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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조신오는 국회의원 최대준의 사무실에서 일하지만, 실제로는 보좌관인 김호태의 비서나 마찬가지다.

김호태는 술을 마시고 나서 조신오에게 운전을 맡겼다. 그가 뒷좌석에서 물었다.

"너 뭐 문제 있냐?"

"예? 아닙니다."

김호태가 발로 등받이를 차며 짜증을 냈다.

"근데 왜 운전이 이렇게 거칠어? 내가 브레이크는 살살 밟으라고 했지?"

"주의하겠습니다."

"강도 새끼는 잡았냐?"

조신오가 강도에게 당했다는 건 김호태도 알고 있었다.

"형사들이 찾고는 있다는데 아직…."

"내가 내일 형사과장한테 전화라도 넣을 테니까 운전이나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조신오가 운전하며 생각했다.

'강도만 잡으면 내 휴대폰은 형사한테 부탁해서 조사 없이 돌려받을 수 있겠지. 그럼 다 괜찮을 거야.'

***

두목이 조신오의 계좌로 코인을 이체했다.

"이, 이게 전부입니다. 코인은 저희도 일하고 받은 거라서 이것뿐입니다!"

"이건 너무 적은데?"

"시, 시간을 주시면 더 만들어오겠습니다!"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시간? 넌 나 또 보고 싶냐?"

"히익?"

"음…. 역시 코인이 더 있어야 해. 너 이 코인은 누구한테 받았냐?"

"그, 그건…."

"밖에서 들으니까 누가 뭔가 일을 시켰다며? 그놈이냐?"

두목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맞습니다."

윤재철 실장이 여기 왔다가 갔다는 건 위치추적기 덕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놈이 뭘 시켰냐?"

"그걸 말하면 저는 죽습…."

"말 안 하면 지금 죽어. 지금 말해야 도망칠 기회라도 있다."

두목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구나."

차우진이 기절한 놈을 질질 끌고 창가로 가더니 창문 너머로 밀어버렸다.

그걸 본 두목은 기겁했다.

"히이익!"

"대답 안 하면 다음은 너다."

두목이 재빨리 말했다.

"조 비서를 턴 강도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누가?"

"윤 실장입니다!"

"이름."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윤 실장이라고만 불러서…."

"코인은 어디서 났어?"

"윤 실장이 시키는 일을 하면 돈 대신 코인을 줍니다."

"납치 이야기는 뭐야?"

"주변을 조사해도 못 알아내면, 배우를 데려와서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라고…."

"배우 누구?"

"진소영입니다. 저도 처음 듣는데, 신인 배우라고…."

차우진이 인상을 살짝 썼다.

'카나리아가 또 붙잡힐 뻔했구나.'

아직은 놈들의 목표가 서준석 사장인지 이선정 박사인지 알 수 없다. 이놈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놈은 아는 게 있겠지.'

"윤 실장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

"많지는 않습…."

"많아야 할 텐데? 살고 싶으면."

두목은 자기가 아는 걸 털어놓았다. 윤재철이 그동안 시켰던 일들도 자백하고, 그 기록이 담긴 문서도 넘겼다.

차우진이 문서 파일이 들어 있는 USB 메모리를 노트북에 꽂았다.

"이런 걸 챙겨뒀네?"

"저도 보험이 필요해서…."

그 문서에는 타깃이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윤재철의 뒤에 누가 있는지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윤재철이 그동안 무슨 일을 시켰는지는 들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아낸 정보도 같이 있었다.

차우진이 두목에게 말했다.

"네가 이 자료를 나한테 넘긴 걸 윤 실장이 알면, 너흰 다 죽겠다?"

"히익! 사, 살려주십쇼!"

"살고 싶으면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도망쳐야지."

두목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확실히 도망쳐서 쥐죽은 듯이 숨어 있겠습니다!"

"그래도 나한테는 어디 있는지 보고해야지."

두목은 당황했다.

"예?"

차우진이 지시했다.

"익명으로 SNS 하나 파서 위치 보고 매일 해라. 하루라도 빠지면 이 자료는 전부 윤 실장에게 넘어갈 거다."

"아, 알겠…."

창문 밖에서 신음이 들렸다.

"끄으으…."

차우진이 창문 밖에 던져놓은 놈을 도로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두목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헉. 그 새끼 안 죽었습니까?"

"이놈을 그냥 밀었는데 난간에 걸렸더라고. 운 좋은 놈이지."

차우진이 두목에게 지시했다.

"네 부하들이 정신 차린 것 같으니까, 여기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치우고 사라져라. 오늘 밤 넘기지 마라."

***

이튿날 낮에 윤재철이 두목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새끼는 왜 보고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

짜증이 났다.

"찾아가서 조인트라도 까야 정신을 차리지."

윤재철 실장이 낡은 건물로 찾아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왜 문도 안 잠가놓…."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새끼들이?"

원래도 그 사무실에는 내부 집기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는 휴지 한 장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가 밖으로 나와 사무실 위치를 확인했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니었다.

윤재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튀었어? 감히?"

240. 윤 실장 II

윤재철 실장이 얼굴을 구기며 텅 빈 사무실을 보았다.

"이 새끼들이 감히 튀어?"

이곳에 있던 새 놈은 해킹도 할 줄 알고 정보 수집도 꽤 하고 지저분한 일도 돈만 주면 가리지 않고 했다. 그래서 써먹기 좋았다.

그런데 어제까지는 멀쩡히 있던 놈들이 오늘은 싹 다 사라졌다.

왜 튀었는지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당장 몇 가지가 생각났다.

"이 일을 그만하려고? 다른 물주가 생겨서? 위험하다 싶어서? 아는 게 너무 많아져서? 아니면…."

인상이 더 구겨졌다.

"조신오를 덮친 강도를 찾다가 빌런 킬러에 대해 뭔가 눈치채서?"

그게 최악의 경우이지만, 그중에 뭐가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배신자 새끼들. 찾기만 하면 다 산에 묻어버릴 테다."

그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불안했다.

"씨발. 설마 그 강도가 진짜로 빌런 킬러와 관계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차를 몰고 공터로 이동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꽤 넓은 공터였다.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성구의 차에는 위치추적기가 붙어 있었다. 윤재철은 그걸 찾아내서 덫으로 이용했다.

이번 일에 빌런 킬러가 관계되어 있다면, 위치추적기가 그의 차에도 있을 수 있다.

윤재철이 차의 배터리를 분리한 후에 탐지기를 사용했다.

작동 중인 도청기나 위치추적기가 있으면 탐지기에 걸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윤재철이 긴장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후우. 내가 좀 과민했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그는 배터리를 다시 연결했다.

"변 사장을 만나서 일을 맡겨야겠어."

***

차우진은 어젯밤에 세 놈을 털어서 자료를 좀 확보했다.

그 자료에는 윤재철이 청부폭력에 이용하는 놈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다만, 그놈들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문서에는 대략적인 위치만 있었다.

"이 근처 어딘가일 텐데…."

차우진이 건물 옥상에서 주변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일이 꼬였다는 걸 알았을 텐데, 오늘은 여기 안 오나?"

그는 건물 옥상에서 다른 지역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으며 궁리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음?"

아래쪽 도로를 지나가는 차가 보였다. 차가 익숙했다. 차우진이 번호판을 확인했다.

"윤 실장이 왔네?"

차우진이 샌드위치를 모두 입에 집어넣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은 아니겠지."

***

윤재철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차 외부를 빙 돌며 추적기가 붙어 있진 않은지 확인했다.

이미 여기 오기 전에 도청장치와 위치추적기는 찾아봤다. 그래도 찜찜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어. 깨끗해"

여기는 다른 전자장비가 많아서 탐지기가 오작동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차 외부만 훑어보았다. 이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건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차우진은 윤 실장의 뒤에 있는 놈이 음지와 양지 양쪽에 발을 걸쳤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여기는 음지의 느낌이 강했다.

그는 윤재철이 들어간 건물의 간판을 확인했다.

"태산개발이라…."

차우진이 자리를 옮긴 후에 태산개발이란 회사를 검색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회사가 몇 개나 나왔지만, 주소가 이곳인 건 없었다.

"북적거릴 때 방문해야겠다."

***

태산파 두목 변공태는 사채와 용역 등으로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힘을 키워 건설 사업의 각종 이권에 끼어들었다.

건물 앞에는 태산개발이라는 간판을 걸어놓았다. 하지만 사업자등록은 전혀 엉뚱한 업종으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사업자 주소도 이 건물이 아니었다.

