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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멸망급 재난들이 터지면서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도 다 터져나갔다. 농약을 만드는 곳도 무너졌다.

설사 비료나 농약을 만든다 해도 그걸 공급할 유통망이 없었다.

그 식량 부족 사태는 쿠에르노 인더스트리 때문에 더 악화됐다.

차우진이 생각했다.

'쫄쫄 굶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배부르게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제안했다.

"오늘 점심은 뷔페로 갑시다."

SL 제약 성혜리가 물었다.

"네? 회의하다가 갑자기요?"

"물론 회의 끝나고 나면. 갑자기 배가 고파서. 회의 계속합시다."

성혜리가 물었다.

"그럼 쿠에르노 인더스트리가 신당읍 주변에서 뭔가 하려는 건가요?"

차우진도 이번 일의 원인이 쿠에르노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다.

쿠에르노의 액체 비료 첨가제는 몇 년 후에나 나온다.

'그러니까 그걸 테스트하는 것도 몇 년 후라고 생각했는데.'

쿠에르노의 첨가제 신제품은 처음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기후와 환경에서 여러 작물에 소규모로 사용된다. 한국은 그 테스트 대상 농지가 신당읍에 있다.

그런데 지금 시기는 그 일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빠르다.

'쿠에르노의 국내 협력업체에서 미리 뭔가 하나?'

차우진이 지시했다.

"쿠에르노의 국내 진출 파트너를 찾아봐요. 협력업체가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찾으면 그 회사가 뭘 만드는지도 알아보고요."

성혜리는 딥어스테크 조사팀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다.

"업계 동향과 소문까지 싹 다 조사할게요. 이런 건 딥어스테크보다는 우리가 잘해요."

***

오전 회의를 마치고 뷔폐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성혜리가 물었다.

"차 이사님. 이번 주말에는 뭐 하세요?"

"저번에 회사에서 계약 도와준 고딩이랑 일 하나 합니다."

"네? 저번 계약은 그냥 음원 공급 계약 아니에요?"

"걔가 곡 하나 더 만들어야 해서, 그거 도와주려고요."

"아. 그렇구나."

성혜리가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배우 정예지와 요트를 타는 건 몸매로 학살당할까 봐 거부했다. 골프도 옷맵시로는 이길 자신이 없어서 추진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예지가 없잖아?'

"차 이사님. 저도 거기 가도 돼요?"

"오는 건 상관없지만, 심심할 텐데."

"안 심심하게 탬버린이라도 칠게요!"

"노래방 가는 거 아닌데."

***

차우진이 토요일에 곽민지를 만났다.

"민지야. 작곡 연습은 해봤어?"

곽민지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책도 보고, 너튜브 강의 영상도 보고, 직접 피아노도 쳐봤어요."

"결과는?"

"멜로디만 몇 개 만들어왔어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들어보자."

곽민지가 만들어온 건 모두 어디서 들어본 것들이다. 게다가 대부분 멸망한 세계가 아니라 지금 시대에 들어보았다.

그중에는 옛날 가요의 멜로디도 있고, 팝송 멜로디도 있고, 심지어 지금 유행하는 곡도 있었다.

"아직 구분이 잘 안 되나 보다."

"네?"

"머릿속에 떠오른 멜로디가 알고 보니 예전에 들어본 노래인 경우가 많다고."

"어쩐지 익숙하더라."

"그래도 한 개는 건졌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든 걸그룹 노래를 기억한다. 그 노래가 히트곡이라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곽민지가 만들어온 것 중에는, 그의 기억 속에 선명히 있는 그 노래와 겹치는 멜로디가 하나 있었다.

분량은 10초도 안 되고 그나마도 좀 고쳐야 하지만, 시작이 좋았다.

"10초나 되네."

차우진이 그걸 골라서 들려준 후에 말했다.

"이걸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자."

"저번처럼 또 그렇게 해요?"

"어. 여기 쓸 멜로디를 생각나는 대로 만들어봐."

작업 방법은 지난번과 같았다.

곽민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멜로디를 쏟아냈다.

대부분은 차우진이 생각한 것과 달랐다. 거의 전부 다 한 번 들어보고 폐기했다.

"잠깐. 지금 그거."

"앗! 이번엔 쓸 만해요?"

"쓸만한데 지금은 못 써."

그 멜로디는 민지의 다른 노래에 들어간다.

"이건 네가 나중에 다른 곡을 만들 때 써."

"네? 다른 곡이요?"

"나중엔 너 혼자 할 수 있을 거야."

작곡 작업은 지난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진행됐다.

차우진은 곽민지가 쏟아내는 멜로디 중에 그가 기억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만 골라냈다. 약간 차이가 있을 때는 조금씩 고쳐주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멜로디 수집 작업을 충분히 한 후에 차우진이 말했다.

"이제 이걸 잘 배치해 보자."

두 사람은 수집한 멜로디를 전부 다 써서 그 작업을 마쳤다. 그런데도 노래에 구멍이 지난번보다 많았다.

곽민지가 말했다.

"지난번보다 빵꾸가 많아요."

차우진이 그 노래를 완벽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몇 부분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나는데 수집한 멜로디 중에는 없는 것도 있었다.

"그 빈 곳을 네가 채워봐. 네가 원하는 대로."

"넹!"

곽민지가 그 구멍들을 새로운 멜로디로 채웠다. 지난번보다 구멍이 많은데도 채우는 속도는 빨랐다.

곽민지가 자랑했다.

"빈 곳 다 채웠어요!"

차우진의 기억과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 노래도 듣기 좋았다.

"너도 이제 느낌 아는구나?"

"히히. 저번에 해봤잖아요."

"거봐. 넌 재능이 있다니까."

"아저씨가 멱살 잡고 끌고 다니면서 만든 거잖아요."

"이 노래는 네가 만든 거야."

꿈속에서 본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들었고, 지금 세계의 곽민지가 멜로디를 다시 떠올렸다. 차우진은 그걸 하나로 합쳤다.

"자. 이제 편곡하는 분 만나러 가자!"

"밥 먹고 가요!"

"떡튀순?"

"오늘은 고기! 소고기 맛있어요!"

"네가 쫑파티 때 고기 맛을 봤구나. 떡튀순을 마다하고."

"히히."

"근데 몸에서 고기 냄새 풍기면서 편곡하는 분 만나게?"

"어…."

성혜리가 얼른 손을 들었다.

"스테이크! 제가 살게요! 사고 싶어요!"

"콜."

그들은 곧바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성혜리는 차우진과 곽민지가 작업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 작업 도중에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그녀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이 노래, 민지가 만든 거 맞아요?"

"만드는 거 봤잖습니까?"

"아닌 거 같아서요."

"왜 눈으로 보고도 안 믿을까?"

"눈으로 봤으니까 안 믿죠. 민지는 어떻게 생각해?"

곽민지가 고기를 썰며 대답했다.

"저도 안 믿어요. 저번에도 아저씨랑 만들면 금방 됐는데, 혼자서 해보면 맨땅에 헤딩만 하거든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제가 벽돌 같은 거 만들면 아저씨가 집을 지어주는 거 같은 느낌이에요."

"어머. 나도 그렇게 봤는데."

노래 가사는 점심을 먹으면서 썼다.

곽민지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차우진이 기억 속 가사에 맞춰 방향을 조정해주었다. 그렇게 고쳐가다 보니 밥을 다 먹을 때쯤에는 원곡과 대충 비슷한 가사가 나왔다.

성혜리는 당황했다.

"아니, 무슨 노래 가사가 밥 먹다가 나와요?"

"민지가 재능이 있다니까요."

오후에는 편곡자를 만났다.

편곡자는 지난번에는 차우진을 조금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마추어가 어설프게 나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편곡자가 깍듯이 인사했다.

"차우진 씨.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은 건 아닌데…."

"아니, 그래서 기다린 게 아니라요. 오늘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에이. 전문가가 초보자인 우리를 가르쳐주셔야죠."

"제가요?"

편집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휴. 지난번에는 제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죠. 부끄럽습니다."

편곡 작업이 시작됐다.

차우진은 그가 기억하는 노래에 맞게 악기를 제안하고 음을 조정해달라고 했다. 기술적인 부분과 곡을 다듬는 작업은 편곡자가 맡았다.

작업을 마치고 그곳을 나올 때 편곡자가 인사했다.

"차우진 씨. 다음 작업 때도 연락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민지가 알아서 할 거라서."

곽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제가요?"

"어. 네가."

편곡자가 곽민지에게도 인사했다.

"민지야. 다음에 곡 쓰면 꼭 연락해."

"제가 뭘 할 줄 알아야 연락을 드리죠."

차우진이 말했다.

"이제 노래 녹음하러 가자."

성혜리가 물었다.

"녹음까지 오늘 다 해요? 민지가 지치지 않았을까요?"

"아. 녹음은 민지가 하는 거 아닙니다."

"네?"

"이 곡은 민지가 걸그룹에 주는 겁니다. 녹음은 루나페어리가 해야죠."

곽민지가 물었다.

"아저씨. 약속은 몇 시로 잡으신 건데요?"

"아차! 연락을 안 했네."

"네?"

차우진이 두 사람을 데리고 LPP 엔터에 방문했다.

LPP는 중소 기획사다. 지난번에는 사장이 직접 곡을 부탁했었다.

사장은 토요일에도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신인 걸그룹과 배우들을 어떻게든 띄워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래서 사장과 루나페어리를 담당하는 팀장은 차우진의 연락을 받았을 때 회사에 있었다.

사장이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일단 뵙지요. 녹음하기 전에 미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장이 전화를 끊은 후에 팀장에게 말했다.

"곡을 부탁한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좋은 곡은 금방 나오기도 한다지만, 고등학생에겐 너무 빠르지."

팀장도 반응이 비슷했다.

"저번에 거절한 게 미안해서 예의상 방문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겠지?"

차우진과 곽민지, 성혜리가 회사에 도착했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루나페어리를 불러서 오늘 당장 녹음했으면 합니다."

사장은 당황했다.

"예? 그렇게 갑자기요?"

"내일은 민지도 공부를 좀 해야죠. 월요일에 학교 가려면 일요일에 할 게 많습니다."

"아, 학교. 고등학생이지."

차우진이 사장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녹음은 오늘 해치우시죠."

"하, 하하. 너무 갑자기라서…."

그렇다고 대놓고 거절하기도 어렵다. 지난번에 차우진이 표절 사건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루나페어리나 LPP 엔터 모두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게다가 지금 노래가 필요한 건 LPP 엔터다.

사장이 제안했다.

"일단 노래를 들어보고 이야기하고 싶군요."

"아. 그렇죠. 노래부터 들어보셔야지."

차우진이 회의실의 오디오에 USB를 꽂고 음악을 재생했다.

음악이 나왔다. 편곡까지 마친 노래였다.

노래를 듣는 사장의 표정이 변했다.

"노래가…."

팀장이 말했다.

"정말 좋습니다."

"우리 애들에게…."

"딱입니다."

음악이 끝났다.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민지 양! 고마워요!"

"네? 저한테요?"

"민지 양이 만든 노래라면서?"

"아저씨가 다 하셨는데."

"차우진 씨. 고맙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민지가 만든 거 맞습니다. 이제 루나페어리를 불러야죠. 민지가 미성년자라서 너무 늦게까지 일 시키면 안 됩니다."

***

김세린은 동생과 홍대에서 놀다가 전화를 받고 환성을 질렀다.

"꺄아아! 새 노래요? 지금 갈 수 있죠! 당장 갈게요!"

네 사람은 회사로 모였다. 그곳에서 노래를 들어보고 다들 활짝 웃었다.

"지난번보다 노래 더 좋아!"

김세린이 곽민지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제가 인사받아도 되나요?"

"이 곡 우리 주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요. 제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좀 있어서요."

신당읍 고등학생 김세나는 언니인 김세린과 놀다가 회사로 따라왔다. 아직 서울 지리에 어두운 김세나를 혼자 집으로 보낼 수 없어서였다.

차우진이 김세나에게 물었다.

"네가 왜 또 여기 있어?"

"네?"

"아니다."

차우진이 루나페어리 네 명에게 말했다.

"다 모였으니까 녹음하러 갑시다."

"네? 지금요? 연습도 안 하고요? 딱 한 번 들어봤는데요?"

"오늘 녹음하는 걸 기준으로 잡고 열심히 연습한 후에, 정식 녹음은 다시 해요. 그땐 나는 없을 테지만 알아서 잘하겠지."

"아. 레퍼런스를 만들어주시는 거군요."

"민지가 학생이니까 10시 전에 끝냅시다."

"세 시간도 안 남았는데요?"

"그걸 알면서 왜 아직도 여기 있을까?"

"네?"

"뛰어."

157. 당일치기 II

차우진이 루나페어리 네 사람을 녹음실에 집어넣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 노래는 원래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든 노래다. 거기서도 4인조 걸그룹이 이 노래를 불렀다.

차우진은 이 노래를 자주 들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네 사람에게 같은 파트를 부르게 한 후에 그가 기억하는 것과 제일 비슷한 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그 부분을 맡겼다.

소리의 차이를 구분할 때는 전투 센스가 도움이 됐다. 마치 전투처럼 목소리를 분석하고 비교하면 차이점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녹음 장비 조작은 LPP 엔터의 엔지니어가 맡았다.

곽민지는 작곡가 자격으로 녹음실에 들어왔다. 차우진은 김세나도 녹음실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김세나와 곽민지는 둘 다 고등학생으로 나이도 같았다.

김세나가 소곤거렸다.

"너 진짜 끝내준다. 벌써 작곡가님이야?"

"아니야. 이건 아저씨가 다 한 거야."

"응? 네가 작곡했다던데?"

"난 그냥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노래가 나오더라?"

"그럼 넌 뭐 했는데?"

"멜로디 만드는 거? 가사 만드는 거?"

"그럼 네가 작곡가 맞잖아."

"아니, 그게 좀 달라."

곽민지가 김세나를 가리켰다.

"내가 아니라 네가 했어도 노래가 뚝딱 나왔을걸?"

SL 제약의 성혜리도 녹음실에 있었다. 그녀는 곽민지와 차우진이 이 노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직접 봤었다.

그녀는 차우진이 루나페어리와 녹음하는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차 이사님은…. 운동도 잘하고 업무 능력도 대단한 건 알고 있었는데, 예술도 잘하는 분이구나."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

루나페어리는 차우진이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뭘 하라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노래가 점점 괜찮아졌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은 엔지니어가 장비를 이용해 조정해주었다.

밤 9시 40분에 차우진이 선언했다.

"여기까지."

곽민지와 함께 구경하던 김세나가 물었다.

"이제 녹음이 다 된 거예요?"

"그렇지."

"언니! 끝났대! 집에 가자!"

루나페어리는 몸은 지쳤어도 정신은 흥분한 상태였다. 네 사람이 차우진을 향해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민지한테 해요."

옆에서 놀고 있던 곽민지가 눈을 깜빡였다.

"넹? 저요?"

"고마워요!"

"제가 뭘 했나요?"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곡을 만들어서 얘들한테 줬잖아."

"제가 진짜 그랬어요?"

"어. 그랬어."

이야기가 길어지면 곽민지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제 나가자."

녹음실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소식을 듣고 사장이 달려왔다.

"녹음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최소한의 선은 어떻게 넘었습니다만, 좀 더 연습해서 재녹음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거야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녹음할 때, 회사에서 생각하는 콘셉트에 맞춰서 노래 분위기를 좀 바꿔도 되겠습니까?"

"제 일은 여기까지니까, 그건 회사와 루나페어리가 알아서 해야지요."

"아. 그렇습니까?"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하고요."

"하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멋지게 가공하겠습니다. 회의실로 가시죠. 활동 콘셉트에 관한 이야기를…."

"민지가 집에 가야 해서요."

"예?"

"미성년자 학생이잖습니까? 집에 보내야 합니다."

"아…. 그렇죠.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죠."

차우진과 곽민지, 성혜리가 회사를 떠났다.

곽민지는 차우진이 데려다주기로 했다. 성혜리는 그녀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차우진이 차에서 말했다.

"이 경험을 잊지 않으면, 나중에는 네가 이런 노래들을 혼자 만들 수 있어."

"에이. 저 혼자서 어떻게 만들어요? 이번에도 아저씨가 멱살 잡고 하셨는데."

"넌 할 수 있어. 내가 봤다."

"네? 어디서 보셨는데요?"

"꿈에서."

"네에. 네에."

성혜리의 차가 신호등에 걸렸다.

그녀가 앞을 보았다. 차우진의 차가 보였다.

"똑똑하면서 예술적 감성까지 대단하고…. 나랑 같이 운동하자고 할까? 살만 빼면 나랑 딱…."

직업상 연예인을 자주 보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야. 너 소개팅 할래? 연예인이야. 잘생겼어.

성혜리가 차우진의 차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말했다.

"남자는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야."

- 응? 언제부터?

"난 배가 좀 나와도 괜찮아."

- 연예인인데 배가 왜 나와?

"소개팅 안 한다고."

- 야. 너 어디 아퍼? 너 원래 얼빠잖아. 연예인 소개팅을 네가 거절할 리가….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었다.

"끊어."

차우진과 곽민지가 탄 차가 먼저 출발했다.

성혜리도 가속페달을 밟았다. 얼마 전에 차우진이 바다낚시에 정예지를 데려오겠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정예지는 민지처럼 그냥 아는 사이겠지?"

***

LPP 엔터 사장과 팀장, 녹음실 엔지니어, 루나페어리 네 명, 거기에 신곡을 담당하는 직원들까지 회의실에 모였다. 직원들은 저녁때 불려 나왔다.

사장이 말했다.

"시간이 늦긴 했는데, 중요한 일이니까 이해 좀 해줘요. 일단 녹음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듣고, 우리 콘셉트랑 비교합시다."

엔지니어가 오늘 저녁에 녹음된 음악 파일을 회의실 오디오에 입력했다. 그런 후에 음악을 재생했다.

'논스톱 걸'이 스피커에서 나왔다. 경쾌한 걸그룹 댄스곡이었다.

사장이 저녁때 이미 이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는 가수의 목소리는 빠져 있었다.

지금 스피커에서 나오는 건 루나페어리가 노래를 부른 버전이다.

노래의 느낌이 아까와 많이 달랐다. 아까도 신나고 경쾌한 노래였는데, 지금은 더 신났다.

