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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율하는 거인 (3)

이 포플러 숲의 별명은 「전율하는 거인(Trembling giant)」이었다. 숲 전체가 하나이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파르르 흔들리는 가지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데, 포플러가 사시나무 속(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직관적인 작명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에도 '사시나무 떨듯 하다'라는 관용어구가 있으니.

하지만 숲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통상시야로 보는 풍경은 정적으로 변해갔다. 바깥에서 흩날리는 눈은 따스한 안개 속에 녹아버리고, 불어오는 동풍 또한 두껍고도 무거운 안개를 밀어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안개는 숲이 마력으로 붙잡아둔 습기니까. 그 물리적 구속력을 뚫으려면 어지간히 강한 바람이 불어야 한다.

이는 부하들의 호흡이 거칠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거의 방독면을 착용한 수준으로 저항이 느껴질 지경이라.

나도 숨쉬기가 거북하고 옷은 축축하며 이마에는 땀이 맺혀 슬슬 불쾌감을 느끼던 차였다.

북반구의 1월, 그것도 해발 2,700미터에서 땀이라니?

체감 습도는 100% 이상이었다. 최대 포화도 이상의 수분을 마력이 강제로 묶어두고 있는 느낌. 총의 금속 파트에는 어느덧 방울방울 이슬이 맺혔다.

얼마 더 가지도 않아서, 나는 또다시 악마숭배의 상징을 발견했다. 경태는 이번에도 기괴스러움의 극치인 시체를 보며 후우- 하고 숨을 내쉰다.

"이 새끼들 혹시, 이 숲에게 인간을 먹잇감으로 인식시키려는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흠. 그럼 이게 형님에 대한 견제일 수도 있겠네요? 코드 수집을 방해하려는 수작이요."

"...글쎄."

이게 나에 대한 견제라면 그레이스는 스승새끼의 배신을- 황금기의 눈이 원탁 밖으로 유출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녀는 원탁의 교조주의자들처럼 머리가 꽉 막혀있지 않을 테니, 원시마법의 쓸모와 이 눈의 활용에 대해서도 생각이 더 열려있을 것이고.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우며 음습하기 짝이 없는 원탁내각의 내부사정이 악마숭배자들에게 흘러나갔다고?

'권력투쟁 과정에서 뭔가 사고라도 터졌으면 몰라.'

그럴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 답답하다. 차라리 원탁에 대한 견제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만,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가능성인 것이다.

"이 짓거리를 벌인 놈들을 족쳐보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턱짓으로 탐색을 재개시켰다.

악마숭배자들이 그려놓은 별은 곳곳에 숨어있었다.

진득하게 고여 있는, 흐르더라도 폐쇄적이고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안개는 보안관들이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공기가 고여 있다는 건 냄새가 갇혀있다는 뜻. 그러므로 경찰견들이 갈피를 못 잡았을 게 첫째요, 보안관들이 겁을 먹었을 게 둘째다.

보나마나 수색은 숲 외곽에서만 돌면서, 우리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며 상위 부서의 지원만 기다리고 있었겠지. 인기투표로 뽑아놓은 보안관들의 한계다.

첫 상징을 발견하고부터 선두는 줄곧 내가 맡고 있었다. 경태 이하에게 고가의 열상장비를 챙겨주긴 했으나, 환경이 이래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쓸 만한 열화상을 뽑으려면 본격적인 거치식 장비가 필요하다.

그나마 이 안개에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는다는 것.'

평범한 안개는 소리를 더욱 멀리, 더욱 빠르게 퍼트린다. 매질로서의 밀도와 탄성률이 마른 공기보다 훨씬 더 높은 까닭.

허나 마력에 묶인 안개는 그 구속력으로 인해 탄성률이 격감한다. 진동으로서의 음파에 덜 흔들린다 이 말이다. 눈을 밟는 소리도, 작게 나누는 대화도, 소음기가 줄여놓을 총성도 이 숲에선 닿는 범위가 줄어든다. 내 눈엔 그 범위가 명확하게 보였다.

텁!

가죽장갑의 마찰음. 나는 주먹을 쥐어 대열을 정지시켰다. 드디어 살아있는 인간, 악마숭배자들이 포착되었으므로. 정면, 12시 방향 29미터 거리에 두 놈이 보인다. 아마도 보초를 서는 게 아닐지. 하나의 그루터기에 등을 기대고 앉아 좌우를 경계하므로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놈들의 정면은 나의 정면과 10도쯤 어긋나있었다.

그루터기 둘레엔 역시나 인간을 찢어 만든 원이 존재했다. 깔고 앉은 자리엔 당연히 핏빛 별이 그려져 있었고.

무장은 둘 다 개머리판도 없는 기관단총인데, 꼴에 또 소음기는 끼워놓았다. 정조준 자체가 불가능할 총알 분무기. 그걸 손마다 하나씩 쥐고 있다. 허리띠에 주술 토템처럼 주렁주렁 달린 탄창들이 인상적이었다.

나와 부하들은 자세를 낮춰 쓰러진 나무줄기에 엄폐했다.

새롭게 알아낸 안개의 특성을 포함하여, 상황을 전파 받은 경태가 떨떠름한 반응을 내비친다.

"쟤들도 머리를 쓰기는 쓰네요."

"의외인가?"

"조금은 말입죠. 악마숭배자라고 하면 왜, 뇌주름 하나하나가 마약에 찌들어있을 것 같은 이미지 아닙니까. 혀에는 막 피어싱도 하고."

"...."

공교롭게도 두 놈 다 피어싱을 하고 있다.

경태가 머리를 굴린다고 평한 건 무기의 선택이다.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니 정밀한 사격 따위 포기하고 총탄을 마구잡이로 뿌리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 사용자의 숙련도도 감안했겠고.

문제는 저것들을 산 채로 잡아야 한다는 점. 우리가 상정한 교전은 사살이 전제였다.

놈들이 소음기를 쓰는 건 숲 외곽을 맴도는 보안관들을 의식한 조치일 테지만, 그럼에도 위험에 처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멀리 있을 패거리들을 일깨울 터였다. 기를 쓰고 내지르는 고함은 이 진득한 안개 속에서도 충분한 경보가 될 것이었다.

총은 있는 놈들이 무전기가 없는 게 의외다.

"저걸 어떻게 제압하나...."

고심이 묻어나는 경태의 중얼거림. 나와의 간격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다. 가서, 잡아서, 내 앞에 무릎 꿇렸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형님. 죄송한데 저희끼리 후딱 해치우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건의하는 경태는 여전히 내가 위험을 감수하는 게 싫은 거다.

"아시잖습니까. 진짜 잠깐이면 끝나는 거."

"안 돼."

난 쓰러진 나무줄기와 불투명한 풍경을 뚫고 악마숭배자들의 비루한 몸뚱이를 투시했다.

"유독 마력의 흐름이 난폭한 자리야. 거의 일부러 고른 수준이군."

"그 말씀은?"

"저놈들이 실시간으로 X 되는 중이란 뜻이지."

저것들은 벌써 몸속에 암세포가 자리 잡았다. 마소를 빨아들이고 마력을 양분으로 삼는 암이라, 양분이 넘치는 환경에선 평범한 암하고는 차원이 다른 증식속도를 보여준다.

'슬슬 몸이 가려워 오나 본데.'

생명에 대한 영향 면에서 마력과 방사선 사이에 큰 차이가 하나 있다면, 전자는 세포를 파괴하기보다 변형시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거다. 겁도 없이 장전된 총의 총구로 몸 여기저기를 긁어대는 사탄의 졸개들이 그 증거.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중증 환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가려움증은 암의 전조증상이자 주요증상 가운데 하나다. 장기에 빌붙는 고형암이든, 림프절과 골수 등에 생기는 혈액암이든. 말기 암환자가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도 손톱이 부러지도록 살을 벗겨대는 모습을 보면 그 가려움의 끔찍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소암도 암인지라 표면적인 증상은 일반 암과 부분적으로 겹친다. 이는 원탁의 마스터들이 인체실험으로 확인한 바. 그들은 한 사람의 암환자를 만들기 위해 수백 명의 영혼을 마력의 재료로 갈아 넣었다.

그게 원래는 타인의 육체에 인위적으로 회로를 뚫을 방법의 연구였다.

그 지식의 수혜자가 바로 나고.

...이게 과연 수혜라고 표현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

경태가 한숨을 내쉰다.

"6미터면 코앞인데 진짜."

6미터. 이 숲에서 내 마력장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의 반경. 「대통령」 때보다 고작 1미터 더 늘었다. 그러나 이 「전율하는 거인」의 압도적인 생체질량과 질량에 비례하는 회로의 장악력을 고려하면, 이 1미터는 '고작' 1미터라고 할 만한 차이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농무 속에서도 맨눈으로 10미터 앞까진 볼 수 있다. 이 와중에 6미터면 총을 든 적과의 간격으로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 우발적인 교전이라면 상대가 날붙이를 들었어도 위험할 지경이다. 경태가 말하는 '코앞'의 의미였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회로에 마력을 돌려 술식을 구축했다. 이 숲에서 얻은 단서들로 구성한 낯선 술식을.

훅-

가까운 안개에 물결 같은 파문이 인다.

"놀라지 마라."

파문을 목격한 부하들에게 손을 들어 보인다.

"내가 한 거다."

경태 이하 넷은 비로소 자세를 풀고 총구를 내렸다.

'될 것 같은데.'

아직 이 안개의 원리를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다. 그래도 숲이 행사하는 마법에 간섭할 만큼의 이해는 갖추었다. 온전히 내 힘만 쓰는 게 아니라, 이미 작용하고 있는 주문에 변화를 줄 뿐이므로 회로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다. 1의 출력으로 100의 결과를 내는 셈.

몇 차례의 실패를 거쳐 기교를 숙지한 나는, 숲이 만들어내는 힘의 방향을 틀어 서로 다른 안개의 흐름이 부딪히도록 유도해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정면에 훅 하고 짙은 백색의 장벽이 뭉쳤다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되는군.

