점과 피를 툭툭 털어낸 댈런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적진을 바라봤다.

그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지휘관과 그 호위들마저 죽었으니, 놀의 습성대로라면 당연히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야 할 터.

그러나 놈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때 댈런의 눈에 전열 앞으로 나온 놀 몇 마리가, 큼직한 뿔나팔을 꺼내 입에 가져다대는 게 보였다.

뿌우우―

균열 전체를 메아리치는 나팔 소리.

그 기나긴 신호가 끝나자마자.

크어어어어!

원래라면 물러나야 마땅할 놀 군세가 울부짖으며, 전력을 다해 성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전원 대기!"

기리릭― 구그그긍.

재장전된 발리스타가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돌덩이를 쏘아낼 준비를 마친 투석기도 대기중이었다.

궁수들이 다시금 시위를 당기고, 쇠뇌수들은 어깨받이에 상체를 밀착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으르릉! 그아아아!

긴장된 호흡들과 미세하게 요동하는 시선들.

그 시선이 바라보는 건, 거대한 계곡을 가득 메우고 달려오는 놀의 군세였다.

오천이 넘어서는 놀 군세는 말 그대로 개미떼처럼 보였다.

그것도 진룡의 힘을 받아 순수한 근력만으로 성인 남성의 허리를 꺾어버리고, 평범한 경비병 몇 명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체고 이 미터짜리 개미떼.

심지어 놈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들고 있는 무기들에서부터 공성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횃불 든 놈, 톱날 같은 칼을 뽑아든 놈, 긴 사다리나 갈고리 밧줄을 어깨에 걸친 놈, 갑각늑대에 올라타거나 큼직한 활을 꼬나쥔 놈, 등등.

가지각색의 무기와 공성 도구를 가지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품질의 갑옷을 걸친 놀 전사들.

그들에게는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살기와 식탐으로 번뜩이는 눈빛.

그건 성벽 뒤에 숨은 먹잇감들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동자였다.

'역시 가짜였군.'

물론 댈런은 그 살기등등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턱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그의 도끼에 단명한 놀 대장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비록 한 방에 가긴 했어도 놈은 충분히 강했다. 무력만 따지자면 미궁에서 붙었던 놀 전사장 바르구프 이상이야.'

놈이 도끼질 한 번에 죽은 건, 그만큼 근 몇 달 동안 댈런의 무력과 무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기 때문.

결코 놈의 실력이나, 진룡에게 하사받은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놈이 진짜 대장이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이토록 일사불란한 군세의 움직임을 보면, 진짜 놀 대장은 저 무리 안쪽 어딘가에 있을 테였다.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가짜 대장, 혹은 무리의 부 지휘관 정도 되는 놈이 발리스타를 어려움 없이 막아낼 정도다.

그렇다면 이 무리를 이끄는 진짜 지휘관은, 과연 얼마나 강력한 무력의 소유자일까.

댈런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그건 놈이 줄 경험치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어쩌면 싸움 자체를 향한 기대감일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 웃고 계시다니. 댈런 경께서는 정말 타고난 전사시로군요."

만천화우滿天火雨(2)

말아올려진 입꼬리를 본 마우그가 말했다. 댈런은 말없이 낮게 웃었다.

이 육체를 입게 된 이후로, 그의 호승심이 남들과 같지 않다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댈런은 이 감정, 혹은 이 감각이 그리 싫지 않았다.

싸움을 앞두고 듫끓는 피와 흥분감은, 그가 이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도 흔한 말로 그저 숨만 쉬는,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이 아닌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건 무기력한 배불뚝이 아저씨였던 시절의 과거를 뇌리에서 지워버릴 만큼 강력한 자극이었다.

'더군다나 어차피 물러날 길 없는 신세인걸.'

모니터 너머에서 이 세계를 수백 번이나 경험해온 그는, 대륙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종말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수백 번에 가까운 삶에서, 이 정도면 종말을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 희망했던 회차가 없던 게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이 극심해질수록, 종말 역시 전에 없는 맹렬한 기세로 그를 추격해 끝내 앞질러냈을 뿐.

그리고 마지막 삶을 시작하게 된 지금.

댈런이 생각하는 대처법은 간단했다.

지나온 길들에서 비롯된 지식들과, 새 육신에 힘입어 또렷해진 의지.

이 정도 조건을 갖춰낸 이상, 예전처럼 쫓길 생각은 없다.

