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3)
"-오랜만이구나."
"...."
"흐음, 이 케이크가 제법 맛있구나. 나이가 들어 그런지 단 걸 자꾸 찾게 되는군, 허허."
"…당신이 왜 여기에…. 하아, 너무 멍청한 물음이었군."
"제 우둔함을 스스로 깨닫는 것은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
"눈빛이 불경하구나."
왕도에 위치한 어느 고급 카페.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는 카페였고, 원한다면 개인실을 이용할 수 있는 카페이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거나,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는 의미.
하여 제법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카페였고, 그러한 카페인 만큼 항상 예약이 꽉 차 있기도 했다.
…한데 그런 곳에서.
"다르게 질문하도록 하지요. 북부는 어쩌고 여기 있는 것입니까, 대공."
어느 '부자(父子)'가 마주쳤다.
로엔은 미간을 좁혔으며, 케이크를 맛나게 먹던 청년….
아니, 청년의 모습이지만 이제 60대에 가까운 그는 북방이란 드넓은 영토를, 아니 일국(一國)을 다스리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하여튼 여전히 입이 건방지구나. 아비에게 대공이니 당신이라니, 내가 가정교육을 잘못 시켰어, 쯧…."
마그누스 율리아 드 라이오넬.
당대 라이오넬의 대공이 다름 아닌 그였음이다.
"하! 당신이 언제 가정교육을 시켰다고…!"
로엔은 답지 않게 발끈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항상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는 그답지 않은 상태.
대공에 대한 반발심과 쌓인 앙금이 상당함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에 대공은….
"음, 여전히 칭얼대는 것이 애송이에 불과하구나. 기사로서의 기량은 훌륭하나 군주로서의 기량은 60점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으니…. 부족하다, 부족해."
"...."
타박을 날릴 따름이었다.
마치 그의 자질이 심히 아쉽다는 듯이.
역대 라이오넬 중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로엔이었건만, 그런 그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박한 마그누스 대공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발 어린 꾸중에도 로엔은 비교적 덤덤했다.
자신의 자질이 어떠한지는 이미 오래 전 깨달았다는 듯이.
"나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군주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하여 대공의 자리는 포기한 지 오래다. 나보단 그 자리를 원하는 당신의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게 어떨까 싶군."
"심히 아쉽게도 나머지 핏줄 녀석들 또한 다 수준이 고만고만하더군. 네놈이 가까스로 평균점이라면 나머진 평균점 이하지. 낙제란 뜻이다. 하니, 네가 물려받아야 한다."
"...."
"또한 당대 사자들 중 [흑왕]에게 인정받은 건 너뿐이지. …숨기고 있는 '그것'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
로엔은 몸을 움찔거렸다.
설마…!
'아, 알고 있는 건가?'
역시 방심해선 안 될 자다.
마그누스 대공.
그는 시간을 거스른 기적을 몸소 겪은 그일지라도 여전히 상대하기 힘든 까다로운 맞수임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로엔은 오늘 따라 감정 조절이 어렵다며 이를 악물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이 사람 앞이면 항상 냉정하게 있기가 힘들다.
왜일까?
한없이 냉정하고도 매정한 인간이라서?
그도 아니면 아무리 모나다 해도 그의 아비라서?
…그것도 아니면.
타악.
"걱정은 마라. 당장은 널 어떻게 통제할 마음은 없으니.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나 또한 그럴 테니."
"...."
그의 복잡한 생각을 끊어버리듯 귓가를 울리는 책상을 울리는 찻잔 소리.
"이 커피란 것과 케이크, 제법 훌륭했다. 좋은 가게를 만들었구나."
"하…. 그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아무렴, 아비가 돼서 아들이 주인인 가게조차 모를까."
"...."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이 카페를 만들 때 그의 존재는 철저하게 감췄거늘.
"어중이떠중이야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너보다 곱절은 산 이들은 대개 눈치챘을 거다. 주인이 따로 있음을. 하니 주의하거라. 귀족들의 정보를 모으는 것이야 좋다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거, 싸가지 없긴. 날 키운 전대 가주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군."
전대 가주, 자기의 아비를 스스로 폐위시킨 마그누스 대공이었고, 그는 자신이 로엔을 뭐라고 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자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걸 보고 업보라고 하는 것인가 싶어.
그러며.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왔었다. 생각해 보니 왕도에 와서 제 자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찾아왔단 겁니까?"
"아비가 자식 얼굴 보는 게 뭐 어때서?"
"...."
"…음, 이건 확실히 나답지 않은 발언이긴 하군. 어쨌든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아들아."
"...차라리 '너'나 '저거'라고 부르시죠.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니 속이 메스껍습니다."
"…나도 말하고도 좀 그랬다."
…이렇게 보면 두 부자는 닮은 듯했다.
생긴 걸 말하는 게 아닌 성격이나 분위기 등이.
애정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건지, 그도 아니면 원래부터 둘의 성격이 꼬여 있던 건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친한 부자 사이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터벅터벅.
그렇게 마그누스 대공은 끝내 일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정말 얼굴 한번 보려던 게 목적의 전부였던 것처럼.
그런 그를 보며….
"막스 숙부는 어디 계십니까. 항상 같이 다니는 것으로 아는데, 오늘은 곁에 없군요."
"…난 당신이고 막스 녀석은 숙부더냐?"
"숙부에겐 신세 진 것이 많고. 당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라 반박도 못 하겠군."
마그누스 대공은 처음으로 투덜거림을 보였다.
어딘지 서럽다는 말투.
허나 저것도 다 연기일 것이다.
저 양반이 이런 것으로 섭섭해 할 리가 있나.
그때.
"…막스 녀석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하는 중이지."
"어울리지 않은 짓?"
"첩자 짓을 해보겠다고 하더군."
"…??"
로엔은 미쳤냐는 시선을 던졌다.
누가 첩자 짓을 하고 있다고?
"숙부가 말입니까?"
"…그렇게 보지 말거라. 나도 말렸었다."
"...."
"크흠."
무안한 표정을 지은 마그누스 대공이었고, 로엔은 한동안 무어라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얘기라서.
'첩자? ...그 눈에 띄는 숙부가?'
…차라리 사자한테 재롱을 부리게 하면 했지, 절대 제 존재감을 숨길 수 없는 숙부를 떠올리며 로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조건 수상한 사람이라 여겨지면 여겨졌지, 제 존재를 감출 수 있는 분이 아니지.'
자신의 숙부, 북부의 흑사자로 불리는 용맹한 기사.
기사 중의 기사로 평가받는 호탕하고 훌륭한 인격자이긴 하지만.
'…너무 눈치가 없어서 문제지.'
로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눈에 훤하여.
─아니나 다를까.
"저기 있다!"
"수상한 놈이다! 당장 붙잡아라!!"
어느 수상한 무리들이 막시무스 아이언 드 라이오넬을 죽일 듯이 쫓고 있었다.
마치 몰이사냥을 하는 느낌이었지만, 사내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그들을 상대했고, 한편으로 이 상황 자체가 의문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들켰지?"
자신이 수상한 놈임을 들킨 것에 대한 의아함을 드러냈다.
자신은 그저….
"너희의 신은 '악신(惡神)'이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왜 이렇게 화를 내지?"
악신 같은 짓을 하기에 악신이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이 질문이 그토록 잘못된 것인가?
막시무스는 도통 그들의 반응이 납득 가지 않았다.
*
*
*
예로부터 종교의 힘은 강성했다.
특히 중세시대.
아직 인터넷이고 신문이고 없던 시대에는 특히 더.
이유?
누군가가 말하길 종교인들 중 식자층, 즉 지식인이 많기에 종교인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이 생겼다는 말도 있으며.
신에 대한 신앙심을 통해 고달픈 삶을 잊고 싶은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어떤 이유가 됐건 종교의 힘은 항상 강맹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의 강성함은 정보화시대에 들어서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도리어 시대가 발달할수록 종교란 더 영악해지고 흉악한 것들도 나오기 마련이었으며, 종교 자체의 힘을 악용하는 이들이 나왔으며, 그 대표적 무리가 다름 아닌 '사이비' 무리라 할 수 있으리라.
"학생 때 길 지나가면 '도를 아십니까?'를 묻는 놈들이 열 명 중 셋이었고, '종교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 인간이 열 명 중 다섯이었지."
"…하하, 저보단 낫네요. 전 그것보다 더 많이 보고 권유받았는데."
"원래 걔들은 순박한 애들 잘 건드리니까."
"교관님도 순박하셨어요?"
"그때는 나름 순박했어. 아니, 연약했지."
"...."
"왜 그렇게 보냐?"
"아, 아니요. 교관님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 말이라서…."
"나도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야."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끔 보면 이 녀석은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한다고.
"누구나 다 약한 시절이 있는 거야."
"하하…."
"그보다 진짜 지랄 맞다. 설마 이 세상에서도 사이비랑 싸우게 될 줄이야…."
"…끔찍한 일이죠."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종교의 힘은 강대하다.
정보화시대라 불렸던 그들의 세상에서조차 사이비는 만연했고, 급기야 무수한 사람이 홀린 듯 따르는 현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게 사이비란 놈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어떤가?
마법과 기사란 [신비]가 실존하는 세상이 아닌가.
도리어 이런 세상이기에 사이비들은 더욱 활개 치는 것이 가능하다.
힘이 있기에.
또한 자신들의 야망과 권력을 위해 신조차 이용해먹는 이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저런 식으로.
"-현 세상은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백성은 항상 약자의 입장에서 서글픔을 겪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약자이고 싶어서 약자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권력자들이, 소위 기득권층이란 자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건 잘못된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소리쳐도 저들은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가 약자이기에! 힘없는 자들의 아우성은 저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브리튼이 무너진 이유조차 자세히 보면 실상 기득권층이 제 마음대로 사람을 휘둘렀기에 그런 것입니다. 당신 같은 인재들을 그저 병사로 놔두었기에 당신들의 조국이 사라진 것이겠지요."
"-힘을 원하십니까?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갑시다! 그 힘, 우리가, 우리의 신께서 줄 테니!!"
[[[와아아아아아아!!]]]
일장연설이 끝나자마자 죄수들이 열광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흘렸고, 또 어떤 이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보고 있노라면 속이 다 메스꺼워지는 광경.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속이 역해지는 광란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보며 이한이 느낀 감상은….
"이 새끼들 약이라도 빨았나? 아니면 집단 세뇌? 뭐 이리 다 미친 거야?"
"어쩌면 언급하신 세뇌랑 약 모두 다 한 걸지도 모르죠."
"…확실히,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정상일 리가 없지.
이한은 땅굴 한복판에 만들어진 아편굴과 같은 집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지독하기 그지없다며.
* * *
땅굴은 지키는 어느 병사가 표현하길, 땅굴은 [미궁]과 같다고 한다.
설령 지도를 만들지라도, 매달 웜들에 이동으로 인해 만들어놓은 통로나 길이 막히기 일쑤이며, 상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여 땅굴을 관리하는 병사들조차 이제는 땅굴 전체를 파악하려는 것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땅굴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딱 [두 곳]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두 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숫자는 물경 3백이며, 그들 모두가 창과 갑옷, 그리고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상태이니 죄수들은 결코 땅굴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땅굴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포기했을지언정, 땅굴에서 죄수가 빠져나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껏 땅굴 역사에서 죄수가 탈출한 역사는 없다!
이것은 땅굴을 지키는 병사들의 자부심이 아닐 수 없으리라.
...분명 그럴 텐데.
"땅굴 지키는 병사 새끼들, 다 눈 뜬 맹인들만 뽑아? 아니, 이런 시설을 지을 장비를 여기서 구했을 리가 없잖아?"
"그, 그렇죠, 절대 여기서 못 구할 자재들이죠…."
그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땅굴 깊숙한 시설.
최소 지하 15층은 될 법한 산소조차 희박한 장소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얼씨구?"
"사, 사람이 사네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나무판자와 흙으로 대충 지은 집들.
추가로.
"밝네, 밝아. 이 새끼들은 돈도 많네."
"하하…."
원래 이 정도 지하면 어두운 게 정상적이지만 밝기 그지없다.
"아티팩트."
그 용도가 무엇이건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전해지는 마법계의 보물 [아티팩트].
빛을 내는 용도로 보이는 아티팩트가 밤을 밝히는 달처럼 지하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왕국이 무능한 걸까, 아니면 얘들이 유능한 걸까?"
"...."
"스읍, 둘 다인가?"
…데릭은 차마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데릭이 난감하게 웃음을 드러낼 때, 이한은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음, 어디서 봤는데?'
이한은 지하 천장을 밝히는 달 모양의 아티팩트를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달 모양 장식품 등은 왕도에서도 흔해빠졌기에 기시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한은 그런 것이 아님을 느꼈다.
달은 달인데, 마치 하현달을 닮은 칙칙함이 감도는 달의 색깔.
그리고 하현달의 테두리에 새겨진 1부터 12까지의 숫자.
시계도 아니고, 저게 뭔 짓일까 싶지만 이한은 저러한 달 문양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제법 어린 시절에.
그러더니 돌연….
- 넌 오늘부터 8호야. 알겠니?
"...아."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떠올리는 데 그는 성공했다.
[검은 달].
이한이 어린 시절 한때 몸담았던, 아니 납치당했던 암살 조직의 문장과 똑같이 생긴 아티팩트를 확인하며 이한은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이거.
"이 새끼들, 없어진 게 아니라 합병당한 거였나?"
그도 아니면.
...원래부터 하나였거나.
'응, 잠깐 그렇게 되면…?'
이한은 중대한 사실 하나를 깨우쳤다.
만약 정말 그의 전 직장이 원래 사이비와 하나였다면….
'나, 나도 사이비 교도…?'
…아,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하, 합병당한 게 분명하다! 아암! 그렇고말고…!'
이한은 자신이 너무 과한 생각을 했다며 머리를 털어냈다.
...마음 한구석 일말의 불안함을 남긴 채.
#116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4)
땅굴 안에 지어진 마을의 중앙 광장으로 사제복을 입은 사제 한 명이 나타나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그 사제는 '귀족으로 태어난 놈들은 다 죄인들이고. 우리는 힘이 없어서 당하고 사는 거다, 그러니 힘을 얻고 귀족이란 자들은 전부 다 때려 죽여야 한다!'란 기적의 논리를 펼친다.
광란이란 말로도 부족한 현장에 두 사람이 아찔해 하는 것도 잠시, 이한은 곧….
