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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90

080화. 대공 티브리아 (3)

히스토리아는 고기빵을 먹으며 티브리아를 살폈다.

그리할수록 차오르는 감상은 경악이었다.

호출받아 파로스의 저택으로 왔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웬 불기둥이 솟은 후 치료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며 자신을 부르기에 웬 미친 인간이 파로스 저택을 침공한 줄 알았다.

한데 알고 보니 그게 대공인 것 아닌가.

북부 일로 바빠 건국제에도 불참하는 사람이 왔다는 것에 처음 놀랐고, 기껏 와서 한다는 게 목숨 걸고 하는 대련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아닌 게 아니라, 막 도착했을 당시의 티브리아는 정말 전신이 걸레짝이 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아마 자신이 아니라면 이렇게 바로 회복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어딘가 나사가 빠진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었고, 그게 더 확실히 와닿는 게 지금.

"하하! 내 정신이 이렇게나 없다! 부끄럽구나!"

본인이 여기에 왜 왔는지도 까먹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런 점을 떼어두고 생각하면 그랬다.

'뭘까?'

거의 북부 붙박이나 다름없던 대공이 여기까지 친히 행차한 이유가 뭘까.

제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는 만큼 히스토리아의 속에 긴장감이 들어섰다.

왜, 대공자가 악마에게 홀려 무언가 사건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 표정까지 굳히며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에 돌아오는 답은 그랬다.

"아들놈이 요즘 영 방을 나오질 않더구나. 이놈이 사춘기가 왔나… 문 앞에 결계까지 쳐두고 있는데 부수고 들어가자니 애 정서에 영 안 좋을 것 같은 게 아니냐. 그래서 도움을 좀 요청하려고 왔지."

"-"

"그래도 나이대 애들이라면 만나주지 않을까 싶어서 너한테 북부 방문 좀 요청하러 내려왔다. 요즘 전하도 가르친다면서? 교육적으로 뭔가 방책이 있진 않을까 싶은 게다."

""

겨우 와서 하는 게 육아 상담?

히스토리아의 눈이 끔뻑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렌의 반응은 그랬다.

"…칩거라."

세상 심각한 표정.

히스토리아는 본인의 인지가 이상한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의 육아 상담.

거기에 화자가 대공이니 정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대공자가 무슨 사고를 치는지 알지 않던가.

그에 더불어 하나 더.

'왜 회귀 전엔 안 오던 제도까지 행차를 하셨나 했더니, 내가 원인이었나.'

대공은 내게 태사로서의 조언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 회귀 전에는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대공이 제도로 내려오는 사건 따위가 없었던 것일 터다.

일말의 궁금증도 해결되었고, 그게 나에게 유리한 방향이다.

확실히 대공이 직접 북부로 데려간다면 괜히 한파 시기에 북부에 가야할 이유를 만들 필요도 없지 않나.

변명거리가 생긴 것이란 말이다.

"한 일 년 전쯤인가… 그때까진 아들놈이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단 걸 기억하느냐?"

"예,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레베카를 만나게 된 경위가 그것인데 어찌 모를까.

대공자는 제도의 황실 아카데미에서 연금술을 전공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저택엔 그놈과 친구로 지내달라는 편지가 오기도 했으나… 누님은 가문을 이끄느라 바빴고, 나는 술 마시느라 바빴다.

직접적인 연은 없었고 그와 별개로 대공자가 제도에서 어땠는지만큼은 나도 안다.

"얌전하셨지요. 사고 한번 안 치시고."

"음, 지난 200년 중 징계 한번 없이 졸업한 헤이론은 내 아들이 처음이다!"

"교우 관계도 좋으셨지요. 항상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음! 남에게 욕을 하지 않는 헤이론은 400년 중 처음이다!"

"연금학과의 수석 졸업생이라고 들었습니다."

"필기 수석은 헤이론의 역사상 내 아들이 유일하다!"

"...."

대공가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 저리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 같다.

함박웃음까지 띠며 눈을 반짝임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예, 뭐. 모범생이셨던 것으로 압니다."

"아비를 닮아서 그렇다. 그치가 몸은 허약한데 머리는 참 좋았거든!"

"그렇습니까."

"아암! 그이 생각이 나는구나!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을 것을 한파 한 번 못 버티고 가버리니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하핫!"

함께 웃어주기엔 너무 지독한 농담이었다.

이게 아줌마의 유머란 말인가.

'맵다. 매워.'

혀를 내두르곤 말했다.

"…아무튼, 그 아카데미가 어쨌답니까."

"아! 그래, 또 얘기가 샜구나. 본 얘기로 돌아와서 아들놈이 졸업한 이후엔 방에 처박혀서 영 나오질 않는 게 아니냐. 대체 뭐 때문에 그런가 했더니, 웬 계집 하나에 빠져서 제도로 돌아가고 싶다고 시위를 한 것이었다!"

"아."

"나도 안다."

대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가 악마였다고 하지 않았더냐. 태자 전하께서 친히 편지까지 써 주셨으니 경각심은 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를 죽인 후 취했던 여러 조치 중 대공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있었다.

아무래도 사고를 칠 게 분명한 인간의 모친이니 옆에서 감시 역을 해주리란 판단이었다.

한데, 이어진 말에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이 슬금슬금 내 눈을 피했다.

"…알려주었지. 네가 죽고 못 산다는 그년이 악마였다더구나~ 하고."

"아이고 세상에...."

"사, 사나이는 한 번씩 아파보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충격에서 금방 헤어 나와서 일어설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암, 내 아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그, 음...."

갑자기 대공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놈이 지 아비를 똑 빼닮아선 어찌 그리 옹졸한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방에 틀어박히더니 도통 나오질 않는다! 분명 방 안에 있는 건 알겠는데 이놈의 새끼가…!"

쿵!

대공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눈빛이 아주 이글거린다.

"어미 말은 말 같지도 않은지, 이젠 답도 안 하더구나…!"

머리가 조금 아파졌다.

"…하여튼 그 안에서 뭘 하는지는 모른다는 겁니까?"

"그래. 일단 밥은 먹고 있단다. 안에서 기척도 느껴지고. 하여 가만두긴 했는데 어찌 계속 놔둘 수가 있단 말이냐."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다행인 일이다.

그놈이 치는 사고는 놈이 설산을 오르며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말이다.

'미룰 순 없겠지만 데드라인은 확보됐고… 아니, 이것도 불투명한가.'

과거에 친 사고는 레베카가 살아있을 당시에 친 사고다.

이번 역시 같은 사고를 치리라곤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외경의 운명 교단 놈들이 어떻게 움직일지가 문제다.

이그로시아 때처럼 직접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단 말이다.

그나마 방에서 나오고 있지 않다니, 그걸 감시하는 인력이 있다니 접선에 대한 걱정은 적다.

대처가 전보단 쉬울 듯했다.

"예, 무슨 말씀인진 알겠습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군요."

"으음! 힐라의 아들답게 시원시원하구나! 아, 이참에 세실리아! 너도 북부 구경을 와보겠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누님이 조금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티브리아가 뜨끔했다.

아암, 당연히 그러셔야지.

"…소가주께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음은 압니다. 악마와 연관된 일인 걸 처음 알았을 때는 정말 그만두라 말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파로스로서 어찌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의무가 그러하다면 저는 응원할 수밖에요. 다만 그와 별개로 소가주께서 다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앞에서 그렇게 다치는 걸 보여줘 놓곤 얼마나 더 보여주려는 속셈이냐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대공이 쪼그라들었다.

"아니… 그게… 그냥 아들 설득하는 건데...."

"괜찮습니다. 저는 몸이 약하여 북부로 향하는 여정부터 발목만 잡을 터이니."

누님이 이리도 누군가에게 위압을 준 일이 있던가.

그저 피곤하다는 듯 말하고 있음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다. 날 향한 힐난이 아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유렌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내 반드시 보호하마."

"예, 대모님이시니 조카를 위협에 빠트리진 않으실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역시 누님, 사람 돌리는 것도 품격이 가득하셨다.

그만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경이었으나 참았다.

히스토리아도 있으니까.

"아, 돌아가시기 전에 폐하를 알현하셔야지요. 신하로서의 예우입니다."

"그, 그리하려고 했다…!"

자신감 넘치게 나타난 대공.

누님의 앞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 * *

그날 대공은 파로스의 저택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이 되었고, 아침 식사 자리는 꽤 무거웠다.

그렇게 황성으로 출발.

그제야 대공은 말했다.

"…세실리아가 참 똑 부러지게 컸구나."

"예, 홀로 가문을 지탱하신 분이니."

"내 개안을 했다. 사람을 위압하는 방법에 주먹 외의 것이 존재했다니."

하룻밤 사이 꽤 얌전해진 대공이 낮게 읊조렸다.

"좋은 아내가 되겠어. 누가 될지 몰라도 남편은 꽉 잡혀 살겠구나. 아, 한데 세실리아는 혼인 생각이 없다더냐? 슬슬 적령기일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슬슬 본인 삶을 찾아 행복해지셔도 될 텐데 어찌 그 화제에 관해서는 매번 같은 답만 한다.

―어찌 소가주께서 혼인하시지도 않았는데 제가 먼저 하겠습니까. 후계를 보신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아들을 낳아야 결혼을 하겠단다.

그에 문득 든 생각인데, 누님께서 독신으로 살고 싶으신 건 아닐까 한다.

왜, 그때가 된다면 적령기는 훌쩍 넘으실 텐데 그때까지 안 하겠다는 걸 보면 의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되는데.'

파로스를 워낙 사랑하시는 분이시니 그게 행복하다면 놔둘 것을.

아직까지는 내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얼버무리시는 거라 넌지시 예상할 뿐이다.

그런 생각에나 빠져 있으니 대공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세실리아의 혼처를 찾아야 한다면 상대는 생각해 둔 게 있느냐?"

"뭐, 본인이 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사람 있으면 하시겠지."

"어허, 내 한번 다녀온 입장으로서 조언하는데, 조건을 안 따지면 훗날 큰일이 나는 법이다. 나부터 보거라. 허약한 사람 만났다가 혼인 5년 만에 다시 독신이 되지 않았더냐."

너무 매웠다.

답할 말이 궁해져 입술을 뻐끔거리길 한참, 나는 겨우 정신을 되찾고 고민에 빠졌다.

"…음, 확실히 건강한 사람이어야지요."

그와 더불어 몇 가지가 더 필요했다.

우선 누님에 어울릴 정도로 지성이 우수하고, 가정을 돌볼 줄 알며, 입에 욕 한 번 담지 않는 것이 기본.

거기에 가난은 인격을 팍팍하게 만들며, 인성이란 자란 환경에서 비롯된다.

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고급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 거기에 그걸 자식에게 물려줄 정도의 재산은 있어야 할 것이다.

아, 무력도 있어야지.

어딜 가서 불의의 상황에 누님을 지켜줄 정도의 능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러자 대공이 입을 꾹 다물고 날 봤다.

"…왜 그러십니까?"

"시집 보낼 생각은 있느냐?"

"누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보내드릴 겁니다만."

"...."

"왜 이러시지 정말."

눈빛으로 사람 뚫겠군.

뭐 저리 징그럽다는 듯이 쳐다보는지 원.

무슨 생각하는지 대충은 안다.

"다 만족하란 건 아닙니다. 그래도 기본은 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큰 결격사유만 없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덧 황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궁 쪽을 봤다.

저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전하 같은 인간만 아니면 됩니다."

"대공! 어서 오시오!"

태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실 조건만 따지면 최고라고 할 수준이나, 그 밑바닥까지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람.

"흠, 태자 정도면 최고의 혼처 아니냐."

"안 됩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됩니다."

"…세실리아가 원한다면?"

글쎄,

"음? 유렌, 표정이 왜 그러나. 꼭 누굴 죽이고 싶어 하는 표정이군."

"아직은 안 죽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음?"

"…아직은."

내가 혀깨물고 자살하던지 태자가 죽던지.

뭐가 됐든 둘 중 하나는 현실이 될 것이다.

081화. 북부행 (1)

칼리오스가 티브리아를 보고 환한 미소를 띤 것엔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강하다.

최소 자신과 동급의 육신, 거기에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까지 있으니 무력적으로 큰 전력이 되는 자원이지 않던가.

인재 욕심이 큰, 그리고 모든 인재를 자신의 장기말로 보는 칼리오스에게 티브리아는 퍽이나 보기 좋은 아군이었다.

둘째로 유렌과의 대련.

듣기로는 파로스 정원의 대련에서 유렌이 불길에 휩싸이고 성녀에게 치료까지 받았다고 하던가.

유렌을 패는 자라면 일단 아군이다.

심리적 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상기한 이유가 있어 생글생글 웃는 낯을 했고, 티브리아의 대접에 있어서도 꽤 공을 들였다.

황제의 알현 직전 식사 자리에서는 대공이 평소 10인분의 고기를 끼니마다 해치운다는 말을 듣고 북부식으로 고기 요리를 내어오기까지 했다.

그러자 유렌이 물었다.

"왜 이렇게 잘해주십니까? 전하가 누구 이렇게 대접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질투라도 하는 건가.

칼리오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며 답했다.

"자네가 내 1번일세."

"-"

"질투하지 말게나."

"뭔 좆같은 소리지. 씨발?"

혐오 가득한 시선에도 칼리오스는 굴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건 이유였다.

"헤이론의 직인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성천검까지 그 한 걸음만이 남아 있네."

제국 3대 귀족가 중 마지막이 바로 대공가 헤이론이다.

다음 일정이 있기 전 직인을 받아내 성천검을 꺼내오고 싶었고, 그런 이유로 오늘 대접에 유독 신경을 쓴 것.

하지만, 결과부터 말해 칼리오스의 의도는 실패했다.

"아, 놔두고 왔소만."

"…?"

"하핫! 직인을 집무실에 놔두고 왔소! 내 전하께 면목이 없군! 뭣하면 따라와서 받아 가시겠소?"

칼리오스는 눈을 끔뻑였다.

가문의 상징을 아무 데나 던져놓았단 말을 저리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맞나?

그녀의 상식에 관한 의문이 차올랐으나 그렇다고 해도 칼리오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

"차라리 잘 됐군! 전하께서도 오시오! 내 아들놈과 아는 사이가 아니오?"

가긴 갈 것이다.

그와 별개로 북부로 떠나기 전 성천검을 챙기고 싶었던 것뿐.

의도 하나가 좌절된 것에 괜히 입맛이 썼다.

무력적 측면에서 느꼈던 호의는 빠르게 식었다.

'음, 머리가 나쁜 편이군.'

칼리오스가 만났던 대공자는 영민했다.

올해 겨우 열다섯 언저리임에도 그 지적 수준만큼은 꽤 훌륭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래도 그게 모계의 영향은 아니었던 모양.

그에 작은 실망감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음, 북부식 고기인가...."

유렌이 중얼거렸다.

그는 식탁 위로 올라온 훈연된 스테이크를 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칼리오스는 그 모습에 직전까지 차오른 실망감을 지울 수 있었다.

'메뉴를 개발 중인 건가.'

붙어다닌 일이 꽤 되어서 안다.

꼭 저렇게 음식에 집중하고 난 이후엔 새로운 레시피가 나온다는 것을.

흐뭇함이 차올랐다.

"뭐 떠오른 게 있나?"

"일 해결되면 북부 시장을 좀 가봐야겠습니다. 훈연한 고기가 꽤 괜찮군요."

"오."

