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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112상황실에 신고 문자가 들어왔다.

폭발물 신고 문자는 설사 장난으로 의심된다 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담당자가 급히 팀장을 불렀다.

"팀장님! 폭발물 신고가 문자로 들어왔습니다!"

팀장은 느긋했다.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놀라냐? 또 장난 문자겠지. 평소처럼 절차대로 대응해."

"시한폭탄 사진도 있습니다!"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또 시계랑 휴지심을 붙여서 흉내를…. 으헉! 이게 뭐야! 진짜 시한폭탄이잖아!"

상황실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팀장님. 폭탄 사진이 다섯 장이나 있습니다."

"같은 폭탄을 찍은 거야?"

"아닙니다. 배경이 다섯 개 다 다릅니다."

"아. 그래?"

팀장이 진정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하나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시한폭탄 다섯 개가 말이 돼? 어디 외국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을 누가 긁어모았겠지. 이런 놈은 잡아서…."

"사진 배경에 한글이 보입니다! 외국이 아닙니다!"

팀장은 당황했다.

"어? 뭐? 설마 진짜야? 거기 어딘데?"

"목동이랍니다!"

"심지어 서울 한복판이야?"

팀장이 사진 다섯 장을 확인했다.

"왜 목동에 폭탄이…."

"신고자에 의하면, 범인이 목동 공개홀을 폭파하려고 한답니다."

"목동 공개홀? 거기는 최근에도 사건이…. 헉! 그럼 이거 진짜구나!"

"어? 팀장님!"

"왜 또!"

"두 시간 후에 터진답니다!"

"제, 젠장! 빨리 사람들 대피시키고, 폭발물 처리반에 협조 요청, 아니, 빨리 오라고 해! 당장!"

***

폭발물 처리반이 비상 소집되었다. 그들이 목동 공개홀에 진입했다.

그들이 사진 속 위치로 실내용 소형 드론을 날렸다.

"첫 번째 폭탄 찾았습니다."

지휘관이 밖에서 무전으로 물었다.

- 상태는?

"접근해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해체반 요원이 폭탄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신고자가 알려준 그대로입니다. 선이 하나 잘려있습니다."

- 작동 중이야?

"비활성화 상태로 보입니다."

- 다른 것들도 확인해.

해체반이 계속 움직였다. 그들은 다섯 개의 폭탄을 모두 찾아냈다.

"폭탄 다섯 개 중에 네 개는 통신모듈을 막아놓은 게 맞습니다. 시한장치는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 그럼 하나는?

"하나는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시한장치의 타이머가 활성화된 걸 확인했습니다."

- 젠장. 신고자가 그 폭탄은 놓쳤다고 했다던데, 진짜였어. 폭발을 막을 방법이 있겠어? 이 근처 통신을 전부 차단할까?

"이미 시한장치가 작동하고 있어서 그건 의미가 없을 겁니다."

- 남은 시간은?

"58분입니다."

차우진은 2시간 전에 시한폭탄이 목동 공개홀에 있다고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과 폭발물 해체팀이 현장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도착한 후에도 안전을 확보하면서 일을 진행하느라 시간이 또 소모되었다.

그래도 아직 58분이 남았다.

- 해체는? 가능하겠어?

"반반입니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나와. 무리하지 마라.

"한강으로 옮겨서 터트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 그건 안돼. 폭탄을 옮기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 폭탄이 한강으로 가다가 터지면 이송팀은 다 죽어.

"드론으로 옮기는 건 어떻겠습니까?"

- 여기서 한강 사이는 대부분 공원이나 주차장이니까, 그건 가능하겠는데?

***

경찰은 폭탄 수송이 가능한 드론을 긴급 수배했다.

가까운 거리의 소방서에 화재 진압 테스트용으로 사용하는 드론이 있었다. 드론의 출력이 꽤 강해서 폭탄을 매달고도 비행이 가능했다.

드론이 비행해야 하는 경로의 도로와 공원이 급히 비워졌다.

지휘관이 해체반 요원에게 무전기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 시간만 충분하면 해체할 자신이 있습니다만…. 남은 시간 안에는 어렵습니다.

"드론 준비 끝났다. 작업 중단하고 폭탄을 통째로 드론에 매달아."

- 알겠습니다.

폭탄을 매단 드론이 목동의 도로와 공원 위를 통해 한강으로 날아갔다. 비행경로 대부분은 공원이었지만 도로도 조금 섞여 있었다.

경찰은 드론이 비행하는 도로는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모두 통제했다.

"폭탄의 현재 위치는?"

"한강 중간 지점입니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5분 남았습니다!"

"투하해!"

드론이 폭탄을 한강에 떨어뜨렸다.

폭탄이 수면에 충돌하는 순간 센서가 반응했다. 폭탄은 물속으로 조금 가라앉다가 갑자기 폭발했다.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관할 경찰서 형사팀장이 강변에서 그 모습을 보며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폭탄 위력 봐라. 저게 시내에서 터졌으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 너 뭐 하냐?"

막내 형사가 한강 사진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기념으로 찍어두려고요."

막내 형사의 표정이 밝았다. 팀장이 물었다.

"넌 저걸 보고도 웃음이 나오나 보다?"

"예. 멋있어서요. 폭탄도 안전하게 처리됐고요."

"일주일 후에도 그 소리가 나올까?"

"네?"

"이제 범인을 잡아야지. 그 일은 누가 해야겠냐? 우리 팀이야."

막내 형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범인 잡을 때까지…."

"집에 못 들어가."

"금방 잡을까요?"

"느낌이 안 좋아. 못 잡을 수도 있다. 그럼 우리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이란 욕은 다 먹겠지."

"아…. 저기, 이 사이즈면 광수대가 맡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 그런가?"

옆에서 다른 형사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제발 광수대! 우리만 아니면 돼!"

***

차우진이 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어디 갔었다고 둘러대나."

그 궁리를 하며 집에 들어갔는데, 소파 위에 차유리가 없었다.

차우진이 전화를 걸었다.

"오늘도 야근이냐?"

- 야근? 야아근?

"아니면 노냐? 드디어 남자 생겼냐?"

- 죽는다.

"그럼 뭔데?"

- 광수대로 외근 왔다.

"응? 왜?"

차유리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 내가 저번에 목동 공개홀에서 장태호를 체포했잖아. 그 새끼는 쪼끄만 무전기 폭탄 하나 가지고 있었잖아?

"그랬지."

- 그런데 이번엔 어떤 미친 새끼가 공개홀에 대형 폭탄을 다섯 개나 설치했네?

그 사건은 이미 속보로 나왔다. 도로를 통제하고 한강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었다.

"목동은 누나네 관할이 아니잖아."

- 나보고 와서 좀 도와달란다. 아니, 내가 뭘 알아야 돕지!

"고생해라."

- 나만 고생할 거 같냐?

"설마 수연이도?"

- 너 말이야. 너!

"어?"

- 우진아. 너한테도 형사들이 뭐 좀 물어볼 거다.

"무전기 폭탄 때 일은 이미 다 설명했는데?"

- 그때보다 큰 게 터졌잖아.

"그럼 내가 거기로 가야겠네?"

- 야. 오긴 왜 와? 너보고 여기로 오라 하면 거절해. 필요하면 너한테 찾아와서 물어보라고 해. 넌 저번 사건을 막아준 사람인데 표창장을 줘도 부족할 판에 네가 왜 불려 다녀? 안돼. 하지 마. 아쉬운 건 네가 아니야.

"그냥 가서 이야기할게. 대신에 취조실은 좀 그러니까 사무실이나 회의실 같은 곳에서 이야기하자고 해."

- 아니, 왜 굳이 오려고?

"누나 혼자 고생하는 게 미안해서?

- 이 새끼. 수상한데?

차유리에게 미안하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다.

차우진이 사건을 해결했더니 차유리가 또 야근한다. 이번에는 자기 사무실도 아니고 광수대로 외근을 나가서 야근해야 한다.

"야식 좀 만들어갈까? 거기 몇 분이나 계시나?"

- 어…. 잠깐. 너 여기 와도 되는지 물어볼게.

차유리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말했다.

- 열 명이 배부르게 먹을 만큼 준비해라.

"그 팀이 열 명이야?"

- 이거 담당하는 인원은 그만큼은 아닌데, 많이 먹으면 좋잖아.

"재료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냐?"

- 부자에 요리 잘하는 동생아. 낙장불입이다. 냉큼 만들어오려무나.

***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 폭파 미수 사건의 담당 팀을 찾아갔다. 양손에는 직접 만든 야식을 잔뜩 들고 있었다.

차유리가 말했다.

"왔냐? 회의실에 놔라."

밥을 먹기 전에 조사부터 해야 한다. 형사들이 밥부터 먹으면 밥을 해준 사람에게 제대로 못 물을 수도 있다.

대신에 조사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차우진이 가져온 야식은 아무도 못 먹는다.

팀장이 인사했다.

"내일 아침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직접 와줘서 고맙습니다."

"뭘요. 이 일이 빨리 끝나야 누나도 집에 오니까 제가 와야지요."

차우진이 사무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이 인원으로 수사하시는 건가요?"

지금 이곳에는 차유리를 빼면 팀장 한 명에 팀원 여섯 명이 있었다.

"곧 특별수사본부나 합동수사본부가 준비될 겁니다. 우리는 일단 먼저 시작한 겁니다."

"아. 그러시구나."

차우진이 형사들의 표정과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를 의심하려나. 나만 아니면 되는데.'

186. 기사

차우진은 광수대 회의실에서 지난번 무전기 폭탄 사건을 설명했다.

로드 매니저 장태호를 의심한 이유나, 차유리에게 장태호를 감시하라고 한 이유도 그때 진술했던 것과 똑같이 말했다.

어차피 한 번 했던 이야기라 굳이 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목동 공개홀 사건을 수사하는 쪽에서 직접 재확인하기를 원했다.

팀장이 말했다.

"사안이 워낙 중요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 부탁합니다."

차우진이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요. 누나가 형사인데 가족인 제가 협조해야죠."

차우진의 직업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신원조회 서류를 보며 팀장이 물었다.

"차우진 씨는, 그러니까…."

서류에는 딥어스테크나 SL 제약, 사덕리소스 등등이 적혀 있었다.

"이 많은 회사에서 동시에 임원으로 재직하신다는 건데,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필요할 때만 일하는 자리입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출근하는 곳도 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이거 분야도 참 다양합니다. 심지어 비료 관련 회사도 있네요?"

"저는 자문이나 좀 하고 방향이나 좀 잡아주면, 일은 실무진이 다 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받는 월급이 얼마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팀장은 다른 걸 물었다.

"그런 대단한 분이 왜 그때 목동 현장에서 일하셨던 겁니까? 다른 일로 바쁘실 텐데 일당이 얼마나 된다고 굳이…."

차우진이 둘러댔다.

"저는 원래 촬영장이나 공연장 같은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촬영장이요?"

"영화나 방송국 일도 종종 합니다."

팀장이 서류를 뒤적였다.

"아…. 여긴 그것까진 없는데…."

"그리고 그날 공연은 LPP 엔터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SL 제약도 CF 촬영 장소로 그곳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일하면 그냥 대충 둘러보는 것보다 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 잠입수사 같은 거군요."