단순한 생존이든 지구로의 귀환이든,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어디를 바라보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것이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종말에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 한 번도 이겨낸 적 없는 놈을, 철저하게 깨부숴야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즐겨야지. 그렇지 않겠소?"

"···거참, 성검의 인정을 받은 분다운 대답이시로군요."

너무나 이상적인 그의 대답에, 마우그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댈런은 한 번 더 소리내어 웃으며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 군세는 시시각각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건 놀 기병들이었다.

단창을 꼬나쥔 기병들은, 보통의 군마보다도 월등하게 빠른 속도로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사선에 가장 먼저 노출된 것 역시 놈들이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 성벽 위.

놀 기병대가 지면에 깔린 화로의 범위 안에 들어온 순간.

침묵을 깨고,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다.

"발리스타! 발사!"

기릭― 철컹!

수십 문에 달하는 발리스타가 일제히 사격을 가한다.

거대한 화살들이 굵은 은빛 직선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건 마치 성벽 아래로 은빛 소나기가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콰과과광!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속도를 높이는 기병대의 진형 한가운데.

굵은 소나기가 늑대 무리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지면을 갈아엎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순간적으로 뿌옇게 시계를 가렸다.

연막 속 들려오는 소음과 짐승의 비명들.

곧이어 선두의 놀 기병들이 그 구름을 헤치고 빠져나왔다. 지휘관이 다시금 소리쳤다.

"궁수! 발사!"

굵은 소나기의 뒤를 이어 가느다란 장맛비가 쏟아진다.

거대 화살을 피해낸 놀 기병들 앞에 닥친 건, 수백에 달하는 화살이 이뤄낸 넓은 화망이었다.

퍼버버벅!

고슴도치가 된 놀들이 고꾸라진다.

발리스타의 일제 사격으로 한 차례 타격을 입은 기병들에게, 이어지는 은화살 세례는 치명적이었다.

고작 두 차례의 일제 사격.

그것만으로도 백 남짓 되는 놀 기병대는 절반 가까이가 시체가 되었다.

나머지 절반 중에서도 크고 작은 상처를 안 입은 놈이 없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노란 눈동자는 흉포함을 잃지 않았다.

애당초 놀 종족을 퇴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었으니까.

무리 전체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던가.

아니면 놈들을 이끄는 지휘관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

두두두두―

생존한 놀 기병들은 마지막 투지를 불태우듯 순식간에 성벽에 접근했다.

놈들이 꼬나쥐고 있던 단창을 들어올렸다. 지면에 깔린 화롯불에 붉게 번쩍이는 창날들.

쐐애애애―

그리고 그 번쩍임은 이내 아래에서 위로 쏟아지는 수십 가닥의 붉은 소나기가 되어 성벽을 덮쳐들었다.

"커헉!"

"끄아아악!"

투창 세례에 성전사들이 쓰러진다.

투박한 창끝에 판금과 사슬이 꿰뚫리고, 성벽에 맞은 투창은 튕겨나가기는커녕 돌 자체에 박혀들었다.

과연 진룡에게 조금씩이라도 힘을 하사받은 놀 전사의 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들 딴에는 단창이라고 하나, 사람에게는 평범한 창이나 다름없는 크기의 투창을 성벽 위로 날려보낼 정도였으니.

"발사!"

십수 명에 달하는 성전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성전사들이 시위를 다시 메기고 화살을 쏘아냈다.

재차 가해진 사격에 놀 기병들이 고꾸라지고, 놈들은 곁에서 아군이 죽어감에도 아랑곳 않고 단창을 던져댔다.

두두두두―

곧이어 전멸에 가까워진 첫 기병대를 뒤이어, 또 다른 백여 마리의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다시금 아래로 쏟아지는 굵은 소나기와 가느다란 장맛비. 역류하는 단창 세례의 번뜩임들.

"재장전! 재장전! 쉬지 말고 사격해라! 놈들을 고깃덩이로 만들어라!"

"투석기는 본대를 노린다! 전원 발사!"

마침내 뒤따르던 본대가 투석기의 범위 안에 들어오고, 투창 세례가 닿지 않는 후방에서 커다란 돌덩이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밧줄의 거친 마찰음과 함께 날아가, 어둠 속에서 포물선을 그리는 거대한 사람 크기만 한 석재들.