"아, 암살조직이요?"
"그래, 아무래도 내가 아는 애들 같다."
이한은 태창이 녀석에게 자신의 과거 일부를 밝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동향 사람이자 비슷한 비밀을 품고 있는 그라면 상담하기 적합하기 그지없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다른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이니 지금이 대화를 나눌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할 테고.
그리고 이러한 이한의 전직 사이비(일지도 모를) 커밍아웃을 듣고 그는.
"...."
"왜 그렇게 보냐?"
"아, 아니요. 그냥 교관님 인생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럽게 인식해서요…."
뭔가 나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러니 특성이 그렇게 많지' 라고 중얼거리는 태창이었고, 이한은 피식거렸다.
이 녀석다운 반응이다 싶어서.
그러더니 돌연 태창이는.
"음, 일단 제가 봤을 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납치당해서 어쩔 수 없이 암살조직원이 됐던 사람한테 '너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일 테니까요."
"흠, 그런가?"
"…뭐, 왕도에는 그런 비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많을 테지만, 그래도 교관님은 그런 건 그다지 걱정하지 않으시잖아요?"
"…넌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게 됐어."
"하하."
녀석의 말대로 이한은 솔직히 자신이 속한 조직이 사이비건 뭐건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 충격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처음뿐이지 조금 냉정해지니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이비 포교 활동을 한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검은 달에 납치당하고 몇 년은 훈련과 세뇌 교육만 받다가, 첫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조직이 망해버리고 만 상태였다.
이후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찔리는 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태창이의 말대로 그의 전직이 밝혀진다면 트집 잡는 인간들이 없지는 않을 터.
기사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허나 만약 그런 이들이 있다면.
"다 때려 부순 다음 튀어야지. 동부 대륙이나 북부 대륙으로 건너가면 되겠네."
"망명 루트 타시려고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으음, 가실 때 저한테 귀띔 좀 해주세요. 같이 가게."
"너는 왜?"
"교관님 없으면 어차피 왕국은 망할 것 같아서요."
"아서라, 넌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해. 나 같은 놈이 없어도 왕국은 잘 돌아가, 이 녀석아."
"글쎄요…."
아닐 것 같은데?
녀석은 눈으로 그리 말했고, 이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였지만, 때론 이러한 고평가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이긴 한가 보다.
"-어, 어쨌든,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설사 밝혀진다 한들, 교관님을 지지해 줄 사람이 제법 있잖아요?"
"음, 지지해 줄 사람들이라…. 하나같이 다 미덥지가 않은데?"
그를 도와줄 이들이 몇몇 떠오르긴 하지만 그다지 영 신뢰는 안 간다.
오히려 자신을 이용해먹을 인간들이 더 많지.
"하하…, 그, 그래도 제이크 경이나 요르드 경 같은 사람도 있잖아요. 그분들은 끝까지 교관님을 믿어주겠죠."
"걔들? 음, 의리 있는 녀석들이긴 한데, 걔들한테 뭘 기대할 게 있나?"
"있죠. 요르드 경은 훗날 기사단장까지 오를 사람이고, 제이크 경은 군부의 장군까지 될 인재니까요."
"…?"
"나중에 무조건 출세할 사람들이란 거예요. 교관님 인맥은 가끔 보면 미래의 거물이 많더라고요."
"허어…."
이한은 진심으로 놀랐다.
제 친구와 후배가 그 정도로 거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지금으로선 잘 상상이 안 되지만….
'역시, 사람 앞날이란 건 모르는 거구나.'
이한이 그렇게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으나, 태창이의 다음 발언에는 더욱 충격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말이죠, 교관님이 받은 실험 내용이 밝혀진다고 해도 딱히 문제는 없을 거예요. 교관님은 마인이 아니니까."
"그것도 스킬로 확인한 거냐?"
"네에, 마인이나 반마인이면 종족명에 뜨는데, 교관님은 '물음표'로 뜨거든요. 그러니 적어도 마인은 아니에요."
"오히려 더 불안한 정보 같은데?"
…내 종족이 사람이 아니었어?!
금일 최고의 충격.
이한은 아찔했다.
허나 녀석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말을 이었다.
"마, 마인이 아니란 게 중요한 거죠. 어, 어쩌면 신비종족의 핏줄이 섞였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그러니 안심, 하, 하세요…."
"…왠지 더 불안하다만."
이한이 영 못미덥다는 눈빛을 주기 무섭게.
"그, 그리고! 귀, 귀족들도 양심이 있으면 교관님이 마물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것 가지고 트집 잡으면 안 되죠! 오히려 그 사람들이 가장 질타 받아야 옳을 텐데."
"…?"
"모르세요? …아, 맞다. 투기법을 익히신 적이 없지, 참…."
"뭔데?"
색다른 정보가 나왔고, 이한은 눈을 끔뻑였다.
대체 뭔가 싶어서.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서 이한은 왜 귀족의 양심 운운하였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귀족들이 익히는, 소위 명문가의 투기법이 [고위 투기법]으로 분류되는 이유는요, 마물의 마석을 섭취하는 덕분이거든요."
오물을 덕지덕지 바른 개들 주제에 겨 묻은 개를 모욕할 자격은 없을 테니까.
다만.
'와, 벌집, 아니 역린 아니야, 이거?'
이한은 왜 고위 투기법이 비밀에 부쳐지며 평민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아는 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때론 몰라도 되는 비밀이란 것이 있는 법이었다.
* * *
다소 잡담이 길어졌지만. 이한과 데릭이 맡은 바 일도 하지 않으며 농이나 주고받는 것은 아니었다.
"허허, 수고하셨습니다, 형제님."
"무얼요.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어찌 수고란 표현을 쓰겠습니까, 허허."
"그것도 그렇군요, 하하!"
남몰래 사제의 뒤를 쫓고 있었지.
'이것들, 진짜 제집처럼 구조를 파악하고 있네.'
사제인지 선동가인지, 아니면 세뇌 전문가인지 모를 놈은 마을을 벗어나 미로와 다름없는 땅굴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막다른 길조차 그에겐 별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이상하게 웜이 출몰하지 않았다.
'역십자가가 마물을 쫓는 효능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네요.'
'그러게.'
로이 반트가 지니고 있던 물품은 크게 다섯 가였는데, 비약 3개와 역십자가, 그리고 찢어진 종이 등이었다.
비약 3개는 각각 마물의 살점으로 만들어진 것과 마약 등이 들어 있는 것으로 구분되었고, 찢어진 종이는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십자가는….
'마물이 싫어하는 파장을 내뿜는다. 정확한 정보였네….'
중급 마물은 모르겠지만, 하급 마물까진 쫓아낼 수 있다는 역십자가.
저들이 마냥 죽고 싶어서 땅굴을 아지트로 삼은 게 아님을 알 수 있는 바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착한 사제의 목적지를 보며….
"??"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세, 세상에…. 흐읍…!"
놀란 건 이한만이 아니었고, 데릭은 실수로 육성으로 경악성을 내뱉다가 제 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허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Krrr]]].
...저놈, 샌드 웜의 울음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110미터' 크기를 자랑하는 샌드 웜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 * *
사람은 믿지 못할 것을 보면 뇌가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무척이나 큰 건물이나 생물을 보면 발이 굳는 생물의 본능처럼.
...지금이 그러했고.
'나, 남부의 샌드 웜은 30미터가 한계인 거로 아는데….'
원래 사막에 서식하는 샌드 웜은 성체가 되면 80~100미터까지 크는 경우가 있다.
허나 이건 사막에서도 드문 경우이며, 100미터를 넘는 샌드 웜이 나오는 건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일이었다.
허나 남부의 샌드 웜은 다르다.
남부 대륙에서 비료를 키워내기 위해 가져온 만큼 개량을 거쳤고, 몸집을 키우기에 적절한 환경도 아닌지라 아무리 커봤자 30미터를 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30미터조차 대경실색할 크기임은 맞지만, 그래도 여기까진 마법사와 기사들이 활약하면 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사막에 비하면 한없이 느리고 약한 수준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저건 다르다.
느리고 약할지라도 '크기'가….
막대하다는 말조차 그다지 저놈을 표현하는 데 부족한 거대함이 있다.
만약 저놈이 지하에서 날뛰었다간 지반이 붕괴되고 그들은 손 쓸 틈도 없이 그대로 토사에 묻혀 세상을 하직하리라.
주르륵….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싸늘해지는 상상이 아닐 수 없었고, 데릭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거였구나! 저들이 노리는 수단이…!'
데릭은 이제야 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왕도를 혼란에 밀어 넣을 것인지 깨달았다.
무슨 수단을 썼는지 모르겠으나, 거대한 샌드 웜을 키워내는 데 저들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샌드 웜이 날뛰는 순간.
'땅굴은 무너진다.'
왕국, 아니 남부 대륙 최대의 비료생산지대가 무너진다는 것은 '식량'에 영향을 끼칠 일이란 뜻이었다.
당장이야 괜찮겠지만, 그동안 비료를 쓰던 것에 비하면 농작물에 크나큰 손실이 닥칠 터.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그 피해는 커질 것이고, 식량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식량의 문제에 가장 고통 받는 건 이 나라를 지탱하는 국민들인 바.
하며 당연하게도 일어날 사건은….
'…농민 봉기.'
과한 예측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왕국은 안팎으로 무너져 내릴 거다.
'지독한 놈들…!'
데릭은 저들이 정녕 왕국을 무너트리기 위해 모두를 굶겨 죽일 계략을 짰음을 인정해야 했다.
허나 데릭은 언제까지고 당황할 수 없다는 듯 스킬-[위기감지]를 펼쳤고, 샌드 웜이 가진 위험도를 측정했다.
"…귀왕에 비하면 두 단계 낮은 레벨이에요. 덩치는 크지만 교관님이라면 충분히 잡으실 수 있어요."
"...."
"다, 다만 단번에 죽여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놈이 날뛸 테고, 그렇게 되면 땅굴은…."
"...."
"아, 아니면 지금이라도 지원군을…."
"태창아."
"...네에?"
"지원군을 부르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
"…너라도 먼저 빠져나갈래?"
"…!!!"
데릭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더러운 쥐새끼들 같으니, 드디어 걸렸구나."
그들이 저들을 쫓고 있었듯, 저들 또한 그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무수한 흑의인들이 어느새 그들을 포위하였다.
* * *
흑의인들이 내뿜는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이만한 인원이, 그것도 저만한 실력자들이 기세를 감추고 지금껏 숨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실력을 알려주는 지표와 다름없다.
도합 서른.
허나 개개인의 실력이 백은사자에 있던 어중이떠중이들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추가적으로….
"포위해라!!"
"이런 천벌 받을 놈들!"
"저주스러운 팬드래건의 기사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점차 모여드는 죄수들까지.
인해전술이라 하였나.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었다.
겨우 단 두 명을 붙잡기 위해서 이만한 인원이 몰려온 것이니 말이다.
그런 대량으로 모여드는 인원들을 보며.
"…흠, 어떻게 알았지? 나름 은밀하게 미행했는데."
"허허, 나 또한 등골이 서늘했다네. 정녕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거든."
이한이 물음을 던지자 뜻밖이게도 사제는 친절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여유가 철철 넘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흐, 한 가지 실수를 했더군. 자네, 이런 종이를 보지 못했나?"
"그거…."
사제가 꺼낸 것은 한 장의 백지였다.
로이 반트의 찢어진 종이와 아주 흡사한.
사제는 싱긋 웃었다.
"우리 쪽 사람의 신변의 문제가 생기는 순간 찢어지는 원리라네. 아마 자네는 우리 쪽 사람 한 명을 잡아서 성과를 내었다 여겼을 테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군. '우리'가 그토록 허술하여 보이는가? 허허."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이거네?"
"이제 와서 알아봤자 늦었겠지만, 그런 거라네. 하여튼 왕국의 기사란 것들은 멍청하기 그지없단 말이지, 아하하하!"
사제는 기뻐 보였다.
팬드래건의 기사로 보이는 자를 포위한 것도 있지만, 본인이 압도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만족스러운 건지.
누군가를 짓밟는 것으로 충족욕구를 얻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투항해라. 그렇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기로 하지."
"살려주는 게 아니고?"
"살려줄 리가 있나. 아, 자네는 확실히 실력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옆에 있는 아이를 비롯하여 동료들은 확실히 죽을 걸세. 우리가, 아니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할 거거든."
"...."
자신들 말고도 다른 세 사람의 존재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모양.
"교, 교관님…."
사면초가.
데릭은 상황이 그들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함을 깨달으며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내,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놈이 이러한 뻔한 함정에나 걸려들고, 대체 뭐하나 싶었다.
자책감이 밀려오며 데릭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낼 준비를 했다.
비록 일은 모두 망가졌지만, 살릴 사람은 살려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도, 도망치세요, 교관님. 제, 제가 어떻게든 붙잡을게요! 마, 만천화우라면 어떻게든 이들 중 반은 데리고 갈 수 있을 거예요!"
"아서라. 너, 사람 상대로 피 볼 수 있냐?"
"그, 그건…."
맞다.
데릭은 지금껏 살생을 해도 그 범주는 마물에 국한되어 있지, 사람을 살생한 적은 없다.
그가 각오를 다지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여전히 현대인이란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해, 해야 할 때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지금이고요."
"…자식, 그래도 좀 성장했네."
툭툭.
"…교관님?"
기특하다는 듯 그의 등을 툭툭 치는 이한이었고, 데릭은 이런 상황에서 무슨 칭찬인가 싶었다.
혹시 자포자기했나 싶지만, 그가 아는 한 이한이란 사람은 결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잠깐 비켜봐라. 내가 이런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
무언가 가르침을 주겠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한이었고 사제와 흑의인들이 내뿜는 살기가 짙어져갔다.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는군."
사제는 이한을 비웃었다.
저 바보 같은 기사는 끝내 그들과 싸울 요량인지 품속에서 무기를 꺼내려는 듯했고, 사제는 손을 들어 공격 명령을 내려….
"─지금 땅굴 구역 곳곳에는 화염 스크롤이 약 100장씩 매설되어 있고, 그중 절반만 점화해도 땅굴은 무너질 거다."
[[...…?]]
...사제를 비롯한 흑의인들은 동작을 멈추었다.
"…뭐?"
사제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었다.
지금 저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서.
한데.
"못 믿겠어? 하긴, 말로만 해서 누가 믿겠어. 뭐, 처음은 간단하게 보여주지."
이한이 품속에서 꺼낸 건 무기가 아니었다.