"바로 그거죠."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역시 이유가 다 있어서 거기 계셨구나."

차우진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이번 사태 때문에 목동 공개홀은 SL 제약 CF 촬영 장소로는 못 쓸 겁니다. 그럼 촬영은 섬으로 가서 해야 하나…."

"저런. SL 제약도 피해가 크겠군요."

"실무진들이 고생하겠지요."

차우진이 오늘 이곳에 방문한 건 이런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어보니까 대답은 하지만, 차우진의 진짜 목적은 수사 방향과 분위기 파악이다.

'나를 의심하는 분위기는 아니네. 그거면 됐지.'

그리 길지 않은 조사가 끝났다.

차우진이 회의실에 쌓아놓은 야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나가 가져오라고 해서 제가 만든 야식입니다. 출출할 때 드시죠."

"어이쿠. 뭘 이런 걸 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수사 분위기는 이미 파악했다. 용의자 리스트 중에 차우진이 없다는 것도 눈치챘다.

여기 더 있으면 새로운 질문이 생길 수 있다. 그걸 굳이 감수할 이유는 없다.

"괜찮습니다. 저는 집에 남겨둔 거 있습니다. 아. 남는 그릇은 누나한테 들려서 보내주십시오."

차우진이 인사하고 그곳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회의실에 모여서 야식을 담아온 밀폐용기들을 열었다.

"와. 이게 다 뭐야? 탕수육도 있고, 샌드위치도 있고, 이건 버섯요리인가?"

"동서양이 다 있는데?"

젊은 형사가 먼저 젓가락을 들고 요리를 하나 집어 먹었다.

"와! 맛있어!"

"어? 진짜 맛있다!"

조사 대상자가 가게에서 사 온 음식이라면 이렇게 먹기는 부담스럽다.

그런데 차우진은 형사인 차유리의 동생이다. 이 음식도 산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왔다.

그래서 수사팀 형사들은 부담 없이 야식을 먹었다.

"차 형사 동생은 회사 이사님이라던데 왜 요리까지 잘해?"

차유리가 대답했다.

"취사병 출신이니까."

"응? 내가 군대에서 먹던 짬밥은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이 광수대 수사팀에는 여자 형사도 한 명 있었다. 그녀가 차유리에게 물었다.

"차 형사. 신원조회 서류 보면 동생이 미혼이던데."

"그쵸."

"혹시 애인 있어?"

차유리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 형사를 보며 말했다.

"선배. 걔는 연하 좋아해요."

"누, 누가 내가 하겠대? 내 동생 소개해 주려고 했지!"

차유리가 얼른 호구조사를 들어갔다.

"그래서 동생이 몇 살? 직업은? 사는 곳은?"

일단 그녀의 동생에 대해 몇 가지 물은 후에 추가로 질문했다.

"예뻐요?"

"나 보면 몰라?"

"선배를 닮았으면…."

"내 얼굴이 어때서! 나도 관리받으면 좋아져!"

혼자 발끈한 여자 형사가 정신을 차리고 툴툴댔다.

"하긴. 차 형사 동생은 얼굴 보게 생겼더라."

차유리는 당황했다.

"네? 걔가 어디가 얼굴 보게 생겼어요?"

"어? 그만하면 얼굴 괜찮지 않나?"

"배는요? 걔 배 나왔는데?"

"좀 나오긴 했지만, 그거야 운동해서 빼면…."

차유리가 벌떡 일어났다.

"역시 걔가 요즘 살이 빠지고 있는 게 문제네! 돼지가 혼자 사람 되려고 하고 있어! 밤에 보족세트 더 시키라고 해야겠다!"

"차 형사. 왜 흥분하고 그래?"

"걔만 살 빠지면 나만 억울하니까요."

***

서울 광수대 수사팀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차우진은 폭발물 신고를 강원도 산속의 사이비 종교 시설에서 했다. 신고할 때 휴대폰이 접속한 기지국의 위치는 조회하면 바로 나온다.

그 기지국 위치로 지역 경찰이 즉시 출동했다.

하지만 정확한 발신 위치는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 산속에는 기지국이 부족했다. 스마트폰에 안테나가 뜨지 않는 곳도 있을 정도였다.

차우진이 폭발물을 신고할 때 사용한 대포폰은 딱 하나의 기지국에만 접속됐다. 와이파이 접속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기지국을 중심으로 꽤 넓은 지역을 다 수색해야만 했다.

게다가 당장 심각한 건 폭탄이 발견된 목동 공개홀 현장이다. 신고자 파악은 그것보다는 덜 급했다.

그래도 꽤 많은 인원이 수색에 투입되긴 했다. 하지만 정확한 지점을 찾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찾았습니다."

결국 발신 지점을 찾기는 했지만, 현장 조사는 그만큼 늦어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사팀장은 현장을 보고 당황했다.

"이건…."

경찰은 신고자의 발신 위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장을 보고 나서야, 여기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팀장님. 사망자만 일곱 명입니다."

"어떻게 죽은 거야?"

형사가 설명했다.

"저 셋은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몸통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범행에 사용한 총기는?"

"저기 있습니다."

형사가 가리킨 곳에는 반자동권총이 비닐 봉투에 담겨 있었다.

"발견된 곳은 저기입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글록이군. 누가 쏜 거야?"

"저 사람입니다."

인도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사망원인은?"

"가슴에 총상입니다."

"어? 자기가 쏘던 총에 맞았나?"

"글록은 아니고, 장신구로 위장한 22구경 2연발 권총에 당했습니다."

"그건 또 어디서 났어?"

"저 사람이 평소에 옷에 붙이고 다녔답니다."

팀장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뭐? 목격자가 있어?"

"사건 목격자는 아니고, 인근 주민을 찾았습니다. 가끔 마주쳤답니다."

"그럼 그것도 자기 총이라는 건데…. 무슨 스파이야? 왜 그런 총을 써?"

"그러게 말입니다."

"2연발이라며. 두 발 다 맞은 거야? 그랬다면 다른 사람이 쏜 거겠지. 혼자서 자기 가슴에 대고 탕탕 쏠 수는 없잖아."

"아닙니다. 두 발 다 발사되긴 했는데, 한 발만 근거리에서 가슴에 명중했습니다."

형사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글록으로 저 셋을 쏴서 죽이고, 22구경도 한 발은 어딘가에 쏜 후에, 마지막 한 발은 자기 가슴에 쐈다?"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팀장이 옆을 가리켰다. 인도자의 부하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럼 저 셋은?"

"총을 쏜 저 사람이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사람들이랍니다."

한 놈은 도끼에 맞아 죽었다. 둘은 칼을 맞았다.

"저 사람들은 누가 죽인 거야? 저 도끼는 어디서 났어?"

"저쪽 트럭에 있던 도끼 같습니다. 트럭에 비슷한 도끼가 더 있습니다."

"트럭은 또 누구 거고?"

"총에 맞아 죽은 세 사람이 타고 온 트럭입니다. 도로 CCTV에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트럭을 운전하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팀장이 인상을 썼다.

"뭐야. 그럼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몰살했다는 거야?"

"일단은 그렇게 보입니다."

"그럴 리가 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

팀장이 말했다.

"누군가 목동 공개홀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신고했다. 사진까지 첨부해서."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신고한 사람은 지금 어디 있냐?"

"어…. 그건, 여기…."

"여기에 죽은 사람 중에 하나라는 소리 하려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22구경 한 발은 어디 갔어? 그거 맞은 사람은 있어?"

"없습니다."

"그 한 발은 신고한 사람을 향해 쐈겠지. 그게 누군지 알아냈어?"

"아니요.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린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가겠다."

***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졌다. 형사들은 물론이고 건물 철거나 폭발물 전문가도 합수부에 합류했다.

합수부에서도 누가 시한폭탄을 신고했는지를 놓고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남아있는 단서만으로는 신고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합수부의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이번에도 빌런 킬러…."

합수부장이 타박했다.

"형사가 증거나 단서로 말해야지, 그런 도시 전설을 여기가 어디라고 꺼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안 드는 건 아니야."

"역시 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합수부장이 인상을 썼다.

"진짜 빌런 킬러면 우린 엿 된 거야."

"예?"

"위에서 잡으라고 난리 칠 텐데, 지금까지 안 잡힌 놈이 이번이라고 잡히겠어?"

"아…."

"그리고, 목동 공개홀을 폭파하려던 놈들을 죽인 건 범죄가 맞아. 맞는데, 그 나쁜 놈들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린 것도 사실이잖아. 그럼 우리가 잡아야 할까?"

"어…. 그래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잡아야지. 그게 정답이지."

합수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기사로 나가면 어떻게 될 거 같냐? 우리가 수사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 목격자가 있어도 수사에 협조하겠어?"

"아니요."

"위에선 잡으라 하고 사람들은 잡지 말라 하면, 사이에 낀 우리만 죽어나는 거야."

합수부장이 강조했다.

"그러니까 빌런 킬러 이야기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 그걸 흘리는 사람은 내가 직접 똥통에 처박아버릴 테니까."

***

빌런 킬러는 경찰 내에서도 들어본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들어본 사람들도 실체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합수부장이 입을 다물라고 경고까지 했다.

그래서 합수부 수사팀은 빌런 킬러 이야기를 굳이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건 자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

강원도 산속에서 일곱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넷은 총에 맞아 죽었고, 셋은 칼과 도끼에 맞아 죽었다.

그 상황이 기사로 나갔다. 기사에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 언제부터 강원도에 텍사스가 있었냐?

- 뭐지? 총잡이랑 칼잡이들이 싸운 건가?

- 내가 저기 근처 지역에 살아서 들은 게 있습니다. 저거 사이비 교주가 세 명을 권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겁니다.

- 그럼 칼이랑 도끼에 맞아 죽은 셋은요?

- 그 세 명은 사이비 교주의 부하입니다. 평소에도 맛이 간 놈들이었습니다.

- 혹시 마약?

- 그럴지도 모르죠. 눈이 좀 풀려 있었다던데요.

그 기사가 목동 공개홀 폭파 미수 사건 기사와 연결되는 건 금방이었다.

- 강원도에서 죽은 놈들이랑 목동 공개홀에서 폭탄 설치한 놈들이 같은 놈들일 걸요?

- 그걸 님이 어떻게 알아요?

- 이런 대형 사건이 같은 날 동시에 터진다? 그것도 비슷한 시간대인 한밤중에? 그게 우연이라고요?

- 어? 그러네요. 그런데 이게 우연이 아니면….

- 사이비 교주가 세 놈을 시켜서 목동 공개홀에 폭탄을 설치하게 한 후에, 다시 그놈들을 죽인 거겠죠.

- 꼬리 자르기?

- 죽은 놈은 말이 없으니까요.

- 그냥 죽어주진 않고 싸우다가 죽었나?

- 그래도 싹 다 죽은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소리언덕 도인선 기자는 사건 전문 기자다. 그녀가 목동과 강원도 사건을 하나로 모은 기사를 썼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누군가 강원도 사건 현장에서 목동 공개홀에 폭탄이 있다는 걸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즉시 댓글이 불탔다.

- 누구냐!

- 범인이냐!

- 범인이 왜 신고해?

- 왜 편들지?

- 우리 중에 범인이 있을 수도?

- 너냐?

