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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김양석은 신고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싸우는 소리와 비명 때문에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다.

요란한 경찰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도착했다. 경찰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제일 먼저 도착한 지구대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어? 뭐, 뭐야?"

"사람이 칼에 맞은 것 같습니다! 한두 명이 아닙니다!"

"빨리 지원 요청해!"

***

형사들도 찾아왔다.

"와. 이거 제대로 저질렀네."

"딱 봐도 일반인은 아닌데, 어느 조직이지?"

"칼 맞은 셋은 처음 보는 놈들인데요?"

"그럼 저놈은? 저거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 형님. 저 새끼 권태환인데요?"

"그 양아치?"

"예. 확실합니다."

***

형사팀장은 조금 늦게 도착해 상황을 확인했다. 그때는 이미 구급차가 부상자들을 데려가는 중이었다.

팀장이 물었다.

"누가 얼마나 당한 거야?"

"피해자의 주장으로는 칼에 맞은 셋은 청부업자랍니다. 셋 다 어깨나 팔, 다리를 찔렸습니다. 구급차에 먼저 실어서 보냈습니다."

"살겠어?"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 둘은?"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쟤들도 청부업자야?"

"아니요. 권태환이라고, 이 근처에서 하우스를 운영하던 놈들입니다."

"아. 그 양아치 새끼."

"네. 그 새끼입니다."

"하우스는 언제 차렸냐?"

"조사하면 나오겠죠."

"그럼 피해자는?"

"이름은 김양석. 전기 기술자이고, 오늘 그 하우스에서 도박을 했답니다."

"잠깐. 김양석? 어디서 들어봤는데?"

형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딥어스테크라는 회사 연구소의 방화 사건 아시죠?"

"아. 맞다. 그 사건 용의자구나. 같은 사람 맞아?"

"예. 맞습니다. 묻기도 전에 자백했습니다."

"뭐? 묻기도 전에?"

"네. 오늘은 불을 지르려던 날이 아닌데 실수로 불이 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자수했으니까 선처해달랍니다."

팀장이 인상을 썼다.

"자수한 이유가 오늘 이 사건과 관계가 있겠는데?"

"청부업자들은 자기 입을 막으려고 킬러들을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게 칼 맞은 세 놈이고?"

"예."

"그래서 차라리 경찰의 보호를 받겠다? 그래. 죽는 것보단 감방이 낫겠지."

팀장이 김양석을 보며 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대? 김양석이 칼잡이들하고 싸워서 이겼대?"

"아니요.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줬다던데요."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복대를 풀었다. 날씬해 보이던 허리가 사라지고 배가 나왔다.

"어우. 편하다."

그가 옷도 편하게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은 짜장면이 당긴다."

배달을 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꺼냈다.

"등심 품질이 좋으니까 쟁반 짜장이나 만들어 먹자."

***

차유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짜장면 냄새를 맡았다.

"야. 내 것도 해라."

차우진이 재료를 볶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할 거면 오고 있다고 문자라도 넣던가."

"넌 분명히 이번에도 많이 만들었을 거야. 얼른 한 그릇 따로 가져와라. 나 오늘도 피곤하다."

소스는 넉넉히 만들어두었다. 면은 차우진이 많이 먹으려고 넉넉하게 삶았다.

차유리가 한마디 더 했다.

"야. 비벼서 가져와."

"손이 없냐?"

"나 오늘 진짜 피곤해. 비빌 힘도 없다."

"왜 또 피곤한데?"

"도박쟁이랑 청부업자가 방화범을 노리다가 칼 맞고 난리가 났어. 그것 때문에 추가 업무 폭탄 맞았다."

그 난리를 시작하고 진행하고 마무리까지 한 사람이 차우진이다.

'이번엔 멀리서 처리했는데 또 누나가 일을 더 하네?'

차우진은 조금 미안해졌다. 미안한 마음의 크기만큼 뭔가 주고 싶었다.

"프라이는?"

"당연히 얹어야지. 반숙으로."

차우진이 달걀을 프라이팬으로 흰자만 익히고 노른자는 탱글탱글하게 조리했다.

"이걸로 퉁 치자."

"뭘 퉁 쳐?"

"맛있을 거라고."

39. 마그마

차우진이 접시에 짜장면을 그럴듯하게 담고 달걀 프라이를 하나 얹었다. 그 짜장면을 차유리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관악구에서 난 사건인데 왜 누나가 피곤해?"

"관악구 사건인지는 어떻게 알았냐?"

"기사 떴어. 검색하면 나와."

"그래? 빠르네."

그녀가 짜장면을 먹었다.

"음?"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노른자도 터트려서 짜장면과 섞어 먹었다.

그녀가 짜장면을 흡입하면서 감탄했다.

"캬아. 이게 짜장면이지! 너 진짜 요리 실력 왜 이렇게 좋아졌냐?"

"먹고 말해라. 입에서 튄다."

"역시 취사병 출신이라 그런가?"

"아니라고. 신선한 채소를 볶고 돼지고기 등심을 넉넉히 넣어서 맛있는 거야."

"이거 팔아도 되겠다."

"원가가 비싸서 단가 못 맞춰."

"그럼 이거 자주 만들어라."

"그러겠냐?"

차우진이 짜장면을 한 그릇 더 가져와 먹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그 사건이나 설명해봐. 왜 누나가 그것 때문에 일을 더 해야 하는지도."

차유리가 짜장면을 먹으며 말했다.

"김양석이라는 전기 기술자가 있는데, 마약중독자에 도박중독자야. 그 사람이 오늘 딥어스테크 연구소 방화 사건…. 어? 잠깐. 내가 그 회사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그녀가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너 요즘 일하는 공사장이 거기 아니야?"

"맞아."

"오늘 거기 불났다던데, 너도 거기서 불구경했어?"

차우진이 불을 질렀다.

"내가 그 불을 껐는데?"

"응?"

"불이 났길래 껐지."

차우진이 불을 지르고 나서 껐다.

그래야만 했다. 방화 살인사건을 설계한 놈들이 불을 지르면 개발 2팀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차우진은 놈들이 세팅해놓은 걸 미리 터트렸다. 그러면서 방화 흔적을 일부러 현장에 남겨놓았다.

그래야 적은 불리해지고 차우진은 유리해진다.

차유리가 짜증을 확 냈다.

"야. 왜 그 불을 왜 네가 끄는데!"

"나한테 연기를 차단하는 마스크도 있고 눈을 보호할 밀페형 고글도 있었거든. 화재 초기라서 크게 위험하지도 않았어."

"그러다 다치면 내 짜장면은 누가 만들어주는데!"

"어?"

"뭐!"

"사 먹어."

차유리가 당당하게 말했다.

"집에서 먹으면 공짠데?"

차우진은 후회했다.

"달걀 프라이는 추가해주지 말걸."

차유리가 물었다.

"다친 데는?"

"없으니까 지금 짜장면 먹고 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진짜야."

"그러시겠지. 본론이나 말해봐. 왜 누나가 바쁜데?"

차유리가 설명했다.

"방화범은 자백했어. 문제는 청부업자들인데, 그놈들이 예전에 우리 지역에서 범죄를 저질렀더라고."

"칼잡이들도 자백한 건가?"

"DNA 검사 하면 다 나온다고 했더니 부하 중에 한 놈이 자백했대. 그래서 우리 쪽에도 수사 협조 요청이 들어온 거야. 내가 그래서 또 야근하게 생겼다."

차우진이 칼잡이들을 잡았더니 차유리가 야근하는 결과가 나왔다. 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 차우진이 사건을 해결하면 차유리가 야근을 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짜장면 더 줄까? 아. 짜장은 있는데 면이 없지."

"뭐하냐? 얼른 밥 퍼라. 달걀 프라이도 더 하고."

"그래. 오늘은 실컷 먹어라."

***

전기 기술자 김양석은 경찰에 체포된 후에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그가 형사들에게 말했다.

"저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요? 여기 칼을 두 방이나 맞은 거 보이시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찔리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던데."

"여기 목도 다쳤습니다. 붕대 때문에 안 보이시나? 그 새끼가 여기에 칼을 댔다니까요?"

"살해 의도가 보이긴 하는군요."

***

칼잡이 청부업자 우두머리 윤기태가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채로 말했다.

"죽이려고 찾아간 건 절대로 아닙니다. 겁만 준 겁니다. 조용히 데려오라는 청부를 받았으니까요."

"칼로 찔렀던데."

"갑자기 우리 일을 방해하는 놈이 나타나서, 위협하려고 그런 겁니다. 실제로는 안 죽였잖습니까?"

"무슨 위협을 칼로 두 번이나 찌르면서 하나?"

"저는 네 방이나 맞았습니다."

윤기태는 부상이 심해서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가 그 상태로 물었다.

"저를 찌른 새끼는 잡았습니까?"

"그걸 네가 왜 알려고 해? 묻는 말이나 대답해."

***

형사들은 아직 윤기태가 살인을 목적으로 김양석을 납치하려 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형사가 팀장에게 보고했다.

"계속 단순 납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랄하네. 납치 살인미수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수사해."

"알겠습니다."

"그 칼잡이들을 누가 찔렀는지 알아냈어?"

형사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당한 놈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놈이 김양석을 찾아왔다는 것만 안다던데요."

"김양석은 뭐래?"

"자기도 모른답니다.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딥어스테크 화재 사건을 정확히 알고 김양석을 찾아갔던데."

"그렇긴 한데, 김양석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CCTV는?"

"그 근처에는 CCTV가 없습니다. 주변까지 다 뒤졌는데 수상한 사람은 못 찾았습니다."

"끄응. 그 사람 찾는 건 쉽지 않겠어. 일단 김양석에게 집중해."

***

형사 두 명이 경찰서 취조실에서 김양석에게 다른 걸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딥어스테크 연구소 화재 살인미수 사건의 범인이다?"

김양석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살인미수라니요! 그건 오늘 저를 찌른 그 새끼들이 한 거고요. 저는 보험금을 노린 방화 사기 사건의 범인이라니까요. 그것도 주범이 아니라 그냥 하수인이죠. 하수인."

"그 불로 사람이 많이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사기 사건이 되냐?"

김양석이 설명했다.

"불이 나면 화재 경보가 울릴 거고, 그러면 그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불을 끄겠지요. 저는 거기 슬쩍 끼어서 불을 끄면서, 현장에 남은 단서를 쓱 치우려고 했습니다."

형사가 물었다.

"그럼 가스는?"

김양석이 눈을 껌뻑였다.

"가스라니요? 물론 거기 가스통이 있긴 하지만, 그건 불이 나는 곳과 거리가 있는데…."

"우리가 확인해보니까 오늘 화재는 가스 때문에 화재가 커졌어. 거의 화염방사기 수준이었다더라. 빨리 안 껐으면 그 가스통이 터졌을 거라던데?"

"그, 그게 무슨…."

형사가 현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당신이 진짜로 불을 질렀으면 거기서 못 빠져나왔다는 소리야. 현장에 남은 증거는 가스통이 터지면 다 사라졌겠지."

"예? 그런 말은 못 들었…."

"당신 바보야? 그걸 왜 당신한테 알려줘? 당신이 죽어야 그 화재를 당신에게 뒤집어씌우잖아."

김양석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개새끼들이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이었어!"

옆에 있던 형사가 살살 달랬다.

"그래. 그 개새끼들이 나쁜 새끼들이지. 김양석 씨. 그 새끼들에 대해서 말해봐요."

"그게, 대포폰으로 지시를 받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생각나는 건 전부 다 말해요. 조사는 우리가 할 테니까."

김양석은 이미 두 번이나 살해당할 뻔했다.

'내가 살려면 그놈들이 다 잡혀야 해.'

그는 그가 아는 건 전부 다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기억을 되살리고, 개인적인 추측도 추가했다.

"회사 관계자가 범인일 겁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형사가 사진을 여러 장 가져와 김양석에게 보여주었다.

"이 중에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요?"

김양석은 모든 사진을 꼼꼼히 살폈다.

"여기 이 사람. 저한테 일을 맡긴 놈의 얼굴은 마스크 때문에 제대로 못 봤지만, 몸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마른 체형이었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그 사람은 장호철 사장의 비서인 김태훈인데…."

김양석이 소리를 질렀다.

"비서? 역시 사장 새끼가 범인입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 새끼 빨리 잡아요. 나도 피해자란 말입니다!"

"김양석 씨는 공범이지 피해자는 아니고요. 일단 앉아요. 이 사람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더 자세히 이야기해봐요."

***

차우진은 이튿날 연구소 공사 현장에 평소처럼 출근했다.

그런데 현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아저씨.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먼저 와 있던 목공 기술자가 대답했다.

"공사가 곧 중단될 것 같아."

차우진이 모르는 척 물었다.

"어제 불난 것 때문에요? 그건 금방 껐는데."

"그게 그냥 화재 사건이 아니었나 봐. 경찰이 회사를 수사하고 있대."

차우진이 생각했다.

'김양석이 쓸만한 정보를 불었나 보네.'

"그건 그거고 공사는 공사 아닌가요?"

목공 기술자는 소문에 밝았다.

"소장님 말로는 이거 수습 못 하면 회사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더라.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공사비로 쓸 돈이라도 빼서 급한 불부터 끄겠지."

"그렇군요."

그날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하지만 하루뿐이었다. 그날 오후에, 이튿날부터는 공사가 당분간 중단된다는 공지가 나왔다.

***

차우진은 그날 밤에 사덕리소스의 서준석 사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허름한 식당 구석에서 만났다.

다른 사람들은 밥과 술을 먹고 마시며 떠들었다. 내부가 꽤 소란스러워서 두 사람의 대화를 남이 들을 염려는 없었다.

서준석 사장이 물었다.

"좋은 곳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왜 여기로…."

"여기가 맛집이거든요."

차우진이 국밥을 먹으며 물었다.

"사덕리소스의 자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운영자금은 여유가 좀 있습니다. 금광이 있으니까 대출이 잘 나오거든요. 하하하."

"이제 여유가 없어질 겁니다."

"예?"

"돈을 박박 긁어서 주식을 한 주라도 더 사야 하니까요."

서준석이 주변을 슬쩍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딥어스테크 말이군요."

"그렇죠."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의 공사장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서준석을 만나 주식 매집 계획을 이야기했다.

"서 사장님은 자사주 매집 계획은 완전히 접으셨지요?"

"하, 하하. 물론입니다. 우리 회사 지분을 10퍼센트나 가진 차 이사님이 저를 지지하는데 그런 무리수를 왜 두겠습니까?"

"제가 이사입니까?"

"이사 자리가 공석이 많습니다. 하나 하시죠."

차우진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출근은 안 하더라도, 명함이라도 하나 있으면 써먹을 곳이 있겠군요."

서준석이 말했다.

"딥어스테크에 난리가 났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오늘 주가도 하락했습니다. 물론 장호철 사장에게 혐의가 없으면 다 원래대로…."

