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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박창수가 옆을 보았다.

"뭐지?"

그쪽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는 소리와 빛을 보고 그게 뭔지 깨달았다.

"섬광탄?"

박창수가 그 방향을 보며 궁리했다.

"저기로 가면 나한테 총을 쏘면서 쫓아오던 그 새끼들이 있겠지?"

박창수가 섬광탄이 터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오케이. 그럼 나는 이쪽으로."

걸음이 꽤 빨랐다.

218. 던지기

차우진은 숲에 들어와 오필리아를 잡을 때까지 전투를 여러 번 치렀다.

총소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의 총기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데다가 총탄도 아음속탄을 사용했다. 총에 저소음 개조까지 되어 있어서, 숲 밖에까지 총소리가 퍼지지 않았다.

폭탄은 달랐다.

무전기 폭탄이 여러 개가 터졌다. 섬광탄도 신전 안에서 하나, 밖에서 하나가 터졌다.

섬광탄은 원래 실내에 있는 적을 강력한 빛과 소리로 무력화시키는 무기다.

무전기 폭탄의 소리도 꽤 컸지만, 섬광탄의 소리가 더 컸다. 오필리아가 쓴 건 소형 섬광탄이지만 그 소리는 한밤중에 숲 밖에까지 퍼졌다.

섬광탄이 터질 때 나온 빛을 보고 그 소리까지 들은 사람이 경찰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다.

다만, 신고한 사람도 그 섬광이나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이상한 불빛과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신고했다.

스페인 경찰이 숲 속에 있는 신전에 도착한 건 2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들이 신전 앞에서 발견한 건 전신 방탄복을 입고 총과 칼을 가진 채로 죽은 놈들이었다.

"헉! 이게 뭐야!"

"지원 요청해! 중무장하고 오라고 해!"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구급차도 불러!"

***

박창수는 숲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섬광탄이 터진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도로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 도로를 걸으면서 지나가는 차를 얻어탈 생각을 했다.

"근데 내가 차를 세워달라고 하면…."

한밤중에 덩치 큰 남자가 숲 근처에 나타나면 차를 세워줄 사람은 많지 않다.

"얻어타지도 못할 거 괜히 내 위치만 드러내지 말고, 일단 걷자."

그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숲은 이미 한 시간 전에 벗어났다.

그러다 도로 맞은편에서 급히 달려가는 경찰차를 몇 대 발견했다.

"저 숲으로 가나?"

윤 형사와 연락이 되기 전에는 스페인 경찰과 접촉하지 않는 게 좋다. 어차피 반대 차선으로 달리는 경찰차를 뛰어가서 잡을 수도 없다.

대신에 주유소를 발견했다. 그 주유소로 걸어가다가 기름을 넣고 있는 택시를 발견했다.

"택시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박창수는 그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거기서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윤 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박창수가 곧바로 욕을 내질렀다.

"야! 넌 나한테 도대체 무슨 위험한 일을 시킨 거야!"

- 왜? 조사해 보니까 뭐 나왔어?

"총 맞아 죽을 뻔했다!"

윤 형사가 놀란 소리로 물었다.

- 어? 진짜로? 너 같은 베테랑이?

"한 놈이면 내 선에서 어떻게 해봤지. 근데 총 든 놈 다섯을 혼자서 어떻게 이겨!"

윤 형사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 너 혹시 목동 공개홀 폭파 사건의 범인을 찾은 거냐?

"아니. 그라나다 시에서 단서를 조금 찾아서 확인하러 갔지. 그러다 들켜서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근데 이 새끼는 내가 다쳤는지는 묻지를 않네?"

윤 형사가 뒤늦게 물었다.

- 다쳤냐?

"내 휴대폰이 다쳤다! 액정 다 깨졌어!"

- 야. 미안. 그거 모델이 뭐냐? 내가 수리비….

"최신형 울트라다!"

윤 형사가 말을 바꾸었다.

- 서울 오면 소개팅 시켜줄게.

그게 통했다. 박창수가 멈칫하다가 물었다.

"예쁘냐?"

- 사람은 얼굴이 전부가 아니다. 길게 만나다 보면 사람 자체가 더 중요해.

"그래서 예쁘냐고."

- 어….

대답이 어정쩡했다. 박창수가 화를 냈다.

"이 새끼가? 형사가 약을 파네?

-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나 해봐! 보고서부터 써야 하니까 빨리!

***

윤 형사는 박창수에게 들은 현장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회의 시작 전에 커피 마실 시간은 있었다. 그는 박창수에게 소개팅 약속을 했다.

"소개팅 안 해주면 내 허리를 접으려고 들 텐데…. 새로운 피해자를 어디서 찾지?"

어디서 사람을 구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의 눈에 민수연이 보였다. 민수연은 데이터 분석과 위치추적을 도와주러 왔다.

윤 형사가 민수연에게 물었다.

"저기, 소개팅할래?"

"누군데요?"

"내 친구."

민수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뇨. 안 할래요."

"어? 내 친구인 게 왜?"

"아니에요."

"아니, 날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는데 그게 문제야? 어? 가지 말고 설명을 해봐.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갔네."

윤 형사가 차유리에게도 물었다.

"차 형사. 소개팅할래?"

"난 나보다 약한 놈이랑은 안 만나."

"응? 앞으로 쭉 혼자 산다고?"

차유리가 윤 형사를 쓱 돌아보았다.

"윤 선배는 좀 치나? 확인해볼까?"

윤 형사가 한 걸음 물러났다.

"미안. 살려줘. 그리고 나 아니야. 내 친구인데…. 걔가 좀 친다."

"얼마나?"

"특수부대 출신이야."

차유리가 피식 웃었다.

"거기 출신인 남자 몇 명 소개받아봤는데, 나한테 안 되던데."

"걔는 다를 거야. 최정예였거든."

"그래? 그럼 자리 한 번 마련해봐요."

윤 형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케이. 그럼 카페와 레스토랑 중에 어디…."

"얼마나 잘 치는지 좀 보게."

"으응?"

***

단장은 신전에서 살아남은 채로 발견됐다. 총을 다리와 얼굴, 목에까지 맞았지만,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죽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스페인 의사가 형사에게 말했다.

"이 환자는 목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언제 깨어날까요?"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못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차우진과 싸운 놈 중에도 생존자가 있었다.

전신 방탄복을 입은 놈이 하나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확인사살을 하러 왔던 둘 중에 몸에서 무전기 폭탄이 터진 놈이었다.

무전기 폭탄의 위력은 방어구가 없는 사람 한 명을 겨우 죽이는 정도였다. 방탄복이 그 폭발 충격을 어느 정도 막아줘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놈도 워낙 중상이라 뭔가 진술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형사가 물었다.

"이쪽은 어떻습니까?"

"그나마 낫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니 기다리면 깨어나겠죠."

스페인 형사가 현지 경찰 간부에게 보고했다. 간부가 지시했다.

"병원에서 대기하다가, 깨어나는 대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

***

숲 속 검은색 신전에는 경찰이 몰려들어 단서를 찾느라 난리가 났지만, 그라나다는 조용했다. 그 사건은 아직 뉴스에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

파블로는 술을 마시고 아지트를 나왔다.

"흐흐. 그러면 그렇지. 이 파블로님이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지."

오필리아의 부하인 디에고는 내일부터는 파블로도 다시 수상한 사람을 찾는 작업에 나서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파블로가 잔머리를 굴렸다.

"내가 꼭 필요하단 말이지. 그러면 이번에는 돈을 더 달라고…."

차우진이 파블로의 뒤에서 말했다.

"임무가 바뀌었다."

파블로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어? 누, 누구냐!"

차우진이 디에고를 팔았다.

"집사 대신에 왔다."

"지, 집사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아. 너는 거기까지는 모르나?"

차우진은 디에고가 오필리아의 부하라는 것만 안다. 집사라는 호칭은 차우진이 대충 갖다 붙인 것이다.

차우진이 일부러 혀를 찼다.

"쯧. 정보를 너무 많이 줬군."

"무슨 소리야!"

"조만간 집사가 다시 너를 찾아가 구체적인 지시를 할 거다. 나는 너에게 미리 준비하라고 연락하러 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집사가 누구…."

차우진은 디에고의 이름을 모른다.

안다고 해도 말할 생각이 없다. 디에고가 파블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려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집사가 너에게 지난 며칠간 동선이 겹치는 사람을 찾으라고 했을 텐데?"

"아!"

파블로의 표정이 펴졌다.

"난 또 누구라고. 그분께서 보내셨군. 내일부터 내가 다시 순찰을 돌면서 수상한 동양인을 찾아볼 테니까, 안심하라고 해."

차우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임무가 바뀌었다고 했을 텐데?"

"어?"

"내일부터는 다른 일을 준비해라. 큰 건수가 있다는 말은 이미 들었겠지?"

파블로가 침을 꼴깍 삼켰다.

"듣긴 했는데, 큰 건수면 그러니까…."

"당연히 보수도 커야지."

"얼마나…."

"천만 달러."

파블로는 화들짝 놀랐다.

"헉! 처, 천만?"

"현금이 아니라 코인으로. 그래야 추적당하지 않으니까."

파블로도 코인이 뭔지 안다. 문제는 금액이다. 관광객을 조사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에 그런 돈을 줄 리 없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를 폭파하는 일이다."

파블로가 놀라서 더듬거렸다.

"어? 어?"

"그럼 설마 도둑질이나 하는데 천만 달러를 줄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거긴 지키는 사람도 많을 텐데 내가 어떻게…."

"연구소 직원이 없는 심야에 야간 경비원의 눈만 피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 그래?"

파블로가 눈알을 굴렸다. 일이 심각하긴 한데, 그에겐 천만 달러가 더 중요했다.

'한탕 크게 할 기회다.'

그가 결정을 내리고 물었다.

"이런 큰 건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저지르지?"

"나를 왜 믿나?"

"어?"

"구체적인 실행 계획, 그러니까 그 연구소에 어떻게 침투해서 어디를 폭파할지는 집사가 내일 만나서 알려줄 거다."

파블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늘 처음 본 차우진의 말만 믿고 쿠에르노의 연구소를 폭파할 순 없다. 이 제안 자체가 누군가의 함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에고가 내일 직접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에고가 시킨 일은 이미 여러 번 했기 때문에 함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당신이 왜 먼저 이 이야기를 해주는 거지?"

"쿠에르노의 연구소를 너 혼자 폭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 아니, 그건…."

"사람이 더 필요하다. 팀을 구성해라."

파블로가 듣기에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음 턱 놓고 큰소리쳤다.

"그런 거였군! 나만 믿으라고! 그 일을 할 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차우진이 디에고의 소지품에서 찾아낸 명함을 툭 던졌다. 파블로가 날아오는 명함을 받았다.

"이건?"

그건 검은색 십자가 여러 개가 그려진 검은색 명함이었다. 앞뒤를 뒤집어 봐도 글씨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뢰의 표시로 주는 명함이다. 가지고 있으면 쓸모가 있을 거다."

"흐흐. 알았다고. 내일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

"집사가 내일 너를 찾아갈 거라고 했을 텐데? 오늘 밤까지 팀을 구성해라. 내일 해도 되는 일이면 내가 지금 연락하러 왔겠나?"

"어? 아. 그렇겠지. 알았다고. 알았어. 참. 우리한테는 연구소를 폭파할 만한 폭탄이 없는데…."

차우진은 이미 파블로의 아지트 2층에서 기폭장치를 봤다.

"기폭장치는 가지고 있을 텐데?"

"그렇지. 집사가 준 걸 가지고 있지."

"거기 연결할 폭약은 집사가 줄 거다. 이미 가지고 있는 기폭장치는 그때까지 잘 관리해라."

***

파블로가 아지트로 돌아가 조직원 몇 명을 불렀다.

비슷한 수준의 놈들끼리 만든 그 조직은 두목이라고 할 놈이 없었다.

그래도 파블로의 목소리가 좀 큰 편이었다. 전부터 디에고를 통해 일감을 많이 따왔기 때문이다.

파블로가 따로 부른 네 명에게 쿠에르노 연구소 폭파 건수를 이야기했다.

다른 놈이 경계했다.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냐? 거기서 폭탄이 터지면 경찰이 난리가 날 텐데?"

"보수가 천만 달러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그래서 그거 할 놈?"

다들 신나서 손을 들었다.

"나! 내가 할 거다!"

"나를 빼면 안 되지!"

"난 방화 경력이 있어!"

"천만 달러면 평생 흥청망청 놀고먹잖아!"

신나서 손을 들었던 놈 중 하나가 말했다.

"잠깐. 우리가 다섯 명인데 천만 달러면…. 이백만 달러씩 나누는 거냐?"

"어? 그러면 평생 흥청망청 노는 건…."

"야. 이거 다른 놈들에게는 말하지 말자. 더 끼워주면 우리 몫만 줄어든다. 그 연구소는 우리끼리 폭파하자고."

"당연히 그래야지!"

모인 놈들이 서로를 보며 실실 웃었다. 그런데 다들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섯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셋이서 하면 나눠 먹을 게 많아지는데.'

'둘이서도 가능하지 않나? 한 명이 망보고, 한 명이 폭탄을 설치하고.'

'나 혼자 하면 천만 달러가 다 내 건데.'

***

파블로는 불러모은 놈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갔다.

"한 놈당 백만 달러씩만 나눠주면 되겠지?"

그는 천만 달러를 다섯 명이 공평하게 나눌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어차피 집사를 만나서 일을 받는 건 내가 하니까, 그 새끼들한테 얼마를 주는지는 내 마음이지. 불평하는 놈이 있으면 다음에 잘해준다고 하면 되잖아."

기분이 좋아진 파블로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밤이 너무 늦은 데다가 술을 많이 마셔서 잠이 금방 들었다. 창문도 활짝 열어놓은 채였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그 창문을 통과했다.

그가 파블로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술 냄새 봐라.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 이 정도면 점심때까지 못 일어나겠네.'

차우진이 파블로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겨 있었다. 해제하려면 패턴이 필요하다.

이 휴대폰 잠금에 어떤 패턴을 쓰는지는 파블로를 미행하면서 이미 확인했다.

차우진이 파블로의 스마트폰 전원을 끈 후에 그걸 비닐봉지에 넣었다.

'이제 쿠에르노 연구소로 가자.'

219. 던지기 II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는 그라나다 외곽에 있다. 최악의 식량난을 일으킬 비료 첨가제도 이 연구소에서 개발 중이다.