187. 기사 II

차우진이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깜짝이야. 내가 댓글 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이거 누구야? 와사비? 일본 사람인가?"

도인선이 기사를 내자마자 퍼다 나르는 기자가 여럿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기자가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건 애당초 숨길 수 없는 정보였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합동수사본부만이 아니라 신고를 받은 112상황실, 그리고 현장에 출동한 형사들과 폭발물 해체 요원들도 두 사건이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경찰 쪽에 전화를 돌린 후에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새로 쓰는 기자들이 여럿 있었다.

강원도 사건과 목동 사건을 연결해서 보는 기사가 점점 늘어났다.

***

KMTV 도정민 기자는 사회부가 아니라 문화부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직접 기사를 내보내긴 어려웠다.

그는 여동생인 도인선 기자와 함께 이번 사건을 취재했다. 도정민은 목동 공개홀을, 도인선은 강원도 현장을 맡았다.

도인선이 남들보다 먼저 기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분업체계 덕분이었다.

그렇게 수집한 정보가 쌓여 새로운 기사가 준비됐다.

도정민이 말했다.

"내가 이 사건을 기사로 내도 위에서 칼질할 거야. 내가 강력사건을 다루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나도 옛날에 거기 다녀봐서 아는데, KMTV 보도국이 좀 그러긴 하지?"

"그러니까 이 기사는 네가 알아서 해라."

"오빠. 이 사건, 차우진 씨랑…."

"목동 공개홀 쪽은 경찰에서 차우진 씨의 이름이 나왔다. 블루퍼핏의 로드 매니저 장태호를 잡을 때 도와줬다더라. 그러니까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강원도 쪽은 차우진 씨와 연결되는 단서가 전혀 없어."

"없는데 넌 표정이 왜 그래?"

도인선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내가 차우진 씨를 좀 아는데, 단서가 없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 결정은 네가 해. 기사로 낼지 말지."

도인선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기사 내기 전에, 먼저 차우진 씨를 만나볼게."

***

도인선이 차우진 앞에서 머뭇거렸다.

"저기…."

"그냥 물어봐요. 뭐가 궁금한 겁니까?"

"알았어요. 그러면요."

도인선이 숨을 고른 후에 대놓고 물어봤다.

"차우진 씨. 혹시 이번에 강원도에서 일어난 사건하고 관계가 있으세요?"

"황야의 7인의 총잡이와 칼잡이 사건? 아. 거기가 황야는 아니구나."

"네. 혹시…."

"나를 의심하는 이유가?"

"의심은 아니고요."

도인선은 서해안 사건 때 살해당할 뻔했다. 그때 복면을 쓴 남자가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 사건으로 천상칠의 상칠파는 무너졌다. 현장에 있던 중국 조직원 일부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때 나를 구해준 사람이 차우진 씨라면….'

그렇게 추측하지만 확신하는 건 아니다. 그때 구해주러 온 사람과 지금 차우진은 체형이 좀 달랐다.

'이번 강원도 사건도 차우진 씨가 해결했을 수 있어. 총과 칼이 등장하고, 죽은 놈들이 나왔으니까.'

도인선이 말했다.

"경찰 쪽에서 목동 공개홀 사건으로 차우진 씨 이름이 나왔다고 들었어요."

"그거야 지난주 폭탄 무전기 사건 때문에 그런 겁니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잡아뗐다.

"그리고 강원도는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아. 그러시구나. 그럼 혹시 들은 이야기는 없으세요?"

차우진이 정보를 흘렸다.

"신고한 사람이 폭탄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를 사진으로 보내줬다는 거?"

"네?"

"청부업자 세 놈이 돈을 받으려고 찍어놓은 사진을, 신고한 사람이 발견하고 112에 전송했다던데."

도인선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디서 어떻게…."

"합수부에 도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쪽에서 조사받다가 얻어들은 겁니다."

"네? 조사를 받아요?"

"이번 사건이 아니라 폭탄 무전기 사건에 관해 물어보더군요. 별것 아니었습니다."

도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차우진 씨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면 지금 여기 계실 수 없겠죠."

"맞습니다. 그런 겁니다."

"방금 말씀하신 거, 제가 기사로 써도 되나요?"

차우진이 조언했다.

"구체적인 건 직접 취재해서 써야 할 겁니다. 나는 형사들이 잡담하듯이 하는 이야기를 잠깐 들은 거라서."

"아. 물론이죠. 저도 이렇게 들은 이야기를 그냥 기사로 쓰지는 않아요."

차우진이 단서도 달았다.

"취재원 보호는 철저히?"

"그것도 당연하죠! 차우진 씨 이름은 절대로 안 나오게 할게요!"

***

기사가 계속 나왔다. 경찰은 결국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인정했다.

합수부장이 직접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폭발물을 신고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강원도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두 그 신고자가 죽인 겁니까?"

"아닙니다. 사망자 중 최소한 세 명은 다른 사망자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나머지 네 명은 누가 죽였습니까?"

"조사 중입니다."

"신고자가 죽인 거 아닙니까?"

"신고자가 그 사람들을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나온 게 없습니다."

다른 의심을 하는 기자도 있었다.

"신고한 사람이 목동에 폭탄을 설치한 거 아닙니까?"

"총상을 입고 사망한 세 명 중에 폭발물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세 명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하는 중입니다."

도인선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목동 공개홀에서 발견된 폭탄 중 네 개는 해체된 상태였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신고자가 해체했다고 봐도 될까요?"

"도인선 기자?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취재원을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대답을 부탁드립니다."

"끄응.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언론 브리핑 내용이 기사로 쏟아졌다. 댓글도 줄줄이 붙었다.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폭탄도 대부분 해체하고, 그걸 설치한 놈들을 쫓아가서 다 쓸어버리고, 마지막 폭탄은 경찰에 신고해서 해체하라고 한 거네?

- 대단하네요.

- 누굴까요?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안 잡혔으면 좋겠습니다.

- 에이. 그래도 체포해야 하지 않을까요? 죽은 일곱 명 중에 한두 명쯤은 죽였을 수도 있다는데.

- 제가 이번 주 목동 공개홀 공연에 갈 예정이었거든요. 그때 폭탄이 터졌으면 저는 죽었을 듯.

- 어…. 안 잡히는 게 낫겠네요.

***

도인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보를 더 모았다. 그런 후에 인터넷 언론사 소리언덕을 통해 구체적인 기사를 냈다. 경찰 브리핑에서 공개된 것보다 더 자세한 기사였다.

그 기사에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 아예 폭탄 설치 위치를 찍은 사진을 경찰에 보내줬다고? 그러면 신고한 놈이 범인이네!

- 기사는 읽고 댓글을 달아요? 폭탄 청부업자들이 찍어놓은 사진으로 보인다잖아요.

- 사진을 보낸 시점에 이미 네 개는 해체되고 하나만 남았는데, 그게 한강에서 터트린 그 폭탄이랍니다.

- 여러분. 이건 추측기사입니다. 증거가 없어요. 기자의 상상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 도인선 기자는 상상으로 기사를 쓰는 사람은 아니죠.

- 속보 떴습니다. 경찰에서 해체된 폭탄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경찰에서 도인선의 추가 기사에 나온 부분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신고한 사람이 보내준 폭탄 사진 중 하나도 공개했다.

사진 속 폭탄은 선이 하나 잘려있었다.

- 역시 도인선 기자 말이 사실이었어. 취재 능력 쩐다.

- 도인선의 기사는 믿고 볼 수 있지.

- 그런데 사진을 보낼 때는 폭탄이 이미 해체되어 있었다면, 한강에서 수중폭파한 그건 뭐지?

- 다섯 개 중에 네 개만 해체되어 있었답니다. 한강에서 터진 건 마지막 하나입니다.

- 하는 김에 다 해체하지 왜 하나를 남겨둔 걸까요?

- 놓쳤겠죠.

- 일부러 그런 거라면요?

TV 뉴스 채널에서 아나운서가 전문가에게 물었다.

"김 소장님. 왜 폭탄을 하나 남겨둔 걸까요?"

"제 생각으로는, 이 사건이 묻히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아. 폭탄 다섯 개가 다 해체된 상태면 아무래도 기사가 덜 나가겠죠."

"덜이 아니라, 아예 묻을 수도 있다니까요. 그 폭탄이 한강에서 터졌으니까 안 묻힌 겁니다."

"하, 하하."

진행자가 어색하게 웃다가 말을 돌렸다.

"폭탄을 네 개나 해체했다던데, 폭탄 해체는 어렵지 않은가요?"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어느 선을 잘라야 하는지 알려면, 폭탄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걸 보자마자 파악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전문가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여기 이 선을 잘랐습니다. 이 선 주변에는 감지 센서가 있어서 건드리면 터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이 위치의 선을 자르려면 딱 맞는 특수 공구가 있어야 합니다."

"칼이나 니퍼로 자를 수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요."

차우진은 그걸 평범한 드라이버로 잘랐다. 그냥 자른 건 아니고 관통력 강화 스킬을 쓰긴 했다.

"그럼 이 폭탄을 해체한 사람은 폭탄의 구조까지 알고 특수 공구를 준비했다는 건데, 도대체 누굴까요?"

"산속에서 발견된 범인들의 거점에서 원격 신호 송신장치와 폭탄 제조에 사용된 장비들이 발견됐습니다. 그들이 범인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김 소장이 단언했다.

"신고한 사람도 평소에 그들의 주변에 있었을 겁니다. 그 주변 사람을 모두 조사하면 누군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에 출근했다가 송미소에게 말했다.

"목동 사건을 신고한 사람이, 범인들의 주변 사람이라는 뉴스 봤습니까?"

"봤어요. 그 추측이 진짜일까요?"

"방송에 나온 전문가 말인데, 믿어야죠."

송미소가 말했다.

"우리 엄마는 방송에 나오는 전문가나 의사들이 하는 말을 다 믿으세요. 그래서 아침에 밥 먹을 때 뭐가 자꾸 추가돼요."

"음?"

"방송에 이상한 외국 너트가 좋다고 하면 그게 식탁에 올라와요. 전에는 무슨 새우 오일이 좋다고 해서 한동안 먹었어요."

"어…."

"먹기만 하면 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한다는 건강보조식품도 많이 사세요. 그런데 그거 광고하는 사람들이 의사예요."

송미소가 하는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차 이사님은 방송에 전문가라고 나온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믿으세요?"

"그냥 해본 말입니다. 사실 잘 안 믿습니다."

송미소가 목동 공개홀을 미리 조사한 이유를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믿는 척한 것뿐이다.

"그럼 목동 공개홀을 조사하라고 하셨던 건…."

"우연이라니까요. 우리가 공개홀을 먼저 조사했고, 그 후에 사건들이 터진 겁니다."

"역시 그렇겠죠?"

차우진이 두 손을 슬쩍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가 폭탄 해체를 어떻게 합니까? 나 취사병 출신입니다."

"네?"

"왜 놀랍니까?"

"아니, 차 이사님은 전문적인 기획 분야나 기술 분야에서 복무하셨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밥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무시하네? 점심 도시락 만들어왔는데 혼자 먹어야겠다."

"앗! 제 것도 있나요?"

"있었는데, 이제 없습니다. 혼자 먹어야지."

"그건 아니죠!"