비록 자그마한 성공이지만 기분이 고양되는 것을 느낀다. 이는 내가 기대한 가능성을 최초로 입증하는 결과물이었으니까.

"이렇게 하지."

난 부하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어떠냐?"

내 구상대로면 접근하는 것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 일정 간격까진 그냥 걸어가면 그만이니. 그다음은 다소 임기응변이 요구될 테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한다.

"어...."

경태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좋긴 합니다만, 형님께선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큰 힘을 쓰시면 회로에 무리가 가지 싶은데요. 분명 적응 끝내시려면 한참 남았다고...."

"걱정할 것 없다. 겉보기에나 크지, 실제 부담은 작아."

"그러시다면야."

"일어나라."

술식은 벌써 회로에 올렸다. 몸을 세운 부하들은 벌써 만들어진 백색의 벽에 무언으로 가벼운 놀라움들을 드러냈다. 실전에서 이런 형태의 마법적 보조를 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밀도 높은 안개의 장막은 차라리 연막에 가까울 불투명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걸었다. 폭포처럼 내리흐르는 안개의 벽이 우리가 걷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걷는 만큼 밀려난다.

경태가 소리죽여 감탄했다.

"와, 형님. 이거 쩝니다, 진짜!"

"호들갑 떨지 마라. 앞으로는 이보다 더한 것들에 익숙해져야 할 테니."

우린 적을 중심으로 80도쯤을 돌아 적의 측면으로 접근했다. 29미터, 25미터, 20미터. 계속해서 줄어드는 간격. 적은 우리를 볼 수 없지만 그건 내 부하들도 마찬가지라, 경태 이하의 걸음걸이에 불가피한 긴장감이 배어든다.

사냥감과의 간격이 15미터 안으로 들어왔다. 14미터, 13미터....

사냥감 중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건?"

우리는 즉각 엄폐했다. 탐문 당시 낚시꾼도 말했듯이, 이 숲엔 죽어 넘어진 줄기들이 발에 채일 지경으로 많았다. 너무도 오래된 숲이기 때문일 것이다.

악마숭배자는 시선을 불투명한 장벽에 고정시킨 채 팔꿈치로 제 동료를 찔러댔다.

"야, 새끼야. 여기 좀 봐라."

"뭐."

"이쪽을 보라고 딸쟁아(Wanker)."

"...와우! 존-나게 마-직스럽네."

마직(Magick)이란 영국계 악마숭배자들이 말하는 마법이다. 끝에 묵음 하나 붙었을 뿐인데 발음이 달라지는 경우였다.

사탄의 두 신도는 엉거주춤 일어나 안개로 다가와, 쥐고 있던 총으로 안개의 벽을 휙휙 휘저어보았다. 장님이 허공을 더듬는 듯한 품새. 총의 약실이 내 장악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들락거린다. 충동적인 잡것들이 충동적으로 방아쇠를 당겨볼 가능성 탓에 이 이상 대놓고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잡것 한 놈이 조심스레 안개장벽 속으로 발을 내딛으려 한다. 나는 그만큼 장벽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워어어어우."

용기를 냈던 놈이 뒤의 동료를 돌아본다.

"봤냐? 봤어?"

그러곤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여전히 떨리지만 아까보다는 대담하게. 당연히 난 벽을 다시 한 차례 끌어당기며 안개의 흐름에 선명한 파문을 일으켰다. 낚시꾼이 찌를 흔들어 물고기를 유혹하듯이. 내 임기응변은 사냥감들을 신나게, 그리고 감격하게 만들었다.

"이건 이 숲이 지닌 영원한 힘(Aeonic power)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야. 마-직 그 자체라고! 생전에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 마-직을 사람이 쓴다고는 생각도 못하는 모양이지?

이건 지식의 문제이자 상상력의 한계이다. 본토의 그레이스 직계가 아니라 그런지 허접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마법을 아는 놈들이라면 곧바로 경계태세에 돌입했을 것을. 악마적인 제례- 인신공양을 거행한 결과 이 포플러 숲이 일으키는 기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이로써 두 숭배자는 내 장악력이 발휘되는 범위 안으로 완전하게 들어왔다. 난 부하들에게 몇 개의 수신호를 연속으로 보냈다. 제압 방식과 제압 시점과 제압 후 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신호들이다. 경태 이하는 총을 등 뒤로 돌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셋, 둘, 하나. 지금.

부하 넷이 엄폐물을 넘어 식육목의 짐승처럼 엄습하는 순간, 난 안개의 벽을 무너뜨리는 즉시 새로운 술식을 장전했다.

#6. 전율하는 거인 (4)

"어?!"

기겁한 두 악마숭배자가 본능적으로 반격한다. 놀란 초식동물이 움찔하듯 당기는 방아쇠일 뿐이어도, 30발을 1.6초 만에 갈겨버리는 총이라 눈먼 탄의 위협이 높다. 내 부하들이 아무리 날렵한들 손가락의 수축보다 빠를 순 없고. 그러나.

틱!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두 놈이 들고 있던 네 자루 모두.

"컥-!"

조금 더 나와 있던 놈이 먼저 복부를 얻어맞았다. 거의 동시에 가깝게 한 발짝 뒤에 있던 놈의 허리도 직각으로 꺾인다. 뒷놈을 친 경태는 측면으로 빠지며 팔꿈치를 꽂아 넣었다. 옆구리를 콱 찍힌 사탄의 졸개는 숨이 턱 막히는 표정으로 주저앉는다. 경태와 부하들은 아픈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축생들을 찍어 누르며 무기를 빼앗아 팽개치곤 손을 묶고 입을 틀어막았다.

사로잡은 둘을 짐짝처럼 취급하며 체중을 가늠한 경태는, 부하들에게 손가락 셋과 넷을 순서대로 세워보였다. 끄덕인 부하 둘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악마 졸개들의 목덜미에 자백제 주사기를 꽂았다. 경태의 판단에 따라 미리 채워놓은 양의 4분의 3만 주입한다.

그사이 난 팽개쳐진 악마숭배자들의 총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철컥.

볼트를 당기자 약실에 있던 불발탄이 튀어나온다. 그것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실탄 뒤쪽엔 공이에 찍힌 흔적이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충격을 받고도 뇌관이 터지지 않은 것이다. 이 불발탄은 내가 사용한 마법의 결과물. 미리 장전해두었던 술식으로 네 개의 자그마한 발화를 억제했을 뿐이다.

후....

나는 긴 날숨으로 몸을 이완시켰다. 예상한 결과일지언정 긴장은 하고 있었기 때문. 안정된 환경이 아닌, 근거리 교전에서 이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기도 했다.

'오래 쓰진 못할 기교라 아쉽단 말이지.'

최초의 한 발. 자동화기는 그 한 발이 막히면 노리쇠를 번거롭게 후퇴 전진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모든 화기를 고철로 전락시킬 수 있다. 고로 내가 써먹은 발화억제는 최저의 비용으로 상대의 화력을 봉쇄하는 아주 좋은 기교였다.

그러나 이는 상대의 화기가 내 회로의 역장- 마소 장악력의 범위 내에 존재할 때에나 비로소 가능한 기교다. 거리가 멀거나, 총을 쥔 상대가 제 고유의 역장을 보유한 능력자라면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방식.

악마졸개의 총을 던진 난 불발탄만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기념품 삼아 가져갈 요량이다.

어으으-

상체를 일으켜 세워진 두 악마숭배자가 괴상한 소리를 이중창으로 흘린다. 풀린 눈으로 침을 흘리며 아직까지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다. 부하들이 힘없이 흐느적대는 놈들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오클랜드에서와 달리 대뜸 자백제부터 놓은 건 이놈들이 광신도일 경우에 대비한 조치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소리를 질러댔다간 곤란해지니까. 정보의 오염 가능성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탄 졸개들의 입에서 침이 좀 덜 튀기를 기다려 물었다.

"사탄의 성도들아. 너희는 어느 교단 소속이냐?"

"교...단? 교단?"

교단이라는 단어를 모르겠다는 듯 입안에서 굴리는 졸개. 같이 묶인 동료가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아아, 교단.... 우리는 「아르크투루스를 섬기는 자들」이야...."

이름 자체는 처음 듣는 잡것들이었다. 「O7A」의 해외 방계에 속하는 전 세계 오만 잡것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을 순 없다. 직할 행동대나 부속교단이라면 몰라도.

다만 아르크투루스(Arcturus), 흔히 악튜러스라 부르는 목동자리의 가장 밝은 별을 단체명에 집어넣은 시점에서, 이놈들은 빼도 박도 못할 광신도 확정이었다. 왜냐면 이 별은 사탄숭배자들에게 있어 어두운 신의 성좌이며 가을철 인신공양의 대상이니까. 과거보다 순해진 현대적 사탄의 교회들은 이 신성한 별에 바치는 전통적인 제례를 폐기한 지 오래다.

"너희, 「아르크투루스를 섬기는 자들」이라 했지."

"응, 맞아...."

"이 숲엔 너희 교단뿐인가?"

"아니."

"아니라고? 다른 교단이 같이 오기라도 했나? 영국에서 파견한 인력이라든가?"

"아니라니까.... 넌 왜 모르지...? X신이야...?"

"내가 뭘 모른다는 거냐."

"조금 전 그 안개를 못 봤냐구 멍청아.... 이 숲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어두운 신들께서 권능으로 임하고 계신단 말야.... 크투나이, 네미쿠, 아타조스, 아르크투루스.... 오, 마-직. 영원한 힘과 성녀와 별들과 복수자들의 영광이여."

"...."

다른 놈들이 있다기에 대서양을 건너온 마녀의 직계인가 싶어 긴장했던 나는, 허무한 대답에 짜증을 가라앉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아아아직. 마아아아아아직. 마아아아아아아직!"

탁 풀린 눈으로 침을 흘리며 점점 크고 신나게 부르짖는 그놈의 마직. 그러자 옆에서 헤- 하고 있던 놈도 덩달아 마직을 외치기 시작한다.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한 놈은 아무래도 약이 좀 과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난 둘 다 뺨을 갈겨 늦기 전에 조용하게 만들었다.

"마아아아직...."