태산파의 조직원은 스무 명쯤이다.

돈만 주면 부릴 수 있는 용역 알바도 백여 명이나 따로 있었다.

조직원과 용역의 차이는 변공태가 지시하면 칼로 사람을 찌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렸다.

그게 되는 놈은 조직원이고, 거기까지는 안 되는 놈은 필요할 때만 용역으로 써먹었다.

윤재철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변 사장. 해줄 일이 있다."

변공태가 히죽 웃었다.

"윤 실장이 시키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공짜가 아닌 건 알지?"

"내가 부리던 머슴 셋이 도망쳤다. 찾아주면 1억을 주지."

변공태가 무슨 일인지 잠시 생각한 후에 실실 웃었다.

"흐흐. 윤 실장. 돈도 좋지만 우리 사이에 더 좋은 건 따로 있잖아."

"조만간 괜찮은 규모의 토목 사업이 있을 예정이다. 거기 끼워주지."

"역시 윤 실장은 말이 잘 통한다니까."

윤재철이 단서를 달았다.

"대신에 사흘 안에 그놈들을 찾아. 사흘을 넘기면 사업 참여는 없던 일로 할 테니까."

***

차우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는 오늘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누나한테는 조금 미안해지네."

차우진은 차유리가 일하는 곳으로 야식을 만들어 배달했다. 그런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가,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

태산파 두목 변공태가 부하들을 건물 3층에 소집했다.

변공태가 조직 간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간부가 대답했다.

"용역 애들도 풀었고 현상금도 걸어놨으니까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사흘 안에 찾아서 끌고 와. 윤 실장이 이번 일만 해결하면 개발 사업에 또 끼워준다고 했으니까."

차우진이 말했다.

"사흘 안에 되겠냐?"

변공태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우진이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저 새끼 뭐야?"

"언제 들어왔어?"

차우진이 태산파 조직원들에게 물었다.

"야. 너네가 우리 직원들 찾는다며? 사흘로는 못 찾을 거다. 꼭꼭 숨었거든."

간부가 물었다.

"너 누구야!"

"너희가 찾는 세 놈을 스카우트한 사람. 걔들이 일을 잘하더라고. 아는 것도 많고."

변공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실실 웃었다.

"그러니까 너를 잡으면 그놈들도 찾을 수 있다는 거구나?"

차우진도 피식거렸다.

"나를? 잡을 수 있겠냐?"

"너 여기가 어딘지 알고 들어온 거냐?"

"간판에 태산개발이라고 되어 있더라?"

"아는 게 그것뿐이냐?"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변공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 새끼야. 지금 여기 몇 명이나 있는지 안 보여?"

이곳은 넓이가 40평쯤 되는 4층 건물이다. 이 건물 전체를 태산파가 사용했다.

지금 조직원들이 모여 있는 곳은 3층이다. 내부에는 기둥만 있고 내벽은 따로 없었다. 그래서 공간이 상당히 넓었다.

그곳에 조직원 20명이 있었다. 머릿수를 채울 때 쓰는 용역을 제외하면 조직원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변공태가 말했다.

"하필 내가 우리 애들을 다 소집했을 때 여기로 들어오다니. 너도 참 재수가 없구나."

"야. 일부러 너희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왔다는 생각은 못 하나 보다?"

"뭐?"

"여기 보일러실이 상태가 안 좋더라?"

"갑자기 보일러는 왜…."

차우진이 유일하게 열려 있던 창문을 닫으며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펑."

"펑?"

건물 지하에는 보일러와 기계, 전기 배전반 등이 모여 있는 공간이 있었다.

갑자기 보일러가 폭발했다. 그 소리가 3층까지 들렸다.

"어? 이게 뭐야!"

"보일러 터지는 소리."

보일러만 터진 게 아니다. 그 충격으로 전기 시설도 모조리 나갔다.

건물의 조명이 전부 꺼졌다.

"뭐, 뭐야!"

"불 켜!"

지금은 한밤중이다.

게다가 이 건물 3층 유리창에는 불투명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을 패고 고문해도 창문만 닫으면 외부에서는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외부의 불빛도 내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당황했다. 옆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이 그런 놈들을 덮쳤다.

전투 센스는 어둠 속에서 싸울 때도 도움이 된다. 비상구 표시등 정도는 들어왔지만, 갑자기 어두워진 상태라 그 빛으로는 사물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차우진은 그 정도 빛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야간 전투 경험이 많았다.

멸망한 세계는 전기가 귀했다. 달빛이나 별빛에 의지해 싸울 때는 상대의 윤곽만 보고도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상황도 유리했다. 태산파 조직원들은 어두운 곳에 있는 스무 명 중에서 차우진 한 명을 찾아야 한다.

차우진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적이다. 아무나 찔러도 된다.

"으아악!"

갑자기 비명이 터졌다. 벌써 한 놈이 칼을 맞았다.

"뭐, 뭐야! 그 새끼 어디 갔…. 끄아악!"

차우진은 비명이 잘 나올만한 곳을 골라 찔렀다. 그렇게 두 놈의 몸에 칼을 박았다.

태산파 조직원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씨발! 어디야!"

"불 켜!"

벽 스위치를 더듬어 찾아 연달아 누르는 놈도 있었다.

스마트폰에는 보통 손전등 기능이 들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장소에 스마트폰을 가진 건 두목인 변공태뿐이다. 다른 놈들의 스마트폰은 모두 거둬들여 3층 바깥에 치워놓았다.

조직원들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면 3층에서 오간 이야기를 몰래 녹음하는 놈이 나올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 한 조치였다.

변공태가 소리를 질렀다.

"겨우 한 새끼다! 잡아!"

"아아악!"

비명이 또 터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벌써 조직원 셋이 당했다.

변공태가 지시를 바꾸었다.

"문 열고 나가!"

문이 있는 곳에는 비상구 표시등은 있었다. 한 놈이 그 방향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그놈이 문을 손으로 잡았다.

갑자기 가슴에 칼이 푹 들어왔다.

"커억!"

네 번째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칼을 찌른 차우진은 그림자만 슬쩍 보였다가 사라졌다. 하나밖에 없던 비상구 표시등이 깨졌다.

어둠 속에서 연달아 터지는 비명은 조직원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다음 차례가 자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보호하려고 주변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놈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몸에 뭔가 닿으면 놀라서 칼부터 휘두르는 놈도 있었다.

비명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제 조직원끼리도 칼을 휘둘렀다.

"으아아!"

"이 새끼야. 나…. 아악!"

"스마트폰! 누가 스마트폰으로 불 켜!"

변공태는 뒤늦게 스마트폰이 생각났다. 그가 급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손전등 기능을 켜려면 먼저 화면을 켜야 한다. 단축키를 설정해놓지 않았다면 그래야 한다.

스마트폰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변공태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등 뒤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간 전투 때는 담뱃불도 켜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었냐?"

"헉!"

변공태가 뒤로 휙 돌아섰다. 차우진이 변공태의 스마트폰을 잡아채면서 발로 밀어 찼다. 변공태가 뒤로 쭉 밀려나다가 나자빠졌다.

"으악!"

차우진이 변공태의 스마트폰 통화 목록을 쓱쓱 보았다. 문자도 빠르게 확인했다.

그 불빛 때문에 차우진의 위치가 드러났다. 조직원들이 차우진의 현재 위치를 알게 됐다.

변공태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이 새끼야! 이제 네가 거기 있는 거 다 알…."

차우진이 스마트폰의 어플 중에 손전등 기능을 켰다. 밝은 빛이 조직원들을 비추었다.

이 넓은 공간을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 하나로 환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그래도 누가 서 있고 누가 쓰러졌는지는 구분할 정도는 됐다.

서 있는 건 변공태까지 포함해도 열 놈밖에 없었다. 나머지 열 놈은 차우진에게 당했거나, 자기들끼리 서로 찌르다가 쓰러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반이나 서 있네?"

불빛 뒤에 서 있는 차우진의 모습은 조직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위치가 앞쪽이라는 건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변공태가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넌 이제 죽었어!"

"나한테 욕을 한 놈부터 죽여야겠는데?"

변공태가 황급히 명령했다.

"여기로 모여! 날 지켜! 뭉쳐 있으면 저 새끼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조직원들이 변공태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모였다.

변공태가 앞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제 됐다. 저 새끼는 저쪽에 있으니까 다 같이 가서 다구리를…."

차우진이 스마트폰의 조명을 껐다. 스마트폰 화면도 꺼졌다. 다시 실내가 어두워졌다.

