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1화
"후우...."
겨울숲 부족 외곽, 에포나의 신전.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이안이 한 차례 침을 꿀꺽 삼켰다.
"록타. 준비됐습니까?"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선물도 챙겨왔고, 전대 족장이 물려준 전통 예복도 챙겨입었다."
록타의 갑옷 같은 근육을 둘러싼 휘황찬란한 모피.
서리감옥 부족의 족장에게만 전해지는, 각양각색의 염료로 물을 들인 요르의 가죽을 강조한 록타가 이안의 등을 툭 떠밀었다.
"슬슬 들어가지. 전사는 망설이지 않는 법이다."
"크흠...아무리 그래도 초면인데. 사과가 목적이라 해도 다짜고짜 이렇게 찾아뵙는 것은 조금 무례하단 생각이...."
"거, 답답하게! 여기까지 와서 왜 또 그래?"
평소답지 않게 망설임이 가득한 이안의 몸짓.
결국, 참지 못하고 짜증 가득한 얼굴로 그를 지나친 록타가 신전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장춘식! 한승현의 친구 장춘식은 어디에 있지?! 겨울숲 부족의 장로, 록타와 이안이 찾아왔다!"
"로, 록타. 장춘식 님의 존함 뒤에는 '님'을 붙여야 합니다."
"흥, 진정한 전사끼리는 그런 허례...허...하여튼. 그런 것 따위 필요 없다."
안절부절못하는 이안을 밀어낸 록타가 성큼성큼 정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한 신전의 내부.
예배당의 투박한 출입문 앞에 선 록타가 문틈에 귀를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찡그렸다.
"무언가가 내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다. 에포나 님의 마력으로 설치한 트랩의 일종인 것 같은데."
"여기에 에포나 님이 트랩을 설치했다는 건, 일종의 축객령 아닐까요?"
"축객령이 뭐지?"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대로 방문했다간 에포나 님의 분노를 살 것 같으니, 아무래도 다음 기회에 오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니. 허락을 구하는 것보단 용서를 바라는 게 쉬운 편이다."
"잠...."
만류하는 이안을 뿌리치고 힘차게 문고리를 움켜쥔 록타가 번개처럼 고개를 숙였다.
피슝-
그와 동시에 록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의 광선.
"이럴 줄 알았지. 흐흐. 지금까지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라고."
"...."
능숙한 동작으로 세인트 캐논을 회피한 록타가 입가에 험상궂은 미소를 내걸었다.
"에크만 그 멍청이가 한 짓을 사과할 겸, 장춘식을 만나러 들어가 볼...끄악!"
피슝-
의기양양하게 몸을 돌린 그의 옆구리에 작렬한 두 번째 세인트 캐논.
"조용히 안 해?! 기껏 결계까지 쳐 뒀더니, 감히 안정을 취해야 하는 장춘식 님의 휴식을 방해해?""
예상치 못한 기습에 주저앉은 록타의 정수리 위로,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자그마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안정이라니, 여기서 에포나 님이 제일 시끄러우시다."
머리를 감싸 쥔 채 꿍얼거리는 록타. 그를 무시한 에포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이안을 향해 눈을 돌렸다.
"뭐야, 왜 온 거야?"
"그게 말입니다...."
머뭇거리던 이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빌론의 기습으로 인해 이틀간 정신을 잃었던 두 장로가 깨어난 이후 가장 처음 접한 소식은.
당시 그들이 상대했던 라이칸스로프의 진짜 정체가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장춘식이라는 것과.
다음 날, 에크만이 대장로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단독으로 벌인 돌발 행동에 관한 것이었다.
"저와 녀석이 둘도 없는 친우이긴 하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외부인에게 제멋대로 무례를 저지른 점은 엄연한 죄이기에.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고 오는 길입니다."
"어, 어? 그러니? 맞지. 그래, 잘못한 거지. 그치. 잘했어."
당시 잔뜩 신바람이 났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조금 뜨끔해진 에포나가 더듬거리며 이안의 말을 받았다.
"그렇기에 에크만에게 한 달간의 근신을 명하고, 겨울숲 부족의 대표로서 저희 둘이 장춘식 님께 사과를 드리고자...."
"정말 사과가 목적이야?"
"그, 그렇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의 옆구리를 쿡 찌른 에포나가 눈을 가늘게 뜨자, 걸치고 있던 족장의 모피를 벗어 던진 록타가 가슴을 탕탕 쳤다.
"이안! 전사에겐 거짓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장춘식에게!"
"님!"
"...장춘식 '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가르침?"
에포나의 눈치를 살피며 호칭을 정정한 록타가 있는 힘껏 자신의 팔뚝을 부풀렸다.
"전사의 가치는 진정한 전사만이 알아보는 법! 장춘식은 록타가 인정한 '전사'다!"
단순히 외적인 강함이 아니었다.
두꺼운 모피 아래로도 훤히 보이는, 말단 근육 하나하나에서까지 느껴지는 생동감과 각자의 의지를 지닌 것처럼 살아 숨 쉬는 근육.
타고난 힘만을 믿고 설치는 멍청이들과는 격이 다른.
노력의 흔적으로 가득한 그의 육신을 마주하는 순간, 록타와 이안의 마음속에선 강렬한 열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춘식 님께 올바른 단련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우리도 한계를 깨고 시시포스 놈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거다!"
혈통을 타고난 로제나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승현.
그리고 초월체인 에포나 같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자연의 힘을 육체에 저장하는 엘븐 아르테스의 위력은 사용자의 근력에 정비례한다.
즉, 근육이 크고 단단할수록 더 많은 자연의 힘을 저장할 수 있으며, 더 강한 위력을 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우리의 육신은 정체되었다! 오거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겨울숲 부족에서 로제 님 다음으로 강한 이안이! 제자리에 멈춰 선 것이다!"
"제가 보았을 땐...아무래도 저희 둘 다 한계에 부딪힌 모양입니다."
과장된 몸짓으로 열변을 토로하는 록타와 이를 보조하는 이안.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포나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장춘식 님의 지도를 받아 한층 더 강해지고 싶단 거지?"
"정확히 보셨다. 에포나 님. 장춘식 님의 몸은 록타보다 더 완벽하다. 전사는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흠, 로제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거네? 잘 알았어. 전해주도록 할게."
"아, 아니다. 로제 님의 훈련은 단순한 단련이 아닌...."
에포나의 은근한 한 마디.
혹한의 대지에서 치러졌던 지옥 같은 일정을 떠올린 록타와 이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한층 더 강도를 올리면...저흰 괜찮더라도, 다른 엘프들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맞다! 그러니까 로제 님에겐 비밀로 해야 한다! 에포나 님은 자비로우시니까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짜식들, 쫄기는."
그들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던 에포나가, 별안간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그건 본인만 허락한다면 상관없겠지만...문제는 지금 장춘식 님의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거야. 부상이 심해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거든."
"듣기로는 폭주한 장춘식 님을 한승현이 제압했다고 하던데. 록타가 인정한 전사인 장춘식 님이 고작 몇 대 맞았다고 드러누웠을 리가 없다."
"너 점점 말이 더 짧아진다? 아무튼,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면 알 거야. 따라와."
두 장로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인 에포나가 예배당 내부를 향해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본래는 고해소로 이용되던 자그마한 방에 도착한 에포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히자.
한구석에 놓인 침대에 누워있던 장춘식이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손을 흔들었다.
"어어, 뭐야. 손님이야? 그때 그 두 녀석이네?"
"이안입니다."
"록타다. 우리 부족원이 큰 결...례를 저질렀다더군. 장로로서 사과하지."
"뭐, 사과할 것까지야. 딱히 기분도 안 나빴고. 나름대로 재미있기도 했...끄윽."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장춘식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록타가 이안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자세한 내막을 물었을 때, 갖은 변명을 대며 황급히 자리를 피하던 부족민들. 그들을 떠올린 이안이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보던 와중.
"육체적인 충격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그런 거래."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장춘식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준 에포나가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급한 대로 포션을 사용해 두긴 했는데, 그래도 대략 반나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더라."
"포션을 썼는데도 반나절이나 걸린단 말입니까?"
"그래. 그것도 몇 통을 썼는데도 말이지. 게다가 치료가 가능할지도 조금 불확실하고."
"어찌 그런...."
승현이 제작한 치유 가속 포션의 효과는 그들 또한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칼에 베여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와도, 어느 한 군데가 완전히 부러지더라도.
눈 깜짝할 새에 나아버리는 마법 같은 효과를 지닌 것이 치유 가속 포션 아니던가.
그런 포션을 아낌없이 들이부었음에도 아직 완벽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은....
"듣기로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던데."
"그 정도였습니까? 얼마나 부상이 심하길래?"
"한승현에게 듣기론, 인간들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땅콩이 떨어졌다.'고 하더라."
"땅콩...?"
"떨어져...?"
생전 처음 듣는 표현 방식이지만, 본능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한 두 장로가 저도 모르게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한승현이 그렇다고 하더라고."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안 떨어졌어. 멀쩡하다고."
힘겹게 몸을 돌린 장춘식이 쥐어짜듯 에포나의 이야기에 반박하며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한승현 이 개자식...돌아오기만 해봐라.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아직 한 번도 못 써본 신상품을 이따위로 만들어 놔?"
부드득-
있는 힘껏 어금니를 깨문 장춘식이 눈물 맺힌 눈으로 두 장로를 바라보았다.
"나...괜찮겠지? 포션을 썼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괜찮으실 겁니다."
