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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문(4)

이런 상행로의 외딴 여관에서 피 냄새 자체가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원가를 절감하며 신선한 고기를 식탁에 올리기 위해, 여관 자체적으로 돼지나 닭 정도는 키우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이건 동물이나 마물의 피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댈런의 초인적인 후각은 사람의 혈향과 짐승의 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의 혈향은 분명히 사람의 것.

그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냄새였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요?"

두 사람의 분위기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파른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의외의 질문에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는 낮게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헝클었다.

"신경 쓸 것 없다. 너는 오늘 여기서 푹 쉴 예정이라는 것만 알아둬라."

일행은 수레와 말이 반쯤 들어찬 마구간 한쪽에 말을 묶어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관으로 들어갔다.

1층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안쪽 카운터에서 주인이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이십니까?"

"그렇소."

"허허, 먼 길 오가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희 여관의 음식은 따뜻하고, 방은 언제나 아늑하답니다. 아무래도 숙녀분께서는 방을 따로 쓰실 테니, 방 두 개에 저녁식사는 삼인분이면 되겠습니까?"

넉살 좋게 웃으며 환영인사를 쏟아내는 여관 주인.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늘이 금식일이라서요. 바로 방으로 올라가보겠습니다."

그녀의 거절에 여관 주인은 한 번 더 푸근한 상인의 웃음을 지으며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러시오. 2층의 201호를 쓰시면 될 거요. 그나저나 금식일이라 하셨소?"

"예. 한 달에 하루 금식하는 것은 성기사의 규율 중 하나입니다. 육신의 배고픔은 영혼의 배부름이 되며, 심신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게, 마치 성기사가 아닌 신앙심 깊은 사제를 보는 듯한 모습.

댈런은 그걸 보며 속으로 픽 웃었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이런 모습만 봤는데, 어떻게 욕쟁이 성기사라고 생각했겠어?

"그···러시군. 성기사라니. 이거 보기 드문 손님이구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댈런의 눈은 성기사라는 말에 살짝 떨리는 여관 주인의 어깨를 놓치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조금 뻣뻣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방 두 개에 저녁 식사 이인분으로 알겠소. 바로 올라가실 거라면, 목욕물을 준비해 드려도 되겠소? 저녁쯤 손님이 오니까 항상 이맘때쯤에 데워놓거든."

"부탁하겠습니다."

루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는 올라가기 전 댈런을 돌아보더니, 한쪽 눈을 슬쩍 찡긋거리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녀는 위에서 자신이 할 일을 할 것이다.

이제 1층은 댈런의 무대였다.

***

댈런은 파른과 함께 아무 자리나 잡고 앉았다. 식사는 금방 나왔다.

스튜가 담긴 큼직한 그릇 두 개에, 댈런 몫으로 나온 맥주가 한 잔.

댈런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그릇에 수저를 푹 담궜다.

그는 내용물을 살짝 뜨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주점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사람이 하나도 없군. 요즘 장사가 잘 안 되시나?"

"근 한 달 사이에 손님이 드물어졌소. 마물들이며 도적들이 활개를 친다는 소문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군. 손님은 오시면서 별 일 없으셨소?"

"딱히."

댈런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요 근처 마을에서 죽은 시체들이 걸어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글쎄. 헛소문일 거요. 여기서 장사한 지 십 년이 됐지만 그런 건 처음 듣는군."

"그렇소?"

댈런은 낮게 웃었다.

이거 이 정도로 시치미를 뗄 줄은 몰랐는데.

그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파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제국 출신이신가요?"

"음?"

여관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저도 제국 출신이거든요. 도시연합에 와서 알게 된 건데, 제국 사람들과 도시연합 사람들은 공용어 억양이 미묘하게 다른 거 있죠? 제국에서는 어릴 때 제국어를 같이 배워서 그런 거래요."

"···아, 맞아. 그렇지. 나도 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단다.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여기로 와서 정착했지. 말한 대로, 벌써 십 년 전 일이네."

여관 주인은 살짝 더듬거리며 이야기했다.

소년은 고개를 다시 한 번 갸웃거렸다.

"우와, 그런데도 아직도 제국식 억양이 남아 계시는구나. 신기하네요. 저는 일 년도 안 지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그 억양이 다 사라졌다고 들었거든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맺어냈다. 여관 주인은 당황한 듯 입을 닫았다.

무심코 댈런의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에, 댈런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이거 하나를 가르치면 그 이상을 배우는군.'

사실 평소처럼 다짜고짜 도끼를 던지는 대신, 잡담으로 여관 주인의 구린 부분을 긁어댄 건 파른을 위해서였다.

소년이 지금껏 보여준 영특한 모습이라면, 수상한 여관 주인과 나누는 한담 속에서 뭔가를 배워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댈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뛰어넘어 그를 놀라게 했지.

제대로 대화가 오가기 전임에도, 이 어린 용병은 여관 주인의 수상함을 대번에 파악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번에는 본인 스스로 여관 주인의 억양을 꼬집으며 그를 간접적으로 추궁하고 있었고.

'이거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겠군.'

댈런은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쿠당탕탕!

위층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계단참으로 무언가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끄으···괴물······."

굴러떨어진 건 장정 네 명이었다. 얼굴과 몸 곳곳을 두들겨 맞고, 반쯤 혼절한 채 신음을 흘리는 남자들.

그 뒤를 따라 루시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갑옷 없이 천옷만 걸친 채, 반쯤 젖은 머리를 쓸어올려 물기를 짜내고 있었다.

댈런은 굴러떨어진 장정들을 보며 물었다.

"위층에는 이게 끝이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쓰레기 새끼들, 제가 무장을 해제하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습격하더군요."

***

주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관 주인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댈런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고는, 놈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 해명해보실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관 주인의 얼굴이 달라졌다.

표정이 아니었다. 여관 주인은 말 그대로 얼굴 자체를 악귀처럼 바꾸더니, 빠르고 거친 음색으로 주문을 읊었다.

"테모므―시르!"

쾅!

주문을 맺자마자 지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열린 문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크에에에!

크엑! 케에엑!

하나같이 괴상하게 울부짖는 사람들.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상인들, 상인의 고용인들, 그들을 호위했을 용병들.

원래 여관 주인이었을 배불뚝이 사내와 이곳에서 일하던 직원들까지.

대충 서른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시체가 되었음에도 걸어다니는 망자들이었다.

마굿간에 주인 없는 마차들이 꽤 있던 걸로 봐서,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여관 주인으로 위장한 사령술사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들이겠지.

크에엑!

켁! 케켁!

망자들은 어설픈 뜀박질로 순식간에 출입구를 막아섰다.

그리고 포위망을 형성해 세 사람을 서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댈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팔짱을 풀고 허리띠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망자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더니 말했다.

"움직임이 굼뜨군. 아무래도 주방 안에 숨어있는 놈이 진짜인 것 같소. 여기는 대충 정리하고, 지하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주시오. 나는 그동안 주방에 숨어든 주문쟁이를 잡아오지."

"알겠습니다."

루시아가 전신에서 빛을 뿜었다.

그 순간 허리띠에 걸쳤던 댈런의 손이 흐릿해졌다. 사령술사가 다급히 주문을 읊었다.

"테모므―컥!"

주문은 맺어지지 못했다. 놈의 악귀 같은 얼굴에 도끼자루가 돋아난 탓이었다.

댈런은 지체 없이 놈을 지나쳤다. 그리고 카운터 뒤편에서 이어지는 주방 문을 그대로 어깨로 들이받았다.

와지끈!

오래된 나무 문짝이 산산조각 나 부서진다.

곧바로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댈런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화르르르―!

검은 화염이 전면을 덮쳐든다. 투명한 마력 칼날이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구우웅―

몇 배는 무거워진 공기가 머리 위에서 전신을 찍어누르고, 얽혀드는 저주가 손발을 느리게 만든다.

이건 함정이었다.

침입자의 걸음을 막아 세우고, 단숨에 고깃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하는 흑마법 함정.

그 함정의 한가운데. 댈런은 오히려 사납게 웃었다.

'역시. 이 놈이 진짜군.'

사령술사와 손을 잡은 흑마법사.

그리고 놈들을 따르는 절박한 피난민 장정들.

그 기척을 잡아내는 건 처음부터 어렵지 않았다.

댈런의 놀라운 감각 수치는, 여관 밖에서부터 지하실에 갇힌 피난민 생존자의 숫자까지 셀 정도였으니까.

다만 놈들이 숨은 위치를 모조리 알아내고서도, 곧바로 도끼를 뽑아들고 쳐들어가지 않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런 앞뒤 없는 살육으로는 어린 소년이 무언가를 배울 수 없음이 첫째였고.

두 번째 이유는, 흑마법사와 사령술사 중 누가 진짜 배후인 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놈들은 분명히 불사의 악마와 연관되어있다. 피난민 부부에게서 듣지 못한 정보를 알고 있겠지.'

사령술사가 불러낸 어설픈 사령술의 결과물을 보아하니, 놈은 결코 이 무리의 실세가 아니었다.

국경 근처의 주요 길목에 자리잡은 여관을 점거하는 대담함은, 어느 수준은 넘어서는 실력자여야 품을 수 있는 생각일 터.

그리고 주방에 설치된 함정들을 보아하니, 그 실력자는 흑마법사임이 분명했다.

맞으면 댈런이라도 위험할 위력의 함정들.

그건 르비바흐에서 숲 속의 길을 안내했던, 반쪽짜리 흑마법사 정도로는 흉내낼 수 없는 주문이었으니까.

쉬이이익―!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 건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

그러나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마력의 칼날은 이미 댈런의 발목 언저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댈런은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스킬로 맞받아친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한 행동은, 그저 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든 것.

그리고 그 단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리그으며, 쇄도해오는 마법들을 베어낸 것뿐이었다.

와장창!

얽혀있는 두 파형의 칼날이, 머리 위를 짓누르던 압력을 깨뜨려 버린다.

피시싯!

검은 불꽃이 그 궤적에 걸려 사그라들고, 발목을 노리던 마력의 칼날 역시 스르르 흩어져버렸다.

손발을 잡아 세우려던 저주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저주막이의 인장이 미약하게 빛을 뿜으며, 그가 암월의 주문살해자를 뽑기도 전에 저주를 무효화한 것.

"뭐, 뭐······!"

막 은폐 마법을 깨고 침입자를 마무리하려던 흑마법사는, 도리어 자신의 안배가 죄다 파훼된 걸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그녀를 보고,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사람의 고기를 갈아넣은 스튜를 보며 추측하긴 했었다.

그가 아는 네임드 흑마법사 중 하나도, 심심하면 그런 짓거리를 벌이곤 했었으니까.

당황한 눈으로 지팡이를 치켜든 흑발의 여자.

그녀는 원래라면 미래에 재의 마녀의 최측근이 되었어야 할,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였다.

[스튜가 된 현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잡아먹혔던 예전 회차를 알림창으로 확인한 댈런은, 지체 없이 손 안의 단검을 떠나보냈다.

쐐애액―!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주문살해자가, 숙련된 흑마법사가 삼중으로 겹쳐 만든 방어막을 단숨에 박살낸다.

"에낙사―꺄아아악!"

그 끝은 흑마법사의 쇄골 언저리.

주문쟁이의 살과 근육을 헤집은 단검은, 그녀가 내뱉던 주문마저도 헤집어놓았다.

"주문, 어째서 주문이···!"

흑마법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친다.

마력을 다루던 모든 감각이 단번에 꼬여버린 이상, 그녀 같은 주문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댈런은 우악스런 손아귀를 뻗어, 못해도 수십 명의 사람을 잡아먹어왔을 턱과 입을 틀어쥐었다.

주문쟁이를 심문할 시간이었다.

불사의 악마(1)

굴러다니는 밧줄로 흑마법사 루카챌라를 묶어놓고 돌아오니, 주점은 거진 다 정리된 상태였다.

눈을 희번뜩대던 언데드들은 죄다 가슴팍이며 머리통이 함몰된 채였다. 루시아와 파른은 그 시체를 주점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금방 끝냈군."

"사령술사가 죽은 이상, 망자들은 실 끊어진 인형일 뿐입니다."

망치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으깨진 시체를 주점 밖에 던져놓으며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대부분의 언데드들은 사령술사를 주체로 삼아 힘을 얻는 존재.

죽음의 기사나 리치처럼 고위 언데드가 아니라면, 사령술사가 사망한 순간 본래 내던 힘의 반의 반도 채 내지 못한다.

물론 손톱과 이빨에 묻은 시독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루시아 정도 되는 성기사에게 문제될 건 아니겠지.

피부와 근육의 내구도를 강화시키고, 각종 저항력을 올리는 신성 문신만 사용하더라도 저런 맨몸뚱이 언데드의 공격은 하루 온종일도 맞아줄 수 있을 테니까.

결론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두고 왔음에도, 그녀가 서른에 달하는 언데드들을 전부 정리하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루시아 기사님! 막 온몸에서 빛이 번쩍이고, 주먹이 여러 개가 되고 하는 것도 기사단에서 배우는 건가요?"

파른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뿐인 팔로 시체를 옮기느라 낑낑대면서도, 소년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 하나 묻어나지 않는다.

예전 갈리오스 상단이 오크 무리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저랬더랬지.

많이 회복된 소년의 모습에, 댈런은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주먹이 여러 개라. 나도 배워보고 싶군."

"그냥 빠르게 내지른 겁니다. 파른, 기사단에서 열심히 수련하면 너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우와!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년이 입을 딱 벌리고 소리쳤다. 루시아는 소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오늘 아침 피난민 부부를 떠나보낸 뒤 그녀는 말했다.

본단에 도착해 의뢰가 끝나면, 소년을 성기사단에 입단시키겠다고 말이다.

지난 며칠간 파른을 가르쳐온 결과, 소년의 재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성실함이나 영특함 역시,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 비하면 월등하다는 말로도 부족했고.

댈런까지 합세해 주점을 정리한 일행은 곧장 지하실로 내려가 사람들을 구출했다.

여관을 점거한 패거리가 모든 사람을 죽인 건 아니었다.

놈들이 죽인 건 원래 여관을 운영하던 사람들과, 쉬어가기 위해 방문한 상인 일행들뿐.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피난민들은, 지하에 갇혀 꽁꽁 묶인 채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음식과 물을 배급받고 있었다.

구출해낸 피난민들을 루시아에게 맡긴 댈런은, 밧줄과 주문살해자로 포박된 흑마법사를 4층의 구석진 방으로 끌고 갔다.

'사령술사들이 불사의 악마를 봉인에서 풀어내려 한다고 했지. 그리고 여관을 조심하라는 말도 남겼다.'

댈런은 어젯밤 만났던 피난민 부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하실에 갇혀있던 피난민들에게 물어보니, 피난민 부부는 가까스로 여관에서 탈출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흑마법사 루카챌라의 패거리 역시 불사의 악마와 분명 어떤 연관이 있을 터.

그리고 루카챌라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피난민 부부에게서 듣지 못한 전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식인 마법사를 이 시점에 여기서 만났다는 것부터가, 댈런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기는 했다.

게임에서 루카챌라는 재의 마녀를 따라다녔지, 불사의 악마와 엮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재의 마녀는 악신과의 첫 계약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었지. 반면 불사의 악마는 예정보다 훨씬 일찍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고.'

결국 종말이 그 움직임을 서두르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미래 역시 원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꼬인 것이다.

얼마 전 갈리오스 상단을 습격한 두 오크 지휘관의 경우와 비슷했다.

"으, 으으······."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렸다. 댈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여관 꼭대기 층의 제일 구석진 방 안.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는, 팔다리가 묶이고 팔뚝에 주문살해자까지 꽂힌 채로 바닥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탁자에 턱을 괴었다. 그가 말했다.

"언제쯤 입을 열 생각이냐."

"나, 난 몰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루카챌라는 고개를 저어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대답만 벌써 몇 번을 들은 건지.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식인 마법사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표정과 말투에서부터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몰라. 정말이야······."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티를 내면서도 끝끝내 제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

심문을 시작한 지 벌써 10분째였다.

흑마법사를 대하는 댈런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기에, 심문이 좀 더 길어지면 루카챌라는 그냥 죽을지도 몰랐다.

"지랄 말아라. 렝클턴 마을 근처에서 사령술사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무슨 일? 난 진짜 모른다니까. 난 그저 사람 고기가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 네가 원하는 답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금껏 했던 말을 또 한 번 반복하는 루카챌라.

눈물 콧물에 침까지 줄줄 흘리는 모습은, 얼핏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수십 명의 사람을 잡아먹은 살인귀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분명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끼익.

댈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흑마법사에게 다가가 팔뚝에 꽂힌 단검을 잡아 뽑았다.

찌지직!

서로 얽힌 두 개의 검날이, 뽑혀나오는 과정에서 살점을 죄다 찢고 뜯어낸다.

흑마법사는 눈이 뒤집힌 채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면 성기사를 부르는 수밖에 없다. 단마의 백염에 타죽고 싶지는 않겠지."

푸욱!

재차 단검을 꽂은 부위는 허벅지.

"끄으으윽!"

단검이 품은 힘이 마법사의 감각을 뒤흔들며, 단순한 육체의 통증 이상의 고통을 가한다.

"흐, 흐흐흐···알았어. 알았다고······."

단마의 백염까지 언급하자, 끝끝내 버티던 정신력이 마침내 무너진다.

육체의 고통과 성기사의 흰 불꽃을 향한 두려움에, 그녀의 동공은 아예 반쯤 풀린 채였다.

댈런은 단검 손잡이를 놓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불사의 악마. 놈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던 게 아닌가?"

"아니···야. 불사의 악마는······."

마침내 그 입에서 기다렸던 단어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이었다.

"악마···는···끄르륵, 끄아아악!"

흑마법사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입에서는 부글거리며 녹색 거품이 솟아올랐다.

곧 얼굴과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고름이 왈칵 쏟아지더니, 흑마법사는 그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철퍽 엎어졌다.

"끄윽, 끄으윽······."

고통 속에서 부들거리는 몸뚱이.

그것마저도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댈런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엎어진 시체를 뒤집어보았다.

"···흠."

흑마법사의 몰골은 처참했다.

온몸은 피고름으로 범벅이었고, 입이나 눈 같은 연조직에는 푸르딩딩한 곰팡이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순간 어깨에 새겨진 저주막이의 인장이, 잠깐 빛을 발했다가 잠잠해졌다.

"···이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댈런은 모르지 않았다.

'저주.'

그것도 발동될 때의 여파만으로도, 인장이 잠시나마 반응할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다.

'이건 예상 밖이군.'

댈런은 손을 뻗어 시체를 회수하며 생각했다.

[스튜가 된 현자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3]

'루카챌라 정도 되는 흑마법사를, 특정 단어를 내뱉자마자 죽일 수준의 저주라.'

이건 결코 일반적인 저주술사의 실력이 아니었다.

상당한 수준의 지능 수치를 얻어, 고양감에 한껏 달아오른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저주술에 능한 존재의 목록을 나열하고, 지금쯤 이 근방에서 활동할 수 있을 만한 이들을 순식간에 추려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번 사태에 엮여있을 만한 존재.

그 중에서도 이 정도로 저주에 능한 존재라면,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곤란하게 됐군.'

댈런은 시체에서 뽑아낸 주문살해자를 잘 닦아,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불사의 악마는 이미···.'

똑똑똑.

그때 루시아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댈런. 지하에 갇혀 있던 피난민들 중 한 명이 이 사건의 전말을 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군."

댈런은 흑마법사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루시아는 그제야 처참한 몰골이 된 시체를 발견하고는,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 불사의 악마가 이미 봉인에서 풀려났답니다."

***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은 새벽같이 여관을 나섰다.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접한 이상,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동틀녘부터 말을 타고 달린 끝에, 그들은 하루 만에 국경을 넘어 렝클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늦게 여관을 잡은 그들은, 이후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한 방에 모였다.

탁자 위에 놓인 건 큼직한 맥주잔 하나와 꿀물을 담은 잔 두 개.

맥주잔은 진작에 비었고, 루시아는 꿀물을 천천히 홀짝이고 있었다.

"크어. 으음,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파른은 꿀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탁자 위에 꾸벅꾸벅 머리를 들이박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승마를 시작한 지 며칠밖에 안 된 소년이다.

