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
김 건은 그저 멍하니 오언주의 사냥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쳤네, 미쳤어.'
문병호의 할머니를 구하러 갔을 때도 느꼈지만, 오언주의 싸움 방식은 정말이지 짐승 그 자체였다.
'사람이 어떻게 맨손으로 오크를 찢어? 아, 사람이 아닌가.'
대상이 고블린에서 오크로 바뀌었을 뿐,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때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 소린가. 저 여자는 재현님의 축복을 받기 전부터 강했었으니.'
또한 하동건처럼 초능력을 각성한 사람이었다.
하동건이 간택을 받고 난 직후 급격한 전투력 상승을 보여줬던 것을 생각하면, 저 여자도 그런 과정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현님은 저 여자를 어떻게 설득시킨 거지?'
오언주의 고블린 집착은 누가 봐도 너무 지나쳤다.
따로 들은 이야기가 없어 정확한 건 모르지만, 고블린에 대한 원한만큼은 분명히 느껴졌었다.
'분명 고블린에 미쳐있던 여자였는데.'
같이 다닐 때도 고블린을 죽이는 것에 눈이 멀어 몇 번이나 단독행동을 하곤 했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며칠이 지난 후에는 아예 따로 행동하게 됐었는데, 지금은 고블린 무리와 조우하게 되어도 그렇게 급발진 하는 일이 없었다.
여전히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래도 명확히 지시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딱 한 가지 그럴듯한 가정이 있었다.
'···저 여자도 뭔가 새로운 능력을 얻은 건가?'
문병호와 강덕수를 시작으로 자신의 파티원들이 하나하나 특별한 힘을 각성하는 것을 보면서, 김 건은 한 가지 욕망이 생겼었다.
초능력을 각성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김재현을 더욱 숭배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바로 각성의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공했지.'
파티원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각성하긴 했지만, 어쨌든 특별한 힘을 각성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능력을 받게되면 사람이 순종적이게 변할 수밖에 없지.'
당장 자신만 해도 혹시나 김재현이 자신의 이능을 가져갈까 알아서 기고 있는 중이었다.
오언주도 비슷한 상황인 거겠지.
그때였다.
띠링!
"파티 퀘스트"
퀘스트 내용 : 복귀.
제한 시간 : 1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없음.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간다."
하동건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김 건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휘파람을 불자 지하철역 구석에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팔에 안착했다.
까악―
김 건은 까망이라고 이름을 지은 까마귀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착하지. 까망아."
까망이와의 교감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무엇보다 100% 신뢰 가득한 존재가 생겼다는 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힘을 얻게 되면 거역하기 어렵지.'
처음에는 세뇌에 대한 의심도 했지만, 세뇌가 아니었다. 김재현의 축복을 받아 능력을 각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를 의심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세뇌라면 자신의 정신상태가 지금처럼 멀쩡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김재현은 성과를 내면 그만큼 대우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뢰할 수 있었지.'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질 때마다 몸이 더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하동건이 김 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건아. 정찰 좀 부탁할게."
"···네, 선배님."
김 건은 까망이를 쓰다듬으며 의지를 전달했다.
'정찰 좀 부탁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를 까망이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동시에 까망이의 의지도 자신에게 전달되어 온다.
감각을 공유하지는 못하지만, 밖이 위험한지 아닌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까망이가 먼저 지하철역 밖으로 날아간 다음 상황을 전해왔다.
"···문제없어요. 바로 나가면 될 것 같아요."
"고마워."
그렇게 지하철역 출구로 나가던 그때.
'응?'
문득 지하철역 한쪽 구석, 짙은 어둠이 잠겨있는 곳.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까망이와의 교감으로 한층 날카로워진 감각 덕분에 눈치 챈 것이었다.
저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순간.
찍-
어둠속에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는 사라져버렸다.
'···뭐야. 쥐였나.'
별 것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김 건은 일행을 따라 지하철역을 빠져나갔다.
찍-
사라진 줄 알았던 쥐는 그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가족을 구하러 남부민동으로 가달란 이야기를 하자마자.
[시민 오언주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오언주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문병호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김가영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
······
어째서인지 신뢰도와 충성도가 줄줄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동정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곳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문병호가 눈이 벌게져서는 말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아니, 돕게 해주십시오!"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보니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도 압니다.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하동건 파티가 아파트 단지 주변을 정찰하면서 보여준 것들이 있었으니까.
충격적이게도,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몬스터는 고블린이었다.
어디에서 그렇게 번식을 해대는지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와 같은 존재들.
그래서였다. 아파트 단지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파트였기 때문에, 고층으로 갈수록 고블린의 영향력이 적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주택의 상황은 처참했다.
고블린 무리가 휩쓸고 지나간 주택가는 모두가 1층, 2층 세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참혹한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시체, 시체, 시체.
버려진 집마다 꽃이 피었다.
고블린들은 어찌나 악랄한지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부지런히 지옥도를 그려놨다.
유혜린이 말했다.
"가족분들도 아파트 단지에 계시면 분명 괜찮으실 거예요! 저희도···."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주택가입니다."
"······."
"그래도 담장이 꽤 높고 외부로부터 침입하기 힘든 구조여서 희망이 있습니다."
"그, 그렇죠! 하하!"
애써 밝게 대답해주고는 있었지만, 유혜린의 얼굴은 굉장히 어두웠다.
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며 말했다.
"전포역을 점령하고 있던 오크들을 모두 정리하기도 했으니 지하철 선로를 따라 서면역으로 가주시길 바랍니다."
하동건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을 이었다.
"서면역에서 1호선 선로로 갈아타서 자갈치역까지 가면 되겠군요."
"네."
자갈치역은 본가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었다.
"2번 출구로 나오면 됩니다. 역에서 나온 이후 구체적인 방향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 강덕수가 손을 들더니 물었다.
"왜 하필 지하철역입니까? 그냥 지상으로 가는 게 더 빠르지 않나?"
나는 대답 대신 일어나서 거실 창가로 향했다.
2901호, 여기에서는 옥상에서처럼 서면의 상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촤라락
암막 커튼을 치우고 말했다.
"저길 보세요."
엉망진창으로 변한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건물과 박살이 난 유리창들, 그리고 그곳의 원래 주인인 양 돌아다니는 괴물들의 모습까지.
"땅 위로 간다면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다가 죽을 겁니다. 반면에 지하철 선로는 몬스터들이 있다고 해도 한정된 양이겠죠. 중간에 도망칠 수도 있고요."
처참한 도시의 풍경을 본 강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겠네요."
"당장 자갈치역까지 한 번에 가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욕심인걸 아니까요."
나는 등을 돌려 모두와 천천히 눈을 마주쳐 가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은 서면역, 그곳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주세요."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모두가 내 부탁을 받아들여주었다.
일부 동정심이나 안타까움이 섞여있는 듯 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가족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고, 내일 아침부터 바로 작전을 시작해주십시오."
그렇게 작전회의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그때였다.
♬♪♬♩~
벨소리가 울리기에 확인해보니 오언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철컥
"무슨 일이신가요?"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오언주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재현님의 능력으로 가족 분들을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대상을 순간이동 시키는 것.
사실 내가 문병호의 각성 능력을 보고 흥분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잘만 하면 저 능력을 극대화시켜 가족들을 단숨에 옮겨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불가능한 퀘스트 보상입니다.]
결과는 완벽한 실패였다.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도 문병호의 할머니가 있는 곳이 내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라서가 아닐까.
'분명 죽었을 게 분명한 고블린이 정산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
게다가 이 가설은 오언주의 아들의 부활이 가능한 이유도 설명이 가능했다.
'그 아이가 죽은 곳이 내 영향력이 닿는 곳이기 때문이었다면?'
만약 정말로 이런 이유라면 부모님이 죽었을 경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내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바깥에서 죽은 게 될 테니까. 젠장.'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하동건 파티가 직접 문병호의 할머니를 구하러 가야 했던 것이다.
"저도 전지전능한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말이죠."
만약 내가 전지전능 했다면 제일 먼저 이 망할 집구석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순간이동 능력을 부여하고 곧바로 가족을 만나러 갔겠지.
그러나 내 능력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고, 나는 그것들에게서 자유롭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발버둥 칠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불안해하는 듯한 오언주를 향해 말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언주 씨와 한 약속은 지킬 수 있는 약속이니까요. 일전에 직접 확인시켜드렸듯이."
오언주는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일행들이 내 능력에 의구심을 가질까 싶어 이렇게 따로 물으러 온 것만 봐도 그랬다.
배려심이 깊었다.
게다가 다른 이들 앞에서 죽은 아들 이야기나 내가 약속한 부활에 대해 언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만큼 입이 무겁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였다.
오언주에게 솔직하게 말해준 것은.
[시민 오언주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오언주씨도요."
그녀를 보내고 난 직후.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익숙한 알림이 나타났다.
시도 때도 없이 시민들이 합류하고 있으니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긴생머리에 비니를 눌러쓴,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다.
'제의해.'
[서예진에게 시민권을 제의합니다.]
[서예진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시민권을 제안하는 것과, 대상이 시민권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름 : 서예진 (Lv. 31)
신뢰도 : 7
각성 능력 : 생쥐의 여왕
경험치 분배율 : 0%
정산금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퇴출』
'각성자라고?'
곧바로 자극이 들어왔던 곳에 절대자의 눈을 비췄다.
그런데.
찍―?
그곳에 있는 것은 서예진이 아닌, 평범한 쥐새끼 한 마리였다.
028화 [Episode 07] 서면역 (2)
서예진에게 오늘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평소처럼 식량을 찾기 위해 생쥐들을 사방팔방으로 풀어놓았었다.
그런데 그 중 전포역 지하상가를 헤매던 생쥐 한 마리에게서 공포를 느끼고 그 즉시 감각을 공유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오크들을 학살하는 사람들이라니.'
오크가 사람들을 학살하는 건 봤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오늘 처음 봤다.
곰으로 변하는 여자.
몸을 빛나게 만드는 여자.
갑옷을 소환하는 남자.
화살에 희미한 빛을 담는 여자.
순간이동을 하는 남자.
까마귀를 다루는 남자.
특히 곰으로 변하는 여자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그냥 창을 들고 싸우는 남자의 모습도 심상치 않았다. 딱히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한 눈에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전원이 각성자···.'
지금까지 생존자 집단을 수도 없이 발견해왔다.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만약 각성자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겨우 한 명 포함된 경우가 전부였다.
모든 이들이 각성자로 이루어진 파티라니 말이 안 되는 확률이었다.
'그게 가능해?'
그러나 진정한 충격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전포역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거기로 간다!"
"몰아!"
"끼긱―!"
서예진은 그 장면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저건 또 뭐야?'
인간들이 고블린을 사냥하고 있었다.
'무슨···?'
지난 한 달간 사람들이 고블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야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냥하는 쪽은 오히려 고블린들 쪽이었고, 인간들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은 정반대였다.
"죽여!"
"끼이이익―!"
