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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

루비 마탑 부장, 홍예화는 눈썹을 찡그렸다.

눈앞에 매우 흔치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창가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홍연화.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구름을 좇는 듯하다.

세월의 덧없음을 깨달은 노인네 같은 모습이다.

평소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모습과 심히 대조된다.

이 사태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들려줄 사람은 단 하나, 홍연화와 같이 2 대 2 대인전을 치렀던 백준석뿐이었다.

메시지를 보내자 백준석이 루비 마탑 동아리실로 찾아왔다.

홍예화가 제 동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야, 저거 왜 저래?"

"...."

백준석이 손가락을 따라 '저거'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말입니다...."

2 대 2 대인전에 들어가서, 김호와 서예인 팀을 상대로 만났다.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

홍예화가 도중에 설명을 끊으며 물었다.

"김호? 혹시 배치 고사에서 졌다던 그 김호야?"

"예, 맞습니다."

"음, 끊어서 미안. 계속해."

첫 경기는 이리저리 불어 대는 강풍에 홍연화의 마법 시전이 취소되고, 결국 서예인의 저격을 허용하며 어이없게 패배했다.

두 번째 경기는 홍연화가 무슨 속셈에서인지 수비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김호와 서예인의 공격을 한 차례 막아 내고, 반격에도 꽤 괜찮은 성공을 거뒀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싶었는데.

멀찍이 서 있기만 하던 김호가 자신들에게 접근하자 경기가 순식간에 뒤집혀 버렸다.

손짓 몇 번에 백준석을 바닥에 패대기쳐 버리니, 혼자 남은 홍연화로서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두 번째 경기 역시 허무하게 기권 패로 끝나 버렸고.

"그랬구나."

홍예화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홍연화가 어쩌다 저렇게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가 됐는지 다 이해했다.

이제 막 루비 마탑을 벗어나, 우물 밖에서 실전을 치르기 시작한 그녀다.

같은 사람에게 3패, 그것도 손도 못 써 보고 압도적으로 패하는 경험을 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하지.

다 이해한다.

그러나.... 용납은 못 한다.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백준석이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홍예화가 홍연화에게 걸어가서 뒤편에 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튕기자,

- 펑!

홍연화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흐어으악!"

부지불식간에 화염이 폭발하자, 홍연화가 괴상한 비명 소리를 흘리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곧 불을 지른 범인인 제 언니를 발견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언니! 쫌!!"

홍예화는 동생의 반발에 더욱 성질이 뻗쳤는지, 가까이 달라붙어서 등짝 스매시를 날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화염으로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기에 이 등짝 스매시 역시 보통 매운 게 아니었다.

한 대 때릴 때마다 한마디씩 내뱉는다.

"뭘 잘했다고! 궁상을! 떨어 대!"

"아! 아! 그만해라! 그만해라 했다!"

"유망주 중에 벌써 3패나 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것도 같은 상대한테!"

"악!!! 나보고 어쩌라고! 그 사람만 2연속으로 잡히는데!"

- 펑!

화염이 한 차례 더 폭발하며 불길이 홍예화에게 옮겨붙었다.

홍씨 자매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부실 안의 온도가 급격히 치솟으며 백준석의 이마에 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것이 단순히 더워서인지, 아니면 그의 조마조마한 심경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홍예화가 다시 공세에 나섰다.

"똑같은 상대가 또 잡힐 것 같으면 잠깐 쉬었다 하든가! 네가 급하게 다음 경기 잡아 놓고 누굴 탓해!"

"악!!"

- 펑! 퍼펑!

백준석은 황급히 벽을 바라보고 섰다.

대화를 듣자 하니 자신에게 불똥이 튈 조짐이 보였다.

- 홍연화, 마음 다잡고 다음 경기 가자.

얼른 다음 대인전을 잡자고 제안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홍연화가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백준석은 필사적으로 벽을 응시했다.

지금 시선을 돌렸다간 백 퍼센트 화염 폭발에 휩쓸린다.

그리고 그는 홍씨 자매와는 달리 화염 마법에 내성이 없었다.

백준석의 시기적절한 회피 탓에 화풀이 대상을 잃어버린 홍연화.

하는 수 없이 제 언니한테 항의한다.

"언니가 뭘 아는데! 그 사람이랑 싸워 보지도 않았으면서!"

"...."

홍예화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순간 홍연화의 눈동자 속에 공포가 스쳐 지나간 까닭이다.

대체 그 김호라는 자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했길래 공포심까지 드는 걸까.

뭐 하는 사람인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다만 호기심 해결은 나중으로 미뤄도 상관없고, 지금은 바닥에 고꾸라진 동생을 일으켜 세우는 게 우선이다.

홍연화는 루비 마탑의 미래.

더 이상 패배감에 젖게 놔두어선 안 된다.

질 땐 지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야지.

홍예화가 삽시간에 모든 화염을 거두어들였다.

어조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앞으로 만날 때마다 져 주겠다고?"

홍연화는 흠칫 놀랐다.

경험상 이럴 때야말로 정말 신중하게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해서 그렇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간 화염 폭발이나 등짝 스매시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해서 홍연화는 한층 쭈굴해진 태도로 조심스레 답했다.

"아니이.... 만날 때마다 져 주는 건 아니고.... 나중에 다시 붙어야지.... 강해져서...."

"좋아, 그럼 멘토링 신청해."

"얘기가 왜 그렇게 돼?"

"강해져서 다시 붙는다며? 그럼 해야지."

홍연화는 여태 멘토링을 안 한다고 버티던 중이었는데,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꽤 유치했다.

아무한테나 배우기는 싫다.

언젠가 루비 마탑주의 자리에 오르기를 꿈꾸는 그녀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 끝에 마탑주 자리에 앉았는데, 웬 놈팽이가 예전 멘토라면서 찾아오는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속이 쓰리다.

아직 마탑주 자리는 멀고도 멀지만 아무튼 홍연화의 상상도에서는 그랬다.

그러니까 이건, 기분 문제였다.

멘토링을 받는다면 마탑회 소속, 아니면 최소한 강대 세력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청하는 입장에서는 누가 걸릴지 알 방도가 없으니, 홍연화의 눈에는 벌써 못 미더운 것이다.

다시 소심하게 반발해 본다.

"진짜 이건 안 하면 안 돼? 다른 거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홍예화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럼 선택권을 줄게. 멘토링을 신청하든가, 김호한테 결투를 신청하든가."

정 멘토링이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지금 김호를 쓰러뜨리고 오라는 뜻.

사실상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홍연화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하면 되잖아, 멘토링. 하면...."

"잘 생각했어."

홍연화는 언니가 보는 앞에서 신청서를 작성했다.

캐스터, 그리고.... 올라운더.

홍연화가 놓친 부분이라면,

'누구에게' 멘토링을 받는지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누구와' 멘토링을 받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54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3)

새벽까지 제1공방에서 보내고 기숙사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서 평소처럼 서예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김호:깸?]

[서예인:....]

[서예인:(째려보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밥?]

[서예인:(이불 덮는 고양이 이모티콘)]

[서예인:(돌아눕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저기요]

[김호:안 가?]

[김호:나 혼자 먹는다?]

....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쯤 지나면 그럭저럭 화가 풀리리라 예상했는데, 반응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윈드포스]의 단점 하나, 상대방이 본래 의도보다 화가 많이 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잠시 내 변호를 해 보자면 원해서 서예인을 대인전 상대로 만난 것도 아니고, 당시 윈드포스 외에는 견제할 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여자애를 뜨거운 모래밭에 데굴데굴 굴렸다는 죄목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

'이건 메시지로는 안 되겠는데.'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봐야 해결될 문제 같다.

혹시 몰라서 학생식당 앞에서 잠깐 기다렸지만, 끝내 서예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안 오려는 모양이다.

해서 오늘 아침 식사는 혼자 해결했다.

마늘빵에 커피를 후딱 해치우고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꽤 일찍 등교했기에 교실에 사람이 몇 안 되었다.

그런데 웬일로 그 몇 명 중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보인다.

"...."

자기 책상에 엎어져 있는 서예인.

인기척을 느꼈는지 엎드린 채로 눈만 빼꼼 내밀어 이쪽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다시 스르르 두 팔 사이로 가라앉는다.

나는 태연하게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서예인에게 물었다.

"너 아침 안 먹었지."

"...."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정황상 높은 확률로 확신했다.

'안 먹었네.'

아마 내가 보낸 메시지 때문에 잠이 깨기는 했을 것이다.

다만 같이 아침 먹는 건 안 내키고, 그렇다고 다시 잠들자니 시간이 애매하고.

해서 곧장 학교에 왔다는 시나리오에 무게가 실린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서예인의 책상 위에 종이봉투를 올려놓았다.

아직 뜨끈함이 남은 봉투에서 마늘빵의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하나 더 받아 왔지.

"...."

서예인은 잠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척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다 엎드린 채로 슬그머니 종이봉투에 손을 뻗더니, 마늘빵을 하나 집어서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내심 배가 고팠나 보다.

그렇게 마늘빵을 우물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직도 덜 풀렸구만.

겉보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이라 화가 났는지 풀렸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도 대화를 하자면 지금이겠지.

나는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어제는 내가 손을 과하게 썼다. 약점을 보여 주고 싶었어."

"...."

서예인의 눈동자가 조금씩 내 쪽으로 움직였다.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귀는 열어 둔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네 전투 스타일은 광역 스킬의 범위에 들어왔을 때, 위치가 노출됐을 때 급격히 취약해져."

저격 자체가 일점을 노리는 공격이다 보니 조금만 방해를 받아도 조준이 엇나가기 쉽다.

이번에 [윈드포스]가 그 취약점을 제대로 찔렀는데, 넓은 범위에 바람을 불게 해서 은신한 서예인을 찾기도 쉬웠고, 이리저리 물리력을 가해서 총구를 돌리니 마력탄이 엉뚱한 곳으로 발사되곤 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상대들에게서도 조금씩 체감하던 중일 터.

그렇다면 해결책은?

서예인의 귀가 쫑긋거리며 대답을 요구했다.

"[부동세(不動勢)]라는 스킬이 있다. 이걸 시전하면 방해를 받아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지. 대미지는 고스란히 들어오지만.... 한발 더 나아가면 [유체화(幽灵和)]라고, 아예 물리력을 흘려 버리는 스킬도 있고."

그 외에도 위치가 발각되었을 시 다음 저격 포인트로 빠르게 이동하도록 이동 스킬이나 은신, 회피기 등을 익혀 두면 유용하다.

"마력탄은 일단 기본은 잡혔고 파괴력도 제법 나오니까, 이다음에는 보조 스킬에 투자를 하면 어떨까 해."

"특강 해 줄 거야?"

"나도 웬만하면 직접 가르쳐 주고 싶은데, 이건 다른 총사한테 배우는 게 더 효율이 잘 나와. 귀찮아도 멘토링 받자."

"...알았어, 할게."

서예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멘토링 신청서를 슥슥 작성해 나갔다.

입으로는 마늘빵을 우물거리면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은 또 잘 들어요.'

처음 멘토링 얘기를 꺼냈을 때 반응을 보고 이건 쉽지 않겠구나 예상했는데, 의외로 한 번에 설득이 됐다.

본인도 필요성을 느껴서 그렇겠지만 가끔 보면 지나치게 순순히 잘 따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유가 궁금하기는 한데, 급하게 알아내려고 애쓰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차차 거리를 좁혀 가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문제는 얘 멘토인데....'

서예인이 내 앞에서 보이는 열의를 멘토 앞에서 똑같이 보일 거란 장담은 못 하겠다.

열의 이전에 컨트롤이나 될지 모르겠고.

그 인간백정 이수독 앞에서도 졸리고 귀찮은 티를 팍팍 내는데, 과연 멘토라고 다를까?

'모르겠다, 나도.'

지금으로써는 운이 좋기를 바라는 수밖에.

아니면 서예인이 멘토 앞에서 의욕이 넘치길 바라거나.

"오. 서 소저도 신청하나 보군."

언제 왔는지 고현우가 인사와 질문을 같이 던졌다.

서예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답했다.

고현우의 상태를 살펴보니,

"다 회복됐네."

"김 형의 말대로 만전의 상태를 만들어 왔소."

오늘은 꼭 못다 한 대인전을 끝마치겠노라 투지를 불태운다.