새벽 3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잠을 자는 시간이다. 당연히 일반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다.

이 새벽에 연구소에 남아 있는 사람이 몇 명 있긴 했다. 그들은 이 연구소를 지키는 야간 경비원이다.

차우진이 연구소를 외부부터 확인했다.

"빈틈이 참 많다. 그럼 나야 좋지."

인터넷에는 이 연구소의 바깥쪽은 물론이고 담장 안쪽에서 사람들이 촬영한 사진이 여러 장 돌아다녔다.

차우진이 연구소 담장을 건너뛰었다.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지만, 사각지대가 꽤 많았다.

담장과 건물 사이에는 공터가 충분히 있었다. CCTV를 피하며 건물 외벽을 살피는 건 쉬웠다.

경비원의 위치는 이미 확인했다. 연구소 정문 경비실에 근무자가 한 명이 있고, 1층 보안실에도 몇 명이 있었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그라나다 연구소는 커다란 건물 한 채로 지어져 있었다. 꽉 찬 직사각형이 아니라 'ㄷ'자 형태였다. 높이는 3층인데 넓이가 꽤 넓었다.

차우진이 연구소 건물 외벽에 폭탄을 하나 설치했다.

이 폭탄은 오필리아의 신전에서 찾아서 가져왔다. 거기에 폭탄이 많았다.

차우진은 폭탄을 설치한 후에 휴대폰의 전원을 켜고 쿠에르노의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가 사용한 건 청부업자인 파블로의 휴대폰이다. 파블로는 지금 술에 취해서 집에서 자고 있다.

차우진이 영어로 말했다. 목소리는 변조해서 녹음해둔 것을 썼다.

"쿠에르노 연구소에 폭탄을 설치했다."

경비원이 짜증을 냈다.

- 이봐. 한밤중에 이따위 장난전화를 해?

차우진이 녹음된 변조 음성중에서 적당한 걸 재생했다.

"장난인지 아닌지는 결과를 보면 알겠지."

- 뭐?

"건물에 설치한 폭탄이 많아. 먼저 하나 터트려서 사실임을 알려주지. 살고 싶으면 당장 그곳을 떠나라."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에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30초 후에 건물에 붙여둔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 외벽이 꽤 크게 부서졌다.

그 근처에 있던 유리창은 폭발 충격에 휘말려 모조리 박살 났다.

연구소의 경비원들이 즉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문 초소의 경비원이 그쪽으로 뛰어왔다.

건물에서 빠져나온 경비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밖으로 나가!"

"폭탄이 더 터진다!"

이제 건물 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내보냈다.

차우진은 공간이동 스킬을 써서 깨진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쿠에르노의 농업 기술 연구소는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 만든 기술이 나중에 대규모 식량난을 일으킨다. 다른 멸망급 재난이 터지면 피해는 극대화된다.

"이 새끼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어."

그러니까 그게 세상에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일하는 경비원은 죄가 없다. 그래서 폭탄을 하나만 터트려 그들을 건물 밖으로 쫓아냈다.

차우진이 귀에 조그마한 주황색 귀마개 두 개를 끼웠다. 주변 소음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차우진이 건물 1층 보안실부터 확인했다. 사람들이 뛰쳐나간 위치를 거꾸로 추적하면 보안실을 찾는 건 쉬웠다.

심지어 보안실 문도 열려 있었다. CCTV를 통제하는 장비가 내부에 있는 게 보였다.

그곳에 폭탄을 하나 던져넣었다. 폭탄이 바닥을 쭉 미끄러지면서 보안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너무 멀리 가지는 않았다. 연구소 내부에 CCTV가 많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먹통이 된 후에 움직이는 게 좋다.

잠시 후에 보안실이 폭발했다. 방 하나만 터진 게 아니라 보안실 주변이 다 터져나갔다.

"귀마개를 끼워도 시끄럽네."

귀마개를 했는데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차우진이 'ㄷ'자 형태의 연구소를 돌아다니며 연구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서버실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도 폭탄을 하나 붙여놓았다.

차우진은 1층부터 3층까지 오가며 실험실이나 연구실처럼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할만한 곳을 찾았다. 그런 후에 더 그럴듯한 곳에 폭탄을 달았다.

어디가 뭘 하는 곳인지 찾는 건 쉬웠다. 벽에 친절하게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샘플 보관실. 이건 꼭 없애야지."

그렇게 작업하는 사이에 서버실에 설치한 폭탄이 폭발했다.

건물이 흔들렸다.

그런데 흔들리는 정도가 심상치 않았다. 바닥이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그거 터트렸다고 벌써 건물이 이 상태가 된다고? 얼마나 부실하게 지은 거야?"

한국에 있는 딥어스테크의 연구소와 그 옆 건물도 부실공사로 지어졌다. 그건 그나마 보강작업이라도 했다.

부실하게 지어놓고 보강을 안 하면, 폭탄 몇 개에도 무너질 수 있다.

"좀 쫄린다."

그래도 남은 폭탄은 다 설치하고 빠져나가야 한다. 아직 확실히 처리해야 할 곳이 많았다.

폭탄이 하나 더 터졌다. 건물 상태가 더 나빠졌다.

차우진이 뛰었다. 뛰면서 폭탄을 여기저기 던져넣었다. 연구소 건물이 꽤 커서 부술 곳이 많았다.

차우진이 가져온 폭탄을 모두 던져놓은 후에 창문 쪽으로 뛰었다. 이미 모든 창문이 부서져서 어디로든 뛸 수 있었다.

폭탄이 또 터졌다. 이제 건물이 버티지 못한다는 게 느껴졌다.

차우진이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해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점프한 방향에는 몸을 숨기기 좋은 구조물이 있었다. 거기서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가기도 좋았다.

그가 빠져나간 후에 건물 내부에서 폭탄이 또 폭발했다.

건물 한쪽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차우진이 탈출한 곳의 반대 방향이었다. 그런데도 작은 파편이 그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차우진은 구조물을 방패 삼아 잠시 기다리다가, 쿨타임이 차자마자 공간이동으로 그곳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가 연구소를 빠져나간 후에도 폭탄이 몇 번 더 터졌다. 건물 여기저기가 펑펑 터져나가고 무너지다가, 내부 폭발을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붕괴했다.

차우진이 돌아서서 걸어가며 말했다.

"가져온 폭탄을 다 터트려도 버티는 거 아닐까 했는데, 생각보다 더 부실공사로 연구소를 지었네. 저긴 철근이 없나?"

경비원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가 탈출한 방향은 경비원들이 대피한 곳과는 완전히 다른 쪽이다.

"연구소가 완전히 무너졌으니까 연구 속도도 늦어지겠지. 저거 복구하려면 오래 걸릴 거다."

쿠에르노의 연구소는 여기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 연구소 중에 비료 첨가제 같은 제품의 연구는 모두 이곳에서 한다.

이 연구소는 이제 시료와 샘플, 연구 자료가 다 날아갔다. 건물이 붕괴했으니 장비도 남아난 게 없다.

그렇다고 저 연구소의 모든 연구 데이터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연구 자료 백업이 이 연구소 내부 서버에만 존재하면 좋지만."

보안 때문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데이터를 외부에도 백업해뒀을 수는 있지."

쿠에르노는 오늘 실험 중이던 샘플을 다 날려 먹었다. 그 샘플을 만들 장비도 전부 새로 주문해야 한다.

만약 외부에 백업 연구 자료가 있다 해도, 연구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시간을 좀 벌었으니까, 그 사이에 성수당바이오가 먼저 완성해서 특허를 내면 돼. 그렇게 시간을 또 벌고 나서 부작용까지 밝혀내면, 멸망급 식량난은 막을 수 있어."

그걸 위해 오늘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를 무너뜨렸다.

쿠에르노라는 회사는 돈이 되면 뭐든 하고, 필요하면 청부업자도 쓴다. 기술 기업을 계략으로 망하게 만든 후에 먹어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는 곳이다.

차우진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성수당바이오도 그런 식으로 망해서 흡수될 뻔했다.

그래서 그런 회사의 연구소를 날려버리는 건 하나도 미안하진 않았다.

***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가 새벽에 폭탄으로 날아갔다.

당연히 현지 경찰이 출동했다.

그라나다 시 경찰 간부가 현장에 도착해서 먼저 와서 조사 중인 형사에게 물었다.

"사상자는?"

"없습니다."

경찰 간부가 무너진 건물을 보며 물었다.

"저렇게 큰 건물이 폭삭 무너졌는데 사상자가 없다고?"

"테러 발생 시간이 새벽이었고, 폭탄을 터트린다는 경고가 먼저 있었답니다."

"그런 경고를 받았으면 경찰에 신고는?"

"범인이 경비실에 먼저 경고하고, 그 말을 믿지 않으니까 폭탄을 시범 삼아 하나 터트렸답니다. 경비원들이 놀라서 연구소 밖으로 탈출한 후에 건물이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경찰 간부가 인상을 썼다.

"끄응. 살인사건이 아닌 건 다행인데, 저렇게 큰 건물을 폭탄으로 무너뜨렸으니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군. 오늘 밤에는 왜 이렇게 큰 사건이 많…. 음? 잠깐. 오늘 밤?"

"왜 그러십니까?"

"우리 관할은 아니지만."

경찰 간부가 한쪽을 가리켰다.

"도시 밖에 있는 숲 속 건물에서도 몇 시간 전에 시한폭탄이 여러 개 발견됐는데…."

그가 무너진 연구소를 보며 물었다.

"여기엔 어떤 폭탄을 썼는지 알아냈어?"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서 아직 수색 작업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기폭장치 파편이라도 찾아. 비교해야 할 게 있다."

***

차우진은 파블로의 집으로 돌아왔다.

파블로는 술을 마시고 늦게 잠들어 아직도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차우진이 파블로의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그는 오늘 이 휴대폰으로 쿠에르노 연구소 경비실에 경고 전화를 했다.

차우진이 파블로에게 말했다.

"야. 고생해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그 집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

오필리아의 부하 중에는 두 명이 살아남았다.

단장은 오필리아가 쏜 총에 맞았지만 급소는 피해서 죽지는 않았다. 다만, 언제 깨어날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무전기 폭탄이 몸에 있을 때 폭발했다. 방탄조끼 덕분에 중상은 입었어도 죽지는 않았다.

그가 아침에 병원에서 깨어났다.

소식을 들은 형사가 달려왔다. 의사가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렸지만 형사가 질문을 쏟아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부하는 대답할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무전기를 터트렸는지는 안다.

"나까지 죽이려고…."

그럴 수 있는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당해보니 배신감이 컸다.

형사가 물었다.

"다들 누구에게 당한 거야?"

"누가 그놈을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성녀와 단장이 쿠에르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형사의 표정이 굳었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

"그건 모릅니다. 둘이서 그 대화를 할 때 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정확히는 못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쿠에르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역시 쿠에르노 연구소 폭파 사건과 관계가 있구나!"

***

스페인 경찰은 현장에서 경고 전화를 걸었던 휴대폰도 추적했다. 그 휴대폰이 연구소 근처에서 사용됐다는 건 밝혀냈다.

그런데 그 휴대폰은 파블로의 명의가 아니었다.

파블로는 청부업자다. 강력범죄도 저지른다. 그는 평소에도 스페인식 대포폰을 썼다.

그래서 휴대폰 명의자를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파블로를 찾아내기 어렵다.

대신에 그 휴대폰이 켜져 있으면 위치를 추적할 수는 있다.

경찰이 휴대폰의 위치를 추적해 파블로의 집 근처를 수색했다. 정확한 위치까지는 파악이 어려웠다. 그래서 의심 가는 집을 직접 조사했다.

형사가 파블로의 집 문을 두드렸다.

파블로가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뭐야?"

그가 현관으로 걸어가 밖을 슬쩍 확인했다.

전기 수리 기술자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파블로가 물었다.

"뭐요?"

"이 근처가 곧 단전될 겁니다. 그 전에 전기 문제로 점검할 게 좀 있으니까 문 좀 열어주시죠."

"난 됐으니까 가쇼."

전기 기술자로 위장한 형사가 경고했다.

"그러다 누전되면 집에 불납니다."

파블로가 인상을 쓰며 잠깐 고민한 후에 물었다.

"끄응. 전기만 보면 됩니까?"

"물론이죠."

파블로가 뒤를 보았다. 총은 숨겨져 있었다. 집안이 더럽긴 해도 약이 나와 있지는 않았다.

파블로가 문을 열어주었다.

"딱 전기만 보고 가쇼."

형사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실내를 빠르게 살폈다.

스마트폰이 보였다. 외형만 봐도 모델명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동일 모델의 사진을 여러 번 보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추적 대상 휴대폰과 같은 모델!'

형사가 작게 말했다.

"전화 걸어봐."

무전기를 통해 대답이 들어왔다.

- 지금 전화 걸었다.

파블로의 휴대폰이 소리를 내면서 진동했다.

형사가 짧게 말했다.

"덮쳐!"

밖에서 대기하던 스페인 무장경찰들이 즉시 집안으로 쳐들어왔다.

파블로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우와악! 뭐, 뭐야!"

형사가 외쳤다.

"생포해!"

"놔! 난 아니야!"

"저항이 심합니다!"

스페인 형사가 파블로를 걷어찼다.

"켁!"

"자폭하지 못하게 빨리 제압해야지! 이 새끼가 여기서도 폭탄을 터트리면 우린 다 죽는다!"

220. 던지기 III

차우진은 어젯밤에 오필리아와 부하들도 잡고,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도 폭파하고, 그걸 청부업자 파블로에게 몽땅 뒤집어씌웠다.

간밤에 한숨도 못 잔 차우진이 하품을 크게 했다.

"어제는 체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공간이동 스킬이나 시간 가속 스킬은 체력을 소모한다. 시력의 빠른 회복을 위해 사용한 상처 회복 스킬은 체력을 특히 더 많이 소모한다.

"배고파죽겠네."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 그래서 아침에 문을 연 식당을 찾아갔다.

그가 간 식당은 어제까지 갔던 곳이 아니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내가 스페인에 갔을 때 말이야. 밥이 먹고 싶어서 쌀밥을 파는 집으로 갔거든?"

"쌀밥?"

"빠에야에 쌀 들어가잖아."

"맛있어?"

"맛있지. 그라나다에 있는 집인데, 거기 빠에야가 진짜 맛있었어. 아. 다시 먹어보고 싶다."