무리를 이룬 인간들이 조직적으로 고블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고블린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았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벌써 몇 번이나 겪은 일이라는 듯이.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무기도 다양했다.
망치, 식칼, 골프채, 알루미늄 배트 등.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드물게 창이나 활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크들이 들고 있는 창이다.'
소수의 남자들이 들고 있는 건 오크들이 주로 애용하는 병기인 글레이브가 분명했다.
저들이 오크들을 사냥해서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강력해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헌터님들이다!"
"덕수야!"
그들이 오크들을 학살하던 파티를 향해 아는 척을 해왔다.
오크를 학살하던 파티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줬다.
'같은 그룹이었나.'
그렇다면 저들이 오크들의 창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말이 된다.
"아저씨! 이것 좀 가져가세요! 아직 창 없으신 분들 많죠? 나눠가지세요!"
그들은 전리품으로 들고 있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역시.'
글레이브를 나눠주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에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이었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저 각성자 파티는 대형 생존자 무리의 리더였던 거야.'
각성자 8명이 모여 만든 생존자무리라니.
대충 생각해봐도 최소 몇 천 명 이상의 생존자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각성자의 비율이 천 명 중에 한 명 정도 있을까 말까였으니까.
'합류하는 게 좋을까?'
슬슬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모두를 책임지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수천 명 규모의 대형 생존자 쉘터를 운영한다는 것은 식수나 식량이 충만한 것일 테지.
그렇다면 충분히 접촉할 가치가 있었다.
'내 능력이라면 충분히 어필 가능해.'
그녀가 이끌고 있는 생존자 서른 명 정도는 충분히 받아줄 것이다.
서예진도 자신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전에 조금 살펴보도록 할까.'
글레이브를 나눠주고 난 뒤, 다시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각성자 파티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서예진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또 다시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해야 했다.
"꺄하하!"
"간다아!"
"엄마! 여기 좀 보세요!"
서예진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놀이터에서 애들이 놀고 있다고?'
물론 세상이 망하기 전에야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방 천지에 몬스터들이 활개치고 있는 세상이었다.
'도대체 여긴···.'
지금 여기가 자신이 지난 한달 간 겪어온 세상과 같은 세상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예진아."
익숙한 목소리에 생쥐와의 감각 공유를 해제하고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정수 오빠?"
"이제 정말 한계인 것 같다. 제일 중요한 물이 다 떨어졌어. 우리 어떡하지?"
서예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광경을 봤었는데, 지금 자신들은 건물 지하실에 숨어서 마실 물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동화 속 세상에서 갑작스레 차가운 현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고민하는 게 바보였어.'
덕분에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눈치를 보던 한정수가 말했다.
"미안. 면목이 없다. 이렇게 항상 너에게 의지만 하고."
서예진은 한정수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든 활로가 보일 것 같거든."
"활로?""응.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우선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해줘."
"무슨 준비?"
"밖으로 나갈 준비."
한정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되물었다.
"밖? 밖으로 나간다고?"
"그래. 그게 아니면 여기서 다 같이 말라 죽을 작정이야?"
"그건 아니지만···."
"살고 싶으면 잔소리 말고 준비하라고 전해둬."
"···알겠어."
서예진은 한정수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능력을 발휘했다.
한정수와의 대화 때문에 각성자 파티를 놓치고 말았지만, 그들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정도는 알기 쉬웠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왔다갔다하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 건물에만 사람이 이렇게 많지?'
몰래 들어가려고 대기 중인데 좀처럼 틈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
서예진의 명령을 받은 생쥐가 앙증맞은 팔다리를 놀리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퍽!
찍―!
투명한 벽에 머리를 박은 생쥐가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이상한 창이 나타났다.
[출입 불가.]
'······이건 또 뭐야?'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시민권을 획득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침입자를 차단하는 벽과 시민권.
그리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
그것들의 맥락을 파악한 순간, 서예진은 거칠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예! 무조건 예!"
사람들을 보호하는 능력자가 이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진 게 분명하다.
이 시민권은 그 사람의 보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인 것 같았고.
띠링!
[시민권을 획득하셨습니다.]
된 걸까?
서예진은 조심스럽게 생쥐를 아파트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번에는 그를 막는 투명한 벽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람과 마주쳤다.
"생쥐다!"
"꺄아아악!"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예상보다 1층에는 사람이 많았고, 다급하게 도망쳐야만 했다.
"도망친다!"
"잡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쥐를 잡기위해 난리를 쳐댔다.
'이크!'
재빨리 비상구 쪽으로 도망간 생쥐는 사력을 다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상계단을 통해 2층으로 진입한 순간.
'!!'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트레드밀, 벤치프레스, 체스트프레스, 시티드로우 등등 수많은 운동기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천장에서 환하게 빛나는 LED 전구와 헬스장 전체에 배경음악처럼 깔려있는 신나는 음악 소리.
♪♬―♩―!
'이건···.'
마치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세상이 망하기 전의 어딘가의 헬스장에 들어와 버린 듯한 기분.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풍경이어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꿈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그 순간.
콰직!
"윽!"
갑작스런 충격과 함께 감각 공유가 강제로 끊어졌다.
누군가 그곳에 있는 생쥐를 잡았다는 뜻이었다.
'아으. 머리야.'
덕분에 깨질 듯 한 두통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하, 하하하하!"
살 길을 찾았다!
'문제는 어떻게 거기까지 가냐는 건데···.'
이곳은 서면이었다.
현실적으로 그곳까지는 너무 멀었다.
예전에는 걸어서 겨우 십오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몬스터 밭을 뚫고 가야 하니까.'
생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자신을 포함한 몇 명 정도는 이동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서른 명이 넘어가는 인원을 모두 데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무조건 전멸하고 만다.
'어떻게든 전포역까지만 가면 되는데.'
거기서부터는 몬스터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 각성자 파티가 모조리 정리한 거겠지.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어떻게든 가면 아파트까지 가는 길은 활짝 열려 있는 셈이다.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나.'
그동안 생쥐들을 이용해 꾸준히 정찰해 왔기 때문에 이 주변 사정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서른 명의 생존자를 데리고 안전하게 전포역까지 가는 방법.
딱 한 가지 존재하기는 했다.
'지하철 선로를 이용하면 되긴 하는데.'
생쥐들을 통해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서면역 안쪽에는 의외로 몬스터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몬스터가 적은 데에는 전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면역에는 그 <괴물 >이 있으니까.'
그놈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정도로 두려운 대상이었다.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성이 있어.'
놈도 결국은 생물이었다.
잠에 빠진 틈을 노린다면 충분히 해볼 만할 것 같았다.
어차피 놈과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몰래 빠져나갈 수만 있으면 된다.
'생쥐들을 잘 활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
'헉?'
헬스장에서 최형준에게 밟혀 죽는 생쥐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서예진이 생쥐로 변한 것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들여진 생쥐(Lv. 2)을 사냥하셨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416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나보다.
시민 관리 창을 확인해보니 아직 멀쩡히 서예진의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휴.'
그녀의 각성 능력을 보니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생쥐의 여왕 (A 등급)
그녀와 마주한 모든 생쥐들은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한 번 길들여진 생쥐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며,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
'생쥐를 조종하고 있었던 거군.'
그렇다는 건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었다는 건데 이런 경우에도 시민권 제안 가능하다는 점은 또 흥미로웠다.
그때였다.
"응?"
거실 창문 밖으로 반가운 놈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어찌 보면 나를 구원해줬다고도 할 수 있는 놈.
물론 저 놈이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저 놈의 종이 그렇다는 것이지.
'켈리칸.'
무슨 우리집 근처에 켈리칸 놈들만의 약속된 모임 장소라도 있는 것일까.
벌써 이번이 세 번째 등장이었다.
'뭐, 그 덕분에 내가 살았지만.'
처음 찾아온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보고 말라죽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켈리칸들에게는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는 놈의 시선이 나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놈은 사냥꾼의 눈으로 아래쪽 놀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일반 시민들을 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보이지 않는 손.'
내 몸에서부터 빠져나온 투명한 손이 거실창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는 곧바로 놈을 향해 뻗어나갔다.
덥석!
-케에엑!?
녀석의 날개 한 쪽을 잡고 이쪽을 향해 거칠게 끌어당겼다.
쿠웅!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놈은 투명한 벽에 몸을 비비며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나는 그런 놈을 보며 중얼거렸다.
"반갑다."
-케에에에엑―!
"가신소환, 하동건."
슈슉
"음?"
갑작스럽게 소환된 하동건은 거실 창문에 버둥거리고 있는 켈리칸을 보고는 말했다.
"처리하면 됩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상점에서 보급용 창 하나를 사서 하동건에게 넘겼다.
푹!
하동건은 신속하게 창을 찔러 버둥거리는 켈리칸의 목을 따버렸다.
[켈리칸(Lv. 25)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38,567,987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업과 동시에.
지이잉―
'으윽.'
집구석 영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양옆에 있던 두 개의 동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029화 [Episode 07] 서면역 (3)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민들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시민권을 부여 받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총 27 명.
그래도 그동안 부지런히 시민들을 받아들인 덕분에 그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부여해.'
혹시나 싶어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27명 중에서 새로운 각성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만큼 각성자의 비율이 낮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A 등급 각성자가 제 발로 찾아와주다니.'
그런 의미에서 서예진은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어찌된 게 각성자들은 이런 식으로 자진해서 굴러들어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무조건 가신으로 받아들여야 해.'
가신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신뢰도와 충성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신뢰도를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대상과의 직접 대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하동건이 옆에서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내려가서 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그를 내려 보내고 나는 서예진을 찾기 위해 곳곳을 뒤져봤다.
혹시나 새롭게 늘어난 아파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롭게 늘어난 두 개 동을 샅샅이 뒤져봐도 서예진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거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길들인 생쥐가 밟혀죽은 것 때문에 악감정이 생겼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불러와야겠어. 퀘스트 부여.'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아파트 방문.
제한 시간 : 48시간 00분 00초
보상 : 콜라와 초코바.
실패 페널티 : 없음.
[이대로 퀘스트를 부여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요즘 매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 두 가지였다.
서예진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보상일 것이다.
그대로 퀘스트를 부여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잠깐만.'
문득 방금 전에 들었던 오언주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현님의 능력으로 가족 분들을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고 그 이유가 내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민권을 부여받은 대상은 내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일까, 아닐까?
정답은 '영향력 아래 있다.'였다.
아무리 집구석에서 거리가 멀어도 그들이 사냥하는 몬스터의 시체는 그대로 정산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퀘스트 수정.'
퀘스트 시간과 페널티를 살짝 건드렸다.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아파트 방문.
제한 시간 : 10초
보상 : 콜라와 초코바.
실패 페널티 : 소환.
[이대로 퀘스트를 부여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성공이었다.
'실패 패널티까지 활용할 수 있을 줄이야.'
실패 페널티라는 거에 꽂혀서 꼭 부정적인 효과만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성공 보상뿐만이 아니라 실패 페널티 또한 내 마음대로 적용 가능했던 것이다.