"어?"

갑자기 뒤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뒤, 뒤에…. 아악!"

241. 태산파

태산파 조직원들은 차우진이 그들의 앞쪽에 서 있는 모습을 확실히 봤다.

이 건물 3층은 기둥만 있고 내벽이 없어서 공간이 넓었다. 조직원 열 명은 뭉쳐 있고 차우진과의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불을 꺼지고 실내가 다시 어두워지자마자 그들의 뒤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놈이나 비명을 질렀다.

차우진이 있던 곳에서 그들의 뒤쪽으로 그렇게 빨리 이동하는 건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이 뒤쪽으로 뛰어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람이 살짝 불긴 했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바람까지 신경 쓰는 놈은 없었다.

공간이동 스킬은 기존 상식을 벗어난 힘이다. 차우진은 어둠 속에서 공간이동 스킬을 써서 적의 뒤로 이동한 후에 두 놈을 처리했다.

조직원들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앞에도 적이 있고, 뒤에도 적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조직원 열 명과 차우진 하나뿐이다. 적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조직원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배신자가 있다!"

이제 뭉쳐 있는 놈들은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됐다.

"빨리 떨어…."

"아악!"

흥분한 조직원들이 서로를 밀쳤다. 밀려난 놈은 공격당했다고 생각하고 칼을 휘둘렀다.

"억!"

칼을 어설프게 맞은 놈이 피를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이 앞이다!"

세상에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사람이 많다. 그 말만 믿고 좌우에서 칼이 들어왔다. 칼을 휘둘렀던 놈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차우진도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진짜다! 이 앞이다! 내가 봤다!"

즉시 그쪽으로도 칼이 들어갔다.

"아, 아니야. 난 아니…. 끄아악!"

어둠 속에서 조직원들이 서로를 칼로 찔렀다.

태산파의 모든 조직원은 최소한 잭나이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십여 개의 칼이 되는대로 공간을 베었다.

태산파 조직원들은 한 곳에 뭉쳐 있다. 그들이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면 가까이 있다가 칼에 맞는 놈이 생긴다.

"아아악!"

모두 그렇게 미련하게 굴지는 않았다. 간부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거리를 벌려! 주변만 견제…. 커억!"

간부의 옆구리에 칼이 들어왔다. 차우진이 간부를 찌른 후에 옆으로 빠지며 소리를 질렀다.

"형님이 당했다! 그놈이 저쪽으로 갔다!"

"씨바알!"

"너냐!"

"아아악!"

차우진은 조직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칼에 찔리는 놈이 계속 늘어났다. 그런데 비명은 점점 줄어들었다.

너무 많이 당해서 비명을 지를 놈이 부족해졌다.

그러다 그 비명조차 사라졌다. 비명 대신에 들리는 건 칼에 찔린 놈들이 내는 신음뿐이었다.

차우진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후에 스마트폰을 켰다.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도 사용했다.

어둡던 실내에 불빛이 생겼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그 정도 빛으로도 주변을 충분히 볼 수 있다.

변공태가 칼을 쥔 채로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그의 칼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변공태의 얼굴이 허예졌다.

"어, 어떻게 전부 다…."

스무 명의 조직원 중에서 서 있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조직원이 칼에 찔린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차우진이 스마트폰의 불빛을 변공태의 얼굴로 향하며 말했다.

"이제 너 혼자네?"

"히이익!"

차우진이 변공태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변공태가 덜덜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칼날도 바들바들 떨렸다.

"너, 너 누구야!"

"너희가 찾는 세 놈. 우리가 데려갔다고 했잖아. 걔들은 이제 우리 직원이다. 너희는 손 떼라."

변공태가 다급히 외쳤다.

"떼, 떼겠다! 이런 일인 줄 몰랐다!"

차우진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일, 누가 시켰냐?"

"어? 어? 그건…."

"왜? 네가 다 책임지게? 가능하겠냐?"

변공태의 눈알이 바닥에 쓰러진 놈들을 향했다. 조직이 단 한 명에게 전멸했다. 그는 공포에 질렸다.

"히익! 아, 아니다! 윤 실장이 시켰다! 세 놈을 사흘 안에 잡아주면 1억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 새끼가 말이 짧네? 아직 살아있는 놈이 많으니까 너도 살 것 같아서 그러냐?"

"히익! 죄송합니다!"

"무릎."

"예?"

"꿇으라고."

변공태는 부하가 반만 남아 있어도 무릎을 꿇지 않으려 했다. 서너 놈만 남아 있어도 체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하들은 전멸했다.

돈으로 부리는 용역이 백여 명이나 있지만, 그들을 지금 불러올 방법은 없다.

'여기서 버티면 죽는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변공태는 꽤 큰 조직을 만들어서 돈도 흥청망청 쓰고 술과 여자, 마약까지 마음대로 즐겼다. 그래서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나 체면은 목숨은 물론이고 쌓아놓은 재산보다도 소중하진 않았다.

'조직원들을 살리기 위해서 꿇었다고 둘러대면 돼!'

나중에 둘러댈 변명까지 생각한 변공태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사, 살려주십쇼."

차우진이 변공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윤 실장이 누구야?"

"그냥 다들 윤 실장이라고 부릅니다."

"뒤에 누가 있지?"

"그건 모릅…."

차우진이 변공태의 어깨에 칼을 꽂았다.

"으아악!"

"내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야."

변공태가 다급히 외쳤다.

"다들 회장이라고 부릅니다! 누군지 본 적은 없습니다! 회장이 힘을 써주면 토목 개발이나 건설 사업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름에 개발이 붙었냐?"

"그렇습니다!"

"어느 회사의 건설 사업이냐?"

"그때그때 다릅니다. 적당한 자리 만들어서 끼워주곤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짐작이 갔다.

'정치권과 건설업계 양쪽에 다 줄이 있겠지.'

이미 윤재철 실장이 국회의원 최대준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걸 봤다. 회장과 연결된 정치인이 최대준 한 명이라는 보장은 없다.

"거물이겠네."

"그, 그렇습니다. 반면에 저희는 떡고물이나 받아먹고 사는 놈들입니다."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어쩔 수 없지. 아는 게 없다니까."

"가, 감사합…."

차우진이 변공태의 가슴에 칼을 푹 꽂았다.

"컥!"

"아는 게 없으면 죽어야지. 대답만 잘했어도 살려주려고 했는데…."

"커컥."

변공태가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뒤로 자빠졌다.

차우진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칼에 맞아 쓰러졌지만 기절하지 않은 놈이 몇 보였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죽은척했다.

차우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진 후에 그나마 상태가 나은 놈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씨, 씨발. 다 죽는 줄 알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끄으으."

변공태가 가슴에 칼을 꼽은 채로 말했다.

"구, 구급차. 빨리…."

"헉! 형님! 안 죽으셨습니까?"

"빨리. 이 새끼야. 빨리 119…."

***

이튿날 차우진이 박창수를 만났다.

"창수 형. 보안점검 결과는 어때?"

차우진이 박창수에게 이선정 박사가 근무하는 화선 바이오의 보안점검을 맡겼다.

"그 회사는 빈틈이 많더라. 그거 싹 다 지적해줬다."

"이선정 박사의 집은?"

"거긴 괜찮더라. 보안이 우수한 아파트로 이사했고, 직접 설치한 CCTV도 충분해. 버튼만 누르면 경찰에 신고하는 시스템도 있어."

"예전에 연쇄살인마에게 당할 뻔한 것 때문에 신경을 썼을 거야."

"집과 회사를 오갈 때는 내가 당분간 따라다니기로 했으니까 괜찮을 거다."

"형이 바쁘네."

박창수가 피식 웃었다.

"야. SL 제약에서 돈 많이 받고 하는 건데 바빠야지. 어차피 유리 씨도 못 보는데."

"누나는 왜?"

박창수가 푸념했다.

"바쁘단다. 나 차인 건가?"

"진짜 바쁠걸?"

***

차우진이 차유리를 찾아갔다.

"집에는 안 오냐?"

차유리는 경찰서 근무와 파견 근무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녀가 경찰서 휴게실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와. 나 진짜 이제 집에 가나 했는데."

"그런데?"

"태산개발 때문에."

차우진을 따라온 박창수가 옆에서 물었다.

"개발 회사입니까?"

"개발은 무슨. 건설 조폭 놈들이 간판만 그렇게 단 거죠."

박창수가 얼른 제안했다.

"그놈들 뒤를 제가 좀 캐볼까요? 제가 그런 거 잘하는데."