아무래도 이 방계 새끼들에겐 마직이 옴(?) 같은 진언(眞言)으로도 통하는 모양이다. 외우기만 해도 어떤 신비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쪽은 치워라. 쓸모가 없겠어."

지시를 받은 경태는 약이 과한 쪽을 뒤로 끌어내 뒤통수에 단발사격을 박아주었다. 툭 터지는 작은 총성과 팍 하고 튀는 검붉은 피. 숨이 멎은 시체는 앞으로 비스듬히 꼬꾸라진다.

난 살려둔 쪽을 상대로 심문을 계속했다.

"묻겠다. 너희는 누구의 지시로 여기에 왔지?"

"당연히... 우리 대장의 지시지, 씨발놈아...."

"너희가 이 숲에 온 건 너희 교단의 의지냐,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의지냐?"

"몰라...."

자백제의 또 다른 단점. 자백제로 쓰이는 약품은 대상의 사고능력을 떨어트리기에, 질문이 어려우면 이해를 잘 못한다. 그래서 모른다는 답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 칠각기사단(O7A)의 그랜드 마스터 말이다."

"아아, 로드 라운위사 그레이스(Grace the Lord Rounwytha).... 선지자이자 성녀 되신 우리의 아름다운 구세주.... 그분께선 우리에게 천년왕국을 약속해주셨다구.... 부럽지? 응? 부럽지?"

"그래, 아주 부럽구나. 아무튼, 그 여자가 너희를 이 숲으로 가라고 했나?"

"어."

"...."

쉽고 짧은 답이 무겁기도 하다.

"그녀가 무엇을 시켰는지 말해봐."

그러자 약에 취한 얼간이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교리부터 시작해서 정기적인 집회와 폭행, 살인, 절도, 강간, 방화 등 어두운 신들이 기뻐하는 행위들까지.

이놈은 그레이스의 종교적 가르침을 그녀가 '시킨 것'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했던 질문들의 맥락은 싹 잊어버린 채로.

'이래서 자백제를 잘 안 쓰는 건데.'

대상이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자백제를 쓰기가 꺼려진다. 또 아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놈들은 약에 취하고도 거짓을 토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질문을 조금씩 바꿔가며 교차검증을 하다보면 진위가 드러나긴 하지만.

난 한숨 한 번 다시 쉬고 질문의 구체성을 보강했다.

"'그레이스가' '너희에게' '이 숲에서' '무엇을' 하라고 했는지 말해."

또박또박 강조하며 물으니 비로소 제대로 된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분은 우리에게... 숲의 영혼을 인도하라 하셨어.... 어두운 신들께서 거하시는... 불가해의 영역으로...."

마녀가 재정립한 사탄숭배 신앙- 기존의 교단을 흡수하고자 적당히 지어냈을 교리에서, 불가해의 영역은 모든 마법(마직)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숲의 영혼을 불가해의 영역으로 이끈다는 건 숲의 마법적인 성장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제물의 피로 신성한 칠각의 별을 그리고... 제물의 생명을 바쳐... 이 숲의 영에게 길을 만들어줬지.... 많이 만들어줬지.... 신나는 일이었어...."

"제물이 굳이 사람일 필요가 있었나?"

양분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큰 차이가 없다. 고로 인간을 먹는 숲과 동물을 먹는 숲은 사실상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인신공양에 따르는 현실적 위험을 굳이 감수해야만 했을까?

허나 이는 어리석은 의문이었다.

"사람일 필요가 있냐고...?"

약에 취한 사탄숭배자가 멍한 눈에 멍한 의문을 담아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 사람이 아닌 제물도... 있어?"

"...."

그래, 이것들은 악마숭배자들이었지. 상식이 다소 맛이 간 인간들.

아무래도 인신공양은 종교적 광신을 조장한 마녀 자신의 업보라고 봐야겠다. 이 나조차 때로는 조직의 관성에 끌려가는 마당에.

이러니까 조직문화는 이성적이어야 하는 거다.

"그건 됐고, 그레이스가 너희에게 달리 시킨 건 없나?"

"있지. 우리는 축복을 받을 거야.... 축복, 아, 축복. 내 영혼을 적실 영원한 힘...."

그건 시킨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괜히 나오는 말도 아닐 것이다. 사고의 흐름으로 미루어, 필시 지시를 받을 때 함께 들은 내용이겠지. 그렇다면 그레이스의 숨겨진 목적도 대충 알 만하다.

'결국 이것들 역시 다른 의미의 제물이군.'

영원한 힘의 축복이 내면에 깃든다는 건, 현상만 놓고 보면 둘 중 하나를 뜻한다. 독특한 암에 걸리거나, 영혼에 회로가 뚫려 초능력을 각성하거나.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암에 걸리면 어차피 뒈질 테니 큰 차이는 없다.

경태의 가설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회로가 뚫리면 능력자가 생겨서 좋고, 암에 걸려 죽으면 암 덩어리가 남아서 좋다.

마소암은 마소와 마력이 주어지는 한 모체가 죽어도 증식을 거듭한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살찌울 육종 덩어리는, 죽은 제물을 통해 인간의 육을 양분으로 인식한 숲이 그 다음으로 끌어당기기에 적합할 '살아있는' 양분이었다.

그로부터 한 발만 더 나아가면 진정한 의미에서 산 사람을 잡아먹는 미궁이 완성될 테지. 사냥감에 대한 단계적인 인식. 반드시 성공한다는 장담은 없을지언정 그레이스 입장에선 시도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것들에게 무전기가 없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암의 진행도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먼저 증상이 심해진 놈이 무전망에 대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 나머지 무장한 제물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것 아닌가.

한데 이 모든 가설을 증명하려면 한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암 걸리기 좋은 자리를 찾는 능력.

"몰라. 몰라...."

영국에서 보내온 무언가가 있느냐는 질문에, 사탄의 추종자는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만취한 주정뱅이가 흔들거리는 모양새로. 자백제의 한계를 감안하여 형식을 거듭 바꿔 물어도 여전히 같은 대답만 돌아올 따름.

"아, 가렵다.... 풀어줘.... 긁을 거야.... 아프면서 가렵고... 가려우면서 아파.... 아픈 건가? 가려운 건가아? 모르겠다.... 민트초코 피자 먹고 싶어...."

가려움이 괴로운지 몸을 땅에 대고 비벼대는 악마숭배자의 모습. 마취제와 뿌리가 같은 자백제의 효과가 슬슬 줄어드는 듯하다.

"일으켜 세워."

경태가 놈의 뒷덜미를 붙잡아 거칠게 들어올린다. 난 한쪽 무릎을 꿇어 멍한 눈을 찌푸리는 악마숭배자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조금만 참아라. 질문 몇 가지만 더 대답해주면 내가 대신 긁어줄 테니."

"얼른, 얼른...."

"그래."

이런 조무래기도 자기네 패거리의 숫자와 서열, 본거지 정도는 알 것 아닌가. 또 그들 각각이 어떤 화기로 무장했는지, 암구호 따위가 있는지, 유사시 행동수칙은 어떠한지....

기대 가능한 모든 정보를 얻은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이쯤이면 됐다. 이제 약속을 지키마."

"약속.... 무슨 약속을?"

"가려운 곳을 긁어주겠다고 했을 텐데."

"아, 맞아.... 빨리 해줘.... 너무 가렵다구...."

"비켜라 경태야."

터엉!

난 이제껏 성실하게 대답해준 놈의 뇌를 총탄으로 긁어주었다. 전신의 가려움을 이보다 시원하게 긁어주는 방법도 없을 것이었다. 코끝에 희미한 초연이 스치고, 소음기에 한 차례 여과된 총성은 완충기 역할의 안개에 갇혀 기이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악마숭배자는 고개를 뒤로 확 꺾은 시체가 되어 흐물텅 무너져 내렸다. 나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흐르는 뇌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경태 네 추측이 맞는 것 같구나."

"어떤 추측 말씀이십니까?"

"숲에게 사람을 먹이는 거 아니냐고 했던 것 말이다."

"아, 그거요? 근데 얘한테 물어보신 것들 중에-"

경태가 발끝으로 방금 죽은 사탄 졸개를 툭툭 친다.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까?"

"유추할 만한 단서가 있었지. 이쪽 바닥에서만 통하는 상징적인 표현들이."

나는 내가 추측한 내용들을 들려주었다. 경태가 기가 막힌 웃음을 짓는다.

"이야, 그 마녀한텐 부하들도 그냥 소모품일 뿐입니까? 악마숭배자들의 우두머리답네요."

"부하와 신도는 구분해라. 그리고, 그 인도년이 이런 잡것들을 좋아할 리가 없지."

속으론 오히려 혐오해마지 않을 거다. 왜냐면 악마숭배자들은 취미로 네오나치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빛과 진리의 원탁」에 대한 증오만은 나에게 뒤지지 않을 그 미친년이, 제국주의가 낳은 사생아 새끼들을 예뻐할 리가 있나.

그러므로 O7A를 필두로 삼는 악마숭배자들의 교세는 그년에게 있어선 그저 복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6. 전율하는 거인 (5)

본디 이 「전율하는 거인」은 느리게 죽어가는 숲이었다. 수명이 다 된 줄기들을 새롭게 자란 줄기들이 대체해야 하건만, 생태계 왜곡으로 인한 초식동물 증가, 인근 목장들의 무분별한 방목 등으로 인해 새로 돋는 싹이 남아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숲의 경계엔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환경당국이 취한 보호조치였지만, 그 단순한 조치가 이 오래된 숲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숲의 중심부가 지척으로 가까워진 지금, 나는 시린 계절의 하얀 숲속에서 연둣빛 새순과 마주하고 있다.

"...."

난 부하들을 대기시킨 채 손끝으로 새순을 건드려보았다. 숲은 곧 통상시야를 벗어난 영역에서 마력의 잔잔한 흔들림으로 반응했다. 내 손길을 감지한 것이다. 인간의 것과는 원리가 다를지언정, 식물에게도 나름의 촉각이 존재한다.

