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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차우진은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 후에 정예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도착했다."

- 도착하다니? 어딜?

"촬영 현장에."

- 익! 힉! 어디에!

차우진이 손을 슬쩍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예지가 얼른 뛰어왔다.

그녀가 환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오늘 하루 경호원 해달라며? 오윤서 씨가 부럽다며?"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래서 온 거야?"

"아니. 사실은 시간이 남아서."

"흐흐. 부끄러워하긴."

강수민도 신나서 달려왔다.

"앗! 예지야. 이 분 누구셔? 너랑 무슨 사이야? 응?"

"야. 너는 그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눈빛부터 좀…."

"누구신데? 말 못할 비밀이야?"

차우진이 말했다.

"예지 씨 매니저입니다."

"네?"

"경호원도 겸하고 있습니다."

강수민이 실실 웃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 아니죠?"

오윤서도 다가왔다.

"어머. 차우진 씨. 어쩐 일이에요?"

"예지 씨 매니저 겸 경호원으로 왔습니다. 여기가 좀 외진 곳이라서요."

"아. 잘됐네요. 우리 경호원은 다친 사람이 생겨서 병원에 같이 갔는데, 차우진 씨가 대신 있으니까요."

강수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이분이 진짜 예지 매니저예요? 처음 뵙는 분인데…."

"가끔 매니저 하셔."

차우진이 말했다.

"들었다시피 매니저 처음 하는 거 아닙니다. 딥어스테크라는 회사 앞에서 드라마 촬영할 때도 매니저라고 인사했었는데."

"네? 그때는 예지가 민지랑…. 아! 생각났어요. 하지만 그때 그 사람은 배가 꽤 나왔는데요?"

"그동안 살이 좀 빠졌습니다."

강수민이 눈을 깜빡이며 차우진의 얼굴을 보다가 손뼉을 쳤다.

"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해요? 어디서 피티 받았어요? 소개 좀…."

정예지가 손을 흔들었다.

"야. 하이에나 눈깔. 아닌 거 알았으면 가."

"쳇. 이번엔 건수 잡은 줄 알았는데."

강수민이 툴툴대며 돌아갔다. 오윤서도 살짝 웃어준 후에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정예지가 실실 웃었다.

"차 매니저. 오늘 하루는 풀코스로 나를 모시나?"

"가시죠. 아가씨."

"흐흣."

"근데 다친 사람이라니?"

"아. 바위에서 촬영하다 미끄러진 사람이 있어서, 윤서 언니가 개인 경호원한테 병원에 좀 데려다주라고 시켰어."

"그런다고 경호원이 자리를 비워?"

"고용주가 부탁하는데 가야지 어떻게 해. 그리고 여기 사람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닌데 뭔 걱정이야?"

"예지 씨는 그런데도 굳이 경호원이 필요하다면서 나를 불렀구나."

"그건, 으으…. 이 바위 같은 놈아!"

"왜 갑자기 욕이야?"

***

상식파 두목 곽상식이 촬영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진소영이 저기 있긴 한데…."

"형님. 대충 봐도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저희가 겁 좀 줘봤자 씨도 안 먹힐 것 같습니다."

"당연히 진소영이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려야지. 넌 설마 촬영 도중에 끌고 가려고 했냐?"

"아. 그렇구나!"

"이 멍청한 새끼. 내가 이런 새끼들을 데리고 일하니까 조직이 안 커지지. 가자. 가서 밥이나 먹다가 밤에 오자."

***

차우진이 옆을 슬쩍 보았다.

'구경하는 사람이 가끔 있네.'

여기는 마을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다. 그래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버스 정류장 정도는 있다.

버스나 차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촬영 현장을 구경하곤 했다. 곽상식 패거리도 그런 사람들처럼 멀리서 어슬렁거리다가 사라졌다.

***

진소영은 신인배우다. 촬영장의 모든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녀는 소속사도 없고 경력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단역이라도 곧잘 맡는 건 그만큼 노력하기 때문이다.

진소영이 톡을 보냈다.

- 작가님. 여기 차우진 씨 왔어요.

연락한 사람은 이 드라마의 작가는 아니다. 이쪽 작가는 아직 개인적인 연락을 보낼 정도의 친분이 없다.

그녀가 톡을 보낸 건 '친구와 연인 사이'의 작가 유소진이다. 이쪽도 친분이 있다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화번호는 알고, 상대가 관심을 보일 이슈도 안다.

유소진이 즉시 반응했다.

- 차우진 씨가 거기 왜?

- 정예지 씨 매니저로 왔대요.

- 그 회사에 들어갔대요?

- 아뇨. 오늘 하루만 도와주러 왔대요. 경호원 겸해서요.

- 아. 경호원. 고마워요. 거기 주소 좀 보내줘요.

- 네? 주소는 왜….

- 진소영 씨. 나 지금 쓰는 드라마에 주인공 동생 자리 오디션 볼래요? 저번에 동생 친구보다는 자주 나오는데.

- 앗! 뽑아주시는 건가요?

- 아뇨. 오디션만. 아직 대본 쓰는 중이에요. 제작 결정되면 비공개 오디션 일정 정도는 잡아줄게요.

- 감사합니다! 여기 주소 상세하게 보내겠습니다! 약도도 첨부할게요!

- 내비 있으니까 그냥 주소만 보내요.

***

유소진은 촬영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차우진부터 찾았다.

드라마 피디가 유소진을 발견했다. 둘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어? 소진아. 여기는 어쩐 일이야? 나 응원하러 온 거야?"

"아뇨."

"아니구나. 그럼 왜…."

"사람 찾으러요. 아."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찾았다."

227. 타깃

다른 드라마 작가 유소진이 밝은 표정으로 걸어갔다.

피디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기로…. 응?"

유소진이 걸어가는 방향에 차우진이 서 있었다.

"남자?"

피디는 유소진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그녀의 오빠와 피디가 친구이기 때문이다.

피디가 유소진의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네 동생 남자친구 있냐?"

- 없어.

"그럼 새로 생겼나?"

상대편의 목소리가 당장 커졌다.

- 뭐? 어떤 놈이야!

"우리 스태프는 아니니까 배우 따라온 것 같은…."

- 소속사는? 평판은? 뒷조사 지금 당장 가능하냐?

"야. 소진이도 나이가 있는데 누굴 사귈 수도 있…."

- 소진이는 연쇄살인마한테 납치돼서 죽을 뻔했어! 이상한 놈 만나는 거 아닌지 확인해야지!

친구의 반응이 과격해지는 걸 들은 피디가 얼른 말을 돌렸다.

"야. 농담한 거야. 농담. 그냥 인사하러 간 거야."

- 진짜야? 그래도 평판 정도는 확인해봐.

"내가 누군지 물어는 볼게."

***

진소영이 차우진에게 다가가 방긋 웃었다.

"다시 보네요?"

차우진이 진소영을 돌아보았다.

"그러게요. 그런데 여기는 작가님이 따로 계신 줄 알았는데…."

유소진의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는 시청률이 상당히 높았다. 대박은 아니라도 그 언저리까지는 갔다.

그런 사람이 다른 곳에 보조 작가로 들어갈 리는 없다.

"아. 여기는 피디님이 오빠 친구라서 응원하러 왔어요."

"그러시구나."

"근데요."

진소영이 차우진의 몸을 훑어보았다.

"배가…."

"요즘 살이 좀 빠졌습니다."

활동할 때마다 조금씩 빠지다가,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싸울 때 살이 특히 많이 빠졌다.

유소진은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됐을 때 차우진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눈 주변이 멍들고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서 차우진의 얼굴은 물론이고 몸도 흐릿한 상태로 봐야만 했다.

'그때도 배가 나오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때 차우진은 복대를 차고 가서 배가 보이지 않았다.

유소진은 전부터 차우진이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가 다른 게 좀 걸렸었다.

그런데 차우진의 체형이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과 비슷해졌다.

유소진이 방긋 웃었다.

'이제 전부 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야.'

피디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야. 소진이 남자친구 이야기는 농담이었는데…."

- 놀랐잖아.

"지금 보니까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 평판!

"이름은 알아놨으니까, 어떤 사람인지 주변에 좀 물어볼게."

***

촬영장에서 차우진이 할 일은 없었다. 그는 한쪽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죽을 운명이었는데 살려놓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니까, 괜한 걱정이 든단 말이야."

멸망한 세계의 정예지는 절벽에서 추락했다. 오윤서는 병원에서 습격당한 사건이 병을 악화시켜 사망했다.

그리고 유소진은 연쇄살인마 살해당했다.

그게 꿈속에서 본 미래의 기억이다.

현재는 차우진이 그들을 모두 살려냈다. 그는 그게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이선정 박사까지 온 것도 아니고, 드라마 찍을 때도 이 세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도 괜찮았…. 아니, 그때도 괜찮지는 않았지."

그때도 사건이 좀 있었지만, 차우진이 문제를 해결해서 괜찮아졌다.

문득 진소영이 생각났다.

"저 아가씨의 원래 미래는 어땠으려나. 차용증을 핑계로 끌려가서 이용당하다가 죽었을 수도 있는데…."

진소영은 단역이라 오늘 출연 분량이 적다. 그녀는 촬영을 일찍 끝내고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이 촬영은 1박 2일간 이어진다. 오늘은 여기서 야간 촬영까지 하고, 내일은 장소를 옮긴다.

원하는 사람은 숙소도 제공된다. 다만 공짜 숙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모여서 자야 한다.

그래서 오윤서나 정예지는 인근의 호텔을 개인적으로 예약해 뒀다.

진소영이 지금 가는 건 숙소가 싫어서가 아니다. 야간 알바가 있어서다.

차우진이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 외진 곳에서 밤중에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혼자 걸어 간다라…."

해가 조금 전에 떨어졌다. 지금은 밤이다.

진소영은 서둘러 가야 한다. 그래야 야간 알바 시간에 늦지 않는다.

다들 촬영에 바빠 단역급 조연 배우를 데려다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배우의 매니저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이 터진다면 지금이겠지."

***

상식파 두목 곽상식이 시골 버스 정류장 근처에 숨어있다가 진소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걸어오고 있었다.

"봐라. 내가 혼자 올 거라고 했지?"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여자는 야간 알바에 가야 한다더라고. 그러니까 나올 줄 알았지."

"밤에 일하면…. 술집이요?"

"피시방이라던데?"

"형님 정보력이 대단하십니다."

그런 정보는 곽상식이 알아낸 게 아니다. 의뢰인이 넘겨줬다.

"흐흐흐. 내가 정보력이 좀 되긴 하지."

진소영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한적한 시골 버스 정류장에도 조명은 있었다. 하지만 CCTV 같은 건 아예 없었다.

해는 이미 떨어졌다. 그녀가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버스가 제시간에 오면 좋겠…."

곽상식과 부하 한 놈이 갑자기 그녀의 앞에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진소영은 깜짝 놀랐다.

"꺅!"

"놀라는 모습도 예쁘네? 흐흐흐."

"누, 누구세요?"

곽상식이 차용증을 꺼내 흔들었다.

"이거 뭔지 알지?"

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안다. 저것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납치됐다.

그녀가 항의했다.

"그거 내가 쓴 거 아니야!"

"본인 도장이 찍혀 있는데 아니긴."

"내가 찍은 거 아니라고!"

그녀는 저 차용증이 등장할 때마다 납치되거나 억류됐다. 지금 붙잡히면 어떤 일이 기다리는지 안다.

촬영장까지만 가면 도와줄 사람이 많이 있다.

그녀가 뒤로 돌아서서 뛰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도 곽상식의 부하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흐흐. 아가씨.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로 도망칠지도 모를까?"

좁은 도로 앞뒤를 남자 셋이 막고 있다. 그냥 서 있으면 붙잡힌다.

진소영이 옆을 보았다. 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었다.

그녀가 그 길로 뛰었다.

조직원이 곽상식에게 말했다.

"형님. 산으로 뛰는데요?"

곽상식은 느긋했다.

"오솔길 앞에서 막으니까 당연히 저리로 뛰는 수밖에 없지. 쫓아가자."

그들의 신발은 가벼운 등산이 가능한 트래킹화였다. 세 놈이 오솔길로 도망친 진소영을 따라갔다.

진소영은 촬영 때는 하이힐을 신었지만 그건 지금 가방에 들어 있다. 지금 신은 건 저렴한 운동화였다.

어두운 밤에 운동화를 신고 오솔길을 뛰다가 발목이 살짝 삐끗했다.

"아야."

크게 다친 건 아니지만, 오솔길을 뛰면 발목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그것 때문에 도망치는 속도가 느려졌다.

뒤쪽에서 손전등 불빛이 보였다. 곽상식의 목소리도 들렸다.

"흐흐흐. 산에서 잘 뛰네?"

그녀는 발목의 통증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희망을 품었다.

"이 너머에 마을이 있으면…."

마을이 아니라 공터가 나왔다.

문제가 생겼다. 공터에서 기다리는 남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상식파 조직원 두 놈이 불평했다.

"에이. 씨. 산에서 기다리다가 모기한테 왕창 뜯겼네."

"쟤한테 모기약값도 물어내라고 하자."

진소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 여기서 나를 기다린 거야?"

뒤에서 곽상식이 공터로 들어오며 말했다.

"도망치기 딱 좋은 오솔길 앞에서 기다린 이유가 뭐겠냐? 차가 다니는 도로가 아니라 이런 조용한 곳에서 빚을 받으려고 그랬지. 흐흐흐."

"역시 형님이십니다. 이 장소는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정보력이 어떠냐? 흐흐흐."

이 장소도 의뢰인이 곽상식에게 알려주었다.

진소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곽상식이 물었다.

"뭐 찾냐?"

진소영은 오늘 촬영장에서 차우진을 보았다. 여기에 차우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하지만 차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려면 멀었어. 차우진 씨는 정예지 선배 옆에 있잖아. 이번엔 나를 구해줄 수 없어.'

그녀는 억울했다. 잘 나가는 정예지는 옆에 차우진이 있는데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왜 나한테만 이래! 남들은 다 행복한데 왜 맨날 나만!"

곽상식이 차용증을 흔들었다.

"그러게 이런 거 쓰지 말았어야지!"

"그거 내가 쓴 거 아니라고!"

***

진소영이 붙잡힌 공터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장복을 입은 석궁 저격수 셋이 숨어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석궁은 사정거리가 길고 위력이 강했다. 야간용 저격 스코프도 달려 있었다.

그들은 이것보다 먼 거리에서도 목표를 저격할 수 있다.

여기서 저격하면 소리도 없고 발사 섬광도 없다.

석궁의 위력도 강해서 제대로만 맞히면 멧돼지도 한 방에 죽인다.

그런 석궁을 든 저격수 셋이 공터를 조준하고 있었다.

왼쪽 놈이 작게 속삭였다.

"저기로 빌런 킬러가 올까?"

가운데 놈이 대답했다.

"지금 오면 일이 편한데, 아닐 수도 있다. 나중에 저 여자를 구하러 올 수도 있어."

"저 미끼는 확실한 거야?"

"빌런 킬러에 관한 것 중에 확실한 게 뭐가 있냐? 전부 다 소문인데."

오른쪽 놈이 설명했다.

"서해안 사건 때 저 여자를 빌런 킬러가 구해줬다더라."

"여기에 안 올 수도 있잖아."

"저 여자와 상관이 없다면 안 오겠지."

가운데 놈이 말했다.