차우진이 단언했다.

"아니요. 사장이 진짜로 살인청부를 했습니다."

"그게 안 밝혀지고 덮이면…."

"밝혀질 겁니다."

차우진은 그 일이 덮이게 놔둘 생각이 없다.

"서 사장님. 장호철이 저지른 짓이 밝혀지면 주가는 폭락할 겁니다. 그때 사덕리소스가 딥어스테크의 주식을 쓸어담아야 합니다."

서준석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딥어스테크가 우리 회사보다 훨씬 큽니다. 금광을 담보로 대출을 더 받아도 딥어스테크를 인수할 수는 없습니다."

"인수가 목적이 아닙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장호철은 결국 쫓겨날 겁니다. 그때까지 회사 주가는 계속 폭락할 거고요."

"그러면 주식을 왜 굳이…."

"새 경영진과 협상할 정도의 지분이 필요합니다."

"새 경영진이요?"

"장호철이 쫓겨나면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겁니다. 딥어스테크는 지분 관계가 좀 복잡하거든요."

서준석은 차우진이 백기사로 나서줘야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차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서준석이 물었다.

"지분까지 인수해서 딥어스테크의 상황에 개입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마그마 탐지기를 개발하려고요."

서준석은 당황했다.

"예? 돈이 되는 광물이 아니라 마그마요? 화산 터질 때 쏟아져나오는 용암 말입니까?"

차우진이 서준석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물론 그 탐지기의 원래 목적은 광물을 찾는 겁니다. 마그마를 탐지하는 건 아마 지금 상태로는 안 될 겁니다."

"아. 역시 광물 탐지기가 메인이군요. 마그마 탐지는 부가 기능이니까 꼭 필요한 건 아니군요?"

차우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필요합니다."

40. 곽수혁

사덕리소스 사장 서준석이 물었다.

"마그마를 왜 찾으려는 겁니까?"

차우진이 둘러댔다.

"원래 마그마 연구에 로망이 있습니다."

"저도 광산을 개발하려고 땅을 깊게 파는 사람이지만, 차 이사님은 훨씬 더 깊은 곳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물론 그 탐지기는 광물 탐색 기능이 메인이죠."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야 탐지기 개발을 진행할 수 있다.

"마그마 탐지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건데 마침 그게 개인적인 취향과 맞는 거고요."

"하하하. 우리처럼 땅 파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취미네요."

서준석은 가볍게 생각했다.

그의 지분에 차우진의 우호지분 10퍼센트가 힘을 더하면 사덕리소스의 경영권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그 대가로 요구하는 게 경영권을 나눠 먹자는 것도 아니다. 서준석이 이사 자리를 제안했더니 차우진은 구체적인 건 묻지도 않고 그냥 명함이나 파 달라고 했다.

'간판만 필요하다는 소리잖아.'

차우진이 그를 지지하는 대가로 요구한 건 외부 회사인 딥어스테크의 주식을 사라는 것이다.

그 주식을 사서 넘겨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 주식은 사덕리소스 소유로 남는다. 사덕리소스의 사장은 서준석이다.

서준석이 생각했다.

'설마 딥어스테크가 망하겠어?'

회사가 망하지만 않으면 낮은 가격에 산 주식은 다시 오를 수도 있다.

그는 손해 볼 건 없다고 판단한다.

서준석이 활짝 웃으며 차우진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드시죠. 차 이사님. 명함은 내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딥어스테크 주식도 차 이사님이 신호하시면 바로 매집하겠습니다."

***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변호사와 함께 경찰서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장호철이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내가 안 그랬다니까! 내가 왜 내 회사에 불을 지르냔 말입니다!"

형사가 조회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화재보험에 가입하셨던데요."

"회사 하는 사람이 신축 건물에 보험 드는 게 뭐가 이상하단 겁니까! 보험료 그거 얼마나 한다고!"

"거액이던데요."

장호철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래서 뭐, 그거 노리고 불을 질렀다는 겁니까? 그 화재로 위층에 있던 연구원들이 죽으면 프로젝트는 다 중단되고 손해가 얼마인데! 보험료 받아도 남는 거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보험금을 노렸으면 개발 2팀이 없을 때 불을 질렀겠지요!"

"방화 사건의 범인이 청부한 사람으로 사장님을 지목했습니다."

"그래서 그 새끼가 나를 봤답니까? 내가 직접 돈이라도 쥐여줬답니까?"

전기 기술자 김양석은 장호철의 비서인 김태훈과 비슷한 체형의 사람을 봤다고 했다.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도 했다.

"수사 정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호철은 기가 더 살아서 따졌다.

"아니, 겨우 범죄자 새끼가 둘러댄 말을 믿고 선량한 기업가를 이렇게 의심하는 겁니까? 내가 윗선에 전화 넣어요? 어?"

한숨 돌리러 취조실에서 나온 형사에게 형사과장이 찾아와서 물었다.

"어때?"

"적극적으로 부인합니다."

"바로 인정하는 놈이 어디 있겠냐. 증거는?"

"있으면 벌써 체포했죠. 심증은 가는데 확실한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비서는 어때?"

"그쪽은 정 형사가 조사 중입니다만, 범인이 김태훈의 얼굴을 본 건 아니라서 압박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과장이 말했다.

"그럼 일단 보내드려."

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혹시 위에서 전화가 왔습니까?"

과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벌써 세 통이나 받았다."

형사가 취조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자기를 자꾸 의심하면 윗선에 전화를 넣는다고 하더니, 이미 전화 다 돌려놓고 그런 소리를 한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형사가 투덜댔다.

"젠장. 제 촉으로는 저 사람이 범인 맞는 것 같은데."

"일단 돌려보내고, 증거 찾으면 그때 다시 부르던가."

***

장호철이 경찰서를 나왔다.

옆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비서 김태훈이 승용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장호철이 뒷좌석에서 앉으며 불평했다.

"새끼들이. 이번에 불 난 건 내가 시킨 거 아니라니까."

김태훈이 차를 운전했다. 그는 경찰서를 빠져나온 후에 말했다.

"사장님께서 김양석을 매수해서 이번 일을 진행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확실해?"

"예. 그건 김양석도 모릅니다."

"너는?"

"예?"

장호철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야 이 새끼야. 경찰이 너는 왜 불렀냐고. 김양석을 매수할 때 얼굴 맞대고 돈 줬냐?"

김태훈의 말이 빨라졌다.

"아닙니다! 처음 의뢰할 때는 만나야 했지만, 그때도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얼굴만 가리면 뭐하냐? 몸을 보여줬잖아."

"예?"

장호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좀 알아봤는데, 김양석이 그랬다더라. 네 체형이 의뢰인과 비슷하다고."

김태훈이 급히 말했다.

"저랑 체형이 비슷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건 절대로 증거로 못 씁니다."

"그렇지?"

"물론입니다!"

장호철이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휴대폰의 연락처를 찾았다.

"전화나 몇 통 더 넣어둬야겠다. 저 새끼들이 다시는 나를 못 부르게."

***

차유리가 말했다.

"그래서 딥어스테크 사장을 직접 수사할 방법이 이제 없다더라."

차우진이 방금 만든 스파게티를 차유리의 접시에 담아주며 물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수사 정보 공유. 우리 팀에서는 청부업자들의 예전 사건을 수사하고 있으니까 소식 정도는 주고받아."

"자백한 놈이 있다며."

"있지. 방화범 김양석."

"딥어스테크는 화재보험을 들었지?"

"거액으로 들긴 했어."

"그런데 왜 직접 수사를 그만둬?"

"거기가 터져서 위층 연구원들이 많이 죽으면 회사에도 타격이 장난 아니게 간다더라. 무슨 팀이더라…."

"개발 2팀."

"아. 그래. 거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사덕리소스 사장님이랑 밥 먹다가 들었어. 둘 다 땅 파는 회사라서 소문을 들은 게 있더라고."

"부러운 놈. 사장님이랑 좋은 거 먹었지?"

"국밥?"

"왜?"

"내가 샀거든."

차유리가 욕을 했다.

"독한 놈."

"설명이나 계속해 봐."

"아. 그 팀이 다 죽으면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여러 개 날아가니까 보험료를 받아도 사장한테는 이익은 아니래. 오히려 손해라던데?"

차우진은 장호철이 불을 지르려 했다는 걸 안다. 장호철과 김태훈이 그 이야기를 할 때 입술 움직임을 읽어내 확인했다.

개발 2팀이 마그마 탐지기를 개발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다는 것도 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목적이 보험료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화재보험은 그 연구원들의 사망으로 인해 회사가 입는 손해를 메꾸기 위한 거라면?"

"응? 에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자기 직원들을 죽이겠어?"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먹어. 먹어. 누나는 생각하지 말고 먹어."

"그럴까? 근데 너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파게티를 만들어주냐? 너 또 사고 쳤냐?"

"많이 먹고 가서 일하라고."

"내가 돼지냐?"

"다른 것도 좀 만들었는데 싸줄까?"

"어. 다 내놔. 야식으로 먹게."

***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사장실에서 전화를 끊었다. 그가 김태훈을 향해 손짓했다.

비서 김태훈이 얼른 다가왔다.

"예. 사장님."

장호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김 비서야. 형사들이 내 뒤를 계속 파나 본데?"

"사장님께서 전화를 돌리셨는데 어떻게 감히…."

"담당 수사팀에 또라이가 있단다. 너랑 나를 용의자로 두고 수사를 계속한다더라."

전화를 돌린 건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장호철과 김태훈은 경찰서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전화로 수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죽은 놈도 없는데 일을 참 열심히들 한다. 이거 어쩔 거야?"

문제는 수사 방향이다. 장호철이 김태훈을 쳐다보았다. 눈알이 번들거렸다.

"김양석이 현장에서 죽었어야 다 뒤집어씌우는데, 살아있잖아."

김태훈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장담했다.

"사장님. 김양석은 제 얼굴을 못 봤습니다. 사건 현장에는 저와 관계된 어떠한 증거도 남지 않았습니다. 뭔가 나와도 김양석이 다 뒤집어쓸 겁니다."

"그래? 그러면 다른 건?"

"체포된 청부업자도 제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거 말고. 이 새끼야."

"예?"

장호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를 냈다.

"곽 팀장 그 새끼 말이야! 이번 화재가 자기를 노린 거라고 깨달으면 가만히 있겠어?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경찰에 달려가면 어떻게 할래?"

"헉!"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수사받고 있는데, 곽 팀장 그 새끼까지 끼어들면 우린 다 죽는 거야! 그러니까 해결방법을 찾아!"

***

차우진은 딥어스테크 연구동 앞에서 개발 2팀 사무실을 쳐다보았다.

딥어스테크의 마그마 탐지기에 관한 영상은 꿈속 미래에서 많이 봤다.

"그게 있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데."

탐지기만으로는 멸망급 재난을 막을 수 없다.

그걸 이용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따로 있다.

재난을 막으려면 마그마 탐지기와 그 사람이 다 필요하다.

"그 탐지기는 개발이 중단됐을 거란 말이야."

개발 2팀 연구원 박효정이 연구동 밖으로 나왔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어머! 우진 씨!"

"며칠만이네요."

"그러게요. 공사 중단돼서 안 오신다고 들었는데…."

차우진이 둘러댔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근처를 지나가던 중입니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러다 딱 마주친 거네요? 운이 좋았어요."

운이 아니다.

2팀과 접촉하려고 일부러 퇴근 시간에 맞춰서 왔다. 2팀은 방화 사건 후로는 모든 팀원이 정시에 퇴근한다.

개발 2팀 사람들이 다가왔다.

팀장인 곽수혁이 박효정에게 물었다.

"누구신데 그렇게 반가워해?"

"아. 팀장님. 우리 아래층 구내식당에서 불났을 때 꺼주신 분이요. 우리 사무실 문이 잠긴 것도 열어주셨잖아요."

"아! 그분! 맞네!"

곽수혁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늘은 얼굴에 검댕이 안 묻어 있으셔서…. 그리고 제가 그때 너무 당황해서 못 알아봤습니다."

박효정이 옆에서 거들었다.

"팀장님은 불난 이후로는 정신을 좀 놓고 다니시잖아요."

"내가 그랬나?"

"네. 혼자만 죽다 살아나셨나 보다."

곽수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차우진에게 말했다.

"하, 하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뭘요. 화재 경보기가 울릴 때 마침 저한테 장비가 있어서 불을 끈 건데요."

"그래도 그게 어디 쉽나요. 하하하."

차우진이 웃는 곽수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멸망 초기에는 방송국이 살아있고 TV도 잘 나왔다. 그때 봤던 곽수혁의 가족 인터뷰가 생각났다.

곽수혁의 딸은 그가 마그마 탐지기의 핵심 개발자라고 했다. 그가 그렇게 일찍 사망하지 않았으면 멸망급 재난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 딸은 연예인이라서 방송에 자주 나왔다. 그래서 그 인터뷰가 기억에 남았다.

'자기 아버지는 살해당한 거라고 주장했지. 당시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도 했고.'

곽수혁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차우진이 입을 열었다.

"제가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불을 껐습니다."

"그러셨죠.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본 게 있는데…."

차우진이 일부러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한 후에 말했다.

"혹시 누군가와 깊은 원한을 맺은 일이 있습니까?"

"네? 원한이라니요?"

"그 화재, 누가 거기 불을 질러서 바로 위층에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건 아닐지…."

곽수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무실 문이 고장 난 건 화재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차우진이 일부러 손을 흔들었다.

"그냥 그렇게 보였다는 겁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팀장님을 노린 건 아닐 수도 있고요."

박효정이 옆에서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누가 팀장님을 노린다는 거예요?"

"왜 타깃이 효정 씨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야 팀장님은 대단한 분이지만, 저는 이렇게 거창하게 쓱싹할 만한 가치가 없거든요."

"아. 하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아? 하긴?"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효정 씨한테 한 말은 농담입니다. 방금 이야기도 경찰이 방화 사건 쪽으로 조사 중이라고 들어서 해본 말입니다."

"에이. 놀랐잖아요."

박효정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른 연구원들도 웃어넘겼다.

하지만 곽수혁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박효정이 얼른 물었다.

"공사 재개되면 다시 오시는 거죠?"

"그래야죠."

차우진이 개발팀을 두고 걸어가다가 뒤를 슬쩍 보았다.

곽수혁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떡밥을 던졌는데 반응이 확실히 오는 건 곽수혁밖에 없어. 역시 놈들의 타깃은 곽수혁이야.'

모든 의문이 해결된 건 아니다.

'그런데 놈들은 왜 청부업자를 보내 곽수혁만 제거하는 게 아니라, 2팀을 다 죽이려고 했지?'

41. 납치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처음부터 곽 팀장 그 새끼만 킬러를 보내서 제거하는 건데."

비서 김태훈이 말했다.

"제가 그렇게 제안했…."

"이 새끼가.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아닙니다."