'소환이 가능하다니.'
일회용이긴 하지만 가신 소환과 같은 능력을 일반 시민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시민권을 획득한 대상을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는 것.
이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걸 활용하면 가족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가족들 모두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퀘스트 부여 시스템을 활용해 집구석 영역 안으로 데려오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전초기지가 활성화 될 경우 일시적으로 집구석 영역과 같은 힘을 지니게 된다고 했었지.'
그 말은 결국 전초기지를 활용해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하동건 파티를 보낸 뒤, 전초기지를 건설한 다음, 가족들 모두에게 시민권을 주고, 퀘스트 부여 시스템을 활용해 이곳으로 소환한다면?
'완벽하다.'
지금까지의 계획 중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계획이었다.
'문제는 돈이 얼마가 드냐는 건데.'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돈이 너무 많았다.
때문에 서예진을 순간이동 시키는 데에 드는 비용이 얼마쯤인지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절대자의 지갑에 있는 전 재산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해 보자.'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할 문제였다.
이럴 때는 그냥 단순무식하게 부딪히는 게 답이었다.
'퀘스트 부여해.'
띠링!
[ 00분 09초 ]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줄어드는 시간을 바라봤다.
퀘스트 비용이 청구되는 것은 퀘스트 완료 시점.
이제 3초 남았다.
'제발 10억만 넘지 마라.'
1회성의 순간이동 능력.
그 가격은.
[시민 서예진이 퀘스트를 실패했습니다.]
[퀘스트 비용 31,674,894 원이 소모됩니다.]
'3천만 원!'
선방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비싼 가격이긴 했지만, 이 정도 가격이라면 필요한 상황에는 충분히 쓸 만한 가격이었다.
'거리에 따른 비용 증가라던가,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지만 어쨌든 제대로 작동한다.'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현관에서 서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현관으로 다가가 서예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서예진씨."
"누, 누구세요? 저 아세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에게 시민권을 준 사람입니다."
"네?"
서예진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자, 잠깐만요. 그렇다는 건 지금 제가 있는 여기는···."
"네. 생쥐를 통해 보셨던 그 아파트의 제일 꼭대기 층입니다."
어찌나 당황한 것인지 내 손을 잡고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서예진에게 차가운 콜라를 한 캔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초대해서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반갑습니다,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나왔다.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아무래도 이제야 지금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동시에 내 능력에 대한 신뢰도 생긴 모양이었고.
그리고.
"그러니까··· 재현님이 저를 이곳으로 불러왔다는 거죠? 아까 그 이상한 퀘스트도 그렇고."
"네. 제가 부여해드린 겁니다."
서예진은 약간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지 않아도 모두를 데리고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었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도박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런.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들어보니 숫자가 꽤 됐다.
총원 35명.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그녀의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재잘거리는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네···?"
순간 서예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그, 그게 무슨···."
"제 힘으로 그들을 여기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민이 아닌 대상을 순간이동 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된다고 하더라도 문제였다. 서예진 한 명을 데리고 오는 데 3천만 원이 들었으니 서른다섯 명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10억이 넘는 돈이 들어간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10억에 가까운 돈을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단호한 대답에 당황했는지, 서예진은 무릎으로 내게 기어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부탁해왔다.
"안 돼요! 저희 어머니랑 동생이 거기 있단 말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척이나 절박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나 고민해봤다.
우선 제일 먼저 떠오르는 평범한 방법은 하동건 파티를 파견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능력을 생각하면 서른 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보다 좀 더 나은 해결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분명 서예진이 직접 접촉한 것도 아니었는데, 시민권 부여가 가능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집구석 영역이 생쥐를 그녀의 일부로 인식했다는 것 아닐까.
'잘 하면 이런 것도 될 것 같은데.'
지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를 가신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야 종 칭호가 활성화 될 테니까.
나는 서예진의 시민 정보창을 확인해봤다.
『이름 : 서예진 (Lv. 31)
신뢰도 : 37
각성 능력 : 생쥐의 여왕
경험치 분배율 : 0%
정산금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퇴출』
한 자리 숫자였던 신뢰도가 그새 30이나 올라 있었다.
'빠르군.'
역시나 직접 대면하자마자 신뢰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올리면 되겠는데?'
신뢰도를 올리고 더불어 추후에 개방되는 충성도까지 일정 이상으로 올릴 방법이 없을까.
물기 어린 눈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서예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뭐든지 하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멈칫하던 서예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든지. 뭐든지 하겠습니다."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나는 자세를 낮춰 주저앉아 있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절실해 보이는 서예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이어 말했다.
"전적으로 저를 믿으시고, 제게 충성을 맹세해 주십시오."
"네···?"
"그러면 구해드리겠습니다."
정면 돌파.
내가 선택한 것은 단순무식하게 나를 믿고, 충성해달라고 직접 부탁하는 방법이었다.
말하면서도 이 방법이 통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도해 본 것뿐이다.
이 방법이 안 먹히면 하동건 파티를 파견 보내면 되니까.
그런데.
"재현님을 믿겠습니다.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마음을 증명하면 될까요?"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의외로 그 방법이 먹혀들었다.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50을 달성했습니다.]
[충성도가 개방됩니다.]
[시민 서예진의 충성도가 30을 돌파했습니다.]
[시민 서예진이 가신 등록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이게 되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최단 시간 만에 가신 등록 조건을 갖춘 것이다.
가족들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 때문인 거겠지.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말을 믿으려고 발버둥친 게 아니었을까. 온 힘을 다해서 말이다.
나는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곧바로 서예진을 가신등록하자.
파아앗!
가신 등록할 때의 특유의 밝은 빛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느낌이 좋았다.
이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좋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 : 서예진 (Lv. 35) [+]
칭호 : [열 번째 종] [기사] [조련사]
신뢰도 : 52 충성도 : 33
각성 능력 : 생쥐의 여왕, 진화
경험치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
{조련사}
길들인 것들의 능력치가 (충성도)%만큼 증가하며, 모든 길들여진 것들의 성장 속도를 (신뢰도)%만큼 가속시킨다.
진화 (A+ 등급)
길들인 대상이 지속적으로 성장합니다.
일정 레벨에 도달한 개체들은 진화하게 됩니다.
네 번째 기사의 탄생이었다.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고 있는 서예진을 향해 물었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 길들인 생쥐들이 있습니까?"
서예진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당장 그 생쥐를 가족들 앞에 데려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현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려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거긴 춥습니다."
서예진은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거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서예진은 두 눈을 감고 집중에 들어갔다.
'절대자의 눈.'
시야의 포커스를 서예진에게 맞춘 순간.
'보인다.'
짧은 다리로 좁은 통로를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보였다.
『길들여진 생쥐(Lv. 2)』
성공이었다.
서예진이 감각 공유를 하고 있는 중인 생쥐를 중심으로 절대자의 눈을 소환 가능한 영역이 생성된 것이다.
어느새 생쥐는 부산스러운 분위기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쥐다!"
"예진이 생쥐 아니야?"
"예진아! 어디로 간 거야?!"
정신없어 보이는 그들의 앞에 상점에서 구매한 물건들을 생성시켰다.
지이잉―
"헉!"
물과 초코바를 시작으로 빵이나 우유 등 간단하게 바로 먹을 수 있는 물건들 위주였다.
그와 동시에.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시민 서예진의 충성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예상대로다.'
보아하니 실제로 서예진이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생쥐에게만 절대자의 눈을 비출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능력과 절대자의 눈의 궁합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하수구를 기어 다니는 수만 마리의 생쥐들이 모두 내 눈이 되어줄 것이다.
'미쳤군.'
최고의 척후병을 손에 넣었다.
030화 [Episode 07] 서면역 (4)
서예진의 능력을 제일 먼저 써먹을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부민동이면 혹시 송도바닷가 근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알아요! 케이블카 타러 가 본적 있거든요! 거기 냉면 집 되게 맛있었는데."
우연히도 서예진은 본가가 위치한 남부민동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하동건 파티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인 것이다.
'게다가 생쥐만 보내면 그만이니.'
직접적인 구조는 하동건 파티를 통해서 실행해야겠지만, 서예진의 생쥐만으로도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구호물자를 보내주는 일은 가능했다.
"맡겨만 주세요!"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서예진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나는 묘한 눈길로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봤다.
'또 올랐다.'
아까부터 계속, 딱히 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시간으로 신뢰도와 충성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대면하는 게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혹시 이 스킬 때문인가?'
[집구석 절대자의 정신 (패시브) Lv. Max]
모든 종류의 정신 계열 능력에 완전 면역 됩니다.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을 3레벨로 올리고 받은 패시브 스킬이었다.
'솔직히 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신 계열 능력에 면역이라니, 어차피 집구석 영역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내게는 쓸모없는 능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민권을 발급받은 이들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그 중에 나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곧바로 제거될 터였다.
고블린 무리 사냥 때 영역 내에 포함되어 있던 고블린들이 죄다 머리가 터진 것처럼 말이다.
그냥 없는 것 보단 낫다 정도?
'그땐 괜히 올렸다 싶었는데,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네.'
품위 유지 스킬의 레벨을 올린 것은 가신 등록이라는 효율 좋은 기능이 이 스킬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가신 등록 한계치가 올라가길 바라면서 품위 유지 스킬에 스킬 포인트를 투자한 것이었는데, 전혀 엉뚱한 패시브 스킬만 얻으면서 낙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지. 어쩌면 그냥 품위 유지 스킬의 레벨이 올라서 그런 걸지도.'
이미 품위 유지 스킬에 저런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다. 어쩌면 레벨이 오르면서 그 효과가 강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신뢰도와 충성도의 성장이 빨라졌으니, 품위 유지 스킬을 올린 것이 아예 의미 없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럼 지금 당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서예진은 날카로워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사근사근한 타입이었다.
"이왕이면 지하철 선로를 따라서 움직여주시기 바랍니다."
"···지하철 선로라면 1호선 말씀이세요?"
"네. 나중에 구출 작전에 그 루트를 이용할 생각이어서요."
그 순간.
"안 돼요!"
갑작스러운 서예진의 급발진에 조금 놀란 나는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왜죠?"
"서면역에는 괴물이 살고 있어요."
"괴물이요?"
서에진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기에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것일까.
"생쥐 한 마리만 그 괴물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시겠어요?"
"···네에."
***
서면역은 의외로 굉장히 넓다.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지하상가가 있기도 했고,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환승역들이 으레 그렇듯 보통 지하철역 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조였다.
번화가의 지하철역답게 평상시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서면역은 그 어디보다도 고요한 장소 중 하나가 됐다.
그곳에 둥지를 튼 하나의 존재 때문이었다.
역사 깊은 곳, 1호선 선로.
스르륵―
촘촘히 돋아나 있는 파충류의 비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
날름거리는 검은 혓바닥.
차가운 철로 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뱀 한 마리였다.