꽈과광! 꽈광!

그 하나하나가 신성력을 품고 은은한 빛의 궤적을 남겨내다, 종국에는 지면과 만나며 폭발해 육편과 핏자국이 가득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게···전쟁인가.'

그 모든 광경이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

댈런은 날아드는 화살과 투창들을 반사적으로 쳐내며 생각했다.

살의를 품은 투사체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크고 작은 화살들. 투창과 돌덩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암기들.

반복되는 날붙이의 교환 속에서, 번복될 수 없는 죽음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단창에 머리가 꿰뚫린 성전사.

발리스타에 상반신이 터져나간 놀 기병.

큼직한 장궁에서 쏘아진 맹독 화살은 성기사의 갑옷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로 하여금 스스로 팔을 잘라내야 하게 만들었고.

그 화살을 쏘아낸 놀 궁병은, 투석기가 날려보낸 돌덩이의 낙하 지점 한가운데 서 있다가 폭발에 휘말리며 단숨에 고깃조각이 되었다.

화로에 타고, 바닥을 구르고, 낙마해 목이 부러지고, 성벽에서 떨어져 몸이 으스러지고, 내장이 흘러나오는 중상이나 그보다는 작은 수많은 상처들을 입은 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절명하는 몸뚱이들.

"······."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전장의 풍경만큼은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수많은 목숨이 있던 자리에서 산화하고, 악신으로 예표되는 악의와는 또 다른 종류의 악의가 공기중에 퍼져나간다.

깎아지른 두 절벽 사이.

오직 혼돈으로 가득 찬 대지.

"후우."

댈런은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압도적인 광경은, 이미 한 단계를 이뤄낸 그의 심상 속에도 어떠한 변화를 이뤄내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다시 뜬 그의 눈은, 기이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은 눈동자 안, 번뜩이는 마력광 사이로 붉게 일렁이는 불과 같은 기운.

그 검붉음 너머에서, 섞이지 않던 두 하늘이 서로에게 스며들어가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

치열한 싸움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동안 놀 기병대는 다섯 차례나 자살돌격에 가까운 공격을 감행했다.

성벽 위의 적들에게 일차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과 더불어, 본대에 집중되어야 할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

그렇게 오백에 가까운 기병들이 들이닥쳐 산화할 즈음, 투석기에 몇 차례 두들겨맞은 놀 군세의 본대 역시 성벽 앞까지 도달했다.

가장 먼저 날아든 건 갈고리였다.

캉! 카가각!

성벽에 걸린 갈고리에는, 칼로도 쉽게 자를 수 없는 튼튼한 밧줄이 묶여 있었다.

이내 길다란 사다리도 성벽에 걸쳐지고, 본격적으로 놀 전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돌을 던져라! 끓는 기름을 부어라!"

지휘관이 소리쳤다. 성전사들이 훈련받은 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둔 솥을 기울여 펄펄 끓는 기름을 쏟아내고, 큼직한 돌을 떨어뜨려 성벽을 기어오르는 놀들의 머리통을 깨뜨렸다.

댈런 역시 단검과 도끼를 뽑아들고 나섰다.

휘리릭! 촥!

주문살해자가 저 혼자 성벽 위를 누비며, 막 성벽에 기어오른 놀 전사들의 목젖을 꿰뚫기 시작한다.

그 사이 댈런은 손도끼로 놀들의 머리를 쪼개거나, 사다리에 도끼날을 걸어 성벽 너머로 되돌려 넘겨버렸다.

스가각!

부상당한 성전사에게 커다란 칼을 내리치려는 놀.

순간 번뜩인 댈런의 도끼가, 놈의 두 팔을 시작으로 머리까지 몸에서 분리시킨다.

"으르르―칵!"

콰직―

곧장 몸을 돌리며 그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던 근육질의 놀 광전사에게 발끝을 뻗어내고, 일격으로 단단한 두개골을 그대로 함몰시켜버린다.

후두둑 튀어오르는 뇌수와 피, 그리고 눈알.

'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것들을 대충 피해내며, 댈런은 생각했다.

과연 지금처럼 도끼를 들어 놀 궁병의 화살을 쳐내고, 올라오는 놈들을 찍어버리며 사다리를 밀어 넘어뜨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직접 성벽 아래로 내려가, 좀 더 거친 싸움을 하는 게 나을지를.

선택지는 두 가지.

