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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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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그만."

목구멍으로 계속해서 찐득한 피가 넘어갔다.

이미 위장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만하거라."

내가 요리에 적용한 감각은 [지독한 목마름].

고통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목이 말랐다.

"그,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서로의 피를 탐하기 시작하고.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 본녀가 잘못했노라. 그러니, 제발 그만."

"...."

"피는 밤의 귀족의 영혼이나 다름없단 말이다. 그걸 다 가져가면, 나는. 나는."

거칠게 끌어안은 여왕의 몸에서.

점차 힘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아... 사라져간다. 본녀의 피가. 본녀의 존재가...!"

"...."

"이,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태양의 아래에서 죽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는...!"

서로가 흡혈을 주고받은 결과.

더 많은 힘을 취한 것은.

"사, 살려다오."

[절대 미각]의 효과를 받는 내 쪽이었다.

"본녀가 잘못했다, 사과하겠노라! 그러니. 제발...!"

"...."

"살려 다오, 제발. 아니.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힘이 빠진 탓일까.

아니면 공포에 질려서일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목숨만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가며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하는 여왕.

하지만.

'목말라....'

아쉽게도.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 있을 만한 정신이 없었다.

[지독한 목마름의-]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애타는 갈증을 해소하는 것.

[주의!]

[지나치게 많은 흡혈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뭔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도 같았지만.

갈증을 해소하느라 바쁜 와중에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더욱 더 힘을 줘서 피를 빨아들였다.

"시, 싫어어... 엄마. 아빠..."

꿀꺽.

"살려 주세요, 흑... 살려 주세요. 훌쩍."

꿀꺽.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

.

.

이윽고.

살려 달라고 비는 목소리조차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꿀꺽....

어둠 속에서.

목 넘김 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 * *

[그림자 장막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력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그림자 장막이 취소됩니다.]

정신없이 갈증을 해소하고 있던 도중.

그런 메시지가 보인 것 같았다.

그리고 곧.

팡!

강한 압력과 함께, 내 몸이 어딘가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몸.

그렇게.

[그림자 장막]의 세계에서 추방당하기 직전.

나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름다운 핏빛의 바다.

'과연. 위에서 보면, 저렇게 생겼었나.'

그리고, 그 핏빛의 세계 위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요새.

아니.

요새라기보단.

'요새 도시....'

언젠가 세계가 멸망한다고 한들.

결코 무너지지 않은 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그래.

마치 방주와도 같은....

[식재료 감별(강화)]

[기동요새 - 비마나]

나의 성채였다.

* * *

정신을 차리자.

"아, 아아...! 보십시오!"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광휘를 내뿜고 있는 군단의 병사들과, 투박한 벙커의 풍경.

'아.... 밖으로 나온건가.'

한 손에는 내가 계속 빨아먹고 있던 여왕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

'—? —! ————."

주변의 병사들이 뭐라 뭐라 떠드는 게 들려왔다.

'뭐라는 거야.'

하지만.

내용을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 여왕의 피를 빨아들이는 데에만 집중했던바.

도통 정신이 없었다.

'제기랄. 목말라 죽겠는데 시끄럽게.'

여전히 이 갈증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

이대로 가다간 무심코 병사들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안 되지.'

나는 병사들을 무시혹 구석의 벽으로 몸을 옮긴 뒤..

벽면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병사들을 보면 물어뜯고 싶어지니.

아예 병사들이 보이지도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목은 여전히 마르고.

너무 많은 피를 빨아들인 탓에 입 안에서는 불쾌한 쇠 냄새가 난다.

정신적으로는 당장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군 생활...."

정말이지.

어떻게든 살아남긴 한 듯하니 다행이다만.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개빡세네...."

84화 피로 만든 요리

전투가 끝난 뒤.

군단의 병력들은 벙커의 수색에 들어갔다.

혹시 숨어 있는 잔당이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차 조사해 본 것인데.

"사, 살려...."

한 구획에서 살아 있는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엔 뱀파이어의 잔당 같은 게 아닌가 싶었으나.

[식재료 감별(강화)]

[영장류 - 인간종]

정말로 멀쩡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여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쪽에도...."

그 숫자가 생각보다 꽤 많았다.

"훌쩍...."

"이젠 안전하니. 진정하십쇼.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지낼 곳을 안내해 준다고 하더니 우리를 이쪽으로 안내했소. 다른 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그건 대충 알 것 같았다.

'뱀파이어가 됐거나, 아니면 뱀파이어의 먹이가 됐거나.'

우리가 의아한 것은 하나.

뱀파이어도, 뱀파이어의 먹이가 되지도 않은 이 사람들은 대체 뭔가 하는 것이였는데.

"그 괴물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무슨 얘기를?"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간 목장'을 만들 예정이라고."

"허."

"거기에 쓰기 위해 따로 빼놓은 이들이니 죽지 않게 잘 관리하라고 하더군요."

인간 목장이라.

인간을 먹이로 보는 녀석들이라고 하나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사람들은 저희가 데려갈게요."

"아. 맡겨도 되나?"

"네. 저도 생존자 출신이기도 하고."

생존자들을 향해 다가가며 말하는 정수아.

"자신들이 어떻게 될 뻔했고, 누구에게 구원받은 건지. 잘 설명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 뭐. 잘 부탁해."

"네!"

구출한 생존자들은 우리 부대에 합류하거나.

혹은 부대 근처에 자리잡은 생존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면 되겠지.

그러던 중.

"히, 히익. 살려..."

"이것도 생존자입니까?"

"아니. 이번엔 뱀파이어 맞네."

기절해 있다가 최근에야 정신을 차린건지.

구석에 숨어 있던 뱀파이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끼엑."

녀석을 처치한 순간.

[길드, '강원도 생존자 연합'을 전멸시켰습니다.]

[인간종 최초로 길드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오?"

시스템이 그 사실을 인지했다.

[앞서가는 이들을 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전 길드원에게 [성장의 비약]X10이 주어집니다.]

[성장의 비약]

[일정 시간 동안 경험치 습득률이 500%가 됩니다.]

'성장의 비약. 그러고 보니 이런 것도 있었지.'

극 초창기에도 보상으로 받았던 적이 있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부대원들은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용했던 걸로 알고 있다.

효과는 꽤 알차다는 듯.

나야 레벨업이 급한 상황은 아니니 일단 가지고 있도록 하자.

이것도 [식재료 감별]을 통해 재료를 알아낸다면, 언젠가 양산해 낼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맙소사. 성장의 비약까지."

"보상이 나쁘지 않군요."

"그러게. 뭣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벙커를 얻은 게 가장 중요한 성과가 되겠지."

"예?"

"왜, 뱀파이어 녀석들이 흘린 소문 있잖아."

이곳 근처에 많은 무기와 식량을 가진 그룹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찾고 있다.

우리가 낸 소문은 아니다만.

많은 무기와 식량을 가지고 있고, 믿을 만한 동료를 찾고 있는 그룹.

"그거. 우리도 얼추 해당되지 않아?"

"아!"

일대의 생존자들은 슬슬 숨어 지내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대형 그룹에 합류하고자 하고 있다고 했지.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다.

군단에 대한 소문.

그리고 벙커에 대한 소문.

그런데 여기서 그 두 선택지를 모두 우리가 먹어 버렸단 말이지.

일대의 생존자들을 모두 우리를 찾아오게 될 터.

투배럭을 돌릴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소문 흘리느라 꽤 고생들 했을 텐데. 그 덕은 우리가 보는 거지."

"큭큭. 나쁘지 않군요."

"우리가 파괴한 초소들의 위치는 다시 생각해 봐도 나쁘지 않았어. 공병들을 파견해서 그 위치에 초소를 복구하고. 병사들 일부를 이쪽으로 옮긴다."

"예."

"한동안은 부대와 벙커를 오가는 길을 청소하는 데 집중해야 할 거다."

인간의 피를 식량으로 삼는 뱀파이어.

녀석들이 세력을 더 넓히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는 생각에 강행한 침공이였다.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한 일이었을 뿐인데.

비약에, 벙커까지.

이 정도로 보상이 쏠쏠할 줄이야.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국, 동맹 세력을 얻기는 실패한 셈이네요."

이상아 조장이 말한 대로.

애초에 내가 이들을 방문한 이유는 '군내 정벌을 위한 동맹 세력 탐색'이었다.

군내를 정벌하기 위한 전력을 키우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다른 이들과 힘을 합치려는 거였다만.

'300명 이상의 각성자.... 이 녀석들이 뱀파이어만 아니었다면.'

전차까지 손에 넣은 우리다.

어떻게든 군내 정벌에 성공했을 터.

하지만 녀석들이 뱀파이어.

인간의 적이었던 이상 아쉬워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

군내 정벌은 차근차근 레벨을 올리고 각성자들을 늘려 가며 전력을 키운 뒤에 시도해야겠지.

"...음."

하지만.

그건 좀 아쉽단 말이지?

* * *

"그들은 훌륭한 아들이자...."

뱀파이어들과의 전쟁.

그 후처리까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뒤.

탄약대대의 뒷산에서 작은 장례식이 치뤄졌다.

'첫 사망자들.'

산속의 부대에 있을 때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정착하기까지.

온갖 전투를 겪었으나 지금까지는 기적적으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사망자가 생기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기도 했지.

하지만 이번 전투는 조금 달랐다.

우리보다 수적으로 우위인 적들.

그렇다고 전투를 피하기에는 저들의 세력이 커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으니.

위험한 전투가 될 것을 알면서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탓.

"신 병장님의 요리로 전력 차이는 대부분 메꿔졌지만, 그래도 병사 한 명이 뱀파이어 둘 이상을 상대해야 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쇼."

"나중에 합류한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사망자가 없었다는 게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인걸요."

장례식을 바라보는 내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남들은 저렇게 말해 주긴 했다만.

'내 요리가 좀 더 강력했다면... 아니. 진작에 뱀파이어들보다 더 많은 부대원들을 확보했더라도 많이 달라졌겠지.'

가정을 붙인다면 끝도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쉬운 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 부대 주변에 자리 잡기 시작한 생존자들 사이에 목사 출신이 한 명 있었다는 것.

종교에는 관심이 없지만 장례 절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컸다.

군종병에게 맡겼던 지난번과 달리.

약식이긴 해도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겠죠?"

"그렇겠지."

423대대부터 함께한 부대원들은 꽤 상심한 반면.

"...또 사람들이 죽었군."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쉽게 됐어."

부대 출신이 아닌 나중에 합류한 생존자 출신의 길드원들은 비교적 덤덤한 태도였다.

그들이 남보다 무신경해서가 아니다.

'익숙해진 거지.'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죽어 나가는 시대.

운 좋게 승승장구해 온 우리와 달리.

그들은 진작부터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비극을 경험해 왔을 터.

그렇기에 경험으로 알고 있는 거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잃는 일이 생길 것이고.

그 죽음에 매몰되어서는 자신이 바로 그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

'내가 죽으면, 먼저 죽은 녀석들을 기억해 줄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이니까.'

앞으로도 우리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그게 먼저 죽은 녀석들을 위한 일이 되겠지.

* * *

그리고.

그 살기 위한 발버둥의 일환으로써.

나는 식당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부대원들의 식사는 얼추 끝난 뒤.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특식'이다.

"아, 따가워."

그것도.

조금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 특식.

재료 준비에만 며칠이 걸렸다.

제대로 써보는 것은 처음인 재료.

조금 긴장되긴 한다만.

"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결과물은 의외로 준수하게 나왔다.

완성된 요리를 든 나는 탄약대대 구석의 한 건물을 향했다.

건물의 입구를 지키며 서 있던 병사가 나를 보고 인사해 왔다.

"어서 오십쇼, 신 병장님."

"오냐. 안쪽은 이상 없고?"

"예. 근데 신 병장님? 그 손은 무슨 일입니까?"

"아. 이거?"

병사가 가리킨 것은 내 왼쪽 팔.

손목 부근에 붕대가 말아져 있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뭐. 신 병장님 하시는 일이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내가 뭐 대단하다고. 아무튼. 문 좀 열어 주라."

"옙."

이곳의 용도는 일종의 '포로 수용소.'

이전에 사로잡은 뱀파이어 녀석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둬 둔 장소다.

그때 그 녀석은 이미 처리된 지 오래.

"안녕하십니까."

지금 그 자리에는 다른 포로가 앉아 있었다.

"준남작... 각하?"

"...힉!"

"아니, 경인가? 공? 뭐라고 불러야 하지?"

얼마 전까지 300의 뱀파이어 무리를 이끌던 수장.

자칭 '여왕'님이었다.

'원래는 죽일 생각이었는데.'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빨아들일 생각이었다만.

어느 정도 피를 빨아들이자.

이 녀석의 마력은 [그림자 장막]을 유지하지 못할 지경까지 가 버렸다.

거기서 튕겨 나오며 정신을 차린 덕에.

이 여왕님은 죽기 직전에 목숨을 건지게 된 것.

다만.

이전과 달리 그녀의 몸에서 두려운 기운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던 금발은 푸석푸석해지고, 피부도 묘하게 갈라져 있었다.

'밤의 귀족들은 피를 먹고 권속을 늘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지?'

그 피는 내가 다 빨아먹었고.

권속들도 나와 병사들이 전부 제거했으니.

약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보, 본녀에게 무슨 볼일이더냐."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좀."

"어차피 본녀를 조롱하려는 속셈 아닌가!"

눈치가 빠르긴 하네.

그녀가 바닥을 보며 흐느끼듯이 말했다.

"본녀의 존재를 그만큼 앗아 갔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

"...."

"제발. 더는 본녀를 괴롭히지 말아다오...."

존재를 앗아갔다, 라.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능력치]

[힘 32 → 37]

[민첩 : 49 → 53]

[마력 : 39 → 49]

[행운 : 30 → 35]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스탯.

전부 이 괴물을 흡혈한 덕에 얻은 성과였다.

'흡혈로 인한 능력치 상승은 일시적인 줄 알았는데.'

권속이라던 녀석들이 사용하던 [하급 흡혈]의 경우.

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야만 영구적인 능력치 상승이 가능하다던가..

하지만 여왕이 지니고 있던 특성, [흡혈]은 조금 다른 건지.

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귀족의 피를 죽기 직전까지 빨아들인 덕에.

능력치가 급격하게 성장한 것.

말 그대로 그녀의 존재를 앗아 간 셈이다.

하지만.

"팍 씨. 이게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그, 그럴 생각은 아니었느니라."

무려 인간 목장까지 만들려고 한 녀석.

동정심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 녀석은 인간들을 사냥한 이유를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했다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

살아남기 위해 이 녀석의 존재를 빨아들인 셈이니까.

"그래도 뭐. 덕분에 능력치가 많이 오른 건 사실이지."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게냐."

"그러니. 보답을 좀 해 주려고."

"...?"

의아해하는 그녀의 앞에.

내가 가져온 '특식'을 내려놓았다.

"이건. 무어냐?"

"아. 모르나?"

[중급 요리사의 정성이 들어간 극상의 행복의 선짓국]

"선짓국이라고 하는 건데."

"무언가의 요리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나는 뱀파이어다.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먹는 음식이 다르다."

"아. 선지가 뭔지부터 설명해야겠네."

피를 받아서 가만히 두면, 아래쪽에 굳은 덩어리와 위쪽의 투명한 액체로 나뉜다.

위쪽이 혈청, 아래쪽이 혈병....

즉, 피떡인데.

이 피떡을 요리에 쓰면 그게 바로 선지가 된다.

새삼 생각해 보면 꽤 기괴한 재료긴 한데.

한국에서는 꽤 일반적인 요리 재료이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다만. 이걸 먹으라는 게냐."

"잘 아네."

"알겠다. 네 말을 따를 테니, 제발 더 이상의 고통은 그만...."

고통이라니, 아쉬운 말을 하는구만.

내가 네게 줄 것은 고통 따위가 아니다.

"...이 맛은, 대체!"

극상의 행복.

"맛있다, 맛있어...!"

"그 정도로 맛있냐?"

뱀파이어는 피를 주식으로 삼는 만큼.

혹시 선지를 요리해 주면 잘 먹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떻게 통한 모양.

"천상의 맛이다. 오래된 피는 비릿해서 맛이 없는 게 일반적이거늘. 이 맛은 대체...!"

그야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히 엄청 맛있겠지.

'아. 그게 전부가 아니구만.'

그야.

누가 재료가 되어 준 요리인데.

당연히 엄청 맛있어야지.

"하아아...."

[극상의 행복]에 취한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풀렸다.

이 표정.

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김 중위.'

김 중위.

그리고 우리 부대를 찾아왔던 범죄자들.

내가 여왕에게 먹인 요리는 선짓국에서 끝나지 않았다.

[블랙 푸딩]

[해기스]

[피순대]

[미쉐까오]

[슈바르츠 자우어]

등등.

며칠에 걸쳐.

요리책을 뒤져 가며 선지가 들어가는 요리란 요리는 모두 찾아서 대접했다.

"...하아아아."

그때마다.

극상의 행복 속에서 몸부림치는 '여왕.'

그렇게 며칠 정도 요리를 제공했을까.

어느 날.

다음 요리를 먹이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하하... 하하하하!!!"

건물 안에 있던 여왕이 미친 듯이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하하하...! 멍청하긴!"

"갑자기 뭔 소리래."

"힘을 잃은 밤의 귀족에게, 피로 만든 요리를 줘!? 그것도 하필이면...!"

팍! 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는 그녀.

"자신의 피를 써서 만든 요리를!"

85화 권속 (1)

"힘을 잃은 밤의 귀족에게, 피로 만든 요리를 줘!?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피를 써서 만든 요리를!"