사장이 말했다.

"아…. 그 노래가 이렇게 되는구나."

4분쯤 후에 노래가 끝났다.

직원들이 감탄했다.

"이번 거 진짜 좋은데요?"

"와. 엄청 신나."

사장도 그렇게 느꼈다.

"네 사람의 목소리가 더해지니까 음악이 완성됐어."

루나페어리 네 명은 흥분했다.

"이렇게 들으니까 진짜 좋다."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아자!"

사장이 네 사람을 보며 칭찬했다.

"노래 정말 잘했다."

"저희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민지 양이 시키는 대로?"

"아뇨. 차우진 선생님이요."

"응? 차우진 씨는 매니저나 기획 같은 역할 아니었나?"

"프로듀서시던데요?"

사장이 녹음실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프로듀서 맞아?"

엔지니어가 대답했다.

"장비 조작은 잘 모르던데요. 그래서 그건 제가 다 했습니다."

"그럼 아니네."

"차우진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어?"

"실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엔지니어가 감탄한 얼굴로 설명했다.

"마치 머릿속에 이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이미 다 들어있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이 업계에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얘들이 노래할 때 정말 작은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수정해주던데요. 그 수정이 또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았습니다."

"그래?"

"얘들이 연습조차 안 하고 처음 들어본 노래를 부르는데도 그걸 실시간으로 교정해서 완성했으니까요."

"대단하긴 하네."

사장이 차우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게 최소한의 선만 넘은 거라고, 더 연습해서 재녹음하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던데? 너희 생각은 어때?"

루나페어리 네 명이 대답했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신 걸 저희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기는 해요."

"맞아요. 가끔 한숨도 쉬시더라고요."

"이게 최선인가…. 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어요."

"우리는 진짜 이게 최선인데…."

팀장이 말했다.

"사장님. 여기서 더 고칠 게 있을까요? 이 정도면 이미 완성된 건데요?"

"하지만 이게 최선이 아니라잖아."

"그건 차우진 씨 기준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손대면 오히려 안 좋아질 겁니다."

"내가 우리 애들 콘셉트에 맞게 수정하겠다고 했는데…."

"제 생각에는요. 애들 콘셉트를 이 노래에 맞춰야 한다고 봅니다. 원래 애들 콘셉트랑 크게 차이 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조정 가능합니다."

노래가 잘될 것 같은 분위기라 회의 분위기가 좋았다. 의견을 한참 주고받은 후에 사장이 선언했다.

"이 노래를 확실히 밀자. 뮤비도 찍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

루나페어리가 흥분했다.

"꺄악. 뮤비까지!"

팀장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그러려면 추가 예산이…."

"그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야지."

시계가 어느새 자정을 가리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다들 퇴근해야지."

루나페어리는 흥분한 상태라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저희는 더 할 수 있어요!"

"너희는 젊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 다들 내일 이야기합시다."

"네!"

회의실이 정리되고 있을 때 사장이 말했다.

"차우진 씨를 잡아야 하는데…."

팀장이 옆에서 설명했다.

"제가 그 드라마 스태프한테 물어봤는데, 현장에서 전기 공사 같은 걸 담당했답니다."

"어? 전기 공사?"

"예. 세트장 공사가 급할 때 부르는 외부 기술자랍니다."

사장이 턱을 긁으며 말했다.

"하는 일은 현장에서 세트장 만드는 일이라…. 재능을 그렇게 낭비하는 건 아깝잖아. 우리 회사로 데려와야겠는데?"

팀장이 제안했다.

"제가 만나서 스카우트 제안할까요?"

"네가 해서 되겠냐? 내가 직접 만나야지."

"그러면 제가 약속부터 잡겠습니다."

***

월요일에 차우진에게 LPP 엔터의 팀장이 전화를 걸었다.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차우진이 대답했다.

"제가 해줄 건 다 해줬습니다."

- 아, 물론 알지요. 그러니까 이건 앞으로의 발전적인 방향을 위해서….

"발전하세요. 응원하겠습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우리 회사로 들어오실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회사는 다니고 있습니다."

- 어? 혹시 다른 기획사에….

"그 업계가 아닙니다."

- 아. 그러면 우리 사장님을 한 번 뵙고 말씀을….

LPP 엔터 사장은 팀장에게나 사장이지 차우진에게는 얼굴 몇 번 본 것뿐인 사람이다.

"바빠서요."

***

전화가 끊어졌다. 팀장이 당황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았다.

LPP 엔터 사장이 옆에서 물었다.

"뭐래?"

"까였는데요?"

***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정예지가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우진 오빠. 회사 다녀요?"

"몰랐냐?"

"맨날 놀던데?"

"요즘은 바쁘다고 했잖아."

"민지 도와주던 거 보면 안 바쁘던데?"

"그건 주말에 시간 내서 한 거고."

정예지가 따졌다.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나랑 놀러 다녔어야지!"

"지난 주말엔 네가 시간이 없던데?"

정예지가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건 예능 촬영이 있어서…. 기회가 왔을 때 지명도를 높여야 하니까….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었다고요."

"내 일도 마찬가지야. 나밖에 할 사람이 없거든."

"무슨 일인데?"

지구 멸망을 막는 일이다.

"아직은 비밀이야."

"나중엔 말해줄 수 있나?"

"언젠가는 밝힐 날이 오겠지."

지구 멸망을 막으면 그때는 밝힐 수 있다.

***

이제 루나페어리는 표절곡을 부르다 망하는 사태를 피했다.

멤버인 김세린은 신당읍 출신이다. 김세린을 도와주면 그 동네에 연줄이 생긴다.

그렇다고 곡만 주고 손을 떼면 안 된다. 그 동네에 자연스럽게 찾아갈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차우진이 김세린에게 연락해 루나페어리를 따로 불렀다.

"난 민지를 데려갈 테니까 동생이라도 데리고 나와."

- 그래도 돼요? 고맙습니다!

그들은 치킨집에서 만났다.

하지만 루나페어리 멤버들은 치킨을 먹지 못했다. 그냥 셀러드만 깨작거렸다.

김세나가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언니는 '논스톱 걸' 때문에 다이어트 중이에요."

김세린이 얼른 설명했다.

"회사에서 우리 신곡을 최대한 빨리 발표할 거래요. 뮤비도 찍어야 한대요. 그러니까 우린 지금부터 관리해야 해요. 이미 관리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치킨은 무리구나."

"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미리 알았다고 해서 메뉴가 바뀌진 않는다. 차우진이 치킨을 먹이고 싶은 건 루나페어리가 아니라 김세나이다.

"너희들은 그럼 풀이라도 많이 먹어."

"네? 네."

곽민지와 김세나는 동갑이다. 그 둘만 신나서 치킨을 먹었다.

김세나가 치킨을 먹으며 말했다.

"그럼 언니들 것도 내 건가?"

"개꿀이다."

김세린이 풀을 먹다가 말했다.

"세나야. 한 조각만…. 아니다. 한 조각을 넷이서 나눠 먹으면…."

다른 멤버들도 대안을 제시했다.

"우리 이거 샐러드에 섞어 먹을까?"

"고기를 먹을 때 눈에 안 보이면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채소 속에 숨겨서…."

"저, 정신 차려! 치킨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 돼!"

김세나는 처음에는 신나게 먹었는데 슬슬 눈치가 보였다. 언니와 언니 동료들이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

김세나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근데 왜 치킨을 사주시는 거예요? 다른 것도 있는데."

"너한테 꼭 치킨이 사주고 싶었거든."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세나에게 치킨을 얻어먹었다. 옛날 통닭 느낌이긴 했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근데 창수 형이 먹은 것까지 내가 사줘야 하나? 그럼 이거로는 부족하겠는데?'

"그럼 언니들은요?"

"건강에 좋은 풀 먹잖아."

"아. 언니들한테 시련을 줘서 강하게 키우는 건가 보다."

"그, 그런 거였어?"

"우리는 강해지고 있다!"

"배고파."158. 오동케미컬

정예지는 치킨집에 뒤늦게 도착했다.

"이런 날은 나도 불러야지!"

루나페어리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예지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됐어요. 밖에서까지 왜 이래요? 남들이 봐요. 이럴 때는 민지처럼 자연스럽게…. 민지야?"

곽민지는 치킨의 뼈와 살을 공들여 분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먹는 게 중요해도 아는 체는 해야지?"

"앗! 언제 오셨어요?"

"아니다. 더 먹어. 많이 먹고 쑥쑥 커라."

"히히."

차우진이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민지가 톡 보내주던데? 왜 난 안 불렀어요?"

"스캔들 안 무섭냐고."

"어머어. 내 걱정했구나."

"나 자신을 걱정한 거란 생각은 안 드나?"

"안 들어요."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차우진은 고향 이야기를 슬쩍 물었다.

다들 한마디씩 하다가 김세린이 고향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정예지가 반응했다.

"어머. 신당읍? 우리 전에 거기 놀러 갔었는데."

치킨을 먹던 김세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앗! 둘이서요?"

차우진이 말했다.

"진짜 스캔들이 안 무섭나. 지금 듣는 귀가 몇 개야? 다들 귀 막아."

루나페어리 네 명은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정예지는 차우진이 그 근처에서 시비 걸던 세 놈을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차우진과 다니다 보면 그런 건 덮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냥 예전에 갔었어. 지나가다가 들른 거지."

"다음에 오면 꼭 연락 주세요. 제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하는 짜장면 사드릴게요."

차우진이 얼른 물었다.

"다음에 언제? 넌 지금 서울에 있잖아."

"주말에만 서울에 있어요. 평일에는 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그래? 그럼 이번 주에는 집에 있겠네?"

"그쵸. 그런데 너무 늦으면 또 안 돼요. 저 곧 서울로 전학 가거든요."

"그러면 빨리 가봐야겠다."

신당읍에 아는 사람이 있을 때 가야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

정예지가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거기 나랑 갈 거지?"

"어…."

"어서 나랑 간다고 해. 어서!"

"그래. 가자."

치킨을 먹는데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 마지막 회가 방송됐다.

정예지가 말했다.

"내가 진짜 오늘 우리 드라마 마지막 회 같이 보자는 거 다 씹고 여기 온 거예요."

"굳이…."

"굳이 오고 싶었다니까?"

방송 중간에 곽민지가 입에 닭다리를 물고 TV를 가리켰다.

"저기, 나! 나!"

"먹고 말해."

"제가 나왔어요!"

곽민지의 출연 분량은 짧았다. 노래 한 곡 하는 게 다였다. 그나마도 곽민지가 노래하는 모습이 나오는 건 30초밖에 되지 않았다.

"끝났다."

"이제 닭다리 계속 먹어."

"넹!"

곽민지의 출연 분량은 끝났지만 노래는 계속 나왔다.

'무지개 고백'은 마지막 회가 끝날 때까지 몇 번 더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정예지가 말했다.

"피디님이 저 노래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차우진도 말했다.

"좋은 노래니까."

"어머. 직접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건가?"

"민지가 만들었는데?"

곽민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진짜 아닌 거 같은데…."

"민지가 만든 거 맞아. 다들 봤잖아."

"우진 오빠. 그 말은 지금 민지도 안 믿잖아."

***

며칠 후에 차우진이 신당읍을 다시 방문했다. 오늘은 정예지와 함께였다.

정예지는 편한 신발을 신고 옷도 활동하기 좋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골프웨어를 입었네?"

정예지가 씩 웃었다.

"흐흥. 내가 뭐 입었나 관심 있나?"

"골프 치러 가는 거 아닌데 그렇게 입어서."

"골프웨어인 듯 아닌 듯 그 선을 지켰지. 그리고 골프장 있던데."

"이 마을에?"

"아니. 차 타고 20분만 가면 있다고요."

시골에서 20분이면 꽤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멀잖아."

"그 정도면 가깝지. 말 나온 김에 같이 갈래요?"

"난 골프는 잘 몰라서."

"어머. 그게 골프대회 우승자가 할 소리인가?"

"그거야 대회라고 부르기 어려운 비거리 시합이었고."

"그 비거리와 퍼팅 시합에 골프 좀 친다는 아마추어들이 여럿 나왔던 거 알아요? 그 사람들을 다 밟아버렸으면서."

차우진은 그때 공을 멀리 치는 법과 퍼팅 요령 두 가지만 며칠 만에 속성으로 배웠다. 그런 후에 전투 센스와 공격력 강화, 시간 가속 스킬까지 사용해 골프공을 쳐서 우승했다.

"그래 봤자 아마추어지."

"역시 프로가 아니면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건가?"

"하고 싶은 말이?"

정예지가 배시시 웃었다.

"골프채 챙겨왔는데."

"난 골프채가 없는데?"

"두 세트 챙겨왔는데."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야."

정예지는 당황했다.

"어? 놀러 온 거 맞잖아요. 세나한테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차우진은 치킨집에서 그런 핑계를 댔다.

"아. 그렇지. 놀러 왔지."

"뭐야. 노는 김에 골프도 치면 되겠다."

정예지가 동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말만 공영주차장이지 아무나 차를 세울 수 있는 공터였다.

차우진이 차에서 내렸다. 정예지도 내린 후에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 공기 좋다."

차우진은 주변부터 확인했다.

'일단은 수상한 놈은 안 보인다.'

정예지가 물었다.

"우리 이제 뭐 해요?"

"밥 먹으러 가야지?"

"미리 말하는데 국밥은 그만!"

"그럼 세나가 자랑한 짜장면?"

"싸우자는 거지?"

***

이 동네에서 최근에 미성년자 납치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 자체는 이미 종결됐지만, 범인들이 기절한 상태로 발견된 게 경찰의 관심을 끌었다.

범인들이 기절한 것도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죽은 놈도 없고, 다친 놈은 많아도 생명이 위험한 놈은 없었다.

도망친 한 놈을 아직 못 잡긴 했지만, 나머지 아홉 놈을 잡았다.

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일단 누가 왜 조기택 패거리를 동원해 이 동네의 농지를 사들이려고 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그 조기택 패거리를 다 때려잡았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형사 두 명이 그 사건 이후로 이 동네에 가끔 찾아와 둘러보고 소문도 듣곤 했다.

형사가 말했다.

"진짜로 빌런 킬러가 움직인 거면 일이 커지는데…."

후배 형사가 물었다.

"빌런 킬러는 도시 전설 같은 거잖아요. 다크 히어로 같은 거죠."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조기택도 소문은 들었다잖아."

"진짜면 대박인데…."

형사가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음? 저 사람 누구지? 딱 봐도 외지인인데?"

"네? 선글라스를 썼는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같이 있는 여자 미모를 봐라."

"와….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썼는데도 예쁜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난 이 동네에서 저런 미녀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외지인이지."

"누구죠?"

형사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알아보자. 혹시 그 사건 때문에 온 놈일 수도 있으니까."

***

차우진은 쌀집에 들렀다.

쌀집 주인 김기환이 활짝 웃으며 환대했다.

"우리 세린이가 망할 뻔한 걸 구해주고 곡도 주신 작곡가님이시라면서요?"

"작곡가는 제가 아니라 민지라고 따로 있습니다."

"아. 프로듀서님이라고 하셨나?"

"그것도 아니고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조금 도와준 것뿐입니다."

"하하하. 어쨌든 많이 도와주신 분이잖습니까? 제가 한턱 대접하겠습니다."

차우진이 사양했다.

"그러면 세린이한테 안 좋은 소문이 돌 수 있습니다."

"네?"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이뤄낸 건데, 뒤로 돈이라도 받았다는 소문이 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어이쿠. 그건 안 되죠."

"그냥 동네 소개만 해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다니겠습니다."

"하하하. 제가 제일 좋은 곳들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전화도 좀 주시고."

"당연하죠. 전화도 쫙 돌리겠습니다."

***

후배 형사가 선배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봤는데요. 형님이 헛다리 짚으셨던데요?"

"어? 왜?"

"저기 쌀집 딸이 아이돌이랍니다. 루나페어리요."

"못 들어봤는데?"

"형님이 벌써 그런 나이…."

"죽을래?"

"신인 아이돌이니까 모르실 수도 있죠."

"그래서?"

후배가 설명했다.

"아까 그 남자는 루나페어리의 프로듀서인데, 쌀집 딸이 이 동네가 좋다고 추천해서 놀러 왔다던데요?"

형사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쩝. 범인이 현장에 다시 돌아온 건가 했더니, 아니구나."

"형님. 그냥 서로 돌아가시죠? 우리 일 밀려 있습니다."

"알았다. 가자. 여긴 다음에 다시 들러보고."

"넵!"

***

쌀집 주인 김기환이 연락을 돌려준 덕분에 차우진은 동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기 편해졌다.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사건 이야기를 앞다투어 했다.

"그놈들이 최 씨에게 협박을 해서 각서를 받았다더라고."

"최 씨가 애들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각서 써줬다더라."

"박 씨는 말은 안 하는데 뭔가 약점을 잡혔었나 봐."

"하긴. 박 씨가 술이랑 화투 좋아하지."

차우진이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조기택 패거리가 협박이나 다른 수작을 써서 매매 각서를 미리 받아뒀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동네에 뭐 다른 일은 없습니까?"

"이 동네에 개발 호재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작곡가 양반도 돈 있으면 땅을 좀 사둬."

그건 딥어스테크에서 이미 헛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려고 여쭤본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동네 자랑도 늘어놓았다. 그중에는 타지로 나간 아이들 자랑도 있었다.

"세린이 걔가 어릴 때부터 참 예쁘고 똘똘했어."

"끼가 있었지."

"TV로 보니까 다른 사람 같더라."

"그걸 봤어?"

"못 봤어? 쌀집에서 녹화해놓고 맨날 틀어줬는데?"

"대추나무집 아들이 서울에 있는 회사에서 중요한 걸 연구한다지?"

"무슨 비료 회사였나?"

"바이오 회사였지. 비료에 들어가는 뭘 만든다고 한 거고."

"아. 그런 거였나?"

차우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가 조금 돌아가는 질문을 했다.

"그 비료는 어떻게 쓰는 겁니까?"

***

식당을 나온 후에 차우진이 차로 걸어갔다.

정예지가 걱정했다.

"우진 오빠. 이 동네에서 농사짓고 살 생각은 아니라고 했지? 진짜지?"

"전에도 말했잖아. 아니라니까."