판단은 빨랐다.

스릉.

기사단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준 검집에서 성검의 푸른 검신이 뽑혀나왔다.

허리춤에 도끼를 꽂아넣은 댈런은, 근처에서 싸우던 고위 기사 마우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리를 잘 부탁하겠소."

"···예?"

마우그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씩 웃어준 뒤 성벽의 엄폐 위로 몸을 드러냈다.

사다리가 성벽에 드리워지고, 갈고리 밧줄이 날아드는 가운데.

접전 중에도 끊임없이 화살과 돌, 투창 세례가 오가는 양쪽 진영의 이목이 단번에 그에게 집중된다.

성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성검을 든 전사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들.

동시에 이쪽을 겨누는 십수 개의 위협적인 사선에 감각이 저릿하게 경고성을 토해냈다.

탁.

댈런은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성벽 너머로 내딛은 그의 발이, 허공을 디디며 기이한 파문을 일으킨다.

꽈아아앙―!

곧이어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솟아오르는 신형.

성벽 너머, 어둑한 하늘 높이 치솟은 그의 눈이 마력광으로 번뜩였다.

스으―

숨을 깊게 들이쉰다. 마력의 바람을 붙들어 세우고, 심상을 구체화해 그 바람에 의지로 덧입힌다.

우르르릉.

그러자 균열 저 위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마치 화산이 제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불편하게 토해내는 듯한 기이한 울음소리.

두 절벽 사이를 메아리치는 불길한 뇌성 저편에서, 붉은 열기가 먹구름을 뚫고 드리웠다.

"이그넬― 셀티데오 라그레타."

짧은 영창이 심상을 형상화한다.

검붉은 먹구름은 균열 안쪽으로 불꽃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댈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전장이 변화시킨 그의 심상 너머, 환상세계의 풍경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휘릭―

거의 백 미터 가까이 치솟은 그가 신형을 반전해, 공중에서 거꾸로 지상을 향한 채 허공을 디뎌낸다.

발밑에 일렁이는 파문. 양손으로 굳세게 쥔 성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건, 그의 심상 너머 영역에서 보이는 하늘이었다.

붉은 화우(火雨)의 기운과, 번쩍이는 우레가 공존하는 빽빽한 먹구름.

원래라면 섞이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던 두 힘이, 마치 전장이라는 혼돈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교차하듯 한 장소에 뒤섞여버린 정경.

우르르릉.

검은 눈동자가 그 심상의 마력을 품어냄과 동시에, 진동하는 성검과 구름 안쪽에서 서로 화답하듯 우렛소리가 울리고.

오천에 달하는 놀 전사들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새겨진 건, 쏟아지는 불의 비 사이로 지상에 내리꽂힌 섬전 같은 신형과.

번쩍!

그의 궤적을 그림자처럼 쫓은 끝에, 그보다 앞서서 내려치는 한 줄기 벼락이었다.

만천화우滿天火雨(3)

"크르르······."

백인대장 계급의 놀 전사, 글루트는 불편하게 으르렁거렸다.

머리 위 하늘의 모든 것이 적의를 품고 있었다.

궁병들의 쇠뇌 세례와 투석기가 날려대는 폭발하는 돌덩이들.

그리고 그보다 한참 더 올라가, 절벽 너머의 먹구름에서부터 쏟아지는 불의 비까지.

갈고리를 던지던 부하는 화살을 피하려는 찰나 쏟아진 화염 세례에 불타버렸다.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난 형제 백인대장은 앞장서서 공성추를 이끌던 도중, 신성력의 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땅 위에서는 저것들을 피할 수 없다.'

죽어가는 놀 전사들을 보며, 글루트는 생각했다.

다만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천이 넘어가는 놀 군세를 이끄는 그들의 대장이, 여전히 살아서 무리를 이끌며 독려하고 있었으니까.

혼란스런 전장 속에서 대장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으나, 특별한 유대감으로 묶인 놀의 영혼은 그들의 지휘관이 품은 의지를 느끼는 게 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성기사들을 향해 불타오르는 대장의 투지.

"그르르···."

글루트는 고심했다.

성벽을 넘어서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번번이 죽음으로 끝나고 있는 상황.

어떻게 하면 이 싸움에서 승리해, 저 더러운 인간 놈들의 살점을 씹어삼킬 수 있는가.

놀의 원시적인 두뇌는 간단한 해답을 도출해냈다.