입맛을 다시던 박창수가 물었다.

"우진아. 빠에야는 어떻게 안 되겠냐?"

"쌀은 가끔 구하니까 어떻게든 되긴 하겠는데, 다른 재료가…."

멸망한 세계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음. 양식 요리사가 있는 마을에 들르면 대체 조리법을 물어보자. 답을 알고 있을 거야."

박창수가 신나서 설명했다.

"그 집 빠에야는 말이야. 다른 집하고 달라. 일단…."

***

차우진이 빠에야를 그릇 바닥이 보일 정도로 긁어먹으며 말했다.

"창수 형 말대로 밥이 맛있다. 2인분 더 먹어야지."

차우진이 빠에야를 먹으며 주변을 슬쩍 보았다. 박창수는 보이지 않았다.

"창수 형이 혹시 밥 먹으러 이 식당에 올까 했는데, 좀 빠른 시기라 안 오나?"

어제 숲에서 본 사람이 박창수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뛰는 모습이 비슷하긴 했는데…."

차우진이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탐사팀이 일하는 현장에도 들르긴 해야지. 비행기 얻어탄 값은 해야 하니까."

***

박창수가 빠에야를 파는 식당으로 걸어가며 합동수사본부의 윤 형사와 통화했다.

"야. 어제 나한테 총 쏜 놈들은 잡았냐?"

- 창수야. 내가 유럽으로 휴가 간 너한테 부탁한 건 공식적인 수사가 아니잖아?

"그래서?"

- 우리가 정식 요청도 안 하고 조사했다는 게 알려지면, 네가 아무리 민간인이라도 외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신고를 안 했다.

"거기로 경찰차가 가던데? 섬광탄 터지는 것도 봤다."

- 무슨 일이 터지긴 했나 보더라. 그래서 그쪽에 수사 상황을 물어보고 있다.

"그래서 뭐 좀 알아냈어?"

- 아직 대답이 없네?

"넌 내가 한국 들어가면 보자. 허리를 접어버리려니까."

- 야. 내가 진짜 소개팅 잡아놨다니까?

"예쁘냐?"

- 넌 자꾸…. 그거 따지려면 거울부터 봐야지?

"야. 나 같은 얼굴은 예쁜 사람 만나면 안 된다는 거, 그거 편견이다. 사람이 사람 만나는 데 얼굴이 중요하냐?"

- 어…. 네 말도 맞는데, 문제는 너는 1차 예선에서 탈락….

"이 새끼가? 난 너 때문에 어젯밤에 총 맞을 뻔했어!"

윤 형사가 얼른 말했다.

- 야. 야. 일단 만나 봐. 사람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게 있잖아.

"음…. 그럴까? 장소는 뭐, 처음에는 가볍게 카페 정도면…."

- 체육관에서 보자는데?

"응?"

- 네가 특수부대 출신이라 잘 친다고 했더니, 얼마나 잘 치는지 보고 싶대. 한 판 뜨재.

박창수가 큰소리로 웃었다.

"음하하하. 재미있는 분이네. 한번 만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체육관에서 만나면, 내가 얼마나 살살 대해야 하냐?"

윤 형사가 조언했다.

- 최선을 다해야 할걸?

"어?"

- 살고 싶으면 그래야 돼.

***

차우진이 말했다.

"스페인 경찰이 파블로의 아지트는 털었으려나? 털 때가 됐는데."

딥어스테크와 마그마에너지 양쪽에서 일하는 박태우가 물었다.

"차 이사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불을 털 때가 돼서요. 그런데 박 실장님은 좀 퀭해 보입니다?"

박태우는 파인드스톤과 마그마에너지 양쪽에서 일한다. 그런데 한쪽 일을 반씩만 하는 건 아니다. 업무를 좀 조정하긴 했지만, 일은 결국 1.5배로 늘었다.

"낮에는 여기 와서 마그마에너지의 일을 하고, 밤에는 화상회의로 스톤파인더의 일을 합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런. 정 사장님이 너무하시네."

"차 이사님이 저를 도와주면 좀 낫…."

"그래서 오늘 준비는 다 됐다고요?"

"아, 네. 안 도와주실 거구나."

"난 아는 게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박태우가 앞쪽으로 손을 뻗으며 자랑했다.

"그래도 보십쇼. 최적의 위치를 선정해 충격파 발생기와 탐지기를 설치했습니다. 저 위치는 사장님이 본사에서 이쪽 데이터를 받아 직접 계산하신 겁니다."

"좋네요. 곧 시작하는 거지요?"

"30분 후에 본사 회의실에 임원들이 모이면, 현장 영상을 전송하면서 시작할 겁니다."

"그때까지 샌드위치라도 같이 드시죠?"

"네?"

"저기 많던데."

오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샌드위치를 넉넉히 사다 놓았다. 여기서는 밥 먹으러 식당에 갔다 오기 어렵다. 그래서 준비한 식사였다.

박태우가 물었다.

"차 이사님은 아침을 드시고 오셨다고 안 했습니까?"

3인분이나 먹고 왔다.

하지만 어제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그걸 다 채우려면 3인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늘은 배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먹어야 한다.

"공짜잖아요. 저 샌드위치."

"아, 예. 공짜….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있는 놈이라고 안 한 게 어디입니까?"

"하하하."

"'어이. 차 씨'라고만 부르지 않으면 됩니다."

"하, 하하."

***

파블로의 아지트를 스페인 경찰이 덮쳤다.

현장에 있던 조직원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모조리 체포됐다. 그곳에 없던 조직원들을 잡으러 간 형사들도 있었다.

형사들이 아지트 내부를 수색했다.

"폭탄 기폭장치다!"

"뭐? 어디!"

"2층입니다!"

"상태는!"

"폭약은 없습니다! 기폭장치만 있습니다!"

경찰 간부가 2층으로 뛰어 올라가 확인했다.

"이건…."

오필리아의 신전에서 폭약과 기폭장치 여러 개가 발견됐다. 차우진은 폭탄을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경찰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 아지트에는 기폭장치만 있었다. 그건 오필리아의 부하인 디에고가 미리 넘겨준 것이다.

차우진도 기폭장치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양쪽 기폭장치는 똑같은 설계로 만들어졌다.

"어젯밤에 그곳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기폭장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밖에 있던 형사가 뛰어와 보고했다.

"팀장님.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 말입니다."

"새벽에 폭파된 곳?"

"예. 거기서 폭발하지 않은 폭탄을 찾아냈답니다."

"그래? 사진 있어?"

"예. 여기 있습니다."

형사가 스마트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폭탄은 건물 잔해에서 찾아냈다. 외관은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형사가 설명했다.

"건물이 무너질 때 콘크리트 파편이 기폭장치를 망가뜨렸나 봅니다. 그래서 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 같답니다."

팀장이 그 사진 속 폭탄의 기폭장치와 지금 이곳에서 발견된 것을 비교해보았다. 기폭장치가 좀 부서져 있지만, 형태를 비교할 수는 있었다.

망가지지 않은 부분의 모양이 똑같았다.

"역시 이 새끼들이 범인이었어!"

***

마그마탐지시스템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땅속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후에 탐지기에 데이터가 쏟아졌다.

충격파 발생기와 마그마 탐지기는 육망성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육망성의 크기는 300미터쯤 됐다.

수집된 데이터는 가운데에 있는 중앙제어장치로 모였다.

모니터에 데이터가 주르륵 올라왔다.

"탐지기 정상 작동합니다!"

차우진이 그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쿠에르노 연구소에 폭탄 하나 남겨둔 건 찾았으려나."

그는 폭탄 중 하나는 일부러 기폭장치를 먹통으로 만들었다. 차우진은 전기 전문가다.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는 걸 살짝 고장 내는 건 쉬웠다.

그는 그걸 나중에 경찰이 찾기 편하라고 연구소 외곽에 설치했다.

기폭장치가 먹통인 상태라 그 위에 콘크리트가 떨어져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폭장치가 적당히 망가져서 이전 상태가 어땠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차우진이 파블로 패거리를 생각했다.

"그놈들이 연구소를 폭파하라는 청부를 날름 받는 거 보면, 전에도 그런 짓을 많이 했겠지. 스페인 경찰이 그런 것까지 다 찾아내면 좋겠는데."

***

형사가 파블로의 소지품에서 명함을 찾아냈다.

"이 명함에 새겨진 이 무늬 이거, 그거지?"

다른 형사가 맞장구쳤다.

"어젯밤 숲 속 그 건물 벽이랑 모양이 똑같아. 그 건물에도 검은색 벽에 검은색 십자가 여러 개가 그려져 있었잖아."

형사가 파블로를 다그쳤다.

"역시 네가 범인이었어! 이 명함이 그 증거다!"

파블로가 외쳤다.

"그, 그건 난 몰라! 그게 왜 내 지갑에 있는지 모른다고!"

"여기서 네 지문이 나와도 모른다고 할 거냐?"

"히익!"

"역시 알고 있네!"

알고 있다. 차우진이 어젯밤에 그 명함을 파블로에게 주었다.

"누, 누가 줬어!"

"누가!"

"모, 모르는 사람이…."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이구나! 이 명함도 네가 그놈들과 한패라는 증거란 말이다!"

***

스페인 경찰이 파블로의 동료 조직원들도 체포했다.

형사들이 그 조직원들을 한 명씩 따로 취조실로 데려가서 압박했다.

"너희가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연구소를 폭파한 걸 알고 있다!"

조직원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나는 아니야!"

"증거가 있다!"

"파블로가 하자고 했어! 나는 반대했다고!"

"더 말해봐!"

조직원 네 명이 어젯밤에 파블로와 만나 연구소 청부 폭파를 계획했다. 그들이 서로를 팔아넘겼다.

"난 하고 싶지 않았어! 거기는 현상금을 독식하려는 놈이 터트렸을 거야!"

"혼자 터트리면 천만 달러를 혼자 먹으니까! 그 돈을 먹은 놈이 범인이라고! 나는 아니야!"

***

마그마 탐지 작업은 온종일 진행됐다.

한 번만 조사해도 완전한 데이터가 나올 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그러려면 탐지 도중에 근처에서 지진이라도 나야 한다.

박태우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운이 좋군요. 차 이사님이 강원도에서 처음 탐지기를 테스트했을 때 우연히 지진이 일어났으니까요."

우연이 아니다.

차우진은 어린이날 강원도에서 지진이 난다는 걸 알고 그날 그곳에 가서 마그마 탐지기를 테스트했다.

그리고 그날 절벽에서 떨어지는 정예지를 차우진이 살렸다.

'그때 예지를 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지.'

박태우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때 그 일을 한 건 내가 아니라 개발 2팀이라는 거요."

"강원도에서 테스트하자고 한 건 차 이사님이라면서요. 딥어스테크의 곽수혁 팀장님이 그러던데요."

"운이 좋았죠."

현장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곧바로 미국 마그마에너지 본사로 전송됐다.

***

형사들은 연구소 폭파 범인이 파블로 패거리 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패거리를 아주 탈탈 털었다.

그들이 이전에 저지른 범죄도 쏟아져나왔다.

"이 새끼들 이거, 악질 청부업자였네."

"미제 살인사건 하나도 이놈들 짓인 거 같습니다."

"증거는?"

"찾는 중입니다."

"이놈들이 그 살인사건의 범인이 맞을 거야. 연구소를 폭파한 놈들인데 살인이라고 안 저질렀겠어?"

사건의 규모가 워낙 규모가 커서 여러 팀이 조사에 투입되었다.

그중 한 팀의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 사건은 이상해. 파블로 패거리가 다 했다고 보기엔 어색한 게 있어."

형사가 물었다.

"숲 속 전투 말입니까?"

"어. 파블로의 조직은 그 정도 전투력은 없어."

"파블로가 킬러를 고용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런 실력의 킬러라면…."

"데스 엔젤?"

"우린 그쪽으로 파보자."

아예 다른 방향으로 사건을 보는 팀도 있었다.

팀장이 사진을 보며 물었다.

"이건 뭐야? 이 사람들은 산에서 뭐 하는 거야?"

"며칠 전부터 미국 회사에서 지질 탐사 작업을 진행 중이랍니다."

"지질 탐사?"

쿠에르노의 연구소는 폭탄으로 파괴됐다. 그 폭탄의 출처는 확인됐다.

그런데 이 팀은 남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조사하는 게 일이다. 팀장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지질 탐사에 폭탄도 쓰나?"

형사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팀장이 지도를 확인했다.

"어젯밤에 사건이 일어난 숲과 이 회사의 작업 장소는 반대 방향인데…."

팀장이 잠시 생각하다 지시했다.

"멀지 않으니까, 찾아가서 물어보고 와. 현장도 직접 확인하고."

***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한 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보안팀이 먼저 그들을 만나 말했다.

"우리 탐사 작업은 이미 관청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형사가 현장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건 확인했습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여기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차우진이 그 모습을 보다가 박태우에게 말했다.

"조사 작업을 계속하세요. 저 사람들은 내가 만나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왜…."

"저도 궁금하군요."

'스페인 경찰이 어디까지 알아냈으려나.'

221. 재회

마그마에너지 탐사팀의 조사 현장은 그라나다 시티의 바깥에 있는 산악지역이다.

차우진이 현장에 찾아온 스페인 형사들을 만났다.

형사가 물었다.

"책임자 되십니까?"

"제가 여기서 직급이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차우진은 마그마에너지의 임원이다. 본사에서 일하진 않지만, 직급이 제일 높은 건 사실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형사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물었다.

"여기서 무슨 지질 탐사를 한다던데, 그러면 조사할 때 폭탄도 씁니까?"

차우진은 형사가 질문한 의도를 분석했다.

'새벽에 폭파 사건이 일어나니까 아침부터 폭탄이 사용되는 곳은 다 뒤지고 있구나. 여기를 크게 의심하는 건 아니야.'

차우진이 일부러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폭탄이라…. 우린 그런 옛날 방식은 안 씁니다."

"옛날 방식이요?"

차우진이 충격파 발생기를 가리켰다.

"저건 최첨단 기술로 만든 충격파 발생기입니다. 저 기계가 땅속으로 충격파를 보내면."

그가 탐지기를 가리켰다.

"저쪽 장비가 지하 구조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합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저 시스템에서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합니다."

"어…. 저거 비싼 장비입니까?"

"엄청나게 비쌉니다."

차우진이 직원들을 가리켰다.