"그때는 그게 맞았어. 곽 팀장이 눈치챘으면 팀원 중에도 아는 놈이 생겼을 수 있으니까. 사고로 위장하려면 한 방에 다 처리하는 게 맞아."

"맞습니다. 그때는 그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김양석이 다 뒤집어쓰고 죽을 예정이었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하필 그 새끼가 없을 때 사고가 나서…."

***

딥어스테크 개발 2팀은 방화 사건이 터진 날 이후에는 모든 팀원이 정시에 퇴근한다.

곽수혁은 오늘은 퇴근하면서 팀원들과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차우진의 이야기를 듣고 났더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팀원들에게 말했다.

"난 급한 일이 생각나서 어디 좀 가야겠다."

박효정은 당황했다.

"네? 팀장님이 저녁 사신다면서요."

"다음에 살게. 다음에."

곽수혁이 사과한 후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박효정이 팀원들을 돌아보다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엔빵?"

팀원들이 동의했다.

"당연하지. 기왕 먹기로 했는데 그냥 가면 서운하잖아."

"그냥 치맥이나 피맥 먹자. 고기는 다음에 팀장님한테 사라고 하고."

"투표합시다. 치맥 손들어봐요. 오케이. 피맥으로 결정."

***

곽수혁은 혼자서 술집을 찾아갔다. 연구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술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소주를 마시며 고민했다.

"내가 사장의 비리를 눈치채서, 사장이 나를 죽이려고 한 건가?"

화재 현장을 벗어났을 때도 그런 의심을 하긴 했다. 그런데 그동안은 그 생각을 애써 털어버렸다.

"나 하나 죽이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게 말이 되나?"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래도 마음 한쪽에는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오늘 차우진에게 방화 현장 이야기를 들었다. 차우진은 곽수혁을 노린 방화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더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진짜 나를 죽이려고 불을 지른 거라고? 팀원들까지 다 죽더라도 상관없이?"

그의 가치관으로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방화 사건이 발생했고 김양석이 자백했다는 말도 들었다.

곽수혁은 이미 며칠째 잠을 설쳤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두 다리 펴고 잘 수 없다는 걸 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 방법이 효과가 있으려면 경찰이 수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런데 곽수혁이 아는 건 살인미수의 증거가 아니다.

비리 사건이다.

사장이 돈과 연줄을 동원해 비리 수사를 방해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설사 사장이 체포된다 해도 처벌을 확실히 받을지도 알 수 없다.

"내가 신고했는데 사장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끝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우리 회사가 내부 고발자를 그냥 놔둘 리가 없어."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장호철이 실권을 쥐고 있으면 곽수혁이 다른 회사로 이직할 때 방해할 게 뻔하다.

그게 곽수혁이 지금 고민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니면…."

곽수혁도 같이 타락하는 방법도 있다.

"사장하고 협상을 하면…."

사장에게 비리를 덮어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과 승진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남들 앞에서 그것과 관련된 말실수를 조금 했던 적도 있다.

그러다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장호철이 불을 질러 그의 팀을 통째로 제거하려고 했다.

"젠장. 차라리 몰랐으면 편했는데, 내가 왜 그걸 눈치채서…."

***

차우진은 길 건너편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 있으면 곽수혁이 술집에서 혼자 고민하는 모습이 잘 보인다.

"곽수혁 팀장. 고민이 많은가 봐."

옥상에는 CCTV가 없지만 곽수혁이 앉아 있는 술집에는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관찰했다.

"경찰 쪽으로 가려나. 장호철 쪽으로 가려나. 아니면 결정을 미루려나."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 그 상황에 맞춰서 대응해야 한다.

"기왕이면 경찰 쪽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

김태훈이 보고했다.

"사장님. 곽 팀장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장호철이 의자에 앉아서 술잔을 흔들며 물었다.

"어떻게 이상한데?"

"곽 팀장이 그 화재가 자신을 노린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 눈치랍니다."

"빨대가 그래?"

"예."

개발 2팀에는 화재 이후에 신규 직원이 배치됐다. 그 직원은 연구원이 아니라 사고 후 업무 지원 명목으로 임시 배치됐다.

장호철은 느긋했다.

"그 의심은 불이 났을 때부터 했겠지. 그러니까 대책을 준비한 거잖아. 넌 빨대를 꽂아도 뭐 그런 놈을 꽂아? 그게 무슨 정보라고…."

"곽 팀장이 오늘 예정된 팀 회식에서 갑자기 혼자만 빠졌다고 합니…."

장호철이 벌떡 일어났다.

"경찰에 가려는 거다!"

"사장님.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

"회식에서 왜 갑자기 빠지겠어? 뻔하잖아!"

장호철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세팅은 어떻게 됐어?"

"준비는 다 됐습니다. 의심받지 않을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중…."

"그냥 시작해! 곽 팀장 그 새끼가 경찰에 찌르러 가기 전에 막아! 너부터 뒈지기 싫으면 당장 막으라고!"

***

곽수혁은 술을 마시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사장은 믿을 수 없어.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나는 물론이고 우리 팀원들까지 또 위험해질 수도 있어. 어쩔 수 없다."

그는 일단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직이 어려우면 치킨을 튀기더라도 일단 살고 봐야지. 경찰에 신고하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아내였다.

곽수혁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어. 난 오늘은 좀 늦을 거야. 너는 언제 퇴근…."

- 민지가 연락이 안 돼.

"어?"

- 학원에서 연락 왔어. 안 왔대. 전화해 봤는데 안 받아.

곽수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안 받는 거 아냐?"

- 전화기가 꺼져있어. 아예 꺼 놓는 경우는 잘 없잖아.

"그건 그런데…."

- 퇴근했으면 노래방이라도 좀 찾아봐.

"알았어. 끊어. 내가 확인해볼 테니까."

곽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불안했다.

"설마 아니겠…."

전화가 또 걸려왔다. 이번에는 그의 딸 곽민지의 전화였다.

곽수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받았다.

"휴우. 야. 넌 엄마 걱정하게 왜 전화를 꺼…."

휴대폰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 민지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곽수혁은 화들짝 놀랐다.

"어? 너, 너 누구야!"

- 경찰에 신고하면 민지는 죽습니다.

곽수혁이 허공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잠깐! 알았어! 알았으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돈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지금은 현금이 없다고!"

-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따님을 살리고 싶으면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다시 말하지만 신고하면 민지는 죽습니다.

"어, 어디로 가면 됩니까?"

- 차를 보내겠습니다.

***

곽수혁이 술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차우진은 그런 곽수혁을 따라 움직였다.

"화장실에서 전화라도 받았나? 반응을 보면…."

다급한 표정으로 서두르는 모습이 익숙했다. 저런 표정과 행동을 멸망한 세계에서 많이 봤다.

"가족이 인질로 잡혔구나. 장호철이 선을 넘었어."

차우진은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의 대응이 너무 빠르고 과격했다.

"창수 형이 이걸 봤으면 저놈들은 다 뒈졌을 텐데."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탄창에 9mm 탄약을 채우며 말했다.

"우진아. 지금 세상에는 나쁜 놈이 너무 많다."

"멸망 전에도 많았어. 멸망급 빌런도 있었잖아."

"그래. 멸망급 빌런 새끼들. 내가 그 새끼들을 멸망 전에 봤으면 다 쏴버렸을 거다. 그럼 세상이 덜 망했겠지."

"누군지 알아야 쏘지. 아직도 정체가 안 밝혀진 놈들도 있는데."

"그건 그렇다. 누군지 모르는 놈도 있지."

박창수가 탄창을 권총에 결합하며 말했다.

"어쨌든 난 애들을 납치해서 인질로 써먹는 새끼들이 너무 싫다. 몇 놈이냐?"

"정찰로 파악한 건 다섯 놈이야."

"탄창 두 개면 다 잡을 수 있겠네."

"형 혼자서?"

"내가 왜 혼자냐? 너도 있는데."

"형이 그놈들하고 싸우면 나는 그 틈에 애들을 구출해야지."

"오케이. 그럼 그 새끼들은 나 혼자 다 잡는다."

"정말이지?"

"근데, 애들 구출하고 나면 지원 올 거지?"

***

갑자기 승합차가 나타나 곽수혁의 앞에 정지했다. 승합차 문이 벌컥 열렸다.

곽수혁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승합차에 올라탔다.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저런 식으로 납치범한테 끌려다니면 다 죽는데."

멸망한 세계에서는 인질 때문에 적에게 끌려다니면 다 죽는다. 살인마가 널려 있는 세계에서는 인질이 있어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머리로는 알아도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결과는 보통 비참하게 끝났다.

"그래서 창수 형이 저런 새끼들을 더 싫어했지."

***

곽수혁은 으쓱한 산자락에서 차에서 내렸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물었다.

"여, 여기가 어디야? 우리 민지는 왜 안 보입니까?"

숲에서 조태혁이 걸어 나왔다. 그는 하얀색 양복을 빼입고 있었다.

"따님은 우리가 다른 곳에 잘 데리고 있지."

"확인부터 시켜줘!"

"확인? 내가 왜 그래야 할까?"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까 우리 민지가 잘 있는지 확인부터 시켜달라고!"

"그 전에 본인 걱정부터 해야지?"

"뭐?"

조태혁이 실실 웃었다.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오면 어떻게 하나? 곽수혁 팀장. 연구만 해서 이런 일에는 머리가 안 돌아가나?"

"그, 그게 무슨…."

"살고 싶으면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끌었어야지."

곽수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돈이 아니라 내가 목적이냐?"

"빙고."

생각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사장의 비리?'

"나, 난 신고 안 했어!"

"하려고 했을 텐데?"

"아니야! 안 했다고!"

"우리 의뢰인께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시나 봐. 뭐, 어쨌든."

마스크를 쓴 양복이 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신고도 못 하고."

그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빨리 끝내고 가자."

봉고차에서 내린 놈들이 곽수혁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곽수혁이 발버둥 치며 외쳤다.

"사, 살려줘!"

양복이 가르치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알아도 모른 척했어야지. 왜 안다는 걸 들키나."

"나 진짜 입 다물 테니까 살려줘요! 내가 무덤까지 가져갈게!"

양복이 씩 웃었다.

"그렇게 해주잖아.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

양복이 손짓했다.

두 놈이 곽수혁의 무릎을 꿇렸다. 덩치가 큰 남자가 쇠파이프를 들고 곽수혁의 뒤로 다가갔다.

곽수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덩치가 쇠파이프를 위로 높이 들었다.

곽수혁은 공포에 질렸다.

"으아아아!"

갑자기 덩치의 고개가 옆으로 콱 꺾였다. 입에서는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켁!"

멀리서 날아와 덩치의 머리를 때린 돌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가 나무에 부딪혀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돌은 어른 주먹 크기였다.

돌에 머리를 맞은 덩치가 옆으로 자빠졌다.

곽수혁이 놀란 소리를 냈다.

"어?"

다른 놈들은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돌이 어디서 날아온 거야!"

차우진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구덩이는 아직 안 팠냐? 그걸 파놨어야 너희들을 묻을 때 쉬운데, 아쉽네."

조태혁이 인상을 잔뜩 쓰며 물었다.

"너 누구냐?"

"저승사자."

"뭐?"

차우진이 적의 수를 셌다.

"기절한 놈이 하나. 봉고차를 타고 온 놈이 셋. 여기서 대기하고 있던 놈이… 흰둥이 포함 둘."

적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곽수혁은 전투력이 보잘것없어 보여서 아군으로 치지 않았다.

"서 있는 건 다섯이네?"

42. 사냥개

하얀 양복 조태혁은 차우진이 나타났을 때부터 싸움을 준비했다.

여기는 납치 사건 현장이다. 목격자인 차우진을 그냥 보내줄 수는 없다.

게다가 곽수혁을 쇠파이프로 내리치려던 부하는 돌에 맞아 나자빠졌다. 전투는 이미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누구냐고 일단 물어본 건, 차우진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지 몰라서다.

조태혁이 물었다.

"경찰이냐?"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새끼 이거 바보인가? 경찰이 돌부터 던지겠냐?"

조태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 경찰만 아니면 됐다. 지원은 없다는 소리니까."

그가 소리를 질렀다.

"씨발! 조져!"

봉고차를 타고 온 셋이 즉시 움직였다.

두 놈은 붙잡고 있던 곽수혁을 밀어버리고 차우진을 향해 이동했다.

한 놈은 봉고차 쪽에 있었다. 그쪽이 제일 가까워서 공격도 제일 빨랐다.

봉고차 앞에 있던 놈이 차우진을 향해 돌진하며 단검을 앞으로 쭉 내질렀다.

칼날의 목표는 차우진의 허리였다. 돌진하는 속도에 칼을 내지르는 속도가 더해졌다. 칼날이 더 빨라졌다.

빠르긴 한데 움직임이 너무 단순했다. 어디를 찌를지 예측도 가능했다. 이런 정면 직선 공격은 멸망한 시대를 살아온 차우진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차우진이 옆으로 슬쩍 피하며 다리를 툭 걸었다. 적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처박혔다.

적은 땅바닥에 처박히자마자 칼을 오른쪽 옆으로 휘두르며 왼팔로 땅을 짚었다.

차우진이 적의 왼쪽으로 성큼 걸어 이동했다. 오른쪽에서 시작해 뒤쪽을 노린 칼날은 아무도 없는 공간만 갈랐다.

차우진이 급히 일어나는 적의 옆에서 턱을 걷어찼다.

"켁!"

적은 고개가 돌아가며 다시 고꾸라졌다. 뒤쪽으로 향한 오른손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차우진이 그 칼을 발로 툭 찼다.

단검이 위로 조금 튀어 올랐다. 그걸 공중에서 잡아챈 후에 기절한 놈을 밟고 전진했다.

두 놈이 그사이에 접근했다.

그들은 동료가 얼마나 쉽게 당하는지 똑똑히 봤다. 그래서 정면에서 공격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차우진의 양쪽으로 이동했다가, 동시에 덮치며 칼을 내질렀다.

"뒈져!"

칼날이 차우진의 양쪽에서 동시에 들어왔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두 자루의 칼이 느리게 보였다.

'좌우에서 들어오는 직선 공격. 빈틈이 많아.'

두 칼이 들어오는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왼쪽이 조금 느렸다.

차우진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적의 팔을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면서 방금 빼앗은 칼을 오른쪽으로 쭉 내밀었다.

오른쪽에서 돌진하던 적의 가슴에 칼이 푹 꽂혔다.

"컥!"

왼쪽 놈의 칼이 차우진의 등을 노리고 뒤따라왔다.

늦었다. 차우진은 이미 오른쪽으로 이동한 상태다. 차우진이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해야 할 오른쪽 놈은 오히려 칼을 맞았다.

왼쪽 놈의 칼이 허공을 휘저었다.

차우진의 칼은 아직도 오른쪽 놈의 몸에 박혀 있다.

왼쪽 놈이 그걸 보고 눈을 번뜩이며 빗나간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칼을 손에서 놓으며 왼쪽 놈을 향해 돌아섰다.