"만들어줄 테니까 3황녀 전하 밥은 그만 좀 뺏어 먹으십시오."

"한 번도 빼앗은 적이 없네만? 아리아가 날 위해 준비해준 것이지."

"에휴."

"흠?"

칼리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대공의 황제 알현은 빠르게 끝났다.

뭐, 애초에 현 황제와 그리 깊은 사이도 아니니만큼 군신으로서의 예만 다하고 온 것이겠지.

그 일이 끝나고는 본격적인 북부행 준비였다.

"이번에도 베아트리스를 데려갈 겁니다. 거기에 친위대랑… 할 수 있으면 사제 한 명 정도는 더 데려가야겠지요."

사람이 많아지면 목걸이의 힘만으로는 치료를 하는 게 힘들어진다.

법황청에 사제 지원요청을 보냈고, 히스토리아가 곧 그와 관련된 걸 처리해줄 터였다.

"한파 시기입니다. 괜히 입을 늘리기보다는 이 정도로 끝낸 후 북부 기사들을 움직이는 게 나을 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놈들의 동향 파악이지요."

내가 말하자 에릴다가 답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북부에 자리 잡은 유력자들을 찾아봤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경청했다.

중요한 문제였다.

그놈들이 술수를 부리고, 그 대상이 대공자라면 접근하기 쉬운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꽤 높았으므로.

"상인이나 깡패 같은 애들은 다 넘기고 의심 가는 사람이 하나."

툭, 에릴다의 검지 끝이 한 노인의 프로필을 가리켰다.

"대공자의 연금술 스승이죠."

"스승이라...."

"묘하더라구요. 대공자가 입학할 시기에 아카데미 초청 강사로 초빙되고, 대공자가 졸업하기 몇 달 전 퇴임."

"그리고 북부로 향한 것까지?"

"뭐, 연금술사들이나 마법사나 제자 하나 제대로 잡아 비전을 다 전수하고 죽는 족속인 걸 생각하면 별일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좀 냄새나지 않아요?"

좋은 통찰이었다.

냄새나는 정도가 아니라, 문제가 있다면 이 인간일 게 거의 확실했으니까.

회귀 전의 사고를 떠올려봤다.

생각할수록 그랬다.

'비전 전수. 그게 문제였겠지.'

아무렴,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라면 어떻게 대공가의 후계자가 '생명 창조' 따위를 시도하겠나.

* * *

여타 사건들이 그랬듯 사고의 소식을 들은 것은 옥에서였다.

다만, 북부에서 일어난 참사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그를 접하게 됐다.

때는 2황자가 즉위하기 전, 현 황제의 집권기 끄트머리였다.

―대공께서 타계하셨습니다.

그날의 누님은 유독 피로감에 절은 표정으로 부고를 전해왔다.

대공의 죽음.

어릴 적의 기억 몇 개가 겨우 있는 생판 타인의 죽음이라 봐도 무방했지만, 제국의 거물 하나가 죽었다는 것에 나는 꽤 큰 놀라움을 느꼈다.

하여 다른 사고 때는 묻지 않았던 질문까지 했었다.

―어찌 돌아가셨답니까?

―사고였습니다. …아니, 사고라 하는 것이 옳을까요.

누님은 충격이 큰 상태셨다.

나는 직후 누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를 바로 알았다.

―대공자께서 연금술의 비원에 도전하셨습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예, 그 일이셨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후 사정은 모릅니다. 몇 달 전 대공자가 실종되었다는 걸 전해드렸을 터인데, 그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예, 대공께서 혹여 제도에서 대공자를 본 일이 있는지 편지를 보내오시기도 했었다지 않았습니까.

―결과부터 말해서, 대공자는 북부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의 설산에 자리를 잡고 정령들의 영기를 이용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 말을 듣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대공자가 하려고 한 일은 그것이었다.

인간이 살기 전부터 그곳의 주인이었던 정령들의 영기. 즉, 생명력을 이용해 무생물에 영혼을 만드는 일에 도전한 것이다.

구상 자체만 보면 그럴싸하다.

실제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는 추측성 연구 또한 일각에선 이뤄진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명백히 금기로 분류된다.

비인도적이어서?

아니, 단순히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정령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영기라고 하면 그치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 아닙니까.

정령에게 영기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증거와도 같았다.

영혼이 뿜어낸 파장의 흔적이며, 그것이 쌓여야만 '격'이 생기기에 정령은 자신의 존재 유지보다 영기의 유지에 더 집착하고 만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저 황실 금서고에 있는 데아가 그렇다.

금서에서 흘러나오는 금기와 자신의 영혼을 공명시켜 영기를 압축, 신격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한 자리에 천년이나 박혀 있지 않았던가.

그걸 건드리면 어찌 되겠나.

자연현상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목숨보다 소중한 걸 도둑맞는다면, 그 대상이 필멸자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느냔 말이다.

당장 설산을 예시로 들면 눈사태다.

시기마다 지역 전체를 한파로 찍어누르는 정령들이 진심으로 나오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일으킨 눈사태가 살아있는 모든 걸 지워버린다.

그것을 막기 위해 대공이 한 일이 있었다.

―…맞습니다. 정령의 분노였지요. 설산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고 몇 차례 탐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끝에서 원인을 깨달은 대공께서 직접 담판을 지으러 가셨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대공께서 대공자를 처형하셨습니다.

―…?

―그리고 스스로의 영혼을 태워 대공자가 쓴 만큼의 영기를 정령들에게 환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거래였다.

정령이 분노한 원인은 영기를 빼앗긴 것.

지금 당장의 수준으로만 봐도 소드 마스터 직전에 있는 대공의 영혼이라면 어느 정도 그들의 손해를 감수해줄 수 있을 만하다.

아니, 강한 영혼이기에 일반적으로 쌓은 영기와는 다른 특별함을 그들에게 주었을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대공자가 정령의 영기를 도둑질했다.

대공은 그 뒷수습을 위해 죽었다.

그리 끝난 비극이었다.

전쟁만 없었다면, 천년 대공가의 몰락으로 일단락났을 것이다.

―썩을 북부. 대공가만 멀쩡했어도 야만족이 저길 길로 쓰는 일은 없었을 걸세.

전쟁기의 북부는 제국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였다.

영산에 사는 야만족들이 제국을 침공하는 통로로 이용해버렸기 때문이다.

대공만 살아있었다면, 헤이론의 군대가 멀쩡했다면 북방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 없이 병력을 모아 다른 방위를 수성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건만, 방위 하나가 더 뚫린 것으로 제국은 너무 큰 피해를 보고야 만 것이다.

당시에는 그렇게 판단한 일.

내 최초 목적도 대공자가 설산에 가기 전에 어떻게든 두들겨 패 생명 창조를 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나.

회귀를 겪으며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 사고가 단순한 비행이 아니라는 걸 알고, 레베카가 악마였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의문이 있단 말이다.

'뭘까.'

악마가, 외경의 그놈들이 대공자로 하여금 생명 창조를 시도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놈들의 의도라는 전제를 깔고 지난 모든 사고를 돌이켜보자.

그렇다면 드러나는 얼개가 있었다.

베아트리스를 통해 또 다른 악마를 소환하려 했다.

베르헤임을 통해 종의 변이를 연구했다.

기르고어의 경우엔 놈들도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이그로시아에서 시도한 건 분명한 '사자 부활'이었다.

끝으로 대공자의 '생명 창조'까지.

대충의 목적성만 따져보면,

"놈들이 원하는 건 어떤 개체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불러오거나 부활시킨다…일 수도 있겠군."

"둘 다일 수도 있지요."

놈들이 제 잘난 줄 아는 황금 세대의 기수들을 통해 연구한 것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생성이었다.

당장 대공자가 일으킬 사고에 관한 것은 남에게 말할 수 없지만, 밝혀진 것만 해도 태자에게 이 인과를 납득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리하여 대화가 오갔다.

"자네는 뭐라고 생각하나?"

"저라고 알겠습니까."

"고대 서적을 살필 필요가 있겠군. 운명의 여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역사보단 과거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겠나."

"3황자가 알겠군요. 금서라면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음, 내 한번 조사를 부탁해보지."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다.

너무 아득한 곳에 있다 생각한 것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니 바라게 되는 것이 있었다.

"북부에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 교단 놈들."

"이번엔 살려서 데려가고 싶네만."

"그 스승부터 조져봐야겠습니다."

이번에도 교단 놈들이 있기를.

* * *

한때는 성자의 타락으로 큰 혼란에 휩싸였던 법황청도 이제는 어느덧 안정화에 이르러 있었다.

천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 교단이 주 세력으로 집권했다는 크다면 변화를 제외한다면 법황청은 이전의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일이 아무런 희생없이 치러진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철야 서류 작업에 끙끙 앓는 한 여인의 눈물겨운 노동이 그랬다.

드르륵―

커다란 트레이에 서류를 가득 싣고 움직이는 늙은 사제가 있었다.

바로 히스토리아의 측근 중 하나인 희망 교단의 주교였다.

벌써 해가 진 시간.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렴, 누굴 봐도 웃음으로 화답하던 히스토리아의 미소를 잃게 만드는 게 이 서류들이 아니던가.

그걸 손수 그녀에게 전달하려니 미안한 마음부터 드는 것이다.

'달달한 간식이라도 함께 드려야겠구나.'

늙은 사제는 히스토리아가 좋아할 간식거리를 떠올리며 잠시 주방에 들렀다.

마침 우울할 때이니만큼 이렇게라도 위로를 해주어야 할 것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오늘 낮에 파로스 가주가 북부 '헤이론 축제'의 축사를 위해 떠났다.

베르헤임이 죽은 이 시점에 히스토리아가 기대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 떠났으니 그 상심이 얼마나 크겠나.

어릴 적부터 히스토리아를 봐온 늙은 사제는 한껏 걱정을 띄우며 간식을 챙겼다.

그리고, 히스토리아의 집무실에 도착한 직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성녀님…?"

집무실이 비어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가 한구석에 놓여 있고, 의자에는 웬 편지가 놓인 채로 말이다.

'설마, 설마!'

늙은 사제는 황망한 걸음으로 의자 위의 편지를 읽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어버렸다.

"서, 성녀니이이임!!!"

편지에 적힌 내용은 짧았다.

[저 이렇게는 못 살아요. 휴가 다녀올게요.]

히스토리아가 도망갔다!

* * *

나는 마차 맞은편에 앉은 히스토리아를 물끄럼 쳐다봤다.

행복한 얼굴로 고기빵을 일곱 개째 해치우고 계신 중이었다.

일단 물었다.

"근데 진짜 직접 따라와도 되는 거 맞습니까? 바쁘신 걸로 아는데."

그러자 움찔, 히스토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왜인지 억울함을 토해내며 내게 소리쳤다.

"저, 저도 사람이에요! 사람! 기계처럼 서류만 볼 수는 없다구요!"

왜 나한테 성질이냐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려 있더라.

082화. 북부행 (2)

히스토리아는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느꼈다.

물론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는 다른 이야기겠지만, 뭐가 됐든 그런 마음의 짐을 지고서라도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이해는 받고 싶은 것이다.

혓바닥이 길어지는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서류! 서류! 또 서류! 하루에 열 몇 시간은 앉아서 서류만 보고 있어요! 아니, 행사 하나하나 처리하는데 왜 전부 결재를 맡는데! 자기들이 재량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있잖아! 이 행사 예산은 이렇고 저 행사 예산은 이런데 이만큼 오차가 나서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다는 그런 말을 하루에도 몇십 번씩 듣는다구요!"

"흠...."

"그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야! 도장만 찍는 게 아니라 각 보고서 별로 피드백도 줘야 해요! 아니! 본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나도 모르겠다고! 이젠 글자만 봐도 징그러워요! 알아요? 하루 열 시간씩 몇 달을 서류만 보고 있으면 글자가 종이 위로 기어 다니는 것 같아요! 이제는 자다가 결재하는 꿈까지 꾼다구요!"

쌓인 게 얼마나 많았는지 한 번 물꼬가 트인 히스토리아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말하다보니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있어 눈꼬리엔 눈물도 매달려 있었다.

유렌의 기억 속에선 죽음의 순간까지 웃으며 희생하던 게 히스토리아라는 걸 생각하면, 서류가 그만큼 흉악했다고도 볼 수 있는 일.

아무튼 화자인 히스토리아는 이 일련의 푸념 과정에서 묘한 희열을 느꼈다.

이제 20년, 그만큼의 세월을 살고서야 남에게 징징거리는 사람이 왜 그런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결론! 저도 머리를 식힐 시간은 필요하단 말이죠! 아, 물론 놀러가는 게 아닌 건 알아요! 그러니까 더욱 제가 가야죠! 제국의 위기니까! 응!"

끝으로 자기합리화까지.

사실 제국 사제 중 최정상이라 불리는 성녀가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전략의 상승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이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도주'라는 게 문제였을 뿐.

유렌은 끝까지 묵묵히 들어줬다.

떠올리는 생각이야 쌓인 게 꽤 많았거니 하는 게 끝이었다.

애초에 '찔리는 게 있으면 혓바닥이 길어진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 그럴싸한 위로를 해줄 수야 있겠나.

고기빵이나 입에 물려주며 고개를 끄덕이기나 해주니 이 정도면 인도적으로 봐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 하나가 이 공간에 함께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흠, 서류가 어렵나?"

히스토리아의 몇 배나 되는 서류도 한 시간이면 훌쩍 해치워버리는 초인 중의 초인, 칼리오스는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공감 능력이나 눈치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푹 찔러버렸다.

히스토리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쩍 벌리다가, 이내 시들시들해졌다.

"…그래요. 제가 못난 거 맞아요."

푸념이야 신나게 했다지만, 네가 뭔데 내 일을 그렇게 말하느냐 할 정도로 심성이 못돼먹지 못했던 히스토리아는 그만 풀이 죽어버렸다.

유렌은 쯧쯧 혀를 찼다.

"말 싸가지가 그냥...."

"나한테 한 말인가?"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허?"

"이거나 먹고 입 좀 다무십쇼. 에휴."

칼리오스는 욕을 먹고 있는 건지 의아해 하면서도 치즈버거는 곧장 받아먹었다.

그제야 마차 내부는 조용해졌다.

* * *

한파 시기의 헤이론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할 데가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다.

그에 관한 조금 천박한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오줌을 싸면 오줌발 그대로 물이 얼어붙는 수준이라던가.

회귀 전의 부하 중에 북부 출신이 있어서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에 그런 답을 건넸었다.

―과장을 해도 꼭 그렇게 더럽게 해야 했냐?

―아니! 진짭니다! 제 친척 중에 거시기가 얼어서....

―그만 새끼야.

―어억!

불쾌한 묘사를 하려 들기에 꿀밤을 먹인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랬다.

"어윽, 흐어어엉…!"

페토가 고간을 부여잡은 채로 웅크려 울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경멸이 가득 들어찬 표정으로 페토의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고, 히스토리아는 차마 페토를 쳐다보지 못한 채로 녀석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래, 진짜로 잘못 싸면 골로 가는 것이었다.

그 녀석의 말이 진실이었단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날씨에 북부에 가는 게 맞나?'

북부인들도 이 시기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단다.

그러니까 그 대공자 놈도 구태여 이런 때 설산을 가진 않을 것 아닌가.

…라는 판단으로 돌아갈까도 싶었지만, 그걸 불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여기에 있었다.

"거참, 친위대라는 놈이 참 허약하구나."