전속력이 아니라지만 열 시간이 훌쩍 넘도록 말을 달렸는데,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겠지.

댈런은 허리띠에 손을 꽂은 채 창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머릿속으로 증인을 자처한 피난민 여자의 말을 되새겼다.

'마을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겔트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라온 상인이었고, 그 여자는 겔트가 신원을 보증한 약초꾼이었거든요.'

겔트는 댈런이 머리에 도끼를 꽂아버린 사령술사의 이름이었다. 그 여자라는 건 다름 아닌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를 의미했고.

루시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겔트와 피난민 여자는 '부적절하게 몸을 섞은 관계'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잠자리에서 겔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었고.

"정리하자면 불사의 악마가 이미 봉인에서 풀려났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들을 시켜 은금 패물과 비보, 그리고 희생물들을 모아오라 했다는 거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을 안 듣는 몇몇에게는, 본보기로 끔찍한 저주를 내렸고요."

따뜻한 꿀물을 한 모금 마시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식인 마법사 루카챌라는 그 본보기에 속했던 모양이었다.

피난민 여자에게 잠자리에서 온갖 정보를 털어놓고도 살아남은 사령술사와는 달리, 그녀는 악마의 이름만 입에 담고도 그 자리에서 저주로 죽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댈런은 벽에 몸을 기대선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렝클턴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관은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상행로 곁에 위치한 마을이라, 그 하나뿐인 여관이 3층짜리나 되는 건물을 사용하는 것일 테였다.

다른 변방 마을이었다면, 여관은커녕 마을에 하나 있는 주점에서 모포를 깔고 잤겠지.

댈런은 여관 3층에서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오래 머무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소."

마을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고, 외지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종말을 외치는 사교도들이 극성을 부린 지 벌써 몇 주나 되었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다 얼마 전부터는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고, 악마에 대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이런 상황에 마을 분위기가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까 주점에서 대화를 엿들어보니,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제국군이 곧 마을에 들이닥칠 거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괜히 외지인으로 머물다가 휘말리면 성검을 운반하는 데도 차질을 빚겠군."

댈런은 등 뒤, 천으로 꼼꼼하게 둘러싸놓은 성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는 여관에 들어와서도 성검은 물론, 갑옷을 포함한 일체의 무장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그럴 듯합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검만 풀어뒀을 뿐 갑옷 차림 그대로였다.

흉흉한 소문이 도는 와중인 만큼, 주민들이 언제 돌변해 외부인인 그들을 적대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파른을, 편하게 탁자 위에 엎드리게 하며 물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나면 되겠습니까?"

"내 짐과 말도 챙겨서 출발해주시오. 상행로에서 마을 쪽으로 빠지는 삼거리. 동틀녘에 그곳에서 보도록 하지."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댈런은 함께 안 가십니까?"

"나는 밤새 할 일이 있소. 악마를 잡아올 것이오."

"풉―콜록, 콜록, 예?"

댈런의 선언에 루시아가 꿀물을 들이키다 말고 뿜어버렸다. 그녀는 얼굴이 꿀물 범벅이 된 채 연신 기침을 해대며 되물었다.

"기, 기사님! 손수건···."

곁에서 졸던 파른이 그 소란에 놀라 허둥지둥 손수건을 찾았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흑마법사가 당한 저주를 봤잖소. 그쪽은 성기사니 저항할 수 있고, 나 역시 나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소. 하지만 파른은 아니지."

그 말에 루시아에게 손수건을 건네던 파른이 약간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댈런은 벽에서 등을 떼고 걸어가,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었다.

"파른을 데리고 동틀녘까지 삼거리로 나와주시오. 나는 오늘 밤 악마를 잡아 올 테니."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댈런의 무력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만,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불사의 악마가 위험한 이유는 저주 때문만이 아닙니다."

루시아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으로도, 신성력으로도 죽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지극히 평범한 동굴에 봉인하였다.」 오래 전에 본 기사단의 문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난 악마를 죽이겠다고 말한 적 없소."

댈런이 웃었다. 그는 소년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헝클어뜨린 다음 방문으로 향했다.

"잡아 오겠다고 했지."

우웅······.

방문을 나서며 남긴 말에, 허리띠에 매달린 주머니 하나가 은은하게 떨렸다.

불사의 악마(2)

별들조차 구름에 가리워진 밤이었다.

렝클턴 마을로부터 걸어서 몇 시간 거리쯤 떨어진 외딴 동굴.

동굴의 입구를 뒤에 두고 선 두 명의 사령술사는, 무료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존나 심심하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해골 병사 한 마리만 데려왔으면 가지고 놀 수라도 있었을 텐데."

"그분이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 이곳은 들켜서는 안 돼. 혹 약초꾼이나 사냥꾼이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해도, 우린 그저 평범한 도적 정도로 보여야 한다."

"아 악마씩이나 되는 양반이 뭐 그리 소심하대?"

사령술사가 툴툴거렸다. 그는 두건을 휙 걷어버리고 머리를 긁어댔다.

두건을 벗고 드러난 건 퀭한 눈에 비쩍 마른 얼굴. 신경질적인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아니 금은보화에 희생물을 가져오라는 것도 그래. 본인이 직접 가면 마을 하나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금방이잖아? 그러면 재물도 약탈하고, 희생물도 얻고. 일거양득인데."

"충분한 희생물로 힘을 회복하신 뒤에는 직접 행차하시겠지."

"충분? 대체 언제 충분해지는데? 영감 다 늙어 뒤지고 난 뒤에? 씨발, 난 악마만 부활시키면 우리의 시대가 올 줄 알았다고!"

"어허! 입조심하게. 그분이 내리시는 저주가 얼마나 강력한지 못 봤나?"

중년의 사령술사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는 잠시 수염을 쓸어내리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선 여전히 등 뒤에서 궁시렁거리고 있는 젊은 동료를 점잖게 타일렀다.

"다 그분의 깊은 뜻이 있을 걸세. 우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오셨으니, 그만큼 현명하고 신중하신 게 당연하지 않겠나."

젊은 동료가 잠잠해졌다.

그래도 사령술사로서 선배라고, 그가 타이르니 알아듣기는 하는 듯했다.

"조금만 인내하게나. 우리가 그분을 잘 보필해드리면, 머지않아···응?"

중년 사령술사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젊은 동료는 궁시렁거림만 멈춘 게 아니었다.

어느새 등 뒤에서 느껴지던 그의 기척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놈, 또 듣기 싫다고 동굴 안으로 내뺐구나.

철부지 소년이었을 때 스승님을 대하던 그 막되먹은 버릇 그대로였다.

"이 망령된 애새끼 같으니라고···!"

사령술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한참이나 연배가 높은 선배로서, 까마득한 후배를 따끔하게 훈계해줄 참이었다.

"이······."

그리고 그는 마주했다.

우악스런 손길에 소리 없이 목이 졸려 죽은 그의 후배와.

그런 후배의 목줄기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갑옷 차림 용병을.

횃불의 일렁임에 따라 번쩍이는 용병의 검은 눈.

마치 맹수의 것과 같은 그 시선을 마주친 순간, 악마를 앞에 두고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중년 사내를 덮쳤다.

"···치, 침입···!"

"쉿."

거대한 손아귀가 얼굴을 움켜쥔다.

침입자라 외치려던 구강 관절과 안면 근육이, 그 손아귀의 억센 힘에 어긋나고 구겨졌다.

"으, 으읍!"

안면을 넘어 두개골까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꽉 막힌 비명이 새어 나온다.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수인을 맺어내는 사내의 손가락.

일생 동안 수백 번을 거듭해왔던 사령 마법이 그 수인 끝에서 순식간에 발현되고.

끄어어···.

목이 으스러져 죽은 후배 사령술사가, 한 마리의 망자가 되어 지면을 딛고 일어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꽈드득!

안면을 움켜쥔 우악스런 손길이, 두개골의 전면부를 으깨버리며 사령술사의 뇌를 찢어발긴다.

머리 반이 으스러진 처참한 몰골로 사내가 쓰러지자, 되살아났던 젊은 사령술사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댈런은 손도끼를 뽑아 망자의 머리를 가볍게 쪼개주었다.

언데드의 약점은 머리 아니면 심장 부근.

사령술의 마력이 뭉쳐 만들어진 핵이, 도끼질에 단숨에 파괴되며 시체가 풀썩 무너진다.

순식간에 사령술사 두 명을 처리한 댈런은, 잠시 감각을 넓혀 그의 습격을 눈치챈 이가 있는지 살폈다.

동굴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사령술사와 흑마법사를 시켜 희생물을 모아오고 있다라. 여관에서 목격했던 것과 일치하는군.'

휙―

붉은 피를 털어낸 손도끼를 허리춤에 도로 꽂으며, 댈런은 방금 들은 말을 되새겼다.

'다행히 놈은 힘을 모으는 중이다. 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어.'

처음 불사의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댈런은 이 싸움이 상당히 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불사의 악마가 그저 '짜증나는 존재'에서 그친다고 하지만, 그건 게임 중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충분한 희생물로 힘을 얻은 불사의 악마는, 성검을 타락시키려 했던 악마 골라캅도 손쉽게 제압할 정도로 강력했다.

다만 그건 충분한 희생물이 공급되었을 때의 이야기.

불사의 악마는 독특하게도, 그런 희생물 없이는 본신의 전투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악마였으니까.

'직접 희생물을 찾아다니지 않는다는 건, 아직까지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소리지.'

젊은 사령술사의 말이 옳았다.

불사의 악마는 악마답지 않게 극도로 소심한 놈이었다.

삼백 년 전 성기사단에게 패배해 봉인되었던 과거가, 놈의 행동 양식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

어쨌든 놈이 아직까지 이 동굴에 처박혀 있기 원한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현재 댈런이 소유한 무력 정도면, 놈을 꽤나 손쉽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였으니까.

댈런은 오랜 시간 달려와 느슨해진 갑옷끈을 한 번 더 조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최소화된 동작으로, 허리띠와 등에 달린 무장들을 확인했다.

등 뒤의 성검. 왼 허리춤의 검과 단검, 오른 허리춤의 도끼.

그리고 허리띠 뒤에 매인 주머니 안, 오래 전 타락한 사슬 형태의 성물까지.

점검을 마친 댈런은 이내 발소리 하나 없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악마에게 목줄을 채울 시간이었다.

***

"침입자! 침입자다!"

"경비로 세운 놈들은 대체 뭘 한 거야!"

동굴 안이 쩌렁쩌렁 울린다.

사령술사들의 고함과 비명, 언데드들의 괴성이 한데 뒤섞여 동굴 벽에 메아리쳤다.

"망자들로 방어선을 구축해! 좁은 길목에서 막아 세워야 한다!"

"테모므― 타레온!"

곳곳에 널브러진 육신이 주문의 힘 아래 일어서고, 어질러져있던 뼛조각들이 스르르 짜맞춰진다.

칼이며 방패, 창 따위를 집어든 망자와 해골 병사들은 우르르 몰려가며 동굴의 통로를 막아섰다.

"벽을 세워! 더 큰 놈을 일으켜내!"

"망자 병사들이 1초를 못 버텨! 일단 물러서면서 시간을 벌―어억!"

동굴 안으로 달려가며 외치던 사령술사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의 뒤통수에는 길쭉한 나무 손잡이가 돋아나 있었다.

손도끼였다.

"히, 히익!"

곁에서 함께 달리던 흑마법사는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도끼가 날아왔을 동굴의 출구 방향을 쳐다봤다.

동굴의 가장 좁은 길목을 가로막은, 수십 구나 되는 망자들과 해골 병사들.

그 살덩이와 유골의 파도를 정면으로 뚫어내는, 거구의 전사가 흑마법사의 눈에 들어왔다.

"괴물···!"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서 한 단어가 흘러나온다.

정작 그 말을 뱉은 당사자가, 괴물과 악마를 이 땅에 불러내는 흑마법사라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동시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사의 눈길이 스르르 돌아가 흑마법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전사가 씩 웃었다.

그리고 섬광이 번쩍였다.

우르르릉―!

동굴을 뒤흔드는 우렛소리.

그 굉음과 함께 뻗어나간 섬광이, 망자의 파도를 죄다 부수고 흑마법사의 몸뚱이마저 으깬다.

살짝 뻐근해진 어깨를 몇 번 휘휘 돌리는 것만으로 금세 풀어버리며, 댈런은 널브러진 살점과 뼛조각의 잔해를 지나 걸어갔다.

"테모므― 스케리드!"

"캄프― 쎄 글램!"

저주막이의 인장이 빛나며 발을 묶어 세우는 저주를 끊어내고.

주먹질 한 번에 지옥문의 파편에서 몰려나온 임프들이 서너 마리씩 으깨져 나가떨어진다.

그르르.

구으으으.

살점과 내장을 덕지덕지 붙여낸 거대한 늑대와, 뼛조각들을 긁어모아 만들어낸 3미터 크기의 해골 거인이 앞길을 막았으나.

우르르릉―

천둥과 함께 댈런의 주먹 끝에서 뻗어나간 섬광은, 그 모든 걸 부수고 그 뒤의 사령술사들까지 쓸어버렸다.

"으, 으으으."

"끄흑! 끄허······."

운 없게 즉사하지 않고, 몸의 일부가 곤죽이 된 채 살아남은 사령술사들이 신음을 흘려댄다.

댈런은 그 사이를 걸어가며, 손도끼를 휘둘러 그 숨통을 끊어주었다.

동굴 입구에 발을 들인 지 한 시간도 채 안 된 시점.

거의 오십에 달하는 사령술사와 흑마법사의 은신처는, 그 짧은 시간 만에 단 한 명의 전사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흠."

흑마법사 잔당을 정리한 댈런은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경험치 막대는 마녀를 잡은 이후로 간신히 반의 반 수준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자 한 건 경험치가 아니라, 그보다 한참 아래의 스킬 목록.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스킬 중 하나의 세부 정보를 열어보았다.

[데하만의 갑주격투(D)]

- 제국 기사단장이었던 데하만이 창시한 갑주 격투술. 휘하 기사들이 무기를 잃어버리면 빈 깡통마냥 당하는 걸 보다 못해 만들었다. 갑옷을 방패이자 무기로 사용한다.

- 숙련도 99%

이 땅에 떨어진 이후 처음 얻은 스킬이자, 분쇄검을 얻기 전까지는 유일무이했던 무투 스킬.

그 스킬의 숙련도는 어느새 백 퍼센트에 근접한 상태였다.

이대로 백 퍼센트를 찍는다면, 야간 시야에 이어 두 번째로 최대치의 숙련도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최대치의 숙련도라는 개념은, 요 몇 주 사이 댈런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야간 시야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 스킬 자체를 영역에 접목시킬 수 있었지.'

그 결과는 단순히 미명의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걸 넘어서서, 주문과 신비로 감춰진 비밀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

그 시야로 마녀의 본체를 찾아낸 순간, 댈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영역을 사용한다'는 개념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말이다.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린테노는, 영역이 존재하는 환상세계를 불가능이 없는 또 다른 우주라고 정의했지.'

지난 몇 주간 틈 날 때마다 영역을 들여다보며, 댈런은 영역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품은 속성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그가 이뤄낸 영역이 일차적으로는 필멸을 넘어선 힘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그 힘이 품은 끝없는 가능성이,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나는 부화장이기도 하다는 사실.

'우렛소리와 섬광을 동반한 일격은, 임계치를 돌파한 근력 수치가 나의 심상과 맞물려 그 가능성을 실체화한 것이다.'

주문과 신비 너머를 꿰뚫어 보는 시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임계치에 다다른 야간 시야가 내포한, '꿰뚫어 본다'는 본질의 가능성이 극대화된 결과.

물론 가능성만 있다고 모든 스킬과 능력치에 영역이 접목되는 건 아니었다.

가능성이 발아하는 조건은, 그 능력이 어떤 임계치에 근접해갈 시점부터였으니까.

인간의 육신으로 음속을 돌파하는 어마어마한 근력.

혹은 최대치의 숙련도를 달성한 야간 시야라는 스킬.

그리고 데하만의 갑주격투 역시 숙련도 백 퍼센트를 코앞에 두고 있는 만큼, 영역을 접목시킬 수 있는 일차 조건이 달성된 셈이었다.

남은 건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과 실전뿐.

사실 그 이미 실마리는 잡혀가고 있었다.

숙련도가 90퍼센트 후반대에 들어설 때부터, 어떤 깨달음의 조각들이 댈런의 머릿속에 간질간질하게 스며들고 있었으니까.

대사도에게 뇌성의 일격을 날렸을 때와 같이.

그리고 잿구름에 가려진 마녀의 진체를 꿰뚫어 봤을 때와 같이.

댈런은 심상 속에 자리 잡아가는 깨달음의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갔다.

그리고 높은 지능 수치는 그 깊은 고찰 속에서도, 주인의발 걸음을 어긋남 없이 동굴 안쪽으로 이끌었다.

***

악마의 처소는 멀리 있지 않았다.

동굴 안으로 오 분쯤 더 걸어들어갔을까.

쩌렁쩌렁 메아리치는 어떤 목소리에, 댈런은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나아갔다.

"당장 희생물을 더 가져와라! 제물을 바치라 하지 않았느냐!"

"하, 하오나 악마시여. 조금 전 동굴에 침입자가 난입했다고 합니다. 희생물을 공양해드리기에 이곳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무례하구나! 내가 여기 있는데 어찌 안전하지 않다는 망발을 내뱉느냐! 그 주둥이가 썩어들어가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아, 악마시여. 제발···!"

작은 공동.

검은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 하나가, 두 손을 모아쥔 채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댈런은 바위 뒤에서 인기척을 죽이며, 살아 꿈틀거리는 그 거대한 음영의 덩어리를 바라봤다.

'놈이군.'

그건 거대한 나무의 음영이 땅에서 솟아나와, 그 스스로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은 모습.

한편으로는 거무튀튀한 부정형의 먹구름이, 수 미터짜리 거인의 크기로 일렁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네놈이 공포를 아느냐! 두려움을 아느냐! 침입자라 하였거늘, 누가 더 네 녀석에게 저주스러운 존재가 될지 알려줘야 하겠는가!"

놈이 분노를 토해내자, 부정형의 구름 몸뚱이에 우르릉거리며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동시에 불길한 안개 같은 것이 그 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놈이 소리쳤다.

"침입자가 있다면 마땅히 전투를 준비하고 희생물을 바쳐 나의 은총을 빌어야 할 것이거늘! 네놈같이 불순한 신도는 잡아먹혀 마땅하도다!"

"제, 제발 그것만은···!"

흑마법사는 뒤늦게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안개를 발견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안개는 기다렸다는 듯,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놈을 덮쳤다.

"흐아아아악!"

안개가 닿는 곳마다 검버섯과 곰팡이가 동시에 피어오른다.

부식되어 떨어지는 옷가지 사이로, 피부 아래 드러난 연조직이 피고름을 철철 흘려댄다.

녹색 거품이 부글거리는 입으로 비명을 지르던 흑마법사는, 얼마 가지 않아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이내 죽은 육체에서 피부와 근육, 장기가 녹아 검은 안개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음. 으음. 역시 타락한 마력이야말로 지고의 별미로구나."

그렇게 영혼과 육신을 모두 섭취한 악마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지켜볼 필요는 없을 듯했다. 댈런은 바위 뒤에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음?"

저주로 검게 변한 흑마법사의 유골을 휙 던져버린 악마가, 인기척을 느끼고 댈런을 돌아봤다.

악마가 말했다.

"호오, 네가 그 침입자인가?"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허리 뒷춤에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차르르르······.

부드러운 금속의 마찰음이 흘러나오고.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사슬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손과 팔목을 자연스레 감싸안는다.

"그, 그건···!"

사슬을 본 악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당혹감을 본 댈런은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미궁도시의 성기사단 지부에서 루시아에게 넘겨받은 뒤, 한참을 주머니 속에 처박아뒀던 이번 의뢰의 선수금.

오래 전 성기사단이 잃어버린 타락한 성물, '할만의 사슬'을 마침내 사용할 때였다.

불사의 악마(3)

스아아아―!

검은 안개가 몰아친다.