포도처럼 생긴 구슬들이 담긴 주머니였지.
그리고 돌연 그는 구슬 한 알을.
빠각.
손쉽게 터트렸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작열하는 폭발음이 지하를 덮치며 땅굴을 뒤흔들었다.
고오오오오…!
후두두두두둑….
"...."
사제와 흑의인들은 얼이 빠졌다.
심상치 않은 땅굴의 지진을 목도하며 그들은 아연실색함을 제대로 느끼는 중이었다.
허나 그런 그들을 보고도.
"아직도 못 믿겠나? 그럼 이번엔 좀 더 큰 폭발을…."
"그, 그마아아안!!"
사제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의 손안에서 터져나가려는 알맹이를 보며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만 것이다.
"미, 믿겠다! 믿겠으니 당장 멈춰라!"
"...."
"다, 다 죽일 셈이냐! 이 천하의 악독한…!"
"-왜 반말하냐?"
"…?"
"내가 네 친구냐?"
"??"
"염병할 놈이, 어디서 명령질이야."
빠각.
그렇게 이한의 손에서 다시금 구슬 한 알이 터졌고, 곧이어.
콰아아아아아!!
다시금 거대한 폭발음이 지하세계를 뒤덮었다.
후두두두둑…!
방금 전보다 더욱 커진 지진과 균열음.
흙먼지가 떨어지며 모든 게 산산조각 나려고 했고, 급기야.
[[[Krrr…]]].
…샌드 웜이, 아니 마더 웜이 깨어나려는 듯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사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어, 어어…. 어…?"
사제의 뇌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냥 굳어버렸고, 그런 그를 향해 이한은….
"또 터트리는 수가 있다. 말조심해라."
"어, 어찌 이런…."
"스읍!!"
"...."
"존댓말 모르냐 이 못 배워먹은 새끼야, 어디서 어린놈의 새끼가…!"
"...."
"그러고 있지 말고, 빨리 무릎부터 꿇어. 다 뒤지고 싶은 거 아니면."
"...."
…왕국을 무너트리려는 테러범이 도리어 협박받는 초유의 사태.
이질적이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고, 사제는.
털썩.
어느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쯧, 진작 그랬어야지."
"...."
진짜 광기 앞에서 가짜 광기 따윈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것이 정해진 순리였음이다.
#117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5)
…그를 향해 미친놈, 아니 두려운 시선을 던지는 테러범들이 보인다.
마치 무어랄까.
분명 저들이 테러범이거늘, 반대로 자신이 테러범을 협박하는 테러범들의 테러범이 된 느낌이랄까?
기분이 영 오묘하다.
'…나 진짜 이래도 되는 거 맞겠지?'
이한은 내심 쫄리긴 했다.
자신조차 이게 영 아닌 것 같기도 해서.
허나 어쩌겠는가.
'원래 테러범들이랑 협상하는 거 아니라고 했어.'
...누님이.
그녀는 말했다.
만약….
- 만약, 네가 갔을 때 땅굴이 손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라면, 눈치 보지 말고 땅굴을 팬드래건의 영토에서 지워버려도 좋다.
땅굴의 상태가 [적]들에게 '장악' 당한 상태라면 임무 내용이고 뭐고 상관치 말고, 또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모든 걸 완전히 없애도 좋다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과 적의 '격멸'뿐이라며.
허나 진정 그렇게 되면 죄수들만 모인 곳이라 해도 필연적으로 희생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게 아닐까 싶어 작은 반론을 내뱉었지만….
- 어차피 거기 간 범죄자들 대부분 살인죄나 겁탈, 일가족을 파멸시킨 사기꾼 등이 많은 바. 하등 살아서 쓸모없는 자들뿐이며, 사실상 죽건 말건 상관없는 '사형수'가 대부분이다. 도리어 마물에게 먹혀서 양분이 되는 것보다 땅에 파묻혀 즉사하는 것이 그들에겐 자비일 터.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아무리 그래도 대량 학살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 이한은 반항처럼 최후의 변론을 펼쳤다.
'그럼 비료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자칫 잘못하면 왕국에 거대한 혼란이 일어날 텐데?' 등.
이토록 많은 의견을 피력했으나.
- 흥, 여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미 대책은 준비됐다. 식량 피해는 걱정할 것 없다. 아무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대를 보낼까, 이미 수단을 강구하였으니 보내는 것이지! 하니 걱정은 집어치우고 강경하게 가거라. 그댄 여를 대리하는 것이니까. 어떠한 짓을 저질러도 모든 책임은 여가 진다.
…전생에도 이런 윗대가리 한 명만 있었으면 아마 자신은 열렬한 지지자이자 팬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
"교관님, 아니, 이건 대체…."
"괜찮아, 나한테 일 시킨 사람이 이렇게 해도 된다고 했어."
"지, 진짜요?"
"어, 오히려 얘들만이 아니라, 땅굴 죄수들까지 싸그리 생매장해도 상관 없대."
"...."
"그렇다고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진짜 생매장할 건 아니고, 일단 겁만 좀 주는 거니까."
"...."
"뭐, 너무 위기다 싶으면 좀 미친놈이 돼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그럼 저흰…."
"'재주껏' '잘' 살아남아야지, 어쩌겠어."
"...."
"어허, 눈으로 욕하지 마라."
"욕 안 했어요, 그냥…."
...물 만난 물고기 같다 싶었을 뿐.
이한,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그의 얼굴은 영락 없는 테러리스트의 그것이었고, 타고났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재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 * *
데릭에겐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만, 이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일 뿐.
이한의 긴장감을 높이며 속으론 마른침을 삼키는 중이었다.
'입은 털었는데, 위기긴 위기네.'
이한이 각 구역마다 100장씩의 스크롤을 묻어놨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물론 그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긴 하지만.
'아, 도합 100장밖에 없는 거 들키면 안 되는데….'
그가 묻어놓은 스크롤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스크롤 자체가 워낙 귀한 물품이기도 하고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수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조차 이를 구할 수 있던 건….
- 야, 3일 안에 화염 스크롤 1,000장만 좀 만들어라.
- 뭐!?
- 3일이다, 3일 안에 만들어.
- 자, 잠깐!
노예 녀석이 있던 덕분이었지만.
그러나 이한의 마법 노예, 오드왈 버나드는 무능했다.
'3일이나' 시간을 줬는데, 겨우 백 장의 스크롤밖에 만들지 못했으니까.
그런 주제에.
- 그, 그것도 남들은 못하는 일이란 말이다!!
통곡하듯 말하던데, 이한으로선 다 변명처럼 들리더라.
하여튼 못 써먹을 놈이다.
어쨌든, 이런 사정이다 보니 스크롤의 숫자는 극단적으로 적었고, 이한으로선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기왕 챙겼으니 땅굴에 갇히고 곧장 이곳저곳 빠르게 돌아다니며 스크롤을 붙여 놓긴 했는데, 이렇듯 도움이 되긴 한다.
허나 반대로 말하자면 들키는 순간 위기인 건 똑같다.
'땅굴 전체를 폭발시킬 위력은 아니거든….'
시험해본 결과 스크롤이 발휘하는 위력은 다이너마이트보다 좀 약한 수준.
구역 몇 곳은 무너트릴 수 있겠지만, 땅굴 전체를 무너트릴 수준은 아니란 뜻이다.
하여 이한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놈들 다 처리할 수 있으려나?'
이한은 어느새 수백 명을 넘어가는 인원이 그를 포위하는 것을 느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나같이 투기법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 죄수들.
로이 반트와 같이 1인분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백은사자 녀석들처럼 반쪽짜리도 상당하다.
들쑥날쑥한 실력들.
허나 이들에겐 백은사자와 다른 점이 엿보였다.
'협동성이 있다.'
반(半)마인 주제에 질서정연한 규율을 보이며 대형을 짜고 있다.
전술을 아는 것이고, 저들이 마냥 따로따로 노는 조직이 아닌 하나의 '군대'처럼 훈련된 조직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한은 안다.
전장에서 전술과 협동성을 갖춘 이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내는지.
적혈수리란 기사들을 상대하였기에 알 수밖에 없는 강렬함.
비록 저들 개개인이 수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수백이 넘는 인원이 모두 투기법을 익혔다는 것은 위협적인 것이 맞다.
숫자 앞에 장사 없는 법.
'절반 넘게 저승길로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나머지는….'
특히 검은 옷을 둘러입은 흑의인들.
서른이 좀 넘을까 싶은데, 저들이 내뿜는 기세만 봐도 알겠다.
개개인이 부단장급 저력이다.
저들과 맞상대한다면 팔다리는 줘야 할 터.
거기다.
'난 모르겠는데, 태창이는 죽겠는데?'
아직은 여러모로 어설픈 태창이 녀석으론 살아남기 힘든 게 사실이었고, 난감하기 그지없다.
'참 쉽지 않아, 무슨 일이든 다....'
새삼 세상 사는 일 중 쉬운 일이 없다는 겸손함을 깨달으며 이한은 사제를 보았다.
무력은 낮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은 자.
또한.
"야, 너."
"왜, 왜 그러나…."
"말투가 영 더럽다?"
"…왜 그러시오."
"하, 금쪽이 2호도 아니고."
"...."
"됐다, 내가 너 같은 놈이랑 뭘 말하겠냐, 그냥 하나만 묻자. 너 [혈십자군]이랑 무슨 관계냐?"
"!!?"
"흐음, 관계있는 건 맞나 보네."
"네, 네놈이 어떻게 우리의 이름을…! 호, 혹 배신자가…!"
"…음."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후천적 감각.
이 덕분에 이한은 짧은 대화에서 무려 네 개의 정보를 건져냈다.
혈십자군은 존재하는 게 맞다는 것과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있다는 점.
왠지 모르겠으나 들키지 않을 수단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다.
그럼 그 수단은 무엇일까?
'신비, 혹은 힘 있는 협력자의 존재….'
예측일 뿐이지만 비밀을 감출 수 있는 신비나 그도 아니면 대귀족, 혹은 왕족과 버금가는 존재가 뒷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왕국의 배신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얻어낸 정보는.
'이놈들, 모두가 다 서로 협력하는 사이는 아니다.'
저놈은 혈십자군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배신자를 입에 담았다.
조직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거나, 그도 아니면 파벌이 갈려 있다는 여지를 준다.
"후우…."
평소에 쓰지 않던 머리를 과도하게 썼기 때문일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머리가 뜨거워진 만큼 얻어낸 정보가 의미가 있을 터.
하기에.
'소심아.'
'네에?'
'튈 준비 좀 해.'
'지, 지금 말입니까?'
'알아낼 건 다 알아냈다. 증거품도 필요하긴 한데, 뭐, 저 사제나 데리고 가지, 뭐.'
'....'
'얼른!'
'아, 예에!'
이한의 재촉에 그는 품에서 연막탄이라도 꺼내려고 했다.
원래 역사적으로 도망가는 데 이만한 것이 없….
후욱!
캉!
"뭔 수작이지? 자살희망자였냐?"
"도리어 우리가 무슨 수작이냐고 물어보고 싶군."
"...."
"우리가 만만한가?"
"어, 놀보다 더."
"…!"
…눈치가, 아니 실력이 있는 놈들을 속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한과 데릭이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하자마자 데릭에게 비수를 날리는 흑의인이었고, 이한은 이를 정면에서 막아냈다.
찌르르.
"아프네…."
금강을 펼쳐 막아냈음에도 충격이 다 해소되지 않는다.
아마 흑의인들 중 최고의 실력자는 저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흑의인은.
"스크롤이 묻혀 있다는 건 진짜겠지. 하지만 네놈이 땅굴 전체를 묻어버릴 정도에 스크롤을 숨겨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우리처럼 비밀 통로를 알지 못하는 한."
"오오, 비밀 통로가 있긴 한가 보네? 근데 그런 걸 막 알려줘도 되나?"
"상관없다. 어차피 네놈들은 살아서 나가지 못할 테니."
"이야, 자신감 넘치네."
"자신감이 아니라 결과를 말할 뿐이다. 네놈들은 절대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고오오오.
심상치 않은 기세가 퍼진다.
사제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미 공격 태세에 들어간 흑의인이었고, 이에 맞춰 죄수들도 살의를 내뿜었다.
왜 죄수가 죄수인지를 알려주듯, 한 번이라도 사람을 해친 자의 저열한 살의가 맴도는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내, 내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거늘!"
사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부터 냈다.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흑의인에게 분노하듯.
"감히 신이 내려준 권위에 도전할 생각이더냐!!"
"그럴 리가."
"한데 어…."
푸욱!
"끄으윽!?"
"하지만 넌 신이 아니지. 너 같은 쓸모도 없는 놈의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고. 쯧, 바보 같은 놈. 적의 허언에 속기나 하다니…."
사제의 등에 비수가 꽂혔고, 사제는 그대로 쓰러졌다.
망설임 없는 단호한 손속.
"내부분열이냐."
"쓸모없는 자를 처리했을 뿐이다."
"흐음."
이한은 딱 봐도 독단적인 행동임을 알았다.
하여….
"역시, 그렇구나. [검은 달]은 혈십자군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구나."
"!!?!"
"역시 합병 당한 거였나? 아니면 원래 대등한 관계였는데, 한 번 묵사발 나고 그렇게 된 건가?"
"네, 네놈…!"
흑의인이 당황하며 말을 버벅거릴 때, 이한은 곧장.
"됐다. 나중에 물어보지, 뭐."
콰앙!
이한은 그에게 날아왔던 비수의 손잡이를 정확히 노려 걷어찼다.
섬세하기 그지없는 컨트롤과 힘의 전달.
- 관일창.
창이나 통나무가 없기에 비교적 위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할 터였지만, 그렇다 한들.
푸화아악!
저딴 놈들의 배를 꿰뚫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바였다.
일순 대장으로 보이는 흑의인을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섰던 흑의인 두 사람은 그대로 절명했다.
철퍽.
"...."
쓰러지는 그들이었고, 이를 보며 그는….
"죽여 버리겠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 * *
'누군가 싶었는데, 4호였네.'
이한은 방금 전부터 흑의인을 보며 익숙함을 느꼈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익숙함.
그리고 지금, 우발적으로 사제를 죽이는 잔혹함과 무식함, 몸놀림 등을 관찰하자 한 사람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4호.
과거 그가 8호였던 것처럼, 12호까지 존재했던 검은 달의 간부 후보들.
아, 지금은 간부가 됐으려나?