"빌런 킬러가 오늘 저 여자를 구하러 와야 우리한테 좋아. 안 오면 일당 백만 원으로 끝. 오면 1억. 돈이 백 배 차이잖아."

"빌런 킬러를 죽여야 1억이지."

"오늘 여기 안 오더라도, 저 여자를 납치해서 가둬두면 거기로는 오겠지. 거기서도 매복하면 결국 잡…."

차우진이 엎드려 있는 세 놈의 뒤에서 말했다.

"어쩐지 함정 같더라."

"그래. 함정…."

오른쪽 놈은 그 목소리가 동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차우진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밤에 이 산에서 너네 찾느라 개고생했다. 좀 찾기 편한 데 숨어있지 그랬냐?"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본 놈이 급히 석궁을 차우진 쪽으로 돌리려 했다.

차우진이 빨렸다. 오른쪽 놈을 발로 걷어찼다.

"켁!"

그 충격으로 석궁 화살이 발사돼 하늘로 날아갔다.

그 틈에 가운데 놈의 석궁이 차우진을 향했다. 적이 방아쇠를 망설임 없이 당겼다.

"죽어!"

차우진은 권총 사격도 총구 방향과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보고 피할 수 있다. 이런 근거리에서 쏘는 석궁은 더 피하기 쉬웠다. 시간 가속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차우진이 옆으로 움직였다.

적이 쏜 석궁 화살이 빗나가 그의 뒤에 있던 나무를 관통했다. 강철로 만든 화살촉이 나무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차우진이 방금 석궁을 쏜 놈을 향해 움직였다.

석궁은 재장전에 시간이 걸린다. 이런 근접 전투에서 장전할 시간은 없다.

적이 석궁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이야압!"

그런 건 안 맞으면 그만이다. 석궁이 허공을 휘저었다.

차우진이 앞으로 성큼 걸어가며 적의 턱을 걷어찼다.

"컥!"

그러는 사이에 왼쪽 놈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는 차우진이 가운데 놈을 잡는 사이에 조준을 마쳤다.

차우진의 전투 센스가 반응했다. 그가 옆으로 슬쩍 이동했다.

왼쪽 저격수의 석궁이 차우진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확신했다.

'이 거리에서는 절대로 빗나가지 않아!'

그렇게 확신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석궁이 발사되는 순간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석궁이 화살을 밀어내는 게 보였다.

차우진이 몸을 휙 젖혔다. 화살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 저격수는 제일 먼저 걷어차였다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던 중이다.

왼쪽 놈이 발사한 화살이 오른쪽 놈의 몸통에 푹 꽂혔다.

"컥!"

차우진이 왼쪽 놈에게 성큼 다가가 머리에 돌려차기를 먹였다.

"켁!"

왼쪽 놈은 옆으로 넘어지며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가운데 놈은 이미 기절했다.

오히려 석궁을 맞은 오른쪽 놈이 아직 기절하지 않았다.

"커컥."

차우진이 말했다.

"야. 너 빨리 병원에 안 가면 죽겠다? 살고 싶으면 서둘러야겠다?"

"다, 당신. 빌런 킬러. 우리를 살려줄 리가 없…."

차우진이 물었다.

"빌런 킬러? 그게 누군데?"

"뭐?"

"난 촬영팀을 따라온 경호원인데? 우리 배우를 너희가 납치하려고 해서 끼어든 것뿐이다."

저격수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비, 빌런 킬러가 아니…."

"그게 누구냐니까?"

"사, 살려줘…."

"말이 짧다?"

"살려주십쇼. 제발…."

차우진이 석궁을 맞고 쓰러진 오른쪽 놈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물었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의뢰를 받았습니다."

"청부업자구나. 의뢰 내용은?"

"빌런 킬러를 죽이면 1억씩. 타깃이 결국 나타나지 않으면 일당 백만 원…."

228. 미끼

100미터쯤 떨어진 공터에는 진소영이 붙잡혀있다. 석궁 저격수들은 조금 전까지 그곳을 조준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우리 배우가 미끼냐?"

동료의 석궁에 맞은 저격수가 몸을 떨며 대답했다.

"끄윽. 맞으니까 빨리 구급차 좀…."

"한국에서 석궁으로 사람을 죽이면 일이 커질 텐데?"

"빌런 킬러의 시체는 저놈들을 시켜서 처리하면 되니까…."

지금 공터에는 곽상식 패거리가 진소영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 들켜도 뒷감당은 저 공터에 있는 놈들이 다 하게 될 테고?"

"그렇…."

"그걸 목격한 우리 배우도 같이 처리할 생각이었냐? 왜? 빽 하나 없는 신인 배우니까 그래도 될 거 같냐?"

"그, 그건 나도 모르는 일…."

"우리 배우는 처리되고, 너희는 1인당 1억씩 3억을 받고? 와. 이거 나쁜 새끼들이네?"

"사, 살려…."

차우진이 일어나며 물었다.

"누가 시켰냐?"

"그것까지는 우리도 모르, 끄으윽."

석궁을 맞은 저격수가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사정했다.

"구, 구급차 좀…. 제발…."

차우진이 혀를 찼다.

"이런. 내가 휴대폰을 안 가져와서 구급차를 못 부르겠네? 어쩌겠냐? 넌 죽겠다?"

"아, 안…."

차우진이 석궁을 맞은 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 새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상식파 두목 곽상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비명 이거 어디서 들린 거냐?"

차우진과 석궁 저격수들이 싸운 소리는 이 공터에서도 들렸다.

"형님. 저쪽인 거 같습니다."

이미 해가 떨어진 후라 저격수들이 있는 곳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곽상식은 긴장했다.

"이 밤에 산에서 비명이 왜 들려!"

"귀, 귀신 아닐까요?"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그럼 호랑이…."

"호랑이도 없어!"

"곰…."

갑자기 그 공터에 박창수가 뛰어들었다.

"이 새끼들이! 여기서 그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뭐, 뭐야! 너 누구야!"

"지나가던 사람이다!"

***

저격수들이 있는 곳과 진소영이 잡혀있는 공터는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 정도면 비명은 물론이고 사람이 소리치는 것도 잘 들린다.

곽상식 패거리는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공터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지금은 전투 중이다. 전투 센스가 활성화되면 시력도 좋아진다.

'창수 형?'

박창수가 진소영을 구하기 위해 공터에 뛰어들었다.

차우진이 석궁을 맞은 놈을 돌아보았다.

"아. 생각났다. 너 그 새끼네."

차우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창수 형이 죽을 때 거기 있었던 새끼.'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는 하이에나 조직원 열 놈에게 습격당해 다섯을 죽이고 죽었다.

지금 이놈은 박창수를 습격했다가 죽은 다섯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넌 그냥 화살 맞고 죽어라."

"사, 살려줘…."

"싫다."

차우진이 공터를 향해 움직였다.

또다시 박창수 혼자 적과 싸우게 할 수는 없다.

***

곽상식이 잭나이프를 꺼내며 인상을 썼다.

"그냥 지나가라고 하기엔 너무 깊이 들어왔네? 어이. 넌 생각이 없어?"

그의 조직원 넷도 잭나이프를 꺼냈다.

박창수는 삼단봉을 뽑았다.

"이것들이 칼까지 있네? 그거 버려라. 말로 할 때 듣는 게 좋을 거다."

곽상식이 비웃었다.

"이 새끼가 미쳤구나? 넌 혼자고 우리는 다섯이야!"

앞쪽에 있던 조직원이 먼저 박창수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그는 등 뒤의 조직원들을 믿고 건들거렸다.

"야 이 새끼야. 그거 버리고 무릎 꿇으면 다리 한 짝으로…."

박창수가 갑자기 앞으로 휙 뛰었다. 적의 눈이 커졌다. 박창수가 건들거리던 놈을 삼단봉으로 후려쳤다. 삼단봉이 옆에서 들어갔다.

상대도 그냥 당한 건 아니다. 박창수의 삼단봉을 황급히 팔로 막았다.

소용없었다. 팔이 뚝 부러졌다. 몸통도 옆으로 꺾였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으아악!"

적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박창수가 특수 소재로 제작한 삼단봉의 손맛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 역시 이게 맞아."

'내 힘이 안 통하는 차 형사가 이상한 거야.'

곽상식의 부하들은 바짝 긴장하며 칼을 앞으로 겨누었다.

"무, 무슨 힘이…."

"고릴라?"

곽상식이 인상을 구기며 뒤쪽에 있는 부하에게 지시했다.

"여자 확실히 제압해!"

그의 부하 중 하나가 이미 진소영을 잡고 있었다. 그는 곽상식의 신호를 받고 여자의 목에 잭나이프를 들이댔다.

곽상식이 박창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야. 너 당장 삼단봉 안 버리면 저 여자 목에 칼을…."

차우진이 조직원의 뒤에 나타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야. 우리 배우 목에 상처 내면 너 뒈져."

"어?"

차우진이 적의 팔을 바깥쪽으로 잡아당기며 손목을 비틀었다. 칼날이 진소영의 목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끄으!"

당황한 적이 팔에 힘을 줬다. 지금 손목을 놓치면 칼날이 진소영의 목에 꽂힌다.

차우진이 적의 다리를 뒤에서 걷어차며 팔을 완전히 꺾었다.

적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팔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꺾였다.

"으아악!"

진소영은 몸이 풀려나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차우진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셨다!'

그녀가 얼른 차우진의 뒤로 후다닥 피했다. 그러다가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댔던 조직원을 보더니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얍!"

"켁!"

차우진이 적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

"와우. 화끈한데?"

"저도 이런 놈들한테 쌓인 거 많아요!"

곽상식은 당황했다. 다섯이 왔는데 둘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셋만 남았다.

그런데 상대도 셋이다.

진소영은 전투력이 없어 보이지만, 차우진과 박창수는 느낌부터 달랐다. 특히 박창수는 체격이 좋았다. 박창수에게 맞은 놈은 허리가 옆으로 접혔다.

곽상식이 소리를 질렀다.

"이, 이 새끼들이…. 너 누구야!"

차우진은 곽상식을 무시하고 박창수를 보며 활짝 웃었다.

"형. 도와주러 왔구나!"

박창수는 차우진이 아군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차우진의 말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가 먼저 왔는데?"

"아니야. 내가 먼저 왔어. 난 저쪽에서 뭐 좀 처리하다 온 거야."

박창수가 저격수들이 있던 곳을 왼손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소리가 들리던데 그거?"

박창수는 차우진이 저격수를 처리할 때 그쪽에도 문제가 생긴 건 알았다. 하지만 이쪽이 더 급해서 여기로 달려왔다.

"저격수가 있더라고. 저기에."

박창수는 깜짝 놀랐다. 여자 하나 납치하는데 저격수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뭐? 무기는?"

"석궁 사수 셋."

"상황은?"

"클리어."

"굿. 그런데…."

박창수는 차우진을 최근에 그라나다에서 만났다. 그리고 오늘 또 여기서 만났다.

그럴 수는 있다.

한국인이 알함브라 궁전에 관광을 가는 일은 흔하다. 거기서 본 사람을 한국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박창수와 친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박창수는 차우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우진에게 어떻게 여기서 또 만났느냐고 따지진 않았다. 적 앞에서 그러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는 전술적으로 판단했다.

'적이 아직 셋이나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라는 걸 노출할 필요는 없지.'

차우진도 박창수가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았다. 그래서 공개해도 되는 정보를 슬쩍 흘렸다. 박창수만이 아니라 곽상식도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내가 촬영팀을 경호하러 왔다가 이걸 봐서 다행이지. 큰일 날 뻔했네."

진소영은 차우진이 정예지의 매니저 겸 경호원으로 왔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차우진에게 구출된 경험이 많아서 눈치가 빨라졌다.

"맞아요. 고맙습니다! 경호원님!"

그녀가 박창수를 향해서도 인사했다.

"경호원님도 고맙습니다! 두 경호원님 덕분에 살았어요!"

박창수는 차우진이 경호원으로 이곳에 왔다는 건 이해했다. 그래서 일부러 원래 한 팀인 것처럼 말했다.

"역시 우리 손발은 잘 맞는다니까. 내가 앞에서 시선을 끌고, 네가 뒤에서 인질 구출했잖아."

차우진이 웃었다.

"흐흐. 당연하지. 우리 이런 거 많이 해봤잖아."

멸망한 세계에서는 박창수가 어그로를 끌면 차우진이 적의 뒤를 쳤다. 반대로 할 때도 많았다.

박창수는 그런 기억은 없지만,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상식파 두목 곽상식의 눈동자가 쓰러진 부하들을 향했다.

'한 놈은 삼단봉에 갑자기 맞았고, 한 놈은 등 뒤에서 당했어. 정면에서 각 잡고 싸우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상대와의 전력 비교도 했다.

'두 놈은 경호원이니까 잘 싸우는데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못 하겠지. 그럼 실질적으로는 2대 3인데….'

이대로 붙었을 때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박창수가 너무 강해 보였다.

'저 새끼들에게 겁을 줄 방법이….'

없다.

상대가 칼에 겁먹거나 협박이 통하는 사람이면 평소처럼 굴면 되는데, 씨도 안 먹힐 분위기였다.

곽상식이 결국 꼬리를 말았다.

"어이. 이대로 붙으면 서로 피 많이 본다. 우리가 물러날 테니까 이쯤에서 끝내자."

차우진이 대답했다.

"싫은데?"

"뭐?"

"저격수까지 배치한 놈들이 또 우리 배우를 노릴지 어떻게 알고 여기서 끝내냐?"

"저, 저격수는 나는 모르는 일이다!"

"경찰한테 그렇게 이야기해라.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너네는 그냥 감방 가라."

곽상식이 잭나이프를 허공에 휘저었다.

"이 새끼가! 이 칼이 장난감 같냐!"

"아이고. 무서워라. 너무 무서워서 빨리 잡아야겠다."

"뭐?"

진소영의 안전은 이미 확보했다. 남은 셋도 잡으면 더 안전해진다.

차우진이 앞으로 툭 튀어나갔다. 조직원 하나가 그쪽에 있었다.

조직원이 즉시 차우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으아아!"

통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간단하게 피하며 적의 턱을 후려쳤다.

"켁!"

박창수도 움직였다. 다른 조직원이 박창수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잭나이프보다 삼단봉이 더 길다.

박창수가 삼단봉으로 적의 손목을 후려쳤다.

"악!"

잭나이프는 옆으로 날아가고 적은 손목이 꺾인 채로 비명을 질렀다. 박창수가 비명을 지르는 놈을 발로 걷어찼다. 적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내 공격이 평소에는 이렇게 잘 통하는데 말이야."

차유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제 곽상식 하나만 남았다.

차우진이 다가가며 물었다.

"야. 너 그 차용증 어디서 났냐?"

여기는 사람이 없는 숲 속이다. 혼자 남은 곽상식의 목소리가 겁에 질려 덜덜 떨렸다.

"뭐? 뭐?"

"차용증을 어디서 알아서 구했나 했는데, 저격수가 있는 건 이상하잖아. 누가 줬냐?"

석궁 저격수들은 진소영을 미끼로 빌런 킬러를 유인해 저격하려 했다.

그렇다면 곽상식 패거리도 미끼였을 수 있다.

차우진이 더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냐?"

"몰라! 씨발!"

곽상식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칼을 슬쩍 피하며 곽상식을 걷어찼다.

"컥!"

뒤로 밀려나는 곽상식을 박창수도 걷어찼다.

