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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디에고가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헉헉."

그가 뛰는 방향은 좁은 숲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쪽으로 뛰다가 중간에 방향을 바꾸었다.

"이 정도면, 헉헉, 따돌렸…."

차우진이 공간을 건너뛰었다. 디에고의 바로 뒤쪽이었다.

"이쪽에 누가 있나 보다?"

디에고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기겁했다.

"히이익!"

그가 뒤로 돌아서며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은 이미 물러나 있었다.

"새끼가 다짜고짜 칼질이야?"

"너, 너도 조금 전에 칼을…."

"넌 내가 아니잖아. 너 그러다 죽는다?"

"히익."

"이 새끼 이거, 현생의 천국에만 관심이 있구나? 야. 그 새끼 이 숲에 있지?"

"그, 그 새끼라니?"

"빌런."

"빌런이라니…."

"테러 빌런 말이야."

디에고는 움찔했다.

"테러라는 말에 반응하는 거 보면 맞네. 청부업자들을 모아서 테러를 저지르게 시켰지?"

"그, 그걸…."

"다음에 큰 건이 있다며? 그때 그놈들도 다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었지?"

"어떻게…."

"다 알고 왔다니까."

"역시 MI6…."

차우진이 물었다.

"그래서 다음 타깃은 어디냐?"

"그건 나도 모르…."

모른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차우진이 떡밥을 던져보았다.

"쿠에르노는 어떠냐?"

"뭐?"

"당황하는 걸 보면 거긴 아닌가 보다? 아쉽네."

디에고가 눈알을 굴리다가 제안했다.

"이봐. 내가 보스가 있는 곳으로 너를 안내하겠다. 대신에 나는 살려줘."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왜? 거기에 함정이라도 파놨냐?"

"아, 아니다."

"맞네."

"그, 그럼 내가 보스의 비밀을 알려주겠다."

"그건 좀 흥미롭다. 말해봐."

"이쪽으로 가까이…."

차우진이 다가갔다. 디에고의 눈이 번뜩였다.

갑자기 디에고가 초소형 권총을 꺼냈다. 22구경 2연발 권총에, 총의 크기도 손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그건 위력도 약하고 명중률도 형편없다. 그래도 총이라서 가까운 거리에서 급소에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죽…."

차우진이 디에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그가 디에고의 등 뒤에서 말했다.

"지옥 가야지?"

디에고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돌렸다. 돌아서는 놈의 가슴에 칼이 푹 박혔다.

"컥!"

디에고가 비틀거렸다. 차우진이 그 손을 툭 건드려 총을 빼앗았다.

디에고는 나자빠졌다.

차우진이 권총을 확인했다.

"무기를 숨기고 유인해서 나를 죽이려는 건 알았는데…."

총이 익숙했다.

"이거 백희선이 가지고 있던 거랑 같은 총이네? 이 총을 누가 공급하는지 궁금해지는데?"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던 백희선이 최용구를 죽일 때 이 권총을 썼다.

차우진쯤 되면 이런 위력도 약하고 명중률도 낮은 권총보다는 칼 한 자루가 낫다. 그가 권총을 디에고의 옆에 툭 던져놓았다.

그런 후에 디에고가 가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이놈이 이 방향으로 도망친 걸 보면, 이쪽에 테러 빌런이 있겠지. 숲 속에 집이나 벙커 같은 걸 준비했으려나?"

차우진이 숲을 걸었다. 한밤중이지만 달빛과 전투 센스를 더하면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 몇 개쯤은 찾을 수 있었다.

"최근에 사람이 걸어서 이동한 흔적. 짐을 옮긴 흔적. 이쪽이 맞네."

그는 어두운 숲을 한참 걸어갔다.

"방향은 맞는데 어디 있는 거야? 왜 불빛조차 안 보여? 지하 벙커이거나 아니면…. 불을 꺼놨나?"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온다는 걸 알고 등화관제를 하나? 밖에 있는 놈들은 조용히 처리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묘하네."

그가 옆을 보았다.

"그럼 지금 야시경으로 나를 보고 있나?"

갑자기 멀리서 작은 불빛이 반짝이며 총탄이 날아왔다.

차우진이 몸을 날렸다. 그는 작은 둔덕 뒤에서 포복하듯이 자세를 낮췄다.

"젠장. 매복인가?"

총탄이 몇 발 더 날아왔다.

총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딱딱거리는 소리만 조금 들렸다.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도 작았다.

"아음속탄. 소음기를 달고 아음속탄을 쏘는구나."

일반 소총이나 권총에 소음기를 달아도 총소리는 꽤 크게 난다.

그 소리를 줄일 방법은 있다.

처음부터 소음 감소에 신경을 써서 만들어진 총이 있다. 그런 총에 고성능 소음기를 달고 탄약도 화약을 덜 쓰는 아음속탄을 쓰면, 총소리가 딱딱 소리 수준으로 줄어든다.

"밀수한 권총이나 들고 다니는 놈들하고는 달라. 장비가 본격적이야. 한 놈만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있는 쪽으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음? 이렇게 대놓고 이쪽으로? 날 얕잡아봤나?"

차우진이 포복 자세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칼을 잡았다. 그래야 상대가 덤비면 단칼에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달리던 사람은 차우진이 있는 쪽이 아니라 그 옆으로 도망쳤다. 그쪽으로 총탄이 다시 날아갔다.

조금 전에 날아오던 것과 같은 아음속탄이었다.

"조금 전에는 나를 쏜 게 아니구나. 내가 아니라 다른 손님도 있었어. 그 손님이 들켰어."

손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손님이 뛰는 모습이 꽤 익숙했다.

"어? 설마 창수 형?"

체형은 달랐다. 지금 도망치는 사람은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보다 훨씬 더 몸이 두꺼웠다.

식량이 부족한 멸망한 세계에서는 살이 찌기 어렵다. 그러니 지금은 살이 쪘을 수도 있다.

"설마? 지금 여기 있을 시기가 아닌데?"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대로 가면 손님이 위험해진다.

적의 총탄이 손님이 뛰는 방향으로 몇 발씩 날아갔다. 운 나쁘게 명중탄이 나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창수 형일 수도 있으니까 구해줘야지. 어차피 처리해야 할 놈들이기도 하고."

다섯 놈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에 둘은 야시경을 쓴 상태였다.

차우진이 조금 전에 공간이동 스킬을 쓰지 않은 건 상대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숨어있는 곳은 상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섯 놈이 차우진이 숨어있는 곳 옆을 뛰어서 지나갔다.

차우진은 네 번째 놈이 지나갈 때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바로 앞에 야시경을 쓴 놈이 있었다.

차우진이 적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컥!"

적이 앞으로 엎어지려 했다. 차우진이 칼을 밀어 넘어지지 않게 막으며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다.

다섯 놈 중에 야시경을 든 놈은 하나가 더 있었다. 그놈이 제일 뒤쪽에 있었다.

그놈의 야시경에는 차우진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헉!"

적은 매복에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는 당겼다. 총에서 아음속탄이 날아갔다.

적과 차우진의 사이에는 칼을 맞은 놈이 서 있었다. 적이 쏜 총탄이 찔린 놈의 등에 퍽퍽 박혔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서 쏘면 잘 쏘네.'

야시경까지 쓰고 권총을 쏘는데도 명중률이 높았다.

하지만 총탄의 관통력이 약했다.

차우진이 방금 빼앗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적의 야시경 한복판을 꿰뚫었다.

"켁!"

이제 밤눈이 달린 두 놈은 제거했다. 나머지 셋이 뒤늦게 당했다는 걸 깨닫고 손전등을 켰다.

"무슨 일이야!"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사라졌다. 손전등의 불빛이 뒤늦게 그가 있던 곳을 훑었다.

"다, 당했어?"

이미 두 놈이 바닥에 자빠져 있었다.

"어, 언제?"

"누가!"

"안 보여! 여기엔 아무도 없다!"

"둘이나 당했는데 어떻게 아무도 없을 수가…."

212. 오필리아

다섯이 박창수를 죽이려고 추격하다가 차우진의 매복에 당했다.

차우진은 야시경을 가진 둘부터 처리했다.

나머지 셋은 허겁지겁 손전등을 켜고 주변을 훑었다.

"없어!"

"저격?"

"저쪽은 칼에 당했다! 와서 찔렀다!"

"사람이라면 벌써 사라질 수가 없는데 어떻게…."

"설마 유령?"

"무슨 개소리야! 야시경부터 주워서 확인해!"

"이건 안돼. 망가졌어."

"그거 말고 저거 가져…. 켁!"

총탄이 날아와 소리를 지르던 놈의 몸통에 퍽퍽 꽂혔다. 한 발로는 위력이 약했다. 딱딱딱 소리와 함께 세 발이 연달아 박혔다.

다른 두 놈은 황급히 총소리가 들린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은 리더로 보이는 놈부터 먼저 제거했다. 고성능 소음총을 써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소리는 들린다. 남은 두 놈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권총을 난사했다.

"으아아!"

"죽어!"

그중 한 발이 차우진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우진이 그 총탄을 발사한 놈부터 쐈다. 이번에도 세 발이었다.

"끄악!"

다섯 중 넷이 순식간에 당했다.

마지막 놈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으아아악!"

차우진이 그놈이 도망치는 방향을 확인했다. 디에고가 도망치던 것과 같은 방향이었다.

"이쪽 맞네."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두 발이 적의 등에 꽂혔다.

"컥!"

탄창이 비었다. 한 발이 모자랐지만 마지막 놈이 엎어졌다.

차우진이 적이 쓰러진 곳으로 걸어가 몸을 수색했다. 예비 탄창이 나왔다.

"수류탄은 없구나. 있으면 일이 편한데 그건 좀 아쉽네."

그가 탄창을 교환하고 예비도 하나 챙겼다. 총알이 관통한 야시경은 놔두고 멀쩡한 야시경도 가져갔다.

그런 후에 박창수가 도망친 곳을 돌아보았다.

"창수 형이랑 뛰는 모습이 비슷했는데…. 지금 시기에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

박창수는 정신없이 숲을 뛰어서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 헉. 이제 안 쫓아오나?"

그가 나무에 등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악. 진짜 죽을 뻔했네. 휴가 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저 새끼들은 왜 다짜고짜 총질이야?"

박창수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어?"

휴대폰 액정이 깨져 있었다.

"와. 이 씨. 내 울트라를…. 할부도 안 끝났는데."

경찰이든 대사관이든 연락을 하려면 휴대폰이 필요하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총을 가진 놈들이 쫓아왔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가 다시 숲을 뛰었다. 지나가는 차라도 세우려면 일단 도로까지는 가야 한다.

***

차우진은 마지막 적이 도망치던 방향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테러 빌런이 나를 잡으려고 함정을 판 것 같은데."