대공이 꺽꺽 울어대는 페토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경악이 절로 나왔다.

이 칼바람에, 나머지 사람은 몇 겹이고 보온 아티팩트까지 끼고 버티는 상황에 맨몸에 셔츠 하나만 걸친 채로 바람을 맞는 걸 보니 저게 사람인가 싶다.

"각하는 괜찮습니까?"

"응? 아아, 적응하면 살만하다! 원한다면 너도 특훈시켜주마. 이 시기에 나가는 사냥은 또 각별하거든."

고개를 저었다.

하긴 검의로 지어내는 것부터가 냉기를 이겨 먹는 불꽃일 텐데, 그걸 완성한 시점에서 대공의 몸은 냉기 저항이 인간의 수준을 벗어나 있는 게 맞다.

그걸 떠나서 후회해봐야 뭣하겠나.

출발한지 일주일, 이미 우리는 북부의 문턱을 넘었으니 이대로 돌아가기도 뭣하다.

"오늘은 근처에서 야영하도록 합시다. 이 꼴 보니까 더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음, 그리하지. 이래서 제도 사내들은 문제구나."

대공의 지적에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 * *

칼바람이 부는 설원 한가운데서 무슨 야영이냐 하겠지만, 그런 걸 걱정하는 건 일반인들 뿐이다.

조금만 돈이 있으면 보온 스크롤을 뜯을 수 있는 게 대륙이고, 나아가 잘 기른 마법사 하나만 있으면 편한 잠옷을 입고 잠들 수 있는 게 이 대륙이다.

그러니까, 베아트리스 하나만 있으면 야영이고 뭐고 큰 문제는 아니란 말이다.

"편리하긴 하군."

태자가 마차에 발을 뻗고 앉아선 말했다.

현재 약 지름 18M 정도의 공간이 베아트리스의 마법 아래 보온 되고 있다.

친위대는 천막을 치고 있었으며, 나는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얘만큼 쓸모있는 애가 없다고."

"과찬이세요."

"너 부른 거 아니야. 결계나 조율해."

"…네."

부르지도 않았는데 끼어들기는.

베아트리스가 다시 마법 조율에 들어갔다.

참 성격이고 하는 짓이고 마음에 드는 건 없는데 이 편의성 때문에 떼어 놓고 다니기가 힘들단 말이지.

폐급폐급 하지만 황금 세대인 이유가 다 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해봐도 그랬다.

'설산 진입 때 데려가야 할 게 베아트리스, 그리고 히스토리아 정도인가.'

이번 북부행엔 대공자와 외경의 교단 외에도 개인적인 목표 하나가 더 있었다.

'초대 그 인간이 뭘 안배해놨는지 알아야겠단 말이지.'

분명 초대 파로스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미 예견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가문에 남긴 신목이나, 통궤안의 강화 따위를 생각하면 이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기르고어에게 설산 원주민들의 정보를 듣고 관련된 조사를 추가적으로 해봤다.

대공에게 직접 물어본 것도 있었고.

뭐,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속단은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면 그랬다.

'정령들한테 뭘 남겨둔 거 같은데.'

내가 수령해야 할 것이, 물건인지 마법인지 모를 뭔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에 관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으아, 냄새 되게 좋네요. 뭐예요. 이거?"

히스토리아가 다가와 풀어진 얼굴로 물었다.

헤실헤실 웃는 게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일하기가 싫었나.

"그냥 탕입니다."

"탕이요?"

"예, 가축 뼈에 붙은 고기와 양념을 물에 때려 박고 푹 끓이는 음식입니다. 원하면 고기빵도 넣어드릴 수 있습니다."

"앗! 이름은 뭔가요?"

"딱히 없습니다."

정확히는 한나가 가르쳐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었다.

녀석은 이따금 정규군에게 배급된 고기 중 손질 후 남은 뼈 부근을 받아와 이런 탕을 끓였었다.

겨울철에 특히 인기가 많은 음식이었는데, 육수만 어떻게든 보충하면 속이 든든해질 때까지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 게 그 이유였다.

개중엔 한나가 먹거리를 복사한다며 경배하는 놈도 있었지.

바로 저기, 리암과 루빈이 그랬다.

―술안주가 끊이질 않아! 한나는 창조의 영역에 들어섰어!

―아아, 먹고 죽…!

―적당히 해라.

흘긋 천막을 치며 낑낑대는 대원 놈들을 봤다.

당시에야 언제 전투가 있을지 모르니 편히 먹게 두지 않았지만, 오늘 같은 날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회귀 전에 녀석들에게 배불리 뭘 먹여주지 못한 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잠시 후 탕이 다 끓었다.

그쯤엔 천막도 완성되어 있었다.

"밥 먹고 쉽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가야지."

말하자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한입씩 고기를 먹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오, 오…!"

"앗! 고기빵도 들어가 있네요!"

"…유렌, 거기 술이 없더냐?"

"...!"

다들 좋다고 먹는다.

옹기종기 모여서 내가 만든 음식을 칭찬하니 꽤 뿌듯하군.

한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은퇴하면 식당이나 할까.'

뭐, 제국을 살리고 가문도 물려준 후라고 생각하면 아주 먼 미래겠지.

문득 먼 훗날의 행복한 미래를 떠올려봤다.

그 순간이었다.

'…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구나. 내가.'

전생에나 현생에나 가장 급한 건 당장이었다.

내일의 전투에서 살아남는 법을 강구하거나, 일어날 어떤 끔찍한 일을 틀어막는 것 등의 일 말이다.

그게 해결된 이후엔… 안락함을 찾은 후엔 뭘 해야 하지?

그런 상념에 머릿속이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태자가 날 불렀다.

"유렌."

"아, 예."

"치즈버거도 같이 넣고 끓여봐도 되나? 고기빵도 넣은 걸 보니 이것도...."

"…이 씨발 악귀들린 새끼를 봤나."

"-"

"아, 미안합니다. 너무 놀라서."

탕에 치즈버거를 넣는다는 발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맑은 눈동자를 보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이 인간의 광기에 소름이 끼쳐왔다.

"안 어울립니다. 그냥 드십시오."

"흐음...."

태자가 영 미련을 못 버리고 탕을 노려봤다.

나는 그쯤 불안감을 느끼고 내 식사를 끝냈다.

눈치 빠른 히스토리아도, 내 행동을 묘하게 지켜보던 베아트리스도 식사를 끝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그랬다.

"흠, 그다지 맛은 없군."

태자는 결국 탕에 치즈버거를 퐁당 빠뜨렸다.

그리고 입맛에 맞지 않으니 그걸 친위대에게 짬때렸다.

"어."

"...."

처음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저딴 새끼가 황제가 되는 게 맞을까.'

거기에 하나 더,

"음! 제도가 음식 문화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구나!"

대공은 치즈 버거가 들어간 탕도 맛있게 먹었다.

똥을 퍼줘도 먹을 인간인 듯하다.

* * *

여정은 큰 사고 없이 이어졌다.

중간에 시간이 지체될 일이라면 북부의 혹독한 추위가 한 번씩 마차에 고장을 일으킨 것.

그리고 어느 지점에선 한파에 서린 정령의 기운이 마법을 훼손해 추위가 몰아쳤던 것.

그런 사고를 이겨내고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보급까지 마친 게 열흘이었다.

"휴, 이제 도착했군. 헤이론에 온 걸 환영하마!"

북부의 심장, 헤이론에 도착했다.

083화. 헤이론 (1)

북부의 심장이라 불리는 헤이론은 야만족, 드워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요충지였다.

그런 지리적 특성 탓이라고 해야 하나.

지난 천년 간 유지 보수되며 발전한 헤이론의 외견은 그러했다.

"요, 요새 같네요...."

"으음! 요새가 맞소! 외적의 침입을 언제나 대비해야 하는 지형이니!"

대공이 히스토리아의 말에 답했다.

그 말처럼 헤이론은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그냥 성벽이 아니었다.

위로 갈수록 퍼지는 성벽의 형태는 꼭 나팔꽃을 연상케 했고, 그 위로 눈이 한가득 쌓여 있으니 차갑고 삼엄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들은 말은 많으나, 나 또한 헤이론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생경한 기분이었다.

그런 중이었다.

"자! 일단 대공저로 가자꾸나! 여독은 풀고 다음 일을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대공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아무렴, 베아트리스가 있어 편했다곤 하나 결국 극지에서의 야영이다.

잠자리부터 식량, 그 외에 하루를 보내는 방식까지 뭐하나 편한 게 없었으니 슬슬 편한 잠자리가 그립지 않겠나.

하지만,

"조금만 미루지요. 아, 전하께선 대공저로 가서 대공자를 붙잡아주십시오."

"자네는?"

"대공자의 스승을 찾을 겁니다. 거주지는 이미 조사해둔 터라."

놀러 온 게 아니다.

여기까지 오며 걱정했던 일 중 하나가 대공자의 탈주, 그리고 스승의 도주였던 만큼 그것부터 확인해야 할 터다.

내 말에 대공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본인의 영역이니 만큼 사고가 없을 것을 자신하는 듯한 행색이었으나, 죄송하게도 그렇게 신뢰성이 있진 않았다.

"베아트리스, 너는 친위대랑 같이 전하 쪽으로 붙어. 대공자의 방에 결계가 있다고 했으니까...."

"네, 풀어볼게요."

"성녀님은 저랑 갑시다. 아, 거기에 페토 너도."

만약의 상황, 전투가 생긴다면 가장 필요한 건 치유력이다.

더불어 페토의 위기 감지 능력은 챙길 수 있는 한 내가 챙기는 게 낫다.

대강의 방책을 수립한 뒤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하, 각하. 조금 있다 뵙지요."

"아아, 그러시게."

그렇게 우리는 찢어졌다.

* * *

마차 창밖으로 흰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조금은 삭막한 헤이론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베아트리스는 그를 보며 작은 아쉬움을 느꼈다.

'따라가고 싶었는데.'

이왕 간다면 칼리오스 쪽이 아닌 유렌 쪽에 붙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억지를 부려 괜한 미움을 살 순 없는 법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결계가 있다면 마법사인 자신이 해주하는 것이 맞지 않던가.

아쉬움은 그런 이유를 붙여대며 털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맡은 일부터 잘하자.

생각하며 연신 창밖을 봤고, 그런 중 대공저에 도착했다.

"으하! 그래도 집이 좋긴 좋군. 오랜만에 본 것이라 그런지 더 반가워."

"오, 꽤 화려하구려."

"아무래도 천년이나 이래저래 건들다 보니."

헤이론의 대공저는 백색과 회색 뿐이던 다른 건축물과는 확연히 달랐다.

외부에서부터 보였던 붉은 휘장, 그리고 온갖 흉악한 마수의 두개골이 곳곳의 외관을 장식한 모양새였다.

이에 관해선 스승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다.

―헤이론에 가면 꼭 대공저에 걸린 두개골들을 봐보세요. 지난 천년 간 헤이론의 가주들이 잡았던 전설적인 마수들의 흔적이랍니다.

―…보존 마법까지 걸어서 그걸 걸어둔 거예요?

―네, 그럴 가치가 있는 마물들이니까요.

처음에야 뭔 웃기지도 않는 자랑질인가 했지만 이리 보니 과연이라고 할 만했다.

'아이스 드레이크, 윈터 오우거, 엘더 리치....'

극지는 극지라고 해야 할까.

제도에서는 만날 일조차 없는 괴물들의 흔적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감탄이 슬쩍 삐져나왔고, 티브리아가 그에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저곳에 있는 그라운드 베어의 두개골이 보이시오? 저게 내가 혼수로 잡아 온 놈이오. 그이가 저걸 보고 놀라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군."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그리하며 베아트리스는 안대를 슬쩍 내려 대공저를 살폈다.

도착했으니 일부터 해야한다는 생각이었다.

키잉―!

유렌의 통궤안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마나 캐쳐.

의안이 공간을 떠도는 마나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찌직, 찌직.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참았고, 그러자 드러나는 게 있었다.

'저기구나.'

이능 행위는 기본적으로 마나의 변질이다.

결계 또한 마찬가지로 공간의 마나를 특정 형태로 붙잡아 가두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대공저 전체에서 딱 하나의 방이 그러했다.

3층의 창이 크게 나 있는 방.

그곳에 얽혀 있는 결계의 양에 베아트리스는 헛웃음까지 흘렸다.

'대체 몇 겹을 쌓아둔 거야.'

소음 차단이나 잠금부터 해서 마나 출입 제어, 관측 방어 따위의 고위 결계가 덕지덕지 방 위로 발려 있었다.

푸는 것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시간은 걸릴 게 분명했다.

꽤 험난한 과정이 되겠다는 생각에 피로가 조금 차오르는 중이었다.

"마법사. 가도록 하지."

칼리오스가 걸음을 옮겼다.

베아트리스는 그에게 알아낸 사실을 공유했다.

"결계는 13종이에요. 그 외에 다른 마법 처리가 7개 정도고...."

하지만, 칼리오스는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는 듯했다.

뭐랄까, 듣고도 한 귀로 흘리는 듯하다고 해야 하나.

대답조차 없으니 괜히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나.

알아들었으면 어떻게 할지 논의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에 짜증까지 치솟는 순간이었다.

"대공."

"음?"

"일단 끌어내기는 할 건데, 우리가 온건해야 할 이유가 있소?"

칼리오스가 티브리아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티브리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뜻이 있으리라 믿소. 맡기기로 했으니 난 지켜보기만 하지."

그제야 칼리오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베아트리스의 속에 의아함이 차오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사춘기 꼬맹이는 대체로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짐승들이지. 짐승은 어떻게 다루는지 아시오?"

스릉―!

칼리오스가 검을 뽑으며 사뭇 상쾌하게 웃었다.

"매로 다스리면 되오. 맞아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지."

베아트리스가 황당함에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음 말을 잇는 것보다 칼리오스가 빨랐다.

키이잉―!

마나가 들끓었다.

칼리오스의 시선이 굳게 닫힌 방문을 향했다.

직후,

꽈아아앙―!

칼리오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러 방문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쩌저적, 13겹이나 되는 결계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그는 흥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 번으로는 안 되는군. 그럼 한 번 더."

곧장 칼리오스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렇게,

꽈아아앙―!

방문이 부서졌다.

'뭐 저런 무식한…!'

베아트리스가 황망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시선은 이윽고 방 안쪽을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다, 당신은…?"

검은 머리에 푸른 눈.

백옥 같은 피부나 마른 체형, 그리고 섬세한 이목구비까지 모든 요소가 가학심을 부추기는 가녀린 미소년이 있었다.

온갖 연구 서적 같은 게 어질어져 있는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덜덜 떨면서 말이다.

칼리오스는 뒷짐을 지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대공자. 그간 무탈히 지냈는가?"

"전하…?"

대공자 슈페르트 헤이론.

그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자리했다.

…베아트리스는 왜인지 슈페르트가 이해됐다.

* * *

"페토, 뭐 느껴지는 거 없냐?"

"제가 뭐 이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형… 아니, 태사님."

"그냥 꺼림칙하고 그런 거 없냔 말이잖냐."

헤이론의 민가를 지나는 중이다.

한파 시기라 그런지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유령 도시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께름칙하지 않았을까.

하여 페토에게 주기적으로 같은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뿐이었다.

저놈의 위기 감지 능력이 이미 이능에 닿아있다는 걸 겪어본 나로서는 꽤 의아했다.