***

목동 공개홀에 폭탄을 설치한 셋과 폭탄 설치를 지시한 놈, 그리고 그 부하들은 모두 죽었다.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놈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무전기 폭탄을 터트리려다가 붙잡힌 장태호는 강원도 사건 이야기를 듣고 패닉에 빠졌다.

"저, 저는 그런 것까지는 모릅니다. 그냥 박상혁만 조금 다치게 하려고 했던 건데…."

박상혁은 폭탄 무전기를 허리에 차고 있던 블루퍼핏의 리더다.

형사가 압박했다.

"조금 다치는 게 아니라 죽이려 했잖아."

"그렇게 센 폭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 말을 누가 믿어줄 거 같아? 장태호 씨. 이거 지금 단순 살인미수 사건이 아니야. 당신 지금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조사받는 거라고."

"테, 테러라니요! 아닙니다!"

"강원도에서 사망자만 일곱이 나왔어! 당신 이대로 가면 사형이야! 사형!"

"히익!

***

차우진이 궁리했다.

"공개홀 건물의 도면을 훔친 놈이 살아 있으면 그놈을 캐보겠지만…. 아마 죽었겠지."

인도자는 공개홀에 폭탄을 설치한 세 놈을 죽였다. 그러니 도면을 훔친 최상만을 살려둘 리가 없다.

"현장에 있던 놈들은 다 죽었으니까, 그 멸망급 빌런 새끼는 꼬리가 잘렸다고 생각하려나."

그 빌런이 방심해 줘야 찾아낼 확률이 올라간다.

"관계자 중에 살아 있는 놈은 장태호뿐인데…."

장태호는 경찰의 손에 있다.

"장태호를 블루퍼핏 담당으로 꽂은 연 상무가 아는 게 있을까?"

만약 연태준이 아는 게 있다면, 멸망급 테러 빌런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188. 접근

목동 공개홀 폭파 미수 사건 때문에 장태호 사건의 수사 범위가 확대됐다. 장태호를 블루퍼핏의 로드 매니저로 꽂은 연태준 상무는 경찰에 소환돼 조사받았다.

연태준은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뇌물을 받았냐니! 나 돈 많습니다. 내가 뇌물 몇 푼 받으려고 그럴 것 같습니까?"

형사가 물었다.

"그럼 왜 장태호를 매니저로 꽂은 겁니까?"

"꽂은 게 아니라! 신입 중에 그나마 멀쩡한 놈인 것 같아서 블루퍼핏한테 보냈습니다. 그런 미친놈인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

합수부 팀장이 보고를 받았다.

"몰랐다고?"

"예.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뭐 나온 건 있고?"

"장태호의 돈을 받은 건 아닌 듯합니다. 재산이 꽤 많습니다."

"돈 많아도 받는 놈들은 받아."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끄응. 근거도 없이 체포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보내줘."

***

차우진이 집에서 물었다.

"연 상무인가 하는 그놈은 어떻게 됐어?"

집에 막 들어온 차유리가 짜증을 냈다.

"야. 넌 합수부에 끌려가서 고생하던 누나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냐?"

"궁금하잖아."

"며칠 동안 그 사건에 매달려서 일했는데, 집에서까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

그 사건을 지금 형태로 만든 게 차우진이다.

차우진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블루퍼핏도 죽고 목동 공개홀도 무너지고 관객들도 몰살당했겠지만, 대신에 차유리가 합수부에 끌려갈 일은 없었다.

차우진이 그 사람들을 살렸더니, 차유리가 며칠 동안 집에도 못 오고 일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짬뽕탕 해줄까?"

"아직도 안 만들어놨냐? 나 씻는 동안 빨리 만들어라. 몸에서 쉰내가 난다."

"쉰내 아니고 썩은 거 같은데?"

"닥쳐!"

차우진이 미리 사다 놓은 해산물로 짬뽕탕을 만들었다. 넣는 김에 차돌박이도 추가했다. 좋은 재료를 듬뿍 넣고 만들었더니 파는 것보다 맛있어졌다.

차우진은 시원한 맥주도 준비해 놓았다.

샤워하고 나온 차유리가 맥주부터 마셨다.

"캬아. 이거지."

그런 후에 짬뽕탕도 먹었다. 맛있었다.

"캬아. 이것도 죽이네. 그런데…. 너 왜 이걸 시키기도 전에 순순히 바치냐? 수상한데?"

차우진이 그녀의 의심을 멈추게 하려고 술을 더 따랐다.

"더 먹어. 더. 맥주 많아."

"어? 야. 거품 넘치잖아! 츄릅!"

차우진이 얼음처럼 차가운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이제 합동수사본부는 안 가나?"

"초기 조사는 다 끝났으니까 나 같은 지원 인력은 복귀해야지. 우리 관할에도 해결할 일이 쌓여 있는데."

"연 상무는?"

"연태준?"

"이름이 연태준이구나."

"그놈은 왜 자꾸 물어?"

차우진이 둘러댔다.

"그때 현장에 있던 매니저 실장이 그러더라고. 장태호를 로드 매니저 자리에 꽂은 게 연 상무라고."

"아. 거기서 들었구나. 연태준은 KYL 엔터 상무인데, 일단은 무혐의야."

"장태호를 꽂았는데 무혐의라니?"

"그런 놈인 줄 몰랐다더라고. 학연 지연 다 찾아봤는데 둘이 딱히 접점도 없어. 그래서 봉투라도 받았나 했는데 증거가 없네? 돈이 많고 KYL 엔터의 지분도 꽤 가지고 있어서, 로드 매니저처럼 자잘한 자리로 봉투를 받을 것 같지도 않…."

차유리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가? 돈 많은데도 고생하는 누나한테 야식값 내라는 놈이 여기 있네?"

"어차피 안 주잖아."

"달라고는 하잖아."

"어쨌든 연태준은 체포할 근거가 없어서 그냥 보냈다는 거네."

"그렇지."

***

차우진은 이튿날 KYL 엔터에서 퇴근하는 연태준의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

연태준은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갔다. 차우진이 그걸 보며 생각했다.

'어제 경찰 조사를 받았으니까, 오늘은 술집을 가거나 쉐도우와 관계된 놈을 만나진 않겠지.'

그런데 차우진 외에도 연태준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차우진은 연태준을 미행했던 사람을 다시 미행했다.

그 사람의 목적지는 차우진도 아는 곳이었다.

"합수부?"

합동수사본부가 있는 건물에 미행한 사람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어…. 고생들 하시네."

이제 경찰이 연태준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연태준도 그걸 안다면, 며칠 더 미행한다고 해서 뭔가 알아내긴 어렵다.

"경찰이 손을 떼야 연태준도 움직이겠지.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겠다."

테러 빌런은 물론이고 경찰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태준에게 접근해야 한다.

***

이튿날 차우진이 LPP 엔터로 출근했다.

전현석 사장이 활짝 웃으며 차우진을 반겼다.

"차 이사님! 얘들이 신곡 발표하는 날은 잊지 않고 오셨군요!"

"어…."

오늘이 그날인 줄은 몰랐다. 연락은 받았는데 잊고 있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오늘만 기다렸습니다."

루나페어리 네 명도 인사했다.

"차 이사님! 우리 오늘 음방에서 진짜 잘할게요!"

"그래. 연습한 대로만 해라."

신곡 '논스톱 걸'은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든 걸 곽민지를 통해 다시 만들었다.

춤은 외부 안무팀에 맡겼다.

차우진은 그 노래는 기억하지만 춤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딱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동작이 있었다. 꽤 섹시한 움직임이라서 그건 확실히 생각났다.

그래서 안무팀이 춤을 만들 때 차우진은 그 동작 하나만 따로 제안했다. 안무팀은 그걸 그대로 사용했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그런데 민지야. 넌 왜 여기 있냐? 학교 안 가냐?"

곽민지가 대답했다.

"토요일인데요?"

"아. 그렇지."

"그래서 음방 구경 가기로 했어요."

"잘 보다 와라."

"어? 아저씨는 안 가요?"

"내가 좀 바빠."

차우진은 오늘 KYL 엔터와 연태준에 대해 알아보려고 LPP 엔터에 왔다. 전현석은 동종업계 엔터 회사의 사장이다.

'소문 정도는 들었을지도 모르지.'

곽민지가 말했다.

"오늘 블루퍼핏도 나온대요. 그 오빠들은 저번에 큰일 날 뻔해서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멘탈이 튼튼한가 봐요."

"회사에서 그냥 내보낸 거겠지."

KYL 엔터가 블루퍼핏만 보낼 리가 없다. 당연히 관계자가 따라온다.

연태준은 KYL 엔터의 임원이다.

차우진이 전현석에게 물었다.

"애들이 오늘 음방에서 신곡을 공개하는데 제가 빠질 순 없지요. 남는 자리가 있을까요?"

"아! 거기 가실 거면 연락 좀 돌려서 자리 하나 만들까요?"

"이미 자리가 다 찼을 텐데 그럴 수는 없죠. 스태프로 따라가도 됩니다."

"당장 스태프 명단에 추가하라고 하겠습니다."

곽민지가 물었다.

"아저씨는 오늘 바빠서 음방에 안 간다면서요?"

"농담한 거야. 원래 가려고 했어."

***

오늘 음악방송은 공개홀에서 진행된다.

목동 공개홀은 당분간은 공연 스케줄이 없다. 있던 것도 모두 취소했다. 지금은 건물 정밀 안전점검을 받는 중이다.

오늘 음악방송이 진행되는 곳은 상암 공개홀이다. 방송국도 KMTV가 아니다.

공연 장소가 하나 빠지면서 상암 공개홀의 스케줄은 기존보다 더 빡빡해졌다. 방송 준비에 쓸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만큼 현장이 바쁘게 돌아갔다.

차우진이 상암 공개홀에서 무대 설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러다 또 사고 나면 어쩌려고 이렇게 대충 하나. 그냥 스케줄을 몇 개 빼지."

루나페어리 담당 매니저가 말했다.

"이 음악방송 스케줄은 원래 목동 공개홀에서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스케줄을 몇 개 빼면 이 방송이 빠집니다."

"이렇게 공개홀끼리 서로 돕고 그러는 거죠. 현장 사람들이 고생이 많겠네요."

차우진이 공개홀을 돌아다녔다. 관객석이 아니라 무대 뒤나 대기실 쪽을 돌아다니면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블루퍼핏이 어디 있을 텐데….'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돌아다녔더니 오늘 출연하는 블루퍼핏과 마주쳤다.

리더 박상혁이 차우진을 알아보았다.

"어? 거기!"

"거기?"

"아, 아뇨! 저기, 그때 살려주신 분이시잖아요."

"거기라고 하는 줄 알고, 괜히 살려줬나 후회할 뻔했네."

"하, 하하. 그럴 리가요. 아. 여기서도 안내 요원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그럼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여기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는데."

"내가 아는 애들이 오늘 무대에 올라가서."

"와아. 그러시구나!"

같이 있던 로드 매니저가 물었다.

"이분이 누구신데…."

"전에 말했던 그분. 무대에서 우리 구해주신 분."

"아! 그 안내 알바…."

로드 매니저 장태호는 체포됐다. 그래서 지금은 KYL 엔터의 다른 로드 매니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거기 누구인데 그러나?"