박창수가 왜 총잡이 다섯을 피해 도망쳤는지는 짐작이 갔다.

"나를 노린 함정에 창수 형이 걸렸나?"

그건 알겠는데 다른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형이 알함브라 궁전을 보러 오는 건 올해가 아닐 텐데?"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한 때는 내년이다.

"저쪽으로 도망친 사람이 창수 형이라면."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얼굴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기에 여기는 왜 온 거야?"

***

박창수는 숲에서 길을 잃었다. 이 숲에 들어올 때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대충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마트폰이 망가져 지도나 나침반을 쓸 수 없다. 달빛에 의지해 숲을 빠져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박창수가 욕을 했다.

"하여간 윤 형사 그 새끼는 일생에 도움이 안 돼. 왜 휴가 온 사람한테 스페인으로 가달라고 해서 총 맞을 뻔하게 만들어? 내가 그딴 걸 친구라고. 아오."

***

차우진은 노출됐다.

"이렇게 빨리 노출될 줄은 몰랐지."

숲 입구에서 디에고와 부하 둘을 잡을 때는 노출되지 않았다. 그들이 다른 놈들에게 연락하기 전에 처리했다.

박창수를 쫓던 다섯 놈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놈들도 차우진을 발견했다고 보고할 틈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사용한 건 총소리를 딱딱 소리로 들리게 할 정도로 고성능인 소음총이다.

그런데 그들은 박창수를 쫓던 중이다. 총까지 쏘면서 쫓아갈 정도면 이미 무전으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봐야 한다.

"나나 창수형 중에 누가 걸렸든 그건 큰 문제가 아닌데."

노출된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 적이 당황하면 빈틈이 생긴다. 그 틈을 파고들면 된다.

그런데 적은 당황한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저택을 드나들던 놈은 내가 인터폴이라고 했을 때 '벌써'라고 했어. 우리나라 합동수사본부에 위치가 노출됐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 저택에서 서둘러 빠져나갔겠지."

서둘렀다고 판단한 건, 디에고가 혼자서 차 트렁크에 폭탄을 싣고 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물건을 한 번에 다 빼지 못했다면, 매복도 본격적으로 하긴 어려웠겠지."

차우진이 박창수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매복에 걸리냐? 지금 시기에는 살이 쪄서 몸이 둔한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짐작이 갔다.

"테러 빌런은 동양인 관광객이 수상하게 보이니까 일단 대피했고, 나를 잡아보겠다고 매복도 했고, 창수 형이 거기 걸렸고, 나도 말려들었는데."

매복 하나는 박창수가 건드려준 덕분에 몰살시켰다.

그런데 그게 끝일 리가 없다.

"저 앞에도 몇 놈 숨어있겠네?"

숲 속 전투는 차우진의 장기다.

"잡으러 가자."

***

오필리아가 인상을 썼다.

매복조는 침입자를 추격 중이며, 곧 잡을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추가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목을 들고 오겠다고 큰소리치더니, 거꾸로 당했나?"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어차피 사도가 아니라 용병입니다."

"용병 따위로는 상대가 안 되는 실력자겠지."

그녀가 무전기를 들고 지시했다.

"손님이 온다. 뭐든 보이면 쏘고 나서 확인해."

***

저격수가 숲 속에 매복해 있었다.

그가 야간용 저격 스코프로 숲을 살폈다. 그가 보는 곳은 박창수를 쫓던 용병들이 전멸한 방향이었다.

"이쪽으로 나타나면 한 방에 머리를 날려주지."

차우진이 바로 옆에서 말했다.

"야. 그쪽에서 누가 오냐?"

"으헉!"

당황한 사도가 차우진 쪽을 향해 총구를 돌리려 했다.

늦었다. 총의 길이가 긴데 소음기까지 있으니 총구를 돌리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거리에서는 총보다 차우진의 칼이 더 빨랐다.

"컥!"

무전기에서 곧바로 소리가 들렸다.

- 지금 누구야! 무슨 소리야?

차우진이 적의 총과 무전기를 챙기며 말했다.

"외곽 초소다. 적이 침입해서 제거했다."

- 우리한테 외곽 초소가 어디 있어!

"아. 없나?"

저격수가 사용한 건 소음이 줄어들게 개조된 소구경 소총이다. 한 발씩 재장전해 쏘는 볼트액션 방식의 소총에는 커다란 원통형 소음기도 장착되어 있었다.

차우진이 총탄을 확인했다.

'이것도 아음속탄.'

이런 총탄으로는 아무리 소총이라도 장거리 저격은 무리다.

'100m 안으로 들어가야 확실히 제압하겠는데?'

차우진이 갑자기 몸을 휙 돌리며 적을 조준했다. 야간용 저격 스코프에 그곳으로 접근하는 놈이 보였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작은 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가 다가오던 놈의 몸통에 박혔다.

"컥!"

한 발로는 부족했다. 적이 옆으로 뛰었다.

차우진이 다음 탄을 장전한 후에 다시 발사했다. 두 번째 총탄이 적의 몸통에 꽂혔다.

적이 고꾸라졌다.

"위력이 너무 약해. 연사력은 더 형편없어. 다수를 상대로 이걸 쓰는 건 무리겠네."

어차피 근거리에서 쏴야 한다면 한 발 쏠 때마다 재장전해야 하는 볼트액션보다는 연사가 가능한 자동소총이나 기관단총이 낫다.

차우진이 고꾸라진 놈에게 접근했다. 그는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총에도 소음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래. 이게 낫겠다."

차우진이 소총은 버리고 기관단총을 챙겨 이동했다.

***

오필리아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안드레아. 마테의 상황은?"

대답이 없었다.

"젠장."

그녀가 무전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쥐새끼 한 마리만 보여도 다 쏴버려!"

"알겠습니다."

여러 목소리로 대답이 들어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예상보다 적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각자 이름을 말해!"

- 베드로.

- 야고보.

- 빌립.

- 시몬.

오필리아가 따지듯이 말했다.

"잠깐. 시몬은 목소리가 다르잖아!"

- 뭐야? 부하들의 목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던 거냐? 귀가 좋은데? 그냥 아무 이름이나 대면 속을 줄 알았는데.

"누구냐?"

- 하여간 이 사이비 새끼들. 사도 이름이 니들이 쓰라고 있는 건 줄 아냐? 십이 사도로는 안 부족하냐? 너희 머릿수가 남아돌면 원탁의 기사도 좀 갖다 쓰지?

"뭐?"

- 야. 테러 빌런. 너 적그리스도 콘셉트냐?

"너 누구야!"

차우진이 대답했다.

- 쿠에르노.

"뭐? 쿠에르노라니?"

- 네가 우리를 노리고 있잖아. 그래서 당하기 전에 먼저 치러 왔다.

"그런 적 없다! 나는 쿠에르노라는 조직을 타깃으로 삼은 적 없단 말이다!"

- 지금은 아니라도, 어차피 우리 회사를 노릴 거다. 그렇지?

오필리아의 표정이 싹 변했다.

"너. 조직 이름을 말한 게 아니군? 쿠에르노 인더스트리?"

- 역시 아는군.

"너희가 선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아니까."

- 그래서 우리를 노렸나?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너희 운이 나쁘면 그렇게 되겠지."

- 우리 회사는 운이 나쁘다는 쪽에 걸었다. 회사에 나쁜 운은 없어져야지. 바로 너 말이야.

"할 수 있겠어?"

차우진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다.

- 흐흐. 이미 몇 놈 제껴 봤더니, 쉽던데?

"지금부터는 달라질 거다. 일단 네 귀를 막아야겠다."

오필리아가 무전기에 대고 지시했다.

"무전 코드 변경. 타입 3."

***

차우진의 무전기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무전기를 확인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암호화 코드가 변경되는 방식이었다.

"그래. 타입 3이 어떤 코드인지는 내가 모르지. 내가 엿듣는 게 싫은가 본데."

차우진은 이미 다음 타깃을 보고 있었다.

그가 공간을 건너뛰었다.

숲에 숨어서 앞을 경계하던 놈이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헉! 어떻게 내 뒤에...."

"다 보이더라?"

적이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늦었다. 차우진이 조금 더 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컥."

차우진이 넘어지는 적의 허리에서 무전기를 잡아챘다.

- 뭐야? 이거 무슨 소리야! 누구야!

"무전기 코드를 바꾸니까 도움이 좀 됐냐?"

- 너 이 새끼 누구야! 정체가 뭐야!

"천사."

- 뭐?

"두려워하지 마라. 어차피 다 뒈질 테…."

갑자기 손에서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차우진이 무전기를 휙 던졌다.

무전기가 멀리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폭발했다.

폭발력은 강한 편은 아니지만, 저 무전기를 들고 있을 때 터졌으면 손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무전기 폭탄."

목동 공개홀에서도 무전기 폭탄이 사용됐다. 그때도 사람 몸에서 터지기 직전에 차우진이 무전기를 구석으로 던져서 처리했다.

"블루퍼핏을 노렸던 폭탄은 급조된 게 아니라 원래 쓰던 거였네? 하여간 이 테러 빌런 새끼는 폭탄을 참 좋아해."

***

오필리아가 숲에서 폭탄이 터지는 섬광을 보며 말했다.

"해치웠나?"

잠시 후에 무전이 들어왔다. 부하의 연락이었다.

- 폭발지점을 찾았습니다.

"죽었나?"

- 접근해서 확인하는 중입…. 커억!

"뭐야!"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내가 어느 무전기를 쓰는지 알 수 있나 보다? 아까는 안 터트리고 지금 터트리는 걸 보면, 금고 속에 넣어뒀던 무선 기폭장치라도 꺼냈냐?

오필리아가 옆에 있는 무선 기폭장치를 슬쩍 보았다. 방금 죽은 놈의 음성이 누구 것인지, 그가 가진 무전기가 몇 번인지도 확인했다.

'시몬의 목소리. 무전기 11번.'

오필리아가 물었다.

"어떻게 살아 있지? 최소한 손은 날아갔어야 하는데?"

"너희 사이비에게 천벌을 내리려면 그 정도 능력은…."

오필리아가 11번 무전기의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무전기가 터지면서 섬광이 번뜩였다.

"가까워지고 있어."

이번에 무전기가 터진 위치는 조금 전에 터트렸을 때보다 가까웠다.

오필리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전기에 대고 말하고 있을 때 터트렸는데, 왜 안 죽는 거지?"

213. 탱커

오필리아가 인상을 썼다.

"몸에 철갑이라도 둘렀나? 입에까지 철갑을 두르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말하고 있을 때 폭탄을 터트렸는데도 죽지를 않지?"

그녀의 옆에는 성기사단장이 있었다. 보통은 그를 단장이라고 불렀다.

"놈은 숲 전투에 익숙한 킬러입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하나씩 사냥당합니다."

"그럼?"