"캐서 뭐하게요? 전멸했는데."

"예?"

"조직원이 스물인데, 신고받고 가봤더니 서 있는 놈이 하나도 없었대요. 두목은 살아는 있는데 칼이 심장 바로 옆에 박혀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어…. 조직 간에 전쟁입니까?"

"외부 습격도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오인해서 서로 찌른 것도 많아요. 칼에 같은 조직원의 피가 묻은 놈이 많으니까."

박창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관할이 여기입니까?"

"아니요."

"그런데 차유리 씨가 왜 바쁩니까?"

"빌런 킬러 짓일 수도 있어서요. 혼자서 이렇게 조직 하나를 털어먹는 건 그놈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조직원들끼리 서로 싸우고 배신자도 있다니까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위에서 정말 아닌지 확인하라네요."

박창수가 아는 체를 했다.

"외국에도 그렇게 혼자 다 털어먹는 고수가 있습니다. 유럽에는 데스 엔젤이라고 엄청 대단한 놈이 있다더라고요."

차유리가 물었다.

"그놈도 칼을 잘 써요?"

"아뇨. 총을 잘 쏩니다."

"이놈은 칼을 더 잘 써요."

차유리가 말하다가 손을 흔들었다.

"아.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는 수사 정보니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저 원래 입 무겁습니다."

"우진이 너도."

"나한테는 누가 그런 거 묻지도 않아."

***

윤재철 실장은 일을 맡겨놓은 게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려고 태산개발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건물 근처에서 화들짝 놀랐다.

"어?"

태산개발이 통째로 쓰는 4층짜리 건물 앞에 경찰차들이 보였다.

"뭐야? 왜 경찰이…."

그는 차를 세우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갔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후에 변공태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말았다.

대신에 기사를 검색했다.

"이게 뭐야!"

폭력조직 사이의 싸움으로 조폭 수십 명이 다쳤다는 기사가 있었다. 오늘 오전에 나온 기사였다.

"씨발. 하필 이 시기에?"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는 연줄이 닿는 경찰을 떠올렸다. 이 지역에는 없지만, 다른 지역에 돈을 좋아하는 형사가 있다.

***

차우진이 말했다.

"그래서 누나는 당분간 집에 못 들어오나?"

차유리가 다짐했다.

"갈 거야. 도망칠 거야."

"꼭 탈출해라."

박창수가 물었다.

"유리 씨. 그럼 이번 주말에 체육관은…."

"체육관은 가야죠. 스트레스 풀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푼다는 말에 박창수가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어…. 그럼 이번 주말은 연기하는 게…."

"왜요?"

"방금 유리 씨 눈에 살기가 번뜩였거든요. 하, 하하."

차우진이 물었다.

"태산파 놈들은 병원에 갔어?"

"병원에 보내야지. 놔두면 다 죽게 생겼는데."

"두목도?"

"두목은 꼴딱 넘어가기 직전이라서 제일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보냈다더라."

***

윤재철은 경찰 쪽 인맥을 동원해 상황을 파악했다.

"태산파가 다른 조직이 보낸 킬러에게 당했다고? 습격한 놈은 한 놈이고? 그게 가능합니까?"

윤재철의 돈을 먹은 형사가 설명했다.

"이게 세팅을 잘했더라고요. 조직원이 다 모여 있을 때 불을 딱 끄고, 거기서 몇 놈 찔러서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멍청한 놈들이 겁에 질려서 자기들끼리 서로 찔렀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직원 중에 배신자가 하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도 못 믿게 된 거죠."

윤재철이 인상을 썼다.

'빌런 킬러와는 방식이 다르긴 한데….'

의심은 가는데 확신이 없었다.

"왜 그랬답니까?"

"태산파에서 찾던 놈들이 셋 정도 있는데, 그놈들을 데려간 쪽에서 거꾸로 태산파를 쳤답니다. 뭐, 그 말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윤재철은 바짝 긴장했다. 그가 태산파에 그 셋을 잡아오라고 청부했다.

'내가 시킨 일 때문이라고?'

이 정보를 가져온 사람은 형사다.

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242. 윤 실장 III

형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윤재철을 보았다.

"태산파가 망해서 뭐 곤란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윤재철 실장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조폭 간의 칼질 이야기를 들으니까 은근히 무서워서 그럽니다. 제가 일반인이잖습니까?"

"아. 그러실 수도 있겠군요. 하하하."

형사는 윤재철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따지지도 않았다.

'태산개발을 박살 낸 범인이라면 나한테 돈까지 주면서 이런 걸 물어볼 필요는 없지. 본인이 더 잘 알 테니까.'

그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태산개발과 뭔가 일이 있나 본데,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가 입맛을 다셨다.

'좀 더 뜯어낼 수 있겠는데?'

윤재철도 눈앞의 형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수사 정보를 팔아먹으러 온 놈이 나를 의심해서 어쩔 건데?'

윤재철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변공태가 있는 곳은 어느 병원입니까?"

형사가 봉투를 쓱 챙겼다.

"거기 두목이랑 조직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 목록을 드리죠."

***

차우진은 태산개발 두목 변공태가 입원한 병원에 들렀다.

병원이 규모가 꽤 커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환자도 있고 보호자도 있고 문병 온 사람도 있었다. 직원들도 돌아다녔다.

그래서 차우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두목을 일부러 살려놓기는 했는데, 윤 실장은 문병을 오려나."

그는 병원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환자나 보호자가 지나다녔다.

차우진은 커피도 한 잔 사다가 마셨다. 하늘에 구름이 조금 떠 있었다.

"날씨 참 좋다."

오늘은 하늘이 참 맑았다.

멸망 초기의 하늘은 먼지 구름으로 뒤덮일 때가 많았다. 그 하늘이 맑아진 건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때 배고팠던 게 생각나네. 오늘 저녁은 삼겹살 먹어야지."

차우진이 하늘을 보던 시선을 앞쪽으로 옮겼다.

윤재철 실장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안경과 가발을 이용해 변장한 상태였다.

"문병을 오긴 왔구나."

차우진이 여기 온 건 윤재철과 변공태의 대화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윤재철이 타고 온 차가 목적이다.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치추적기를 붙였다 뗐다 하는 것도 일이구나."

***

변공태와 조직원들은 이번 사건만 놓고 보면 피해자다.

그런데 사건 당시에 그 건물에 있던 조직원들은 모두 칼을 가지고 있었다. 피해자 상당수는 그 칼로 서로를 찔렀다.

칼을 살살 맞아서 상태가 그나마 나은 조직원이 형사에게 둘러댔다.

"그 칼은 호신용 칼이라니까 그러시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형사님. 난 선량한 회사원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협박을 많이 당해요. 그래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고 한 거란 말입니다."

변공태는 조직폭력단의 두목이라는 건 입증된 게 아니다. 조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침입자 때문에 어둠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저항하다가 다친 거란 말입니다."

태산파의 건물에서는 칼이 많이 나왔다. 그렇지만 불법무기 수준으로 칼날이 길지는 않았다.

총도 나오지 않았다.

형사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 나중에 다른 단서가 나온다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체포할 명분이 부족했다.

윤재철은 변장까지 하고 병원에 들어갔다.

변공태의 병실 앞을 덩치 좋은 남자 둘이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태산개발에서 필요할 때마다 돈을 주고 쓰는 용역들이다.

윤재철 실장이 문앞에서 말했다.

"변 사장 문병 왔다."

"누구쇼?"

"윤 실장이라고 하면 알 거다."

한 놈이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들어가시죠."

윤재철이 병실에 쓱 들어갔다. 1인실이라 다른 사람은 없었다.

윤재철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변 사장. 꼴이 말이 아니네?"

변공태는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다.

"윤 실장. 나 심장 근처를 찔렸다. 1센티만 옆에 맞았어도 죽었을 거라더라. 그러니까 놀라게 하면 안 돼."

"누구한테 당한 거야?"

변공태가 욕을 했다.

"씨발. 내가 묻고 싶은 거다. 그 새끼 뭐야? 윤 실장이 찾아내서 잡아오라던 세 놈을 스카우트했다던데."

"스카우트?"

"이제 자기네 직원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더라. 씨발. 그걸 꼭 칼침을 놓으면서 통보해야 해? 말로 해도 되잖아."

윤재철이 물었다.

"어떻게 생긴 놈이지?"

"얼굴은 못 봤다. 복면을 썼더라고."

"혹시…."

"혹시 뭐?"

윤재철의 목소리가 조금 긴장한 소리로 바뀌었다.

"저승사자나…."

