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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스아아아.

탑이 황금빛으로 변화한 순간, 왕좌에 앉아있던 문의 여왕 메두사가 반응했다.

잠들어있던 그녀의 뱀들이 혀를 내밀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메, 메두사님께서······!"

"이게 몇년만에 움직이신 건지!"

메두사와 비슷한 형상을 했지만 그 크기가 훨씬 작은 서펀트들.

메두사의 피에 의해 태어난 서펀트들은 그녀의 움직임에 환호를 내질렀다.

'그 사건' 이후 입은 상처를 치료하고자, 메두사는 몇 년동안 본체의 움직임을 멈춘 채 오로지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

촤악. 촤아악.

서펀트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상급 여신의 눈물이 담긴 온천수를 메두사의 몸에 쉬지않고 적시는 중이다.

그녀와 같은 지고한 격을 지닌 괴물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었으니.

하지만 메두사의 반응은 지극히 짧았다.

'신화 신비의 관을 누군가가 열었나보군.'

신화 신비의 관은 이 도시가 '크람델'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 두 번 열린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백왕.

나머지 한 번은 찬란한 황금빛의 고룡에 의해.

백왕은 신화 신비의 관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황금빛의 고룡은 실패한 뒤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로 열린 적이 없거늘.'

신비의 관은 마수들에게 신비를 부여하기 위한 장소다.

하지만 신비의 관은 철저하게 종족을 구분한다.

그 모든 종을 초월했던 고룡이나, 백왕 정도가 아니면 신화급의 관은 열리지 않는다.

그럼 그 둘과 비슷한 누군가가 관에 도전했다는 걸까?

'어차피 성공할 수 없으리라.'

찬란했던 황금의 고룡도 죽음을 맞이했다.

백왕 역시 진절머리를 쳤다.

신화 신비의 관은, 그 종족과 도전자의 격에 따라 불가능한 시련을 연속해서 내는 탓이다.

북부의 수호신인 백왕은 신화 신비의 관에 도전해 막강한 힘과 그에 걸맞은 신비를 얻었으나, 결국 끝에 다다르진 못했다.

-이 신화의 시련은 끝을 보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백왕이 직접 평했으니 이견은 없으리라.

그래서 확신하는 것이다.

어차피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하지만 만약을 위해 신비의 탑 상공에 눈을 하나 띄워두었다.

탑의 변화는 지켜봐야 했으니까.

*

까악!

까아악!

상공을 날아다니는 시체 까마귀 두 마리.

그 시체 까마귀들과 시야를 공유한 채 나는 절벽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엄청나군.'

신화 신비의 관에 도달한 즉시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그건 끝없이 펼쳐진 해골병사의 행렬.

족히 1만 대군은 될 것 같은 숫자였기에.

'이걸 혼자서 다 죽이라고?'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Lv.4]

모든 해골병사의 레벨이 4라는 것.

<'해골병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착용한 장비를 제외한 모든 도구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모든 가호와 수호의 작용이 벗겨집니다.>

일반 몬스터지만 그 숫자가 무려 1만이다.

같은 레벨이라면 많이 잡아야 수십 마리가 한계일 터.

'내가 일반적인 4레벨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내 레벨은 4지만, 4의 기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맥스치까지 모든 능력치가 찍히는데다, 그 능력치도 1.2배에 달했으니.

모든 능력치가 48이면 어지간한 6~7레벨 수준이다.

뿐만인가.

별을 보유해서 모든 능력치가 5가 더 올랐다.

평균적인 7레벨의 강자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레벨이 높았으면 망할 뻔했다.'

내 레벨이 만약 10이었다면?

10레벨의 해골병사는 평범한 해골병사가 아니다.

스킬을 쓰고 뼈에 마력을 입혀서 그 자체로 검기(劍氣)처럼 변했을 것이다.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1만의 검사와 마주하는 셈.

차라리 레벨이 낮아서 다행이었다.

필요 경험치가 너무 많아서 욕이 나왔었는데, 이런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할까?

달그락! 달그락!

해골병사들이 절벽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저 물량에 압사할 것이다.

"일어나라, 까악!"

외침과 함께, 대상을 고르고 스킬을 발동하자 상공을 배회하던 시체 까마귀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한 해골병사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달그락!

시체 까마귀는 4레벨의 보스 몬스터.

평범한 4레벨의 해골병사 쯤이야 간단하게 장악할 수 있다.

"합체해라, 까악!"

그리고 시체 까마귀의 왕은, 시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다.

시체의 예술가라는 표현이 맞으리라.

해골병사를 장악한 시체 까마귀가 주변의 해골들을 연이어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후 내 성력을 보태자 장악한 해골병사들이 합쳐지며 거체의 골렘처럼 변했다.

두 마리의 시체 까마귀가 해골병사들을 연결하고 내가 조종한다.

'시체 조종술, 시체의 예술.'

모두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된 이후 사용 가능해진 스킬들.

이 시련을 깨는데 이보다 더 좋은 스킬은 없으리라.

"다 부숴버려라, 까악!"

콰아아앙!

*

대체 몇시간을 싸운걸까.