"모여 있어야 합니다. 놈은 어차피 혼자입니다. 모든 전투는 정면에서 붙으면 병력이 많은 쪽이 이깁니다."

오필리아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전부 복귀시켜."

오필리아의 부하들이 매복장소를 벗어나 거점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돌아가는 속도가 다 똑같지도 않았고, 매복 위치도 제각각 달랐다.

제일 먼 곳에 매복했던 놈이 주변을 경계하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놈은 어디쯤…."

바로 뒤에 차우진이 나타났다.

"이쪽이냐?"

후퇴하던 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등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자 기겁했다.

"히익!"

그가 급히 뒤로 돌아섰다. 다 돌아서기도 전에 방아쇠부터 당겼다. 소음기를 통과한 총탄이 허공에 부챗살처럼 뿌려졌다.

총은 차우진도 가지고 있다. 이미 제압한 놈이 가지고 있던 소음기관단총을 가져왔다.

적의 총구가 뒤로 완전히 돌기도 전에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 세 발이 적의 몸통에 퍽퍽 박혔다.

"컥!"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차우진이 나자빠진 적의 손에서 기관단총을 챙겼다.

이건 다른 놈이 가지고 있던 것과 달랐다. 팔뚝만 한 소음기가 일체형으로 붙어 있었다.

"K7 소음기관단총? 국산이 왜 여기서 돌아다니지? 국내에서 유럽으로 무기를 밀수하는 놈이 있나?"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한국군 무기를 여럿 다뤄보았다. 주한미군의 장비도 가끔 챙겼다.

차우진이 기관단총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가 아는 총과 비슷하긴 한데, 디테일에 차이가 있었다.

"아니네. 이건 외국에서 만든 짝퉁이구나. 거기다 저소음 키트로 개조까지 했네."

이번에는 무전으로 오필리아를 자극하지 않았다. 이제 적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으니 더 자극할 필요가 없다.

"이쪽으로 가면 있단 거네."

시간이 새벽까지 있다면 이 숲에서 한 놈씩 사도를 찾아내 제거하고 마지막에 오필리아도 찾아내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없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현지 경찰이 눈치채고 달려올 확률도 올라간다.

오늘 밤에는 여기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적을 빨리, 모두 잡으려면 한곳에 모이게 해야 한다.

차우진이 새로 획득한 기관단총의 탄창을 교체하며 말했다.

"짝퉁이라 조금 찜찜하긴 한데, 총알은 나가겠지."

***

오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섯? 겨우?"

복귀한 사도는 다섯밖에 없었다. 원래는 이 숲에 열 명을 배치했다.

"벌써 다섯이나 당했다고?"

단장이 말했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한 놈이잖아!"

단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한 놈이라면, 어쩌면 죽음의 천사일지도 모릅니다."

오필리아가 멈칫했다.

"프라하에서 조직 두 개를 무너뜨린 그놈?"

"이 정도 실력자는 전 세계를 뒤져봐도 극히 드뭅니다. 이 유럽에서는 죽음의 천사가 제일 의심스럽습니다."

오필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어차피 돈에 팔리는 킬러다. 쿠에르노의 돈을 받고 일하는 놈이란 말이다!"

"그건 그렇습니다."

"결국 돈 싸움이라 이거지?"

그녀가 사도 다섯을 보았다.

사도에게 죽은 후의 천국은 일종의 보험이다.

그들은 현생의 부귀영화를 더 원한다. 원하는 걸 누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오필리아가 그들에게 말했다.

"적의 몸에 박힌 총알 한 발당 10만 달러. 죽이면 100만 달러."

사도들은 어차피 싸워야 한다. 현상금까지 걸리자 기세가 살아났다.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장비도 완벽하게 지원하겠다."

오필리아가 미리 준비해둔 장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상체와 하체는 물론이고 팔다리까지 보호할 수 있는 전신 방탄복이 있었다. 그 옆에는 방탄마스크와 헬멧도 있었다.

"딱 다섯 세트가 있는데, 사도가 다섯이 돌아왔으니, 이 또한 신의 뜻이다."

용병들이 전신 방탄복을 챙겨 입었다. 조금 전에는 이런 상황까지 고려하지 않아 몸이 가벼웠었다.

지금 입는 방탄복은 무게가 꽤 나갔다. 게다가 방탄소재가 팔다리까지 감싸고 있어서 뛰는 건 쉽지 않았다.

한 사도가 물었다.

"방어력은 충분합니까?"

오필리아가 말했다.

"적도 아음속탄을 쓰고 있다. 그래서 총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진 않았다."

그 무기가 어디서 났는지도 안다.

"놈은 우리 무기를 훔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 탄환은, 이 갑옷을 뚫지 못한다."

오필리아가 장담했다.

"지금까지 당한 사도들은 방탄조끼가 없었다. 이제 너희는 탱크다. 적의 탄환은 너희를 죽일 수 없다. 적은 너희 총에 맞으면 죽는다. 그놈은 보병이란 말이다."

그녀가 명령했다.

"그러니까 죽여!"

***

차우진이 오필리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다른 놈들이 후퇴하는 걸 따라갔기 때문에 위치를 찾는 건 쉬웠다.

그러면서도 주변 경계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

차우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 적의 기지가 보였다.

"이야아. 저건…."

지하 벙커나 평범한 집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숲에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앞에 검은색으로 칠해진 건물이 서 있었다.

"철근 콘크리트 위에 검은색 페인트를 칠했는데."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을 워낙 많이 봐서, 겉모습만 봐도 재질은 짐작이 갔다.

"벽에 새겨진 저건…. 십자가인가?"

검은색 벽에 수십 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십자가도 검은색이어서 이런 밤에 보면 벽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거 혹시 사이비 신전이냐?"

차우진이 한국 강원도에서 싸웠던 인도자는 교주 행세를 했다.

"제대로 찾아왔네."

차우진이 주변 지형과 사물부터 확인했다. 그걸 머릿속에 담아둔 후에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적의 매복에 당했을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차우진이 즉시 옆으로 뛰었다. 그 방향에 바위가 있었다. 그는 바위 뒤로 몸을 날렸다.

곧바로 신전에서 불빛이 번뜩이며 총탄이 날아왔다.

소음기에는 사격할 때 발생하는 불꽃을 숨겨주는 소염기 효과도 있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 쏘면 아무리 소음기가 있어도 불꽃이 보이기 마련이다.

차우진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총탄이 연달아 꽂혔다.

아음속탄이 상대적으로 느리긴 하지만 어차피 사람보다는 빠르다. 위력이 낮지만 100미터도 안 되는 이 거리에서 맞으면 치명상을 입는 건 마찬가지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더라."

그는 일부러 적을 이곳에 몰아넣었다. 이 넓은 숲에서 적을 하나하나 찾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한 방에 처리하는 게 낫다.

사람들이 풀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투 센스 덕분에 소리만 듣고도 적의 위치를 예상할 수 있다.

'셋.'

그 정도면 싸우기 적당했다.

물론 한 번에 셋과 동시에 싸우는 것보다는, 하나씩 제거하는 게 당연히 낫다.

이 바위에서 뛰어나가 싸우는 건 바보짓이다. 신전은 2층 건물이다. 2층에서 이쪽을 조준하는 원거리 딜러가 있다.

차우진이 다가오는 놈 중에 제일 왼쪽 놈과의 거리 계산했다.

'20미터.'

왼쪽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무줄기가 굉장히 두꺼워서 사람 한 명쯤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바위 뒤에서 사라졌다가 나무 뒤에 나타났다.

세 놈은 바위를 조준한 상태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우진이 나무 옆으로 나오며 왼쪽 놈을 향해 사격했다.

그는 세 발을 발사했다. 따다닥 소리와 함께 아음속 총탄 세 발이 날아가 제일 왼쪽 놈의 몸통에 퍽퍽 꽂혔다.

"큭!"

적은 작은 소리를 냈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총에 맞을 때 움찔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적이 똑바로 선 채로 차우진 쪽으로 돌아섰다.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어?"

사람이 총에 맞으면 저렇게 돌아설 수 없다. 저럴 수 있는 이유는 뻔했다.

'방탄조끼?'

차우진이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서는 적의 얼굴을 향해 사격했다. 쇳소리와 함께 적의 얼굴에서 불꽃이 튀었다.

'방탄 가면?'

적이 방아쇠를 당겼다. 몸을 돌리자마자 서둘러 사격한 바람에 초탄은 한참 빗나갔다.

그런데 적이 가진 건 단발 권총이 아니라 소음기관단총이다.

적이 방아쇠를 꽉 당겼다. 총탄이 차우진 쪽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차우진이 굵은 나무 뒤로 재빨리 피했다.

흩어지던 총탄이 그가 엄폐한 나무 쪽으로 날아왔다. 몇 발은 나무에 퍽퍽 꽂혔다.

다른 두 놈도 상황을 깨닫고 총구를 그쪽으로 돌렸다.

차우진은 적의 전법을 깨달았다.

'온몸을 방탄복으로 둘렀어.'

방탄판이 없는 평범한 방탄복이라면 관통력 좋은 소총과 총탄을 쓰면 뚫을 수 있다.

그런데 차우진이 가진 총은 소리가 작은 대신에 위력이 약한 아음속 권총탄을 쓴다. 총도 소총이 아니라 기관단총이다.

'저놈들은 탱커다.'

이걸로는 방탄장비로 떡칠한 탱커를 잡기 힘들다.

***

오필리아가 야시경 기능이 있는 쌍안경으로 전장을 보며 웃었다.

"구석에 몰아넣었다. 저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단장이 물었다.

"제압이 가능할 듯한데, 산 채로 잡아올까요?"

"아니. 죽여. 나는 변수가 싫다."

"정보를 캐내야 이곳을 노리는 다른 놈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거점은 다시 옮기면 돼. 저 킬러가 누구인지는 그 후에 시체를 조사하고 돈을 풀어서 알아내야지. 물론 쿠에르노의 건물도 날려버려야 하고."

단장이 의문을 가졌다.

"정말로 쿠에르노에서 저 킬러를 보낸 걸까요? 적이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오필리아가 피식 웃었다.

"사실이 아니면 회사 건물을 잃은 쿠에르노는 억울하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

"하긴. 남의 사정은 상관없지요. 알겠습니다."

단장이 무전으로 지시했다.

"죽여라. 생포할 필요 없다."

- 알겠습니다.

***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의 쿨타임을 계산했다. 아직 멀었다.

다른 두 놈도 차우진이 있는 나무를 향해 사격했다. 그러면서 한 놈이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면 적의 사선에 몸이 노출된다.

차우진이 손을 위로 뻗으며 점프했다. 손에 굵은 나무 옹이가 잡혔다. 그 옹이를 잡고 발로 나무를 밟으며 위로 몸을 더 솟구쳤다가, 굵은 줄기를 박차며 옆으로 점프했다.