"케엑!"

두 대나 걷어차인 곽상식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씨발. 이게 아닌…."

곽상식이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차우진이 혀를 찼다.

"창수 형. 살살 찼어야지."

"네가 먼저 찬 게 결정타였다. 내 발은 거들었을 뿐."

"그럼 이제…."

"경찰에 신고해야지."

진소영은 깜짝 놀랐다.

"네? 그래도 돼요?"

박창수가 도로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혹시 신고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진소영은 납치 감금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그중에는 신고 없이 사라져야 할 때도 있었다.

차우진이 얼른 말했다.

"당연히 신고해야지. 배우를 납치하려는 강도를 잡았는데."

진소영이 얼른 맞장구쳤다.

"아! 제가 직접 신고하고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진짜예요!"

229. 박창수 II

드라마 작가 유소진이 남의 촬영장에 와서 두리번거렸다. 차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갔나? 그냥 잠깐 들른 거였나? 아직 이야기도 거의 못 했는데…."

차우진이 없으면 유소진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나도 갈까?"

피디가 유소진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다가 그녀의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소진이가 관심 보이던 사람 말이야."

- 평판이 어때?

"이름은 차우진."

- 어? 나 그 이름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소진이한테 들었겠지. '친구와 연인 사이' 찍을 때 같이 일했더라고."

- 그런가? 그래서 어떤 사람이냐고.

"전기 기술자인데 실력이 굉장히 좋대. 그때 스태프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아."

- 일단 연예인은 아니구나. 그건 마음에 든다.

"그런데 풀타임은 아니고 잠깐씩 일했어."

- 알바? 그럼 나머지 시간에는?

"평소에는 논다는 말이 있더라."

-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야. 근데 걱정하지 마. 안 보여. 소진이만 놔두고 갔나 봐.

유소진의 오빠가 화를 벌컥 냈다.

- 그놈이 뭔데 내 동생만 놔두고 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냥 갔겠지?

- 아. 그런가?

***

곽상식 패거리에게 납치당할 뻔했던 신인배우 진소영이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의 신고 내용이 워낙 심각해서, 현장이 외진 곳인데도 10분 만에 경찰이 도착했다.

지역 파출소에서 온 경찰들은 현장을 보고 당황했다.

"다섯 명에게 납치당할 뻔했다면서요."

"맞아요!"

"정작 여기 다섯 명만 너무 많이 다친 거 아닙니까?"

진소영이 목소리를 높여 설명했다.

"저놈들이 날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어요!"

"죽여요?"

"납치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적당히 이용해먹다가,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죽이겠죠!"

"꼭 그러지는 않…."

"저 배우예요. 배우. 드라마에도 나왔어요. 유명인인 저를 납치한 후에 살려서 풀어줄 리 있어요?"

진소영은 그들이 자신을 납치해서 이용하리란 건 알았지만, 죽이려고 했는지까지는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밀어붙였다.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저격수까지 있어서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가 옆을 가리켰다.

"저쪽에 석궁으로 여길 겨눈 놈이 셋이나 더 있단 말이에요!"

"뭐? 석궁이요?"

"그런 놈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에요. 셋!"

"빨리 지원 요청해!"

"이미 오고 있답니다!"

"더 밟으라고 해!"

차우진은 오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 피디님이랑 통화해야겠는데, 연결 좀 시켜주시죠."

정예지가 아니라 오윤서에게 부탁한 건, 그녀가 더 잘나가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소한 부탁을 피디가 무시할 리 없다.

현장에 경찰이 더 도착했다. 그 지역 경찰서 형사들도 찾아왔다.

석궁을 가지고 저격하려던 놈은 셋이다.

형사팀장은 저격수 쪽으로 조사하러 간 형사의 전화를 받았다.

"뭐? 한 명은 석궁에 맞았다고? 누가 쏜 거야!"

차우진이 말했다.

"자기들끼리 쏜 겁니다."

"자기들끼리요?"

"저를 노리고 쐈는데 운 좋게 빗나갔거든요."

형사팀장이 형사에게 물었다.

"여기 계신 분이 그러는데, 그거 자기들끼리 쐈다는데?"

-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놈이 석궁을 든 채로 기절했는데,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 있습니다.

"맞은 사람은 살아는 있어?"

- 살아는 있습니다만….

"그럼 빨리 구급차에 실어서 보내!"

형사팀장이 통화를 마친 후에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혼자서 석궁을 든 세 놈을 잡았다는 겁니까?"

"그렇죠."

"왜 위험하게 혼자서 싸운 겁니까?"

"안 그러면 이쪽으로 화살이 날아갔을 테니까요. 저격수 셋이 여길 노렸습니다. 그걸 놔뒀으면 우린 다 죽었을 겁니다."

"어…. 위험하셨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때 여기에 오셨습니까?"

"길이 어둡길래 집에 가는 배우를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러?"

"아하. 그렇군요. 그래도 이거 일을 너무 크게…."

갑자기 사건 현장에 방송 촬영팀이 몰려왔다.

그들을 부른 건 차우진이다.

피디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 배우가 납치될 뻔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진소영은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잘하는 신인 배우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판이 좋았다.

다른 스태프들도 흥분했다.

"아니, 어떤 새끼들이!"

"야. 다 찍어! 이거 보도국에 보내!"

형사팀장은 당황했다.

"사건 현장입니다! 촬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배우가 습격당했는데 왜 안됩니까!"

"도대체 어디서 오신 겁니까?"

"KMTV 방송국입니다!"

"피디님! 보도국 선배한테 전화했더니 영상 나오면 바로 보내달랍니다!"

"아주 깔끔하게 편집해서 보내주겠다고 해!"

형사들은 차우진과 박창수를 체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젠 그냥 데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졌다. 카메라 앞에서 실수하면 뒷감당이 되지 않는다.

형사팀장이 차우진과 박창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분들은 경호원이라던데…."

오윤서가 얼른 박창수를 지목하며 말했다.

"맞아요. 저분은 제 경호원이에요."

정예지도 얼른 나섰다.

"저분은 제 경호원 겸 매니저예요."

"아. 오윤서 씨와 정예지 씨…. 유명한 배우분들은 경호원을 두시는군요."

오윤서가 설명했다.

"외진 곳을 다닐 때만 같이 다니는 분이에요. 저번 주에도 산에 촬영갈 때 같이 다녀왔어요."

차우진은 판이 적당히 깔리자 아까 형사들에게 했던 주장을 다시 했다.

"배우 혼자 버스 타러 갔다는 말을 듣고, 바래다주려고 따라왔다가 사건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박창수도 말했다.

"외부에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산에서 불빛이 움직이는 모양이 좀 수상해서 차를 잠깐 세웠는데, 그때 여자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박창수가 자랑했다.

"제가 또 여자분이 위험해지는 건 못 보는 성격이라. 음하하하."

형사팀장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스태프들을 본 후에 제안했다.

"알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서로 같이 가셔서…."

정예지가 얼른 따졌다.

"우리 경호원이에요! 경호원을 데려가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오윤서도 편을 들었다.

"피해자이면서, 납치 피해자를 구한 용감한 분들을 체포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급한 건 우리 경호원들이 아닐 텐데요?"

"어…. 신분이 확실한 분들이니까…."

차우진이 제안했다.

"오늘은 일단 범인들부터 처리하시죠. 우리는 내일 촬영이 끝나고 조사에 협조하겠습니다."

***

사건 현장은 경찰에게 넘기고 사람들은 촬영 현장으로 돌아왔다.

피해자인 진소영은 형사들을 따라갔다. 아무리 카메라가 있어도 진소영까지 빠지는 건 어려웠다.

박창수가 촬영장에 도착한 후에 차우진을 따로 만났다.

"차우진이라고 했지?"

그 이름은 형사들 앞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

"넌 날 잘 아는데, 난 왜 네가 기억에 없지?"

"형이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건 아니잖아."

"그야 그런데…. 날 자꾸 형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모르는 게 이상해."

"그게 뭐 중요하겠어? 아. 근데 형을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차우진은 박창수를 지구 멸망을 막은 후에나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오윤서 씨 경호원으로 잠시 일하고 있다."

오윤서는 차우진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이미 사망했어야 한다.

'내가 개입한 사건은 바뀌고, 개입하지 않은 사건은 그대로 진행되는데….'

오윤서의 인생은 그가 개입해서 바뀌었다.

'오윤서 씨의 미래가 바뀌니까, 이 정도는 바뀔 수도 있나? 아니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창수 형이니까 내 활동에 영향을 받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지?"

"어떻게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났나 하는 생각?"

차우진이 계속 생각했다.

'창수 형은 위험한 일은 안 하고 살았으면 했는데.'

아직도 박창수가 죽던 그 꿈속 기억이 생생하다. 그걸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꿈속 미래의 기억은 멸망 초기인 10년 후부터 시작된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언해줄 수는 없다.

박창수에게 눈앞에서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보여주면 초능력을 믿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는 미래를 믿을지는 알 수 없다.

차우진은 박창수 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박창수가 죽는 미래는 다시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박창수를 다시 만났다. 그것도 외국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만났던 때와는 다르게, 같은 현장에서 사건과 얽혀서 만났다. 그리고 멸망한 세계에서처럼 같이 싸웠다.

'창수 형은 이미 영향을 받았어. 이쪽 운명의 수레바퀴에 끼어든 거야.'

결론이 났다.

'그럼 친하게 지내야지.'

차우진이 제안했다.

"창수 형. 야식이라도 좀 만들어줄까? 내가 요리 좀 하는데."

"아니, 난 네가 기억도 안 나는데 왜 이렇게 친한 척을…."

"치즈불닭볶음 어때? 내가 그거 좀 하는데."

"어? 그게 여기서 된다고?"

"사람들한테서 재료를 수집하면 되겠더라고."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치즈불닭볶음 먹고 싶다."

"그게 가능하겠냐고."

"안 되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치즈가 있겠냐고."

"우진아. 나중에 치즈 구하면 한 번만 만들어주라. 내가 옛날에 그거 진짜 좋아했거든. 내 동생도 그거 잘 먹었는데."

박창수의 동생은 죽었다. 그는 평소에는 동생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 나중에 치즈 구하면 해줄게."

***

박창수가 치즈불닭볶음을 먹으며 활짝 웃었다.

"와. 이 친구 이거 요리 좀 하네!"

"흐흐. 이거 꼭 해주고 싶었어."

멸망한 세계에서는 치즈를 구하지 못해 이걸 끝내 만들지 못했다.

정예지도 옆에서 모이 쪼아먹듯이 조금씩 얻어먹었다.

"우진 오빠 요리 잘하는 건 알았는데, 이건 진짜 대박이다."

"넌 이거 먹으면 촬영은 어쩌려고?"

"그래서 쪼아먹고 있잖아."

박창수가 물었다.

"정예지 씨. 저기, 이 친구랑 원래 아는 사이십니까? 친해 보이는데…."

정예지가 활짝 웃었다.

"어머! 그렇게 보여요? 사실 엄청 친해요."

"연예인이 경호원하고 그렇게 친해지는 겁니까? 그럼…."

박창수는 앞으로 이쪽 일을 좀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우진 오빠의 원래 직업은 경호원 아니에요. 전기 기술자예요. 오늘은 나 좀 지켜달라고 부른 거예요."

박창수가 아까 공터에서 진소영을 구하기 위해 같이 싸웠을 때를 생각했다.

"이 친구 실력은 프로던데?"

"운동 엄청 잘해요."

"전투 정보 전달도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창수 형. 더 먹어. 더. 형 이거 좋아하잖아."

박창수가 치즈불닭볶음을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 근데 맛있다. 이거 먹으니까 동생 생각나네."

정예지가 물었다.

"어머. 동생이 있어요?"

차우진이 얼른 말렸다.

"아니, 지금은 좋은 곳에 갔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

박창수가 물었다.

"너 내 동생도 알아?"

"직접 아는 건 아니야."

"그리고 좋은 곳에 가다니? 병원이 어떻게 좋은 곳이냐?"

"응? 병원?"

"뭐야. 몰랐어?"

차우진이 벌떡 일어났다.

"병원! 그럼 아직 살아 있…."

"이 새끼가?"

차우진이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야! 미안!"

박창수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착각 맞아?"

"당연하지! 내가 이런 착각을 다 하네. 하, 하하."

옆에서 정예지가 얼른 편을 들었다.

"우진 오빠가 원래 사람 막 헷갈리고 그래요! 오빠가 알고 보면 구멍이 참 많아요."

"그런가?"

박창수가 다시 젓가락으로 치즈불닭볶음의 고기를 집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아는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고?"

"형은 아니야. 형 동생은 내가 본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어. 미안."

"이게 맛있으니까 넘어간다."

차우진이 고기를 먹는 박창수를 보며 생각했다.

'여름이가 아직 살아 있어?'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는 동생이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 죽었다고 했는데….'

"형 동생 나이가…."

"고등학생이다."

"민지랑 비슷하네?"

박창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너도 민지 아는구나!"

차우진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어렸을 때가 아니잖아!"

"늦둥이니까, 나한텐 아직 어려."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할 건데?"

"음…. 올해까지?"

문제가 생겼다.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는 박여름이 어렸을 때 죽었다고 했다.

박여름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차우진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아…. 큰일 났네."

230. 빌런 킬러

차우진이 물었다.

"창수 형. 동생이 많이 아파?"

"아니. 관리만 잘하면 돼."

"병원에 갔다며."

"잠깐 치료받으려고 입원한 거야."

"치료? 입원?"

"가끔 받는 거 있어."

박창수는 동생이 왜 아픈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때도 그러더니.'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도 늦둥이 동생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박여름이라는 이름도 우연히 들었다. 어쩌다 흘린 몇 마디로 어렸을 때 죽었다는 것만 알았다.

'어렸을 때가 아니라, 창수 형 눈에 어려 보일 때였잖아. 미리 알았으면 찾아가 봤을 텐데.'

박여름이 언제 사망하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올해 안에 사망한다는 건 안다.

박창수가 박여름을 어린애 취급하는 게 올해 말까지라고 했기 때문이다.

박창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너 내 동생에 대해 뭔가 아는 거 같다? 왜 큰일 났다고 한 거야?"

"응? 어. 고등학생을 아직 어린애 취급하니까 큰일이라는 거였어."

"늦둥이라 내가 업어 키웠다. 나한테는 아직 애 맞아."

정예지가 눈치를 보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제가요. 민지랑 친해요."

박창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오! 역시 연예인은 다르십니다! 같은 드라마에 나왔으니까 아시겠구나!"

"민지가 우진 오빠랑도 친해요."

"네?"

"엄청 친해요."

박창수가 즉시 차우진에게 부탁했다.

"헉! 야. 나 사인 좀…."

"아니, 이 형이 갑자기…. 한 장이면 돼?"

"내 동생도 민지 좋아하는데…."

차우진이 슬쩍 제안했다.

"동생이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 주말에 민지랑 같이 문병 갈까?"

"그전에 퇴원해. 가끔 건강 안 좋아지면 잠깐 입원해서 처치 받고 퇴원하는 거야."

"그럼 퇴원한 후에 밖에서 민지랑 같이 보면 되겠네."

박창수가 활짝 웃었다.

"와. 야. 너 진짜…. 좋은 놈이구나?"

"겨우 이걸로?"

***

신인배우 진소영은 경찰서에서 피해자 진술을 했다. 그녀는 얼마나 위험한 일을 겪었는지 몇 번이나 설명했다.