나를 가리키며 말하는 그녀.

"음? 내 피인건 어떻게 알았대."

"한번 맛본 피의 정체를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녀의 말대로.

그녀에게 제공한 선지를 이용해 만든 수많은 요리들.

거기 쓰인 피는 모두.

'내 피지.'

몬스터의 고기는 대부분이 냉동상태.

신선한 피를 뽑을 수가 없기도 했고.

그렇다고 병사들한테 헌혈을 받기도 뭐하잖아.

사용된 피가 상당했던 만큼 의무병에게 꽤 도움을 받긴 했다.

중간부터는 빈혈에 좋다는 요리를 만들어서 직접 먹기까지 했지.

"안 그래도 네놈의 피는 질이 좋았지. 거기에 본녀의 피를 다 빨아 갔으니."

"맛있었냐?"

"엄청나게 맛있었다. 단순히 피의 질이 좋다는 거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의 극상의 맛....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행복해지는 그 맛이란...."

아무리 내가 요리사라지만.

눈앞에서 이렇게까지 극찬을 늘어놓으면 좀 부끄러운데.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팍!

여왕의 몸을 묶고 있던 굵은 사슬이 가볍게 끊어졌다.

안 그래도 질이 좋다는 내 피를 정성껏 요리까지 해서 먹었으니.

힘이 회복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본녀에게 피를 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큼 힘을 회복한 이상.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게다."

"그래?"

"어떻게 뱀파이어의 권능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본녀가 패배한 것은 서로의 피를 탐하는 대결에서였지. 평범한 전투라면 네놈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 본녀의 피를 빨지 못하도록 이빨을 모조리 박살 내 주마. 네놈은 권속이 아닌 노예로..."

"그러길 바란다면, 뭐...."

힘을 회복하면서 자신감을 되찾은 건지.

위풍당당하게 외치는 여왕.

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뒤.

"먹든가."

목덜미를 들어내고.

그녀의 앞에 들이밀었다.

깨물기 아주 좋은 위치에.

"...무슨 속셈이지?"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하는 여왕.

"속셈은 무슨. 날 권속으로 만들 거라며. 내 피는 맛있다고도 했고. 그러니까 한 입 크게 하시라고."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본녀가 위축되리라 생각했다면-!"

"아. 근데 이거 하난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이빨이 내 목의 혈관을 찢고 들어가기 직전.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기로 했다.

"날 권속으로 만들면, 내 요리 다신 못 먹을걸."

"...?"

그건 대체 무슨 소리냐, 하는 듯한 눈빛.

조금 자세히 설명해 줘야겠네.

"네가 부하로 삼은 권속들."

"네놈들이 모조리 죽여 버린 그 아이들 말이더냐."

"어. 그 녀석들을 좀 살펴봤는데 말이지. 직업이 하나로 통일돼 있더라."

"...그건."

뱀파이어라고 묶어서 부르긴 했지만.

개중에는 마법을 쓰는 녀석, 칼을 쓰는 녀석, 활, 창, 도끼를 다루는 녀석 등.

다양한 전사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직업은 하나.

"전부 뱀파이어 나이트였지."

기사는 본래 활도 쏘고 창도 쓰고 칼도 쓰는, 종합 전투인 같은 느낌이니.

"아마 너의 권속이 되면 나도 뱀파이어 나이트가 되는 거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내 말이 맞을걸."

내 요리의 맛은 내가 '중급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

요리사의 특성과 스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요리다.

뱀파이어 나이트로 바뀐다면 전투 능력은 올라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만들어 준 저 요리들은 아마 다시는 맛보지 못할걸."

"인간들이 겪는 각성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듣긴 했다만...."

"뭐. 내가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고."

다시 목을 들이밀며 말했다.

"츄라이 츄라이."

"...."

"내 요리를 못 먹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날 권속으로 만들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그러나.

"...크윽!"

내 목에 닿아 있는 이빨은.

그 이상 내 피부를 파고들지 않았다.

"왜 안 물어? 지금이라면 어렵지 않을 텐데."

"네 놈...!"

"내 몸의 피를 전부 다 빨아들이고, 거기에 네 피를 집어넣으면 권속이 된다며? 자. 어서."

"시, 싫다."

오히려.

목을 들이미는 나를 살짝 밀치는 그녀.

"이, 이렇게 하자꾸나."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듯.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그녀.

"널 권속으로 만들지 않겠다. 거기에 더해 너희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마."

방향성은 대충 맞았는데.

"그 대가로, 네가 만든 요리를 주기적으로 제공하거라. 어떠냐?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얘기 아니더냐."

"에이. 그건 아니지."

좀 더 가 주셔야겠다.

"내가 너한테 요리를 해 줄 필요가 어딨다고. 적대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었지."

"...본녀를 놀리려는 것이냐!"

요리를 해 달라?

내가 요리하는 걸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대신, 조건이 있어야지."

"조건?"

나는 손가락을 뻗어 바닥을 가리킨 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복종할 것."

"...!"

이 녀석은 귀족급 뱀파이어.

평범한 인간도 권속으로 만들어, 각성자를 엄청난 속도로 늘릴 수 있는 존재.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진 뱀파이어들은 꽤 강력하다.

마땅한 장비가 없음에도 온갖 버프와 장비를 떡칠한 우리 부대 병사들과 맞먹을 정도.

'이번에는 [항마의 빛] 버프로 카운터를 치는 데 성공해서 그렇지. 일반적인 수준의 버프 요리였다면 우리 쪽이 졌을 거야.'

말도 안 되게 강한 거다.

거기에 우리 길드의 장비와 요리가 더해진다면 더욱더 강해질 터.

'그런 뱀파이어들을 양산하는 게 가능한 존재를 죽인다?'

너무 아깝잖냐.

동맹을 구하는 데 실패했으니.

이 녀석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어.

"내게 복종을 맹세해라."

"무, 무슨."

"그러면 네 식사는 내가 책임져 주지. 매 끼니 감동할 수밖에 없는 요리를 제공해 주마."

"큿...."

지금은 버티고 있지만.

확신한다.

김 중위에, 다른 범죄자들, 약탈자들까지.

이미 많은 이들이 거절하지 못한 제안.

아무리 대단하신 귀족이라고 한들.

이미 며칠이나 내 요리를 맛본 그녀다.

그 맛을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번에도 분명-.

"아, 안 된다."

...어?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안 된다고?"

이거 설마.

"...내 요리가 그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건가?"

자존심이 팍 상했다.

감히.

감히 내가 만든 요리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거부해?

"아무래도 일반적인 요리만 대접했더니 아직 맛이 부족하다 느꼈나 본데...!"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전력을 다해 만든 코스 요리를 먹여주마.

맛있어서 기절할 정도의 맛을 보여주면 생각이 조금은 바뀌겠-.

"그, 그런게 아니다!"

"?"

"본녀의 종족. 밤의 귀족은 마족에게서 비롯된 종족이니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 요리의 맛이 부족한 탓은 아니었나 보다.

"마족의 언어에는 힘이 깃들어있지. 하급 귀족이라고는 하나, 귀족인 본녀 역시 그 특성을 이어받았노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

"본녀가 하는 말에는 강제력이 생긴다는 게다."

즉.

"복종을 입에 담는 순간... 본녀는 절대 너를 배신할 수 없게 되겠지."

한번 복종을 맹세하면 절대 배신할 수 없다라.

그건.

"오히려 좋은데?"

"이, 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느냐! 본녀의 존재 자체가 네놈에게 귀속된다는 뜻이란 말이다! 그깟 요리 때문에 자기 존재를 남에게 바치라니. 그런 짓을...!"

"아. 그러니까."

다시 목을 내밀고.

"그게 싫으면. 내 피를 드시라고."

"크읏."

"너도 알겠지만, 나는 이 길드에서 완전 핵심 인사야. 나 하나만 권속으로 만들면 나머지를 권속화하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나한테 복종하는 게 싫다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

"...."

"선택하시죠. 여왕님."

내 목을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여왕.

진짜로 여기서 나를 권속 삼는다면 큰일이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감의 근거는 하나뿐이었다.

'누가 만든 요린데.'

남들이 들으면 터무니없이 빈약한 근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한 근거.

그리고, 내 생각대로.

"본녀가 복종을 맹세했다고 치자. 그때 가서 요리를 제공한다는 약속을 어기진 않겠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맹세하거라!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겠노라고!"

"아, 맹세한다고요."

부대원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취사병인 내 책임.

부하로 들어오게 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거 하나만큼은 제대로 챙겨 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후우."

그녀는 수치심에 몸을 떨며 무릎을 꿇은 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시조 벨라트릭스의 먼 후예이자, 카르슈타인 혈족의 준남작. 아리엘라 카르슈타인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그녀가 맹세를 입에 담은 순간.

술렁-

주변의 공기가 크게 출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력의 진동.

그녀의 맹세에 호응한 마력이 크게 일렁이며 나와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 현상의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족의 언어에는 힘이 깃들어 있지.]

이게 그녀가 말한 그 힘.

이제부터 그녀가 입에 담는 맹세는 강제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받아들이지."

무릎을 꿇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대답한 순간.

띠링.

[이계의 존재가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권속을 획득합니다.]

[소유중인 권속 (1)]

[뱀파이어 준남작 - 아리엘라 카르슈타인]

[카르슈타인 혈족의 수장, 이자벨라 대공의 선택을 받은 밤의 귀족입니다.]

[혈족으로서의 서열은 말석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권속입니다.]

[권속을 소중하게 대하고, 키워 보세요!]

[당신의 보조에 따라 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의!]

[권속이 모종의 사유로 힘을 크게 상실한 상태입니다.]

[권속은 당신의 신체 일부와 같습니다!]

[권속의 상태를 세심하게 신경 써 주세요!]

그녀가 나에게 완전히 종속되었음을.

시스템이 인정했다.

'게임에서 펫한테나 뜨는 문구 같네.'

그리고.

[업적 : 헤어날 수 없는 맛 (2)]

[요리를 통해 이계의 귀족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요리사로서 이룰 수 있는 업적 중에서도 상상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경지입니다.]

[경험치를 대량으로 획득합니다.]

[업적 보상으로, [최상급 식재료 : 잊혀진 성자의 성혈]이 지급됩니다.]

'업적까지?'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메시지를 읽던 도중.

내 눈앞에 미약한 빛을 내뿜는 새하얀 액체가 담긴 병이 나타났다.

얼마 전에 경험한 [항마의 빛]과 비슷한 느낌의 빛.

그 병을 품 안에 챙겨 넣으며 업적 메시지를 확인했다.

업적의 이름은 헤어날 수 없는 맛.

...(2)

(2)라는 건.

(1)의 업적도 있었다는 건데.

그걸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달성했구나."

이거, 그거다.

과거.

김 중위를 요리를 통해 굴복시켰을 때 달성한 업적.

[헤어날 수 없는 맛.]

당시의 업적 달성 조건은 '요리를 통해 한 사람을 지배하에 둘 것.'

(2)로 넘어오면서 '이계의 귀족을 지배하에 둘 것.'으로 조건이 바뀌었나.

조금 더 난도가 올라간 셈이다.

'잠깐.'

그때 얻었던 보상이 분명.

[최상급 식재료 : 아룡의 심장]이었지.

'그리고 그건, 능력치 물약의 제조에 들어가는 재료였을 터.'

그렇다는 건 설마.

[1,000pt를 지불합니다.]

나는 급하게 포인트 상점을 열어 능력치 상승의 물약 하나를 구매했다.

그리고 식재료 감별을 사용하자.

[정체불명의 재료 - ??%]

[아룡의 심장 - 10%]

[정체불명의 재료 - ??%]

.

.

.

[잊혀진 성자의 성혈 - 10%]

'역시!'

이번 보상 역시 능력치 물약에 들어가는 최상급 재료였다.

아룡의 심장을 포함하면 벌써 재료의 20%가 모인 셈이다.

이 재료들을 모두 모으는 순간.

능력치 물약을 내가 직접 요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우리 부대의 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겠지.

"아...."

그런 생각에 흥분하고 있자니.

내 앞에 무릎 꿇은 뱀파이어.

아리엘라가 묘한 탄성을 냈다.

"무슨 일이지?"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맹세 따윈 거짓이고 여기서 바로 반란을 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머릿속에서 울리던 상념이...."

상념?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었지.

"사라졌노라."

그렇게 말하는 뱀파이어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86화 권속 (2)

상념.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했었지.

"지난번에는 제대로 못 들었다만. 설명해 봐라. 그 상념이란 건 대체 뭐지?"

"본녀도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존댓말."

"...저도 그 정체는 잘 모르겠더군요. 이 세상에 내려온 뒤로 저를 계속해서 속박해 오던 의지... 라고 할까요."

속박이라니.

이만한 괴물을 속박하는 의지가 있었다고?

"정확히는 한 가지 명령이었죠."

"명령이라니."

"[인간종의 무력 시설을 침공하고. 점거하라.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인간종의 무력 시설.

즉.

"군부대?"

군부대에는 어째서인지 평범한 놈들보다도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났다.

강력한 괴물들이 죄다 전투광도 아니고.

우연히 군부대에만 나타날 리는 없으니.

어떤 존재의 개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류를 적대하고자 하는... 뚜렷한 악의.'

지금까지는 추측에 불과했던 상상.

"상념이 말하는 무력 시설이란. 그 동굴의 벙커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벙커.

정부의 벙커로써, 분명 군부대와 관련된 시설이었다던가.

"그걸 무시하면 어떻게 되지?"

"무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곳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 머릿속에 저 명령이 파도처럼 몰려들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금 벙커를 지키고 있는 처지였죠."

그 상상이 옳았다는 것을.

그녀가 확인해 주었다.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도, 계속해서 우리 부대를 공격하던 강철 리자드들.

큰 부상을 입고도 우리의 공격에 도망치지 않았던 아라크론의 거미 여왕.

남을 조종하는 강력한 이능을 가지고도 전차대대에만 머무르고 있던 눈알 괴물.

거기에.

눈앞의 이 뱀파이어 여왕까지.

이 녀석들이 멍청해서 군부대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의지가 개입한 거다.

"힘을 기르고자 한 이유 중에는 그 상념도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계속해서 힘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상념도 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상쾌함마저 어려 있었다.

"상관없어졌다는 건. 나에게 종속된 순간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건가?"

"네. 그 상념 덕에 편한 날이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머리가 깨끗한 기분은."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친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싱긋 웃는 그녀.

"남의 권속이 된다는 것도, 사실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내 권속이 된 것은 무척이나 꺼리던 그녀였음에도.

머릿속을 지배하던 상념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 권속이 된 것을 기뻐할 정도라니.

"못생긴 괴물이었으면 모르겠지만. 주인님 정도면 그럭저럭 제 취향인 얼굴이기도 하니."

"...."

...뭐.

자기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저는 이제 당신의 권속입니다."

그녀가 다시금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치욕에 몸을 떨던 이전과 달리, 상쾌하기까지 한 몸짓이었다.

"음."

"뭐든지 명령해 주시길. 나의 주인이시여."

뭐가 어찌 됐든.

이걸로 내 목적은 달성한 거나 다름없다.

"그럼 바로. 첫 번째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나는 품 안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이 근처의 지형을 적은 지도다. 그곳에 표시된 곳으로 이동하면 어떤 인간들이 자리 잡고 있을 거다. 각성자들의 비율도 꽤 높을 거야."

"...인간들이라. 이걸 저에게 건네셨다는 의미는,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지?"

"그들을 네 권속으로 만들어라."

내 명령을 들은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인간을 혈족으로 만드는 행위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싫어하는 거 맞아."

"그렇지만 방금 내린 명령은."

"정확히 말하면, '죄 없는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걸 싫어하지."

정령안을 통해 지상의 정보에 해박했던 정수아.

그녀는 이 일대에서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의 존재를 미리 파악해 두었다.

이건 그중 하나.

"그 위치에 있는 녀석들은 약탈자들이다."

"약탈자라."

"그중에서도. 특히나 죄질이 나쁜 녀석들이야."

다른 인간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은 물론.

남들을 노예로 삼기도 하고.

문명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표출할 수 없었던 욕망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하는 녀석들.

즉.

"너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쓰레기들이지."

"...저는 이제 주인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저와 비슷한 쓰레기들. 이해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이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가급적 빠르게 정리해야 하는 놈들이다.

녀석들을 토벌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하루가 늦어질수록.

다른 평범한 생존자들이 피해를 입을 테니까.

"그렇다고 죽이는 건 또 아깝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력이 소중한 시대니까."

지금까지는 내 요리를 통해 일일이 굴복시켰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효율도 떨어진다.

능력이 뛰어난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널려 있는 약탈자 놈들에게 일일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래 걸리는 방법.

그렇게 시간을 끌리는 사이, 다른 평범한 생존자들이 입을 피해는 늘어만 가겠지.

그러니.

솔직히,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지만.

"저라면. 그 쓰레기들을 손쉽게 재활용할 수 있겠군요."

"그런 거다."

동맹을 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권속을 불릴 수 있는 아리엘라를 굴복시킨 이상.

쓰레기 같은 약탈자들을 재활용.

어지간한 길드 수준의 세력을 휘하에 둘 수 있게 되겠지.

'문제가 있다면. 내 기분뿐.'

괴물에게 인간을 사냥하라고 하는 일이다.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괴물이 인간을 죽이는 꼴 만큼은, 보고 싶지 않던 나지만.

'언제까지고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수는 없다는 거지.'

이 녀석의 힘은.

사용한다면 엄청난 전력이 된다.

이런 세상이니만큼.

머지않아, 부대원들에게는 시킬 수 없는 더러운 일들도 생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뱀파이어들.