'···땅 아래. 성벽 밑으로 내려가면 돼.'

아우우우!

글루트가 길게 울부짖었다. 그의 부하들을 불러모으는 울음소리였다.

금세 모여든 부하들에게, 글루트는 땅을 파기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최대한 깊고 튼튼하게, 그러면서도 성벽 쪽으로 기울어진 땅굴을 만들라는 지시.

상명하복 체계가 철저한 놀들은 이유를 묻지 않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퍽퍽! 퍽!

수십 마리가 돌과 흙을 헤집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굴의 초입 지점이 번듯하게 완성되었다.

균열의 절벽에 동굴을 파고 사는 놀들은, 다른 지역의 동족들보다 땅굴 파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

글루트는 재빠르게 부하들을 이끌고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 먼 죽음들이 오가는 지상에 비해 땅굴 안은 굉장히 아늑했다.

더 이상 떨어지는 불덩이들도, 날아드는 화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만 더 깊게 내려가면 폭발하는 돌덩이들까지도 막아낼 수 있겠지.

그리고 부하들의 땅굴 파기 실력이라면, 성벽 아래로 침투하는 건 금방일 듯했다.

"크르릉."

글루트는 클클 웃었다.

역겨운 성기사 놈들, 뒤에서 우리가 등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놈들의 방심한 뒷덜미를 물어뜯고,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를 뒤집어쓸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고였다.

구르릉······.

그때였다.

땅굴 벽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근처에서 끔찍한 전쟁신의 힘을 담은 돌덩이가 폭발했나? 글루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굴을 더 깊게 파라고 지시하려던 찰나였다.

쿠르르릉···!

발밑이 뒤흔들린다. 바닥만이 아니었다.

천장에서 푸스스 모래 부스러기가 흘러내리고, 튼튼하게 다져진 흙벽이 퍼석거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

땅굴이 붕괴한다. 토사가 머리 위로 쏟아지고, 돌덩이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릉! 크어!"

지진이다. 도망쳐라.

원시적인 놀 언어로 그렇게 외친 글루트는, 곧장 몸을 돌려 굴 입구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외침은 놀 백인대장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뒤흔들리던 땅이 다음 순간 입을 쩍 벌리고, 굴 안에 있던 모든 놀들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

"후우."

펠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에서도 유독 높게 솟은 첨탑 위, 그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인을 맺어내고 있었다.

복잡한 수인이 아니었다.

몇 개의 선을 긋고, 그것을 둥글게 이어내는 간단한 손짓들.

허나 그 수인 끝에 발현된 마법은 계곡의 지면을 진동시키고, 지하로 침투하던 놀들을 그대로 생매장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손에 매장된 놀이, 벌써 백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스승님, 축하드립니다! 마침내 경지를 이뤄내신 거군요!"

곁에서 큼직한 돌덩이 창을 빚어 날리던 토미가 외쳤다.

제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주문 한 줄 없이 수인과 의지만으로 빚어낸 마법이, 땅을 몇 번이고 움직이며 갈아엎는 광경.

그건 분명 자신의 스승이 오랜 정체기를 뚫고,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래."

펠버는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어,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제자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제자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가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기쁘지 않으십니까?"

"아니. 기쁘다. 어찌 기쁘지 않겠니."

펠버는 의식적으로 조금 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자의 말이 맞았다. 그는 경지를 돌파했고, 그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삼십대 중반에 작은 영역을 빚어내고, 사방에서 천재라고 치켜세워주던 목소리에 오만했던 젊은 시절.

그렇게 엘가이아 마탑의 최연소 원로 마법사 직책을 단 이후, 수십 년간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었던 절망감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경지를 뚫어내기보단 지금 가진 힘의 활용성을 극대화하는 걸 택해, 나름 대지술 주문의 응용 방면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권위자가 되긴 했다.

'경지는 위로만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도 넓어지는 법일세.'

동료 교수들과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선언하며, 스스로의 정체기를 합리화하다 못해 안주해버린 그의 노년기.

그 과정에서 젊을 적 잃어버렸던 겸손과 인내라는 미덕을 다시 배우게 되긴 했지만, 어찌됐건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성취가 막힌 여느 마탑의 원로들처럼, 그 역시 그렇게 살다가 끝을 맞이했으리라.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계기로.

한 줄기 빛과 같은 기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댈런.'