어제 학생 상점에서 구매한 표사의 장검, 표두의 장검도 시험해 보고.

나는 간밤에 제작한 아이템을 건넸다.

"이것도 같이 써 봐."

"이건...."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철제 클립.

얼핏 문방구에서 파는 클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정교한 부품들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눈에 띌 것이다.

마법공학 아이템이라는 증거다.

[튼튼이 클립(D)]

▷무기 내구도 보호

▷무기 내구도 자동회복

오로지 내구도만을 위해 특수 제작한 아이템.

[내구도 보호]는 무기가 손상되는, 즉 내구도가 깎이는 정도를 완화시켜 주고,

[내구도 자동회복]은 일정 시간마다 아주 조금씩 손상된 무기를 수리한다.

그래 봤자 많은 양은 아닌 데다, 계속해서 강력한 초식을 사용한다면 어차피 깎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상처에 연고와 반창고 구실 정도는 하겠지.

고현우가 클립을 셔츠 앞주머니에 꽂았다.

"든든하군. 잘 쓰겠소."

"나머지 대인전 치르고, 내일 같이 분석해 보자고."

"그렇게 하리다."

[튼튼이 클립]의 보조를 받는 E, D등급 무기가 F급 철검에 비해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 내일 리플레이를 확인해 볼 예정이다.

그 결과에 따라 다음 행보를 결정하면 되리라.

* * *

수업이 끝난 뒤 제4공방으로 직행했다.

자기 일을 보던 4공방 지박령 선배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왔냐."

"안녕하십니까."

어제에 비해 관계가 많이 개선된 느낌이다.

최소한 불편한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

재료도 주고받았고, 그것을 봉재석에게 솔직하게 밝혔음에도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

그러니 나와 엮인다고 어떤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겠지.

앞으로도 종종 거래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왕이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기도 하고.

한쪽 작업대에 자리를 잡고 봉재석의 실패작들을 꺼냈다.

혹시 몰라서 의뢰 기한을 길게 잡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최우선으로 해치울 심산이었다.

'그래야 [마력기관]을 받으니까.'

핵심적인 소재인 만큼 빨리 확보해 두는 게 낫다.

나는 곧바로 일에 착수했다.

[마법공학]을 시전하자 작업대 위의 모든 것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집중을 유지한 채, 커다란 고철 덩어리를 조금씩 덜어 내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손을 멈추고 공구를 내려놓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푸른빛이 삽시간에 사그라든다.

'많이도 나왔네.'

분해가 끝난 재료들이 작업대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이제 막 하늘이 붉어질까 말까 한다.

시작하고 지금까지 두세 시간쯤 됐을까.

그사이에 봉재석의 의뢰를 뚝딱 해결해 버린 것이다.

"끝났냐?"

"예."

질문을 던진 것은 3학년 선배였다.

얼굴에 감탄한 기색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는데, 이번에도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엿본 듯했다.

"야.... 나는 너 무슨 기계인 줄 알았다? 어떻게 앉은 자리에서 일 초도 안 쉬고 그걸 다 해치워 버리냐?"

어디서 많이 들어 보던 칭찬이었다.

한창 S급 영웅들을 마구 찍어 내던 때에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가설이 꽤 유력했었지.

오죽하면 나를 특수 NPC라고 착각하고 퀘스트를 받으러 오는 유저도 있었으니.

아무튼 봉재석의 의뢰는 일단락됐고, 자정에 제1공방 가면서 한 번에 전달하면 될 듯하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선배가 물었다.

"들어가게?"

"그럴 리가요."

우리는 동시에 잡동사니의 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튼튼이 클립]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고현우의 아이템은 다 만들었고, 이제 내 차례다.

내 무기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 마법공학이 들어가는 부분을 해결할 예정이다.

재료를 모으는 과정은 어제와 거의 같다.

포인트가 들어가는 부분, [열촉매 시약]은 고현우에게 공임으로 한 개 받았다.

이것 외 재료 일부는 실패작들을 해체해서 얻고, 일부는 어제처럼 이 선배님이 채워 줄 것이고.

"하는 김에 나 부탁 좀 들어줄 수 있냐?"

'하는 김에'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그 부탁이란 것이 아이템 분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잡동사니의 산을 가리키며 설명을 잇는다.

"실은 내가 저기서 필요한 게 몇 개 있는데, 그거 위주로 분해해 줄 수 있나 해서. 물론 너만 괜찮으면."

어제는 내가 분해하고 나온 재료들 중에 필요한 걸 골라서 물물 교환했다면,

오늘은 아예 처음부터 필요한 재료가 포함된 실패작을 고르고, 그걸 분해해서 교환하자는 뜻이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고맙다. 너 필요한 것도 최대한 맞춰 줄게."

내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재료만 얻으면 그만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편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우리는 잠시 잡동사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쇼핑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원하는 것들을 골라낸 다음, 작업대로 가져와 빠르게 분해했다.

이 실패작들은 봉재석의 의뢰보다 한참 쉬운 난이도였기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재료로 화했다.

그 재료들을 두고 곧장 거래가 이루어졌다.

"진짜 고맙다. 네 덕에 시간 엄청 절약했어."

선배가 나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재료 구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수고를 어제오늘 물물 교환 몇 번으로, 그것도 매우 저렴한 값에 처리했으니 고마울 수밖에.

나는 나대로 필요한 재료를 다 모았다.

이것도 자정에 제1공방에 가져가서 제작할 예정이다.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많이 남는데.'

봉재석의 의뢰에 두 번째 아이템의 재료 조달까지 마치고도 자정까지는 한참 남았다.

트레이닝 센터 가서 수련이나 할까, 아니면 당장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여분의 재료를 확보해 둘까.

그러나 이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일감이 알아서 나를 찾아왔기 때문에.

- 쟤야?

- 쟤 맞는 거 같은데?

제4공방 밖에서 두 쌍의 눈이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55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4)

제4공방 밖에서 안쪽을 엿보는 여학생 둘.

나한테 볼일이 있어 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그렇다.

게다가 딴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하지만, 멀리서도 대화 내용이 다 들렸다.

- 확실해? 쟤?

- 우리 부원도 아니잖아. 그리고 여기서 작업한다고 들었으니까 백 프로야.

- 그럼 네가 가서 말 걸어 봐.

- 같이 가자 좀. 넌 의리도 없냐?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찾아온 듯했다.

물론 내가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특정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저기 한구석에서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는 제4공방 지박령 선배를 제외하면, 자연스레 소거법으로 나만 남으니까.

여학생들이 마침내 공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는 굳이 먼저 반응하기보다 모르는 척, 하던 일에 집중하는 걸 택했다.

여학생들 역시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다가왔고, 근처에서 내가 실패작 하나를 깔끔하게 해체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나는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가기 전 잠시 공구를 내려놓고, 시선을 들어 올려 여학생들을 마주했다.

제1공방을 오가며 한두 번쯤 스쳐 가듯 봤던 얼굴들이다.

덧붙여 넥타이에는 3학년 핀이 꽂혀 있다.

마법공학 동아리 3학년 선배들, 그중에서도 1군에 드는 장인들이다.

"안녕하십니까."

"안녕. 봉재석한테 의뢰받았다고 들었는데, 맞아?"

짐작대로 선배들의 용건은 실패작 분해였다.

귀찮게 그지없는 일이다 보니, 누군가 그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준다면 무조건 확인하러 찾아오게 되어있다.

그 누군가의 실력이 꽤 괜찮다고 한다면 더욱.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작 몇 개 맡기셨습니다."

"봐라, 내 말 맞지!"

선배 하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다른 선배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우리 거도 같이 해 줄래?"

내 손재주는 방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테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격 흥정만이 남았을 뿐.

"공임만 충분하면 못 할 것도 없죠."

"봉재석한테는 뭐 받았어?"

"고급 재료 하나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면 돼? 뭐 필요해?"

"예, [웨더 칩]이나 [부유석 추출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봉재석에게 의뢰 보수로 받을 [마력기관]과 마찬가지로, 모두 내 무기에 들어갈 핵심 부품들이다.

곁가지 부분은 분해한 아이템을 쓰더라도, 무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는 고등급 재료를 써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EX급을 노리고 있으니까.

"어, 나 그거 있어!"

선배 하나가 즉시 인벤토리에서 [웨더 칩]을 꺼내더니 아예 선불로 건넸다.

다른 선배도 순간 움찔하는 걸로 보아 같은 아이템을 보유한 듯했는데, 이미 한발 늦었다.

다른 아이템으로 대신 주면 안 될까? 묻고 싶은 표정.

그러나 선배가 돼서 그러기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눈치다.

"부유석 추출물...은 지금 없는데, 내일까지 구해다 줄게."

"좋습니다. 하죠."

곧바로 실패작들을 넘겨받았다.

이 사람들도 마법공학 동아리 소속이라 그런지 밀고 당기기 없이 시원시원하다.

제작 계열 클래스들은 항상 시간에 쫓겨 살다 보니, 자기 시간을 아끼는 데는 꽤 후하게 비용을 지불하는 편이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듬뿍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자정까지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천천히 해도 되는데."

"시간 충분합니다."

"알았어. 고마워~ 이따 봐~"

용건만 처리하고 급히 제1공방으로 떠나는 두 선배였다.

본인들 앞으로 들어온 제작 의뢰도 잔뜩이니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순 없겠지.

나는 다시 공구를 들었다.

곧 작업대 위가 푸른빛으로 채워졌다.

* * *

"킁, 킁."

당규영은 옷소매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교복에 냄새가 밴 것 같았다.

지하 수로 청소.

던전섬 지하에 미로처럼 펼쳐진 통로를 꼼꼼히 수색하는 작업이다.

간혹 외부에서 흘러들어 오는 몬스터를 발견하고 처치하는 게 목표다.

당연한 얘기지만 하수구 특유의 퀴퀴한 악취를 맡아 가며, 어둡고 비좁고 습한 지하 수로를 돌아다니고 싶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씩은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쓸 일도 생기기에 더욱.

그렇다고 방치하면 몬스터들이 교내까지 침입할 수도 있는 터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해서 지하 수로 청소는 대개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징계로서 주어지곤 했다.

바로 당규영과 도둑 동아리 부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당규영 일당이 오늘치 작업을 끝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곽승재가 그들을 맞이했다.

항상 끝나는 시간을 칼같이 맞춰서 나타나는 그였다.

"끝나셨습니까, 선배님."

"엉. 봐라."

당규영이 영상기록 수정구를 휙 던지듯 건넸다.

이 수정구는 학생들의 대인전, 공략전에 쓰이는 리플레이 수정구와 마찬가지로, 지하 수로에서 벌어졌던 일을 낱낱이 기록하는 용도로 쓰인다.

이렇게 농땡이 안 치고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를 보여야 선도부 측에서 그날 치 징계를 빼 주는 것이다.

곽승재가 빠르게 수정구를 재생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인했습니다."

그는 수정구를 회수한 뒤, 가져온 단말기로 도둑 동아리 부원들의 학생증을 한 번씩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당규영이 물었다.

"야, 승재. 우리 얼마나 남았냐?"

앞으로 남은 징계 일수가 얼마나 되는가 묻는 것이다.

곽승재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앞으로 지하 수로 9일, 건물 보수 작업 5일, 외부 의뢰 2회씩 남으셨습니다."

"...졸라 한참이네."

그 말에 맞장구치듯 곳곳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딴에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징계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당규영 역시 사람이라 더러운 일, 궂은일 싫어하는 건 남들과 같았다.

특히 이 비릿한 냄새.

지하 수로 청소를 하고 나면 한동안 그 냄새가 코끝을 맴돌아서 식욕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불퉁한 표정을 짓는 당규영에게 곽승재가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부장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실눈이가?"

"예, 선배님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선도부장 오세훈의 전언, 그리고 당규영에게 좋은 기회.

대화의 흐름으로 미루어 보아 징계를 줄일 방법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거래라 함은 얻는 게 있으면 내어 주는 것도 있는 법.

당규영이 선수를 쳤다.

"미리 못 박아 두겠는데, 그때 얘기면 난 더 할 말 없다."

지난 임시 보관소 침입 사건에서 탈취당한 금지 아이템들, 그리고 [인페르노 피스트]를 썼던 복면인은 아직도 학생선도부 차원에서 추적 중이다.