이 녀석들이라면, 그런 일을 맡기기에도 제격이겠지.

"최대한 빠르게 권속을 늘려라."

그렇기에.

나는 구역질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녀석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지금의 제 힘으로는 많은 권속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요. 주인님에게 빼앗긴 피가 너무 많다보니."

나름대로 이번 요리로 돌려주기는 했다만.

내 능력치도 많이 오른 만큼, 녀석의 능력은 많이 떨어진 것.

"지금 상태라면. 많아 봐야 100명 정도일까요."

"뭐, 그 정도면 적당하군."

어차피 제한이 없었다고 해도 그 정도 숫자만 유지할 생각이었다.

피를 먹는 뱀파이어들.

녀석들을 유지하기 위해선 피가 필요하다.

몬스터들의 피로 유지 가능한 병력은, 많아야 100인 정도일 테니까.

"그 후로는 약탈자들을 처리하더라도 권속들의 성장에 사용할 것. 추가적인 약탈자들의 위치를 알게 되면 그때그때 알려 주지."

"알겠습니다."

"근방의 악질들은 모두 네가 청소해 줘야겠다."

어차피 약탈자 제거는 언젠가 해야 할 일.

그녀가 청소와 재활용을 통해 주변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세력을 키우는 동안.

우리 부대 역시, 벙커와 탄약대대의 투배럭을 통해 생존자들을 영입.

길드의 규모를 키워 나갈 것이다.

"그러면, 말씀하신 인원을 채운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될지."

"그다음에는...."

잠깐 고민을 거친 뒤 말했다.

"다음 단계로 가야겠지."

* * *

그리고.

그로부터 2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부대도 놀고 있지는 않았고.

벙커와 탄약대대 사이의 길을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청소.

괴물들을 사냥함으로써 힘을 기르고, 부대 주변의 안전을 확보했다.

탄약대대의 대대장실에 앉아 있던 나를 찾아온 손님.

"끼잉."

"오. 까망이 왔냐."

지난번 전투에서는 이 녀석이 도움이 됐다

우리 화력으로도 뚫기 어려운 벙커에 구멍을 내준 것은 물론.

전성기보다 약해진 상태로도 뱀파이어 몇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 줬지.

그 공을 인정받은 결과.

자재 창고를 집으로 삼고, 그 바깥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끼이잉!"

영역 동물이라서 그런가?

탄약대대를 떠나진 않고, 안쪽에서 잘 돌아다니더라고.

다른 부대원들과도 꽤 친해졌지만.

아무래도 심심할 때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오곤 한다.

발에 머리를 비벼 대는 녀석.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개냥이다.

"...야. 까망아."

"낑?"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막. 머릿속에 이상한 명령 같은 게 박혀 있고 그러냐?"

"???"

"아니, 됐다. 내가 뭘 묻는 거람."

그동안 의심만 하고 있던 것이 얼마 전에 확신으로 바뀐 뒤.

나는 꽤 심란한 상태였다.

'인류를 적대하는 악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의지가 괴물들을 조종해, 인류의 무력을 먼저 제거했다.

멀쩡하던 세상에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나 문명을 파괴해 버렸다.

그 '멸망의 날' 역시.

저 악의와 무관하지는 않겠지.

내 목표는 나와 부대원들의 생존이다.

고향에 있을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다던가, 여러 가지 목표도 있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생존.

하지만 인류를 적대하는 악의의 존재가 확실하게 된 지금.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악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 강력한 괴물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박아 놓은 존재.

신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그 악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

"갈 길이 멀구만...."

한숨만 나온다.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눈치챘다고 해도.

그렇게 초월적인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솔직히 감도 안 잡힌단 말이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쎄다.

"시스템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 정도인가."

정체불명의 시스템.

하지만 우리를 죽이려 드는 괴물들과 달리, 일단 시스템은 우리에게 살아남기 위한 힘을 주었다.

던전을 발견했을 때는 던전의 존재에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그 안내를 따라가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까망이 녀석을 쓰다듬고 있자니.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한 병사가 대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음? 무슨 일이야?"

"은인께 질문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정수아.

정령을 통해, 우리 부대의 위기를 파악한다는 중요한 업무를 맡은 병사였다.

"최근에 부대의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조금 느슨한 편제긴 하지. 너는 마법사조에 들어가 있는 거로 돼 있던가?"

나는 조금 머리를 굴린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능력을 생각하면 마법사조는 이상하긴 하군. 정찰조 같은 걸 따로 만들어서-"

"아뇨. 그것도 그거지만. 묻고 싶은 건 그 부분이 아니라."

"음?"

"군단장님의 직속 부대가 없더군요."

전사조장, 전광일.

마법사조장, 이민재.

사수소장, 서수혁.

생산직은 이상아, 이공우, 그리고 박씨 할아버지 3인.

그들 모두가 내 휘하에 있다고는 하나.

내 직속 부대가 없기는 하다.

나야 일단 군단장이니 관여는 하지만.

조장들의 권위는 존중해 주려고 하는 편이고.

"군단장님의 위치나 중요성을 고려하면. 직속 부대... 친위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흠."

"지원자를 모집한다면 많은 이들이 모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드는 이들이 있었다.

"저 역시, 그중 한 명이고요."

나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정수아.

나를 은인이니 뭐니 하는 명칭으로 부르는 여자니까.

아무래도 내 친위대에 지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슬쩍 고개를 뻗어 뒤를 보자.

문밖에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병사들도, 너하고 같은 의견인가."

"네."

정작.

그중에 423대대 시절부터 함께한 부대원들은 적었다.

'친위대 같은 얘기가 나오면 나랑 사적으로 친한 사람들이 먼저 지원하지 않나? 조금 의외네.'

밖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본 결과.

나와 말 한마디 나눠 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지상에서 합류한 생존자들.

특징이 하나 있다면....

약탈자나 뱀파이어들.

그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구출된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우연인가?'

그들이 보내는 선망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친위대라.

나쁘지 않은 얘기긴 하다만.

"각하다."

"어째서입니까? 저희는 모두 군단장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언제나 내게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리던 정수아였으나.

이 결정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반발하는 모습.

그래도 말이지.

"친위대 역할은 이미 있거든."

"...예?"

나는 내 발아래의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만 알아 둬."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은 그림자.

그 안에서.

내게 고개를 숙이는 여자의 형체가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들로 충분하다.'

당장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 이들에 대한 원한이나 적의가 수그러들 때쯤.

정식으로 길드에 가입시킬 예정인 이들.

내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100인의 병력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당장은 필요 없다."

"하지만...."

"네 능력은 정보전 쪽에 맞아. 산맥을 지키고 있는 박태준 병장이 복귀한 뒤에는 고려해 볼 만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정찰조를 따로 만드는 건은 진행하도록 하겠지만. 친위대는 참아라."

"...알겠습니다."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이들.

그림자 속의 병력도 약간은 하자가 있다.

언젠가 증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 되겠지.

"아, 맞다. 이왕 온 김에 하나만 말해 두자면."

"네? 무슨 일이신지."

"조만간 바빠질 것 같으니까. 미리 준비해 둬."

"바빠질 거라는 말씀은?"

아리엘라에게 명령한 병력이 모였다.

그러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거든."

"다음 단계...?"

멸망해버린 세상.

인류의 멸망을 바라는 것 같은, 정체 모를 악의.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것이 많지만.

그걸 해결할 만한 뚜렷한 방법도 딱히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스템의 안배를 따라가는 것뿐.

다음 단계라고 할 만한 것도.

당연히 하나뿐이다.

"점령."

[점령전이 진행 중입니다!]

[강철 군단]

[점령지 - 산맥(3%)]

"생각해 보면. 참 개같이도 오래 걸렸어."

이제.

이 일대를 지배하에 둘 때가 되었다.

87화 인제군 공략 (1)

길드, [강철 군단]이 자리 잡은 지역.

인제군은 작은 도시다.

군부대가 몰려 있는 강원도.

그중에서도 인제군은 최전방으로써 가장 많은 군부대가 몰려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많은 부대의 위수 지역이기도 했던 탓에.

시골임에도 중심부에는 꽤 많은 건물과 자원이 몰려 있었다.

가장 많은 자원과 사람들이 있는 곳.

즉.

괴물들 입장에서 가장 많은 사냥감이 모여 있는 장소.

그곳이 바로 군내.

지금은 마경이나 다름없어진 장소지만.

저곳이 바로 이 지역의 중심부다.

그리고.

"1번부터 3번대까지. 전원 전투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공병들의 전차와 전투차량도. 모두 배치 완료됐어요."

그 군내의 주변을.

백 명이 넘는 군인들과 전차, 개조 차량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모여든 병사들의 면면은 꽤 다양했다.

남녀는 물론.

노소조차 가리지 않는 다양한 인물들.

무기조차 가지각색인 그들이, 검은색 군복을 입고 하나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후우!"

"뭐야. 긴장되냐?"

그런 병사 중 몇몇이 작게 소곤거렸다.

"당연히 긴장되지."

"몬스터하고 전투가 한두 번도 아니면서. 왜?"

"그건 그렇지만. 시가전은 보병들의 지옥이라는 말도 있잖냐."

시가전.

건물 하나하나가 적을 숨겨 주는 은신처이자 바리케이드가 되어 주는 환경.

언제 어느 건물에서 적이 튀어나와 아군을 덮치게 될지 모른다.

보병들의 지옥이라 불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큭큭. 그렇긴 한데. 그것도 평범한 군대일 때 얘기지."

"뭐?"

"저기 좀 봐."

긴장 따윈 안 했다는 듯 가볍게 웃는 병사.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 구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뭐가 있길래... 아!"

"봤냐?"

그곳에는, 배치를 마치고 대기 중인 전차가 한 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 한 남자.

한 손에 긴 사시미칼을 든,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분위기만 보면 그 식칼로 사람 몇 명 담가 봤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칼을 쥔 반대쪽 손에 들린 것은, 신선한 채소들.

"신 병장님이, 요리하고 계신다."

"...그러네."

그 말을 듣자.

병사의 얼굴에서 긴장이 조금 줄어들었다.

'신영준 병장.'

솔직히 말해.

423대대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소규모 부대였다 보니 중대와 상관없이 친하게 지내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취사병.

업무적으로 접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가까운 기수가 아니라면 엮일 일 자체가 없었던 것.

하지만.

멸망의 날 이후로는 달랐다.

'비각성자 시절에. 이미 식칼 한 자루만으로 리자드의 목을 베어 넘겼던 사내.'

본인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라고 하지만.

또 부정은 하지 않았다.

각성 후에도 리자드와의 전투에서 고전하는 병사들이 많았거늘.

그걸 각성 전에 해낸 괴물.

그가 근접해서 리자드를 처리해 준 덕분에.

각성법을 깨닫고 빠르게 부대원들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괴물을 가까이에서 죽여야 한다는 발상 자체에 도달하지 못하고, 총알만 허비하다가 전멸하고 말았겠지.

전멸해 버린 다른 많은 군부대와 마찬가지로.

그 후에도 신영준 병장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리자드가 세력을 모아 쳐들어왔을 때는, 부대원들에게 버프 요리를 먹여 격퇴했고.

산맥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몰려드는 괴물한테는 오히려 디버프 요리를 먹여 무찔렀다.

사실.

이때만 해도 요리사로서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약탈자 토벌.

모든 정예 각성자가 덤벼도 고전하던 약탈자들의 대장을 식칼 한 자루로 베어 버렸다.

던전 공략.

모든 길드원이 발이 묶인 사이 던전의 심부에 홀로 걸어 들어가더니.

뒤늦게 진입한 병사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

엄청나게 강력해 보이는 보스 몬스터.

그 보스 몬스터가 일격에 목을 베여 만들어진 시체뿐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뱀파이어들의 보스마저 홀로 격퇴하지 않았던가.

신영준 병장의 직업은 요리사.

분명 비전투 계열의 직업이지만.

그럼에도 전투능력마저 격이 다른 수준이라는 게 밝혀진 셈.

'...솔직히, 같은 인간이 저럴 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안 그래도 전광일 상병 같은 이들은 그를 열렬하게 따랐다.

유약했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준 은인이라던가.

거기에 최근에 적대 세력의 노예나 포로로 잡혀 있던 이들.

그들은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구출된 뒤.

아예 신영준 병장을 신봉하는 세력이 되어 버렸다.

그 정도가 꽤 심해서 다른 병사들은 그들을 꺼림칙하게 여기지만,

그마저도 '신영준 병장님이 보여 준 능력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는 상황이다.

생존자들이 합류하며 다양한 인간들이 길드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군단의 일인자.

그게 바로.

저 20대 초반의 청년인 것이다.

'그런 신 병장님이 식칼을 쥐고 요리를 시작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병사들 사이에 돌던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메운 것은 자신감.

"시가전이 보병들에게 지옥이라고?"

"큭큭. 그러면 오늘 저녁은 지옥에서 먹게 되겠군."

"저녁에는 또 무슨 요리를 해 주실지 기대되는데."

그런 그들의 앞에.

[아군 중급 요리사의 스킬이 발동됩니다.]

[오병이어]

['중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대 시가전 특화 코스 요리'가 전 군단원들에게 제공됩니다.]

갑작스럽게 요리가 나타났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지만.

이제 이런 일에도 익숙해진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그릇을 받아 들었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오냐."

그리고.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을 때.

쿵....

동시의 내디딘 군홧발의 진동이 지면을 울렸다.

* * *

군단의 본격적인 군내 공략이 시작되었다.

많은 괴물이 자리 잡은 도시.

거기에 대응하는 군단의 전략은 간단했다.

'총력전.'

한 분대의 병사들이 군내로 진입을 개시했다.

사방에 깔린 것은 아스팔트 건물들.

하나하나가 괴물들의 은신처가 될 수 있는 장소였다.

일반적인 시가전이라면 여기서 건물들을 클리어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겠지.

공략에 걸리는 시간은 늘어나고, 병사들의 피로 역시 엄청나게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보자. 여기 2층에 괴물들이 모여 있을 거라고 하는군요."

"전에 잡아 봤던 놈들이네. 이 근처 건물에서는 거기뿐인 것 같슴다."

"좋아. 빠르게 정리하고 넘어간다!"

한 장의 지도를 들고 거침없이 진입해 들어가는 병사들.

괴물들의 위치는 이미 완벽에 가깝게 파악된 상태였다.

"정령안이라."

"신 병장님을 신봉하는 그 여자의 능력이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지난 몇 주간.

정령안을 지닌 정령사, 정수아가 정령으로 정찰한 결과였다.

과거의 그녀로서는 군내 전체를 정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신영준 병장의 요리를 먹어 가며 눈을 혹사한 그녀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 지역에 정착하는 괴물들에 한해서나 유효하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좀비들만 수천에 가까운 도시.

배회하는 괴물들의 갑작스러운 습격도 대비해야겠지만.

[예민한 청력(열화)]

두두두....

"3시 방향에서 짐승의 발소리!"

"이쪽으로 오는군. 다들 요격 태세."

주변을 배회하던 괴물들이 분대를 덮쳤으나.

이미 몇백 미터 밖에서부터 접근을 눈치챈 분대는 적습에 쉽게 대응할 수 있었다.

신영준 병장이 병사들에게 먹인 요리의 이름.

[대 시가전 특화 코스]

코스 요리 하나하나가 시가전에 특화된 능력을 제공했다.

능력치뿐만 아니라, 불의의 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이런 특성까지.

그리고.

공략에 투입된 것은 병사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저 건물이다. 통째로 괴물들의 부화장이 된 상태라더군."

"진입해서 공략하는 건 어렵다. 피해가 클 거야."

"그럼 뭐."

두두두두....

방해되는 물건들을 가차 없이 짓밟으며 전진하는 무한궤도의 소리가 들려 온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육중해 보이는 기갑들.

움직이는 바리케이드로 병사들의 임시 거점이 되어 준 그 기갑들이자, 동시에.

"터트려 버리죠 뭐."

움직이는 포대이기도 했다.

"발사!"

콰아아아아앙....

공병들의 개조를 거친 전차의 포격.

마법사들의 전력을 다한 화력 투사.

몬스터들이 완전히 잠식했다는 작은 건물이 박살 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내 곳곳에서는 포탄과 마법의 궤적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소음을 듣고 적이 몰려올 수 있다는 이유로 억제해 놓은 화력.

하지만 이번에 선택한 것은 총력전.

소음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최대한의 화력이 곳곳에서 퍼부어졌다.

그때.

"우리가 있는 곳이 여기고, 여기 보면 시장이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한 분대가 군내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군단 병력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분대.

"아. 여기가 그 군락이 형성되었다는 그곳이군요."

"까다롭겠는데요."

"이쪽은 피하는 게...."

분대원들이 우려를 표했으나.

분대장을 맡은 병사는 그들을 독려하며 말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건 우리 분대인 것 같거든."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 시장. 넓이도 넓이지만 군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고, 통로도 많아. 여기만 뚫으면 다른 분대들의 진입이 훨씬 편해질 거다."

"음...."

"다른 부대원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해야 한다."

그 말에.

병사들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죠."

"끽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각오를 다진 그들이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아. 김 상병님!"

"어?"

저 멀리서부터.

다른 분대의 병사가 다가오며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는 병사.

문제는.

"너... 어떻게 그쪽에서 온 거냐?"

그 병사가 나온 곳이.

그들이 목숨을 걸 각오로 공략하려던 바로 그 시장이었다는 것.

김 상병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마. 너희 분대가 저 시장을 정리한 거냐?"

시장에서 나왔다는 것은 시장의 괴물을 토벌했다는 것.

당연한 생각이었으나.

"예? 아닌데요."

그의 대답은 반대였다.