"근데 왜 농사짓는 법을 그렇게 자세히 물어봐?"

농사짓는 법을 물어보면서 그 비료 첨가제를 개발하는 회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세계 식량 문제가 걱정돼서."

"그래. 그런 거시적인 거만 걱정해. 그건 나도 찬성이야."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메이야?"

"응?"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밥만 먹고 올라가냐?"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랑 케이크?"

"골프는?"

"골프는 됐고, 서울 가면 술도 사줄까?"

"응!"

***

차우진은 이튿날 SL 제약에 출근했다. 그가 분석팀을 소집한 후에 질문했다.

"성수당바이오. 이 회사에 대해 아는 거 있습니까?"

성수당바이오는 신당읍 대추나무집 아들이 다니는 회사다. 어제 비료에 관해 물으면서 회사 이름을 알아냈다.

성혜리가 대답했다.

"들어본 적은 있어요. 제약업계는 아닌데, 이번에 차 이사님 지시로 국내 업체들을 조사할 때 그 이름도 있었던 게 기억나요."

"관계가 있던가요?"

"회사 규모가 신당읍에 그런 일을 꾸밀 수준은 아니에요. 유럽 회사와 손잡았다는 소문도 없었어요."

"그러면 유럽 쪽과 손잡을 만한 곳은?"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와 관계를 맺을 만한 국내 업체를 추리는 중이에요. 이제 다섯 개로 압축했어요. 시간을 더 주시면 셋 정도로는 줄일 수 있어요."

"그 다섯 개 업체가 어디인지 봅시다."

성혜리가 보고서를 화면에 띄웠다. 화면에 띄운 건 한 페이지짜리 요약본이었다. 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근거도 첨부되어 있었다.

차우진이 다섯 회사의 요약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그중 한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오동케미컬?"

"농업 관련 제품을 만드는 업체인데, 유럽 쪽에서 투자를 받거나 아예 인수된다는 소문이 있어요. 인수되면 그 회사의 한국 지사가 되는 거죠."

그런 이슈는 다른 네 회사에도 있다. 차우진의 눈에 들어온 건 그게 아니다.

"특이사항에 사채라…."

"몇 년 전에 사장이 사채를 썼다가 회사가 통째로 넘어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흑자가 나고 있군요."

"네. 그 후로는 영업이익이 꽤 잘 나와요."

"돈세탁인가?"

"네?"

159. 돈세탁

차우진은 사덕리소스가 망하기 직전에 주당 100원에 지분을 매집해 2대 주주가 됐다. 사덕리소스는 그 후에 금광을 발견해 기사회생했다.

그 사덕리소스를 빼앗으려던 사채업자 박재구의 목적은 돈세탁이었다.

박재구는 금광을 발견한 회사를 먹어치우면 돈세탁이 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 차우진이 가진 지분을 헐값에 빼앗으려고 했었다.

'그때 도망친 놈이 조천상이었나?'

차우진이 예전 생각을 하며 화면에 뜬 오동케미컬의 자료를 확인했다.

'회사가 하는 일에 비해서 이상할 정도로 수익이 많이 나. 박재구가 하려던 게 이런 거였지.'

차우진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돈세탁 맞네."

SL 제약의 성혜리가 물었다.

"돈세탁은 무슨 말씀이세요?"

"사채업자가 적자인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잘나가는 흑자로 돌려놓는 경영 천재라고 칩시다. 그런 실력이 있으면 양지에서 기업가가 되어야지 왜 음지에서 사채나 합니까?"

"아…. 돈을 쉽게 버니까?"

"그럴 수는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 회사는 매각 소문이 도는데요? 돈세탁용 회사라면 왜 팔려는 거죠?"

"몇 년 정도 돈세탁하는 데 써먹었으니까, 이제 이 회사는 팔아치우고 다른 회사를 인수해 새로 세탁하려는 거겠지요."

"아! 그래서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 회사에 파는 거군요!"

"서류는 잘 맞춰놨을 테니까."

SL 제약 사장 딸인 성혜리가 물었다.

"그런데 돈세탁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SL 제약은 비자금 안 만듭니까?"

"당연히 안 만들죠."

차우진이 설명했다.

"오동케미컬이 만든 물건이 농민에게 10개가 팔렸다고 칩시다. 그런데 서류에는 20개가 팔렸다고 적는 겁니다. 당연히 세금도 그만큼 내야지요."

"그러면 세금 때문에 손실이 커지잖아요."

"나머지 10개 분량의 돈을 농민이 아니라 사채업자의 불법자금으로 채워 넣으면 탈이 안 납니다. 그 돈은 세금만 내면 깨끗한 돈으로 세탁됩니다."

"아! 그러면 실제로는 적자지만 서류상 매출은 두 배로 뛰고, 영업이익도 엄청 많아진 것처럼 서류가 만들어지겠네요!"

"돈세탁이나 비자금 조성에 대해 모르는 거 맞아요?"

"진짜 모르거든요?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사장님이 법을 철저히 지키는 분은 아니던데…."

"그래도 선은 안 넘잖아요."

"다행이네요."

성혜리가 물었다.

"돈세탁을 하면 서류상으로는 회사가 계속 흑자가 되잖아요. 그럼 회사를 팔 때 비싸게 팔 수 있겠네요."

"쿠에르노가 속아준다면."

성혜리는 차우진의 말에서 단어 하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네? 속는 게 아니라 속아준다니요?"

"쿠에르노는 나중에 세계를 팔아먹을 놈들입니다. 오동케미컬을 이용하려고 속아주는 척할 수도 있습니다."

차우진이 보고서 파일을 USB에 복사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알찬 정보였습니다. 우리 분석팀은 실력이 참 좋군요."

성혜리가 얼른 자랑했다.

"제가 열심히 했어요."

"이제 오동케미컬과 쿠에르로 인더스트리를 같이 파봐요. 외국 회사라고 방심하지 말고,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서."

"네!"

***

차우진이 오동케미컬의 건물을 멀리서 확인했다. 넓은 땅에 콘크리트 건물과 조립식 건물이 혼재되어 있었다.

"현장이 복잡해야 침투는 더 쉬운데, 땅이 좀 넓다."

어차피 오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다. 차우진이 보고서를 확인했다.

"사채업자 한노성."

분석팀은 오동케미컬이 몇 년 전에 사채를 썼다가 회사가 통째로 넘어갔다고 보고했다. 그 사채업자의 이름이 한노성이다.

분석팀의 보고서에는 한노성의 사채 사무실 주소는 물론이고 집 주소까지 들어있었다.

"우리 분석팀이 일을 참 잘해."

***

SL 제약의 법무팀 대리 윤병수가 말했다.

"분석팀에 들어가고 싶다."

그의 회사 동기가 물었다.

"어느 분석팀?"

"당연히 차 이사님 직속 분석팀이지."

"법무팀은 어쩌고?"

"그 분석팀은 TF로 운영되니까 일이 있을 때만 투입돼. 양쪽 다 일할 수 있어. 그 팀은 다들 그렇게 해."

"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하려면 일이 너무 많을 텐데?"

윤병수가 씩 웃었다.

"대신에 스릴이 있다더라. 재미있대."

"그래?"

"그리고 분석팀에 성혜리 대리도 있잖아. 그게 무슨 뜻이겠냐? 거기서 해결한 일은 중요한 실적이 돼서 인사고과에 들어가겠지?"

동기가 물었다.

"잠깐만. 그 팀 상황을 왜 그렇게 잘 알아? 차 이사님 직속 팀이 하는 일은 비밀이라서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아는지도 비밀이니까 말해줄 수는 없다."

윤병수 대리는 분석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조금은 안다. 공장 폭파 미수 사건 때 법무팀 사건 수습 담당자가 윤병수였기 때문이다.

윤병수가 아쉬워했다.

"근데 사람을 안 뽑네. 티오를 늘리거나 아니면 누가 분석팀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바로 지원할 텐데 말이야."

***

차우진이 의심 대상 회사 중에 오동케미컬을 선택한 건 그곳이 제일 유력해서가 아니다.

정상적인 기업인보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채업자가 더 만만해서였다.

"사무실은 작네?"

차우진이 한노성의 사채업자 사무실을 보았다. 위치는 평범한 3층 건물의 3층이었다.

"사채라도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면 일이 어려워지는데…."

이미 한밤중이라 다른 곳은 다 문을 닫았다. 건물에 불이 켜진 곳은 3층뿐이었다.

***

한노성은 사채 사무실 운영을 오른팔 박민수에게 맡겼다.

사채업자 박민수가 탁자 위에 각서를 올려놓고 말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

신인 배우 진소영이 소리를 질렀다.

"이건 내가 쓴 각서가 아니라고요! 친구가 내 도장 훔쳐가서 찍은 거라고!"

"그럼 난 너한테 돈을 받고, 넌 그 친구에게 돈을 받으면 되겠군."

"걔는 죽었잖아!"

박민수가 히죽 웃었다.

"저런. 안됐군. 어차피 우리는 너한테 돈을 받을 테니까 상관은 없다만."

진소영은 이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녀는 뉴스에 많이 나온 대형 사건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저기요. 상칠파 알아요? 서해안 사건의 상칠파요."

"알지. 서해안 사건에서 전멸한 상칠파. 이 바닥에 그 사건 모르는 사람이 있나?"

"나 그때 거기 잡혀 있었어요. 나한테 이러면 당신들이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는다고요!"

"그래서 손을 안 대려고 했는데, 내가 기사를 하나 봤네? 이러니까 사람은 글을 읽어야 한다니까."

"네?"

박민수가 스마트폰에 기사를 띄워서 보여주었다.

"백희선과 최용구가 죽은 사건. 천상칠한테 킬러를 보낸 건 백희선이라며?"

"그, 그건…."

"그러니까 이제는 너한테 돈을 받아내도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진 않아. 그래서 이렇게 모셔왔잖아. 돈 받으려고."

"내가 빌린 것도 아닌데 나한테 왜 자꾸 이래!"

사채업자 박민수가 회칼을 꺼내 탁자에 탁 소리가 나게 박았다.

진소영이 비명을 질렀다.

"히익! 나 드, 드라마에 출연했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면 인기 배우가 돼서 갚을게요!"

"우리도 드라마가 끝나기만 기다리긴 했지. 그런데 이거 이자가 많이 붙어서 네 출연료로는 다 못 갚을 텐데?"

박민수가 계산기에 숫자를 찍어 보여주었다. 진소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갚아야 할 돈이 10억이라고 찍혀 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이렇게 많은 돈을 빌려줬다는 게 말이 돼요?"

"이자가 복리로 붙었잖아?"

"말도 안 돼."

"사채가 다 그렇지. 우리는 이자가 다른 업자보다 더 높아. 그러니까 돈으로는 못 갚는 건 네 몸으로…."

차우진이 말했다.

"와. 너는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사채 사무실에 있던 놈들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휙 돌아갔다.

차우진이 사무실 한쪽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뭐, 뭐야? 저 새끼 누구야!"

"언제 들어왔어!"

이 사무실의 화장실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의 크기도 사람이 통과할 만큼 커서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

차우진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런데도 진소영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미 몇 번이나 차우진이 구해줬기 때문이다.

그녀가 차우진을 보며 환성을 질렀다.

"꺄아! 믿고 있었어요!"

"나를? 왜?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

진소영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형사님 아니세요?"

"형사 맞아."

사채업자가 인상을 썼다.

"이 지역 관할이 아닌데?"

"난 지금 마스크를 썼는데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거야 조 과장이…."

"조 과장이 사채업자 돈을 많이 처먹었구나?"

"어? 너 진짜 누구냐? 형사 아니잖아!"

"당연히 아니지. 나는 네가 지금 생각하는 거기서 왔다."

"거기라니?"

"스페인."

스페인에 쿠에르노 인더스트리가 있다.

박민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 혹시 우리 회장님하고…."

"약속이 되어 있었지. 연락이 안 돼서 찾아왔으니까, 전화 걸어봐라."

"그럼 방금 한 이야기는…."

"저 여자가 착각하길래 농담한 거다. 내가 형사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박민수가 찜찜한 표정을 짓다가 휴대폰을 하나 꺼냈다. 구형 휴대폰이었다.

그가 대포폰을 켜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한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뭐냐?

"회장님.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누구?

"스페인에서 왔다고…."

- 그놈들이 거길 어떻게 알고 찾아가?

"그건 저도 잘…."

한노성이 물었다.

- 그런데 네가 스페인 사람하고 어떻게 대화한 거냐? 너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못 하잖아.

"예? 손님이 한국말을 잘하는데요?"

한노성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씨발! 이 멍청한 새끼야! 그 새끼 가짜다!

전화가 뚝 끊어졌다.

사채업자가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어?"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들켰네?"

"씨, 씨발. 독수리 놈들이 보냈냐?"

"잘 아는구나."

"저 새끼 조져!"

지금 이 사무실에는 박민수와 부하 둘이 있다.

부하들이 즉시 차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오른쪽 놈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적의 공격 안쪽으로 파고들며 턱을 향해 주먹을 가볍게 날렸다. 주먹에 공격력 강화 스킬이 살짝 깃들었다.

"켁!"

한 방이면 충분했다. 적이 책상에 처박혔다.

다른 놈이 반대편에서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차우진을 붙잡으려 했다. 유도 기술이었다.

차우진이 발을 내질렀다. 옆차기가 적의 손 아래로 파고들어 배에 꽂혔다.

"컥!"

적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이번엔 공격력 강화 스킬을 쓰지 않았지만, 차우진의 발차기는 체중이 실려 있어서 원래 강하다. 그걸 상대가 버텼다.

"맷집이 제법이다?"

차우진이 옆에 있던 나무 의자를 들어 적의 머리를 내리쳤다. 의자가 박살 나면서 적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도 단련했어야지."

이제 사무실에 서 있는 놈은 사채업자 박민수 하나였다.

박민수가 탁자에 꽂힌 회칼을 뽑았다.

"이, 이 새끼!"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너, 칼을 잡았구나?"

"가까이 오면 죽는다!"

"누가 죽는데? 난 아니니까, 넌가?"

박민수가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은 칼날이 눈앞을 지나가자마자 전진해 적의 팔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으아악!"

적의 팔꿈치 관절이 꺾이면서 회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차우진이 떨어지는 칼을 잡아챘다.

박민수가 관절이 꺾인 팔을 왼손으로 붙들며 다급히 외쳤다.

"파, 팔!"

"다리."

차우진이 회칼을 박민수의 다리에 푹 박았다.

"으아악!"

박민수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자빠졌다.

시끄러웠다.

차우진이 비명을 지르는 놈의 턱을 걷어찼다.

"켁!"

이제 사무실에 있던 세 놈은 모두 기절했다.

차우진이 박민수를 내려다보았다.

'이놈은 스페인과 거래한다는 건 알지만, 구체적인 건 몰라.'

그래서 차우진이 한국어로 말해도 속아 넘어갔다.

진소영이 차우진을 향해 활짝 웃었다.

"진짜 믿고 있었어요!"

"우리는 만난 적이 없…. 아니다. 다 기절했구나."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우리밖에 없어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차우진이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좀 보자."

"네?"

"네가 무슨 오로라 공주냐? 왜 맨날 붙잡혀?"160. 언니

차우진이 물었다.

"넌 왜 또 여기 있는 거냐? 또 그 차용증이냐?"

신인 배우 진소영이 푸념했다.

"네. 없애도 없애도 종류별로 자꾸 나와요. 여기 이놈들은 제가 출연한 드라마가 끝나기만 기다렸대요."

"경찰에 신고나 해."

"네!"

그녀의 눈에 책상 위의 대포폰이 보였다.

"저기 휴대폰이 있네요. 제 휴대폰은 끌려올 때 잃어버렸어요. 저걸로 신고…."

차우진이 손을 들어 말렸다.

"저 대포폰은 절대로 손대지 마라. 경찰이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증거니까. 저기서 네 지문이 나오면 네가 망하는 거야."

"앗! 경찰 수사를 도와주시는 거군요! 휴우.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너 그동안 나 의심했냐?"

"아, 아뇨!"

"신고할 때 내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요."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그래. 한두 번이 아니지.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

진소영이 억울해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이 가짜 채무 각서가 진짜 마지막이었으면 하네요. 그리고 다음에는 제가 꼭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다음에 또 이런 일로 보자고?"

"아, 아니, 그러니까, 이런 일 말고 좋은 일로 만났을 때요."

차우진이 사채업자 사무실을 나왔다.

"이놈들이 선 넘는 놈들인 건 확인했으니까 소득은 있네."

이제 한노성을 쳐도 부담이 없다.

***

진소영은 사채업자의 사무실 전화로 납치당했다는 신고를 했다.

그런데 신고 후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드라마 하나 제대로 나왔는데, 사채업자 사무실에 내가 있었다는 게 기사화되면…."

그녀는 서해안 사건 때도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캐스팅에 불리할 텐데…."

고민하던 그녀가 현장에 있던 각서만 챙겼다.

"어차피 신고는 했으니까, 찢어버리고 난 튀어야겠다."

***

한노성의 집 주소는 SL 제약 분석팀의 보고서에 들어있었다.

차우진이 그곳으로 이동해 눈으로 집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곳은 고급 주택이 아니라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 기업체까지 소유한 거물 사채업자 한노성이 살기에는 너무 소박했다.

"남의 집에 주소를 걸어놓고, 실제 집 주소는 숨긴 거네."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차유리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전화가 걸려왔다.

- 아우. 씨. 야. 너 어디야?

"집."

- 잘됐다. 야식 좀 만들어서 보내라.

"왜?"

- 오늘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납치 감금 사건이 발생했다.

"그거 누나네 지역 사건이 아니잖아."

- 아닌 건 어떻게 알았냐?

차우진이 오늘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진소영을 구해주었다.

"짜증 내는 거 보면 뻔하지."

치유리가 불평했다.

- 사건은 다른 데서 일어났는데 피해자가 우리 관할에 살아. 그래서 피해자 조사를 우리 팀이 맡았다. 고생하는 누나를 위해서 어서 맛있는 야식을 만들어와라.

"종류는?"

- 편하게 먹으면서 맛있는 거. 힘도 나는 거로.

"조건이 까다로운데?"

- 하여간 만들어와라. 많이 만들어라.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지금쯤이면 현장에 놔두고 온 대포폰으로 경찰이 위치추적을 했을 텐데, 누나네 팀에 그 자료가 있으려나."