새순이 돋아난 그루터기엔 성화(聖?)에 덧칠한 낙서처럼 핏빛의 칠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악마숭배자들의 미학엔 아름다움이 없다.

위에선 외곽엔 희박하던 빛이 내리쬔다. 중심부의 안개는 층이 얇았고, 목적이 선명한 대류(對流)를 통해 주변부로부터 끊임없이 온기를 공급받고 있었다. 속도는 느려도 꾸준한 흐름이다. 이로써 이곳은 광합성이 가능한 환경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파악한 숲의 마법은 두 가지 특성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물의 상전이(相轉移). 그리고 물에 대한 구속력.'

안개가 품은 온기는 태양광에서 비롯된 지분과 물의 상전이로부터 부수적으로 발생한 지분이 섞여있을 것이었다. 이중 후자는 수분의 물리적 압축이 빚어내는 열.

유효하게 작동하는 회로의 비중이 1푼에 불과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술식을 구축하고 효과적으로 운용한다는 사실이 감탄스럽다. 최저 8만 년, 최대 100만 년을 존재해왔으리라 추정되는 포플러 숲의 영혼은 그 세월에 걸맞은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도의 염동력 술식으로 비슷한 현상을 빚을 순 있겠다. 허나 숲의 마법은 염동력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직 낭비가 많고 단순한 이 술식을 내 회로에 맞게 이식(porting)하고 개선하는데 성공한다면, 이것만으로도 나는 전대미문의 폭탄마로 거듭날 수 있을 듯했다.

"형님."

경태가 우려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 본격적인 교전을 치러도 괜찮은 겁니까?"

"왜?"

"빗나간 탄들이 나무줄기에 와다다다 박히기라도 하면 거인이 화를 낼까 봐 그렇습니다."

그런 걱정이었나.

"내가 이 숲을 계속해서 의인화하긴 했다만, 식물에게 동물적인 사고와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어.... 아무 반응도 없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반응이야 하겠지. 가능하다면 위협을 배제하려고도 할 것이고. 단지-"

나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짚어보였다.

"단지, 사고를 틀에 가두지 말라는 거다."

"아하."

"차라리 외계생명체를 상대한다고 생각해라. 감각도, 감정도, 지능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식물에겐 통각이 없지만 그것이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통의 개념 자체가 동물과는 다르단 뜻일 뿐.

'달리 대체할 표현이 마땅찮으니 동물적인 단어를 쓸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경태는 내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었다.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본질적인 차이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별개로, 경태가 제기한 우려는 나 역시 염두에 두고 있던 바다. 나는 숲이 '분노' 내지 '당황'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지 숙고해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공격은 속행한다. 강풍에 대비해라."

"강풍입니까?"

"그래. 현재로선 그게 이 숲이 분노를 표현할 유일한 방법 같구나."

"알겠습니다."

숲을 돌며 악마숭배자들의 2인 1조 외곽 경계를 다 무너뜨리고 숲의 중심을 앞둔 이 시점에서, 우린 사탄 졸개들의 마지막 무더기 사냥만을 남긴 상태였다. 통상시야가 소폭 개선된 환경에서 자동화기로 무장한 열아홉과 교전을 치르자면 유탄(流彈)이 촉발할 여파에도 대비해야 한다.

보다 단단히 엄폐를 유지하는 것 외엔 달리 대비할 방법이 없을지라도, 무엇이 닥쳐올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경태가 고개를 까딱였다.

"저희는 준비됐습니다."

공격은 내 발포로 개시된다. 적을 관측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니까. 적이 대응사격을 개시하면 그 총구화염을 보고 경태 이하도 대략적인 제압사격을 가하게 될 것이었다.

안개가 소음을 억제해줄 줄 알았으면 수류탄을 구해왔을 텐데.

부질없는 미련을 떨치며, 난 조정간을 단발로 맞추고 조준선을 정렬했다. 속으론 표적에 번호를 매기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보았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적들이 피격에 반응하기 전까지 셋을 죽이는 게 베스트겠다. 가늠자와 가늠쇠 너머에 적의 머리를 두고 호흡을 차분하게 다스린다.

스읍, 후-

날숨을 중간에 끊어 몸의 기복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나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터엉! 터텅!

터지는 대가리가 둘에 관통당한 어깨가 하나. 세 번째 놈은 안 뒈졌다. 비명과 쌍욕이 터져 나온다. 난 즉각 조정간을 밀고 우왕좌왕하는 잡것들에게 3점사를 갈겨댔다. 터터텅! 터터텅! 터터텅! 쓰러진 줄기들이 파편을 튀기는 가운데 몇 줄기의 선혈도 같이 뿜어진다. 부상자가 둘 늘었다. 6밀리 강판을 뚫는 철갑탄 세례는 살아있는 줄기에도 거침없이 박혀들었다.

화악- 하고 안개가 파도친다.

아직은 흐릿한 미풍이었다. 물의 압축과 팽창이 만들어낸 바람에 안개가 흩날려 통상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가운데 악마숭배자들이 당황하여 내지르는 고함들. 뭐야?! 어떤 새끼들이야?! 직후 반격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챠라라라라락!

울림의 높이부터 다른 총성. 무지막지한 연사속도 탓에 날카로운 쇳소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진다. 그 높은 연쇄가 끝나고서야 낮은 음계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향을 한참이나 잘못 잡았다. 난 어중간하게 엄폐한 사수의 상체에 아음속 철갑탄 세 발을 박아주었다. 반동이 어깨를 친다 싶은 순간 표적의 이마에 붉은 점 세 개가 찍히며 뒤통수가 폭발한다. 두개골이 앞뒤로 깨진 녀석이 풀썩 무릎 꿇고, 남은 적들이 악을 쓰며 초당 수백 발의 총탄을 분사하는 수준으로 뿌려댄다. 순간적인 화력이 워낙 엄청나서 이번엔 나도 몸을 사려야만 했다. 방탄복과 방탄모는 최후의 보험에 불과하다.

흔들. 한순간 거센 바람이 등을 밀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숲이 당황하는 느낌. 우리가 빗맞히는 탄보다 적들이 빗맞히는 탄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바람도 이쪽에서 더 많이 불 수밖에 없었다. 숲은 시각적으론 빛과 어둠만 구분하는 장님이나 다름없으니까. 진짜 가해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턱이 있나.

무지막지한 탄막을 형성하던 적들의 사격은 채 1분도 안 되어 한계를 맞이했다. 탄이 바닥나서가 아니라 소음기가 과열되어서다.

"Fuck!"

저편에서 들려오는 단음절의 욕설. 연사력이 정신 나간 총으로 대용량 드럼 탄창들을 비워댔으니 갇힌 열이 오죽이나 뜨거울까. 그 달아오른 쇳빛들을 통상시야로도 식별할 수 있을 지경. 저놈들 총은 그렇잖아도 소음기 내구성이 X신 소리 듣던 물건이다.

터터텅! 터터터텅!

경태 이하가 더욱 거세진 강풍을 가까스로 견디며 제압사격을 실시했다. 나 또한 엄폐물 삼은 줄기에 단단히 몸을 밀착시켜 몰아치는 강풍 속 정조준 능력을 확보했다. 귓가를 가득 메운 바람소리에 내가 당긴 삼점사의 총성이 섞인다.

망할...!

한 뼘이나 빗나갔다. 우왕좌왕 엄폐가 아직인 놈을 골랐건만. 엄한 포플러 줄기만 바바박 부서진다. 방아쇠를 연달아 네 번 더 당기고서야 겨우 한 놈의 피를 볼 수 있었다. 이놈의 아음속탄은 바람의 영향을 지랄 맞게 받는다. 경태 이하의 사격에 부상당한 놈들의 존재가 그나마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

이젠 적들도 몸을 가누기 어려워했다. 몰아치는 강풍에 미친 듯이 전율하는 가지들. 파도처럼 물결치는 안개는 밀도의 변화를 거듭하며 투명과 불투명의 경계를 오갔다.

악마숭배자들은 전투에선 아마추어일지언정 겁 하나는 지독하게 없는 놈들이었다. 나는 서열 높은 놈이 나머지에게 지시하는 내용을 독순술로 읽었다. 환경이 요란하여 잘못 알아듣는 부하들에게 소리를 키우지 않고 여러 번 반복해 지시한다. 이쪽이 엿듣지 못하도록 애쓰는 꼴은 가상하다만....

터터텅!

엄폐물에서 포복으로 기어 나오는 녀석의 옆구리에 관통상을 뚫어준다.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들어간 탄은 뱃가죽을 찢고 땅을 치며 꺾여 반대편 옆구리로 튀어나갔다.

엄호를 받으며 흩어져 이쪽의 화력을 분산시키고 반 포위를 짜려던 절반의 적들은, 그러나 내 연속 사격에 차례차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딱 한 놈만 제외하고.

"마아아아아직!"

낯짝에 마약을 분칠한 새끼 하나가 벌떡 일어나 달려든다. 내 사격은 간발의 차로 놈이 기어가던 자리를 두들겼다. 즉각 조준을 고쳐 삼점사를 쏘았으나-

'신체강화...!'

암과 원시마법 각성을 함께 얻은 악마숭배자의 속도가, 새로 더해진 힘에 적응하지 못한 괴상한 움직임이 예측 사격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차라리 정면으로 달려들었으면 맞았겠는데 이번엔 안개와 강풍 탓에 비틀리는 경로가 문제였다.

철컥! 공이가 빈 약실을 치는 소리. 하필이면 이때! 난 즉시 탄창을 교환했지만, 저편에 남은 적들이 목숨을 내놓다시피 가하는 일제사에 바짝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마찬가지인 경태 이하의 머리 위로도 자잘한 파편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우리 측 화력의 순간적인 침묵은 약에 취한 놈의 돌진에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넘어질 때마다 방향이 꺾여서 그렇다. 저는 똑바로 달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안개 속에서 방향유지가 쉬울 턱이 있나.

"마아아흐, 흐, 지익!"

호흡곤란에 시달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기고 뛰던 사탄의 광전사는, 결국 우리가 있는 선을 멀찍이에서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

난 그 허망한 등짝에 연사를 갈겨주었다. 총성에 이은 둔탁한 타격음.