"저희 분대가 김 상병님 분대만큼 강한 것도 아니고. 절대 무리죠."

"그럼 어떻게 저기서 온 거야? 지도에 적힌 정보대로라면 괴물들의 대규모 군락이 있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병사는 오히려 자기가 궁금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희 분대도 꽤 긴장한 상태로 진입했습니다만. 안쪽에는 괴물 한 마리 없었슴다."

"뭐?"

"괴물들이 있었던 흔적은 있더군요. 한바탕 전투가 있었던 것 같은 흔적도.... 그래서 저희는 당연히 김 상병님네 분대가 정리해 주신 건 줄 알았습니다. 이 근처까지 진입한 분대 중에서는 김 상병님네 정도밖에 없었으니.... 근데 그게 아니란 겁니까?"

"우린 아니야. 이제 막 어떻게 공략하면 좋을지 얘기하던 중이었다."

"그럼. 그 괴물들은 대체 누가...."

"내 말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하는 병사들.

그들이 그렇게 의아해하는 동안.

"명을 마치고 복귀하였나이다."

다른 곳에서는.

보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88화 인제군 공략 (2)

"명을 마치고 복귀하였나이다."

무릎을 꿇는 금발의 여인.

그리고, 그 앞에는.

"나의 주인이시여."

전차에 걸터앉은 채.

무심하게 채소들을 손질하고 있는 군인이 있었다.

아니, 둘만이 아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의 그림자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존재들.

그들은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냉병기를 든 채, 군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인과,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수십의 형체들은 분명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분위기는 여타 군인들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최하급 뱀파이어 나이트]

기묘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이들.

그들을 향해.

"잘했어."

한참 재료를 손질하던 내가 말했다.

얼마 전에 토벌에 성공해, 권속으로 들인 뱀파이어.

그녀와 그녀가 만든 권속들은 내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냥 명령만 따르는 게 아니지.'

아리엘라가 가지고 있던 권능 중의 하나.

[그림자 장막]

그림자 속에 그녀만의 심상 세계를 구현시키는 강력한 능력이다만.

알고 보니, 딱히 그 능력을 본인의 그림자에만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은 즉시.

'바로 내 그림자로 옮겨 버렸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세계.

[그림자 장막]은, 지금은 내 그림자 속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 후로.

아리엘라와 그녀의 권속들은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내 그림자 속에 숨어 지낸다.

나를 그 무엇보다 가까이서 호위하는 친위대가 생긴 셈.

'조금 아쉬운 점은. 아리엘라가 약화되면서 공간도 작아진 점이려나.'

내가 처음 그녀의 공격을 받아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림자 장막]은 상당한 넓이를 자랑했다.

무려.

'요새가 자리 잡을 수 있었을 정도로.'

[기동요새 비마나]

내게 소환권만 주어졌다고 생각했던 그 요새는, 내 심상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 듯.

그림자 장막 속에 끌려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부분도 대단했지만.

내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그 안에 만들어져 있던 한 시설.

[식당]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요리에 버프가 부여되는 시설.'

그녀를 지배하에 둔 뒤.

나는 곧바로 그 식당을 다시 방문할 계획이었다.

요리할 때마다 그곳을 방문한다면.

내 요리의 효과도 엄청나게 증가할 테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 너무 커서 못 쓴다니. 어이가 없어서.'

[기동요새]는 지나치게 거대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도, [그림자의 장막]을 거의 가득 채웠을 정도니까.

아리엘라의 힘이 약화되어, [그림자의 장막] 역시 축소된 지금.

그 안에 요새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현실에서 소환을 시도할 때와 마찬가지.

공간이 부족한 탓에,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지.

'조금 아쉽긴 하지만. 뭐.'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을 간편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다는 점.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니, 그쯤에서 만족하는 수밖에.

"주인님?"

"음?"

"어째서 제게 그곳의 정리를 맡긴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간단해. 그 시장은 정리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지만, 병사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싶은 곳이었거든."

시장의 천장은 빗물을 막 아주는 큰 차양막으로 막혀 있는바.

햇빛이 들지 않는 장소다.

이들이 활약하기에는 최고의 환경.

"그래서. 피해는?"

"권속 중에서 둘이 피로 돌아갔나이다."

"둘이나?"

"군락을 형성하고 있던 모체가 꽤 강력하더군요. 제 권속들은 아직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터라."

흠.

둘이라.

눈앞의 여자.

아리엘라가 이끄는 흡혈귀들은 분명 강했다.

햇빛 아래에서 힘을 크게 잃는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늘어나는 속도와 능력을 감안하면, 그런 건 단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정도.

그럼에도 둘이나 죽었다는 건.

'정찰로 알아본 것보다 더 위험한 장소였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뭐.

"그 정도는 금방 채울 수 있겠지?"

"네. 재활용할 쓰레기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딱히.

타격이 크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녀에게는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약탈자들을 사냥해 권속으로 만들라고 명령해 놓은바.

지금 우리가 군내를 정벌하는 이 시점에서도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을 약탈자들이 많았다.

'평범한 병사들이 죽었다면. 많이 가슴 아팠겠지만.'

이들은 애초에 반쯤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전력.

큰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은 이 아파트로 향해라. 포격을 하기도 애매한데, 전체가 괴물들로 들어찬 곳이야."

"흐음... 규모가 상당한 것 같네요."

"힘든 싸움이 되겠지. 그래서 너희를 보내는 거고."

잃은 병력은 금방 충당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꽤 험한 취급이었으나.

"혹시 불만이냐?"

"설마요. 오히려 기쁩니다."

권속이 된 여인.

아리엘라는 군말 없이 명에 복종했다.

"그 마수들의 피를 섭취한다면. 제 힘도 조금은 더 강해질 수 있겠죠. 후후...."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옅은 웃음을 흘리며 모습을 감추는 아리엘라.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의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하는 뱀파이어들.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벙커에 숨어 지내고 있던 녀석이라 몰랐는데. 생각보다 호전적이야.'

뱀파이어 준남작.

아리엘라.

그녀는 내 권속이 되었고.

내 명령이라면 어떤 사소한 것 하나 거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인격이 말소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뿐.

복종하면서도, 험한 취급에 불만을 표출할 수는 있다는 것.

하지만.

내가 위험한 전장만 골라서 내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격한 전장일수록 기뻐한다.'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한 것이었다.

강한 적을 상대로는, 질 좋은 피를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본인과 권속들의 힘을 키울 수 있고.

그녀 스스로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

'몬스터 답지 않게... 향상심이 강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녀가 벙커에 틀어박혀 있었던 이유는.

인간종의 무력 시설을 점거하라는 [상념]이, 벙커를 떠나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던가.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저 정도로 호전적이고, 향상심이 강한 괴물.

그녀가 아무런 제약 없이 힘을 키웠다면.

'재앙.'

막을 수 없는 대재앙이 되어, 우리를 덮쳤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지금은 큰 의미 없는 가정이지.'

그도 그럴 것이.

그 재앙은 이제. 내 발아래 들어왔으니까.

* * *

그렇게 군내의 정벌이 진행되는 중.

나는 저 멀리 한 건물 앞에 서 있는 병사를 발견했다.

"이상아 조장?"

멍하니 선 채, 건물 안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이상아 조장이었다.

'마침 재료 손질도 대충 끝난 참이고.'

나는 전차에서 내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뭘 발견했길래 저렇게 멍하니 있나, 싶었던 것인데.

"여기서 뭘... 아."

건물 앞에 서자.

그녀가 왜 이곳에 서 있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월계관 양복점]

양복점.

이상아의 각성자로서의 직업은 [재봉사]

각성하기 전의 직업은, 양복점의 의상 디자이너라고 했던가.

즉, 이곳은.

"제 전 직장이에요."

멍하니 그 간판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전 직장이라."

"네. 설마 다시 올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요."

"우리 부대를 찾아오기 전에는 군내에서 활동했다고 하지 않았나?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이 근처는 너무 괴물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거든요. 특히 저기. 저 시장 쪽이요."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슨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방금 전에 아리엘라가 토벌한 몬스터 군락 근처로군.'

강력한 몬스터 집단.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을 투입했음에도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그만큼 강력한 몬스터 군락이 자리 잡았던 장소.

평범한 생존자 그룹을 이끌던 그녀다.

그 그룹에는 각성자의 숫자도 적었던바.

그녀로서는, 이곳에 돌아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겠지.

-끼이익.

"들어가 보려고?"

"네. 뭐 안될 건 없잖아요?"

이미 유리문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지만.

그녀는 굳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나 역시 궁금증에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일찍이 저 괴물들이 자리 잡은 탓일까.

안쪽은 생각보다도 더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글쎄.

한가운데에 뒹굴고 있는 좀비의 시체 정도일까.

"제가 죽인 좀비네요."

"...확실히. 목덜미에 가위가 박혀 있군."

"이 좀비를 죽이고 각성했었죠. 죽일 때는 좀비인 줄도 몰랐지만."

안쪽을 둘러보던 이상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저한텐 나름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는데. 이렇게 돼 버렸네요."

"고향 같은 곳이라니?"

"저는 가족들하고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거든요."

화목하지 못한 가정.

그녀는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빨리 독립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독립한 사람이 혼자 산다는 게 쉬울 리가 있나.

그런 그녀를 많이 도와준 것이 바로.

"여기 사장님하고 사모님이셨죠. 저한테 참 정을 많이 주셨는데...."

"지금은...?"

"초기에는 같이 활동했었어요. 하지만, 중간에 사고로 떨어지고 만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두 분 다 나이도 많고, 몸도 편찮으신 편이었으니... 아마도."

"...."

"그래도 뭐. 이런 세상에서 저라도 살아남았으니. 그거에 만족해야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처 씻어 내지 못한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슬쩍 안쪽을 둘러보자.

밖에서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작은 탕비실 같은 공간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지금은 썩어 버린 요리들이 보였다.

"저건?"

"아. 사모님이 매일 싸다 주시던 도시락이네요. 직원들한테도 나눠 주셔서, 양이 좀 많죠?"

"다 썩어 버렸네."

"그러게요. 사모님이 요리 실력이 뛰어나신 편이라. 되게 맛있게 먹었는데.... 아쉽게도."

슬쩍 그 요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썩어 버린 요리들.

하지만.

나도 이제는 꽤 짬이 찬 요리사다.

원래 어떤 메뉴였는지 알아보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쉽게도, 라.'

이 정도 메뉴라면.

흠.

"정 그렇게 아쉬우면. 내가 새로 해 줄까?"

"...네?"

내 말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뒤돌아보는 정수아.

"재료까지 완전히 같게 하기는 요즘 상황에선 좀 어렵겠지만. 몬스터 고기 중에 잘만 찾으면 비슷하게... 아니. 훨씬 더 맛있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여기가 고향 같은 곳이었다며?"

"그건, 그렇죠?"

"다행히 과거형이네."

과거에는 여기가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우리 부대를 제3의 고향처럼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네?"

"하필이면 군대라는 점이 좀 흠이긴 한데... 나 집밥도 잘하거든. 군대 요리란 게 한식 위주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정수아를 향해.

나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해준 집밥을 먹다 보면, 여기야말로 진짜 고향이다 싶어질걸."

"...푸흡!"

나름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나름 진심이었는데. 너무 웃겼나?"

"아뇨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치고는.

힘겹게 웃음을 참으면서 말하는 그녀.

"너무 요리 위주로 생각하시는 게. 천상 취사병이시구나, 싶어서요."

"...."

제기랄.

나도 모르게 모든 관심사가 요리 쪽으로 치우쳐져 버렸나.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푸흐흐…."

그래도 뭐.

울적하던 부대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걸 보면.

그걸로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네요. 고향이라."

웃음을 멈춘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원래 이 양복점도 진짜 고향은 아니었으니까. 부대를 고향처럼 여겨도 문제는 없겠네요."

"사실 고향이란 게 그렇게 갈아 끼워지는 건가, 싶기는 한데."

"에이, 뭔 상관이래요.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거지 뭘."

뭔가 홀가분해진 것인지.

가볍게 말하는 그녀.

"신경 써 주셔서 고맙네요. 군단장님."

"그냥 해 본 말인데, 신경은 무슨."

"멋쩍어 하시는 거 봐."

잠깐 둘러보기만 할 생각이었는지.

그녀는 홀가분해진 발걸음으로 양복점을 나와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고향이라....'

그녀에게는 가볍게 말했지만.

사실, 내게도 고향이란 꽤 중요한 키워드기는 하다.

'나뿐만이 아니지.'

대부분의 부대원은 타지인이니까.

자신들의 고향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족들은 살아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을 알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될 경우가 많겠지.

지금 세상에서 살아남은 이보다는 스러져 간 이들이 훨씬 많을 테니까.

그럴 때.

군단이 그들의 제2의 고향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 한 것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양복점을 나서자.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러운 전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콰앙....

-뚫렸다! 진입, 진입!

-여기, 화력 지원 바랍니다!

마법사들의 마법과 포탄의 궤적이 도시 곳곳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적이 괴물로 바뀌었을 뿐.

들려오는 소리는 전쟁 영화에서나 보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시야의 끝에서는, 이 지역의 중심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리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군청.'

낡고, 오래됐지만.

그 무엇보다 이 지역을 상징하는 건물.

우리의 목적지가 보였다.

89화 인제군 공략 (3)

군청 주변에 모인 병력들.

군내 정벌이라고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100% 토벌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일.

화려하게 병력을 밀어붙이며 뚫고 들어오긴 했다만.

'실제로는 3분의 1도 정리하지 못했겠지. 아마.'

우리 부대에서 가장 빠르게 군청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탔을 뿐이다.

우리 목적은 점령지를 늘리는 것

그 기준이 뭘까 고민했다.

그 결과 나온 결론은 하나.

'상징성.'

산맥의 부대는 그렇게 크지도 않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를 제외하면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리자드들을 박멸했다.

그로써 시스템으로부터 우리의 점령지임을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가장 큰 상징성을 가진 장소를 점령하면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인제군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라고 한다면.

'군청밖에 없지.'

내 경험상.

시스템은 인간의 사회 시스템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여길 점령함으로써 뭔가 달라질 것이다.

"영준아."

"어."

"우리 쪽 피해 상황을 보고하마."

그럼에도 피해가 상당했다

일단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상자가 3할이 넘었다.

'대비한다고 전력을 다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병사들의 피해만을 보고하는 것이라 그나마 적은 거지.

험하게 굴린 뱀파이어들은 열 명 넘게 죽어 나갔다.

기름 먹는 괴물인 전차들은 그동안 모은 기름을 전부 쏟아부었음에도 불구.

이제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고.

만약 군청을 공략해도 점령에 실패한다면.

그때는 정말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가면서 공략해야 할 것이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안쪽은 방울이가 보지 못하더라구요."

"흠."

아쉬운 점은 정수아의 정찰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

군내에서 몇 군데 그런 곳이 있었다.

정령의 접근을 차단할 만한 능력을 지닌 괴물이 있다는 뜻이다.

다른 지역은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며 왔지만

군청 공략은 피할 수 없는 일.

"앗, 신 병장님."

"조심하십시오."

나는 가장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여는 순간.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칵칵칵! 바보 같은 인간!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들어왔다!"

"병신! 맛있게 먹어 주겠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두 개의 형상.

'수, 숨어 있던 거라고?'

저 괴물들의 말대로.

난 녀석들이 숨어 있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소리를 숨길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괴물들이다 보니.

그냥 원래 거기 있는 놈들인가 했지.

"아니. 숨어 있다고 할 정도면 숨소리 정도는 죽였어야지."

"케엑?"

서걱-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휘두른 칼날에 고기가 손질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거슬리는 감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강한 괴물은 아닌 건가.'

바닥에 떨어진 괴물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녹색 피부의 난쟁이 두 마리.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작은 뿌리 고블린]

[숲속에서 주로 활동하는 고블린의 아종입니다. 개개인의 전투 능력은 높지 않은 대신 숲속의 지형을 이용한 집단전에 도가 튼 부족으로서, 아쉽게도 사냥 난이도에 비해 살점이 많지는 않아 썩 선호되는 재료는 아닙니다. 손질을 위해서는 우선 등의 척추뼈를 중심으로-.]

과연.

본래 숲속에서 활동하는 괴물들.

어쩌다 이 콘크리트 도시에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래의 집단전 능력은 없다는 거다.

"진입, 진입!"

"군내 진입에 너무 시간이 걸렸어. 빠르게 정리한다!"

내 뒤를 이어 진입한 병사들도 꽤 쉽게 괴물들을 제압해 나갔다.

긴장했던 군내 정벌의 최심부치고는 꽤 싱겁긴 하지만.

토벌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녀석들도 말을 하는군.'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어서인지 병사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하고 있는 건지.

애초에 저 녀석들이 진짜로 한국어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꽤 중요했다.

슬쩍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

그 안에서 내 시선을 느끼고 움직이는 존재가 느껴진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조우한 '대화가 가능한 괴물.'

그리고 그 녀석은 내 [권속]이 되었고.

그 결과.

꽤 쓸 만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녀석들도 너 같이 권속으로 삼을 수 있을까?"

-저런 하등한 종족과 같은 취급을 하시는 건 조금 서운한데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멸망의 날' 때 이미 인류의 대부분은 절멸했다.

남아 있는 생존자는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겠지.

'생존자들이 합류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생존자들만으로 세력을 구축하는 데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과거 칭기즈 칸이 정복 전쟁을 벌일 당시.

부족한 병력은 몽골인이 아닌 정복 지역의 노예들로 채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경멸스러운 몬스터라고 한들.

쓸 만하다면, 노예병으로 기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토벌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군청의 최상층에 도착했다.