***

진소영은 납치 신고한 후에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사건 현장에서 그녀의 차용증이 발견됐다. 원본은 그녀가 가져가서 찢어버렸지만 복사본이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있던 진소영은 결국 그 지역 경찰서로 끌려와서 조사를 받았다.

차유리가 진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또 보네요?"

진소영이 울상을 지었다.

"저는 진짜 억울해요. 가짜 차용증 보셨잖아요. 저는 피해자라고요."

차유리가 물었다.

"그런데 왜 신고를 한 후에 그냥 가셨어요?"

"저 신인 배우예요. 이제 겨우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이런 거로 안 좋은 기사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냥 빠져나갔어요."

"그런 기사는 서해안 사건 때 충분히 나왔을 텐데…."

"그 일이 반복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잖아요.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뽑아줄 거예요."

오늘 진소영을 납치한 사채업자 셋은 사무실에서 기절한 상태로 발견됐다.

차유리가 의심했다.

"혹시 진소영 씨가 그놈들을 제압한 건…."

그녀가 얼른 날씬한 팔을 들어 보였다.

"제가요? 이 팔로요? 어떻게요?"

"아닌 건 알아요. 그래서 간단하게 조사만 하는 거니까요. 그럼 누가 그랬는지 봤어요?"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전혀 못 봤…. 어?"

차우진이 도시락을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진소영이 그런 차우진을 발견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여, 여, 여기 어떻게…."

차유리가 차우진을 보며 말했다.

"가져왔냐?"

차우진이 그녀의 책상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았다.

"옜다."

"맛은?"

"빵 사이에 안심 스테이크를 넣었는데 맛이 없으면 이상하지."

"양은?"

"다른 분들도 나눠드릴 만큼?"

그러려고 일부러 넉넉한 양을 준비했다.

"오냐. 나 지금 조서 쓰는 중이니까 가라."

"내가 아주 그냥 머슴이지."

"야. 잠깐만."

진소영이 차우진을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보고 있었다.

차유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진소영 씨. 쟤를 왜 그렇게 봐요?"

진소영은 당황했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 더듬거렸다.

"네? 그, 그, 그게…."

차우진이 말했다.

"진소영 씨네. 우리 드라마 배우."

"네?"

"나 알죠? 드라마 촬영장에서 몇 번 일했는데."

진소영은 무슨 소리인지 깨달았다.

"네! 네! 알죠! 드라마 현장에서 만났죠!"

"여기서 마주쳐서 놀라셨나 보다."

"맞아요! 그래서 놀랐어요! 제가 경찰서에 온 거, 연예계에서 알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난 입이 무거우니까 안심해요."

진소영에게는 그 말이 입을 꽉 다물라는 소리로 들렸다.

"네! 저도 입이 진짜 무거워요!"

차유리가 물었다.

"진소영 씨가 출연한 드라마가 '친구와 연인 사이'였죠?"

"네. 오윤서 씨 동생 여자친구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친절하시다. 배우가 세트장 알바로 몇 번 일한 저 녀석까지 기억하는구나."

"네?"

"왜요?"

"아, 아니에요. 전기 공사 하셨죠."

"와.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네요."

차유리가 차우진에게 말했다.

"야. 넌 영광인 줄 알아. 배우님이 너 기억하신다."

"가문의 영광이지."

"네? 네?"

차우진은 도시락을 더 준비해왔다. 그걸 차유리와 같은 팀의 형사들에게도 나눠주었다.

"퓨전 샌드위치입니다. 식빵이 아니라 두꺼운 빵을 썼습니다. 사이에 있는 고기는 안심 스테이크입니다. 직접 구웠습니다."

형사들이 도시락을 받으며 환성을 질렀다.

"이야아. 잘 먹을게요. 번번이 신세만 지네요."

"뭘요. 누나 거 만들면서 같이 만든 건데요. 그런데 무슨 사건인데 다들 야근하세요?"

"아이고. 말도 말아요. 다른 지역에서 사채업자가 털렸는데 불똥이 우리한테까지 튀었다니까요."

"이게 그럴 만큼 큰 사건인가요?"

"아니죠. 그런데 피해자가 진소영 씨잖아요. 혹시 서해안 사건과 관계가 있나 싶어서 조사 중입니다."

진소영이 차우진을 힐끗 보며 차유리에게 물었다.

"저…. 형사님. 차우진 씨와는 무슨 관계…."

"동생이에요. 친동생."

"앗! 역시 그러시구나! 저기…."

진소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네? 갑자기?"

"언니랑 저랑 자주 보잖아요. 더 자주 볼지도 모르잖아요."

차유리는 흠칫했다.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래요?"

"네?"

"진소영 씨는 이런 일을 또 당하게요?"

"아, 아뇨!"

차우진이 형사들에게 이번 사건을 물어본다고 해서 자세히 대답해줄 리 없다. 너무 캐물으면 오히려 의심만 산다.

그래도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보면 사건의 개요 정도는 들을 수 있다.

형사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네. 역시 차우진 씨의 요리 실력은 끝내준다니까. 식당 차려요, 식당. 매일 가게."

"그거 빵 사이에 안심 스테이크를 넣은 겁니다. 가게에서 먹으면 비쌉니다."

"아…. 식당 차려도 공무원 월급으로는 자주는 못 가겠네."

"그런데 서해안 사건과 관계가 있으면 오늘 집에는 다 가셨네요?"

"그럴까 봐 걱정했는데,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다행이네요."

"우리는 조금 있다가 퇴근하면 되는데."

형사가 진소영 쪽으로 눈짓을 살짝 했다.

"차 형사랑 진소영 씨는 고생하겠죠."

차우진이 다른 형사들에게도 샌드위치 도시락을 나눠주면서 모니터나 책상 위를 힐끗 보았다.

어차피 사건의 자세한 정보는 알 필요가 없다. 사채업자를 턴 사람이 차우진이기 때문이다.

그가 찾는 건 한노성의 실제 거주지 주소다.

차우진의 동체 시력에 전투 센스가 적용됐다. 그러면 지나가면서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책상 위나 모니터에 뜬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한노성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게 있었다.

'대포폰 위치추적 결과.'

차우진이 사채업자 박민수를 시켜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게 했을 때,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이 한노성이다.

'그리고 용의자 리스트'

그 사채업체와 경쟁 관계이거나 갈등 관계인 조직이나 사채업자, 회사, 개인 등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명단에 적힌 대상이 수십 개나 됐다. 그 사채업체와 약간의 관계만 있어도 명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차우진은 거기서 아는 이름을 하나 찾았다.

'독수파.'

사채업자 박민수는 차우진을 독수리가 보냈다고 의심했다.

'독수파 별명이 독수리겠지. 저 독수리는 아는 게 있으려나.'

차우진이 차유리에게 준 도시락에는 샌드위치가 여러 개 들어있었다.

진소영이 그 샌드위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차유리가 물었다.

"하나 드려요?"

"네? 네! 고마워요, 언니!"

"왜 자꾸 나를 언니라고…."

진소영이 샌드위치를 조금씩 먹었다.

"맛있다."

"맛있죠."

진소영이 물었다.

"차우진 님께서는 요리 잘하시나 봐요?

"님?"

당황한 진소영이 얼른 둘러댔다.

"아뇨. 그게, 촬영할 때 신세를 져서요!"

"제 동생이 딱 하나 잘하는 게 있는데, 그게 요리예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거든요."

"아닌데. 잘하시는 거 많은데."

"집에서 전구는 잘 갈더군요."

"전문가신데."

"그게 다예요."

진소영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닌데….'

샌드위치가 점점 줄어들었다. 맛있어서 먹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맛있어요. 이거 자주 먹으면 살찌겠다."

"그래서 우진이가 배가 나왔죠."

진소영이 자기 배에 손을 대며 얼른 변명했다.

"아니, 아니, 차우진 님 배가 아니라요!"

저쪽에서 차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내 배 이야기를 했는가?"

"아뇨! 아니에요!"

차우진은 샌드위치 도시락을 다 나눠주고 차유리에게 말했다.

"간다. 도시락통은 집에 올 때 걷어와라."

"오냐."

"설거지 꼭 해서 가져와라."

진소영이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소영 씨도 고생해요."

"다음에 또 뵐게요!"

차우진은 진소영이 납치된 모습만 벌써 몇 번을 봤다. 그래서 저절로 인상을 썼다.

"다음? 또?"

"그러니까, 다음 드라마에서도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난 이번 드라마는 알바로 잠깐 한 거라서. 그럼 갑니다."

차우진이 간 후에 진소영이 차유리에게 물었다.

"우진 님은 평소에 뭐 하세요?"

"놀아요."

"다음에 드라마 또 하시면 돈도 벌고 좋을 텐데요."

"쟤는 일당으로 받는 돈이 별로 안 중요할 텐데."

진소영이 궁금해했다.

"왜 그러시지? 돈에 관심이 없으신 건가? 하긴. 평소에도 고고하고 도도하고 시크하고 무심하셨지."

"그게 아니라 쟤는 가난한…."

가난한 공무원 누나를 구박하는 부자 동생이라는 농담이 평소에 입에 붙었다. 그래서 그 말을 습관적으로 하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차우진은 주식도 많고 이사 직함도 몇 개나 가지고 있다. 직함만 있는 게 아니라 임원 월급도 회사마다 나온다.

그렇지만 그걸 조사 대상자인 진소영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진소영이 걱정했다.

"아. 저처럼 가난…. 그럼 저처럼 더 열심히 촬영 현장에 출근하셔야 할 텐데. 언니가 설득해 보시면 안 돼요? 제가 다음에 드라마 들어가면 현장 쪽에 자리 있냐고 말씀드려 볼까요?"

차유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누가 조사받는 거죠? 진소영 씨. 조사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죠?"

"네. 언니."

"왜 자꾸 나를 언니라고…. 그거 하지 마요."

"네에…."

"오늘 사건 현장 이야기로 돌아가죠."

"네. 언니."

"하지 말라고!"

161. 시사회

경찰은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대포폰을 발견했다. 그 대포폰이 마지막에 통화한 상대방의 위치도 휴대폰 위치추적으로 알아냈다.

차우진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현장에는 이미 경찰차가 몇 대 와 있었다. 형사들이 주변을 조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진소영 때문에 관할도 아닌 형사팀을 야근시킬 정도인데, 여기도 당연히 확인했겠지."

그걸 알면서도 찾아온 건, 한노성이 여기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없구나. 아까 대포폰으로 통화한 후에 바로 현장을 떴어."

그래서 경찰은 한노성은 잡지 못하고 주변에 탐문 수사만 하는 중이었다.

차우진이 다시 이동했다.

사채업자의 사무실이 오늘 습격당했다. 경찰은 갈등 관계인 개인이나 조직, 회사의 명단을 만들었다. 명단에 언급된 대상은 수십 개였다.

그중 하나인 독수파의 주소는 아까 확인했다.

차우진이 독수파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경찰이 출동하지 않았다.

"명단에 있던 수십 곳을 동시에 조사할 수는 없겠지."

독수파는 의심 가는 곳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는 형사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독수파가 운영하는 사무실은 규모가 작았다.

"한노성의 사채 사무실에도 사람은 셋밖에 없던데."

한노성의 부하인 곽민수는 차우진을 보낸 곳이 독수파라고 생각했다.

"조밥들끼리 치고받았던 건가?"

차우진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세 놈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따르는 여자도 한 명 있었다.

한 놈이 차우진을 향해 욕을 했다.

"야 이 새끼야. 배달시킨 지가 언제인데 이제 가져와? 내가 너네 가게에 불 질러야 정신을 차릴 거야?"

"아. 여기는 불 지르면 되는 거냐?"

세 놈의 표정이 변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확 그냥…."

독수파 두목이 물었다.

"잠깐. 너 배달이 아니구나?"

"내가 지금 빈손이잖아?"

두목이 여자의 어깨에 팔을 걸친 상태로 좌우로 손짓했다. 좌우에서 술을 마시던 놈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목이 물었다.

"너 뭐냐?"

"대머리독수리가 여기도 있네? 그래서 독수파구나. 머리 보면 네가 두목인가 보다?"

"이 새끼가 감히 내 머리를…."

"한노성 회장님이 너희가 보낸 인사 잘 받았다고, 답례나 하라더라."

"한노성이?"

두목이 인상을 쓰며 손을 흔들었다.

"야. 너희 사무실 털린 이야기는 들었다. 그거 우리 아니다."

"너희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냐?"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그래도 이렇게 나오니까 기분이 나쁜데?"

두목이 차우진을 가리키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나도 답례를 보내야겠다. 칼이라도 박아서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반항하면 죽여."

두 놈이 차우진을 향해 걸어가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잭나이프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차우진이 먼저 점프했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체중을 실은 발차기가 왼쪽 놈에게 꽂혔다.

"케엑!"

걷어차인 놈이 뒤로 날아가 캐비닛에 처박혔다.

오른쪽 놈이 깜짝 놀라 칼을 꺼냈다. 차우진이 바닥에 착지했다가 그대로 박차며 오른쪽 놈에게 달려들었다.

적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의 자세가 낮아졌다. 칼날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차우진이 일어서며 적의 턱을 올려쳤다.

"케엑!"

차우진이 적의 손에서 잭나이프를 빼앗아 자세가 무너지는 놈의 어깨에 박았다.

"끄아악!"

차우진이 비명을 지르는 놈에게 체중을 실은 앞차기를 먹였다. 적이 뒤로 날아가 다른 캐비닛에 처박혔다가 앞으로 엎어졌다.

차우진이 두목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면 여기선 죽여도 되는 거지? 네가 죽으면 되겠다?"

두목은 이미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 그건 그냥 겁주려고 말한 거였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난 죽음의 공포를 느꼈는데? 너무 무섭더라."

두목이 캐비닛에 처박힌 놈과 칼을 맞고 바닥에 엎어진 높을 번갈아 보았다. 두 놈이 당하는 데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네?"

"아니, 기분 푸시고 대, 대화로…."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옆에 있던 여자는 이미 벽으로 도망가서 찰싹 붙어 있었다. 그녀는 차우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쳤다.

"저는 그냥 술 팔러 온 거예요! 여기 직원이 아니에요!"

"그럼 넌 가라."

"네! 네!"

여자가 사무실 밖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차우진이 두목에게 다가갔다.

"야. 대머리독수리."

"난 대머리가 아니라 머리를 민 거…."

"회장님 답례가 어떠냐?"

"자, 잘 받았다고 말씀드려라. 잘…."

차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이러면 계산이 안 맞아."

"어? 뭐, 뭐가…."

"한 사장님 전문분야가 뭐냐?"

"사, 사채?"

"그러니까 원금만 돌려주면 되겠냐? 이자도 받아야지."

"돈이라면 내가 준비할 테니까…."

"너 불 지르는 거 좋아하지? 방금도 배달 온 가게에 불 지르겠다며?"

"그, 그것도 그냥 협박…."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데, 네가 협박만 하면서 살았겠냐? 기회 되면 사람도 죽이고 불도 지르고 그랬겠지."

"아, 아니…."

차우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두목은 살기를 감지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목이 손에 숨겨둔 잭나이프를 발작적으로 휘둘렀다.

"으아아!"

차우진이 그 칼을 탁 잡아챘다가 두목의 어깨에 푹 꽂았다.

"으아악!"

그런 후에 비명을 지르는 놈의 턱을 후려쳤다. 두목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이제 세 놈 다 기절했다.

도망친 건 여자 한 명뿐이다.

"목격자가 있으니까…."

그 여자는 일부러 풀어주었다.

차우진이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라이터로 사무실의 종이에 불을 붙였다.

"불이 난 걸 알겠지."

***

두목은 잠시 후에 깨어났다. 일부러 금방 깨어날 정도로 때렸다.

두목은 칼을 맞은 어깨가 아팠다.

"씨발. 죽는 줄 알았다. 빨리 병원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화재경보기 소리였다. 그 소리 때문에 깨어났다.

책상 위에서 서류들이 활활 타고 있었다.

"으, 으아! 불! 불!"

두목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가 건물을 나오자마자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다. 사무실로 물이 쏟아졌다.

"휴우…."

뒤늦게 사무실에 부하 두 놈이 쓰러져있다는 게 생각났다.

"아차."

부하 두 놈은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허억.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화재는 그리 크지 않아 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그런데 사무실 책상에 불이 붙었던 흔적이 보였다.

"불이 났었어!"

불은 이미 꺼졌지만 두 놈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은 상태였다.

두목이 화를 냈다.

"이 새끼들아! 빨리 튀어나왔어야지!"

그들이 두목을 보았다. 두목은 어깨에 칼은 맞았어도 물에 젖지는 않았다. 스프링클러가 터지기 전에 혼자 도망쳤다는 뜻이었다.

"어…."

"우리만…."

두목이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애들 모아! 부를 수 있는 새끼는 다 끌어모으고, 한노성 그 새끼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아! 복수다!"

"아, 예."

"난 병원 가야 하니까, 그동안 애들 불러!"

"형님. 저도 병원에 좀…."

"넌 칼도 안 맞은 새끼가! 애들 불러놓고 가!"

***

독수파 조직원들이 모였다.

사채업 직계 부하는 몇 명뿐이지만, 심부름꾼이나 평소에 돈을 주고 일을 시키던 양아치들은 제법 있었다.

차우진은 독수파 조직원들의 사진을 광학 10배 줌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으로 찍으며 말했다.

"우왕좌왕하는 걸 보면, 한노성을 금방 찾지는 못하겠다."

오늘 바로 찾으면 좋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

"칼도 맞고 불도 났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 한노성의 부하들이라도 찾아서 싸우겠지. 그러면 경찰이 한노성까지 수사할 테고, 그러다가 오동케미컬도 털겠지."

그렇게 되라고 일부러 한노성과 독수파를 싸움 붙였다.

정상적인 업체는 독수파 같은 놈들과 얽혀있지 않거나, 설사 얽혀있다 해도 외부에서 알기 어렵다.

반면에 한노성은 납치까지 하는 사채업자라 이런 식으로 건드리기 편했다.

판은 깔아놨지만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차우진이 현장을 벗어났다.

뒤에서 병원에 갔다 온 두목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정 못 찾으면 그 새끼 회사라도 쳐들어가!"

차우진이 말했다.

"그것도 좋지."