차우진이 그쪽을 힐끗 보았다.

'연태준. 너도 왔구나.'

연태준은 지금은 몸조심해야 한다. 경찰이 주시하고 있는데 룸살롱 같은 곳을 갈 수는 없다.

'그러면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지. 평소에는 안 가던 음악방송이라도 가야 할 테고, 평소에 가던 곳이면 꼭 가야겠지. 그래야 의심을 피할 테니까.'

그래서 그는 연태준이 오늘 여기에 올 거라고 예상했다.

로드 매니저가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상혁 씨가 목동 공개홀에서 도와준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연태준이 짜증을 냈다.

"목동 이야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연태준은 차우진을 쓱 본 후에 지나갔다.

박상혁이 사과했다.

"연 상무님이 요즘 컨디션이 좀 안 좋으셔서…."

"저 사람이 장태호를 꽂았다더니."

"예? 그걸…."

그때 블루퍼핏의 매니저 실장이 말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른 매니저가 있는 데서 꺼내는 건 곤란하다.

"소문이 돌더라고."

***

루나페어리가 무대에 올라갔다.

'논스톱 걸'은 원래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들었다.

그 노래는 멸망 초기를 기준으로 2년 전에 히트한 노래다. 그런데 그건 지금부터 8년 후다.

시대가 달라지면 유행도 변한다. 어떤 노래는 마침 그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유행하기도 한다.

루나페어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차우진이 관객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시대에도 이 노래가 통하려나…."

통했다.

'논스톱 걸'은 8년 정도의 시차쯤은 무시할 정도로 관객의 반응이 좋았다.

"이 노래 뭐야? 좋은데?"

"춤도 좋다."

"와아아!"

차우진이 관객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멸망 초기보다 더 좋은 거 아닌가?'

이 노래가 멸망한 세계에서도 히트곡이라는 건 안다. 그게 지금도 통할지는 몰랐는데, 관객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그 이유를 나름 짐작해보았다.

"논스톱 걸은 8년 후보다 지금 시대에 더 맞는 노래였나 보다."

블루퍼핏 네 명은 루나페어리의 노래를 들으며 입을 벌렸다.

"노래 진짜 좋다."

"나도 저런 노래 부르고 싶다."

어느새 노래가 끝났다. 관객들이 환성을 질렀다.

"꺄아아!"

"노래 너무 좋아요!"

루나페어리는 관객들의 환호에 활짝 웃으며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블루퍼핏이 그걸 보며 부러워했다.

"우리는 저런 노래 안 받아오나?"

"작곡가가 누구야? 유명 작곡가겠지?"

"검색해볼게. 신곡 발표했으니까 올라왔을지도 몰라."

검색 결과는 두 팀이 더 무대에 올라와 노래한 후에야 나왔다.

"음원 떴다. 논스톱 걸."

"작곡가가 누구야?"

"곽민지."

"곽민지? 어디서 들어봤는데…."

리더 박상혁이 손뼉을 쳤다.

"아! 우리 저번에 노래할 때, 우리 앞에서 여자애가 무지개 고백을 불렀잖아. 걔 이름이 곽민지야."

"에이. 걔는 고등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다른 멤버가 곽민지를 검색했다.

"어? 곽민지는 싱어송라이터라는데?"

"응?"

"'무지개 고백'도 직접 작곡했대."

"고등학생이?"

"어."

"와. 연예계는 정말 재능빨이 최고네. 자괴감이 든다."

박상혁이 말했다.

"야. 우리도 남들이 보면 재능 쩔어. 얼굴 잘생겼지. 노래 잘하지. 춤 잘 추지."

"학교 다닐 때는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이 바닥에 들어와 보니까 다들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잖아."

"그건 그렇지?"

박상혁도 멤버들과 같은 의견으로 돌아섰다.

"진짜 재능 쩌는 건 우리가 아니라 곽민지네. 쟤는 앞으로도 자기가 노래 만들어서 자기가 부르면 되잖아."

"우리처럼 누가 좋은 곡 주기만 바랄 필요도 없지. 좋은 곡을 직접 만들면 되니까."

"그러다 남는 거 있으면 남에게 팔면 되고."

"진짜 부럽…. 우리도 남는 곡 살 수 있나?"

"오늘 연 상무님 오셨잖아. 지금 방송국 관계자 보러 가셨을 텐데, 나중에 이야기해보자."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건가? 팔아야 사지."

"곽민지한테 곡 의뢰도 받냐고 물어는 볼 수 있잖아."

***

곽민지는 무대를 보며 감탄했다.

"우왕. 다들 노래 진짜 잘해. 부럽다."

곽민지가 앉아있는 자리는 관계자나 기획사에 할당된 곳이다. 지금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업계 종사자나 그 지인들이다.

그중 몇 명이 곽민지를 알아보았다.

"쟤 걔 아냐? 무지개 고백 부른 애."

"노래는 쟤가 더 잘하지 않나?"

189. 접근 II

업계 관계자가 곽민지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무지개 고백, 그 OST 참 좋았지."

오늘 루나페어리가 부른 '논스톱 걸'을 검색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곡 그거 좋더라. 누가 작곡한 거야?"

"모르겠습니다."

"음원 사이트에 떴을 거야. 찾아봐."

루나페어리가 무대에서 그 노래를 부를 때는 아직 음원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 음원은 두 팀이 더 노래한 후에야 음원 사이트에 올라왔다.

"논스톱 걸을 찾았습니다. 아직 순위에는 없는데 검색하면 나옵니다."

"신곡이 벌써 순위에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작곡가가 누구야?"

부하직원이 정보를 확인했다.

"곽민지라는데요?"

"응? 곽민지? 그거…."

업계 관계자가 옆을 보았다.

"쟤 아냐?"

곽민지는 응원봉 대신에 스마트폰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꺄아! 노래 진짜 잘해요! 부럽다!"

논스톱 걸의 작곡가가 누구인지 찾아본 관계자는 몇 명 더 있었다.

곽민지와 가까운 곳에 있던 기획사 직원이 수군거렸다.

"노래는 쟤가 더 잘하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작사작곡 다 자기가 하잖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업계 관계자도 관심을 보였다.

"논스톱 걸 노래 대박 냄새가 나던데요?"

"곽민지 소속사 어디야? LPP 엔터야? 곡 의뢰라도 넣어볼까?"

"곽민지는 소속사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러니까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라고?"

***

곽민지는 신나서 소리도 지르고 팔도 흔들면서 음악방송 무대를 즐겼다.

마지막 곡도 끝났다. 이번 주 1위를 발표하는 시간이 왔다.

루나페어리는 신곡을 오늘 발표했다. 당연히 1위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블루퍼핏 역시 어림도 없었다.

1위는 요즘 잘 나가는 걸그룹이 차지했다.

이제 오늘 음악방송이 모두 끝났다.

곽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우. 하얗게 불태웠다."

그 자리는 방송국이나 기획사에 할당된 자리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 중에는 연예인도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다른 관객석과는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달랐다. 안 그러면 연예인의 팬과 뒤엉킬 수 있어서였다.

곽민지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대 뒤로 이동했다. 그쪽에 나가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관객석을 벗어나 무대 뒤로 가자마자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곽민지 양?"

"넹?"

두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늘 노래 잘 들었습니다."

"저는 노래 안 불렀는데요?"

"논스톱 걸을 민지 양이 작곡했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웅…. 제가 하긴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무슨…."

"그러게요."

"어쨌든 민지 양이 작곡한 게 맞는다는 소리군요. 그러면."

남자가 명함을 주며 말했다.

"민지 양이 LPP 엔터에 곡을 줬으니까, 우리 회사에도 곡을 줄 수 있겠군요."

"네? 제가요?"

"곡비는 잘 쳐줄 테니까, 하나 잘 뽑아봐요."

"전 할 줄 모르는데요?"

"어? 논스톱 걸을 만든 사람이 민지 양이라면서?"

"그렇긴 한데요. 그걸 제가 만들었다고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말을 건 남자의 옆에 있던 남자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음…. 튕기는 건가? 고등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업계 선배한테 이러면 곤란해. 어른이 좋은 기회를 주면 고맙다고 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차우진이 곽민지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미성년자한테 계약서 사인이라니? 양아치인가?"

곽민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앗! 아저씨!"

"너 왜 여기 있냐? 집에 안 가고."

"가고 있었는데요. 저 어른들이 붙잡아서요."

"너한테 곡 달래?"

"네."

차우진이 두 사람을 쓱 훑어본 후에 곽민지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혼자 공부해보고는 있는데 아직 감이 안 잡혀요. 그리고 저 어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그럼 곡 주지 마."

"넹!"

남자들이 인상을 썼다.

"이봐요. 당신이 누군데…."

"민지 부모님한테 계약 조건 협상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어?"

"그런 나도 협상만 대신하지 사인은 못 하는데, 당신들 어디서 온 사람들인데 미성년자 붙잡고 이 난리야?"

곽민지가 얼른 방금 받은 명함을 내밀었다.

"여기서 왔대요!"

"그래?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회사 통해서 따로 알아봐야겠네. 가자. 민지야."

"넹!"

차우진이 곽민지를 데려갔다. 뒤에 남은 두 남자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야.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인 줄 알았는데, 이미 누가 있었어?"

"그런가 봅니다."

"너 이 새끼. 곽민지는 소속사가 없다며?"

"검색하면 없다고 나와서…."

"회사 들어가면 제대로 알아봐!"

***

차우진이 곽민지를 데리고 루나페어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나갈 때 차 얻어타고 가자. 그래야 엄한 놈이 또 달라붙는 걸 피하지."

"네. 히히."

"근데 너 요즘 작곡 공부하냐?"

"네! 대단하죠?"

"대단한 건 좋은데, 그럼 학교 공부는?"

"에이. 작곡 공부는 취미 생활 같은 거죠. 고딩도 취미쯤은 있어도 되잖아요."

"그래. 취미든 본격적으로 하든, 네가 결정하는 게 맞겠지."

그들이 루나페어리를 만나러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블루퍼핏도 주차장으로 왔다가 그들과 딱 마주쳤다.

리더 박상혁이 곽민지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 쟤 개다! 곽민지!"

곽민지가 얼른 인사했다.

"앗! 안녕하세요! 노래 진짜 잘하세요!"

다른 멤버가 앞으로 나섰다.

"야. 너 노래 진짜 잘 만들더라. 너 우리랑 놀러 가자. 우리가 오늘 뒤풀이로 끝내주는…."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민지 미성년자다. 얘를 클럽 같은 데 데려가면 블루퍼핏은 그날로 문 닫는 거야."

박상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왜 여기 계세요?"

"민지랑 아는 사이라서 루나페어리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려고."

차우진이 바깥쪽으로 손짓했다.

"그리니까 고딩한테 이상한 물 들이지 말고 가."

"하지만 곽민지는 연예인이잖아요."

"연예인은 학생 아니냐?"

"저희는 연습생 때 학교 거의 못 갔는데…."

"그건 너희 회사에 따져."

박상혁이 말했다.

"저기, 근데 저희가 곽민지의 곡을 꼭 받고 싶은데요. 어떻게 안 될까요?"

차우진이 곽민지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집에 가서 숙제해야 돼요."

차우진이 손을 바깥쪽으로 크게 내저었다.