차우진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적들은 사람의 키를 고려해 2미터 아래를 조준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우진이 점프한 높이는 4미터는 되었다.

적이 차우진이 위쪽에서 나타난 걸 보고 총구를 위로 돌리려 했다.

전신 방탄복은 방어력은 높은데 민첩을 떨어뜨린다. 온몸을 두꺼운 방탄소재가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적의 총구가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느렸지만, 사람이 뛰는 것쯤은 쫓아가고도 남았다.

차우진이 공중에서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적의 움직임이 더 느리게 보였다.

그가 공중에서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적의 몸은 방탄복으로 단단히 보호되어 있다. 찾아보면 빈틈이 있겠지만 찾을 시간이 없다. 당장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적의 반격에 당한다.

그래서 차우진은 적이 아니라, 적의 무기를 노렸다.

제일 왼쪽 놈의 기관단총이 제일 먼저 차우진 쪽으로 총구가 이동했다.

차우진이 그놈을 노리고 사격했다. 총탄이 날아가 적의 기관단총을 때렸다.

방탄복은 적의 몸뚱이는 보호해도 기관단총까지 보호해주진 못한다.

총탄 두 발이 기관단총에 꽂혔다. 총알을 뿌리던 기관단총이 순식간에 먹통이 됐다.

스킬을 사용하고 0.3초가 지났다. 차우진은 아직도 공중에 떠 있었다.

차우진이 총구를 조금 옆으로 돌렸다. 방아쇠는 여전히 당긴 상태였다.

총탄 몇 발이 허공을 가르고 사라졌다.

그다음 총탄 몇 발은 두 번째 놈의 몸통을 때리다가 그중 한 발이 기관단총에 박혔다.

"큭!"

적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차우진은 나무 위에서 점프했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놈의 차우진을 조준했다.

이번에는 적의 사격이 더 빨랐다.

적의 총탄이 차우진을 향해 날아왔다.

214. 탱커 II

차우진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세 번째 놈이 방아쇠를 당겼다.

공중에서는 위치를 바꾸기 어렵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은 이미 조금 전에 사용했다.

그래도 적이 총구가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갑자기 총구를 돌리며 쏘는 사격이라 정확하지 않았다.

적의 초탄이 빗나갔다.

차우진은 아직도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그의 총탄이 공중에 뿌려지다가 세 번째 놈의 몸에 꽂혔다.

적의 상체는 방탄복으로 보호받고 있다. 낮은 위력의 총탄은 그 방탄복을 뚫지 못했다.

대신에 적의 총구 방향을 조금 더 빗나가게 할 수는 있었다.

차우진은 나무 위에서 옆으로 점프해 사격했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질 때는 몸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는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반쯤 누운 상태로 뒤로 날아갔다.

차우진은 뒤로 가는데 총탄은 앞으로 쏟아졌다. 아직도 기관단총의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가 발사한 총탄이 적의 상체에 쏟아졌다. 총탄은 방탄복을 관통하진 못했지만 상체를 조금 더 돌려놓았다.

그런 총탄 중 한 발이 적의 기관단총을 때렸다.

충분하진 않았다. 아무 곳이나 맞힌다고 기관단총이 망가지는 건 아니다.

진짜는 마지막 총탄이었다. 차우진이 발사한 총탄 하나가 적의 손을 때렸다.

적의 장갑은 관통되는 건 막았지만, 손가락과 손등 사이가 부러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끄악!"

적이 비명을 질렀다. 방아쇠를 당겨야 할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총에서 미끄러졌다.

세 놈의 중장갑 보병이 무력화됐다. 둘은 총이 고장 났고, 하나는 오른손이 부러졌다.

차우진의 탄창도 텅 비었다. 방금 쏜 게 마지막 탄약이었다.

차우진이 뒤로 낮게 점프했다가, 왼손으로 땅을 짚고 비보이가 춤을 추듯이 빙글 회전했다. 발이 다시 땅에 닿았다.

차우진이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제일 가까운 적과의 거리는 20미터였다. 가까웠다.

차우진이 돌진하며 단검을 뽑았다. 첫 번째 적이 권총을 뽑고 있었다.

차우진이 적에게 달려들어 목을 노리고 칼을 박아넣었다.

칼날이 막혔다. 중장갑 보병은 목에도 방어구를 두르고 있었다.

적이 권총을 마저 뽑았다.

중장갑 보병의 단점은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차우진이 적의 등 뒤로 돌아가며 목을 잡았다. 목을 보호하는 방어구가 방해됐다.

차우진이 적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등을 발로 밀며 목을 돌렸다.

방탄복과 각종 방탄장비는 총알은 막았지만 목이 돌아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적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두 번째 적이 권총을 뽑았다. 그가 서둘러서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다.

총알이 날아와 첫 번째 중장갑 보병의 몸통에 퍽퍽 박혔다.

차우진은 적을 방패 삼이 총탄을 피하며 단검을 던졌다. 날아간 단검이 적의 발등에 꽂혔다.

적의 신발은 앞쪽에만 단단한 철판이 들어 있었다. 발등과 발목의 경계는 방탄이 아니었다.

"끄악!"

적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차우진은 목이 돌아간 놈의 손에서 권총을 잡아채며 돌진했었다.

발등에 칼이 꽂힌 놈이 황급히 권총을 들다.

그 손을 차우진이 걷어차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총구를 적의 방탄 가면에 댔다.

방탄 가면에는 앞을 보는 구멍이 수평으로 가늘고 길게 뚫려 있었다.

"여기도 방탄이냐?"

차우진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발사돼 앞을 보는 구멍에 박혔다. 하지만 뚫지는 못했다.

대신에 구멍이 조금 넓어졌다. 차우진이 정확히 그 자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두 번 더 당겼다.

세 번째 총탄이 구멍을 비집고 가면 안으로 들어갔다. 적이 비명을 질렀다.

"크악!"

그런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네 번째 총탄이 방탄 가면의 구멍을 통과했다.

"컥!"

적이 뒤로 넘어갔다. 차우진이 넘어가는 놈의 칼집에서 단검을 뽑았다.

아직 한 놈이 남았다. 오른손에 총을 맞은 놈이다.

"어? 어?"

적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기관단총은 손에 총을 맞았을 때 떨어뜨렸다.

차우진이 총과 칼을 양손에 들고 마지막 장갑 보병을 향해 돌진했다.

갑자기 차우진이 있던 곳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신전에서 발사한 총탄이었다.

야간에 급히 쏜 것이라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다. 고속으로 돌진하는 사람을 한 번에 맞히는 건 어려웠다. 빗나간 총탄이 차우진의 근처 흙에 퍽퍽 박혔다.

원거리 딜러가 자유롭게 사격하면 당하는 쪽에서는 좋을 게 없다.

차우진이 돌진 속도를 늦추며 신전을 향해 사격했다. 발사 섬광 때문에 적의 사격 위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쏜 총탄이 발사지점으로 날아갔다. 반쯤 남아 있던 탄창이 순식간에 비었다.

적이 침묵했다. 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적이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기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차우진이 빈 권총을 버리고 세 번째 놈을 덮쳤다.

그놈은 한 손으로 권총을 뽑아 쏘려고 했다. 한 손으로는 장전은커녕 안전장치 해체조차 쉽지 않았다. 가능은 한데 시간이 없었다.

적이 권총을 버리고 단검을 뽑았다.

차우진도 단검 한 자루는 남아 있다.

적이 차우진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동작이 컸다. 동작이 그렇게 크면 차우진에게 어디를 찌를지 들킨다.

차우진이 자세를 휙 낮춰 적의 공격을 피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상대는 장갑 보병이다. 총알도 안 박히는데 주먹 같은 타격기가 먹힐 리가 없다.

관절은 이야기가 다르다. 적이 팔을 움직이려면 관절이 움직이는 부분은 조금 부드러운 소재를 써야 한다.

그 약한 부분은 정면에서 싸울 때는 노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칼을 내지를 때는 약점이 살짝 노출된다.

차우진이 적의 겨드랑이 안쪽에 칼을 박아넣었다. 칼날이 부드러운 소재의 천을 뚫고 들어갔다.

"끄아악!"

적이 비명을 질렀다.

***

단장은 차우진이 사격할 때 엄폐물 뒤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차우진의 권총 사격이 너무 정확해서, 계속 서 있으면 얼굴에 총탄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가 엄폐물로 사용되는 난간 아래로 몸을 숙였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마지막 장갑 보병이 칼에 맞았다.

"셋 다 당했습니다."

오필리아가 뒤에서 명령했다.

"빨리 쏴!"

***

차우진이 적의 겨드랑이에 칼을 박아넣자마자 신전 쪽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한두 발이 아니었다.

차우진이 방금 잡은 적의 뒤로 이동했다.

날아온 총알 중 몇 발은 방금 제압한 놈의 가슴에 퍽퍽 박혔다. 방탄복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몸이 흔들거렸다.

차우진이 적을 방패 삼아 질질 끌면서 바위 뒤로 이동했다. 총알이 몇 발 더 박혔다.

차우진이 적의 몸에서 손을 놓으며 바위 뒤로 피했다. 바위 뒤에 완전히 엄폐하려면 자세를 조금 낮춰야 했다.

총탄이 몇 발 더 날아와 바위를 때리다가 적의 사격이 중단됐다. 총탄으로는 바위를 뚫을 확률이 없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바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금 시대의 적이 전신 방탄복으로 무장하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은 좀 빡세다."

***

단장이 말했다.

"적이 바위 뒤로 피했습니다. 여기서는 사격 각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필리아가 물었다.

"지금 저놈이 끌고 간 거, 바위 옆에 있는 저건 누구야?"

"라파엘입니다."

오필리아가 원격 격발기를 잡았다.

"라파엘이란 말이지."

단장이 말렸다.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결국 죽을 거야. 저놈이 라파엘을 살려둘 리가 없잖아."

오필리아가 격발기를 누르며 말했다.

"이건 성전이야."

***

차우진은 쎄한 느낌을 받았다. 방패로 사용한 놈의 방탄조끼 옆에 매달린 무전기가 보였다.

'무전기 폭탄?'

그런 폭탄은 목동 공개홀부터 오늘 이 숲에서까지 여러 번 보았다. 폭탄의 위력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중상 또는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는 된다.

폭탄을 피하려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 바위 뒤에서 나가면 적의 사격이 쏟아진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은 쿨타임이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더 기다려야 스킬을 다시 쓸 수 있다.

그래도 쿨타임이 어느 정도 지난 지금이라면, 아주 가까운 거리는 이동할 수는 있다.

다만,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킬을 쓰면 몸에 무리가 크게 간다.

차우진이 바닥에 엎드리며 스킬을 사용했다.