서면역 근처에 있는 오크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놈의 배는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그것이 서면역이 아무것도 없이 한적한 이유였다.
뭣도 모르고 서면역에 들어온 몬스터나 인간들은 모두 이놈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됐으니까.
지금 이곳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것은 배가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소화가 완료되면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눈에 보이는 모든 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울 것이다.
찍―
서면역의 주인은 소리가 난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땅의 진동을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에 이미 진즉에 저 작은 존재에 대해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쥐새끼 한 마리를 먹기 위해 움직이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은 몸집답게 구멍 속으로 도망가 버리면 잡을 방법도 없는 놈이었다.
자진해서 자신의 입으로 들어와 준다면 모를까, 저 작은 놈을 잡아먹기 위해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스르륵―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자진해서 접근해준다면 먹지 못할 것도 없었다.
타고난 대식가인 만큼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그의 식성은 작은 먹이 큰 먹이를 가리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해 쥐를 잡아먹기 위해 놈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멍청한 쥐새끼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스르륵―
혀를 날름거리자 축축한 지하실의 습도 사이로 군침 도는 쥐새끼의 체취가 풍겨져왔다.
폭발하는 식욕을 참지 못하고 움직이려던 그 순간.
찍찍―
지금까지 겁도 없이 접근하던 쥐새끼가 기겁하며 도망쳐버렸다.
순식간에 쥐구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끼며 거대 뱀은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다짐했다.
다음에 나타나면 곧바로 덮쳐버리겠노라고.
***
"······."
서예진의 말대로 서면역에는 엄청난 것이 살고 있었다.
몸길이만 수십 미터가 되는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을 줄이야.
'저런 놈은 과연 레벨이 얼마일까.'
덩치만 봐도 30레벨은 족히 넘길 것 같았다.
'어쩌면 40레벨이 넘어갈지도.'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서예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현님도 보셨죠? 서면역을 이용하실 생각은 버리는 게 나아요."
그야 그랬다.
저런 괴물이 버티고 있는 곳을 지나가는 것 보다는 지상의 괴물들을 뚫고 지나가는 게 더 나을 판이었으니까.
"차라리 한 정거장 건너뛰고 범내골역으로 가시는 건 어때요? 재현님의 동료 분들의 실력은 저도 봐서 알고 있거든요. 그분들의 실력이라면 무난하게 거기까지 길을 뚫을 수 있을 거예요."
서예진의 말이 맞았다.
나라도 서예진과 같은 작전을 세웠을 것 같았다.
'서예진이 합류하기 전이었다면 말이지.'
그녀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서예진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2701호로 가시면 됩니다."
"네?"
"오늘부터 그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아, 청소는 좀 해야 할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그동안 800명이 넘는 인원이 새롭게 합류했지만, 아직 빈 방은 많았다.
내가 그들에게 비어있는 방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공을 세운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서예진은 그 중 하나를 받을 합당한 자격이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쉬세요."
서예진을 보내고 난 뒤 곧바로 건설 모드를 활성화시켰다.
'태양광 발전기 설치.'
[태양광 발전기 시설 건설 완료까지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59초
새롭게 합류한 두 개 동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지었다.
아직 3억 5천만 원에 달하는 지원금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2기 모두 공짜로 지을 수 있었다.
'이게 의외로 효율이 괜찮단 말이지.'
지원금을 활용해서 짓는 거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어차피 건설에만 쓸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합류한 동에도 공용시설을 늘려주자.'
사람들은 저들끼리 당번을 정해서 공용시설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용변을 보는 등 알아서 잘 처신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800명에 가까운 인원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21층의 두 개 세대가지고는 아무래도 부족했다.
'또 이것저것 새롭게 공지해야겠네.'
다행히 김다빈이 꽤 유능한 편이어서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주급을 지급하고 있어서 김다빈도 열정적으로 일처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다빈에게 지급하는 주급은 겨우 70만원이었지만, 현재로써는 그녀도 매우 만족하는 편이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무려 고블린 700마리를 잡아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주변에 고블린이 씨가 말라가는 현 상황에서는 그 가치가 더욱 귀했다.
당장 그녀의 동생인 김민호보다도 그녀가 돈을 잘 벌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일할 사람을 늘리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나에게 직접 호소하지는 않았지만, 절대자의 눈을 통해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공용 시설이 운용되는 24시간 중 16시간 이상을 그녀 혼자 일하고 있었고, 나머지 8시간을 김민호가 보고 있었으니까.
사실상 학대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있었더라면 진즉에 고발당했을 것이다.
'최소 3교대 시스템은 만들어야해. 새롭게 생기는 공용시설도 마찬가지고.'
할 일이 많았다.
이것저것 정신없이 일처리를 하다 보니, 금세 다음날이 되었다.
'시작해볼까.'
사냥의 시간이었다.
***
하동건 파티는 전포역을 통해 서면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였지만, 여덟 명 모두 헤드 랜턴을 끼고 있어서 환하게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온다!"
-캬아아악!
전포역에서 서면역까지 이어지는 지하철 선로를 점령한 것은 사람만한 박쥐 괴물들이었다.
그러나 하동건 파티에게 그것들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쐐애애액! 푸욱!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나타날 때마다 놈들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꿰뚫는 김가영의 존재 덕분이었다.
몇 번의 전투 이후에는 아예 박쥐들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조용히 선로를 따라가던 와중에 유혜린이 김가영을 향해 물었다.
"언니. 그런데 재현님이 말씀하신 서면역에 있는 뱀이요. 정말 저희끼리 사냥할 수 있을까요?"
"괜찮지 않을까? 만일의 경우에는 재현님이 우리를 소환해주실 테니까."
"아, 맞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그들 모두 가신 소환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적호와 싸웠을 때도 절묘한 타이밍에 가신 소환으로 무사할 수 있었던 유혜린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믿음이 더 강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하동건 파티는 모두가 김재현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일이 틀어져도 그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길었던 터널이 끝나고 드디어 서면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음···."
그곳에는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지하철하나가 완전히 선로를 이탈하여 뒤집어져 있었는데, 곳곳에 핏자국과 시체가 남아 있었다.
박쥐 놈들이 파먹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 시체들도 존재했다.
"우욱."
그에 따른 악취 때문에 절로 헛구역질이 나오는 환경이었다.
하동건이 그런 일행들을 추스르며 말했다.
"1호선으로 이동한다."
쓰러진 지하철을 밟고 올라가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처참하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구석구석에 시체들이 즐비했다.
희한한 것은 고블린이나 오크와 같은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환승 구역을 따라 1호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
1호선 안에 헤드 랜턴의 빛을 비춰본 하동건 일행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쪽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괴물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그 공포에 모두가 얼어붙었던 그 때, 공포에 질린 강덕수가 소리쳤다.
"저, 저딴 거랑 무슨 수로 싸워!"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앙!
"으윽!"
"엎드려!"
난데없이 들려온 폭발음이 지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삐――――이이이
이명과 함께 낯익은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띠링!
"파티 퀘스트"
퀘스트 내용 : 거대 뱀 마무리하기.
제한 시간 : 10분 00초
보상 : 대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없음.
'이건···? 마무리라고?'
하동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금까지 괴물이 있었던 장소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거대 뱀 한 마리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처참하게 박살이 난 거대 뱀의 몸뚱어리였다.
안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난 것인지 내부 장기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회였다.
하동건이 창을 들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거대 뱀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푸욱!
031화 [Episode 07] 서면역 (5)
거대 뱀에게는 산 채로 먹이를 잡아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뱃속에 들어온 살아있는 생명체가 마지막 발악을 한다면 상당히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을 사용해 완전히 제압하거나 조여서 질식사 시킨 다음 삼키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덩치가 큰 먹잇감에게 해당하지, 자신의 덩치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쥐새끼 한 마리를 산 채로 삼키는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별 생각없이 삼켜버린 생쥐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좋아 삼켰다.'
하동건 파티가 서면역에 도착할 즈음, 나는 서예진을 시켜 생쥐 한 마리를 거대 뱀의 입 속으로 달려들게 만들었다.
놈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낼름 집어삼켰고, 나는 놈의 위장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창고 오픈.'
절대자의 눈으로 가신들을 지켜보면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총 두 가지다.
창고와 상점.
품위 유지 스킬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가신들의 '종' 칭호로 만들어지는 영역은 집구석 선포가 된 영역과는 그 성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영역에서는 오로지 '집구석 절대자의 눈'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될 뿐이었다.
그러니 이 영역에서 전기나 가스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스 소환.'
집구석 영역에서 만든 가스를 창고에 담은 다음 창고 스킬을 사용하여 그곳에 소환하는 것은 가능했다.
약간의 꼼수인 것이다.
푸쉬이이이―
하동건 파티가 2호선을 빠져나와 거대 뱀이 있는 1호선까지 다가왔을 때쯤에는 이미 놈의 위장은 가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불붙은 휴지 소환.'
가스가 충만히 들어찬 거대 뱀의 위속에 미리 준비해둔 불붙은 휴지를 소환했다.
한 번 불을 붙인 상태로 창고에 들어가게 되면, 그 상태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가스가 가득 찬 곳에서 불씨가 생겨났으니 그 다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콰아아아앙―!
거대 뱀의 위장에서부터 시작된 화려한 폭발이 놈의 몸을 완벽하게 박살내 놓았다.
"으윽!"
내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서예진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깨어났다.
폭발의 여파에 생쥐를 잃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감각 그 자체를 공유하는 만큼 폭발의 고통을 그대로 느꼈을 것이다.
"괜찮아요?"
"앗. 네! 전 괜찮아요!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씩씩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다.
"소파에 누워서 조금 쉬고 있을래요?"
"앗, 괜찮은데···."
"시키는 대로 해요."
"그럼 조금만 실례하겠습니다아···."
지친 얼굴로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수고했어요."
"네에···."
서예진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절대자의 눈을 소환해 하동건 파티를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대폭발에 하동건 파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잡은 걸로 돼서는 안 돼.'
놈은 반드시 기사 칭호를 받은 가신들의 손에 죽어야 했다.
그래야 6배의 경험치와 정산금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자칫 내 손에 죽어버리면 6배의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었다.
'하동건과 오언주에게 파티 퀘스트 부여, 거대 뱀 마무리하기.'
두 사람 중 하동건이 먼저 일어났고, 그가 던진 창에 거대 뱀의 머리가 박살나며 그대로 즉사했다.
[킹스네이크(Lv. 40)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812,043,879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시민 하동건이 '서면역'의 우두머리를 해치웠습니다.]
['서면역'에 전초기지 건설이 가능해집니다.]
무려 18억이 넘는 현금과 함께.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집구석 선포가 15레벨에 도달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3개 획득합니다.]
단숨에 3개 레벨이 올랐고, 그에 따른 격통이 찾아왔다.
'으윽.'
어떻게 된 것이 공간이 늘어날수록 고통의 강도도 함께 늘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구잡이로 늘어나던 영역은 총 10개 동을 완벽히 집어삼키고 나서야 확장을 멈추었다.