펠버는 고개를 들었다.

균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과, 그 먹구름에서 쏟아지는 불덩이의 세례가 보였다.

전장을 압도하는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고도, 적들의 심부로 파고들어가 홀로 세 자릿수의 놀을 격살하고 있는 대전사.

그 초인적인 역량을 눈앞에 둔 채, 펠버는 문득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았다.

***

'그땐 의뢰주와 용병의 관계였었지.'

쫓겨난 사형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되려 실종되어버린 제자를 놓고 애타던 시절이었다.

안면이 있던 청동 경비대의 침묵중대장 가웨인이, 한 용병을 추천해주기에 망설임 없이 지명 의뢰를 넣었었다.

사실 의뢰를 맡겨놓고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컸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제자를 돌려받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 장본인이 대체 누군지 궁금해 만남을 요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댈런과 마탑 지부에서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호기심에 몰래 펼쳐낸 영역의 힘이, 한낱 용병의 혈관에 용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으니까.

'끌끌, 그게 고작 반 년도 안 된 과거라니.'

그 이후 몇 달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저 전사에게 붙은 이명은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교도의 수괴를 죽이고 미궁에서 악마를 처치한 것도 모자라, 마녀의 숨통을 끊어버리며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신의 전사.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기사단을 구해낸 용살자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그였다.

공교롭게도 펠버 자신이 오랜 정체기를 돌파해낸 것 역시, 그가 용의 목을 잘라버린 바로 그날이었다.

'죽음의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더니.'

홀로 주문을 쥐어짜 특임대의 공세를 막아내던 그날.

대부분의 마력이 소모된 채, 에버로크의 일격에 얻어맞은 펠버는 며칠간 생사를 오갔었다.

다행히 성기사단의 치유 기도와 고도화된 의술은 그의 몸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안정된 마탑의 삶에 적응했던 그에게, 죽음의 위기가 가져다온 충격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충격만이 돌파구를 만들어주는 법.

수십 년간 정체되어있던 영역의 풍경은, 사경을 헤매는 중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우웅······.

손끝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떨린다.

의지의 발현은 곧 마력의 바람과 일체가 되었다.

생사의 갈림길 끝에 이루어낸 상승은, 모든 마법사들이 꿈꾸는 지고의 경지.

'큰 영역.'

흔히들 대마법사라 불리는 기준에, 펠버는 마침내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스승님! 11구역 성벽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엘르― 발라둠!"

어둠 속에 휘적이는 깃발을 본 토미가, 황급하게 주문과 함께 수인을 맺어냈다.

한 번의 마법으로 열 개에 가까운 돌화살을 만들어내, 필요한 적재적소에 지원 사격을 가하는 능숙함.

근래 들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1인분 이상을 하게 된 청년 마법사의 뒤에서, 손끝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그걸 동일하게 해내며 펠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상 너머, 영역을 들여다본다.

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확장된 영역의 크기.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린 영창에 그의 발밑에서 파문이 퍼져나갔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영역을 이룬 이조차 감지하지 못할 희미한 파동.

그 파동은 단숨에 전장 전체를 뒤덮어버리고, 그 범위 내의 수천에 달하는 생명들이 펠버의 머릿속에 동시에 각인되었다.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는 성전사.

그 성전사에게 투창을 겨누는 놀 기병.

섬전처럼 날아들어 놀의 머리를 쪼개버리는 손도끼와, 그 도끼에 연결된 의지의 주인까지.

마치 신이 땅을 굽어보듯 모든 존재를 동시에 인식하는 펠버의 시선은, 심지어 현재에만 묶여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각 생명체의 과거가 수천 개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과거를 기반으로 각자에게 예정된 미래까지 그려진다.

단순히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에 아슬아슬하게나마 미친 영역의 힘.

그건 신의 능력인 전지(全知)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편린의 편린 정도에는 닿았다 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도.'

펠버는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가 이뤄낸 영역의 힘은, 단순히 과거와 미래를 관망하는 선에서 그치는 종류가 아니었다.

다만 그 숨겨진 진가를 이끌어냈을 때, 늙고 노쇠한 몸이 버틸 수 있을 것일까.

펠버는 거기에도 명확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 힘을 사용하는 순간, 그의 여정은 거기까지라고.

주륵.

뜨끈한 액체가 코에서 흘러내린다. 펠버는 제자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흘러내린 핏줄기를 훔쳤다.