멀리 이동한 것도 아니다. 겨우 몇 미터 옆이 한계였다. 그 위치에 무성한 풀숲이 있었다. 풀숲 뒤에는 작은 구덩이도 있었다.

아무리 무성한 풀숲이라도 총알을 막을 순 없다. 차우진이 이쪽으로 이동하는 걸 들키면 바로 그 위치로 적의 총알이 날아온다.

하지만 적이 모르게 이동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우진이 사라졌다가, 풀숲 바로 뒤에 엎드린 자세로 나타났다.

무전기 폭탄이 폭발했다.

***

오필리아가 물었다.

"폭탄이 터질 때 바위 뒤에서 뛰어나오진 않았지?"

단장이 야시경으로 바위를 보며 대답했다.

"예. 그 위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럼 죽었거나, 최소한 중상이겠지?"

"그럴 겁니다. 폭탄이 근거리에서 터졌으니까요."

"가서 확실히 죽여."

"남은 사도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인데, 충분하지."

***

차우진은 폭탄은 피했다.

하지만 쿨타임이 완전히 차기 전에 너무 무리해서 스킬을 썼다. 겨우 몇 미터를 건너뛴 것뿐인데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마치 한여름에 땡볕에서 무거운 벽돌을 쉬지 않고 한 트럭쯤 옮긴 것처럼 힘들었다.

"아. 오늘은 진짜 힘드네. 이러니까 내가 자꾸 살이 빠지지."

그는 엎드린 채로 잠시 쉬었다. 일단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

신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묵직했다.

'그래. 확인 사살하러 와야겠지.'

"후우."

이 풀숲을 벗어나 바위를 지나 공터까지 가면 권총 정도는 챙길 수 있다.

그런데 신전에서 적이 이쪽을 보고 있다. 이곳을 벗어나면 총탄이 날아올 게 뻔하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은 지금은 못 쓴다. 쿨타임을 무리하게 당긴 대가로 몸에 부담이 너무 크게 걸렸다. 쿨타임도 평소보다 훨씬 길게 늘어났다.

'총이 없으면 돌이라도 써야지.'

멸망한 세계에서는 뭐든 무기로 사용했다. 총이 당연히 제일 좋고 그다음이 칼이지만, 없으면 돌이나 나무도 사용했다.

적이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이 무전으로 보고하는 소리도 들렸다.

"바위 뒤에서 움직임은 없습니다."

단장이 지시했다.

- 죽었을 수도 있지만, 살아서 반격을 노릴 수도 있다. 동시에 진입하면서 사격하라.

두 놈이 바위 앞에서 서로 수신호를 했다. 그런 후에 두 놈이 양쪽에서 바위 뒤쪽으로 동시에 돌입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바위 뒤로 진입하기 직전부터 발사됐다. 처음에는 바닥을 긁던 총탄이 바위 뒤로 쏟아졌다.

두 놈은 바위 뒤 땅바닥을 향해 사격하다가 당황했다. 손가락도 방아쇠에서 떨어졌다.

"어? 없다!"

맞은편에 있던 놈이 풀숲 사이의 차우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기!"

그놈이 총구를 차우진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차우진이 들고 있던 주먹 크기의 돌을 힘껏 던졌다.

돌이 강속구처럼 날아가 맞은편 놈의 얼굴을 때렸다.

적은 얼굴에 방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총알도 막는 가면은 돌팔매에 뚫리진 않았다.

그런데 돌이 너무 빨리 날아왔다. 무게도 무거웠다. 그만큼 맞았을 때의 충격도 컸다.

적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큭!"

충격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정확히 조준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총구가 향한 방향에는 차우진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장갑 보병도 있었다.

적은 누가 맞든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장갑 보병에게는 아음속탄은 통하지 않는다.

돌에 맞은 놈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몇 발이 동료의 몸통에 퍽퍽 박혔다.

총에 맞은 놈은 방탄복과 방탄 가면, 헬멧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몇 발쯤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그래도 근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이라 몸에 충격은 좀 받았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는 게 조금 늦어졌다.

차우진이 땅을 박차고 뛰어 총에 맞은 보병의 뒤를 덮치며 말했다.

"느리다?"

"헉!"

차우진이 적의 등에 무릎을 대고 목을 잡아 꺾었다.

"컥!"

맞은편 놈은 돌에 맞은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다.

차우진도 방금 잡은 놈의 기관단총을 빼앗아 방아쇠를 당겼다.

근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215. 오필리아 II

적이 쓰는 기관단총은 탄창을 꽉 채우면 서른 발이 들어간다. 바위 뒤를 처음 덮칠 때 두 놈은 이미 열 발쯤은 소모했다.

맞은 편 적은 차우진을 발견했을 때 열 발을 더 쐈다.

이제 적의 탄창에는 열 발이, 차우진이 빼앗은 기관단총의 탄창에는 스무 발이 남았다.

적과 차우진이 서로를 향해 거의 동시에 총탄을 쏟아부었다.

열 발이 남았던 적의 탄창이 먼저 텅 비었다.

"헉!"

차우진이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

"낭비했냐?"

적이 서둘러 탄창 교환을 시도했다.

차우진이 방패로 쓰던 장갑 보병의 옆으로 나와 적을 향해 사격했다. 이번에는 약해 보이는 곳을 정확히 조준하고 갈겼다.

아무리 방탄복이 튼튼하고 아무리 아음속탄이 약해도, 이런 근거리에서 스무 발쯤 맞으면 약한 곳이 뚫리기 마련이다.

약해 보이는 곳을 대놓고 노리고 쏘면 더 잘 뚫린다.

총탄이 온몸을 두른 방탄소재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적의 다리 안쪽에서 피가 튀었다.

"컥!"

적이 짧은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이제 차우진의 기관단총도 탄창이 텅 비었다.

차우진이 기관단총을 버리고 점프해 공중에서 적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체중이 실린 발차기를 맞은 놈이 뒤로 쭉 밀려나 나자빠졌다.

"커억!"

차우진의 몸을 가려주던 바위가 크긴 하지만, 날뛰어도 될 만큼 크진 않았다. 그의 몸이 바위 밖으로 노출되자 신전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차우진은 적을 공중에서 걷어차자마자 자세를 낮추었다.

그의 몸이 바위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리 위로 총알이 휙휙 지나갔다.

차우진이 뒤쪽에서 기척을 느꼈다.

방금 목을 꺾어놓은 놈에게 들어간 타격이 생각보다 약했다. 전신 방탄복의 목 보호대 때문에 목이 제대로 꺾이지 않았다.

그놈은 동료의 총탄에 온몸을 두들겨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뒤쪽 놈이 정신을 차리고 단검을 뽑았다. 그 칼을 크게 휘두르며 차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

차우진이 적의 안쪽으로 파고들며 적의 팔을 잡았다. 적이 달려드는 힘을 이용해 엎어치기를 걸었다.

적의 몸통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바위 위로 회전했다가 바위 바깥쪽으로 떨어졌다.

"컥!"

방탄복을 입어도 질량에 의한 충격은 들어간다. 몸이 무거워진 상태라 충격이 더 크게 들어갔다.

총탄 몇 발이 날아왔다. 바깥에 떨어진 놈의 몸에도 두 발이 꽂혔다가 사격을 멈추었다. 사람이 바위 뒤로 튀어나오니까 일단 쐈다가, 자기네 편인 걸 뒤늦게 알아보고 사격을 멈추었다.

***

오필리아가 물었다.

"왜 쏘다 말아!"

단장이 대답했다.

"놈이 아닙니다!"

"그럼 두 사도 중에 누구야!"

"여기서는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러면!"

오필리아가 무선 격발기 두 개의 버튼을 콱 눌렀다.

"두 개 다 터트리면 되잖아!"

***

업어치기에 당한 놈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차우진이 적의 머리를 잡고 확 끌어당겼다. 적의 몸이 바위 뒤로 딸려왔다.

차우진이 적의 무전기부터 잡아 뜯어 던졌다.

뒤쪽으로 날아간 무전기가 폭발했다.

폭탄 무전기는 하나가 더 있었다. 머리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놈의 무전기도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무전기 폭탄의 폭발력은 그리 크지 않아서 방탄조끼를 뚫기엔 부족했다. 그렇다고 충격이 약한 건 아니다.

"끄아악!"

머리를 걷어차이고 뒤로 밀려나 나자빠졌던 놈이 폭발에 휘말려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붙잡혀 끌려온 놈이 급히 팔을 휘저었다. 오른손에는 아직도 단검을 쥐고 있었다.

차우진이 적의 팔을 젖히고 손목을 발로 밟았다. 체중을 실어 밟았더니 적의 손이 저절로 펴졌다.

차우진이 적의 칼을 빼앗았다. 그 칼을 다시 적의 몸에 박아넣었다. 방탄복 사이의 틈으로 칼날이 푹 들어갔다.

"컥!"

차우진이 칼에서 손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차우진이 죽었는지 확인하고 살아 있으면 사살하러 온 두 놈을 잡았다.

바위 바깥에 쓰러져 있는 놈은 방탄복에 붙어 있던 무전기 폭탄이 터졌다. 그놈은 비명을 잠깐 지르고 조용해졌다.

차우진이 바닥에 떨어진 기관단총을 챙겼다. 그런 후에 탄창을 교환했다.

"힘들어 죽겠네."

***

오필리아가 야간용 쌍안경으로 전장을 살폈다.

"이겼나?"

단장이 말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보고는?"

"무전기가 두 대 다 폭발해서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병력은…."

"부하들은 전멸했습니다. 이제 우리 둘뿐입니다."

오필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새끼 도대체 뭐야? 어떻게 혼자 저럴 수 있어?"

"역시 체코에 나타났던 죽음의 천사가 아닐지…."

"확실해?"

"혼자서 용병들과 중장갑으로 무장한 사도들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마치 프라하에서처럼."

"그놈이 왜 나를 노려!"

"쿠에르노의 청부를 받았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필리아가 이를 갈았다.

"결정했어. 그럼 다음 타깃은 쿠에르노의 연구소다. 가까운 곳에 있잖아."

"그 전에 저놈을 잡아야…."

갑자기 단장이 몸을 긴장시키며 앞쪽을 조준했다.

바위 뒤에서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온몸을 방탄복으로 덮고 얼굴에 방탄 가면과 방탄모까지 쓴 사람이었다.

오필리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저걸 봐! 이겼어! 나의 사도가 천사를 죽였어!"

단장이 총을 겨눈 채로 말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방탄 가면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겉모습만으로는 우리 사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물어봐!"

"무전기가 없습니다."

"그럼 소리라도 질러!"

상대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단장이 외쳤다.

"이름을 밝혀라!"

상대가 손으로 목을 가리키며 걸어왔다.

"목을 다쳤나 봅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 가면을 벗으라고 해!"

"가면을 벗어라!"