"전사에게 그깟 땅콩쯤은 중요하지...읍!"
"조용히 해, 록타!"
눈치 없이 막말을 내뱉는 록타의 입을 틀어막은 에포나가 말버릇을 고쳐주려던 그때.
빠지지직-
텅 빈 허공에 스파크와 함께 균열이 생겨나며, 그 안에서 두 사람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으, 유틸리티 자켓을 챙겨오길 잘했네. 어째 전보다 더 추워진 것 같다."
"센티넬의 훈련을 위해서 일부러 에포나님께 부탁해 더 가혹한 환경을 조성했거든요. 요르들은 좋아하던걸요?"
"하기야, 걔들은 워낙 털가죽이 두꺼우...어라? 이안 씨랑 록타네? 오래간만입니다."
"여기 계셨네요? 몸은 좀 괜찮아요?"
세계수와 연결된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온 승현과 로제가 두 장로에게 태연히 인사를 건네자.
자리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난 장춘식이 싸늘한 냉기가 남아있는 승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이 형님이...형님이...."
"뭐야. 이제 정신이 좀 드냐?"
"정신이 좀 드냐?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야 인마! 나 장가 못 가면 네가 책임질 거냐? 어?"
"뭘. 어차피 쓸모도 없는 거. 그냥 사랑니 뽑은 셈 쳐."
"사랑니? 사랑니이? 오늘 그냥 너 죽고 나 죽자. 이 새끼야! 포션을 들이부어도 감각이 없다고!"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승현을 거칠게 흔들던 장춘식이 막 주먹을 내지르려던 찰나.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을 내건 승현이 장춘식을 향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약효가 안 먹히면 권능으로 재생시켜 주려 했는데. 싫으면 마라."
"...그게 가능해?"
"불가능하진 않지."
"형님."
"뭐, 너 하는 거 봐서."
"사나이 장춘식, 형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비굴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장춘식.
그의 어깨를 짚은 승현이 한구석에 곱게 개어진 장춘식의 옷가지를 가리켰다.
"그럼,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어. 시간이 없거든."
"옷? 시간? 어디 가냐 우리?"
"말했잖아. 판테온에 갈 거라고. 곧 깨어날 구시온 놈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니, 서둘러야 해."
"맞아!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 묻질 못했는데, 너는 그렇다 치고 장춘식 님은 왜 데려가는 거야?"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포나가 의아한 듯 질문을 던지자, 손뼉을 탁, 친 승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맞다. 내가 설명도 제대로 안 해주고 데려왔구나?"
"...그걸 이제야 알아챘냐."
"뭐, 바쁘니까 그럴 수도 있지. 보아하니 두 장로님은 춘식이한테 용건이 있으신 것 같은데...죄송하지만, 그 용건은 뒤로 좀 미뤄주셔야겠습니다."
"그거야 상관없지만, 대사제님께 듣기론 판테온이라면 초월체들이 거주하는 차원이라던데. 거기에 필멸자인 장춘식 님을 대체 왜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건 말이죠. 아까 벌어졌던 일과도 관련이 있는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잠시 뜸을 들이던 승현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장춘식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 녀석을 '짐승의 왕'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2화
"어으, 춥다. 더럽게 춥네. 그래서, 그 짐승의 왕이라는 게 대체 뭔데?"
"쉿!!!"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의 형태를 띤 세 번째 뿌리 능선의 내부.
승현의 뒤에서 어기적거리며 걷던 장춘식을 향해 로제가 다급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려던 그때.
아아아아──
통로 저 너머의 어둠 속에서 기묘한 울림이 전해졌다.
"뭔 소리냐 저게?"
"그러게 여기선 좀 조용히 하라니까요. 하여간...웬만하면 편하게 가고 싶었는데."
아아아아아──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해서 울리는 가냘프고 애처로운 여성의 목소리.
"그러니까, 이유 정도는 설명해 줘야지."
"승현이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 판테온에 도착하고 나면 이야기해 주겠다고."
"아니 그거 말고. 왜 조용히 해야 하는...뭐냐, 저건?"
툴툴대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장춘식이 천천히 정면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어둠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실루엣.
턱, 스으윽- 턱, 스으윽-
가느다란 양팔로 몸을 지탱한 채 화려한 무늬를 가진 배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나타난.
전신에서 샛노란 진액을 뿜어내는 인간과 곤충이 뒤섞인 괴물을 본 승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봐. 들켰네. 너 때문이야."
"야, 이게 왜 내 탓...뭐 저런 징그러운 게 다 있냐? 몬스터인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역한 악취.
의아한 표정으로 코를 틀어쥔 장춘식을 향해 로제가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왕이었던 녀석이에요."
"여왕? 어디서 들은 적 있던 것 같은...아! 그 케이프인가 하던 녀석이 예전에 조종했다는 그으으윽...."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장춘식이 세차게 손뼉을 탁, 치다 말고는. 다리를 오므린 채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씨. 손뼉만 쳐도 아프잖아. 막 울린다고. 빨리 권능인지 뭔지를 써서 원래대로 고쳐놔."
"자업자득인데 뭘 그래? 수리는 판테온에 도착한 뒤에 해 줄게. 빈 땅콩."
"...그렇게 부르지 마라. 정 할 거면 땅콩 말고 코코넛 정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저기 있는 녀석이랑 안면이라도 익혀 놔."
웅크린 장춘식의 말을 끊은 승현이 배를 질질 끌며 그들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는 여왕을 가리켰다.
아아아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선명히 드러나는 여왕의 실루엣.
"날개가 사라지고, 털이 더 복슬복슬...우욱. 도저히 예쁘게 보려 해도 안 되네요. 이전에는 그래도 봐줄 만했는데."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
이전보다 한층 더 혐오스러워진 외형. 입을 틀어막은 채 헛구역질을 내뱉는 로제를 다독여준 승현이 장춘식을 일으켰다.
"너는 이참에 얼굴 좀 익혀 놔. 친하게 지내야지."
"친하게? 내가 왜?"
아픔도 잊고 황당한 듯 승현을 바라보던 장춘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아아아아───
입안에서 무언가를 씹고 있는 듯 연신 바쁘게 움직이는 새빨간 입술.
창백한 여성의 얼굴 위로 묻어나오는 정체 모를 진액과. 이빨 사이에 덕지덕지 낀 살점을 본 장춘식이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야이 씨. 차라리 몬스터가 낫겠다. 이건 뭐...내가 상대하랴? 아직 아프긴 해도 저 녀석 정도는 충분히 될 것 같은데."
"아니, 앞으로 한솥밥을 먹게 될지도 모르는 녀석을 때리면 쓰나. 게다가 저 녀석, 지금의 네가 상대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을걸?"
"...한솥밥?"
"아직 탈피를 다 끝마치지 못해서 생긴 건 좀 그렇지만. 나중엔 좀 괜찮아질지도 모르지. 네 부하가 될 녀석이니 인사해."
"미쳤냐 너?"
황당함을 넘어서 어이가 없어진 장춘식이 입을 쩍 벌렸다.
"부하?"
혐오스러운 외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할지조차 불분명한 저 괴생명체가 자신의 부하라니.
당황한 장춘식을 향해 다가오던 여왕이 천천히 경계 태세를 갖추며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외형은 조금 다르지만, 익숙한 기운. 여왕에게서 느껴지는 독기를 감지한 승현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공격성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구시온 자식, 여기서 진짜 별짓을 다 했었군."
"정확히는 구시온의 사주를 받은 케이프가 벌인 짓이죠. 이 녀석을 만든 게 고독(蠱毒)의 술법이라고 했었던가요?"
"맞아. 무고(巫蠱)라고도 부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녀석인데. 설마 여기에 둥지를 틀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고독? 무고? 그게 뭔데?"
"그게 말이야...."
수천 마리의 독충과 독물을 한 통에 몰아넣고, 굶주림에 지친 녀석들이 최후의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서로를 잡아먹게 놔둔 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최후의 한 마리를 죽여 상대를 저주하거나, 또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를 부리는 술법인 고독.
승현과 로제가 여왕이 서식하던 세 번째 뿌리 능선에서 고독을 발견한 것은 장춘식이 의식을 잃고 있던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구시온 자식. 시시포스의 아바타가 강림할 시기에 맞춰 최소한의 숫자만 밖으로 끄집어내어 두고, 나머지는 전부 약화된 세계수의 눈을 피해 저걸 만들던 거였어."
수천 마리의 여왕. 그리고 감시자가 서로를 잡아먹고 죽여 탄생한 고독.
고요히 얼어붙은 혹한의 대지 아래에서 벌어진 그 과정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훤히 알 것 같았기에
고약한 악취와 약간의 분노. 그리고 짜증으로 인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로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아무리 인위적으로 창조된 생명이라곤 해도 어떻게 저런 짓을...."
"책임은 한 달 뒤에 묻도록 하고, 지금은 일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조만간 장춘식의 부하가 될 녀석이니 겁만 줘서 쫓아내야겠지."
"아니, 그러니까 왜 저게 내 부하...."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해."
장춘식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 승현이 천천히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천천히 주변을 맴돌며 자신들을 탐색하는 고독은 규격 외 등급 몬스터와 비등한 힘을 가진 괴물.
괜히 싸움을 길게 끌었다간 동굴 전체. 더 나아가 능선 자체가 흔적도 없이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귀찮으니까...."
짝-
가볍게 손뼉을 친 승현의 주변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찬란한 광휘가 잠식해 나갔다.