'제일 수상한 인간한테 가는 건데 잠잠하단 말이지.'

스승이란 작자의 행적이 그러하지 않던가.

어딘가에서 정식으로 학문을 수학한 게 아님에도 황실 아카데미에 초빙교사로 들어온 남자다.

그것도 딱 대공자가 입학한 시기에 말이다.

그러더니 대공자의 담당 교수로 임명됐고, 대공자의 졸업 때는 아카데미를 함께 나와 북부까지 왔다.

뭔가 술수를 썼다면 그 스승을 통했을 가능성이 이리도 높건만 어찌 페토가 수상함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이미 자리를 떴나?'

그런 가능성마저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며 근처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 그 영감 말이오? 딱히 어딜 떠난 것 같진 않았소. 애초에 연고자도 없는 것 같던데.

대공자의 스승은 높은 확률로 이곳에 있다.

연고자가 없다는 말은 대공자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수상함을 부추기는 일이었으나, 그것 또한 만나보면 알 일.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 어떤 심문을 해야겠는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던 중이었다.

"흐아, 다 왔네요."

히스토리아가 입김을 불며 말했다.

털뭉치에 가까운 외투로 전신을 여미고도 추위를 영 떨쳐내지 못하는 모양.

어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해 보여 안쓰러웠으나, 적진일지도 모르는 곳 앞이다.

나는 문을 노려봤다.

'겉보기엔 평범하고.'

건물은 석재였고 문은 털가죽을 덧댄 나무문이었다.

굴뚝으로는 연기가 치솟는 건 안쪽에 불이 지펴져 있다는 뜻.

주소를 틀리지도 않았으니 확실히.

'저 안에 있는 게 스승이란 작자겠고.'

하지만 통궤안에 비치는 생명의 마나가 하나가 아니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건 뭐야?'

문 뒤로 내 무릎까지나 올법한 작은 키의 생명 마나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수가 넷이다.

인간도 아니고 드워프는 더더욱 아님이 분명했다.

수상한 점 하나 추가.

"페토. 아직도 이상한 게 없나?"

"예에, 뭐...."

저렇게 대놓고 수상함에도 페토가 뭔가를 못 느낀다는 건 께름칙했으나, 어쩔 수 없다.

'그냥 쳐들어가보면 알겠지.'

뭐가 됐든 생포다.

까보면 뭐든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나는 신목을 쥔 채로 문을 걷어찼다.

꽝!!!

진동과 함께 지붕에 쌓인 눈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나는 마나를 끌어올린 채 신목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눈에 보인 광경은 생각한 어느 것과도 달랐다.

"쿨럭…! 누구시오…?"

"…?"

"1호야, 손님이 왔느냐?"

"삐잇!"

"으잉? 왜 매달리고 그러느냐."

몸이 덜컥 멎었다.

나뿐만 아니라 페토도, 히스토리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늑한 집 안, 모닥불이 겨우 지펴진 거실에는 웬 시체나 다름없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듯 더듬더듬 지팡이를 찾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검은색의 난쟁이 같은 것들이 모여 삐이삐이 울며 떨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이 조금의 위압감도 주지 못했다.

통궤안조차도 위협을 말하지 않았다.

"게 누구 있소…? 강풍에 문이 뜯긴 건가...."

노인이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형님, 이거 주거침입 아니죠?"

페토의 물음에 나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도둑 새끼가 주거침입을 신경 쓰는 게 맞냐는 구박조차, 나는 할 수가 없었다.

084화. 헤이론 (2)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건가.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그것이었고, 그럼에도 저 새까만 난쟁이들을 보면 노인이 일반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물은 것이 이름.

"…아인델 크로니드. 맞습니까?"

"음? 내가 그 사람이긴 하오? 아아, 손님이었나...."

노인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사람을 제대로 찾긴 했다는 생각에 작은 안도.

하지만 의구심은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린 게 없었던 만큼 긴장을 놓진 않았다.

그런 우리의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인델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쪽으로… 쿨럭…! 오시오."

딱, 딱, 딱.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식탁 앞으로 향했다.

난쟁이들이 우당탕탕 데굴데굴 구르며 그런 아인델의 뒤를 따랐다.

히스토리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되게 목가적인 분위기네요. 적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생각해도 그렇긴 하다.

* * *

우선 하나, 대공자 슈페르트의 스승 되는 노인 아인델은 병자였다.

눈이 안 보이는 건 기본에 쉴새 없이 토해내는 마른기침은 단순한 재채기완 달리 어떤 병이 그를 범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둘, 저 작은 난쟁이들은 어떤 자연적 생명체가 아니다.

그가 만들어낸… 인공물이었다.

"너무 놀라지 않으셔도 되오. 호문쿨루스요. 내 연금술에 평생을 몸담으며 얻은 작은 재주지."

"…생명 창조?"

"허허, 그런 거창한 게 아니오. 쿨럭…! 기계를 생각하면 쉽겠군."

가만히 보면 그림자나 다름 없을 정도로 실루엣만 존재하는 검은 아이의 형상.

아인델은 그것을 쓰다듬으며 설명을 덧붙여줬다.

"아이들은 유기체로 이뤄진 자율 행동 물체요. 내가 내리는 간단한 명령을 수행하는… 지능이 세 살 정도에 멈춰 어떤 주도적 사고도 불가한 녀석들이지. 아아, 고맙소."

"아, 아니에요! 이렇게 아프신데 참느라 힘드셨겠어요...."

히스토리아는 아인델의 비루먹을 행색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를 치료하고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난쟁이가 내어 온 쓰디쓴 차를 마시며 헛웃음을 흘렸다.

간단한 듯 말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반쯤은 생명 창조의 영역에 들어선 거잖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거의 0에 가깝다곤 말했지만 내가 침입한 순간의 반응은 이들에게 생존 본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외에 통궤안으로 봐도 그랬다.

호문쿨루스라 불리는 것들은 한없이 생물에 가까운 마나 배열을 품고 있었단 말이다.

저게 단순한 인공물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는 떠보듯이 말했다.

"…기인이셨군요."

"기인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오."

"살고 싶어 하는 유기체라면 이미 생명이 아닙니까."

"그것은 꽤 어려운 주제에 닿는 말이구려."

적아를 확실히 구분해보고자 던진 말에 대한 아인델의 답은 꽤 탐구적인 면이 있었다.

"생명을 무엇으로 정의하는 것인 지에 관한 말 같소. 스스로 살고자 한다면 생명, 사고하고 결과를 도출하면 생명. 살아 숨 쉬며 세상과 교류하는 유기체를 생명. 여러 의견을 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연금술에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요."

"바로 혼이 존재하는 유기체. 신이 이 땅에 피조물을 만들며 가장 세심히 빚어낸 것은 영혼이었으며, 그것만큼은 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오. 혼은 자생하며, 불멸하고 번성하지. 그 초월적인 기전은 절대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에 있소."

"아시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 함은 곧 새로운 혼의 발생이오. 그것은 기존에 만들어진 두 생명의 혼이 충돌하며 생겨난 에너지에서 비롯되지."

"당신도, 이 사제 여인도, 거기 조용한 청년도. 나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태어나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보시오."

아인델이 부드럽게 난쟁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난쟁이는 편안한 듯 힘을 푼 채 노인의 무릎 위에서 삐약거리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혼이 없소. 내 손보지 않는다면 성장도 없소. 심지어 번식능력조차 전무하지. 그러니 이것은 분류상 생명이 아니오.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생명 창조를 연금술적으로 말해보자면...."

이어진 것은 내가 궁금했던 이야기의 답.

그에 집중을 더하자, 아인델이 말했다.

"…혼의 발생. 그것으로 인한 자생, 번식이 가능한 생물의 작성. 우리는 그걸 생명의 창조라 말하오."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가 펼친 모든 논리와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확신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다.'

그가 대공자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 인물인 건 확실해 보였다.

그 외의 것을 따지자면 그랬다.

'아군, 적군. 어느 쪽도 아니야.'

그저 외인이다.

어떤 인과에 의해 대공자와 만났을 뿐인.

그리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게, 말이나 행동은 둘째치고서라도 이제껏 만난 외경의 교단과 달리 아인델은 그들에게서 느낀 어떤 신적인 연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단서를 얻어갈 수 있을까?

입 안이 살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런 중, 아인델이 난쟁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아, 오랜만의 이야기라 신났던 건가. 몸도 한결 가뿐해지니 더 정신이 없었던 것 같소. 미안하오. 그래서 어디서 온 누구시라고?"

그저 죽어가는 변방의 노인.

하지만, 우군으로 둔다면 확실히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사람.

그 확신에 나는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유렌 파로스. 파로스의 소가주...."

그 순간이었다.

덜컹!

"아, 아아…!"

아인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하곤 비틀비틀 식탁을 짚으며 내 앞으로 왔다.

뭐지?

순간 당황이 차올라 입술을 뻐끔거리자, 아이델이 어느덧 내 앞으로 와 더듬더듬 손을 맞잡았다.

그리하곤 떨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셨군. 이제야 오셨어...."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아암, 내 이곳에서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정말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오."

아인델의 표정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주름은 모양새를 바꿔 환희가 되었다.

이어진 것은,

"헤이론의 대공자를… 슈페르트를 구하러 와준 것이지 않소? 정말 잘 와주었소…!"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이었다.

* * *

칼리오스는 이번 북부행에 있어 '대공자를 설득한다'라는 선택지를 깔끔하게 지운 상태였다.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제껏 본 자신을 제외한 모든 황금 세대의 기수… 이그로시아의 경우엔 이아스까지 레베카의 유혹에 빠져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벌이지 않았던가.

최초 베르헤임에게서부터 이어져 왔던 실망감은 이제와 바뀌기엔 너무 먼 강을 건넜다.

그러니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패놓고 생각하지.'

짐승에겐 매가 약이라고.

저들에게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결국 방 문을 강제로 부숴버린 것 또한 그 일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들어온 방 내부.

마침내 슈페르트를 마주한 칼리오스는 그의 수척한 꼴에 자신이 옳았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불도 끄고 커튼까지 다 쳐놓고 뭐하는 겐가. 사람이 볕을 봐야지."

촤악―!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방이 밝아졌다.

아주 더러웠다.

연구자의 방이 평균적으로 그리 깔끔하지 못함을 생각해봐도 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수준.

수기로 쓴 연구 자료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먼지가 뭉쳐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가 드문드문 보인다.

이게 돼지 우린지 대공자의 방인지.

"자네가 칩거한 지 몇 개월이 되었다고 했나? 으음… 몸에서 썩은 내가 나는군."

칼리오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슈페르트는 너저분한 꼴로 황망하게 태자를 올려다 보다가, 이내 분노한 표정으로 대공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이게 무슨 횡포입니…!"

그러나 칼리오스는 불효를 눈감아주지 않았다.

따악!

검집으로 슈페르트의 머리를 내리쳤다.

대공은 불편함을 참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악!"

"어딜 어머니께 언성을 높이나. 자네는 가정교육을 오크에게 받았나?"

자식과 부모를 보는 동시에 맥이는 기적의 욕.

대공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까지 계산한 언어폭력에 베아트리스가 아찔함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오스는 생글생글 웃는 채로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자네는 달리 전투적인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 괜히 땀을 뺄 필요가 없을 것 같거든. 왜, 남의 집에 와서 건물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그래도 천 년 역사의 고성인데."

"태, 태자 전하. 이런 무도함은...."

"무도한 건 자네지."

"읏?!"

칼리오스는 슈페르트의 뒷목을 잡았다.

이 방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부터 차차 알아가면 될 일.

그보다 우선.

"일단 박박 씻기기부터 해야겠군. 뭔 열다섯 밖에 안 된 친구가 몸에서 홀애비가 냄새가 진동을 해. 대공, 이 아이의 시종들을 다 부르시오. 내 씻는 걸 직접 감시할 테니."

"그리하지."

칼리오스는 발악하는 슈페르트를 질질 끌고 나갔다.

그리하며 베아트리스에게 말했다.

"연구 자료를 조사하게.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지 않나?"

애초에 문의 결계를 부술 생각을 했음에도 데려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의안과 의수를 일컬어 건넨 말에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말로 폭풍 같은 일처리였다.

* * *

슈페르트를 씻기는 일은 꽤 고역이었다.

칼리오스가 아닌, 시종들의 입장에서 그랬다.

"놓아라! 지금 누구 몸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냐!!!"

"대, 대공자님! 하나...."

"정녕 피를 보고 싶은 게냐! 내 놓으라 하였다!!!"

아주 누가 보면 어딘가의 왕자라도 되는 줄 알겠군.

슈페르트가 불거진 눈으로 발악을 할 때마다 칼리오스는 혀를 차며 마나를 발했다.

그것으로 슈페르트의 어깨를 짓눌렀고, 슈페르트는 그때마다 억지로 씻겨지는 고양이처럼 낑낑대며 움츠러들었다.

아무튼 그 고생도 끝.

때를 빼고 광을 낸 슈페르트를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언젠가 연회에서 술에 취한 영애 하나가 그런 말을 했었지.

―덮치고 싶어요. 마구마구 괴롭혀서 눈물을 흘리게....

소년미와 퇴폐미가 어우러져 어쩌구 저쩌구.

솔직히 역겹기만 한 발상이었지만 용모가 빼어남은 어느 정도 인정할 만했다.

물론 자신보단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건 그거고.

"그럼 이제 얘기를 시작해보지."

칼리오스는 베아트리스가 정리한 연구 자료를 봤다.

서류 처리는 그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자신이 아는 분야가 아니라 한들, 전문가의 손을 거쳐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된 문서라면 맥락을 짚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 순간 나오는 것은 헛웃음이었다.

"생명과 혼에 관한 연구라."

유렌과 추측해봤던 대로, 이 연구는 다른 황금 세대들이 했던 연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결국 이놈도 유혹에 빠져 사리분별 못하는 버러지다.

확신에 찬 칼리오스가 물었다.

"그래, 자네는 이걸 연구해서 뭘 하고 싶었나? 죽은 레베카를 살리고 싶던? 그럼 악마 소환이 편했을 텐데… 아! 레베카와 완전히 닮은 여자를 만들어내 신부로 삼으려고? 직접 만드는 신부라…! 그것참 새로운 발상인데."

비아냥이 한껏 섞인 질문.

그에, 내내 칼리오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진이 빠져있던 슈페르트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저를 전하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

"계집 따위에 공무도 내팽개친 인간 주제에 절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제 연구를 보고도 직접 만드는 애인 따위나 떠올리는 수준, 잘 알겠습니다."

"오."

마지막 감탄사는 티브리아였다.

칼리오스는 웃지 못했다.

"…허?"

칼리오스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의 미소가 삐걱거렸다.

085화. 헤이론 (3)

아인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짧은 몇 마디의 말, 행동만으로도 확실히 인지되는 것이 있으니,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기다렸다, 그리고 도와달라.

이 노인이 외경의 그것들과는 다른 무리라는 뜻이 아니겠나.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느냐?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어떤 이능적 위협도 느껴지지 않으므로 이야기를 들을 가치는 있었다.

그런 판단으로 물었다.

"일단 얘기부터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아아, 그래. 얼마든지. 내 무슨 일을 겪었고, 당신을 기다려온 이유까지 모든 걸 말해주겠소."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가 손짓하자, 호문쿨루스가 아장아장 걸어 또 씁쓸한 차를 타왔다.

이야기는,

"…우선은 먼 이야기부터 해야 할 터요."