"들었지? 가라."

블루퍼핏 멤버들은 차우진 덕분에 무전기 폭탄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리더인 박상혁은 그때 죽을 뻔했다.

그래서 그들은 차우진을 조금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었을 때 그곳에 없었던 새 로드 매니저는 달랐다. 그가 끼어들었다.

"이봐요. 이건 아티스트들끼리 해결할 이야기니까 우리는 빠집시다. 보니까 그쪽은 그냥 아는 일반인 같은데."

차우진이 매니저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박상혁을 보았다.

"역시 그날 괜히 살려줬나? 구경이나 할걸."

박상혁이 급히 말했다.

"네? 아뇨!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민지야. 가자."

"넹!"

차우진이 곽민지를 데리고 루나페어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곽민지가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본 후에 차우진에게 말했다.

"블루퍼핏한테는 곡 안 줄 거예요."

"네가 주기 싫으면 안 주는 거지."

"팬도 안 할 거예요."

"너 쟤들 팬이었냐?"

"아뇨. 앞으로도 안 할 거라고요."

"그래라."

"그리고 아까 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안 줄 거예요."

"그건 나도 찬성. 그놈들은 양아치더라고."

"맞아요. 딱 보니까 그래요."

"역시 양아치는 양아치를 잘 알아…."

"그, 그 골목은 그냥 아는 언니 따라갔던 거예요! 전 양아치 아니에요!"

"그래. 앞으로 아니면 됐지."

"진짜 아닌데."

곽민지가 투덜대다가 말했다.

"근데 저는 작곡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이런 이야기 하니까 부끄러울라 그래요."

"나중에 잘하게 될 거야."

차우진은 곽민지를 루나페어리의 차로 보냈다.

"난 일이 남아서 따로 갈 테니까, 너희끼리 가라."

김세린이 말했다.

"민지는 저희랑 뒤풀이하고 나서 이 차로 집에까지 데려다줄게요! 우리 작곡가님인데 잘 모셔야죠!"

"그래. 가라."

차가 출발했다. 곽민지가 차에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이 우리 아저씨를 막 무시하더라니까요?"

루나페어리 멤버들은 흥분했다.

"우리 피디님한테 예의가 없어!"

"민지야! 걔들한테는 곡 주지 마!"

"안 줄 거예요. 줄 곡도 없지만."

"곡 새로 나와도 주지 마."

"당연하죠!"

"우리 줘."

"당연…. 네?"

김세린이 얼른 말을 돌렸다.

"뒤풀이는 떡튀순이나 마라탕 먹으러 갈까?"

"소고기?"

"그래! 소고기!"

곽민지가 말했다.

"근데 어차피 아저씨가 안 도와주면 곡 못 만들어요. 저 혼자 해봤는데 안 돼요."

"우리도 피디님이 프로듀싱을 또 해주셔야 해. 논스톱 걸이 이렇게 잘 나온 건 다 민지랑 피디님 덕분이거든."

"그런 아저씨를 말이야!"

"피디님한테 예의를 안 지켜!"

"아저씨가 살려줬다는데!"

"그래. 살려…. 응?"

김세린이 물었다.

"살려줬다니?"

"몰라요. 아까 그랬어요."

"그건 농담 아닐까?"

"진짜일 거예요. 아저씨가 원래 누구 살려주는 거 잘해요."

김세린이 눈을 반짝였다.

"더 자세히 이야기해봐. 궁금하다."

"안돼요. 직접 물어봐요."

"직접 물어보면 이야기해주실까?"

"안 할걸요?"

***

음악방송이 끝난 후에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신곡 '논스톱 걸'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

- 노래가 귀에 팍팍 꽂히는데?

- 걸그룹에 특화된 노래 같다.

- 루나페어리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저 노래로 뜨겠다.

- LPP 엔터가 칼 갈았나 보다.

곡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 이거 작곡가가 곽민지던데, 그게 누구지?

-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에 고등학생 가수로 잠깐 나오는 애.

- 잠깐. 나도 그 드라마 봤는데,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가수였어? 진짜 고딩이라고?

- 고등학생 맞고, 그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게 노래를 잘해서라더라.

- 작곡가라며?

- 카메라 앞에서 노래 몇 번 하더니 갑자기 각성해서 '무지개 고백'을 만들었다더라고. 마지막 화 OST 말이야.

- 그리고 '논스톱 걸'도 작곡해서 걸그룹한테 주고?

- 재능 쩌네.

루나페어리가 춘 춤에 대해서도 나왔다.

- 안무는 누가 짠 거야?

- 검색해도 안 나와.

- 춤이 느낌이 장난 아니더라. 신나면서 섹시해.

- 맞아. 중간에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상체 흔들 때 입을 못 다물었다. 너무 섹시해서.

- 국내 안무팀 중에서 특급을 썼나 본데?

- 외국 A급 안무팀 아닐까?

- 소속사가 진짜 작정하고 밀어줬구나. 그 회사 돈 많나?

- 아닐 텐데….

***

이튿날 차우진이 LPP 엔터로 출근했다.

전현석 사장이 활짝 웃었다.

"차 이사님! 논스톱 걸 반응 보셨습니까? 하하하!"

"아직 차트는 그리 높지 않던데요."

"이제 겨우 하루 지났잖습니까? 차트에 들어간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추세도 장난 아닙니다. 하하하."

"애들이 고생했네요."

"차 이사님이 다 하셨죠. 안무도 직접 짜주시고요. 하하하."

"제가 짠 건 아니고, 저는 딱 한 부분만 거들었습니다만?"

"그게 제일 핵심이잖습니까? 사람들은 외국 정상급 안무팀을 쓴 줄 알더라니까요?"

"국내 안무팀도 잘하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든 춤은 차 이사님이 지휘했다고 보도자료를…."

"그러지 마시죠."

"네?"

"안무팀이 다 한 겁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일로 얼굴 팔리면 다른 일에 지장이 생깁니다."

"아…. 그렇겠군요. 다른 곳에서도 이사님이시라고 들었으니까…."

"쪽팔리기도 하고요."

"아니, 그런 멋진 동작을 만드시고 왜…."

"그냥 놔뒀으면 10년쯤 후에 누군가 같은 걸 만들었을 텐데, 먼저 가져다 쓴 게 미안해서요."

전현석이 웃었다.

"10년이요? 하하하. 하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사이에 그런 춤이 나올 수도 있겠죠."

차우진이 오늘 온 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민지한테 곡 달라는 요청이 있다면서요?"

"예. 우리 회사로 연락이 왔습니다."

"LPP가 민지 소속사도 아닌데 그 사람들은 왜 그랬답니까?"

"전부터 그런 연락이 가끔 왔습니다. '무지개 고백'의 음원 유통을 우리가 했으니까요. 이번에 '논스톱 걸'도 우리가 받았으니까, 민지랑 우리랑 긴밀한 관계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지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느냐는 문의는 다 거절했습니다. 곡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는 따로 모아놓았습니다."

"곡 달라고 한 곳의 명단을 좀 주시죠."

"여기 있습니다. 그럼 민지가 신곡을 준비…."

"아니요. 어제 민지한테 물어봤는데, 학생이니까 공부하겠답니다."

"예? 그럼 이 명단은 왜…."

"명단에 KYL 엔터도 있군요."

KYL 엔터에는 무전기 폭탄 사건의 범인 장태호를 블루퍼핏의 로드 매니저로 꽂은 연태준 상무가 있다.

190. 연태준

LPP 엔터 사장 전현석은 당황했다.

"아니, 민지는 그런 재능으로 왜 음악을 안 하고 공부를…."

차우진이 대답했다.

"재능이 제대로 개화된 후에는 생각이 달라질 수 있지만."

아직은 차우진이 길을 다 깔아줘야 겨우 따라온다.

"지금은 연예인이라는 자각조차 없으니까요."

"이미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음원도 내고 곡도 팔았는데요?"

"하나씩 짧게 한 거죠. 그리고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겁니다."

"아니, 그야 그렇지만…."

멸망한 세계의 민지는 싱어송라이터로 꽤 잘 나갔다. 배우 활동도 괜찮았다. 그때의 민지는 노래와 연기, 작곡까지 다 되는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곽민지는 그 민지가 살았던 인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재능은 있으니까 열심히만 하면 실력은 올라오겠지만.'

그때처럼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연예계는 재능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성공하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차우진은 곽민지와 가족이 알아서 미래를 결정하게 두었다.

"민지는 지금은 학교 다니느라 바빠서 곡을 쓰지 않으니까요."

"아쉽습니다. 재능이 진짜배기던데…."

"그런데, 연락 온 곳 중에 KYL 엔터가 있군요."

"아. 거기요. 차 이사님한테 거기 로드 매니저가 예의 없게 굴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식적으로 항의하려고…."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네?"

"제가 가서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KYL 엔터와 미팅 약속 좀 잡아주시죠."

"아. 그럴까요?"

"기왕이면 연태준 상무와 만나는 게 좋겠군요."

***

차우진이 KYL 엔터를 방문했다.

그는 일부러 회사 건물을 방문했다. 그래야 내부 보안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차우진이 KYL 엔터의 사무실의 분위기를 먼저 파악했다. 평범해 보였다.

중요한 건 사무실이 아니다. CCTV 배치 현황과 창문의 상태, 임원실의 위치 등을 알아내야 한다.

***

연태준 상무가 회의실에서 블루퍼핏 멤버들에게 말했다.

"LPP 엔터에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 후에 곽민지라는 애한테 전달하겠다니까, 너희도 알아서 잘해라."

"예!"

차우진이 회의실로 걸어갔다.

로드 매니저가 회의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어? 당신은 저번에 그…."

그가 인상을 쓰며 차우진을 쫓아내려다가 멈칫했다.

지난번 주차장에서는 차우진이 곽민지와 함께 있었다. 오늘은 LPP 엔터에서 곽민지를 대신해 사람이 찾아온다.

"설마…."

차우진을 안내하던 매니저 실장은 지난번 일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로드 매니저가 회의실 앞에 있는 걸 보고 살짝 놀랐다.

"왜 네가 여기 있냐?"

"상무님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내하라고 하셔서…."

"끄응."

차우진이 말했다.

"일부러 나 멕이는 건가…."

실장이 얼른 말했다.

"그럴 리가요. 들어가시죠."

차우진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실장은 로드 매니저에게 인상을 확 쓴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블루퍼핏 멤버들도 차우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자주 보네?"

"여긴 어떻게…."

"오늘 회의하자며?"

"LPP 엔터에 다니세요?"

"가끔."

"그럼 그날은…."

"민지가 그날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갔잖아. 그래서 겸사겸사 거기 있었지."

옆에서 실장이 말했다.

"나도 오늘 깜짝 놀랐다. 일부러 현장에서 단기 알바로 일하면서 무대 상황을 확인하셨다더라고."

"와…. 그 회사는 가수 서포트가 장난 아니네요."

연태준 상무가 헛기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커흠."

그런 후에 차우진에게 명함을 주며 말했다.

"연태준입니다."

"차우진입니다."

연태준이 차우진의 명함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LPP 엔터의 이사님이시군요."

"논스톱 걸의 프로듀싱도 맡았습니다."