<'시체 조종술'의 스킬 레벨이 1 올랐습니다.>

<'시체의 예술'의 스킬 레벨이 1 올랐습니다.>

<'시체 까마귀 소환술'의 스킬 레벨이 1 올랐습니다. 시체 까마귀 한 마리를 추가로 더 소환할 수 있습니다.>

<'시체 조종술'의 스킬 레벨이1 올랐습니다.>

<'시체의 예술'의 스킬 레벨이 1 올랐습니다.>

<'시체 까마귀 소환술'의 스킬 레벨이 1 올랐습니다. 시체 까마귀 한 마리를 추가로 더 소환할 수 있습니다.>

···.

······.

끊임없이 숙련도가 오른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지닌 히든 특성 '손재주'는 모든 스킬과 장비의 숙련도를 +1 해주지만, 그와 별개로 스킬 경험치를 말도 안 되게 빠르게 올려준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끝이 없이 몰려오는 해골 병사가 지긋지긋해질 때 쯤.

까악!

까악!

까아악!

어느덧 내 주변을 날아다니는 시체 까마귀는 일곱 마리가 됐다.

스킬 레벨 7. 이대로 10레벨을 찍고 열 마리를 소환하면 스킬의 초월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스킬의 레벨 상승으로 인한 기쁨은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까아아아아악!"

부서진 해골의 산 꼭대기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이겼다!'

마침내, 일만마리의 벽을 뚫어냈다.

이 징글징글한 놈들!

지금 내 상태가 시체 까마귀의 왕이 아니었다면 절반도 채 없애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시체 까마귀의 울음소리마저도 정겨울 지경이었다.

"'종의 벽'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으로 신화급 신비 '오버로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획득하지 않을 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설마 이게 끝이 아닌 건가?

난생 처음 보는 신비의 이름.

이걸 얻으면 나갈 수 있다는 말!

'신화급 신비면 뭐가 됐든 충분하다.'

괴물들이 사용하는 신화급의 신비면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게 뭐가 됐든 엄청난 효과를 지녔을 것은 자명한 일.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없었다.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다.

이제는 해골만 보면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시련의 끝이 아니란다.

허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련을 계속 도전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야말로 죽음을 자처하는 짓이었다.

"'오버로드'의 획득을 거부했습니다."

누군가가 보았으면 죽고싶어 환장했냐고 소리칠 일.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깬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 신화 신비의 관을 오를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다.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테니까.

도전하다가 레벨이 오르면 어떡하냐고?

'어차피 내 레벨은 고정이다.'

해골병사 만 마리를 잡아도 레벨업이 안 됐다.

같은 레벨의 괴물을 수십만 마리, 수백만 마리 잡아봤자 내 레벨은 안 오른다.

말하자면 이곳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끝을 볼 수 있는 장소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도전자가 더 높은 단계의 시련에 도전합니다."

"업적 '더 높은 신화에 도전하는 무모한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초월

"다음 메인 퀘스트도 란돌프가 1위를 할까요?"

강남의 건물 꼭대기.

정식으로 발족한 영웅연합의 본거지에서 누군가가 문득 물꼬를 텄다.

하지만 이 물음은 모든 플레이어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팬텀으로 추정되는 란돌프가 메인 퀘스트 5마저도 1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게이머 시절 전성기이자 전설이었던 팬텀.

그가 가진 지식은 모든 플레이어를 합친 것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비'에 관해 지식이 있는 자들이라면 결과에 회의적이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희박하지."

"애초에 신비라는 게 뽀대용이니까."

겉으로 보여주는 용도.

신비라는 것 자체가 멋을 부리는 외에 큰 효용은 없다는 게 정설이다.

"뭐······ '지배자' 급의 신비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확실히. 대도시의 지배자들이 가진 신비는 최상급에 보유 효과도 있지."

"이제 메인 퀘스트 4를 완료한 란돌프가 도시의 지배자가 된다? 초월자도 하기 힘든 게 도시를 먹는 건데?"

"마스터처럼 세력으로 밀어붙여서 초창기에 도시를 먹어둔 경우라면 가능은 해. 그런데 팬텀은 세력은 없지 않나?"

란돌프가 1위를 하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이유.

최상급의 신비를 얻으려면 그만한 강자이거나, 세력을 가지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세력으로 밀어붙여 도시를 먹고 지배자가 되면 '도시의 지배자' 신비를 얻을 수 있다.

신비 '도시의 지배자'는 손에 꼽히는 성능을 가진 신비였다.

하지만 팬텀은 세력이 없다.

솔로 플레이어.

독고다이로만 움직여왔으니, 이 방법으로 신비를 얻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란돌프가 과연 초월자에 버금가는 강자냐?

'그만한 강자는 아니지.'

하면, 당연히 아니다.

팬텀이 플레이어로 소환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메인 퀘스트 4까지는 지식과 요령으로 1위를 먹었다고 할지언정, 최상급의 신비를 얻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만에 하나 도시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음. 마스터의 기록을 깨긴 어렵겠지."

마스터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다.

3년 전부터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은 '타차원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마스터와 함께하는 플레이어는 50명이 조금 넘지만, 비공식적인 그들의 숫자는 백 명이 넘어갈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라시아는 표면적으로라도 '대의'를 말하며 어느 정도 실천하려 하지만, 마스터는 자신의 것, 자신의 편이 아닌 존재는 쥐도새도모르게 없애버리기로도 유명했다.