적의 칼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며 차우진의 목을 노렸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칼은 상대하기 쉽다.

차우진이 앞으로 한 걸음 이동해 적의 팔을 왼팔로 막으며 턱에 주먹을 꽂았다.

"켁!"

적의 고개가 뒤로 덜컥 젖혀졌다.

갑자기 차우진이 옆으로 휙 이동하며 뒤로 돌아섰다.

조태혁의 옆에 있던 놈이 단검을 던지고 있었다. 그 단검이 차우진이 서 있던 곳을 지나갔다.

차우진은 이미 옆으로 피했다. 그가 원래 서 있던 공간 너머에는 턱을 맞은 놈이 있다.

날아온 단검이 턱을 맞고 비틀거리던 놈의 배에 박혔다.

"으악!"

단검을 맞은 놈이 동료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개새끼가 나를…."

그놈은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고꾸라졌다.

고꾸라지는 놈의 손에서 차우진이 칼을 빼냈다.

차우진이 단검을 던진 놈을 보며 히죽 웃었다.

"팀킬이네?"

단검을 던진 놈은 당황했다.

"어, 어떻게 그걸 피했지?"

그는 차우진의 등을 노리고 단검을 던졌다. 그것도 동료의 턱을 후려치는 순간을 노려 던졌다. 그래서 피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빗나갔다. 칼은 그가 노린 곳으로 정확히 날아갔는데 차우진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피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난 뒤통수에도 눈이 있거든."

이제 남은 놈은 둘이다. 두 놈 다 바짝 긴장했다.

조태혁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칼을 쓰는 걸 보면 역시 짭새는 아니야."

"그래서 더 무섭지?"

조태혁이 손을 슬쩍 들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끼리 이러지 맙시다."

"새끼. 쫄았네."

조태혁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서로 아는 사람을 찾다 보면 겹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럼 피차 입장이 곤란해지잖습니까?"

차우진이 곽수혁 팀장을 힐끗 보았다. 두 놈이 칼을 가지고 있어서 곽수혁은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차우진은 곽수혁이 필요하다.

'마그마 탐지기 개발에는 곽수혁이 필요해.'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할 수는 있다.

그런데 누구로 대체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런 사람이 회사 내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곽수혁을 대체할 사람이 아예 없을 수도 있어.'

곽수혁을 살려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장호철 사장이 곽수혁을 죽이려는 건, 죽여서 묻어야 할 만큼 치명적인 정보를 곽수혁이 안다는 뜻이니까.'

마그마 탐지기를 곽수혁이 개발하게 하려면,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장호철이 사장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 그게 안 된다. 장호철이 쫓겨나고 회사가 혼란에 빠져야 경영에 개입할 만큼의 영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곽수혁은 죽으면 안 되지.'

그렇다고 곽수혁을 구하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곽수혁을 구하려면 적이 그의 가치를 몰라야 한다.

차우진이 곽수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놈을 넘겨."

조태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 저놈을 구하러 온 거냐?"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일을 망친다.

"설마 그러겠냐? 나도 너랑 같은 일을 받아서 온 거다. 우리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잖아."

"그게 무슨 개소리…."

"장 사장이 나한테도 의뢰했다고."

조태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새끼가 양다리를 걸쳤다고?"

차우진이 씩 웃었다.

'장 사장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네? 저놈은 딥어스테크 장호철 사장이 뒤에 있다는 걸 알아.'

지난번 청부업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의뢰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장호철이 많이 급했구나. 직거래를 다 하고.'

차우진이 조태혁을 속이기 위해 한 마디 더했다.

"아니면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겠냐?"

조태혁이 눈알을 굴리며 궁리했다. 부하 셋이 차우진을 덮쳤다가 순식간에 당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내 급이 떨어지고, 싸우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조태혁이 제안했다.

"반띵 하자."

"내가 왜?"

"씨발. 의뢰비만 받고 땡 칠 거야? 크게 해먹어야지!"

"그래? 더 지껄여 봐라."

차우진이 관심을 보이는 척하자 조태혁이 급히 설명했다.

"이 새끼는 입을 막아야 할 만큼 중요한 뭔가를 알고 있어. 그 자료만 받아내면, 그걸 가지고 사장 새끼하고 딜을 치는 거지."

"그러면 얼마나 받아낼 수 있지?"

"돈 많은 회사 사장이니까 의뢰비의 열 배도 땡길 수 있을 거야!"

"그걸 나 혼자 먹어도 되는데 너랑 나눠야 하는 이유는?"

"씨발. 역시 이 바닥 새끼네. 피도 눈물도 없어."

"그건 대답이 아닌데?"

조태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 새끼한테 자료 받아내는 것도 내가 하고, 사장 새끼한테 딜 치는 것도 내가 칠게! 너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받아낼 테니까 넌 그냥 돈만 받아!"

차우진이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었다.

곽수혁에게 중요한 자료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의뢰인이 누구인지도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짐작하던 일이다.

이제부터 알아내야 하는 건 다르다. 이건 차우진도 정보가 없다.

차우진이 물었다.

"자료를 내놓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데, 저놈이 순순히 내놓겠냐?"

"내놓을 거야. 이 새끼 딸이 내 손에 있으니까."

차우진이 이제부터 알아내야 하는 건 곽수혁의 딸의 현재 위치다.

"아. 그렇구나. 네가 애를 납치했구나. 넌 살인청부업에 유괴까지 하는 새끼네."

"씨발. 어차피 우리 일이 다 그렇지."

차우진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넌 고객에 대한 의무 같은 거 없냐? 이렇게 통수를 쳐도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 새끼가 양다리 걸쳐서 우리 애들 넷이 당했는데!"

"그런 그러네."

"그럼 반띵 하는 거로…."

"그런데 너랑 나랑 받은 의뢰가 좀 다르네?"

"뭐?"

차우진이 곽수혁을 가리켰다.

"난 저놈 죽이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너는 정보를 캐내라는 의뢰도 받았나 보다?"

"씨발.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죽이라는 의뢰만 받았지."

"그런데도 다른 생각을 하네? 그래서 사장이 너희가 배신할 거라고 예상했구나."

조태혁의 표정이 굳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

"너희도 다 없애라더라. 사장이."

"씨발? 왜!"

"왜겠냐? 너희도 잘라내야 하는 꼬리인 거지."

조태혁이 악을 썼다.

"장 사장 이 개새끼가!"

"어차피 우리 일이 다 그렇잖아?"

차우진이 두 놈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너희는 곽수혁을 납치해서 죽이고, 나는 너희를 정리하는 거지. 경찰이 너희를 찾아낸다 해도 이미 다 죽어버렸으면 수사는 미궁에 빠지겠지. 사장이 원하는 건 그거야."

차우진의 말이 조태혁의 귀에는 진짜처럼 들렸다.

조태혁이 소리를 질렀다.

"씨발! 조져!"

부하가 차우진의 왼쪽으로 뛰었다.

그 부하는 다른 녀석들보다 전투력이 좋았다. 특히 단검 던지기를 잘했다.

그가 차우진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칼이 그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갔다.

차우진이 옆으로 슬쩍 움직여 단검을 피했다.

그 부하는 당연히 조태혁이 차우진의 오른쪽을 맡을 줄 알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걸렸다! 그쪽으로 피하면 넌 죽….'

그의 시선이 차우진의 옆을 향했다. 그쪽에서 조태혁이 기습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차우진의 오른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 연습한 대로라면 조태혁이 지금 오른쪽을 덮쳐야 했다.

"어?"

하얀 양복 조태혁이 뒤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부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개새끼가!"

차우진이 부하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전투는 멈출 수 없었다.

부하가 즉시 단검 두 자루를 더 뽑으며 차우진의 옆구리를 노렸다.

'한 방만 박으면 돼. 칼이 들어오면 한 자루로 막고, 그 틈에 다른 칼로 저 새끼의 옆구리에….'

차우진도 단검이 있다. 그가 손을 앞으로 휙 뻗었다. 단검이 날아갔다.

칼잡이는 피할 틈이 없었다. 칼날이 가슴에 푹 박혔다.

"컥!"

차우진이 말했다.

"왜? 너만 칼을 던질 줄 안다고 생각했냐? 나도 잘 던져."

차우진이 처음에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고 고꾸라진 놈을 가리켰다.

"저놈을 어떻게 잡았는지 생각해보면 알잖아?"

"끄륵."

적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곽수혁이 벌떡 일어나 조태혁을 쫓아가려고 했다. 무기가 없어서 손에는 돌을 쥐었다.

"저 새끼 잡아야 해!"

차우진이 곽수혁에게 성큼 다가가 뒷덜미를 당겼다. 뛰려던 곽수혁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곽수혁은 마음이 급해서 조태혁부터 쫓아가려 했지만, 차우진에게 잡히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자료 다 넘겨줄 테니까, 저 새끼 좀 잡아줘요! 우리 딸을 구해달라고!"

"자료는 곽수혁 팀장이 직접 까야지."

"지금 여기 없으니까, 내가 나중에 줄 테니까…."

"나한테 그걸 왜 줘? 경찰에 넘겨야지. 아니면 인터넷에 터트리던가."

"어? 그게 무슨…."

곽수혁은 당황했다.

"자료를 빼앗고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야?"

"당신을 왜 죽여? 살아서 열심히 일해."

곽수혁은 탐지기 개발팀의 팀장이다. 마그마 탐지기는 멸망급 재난 중 하나를 막는 데 꼭 필요하다.

그건 지금 개발해야 한다. 나중에 다른 곳에서 만들면 너무 늦는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많아."

곽수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러 왔다고…."

"그렇게 말해야 당신이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지지. 곽 팀장을 구하러 왔다고 하면 저놈은 즉시 당신 목에 칼부터 들어댔을걸?"

"사장의 청부를 받았다는 건…."

"거짓말이야. 저놈을 속여야 했으니까."

"그, 그럼 우리 같은 편이죠?"

곽수혁이 다급히 부탁했다.

"그럼 저 새끼 빨리 좀 잡아줘요! 우리 딸을 저 새끼가 납치했단 말입니다!"

"알아."

"빨리 저 새끼를 잡아야…."

"도망치게 놔둘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래야 저 새끼가 당신 딸한테 달려갈 테니까."

"닥치…. 어? 뭐? 예? 뭐라고요? 지금 하신 말씀이 그러니까…."

"저 새끼를 당신 딸을 찾는 사냥개로 쓸 거라고."

43. 민지

차우진이 도망치는 조태혁을 보며 곽수혁 팀장에게 설명했다.

"당신 딸이 어디 있는지는 저놈이 알아. 내가 저놈을 쫓아가서 찾아내고 구출하면, 곽 팀장은 내 연락받고 나서 경찰에 신고해야지."

곽수혁은 마음이 급했다.

"지금 당장 신고하겠습니다!"

"당장 신고하면 나는 어쩌라고."

"예?"

차우진이 주변을 가리켰다.

칼에 맞은 놈들과 머리가 깨진 놈이 있었다. 턱이 돌아간 놈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멀쩡한 놈은 하나도 없었다.

죽은 놈이 없는 건 목격자 곽수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 딸을 구출하는 사이에 경찰이 들이닥치면, 나까지 잡히겠네?"

"그, 그건…."

"당신 딸을 구출한 후에 연락할 테니까, 그때 신고합시다. 오케이?"

곽수혁은 그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고수가 민지를 구출하는 곳에 경찰이 출동하면….'

차우진이 순순히 체포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이 경찰과 싸우다가 만약 민지가 말려들기라도 하면….'

그가 주변을 보았다. 차우진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직접 봐서 안다. 만약 차우진이 경찰과 충돌하면 같이 있던 곽민지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차우진은 그를 구하러 왔다. 목숨도 구해주었다.

'이 사람은 적이 아니야. 실력도 확실해. 지금은 믿고 맡겨야 해.'

곽수혁이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제 휴대폰을 빼앗겼는데 저 봉고차 어딘가에 있습니다. 전화 주십시오. 제 딸이 전화번호를 압니다."

차우진이 단서를 달았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자료 말인데."

"드, 드릴까요?"

"필요 없어."

"아, 예."

"그걸 경찰에 넘기면 당신도 체포되나?"

그러면 앞으로의 일에 문제가 생긴다. 곽수혁은 마그마 탐지기를 개발해야 한다.

"아니요. 사장의 비리 자료이지 제 비리는 아니니까요. 사장은 싫어하겠지만 제가 체포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됐네.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당신이 납치된 원인인 그 자료를 다 깝시다. 그래야 장 사장이 당신을 못 건드리지."

곽수혁은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차우진이 말한 조건쯤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경찰서에 가면 자료 다 까겠습니다! 다만!"

"제한시간?"

"그, 그렇습니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모르고 밤새 기다릴 순 없으니까…."

차우진은 조태혁이 도망친 쪽을 힐끗 보았다. 이미 숲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저런 놈들의 패턴이나 도망치는 방향을 보면 멀진 않겠네.'

"그래도 나를 믿고 기다려야지. 내가 가는 게 제일 확실하니까."

"너무 오래 걸리면 이놈들은…."

"딸 목숨이 더 중요한 거 아니었나?"

"그렇죠! 이 새끼들은 죽든 말든 상관 안 합니다."

"한 시간 안에 구출하고 신고하면 이놈들은 살겠지."

***

하얀 양복 조태혁은 산을 타고 도망치며 숨을 헐떡거렸다.

"그 새끼 도대체 뭐야? 어디서 튀어나온 킬러야?"

그는 차우진이 킬러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곽수혁을 죽이려고 찾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새끼가 나를 속였어. 죽이러 온 놈이 아니라 구하러 온 놈이야."

왜 속였는지도 깨달았다.

"곽수혁이 인질로 잡힐까 봐 구라를 친 거야. 씨발. 그런 얕은 수작에 속다니."

그래서 화가 났지만, 대신에 차우진을 상대로 협상할 수단이 생각났다.

"곽수혁을 구하는 게 목적이면, 딸년도 살려야겠지. 그걸로 협상할 수 있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앞을 보았다. 짙게 틴팅이 된 SUV가 숲 속 공터에 들어와 있었다.

"씨발. 이렇게 다 쓸려나갈 줄 알았으면 한 놈은 여기 남겨두는 건데."

그가 차로 다가가 앞문의 잠금부터 해제한 후에 뒷문을 벌컥 열었다.

차 안에는 입에 테이프가 붙어 있고 손발이 단단히 묶여 있는 고등학생이 있었다. 두 손을 묶은 끈은 다시 차량 내부 고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곽민지가 겁먹고 소리를 질렀다.

"읍읍!"

입이 테이프에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태혁이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 왼손은 곽민지를 향해 뻗었다.

"너만 있으면 그 새끼랑 협상할 수 있어."

차우진은 조태혁이 곽민지를 끌어내려는 걸 보며 작게 말했다.

"인질 위치 확인."