"저기서 장비를 확인하며 돌아다니는 분들은 대부분 박사급 연구원입니다. 그런 분들이 싼 장비를 다루겠습니까?"

"저 기계의 원리가 뭡니까?"

지금까지 말한 건 관청의 허가를 받을 때 공개한 것이다. 원리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다.

"그건 회사 기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어…. 들어도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차우진이 정보를 얻기 위해 물었다.

"이거 다 허가받고 일하는 건데,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형사가 대답을 피했다.

"아닙니다. 어디서 사건이 좀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러 온 겁니다."

차우진이 일부러 형사를 좀 건드렸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농업 기술 연구소 폭파 사건?"

형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꺼내 기사를 검색해 보여주었다. 새벽에 일어난 연구소 폭파 사건에 관한 기사가 아침부터 나오고 있었다.

"폭탄 테러가 의심된다는 기사가 떴더군요. 그리고 저한테 한 질문이 여기서 폭탄을 쓰냐는 거잖습니까?"

"아. 박사라 그런지 상황을 금방 파악하시는군요."

차우진은 연구원들이 박사급이라고 했지 자신이 박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일부러 항의하는 척하며 질문했다.

"폭탄을 못 찾고 범인도 놓쳐서 우리를 의심하는 겁니까? 우리가 누명을 벗으려면 미국에서 본사 법무팀을 데려와야…."

스페인 형사는 일을 키우겠다는 차우진의 말에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폭탄은 찾았습니다. 범인들도 잡았고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차우진은 형사의 말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가 추가로 질문했다.

"그럼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이건 확인 차원에서 조사하는 겁니다.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에 물으러 다닙니다."

"아. 그러시군요."

형사들은 현장을 가볍게 둘러본 후에 돌아갔다.

차우진은 떠나는 형사들을 보며 작게 말했다.

"폭탄을 찾았다는 건 신전에 남겨둔 걸 찾은 것일 테고, 범인들을 잡았다는 건."

오필리아의 부하들은 전멸했다. 신전에 생존자를 남겨두긴 했지만, 목숨만 겨우 붙여놓은 상태라 그놈들이 연구소를 폭파할 수는 없다.

"잡히라고 세팅해 놓은 놈들을 잡았겠지."

파블로 패거리는 아지트에 기폭장치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만 달러를 대가로 쿠에르노 연구소를 폭파하려고 했다.

차우진은 파불로가 더 확실히 잡히게 하려고 오필리아의 신전 명함도 한 장 주었다.

그 정도면 빠져나가기 어렵다.

설사 나중에 그들이 범인이 아닌 게 밝혀지더라도, 그때쯤이면 차우진은 스페인에 없다.

"이제 성수당바이오만 열심히 일하면 되겠네."

성수당바이오의 유해준 팀장이 쿠에르노 연구소의 첨가제와 비슷한 걸 개발하고 있다.

박태우가 다가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열심히 일해야겠다고요."

"데이터는 잘 뽑히고 있습니다. 근데 형사들은…."

차우진이 형사들이 떠나는 곳을 보며 설명했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라는 회사의 연구소가 새벽에 무너졌는데, 그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 물으러 다닌답니다."

"설마 우리를 의심하는 겁니까? 아니, 이 사람들이, 우리가 미국에서 왔다고 해서 막 의심하고 그러나?"

"우리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탐문 수사라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잘 설명해서 보냈습니다."

***

마그마 탐사 작업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오후 늦게 탐사 장비는 철수했다.

데이터는 마그마에너지 본사에서 정수찬 사장의 지휘 아래 분석해야 한다.

이제 스페인에서 탐사팀이 할 일은 끝났다.

스페인에 올 때는 미국 정부가 제공한 수송기를 이용했다. 그 수송기는 일정 문제로 이틀 후에 출발한다.

박태우가 설명했다.

"미국 정부에서 가져갈 물건이랑 데려갈 사람이 좀 있나 봅니다. 원래 잡혀있던 스케줄이라던데요."

"우리가 그 비행 스케줄에 끼어든 거군요."

"맞습니다. 원래는 수송기가 화물 없이 스페인으로 올 예정이었다더군요. 그리고 우리 장비는 뭐, 남들은 봐도 뭔지 모를 테니까 상관없고요."

"포장해서 가져갈 테니 더 모르겠죠."

그래서 시간이 남았다. 어차피 탐사팀이 쉴 시간은 필요했다.

차우진은 그날 저녁은 탐사팀과 같이 먹었다.

박태우가 말했다.

"첫날 추천해주신 곳도 좋았는데, 여기도 맛있네요."

"아는 형이 추천한 식당입니다."

"빠에야가 특히 더 맛있습니다."

"그걸 잘하더라고요."

오늘은 일부러 탐사팀과 같이 밥을 먹었다. 그래야 같이 일하고 같이 밥도 먹었다는 이야기가 남는다.

이튿날은 탐사팀 사람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장비를 지켜야 하는 연구원과 보안요원 한 명씩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흩어졌다.

차우진은 알함브라 궁전을 다시 들렀다.

"숲에서 도망치던 사람이 창수 형 같았는데…."

그때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확신하진 못했다.

"여기 가봤다는 창수 형 자랑을 수십 번은 들었…."

저 앞쪽에 궁전 입구가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옆을 돌아보았다.

차 한 대가 좁은 도로를 질주했다. 그 도로 위에 관광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느라 차를 발견하지 못했다.

차우진이 여자 쪽으로 뛰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공간이동 스킬은 단거리용이다. 지금 여자가 있는 곳까지는 무리해도 도달하기 어렵다.

설사 거리가 닿는다 해도 여기서 스킬을 쓸 수는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하면, 모든 계획이 뒤틀린다. 지금까지 조폭과 약쟁이, 빌런들을 처리할 때 만든 알리바이가 다 깨진다.

차우진의 능력이 알려지면, 그리고 그동안 빌런들을 잡은 이유를 설명하려면, 10년 후의 멸망급 재난을 공개해야 한다.

온 세계가 그 재난을 막기 위해 뛰면 좋은데,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멸망 초기에도 자기 욕심부터 채우려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멸망이 10년이나 남은 상태라면, 협조는커녕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

멸망급 빌런들이 날뛸 수도 있다. 그러면 이미 막아놓은 재난이 다시 터지고, 어떤 재난은 앞당겨질 수 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차우진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 크기의 칼날이 달린 기념품 칼이 잡혔다.

'관통력 강화 스킬을 걸어서 던지면 타이어 하나는 터트릴 수 있어. 그러면 차의 방향을….'

도로 주변에 사람이 꽤 있었다. 차가 방향을 잘못 틀면 피해자가 더 늘어난다.

갑자기 덩치 큰 남자가 도로에 뛰어들었다. 덩치는 큰데 움직임이 빨랐다.

납자가 여자의 허리를 팔로 잡아채며 도로 밖으로 뛰었다.

"꺅!"

여자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차가 그곳을 질주하고 지나갔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우진은 뛰던 걸 멈추고 걸었다.

"다행…. 어?"

남자의 체형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창수 형?"

여자를 구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어우. 큰일 날 뻔했네."

차우진이 활짝 웃었다.

"형! 살아 있었구나!"

박창수가 대답했다.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하하하. 당연하지! 안 죽어야지!"

박창수가 차우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압니까?"

"알지!"

박창수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구지? 군대 후배인가? 사회에서 만났나? 난 왜 기억이 안…."

"으하하하. 예정보다 빨리 알함브라 궁전을 보러 왔구나! 나도 관광하러 왔어! 난 그냥 관광객이야!"

박창수는 멸망한 세계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일을 그렇게 많이 자랑했다. 그래서 차우진은 오늘 혹시나 하고 이곳에 들렀다.

"그러고 보니 놀러 온 형이 왜…."

숲에서 오필리아의 부하들에게 쫓기는 박창수를 봤다. 그때 용병들은 박창수를 향해 총을 쏘면서 쫓아가다가 차우진에게 걸려서 전멸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는 이 도시에서 휴가만 즐기고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테러 빌런의 부하들에게 쫓겼다.

박창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뭐가 궁금한 겁니까?"

"아니야. 됐어."

"그리고 당신 진짜 누구야?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왜 나한테 자꾸 형이라고 하는 거야?"

차우진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설명해주면 날 미친놈이나 사기꾼 취급할 테니까 지금은 말하면 안 돼."

"내가 믿어줄 테니까 일단 설명부터…."

사고가 난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박창수가 구출한 여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한국 분이시죠? 고맙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길을 건널 때는 휴대폰 좀 보지 말아요."

"네. 죄송해요. 길을 찾느라고 지도를 보다가…."

"저 차를 운전한 놈은 이 넓지도 않은 길에서 과속하던데. 아가씨를 혹시 누가 노리…."

그쪽으로 젊은 남자가 뛰어왔다.

"자기야!"

"오빠!"

그녀가 남자 쪽으로 뛰어가서 와락 안겼다.

"나 죽을 뻔했어!"

"괜찮아. 이제 내가 왔잖아."

"왜 이제 왔어!"

박창수가 그 모습을 보다가 혀를 찼다.

"쩝. 임자가 있으셨구나."

차우진이 활짝 웃었다. 여자를 꼬시려다가 실패하는 모습이 멸망한 세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하하하."

"왜 자꾸 웃지? 같이 좀 웃으면 좋겠는데. 당신 나 어떻게 알아?"

"지금은 말해봤자 안 믿는다니까."

박창수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갑게 웃는 모습이 연기 같지는 않은데….'

차우진의 얼굴이 기억에 없었다.

박창수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발신자를 확인한 후에 말했다.

"나한테 더 볼 일이라도?"

차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몇 년 걸릴지도 몰라."

"그럼 나중에 봅시다. 인연이 되면 마주치겠지."

박창수가 전화를 받으며 걸어갔다.

"어. 야. 이거 국제전화다. 빨리 말해."

차우진이 멀어지는 박창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창수 형. 이번엔 죽지 마라.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안전하게 살아."

박창수가 말했다.

"국제전화니까 용건만 빨리 말해. 돈 든다."

윤 형사가 따졌다.

- 니가 전화로 따질 때는 길게 말하더니?

"왜 따졌는지 까먹었냐? 너 허리 진짜 접어줘?"

- 너 귀국 언제냐?

"내일 출발. 왜?"

- 체육관 빌리는 날짜 확인하려고. 그럼 이번 주말에 보면 되겠네.

"내 소개팅?"

윤 형사가 대답했다.

- 어. 차유리 형사가 아는 체육관이 있는데, 이번 주말에 싸우재.

박창수가 피식 웃었다.

"내가 살살 할 건데 시간이나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지 않나?"

- 야. 살고 싶으면 최선을 다하라니까.

박창수는 윤 형사가 농담한다고 생각했다.

"알았다. 그 차유리라는 여성분이 눈치 못 채게 진심인 척은 할게."

- 너 그러다 죽어.

222. 귀국

차우진이 알함브라 궁전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창수 형이 살아 있는 거 보니까 참 좋다."

박창수가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이에나들과 싸우다 사망한 기억은 멸망한 세계의 것이다. 지금 사는 현실에서는 살아 있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직접 보니까 좋았다. 괜히 신났다.

"살아 있는 거 봤으니까 됐다."

신나서 걷는데 전화가 왔다.

차우진이 스페인에서 쓰는 휴대폰은 마그마에너지에서 제공한 업무용 스마트폰이다.

"여보세요."

- 거기 어디야!

여자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예지냐?"

정예지가 따지듯이 물었다.

- 그래! 나다! 왜 혼자서 목소리가 그렇게 밝아?

차우진이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한국이 아니네?"

- 나 지금 스페인 그라나다.

"응?"

-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그래서 오늘 왔어.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그는 한국에서 미국 뉴욕을 거쳐 스페인으로 왔다. 사용한 항공편도 일반 여객기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이용하는 수송기다.

의문은 간단히 풀렸다.

- 윤서 언니 통해서 물어봤지.

"정수찬 박사님이 말했구나. 그래서 이 번호도 아는 거고."

정수찬 사장은 오윤서와 연인 사이다. 오윤서는 정예지와 친하다.

정예지가 따졌다.

- 스페인에 혼자 오니까 좋냐? 여기 올 거면 나도 데려가지!

"넌 스캔들을 조심…."

- 여기 유럽이야! 여기서까지 나겠냐?

"하긴. 넌 유럽에선 안 유명하지."

- 그래서 어디야? 나 시간 안 많아. 유럽 스케줄 왔다가 스페인으로 잠깐 넘어온 거야.

"지금 알함브라 궁전이다."

- 가깝네! 딱 기다려. 지금 간다.

차우진이 알함브라 궁전 앞에서 정예지를 기다렸다.

그녀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우진 오빠를 외국에서 보니까 좋다. 좋은데…."

그녀가 차우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 때깔도 좋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윤서 언니네 형부가 일 엄청 많이 시켜?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굴렸는데 살이 이렇게 쪽 빠졌어?"

차우진이 손으로 배를 만져보았다. 이젠 이 배를 위장용으로 쓰기도 어려울 정도다.

"역시 더 열심히 먹어서 도로 채워야겠지?"

정예지는 당황했다.

"어? 그건 아니지! 남들은 힘들게 빼는데 왜!"

"배는 인덕이니까 도로 키워야…."

"하지 마! 그거 인덕 아니야!"

"음…. 아닌가?"

"네버!"

차우진이 물었다.

"그런데 넌 유럽은 무슨 일이냐?"

"우진 오빠 만나러?"

"뻥 치지 말고."

"쳇. 속는 척해줄 수도 있잖아."

"와. 감동이다."

"'옜다, 감동'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그래서 왜 온 거야?"

정예지가 설명했다.

"드라마 유럽 로케 촬영."

"너 새 드라마 들어갔냐?"

"이 드라마는 본격적인 출연은 아니고, 카메오로 그냥 몇 번 나와."

"그럼 오래 있진 않겠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 그래서 오늘만 여기서 놀고 이따가 가야 돼. 오늘 밤에 야간 촬영이 있거든."

"나도 내일 회사 연구팀이 철수할 때 같이 미국으로 돌아간다."

정예지가 서둘렀다.

"뭐야. 우리 둘 다 바쁘네. 빨리 놀아야겠다."

"그러면, 음…. 이 궁전 본 적 있냐?"

"그라나다엔 처음이야. 오늘 오빠랑 말로만 듣던 알함브라 궁전을 다 보겠네?"

"내가 안내해 줄게. 들어가자."

정예지가 멈칫했다.