척살단도 운영하며 이권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탓이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구설수가 많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마스터는 '룬델라'의 주인이니······."

"그러고 보니 왜 룬델라의 주인은 다른 도시의 주인들이랑 신비가 다른거죠?"

"룬델라는 유적도시니까. 일반 도시랑은 궤가 달라."

마스터가 룬델라의 주인이 되면서 얻은 신비는, 다른 도시의 주인들과 궤가 다르다.

그래서 마스터는 압도적으로 메인 퀘스트 5의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 기록은 지금도 화자될만큼 압도적이었다.

"2등이랑 50점 차이가 나니까, 말은 다했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전설적인 팬텀이라도 이번 퀘스트의 1위를 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음. 차라리 이번 퀘스트는 빠르게 넘기는 게 나을지도."

"그래도 명색이 팬텀인데 순위권에는 들려고 하겠죠."

그때였다.

"뭐야, 이거. 황금률 상점 왜 안열려?"

연합원 한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황금률 상점이 안 열린다니.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어? 나도 안열리는데?"

"아니, 이게 왜 안 열려?"

"잠깐. 비밀경매장도 안 열리는데요?"

"다른 건?"

"다른 것도······ 다 안 열리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황금률 상점뿐만이 아니었다.

이권으로 얻은 모든 상점이 안 열렸다.

강제로 문을 닫은 것처럼.

한 명이 그런다면 우연이겠지만, 이곳에 모인 열 명이 넘는 연합원 모두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다른 지역 플레이어들한테 연락해봐."

"지금 하고 있는데 다들 먹통이라는데요?"

"해외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또, 똑같습니다."

"이상하군. 가끔 한 번씩 그럴 때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상점이 안 열리는 건······."

동시에 모든 이들이 이맛살을 구겼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들이 모르는 상황이.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당신에게 몰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관음당하고 있다.

그것도 백성전의 성좌들에게.

그야 퀘스트의 보상 등급을 올려주는 존재이니 관심을 끌어서 나쁠 건 없다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개고생하고 있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백성좌 전부가 말이다.

"빌어먹을, 까악! 허무 타입, 까악!"

나는 지금 쫓기고 있었다.

일만에 달하는 해골병사에게.

첫 번째 시련과 다를 바 없어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그건 모든 해골병사가 '허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상극의 속성을 갖게 해주는 바로 그 히든 특성 말이다.

쉬이이이이!

촤르르르르륵!

하늘에서 빗발치는 빛의 화살을 본 적이 있는가?

수만발의 화살이 오직 나 하나를 죽이려고 비처럼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해골병사 주제에, 빛속성의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해골병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해골병사'가 '허무'로 인한 상극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 추가된 정보.

일만의 해골병사가 허무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얼핏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별 거'였다.

허무는 상극의 속성을 갖게 해준다. 말하자면, 약점을 없애준다는 뜻이다.

그와 별개로 시체 까마귀는 저주속성이었다. 나 역시 허무의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내 스킬까지 그 특징을 갖지는 않았다.

소환한 시체까마귀들이 빛의 화살에 의해 순식간에 도륙당한 것이다.

'잠깐. 내가 왜 도망치는거지?'

그런데 문득 뛰면서도 의아함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거인의 항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정통으로 맞아봤자 스킬의 데미지는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수만발의 화살이라도 고작해야 하급 '빛의 화살' 스킬.

레벨 4짜리 해골병사가 쏘아내는 별 마력도 실리지 않은 공격이지 않나.

'······ 거인의 항마력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걸 막아주는 거지, 마력으로 생겨난 물리현상까지 막아주진 않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수만발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다간 몸이 분쇄될 것이다.

빛의 화살 때문이 아니라 물리력에 의해 그렇게 될 것이었다.

스킬을 쓴다는 건 마력에 물리력을 더한다는 것.

거인의 항마력은 마력에 의한 타격은 지워주지만 수만발의 빛의 화살이 허공을 쇄도하며 일으킨 물리현상까지 지워주진 않는다.

고로, 가만히 맞고 있으면 내 육체는 갈기갈기 찢긴다.

그럼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할까?

'해골병사들은 단순하다. 나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쏟아내고 있다.'

해골병사는 지능이 있어도 높지 않다.

나를 죽이려고 빛의 화살을 미친 듯이 쏟아내고 있었다.

실제로 몇 발은 맞았으나 그 정도로는 타격이 크지 않다.

그렇다면.

'모든 마력을 소진시키면 그만.'

아무리 허무 속성을 지녔대도 마력이 무한하진 않으리라.

'고작 레벨 4짜리니까.'

고작 레벨 4짜리의 해골병사가 마력이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는가!

레벨에 따른 마력 포인트를 최대 40으로 가정해도 빛의 화살 20발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빛의 화살 20만발이라.'

반대로 20만발의 빛의 화살을 소모시킬 수만 있다면, 저놈들 모두가 일반 해골병사와 다를 게 없어진다는 뜻이다.

다만, 이렇게 도망만 치는 식으로는 절대로 20만발을 소진시킬 수 없다.

그 전에 내가 죽을 테니까.