'저놈 강했었지.'
과거 4호는 단순무식하며 성정이 불같아 여러모로 저평가당하는 놈이었으나, 그래도 잠재능력은 대단했다.
듣기론 바바리안의 하프이고, 바바리안이란 종족이 가진 특성을 더욱 개조하기 위해 오우거의 힘줄을 몸에 이식한 실험체라고 했던가?
무려 바바리안 하프에게 오우거의 힘줄을 준 것이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준 것과 마찬가지.
하여 힘과 잠재력만큼은 그 누구보다 대단했었고, 어릴 적 이한은 4호와 붙는 것이 여러모로 꺼려졌었다.
...어릴 때는 말이다.
쿠웅!
"!"
"힘 하나는 무식할 정도로 좋네."
이한에게 부딪친 4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밀리지 않는다.
마치 바위에게 부딪친 바보가 된 느낌.
힘 싸움으로 진 게 처음인 것처럼.
허나 이한은 딱히 힘으로 놈을 막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나무 이백 그루를 뽑아가며 익힌 노력과 기술의 성과일 뿐.
그러니.
후우우욱!
"너 같은 놈에게 밀리면 내가 노력한 날들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 싶다."
이한은 그대로 놈을 들어 허공으로 부유시켰다.
나무를 그토록 뽑아댔는데, 사람 한 명 허공으로 띄우는 게 어려우랴.
그렇게.
콰아앙!!
4호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내팽겨 쳐졌다.
"크윽?!"
크게 다친 것으로는 안 보인다.
역시 개조인간.
웬만하면 뇌진탕도 일어날 법한데, 이 정도론 턱없이 부족한 게 맞다.
하여 더욱 큰 일격을 날리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교, 교관님!"
"튀자."
달려드는 적들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힘든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싶었다.
"이놈! 도망치지 말란 말이다!"
"뭐래."
생각해 보니 적혈수리와 다른 점은 하나 더 있다.
그들은 적이었지만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정정당당하게 싸워도 값어치 있을 훌륭한 전사들임이 분명했으나….
"너희는 아니야."
휘익!
이한은 주머니 속에서 잠들어 있던 최후의 스크롤 두 장을 꺼내 휙 하고 던지며.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많이 뜨겁지 않을까 싶다."
투욱.
매개체를 망설임 없이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작열하는 폭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화염이 주변을 뒤덮었고, 수백의 죄수들이 화염에 삼켜졌다.
이를 목도하며….
"역시 화력이 최고지."
"...."
"안 그러냐?"
"…하하."
태생은 어디 안 간다고, 환생했을지언정 화력의 매력에 헤어 나올 수 없는 환웅의 후손은 강력한 화력이야말로 세상의 진리란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겼다.
#118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6)
화마의 불길이 덮치며 죄수들은 화상을 입은 이들이 넘쳐났고, 한차례 혼란으로 인해 저들끼리 엉키며 넘어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다른 이들 같으면 이러한 불길과 화상 등에 고통에 괴로워하며 아픔을 호소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보통 인간들이 아니었다.
"주, 죽여 버릴 테다!"
기본적으로 팬드래건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가 주입당한 인간들.
거기다 기본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이며, 웜들과 생존경쟁을 펼친 독종들이 다름 아닌 저들이다.
하니, 자기들을 뒤덮은 공격에 아파하는 대신 분노하며, 자신들을 다치게 한 원흉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게 저들의 본능이었다.
그렇게.
"저기 있다!!"
"쫓아라!!"
화염에서 빠져나온 죄수들은 팬드래건의 기사를 죽이기 위해 광견병 걸린 사냥개처럼 몰려갔다.
"…우리도 놈을 쫓는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일격을 먹었던 사내는 피가 폭포수처럼 흐르는 코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붉게 충혈한 눈에는 살의를 머금은 채로.
"4사도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그보다 얼른 뒤를 쫓는다. 난 잠시 회복만 하고 쫓겠다."
"...알겠습니다."
휘익!
바람 소리와 함께 흑의인들은 사라졌고, 4사도라 불린 사내는 숨을 고르며.
"검은 달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이지…."
검은 달에 대한 것을 파악하던 기사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절대 살려서 보내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는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기필코 죽이겠다."
[[Krrr….]]
설사 그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제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굴욕적이게 던져진 것이 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닌, 대의를 위해서 말이다…!
…주르륵.
피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
*
*
─백보신권의 권압(拳壓)이 그들에게 달려드는 일련의 무리를 덮쳤다.
퍼버버벙!
"아아악!"
"커헉!?"
"?!!"
자신들이 무엇에 맞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백보신권이란 기술 자체를 처음 겪어보는 이들로선 아마 유령이 그들을 때린 게 아닐까 하는 착란마저 일어났을 터.
허나 귀신의 소행으로 착각이 들 만도 한 것이.
"보, 보이지 않는 손길이다!"
"저, 저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팬드래건의 기사가 귀신을 다룬다!!"
삼십 보와 오십 보 거리를 자유롭게 장악하며, 권압을 정확히 상대에게 맞추는 행위는 그야말로 귀신의 손길과 같은 바.
그리고 뜻하지 않은 공포를 안겨주며 죄수들은 주춤거리는 기색이 역력했고, 그럴 때마다 이한은.
퍼억!!
주춤거리는 놈들의 얼굴을 걷어차거나 다리를 부러트리길 망설이지 않았다.
그로선 당황하거나 얼을 타는 인간이 많을수록 좋았다.
그만큼 돌파하기 쉬워진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쿠웅!
"겁먹지 말고 달려들어!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칼침 맞으면 기사건 기사 할아비건 다 죽어 이것들아! 찔러-!!"
"대형을 유지해! 흐트러지지 말라고, 이 머저리야!!"
모두가 얼을 타는 것은 아니었다.
실전에 익숙한 놈들이 많음을 증명하듯 백보신권이 선보인 생소한 기예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금세 덤벼드는 이들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지휘관 경험도 있는 것인지 서서히 그를 압박하려 들었고, 또 어떤 이는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물론 그런 이들 같은 경우.
뽀각!
"비켜."
콰득!
인정사정없는 손속으로 말 그대로 부숴버렸다.
일순 주먹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상대의 인중과 가슴 중앙까지.
인체의 급소를 가격하여 가볍게 무력한 후, 그의 손날이 작살처럼 상대의 옆구리를 찌르며 그대로-!
우두둑!!
잡아 뜯어버리듯 움켜쥐는 순간 갈비뼈가 으스러진다.
으스러진 뼈들은 그대로 장기를 파고들었고, 쓰러지는 죄수들이 속출했다.
설령 살아난다 해도 앞으로 평생 장애로 남을 부상을 안겨준 셈.
누군가는 잔혹한 손속이라 할 테지만, 이한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썩은내가 진동을 하네.'
이들에게서 나는 썩은내.
씻지 않아서 나는 악취를 맡은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이건 굳이 말하자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후각이 맡아낸 썩은내였다.
주문쟁이 중에서도 흔히 위법 마법사라 불리거나 그도 아니면 불법 노예상인과 같은 놈들에게서 날법한 썩은내.
결코 죄의식 따윈 없으며,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기보단 남을 해하는 것에 쾌락과 전율마저 느끼는 사회의 암 덩어리 같은 것들.
그런 놈들에게서 날법한 악취가 진동하였고, 이한은 이들에게 손속을 아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살아서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들에게까지 감정 소비할 시간 없다.'
이한의 눈은 조약돌처럼 감정이 희미하게 변해갔다.
이들을 사람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처리해야 할 해충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한은 돌파하면서도 착실하게 놈들을 때리고 부수길 망설이지 않았다.
제 앞을 막는다면 박살 내고, 대든다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러한 원칙으로 앞으로 나아가길 반복하자-!
콰드드득!!
"교, 교관님, 우리 이제 빠져나온 것 같은데요?"
"...."
"교관님…?"
"…정신 좀 잃은 기분인데."
"모, 몰입이네요. 그것도 무서울 정도의…."
"후우…."
...어느 순간, 그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데릭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정도로 방금 전 이한이 보인 고도의 몰입과 그로 인해 발생한 무력은 그야말로.
'터미네이터도 저것보단 덜 무섭겠다.'
그야말로 무기물을 제거하는 기계와 같은 움직임.
상대가 죄인임을 확인하자마자 손속에 자비가 없어지며, 그 움직임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위력적으로 변했는바.
압도적이다 못해 사신이 있다면 저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금강승] 특성이 폭주한 것 같은데….'
이한의 가진 7개, 아니 아마 지금은 8,9개임이 분명할 특성들.
그중 최고 레벨을 자랑하는 금강승은 추측하건대 '선(善) 계열'의 특성이다.
죄악을 저지른 인간에게 민감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악인이 상대라면 더욱 특성이 힘을 발휘할 터.
여기서 추가적으로 그가 가진 감각 계열 특성들의 시너지 효과마저 받는다면 금강승 특성은 더욱 강렬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특성의 연계 효과가 가진 장점이었다.
'만약, 주문 학살자 특성까지 연계되어 특성의 힘이 증폭됐다면…. 교관님은 동급 레벨 중에서 최고의 저력을 발휘할 거야.'
방금 확인했듯이….
부르르!
데릭은 같은 편이기에 다행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정도로 그가 죄수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강렬하다 못해 공포심마저 드는 것이었기에.
"한 번 더 교관님의 상태창을 보고 싶네요. 대체 얼마나 변했을지…."
"특성이라…. 참 나, 진짜 게임도 아니고."
"하하, 나중에 제가 능력치 적어서 보여드릴게요."
"보아하니 스킬 쿨타임 다 돌았나 보다?"
"하하…."
데릭은 딱히 숨기지 않았다.
그 말대로 이제 [스테이터스 간파] 스킬이 사용 가능했기에.
무엇보다.
'이제 무려 다섯 번 연속 사용 가능하다, 이거야.'
그동안 그 또한 나름 노력하고 경험치를 쌓은 덕분인지, 전체적으로 스킬들이 상향된 상태인지라 그 효력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반갑게도 스테이터스 간파를 다섯 번 연속 사용 가능한 것도 그렇고, 쿨타임도 이제 3개월이 아니라 보름으로 줄어든 것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렇기에.
"특성만 확인하면 교관님의 새로운 성장 트리가 보일 거예요. 특성은 곧 잠재력이기도 하니까요."
"스읍, 내가 게임 캐릭터가 된 기분인데…."
이한은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성정할 방향성을 잡아준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
게임 캐릭터 취급을 받건 말건, 그조차 모르던 잠재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기도 했으니까.
나중이 기대되는 이한이었다.
…물론.
"무사히 빠져나갔을 때 얘기겠지만."
"네에?"
"…무시무시한 놈이 오고 있는 것 같은데?"
"교관님…?"
"도망갈 준비부터 해. 만만치 않은 놈이 오고 있으니까."
"!?"
이한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의 감각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4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역시 그런 어설픈 놈만 있는 게 아니었나."
"...."
데릭은 그가 저토록 긴장감을 높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뭐, 뭐지? 누가 오는 건가?'
데릭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지] 스킬을 펼쳤다.
대체 뭐가 오고 있나 싶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삐이이이이익!!]
"!!!?"
데릭은 곧 경악하며 그대로 나자빠졌다.
엄청난 경고음이 그의 뇌리를 강타하며 머리가 뒤흔들리는 것이었다.
"끄으윽…!"
"도망갈 준비 하라고 했지, 이상한 짓 하라고 했냐?"
"교, 교관님! 어, 엄청난 놈이 오고 있어요. 최, 최대 Lv.8의…!!"
데릭은 경악했다.
그들과 대략 10km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그걸 감지해낸 이한의 감각에 한 번.
두 번째로 10km 거리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적에게 두 번.
끝으로….
'미친!? 낙하하고 있잖아!?'
적은 지금 땅굴의 바닥을 부수며 낙하하는 중이었고, 순식간에 그들과 거리를 좁히는 중이었다.
상대 또한 자신들이 존재를 눈치채고 여기로 오고 있다는 의미.
데릭은 경악했고, 빠르게 회피하려 했지만.
"-늦었어."
이한은 직감했다.
상대는 이미 그들이 피하건 말건 정확히 그들을 덮칠 것이라고.
그리고 저만한 놈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콰앙!!
'떨쳐낼 수 없다면 짓뭉개버리면 그만이다.'
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고, 전신의 힘을 주먹으로 집중시켰다.
경(勁).
신체의 근육과 뼈, 힘줄, 무게 등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수단.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경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그였기에 이한의 경은 생도들과 수준이, 아니 격이 달랐다.
우지지직!
이 세상 유일무이한 경의 달인은 온몸 구석구석에 퍼진 힘을 한곳에 모으는 것을 넘어 그 힘을 중첩시켰다.
우우우웅!
상대가 올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더욱 힘을 끌어 모을 여유가 생긴다.
이한은 핏대를 올리며 힘을 한계까지 모았고, 급기야.
쿠웅!
쿠우웅!
몸속 내부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힘을 터트릴 준비에 들어간 것이고, 딱히 기술이랄 것도 없는 그저 단순 무식한 힘의 연쇄적인 격발.
남들 같으면 진작 몸이 터져나갔을 수단을 해낸 것이었고, 이한은 고통을 참아내며 서서히 주먹을 뻗을 준비에 들어갔다.
발타르에게 한 대라도 먹이기 위해, 그가 가진 육체를 믿기에 사용하는 기술.
굳이 이름 붙이자면.
- 중첩경(重疊勁).
이한이 현재 펼쳐낼 수 있는 최대의 일격이었고, 그러한 일격이 완성되는 순간.
콰아아아앙!
천장이 무너지며 놈이 나타났다.
[으하하하하!!!]
미친 광소를 머금은 채 등장한 놈은 이한이 이미 적의 존재를 안 것처럼, 그 또한 이한의 존재를 알며 향해 공격태세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이한이 내뿜는 기세와 맞먹는 가공할 만한 위압감과 함께 적은 이한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드드득!
쿠구구궁!
두 사내의 기세와 기운이 부딪치는 순간 이미 주변 일대는 초토화되었고, 더는 도망갈 장소조차 없었다.
그렇게 두 사내는 격돌하기 직전 눈이 마주쳤고, 서로를 향해 적의를….
"어?"
"음?"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
'막시무스였나?'
━콰앙!!
활화산과 같은 폭발력을 머금은 주먹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같은 주먹이 부딪쳤고, 두 남자의 격돌은 기어이.