오세훈의 전언이 이것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당규영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심산이었다.

이제 와서 김호를 팔아먹기도 싫고, 아이템들 대다수는 진작에 현금화했고.

곽승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기대도 안 합니다."

"그럼 뭔데?"

"한번 보시죠."

당규영은 곽승재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표지부터 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멘토링 활동 계획서>

휙휙 넘기며 핵심적인 내용만 간추리자면 대강 이랬다.

금년도 신입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은바, 학사 측에서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해서 이번 멘토링을 보다 밀도 있게 진행하고 싶다.

멘토 한 명당 신입생의 수를 평균 다섯 명 이하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존보다 더 많은 숫자의 멘토가 필요하다.

자격에 부합한다면 부디 멘토링에 참여해 주길 바란다.

당규영의 실력은 3학년 상위권.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 이끌기에는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다만....

'또 귀찮은 게 튀어나왔네.'

보모 노릇은 딱 질색인데.

지금 뒤에 있는 도둑놈들 이끄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 그녀였다.

그런데 여기서 케어할 사람이 더 늘어난다면?

심지어 멘티로 들어올 병아리들은 십중팔구 다른 동아리 소속, 즉 '남의 집 자식들'이다.

도둑놈들 대하듯 막 대했다간 그쪽 동아리와 마찰을 빚을 확률이 매우 높다.

반쯤은 상전 모시듯 해야 한다는 뜻.

거절하는 쪽으로 급격히 무게추가 쏠렸지만 당규영은 일단 말을 아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보고 결정해야지.

"그래서, 받으면?"

"이번 징계를 전면 탕감해 준다 하셨습니다."

"나만? 아니면 얘들도?"

"이번 징계에 포함된 인원 모두입니다."

"...!"

"...!"

당규영뿐만 아니라 임시 보관소 침입 사건에 연루된 모든 부원들이 해방된다.

도둑 동아리 부원들이 일제히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누가 보면 눈에서 레이저 빔이 뿜어져 나오는 줄 알겠다.

'부장님, 제발!'

'누님, 그냥 눈 딱 감고 오케이해 버리쇼.'

'받아들이는 게 부장님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입니다...!'

거절하면 하극상이라도 일으킬 기세.

'근데 이것들이...?'

감히 하늘 같은 부장님한테 무언의 압박을 가해?

당규영이 째릿 눈빛을 마주 보내자 시선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제 날 잡아서 한번 기강을 바로잡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규영이 선도부 측의 제안을 짧게 요약했다.

"한마디로 징계 대신 멘토 해라, 이거지?"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으흠.... 이걸 받아, 말아?"

당규영이 한쪽에는 징계, 반대쪽에는 멘토링을 놓고 열심히 저울질을 해 댔다.

어느 쪽이 명백히 이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수구 냄새를 안 맡는 대신 상전이 너덧 명 생기면 우환거리는 그대로니까.

곽승재는 당규영의 고민이 길어지는 듯하자,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해 봐."

"받으시는 게 맞다 생각됩니다."

"왜?"

"지금 도둑 동아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간 아니겠습니까. 심부름센터도 운영하셔야 하고, 곧 열릴 암시장도 준비하셔야 하고."

당규영이 홱 고개를 돌려 뒤쪽에 대고 물었다.

"야, 우리 보안 이대로 괜찮은 거 맞냐? 선도부가 우리 일정을 다 꿰고 있네!"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도둑 동아리가 밴 웨이브 다음에 임시 보관소를 노리리라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심부름센터 운영도, 암시장도.

게다가 곽승재의 말마따나 시간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선도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부원들은 아예 징계가 탕감되니 훨씬 운신이 자유로워지며, 당규영 본인에게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멘토링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신다면,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지도 모르지요. 용살학원이 이런 데는 철저하니 말입니다."

"그건 너무 긍정적인 관점 아닐까?"

"그래서 저도 크게 기대는 안 합니다."

"...."

당규영이 표정을 구겼다.

재수 없게 솔직한 놈.

그래도 곽승재의 말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은 되었다.

나지막이 혀를 차고 답한다.

"쯧, 하겠다고 전해."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로그 계열 스킬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나?"

"제가 알기로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곽승재가 고개를 젓고 덧붙였다.

"...선배님의 특기 분야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림자 술사 당규영.

그녀는 도둑의 온갖 비기에 통달한 달인임과 동시에,

마탑회 부장들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강력한 배틀메이지였다.

56화 리플레이 분석 (1)

약속 시각인 자정에 정확히 맞춰 의뢰받은 아이템들을 전달했다.

설마하니 정말 자정까지 끝낼 줄은 몰랐는지 봉재석과 선배들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곧 나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되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야, 쟤 우리 동아리 안 들어온대?

- 생각 없으시단다.

- 네가 적극적으로 안 꼬셔서 그런 거 아냐?

- 그냥 놔둬. 쓸데없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 그래도.... 스읍.

자꾸 나를 보면서 입맛을 다신다.

계속 근처에 얼쩡거렸다간 납치라도 할 기세라, 나는 짐짓 바쁜 척 준비해 온 재료로 아이템 제작에 나섰다.

그렇게 하룻밤을 투자해서,

'뼈대는 잡혔다.'

작업대 위에는 작은 심 형태의 부품이 놓여 있었다.

시험 삼아 마나를 불어 넣자 작업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것들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달그락거리는 소음을 만들었다.

아직 만들다 만 반쪽짜리라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지만, 진득하게 며칠 더 투자하면 완성할 듯했다.

* * *

대인전 수업은 담당 교사가 이수독인 만큼 항상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심지어 오늘은 그 분위기에 무게가 더 추가되었다.

이수독이 '그 단어'를 입에 담았기 때문에.

용살학원의 학생이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늪 같은 단어.

"숙제다."

학생들은 이수독이 농담이었다고 말하길 바라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그도 사람이니 가끔씩은 학생들에게 못된 장난을 치지 않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수독은 농담이나 장난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내였다.

수업 내내 유지하던 평이한 어조로 설명을 잇는다.

"수련과 실전을 거듭하는 것만큼 지나간 전투를 복기(復棋)하는 것도 중요하다. 금주 대인전은 여러모로 돌아볼 요소가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의 실력만 배양할 줄 알았지, 2 대 2처럼 타인과 합을 맞추는 팀 게임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대인전 주간에는 여러모로 색다른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합을 맞추면서 의도치 않게 실수도 많이 나왔고,

분명 해 볼 만한 상대인데 손발이 안 맞아서 어이없게 패하는 경험도 하고,

평소에는 힘겹던 상대를 팀원과 힘을 합쳐 쓰러뜨리는 경험도 해 봤으리라.

어느 경우든 복기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리플레이를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아군과 적군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이었는지, 서로의 전략은 무엇이었는지, 더 유효한 전략은 없었을지. 4경기 중 하나를 선택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기한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다."

아직 목요일이고, 이번 주 할당량인 4경기를 다 끝내지 않은 학생도 꽤 될 테니 기한을 넉넉하게 준 듯했다.

물론 보이는 것만 넉넉할 뿐, 다음 주에 또 무슨 숙제가 생길지는 모를 일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다.

"김 형."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수업이 끝나는 즉시 고현우가 내 근처로 다가왔다.

서예인 역시 무표정한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본다.

말은 안 하지만 숙제를 같이 하자는 뜻이 전달된다.

'마침 잘됐네.'

이미 고현우와 나머지 대인전 리플레이를 같이 살펴보기로 약속을 해 둔 상태.

서예인은 이 일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다 같이 분석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보고서 작성에도 제법 도움이 되리라 예상한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갑시다. 조용한 곳으로."

* * *

매점에서 마실 거리를 하나씩 사 들고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일전에 에메랄드 마탑, 대자연 동아리와 협상을 했던 그 장소다.

아래층에 제법 학생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이는데 위층은 여전히 인적이 드물었다.

큼지막한 원형 테이블 한쪽에 세 사람이 몰려 앉았다.

내가 가운데, 양옆에 고현우와 서예인.

"이것이오."

고현우가 내 앞에 리플레이 수정구 두 개를 내려놓았고.

서예인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미동도 안 하고 수정구를 응시했다.

입에 물린 빨대를 통해 방금 사 온 아이스티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완벽하게 관람모드에 들어간 상태.

나도 가져온 아이스티를 한 모금 하고, 첫 번째 수정구를 집었다.

"순서대로 보자."

곧 리플레이가 재생되었다.

첫 번째 경기에 참가한 인원들은 모두 고현우와 비슷한 600~700점대.

고현우의 팀원으로는 마법사, 상대편으로는 궁수와 전사가 나왔다.

다들 별다른 묘사가 필요 없을 만큼 전형적이었다.

가령 전사는 며칠 전에 붙은 백준석과 비슷한 검과 방패 스타일이었는데,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방어구가 판금 대신 가죽이라는 것 정도였다.

백준석보다 몸이 조금 더 가볍긴 하겠지.

[3]

[2]

[1]

[Start!]

- 쾅!

경기가 시작되고, 고현우와 상대편 전사가 격돌했다.

몇 합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현우가 압도하는 구도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안 봐도 저절로 예측이 될 만큼 뻔했다.

문제는 바로 다음 순간 발생했다.

고현우의 팀원인 마법사가 사달을 내고 만 것이다.

앞에서 근접 클래스들이 치고받는 중이면 당연히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무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곧장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두 손에 백색 구체들을 소환해 연이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좀 무모한데.'

저 백색 구체가 근거리 계열에 가까운 마법이라 접근해서 던져야 하는 건 맞다.

다만 근접전이 약한 마법사의 특성상, 상대에게 접근하기 전에 보험을 들어 두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육체 능력 강화 등의 버프를 걸거나, 방어 마법을 둘러치거나, 따로 소환수 등을 대동하거나.

그런데 저 마법사는 무턱대고 앞으로 튀어나오기만 했다.

고현우가 알아서 맞춰 주리라 믿었거나, 적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듯하다.

상대측에서 그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전사는 날아오는 구체를 방패로 쳐 내는 즉시, 고현우를 무시하고 마법사에게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공격을 상당히 허용하고 체력을 꽤 많이 잃었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마음가짐인 듯했다.

마법사가 워낙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참이었기에 크게 한두 걸음 뛰니 금세 코앞에 당도했다.

- 서걱!

내지른 일검에 마법사의 체력이 반 가까이 날아가며 거의 빈사 상태에 빠졌고,

- 푹,

뒤이어 가슴 한복판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상황을 주시하던 궁수가 날린 일격이었다.

마법사는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경기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이고?"

"...."

나는 고현우에게 대견함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저 상황에서 용케 쌍욕을 안 하고 참았네.

고현우도 내 시선에 담긴 속뜻을 알아채고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팀원의 심각한 트롤링 덕분에 경기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2 대 1이 된 상황.

이미 반 이상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고현우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 채 계속 검을 휘둘렀다.

전사와의 공방에서는 그가 우세한 데다, 어느 정도 피해도 입혀 둔 터라 아직 약간의 희망은 남았다.

두 근접 클래스가 전투를 이어 갔다.

금세 다시 압도하기 시작한 고현우였으나, 간간이 궁수가 날리는 화살을 쳐 내거나 피할 때마다 수세로 전환해야 했다.

밀고 당기며 맞붙던 도중.

고현우가 돌연 맹공을 퍼부어 틈을 벌렸다.

먼저 절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기세를 끌어올려 [청류]를 사용하자, 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며 부드러운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상대방 궁수에게 집중시키자 삽시간에 체력이 뚝뚝 떨어지더니, 오래 못 버티고 전투 불능이 되고 말았다.

아레나의 보호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온몸이 난자당하는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역시.'

다른 전투에서도 확인한바, [청류]로 불러일으킨 바람은 그 자체로 검기의 역할을 한다.

마법의 영역에도 한 발을 걸쳤다고 평가하는 건 저런 이유에서다.

- ...!

전사는 팀원이 순식간에 당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청류가 집중된 일검이 떨어져 내렸다.

- 파앗!

"이겼네."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소. 합이 잘 맞는 대신 일정한 규칙이 보이더군."

상대측의 팀워크 자체는 훌륭했다.

다만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것이 되려 서로의 행동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고현우의 눈에는 규칙적으로 보였던 것이고.

물론 지금은 완전히 숙달되지 않아서 그런 단점이 부각되는 거지, 앞으로 더 갈고닦을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워질 것이다.