'모든 해골병사가 나를 인식하고 있다. 10.45m 이내일 땐 스킬을 쏘지 않지만, 그 바깥으로 거리가 벌어지면 빛의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어그로는 이미 끌렸다.

나는 도망치면서 녀석들의 정확한 인식범위를 계산하고 있었다.

10m 45cm.

정확히 그 이상의 거리를 벌리면 해골병사들은 빛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반면 50m 이상으로 벌어지면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살의 사정거리가 딱 그 밑이기 때문이다.

1만 마리의 해골들이 동시에 빛의 화살을 쏟아붙게 만들려면 10.45m의 간격을 유지 하며 50m 안쪽으로 모두 끌어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지형이 존재할리 없었다.

'놈들은 단순하다.'

게임과 다를바 없을만큼 단순하다.

그걸 이용해야만 했다.

'놈들의 중심부.'

가장 확실하게 조건을 만족하는 건, 저 군단의 중심부.

수만발의 화살이 빗발치는 저 죽음의 장소로 뛰어들면 모든 화살을 소진시킬 수 있으리라.

어지간한 강심장도 하지 못할 짓이다.

하지만 괜찮다.

걸어서 갈 생각은 없으니까.

"나를 띄워라, 까악!"

새롭게 소환한 일곱 마리의 시체 까마귀들이 발톱으로 내 전신을 옥죄인 뒤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자 본체가 공중에 떠올랐다.

이제 남은 건 도망치며 계산한 거리를 정확하게 이용하는 것뿐.

"멈춰라, 까악!"

해골병사들의 사이로 대담하게 날아올라 49.8m쯤 되는 지점에 멈춰세웠다.

그러자 해골병사들이 하늘 위에 있는 나를 조준했다.

쉭!

쉬쉬쉬쉬쉬쉭!

"더 올라가라, 까악!"

빛의 화살의 사정거리인 50m를 넘어 더 높게 올라간다.

해골병사들이 쏜 화살은 내게 닿기 직전 힘을 잃고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이거다.

이 거리였다.

나는 끊임없이 해골병사들과의 미묘한 거리 줄다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하나, 둘 마력을 소진해 멍때리는 해골병사가 늘어나고 있었다.

'해골병사의 레벨이 높았다면 이것도 꿈도 못 꿀 방법이었겠지.'

레벨이 높다는 건 마력과 스킬의 레벨도 높다는 소리.

무한하게 쏘아내는 빛의 화살의 사정거리가 수백, 수천미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빛의 화살보다 훨씬 상위의 스킬을 사용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깨라고 만들어놓은 시련이 아니다.'

신화 신비의 관을 깨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나처럼 모든 재능을 찍은 탓에 필요한 경험치가 미친 듯이 높아서 동레벨의 괴물을 아무리 잡아봤자 레벨업을 할 수 없어야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레벨에 비해 엄청나게 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빠른 상황 판단력, 게임에 대한 수준높은 이해도 등등이 필요했지만 그 모든걸 종합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가 과연 몇이나 되겠나.

'깰 수 있는건 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밖에 없다.

그조차도 내가 7이나 8레벨쯤에 신비의 관에 도전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이걸 천운이라고 해야할까?

"2라운드 시작이다, 까악!"

모든 마력을 소진한 채 멍때리는 놈들을 바라보며, 나는 해골병사들의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

까악!

까아악!

시체 까마귀들이 해골병사들을 유린한다.

더 많이 이어지고, 더 많이 합체하고, 더욱 커진 채 해골병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느 일부러 느긋하게 해골병사들을 상대했다.

이로써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스킬 레벨부터 올려놔야한다.'

다음 단계로 가기 전에 스킬레벨부터 다 올려놔야 한다는 걸.

<'시체의 예술' 스킬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시체의 예술' 스킬이 '시체 예술의 거장(1Lv)'으로 초월합니다.>

<'시체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시체 까마귀 소환술' 스킬이 '상급 시체 까마귀 소환술(1Lv)'로 초월합니다.>

스킬 초월!

단순 숙련도가 아닌 스킬은 10레벨에 다다르면 초월하는 경우가 있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시체 까마귀였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나, 나는 시체 까마귀의 왕이다.

연계되고 초월되는 스킬들이 더 있는 건 당연한 일.

"'종의 벽(2)'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으로 궁극신화급 신비 '허무의 정점'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획득하지 않을 시, 더 높은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허무 속성의 해골병사 만 마리와 전쟁을 벌여서일까.

오버로드에 이어 허무의 정점이라는 신비가 떠올랐다.

게다가 궁극신화라니. 이런 등급은 또 처음본다.

확실한 건 오버로드보다 상급의 신비일 터.

허나, 여기에서 만족하긴 이르다.

"신비 '허무의 정점'의 획득을 거부했습니다."

이 시련에 대해 어느정도 감이 잡혔으니까.

"도전자가 더 높은 시련에 도전합니다."

"신비의 관 전체가 요동치며 전율하기 시작합니다."

"업적 '신화의 완성에 도전하는 불굴의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어디 한 번 끝장을 보자.

신화의 완성

처음 나타난 시련은 나와 같은 레벨의 해골병사 1만 마리.

그다음엔 '허무'의 히든 특성을 지닌 해골병사 1만 마리가 나타났다.

'내 종족값과 관련이 있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었다.