쿠구구구궁!!
─지진을 일으켰다.
#119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7)
쿠구구구구궁!
"지, 지진이다!"
"대, 대피! 대피해라!"
병사들은 땅굴에서 지속적으로 울리는 지진에 공포를 느끼며 허겁지겁 대피 명령을 내렸다.
이러다 땅굴이 무너지면 그들도 같이 죽을 판이기에.
그러나.
"죄수들도 같이 챙기라고 했을 텐데?"
"하, 하지만 왕자님…."
"왕자가 아니라 아렌 경이라 불러라! 지금은 공무수행중이다!"
"흐읍!"
"명령 불복종은 받지 않는다. 죄인들은 모두 데리고 가도록."
"예, 예엡…!"
아렌 팬드래건의 명령에 의해 병사들은 죄수들을 챙겨야 했다.
"비, 빛이다…!"
"앞에! 빨리 움직이지 못해! 너 때문에 다 죽으면 책임질 거야!!"
"죄, 죄송합니다!"
죄수들은 간만에 보는 햇빛과 구름에 반가워 할 새도 없이 도망차기 바빴으나, 살았다는 기쁨에 이러한 자연재해를 도리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원래 같으면 설사 땅굴이 무너진다고 해도 종신형이 확정된 그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원칙적으로 맞았으니까.
허나.
"다시금 말하지만, 이 '명단'에 적힌 이들만 데리고 가는 것이다. 엉뚱한 녀석이 섞여 있다면 그 즉시 처단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왕가의 핏줄'은 그 모든 원칙을 뒤엎을 힘이 있는 바.
지저분한 회색머리를 씻어내고 팬드래건을 상징하는 백은발을 흩날리는 아렌의 명령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병사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불만은 다소 적었는데, 그가 내린 명령이 합당하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역시 왕가의 핏줄인가, 억울하게 죽게 하는 이들이 없게 하려는 거군."
"확실히 지금 명단에 적힌 놈들은 다들 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고귀한 백사자라더니, 허명이 아니었어."
땅굴에 갇힌 이들 중 드물게 죄질이 미약한 자들.
귀족에게 밉보이거나 모함 혐의가 있는 이들만 구출 중이기에 불만이 없을 수밖에.
찬사 받아도 마땅할 고귀함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다만 찬사 받는 입장에선.
"빌어먹을…."
굴욕스럽기 그지없다.
남의 명성을 훔치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나도 명령을 듣는 처지란 말이다!'
길드를 협박하여 얻어냈다고 하는 명단과, 자신에게 죄수들을 구출하란 명령, 아니….
- 명단에 적힌 놈들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한 명당 백 대란 걸 기억해라.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협박이 있었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왜 왕족인 그가 법마저 어기며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싶으나 그런 불만을 내뱉었다간 후환이 두려운 아렌이었다.
그러나.
"가, 감사합니다, 기사님!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 1년만 버티면 어머니를 만나게 해준다고 했는데, 어머니 얼굴도 못 보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죄수들, 아니 선량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아렌의 가슴에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이게 뭐일까?
"가, 감사 인사 같은 거 하지 말고 얼른 탈출이나 하란 말이다!! 거기 너,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군, 얼른 업혀라."
"가, 갑옷을 더럽힐 수도...."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란 말이다!"
아렌은 어느 순간부터 괴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을 돕고자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래도 인성이 영 모난 사람은 아니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금만큼은 진짜 '백사자'란 이명이 어울리는 분입니다."
"확실히 백사자처럼 용맹하면서도 고귀해 보이긴 하네…."
서걱!
아렌처럼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섞여 탈출하려는 '흉악범'을 처단하는 역할을 맡은 제이크와 요르드는 거침없이 죄수들을 베어내는 중이었다.
몇몇 이들 중엔 투기법을 익힌 놈들도 있었는데, 혈십자군 소속임이 분명하리라.
아마 혈십자군을 배신하고 탈출하려던 놈들일 터.
"의리 따윈 없는 놈들이군."
"이교도, 아니 이딴 쓰레기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휘이익!
요르드가 자신을 덮쳐오는 죄수를 향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펼쳐지는 망설임 없는 횡 베기.
싹둑!
끝으로 깔끔하기 그지없는 마무리까지.
극한의 쾌검술이란 말이 아깝지 않았다.
왜 그가 이번 년도 백은사자 신입 중 수석인지를 알려주는 놀라운 실력.
그리고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선배 기사는.
후우우웅!!
퍼어억!
"그 녀석처럼 칼이나 화살조차 튕겨내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도 제법 단단하거든."
제이크는 적들의 공격을 온몸으로 견뎌내었고,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금강.
이한이 생도들에게 경을 가르치기 전 최초로 경을 배운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이크였다.
실험체 취급이긴 했지만, 원래도 뛰어난 기사였던 제이크의 학습 능력은 생도들보다 좋았다.
그래선지 이한만이 가능한 줄 알았던 금강마저 가능할 따름.
그렇기에.
"다음 생엔 태어나지 마라, 너희는 숨을 쉬는 것조차 아까우니."
이교도들 따위가 그를 건드릴 수 없단 뜻이었다.
숭겅!
깔끔한 거합도가 펼쳐지며 순식간에 그에게 덤벼든 이들 전원의 목이 숭겅 잘려나갔다.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어내는 것 같은 깔끔함.
중급 기사에 머무는 자라곤 생각할 수 없는 최상위 기사의 실력이 아닐 수 없는 바.
제이크는 가볍게 숨을 토해내며 땀을 식혔다.
"후우, 어느 정도 다 처리한 건가?"
"이교도들은 어느 정도 처리한 것 같습니다만, …저희가 없앤 녀석들은 일부분에 불과하겠죠."
"…그것도 그렇지."
제이크와 요르드가 베어낸 놈들의 숫자는 오십을 넘었지만, 그렇다 한들 아직 죄수들이 수백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죄수들은.
"저 안에 있겠지."
"…이한 선배님 말대로 다른 통로가 있다는 건가…?"
이런 지진과 폭발음에도 나올 생각이 없는 수백의 죄수들의 행동력.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겠지.
"후우, 대체 배신자가 얼마나 있는 거야?"
이제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죄수들을 감금하는 땅굴에 그들도 모르는 시설이 있고, 수상한 세력이 기생하여 그 세력을 부풀리고 있다.
그저 그런 테러 조직이나 이교도 집단이 아니다.
누군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막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지금은 현 상황을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하자. 다른 일에 신경 쓰면서 싸우다 칼침 맞으면 우리만 손해니까."
"...."
"왜 그렇게 봐?"
"…지금 발언 이한 선배님이랑 닮아서요."
"내, 내가?"
제이크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이 그 막장 기사랑 말투가 닮았다니…!
그럼 자신도 막장이란 말이 아닌가?
"나, 난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요, 똑같은데, 흐흐."
"이 녀석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뺀질거리는 후배를 보며 제이크는 혈압이 오를 것 같았다.
이 녀석, 원래는 성실한 모범생이었는데, 왜 이렇게 변했지?
'다, 그 녀석 때문이다.'
이한.
친구라 말하지만 악우(惡友)에 불과한 녀석.
그 녀석과 엮이고 나서부터 어째 멀쩡한 일이 없는 것 같다.
"하아…."
허나 제이크의 시선은 칠흑과 같은 땅굴을 향하고 있었다.
저 칠흑 속 어디선가 싸우고 있을 그를 걱정하며.
'괜찮은 거냐?'
마음 같아선 도와주러 가고 싶지만, 방해만 될 것을 알기에 참아야 했다.
홀로 싸울 때 더 활약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다만 마음이 안 좋은 건 맞다.
이토록 뒤처리나 하고 있는 건 본인의 부족함을 실감하게 했으니 말이다.
"쯧, 지금만큼은 내가 북부의 흑사자였다면 좋겠군."
"북부의 흑사자? 흑철사자의 부단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나 보지?"
"그가 쌓은 업적은 북부를 넘어 왕국 전체에서도 유명하니까요, 흑사자 막시무스 아이언 드 라이오넬, 그 유명한 '자이언트 슬레이어(Giant Slayer)' 아닙니까?"
거인 처단자 막시무스.
홀로 서리 거인을 무찌른 용맹한 기사.
남부 대륙을 대표하는 젊은 기사들 중에서도 그 위업과 명성 등이 차원이 다른 이였으니.
"…저도 얘기로만 들은 게 다입니다만, 그렇게 강한 사람입니까?"
"나도 딱 한 번밖에 본 적 없어. 그것도 우연히 본 게 다야. …하지만."
"?"
"-강해. 그것도 엄청나게."
"...."
잊을 수가 없다.
그가 한창 스승이었던 아버지에게 기사 훈련을 받던 시절, 북부 근처까지 간 일이 있었다.
도중 북부의 기사들을 마주쳤는데, 그중.
- 하하, 훌륭한 기사로군!
'그'가 있었다.
아직 10대에 불과했으나, 노련한 기사였던 아버지마저 뛰어넘던 존재감과 덩치, 그리고 강렬한 기세까지.
- 하하!! 하얀 고양이치고 제법 튼실하군. 어떻게, 내 일격을 받아보겠나? 생사는 장담할 수 없다만. 뭐, 죽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 기사의 싸움이란 그런 거니까, 으하하하하!!
지금껏 그토록 강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 광명의 빛께선 아주 가끔, 한 백년 단위로 어느 한 명에게 과도한 축복을 내려주실 때가 있다. 그야말로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재능이며, 천만 분의 1의 재능을 가진 자들인 셈이지.
- 그럼 저는요?
- 100명 중 한 명은 될 거다, 허허.
- ....
- 어쨌든 저런 자와 싸우진 말거라. 지금도 무서울 정도로 강하지만, 저런 자는 계속해서 성장할 거다, 끝도 없이….
제이크는 아버지의 말에 납득했다.
아니, 납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감과 기세가 아닐 수 없다.
하며 생각했었다.
앞으로도, 이후로도 저러한 사람을 그의 인생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하고.
…뭐.
'그 녀석을 만난 이후 생각이 달라졌지만.'
어찌 보면 천만 분의 1의 확률을 뚫고 태어난 괴물보다 더 특이했던 놈.
실력으론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을 녀석.
막시무스가 소위 하늘에서 내린 재능을 천재라고 한다면, 그놈은 역경과 시련을 통해 힘을 손에 넣은….
이른바.
'혼종(混種), 키메라 같은 놈이려나?'
이것저것 특이, 아니 괴상한 걸 잘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하…!
제이크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보고 혼종이라 하는 건 너무한 말이라며 피식거렸고, 미안함을 느꼈다.
'나중에 맥주나 한 잔 사주지, 뭐.'
...이 일이 다 무사히 끝나고 나서.
숭겅!!
제이크의 검은 다시금 인두겁을 쓴 짐승의 목을 수확했다.
*
*
*
그리고 평가받길 천만 분의 1의 재능을 타고난 괴물과 시련을 통해 괴상한 힘을 손에 넣은 어느 혼종은….
"그래서,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하하, 잠시 첩자 일을 하던 중이었다네. 한데 이상하게 나를 수상한 놈이라며 쫓길 일쑤더군, 왜 들킨 건지, 원…."
"…난 그 이유를 너무 잘 알 것 같은데…."
"음?"
이한과 막시무스.
두 기사는 서로의 목을 향해 칼과 도끼를 겨누는 중이었다.
언제라도 상대방의 목을 수확하기 위하여.
그들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저기, 저희 생매장 당하는 중인데요…."
쿠구구궁!
데릭은 떨어지는 흙먼지와 바위 등을 가리키며 그만 좀 싸우고 탈출 좀 하자며 절규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당신이 먼저 칼 내려."
"네가 도끼를 내리는 게 좋지 않을까?"
"...."
그들은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고, 데릭은 생각했다.
...어느 세상을 가나 남자들이 빨리 죽는 이유는 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임이 분명하다고.
#120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8)
알고는 있었다.
Lv.8의 영웅들이 가진 힘은 그야말로 초월적이란 걸.
허나….
'알고 있는 거랑 진짜로 보는 거랑은 다른 거구나….'
콰지지직…!
쿠구궁!!
바닥이 부숴지기 시작했고, 천장 또한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
아니, 이미 9할 넘게 무너져 언제 다 박살이 나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이것이 단순히 두 사람의 충돌로 인해 만들어진 현상이란 사실에 아찔함을 느낀다.
이게 정녕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힘이 맞단 말인가…?
"흐음,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본단 말이야. 역시 강하군, 그래도 설마 '벼락 떨구기'를 막아낼 줄이야."
"뭐야, 그 유치한 이름은?"
"괘, 괜찮은 이름이 아닌가?"
"그다지…?"
"으음…."
허나,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펼쳐낸 자연재해조차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며 두 기사는 여전히 서로에게 날붙이를 들이미는 중이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우리 이러고 있지 말지. 서로 목적은 비슷해 보이는데?"
"비슷한 거야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선빵 날린 놈을 좋게 봐야 할 이유도 없지."
"…음, 할 말이 없군."
이한의 말대로였다.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먼저 적의를 드러내고 적의를 내비친 것은 막시무스였다.
하니 이한 또한 공격 태세를 갖추고 전력으로 일격을 날린 것이었고, 만약 그가 대응하지 않았다면 제법 아픈 꼴을 봤으리라.
"그러나 변명할 게 있다. 라한이여, 네가 내뿜는 기세는 살벌하여 솔직히 마물로 오인한 것도 있다, 하니 이쯤에서 이해심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가?"
"조금 열 받을 일이 있어서 살벌해진 건 맞지, …그보다 내 이름 그거 아니야."
"그래, 리한이여."
"…돌겠네."
말이 안 통하는 상대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건 '악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선 정녕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눈처럼 새하얀 순진무구함이 돋보이는 호승심만이 잔잔하게 느껴질 뿐.
하지만.
찌릿!
'아파 죽겠네.'
그와 격돌한 팔은 물론이고 어깨까지 아릿하여 이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인간 고릴라, 아니 킹콩 같은 놈 같으니…!'
이한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 * *
막시무스.
그를 처음 본 것은 학술원 중간평가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였고, 라이오넬 대공과 함께 얼굴을 마주한 것이 다였다.
그리고 그때도 얼핏 느꼈지만, 막시무스란 기사는.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위협스럽기 그지없다.
그동안 자신 또한 성장통을 겪을 일이 많아서일까?
이한은 전날에 보지 못했던 막시무스의 강함이 엿보였다.
'엄청난 육체다.'