'후후···그러든 말든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긴 하다만.'

짧으면 몇 주. 길어봐야 반 년.

펠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남은 날을 대략 셈해보았다.

'그래도 아쉽구나. 이제야 가까스로 닿은 힘이거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년에 경지의 급격한 상승을 이뤄내긴 했지만, 그 힘은 노쇠한 육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분량.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담아두는 게 영역이라는 그릇이라고 하나, 그 통로가 되는 육신의 역할 역시 영역의 크기 못지않게 중요했다.

영역의 힘을 굳이 이끌어내지 않더라도, 그릇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듯 그 힘의 일부분은 끊임없이 육신을 통해 현실로 새어나오는 건 당연한 일.

그 일부마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낡은 몸뚱이라면, 필연적으로 얼마 가지 못해 부서지는 법이었으니까.

'어차피 마지막을 맞이할 신세라면, 그 끝은 의미 있게 마무리하는 게 좋겠지.'

펠버는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놀 군세의 한가운데, 유독 듬성듬성 비어있는 공간이 보였다.

그건 홀로 수백의 놀을 학살하고, 그들의 대장과 맞붙기 시작한 어느 용병이 만들어낸 공백.

운 좋게도 펠버가 이뤄낸 전지의 편린은, 출처를 알 수 없던 저 용병의 과거마저도 조금은 알아낼 수 있었다.

'대지의 기억이 없다 해서 기이하게 여겼거늘. 회귀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펠버가 본 건 누군가의 인생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 아닌, 수많은 삶의 시작과 끝.

거기에는 현자의 얼굴을 한 노인도 있었고, 지금의 댈런과 같은 용병도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방향으로 걸어간 인생들을 펠버는 목도했다.

동일한 지점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 끝내 종말에 맞서며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십에 달하는 삶의 궤적들.

'내가 본 것만 수십이었으나, 내 힘으로도 내다볼 수 없는 수백이 더 이상이 있었지.'

한 사람의 과거에 그 수많은 생애가 들어있다는 걸, 펠버는 회귀라는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종말을 막기 위해 태어난 듯, 똑같은 시점을 다양한 조건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회귀자의 영혼.

그리고 적어도 그가 본 바에 의하면, 지금만큼이나 성공적으로 종말의 기세를 꺾어놓은 회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한이 정해진 인생에서, 의미 있는 마무리는 무엇일까."

펠버는 저도 모르게 스쳐가는 상념을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가 싶어 제자가 고개를 돌렸지만, 펠버는 끌끌 웃을 뿐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는 대신 제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손을 들어 전장 한가운데의 공터를 가리켰다.

"아! 드디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토미가 외쳤다.

나직하게 웃는 원로 마법사의 마력광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역시, 청년이 본 것과 동일한 광경을 비춰내는 중이었다.

웅성이며 소란이 퍼지기 시작하는 놀 군세의 진형.

그 한가운데, 놀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공터 한복판.

푸르게 빛나는 성검을 든 전사가, 적장의 목을 잘라 높이 들어올리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

타락기사(1)

싸움은 끝났다.

대장의 목이 하늘 높이 들리자, 놀 군세는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균열 안쪽을 향해 내달리는 그들의 등 뒤로 내리꽂히는 수많은 화살과 돌덩이들.

접전을 벌이며 이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놀 군세는, 결국 도망치는 과정에서 이천쯤을 더 희생하고서야 후퇴할 수 있었다.

천의 병력으로 하룻밤에 오천의 놀을 쳐부순 수성전.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지만, 요새 안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쿵!

갈기갈기 찢긴 시체가 관 안에 거칠게 놓인다.

동료의 시체를 벌써 열 구도 넘게 옮긴 성전사는, 거의 울음을 토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사제복을 입은 성기사의 손에 관뚜껑이 덮이고, 짧은 묵념 이후 관이 수레에 실렸다.

끼이이익.

열 개가 넘는 관짝을 실어 위태위태한 수레의 모습.

사람의 무게도 무게일진대, 워낙 처참하게 죽은 탓에 갑옷에서 제대로 분리할 수도 없는 시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사지 육신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팔다리나 머리를 잃어버리거나, 아예 온몸이 뜯어먹혀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덜커덩. 덜커덩.

적재량의 한계에 다다른 수레가 장례를 위해 본단으로 출발했다.