"카악! 이 인간들! 졸래 세다!"

"미친! 개짜증!"

어눌한 말투로 경박한 소리를 지껄이는 괴물들.

그 중심에는 엄청나게 화려한 복색을 한 고블린 한 마리가 있었다.

"카악!!! 제대로 못 하냐! 쓸모없는 놈들!"

지팡이를 휘두르며 다른 고블린들을 독촉하는 녀석.

[식재료 감별]

[중급 고블린 주술사]

아마도 저 녀석이 이곳 고블린들의 수장.

정령을 쫓아낸 것도 녀석이겠지.

물론.

그래 봤자 고블린.

"케, 케에에엑...!"

병사들에게 제압되어 바닥에 얼굴이 처박히는 녀석.

화려한 장신구들도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않은 모양이다.

"거, 거기 인간!"

그때.

녀석이 나를 보고 소리쳤다.

"사, 살려 줘라!"

"...?"

"나! 눈치 좋다! 너! 이 인간들 대장이다! 케륵!"

"허."

"너 말 한마디면 다 듣는다! 맞다!?"

군청 내에서의 전투에서 딱히 전투 지휘를 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대충 눈치로 내가 대장이라는 걸 때려 맞췄다는 것.

'괜히 주술사가 아니란 건가?'

우리 부대의 무당하고 비슷한 선견지명 같은 게 있나 보지.

점점 더 흥미가 생기는데.

"케륵. 나 살려 주면 좋은 거 많다!"

"좋은 거?"

얌전히 굴복한다면 쓸 만한 병력을 얻을 수도 있는 일.

녀석이 말하는 얘기를 듣기 위해 가까이 발을 옮긴 순간.

-주인님, 조심...!

눈앞에.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케케케! 이걸 속냐! 병신!"

병사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음에도 마법은 발동할 수 있었나 보지.

아마도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파이어볼과 비슷한 마법.

"케켁! 적 대장 뒈졌다!"

"역시 주술사!"

"크켁. 믿고 있었다!"

"반격의 서막...!"

신나서 떠들기 시작하는 고블린 녀석들.

그 모습을 보니.

"...하아."

"케륵?"

내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껏 쓸 만한 병사들을 얻을 수 있나 싶었는데 말이지."

[특성 - 중급 화염 친화]

[개조를 거친 하급 재봉사의 강철 가죽 지휘 전투복]

요리사는 불과 친하다.

요리를 통해 능력치도 뻥튀기가 된 지금.

이 정도 불꽃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지.

"케, 케륵. 미안하다."

"넌 안 되겠다."

"항복! 굴종! 충성충서어엉!!!"

이제 와서 바닥에 몸을 숙이는 녀석.

하지만.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 없다.

서걱-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아쉽게도 종의 지도자급은 아닌 건지, 업적 달성 등의 메시지는 없었다.

"신 병장님?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예. 그럼 이 괴물 녀석들은."

"다 처리해."

"예! 얘들아! 남기지 않고 처리하란다!"

"케륵!!! 살려 줘라!"

남은 고블린들이 병사들의 손에 처리되어 갔다.

난 구석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봤다.

-주인님.

'응?'

그림자 속에 있던 뱀파이어 준남작이 말을 걸어왔다.

-이미 권속이 되어 버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뭔데.'

-마물들을 휘하에 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마물....

몬스터들을 말하는 거겠지.

-마력을 타고난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강합니다. 힘에 굴종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죠.

'노예병... 같은 건 없다는 건가?'

-네. 제 맹세처럼 강력한 속박이 가능한 게 아니면, 힘으로 억눌러 봐야 결국 배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일걸요?

흠.

몬스터 노예 병단이라는 원대한 꿈이 무너지는 느낌인데.

'내 요리로 꼬드겨도 안 되려나?'

-으음. 주인님이 내려 주시는 은총은 지고의 행복을 가져다주긴 하지만요....

내 요리의 맛을 아는 인물이다 보니.

간단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제 생각에는 마물의 성향에 따라 다를 것 같네요.

'성향이라니?'

-호전적이지 않은 마물이라면 은총을 통해 호감을 얻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저런 마물들은 대체로 호전적이거든요.

하긴.

부대에 쳐들어왔던 리자드들은 죽기 직전까지 우리 병사들을 물어뜯으려고 난리였지.

개인 생활을 하며 영역을 지키기만 할 뿐이었던 '강철을 먹는 맥'.

까망이 같은 경우가 호전적이지 않은 사례겠지.

-이번에는 애초에 거래부터가 틀어졌지만. 만약 거래를 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저 녀석들이 주인님의 은총을 맛보게 된다면, 협력해서 그 요리를 받아 내기보단, 어떻게든 배신해서 주인님을 은총 공장으로 만들 계획을 궁리하겠죠.

'은총 공장....'

꽤 참신한 단어 조합인데.

아무튼.

지나가는 몬스터를 붙잡고 요리를 먹여서 냅다 권속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띠링.

[ROK.17 지역의 영토 '소도시 (3)'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영토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동안, 추가적인 '점령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길드의 점령지가 확장되었습니다!]

[선정 가능한 간부의 인원이 '1' 늘어납니다.]

'역시!'

눈앞에.

기대했던 문구가 나타났다.

"어, 지배권?"

"이게 무슨 소립니까?"

몇몇 병사들은 그 메시지를 보고 의아하다는 태도였다.

대부분이 최근에 합류한 이들.

반면.

"이거 오랜만에 보는 문구군요."

"캬. 그게 언제 적 일이야."

대대부터 함께해 온 병사들.

그중 몇 명은 그립다는 듯 말했다.

'정말 오래 걸렸다.'

처음 이 문구를 본 것은.

군세를 이끌고 온 치프틴의 병력을 무찔렀을 때.

[산맥]의 지배권을 얻었던 날이었다.

당시 부대의 각성자는 기껏해야 스무 명 남짓.

이 문구를 본 적이 있는 각성자가 적을 만도 하지.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을 향해.

이민재 병장이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

"우리 전력이 인제군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라고 판단된 거지."

리자드들을 제외하면 잡다한 몬스터밖에 없던 [산맥]과는 달랐다.

다양한 생존자 그룹이나 약탈자들.

인간들을 사냥하기 위해 몰려든 몬스터와 괴물.

그들에게 죽어 도시를 배회하는 좀비들.

강원도에 넘쳐 나는 군부대들을 점거하고 있을 괴물들까지.

그 녀석들을 모두 제치고.

이 근방의 '지배 세력'으로 인정받은 셈.

"하하... 그래도 마지막엔 꽤 쉬웠던 것 같은데요."

"그러게?"

"군내 공략도. 뭐 100% 완료한 건 아니지만. 엄청 고생할 줄 알았는데 성공했잖아."

"처음 부대를 내려와서 군내를 볼 때만 해도 저기는 절대 공략하지 못하겠다 싶었는데... 운이 좋았네."

운이 좋았다니.

난 고개를 저으며 병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야."

산맥을 내려올 때.

우리 부대가 생존할 수 있었던 점에는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내 각성은 그렇다 쳐도, 어째서인지 좀비도 나타나지 않는 환경이었으니.

하지만 지상에서는 다르다.

운은 무슨.

"우리가 그만큼 노력했고, 강해진 거다."

"아...."

"그렇군요. 신 병장님 말이 맞슴다."

당장 이 군청만 해도.

처음 부대를 내려왔을 때의 우리였으면 엄청나게 고생한 끝에 공략할 수 있었을까 말까 한 수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나타난 것뿐.

[강철 군단]

[ROK.17 지역의 지배 영토]

[산맥 - 3%]

[소도시 (3) - 3%]

소도시 (3)의 비중은 3%.

넓이로는 산맥이 훨씬 더 넓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 수치라는 건.

역시 기존의 문명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거겠지.

'드디어 다음 단계로 넘어왔다.'

인제군을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는 것.

즉.

다른 지역으로 진출할 차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차는 물론. 전차가 이동할 수 있는 지하철도 확보했다.'

이렇게 영역을 넓혀가다 보면, 언젠가.

부모님이 계신 고향.

집으로 도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90화 재활용 쓰레기 (1)

인제군의 점령을 완료했으나.

우리 부대의 일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산맥도 그렇지만. 점령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괴물들이 전멸한 것도 아니니까."

점령이란 가장 큰 영향력을 의미할 뿐.

인제군 내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괴물이나 적들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군내도 완벽하게 청소하는 데 성공한 것도 아니다.

군청까지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을 뚫고 들어갔을 뿐.

우리가 처리한 부분은 전체의 3분의 1도 채 안 되겠지.

'거기에. 군부대들도 있으니까.'

일반적인 괴물들보다도 강력한 녀석들만 출몰한다는 군부대.

그리고 인제군은 대한민국의 군부대 대부분이 몰려 있는 강원도.

그중에서도 최전방에 위치해 있다.

군부대가 그야말로 '깔려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다는 뜻.

그중에는 우리 부대에 충분히 위협적인 괴물들도 있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괴물들은 어지간하면 영역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점이려나.'

바로 그 괴물 중의 하나였던 아리엘라의 말에 의하면.

군부대를 점령한 괴물들은 사실상 어떤 상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점거하고 있는 '인간종의 무력 시설'을 지키는 데 전념할 뿐.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는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바깥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니,

군부대들은 천천히 탈환해 나가야겠지.

어쨌든.

여전히 괴물들이 넘쳐 나는 도시인 건 변함이 없다 보니.

부대원들은 계속해서 주변을 정찰하며 괴물을 사냥했다.

정찰에 포함되지 않은 비번 때는 각자 알아서 능력을 단련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전사조 같은 경우는 부대의 체육관에서 서로 스파링을 하며 전투 감각을 단련한다던가?

내 경우에는 요리 연구이다.

요리를 끝내고 시간이 남을 때면 부대원들이 구해 온 레시피 북을 펼친 뒤.

새 레시피를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지금은.

대대장실에 앉은 채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최근에 [대규모 조리]라는 재능을 각성한 결과.

부대원들의 식사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었다.

"...역시 잘라야 하려나?"

덕분에 여유 시간이 너무 남아 버렸거든.

가끔은 이렇게 딴생각을 할 여유도 생긴 것.

"씁. 너무 길긴 하네."

지금 하는 딴생각은 머리카락에 관련된 것.

'멸망의 날'은 내가 전역하기 며칠 전이었다.

우리 부대는 그다지 빡센 부대도 아니었던지라.

전역을 며칠 앞둔 내가 은근슬쩍 머리를 기르는 것 정도는 용인해 줬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인이 보기엔 영락없는 빡빡이 군바리 수준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좀 심하다.

'몇 개월을 전투와 요리만으로 보냈으니, 어쩔 수 없지.'

머리를 자를 여유 따윈 없었단 말이지.

그러다 보니 거의 어깨까지 오게 된 머리.

나 말고 다른 병사들도 비슷한 고민이 있던 것 같다만.

특이하게도 전사조의 경우는 전부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저희는 아무래도 근접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많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싸우다 보면, 적한테 머리카락을 붙잡힐 때도 많거든요.

-아.

-짧게 치는 편이 어울린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지극히 실전 지향적인 이유인 거죠. 스포츠 컷 정도야 저희끼리 칼 들고 잘라도 되는 거니 관리도 편하고. 뭐 나쁘지 않습니다. 신 병장님도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잘라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면서 자신의 칼을 들어 올리던 병사.

그 손에 들려 있던 것은, 거의 사람만 한 크기의 대검이었다.

-아, 아니. 마음만 받으마.

-아쉽군요. 제가 이걸로 머리 참 잘 자르는데.

-...머리카락 얘기 맞지?

-예? 그거 말고 자를 게 있습니까?

그때는 기겁하며 거절하긴 했다만.

생각해 보면 꽤 기특한 이유란 말이지.

나도 전투 시에는 근접전으로 싸울 때가 많았다.

게다가 요리사들도 대부분 머리는 짧게 자르지 않던가.

나 역시 다시 빡빡이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음! 대충 정돈만 하자!"

전역까지 이틀 남았던 나다.

다시 빡빡이로 돌아가라는 건 너무 잔인한 얘기잖냐.

'그러고 보니. 이상아 부대장이 머리를 잘 자른다고 했지.'

'재봉사'로 각성한 그녀는 [가위 숙련]을 지니고 있다.

좀비의 머리를 싹둑 해 버린다는 의미로도 잘 자르긴 하지만.

이발 쪽으로도 꽤 조예가 있다고 들었다.

재봉사로서 부여받은 특성.

본래라면 머리를 손질하는 쪽과는 거리가 있어야 할 것 같다만.

'나도 요리사로서 받은 단도 숙련으로 괴물들 좍좍 베고 그러는데 뭐.'

그녀가 이발에 조예가 생겼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나중에 그녀한테 머리 손질을 부탁해 보든가 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신 병장님?"

병사 한 명이 대대장실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이민재 병장님이 잠깐 마을 쪽으로 와 달라고 하십니다만."

"민재 형이?"

어차피 지금은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고 하니.

난 병사를 따라 밖으로 이동했다.

부대의 정문을 나와 밖으로 이동하자.

그곳에는 작은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논밭뿐이던 군부대.

그나마 가까운 건물이라고 해 봐야 멀리 떨어진 농막이나 창고 정도였으나.

'이 정도면 그래도 살 만해 보이네.'

지금 부대 근처에 만들어져 있는 것은 잿빛 건물들이었다.

근처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약간의 대가를 받아 만들어 준 집들이다.

철로 만들어진 건물들.

본래라면 주거용으로는 썩 훌륭하지 않은 소재였겠지만.

[식재료 감별(강화)]

['맥'의 마력을 머금은 강철]

까망이의 마력으로 강화된 자재들.

거기에 공병들의 손까지 더해지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차량도 맨손으로 뜯어 버리는 괴물들을 상대로도 안전할 정도로 튼튼한 것은 물론.

어떤 작용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온, 방한 효과도 있다고 한다.

그 근처를 걸어가자.

"오. 취사병 총각 왔는가."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해 왔다.

"충성 충성. 잘들 지내셨습니까."

"우리야 자네들 덕에 잘 지내고 있지."

처음 생존자들이 주변에 정착하게 된 후로 꽤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에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들이 꽤 많았다.

'이제는 주변 마을의 인구가 군단 인원수랑 비슷할 정도니까.'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 길드의 보호를 받기로 한 이들.

참고로 그 대가는 대부분 '농부' 각성자인 철욱의 일을 도우며 받은 식량들이다.

"정말이지... 고마운 일이야."

농사일도 쉽지는 않을 테니, 여유로운 삶이라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죽을 걱정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우리 부대에 대한 호감도는 대부분 매우 높은 상태이다.

"김 중위님에게도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고 좀 전해 주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대가만으로 우리를 지켜 주기로 하셨으니. 그분이야말로 위인이시지."

다만.

이들은 여전히 김 중위가 우리의 보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하. 굳이 제가 전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 마음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얼마 전.

이 부분에 대해서 김 중위가 말을 하기도 했다.

-영준아. 솔직히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안 되겠니.

-예? 뭐가요.

-네가 나한테 명목상의 대대장 자리를 맡긴다고 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다른 군부대와 마주하거나 할 때 내 직위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을 테니까. 나름대로 말빨에도 자신은 있는 편이기도 하고. 하지만....

슬쩍 한숨을 내쉬는 김 중위.

-차라리 고생을 하면 고생을 하지. 저 사람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 건 영준이 너인데, 내가 감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잖아. 이건 너무 부담이 커.

그 말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고, 다 칭찬만 하고 있던데 부담스러울 건 뭡니까.

-차라리 욕을 하면 참고 말지...!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 중위도 할 말이 명확한 듯.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칭찬이니까 더 부담스러운 거다.

-흐음.

-다른 군대들도 전멸한 게 확실한 상황이니 내 직위가 그렇게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슬슬 네가 대외적으로 나서도 되지 않을까? 뭣하면, 네 군인으로써의 직위를 하사로 올리고....

음.

크게 틀린 말은 아니긴 했지만.

-귀찮은데요.

-그, 그러냐.

지금이야 약간은 여유가 생겼다지만.

애초에 김 중위에게 저런 역할을 맡긴 이유는 대외적인 지위 문제뿐만이 아니였다.

'내 일을 좀 덜려는 속셈도 컸지.'

안 그래도 바쁜데.

대외적인 대장 역할까지 하라니, 너무 귀찮잖냐.

-저도 영준이가 대장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건 좋지 않다고 봅니다.

내가 생각해도 좀 무책임한가? 싶었으나.

민재 형이 내 말을 거들었다.

-위험한 세상이니까요.

-그거랑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만약 우리를 적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대장을 노릴 겁니다. 저번 뱀파이어 토벌 때도, 최근에 만난 고블린도 그랬죠. 그런 위험한 역할에 진짜 대장을 올려놓을 필요는 없다 봅니다.

민재 형의 말인즉.

-김 중위님이 내 그림자 무사가 되어 줘야 한다는 건가?

-...민재야. 그 말은. 나는 죽어도 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죽어도 된다는 거까진 아닙니다. 김 중위님도 중요한 인력이니까요. 하지만, 이왕 죽을 거면 영준이보다는 김 중위님이 죽는 게 낫긴 합니다.

-....

-어차피 길드원들은 영준이가 진짜 보스라고 다 알고 있잖습니까. 길드의 상태창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길드원들 사이에서 혼동이 생기는 게 아니라면, 외부인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김 중위님에게 간다고 해서 딱히 나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김 중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이가 만약 길드원이 된다면 '사실은 그게 신영준이 한 일이었구나.' 하고 알게 될 테니.