이미 밤이 너무 늦어 촬영장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어차피 오늘 촬영은 끝났을 시간이다.

야간 알바도 늦었다. 그곳에는 전화를 걸어 오늘 못 간다고 사과했다.

문제는 내일 촬영이다.

오늘 이런 일을 겪었는데 내일 혼자 촬영장에 가는 건 무서웠다.

"내일 저 데려다줄 사람한테 전화 좀 할게요. 아. 스피커폰으로 해야 오해도 없고 좋겠죠?"

"그러면 좋죠."

진소영은 차유리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간 후에야 차유리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언니!"

차유리가 툴툴댔다.

- 내가 왜 언니냐니까, 아직도 그렇게 부르네?

"언니 혹시 내일 시간 돼요?"

- 나 내일 쉬는 날이야. 그러니까 시간 안 돼. 내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소파랑 한몸이 될 거야. 근데 이거 소리가 스피커폰이네?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지금 잡혀있어요."

차유리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지고 커졌다.

- 뭐? 또 납치된 거야? 어디야!

옆에서 형사가 한마디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붙잡아두고 있는 건 아니….

- 너 이 새끼. 너 누구야!

"경찰입니다."

- 어?

"그러는 분께서는 누구신지?"

- 경찰인데요?

"어?"

진소영이 형사에게 설명했다.

"이 언니는 아는 형사 언니예요. 언니. 내일 저 촬영장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 무서워서요. 좀 도와주세요."

- 무슨 사건에 엮인 건데?

"저 또 납치될 뻔했어요."

- 또? 와. 이번엔 누구 짓이야?

"몰라요. 범인이 잡히긴 했는데, 따로 조사받아서 잘은 몰라요."

- 기다려. 내가 내일 몇 시까지 가면 돼?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해.

"내일 아침에만 와주시면 돼요. 고맙습니다!"

형사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이거 우리 사건입니다?"

- 당연히 알죠. 그 사건은 그쪽에서 해결하셔야죠. 우리 쪽도 진소영 씨 관련해서 마무리가 안 된 사건이 있는데, 우린 그것만 정리하면 돼요.

"어…. 정보 공유?"

- 좋죠. 내일 아침에 뵐까요?

***

촬영은 1박 2일간 진행됐다.

그런데 이틀째 촬영 장소는 바닷가가 아니라 마을 근처였다.

이튿날 오전에 진소영이 그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피디가 물었다.

"소영 씨. 괜찮아?"

진소영은 촬영장에서 이런 관심을 받아본 게 처음이다.

"네! 괜찮아요!"

"힘들면 오늘 쉬어도 되는데."

오늘 쉬면 그녀의 출연 분량이 날아간다. 신인배우인 그녀에게는 모든 분량이 중요하다.

"아뇨! 저 진짜 괜찮아요! 열심히 할게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는 언니예요. 혼자 오기 무서워서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차유리가 맡은 진소영과 관련된 과거 사건 중에는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래서 차유리는 정보교류도 할 겸해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이곳에 따라왔다.

차유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나 촬영장 처음 와봐. 와아! 오윤서! 와! 정예지! 와. 차우진…. 어?"

차유리가 눈을 껌뻑였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차우진도 물었다.

"누나는 왜 여기 있냐? 오늘은 소파랑 한몸이 될 거라더니?"

진소영이 얼른 말했다.

"제가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차유리가 옆을 보았다.

"창수 씨는 왜 여기 있어요?"

박창수도 당황했다.

"유리 씨야말로 왜 여기 있습니까?"

차우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멈칫했다. 박창수의 얼굴에는 멍이 남아있었다.

"잠깐. 누나. 설마 최근에 그 소개팅 상대가 창수 형이야?"

"어."

"아. 또…."

"또라니?"

"아니야. 만날 사람은 결국 다시 만나나 보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

현장에서 체포된 곽상식은 부하들과 함께 진소영을 납치하려 했다. 그놈들이 모두 체포됐으니 입을 열 놈은 많았다.

문제는 석궁 저격수 셋이다.

연예인이 납치될 뻔한 사건은 결국 KMTV 뉴스에 나왔다. 그래서 그 지역 경찰서장이 직접 형사팀의 보고를 받았다.

"저격수들의 목적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그럼 뭘 노린 거야?"

"빌런 킬러라고 합니다."

"빌런 킬러? 그게 누군데?"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건 누가 한 이야기야?"

"석궁을 맞은 놈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놈한테 석궁을 쏜 놈은 같은 패거리고?"

"네."

서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개막장 청부업자의 말을 믿어야 하나? 피해자를 납치하려 한 놈들은 따로 있다며? 그놈들은 뭐래?"

"지금 박 형사가 물어보는 중입니다."

***

사건 담당 형사가 곽상식에게 물었다.

"빌런 킬러는 왜 노렸어?"

곽상식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도로 물었다.

"네? 아닙니다. 그런 거물을 저 같은 잔챙이가 어떻게 노립니까?"

"거물?"

"거물이죠."

"너희 목적은 빌런 킬러를 죽이는 거잖아."

곽상식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희가요? 그럴 리가요. 그랬다간 저희 따위는 다 죽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너희와 같이 붙잡힌 저격수가 진짜 타깃은 빌런 킬러라고 자백했다. 너희가 유인하는 일을 맡았다며?"

곽상식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욕을 했다.

"히이익! 그 개새끼들이!"

"이 새끼가?"

"아, 아니, 형사님이 아니라 그 저격수 새끼들 말입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우리까지 끌어들여!"

곽상식이 수갑에 묶인 손까지 흔들며 말했다.

"형사님. 우리는 진짜 아닙니다! 그따위 소문이 나면 우린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아니라고 확실히 발표해주십시오!"

"누구한테 죽는다는 거야?"

"그야 당연히 빌런 킬러한테 죽겠죠!"

***

서장이 물었다.

"거물?"

"범죄자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빌런 킬러가 혼자서 조직 몇 개를 무너뜨렸답니다."

"혼자서?"

"예. 곽상식이 공포에 질려서 자긴 아니라면서, 납치 청부를 어떻게 받았는지까지 다 털어놨습니다. 그러니까 차용증을…."

서장이 손을 들었다.

"잠깐. 진소영 씨는 서해안 사건의 피해자라고 했지?"

"예. 그때 상칠파가 궤멸당하고 천상칠과 조직원 일부가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놈들도 대부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걸 빌런 킬러가 했다?"

"범죄조직 사이에서는 그렇게 알려졌답니다."

"그럼 진소영 씨는?"

"빌런 킬러가 그때 진소영 씨를 구출했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미끼로 쓴 것 같습니다."

서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 진소영 씨를 구한 사람은 경호원이라며?"

"네. 촬영팀의 여배우 경호원 두 명이 나서서 구출했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헛다리 짚었네?"

"범인들도 납치 순간에는 빌런 킬러가 나타날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어디 가둬놓고 함정을 팔 계획이었답니다."

"다음 단계까지 준비해뒀구나. 그런데 도대체 누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조사 중입니다."

서장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빌런 킬러가 진짜 있긴 있어?"

"제가 서해안 사건 담당자한테 물어봤습니다. 도시 전설 같은 거긴 한데, 경찰 내부에서도 소문이 돌긴 한답니다."

"소문?"

"네. 최근에는 목동 공개홀 사건을 맡은 합동수사본부에서…."

***

차유리는 촬영 현장을 둘러보았다. 박창수가 옆에서 말했다.

"우진이의 누나가 유리 씨인 줄은 몰랐습니다."

"우진이가 전에 말한 창수 형이 설마 박창수 씨인 줄은 몰랐네요."

차우진도 말했다.

"형이랑 누나가 벌써 만나다니. 몇 년은 빠른데. 이게 다 나 때문인가?"

차유리가 물었다.

"뭔 헛소리야? 나는 윤 선배가 좀 치는 친구가 있다길래 만난 건데."

차우진이 박창수를 보았다. 박창수가 대답했다.

"윤 형사 때문에 내가 스페인에서 고생을 좀 했거든. 걔가 그거 갚는다고 소개팅 알아봐 준다고 했는데, 유리 씨가 나오더라."

차우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래서구나."

'스페인이면, 나 때문이 맞네.'

차유리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와. 윤 선배는 양반 되긴 글렀다. 아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호랑이인가?"

"걔가 호랑이는 아니고, 치타 정도…."

"어머. 눈물 자국 달린 치타. 어울리네요."

"그쵸. 하하하."

차유리가 전화를 받았다.

"윤 선배. 지금 선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 어? 나? 왜?

"박창수 씨 만났거든."

- 이야아. 둘이 잘 되고 있나 보다?

"그게 아니라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 어? 현장?

"내가 전에 담당했던 진소영 씨라고 있는데, 잠깐 도와주러…."

- 어? 야. 진소영? 서해안 사건 피해자? 어제 납치될 뻔한 그?

차유리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지? 어젯밤 일을 왜 이렇게 잘 알지? 선배 담당도 아닐 텐데? 나 지금 되게 불길하다?"

- 마침 잘 됐다. 그쪽 사건이 우리랑 연결….

"끊어."

- 야! 야! 잠깐!

"나 또 합수본으로 부르면 진짜 안 참아."

- 야. 합수본은 곧 임무 끝나잖아. 아니야.

"그치? 그래서 전화한 거 아니지?"

- 다른 팀이 만들….

"확 씨."

윤 형사가 얼른 설명했다.

- 상시 운용되는 팀은 아니야. 필요할 때 잠깐씩 모이는 팀이야. 빌런 킬러가 실존하는지 조사하는….

"난 원래 필요할 때마다 합수본에 불려갔다고. 그럼 그거랑 뭐가 달라!"

- 아. 그러네.

"끊어!"

***

차가운 목소리가 부하를 질책했다.

"멍청한 놈! 빌런 킬러를 잡을 덫을 세팅했다더니, 겨우 경호원 따위에게 당해?"

"죄송합니다. 하필 석궁 저격팀이 뒤에서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누구 경호원에게 당한 거야? 그 여자는 신인이라서 경호원을 데리고 다닐 돈이 없을 텐데."

"경찰 자료를 입수해 확인했습니다. 촬영 현장에 있던 유명 배우들의 경호원들이라고 합니다."

"무능력한 놈들. 뒤처리는?"

"곽상식이나 저격팀은 돈에 팔려 움직이는 놈들입니다.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도 우리를 찾아내진 못할 겁니다. 다만…."

"다만?"

"저격팀의 리더로 삼은 놈은 우리 쪽에서 따로 관리하던 놈이라…."

"아는 게 있는 놈인가?"

"아닙니다. 탈이 날 만큼 아는 건 없습니다."

목소리가 지시했다.

"그럼 새 덫을 준비하고, 미끼로 쓸 것도 새로 찾아. 빌런 킬러를 잡기는 해야지."

"이번엔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231. 차유리

차유리에게 오늘은 쉬는 날이다.

그녀는 모처럼 연차를 쓰고 아침부터 밤까지 소파에 달라붙어 배달 음식과 라면을 먹으며 TV를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소파가 아니라 지방 촬영장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영화 두 개랑 드라마 하나 조지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그녀가 촬영 현장을 구경하며 투덜댔다.

"눕고 싶다."

하지만 여기에는 소파가 없다.

그녀의 옆에 정예지가 슬그머니 앉았다.

"언니. 저 여기 앉아도 돼요?"

"앗! 정예지 씨? 그럼요. 얼른 앉으세요. 아. 이미 앉으셨구나."

정예지가 차유리의 앞에 있는 간이 탁자에 커피와 도넛을 올려놓았다.

"이것 좀 드세요."

"어머. 촬영장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원래는 없다. 이건 오윤서가 스태프에게 돌린 커피다.

"제가 저기서 빼앗아왔어요. 어차피 남아요."

"고마워요. 그런데…."

차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배우들은 원래 아무나 보고 언니라고 불러요? 진소영 씨도 나한테 그러던데."

정예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어. 언니가 어떻게 아무나예요?"

"난 아무난데?"

"우진 오빠 누나면 저한테는 언니죠!"

"응? 우진 다음에 뭐라고요?"

"우진 오빠?"

차유리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귀한 분께서 왜 저따위 놈한테 오빠라는 말을 써요?"

"네?"

"'어이. 차 씨'라고 부르지만 않아도 그게 어딘데…."

"에이. 그게 무슨 말이세요? 우진 오빠한테 평소에 신세 진짜 많이 지고 있어요."

차유리가 코웃음을 쳤다.

"쟤한테요? 쟤가 신세를 지겠지."

"아니에요. 얼마나 든든한데요. 호호."

"어…."

차유리가 정예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 형사인 거 알죠?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봐요. 우진이한테 돈이라도 꿨어요?"

"네?"

한쪽에서 강수민이 정예지가 하는 짓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쟤가 아무나한테 저렇게 꼬리를 칠 리가 없는데…. 저 형사 언니 정체가 뭐지? 높은 분인가?"

***

진소영 납치 미수 사건을 담당한 형사들은 차우진과 박창수를 잊은 게 아니다. 그들은 참고인 진술을 받기 전에 사전 조사부터 했다.

형사들은 먼저 박창수의 신원조회를 시도했다.

실패했다.

"팀장님. 박창수는 신원조회에 락이 걸려 있다는데요?"

형사팀장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락을 감히 어디서 걸어?"

"군에서 걸었답니다."

"어? 군대에서?"

"게다가 우리가 조회하니까,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박창수를 왜 조회하냐고 도로 물어보던데요? 그래서 진짜 기본적인 것밖에 못 알아냈습니다."

형사팀장이 나름대로 납득했다.

"역시 8대 2로 싸워서 이긴 게 우연이 아니구나. 대단한 특수부대 출신인가?"

"그런가 봅니다."

"박창수 씨가 오윤서 경호원이라고?"

"네. 스타라서 그런지 진짜 비싼 경호원을 썼나 본데요."

경호원으로 알려진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형사팀장이 물었다.

"그럼 차우진은? 정예지는 그런 비싼 경호원을 쓸 만한 급은 아니지 않나?"

형사가 머뭇거렸다.

"어…. 그게 참…."

"왜? 차우진도 특수부대야?"

"아뇨. 취사병 출신입니다."

"근데?"

형사가 조회 결과가 적힌 서류를 보여주었다.

"차우진은 직업이 경호원이 아니던데요?"

"그럼 뭔데…. 응? 이게 뭐야? 이사 직함이 몇 개야? 사기꾼이야? 아니면 남자 꽃뱀이야?"

형사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이거 국민연금 통해서 조회한 건데요. 제가 이 중에 큰 회사 몇 곳에 전화해 봤는데, 다 진짜랍니다."

형사팀장은 당황했다.

"어? 진짜로 진짜래?"

"다 자기네 회사 차 이사님이 맞는다고 하던데요."

"혹시 사칭…."

"그중 한 곳은 제가 신분증에 있던 사진 이미지까지 보내서 확인했습니다. 확실하답니다."

"그럼 혹시 회사에 이름만 걸어놓고…."

"중요한 일을 하는 이사님이랍니다."

"모든 회사에서?"

"네. 제가 전화한 회사는 전부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팀장은 당황했다.

"회사가 이게 다 몇 개야? 이중엔 중견 기업들도 있는데…. 그런 대단한 분이면 바쁠 텐데 왜 촬영 현장에서 경호원을…."