상대가 가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계속 걸어왔다.

"뭐라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너!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차우진이 말했다.

"란슬롯."

"뭐?"

"코드네임으로 원탁의 기사도 좀 쓰라니까."

"역시 사도가 아니라 킬러구나!"

단장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두운 밤에는 소음기를 써도 발사 섬광이 보였다.

차우진도 그 섬광을 향해 사격했다.

단장이 쏜 총탄은 차우진이 빼앗아 입은 방탄복에 막혔다. 차우진이 쏜 총탄 몇 발이 단장이 있던 곳을 훑고 지나갔다.

단장은 방탄조끼만 입었을 뿐 전신 방탄복은 입지 않았다. 남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총탄 한 발이 단장의 어깨를 스쳤다.

"큭!"

단장이 급히 2층 난간 뒤로 몸을 피했다.

"사도들이 전멸했습니다."

오펠리아가 명령했다.

"죽여!"

"화력이 부족합니다."

"화력?"

오필리아가 폭탄을 하나 넘겼다.

"화력이라면 이걸 써!"

"화력이 너무 강합니다. 여기서 그 폭탄을 터트리면, 이 위치가 외부에 노출됩니다."

"이미 무전기를 몇 대나 터트렸어! 어차피 당장 경찰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야! 그럼 한 방 정도는 더 터트려도 괜찮잖아!"

"알겠습니다."

단장이 폭탄을 받은 후에 난간 바깥을 슬쩍 확인했다.

"어?"

"왜!"

"킬러가 사라졌습니다!"

"뭐? 어떻게!"

"방탄복을 벗어놓고…."

차우진은 방탄복을 제대로 입은 게 아니다. 벗기 쉽게 대충 걸친 후에 걸어오면서 사격해 단장을 난간 뒤로 밀어냈다.

단장은 차우진이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신 방탄복을 입고 뛰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단장이 틀렸다. 차우진은 몸에 대충 걸쳤던 방탄복을 버려두고 신전으로 뛰었다.

오필리아가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갔다는 거야!"

단장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이 신전?"

1층 출입구에 설치해둔 동작 감지기가 삑삑 소리를 냈다.

단장이 2층 안쪽으로 뛰어들어가 1층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총으로 조준했다.

"놈이 신전에 진입했습니다!"

"막아!"

"2층으로 올라오는 길은 이곳 하나뿐입니다. 놈은 못 올라옵니다."

2층 난간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네 생각이고."

단장은 목소리가 들린 위치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뒤쪽? 난간 앞?"

단장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몸을 다 돌리기도 전에 총알이 박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장이 등을 보인 채로 물었다.

"어떻게?"

차우진이 대답했다.

"내가 높이뛰기를 잘해."

"신전 2층 난간은 5미터 높이다!"

"내가 잘한다니까?"

오필리아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차우진을 보았다.

차우진은 방탄복은 버리고 방탄 마스크 하나만 쓰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물었다.

"너 누구야!"

"천사. 너희를 멸하러 왔지."

"죽음의 천사?"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는 놈이 있네? 아니, 년인가?"

그녀의 눈동자가 단장과 차우진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단장은 총을 쥐고는 있지만 이미 뒤를 잡혀서 움직이지 못했다.

오필리아가 질문했다.

"쿠에르노에서 얼마를 받기로 했지?"

"영업비밀이라."

"얼마이든 상관없다. 천만 달러보다는 적겠지."

"호오. 그 돈을 주겠다?"

"추적 불가능한 코인으로 주지."

오필리아가 조건을 걸었다.

"대신에 네가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회장을 죽여줘야겠어."

"그건 별도 요금이 붙는데?"

"얼마면 되지?"

"선제시해."

오필리아가 제안했다.

"회장 목숨에 천만 달러."

회장이 죽어도 연구 성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의 기술 개발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연구소가 사라지면, 이미 하던 개발도 일정이 지연된다. 일부는 취소될 수도 있다.

차우진이 거꾸로 제안했다.

"회장보다는 쿠에르노의 연구소가 어때? 거기에 폭탄을 설치하면 더 화끈한 복수가 되겠지."

오필리아가 제안을 추가했다.

"나는 나를 죽이려 한 놈을 살려두지 않아. 회장 목숨에 천만, 연구소에 천만."

"연구소를 무너뜨릴 폭탄은 있고?"

"이 신전에 충분히 있다."

"삼천만 달러면 짭짤하네."

오필리아의 표정이 느긋해졌다.

"천국에 가기 전까지 현생을 실컷 즐기며 살 수 있는 돈이지."

"선입금?"

"너를 믿을 수 없으니 그건 곤란하다. 지금 이대로 물러난다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코인을 보내주지."

차우진이 물었다.

"네 부하를 내가 다 죽였잖아. 그런데도 이래도 되나?"

"그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리라."

"천국 갈 놈들을 다 죽였으니 난 지옥행인가?"

"천국에 가려면 너도 바치는 것이 있어야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네 위에서 나한테 천벌은 안 내리나?"

오필리아가 웃었다.

"내 뜻이 그분의 뜻이다. 너는 네가 죽인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라. 그러면 현생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네 죄도 씻을 수 있으리라."

"아. 내가 그 말을 안 했구나."

"무슨?"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선입금이 아니라며? 돈부터 주면 먹고 배 째려고 했는데. 아. 내 배 말고 네 배를 짼다고."

오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 농락해?"

"농담 몇 마디에 삼천만 달러를 받을 수 있으면 시도할만했잖아? 결국 꽝이 됐지만."

오필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너에게 천벌이 떨어지리라!"

"어. 궁금하다. 너네 천벌. 미사일이 여기 내리꽂히는 건 아닐…."

차우진의 표정이 싹 변했다. 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느낌의 방향이 앞쪽이었다. 그쪽에는 오필리아가 있다.

오필리아가 두 팔을 옆으로 활짝 펼쳤다.

"천벌이다!"

오필리아의 옷 앞쪽이 쭉 찢어지며 작은 폭탄이 앞으로 툭 튀어나갔다. 그 방향에 차우진이 있었다.

차우진은 이미 단거리 공간이동을 사용해 이 신전의 2층으로 올라왔다.

좀 전에 밖에서 싸울 때도 공간이동 스킬을 무리하게 사용했다. 그때 늘어난 쿨타임을 겨우 채우자마자 스킬을 다시 써서 2층으로 올라왔다.

또 쿨타임을 무시하고 스킬을 당겨 쓰는 건 무리였다.

눈앞에서 폭탄이 날아오는데, 공간이동 스킬은 쓸 수 없다.

"젠장!"

216. 오필리아 III

오필리아가 옷 속에 숨겨둔 폭탄이 스프링의 힘으로 튀어나갔다.

그 스프링은 워낙 작아서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폭탄은 느리게 날아갔다.

차우진이 바닥을 박차 왼쪽 후방으로 점프해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낮췄다. 왼손이 바닥에 닿았다.

'폭탄인가? 타입은?'

전투 센스가 뇌의 사고회로를 가속해 머리가 팽팽 돌았지만, 폭탄 타입을 분석할 시간까지는 없었다. 대신에 상대의 성향을 판단했다.

'강한 폭탄이 근거리에서 폭발하면 저 여자도 죽어. 폭발력은 약해.'

그는 전방으로 산탄이 쏟아지는 타입의 폭탄을 생각했다.

'사방으로 터지는 폭탄이면 자기도 죽어.'

차우진은 지금 후방 옆쪽으로 빠지는 중이다. 자세도 낮췄다.

'전면으로만 파편이 폭사되는 타입이라면.'

차우진은 파편의 살상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피했….'

차우진의 눈에 오필리아가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한 폭탄이라 해도 미리 고개를 돌릴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걸 의심해야 한다.

'섬광탄?'

일반 폭탄이면 오필리아도 다칠 수 있는데, 섬광탄이면 그녀는 다치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섬광탄이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차우진이 급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조금 늦었다. 섬광탄이 터졌다.

오필리아는 자폭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녀는 물리적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상대를 타격하기 위해 섬광탄을 터트렸다.

강렬한 섬광이 2층을 채웠다.

차우진은 폭탄을 노려보며 대응하느라 고개를 돌리는 게 조금 늦었다. 차우진의 시력이 강력한 섬광에 마비됐다.

'당했다.'

폭탄의 정체는 알아냈는데, 간발의 차이로 늦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싸워야 한다.

청력도 문제였다.

오필리아가 사용한 건 개조된 소형 섬광탄이다. 섬광탄은 원래 강력한 빚과 귀를 마비시키는 큰소리를 내는 비살상 제압 무기다.

그런데 이 소형 개조 섬광탄은 터지는 소리가 양산품보다는 작았다.

그래도 근거리에서 터지면 귀를 잠시 마비시킬 정도는 되었다. 터진 위치도 차우진과 가까운 쪽이었다.

차우진의 눈과 귀가 순간적으로 마비됐다. 이곳에 적은 둘이나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싸워야 한다.

그는 조금 전까지 봤던 것을 바탕으로 사물의 위치를 판단하고 적의 위치도 계산했다.

'등을 보이던 놈은 피해가 없다!'

단장이 당장 돌아서서 차우진을 향해 사격할 게 뻔했다.

차우진이 총구를 단장 쪽으로 향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음속탄이 단장을 향해 쏟아졌다. 바닥으로 탄피가 후드득 떨어졌지만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명중했는지 알 수 없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긴 채로 옆으로 뛰었다.

'엄폐물!'

이쪽에 대형 화분이 있다는 게 기억났다. 사람의 몸을 가릴 만큼 큰 화분이었다.

차우진이 화분 쪽으로 몸을 던졌다.

옷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총탄이 느껴졌다. 오필리아는 두 손이 비어 있었다. 벌써 총을 뽑아 쏘긴 어렵다.

반면에 단장은 손에는 총을 쥐고 있었다.

'놈이 쏜다.'

더 늦으면 당한다.

차우진이 왼손을 내밀었다. 손에 화분이 닿았다. 그가 화분을 붙잡으며 옆으로 휙 회전했다가 그 뒤에 몸을 붙였다.

화분 뒤라고 해서 안전지대는 아니다.

그가 단장의 의도를 예측했다.

'돌입.'

단장은 차우진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러니까 화분 옆으로 대놓고 이동하며 사격할 게 뻔하다.

차우진이 적에게 더 유리한 각도를 계산했다. 차우진은 총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다.

'왼쪽!'

차우진이 오른쪽으로 뛰어나가며 왼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단장이 접근하리라 예상되는 방향으로 총탄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앞으로 점프했다. 그 방향에 1층으로 내려가는 일자 계단이 있는 걸 기억했다.

몸이 바닥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계단에 진입했다.'

계단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지면 목이 부러진다.

차우진이 왼손을 뻗었다. 계단 난간이 손끝에 닿았다.