분명히 내가 입장할 때 보았던 '종족값'과 시련 사이에는 깊은 연관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다음 시련엔 뭐가 나올까.

'거인, 드루이드, 천상인.'

아마도 첫 시련은 '시체 까마귀'에 대한 평범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시체들과의 대결 자체가 시체 까마귀와 연관이 되므로.

그럼 남은 건 셋.

거인(10), 드루이드(10), 천상인(20).

종족의 값에 붙여진 숫자에 따라 난이도가 추가되는 것이라면 거인이나 드루이드는 허무와 같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머리를 쓰고 전략을 짜내면 어찌어찌 타파 가능한 수준.

복리처럼 더해진다는 것이 살인적이긴 하지만 아예 길이 없지는 않을 터.

'문제는 천상인이다.'

천상인 혼자 20점이다.

대체 천상이 뭐기에?

신계의 천족, 마계의 마족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나?

허나 천족과 마족의 종족값이 거인보다 높으리란 생각은 안 든다.

거인은 여신을 지키던 위대한 종족.

신화에 따르면 몇몇 거인은 신과도 대등한 무력수위를 지녔다고 했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예 다른 것일 수도 있겠군.'

그러니 '천상'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아예 천계나 마계와는 관계가 없는 그런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어야겠다.

'어쨌든 시련에 오르면 알게 되겠지.'

시련은 계속해서 종족의 특성을 더해간다.

저 천상인의 시련까지 오르면 윤곽이 파악되리라.

그때가 되면, '천상'이 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앞에 두 가지 선결과제를 먼저 타파해야만 한다.

거인, 드루이드.

'허무가 해골병사에게 빛의 속성을 추가해줬다. 거인의 항마력은 마법저항력을 올려주고, 드루이드는 당연히 정령과 관련된 무언가를 추가해줄 거다.'

신중하게.

다음 시련을 밟기 전에 먼저 생각한다.

추가된 능력을 갖춘 해골병사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미리 그려본다.

더불어 달라진 내 능력 또한 한 번 더 점검한다.

모든 걸 종합하여 계산하고 움직여도 부족할 테니까.

<'해골병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해골병사'가 '허무'로 인한 상극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해골병사'가 '거인'의 특성을 갖게 됩니다.>

준비를 끝마치고 다음 시련에 도전했다.

새로이 생성된 워프를 타고 넘어가자 그 앞에 보이는 건 여태껏 봐왔던 지형지물들과 크게 바를 바가 없었다.

메마른 땅.

곳곳에 놓인 절벽들.

그리고.

"······."

일만의 해골병사.

하지만 놈들을 보는 내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최악이군, 까악."

해골병사들이, 크다.

거인처럼, 컸다.

거인의 항마력을 추가한 게 아니라 그냥 거인으로 만들어놨다.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

*

"······."

아이작은 멍하니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식 밖의 일.

생각 자체를 포기해야만 하는 불가해가 눈앞에 있었으니.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건 아이작만이 아니었다.

크람델의 괴물들이 하나, 둘 탑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신비의 탑이 내보내는 빛의 파장이 계속해서 거세지며 크람델 전역에서 이 현상을 볼 수 있게 된 탓이다.

신비의 관은 크람델에 온 존재라면 모두가 한 번씩 들르는 곳.

그러나 탑이 이런 현상을 보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건만.

수많은 괴물이 궁금해하며 탑의 주변으로 모였고, 탑의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빛의 고리가······."

"대체 누가 탑의 시련을 받는 거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기에?"

탑의 꼭대기.

저 끝없이 펼쳐진 탑의 정상에 둥그런 황금의 고리가 생겼다.

처음 한 개로 시작한 빛의 고리는 이내 두 개가 되었다.

두 개의 고리는 더 많은 빛을 흩뿌리며 괴물들의 넋을 놓게 했다.

"······'초월종(超越種)'만이 받을 수 있는 탑의 마지막 시련이다."

그때였다.

어슬렁 어슬렁 다가온 괴수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그 괴수가 발을 옮길 때마다 길이 생긴다.

복잡하던 신비의 탑 근처에 마치 홍해가 갈리는 듯한 현상이 일어났다.

소와 같으나 고슴도치의 털을 지닌 환상종, 궁기(窮奇).

호랑이 같은 얼굴과 갈고리 모양의 발톱, 앞다리에 날개가 돋아있는 흉악한 존재였다.

같은 괴물들도 두려워하는 존재인 궁기가 긴장한 기색으로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월종? 신화종이나 환상종 같은 건가?"

"그게 뭐야?"

하지만 초월종에 대해 무지한 괴물들은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초월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종의 규격을 초월한 자. 이곳 크람델에선 오직 백왕만이 가능했던 시련이다."

"······!!!"

"그, 그럼 백왕께서 하셨던 시련을 누군가가 받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 존재가 지금 탑의 안에 있다고?"

모두가 경악하며 탑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었다.

백왕이 누구인가.

북부의 신이다.

크람델의 수호자이며, 절대자가 바로 백왕이었다.

감히 어느 인간도, 심연과 그곳의 지배자들조차도, 천상자들마저도 백왕이 있는한 이곳 북부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그 어떤 신화종이나 환상종도 백왕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만한 존재와 같은 규격을 지닌 누군가가 지금 이 탑의 안에 있다는 뜻인가?