광전사는 방탄복을 입고 있었으되 이쪽은 돌격소총에 아음속 철갑탄을 장전해서 쓰고 있다. 권총탄이나 막을 가벼운 방탄판으론 소총으로 쏜 철갑탄을 방어할 수 없었다.

'그냥 둬도 급사했겠지만.'

막 각성한 주제에 힘을 미친 듯이 끌어올린 탓으로 벌써부터 장기가 망가지던 놈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능력 사용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 불완전한 회로, 마력의 급격한 누수에 따른 세포 붕괴는 일찍이 수연과 경태에게도 숙지시켰던 위험성이다.

화력의 균형이 역전되었다.

적은 이제 순간화력으로도 우리를 압도하지 못했다. 머릿수로는 여전히 근소하게 우위였으나 탄이 바닥나기 시작한 것이다. 분당 천 발이 넘는 발사속도를 무분별하게 남용해버린 결과다.

당장 한 놈이 분통을 터트리는 게 보인다. 나무 밑동에 총을 내리쳐 시뻘겋게 휜 소음기를 분지른 것까진 좋은데, 남은 탄창이 딱 하나뿐이었기 때문.

반면 이쪽은 소음기도 멀쩡하고 잔탄도 넉넉하다.

터터텅!

조준사격이 또 하나의 무가치한 인생을 끝장낸다.

저들이 더 이상 무지막지한 탄막을 뿌리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 사탄 졸개 하나하나의 간헐적인 대응사격은 아까보다 현저하게 감소한 위협이었다. 더욱이 이쪽이 여전히 소음기를 쓰고 있었으므로 더더욱 그러하다. 적들이 대응사격의 방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소음기는 탄속을 줄이지도 않고 살상력을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지금 쓰는 「비흐리」처럼 총열이 짧은 총은 탄속과 정확도가 소폭이나마 증가하기까지 한다.

더욱이 소음만이 아니라 총구화염까지 줄여주기 때문에, 적들처럼 난사를 해대지 않는 이상은 섬광에 따른 위치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순간에 이르도록 소음기를 제거하지 않은 이유들이다.

전투지속력이 고갈된 악마숭배자들이 거친 의견들을 교환한 끝에 최후의 선택을 내린다. 그것은 앞서 뒈진 광전사를 본받는 광신적인 돌격. 폭력이 미덕이고 살인이 교리인 종교의 광신자들이라 도주 따윈 선택지에도 없는 느낌이다.

놈들은 휴대한 마약봉지를 얼굴에 문대는 수준으로 흡입하고는, 눈을 껌벅이며 허연 낯짝으로 몸을 떨다가 그들의 신을 부르짖었다.

"아아아아아아르크투루스여! 높은 곳의 어두운 성좌들이여!"

그러나 광신이 부른 장렬함은 강풍을 견딜 자리를 버리는 우행이었다. 달리 선택지가 없기는 했다만.

어쨌든 잘되었다.

서열 높아 뵈는 놈을 살려다가 머릿속을 긁어볼 수 있을 것 같으니.

#6. 전율하는 거인 (6)

전투가 끝났다. 총격전이 그치자 오래지 않아 숲의 전율도 잦아들었다.

서열 높은 놈에게 자백제를 투여한 결과는 썩 대단치 않았다. 진정한 마법에 대해서, 원탁과 마녀와 O7A에 대해서, 그리고 황금기의 눈을 가진 자에 대해서 특별히 아는 게 없었으므로.

'이것들은 철저하게 버리는 패였군.'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나 조금 아쉽기는 하다. 웨일즈의 마녀 입장에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정도의 가벼운 감각으로 시도한 일일 것이다. 들어가는 품에 비해 기대수익이 높으니까.

의외인 건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거느린 세력의 역량이다. 영국 본토에 본거지를 둔 주제에, 원탁의 견제 밖에서 수작을 부리는 걸로도 모자라 이 정도의 광신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모한단 말이지....

2인 1조로 외곽 경계를 맡고 있던 놈들과 달리, 숲의 중심부를 지키는 놈들은 열아홉이 한 패거리로 뭉쳐있었다. 이 열아홉은 암세포 형성에 따른 통제력 상실을 우려하지 않았다는 증거. 즉 끔찍한 고통조차 시험으로 받아들일 만큼 차원이 다르게 신실한 사탄의 종복들이란 뜻이었다. 장차 칠각기사단(O7A)이 외연을 확대해나간다면 1순위로 영입할 인적자원들.

마(魔)의 은총(Grace)에 침식당한 사탄숭배자들의 지하교회는 상정 이상으로 거대한 교세를 확보한 모양이다. 그 교세에 조직력은 결핍되어 있을지라도.

난 전투흥분을 가라앉히며 유일한 전리품을 살펴보았다. 손목시계처럼 생겼으되 베젤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별을 그린 원판과 구슬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비어있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생김새만 보면 그거 같네요.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시계."

시신을 등진 경태의 말에 나는 시선을 기울였다.

"그런 것도 있나?"

"예. 제가 또 시계를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쩌어기 스위스에서 몇 년 전에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시계'를 출시했지 말입니다. 그게 오틀랑스(Heutlence) 제품이었을 겁니다, 아마. 그것도 시계판 위에 구슬 하나 올려놨던 걸로 기억하지 말입니다."

오틀랑스...? 모르는 브랜드다. 애초에 세계 최고의 명성을 지닌 브랜드가 아니면 알 가치도 없다. 내게 있어서 명품 시계란 얕보이지 않기 위한 장식품 내지 정치인들에게 주는 뇌물에 불과하니까. 드물게는 자금세탁 및 운반 수단으로 쓰기도 하고.

그도 그럴 게 파텍 필립의 하이엔드쯤 되면 손목에 차고 다니는 수백만 달러가 아닌가. 유사시 담보물로 삼거나 비상금을 마련하기에도 적합하다.

경태는 악마숭배자의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본 끝에 이렇게 평가했다.

"근데 그게 그런 명품 같지는 않네요."

난 가볍게 끄덕여보였다.

"이건 일종의 나침반이다. 마소와 마력을 좇는 탐지기지."

"오우. 마법 아이템이네요?"

"아이템?"

"어, 요즘은 대개 그렇게들 부르지 말입니다. 게임에서나 소설에서나."

"글쎄. 적어도 원탁에서는 아니었는데."

그들이 신성시하는 「황금기」에 만들어진 것들은 성유물이란 의미에서 「렐릭」이나 「앤티쿼티」 같은 명칭을 쓰고, 고대의 유물이라도 「황금기」 이후에 만들어진 물건들은 「아티팩트(artifact)」라고 부른다. 후자에 속하는 물건들 중 특별히 중요한 것들은 철자가 하나 다른 「아티팩트(artefact)」로 구분하고.

아티팩트에도 속하지 못할 잡다한 것들은 다시 「탤리스만(부적)」으로 분류한다. 대개는 원탁의 마스터들이 이번 '변화' 이전에 만들어낸 잡동사니들. 이 시계를 닮은 탐지기를 굳이 구분하자면 탤리스만에 속할 것이었다.

"뭐, 어떤 명칭으로 부르느냐가 중요하진 않겠지."

나부터가 편의상 마법의 원천에 마소라는 임의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런던의 원탁에서야 「아이테르」니 뭐니 할지라도 앞으로의 세상이 거기에 맞춰주진 않을 터. 훗날 원탁의 마스터들이 영국 정부를 등에 업고 국제표준을 정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결과를 볼 일이었다. 그것들도 자기들 밑천을 함부로 까 보일 처지가 못 되니까.

"아무튼 그거 혹시 끕이 좀 되는 물건입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경태의 질문에 질문을 돌려주었다.

"그럴 것 같으냐?"

"아뇨."

"그래, 아니다."

"역시...."

충견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조금 기대했지 말입니다. 이 난리를 치고 얻은 보상인데."

"진짜 보상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하. 마법 아이템이라니까 혹시나 싶었죠. 제가 좀 만져 봐도 괜찮겠습니까?"

난 말 대신 탐지기를 휙 던져주었다. 받아든 경태는 원판을 기울여가며 때때로 중력을 거슬러 멋대로 구르는 금빛 구슬의 움직임을 신기해했다.

"오오. 초딩 때 자석 실험하던 추억이 되살아나네요, 이거. 아기자기한 게 형님께서 보여주시던 마법이랑은 또 다른 맛이 있는데요."

"마스터들도 각자 특기분야가 다르니까."

이 손목시계형 탐지기는 예전이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하등품이었다. 감도가 낮아 어지간히 강한 마력이 아니고선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준인데, 과거의 환경엔 그 조건에 해당하는 마력이라는 게 존재하질 않았으니까.

'원탁의 마스터 개개인을 코앞에 두고도 반응할까 말까 했을 물건인데 어디다 썼겠나.'

허나 이런 폐급이라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산 제물로부터 뜯어낸 영혼을 사물에 접붙여 반영구적으로 술식을 정착시키는 기술은 그레이스가 살해한 마스터의 대표적인 장기였다. 특히 소형화 분야에서. 내 스승새끼는 뛰어난 마법사이긴 했어도 지름 2밀리미터짜리 구슬을 탤리스만으로 만들 능력까진 없었다.

이제 세계가 달라진 만큼 나도 실험을 거듭하면 흉내를 내볼 수 있을 것이다.

탐지기를 지분거리던 경태가 문득 입을 연다.

"형님. 제가 방금 기똥찬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는데요."

"아이디어?"

"옙. 원탁에 둘러앉은 틀니들이든 십자가로 자위하는 웨일즈의 마녀든, 이런 거 백날 만들어봐야 형님의 눈보다는 못한 거잖습니까?"

"그런데?"

"이 숲의 성질머리는 아까 겪은 것보다 더 거칠어지는 거고요."

"십중팔구는."

"그럼 이딴 구슬 장난감 말고 형님의 눈으로만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곳에다 비밀 거점들을 구축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이죠."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앗."