피부를 녹이고 근육을 짓무르게 하며, 내장을 부패시키고 신경을 교란하는 저주의 총체.

수십 가지 저주가 뒤섞인 끝에 눈에 보이는 실체로 빚어진 것이, 동굴의 바닥과 벽을 부식시키며 한 명의 인간을 향해 내달렸다.

우우웅―!

그리고 문신이 빛을 발한다.

어깨에 새겨진 저주막이의 인장.

가히 백에 달하는 저주의 융단폭격이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반 가까이는 그리 치명적일 것 없는 저주들이다.

설사를 유발하고, 가려움을 일으키며, 독한 구취나 피로감 따위를 빚어내는 저주들.

인장의 힘은 그것들을 가볍게 끊어내고, 그보다 상위의 저주들 역시 위력을 반감시켰다.

쩌저저정!

저주의 안개와 인장의 힘이 충돌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나온다.

거무튀튀한 안개를 쏟아내던 불사의 악마는, 힘의 충돌로 깨져나가는 저주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건 엘프의 인장! 그 뾰족귀 놈들은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을 맹세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거냐!"

댈런은 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도끼를 뽑아들고 내달렸다.

꽈광―!

발밑의 동굴 바닥이 퍽 하고 부서지며, 댈런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진다.

악마가 쏟아내는 저주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과감한 선택.

쩌정! 쩌저정!

저주막이의 인장이 수십에 달하는 저주를 해소함에도, 거무튀튀한 안개 자체는 끝내 댈런의 몸에 닿고야 말았다.

피부 위에 보랏빛 피멍이 피어오른다. 주름마다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자라났다.

강철 같은 근육이 올올이 짓무르기 시작하고, 신경에 스며든 저주가 초인적인 감각을 그 자체로 교란하려 한다.

저주막이의 인장으로 위력이 반감되었다고는 하나, 저 검은 안개의 주축을 이루는 저주들은 그럼에도 가히 사람을 죽일 위력.

모든 것을 재로 바꿔 흩어버리는 마녀의 저주에는 못 미칠 터이나, 이 역시 어지간히 튼튼한 몸뚱이 정도로는 버틸 수 없는 위력이었다.

물론 댈런의 육신은, 그냥 어지간히 튼튼한 몸뚱이가 아니었다.

두근.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는 순간, 뜨거운 혈액이 그의 사지말단까지 뻗어나간다.

두근.

펄펄 끓는 용혈의 재생 인자는 임계에 가까워지는 체력 수치와 맞물려, 몸이 손상을 입음과 동시에 수복해나갔다.

치이이이···!

짓무르던 근육이 더욱 탄탄하게 재생되고, 피어오르는 곰팡이는 고열을 버티지 못해 바스라진다.

용혈이 격하게 활성화되며 온몸에서 증기가 뿜어진다.

쏘아진 댈런의 신형은, 마치 포연 속을 꿰뚫는 포탄과도 같았다.

"요, 용의 피라니···!"

그 광경을 본 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으나, 댈런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느새 도달한 악마의 면전.

그가 도끼를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감탄은 다 했나?"

우르르릉―!

섬광과 뇌성이 벼락처럼 내리꽂힌다.

아니, 그건 말 그대로 한 줄기의 벼락이었다.

오래 전, 텔리아 상회주를 두 동강내며 깨달음의 단초를 열어젖혔고.

대사도와의 결전에서 맨손으로 악마의 육신을 찢어발긴다는 불가능을 이룩해냈으며.

펠버와의 대화를 통해 영역의 개념을 자각한 끝에, 악마 골라캅을 소멸시키면서 그 심상을 마침내 구체화한 일격.

우뢰를 동반한 벼락같은 섬광.

「뇌격(雷擊)」.

"끄아아아악!"

부정형의 육신마저 으깨버리는 일격을 날리며, 댈런은 다시금 영역의 개념을 재정립한다.

주먹과 날붙이로 벼락을 불러온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심상과 가능성만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영역의 힘.

수십 번이나 반복한 옛적의 깨달음을 반추해내며, 거기서부터 확장되는 새로운 깨달음의 입지를 더듬어간다.

"대체 어떻게 날붙이 따위로 내 육신을···! 나는 형태 없는 존재, 어떠한 주먹이나 날붙이로도 나를 위협할 수 없을진대!"

악마가 고통스레 발악하며 붉은 기운을 몸에 덧씌운다.

놈의 몸뚱이는 처음에 비해 1할 정도가 줄어든 상태였다.

희생물의 숫자에 따라 몸을 불려내고, 반대로 힘을 쓸수록 덩치와 능력이 약소해지는 놈의 특성 때문이었다.

"안 되겠구나! 내 모든 힘을 쏟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네놈을 집어삼켜야 하겠다!"

악마가 소리쳤다.

놈의 주변으로 공간이 이지러지기 시작하고, 핏빛 화염이 넘실대며 두 손에서 쏟아졌다.

"나는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 역천에 드리운 어두운 별나무 그 자체이며, 비틀린 공간과 지옥화염을 발 밑에 둔 자. 종말까지 영속하는 삶을―커억!"

우르릉―!

재차 내던진 강철검이, 뇌격의 섬광을 품은 채 악마의 안개 덩어리 같은 육신을 강타한다.

"크윽! 으으윽."

악마가 땅을 뒹굴며 신음을 토해낸다.

댈런은 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며, 두 주먹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임계치를 넘어선 근력 수치는, 우렛소리와 벼락을 부르는 뇌격으로 표출되었다.

마찬가지로 임계점에 닿은 야간 시야는, 주문과 신비를 꿰뚫어 보는 기이한 시선으로 발돋움했고.

그렇다면 최초로 습득했던 무투 스킬이 임계에 다다른 이 순간.

제국의 옛 기사단장 데하만의 손에서 창시된 갑주격투술은, 어떤 형태로 그 가능성을 완성해낼 것인가.

"후우."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심상 속을 뻗어나가는 가능성의 편린을 움켜쥔다.

갑주격투라 함은 결국 갑옷을 입어야만 효율을 내는 무투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댈런에게 있어, 그의 피부보다 단단한 갑옷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갑주격투가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갑옷을 빚어낼 재료가 필요했다.

우르르릉!

심상 너머의 영역을 들여다본다.

그 설산의 기초를 이루는 건 뇌성을 품은 하늘과 용혈의 힘으로 맥동하는 대지.

하늘과 땅을 두드려 갑옷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 돌려보면 다른 가능성들이 보였다.

화륵! 화르륵!

파지지직!

오두막 근처에서 맴돌며 얽혀대는 불꽃과 냉기, 그리고 전격의 향연.

그가 얻어낸 D등급 주문 스킬들은, 처음에 비해 그 크기를 꽤나 불린 상태였다.

후우.

댈런은 반개했던 눈을 떴다.

그리고 꽉 말아쥔 주먹을 눈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굳은살과, 마수의 가죽 이상으로 질긴 피부.

드높은 체력 수치로 빚어진 그 갑옷 위에.

화르르르!

심상 속 불꽃으로 새로운 갑주를 덧씌운다.

"그, 그건 또 뭐냐."

뇌격의 여파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악마가, 두 팔과 다리를 덮은 화염의 갑주를 보고 질겁했다.

악마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 굳이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

아공간 속으로 도망쳤다가, 전사가 방심할 때 다시 기습하면 그만이었다.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는 은밀하게 등 뒤의 공간을 열어젖혔다. 공동의 어둠이 일렁이며 비틀린 틈을 내보였다.

그리고.

화륵!

전사가 사라졌다.

콰과과광―!

화염을 휘감은 주먹이, 악마의 측면을 파고들며 그 육신을 강타한다.

"커어억!"

주문을 갑주이자 무기 삼은 박투술은, 저주로 빚어진 부정형의 뭄뚱이마저도 찢어발길 수 있었다.

화륵―!

아래에서 위로 발끝을 올려차, 악마의 거대한 몸뚱이를 공중에 붕 띄우고.

꽈과광!

어느새 천장을 거꾸로 디딘 전사의 신형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며 화염 두른 주먹으로 악마를 다시 지면에 처박는다.

콰광! 쿠르르르!

끊임없이 몰아치는 공세 속에서, 악마의 육신이 점차 작아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놈의 정신은 혼미함 그 자체가 되어갔다.

저주나 다른 수단으로 반격할 의지는 이미 상실했고,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은 도망치는 것뿐.

허나 그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우렛소리를 내던 예의 그 공격이라면, 일격의 전후에 생기는 잠깐의 틈이라도 활용해 도망칠 텐데.

불꽃 갑주를 두른 전사의 공격은, 물 흐르듯 끝없이 이어지며 그 잠깐의 틈마저도 내어주지 않았으니까.

"자, 잠깐! 잠깐만 기다···커어억!"

틈이 생겼다 싶으면 주먹이 짓쳐들어오고.

"조금만 시간을―그아아악!"

마력을 운용하려 하면 바로 어깨로 들이받는다.

마치 악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수단으로 도망치려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

'새끼. 바로 꼬리 마는 거 봐라. 내가 너 때문에 한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도주 패턴들을 기억 안 해놨을까?'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뇌격이라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댈런이 굳이 갑주격투를 통한 깨달음을 얻으려 한 이유.

그건 바로 수틀리면 일단 도망치고 보는 불사의 악마의 행동 양식을, 말 그대로 지겹도록 봐온 까닭이었으니까.

"자, 잠ㄲ―!"

"닥쳐라."

"커허억!"

전투라고 하기에도 뭣한 일방적인 구타는, 그렇게 한참을 더 이어졌다.

***

동틀녘이 가까워졌다.

거의 30에 근접한 수치가 되어, 인간을 한참이나 벗어난 댈런의 체력마저도 슬슬 지쳐갈 정도였다.

몇 시간에 달하는 주먹과 발길질의 향연.

그 끝에.

"하, 항복!"

마침내 악마는 항복을 외쳤다.

"하, 으하하, 항복. 항복······."

실성한 듯 웃는 악마의 정신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 으스러진 상태.

기본적인 마력의 운용마저 중단해버려, 부정형의 몸이 난잡하게 일그러진다.

희생물로 얻은 힘은 이미 다 소모한 상태라, 놈의 몸뚱이는 이제 댈런의 무릎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놈은 두 손 두 발을 펴고 댈런의 발치에 넙죽 엎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댈런은, 마침내 천천히 주먹을 내렸다.

'이 정도면 됐겠군.'

댈런은 생각했다.

죽일 것처럼 패긴 했지만, 정말로 놈을 죽일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애당초 불사의 악마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죽일 수 없는 존재.

그럼에도 댈런이 놈을 이토록 두들긴 건, 다름 아닌 타락한 성물을 사용하는 조건 때문이었다.

'할만의 사슬은 의외로 그 사용 조건이 까다롭지.'

일단 구속하는 순간부터는, 설령 용이라도 복종시킬 만큼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할만의 사슬.

하지만 그 구속을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 중 하나를 만족해야만 했다.

구속되는 대상이 어떤 간섭에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대신 그 의지가 저항 불가할 정도로 꺾인 상태여야 하는 것.

불사의 악마라는 특성상, 첫 번째 조건은 달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희생물로부터 얻어낸 놈의 힘을 죄다 소진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잃은 상태가 되는 것.

댈런의 무차별적인 구타는, 바로 그 상태가 될 때까지 두들겨 패려는 의도를 담은 폭력이었다.

"흐, 흐흐흐흐···살려만, 살려만 다오. 아니, 죽여줘도 좋다. 신이여, 나를 이 무자비한 폭력에서 구원해주시오······."

악마가 애처롭게 신을 부르짖는 모순적인 광경.

댈런은 피식 웃으며 손목을 감은 사슬을 풀어냈다.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감도는 사슬은, 마치 자의식을 가진 것마냥 스르르 움직여 악마에게로 향했다.

이미 정신이 곤죽이 된 악마는 저항하지 않았다.

차르르르―!

곧이어 사슬이 작은 상자만 해진 악마의 몸을 휘휘 감아버리더니, 보랏빛을 강렬하게 뿜으며 그 부정형의 피부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댈런은 악마와 자신이 어떤 굴레로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마침내 악마의 정수를 감아버린 사슬이, 악마를 그의 종복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몸뚱아리를 실체 있는 형태로 바꿔라."

"으윽."

댈런이 명령했다. 악마의 몸은 그 즉시 부정형을 벗어나 물리적인 실체를 갖춰냈다.

발끝으로 툭툭 차보니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감촉이었다.

마치 솜사탕과 고무공을 반쯤 섞은 듯한 질감이랄까.

"···으흐, 으흐흑. 내가 어찌 이런 꼴로 전락했는가······. 내가 어찌······."

그제야 본인의 처지를 깨달은 걸까.

불사의 악마는 땅을 치며 눈물 없는 울음을 흘려댔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가 말했다.

"야."

"······어흐흐흑."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 없는 울음만을 계속 흘려댈 뿐이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음, 이거 대답하는 교육은 따로 시켜야 하나 보군.

댈런은 다 삭아버린 갑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동굴 저편에서 흑마법사의 로브 하나를 가져와 걸쳤다.

편한 복장까지 갖췄으니 준비는 끝났다. 댈런은 뻐근해진 어깨를 슬슬 풀었다. 그가 말했다.

"야, 악마 새꺄."

"어흐흑. 필멸자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반항 하나 할 수 없는 내 신ㅅ···."

"지금부터 '예.'나 '주인님'. 이외의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열 대씩 더 맞는다. 알겠나?"

악마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놈이 중얼거렸다.

"아, 어···예?"

"일단 스무 대."

댈런은 주먹을 들어올렸다.

예로부터 주인 말 안 듣는 악마는 제때 패서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 법.

체감상 동틀녘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교육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이었다.

***

루시아는 저 멀리 산자락을 내다봤다. 해가 산능성을 완전히 넘어오고 있었다.

댈런과 삼거리에서 만나기로 한 건 분명 동틀녘.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오지 않고 있었다.

'잘못된 건 아니겠지?'

루시아는 손끝으로 말 고삐를 문질거렸다. 그 손길에서 초조함을 느꼈는지, 말이 고개를 치켜들며 짧게 울었다.

그때였다.

"어? 저기 댈런 님 아닌가요?"

소년 용병 파른이 소리쳤다.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보통 사람에 비해 유난히 시력이 좋은 소년.

루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신성 문신의 힘을 끌어올려 시력을 강화했다.

저 멀리 걸어오는 거구의 전사가 보였다. 갑옷은 어디에 팔아먹고, 어두운 색의 로브 하나만 걸친 전사.

등 뒤의 천에 싸인 성검과, 허리춤의 마법 단검이 멀리서도 그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댈런!"

루시아가 소리쳤다. 댈런은 이미 그들을 발견했는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휘휘 흔들어주었다.

"어···근데 저건 뭐죠?"

파른이 말했다.

루시아는 그 말을 듣고 시력을 좀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저 멀리 댈런이 무언가를 질질 끌고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밧줄에 묶인 거무튀튀한 어떤 덩어리.

무슨 산짐승을 잡아왔나 싶었던 그녀의 짐작은, 댈런이 화살 한 바탕 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와장창 깨졌다.

죽은 줄 알았으나,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무튀튀한 덩어리.

그 어떤 짐승의 형태와도 같지 않은, 마치 찰흙덩이를 뭉쳐 놓은 듯한 덩어리의 외견.

거기다 결정적으로 성기사의 내면을 언제나 충만하게 채우는, 신성력의 불길한 떨림과 경고까지.

짐덩이처럼 질질 끌려온 그 검은 존재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며, 루시아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댈런, 그거 설마······."

"맞소."

댈런은 씩 웃었다.

그는 밧줄을 눈앞에 들어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채, 다 죽어가는 신음을 흘리는 검은 존재.

"즈인···님···예, 알겠습···주잉······."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만을 중얼거리는 그 존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댈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요."

"······."

"오늘부로 내 노예가 됐지."

루시아는 할말을 잃었다.

내분(1)

"우와."

소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물렁―

손끝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

첫 감촉은 어린 짐승의 살갗처럼 말랑했다가, 조금 더 힘을 주자 손가락 반 마디 깊이까지는 스르르 묻혀버린다.

그러면서도 그 안쪽은 탄력이 있어서, 손을 떼는 순간 탱글거리며 곧장 형태를 회복했다.

"오오. 신기해."

악마의 피부에 손을 문질거리면서, 소년의 눈빛이 점차 흥미로 물들어갔다.

소년은 하늘의 구름을 조금 뜯어 가져오면 이런 느낌일까 하고 상상했다.

물론 푸르른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은 아니고, 밤하늘의 어두컴컴한 먹구름이긴 하겠지만.

"재밌나?"

"어, 음······예. 헤헤."

소년은 해맑게 웃으며 악마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댈런은 그 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유일하게 불편한 이는 악마 본인뿐이었다.

하긴, 명색이 악마인데 십대 소년의 장난감이 됐으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러나 댈런이 보고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불편한 침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눈이 좀 무서운 거만 빼면 괜찮은 친구 같아요."

"음. 눈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밧줄을 휙 당겨 악마를 들어올렸다.

"케엑―!"

수박만 한 크기의 악마가 눈앞에서 대롱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놈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비록 수박 크기로 줄어들긴 헀지만, 겉모습 자체는 수 미터짜리 거체일 때와 비슷한 형태였다.

거무튀튀한 찰흙덩이 같은 몸체.

짧지만 고무줄처럼 죽죽 늘어나는 팔다리.

그리고 몸통 한가운데 갈라진 틈처럼 보이는 입과 검붉게 박힌 두 개의 눈.

그중에서도 두 눈이야말로 가장 악마답다고 할 만한 부위였다.

흰자위 없는 검붉은 눈은,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어 충분히 소름돋을 법했으니까.

"야."

"아, 예. 주인···님······."

거듭 시선을 피하던 악마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댈런은 씩 웃었다. 그가 말했다.

"너 눈깔 색도 바꿀 수 있냐?"

"···가능은 합지요."

"바꿔봐. 좀 봐줄 만한 눈깔로."

악마는 살짝 불만인 표정이 되었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았다.

놈은 조막만 한 두 손을 눈으로 가져가더니 몇 번쯤 비벼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붉던 두 눈은 흰자위에 검은 동공이 있는 평범한 눈이 되었다.

"음, 훨씬 낫군."

댈런은 밧줄을 내려 악마를 소년의 곁에 놓아주었다.

파른은 변한 악마의 눈을 보더니, 손을 뻗어 악마의 머리를 도담거리기 시작했다.

"헤헤, 귀여워졌네."

"···댈런, 대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한 겁니까?"

루시아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일 수 없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굴복시켜야지. 달리 방법이 있나?

"성기사단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입니다. 그래서 결국 외딴 동굴에 봉인했던 것이고요."

"생각은 했을 거요."

댈런이 말했다. 루시아가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이 불사의 악마를 봉인한 건, 기사단의 전성기였던 삼백 년 전 악마 토벌기 시절 아니오? 할만의 사슬은 그보다도 백 년 전에 혈귀전쟁에서 잃어버린 물건이지. 기사단도 생각은 했을 거요. 실행할 성물이 없었을 뿐."

"댈런은 가끔 이상할 정도로 박식하십니다. 평소랑은 전혀 다르게요."

루시아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던 손을 멈칫했다.

···내 평소 이미지는 뭔데 그럼?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성기사는, 말 고삐를 빙글빙글 꼬아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지는군요. 기사단 쪽에서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국 영토 안에서 말을 못 타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여간 적응할 수 없는 문화라니까요."

렝클턴 마을을 떠난 지 이틀째.

일행은 제국 가도를 따라 걸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대륙의 삼분의 일을 홀로 지배하는 제국은, 그 크기만큼이나 잘 닦인 길로도 유명했다.

매끈한 판석을 고르게 깔고, 양 옆에는 배수로까지 파서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제국의 가도.

그러나 의외로 불편한 것이, 바로 제국 가도에서는 아무나 말을 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귀족의 가문 구성원이나 기사, 아니면 전령만 말을 탈 수 있다니. 대체 무슨 법이 이렇답니까?"

"그만큼 제국은 귀족 계급이 중심축이라는 소리 아니겠소."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합니다. 제국의 황제든 영지에 묶인 농노든 간에, 신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필멸자일 뿐입니다."