오오오오───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이 승현의 영역인, '불완전한 성역' 안으로 들어온 고독이 괴로운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기를 근간으로 둔 녀석이라 그런지, 에테르에 취약하네."
- 불쾌한 건 나도 매한가지다. 프레이야. 질질 끌지 말고 얼른 치워버려라.
"이제 삐진 건 좀 풀린 모양이지? 뭐, 기분이다. 분부대로 해 줄게."
그림자 안에서 고개를 불쑥 내민 굴베이그가 볼멘소리를 내뱉자,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본 승현이 합장하듯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죽지는 않겠지만...제법 아플 거다."
빠지지직-
그와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쏘아진, 고독의 전신을 꼬챙이처럼 관통하는 한 줄기 푸른 뇌전.
아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며 사정없이 몸을 뒤틀던 고독이 이내 눈을 까뒤집으며 축, 늘어졌다.
"급한 대로 기절만 시켜 놨으니까. 다음에 데려가서 잘 키우도록 해. 애지중지. 알지?"
"방금 그건...뭐냐, 대체? 너 번개도 쓸 수 있어?"
이러한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장춘식이 놀란 듯 더듬거리며 묻자, 그림자에서 머리를 쏙 내민 굴베이그가 한심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 제 능력을 뺏긴 것도 못 알아채다니. 어지간히 모자란 녀석이군.
"내 능력이라고? 뺏겨?"
"어. 에트나의 폭염이나 아이네아스의 포격을 쓰면 기절이 아니라 그대로 통구이가 될 거 아냐. 동굴이 무너질지도 모르고. 당연한 걸 뭘 물어?"
"그게 아니라...."
"영역을 써서 아주 잠깐 네 능력을 빌린 거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
자신의 인지를 벗어난 승현의 능력에, 할 말을 잃어버린 장춘식이 허망하게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각성자의 능력을 뺏어서 사용했다고?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게 다 있어?"
"영역 안으로 한정된 게 단점이지만 그리 어려운 건 아니야. 뭐, 최상급 신장쯤 되면 안 통하는 잔재주 같은 기술이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히 답한 승현이 정신을 잃고 늘어진 고독을 향해 와이어를 뻗었다.
곧이어, 녀석의 거대한 육신을 들어 한구석으로 치워버린 승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쥐었다.
"으...지독하구만."
늘어진 고독의 움직임에 맞추어 주르륵 아래로 떨어지는 샛노란 진액들.
"그래도 뒷정리는 깔끔히 하고 가야겠지."
권능을 사용해 어지간한 인간은 닿기만 해도 목숨을 잃게 되는 극독을 정화한 승현이 장춘식과 로제를 향해 손짓했다.
"녀석이 깨어나면 귀찮아질 테니 얼른 가자. 웬만하면 안 마주치고 지나가려 했는데...너 때문에 이게 뭐냐. 으, 찝찝해."
"이게 왜 내 탓이냐. 그보다 저걸 내가 다뤄야 한다고? 그냥 네가 가지면 안 되냐?"
"난 가져봐야 쓸모가 없어. 지성이 거의 없는 녀석들과는 의사소통이 안 되거든. 당연히 다룰 수도 없고."
"나는 될 것처럼 말한다?"
"그야 수준이 비슷하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다람쥐나 해파리 정도의 지능은 있을 테니까. 침팬지 수준인 너랑 잘 맞을걸?"
"...."
어쩐지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만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든 장춘식이 슬그머니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서, 판테온에 가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건데? 저 녀석이 기절했으니 이제 말해도 되는 거지?"
"거의 다 왔어. 내 사념이 잠든 세계수와 연결된 통로가 이 근처에 있거든."
"사념?"
"어. 그리고 판테온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장춘식이 가진 가능성.
그리고, 그가 완전한 각성에 실패한 채, 지금의 상태를 유지했을 때 일어날 참혹한 결과.
두 가지를 동시에 떠올린 승현이 표정을 굳히며 장춘식을 응시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해주겠는데. 널 판테온에 데려가는 건 내 욕심 때문만이 아니야."
"딱히 그것 때문이라도 상관은 없는데.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네 일이 내 일이지. 사나이 장춘식, 의리 빼면 시체인 거 모르냐?"
"와...맨날 헛소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 멀쩡한 말도 할 줄 아네요. 의리 빼면 시체라...나도 나중에 써먹어야지."
"이 정도쯤이야. 진정한 사나이가 되고 싶다면 언제든 날 찾아오도록."
"그건 됐어요."
"쯧, 사나이란 이름이 가지는 가치를 모르는구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리는 로제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 장춘식.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선 승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고. 이건 농담이 아니니까 잘 들어. 여기까지 왔으니 이야기해 주는 거야."
갑작스레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장춘식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게 분위기를 잡고 그래?"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짐승의 왕이 되어야 해.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건 선택권이 없어."
"그러니까. 이유 정도는 설명해 줘야 할 거 아니야."
- 그냥 사실대로 말해라 프레이야. 이전부터 느낀 거지만. 넌 너무 마음이 약하다.
"그건...."
- 내가 말하지.
승현이 조금 머뭇거리자, 답답한 듯 그림자 안에서 빠져나온 굴베이그가 장춘식과 마주 섰다.
- 만일 왕으로서의 '격'을 얻지 못한다면. 반년 뒤에 마나의 씨앗이 개화되는 순간, 넌 반드시 죽는다.
"죽는다고? 내가?"
- 네 녀석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어긋난 능력은 오랫동안 근원의 그릇인 저 녀석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 마나의 씨앗에서 개화한 세계수는 너를 잘못된 존재로 인식하고....
"가장 먼저 널 죽일 거야. 어찌 보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굴베이그의 말을 이어받은 승현이 눈에 힘을 주며 장춘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짐승의 왕이 되어야 해. 고독을 비롯한 마수와 신수들의 지배는 둘째고. 일단은 네가 살기 위해서라도."
잠시간 이어진 정적.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장춘식이 말문을 열었다.
"...사실이냐, 그 얘기? 내 능력이 네 영향을 받아 변화한 결과물이라고? 내가 팀원들을 죽인 것도. 그간 능력을 억누르며 살아온 것도?"
"내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겠냐.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됐네. 미안하다."
거짓 따위는 묻어나오지 않는 목소리. 땅바닥을 바라보는 승현에게 다가간 장춘식이 그의 등을 퍽- 후려쳤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고개를 숙이냐. 새끼가 이럴 때 보면 존나게 소심해요, 하여간. 그래서 그 왕인지 뭔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펜리르."
"펜리르?"
"판테온에 잠든 짐승의 왕, 펜리르를 네가 잡아먹어야 해."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3화
세 번째 능선의 심층부.
판테온과 이어진 통로가 개설된, 세계수의 입구에 도착한 승현과 장춘식을 향해 로제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둘 다 잘 하고 와요!"
"잠깐만 기다려. 야, 춘식아. 로제랑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자리 좀 비켜줘라."
"할 얘기? 뭔데? 나도 들을려."
"넌 몰라도 되는 얘기니까 저리 가. 인마."
"이 새끼가...왜 나만 따돌리냐?"
"공부는 더럽게 안 하던 놈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너 요즘도 이틀을 2틀이라고 쓰지?"
"고친 지가 언제인데 인제 와서 그 얘기를 왜...쯧,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비밀 얘기 존나게, 실컷. 신나게 하고 와라."
조금 토라진 듯, 툴툴거린 장춘식이 거친 발걸음으로 자리를 옮기자.
에테르를 방출해 사방에 차음막을 펼친 승현이 품속에서 반지 케이스 정도 크기의 밋밋한 나무 상자를 꺼냈다.
"받아. 선물이야."
"선물? 뭐예요 이게?"
"일출. 단탈리온이 철수한 뒤에 아레스에 남아 있던 걸 뺏어온 거야."
"네?"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한 승현의 태도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로제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내가 한 건 아니고 유신애 팀장. 아니지, 이제는 지부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그 사람이 찾아온 거야."
"진짜 이게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일출이라고요?"
"정확히는 그 상자 안에 든 게 일출이지. 괜찮으니까 열어 봐."
손에 쥔 상자와 승현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로제가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고.
곧이어, 한복판에 곱게 놓인 새하얀 보석을 발견한 로제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게...."
마치 사람의 체온처럼 온기를 품은 보석을 만지작거리던 로제가 일출을 손에 꼭 쥐자, 그녀를 알아본 듯한 일출이 한 차례 짧게 진동했다.
"아버지의 일출이구나."
냉기를 품은 일몰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
희미하게 감지되는 베일의 마력을 느끼며 깊은 생각에 잠긴 로제.
그녀를 향해 다가선 승현이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원래는 무기의 형태였겠지만, 손상 정도가 워낙 심해서 일단은 장비의 성질을 기억하는 코어만 복원해 놨어. 나머지는...."
"제가 직접 찾아왔어야 했는데...고마워요!"
우두둑-
감격에 찬 얼굴로 있는 힘껏 승현을 끌어안은 로제.
승현의 경추가 신장 급에 도달한 그녀의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버렸다.
"...."
"어, 어어어...? 미안해요."
"괜찮아, 이 정도는 다시 맞추면 원래대로...."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해 줄게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요."
우두둑- 우두둑-
다급한 로제의 손놀림에 맞추어 연신 제멋대로 꺾이는 승현의 목덜미.
"아, 아니야. 내가 할게. 제발."
이대로 있다간 연체동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에, 에테르를 끌어 올린 승현이 다급하게 치유 능력을 발휘했다.