"여기 보면 LPP 엔터라는 연예 기획사에도 겸직하고 있던데요? 경호원은 핑계고, 현장 보러 간 거 아닐까요?"

"그런가?"

형사가 물었다.

"어떻게 하죠? 참고인으로 불러야 하는데…."

팀장이 큰소리쳤다.

"뭘 어떻게 해? 우린 경찰이다. 수사에 필요하면 상대가 아무리 잘나가도 참고인 조사는 해야지."

"그럼 빨리 오라고 할까요?"

"어…. 우리가 갈까?"

***

차우진은 궁리했다.

"누가 왜 빌런 킬러를 노린 걸까?"

한국에서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건 안다. 유럽에 가면 그 별명이 죽음의 천사나 데스 엔젤로 바뀐다.

"상칠파의 잔당이 나를 노리나?"

상칠파는 서해안에서 궤멸했다. 차우진의 손에 조직이 박살 나고 이후에 경찰이 탈탈 털었다.

다 무너진 조직의 잔당이 벌이기엔 정보력과 자금력이 너무 좋았다.

"아니면 그때 약을 사러 온 중국 조직?"

그건 가능했다. 약을 거래하던 중국 조직은 적어도 자금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그동안 제거한 살인마나 조폭이 꽤 많았다.

"사채업자 잔당?"

사채업체인 재구파의 행동대장 조천상은 박재구가 죽을 때 도망쳐서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동안 처리한 일이 많다 보니 의심 가는 놈이 너무 많았다. 정보가 부족했다.

"어떤 새끼지?"

***

형사들이 촬영 현장으로 차우진과 박창수를 만나러 왔다.

차유리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박 형사님. 내 동생은 왜요?"

"어? 저분이 차유리 형사 동생이었습니까?"

"맞아요. 근데 왜요?"

"저 두 분이 바로 진소영 씨를 구출한 사람들입니다."

"아. 그래요?"

차유리가 차우진에게 화를 냈다.

"너 이 새끼. 주먹 조금 쓸 줄 안다고 어딜 나서? 뒈지게 맞고 싶냐?"

"나도 좀 치는데?"

"박창수 씨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네? 오늘 날 잡자."

"진소영 씨가 납치되는 걸 봤는데 못 본 체할 수는 없잖아."

"아. 그건 그렇지. 내가 널 그렇게 비겁하게 키우진 않았지."

"누나가 언제 나를 키웠냐고. 요즘도 밥은 내가 해주는데."

형사들은 박창수와 차우진을 한쪽에서 만나서 당시 상황을 조용히 질문했다.

차우진이 대답했다.

"창수 형은 진소영 씨를 구하러 가고, 저는 저격수들부터 잡았습니다."

"저격수가 셋이나 있었는데 거길 왜…."

"그래서 뒤에서 덮쳤습니다. 한 놈이 놀라서 자기네 편을 석궁으로 쐈으니까 두 놈만 상대하면 됐습니다."

그 대답에는 진실에서 몇 가지가 빠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촬영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대화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다.

형사가 물었다.

"저희가 알아보니까 대단한 분이시던데, 왜 경호원을 하신 겁니까?"

이럴 때는 그럴듯하게 둘러대야 한다.

"전 평소에도 이렇게 현장을 한 번씩 확인합니다. 제가 기획사 이사거든요."

"역시 그래서군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차우진도 물었다.

"석궁을 쏘던 놈들의 정체는 밝혀졌습니까?"

형사가 대답을 망설였다.

"그건…."

차우진이 엄살을 부렸다.

"형사님. 제가 그놈들 석궁에 죽을 뻔했는데, 그 정도는 들어도 되잖습니까?"

차유리도 팔아먹었다.

"그리고 저 형사 가족입니다. 누나가 형사란 말입니다."

"음…. 그놈들은 청부업자들입니다. 누가 청부했는지는 자기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창수 형이랑 잡은 놈들은요?"

"상식파라는 작은 규모의 조폭인데, 단순히 이용당한 것 같습니다."

"상식파? 두목 이름이 상식입니까?"

"곽상식입니다."

"상식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차우진이 잠시 갸웃거리다가 손뼉을 챘다.

"아. 생각났다."

딥어스테크 공사장 자재 빼돌리던 놈은 차우진을 상식이가 보낸 킬러라고 착각했다.

'그 상식이가 이 상식이구나.'

형사가 물었다.

"생각나셨습니까?"

"고등학교 친구 중에 별명이 상식이란 녀석이 있었습니다. 상식이 없어서 상식이였죠."

"아니, 지금 그 이야기를 왜…."

"갑자기 생각나서요."

***

촬영은 모두 끝났다. 배우들은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스태프 중 일부는 장비를 챙겨서 돌아갔다.

차유리는 이곳에 올 때 진소영을 차에 태워서 데려왔다.

진소영이 부탁했다.

"유리 언니. 집에 갈 때 저도 좀…."

"또?"

"우리 한동네 살잖아요."

"옆 동네겠지. 구만 같지 동은 다르잖아."

"그 정도면 거의 한동네죠."

"아닐걸?"

차우진이 말했다.

"그럼 나도 누나 차 타고 가야겠다."

"그래라. 어차피 네 차 가져왔으니까."

"어? 왜 내 차를 쓰는데?"

"내 차는 정비소에 있어. 또 고장 났거든."

"차 좀 바꿔라."

"사줄 거냐?"

"정비소에서 잘 고쳐줄 거다. 10년은 더 타겠네."

정예지가 얼른 말했다.

"나도!"

"응?"

"언니! 저 내려올 때 윤서 언니 차 얻어타고 왔어요. 그러니까 올라갈 때도 얻어탈 차가 필요해요!"

"왜 배우들이 자꾸 나한테 언니라고 하지? 적응 안 되게."

결국 네 사람이 차우진의 차에 탔다. 남자 하나에 여자 셋이 타니까 소문이 날 걱정은 굳이 하지 않았다.

차유리가 말했다.

"네 차니까 네가 운전해."

"역시. 이렇게 동생을 부려먹어야 우리 누나지."

"시끄러워."

"창수 형이 이런 거 알아야 하는데."

"아무 사이 아니다."

"아직 아니겠지."

드라마 작가 유소진은 차우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촬영장에 다시 찾아왔다.

그녀가 그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빈자리 있으면 저도…."

승합차라면 모를까 승용차에 다섯 명이 타면 좀 불편해진다.

정예지가 얼른 물었다.

"어머. 유 작가님은 차 가져오시지 않았어요?"

"아. 가져왔죠."

"그럼 같이 못 가시겠다."

"그러네요. 난 차를 왜 가져왔을까…."

유소진이 소득 없이 조용히 멀어졌다.

정예지가 그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앞으로 위험요소는 방심하지 말고 바로바로 쳐내야지. 그동안 내가 너무 내 미모만 믿었어.'

차우진도 유소진을 보며 생각했다.

'유소진 씨까지…. 내가 살린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사건이 발생할 확률이 올라가나? 에이. 그럴 리가.'

***

차우진은 서울로 돌아갔다. 먼저 진소영을 동네 근처에 내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하자."

진소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이번이 마지막 사건이고 싶네요."

차우진이 정예지에게 물었다.

"예지 씨도 가야지?"

"어머. 우진 오빠. 난 왜 집에 안 데려다줘?"

"아까 먼저 내려준다고 할 때는 거절하더니?"

"아니, 그건…. 우이씨. 간다. 가. 가다가 발병이나 날 테다."

"기다려. 누나 내려주고 나서 데려다줄 테니까."

"히힛."

차우진은 차유리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차유리가 슬쩍 제안했다.

"정예지 씨. 집에 와서 커피라도?"

"어머! 그럴까요?"

차우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집에 갈 거야. 예지 씨 지금 피곤해."

차우진이 정예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정예지가 투덜댔다.

"진짜 데려다만 주고 그냥 가냐?"

"어. 그냥 간다. 쉬어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선정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변에 이상한 일 있습니까?"

- 네? 없는데 왜 그러세요?

"안 좋은 꿈을 꿔서."

- 어머. 제 꿈을요?

"안 좋은 꿈이라니까요."

- 꿈은 반대라잖아요.

차우진이 통화를 마친 후에 말했다.

"세계가 멸망하는 꿈, 현실에서는 반대였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차우진은 주변 사람이 모두 죽는 미래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는 소파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야. 너 연예인이랑 되게 친하더라?"

"아는 사이라고 했잖아."

"연예인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돼지랑 친하지?"

"사람이 친한 데 외모가 중요한가?"

"아. 그래서 독하게 살 뺀 거냐? 정예지 씨한테 잘 보이려고?"

차우진이 투덜댔다.

"안 뺐다고. 알아서 빠졌다고."

스킬을 쓰면서 싸우면 살이 쭉쭉 빠졌다.

"많이 먹어서 다시 찌울 거라고."

"부러운 놈. 알아서 살이 빠지다니."

이번에는 차우진이 공격했다.

"창수 형이랑 잘 되고 있어?"

"체육관에서 두 번 붙어본 게 다야."

"창수 형도 꽤 칠 텐데?"

"나한테는 안 되더라."

"그 형이 각성하면 장난 아니야."

"그래도 지금까지 본 놈 중에는 제일 단단하긴 하더라."

차우진이 물었다.

"또 만날 거야?"

"주말에?"

"좋은 곳?"

"체육관."

"그래.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구나."

"응? '이번에도'라니?"

232. 여름

멸망한 세계에서는 무너진 건물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건물 잔해를 수색하면 쓸만한 게 꽤 나오곤 했다.

금속은 철광석을 제련하지 않고 그런 곳에서 얻었다. 금속은 녹일 방법만 있다면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 수 있다.

당연히 쇠를 녹이는 건 어려웠다. 금속은 구하기는 쉬운데 쓰는 건 쉽지 않았다.

플라스틱 제품도 흔했다. 그건 썩지 않기 때문에 상태만 멀쩡하면 가져다 썼다.

가끔은 전자제품 중에도 망가지지 않은 게 있었다. 전기만 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쓸 수 있다.

문제는 전기였다. 발전기나 연료가 귀했다.

차우진과 박창수는 평소에 그런 폐허를 자주 수색했다.

그날은 무너진 체육관을 조사했다. 식량이나 의약품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태양광 패널을 하나 찾아냈다.

박창수가 활짝 웃었다.

"캬아. 우진아. 내가 전기를 찾아냈다."

차우진은 전기 기술자다. 이제는 고장이 나거나 낡은 물건을 특히 더 잘 다루게 됐다. 그가 패널을 점검했다.

"상태가 괜찮은데?"

그들이 사용하는 태양광 패널은 이미 예비 부품까지 있다.

"우진아. 이건 도인선 씨에게 넘기고 술 달라고 하자."

"손하은 쪽 전기 패널이 상태가 좀 안 좋아. 약 만들려면 전기가 필요하잖아."

"아. 그럼 그쪽부터 줘야겠네. 쩝. 간만에 술 마시나 했더니."

박창수가 아쉬워하며 무너진 체육관을 보다가 말했다.

"옛날 생각난다. 유리랑 이런 곳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는 만나자마자 싸우기만 했다더니."

"오고 가는 돌려차기와 공중이단차기로 쌓은 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알고 싶지 않아."

"하긴. 넌 모르겠지. 모쏠 자식 같으니라고."

차우진이 불평했다.

"내가 이런 세상에서 누굴 사귀냐고. 내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박창수가 피식 웃었다.

"이런 세상이라도 애는 태어나더라."

***

차유리는 '이번에도'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차우진이 둘러댔다.

"저번에도 창수 형이랑 체육관에서 봤다면서. 이번에도 체육관이냐는 말이었어."

"다음에도 체육관일 거다."

"그래. 한동안 그러겠지. 창수 형 연락처나 알려줘."

차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랑도 아는 사이라더니 왜 연락처가 없어?"

"설명하기 복잡해."

차유리는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톡으로 전화번호를 보냈다.

"옜다."

***

차우진이 박창수에게 연락해 국밥집에서 만났다.

"창수 형. 국밥이야. 많이 먹어."

"수육도?"

"당연히 수육도 시켜야지."

박창수가 물었다.

"내가 이런 집 좋아한다는 것도 혹시 알고 온 거냐?"

"어. 국밥은 경찰서 앞에서 먹어야 진국이라며."

"그게 내 취향은 맞는데…."

박창수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우리 진짜 어디서 만난 거야?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오다가다 만났다고 하기엔 너무 나에 대해 잘 알고 너무 친하게 구는데?"

"흐흐. 그게 중요한가? 내가 유리 누나 동생인 게 중요하지."

"음? 어.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

차우진의 신분은 확실하다. 형사인 차유리의 동생이고 연예인들과 친하게 지낸다. 박창수를 등쳐먹으려고 접근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박창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생각이 안 나는데…."

차우진이 국밥을 먹으면서 물었다.

"근데, 창수 형."

"왜?"

박창수는 동생이 아직 어리다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이제 이해가 갔다.

'늦둥이 동생이 아프니까 고등학생인데도 어리게 느껴졌겠지.'

박창수가 올해까지만 동생을 어리다고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동생이 어릴 때 죽었다고 했다.

이대로 놔두면 박창수의 동생 박여름이 올해 안에 사망한다.

"동생이 입원한 병원이 어디야?"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냐?"

"문병 가려고."

"그러니까 왜…."

박창수를 설득하려면 그럴듯한 이유를 대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인맥이 좀 돼. 그중에는 바이오 회사도 있고, 제약회사도 있어. 그쪽에 치료법을 좀 물어보려고."

박창수가 관심을 보였다.

"제약회사? 어디?"

"SL 제약."

"아. 거기 알지. 그 회사의 누구랑 아는데?"

"누구를 안다기보다."

차우진이 SL 제약 명함을 꺼냈다.

"내가 거기서 일을 좀 해."

박창수는 별생각 없이 명함을 받았다.

"어?"

그 명함에는 차우진의 이름과 이사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박창수가 차우진을 보고 명함을 보다가 인상을 썼다.

"너 혹시 사짜냐?"

"안 믿을 거 같더라."

"너 같으면 명함쪼가리 하나 보고 믿겠냐? 아무리 네가 유리 씨 동생이라도 그건 아니지."

"알았어. 같이 가자. 확인시켜줄게."

***

두 사람은 곧바로 SL 제약을 방문했다.

홍보팀 대리 성혜리가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어머. 차 이사님. 오늘은 출근 안 하시는 줄 알았는데!"

"친한 형한테 내가 여기 이사라고 했더니 안 믿어서요."

성혜리가 박창수를 돌아보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어머나! 차 이사님은 우리 회사에 어어엄청 중요한 분이세요."

박창수가 아직 다 믿지 않았다.

"어…. 혹시 여기 직원과 짜고…."

"앗! 아빠가 차 이사님 잠깐 보재요."

"잘됐네요. 갑시다."

그들은 사장실로 이동했다. 비서가 차우진을 보고 인사했다.

"오셨어요? 차 이사님."

"요즘 좀 자주 오죠?"

"아뇨. 너무 뜸하세요."

그들이 사장실로 들어갔다. 성혜리가 비서를 쳐다본 후에 따라 들어갔다.

사장실에서 성기호가 차우진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하하하. 차 이사. 잘 왔어. 이번 주말에 바다나 갈까?"

"이번 주말에는 제가 많이 바쁠 겁니다."

"아니, 그렇게 바쁘면 나랑은 언제 놀아주나?"

"다음 주말?"