댈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지나가던 제국 병사가 들으면 바로 포승줄로 묶어버릴 발언인데.

"그 와중에 말 이외의 짐승이나 마차를 타는 건 괜찮다고 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루시아가 툴툴거렸다.

댈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이야기이긴 했다. 제국에는 생각보다 이런 뭣 같은 법이 많기 때문이었다.

길 맞은편에서 귀족이 다가오면 가도를 잠시 벗어나서 가야 한다던지.

귀족이 여관에서 묵게 되면 양 옆의 방은 무조건 비워야 하는 등등.

이건 제국이 귀족 중심의 문화이기도 하거니와, 그 귀족과 기사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남작만 백수십에, 그 윗줄의 귀족들까지 하면 수백.

거기다 그 가문 구성원까지 하면 수천이 훌쩍 넘어가는 숫자였다.

준귀족이나 다름없는 기사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십만 이상까지 올라가겠지.

더 놀라운 건 이것도 예전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줄어든 결과라는 점이었다.

전대 황제는 중앙집권을 이룩하는 데 열심이어서, 쓸데없는 관직을 싸그리 정리하고 수많은 귀족 핏줄들의 대를 끊어버린 인물이었으니까.

그 손에 숙청된 귀족들만 기백에 달한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결과론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몇 배나 강해지긴 했지. 그리고 중후반부의 재앙들 중 절반 가까이가, 그 비대해진 황권과 전쟁광 황제의 충동적인 행동 때문이었어.'

다행히 아직까지 전쟁에 대한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종말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는 것 역시 사실.

어쩌면 이 땅에 평화로이 발을 들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댈런은 제국의 가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

세 사람과 악마 하나는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일행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사와 병사들의 무리를 마주쳤다.

이유는 뻔했다.

종말이 다가오며, 전 대륙에 마물이 준동하는 상황.

제국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는 없으니, 제국군은 마물이나 오크, 혹은 그들에게 밀려난 도적들을 토벌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종종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부상병들이 끼어있는 걸로 봐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제국 역시 토벌이 마냥 쉽지만은 않은 모양.

다만 그들의 노력 덕분인지, 가도 근처는 며칠 동안 평온했다.

중간에 상단 하나를 만나 옷가지와 식료품 조금을 산 것 이외에, 댈런과 일행은 별다른 일 없이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렝클턴 마을에서 출발한 지 닷새째.

세 사람과 악마 하나는 마침내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저기 보이는군."

댈런은 저 멀리 사람들이 줄을 선 검문소를 보며 말했다.

검문소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앞에 있었다.

북에서 남으로 흘러, 균열을 만나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에스트라 강.

노리아 왕국으로 넘어가는 제국의 서쪽 경계는 강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우와, 사람이 되게 많네요."

파른이 말했다.

시력 좋은 아이는 저 멀리 깨알만 한 다리 위의 검문소도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댈런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검문이 강화되었다 하더니 정말이군. 아무래도 짐 검사까지 다 하는 모양이오."

"저희가 고기랑 채소를 산 그 수염쟁이 상인 아저씨 말이죠?"

"그래. 그 수염쟁이 상인."

댈런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어깨를 움직여 배낭을 슬슬 흔들어보았다.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

그동안 따로 쓸 일이 없었기에, 가방에 든 금화는 이백 닢이 넘어갔다.

'이거 잘못하면 통행세를 금화 단위로 뜯길 것 같은데.'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악마를 내려다봤다. 그가 말했다.

"야."

"···예, 주인님."

어느새 주인님 호칭도 익숙해진 악마가, 넋을 반쯤 놓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밧줄을 툭툭 당기며 말을 이었다.

"너 아공간 있지 않냐."

"···그렇습니다만."

"좀 빌려야겠다. 어떻게 열지?"

댈런의 말에 악마가 머뭇거렸다.

놈은 땅딸막한 팔로 눈가를 긁적이며 말했다.

"주인님께 두들겨 맞으면서 마력을 바닥까지 털린 탓에···정해진 통로 외에 추가로 여는 건 안됩니다."

"정해진 통로는 어딘데?"

악마가 손을 들었다. 놈이 가리킨 건 자기 입이었다.

"여기······."

"됐군. 아가리 벌려라."

"으으븝···!"

댈런은 곧장 가방을 벗어서 악마의 입에 밀어넣었다. 별달리 고민할 건 없었다.

불사의 악마는 원래 부정형의 존재. 사람처럼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내장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놈의 입은 그냥 아공간 주머니의 입구인 셈이었다.

"우욱···컥! 콜록! 콜록!"

가방을 삼킨 악마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놈은 자기 몸보다 몇 배는 큰 배낭을 집어삼키느라, 몸뚱이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돌아온 상태였다.

"······."

"······."

그리고 파른과 루시아는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걸 바라봤다.

파른은 저 작은 몸뚱이에 큼직한 배낭이 들어간 걸 신기해했고.

루시아는 악마를 무슨 진짜 노예 부리듯 하는 댈런의 태도에 식겁한 것이었다.

물론 댈런은 그런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악마의 아공간에 품속의 금화 주머니까지 집어넣은 뒤, 놈의 본체를 아공간에 숨어있도록 명령했다.

아쉽게도 성검은 아공간에 넣지 못했다.

한때마나 강력한 신성력을 품었던 물건이라, 악마의 아공간에 넣었다가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들리지? 금화 한 닢이라도 잃어버리면 서커스단에서 갚아야 할 거다.'

[······예.]

아공간 속의 악마를 속으로 윽박지르면서, 댈런은 자연스럽게 파른의 짐을 대신 짊어졌다.

저 멀리 보이던 검문소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이었다.

늦은 손님을 맞게 된 경비가 피곤한 얼굴로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정지. 잠시 검문이 있겠다."

하품을 쩍쩍 하며 손바닥을 펴는 수염 덥수룩한 경비. 갑옷에 독수리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기사였다.

"그대가 대표인가?"

"그렇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나?"

댈런은 용병패를 꺼내주었다. 금패를 본 기사는 약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기사는 댈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투가 바뀐 건 덤이었다.

"일행은 이렇게 세 명이오?"

"그렇소."

댈런이 끄덕였다.

사실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사람으로 안 치니 세 명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르비바흐. 성기사단의 본단으로 가고 있소."

"본단 말이오?"

기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댈런은 손을 뻗어 파른을 앞으로 데려오며 말했다.

"이쪽은 내 이복동생이오. 성기사님께서 얘한테 성기사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하셨소. 그래서 데려가는 길이지."

기사가 졸린 눈을 큼직하게 떴다.

어린 소년과 덩치 큰 댈런이 형제라는 점에서 한 번, 그리고 그 곁의 로브를 두른 미인이 성기사라는 점에서 한 번 더 놀란 것이다.

루시아는 로브를 살짝 젖혀 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보여주었다.

기사는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소이다. 요즘 사령술사에 대한 소문이 팽배하다보니, 검문을 철저하게 하고 있소."

"괜찮습니다. 악을 처단하는 일에는 모두가 협력해야 하는 법이죠. 귀하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기사는 쑥쓰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는 눈 둘 곳을 못 찾다가, 괜히 파른을 향해 칭찬을 쏟아냈다.

"허허, 꼬마 손님이 어린 나이에 험한 일을 좀 당한 모양이군. 그러고도 성기사님의 눈에 들었다니, 굉장한 무재겠소."

"신의 은총을 입은 아이지요. 기사단에서 그 은총은 한 자루 검으로 연단될 겁니다."

"허허허, 파웰이 그대들을 굽어보시기를."

"전쟁의 신께서 함께하시길."

성기사와 기사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댈런은 그 와중에 손으로 덮은 작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느꼈다.

기사는 일행에게서 기본적인 통행세만 받았다. 따로 짐 검사도 하지 않았다.

대륙을 지키는 성기사께 무례를 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별 탈 없이 검문을 통과하려던 찰나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리 건너에서 웅성임이 일었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다리 위로 이어졌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급하게 말을 몰아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정지! 여기서부터는 제국의 영토다! 말에서 내려서···"

"전령이오! 전령!"

사내가 소리쳤다.

그는 경비병의 코앞에서 말을 멈춰세우더니, 큼직한 패 하나와 문서를 들이밀었다.

기사는 미간을 팍 좁힌 채 그걸 낚아채서 살펴봤다.

그때 루시아가 사내를 보고 외쳤다.

"오클란?"

"루, 루시아 경!"

사내는 놀라서 마주 외쳤다. 그는 곧장 말에서 뛰어내려 다가왔다.

'성전사?'

댈런은 빠르게 사내의 옷차림을 훑었다.

어두운 색의 로브. 가죽 갑옷에 새겨진 성기사단의 문양. 그 위에 튄 얼마 안 된 핏자국. 손과 목에 자잘한 상처들.

그는 성전사였다.

그것도 전투를 겪은 지 오래지 않은 성전사.

뭔가 불길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동안 지체 없이 루시아에게 다가간 사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루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루시아 경. 단장님께서 경과 일행에게 피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냐는 의미였다.

성전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기사단이 둘로 분열됐습니다. 내전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내분(2)

"내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루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클란이라 불린 성전사는 침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부단장과 그 휘하의 특임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삼백 년 전 기사단의 영광은 어디 갔냐며, 기사단이 이렇게 변방의 소왕국에 틀어박혀있는 건 기사단장의 욕심 때문이라 주장했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루시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곁에서 댈런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성기사단의 부단장, 에버로크 글라스덴.'

재의 마녀와 함께 중반부 최악의 난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존재.

사실 완전히 각성한 마녀에 비하면, 그 본신의 무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악신과 계약을 맺고 힘을 증폭시킨 마녀와는 달리, 부단장은 악신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놈이 까다로운 난적인 건 그 무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 성기사단의 내분을 일으키는 주범이기 때문이지.'

대륙의 운명은 벼랑을 양 옆에 끼고 걷는 장님 신세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전운과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는 악신의 시선 속에서, 그야말로 매 순간 멸망으로 다가가는 상황.

그런 와중에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자신의 이익마저 도외시하고 종말에 온전히 맞서고자 하는 세력은 많지 않았다.

비단 전쟁에 미쳐가는 남부 제국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문화가 극명하게 차이나는 동부의 삼왕국은 무슨 재앙이 닥치든 서로를 도외시했고.

서쪽 연맹국들은 지난 백 년동안 그랬듯 돈과 권력을 두고 저들끼리 물어뜯기 바빴다.

수십 년째 야만인들의 침략을 받는 차르국과 균열을 틀어막은 성기사단, 그리고 미궁을 발밑에 둔 팔시온의 초월자들 정도가 그나마 종말을 막고자 노력하는 이들.

부단장 에버로크는 그토록 중요한 세력 중 하나를, 내부에서부터 와해시키는 주범이었다.

'안 그래도 본단에 도착하면 놈의 근황을 알아보려 했는데, 벌써 내분을 일으킬 줄은 몰랐군.'

종말의 발걸음이 다시금 한 박자 빨라진다.

부단장의 때 이른 반역은, 아무래도 재의 마녀의 영향이 컸을 테였다.

사실 천 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던 기사단을 분열시키는 건, 아무리 부단장의 지위를 가졌더라도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놈은 오랫동안 재의 마녀와 내통하며, 자신의 그릇된 야망을 이루고자 준비해왔다.

그리고 그 협력자인 재의 마녀가 사망한 지금.

궁지에 몰린 놈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준비해온 야망을 모두 포기하던지, 결과가 어찌되건 마지막 발악을 해보던지.'

현 상황을 보니 놈은 후자를 택한 모양이었다.

"부단장은 역대 단장들이 심문관들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능력이 출중한 성기사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다면서요."

"어떻게 그런 미친 소리를···! 그걸 믿는 이들이 있습니까?"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특임대 대부분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제가 본단을 떠날 때쯤, 놈들은 제 3성소를 완전히 장악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사는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흰 가닥이 드문드문 보이는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의 흉터와 깊은 주름들은, 그가 오랜 시간 성기사단에 몸담아 헌신했다는 증거.

그런 완숙한 전사에게도 지금의 일은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큰 사건이었다.

루시아는 한동안 말을 잊시 못했다. 잘근잘근 짓씹던 입술이 창백해질 즈음에야,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단장님께서는 만약 루시아 경을 만나게 된다면, 운반 중인 물건을 반드시 사수할 것을 당부해달라 하셨습니다."

"명심하지요. 그대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십시오."

루시아가 힘겹게 미소를 자아냈다. 성전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사에게서 패와 문서를 건네받았다.

"명심하시오, 제국의 기사. 이 사안은 결코 퍼져나가서는 안 될 것이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기사에게 경고한 성전사는, 댈런과 그 일행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곤 다시 말을 타고 달려갔다.

그 방향은 제국 안쪽을 향해서였다.

단장의 전령으로서 제국 곳곳의 성기사단 지부에 내전 소식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

성전사가 떠난 후, 일행은 말없이 검문소를 통과했다.

루시아는 계속해서 입술을 잘근거렸다. 댈런은 언제나와 같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파른은 두 어른을 힐끔거리며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댈런과는 달리 소년은 성전사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지만, 용병 생활을 하며 눈칫밥을 꽤 먹었던만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검문소를 지나서도 말을 타고 한참을 갔을 무렵.

루시아는 말을 멈춰세웠다.

"댈런. 여기서 의뢰를 마치셔도 좋습니다."

댈런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성기사를 바라봤다.

"여기서?"

"예. 여기서 그만두셔도 의뢰는 완수한 것으로 취급하겠습니다. 보수는 상황이 수습되는 대로 본단에 초청해 지급해드리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도움은 필요 없으시오?"

"······."

루시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이내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굳이 당신을 사지로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는 그쪽은?"

"저는 성기사단의 심문관입니다. 기사단을 배신한 반역자를 처치하는 게 제 의무죠."

루시아는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 내비쳤다.

조금 전, 전령으로 길을 떠난 성전사에게 지어보였던 그 미소와 비슷했다.

댈런은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는 천에 싸인 성검 손잡이를 잡고 그걸 묶은 쇠사슬을 풀어냈다.

차르르르―

사슬과 천이 벗겨지며 성검의 푸른 자태가 드러난다.

넓고 길쭉한 검신의 양손검은, 곳곳에 희미한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각지고 날카로운 형태의 물결 무늬.

공들여 섬세하게 세공한 것이 아닌, 누군가 실수로 망치를 잘못 놀린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새겨진 흔적들.

아름다움과 투박함을 동시에 간직한 검신을, 댈런은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봤다.

우웅······.

그러자 성검이 희미하게 울었다.

댈런뿐 아니라 곁에 있는 루시아와 파른도 느낄 수 있는 울림.

댈런은 씩 웃더니 말했다.

"이걸로 하지."

"예?"

"이번 의뢰의 보수 말이오."

루시아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검은 날 선택했소. 신성력을 상실한 뒤, 내 손에서 그 힘을 되찾았지. 르비바흐 숲에서 마녀가 한 말을 빌리자면, 그건 신이 나를 선택한 거나 다름없소."

그리고 역사를 보면 그 선택은 언제나 절대적이었지. 댈런은 덧붙였다.

기사단의 오랜 역사에서도 몇 번 없긴 했지만, 성검이 성기사 이외의 존재를 주인으로 인정한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들 중 일부는, 전쟁의 신을 따르지 않음에도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곤 했으니까.

그리고 기사단에 굵직굵직한 풍파가 불어닥칠 시기마다, 그 영웅들은 성검을 휘두르며 기사단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루시아는 댈런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고는 반색했다.

"기사단의 내전에 개입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야지. 아니면 내 보수를 어디서 받겠소?"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동안 체력 능력치가 근력을 많이 따라온 상태라, 처음 생각하던 체력 증강 문신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신성 문신에 체력을 올려주는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각 능력치를 높여주는 건 물론이요, 독이나 화염, 주문에 대한 내성을 높여주는 것들도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종말이 끊임없이 발을 빠르게 놀리는 이 때, 그런 문신들의 하나하나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법이다.

'거기다 신성력을 얻으려면 언젠가는 성기사단을 한 번 들러야 하고.'

신성 문신이든 성검이든,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신성력을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댈런의 기억 속, 신성력을 가장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시체는 균열 저 안쪽에 들어가야만 찾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루시아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댈런은 픽 웃으며 성검을 다시 천으로 싸맸다. 그가 말했다.

"거 신성 문신 없었으면 진작에 입술 다 헐었겠소."

천으로 싸맨 성검을 사슬로 등에 멘 댈런은, 고삐를 살살 흔들어 말을 출발시켰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어두운 남색이었다. 태양은 이미 지평선 위로 넘어가 있었다.

사라진 태양은 작별 선물이라는 듯 지평선 위에 보랏빛과 붉은빛, 주황, 노랑을 켜켜이 쌓여 층을 만들어냈다. 댈런은 그걸 보며 달달한 칵테일을 떠올렸다.

까마귀 둥지에 돌아가면 버번에게 칵테일 한 잔 만들어달라 해야겠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댈런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말했다.

"어서 갑시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오. 오늘은 씻고 침대에서 자야지."

댈런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말은 곧장 길을 따라 내달렸다.

용병 소년도 어어 하더니, 실수로 말 옆구리를 차버려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마지막으로 남은 루시아는 전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삐를 쥐고 말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일행의 선두가 되었다.

댈런에게는 아직까지도 승마 스킬이 없었다.

***

성기사단의 본단은 노리아 왕국의 남서쪽에 있었다.

대륙 남부의 대수림으로 이어지며, 끝을 모르고 깊어지는 거대한 계곡인 '균열'.

그 균열의 입구를 틀어막은 게 바로 기사단의 본단이기 때문이었다.

제국 국경을 넘은 이후, 일행은 며칠 동안 말을 타고 노리아 왕국을 가로질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오클란과 같은 전령들을 몇 명 더 마주쳤다.

그리고 소문은 보통 말을 타고 달리는 전령만큼이나 빠른 법.

마을 여관이나 도시의 대장간을 방문할 때마다, 기사단의 분열에 대한 소문이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 강성하던 기사단에 내분이라니. 믿기지 않는군. 역시 인간은 필멸자 중에서도 줏대 없기로 손꼽히는 놈들이야.]

악마가 아공간에서 중얼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혼잣말이냐, 아니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호, 혼잣말이었습니다, 주인님!]

"혼잣말이 좀 큰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악마가 쭈글쭈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이 아공간에서 두 손바닥을 싹싹 빌어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댈런은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봤다.

깊은 숲 속의 야영지. 타오르는 모닥불. 깊게 잠든 성기사와 소년. 저녁 남은 걸 데워먹은 빈 그릇.

르비바흐를 떠난 지 보름이나 되어, 어느새 익숙해진 밤풍경이었다.

'어쩌면 이 풍경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군.'

댈런은 숲 너머의 산자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들이 노숙하는 곳은 노리아 왕국 남서쪽의 이름 모를 숲이었다.

이 숲에서 눈앞의 산맥까지는 대략 하루 거리. 거기서부터는 성기사단의 영역이었다.

내전이 진행중이라고는 하나, 루시아의 말에 따르면 산맥의 관문까지 부단장의 부하들이 장악했을 확률은 낮았다.

게임의 경험을 되새겨봐도, 보통 산맥의 관문과 본단 건물은 부단장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놈이 주로 본거지로 삼는 곳은 각종 성물과 특별한 무구를 보관해두는 제 3성소였으니까.

애초에 부단장이라는 직책 자체가, 기사단의 무기고라 불리는 제 3성소의 관리를 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뚱한 눈으로 산자락 위에 걸린 별자리를 바라보던 댈런은 문득 물었다.

"에낙사구스에 대해 잘 아냐?"

[저,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머릿속에 울리는 악마의 목소리.

"그래. 같은 악마잖아."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악마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에낙사구스라···지옥의 다섯 신들 중 가장 교활한 존재지요. 뒤집힌 하늘의 지배자이자, 종의 탈피를 연구하는 천 개의 손. 제가 태어난 곳도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였습니다. 대륙에서는 운명을 엮는 난쟁이라는 별명으로 가장 유명하다더군요.]

"그런 추상적인 내용 말고는 없어?"

[어······.]