꿀꺽!

'그럴 리가······.'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큰일이다.'

탑을 지켜보는 모두가 긴장했다.

이곳 크람델이 마물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백왕이 있어서다. 감히 어느 누구도 백왕의 앞에서 문제를 일으킬 순 없으므로.

그런데 백왕과 같은 규격의 존재가 탑으로 들어가 시련을 받고 있다.

만에 하나 그 존재가 탑을 나온다면?

크람델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고 한들, 적어도 크람델의 팽팽한 균형의 줄이 끊어지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신화의 시련에서 백왕은 세개의 고리를 만들었다.'

궁기는 탑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탑을 감싸고 있는 저 둥근 황금의 고리는 '신화의 완성도'를 나타내는 지표다.

하지만 천하의 백왕도 세 개의 고리를 만들고 탑을 나왔다.

이후 아무도 신비의 탑에서 신화의 관을 열지 못했으니, 이곳 괴물들에게 저 현상은 그야 생소할 만도 한 것이다.

'둘.'

그리고 지금 신비의 탑을 감싼 고리는 두 개.

아직 신화의 완성도가 백왕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두 개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결과다. 어찌됐든 초월종만이 받을 수 있는 시련을 두 단계나 돌파했다는 증명이었으니.

이제 하나, 둘 탑에서 나오는 괴물들을 보면 그중 누가 신화의 시련을 받았는지 판가름 날 것이다.

"세, 세 개!"

"고리가 세 개로 늘어났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 개의 고리라고?'

궁기의 눈동자가 커졌다. 말마따나 고리가 세 개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백왕과 같은 삼단의 시련을 깼다는 뜻.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쉬이이이익!

그 순간이었다.

"하, 하늘에!"

"메두사의 눈이······!"

"허억!"

하늘에 메두사의 거대한 눈이 보란 듯이 생겨났다.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건 메두사가 모든 '눈'을 이곳에 모았다는 뜻.

즉, 몇 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가 초유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리가 세 개가 생긴 순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백왕의 최측근이라 불리는 네 마물 중 한 축.

이곳 크람델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지배자들 중 하나인 그녀가 무언가에 이만한 관심을 보인건 전례가 없던 일!

"타, 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누구지?"

"분명히 최강, 최악의 존재이겠지."

"모든 종을 초월할만큼 흉악한 녀석이 틀림없다."

"음. 압도적으로 끔찍한 괴물일 게 분명해."

모든 괴물이 탑의 시련을 받는 존재에 관해 유추하며 떠들었다.

하지만, 예상도 가지 않는다.

어떤 엄청난 괴수가 저 탑에서 시련을 받고 있는 건지.

얼마나 흉악하고,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강력하기에 메두사와 궁기마저도 이만한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

쿵!

쿠르르릉!

쾅! 쾅! 콰아아앙!

"······."

나는 가만히 눈앞에서 도미노처럼 쓰러져가는 해골병사들을 바라봤다.

신장만 10m에 다다를만큼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거인의 해골병사들.

놈들이 손을 휘두르고 빛의 화살을 쏘아내면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거인 해골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맨 앞의 해골병사가 쓰러지자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도미노마냥 주르르륵 넘어지고 부서진다.

'아. 레벨.'

그제야 깨달았다.

저 거인들의 레벨도 '4'라는걸.

비대해진 몸을 지탱하기 위한 능력치가 너무나도 낮았던 것이다.

아무리 반대 속성을 지니고 몸집이 커졌다고 해도, 결국 레벨은 4였다.

레벨 4는 아무리 강해도 한계가 있다.

힘과 체력, 마력 따위를 최대로 키워봤자 40을 넘기지 못하니까.

거인의 거체를 유지하고 움직이기엔 턱없이 부족했겠지.

앞에서 쓰러지는 거체를 받아내고 버텨낼 힘은 더더욱 없을 테니.

쾅! 쾅! 쾅! 콰아아앙!

"······."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어이가 없었다.

'······운이 좋군.'

앞선 두 시련과 다르게 세 번째 시련은 공짜였다. 보너스 스테이지같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시련도 똑같을까?

어찌 됐든 거인의 특성은 고스란히 유지가 될 텐데.

레벨이 4인 이상 몸이 무거워서 버티기 힘들어할 건 분명했다.

하기야, 시련을 설계한 설계자도 설마 나 같은 놈이 도전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너무 쉽게 깼다고 보상을 안 주는 거 아닌가?'

솔직히 조금 걱정스러웠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시련이라는 건 도전자가 한계를 부딪치고 깨는 과정의 일이다.

부딪힌 것도 없고, 깬 것도 없으니 당연히 시련의 보상도 주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종의 벽(3)'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으로 초월신화급 신비 '시조의 거인'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획득하지 않을 시, 더 높은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시련은 깬 것으로 간주해주는 모양이었다.

'궁극 다음은 초월이라.'

초월 다음엔 뭐지?

이제는 뭐가 나올지 내가 다 궁금해진다.

"신비 '시조의 거인'의 획득을 거부했습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여기서 멈춘다면 절대로 나는 만족하지 못하리라.

고로, 못 먹어도 고였다.