"잠깐! 안내라니? 여기 누구랑 왔는데?"

"며칠 전에 나 혼자 잠깐?"

"흐흐. 근데 오늘은 둘이구나. 저녁도 사줄 거야?"

"촬영 있다더니?"

"그러니까 빨리 다녀야지. 저녁 일찍 먹으면 되겠다."

"내가 맛집 알아놨다. 거기 가자."

"거기도 혼자 갔어?"

"출장 온 사람들이랑?"

"흐흐. 좋아."

차우진이 정예지와 함께 궁전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랑 놀고 밥 먹은 이야기는 어디 가서 하면 안 돼. 괜히 스캔들 난다."

"스캔들 이야기는 그만! 귀에서 피 나겠다!"

***

박창수는 프랑스에서 출발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권을 가지고 있다. 그 티켓은 유럽에 올 때부터 예매해뒀기 때문에 한국에 가려면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박창수는 프랑스로 이동해 밤을 보낸 후에 이튿날 공항으로 갔다.

"올해 유럽은 여기까지인가…. 윤 형사 때문에 고생만 하고 제대로 놀지도 못했어."

그가 투덜대다가 옆을 보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여자 두 명이 보였다. 둘 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와…. 정예지랑 강수민?"

둘 다 최근에 방영된 드라마에 조연으로 나왔다. 박창수는 그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

그는 눈썰미가 좋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쉽게 알아보았다.

"연예인은 진짜 다르구나.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정예지와 같이 드라마를 촬영하러 유럽에 온 강수민이 물었다.

"너 어제 어디 갔다 왔어?"

"너 나 감시하니?"

"저녁 먹을 때 없으니까 물어본 거잖아."

정예지가 씩 웃었다.

"관광. 유럽에 왔으니까 좀 돌아다녔지."

"혼자 아무 곳이나 다니진 않았을 거고, 목적지 딱 정해놓고 갔겠네? 어디 갔어?"

차우진은 정예지에게 스페인에서 그를 만난 이야기를 남에게 하면 스캔들이 난다고 했다.

정예지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있어. 좋은 데."

강수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너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어제 아침엔 툴툴댔으면서."

"힐링해서?"

강수민이 대놓고 의심했다.

"너 수상해. 스캔들이 터지더라도 우리 나온 거 방송되고 나서 터져라."

"터져도 네가 먼저 터지겠지."

강수민이 가슴을 내밀었다.

"난 당당한데?"

"좋겠다? 아무것도 없어서."

강수민이 발끈했다.

"너 그거 무슨 뜻이야?"

"아니야."

"야. 넌 그거 뽕인 거 내가 다 알거든?"

"그 이야기 아니라고!"

"근데 그거 어디서 샀어?"

"으응?"

***

차우진은 스페인 공항에서 미국 정부가 관리하는 수송기에 탑승했다.

올 때는 수송기의 화물칸에 공간이 넉넉했는데, 갈 때는 짐이 꽤 차 있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물자는 모두 단단히 포장되어 있어서 내용물을 알 수 없었다.

차우진이 생각했다.

'뉴욕에 가면 하루쯤 있다가 한국으로 들어가야겠다. 그게 자연스러워.'

새로 추가된 승객 중에서 책임자가 박태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서로 앉을 자리도 확실히 구분했다.

차우진이 상대편을 쭉 훑어보았다. 남자가 넷, 여자가 하나였다.

'여자가 수송기 내부 상황을 습관적으로 파악하는데? 일반인이 아닌가?'

차우진이 의자에 앉았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

차우진이 탄 비행기는 뉴욕으로 돌아갔다.

탐사팀은 마그마에너지 본사로 복귀했다. 차우진도 같이 움직였다.

정수찬이 차우진을 회의실에 따로 불렀다. 그는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차 이사님. 그라나다 지하에서 폭발 가능성이 있는 마그마를 찾아냈습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데이터 분석이 벌써 끝났습니까?"

"그동안의 노하우로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를 제작했습니다. 아직 일부 기능만 되고 오류도 많은 알파 버전이지만, 덕분에 분석 시간을 많이 단축했습니다."

"역시 정 박사님.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지구 전체에서 위험 지역을 찾아내려면 데이터를 빨리 수집하고 분석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정수찬이 관련 이론을 만들고 방법을 찾아내면, 분석 시스템은 프로그래머들이 만들 수 있다. 돈을 쏟아부으면 시스템은 더 빨리 개발된다.

정수찬이 말했다.

"분석 데이터를 3D 이미지로 만드는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아직은 알파 버전이지만, 데이터를 입력하면 대략적인 모양은 볼 수 있습니다."

정수찬이 3D 이미지를 회의실의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

"음…. 아직 갈 길이 머네요?"

화면 속 3D 이미지는 선을 대충 찍찍 그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 게다가 선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그것만 봐서는 마그마의 실제 모양을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알파 버전이라 오차가 많고 이미지도 대략적인 형태만 구현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시면."

정수찬이 삐죽 튀어나온 선 하나를 가리켰다.

"이 부분이 도화선으로 의심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의 데이터만 따로 떼어내 직접 분석했더니."

"도화선이군요."

정수찬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마그마 폭탄의 도화선이 확실하더군요. 이 마그마의 피해 규모는 강원도급입니다."

강원도 지하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규모로 그라나다 옆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면, 그 도시는 통째로 날아간다.

차우진은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멸망한 세계에서 그가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는 몇 개의 마그마 폭탄 중 하나다.

"정 박사님이 찾아내실 줄 알았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정수찬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여기를 조사하자고 한 건 차 이사님이잖습니까?"

"후보지 중에 알함브라 궁전 근처가 있길래, 관광이나 하려고 말을 꺼내본 겁니다. 사심이 가득한 제안이었지요. 그런데 우연히 거기가 당첨됐군요."

"정말 그게 다입니까?"

"그게 다입니다."

후보지는 이곳 하나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미 시도한 곳들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가 달랐다.

"미국에서 추가로 시도한 탐사는 다 실패했지만, 차 이사님이 찍은 지역은 한 번에 성공했는데요?"

"제가 운이 참 좋죠? 그런데 왜 로또는 안 되나 모르겠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안 되네요."

"오천 원이 아니라 천 원짜리요?"

"천 원어치만 사는 스타일이라서."

정수찬이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 연구해서 저도 운이 좋아져야겠습니다. 차 이사님의 운을 좀 따라잡고 싶으니까요."

"제 운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니까요. 저는 정 박사님만 믿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물론이죠."

멸망 초기의 다른 전문가들은 마그마 폭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오직 정수찬 박사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

박창수는 한국에 도착했다.

윤 형사가 공항에 나와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야. 유럽에 놀러 가니까 좋냐? 아주 그냥 때깔이…. 어? 때깔이…. 너 왜 꼬라지가…."

박창수가 윤 형사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총 맞아 죽을 뻔했다."

"켁켁. 야. 공항에서 이러면 안 돼. 큰일 나."

"그래서 일부러 공항으로 마중 나왔냐?"

"흐흐. 미안."

"네가 차유리 씨하고 소개팅 주선해줘서 넘어가는 줄 알아라."

박창수가 멱살을 놓으며 물었다.

"근데 너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거냐?"

"합동수사본부 일 좀 도와달라고 한 건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나도 몰랐지. 너 왜 그 숲까지 간 거야?"

"네 말 듣고 조사하다 보니까 거기에 뭔가 있어 보이더라. 조사하는 김에 가봤지."

"하여간 쓸데없이 수사력만 좋은 새끼. 너 같은 새끼가 경찰이 돼서 우리 합수본에 왔어야 하는데."

"꺼져. 나 이제 나라에서 주는 월급 안 받는다."

"경찰서 앞 국밥은 잘만 먹더라."

"국밥은 맛있으니까. 한국 왔으니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윤 형사가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경찰에 지원해봐. 너 경찰 안 하는 건 재능 낭비야."

"아. 됐다고. 나도 밥은 먹고 산다고."

윤 형사가 툴툴댔다.

"하긴. 유럽 여행까지 가는 새끼를 내가 왜 걱정하냐. 부럽다. 난 동남아도 못 가는데."

"형사 월급이면 동남아 정도는 가고도 남잖아."

"바빠서."

"바빠서? 이 물귀신 새끼가! 너 혼자만 바쁘면 되지 그런 곳에 나를 끌어들이려고 들어?"

윤 형사가 말을 돌렸다.

"야. 가자. 집에까지 태워줄게."

"국밥집부터. 가면서 내가 무슨 일에 말려든 건지나 설명해라. 전화로는 못 한다는 이야기나 좀 듣자. 특히 나를 총으로 쏜 새끼들."

박창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끼들이 누군지 내가 꼭 좀 알아야겠다."

윤 형사가 멈칫했다.

"어…. 그 새끼들 말인데. 정황을 보면…. 다 죽은 것 같다."

"어? 뭐?"

윤 형사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창수야. 혹시 네가 죽였냐?"

"야. 내가 맨손으로 총 든 놈 다섯을 어떻게 이기는데?"

"하긴. 너한테도 그건 무리지?"

박창수가 자존심을 세웠다.

"사실 죽을 각오로 싸웠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근데 진짜 베테랑은 전장에서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해. 전술적 후퇴는 공격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래서 열심히 튀었구나."

"차 어디 있냐? 주차장이 왜 이렇게 멀어?"

223. 귀국 II

합동수사본부 윤 형사가 물었다.

"어쨌든 네가 죽인 건 아니란 거지?"

박창수가 손을 흔들었다.

"야. 나 민간인이야."

"그럼 다행이긴 한데…."

윤 형사가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다.

"그래도 스페인 경찰은 다르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네가 그 숲에 갔다는 거,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스페인에서는 내가 죽였다고 의심할 거 같냐?"

"어. 너 특수부대 출신이잖아."

"한국에 특수부대 출신이 한둘이 아닌데."

"어쨌든 네가 의심받으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

"외교? 왜?"

"내가 너한테 부탁해서 프랑스에 있던 네가 그라나다에 갔잖아. 근데 난 그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 소속이잖아. 그럼 비공식 수사니까 문제가 되겠지?"

박창수가 투덜댔다.

"이 새끼는 친구 걱정을 한 게 아니라 그걸 걱정한 거냐? 내가 남의 나라 경찰한테 의심받기 싫어서라도 어디 가서 이야기 안 할…."

박창수가 멈칫했다.

윤 형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왜? 어? 혹시 너 휴대폰 위치추적…."

"장사 한두 번 하냐? 숲에 들어갈 땐 당연히 유심 뽑고 비행기 모드로 해놓고 들어갔지. 위치추적 대비는 충분히 했다."

"그럼 왜 멈칫하는데? 사람 긴장하게."

박창수가 차우진을 떠올렸다.

"그라나다에서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났거든."

"그 숲에서?"

"아니. 알함브라 궁전 앞에서."

윤 형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난 또 뭐라고. 거기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데 그럴 수도 있지."

"그치?"

"그 숲에 갔단 말만 하지 말아라. 지금 스페인은 그 사건이랑 거기 연결된 사건 때문에 난리가 났다."

"거기 연결된 사건들이라니? 뭐가 또 있어?"

"연구소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그 숲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폭탄으로."

***

차우진은 뉴욕에서 정수찬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마그마에너지 연구소가 돌아가는 걸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멸망한 세계에서 얻은 지식으로 몇 마디 조언도 했다.

밤늦게 동네 친구 민수연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왜?"

- 내 선물 샀냐?

"샀겠냐?"

- 면세점에서 화장품 사와라.

"뭐 살지 보내봐라."

민수연이 즉시 화장품 목록을 보냈다. 목록에 예상 가격도 적혀 있었다.

차우진이 즉시 물었다.

"이 가격 실화냐? 야. 호박에 비싼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다."

- 호박 때깔이라도 좋아지겠지! 선물은 꼭 그걸로 사와!

차유리도 전화를 걸었다.

- 내 선물은 화장품 사 와라.

"둘 다 왜 그래?"

- 그럼 그냥 오려고 했냐?

"왜 화장품이냐고."

-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까 수연이 거랑 똑같은 거로 사 와라.

"수연이가 고른 건 비싼 화장품이던데?"

- 괜찮아. 동생이 부자거든.

"나?"

- 하나도 빼먹지 마라. 수연이 거랑 비교해볼 거다.

차우진이 전화를 끊은 후에 투덜댔다.

"예지는 이런 거 물들지 않으면 좋겠다."

***

차우진이 귀국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공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와 민수연이 TV를 켜놓고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차우진이 그 꼴을 보면서 말했다.

"면세점에서 산 화장품은 미개봉 중고로 팔아야겠다."

민수연이 벌떡 일어났다.

"우진이 왔구나! 기다렸어!"

"화장품을 기다렸겠지."

"집에까지 와서 너 기다렸어!"

"누나가 두 세트 다 가질까 봐 그랬겠지."

"그래서 샀어?"

차우진이 화장품이 들어 있는 종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옜다. 오다가 주웠다."

"흐흐. 땡큐."

차유리가 맥주를 입에 털어놓은 후에 지시했다.

"수연아. 빼먹은 거 있는지 확실히 확인해."

"당연하지!"

차우진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든 후에 말했다.

"너랑 누나는 도대체 누가 데려가려나. 아니다. 아무도 안 데려가겠네."

민수연이 피식 웃었다.

"야. 반사. 네 걱정이나…. 근데 너 살 빠졌다? 어? 왜 너만 빠지는데!"

"화장품에 눈이 멀어서 그게 이제 보이냐?"

"미국 음식이 입에 안 맞았냐? 하긴. 촌놈이 뉴욕에 가니까 음식이 다 짜고 느끼해서 먹기 힘들었겠지."

"야. 화장품 도로 내놔."

민수연이 쇼핑백을 품에 안았다.

"이제 내 거야! 안돼! 못 줘! 배 째!"

"어? 너 말하는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야. 그 화장품값은?"

"이거 선물이잖아."

"그 가격이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라고 해야지!"

"어…. 술 사줄까?"

"당장 내놔!"

***

스페인은 오필리아의 신전과 쿠에르노 연구소 사건 수사에 경찰력을 대규모로 투입했다.

한국에서도 낌새를 눈치채고 수사 정보를 요청했다. 한국은 이미 목동 공개홀 사건 때부터 스페인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 상태였다.

이젠 스페인 경찰도 목동 공개홀의 수사 자료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스페인 경찰은 현재 수사 상황을 한국의 합동수사본부로 간단하게나마 전달했다.