윤곽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거대한 육체.
명장이라 불리는 조각가가 깎아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
그 또한 나름 육체파 기사이기에 안다.
저러한 육체를 만들기 위해선 노력도 노력이지만, '타고나야 하는 것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거, 인생 불공평한 걸 알려주는 교보재 같은 인간일세?'
육체 흙수저 출신에게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아니꼽거나 열등감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감탄이 나오면 나왔고, 다음에는 저런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보자는 향상심 비슷한 것도 생기니까.
하지만….
'친해지고 싶은 부류는 아니야.'
전날에도 생각했지만, 진짜 멀리 하고 싶은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도 보아라.
"자네가 좀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약한 놈들만 상대하다가 훌륭한 강한 적을 발견하니 얼마나 반갑던지, 하여 우발적으로 덤비고 말았네. 다음엔 이런 실수가 없을 거야, 하하!"
사과를 하는 건지 시비를 거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다.
아마 저 양반에게 적이 많다면 그건 다 저 양반이 자초한 게 아닐까?
그 정도로 원한 사기 쉬운 부류.
이한은.
"…후우."
이러는 다툼이 무의미하다 싶었다.
대화하고 있으면 제 속병만 생기지.
"그만 둡시다."
"응?"
"안 그래도 급해 죽겠는데, 당신이랑 다퉈서 뭐합니까. 그냥 서로 갈 길 가는 게 낫지."
"으음, 매정하군."
도끼를 내려놓으니 오히려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으로 보아, 싸움이 고프긴 했나 보다.
'마교도 같은 놈….'
가까이 해선 안 될 인간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때.
"흠, 그래도 사죄는 해야 할 것 같군. 북부의 기사가 돼서 어찌 말만으로 넘어갈까, 으음…. 아, 그래!"
쿠우웅!
"-저들은 내가 상대하도록 하지."
막시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들이 그들 주변으로 솟구쳤다.
후욱!
무서운 살의를 드러내는 흑의인들은 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비수를 날렸다.
어디 숨기고 있던 건지 가늠이 안 갈 정도로 많은 비수들이 허공을 유영하며 위협스럽게 이한을 노렸고, 그러한 비수들은.
파아아앗!
"어디서 암살자 따위가 명예로운 기사를 노리느냐!"
막시무스가 거침없이 휘두른 검에서 강한 돌풍이 발생하며 모든 비수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떠한 기술을 쓴 게 아니라, 단순히 강하게 휘둘러서 비도들을 모두 쳐낸 것일지니…!
가공할 만한 거력.
콰앙!
그리고 막시무스는 바닥에 족적을 남기며 몸을 앞으로 쏘았고, 일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서걱!
"한 명."
"!!!?"
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을 때 흑의인들은 경악해야 했다.
동료 중 한 명의 허리와 다리가 분리되어 있었기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눈으로 쫓기에도 벅찬 휘두름과 몸놀림이었다.
허나 더욱 경이적인 것은.
"역시 검은 쓰기 불편하군."
절그덕.
막시무스가 땅굴에서 주운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벌써 그 내구도를 다 하며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그의 무지막지한 힘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에.
"흠, 그냥 맨손으로 싸우는 게 편하겠군."
"…자만하지 마라!"
그는 미련 없이 검을 버렸고, 이를 그들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인 흑의인들은 분노했으나.
"자만? 내가-?"
콰득!!
막시무스의 양 손이 박수를 하듯 흑의인의 머리를 때리자 흑의인의 머리는 찰흙마냥 구겨지며 절명했다.
사람의 두개골이 저토록 쉽게 구겨지는 것이었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흑의인들은 주춤거렸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인과도 같은 남자의 광포함과 단호함, 그리고 힘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으니까.
뒷걸음질 치는 것은 살고자 하는 본능과 같으리라.
하지만 막시무스의 눈은 형형했다.
저들 중 한 사람도 놓치지 않을 것이란 듯.
"자만은 네놈들이 하는 것이겠지. 상대의 실력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덤벼드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꼴사나운가."
후욱!
막시무스가 다시금 앞발을 내밀자 그대로 몸이 사라졌다.
거인처럼 큰 덩치를 가진 주제에 물 흐르듯 순식간에 몸을 이동시키는 속도는 마치 치타나 뱀을 보는 것 같았다.
치타의 순간 가속도와 온몸 근육을 마치 뱀의 근육마냥 자유롭게 다루는 탄력성까지.
과연 저게 인간에게 가능한 몸놀림인가 싶은, 그야말로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다음 순간.
콰직!
막시무스의 주먹이 작렬하며 또 한 명의 흑의인의 머리는 터져나갔고, 또 어떤 이는 몸이 찢겨나갔다.
단 한 사람에 의해 흑의인들은 몰살당하는 공포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두 번째는 없는 체험을 말이다.
"저게 사람 새끼냐?"
이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말 그대로 고릴라한테 무술과 기술 등을 가르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순간 가속도가 100은 그냥 넘는데?'
궁신탄영을 실시간으로 펼치는 수준이다.
허나 이한의 경우는 그걸 기술로 펼치는 거지, 저놈은 그냥 패시브로 궁신탄영이 달려 있는 것 같다.
"뭐, 저런 불합리한 놈이 다 있는지, 나 같은 범재는 어떻게 살라고…."
"...."
"…왜 그렇게 보냐?"
"아, 아니요, 그냥…."
…그도 그럴 게 그가 내뱉는 감상 모두가.
'아마 다른 사람들이 교관님한테 느낀 감상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데릭은 차마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 흑의인들처럼 반으로 찢겨지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 * *
털썩.
"흠, 감질나는군."
막시무스가 적들의 머리와 목을 분리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고, 무려 서른이 넘는 이들이 죽어 있었다.
누군가는 저들이 약했기에 그가 쉽게 이긴 게 아닐까 싶을 테지만, 스킬을 가진 어느 상태창의 평가하기로 저들의 수준은 하나같이 Lv.5.
엘리트 기사급이라 할 만하다.
한데 그런 이들을 순식간에 전멸시킨 것이니, 도리어 막시무스의 무력이 압도적이란 말만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적인 적들을 상대하고도 막시무스의 표정에는 큰 감흥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아쉬움만 남았을 뿐.
그 정도로 허무한 대결이었다.
"자고로 대결이란 피와 살점이 튀어야 하는 것이거늘…."
지극히 싸이코적인 발언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북부인의 마인드였다.
전투란 격렬해야 하며, 전투로 죽는다면 오히려 명예로운 바.
오히려 비겁한 방식으로 살거나, 대결을 두려워하는 것이 북부인에겐 더욱 굴욕적인 것이었다.
'흠, 모처럼 눈앞에 만족할 만한 강자가 있으나,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는 것은 경우가 아니겠지.'
막시무스는 힐끔거리며 팬드래건의 젊은 기사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분명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거늘, 지금은 한층 더 아우라가 거대해졌다.
전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장.
'그렇군, [투쟁의 시련]을 이겨낸 것인가-?'
북부의 전사들은 투쟁을 숭상하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욱 강력한 적과 싸워 이김으로 성장할 수 있다 믿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투쟁을 시련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시련을 이겨낸 자는 강해진다.
승리를 통해 '업(業)'을 쌓는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업을 쌓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아무리 용맹한 전사일지언정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결투에서 살아남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기에.
'대단한 자야.'
기어이 승리를 거머쥔 챔피언.
막시무스로선 가히 매력적인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싸우고 싶군, 진심으로…!'
그때는 그저 투쟁심을 자극하는 정도였으나, 이제는 다르다.
저자를 이긴다면 그는 한층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으리라.
성장에 대한 끝없는 상승 욕구.
마냥 재능만이 아닌, 이러한 끝도 없는 욕구가 그를 북부 최강의 전사란 이명으로 불리게 한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투쟁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칠 때.
[[Krrrrr!!!!]]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마더 웜.
120미터의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샌드 웜이 분노 어린 포효와 함께 질주하는 중이었다.
"…지렁이 주제에 덩치가 제법이군."
마더 웜의 질주를 보고도 막시무스는 그저 그러려니 싶었다.
저런 거대한 놈은 북부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도리어 더 시선을 잡는 것은.
"저기 저놈, 자네에게 열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혹시 아는 사이인가?"
"으음, 과거 직장 동료긴 하지."
"호오."
마더 웜의 머리에서 질주하는 어느 흑의인.
4호를 보며 막시무스는 눈을 빛냈다.
보기만 해도 알겠다. 방금 전 흑의인들보다 지위가 높은 자임을.
그렇다면.
"전 직장 동료란 자, 혹시 내가 데리고 가도 되겠는가?"
막시무스 말은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안 된다고 하면?"
"허허…!"
"...."
무언의 통보와 다름없었지.
대답 없는 웃음이었으나 이미 답변을 들은 것처럼 그는 나지막한 웃음을 내었고, 이한은 피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그들은.
콰아아앙!!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등을 맡길 수 없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적'이었기에.
마더 웜과 4호는 어쩌고 싸우냐고?
─그런 걸 계산할 정도로 현명하면 원래 기사 일은 못 해 먹는 법이었다.
#121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9)
신비(神祕)란 대륙 이곳저곳에 퍼진 '알 수 없는 힘'을 뜻한다.
누군가는 악마의 축복이라 말하고, 혹은 신이나 요정이 내려주는 축복이라고도 말하는….
허나 유명한 현자 멀린의 가설에 따르면.
- 신비란 자연의 축복이요, 자연의 순환과정에서 생성되는 무한한 에너지의 일부가 우리에게 스며드는 것일 뿐이다.
라는 게, 현재 학계가 가장 주력으로 미는 학설이었다.
실제로 신비를 품은 휴화산 불칸이나 춥지만 춥지 않은 북부의 만년설만 보아도 대자연이 이루어낸 신비가 아닌가?
하여 사람들은 대현자의 가설을 정설처럼 믿었다.
허나 이런 대현자가 다시 언급하길.
- 신비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잔혹할 정도로 대가를 요구하는 힘이지.
신비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힘이 아니다.
신비종족이라 불리는 이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바리안은 타고난 괴력과 전사로서의 재능을 가졌으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수인은 타고난 용맹함과 빠른 성장 능력을 가졌지만, 융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드워프가 타고난 손재주와 긴 수명을 가졌을지언정 모근이 십대 때 소실되는 것처럼.
신비를 타고났건, 아니면 신비를 얻었건 그 신비에는 모두 대가가 주어진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커허어억!"
마더 웜 같은 초대형 마물을 조작하는 신비의 경우엔 어마어마한 대가가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히 일개 인간 따위가 대가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주르르륵…!
4호,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하고 뿜어졌으며 피눈물을 쏟아냈다.
그 모습은 말 그대로 한 맺힌 귀신.
이미 삶을 포기한 혈인(血人)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는가.
'죽음을! 우리의 적들에게 죽음을…!'
4호, 그는 이미 이성을 유지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건 오로지 적에 대한 살심(殺心)뿐!
'장장 12년이다! 12년 동안 이 더러운 땅굴 안에서 버티고, 그 역겨운 사제의 비위를 맞추며 견뎌낸 시간이었는데…! 그걸 다 망쳐놔!'
무려 12년 동안 그는 이 빌어먹을 땅굴에서 살았다.
오로지 조직에게, 아니 검은 달에게 헌신하기 위하여.
'숙원(宿願)'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기사 따위가 감히 망쳐도 될 숙원이 아니란 말이다!'
4호는 이를 악물었다.
- 4사도. 넌 그 다혈질적인 성격을 고칠 필요가 있다. 그런 면만 고친다면 진작 2사도 노려봄직 할 텐데.
4호, 아니 4사도의 이름을 가진 그가 1사도에게 자주 들은 얘기였다.
실질적으로 검은 달을 이끄는 리더이자 [대사도(大使徒)]에 가장 근접한 인물.
그런 1사도의 충고는 같은 사도인 그조차 쉽게 흘려듣지 못하는 얘기였다.
- 노력하도록 하지.
- 노력만으로 안 될 거다. 넌 타고난 성정부터가 다혈질인데, 오우거의 힘줄을 이식한지라, 알게 모르게 마물의 영향도 받고 있지. 너의 그 성정을 바꾸는 건 아마 불가능할 거야.
- …지금 나 놀리는 거냐?
-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 직시를 하게 하는 거다. 동시에 이런 충고를 주도록 하지.
- 충고?
- 그래, 만약 너보다 마땅히 우위에 있는 실력자를 보게 된다면 무조건 도망가라. 넌 분명 실력자를 만나더라도 그 성정 때문에 불나방처럼 달려들 우려가 있으니.
- 아, 아무리 그래도 도망이라니!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이....
- 기억해라. 우리에겐 자존심을 굽히더라도 이루어야 할 숙원이 있다.
- !!
- 지금 혈십자군 내에서 검은 달의 지위는 한없이 낮다. 과거 우리가 어리석게 일을 그르쳤기 때문일 테지. 우리가 사도의 이름을 쓰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하니, 4사도, 아니 드락….
- ....
-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도가 필요하다. 그러니 위험한 적을 만나면 도망치고, 최대한 많은 부하들을 살려라. 우린 아직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 ...알았다고.
웬만해선 그들을 본명으로 부르지 않는 1사도의 발언에 드락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다고 말했다.
최대한 많은 인력을 살리고, 그 또한 살겠다고….
하지만 지금.
'1사도! 미안하게 됐다. 네 말 못 지키겠다!!'
드락은 1사도가 자신의 성정을 아주 정확히 꿰뚫어봤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는 다혈질이 맞다.
그것도 도저히 가슴 속 분기를 풀지 않는 한 진정할 수 없는 종류의…!
'죽인다! 어떻게든 죽이고 만다!'
한 놈 때문에 12년 동안 일군 터전이 망가지고, 기껏 훈련시켜놓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다.
몇몇은 이미 땅굴에 파묻혀 죽어가는 중이더라.
이를 확인하며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성인군자라 할 만하겠으나, 안타깝게도 드락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Keeeeee!!!]]
이런 괴물의 고삐마저 풀어버린 것일 터.
드락은 마더 웜의 머리 위로 바늘 하나를 박아놓은 상태였다.
대략 사람의 신장과 비슷한 길이의 거대한 바늘이었고, 이 바늘이야말로 조직이 마더 웜을 조종할 수 있는 비장의 수인 '마물 조종의 신비'였다.
사용자의 수명을 '대가'로 가져가는 신비.