그나마 그 속도가 빨라진 게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이제 절반 정도 남은 건가.'
1단지 25개 동의 아파트 중 13개 동을 집구석 영역으로 만들었다.
거진 절반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한꺼번에 10개 동이 늘어난 만큼 시민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많았다.
'200명이나 된다고?'
정확하게는 214명.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 꽁꽁 숨어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부여해.'
그들에게 일괄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순간.
[시민의 숫자가 1,00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의 숫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모든 시민이 '기본급' 스킬을 개방합니다.]
{기본급} (패시브)
시민들이 획득하는 경험치와 정산금이 100% 만큼 별도로 증가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시민 정보창을 확인해보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이름 : 김민호 (Lv. 17)
신뢰도 : 57 충성도 : 13
각성 능력 : 없음
경험치 분배율 : 70% (+100%)
정산금 분배율 : 30% (+100%)
★퀘스트 부여 퇴출』
말 그대로 기본급.
내가 분배율을 0%로 조정하더라도 별도로 100%의 경험치와 정산금을 얻어간다는 소리였다.
'좋네.'
그렇지 않아도 시민들의 정산금을 늘려줄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매점을 통해 시민들의 돈을 회수할 수도 있었고, '세금 징수'의 효율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일정량 이상의 돈을 시민들에게 투자하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꼼수가 통하지 않는 게 조금 아쉬웠지.'
세금 징수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퀘스트 부여를 통해 돈을 지급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김다빈에게 주급을 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수수료를 10%나 떼여야 한다는 거지.'
김다빈에게 7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7만 원의 퀘스트 비용을 내야만 했다.
세금 징수의 효과가 10%의 돈을 복사해오는 것이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돼버리는 것이다.
'돌려받을 때 다시 10%의 수수료가 차감되니 사실상 손해인 셈이지.'
세금 징수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달 이상 돈을 묻어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 잠깐만.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돈을 안 빼고 묵혀두면 계속해서 10%의 이윤이 생기는 거잖아?'
다달이 약속된 10%의 이자, 1년이면 120%의 이자를 가져다주는 셈이었다.
이런 금융 상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있었다면 100% 사기였을 것이다.
'10억 정도만 투자해 놓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소파에 누워있던 서예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어··· 재현님."
"음? 네?"
"이런 말 부탁드리기 죄송하지만, 제 일행을 여기에 데려와주실 순 없을까요?"
서예진의 가족이 포함된 서른다섯 명의 생존자들.
물자를 지원해줬다고는 하지만, 그곳은 오래 지낼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포근한 침대에서 잠들었던 서예진이었다.
그녀의 가족에게도 하루빨리 정상적인 생활을 선사하고 싶겠지.
"당연히 해드려야죠."
서예진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혹시 지금 다시 생쥐 조종 가능하시겠어요?"
"물론이죠! 완전히 괜찮아졌습니다!"
"생쥐를 따라가라고 말해놓을 테니 안내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생쥐의 뒤를 따라가 생존자들을 구해오라는 파티 퀘스트를 부여한 다음, 절대자의 눈을 켜 놓고 느긋하게 하동건 파티를 관찰했다.
서면역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대 뱀의 구역이었던 만큼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면역 2번 출구로 나와 마주한 도시의 풍경은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완전 폐허군.'
너무나도 처참했다.
제멋대로 뒤집힌 차량들과 도로에 가득한 핏자국, 1층 건물의 깨진 유리창과 곳곳에 방치된 채 썩어가는 시체의 모습은 끔찍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침묵이 내려앉아 고요한 모습이 오히려 공포를 자아내고 있었다.
찍―
서예진의 생쥐가 최적의 루트를 따라 안내를 했기 때문에, 교전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가끔 고블린들과 마주치는 게 전부였고, 하동건 파티에게 고블린 무리란 식은 죽 먹기와 다를 바 없었다.
'신경 쓸 필요 없겠군.'
절대자의 눈을 유지한 채로 스킬창에 집중했다.
[보유 스킬 포인트 : 3]
'이걸 어디에다 투자해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초반에는 무조건 상점 스킬을 올리는 게 답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더 많은 물품을 등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상점의 스킬 레벨이 5레벨이 되면서 대폭 늘어난 슬롯과 '품목화' 기능 덕분이었다.
'이제는 500개의 슬롯을 다 채우는 것도 일이야.'
영양제, 비타민 따위의 물건까지 모조리 물품 등록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500개의 슬롯의 반도 못 채운 상태였다.
'굳이 무리해서 상점을 레벨 업 시킬 필요는 없어.'
그것 말고도 스킬 포인트를 투자할 곳은 넘쳐났다.
현재 레벨 옆에 [+] 버튼이 활성화 되어 있는 스킬은 품위 유지, 창고, 절대자의 눈, 절대자의 건강, 보이지 않는 손 이렇게 총 5가지였다.
'역시 첫 번째는 절대자의 눈 스킬이겠지.'
지금에 와서 가장 활용도 높은 스킬이 바로 절대자의 눈 스킬이었다.
'서예진과의 궁합도 좋고.'
앞으로 가족들을 구하러 갈 때에도 가장 핵심적인 스킬이 되어 줄 터였다.
나는 고민없이 레벨업을 진행시켰다.
'집구석 절대자의 눈, 레벨업.'
우우웅
그렇게 절대자의 눈 스킬이 3레벨로 올라가는 순간.
화끈―
'으윽.'
눈 표면이 타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절대자의 눈이 비추는 시야에 변화가 생겨났다.
「고블린(Lv. 8)」 「고블린(Lv. 7)」 「고블린(Lv. 7)」 「고블린(Lv. 7)」
하동건 파티와 교전중인 고블린들의 머리 위로 놈들의 레벨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블린들의 특징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고블린(Lv. 8)」
신장 103cm. 무리 생활을 하며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의외로 시력이 좋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문제없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다.
'괜찮군.'
지금까지 레벨은 해당 몬스터를 죽여야만 드러나는 정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절대자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몬스터의 레벨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능력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퀘스트 난이도를 올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레벨 높은 몬스터를 사냥하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정 레벨 이상의 몬스터들은 그 숫자가 귀하다는 점이다.
한 자리 수 레벨인 고블린들이야 여기저기 널렸지만, 당장 20레벨 대의 몬스터만 해도 찾아보기 힘들어 진다.
'솔직히 고레벨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도 고레벨 몬스터를 찾는 게 더 어려운 일이지.'
추후 오언주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이 능력은 반드시 필요한 능력 중 하나였다.
먼저 적당한 레벨의 몬스터를 찾아 놓고 그녀에게 퀘스트를 부여해야 부활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낄 수 있을 테니까.
'레벨을 하나 더 못 올린다는 건 조금 아쉽긴 하네.'
3레벨이 된 절대자의 눈 스킬의 옆에는 [+] 버튼이 사라져 있었다.
숙련도가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다음은···.'
다른 것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품위 유지'스킬.
'서예진의 신뢰도와 충성도가 고속으로 상승한 것이 정말로 품위 유지 스킬의 레벨이 상승했기 때문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스킬 포인트를 투자할 가치가 있다.'
새로운 가신을 받아들일 때도 도움이 될뿐더러, '신뢰의 힘'이나 [기사] 칭호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존재했다.
'품위 유지, 레벨업.'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이 4레벨로 올라가며 새롭게 나타난 기능을 확인하려던 순간.
타앙―
'응?'
난데없이 들려온 총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확인해본 결과 총 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고블린이었다.
'저건···?'
고블린이 다시 하동건 파티를 향해 총구를 겨누려던 그 순간.
슈슉! 서걱!
문병호가 놈의 뒤쪽으로 순간이동 해 고블린의 목을 쳐냈다.
"끼기긱!"
나머지 고블린들도 문병호의 창에 무자비하게 갈려나갔다.
'물품 등록!'
문병호가 고블린들을 처치하는 동안 나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물품등록 시킨 다음, 다이렉트로 수복까지 시켰다.
S&W M60 (476,320 원)
.38 구경 실탄 100발 (158,400 원)
상점에 등록된 권총을 보며 나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총이라니.'
032화 [Episode 08] 환수 소환 (1)
S&W M60은 38구경의 리볼버로 대한민국 경찰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총기 중 하나였다.
물론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겨우 권총 하나였지만, 이것만으로 많은 것이 바뀌게 될 터였다.
'매점에 전시할 수는 없어.'
총을 전시하면 장점이야 많았다.
당장 사람들의 몬스터 사냥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10레벨 이하의 평범한 사람들이 오크를 잡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겠지.
그보다 더 강력한 몬스터들도 총을 든 시민이 여럿 있다면 충분히 해 볼만 했다.
'그만큼 시민들이 벌어오는 경험치와 정산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하지만 장점만큼 커다란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들을 신뢰하기는 힘들다.'
지금 내가 시민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구잡이식이었다.
기준이 없다는 말이다.
어떠한 검증도 없이 전부 받아들였던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들을 통제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생겨나는 장점들도 많았고.
하지만 총기를 들고 있게 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없다는 보장이 없어.'
검증되지도 않은 이들에게 총기 소유를 허가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불 보듯 뻔했다.
시기, 원한, 질투.
어떤 이유에서건 사고가 발생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사람이 죽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정신병이 있는 사람에게 총을 쥐어주면 파국으로 치닫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검증된 사람들에게만 나눠주는 방식이어야 해.'
기준이야 심플했다.
'충성도가 높은 사람들에게만 줘야해. 그중에서도 걸러낼 사람은 걸러내고.'
노골적인 차별에 불만이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사고가 발생하는 것 보다는 나았다.
충성도가 높은 인원들에게만 총기를 주면, 어느 정도 신뢰도나 충성도의 상승을 유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줘야 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네.'
정신에 문제가 없으며, 충성도도 높고, 총기 활용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문병호에게 상점에서 새로 구입한 권총 한 자루와 실탄 100발을 지급했다.
지이잉―
얼떨결에 허공에서 생겨난 총기와 실탄을 받은 문병호는 이내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거기 아닌데.'
내가 보고 있는 쪽이 아닌 엉뚱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그 의미만 전달되면 된 거 아닐까.
하동건 파티는 생쥐의 안내를 따라 금세 생존자들이 숨어 있는 쉘터에 도착했고, 큰 문제없이 그들을 데리고 복귀했다.
"곧 도착할 거 같은데, 같이 내려갈까요?"
"재현님도요?"
"오랜만에 산책이나 좀 할까 싶어서요."
서예진과 함께 내려간 나는 산책로를 걸으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스읍- 하아."
공기 좋네.
집구석 영역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산책로까지 포함된 상태였다.
거의 한 달 만에 나와 보는 것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하동건 파티가 구해온 생존자 서른다섯 명이 정문에 도착한 모양이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제안해.'
그렇게 서른다섯 명의 시민들이 추가로 합류했다.
'이번에도 없나.'