첫 경기는 시종일관 끝까지 침착하게 운영한 고현우의 승리였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무기 좀 보자."

리플레이를 경기가 끝나기 직전으로 돌리고, 고현우의 무기를 확대했다.

포인트로 구매한 E급 무기, [표사의 장검].

검날에 금이 간 정도로 미루어 보아 내구도가 거의 바닥이었지만, 가까스로 부서지지는 않았다.

어제 만들어 준 [튼튼이 클립]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듯했다.

"청류 쓰고 버틴 건 이번이 처음이지?"

"그렇소."

대답하는 고현우의 안색이 밝았다.

언제나 고민거리였던 부분이 해결되려 하니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물론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마지막 경기까지 본 다음에 생각해야겠지.

"좋았어. 이제 다음 거 봅시다."

고현우가 다음 리플레이를 재생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나는 눈빛을 빛냈다.

'올 것이 왔구만.'

[고현우 785점 북궁한설 932점]

vs

[정수지 693점 박나리 998점]

여태까지 고현우의 승률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배치 고사는 조벽에게 1패를 제외하면 전승,

1주 차 대인전은 3전 전승,

이번 3주 차 대인전은 방금 본 리플레이가 4경기 중 3번째 승리였다.

때문에 점수가 가파르게 상승하며 800점대에 근접했고, 슬슬 900점대도 하나둘 만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양측에 한 명씩 나왔다.

북궁한설은 고현우와 같은 무인이었다.

북궁이라는 성씨와 무기를 들지 않은 두 손이 권장법의 달인임을 암시했다.

반면 상대는 상당히 낯이 익은 박나리, 정수지 듀오.

박나리는 드루이드, 정수지는 목토술사로 원거리 클래스다.

근거리 계열 둘과 원거리 계열 둘의 대결인 셈.

다만 저쪽은 마냥 원거리라고 볼 수는 없었는데,

- 으르렁,

박나리 옆에 앉아서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는 호랑이, '범이' 때문이었다.

57화 리플레이 분석 (2)

호랑이 범이는 평소에는 축소 마법으로 크기를 줄여 놓기에 손바닥만 하지만, 본래 모습은 저렇게 사람보다 더 크다.

'집채만 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었다.

범이는 박나리가 등을 부드럽게 한 차례 쓰다듬자, 낮게 그르렁거리고 앞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3]

[2]

[1]

[Start!]

범이가 몸을 한껏 웅크리더니,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눈 깜박할 사이에 고현우의 앞까지 쇄도해 앞발을 휘두른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민첩한 속도.

뿐만 아니라 앞발에 온몸의 무게가 가득 실려 일격이 묵직하고, 발톱에는 마나까지 맺혀 있다.

'영물은 영물이군.'

저 호랑이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600점대는 모조리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다.

앞발 한 대 얻어맞으면 턱주가리가 등 뒤로 돌아가 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무식하게 강력한 앞발을 고현우가 방어하자,

- 퍼서석,

한 합 만에 E급 [표사의 장검]이 명을 달리했다.

사실 꼭 범이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내구도가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이전 경기에서 많이 깎였던 상태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곧바로 D급 [표두의 장검]을 뽑아 드는 고현우.

- 파파파팟!

잠시 생긴 빈틈은 파트너인 북궁한설이 메꿨다.

그녀가 장력을 마구 쏟아붓자 호랑이 범이가 잠시 주춤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상인이네."

"제법 합이 잘 맞는 소저였소."

이전 경기의 마법사와는 달리, 팀워크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은 잡혀 있었다.

북궁한설은 짐작한 대로 권장법의 고수.

두 손에는 서리가 맺힌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한빙(寒氷) 계열의 무공을 익혔다는 증거였다.

고현우와 북궁한설이 본격적으로 합공에 들어갔다.

범이에게 검기와 장력이 마구 쏟아졌으나,

[박나리 94%]

[박나리 95%]

[박나리 97%]

그다지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가죽이 단단한 갑옷이라도 두른 것처럼 검기를 튕겨 내고, 조금 입힌 상처마저 엄청난 속도로 회복한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박나리, 정수지가 자리 잡은 본진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박나리에게서 싱그러운 초록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다.

'서포터 계열이구만.'

보호, 회복에 강화까지, 다양한 보조 스킬에 발을 걸치는 서포터형 드루이드.

스킬의 수준이 낮으면 이도 저도 아닌 잡탕이지만, 수준이 높으면 그야말로 만능에 가깝다.

그리고 박나리는 4대 세력의 유망주급이다.

정수지는 나머지 셋에 비해 별 존재감은 없지만, 이따금씩 흙탄환을 날려 보내거나 나무 덩굴로 발을 휘감아 두 무인을 견제한다.

곽지철과 같이 덤볐을 때도 깔짝대는 게 은근히 거슬렸었다.

번역하면 견제를 잘한다는 뜻. 칭찬이다.

박나리 측의 전략을 한 줄로 요약하면, 범이를 전방에 세우고 전폭적으로 보조하는 형태다.

장기전으로 가면 유지력이 좋은 박나리 측의 승리로 끝날 테니, 고현우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 구도를 무너뜨려야 한다.

나는 말 없이 리플레이를 지켜보던 서예인에게 언질을 주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해. 잘 봐."

"응."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가 고현우와 북궁한설의 판단력을 보여 주는 셈이니까.

두 사람은 먼저 가장 단순무식한 방법부터 시도해 보려는 듯했다.

정면 승부.

박나리의 보호 마법과 회복량을 상회하는 대미지를 입혀 단번에 결판을 내는 것이다.

기세를 끌어올리고, 각자의 절기를 꺼내 일순간에 쏟아부었다.

[청류(淸流)]

[빙극설혼장(氷極雪魂掌)]

바람의 칼날과 한파가 몰아쳤다.

- 콰콰콰콰콰—!

그러나....

[박나리 79%]

호랑이 범이는 그마저도 버텨 냈다.

체력이 꽤 떨어졌으나 치명적인 피해까지는 입지 않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차오르는 중이었다.

[박나리 79%]

[박나리 80%]

[박나리 82%]

- 으르렁,

범이는 영악하게도 회복하는 동안은 방어와 회피 위주로 대응하며 버티기만 했다.

"사실 정면 승부가 제일 어렵거든."

"옳은 말이오."

내 말에 고현우도 동의를 표했다.

정면 승부는 단순한 대신 매우 높은 기량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상대보다 두세 수는 위에 있어야 범이를 손쉽게 압도할 텐데, 두 사람의 기량은 박나리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살짝 떨어지는 편이겠지.

[박나리 100%]

기껏 열심히 때려 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상 복구된 범이의 체력.

리플레이를 보는 사람들까지 힘이 빠지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그러나 고현우와 북궁한설의 눈에는 여전히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짧게 몇 초간 작전 회의를 하나 싶더니, 양옆으로 갈라지며 같은 절기를 사용한다.

이번에는 범이가 아니라, 박나리와 정수지가 위치한 본진으로.

- 콰콰콰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건 좋았다."

고현우가 첫 경기에서 썼던 수법과 비슷했다.

원거리 공격으로 상대적으로 약한 후열을 먼저 노리는 것.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답해 보라는 듯 옆으로 시선을 보내자, 서예인이 나를 흘끔 마주 보더니 빨대에서 입을 뗐다.

"...너무 시간을 많이 줬어."

"그렇지."

박나리 정수지 측에서는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원거리 공격이 적 본진에 도달할 즈음에는 이미 흙벽과 나무 덩굴을 비롯한 방어 마법들이 겹겹이 둘러쳐진 뒤였다.

- 크허헝!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범이가 달려들며 흐름을 끊었다.

북궁한설에게 몸통 박치기를 가하자 그녀의 신형이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뻥 튕겨 나갔다.

고현우는 어쩔 수 없이 범이를 뒤쫓아야 했다.

"여기서부터 꼬였구만."

"그렇다오. 아쉬운 일이지."

박나리와 정수지 측에서도 계속 상대가 이 방법 저 방법 시도해 보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꾸준히 흔들며 정신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후에는 앞선 두 전략과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었고 번번이 철옹성 같은 방어에 막힐 뿐이었다.

- 퍼석,

[청류]를 네 번쯤 연이어 사용한 시점에서 D급 [표두의 장검] 역시 내구도가 다했다.

고현우는 그 뒤에도 철검 몇 개를 더 깨 먹으며 분전했지만, 끝내 기울어 가는 경기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남은 시간 0:00]

[고현우 북궁한설 Lose]

vs

[정수지 박나리 Win]

결과는 제한 시간 10분을 모두 소모해서 판정패.

"두 분에게 부끄러운 경기를 보였구려."

"아니야. 유망주 상대로 이 정도면 잘 싸웠어."

아직 고현우가 쓰러뜨리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충분히 질 만한 싸움에서 졌으니 실망도 안 했다.

고현우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 형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서예인 역시 궁금하다는 듯 빤히 나를 보았다.

나는 리플레이 수정구 속 사람들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런 상황이면 역할을 나눠 봤겠지."

"역할 분담이라...."

한 명이 호랑이 범이를 붙잡아 두는 동안 다른 한 명이 본진을 타격하는 방법.

빙공의 제어하는 특성을 살려서 북궁한설이 전자, 상대적으로 파괴력이 높은 고현우가 후자를 맡는 게 이상적이다.

적진까지 파고드는 길도 순탄하다곤 못하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근접전에서 두 캐스터의 방어를 뚫고 베어 넘기는 건 훨씬 쉽다.

고현우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내 작전을 그려 보는 듯했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요. 왜 거기까지 생각이 안 닿았을까?"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범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덮쳐 와서 정신이 없기도 했을 테고, 제한 시간 10분이 시시각각 줄어드는 압박감 역시 사고를 제한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새로운 작전을 떠올리고 팀원과 의견 조율까지 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다음에 더 잘하면 돼. 보고서에는 이 정도 쓰면 될 것 같은데, 더 물어볼 거 있냐."

"...."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해서인지 고현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예인에게 눈길을 보내자 마찬가지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둘 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니 이만하면 감을 잡았겠지.

"이제 보고서에 못 넣는 얘기를 해 보자. 솔직히 방금 말한 방법을 썼어도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 그렇소?"

"스펙 차이가 너무 심하거든. 특히 장비."

보고서에 '상대랑 스펙 차이가 나서 졌어요'라고 썼다간 이수독이 뒤통수를 후려갈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고서에서는 뺐지만, 스펙 차이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박나리는 길드연합의, 대자연 동아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유망주다.

익혀 놓은 스킬과 특성의 폭이 매우 넓어 본신의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아이템으로 도배를 했다.

최근에 나와 거래한 [생명의 큐브]도 포함해서.

반면 고현우가 가진 것이라곤 칼 한 자루가 전부.

그마저도 명검과는 거리가 먼데다, 깨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고작이다.

잠시 내 말을 곱씹던 고현우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는 것도 당연했구려. 상대의 실력이 본인의 아래가 아니었는데 준비까지 철저했으니.... 반성해야겠소."

"스펙을 박나리 수준까지 맞출 필요는 없어.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지. 저쪽은 거의 동아리 살림을 한 사람한테 퍼붓는 건데. 몇몇 핵심적인 대비책만 들고 있어도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거다."

"그런 게 있단 말이오?"

고현우는 솔깃한 표정이 되었다.

서예인 역시 조만간 박나리 같은 상대와 만날지 모른다 생각했는지 가만히 내 말에 집중했다.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검(魔劍)."

정확히는 '치유 감소' 저주가 부여된 마검으로 바꿔 드는 것이다.

가령 [굶주린 톱니검]으로 상대를 드륵 긁으면, 일정 시간 동안 상대가 받는 회복을 톱니검이 흡수한다.

[내장 쑤시개]에 당한 대상은 회복 마법에 되려 추가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끔찍한 고통은 덤.

치유 감소 외에도 마비나 중독 상태이상을 부여하거나 마법사의 배리어만 전문적으로 깨뜨리는 등, 보유한 검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의 폭도 넓어진다.

최상위권 검사들의 인벤토리를 들여다보면 명검 전시회가 따로 없다.

총사는 검은 안 써도 다양한 [특수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설명을 모두 듣고 고현우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과연.... 아직 아이템에 대해서는 많이 무지하오. 김 형에게 또 하나 배우는군. 새삼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오."