***

이튿날 차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윤성준 감독이었다.

- 차우진 씨. 우리 영화 시사회에 올 거지?

"'운명의 풍차'가 벌써 개봉할 때가 됐나요?"

- 벌써라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그리고 왜 그걸 몰라? 개봉일 연락 갔잖아.

"안 왔는데요."

-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출연 배우들에게 영화사에서 개봉 예정일 연락 보냈을 텐데?

"저 같은 엑스트라는 빠졌나 보죠."

- 우리 영화 일등 공신을 누가 엑스트라…. 내가 영화사에 한소리 해야겠어!

"하지 마시죠. 담당자는 절차대로 했을 테니까요."

- 그런가? 그래도 시사회는 올 거지?

"초대권이 없는데요?"

- 아니, 내가 진짜 영화사에…. 자리 만들어서 보내줄게. 꼭 와. 내가 고마워서 그래.

"시간 되면요."

***

정예지는 차우진을 직접 찾아왔다.

"우진 오빠. 시사회 때 팔짱 끼고 같이 들어가는 건 어때?"

"진짜 스캔들이 안 무섭나?"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농담이야. 근데 자리는 어디야?"

"내가 초대권이 없어서."

"응?"

"명단에서 빠졌더라고."

그녀의 웃던 얼굴이 화난 얼굴로 변했다.

"와. 윤 감독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은혜를 모르는 분이신가? 어떻게 영화 엎어질 뻔한 걸 막아준 오빠를 이렇게 박대해?"

정예지는 영화 촬영 도중에 절벽이 무너져 사망할 뻔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때 죽었으면 영화도 당연히 엎어질 줄 알았다.

차우진이 정정해주었다.

"안 엎어졌을 거야."

멸망한 세계의 '운명의 풍차'는 정예지가 출연한 장면을 모두 살려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건 정예지에 대한 추모 영화 느낌이었다.

"윤 감독님은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했을 거야. 설사 극장에는 걸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초대권은 내가 구해줄게."

"초대권 없는 건 감독님도 몰랐다더라. 그래서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보내준다더라고."

"그래? 나랑 자리 가까우면 좋겠다."

"아닐걸?"

"아니길 바라는 거 같다? 기대는 할 수 있잖아!"

차우진이 시사회가 열리는 날에 극장에 도착했다. 포토존도 있었다.

오윤서가 포토존에 섰다. 기자들이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정예지도 반응이 좋았다. 그녀는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다.

차우진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예쁘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근데 겉으로 보면 표가 안 나는 비싼 뽕을 쓴다고….'

갑자기 정예지가 차우진 쪽을 째려보았다.

"어…. 감이 좋은데?"

그의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나를 노려봐줬어!"

"아니야! 나를 째려본 거야!"

차우진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자리를 옮겨야겠다."

차우진이 극장 로비로 들어갔다. 시사회 상영관 앞쪽 로비는 초대권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음?"

LPP 엔터 사장이 차우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 차우진 씨가 여긴 어떻게…."

"초대권이 생겨서요. 사장님은요?"

"우리 애들 신곡이 곧 나오잖습니까? 게다가 세린이는 연기도 하니까, 소문이라도 좀 내려고 이런 자리가 있으면 다 찾아서 돌고 있습니다."

"바쁘시구나."

김세린의 동생 김세나도 차우진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넌 왜 또 여기 있어?"

"사장님이 언니들한테 영화표를 한 장 주셨어요. 근데 언니들은 연습해야 해서 못 온대요. 그래서 그걸 저한테 줬어요."

"이제 서울 교통에는 익숙해졌냐?"

김세나가 자랑했다.

"당연하죠. 저 이제 서울 사람이에요."

"신당읍은 버리는 거냐?"

"물론 집에 가면 신당읍 사람이죠."

"적응력이 뛰어나구나. 그래야 생존에 유리하지. 그때도 그러지 그랬냐."

"네?"

"아니다. 다른 이야기다."

"왜 그 이야기를 저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해요?"

"아니라니까. 아. 치킨 사줄까?"

"지금이요?"

"시사회 끝나고. 집에는 내가 데려다줄게."

"그럼 우리 둘이 두 마리 먹어요?"

"우리 둘이 아닐걸?"

"네?"

차우진은 SL 제약 성혜리도 이곳에서 마주쳤다.

"성 대리가 여기는 왜?"

성혜리가 초대권을 흔들었다.

"홍보팀으로 이 영화 초대권이 들어왔거든요.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친구랑 같이 보고 술이라도 마시려고 왔어요. 근데 차 이사님은 왜…."

"이 영화에서 엑스트라를 해서."

"엑스트라요? 그걸 왜 하셨는데요?"

"일당 주니까?"

"네?"

차우진이 지나갔다.

성혜리의 친구가 다가왔다.

"뭐야? 누구야? 뭔데?"

성혜리가 차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우리 회사 차 이사님."

"저렇게 젊은데 벌써 이사야? 능력 있나 보다."

"능력 쩔지. 우리 아빠는 차 이사님 말이라면 껌뻑 죽어."

그녀의 친구가 실실 웃었다.

"야. 너 내가 너한테 연예인 소개팅 여러 번 해준 거 기억하지?"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해?"

"너도 나한테 소개팅 한 번 해줘야지? 난 저 남자 마음에 든다. 자리 좀 마련해 봐."

성혜리의 눈꼬리가 휙 올라갔다.

"이년이?"

"흐흐. 반응 봐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네가 요즘 소개팅을 거절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알면 협조나 해봐."

"어떤 협조?"

"몰라. 뭐든 도움되는 거."

162. LPP 엔터

영화 '운명의 풍차'는 재미있었다. 시사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평도 좋았다.

차우진의 뒤에서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손익분기점은 넘겠지?"

"당연히 넘겠지. 난 최소한 오백만 관객 본다."

"수상도 가능할까?"

"국내에서라면 후보 정도는 충분히 오르겠지."

배우들의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그중에는 정예지도 있었다.

"정예지 연기 좋네."

"감독이 정예지한테 특히 더 신경 쓴 거 같아."

"그것 때문에 그랬나?"

"그거?"

기자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예지가 촬영 도중에 절벽에서 사고로 죽을 뻔했잖아. 미안해서 감독이 신경 더 써줬나 해서."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영화가 끝난 후에 박수가 쏟아졌다.

윤성준 감독이 스크린 앞에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차우진 씨."

고마운 사람 중에 차우진의 이름도 있었다.

차우진은 당황했다.

"아니, 왜…."

뒤에서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우진이 누구야?"

"몰라. 제작사나 투자자 쪽이겠지."

그의 이름은 여러 명의 이름 사이에 섞여서 언급됐다. 기자들은 별다른 관심은 가지지 않았다.

LPP 엔터 사장 전현식은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 차우진?'

그는 차우진이 이곳에 자신처럼 초대권을 구해서 들어온 일반 관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이 영화 제작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을 언급할 때 차우진의 이름이 나왔다.

'그냥 방송국 스태프가 아니었나?'

LPP 엔터 팀장은 차우진이 누구인지 방송국 드라마 촬영팀에 물어봤었다. 그때 전해 들은 건 차우진은 임시직 현장 스태프라는 이야기였다.

'그 재능으로 왜 현장 스태프를 하나 했더니, 역시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전현석은 차우진을 회사로 끌어들이고 싶다. 그런데 이미 팀장을 통해 따로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내가 직접 연락해야겠어.'

***

SL 제약 성혜리는 차우진의 이름을 듣고 당황했다.

"차 이사님 이름이 왜 나와?"

친구가 옆에서 소곤댔다.

"아까 그 이사님 맞아? 영화 일도 해?"

"엑스트라로 출연했다고 했는데…."

"감독이 왜 엑스트라한테 감사 인사를 해?"

"나도 몰라."

"혹시 네 그 차 이사님이 문화예술 쪽으로 잘하는 거 있어?"

"있지."

그녀는 차우진이 곽민지와 작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대중가요 제작 전반에 능통한 전문가야."

"제약회사 이사인데 동시에 대중가요 전문가? 어쩌면 영화 쪽도 전문가일 수도 있겠는데?"

"그런가?"

친구가 입맛을 다셨다.

"진짜 탐나는데?"

"꺼져."

성혜리는 SL 제약에서 분석팀 TF가 소집되면 그곳에 가서 일한다. 그 일이 없을 때는 홍보팀 소속이다.

친구가 조언했다.

"너 홍보팀에 있잖아. CF 만들 때 차 이사님도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말해봐. 그러면서 더 친해지면 좋잖아."

"좋은 생각인데?"

"나 오늘 술값은 했다? 그러니까 술은 네가 사."

"비싼 거 사줄게."

***

영화가 끝난 후에 차우진이 고등학생 김세나를 치킨 전문점으로 데려갔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한테 치킨을 꼭 사주고 싶었어."

"전에도 사주셨어요."

"아직 덜 샀어."

그는 멸망한 세계에서 세나가 만들어준 치킨을 먹은 적이 있다. 박창수도 같이 먹었다.

치킨이 귀한 세상에서 먹은 걸 현대에서 똑같은 양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치킨이 흔하니까 더 사야 한다.

"저야 좋죠. 근데요."

김세나가 옆을 보았다.

정예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 우리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게 아니라요. 사람이 셋인데 치킨이 두 마리라서…."

"으응?"

"이건 아니지 싶어서요."

차우진이 말했다.

"어차피 사람 더 오니까 닭다리 콤보 추가로 시켜야겠다. 아는 형한테 닭다리 빼앗긴 게 아직도 생각나네."

"누가 또 와요?"

곽민지가 그곳에 도착했다.

"앗! 치킨이다!"

정예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민지 안녕?"

"안녕하세요! 앗! 세나도 있다. 잠깐만. 그러면 사람이 넷인데 치킨이 두 마리? 아저씨? 이건 아니지 않나요?"

"고딩들은 원래 다 그러냐? 더 시킬 거야."

"몇 마리요?"

"한…."

"설마?"

"두 마리?"

정예지가 신나서 자리에 앉았다.

"아싸아. 여기 사이드로 피자도 판대요. 떡볶이도요."

"그래. 다 먹어라. 창수 형이 이러는 너를 보면 기겁하겠다."

"창수 형이 누군데요?"

"응? 아. 있어. 네 팬이야."

"제가 팬이 있어요?"

"지금은 없지."

***

차우진이 집에 돌아왔다.

차유리가 소파 위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냐?"

"영화 시사회."

"엑스트라로 출연한 그 영화? 제목이 뭐더라?"

"운명의 풍차."

"맞다. 근데 엑스트라한테도 시사회 표를 주냐?"

"주더라고."

"현장 스태프 알바도 했으니까 줬나 보네."

차우진이 차유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는 금요일 밤인데도 소파에 누워 있냐?"

"왜? 편하잖아."

"연애 안 해?"

"난 나보다 약한 놈하고는 안 사귄다."

"평생 혼자 살겠구나."

"응. 반사."

"저번에 야근한 거, 그 사채업자는 어떻게 됐어?"

신인배우 진소영은 얼마 전에 한노성의 부하인 박민수에게 붙잡혔었다. 그런 그녀를 차우진이 구출했다.

"그 사건은 조사 중이야."

"구속은?"

"불구속 수사. 피해자는 맞은 곳이 없고 오히려 그놈들만 다친 데다가, 빌려준 돈을 받으려고 겁만 준 거라고 주장하고 있거든. 거기다 비싼 변호사까지 썼어."

"그 변호사는 누가 고용했을까?"

"뒤에 쩐주로 의심 가는 놈이 있어. 근데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모른대. 수배를 때릴 만큼 혐의가 있는 건 아니라더라."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오래 걸리네."

차우진은 독수파와 한노성 사이에 싸움을 붙여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치고받고 싸우려면 한노성이 어디 있는지를 독수파가 알아내야 한다.

"부하들끼리도 안 싸우나? 그놈들이 싸우면 쩐주도 조사할 수 있잖아."

"분위기 안 좋다는 소문은 들리더라. 그래서 그쪽 지역 형사팀은 일이 늘어났다는데."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말했다.

"괜찮아. 일하는 게 나만 아니면 돼."

"월급 루팡이 여기 있었네?"

"우리 관할 아니라고. 그리고 넌 경찰한테 루팡이 뭐냐?"

"그럼 뭘 원하는데?"

"월급 캣우먼?"

"양심 빻았네. 거울이 뭔지 모르냐?"

"야. 반사."

***

이튿날 LPP 엔터 사장 전현석이 차우진을 만났다.

전현석이 말했다.

"어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길래 감독님이…."

"영화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거군요?"

전현식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당연히 '논스톱 걸'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논스톱 걸'은 차우진이 곽민지를 시켜 만든 루나페어리의 신곡이다.

전현석이 설명했다.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그 노래를 확실히 밀려고 합니다. 마케팅도 하고, 뮤직비디오도 찍고요."

"얘들이 좋아하겠군요. 그런데…."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금 여유가 없으신 줄 알았는데요."

"예? 그걸 어떻게…."

최근에 서두르는 게 눈에 보여서 눈치챘다.

"어디서 들었습니다."

전현석이 푸념했다.

"아. 이 업계에는 정말 비밀이 없군요. 부비디도 그걸 알고 우리를 만만하게 본 거니까요."

"그럼 뮤비는 싸게 찍으려는 겁니까?"

전현석이 큰소리쳤다.

"아니요. 뮤비도 확실히 밀어줄 겁니다. 혹시 아는 감독님이 계시면…."

"윤성준 감독님?"

"아이고. 윤 감독님 같은 거물은 맡아주실 리가 없죠."

"그건 그렇죠. 당분간 쉬신다고 했으니까."

"뮤비 감독 중에서 유명한 분으로 섭외할 겁니다. 예산은 회사 지분을 팔면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지분을요?"

"이번에 회사의 명운을 걸려고 합니다."

LPP 엔터는 상장사가 아니다. 코스피나 코스닥에서 개인이 직접 거래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지분을 직거래하는 건 상장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물건을 팔거나 부동산을 파는 것처럼 거래하면 된다.

전현석은 차우진을 LPP 엔터로 끌어들이고 싶다.

"차우진 씨는 전기 공사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재능을 낭비하는 겁니다. 우리 회사로 오시죠. 와서 루나페어리를 맡아주십시오."

"이미 회사를 다니고 있다니까요."

"거기보다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하겠습니다."

"불가능할 텐데요."

차우진은 사덕리소스, 딥어스테크, SL 제약에, 미국 정부가 자금을 대는 마그마에너지에도 임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 회사들은 임원 월급도 준다. 사덕리소스는 2대주주인 차우진에게 금을 팔아서 벌어들인 수익도 배당했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전현석이 큰소리쳤다.

"지금 연봉을 얼마를 받으시던, 제가 더 드리겠습니다!"

차우진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불가능하다니까요."

"아…. 그러지 마시고 생각을…."

"다른 이야기를 좀 하죠. 회사 지분을 판다고요? 얼마나요?"

"예?"

"루나페어리의 신곡에 얼마를 투자할 생각이고, 그 자금을 마련하려고 지분을 얼마나 파실 겁니까?"

"투자금은 2억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뮤비도 찍고 초기 홍보도 하려고요."

"팔려는 지분은요?"

"5퍼센트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5퍼센트에 2억이라…. 그럼 LPP 엔터의 가치를 40억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아니지.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생각하면 최소한 50억 이상이라고 보시는 거군요."

"아, 그야…."

"사장님이 소유한 지분을 파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돈을 투자받아서 증자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그러면 지분 5퍼센트의 가치는 더 떨어지겠군요."

전현석도 안다. 지금 LPP 엔터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회사를 50억에 사 줄 곳은 없다.

"최대 10퍼센트까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자 후 기준으로 10퍼센트가 되게 할 겁니다."

"그럼 회사 전체 가치는 20억에서 25억이라…."

"우리 회사가 그 정도 가치는 있습니다."

"회사가 망하지 않는다면요."

회사가 망하면 20억은 고사하고 빚잔치부터 해야 한다.

"'논스톱 걸'이 히트 치면 회사는 망하지 않을 겁니다."

"흐음…."

차우진이 잠시 궁리했다.

'논스톱 걸'은 멸망한 세계에서 멸망하기 전에 4인조 걸그룹이 발표해 히트한 노래다.

문제는 발표 시기와 유행이다. 그때는 히트했지만, 지금 시대에 발표했을 때 히트한다는 보장은 없다.

"추가 조건은 없습니까?"

"지분이 안 팔리면 사채를 써서라도…."

"사채는 안됩니다."

"예?"

"사채 썼다가 회사가 사채업자한테 넘어간 곳을 하나 알아서요."

오동케미컬이 그런 식으로 한노성에게 넘어갔다.

"그, 그렇습니까?"

차우진이 잠시 생각했다.

'세나한테 얻어먹은 것도 있고, 민지 노래도 히트하면 좋은 데다가, 아직 신당읍 문제도 진행 중이니까….'

신당읍에서 차우진은 김세린의 회사 윗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걸 더 확실히 해두는 것도 좋겠지. 지분은 나중에 LPP 엔터에 다시 팔 수도 있으니까.'

차우진이 제안했다.

"2억에 10퍼센트. 그거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예? 차우진 씨가요? 돈이…."

"현금으로 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전현석은 오늘 여기에 차우진을 스카우트하러 왔다. 그런데 스카우트는 단번에 거절당했지만, 투자 제의를 받았다.

어차피 외부에 팔려던 지분이다. 그가 머리를 굴렸다.

'지분을 팔러 다니지 않아도 되고, 이러면 확실한 끈으로 연결되니까.'

"그럼 지분을 인수하시고 이사로 취임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시죠."

"아! 드디어! 그럼 루나페어리를 담당…."

"일은 안 할 겁니다."

"네?"

"자리만 받겠습니다."

"그게 무슨…."

"회사에 이사 월급 줄 여유가 없으면 명함만 파줘도 됩니다."

그러면 그 명함을 신당읍에서 쓸 수 있다.

***

영화는 시사회 이틀 후에 극장에 걸렸다.

이틀 사이에 기사가 충분히 나왔다. 영화사와 제작사 홍보팀이 기사를 뿌렸다.

감독의 감사 인사 중에 차우진의 이름이 있었다는 건 기사로 나가지 않았다. 기자들은 차우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데다가, 그게 아니라도 기삿거리로 삼을 게 많았다.