세 번째 시련은 거저 먹은 셈이니 남은 건 드루이드와 천상뿐.

특히 천상에 대한 의문이 폭발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끝을 볼 생각뿐이었다.

"도전자가 더 높은 시련에 도전합니다."

"업적 '신화의 완성을 목전에 둔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들이 어이가 없어합니다."

예상을 뛰어넘다 <무료 마지막>

땅의 지평선 위에 떠오른 워프.

그곳을 넘어 다음 시련에 도전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장 단단한 뼈를 골라내라, 까악."

까악!

까아아악!

시체 까마귀 열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거인의 뼈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Lv.6]

레벨 4의 보스 몬스터였던 시체 까마귀가 레벨 6으로 격상했다.

평범한 시체 까마귀 소환술이 상급 시체 까마귀 소환술로 초월하며 생긴 변화.

하지만 레벨만 변한 건 아니었다.

시체 까마귀가 날갯짓하자 저주로 얼룩진 보라색의 손 두 개가 나타나 커다란 뼈들을 들어냈다.

상급 시체 까마귀가 되며 새로운 스킬 역시 부여된 것이다.

이렇게 빠르게 스킬초월이 가능했던 건 모두 히든 특성 '손재주' 덕분이었다.

'손재주는 초월한 스킬의 레벨도 올려주지.'

스킬은 초월하면 레벨이 초기화된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한 '손재주'의 사기성이 나타난다.

애당초 평범한 '시체 까마귀 소환술'에서도 스킬 레벨을 1 올려준 게 손재주였다.

그런데 스킬이 초월하며 '상급 시체 까마귀 소환술'로 변모하자, 이 역시 1의 레벨을 더해 2Lv로 시작하게 해주었다.

지금 소환한 상급 시체 까마귀가 열 한 마리인 이유다.

'손재주가 2레벨을 올려준 거나 다름없다.'

초월하여 초기화된다고는 하나, 말이 초기화지 사실 '계승'과 다를 바가 없다.

초월 전의 스킬 특성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한계 레벨을 더 올려주는 셈이었으므로.

이게 시스템의 오류인지, 버그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을 초월하면 초월할수록 '손재주'의 사기성은 복리 이자처럼 커지는 것이다.

거기다가 숙련도가 올라가는 속도마저 증폭시켜준다.

이보다 가성비 좋은 특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웨폰 마스터는 무기 숙련도에 한정되지만, 손재주는 '모든 숙련도'에 관여하니 말이다.

까아악!

툭!

녀석들은 부서지지 않고 상태가 멀쩡한 거인의 뼈들을 골라 차곡차곡 내 앞에 쌓아갔다.

'레벨이 낮아서 견디지 못했을 뿐, 이건 전부 거인의 뼈다.'

해골병사의 덩치만 커진 게 아니다.

거인의 특성. 저 뼈들은 강력한 항마력으로 무장된 진짜배기였다.

뼈의 강도는 강철보다 단단하며 어지간한 물리 공격에는 긁히지조차 않을 터.

멀쩡한 거인의 뼈만을 모으는 이유는 간단했다.

'열한 마리의 상급 시체 까마귀를 이용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다음 시련의 대비를 위한 '작품'을 창조할 생각이다.

스킬이 초월하여 변형된 건 시체 까마귀 소환술만이 아니었으니.

<'시체예술의 거장(Lv.2)' 스킬을 사용합니다.>

'시체의 예술'이 초월하여 '시체예술의 거장'이 됐다.

이전에도 뼈를 쌓아 골렘처럼 만들 수는 있었으나 '거장'이 되며 활용도가 더 높아졌다.

더 많은 재료를 사용해 더 큰 예술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시련에서 드루이드의 특성이 추가된다면 분명히 자연계열 정령을 다루겠지.'

드루이드는 정령에 특화된 자연계의 종족.

정령을 이용하면 충분히 거인의 거체도 지탱할 수 있다.

드루이드의 무서운 점은 '모든 자연속성'의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이보다 더 최악의 경우다.

'······허무가 빛의 속성을 추가해줬다. 빛의 정령마저 다룰지도 몰라.'

자연속성이 아닌 빛의 정령.

자연계열보다 상위라고 평가되는 그 정령도 소환된다면 지금 상태로 클리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철저하게 대비해갈 수밖에.

"제대로 이어라, 까악! 틈새가 없게 만들어야한다, 까악!"

*

신비의 탑 주변은 어느새 만석이었다.

크람델 전역에서 모여든 괴물들의 숫자가 만단위를 넘어간 탓이다.

게중에는 크람델에서 힘 좀 쓴다는 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피닉스, 이무기, 성체의 레비아탄, 미노타우르스 킹, 다수의 오우거, 시체 까마귀의 왕, 진혈족, 서펀트······."

붉은색 투구를 쓴 마수들이 신비의 탑 입구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지금 탑에 들어가있는 대상들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상 100명이 지금 입장해있는 상태인가보군."

"이중에 초월종이 있다."

신비의 관은 동시에 100명의 입장객만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의 임무는 신비의 관에 들어간 100명의 입장객을 모두 조사하는 것이었다.

안에서 '신화의 시련'을 진행중인 존재가 크람델과 우호족인 자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였다.