"네 말대로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이제 3주 차밖에 안 됐으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는 말고."

"명심하리다."

"그럼 아이템 얘기 나온 김에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현재 고현우가 다양한 명검을 수집하는 것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것.

바로 내구도 관리다.

우리가 리플레이를 같이 보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고현우가 여태 가장 많이 썼던 초식인 [청류]를 기준으로, E급 장검은 가까스로 한 번, D급은 네 번 쓸 때까지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을 토대로 대강 계산을 해 보면.

"B급 이상에 내구도 관련 아티팩트 몇 개 더. 그럼 깨질 걱정은 거의 없어지겠지."

"B급이라....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소."

"지금은 너무 먼 목표긴 해. 징검다리 격으로 C급만 써도 당장은 큰 문제가 없을 거다."

다만 C급도 결코 흔한 랭크는 아니다.

개중에 괜찮은 건 2학년들도 쓰는 수준이니.

고현우가 카탈로그를 꺼내 '장검' 항목을 확인했다.

조금씩 학생 상점 이용에 익숙해지는 그였다.

다만 포인트로 C급 무기를 사려면....

"만만치가 않군."

"비싸지. 포인트는 아껴 둬. 소모품에 쓰기는 아깝잖아."

[표국 시리즈]는 반쯤 실험용으로 산 데다, 랭크가 낮아 포인트 부담도 적었다.

그러나 C급부터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언젠가 반드시 파괴될 소모품에까지 포인트를 들이부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다른 방법으로 얻으면 그만이다.

돈도, 포인트도 안 쓰고.

고현우의 시선이 나를 따라 한쪽으로 이동했다.

시야 한쪽을 차지하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동산.

던전동.

"드랍으로 먹는다."

58화 리플레이 분석 (3)

던전동 지상층의 인공 던전들은 오로지 학생들의 교육과 시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위험 요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여러 단계의 안전장치가 학생들을 보호한다.

치명적인 부상이 예측될 시 곧바로 학생을 던전 밖으로 튕겨 내는 '이탈 장치'가 대표적인 예시다.

반면 던전동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던전들.

용살학원이 세워진 이 섬을 <던전 섬>이라고 부르게 만든 무수한 던전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실전이다.

공략 중에 일이 잘못 풀리면 다치는 건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다.

그 대신 위험도에 상응하는 보상 또한 주어진다.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주어지거나, 보스 몬스터가 떨어뜨리거나, 던전 곳곳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기도 하다.

설명을 듣던 고현우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는 말은...."

"무기도 드랍이 되지."

C급, B급 무기도.

고현우의 표정이 특수연공실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해졌다.

그러나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도중에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헌데.... 지금은 불가능하지 않소?"

"아직 대인전 주간이니까."

던전동은 공략전이 열리는 다음 주에나 열린다.

며칠간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큰 걸림돌이 있는데,

"어차피 다음 주에도 지하는 못 내려가."

"그건 왜 그렇소?"

"자격이 안 되거든."

목숨을 건 실전에 갓 입학한 1학년을 투입할 리가 없다.

만에 하나 후유증이 남을 만큼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장래의 영웅 후보가 하나 줄어드는 셈이니까.

지상층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고, 내·외면으로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한 자들만이 아래로 내려갈 자격을 얻는다.

해서 지하로 내려가기 위한 최소 조건, 즉 F급 던전의 입장 조건은.

"공략전 누적 점수 5,000점. 포인트랑 무관하게 순수한 던전 클리어 점수만 집계해서."

"으음...."

고현우가 학생증을 꺼내 뒷면을 확인하곤 침음을 흘렸다.

보나 마나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현재 내 공략전 총점이 정확히 2,266점이다.

[픽스 존]은 683점으로 중상위권,

[고블린 늪지대]에서 서예인과의 듀오는 728점으로 최상위권,

솔로 플레이는 855점으로 볼 것도 없이 학년 1등이다. 리플레이 저장은 안 했지만.

합산 랭킹은 상위 5%에서 10% 사이인데, 이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몇 주는 더 공략전을 진행해야 F급 던전에 발이라도 들일 수 있다.

심지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F급 따위가 아니라 더 상위 랭크 던전들.

E급, D급, 그리고 그 위는 더 점수를 쌓거나 시험을 통과해서 순차적으로 해금해야 하니, 사실상 1학년 1학기 중에는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고현우가 물었다.

"하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는 것 아니오?"

"공식적으로는."

"공식적으로는...?"

고현우가 내 말을 되뇌었다.

곧 그 속뜻을 이해했는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꼭 용살학원에서 정해 놓은 대로만 하라는 법은 없지.

"몰래 들어가면 돼."

이런 때를 위해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가 있는 것이다.

도둑 동아리는 금지 아이템 거래를 비롯해 다양한 교칙 위반 사업에 발을 걸치고 있다.

자격 미달인 던전에 몰래 입장하게 해 주는 것도 그중 하나.

신병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호:심부름]

[신병철:어디십니까손님]

[김호:매점 2층 테라스]

[신병철:바로가겠습니다손님]

"신 형을 부른 거요?"

"어. 금방 올걸."

기다리면서 슬쩍 서예인의 반응을 살폈다.

대놓고 교칙 위반을 하겠다고 떠들었는데도 그러려니 하는 태도.

지금은 마시는 아이스티에 더 관심이 많은 느낌이다.

'그러시겠지....'

예상대로 교칙 위반에 별다른 반감은 없는 것 같다.

아예 교칙에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까.

그렇다면 언젠가 서예인의 필요에 따라 함께 지하층을 공략할 일도 생길지 모른다.

저 부잣집 아가씨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소리다.

메시지를 보낸 지 5분도 안 돼서 신병철이 튀어 왔다.

심부름 서비스답게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여기들 계셨구만? 어떻게 도와드릴까?"

"던전 좀 들어가려고."

"던전? 다음 주에 열리는 건 알지?"

"월요일 저녁 생각하고 있어."

"월 저녁 딱 좋지, 번호가 뭔데?"

"388번."

"보자, 보자.... 388번이면...."

신병철이 수첩 비슷한 것을 꺼내 잠시 뒤적거렸다.

던전 정보를 확인하는 모양이다.

"...[깃털뱀 제단]? D급이네?"

"어."

"4인 던전인데 누구누구 들어가?"

"나랑 얘, 둘만."

신병철이 나와 고현우를 번갈아서 보았다.

그리고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괜찮겠냐? D급에 4인 던전인데."

우리 걱정 반, 자기 걱정 반이다.

혹여 우리가 던전에 들어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몰래 들여보내 준 신병철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D급이라면 우리 실력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네 명이서 해야 할 것을 둘이서 한다고 하면 그게 될까,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죽진 않겠지. 수틀리면 바로 튀고."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쟤도 자기한테 피해가 안 생긴다는 확신이 들어야 이 일을 맡을 테니까.

신병철은 고현우에게도 확인차 물었다.

"너는? 괜찮냐?"

"본인은 김 형을 믿소. 다 생각해 둔 게 있겠지."

고현우의 대답은 맹목적이라 느껴질 만큼 단호했다.

질문을 던진 신병철이 되려 머쓱해 했다.

"...에이, 그럼 그래라. 월요일 저녁에 준비해 놓을게."

"보수는?"

지하층 던전에 잠입시켜 주는 과정은 여러모로 까다롭고 위험 부담도 크다.

해서 당연하게도 일정 보수를 도둑 동아리 측에 지불해야 한다.

선불로 내기도 하고, 던전 클리어 보상의 일정 지분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병철은 손사래를 쳤다.

"아유, 우리 사이에 보수는 무슨. 저번에 빚 있지? 그냥 그거 갚은 걸로 쳐."

밴 웨이브 당시 금지 아이템을 모조리 압수당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내가 그것들을 [생명의 큐브]에 숨겨 줬다.

덕분에 신병철은 선배들에게 변사체가 될 때까지 두드려 맞을 운명에서 벗어나, 적당한 수준의 구타와 머리 뽑힘으로 그칠 수 있었고.

그 빚을 지하층 잠입을 공짜로 도와주는 거로 퉁치겠다는 말이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다시 봤네."

"에이, 누가 들으면 무슨 은혜도 모르는 놈인 줄 알겠네. 사나이 신병철, 다른 건 다 떼먹어도 의리는 지킨다, 이 말씀이야."

"그러시군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건 다 떼먹는구나.

쟤한테는 뭐 빌려주지 말아야지.

덧붙여 신병철이 공짜 얘기를 먼저 꺼내는 데에는 그것 말고도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리고 솔직히.... 나도 지하는 딱 한 번 내려가 봤거든. 당 누님 따라서. 이번에 경험 좀 쌓자."

"...."

그 역시 1학년이라 경험이 적었던 것이다.

당규영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 본 게' 한 번이고, 미숙한 길잡이의 첫 손님은 우리가 될 예정이다.

고현우가 나에게 눈빛으로 이래도 괜찮은가 물었다.

100% 확실하게 하고자 한다면 2학년 이상을 고용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신병철의 실력은 다소 못 미덥지만, 그래도 도둑 동아리로서 기본은 되어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내가 나서면 그만이고.

"우린 상관없어. 처음이라고 대충 하지만 않으면."

"아유, 당연한 말씀입죠. 최선을 다해 모셔야지. 이걸로 끝입니까, 손님?"

"아니, 하나 더."

"또 던전? 어디."

"104번."

"104...?"

신병철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기 수첩을 확인하곤 미간이 더 좁아진다.

"104번...[흑사방]. B급인데. 뭐 잘못 안 거 아냐?"

"제대로 봤다. 흑사방 맞아."

"이건 심층부 던전인데.... 야, 솔직히 이건 내가 어떻게 못 도와주겠다."

신병철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S부터 B랭크 사이의 던전들은 던전동 가장 깊은 곳, '심층부'에 존재한다.

일반 학생들은 접근조차 불가능하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발각되는 것만으로도 최고 수준의 징계가 가해진다.

신병철의 능력으로는 데려다주기도 어렵고, 능력이 된다 한들 1학년인 그가 함부로 다룰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런 대답을 돌려주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알아. 부장님한테 얘기나 한번 꺼내 봐."

"그 정도는 뭐, 안 될 거 없지. 물어보고 알려 드릴게. 또?"

"그게 다야."

"오케이. 그럼 난 간다. 수고들~"

용건을 다 말하자 신병철은 급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그런 다음 고현우에게 여태까지의 대화를 정리했다.

"큰 틀에서 우리 계획은 이래. 월요일 저녁에 D급 던전, [깃털뱀 제단]에 들어간다. 거기서 네 무기를 구할 거야."

결론만 말하자면 꽤 쓸 만한 장검을 획득할 수 있다.

그 장검이라면 당분간 고현우가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나도 나름대로 이득을 챙길 심산이다.

장검을 드랍하는 여러 던전 중에 깃털뱀 제단을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다음 며칠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다. 도둑 동아리 쪽과 협상도 하고, 아이템도 사 놓고."

신병철이 언급했듯이, 심층부 던전은 그가 다룰 사안이 아니다.

적어도 도둑 동아리 3학년, 아마 당규영과 협상을 하게 될 것이다.

협상이 불발로 끝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안 돼도 되게 만들 테니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아. 사소한 실수 하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야."

"각오는 되었소. 본인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오?"

"네 역할이 중요해."

단순히 실력 좋은 칼잡이로서 고현우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던전 안에서 그는 철저하게 또 하나의 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던전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어야겠지."

가져온 서류 다발을 건넸다.

받아서 한 장씩 넘기는 고현우의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

[깃털뱀 제단]과 [흑사방]의 공략본.

던전의 구조부터 시작해서 등장하는 적들과 위치, 우리가 어떤 경로로 이동해서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등.

모든 것이 두 공략본에 담겨 있었다.

"외워. 한 글자도 빠짐없이."

59화 4주 차 공략전 (1)

고현우는 보고서 작성과 내가 추가로 내준 숙제로 바빠졌다.

주말 동안은 머리가 많이 고생할 것이다.

한편 나는 마법공학 공방에서 더 시간을 보냈다.

하는 일은 지난 며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4공방에서 밑 준비를 하고, 가끔 마법공학 동아리 선배들이 가져오는 실패작을 분해해 준다.

제1공방에 자리가 나면 잽싸게 들어가서 아이템을 만든다.