그 난간을 손으로 덥석 잡고 몸을 끌어당겨 계단을 벗어났다.

그는 계단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계단 위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단장이 실력이 있다면 쫓아왔을 수도 있다.

총탄이 몇 발 나가다가 멈췄다. 탄창이 비었다.

차우진이 계단 난간 아래쪽으로 뚝 떨어졌다.

발에 충격이 왔지만 견딜만했다. 이제 1층이다.

아직도 눈이 보이지 않았다. 섬광탄이 터지고 나서 몇 초 지나지도 않았다.

차우진은 자가 회복 스킬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시력은 자연히 회복된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늦는다.

차우진이 기관단총을 버렸다. 이미 탄창이 비어서 쓸모가 없었다.

차우진이 오른손으로 눈을 덮었다.

회복 스킬은 작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한다. 장님이 된 것도 아니고 시력이 잠시 마비된 것 정도는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다.

***

단장이 왼팔을 보았다. 총탄이 스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젠장."

가슴에도 몇 발을 맞았다. 방탄조끼가 없었다면 이미 바닥에 드러누웠을 뻔했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일 텐데, 어떻게 이런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지?"

오필리아가 물었다.

"저 새끼 눈이 먼 거 맞아?"

단장이 탄창을 교환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말했다.

"눈이 보였다면 우린 이미 다 죽었을 겁니다."

오필리아가 2층에서 급히 물었다.

"지금은 잡을 수 있지?"

"눈이 회복되기 전에 잡으면 됩니다."

단장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차우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총구를 휙 돌렸다. 차우진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1층은 처음이니까 기억에 의존해서 움직이지도 못했겠지. 그러니까.'

계단 가까이에 손으로 더듬어 움직여도 찾을 수 있는 엄폐물이 있었다. 석상이 올라가 있는 장식대였다.

그 장식대는 대리석과 시멘트로 만들었다. 총알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고, 사람 몸도 한 명쯤은 숨길 수 있다.

"거기냐!"

단장이 그 석상 옆으로 달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석상 뒤, 장식대 아래쪽으로 날아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탄환이 맨바닥을 때렸다.

"어?"

단장은 함정에 당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몸을 뒤로 휙 돌렸다.

차우진이 단장을 향해 돌진했다. 단장이 황급히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이 조금 더 빨랐다. 단장의 총구를 손으로 잡고 밀어내며 다리를 걷어찼다.

총탄이 옆으로 날아가다가, 단장이 넘어지면서 천장을 향해 쏟아졌다. 단장은 나자빠진 상태에서도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탄창 속 탄약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탄피가 옆으로 쏟아지고, 총구는 점점 차우진 쪽으로 다가왔다. 총탄 몇 발은 차우진의 얼굴 근처로 날아갔다.

30발이 소모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탄창이 비었다.

차우진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다. 그런데도 충신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단장은 총에서 손을 놓으며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 앞으로 휘둘렀다.

차우진이 뒤로 휙 물러났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단장이 허리를 튕기며 벌떡 일어났다. 그가 칼을 앞으로 겨누며 물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내가 원래 회복이 빨라."

차우진의 귀는 눈보다는 마비 정도가 약했다. 이미 이명도 사라지고 말소리 정도는 충분히 들렸다.

단장이 물었다.

"죽음의 천사. 맞나?"

"천사라는 건 농담이었는데. 사실 지옥에서 왔거든. 너희들을 끌고 가려고."

"나는 교단의 성기사단장이다. 내가 갈 곳은 천국뿐이지."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너 진짜 그거 믿는 건 아니지? 그걸 믿는다고 보기에는 너무 세속적인 거 아니냐?"

"세속적인 게 나쁜가?"

"교리에 따라 세속적일 수는 있지. 너희 교리가 사이비인 게 문제이지만."

차우진이 손끝을 까닥였다.

"죽어보면 네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알 수 있겠지. 들어와라."

단장이 눈동자를 굴리며 차우진의 실력을 판단했다.

'사격이나 전투기동, 전장 인식 능력 모두 탑 오브 더 탑. 그러면 칼도 잘 쓰겠지?'

그는 차우진이 처음에 이 신전의 정면으로 걸어왔다는 걸 떠올랐다.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만큼 오만한 놈이야. 나만 상대하면 되니까 여유를 부리겠지.'

단장이 결론을 내리고 왼손으로 허리를 한 번 훑었다. 그러면서 차우진을 향해 전진했다. 발바닥에 바닥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아 마치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단장이 차우진을 향해 오른손의 단검을 내질렀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차우진이 그 칼을 단검으로 막았다. 단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막을 줄 알았다!'

칼은 미끼였다.

단장이 왼손을 앞으로 슬쩍 꺾었다. 왼손에 2연발 초소형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단장이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이 그 손을 툭 쳐서 바깥으로 밀어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쳐내는 게 더 빨랐다.

총탄이 발사됐지만, 옆으로 한참 빗나갔다.

차우지이 히죽 웃었다.

"내가 단검 막는 데만 신경 쓸 거 같았지?"

"큭! 어떻게…."

"손이 눈보다 느리면 그런 어설픈 수작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단장이 다시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비틀려 했다. 아직 한 발이 남았다.

'이 거리에서는 빗나가지 않아!'

갑자기 차우진이 옆으로 뛰었다. 단장이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들이 있던 곳으로 총탄이 쏟아졌다.

오필리아가 2층에서 자동권총을 1층으로 난사했다.

그녀는 소총이나 기관단총이 아니라 권총을 자동으로 놓고 사격했다. 자동권총은 조준을 정확히 해도 반동 때문에 명중률이 떨어진다.

그래도 탄창 하나를 고속으로 갈기면 총탄 몇 발쯤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총탄이 1층 전체에 흩뿌려졌다. 그중에는 단장이 있는 곳으로 날아간 게 제일 많았다. 처음에 차우진과 단장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장도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피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총탄 두 발이 단장의 방탄조끼에 꽂혔다. 한 발은 단장의 다리에 박혔다.

"끄악!"

단장이 옆으로 뛰려다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그가 2층을 보았다.

오필리아가 탄창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독기가 흘렀다.

"다 죽여버릴 거야!"

단장은 오필리아가 자신까지 죽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나를 배신…."

차우진이 석상 뒤쪽으로 잠깐 피했다가 다시 나오며 단장에게 말했다.

"말은 바로 하자. 넌 동료가 아니라 도구였어. 그러니까 이건, 배신당한 게 아니라 버림받은 거다."

"제기랄…."

그 사이에 오필리아가 탄창을 교체했다. 그녀가 차우진에게 제안했다.

"천만 달러로 부족해? 그럼 이건 어때? 내 일 몇 개만 해주면 일억 달러를 주지."

차우진이 단장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돈은 있고?"

"코인이라면 충분히 있다."

"그거 언제 다 환전하냐? 귀찮다. 난 현금을 원해. 그것도 달러로."

"그럼 협상 결렬이군."

오펠리아가 1층을 향해 다시 권총을 난사했다.

한 발씩 쏴도 명중률이 떨어지는 게 권총이다. 자동권총을 자동으로 놓고 쏘면 명중률은 바닥을 친다.

총탄이 다시 1층 전체를 휩쓸었다. 그중 한 발이 단장의 얼굴을 관통했다.

"크악!"

다른 한 발은 단장의 목에 박혔다.

차우진이 위층으로 단검을 던졌다.

오필리아가 몸을 휙 젖혔다. 피하는 동작에 여유가 있었다. 대신에 그녀가 쏘던 총탄은 벽으로 날아갔다.

자동권총은 한 탄창을 비우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오필리아가 쓰는 권총은 연사 속도도 빨라서 탄창을 비우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탄창이 다시 비었다.

차우진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말했다.

"사격술은 개판인데 몸은 좀 쓰나 보다? 운동 뭐 했냐?"

그녀가 탄창을 새로 꺼냈다.

"사람 죽이는 운동을 했지."

차우진이 물었다.

"네가 탄창을 바꾸는 걸 내가 여기서 구경만 할 거 같냐?"

"닥쳐!"

오필리아가 빈 탄창을 버리고 새 탄창을 권총에 끼우려 했다.

차우진이 계단 위를 뛰었다.

오필리아의 탄창 교환속도보다 차우진이 뛰는 게 빨랐다.

217. 테러 빌런

오필리아가 탄창을 교체하려고 했다.

권총의 탄창 교환은 버튼만 누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원래 들어 있던 탄창을 빼내고 새 탄창을 집어넣어야 한다. 집어넣을 때도 구멍을 찾아서 잘 끼워야 한다.

그런 후에 후퇴 고정된 슬라이드도 전진시켜야 한다.

그러고 나서 방아쇠를 당겨야 총알이 나간다.

그걸 다 하는 것보다 차우진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오필리아가 탄창 교환을 포기하고 권총과 탄창을 계단 아래로 던졌다. 목표는 뛰어 올라오는 차우진이었다.

차우진이 옆으로 점프해 계단 난간을 밟았다. 권총과 탄창은 계단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튕겨 내려갔다.

차우진이 난간을 박차고 다시 위로 뛰었다.

오필리아는 권총을 던져놓고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뒷걸음인데도 상당히 빨랐다.

차우진이 2층에 도착했다.

뒤로 물러난 오필리아가 손을 옆으로 뻗어 장식대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았다. 칼날의 폭이 손가락 두 개 정도 되는 얇은 칼이었다.

그녀가 그 칼을 차우진 쪽으로 겨누었다.

"너! 자신 있으면 칼로 승부 보자."

차우진이 근처에 있는 다른 장식대에서 칼을 뽑았다. 그 칼도 얇고 길었다.

"실력은 되고?"

오필리아의 입꼬리가 위로 쭉 올라갔다.

"와서 직접 확인해봐라."

차우진이 천천히 움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방법도 있는데."

"코인은 싫다더니?"

차우진이 씩 웃으며 물었다.

"바로 그거. 네가 뿌리는 그 코인은 어디서 났냐?"

"뭐?"

강원도에서 싸운 인도자는 돈의 힘으로 현실에서 천국을 누렸다.

자기 자신을 아이스 이글이라고 부르던 이덕수는 코인 브로커였다. 이덕수는 한국 지부의 자금책이었다.

오필리아는 차우진에게 대가를 코인으로 줄 테니까 쿠에르노의 회장을 죽이라고 청부했다.

그 정도 정보가 있으면, 이 사이비 교단의 돈이 코인에서 나왔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그 코인을 네가 직접 불렸냐?"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다가 돌아왔다.

"알고 싶으면 나를 이겨 봐!"

"어. 대답이 됐다. 코인 공급책은 따로 있구나."

"뭐? 왜 그게 대답이…."

"네 반응이 중요하지 증거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놈이 네 신도이든, 너한테 코인을 빼앗긴 것이든 그건 뭐 중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오필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너의 진짜 목적은 뭐지?"