동시에 신비가 사용된 마물은 '제물'을 먹을수록 더욱 커지고 강해졌고, 지금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원래 같으면 마더 웜을 지금보다 두 배는 더 키운 후, 땅굴을 무너트리고 더 나아가 왕국마저 침략하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마더 웜만이 아니라 병장기로 무장한 죄수들마저 돌진시켰다면 왕국에는 거대한 타격이 생겼을 터.
장장 12년을 넘게 투자한 계획 중 일부였으나, 단 한 명의 미꾸라지로 인하여 계획의 절반 정도가 이미 망가진 상황.
그렇기에….
'우리의 숙원을 망친 기사만큼은 반드시 죽인다!!'
설령 마물에게 수명을 모두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살의를 머금은 드락은 그렇게 마더 웜과 함께 죽음을 향한 질주를 내달리고 있었다.
이제 땅굴이 무너지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후우욱!!
...분명 그러했었다.
푸화아아아악!!!
[[!!!?]]
"??"
분노에 미쳤던 마물 레이서 드락은 이 순간 분노마저 잊고 멍해지고 말았다.
─마더 웜의 목 부분이 정확히 꿰뚫렸기에.
"그건 뭐라는 기술인가?"
"관일창."
"호오, 한번 받아보고 싶은 기술이군."
"지금 경험하게 해줄 의향도 있다만."
"하하,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증오스러운 기사가 발로 걷어찬 창이 정확히 마더 웜의 목을 꿰뚫었고, 마더 웜의 몸통은 머리를 잃으며 그대로 질주를 멈추었다.
일련의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드락이었으나, 그는 멍하니 있어선 안 되었다.
후욱!
"일단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겠지."
"!!!?"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거한의 남자.
그 남자는 어느새 드락의 어깨를 부여잡았고, 드락은 본능적으로 사내를 떼어놓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콰직!
"나쁘지 않은 실력이지만, 재능만 믿고 단련을 게을리 했군. 아쉬운 노릇이야."
사내, 막시무스의 손은 가볍게 칼날을 쳐내며 칼을 유리처럼 부쉈고, 더 나아가 드락의 어깨를 뭉개버렸다.
"끄아아악!!"
육체의 능력으론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자신했던 드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드락처럼 그럭저럭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힘이란 이렇게 쓰는 거다."
콰아아앙!!
산마저 뒤흔드는 힘을 가진 자였지.
-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막시무스의 힘은 말 그대로 산을 뒤엎을 거력을 머금고 있었고, 겨우 산에 기생하여 사는 바바리안과 오우거의 잡종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뿌드드득!
막시무스의 일격에 드락의 팔다리가 가루가 되었고, 그는 그대로 실신했다.
사도란 이름을 가진 자치고, 무척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자, 방해꾼은 사라졌군. 다시 싸움을 이어가도록 하지."
"…그놈 데리고 도망갔으면 내가 못 쫓아갔을 것 같은데?"
"하하, 그런 비겁한 짓을 하는 기사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널리지 않았을까?"
이한과 막시무스는 초대형 마물 한 마리와 실력자 한 명을 끝낸 것치곤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들의 귓가에서 거슬리게 앵앵 거리는 모기를 잡은 이들처럼 평온한 기색만이 역력했지.
이제 아무런 방해도 없이 싸울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리고 이런 둘을 바라보며….
"아니, 이제 싸울 이유가 없지 않아요?"
너무나 당연한 의문을 드러내는 데릭이 있었으나, 데릭은 차마 저들에게 제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였다.
...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무슨 험한 꼴을 보겠나 싶어서.
현명한 선택을 내리는 도적 클래스였다.
* * *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인가.
<'스테이터스 간파' 스킬 사용이 가능합니다.>
하늘의 계시마냥 스킬의 쿨타임이 끝나며 알람이 들려왔고, 데릭은 본능적으로 [스테이터스 간파]를 쓰고 말았다.
띵.
━
이름 : [막시무스 아이언 드 라이오넬]
종족 : [??]
특성 : [북부의 대전사(Lv.8), 역발산기개세(Lv.8), 천무지체(Lv.7), 전술가(Lv.6), 마물 사냥꾼(Lv.5), 흑왕의 후예(Lv.3).]
북부의 대전사 : 천 번의 생사결에서 승리한 자만이 얻는 특성. 투쟁을 통해 성장하며 강자를 만났을 시 신체능력에 추가 보정이 들어간다. 불명예한 전투를 하는 비겁한 악인이나 인정할 만한 전사를 만났을 시 [광전사]가 발동하며, 신체능력이 두 배 상승한다.
역발산기개세 : 홀로 산을 옮겼을 경우 주어지는 특성. 말 그대로 산 하나를 홀로 뒤엎을 경우 얻을 수 있는 특성이며 땅 위에서 지치지 않은 체력과 힘을 얻게 된다. 다만 힘을 과용할 시 육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다.
천무지체 : 천만 분의 1의 확률로 주어지는 극소수만이 갖고 태어나는 선천적 특성. 종족을 뛰어넘는 힘과 체력, 회복력 등이 주어지며, 현존하는 인류의 육체 중 가장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극강의 육체를 가지게 된다. 영구적인 신체강화 보장.
전술가 : 천 번의 전장에서 훌륭한 지휘를 해낸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특성. 야수의 심장과 현자의 판단력을 가질 수 있다. 전투 상황에 처하였을 시 추가 보정이 들어간다.
마물 사냥꾼 : 만 마리의 마물을 단독으로 사냥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성. 마물이 상대일 경우 우위를 점하며 근력과 회복력이 증폭한다.
흑왕의 후예 : 북부의 수호신이자 토지신 흑왕의 후예들이 가진 특성. 무병장수하지만, 타고난 호전성 때문에 핏줄과 사이가 나쁘다. 다만 특성을 가진 자의 레벨 수치가 극도로 낮을 경우 모든 핏줄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게 가능하다.
━
쩌억...!
데릭은 경악했다.
Lv.8의 영웅 클래스임은 이미 감지 스킬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 특성의 내용을 보자마자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종족명 표시가 다시금 물음표가 뜬 것도 뜬 것이지만, 그런 건 지금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뭐냐, 이 화려하다 못해 웅장하고도 사기적인 특성들은!?
'부, 북부의 대전사? 북부 최강의 챔피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잖아? 얻을 확률이 0.000003%에 불과한 그…!'
그냥 [대전사] 특성도 아니고 수식어로 [북부]가 들어간다는 건 일국을 대표하는 챔피언이란 뜻이다.
하여 사실상 목숨 내놓고 싸운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최상위 수준의 특성.
한데 그런 특성이 무려 레벨8….
허나 더욱 놀라운 것은 다름 아닌 '역발산기개세'와 '천무지체'였다.
'저런 듣도 보도 못한 특성이 다 있나….'
역발산기개세를 얻기 위한 조건도 조건이지만, 그걸 해낸 사람이 있는 것도 어지럽다.
한데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혜택이 미쳤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이미 천무지체를 통해 영구적인 전체능력치 보정을 받는데, 거기다 추가적으로 보정이라니…!
거기다 신체능력치와 연계되는 특성들이 하나가 아니다.
무려 여섯 개의 특성 중 다섯 개가 전부 신체능력치와 관련된 능력치였지…!!
…저 인간은 판타지에서 태어난 항우, 아니 헤라클레스란 말인가?
'처음 듣지만 알겠어, 저 특성들, 무조건 최상급 특성이다….'
'근력 보정이라고? 저건 뭐 트럭에다 제트기 엔진 다는 것도 아니고?'
'능력 증폭 수치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지만, 최상급 특성이 주는 능력 증폭 수치 평균은 45%야…. 그리고 북부의 대전사는 기본 50% 증폭이고, 나머지 흑왕의 후예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개 특성들이 각각 35% 증폭이라고 한다면….'
총합 210%의 보정.
저 인간은 원래도 사기인 육체에 진정으로 제트기 엔진을 단 인간이 맞았다.
...아찔하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다 나왔단 말인가?
그야말로 이레귤러 캐릭터.
만약 저게 보스로 나왔다면 잡지 말란 것과 다름없다.
분명히 말해 시스템 오류로 탄생한 버그 캐릭터일 테니까.
그렇게 아찔함을 느끼며 데릭은 이한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아무리 교관님이 강할지라도 저런 '버그 몬스터'와 싸운다면 무사하지 못할….
─콰아아아앙!!
"-----."
찌이잉, 하고 일순 주변 일대가 진공 상태로 변했다.
두 기사가 격돌하는 순간 거대한 동심원이 수십 미터 반경을 뒤덮으며 대기를 일그러트린 것이다.
데릭은 일순 그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쿨럭."
주륵.
일순 충격으로 코피마저 터진 데릭이었지만, 데릭은 피를 닦을 생각도 없이 그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고, 이한을 향해.
"…스테이터스."
스킬을 발동했고, 그는 보았다.
말 그대로-.
━
이름 : [이한 터틀]
종족 : [??]
특성 : [금강승(Lv.8), 강한 재생력(Lv.6), New-초감각(Lv.7), New-극독 내성(Lv.5), 종사의 자질(Lv.8), 주문 학살자(Lv.6), New-불굴(Lv.5).]
금강승 : 육체를 부수고 목숨을 담보로 한 역경에서 살아남은 수도승(修道僧)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 육체능력 상승, 여성을 돌같이 볼수록 색욕이 내구력으로 전환된다.
+'악(惡)' 성향을 가진 자들에 한해서 우위를 차지하며, 또한 적으로 규정한 자가 눈앞에 있을 경우 신체지구력이 '크게' 상승한다.
강한 재생력 : 육체의 제련(製鍊)을 성공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 피부와 뼈, 근육, 신경, 장기 등 육체 전신의 재생력이 증가하며, 고통이 수반된 육체 단련을 반복할수록 육체는 질겨진다.
+큰 충격을 받더라도 일정 부분 흘려낸다.
(New)초감각 : 맹수의 육감과 노련한 직감이 합쳐진 특성. 신비에 가까운 감각 능력이며, 기적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전투수행 시 움직임이 더욱 정교해지며 상대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꿰뚫어본다.
(New)극독 내성 : 기본의 독 내성이 귀왕의 독을 만나 진화한 특성. 독에 대한 특성은 물론이고, 독 또한 음식물처럼 흡수가 가능하며, 돌이나 철 따위 등도 소화가 가능하다.
종사의 자질 : 새로운 무학을 전파하고 탄생시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성. 독자적인 무학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부족한 기술의 재능을 보조해준다.
+기술의 정교함 강화, 전투 상황 시 능력치 증폭.
주문 학살자 : 마법사의 천적 퀘스트를 달성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성. 마력저항력을 비롯하여 마법사에게 심리적 공포를 안긴다.
+마법사 혐오 수치에 따라 특성 <광전사 >가 발동한다.
(New)불굴 : 자신보다 압도적인 강자를 상대로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는 전사에게 주어지는 특성. 신체 능력치 강화 및 증폭 효과가 있으며,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을지라도 투지가 꺾이지 않는 한 죽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해준다. 광전사와 연계 가능.
━
...저게 사람인가 싶은 능력치였다.
"...…."
데릭은 너무 놀라 기절할 것 같았다.
분명 귀왕의 비약을 비롯하여 Lv.8로 넘어가는 시련에서 그가 죽음을 동반한 위기를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추가적인 특성이 생기겠지 예상은 했지만, 이건 뭐…!
'미, 미친! 불굴이라고? [인내하는 자], [광인], [고통을 즐기는 자] 특성 모두가 생겼을 때 생기는…!?'
원래는 비약의 고통에서 살아남고 하나라도 생기면 다행인 특성인데….
비약을 섭취한 그날 세 개의 특성 전부가 생성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이것만으로도 경악스럽지만, 그밖에 [초감각]과 [극독 내성] 특성을 확인한 데릭은 까무러칠 뻔했다.
저것들 모두가 북부의 대전사와 비견되는 확률로 생성되는 특성이니까.
전율적인 특성들.
그리고 Lv.8의 특성들이 가진 능력을 확인하며 데릭은 자신의 걱정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깨달았다.
'와.... 귀왕이 사람으로 둔갑한 수준인데?'
데릭은 혹시나 싶은 깨달음을 얻었다.
저들의 종족명이 물음표 표시로 돼 있는 것은 저들을 더는 인간으로 규정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러니.
'…나, 죽는 거 아니겠지?'
괜히 고래 싸움에 끼어든 새우가 된 것 같은 데릭은 빠르게 도망갈 장소를 찾았다.
저 킹콩인지 고질라인지 모를 놈들 사이에 끼어 있다간 뼛조각조차 남기지 못하리라 싶어.
#122 EP-29 킹콩과 혼종은 격돌한다(10)/후기.
-시작은 가벼운 탐색전을 하듯이 날리는 잽이었다.
그저 가벼운 주먹질.
허나 그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는.
쾅!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게 과연 가벼운 잽이 맞는 걸까?
콰앙! 쾅! 콰아앙-!
포탄을 연상케 하는 위력.
한데 이런 위력적인 일격들이 부딪치고 서로의 가드를 때릴 때마다 연신 미친 듯한 파공성이 울린다.
퍼엉!
허나 포탄의 힘이 서린 일격들이 상대를 맞추더라도 그들에겐 조금의 데미지도 없어 보였다.
분명 둘 모두 맨몸이거늘….
서로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타이어와 같이 탄력적인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후욱-!
가벼운 탐색전은 이제 질린 것인가, 먼저 공세에 나선 건 막시무스였다.
쿠우웅!
단순히 동작과 움직임이 변한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권압이 뿜어진다.
누군가는 저 주먹에 스치는 것만으로 목숨을 내놔야 할 터.
상식적으로 피하거나 도망가야 하는 것이 이치겠지만.
콰드득.
안타깝게도 그는 조금도 피할 마음이 없었다.
이한. 그는 가공할 만한 권압을 그대로 받아내며 똑같이 일장을 뻗었고, 권압을 그대로 받아내며 진각을 밟았다.
땅이 움푹 파이며 몸 전체를 꼿꼿하게 고정한 그였고, 그는 그렇게.
콰아아앙!
노 가드 상태로 주먹을 받아냈다.
"?!"
막시무스는 놀랐다.
그의 일격을 피하거나 막지도 않은 이를 살면서 처음 본 까닭도 있을 테지만.
쿠웅!
"…아프군."
정통으로 맞는 동시에 막시무스의 옆구리를 정확히 강타한 그의 주먹.
무겁다.