윤 형사가 회의실에서 말했다.

"이 사건의 주범인 오필리아는 특이사항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건 이미 보고했다. 지금 하는 건 추가 보고다.

"유럽 펜싱 선수권 대회 은메달리스트입니다."

합수부장이 말했다.

"운동으로는 잘 나갔구나."

"프랑스 경찰도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중입니다. 프랑스에서 우리 쪽에 수사 자료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프랑스는 왜?"

"오필리아가 은메달을 딴 경기의 심판이 프랑스인인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어?"

"당시에 금메달을 딴 선수도 프랑스인인데, 가족이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합수부장이 인상을 썼다.

"잠깐. 그럼 그게 다 사고가 아니라…."

"그동안 범인을 찾지 못했는데, 이젠 둘 다 오필리아의 짓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고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지독한 여자였구나."

윤 형사가 계속 설명했다.

"가족을 잃은 그 선수는, 유력한 용의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위로를 받긴 했네. 좀 늦었지만."

***

차우진도 맥주를 잔에 따랐다.

"둘 다 왜 이렇게 느긋해? 이 늦은 시간까지 술 마시고 노는데 표정들이 되게 편안해 보인다?"

차유리가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오늘 저녁부터 휴가."

"왜?"

"합수본이 맡은 목동 공개홀 사건이 끝이 보이거든. 유럽에서 범인이 잡혔, 아니, 죽었어."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은 합수본 입장에서는 기밀까지는 아니다.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직 상황이 마무리되지 않아 그걸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다. 그래도 합수본에 참여한 각 기관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차유리가 말했다.

"이거 어차피 외국 뉴스에 날 테니까 말해줄게. 범인은 오필리아라는 여자인데, 폭탄 관련 기술을 독학으로 익혔대. 그걸 혼자 배웠기 때문에 추적이 어려웠대."

차우진이 민수연에게 물었다.

"넌 뭐 아는 거 없어?"

"있지."

이번엔 민수연이 설명했다.

"오필리아의 자금력은 대량의 코인에서 나왔어. 작년에 코인 사기로 떼돈을 번 놈이 실종됐는데, 거기서 나온 코인이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야."

"목동 공개홀의 범인이 그 여자인 건 확정된 거지?"

민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현장에서 발견된 기폭장치가 우리 쪽에서 확보한 거랑 같은 설계로 만든 거야. 폭약의 성분도 같아."

"다른 건? 오필리아가 목동 공개홀만 부수려 하진 않았을 텐데."

"유럽에서 몇 건 더 찾았다는데, 그건 유럽 내부의 일이라면서 스페인 경찰이 공유를 잘 안 해줘."

"뭐, 조사하다 보면 다 나오겠지."

차유리가 맥주잔을 들며 씩 웃었다.

"중요한 건 범인이 잡혔고, 우리는 합수본 파견이 끝나서 집에 왔다는 거지. 이제 주말까지 쭉 휴가다."

차우진이 물었다.

"오늘 목요일인데? 게다가 이미 밤인데? 쭉이라는 표현이 맞아?"

"내일 하루라도 쉬는 게 어디냐?"

"우리 누나가 훌륭한 공노비 마인드를 장착했구나."

"아. 그런가?"

차우진이 타박했다.

"당연히 휴가 더 받아냈어야지! 그동안 추가로 일한 날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네. 내일 쉰다고 괜히 좋아한 나를 반성해야겠다."

차유리가 술을 벌컥 마셨다.

"어쨌든 앞으로 합수본에는 끌려가고 싶지 않아.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차우진이 일을 저지르면 차유리가 야근을 한다. 그런 일이 그동안 많았다.

"어…. 부디 앞으로는 괜찮길 진심으로 바란다."

민수연이 말했다.

"언니 토요일에 소개팅 있으니까 금요일에 피부관리라도 받는 게 어때?"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소개팅? 그래서 화장품이 필요했구나? 이번엔 어떤 놈이야?"

차유리가 대답했다.

"좀 친대. 얼마나 치나 보려고 체육관 잡아놨어."

"소개팅이라길래 혹시나 했다. 누나가 그러면 그렇지."

***

차유리는 박창수를 체육관 앞에서 만났다.

"박창수 씨?"

박창수가 활짝 웃었다.

"차유리 씨. 듣던 대로 미인이십니다. 하하하!"

"하는 일이, 약을 파시나?"

"예?"

"윤 선배가 나를 미인으로 소개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소개했…."

"속으셨네."

"안 속았습니다?"

"경찰한테 사기 치면 잡혀가요."

"어….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다고 하면 안 되지!"

"아! 그렇군요!"

"좀 치신다고요?"

박창수가 어깨를 펴며 자랑했다.

"음하하하. 잘 칩니다."

차유리가 박창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우리가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창수를 보다가 물었다.

"목동 공개홀 공연에 간 적 있죠?"

박창수는 당황했다.

"어? 그걸 어떻게 압니까?"

차유리도 그날 거기에 있었다.

"그 고릴라가 여기 있네?"

"네?"

"민지 팬?"

박창수가 웃었다.

"하, 하하. 민지 노래가 딱 제 취향이라. 제가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차유리는 차우진 덕분에 민지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같이 치킨도 먹었다.

목동 공개홀에서 민지가 노래할 때 박창수가 소리 지르던 모습이 생각났다.

"킹콩?"

"네?"

"추바카인가?"

"아니, 내 별명을 어떻게 전부 다…. 진짜 저 아시나? 요즘 나 아는 사람을 왜 이렇게 자꾸 만나지?"

차유리가 체육관 문을 열었다.

"일단 함 뜨죠? 얼마나 잘 치는지 보게."

"만족하실 겁니다. 하하하."

박창수가 따라 들어가며 생각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자의 모습을 보여줘야지. 흐흐흐.'

둘 다 옷은 갈아입지 않았다. 격투기용 경량 글러브만 꼈다.

박창수가 주먹으로 글러브를 팡팡 치며 말했다.

"차유리 씨. 살살 할 테니까 들어오시…. 어?"

박창수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차유리의 점프가 너무 높아서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

하늘에서 발이 내리꽂혔다. 박창수가 두 팔로 그 발을 급히 막았다.

"으헉!"

5분 후에 박창수가 외쳤다.

"자, 잠깐! 뼈 맞았어요!"

"그럼 잘 막던가!"

"안 되겠네! 내가 진짜로 힘을…. 꾸에엑!"

***

박창수는 토요일에 차유리를 만나고 일요일에는 소개팅을 주선한 윤 형사를 만났다.

윤 형사가 물었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박창수 얼굴 한쪽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계단에서 굴렀어."

"처맞았네."

박창수가 자존심을 세웠다.

"야. 내가 실수해서 그래. 처음부터 진심으로 했으면 내가 이겼을 거야."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그 부분에서 실수했다고. 설마 진짜로 최선을 다해야 할 줄은 몰랐지."

윤 형사가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살아서 돌아왔구나."

박창수가 술을 마신 후에 물었다.

"사실 죽을 뻔했다. 그 여자 도대체 뭐냐?"

"차 형사가 왜?"

"사람이 하늘에 떠서 발차기를 하는데, 그래. 한 번은 그럴 수가 있어. 근데 내가 막았거든? 그걸 발로 차고 공중에서 또 뜨는데, 그게 사람한테 가능한 동작이냐?"

"선수 출신이다."

"그 실력이면 올림픽 금메달도 땄겠네? 아니지. 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주 그냥 다 휩쓸었겠는데?"

윤 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올림픽에 못 나갔어."

"응? 왜?"

"차 형사가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대회에서 상대 선수랑 심판을 두들겨 팼거든."

박창수는 당황했다.

"어? 경기 중에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래서 선수 때려치우고 경찰에 특채로 들어왔다."

"응? 대회에서 그러면 전과 안 생기냐?"

윤 형사가 소주를 마신 후에 대답했다.

"심판이랑 협회 고위층이 상대 선수한테 받아먹은 게 많아서, 정식으로 수사 들어가고 재판 가면 그 사람들도 옷 벗어야 한다더라."

"아. 그래서 협회 차원에서 그냥 덮었구나."

"대신에 차 형사는 그 종목에서 영구 퇴출. 그 협회가 차 형사를 안 받아줘."

"협회가 조직적이네."

윤 형사가 씩 웃으며 물었다.

"어쨌든 차 형사를 만나보니까 어떠냐?"

박창수가 손으로 얼굴에 멍든 곳을 만지며 말했다.

"어…. 몇 번 더 만나 봐야 알 거 같다."

224. 알바

차유리의 합동수사본부 파견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그래도 그동안 한 일을 정리해서 넘겨주는 절차는 남았다. 그녀가 합수본 사무실로 업무를 인계하러 왔다.

"윤 선배. 이제 나 여기로 끌어들이지 마. 또 부르면 다음엔 진짜 안 참아."

"어…."

"뭐지? 이 머뭇거리는 반응은? 왜?"

윤 형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이번에 실적 쩔었잖아. 특히 너 혼자 접근하면 범인들이 방심하니까 체포가 쉬웠지. 그래서 윗분들이 좋게 보더라고."

"그냥 좋게만 보지 말고 승진이라도 시켜주던가."

"그거야 네가 예전에 친 사고가 하도 많아서…."

"아니, 범인 잡다 보면 어디가 좀 부러질 수도 있지!"

"다 용의자가 부러졌지."

"내가 착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날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데, 그럼 그냥 맞아야 하나?"

"네가 어딜 봐서 착…."

"선배는 내 얼굴이 익숙해서 모르는 거야. 나 착해 보인단 말 많이 들어."

"어…. 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런 말을…."

"메이야?"

"아니야. 너 착해 보여. 어. 그래."

윤 형사가 말을 돌렸다.

"창수랑 토요일에 만났다며? 어때?"

차유리가 피식 웃었다.

"좀 친다더니, 약하던데?"

"그거 창수가 방심해서 그렇다더라. 본 실력이 아니었대."

"하긴. 다른 놈들보다는 낫더라. 그래도 나보다는 약하지만."

"다시 붙으면 이번엔 다를 거라고 장담하더라. 걔가 특수부대에서도 최정예였다니까?"

차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처맞고 갔으면서 다시 보재? 그렇게 맞으면 다들 도망치던데?"

"창수가 맷집이 참 좋아. 어떻게 할래?"

"그럼 주말에 체육관에서 다시 붙어보자고 해."

"어? 또 체육관이야?"

"다시 붙자며?"

"먼저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다가 체육관 가는 거 아니고?"

"그렇게 먹고 나서 맞으면 토할 텐데?"

"네가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혼자…."

"윤 선배도 체육관 오게?"

"창수한테 주말에 체육관으로 가라고 할게."

***

차우진이 성수당바이오로 출근했다. 그는 이 회사의 지분 일부와 이사 직함을 가지고 있다.

유해준 팀장이 커피를 마시면서 물었다.

"차 이사님. 쿠에르노 인더스트리를 잘 아시죠?"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잘 안다.

"우리 회사와 비슷한 분야의 제품을 만드는 경쟁자라는 건 압니다."

"혹시 뉴스 보셨습니까? 거기 연구소가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더라고요."

"국내에는 아직 그 뉴스가 안 나왔을 텐데요? 어디서 봤습니까?"

"업계에 일 났다는 소문이 돌길래 유럽 뉴스를 좀 찾아봤습니다. 아주 그냥 폐허가 됐더라고요."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새벽에 경비원들을 쫓아내고 폭탄을 터트렸다. 그래서 다친 사람조차 없다.

"그러게요. 천만다행이죠."

차우진이 물었다.

"유 팀장님. 연구소가 날아갔으니까 우리와 겹치는 기술개발은 늦어지겠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데이터야 아마 백업해뒀겠지만…."

유해준의 표정은 조금 밝았다.

"제가 좀 알아보니까 샘플 보관실부터 실험 장비까지 싹 다 날아갔다더라고요. 이거 참 남의 불행을 기뻐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그 회사의 기술개발이 얼마나 늦어질 것 같습니까?"

"다시 다 세팅해서 지금 수준으로 돌아오려면 일 년은 걸릴 거라더군요."

"일 년이라…. 그 전에 우리 비료 첨가제를 완성해서 특허를 추가로 내야겠군요."

"네?"

"반년 안에 만들면 더 좋고요."

"차 이사님. 식물이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반년은 좀…."

"특허라도 먼저 내야 합니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보다 먼저 완성해서 먼저 특허를 내야 한다.

'멸망한 세계의 쿠에르노는 성수당바이오를 집어삼키고 기술을 빼앗아갔어.'

그러기 위해서 오동케미컬과 사채업자 한노성을 이용했다.

쿠에르노처럼 큰 회사가 그래야 할 정도로 성수당바이오의 기술력은 좋았다.

"꼭 쿠에르노보다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제품 판매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기술만 개발하는 게 아니라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미리 알아내서 공개해야 한다.

특정 조건에서는 첨가제를 쓴 지역의 농작물이 다 죽거나 변형된다는 걸 알려야 한다.

그걸 쿠에르노보다 먼저 해내야 한다.

그래서 차우진이 쿠에르노의 연구소를 날려버리고 시간을 벌었다.

"물론 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유 팀장님만 믿습니다."

"네? 저를요?"

"해낼 수 있습니다. 파이팅."

***

차우진은 이선정 박사도 만났다.

이선정이 자랑했다.

"SL 제약이랑 동물 실험을 하는 중인데, 생쥐로 실험한 건 결과가 되게 좋아요."

"그 약이 동물에게는 통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세포 단위 실험보다 훨씬 발전된 결과에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은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오메가 바이러스는 10년 후에 터진다. 그러니까 치료제를 그 전에 전 세계에 뿌려놔야 한다.

이선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모르죠. SL 제약과 계획은 잡고 있는데, 임상이란 게 원래 도박이라서요. 장담은 못 해요. 결과가 안 좋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거나 중간에 접을 수도 있으니까요."

"음…."

멸망한 세계의 과학자들은 이선정 박사가 연구한 것을 기반으로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는 개발 시기가 너무 늦어서, 오메가 바이러스가 퍼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그걸 막으려면 치료제가 미리 충분히 공급되어 있어야 한다.

성수당바이오는 식물용 비료 첨가제를 개발하고 있다.

"동물용은…."

"네?"

"생쥐 실험에서는 효과가 좋았다면서요. 그 약을 동물용으로도 만들 수 있겠군요."

이선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바이러스에 의한 피부질환 치료제를 동물용으로요?"