"알고 싶으면 대답 하나 더 해라."

차우진은 오필리아가 멸망급 테러 빌런인지 확인해야 한다. 오필리아가 아니라 그 코인을 공급한 놈이 테러 빌런이라면,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

차우진이 물었다.

"에펠탑. 무너트리고 싶냐?"

오필리아의 표정이 더 딱딱해졌다. 그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정체가 도대체 뭐야!"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 표정과 목소리를 보니까, 대답이 됐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멸망급 테러 빌런은 에펠탑에 다섯 번의 테러를 저질렀어."

"에펠탑은 멸망 초기에 무너졌잖아. 그 전까지는 잘 서 있었을 텐데?"

"10년에 걸쳐서 에펠탑에 다섯 번의 테러를 시도했지. 그중 한 번은 실패했고, 세 번은 성공했는데 탑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어."

"하긴. 폭탄 좀 터진다고 그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무너지진 않겠지. 멸망 초기에 터트린 건 진짜 컸으니까 다르지만."

"맞아. 그중 두 번은 식당이 날아가는 선에서 그쳤지. 네 번째 테러에서는 첨탑이 부러졌지만 그때도 에펠탑은 무너지지 않았어."

에펠탑은 다섯 번째 테러로 무너졌다.

차우진이 물었다.

"프랑스 경찰은 뭐 하고? 탑에 출입하는 민간인 통제는 안 했어?"

"일 년에서 삼 년 간격으로 한 번씩 터트리는데 대비는 해도 폐쇄는 무리지. 에펠탑이 관광객을 얼마나 많이 끌어들이는데."

"하긴."

차우진이 빵 봉지를 뒤적였다. 그들의 이 대화는 빵 봉지에 그려진 탑 그림 때문에 시작됐다.

"테러 빌런은 왜 에펠탑을 무너뜨리려고 한 거야? 그것도 그렇게 여러 번이나."

박창수가 썩어 버린 빵을 보고 아쉬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테러리스트의 생각을 누가 알겠냐. 프랑스인 중에 싫은 사람이라도 있었나?"

***

차우진이 물었다.

"야. 에펠탑은 왜 그렇게 부수고 싶어 했던 거냐?"

오필리아가 차우진을 향해 칼을 겨누며 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마음에 안 들어서."

"하긴. 사이비에게 무슨 대단한 목적이 있겠냐. 미친년이 하필 거기에 집착한 것뿐이지."

오필리아가 짜증을 냈다.

"프랑스의 상징인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프랑스인 남자친구한테 차였냐? 아니면 요리가 마음에 안 드나? 너 이탈리아나 영국 사람이냐?"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프랑스는 과거에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이비 테러리스트에게도 명분은 필요한 법이지. 진실이 살짝 섞여 있으면 더 그럴듯하지. 명분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실적이 필요했냐?"

차우진이 오필리아의 칼을 슬쩍 보았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제대로 배운 사람의 자세였다.

"아니면, 대회에서 프랑스 선수한테 져서 메달을 놓쳤냐?"

오필리아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맞네. 프랑스 선수한테 졌네. 그래서 에펠탑을 노린 거네. 창수 형은 진실을 관통하는 말을 할 때가 가끔 있다니까."

차우진이 이걸 따져 물은 건, 이유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멸망한 세계의 테러 빌런은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에펠탑을 무너뜨렸다.

"결국 에펠탑을 폭파하려는 건, 네가 원해서네?"

그녀가 테러 빌런이 아니라 해도 살려둘 생각은 없다. 그녀는 이미 선을 너무 많이 넘었다.

지금 이 질문은, 살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표를 확실히 찾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차우진이 결론을 내렸다.

"네가 그 테러 빌런 맞네."

오필리아는 차우진과 대화하면서 간격을 조금씩 좁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펜싱 경기장에서의 거리와 비슷해졌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이 간격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은 수도 없이 많이 수련했다.

그녀가 바닥을 박차고 큰 걸음으로 전진하며 차우진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빨랐다. 둘 사이의 간격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카로운 칼끝이 차우진의 가슴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오필리아의 칼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보였다. 그런데도 상당히 빨랐다.

차우진이 그 칼을 옆으로 빗겨냈다. 오필리아의 칼이 옆으로 밀려 나갔다가, 즉시 방향을 바꾼 후에 다시 옆에서 치고 들어왔다. 차우진이 칼을 세워 그 공격을 막았다.

차우진은 두 번을 막으면서 전진한 후에 반격했다. 그의 칼이 앞으로 쭉 나아갔다.

차우진의 공격도 날카로웠다. 그의 칼은 실전에서 단련된 것이다. 그의 칼 쓰는 법에는 다양한 검술이 녹아 있는데, 그중에는 펜싱도 있다.

그의 칼끝이 노리는 곳이 오필리아의 심장이었다.

오필리아가 몸을 옆으로 젖히며 칼을 기울여 차우진의 공격을 밀어냈다. 그런 후에 칼을 위로 올렸다가 내리쳤다.

차우진이 칼을 빗겨 들어 그 칼을 막았다.

순식간에 공방이 오갔다. 공격과 방어가 너무 빨라 이제 겨우 0.7초가 흘렀다.

공방을 계속 주고받기만 하면 시간 가속 스킬이 끝난다.

차우진이 오필리아의 수직 베기를 막으며 전진했다.

오필리아가 물러나며 방어하려 했다. 서로의 자세가 변하면서 맞부딪혔던 칼과 칼이 X자로 교차됐다.

"걸렸구나."

힘은 차우진이 더 강했다. 그가 그대로 밀어붙였다.

오필리아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쭉 밀려났다.

이대로 계속 밀려나면 2층 외부 난간이 나온다. 오필리아도 그걸 안다.

그녀가 몸을 옆으로 휙 기울이며 칼을 밀어냈다.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녀의 몸은 균형을 잃었다. 대신에 왼손이 차우진의 얼굴을 노렸다.

손톱에 붙여놓은 장식이 날카로웠다. 사람 살을 충분히 파고들 수 있었다.

이미 시간 가속 스킬의 효과는 끝났다.

차우진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오필리아를 걷어찼다. 오필리아가 뒤로 쭉 밀려나다가 2층 난간과 등이 충돌했다.

"컥!"

그녀는 등에 받은 충격을 견뎠다. 오히려 바닥을 박찼다. 칼날이 다시 차우진을 노렸다.

하지만 이미 척추에 충격을 꽤 받았다. 이번 공격은 날카롭지 않았다. 차우진의 눈에 어디를 공격할지가 훤히 보였다.

차우진이 적의 공격을 피하며 칼을 앞으로 쭉 뻗었다. 칼날이 오필리아의 어깨를 관통했다.

"끅!"

차우진이 오필리아를 걷어찼다. 칼날이 뽑히면서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나다가 난간에 다시 충돌했다.

오필리아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어깨가 뚫리면서 손에 힘이 빠져 칼을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이 실력은 뭐지? 너도 펜싱 선수 출신인가?"

"내 검술이 펜싱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 안 드냐?"

펜싱 기술은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커뮤니티에서 배웠다. 그때는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은 뭐든지 다 배워야 했다.

검술을 그것 하나만 배운 건 아니다.

그가 방문한 마을에 펜싱 선수 출신이 있으면 펜싱을 배웠다. 해동검도 고수가 있으면 검도를 배웠다. 특수부대 단검술도 배웠다.

그 다양한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배운 건 아니다. 생존과 실전에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배우고 실전을 거치며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차우진이 오필리아의 실력을 평가했다.

"넌 예선 탈락이겠네?"

오필리아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유럽 선수권 은메달이다!"

"그럼 금메달은 프랑스 선수냐?"

"내가 이길 수 있었어. 상대가 심판을 매수해서 진 거야!"

"내가 아는 사람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그럼 나를 이해…."

"이해 안 하지. 내가 아는 사람은 너처럼 뒤에서 에펠탑을 노린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선수랑 심판을 두들겨 팼거든."

"그러면 그때까지 이룬 걸 모두 포기해야 해! 내가 왜! 억울한 건 난데!"

"야. 그런데 심판은 살아 있냐? 아니다. 이미 죽였겠구나. 그럼 그 선수는 살아 있냐? 에펠탑은 둘 다 죽이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려서 부수려던 거냐?"

오필리아는 어깨를 찔린 충격으로 잠깐 팔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팔이 움직였다.

"저승에 가서 물어봐라!"

그녀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한쪽 팔이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조금 전에 그렇게 했을 때는 가슴에서 섬광탄이 튀어나왔다.

차우진은 오필리아가 팔을 벌릴 때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이번에는 칼이 닿지 않았다.

손에서 칼을 놓았다.

칼이 창처럼 날아가 오필리아의 가슴에 푹 꽂혔다.

오필리아의 눈이 커졌다.

"컥!"

다른 소리는 내지 못했다. 입은 열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뒤로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2층 난간 아래로 추락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나를 바보로 아나. 가슴이 짝짝이가 된 게 뻔히 보이는데, 한 번 쓴 섬광탄 수법을 또 쓰고 있어."

오필리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두 팔이 옆으로 활짝 펴졌다.

그 직후에 가슴에 숨겨둔 두 번째 섬광탄이 발사됐다.

그 섬광탄이 위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스프링이 약해 2층까지 올라오진 못했다.

섬광탄이 1층 중간에서 폭발했다.

강력한 섬광이 폭음과 함께 터졌다. 검은색으로 칠해놓은 신전이 회색으로 보일 정도로 빛이 밝았다.

그 섬광은 난간에 막혔다. 강한 빛이 2층까지 보이긴 했지만 차우진의 눈을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차우진이 난간 앞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필리아는 1층 바닥에 두 팔을 좌우로 활짝 펼친 채로 떨어져 있었다.

"죽었네."

차우진은 멸망급 테러 빌런을 잡으러 스페인에 왔다. 그리고 오필리아를 찾아냈다.

"나중에는 멸망급 테러 빌런이 되지만."

그건 멸망한 세계의 이야기다.

"10년쯤 일찍 찾아내니까 아직 덜 커서 혼자서도 잡을만했어."

그가 돌아섰다.

"근데 진짜 힘들어 죽겠다."

오늘 전투에서 스킬을 자주 쓰는 바람에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아래를 보았다. 배가 들어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러다 배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턱선 생길라."

이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여기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숲이긴 하지만, 치열한 전투도 치르고 섬광탄도 터졌다. 이러면 경찰이 확인하러 올 확률이 높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오긴 오겠지."

그 전에 이곳을 수색해서 필요한 걸 찾아야 한다.

"챙겨갈 건 챙겨가고, 스페인 경찰한테 남겨줄 건 남겨주고."

꼭 찾아야 하는 것도 있었다.

"여기에 폭탄이 충분히 있다고 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