"시간 비워놓을게!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친한 형인데, 제가 여기 다닌다는 걸 안 믿어서 잠깐 같이 들렀습니다."

성기호가 호들갑을 떨었다.

"뭐? 당장 재직증명서 떼어오라고 지시하지!"

박창수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제 믿습니다."

차우진은 사장실에서 커피만 한 잔 얻어 마신 후에 박창수를 데리고 회사를 나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제 믿어지지?"

"안 믿을 수가 없잖아. SL 제약 사장님이 날 속이려는 건 아닐 테니까. 이걸 다 세팅하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그럼 동생 문병 가자. 내가 인맥 동원해서 치료법을 좀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

제약회사를 등에 업은 차우진의 제안을 박창수는 거절할 수 없다. 그래도 걱정은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치료법이 있다면 의사들이 알지 않겠냐?"

"제약회사에는 아직 실험 단계인 치료법도 있으니까, 병원이랑은 조건이 또 다르지. 의사들은 검증된 약을 쓸 테니까."

박창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뭐? 실험?"

"당연히 그걸 쓰자는 건 아니지! 의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는 거야."

박창수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내 동생은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 괜찮아져."

이대로 두면 박창수의 동생은 죽는다. 오직 차우진만이 그걸 알고 있다. 박여름을 살리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럼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잖아. 그냥 문병이라고 생각해."

***

두 사람은 곧바로 한국대병원으로 이동했다.

박창수의 동생 박여름이 병실에 앉아있었다.

"누구세요?"

"난 차우진이라고, 창수 형 친한 동생이야."

"처음 듣는데요?"

"진짜 친해. 치열한 전장에서 서로 등을 맡기고…."

박여름이 손뼉을 쳤다.

"아! 군대!"

"아니. 밖에서."

"네?"

박창수가 얼른 말했다.

"그게 아니라."

차우진이 먼저 설명했다.

"바깥세상은 전쟁터처럼 치열하단 뜻이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돼."

"아. 그렇구나. 저도 책에서 그런 거 많이 읽었어요."

"책 좋아해?"

"책도 좋아해요. 음악도 좋아하고, 드라마, 영화 다 좋아해요."

"나도 음악 좋아하는데. 곽민지 알지?"

박여름의 얼굴이 환해졌다.

"당연히 알죠! 저 무지개 고백 진짜 좋아해요!"

"내가 민지랑 아는 사이인데, 나중에 사인받아줄까?"

"좋아요! 저 공연도 가고 싶어요!"

"민지는 공연을 안 하는데…. 걔가 아직 학생이잖아. 공부하느라 바쁘거든."

박여름이 조금 실망했다.

"그렇구나."

"대신에 민지가 가끔 초대가수로 나갈 때가 있는데, 그때 티켓이라면 구해볼게."

"앗!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네가 병원에서 나와야…."

"오늘 퇴원하는데요?"

"응?"

차우진이 박창수를 돌아보았다.

"여름이가 오늘 퇴원해?"

"병원에 갔다가 처치만 받고 금방 나올 거라고 했잖아."

"입원은 언제…."

"어제."

"아니, 그럼…."

'왜 죽는 거야?'

박창수가 병원에서 박여름의 진료기록을 뽑았다. 지난 몇 년간 치료받은 기록을 다 뽑고 각종 영상 자료도 CD로 받았다.

박창수가 자료를 챙겨 병실로 돌아왔다.

박여름은 병실에서 퇴원 준비를 위해 짐을 챙겼다. 차우진은 박여름과 놀아주는 중이었다.

"와. 블루퍼핏도 아시는구나. 그 오빠들 LPP 엔터로 옮겼다던데."

"내가 LPP 엔터랑 잘 알아. 나중에 회사 구경시켜줄까?"

"앗! 진짜요? 고맙습니다!"

"뭘 이 정도로. 하하하."

"그럼 혹시 블루퍼핏 오빠들 공연도 볼 수 있어요?"

"걔들도 아직 급이 안 돼서 단독 공연은 어려운데, 게릴라 콘서트라도 하면 내가 미리 정보 빼내서 알려줄게."

"그래도 돼요?"

"안 들키면 돼. 너 혼자 오면 안 들켜."

박창수가 병실에 들어오면서 말했다.

"좋은 거 가르친다."

"형도 할 수만 있으면 똑같은 거 해줬을 텐데?"

"그건 그렇지."

박창수가 차우진을 병실 밖으로 불러내 진료기록을 넘기며 설명했다.

"병의 원인은 몰라. 치료법도 몰라. 하지만 약과 수혈로 현상유지는 시킬 수 있어. 대신에 평소에도 무리하면 안 돼. 혈액의 기능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거든."

"내가 제약회사에 넘겨서 검토하라고 할게."

박창수가 물었다.

"근데 진료기록은 왜 두 세트가 필요한 거냐?"

"한 세트는 SL 제약에 넘기고, 다른 하나는 천재한테 분석을 맡겨보려고."

"천재?"

***

멸망한 세계의 폐허에서 박창수가 멍한 얼굴로 파괴된 의약품 상자를 보았다.

무너진 잔해에서 찾아낸 부서진 상자에는 오메가바이러스의 치료제가 들어 있었다.

"이 약이 일찍 나왔으면 내 동생을 치료할 수 있었을 거야."

차우진이 물었다.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로? 옛날엔 그 바이러스가 없었잖아."

"멸망 초기에 이 치료제 연구팀을 호위하는 작전을 뛴 적이 있다. 그때 거기 박사에게 물어보니까 그러더라. 이 치료제를 연구하다 만든 파생 의약품이 있는데, 그게 내 동생 같은 상태 이상을 바로잡아줄 가능성이 있다고."

"이걸로 어떻게?"

"사이드 이펙트가 있다더라. 이 약 하나만으로는 안 되고, 블러드 크리스털을 칵테일하고, 회복 스킬까지 같이 쓰면 가능성이 있다더라고."

"셋 다 옛날에는 없던 거잖아."

"그렇지."

***

차우진이 진료기록 자료를 이선정 박사에게 넘겼다.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자인 이선정은 차우진이 가져온 간식을 먹으며 앉은자리에서 자료를 확인했다. 페이지가 휙휙 넘어갔다.

"음. 음. 음."

옆에서 손하은도 자료를 같이 검토했다.

"우웅. 우웅."

이선정이 자료를 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녀가 영상까지 확인한 후에 말했다.

"안 좋네요."

"잠깐 입원하고 금방 퇴원했다던데."

"치료한 게 아니라 수혈과 약물로 증상만 완화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약을 먹어서 관리하다가, 상태가 나빠지면 병원에서 수혈을 받는 거죠."

"피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유가 뭡니까?"

"그건 병원에서도 못 찾아냈어요. 증상만 완화할 뿐, 원인을 모르니까 치료도 못 하고 있어요."

"이선정 박사님도 모릅니까?"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요."

이선정은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혼자 개발한 사람이다. 멸망한 세계의 과학자들은 그녀가 천재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차우진이 물었다.

"이번에 만든 약에 레드 크리스털을 섞어보면 어떻습니까?"

"네?"

박창수가 그렇게 말했다. 박창수도 멸망 초기의 과학자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레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마약인 블러드 크리스털의 핵심 원료다.

"그러면 가능성이 있습니까?"

"잠깐만요."

그녀가 자료를 한참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간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니, 이런 생각을 어떻게…."

"왜 그럽니까?"

"차우진 씨. 이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천재예요?"

"전 아닙니다."

천재는 말 몇 마디만 듣고 단서를 벌써 찾아낸 이선정이다.

233. 포션

이선정이 설명했다.

"우진 씨 말처럼 제가 만든 약에 레드 크리스털을 칵테일 하면 예상되는 효과가…. 이 환자 증상에 도움이 되겠는데요?"

레드 크리스털은 마약이다. 차우진이 상칠파부터 체코의 스컬스까지 다 박살 냈기 때문에 이제는 구하기 어렵다.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된다.

이선정은 레드 크리스털을 분석한 적이 있다. 지금 옆에 있는 손하은은 양산 기술개발에 참여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회사 장비를 이용해 작업하면 만들 수는 있다.

손하은이 걱정했다.

"하지만 레드 크리스털은 마약인데…."

이선정이 설명했다.

"그 마약을 만든다는 게 아니야. 일부 성분만 만들어서 내가 개발한 약과 섞으면…."

그녀가 잠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진짜 만들 수 있겠는데요?"

차우진이 물었다.

"치료제를요?"

"에이. 당연히 그건 아니죠. 병의 원인을 모르는데요."

그녀가 개발한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는 면역체계에, 레드 크리스털은 혈액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도 기존 약물보다 훨씬 강력한 효과가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위급상황에 처했을 때 응급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그쵸. 제 생각대로 된다면요. 물론 된다 해도 효과는 오래 가지 않겠지만요."

"일단 시간을 벌고 나머지는 병원에서 치료하면 되겠군요."

"그렇죠."

차우진이 물었다.

"그 약은 언제까지 만들 수 있습니까?"

"그거야 금방…. 어머!"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걸 만드는 건 쉬워요. 회사 실험실에서 조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사람한테 쓸 순 없어요. 당연히 임상부터 거쳐야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여름이는 이대로 놔두면 올해 안에 사망해.'

그렇다고 검증되지 않은 약을 무작정 한여름에게 주사할 순 없다.

'여름이의 사망원인이 병이 아닐 수도 있잖아.'

오늘 본 박여름은 올해 안에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박창수가 괜히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레드 크리스털은 다시 세상에 나오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약은 정식으로 생산해서는 안 된다.

답답했다.

"아니, 창수 형은 설명을 좀 잘 해주지. 왜 제일 중요한 건 말을 안 해."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는 박여름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사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치료제가 어떤 원리인지도 듣지 못했다.

현재의 박창수에게 그걸 물어봤자 알 리가 없다.

차우진이 물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SL 제약의 연구진과도 논의하고 싶은데."

이선정이 물었다.

"환자가 중요한 사람인가요?"

"저한테는 동생 같은 애입니다."

한여름은 오늘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박창수의 동생이면 차우진에게도 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당장 가죠? 하은아."

"네! 저도 당장 준비할게요!"

"아니, 너는 회사에서 나 대신에 일을…."

"저도 차우진 씨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음…. 언니한테는 내가 말할게. 우리 둘 다 오늘 반차 쓰자."

"네!"

***

SL 제약 사장 성준혁의 지시로 연구원 세 명이 이선정과 만났다. 그들은 이선정이 개발한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의 SL 제약 쪽 담당자들이다.

이선정은 박여름을 위해 새로 만들려는 약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연구원이 말했다.

"이선정 박사님.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설명을 너무 간략하게 줄이신 거 아닌지…."

"중요한 설명은 다 한 건데요?"

다른 연구원은 아예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도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선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왜 이해가…."

"원리는 이선정 박사님만 이해하는 거 같은데요."

"저만 아는 거 아니에요. 차우진 씨가 아이디어를 냈단 말이에요."

"어? 이거 차 이사님의 아이디어입니까?"

"네. 응용 방법을 바로 생각해내시더라고요."

연구원들이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역시 차 이사님."

"그럼 이선정 박사님 대신에 차 이사님이 좀 쉽게 설명을…."

차우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난 아닙니다. 어쩌다 찍은 게 걸려든 겁니다."

"아닌 거 같은데…."

결국 연구원들은 약효나 개선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이선정은 기왕 찾아온 김에 다른 걸 요청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칵테일에 약을 추가로 섞고 싶은데, SL 제약에 이게 있을까요?"

"아. 이거라면 있습니다."

"이것도요."

"물론 있습니다."

"역시 제약회사는 다르네요."

***

연구원들과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차우진은 밖으로 나왔다.

성기호 사장의 딸인 홍보팀 성혜리가 물었다.

"차 이사님. 저 약은 왜 만들려는 거예요?"

"동생 같은 애가 아픈데, 치료할 약이 없습니다."

"아…. 그래도 이선정 박사와 우리 회사가 협업하면 언젠가는 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서."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데 약을 그냥 뚝딱 만들어서 쓸 수는 없어요."

"역시 부작용이 문제이지요?"

"그렇죠."

***

SL 제약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우진이 이선정에게 물었다.

"내일 당장 그 약을 만들어서 환자에게 주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불법이죠."

"죽는 것보다는 낫잖습니까? 약을 누가 줬는지는 안 들키면 되고."

이선정이 걱정했다.

"약을 써도 산다는 보장이 없어요.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고, 늦었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환자에게 독이 될 수도 있어요."

"만약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면, 독이든 뭐든 써봐야죠."

이선정이 차우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우진 씨. 왜 그 환자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예요?"

"보험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만들 수 있습니까?"

"음…. 네. 필요한 약품을 SL 제약에서 연구용으로 공급받으면 금방 돼요."

"몇 세트만 부탁하죠. 이 문제는 우리끼리만 아는 거로 하고."

손하은이 차를 운전하면서 얼른 대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실장님 도와서 그 약을 만들긴 할 건데, 아무것도 모를 거예요! 저는 바보거든요!"

***

이선정은 손하은과 함께 실험용 치료제를 몇 세트 만들었다.

"제가 개발한 약에, 하은이의 도움을 받아서 레드 크리스털의 핵심 성분을 조합했어요. SL 제약에서 받은 것도 섞었어요."

그렇게 만든 치료제는 손가락만큼 작은 병에 들어 있었다. 그 병에는 주사기 기능도 붙어 있었다.

"몸에 대고 여기를 누르면 바늘이 나오고 약이 주사돼요. 제 생각대로만 된다면 효과는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이선정이 경고했다.

"우진 씨. 이 주사를 맞으면 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요."

"보험으로 가지고만 있겠습니다."

***

차우진이 박창수와 만나 탁자 위에 약병을 올려놓았다.

"여름이의 병이 갑자기 나빠져서 죽을 거 같을 때,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약이야."

박창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치료제냐?"

"아니. 일시적으로 상태를 개선해 위기를 넘기게 해주는 보험."

"그래도 미리 사용하면…."

"최고의 전문가들이 여름이의 몸에 맞춰 만든 약이지만, 검증이 안 됐어. 당연히 미리 주사할 순 없어."

"안정성은?"

"이 보험은 잘못 쓰면 죽어."

박창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너 그따위 걸 내 동생에게…."

"화학무기에 당했을 때 맞는 응급 주사 같은 거야. 그거 한 세 방 맞은 거라고 생각해."

박창수는 무슨 소리인지 바로 이해했다.

"진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구나."

"위기만 넘기면 다시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되니까, 그런 날이 안 오면 좋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있어."

"이거 하나뿐이냐?"

차우진이 한 병을 더 꺼냈다.

"하나는 형이 가지고, 하나는 여름이에게 맡겨놔.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해. 물론 사용하지는 말고."

"음…."

이 약을 사용할 때는 박여름을 살릴 방법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뿐이다. 그때는 이 약을 안 써도 어차피 죽는다.

차우진은 박창수가 믿게 하려고 SL 제약 사장실에까지 데려갔다. 그래서 그는 이 약이 골방에서 대충 만든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건 안 받을 수가 없네."

차우진이 단서를 달았다.

"이걸 사람 몸에 쓰는 건 당연히 불법이야. 약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하고, 이걸 써야 할 순간이 와도 들키지 마."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냐?"

"형 동생이면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왜…."

"나중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말해줄게."

박창수가 물었다.

"그 문제 해결에 내가 도와줄 게 있냐?"

차우진이 말했다.