"씨발. 나 안 죽었어."

"빌런 킬러라는 말은 안 하던가?"

"허억!"

변공태는 기겁했다.

"씨, 씨발. 그 새끼가 빌런 킬러였어?"

"나도 모른다. 혼자 쳐들어왔다길래 물어본 것뿐이다."

"씨발. 아니어야지. 빌런 킬러는 두목은 꼭 죽인다던데! 애들 더 불러야겠어!"

"그냥 물어본 거라니까."

"진짜 아니야?"

"흥분하지 말고 치료나 잘 받아."

***

윤재철이 병원을 나왔다.

"젠장. 확실한 건 하나도 없는 데도 불안해 미치겠네. 왜 내가 쓰던 놈들이 하나씩 날아가는 거야?"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윤재철은 그의 보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빌런 킬러가 어떻게 살아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의 보스가 했던 말은 지금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맞아. 내가 쓰던 놈들이 날아가고 있다는 게 중요해."

그가 목을 쓰다듬었다. 방금 변공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빌런 킬러는 두목은 꼭 죽인다고?"

그러면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그가 대포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조금 기다렸다.

상대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 무슨 일이지?

"회장님. 만나서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 당분간 전화로 보고하라고 했을 텐데?

"태산개발이 날아갔습니다."

- 음….

잠시 후에 상대가 말했다.

- 일곱 시. 오청각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윤재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씨발. 욕 많이 먹겠네."

그가 손으로 목을 다시 만졌다.

"설마 내 목을 날리진 않겠지."

어쨌든 회장과 만날 장소는 정해졌다.

"오청각이라…. 집으로는 앞으로도 오지 말라는 거군. 젠장."

***

오청각은 고급 요정이다. 한옥으로 지은 곳은 아니다. 현대식 건물에 곳곳에 CCTV가 있었다.

차우진은 오청각 밖에서 그곳을 관찰했다. 거리는 좀 멀지만 누가 그곳에 드나드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윤재철이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차우진이 인사를 받는 사람의 얼굴을 멀리서 촬영한 후에 확대했다.

"이제 이놈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하는데…."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찾는 건 어렵다.

"수연이한테 부탁하면 해주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음? 가만."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멸망한 세계에서 봤는지, 이쪽 세계에서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봤다는 것만 기억났다.

"TV에서였나? 맞는 것 같…. 아! 생각났다."

차우진이 대포폰으로 인터넷을 조회했다.

사진이 하나 떴다.

TSJ 그룹 정태식 회장. 너였냐."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찢어진 잡지를 보며 말했다.

"멸망 10년 전에 사망한 이선정 박사의 연구를 누가 찾아냈는지 알아?"

"나도 멸망 초기에 TV에서 여러 번 봤어. TSJ 그룹이 찾아냈다며. 거기 회장이 TV에 나와서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해 그 연구 자료를 공개했다고 자랑 엄청 하더라."

박창수가 TSJ 그룹 정태식 사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류를 위해서겠냐? 오메가 바이러스에 걸리면 자기도 죽으니까 허겁지겁 찾아서 공개한 거지."

"창수 형. 평가가 좀 짜다?"

"TSJ 그룹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좀 있어서 그래. 저거 양아치들이야."

"양아치?"

"사채와 조폭 쪽으로 돈을 벌고, 남의 기업을 잡아먹어서 회사 덩치를 키우고, 정치권에 줄도 대고. 개쌍양아치지."

차우진이 찢어진 잡지를 보았다. 거기에 정태식 회장의 사진이 있었다.

"저 회장은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오메가 바이러스는 피했겠지. 치료제가 개발되긴 했으니까. 멸망을 막기엔 너무 늦은 시기에 나왔지만."

"멸망급 재난 하나는 피했어도 다른 재난으로 죽었을 수 있잖아."

"재벌이니까 어느 정도 대비는 했겠지. 그래도 운 나쁘면 죽었겠지만."

***

차우진이 정태식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제 알겠네. 정태식은 이선정 박사의 연구를 멸망 초기에 찾은 게 아니야."

멸망한 세계에는 그렇게 알려졌다. 본인이 그렇게 주장했고, 다른 판단을 할 단서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정태식 회장이 윤재철 실장의 인사를 받고 있다. 윗사람을 대하는듯한 깍듯한 인사였다.

"이선정 박사의 연구 결과를 10년 동안 가지고 있다가, 오메가 바이러스가 터지니까 공개한 거야."

멸망 초기보다 10년 전에 이선정이 했던 연구는 치료제의 핵심 열쇠였다. 그걸 TSJ 그룹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깨달았다.

"이선정 박사가 죽은 후에 연구를 가져가서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안 돼서 접었겠지. 그때 쌓은 데이터로 알게 된 거겠지."

멸망한 세계에서 이선정을 죽인 건 연쇄살인마 마상국이다. 김준배는 실패했다.

"정태식이 김준배를 보냈다가 일이 틀어졌겠지. 그렇지만 마상국이 성공하면 결과는 같아져. 이선정 박사의 사망."

이선정이 사망하면, 그녀가 연구하던 자료를 빼돌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선정은 지금은 살아있다.

"이미 연구 자료를 빼돌려서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네. 창수 형을 만나야겠다."

***

차우진이 박창수를 만났다. 혼자 만난 게 아니라 이선정과 함께였다.

"이선정 박사님. 혹시 TSJ 그룹과 일한 적 있습니까?"

이선정이 눈을 깜빡이며 도로 물었다.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좀 들어서요. 물론 TSJ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외부에서 실험이나 검사 같은 걸 의뢰받아서 대신 진행하는 거잖아요. TSJ 쪽 일도 몇 번 받았어요."

박창수가 물었다.

"이 박사님은 신약을 개발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약은 박창수의 동생 박여름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건 제 개인 연구예요. 회사의 본업은 아니죠. 회사가 돈을 벌려면 외부의 일을 받아서 해야죠."

차우진이 물었다.

"이선정 박사님의 개인 연구에 관해서 TSJ 쪽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개인 연구를 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에요. 직원들은 다 아는 거니까요. TSJ 쪽 사람이 직원에게 들었을 수 있겠죠."

"그럼 TSJ 그룹의 사람이 화선바이오 연구실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까?"

"업무 협의하러 왔었죠? 근데 왜 그러세요?"

"그 회사가 남의 기술을 잘 훔친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이선정이 손뼉을 쳤다.

"아. 저도 그런 소문은 들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도 욕 많이 해요."

"역시 양아치네."

박창수가 물었다.

"뭐야? 왜 난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원래 형이 나한테…."

"응?"

"아니야."

TSJ 그룹이 양아치라는 건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가 해준 이야기다.

"창수 형. 화선바이오의 보안점검 다시 해야겠다."

"외부 침입 문제라면, 저번에 개선한 것보다 더 보강하면 진짜 보안시설 수준이 되는데? 회사에서 그런 지출을 하려고 할까?"

"음…. 그럼 데이터 관리 쪽을 보강해야겠어."

"어? 그건 내 전문분야는 아니다."

"괜찮아. 그거 잘하는 친구가 있으니까."

***

차우진이 민수연을 만나 물었다.

"알바 할래?"

"야. 나 경찰이야."

"그럼 돈 안 받으면 되겠네."

"뭔데?"

"내가 아는 회사에 데이터 유출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대책 세워주는 거."

민수연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회사는 커?"

"아니. 아주 작은 바이오 연구소야. 실험이나 분석 같은 걸 대신해주는 곳이지."

민수연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돈은 못 받으니까, 밥 열 번."

"밥을 사라고?"

"당연히 네가 만들어줘야지!"

"콜."

민수연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

"나 지금 엄마한테 전화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만든 김치찌개 가져간다고."

"그 열 번은 메뉴도 네가 정하는 거였냐?"

"싫으면 없던 일로?"

"돼지고기가 좀 들어가야겠지?"

"넉넉히."

"그래. 넉넉히."

243. 덫 II

TSJ 그룹 회장 정태식이 윤재철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재철은 정태식이 먼저 전화를 거는 걸 보고 실실 웃었다.

"결론이 나왔구나."

그는 지난번에 고급 요정인 오청각에서 정태식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때 빌런 킬러가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하고 그룹 차원에서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도 잘만 이용하면 기회가 되지."

그는 지원을 받으면 그걸 이용해 빌런 킬러도 잡고 자신의 힘도 키울 계획이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정태식이 말했다.

- 윤 실장은 당분간 잠수 타야겠어.

윤재철은 당황했다.