"음…. 애완동물용?"

"글쎄요. 동물 실험 결과가 좋기는 한데…."

"그 약 성분을 화장품에 살짝 섞으면 효과가 어떻습니까? 피부 개선 효과가 있습니까?"

"그건…. 테스트해봐야 알아요."

"어떤 약은 성분을 조금만 넣으면 영양제가 되고 많이 넣으면 의약품이 된다던데, 그런 식으로 피부 영양제로 만드는 건요?"

"웅…. 면역력 개선 효과도 이용하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은 한데…."

"그렇게 동물용 약으로도 공급하고, 저함량 영양제로도 만들어 팔면서, 고함량 제품은 의약품으로 임상을 진행하는 거죠."

차우진의 목적은 하나다.

'많이 만들어서 많이 뿌려놔야 해.'

오메가 바이러스가 터지기 전에 치료제가 충분히 보급되어 있어야 한다.

'영양제 형태로라도 많이 보급되어 있으면,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 단일성분 영양제로 만들면 필요할 때 많이 먹어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차우진이 제안했다.

"갑시다."

"네? 어디로요?"

"SL 제약."

***

SL 제약 홍보팀 대리 성혜리가 활짝 웃었다.

"당연히 되죠. 우리 회사에서 영양제 많이 팔아요. 콜라겐 영양제처럼 먹으면 피부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팔면 되잖아요."

이선정이 대답했다.

"그거랑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렇죠."

차우진이 물었다.

"성 대리가 왜 이 회의에 왔을까?"

"차 이사님 오셨다고 해서 왔죠. 제가 분석팀의 오른팔이잖아요."

"어…."

사장인 성기호도 말했다.

"영양제의 안정성만 확인되면 만들어 파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이선정이 설명했다.

"소량만 쓰면 면역력 개선 효과가 약하거나 없을 수도 있어요."

"설명 문구에 '효과가 있다.'가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음.'이라고 쓰면 됩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런데 서 사장님은 왜 여기에…. 실무자만 있어도 되는데."

"차 이사가 오랜만에 출근했으니까 왔지. 하하하. 자주 좀 오지."

"미국에 좀 다녀오느라고요."

성혜리가 물었다.

"어머. 미국 어디요?"

"뉴욕."

"저 뉴욕 잘 아는데! 말씀하셨으면 제가 같이 갔을 텐데."

"다른 회사 일로 출장 간 거라서."

"딥어스테크요?"

"아니요. 미국 회사입니다."

"네? 미국 회사에도 다니세요?"

"어쩌다 보니까."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오늘은 제품 출시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출시가 가능한지, 로션이나 영양제로 만들려면 어떤 테스트를 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일정을 잡는 회의였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네 사람이 같이 식사하러 갔다.

이선정과 성혜리는 서로 이것저것 질문했다. 주로 차우진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선정 박사가 말했다.

"길에서 칼 든 강도한테 공격당했는데 우진 씨가 구해주셨어요."

"어머. 저도 차 이사님이 바다에 빠진 걸 구해주셨는데."

"저는 또 구해주신 적 있어요."

"어머. 저도 또 있는데."

"웅…. 일 이야기나 할까요? 이론적으로는 화장품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농도를 약하게 해서 화장품에 섞으면 여드름 같은 피부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이론적이면, 확인된 건 아니죠?"

"이제 확인해야죠. SL 제약에서."

성기호가 차우진에게 말했다.

"차 이사. 내 딸이랑 이선정 박사랑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러나? 눈에 불꽃이 튀는 거 같지?"

"그러게요. 저렇게 열심히 하니까 곧 좋은 성과가 있겠네요."

***

차우진은 이튿날 정예지를 만났다.

정예지가 말했다.

"우진 오빠. 유럽에서도 보고 한국에서도 보니까 신기하다. 그치?"

"그런 거 떠들고 다니면 스캔들 터진다."

"윤서 언니한테만 말했어. 나도 생각이 있다고."

"다행이네."

정예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왜 겨우 이 정도로 다행이란 말이 나오지?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한 거야?"

"어…."

"나 바보 아니다!"

"밥 먹으러 갈까?"

"고기?"

"고기는 언제나 좋지."

정예지가 고기를 먹으면서 말했다.

"나 곧 윤서 언니랑 지방 촬영 있어. 1박 2일."

"다녀와라."

***

오윤서는 지방 촬영 일정이 잡혔다. 1박 2일간 인적이 드문 산에서 촬영하는 행사였다.

정수찬은 그 소식을 듣고 걱정했다.

"괜찮겠어?"

- 안 괜찮을 게 뭐야?

"산에서 곰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 미국사람처럼 말하네? 우리나라 산에서 곰이 왜 나와? 방사된 건 있지만 봤다는 사람은 못 봤는데.

"그럼 멧돼지."

- 쓸데없는 걱정은.

정수찬이 생각했다.

'윤서가 위험한 곳에 갈 때는 경호 지원을 쓰라고 했지.'

오윤서가 미국에 왔을 때는 사람이 항상 따라붙었다.

하지만 한국에서까지 미국 정부 요원을 경호원으로 쓰지는 않는다.

대신에 미국 정부의 돈이 마그마에너지로 들어와 경호 지원 비용으로 사용된다.

"내가 경호원 보내줄게."

- 오버한다.

"전에도 병원에서 위험한 일이 생겼었잖아. 그때는 차 이사님이 있었으니까 무사했는데, 이번엔 아니잖아."

- 예지는 같이 가는데, 우진 씨는 안 오겠지.

"거봐. 촬영 기간 1박 2일 동안만 도와줄 사람을 섭외할 테니까 그냥 받아. 스태프 한 명 늘어난다고 생각해."

- 알았어.

"아이. 착하다."

- 칫.

정수찬이 전화를 끊은 후에 마그마에너지의 보안책임자를 만났다. 보안책임자는 미국 정부에서 보낸 사람이다.

정수찬이 말했다.

"한국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경호원을 섭외하려고 하는데, 절차 좀 밟아주시죠."

"경호 대상은 누구입니까?"

"윤서입니다."

"아. 그럼 실력자로 물색하겠습니다."

***

박창수가 그의 군대 선배가 운영하는 경호 회사를 방문했다.

"회사는 잘 돼요?"

사장이 커피를 박창수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이제 자리는 잡았지.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살아."

"손님한테 믹스 커피 타주는 거 보니까 잘 되는 거 맞나 싶은데."

"넌 손님 아니잖아. 그리고 이거 믹스는 아니다. 블랙커피다."

"설탕조차 아꼈겠네. 국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사장이 커피를 홀짝이는 박창수에게 제안했다.

"창수야. 너 알바 안 할래?"

"뭔데요?"

"연예인 근접경호. 1박 2일짜리 단기 경호다."

225. 박창수

경호 대상이 연예인이라는 말에 박창수가 관심을 보였다.

"연예인 누군데요? 가수인가?"

"넌 여전히 가수를 더 좋아하네?"

"가수의 노래가 내 마음을 위로해주니까 그러죠. 그중에서도 민지 경호라면 내가 특별히…."

"아니. 배우. 기간은 1박 2일."

박창수의 반응이 시큰둥하게 변했다.

"아. 배우. 그럼 그냥 이 회사에서 하면 되지 왜 나한테 넘겨요?"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우리 애들 서류를 먼저 넣어봤는데 거절당했어. 저쪽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고를 원하더라고."

"연예인 경호에 굳이?"

"덕분에 우리한테까지 연락이 온 거야. 내가 옛날에 너랑 실전 좀 뛰었잖아."

"그럼 형님이 직접 뛰면 되겠네."

사장이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야. 난 현장 안 뛴 지 너무 오래돼서 감이 떨어졌어."

"사장 되더니 배에 기름기 낀 건 아니고요?"

"이 쪼끄만 회사에 낄 기름이 있어 보이냐?"

"그럼 밥 먹고 나서 스파링 한 판?"

"어…. 너랑? 아니다. 됐다. 내 배에 기름기 낀 거로 하자. 어쨌든."

사장이 말했다.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서류탈락으로 끝내냐? 다른 데서 가져가지 못하게 우리가 챙겨야지."

박창수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다.

"창수야. 그러니까 좀 도와주라."

"내가 원래 경호원도 아니고, 가수라면 모를까 배우는 굳이…."

"일당이 백만 원이다."

"1박 2일에?"

"2일이니까 이백이지."

박창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배우가 어디 전쟁터라도 가나?"

"아니. 우리나라 산에서 촬영한대. 방송국 촬영팀이 다 들어가는데, 거기서 배우 한 명만 경호하면 돼."

박창수가 인상을 살짝 썼다.

"배우가 협박이라도 당한대요? 차라리 협박한 놈 찾아달라고 하는 거면 내가 적당한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아냐. 협박받은 거 아니야. 저번에 병원에서 습격당한 적이 있어서 경호원을 최고로 쓰려고 한다더라."

"경호 대상이 누군데요?"

"오윤서."

박창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니, 오윤서라고 미리 말을 하시지!"

"응? 넌 가수를 좋아하잖아."

"그렇다고 배우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최근에 '운명의 풍차'랑 '친구와 연인 사이'를 진짜 재미있게 봤거든요."

"아. 그 영화랑 드라마."

"흐흐. 산에서 오윤서 옆에만 있어도 이백? 이건 무조건 받아야지. 콜."

경호 회사 사장이 제안했다.

"네 서류 넣어봐서 통과되면, 수수료는 안 뗄게."

"응? 형님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대신에 넌 우리 회사 이름으로 이번 일 들어가는 거다? 이걸로 방송국에 인맥 좀 만들게."

"아. 그거야 뭐 그러시던가. 나야 뭐 잠깐 하고 마는 거니까."

***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일하는 라이언 최가 경호원 후보 명단을 확인했다.

이 명단은 정수찬의 요청으로 마그마에너지 보안책임자가 준비한 명단이다.

경호원 후보는 세 명이었다. 보안책임자는 그 세 명에 대한 교차 검증을 라이언 최에게 요청했다.

"셋 다 연예인 경호원으로는 스펙이 과하긴 한데."

그 서류 중에는 박창수의 것도 있었다.

"음…."

서류에는 미국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문서가 같이 첨부되어 있었다.

라이언 최가 미국 쪽 문서를 점검했다.

"박창수는 한국군에서 복무할 때 델타와 함께 작전을 뛰었군."

한 번만 뛴 것도 아니었다. 중동과 유럽에서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비공식 구출 작전에 참여한 기록이 있었다.

그중에는 당시 미군 특수부대 지휘관의 평가도 있었다.

"전투력도 우수하고, 특히 탐색과 추격 능력이 S급이라…. 이런 인재가 벌써 제대하고 경호원을 해? 낭비 아닌가?"

그가 한국군 내부 사정까지 조사할 필요는 없다.

"아쉽네. 미국인이었으면 우리 쪽으로 스카우트했을 텐데."

***

라이언 최의 의견은 마그마에너지의 보안책임자를 거쳐 정수찬에게 전달되었다.

정수찬이 박창수의 경호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경호원 섭외 문제로 전화 드렸습니다."

- 이거 국제 전화인데….

"미국에 잠시 나와 있어서요."

- 아. 그러시구나!

"박창수 씨 말인데요."

- 아! 그 경호 의뢰를 주신 분이구나! 창수가 실력 하나는 확실하죠. 만족하실 겁니다. 하하하.

***

박창수는 오윤서를 촬영 당일에 만났다.

"오윤서 씨. '운명의 풍차'와 '친구와 연인 사이',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고마워요."

박창수는 정식 경호원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경호원처럼 선을 긋거나 무게를 잡지 않았다. 오히려 연예인을 만나서 신난 얼굴이었다.

오윤서가 말했다.

"저도 박창수 경호원님 실력이 최고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녀가 박창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쪽에 멍이 들어 있었다.

박창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훈련하다 생긴 겁니다. 제가 평소에도 실전 같은 훈련을 해서요. 하, 하하."

얼굴의 멍은 차유리와 체육관에서 싸우다가 생겼다.

"아. 그러시구나."

오늘 촬영에는 정예지도 나온다.

그녀가 옆에서 박창수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창수….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박창수가 물었다.

"최근에 파리에 가신 적 있지요?"

"네. 촬영 때문에 잠깐 갔어요."

"그때 파리 공항에서 정예지 씨를 봤습니다. 선글라스 쓰고 계시던데."

"어머. 이런 우연이! 반가워요!"

서로 인사를 마친 후에 박창수가 물었다.

"제가 특별히 알아둬야 할 위험이 있습니까?"

오윤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는 분이 괜히 걱정이 많아서 경호원님을 섭외한 거예요. 평소처럼 촬영하고 오면 돼요."

정예지가 옆에서 물었다.

"무기는 뭐 쓰세요? 혹시 총 같은 거…."

박창수가 허리를 보여주었다.

"삼단봉입니다."

"아. 그렇구나."

"제가 이거 진짜 잘 씁니다."

정예지가 오윤서를 보며 투덜댔다.

"언니는 걱정해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 난 걱정 하나도 안 해주는데."

"대신에 넌 위험할 때마다 나타나서 구해준다며."

정예지가 실실 웃었다.

"그건 그렇죠. 히힛."

***

1박 2일 촬영은 아무 탈 없이 끝났다. 촬영 기간은 목요일부터 금요일 이틀이었다.

박창수는 이틀간 오윤서를 따라다니며 촬영 현장 구경을 실컷 했다.

스케줄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올 때도 오윤서의 차를 이용했다. 그녀의 집 근처에서 박창수가 내렸다.

오윤서가 인사했다.

"고생하셨어요."

"별말씀을."

경호비는 일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지급됐다.

박창수가 스마트폰에 뜬 입금 문자를 보며 말했다.

"이거 해보니까 개꿀이네? 연예인도 많이 보고, 힘든 것도 없고, 촬영 현장 구경도 하고. 앞으로도 이런 개꿀 의뢰가 있으면 받아야겠는데?"

남자 경호원이 여자를 경호할 때는 갈 수 없는 곳이 있다.

박창수가 실실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차유리가 전화를 받았다.

- 왜요?

"차 형사님. 부업 어때요?"

- 부업?

"연예인 경호인데."

- 형사가 그거 하다 걸리면 잘릴까요? 안 잘릴까요?

"아. 그런가? 그래도 이쪽이 형사 월급보다 나아 보이는데, 걸리면 사표 쓰고 이쪽으로 넘어오면 되잖습니까?"