일일이 시민 정보창을 확인해봤지만, 각성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레벨업으로 10개 동을 집어삼키며 새로 합류한 200여 명의 시민들 중에서도 각성자는 없었다.
그만큼 각성자는 귀한 인재였고, 그 중에서도 서예진과 같은 A 등급 능력을 가진 인재는 더 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각성 능력을 부여하는 건 퀘스트 보상으로도 할 수 없었지.'
이미 실험해 봤다.
시민들 중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남지호에게 각성 능력을 부여하려고 해봤지만 '불가능한 퀘스트 보상'이라고 떴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아니라 불가능한 퀘스트 보상이라고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 사람의 타고난 본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겠지.'
그러니 평범한 사람을 각성자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가신 등록 뿐이었다.
하지만 가신 등록조차도 각성자를 우대하는 시스템이었으니, 타고난 유전자가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천천히 생각하자. 어차피 가신 등록이 가능한 슬롯도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까.'
벌써 열 명을 다 채운 상태였다.
남은 것은 문병호가 충성도 100이 되며 늘어난 한 자리뿐.
'충성도 100만들기가 좀 어려워야지.'
일부러 하동건 파티와 대면하는 시간을 늘려보기도 했지만, 일정 이상 오른 충성도는 더 이상 오를 생각을 하질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문병호처럼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는 이상, 충성도 100을 채우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새롭게 시민권을 받은 서른다섯 명의 시민들이 정문을 지나 이곳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엄마! 여진아!"
서예진이 달려가 가족들 품에 안겼다.
"예진아!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미안해, 엄마."
겨우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모녀는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엄마 생각이 났다.
"대박! 언니 좋은 냄새 나! 샤워했어?"
"응. 따뜻한 물도 나오고 목욕도 할 수 있어."
"진짜?"
"물론이지. 침대도 있고 따뜻한 밥도 먹을 수 있어."
서예진의 말을 들은 나머지 생존자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예진씨."
"네?"
"2701호는 서예진씨에게 지급한 겁니다. 서예진씨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만,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조금 비좁을 겁니다."
"아······."
서예진은 내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책임져온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빈 방 세 개를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서예진씨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앗, 감사합니다!"
10명 이상이 집을 공유할 경우 전기, 수도, 가스를 공급한다는 것은 다른 시민들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조건이었다.
실제로 이 조건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고 함께 사는 시민들도 제법 많았다.
"같은 건물 2402호, 2301호, 1902호를 쓰시면 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민 서예진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서예진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그렇게 서예진을 시작으로,
[시민 홍달래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시민 서여진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시민 이승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한정수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
······
시민들의 신뢰도가 상승했다는 알림들이 폭발하고 있었다.
'확실히 달라지긴 했어.'
시민들의 신뢰도가 무더기로 올랐던 적은 이전에도 있었다.
고블린 무리 사냥을 위해 최형준의 집에 사람들을 모았을 때였다.
물이나 식량들을 소환하는 등의 능력을 보여주는 순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신뢰도가 무더기로 올랐었다.
'하지만 「크게」 올라가는 경우는 없었지.'
지금은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신뢰도가 마구마구 오르고 있었다.
품위 유지 스킬의 레벨이 오르면서 생긴 효과인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레벨만 올려놓고 확인을 못했었지.'
4레벨이 된 품위 유지 스킬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ᛇ환수 관리(0/10)
'음···?'
확인해보니 환수를 소환할 수 있는 버튼이 존재했다.
[환수 소환] (1,000,000,000 원)
'······10억?'
아무래도 새롭게 추가된 기능은 돈 먹는 하마인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재현님.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유혜린이었다.
"무슨 일이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그게···."
유혜린이 다른 일행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올라가서 쉬고 계세요."
서예진 그룹은 세 개의 방을 쓸 인원을 나눈다고 바빴고, 하동건 파티는 눈치껏 빠져줬다.
그들을 보내고, 유혜린에게 말했다.
"우린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요?"
"산책··· 네, 좋아요."
유혜린과 나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고, 몇 분쯤 지났을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한참을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네, 그럼···."
유혜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정말 죄송한데, 저는 파티에서 빠지고 싶어요."
예상대로였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
그녀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제 능력은··· 파티 내에서 존재감도 없고, 제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죄를 지은 것처럼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향해 최대한 자상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러자 유혜린은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무서워요!"
한 번 내뱉은 그녀의 감정은 속사포처럼 흘러나왔다.
"너무 무서워요. 고블린도 무섭고, 오크들이랑 싸울 때도 그렇고, 그 거대한 뱀도 그렇고 너무 무서웠어요."
터져 나온 감정은 이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기껏 저를 선택해주셨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흐윽."
그런 낌새는 이전부터 있었다.
문병호의 할머니를 구하러 갈 때에도 솔직히 유혜린의 활약은 거의 전무했다.
마지막에 적호와의 추격전에서는 넘어지며 죽을 뻔하기도 했었고, 오크들을 토벌할 때에도 딱히 하는 건 없었다.
독 안개라는 능력 자체가 자칫 잘못하면 팀원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이다 보니 활용하기가 힘든 것이다.
신체 능력이 향상되며 활 쏘는 능력은 많이 향상되었지만, 그게 도움이 됐냐고 하면 글쎄.
김 건 조차도 까망이를 이용한 정찰로 팀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그녀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티에 쓸모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혜린도 분명 목숨을 걸고 파티에 동행하고 있는 것인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속이 쓰릴 수밖에.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오늘 거대 뱀과의 조우에서 터진 것 같았다.
"끅. 흐으윽."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것인지 유혜린은 끅끅대며 서럽게 울었다.
그녀에게서는 공포보다도 분노와 쪽팔림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잘 됐네요. 마침 일손이 필요하던 참이었거든요."
"끄윽. 네에···?"
"21층 공용시설에 김다빈씨 알죠? 업무를 처리하느라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아무래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다보니."
"훌쩍."
"거기뿐만 아니라 동마다 공용시설을 만들고 운영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었죠."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유혜린이 훌쩍대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혜린씨라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와주시겠어요?"
유혜린을 어르고 달래면서 솔직히 그녀를 가신으로 등록한 게 조금 아깝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시민 유혜린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유혜린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유혜린은 이미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이게?'
별것도 아닌 일로 충성도 100을 찍을 줄이야.
"흐아아앙."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이처럼 목 놓아 울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다가간 순간, 갑자기 그녀가 와락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열심히 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흑."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가볍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흐윽, 충성을 다 하께요!"
"네, 네."
겨우 진정된 그녀를 2901호에 데려다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 가지 버튼을 노려봤다.
[환수 소환] (1,000,000,000 원)
'해 보는 게 좋겠지?'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기능은 전부 쓸모가 있었고, 돈이 들어가는 것들은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 까짓 거 해 보자. 환수 소환!'
[환수 소환 비용으로 1,000,000,000 원이 소모됩니다.]
우우웅―
033화 [Episode 08] 환수 소환 (2)
허공에서 피어오른 황금색 빛은 여덟 갈래로 갈라져 아름다운 선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선이 만나 완성시킨 동그라미 안으로 여섯 개의 선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화려한 문양을 새겨나가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그리고 문양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낸 빈 공간에서 그림 같은 문양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12시 방향부터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뻗어나가던 그것들이 비어있던 공간들을 가득 채웠을 때.
파아앗!
마법진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농구공 정도 크기의 황금알을 소환해냈다.
그리고.
쩌적
알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개방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그마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엇?"
나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작은 물체에서는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보송보송한 검은 색 솜털 덩어리가 있었다.
녀석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삑?
귀여운 아기 새가 그곳에 있었다.
'절대자의 눈.'
「삼족오(三足烏) (Lv. 1)」
세 발 달린 까마귀 신수.
날 때부터 태양의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 아직은 성장하지 못해 보호가 필요한 아기 새.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태양광을 쬐어주어야 한다.
꼭 검은 병아리 같은 생김새였다.
"안녕?"
-삑!
어색하게 인사하자 녀석이 힘차게 대답해왔다.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삼족오라고 부르기에는 정이 없으니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새까만 까마귀니까 까미 어때?"
-삐빅! 삑!
태어나자마자 어찌나 에너지가 넘쳐나는지 작은 날개를 푸닥거리며 무어라 계속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어째선지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마음에 든다고?"
-삑!
"다행이네."
태어나자마자 말이 통하다니 까미 녀석 굉장히 영특했다.
-삐빕!
"배고프다고?"
-삡!
벌레라도 잡아와야하나 고민했지만, 이내 삼족오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녀석이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조심스레 거실 창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햇살이 들어오는 바닥에 녀석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자.
-삐이이···
팔자 좋게 늘어지더니 두 눈을 감고, 온몸으로 햇볕을 쬐기 시작했다.
"···팔자 좋구나."
녀석은 그 자세 그대로 잠을 청했다.
자그마한 녀석이 숨을 고르게 내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까지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삼족오(三足烏)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100% 증가합니다.]
'음?'
태양빛을 받으며 삼족오의 레벨이 오른 것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난데없이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증가하다니?
나는 곧바로 건설 모드에 진입해 태양광 발전기 항목을 확인해 봤다.
"태양광 발전기"
태양광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시설.
하루 일조량에 따라 8~10만(+100%) 원 치의 전기를 생산하며, 사용되고 남은 잉여 전력은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으로 환급된다.
태양광 발전기가 생산하는 전력량이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잠깐만 이러면···.'
최근에 새롭게 얻은 10개 동에는 태양광 발전기를 짓지 않은 상태였다.
지원금을 거의 다 썼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1년은 지나야 3천만 원의 효율을 내는 시설에 생돈 1억 3천을 투자하기는 아까웠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지.'
까미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계속해서 효율이 증대한다면 충분한 투자가치가 생긴다.
물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까미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발전기 효율이 증가한다고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다시 한 번 알람이 나타났다.
[삼족오(三足烏)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100% 증가합니다.]
단숨에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3배가 됐다.
'1년에 9천만 원.'
레벨업을 몇 번만 더 해도 투자금 회수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물론, 시간이 지날 때마다 이윤이 늘어나는 셈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10개 동에 전부 태양광 발전기 지어줘.'
띠링!
[태양광 발전기 시설 건설 완료까지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59초
건설 모드를 마치고 나오니 까미는 단잠에 빠져 있었다.
까미가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나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제일 먼저 남은 스킬 포인트 1개를 어디에 투자할지 정해야 했다.
'남은 하나로 뭘 올려야하지?'
이제 [+]버튼이 남아 있는 스킬은 세 종류였다.
절대자의 창고, 절대자의 건강, 보이지 않는 손.
'이 세 개 중에서는 그나마 창고가 제일 나은 데.'
건강은 솔직히 올려봤자 의미가 있나 싶긴 하다.
어차피 나는 안전한 집구석 영역 밖으로 한발자국도 못 나가는 신세였으니까.
여기서 더 건강해진다고 해 봐야 쓸모가 있을까 싶었다.
'보이지 않는 손도 마찬가지야.'