"후우, 하마터면 아파서 죽을 뻔했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이 정도로는 안 죽는 거, 알고 있었지?"
"그럴 리가요."
"아무리 봐도 알고 그런 거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능글맞은 로제의 눈웃음.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난기 가득한 에포나의 얼굴을 지워버린 승현이 로제의 손에 쥐어진 일출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부탁할 게 한 가지 더 있어."
"부탁이요?"
"잠깐 저 녀석 좀 맡아 줄래? 저런 건 판테온에 못 데려가거든."
- 저런 거라니. 실례다.
"악! 깜짝이야!"
일출이 담겨있던 상자 안에서 예고 없이 불쑥, 튀어나온 굴베이그의 새까만 머리.
기함한 로제가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흉내쟁이와 융합한 저 녀석이 머물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거든. 반나절에 한 번씩 마나를 공급해 줘야 하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선인장 키우는 셈 치면 될 거야."
- 감히 이 위대한 굴베이그 님을 화분 취급하다니. 이 굴욕의 대가는 언젠가 톡톡히....
"시끄러워. 말라죽기 싫으면 한 달 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가차 없이 뚜껑을 닫아 굴베이그의 불만을 일거에 응축한 승현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로제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선물이 더 있는데 말이지."
"선물이 또 있다고요?"
"사실 이게 본론이거든. 지난번에 했던 얘기, 기억나?"
천천히 뻗어진 승현의 손가락이 로제의 목덜미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투박한 목걸이, 브리싱가멘을 가리켰다.
"이게 왜...설마?"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린 로제의 까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찾았어. 두 분 다 판테온에 계시더라."
"진짜죠?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그래. 그러니까 춘식이 다음은 네가...."
"고마워요!!!"
우드드득-
승현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로제의 힘을 이기지 못한 그의 허리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미안해요...."
* * *
"뭐야. 여기가 판테온이냐?"
"어. 확실히 우회해서 오니까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부담이 적네. 자주 써먹어야겠어."
로제와 굴베이그를 돌려보낸 이후.
승현과 함께 통로를 넘어선 장춘식이, 로제에게 빌린 브리싱가멘을 매만지며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게 끝? 시시하구만."
녹음이 우거진 풀숲과 새파란 하늘. 그리고 맑게 지저귀는 산새들.
분명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초월체들이 거주하는 차원이라기엔 지나치게 평범하다.
"뭘 기대했는데?"
"외계인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 아니면 그런 거 있잖냐. 고질라나 E.T 같은 거."
"왜, 그냥 포켓몬이랑 디지몬도 찾지. 몬스터볼 하나 만들어 줘?"
"유치한 새끼. 저런 게 여기 대장...."
장춘식이 자신을 향해 비아냥대는 승현을 향해 막 삿대질을 하려던 그때.
- 필멸자 주제에 감히!!! 무엄하다!!!
우거진 수풀 속에서 누군가가 잔뜩 쉰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뭐야, 누구야?"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척.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장춘식을 향해 의문의 목소리가 재차 호통을 내질렀다.
- 미천한 인간이 프레이야 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다니. 당장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리지 못할까!
"뭐야, 너 누구야. 뭐 하는 놈인..."
- 이노오오옴!!! 당장 머리를 조아리거라!
수풀 전체를 쩌렁쩌렁 뒤흔들 정도의 굉음. 그와 동시에 지면이 세차게 흔들리며, 지면에서 튀어나온 식물의 뿌리가 장춘식의 허벅지를 휘감았다.
"고작 이 정도로 사나이 장춘식을 무릎 꿇리려 했던 거냐? 가소롭군."
빠지지직-
부분 수인화를 펼침과 동시에 커다랗게 부푼 장춘식의 허벅지가 식물의 뿌리를 썩은 밧줄처럼 끊어내자.
이번에는 그의 머리 위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 끄악! 감히 인간이 내 공격을 파훼해? 용서할 수 없다!
노성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장춘식의 굵은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대침.
카앙-
에이트를 꺼내 그것을 쳐낸 승현이 이름 모를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아마란스였구나. 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 일행이거든."
- 헙...프, 프레이야 님께서 저, 저따위를 기억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잘 지냈어? 신마대전 이후로 처음 보는 건가?"
- 친히 안부까지! 이 아마란스, 분에 넘치는 영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필멸자로 환생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드디어 격을 되찾으신 겁니까?
"뭐, 그렇게 됐어."
- 경축드립니다! 프레이야 님. 이 아마란스는 프레이야 님께서 돌아오시길 오매불망....
감격에 찬 목소리.
끝없는 수다에 지친 승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거대한 나무가 이에 화답하듯 꾸벅, 몸을 숙였다.
"얘기는 들었는데 이전과 많이 달라져서 바로 못 알아봤네. 예전에는 자그마한 묘목 크기였는데 말이지."
"누군데, 저게?"
"아마란스. 초월의 격에 든 식물이자, 펜리르의 영역을 지키는 문지기야."
"식물도 초월체가 있어? 게다가 그런 녀석이 문지기? 잠깐..."
승현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장춘식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승현의 어깨를 움켜쥐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럼 여기가 그 펜리르인가 하는 녀석의 영역이란 말이야?"
"어. 왜?"
"미친놈아! 내가 짐승의 왕인지 뭔지가 되려면 그놈을 잡아먹어야 한다면서."
"잘 아네. 맞아."
"잘 아네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다짜고짜 적진에 들어오는 놈이 어딨어! 이럴 땐 최소한 상대의 숫자 정도는 파악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식'이란 단어까지 사용해 가며 승현을 향해 열을 올리는 장춘식.
거칠게 자신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장춘식을 빤히 쳐다보던 승현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모든 승부는 일 대 일일 테니까. 떼로 덤비는 일은 없을 거야."
"일 대 일?"
"어. 그게 펜리르가 세운 이곳의 규칙이거든. 맞지? 아마란스?"
- 그렇습니다. 역시 프레이야 님! 판테온의 주인답게 사소한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비굴한 동작으로 승현을 향해 나뭇가지를 싹싹 비비는 아마란스.
"살다 살다 나무가 아부를 떠는 것도 보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조금 벙찐 장춘식의 귓가에, 잔뜩 쉰 아마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런데 프레이야 님. 주제넘은 행동이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괜찮아. 질문이 나쁜 거도 아니고."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기 있는 멍청해 보이는 인간과 프레이야 님은 어떤 관계인지....
"물질계에서 데려온 내 부하야. 인간들 식으로 말하자면 쫄따구? 쫄병? 따까리?"
빙글빙글 웃으며 장춘식의 넓은 등을 툭툭 두드리는 승현.
어이가 없어진 장춘식이 재차 승현의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귓가로 전해지는 승현의 목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이 그의 입과 손을 휘감았다.
"뭐? 이 형님한테 감...."
- 조용히 하고 내 말 들어 인마. 대다수의 초월체는 필멸자와 초월체가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한다고. 굴베이그만 봐도 모르겠어? 나야 상관없지만 네가 괜히 피곤해져.
"끄응."
하는 수 없이 앓는 소리를 낸 장춘식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마란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 아하!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제가 물질계에 있을 때 보았던 노예와 비슷한 직책이로군요!
"...."
"그렇다고 보면 돼. 그보다 난 지금부터 이 녀석을 데리고 펜리르의 영역에 들어갈 생각이거든. 괜찮겠지?"
- 그, 그러고 보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제가 얼핏 듣기론 저 인간이 펜리르 님께 도전한다고....
"아, 그건 말이야. 네 귀가 이쪽이었던가?"
아마란스에게 바짝 다가간 승현이 쪼그려 앉아 그의 밑동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사실 저 녀석을 꽁꽁 묶어 펜리르의 먹이로 던져줄 생각이거든. 깜짝 선물이야. 선물. 그러니까 펜리르한텐 우리가 여기 온 걸 비밀로 해 줘."
- 과연! 겁 많은 인간이 지레 도망치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하신 거군요. 자비로우셔라.
"뭐, 그런 셈이지."
- 그러고 보니, 겁에 질린 인간은 맛이 급격히 떨어진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역시 프레이야 님이십니다! 흐흐....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아마란스가 음흉한 웃음을 내비치자, 자리에서 일어난 승현이 그의 줄기를 향해 넌지시 손을 뻗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영역 내부를 좀 안내해줄 수 있을까? 너무 오래간만이라 길이 가물가물해서 말이지."
- 물론입니다! 이 아마란스, 온 힘을 다해 프레이야 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어디 보자...그럼 여기서 가장 가까운 구역의 왕이 누구지? 아직도 다섯으로 나뉘어져 있던가?"
- 지금은 셋으로 줄었습니다. 헌데 주제넘은 질문이지만, 곧바로 펜리르 님께 방문하시면 될 것을 왜....
"이왕 선물로 줄 거 제대로 해 줘야지. 알잖아, 펜리르 그 자식이 뭘 좋아하는지."
- 그런 깊은 뜻이...!!!
펜리르에게 복종을 맹세한 세 마리의 왕.
각자의 구역을 지배하는 그들의 존재를 상기한 아마란스가, 승현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그럼,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먼저 모시겠습니다.
"가까운 구역이라...거기의 왕이 누군데?"
"본디 유인원 태생의 초월체인데 수백 년 전 펜리르 님께 복종을 맹세한 자입니다."
"그래? 원숭이 출신은 드물 텐데...내가 아는 녀석인가?"