눈을 굴리는 경태. 내가 그 방안을 구상해보지 않았을 리 없잖은가. 「황금기의 눈」이 부여하는 비대칭적 우위를 유감없이 활용할 방법인데. 녹색 미궁에 구축할 여러 거점들의 효용은 간단히 생각해봐도 무궁무진하다. 비상시 대피시설, 밀수 중계지, 비밀창고 등.

잘하면 잠재적 적성세력들로 하여금 내 근거지를 오판하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이었다. 이 방안을 처음 떠올렸을 때 가장 매력을 느꼈던 부분.

"문제는 좋은 터가 의외로 드물 거라는 점이지."

"그렇군요...."

"한국만 해도 그렇다. 그쪽에 적당한 장소가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질문을 받은 경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많진 않겠네요, 확실히."

한국은 이런 면에서 괜찮은 환경이 아니다. 산지가 70%라곤 하나 국토의 절대면적 자체가 작고, 질적으로는 「대통령」이 있던 국립공원이나 숲 전체가 단일 유기체인 이 「전율하는 거인」에 미치지 못하니까. 적의 이목을 내 진짜 기반으로부터 떨어트려놓기 위한 더미 사이트(dummy site)로서의 후보지로는 특히 더 부적합하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후보지가 대폭 늘어나지만, 그 대부분이 격오지일 터라 거점을 건설하고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될 터였다. 배치할 인력부터 애매하고.

무엇보다 바다 건너에 둔 인력이 동양계 일색이면 그건 그 자체로 하나의 단서가 되어버린다. 내 진짜 근거지를 추정할 단서가. 영국 본토공략과 마찬가지로 비동양계 추가 인력을 구해야만 가능할 일인 것이다.

경태는 멋쩍어하는 낯으로 말했다.

"저는 그, 팔문둔갑(八門遁甲) 같은 걸 상상했지 말입니다."

"팔문...뭐?"

"팔문둔갑이요. 연의에서 공명이 쓰는 술법 겸 진법 있잖습니까. 형님도 삼국지연의는 읽어보셨을 텐데요?"

소설을 낭비로 여기는 나라도 삼국지는 읽어보았다. 흥미가 일어서가 아니라 그게 일부 중국 새끼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까닭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문화를 한 번 다 태워먹은 X신들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문화적 자산의 대표 격이니까.

물론 그렇게 상대해주는 놈들 치고 정사나 연의를 제대로 읽어본 작자는 드물었다. 그들 대부분이 아는 지식은 깊이가 깊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원전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놈들이 맞장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앎을 내비쳐주면, 좋아하는 놈들은 어찌나 좋아하는지.

예컨대 연의를 수십 번이나 정독했다고 자랑하는 놈 앞에서 예의를 차려 조금 더 아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 수십 번의 정독이 허세임을 인정하는 대신 나를 더 대단한 인간으로 추켜올려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X신 머저리들에게 눈높이를 맞춰주기가 이렇게나 피곤한 일이다....

난 기억 속에서 경태가 말한 내용을 끄집어냈다.

'분명 공명은 육갑천서의 귀신을 잘 부리고 팔문둔갑에 능하다는 서술이 있었지.'

그 힘으로 24신장(神將)을 불러내 부리고 축지법을 사용하며 풍백우사의 비법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꾼다는 둥 해괴한 묘사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갈피엔 진법(陳法)에 관한 내용도 존재했다. 팔진도니 팔문금쇄진이니 하는 것들. 개(開), 휴(休), 생(生), 두(杜), 경(景), 경(驚), 상(傷), 사(死). 열고(開) 쉬고(休) 살아남는(生) 3개의 문과 두렵고(驚) 다치고(傷) 죽는(死) 3개의 문. 그 사이에 존재하는 길은 막는(杜) 문과 밝은(景) 문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경태가 연상한 게 바로 이것일 터였다.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의 개념을 떠올렸던 거냐?"

"예, 예! 바로 그거요."

"...굳이 따지자면 비슷하기는 하겠구나."

"그렇죠?"

생문은 살아서 나오는 문이고, 사문은 들어가면 죽는 문이다. 주역 팔괘에 대응하는 이론의 허무맹랑함은 차치하고, 이상적인 거점을 구축한다면 최소한 효과 면에선 유사할 것이다.

내 긍정에 경태는 기가 살아났다.

"어차피 영국 본토로 무기랑 인력을 실어 나르려면 멕시코 만에 중계기지 하나쯤은 마련해야 하지 않습니까?"

"계속해봐."

"중남미 애들이 열대우림의 강과 늪지에서 잠수정을 건조하거나 화물을 선적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머잖아 그런 거점들 상당수가 어쩔 수 없이 버려질 게 뻔한데, 그중에 우리가 건질 시설이 적어도 하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찾거나 인수하거나 하는 거죠."

어차피 버릴 거, 비싸게 매겨봐야 얼마나 비싸겠냐는 게 경태의 생각이었다.

굳이 아마존 밀림 일대가 아니더라도, 브라질 동북부엔 마약 카르텔이 거점을 숨길 만한 그늘이 허다하게 널려있다. 강과 바다가 만나 이루는 혼탁한 물길들은 무수히 많은 나무뿌리의 형상으로 밀림 가득한 해안을 파고든다. 그 잔뿌리 하나하나가 연간 수백 톤씩의 코카인을 공급할 잠재력을 지닌 마약시장의 모세혈관들이었다.

난 숙고 끝에 대답했다.

"말처럼 간단할 일은 아니겠다만, 기회가 닿으면 검토해보마."

그리고 시선을 숲 바깥을 향해 돌렸다.

"정리할 거 있으면 정리해라. 슬슬 나가야지."

"옙."

중심부의 회로는 이미 확인했다. 느린 탐색이었고 낮이 짧은 계절이었으므로 이제 곧 하늘의 색이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보안관들의 허술한 순찰을 피해 빠져나가는 건 조금도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거인의 회로도와 더불어, 런던의 원탁이 지닌 지식의 총록(總錄) 「장엄한 황금의 책(Codex Gigas Aureolus)」에도 실려 있지 않은 마법의 조각을 얻었다.

#7. 8월의 가로수들 (1)

끔찍한 일이 있었다.

중국 우한에서 출현한 바이러스성 폐렴 하나가 약 반년에 걸쳐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것이다. 주요 국가들의 감염 확산이 억제된 현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감염자 수는 물경 310만에 이르렀으며, 사망자는 20만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었다. 후진국들은 신뢰할 만한 통계 자체를 못 내는 상황이었고.

이 사태를 바라보는 나는 적잖이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마소의 풍요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미세유기체에겐 유해한 환경이었을 텐데.'

스승새끼가 몸담았던 「빛과 진리의 원탁」은 영국 정부에게 손절당하기 전 정부의 요청에 따라 생물병기 연구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마법적인 질병을 창조해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을 뿐이다.

세균은 작다. 바이러스는 더더욱 작다. 마이크로미터와 나노미터 단위의 유기체에 깃든 영은 회로가 새겨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오히려, 마소와 마력에 강하게 피폭당한 병원체들은 자외선에 노출된 것 이상의 속도로 지리멸렬하게 죽어나갔다.

미세유기체에게 회로를 새길 수만 있다면, 크기가 작은 만큼 마소 요구량도 미미하여 마소가 거의 고갈된 환경에서도 유의미한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라는 게 영국 정부의 발상이었으나, 그건 결국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발생했단 말이지.

원래대로라면 더 크게 번졌어야 할 질병이 마소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로 억제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모종의 변인이 질병의 확산을 증폭시킨 것일까.

머리는 전자로 기울지만 가슴으로는 좀처럼 갈피를 못 잡겠다. 최근 제약회사를 비롯한 여러 바이오기업들이 균주 및 세포주 배양 수율 감소로 골머리를 앓는 걸 보면, 역시 전자가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어쩌면 제국주의자들의 실험 자체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어딘가 편찮으십니까?"

상념에서 깨어보면 내 안색을 살피는 수연의 얼굴이 조금 가깝다.

"딱히."

조직의 우두머리가 자신감 없는 태도를 내비쳐선 곤란하다. 난 표정에서 감정을 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저 운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 탓입니다."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넌 아주 잘해주었어."

이 녀석의 사죄는 광둥삼합회- 실질적으로 중국 공산당과 체결한 무기 공급 계약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 놈들의 주문은 납기에 제한이 걸려있었다. 한데 생각해보면, 이 납기제한은 우리만이 아니라 협상장에 나선 짱깨들에게도 족쇄처럼 작용하는 조건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온 지시인즉 어떻게든 그 전에 해결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수연은 바로 이 점을 이용했다. 계약이 무난히 성사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며 양보에 양보를 반복하여, 너무도 쉬운 협상과 딴 주머니 찰 욕심에 눈이 먼 중국 측 협상단이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터무니없는 요구를 거듭하도록 유도한 것. 거래항목이 워낙 다양하여 시간을 끌기가 쉬웠다고 한다. 각각의 항목마다 마진을 달리했으므로.

때가 무르익자 수연은 꾹 참아왔던 분노를 연기하며 판을 엎어버렸다.

사후보고의 녹취록엔 당시의 발언이 적혀있었다.

「우린 이미 전례 없는 수준의 양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당신들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버리는군요. 정말로 모욕적인 요구입니다.」

「앞으로 우린 여러분과 거래하지 않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수연이 내세운 명분은 체면이었고, 짱깨들에게 있어서 체면은 목숨이 오가는 문제였다. 갈수록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게 자신들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다 된 밥이라고 보고 예비 거래선을 준비할 생각조차 않았던 중국 놈들은 엄청난 양보를 해서라도 '격노한' 수연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기한을 못 맞추면 깨지는 건 자신들일 테니.

'깨지는 선에서 그치면 다행이지.'

공산당 내부의 실적경쟁과 계파다툼은 살벌하기로 악명 높다. 낙관적인 경과보고를 몇 번이고 올려둔 상태에서 무리한 욕심으로 일을 그르쳐봐라. 실적과 부정축재를 함께 날려먹은 직속상관의 분노가 과연 일반적인 징계만으로 해소될까?

그리하여 최종 협상은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타결되었다.