외부의 평가가 긍정적이기만 한다면.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김 중위님이 할 일은 군단의 대외적인 지휘관으로서 이미지 관리를 잘하는 겁니다.

-후우. 알겠다. 그나마 자신 있는 게 정치질이나 이미지 관리니까.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뭐 그렇게 돼서.

여전히 외부에는 김 중위가 대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 중위는 종종 마을을 순찰하며 소통까지 한다고.

내가 할 일이었으면 끔찍하게 귀찮았을 일.

'김 중위에게 떠넘겨서 천만다행이지.'

어쨌든.

우리 부대 근처에 인간 사회를 재건한다는 계획.

그 계획은 꽤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이런 일에는 언제나 부작용도 있는 법.

"크, 크윽...!"

"움직이지 마, 인마."

나를 부른 민재 형이 있다는 곳으로 이동하자.

한 남자가 병사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래."

"오. 영준이 왔냐."

"구, 군인분들! 정말 오해입니다!"

오해고 뭐고.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민재 형을 바라보자.

"이 남자. 약탈자였다는 의심이 있다."

"뭐?"

"최근에 합류한 생존자 중 누군가가 은밀히 와서 말해 주더군. 이 남자가 자기들을 공격했던 약탈자랑 똑같이 생겼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전 억울하다고...!"

"그래서 제대로 알아보려고 접근했더니, 우리 병사들을 공격하고 도망치려고 했지? 그것도 억울한가?"

"그, 그건. 갑자기 주변에 모여드니 당황해서 실수를...."

흠.

대충 상황은 알겠다.

"너희들은 일단 업무로 복귀해."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 이 녀석은 나랑 민재 형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음.... 신 병장님이라면 위험한 상황이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알겠습니다."

일단 민재 형을 제외한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아저씨는 저희 좀 따라옵시다."

"어,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진짜 결백하시다면 별문제 없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남자를 데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주변에는 민재 형과 나뿐.

이 남자가 약탈자 출신이라는 근거가 있고.

하지만 본인은 결백을 주장 중이다?

그러면 뭐.

쉽게 알아볼 방법이 있지.

"자. 아~ 하세요."

"그으읍."

남자의 입을 강제로 벌린 뒤.

언제나 들고 다니는 사탕 한 알을 먹었다.

[중급 요리사의 솔직한 감정의 알사탕]

"자. 솔직하게 얘기해 봅시다. 우리 부대를 찾아오신 이유부터."

"최, 최근에 안 좋은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효과는 직빵이었다.

곧바로 누구보다 솔직한 성격으로 변해 버린 남자.

그런데.

안 좋은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이요?"

"그게 아무래도, 약탈자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 같다고...."

약탈자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이들.

...음.

뭔가 짐작이 좀 가는데.

'그게 벌써 소문이 돌 정도가 됐나.'

밖을 돌아다니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소문은 참 빨리도 돈다 싶었다.

"그 사냥꾼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들이라. 꽤 세력을 구축한 그룹도 속절없이 사라져 나가는 것 같더군...."

"큼. 그래서요?"

"난 안 그래도 그룹 내에서의 권력 싸움에도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가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지. 그 소문의 사냥꾼들한테 사냥당해 죽거나, 아니면 그룹의 권력 싸움에서 내쫓겨서 길거리에서 말라 죽거나. 둘 중 하나.... 그 와중에 이곳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자기가 약탈자였다는 건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네.

"어떤 호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무상에 가까운 대가만으로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하니. 내 입장에서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허어. 그럼 이 마을에 온 다음에는? 마음 다잡고 착하게 살려고 하셨습니까?"

혹시 그런 거였다면.

한 번은 봐줄 용의도 있었다만.

"내가 미쳤나? 마음을 다잡기는 무슨."

아쉽게도.

개과천선한 악인은 아닌 모양.

거기에 다음으로 내뱉는 말이 가관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야. 빛이 커져 나갈수록 어두운 면도 커지는 법이지.... 이곳의 사회가 아직 초창기인 만큼. 빠르게 이곳에 섞여 드는 데 성공한다면 그 어두운 면을 선점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지."

"...아. 그런 생각을 하셨구나?"

"흐흐. 군인 놈들의 시선만 잘 피한다면 몰래몰래 세력을 키우는 건 어렵지 않아."

"뭐. 그렇게 힘을 키웠다 치고. 그다음은?"

"우선은 나를 내쫓으려 한 녀석들에게 복수를 해 줘야겠지.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회가 무너지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멸망한 사회의 잿더미 위에 새로운 사회가 생겨나고 있어. 나는 그 사회의 어두운 면... 암흑가의 제왕이 될 거다."

꿈이 꽤 거창하시구먼.

뭐.

이 정도면 들을 건 다 들은 거 같네.

"그렇다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썹 사이를 매만지며 얼굴을 찡그리는 민재 형.

혹시나 싶어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식재료 감별(강화)]

[최하급 건달 Lv. 9]

확인해 본 결과.

이래 보여도 일단은 각성자였다.

레벨도 9 정도로 나름 준수한 편이다만.

쓸 만한 스킬이나 특성을 가진 건 없어 보였다.

"주변에 사회를 만든다는 건 좋지만, 이런 녀석들이 얼마나 더 들어올지.... 골치 아프군."

"뭐. 어느 정도 부작용은 예상했던 부분 아니겠어."

"일단 이 녀석의 처분은...."

"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움찔.

그 말을 들은 민재 형이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생각하는 그 처분이냐."

"음. 아마도."

"...후우. 그래. 그게 이득이겠지."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민재 형.

"일하자. 나와."

내가 바닥을 탁탁 두들기며 말하자.

"네. 나의 주인이시여."

거기에 답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뭐, 뭐냐 저건!"

자칭 미래의 암흑가의 제왕님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암흑가를 먹겠다는 사람치고는 담이 그렇게 센 편은 아닌 것 같네.

"사랑하는 나의 주인님. 또 은총을 내려 주시기 위해 불러 주셨는지?"

"밥 시간 아직 멀었다."

"아, 넵."

귀족급의 뱀파이어들만이 가진다는 능력 중의 하나.

[그림자의 장막].

그림자 안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기술이다.

얼마 전에 나를 끌고 들어갔던 어둠뿐인 공간이 바로 그것.

원래는 그녀 자신의 그림자 속에 만든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딱히 본인의 그림자에만 만들 수 있다는 건 아니라고 하길래.

지금은 내 그림자 속으로 옮겨 간 상태였다.

밤에는 약탈자들을 사냥하고.

활동하기 힘든 낮에는 내 그림자에 복귀하여 호위 겸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해 놓은 상태이다.

그녀의 권속들도 부대에 정식으로 합류한 것은 아닌지라.

기본적으로 낮에는 저기서 자고 있다.

"애초에. 무슨 얘기하는지도 듣고 있었을 거 아냐? 이 남자다."

"아. 네. 웬 벌레 한 마리가 있긴 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를 바라보는 그녀.

정말로 벌레를 보는 것 같은, 경멸이 섞인 표정이었다.

"너무 하찮은 존재라 눈치채지 못했네요."

이 녀석을 굴복시키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에 내게 종속된 상태가 익숙해진 걸까.

원래의 성격이 조금씩 보일 때가 있다.

오만하고.

강압적이고.

인간을 벌레쯤으로 여기는 녀석.

그러나.

"말 이쁘게 하랬지."

"힉. 죄송합니다!"

시스템이 인정한 [권속].

원래 성격이 어떻든 간에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이 녀석. 레벨은 그럭저럭인데, 인간으로서는 쓰레기야."

"흠. 재활용하기에는 적당하겠네요."

"데려가라."

"명령에 따르겠나이다."

최근의 전투에서 권속을 꽤 잃었으니까.

그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제격이겠지.

"...주인님의 동료분이 보시기에는 좋지 않을 광경일 듯하니, 이 남자는 따로 데려가도록 하지요."

그 와중에 민재 형은 그녀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나 보다.

곧 자신의 권속이 될 남자와 달리, 민재 형은 주인인 내 동료.

그녀도 눈치가 보이는 듯, 남자를 권속으로 만들기 위해 남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영준아."

그 모습을 보고 민재 형이 말했다.

조금은 꺼림칙한 태도로.

"일단. 난 네 선택을 존중한다. 내가 겪어 온 바로는, 너는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해 왔으니까."

"갑자기 칭찬하니까 뒷말이 무서운데."

"하지만."

작게 한숨을 내쉬는 민재 형.

"저 여자를 부하로 삼는 게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을지, 나는 조금 의문이 든다."

91화 재활용 쓰레기 (2)

"저 여자를 부하로 삼는 게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을지, 나는 조금 의문이 든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민재 형.

음.

솔직히.

이런 반응도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로 요리를 만들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이제 더 나아가서 인간을 잡아먹은 괴물을 부하로 쓴다고 하니.

반발이 없는 게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민재 형은 그런 것보단 실리를 추구하는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반응이 민재 형 쪽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뱀파이어들과의 교전에서, 우리는 부대는 산에서 내려온 뒤 첫 전사자가 발생했지."

"음."

"그때 많은 부대원이 슬퍼했다. 곧바로 장례가 치러졌고....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거기서 가장 크게 슬퍼한 건 바로 너였지."

민재 형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꽤 날카로웠다.

꽤 생소한 감각이었다.

"그 장례를 치르게 된 주범이 바로 저 괴물이고. 너, 설마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부대 시절부터 나를 가장 지지해 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민재 형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경계심.

'민재 형이라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실수했나.'

우리 부대의 간부 중.

실리를 가장 우선으로 추구하는 이를 꼽아 보라고 하면, 이민재 병장과 서수혁 상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저번에 겪어 봤던 대로, 서수혁 같은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실리를 추구하지만,

민재 형은 조금 달랐다.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정에 약해.'

이득을 위한 비정한 선택과 손해를 보는 인간적인 선택.

그 갈림길에 섰을 때.

민재 형은 내게는 전자를 권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내가 후자를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인물이다.

부대에서 2번째로 각성한 인물.

머리도 좋은 양반이고.

나름 카리스마도 있다.

여차하면 자신이 부대의 대장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을 테지.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를 대장으로 만든 게, 바로 이 형이란 말이지.'

심지어 내 동의도 없이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 역시 저런 성향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머리로는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정을 추구하니.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건 꽤 머리 아픈 일.

그렇기에, 선택을 내려야 하는 자리는 믿을 만한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은 냉정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선택지만 제안해도 될 테니까.

'지금 반발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

우리 부대원들을 살해한 괴물.

그런 괴물을 쓸 만하다는 이유만으로 부하로 두는 것이 옳은 일이냐.

보통이라면 내게 실리를 추구할 것을 권했을 테지.

하지만 정말로 내가 실리를 추구해 뱀파이어들을 수하로 들인 모습을 보자.

막상 거기에는 반발하는 것이다.

딱히, 비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그런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다만.

다른 이유가 더 있다면 모를까.

'우리 부대원들을 죽인 괴물이다.'가 이유의 전부라고 한다면.

"죽은 녀석들은 죽은 녀석들이야."

내가 해 줄 답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해. 다른 산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면 모를까. 죽은 녀석들을 신경 쓰다가 손해를 볼 수는 없지."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저 녀석은 우리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실제로 경험해 보기도 했잖아?"

아직 부대원들 대부분은 그 '뱀파이어 여왕'이 내 권속이 되었다는 걸 모른다.

민재 형을 포함한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민재 형은 지난번 전투에서 그녀와 그 권속들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알고 있었다.

"부대원들을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만한 전력을 포기하자? 다른 부대원들의 생존은 고려하지 않은 제안 같은데."

"강력한 괴물이었으니 능력이 쓸 만하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 녀석의 본질은 인간을 먹이로 보는 괴물이야. 아까도 봤잖냐? 그 남자를 벌레처럼 보는 거!"

민재 형은 자신이 흥분한 것을 눈치챈 듯.

잠시 얼굴을 쓸어내린 뒤 말을 이었다.

"병사들이 저 괴물들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을리가 없다. 오히려 집단에 균열을 일으키는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 부대의 단합을 가장 중요시한 건 너였다, 영준아."

"형. 저 녀석의 본질이 어떻다든가,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하나 뿐이다.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것."

짧은 실랑이 후.

팔짱을 낀 민재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지. 다른 이유들은 사실 내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그럼?"

"네가 부대원들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잊어버리는 것. 그게 난 두렵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했더니.

"저 괴물들이 조금 쓸 만하다는 이유만으로, 저지른 짓들을 가볍게 용서한다든가. 그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뭐? 용서?"

용서는 무슨.

어이없는 소리.

"아리엘라."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네. 주인이시여."

남자를 데리고 멀리 사라졌었던 그녀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명령하신 대로 그 쓰레기는 저의 권속으로 재활용되었나이다. 또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엎드려뻗쳐."

"네. ...네?"

순간 당황하는 그녀.

자신이 뭘 들은 건가 싶겠지.

시킨 일을 잘 해결하고 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엎드려뻗치라고."

"네!"

잘못 들은 게 아닌 것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리는 그녀.

"영준이 너. 뭘 하려는...."

"푸시업 50개. 실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민재 형을 뒤로하고.

그녀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내렸다.

"오른쪽으로 굴러."

"왼쪽으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군부대 전통의 얼차려 세트.

내 후임들한테도 시켜 본 적 없는 걸 전역 예정일 한참 지나서 시키게 될 줄이야.

그렇게 얼차려가 끝난 뒤.

"수고했다."

"허억... 허억.... 네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주인님...? 한 가지 질문드려도 될지?"

"해 봐."

"방금 이 비생산적인 행위에는, 대체 어떤 의미가...?"

시키니까 하긴 했지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당황스러워하는 그녀.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이라 봐야 하나였다.

얼차려의 의미?

"아무 의미도 없어."

그딴 게 있겠냐.

"아, 아무 의미도 없다니. 그 말씀은 대체...."

"아무튼 수고했고. 들어가 봐."

"...네. 알겠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

"...허."

민재 형은 그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봤지?"

"보긴 봤다만.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모르겠군."

"저 녀석, 나한테 완전하게 종속된 상태야. 처음에는 연기로 굴복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시스템창이 내게 종속됐음을 인정했지."

이 시스템창이 선인지 악인지,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

민재 형이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쓸 만한 부하를 얻었다는 걸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형. 남에게 완전히 종속된다는 건... 사형도 가볍게 여겨질 정도의 형벌이라고 생각해."

내가 부대원들을 살해한 적을 용서했다고?

미친 소리지.

"나름대로 요리를 통해 굴복시킨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 사람들도 이 정도로 완전히 종속되지는 않았어. 저 녀석은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을 빼앗긴 상태고."

"그 자체가 형벌이다, 그거냐."

"그래. 원한은 제대로 갚고 있어.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고."

그리고 저 녀석은.

보통 쓸 만한 수준이 아니다.

"...하아."

이쯤 되면 충분히 설득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대답이 영 석연치 않은데."

"...그래도 난 잘 모르겠군."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아 보이는 민재 형.

"다만. 이 일로 더 딴지를 걸지는 않으마."

"?"

"네 말도 옳다고 생각하고... 뭣보다, 우리 대장은 너니까."

그럼에도.

결국은 내 결정을 존중해 주기로 한 것 같았다.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네 선택을 존중해. 널 대장으로 추대한 것도 나니까."

그렇게 사과를 하며, 다른 업무를 위해 복귀하는 민재 형.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민재 형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전력이다.'

저 형한테는 그냥 전력으로 쓸 만하다고만 말했지만.

사실.

그 이상으로, 쓸 구석이 많은 전력이거든.

'지금은 권속이 돼 버렸을 아까 그 남자가 말했던 대로.'

사람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게 된 지금.

빛이 있는 곳에는 꼭, 어두운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저 남자는 그 어둠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우리 부대도 어두운 부분에 관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쩌면, 때로는 더러운 일을 해야 할 때도 생기겠지.

'부대원들에게 그런 일을 맡기고 싶진 않아.'

더러운 일을 맡기기에는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만 한 전력이 없다.

내게 완전히 귀속된 그녀는 일종의 친위대이다.

잡다한 업무나 호위는 물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업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암살이라든가.

뭐 그런 것.

민재 형이라면 반발할 만한 일들이지만.

그게 우리 부대의 이득이 된다면, 난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다.

반발을 무시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해 두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다.

"주인님."

그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줄 알았던 아리엘라가, 그림자 속에서 말을 걸어왔다.

"혹시 방금 그 일이 신경 쓰이는 거면 그냥 무시해라. 말했던 대로 별 의미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뇨. 주인님이 명령하신 일을 따른 것일 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정말?"

"...주인이 도구를 장난감으로 쓴다고 한들, 도구가 불만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되게 맘 상했나 보군.

"다만, 시키신 일에 대한 보고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보고라니."

"명령하신 정찰 임무를 나간 권속들이 드디어 복귀했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말한 임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내가 시킨 일이었으니까.

얼마 전.

우리는 인제군의 정복에 성공했다.

드디어 약간의 여유가 생긴 셈.

이 인제군 내의 몬스터들을 줄여 나가는 작업도 중요하겠지만.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결국은 다른 지역으로 진출해 나가야겠지.

그리고.

그 진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다.

그렇다면.

'고향... 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그동안은 생존에 급급해 잊고 지내려 노력했지만.

나도, 부대원들도 사람이다.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번에 진입했던 던전의 보스 몬스터.

[검은 모래의 무리 어미].

녀석이 나를 자식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부모님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인제군의 정복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생각한 것도 역시 그쪽.

'부대원들도 서울이나 경기도 쪽 출신이 가장 많으니, 호응을 이끌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아.'

그들의 지지를 받으며 아래로 진출해 내려간다면.

머지않아 부모님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아리엘라의 권속들을 출장 보냈었다.