"아. 그래서 오늘 대표로 오셨군요. 하하하. 환영합니다. 거기 뭐해? 차라도 좀 가져와."

로드 매니저가 얼른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기, 차는 뭐로…."

"아아."

"네? 아.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별다방 거로."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그걸 사려면 회사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차우진은 로드 매니저를 멀리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는 커피나 마시러 온 게 아니다. 그래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민지의 곡을 받고 싶으시다던데."

"블루퍼핏이 곽민지 양의 노래를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곽민지 양에 대한 제 평가도 높습니다."

"민지는 고등학생입니다. 학업에 집중하고 있어서 지금 당장은 줄 곡이 없습니다."

"그런 재능으로 공부만 하는 건 낭비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민지가 선택할 일이지요. 어쨌든, 블루퍼핏과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제안은 전하겠습니다만…."

"하하. 고맙습니다."

"그러려면 이 회사 상황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민지에게 말을 전할 수는 없으니까요."

"예? 설마 회사 경영 상태를…."

차우진이 손을 흔들었다.

"내부 시설 이야기입니다. 연습실이나 녹음실,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사무실 같은 곳들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거야 얼마든지요. 상혁이한테 안내하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나가봐야 해서."

차우진은 연태준과 악수를 했다. 차우진이 상대의 손바닥 상태를 확인했다.

'이 굳은살은 펜대만 잡아서 생기는 게 아닌데?'

***

블루퍼핏의 리더 박상혁이 차우진을 안내했다. 다른 세 명도 따라왔다.

"여기가 연습실입니다."

"여기는 회의실이고요."

"여기는 화장실…."

차우진이 물었다.

"임원분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시나? 막 호화찬란한 곳에 계시나?"

"안내해 드릴게요!"

"좀 전에 본 상무님 사무실은?"

"이쪽입니다!"

임원실 앞까지는 안내받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임원실은 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내부를 슬쩍 볼 수는 있었다.

'바깥 창문이 닫혀 있긴 한데, 잠기진 않았어. 딱 좋군.'

"여기 말고 임원실 내부를 볼 수 있는 곳은 없나?"

"아! 임원실로 썼던 빈방이 하나 있어요! 보여드릴게요!"

차우진이 그 방에 들어갔다. 내부에 책상이나 의자 같은 기본 집기만 있었다.

"여긴 당분간만 비어 있는 건데, 직원분들이 회의실이나 휴게실처럼 임시로 쓴대요."

서류나 기타 집기를 치울 때 CCTV 같은 기본 설치물까지 떼어냈을 리는 없다.

그 방에는 CCTV가 없었다. 경비회사에서 설치하는 동작 감지기도 사무실 전체 출입구 쪽에만 있지 임원실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한군데만 더 확인하면 된다.

"옥상도 볼 수 있을까?"

"예? 옥상은 왜…."

"옥상에서 보는 뷰가 궁금해서."

***

그날 저녁때 차우진이 곽민지를 만나 오늘 일을 전해주었다.

"너한테 곡 달라는 회사는 많아. KYL 엔터에 줄 필요는 없어."

곽민지가 당면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맞아요. 줄 거면 LPP 엔터에 주죠."

"아니면 아예 5대 기획사랑 거래하거나."

"KYL이 5대 기획사 수준으로 커진다고 해도 안 줄 거예요."

"왜?"

"일단 줄 곡이 없어요."

"하긴."

"그리고 거기 마음에 안 들어요."

"감이 좋은 건가?"

"네?"

"아니다. 마라탕은 맛있냐?"

"맛있어요."

옆에서 김세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개맛있어요. 오늘은 치킨이 아니라 더 맛있나 봐요."

"너 치킨 좋아하잖아."

"아저씨가 저 볼 때마다 치킨을 사주니까, 이젠 쪼끔 다른 것도 먹고 싶달까?"

"음…. 다음엔 돈까스로 할까? 그것도 얻어먹었는데."

"어디서요?"

"식량과 식용유가 모두 귀한 곳에서."

***

차우진은 그날 밤 KYL 엔터 건물 옥상으로 점프했다.

오늘 낮에 건물을 확인할 때 옥상의 보안 상태도 확인했다.

"이런 일반 건물은 옥상에 CCTV를 달지 않아서 좋아."

옥상에 헬리포트라도 있으면 CCTV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기는 그런 규모의 건물은 아니다. 옥상 공원도 없어서 CCTV를 달 이유는 더 없었다.

차우진이 건너편 건물을 확인했다.

KYL이 입주한 건물의 맞은편에도 건물은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맞은편 건물의 모든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가 아래쪽을 슬쩍 확인했다. 이미 밤이 깊어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누가 위를 올려볼 리는 없다.

차우진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목표 지점을 확인했다. 연태준 상무의 임원실은 옥상에서 4층 아래에 있다. 그 정도는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차우진이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옥상에서 사라졌다가 연태준의 임원실 창문 바로 앞에 나타났다.

눈앞은 콘크리트 벽이고 창틀은 오른쪽에 있었다. 차우진이 오른손을 뻗어 창틀을 재빨리 잡았다. 두 발로는 콘크리트 벽을 밟았다.

차우진은 안정적으로 벽에 붙은 후에 왼손을 옆으로 뻗어 창문을 당겼다.

여닫이 형식의 창문이 쓱 열렸다. 사람 한 명쯤은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 생겼다.

차우진이 그 공간을 통해 사무실 내부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공간이동 스킬을 쓰진 않았다. 쿨타임 문제도 있지만, 내부에 숨겨둔 카메라가 있는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어디 보자. 연태준은 뭘 숨기고 있나."

차우진이 사무실을 조사했다. 이 사무실에도 CCTV나 동작 감지기는 없었다.

책장에는 책과 서류철이 꽂혀 있었다. 책장에 개인용 요트 사진도 장식되어 있었다.

"인천 요트 선착장이네?"

여기는 SL 제약 성기호 사장과 갔던 적이 있다. 여기서 성혜리를 처음 만났다.

차우진이 책장을 더 조사했다.

"이걸 지금 다 뒤져볼 수는 없고, 폭탄 정보를 책장에 둘 리도 없겠지."

책상 서랍은 잠겨 있었다.

"서랍은 하나만 잠그면 다 잠기는 방식이구나."

책상 서랍의 자물쇠는 평범한 방식이라 따는 건 쉬웠다.

차우진이 서랍을 열었다. 내부에는 몇 가지 도구와 서류 등이 있었다.

문제는 오른쪽 제일 아래에 있는 서랍이었다. 그 서랍은 버튼식 잠금장치가 추가로 붙어 있었다.

"업무 서류는 일반 서랍에 있으니까, 여기엔 남이 보면 안 되는 게 있겠지."

서랍을 뜯어가는 건 간단하지만, 그러면 누가 여기 침입했다는 걸 연태준이 알게 된다.

차우진의 타깃은 연태준이 아니라 멸망급 테러 빌런이다. 그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사해야 한다.

연태준은 키보드 바닥에 비밀번호를 적어놓는 짓은 하지 않았다. PC도 로그인 비밀번호를 알아야 접속할 수 있었다.

"좀 기다려야겠다."

차우진이 연태준의 사무실 구석에 소형 카메라를 숨겼다. 그 카메라는 기본 배터리만으로도 10시간 이상 사용할 수 있다. 차우진은 그 카메라를 개조해 배터리를 추가로 붙여놨다.

이제 이 카메라는 24시간 연속 녹화가 가능했다.

카메라를 숨겨놓은 후에 차우진이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후에 열린 창문을 다시 닫았다.

차우진이 벽에 붙어서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사라졌다.

***

이튿날 차우진이 LPP 엔터에 들렀다.

"KYL 엔터의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전현석 사장이 물었다.

"거기서 또 예의 없게 굴었습니까?"

"그건 아닌데, 민지가 공부하느라 바쁩니다."

"아…. 고등학생이니까 공부도 중요한데, 그래도 그 재능이 아깝습니다. 어떻게 병행을…."

"그리고 연태준 상무를 봤는데, 신뢰가 안 가더군요."

"어? 그렇습니까?"

차우진이 슬쩍 물었다.

"혹시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 바닥이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니까요."

"그럼 부탁 좀 드릴까요?"

전현석이 큰소리쳤다.

"하하하.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당장 전화를 돌려서…."

"저쪽에서 모르게요. 뒷조사하는 걸 알면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죠. 조용히 알아보겠습니다."

***

차우진이 SL 제약으로 이동해 성혜리를 만났다. 정보는 가능하면 교차 확인하는 게 좋다.

"기획사 평판 정보가 좀 필요한데."

홍보팀 성혜리가 얼른 말했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홍보팀이 CF 때문에 그런 거 자주 조사해요. 그리고 또…."

"또?"

"제 친구가 연예계에 있어서 소문을 많이 듣거든요."

"그럼 KYL 엔터와 연태준 상무에 대해 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저쪽에서 모르게. 비밀리에."

"그럼 제 친구 불러올게요. 걔가 입도 무겁고 그런 거 잘 알아요."

191. 유지원

"안녕하세요. 유지원이에요."

성혜리는 친구인 유지원을 데려왔다. 만난 장소는 창밖 전망이 좋은 고급 식당이었다.

"맛있는 거 사신다고 해서 왔어요."

차우진이 말했다.

"먹을 수 있는 만큼 시키시죠."

유지원이 배시시 웃었다.

"어머. 다 못 먹고 남기면 안 되나요?"

***

박창수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야. 중간을 정확히 딱 잘라라."

그들이 폐허 속에서 찾아낸 건 햄 통조림이었다. 차우진이 햄 한 덩어리를 집중해서 자르면서 말했다.

"그럼 형이 나누던가."

"내가 나누면 네가 귀신같이 더 많은 거 가져가잖아. 네가 나누면 내가 가져가는 게 맞아."

그들은 햄 반쪽씩을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구운 햄은 맛있었다.

그런데 양이 너무 적었다.

박창수가 말했다.

"옛날에는 줘도 안 먹었는데, 이게 이렇게 맛있네."

"그때도 주면 먹었지."

"난 스팸 아니면 안 쳐줬다."

"스팸 맛있지."

"실컷 먹어보고 싶다."

"다음에 통조림 박스라도 찾으면 실컷… 먹으면 안 돼. 이 귀한 걸 어떻게 막 먹어? 아껴 먹어야지."

박창수가 깨끗해진 통조림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우진아. 맛이 없으면 남기고 다 못 먹어서 버리던 그 시절이 다시 올까?"

차우진도 빈 깡통을 보며 대답했다.

"오면 좋겠다."

***

멸망한 세계는 음식이 귀했다. 맛있는 음식은 더 귀했다. 식량은 가져갈 방법이 없을 때만 배에 최대한 채워 넣고 어쩔 수 없이 남겼다.

그 경우 외에는 음식을 남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먹고 싶은 거 다 시키고 맛없거나 많으면 남겨요."

유지원이 손끝으로 메뉴판을 쭉 훑었다.

"호호. 그럼 여기부터 여기까지?"

옆에서 성혜리가 한마디 했다.

"야. 장난 그만 쳐."

"알았어. 그냥 물어본 거야."

유지원이 음식을 몇 가지 주문했다. 그런 후에 차우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콧소리를 냈다.

"흐응."

"왜 그러시는지?"