전략 자체는 간단할지라도 실천은 별개의 영역이다. 행동이 말처럼 쉬울 것 같으면 주식 좀 안다는 사람들은 죄다 백만장자가 되어있을 터. 이번 협상에서 보여준 수연의 역량은 내가 알고 믿던 것보다 한 단계 성장한 것이었다.

나는 턱을 괴고 말했다.

"분명히 말해두마. 이번에 죽은 애들은 네 책임이 아니야. 그것 또한 운이 나빴던 거지. 그 바이러스가 그렇게까지 확산되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어. 할 수도 없었고."

"아닙니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였습니다. 믿을 만한 정보가 들어와 있었으니까요."

"그 정보는 나도 받아봤다."

"...."

"다시 말하지만, 너에겐 잘못이 없다. 이건 '내가' 내리는 판단이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수연이 짧게 고개를 숙인다.

이 녀석이 자꾸 자기 책임을 이야기하는 건, 상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태국으로 들어간 우리 애들 중 다섯이 폐렴과 뎅기열의 합병증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오가는 길이 험한 데다 방역봉쇄의 여파도 있어 소식이 전해지는 것조차 늦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팬데믹이 터졌으면 납품을 연기해주는 게 맞다. 그러나 이쪽 시장엔 상식이라는 게 없었고 중국 놈들에겐 더더욱 없었다. 놈들은 약정한 기일을 무조건 준수하라며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다. 시국이 시국이라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질까 두려웠던 것이겠지. 그러면 횡령을 못하게 되지 않는가. X미 뒈진 짱깨 새끼들 같으니.

난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가만히 시선을 내리까는 녀석.

'참, 예전부터 변하질 않아.'

수연의 자책엔 슬픔이 없었다. 이 녀석을 오랫동안 보아온 나는, 대뇌 변연계(limbic system)의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형태로부터 대략적인 감정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보통은 이자가 뭔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정도로 그치는 투시임에도.

그러므로 이 녀석이 느끼는 책임은 오로지 제 오판으로 나에게 입힌 손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전전두피질에 흐르는 강도 약한 신호의 정체는 필시 나를 향한 죄의식일 테고.

사망자가 다섯.

확실히 가벼운 손실은 아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이 마음이 상했었지.

국제밀수의 일선에 투입하는 애들은 경호실과 마찬가지로 행동타격대 이상의 정예이자 내 귀중한 자산이다. 개개인이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험지생존기술 및 교전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악의 상황에선 자살과 자폭으로 흔적을 지울 만큼 투철한 충성심과 탁월한 임기응변 역량을 겸비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환산하면 최저 수십억씩을 매겨야 할 터.

돈과 달리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기에 더더욱 큰 손실이다. 현찰로 되살릴 수만 있다면 천억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봐야 몸값 비싼 축구선수 하나의 연봉밖에 더 되나?

최고의 성적을 바란다면 최고의 구단을 꾸려야 한다.

"형님."

"음?"

"태국 건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운이 나쁘다고 하셨던 겁니까? 혹시 김재환 사장의 일을 신경 쓰고 계십니까?"

"...그것도 아니야."

김재환은 여의도 김씨의 본명이다. 녀석은 팬데믹으로 인한 폭락장에서 3천억대의 손실을 보고했다. 이유와 시기가 다르긴 하나 어쨌든 폭락장이 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실패 없는 투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조건적인 성공을 요구하는 조직은 결국 실패를 은폐하는 조직으로 변질될 따름이다. 보고받은 손실은 불가항력에 가까웠으며, 나는 김재환이가 이번 경험을 통해 더욱 뛰어난 투자가로 거듭날 것을 믿는다.

내 아쉬움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반년씩이나 발이 묶여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운 거다, 나는."

"아."

수연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세계 각국이 방역 목적으로 국경을 봉쇄하기 전, 1월과 2월에 걸쳐 가장 중요한 장소들은 탐사를 마쳐두긴 했다. 그러나 원탁과의 격차를 최대한 벌려놓아도 모자랄 이때 추가적인 탐사가 봉쇄된 건 뼈아픈 일이었다. 중진국 이하로는 지금까지도 항구와 공항을 걸어 잠그고 있는 국가들이 많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한숨을 참기가 어렵다. 정말로, 이렇게 운이 안 따라 줄 수가 있나.

"TV나 켜봐라."

내 말에 수연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곧바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무실에서 매양 시청하는 건 뉴스 채널이었다. 여러 사건사고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수연이 가져온 보고서를 정독하던 나는, 아나운서가 전하는 올림픽 소식에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일본 소식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과 일본 정부의 늑장 방역 및 불투명한 정보공개 등으로 한때 좌초 위기마저 겪었던 2020년 도쿄 올림픽. 그러나 개최일자를 한 달 가까이 연기한 끝에 결국 어제, 성공적으로 개막식을 치러냈죠. 아베 총리의 강력한 추진의지와 적극적인 올림픽 외교가 빚어낸 성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쿄 올림픽이 첫날부터 좋지 않은 구설수에 휘말렸습니다. 바로 도핑 논란인데요, 선수단 대표 다수의 거센 항의로 일부 경기는 아예 중단되기까지 했습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특파원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강영림 특파원?」

화면이 바뀌어 경기장을 배경으로 마이크를 든 기자의 모습이 잡혔다.

「예, 강영림입니다.」

「현지 상황, 어떻습니까?」

해외 특파원의 보도가 늘 그렇듯 대답은 한 박자쯤 늦게 돌아왔다.

「네. 저는 지금 도쿄 고토쿠(江東?) 소재의 올림픽 아쿠아틱스 센터에 나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오전 9시부터 남자 400미터 자유형 예선이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경기 진행 초반부터 기존 세계기록을 큰 폭으로 경신하는 사례가 속출하여 결국 경기중단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아나운서가 다시 질문한다.

「세계기록 경신 사례가 다수 쏟아졌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경기 진행이 중단될 수 있는 건가요? 그게 선수들 실력의 상향평준화를 의미하진 않겠습니까?」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자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세계 정상권 선수들의 메달 경쟁은 백분의 1초를 다투는 싸움이죠. 실제로 오늘 이전까지 최고기록 보유자였던 독일의 폴 비더만 선수는 단 0.01초 차이로 기존의 1위 기록을 경신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태국의 피타야 송캄(Pitaya Sonkham) 선수가 비더만 선수의 기록을 27초 92나 단축하여 비공식적인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로 등극했습니다.」

「27초 92라고요?」

「네. 송캄 선수의 기록은 3분 12초 15이고 비더만 선수의 기록은 3분 40초 07입니다. 지난 20년간의 자유형 장거리(Long course) 400미터 월드 레코드가 모두 3분 40초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죠.」

「과연 충격적이군요. 한데 그런 사례가 송캄 선수 말고도 많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타우픽 아흐마드(Taufik Ahmad) 선수가 3분 19초 83을, 캐나다의 딜런 바나비(Dylan Barnaby) 선수가 3분 22초 20을 기록하며 예선전 2위와 3위에 올랐고, 그 아래로 7위까지가 모두 비더만 선수의 기록을 초 단위로 압도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1위부터 7위까지의 국가들 가운데 캐나다를 제외한 나머지 6개국이 단 한 번도 세계기록을 내본 적이 없는 국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도핑 의혹이 제기될 만 하네요?」

「예. 경기가 중단된 후 타우픽 아흐마드 선수가 흉부와 복부의 통증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이송되어 어수선함을 더했습니다. 의혹을 제기한 선수단 대표들은 아흐마드 선수의 컨디션 난조가 약물 과용의 부작용이 아닌지 의심하며 철저한 검사를 실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다만 어떤 약물이 이토록 강력한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올림픽 위원회 측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단 전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약물 검사를 진행하는 한편, 공식 타임키퍼(Timekeeper) 제조사인 오메가 사(社)의 파견 기술자들에게 전자계측 시스템의 이상여부 확인을 의뢰했습니다.」

「아아. 계측장치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오메가 관계자는 자사 퀀텀 타이머의 최대오차가 천분의 1초에 불과하며, 기록 영상을 다시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이 증명된다고 항변하면서도, 위원회가 요청한 시스템 점검엔 성실히 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점검이 완료될 때 까지는 시간 계측이 필요한 다른 경기들도 연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상세한 소식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눈동자를 수연에게로 돌렸다.

"적응은 잘 되어가나?"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는 당연히 육체강화에 대한 물음이었다.

#7. 8월의 가로수들 (2)

"신체기능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참으로 기능적인 대답이다.

"그건 안다."

내가 조정했고 그 결과를 매일같이 확인하니까.

"난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이 없는지 궁금했던 거였다."

짧게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흔든다.

"역시 문제없습니다."

"그러냐."

난 수연의 호흡을 눈여겨보았다. 말을 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이 녀석은 미미한 숨을 아주 느리게 쉬고 있었다.

일부러 참는 게 아니라 호흡의 효율이 그만큼 증가한 덕분이다.

내 영의 회로를 마소 농도에 맞게 조율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시점에서, 나는 가장 긴요한 전력이 될 부하들부터 회로를 열어주는 과업에 착수했다. 경태, 수연, 경호실과 국제사업부, 행동타격대, 그 밖의 간부 및 본사 배치인력 등 급변사태 발생 시 고강도 교전에 노출될 개연성이 존재하는 애들.

안정적인 영의 회로가 처음으로 개화시키는 능력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생명의 기본적인 기능들을 강화하는 쪽이다. 그러나 그 기능들이 반드시 균형 있게 향상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예컨대 면역체계의 과도한 강화는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을 야기한다. 골격의 강도는 그대로인데 근력만 계속 증가하여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폐의 기체교환 효율- 즉 산소를 흡수하는 효율이 너무 급등해 혈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바닥을 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죽겠지. 몸의 염기도(鹽基度)가 치명적으로 올라갈 테니.'

물론 그 전에 호흡을 조절하면 될 테지만, 사람의 호흡은 다분히 습관적이어서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게 아니면 어려울 수 있었다.