"예? 회장님. 제가 말입니까? 제가 하는 일이 있는데 갑자기…."

- 괜찮아. 빌런 킬러는 그룹 차원에서 대응해야지. 윤 실장의 일은 다른 직원들에게 나눠주면 돼.

"회, 회장님. 그 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접니다!"

- 지금 그게 중요한가?

"예?"

정태식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 네 담당이던 태산개발이 날아갔다. 빌런 킬러가 너까지 인지했을 수 있다. 네가 잡히면 나도 곤란해져. 그러니 당분간 숨어 있으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 경기도에 별장을 하나 준비해뒀다. 그곳에서 연락이 있을 때까지 대기해.

통화가 끝났다. 잠시 후에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별장의 주소와 현관 도어락의 비밀번호였다.

윤재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게 아닌데…."

빌런 킬러를 이용해 실권을 쥘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리에서 밀려나게 생겼다.

그가 별장의 주소를 확인했다. 경기도에서도 외진 곳이었다.

"젠장. 느낌이 쎄한데."

***

차우진은 정태식 회장이 윤재철의 뒤에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정태식이 이선정 박사를 죽여서 얻으려는 이익이 뭐지? 김준배를 보냈을 때만 해도 그 연구는 완성된 게 아닌데."

그게 의문이었다.

"정태식까지 찾았으니까, 이제 윤 실장을 만나야겠네."

윤재철은 차우진을 죽이려고 덫을 놓고 불을 지른 놈이다. 그때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성구가 미끼로 사용됐다가 죽었다.

차우진이 위치추적기의 정보를 확인했다. 윤재철의 차에 붙여둔 추적기가 경기도 외진 곳에 가 있었다.

"외진 곳이라…. 장소가 딱 좋네."

***

윤재철이 경기도 외진 곳에 있는 별장으로 이동했다. 정태식이 보내준 도어락 번호를 입력하자 현관이 열렸다.

그가 집 내부를 확인했다.

먹을 거라곤 술 몇 병과 라면, 햇반 정도만 있었다.

윤재철이 욕을 했다.

"씨발. 여기 준비한 새끼는 누구야? 난 이런 거 준비할 때는 먹을 거랑 마실 거는 풀세트로 채워놓는데."

그래서 송성구가 별장에서 머물 때는 먹고 마실 건 충분했다.

그가 소주의 뚜껑을 땄다. TV는 공중파 수신만 가능했다.

"볼 것도 없네. 이러니까 송성구가 인터넷이 안 된다고 불평…."

윤재철은 멈칫했다.

"어?"

송성구가 숨었던 곳도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집이었다. 그 집 자체가 빌런 킬러를 잡기 위해 준비한 덫이고 송성구는 미끼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상황이 그 당시 송성구와 너무 비슷했다.

"설마 나도 미끼로 쓴 건 아니겠지?"

불안해졌다.

윤재철이 소주를 내려놓고 집부터 수색했다.

그때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을 쓰려면 일단 기름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탈출이 가능한 곳부터 불이 붙도록 세팅도 해놓아야 한다.

이 별장은 거실 창문은 물론이고 다른 창문도 사람이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창문에 창살이 있지도 않았다.

그가 실내는 물론이고 조사하고 보일러실도 확인했다. 기름이 뿌려진 곳은 없었다.

"휴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그의 차에 위치추적기가 없다는 건 여기 오는 도중에 이미 확인했다.

"여긴 안전해. 덫이 아니야."

그래도 마음이 좀 불안했다.

그는 거실과 방 창문을 모두 활짝 열었다.

창문 근처에 부비트랩이 없다는 건 확실히 확인했다. 이제 이 집에 불이 붙으면 어느 쪽으로든 뛰기만 하면 탈출할 수 있다.

"연기 냄새만 나도 뛰어야지. 그러면 살 수 있어."

그가 탈출 준비를 마치고 소주를 따를 잔을 찾아보았다. 소주잔은 없고 컵만 있었다.

"젠장. 내 은신처를 이따위로 준비한 새끼, 내가 나중에 찾으면 가만 안 둔다."

그가 컵에 소주를 따른 후에 마셨다.

"크으. 쓰다."

바람이 불었다.

"산속이라 그런지 춥네. 여긴 안전한 거 말고는 장점이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기름이 없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다."

윤재철이 기겁하며 뒤로 휙 돌아섰다.

"헉!"

차우진이 서 있었다.

"누, 누구냐!"

"누군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설마…."

"저번에 선물은 잘 받았다. 불이 뜨겁더라."

"빌런 킬러!"

"너희가 나를 그렇게 부르더구나."

"역시 살아있었나!"

"하마터면 불타 죽을 뻔했다. 갑자기 그렇게 불길이 치솟을 줄은 몰랐으니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우진은 그때 그 집에서 불길이 치솟자마자 공간이동 스킬로 탈출했다. 그때 그의 몸에는 불똥 하나 튀지 않았다.

윤재철은 당황했다. 그는 차우진이 살아있더라도 중화상을 입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차우진이 너무 멀쩡해 보였다.

"젠장. 역시 빌런 킬러…. 여기는 어떻게 알았지?"

"위치추적기."

"뭐? 그럴 리가 없다. 내 차에는 위치추적기가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

"네 차는 깨끗하단 말이지? 위치추적기의 신호가 차를 주차해둔 곳 근처를 가리키고 있던데…. 누가 추적기만 따로 가져다 놨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차우진은 여기도 함정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몰랐던 척하며 일부러 혀를 찼다.

"쯧. 또 함정인가?"

이렇게 해야 적이 그가 함정에 빠졌다고 착각한다.

치우진이 벽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넌 미끼로 사용된 거겠지."

"아니야! 이 집은 내가 다 확인했…."

"엎드려. 살고 싶으면."

윤재철은 이용당했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우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윤재철이 즉시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그 직후에 집안으로 총알이 날아왔다. 소음기까지 사용한 총알이 소파에 푹 박혔다.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고성능 소음기에 아음속탄…. 익숙한 조합이네?"

스페인에서 오필리아를 잡을 때 그 숲에 있던 놈들도 같은 조합을 사용했다. 이 조합을 쓰면 총탄의 위력이 약해지는 대신에 총소리가 아주 작아진다.

윤재철이 바닥을 포복으로 기었다. 갑자기 집안으로 총탄이 여러 발 쏟아졌다. 반쯤 남은 소주병이 박살 났다.

"으아아!"

아음속탄은 위력이 약하지만 그래도 총탄인 건 마찬가지라 맞으면 죽는다.

윤재철은 화재를 대비해 거실 창문과 방의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았다. 그런데도 창문의 유리들이 총탄에 맞아 와장창 깨졌다.

윤재철이 바닥을 포복으로 기어 벽에 붙었다. 총알이 무서워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아음속탄은 위력이 약해 이 집의 벽을 뚫을 수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도 이제 네가 미끼로 쓰다가 죽인 송성구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구나."

"너도 송성구를 죽이려고 했잖아!"

"죽인 건 너다만?"

"날 미끼로 쓰는 건 말이 안 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이용가치가 다 된 거겠지."

윤재철이 소리를 질렀다.

"난 유능하단 말이다!"

"아니면 이용가치보다 리스크가 더 커졌든지."

"씨바알! 정 회장 개새끼야!"

총격은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뚝 중단됐다.

"사, 사격이 멈췄어? 회장님!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회장이 여기까지 왔을 리 있나. 이런 건 하수인을 시켜야지."

"하, 하수인? 누가…."

"너 조수 같은 거 없냐?"

윤재철은 멈칫했다.

송성구를 미끼로 썼다가 죽일 때 차에서 같이 대기하던 직원이 있다. 그가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 직원은 그 사건 이후에는 다른 일에 투입됐다고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윤재철 혼자 움직여야 했다.

"설마 박 대리가…."

"잘 가르쳤나 봐?"

함정을 세팅하고 매복하는 걸 데리고 다니면서 보여주긴 했다. 이건 그때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집을 덫으로 쓴다는 건 같았다.

정태식 회장은 이 문제를 그룹 차원에서 대응한다고 했다. 윤 실장과 박 대리 모두 정태식의 부하다.

"개새끼! 죽여버린다!"

"지금은 네가 죽게 생겼다만?"

윤재철이 핏발이 선 눈으로 말했다.

"빌런 킬러. 당신이라면 이 상황 해결할 수 있지?"

"나 하나 빠져나가는 거야 가능하다만."

"호, 혼자?"

"정보를 내놓던가."

"뭐, 뭘…."