악마가 입을 다물었다. 놈도 딱히 더 이상 아는 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대륙의 비밀 대부분을 아는 댈런마저도 악신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유일하게 확실한 정보는, 놈들이 모든 종말의 배후에 도사리는 원흉이라는 사실.

그나마 악신 에낙사구스는 다른 악신들보다 정보가 많은 편이었다.

가장 교활한 악신이라는 말대로, 놈은 대륙 곳곳에 자신의 종복들을 암약시켜두었기 때문.

그만큼 모니터 너머에서부터, 댈런은 놈과 간접적인 충돌을 숱하게 겪어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인가. 팔시온에 도착한 뒤로 이상하게 그놈이랑 자주 얽히는군.'

역행의 사도들과 대사도, 놀 전사장 바르구프, 불사의 악마, 재의 마녀.

그리고 그 마녀의 영향을 받은 부단장 에버로크 역시 악신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댈런이 팔시온에서부터 해온 싸움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에낙사구스와의 대결이나 다름없을 정도.

'신들이 주시하는 전사.'

죽은 대사도와 초월자 중 하나인 에버론이 했던 말이,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곱씹어진다.

신적인 존재들이 실제하는 이 세계에서, 저 신들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제국의 만신전? 지옥의 악신? 아니면······.

바스락.

상념은 거기에서 끊겼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없는 숲 속.

빽빽한 나뭇잎에 별과 달도 가려져, 짙은 음영은 그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흐릿했다.

그러나 댈런의 눈은 그 어둠을 꿰뚫고 바라볼 수 있었다.

광을 지워낸 판금과 부드럽고 유연한 가죽으로 만든 흑색의 갑옷을 입고, 날을 검게 칠한 무기를 뽑아든 스물 남짓의 인영들.

사실 놈들이 일행의 뒤를 밟기 시작한 건 저녁즈음부터였다.

굳이 쫓아가서 처리하자니, 아무리 그라도 다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기에 내버려뒀을 뿐.

그러나 한밤중이 되니 생각이 달라진 걸까.

댈런이 숲에 발을 들일 때부터 천천히 좁혀오던 포위망은, 어느새 그를 중심으로 백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댈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성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검을 감싸고 있던 천과 사슬이 떨어지며, 숨겨졌던 성검의 모습이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빛의 검신.

그 모습에 포위망을 구축한 인영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댈런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고는 발끝에 힘을 줬다.

그러자.

퍼억―!

방금까지 서 있던 땅이 가볍게 터져나가며, 그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내분(3)

테른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붙이고, 전방을 향해 세 번 흔들었다.

'전진.'

나아가라는 수신호였다.

자박.

신호를 받은 소대원들이 조심스레 풀숲을 헤치고 전진했다. 테른도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특임대였다.

성기사단에서도 뛰어난 인재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특수한 임무를 전담하는 부대.

최상급의 무구와 특수한 장비들로 무장하고, 그에 맞는 훈련을 받은 전투원들이었다.

스으―

검은 가죽과 무광 처리된 판금이 소리 없이 수풀을 스친다.

목까지 덮는 얇은 가죽옷과 얼굴에 쓴 가면은, 신성 문신의 빛마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막아주었다.

테른은 목 뒤쪽의 문신을 활성화했다. 시력을 강화해주고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신성 문신이었다.

'저기 있군.'

백 걸음쯤 떨어진 나무들 사이. 목표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오후부터 추격해온 성기사의 호위 의뢰를 맡은 용병.

놈은 북쪽 서리고원에서 내려온 듯한 덩치의 전사였다.

이 미터쯤 되는 키에 갑옷 위로도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들. 검고 긴 머리와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

검과 방패를 쓴다는 정보와 달리 놈은 방패 없이 검 하나만 달랑 차고 있었다.

그밖에 장비한 건 허리 뒤쪽의 단검, 오른 허리춤의 손도끼, 그리고 등 뒤에 사슬과 천으로 묶어둔 길고 넓적한 물건이었다.

길고 넓적한 물건.

'성검.'

부단장이 말한 대로라면, 저건 여섯 번째 성검 토르타니스였다.

원래라면 본단의 비처에 잠들어있어야 할 기사단의 보물.

그러나 몇 달 전, 바렛이라는 성기사가 미궁도시로 수행을 떠나며 멋대로 들고 나가버렸다고 들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한 건지······.'

사실 테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렛의 이름은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뛰어난 실력과 존경받을 만한 인품으로, 수습기사 시절부터 돋보였던 인재.

그런 이가 어쩌다가 성검을 도둑질한다는 생각을 한 건지.

아니, 그 전에 성검이 보관된 본단의 비처에 대체 무슨 수로 들어간 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비처는 기사단장의 승인이 있어야지만 출입 가능한 공간.

설령 기사단장이 부재했을 경우라도, 부단장의 승인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으니까.

'···으음.'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테른은 방금까지 하던 생각이 어째선지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작전 중에 쓸데없는 생각은 금물.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목표였다.

'놈이 가진 성검. 저건 어쩌면 이번 내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물건이다.'

비록 악마의 손아귀에서 사실상 힘을 잃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성검은 기사단 최고의 보물이었다.

성검이 가진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분명 열세인 전황을 극복할 카드로 쓸 수 있을 테였다.

차르르르···.

그때였다.

야만인이 꿈지럭거리더니 성검을 뽑아들었다.

천과 사슬이 풀려나며 드러나는 푸른 검신.

은은하게 푸른빛을 머금은 검신을 보며 테른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힘을 회복한 건가···?'

테른은 나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수신호도 잊어버렸다.

분명 성검은 힘을 잃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빛을 내고 있지?

만약 성검이 처음부터 힘을 잃지 않은 것이라면, 저 야만인 전사는 성검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검의 인정을 받은, 신이 간택한 전사를 습격하려 한다는 의미.

성검이 진짜 힘을 잃었었다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힘이 저 전사의 손에서 되찾아졌다는 소리니까.

단순히 인정을 받은 수준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크윽!'

복잡해지는 머릿속. 또다시 아까의 그 기분 나쁜 찌릿함이 머리를 파고든다.

'임무에 집중하자. 임무에······.'

곧 혼란은 사라지고 목적만이 뚜렷해졌다. 테른은 찌푸렸던 눈을 부릅떴다.

그는 손을 들어 공격 신호를······.

"···어?"

눈앞의 전사가 사라지고 없었다.

강화된 테른의 시선이 포착한 건, 전사가 있던 자리에서 튀어오른 흙더미뿐.

순간적으로 끌어올려진 감각에, 나뭇가지가 연달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숲 저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

'이걸로 다섯.'

댈런은 성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냈다.

그의 발밑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시체가 두 동강 난 채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감각을 흩뿌려 다음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퍼억!

발밑의 부드러운 흙이 터져나가며 그의 몸이 쏘아진다.

댈런은 땅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도약 스킬로 가속을 거듭했다.

달빛조차 가려진 어둠 속.

그의 신형은 흐릿한 음영이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흔들리는 풀숲의 그림자와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정도.

신성 문신으로 안력을 강화한 특임대의 성기사들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걱―!

또 한 명. 잘려나간 상반신이 허공을 빙글 돌았다.

자리를 박차려던 댈런은 검을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쏘아진 무언가가 그의 검에 부딪혔다.

꽈아앙!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그 순간적인 섬광으로 쏘아진 물건의 형태가 드러났다.

'사슬추?'

그건 끝에 작은 추가 달린 사슬이었다.

보통의 사슬추와 다른 점이라면, 풀숲 너머로 빠져나온 길이만 수 미터 이상이라는 것.

차르르르―!

사슬추는 공격이 막히자마자 쏘아졌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댈런은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흐릿한 궤적을 쫓아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사슬추를 수습하는 특임대원이 보였다.

"어, 어떻게···!"

당황하는 검은 가면. 댈런은 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옆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순간 시간이 느려진 듯 느껴졌다. 인간의 영역을 한참이나 초월한 그의 감각 수치가 만든 현상이었다.

느려진 시간. 가속된 감각. 그 사이로 비산하며 날아드는 납구슬들이 포착됐다. 시발. 산탄총이냐?

댈런은 내리긋던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날아드는 납탄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대신 그는 검 손잡이에 왼손을 더했다. 그리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스으으―

어깨로부터 마력의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그 소용돌이는 성검이 사슬추를 든 특임대원의 머리와 가슴을 쪼개고 옆으로 빠져나올 즈음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검끝에서 폭풍이 시작되었다.

쩌저저저정―!

크게 한 바퀴 휘둘러낸 검이, 그 휘둘러진 궤적 그대로 어떤 바람의 벽을 만들어낸다.

날아들던 수십 개의 납탄은 검면에 부딪히거나, 분쇄검의 여파에 휘말려 힘을 잃거나, 운 좋게 댈런의 갑옷과 피부를 찢어냈다.

그렇게 피부를 찢어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댈런은 납탄을 막아낸 즉시 손도끼를 내던졌다.

손도끼가 수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내 퍽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비명은 없었다.

댈런은 곧장 땅을 박찼다.

'놈들이 도망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성기사단의 특임대.

기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위험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이자, 기사단의 무기고에 잠든 온갖 기이한 병기들을 다루도록 훈련받은 이들.

놈들은 성기사의 능력을 가졌다뿐, 실상 싸우는 방식은 암살자에 가까웠다.

사교도나 타락한 이단, 혹은 악마 자체를 처리하는 심문관들과는 다르게.

특임대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인해 불가피하게 기사단의 '비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기 때문.

그런 만큼 한 명이라도 살아서 돌아가는 순간, 다음 습격은 더욱 치밀하고 교묘해질 게 뻔했다.

본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수백 회차 동안 이 세상을 구해보려 노력한 그의 경험상, 이곳에서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끄으윽···!"

목이 반쯤 갈라진 성기사가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쓰러진다.

십여 분에 걸친 사냥 끝에, 남은 건 한 놈이었다.

그리고 진형의 변화를 지켜본 결과, 놈은 이들의 지휘관이었다.

부스럭.

댈런은 풀숲을 헤치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특임대 지휘관 역시 피할 수 없음을 눈치챘는지, 움직임 없이 제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댈런이 물었다.

"이름이 뭐냐?"

"테른."

검은 가면이 들썩였다. 긴장한 호흡이었다.

"성검을 노린 건가?"

"그렇다."

"부단장이 시켰나?"

"···네가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거 성기사가 아니라 사이비 신도가 다 됐네.

그는 성검을 가볍게 고쳐 쥐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특임대원이 어떤 막대를 내밀었다. 그리고 막대 끝이 빛났다.

뻐어어엉―!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 눈앞을 가득 메우는 하얀 빛.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어떤 가루가 흩뿌려지고, 그 가루에 불똥이 마구 튀더니 저절로 불이 붙는 게 보였다.

타다다다닥!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가루에서 촉발된 화염이 전신을 뒤덮어버렸다. 도시에서 산 갑주는 순식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댈런은 어지러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검을 놓아버렸다.

화륵!

굳게 말아쥔 주먹.

두 손에서부터 불꽃이 일렁이며 피부 위를 내달린다.

불꽃은 주먹과 팔, 어깨를 집어삼키며 반쯤 불탄 갑옷 위로 화염의 갑주를 뒤덮었다.

이내 전신을 갑옷처럼 둘러싼 화염이, 막대에서 뿜어진 불을 집어삼켜 꺼뜨려버린다.

댈런은 눈을 떴다.

특임대원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였나?"

댈런은 주먹으로 대답해주었다.

콰득!

뻗어진 주먹이 검은 가면을 부수고 두개골을 으깨버린다.

금속과 가죽, 천을 겹친 단단한 재질의 가면은 유리처럼 와장창 박살나버렸다.

걸쭉하게 흘러나온 뇌수와 피, 부서진 가면의 조각들이 주먹에 엉겨 붙었다.

댈런은 손을 휘휘 털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성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문득 어떤 기척을 느꼈다. 그의 손이 흐릿해졌다.

쐐애애애―!

뒷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검이 날았다.

주문을 부수고 마법사의 마력 감응력을 꼬아버리는 마법 단검, 주문살해자였다.

상대는 단검을 맞아주지 않았다. 놀랍게도 피한 것 역시 아니었다.

스르르릉―

날아든 단검의 첨단이 새하얀 검면과 부드럽게 얽혀든다. 곧게 뻗은 검신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유연하게 단검을 인도했다.

미간을 노리고 날아간 단검은 그 흐름 속에서 힘을 잃었다.

스르르 떨어지는 주문살해자. 그 종착지는 부드러운 흙바닥이었다.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박.

백색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단검을 주워든 인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검날 부분을 잡고 내밀었다.

"부단장이 성검을 노리고 특임대 한 소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곧바로 달려왔음에도 좀 늦었군요."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푸른 눈의 초점은 흐릿했다. 분명 댈런을 향해 있음에도, 허공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소매가 나풀거리는 왼팔. 그에 반해 근육이 올올이 느껴지는 굳건한 오른팔과 손아귀.

천옷 위에 걸친 가벼운 가죽 갑옷에는 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댈런은 주문살해자를 받아들었다. 그는 단검을 허리띠에 대충 꽂아두고 손을 내밀었다.

"딱 맞게 오신 듯하군. 처음 뵙겠소, 기사단장."

"처음 뵙겠습니다. 신께서 주목하시는 자, 댈런."

흐릿한 눈의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좀 더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남자.

댈런의 손을 맞잡은 외팔의 검객은, 바로 성기사단의 기사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였다.

작가의 말(외전)

***

"흐음."

모닥불 앞. 루시아가 미간을 좁혔다. 가만히 불멍을 때리던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시오?"

"마음에 안 듭니다."

마음에 안 들어? 다짜고짜 뭐가?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넘겼을 발언이지만,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사슴 앞다리살을 앞에 두고 있자니 그럴 수만도 없었다.

모닥불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저 고기는, 분명 하루치의 여독을 사르르 녹여줄 만큼 탐스러운 미식이 될 터.

그 미식을 제공하는 요리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게 있으면, 뭐가 되었건 간에 도끼로 머리를 찍어버리는 게 옳았다.

"으에···?"

무심코 허리춤으로 향하는 손을 본 건 불사의 악마뿐이었다. 놈은 저주로 맛있게 녹여먹던 들쥐 시체를 툭 떨어뜨렸다.

그때 루시아가 말했다.

"불이 마음에 안 듭니다."

"불?"

댈런은 허리춤으로 향하던 손을 거뒀다. 불은 도끼로 찍어버릴 수 없었다. 루시아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에는 모닥불의 세기를 대략적으로나마 조절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습니다. 원정을 떠날 때면 항상 챙겨가곤 하죠. 무게가 좀 나가긴 하지만 야전 요리에는 그만 한 게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댈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휴대용 버너가 필요하단 거군."

"휴···예?"

"되었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댈런은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댈런의 그림자 속. 반쯤 녹은 들쥐 시체를 막 다시 집어들던 악마 아르보르가, 댈런과 눈이 마주쳤다.

"어···주인···님?"

악마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모닥불의 빛을 등진 댈런은, 그 가장자리가 붉게 빛나고 얼굴을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그림자 속에 묻혀서 음영이 졌다.

아르보르가 보기에 그건 마치 붉은 지옥의 기운을 겉에 두른 어둠의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악마도 두려워할 악마. 그의 입이 열렸다.

"야, 너 지옥불 다룰 줄 알지?"

아공간 주머니에게 또 다른 역할이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휴대용 버너였다.

내분(4)

루시아와 파른이 있던 야영지 역시 습격을 받았다.

댈런이 성검까지 뽑아가며 최대한 많은 숫자를 유인했음에도 한계는 있었던 것이다.

다만 기습은 실패했다. 야영지를 떠나 숲으로 들어가는 길. 댈런이 고의적으로 루시아의 모포를 툭 건드리고 갔던 것이다.

'······.'

눈치 빠른 성기사는 가만히 자는 척하다가, 습격자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벌떡 일어나 한 명의 목을 베어버렸다.

남은 숫자는 하나. 놈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루시아와 검을 맞댔다.

고도의 훈련과 특수한 장비로 무장한 특임대는, 혼자서 평범한 성기사 두셋까지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다만 루시아 역시 평범한 성기사의 수준은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선 바.

미궁에서 댈런의 뒤를 따라 백 마리가 넘는 놀 병사를 갈아버리고, 타락기사의 목을 잘라버린 경험 역시 그녀의 잠재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 투명한 단검으로 빈틈을 노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루시아는 옆구리 갑옷 부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투명 단검에 갑옷은 찢겨나갔고, 그 안쪽으로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신성력으로 치유했음에도 통증 자체는 약하게나마 잔류하는 모양이었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루시아 너는 열세인 상황을 뒤집는 잠재력이 있다. 다만 네가 우세할 때는 방심하는 경향이 있지. 주의하도록 해라."

"···예."

기사단장 에드거의 말에 루시아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저 여자가 저러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

평소 플레이대로라면 루시아와 기사단장은 도통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궁에서 악마 골라캅과 한 판 붙은 뒤, 끝내 악마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쳤을 루시아.

그녀는 도시와 야생을 떠돌며 수련을 거듭한 끝에 게임 중반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성기사단은 균열에서 범람하는 마물로 인해 반쯤 무너진 상태고, 기사단장 역시 최전선에서 싸우다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 번에 한 번 나올까 한 플레이로 둘 모두 살아서 재회했다 하더라도, 그때의 루시아는 수습기사가 아닌 완성된 영웅.

지금 같은 대화를 주고받을 리 없었다.

'이번 회차가 정말 많이 변하긴 했군.'

댈런은 새삼 느껴지는 감상에 한 번 더 소리 없이 웃었다.

"왜 자꾸 웃으십니까?"

"신기해서. 불만이시오?"

"···불만이라고는 안 했거든요."

루시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가만히 말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네 사람은 관문을 향해 말을 천천히 몰아가는 중이었다. 말은 세 필뿐이었기에 기사단장은 파른의 말에 함께 탔다.

소년 용병은 이따금씩 슬며시 고개를 돌려, 단장의 나풀거리는 소매를 힐끔거렸다.

일종의 호기심과 동질감, 어쩌면 기대감도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이제 말도 잘 타는구나. 어지럽다고 항상 도중에 포기하더니. 승마를 따로 훈련했느냐?"

"훈련은 아니었습니다만, 더한 것도 겪다보니 버틸만 합니다."

"형태가 어떠했건 약점을 극복했다면 그게 곧 훈련이지. 잘했구나."

단장은 낮게 웃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저거 설마 그때 갑각늑대 등 위에 올라탔던 걸 말하는 건가?

"그런데 단장님께서는 어째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희가 오실 걸 아신 겁니까?"

"네가 노리아 왕국 국경을 넘은 걸 신께서 보여주셨다. 너와 함께 온 세 손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지."

기사단장 에드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숲길 사이로 내리쬐는 달빛에 반짝거렸다.

고개를 꺾어 그걸 올려다보던 파른이 말했다.

"맞아! 예지안! 성기사단의 단장님은 미래를 내다보실 수 있어서, '인도자'라고도 불린다고 들었어요!"

소년의 외침에 기사단장은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머금었다.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는 듯한 미소였다.

"맞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미래를 전부 꿰뚫어보는 능력은 아니란다. 그저 신께서 간혹 어떤 장면들을 보여주실 뿐이야."

글쎄. 그 말보다는 더 대단한 능력이 맞을 텐데. 댈런은 생각했다.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

외팔의 검성으로도 유명한 그는, 앞이 안 보이는 대신 전쟁의 신이 내려주는 계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균열을 통해 미궁과 직접 맞닿아있는 성기사단이, 범람하는 마물에 맞서 단번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의 절반쯤이 성기사들의 공로였다면, 나머지 절반은 침공의 날과 시까지 정확하게 내다보고 대비해낸 단장의 공이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만능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부단장이 지금과 같은 반란을 벌일 리도 없었을 테니.

"세 손님···혹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루시아가 슬며시 물었다. 에드거는 초점 없는 동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성기사의 곁에는 어린 검성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자, 그리고 그에게 잡힌 작은 나무가 있다고 하셨지."

"검성······."

파른이 작게 중얼거렸다. 소년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스르르 피어올랐다.

댈런은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외팔 외눈의 검성이라.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을 듯했다.

***

날이 밝아올 무렵.

네 사람은 관문이 있는 계곡에 접어들었다.