이처럼 자연발생적 원시마법에 의한 인체강화는 인공적으로 설계된 내 인체강화 술식과 달리 무수히 많은 위험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원시마법에 대한 적응력만 놓고 볼 때 동물은 식물보다 한참이나 열등하다. 식물은 자신의 일부를 죽여 가며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으나, 동물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인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회로를 개화시킨 부하들은 조직 산하의 병원에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받으며, 그 상세는 나에게 직통으로 보고된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새겨준 회로들은 자연적으로 열릴 회로들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정교하며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었을 터이나, 그래도 만약의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

자체적으로 역장을 형성하는 회로의 특성상, 일정 수준 이상으로 회로가 정착한 다음에는 나도 더 이상 손을 써줄 수가 없다. 본인의 역장이 내 마법적인 간섭을 밀어내버리니까. 문제가 있다면 조기에 발견해야 한다.

내가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에도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소식들을 전했다.

「-각종 경기들의 일정이 줄줄이 미뤄지면서 도쿄에선 관광객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세이코 하시모토 올림픽 담당상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올림픽 개최를 연기할 당시 8월 무더위를 고려해 순서를 미루었던 축구 경기 일정을 다시 앞으로 당겨오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기존의 일정에 맞춰 현지 적응에 한창이던 각국 축구 대표단은 하시모토 담당상의 발표가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며 강한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진이 남아있는 제3세계에 의료진과 전세기를 보내면서까지 대표단을 실어왔던 일본. 그만큼 이번 올림픽에 거는 기대가 컸던 것이겠죠. 그러나 성화가 봉송 도중 꺼지는 사건에 이어 올림픽 개최 지연으로 인한 추가비용 발생, 후생노동성의 국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통계 조작 의혹, 바이러스 확산 도중에 있었던 총리 부인의 부적절한 신사 나들이, 이번엔 도핑 논란과 경기 중단 사태까지. 끊임없이 잇따르는 악재들에 아베 총리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지난 반년 간 서서히 누적된 세계의 변화는 이제 인류가 인지 가능한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초 단위의 기록 갱신이자 급증하는 암 발병률이며, 야생동물에 의한 인명사고 증가와 도로를 손상시키는 나무의 뿌리들이기도 했다.

'30만 6천 972그루...라.'

이게 서울 한 도시에 있는 가로수의 숫자다. 보고서에 첨부된 중량 추정치를 보면 근원 직경이 10센티만 되어도 그루당 무게가 1톤을 넘는다. 생체질량에 따른 각성확률의 대비로는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13배 이상. 근원 직경 30센티부터는 34배, 40센티부터는 70배, 50센티부터는 100배 이상까지 치솟는다.

인간이 고작 세계기록에서 초 단위의 변화를 겪고 있을 때 8월의 가로수들이 본격적인 각성 및 기형적인 성장들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였다.

난 보고서에 명시된 대응방안 중 하나에 주목했다.

"흠. 국립생태원? 산딸기 녀석에게 이런 조카가 있었나?"

조직 간부의 조카 하나가 작물생명과학을 전공하고 학과 교수의 사노비 노릇을 하는 중이니, 돈을 처발라 빠르게 박사를 달아주고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먹여 국립생태원에 꽂아 넣자는 제안. 발안자는 수연이라고 적혀있다.

'괜찮은데?'

국립생태원이면 수목에 관한 온갖 통계와 국책연구의 결과물들이 집중되는 기관이다. 그 위상은 조만간 폭발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겠지. 단순히 정보를 얻는 걸 넘어서서, 연구의 방향성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단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뒤쪽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선 맡기기 어려울 역할. 단순히 연구원을 매수하는 것만으로는 내 지식을 풀어놓기 곤란하다. 비록 식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일지라도 마소와 회로에 관한 지식은 동물에게 확장 적용될 수 있다.

이는 내가 비서실에 방법을 찾아보라고 특별히 지시한 사안이다.

'이렇게라도 해놔야 원탁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겠지.'

영국 놈들이 마법연구에 관한 국제표준을 선도하게 되면 원탁의 영향력도 그만큼 강해지지 않겠는가? 전 세계의 관련 정보들이 런던으로 집중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지식의 불균형도 불균형이거니와, 그 정보 가운데 나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수연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냐?"

수연은 보기 드물게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송흥주 부장을 산딸기라고 부르셔서...."

"...."

이런.

이건 경태의 영향이다. 녀석이 매번 산딸기, 산딸기 하고 부르니 나까지 실수를 하게 되지 않는가.

산딸기는 경찰이 붙인 조직명으로부터 유래한 별명이다. 안산 산딸기파. 필요하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파견되는 팀이 어쩌다 안산에서 흔적을 남기는 바람에, 경찰에겐 실체가 불분명한 의문의 조직으로 남았다. 의문으로 남도록 돈을 쓰기도 했지만.

수연은 표정을 지우고 본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다른 관계시설에 대해서도 동일한 계획을 추진 중입니다만, 적합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외국의 기관은 더더욱 그렇고요."

"네 동문 중에도 딱히 없는 모양이지?"

"예."

"아쉽구나."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 좀 해라. 난 네가 거기서 몇 명이라도 협력자를 모집한 것 자체가 놀라웠으니."

"...예."

이 녀석은 예전부터 공부머리가 좋았다. 하는 꼴을 보고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는 생각에 유학 물을 먹여봤더니, 고작 2년 반 만에 졸업장을 따오지 않겠는가. 고등학교 졸업도 검정고시로 대신했던 녀석이, 나름 명문으로 꼽히는 미국의 에머리 대학에서.

'조직에 한시라도 빨리 합류하고 싶다는 이유였지.'

심지어 그 치열한 학업의 와중에 인맥을 관리하며 고학생 셋을 현지협력자- 조직 장학생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과 지원을 구하는 메일을 받았을 때의 어처구니없음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싫어하실 것은 알지만-"

신중하게 입을 여는 수연.

"상황이 예전과 달라졌으니, 조직원을 영입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식을 달리한다? 어떻게?"

"목숨을 빚져야 할 지경에 처한 사람을 물색한 다음 필요한 인재를 고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인재가 목숨을 빚지도록 만드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함정을 파서?"

"예."

난 눈을 심하게 찌푸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수연은 내가 드러내는 거부감 앞에서도 특유의 침착성을 유지했다.

"분명한 건 원탁의 제국주의자들을 견제할 학문적 성과가 한국에서만 쏟아져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게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목표는 형님의 최종적인 승리이며, 다른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정체성이라도 말이냐?"

"극단적인 상황엔 때로 극단적인 대응이 요구됩니다. 형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더라도 제 충성엔 변함이 없을 것이고, 비밀은 끝까지 지켜질 것입니다. 그리고 작전을 수행하는 인원들은 작전의 전모를 모르도록 파편화하면 그만입니다."

"...."

여기에 대고 차마 너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소리는 못하겠다. 그러나 수연의 제안은 잠재적으로 조직 전체를 무너뜨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수연의 계책을 실제로 시행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사실이 어쩌다 조직 내에 새어나갔다고 치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게 빚을 지고 있는 애들이 저마다 의심을 품기 시작할 테지.'

어쩌면 나도? 하는 의혹들. 물론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내 도움을 받은 녀석들까지 그러진 않겠으나, 보스로서의 나에 대한 믿음은 절대로 지금과 같을 수 없을 터. 구원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결함이 큰 인간에 대한 메마른 의리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렇게 삐걱대는 조직은 결코 원탁에 대적할 무기가 되지 못한다.

자칫 조직 전체를 날려버릴지 모를 폭탄의 도화선을 수연 한 사람에게 쥐여 줄 순 없는 노릇. 이 녀석은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눈치지만, 나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믿지 않는다. 능력 있는 부하에 대한 신뢰와 맹목적인 믿음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안 된다."

난 반복해서 강조했다.

"절대로 안 돼."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는 수연의 낯빛에 찰나의 아쉬움이 스친다.

"차선책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방안이 있겠습니다만, 이 방법으로는 형님의 지식을 직접 전달할 수가 없으므로 효율이 상당히 떨어질 것입니다."

"감수하는 수밖에."

"다소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다른 대안도 있습니다."

"말해봐."

"런던입니다."

"...?"

내가 의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자, 수연이 차분하게 풀어놓는 계획.

"「빛과 진리의 원탁」이 마법에 관한 분야에서 장차 세계를 선도하고자 한다면, 이 시점에선 이미 영국정부나 정계에 연이 닿아있는 유력인사에게 관련된 정보들을 공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영국정부라면 모를까, 원탁의 마법사들은 마법의 대가일 뿐 전자보안의 대가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돈 많이 들여 외주를 쓰는 수준이겠죠. 또한 영국정부와 원탁의 관계가 그렇게 원만하기만 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

정말이지, 머리 하나는 참 잘도 돌아가는 녀석이다. 과거 정부로부터 손절당하기 전에도 원탁은 사뭇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이었다. 놈들은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지혜를 정부에 전적으로 공유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정부가 제공하는 보안이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있나? 결국엔 자신들이 정부의 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놈들인 것을.

"맞다 치고, 다음."

"다음으로 형님께선 그 연결고리를 유추할 만한 원탁의 내부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죽은 스승새끼의 지식을 말하는 거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지식일지언정, 종교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마스터들의 인간관계는 '귀족적으로' 고착되어 있으니.

"그리고 런던 정가의 비밀스러운 정보는 언제나 다른 국가들의 주요한 관심사죠.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그렇습니다. 영국이 심상찮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정황만 파악한다면, 나머지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낼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그들의 등을 살짝 밀어주는 것뿐입니다."

그 살짝 밀어주기- 냄새를 맡게 해주기가 어감처럼 만만한 일은 아닐지라도,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마법 연구의 단초를 제공할 지식이 암암리에 주요 국가 전체로 확산된다면 원탁에 대한 간접적인 견제도 효율이 많이 높아질 터. 손을 모은 채 평가를 기다리는 수연의 모습이 예쁘게 보인다.

"구체적인 계획을 짜봐."

난 보고서를 툭툭 두드리며 허가를 내렸다.

"돈과 인력은 얼마든지 가져다 써도 좋다."

"예."

수연이 까딱 고개를 숙인다.

#7. 8월의 가로수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