"아마 생소하실 겁니다. 초월의 격을 얻게 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무슨 권능을 가진 놈인지는 알아?"
은근슬쩍 정보를 캐묻는 승현.
잠시 머뭇거리던 아마란스가 그에게 답변을 내놓았다.
"사토리. 상대의 생각을 읽는 자입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4화
햇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밀림.
사토리의 영역을 향해 걷던 장춘식이 찌는 듯한 더위를 참지 못하고 땀에 푹 젖은 티셔츠를 벗어젖혔다.
"와, 씨. 뭐가 이렇게 후덥지근하냐...사우나 같네. 넌 안 덥냐?"
오른손에 붉은 꽃이 핀 나뭇가지를 쥔 채, 여유롭게 걷던 승현이 체온 조절 기능이 붙은 자신의 유틸리티 자켓을 가리켰다.
"난 이게 있어서 별로."
무덤덤한 목소리지만 어딘지 모르게 얄미운 모습. 인상을 한껏 구긴 장춘식이 승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네가 입고 있는 그거. 혼자만 좋은 거 입고 다니냐?"
배알이 뒤틀린 장춘식이 유틸리티 자켓의 옷깃을 잡아채려던 그때, 승현이 손에 쥔 나뭇가지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 이놈!!! 무엄하다!!! 당장 그 손 치우지 못할까!
"...."
그의 목소리에 맞추어 사방으로 흩날리는 샛노란 꽃가루.
안내역으로 데려온 아마란스의 분신이 풍기는 지독한 악취에 흠칫한 장춘식이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쥐었다.
"아이 씨. 뭐 이런 게 다 있어?"
- 이놈! 필멸자 주제에 감히 근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려 하다니! 내 당장 물질계에 현신하여, 네 녀석의 삼족을 멸하겠다!
"됐어. 난 괜찮으니까 그냥 넘어가도 돼."
- 제 주제도 모르는 미천한 인간이 이를 드러냈음에도 어찌 그런....
"아랫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도 지배자의 덕목이거든."
- 과연...이 아마란스! 프레이야 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씨에 다시금 감복했습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히 대화를 이어가는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장춘식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여기가 판테온이라면 그 펜리르란 녀석도 네 아래에 있는 놈 아니야? 그런 놈을 내가 죽여도 되는 거냐?"
"상관없어. 여기 사는 녀석들은 나를 따르는 녀석들이 아니거든. 게다가...아니다."
판테온에 소속되길 거부하는 신수들이 모인 짐승의 땅.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꺼던 승현이 말끝을 흐리자, 장춘식이 의아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뭔데 그래?"
"아니야. 지금 얘기해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흥분하면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장춘식의 능력. 이를 떠올린 승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싱거운 놈 같으니라고."
다시금 이어진 침묵.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벗어둔 티셔츠로 비처럼 흐르는 땀을 닦은 장춘식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후...."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정글. 아마란스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백 퍼센트 길을 잃었을 게 분명한 곳이다.
"사토리란 녀석은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이러다 여기서 늙어 죽겠네."
더위에 지친 장춘식이 막 걸음을 멈추려던 찰나. 조금 긴장한 듯한 아마란스가 중얼거렸다.
-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거냐?
"눈치채? 뭘?"
-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사토리는 한참 전부터 우릴....
"따라오고 있었다고?"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장춘식의 눈에 보인 것은, 굵은 나뭇가지 아래로 매달린 붉은 덩어리였다.
"뭐냐, 저건?"
"나?"
장춘식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얼핏 잘 익은 열매처럼 보이는 구체가 별안간 지면을 향해 뚝, 떨어졌다.
꽈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 구체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폈다.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 흰자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까만 동공과 못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이빨.
"사토리다. 반가워."
침팬지와 고릴라의 그 중간쯤 되어 보이는 생물이 그들을 향해 붉은 털로 뒤덮인 손을 까닥였다.
"뭐야, 원숭...."
"뭐야, 원숭이잖아? 침팬지인가?"
"내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떻게 알았지?"
"...."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장춘식의 말을 따라 한 사토리가 긴 팔을 늘어트리며 승현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판테온의 주인이라는 자가 당신이구나? 펜리르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프레이야."
"그래. 한승현이라고 불러. 지금은 그 이름이 더 익숙하니까."
"한승현? 와...얘기만 들었지, 직접 보니까 좀 당황스럽네. 정말 아무것도 안 읽혀."
- 이놈! 프레이야 님께....
"무슨 말버릇이냐고? 프레이야를 따르지 않는 내가 굳이 굽신거려야 할 이유가 있나?"
아마란스의 노호성을 비아냥으로 끊어버린 사토리가 신기한 듯 승현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 온 이유가 뭔데? 진짜 나랑 저 모자라 보이는 인간을 붙여보기 위해서 온 거야? 순수히 그 목적으로?"
"맞아."
"흠...저 인간이 펜리르를 향한 선물이라. 뭔지 알겠다!"
장춘식과 아마란스의 생각을 읽은 듯.
별안간 걸음을 멈춘 채 아마란스를 응시하던 사토리가 승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저 인간이 내 '격'을 먹어치우게 하려는 거구나! 맞지? 정확히 맞혔지? 응? 저대로 가져가면 맛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맞아. 펜리르쯤 되는 녀석한테 시시한 선물을 전해줄 순 없으니까. 최대한 살찌워서 보내줘야지."
"푸하하하하하!"
습기로 가득한 밀림 전체를 쩌렁쩌렁 뒤흔드는 폭소.
허리를 뒤로 꺾은 채 한참을 웃어대던 사토리가 별안간 뚝, 표정을 굳혔다.
"저놈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당신도 끼어들 생각이야?"
"그렇다면?"
"안 싸워. 도망가서 꼭꼭 숨어야지. 판테온의 공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빙글빙글 웃으며 녹슨 못처럼 돋아난 이빨로 손톱을 물어뜯은 사토리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무슨 꿍꿍이지. 근원쯤 되는 존재가 굳이 날 죽이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건 아닐 테고...설마, 저 하찮은 인간에게 정말 날 먹이로 던져줄 생각인가? 펜리르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상대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읽는 능력을 보유한 그였지만, 눈앞의 승현은 마치 검은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새까만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토리.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만일 저놈이 지더랃도 판테온의 군사들이 너흴 토벌하러 올 일은 없을 거야."
그를 향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간 승현이 정신 방벽을 살짝 흐트러트렸다.
"...정말이야?"
"그래. 네가 이기면 마음껏 먹어.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을 테니까. 승자가 모든 걸 취한다. 그게 이곳의 법칙이잖아?"
방벽의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온 승현의 생각. 이를 읽어낸 사토리가 미심쩍은 듯 되물었다.
"약속한 거지?"
"근원의 격을 걸고 약속하지. 단, 저놈이 '제물'이란 것과, 내가 방문한 것을 펜리르에게 비밀로 해 준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끼얏호!"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승현의 대답. 환호성을 내지른 사토리가 길쭉한 양팔을 번쩍 들며 장춘식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반갑다. 도전자."
"도전자?"
"내가 이곳의 왕이니까. 당연히 네가 도전자지."
외모와는 달리 천진난만한 행동. 마치 어린아이 같은 사토리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장춘식이 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짜 해도 되는 거냐?"
"어. 눈치 볼 거 없이 그냥 해. 이곳의 지배자인 펜리르를 만나려면 먼저 저놈들을 상대해야 하거든."
"그래도...덩치만 컸지, 하는 짓은 완전 애...."
"나랑 붙기 싫어? 그럼 얌전히 먹히던가. 배를 곯은 지 오래여서 시장하던 참이었거든."
"끄응...."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찢어질 듯 벌리는 사토리.
'펜리르를 먹어치우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했었지.'
승현의 이야기를 떠올린 장춘식이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리자.
대치 상황이 지루한 듯, 길쭉한 발가락으로 땅바닥을 긁어대던 사토리가 별안간 천둥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펜리르를 먹어? 너 따위가? 푸하하하하! 불쌍한 놈...."
"불쌍해? 내가?"
"됐고. 덤벼. 네가 가진 수인화인지 하는 능력을 써도 좋고. 안 써도 되고. 마음대로 발버둥 쳐 봐."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이는 사토리. 하는 수 없이 자세를 취한 장춘식의 팔뚝에 푸른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녀석을 패는 건 사나이가 할 짓이 아니지만...어쩔 수 없지. 원망하려면 저놈을 원망해라."
"허세 부리지 마. 말은 그렇게 해도, 주변에 부하를 매복해 뒀을까 봐 걱정하는구나?"
여유로운 몸짓으로 장춘식과 마주 선 사토리의 몸이 점점 작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부하는 없어. 여긴 나 혼자뿐이야."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이 구역의 왕이라면서. 부하가 없는 왕이 세상에 어디...."
"진짜야. 전부 먹어버렸거든. 내가."
쩌억-
하마처럼 입을 벌린 사토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구멍을 가리켰다.
"부하를 먹어?"
"난 짐승이니까. 굶주린 짐승에게 동족 포식 정도는 기본 아니겠어?"
"이거, 가만 보니 굉장히 기분 나쁜 놈이네."
당연하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어대는 사토리. 눈썹을 찡그린 장춘식이 에고 아머를 착용하며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이 형님이 네 버릇을 단단히...."
"왼쪽 옆구리. 맞지?"
콰앙-
한 끗 차이로 허무하게 빗나간 장춘식의 주먹이 사토리가 서 있던 자리에 적중했다.