착잡한 표정의 생존자들은 머지않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들에게 죽음을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마물의 군세가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지금, 요새의 모든 시설은 최대한 빠르게 복구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

창가 쪽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댈런은, 문득 입안에 퍼져나가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포도주로 입안을 헹궜다. 고개를 들어보니 회의실에 둘러앉은 이들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번 전투로 기사단은 성전사 삼백 열네 명. 성기사 스물일곱 명을 잃었습니다."

상석에 앉은 마우그가 착 가라앉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본단에 지원 요청을 보냈으니, 며칠 지나지 않아 다수의 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할 겁니다. 먼저 떠난 이들에게 내세에서 신의 은총이 임하길."

은총이 임하길. 읊조리는 목소리들. 후우. 혹은 작게 내쉬는 한숨들.

마우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로크를 처치하고 방벽 열쇠를 회수하는 임무는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이견 있습니다."

성기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심문관 피드나. 말씀하세요."

"모두들 아시겠지만, 어젯밤 이곳을 침공한 놀 대군은 균열 안에서부터 왔습니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가 한탄과 우수에 젖어 축 늘어진 공기였다면, 이제는 그 슬픔을 딛고 현실을 바라보는 베테랑들의 완숙함이 테이블 위에 깃들었다.

"그리고 저 정도 규모의 놀 군세가 균열의 첫 번째 방어선, 에스트라 요새를 우회할 방법은 없죠."

"심문관 피드나,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혹시···."

"예, 맞습니다. 저희의 일차 목적지인 에스트라 요새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이죠."

그녀의 선언에 회의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여기 모인 모두의 생각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몰려드는 놀 군세를 보고 에스트라 요새의 함락을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까.

"원래의 임무 계획은 에스트라 요새를 거점으로, 원활한 보급선을 유지하며 며칠 단위의 단기간 수색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점으로 예정했던 곳은 파괴되었고, 이곳 제2 방어선은 수색해야 할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죠."

피드나가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녀의 어조는 일견 냉소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도 했기에, 일행의 리더인 마우그의 얼굴에는 점점 더 갈등이 어렸다.

"자네는 마치 성기사가 아닌 세속의 지휘관들처럼 이야기하는군, 피드나 심문관."

그때 중후한 얼굴의 노기사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의 싸움은 근 십 년간 전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한 혈전이었다네. 그럼에도 이번 임무에 참여한 우리들 중에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지. 이건 신이 우리로 하여금 임무를 속행하라 말씀하시는 걸세."

"혹은 우리 전력이 온존함으로 이후에 있을 싸움을 대비하게 하신 걸지도 모르죠, 도메르 차석 심문관님."

피드나가 곧바로 반박했다.

"당장 어젯밤 싸움을 돌아볼까요? 저희가 없었다면 이 요새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이 요새에 주둔하던 병력은, 백 가량의 성기사를 포함해도 천에 못 미치는 숫자.

반면 적들은 하나하나가 진룡의 힘에 조금씩이라도 물들어, 보통보다 반 배는 더 강해진 놀 전사들이었다.

때마침 합류하게 된 고위 기사와 심문관들이, 성벽 곳곳에서 전투기도로 아군의 사기를 돋우며 버텨주지 못했다면.

접전이 벌어지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점령당했으리라.

그건 적진을 종횡무진 누비며 끝내 대장을 처치한 댈런이나, 후방에서 끊임없는 마법 지원을 보태준 두 마법사가 있었다 해도 변하지 않았을 테였다.

댈런과 발렌티노 사제(師弟)가 아무리 분전했다 한들, 성벽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싸움은 진 것이니까.

"거기다 어제의 놀 군대가 공세의 끝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 정도로 대대적인 공격이라면, 청린은 균열 깊은 곳에 언제든 공격할 준비가 된 마물의 군대를 몇이나 더 두었을 겁니다."

피드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 저희만 전선 앞으로 튀어나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자살 행위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에스트라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일만 대군이 몰려와도 피하거나 숨을 곳조차 없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한다는 듯,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

대놓고 동의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라듯 말하던 차석 심문관 도메르마저, 그저 불편한 침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댈 뿐이었다.

"···그럼 임무 전에 이야기한 대로, 이번 일은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결국 잠깐 사이 얼굴에 피로가 가득해진 마우그가 입을 열었다.

"임무 속행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신다면, 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