다만 이번에는 들어가는 재료의 수준이 훨씬 높았다.

[마력기관]

[부유석 추출물]

[웨더 칩]

여기에 다른 선배들이 의뢰 보상으로 내준 고급 재료들까지 모조리 제작에 활용했다.

그렇게 쳇바퀴 같은 며칠이 흐르고....

주말 아침.

새벽이 막 끝나고, 창밖에서는 서서히 동이 터 올 무렵.

나는 손에 든 공구를 내려놓았다.

'끝났다.'

가늘고 길쭉한 심 형태의 부품.

며칠간 이것만 붙잡고 씨름하다가 드디어 완성한 것이다.

부품에 마나를 불어 넣자, 미약한 상승기류가 발생하며 작업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것들이 붕 떠올랐다.

몇 센티미터가량 떠올랐을 때 마나를 끊으니 다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

때마침 짧은 휴식을 취하던 선배들이 그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에게 부담이 되리라 생각했는지 우르르 몰려들지는 않고, 봉재석과 일전에 봤던 여선배 하나만 나에게 다가온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 탐구욕이 가득했다.

"무슨 재료를 그렇게 열심히 긁어모으나 했더니.... 또 신기한 걸 만들었네."

"잠깐만 봐도 돼?"

"예, 선배님."

내가 승낙하자 두 선배가 부품에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고 이모저모 살폈다.

번갈아서 감탄사를 흘린다.

"이런 구조구만...."

"부유석 추출물이 왜 필요한가 했는데, 다 쓰임새가 있었네...."

"와, 이거 봐 봐.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이 부품의 원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마력기관]을 통해 마나를 공급하면,

[웨더 칩]이 일정 범위 내에 기후 변화를 일으키며,

[부유석 추출물]이 그 기후의 종류를 결정한다.

봉재석이 부품을 나에게 건네며 물었다.

"생김새가 무기에 들어가는 건가 본데, 스태프? 셉터?"

"비슷합니다."

"본체는 구했고?"

현재로서는 부품에 불과하기에 무언가에 장착해야만 아이템 구실을 한다.

인벤토리에서 1미터 남짓한 길이의 철봉을 꺼냈다.

"아쉬운 대로 이걸 쓰려 합니다."

용살학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F등급 철봉을 살짝 뜯어고친 것이다.

부품을 끼워 넣자 무리 없이 하나가 되었다.

[부유의 철봉(E)]

▷'레비테이트 존(F)' 상시 발동

레비테이트 존. 부유 구역.

상승 기류를 일으켜 범위 내의 모든 것을 떠오르게 만드는 바람 마법이다.

사물이든 몬스터든 각자 무게가 다르고 마법 저항력도 다르니 떠오르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부유하는 것들은 모두 물리력의 영향을 받기 쉬워진다.

즉, 범위 내에서는 [윈드포스]에 더 취약해진다는 말이다.

다만 이 [부유의 철봉]의 랭크는 고작 E.

상시 발동하는 [레비테이트 존]도 F급에 불과하다.

위력이 미미하고 범위도 좁다. 비유하자면 단칸방 정도일까.

'철봉을 썼으니까.'

마법공학 아이템은 부품뿐만 아니라 본체를 이루는 금속의 재질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임시방편이기는 하나 철봉을 썼으니 잘해야 E등급이 한계.

더 좋은 금속을 써서 더 뛰어난 본체를 만들면 당연히 랭크도 성능도 상승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금속'은 어디에서 구하는가.

'내려가야지.'

던전동 지하로.

철봉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내가 떠날 때가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는지, 봉재석이 나를 바라보며 조금은 아쉬운 투로 말했다.

"이제 당분간 안 오겠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내가 [부유의 철봉] 완성에 정확히 맞춰서 모아 둔 재료를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뭘 더 만들 생각이었다면 조금은 남겼을 테니까.

사실이었기에 나는 부인하지 않았다.

"예,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여선배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신세 많이 졌으면 우리 동아리 가입븝븝!"

"신세는 무슨. 또 만들고 싶은 거 생기면 언제고 찾아와라."

봉재석이 도중에 주둥이를 막아 버렸다.

내 마음이 떠난 게 보이니 차라리 쿨하게 보내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나는 정중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제1공방을 나섰다.

- 아니, 왜 그냥 보내?

- 아서라, 쟤가 입부를 하겠냐. 어디 묶여 있을 그릇이 아니야.

- 그건 끝까지 모르는 거지!

- 그냥 포기해라.

공방 안쪽에서 가벼운 말다툼이 이어졌다.

* * *

남은 주말은 트레이닝 센터에서 [윈드포스]와 [코어]를 수련하며 보냈다.

월요일.

학생 식당이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서예인과 나는 인파 속에 끼어서 아침 식사를 하기보다 밖으로 나가는 걸 택했다.

한 손에는 커피, 반대쪽 손에는 반으로 접은 와플을 들고.

교정 한켠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와플을 먹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자니 사복 차림의 비율이 부쩍 늘어났다.

멘토링을 위해 초빙된 졸업생들.

이번 주 들어 학생 식당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건 저들의 영향이 크다.

멘토링은 학기 둘째 달인 5주 차, 즉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번 한주는 저들이 학사 측으로부터 기본적인 지침과 멘토링의 골자 등을 전달받는 기간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서예인에게 해 둘 말이 있었다.

"공지사항. 김호의 마력탄 특강은 임시 휴강입니다."

"...?"

서예인이 와플을 한입 베어 물려다 말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볼에 크림이 조금 묻었는데, 내 말에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며 '왜 휴강이지?' 이유를 묻는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어차피 새 스킬은 다음 주 멘토링 때 익히니까 지금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이 일주일은 내실을 다지는 게 낫겠다."

효율적으로 성장하려면 무턱대고 스킬의 종류만 늘릴 게 아니라, 보유한 스킬의 숙련도와 랭크를 올려 주는 시간도 필요하다.

누구든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고, 내가 보기에는 이번 주가 아주 적절하다.

알아서 잘 수련하라고 말하려다가, 서예인은 약간의 방향성이나 목표를 제시해 주면 더 능률이 오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력탄]이랑 [사출], 둘 다 C랭크를 목표로 해 보자. 멘토 아저씨를 놀래켜 주는 거지. 아닛! 1학년이 이런 마력탄을? 하고."

아직 멘토가 졸업생일지 3학년일지는 모를 일이라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요점은 열심히 수련해서 멘토를 놀라게 해 준다는 거다.

서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해 볼게."

기억하기로 마력탄이 D, 사출이 E니까, 일주일 만에 동시 C랭크는 사실 무리한 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목표를 높게 잡은 이유는, 그래야 열심히 수련할 것 같아서.

또 서예인의 압도적인 재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야, 근데 너 볼에 크림 묻었다."

"?"

"아니, 거기 말고. 반대쪽."

"??"

"조금 옆에."

"???"

* * *

공략전 수업.

서청용 선생님이 칠판에 단어 두 개를 적었다.

[자원] [시간]

"지난 공략전은 너희들의 가장 소중한 자원,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지."

타임 어택.

던전에서 얼마나 적은 시간으로 목표를 달성하느냐가 핵심이었다.

"여기서 손 한번 들어 보자. 사실 그 늪지대 중반쯤에 특이한 게 있었거든. 혹시 기억나는 사람?"

"...?"

3반 학생들이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얼굴에 이렇게 쓰여 있다.

- 그런 게 있었다고?

규칙이 규칙이라 다들 최대한 빨리 던전을 주파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데다가, 등 뒤에서는 참수자 고블린이 식칼을 들고 쫓아왔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대체 누가 여유를 부리며 주변 환경을 찬찬히 훑어보겠는가.

사람이 무슨 고인물 플레이어도 아니고....

물론 나는 이럴 때 혼자 번쩍 손을 들어 올리는 관심종자는 아니었다.

한참이나 아무도 나서지 않자, 서청용이 빙긋 웃더니 칠판에 정답을 띄워 올렸다.

고블린 늪지대 중반부, 나무 밑동 부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주의 깊게 봐도 눈에 안 띄지. 급박한 상황이면 더 지나치기 쉬워. 그래도 항상 이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캐치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단다. 왜일까?"

이 질문에는 제일 앞줄의 여학생이 대답했다.

"정말 사소한지는 확인해 봐야 아는 거니까요."

"바로 그거야."

그 사소해 보이는 것이 사실 던전의 핵심 요소라면?

가령 그것이 일대의 함정들을 가동하는 장치라면?

추가로 몬스터를 소환하는 장치라면?

숨겨진 방으로 통하는 입구라면?

무심코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

"자, 그래서 이번 주 공략전 주제는—"

MAP:[무작위]

RULE:[소탕][2인 던전][랜덤 매칭]

"—바로 소탕입니다."

소탕.

던전 내부를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하는가.

가령 몬스터 100마리가 존재한다면 그중 몇 마리까지 발견하고 처치하는가.

물론 100마리가 던전 입장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올 가능성은 전무하고,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던전 구석구석을 주의 깊게 살피고 다녀야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서청용이 손가락을 하나 꼽았다.

"중요한 거 하나. 이번에는 시간제한이 없단다. 서두르지 않고 꼼꼼히 보기만 하면 누구든 최고점! 어때?"

학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인전에 치이고, 타임 어택에 치이고, 강적에 치이고, 2대2에 치이던 차에, 이런 쉬어 가는 공략전이라니.

서청용이 빙긋 웃으며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중요한 거 둘. 지형은 랜덤이야. 정글이 나올 수도 있고, 유적지가 나올 수도 있고, 동굴이 나올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른 던전에서 공략전을 치르는 거지."

제일 앞줄의 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선생님, 그러면 연습 모드랑 실전 모드도 지형이 달라요?"

"다르지."

"그럼 연습 모드 해 봤자 아무 소용 없는 거 아니에요?"

"정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니?"

"...아."

질문을 한 학생이 무언가 깨닫곤 손을 내렸다.

매번 다른 던전에 들어가더라도 경험은 계속 쌓인다.

관찰력 역시 단련할수록 늘어난다.

그렇게 향상된 관찰력은 결국 실전에도, 나아가서 학기 중 다른 공략전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너무 점수에만 목매지 말고, 경험 삼아 여러 번 연습 모드를 해 보렴. 컨닝할 생각인 친구들도 이번에는 포인트를 아끼자."

몇몇 학생들이 뜨끔해서 서청용의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무작위 던전이라 남의 리플레이를 보고 따라 하는 꼼수는 안 통한다.

서청용이 시간을 확인하고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보내 주기 전에, 이번 주에는 숙제가 있습니다."

서청용이 저주받을 단어를 입에 담자, 학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믿었던 당신마저 숙제를 내줄 줄이야....

미안하다며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서청용이었다.

"각자 리플레이를 보면서 지도를 그려 오면 돼. 몬스터 위치 표시하는 거 잊지 말고. 기한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그럼 수업 끝! 다음 시간에 보자!"

오늘은 고현우 서예인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팀원도 무작위로 정해지고,

저 둘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니 연습 모드부터 시작해야겠지.

반면 나는 경험이 넘치도록 쌓인 놈이라 연습 모드를 해 봤자 시간 낭비다.

초장부터 실전으로 간다.

곧장 던전동 상층으로 향했다.

단말기에 학생증을 찍고, 팀원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쓸 만한 친구가 걸리면 좋겠는데....'

이번 주 퀘스트를 확인해 보면,

[서브 퀘스트:4주 차 공략전]

▷목표:공략전 던전 클리어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완성도에 따라 차등 지급 (??/100%)

내가 있는 이상 파트너로 누가 걸리든 완성도 100%는 따 놓은 당상이다.

솔직히 말해 하나부터 열까지 나 혼자서 다 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쓸 만한 친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복사]로 가져올 만한 스킬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마법공학 공방에서 해야 할 일은 일단락 지었기에 [마법공학] 스킬은 당분간 안 쓴다.

그 자리를 전투 계열 스킬로 덮어씌울 생각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근처에 순간이동 포탈이 입을 열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공기가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지면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못한 걸로 보아 산간 지대로 추측된다.

그리고 내 파트너는....

'또 너니?'

빨간 머리와 불타는 루비.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버린.

홍연화였다.

60화 4주 차 공략전 (2)

대인전에서도 두 경기 연속 상대로 만나더니,

이번에는 홍연화와 파트너가 됐다.