우지지지직-
그의 주먹에 얻어맞아 썩은 수수깡처럼 맥없이 부러진 고목.
"보기보다 빠르다고 생각하네. 놀랐어?"
가볍게 몸을 날려 그 위에 걸터앉은 사토리의 안면에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얼굴인 척 속임수를 쓴 뒤에 날 붙잡으려고 했지?"
마치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사토리의 움직임.
손쉽게 장춘식의 손아귀를 벗어난 사토리가 자신의 새까만 혓바닥을 낼름, 내밀었다.
"인간 중에선 한 가닥 하는 것 같지만 나한테는 안 통해. 다 보이거든. 시시하다. 시시해."
"저런 개...아니, 원숭이 새끼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새하얀 엉덩이를 짝짝 때리며 도발을 반복하는 사토리.
약이 잔뜩 오른 장춘식이 다시금 거칠게 땅을 박찼다.
"왼쪽, 왼쪽. 오른쪽. 하단. 어? 번개도 쓸 줄 아네? 멍청하게 생긴 걸 보니 마법사는 아닌 것 같은데. 우와...한 대도 못 맞추는구나. 한심해라."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몸을 피한 사토리가 양팔을 땅에 짚은 채 장춘식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승부가 너무 쉽게 날 것 같은데? 다 큰 사내놈은 영 질겨서 별로긴 하지만...약속은 약속이니, 잘 먹을게. 설마 무섭다고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너, 사람도 먹는 거냐?"
"어라? 몰랐어? 내가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초월체가 되기 전엔 하루가 멀다 하고...너 설마, 내가 사람을 먹은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나는 짐승이야, 짐승. 지금도 그렇지만, 물질계에 있을 때도 짐승이었다고. 짐승이 살기 위해서 사람을 먹는 게 나빠?"
할 말이 없어진 장춘식이 멍하니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바닥에 주저앉은 사토리가 말을 이어갔다.
"하여간, 인간들은 제멋대로 우릴 판단한다니까. 멍청이들 같으니라고. 뭐, 그건 됐고. 좀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거냐."
"다 큰 사내놈은 질겨서 영 입맛에 안 맞거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
"어린애. 그것또 세 살 정도 되는 어린애를 엄마 앞에서 산 채로 잡아먹는 거지."
표정을 굳힌 장춘식의 앞에서 자랑스레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토리.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뒤에 울부짖는 어미를 후식으로...."
꽈아아아앙-
커다랗게 부푼 장춘식의 팔뚝과 번개를 머금은 주먹이, 사토리의 머리통을 땅바닥에 박아넣었기 때문에.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5화
우지직-
거대한 압력과 함께 전신을 강타하는, 경추와 안면이 함몰되는 격통.
장춘식의 손에 짓눌린 채 땅바닥에 반쯤 머리를 처박은 사토리가, 다급히 재생 능력을 발휘해 부러진 뼈를 회복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착오는 없었다.
상대의 투로는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고, 이를 읽어낸 사토리는 그에 맞춰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잡힌 거지?'
속도. 힘. 그리고 경험까지. 불과 수십 년을 산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자신이 우월할진대.
'알고도 못 피했어.'
아무리 상대가 인간 중에서는 드문 수인화 능력자라고는 하나, 드물다는 것이 곧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기에 사토리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생각대로 안 움직여지네."
짐짓 여유로운 척 허세를 부린 사토리가 양팔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장춘식에게 짓눌려 있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다.
"어?"
꾸구구국-
전력을 다했음에도 미동조차 없는 자신의 머리.
당황한 사토리의 귓가에 장춘식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그 이야기. 사실이냐?"
"아아, 그거?"
땅바닥에 반쯤 처박힌 사토리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사실인데? 난 인간들이랑 달라서 거짓말 안 해. 싫어하...."
콰지지지직-
답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완전히 땅속으로 깊숙이 파묻혀버린 사토리의 머리.
그를 짓누른 장춘식의 앞발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왜 그랬냐."
"재미있잖아."
"그게 끝이냐?"
"왜 화를 내고 그래? 난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그게 무슨...."
"인간들 식으로 얘기하자면. 상부상조라고 해야 하나?"
땅바닥을 짚은 사토리의 두 팔이 별안간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축축한 손바닥이 장춘식의 안면을 뒤덮었다.
"자, 봐. 거짓말 아니야. 지금부터 네가 보는 건 전부 내가 겪었던 일이거든."
잠시간의 암전 이후 펼쳐진 환영.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휙휙 지나가는 사토리의 기억에, 장춘식은 멍하니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이건...."
"봤지? 다들 바라던 거라니까?"
혼돈.
이것 외에는 그가 본 광경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때로는 옆집 젖먹이를, 때로는 어제까지 친근히 인사를 나누던 이웃집 노파를.
어떨 땐 노쇠한 자신의 부모를.
식인 요괴로 군림하던 사토리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앞다투어 산 제물을 바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본 장춘식이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새끼가 판테온에...."
"올 수 있었던 거냐고? 사람이나 잡아먹는 원숭이 새끼가?"
"...."
"그야 간단하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인간들이 대가를 바친 만큼 그들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지켜줬지. 그럴듯한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허울만 좋은 놈들보다는 내 쪽이 더 신답지 않아? 그리고 말이야...."
뻐어억-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잔뜩 신이 나 떠들어대던 사토리의 주먹이 장춘식의 안면을 강타했다.
"악신(惡神)도 신이거든!"
콰지지지직-
족히 수백, 수천 년은 살아왔을 듯한 거목을 수수깡처럼 부수며 날아간 장춘식.
죽은 듯 바닥에 드러누운 그가 멀리서 팔짱을 낀 채 사태를 관망하는 승현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짜냐, 저거."
"어."
"저런 놈이 판테온에 있다는 건, 네가 받아준 거냐?"
"아니. 내 의지와는 관계없어."
"그럼 됐다."
승현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 뒤.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린 장춘식이 정면을 응시했다.
"착각은 아닌 것 같고. 아까보다 더 커졌네?"
어린아이 크기였던 조금 전과는 달리 어느새 3M가 넘어갈 정도로 불어난 사토리의 체구.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유인원에게서 시선을 뗀 장춘식이 재차 승현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몬스터랑 다른 게 없는 놈이구나."
"더한 놈이지."
"역시, 그렇지? 죽여도 죄책감은 안 들겠네."
"네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해."
살의를 품은 사토리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가만히 이를 듣고 있던 사토리가 실소를 머금었다.
"죽여? 날? 네가? 프레이야의 개입도 없이? 너 따위가?"
조금 전엔 방심한 탓에 일격을 허락했다지만, 그 또한 신장 급에 비견될 만한 신수.
"인간 중에선 제법 강한 것 같은데, 그래 봐야 인간이지."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리 없기에.
제멋대로 거만하게 내뱉던 사토리의 언행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날 죽이고 싶으면, 적어도 락샤사 정도는 데려...."
푹-
순식간에 바짝 다가온 장춘식의 붉은 눈동자.
그와 동시에, 복부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격통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어?"
분명 읽었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변칙을 섞어 돌진한 뒤.
자세를 바짝 낮추어 안면을 향해 내질러진 주먹은 눈속임일 뿐이며. 진짜는 자신의 복부를 향해 창처럼 내질러진 손가락이라는 것을.
"...."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다.
조금만 몸을 뒤틀어도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일격이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대지를 굳건히 딛고 선, 두 다리는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적의 공격을 쉽사리 허용했단 말인가.
"아프냐?"
치명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는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릿해지고. 호흡이 점점 가빠지며, 목구멍을 타고 붉은 피가 울컥울컥 치솟는다.
고개를 천천히 내린 사토리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복부에 어깨까지 박힌 장춘식의 오른손과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자신의 두 다리였다.
"말도 안 돼...."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자신의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한 섬찟한 감각.
그제야 전신을 옭아맨 족쇄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토리가 새까만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인간에게?'
펜리르와 지배자의 자리를 놓고 벌인 전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공포.
이를 인지한 사토리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가기 시작했다.
"히이이익...."
입가에선 침이 질질 흐르고 팔다리가 제멋대로 떨려온다.
조금 전까지의 의기양양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강렬한 생존 본능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내장을 포함한 뱃속의 모든 장기가 상대의 손아귀에 붙잡힌 지금.
아까와는 달리, 신수가 가진 재생 능력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된 그가 택할 방법은 한 가지였다.
"살려줘...."
그에게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이 그래왔듯, 최대한의 비굴한 자세로 목숨을 구걸하는 것.
"사실 난 널 죽일 생각이 없었어. 알잖아. 헤, 헤헤...나 같은 원숭이들은 원래 장난을 좋아하고...응? 장난. 그래! 장난!"
"그래?"
비굴한 미소를 지은 사토리가 천천히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벼대기 시작함과 동시에.
"꺄아아아아악!!!"
빠지지지지지직-
장춘식의 오른팔에서 방전된 새파란 전류가 사토리의 전신을 말 그대로 '튀겨'버렸다.
* * *
- 인간이 정말로 사토리를 쓰러트렸어. 프레이야 님의 도움 없이....
전투가 끝난 이후.
힘을 잃은 채 먼지처럼 흩어지는 사토리의 시체를 본 아마란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분명 사토리의 육체 능력이 다른 왕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해도....
판테온을 거부한 이들이 모여 사는 이곳, 짐승의 숲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살아온 아마란스기에.