성기사단이 위치한 균열 입구 주변은 굉장히 독특한 지형의 땅이었다.

균열 입구를 틀어막은 본단과, 그 본단을 중심으로 십여 개의 크고 작은 성소가 점점이 흩어진 모양.

그리고 그 본단과 성소가 펼쳐진 넓은 평원을,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맥이 둥글게 둘러싼 일종의 분지 지대였다.

그건 마치 신성한 땅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자연 성벽과 같은 형태.

혹은 반대로 균열에서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마물의 군세로부터 대륙을 지켜내기 위해, 그 입구를 넓게 둘러싼 우리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관문은 그 우리의 유일한 출구지. 아니면 성벽의 유일한 입구이거나.'

산맥은 말 그대로 절벽과 낭떠러지 같은 지형으로 가득했다.

어지간한 고산지대도 제 집으로 삼는 산짐승조차, 도저히 넘나들 수 없을 정도의 험지.

그런 산맥에 신기하게도 단 한 군데,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기사단의 관문은 바로 그 계곡의 중간을 틀어막은 요새였다.

계곡에 다다르기까지 루시아는 댈런과 함께 겪어온 여정을 풀어놓았다.

팔시온의 순은 구역에서 만나게 된 것과, 미궁에 내려가 악마를 처치하고 타락기사가 된 바렛의 눈을 감겨준 것.

그리고 성검을 운반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 만드레이크가 가득한 숲에서 마녀를 죽이고,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들이 가득한 동굴을 쓸어버린 일까지.

아공간에 짱박혀있는 악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에드거도 예지안을 통해 대충 뭔가 있다는 건 아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악마라는 사실을 이실직고하는 건 별개였으니까.

그것도 그냥 악마도 아닌, 삼백 년 전 성기사단조차 죽이는 걸 포기하고 봉인했던 악마라면 더더욱.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죠. 신께서 어째서 그대를 주목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에드거가 웃으며 말했다. 댈런은 무심하게 턱을 긁적였다.

용병이나 뒷골목 정보상도 아니고, 저렇게 신실한 사람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조금 낯간지러웠다.

"그래서 전황은 크게 변한 게 없이, 여전히 고착 상태라는 거군. 맞소?"

"맞습니다."

기사단의 내전은 오면서 마주친 전령들에게 들었던 소식 그대로였다.

부단장과 특임대는 여전히 제 3성소를 빼앗아 점거하고 있었고, 본단은 큰 타격 없이 균열과 제 3성소를 동시에 견제중이었다.

사실 특임대의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공격한다면 당장에라도 제 3성소를 함락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건 단장의 의지였다.

"대부분의 특임대원들은 자의로 기사단에 반기를 든 게 아닙니다. 저주 때문이죠."

"저주 말입니까?"

루시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성기사가 저주에 걸리다니?

성기사의 신성력은 저주와 상극. 어지간히 강력한 저주가 아닌 이상 성기사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만약 진짜 그런 저주에 당한 거라면, 여전히 신성력을 사용하던 특임대원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정확히는 저주의 형태를 띤 세뇌, 그 사이의 어중간한 경계에 위치한 술수다."

부단장은 특임대가 주로 사용하는 특수한 장비들에 그 씨앗을 퍼뜨려두었다.

물건에 깃들어 그 물건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사용자에게 침투하는 저주는, 저주술을 통한 암살에 흔히 사용하는 방식.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신체나 정신에 어떠한 직접적인 위해도 미치지 않았다.

그랬다면 사용자의 영혼에 직결된 신성력이 당장에 반발했을 테니까.

"이 저주는 교묘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피해자의 의식을 전환시키는 방식입니다. 수백 년 전에 비해 약소해진 성기사단의 위세에 불만을 가지게 만들고, 그래서 부단장이 외치는 기사단의 부흥을 옳다고 여기게 만들게끔 말이죠."

"부단장은 대체 어떻게 그런 저주술에 조예를 가진 겁니까?"

"그가 직접 만든 건 아닌 것 같구나. 기껏해야 신성력의 반발을 중화시키도록 약간의 조치를 취한 게 전부고, 나머지는 외부의 도움을 받았겠지."

마녀와 용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단다. 에드거는 덧붙였다.

댈런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생각했다.

용. 용이라.

그거 균열 안에 있는 그 용을 말하는 것 같은데.

'신성력을 얻음직한 시체가···아마 그 용의 영역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지.'

댈런은 성기사단의 본단까지 온 목적 중 하나를 다시금 되새겼다. 그때 에드거가 말했다.

"아, 벌써 도착했군. 기사단에 온 걸 환영합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관문이 코앞이었다.

***

관문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성벽이었다.

30미터에 달하는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 그 양끝은 깎아지는 절벽과 맞닿아 있었다.

산맥 사이로 푹 꺼진 계곡을 완전히 틀어막은 관문은, 악마의 침공이라도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멈추시오!"

관문의 성벽 위. 경계를 서는 성전사들 사이에서 성기사 한 명이 소리쳤다.

안력을 강화해 일행을 살피던 성기사는, 기사단장을 발견하고는 흠칫 굳었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혹시 단장님이십니까?"

에드거는 말 고삐를 놓고 검을 뽑아들었다. 흰 검신이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의 하늘 아래에서 빛났다.

첫 번째 성검, 백검(白劍) 루와흐.

기사단장을 상징하는 증표를 본 성기사는 다급히 외쳤다.

"개문하라!"

육중한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십 미터 가까운 높이의 거대한 성문이 활짝 열렸다.

일행은 말을 몰아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관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였다.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더라도 족히 몇 달은 내부에서 버틸 수 있도록, 충분한 물자와 무기가 확충된 거대한 요새.

"신성 문신은 본단에서 새겨드릴 수 있습니다. 기사단을 위해 여러 의뢰를 완수하시고, 성검까지 되찾아오신 만큼 제가 직접 새겨드리도록 하죠."

기사단장을 맞아 경례하는 성전사와 성기사들을 지나치며, 에드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성검의 인정을 받으셨다지요."

"그렇게 되었소."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성검의 소유권을 가지고 담판을 짓긴 해야 했다.

성검의 인정이 절대적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성검은 기사단의 소유물이었으니까.

때문에 댈런은 내전의 해결을 도와주고, 그 보수로 성검을 정식으로 양도받고자 했다.

"원래라면 본단으로 모셔서 여독을 풀 시간을 드리는 게 맞겠지만, 만약 이 내전을 도와주실 거라면 바로 작전에 투입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거가 말했다. 작전이라는 걸 보니, 정공법으로 승부를 볼 생각은 아닌가 보군.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 없소. 나 혼자 가는 거요?"

"아닙니다. 성기사 루시아가 동행할 것이고, 저희를 도와주고 계시는 마법사도 함께 작전에 투입될 겁니다."

"마법사라."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주문쟁이랑 같은 편에서 싸운 건 역행의 사도들을 처리할 때 이후로 처음인데.

그리고 잠시 후, 작전의 설명을 위해 회의실로 들어간 댈런은 너털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댈런! 여긴 어쩐 일인가!"

반색하며 그를 맞이한 갈색 수염의 노인.

그는 팔시온에서 사교도들에 맞서 함께 싸웠던 대지술사이자, 댈런이 신뢰할 수 있다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주문쟁이중 하나.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였으니까.

침투작전(1)

"흐하하! 이 머나먼 땅에서 아는 얼굴을 만날 줄이야. 어서 들어오게나! 어쩐지 마탑을 떠날 때 원두를 넉넉하게 챙겨오고 싶더라니, 다 이 때를 위해서였구만!"

환하게 웃으며 회의실 구석의 탁자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펠버.

금세 퍼지기 시작하는 구수한 향기를 맡으며 댈런은 미소 지었다.

'원래 저 정도로 유쾌함을 뿜어대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먼 타지에 가면 사람의 성격이 바뀐다고 하던가.

마탑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다가 머나먼 성기사단의 본단까지 왔으니, 나이가 지긋한 마탑의 원로 마법사라도 그럴 법했다.

"안녕하십니까, 댈런 님."

스승이 커피를 타는 동안, 과자와 과일을 그릇에 담아 가져온 금발의 청년 마법사가 인사를 건넸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토미 발렌티노.

하수도에서 은가면 사도에게 사로잡혔던 걸, 프로그맨 무리를 뚫고 구해냈던 원로 마법사의 제자.

어수룩함이 남아있던 모습은 이제 다 옛말인 듯, 그는 어느새 어엿한 마법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댈런은 갑옷 끈을 넉넉하게 풀어놓고, 성검과 강철검도 테이블에 기대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딱딱하지만 등을 잘 받쳐주는 의자였다.

"노인장은 여기 무슨 일로 오셨소? 마탑은 어쩌고."

"나? 나야 연구를 좀 할까 해서 여행을 떠났지. 내가 탑주도 아니고, 마탑은 나 하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네. 내가 맡고 있던 강의만 몇 개 떠넘기면 그만이니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연구? 성기사단이 자리잡은 이 땅에 마법사가 연구할 구석이 있나?

사실 신성력과 마력은 전혀 연관이 없는 영역이었다.

신성력과 마법이 뚜렷하게 실존하는 세상.

흔한 판타지 소설에서처럼 성직자들과 마법사들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세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친해질 구석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닐 텐데?

"허허, 몰랐나 보구만? 성기사단이 천혜의 요새로 사용하는 이 '장벽 산맥'은, 사실 주문으로 빚어낸 장벽이라네. 천이백 년 전, 작금의 대지술사들의 선조격 되는 젠글라 엘가이아께서 세우신 걸작이지."

댈런은 포도 몇 알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또 처음 듣는 설정이군.

영토의 주인인 기사단이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 이 땅을 두른 산지를 흔히들 장벽 산맥이라고 부르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산맥이 주문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라는 사실은 금시초문.

오랜 게임 플레이로 미래에 대한 지식은 빠삭하지만, 멸망과 전혀 연관이 없는 역사나 상식 쪽에서는 취약한 탓이었다.

약간 멀뚱해진 표정의 댈런 앞으로, 펠버는 끌끌 웃으며 커피 두 잔을 내어왔다.

"짐작하시겠지만, 그분은 우리 엘가이아 마탑의 초대 탑주이기도 하시다네."

"그렇군. 잘 마시겠소."

"그나저나 주문이 더 늘었구만. 저번에 미궁에 다녀왔을 때도 그렇더니. 대체 어디서 스승을 구해오는 겐가?"

시체를 주워서 얻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댈런은 그저 커피만 홀짝였다.

펠버 역시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는지, 곧장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이러니 내가 어찌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있겠나.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난 건 자네의 영향이 컸다네. 무섭도록 성장하는 자네를 보면서, 내 지난 세월의 안일함을 돌아보게 되었거든."

오랜만에 봤더니 말이 배는 많아진 펠버를 앞에 두고, 댈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커피와 함께 내어온 과자를 우물거렸다.

밀가루에 꿀을 섞어 구운 과자. 간만에 먹어보는 단 음식이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기사단장 에드거가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처음 보는 두 수염쟁이 성기사, 그리고 루시아도 함께였다.

"죄송합니다. 새 단원을 안내하느라 좀 늦었군요."

에드거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루시아의 약속대로 파른은 성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이 확정되었다.

다만 내전 중인 지금, 기사단의 영토는 곳곳에서 산발적인 습격과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훈련생 하나를 본단으로 데려가겠다고 온갖 호위를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파른은 당분간 관문 요새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막 합류한 분들도 있으니 현재 상황을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드거는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제 3성소를 점거한 부단장과 휘하의 특임대원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기사단의 물자 이송과 훈련을 방해하기 위해 끊임없는 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곳은 제 3성소 하나뿐이나, 다방면에서 발생하고 있는 피해는 그 이상이죠."

초점 없는, 그러나 선명한 의지를 띈 눈동자가 방 안에 자리한 여섯 명을 차례차례 짚어간다.

"그런 고로 시간이 많지 않다보니, 서로를 소개하는 순서는 잠시 뒤로 미루겠습니다. 울스턴 경, 헤스턴 경."

에드거의 부름에 성기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두루마리 몇 장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펼쳐 이리저리 퍼즐처럼 끼워맞췄다.

머지않아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지도 한 장이 완성되었다.

수많은 방과 복도, 벽과 기둥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 복잡한 지도.

펠버는 두 눈에서 마법사 특유의 마력광을 번뜩이며 지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건···고대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 지도군. 기사단의 지하에 거대한 유적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저 음유시인들의 과장된 서사라고 생각했건만."

"기사단 내부에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기밀입니다. 대대로 단장과 소수의 유적 관리자만에게 비밀리에 전승되어 왔지요."

에드거는 잔잔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흐릿한 눈동자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이지만, 묘한 압박감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내가 좀 흥분했소이다. 미안하오."

펠버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번뜩이던 눈빛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테이블을 내리누르던 분위기가 즉시 걷혀나갔다.

에드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젯밤 보급대를 습격한 특임대원 중 하나를 운 좋게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특임대의 간부격 되는 기사였죠. 그에게서 들은 증언으로, 특임대와 일부 성기사들을 여전히 세뇌하고 있는 저주의 근원지를 파악했습니다."

루시아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도착한 그녀로서는, 기사단의 주요 전력 중 하나가 그런 술수에 당했다는 걸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에드거는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 근원은 제 3성소에서도 가장 깊은 창고, 이곳입니다. 지하 유적을 통하면 외부의 수비 병력과 충돌하지 않고도 접근할 수 있죠."

이어지는 작전의 골자는 간단했다.

투입되는 인원은 이 자리에서 단장을 제외한 여섯 명.

이들은 관문 근처의 숨겨진 유적 입구로 들어가, 지하 유적을 통해 제 3성소로 향한다.

그리고 단장의 역할은 그동안 병력을 모아, 마치 전격적인 공성전을 할 것처럼 성소로 진군하며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단장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선 만큼, 대부분의 병력이 수비를 위해 성소의 외곽 성벽 쪽으로 집결할 터.

그렇게 내부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우리가 놈들의 뒤에 있는 저주의 근원지를 파괴한다는 거군."

"맞습니다."

댈런의 말에 에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의 근원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자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정비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겠소."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지하 유적을 통해 걸어가는 이상, 아무리 서둘러도 나흘길 이상은 걸릴 거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기사단의 피해는 심해질 터.

머지않은 종말을 대비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한 명의 성기사라도 더 살아남아 균열을 지켜내는 편이 좋았다.

***

그날 저녁.

마법사 둘과 성기사 셋, 그리고 용병 하나는 관문 요새의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굳게 잠긴 문과 숨겨진 통로를 몇 번이나 지나, 그들은 마침내 지하 유적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옛날 생각 나는데.'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한 통로 안.

빛 한 점 없는 어둠을 횃불로 밝혀 나아가면서, 댈런은 이곳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백 번의 플레이 중에서도 고작 두 번 정도였나.

그마저도 둘 다 정상적인 플레이는 아니었기에,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회차들이었다.

'시체를 회수할 겸 거기도 들러야겠군.'

이곳 지하 유적에는 불사의 악마의 힘을 크게 늘려줄 만한 장소가 있었다.

기껏 잡은 악마를 지금처럼 아공간 주머니 겸 휴대용 버너로만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사령술사들이 했던 것처럼 산 제물을 잡아다 먹이로 던져줄 수도 없는 노릇.

이런 기회가 있을 때 힘을 키워둬야 했다.

'중간에 잠시 빠질 수 있는 기회를 노려봐야겠어.'

댈런은 속으로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일행은 그렇게 지하 유적을 나아갔다.

뻣뻣한 수염을 길게 기른 두 성기사, 울스턴과 헤스턴이 앞장서서 이끌었다.

두 사람은 기사단에서 대대로 유적 관리자를 맡은 가문 태생이었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둘은 친형제였다.

"흐음. 여기는 저 통로랑 연결된 방 아닌가?"

"아니라니까. 이쪽이랑 이쪽이 이어지는 게 맞아."

수십 조각으로 쪼개진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끊임없이 이 길이 맞는지 토론하는 두 사람.

그럼에도 그 발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어, 마치 잘 아는 동네에 산책 나온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사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의 도면에, 적힌 글자마저 고대어인 이상 지도를 볼 수 있는 건 두 사람뿐.

태도가 약간 못미덥긴 해도 그냥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무너진 길이군."

"그럼 여기 이 통로를 타고 광장을 지나는 게 낫겠어. 중요 물자를 수송하던 통로라니, 그만큼 단단하게 지어져 있겠지."

경로는 중간중간 몇 번씩 수정되었다.

이 유적은 수천 년 전, 모래 황제가 전 대륙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할 적에 만들어진 장소.

곳곳이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해 막혀버린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령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더라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경우 역시,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하루쯤 이동하면서 일행은 점점 더 유적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댈런은 지도를 볼 줄 몰랐지만, 감각만으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경이로운 감각과 지능 수치는 발 아래의 복도가 어떤 각도인지, 출발한 이후 지금이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내려왔는지 항상 자동으로 계산하고 있었으니까.

"무너진 구간이 훨씬 줄어들었군. 유적 깊은 곳이 저층부보다 튼튼하게 지어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상태가 훨씬 좋다는 말이 맞았던 거야."

"삼촌도 그러셨지. 그 이야기를 꺼내시고 나서, 유적 심층부를 조사하겠다고 내려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지만."

"맞아. 그래서 당연히 심층부의 상태가 더 안 좋을 거라고 여겼었어."

작은 소리로 두런거리는 형제 성기사의 대화를 들으며, 댈런은 뒷목을 슬슬 긁었다.

무너진 통로나 방이 없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다른 것들도 멀쩡할 확률이 높다는 뜻도 되었다.

'굳이 좋은 예시로 들자면, 환기 시설 따위의 마법 장치라던가.'

댈런은 코를 킁킁거렸다.

저층부에서도 텁텁하던 공기가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오히려 맑아져 있었다.

나쁜 예시는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댈런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생각이라 해도 괜히 머릿속에 담아뒀다가 일이 터지게 되면······.

[이해가 안 되는군. 명색이 사망 왕조의 유적인데, 왜 함정이 하나도 없는 거지?]

"······."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이라면 저층부는 생활 공간으로, 심층부는 군사 시설이자 왕들의 묘지로 사용되었을 게 당연한데···아, 그,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입니다! 살려주십쇼 주인님···!]

'닥치고 있어.'

댈런의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인식했는지, 불사의 악마가 싹싹 빌어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무래도 악마 교육을 한 번쯤 더 해야할 것 같았다.

그때처럼 하룻밤 정도 시간을 비워놓고 신을 찾을 때까지 두들기면 입을 닫을 때를 아는 눈치도 좀 생기겠지.

댈런은 뒷목을 긁적이던 손을 옮겨 그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때였다.

끼이익― 철컹.

귓가를 간질이는 아주 미세한 소음.

관자놀이쯤의 손짓이 멈칫했다.

철컹. 드르륵. 그그그그―

톱니와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 무언가의 궤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진동.

어떤 복잡한 기계장치가 작동하며 발생하는 소음의 총아 속, 댈런은 본능적으로 감각을 확장시켰다.

오감이 공기와 땅의 떨림을 느끼고, 그걸 넘어선 육감으로 벽 너머에 빽뺵하게 들어찬 장치들의 작동을 읽어낸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마력의 흐름과 그 속에 감춰진 오래된 신비의 흔적마저 포착해내며.

벽 너머, 통로와 통로 사이를 가득 메운 어떤 장치가 그의 감각에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그 움직임과 작동 방식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장치의 목적.

'썩을.'

그건 바로 허가되지 않은 침입자를 말살하는 것.

그것도 아주 뼛조각마저 온전히 남기지 않겠다는 의도로 가득했다.

"어, 어어······."

뒤늦게 앞서가던 형제 성기사 중 하나, 울스턴이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기리릭―

그의 발밑, 움푹 들어갔던 바닥이 서서히 올라온다.

그걸 본 나머지 일행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

"······."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

댈런이 말했다.

"좆 됐군. 다들 뛰시오."

침투 작전(2)

댈런은 달렸다. 앞에는 길잡이 역할의 형제 성기사가, 뒤에는 두 마법사가 함께 달리고 있었다.

후미의 루시아를 돌아보던 그는, 손을 뻗어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챘다. 황동 화살촉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이런 씨발!"