꽤 지난 과거까지 돌아가야 했다.

* * *

연금술사라는 작자들은 대체로 폐쇄적이다.

그런 성향의 심화로 대부분의 연금술사가 대외적인 모임을 경멸한다.

노력하지 않고 지적 자산을 얻는다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었다.

아인델은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랐다.

"나의 스승도 그러하였소. 사실, 아직도 대부분의 연금술사가 그러하지. 나는 그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었소."

일곱 살, 아인델이 연금술에 입문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스승의 비전을 처음 접한 것은 사십 살이 된 후였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전에 관해 입을 연 것이니, 그 스승의 됨됨이가 얼마나 졸렬한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문화요? 그 마법사들조차 이리 비전에 인색하지 않소. 가르침이나 배움에 관한 벽을 이렇게까지 쌓진 않는단 말이오."

"그들은 항상 연금술이 쇠퇴하는 시대에 탄식하오. 한데 누구도 발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 하오. 불쌍한 것이지."

"가진 것이 그 비전 하나밖에 없으니, 마음이 빈곤하니 베풀 줄 모르는 것이오. 그런 폐쇄성이 대를 거쳐 이어져 오니 학문의 교류는 끊기고, 학문 자체가 무너지는 이런 시대가 올 수밖에. 나는 바꾸고 싶었소. 이 시대를, 이 무너져가는 학문을."

그런 열정 하나였다.

그것이 아카데미 교수행을 결심한 이유였다.

"운이 좋았지. 마침 연금술 교수 자리가 비어 있었소. 정확히는… 항상 비어있었지. 상급 연구가 가능한 연금술사는 비전을 베푸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으니."

아인델은 끌끌 웃으며 그 순간을 회상했다.

"늙고 말라비틀어진 꿈이오. 그럼에도 초라하진 않은 꿈이었소. 처음 교수가 된 날은 아직도 생생하오.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날 올려다보는 순간을 상상해보시오."

태사라고 하니 유렌도 그 기분을 이해하지 않을까.

어림짐작하며 아인델은 말을 더했다.

"너무 어여쁘지 않겠소? 그 아이들이 연금술의 미래가 될 것이란 생각만으로 벅차오름이 있었소. 그날이었지."

아인델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씁쓸함을 동반한 채로 말이다.

"…슈페르트.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아인델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이 순간 유렌의 표정은 아주 진중해지고 있었다.

진솔한 속내를 말하는 일이었으나, 이는 유렌에겐 없었던 정보… 즉 그가 초빙교수로 들어온 일에 관한 인과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학생들은 담당한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학문의 새 시대를 만들 아이들은 때 묻지 않아야 하오. 개방적이어야 하고, 지식을 나누는 일을 자랑스러워할 줄 알아야 하오."

"확실히 공감하는 말입니다."

"허허, 역시 제국의 스승이라 불리는 분이구려."

유렌의 행실을 아는 페토가 웃음을 참았고, 유렌이 그에 눈초리를 줬다.

눈이 멀어 있는 아인델은 그런 것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나는 그날의 만남에 운명을 느꼈소. 슈페르트는 어떤 아이보다 순수했으며, 어떤 아이보다 영특했던 까닭이오."

"…순수?"

"입이 좀 거칠긴 하오. 그래, 나도 어찌 그를 모르겠소. 소문이 안 난 동네가 없는데. 하지만 사람을 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내면이 아니오? 슈페르트는 참 맑았소. 특히 지식을 향한 갈망이 너무나도 순수했지."

입이 말랐다.

제자에 관한 칭찬을 하려니 조금 더 들뜨는 기분이 된 까닭이었다.

아인델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내가 가진 비전은 생명의 비전이오. 가장 근원적인 탐구인 만큼 깊은 철학적 사고와 윤리관을 요구하지. 그렇기에 나는 비전을 베품에 있어 인간됨을 볼 필요가 있었소. 그걸 시험하는 여러 과정에서 유일하게 만점으로 통과한 게 슈페르트였지. 그 아이가 내게 한 첫 질문이 무엇인 줄 아시오?"

"…무엇입니까?"

"교수님, 어째서 같은 생명에 다른 가치를 둬야 하는 겁니까?"

아인델의 손끝이 찻잔을 어루만졌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천장으로 고개를 향했다.

"얼마나 갸륵하오?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모든 생명에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오. 생명의 아름다움을 인지한단 말이오. 한데 그 성적 또한 탁월했지. 양심과 능력. 슈페르트는 둘 중 무엇도 모자라지 않았소."

생명의 탐구는 악용의 여지가 많은 연구였다.

조금만 잘못 다루면 도시 하나를 궤멸시킬 독약을 만들 수가 있고, 달리 끔찍한 기형을 만들어 살포할 수 있는 연구였다.

연구자의 양심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임에, 그걸 알면서도 뛰어난 슈페르트는 참으로 매력적인 학생이었다.

"그 순간에 그런 결심을 했소. 내 모든 비전을 그 아이에게 전해야겠다. 그렇게 가르치다 보니 아는 게 있었소. 태사, 당신은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소? 누군가를 가르치며 내가 발전하는 기분 말이오."

"…대충은 알겠습니다."

"나는 그런 감정을 매 순간 느꼈소."

아인델이 손짓하자 호문쿨루스들이 다가와 무릎 위에 앉았다.

어떤 호문쿨루스는 아인델의 발밑에 기대 누웠다.

아인델의 목소리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삐이…!"

"이 아이들이 그 결실이지. 내 사실을 말하자면, 이 아이들은 나와 슈페르트가 함께 연구해 피워낸 아이들이오. 생명엔 닿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가능성을 보여준...."

분류적으로 생명에 들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명을 연구하는 연금술사들의 비원인 생명 창조에 닿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이 아이들이었다.

그날이 얼마나 감동적이던가.

아인델은 아직도 슈페르트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3학년이 될 적에 이미 나의 비전을 모두 소화했소. 이후는 스승과 제자가 아닌, 연구를 함께하는 동료로서 4학년을 맞았고."

기쁜 이야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아인델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유렌이 그 이유를 짐작하곤 말했다.

"…레베카?"

아인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녀가 나왔지."

마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터였다.

아인델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처음엔 그저 풋풋하게만 봤소. 사랑을 아는 아이와 모르는 아이는 그 영혼의 성숙함이 달라지니, 설령 실패한다고 한들 첫사랑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여 도움을 줬었지."

때로는 손안에서 장미를 피워내는 잡기술을 가르친다거나, 소싯적의 경험을 살려 멘트를 전해준다거나.

부끄러워하면서도 내내 실실거리던 슈페르트가 참으로 어여뻐 그런 일까지 했었다.

그게 후회가 되었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나와 슈페르트의 연구가 기이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소. 그러니까...."

정확한 시점을 말하자면,

"…호문쿨루스. 슈페르트는 이 아이들을 통해 무언가 실험하려 했지."

그 실험의 잔혹함이 도를 넘은 순간이 있었다.

"생명이 되지 못했지만 호문쿨루스는 이대로 완성된 아이들이오. 가능성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존중받을 여지는 충분했소. 어찌 실험 재료 따위로 보겠소? 슈페르트 본인이 그런 걸 꺼리던 아이였소. 한데 어찌...."

아인델은, 그날 슈페르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나아지게 해주려는 거예요. 과정에서 고장 나면 새로 만들어야죠.

아인델의 입술이 꽉 물렸다.

대체 그 순수하던 아이를 바꾼 것이 무엇인가.

조사를 해야만 했다.

이미 모든 비전을 소화한 제자가 타락한다면 그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게 옳았으므로.

"꽤 쉬웠소. 원인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거든."

레베카.

끔찍한 마녀 레베카.

"위화감이 있었소. 그렇게 그 여자의 뒤를 쫓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소. 아시오? 그 여자가 성 밖의 동굴에 살았다는 사실을?"

"…예."

"그걸 인지한 순간에야 아차 싶더군.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여자의 뒷배경이나 부모, 거주지 따위를 궁금해했던 적이 없던 것이오! 마치, 마치...."

"모르는 상태가 가장 완벽한 상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셨겠지요."

"…맞소! 그걸 알아내려 하는 일이 정말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있었지. 그걸 참아내고 나아가야 진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고."

그때가 슈페르트의 졸업기였다.

초빙교수로서의 업무를 사퇴하고, 슈페르트를 따라 북부에 오기 위한 서류 처리도 끝난 때 말이다.

"그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 차라리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

"…하필 그때 그 여자와 마주했고, 나는 물었소. 네년의 정체가 뭐냐고."

"...."

"그날 내가 죽었소."

눈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하나, 지금 유렌이 당황한 것 정도는 느껴졌다.

그래,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을 죽었다고 이르니 황당하겠지.

하지만 자신은 죽은 게 맞았다.

그날 레베카에게 눈을 빼앗겼고, 심장이 꿰뚫렸고, 그녀에 의해 땅속에 묻혔다.

그런 자신의 무덤에 슈페르트가 찾아와 애도하기까지 했다.

―…스승님 연구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 스승님의 몫까지.

슈페르트가 목놓아 울었으나, 그게 끝.

―나아가자. 그래야 하는 거잖아.

레베카가 슈페르트로 하여금 자신을 잊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영영 죽은 사람으로 남아 그 이유를 조사하지 않게 만들려 한 게 아닐까 싶소. 아무렴, 그걸 알아내려 하는 순간 슈페르트가 그 마녀를 의심하게 되니 당연하오."

행운인 이유가 그것.

슈페르트가 더 이상 자신을 조사하지 않았기에 북부로 숨어들어 이리 거처에 똬리를 틀기까지 방해가 없었다.

이후엔 레베카의 실종 및 죽음에 관한 얘기를 들었고, 그 이후로 일어난 사고로 유렌이 레베카와 연관된 이를 구하고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인델은 웅크렸다.

미혹에 빠져있는 슈페르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유렌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홀로 나서봐야 홀려 있는 슈페르트가 어떻게 나올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므로.

"당신을 정말 애타게 기다렸소."

그리 말하고도 한참, 유렌은 말이 없었다.

고민에 빠진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 끝으로 예상된 질문 하나가 나왔다.

"…죽었다는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인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이런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찌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실례하겠소."

아인델은 천천히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꽉 묶어둔 상의를 풀어 헤쳤다.

그러자,

"...!"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마도 끔찍할 것이다.

"지금은 이게 나의 심장이오. 말하지 않았소. 호문쿨루스는 생명의 가능성이라고."

스스로를 호문쿨루스화 했다.

사라진 심장을 대신해서, 스러져 가는 생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해선 안 될 일을 벌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소. 그러니 도와줄 수 있겠소…?"

스승으로서, 연구를 함께한 동료로서, 인연으로서.

아인델은 슈페르트를 구하기 전까지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086화. 헤이론 (4)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델의 행색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심장부는 무엇에 관통이라도 된 듯 크게 구멍이 나 있는 상태였으며 그 속에 검은 점액질의 무언가가… 저 호문쿨루스들의 몸을 이루는 물질이 차올라 있었다.

물질의 꿀렁임은 꼭 심장의 박동 같았다.

아니, 저것이 실제로 심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음이 통궤안을 통해 보였다.

'죽은 목숨을 붙잡는 기술?'

듣도 보도 못했다.

순간 떠올린 생각은 저 기술이 전쟁에 사용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나올까.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으나, 그런 감상에 취해 있을 때는 아니었다.

"저럴 수가...."

히스토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페토는 딸꾹딸꾹 헛숨을 들이켰다.

드러난 것에 다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아인델은 다시 한번 부탁했다.

아주 간절하게 미소 지으며 말이다.

"그래줄 수 있겠소? 내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할 터이니 부디...."

의미가 없는 질문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까.

"…예,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만."

"아아, 고맙소.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되오. 내 목숨은 그 아이의 구원을 위해 쓰이는 것으로 족하니."

걱정의 말을 미리 잘라버린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을 포기했다.

적어도 그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면 타인인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 * *

이후로는 줄곧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과정에서 내가 아는 정보를 털었다.

흑막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아인델은 그런 답을 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소. 악마가 나왔다는 것은 분명 소환자도 있다는 말이니. 나의 신중함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오.

그렇게 정해진 방침이 있었다.

―이곳에서 더 숨어 있겠소.

우선 아인델은 위기 감지에 능한 페토와 함께 거처에 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존재를 드러내기에는 당장 대공자의 반응도 미지수가 아니던가.

인지 조작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신의 맞은편에 서 있는 존재들이 뇌를 주물러 헝클어뜨린 것이다.

그 결과물은 악마밖에 모르며 그 정도도 지극하기 그지없음인데, 그것을 알고 풀기 위해 확실히 해둬야 할 게 있는 것이다.

―슈페르트가 연구한 자료가 있을 것이오. 그것을 모두 확보해 내게 가져와 주시오.

―그게 왜 필요합니까?

―내가 그 아이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오. 과격한 연구를 시작한 느꼈건만, 상세한 내용을 알기도 전에 이 꼴이 되어버린지라… 연구 내용만 안다면 목적을 유추하는 게 가능하오. 목적의 유추가 가능하다면 그에 어울리는 방책을 마련하는 것도 가능하오.

그 시점에서 회귀 전의 일을 넌지시 가설로 던져봤다.

소문으로 들었다는 식으로 전해봤는데, 그럼에도 답은 같았다.

―연구란 변수의 집합체인 법이오. 설령 그것을 목적으로 연구를 했다 한들 방법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확인하는 것이오.

반박이 불가했다.

확실히 지난 사건들만 해도 그 양상이 내 기억과는 조금씩 다르지 않았나.

회귀가 만든 나비효과였다.

부탁 자체가 어려운 것도 아니라 나는 수긍을 했고, 그게 지금.

"왔군. 수확은 있었나?"

"예, 일단 대공자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에 있습니까?"

돌아오자마자 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자가 뜨끔하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뭐지?'

생각하며 베아트리스를 보니 한숨, 대공을 보니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문득 불안해졌다.

"…뭡니까. 사고 쳤으면 빨리 말하십쇼. 그래야 대처도 할 수 있으니까."

태자가 머뭇거렸다.

한숨까지 푹 쉬며 마른세수를 하는 게 꽤 답답한 모양.

저러니까 도리어 무섭다는 걸 알긴 할까.

눈씨름을 이어가던 중 태자가 결국 사실을 실토했다.

"…조금만 손 댔네. 진짜 조금."

의뭉스러운 말이었으나 대공자의 방으로 가니 과연, 무슨 뜻인지는 바로 알겠더라.

기둥에 묶인 대공자의 눈이 아주 새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

"아니, 저 친구가 시비를 걸었다니까?"

"...아."

"나도 원만하게 해결하려 했네! 진짜라네!"

잡아두라고 했지 패라곤 안 했던 것 같은데.

말도 제대로 나누기 전에 적개심부터 키우면 어쩌잔 건가.

뒷골이 살살 당기는 중, 대공자가 입을 열었다.

"아아, 훈련사께서 오셨군요. 미쳐 날뛰는 개새끼를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삐죽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리는 미소.

그리고 형형한 눈빛.

나는 헛웃음을 흘렸고, 태자는 울컥 화가 솟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게! 저 찢어 죽일 불경한 태도 좀...."

"불경 타령은 궁에 가서 하는 게 어떠신지. 여긴 헤이론입니다만."

"오우."

"…저 씨발 놈의 새끼."

태자가 꽤 그리웠던 욕을 했다.

나는 박수갈채를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저 인간을 긁을 수 있는 인간이 또 있었을 줄이야.'