조태혁의 손에 인질이 들어가면 일이 복잡해진다. 느긋하게 접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보는 사람도 없었다.

차우진이 앞으로 크게 걸으며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평소보다 이동 거리가 넓었다.

차우진이 그곳에서 사라졌다가 조태혁의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공간이동의 영향으로 바람이 불었다.

차우진은 공간을 건너뛰자마자 바닥을 박차며 점프했다. 체중이 실린 발차기가 조태혁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갔다.

조태혁은 옆구리에 발이 꽂힌 후에야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조태혁은 허리가 옆으로 꺾이면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케에엑!"

곽민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눈앞에서 칼을 들고 손을 뻗던 놈이 옆으로 휙 날아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차우진이 조태혁을 날려버리고 차 안을 보며 말했다.

"네 아빠가 보내서 구하러 왔다."

곽민지가 몸을 뒤틀며 소리를 냈다.

"읍읍!"

차우진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집었다.

"묶인 것부터 풀어줄게. 밧줄부터 자를 거야."

곽민지가 조용해졌다. 대신에 몸을 뒤로 돌렸다.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차우진이 곽민지의 손을 묶은 밧줄부터 끊었다. 그 줄은 뒷좌석에 추가로 설치된 고정 고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차우진이 줄을 잘라주자마자 곽민지가 두 손으로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러면서 외쳤다.

"아저씨! 저 새끼 나쁜 새끼예요!"

차우진이 곽민지의 다리를 묶은 줄도 끊으며 말했다.

"그래. 나쁜 새…. 어?"

차우진이 곽민지의 얼굴을 보다가 뒤로 물러나며 밖으로 손짓했다.

곽민지가 얼른 차에서 내리다가 비틀거렸다. 그녀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코에 묻히며 말했다.

"다친 거 아니에요. 다리 저려서 그래요."

차우진이 곽민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설마 네가 그 민지였냐?"

"제가 곽민지 맞는데, 그 민지는 누구예요?"

"있어. 철이 든 곽민지."

"네?"

차우진이 마스크를 쓴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민지가 날라리였다니."

차우진은 지금 이 곽민지를 얼마 전에 본 적이 있다. 미래 예지몽을 꾸고 나서 이선정 박사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였다.

그때 곽민지는 골목에서 다른 날라리들과 같이 있었다.

그 골목에서 남자 고등학생 날라리 두 놈은 차우진의 돈을 빼앗으려다 얻어맞고 도망쳤다. 곽민지는 자기는 미성년자라고 주장하다가 쫓겨났다.

곽민지가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앗!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날라리라니요?"

차우진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창수 형. '그 하늘의 스타라이트'는 안 나올 건가 봐. 얘가 날라리가 됐어."

'그 하늘의 스타라이트'는 박창수가 좋아하던 노래다.

차우진은 곽수혁의 딸이 멸망 초기에도 활동한 연예인 민지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민지가 예전에 골목에서 만난 날라리라는 건 몰랐다.

곽민지가 말했다.

"아니, 저는 날라리가 아니…."

"아니다. 이 시기에는 원래 날라리였겠구나."

멸망 초기에 TV에서 본 민지는 아버지가 연구소 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곽수혁이 살아있다. 곽민지가 겪을 뻔했던 시련이 사라졌다.

"얘는 앞으로도 날라리일 거야. 이제 그 노래는 안 나와. 형이 포기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한국말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차우진이 곽민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구해야 할 대상이 날라리가 됐다고 해서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고쳐보자. 일단 말부터. 학생은 좋은 말 고운 말 써야지."

"네? 지금 이 상황에서요?"

"어."

"어떤 말을…."

"저 새끼 나쁜 새끼라고 한 것부터."

곽민지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했다.

"저 사람 나쁜 강아지 아들이에요."

"옳지."

"와…. 경찰 아저씨 진짜…."

"나 경찰 아니다."

"네? 저를 구하러 오셨다면서요."

"그건 맞아."

"어…. 그럼 경찰 아저씨 아니라도 괜찮아요."

조태혁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 잠깐 여기 있어라. 내가 저놈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

"저도 보고 싶어요. 저를 납치한 나쁜 놈이잖아요."

"그래. 그러는 게 너답긴 하다."

곽민지는 그때 그 골목에서도 한 번은 대들었다가 도망쳤다.

"그래도 이건 애들이 볼 장면은 아니야. 다른 데 보고 있어. 기왕이면 귀도 막고. 안 그러면 꿈에 나온다."

"아…. 네."

곽민지가 뒤로 돌아서서 귀를 막았다.

차우진이 조태혁이 날아간 곳으로 걸어갔다.

하얀 양복 조태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새로운 단검을 뽑으며 소리를 질렀다.

"씨발. 언제 쫓아온 거야!"

"내가 원래 길이 아닌 곳에서 빨라."

멸망한 세계에서는 길이 아닌 곳을 움직일 일이 많다. 그는 현대 문명에 익숙한 조태혁보다 훨씬 빨리 산악 지역을 이동할 수 있다.

조태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차에 도착할 때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차우진은 조금 거리를 두고 미행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블링크를 사용해 공간을 건너뛰었다.

"동태눈깔을 피해서 접근하는 거야 쉽지."

차우진이 칼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제 쟤는 구출했으니까, 넌 살려둘 필요가 없네?"

조태혁은 겁이 덜컥 났다.

그는 부하들이 칼에 맞아 나자빠지는 걸 보면서 도망쳤다. 차우진과 정면으로 싸워봤자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안다.

이제는 인질도 없다. 다른 게 필요했다.

조태혁이 협상을 걸었다.

"나, 나는 아는 게 많아!"

"별로 안 궁금한데."

"나한테 이번 일을 시킨 건 김 비서라는 놈이야. 김 비서 뒤에 장 사장이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려줄 테니까, 그거로 거래하자!"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어? 뭐?"

"나 경찰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나는 쟤 구하러 왔다."

"그, 그렇지만…."

"그런데 말이야. 이제 장 사장이 너까지 제거하려고 날뛰겠네? 네가 살아있으면 자기가 더 위험해지니까."

오늘 곽수혁이 살해될 뻔한 건 장호철에게 불리한 정보를 알고 있어서다. 조태혁은 아까 들었던 꼬리 자르기라는 말이 생각났다.

"씨발. 나도 똑같은 꼴이 된 건가."

차우진이 조태혁에게 성큼 걸어갔다. 겁에 질린 조태혁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으아아!"

조태혁의 칼은 초반에 잡은 세 놈보다는 빨랐다. 하지만 마지막에 잡은 칼잡이보다는 느렸다.

조태혁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이 다리를 걷어찼다. 조태혁은 칼을 휘두르다가 옆으로 나자빠졌다.

넘어지는 놈의 턱을 차우진이 다시 걷어찼다.

"켁!"

조태혁은 고개가 돌아가며 기절했다.

차우진은 조태혁을 찌르지는 않았다. 미성년자인 곽민지가 근처에 있을 때 피를 보는 건 내키지 않았다.

곽민지가 물었다.

"끝났어요?"

"귀 막고 있으랬더니."

"막아도 들리는 걸 어떻게 해요."

"대충 막은 건 아니고?"

"거짓말하면 안 되죠?"

"어."

"대충 막았어요."

"역시 너답다."

이제 곽민지는 구출했다. 그럼 곽수혁에게 연락해야 한다.

"너 휴대폰 어디 있냐?"

"저놈들이 빼앗아갔는데…. 잠깐만요."

곽민지가 차의 문을 활짝 열고 내부를 확인했다.

"아. 여기 있다."

스티커가 여러 개 붙어 있는 분홍색 케이스의 스마트폰이 조수석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곽민지가 전원을 켰다.

차우진이 말했다.

"곽 팀장님에게 구출됐다고, 이제 신고해도 된다고 전화해."

"우리 아빠는 괜찮아요?"

"어. 괜찮아. 너 구하러 같이 와서, 지금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44. 신고

곽수혁은 차우진의 연락을 딱 한 시간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차우진이 구출에 실패했을 수도 있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다.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20분도 안 지났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초조했다. 그의 손가락이 스마트폰 키패드로 향했다. 어느새 번호가 1, 1, 2로 늘어났다. 이제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된다.

"아니야. 안돼. 최소한 한 시간은 믿어야…."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곽수혁은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놓쳤다.

"으헉!"

스마트폰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가 땅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급히 들었다. 액정이 깨지진 않았다.

"휴우…. 어?"

발신자가 곽민지였다.

"어? 어? 벌써?"

곽수혁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까 곽민지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납치범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지냐?"

- 아빠아!

곽수혁이 다급히 물었다.

"민지야! 너 괜찮냐? 괜찮냐고!

- 이제 괜찮아.

"너를 납치한 놈은?"

- 저기에 허리가 꺾여 있어.

"어?"

- 목도 돌아가 있는데…. 죽었나? 아니래. 안 죽었대.

곽수혁은 당황했다.

"너, 너는? 너는 괜찮지?"

- 괜찮아. 아저씨가 구해줬어.

"아저씨?"

- 아빠가 보냈다던데?

곽수혁은 아저씨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맞아! 내가 보냈어! 다행이다. 다행이야."

- 근데 잡담 그만하고 경찰에 신고하래.

"아! 그래! 신고해야지! 신고하고 내가 거기로 갈게!"

- 여기 어디인지 알아?

"어? 네가 알아야지."

- 난 끌려와서 모르는데.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데…."

- 나는 여기서 신고할게. 신고부터 하고 다시 통화하래.

곽수혁은 딸과의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에 112를 다시 입력했다.

"후우. 후우. 살았다. 살았…."

그가 있는 곳에는 다섯 놈이 쓰러져 있다.

"이놈들도 사나?"

곽수혁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나마 상태가 좋은 놈을 발로 걷어찼다.

"이 새끼들이 어딜 감히 내 딸을!"

***

여고생이 112에 납치 신고를 했다. 즉시 비상이 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경찰차가 달려갔다.

곽수혁도 비슷한 시간에 신고했지만 곽민지가 있는 곳에 경찰차가 먼저 도착했다.

경찰 두 명이 차에서 서둘러 내려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학생! 괜찮아?"

곽민지는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었다.

"앗. 이번엔 진짜 경찰 아저씨다. 네. 저는 괜찮아요."

"학생이 신고 했…."

차를 운전한 경찰이 뒤따라 오다가 조태혁을 발견하고 외쳤다.

"헉! 저기 시체가 있습니다!"

"뭐? 시체?"

곽민지가 얼른 말했다.

"아. 그 나쁜 강아지 아들은 안 죽었대요."

"어? 강아지 뭐?"

"저를 납치한 놈들의 두목이에요."

"어? 두목?"

"여기 있는 건 저놈뿐이지만, 다른 곳에 또 많거든요."

경찰이 조태혁을 보며 동료에게 물었다.

"구급차는 어떻게 됐어?"

"방금 연락했는데요. 다른 쪽이 상황이 더 심각해서 거기부터 가야 한다던데요?"

"여기도 상태가 만만치 않은데, 이것보다 더 심하대?"

"그렇다네요."

경찰이 곽민지에게 물었다.

"혹시 학생이 저렇게 한 거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요? 이런 날씬한 팔로 어떻게 저 덩치 큰 어른을 수수깡처럼 꺾어놔요?"

"그럼 저 사람은 누가…."

"지나가던 분이 저를 구출해주셨어요. 누군지는 몰라요. 알아도 말 못하지만요.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얼굴도 못 봤어요."

***

곽수혁이 있는 곳에도 경찰이 달려왔다. 곽민지가 있는 곳보다는 늦게 도착했지만 시간은 몇 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은 곽민지가 있는 곳보다 훨씬 더 상황이 심각했다. 칼을 맞은 놈이 많았고 머리가 깨진 놈도 있었다. 고개가 돌아간 놈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이미 곽민지가 발견됐기 때문에 사건의 성격이 납치와 살인미수라는 건 확실히 알려졌다.

순찰차와 구급차가 온 후에 형사들이 도착했다. 구급차가 부족해 납치범들을 다 옮기기 전이었다.

형사들은 현장을 보고 당황했다.

"조직 간에 전쟁이라도 터졌나?"

"납치범이라던데요?"

"납치범이 왜 다 누워 있냐?"

현장을 둘러본 형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곽수혁을 보며 물었다.

"설마 선생님이 이렇게 하신 건…."

곽수혁이 펄쩍 뛰었다.

"전 아닙니다!"

기절한 놈을 걷어차긴 했지만 다른 건 곽수혁이 한 게 아니다.

"제가 그럴 실력이 있으면 납치됐겠습니까? 전 납치 피해자입니다. 피해자."

"아. 그렇죠. 그럼 이건 누가…."

"어…. 지나가던 사람이?"

"예?"

자세한 건 말해줄 수가 없다. 한국은 정당방위의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차우진은 경찰에 신고하는 건 곽민지의 연락을 받은 후에 하라고 했다.

차우진은 실제로 곽민지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곽민지는 전화로 다친 곳이 없다고 했다. 차우진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

딸을 안전하게 구해준 사람에 대해 상세히 진술하는 건 도리를 모르는 짓이다. 곽수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것보다, 범인들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만."

"아, 예. 일단 가시죠. 병원부터…."

"아니요. 저는 괜찮으니까 병원은 나중에…."

곽수혁은 장호철 사장의 비리 자료 공개를 망설이다가 딸까지 납치당했다. 그 자료를 계속 쥐고 있으면 곽수혁은 물론이고 아내와 딸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마음이 급했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아내였다. 곽수혁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

- 민지는 찾았어?

"어? 어. 찾았지."

- 어디야. 또 노래방이야?

"아니, 그게…."

- 나 지금 퇴근해. 내가 지금 잡으러 가니까 빨리 말해.

"여기가 어디인지 나도 잘…."

그는 경찰에 신고한 후에 현재 위치를 지도 앱을 이용해 확인했다. 그런데 이곳은 곽수혁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실수한 게 생각났다.

"아차. 내가 아직 말 안 했구나."

- 무슨 말? 민지 사고 쳤어?

"아니. 그게 아니라…."

- 네가 사고 쳤니?

"아니다. 나중에 말해줄게."

- 너 지금 어디….

곽수혁이 전화를 끊었다.

형사가 물었다.

"사모님한테 이 상황이나 따님 이야기를 아직 말씀 안 드린 겁니까?"

"깜빡했습니다. 형사님. 경찰서부터 빨리 가시죠. 제가 지금 와이프한테 잡히면 죽을 거 같아서요."

***

차우진은 집으로 돌아와 복대를 풀었다.

"이야. 이제 배가 편해졌다."

싸울 때는 잠시 사라졌던 배가 복대 하나 벗었다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인덕을 숨기는 건 역시 힘든 일이야."

차우진은 집에서 상의를 벗었다. 칼에 맞은 곳은 없었다.

그런데 조치가 필요한 곳은 좀 있었다.

"어우. 허리부터 좀…."