루시아가 소리쳤다. 그녀가 휘두른 방패에 화살과 칼날들이 튕겨나간다.

황급히 일행 모두에게 보호막 주문을 입히는 펠버와 토미 발렌티노. 댈런은 또 한 번 날아온 화살을 손등으로 걷어내며 생각했다.

'좋지 않은데.'

감각이 사방에서 경종을 울려댄다. 벽이 다가온다. 사방에서 통로가 숨통을 조여왔다.

벽 사이의 틈이 녹슨 날붙이를 들이대고 갈라진 천장은 오물 섞인 기름을 쏟아냈다.

위를 올려다본 댈런은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칼로 기름을 쳐내는 게 가능할까?

"엘르 니멘툼!"

그때 다가오던 벽의 일부가 부서지며 흙더미가 치솟았다.

순식간에 구축된 토사의 벽은 쏟아지는 기름을 잠시 받아내다가, 일행이 지나자마자 무너졌다.

"괜찮으십니까, 스승님?"

"허허허! 내 비록 나이를 먹었어도 다리에 녹이 슬지는 않았다네! 젊을 적에는 미궁에도 곧잘 내려갔었어!"

제자의 염려에 껄껄 웃으며 대답하는 펠버. 참 유쾌해진 노인장이었다.

댈런은 강철검을 뽑아 날아오는 투창을 잘라버렸다. 창대까지 황동으로 만들어진 투창이었다.

"헤스턴 경! 언제까지 뛰어야 합니까!"

쿠르르르―!

고작 이십 미터 떨어진 등 뒤에서, 바닥과 천장이 하나가 되는 걸 본 루시아가 소리쳤다.

"그, 그게! 함정이나 숨겨진 길까지 따로 표시된 지도는 아니다 보니···!"

"이 멍청한 새끼야! 식당이나 창고 쪽으로 가면 되잖아! 밥 처먹는 곳에 함정을 설치했겠냐!"

"그렇군! 그렇다면 이쪽이오!"

투닥거리면서도 끝내 길을 찾아 달리는 성기사 형제들. 댈런은 어째서인지 간질거리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두 성기사가 못미더워서가 아니다. 하루 동안 지켜본 결과, 옥신각신 다투기는 해도 길 하나는 제대로 찾는 이들이었다.

다만 과연 식당 쪽으로 갔을 때 함정이 없겠는가.

일행들 중에서 가장 월등하다 할 법한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는 함정을 피하고 있는 게 아니야.'

댈런의 직감은 그렇게 말했다.

'함정에 쫓기고 있는 거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가만히 설치된 함정이 뭐라고 그들을 쫓아오겠는가.

댈런은 감각에 집중했다. 촉각이나 시각 따위의 오감이 버무려져,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된 감각이 벽 너머를 내다봤다.

기이이― 철컹.

구그극!

통로 사이 땅 속을 이동하는 벽돌들. 흙 사이를 헤엄치고 재조립되는 기관장치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일행의 자취를 뒤쫓으며, 화살과 날붙이를 날리고 통로를 짓눌러 으스러뜨렸다.

시발. 박물관이 살아있다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댈런은 속으로 아공간에서 흐느끼고 있는 악마를 불렀다.

'야.'

[흐윽, 말 한 번 잘못했다가···예, 옙!]

'질질 짜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벽이며 함정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어떻게 된 거냐?'

사실 그도 이런 유적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종말을 막아내는 게 핵심 컨텐츠인 게임이다. 대부분의 회차는 인간의 편에 서서, 어떻게든 대륙을 구해내고 멸망을 막으려고 아등바등 몸부림쳤다.

몇몇 회차들에서 훼까닥 돌아 종말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모든 걸 던져버린 채 약초꾼이나 고기잡이 따위의 소일거리를 한 적도 있긴 했지만.

'약초꾼이나 귀농은 힐링이라도 되지, 고고학자 같은 건 상형문자니 대륙의 역사 같은 걸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만들잖아?'

애당초 먹고 살기 팍팍하고 머리 아파서 도피한 게 게임인데.

그 게임에서까지 유적지 고고학 놀이를 하면서 머리 빠지게 공부하고 싶을 리 없었다.

"···쯧."

댈런은 혀를 찼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그리고 잘 모르는 게 있으면 오래 산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보통 옳았다.

이 경우에는 사람은 아니고, 목줄 묶인 악마이긴 했지만.

[···아마 영혼 제단술로 만들어진 수호자일 겁니다.]

'영혼 제단술? 맞아. 모래바람 왕조는 석상이나 구조물에 영혼을 주입시켜서 작동시키곤 하지.'

[그건 또 대체 어디서···멸망한 지 삼천 년도 더 된 왕조인데?]

모래바람 왕조.

이제는 저 먼 서쪽 대사막에서야 그 잔재를 찾아볼 수 있는 고대 문명.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 왕조는 강력한 골렘들을 다루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딱 한 번, 악신들의 침공에서 동맹으로 함께 싸운 적이 있지.'

이미 멸망해버린 국가.

그러나 그 찬란한 기술 때문에, 일부 왕들과 그들의 군세는 아직까지도 사막 깊은 지하에서 영면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비록 그 기술력으로도 끝내 종말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모래바람 왕조는 영혼 제단술에 도가 튼 문명입니다. 무덤이나 군사 시설같이 중요한 장소에는 건물 자체에 영혼을 박아넣기도 했죠.]

석상도 아니고 건물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라. 댈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면 다 뒈질 때까지 쫓아온다는 소리냐?'

[아마 그럴 겁니다.]

도망쳐서는 답이 없다는 거군.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싸우는 것.

댈런은 속도를 줄였다. 그는 뒤에서 달려오던 두 마법사와 루시아의 곁에 붙어서 외쳤다.

"멈추지 말고 달리시오! 곧 따라갈 테니."

"뭐? 자네 무슨 소린가!"

펠버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댈런은 대답 대신 강철검을 꽂아넣고 성검을 뽑아들었다.

두 손으로 쥐고 심상 너머의 힘을 끌어오자, 나지막한 우렛소리가 검면을 타고 울렸다.

펠버가 침음을 흘렸다.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영역을 그 정도까지···알겠네. 먼저 가지."

두 마법사가 그를 앞지르고, 루시아도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악마에 마녀까지 때려잡으면서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던 사람이다.

그 이상한 신뢰가 담긴 눈빛에 댈런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그는 멈춰섰다.

기이이익!

구구구구―

바닥이 울렁거린다. 벽과 천장이 그를 단숨에 찌그러뜨릴 듯 다가온다.

그 앞에서 댈런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어깨에서부터 어떤 기운이 회오리치며 손끝으로 내달렸다.

살아 숨 쉬는 것들과는 수도 없이 싸워왔다. 죽었다 되살아난 존재들과도.

하지만 처음부터 살아있지 않은 존재라면? 댈런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런 건 없었다. 적의를 가진 존재인 이상, 어떤 의미로는 살아있다는 소리였다.

그 겉모습이 돌이나 기계, 혹은 아예 자연 그 자체이건 간에.

영혼 제단술은 거의 사장된 거나 다름없는 잊혀진 기술.

그 수천 년 전 기술은, 사실상 주문이라기보다 신비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야간 시야가 영역에 접목되며 만들어진, 신비에 감춰진 걸 내다보는 시야.

마녀의 영역마저도 간파해낸 그의 시야가, 다가오는 벽과 함정들 너머의 존재를 꿰뚫어본다.

마녀와 싸울 때랑 다르게, 어떤 본체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쏘아지는 적의. 눈앞의 침입자를 죽이고자 하는 살기만큼은 명확하게 느껴졌다.

검을 휘두르는 데는 그거면 충분했다.

쩌어엉―!

번뜩이며 공간을 가르고 지나간 성검이, 폭풍 같은 궤적을 그 뒤에 흩뿌린다.

좁혀지던 벽이 쩍 하고 갈라지고, 그 상흔에서부터 터져나온 폭발이 벽돌들을 죄다 부스러뜨렸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찔하며 물러나는 벽과 천장.

댈런은 사납게 웃으며 검을 내질렀다.

파란 검신이 우뢰를 토해냈다.

***

벽이 부서진다. 천장이 내려앉는다. 마치 검으로 땅 그 자체를 상대하는 것 같은 모양새.

허나 댈런은 몰려오는 땅이 아니라, 그 너머의 어떤 의지를 바라봤다.

지진이라면 어쩔 수 없다. 갈라지는 대지와 쏟아지는 토사에 의지 따윈 없으니.

그러나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달려드는 상대인 이상, 그 의지를 꺾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꽈르르릉―!

덮쳐들던 천장이 섬광 속에서 가루가 되고, 후려치던 벽이 갈려나가 빚어지기 이전의 돌과 흙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마다 유적은 움찔거리며 벽이나 천장을 뒤로 물렸다.

마치 부서지는 게 제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 마냥.

꽈릉! 우르르르―

검끝에서 터져나오는 우렛소리가 유적의 통로 안에 몇 번이나 메아리쳤을까.

어느새 좁디좁았던 통로는 거대한 공동으로 변해, 처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침입자를 압박해가고 있었다.

까앙―!

휘둘러진 검면에 황금빛 탄알이 튕겨나간다.

수백 개씩 쏟아지는 황동 탄막 앞에서 댈런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분쇄검의 폭풍에 갈려나가는 탄환들. 개중 몇은 머리며 얼굴, 팔다리의 살갗을 벗기고 근육을 얕게 찢어놓았다.

탄알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장난 아니었다. 얼마 전 특임대원이 쏘아댔던 탄환의 몇 배는 되는 위력이었다.

까가가가각!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검에 좀 더 힘을 준 것이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휘둘러지는 성검.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탄막이, 어떤 벽에 막힌 듯 더 이상 나아기지 못했다.

후우.

거칠어지는 호흡.

후우.

그 호흡만큼이나 거세게 맥동하는 심장.

오랜만에 체력이 한계에 몰려간다. 대사도에게 깃들었던 악마, 아라크네의 파편에 맞선 이후로 이런 적이 있었던가.

어지간한 최하급 악마라 해도 썰어버릴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유적이 그를 덮쳐서 죽이려 한다.

"푸흐흐."

입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게 내가 하던 게임이지.

아무리 캐릭터를 강하게 키워도, 그 이상의 시련이 덮쳐오는 게임.

수백 회차의 끝자락 즈음에 키운 캐릭터들은, 그 어떤 영웅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초인들이었다.

상급 악마와 칼 한 자루로 드잡이질을 하고, 용의 아가리를 주문 한 줄로 닥치게 만드는 캐릭터들.

그런 그들마저도 끝내 차가운 시체로 만들어버린 게, 이 대륙을 덮쳐오는 종말 아니던가.

쩌저저정!

거대한 도끼날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검의 번뜩임 한 번으로 죄다 잘라버렸다.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머리를 덮쳐왔다. 성검을 올려 찌르자 우렛소리와 함께 돌조각이 토네이도처럼 휘말려 올라갔다.

어깨가 뻐근해지고 내장이 뒤틀리는 감각. 영역을 수백 번이 넘도록 연달아 사용해내며, 근력을 거의 따라잡은 체력 수치가 오랜만에 온 힘을 쥐어짜냈다.

그렇게 한계에 몰려갈수록 입꼬리는 점점 올라간다. 하수도에서 개구리들을 잡아 족칠 때도 그랬다. 숲을 박살내며 재의 마녀를 쫓아갈 때도 그러했고.

정신은 몸을 따라간다던가. 철학에 쥐뿔도 관심 없는 댈런이지만, 그 말만큼은 옳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중세풍의 이 세계를 뒤떨어졌다 욕하며, 거친 옷감과 비릿한 오줌맛 맥주에 눈을 찡그리던 회사원은 사라져가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는 싸움을 위해 천상에서 내려온 신의 전사나 다름없었다.

[미친···미친 놈이었어. 내 주인놈은.]

내면에서 중얼거리는 악마의 목소리. 그 무례함에도 댈런은 피식 웃으며 검을 고쳐잡았다.

어느덧 소강 상태가 된 공동.

사방에서 찔러오는 살기는 여전했지만, 유적은 더이상 그에게 함부로 칼날을 들이밀지 못했다.

댈런은 고쳐잡은 검을 내려다봤다.

성검은 이 하나 나가지 않고 반짝이고 있었다.

황동 탄막과 거대한 돌덩이를 막아내고, 천장과 벽을 박살내면서도 부러지지 않은 성검이다.

전설적인 대장장이, 르베론 아하킴마저도 이런 무구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정도였다.

구르릉.

그때 공동 저편의 문이 열렸다. 언제 만들어진 문이지? 댈런은 먼지 때문에 불편해진 코를 킁 풀었다.

유적이 제멋대로 벽돌 단위부터 이리저리 끼워 맞춰대니, 사실 문이고 나발이고 구분이 없어진 지 오래긴 했다.

티디딕. 티딕.

문 안쪽에서 풍뎅이들이 기어나온다.

하나하나가 대형 오토바이만 한 크기의 벌레들. 금빛으로 번쩍이는 등딱지와 보석 박힌 눈알은 꽤 멋들어졌다.

댈런의 기억 속에 있는 기물들이었다. 모래바람 왕조에서 전쟁 병기로 사용하는 석상들 중 한 종류.

티디디딕.

티딕. 티디딕.

풍뎅이들은 얇고 날카로운 다리를 열심히 놀려 댈런을 넓게 포위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 수백쯤 되어 보였다.

그중 가장 큼직한 놈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내 놈의 등딱지가 열리고, 파라오 가면 같은 머리통이 스르르 올라왔다.

파라오 가면은 멍한 표정으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댈런을 발견하고는 오-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시―억?!"

"아. 인사하려던 거였나."

도끼로 가면의 입을 틀어막은 댈런이 뒤늦게 말했다.

침투 작전(3)

얼굴 한가운데 도끼를 꽂은 파라오 가면이 부르르 떨렸다. 노랗게 빛나던 보석눈의 광채가 사라져갔다.

기기긱― 쿵.

가면이 핵심 장치였던 건지, 그 밑에 있던 거대한 풍뎅이도 작동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댈런은 떨떠름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괜히 던졌나?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침입자라고 대뜸 주문부터 날렸으면 어떡하려고?

모래바람 왕조는 영혼 제단술을 위시로 어마어마하게 발전된 마법학 위에 세워진 문명이었다.

석상에 영혼을 불어넣어서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석상이 주문을 외우게도 할 수 있는 이들.

개중에는 상대를 모래 조각상으로 바꿔버리는 주문마저 존재했다.

이건 몇 번 안 되는 회차에서 그들과 함께 싸워본 터라 확언할 수 있었다.

티디딕.

그때 풍뎅이 하나가 또 걸어나왔다.

놈은 작동을 멈춘 풍뎅이 곁에 서더니, 똑같이 등딱지를 열고 파라오 가면 쓴 흉상을 드러냈다.

파라오 가면은 도끼가 물린 먼젓번의 가면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놀란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런. 도끼였다니. 거의 주문이라 해도 믿겠군."

풍뎅이가 집게 달린 앞다리를 슬쩍 들어 도끼를 뽑아냈다.

파라오 가면은 도끼를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이쪽으로 밀어 보냈다.

유적 바닥을 미끄러져 돌아온 도끼. 댈런은 그걸 주워들었다.

무기를 돌려준다는 건, 대충 방금 공격으로 꼬투리 잡지 않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 추측이 맞았는지 파라오 가면이 재차 인사를 건넸다.

"다시 인사하겠소. 안녕하시오?"

"···다짜고짜 도끼 던진 건 미안하지만, 별로 안녕하진 않군."

도끼를 허리띠에 꽂은 댈런이 말했다. 안녕하지 않은 게 맞았다.

벽이며 천장이 그를 산 채로 젤리 만들려고 덮쳐오고, 황동 탄환이 무슨 크레모아 터지듯이 밀려오는데 안녕하겠는가?

"···하긴. 대충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럴 것 같긴 하구려. 우선 소개하지. 나는 위대한 모래바람 왕조의 14대왕, 크헤프 네하카라 아하셉수트라고 하오. 그대의 이름은?"

"댈런."

"반갑소, 댈런. 잠시만 기다려주겠소? 아무래도 수호자의 기억 단말을 좀 읽어봐야 상황을 정확하게 알 것 같으니."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아래로 내렸다. 동의를 얻어낸 파라오 가면의 보석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푸후······."

치이이······.

내쉬는 한숨에서 뿜어지는 하얀 김. 온몸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증기.

파라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간을 벌고, 긴장을 살짝 풀자마자 용혈의 재생 인자가 몸을 급속도로 회복시키기 시작한다.

사실 아무리 댈런이라도 유적의 벽이며 천장, 온갖 함정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멀쩡하기란 힘들었다.

그나마 전투에 필요한 기능들을 바로바로 회복해낸 건, 그의 체력 수치와 용혈 숙련도가 예전에 비해 극적으로 높아진 덕분.

바꿔 말하면, 당장 전투에 필요 없는 소화기관이나 일부 골격 등은 피해가 상당히 누적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치이이이―

뒤틀렸던 혈관과 신경이 위치를 바로 하고, 부러진 뼛조각들과 내장 곳곳에 난 상처들이 순식간에 붙어 아물었다.

몸이 고쳐지는 동안 댈런은 잠시 딴 생각을 했다. 왕이라. 사막의 왕이니 파라오라는 소리지. 거기에 14대라면 왠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

가물가물한 모니터 너머의 기억들 속, 몇 번 없었던 모래바람 왕조와의 협력을 되새긴다.

모래바람 왕조는 왕들이 한둘도 아닌 데다 이름까지 더럽게 어려웠다. 그나마 근래 높아진 지능 수치 덕분에, 가까스로 원하는 정보를 건져낼 수 있었다.

'모래바람 왕조의 14대왕. 크헤프.'

맨 앞 이름만 따서 그냥 크헤프라 불렀던 것 같았다. 이백 몇십 회차였나에 공동 전선을 이뤘던 파라오였다.

독특했던 건, 파라오들 중에서는 인간에게 굉장히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지.

"음. 기다려줘서 고맙소."

그때 무슨 컴퓨터의 로딩 커서처럼 빙글거리던 보석 눈알이 멈췄다.

파라오 크헤프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듯 하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묘지의 수호자가 그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구려. 악의 없이 묻는 건데, 혹시 무덤 도굴을 시도했소?"

"아니."

파라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악의 없이 묻는 거요. 정말로. 어차피 이 무덤의 주인은 네하카라 강을 건넜소. 부활할 수 없지. 거기다 그대들 종족에게 우리 문명의 옛 흔적들은 꽤 가치가 높다고 알고 있소."

주인 없는 무덤 좀 판다고 뭐 잘못된 일이겠소? 마치 도굴을 정당화하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그가 덧붙였다.

파라오가 저렇게 말한다니 꽤 웃긴 일이었지만, 댈런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뭐라 그래?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군사 시설 겸 무덤인데,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건······."

"삼천 년도 전에 버려졌으면 군사 시설이고 나발이고 그냥 동굴이지."

"흠, 그것도 맞는 말이구려."

파라오 가면이 위아래로 끄덕였다. 댈런은 어깨를 슬슬 풀었다.

잠깐 사이에 금이 갔던 뼈나 찢긴 혈관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높은 체력 수치 덕분에 용혈로 재생했음에도 피로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면 그 수호자인지 뭔지한테 나와 내 일행을 내버려두라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미안하게 됐군. 그건 힘들 것 같소."

파라오 크헤프가 고개를 저었다. 댈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왕이라며? 무덤 수호자 하나 어떻게 못해?

그 표정을 읽었는지 크헤프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이 묘지의 주인이 아니라 그렇소. 내게는 명령권이 없지. 지금의 난 이곳의 건설 때 심어두었던 의식 매개로 이곳과 잠시 연결되었을 뿐, 본신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나만의 안식처에 뉘여 있소. 아마 이 연결도 곧 끊길 거요."

"묘지의 주인만이 수호자를 멈출 권한이 있는 건가?"

"보통은 그렇소."

시발. 댈런은 얼굴을 좀 더 일그러뜨렸다. 아까 묘지 주인 뒈졌다며. 부활 못 한다며. 그러면 이 유적의 마지막 벽돌 하나까지 부숴야 멈춘다는 건가?