영화 반응은 좋았다. 개봉관도 꽤 잡았고, 관객도 많았다.

덩달아 정예지의 스케줄도 대폭 늘어났다.

전화가 걸려왔다.

- 차 매니저! 도와줘요! 헬프미!

"포기하라고."

- 힘들어!

"네가 선택한 스케줄이다."

- 회사가 골랐어! 난 오케이만 했다고!

"그래. 더 고생해라."

- 야!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지금 사건 현장에 와 있다.

"독수파와 한노성의 부하들이 제대로 붙었네."

이미 싸움은 끝났다. 현장에는 사람은 없고 노란색 폴리스 라인만 있었다.

차우진이 현장에 남은 흔적을 보고 상황을 분석했다.

"습격한 건 분명히 독수파인데, 한노성 쪽이 미리 알고 제대로 받아쳤구나."

차우진이 독수파 사무실에 불을 질렀을 때 두목은 혼자 도망쳤다. 차우진은 그때 뒤늦게 건물을 빠져나온 조직원 두 놈의 표정을 떠올렸다.

"독수파 쪽에서 습격 정보가 샜겠어."

그 결과 양쪽 조직에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불 지른 보람이 있다."

163. 서치

오동캐미컬의 오너인 사채업자 한노성은 측근인 박민수가 체포되기도 전에 잠수를 탔다. 그럴 때 지내는 아지트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수사의 칼끝은 피하면서 인맥을 통해 정치권과 권력기관에 봉투를 몇 개 돌렸다.

형사가 오동케미컬 사장을 만났다.

사장은 모든 걸 잡아뗐다.

"한노성 씨가 우리 회사 투자자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경영에 관여하진 않습니다."

"그럼 회사는 누가 경영한다는 겁니까?"

"우리 회사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됩니다. 내가 바로 사장입니다."

형사가 회사를 떠나면서 투덜댔다.

"저 사장은 전문 경영인 경력이 없더라. 이거 냄새가 나는데…."

"더 파볼까요?"

"위에서 확실한 증거 없으면 적당히 마무리하란다."

"수사를 해야 증거가 나오죠. 나 참."

"어쩌겠냐? 까라면 까야지."

형사들이 떠난 후에 사장이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회장님은 단순 투자자라고 딱 잡아뗐습니다."

한노성이 물었다.

- 지분 관계나 자금 흐름은 어디까지 알고 왔어?

"차명계좌까지 추적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 그러면 경찰 쪽은 됐는데….

한노성이 욕을 했다.

- 독수파 새끼들은 왜 같이 죽자고 난리야?

"누가 독수파를 습격했는데, 회장님이 보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런 거야?

"알아보고 있습니다."

한노성은 초조해졌다.

- 이번 일이 유럽에 알려지면 안 된다. 회사를 팔아치우려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처리해야 해.

사장이 큰소리쳤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 땅은 어떻게 하고 있어?

"경찰이 신당읍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땅을 매수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라고 있는 게 차명계좌나 대포통장이잖아. 방법을 찾아봐."

- 알겠습니다.

오동케미컬 사장이 떠난 후에 바로 옆 벽 뒤에서 차우진이 걸어 나왔다. 전투 센스 덕분에 가까운 거리의 휴대폰에서 나온 소리 정도는 대충 들을 수 있었다.

"유럽에 신경 쓰는 거 보면 쿠에르노하고 연결된 건 맞아 보이는데, 회사를 지금 팔 거면 그 논은 왜 사려는 거야?"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당읍의 논이 목적이 아니라 땅속에서 광물이라도 찾나? 거기서 유전이 나오진 않을 텐데?"

신당읍에서 유전이나 돈이 되는 광물이 나왔다면, 멸망 초기에 그게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다.

"목적이 뭐야?"

***

그날 밤에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가 닭강정을 펼쳐놓고 먹고 있었다.

"어? 그거 설마 내가 주문한 거냐?"

차유리가 닭강정을 씹으며 말했다.

"네 닭강정 쩐다?"

"그거 먹으려고 산 거 아닌데."

"그래? 종이 상자가 두 개라서 하나씩 먹자는 줄 알았지."

종이 상자 하나에 치킨 한 마리 분량의 닭강정이 들어있다. 차유리는 이미 하나를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

차유리가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빨며 물었다.

"근데 먹으려고 산 게 아니면 왜 샀는데?"

"누구 좀 주려고."

"여자냐?"

"고딩. 치킨을 좀 빚져서."

"넌 고딩한테 치킨 얻어먹고 다니냐?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그렇게 독하게 해서 부자가 됐구나."

"얻어먹은 건 맞지만, 그런 거 아니라고."

"한 박스 남겨놨으니까 그거 주면 되겠네."

***

차우진이 이튿날 사덕리소스 서준석 사장을 만났다.

"아이고. 차 이사님. 자주 좀 오시지."

"그러게요."

"회사 이사할 땐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다른 지역에 일이 있어서요."

차우진이 사덕리소스 본사 건물을 보았다.

"건물이 좋네요."

"마침 이 건물이 싸게 나와서 아예 샀습니다."

"서 사장님. 성공하셨습니다."

"하하하. 이 건물 저기부터 저기까지는 차 이사님 거잖습니까?"

서준석이 사덕리소스의 대주주이고, 차우진은 2대주주다.

서준석이 설명했다.

"요즘 금광에서 금이 많이 나옵니다. 예상 매장량도 조사할 때마다 늘어납니다."

사덕리소스는 멸망 초기까지 망하지 않고 버틴 회사다. 지금은 망해가던 회사가 그 시기를 버틸 정도로 잘나가려면, 금광에서 금이 많이 나와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금은 최소한 10년은 계속 나올 겁니다. 더 나올 수도 있고요."

"차 이사님. 앞으로 우린 망할 걱정은 없습니다. 하하하."

"세상이 망하지 않으면 사덕리소스도 안 망하겠지요."

"세상이 망할 리야 없잖습니까? 하하하."

차우진은 망한 세상을 보았다. 지금 세상도 차우진이 멸망급 재난을 막지 못하면 망한다.

차우진이 말을 돌렸다.

"혹시 신당읍이라고 아십니까?"

"신당읍이요?"

"그곳에서 채산성이 있는 광물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혹시 들으셨습니까?"

사덕리소스는 광산 회사다. 서준석은 그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글쎄요. 그런 소문은 못 들었습니다만…. 어? 헉!"

"뭔가 아십니까?"

서준석이 깜짝 놀라 물었다.

"혹시 거기도 악당이 나타났습니까?"

"예?"

"역시…."

"지금 생각하시는 그거, 저 아닙니다."

서준석은 금광이 폭파될 뻔한 걸 막아준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서준석도 살아남았다.

"아. 그렇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 하하."

"어쨌든, 거기서 광물이 발견됐거나, 광산 개발 계획이 있는지 좀 알아볼 수 있을까요?"

"소문내지 않고 알아봐야겠지요? 제가 유도진 이사와 함께 조용히 알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거 저 아니라고요."

"그럼요. 그때 그 사람이 절대로 아니시겠죠."

***

차우진이 신당읍을 방문했다. 지난번에 명분을 만들어놓은 데다가 이제는 LPP 엔터의 이사 명함도 있다.

그래서 그가 신당읍을 찾아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쌀집 딸 김세나는 평일에는 신당읍에서 학교에 다닌다.

"앗! 작곡가 아저씨다."

"난 작곡가 아니다. 작곡가는 민지잖아."

"민지 이야기는 많이 다르던데요?"

차우진이 닭강정 박스를 내밀었다.

"먹을래? 속초에서 주문한 건데."

"앗! 매번 감사합니다."

김세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두 손으로 닭강정을 받은 후에 물었다.

"근데요. 왜 매번 치킨만 사주세요? 물론 맛있지만, 그냥 궁금해서요."

"그러게. 너만 보면 치킨이 사주고 싶네."

김세나가 쌀집 근처 평상에서 닭강정을 먹었다.

"맛있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 동네에 전설 같은 거 있냐?"

"전설이요? 귀신 같은 거요?"

"그런 거나, 아니면 땅속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 같은 거."

"있죠. 일단 귀신 이야기부터 들어보실래요?"

"응? 어. 그래. 그것부터 하자."

김세나의 이야기는 귀신에서 시작해서 도깨비도 나오고 동굴 이야기도 나왔다.

"동굴? 그건 어디에 있는데?"

"몰라요. 우리 마을 어딘가에 있대요. 근데 그 동굴에는 해적왕이 숨겨놓은 전설의 보물이 있대요."

"여긴 바닷가가 아닌데?"

"예전에 여기가 바다였다든지…."

"그 시대에는 사람이 안 살고 익룡이 날아다녔겠지."

"그럼 도깨비가 바다를 만든 건가요?"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구나."

차우진은 한노성이 이 지역 농지를 노리는 이유를 생각했다.

"산이 아니라 논이라…. 논에는 동굴이 없는데…."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세나야. 저번에 그놈들이 이 지역 어느 논들을 사려고 했는지 혹시 알아?"

"알죠. 어른들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

차우진이 서울로 돌아와 서준석 사장과 유도진 이사를 만났다.

유도진이 설명했다.

"알아봤는데, 신당읍에서 광산 개발을 추진하는 업체는 없습니다."

"혹시나 했습니다."

"그런데 신당읍만이 아니라 그 일대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그런 소문이 도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광산 개발 업체입니까?"

"아니요. 투자금을 가로채려는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 확실합니까?"

"우리 회사와 협력해서 금광을 개발한다더군요. 사덕리소스의 금광 신화를 거기서 다시 만들겠답니다."

차우진이 서준석 사장을 돌아보았다. 서준석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런 사업을 할 거면 차 이사님한테도 이야기했겠지요. 우리 회사는 그런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사기꾼 맞네요."

"맞습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러면 다른 건 없습니까? 고대의 보물이 동굴에 묻혀 있다든지…."

유도진이 물었다.

"차 이사님. 그런 이야기 좋아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아는 애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난 아닙니다. 하나도 안 믿었습니다."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가 소파에서 뒹굴었다.

"누나. 일이나 해."

"닥쳐."

차우진이 서류 봉투를 넘겼다.

"사기꾼 잡아야지?"

"이게 뭔데?"

"누가 금광 사기를 친다네?"

차유리가 누운 채로 서류를 꺼내서 훑어보다가 물었다.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았어?"

"그 사기꾼이 사덕리소스를 사칭해서 사기를 친다잖아. 내가 아니라 사덕리소스에서 알아냈어."

이 서류는 유도진 팀장이 넘겨주었다.

"아. 너 거기 주식 많지? 아니다. 거기가 제일 많나? 요즘 사덕리소스 주가가 얼마야?"

차유리가 스마트폰으로 주가를 검색했다가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더 부자가 된 동생아. 호텔 뷔페 가자. 쏴라."

"이 늦은 시간에 거기를 어떻게 가냐. 문 연 곳도 없다."

"그럼 야식이라도 배달시켜봐."

"사덕리소스 주식은 안 팔 거라니까."

"그 회사는 배당 같은 거 안 주냐?"

"주더라."

"응?"

"요즘 금이 좀 많이 나와서 돈이 남는다더라고."

"야 이. 당장 배달시켜!"

"그 금광 사기꾼은?"

"이런 놈을 잡는 부서로 넘길게."

***

차우진이 야식으로 보쌈을 먹으며 스마트폰에 지도를 띄웠다. 그런 후에 조기택 패거리가 신당읍에서 사들이려던 곳들을 확인했다.

'대상 농지가 한 군데에 모여 있긴 한데, 광산도 아니고, 보물도 아니고, 쿠에르노의 액체비료 첨가제는 아직 개발되기 전이고….'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도 이놈들은 신당읍의 농지를 사려고 한단 말이야.'

차유리가 말했다.

"야. 마늘 좀 더 썰어와 봐. 서비스로 준 건 너무 조금이라서 다 먹었다."

"마늘은 혼자 다 먹고선 왜 나한테 썰래? 돈은 내가 냈으니까 써는 건 누나가 하지?"

"부자 동생이 돈다발로 누나 부려먹는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소리 마라. 보쌈이 돈다발을 줘야 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마늘은 네가 잘 썰잖아. 아주 균일한 두께로 썰더라."

"그냥 통마늘 먹…. 어? 잠깐. 마늘밭?"

한노성의 본업은 사채업이다. 게다가 그는 한노성이 오동케미컬을 자금세탁용으로 쓴다고 생각한다.

"마늘밭이라…."

"왜? 누가 또 마늘밭에 돈다발이라도 묻어놨냐?"

"누나 천잰데?"

차유리가 자랑했다.

"그런 소리 많이 들었지."

"옛날부터 사람 패는 데 천재긴 했지."

"그래서 마늘은 언제 썰어오는데?"

"보쌈 맛있다."

차우진이 그의 방에서 모니터에 신당읍 지도를 띄웠다. 조기택 패거리가 사려던 지역은 따로 표시했다.

대상 지역은 밭도 조금 있지만 대부분 논이었다.

"논 아래에 돈뭉치를 묻어놓으면 썩을 위험이 있는데…."

그 문제는 돈을 단단한 케이스에 넣어 완전히 밀봉하고 방습제를 많이 쓰면 해결할 수는 있다. 그런데 다른 의문도 있었다.

"남의 논에 돈을 묻어놓고 나중에 그 땅을 사려 한다? 그것도 이상하지. 논 하나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개를 사는 건 더 이상하고."

돈은 습기가 차면 썩지만, 썩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럼 장물이 묻혀 있나? 아니면 장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위치는 한노성도 모르는 걸 보면, 부하나 동업자가 거기에 뭔가 묻어놓고 도망쳤나?"

확인할 가치는 있다.

***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의 개발 2팀을 만났다.

곽수혁 팀장이 마그마 탐지기 개발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미국의 스톤파인더와 마그마에너지 두 회사와 협조해 탐지기를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개발 예산은 잘 나옵니까?"

"저쪽에서 탐지기 개발용으로 용도를 제한한 투자금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예산은 넉넉합니다."

"좋군요."

"차 이사님 덕분이죠. 마그마에너지에서도 임원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명함에 이름만 박은 겁니다."

"그 회사의 이야기는 좀 다르던데요?"

"어쨌든 예산이 충분하면, 현장 테스트도 종종 나가겠군요."

"예. 부담 없이 자주 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나갈 예정입니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그러면 이번 테스트 장소는 제가 정해도 되겠습니까?"

"원래 계획된 장소야 다음에 가도 되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차 이사님이 장소를 정하신다는 건…."

곽수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번에도 거기서 마그마나 지진이…."

"그럴 리가요. 지진을 어떻게 미리 알겠습니까?"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왜 장소를 직접 지정하시는 겁니까?"

"보물찾기를 하려고요."

"예? 거기 보물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죠."

"하하. 차 이사님도 농담하신 거군요. 그래서 다음 테스트 장소가 어디입니까?"

"신당읍입니다."

164. 신당읍

차우진이 그날 저녁때 신당읍을 다시 방문했다.

쌀집 주인 김기환이 웃으며 말했다.

"작곡가님. 요즘 자주 오십니다."

"작곡가는 제가 아니라 민지라니까요."

"아. 이제 차 이사님이라고 하셨지. 우리 세린이를 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차우진이 물었다.

"이 동네에 아는 분 많으시죠?"

"쌀집을 하니까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죠."

"그럼 지역 유지 몇 분하고, 논을 가진 분을 좀 만나고 싶은데요.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요. 가능할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기획사 이사님이 우리 마을 사람들은 왜…."

"다른 회사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김기환이 동네 주민 십여 명을 모았다.

그중 일부는 지난번에 조기택 패거리에 논을 팔라는 협박을 당한 사람들이다.

신당읍에서 목소리 좀 내는 지역 유지도 몇 명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제가 사덕리소스 사장님과 아는 사이입니다."

몇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아. 사덕리소스면 그…."

"금광 회사?"

사덕리소스는 광고를 하는 회사가 아니다. 개인용 물품을 팔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몇 사람이 광산 회사의 이름을 들어보았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 근처에서 금광을 개발하겠다는 사기꾼이 있다더군요. 소문 들으셨죠?"

"어? 그거 비밀이라고 했는데…."

"아는 사람이 여기에도 몇 분 계시나 본데, 그 정도면 비밀이 아니죠."

지역 유지가 물었다.

"사기꾼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김 사장은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은 연락이 안 될 겁니다."

"그, 그렇긴 한데, 사정이 있겠지요."

"사정이야 물론 있지요. 경찰에 체포됐거든요."

차유리는 차우진이 넘겨준 서류를 다시 이 지역 형사에게 넘겼다. 그 서류에는 사덕리소스에서 제공한 증거가 첨부되어 있었다. 형사는 실적이 굴러들어왔다면서 사기꾼을 체포했다.

"어? 체포요? 무슨 오해가 있거나 누명을 쓴 거 아닙니까?"

차우진이 설명했다.

"제가 알아봤는데, 사덕리소스는 이 지역에 금광은커녕 광산 탐사 계획이 아예 없습니다. 사기꾼이 사칭한 겁니다."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아니, 김 사장이 그럴 리가…."

차우진이 말했다.

"그래도 의심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사기가 아니라 정말 금광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겠죠. 계약금이라도 넘겼으면 더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탐사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옆에 서 있던 곽수혁이 인사했다.

"딥어스테크의 곽수혁 팀장입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지하 광물을 탐지기로 탐사하는 장비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이분이 이 지역 논 주변에 광물 탐지기를 설치해 지하를 조사할 겁니다."

이번에는 논을 가진 사람이 걱정했다.

"어? 그러면 농사는 어떻게 하라고…."

차우진이 설명했다.

"농사에 방해 안 되게 하겠습니다. 협조만 해주시면 하루면 끝납니다."

"돈은 얼마나 듭니까?"

"돈은 사덕리소스에서 땅 주인분들께 드립니다. 많은 금액은 아닙니다만, 공짜로 탐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회사가 왜 굳이 그렇게까지…."

"사기꾼이 그 회사의 이름을 파는 걸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아, 그건 그렇겠네요."

다른 사람이 질문했다.