차우진이 허리에 파스를 붙였다. 몸에도 여기저기에 파스를 한 장씩 붙였다. 집에는 차유리가 사놓은 파스가 많았다.

"이거 그냥 자면 내일 분명히 근육통 온다."

그는 단련하지 않은 몸으로 전투를 치렀다. 적의 칼을 피하고, 여섯 놈을 제압하고, 공중 발차기까지 했다.

그 움직임은 원래는 현재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싸움이 가능했던 건, 꿈속 미래에서 익힌 전투 센스와 적절히 사용한 시간 가속 스킬 덕분이다.

그런데 전투 센스나 시간 가속이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의 단련되지 않은 신체로 전투 센스와 시간 가속의 움직임을 감당하려면 당연히 근육에 부담이 가는 걸 피할 수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신체를 강철같이 단련하는 것이다. 그러면 배도 들어간다.

"그건 아니지. 인덕을 포기할 수는 없어. 이건 내 꿈이었다고."

차우진은 멸망한 시대에서 살아갈 때 살이 찔 정도로 풍족한 세상을 그리워했다. 그건 다시는 오지 않을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현실이 됐다.

도저히 이걸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체중이나 인덕이 중요한 건 아니야. 중요한 건 작전과 계획이지. 그러니까 운동은 안 할 거야. 필요하면 파스 또 붙이지 뭐."

차우진이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그의 누나 차유리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야. 없는 시간 쪼개서 잠깐 들어왔으니까 밥 내놔. 야식으로 먹게 도시락도 좀 싸주고. 오늘은 무슨 요리…."

차유리가 차우진을 보며 인상을 썼다.

"뭐야? 몸에 파스를 왜 붙여? 넌 무게 위주로 일하는 업종이 아니잖아."

"운동 좀 했어."

"헬스장 끊었냐?"

"아니. 그냥 공원에서."

"겨우 그거 했다고 온몸에 파스를 미라처럼 붙였냐? 네가 산 파스 아니라고 막 쓰냐?"

"많이 있더라. 남겠던데?"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주식 부자가 가난한 공무원한테서 파스를 뜯어내네."

"사덕리소스 주식은 안 팔았다고. 팔아야 돈이지."

"시끄러워. 그리고 공원에서 체계적인 운동이 되겠냐? 제대로 하려면 나 따라 하던가."

"선출을 일반인이 왜 따라 하는데?"

"너 몸 좀 쓴다던데? 재구파 몇 놈이 너한테 맞아서 쫓겨났다며."

그 정보는 사채업자 박재구의 사건을 수사하다가 알게 됐다.

차우진이 물었다.

"아. 그 사건은 어떻게 됐어? 조천상은 잡았어?"

조천상은 재구파 서열 3위의 간부였다.

"아니. 잠수를 얼마나 깊게 탔는지 흔적도 없다더라."

"나한테 겁먹었나?"

"설마 그래서겠냐? 박재구가 죽고 재구파도 그 꼴이 되니까 꼭꼭 숨었겠지."

"하긴."

차우진이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하여간 누나는 알아서 사람 잡는 운동해. 나는 내가 알아서 숨쉬기 운동할 테니까."

"너 그러면 뱃살 안 빠진다."

"이건 인덕이라고. 안 뺄 거라고. 그리고 잔소리 더 하면 야식 도시락 안 싸준다?"

"입 닥칠게."

차우진이 식사를 준비하며 물었다.

"오늘은 왜 또 바쁜데?"

"납치에 유괴에, 납치범들은 칼 맞고 전멸했다. 오늘도 아주 화려하다."

차우진은 살짝 미안해졌다.

"아. 또…."

"또?"

"또 야근한다고."

차우진이 멸망에 방해되는 놈들을 처리하면 차유리가 야근할 일이 자꾸 생긴다.

"야근은 왜 하는데?"

"사건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유괴됐던 여고생이 사는 곳이 우리 지역이야."

"환장하겠네. 걔가 우리 동네에 살아?"

"우리 동네는 아니고 옆 동네야. 그런데 너 피해자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말한다?"

"어쩐지 보면 알 것 같아서."

"철컹철컹?"

"사람을 뭐로 보고."

"그치. 그건 아니지. 야. 도시락이나 잘 싸라. 이번에는 양 더 많이. 팀원들이랑 나눠 먹게."

"돼지가 늘었어."

"그 돼지들이 저번에 내 도시락 맛을 보더니 더 내놓으라더라."

"재료비는?"

"지금 네 몸에 붙인 파스 값으로 퉁 치자."

"뭐지? 지금 여기는 탐관오리가 선량한 백성을 수탈하는 현장인가?"

"네가 선량해?"

"아니. 내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차우진이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확인하다가 물었다.

"피해지가 여고생이니까 수연이도 야근하겠네?"

"당연하지."

그는 차유리가 야근하게 된 게 미안해서 요리를 만들려고 했다. 이제 민수연에게도 조금 미안해졌다.

"수연이한테 보낼 것도 싸야겠다."

"요리 재료 부족하면 우리 팀 것만 싸라."

"안 부족해. 찬장이랑 냉장고 다 털면 어떻게든 돼."

***

조태혁과 부하들은 병원으로 보내졌다. 여섯 놈 모두 부상이 심해서 치료부터 받아야 했다.

형사가 보고했다.

"급한 놈들은 수술 먼저 들어갔고, 덜 급한 놈들은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형사팀장이 물었다.

"어떨 것 같아? 죽겠어? 살겠어?"

"다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의사가 그러는데 칼에 맞은 놈들도 전부 급소는 피해서 찔렸답니다."

"그건 다행이다. 죽으면 이거 살인사건으로 바뀌는데, 내키지 않는 사건이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전부 급소를 피해서 찔렀다? 한 놈 정도라면 몰라도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면서 전부 그러긴 어렵지 않나?"

"어렵죠."

"그리고 어떻게 갑자기 나타나서 곽수혁 씨와 딸을 구해주고 사라진 거지? 도대체 정체가 뭐야? 홍길동이야?"

"전문적인 관점에서 보면 홍길동보다는 일지매 쪽이…."

"죽을래?"

"죄송합니다."

45. 주식

곽수혁과 곽민지 납치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팀의 팀장이 병원에서 경찰서로 돌아왔다.

이미 다른 형사들이 곽수혁을 대상으로 참고인 조사를 하고 있었다.

"뭐 좀 나왔냐?"

형사가 보고했다.

"곽수혁 씨가 피해자인 건 확실합니다."

"다 아는 거 말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겠답니다. 팀장님과 이야기하고 싶다는데요."

"누가 구해줬는지 말하겠대? 홍길동이야, 일지매야?"

"아니요. 그건 누군지 자기도 모른답니다."

팀장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럼 뭔데?"

"딥어스테크 장호철 사장의 개인 비리 정보랍니다."

팀장이 머리를 긁던 손을 멈췄다.

"어? 갑자기?"

"예. 우연히 알게 된 정보랍니다."

"잠깐만. 그럼 곽수혁 씨가 오늘 살해당할 뻔한 이유가…."

"자기 입을 막으려던 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건 못 참지. 무슨 비리인데 사람을 납치해서 죽이려고 한 건지 빨리 들어보자."

***

그날 밤에 민수연이 도시락을 팀원들과 나눠 먹었다.

팀원들이 감탄했다.

"이야아. 이거 진짜 맛있다."

"이걸 차유리 형사가 줬다고?"

"역시 차 형사가 먹을 거엔 관대하다니까."

"호텔에서 사 온 거야?"

"그게 아니라 차 형사님 동생이 만들어준 거라던데요?"

"그걸 왜 우리 팀에 보내?"

"동생이 민 경장 친구래요."

"아. 여자."

"남자요."

팀원들이 놀란 얼굴로 민수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민 경장! 남친 있었어?"

민수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친구예요. 동네 친구."

"언제부터?"

"태어날 때부터죠."

"응?"

"같은 산부인과에서 하루 차이로 태어났어요."

"그럼 민 경장이 누나야?"

"식사나 하세요."

"아니구나."

다른 팀원이 물었다.

"민 경장. 친구 직업이 요리사야?"

"아뇨. 전기 기술자예요."

팀원이 젓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말했다.

"이런 실력이면 요리사를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전기 쪽으로도 잘나가요. 놀 때가 많아서 그렇지. 요즘도 놀고 있어요. 아. 진짜 너무 오래 노는 거 아냐? 부러워라. 나도 놀고 싶다."

"응?"

"어머. 아니에요. 어쨌든 요즘 노니까 시간이 남아서 만들어준 거래요."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이 이렇게 많이 만들어서 보내주나?"

민수연이 오늘 야근하는 건 차우진이 곽수혁을 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우진이 그녀의 야식을 챙겨줬다.

민수연이 말했다.

"취사병 출신이라 원래 음식 많이 만드는 거 잘해요."

"그 말을 왜 그렇게 자랑하는 표정으로 해?"

"식사나 하시라니까요."

***

그날 밤에 차우진이 사덕리소스 사장 서준석을 찾아갔다.

서준석이 활짝 웃으며 차우진을 반겼다.

"우리 대주주님께서 오셨는데 나가서 술이라도 할까요?"

"주식은 서 사장님이 더 많으시잖습니까?"

"하하. 그걸로는 부족한 거 아시잖습니까? 10퍼센트를 가진 차 이사님이 저를 지지하시니까 경영권을 유지하는 거지요."

"경영권을 노리던 세력은요?"

"그놈들은 일단은 포기한 눈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금광을 노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안심은 못 합니다."

"금광의 예상 매장량이 더 늘었던데요."

"예. 탐사하면 할수록 예상 매장량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전에 이야기한 걸 할 수 있겠군요."

서준석이 주변을 슬쩍 본 후에 물었다.

"딥어스테크의 주식 매집 말입니까?"

"그렇죠. 경영권에 영향을 끼칠 만큼 확보해야 합니다."

"우리 금광의 예상 매장량이 늘고는 있습니다만, 아직 그 정도는…. 딥어스테크는 우리 회사보다 큰 기업입니다."

차우진이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해 보여주었다.

"오늘 납치 사건이 두 건 일어났습니다. 납치범들은 크게 다쳐서 체포됐고, 피해자들은 무사히 구출됐습니다."

"아.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 기사를 왜…."

"납치됐다가 구출된 곽수혁 팀장은 딥어스테크의 개발팀장입니다. 다른 피해자는 곽 팀장의 딸입니다."

"어쨌든 무사히 구출됐잖습니까?"

"곽수혁 팀장은 장호철 사장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비리를 알고 있습니다."

서준석은 당황했다.

"네? 어? 그럼 이 납치가 혹시…."

"사장이 시킨 거죠. 곽 팀장을 제거해서 입을 막으려던 겁니다."

"헉!"

"사장이 권력을 쥐고 있으면 곽수혁 팀장은 같은 일을 또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 팀장이 자기가 아는 사장의 비리 자료를 경찰에 넘겼습니다."

곽수혁은 아까 그 자료를 경찰에 넘기겠다고 차우진에게 말했다.

"와…. 그럼 장호철 사장은 혹 떼려다 혹 붙인 겁니까?"

"그렇죠."

서준석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딥어스테크가 작은 회사도 아닌데, 장호철 사장이 왜 그런 무리한 짓을…."

"그래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비리가 있겠지요. 뇌물 좀 먹여서는 사장이 교도소에 가는 걸 막을 수 없는 뭔가가 있을 겁니다."

서준석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았다.

"비리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선, 딥어스테크가 상장 폐지될 수도 있습니다. 사장이 대규모 배임 횡령이라도 저질렀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 전에 주식을 모으면 됩니다. 주식의 의결권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까요."

서준석이 말했다.

"사장의 비리가 뭔지 모르겠는데, 회사가 어려워질 수는 있어도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개인 비리라면 사장만 잘릴 수도 있으니까요."

사장만 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장호철 하나만 제거한다고 마그마 탐지기 개발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딥어스테크는 이미 그 탐지기 개발을 중단했다. 꿈속 미래에서 본 기사에 의하면 앞으로도 그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다.

지금 경영진을 그대로 놔두면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결과를 바꾸려면 판을 뒤집어엎어야 한다.

그러려면 딥어스테크의 지분이 많이 필요하다.

차우진이 말했다.

"장호철이 사장 자리에서 버티는 동안은, 공개되는 범죄와 비리가 크면 클수록, 그래서 심각한 뉴스가 나올수록 주가는 더 많이 내릴 겁니다."

"그러긴 하겠군요.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사람은 아니니까 주가는 진짜 많이 폭락하겠군요."

서준석이 장담했다.

"그때 우리 회사가 주식을 긁어모으면 예상보다 많이 살 수 있습니다."

"지분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저도 딥어스테크 주식을 개인적으로 살 겁니다. 경영진을 뒤집어엎어야 하니까."

"예? 그 자금은 혹시…."

"제가 보유한 사덕리소스 주식을 담보로 잡히고 사야죠."

서준석은 긴장했다.

"우리 회사 주식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차 이사님이 그걸 잃으면 저도 경영권을 잃습니다."

"사덕리소스 주가는 우리 금광의 예상 매장량이 늘어나는 동안은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차우진은 사덕리소스가 10년 후에도 안 망한다는 걸 안다. 그러려면 금광에서 금이 계속 나와야 한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서준석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다가 차 이사님이 딥어스테크에서도 대주주가 되시겠습니다."

차우진은 진지했다.

"필요하면 그래야지요."

***

장호철이 소리를 질렀다.

"그 비싼 놈들을 썼는데 어떻게 겨우 회사원 하나 처리하는 걸 실패하나! 도대체 왜!"

비서 김태훈이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 일단 우리 쪽에서 보낸 놈들은 전멸했다는 말을 들었…."

"그럼 곽수혁은?"

"현장에 출동한 형사들과 함께 경찰서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그 새끼가 입을 열까?"

"만약 사장님께서 납치를 지시했다는 걸 눈치챈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경찰에 넘길 수도 있…."

장호철이 술잔을 던졌다.

"야 이 새끼야! 그럼 빨리 돈을 뿌리고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덮어야지! 이거 해결 못 하면 다 죽어!"

"죄, 죄송합니다."

"씨발. 이제는 전화 돌리는 거로는 안 되겠다. 차 준비해!"

***

하얀 양복 조태혁은 칼을 맞지는 않았다.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조태혁이 목에 깁스를 한 상태로 주장했다.

"장 사장이 곽수혁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장호철에게 불리한 건 사실대로 말했다. 반면에 자신의 죄는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냥 겁만 주려고 한 겁니다.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진짜입니다."

형사가 물었다.

"너희 전부 다 칼을 가지고 있던데?"

"형사님. 칼은 겁만 주려고 가져간 겁니다. 실제로 칼에 맞은 건 전부 우리 애들이잖습니까?"

"장호철 사장이 시켰다는 증거는 있고?"