이것도 능력이라면 엄청난 능력이다.

악마에게 홀린 상태고 뭐고, 일단은 가산점이 들어갈 정도....

"한데 태사께선 개새끼 짖는데 간수도 안 하십니까?"

…아니, 감점이네.

내 입이 절로 열렸다.

"근데 이 새끼가 왜 남보고 새끼새끼 지랄이지? 너 나 아냐?"

대공이 흠칫했다.

"유렌! 내 아들이잖느냐. 네 동생이다!"

"…각하, 좀 나가 계시겠습니까?"

그걸 진짜 몰라서 묻겠냐고.

안타깝게도 감정은 안 전해졌는지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그래! 또래끼리의 대화를 방해했구나! 좋은 시간 되거라!"

좋은 시간이 될 거란 기대를 하는 건가.

대공이 나간 직후 나는 다시 대공자를 봤다.

곧장 적개심 가득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쪽은 또 어딜 두들기시려고?"

"에휴."

아주 독기에 가득 찬 것이 콕 찌르면 독부터 흐를 놈이었다.

* * *

헤이론의 대공자 슈페르트 헤이론이 성격 더러운 도련님이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처럼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닌 건 아니고, 저 녀석이 제도의 아카데미에서 지낸 4년간 보여준 퍼포먼스가 있어서 그렇다.

유명인의 삶이란 게 그렇다.

작은 행동 하나까지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는 법인데, 미래의 대공씩이나 되는 놈의 행적이 왜 입방아에 오르지 않았겠나.

녀석을 설명하자면… 그래, 일단 미남이라면 어떻게든 포장하는 영애들조차 혀를 내두르며 붙인 별명이 '독을 품은 입술'이다.

그렇게 심각한 별명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귀족 영애란 것들이 아름다운 것에게 얼마나 관대해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니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터다.

여하튼 그 정도로 입이 더럽다.

다가오는 인간에겐 죄다 막말을 일삼는 눈깔 뒤집힌 개새끼가 저놈이다.

'뭐.'

내 입장에서야 올해 겨우 열다섯 밖에 안 된 놈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황금 세대니 뭐니, 결국엔 당장 잘난 놈들이 아닌 '미래에 잘나질 게 확실한 놈들'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던가.

게다가 사춘기의 비행이라면 나도 그렇게 할 말은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감상적인 일이 지금 중요친 않았다.

"그래서, 일단 다 내보내긴 했거든. 이 정도면 말할 환경은 되나?"

놈과 대화를 요청하니 독대를 하고 싶단다.

하여 방에 있던 사람들을 다 내보냈다.

서재를 톡톡 건드리며 묻자 대공자가 답했다.

"…예, 한결 편하네요. 태자가 없는 점이 특히요."

"되게 싫어하네."

"그 인간 본성을 알고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차마 반박은 못하겠군.

이놈뿐만 아니라 황금 세대라는 것들 대부분이 태자를 싫어하는 걸 생각해보면 그게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고.

"그래도 능력은 좋아. 건국 황제의 재림이시라잖냐."

"제가 공적으로 그 인간을 모실 일이 그리 많진 않을 듯해서."

"3대 귀족가 후계자면 많을 텐데."

"계승하면 북부에서 안 나갈 겁니다. 저 인간하고 다시는 안 엮이고 싶거든요."

어깨를 으쓱하자 대공자도 더 말하지 않았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지.

"그럼 이제 얘기나 해볼까."

대공자가 상황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는 것 같진 않았다.

녀석의 침대에 걸터앉자, 미간을 찌푸린 대공자가 말했다.

"…걱정하는 게 뭔지 압니다. 레베카 그 년에게 아직도 홀려 있을 걸 걱정하는 것 아닙니까?"

"오?"

"듣는 귀가 있고 판단할 머리가 있습니다.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어요."

이건 놀라운데.

기르고어를 예외의 경우라고 쳐도 스스로 빠져나왔다 일컫는 인물은 최초다.

물론,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 그런 것은 다른 얘기지만 말이다.

대공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행동이, 스승님을 실망시켰다는 게 죄송할 뿐입니다."

대공자는 비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눈을 좁혔다.

'아직도 죽은 줄 알고 있다?'

하긴, 훈련을 명목으로 북부에 불려와 구금당하다시피 한 것으로 안다.

처박혀 있는 동안 주도적으로 뭘 알아보진 못했겠지.

의심을 지우기엔 이르지만 인과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나는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했고, 그러자 대공자가 말을 이었다.

"…홀려 있었습니다. 레베카의 속삭임은 그랬죠. 생명이 유한하고 모두가 다른 시간을 사는 건 참 슬픈 것 같다고."

"그래서?"

"저라면… 그 슬픔을 지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창조신이라도 될 수 있을 줄 알았단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자 대공자가 시선을 피했다.

"…호문쿨루스도 만들었으니까요. 그 이상이라고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네, 헛소리죠. 창조의 영역은 인간이 발을 디딜 자리가 아닙니다. 그걸 깨닫는 게 늦었던 거죠. 멍청하게도…!"

대공자의 얼굴 위로 분노가 서렸다.

"생각해보면, 그 여잡니다. 그 여자가 스승님을 해친 게 분명해요! 저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 여자한테 위로받으면서…!"

눈가가 충혈되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격한 감정에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한다.

호흡을 가다듬은 대공자가 이내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속죄를, 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속죄라?"

"스승님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이다가 끝났죠. 돌아가신 스승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래서 스승님의 연구를 이어받으려는 것뿐입니다."

대공자의 눈빛이 사뭇 형형했다.

저건 내가 아주 잘 아는 눈이다.

아무렴, 회귀 전의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봤던 것이 딱 저런 눈이었을진대 오죽할까.

그것으로 하여금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스승 공경이 지극한 놈.'

누구 씨가 제발 좀 본받아주면 좋을 태도다.

그걸 걸 떠나서는 그랬다.

아인델이 대공자를 표현하던 말이나, 지금 대공자가 아인델을 이르는 말만 봐도 사이가 각별했음이 보이지 않나?

그에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있었다.

'정말 멀쩡한 건가? 인지에 바뀐 점은 없다?'

아인델은 죽음을 위장한 후 대공자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

지금 대공자의 상황을 모르니 아직 홀려 있을 때를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할 리가 있겠냐.'

방심하다가 터져본 기억이 있어서 두 번은 못 그러겠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네 연구 자료 좀 내놔봐라. 숨겨둔 것까지 모두 다."

"그게 왜 필요한 거죠?"

"내가 너희들 뒤치다꺼리하고 다닌 건 알지 모르겠네. 하나 같이 앞에선 멀쩡한 척하면서 꼭 음흉하게 사고를 치더라고."

그러자 대공자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음, 익숙한 반응.

"네가 마지막인데, 나도 이제는 쉽게 가야지."

툭, 검지로 이마를 치자 놈이 화를 참는 기색으로 말했다.

"…거짓을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게 완전한 진실도 아닐 거잖냐.

"판단은 내가 하는 거고."

혀가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네.

* * *

슈페르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자신의 방을 이 잡듯이 헤집는 유렌의 모습에 작은 불안감이 생겼지만, 그것은 다스릴 수 있는 불안이었다.

'다 들켜도 돼. 어차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당장 탈출이 불가함은 안다.

그리고 유렌이 어떤 사람인지 또한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목적을 뻔히 알 것이란 것과는 다른 얘기였다.

'이걸 이해하는 건, 나와 스승님 뿐이야.'

달리 말해, 저 자료의 진짜 목적을 아는 것은 이제 자신 뿐이란 얘기다.

슈페르트는 이를 꽉 물었다.

유렌에게 한 말 중 거짓은 없었다.

실제로 레베카가 악마라는 말을 들은 후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가.

그날의 일들이 얼마나 후회스럽던가.

그러니 이 연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너무 명료했다.

연구를 완성하는 것.

그리하여 속죄하는 것.

―슈페르트, 너에게 맡기마.

그리하여 못다한 스승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내....'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리할 것이다.

"흠, 필체 존나게 더럽네."

슈페르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료를 뒤적이는 유렌을 노려봤다.

이변은 없을 터였다.

087화. 헤이론 (5)

티브리아는 소란스러운 대공저를 안정시키느라 바빴다.

보통 한파 때의 헤이론이라면 조용한 게 맞건만, 이번엔 이 시기에 태자와 태사, 거기에 성녀와 차기 마탑주까지 묶여서 왔다.

거물급 손님이 우르르 찾아오니 어찌 대공저가 휴식을 취하겠나.

그나마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북부 사람들이라, 기쁜 마음으로 대접을 준비하는 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식사는 거창할 필요 없다. 든든하게만 내어 오거라!"

티브리아 또한 껄껄 웃으며 기쁘게 이 열기를 감내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마냥 즐거움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일을 끝내고 나면 티브리아는 슈페르트의 방으로 갔다.

후계를 떠나 직접 배 아파 낳은 아들이다.

그 아들이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나.

"슈페르트, 어깨가 결리거나 하진 않으냐?"

"...."

"녀석, 어미가 말하는데 듣지도 않고."

티브리아는 내내 묶여 있던 슈페르트의 어깨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근육을 풀어주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터라는 생각이었다.

하나, 그에 돌아오는 답은 꽤 날이 서 있었다.

"그럼 풀어주시지요. 이리 묶어둘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함은 너도 알지 않느냐."

"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원래 안 괜찮은 놈이 그런 말을 하는 법이란다."

날 선 말에 철벽처럼 벽을 친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얄궂게도, 티브리아에겐 이것조차 그리웠던 '대화'였다.

아무렴, 슈페르트가 방구석에 박혀 입을 열지 않았던 게 몇 달이지 않던가.

겨우 얼굴을 보고 나누는 말이니 모친으로서 느끼는 안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미안하구나."

티브리아는 슈페르트를 끌어안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불편해하는 티를 낸다.

하지만 전처럼 날 선 발악을 하진 않았다.

이유를 모를 리가, 슈페르트는 원래부터 그런 아이였다.

"착하지. 내 아들."

"…어린애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아직 한참 어리단다."

험악하게 구는 주제에 정작 소중한 사람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들이 상처받을까 걱정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게 고작이다.

마치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다고 해야겠지.

그런 아들이었기에 티브리아는 진심으로 바랐다.

"네가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면 한다."

"...."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한단다. 수련에 미쳐서, 일에 미쳐서 널 돌보지 못했다. 나는 아비조차 일찍이 여윈 너에게 너무 매정했다."

사죄의 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이 죽었던 때, 슈페르트는 아직 갓난아이였다.

후계로서의 책임감이나 의젓함을 논하기엔 너무 어린아이 말이다.

그런 아이를 곁에 두고도 티브리아는 많은 시간을 쏟아주지 못했다.

아직 대공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았던 티브리아에겐 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이리 성격이 모난 점 또한 자신의 책임임이 분명했으므로.

하지만 슈페르트는 그 점을 단호히 부정했다.

"제국의 기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신 것뿐입니다. 어머니께선 조금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티브리아는 피식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하기는.

"의젓한 척은 됐다. 의지해주면 좋겠구나. 네 고민이 있다면...."

더 말을 잇진 못했다.

슈페르트의 입이 꾹 다물린 것이, 더 이야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으므로.

짧게 숨을 내쉰 티브리아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거라. 내 조사만 끝나면 한동안은 너와 시간을 써주마. 함께 산책이라도 다니자꾸나."

그리 돌아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나쁜 일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작은 목소리지만 확실히 들렸다.

티브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고, 그게 끝.

"그래, 믿으마."

티브리아는 방을 나섰다.

* * *

아인델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다음 날도 아닌 당일 저녁, 늦은 밤.

유렌은 슈페르트의 모든 연구 자료를 긁어와 그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료만 받았다고 끝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몸 상태가 문제였다.

눈이 멀어버린 이유로 자료를 직접 보지 못하고 목소리를 통해 전해 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베아트리스가 나섰다.

"21번은...."

우습게도, 그 순간 아인델은 미소를 짓게 됐다.

'아아, 역시 영특해.'

제자의 연구는 창의적인 관점으로 진행됐다.

아인델이 알던 대로 날카로운 통찰을 겸비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기존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 계산이었다.

함께 연구했다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아쉬움이 들다가도 홀로라도 연구를 멈추지 않은 노력을 생각하니 대견함이 더 크게 차올랐다.

그런 감상에 젖어 이야기를 이어 듣길 한참.

아인델은 최초의 목적을 생각하며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고, 그런 중이었다.

"…잠깐, 잠깐만."

"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인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그 부분을 다시 읽어줄 수 있겠소?"

"어딜 말하는 거죠?"

"거기, 직전 말했던 혼의 동력 이론 부분… 이, 일곱 번째 문장을...."

작은 거슬림이었다.

하지만 슈페르트의 개인 연구라는 생각에 더 꼼꼼히 채점하듯 따졌던 아인델은 괴리감을 느꼈다.

'…아니다.'

이게 아니다.

해왔던 연구와 최초 슈페르트가 연금술로 이루고자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이런 계산과 결론은 나와선 안 됐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 연구는.

"…혼은 결국 보조제다. 정체성을 부여하는 사고력, 물리력은 육신에 있으며, 혼의 역할이라고 해봐야 가능성의 생성이 끝. 이 부분 말인가요?"

명백히 금기를 향해가고 있었다.

덜컹!

아인델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저 이론을 알았다.

언젠가 생명 연금술의 역사에 있었던 사건들을 조사하던 중 꼭 닮은 이론을 본 일이 있으므로.

"아, 안 되오. 막아야 하오…!"

"왜 그러십니까."

유렌이 나섰다.

긴장감이 가득한 목소리였고, 아인델은 그에 황급히 답했다.

"만나봐야겠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절대 가만히 두어선 안 되오.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를 위해서라도!"

"아니, 그러니까 이게 대체 뭐길래…!"

"사자 부활!!!"

덜컥, 공간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아인델은 질린 낯으로 말을 이었다.

"생명 창조가 아니었소! 슈페르트가 연구하는 것은 사자를 부활시키는 실험이란 말이오! 우리가 잘못 짚었소!!!"

육신의 기둥 됨을 믿는다.

영혼의 힘은 그것을 위한 동력 따위로 제시한다.

이것은 멈춘 육신에 영혼이라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생체 활동을 재개시키는 연구였다.

절망이 아인델의 속에 차올랐다.

다만 지금이라면 그런 연구를 시도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절기! 지금이 한파 시기고… 오, 오늘 달이 무엇이오!"

"…만월입니다만."

"아, 안 돼!"

꽈당!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려던 아인델이 제 발에 걸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르신!"

히스토리아가 놀라 부축했다.

하지만 아인델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의 사례를 안다는 것은 달리 말해,

"막아야 하오! 어서 날 대공저로 데려가 주시오!"

그 결과까지 안다는 뜻이었으므로.

* * *

꿈이란 것은 대체로 명확하지 못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슈페르트의 꿈은 달랐다.

언젠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슈페르트의 꿈은 확실한 인과와 개연성을 가지고 특정한 사건과 상황을 보여줬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슨 조화인지, 슈페르트는 꿈을 통해 타인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몽마라도 된 걸까.

그런 생각도 떠올린 적이 있었으나, 그것과는 달랐다.

정확히는, 몽마가 슈페르트의 꿈에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은 잘 되고 있어?"

침대에 누워 생긋 웃는 여자가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천박한 복장에,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 위로 푸르게 올라온 핏줄 따위가 인상적인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외경의 종족이니 적이다.