생각을 읽는 사토리의 전투력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 다른 두 지역의 왕도 사토리를 상대로는 백 퍼센트 승리를 장담할 수 없건만...게다가 아까의 그 사토리를 억누른 기세는 대체 뭐란 말인가.
사방을 얼어붙게 만드는 장춘식의 섬찟한 기운을 떠올린 아마란스가 가볍게 제 가지를 떨었다.
- 저 정도로 강한 제물이라니. 펜리르 님이 보면 기뻐하겠어.
실체가 분명한 물질계의 먹잇감을 선호하지만.
평소 다른 차원에 거주하는 그들과 마주할 일이 없는 데다, 강한 상대를 먹을수록 포만감을 느끼는 신수의 특성상.
두 가지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장춘식은 펜리르에게 최고의 특식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저런 녀석을 바친다는 건...그만큼 어려운 제안을 하기 위함이겠지.
판테온의 주인이 친히 귀한 선물까지 바쳐가며 짐승의 왕에게 얻어내려는 게 대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에 잠긴 아마란스의 감각 기관에 불만이 가득한 듯한 장춘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러운 새끼...그딴 짓을 벌인 게 뭔 자랑이라고. 그나저나 이게 뭐냐."
먼지처럼 흩어진 시체 위로 남은 손톱 크기의 검붉은 구슬.
손에 묻은 사토리의 피를 털어버리며 그것을 주워든 장춘식이 승현을 향해 다가갔다.
"삼켜. 전리품이야. 원래는 사토리를 통째로 삼켜야 하지만...그건 좀 그럴 것 같아서 권능으로 정수만 추출했지."
"이게 뭔 줄 알고?"
"그간 사토리가 신수로서 쌓아 올린 격. 지금의 너한테 꼭 필요한 거야."
에테르를 이용해 아마란스가 대화를 엿듣지 못하도록 인식 왜곡을 펼친 승현이 구슬을 가리키자.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장춘식이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죽는 거 아녀?"
"자칭 사나이란 놈이 뭐 그리 의심이 많아?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느껴보는 게 빠르니까 그냥 먹어 인마."
"이건 사나이를 떠나서 당연한...어?"
딱-
장춘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승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사토리의 구슬이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뭐 한 거냐 지금?"
"별거 아냐. 그냥 권능을 써서 사토리의 정수를 네 위장으로 옮겨둔 것 정도?"
"...."
뱃속을 가득 메우는 기이한 열기.
생소한 감각에 입을 꾹 다문 장춘식을 향해 승현이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까불면 덕구 배변 패드를 통째로 옮겨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웅웅 울린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을 느낀 장춘식이 수인화를 사용하여 자신의 앞발로 승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인마! 이게 뭔 줄 알고 덥석덥석 먹이...어?"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능력을 사용했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에고 아머.
당황한 장춘식이 손아귀에 힘을 풀자, 피식 웃은 승현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고 아머를 쓰지 않아도 첫 단계까지는 통제가 가능해진 모양이네. 두 번째는 아직 힘들겠지만."
"뭔 소리냐, 이게?"
"뭐긴. 사토리의 격을 흡수함으로써, 오류로 치부되던 네 능력이 조금 보정되었다는 거지."
"어?"
승현에게서 물러난 장춘식이 멍하니 자신의 앞발을 바라보았다.
에고 아머 없이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던 이전과는 달리, 현재 그의 정신은 지극히 온전하다.
"그렇다는 건...앞으로 남은 두 녀석을 먹어치우면, 에고 아머 없이도 완전한 통제가 가능해진단 말이냐?"
"그거야 네게 달린 거지. 그보다 먼저 나한테 물을 게 있지 않아?"
"그렇지, 맞아! 대체 왜 사토리 같은 놈이 만신전에 있는 거냐? 분명 ...."
언젠가 승현에게 들었던.
판테온의 초월체가 되기 위한 조건을 떠올린 장춘식이 험상궂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에테르인지 뭔지를 사용할 수 있는 놈이 되기 위해선 믿음과 신앙이 필요하다면서. 당연히 착하게 살아온 놈만 판테온에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말이지. 이 짐승의 숲이 생긴 이유와도 연관이 있는 건데...."
판테온의 이중성에 관해서는 언젠가 설명해야 할 일. 승현이 막 장춘식을 향해 입을 떼려던 찰나.
콰아아아아-
별안간 불어온 거센 폭풍과 함께, 울창한 활엽수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거대한 박쥐가 두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 프레이야? 당신이 왜 사토리의 영역에 있는 거지?
새파란 빛을 띠는 눈동자의 크기만 해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을 넘어서는.
말 그대로 박쥐라기보단 괴수에 가까운 무언가.
"잠깐...너는...."
그의 정체를 기억해낸 승현이 의외라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굴의 왕 무르시엘라고? 너는 분명 미카엘의 손에 죽었을 텐데?"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6화
과거 신장 미카엘에게 격퇴당한 판테온의 신수이자, 동굴의 지배자라 불리던 무르시엘라고.
- 저, 저기 있는 무르시엘라고가 현재는 눈먼 자들의 왕이라 불리는, 다음 구역의 지배자입니다.
"흠...저 녀석이 아직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네."
겁에 잔뜩 질린 아마란스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양 날개를 쭉 펼친 무르시엘라고가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로 승현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 미카엘....
콰아아아-
족히 100m는 될 법한 거대한 날개로부터 쏘아진 전신을 짓누르는 풍압.
수인화를 발동한 장춘식이 두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로막았다.
"저 괴물은 또 뭐야. 아는 사이냐?"
"예전에 조금 인연이 있던 놈이지."
"...아무리 봐도 인연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렇게 화가 났냐."
사토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기세.
점차 강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장춘식이 수인화의 두 번째 단계를 해방하려던 찰나.
"넌 미카엘의 손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더니 멀쩡하네? 전보다 더 커진 것 같기도 하고."
철컥-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아이네아스의 갑옷을 해방한 승현의 전신에서 묵빛 포신이 튀어나왔다.
-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그보다 아까의 질문에 답해라. 물질계로 환생했다던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지?
"네게 알려줄 이유는 없어. 호기심 많은 것도 여전하네."
- 보아하니 또 새로운 장난감을 만든 모양이군. 좋아. 아주 좋아. 이래야 빛과 창조의 근원이자, 미카엘의 주인이지.
무미건조하게 답한 승현의 포신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새까만 포구 끝에 모여드는 빛의 입자.
- 어디. 그 알량한 장난감이 얼마나 쓸만한지 한 번 볼까?
날개 끝에 달린 거대한 갈고리로 승현이 걸친 갑옷을 가리킨 무르시엘라고가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주변의 대기가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며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복부.
이를 본 승현이 장춘식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장춘식, 귀 막아!"
"뭐?"
"너까지 지켜주기엔 시간이 촉박하니 귀 막으..."
삐이이이이익-
승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음이 지면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수천 년 묵은 거목들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수풀이 무성한 밀림의 대지가 비명을 내지르며 제 속살을 드러냈다.
오래전 멸종된 드래곤의 포효와 비견될 정도의 쇼크 웨이브.
불완전한 성역을 펼쳐 이를 상쇄한 승현이 헬름의 바이저를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성질 급한 것도 여전하군. 이번엔 어지간하면 안 나서려고 했는...."
- 호오? 저 인간은 뭐지? 필멸자 주제에 판테온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내 일격을 견뎌내?
단박에 승현의 말을 자른 무르시엘라고가, 두 다리로 꼿꼿이 바닥을 딛고 선 장춘식을 가리켰다.
"너 이 새끼...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야."
뱃속에서 치미는 핏덩이를 억지로 삼킨 장춘식이 무르시엘라고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전신에서 돋아나는 검푸른 갈기와 입가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굵고 날카로운 송곳니.
수인화의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든 장춘식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감지한 무르시엘라고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 너, 사토리를 먹었군. 게다가 그 모습은...큭. 아주 재미있는 인간이 판테온에 들어왔어.
"...?"
- 수인화라. 물질계에 있을 때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을 종종 봤었지. 네 녀석은 그중에서도 좀 더 특별한 것 같지만 말이야. 프레이야가 말 안 해주던가?
"알게 뭐냐?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덤빌 거면 빨리 덤벼."
- 큭...크하하하!
장춘식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무르시엘라고의 광소가 밀림 전체를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 좋아. 아주 좋아. 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게 아주 마음에 드는 인간이야. 이름이 뭐지?
"장춘식이다. 난 네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 장춘식...제 능력만 믿고 설쳐대는 멍청한 사토리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지. 아마 다음 표적은 나인 모양이로군.
"그래. 안 그래도 두 번째 왕이란 녀석을 찾아가려 했었어. 그게 너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조금 전부터 귓가에서 피를 흘리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한 장춘식.
그를 대신해 답한 승현이 긴장감을 숨기며 가만히 무르시엘라고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맞붙으면 끝장이야.'
일견 가벼운 부상처럼 보이지만.
사토리와의 격전으로도 모자라, 무르시엘라고의 쇼크 웨이브를 대비 없이 얻어맞은 장춘식은 지금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중태였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건 오로지 한 줌의 의지와 적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자존심뿐.
'계획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권능을 쏟아부어 치유하더라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중상이니....'
초월자의 눈으로 이를 간파한 승현이 어쩔 수 없이 무르시엘라고를 상대하리라 마음먹던 그때.
- 상처를 치료한 후 내가 지배하는 구역을 찾아오도록 해라. 제법 재미난 여흥이 될 것 같으니 당신들에게 맞추어 어울려 주도록 하지.