"진짜 타깃이 누구냐?"

"뭐?"

"너희가 정의의 사도도 아닌데, 굳이 나를 건드릴 이유가 없잖아. 누굴 노리는 데 내가 있으면 방해가 되는 거냐?"

윤재철이 눈알을 굴렸다.

"그건…."

"말하기 싫으면 그냥 죽던가."

윤재철이 급히 대답했다.

"시, 신약 사업에 네가 방해된다고 들었다. 구체적인 건 나도 모르지만, 그렇게 알고 있다."

대답으로 충분했다. 사덕리소스는 광산 회사다. 금광과 신약 사업은 관계가 없다.

'역시 이선정 박사가 타깃이구나.'

그쪽이 제일 유력하다는 판단은 이미 했다. 지금 윤재철이 그걸 확인해주었다.

이제 타깃도 찾았고, 일을 꾸민 놈도 찾았다. 윤재철은 하수인이고 몸통은 정태식이다.

'10년 후에 하이에나들의 두목이 되는 놈은….'

알 수 없다. 정태식 회장이 제일 유력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다른 놈일 수도 있다.

차우진이 윤재철 실장을 보았다.

'이놈일 수도 있지. 정태식이 멸망 초기에 죽으면, 무력 세력을 자기 손에 넣고 두목이 될 수 있으니까.'

10년이면 실세가 바뀔 수도 있다. 대리가 실장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놈을 따라다니던 박 대리일 수도 있고.'

차우진은 적이 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집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윤 실장님. 살아있습니까?"

윤재철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박 대리!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저도 회장님 명령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겁니다. 이해하시죠?"

"야 이 새끼야!"

"이해 못 하시나 보네."

거실 창문을 통해 두 놈이 나타났다. 둘 다 내부를 권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 뒤에서 다른 놈 둘이 백업을 서고 있었다.

현관문도 벌컥 열렸다. 그곳으로도 두 놈이 들어왔다.

여섯 놈이 실내에 들어왔다. 그중 다섯이 차우진을 조준했다. 하나는 윤재철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마지막으로 박양수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윤 실장님. 일어나시죠."

윤재철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내가 양수 너를 믿…."

"가실 때 가시더라도 일어서 계셔야지, 바닥에서 그게 뭡니까? 버러지인가?"

"뭐? 이 새끼가!"

윤재철은 화는 냈지만 덤벼들지는 못했다. 총구 하나가 윤재철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윤재철은 차우진의 반대쪽에 있다. 차우진을 향한 총구는 다섯 개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외국 용병인가? 어디서 왔지? 유럽?"

박양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유럽인 건 어떻게 알았지?"

"인종적 특징과 문화권 고유의 몸짓을 보고 판단했지."

"그런 판단이 가능해야 전설을 쓴다는 건가? 역시 빌런 킬러는 대단하군."

차우진은 용병들의 특징을 보고 안 것이 아니다. 스페인 그러나다 인근 숲에서 싸운 놈들과 용병들의 무기 구성이 비슷했기 때문에 먼저 물어본 것뿐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다 연결되어 있구나."

"무슨 소리지?"

"지옥에 가면 물어봐라. 먼저 간 놈들이 있을 테니까."

박양수가 웃었다.

"하하하. 빌런 킬러. 넌 아직도 네가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하나? 세상 모든 게 불공평해도 딱 하나는 공평하지. 사람은 총 맞으면 죽는다는 거."

그가 차우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빌런 킬러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다. 주 무기는 칼. 총을 사용한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현장에서 총을 빼앗아 썼더군."

박양수가 차우진의 몸을 훑어보았다.

"사건 현장에 남아 있는 총의 숫자는 항상 딱 맞았어. 가져간 건 없다는 거지. 경찰 수사의 강도를 조금이라도 낮춰보려고 그런 건가?"

차우진이 말했다.

"경찰 수사 기록을 빼냈구나."

박양수가 차우진의 몸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흐흐흐.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너는 총이 없어. 총은 크기가 있으니까 표가 나거든."

"총 대신에 작은 칼이 있을 수 있잖아?"

"네가 아무리 칼을 잘 써도, 너를 이미 조준하는 총 다섯을 이기진 못한다."

"아이고. 무서워라."

"이 새끼가…. 죽고 싶나?"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가능하겠어?"

244. 박 대리

박양수 대리가 얼굴을 구기며 욕을 했다.

"씨발. 사람은 총에 맞으면 죽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차우진이 용병들의 어깨와 손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럼 갈겨보던가. 실패하면 너네는 다 죽으니까 정확히 조준해서 잘 쏴라."

"이렇게 나오면 진짜 죽여버…. 후우. 이게 아니지."

박양수 대리가 손을 슬쩍 들며 제안해다.

"빌런 킬러.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 너와 우리가 경쟁자는 아니잖아?"

"협상?"

"서로 만족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지."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나를 사냥개로 쓰고 싶나?"

윤재철 실장은 지난번에 차우진에게 다른 조직이나 연쇄살인마의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처리해주면 돈도 주겠다고 했다.

박양수 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윤 실장님 때와는 다르지. 이번에는 마이크나 스피커가 아니라 총구를 들이대면서 말하고 있으니까."

"조건은 저번과 같은가?"

"그렇지. 정보도 주고, 돈도 주고. 대신에 우리는 네 얼굴을 확인하는 거지. 그래야 우리도 보험이 생기니까."

차우진이 일부러 총구 다섯 개를 쓱 훑어본 후에 말했다.

"서로 조건이 맞으면 그렇게 하지."

박양수가 히죽 웃으며 윤재철을 돌아보았다.

"윤 실장님. 봤습니까? 일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윤재철이 이를 갈았다.

"이 새끼가…. 넌 내가 복귀하면 두고 보자."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셨나?"

"뭐?"

"미끼로 쓰였다는 건, 숙청됐다는 겁니다. 어디 감히 실장 복귀를 원합니까? 그건 이제 내 자리입니다."

"너 이 새끼…."

윤재철은 화가 났지만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는 총으로 무장하고 쳐들어온 용병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 말은 지금 이곳에 있는 용병들은 박양수의 지시만 듣는다는 뜻이다.

박양수가 차우진을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어이. 빌런 킬러. 하나 묻자.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위험하고 힘든 데다가, 현장에서 돈이나 약을 챙긴 것도 아니던데."

"할 사람이 나밖에 없거든."

"실력이 좋다는 건 안다만…."

"이걸 안 하면 내가 살리고 싶은 사람이 다 죽어."

멸망한 세계에서는 차우진이 꼭 살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박양수 대리가 눈을 껌뻑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차우진이 물었다.

"넌 신약 사업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신약 사업? 레드 크리스털 같은 마약을 만드는 건가? 어느 조직이냐?"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넌 윤 실장보다 급이 낮구나."

박양수가 화를 벌컥 냈다.

"이제 내가 실장이다!"

"넌 아는 게 없어. 그러면 협상은 결렬인가."

"뭐? 너 이 새끼. 몸에 총알구멍 나고 싶어?"

"능력이 되면 쏘라니까."

차우진은 조금 전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상대의 제안에 동의하는 척했다.

그런데 박양수는 윤재철보다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럼 더 대화할 게 없다.

박양수가 화난 얼굴로 옆에 있는 용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병이 박양수를 쳐다보았다.

"총 달라고! 기브 미 어 건!"

차우진이 말했다.

"피스톨이라고 해야지."

"알아! 이 새끼야!"

용병이 무슨 뜻인지 눈치채고 권총을 넘겨주었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이었다.

차우진을 조준하던 다섯 개의 권총 중 하나가 박양수의 손에 넘어갔다.

박양수가 그 권총을 들고 차우진에게 다가가려 했다. 용병이 그런 박양수의 어깨를 툭 잡았다.

"왜!"

용병이 경고했다.

"It's dangerous to get close."

"위험하다고? 알았어. 씨발."

박양수가 차우진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권총을 겨누었다.

"빌런 킬러. 마지막 제안이다. 얼굴 까고 우리 사냥개가 되어라."

"그냥 쏴. 근데 그거 빗나가면 넌 죽는다."

"이 새끼가! 그럼 죽어!"

박양수가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탄피가 튀며 총탄이 발사됐다.

그리고, 차우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헉!"

차우진을 조준하고 있던 용병들도 기겁했다.

"뭐, 뭐야!"

"어디 갔어!"

차우진이 가장 바깥쪽에 있던 용병의 뒤에 나타났다. 그런 후에 용병의 손목에 작은 칼을 푹 꽂았다. 칼날이 손목을 관통했다.