- 선생님. 근무시간에 전화로 시비 걸면 주말에 또 처맞으시는 수가 있어요.

박창수가 큰소리쳤다.

"지난주에는 내가 방심하다가 맞은 겁니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 그럼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내일 콜?

"콜."

***

토요일에 오윤서가 탄 차가 접촉사고를 당했다.

"진짜 하나도 안 다쳤어. 사이드미러만 좀 깨지고 차 옆만 긁힌 거야. 범퍼도 떨어지긴 했지만, 사람은 안 다쳤어."

정수찬이 놀란 소리로 말했다.

- 그래도! 뺑소니라며!

"회사 차가 커서 안 다쳤다니까?"

- 월요일에도 지방 촬영 있다고 했지?

"어. 이번에는 바닷가.

- 경호원 데려가. 저번에 그 사람 어때?

"박창수 씨? 사람 좋더라. 다른 스태프들 일까지 알아서 도와주던데?"

- 내가 경호 회사에 연락할 테니까 월요일에 같이 가.

"알았어."

***

토요일에 박창수가 차유리와 체육관에서 만났다.

박창수가 손가락이 노출된 글러브를 팡팡 치며 말했다.

"이번엔 저번하고 다를 겁니…."

차유리가 성큼성큼 다가가다가 갑자기 공중으로 휙 떠올랐다.

박창수가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그 수법에 안 당하지!"

차유리의 공중 발차기가 박창수를 노리고 들어갔다. 박창수가 두 팔을 X자로 교차하며 그 공격을 막았다. 차유리가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공중에서 발을 내질렀다.

박창수가 뒤로 물러나며 그걸 다시 막았다.

차유리가 착지했다.

박창수가 팔을 흔들며 실실 웃었다.

"내가 한 번 당한 수법에는 잘 안 당합니다."

차유리도 피식 웃었다.

"한 번 당해보고 나서야 안 당하는 게 자랑인가요? 그리고 좀 친다더니, 계속 막기만 하게요?"

"그럼 이번에는!"

박창수가 바닥을 박차며 전진했다.

"조심해야 할 겁니다!"

박창수가 차유리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

여기는 전장이 아니라 체육관이고, 이건 전투가 아니다. 죽일 기세로 친 건 아니다.

그래도 주먹에 담긴 힘은 강했다.

차유리가 그 주먹을 정면에서 막지 않았다. 체중은 박창수가 훨씬 더 무겁다. 힘 싸움은 불리하다.

대신에 그녀는 스피드를 선택해, 그 주먹을 피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박창수도 그 정도는 대비하고 있었다. 즉시 왼손으로 그녀를 잡으려 했다.

'잡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어?"

차유리가 예상보다 더 빨랐다.

그녀가 자세를 바짝 낮춰 박창수의 옆으로 빠져나가며 배에 주먹을 꽂았다.

"컥!"

차유리가 옆으로 휙 빠져 거리를 띄운 후에 물었다.

"박창수 씨. 이런 식으로 처맞으시면 난 언제 후회하나요?"

박창수가 손을 배에 댔다.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손에 감정을 너무 담으셨네? 이거 나니까 버텼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병원 갔습니다?"

"맷집은 세시더라고. 많이 맞아보셨나?"

"이제 진짜 안 봐줍니다!"

"날 상대로 봐줬다고? 와. 존심에 스크레치 가네? 그럼 나도 진짜로 합니다?"

"어? 잠깐. 그럼 지금까지는 진짜가 아니…."

차유리가 날았다. 박창수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잠…."

***

월요일에 박창수가 오윤서와 만났다.

오윤서가 인사했다.

"박 경호원님. 다시 봐서 반가워요. 그런데…."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얼굴에 멍이 늘었네요? 저번엔 왼쪽이었는데 이번엔 오른쪽…."

박창수가 웃어넘기려고 했다.

"훈련하다 다친 겁니다. 하하하."

"훈련을 진짜 거칠게 하시나 보다."

"맹수랑 하다 보니까…."

"네?"

"실전 같은 훈련이란 뜻입니다."

***

오늘 촬영에도 정예지가 함께였다.

그녀가 바닷가에서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진 오빠. 윤서 언니는 남친이 경호원도 보내줬다?"

- 그만큼 안전해졌으니까 잘됐네.

"나는?"

- 오윤서 씨 옆에 있으면 묻어서 경호 받지 않나?

"캬아악!"

- 왜 화를 낼까?

"실력은 우진 오빠가 낫잖아."

정예지는 박창수의 실력은 모른다.

그런데 박창수는 볼 때마다 얼굴에 멍이 늘어서 왔다. 그래서 실력을 믿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좀 들었다.

"우진 오빠. 오늘 내 일일 경호원 어때?"

- 날 매니저로 고용하는 건 포기하라니까.

"경호원이랑 매니저는 다르잖아!"

- 네 의도는 비슷한데?

"필요할 때 해준다며!"

- 지금 위험하거나 꼭 필요한 상황이야?

"아니."

- 그럼 필요할 때 연락해.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정예지가 툴툴댔다.

"진짜 이 바위처럼 무딘 놈. 아무리 신호를 줘도 알아먹지를 못…."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그녀가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이상하다. 설마 다른 여자가 있나? 주변에 얼굴로 나를 이길 여자가 있을 리는 없는데."

오윤서가 다가와서 물었다.

"왜? 뭐가 잘 안돼?"

"우진 오빠한테 오늘 내 경호원 하랬더니 싫다고 해서요."

"응?"

"일당 올려준다고 해볼까요?"

오윤서는 차우진이 정수찬과 일한다는 걸 안다. 마그마에너지에 방문했을 때 간부급 직원들이 차우진을 특별하게 대하는 것도 봤다.

차우진이 여러 회사에 임원으로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걸 정예지가 모른다는 것도 안다.

오윤서가 조언했다.

"차우진 씨를 일당으로 꼬시는 건 어렵지 않을까?"

"왜요? 요즘 공치는 날이 많은지 자주 놀던데."

"응…. 그게."

정예지가 손뼉을 쳤다.

"앗. 설마 내가 돈을 주면 너무 일적인 관계가 되니까 거절한 건가? 흐흐흐. 뭐야. 그런 거였어? 표현을 좀 하지."

"예지야. 너도 참 답이 없…."

"네?"

"아니다. 난 피디님한테나 가야겠다."

"앗. 같이 가요!"

***

정예지는 조연급 배우라서 촬영장에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

촬영 순서는 기왕이면 오윤서 같은 배우 위주로 먼저 잡고, 그 후에 정예지 같은 조연급 배우를 끼워 넣었다.

강수민이 옆에서 말했다.

"난 나중에 톱스타가 되면 조연들 먼저 찍으라고 할 거야."

정예지가 피식 웃었다.

"네가? 퍽이나."

"왜? 나 진짜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니까?"

"아니, 나중에 톱스타가 된다는 거 말한 건데? 네가 퍽이나?"

"이년이?"

"야. 너 그렇게 욕하는 거 누가 찍어서 올리면 인터넷에 박제된다?"

강수민이 얼른 주변을 보았다.

스태프들은 대부분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지만, 시간이 남는 배우나 관계자도 있었다.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이 여인이? 난 그렇게 말한 거야."

오늘 촬영 현장에는 신인배우 진소영도 있었다.

그녀는 차용증 때문에 납치 감금을 몇 번이나 당했다가, 그때마다 차우진 덕분에 구출됐다.

진소영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여기는 참 평화롭고 평온해서 좋네요."

226. 카나리아

정예지가 손을 흔들었다.

"아. 소영 씨. 반가워요. 우리 또 같이 일하네요?"

신인배우 진소영이 활짝 웃었다.

"네!"

강수민도 진소영을 알아보았다.

"아. '친구와 연인 사이'에 나왔던 그…."

"네! 진소영입니다! 오윤서 선배님 동생 여자친구로 나왔습니다!"

"그렇구나. 반가워."

정예지가 강수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드라마에선 신인인데 우리보단 나이가 많아."

강수민이 말투를 살짝 고쳤다.

"반가워요. 여기 앉을래요?"

"앗! 고맙습니다!"

정예지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차우진의 전화였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응. 우진 오빠. 윤서 언니?"

그녀가 카메라가 돌아가는 쪽을 보았다.

"지금 촬영 중이라서 전화 안 될 거야. 왜? 아. 그래. 전화하라고 할게."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강수민이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누구야아?"

"너 또 그 못된 눈빛.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꺼."

"아무것도 아닌데 전화 받는 표정이 왜 그렇게 밝아?"

"통화 못 들었어? 윤서 언니랑 일 때문에 연락할 게 있는데 안돼서 나한테 물어본 거야."

"그 남자 이름이 우진이야?"

"그건 또 언제 들었대?"

"'어머어. 우진 오빠.'라고 간드러지게 말하던데?"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응'이라고 하면서 받았어!"

진소영이 편을 들었다.

"맞아요. 차우진 씨가 그냥 물어보신 거 같았어요."

정예지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응? 소영 씨가 우진 오빠를 어떻게 알아요?"

"전에 드라마 회식 때 같은 테이블에 계셨잖아요."

"그때 내가 우진 오빠 성까지 말했나?"

진소영이 슬쩍 자랑했다.

"평소에 차우진 씨한테 신세를 많이 지고 있고 있…."

정예지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어? 신세라니? 우진 오빠랑? 왜?"

진소영이 차용증 문제로 납치나 감금되기만 하면 차우진이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녀는 정예지가 차우진과 친하게 이야기하는 게 부러웠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조금 흘리면서 살짝 자랑했다.

그런데 정예지가 정색하고 그걸 따져 물었다.

진소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하고 나서야 그건 공개하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게 생각났다.

진소영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뇨! 그, 차우진 씨의 누나, 그러니까 유리 언니한테 신세를 졌단 말이었어요!"

차유리의 관할 구역에 진소영이 산다. 그래서 사건이 생기면 차유리 형사가 진소영을 담당했다. 한 번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예지에게는 그 말이 다르게 들렸다.

"뭐야. 우진 오빠 누나랑도 아는 사이야? 소영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사람이었어요?"

"네?"

강수민이 옆에서 물었다.

"훅 치고 들어온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넌 지금 그게 중요하니?"

"그럼 뭐가 중요한데?"

강수민은 입이 싸다. 정예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농담한 거야. 재미있었지?"

"너 정색했었어."

***

정예지가 장소를 옮겨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진 오빠. 진소영 씨 알아?"

- 알지.

"진소영 씨가 이 드라마에 출연한다? 단역으로."

- 조금씩 자리 잡아가나 보네.

"뭐지? 이 부드러운 반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 오다가다 몇 번 마주쳤어. 너랑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드라마 회식 때도 같이 앉았잖아.

"우진 오빠네 언니랑도 아는 사이라던데?"

- 그 이야기를 해? 의외네.

"뭐지? 오다가다 만났다고 하기엔 되게 잘 아는 느낌인데? 진짜 어떻게 아는 건데?"

차우진이 잠시 조용해졌다. 정예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차우진이 말했다.

- 음…. 진소영 씨는 카나리아 같은 사람이야.

"카나리아처럼 예쁘단 말이야?"

- 광산 속 카나리아. 위험이 닥치면 제일 먼저 당해.

정예지는 긴장이 탁 풀렸다.

"뭐야. 그게."

- 누나가 담당한 사건의 참고인이었어. 자세한 건 프라이버시라서 말 못해. 이것도 진소영 씨가 먼저 말했다니까 알려주는 거야.

"흐응. 어쨌든 둘이 뭐 특별한 사이는 아니란 거네?"

- 왜 특별해야 하는데?

"아니야. 끊어."

정예지가 전화를 끊었다.

"하긴. 내가 뭔 걱정을 하냐. 신호를 아무리 보내도 꿈쩍도 안 하는 바위 같은 놈인데."

그녀가 좀 밝아진 얼굴로 촬영장으로 돌아가 진소영을 찾았다.

"진소영 씨. 우리 커피 마실래요?"

***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진소영이 거기 있다라…."

진소영은 이미 몇 번이나 납치되거나 억류됐다가 구출됐다. 서해안 사건 때도 현장에 잡혀있었다.

"혹시 이번 촬영 현장에서 또 사건에 말려들려나?"

지금 현장에는 오윤서가 있다. 오윤서에게 문제가 생기면 정수찬이 좌절하고, 그러면 멸망급 재난을 막는 일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예지도 있다.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찜찜하니까 가봐야겠다. 진소영이 진짜로 카나리아일 수도 있으니까."

***

상식파 두목 곽상식이 진소영의 사진을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얘가 타깃이다."

조직원이 감탄했다.

"와. 장난 아니게 예쁜데요? 뽀샵인가?"

"타깃 사진인데 뽀샵을 쓰겠냐? 배우니까 당연히 예쁘지."

상식파 조직원이 멈칫했다.

"어? 형님. 배우요?"

"어. 드라마에 나온다더라."

"형님. 그러면 우리가 건드릴 사이즈가…."

상식파는 작은 조직이다. 조직원이 두목인 곽상식을 포함해도 다섯밖에 안 된다.

곽상식이 씩 웃으며 차용증을 꺼내 흔들었다.

"이게 뭔지 아냐? 이 여자가 도장 찍은 차용증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빚을 받으려고 이 여자를 데려오는 것뿐이야. 이러면 탈 안 나."

조직원의 얼굴이 당장 밝아졌다.

"형님. 대단하십니다. 그건 어디서 나셨습니까?"

"의뢰를 받았지."

"네? 의뢰요?"

"이걸 미끼로 납치해서 며칠 데리고 있으라는 의뢰를 받았다. 여기 적힌 돈은 다 내가 가지기로 했어."

"와. 짭짤하겠는데요?"

곽상식이 비웃었다.

"멍청한 새끼. 그러니까 내가 두목이고 넌 부하인 거야."

"예?"

"여기다 이자 팍팍 붙이고 협박도 해야지. 그러면 돈 벌어오는 연예인 노예가 생기는 거야. 얘 팔아서 팔자 펴 보자."

"역시 형님이십니다!"

다른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그런데 그 차용증은 누가 줬…."

"몰라. 의뢰인이 얼굴도 안 보여줬다."

"예? 그럼 누군지도 모르는 놈의 청부를 함부로…."

"그래도 해야 돼.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순 없어. 어차피 이거 청부한 놈도 좋은 놈은 아니니까, 우릴 경찰에 넘기려고 함정을 판 건 아닐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