"이번엔 죽지 마. 그거면 돼."

"이번?"

"죽지 말라고."

"내가 왜 죽냐? 군대도 제대했는데."

"그럼 안 죽겠네."

***

차우진은 박여름에 관해서는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진소영이 납치될 뻔했던 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누가 석궁 저격수까지 배치해서 왜 빌런 킬러를 노렸을까?"

차우진은 그런 별명이 자신에게 붙었다는 건 안다.

"복수가 목적인가?"

아닐 수도 있다.

"빌런 킬러가 방해될까 봐 미리 제거하려는 건가?"

그 경우라면 적의 목적은 따로 있어야 한다.

"어쩌면 하이에나와 연결됐을 수도 있는데…."

멸망한 세계에는 하이에나라고 불리는 강력한 약탈자 그룹이 있었다. 박창수는 그놈들과 싸우다 죽었다.

차우진은 예전에도 하이에나를 본 적은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봤던 놈이 지금도 청부업자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칼이나 휘두르던 청부업자와, 빌런 킬러를 노린 저격수는 느낌이 좀 다르다.

체포된 석궁 저격수를 경찰이 조사해서 뭔가 알아내면 좋지만, 그것만 기대할 순 없다.

상대는 빌런 킬러를 찾으려고 진소영을 미끼로 썼다.

"나도 미끼를 써야겠는데…."

그러려면 미끼로 쓸 놈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은 많다.

"여름이하고 약속한 것도 지켜야지. 기다릴 텐데."

***

차우진이 곽민지를 만났다.

"너 요즘 바쁘냐?"

곽민지가 불만을 말했다.

"엄마가 변했어요!"

"왜?"

"이제 학원에 가기 싫으면 안 다녀도 된다더니!"

곽민지는 학원에 가다가 납치된 적이 있다. 범인들의 목표는 곽민지가 아니라 곽수혁 팀장이었다.

그때는 차우진이 구해주었다.

그 후로 곽민지는 학원에 억지로 가지는 않았다.

곽민지의 입이 삐죽 나왔다.

"그때 약빨이 떨어졌나 봐요. 다시 학원 가래요."

"네 성적 문제가 심각해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냐?"

"아직 고3도 아닌데."

"넌 그러다 고3이 되면 아무것도 안 보이겠다."

"네? 왜 안 보여요?"

"눈앞이 캄캄할 테니까."

"에이. 설마요."

"너 시간 되면 누구 좀 만나달라고 하려고 했더니."

"오늘 세나 만나서 놀기로 했는데."

"음…. 셋 다 동갑이니까 같이 보면 되겠네."

***

박여름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와! 대박! 진짜 곽민지야! 안녕하세요! 팬이에요!"

곽민지도 신났다.

"와. 저도 팬이랑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김세나가 차우진의 옆에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쟤들은 동갑끼리 왜 저런대요?"

"넌 저기 안 끼냐?"

"얘들 노는 곳에 굳이."

"너도 동갑이야."

김세나가 커피를 홀짝였다.

"커피 맛있…. 쓰다."

"치즈불닭볶음 먹으랬더니."

"언니가 그러는데요. 커피의 쓴맛을 알아야 인생을 안대요."

"세린이가 인생을 논할 나이는 아니지 않냐?"

"제 말이 그거라니까요."

"근데 너랑 민지랑 같은 학교라고?"

"서울로 전학 왔더니 학교에 민지가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곽민지와 박여름은 꺅꺅거리면서 수다를 떨었다.

"여름아! 너 원래 꿈이 가수였어?"

"응! 너도 그렇지?"

"난 아닌데?"

"어?"

곽민지가 말했다.

"난 아저씨가 가수 해보라고 등 떠밀었어. 근데 해보니까 되더라고."

"아저씨라니?"

"저기 있잖아."

박여름이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가수가 그냥 등만 떠밀면 돼?"

"아저씨가 노래도 만들어줬어. 무지개 고백."

"어? 그건 네가 작곡한 거 아냐?"

곽민지는 그 문제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하긴 했는데,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노래가 나온 거야. 그래서 내가 만든 게 맞는지 난 아직도 긴가민가해."

"와…. 그러니까 저 아저씨가 프로듀서?"

"응."

김세나가 슬그머니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언니네 노래, 논스톱 걸. 그거 민지가 만들 때도 아저씨가 프로듀싱 다 했어."

"우와아!"

차우진이 손을 흔들었다.

"두 곡 다 민지가 만든 거야. 난 그냥 그걸 좀 더 빨리 꺼내게 도와준 것뿐이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나왔을 노래야."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그 노래들을 만들었다.

다만, 곽민지의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 노래들이 이번에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박여름이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 저도요!"

"응?"

"저도 꿈이 가수예요! 전에는 연습도 엄청 했어요."

"지금은?"

"몇 년 전부터 건강에 문제 생겨서 병원 다니느라 제대로 못 하고 있죠."

"어…. 넌 일단 건강부터 회복하자. 지금 상태로는 가수 할 체력이 안 돼."

"앗! 네! 잘 먹고 열심히 회복할게요!"

"너 치즈불닭볶음 좋아한다며? 많이 먹어."

박여름이 말했다.

"이건 제가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응?"

"이건 오빠가 좋아해요."

"아…. 창수 형. 이걸 또 속이냐."

234. 미끼 II

차우진은 박여름과 곽민지, 김세나 셋이 실컷 먹고 놀게 해주었다. 다 놀고 난 후에는 각자 집에도 데려다주었다.

곽민지와 김세나는 서로 가까운 곳에 산다. 그래서 둘을 먼저 데려다주었다.

박여름이 마지막이었다.

"저기 저 아파트예요. 고맙습니다."

"집이 멀진 않네."

***

차우진이 박창수를 만나 따져 물었다.

"여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치즈불닭볶음이 아니라던데?"

"그건 내가 좋아하지. 그리고 여름이도 잘 먹어."

"주면 잘 먹긴 하는데, 자기가 먼저 먹자고 한 적은 없다더라."

"어쨌든 잘 먹잖아."

"와. 이…."

"왜?"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는 동생이 치즈불닭볶음을 좋아했다면서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때는 치즈를 구할 곳이 없어서 결국 만들지 못했다.

"요리 하나에 동생을 팔 줄이야."

"무슨 소리야?"

"치료비는 충분한가 해서."

"군대에 있을 때는 부족했지. 군인 월급으로는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전역했다."

"지금은 돈 좀 버나?"

박창수가 자랑했다.

"밖에 나와 보니까 내 기술이 돈이 되더라. 치료비는 물론이고 해외여행도 갈 만큼 돈이 잘 들어와."

"일은 잘되고? 이 시기에는 보안점검 일을 하지?"

차우진은 박창수가 이맘때 무슨 일을 했는지 안다.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에게 들었다.

"어. 외부에서 침입할 경로를 찾아내고, 그걸 어떻게 보완할지 알려주는 거."

박창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래서 네가 내 이야기를 들은 건가? 너 SL 제약 이사잖아. 내가 저번에 그 공장 보안점검을 했었지."

"저번에 언제?"

"거기 보안사고 터진 후에?"

"아. 그 사건이 터진 이후구나."

SL 제약 성기호 사장은 딸인 성혜리와 아들인 성준혁을 자녀로 두고 있다.

그중에서 성준혁은 군 복무 중에 휴가를 나왔다가 공장을 폭파하려는 놈들에게 이용당했다.

그때 일을 꾸민 건 라이프레인 제약 이사 백희선이다.

그 사건은 차우진이 공장과 성준혁을 모두 구해주면서 마무리됐다.

차우진이 말했다.

"형이 원래 그런 걸 잘했지."

멸망한 세계에서는 수색과 탐색, 침투 모두 차우진이 박창수보다 잘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런 건 처음에는 박창수에게 배웠다.

전투 기술도 마찬가지다.

차우진은 여러 생존자 커뮤니티에서 전투 기술을 추가로 배우거나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기술을 처음에 가르쳐준 사람도 박창수였다.

박창수가 말했다.

"네가 왜 날 이렇게 잘 아는지 모르겠는데, 이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련다. 넌 나쁜 놈은 아니더라고."

"나쁜 놈 아닌 건 어떻게 알았어?"

"여름이가 그러는데, 네가 민지 노래 프로듀싱했다며?"

"그것만 가지고 판단한 건가? 뭔가 좀 부족한데?"

"그리고, 네가 나쁜 놈이면 유리 씨 손에 이미 예전에 죽었을 거 같아서"

"어…. 누나가 눈 돌아가면 무섭긴 하지."

차유리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뭐야. 둘이 내 욕했어?"

"누나는 왜 추리닝 입고 오냐?"

"오늘은 체육관 가서 제대로 붙어보려고."

박창수가 큰소리쳤다.

"오늘은 안 봐줄 겁니다."

"예이. 예이. 그런 말은 맞기 전에 실컷 하세요."

차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누나랑 창수 형은 정말…. 이것도 다 그대로구나."

***

차우진은 빌런 킬러를 노리는 놈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놈을 찾아낼 정보가 없다.

"역시 미끼가 필요해."

상대가 먼저 신인배우 진소영을 미끼로 써서 차우진을 저격하려 했다. 그래서 차우진도 미끼를 써서 상대를 찾아낼 생각이다.

그런데 적당한 미끼가 없었다. 미끼부터 찾아야 한다.

차유리가 툴툴대면서 집에 들어왔다.

"아오. 그 새끼들. 확 다 쓸어버리고 싶다."

"누구?"

"약쟁이 새끼가 약 처먹고 칼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려서 잡았는데, 봐라. 여기 다친 거."

차우진이 차유리를 보았다. 팔에 멍이 살짝 들어 있었다.

"그놈이 칼을 휘둘렀다며?"

"넌 내가 칼에 맞았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그냥 물어본 거야. 그리고 팔에 그 멍은 창수 형이랑 주말에 데이트하다 생긴 거 아냐?"

지난 주말에 차유리와 박창수는 체육관에서 만났다.

"데이트는 아니고 누가 더 잘 치는지 알아본 거야."

"어쨌든 창수 형 때문에 생긴 멍이잖아."

"공식적으로는 그 약쟁이 새끼 때문에 생긴 거야."

"핑계가 필요한 거 보니까 또 어디 부러뜨렸구나."

"손가락 두 개밖에 안 분질렀다. 칼을 빼앗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이번엔 살살 했네."

"그치? 살살 했지? 근데 왜 내가 또 한소리를 들어야 하느냐고!"

차유리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가 벌렁 드러누웠다.

"그 새끼한테 약을 판 약팔이 새끼들을 다 잡아서 팔다리를 분지르고 싶다."

"약을 누가 팔았는지는 알아?"

"퍼시픽뉴월드파. 그놈들이 제일 유력해."

"국제적으로 파는 놈들인가?"

"이름만 국제적이야. 조직원은 열 놈도 안 돼."

"증거는?"

"있으면 벌써 잡아들였지."

"그놈들 어디 살아?"

***

퍼시픽뉴월드파는 마약을 수입해서 판다.

두목인 송성구가 말했다.

"옛날처럼 돼지 축사 옆에서 약을 만들 필요가 없다니까? 그냥 수입해서 팔면 간단한데 뭐하러 돼지똥 냄새를 맡아?"

"맞습니다. 형님."

"세상 참 좋아졌지. 그런데 여전히 안 좋은 것도 있어. 한 새끼라도 걸리면 그거 덮는 데 돈이 참 많이 들어."

송성구가 서늘한 눈빛으로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이번에 난동 부리다 잡힌 새끼가 우리 약을 처먹었다고?"

"원래 약을 먹은 새끼들이 자주 그러…."

송성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잡혔잖아! 안 잡혔어야지! 그리고 잡혀도 기사가 안 나게 조용히 잡혀야지! 이거 수습하려면 또 뒷돈을 얼마나 처먹여야 하는지 알아?"

차우진이 말했다.

"나야 모르지. 이번엔 얼마나 먹일 거냐?"

송성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화를 냈다.

"뭐? 이 새끼가 감히 나한테 반말을…."

그는 멈칫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모자까지 쓴 사람이 그들의 아지트에 들어와 있었다.

송성구가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너 누구냐?"

"저승사자."

"뭐? 미친 새끼."

그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야. 저 새끼도 약 좀 했나 보다. 뭐해? 다리 한 짝 끊어놓고 끌고 와! 반항하면 죽여!"

퍼시픽뉴월드파 조직원들이 즉시 칼을 뽑았다.

차우진이 옆에 굴러다니던 막대기를 발로 툭 찼다. 막대기가 똑바로 섰다.

차우진이 그걸 잡으며 끝부분을 발로 밟았다. 끝이 사선으로 부러졌다.

"다들 눈동자를 보니까 약 기운이 남아 있나 본데, 그러면 맞을 때 좀 덜 아픈가?"

"흐흐. 이 새끼야. 너 다리 잘리고 나면 네가 알려…."

차우진이 막대기를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던졌다.

짧아진 막대기가 마치 창처럼 날아가 조직원의 옆구리에 푹 꽂혔다.

"끄아악!"

차우진이 앞으로 뛰었다. 적이 창을 맞고 고꾸라졌다. 넘어지는 놈의 손에서 칼을 잡아챘다.

"아홉? 하나는 지금 잡았으니까, 여덟 남았네?"

송성구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습격이다! 죽여!"

차우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를 향해 달려들려던 놈의 몸에 칼을 푹 꽂았다.

"컥!"

그 칼을 뽑아 뒤로 던졌다. 뒤에서 덤비던 놈도 칼을 맞고 나자빠졌다.

"으악!"

차우진이 앞에서 넘어지는 놈의 손에서 다시 칼을 빼앗았다.

다른 놈들은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차우진이 물었다.

"뭐야? 왜 더 안 덤벼?"

송성구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너, 너, 누, 누구냐!"

"저승사자라니까."

"누가 보냈어!"

"난 혼자 일해."

"그래도 누가 청부를…. 어? 헉!"

송성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자, 잠깐. 혼자 일하는 저승사자? 서, 설마 빌런 킬러?"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웃는 소리가 복면 밖으로 슬쩍 흘러나왔다.

"다들 죽기 전에 날 그렇게 부르더라?"

"히익! 쳐! 죽여!"

이제는 그런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이미 세 놈이 차우진에게 덤볐다가 순식간에 당했다. 칼만 흔들던 놈도 막대기가 몸에 꽂힌 채로 고꾸라졌다.

거기다 빌런 킬러라는 별명도 들었다.

상대는 하나뿐이고 조직원은 송성구 외에도 다섯이나 있다. 그런데도 조직원들은 주춤거리다가 앞다투어 도망쳤다.

"으아아!"

송성구도 도망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차우진을 죽이라고 명령하자마자 제일 먼저 도망쳤다.

차우진이 도망치는 놈 중 하나를 덮쳐 칼을 꽂았다.

"아악!"

그러면서 그놈의 칼을 빼앗아 다른 놈을 다시 덮쳤다. 칼이 조직원의 등에 꽂혔다.

"케엑!"

그러는 사이에 나머지 놈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퍼시픽뉴월드파 조직원 아홉이 이곳에 있었다. 그중에 탈출한 건 두목인 송성구와 조직원 셋이다.

차우진은 조직원 셋은 도망치게 놔두었다. 빌런 킬러에게 당했다는 소문을 낼 놈이 필요했다.

그는 도망치는 송성구를 따라갔다.

"미끼는 역시 약쟁이가 좋겠어."