분명 강력한 능력이긴 했지만, 집구석에서 나가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집구석 영역 근처에 다가온 몬스터를 제압하는 데에나 쓸 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창고는 절대자의 눈과 연계해서 써먹기는 하니까.'
하지만 창고의 레벨을 올린다고 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겠는가.
'그냥 킵해뒀다가 품위 유지 스킬이나 절대자의 눈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게 낫겠어.'
결론을 내린 나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우선 바로 옆집인 3001호를 찾아가 최형준을 만났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네, 재현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10억을 좀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세금 징수 스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는데, 믿을만한 시민에게 돈을 주고 묵혀둘 경우 이득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처음 증여할 때 10%의 수수료가 들긴 하지만, 그 이후로는 한 달 마다 정기적으로 10%의 이윤을 창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정한 10억을 맡길 대상은 바로 최형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름 : 최형준 (Lv. 25) [+]
칭호 : [첫 번째 종]
신뢰도 : 89 충성도 : 98
각성 능력 : 고릴라의 괴력
★퀘스트 부여 』
신뢰도와 충성도 수치가 넘사벽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만나기 때문인지 그만큼 신뢰도와 충성도 수치가 극한까지 늘어나 있었다.
'이 정도면 믿을만하지.'
나는 곧장 그에게 퀘스트 부여를 통해 10억을 증여했다.
[퀘스트 비용 100,030,000 원이 소모됩니다.]
수수료 10%인 1억 원과 퀘스트 기본비용인 3만 원이 소모되었다.
"마, 맙소사···!"
그 순간.
[시민 최형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최형준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최형준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최형준은 이미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최형준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다, 당연히 안 쓰고 들고 있어야 하는 거겠지요??"
원래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우 이런 것으로 충성도 100을 찍어줄 줄이야.
가신 보유 한계치의 가치를 생각하면 10억을 더 얹어줘도 모자랐다.
"어느 정도는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저,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유혜린을 김다빈에게 데려가 소개시켜주었다. 그리고 공용시설 직원에 대한 전권을 김다빈에게 일임했다.
"정말 제가 마음대로 뽑아도 되나요?"
"네. 상관없습니다. 다빈씨가 팀을 만들어보세요. 팀장이시니 주급은 2배로 쳐드리겠습니다."
[시민 김다빈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김다빈이 유혜린에게 인수인계하는 것을 지켜보며 잠시 공용시설을 구경했다. 시민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식당 당번인 이들이 밥을 하고, 줄 서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불편하겠군.'
공용시설이라고는 해도 한때는 일반 가정집이었던 곳이다.
공중화장실처럼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거나 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샤워를 하는 게 시민들 사이에서는 특권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이니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냥 줄 수는 없는데.'
그랬다가는 노력해서 전기, 수도, 가스를 획득한 시민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매점에서 팔수는 없나?'
시험 삼아 항목을 등록해봤다.
[하루 전기 사용권] (10,000 원)
'되네?'
무형의 가치도 등록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키오스크 방식으로 해당 동수와 호수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전기가 공급되는 방식이었다.
'수도랑 가스도 만들자.'
하루, 일주일, 한 달 이용권으로 나누어서 각각 만원, 3만원, 10만원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살 사람은 사겠지.'
나라면 저런 불편한 공용시설을 이용하기보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사용권을 구입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해결할 것은 총기 지급 문제였다.
충성도가 높은 시민들 중에서 총기를 지급할만한 인물들을 추려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신뢰도 50을 달성하여 충성도를 개방한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조건에 부합하는 이들은 죄다 전투인원들이군.'
전투 인원들과는 일부러라도 대면을 시도한 덕분인지 대부분 충성도를 개방한 상태였다.
그 중에서 백승엽도 57의 충성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놈에게는 권총을 지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놈 성격에 어떻게 될지 뻔하지.'
백승엽에게 권총을 준다면 그것을 가지고 유세나 부리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건 김민호, 남지호, 신유라 정도인가.'
S&W M60을 등록하고 품목화로 생겨난 것들은 죄다 S&W마크가 붙은 리볼버였는데, 그 중에서 M60이 가장 나았다.
'나중에 따로 만나서 지급하자.'
지금은 세 명 다 영역 밖으로 사냥을 떠난 상태였다.
'서예진은 바쁜 것 같고···.'
보니까 동료들을 진두지휘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우선은 2901호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동건 파티를 찾아갔다.
♩♬―
[29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절대자의 눈으로 확인해 보니 2902호를 쓰는 김다정과 오언주도 2901호에 모여 있었다.
"그 뱀이 레벨 40이었다고요?"
"네."
"흐음. 그렇군요···."
하동건의 대답에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 오언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때 보여주었던 퀘스트 내용을 떠올린 거겠지.
철컥.
그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도 다들 고생하셨어요. 컨디션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완전 괜찮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뭘."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이들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서면역에 있던 괴물 덕분에 주변은 몬스터가 없는 청정구역이 됐습니다. 특히 지하철 선로는 더욱 그렇죠."
현재 서면역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인이었던 킹스네이크가 죽었지만, 아직 그 사실이 널리 퍼지지는 않은 상황.
몬스터들은 평소처럼 서면역을 기피하고 있을 것이다.
"서면역 근처의 범내골, 범일역까지 몬스터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서예진의 능력으로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놈이 1호선 선로에 떡하니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인지 두, 세 정거장 근처에는 몬스터 한 마리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다른 몬스터들이 그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해요."
오늘, 유혜린이 울면서 나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내 부탁을 수행하는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들은 내게 목숨을 맡기고 있는 셈이었다.
서예진의 합류로 서면역에 있는 괴물을 미리 알아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지금 바깥세상은 정말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가족의 안전을 바라는 게, 그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 게 욕심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럼에도.'
이들의 목숨 값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내일, 자갈치역까지 다이렉트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034화 [Episode 08] 환수 소환 (3)
거실 창가 바닥, 작고 네모난 베개 위에 까맣고 동그란 털 뭉치가 놓여 있었다.
검게 물 들었던 하늘이 다시 파랗게 제 색을 되찾을 즈음, 산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태양이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털 뭉치가 차지한 자리는 동이 트는 순간의 햇살을 한 몸에 받는 최상의 자리였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검은 털 뭉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든 검은 털 뭉치는 이내 기지개를 켜더니 온몸으로 햇살을 받아들였다.
[삼족오(三足烏)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100% 증가합니다.]
'벌써 레벨 5인가.'
거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까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빙긋 웃었다.
이것으로 벌써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5배로 늘어났다.
이제는 1년 만에 본전 이상을 뽑는 시설로 변모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단 하루만의 변화였다.
'솔직히 10억을 투자한 가치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10억을 회수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까.'
그런데, 변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삼족오(三足烏)가 태양의 힘을 일부 개방합니다.]
[환수의 힘을 일부 계승합니다.]
[초급 속성 마법(火)을 각성합니다.]
'마법?'
이상한 알림이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초급 속성 마법(火)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건···?'
낯선 지식이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지식인양 편하게 느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세 이해하고, 힘을 다룰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그곳에 불꽃의 형상을 이미지화했다.
그 순간.
화륵
거짓말처럼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인데. 아!'
이내 그것이 품위 유지 스킬로 전기나 가스등을 만들어내는 감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이터만한 크기의 불꽃을 없앤 다음, 손바닥을 펼쳐서 이번엔 야구공만한 크기의 불꽃을 형상화했다.
화르륵
손쉽게 불꽃이 생겨났고, 생각보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왔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절대자의 눈.'
이제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녘이었다.
아무리 안정을 되찾았다고 해도 이 시간에 밖으로 산책을 나오는 시민들은 드물었다.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노려보며 집채만 한 불꽃을 상상해봤다.
화르르륵!
그러나 허공에 생겨난 결과물은 모닥불 정도 크기의 불꽃이었다.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인가.'
솔직히 그리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품위 유지 스킬을 사용해 가스를 퍼붓는 순간.
화르르르륵―!
불꽃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길을 쏟아냈다.
'품위 유지 스킬과 궁합이 좋다.'
초급 속성 마법(火)만으로는 화력이 부족했지만, 품위 유지 스킬로 만들어낸 가스와 합쳐지면 충분히 위협적으로 변모했다.
'앞으로 번거롭게 불 붙은 휴지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겠네.'
그러나 딱 그 정도였다.
가스 폭탄을 사용할 때,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수준.
그렇게 간단한 실험을 끝냈을 때, 이유모를 피곤함이 느껴졌다.
밤을 새운 탓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피로감이었다.
'그렇군. 품위 유지 스킬과는 사용하는 자원이 다르다 이거지?'
힘의 사용법은 비슷했으나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힘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품위 유지 스킬은 아무리 써도 딱히 피로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지갑에 쌓여 있는 돈만 줄어들 뿐이었다.
그런데 초급 속성 마법(火)의 경우 아무래도 정신력을 자원으로 발휘되는 힘 같았다.
'그래도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힘이다. 까미는 계속해서 성장할 테니까.'
앞에 '초급'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만큼, 까미의 레벨이 오르면 중급, 고급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 분명했다.
'밥이나 먹자.'
잠을 안 자고 밤을 지새운 탓인지 아침부터 배가 고파왔다.
오늘 아침은 간단하게 간장계란밥.
반숙으로 된 계란프라이 두 개를 밥 위에 얹고 간장과 참기름을 적절히 부은 다음 뒤섞었다.
한 숟가락을 푼 다음 김치를 올려 입에 넣으니 기대했던 맛 그대로였다.
'할머니가 자주 해주셨었지.'
어머니는 맞벌이를 하셨기에 할머니가 대신 밥을 챙겨준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에게 자주 해달라고 졸랐던 메뉴가 바로 간장계란밥이었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해주는 간장계란밥이 먹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구하러 갈게요.'
오후가 되고 시스템 알림이 연거푸 올라왔다.
[태양광 발전기 시설 건설이 완공되었습니다.]
[태양광 발전기 시설 건설이 완공되었습니다.]
······
······
아침 이후로 까미의 레벨이 3단계나 더 오르면서 새롭게 지어진 태양광 발전기 시설들은 시작부터 8배의 효율을 갖게 됐다.
'이 정도 수준이면 슬슬 지갑으로 들어오는 돈도 생길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태양광 발전기가 만들어내는 전기는 전부 시민들에게 공급되고 있었다.
오히려 지갑에서 돈이 더 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효율이 8배가 늘어난 지금은 전기를 모두 공급하고도 잉여 전기가 남을 것이 분명했다.
'얼마쯤 들어오려나.'
그때쯤 서예진이 집으로 찾아왔다.
♬♪♬♩~
'왔군.'
이번 작전의 핵심 인력인 서예진의 도착이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목욕물을 받아 따뜻한 물로 몸을 데우고,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까지 먹고 왔다.
서예진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오라고 직접 주문했기 때문이다.
내 나름의 배려였다.
어쨌든 서예진이 이끌던 생존자 집단은 거진 한 달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었으니까.