나랑 무슨 인연이 있길래 자꾸 붙는지 모를 일이다.

'나쁘진 않아.'

어중간한 상대와 공략전을 하느니 차라리 얘가 낫다.

유망주급이라 전투력 하나는 검증된 셈 아닌가.

전투가 필요한 부분은 다 떠넘기면 된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다.

루비 마탑주는 예전 내 주류 픽이었고,

홍연화는 보면 볼수록 그 루비 마탑주를 많이 닮았다.

몇 년 젊어진 버전을 보는 것 같다.

'표정만 비슷하면 완전 판박이인데.'

차이점이라면 나를 보는 표정.

루비 마탑주는 그 불같은 성정을 드러내듯 항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분위기인 반면, 눈앞의 홍연화는 잔뜩 겁에 질려 위축된 상태다.

물론 이건 내 탓이 없잖아 있었다.

만날 때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박살을 내 버렸으니 위축될 만도 하지.

그래도 저렇게 보자마자 지레 겁을 집어먹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큰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세상 스윗하게 대하며 차차 오해를 풀어 나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굳이?'

꼭 풀어야만 하나?

지금 내 목표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퀘스트를 깨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편이 목표 달성에는 더 도움이 될 듯하다.

해서 나는 홍연화의 마음속 이미지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나를 폭군이라 생각한다면, 폭군이 되어 주리라.

섬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홍연화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탈색되었다.

* * *

홍연화는 울고 싶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던전동에 도착해서 매칭을 잡으려던 홍연화.

그러나 학생증을 스캔하기 직전, 그녀는 발견하고 말았다.

근처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김호를.

다행히 김호는 반대쪽을 바라보고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뒷모습만 보고도 홍연화의 등줄기에 오한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공략전 성적보다 더욱 중요한 목표가.

'파트너만은 피해야 해.'

팀원은 랜덤으로 정해지지만, 지금 학생증을 찍었다가 만에 하나 저 괴물 같은 사내와 매칭이 잡힌다면....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된다면....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홍연화는 언니 홍예화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공략전은 조금 기다렸다 신청하는 걸로.

김호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면, 그때 자신도 팀원을 찾으면 된다.

해서 그녀는 김호를 몰래 훔쳐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의 근처에 순간이동 포탈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속 기다렸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홍연화의 자존심이 점점 더 구겨졌다.

그와 반비례해서 자괴감이 크기를 키워 갔다.

내가 명색이 차기 루비 마탑주가 될 사람인데, 이렇게 쥐새끼처럼 남 눈치를 봐야 하나?

다시 흘긋 김호를 보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매칭이 잡힐 기미는 여전히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더는 못 기다려!'

두려움에 억눌리던 자존심이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계속 이렇게 눈치만 보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김호와 파트너를 할 자신감이 생겨난 건 아니고, 작전만 슬쩍 변경했다.

잽싸게 먼저 들어가 버리는 쪽으로.

거기에 홍연화는 약간 더 잔머리를 굴렸다.

'실전 모드로 가자.'

저자도 사람인 이상 연습 모드를 하기는 할 거다.

그러니 자신이 연습 모드를 건너뛰고 곧바로 실전에 들어간다면, 파트너가 될 일말의 가능성마저 차단할 수 있다.

초장부터 실전이 다소 불안하기는 한데, 어떻게든 몸을 비틀면 되겠지.

홍연화가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학생증을 스캔하자....

순간이동 포탈이 그녀 앞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호 앞에도.

홍연화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게 왜...?'

아니겠지?

그냥 우연히 동시에 열린 거겠지?

내 파트너는 다른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홍연화가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 김호는 망설임 없이 던전에 발을 들였다.

다음은 그녀가 들어갈 차례.

그러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순간이동 포탈이 그녀의 눈에는 지옥 무저갱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계속 쭈뼛거리던 홍연화가 이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 그래, 들어가야지.'

이러고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무거운 발을 억지로 떼서 던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

"...."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안에서 기다리던 김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홍연화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다.

'망했네....'

설마가 사람을 잡고 말았다.

설마 김호가 실전을 신청했을 줄은.

그제야 그가 한참이나 기다린 것이 설명되었다.

이제 막 공략전이 시작된 참이라 학생들 절대다수가 연습 모드에 몰렸고, 벌써부터 실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아니, 없었다.

파트너가 도통 나오질 않으니 계속 기다리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매칭을 잡자마자 파트너가 되는 것도 당연했고.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격이었다.

'나 진짜 왜 그랬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존심 세우지 말걸,

잔머리 굴리지 말걸,

그냥 오늘 쉬고 내일 할걸....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후회한다고 지금 이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다.

홍연화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상황이 어찌 됐든 이 던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남은 몬스터 수:88]

이번 공략전의 목표는 소탕.

몬스터 88마리를 다 잡으면 100% 완성도로 만점을 받는다.

공략전 교사가 '디테일,' '꼼꼼함,' '관찰력,'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이 몬스터들이 제 발로 찾아올 가능성은 작았다.

분명 던전 곳곳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어떻게 찾아볼까.'

팀원과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에 팀을 이루었던 백준석은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는 탓에 대개 홍연화가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었다.

무식한 검사들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반면 김호는 그녀와 같은 캐스터 계열.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홍연화가 논의를 위해 바닥으로 향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즉시 김호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고,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준석에게는 잘만 했던 말들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홍연화가 계속 입술만 달싹이고 말을 못 하자, 김호가 짤막하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따라와라."

"어, 어?"

그리고 저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홍연화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영문도 모르고 뒤따랐다.

한동안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던 김호가 또 저 혼자 멈춰 서더니, 숲 한쪽의 덤불을 바라보았다.

홍연화가 같은 곳을 응시했으나 별다른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 순간, 김호가 발끝으로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그러자 돌멩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나가 덤불 너머로 사라졌고,

"꽤액!"

[남은 몬스터 수:87]

외마디 단말마와 함께 남은 몬스터 숫자가 하나 줄어들었다.

홍연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있었네?'

"케륵!"

놀라는 것도 잠시, 덤불 안에서 고블린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매복했다가 동족의 죽음에 분개하여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김호는 놈들을 한번 일별하더니,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의 이목은 남아 있는 홍연화에게 쏠렸고.

홍연화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떠나는 김호와 달려오는 고블린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저기."

이래 놓고 그냥 가 버린다고?

어이없음이 정도를 지나쳐서 화도 나지 않았다.

루비가 번쩍 붉은빛을 발하고,

- 퍼펑!

[남은 몬스터 수:84]

고블린 세 마리가 숯덩이로 화했다.

사실 고블린 따위는 그녀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잡몹이기는 했다.

그렇게 알아서 대강 납득을 한 다음 시선을 돌려 보니, 김호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홍연화는 놓칠세라 전력 질주로 달려갔다.

겨우 따라잡았을 즈음.

김호의 손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큼지막한 짱돌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가차 없이 인근 덤불에 집어 던지자, 또 성난 고블린 네 마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한번 겪어 본 터라, 홍연화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 퍼펑!

[남은 몬스터 수:80]

돌아보니 그 짧은 시간에 또 한참 거리를 벌린 김호.

홍연화가 결국 폭발했다.

솔직히 그녀의 성질머리에 이만큼 참았으면 많이 참은 것이다.

'야!! 같이 좀 가자!! 공략 혼자서 하냐!!'

—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고.

실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이랬다.

"야, 같이 좀."

김호를 상대로는 신기하게도 볼륨이 자동으로 조절된다.

그 조그마한 말이 들렸는지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걸음걸이를 늦춰 주었다.

'진짜 늦춰 주네....'

새삼스럽게 저 남자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홍연화였다.

어쨌든 슬슬 패턴이 몸에 익어 간다.

김호가 앞서서 걷다가 돌을 던지거나 무형의 힘을 써서 덤불이나 나무 위, 바위 뒤편 등의 매복지를 자극하면, 그에 반응해서 몬스터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뒤처리는 홍연화의 몫.

대개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의 저등급 몬스터라 어려울 건 없었다.

- 화르르륵!

[남은 몬스터 수:66]

"케륵!"

몬스터들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간혹 발각되자마자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놈도 있었다.

[소탕] 규칙에서는 이런 놈이 골칫거리인데, 그렇게 도망쳐서 다른 곳에 숨으면 이미 갔던 장소를 또 돌아봐야 할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케륵?"

그러나 도주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고, 놈들은 마치 투명한 벽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홍연화가 소환한 화염에 삼켜져 버렸다.

- 화르르륵!

몇 번 반복하니, 처음에는 뭐가 숨겨져 있는지 감도 못 잡던 홍연화의 눈에도 조금씩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매복한 곳에는 특유의 위화감이 존재했다.

보면 볼수록 그 위화감이 점점 더 눈에 잘 띈다.

저도 모르게 관찰력이 쑥쑥 늘어나는 것이다.

홍연화가 김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이상...한데?'

뭐 이렇게 쉽지?

워낙 성미가 급한 그녀라 소탕전 같은 느긋하고 세심한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해서 던전에 입장할 때만 해도 고생 좀 하겠구나 예상했었다.

그런데 실상은 김호가 가는 곳마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니,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전부 해결되었다.

김호는 공략전 내내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다음 장소, 또 다음 장소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마치 이런 것을 수십 수백 번은 해 본 것처럼 능숙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수십 수백 번 해 봤을 리가 없으니, 눈썰미가 엄청나게 좋거나, 그에 준하는 감지 계열 스킬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홍연화가 머릿속으로 김호의 정보를 추가했다.

엄청난 마법 방어력, 극에 달한 권법, 그리고 매우 높은 수준의 감지 능력.

"...."

그러던 와중 또 김호가 제자리에 정지했다.

홍연화가 따라 정지해서 전방을 살펴보니, 깊게 파인 웅덩이 같은 지형이 그들 앞에 자리했다.

이 대수림의 지형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편이기는 했는데, 저건 유난히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김호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 퍼서석,

과연 웅덩이 한쪽의 흙이 무너져 내리며 토굴 입구가 드러났다.

홍연화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게 보였다고?'

내려가서 자세히 살펴볼 만하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단번에 찾아낼 줄은.

당황스러움을 뒤로하고 홍연화 역시 토굴을 관찰했다.

크기는 고블린들에 맞춰져 있어, 사람이 들어가려면 불편하게 몸을 웅크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김호가 입을 열었다.

"확인해 봐라."

"...내가?"

"싫은가?"

김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홍연화가 본능적인 위기를 느끼고 재빨리 답했다.

"가, 가면 될 거 아냐. 가면...."

그리고 툴툴거리면서 토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실 '확인해 보라'는 말은 저 안으로 화염 마법을 써 보라는 뜻이었으나, 홍연화로서는 그 사실을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들어가고 잠시 후,

- 펑! 퍼펑!

[남은 몬스터 수:35]

안쪽에서 폭발음이 몇 번 울리고 몬스터 숫자가 제법 많이 줄어들었다.

뒤이어 자욱한 연기와 함께 홍연화가 토굴에서 기어 나왔다.

온몸이 흙투성이로 지저분하고, 불쾌한 심정을 대변하듯 오만상을 쓰고 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는데!'

그러나 김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짓 좀 할 수도 있는 것 같아.'

여태 저 남자 덕분에 편하게 갔으니까.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다.

"...."

김호는 그런 홍연화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홍연화가 황급히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 * *

[남은 몬스터 수:2]

폭풍처럼 몰아치던 공략전도 어느덧 끝이 보인다.

마지막 두 마리는 힘들게 찾지 않아도 될 듯했다.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트롤.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체구가 우람한 중형 몬스터다.

재생력이 높고 나름의 마법 저항력까지 갖춰서 마법사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이다.

그런 트롤이 두 마리.

심지어 이놈들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게 보스 몬스터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한 놈은 큼지막한 곤봉, 다른 놈은 쌍도끼를 들었다.

홍연화가 김호에게 조심스레 어떻게 할지 묻는 눈빛을 보냈다.

김호가 그 눈빛을 몇 초간 마주 보더니 짤막하게 답했다.

"싸워 봐라."

"...나 혼자?"

"...."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홍연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저 남자가 친절하게 합을 맞춰 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홍연화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곧 그녀의 주변이 서서히 열기로 달아올랐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 트롤들이 흔들거렸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61화 4주 차 공략전 (3)

자신 있게 나섰지만 보스급 트롤 두 마리가 그리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최소한의 계획은 세워 두고 들이받아야 한다.