"그 장비만 쓰면 땅속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사기꾼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 지역 어딘가에 금맥이 있다는 말이 은밀히 퍼졌다. 혹시 그 금맥이 내 땅에 있나 하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이야기를 듣고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땅속에 정말로 금맥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탐사 대상이 되는 논의 주인들은 모두 찬성했다. 그들은 다들 조기택 패거리에게 협박당해본 경험이 있어서, 뭐가 됐든 결론이 깔끔하게 나기를 바랐다.

이튿날 탐사기가 신당읍에 설치됐다.

오늘은 사덕리소스 사장 서준석도 있었다. 그는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가는 길에 잠깐 이곳에 들렀다.

서준석이 탐지기 설치 작업을 보며 말했다.

"전에 차 이사님이 딥어스테크 주식을 매집하라고 할 때는, 왜 그러시나 했는데…."

"주가가 많이 올랐죠?"

"생각보다 더 많이 올랐습니다. 한동안은 차 이사님이 하란 대로 금이 나올 때마다 사 모았는데, 요즘은 너무 올라서 매집을 중단했습니다."

"그 정도 사셨으면 충분합니다."

"차 이사님도 수익이 많이 나셨겠습니다."

사덕리소스만 딥어스테크의 지분을 대량으로 보유한 게 아니다. 주가가 바닥일 때 차우진이 개인적으로 사들인 지분도 꽤 많았다.

"저는 지분을 팔 생각이 없어서."

"그럼 우리 회사 보유분도 팔지 말아야겠습니다. 하하하."

차우진은 사덕리소스의 2대 주주이다. 그러니 사덕리소스가 보유한 딥어스테크 주식 중 일부는 차우진 거나 마찬가지다.

테스트가 시작됐다.

메인 시스템을 맡은 박효정이 말했다.

"데이터 들어옵니다!"

***

오동케미컬의 실질적인 주인인 사채업자 한노성은 여전히 대외 활동을 멈춘 상태였다.

오동케미컬의 사장이 한노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 그 동네에 금광이 있다면서 투자금을 모으던 놈이 있었습니다.

한노성이 물었다.

"금광? 거기에 그런 게 있어?"

- 없습니다. 그놈은 사기꾼이라서 이번에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한노성이 혀를 찼다.

"그런 사기꾼 놈들 때문에 나처럼 선량한 사업가가 피곤해지는 거야."

- 그 사기꾼이 이름을 팔아먹은 회사가 사덕리소스라는 광산 회사입니다. 그 회사에서 거기에 금광이 없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노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광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걸 어떻게 보여준다는 거야?"

"지하 광물을 찾는 탐지기 회사를 불러서 그 지역을 조사한답니다."

"돈이 썩어나는 새끼들이네. 뭘 그런…. 잠깐. 어디를 조사한다고?"

- 저번에 조기택이가 매입하려던 농지들 말입니다. 조기택이랑 금광 사기꾼이 얽혀있을 거라면서, 거기를….

한노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안돼! 막아!"

- 예?

"아니다. 넌 가만히 있어!"

한노성이 전화를 끊었다. 그가 박민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장 신당읍으로 애들 끌고 가서 막아!"

박민수는 당황했다.

"지, 지금 말입니까?"

"당연히 지금 가야지!"

"독수파 놈들이랑 싸우다가 애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다른 애들을 새로 모으려면 시간이…."

"그래도 어떻게든 모아!"

***

차우진이 곽수혁 팀장에게 물었다.

"이대로 탐지기를 돌리면 결과는 언제쯤 나오겠습니까?"

"탐지 작업이야 오늘 끝나지만,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며칠은 걸릴 겁니다."

"땅속 깊은 곳은 그렇겠지요. 표면은요?"

"네?"

"그러니까 지표면에서 1미터, 아니, 최대 2미터쯤 안쪽에 뭐가 있는지 보고 싶은데요."

곽수혁이 제안했다.

"탐지기 세팅을 조금 바꿀까요? 그러면 지표면은 삼각측량으로 금방 확인 가능한데요."

"그렇게 하시죠. 물론 결과는 비공개로."

"알겠습니다."

탐지기 테스트는 그날 오후에 끝났다.

마을 사람이 물었다.

"우리 마을에 금광이 있는지는 바로 알 수 있는 겁니까?"

차우진이 대답했다.

"데이터를 분석해야 하니까 광물 매장 여부를 확인하려면 며칠은 걸립니다."

"어휴. 고생 많이 하시겠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차우진이 태블릿 PC 화면에 지도를 띄웠다. 논이 있는 곳이었다.

"이쯤에 뭐가 있는데요?"

"어? 거기에 금맥이 있는 겁니까?"

"아니요. 금맥이라고 보기엔 너무 지표면 가까이에 있습니다. 깊이가 2미터도 안 됩니다."

"에이. 아쉽네요."

"금속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쇠로 만든 것 같은데, 깊이가 그리 깊지 않은 걸 보면 뭔가 묻혀 있나 봅니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뭐지? 쇠라면…. 누가 드럼통이라도 묻었나?"

"농기구가 실수로 묻힌 거 아냐?"

"파보면 알겠지. 정확히 어디인데요?"

차우진이 논을 가리켰다.

"저쯤인데, 정확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이걸로는 대략적인 위치만 나오는 거라서요."

"그럼 이걸 어쩐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내일 포크레인을 불러서 파볼까요?"

그 논의 주인이 반대했다.

"그 지도에 나오는 데가 다 내 논인데, 그러면 농사는 어쩌라고요. 보상금 몇 푼으로는 해결 안 됩니다."

"그럼 제가 내일 회사에서 금속탐지기를 가져와서 그게 묻혀 있는 부분만 찾아서 파겠습니다. 그게 뭔지 몰라도 논에서 파내는 게 좋잖습니까?"

"놔두면 찜찜하긴 한데…. 그럼 그렇게 합시다."

***

딥어스테크 개발 2팀은 테스트를 마치고 철수했다. 서준석은 이미 오전에 출장지로 갔다.

차우진도 내일 혼자 금속탐지기를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 마을을 떠났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가 걸려왔다. SL 제약 성혜리였다.

- 차 이사님. 딥어스테크랑 사덕리소스를 움직이셨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

- 신당읍에 관계된 기업들을 조사하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지역에 특이 상황이 생기면 우리가 알아야죠. 그래서 오늘 차 이사님이 그 두 회사와 함께 일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역시 유능하네요."

- 앗. 고맙습…. 아니, 그게 아니라요. 왜 그 두 회사만 부르셨어요?

"탐지기가 필요해서 부른 거라서?"

- 아무리 그래도 저도 부르셨어야죠!

"오늘은 제약 업체는 할 일이 없었는데."

- 가서 비타민 음료라도 돌렸을 텐데!

"하하."

성혜리가 놀란 소리를 냈다.

- 어? 웃었다. 차 이사님 그렇게 웃을 줄도 알아요?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한 겁니까?"

- 빈틈이 없고 완벽하면서 차가운 도시 남자?

"우리 누나가 이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데."

- 앗! 제가 찾아가서 대신 자랑할까요?

"됐습니다."

- 그럼 내일은요? 내일도 거기 가신다면서요?

차우진이 슬쩍 웃었다.

"그 이야기를 성혜리 대리가 들을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들었겠군요."

- 네? 다른 사람 누구요?

"좀 들었으면 하는 사람."

***

사채업자 한노성이 욕을 했다.

"씨발! 그놈들이 거기서 뭔가 찾았다고?"

한노성은 그 조사를 막으려고 양아치를 몇 놈 모았지만, 그들이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딥어스테크의 일이 끝났다.

박민수가 보고했다.

"그놈들이 그곳에 금광이 있는지 탐사를 하다가, 논에 뭔가가 묻혀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한노성이 화를 벌컥 냈다.

"야 이 새끼야! 그걸 막았어야지!"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조사를 마치고 철수하던 중이었습니다."

"씨바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던 한노성이 박민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거기서 찾아낸 걸 파냈어?"

"아닙니다. 아직…."

"찾았다며?"

"내일 땅을 팔 거랍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오늘 밤에 가서 파내면 되겠어. 그러면 다 해결되는 거야! 이번엔 믿을만한 애들로 두셋만 모아!"

"예?"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지?"

박민수가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게…. 그 회사도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모른다고…."

"야 이 새끼야! 너는 왜 대답이 다 안된다는 것뿐이야? 방법을 찾아!"

"내일 그 회사 사람이 금속탐지기를 가져와서 찾아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다시 온다고?"

"아닙니다. 직원 한 명만 금속탐지기를 들고 와서, 논에 들어가서 직접 찾아보겠답니다."

"그래? 그럼 우리도 금속탐지기를 하나 사서 가져가면 되잖아."

"고성능 탐지기가 필요하답니다. 아무 데서나 파는 탐지기로는 안 된다고…."

"잠깐. 그러니까."

한노성의 눈알이 번뜩거렸다.

"그 회사 직원이 내일 혼자서 고성능 금속탐지기를 가져온다?"

"예."

"그럼 빼앗으면 되겠네."

"네?"

"그것만 있으면, 똘똘한 놈 시켜서 그 회사 직원인 척하고 그걸 찾아낼 수 있어. 그런 후에 파내면 되잖아."

박민수가 아부했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그럼 그 회사 직원은 어떻게 할까요?"

"죽여서 그 구덩이에 묻으면 완벽한데, 탈이 나겠지?"

박민수가 말렸다.

"중견기업 직원이 사라졌는데 현장에서 누군가 그 일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당연히 탈이 납니다."

"그럼 내일 그 마을로 가는 길에서 기다리다가 그 직원을 잡아. 겁도 주고 집 주소도 알아내. 신상 탈탈 털어서 협박하면 신고 못 해."

박민수가 큰소리쳤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잖습니까?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165. 보물찾기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의 고성능 금속탐지기를 차에 실었다. 승합차의 옆에는 딥어스테크라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건 회사 차였다.

곽수혁 팀장이 물었다.

"차 이사님이 굳이 직접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어제 신당읍 쪽에 미끼를 뿌려놨다. 그러니까 차우진이 직접 가야 한다.

"그게 편합니다."

송미소는 비서실의 차우진 담당자다. 그녀는 조사팀의 팀원이기도 하다.

"차 이사님. 운전은 제가 할게요."

"혼자 가도 된다니까요."

송미소가 고집을 부렸다.

"저도 뭔가 해야죠. 제가 하게 해주세요."

"비서실 일은 안 바쁩니까?"

"급한 일은 다 처리해놨어요."

"운전 실력이?"

"1종 보통에 지게차, 미니 굴착기 면허도 있어요."

차우진은 더는 말리진 않았다.

혼자 가는 게 간편하긴 한데, 어차피 신당읍에 가면 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 명 더 추가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다만, 목격자가 있으면 가는 길에는 선을 좀 지켜야 한다.

"운 좋은 놈들이네."

"네?"

"미소 씨한테 말한 거 아닙니다. 갑시다."

승합차 운전은 송미소가 했다.

차우진이 신당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 길이 좁긴 하지만 사람도 없고 차도 안 다녀서 좋습니다."

"하지만 내비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기계의 명령 따위 듣지 말아요."

"네?"

"내가 AI한테 당한 게 좀 있어서."

"그게 무슨…."

"이쪽으로 가야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야 목격자도 없고, 그래야 습격당하기 좋다.

"그러니까 왼쪽으로."

"네."

송미소가 왼쪽 길로 차를 움직였다.

그 길은 중앙선조차 없는 시골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도 나쁘진 않았다.

송미소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 경치가 참 좋아요."

"그래서 이쪽으로 가자고 한 겁니다."

"차 이사님. 이러니까 드라이브 온 거 같아요."

차우진이 앞을 가리켰다.

"맞은편에 차."

반대 방향에서 승용차가 한 대 달려오고 있었다.

송미소가 차를 도로 오른쪽에 붙였다.

"괜찮아요. 길이 넓진 않지만, 천천히 지나가면 교차해서 지나갈 수 있어요."

송미소가 차량 속도까지 줄였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는 차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도로 한복판에서 달려왔다.

송미소가 걱정했다.

"어머. 저러면 못 피하는데 왜…."

"충격에 대비해요."

"네?"

"혹시 모르니까."

맞은편 차는 10미터 앞에서 정지했다. 좁은 시골길은 그 차 때문에 완전히 막혔다.

송미소가 인상을 썼다.

"아니, 저 사람들 운전을 왜 저렇게…."

승용차 문이 좌우로 벌컥 열리면서 남자 둘이 내렸다. 둘 다 손에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송미소는 깜짝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꺅?"

차우진이 말했다.

"미소 씨는 차에서 내리지 말아요."

"네?"

"저거 싸우자고 온 양아치들이니까."

"그, 그럼 도망쳐야죠!"

"이 길로 후진하면 도로 끝을 막는 놈이 올 겁니다."

"서, 설마요."

"어쨌든 우리는 이 길로 갈 겁니다."

차우진이 차에서 내렸다.

양아치가 껌을 씹으며 물었다.

"딥어스테크?"

"차에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데, 한글을 모르나?"

"이 새끼가?"

"새끼라니. 덩치는 내가 더 큰데."

조수석에서 내린 놈이 물었다.

"야. 혼자 온다고 들었는데 왜 둘이냐? 데이트냐?"

"그렇게 보이나?"

"이 새끼가 왜 자꾸 반말이야? 야. 이 새끼 일단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두들겨 패."

"형님. 여자는요?"

"내가 끌어내야지."

조수석에서 내린 놈이 운전석 문으로 걸어갔다.

차우진이 말했다.

"문 잠겼으니까 억지로 열다가 차에 기스 내지 마라."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형님. 제가 닥치게 하겠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놈이 차우진을 향해 걸어가면서 야구 배트를 내리쳤다.

차우진이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알루미늄 배트가 차 보닛을 때렸다. 보닛 철판이 움푹 들어갔다.

차우진이 적의 손목을 툭 쳤다. 적의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배트를 잡은 손가락이 조금 풀렸다.

차우진이 그 배트를 잡아챘다. 알루미늄 배트가 순식간에 차우진의 손으로 넘어갔다.

"어?"

"기스 내지 말라고 했더니 아예 찌그러뜨려?"

차우진이 배트를 위로 휙 흔들었다. 배트의 뭉툭한 끝이 적의 턱을 때렸다.

적의 턱이 뒤로 젖혀졌다.

"켁!"

차우진이 적을 발로 밀었다. 양아치가 뒤로 나자빠졌다.

다른 놈은 운전석으로 걸어가다가 그걸 보았다.

"어?"

늦었다. 게다가 거리도 가까웠다.

적이 반응하기도 전에 차우진이 배트를 옆으로 쭉 뻗었다. 배트의 뭉툭한 끝이 적의 배에 창처럼 푹 꽂혔다.

"꾸엑!"

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차우진이 알루미늄 배트를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역시 난 야구를 했어야 해."

차우진에게 맞은 두 놈은 기절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 놈은 턱을 다쳤다. 다른 놈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컥컥대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차우진이 배트를 어깨에 턱 걸치며 말했다.

"일어났네?"

그들은 이미 전투 의지를 잃었다. 두 놈은 허겁지겁 뒤로 빠졌다가 승용차를 타고 도망쳤다.

도로가 좁아 바로 차를 돌릴 수는 없었다. 양아치들은 후진으로 도망치다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차를 돌렸다.

차우진이 그놈들을 보며 말했다.

"겨우 두 놈뿐이라니. 신당읍으로 가는 길이 더 있긴 하지만, 수가 너무 적은데?"

그는 몇 놈이 오든 한노성이 직접 찾아온 게 아니면 보내주려고 했다. 저놈들이 살아서 돌아가야 다른 놈들도 유인할 수 있다.

송미소가 차에서 내렸다.

"차 이사님. 괜찮으세요?"

"봤잖아요."

"이사님은 괜찮으시네요. 그런데 차가…."

"응?"

"차가 손상된 사유를 서류작업으로 제출해야 하는데…."

"강도를 만났는데, 차를 안 빼앗기려고 싸우다가 좀 찌그러졌다고 해요."

"어머. 저놈들이 이 차를 노린 거예요? 고급차도 아니고 그냥 회사 승합차인데 왜…."

"차가 아니라 차에 있는 금속탐지기를 노린 겁니다."

"네? 그걸 왜요?"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랬는지는 신당읍에 가면 알게 되겠지요. 갑시다."

***

차우진과 송미소가 신당읍에 도착했다.

그런데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SL 제약 성혜리 대리였다.

"차 이사님. 왜 이제 와요?"

"오다가 누굴 좀 만나서."

"누구요?"

"모릅니다."

송미소도 차에서 내렸다. 성혜리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누구?"

차우진이 설명했다.

"딥어스테크 조사팀 송미소 대리."

"아. 조사팀에 계신 분이구나. SL 분석팀의 성혜리예요."

"네. 안녕하세요."

"차 이사님 혼자 오실 줄 알았는데."

"제가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굳이?"

"제가 차 이사님 비서라서요."

성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회사에 출근도 잘 안 하실 텐데 비서가 있어요?"

"출근하실 때는 제가 담당 비서예요."

"비서가 여기까지 오나요?"

"이번 일과 상관없는 SL 제약에서도 오셨는데요?"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차우진이 손뼉을 쳤다.

"일합시다."

그가 승합차의 뒷문을 열었다.

딥어스테크 연구소 개발 2팀은 땅속을 탐지하는 장비를 개발한다.

2팀이 기존에 개발한 장비 중에는 지하 2미터에 묻혀 있는 쇳조각도 탐지할 수 있는 고성능 금속탐지기가 있다.

차우진이 그 금속탐지기를 가방처럼 등에 짊어졌다.

성혜리가 걱정했다.

"무겁겠다."

송미소가 반박했다.

"차 이사님이 관리하시는 연구소에서 개발한 탐지기예요. 안 무거워요."

차우진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일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싸우러 왔나?"

그렇다고 두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다.

그는 이곳에 오는 동인 이미 습격을 한 번 당했다. 송미소는 단순 강도라고 생각했지만 차우진은 그놈들을 누가 보냈는지 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차우진의 근처에 있어야 한다.

차우진이 장화를 신고 논에 들어갔다. 논의 주인에게는 어제 동의를 받았다.

"시작합시다."

차우진이 금속탐지기를 켜고 논을 돌아다녔다. 조사 대상 지역이 제법 넓었다.

***

사채업자 한노성이 부하들을 걷어찼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둘이 가서 한 놈에게 얻어터져? 너네가 그러고도 깡패야?"