잠시 숨을 돌려서 컨디션이 돌아왔다지만, 그건 답이 없는 짓거리였다.

지금도 사방에서 살기가 조여오는 걸 보니 그 수호자라는 놈은 단단히 벼르는 중이었다.

파라오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더니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오히려 그대가 모시고 있는 귀인이 답이 될 것 같소만."

"귀인?"

"모시고 있다기보다는, 사로잡은 쪽에 가까운 것 같긴 하구려."

[뭐? 나?]

머릿속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라오 크헤프는 작게 웃었다.

"그렇소. 환상세계의 작은 처소에 몸을 뉘인 나무여. 우리가 어찌 그대를 알아보지 못하겠소? 비록 무성한 잎과 가지는 다 꺾여 뿌리와 밑동밖에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썩어버린 듯하지만."

[뭐, 뭔 소리냐. 난 너 같은 놈 모르는데? 우리 초면이거든요?]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 안에서 그대는 과거의 영광을 망각했다지.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싶었건만,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구려."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파라오 가면. 댈런도 고개를 기울였다.

불사의 악마가 무슨 나무라고? 기사단장도 그렇고 이 파라오도 그렇고 자꾸 이 악마에 대해 그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댔다.

'어쩔 수 없지. 한 번 걸리면 그 회차 조지는 새끼라, 게임에서는 그냥 최대한 무시하고 피해 다녀야 했는데.'

어쨌든 이 악마 노예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정작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긴 했지만.

"모래바람 왕조의 모든 영혼들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을 거외다. 귀인이여."

[으엥···?]

파라오 가면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악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노랗게 빛나던 보석눈이 다시 광채를 잃기 시작했다. 댈런이 도끼로 머리를 쪼갰을 때와 비슷한 반응. 연결이 끊겨가는 모양이었다.

크헤프는 댈런을 돌아보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수호자를 멈추고자 한다면, 영혼 단지를 파괴하면 될 거요."

"···고맙군."

그 말을 끝으로 파라오 가면의 눈이 빛을 잃었다. 댈런은 씩 웃었다. 그래. 진작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야지.

영혼 단지는 그도 아는 물건이었다. 아니, 사실 어떻게든 틈을 봐서 찾아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유적의 영혼 단지는 악마의 힘을 회복시키는 좋은 공급원이니까.'

그건 목숨을 대가로 우연히 알아낸 사실.

악마 노예를 얻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당시에는 쓸데없는 정보라 생각했던 사실이었다.

기기기긱―

파라오의 의식이 떠나자 유적이 다시 움직인다.

번뜩이는 살의. 덜컥이며 움직이는 벽과 천장들.

댈런은 검을 고쳐쥐었다. 풍뎅이들까지 눈을 붉게 물들인 게, 아주 한 판 제대로 붙어볼 생각인 듯했다.

그르릉! 쿠르르르.

그리고 천장이 회전했다. 몇 바퀴 돌아가며 뭔가 맞춰내더니, 거대한 돌기둥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곧장 천장에서 바닥으로 쇄도하는 돌기둥. 이건 숫제 바위 거인의 주먹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댈런은 검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짧게 들이쉰 호흡에 다시금 두 팔을 회오리 같은 기운이 휘감는다.

아직까지도 이 하나 나가지 않은 성검.

우렛소리와 섬광으로 악마의 육신마저 찢어발기는 뇌격.

둘의 조합이라면 저 기둥마저도 부숴버릴 수 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그대가 모시고 있는 귀인이 답이 될 것 같소만.'

문득 파라오의 말이 떠올랐다. 헛소리를 할 양반은 아니었다. 댈런은 속으로 악마를 불렀다.

'야.'

[네, 넵?]

'튀어나와.'

'?!'

악마가 대답을 못했다. 댈런은 의지를 담아 명령했다.

"당장 튀어나오라고."

촤르르르!

할만의 사슬이 제 역할을 해냈다. 허공에 사슬이 죽 늘어나고, 그 끝에서 악마가 대롱거리며 딸려 나왔다.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공간에서 방출된 악마가 댈런의 손에 붙잡혔다.

"자, 잠시만! 저거···나 죽네!"

들이닥치는 거대한 돌기둥을 본 악마가 소리쳤다. 댈런은 그러거나 말거나 악마의 뒷덜미를 잡은 채 기둥을 향해 내밀었다.

성벽이라도 부술 기세로 짓쳐드는 돌기둥.

실체화된 악마를 피떡으로 만들고, 당장에라도 그 뒤의 댈런을 으깨버릴 기세의 기둥은―

우뚝.

"호오."

악마와 부딪히기 직전.

그 코앞에서 멈췄다.

쿠르르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지.

그 감속의 반동을 견디지 못한 기둥이, 푸스스 먼지를 흘리더니 그대로 조각나 떨어졌다.

댈런은 악마 든 손을 천천히 주변으로 돌려봤다. 뒷덜미를 탈탈 털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뒤틀리던 천장과 벽이 움찔거리고, 언제라도 달려들 기세이던 황동 풍뎅이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

뭔가 멍한 눈이 된 악마. 댈런은 낮게 웃으며 이번에는 악마를 고쳐쥐었다.

오른손에는 성검. 왼손에는 고기, 아니 악마 방패.

유적 공략에 안성맞춤으로 장비를 갖췄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레이드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

티디디딕!

풍뎅이가 달려든다. 날카로운 집게발과 주둥이 안의 길쭉한 침이 위협적이었다.

슥―

댈런은 그 면전에 방패를 들이댔다. 방패는 좀 허접해 보였다.

거무튀튀한 찰흙덩이 같이 생긴 게, 화살도 제대로 못 막아줄 것 같은 모양새.

움찔!

그러나 그 방패를 본 풍뎅이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댈런은 곧장 검을 내리그었다.

콰지직!

풍뎅이가 반격할 생각도 못 한 채 두 쪽으로 쪼개졌다.

댈런은 상태창을 슬쩍 열어보았다. 들어온 경험치가 쏠쏠했다.

벌써 족친 풍뎅이 숫자만 백을 훌쩍 넘어갔다. 하나하나가 프로그맨이나 놀 같은 마물 한 다스는 잡아야 될 경험치를 선물해 주는 놈들이었다.

쿠구구궁!

뭔가 형태를 바꾸려던 벽과 천장도, 살아서 꿈틀대는 방패를 들이대니 그 하던 걸 멈추고 잠잠해진다.

댈런은 미동도 없는 통로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웃음이 맺혀있었다.

"에휴, 내 시발 인생······."

방패, 아니 악마가 푸념했다.

배낭에 휴대용 화로로 쓰이더니, 이제는 말 그대로 고기 방패가 됐다.

물론 저 모래바람 왕조가 자신과 뭔지 모를 관계가 있고, 그래서 실질적으로 공격을 맞는 일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고기 방패가 되는 건 그 자체로 기분 나쁜 일이다.

자신은 악마였다.

인간을 제물로 잡아 씹고 뜯으며,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를 호령해야 할 악마. 이 세상을 저주해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야 마땅한 고귀한 존재.

오랜 봉인에서 풀려나 이제 그 염원을 다시 이뤄 보나 했는데, 웬 깡패 새끼 하나가 쳐들어와서는···.

"야."

악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인놈이었다.

듣기만 해도 울분에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뿌예지는 것 같은 목소리.

"야, 대답 안 하냐."

"아닙니다, 주인님!"

"다 왔다."

"예?"

"다 왔다고."

악마는 눈을 비비고 앞을 바라봤다. 그의 주인놈은 거대한 돌문 앞에 서 있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얼마 전에 봤던 관문 요새의 성문만큼이나 거대한 석문.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악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눈을 들어 주인을 쳐다봤다. 주인은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열어."

"하오나 어떻게···?"

"못 하냐?"

이거 고기 방패 이상은 못 되는군.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황동 가루가 코며 입에 조금씩 들어간 것 같아 찝찝했다. 갑옷 안쪽에도 돌부스러기에 황동 조각이 꺼끌거렸다.

얼른 작전을 끝내고 씻어야지. 그러려면 이 유적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길을 찾는 건 쉬웠다. 지도는 없었지만, 복도의 바닥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표식은 주요 장소로 향하는 일종의 이정표였다.

댈런이 찾아가려는 곳은 묘지의 심부인 왕의 묘실.

고고학 놀이를 안 했더라도, 그 표식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마에게 쫓길 때 저걸 따라갔었으니까.'

댈런이 유적을 방문한 두 회차 중 하나의 말미.

균열에서 십수 마리의 악마와 그 군세가 침공을 가했고, 성기사단은 그에 맞서 싸우다 붕괴하고 말았다.

후반부에 다다른 게임이었기에 그의 캐릭터는 나름 초인의 반열에 들었던 용병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물을 한껏 취해 평소보다도 강력해진 악마와 홀로 드잡이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몇몇 생존자들과 함께 악마에게 쫓겨 도망쳐온 곳이 이 유적이었다.

그때 일행의 퇴로를 이끌던 웬 고고학자 NPC가 남겼던 유언이, 바로 저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라는 것.

그 종착지에서 댈런은 왕의 묘실 앞에 도착했고, 유적에게 주요한 침입자로 낙인 찍혀 함정을 뚫고 오며 쇄약해진 악마와 마지막 혈투를 벌였다.

그나저나 못 연다는 거지. 댈런은 어깨를 슬쩍 풀었다.

악마를 내려놓으면 유적이 바로 태세를 전환할 테니 그럴 순 없었다.

그는 성검을 잠시 바닥에 꽂아놓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화염의 갑주가 순식간에 손과 팔 전체를 감싸 안았다.

'갑주는 방어의 수단이자, 동시에 공격의 수단.'

데하만의 갑주격투가 품은 묘리를 떠올리자, 화염 갑옷의 주먹 부분이 폭발할 듯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구체화된 심상과, 그에 맞게 약간 개조된 가능성. 영역에서 이뤄낸 가능성을 현실에까지 뻗어낸다.

스으―

호흡을 들이쉬고.

휙.

댈런은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아―!

그건 마치 용이 내뿜는 숨결과도 같았다.

온갖 방어 주문으로 점철된 석문.

그 모든 주문과 수 미터 두께의 석재는, 몰아치는 화염의 파도 앞에 단숨에 헤집어지고 녹아버렸다.

직경 이 미터쯤 되는 구멍이 뻥 뚫린 석문.

스각.

댈런은 돌바닥에서 성검을 뽑아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휘이이······.

묘실 안쪽에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퀴퀴한 공기는 그 자체로 어떤 불길함을 머금고 있었다.

우웅

저주막이의 인장이 빛을 발했다. 댈런은 무시했다. 이 정도 저주는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눈이 번뜩이며 주문으로 가득한 어둠을 뚫어냈다. 댈런은 찾던 걸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있군.'

묘실 저 깊은 안쪽.

거대한 석관 앞. 딱 봐도 기이한 기운이 일렁이는 제단과 그 위에 놓인 항아리.

그리고.

[악마와 술래잡기를 한 용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제단 곁에 팽개쳐진, 전신이 갈기갈기 찢긴 잿빛의 시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침투 작전(4)

'우연이었지.'

묘실 저 안쪽의 제단과 영혼 단지, 그리고 그 아래의 잿빛 시체.

댈런은 그것들을 보며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십수 마리의 악마가 동시에 균열을 침공하고, 그 어마어마한 군세에 성기사단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회차.

성기사단에 고용된 용병이었던 댈런은, 십여 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지하의 유적으로 대피했다.

악마의 추적은 집요했다. 놈은 유적의 온갖 함정을 기어이 뚫어내여 그들을 쫓아왔다.

마치 최후의 한 명까지 고통스럽게 죽여야만, 폭력과 살심으로 점철된 제 본성이 충족된다는 듯이.

끝이 보이지 않는 추격전 속.

하나씩 줄어가는 생존자들.

악마의 발톱과 이빨에 찢긴 성기사. 그 악마를 공격하는 함정에 휘말려 몸의 하반신이 으깨진 용병.

비명과 악다구니로 점철된 여정의 끝은, 유적 밑바닥에 있는 왕의 묘실이었다.

그리고 열 남짓 되던 생존자들 중, 그곳에 도착한 건 단 한 명.

댈런의 캐릭터뿐이었고.

'더 이상 도망칠 구석도 없어,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었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

왕의 묘실.

그곳에서 댈런의 캐릭터는 악마와 다시 한 번 붙었다.

일방적으로 쫓기던 것과는 달리, 치열한 공방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그건 그만큼 악마가 쇠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놈은 유적의 함정을 정면으로 부수며 내려왔고, 끝내 왕의 묘실을 지키던 수호자까지 상대했으니까.

제물로 얻은 힘을 죄다 잃고, 수호자가 죽어가며 남긴 저주까지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상태의 악마.

반면 댈런의 캐릭터는 본격적인 종말의 초입까지 버텨낸 만큼, 나름 영웅의 반열에 접어든 용사였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간 보스전.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는 전투 끝에, 모니터 너머의 댈런은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이겼다 생각했던 찰나, 놈이 영혼 단지를 흡수했지.'

그건 우연의 일치였다.

댈런의 검에 맞고 넝마가 된 악마가, 우연히 제단 쪽으로 넘어지며 영혼 단지를 몸으로 뭉게버린 것.

악마는 단지 안의 영혼을 흡수하자마자 모든 상처를 회복해냈다.

힘을 되찾은 악마 앞에서, 댈런의 캐릭터는 도망칠 틈도 없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침입자여―]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묘실을 쩌렁쩌렁 울린다. 댈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감각의 끄트머리를 간질이는 불길한 느낌.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묘실 중앙을 바라봤다.

스으으으.

묘실의 한가운데.

단촐한 석관으로 어두운 기운이 몰려드는 모습.

검은 기운은 관 안의 해골을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팔다리를 휘감으며 어떤 연기의 로브 같은 걸 만들어냈다.

관 안에서 지팡이가 둥실 떠오르고, 빨려들어가듯 해골의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구우웅―

이질적인 마력의 울림과 함께 텅 빈 눈구멍 속에서 불꽃이 희번뜩 타올랐다.

해골 마법사는 댈런을 노려보며 턱뼈를 딱 벌렸다.

[나는 왕의 수호자 카샨 호르아하크!]

쿵―

바닥을 찍는 지팡이. 그 아래에서 불똥이 튀기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돌풍이 수천 년 동안 쌓인 먼지를 죄다 몰아내는 가운데, 그 중심에서 수호자가 외쳤다.

[지고의 왕을 모신 무덤에 침입한 자여! 내 수호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즉시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가···.]

"쿨럭! 시발 미세먼지 좀, 새꺄."

[······?]

"너만 폐 안 달려있으면 다냐? 이기적인 새끼."

댈런은 악마를 부채 삼아 먼지를 휘휘 몰아냈다.

해골 마법사는 그걸 보고 약간 멍한 얼굴이 됐다. 악마는 '내 인생···.'하는 푸념을 표정으로 자아냈고.

그때 빛이 번쩍였다.

패래래랙―캉!

빛의 원반이 되어 날아간 손도끼가 튕겨나갔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막아? 이걸? 나름 블러핑까지 하고, 심지어 먹혔는데?

자세히 보니 완전히 막은 건 아니었다. 몇 걸음쯤 비틀거리며 물러난 수호자는 쇄골 언저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후드득. 실금이 거미줄처럼 뻗어난 가운데, 깊게 패인 빗장뼈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놈이 신음을 흘렸다.

[크으.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었구나.]

눈구멍 안쪽의 불꽃이 이채로 번뜩인다. 놈이 지팡이를 쳐들었다.

[왕의 안식을 범한 대가. 죽음의 저주가 그대를 고통스런 영면으로 이끌리라!]

묘실에 메아리치는 이질적인 힘이 단긴 목소리. 불길한 기운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피부에 소름이 오도독 돋는다. 위기를 감지한 댈런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밤의 어둠을 꿰뚫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신비와 비밀마저 내다보는 시야.

그 시선이 놈의 목소리에 녹아난 주문의 본질을 관통했다.

'저주.'

그것도 영창마저 생략한, 언령술에 한 발 걸쳤다 할 수 있는 경지의 주문.

댈런은 놓았던 성검을 발끝으로 차올려 다시 잡았다. 즉시 저주의 파도가 그를 덮쳤다.

치이이이―!

저주막이의 인장이 강렬하게 빛을 뿜는다. 용혈이 온몸을 내돌며 근육을 뜨끈하게 덥혔다.

폐 속에 모래가 가득 차게 만드는 저주. 딱정벌레가 눈알을 유리체에서부터 파먹게 만드는 저주. 내장에서 구더기가 자라고, 아무런 이유 없이 심장이 정지하는 저주까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수십 번도 넘게 죽어나갈 저주를 앞에 두고, 댈런의 머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판단을 빨랐다.

이건 재의 마녀와 싸울 때와 같았다.

저주의 파도에 그가 먼저 쓰러지느냐, 아니면 그 전에 저 해골을 두 쪽 내느냐의 싸움.

'속전속결이다.'

감각과 지능 수치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한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난 시간 속에서, 댈런은 방패를 놓았다.

고기 방패는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의 존재를 겨냥한 저주는, 방패로 진로를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었기에.

콰득!

돌바닥을 파고드는 발끝. 그 초인적인 근력에 요동치는 발밑의 땅.

습―

어깨에서부터 폭발하듯 터져나온 기운이 그의 팔과 손끝을 덮어가고.

히죽.

순식간에 여러 겹의 거무튀튀한 방어벽을 구축해내며, 턱뼈를 달그락거려 웃는 해골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흡! 흐읍! 후르릅, 쩝쩝!"

느닷없이 발밑에서 뭔가를 처먹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격돌 직전, 한껏 집중된 감각마저 일순 흐트러질 정도로 게걸스러운 소리.

[······.]

"······."

댈런은 시선을 내렸다. 그가 방금 놓아버린 고기 방패가 뭔가를 미친 듯이 흡입하고 있었다.

눈이 반쯤 돌아간 채, 침을 질질 흘리는 놈의 몰골.

그리고 댈런은 순간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뭐?

"으음, 쩝쩝쩝!"

악마가 게걸스럽게 뭔가를 씹어삼킬 때마다, 몸을 뒤덮은 저주가 하나씩 녹아나간다.

근육이 원래의 힘을 되찾고, 내장을 파고들던 구더기가 용혈에 타죽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댈런은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놈의 핵을 칭칭 휘감고, 그 끄트머리로 놈의 몸통을 한 바퀴 둘러낸 할만의 사슬.

그 타락한 성물이 은은하게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아, 아니. 먹을 생각이 아니었습···!"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악마가 댈런의 시선을 의식했다. 놈은 황급히 흘러내린 침을 닦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전투 중에 혼자 뭘 처먹은 죄. 싸움에 미친 주인놈이라면 이틀을 두들겨 패고도 남을 죄목이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는데 어떡하라고? 영혼의 핵을 감아버린 빌어먹을 성물이 갑자기 뭔가 하더니, 입에 간만에 맛있는 걸 쳐넣었는걸? 그걸 어떻게 참아?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몸에 베인 대로 두 손을 싹싹 모아 비는 악마였다.

그리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잘했다. 계속 먹어라."

"다시는 전투 중에 무단취식을···어? 예?"

"계속 먹으라고."

악마는 멍해졌다. 주인놈 돌았나? 아니, 저주를 뒤집어쓰더니 맛이 간 건가?

하지만 악마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닥치고 끄덕이면 되는 거다. 오랫동안 처맞으면서 배운 진리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여대는 악마를 두고, 댈런은 시선을 다시 수호자에게로 향했다.

[···어찌 이런 일이.]

해골 마법사 역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은 픽 웃고는 악마 뒷덜미를 왼손으로 잡아들었다.

고기방패를 다시 앞세운 채, 해골 마법사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

해골 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귀인을 방패로 삼아대기에 저주라는 차선책을 택했는데, 그것마저 안 통한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턱을 딱딱 부딪히는 수호자를 몇 걸음 앞에 두고, 댈런은 씩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했다.

"어디 다시 해 봐."

[이, 이······!]

놈이 지팡이를 다시 치켜들었다. 댈런도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한동안 뼈마디 꺾는 소리가 묘실에 울려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