그녀의 권속인 뱀파이어들은 내게는 기본적으로 소모품에 불과하다.

햇빛 아래에서 약해진다지만 그거야 밤에만 이동하면 될 일이고.

[안개화] 덕에 어지간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 정찰병들이 복귀했다는 것.

그런데.

"주인님."

"어. 빨리, 결과 보고를-."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주인님이 나름 마음에 드는 편입니다."

?

갑자기 무슨 소리래.

"밤의 귀족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거든요. 주인님의 얼굴은... 조금 취향을 탈 것 같긴 한데. 그럭저럭 제 취향에는 들어오는 편이에요. 권속이 되는 건 끔찍하게 싫었지만 뭐. 머릿속을 지배하던 상념이 사라진 걸 생각하면, 아까 같은 무의미한 짓도 참을 만하죠."

"서론이 기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주인님이 슬퍼할 만한 소식을 전달하는 저도 가슴이 아프니. 괜히 저한테 화풀이하지만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 뭐 그런 얘기예요."

"...?"

그림자 속에서 지도를 쥔 손이 튀어나왔다.

그 지도를 받아 펼쳐 본 결과.

"이 선은. 뭐지?"

지도에는 굵은 마카로 검은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강원도의 경계선을 따라 이동하는 검은색 선.

무슨 의미인가 싶었는데.

"벽이에요."

"뭐?"

"그 선을 따라서 벽이 세워져 있어요. 넘어갈 수 없는 높은 벽이."

이게 뭔.

개소리야.

92화 벽이라니?

던전을 공략함으로써 군단의 영향하에 두게 된 지하철역.

그 철도를 이용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개조 차량과 전차들.

그 두 가지가 확보된 시점에서.

다른 지역으로 진출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 끝까지 닿은 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라더군요."

"벽이라니."

"저도 보고를 받았을 뿐이라,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요. 이 선을 중심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자세한 건 이 아이한테 들으시죠."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또 다른 뱀파이어.

상태가 좀 이상했다.

여기저기 다치고 초췌해진 것은 물론, 한쪽 팔은 아예 없어진 상태.

"충성! 주인님의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 와중에 군기는 제대로 들은 듯.

없어진 한쪽 팔로 경례를 하려 했으나 손이 안 움직여 당황하는 녀석.

"자세하게 보고해라."

"예!"

자신의 정찰 임무 초반부터 설명하는 녀석

북쪽으로 가려고 한 사람은 자기 포함 셋이었는데 그중에 둘이 죽어 나간 험난한 여정이었다는 듯하다.

꽤 엄청난 모험이었던 거 같긴 한데 솔직히 관심 없고,

중요한 건 벽에 도달한 후였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묘하게 더워지더군요."

"더워졌다고?"

"예. 아시다시피 원래라면 대관령 너머 북쪽은 시원하면 시원했지, 더워질 지역은 아니잖습니까. 저도 그래서 당황했습니다만, 어느 정도 나아가자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아까 말한 그 검은 벽이라는 거겠지.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터 하늘까지 닿은 벽이 보이더군요."

정말 그렇게 높은 벽이라면 여기서도 보일 만도 한데.

아무래도 접근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콘크리트 같은 벽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림자 같은 느낌의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벽이었죠. 거기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열기라."

"열등... 아니아니. 일반적인 인간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 같은 열기였습죠."

"그래서. 그냥 돌아온 거냐?"

"아뇨. 주인님의 명령은 외부로 진출해 그곳 사정을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막힌 벽이라면 모를까, 일렁거리는 모습을 보니 통과할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하지만...."

슬쩍 손을 들어 올리는 녀석.

벽에 손을 집어넣어 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뱀파이어들은 약점인 심장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중상을 입어도 흡혈 몇 번이면 원상 복구된다.

몬스터를 사냥해서도 치료는 가능할 텐데 왜 잘린 채로 뒀나 했는데

보여 주기 위함이었던 모양.

자세히 보니 잘린 게 아니라, 그 너머로 불타서 없어져 버린 것.

"벽의 주변의 열기는 벽 자체가 뿜는 열기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

"그 후로는 장벽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최대한 파악하고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돌아온 동지들과 대조해서 그려낸 게 저 선입니다."

즉.

"그 정체 모를 검은 벽이란 것이 강원도와 외부를 완전히 단절해 놓은 상태다?"

"저희 예상으론 그렇습니다."

"...누가? 왜?"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군지는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 남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녀석.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그놈이겠죠."

"...."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던 참이었는데.

이런 정보라니.

'강원도를 둘러싼 경계....'

그러고 보면.

생각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점령전 현황표.'

[소속 지역 - ROK. 17]

[현재 점령 중인 지역]

[산맥 - 3%]

[소도시 (3) - 3%]

점령전 현황표를 볼 때나.

업적을 달성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올 때.

드물게 보였던 것이 바로 저것.

[ROK. 17]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을 뜻하는 단어.

그렇다면 17은.

'우리나라에... 특별시가 한 개. 광역시가 여섯 개지. 특별자치시가 세종이고. 특별자치도가 제주도... 거기에 도가 여덟 개니까.'

전부 더하니 17.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 직감이 말했다.

이 추측은 아마도,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고.

그리고 저게 아마도 강원도를 뜻하는 숫자일 것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강원도에 갇힌 채 이 점령전을 수행해야 할 운명이라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네?"

우리가 영원히 여기 갇혀 있어야 할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저 구분 자체가 필요 없겠지.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차단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에도.

시스템은 [대분류 ROK]니 [소분류 ROK. 17]이니 하는 구분으로 다른 지역의 존재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하나.

'지금은 작은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이 '게임'이, 언젠가 대분류로 넘어가게 될 거라는 뜻이겠지.'

당장은 강원도라는 대한민국의 도 하나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양상이지만.

언젠가 더 넓은 영역....

대한민국 전체를 두고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어쩌면 그다음 단계까지도.'

뭐.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마 먼 미래의 일.

우리가 할 일은 하나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언젠가 저 장벽을 치우고 이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힘을 기르는 것.

"기껏 들떴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구먼."

금방이라도 집으로 가,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떴는데.

뭐.

그렇게 쉽게 풀리는 일은 없다는 거겠지.

오히려 최근 너무 승승장구하고 있던 거지.

결코 쉬운 세상이 아니란 거다.

'그래도.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저 장벽이 언제까지 존재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직접 쳐부수고 나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게 언제쯤 가능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히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어디까지나 미뤄진 것일 뿐.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 수밖에.

* * *

"어.... 정말입니까?"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은 막힌 셈인 건가."

나는 그 정보를 조장급 인물들에게만 알렸다.

다른 이들도 충격이 큰 듯.

"좀 놀랍긴 하네요. 저희는 뭐 큰 불만은 없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건 423대대 병사들을 제외하면 현지인 출신이 대부분이란 것.

개중에도 다른 지역에 가족이 있는 이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아예 타지 출신인 병사들보다는 불만이 덜하겠지.

"이 얘기. 병사들한테는 하지 않는 거로 하지."

"사기 때문에?"

"네가 생각한 추측대로 저 장벽이 언젠가 열린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덮을 정도는 못 되겠지."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얘기긴 하다만.

당장 할 이유는 또 없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우리 계획이 많이 틀어지겠군요."

서수혁 상병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본래라면 이 지하철도를 따라 경기도권으로 천천히 진출해 나갈 계획이었습니다만...."

"뭐. 그 계획은 캔슬이라고 해야겠네."

"그렇다고 타지로 진출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인제군에만 머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부대와 벙커 근처에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다.

"지금 흐름대로 생존자들을 수용하고, 몬스터를 사냥하며 세력을 늘린다면. 꽤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는 민재 형.

"아마 네 생각은 반대겠지."

"잘 아네."

안정적인 성장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인제군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

"그나마 군부대가 많아서 상권이 유지되던 도시야. 그 군인들마저 전멸한 지금, 찾아오는 생존자들을 수용하며 성장하는 것도 금방 한계가 오겠지."

내가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쪽으로 생각한 것도 이런 사정이 컸다.

인제군에 널려 있는 군부대를 하나씩 점거해 나간다면 무기는 많이 확보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걸 쓸 인력에 한계가 있단 말이지.

결국.

이곳의 전력을 유지한 채, 다른 도시로 진출해 세력을 늘려 나가야 한다.

탄약대대와 벙커가 투배럭이라면.

이제는 멀티를 늘려야 한다는 것.

"일단 강원도 내에서 고려 중인 지역은 세 곳 정도군."

민재 형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춘천시. 속초시. 그리고 양구군."

"다른 두 곳은 알겠는데. 양구요? 거긴 여기랑 비교해도 큰 곳은 아니지 않나요?"

이상아의 의문에 대답한 것은 김 중위였다.

"여기에 우리 군단의 본부가 있습니다."

"네? 우리 길드 본부요?"

"아뇨. 각성자 세력... 강철 군단으로서의 본부가 아니라, 423대대의 상위 부대인 군단 본부 말입니다."

"...아!"

대한민국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소속 제12 군단 예하 직할부대.

423 방공대대 입장의 군단 본부.

김 중위가 상위 부대의 지시를 받기 위해 운전병들을 내보낼 때, 운전병들이 향할 예정이었던 바로 그 부대다.

사실 우리 부대만 그런 게 아니고.

12군단은 강원도 중북부 지역의 방어를 맡고 있다.

이 탄약대대만 해도 12군단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12군수 지원단 소속.

얼마 전에 탈환한 전차대대는 12군단 휘하의 기갑여단 소속이다.

인근에 널려 있는 군부대들은 죄다 12군단 소속이라 보면 얼추 맞을 정도이다.

'산에서 내려올 때 영서지방을 선택한 것도... 군단 본부가 있다는 게 꽤 중요하게 작용했지.'

설마하니 군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김 중위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대에서 섣불리 운전병들을 보낸 건 내 실수가 맞다. 하지만. 그래도 상위 부대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는 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야."

"음.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군단 본부라고 멀쩡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군부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이상,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지."

김 중위의 말에 우려를 표하는 전광일 상병.

확실히 김 중위의 말도 틀리진 않다만....

강한 부대일수록 강한 괴물이 자리 잡는 것 같다던가.

'무려 군단 본부.'

얼마나 강한 녀석이 자리 잡고 있을지 상상도 잘 안 가네.

"정령안으로 확인하는 것도 힘들겠지?"

"네.... 거기까지는 거리도 거리지만, 애초에 군부대들 대부분이 방울이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어서요. 은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죄송할 따름...."

"아니 뭐. 죄송할 건 없고. 어쩔 수 없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를 차리는 수아.

뭐 여차하면 뱀파이어들을 소모품 삼아 정찰 보내면 되는 일이니까.

"굳이 군단 본부를 확인하려 한다면, 냅다 병사를 끌고 가는 식으론 힘들 겁니다."

"이런 건 어때. 근처의 군부대를 천천히 흡수하면서 북진하다가 길드원들이 충분히 늘었을 때...."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는 너무 느리니까 다른 곳으로 진출할 방법을 찾던 거 아닙니-."

어쩌다 보니 군단 본부로 진출하냐 마냐로 열띤 토론이 오가게 돼 버렸네.

나도 나름 생각하는 게 있다 보니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던 찰나.

"저기, 조장님들."

"군단 본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빠르게 선점한다고 나쁠 건- 어?"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병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제, 제발. 도와주십쇼."

"예? 도와주고 자시고."

"누구신데 여기까지...."

"제발...."

털썩.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도 없이 도와 달라고 말만 하더니.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남자.

쓰러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중요한 것이었다.

"던전... 던전이. 도시를 집어삼켜 버렸어...."

던전.

...던전이라고?

본의 아니게.

부대의 다음 진로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93화 침식 이계 (1)

"음. 아무래도 깨어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요."

"그 정도야?"

갑자기 회의 중인 우리를 찾아오더니 기절해 버린 남자.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한 의무병이 말했다.

"애초에 영양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상태에서도 꽤 무리를 한 것 같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 의료술로도 힘들다고?"

의무병, 사의준 일병.

내가 우리 부대의 요리를 혼자 만들며 경험치를 쌓았다면.

우리 부대의 단 둘 뿐인 의무병과 군종병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나온 부상자들을 둘이서 책임지고 치료하며 경험치를 쌓았다.

두 힐러 모두 상당한 고레벨을 달성한바.

어지간한 중상도 죽지만 않으면 살려낼 정도였는데.

"애초에 부상이 문제가 아니고, 에너지의 문제 같은 겁니다."

"뭐가 다른 거야?"

"영양실조 같은 거면 영양제라도 맞추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아무래도 각성자인 것 같거든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뒤늦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식재료 감별(강화)]

[신선도 - 중하]

[각성자: 김영관]

[직업: 하급 전령 Lv. 11]

[상태: 마력 고갈]

"몇 달간 지켜보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각성자들은 어지간해서는 영양실조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영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몸 안의 마력이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어 주죠."

"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 마력마저 모조리 고갈될 정도로 몸을 혹사시킨 상태란 겁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일주일... 길면 한 달 정도는 이 상태일 것 같군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란 것은 사의준 일병의 말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식재료 감별을 통해 알아본 결과.

'신선도가 중하라....'

살아 있는 생명체의 신선도는 대부분 최상.

못해도 상 정도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죽은 재료라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상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데도 중하라.

목숨만 붙어 있을 뿐.

몸 상태는 시체 수준이란 거지.

"...요리라도 먹여 볼까?"

이래 봬도 실명한 사람의 눈도 뜨게 해 본 경력이 있다.

먹일 수만 있다면 마력 고갈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절해 있는 사람한테요? 관두십쇼."

"역시 안 되나?"

"신 병장님 요리라면 효과야 확실하겠지만, 잘못하면 기도로 넘어가서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큰일 날 겁니다."

"큼."

"애초에 급하게 치료할 만한 환자도 아니고요. 살려 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뿐인 거죠."

"그렇담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이 남자가 말한 도와달라는 말.

그 사정을 전혀 모르겠다는 거지.

내가 아는 키워드는 하나.

'던전.'

사실.

이 키워드만 아니었어도 느긋하게 치료되길 기다렸을 텐데 말이지.

나는 슬쩍 옆을 보았다.

거기 서 있는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병민아."

"예. 이병 이병민."

"넌 뭐 들은 거 없냐?"

"그게...."

이병민.

이번에 저 남자를 데리고 회의실까지 온 당사자다.

"저도 자세하게 들은 건 없습니다. 그냥,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저기 춘천 쪽에서 왔다고만...."

"춘천이라."

"죽어 가는 몰골을 한 사람이 자꾸 도와 달라고 하길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싶어서 바로 회의실로 안내한 거라서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침착하게 좀 더 여러 가지 물어봐야 했는데."

"아냐, 잘했어."

어차피 그 시점에서 한계에 도달했을 남자.

우리에게 한 말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겠지.

'던전이라.'

처음 듣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지하철에 생겨난 던전을 점령함으로써 꽤 큰 성장을 이룩했다.

부대원들의 폭발적인 레벨업은 물론.

길드 스킬까지 얻었으니까.

공략에 참가한 모든 길드원이 그 정도로 성장한 경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야말로 미친 보상.

하지만 그 후로는 던전을 공략한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

'공략하고 싶긴 해도, 어디 있는지 알아야 말이지.'

던전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정령안을 통해 인제군 일대를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정수아조차, 그때 우리가 공략한 던전 외에는 발견한 게 없는 수준이니까.

위험하긴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놓는 최고의 파밍처.

도움을 요청해 온 이 남자의 입에서 그 귀한 던전에 대한 언급이 나오다니.

'도움 요청도 도움 요청이지만, 던전 공략의 기회기도 하다.'

당장은 강원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훗날에 대비해 부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놓칠 수 없는 일.

'그래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나서긴 힘드니까.'

나는 길드 메시지창을 열었다.

그리고.

[셰프: 무당 선생.]

우리 길드의 무당....

아니.

[천문관] 각성자, 박태준 병장을 불렀다.

그런데.

[셰프: 저기요?]

[셰프: 주무십니까.]

꽤 한참 동안 답이 없는 녀석.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될 때쯤.

[무당: 아. 영준이냐.]

한참이 지나서야 답변이 돌아왔다.

[셰프: 뭐야. 혹시 바쁜 건가? ...혹시 그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라면.]

[무당: 아니. 당장 큰 문제는 없다.]

[셰프: 정말?]

[무당: 잠깐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답변이 늦었을 뿐이야. 무슨 일이지?]

약간 의아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이라면 무슨 일이 생기기도 전에 '거기는 가도 된다, 안 된다' 하며 경고해 주던 녀석.

그런 경고가 끊긴 지도 꽤 된 것 같다.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

내가 아는 태준이 녀석이라면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조금 신경 쓰이긴 하네.

'뭐.... 도움이 필요하다면 본인이 먼저 말하겠지.'

굳이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도 하고.

[셰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무당: 흠. 조금 살펴봐야겠는데.]

일단은 원래의 목적대로.

녀석에게 춘천에서 온 남자에 관한 얘기를 전달했다.

그러자.

[무당: 보이는 게 있긴 한데. 음.]

[셰프: 오. 뭔데 그래?]

[무당: 너무 추상적인 풍경이라.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추상적이라.

이 녀석의 능력은 이게 단점이란 말이지.

[셰프: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알려 줘.]

[무당: 뭐, 나야 본 것만 말해 주면 판단은 그쪽에서 잘해 줄 테니. 알겠다.]

그렇게.

태준이 녀석이 말해 준 풍경은 대충 이랬다.

[반쯤 물에 잠긴 도시.]

[건물들의 옥상에서부터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린다.]

[대낮에도 햇빛이 침범하지 못해 도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고.]