전혀 예상치 못한 무르시엘라고의 제안이 던져졌다.
가히 파격적인 조건. 이를 들은 승현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어째서지?"
- 그야, 당신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무르시엘라고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악의와 원한. 이를 감지한 승현이 눈살을 찡그렸다.
"...미카엘이로군."
- 만일 내가 저기 있는 인간 장춘식에게서 승리를 거둔다면, 당장 신장 미카엘을 내 앞에 데려오겠다고 근원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라.
미카엘을 향한 그의 원한은 익히 알고 있다.
오래전 벌였던 미하일과의 결전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왕좌에 앉아있는 것은 펜리르가 아닌 무르시엘라고였을 테니까.
"약속하지."
팔짱을 낀 승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은 무르시엘라고의 거체가 천천히 창공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내가 지배하는 눈먼 자들의 땅은 겁쟁이 아마란스의 인도를 받으면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을 거다. 그럼,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 겁쟁이라니....
아마란스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은 이내 무르시엘라고의 거대한 날갯짓에 묻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갔냐? 돌아간 거 맞지?"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고 있던 장춘식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 * *
"끄악!"
정신을 잃고 바닥에 짐짝처럼 내던져져 있던 장춘식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어쩐지 끔찍한 악몽을 꾸었던 것 같다.
"으, 오래간만에 한판 벌였더니 안 쑤시는 곳이 없...어? 멀쩡하네? 한승현 그놈이 치료해둔 건가?"
정신을 잃기 전 벌였던 전투와.
겨울숲 부족에서 승현에게 입었던 치명상이 말끔히 회복된 것을 확인한 장춘식이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여긴 또 어디냐."
분명 정신을 잃기 전까진 수풀로 가득 뒤덮인 후덥지근한 밀림에 있었는데.
깨어난 그의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붉은빛을 띠는 고운 모래와 바위뿐이다.
갑작스레 바뀐 주변 환경에 당황한 장춘식이 멍하니 별이 가득 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때.
모래를 짚은 그의 손바닥 언저리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깨어난 거냐. 무려 이틀이나 정신을 잃다니, 나약한 인간 같으니라고.
"뭐야, 아마란스냐?"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린 장춘식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손바닥 언저리에서 나뒹구는 아마란스였다.
"근데 꼴이 왜 그러냐?"
가지에 매달려 있던 붉은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수분을 머금은 채 은은한 광택을 내뿜던 가지는 바짝 말라비틀어졌다.
기억과는 다른 아마란스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장춘식.
깡마른 자신의 가지를 한 차례 부르르 떤 아마란스가 그를 향해 으스대며 말했다.
- 흥, 영광인 줄 알아라. 인간이 이 아마란스 님의 은총을 받은 것은 지금껏 전례가 거의 없던 일이니까.
"은총?"
- 프레이야 님의 명이 아니었다면 인간에 불과한 네가 이 아마란스 님의 귀중한 생식 기관을 섭취할 은혜를 입을 일은 없었을 거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넌 지금쯤....
"...잠깐. 뭘 먹었다고?"
"제대로 못 들었나? 분명 청력은 원래대로 돌아왔을 터인데? 생식 기관 말이다. 종족 번식에 사용되는 생식 기관!"
"그런 걸 왜 처먹여!"
믿을 수 없다는 듯 우악스럽게 아마란스를 움켜쥔 장춘식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어쩐지 조금 전부터 속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더라니...한승현 이 개자식이!"
- 이놈이! 기껏 인심을 써 줬더니 얼마나 귀한 건지도 모르고...생식 기관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는 거냐!
"그걸 누가 몰라 이 새끼야! 처먹을 거면 혼자 처먹지 그딴 걸 왜 나한테...."
"뭐야, 그새 일어났네. 몸은 좀 괜찮냐?"
아마란스의 가지를 거칠게 쥐고 흔들던 장춘식의 뒤에서 나타난 승현이 태연히 말을 건넸다.
곧이어, 아마란스를 바닥에 내팽개친 장춘식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승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 새끼...이 형님한테 대체 뭘 먹인 거야."
"뭘 먹였냐니? 왜. 안 받나? 아마란스의 꽃은 종족에 상관없이 효과가 발동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꽃이라니, 내가 기절한 동안 저 자식의 생식 기관을 처먹였다며. 어? 생식 기관이라면 이거 아냐, 이거! 이 새끼가 고등학교 개근상까지 탄 날 뭐로 보고!"
장춘식이 떨리는 손으로 연신 자신의 가랑이를 가리키자, 기가 찬다는 듯 그를 바라본 승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춘식아."
"왜 인마!"
"너 과학 시간에 졸았지."
"?"
"식물의 생식 기관이 꽃 아냐, 이 등신아."
"어...그러냐?"
머쓱해진 장춘식이 슬며시 손아귀의 힘을 풀자, 옷깃을 몇 차례 털어낸 승현이 바닥을 나뒹구는 아마란스를 주워들었다.
"쯧, 네가 고생이 많다. 일단 저 녀석이 정신을 차렸으니 좀 쉬도록 해."
- 명에 따르겠습니다, 프레이야 님. 그 전에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프레이야 님께서는 저 버릇없고 우매한 노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건 나도 동의해. 가끔 같이 다니기 창피할 때가 있거든."
- 그 마음 프레이야 님을 존경하는 판테온의 신하로서 백분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럼, 저는 의식을 멈추고 재생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승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지만 남은 아마란스의 몸체가 검은 빛을 띠며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한 숙면에 빠진 아마란스. 그를 품속으로 갈무리하는 승현을 향해 장춘식이 말문을 열었다.
"그 꽃이 대체 뭔데 그래?"
"포션의 근원. 치유 능력만 놓고 보자면 내 권능이랑 비슷할 걸?"
"...?"
"본래 아마란스는 트롤들이 거주하는 차원에서 신목(神木)으로 추앙받던 녀석이거든. 그 덕에 판테온에 오게 된 거고."
"그게 뭔 소리냐?"
"그러니까, 트롤에게 대대로 유전되는 치유 능력은 전부 원시 트롤에게 신성한 나무라 불리던 이 녀석으로부터 비롯된 거란 소리야."
승현이 별거 아니라는 듯 아마란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눈이 휘둥그레진 장춘식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럼 나도 트롤처럼 되는 거냐?"
"생긴 건 지금도 비슷한데. 오거 쪽에 더 가깝나?"
"헛소리하지 말고.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몸에서 트롤이랑 비슷한 냄새가 나더라니...."
"그건 네가 안 씻어서 그런 거고. 고작 하나 먹었다고 유전 형질이 즉각 바뀌거나 하진 않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그러냐."
승현의 이야기에 또다시 머쓱해진 장춘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새끼가, 진작 좀 말해주지. 그나저나 여긴 어디냐."
"사토리와 무르시엘라고가 지배하는 영역 사이의 경계선."
"그럼 곧바로 무르시엘라고인지 하는 녀석한테 가는 거냐?"
"아니. 계획을 좀 바꾸었어."
고개를 저은 승현이 지난 이틀간, 아마란스가 알고 있던 것과 주변을 탐색하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꺼냈다.
"세 번째 왕부터 처치한다."
"세 번째? 무르시엘라고는 두 번째 왕 아니었어?"
"맞아. 두 번째."
"그런데 왜?"
장춘식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승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의견을 꺼내놓았다.
"무르시엘라고가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네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그건...."
"네가 가진 능력을 끝까지 개방하면 물론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그건 발동이 걸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이성을 잃게 되어버리지. 피아 식별도 불가능해지고."
"인정하긴 싫지만...그렇긴 하지. 그놈이 나보다 강한 것도 사실이고."
이는 무르시엘라고의 공격을 가감 없이 맞부딪혀본 장춘식 또한 뼈저리게 체감한 바였다.
아무리 사토리와의 격전을 치른 후라고는 하나, 단순한 포효 한 번으로 그를 빈사 상태까지 몰고 간 무르시엘라고.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 장춘식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래서, 바뀐 계획대로 하면 무르시엘라고랑도 붙어볼 만한 거냐? "
"충분히. 너한텐 힘이 부족한 게 아니라, 통제력이 부족한 거니까."
장춘식이 가진 잠재력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승현이었기에.
자신 있게 답한 승현이 넓게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을 가리켰다.
"세 번째 왕이 머무는 곳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 거야. 걸어서 가면 아마...사흘 정도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은데."
"사흘? 먼 건지 가까운 건지 감이 안 잡히네. 그래서, 그 세 번째 왕이라는 놈이 누군데?"
"기린."
"...동물원에 사는 그거? 얼룩무늬에 목 길고 뿔 달린?"
"아니, 그 기린 말고. 설마 그게 판테온에 있겠냐?"
굵은 손가락을 쭉 뻗어 자신의 관자놀이 옆에 가져다 대는 장춘식.
황당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 승현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신의 사자 기린. 신벌(神罰)의 집행자를 자처했던 녀석이지."
"기린이라...어쩐지 이름이 친근한데. 설마 그놈도 사토리 같은 녀석이냐."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사토리의 악행.
가만히 어금니를 깨무는 장춘식과 마주 앉은 승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얘기해 주려 했는데. 아마란스가 잠든 지금이 적기인 것 같다."
"뭘?"
"우리가 있는 이곳, 짐승의 숲과 판테온에 관해서 말이야."
복잡한 심경이 엿보이는 눈동자.
한 차례 뜸을 들인 승현이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수를 포함한 판테온의 초월체들은 절대적인 선(善)이 아니야.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