단순히는 그렇게 볼 수 있겠으나, 생명의 연금술에 있어서 모든 생물은 동등하다.

집단적인 감정이 아닌 개인적인 감정으로 판단해, 저것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슈페르트는 꿈속 자신의 방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오늘이다. 내가 말한 것들은?"

"다 옮겨놨지. 응, 네가 말한 시약들이랑 다른 준비물도 빠진 건 없어."

슈페르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고, 이내 내쉬었다.

곧이다.

이 지지부진했던 연구가 끝을 맺는 것은.

"변수가 생겼다. 태자와 태사가 왔어."

"으음, 일단 탈출 자체는 도와줄 수 있는데. 그 다음은 어쩌게?"

"그거면 됐다. 한파 시기이니 따라 나오는 것도 힘들어. 나온다 한들 내 위치를 찾는 건 더 힘들 테고."

눈보라가 몰아칠 밤이다.

발자국 따위도 금방 사라질 터인 데다가, 탈출 루트도 이미 짜둔 상태라 찾는 게 쉽진 않을 터였다.

저 몽마의 말대로 탈출 자체만 성공시켜 준다면 더 위협거리는 없단 말이다.

서큐버스는 요사스럽게 눈웃음을 흘리며 다리를 꼬았다.

자신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으나, 슈페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박한 유혹은 그만둬라. 구역질이 나니까."

"너무하네. 그래도 우리 동료 아냐? 기념으로 한 번은 해줄 수도 있잖아."

"협력 관계일 뿐이야."

"아쉬워라. 너처럼 맑은 정기는 어디 가서 찾기 힘든데."

입맛을 다시던 몽마는 권유를 포기했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슈페르트에게 다가왔다.

슈페르트는 눈을 감았다.

이후의 일은 계획된 것이었으므로.

"딱 반나절이야. 네가 내 힘을 쓸 수 있는 건."

뇌 속에 정보가 새겨졌다.

몽마의 유혹, 그것의 사용법, 그리고 응용법에 관한 것이었다.

전신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비유가 아닌 물리적으로 그랬다.

이제 눈을 뜨면 현실이겠지.

정말 끔찍한 현실이겠지.

하지만 괜찮다.

더 끔찍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것이니.

"잠시 후에 봐.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겠네. 떨려라."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슈페르트가 눈을 떴다.

그러자 몽마가 사라진 방… 현실이 보였다.

직전과는 다르게 몸이 묶여 있었으나, 이젠 방해가 아니었다.

"점화."

화르륵―!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재가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뻐근함이 잠시, 묘할 정도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몽마의 힘이 냉기를 막은 것이었다.

방을 나서자 경비들이 있었고, 그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슈페르트는 손을 휘저었다.

"잠들어 있어."

털썩!

경비들이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슈페르트는 그들에게 달콤한 꿈을 주었다.

'괜찮아.'

누구도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

희생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 하나면 족한 일이었다.

잠시 경비들을 지켜보던 슈페르트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우...."

허공에 숨을 불어넣으며, 숨 속에 꿈을 불어넣으며.

대공저가 침묵하기 시작했다.

* * *

아인델의 말을 듣곤 먼저 저택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인 것은 혈압이 오르는, 그리고 예상된 광경이었다.

"끄윽…! 이제 왔나."

태자가 비틀거리며 날 마중 나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네. 어느 순간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네. 뭔가 이상해서 주술 베기로 베 봤는데...."

"쯧, 됐습니다."

휙, 허공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태자의 몸에 얽혀 있는 이능이 있었던 까닭이다.

졸음의 원인으로 보였던 것을 끊어내자 태자가 그제야 몸을 바로 세웠다.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공자는 어딨습니까."

"없네. 가장 먼저 방으로 향했는데 이미 사라진 후였어."

"염병하네. 진짜. 경비들은 뭐한답니까?"

"잠들어 있었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꽝―!

대공이 벽을 부수며 나타났다.

몸 주위에 불꽃이 번갯불처럼 튀고 있었다.

마나로 몸을 태워 잠을 쫓아내고 있는 꼴.

번들거리는 눈빛이 내게 쏘아졌다.

"슈페르트를, 찾으러...."

뭐, 그래야겠지.

다급해 보이기에 일단 말했다.

"뭔가 이럴 것 같덥니다. 오늘 일이 벌어진다 어쩐다. 이게 구도가 이젠 너무 익숙하더라고."

조금만 편하게 가주면 좀 덧나나.

매번 아슬아슬할 걸 생각하니 묘하게 불안한 게 있었다.

그걸 무시하지 않았을 뿐이고.

"그래서 따로 보냈지요."

"음…?"

"추적이야 나보다 잘하는 사람 많잖습니까."

태자가 눈을 끔뻑였다.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왜 여기에 혼자 왔겠나.

"찾으면 연락...."

말하는 순간이었다.

삐이이―!

허리춤에 걸어둔 통신기가 울렸다.

나는 눈썹을 들었다.

"바로 찾았네."

고생은 덜하겠다.

* * *

"설산이네요."

히스토리아가 눈을 끔뻑이며 아인델의 등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에 페토가 덜덜 떨며 답했다.

"으어어… 누, 누님, 이거 뒤지게 불안한데요?"

"하지만 저기로 가버린 걸요."

"저, 저는 빠져도 됩니까?"

그 말에 베아트리스는 짜증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이 날씨에 제 마법 없이 성채 안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던가."

페토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떨궜다.

아무렴, 이 한파 속에서 밖까지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베아트리스의 마법이 아니던가.

조금만 떨어져도 죽음이다.

페토는 그걸 알아 아무런 말도 못했다.

"굴? 아니면 신전?"

베아트리스는 먼곳으로 바라보며 의안을 조절했다.

그리하며 떠올리는 것은 이곳까지 오기 전 유렌의 말이었다.

―난 저택으로 갈 테니까 넌 성채 밖으로 나가. 뭐든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하면 쫓아보고.

―대공자가 저택 안에 있으면요?

―내가 통신기로 연락할게. 네가 발견하면 네가 먼저 울려. 아, 그리고 하나 더.

흔적을 찾은 것은 앞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막지 않고 뒤따라온 이유가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대공자 옆에 아무도 없을 리가 없거든. 일을 치를 거면 합류를 할 거란 말이지.

―아.

―본거지 찾을 때까지 잡지마. 통신기에 네 위치 수시로 표시해두고.

어디까지 내다본 것인지.

베아트리스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내가 잘해야 해.'

유렌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 흐름을 끊어선 안 될 터였다.

088화. 설산 (1)

베아트리스는 슈페르트를 쫓아 설산 어귀로 향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장소.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철문이었다.

물론 단순한 철문은 아니었다.

"신성력… 운명의 신성력이에요."

철문을 쓰다듬던 히스토리아의 말이었다.

심각한 표정에 저 말까지, 이번 역시 유렌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슈페르트의 배후에 있는 것은 외경의 운명 교단.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뚫고 들어간다?'

정면으로 맞선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베아트리스는 면밀히 가능성을 따져봤지만, 끝으로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힘들어.'

상대의 전력을 모른다.

아군 측의 전력이 모자라다.

자신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건 다 쓸어 담을 수 있겠지만, 지금 도움이 될 만한 건 히스토리아가 끝.

그녀조차 공격보단 지원에 특화된 형태에 남은 둘은 익스퍼트도 못 된 좀도둑 하나에 시력이 없는 노인이다.

싸움이 격해진다면 바로 발목이 잡힌단 말이다.

그렇다면 대기를 해야 하나?

'…아니.'

유렌이 늦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의수를 조작했다.

끼릭, 끼릭―

소음과 함께 마공핵이 드러났다.

직후 베아트리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추적, 투명화, 투과."

마법진이 완성되어 빛났다.

스으으―

운무가 퍼지며 네 사람을 감쌌다.

히스토리아가 깜짝 놀라 읊조렸다.

"잠입용 마법이네요…!"

"완벽하진 않아요. 적들이랑 가까워지면 쉽게 들킬 테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죠."

애초에 이런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놈들이 범상한 수준일 리가 없지 않나.

방심은 없었고, 그렇게 베아트리스는 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그렇게 마주한 게 있었다.

'…신전?'

철문 너머 크고 넓은 통로.

그곳은 베아트리스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양식의 거대한 신전이었다.

* * *

슈페르트는 철문을 넘어 신전에 닿았다.

마중나와 있는 것은 검보라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들.

펑퍼짐한 로브로도 숨길 수 없는 몸의 굴곡을 가진 몽마들이었다.

"어서오십시오."

"안내해라."

슈페르트는 시큰둥하게 지시했고, 몽마들은 킥킥 웃으며 그에 따랐다.

길은 복잡했다.

한번 본 것은 대체로 정확히 기억해내는 슈페르트조차 몇 번은 와봐야 길이 눈에 익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

한참을 움직여 신전의 중심에는 낯설고도 익숙한 몽마가 있었다.

"어서와. 슈페르트."

"…벨."

"후후, 내 이름 기억해주고 있구나. 기뻐라."

매번 꿈에 나와 계획을 함께해온 몽마, 벨이 제단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요사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슈페르트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정신을 붙잡았다.

그녀가 뿜어내는 피어가 심령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무슨 짓이냐."

"미안한데 아무것도 안 했어. 내 존재감이 그런 걸 어떡하니."

쿡쿡 웃던 벨이 몸을 일으켰다.

"너도 그냥 거슬리고 마는 수준 아냐? 이 정도는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쯧."

혀를 찬 슈페르트는 제단 위를 살폈다.

더 입씨름이나 할 생각은 없었던 까닭이다.

그의 손이 수많은 기하학적 문양이 음각된 제단을 쓸었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경이에 가까웠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 외신의 유산인가."

"우리 어머니의 상징이지. 여기까지 옮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신전 짓는 것도 일이었어. 원주인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잠시만 빌리겠다니까 그것도 싫다고 빼액~ 빼액...."

슈페르트는 벨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힘.'

몽마를 포함한 외경의 종족들을 창시한 외신들의 상징물.

'이것만 있으면....'

섭리를 거스를 수 있다.

외신의 힘은 이 땅의 법칙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목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에 슈페르트는 적잖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물론 그에 취해 섣부르게 행동하진 않았다.

"시약을 준비하지. 마지막으로 직접 점검하겠다."

"그 전에 말이야."

"뭐냐."

"우리 약속, 잊은 건 아니지?"

벨의 미소가 길게 찢어졌다.

슈페르트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나는 단 한 번 외신의 섭리를 허락받는다. 나는 너희들에게 혼의 그릇이 될 육신을 지어준다. 그런 계약이지 않았나."

처음 꿈속에서 만난 날 벨이 청해온 거래였다.

혹여 섭리로 인해 목적을 방해받고 있다면 자신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그러니 혼이 담기지 않은 육체를 하나 지어달라고.

'혼이 없는 육체라면 호문쿨루스를 만들어주면 된다.'

외신의 섭리를 빌리는 대가로는 작을 수도 있겠으나, 거래란 언제나 상대적 가치가 나뉘는 법이다.

생각해보라, 현시점에 호문쿨루스의 제작이 가능한 연금술사는 자신뿐이지 않던가.

그런 점으로 보면 이것은 참으로 공정한 거래인 것이다.

'그걸 어디에 쓸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슈페르트는 저들의 목적보다 자신의 목적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약을 하나둘 확인했다.

빠진 것도 없고, 농도에 오차가 난 것도 없었다.

벨이 호언장담한 대로 준비는 완벽하게 끝나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시간.

만월이 가장 높게 뜨는 밤.

'한파 시기엔 정령의 냉기가 신들의 눈을 가려. 거기에 달빛이 정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때엔 영력의 생성량이 크게 증가하고.'

혼이라는 에너지원이 공간에 가득해지는 시간, 동시에 신들의 눈이 가려져 외신이 현계에 간섭할 수 있는 시간, 장소.

이날을 지난 일 년간 기다려왔다.

지금을 놓친다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할 터이니,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이제 정말 곧이었다.

정말 조금만 더 한다면....

'…살릴 수 있어. 다 바로 잡을 수 있다.'

슈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하고 애처로운 미소였다.

* * *

나는 태자와 대공, 거기에 친위대 녀석들까지만 깨워 곧장 길을 떠났다.

어차피 잠에 든 것일 뿐이니 대공저의 사람들은 나중에 깨워도 무방했다.

그보다는 사건 수습이 먼저가 아니겠나.

한파 시기에 설산을 향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들 한다.

그 일을 무사히 수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베아트리스가 미리 만들어주고 간 휴대용 보온 아티팩트 덕택이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낙오되는 친위대는 위치만 찍어 따라오게 한 뒤 태자와 대공만을 대동해 설산에 닿았다.

20분… 아니, 15분.

마나까지 죄다 끌어와 달린 결과였다.

그렇게 나는 철문을 마주하게 됐다.

통궤안으로 읽히는 정보가 많았다.

'운명의 신성, 문의 두께는 50cm가량, 안쪽으로는… 쯧, 철문에 걸린 신성이 방해하고 있다.'

그럼 베아트리스와 나머지 셋은?

'마나의 흔적, 이미 들어갔어.'

투과 따위의 마법을 사용했다면 들어가긴 쉬웠을 터다.

이 문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자극에만 반응하니까.

선발대가 있고 그들이 무사하기까지 한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문제다.

"뚫을 방법, 생각나는 것 있습니까?"

"밀고 들어가면 안 되겠나?"

"말이 되는 소릴."

왔다고 광고라도 하게?

태자도 진지하게 한 소리는 아닌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한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부수고 들어가지."

눈이 충혈된 대공이었다.

조바심, 분노, 불안 따위의 감정이 마나로 화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걱정되는 것은 저 분노가 이성을 둔하게 만드는 상황.

"…각하,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식혀야 합니다."

"아네, 알고 있네."

그럼 표정 좀 죽이든가 하시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배 아파 낳은 아들이 저 어딘가에서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아들에 관해서 만큼은 그렇게나 아끼는 티를 내던 대공일진대 오죽 불안할까.

실제 회귀 전 과거를 생각해도 그랬다.

슈페르트가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대공은 스스로의 영혼을 불태워 정령들에게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었다.

'두 번은 허락 못해.'

전력 상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이대로 대공이 죽게 뒀다간 내 부모를 볼 면목이 없다.

저승에서 저놈은 뭐하냐는 소리나 하실 텐데, 그럼 내 얼굴 뿐만 아니라 누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것 아닌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방법을 찾을 테니."

"대체 언제까지…!"

"잠시."

여기서부터 쓰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것은 베아트리스에게 들은 마법의 요령 중 하나였다.

―수인(手印)이나 주문은 무시할 게 못 돼요. 상상을 구현하는 경험이 떨어지는 초보자라면 더욱이요.

―그래서 나보고 주문이나 소리치면서 싸워라?

―…그런 말은 아니었어요. 수인이나 주문은 분명 마법의 효율적 운용에 도움이 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였죠.

수인, 주문.

두 가지는 단순한 겉멋이 아닌 실제 마법 구현 효율을 올려주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걸 들으니 나로서도 드는 생각이 있지 않나.

금서고에서 얻은 통궤안의 강화 마법.

썼다 하면 후유증부터 날아오는 이 빌어먹게도 끔찍한 기술을 조금 더 덜 피곤하게 쓰는 법이 될 수도 있단 말이다.