가족과 함께 회포를 풀도록 시간을 준 것이었다.
"헤헤. 어제 일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드렸을 뿐입니다."
서예진 덕분에 능력의 활용 폭이 대폭 늘어났다.
예뻐할 수밖에 없지 않나.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동건 파티는 현재 서면역에서 대기 중입니다. 바로 안내해주시면 됩니다."
서예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하철 노선을 따라 생쥐들을 보내놨습니다. 초량역까지는 문제없이 진입할 수 있겠더라고요."
"초량역 '까지는'이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그 이후로 문제가 생겼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네. 정확히는 부산역에요."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서예진은 가부좌를 틀고 곧바로 감각 공유를 실행시켰다.
생쥐를 통해 본 부산역은 확실히 문제가 많아 보였다.
'······.'
촤아아아―
부산역에 진입하기 한참 전부터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전방이 아예 침수되어 물로 가득 했다.
설상가상으로 선로 중간에 천장이 무너져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길을 아예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이래서야 지나갈 수가 없겠는데.'
부산역에 진입하기 전에 지상으로 올라가서 통과를 하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서예진이 감각 공유를 해체한 다음 눈을 뜨고 말했다.
"보시다시피 철로가 이런 상태라서 위쪽으로 생쥐들을 보내봤어요. 그런데···."
그녀는 말을 마무리하는 대신에 눈을 감고 다시 감각 공유를 사용했다.
나는 절대자의 눈을 통해 그녀가 감각 공유를 사용한 생쥐와 시야를 공유했다.
그리고.
'허어.'
지상의 풍경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전쟁이라도 난 듯했던 서면의 풍경이 오히려 양반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주변에 멀쩡한 건물이 없다.'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다.
파괴의 신이 강림한다면 꼭 이렇게 되지 않을까.
고층 건물은 멀쩡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고, 도로는 뒤집어 지거나 박살난 형태로 울긋불긋했다.
사실상 지형을 바꿔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참하게 파괴된 모습은 정말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찍―
생쥐가 작은 몸으로 열심히 움직이는 동안 나는 절대자의 시야로 주변을 넓게 관찰할 수 있었다.
덕분에 생쥐가 열심히 뛰고 있는 곳이 어떤 형태인지 한 눈에 보였다.
'······발자국?'
그곳에 거대한 발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길이만 약 10m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발자국.
현실성이 뒤틀려버린 듯한 그 광경에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설마?'
그것이 발자국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파괴된 주변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서진 건물들, 박살난 도로, 그곳의 중심에 어지럽게 새겨져 있는 거대한 발자국들.
'···거인?'
이곳에 남은 흔적만 봐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그 괴물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했을지 말이다.
항거 불가능한 크기의 차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얼마나 커다란 절망을 느꼈을 지가 적나라하게 전해져왔다.
'미친.'
그때였다.
콰르르릉―
무언가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들리는 거지?'
처음에는 당연히 생쥐가 있는 곳에서 들려온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재, 재현님!"
쿠구구구구―
집이 흔들리고 있었다.
커다란 굉음은 생쥐가 있는 부산역 근처가 아니라 우리 집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진인가?!'
흔들림은 십여 초나 계속되다가 멈추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불길한 예감은 왜 빗나가는 법이 없는지.
바로 다음 순간.
쿵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최형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현님! 재현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와 서예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밖으로 나가봅시다."
"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심각한 표정의 최형준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 저희 집으로···!"
창백한 얼굴로 달려가는 그의 뒤를 따라 최형준의 집 거실로 가 보니,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콰르르릉!
서면의 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최형준의 집 거실 창가.
저 너머에 비현실적인 덩치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 아파트 단지를 통째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놈이 아파트 건물을 거대한 몸집으로 밀어내면, 아파트가 통째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근처에 있는 다른 동들과 부딪히며 도미노처럼 박살났다.
콰르르릉!
그 과정에서 천둥번개와 같은 소리가 나고, 지진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를 충분히 박살 낸 괴물이 눈길을 돌렸다.
다음 타겟은 서면에 있는 고층 건물인 듯 했다.
'···가신 소환.'
서면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동건 파티를 모조리 소환했다.
저 거인의 발걸음에 언제 지하가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단체로 소환된 하동건 파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라? 우리가 왜 여기에?"
"뭐지?"
"지진 때문인 것 같은데요."
이야기를 나누던 하동건 파티는 거실 창문 너머의 광경을 본 순간 하나 같이 얼어붙었다.
쿠웅!
거인이 점점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쿠웅― 쿵!
속도를 높이던 거인은 서면의 롯데백화점에 그대로 몸통박치기를 했고.
콰아아아앙!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이 된 백화점 건물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희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조차 참상을 전부 가리지는 못했다.
"······."
쿠웅!
거인은 멀쩡한 모습으로 흙먼지 속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거인의 눈앞에 마주한 것은, 우리 아파트였다.
'이런 미친.'
쿠웅!
홑눈의 거인이 하나뿐인 눈을 부라리며 이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싸이클롭스(Lv. 51)」
과연 내 능력은 저 괴물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버틴다고 하더라도 아직 영역에 포함시키지 못한 나머지 동들은 죄다 파괴되겠지.
'막아야 해.'
그러나 무슨 수로?
그때였다.
"재현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옆에서 오언주가 불타는 눈빛으로 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저 압도적인 모습을 보고도 투지를 불태우는 것은 오로지 오언주 뿐이었다.
"후우. 좋습니다."
나는 오언주에게 약속의 퀘스트를 부여했다.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싸이클롭스 사냥 (0/1)
제한 시간 : 24시간 00분 00초
보상 : 아들의 부활 하루.
실패 페널티 : 하루 동안의 극심한 고통.
035화 [Episode 08] 환수 소환 (4)
♩♬―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하동건 파티에게 최대한 간략하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다들 이해하셨습니까?"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우리는 다 함께 1층 현관으로 향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
"엄마아아! 흐아앙!"
"다, 다 죽을 거야!"
그곳에서는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분명 집구석 영역 안에 포함되어 보호받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공포에 집어삼켜진 것이다.
쿠우웅―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거인의 발소리.
아파트 건물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괴물.
"꺄아아악!"
"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놈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여기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서둘러서 작전 위치로 움직여주세요."
우리는 세 개의 조로 쪼개져서 움직였다.
오언주를 필두로 하동건, 김다정, 강덕수가 1조.
김가영, 문병호, 김 건이 2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서예진이 3조였다.
1조와 2조가 작전 위치로 달려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패닉에 빠진 시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아,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성공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내 통제 아래에 있는 모든 세대의 방송 장비를 통해 내 목소리를 송출시켰다.
"현재 거인이 우리 아파트 단지를 향해 접근 중에 있습니다. 군필자 분들은 정문에 모여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피신하여 주십시오."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런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거인이 접근 중···."
태연함을 가장한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이것도 품위 유지 스킬의 효과인 걸까.
내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패닉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래! 지하 주차장! 지하 주차장이 있었지!"
"거기로 가면 안전할까?"
"일단 여기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부터 보내세요! 지금 당장 지하주차장으로 가야 합니다!"
일단 목표를 정해주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보! 도윤이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 있어."
"당신은요?"
"나는 정문으로 가야지. 군필이잖아."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당신은 예비군도 끝난 아저씨가 무슨···!"
"잔소리하지 말고, 가! 얼른!"
"······무리하지 마요."
저 남자처럼 내 명령에 따라 정문으로 모이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저런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문에 모인 사람들은 고작 121명.
1200명이 넘는 총원 중에 미성년자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이라고는 해도, 성인 남성의 숫자만 400명이 넘어간다.
그 중에 군필자가 겨우 백 명 밖에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병역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면제 받은 신의 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
'도망쳤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르는 척 지하주차장으로 피신한 것이다.
'겁쟁이 놈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바보라서 목숨 걸고 모인 것이 아니었다.
싸우지 않으면 전부 다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아파트 단지를 지키기 위해서 모인 게 아니었다.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모인 것이다.
심지어 121명 중에는 여자도 8명이나 있었다.
8명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신유라를 포함해서 그녀가 이끄는 팀 6명이 전원이 함께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김민호 팀에 소속된 문해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혜린이었다.
유혜린을 향해 물었다.
"혜린씨, 군필자셨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이곳으로 오셨죠?"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어서···."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 키 작은 남자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 그런데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그는 백승엽의 동생인 백승민이었다.
그에게 물었다.
"백승엽씨는 어디 계시죠?"
"그건···."
백승엽과 쌍둥이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치셨나 보군요."
"······."
그와 동시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망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먹은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일부는 정문에 온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솎아낼 필요가 있겠어.'
한 번 더 여지를 주기로 결심한 내가 입을 열었다.
"냉정하게 현 상황을 전달하겠습니다."
고민에 빠진 이들을 훑어보며 이어 말했다.
"솔직히 저도 저 괴물을 처치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다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직접적으로 죽음을 입에 올리자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편입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으신 분들이 계신다면, 도망치세요. 붙잡지 않겠습니다."
나는 등을 돌려 정문을 바라보았다.
"딱 10초만 세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실 수 없을 겁니다."
쿠웅!
그러는 동안에도 거인은 계속해서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거대한 건물들을 밀어 넘어뜨리며, 쑥대밭을 만들면서 걸어오는 중이었다.
"10, 9, 8···."
콰아아아앙!
거인의 손에 의해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땅바닥과 충돌하며 굉음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폭발 소리가 들린 직후, 뒤쪽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한 명이 스타트를 끊자 고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3, 2, 1."
그렇게 10초를 세고 돌아보니 121명이었던 인원은 101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팔다리도 후들후들 거렸다.
그럼에도 이들은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아주셨네요."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두려움으로 가득해진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을 우대할 것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닌, 두려움에 맞서기로 결정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였다.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이것을 받아주세요."
상점에서 101자루의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그들에게 지급했다.
"총?"
"진짜 총이야?"
"진짜야, 이거!"
겨우 권총 한 자루일 뿐이었다.
사실상 저것으로 거인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화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따라 각자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시민 박종찬의 신뢰도가 50을 달성했습니다.]
[충성도가 개방됩니다.]
[시민 이혁진의 신뢰도가 50을 달성했습니다.]
[충성도가 개방됩니다.]
······
······
101명의 신뢰도와 충성도 상승 알림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걔 중에는 단숨에 충성도 30을 뛰어넘으며 가신 등록의 여건을 만족시킨 이들도 여럿 있었다.
'여기 있는 이들의 경험치와 정산금 분배율을 100%로 올려.'
시민들의 숫자가 천 명을 넘기며 '기본급' 스킬이 등장한 뒤로 모든 시민들의 경험치와 정산금의 분배율을 0%로 조정했었다.
그러니 이제 여기 있는 101명은 앞으로 몬스터를 사냥할 때, 다른 시민들보다 2배 더 빠르게 성장하고 2배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때.
-크아아아아악!
거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시작됐군.'
절대자의 눈을 통해 오언주가 있는 1조의 동향을 살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