차우진은 그 두 놈을 팔다리도 분지르지 않고 제법 멀쩡한 상태로 보냈다. 그렇지만 한 놈은 차우진에게 맞아 턱을 다쳤고, 배를 맞은 놈은 갈비뼈에 금이 갔다.

갈비뼈에 금이 간 놈이 걷어차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회장님! 두 놈, 두 놈이었습니다!"

"이 새끼가! 하나는 여자였다며!"

"아아악!"

한노성의 부하들을 몇 번 더 걷어찼다.

옆에서 박민수가 말했다.

"이 새끼들은 회사원에게 얻어터져 놓고 핑계는. 아무리 깡패라도 양심이 없네."

한노성이 옆을 돌아보며 화를 벌컥 냈다.

"너 이 새끼! 이건 너한테 맡긴 일이잖아!"

"그게…. 사람을 급하게 모으다 보니까…."

"그리고 너도 저번에 얻어터졌잖아!"

박민수가 변명했다.

"회장님. 그때 그 새끼는 회사원이 아니라 독수리 놈들이 보낸 진짜 킬러였습니다."

박민수는 한노성의 사채 사무실을 대신 관리하는 최측근이다.

그는 최근에 진소영 납치 감금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한노성은 박민수에게 비싼 변호사를 붙여주었다.

박민수는 형사에게 단지 채무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요구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피해자인 진소영은 다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박민수는 수사는 계속 받지만, 구속만은 피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면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상황이 다급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한노성이 욕을 했다.

"씨발. 독수파 그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한노성의 사채업체 소속 부하들과 독수파가 최근에 크게 충돌했다. 그때 죽은 놈은 없지만 다친 놈이 많았다.

한노성이 박민수에게 화를 냈다.

"아무리 급해도 저런 덜떨어진 놈들까지 써야 했냐? 회사원 하나 잡아오라고 보냈더니 얻어터지기나 하고."

얻어맞고 온 두 놈은 사채 사무실 직속은 아니다. 그들은 평소에 필요하면 돈을 주고 부려먹던 양아치들이다.

한노성은 문제가 생기면 꼬리를 자르려고 그 양아치들을 고용했다.

"민수 너 이 새끼. 왜 저런 새끼들을 그 길로 보냈어?"

"하지만 회장님. 신당읍으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서…. 그놈이 하필 제일 좁은 길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박민수는 딥어스테크 직원이 당연히 큰길로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시골길이 뚫렸다.

"씨발. 그래서 그 새끼는 지금 어디 있어?"

"지금 논에서 금속탐지기로 물건을 찾고 있답니다."

"도로에 깔아놓은 애들 다 복귀시켰어?"

"예."

"가자. 그 새끼가 내 물건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쳐들어가서 회수해야겠다."

***

차우진의 금속탐지기는 가끔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신호가 약했다.

딥어스테크의 고성능 금속탐지기에는 대상 물체가 감지되는 면적을 이용해 크기를 어느 정도는 추측하는 기능이 있었다.

차우진이 예상 지역을 다 확인했다. 어제 사용한 광역 탐지기에 걸릴 만한 건 하나뿐이었다.

"여긴가?"

차우진이 논 주인에게 말했다.

"여기를 파야겠습니다."

"거길 파면 농사를…."

"당연히 수확량 감소분은 보상해드려야죠. 이거 제가 아니라 회사가 하는 일인데요."

"그렇다면야 파야지요. 그런데 작곡가 양반이 그 회사 일을 다 하시네?"

"작곡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아. 프로듀서라고 그랬나?"

"아니요."

다른 마을 사람이 말했다.

"세린이네 회사 이사님이잖아. 이사님."

"아. 그렇지."

차우진이 삽을 가져와 땅을 팠다.

그걸 본 마을 사람들이 감탄했다.

"삽질을 진짜 잘하는데?"

차우진이 땅을 파는 걸 멈췄다. 삽에 걸리는 게 있었다.

"역시 여기에 뭐가 있네."

차우진이 그 상자를 끌어냈다. 금속으로 만든 단단한 상자였다. 잠금장치도 걸려 있었다.

상자의 겉은 두꺼운 비닐로 감싸져 있었다.

"습기를 막기 위해서 급하게 비닐로 쌌겠지."

차우진이 상자를 들고 논 밖으로 이동했다. 성혜리가 그걸 보며 말했다.

"무겁겠다."

송미소가 갑자기 신발을 벗더니 가방에서 분홍색 장화를 꺼내 신고 논으로 들어갔다.

"도와드릴게요."

"앗. 나도…."

성혜리는 장화가 없었다. 맨발로 들어가기엔 논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이힐을 신고 들어가는 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차우진에게 다가가는 송미소를 보며 말했다.

"조사팀의 저 여자. 만만치 않아. 방심하면 당하겠어."

166. 보물찾기 II

차우진이 송미소와 함께 금속 상자를 들고 논 밖으로 나와 마른 땅에 올려놓았다.

"꽤 무겁네."

"네? 저는 별로 안 무겁…."

"내가 다 들었으니까."

옆에서 성혜리가 얼른 한마디 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종이 반 개만큼 들었나 봐요?"

"드시기 편하게 옆에서 보조한 거예요. 그래서 그래요."

마을 사람 여러 명이 구경하러 와있었다.

"드럼통이 아니네?"

"혹시 누가 돈이라도 상자에 넣어서 묻어놨나?"

"마늘밭처럼?"

"그럼 이거 찾으면 보상 나오나?"

"최 씨가 찾은 건 아닌데?"

"그래도 최 씨 논에서 나오니까 보상이 있을걸?"

논 주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뭐가 들어있는지 열어나 봅시다."

차우진이 말했다.

"잠겨있는데, 일단 뜯어야겠습니다."

성혜리가 말렸다.

"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뜯어도 돼요?"

논 주인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내 논에서 나온 거라서 뜯어봤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뜯읍시다."

차우진이 차에 가서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그런 후에 공구를 가져와 가방의 잠금장치를 뜯기 시작했다.

송미소가 옆을 보았다.

차 두 대가 그곳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승합차 한 대와 승용차 한 대였다.

송미소가 차우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차 이사님. 아까 싸움을 걸었던 그 차예요."

"패거리를 데려왔나 보네."

아까는 그러라고 두 놈 다 살살 팼다.

승용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사채업자 박민수가 차에서 내렸다. 승합차에서도 부하들이 우르르 내렸다.

박민수가 차우진에게 말했다.

"어이. 그거 우리 물건이니까 손대지 마라."

승합차에서 내린 놈은 일곱이다. 마을 사람은 넷이다. 차우진 일행까지 더하면 양쪽 숫자는 비슷했다.

논 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둘러본 후에 반발했다.

"이건 내 논에서 나온 거야! 넌 뭔데 내 물건이 네 거라고 하냐!"

박민수가 화를 벌컥 냈다.

"이 영감탱이가 죽고 싶나! 그거 우리가 거기 흘린 거다! 찾으러 왔으니까 손 떼라!"

일곱 놈이 각목이나 쇠파이프,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있었다.

무기를 든 놈들이 박민수의 옆에서 문신을 자랑했다.

논 주인은 기가 죽었다.

"나쁜 새끼들…."

차우진이 물었다.

"야. 이게 너희 물건이라는 증거는?"

차우진은 지난번에 박민수의 사채 사무실을 습격해 신인배우 진소영도 구출했다.

그런데 그때는 보정 의류를 이용해 배도 집어넣고 체형도 좀 날씬해 보이게 만든 상태였다.

지금은 배가 나와서 그때와는 체형이 달랐다.

다만, 그동안의 활동으로 배가 좀 들어가는 바람에 예전보다는 체형 차이가 덜했다.

박민수는 차우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새끼는 뭔데 겁이 없지?"

아까 얻어터진 양아치가 얼른 보고했다.

"형님. 저 새끼가 그 새끼입니다. 저쪽 좁은 길에서 싸운 새끼요."

박민수가 차우진을 보며 히죽댔다.

"아. 좀 치는 새끼?"

차우진도 웃었다.

"내가 잘 치지."

"너 지금 우리 애들 안 보이냐? 다져지고 싶냐?"

성혜리는 조금 전에는 송미소의 준비성에 밀려서 논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도 뭔가 해야지!'

그녀는 장화는 없지만 다른 게 있다. 그녀가 바로 옆에 세워놓은 차의 트렁크를 열고 골프채를 꺼냈다.

"이거 쓰세요!"

차우진이 골프채를 넘겨받아 허공에 흔들어보았다.

"나도 이제 무기가 있네? 너 이거 맞으면 머리 깨진다?"

박민수가 비웃었다.

"미친 새끼. 겨우 골프채 하나로…."

송미소가 성혜리에게 항의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저런 어중간한 걸 주면 차 이사님이 위험해지잖아요."

"차 이사님은 골프 잘 치잖아요."

"그건 알지만 이건 골프가 아니라 싸움이에요."

"차 이사님은 사람도 잘 쳐요."

"네?"

성혜리는 압구정에서 차우진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었다.

"어머. 조사팀에서는 잘 모르시는구나?"

"뭘…."

"차 이사님은 골프채만 있어도 쉽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물론 혼자서는 위험할 테니까 우리도 무기는 있어야죠."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골프채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다들 이거라도 드세요."

농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는 이런 거는 좀…."

"어르신. 맨손으로 있다가 맞으면 더 아파요."

송미소도 일단 골프채를 하나 뽑았다.

승용차 문이 벌컥 열렸다. 한노성이 차에서 내리더니 박민수를 향해 화를 냈다.

"너 이 새끼. 일 처리 제대로 안 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저 새끼가 말을 안 듣고 저년도 괜히 나대서 상황을 파악하느라…."

차우진이 씩 웃었다.

'한노성이 왔으니까, 덫을 놓은 보람이 있다.'

한노성이 화를 벌컥 냈다.

"가서 내 물건 가져와!"

한노성과 같이 차에서 내린 두 놈이 차우진을 향해 걸어갔다. 차우진의 옆에는 금속 상자가 있다.

차우진이 경고했다.

"오면 다친다."

두 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차우진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중간에 구경하던 마을 사람을 지나쳐야 한다.

"어? 어?"

"비켜! 이 새끼야!"

한 놈이 마을 사람을 향해 야구방망이를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성큼성큼 걸으며 골프채를 앞으로 쭉 뻗었다. 골프채의 금속 헤드가 야구방망이를 쳐서 밀어냈다.

"어?"

차우진이 골프채를 옆으로 뻗었다가 수평으로 휘둘렀다. 헤드가 적의 옆구리에 깔끔하게 꽂혔다.

"끄악!"

목격자가 이렇게 많은 곳에서 적을 죽일 수는 없다. 중상만 입혀도 나중에 번거로워진다.

그래서 차우진은 힘을 조절해서 때렸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옆구리를 맞은 적이 몸을 웅크렸다.

"끄아아…."

차우진이 적의 머리를 골프채 헤드로 툭 쳤다.

맞은 놈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른 놈이 뒤늦게 쇠파이프를 높이 들었다.

"이 새끼가!"

차우진이 골프채로 상대의 가슴을 푹 찔렀다. 금속 헤드가 적의 명치에 꽂혔다.

"컥!"

적이 쇠파이프를 떨어뜨리고 비틀거렸다. 차우진이 골프채로 공을 치듯이 놈의 다리를 쳤다.

"아악!"

그놈도 옆으로 넘어졌다.

두 놈은 기절하진 않았지만, 충격이 커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노성이 차우진을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너 뭐냐? 검도 선수냐?"

"내가 골프를 좀 쳐."

"그래서 골프채를 잘 다루나? 그런데 너 혼자서 되겠냐?"

차우진이 골프채를 어깨에 턱 걸치고 상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여기 우리 편 많은데?"

마을 사람들이 골프채를 들고 서 있었다. 방금 얻어맞을 뻔한 마을 얼른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송미소와 성혜리도 있었다.

한노성이 비웃었다. 부하들이 무기를 단단히 쥐고 한노성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그런 시골 촌놈들이 우리 애들 상대나 되겠어?"

차우진이 갑자기 놀란 시늉을 하며 한노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너 한노성이구나!"

한노성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네가 나를 어떻게 알지?"

"오동케미컬의 실질적 오너잖아. 회사에서 시장조사를 하다가 네가 누군지 알게 됐지."

한노성이 소리를 질렀다.

"그 회사가 왜 나를 조사해!"

"네가 아니라 시장조사를 했다니까?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네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이제 많아졌네? 그런데도 계속 덤비게?"

한노성의 눈빛이 독해졌다.

"씨발. 다 죽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돼."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집단으로 살해당하면 특별수사본부가 생긴다? 그럼 너 빠져나갈 수 있겠냐?"

"이, 이 새끼가…."

차우진은 금속 상자를 골프채로 툭툭 쳤다.

"여기 든 게 그렇게 중요한 거냐?"

"이 새끼가 내 물건을…."

"아. 맞다. 자물쇠 이미 부숴놨지."

"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잘라놨는데."

차우진이 가방을 벌컥 열었다.

한노성이 소리를 질렀다.

"안돼!"

"이야아. 이게 다 뭐야?"

차우진이 한노성을 보며 히죽 웃었다.

"너 장물도 취급하냐? 약도 있네? 이건 총이야? 이거 종합선물세트다?"

가방 안에는 보석 목걸이나 반지 같은 귀금속과 금괴 몇 개, 대량의 알약, 그리고 6연발 리볼버 권총이 들어있었다.

서류 봉투도 하나 있었다.

"총이 있네? 이거 쏘면 총알이 나가나? 쏴볼까?"

한노성이 욕을 했다.

"야 이 새끼야! 거기엔 총알이 없어!"

"그걸 아는 걸 보면, 이게 네 물건이 확실하구나?"

"뭐?"

"그런데 너 이 소리 아직도 안 들리냐?"

"소리라니?"

"사이렌 소리."

한노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우진의 말을 듣고 나서 귀를 기울이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였다.

"신고? 언제? 휴대폰을 꺼내는 놈은 못 봤는데?"

"내가 여기 오다가 이상한 놈들한테 습격을 당했네? 여기 왔더니 논에서 이상한 상자가 나오네? 그래서 신고했지. 네가 오기 직전에."

그는 한노성 패거리의 차가 오는 걸 인지하자마자 경찰에 신고했다. 112 신고는 문자로 해도 된다.

한노성이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일단 가방부터 빼앗아!"

그의 부하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칼을 꺼내는 놈도 있었다.

차우진이 들고 있던 골프채를 창처럼 집어 던졌다. 빨랫줄처럼 직선으로 날아간 골프채의 단단한 금속 헤드가 선두에서 다가오던 놈의 이마를 때렸다.

"켁!"

그놈은 뒤로 넘어지며 들고 있던 칼도 바닥에 떨어졌다.

차우진이 앞으로 걸어가며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재장전."

무슨 말인지 눈치챈 송미소가 얼른 따라가서 들고 있던 골프채를 차우진의 손에 올려놓았다.

차우진이 그 골프채를 다시 던졌다.

두 번째 놈도 뛰어오다가 골프채를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성혜리도 상황을 깨닫고 얼른 골프채를 차우진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올려놓은 건 퍼터였다.

차우진이 골프채를 던지려 했다. 달려들던 놈들이 움찔하며 멈췄다.

차우진이 던지는 시늉만 하며 말했다.

"시간 없을 텐데 어서 들어오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박민수가 급히 한노성에게 말했다.

"회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박민수는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고 있다. 지금 체포되면 구속을 피할 수 없다.

한노성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씨발! 철수해! 현장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차우진의 옆에는 머리를 얻어맞은 놈이 넘어져 있었다. 차우진이 그놈을 발로 툭툭 찼다.

"야. 너네 두목 도망친다."

"컥!"

그놈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차우진이 왼손으로 그놈의 옷을 잡았다. 초소형 위치추적기 하나가 그놈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차우진이 그놈을 툭 밀었다.

"가라."

먼저 덤볐다가 엎어진 두 놈은 그동안 정신이 들 정도로는 회복했다. 하지만 제대로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놈들이 비틀거리면서 자기들이 타고 온 승용차로 도망쳤다.

경찰차 소리가 가까워졌다.

다른 놈들도 허겁지겁 승합차에 올라탔다.

차우진의 승합차 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칼이 발끝에 걸려서 앞으로 툭 움직였다.

송미소는 당황했다.

"앗! 칼로 찌르는 건 안 되는데…."

성혜리는 오히려 응원했다.

"뒷일은 우리 회사 법무팀에 맡기고 저질러버리세요!"

한노성이 탄 승용차는 이미 출발했다.

승합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박민수가 머리를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아직 끝난 거 아니다!"

차우진이 골프채를 어깨에 걸친 채로 말했다.

"야. 경찰 오는데 그런 소리 할 시간이 있냐?"

"씨, 씨발! 왜 아직도 출발 안 해!"

"시동이 잘 안…. 아! 걸렸습니다!"

경찰차가 더 가까워졌다. 박민수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

승합차가 출발했다.

차우진이 먼저 출발한 승용차를 보았다. 그 차에 한노성이 타고 있다. 주머니에 위치추적기가 들어있는 부하도 그 차에 있다.

'한적한 곳으로 튀어야 일이 편해지는데.'

잠시 후에 경찰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한 대였다.

차우진이 승용차를 보며 생각했다.

'순찰차 한 대 정도만 먼저 올 줄 알았는데?'

승용차에서 형사들이 내렸다. 가끔 이 동네를 확인하던 형사들이었다.

'마침 근처를 조사하고 있었구나.'

형사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성혜리가 도망치는 차량 두 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놈들 아주 나쁜 새끼들이에요! 잡아주세요!"

송미소는 금속 상자를 보여주었다.

"저놈들은 이 상자를 빼앗으려고 왔어요."

형사가 내용물을 확인했다. 알약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귀금속과 권총만 봐도 범죄와 관련된 물건이 확실해 보였다.

형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거 어디서 난 겁니까?"

"저 논에 묻혀 있던 거예요."

그 형사들은 평소에도 이 마을에 들러 한 번씩 둘러보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제 여기서 딥어스테크가 탐지기로 지하를 조사했다는 걸 알고 있다.

"진짜로 여기에 금이 있었군요. 금광은 아니라 금괴랑 금 장신구이지만."

같이 온 경찰이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했다.

형사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작곡가라고 들었는데, 여기에는 왜…."

167. 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