하여 개인 교습 형태로 주문과 수인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 끝에 얻은 결실이라고 해야 할까.

"천통."

화아아악―!

마법의 출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머릿속을 짓이기는 듯한 고통이 아닌, 눈이 뜨거워지는 수준으로 통증이 줄었다.

하지만 그 정도라도 이가 악 물렸다.

관자놀이에 얹은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쓰러지고 싶었지만, 고통에 신음할 틈도 아까웠다.

마법이 아직 멀쩡히 발동되는 중인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므로.

'문을....'

들키지 않고 통과할 방법.

더불어 철문 뒤의 상황까지 알아봐야 했다.

통궤안이 철문을 투과했다.

그 구조를 낱낱이 헤집었고, 그 너머의 있는 것을 보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아.]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린 것은.

[이제야… 이제야 왔구나.]

흠칫 몸이 떨렸다.

집중이 흐트러지며 마법의 출력이 떨어졌다.

맑은 여인의 목소리, 그리고 시선, 존재감.

대체 뭐지?

무엇이 간섭해온 거지?

분명 내 시선을 느끼고 이 말을 내 머릿속에 직접 때려 박기까지 했다.

위기감이 순간적으로 치솟았다.

하여 통궤안의 마법을 거두려 했고, 그 순간이었다.

[아, 안 돼! 가지 말아라―!]

키이이이이잉!!!

"끕?!"

여인의 새된 목소리가 함께 이명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졌고, 내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그 순간 들은 목소리는 그랬다.

"유, 유렌!!!"

태자의 비명소리.

그것을 뒤로한 채, 내 시야가 암전됐다.

* * *

칼리오스의 표정은 단단히 굳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직전까지 문을 노려보며 방법을 강구하던 유렌이 갑작스레 바닥 아래로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걸 추락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꼭....'

다른 어딘가로 끌려간 것만 같았는데.

뭐가 됐든 예상치 못한 낭패였다.

머뭇거림이 차오른 와중에도 칼리오스는 생각을 이었다.

가만히 있는다면 무엇도 바뀌지 않음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대공."

칼리오스가 부르자 티브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대치 상태, 혹은 합의 과정.

두 사람은 잠시 유렌이 사라진 자리를 봤고, 이어서 철문을 봤다.

칼리오스의 입이 열렸다.

"…유렌조차 없소. 하지만 그 친구라면 어떻게든 빠져나오겠지. 지금은 한시가 촉박한 상황이오."

"아아,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가 저 안에 갇혀 있기도 하오."

"난 잠입에는 영 재주가 없소."

"전하께선 나와 닮은 점이 많군. 나 또한 잠입은 그다지."

"그럼 결정됐군."

칼리오스는 심호흡을 하며 몸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티브리아는 조바심이나 분노에 절은 낯짝으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녀의 주먹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칼리오스가 기수식을 취했다.

"중앙까지 일직선으로 뚫지."

그러자 티브리아가 답했다.

"난 슈페르트를 먼저 확보해보겠소. 전하께선?"

"이 안에 있는 외경 교단 놈들. 이번엔 꼭 생포로 잡고 싶은데."

"정해졌군."

그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익스퍼트 최상위에 오른 기사였으며, 사건 해결에 대한 견해도 꽤 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신형이 흔들렸다.

직후,

꽈아아아앙―!

철문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089화. 설산 (2)

몸이 아래로 푹 꺼지는 감각은 생각보다 불쾌하다.

더군다나 시야가 막힌 상태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너무 순간적인 일이라 대응하지 못한 게 컸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허우적댔는데, 그리해도 감각 어딘가가 망가진 건지 방향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 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당황스러운 기분이 치미는 어느 때였다.

푸확!

바닥에 닿았다.

정확히는 눈밭 위에 몸이 팍 꽂혔다.

"뭔…!"

냉기가 몸에 스며들어왔다.

호흡을 가다듬어 마나를 전신에 둘렀고, 그리하자 아티팩트와 감응한 몸이 열기를 되찾아갔다.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혹시라도 함정에 빠진 것이라면 남은 태자와 대공이 위험....

[아아, 다행이다. 정신이 드니?]

덜컥, 몸이 멎었다.

머릿속에 직접 꽂히는 음성 탓이었다.

나는 긴장을 더하며 말했다.

"…뭐야, 넌."

[적이 아니란다. 응, 오히려 나는 아군이지. 자, 괜찮으니 천천히 눈을 떠보렴.]

아이를 달래는 듯한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이를 깨물며 눈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점차 시력이 돌아왔다.

흐릿해져 있던 풍경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것이 사물을 구분 지을 정도가 될 즘이었다.

"...!"

내 눈이 부릅 뜨였다.

[후후, 너무 놀라는구나.]

얼음으로 지어진 거대한 홀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전신이 얼음처럼 반짝이는 5미터는 족히 넘는 키의 여자가 날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저게 무엇인가.

그 정체는 통궤안이 알려주었다.

'…정령?'

고위 정령이다.

황실 금서고에 있는 데아 수준의… 어쩌면 그 녀석 이상일지도 모르는 최고위 정령.

그걸 인지한 순간 그녀의 주변으로 눈송이 크기의 새하얀 소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호위하듯 여자를 둘러쌌고, 그 한가운데서 여자는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잘 와주었다. 우리의 기적이 될 아이야.]

그녀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 * *

철문을 부순 칼리오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저 멀리 지어진 신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각 국가의 특별한 건축 양식에 대한 교육을 받은 칼리오스가 보기에도 신전의 양식은 아주 이질적이었다.

다만 놀라움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상황이 썩 여의치는 않았다.

칼리오스의 눈이 좁아졌다.

"벌떼처럼 몰려오는군."

"인간이 아니구려."

"나도 아오. 사람이면 저렇게 날아서 올 리가 없지."

칼리오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적들은 땅을 딛지 아니하고 박쥐의 날개 같은 것을 펼쳐 날아오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저런 특징을 지닌 종은 이 땅에 하나뿐이었다.

"외경에서 손님이 오셨군."

"…남의 땅에 어딜 감히."

"당신 아들이 부른 손님 아니오?"

"웃기지도 않는 소리요."

화르륵―!

티브리아가 불꽃을 둘렀다.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포악하게 날뛰는 불꽃이었다.

"이 땅의 주인은 나요. 암만 슈페르트라 하여도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그 말 기억해두겠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실제로 칼리오스는 적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부터 꽤 반가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몽마.'

천박한 복장으로 살덩이를 흔들며 달려드는 꼴이 보기 역했다.

왜 저것들이 여기에 있을까.

그 답은 생각보다 뻔하게 나왔다.

'외경에 똬리를 튼 놈들이다. 접촉이 없는 게 이상하지.'

자세한 건 더 알아보면 될 일이다.

그보다는 당장의 일.

칼리오스는 무엇보다 적이 이종족이라는 사실에 적잖은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검의를 쓸 수 있다. 내가 아는 검의를.'

익스퍼트 최상위의 경지.

소드 마스터를 앞둔 만큼 칼리오스 또한 이제는 성장 방향성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유렌이 그 중요성을 지독하게도 언급한 까닭이었다.

―전하께선 모자란 게 없으십니다. 육체도 마나도 황실에서 금이야 옥이야 관리해 주었으니 깨달음도 솔직히 모자라진 않고… 그나마 경험이 영 일천합니다.

―흠, 그럼 별다른 주의사항은 없는 건가?

―그걸 지금부터 말할 겁니다. 잘 기억해두십시오.

유렌은 말했다.

―전하께선 이미 성질이 결정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시점에 신경 쓸 것은 그것을 어찌 통제할 것인가. 혹은 그 성질에 얼마나 큰 가능성을 심을 것인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되게 하는 게 '검의'입니다.

―검의?

―말했잖습니까. 제국검술이란 본디 이종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것은 달리 말해 건국 황제가 종족이란 개념을 '지배'에 복속시키기 위해 이 검을 지었다는 말도 됩니다.

―…아아, 알겠군.

―지금부터 마스터에 오르기까지, 전하가 생각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필요한 것은 '왜'라는 질문.

그것을 쉽게 풀어 말하길.

―그 검으로 무엇을 지배할 것인가. 많이 고민하고 경험하며 결정하십시오.

있어 보이게 말했으나 골자는 하나였다.

검의를 완벽히 사용할 정도는 되어라.

그래야 마스터에 오른 후에 무력적인 도약을 도모할 수 있으니.

쉬운 과제는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칼리오스는 이제껏 검의를 제대로 다룬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쓸 줄 아는 게 미숙한 주술베기.

원인으로 따지면 많은 것을 짚을 수 있겠으나, 일단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었다.

'제국 검술의 검의를 사용할 일이 없었지.'

칼리오스가 평생 배워온 검의 검의를 사용하려면 이종족이라는 상대가 필요했다.

한데 그런 적이 어디 찾기 쉬운 것들이던가.

와중에 이런 기회가 온 것이다.

이건 모자란 경험을 채우기 위한 최고의 무대였다.

기쁜 마음에 히죽대자 대공이 물었다.

"전하께선 여색을 즐기시오?"

"그다지, 첫사랑이 영 끔찍했던 터라."

"그렇다면 다행이군. 홀릴 일은 없어서."

"뭐, 여색을 즐긴다 하여도 저런 천박한 몸뚱어리는 썩 좋아하지 않소. 난 단아한 게 취향이거든."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소."

티브리아가 피식 웃으며 한 발 나섰다.

칼리오스 또한 검 위로 마나를 덧씌웠다.

'몽마를 상대하기 위한 검술이 뭐였더라....'

기억을 뒤져봤다.

제국 검술의 식은 모두가 각각의 이종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개중엔 분명 외경의 이종족들을 대비한 수도 있었고, 유렌이 그것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칼리오스는 그걸 기억해냈다.

'…그래.'

혼원식.

단순하게는 혼은 일깨워 집중력을 높이는 식이었고, 유렌의 설명대로라면 몽마의 환영에 저항하여 역으로 공격하는 식이었다.

칼리오스가 기수식을 취했다.

그렇게,

"그럼 나중에 보지."

"알겠소."

꽈아아아앙―!

섬전처럼 뻗어나간 두 사람의 신형이 달려드는 몽마들을 찢어발겼다.

잡졸들로 막기엔, 그들이 너무나도 명백한 강자였다.

* * *

구구구궁―!

공간 전체에 진동이 일었다.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일대를 휩쓸었고 그에 베아트리스의 중심이 살짝 흔들렸다.

겨우 중심을 잡곤 뒤를 돌아 일행을 확인.

히스토리아가 입을 떡 벌린 게 보였다.

"…이거 태자 전하죠?"

"네."

"지, 지금...."

"문 부수고 들어왔네요. 저쪽으로 적들이 몰리고 있고."

베아트리스의 입에서 한숨이 삐져나왔다.

유렌의 마나가 없는 걸 보니 다른 작전, 혹은 엇갈림일 것이다.

그걸 생각해도 너무 대책이 없었다.

대체 뭐가 있는 줄 알고 몸부터 들이민단 말인가.

역시 좋아하려 해도 좋아할 수가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뭐… 덕분에 움직이긴 조금 더 수월해졌다.

"경비가 허술해졌어요. 이제 길만 찾으면 돼요."

신전 내부 쪽에 포진되어 있던 적들 탓에 돌아돌아 움직이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한데 태자가 날뛰며 그중 절반 이상이 신전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 덕택에 운신의 폭이 조금 더 넓어졌다.

끼기긱, 의수가 마법을 조율했다.

의안에는 반쯤 작성된 신전 내부의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베아트리스의 신경은 아주 날카로워져 있었다.

'몽마는 상정 외야. 정신 방어를 추가해야겠어.'

생각지도 못한 적이었다.

아무렴, 외경 너머에나 있어야 할 것들이 왜 하필 이곳에, 그것도 운명 교단과 엮어 있단 말인가.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성녀님, 확실하죠?"

"…네, 저 몽마들. 운명의 신성력을 수여 받았어요."

몽마들이 운명의 신 휘하로 들어갔다.

외신의 피조물들이 운명의 신을 받드는 이유야 오리무중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저들의 신은 이미 이 차원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신을 잃은 종족은 먼 과거 창세 때 그랬듯, 승리한 신에게 귀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해야 할 점이 하나 더.

'다른 외경의 종족들도?'

운명의 신과 얽혀버린 게 아닐까.

이 점에 관해서는 유렌의 의견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여하튼, 당장은 대공자를 찾는 게 우선.

베아트리스는 숨을 몰아쉬는 아인델을 발견하곤 물었다.

"…괜찮아요?"

"으음...."

고개를 끄덕이지만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미 사라진 심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잠시 생명을 붙잡아둔 상태.

격한 움직임이 불가능함에 더불어 이리 페토에게 업혀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워 하고 있었다.

'안 돼.'

대공자를 설득할 거의 유일한 카드인 만큼 그는 절대 죽어선 안 된다.

"성녀님."

"치료하고는 있어요. 하지만...."

슬슬 치료로는 한계인 거겠지.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머리 아픈 거였구나.'

유렌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리더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에 이 세 명을 이끄는 일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남을 챙기는 것은 베아트리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유렌에 대한 감탄이 반,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자책감이 반.

차오른 감정을 어떻게든 억눌러낸 베아트리스는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지금까지 밝힌 부분만 보면 신전 중심에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그리하겠소. 내 방해가 되어 미안하오."

아인델이 핼쑥한 낯으로 사과를 건네왔다.

베아트리스는 공연히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탐색 범위를 조금 더 넓혔다.

* * *

벨은 몽마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그게 엄청난 권위와 권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 외신들이 이 땅에서 추방당한 그날 이후 외경의 이종족들은 모든 권위와 권능을 잃었다.

즉, 몽마의 여왕이란 직위는 그저 위대했던 선조의 휘광에 기댄 직위란 말이었다.

한때는 손짓 한 번으로 정신을 붕괴시킬 힘을 선사 받는 자리였건만, 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후 남은 것은 고작 타인의 꿈에 간섭하는 능력이 끝.

벨은 살아온 인생을 회고해 보았다.

당연히 쥐었어야 할 것조차 쥐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건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던가.

모멸감에 차 있던 삶은 회상하면 할수록 분노로 이성을 녹여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벨은 이내 시원스레 웃으며 분노를 털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끝이야. 이젠.'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지만, 오늘 이후 몽마는 과거의 영예를 되찾을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설원과도 이별이었다.

'운명은....'

뭐, 계속 협력을 유지하겠지.

애초에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

그리고, 아주 쓸만했던 이 능력도 얻을 수 없었을 테니.

"준비는 다 끝났니?"

"그래, 이제 제 시간에 시약 뿌리면 된다."

슈페르트가 확신에 차 말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랬다.

'지독하단 말이지.'

정신에 간섭해 무너뜨리는 몽마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운명의 여신은 참으로 끔찍한 면모가 있었다.

보아라, 이 작은 인간은 자신이 어떤 꼴로 영락할지도 모르고 희망에 차 발악하고 있지 않나.

그래도 귀여워하던 장난감이라 동정 정도는 품었다.

물론 그게 끝이었다.

"일단 우리 애들이 막아주고 있는데,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방해가 들어왔어. 네 친구들은 참 과격하네."

"걱정마라. 일단 시작만 된다면 그 이후는 나도 돌이킬 수 없으니까."

"응, 잘 부탁해."

제5 사도, 몽마의 여왕 벨.

그녀는 끝까지 호의에 찬 미소로 화답했다.

090화. 설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