"연예인보다는 외모가 좀,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아! 제가 연예인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까 초면에 실례했어요."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차우진의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차유리였다.

"음식은 주문하시죠. 저는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럼요. 편하게 하세요."

차우진이 일어나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성혜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야. 너는 차 이사님을 보자마자 얼굴 평가부터 하냐?"

"네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하던 차 이사님이잖아. 그래서 자세히 본 거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많이 말했냐?"

"열 번은 넘었지. 그리고 말이야."

유지원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넌 얼굴 뜯어먹고 사는 애잖아. 그래서 네 차 이사님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기대를 많이 했단 말이야."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어머. 언제냐니? 내가 왜 너한테 연예인 소개팅을 그렇게 많이 잡아줬는데? 네가 무조건 잘생긴 사람 해달라며?"

그래서 성혜리도 연예계 소식에 제법 밝았다.

"야! 차 이사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잡아먹어 버린다?"

"이해가 안 가서 그러지. 넌 둔해 보이는 사람은 싫다며?"

"차 이사님이 어디가 둔해?"

"배?"

"운동 엄청 잘해."

"예를 들면?"

"웅…. 아! 수영 진짜 잘해. 물속에서는 상어처럼 빨라."

"하마 아니고?"

"바다였어!"

"그럼 바다코끼리."

"야. 너 가!"

아직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다. 유지원이 손을 들었다.

"범고래로 합의 보자."

성혜리는 그 비유는 만족했다.

"그래. 범고래는 포스가 있지. 그거 딱 좋다."

"걔들이 원래 좀 통통하잖아. 그래서 범고래."

"야!"

차우진이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십니까?"

"범고래 이야기요. 혹시 고래 좋아하세요?"

"잡으면 고기가 많이 나오겠더군요."

"네?"

"물론 고래사냥은 반대합니다. 잡아본 적은 없습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고래를 잡아요."

"그러게요."

성혜리가 말했다.

"차 이사님이 농담하신 거야. 옛날 옛적 포경선 시절 이야기지. 백경 같은 거."

"아. 그러시구나. 호, 호호."

유지원이 어색하게 웃다가 말했다.

"저는 안무가로 일해요. 아이돌 안무를 주로 하지만, 가수나 배우도 담당해요. 물론 개인 강습도 하고요. 그래서 연예계 정보가 좀 밝아요."

차우진이 물었다.

"KYL 엔터 연태준 상무에 대해서 아신다면서요?"

유지원이 얼굴을 찡그렸다.

"알죠. 뒤통수 크게 맞아봤으니까."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아. 제가 그런 놈들을 좀 상대하다 보니까 초면에 실례했군요. 뒤통수 맞은 당사자 앞에서 흥미롭다니."

"어머. 뒤끝 있으시다."

"이해는 하시는지?"

"알았어요. 저도 이해해요. 괜찮아요."

"이제 본론을 듣지요. 뒤통수를 맞으셨다?"

"제가 아는 애들이 많이 당했어요."

유지원의 말이 빨라졌다.

"줘야 할 돈 후려치고, 자기가 중간에서 그 돈을 빼돌리는 건 기본이고, 노는데 불러서 술 따르라 하고, 더듬기도 하고."

"연태준이 나쁜 놈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통수라고 표현한 건 따로 있을 듯한데."

"좋은 일감, 예를 들면 자기한테 잘 보이면 블루퍼핏의 안무를 맡기겠다고 하는 거죠. 그 핑계로 실컷 부려먹다가 정작 안무가를 선정할 때는 나 몰라라 해요."

성혜리가 옆에서 발끈했다.

"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내가 아니라 나랑 친한 동생이 당한 거야."

"진짜 너 아니야?"

"연태준은 스물다섯 넘으면 가지고 놀지도 않아."

"나쁜 새끼네."

차우진이 물었다.

"연태준이 그러고 다니는데도 문제가 안 생깁니까?"

"힘없고 빽 없는 애들만 이용하거든요.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애들만 건드리고, 유명하면 건드리지 않으니까 이슈가 안 돼요."

"지저분한 곳이군요."

"기획사가 다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안 그런 곳도 많아요."

차우진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질문했다.

"LPP 엔터는 어떻습니까?"

"거기는 괜찮죠. 사장님이 감이 좀 부족해서 그렇지 사람은 좋거든요."

"그런 거 같더군요."

"이번에 '논스톱 걸'이 노래랑 춤이 참 좋더라고요. 저번에 나온 '무지개 고백'도 참 좋았고요."

성혜리가 옆에서 물었다.

"그 노래들이 그 정도야?"

"어. 그 회사랑 루나페어리 앞에 꽃길까지는 아니지만 걸어볼 만한 길이 깔린 거야. 능력 있는 피디라도 들어왔나?"

성혜리가 차우진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렇구나."

유지원이 냉수를 마신 후에 말했다.

"크. 논스톱 걸의 안무에 내가 예전부터 생각하던 게 들어 있었어. 근데 걔들이 먼저 썼더라. 아깝다."

차우진은 멈칫했다.

"어…. 안무 어느 부분이 예전부터 생각하던 겁니까?"

"네?"

"궁금해서."

유지원이 양손 손가락 열 개를 움직여 춤추는 모습을 만들었다.

"여기 이렇게 자세 잡고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상체를 이렇게 흔드는 거요."

"아…."

"제가 생각하던 건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더 다듬어서 써먹어야지 했는데, 완성형이 나와버렸네요? 아깝다. 하긴. 그런 건 원래 먼저 만들어서 쓰는 놈이 장땡이지."

차우진은 그 동작을 안다.

논스톱 걸의 춤은 안무팀이 맡아서 진행했다.

차우진은 그 춤에 동작 딱 하나만 넣자고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건 멸망한 세계에서 논스톱 걸을 부른 걸그룹이 추던 춤 동작이다.

'창수 형이 영상 보고 따라 하던 걸 몇 번이나 봐서, 그게 생각나서 넣었던 건데.'

박창수는 그 동작을 꽤 그럴듯하게 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넣었다.

그가 유지원을 보았다.

'이 사람이 만든 거구나. 이미 이 시기에 원형은 만들어둔 거였네.'

논스톱 걸은 곽민지가 만들었다. 곽민지가 그걸 루나페어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춤의 핵심 파트를 만든 사람이 눈앞에 있다.

이미 '논스톱 걸'은 춤과 함께 공개됐다. 그걸 되돌릴 수는 없다.

"음…. 유지원 씨. 그런 거 더 있지요?"

"생각해둔 춤이요? 당연하죠. 많아요."

"나중에 LPP 엔터에서 신곡이 나올 때, 춤이 필요하면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유지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LPP 엔터 일을 차 이사님이 왜…."

차우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LPP 엔터에서도 월급을 받고 있어서."

LPP 엔터에서 받는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월급은 회사 상황이 좋아지면 그때 제대로 받기로 했다.

대신에 차우진은 LPP 엔터의 지분을 꽤 가지고 있다.

유지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LPP 엔터 차우진 이사님? 혜리야. 너희 회사에선 잘리신 거야?"

"둘 다 하셔."

"어?"

"양쪽 회사에서 다 임원이시라고."

유지원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능력 쩌시나 보다! 그래서 네가 얼굴 안 보고…."

"야. 밥 먹어. 밥."

"응? 어."

차우진이 물었다.

"가능하신지?"

유지원이 신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요! LPP 엔터에서 불러주면 언제든지 가죠! 아. 그런데 어떤 노래로…."

"아직은 노래가 없고, 나중에 만들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아무리 이사님이라도 그걸 마음대로 정하셔도 돼요? 새 피디가 생각해둔 안무가가 있으면 어쩌려고요?"

"없었는데, 방금 생겼습니다."

"네? 그게 무슨…."

성혜리가 말했다.

"차 이사님이 '논스톱 걸' 프로듀서야."

유지원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아니,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분이 어떻게 프로듀서를…."

"나도 놀랐어."

유지원이 성혜리와 차우진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다 이유가 있어서….

"물 줄까?"

"어? 응."

차우진이 물었다.

"이제 연태준에 대해 계속 들어볼까요?"

유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하나만 확실히 말해줘요. 연태준한테 좋은 거 주려고 물어보시는 건 아니죠?"

"전 연태준을 싫어합니다만?"

유지원이 활짝 웃었다.

"저랑 똑같네요! 차 이사님 같은 능력자가 나서주면 연태준한테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겠네요!"

"목을 치는 게 목적입니다만?"

유지원은 당황했다.

"네? 모, 목이요? 아! 쫓아낸다고요?"

"그렇죠. 설마 진짜로 목을 치겠습니까?"

"어머. 농담을 참 짜릿하게 하신다. 호호호."

차우진의 휴대폰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도 차유리의 전화였다. 수사 상황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어서 이 전화는 안 받을 수가 없다.

"누나가 자꾸 찾아서. 잠시만요."

"네. 통화하고 오세요."

차우진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성혜리가 말했다.

"야."

"응? 왜 눈에 쌍심지를 켜니?"

"너 왜 차 이사님이랑 죽이 이렇게 잘 맞아?"

"같은 업계 종사자라서?"

"나도 같은 업계 종사자거든? 난 같이 일하거든?"

"나도 나중에 같이 일하자고 하시잖아."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유지원이 웃으며 두 손을 앞으로 들고 주먹을 살짝 쥐었다.

"난 호랑이보다는 고양이 하면 안 될까? 야옹."

"이게! 야. 미리 선언하는데, 내가 선점한 차 이사님한테 입찰하지 마라."

"야. 야. 장난이야. 장난. 내가 설마 친구의 남자를 빼앗겠어?"

"그치? 넌 그럴 사람은 아니지?"

유지원의 춤으로 단련된 몸매는 꽤 섹시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슬쩍 움직여 몸매를 자랑하며 말했다.

"혜리야. 근데 차 이사님은 아직 네 남자는 아니지 않나? 그러면 빼앗는 건 아니…."

"죽을래?"

"농담이니까 포크는 내려놔. 도끼 눈도 풀어. 차 이사님이 너 지금 표정 보면 놀라신다."

"잘해라."

"녜이."

차우진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연태준이 어떤 자리에 지원 씨 후배를 불렀습니까? 그 후배가 만난 놈은 누구입니까?"

유지원은 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자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건 제가 금방 알아올 수 있어요. 한두 명이 아니고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까 아예 명단 뽑아올게요."

"그러면 지금은 바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부터 듣고 싶군요."

"연태준은 일단 돈이 많아요."

"회사에 지분도 있습니까?"

"맞아요. KYL 엔터에 지분도 있어요."

"업계 평판은요?"

"방송국 관계자나 기자하고 술을 자주 마셔요. 물론 술값은 항상 연태준이 내고요."

"돈이 많은데도 유지원 씨의 아는 동생을 굳이 술자리에 부르는 걸 보면, 선을 넘을 때 자극을 받는 타입이겠군요."

"어머. 그 변태 새끼가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같이 선을 넘은 피디나 기자와의 관계도 더 끈끈해질 테고요."

차우진이 원하는 건 멸망급 테러 빌런과의 관계다.

"그런 놈이면 더 안 좋은 쪽 이야기도 있을 듯한데."

"있죠."

유지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연태준이 조폭하고 엮여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차우진이 씩 웃었다.

"그거 재미있군요."

192.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