"장 사장 밑에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김태훈이라는 비서가 있습니다. 김 비서를 통해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장호철이 시킨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조태혁이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건, 장호철이 곽수혁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그의 입도 죽여서 막으려 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살려면 장호철이 잡혀야 돼. 다 말하자.'

***

조태혁을 조사한 형사가 팀장에게 보고하러 갔다. 팀장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팀장이 전화를 끊은 후에 푸념했다.

"환장하겠네. 어. 박 형사. 뭐래?"

"조태혁은 모든 걸 장호철이 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증거는?"

"정황은 열심히 설명하는데, 물증은 없습니다."

"젠장. 전화가 자꾸 오는데…."

"무슨 전화인데요?"

"이번 사건은 비공개로 수사하란다. 곽수혁 씨가 넘겨준 자료도 보안 유지 철저히 하래."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중견기업 사장이 엮인 일인데, 잘못된 정보라도 나가면 큰일 나잖습니까?"

"그게 우리 자체적으로 그렇게 판단한 거면 모르겠는데, 외부에서 압력이 위로 들어왔다가 다시 내려온 거야."

"외부요?"

"내 생각에는 여의도 같아. 느낌이 싸하지 않냐?"

"어떻게 하죠?"

"우리가 뭐 힘이 있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다들 기자한테는 입도 뻥끗하지 마라."

***

곽수혁은 진술을 마치고 자료도 경찰에 넘겨준 후에 집에 돌아왔다.

그의 아내에게 잔소리를 조금 듣긴 했다. 그렇지만 곽수혁도 죽을뻔했기 때문에 구박을 받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는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준비하고 소주도 꺼냈다.

곽수혁이 김치찌개를 맛보며 말했다.

"맛있네. 당신 요리 실력이 언제 이렇게 늘었지?"

"배달시켰어."

"어?"

"난 뭐 음식 만들 정신이 있겠어? 민지는 납치됐었다고 하지. 당신은 죽을뻔했다고 하지."

"아. 하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이 비공개 수사로 진행한다는데…."

"그럼 다 해결된 거야?"

"아니."

곽수혁은 차우진이 그를 구해주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한테 그걸 왜 줘? 경찰에 넘겨야지. 아니면 인터넷에 터트리던가.'

'그럼 됐네.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당신이 납치된 원인인 그 자료를 다 깝시다. 그래야 장 사장이 당신을 못 건드리지.'

곽수혁이 말했다.

"약속을 지켜야지. 형사들은 싫어하겠지만, 그래야 해."

***

차우진이 집에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올라왔네."

곽수혁 팀장이 경찰에 넘긴 자료는 디지털 파일로 되어 있다.

디지털 파일은 복사가 쉽고, 인터넷에 올리기도 쉽다.

곽수혁은 그가 겪은 일을 간단히 적었다. 곽민지 이야기는 빼고 그가 납치돼서 죽을뻔했다는 것만 썼다.

사건 현장 사진도 올렸다. 경찰이 오는 동안 찍어둔 사진이었다.

칼에 찔린 놈들의 사진도 여러 장 찍어뒀지만 그건 올리지 않았다. 그게 올라가면 게시글 자체가 삭제된다.

대신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칼 사진이나 한쪽에 세워진 승합차, 납치범들의 다리 사진 정도만 올렸다.

차우진이 그 글에 붙은 댓글을 읽었다.

- 죽다 살아났나 보다.

- 칼 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가 본데?

- 와. 무섭다.

- 도대체 무슨 비리 정보인데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져요?

- 내가 올라온 자료 훑어봤는데, 실험실 장비를 좀 빼돌렸나 봅니다.

- 저도 읽어봤습니다. 빼돌린 장비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겠던데요?

- 여러 가지 뭐요?

- 약물도 가능하고, 화약도 가능하고.

- 에이. 그건 아니죠. 너무 나갔네요. 딥어스테크는 구멍가게가 아니라 중견기업인데 그럴 리가요.

46. 살모사

딥어스테크 비서 김태훈이 사장실로 뛰어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장호철이 짜증을 냈다.

"그 큰일을 수습하려고 내가 이 밤에 사람 만나고 왔잖아!"

"곽수혁 팀장이 경찰에 넘긴 자료를…."

"그 자료는 비공개 수사로 진행해서 외부 유출 안 되게 잘 관리하기로 했다. 일단 시간은 벌었으니까, 그사이에 다른 증거를 모두 인멸…."

김태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자료를 인터넷에 뿌렸습니다!"

"뭐?"

"제가 봤는데 위험한 내용이 많…."

장호철이 화를 벌컥 냈다.

"야 이 새끼야! 넌 뭐 하고 있었어! 퍼지기 전에 막았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곽 팀장 그 새끼 미친 거 아냐? 경찰에서 유출 금지라고 단단히 경고했을 텐데, 그걸 왜 인터넷에 뿌려!"

"저도 곽 팀장이 이렇게 무식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젠 덮을 방법이 없습…."

"방법을 찾아! 못 덮으면 다 뒈지는 거야! 다른 기사 터트려서 덮으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대행업체에 돈을 주고 연예인 스캔들 기사를 뿌렸습니다. 효과도 있었습니다."

"거봐! 이번에도 통하잖아!"

스캔들 기사를 이용해서 납치 사건에 관한 관심을 낮추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그 자료가 올라오는 바람에 다시 관심이…."

"그럼 업체에 돈 더 주고 스캔들을 더 터트려!"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는 가십이 아니라 법적 증거가 되는 수준이라서…."

"스캔들 기사로 안 되면 비슷한 가짜 정보를 더 뿌려서 혼란을 일으켜! 정보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글을 집중적으로 올리고 싸움도 붙여서 사람들이 외면하게 하라고!"

"칼에 맞은 놈이 많은 데다가, 연구소에 불을 질러 연구팀을 몰살시키려던 것도 이번 일에 연결되어 있어서…."

장호철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넌 왜 안된다는 말밖에 못 해! 그럼 돈을 더 뿌려! 언론사도 움직여!"

"사장님. 우리 회사의 능력으로는 지금보다 더 강력한 여론조작은 어렵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딥어스테크는 중견기업이다. 회사 공식 자금은 여유가 없지만 숨겨둔 비자금은 꽤 많았다.

그런데 그 돈을 뇌물로 주려면 은행에서 그냥 이체해서는 안 된다. 뇌물을 안전하게 주려면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거나 은밀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일이 너무 커진 데다가 인터넷에 증거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덮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장호철이 화를 내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씨발. 이게 다 곽수혁 그 새끼가 살아남아서 그래!"

곽수혁은 납치됐다가 구출됐다.

"곽수혁을 도와줬다는 그 칼잡이 새끼. 그 새끼는 도대체 누구야!"

"그건 경찰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내 일을 다 망쳐놓은 거냔 말이다!"

***

차우진이 배를 긁으며 말했다.

"주가가 쭉쭉 잘 떨어진다."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은 체포되지는 않았다. 단서는 많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는 데다가, 지난번에 조사받을 때 인맥을 동원한 게 약발이 먹혔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곽수혁 팀장이 인터넷에 공개한 자료가 퍼지면서 소문도 같이 퍼졌다.

그 자료에 장호철의 이름은 없지만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충분히 담겨 있었다.

- 이건 고위층이 개입한 게 아니면 이렇게 못 하지.

- 빼돌리는 건 그냥 고위층도 할 수 있는데, 덮는 건 최고위층이라야 가능합니다.

- 조직적인 비리네요.

- 왜 이 비리를 저질렀는지가 더 의문입니다. 빼돌린 장비들이 일반적인 장비가 아니거든요.

- 팔려고 빼돌린 게 아니라, 직접 쓰려고 빼돌린 거라면?

- 그럼 어디에 쓰려고 했냐가 문제겠죠.

***

차우진이 사덕리소스 서준석 사장을 만났다.

사덕리소스는 광산이 주력이고 딥어스테크는 토목 사업도 한다. 두 회사 다 땅을 판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서준석은 업계에 도는 소문을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차 이사님. 제가 알아봤는데, 딥어스테크의 경영 상태는 약간 적자 상태입니다."

"연구소를 새로 짓던데요."

딥어스테크는 땅을 마련해 한쪽에 연구동을 짓고 다른 쪽에 사무동을 짓는 중이다.

"공사비는 예전 연구소 땅을 팔아 갚기로 하고 빌린 겁니다. 그거로도 모자라서 추가 대출도 받았습니다."

"공사비 많이 빼돌리던데요."

"소문 들으셨군요."

"현장에서 직접 봤습니다."

"네?"

차우진이 현장에서 그걸 빼돌리던 놈들을 때려잡았다.

서준석이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 그곳의 공사 자금 횡령 여부도 조사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온갖 악재가 펑펑 터지겠네. 아. 그 돈은 장호철이 빼먹었습니다. 확인한 겁니다."

"증거가…."

"증거는 없고요."

"이미 다 지은 연구동에 최근에 거액의 화재보험을 들었더군요."

"화재보험료는 건물의 가치보다 높을 수는 없지만…."

화재 보험사는 호구가 아니다. 신축 건물에 불을 질러 이익을 보기는 어렵다.

"사람을 죽이려고 화재를 일으키면서 거액의 보험을 미리 든 건, 한 푼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의지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장호철 사장. 참 지독한 사람입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서 사장님. 금광을 담보로 자금을 추가로 마련하는 건 어떻게 됐습니까?"

"목표 금액을 확보했습니다."

"장호철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고 딥어스테크 주가는 예상대로 폭락하는군요. 그러니까 이제."

차우진이 서준석에게 말했다.

"그 주식을 우리가 긁어모읍시다."

***

장호철이 아무리 손을 썼어도 일이 이렇게 터졌는데 경찰 조사조차 안 받을 수는 없다.

장호철은 경찰서에 출두해 일관되게 주장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형사가 말했다.

"범인이 김태훈 씨를 지목했습니다."

"그럼 그건 범인이랑 김 비서한테 물어보셔야지."

"김태훈 씨는 장호철 사장님의 비서잖습니까? 각기 다른 사건에서 두 번 다 김태훈 씨가 지목됐습니다."

"비서가 개인적으로 뭘 하고 다니는지 내가 알아야 합니까? 그건 비서 개인의 일탈입니다. 나는 모릅니다."

장호철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후에 욕을 내뱉었다.

"씨발. 돈을 그렇게 뿌렸는데도 일이 쉽지 않아."

김태훈이 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장호철이 차에 탄 후에 물었다.

"너 일찍 나왔다?"

"예? 아, 예. 제가 물증을 안 남겼으니까…."

"잘했다. 네가 잘하는 것도 하나쯤은 있구나."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이 새끼야."

김태훈이 어깨를 움츠리며 운전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사장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수사 자체는 못 막지만, 불구속 정도는 가능할 거다. 돈이 더럽게 많이 들었는데 그 정도도 안 되면 되겠어?"

불구속이라고 해서 수사를 안 받는 건 아니다. 구속과 불구속은 체포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느냐,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받느냐만 다르다.

"사장님. 그것만으로는 지금 사태가 해결이 안 됩니다."

"물증은 없다며?"

"제가 최근에 처리한 일은 물증이 없는데, 횡령 문제는…."

"그건 그동안 돈 먹인 놈들에게 해결해달라고 해야지."

장호철이 장담했다.

"어쨌든 죽은 놈은 없고, 내가 시켰다는 물증도 없잖아. 덮는 데까지 덮어. 유죄가 나오더라도 집행유예만 받아내면 돼."

김태훈이 걱정했다.

"하지만 그 장비가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경찰이 알면…."

장호철이 화를 벌컥 냈다.

"그건 안 들켰잖아! 내가 사장이니까 그것도 다 덮을 수 있다고!"

***

며칠이 더 지났다.

딥어스테크의 일부 주주들을 임시 주주총회를 요구했다. 대표이사 해임을 목적으로 한 임시 주총이었다.

장호철이 지분을 가진 투자 회사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진짜 억울합니다!"

목소리에는 울분이 담겨 있었다.

"내가 회사 자산으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하기도 했다.

"이건 다 나를 음해해 쫓아내려는 놈들의 음모입니다!"

- 하지만 장 사장님. 지금 분위기가….

"법원에서 판결이 난 것도 아닌데 이게 말이 됩니까? 법정에서 내 죄가 진짜라는 증거가 나오면 그때는 나도 다 받아들이겠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 일단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장호철이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에 욕을 내뱉었다.

"씨발. 전화 돌릴 때마다 이러기도 힘드네."

김태훈이 날달걀을 가져왔다.

"사장님. 이거 드시고 목을 관리하셔야…."

"이 새끼가. 너 정신 못 차려?"

"예?"

"목이 좀 쉬고 그래야 더 억울해 보이잖아!"

"아.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장호철이 날달걀은 놔두고 물을 벌컥 마셨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그래서 결과는…."

"임시 주총은 못 막아. 다들 생각은 해본다는데 반응이 좋지는 않아."

"그, 그럼 어떻게 하죠?"

"대신에 긴가민가한 마음은 있겠지. 그러니까 여기처럼 담당자가 따로 있는 경우는 뇌물을 먹여서라도 내 손을 들어주게 하고, 시간을 끌면서 증거를 없애야 해."

"곽수혁 팀장이 이미 자료를 까서…."

"그 새끼가 눈치챈 건 일부야. 나머지라도 숨기려면 내가 사장 자리를 유지해야지! 명단 가져와!"

김태훈이 새로 조사한 주주 명부를 결재판에 넣어 내밀었다.

장호철이 새 주주 명부를 확인했다. 최근에 주식을 대규모로 매집한 곳이 있었다. 아직도 계속 매집 중이었다.

"사덕리 소스? 시골에 있는 소스 회사야? 간장이나 된장 만드나? 이런 곳에서 왜 내 회사 주식을 이렇게 많이 매집하는 거야?"

"사장님. 사덕 리소스입니다. 광산이 주력인 회사입니다. 최근에 금광을 발견했답니다."

"그래? 그러면 땅을 판다는 것만 같지 전문분야는 다르네?"

"예.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주식이 싼 걸 보고 저점 매수를 했겠지. 여기 사장은 직접 만나야겠다."

***

장호철은 사덕 리소스 사장 서준석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만나는 장소는 회사가 아니라 호텔 미팅룸이었다.

그런데 미팅 자리에 나온 건 서준석이 아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서준석 사장님은 금광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어차피 딥어스테크 지분 인수는 차우진이 원해서 진행한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도 차우진이 결정한다.

장호철이 속으로 짜증을 냈다.

'나보다 작은 회사 사장이 감히 나를 만나는 자리에 이사 따위를 내보내?'

지금 아쉬운 건 장호철이다. 그는 차우진의 명함을 보며 억지로 인상을 폈다.

"차우진 이사님. 젊은 분이 이사 자리에 계시군요. 능력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전부터 근무하던 건 아니고, 최근에 스카우트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뭔가 결정할 수는 있는 겁니까?"

"서준석 사장님으로부터 협상의 전권을 받아왔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장호철이 머리를 굴렸다.