***

서늘한 목소리가 물었다.

"빌런 킬러가 나타났어?"

윤재철 실장이 보고했다.

"예. 퍼시픽뉴월드파를 습격했답니다."

"왜?"

"마약에 취한 놈이 난동을 부렸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 마약을 공급한 곳이 퍼시픽뉴월드입니다."

"뉴스 때문에 그놈들이 노출됐군. 빌런 킬러는 약쟁이들을 선호하니까, 뉴스를 보고 덮쳤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빌런 킬러 짓인 건 확실한가?"

윤재철이 설명했다.

"다섯이 당했지만, 두목과 부하 셋이 탈출했습니다. 도망친 놈들의 말을 들어보면 빌런 킬러가 확실합니다."

상대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빌런 킬러는 서해안 사건 때도 두목을 결국 찾아내서 처리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걸 이용해야지."

윤재철 실장이 물었다.

"두목을 미끼로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빌런 킬러가 미끼를 잡으러 오면, 그때 그 새끼를 죽여."

"알겠습니다."

"이번엔 확실하게 처리해. 저번처럼 어설프게 저격수 몇 놈 보냈다가 거꾸로 당하지 말고."

윤재철이 장담했다.

"이번엔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내 윤 실장만 믿지."

***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성구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윤재철 실장이 대답했다.

"별장을 준비했습니다."

"별장?"

"거창한 건 아니고, 조용하고 외진 곳에 있는 단독주택입니다. 마당도 있습니다."

송성구가 불평했다.

"내가 주기로 한 돈이 얼마인데 겨우 그런 곳에…."

"그곳에 술과 약, 식량까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깟 술이 중요해? 난 안전한 보호를 원해서 그 많은 돈을 내기로 한 거다."

"그 집에서 사장님 혼자 지낼 테니까 그곳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만?"

송성구는 조금 당황했다.

"어? 나 혼자? 그래도 누가 지켜줘야…."

"지켜주는 놈들은 믿을 수 있습니까?"

송성구가 잠깐 생각하다가 투덜댔다.

"하긴. 경호원 한두 놈 배치해봤자 빌런 킬러에게 들키면 다 죽겠지."

윤재철 실장이 입을 털었다.

"오히려 그 한두 명이 실수하면 위치가 노출될 확률만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사장님 혼자 있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바로 뒤에 차가 한 대 더 따라왔다. 그 차는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성구의 차였다.

윤재철 실장이 설명했다.

"이 집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다가, 조용해지면 나오시죠."

송성구가 집을 둘러보며 불평했다.

"여기 갇혀 있으라고?"

"사장님 차도 여기 둘 테니까, 벗어나고 싶으면 언제든 직접 운전해서 떠나도 됩니다."

"그래?"

윤재철 실장이 단서를 달았다.

"다만, 그러면 사장님의 안전은 우리가 보장 못 합니다."

"끄응…."

송성구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윤재철의 말처럼 술이 쌓여 있었다. 소주는 박스로 있고, 위스키나 코냑처럼 독한 술도 많았다.

"약은?"

윤재철이 한쪽을 가리켰다. 탁자 위에 다양한 약이 올려져 있었다.

"종류별로 준비해뒀으니 취향껏 쓰십시오."

"레드 크리스털도 있나?"

"그건 요즘 공급이 없어서."

"끄응. 밥은 어떻게 하지?"

윤재철 실장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과 냉동식품은 여기에. 그리고 라면과 과자, 육포 등등은 저기에 있습니다. 즉석밥도 많습니다."

송성구가 물었다.

"술과 약은 있는데…. 여자는?"

윤재철이 피식 웃었다.

"여자를 부르시게? 그러다 노출되면 빌런 킬러에게 들켜서 죽을 텐데?"

"그냥 해본 소리다."

윤재철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차에 타기 전에 말했다.

"잔금은 7일 후에도 살아 있으면 지불하시죠. 떼어먹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갑니다."

송성구는 그 말에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선금으로 이미 1억을 주었다. 잔금 2억은 그가 살아 있어야 줄 수 있다.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성구가 히죽 웃었다.

"그럼 7일 후에 보자고."

***

윤재철 실장이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물었다.

- 미끼는?

"덫에 세팅했습니다. 7일짜리입니다."

235. 덫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석구는 외딴집에 혼자 남았다.

송석구의 차는 집 앞 공터에 주차했다. 그 차는 윤재철 실장의 부하가 몰고 왔다.

부하는 이번에는 윤재철이 몰고 온 차를 운전했다.

윤재철이 뒷좌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말했다.

"덫은 준비했고, 미끼도 세팅했으니까, 이제 사냥감만 걸리면 되는데…."

이 덫은 7일짜리다. 그때까지 빌런 킬러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송성구의 차를 저 집에 뒀으니까, 알아서 찾아오겠지."

부하가 운전하며 물었다.

"실장님. 어디로 갈까요?"

"가긴 어딜 가."

"예?"

윤재철이 스마트폰에 지도를 띄워 장소를 찍었다.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이었다.

"여기로 가자."

"여기는 산속인데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 목격자도 없지. 그래서 여기로 가는 거야. 차를 숨기고 대기해야 하니까."

***

송성구가 숨어있는 집은 주변에 다른 주택이 없다. 옛날에는 근처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잡초만 무성했다.

윤재철의 짐작처럼 차우진은 이곳을 쉽게 찾아냈다. 퍼시픽뉴월드파를 습격했을 때 송성구의 차에 위치추적기를 붙여두었기 때문이다.

윤재철의 예상과 다른 건, 차우진이 이곳을 너무 빨리 찾아냈다는 것이다.

차우진은 윤재철이 여기 올 때 부하가 운전하던 차에 타고 있었다. 혼자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침투하는 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쉬웠다.

그는 이곳에서 송성구와 윤재철의 대화도 엿들었다. 윤재철이 누군가에게 전화로 보고하는 것도 보았다.

차의 창문에는 모기장을 붙여놔서 공기는 잘 통했다. 하지만 승용차에서는 두 다리를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캠핑용 텐트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제가 가서 사 올까요?"

"이 새끼가? 그럼 나 혼자 여기서 지키고 있으란 거야?"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야. 소리 키워봐."

부하가 무전기의 소리를 키웠다. 송성구가 보는 TV 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다.

송성구가 욕하는 소리도 들렸다.

- 씨발. 케이블 TV 정도는 깔아줘야 할 거 아냐. 이 새끼들은 1억이나 처먹고 어떻게 인터넷도 안 깔아놔?

윤재철이 욕을 했다.

"저 새끼는 우리보다 편하게 지내면서 불평만 하네? 그리고 그런 외진 집에 인터넷을 왜 깔아?"

- 라면도 이제 지겹다.

"저 새끼는 직접 요리하라고 식재료 채워줬는데도 라면만 처먹고 있네. 저런 새끼가 두목이니까 조직이 망하지."

송성구의 목소리는 술에 취해 있었다.

- 씨발. 빌런 킬러는 왜 나를 노리는 거야? 나보다 약 많이 파는 새끼가 쌔고 쌨는데 왜 약한 나를 괴롭히냐고.

윤재철이 조수석 의자를 뒤로 최대한 눕힌 후에 말했다.

"야. 나 잘 테니까 다른 소리 들리면 깨워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실장님. 지금 주무시면 혹시 야간에 교대를…."

"이 새끼가?"

"당연히 밤에도 제가 하겠습니다."

***

차우진은 그 산의 좀 더 높은 곳에서 두 놈이 숨어있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잘 숨긴 했네. 찾는 데 오래 걸렸네."

차우진은 윤재철이 이 산으로 이동할 때는 그 차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윤재철이 뒷좌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이틀간 이 차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목격자와 마주치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해서 돌아다니느라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너희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좀 들어보자."

차에 두 명만 있다 보면 심심해진다. 그들은 통신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았다.

몸으로 할 게 없으면 입으로라도 떠들기 마련이다. 그들의 잡담에는 어떤 덫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들어 있었다.

***

차우진이 그날 밤에 송성구가 숨어있는 외진 주택 앞에 나타났다.

차우진이 윤재철 실장이 있는 쪽을 힐끗 보았다. 실장은 산 너머 먼 곳에 있어서 이곳을 직접 볼 수는 없다.

"나한테 노출되지 않으려고 너무 멀리 가서 숨었어. 그래도 무전기에만 의지할 게 아니라 관측할 방법을 남겨놨어야지."

차우진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큼직한 돌을 집었다. 그걸 거실 유리를 향해 던졌다.

대형 유리창이 돌에 맞아 완전히 박살 났다.

"스트라이크."

송성구는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다가 유리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누, 누구야!"

차우진이 거실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겨우 여기까지 도망쳤구나?"

차우진이 지금 쓰고 있는 복면과 모자는 며칠 전에 퍼시픽뉴월드파를 습격할 때 쓴 것이다.

송성구는 기겁했다.

"히익! 너, 너는 저번에 그!"

차우진이 소파에서 일어나는 송성구를 앞차기로 밀어 찼다.

"저승사자다."

"컥. 빌런 킬러."

***

무전기와 연결된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졸고 있던 부하가 화들짝 놀랐다.

"시, 실장님! 떴습니다!"

옆에서 자던 윤재철이 벌떡 일어나다가 머리를 차 천장에 박았다.

"으악! 씨발! 진짜야? 맞아?"

"두목이 빌런 킬러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걸렸구나! 소리 키워!"

부하가 헤드셋 코드를 뽑았다. 무전기의 스피커를 통해 대화가 들렸다.

송성구가 소리를 질렀다.

-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한국에서 나만 약을 판 것도 아니잖아!

- 지옥에 가서 먼저 간 놈들에게 물어봐라. 네가 왜 불구덩이에 떨어졌는지.

윤재철이 인상을 썼다.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죽이려나 본데?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답군."

"어떻게 할까요?"

"우선 대화가 가능한 놈인지 봐야지."

윤재철이 무전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런 후에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어이. 빌런 킬러."

***

실내에 있는 스피커에서 윤재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이. 빌런 킬러.

송성구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 대단한 분을 이렇게라도 만나니 반갑구만.

차우진이 일부러 혀를 찼다.

"쯧. 함정인가?"

함정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가 알고 있었다는 걸 몰라야 한다.

- 빌런 킬러. 난 대화를 원한다.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그래? 들어보지."

- 국내 마약조직의 정보를 제공하겠다. 원한다면 살인마에 관한 정보도 있다.

"왜?"

- 이유가 중요한가? 넌 그런 놈들을 전문적으로 죽이는 킬러니까, 그걸 주겠다는 거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나를 사냥개로 쓰겠다?"

- 물론 공짜는 아니다. 대가는 코인으로 지불하지. 충분히 많이. 예를 들면, 거기 있는 놈의 모가지는 1억. 어때?

송성구가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당신이 나를 지켜줘야지! 내가 선금으로 1억이나 줬잖아!"

- 그 1억이 네 모가지 값이지.

"야 이 개새끼야! 감히 나를 속여?"

- 같은 개새끼끼리 욕은 하지 말자고.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날 믿지는 않을 테니까, 보험을 원하겠군."

- 물론이지. 네가 워낙 위험한 사냥개라서.

차우진이 이 대화를 받아주는 건 이런 걸 통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보험을 원하지?"

- 얼굴 사진 한 장 정도?

"내가 얼굴 까는 걸 싫어해서."

윤재철이 경고했다.

-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

"내가 원래 혼자 일하는 성격이야. 난 아무도 믿지 않아."

- 어이. 빌런 킬러. 넌 선택권이 없어. 내 제안을 거절하면 넌 죽는다.

"나를 죽이는 데 실패하면 네가 죽어. 알잖아."

- 하하하. 실패할 수가 없지. 넌 지금 죽을 테니까. 협상은 결렬이군.

"몇 놈이든지 상관없으니까 와라. 전부 상대해 주마."

윤재철이 웃었다.

- 흐흐.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쓸 필요가 있나?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데.

딸각 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렸다. 곧바로 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 집에는 작은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그 폭탄 SL 제약 공장에서 터트리려던 것과 비슷한 무선 기폭장치를 사용했다.

그런데 터트리는 건 화약이 아니라 가스였다.

무선 신호가 수신되자마자 기폭장치가 작은 가스통을 터트렸다. 그 폭발이 가스통과 붙어 있던 플라스틱 기름통을 찢었다. 기름통이 찢어질 때 기름이 넓게 흩뿌려졌다.

제일 먼저 현관과 거실 창문이 불길에 휩싸였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초였다.

불길은 기름을 타고 빠르게 퍼져 순식간에 집 전체를 뒤덮었다. 애당초 그렇게 불타도록 윤재철이 부비트랩을 세팅해뒀다.

퍼시픽뉴월드파 두목 송성구가 탈출하려면 처음 폭발음이 들리고 나서 2초 안에 거실 창문을 통해 탈출해야 했다.

그건 불가능했다. 2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것조차 어려운 짧은 시간이다.

송성구가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

윤재철이 사용하는 무전기에서는 치지직 소리만 났다. 폭탄이 터지고 화재가 집안 전체로 번지면서 건물 내부의 모든 장비가 망가졌다.

무전기가 망가지기 직전에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무전기도 불길에 휩싸여 망가졌다.

부하가 물었다.

"해치웠을까요?"

"집 전체가 불구덩이가 됐는데 거기서 살면 그게 사람이냐? 당연히 죽었지."

"혹시 눈치채고 빠져나갔으면…."

"내가 폭파 버튼을 누르면 폭탄은 즉시 폭발한다. 불길이 탈출 가능한 경로 두 개를 차단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2초. 사람이 어떻게 빠져나간다는 거냐?"

"역시 실장님은 기술이 좋으십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철수합니까?"

"가서 잘 터졌는지 확인은 해야지."

외딴곳의 집이라도 불이 나면 소방차는 출동한다.

소방차 몇 대가 달려와 집에 물을 뿌렸다.

그 집은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조립식으로 지어졌다. 건축자재에 기본적인 방염처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염처리만으로는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걸 막을 수 없다.

소방차가 화재를 진압했지만 남은 건 잿더미뿐이었다.

윤재철이 200m쯤 떨어진 곳에서 화재 진압 현장을 보며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처리했습니다."

- 탈출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가 대화하는 도중에 폭탄을 터트렸습니다. 빌런 킬러가 아무리 대단해도 저곳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 돈에 움직이는 놈이던가?

"좋은 조건을 제안했습니다만, 고려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 예전 일들은 누가 시켜서 한 건 아니겠군.

"예상대로 독고다이였던 것 같습니다.

- 알았다. 단서는 모두 폐기하고 복귀해.

"알겠습니다."

윤재철이 통화를 마쳤다.

부하가 물었다.

"저기, 실장님. 아까 빌런 킬러에게 제안하신 건…."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이면 사냥개로 잠깐 쓰다 삶으려고 했지. 실력은 확실하잖아."

"아…."

"덤으로 뒤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보려고 떠본 거였다. 누가 더 있으면 그놈도 처리해야 하니까."

"역시 실장님은 계획적이시군요."

"가자."

"알겠습니다."

윤재철이 지시했다.

"가는 길에 저수지에라도 들러."

"저수지는 왜…."

"무전기랑 대포폰 버려야지."

"역시 철저하십니다. 알겠습니다."

***

차우진이 멀어지는 차를 보며 말했다.

"대가리는 언제 만나러 가려나. 난 그놈 얼굴을 봐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