지금 같은 2 대 2, 사실상 2 대 1 구도에서는 원거리에서 야금야금 깎아 먹는 방식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다만 저놈들의 저항력과 재생력을 고려했을 때 그 방식은 하루 종일 걸릴 가능성이 크다.

단기간에 대미지를 누적시켜 쓰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근접전.'

일반적인 마법사는 감히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 올라운더형 캐스터를 지향하는바.

미숙하나마 근접전 스킬도 배워 둔 게 있었다.

완드에 박힌 루비가 번쩍 붉은빛을 발하고.

[오버히트]

홍연화의 온몸에서 옅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드를 들어 트롤 한 놈을 척 가리키는 것이 개전 신호가 되었다.

"크아아아!"

트롤 두 마리가 그녀를 노리고 돌진해 왔다.

홍연화는 똑바로 마주 걸으며 완드를 들지 않은 손에 빠르게 주문을 조립했다.

- 부웅!

휘둘러 오는 곤봉을 슬쩍 몸을 기울여 피하고, 곧장 물러나 마구잡이로 허공을 찍어 대는 쌍도끼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마법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한 움직임.

화염 계열 육체 강화 스킬, [오버히트]의 효과였다.

회피를 하면서도 계속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근접 공격이 닿을락 말락 한, 그러나 마법을 던지면 곧바로 직격할 만한 거리를.

곧 홍연화의 손에 사람 머리통만 한 화염구가 들렸고,

[플레임 오브]

- 펑!

트롤의 상반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놈은 뜨겁지도 않은지 아랑곳하지 않고 둔기를 휘둘렀다.

그것을 피해 조금 거리를 벌리고 살펴보니, 아직 잔불이 타오르는 상반신에 옅은 화상 자국이 남았다.

동시에 도끼를 든 놈의 육체에도 똑같은 화상 자국이 새겨졌다.

홍연화가 인상을 구겼다.

'라이프링크? 진짜 던전 꼬라지 하곤....'

[라이프링크]. 생명 공유 마법.

한쪽이 피해를 받으면 연결된 두 개체가 그 피해를 나눠 받는다.

100의 피해를 받으면 50씩.

안 그래도 마법 저항력 때문에 대미지가 90, 80으로 깎여서 들어가는데, 그것마저 절반으로 나뉘는 셈.

이렇게 나눠 받은 피해는 트롤 특유의 높은 재생력으로 금세 회복해 버린다.

'그렇게 만점 주기가 싫었나?'

마지막 두 마리에 저런 치사한 짓을 해 놓다니.

누가 이 인공 던전을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마음씨가 옹졸하고, 치사빤쓰하고, 말미잘—

- 부웅!

또다시 곤봉이 날아왔기에 홍연화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훌쩍 물러나며 두 번째 플레임 오브를 시전한다.

'아직 할 만해.'

방금 대미지가 영 시원치 않았던 이유는 트롤들에게 걸린 [라이프링크] 탓도 있었지만, 화염구의 크기가 작아서이기도 했다.

시전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작게 만든 것은 좋았지만 위력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크게 만들면 되지.

- 퍼엉!

한층 커다란 폭발이 곤봉 트롤의 상반신을 집어삼켰다.

대미지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확인하고자 한다면, 한창 불타는 중인 곤봉 트롤 대신 쌍도끼 쪽을 보면 된다.

피해를 공유하니까.

화상 자국이 빠르게 번져 나가는 걸 보니 이번에는 유의미한 피해를 준 것 같다.

"크아아아!"

그럼에도 놈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지, 아니면 고통을 고스란히 분노로 바꿔 싸우는 건지, 온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불붙은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그것을 피하는 찰나,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파공성을 그리며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 휘리리릭!

"!"

확인보다는 당장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홍연화가 급히 몸을 옆으로 기울이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져 흩날렸다.

쌍도끼 트롤이 도끼를 하나밖에 안 든 것을 보고서야 방금 지나간 것이 손도끼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크아아아!"

도끼 트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펄쩍 뛰어 하나 남은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에 보조를 맞추듯 몽둥이 트롤이 자세를 낮추며 바닥을 쓸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동시에 노리는 연계 공격.

몬스터답지 않게 합이 잘 맞았다.

홍연화가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바닥을 가볍게 걷어차 허공으로 떠오르자 발아래에 몽둥이가 스쳐 가고,

착지하는 즉시 또 바닥을 걷어차 도끼질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리고 그사이에 완성한 플레임 오브를 집어 던진다.

- 퍼엉!

계속해서 누적되는 피해.

또 아무렇지 않게 연계 공격을 이어 가는 트롤들.

"!?"

홍연화는 위화감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짧은 찰나 냉정한 눈으로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패턴을 반대로 바꿨어.'

몽둥이가 상반신으로 휘둘러지고, 도끼가 하체를 노린 것이다.

방금 전과 똑같이 대응했다면 뛰어올랐다가 몽둥이에 얻어맞아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 휘리리릭!

등 뒤에서 파공성이 가까워져 온다.

'이게 무슨?'

황급히 몸을 옆으로 날리자 손도끼가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가 도끼 트롤의 손에 척 잡힌다.

부메랑처럼 먼 거리를 한 바퀴 선회하고 돌아온 것이다.

[회수] 계열 마법이 걸린 투척 무기.

홍연화는 어이가 없어졌다.

'저건 반칙 아니야?'

무슨 인공 던전 보스가 [라이프링크]에 마법 아이템까지 들고 있어?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오히려 오기가 생긴 홍연화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

"크아아!"

짧은 시간 소강상태에 놓였던 전투는 쌍도끼 트롤이 도끼 하나를 투척하며 재개되었다.

연계 공격 자체는 계속 똑같은 방식이었다.

한 놈이 위쪽, 다른 놈이 아래.

다만 몽둥이가 불규칙적으로 위쪽을 노렸다 아래를 노렸다 하는 게 몹시 헷갈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중간중간 앞뒤로 날아드는 손도끼까지 피하려니, 홍연화의 손발이 급격히 어지러워졌다.

좀처럼 마법을 끼워 넣을 틈이 나지 않는 상황.

이렇게 놔두면 기껏 쌓아 놓은 대미지마저 회복해 버린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제일 거슬리는 건 부메랑같이 날아다니는 손도끼지만, 그걸 무력화하기는 어려워 보이고.

'...몽둥이.'

그렇다면 저 몽둥이부터 파괴하고 보자.

홍연화가 일순간 정신을 집중하여 스킬을 사용하자, 한쪽 손이 손목까지 빨갛게 달구어졌다.

휘둘러지는 몽둥이를 피하고, 회수되는 순간을 노려 강하게 움켜쥐었다.

[피닉스 그립]

- 콰드드득!

몽둥이의 중간 부분이 으스러지면서 장작으로 화했다.

트롤은 반 토막 난 몽둥이를 집어 던지더니 아예 두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 휘리리릭!

뒤쪽에서 손도끼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홍연화가 피할 준비를 하는데,

- 휘리릭!

앞쪽에서도 희끄무레한 것이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

도끼 트롤을 확인해 보니 완전 빈손이다.

홍연화는 새삼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다.

'아, 그렇네.'

손도끼 하나를 던질 수 있으면 두 개도 동시에 던질 수 있는 거지.

이건 못 피하겠는데....

짧은 찰나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맞으면 바로 리타이어인가?

머리에 손도끼가 꽂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곧 알게 되겠지.

홍연화가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

- 텅! 텅—!

머리 근처에서 생소한 충돌음이 울렸다.

천천히 눈을 떠 보니 언제 왔는지 김호가 앞에 서 있고, 자신에게 날아들던 손도끼는 저만치 튕겨 난 상태.

"...!"

홍연화의 머릿속이 더 뒤죽박죽 뒤엉켰다.

그중 두어 개를 꼽자면 '여태 뭐 하다 이제 도와주나?'와 '그래도 도와주긴 하는구나!' 정도.

"크아아아!"

트롤이 저돌적으로 두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김호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놈을 맞이했다.

그러다 한 걸음 내디디며 놈의 어깨 어림에 손을 얹었고,

- 텅—!

우람한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김호가 곁눈으로 시선을 보내자 홍연화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김호의 입이 열렸다.

"포대(砲臺)를 서라."

"포, 포대? 무슨 마법?"

"파이어 필라."

일정 구역 내에 불기둥을 피워올리는 마법.

김호와의 배치 고사에서도 승부수로 꺼냈었는데, 그러고도 1%의 체력조차 못 깎은 아픈 기억이 있었다.

위력 하나는 압도적인 대신 단점 역시 명확한 마법이다.

적이 범위를 벗어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해서 이 마법을 쓴다면 가장 먼저 '어떻게 적들을 묶어 둘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홍연화는 어쩐지 그 질문이 쓸데없이 느껴졌다.

해서 군말 없이 자리를 잡고 주문을 영창했다.

지면에 복잡한 문자들이 새겨지며 둥그런 원 모양 마법진이 완성되어 갔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는지 트롤들이 마법진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 터엉—!

김호가 그 주변을 겉돌며 놈들을 가로막고 안으로 밀쳐 넣었다.

손동작은 툭툭 가볍게 건드리는 것 같은데, 닿을 때마다 속절없이 밀려나기 바쁘다.

"크아아아!"

도끼 트롤이 손도끼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김호가 철봉 비슷한 것으로 툭 건드리자 괴이한 충돌음이 울리고 바닥에 꽂혔다.

주인에게 되돌아가려는 듯 부르르 떨리는 것을 그의 발이 지그시 밟는다.

- 휘리리릭!

뒤이어 두 번째 손도끼가 날아왔다.

김호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채고 도로 집어 던졌다.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가 주인의 어깨에 콱 틀어박히는 손도끼.

"??? ?????"

그 광경을 보고 홍연화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마터면 잘 시전하던 마법이 취소될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해 그것만은 막았다.

'그, 그냥, 생각하지 말자....'

홍연화는 일단 방금 본 것을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지금은 맡은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파이어 필라부터 다 만들고 보는 걸로.

눈앞의 사내가 트롤 두 마리를 어린애 갖고 놀 듯하며 원 안에 붙잡아 놓다 보니, 마법진이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며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김호는 마지막까지 날뛰는 트롤을 뻥 걷어차서 안쪽으로 밀어 넣고, 가볍게 뒤로 도약했다.

다음 순간 불기둥이 맹렬하게 피어오르며 놈들을 삼켜 버렸다.

- 콰아아아아!

두 사람이 잠시 불구경을 하고 있자니 결과가 나왔다.

[남은 몬스터 수:0]

[완성도:100% = 800점]

+[클리어 보너스:200점]

—————

[총 점수:1,000점] * 0.8배율

= 800 pt

이번 주 공략전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 점수였다.

이제 서로 갈 길을 가면 되지만,

"그, 저기."

"...."

홍연화는 아직 용건이 남았다.

김호를 마주 보며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연다.

"저, 그으.... 리플레이 좀 비공개로 해 주면 안되...냐?"

이번 공략전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여러모로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김호 앞이라 많이 당황한 탓이다.

토굴에 기어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김호는 '확인해 보라'고 했었는데, 문득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기어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냥 안쪽에 화염 마법을 쏟아부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그녀가 밤에 이불을 걷어차게 만들 흑역사들이 가득했으니....

사람들이 봐서 하등 이로울 게 없는 리플레이였다.

문제는 김호가 포인트를 포기할 만한 메리트가 딱히 없다는 점이다.

균형을 맞추려면 뭐라도 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홍연화가 인벤토리에서 루비 한 알을 꺼냈다.

"대신 이거...."

"필요 없어."

김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콩알만 한 루비 갖고는 턱도 없다는 뜻인가?

홍연화가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다른 루비를 꺼내서 건넸다.

이전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놈으로.

"...."

김호가 그것을 받아 들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침묵만 돌아오자 홍연화가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로도 안 되나? 하씨, 더 없는데.'

방금 건넨 루비가 지금 그녀가 보유한 아이템 중에는 최고로 값진 것이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김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수고 많았다."

그리고 그대로 던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홍연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마지막 말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수고 많았다고?"

...칭찬받았어?

62화 No.388 깃털뱀 제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