'이 젊은 놈을 구슬리려면 뭐가 필요할까? 돈? 여자? 아니면 둘 다?'

장호철이 정보를 얻기 위해 물었다.

"스카우트면, 혹시 미국에서…."

"뉴욕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뉴욕에 마약을 하는 놈이 어디 한둘인가? 이놈도 그럴까? 국내에서는 구하기 까다로울 테니 약을 이용해서 매수할까? 어차피 자기 회사도 아니잖아?'

장호철이 결론을 내렸다.

'돈, 여자, 거기에 약까지. 셋 다 쓰지 뭐. 약은 충분히 있으니까.'

차우진이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장호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이 새끼였구나.'

그는 장호철이 어떤 놈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모니터 속 사진만으로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꿈속 미래에서 봤던 것과는 모습이나 분위기가 너무 달라 같은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렇게 얼굴을 직접 마주하니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차우진이 멸망한 세계에서 본 놈이었다.

'살모사 장. 장호철이 그때 그 빌런 새끼였네.'

47. 차 이사

인류가 만든 현대 문명 시스템은 멸망 초기까지는 작동했다. 그때만 해도 TV 방송도 잘 나오고 생산시설도 어느 정도는 돌아갔다.

당시 방송의 주요 이슈는 대규모 재난에 관한 것들이었다. 차우진이 멸망에 관해 본 기사나 영상은 대부분 그 시기에 나온 것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멸망급 재난이 연달아 터지면서 사회 시스템은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법은 무시되고 치안 상황은 개판이 됐다.

현대 문명이 붕괴한 후에는 생존자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때는 10대만 되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쥐어야 했다.

멸망한 시대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선택을 했다. 그중에는 약탈자가 되는 놈들이 있었다.

어떤 약탈자 조직은 사람을 붙잡은 후에 털어먹었다. 그러는 놈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어떤 조직은 일단 죽인 후에 약탈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차우진과 박창수가 불타버린 건물 앞에서 인상을 썼다.

이곳은 차우진과 박창수 가끔 접촉하는 생존자 그룹이 거점으로 쓰는 건물이다.

지금 그 건물은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됐다.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생존자들이 외부에서 모으거나 직접 생산한 물자가 보관된 창고도 텅 비어 있었다.

박창수가 말했다.

"여기는 방어력이 상당했는데, 어떤 새끼들한테 이렇게 당했지?"

차우진이 건물 내부에 남은 흔적을 확인했다.

"기습을 당했어."

"방식은?"

"폭탄."

"폭탄이 먼저라고?"

차우진이 잔해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적이 폭탄을 건물 안에 들여보낸 후에 터트렸겠지. 그렇게 일차 타격을 하고,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쳐들어와서 다 죽였어."

"젠장. 내부에서 터지면 타격이 더 크지. 여기는 경계 수준이 상당했는데, 방심했나."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어떻게 폭탄을 내부로 들여보낸 걸까?"

차우진이 건물 내부를 계속 조사했다. 인형과 수제 장난감이 굴러다녔다.

"창수 형. 이곳엔 애들도 있었잖아. 그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나 그것까지는 볼 자신 없어서 못 찾아봤는데, 없단 말이지. 그럼 그 새끼들이 애들을 납치한 거야."

"이유가 뭐지? 너무 어려서 전투력도 없고 짐꾼을 시킬 수도 없는데?"

박창수가 말했다.

"최근에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애들을 이용해서 폭탄을 배달하는 약탈자 그룹이 있다더라."

차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두목이 누구야?"

"살모사 장."

"그럼 우리가 맡겨둔 물건도 그 새끼들이 가지고 있겠네."

박창수가 소총의 상태를 점검하며 물었다.

"난 애들 찾으러 간다. 너는?"

차우진이 일어났다.

"우리 물건 찾아야지."

"오케이. 애들은 구하고, 그 새끼들은 싹 다 쓸어버리자."

***

차우진이 장호철을 보며 그 일을 떠올렸다.

'이 독사 새끼가 지금은 사람인 척하면서 넥타이까지 매고 앉아 있네? 창수 형이 봤으면 방아쇠부터 당겼을 텐데.'

멸망한 세계의 빌런은 대부분 사람의 목숨을 도구로 써먹는 악마들이다.

장호철도 그 시대에 빌런으로 활동했다. 별명이 살모사 장이었다.

'멸망급 빌런은 아니지만, 이 새끼도 사람 많이 죽였지.'

장호철이 살모사라는 별명을 얻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시대가 오면 다시 일어날 일이기도 하다.

차우진은 빌런은 믿지 않는다. 같은 편을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빌런을 이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빌런을 속일 줄 알아야 한다.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먼저 밑밥을 깔았다.

"잘나가는 젊은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를 알고 있는데, 차 이사님 정도면 거기 잘 어울리시겠군요."

"뉴욕에도 그런 자리가 꽤 있었죠."

차우진은 외국에서 일하다 사덕리소스의 이사로 스카우트된 사람인 척했다. 그중에서도 뉴욕 출신 전문가로 위장했다.

차우진은 그 도시 외부의 특정 지역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둘러댈 도시로 뉴욕을 골랐다.

장호철이 웃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한국에서는 보통 어디서 모입니까?"

"요즘은 강남의 폐쇄형 VIP 클럽에서 곧잘 모인다더군요. 아무나 들어가진 못하지만, 거기선 못 구하는 게 없거든요."

차우진은 거기가 어디인지 모른다. 그가 일부러 관심이 있는 척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장호철은 밑밥이 잘 깔렸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약과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아들었나 본데? 관심이 많아 보여. 여기에 돈만 추가하면 삼위일체가 되겠지.'

그가 본론을 꺼냈다.

"이번 임시 주총, 차 이사님이 도와주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차 이사님이 만족할 만한 대가를 드리지요."

"내가 뭘 원하는지 아시고?"

"뭐가 필요합니까? 원하는 건 다 구해줄 수 있습니다. 그게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거라도 말이지요."

그건 마약을 구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장호철이 차우진의 반응을 관찰했다.

'폐쇄형 VIP 클럽 이야기를 밑밥으로 깔아뒀으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겠지.'

차우진이 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쓱 문지르며 씩 웃었다.

"좋군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

회의를 마치고 나온 후에, 장호철이 차에서 실실 웃었다.

"흐흐흐. 차 이사 그 새끼. 약 이야기라는 걸 눈치채니까 눈빛부터 달라지더라."

김태훈이 운전하며 물었다.

"사장님. 그놈을 확실히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면, 약 하나만으로는 좀 약하지 않을까요?"

"내가 설마 그것만 제안했겠냐? 약도 구해주고, 돈도 비자금으로 따로 찔러주고, 여자도 연예인 못지않은 애로 구해주고. 주총에서 나를 밀어주면 그거 다 해준다고 했다."

"직접 말씀하셨습니까?"

"너 등신이냐? 그 새끼를 어떻게 믿고 그런 걸 직접 말해? 알아듣게 돌려 말했지."

"저는 그걸로 될지 걱정이…."

장호철이 운전석 등받이를 발로 찼다.

"야 이 새끼야. 넌 안된다는 말밖에 몰라?"

"죄, 죄송합니다."

"차 이사는 최근에 저 회사에 고용된 놈이잖아. 오너가 아니야. 내가 뒤로 이만큼 챙겨주면 주총에서는 당연히 나한테 표를 던져야지. 너라면 안 그러겠냐?"

김태훈이 정색했다.

"저는 어떠한 제안을 받더라도 오직 사장님을 위해 충성을 바칠 겁니다."

"하긴. 넌 당연히 그래야지. 배신하면 죽을 테니까."

***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떠난 후에 차우진도 일어났다. 그는 그 호텔에 있는 다른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딥어스테크의 부사장 홍성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준석 사장님?"

차우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차우진입니다. 사장님은 지금 금광에 계셔서 제가 대신 참석했습니다."

"아. 차우진 이사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제가 협상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결정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진행될 겁니다."

홍성준은 서준석과 친목 도모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전권을 가진 사람이 나왔으면 충분하다.

홍성준이 테이블 위에 서류를 펼쳐놓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우리 회사를 살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장호철 사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장호철 사장은 다르게 이야기하던데요?"

"예?"

"바로 앞 스케줄이 장호철 사장과의 미팅이어서요."

홍성준은 당황했다.

"아니, 저랑 미팅하기로 해놓고 왜…."

"이야기는 양쪽을 다 들어봐야 하잖습니까? 우리 회사가 그 주식에 투자하는데 한두 푼을 쓴 게 아니니까요."

"그, 그렇죠."

부사장 홍성준은 회사 지분을 조금 가지고 있다.

장호철이 범죄혐의로 수사받게 되면서 투자자 몇 명이 돌아섰다. 그들은 홍성준을 대안으로 선택했다.

이사 중 몇 명도 홍성준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장호철 사장을 쫓아낼 수 없다. 홍성준이 경영권을 장악하려면 사덕리소스가 가진 주식의 의결권이 더해져야 한다.

"차 이사님이 도와주시면 장호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회사가 살고, 그래야 사덕리소스도 손해를 안 봅니다."

"장호철 사장은 그 이상의 이익을 약속하던데요."

홍성준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거 분명히 거짓말일 겁니다. 원래 신의가 없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장호철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차우진도 안다.

그렇다고 그게 홍성준이 장호철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직은 홍성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차우진이 두 팔을 탁자에 올리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흐음…."

홍성준은 차우진이 장호철과도 만났다는 말을 듣고 초조해졌다.

만약 장호철이 차우진과 손잡으면, 홍성준 쪽 세력이 장호철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

딥어스테크 홍성준 부사장이 물었다.

"차 이사님. 혹시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차우진이 씩 웃었다.

"이사 자리 하나 주시죠."

홍성준은 긴장했다.

"혹시 경영권이 목적…."

"아. 경영은 알아서 하시고요."

차우진이 그 회사 경영에 일일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 딥어스테크에서 필요한 건 마그마 탐지기다.

차우진이 조건을 말했다.

"어느 개발팀에 연구 예산을 밀어줄지 결정할 권한이 있는 이사 자리면 됩니다."

"예?"

홍성준은 당황했다. 요구 조건이 이상했다.

"개발팀을 왜…."

"딥어스테크 개발팀의 실력과 비전이 괜찮아 보여서요."

홍성준은 차우진이 경영권 일부를 요구해도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건 그것보다는 훨씬 가벼운 요구였다.

"차 이사님이 밀어주는 연구팀에 대해서는 예산 외에 인사권도 있으셔야 하겠군요."

"당연하지요. 그래야 외부 압력을 무시하고 연구할 수 있으니까요."

홍성준은 고민했다.

'이 요구를 안 들어주면 이쪽 지분이 장호철을 지지할 수도 있어.'

홍성준은 장호철을 쫓아내야 회사가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다고 경영권 싸움이 끝나는 건 아니다. 회사 상황이 복잡해서, 장호철을 쫓아낸다고 해도 홍성준 쪽이 절대적인 지분을 장악하지는 못한다.

'차 이사가 밀어주면 내가 사장 자리에 오를 확률이 높아. 그 후에도 계속 지지를 받아야 자리를 지킬 수 있어.'

그 대가도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이다.

'경영권 노리는 거라면 계산이 복잡해지는데, 차 이사가 요구하는 건 그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홍성준이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차우진은 느긋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거지?'

"혹시 그렇게 개발한 성과를 가져가시려는 건…."

"회사 돈으로 개발한 건데 그럴 리가요."

홍성준은 차우진의 의도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은 시간을 끌기로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시죠."

차우진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걸 보고 홍성준이 한마디를 추가했다.

"말씀하신 조건을 좀 조정할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 주십시오. 이게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조건을 조정하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싫으면 마시던가. 장호철 사장은 조건이 참 좋던데요."

차우진은 장호철과 손잡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기에는 장호철은 너무 나쁜 놈이다.

하지만 홍성준은 그런 사정을 모른다.

그가 급히 말했다.

"예? 아니, 싫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겠다는 거지요. 하, 하하."

***

홍성준은 그의 편에 선 이사들을 소집했다.

오늘 미팅 결과를 들은 이사들이 물었다.

"부사장님. 특정 개발팀을 밀어줄 권한을 달라니요? 무슨 조건이 그렇습니까? 그런다고 도대체 뭐가 남는다고."

"나도 조건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개발된 기술을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아닌 척하다가, 나중에는 경영권에 개입하려는 거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군요."

"기술을 몰래 빼가려고 그러나?"

"그건 우리 쪽에서 잘 관리해야겠지요."

차우진의 제안을 의심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개발 쪽에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거면, 그냥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정 이사님. 연구소가 정 이사한테는 남의 일이라고 이럴 겁니까?"

"송 이사. 지금 경찰 검찰 모두 우리 회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론도 안 좋아요."

"우리가 여기서 접어도 사장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미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맞습니다. 이제 사장을 못 쫓아내면 우리가 쫓겨납니다."

찬반을 놓고 토론이 한참 이어진 후에 홍성준 부사장이 결론을 내렸다.

"회사를 살리고 우리도 살아야지요. 차 이사가 요구한 조건. 받아들입시다."

48. 금광

사람이 여럿 모이면 비밀을 아는 사람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러면 정보는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최측근 한 명에게만 이야기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주 일부만 말하면 상대가 모를 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상대편에서는 그 정보들을 모아서 연결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때로는 그런 절차 없이 정보가 통째로 넘어갈 때도 있다.

장호철은 차우진이 부사장 홍성준을 만났다는 걸 알게 됐다. 제안 내용도 홍성준 쪽이 더 구체적이었다.

"차 이사 그 새끼가 이렇게 나와? 약이 필요 없다는 거야? 아니면 약을 구할 다른 경로가 있나?"

비서 김태훈이 의견을 냈다.

"사장님이 제안하신 걸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게 아닐까요?"

"그 새끼가 코 밑을 문지르는 거 내가 봤어! 그건 알아들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야!"

"그럼 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젠장. 회사 지분을 더 필요해. 개인투자자까지 다 확인해. 작은 지분들도 모아야겠다."

***

차우진은 사덕리소스로 주식 담보대출을 받았다. 목적은 딥어스테크 주식을 사기 위해서였다.

사덕리소스는 이미 딥어스테크 주식을 사들였다.

차우진은 아직 사지 않았다.

"장호철의 비리가 더 알려지면 주가는 더 내려갈 것 같단 말이야."

사덕리소스가 주식을 사야 딥어스테크의 사장이나 부사장과 협상할 수 있다. 거기까지는 이미 진행했다.

차우진은 이제부터 주식을 긁어모으려고 한다.

"지금은 정찰대만 보내자. 예산의 10퍼센트 정도만 써야지."

그동안 사덕리소스 주식은 많이 올랐는데 딥어스테크의 주식은 폭락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주식을 많이 살 수 있었다.

"내가 주식이 좀 있다는 걸 장호철도 알아야 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