"으아악!"

용병의 손이 힘을 잃었다. 차우진이 용병의 권총을 가로챘다.

차우진을 조준했던 다른 놈들이 비명을 듣고 뒤로 휙 돌아섰다. 그들은 차우진이 뒤에 나타난 걸 보고 또다시 기겁했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놈에 나가떨어졌다.

"컥!"

원래 차우진을 조준했던 용병은 다섯이다. 그중 하나는 방금 손에 칼을 맞고 총을 빼앗겼다. 다른 하나는 이미 권총을 박양수에게 넘겨주었다.

총을 든 용병은 셋이 남았는데 하나가 당했다.

남은 둘이 즉시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다.

차우진이 용병을 방패로 삼았다. 총탄이 용병의 몸에 퍽퍽 꽂혔다.

"끄악!"

아음속탄은 위력이 약해 사람의 몸을 관통하지 못했다.

차우진이 권총을 용병의 허리 옆쪽으로 내밀며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이 연달아 날아가 용병들의 몸에 퍽퍽 꽂혔다.

"컥!"

차우진이 총에 맞은 놈을 옆으로 밀어버리며 쓰러진 놈들을 향해 한 발씩 더 사격했다. 세 놈에게 세 발이 박혔다.

"케엑!"

박양수에게 권총을 넘겨준 용병은 빈손이다.

한쪽에서 윤재철을 조준하고 있던 용병은 차우진 쪽으로 총구를 돌릴 기회를 놓쳤다.

차우진의 현재 위치는 그 용병의 등 뒤쪽이다. 용병이 몸을 뒤로 돌리며 사격하는 것보다 차우진이 그냥 쏘는 게 더 빠르다.

박양수가 덜덜 떨었다. 그가 믿었던 유럽 용병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너, 너 뭐야? 너 뭔데 어떻게…."

"빗나가면 죽는다니까?"

윤재철을 조준하던 놈이 눈치를 보다가, 몸으로 권총을 가리며 차우진 쪽으로 총구를 슬그머니 돌렸다.

차우진이 옆으로 팔을 쭉 뻗어 방아쇠를 당겼다.

"컥!"

비틀거리는 놈에게 한 발을 더 꽂았다. 적이 고꾸라졌다.

"쏘려면 다른 놈들이 쏠 때 같이 쐈어야지."

이제 용병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권총을 박양수에게 넘겨준 덕분에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 너는 설마…."

그는 유럽에서 최근에 나타난 무서운 킬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스 엔젤?"

박양수가 다급히 물었다.

"뭔데! 그게 뭔데!"

차우진이 용병에게 물었다.

"넌 어디서 왔냐? 체코? 스페인?"

용병이 그 두 나라의 이름을 듣고 확신했다. 둘 다 데스 엔젤이 나타났던 나라다.

용병이 비명을 지르면서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으아아악!"

도망치는 용병을 향해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도망치던 놈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컥!"

박양수는 덜덜 떨었다.

"너, 너 뭐야? 어떻게 사람이…."

그는 방금 사람이 순간 이동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질문은 내가 해야지. 아는 거 다 말해봐."

"뭐, 뭐?"

"네가 가진 정보가 목숨값이 되는지 봐야지?"

윤재철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신나서 외쳤다.

"이 배신자 새끼야! 꼴 좋다!"

윤재철은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던 용병 때문에 차우진의 공간이동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박양수처럼 경악하지는 않았다.

윤재철이 넘어진 용병을 향해 팔을 뻗었다. 용병의 권총을 주우려 했다.

차우진이 윤재철의 손 바로 앞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총탄이 바닥을 때렸다.

"히익!"

"너 뭐 하냐?"

"어? 어? 아니, 난 도와주려고…."

"왜?"

"적의 적은 같은 편이니까…."

"날 죽이려고 함정을 판 놈이?"

지난번에 송성구를 미끼로 쓰고 무선 기폭장치의 폭파 버튼을 누른 건 윤재철이다.

"그, 그건…."

"넌 아는 게 없다며."

윤재철이 다급히 말했다.

"내, 내가 아는 게 많아! 내 뒤에 누가 있는지도 다 말할 수 있다! 살려주면 말해줄게!"

"정태식 말이냐?"

"헉!"

"왜? 신기하냐?"

"다, 다 알고 있…."

"네가 솔직히 말하는지 확인한 것뿐이다."

"씨발…."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윤재철의 몸에 박혔다.

"끄악!"

박양수는 차우진의 윤재철을 쏘는 순간 총구를 들었다.

'지금 쏘면 내가 빨라!'

그가 방아쇠를 당기며 소리 질렀다.

"죽어!"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박양수의 총구 방향과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을 확인하며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총탄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우진이 반격했다. 박양수의 몸에 총탄 두 발이 박혔다.

"커컥!"

박양수가 짧은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윤재철 쪽으로 돌아섰다.

"방탄조끼 성능이 좋다?"

윤재철은 죽지 않았다.

그는 이 집에 숨을 때 몸을 보호할 장비를 챙겨왔다. 그중에는 칼과 총탄을 어느 정도는 막는 경량 방탄방검조끼도 있었다.

차우진도 윤재철이 방어구를 입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윤재철이 손을 가슴에 대며 숨을 헐떡였다.

"가, 가슴이…."

"그게 방어력은 괜찮은데, 힘 빼고 있다가 맞으면 많이 아파."

차유리에게도 같은 걸 선물했기 때문에 방어력이 어떤지는 잘 안다.

"방탄조끼를 알고 있…."

"물론이지. 널 죽일 거였으면 머리를 쐈겠지."

"사, 살려…."

"아직 살려준 건 아니고."

차우진이 물었다.

"정태식의 진짜 계획이 뭐냐? 나한테 좀 전에 말한 게 네가 아는 거 전부라면, 넌 죽어."

윤재철은 지금 이것저것 잴 상황이 아니다. 총을 든 용병 여섯과 박양수 대리가 차우진을 죽이려다가 모조리 죽었다.

게다가 총에 맞아보니 아무리 방탄방검조끼를 입었어도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총탄이 조끼가 아니라 이마에 꽂히면 진짜로 죽는다는 것도 실감했다.

윤재철이 다급히 말했다.

"내가 알아낼 수 있어! 알아낼 수 있다고!"

"모른다는 거네."

"정태식 회장을 속여서라도, 아니면 그 밑에서 일하는 다른 놈을 찾아서라도 알아내면 돼! 살려줘!"

"내가 너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정 회장이 나를 미끼로 썼잖아! 나도 죽이려고 했잖아!"

차우진의 목표는 정태식 하나가 아니다. 하이에나들의 두목이 될 만한 놈은 모두 목표다.

그런데 그런 놈은 정태식의 근처에 있을 게 뻔했다. 윤재철도 후보 중 하나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정태식의 밑에서 일한다는 다른 놈이 누구냐?"

"박 실장이라고 있어! 그 새끼는 뭔가 알 거야!"

"확실한 건 아니구나."

"그놈이 모르면 정 회장을 속여서라도 내가 꼭 알아낼 테니까…."

"여전히 불확실하군. 그러면 계산이 안 맞아."

"계, 계산이라니?"

"네가 저번에 나를 죽이려 했잖아. 그때 데인 화상이 아직도 쓰라리군. 역시 네가 죽어야 계산이 맞아."

차우진이 권총 총구를 윤재철의 이마에 댔다.

"헉! 아, 아니야! 그때 그 일은 내가 아니라 저 새끼가 한 짓이다!"

윤재철이 박양수에게 뒤집어씌웠다.

"저 새끼 말하는 거 들었잖아! 저 새끼가 실무는 다 했어! 나는 아니야!"

"그럼 넌 하는 게 뭐야?"

"난 이용가치가 있어. 고급 정보는 내가 더 접근할 수 있다고!"

차우진이 권총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

"믿어보지."

"고, 고맙…."

"두 시간 주지. 고급 정보를 가져와라."

"헉! 겨우 두 시간…."

"늦으면 내가 널 찾아간다. 그러니까 서둘러라."

"차, 차는…."

"수단과 방법은 네가 알아서 해라."

윤재철이 허겁지겁 차를 향해 뛰었다. 그가 차 문을 벌컥 열고 탄 후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닫았다. 쾅 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눈치채지는 못했다.

그가 차를 타고 출발했다. 백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백미러로는 뒷좌석 시트 아래쪽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빠져나온 집이 점점 멀어지는 것만 보였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살았다! 난 살았다고! 박 대리! 꼴 좋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