[그 안을 아가미 달린 인간들이 돌아다닌다.]

...추상적이긴 하네.

도무지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풍경.

태준이 녀석의 직업.

[천문관]이란 게 원래 그렇다.

점쟁이에 가까운 능력.

미래의 일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강력하지만,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 드물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경우가 대부분.

'실제로 춘천이 그렇다기보단, 몇몇 특징을 극대화해서 표현한 거라고 봐야겠지.'

확실히 유용한 능력이지만.

이런 점은 아쉽기는 하다.

태준이 녀석도 조금은 답답해하는 것 같고.

'아니.... 이편이 나을 수도 있어.'

이왕이면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게 더 좋겠지만.

어떤 편으로는 이쪽이 나을 수도 있다.

'준비해야 할 특징이 확실하게 나타나니까.'

현실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추상적으로 보여 준다.

반대로 말하면.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모조리 치운 뒤.

핵심적인 특징만 보여 준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주의해야 할 특징들은.

"물하고, 어둠 정도인가?"

그 키워드에 맞춰서 준비하면 되겠지.

이런 말을 직접 하긴 뭐하지만.

대비해야 할 키워드만 알고 있다면.

'내 요리로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거든.'

* * *

"원정 준비. 완료됐습니다."

"갑작스러운 준비였을 텐데. 꽤 빨리 됐네."

던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감하던 점이다.

군단 본부가 어쩌니 하던 회의가 무색하게.

결국 우리 부대의 다음 진출지는 춘천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원정 준비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이번 던전행은 기본적으로 저 기절해 있는 남자의 구원 요청에 의한 것.

'이 녀석들. 부대원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 매정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이렇게까지 이타적일 수 있다니.

국민을 보호하는 군인의 의무에 충실한 모습은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저 녀석들. 던전 공략이라고 하니까 흥분했나 보군."

그 모습을 본 민재 형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저번 던전 공략. 기억 안 나? 공략에 참여했던 부대원들 대부분이 엄청나게 성장했잖아."

그렇긴 했지.

던전 공략으로 인한 경험치 대부분은 내가 독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몬스터들을 사냥한 덕에 다른 부대원들도 최소한 레벨이 하나씩은 오를 정도의 성장을 겪었었다.

"그때 빠진 녀석들이 엄청 서운해할 정도였지."

"그럼 저 녀석들이 저렇게 서두른 건...."

"힘이 강할수록 유리한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 이 세상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만, 그만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던전이라고 하니 흥분할 수밖에."

"...."

이타심이니 뭐니 하는 거랑은 결론이 먼 이유였다.

'누굴 탓하겠냐. 이렇게 돼 버린 것도 내 요리 영향일 텐데.'

부대원들이 향상심이 강하단 점에 만족해야겠지.

직선 경로인 철로를 이용한다고 해도.

춘천까지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닌 만큼, 병력을 나눌 필요가 생겼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저번에 말 안 했나? 저 양복점에서 일할 때 매니저 역할도 했거든요."

"그거랑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말이 그렇단 거죠."

원정하는 동안.

부대의 관리는 부대장 중 유일한 생산직인 이상아가 맡기로 했다.

양복점 매니저 경력 같은 건 농담이라 쳐도, 그녀는 생존자 그룹의 리더였던 경력자.

길드 메시지를 통한 소통도 가능한 간부이기도 하니.

믿고 맡길 만했다.

부대에는 생산직 각성자를 제외하면 몇 명 남지 않게 되겠지만.

생산직 각성자들도 전투 능력이 그렇게 나쁘진 않으니까.

사실 나만 해도 생산직이고.

"부대 근처에는 공병들이 만든 장벽도 있고. 전차는 기름을 너무 많이 먹으니 두고 가신다면서요? 그 방어 시설까지 고려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나마 다행이군."

"굳이 문제가 있다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이상아.

뭐가 문제인 건가 싶었는데.

"군단장님 요리를 못 먹게 된 병사들이 불만이 많다는 것 정도?"

"아."

이건.

내가 뭘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문제인데.

"그래도 만들어 놓고 가는 전투식량이 꽤 많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요. 직접 만들어 주신 요리랑은 다르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그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원정에 참여하는 게 더 고된 일일 텐데, 남기로 한 병사들이 더 불만이 많을 정도니. 복지에서 먹을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요즘 와서 엄청 체감하네요."

뭐 어쩔 수 있나.

나 말고도 다른 [요리사] 각성자가 합류하기 전에는 참아 주는 수밖에.

나머지 부대원들은 최대한의 자재와 식량을 챙기고 이동을 개시했다.

이동 루트는 이전에 확보해 둔 지하철의 철로.

사고 차량으로 꽉꽉 틀어막힌 도로들과 달리, 직선으로 뻥 뚫린 길이였다.

애초에 사람이 있는 경우가 드문 장소였다.

중간에 쓰러져 있던 열차에서 좀비들이 기어 나온 한 번을 제외하면.

큰 위기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역시... 지하철은 꽤 안전하군요."

"지상의 철로가 문제긴 하겠지만. 그쪽의 벽만 어떻게든 강화한다면, 꽤 안전한 보급선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정에 동참한 공병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며 이동을 계속했다.

역 하나를 거친 뒤.

그다음 역인 춘천역을 향해 이동하려 했으나.

"정지, 정지!"

가장 앞에서 선도하던 이들이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정지 신호를 보낸 곳은.

지하철을 벗어나 지상으로 연결되는 구간이었다.

지상의 풍경이 보이는 곳으로 나오자.

저 멀리.

커다란 벽이 하나 보였다.

"...?"

본래라면 춘천시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해야 할 타이밍.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선을 그어 놓은 뒤.

선을 기준으로 양쪽에 다른 그림을 그린 것처럼.

전혀 다른 두 개의 풍경이 아무렇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저건, 대체."

한쪽은 평범한 풍경이었으나.

이질적인 것은 다른 한쪽.

본래라면 춘천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어야 할 공간.

그곳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밤처럼 어두웠다.

'검은색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그 검은 커튼은 투명한 듯.

안쪽이 조금 비쳐 보였다.

사람의 가슴까지 올 것 같은 물이 출렁이고 있었으나.

그 공간 밖으로는, 물이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빌딩들의 벽면에서 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폭포수처럼.

이 풍경.

얼마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추상적은 무슨."

태준이 녀석이 봤다는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완전 구체적이었구만...."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침식 이계 - 다스무르]

94화 침식 이계 (2)

[침식 이계 - 다스무르]

춘천시의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장막.

우리는 그곳에 진입하기보다는 일단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강이랑 댐 쪽의 물이 눈에 띄게 줄어 있어요."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정수아가 말했다.

정령을 통한 정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저 안에 들어찬 물.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 아닌가 봐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던전은 몬스터들이 테라포밍을 진행한 공간.

이전에 마주했던 지하철의 던전은 비교적 좁은 공간을 자신들의 생활 환경에 맞춰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저건.

'저 대도시의 중심가를 아예 둘러싸 버리다니.'

멀쩡한 도시를 가둬 버린 투명한 벽.

그 안은 아예 다른 세계가 돼 버렸다.

지하철 내부를 바꾼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닫힌 공간 내부를 꾸미는 것과, 열린 공간을 비틀어 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거다.

"저딴 짓을 저지른 괴물이, 저 안에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녀석을 이긴다는 게 가능하긴 합니까?"

"글쎄다."

아연해진 병사들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물은 다른 곳에서 끌어온 것 같다고 하니. 진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적인 존재는 아니란 거야."

"어.... 꽤 긍정적이시군요?"

"벌써부터 쫄아서 좋을 게 뭐 있겠냐."

나도 저 광경을 보면 조금 압도되긴 한다.

인제역 지하의 던전에서 지하철이 모래로 뒤덮인 것도 대단하긴 했다만.

그건 돌바닥을 부술 힘만 있다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도 드니까.

저건 범위도, 보이는 위압감도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고 너무 위축돼도 안 되지.'

중요한 것은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

뭐 그렇게 봐도 위험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전차를 부대에 두고 온 게 후회되는데.'

먼 거리를 이동하기에는 기름 소모가 너무 크다는 판단이었는데.

전차를 끌고 와도 될지 어떨지 모르겠는 비주얼이잖아.

'역시. 일단은 후퇴가 답인가.'

던전 공략이나 안쪽에서 온 구조 요청도 중요하긴 하지만.

공략에 자신이 없다면 미루는 게 답.

부대원들에게 일단 후퇴를 지시하려던 순간이었다.

"이상하군요."

서수혁 상병이 말했다.

"이상하다니?"

"제가 병장님 요리를 먹은 뒤로 감각이 좀 예민해진 거. 아시잖습니까?"

서수혁의 저격을 돕기 위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요리를 먹인 뒤.

그 뒤에도 전차의 포격 등에 동원하기 위해 비슷한 요리를 몇 번 더 먹었다.

그 후유증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평소에도 이전보다 많이 예민해진 녀석.

"저만 눈치챈 건 아마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만. 이 벽, 조금씩 넓어지고 있습니다."

"...?"

넓어진다니?

"아. 직접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들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대검을 장착한 총기를 들고 검은 벽으로 접근하는 서수혁 상병.

그가 벽 근처에서 2cm 정도 떨어진 바닥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보십쇼."

"...정말이군."

바닥에 그어졌던 선이 벽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벽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

던전이란 괴물들에 의한 테라포밍.

즉.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건가."

"이 벽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만 해도 이미 상당합니다. 도시를 에워싸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 넓은 원이 이 짧은 시간 만에 2cm 이상 넓어졌다는 건...."

2cm라고 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원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엄청난 속도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영역은 넓어지기만 할 터.

그리고.

저 영역이 넓혀져 가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지금 후퇴한다고 한들, 이 속도면 금방 우리 부대까지 닿겠네."

"아마도 그렇겠죠."

"그렇다면 뭐."

뱀파이어 토벌 때와 비슷한 흐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게 힘을 키워서 공략할 여유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저 영역이 더 넓어지기 전에 진입해야겠네."

"가능하겠습니까?"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그리고...."

사실.

그렇게 답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거든.

'물. 그리고 어둠.'

태준이 녀석이 알려 준 키워드는 정확했다.

그러니.

"댐하고 강 쪽에 물이 많이 줄었다고 했지?"

"예. 그렇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가서 낚시 좀 해 와라."

"예?"

* * *

[침식 이계 –다스무르에 진입합니다.]

[달빛만이 은은하게 빛나는 물에 잠긴 세계입니다.]

[다스무르의 주민들은 한때 신의 보호 아래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나, 신을 잃은 지금.]

[그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의 영광의 순간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이는 명백한 침략 행위.]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환경입니다. (환경 적응도 - 74%)]

[종족 페널티 - 모든 능력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던전에 진입하자.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이 군복을 적시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난번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문구 하나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라.'

저 말은 시스템의 의지인 걸까.

아니면 우리의 전의를 불태우기 위한 퀘스트 문구에 지나지 않는 걸까.

'전자라면 시스템은 인간들의 아군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

"진입, 진입!"

"후읍...!"

"처음에는 숨쉬기가 좀 힘들 거다! 차분히 적응해!"

내 뒤를 따라 길드원들이 점차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급격한 환경 변화.

하지만 던전 공략이 처음도 아니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다들 약간의 고통이 있을 것이란 말을 들은 뒤였던지라, 그럭저럭 당황하지 않고 적응할 수 있었다.

"전투 차량도 진입했습니다!"

"상태 안 좋은 애들부터 올려."

이윽고,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끌고 온 차량들도 던전에 모두 진입을 완료했다.

물속에서의 전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모조리 방수 처리를 끝낸 차량들.

차량들은 높이가 꽤 있는 편이니까.

위쪽으로 올라타면 그럭저럭 물을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되겠지.

나는 차량에 올라타기 전.

우리가 들어온 던전의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밖에서는 안쪽이 잘 보이는 편이었는데.'

안쪽으로 들어오자.

외부와의 경계 지점에는 엄청나게 강력한 물살이 내리치고 있었다.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던 군용 대검을 슬쩍 그 물살에 가져다 대자.

파사사삭....

대검의 끝부분이 그라인더에 가져다 댄 것처럼 갈려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나타나는 문구.

[한번 입장한 던전은 공략이 완료될 때까지 탈출할 수 없습니다.]

진입할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 거겠지.

나름대로 강화한 전투차량조차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날 것 같은 엄청난 수압이었다.

'뭐.... 중도 이탈이 불가능하단 건 알고 있었으니까.'

이전의 던전도 그랬거든.

일단 안으로 발을 들인 이상.

던전 공략을 클리어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는 거다.

도시 하나를 뒤덮은 상당한 규모의 던전.

'장기전이 되겠지.'

나 역시 근처의 차량 위에 올라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 안의 공병이 소리치며 차량들이 전진을 시작했다.

목표는 가까운 고층 건물.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간 뒤에 근처를 둘러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거든.

전진하는 차량 위에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처럼 아래를 본 병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물이 맑군요."

"그러게."

홍수가 난 도시의 풍경 같은 걸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하수도의 더러운 물과 도시의 모래, 먼지가 섞여 빈말로도 깨끗해 보인다고는 하기 힘든 모습이 대부분이었지.

'일반적인 홍수는 아니란 거겠지.'

지금 도시를 잠식한 물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물 안에 떠다니는 낡은 전단지까지 보일 정도로.

그 순간.

슈슉....

'어?'

멀리서.

무언가 물속을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했으나.

'착각이 아니야.'

물속에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

그 그림자는 한두 개가 아니었고.

엄청난 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온다!"

"전투태세!!!"

김 중위의 외침과 함께 버프가 퍼져 나갔다.

이윽고.

파악!!

물속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향해 몸을 날려 오는 괴물.

움직임이 워낙 빨라 정확한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대충이나마 파악한 실루엣으로 보니....

'어인?'

비늘과 아가미가 달린 인간형의 괴물.

지구의 물고기와 같은 종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성질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대놓고 수중전 특화냐.'

적들은 물속에서 덤벼들었다.

반면 우리는 땅을 밟고 살던 인간들.

그 땅은 지금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로 인해 뒤덮인 상태였다.

전투차량들이 있다고 하나, 그 위에서 자유롭게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무리 날고 기는 전사라고 한들.

물속에서는 제 실력의 반의반도 내기 힘들기 마련이다.

본래라면 엄청나게 불리한 환경....

'이었겠지.'

뭐.

지금은 별 상관없는 얘기다.

"카하하하하하!!!"

괴성을 지르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전사들.

그 행동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이유야 뻔하지.

[요리의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코스 요리 - 심해]

밥을 든든하게 먹은 덕분.

[붕어 매운탕]

[미역 초절임]

[모듬회]

[피시소스를 곁들인 나이트호크 구이]

밤부엉이는 정수아의 눈을 치료할 때 사용했던 몬스터 중 하나.

녀석이 가지고 있던 특성은 [어둠 시야].

이름 그대로, 어둠 속에서도 시각을 잃지 않게 해 주는 특성.

그리고 그 외의 요리는 모두 수산물로 구성했다.

심플할 정도로 콘셉트를 알기 쉬운 구성.

그 콘셉트대로의 효과가 구현되었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섭취 시, 수속성 저항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섭취 시, 일시적으로 특성 [환경 적응 - 수(水)]를 획득합니다.]

[섭취 시, 일시적으로 특성 [어둠 시야]를 획득합니다.]

물속에 들어간 전사들이 무기를 휘두른다.

물의 저항력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휘둘러질 리가 없는 공격이었지만.

쿠웅!!!

-카아아아악!

공격에 얻어맞은 괴물이 비명을 내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우리가 차량에 탑승한 것은 어디까지나 편하게 이동하기 위함.

저 요리를 [오병이어]를 통해 모든 부대원에게 먹인 지금.

"카하하! 덤벼라, 물고기 새끼들아!"

"전 맥주병이라, 물속에서 싸울 거라고 했을 땐 솔직히 무서웠습니다만."

"땅에서 싸우는 거보다 편하구만!"

물에 잠긴 도시라는 환경은 우리에게 전혀 마이너스가 아니었다.

'요리에 쓰인 재료가 대부분 평범한 수산물인 게 아쉽긴 하다만.'

마력을 품고 있는 몬스터의 재료와 평범한 물고기나 해초류의 성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물과 관련된 특성을 가진 괴물을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요리는 코스 요리로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능력치 증가량은 미미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부대원들 역시 강해진 덕일까.

-케에에에엑...!

환경에만 적응시켜 줬을 뿐임에도 전투는 우리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나 역시 차량에서 내려와 칼을 꺼내든 뒤.

덤벼드는 어인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스킬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중급 요리 비결 - 다스무리안 유체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심해의 다스무리안 유체]

[깊은 물의 세계, 다스무르의 수호종족인 다스무리안의 유체입니다.]

[다스무르의 생명체들에게는 그들 세계를 수호하는 어인, 다스무리안의 살점을 먹는 자는 불로불사를 이룰 수 있다는 민간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귀하게 평가받는 식재료입니다.]

[높은 잠재력을 지닌 종족이지만, 잠재력의 대부분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손질을 하기 위해선 우선 아가미 부위에-.]

어인이라.

"약점은 가슴 부위의 아가미다! 뭐든 찔러 넣어!"

머릿속에 스며 들어오는 손질법을 병사들에게 알리며.

손에 쥔 칼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독고구식].

박씨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칼.

내 주 무장인 이 녀석은 긴 사시미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워낙 잘 드는 칼이다 보니 다용도 칼처럼 쓰고 있었다만.'

본래의 용도는... 생선을 손질하는 것.

씨익.

'베는 맛이 있겠어.'

95화 침식 이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