거대한 해머가 그대로 옆구리를 가격한 것만 같다.
일반인이 맞았다면 그대로 내장 전체가 파열했으리라.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데?"
"하하, 진심으로 아프다네. 이거 부끄럽구먼. 자네는 내 일격을 버텨냈는데, 난 이렇게 엄살이나 피우고 있으니, 원."
"…버텨내긴."
이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금강으로 버텨내긴 했으나, 맞은 부위가 저릿저릿하다.
황소의 돌진을 가슴 정중앙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묵직하네.'
칼이든 창이든, 혹은 활조차 가뿐히 막아내는 금강으로조차 해소하지 못하는 충격량.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한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인간은 기술도 안 쓰고 버텨내네.'
자신은 방어기술을 펼쳐 견뎌낸 것에 반해, 막시무스는 그저 순수 몸뚱이 하나로 일격을 견뎌낸 것이다.
자신은 가벼운 잽 수준이 아니라 녹다운을 시킬 생각으로 날린 일격인데, 이 인간은 엄살을 부리듯 조금 아파할 뿐 여전히 굳건하다.
말 그대로 미친 몸뚱이가 아닐 수 없다.
인자강이란 건 이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전생에 누가 그랬던가? 세계 챔피언의 주먹도 곰 같은 맹수들에겐 마사지에 불과하다고.'
불현듯 생각나는 예시.
그리고 이한은 자신의 예시가 적절하다 싶었다.
사자나 곰에게 있어 인간의 주먹이나 발길질이 고양이나 강아지의 몸부림처럼 느껴지듯 이놈에게 통상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전력.
그가 내지를 수 있는 전심전력의 일격이 유일하게 저자를 녹다운 시킬 수 있으리라.
가벼운 잽 수준이 아니라.
'강한 한 방이 중요하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반응할까.
이한이 재차 일장을 뻗었다.
'재밌다! 미치도록 재밌어!!'
막시무스는 거대한 흥분과 전율을 느꼈다.
일격이 주는 무게감도 무게감이지만, 자신이 내지른 일귄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 내다니!
'일순 판금 갑옷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단단했던 것 같다.
때린 손이 더 아프다면 믿겠는가?
신기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
뭔지 모르겠으나 상대는 신묘한 기예를 익힌 것이 분명하다.
몸을 순식간에 판금갑옷처럼 단단하게 하는 기예를 말이다.
들은 소문에 의하면 검으로 꽃을 피워 낸다고도 했던가?
즉, 신묘한 기예는 이제부터 시작이란 뜻이었다.
'흐흐흐!'
막시무스는 기대가 되어 흥분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상대의 강함을 확인했고, 그 신묘함은 생소하면서도 신비롭다.
그야말로 난적!
허나 그렇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다.'
결투란 자고로 이런 것이다.
시련과 같은, 승리조차 불확실한 상대와의 격렬한 부딪침.
이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보여다오, 넌 뭘 더 숨기고 있는지!'
쿵.
막시무스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전력을 받아줄, 아니 어쩌면 패배를 선물해줄지도 모르는 그를 향하여.
그리고 역시나.
후욱!
펑!
"??"
그는 기대에 보답하듯, 아니 기대 이상을 보여주듯 더욱 신묘한 수단을 그에게 선사했다.
...막시무스의 머리가 돌아갔다.
상대의 주먹이 그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격산타우]라고 한다."
"!!"
"아마 정신없을 거다."
친절한 예고와 함께 상대는 방금 전과 똑같이 가벼운 원투 동작으로 주먹을 날렸고, 그 또한 똑같이 막아내면 그만일 테지만….
퍼어엉!
막시무스는 이번에도 막아내지 못하며 그대로 일격을 허용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일격.
귀신의 손길이 아닐까 싶은 어지러움과 당혹스러움!
감각을 어지럽히는 상대의 권격과 귀수(鬼手)가 그를 사정없이 농락한다.
막시무스는 귀신에게 홀린 감각을 느끼며 자신의 감각에 혼선이 생겼음을 인정했다.
'권압을 날리는 건가? 그것도 방향에 상관없이?'
전후좌우를 상관하지 않고 날아온다.
심지어는.
캉!
"…신기하군. 그런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아래와 위마저 날아온다.
그야말로 전방향에서 날아오는 물리법칙을 거뜬히 뛰어넘은 술수.
막시무스는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나중에 가르쳐주지."
"하하, 치사하긴."
퍼엉!
막시무스의 몸이 날아갔다.
* * *
격산타우.
어떻게 보면 백보신권의 원형이 되는 기술이다.
백보신권이 그저 일직선으로 힘을 뻗는 요령이라면 격산타우는 힘의 미세한 컨트롤이 지극히 중요한 바.
후욱, 하고 이한의 권경(拳勁)이 주변의 장애물에 반사되며 상대가 미처 반응하거나 보지 못하는 사각을 노린다.
원래 같으면 이런 기술을 펼치기 위해선 수학적 계산 능력이 필요하다.
권경의 각도와 방향을 실시간을 가늠해야 했기에.
자칫 잘못 휘두르면 나 자신이나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는 노릇.
하지만.
퍼억!
"백발백중이 따로 없군."
"당신은 좀 아파해라."
이한의 감각이.
초직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감각은 그 모든 계산을 감으로 해결해 준다.
신비 수준의 감각 기예.
거기다 기술의 정교함과 적절한 힘 배분을 통하여 이한은 그야말로 알고도 막지 못하는 일격을 날렸다.
후욱! 하고 뻗는 일권과 함께 뻗어나가는 격신타우의 한 수.
마치 공기가 압축된 탄환이 터지는 격이었고, 이러한 일격이 쉼 없이 상대를 두들긴다.
팔이 두 개가 아니라 여덟 개로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권경.
그리고 리치를 무시하는 격산타우의 한 수까지.
웬만한 대형 마물조차 진작 다져진 햄버거 패티처럼 되도 이상할 게 없다.
한데도.
콰득!
"오호, 그렇군. 이런 식으로 막으면 되는 건가?"
"...."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반응마저 한다.
격산타우를 꺼낸 지 겨우 3분도 채 되지 않았거늘, 벌써 반격마저 하려고 한다.
물론.
퍼어억!
"아, 착각이었군."
아직까지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지만.
허나 이한은 자신이 우위인 상황임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상대의 초인적인 반응 속도는 그렇지만….
'몸 한번 더럽게 튼튼하네, 이 인간!'
불합리할 정도로 단단한 몸을 겪고 있자니 헛웃음이 다 나왔기에.
뭐 이따위로 단단하단 말인가?
'때리는 내 손이 다 아픈 게 말이냐-?'
자신 또한 몸이 탄탄하다 자부하지만, 이 녀석은 격이 다르다.
자신의 경우 끝없는 단련도 단련이지만, 성격 나쁜 오러 유저에게 두들겨 맞으며 맷집을 늘리고, 더는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 금강이란 산물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자는 그저 선천적으로 몸이 강했다.
살갗과 근육, 뼈.
그밖에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질기기 그지없다.
이한의 몸이 마치 쇠사슬을 한데 뭉쳐 만든 듯한 비상식적인 형태의 근육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다면, 막시무스의 몸은 금강석이다.
태어날 적부터 다이아 원석이었던 놈이 세공을 통해 더욱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일 테지.
그렇기에 쉽지 않다.
그저 자잘한 공격 정도로는 절대 그냥 뚫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큰 거면 되겠지!!'
콰앙, 하고 이한의 몸속 내부에서 작은 폭발이 발생했다.
경을 중첩하여 힘을 실시간으로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 중첩경.
원래는 실시간으로 전투 중인 상황에서 써선 안 될 기술이다.
이 기술에 들어가는 막대한 집중력 때문에 자칫 그가 당할 우려가 있으니까.
허나 이한은 썼다.
그가 무식한 승부사라 그런 게 아니라….
'저 인간은 안 피한다.'
우습게도 이 순간 이한은 상대를 믿었다.
저 무지막지한 인간은 절대 자신의 기술을 방해하지 않으리란 확신.
왜일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을 자신은 왜 신뢰할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북부인들은 안다.
한 번이라도 그와 결투를 벌인 경쟁자들은 이한의 심정에 공감하며 이렇게 말할 테지.
- 그게 막시무스니까.
라고.
고오오!
"하하! 기세가 사뭇 위협적이군!"
아니나 다를까.
심상치 않은 기세 속에서도 막시무스는 호탕하였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며.
생경한 기술에 대한 흥분감이 가슴을 자극하여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런 그를 보며.
'…특이한 인간이네 진짜.'
이한은 중첩경을 담은 백보신권을 날렸다.
화아아악!
백보신권과 중첩경의 조화.
이는 단순히 더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원래도 직선적으로 주먹을 뻗는 백보신권의 권경은 위력적인데, 여기서 추가적으로 중첩경이란 폭탄을 같이 날리는 거다.
무게와 강한 폭발력 등이 겹쳐진 순간 이를 제대로 맞았다간 아무리 몸이 튼튼할지언정 막아낼 수 없다.
상대가 결국 피륙으로 이루어진 영장류인 이상.
이한은 드디어 저 당당한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기대했다.
한데.
"…아,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갔어. 이렇게 하는 거군."
후우욱!
일순 이한은 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했다.
...저 새끼가?
거울에 비치는 듯한, 아니…. 자신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막시무스는 경악스럽게도─.
화아악!!
[백보신권]을 펼쳤다.
콰르릉.
그와 비슷한….
아니, 더욱 사나운 벼락과 같은 기운을 담아서.
'시부럴, 저 새끼 역시 바보인 척 사람 기만하는 놈이었어….'
격돌하는 두 기운을 보며 내뱉은 이한의 감상이었다.
* * *
구구구궁-!
콰지지직….
땅굴이, 백년의 역사를 가진 지저세계가 무너진다.
스크롤의 폭발.
마더 웜의 몸부림.
이런 대사건이 하루에 연달아 일어난 것만 해도 문제인데, 더 나아가 Lv.8의….
어느 소년이 이르길 시대를 대표하는 괴력난신의 영웅들이 충돌한 것이다.
이것만으로 거대한 충격을 입은 지저세계가 무너지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부딪칠 때마다 포탄이 터지는데 도리어 버틴다면 땅굴이 대단한 것일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땅굴은 연약했다.
아마….
"교관님, 못해도 30분 안에 무너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저 먼저 도망갈게요."
"…오냐. 험한 꼴 보느라 고생 많았다."
"...예의상 아니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차마 그럴 수가 없네요."
태창이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두 괴력난신이 싸우는 한복판에 있었으니, 꼴이 멀쩡하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리라.
다른 이들이 이런 험한 경험을 했다면 대번 욕을 내뱉고 단칼에 연을 끊었을 테지만, 태창이는 요즘 애들답지 않게 착하고 성실한 대인배였다.
파스슥….
태창이는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벽면에 처박힌 그를 향해 물었다.
"교관님, 그냥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같이 안 나가실래요? 아무리 봐도 지금 헛짓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 애들답게 말투가 따갑긴 하네.
허나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도 안다."
이게 지금 다 헛짓거리인 거.
사실 두 기사는 더는 싸울 이유가 없다.
그들의 목적은 이유가 뭐건 간에 땅굴에 있는 불온한 무리….
즉, 광신도 무리를 잡아내고 그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거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 마지막이 허무하긴 했지만, 광신도 조직의 존재를 증명하는 놈들을 찾아냈고, 더 나아가 땅굴에서 키워지던 초대형 마더 웜도 죽이는 데 성공했다.
…덤이지만 전 직장 동료 겸 광신도 조직 고위 간부로 보이는 이를 사로잡기도 했고.
이제 서로의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을 가지거나, 그도 아니면 각자의 윗선에게 말하여 이 상황을 종료하는 게 이로운 과정이었다.
쿠르르릉!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저 공간에선 더더욱.
땅굴에 파묻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는 게 합리적이며 현명한 일이다.
그리고 두 기사는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이거나 어리석은 이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영민하였지.
다만.
"나 말이야, '옛날에' 버킷 리스트가 하나 있었거든."
"버킷 리스트?"
뜬금없는 커밍아웃에 그는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으나, 그는 이어지는 이한의 바보 같은 얘기를 들어주었다.
"다른 건 아니고, '친구랑 주먹다짐하고 바보처럼 웃기'였을 거야, 아마."
"…?"
"내가 학창시절에 친구가 없었거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걔들도 친구는 아니었어. 그냥 안면이 있는 사이에 불과했지."
"...."
"그런 게 부러웠어. 사소한 일로 다퉈보고, 같이 바보짓도 해보고, 그러다 그냥 시원하게 주먹다짐도 해보고 싶었지. 물론 싸우다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래도 해보고 싶었어. 약간 우리 시절 낭만 같은 거였거든. 싸우고 친구가 되는 거."
"…야인시대 재밌죠."
"그래, 그거. …근데 너 몇 살인데 그걸 아냐?"
콰직!
이한은 어쩌면 이 녀석이 사실은 상당히 연배가 있는 놈이 아닐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 다시금 벽면이 무너졌으며, 몸을 일으키자 볼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좀 세게 맞은 모양.
"아프네…."
"…버킷 리스트 이루셨네요."
"아니지, 저 양반이 내 친구는 아니잖아? 그래도…."
콰득!
"하하! 멀리까지도 날아갔군. 이거야, 원. 내가 허릿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꼴사납게 됐군, 크하하!"
이한은 저 멀리서 자신처럼 벽면을 부수고 나오는 막시무스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보같이 시원시원한 인간은 맞지. 버킷 리스트 중 반은 이루지 않을까 싶다."
"...."
"등신 같지? 알아 나도."
이한은 몸을 풀었다.
욱신거리는 몸도 서서히 낫고 있다.
이 정도 타박상은 저놈이나 자신이나 상처 축에도 끼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이한에게….
"그 버킷 리스트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서로 감정 안 상한다는 기준 하에."
"...."
스릉.
"그래도 가능하면 이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 그게 더 폼 날 것 같네요."
"…하."
녀석은 그에게 칼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언제 챙겨둔 걸까.
그러나 물을 새도 없이 녀석은 4호를 짊어진 채 빠져나갔다.
"…그래, 그래야지."
이한은 멀어지는 녀석에게 뒤늦게 답변하며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래, 기왕 바보짓을 해도.
'이기는 바보가 멋지지.'
이한은 웃었다.
막시무스보다 더욱 시원스레.
#123 EP-30 그들에게 필요한 건 명예가 아니었다.
스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