우호적이라면 대우할 것이나, 우호적이지 않다면 대비를 해야만 했기에.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자는 넷이다."

"이무기, 레비아탄, 진혈족과 미노타우르스 킹."

초월종이 종을 초월한다고는 하나, 밑바탕이 훌륭해야 그것도 가능한 것이다. 하위종족에서 초월종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였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게 넷.

그중 이무기와 레비아탄은 신화종이었다.

"미노타우르스 킹은 아니다."

"······ 궁기님?"

그때 궁기가 난입했다.

붉은색의 관리자 투구를 쓴 괴물들이 궁기를 보며 털을 곤두세웠다.

크람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는 네 괴물 중 하나가 바로 궁기이기 때문이다.

백왕의 네 측근 중 하나.

사주력(四主力)이라고 불리는 자들 중 삼주력에 해당하는 존재.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미노타우르스 킹은 내 휘하에 있는 녀석이다. 허나, 녀석은 초월종이 아니다."

"아아. 지금 탑에 들어간 게 그럼, 최근 삼주력령에서 탄생했다는 그 미노타우르스 킹입니까?"

"그렇다."

슥슥.

줄을 치자 남은 건 셋이었다.

붉은 투구의 관리자 중 한 명이 말했다.

"레비아탄은 음산한 호수의 아휀델로 파악됐다. 하지만 이무기와 진혈족에 대해선 제대로 파악된 게 없어."

"둘 중 하나가 그럼 신화의 시련을?"

신화의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 탑은 닫힌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만약 신화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온다면 반드시 파악해야만 했다.

그때 궁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머지 주력들은 어디가고 네놈들만 나온 것이냐?"

다른 이도 아니고 궁기가 묻는다.

아무리 크람델의 관리자들이라도 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메두사님은 아직 회복에 집중하셔야 할 때인지라······."

"사왕(死王)께선 중요한 연구를······."

"대토룡께선 동면시기가······."

그 변명을 듣고 궁기는 눈썹을 찌푸렸다.

"고리 세 개가 떠오른 것을 보고도 태평하다고? 아니······ 하기야, '그 인간'을 상대할 때도 태평하던 놈들이다. 그 뒤로도 깨달은 게 없나보군."

궁기가 고개를 저었다.

2년 전 그날, 사주력은 패배했다.

힘을 합쳤으면 모르겠으나 인간이란 종을 무시했던 탓에 차례대로 격파당했다.

고작 인간 한 마리에게 사주력 전원이 말이다.

'놈이 우리를 죽이지 않은 건 백왕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굴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놈은 강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만큼.

결국 백왕이 어금니 하나를 내어주는 대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나.

헌데 그 뒤로도 다른 주력들은 깨달은 게 없는 모양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주력들이 지금 살아있는 건 온전히 백왕의 은혜 덕분이었다.

만약 백왕이 스스로의 어금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들 네 주력은 모조리 한 인간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궁기는 그날 이후 변했다.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며 힘을 키웠다.

똑같은 굴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이라면 전처럼 쉽게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궁기는 놈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싸운다면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리라.

그때와 비교해 몇 배는 강해졌으니까.

그는 놈과 다시 대결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이제는 나와야 정상이거늘.'

세 개의 고리.

백왕과 같은 업적을 달성한 초월종.

이제는 슬슬 나올 때였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탑은 열리지 않았다.

'··· 설마, 네 번째 고리에 도전하는 중인가?'

만약 네 개의 고리가 완성된다면······ 이는 백왕을 넘어서는 업적이다.

그때가 되면 다른 주력들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아무도 달성한 적 없는 불후의 업적은 그들에게조차 경계의 대상이니.

궁기가 탑의 정상을 바라봤다.

···아직, 고리는 세 개였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고리가 네 개가 된다면······ 크람델의 모든 주력이 이곳에 모이리라.

그리고 맞이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초월종을.

아군, 혹은 적군으로서.

*

세 번째 시련과 달리, 네 번째 시련은 확실히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해골병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해골병사'가 '허무'로 인한 상극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해골병사'가 '거인'의 특성을 갖게 됩니다.>

<'해골병사'가 '드루이드'의 특성을 갖게 됩니다.>

드루이드의 특성을 고스란히 받은 해골병사들.

정령으로 무거운 거체를 지탱하고 움직이며 빛의 화살을 쏘아댄다.

기존 50m에 불과하던 사정거리는 크기만큼 비례해서 증가했다.

파괴력 역시 마찬가지.

쾅! 쾅! 콰르르르!

격한 진동과 함께 벽이 흔들린다.

시체의 거장 스킬을 사용해 만든 것은 두껍기 그지없는 '벽'이었다.

높이 10m 규격에 이르는 거대한 벽.

이 벽을 나는 최대한 좁은 절벽의 사이에 설치했다.

'빛의 화살은 거인의 항마력을 뚫지 못하지.'

거인의 특성을 고스란히 역이용한 셈이다.

자신들의 뼈를 이룬 항마력으로 인해 빛의 화살은 벽을 뚫지 못한다.

물리력으로 뚫으려면 몸을 격하게 움직여야하는데, 정령으로 지탱한들 그 정도의 추진력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좁은 지역에 설치해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가두리 양식장 완성이다.'

말 그대로, 가두리 양식장이다.

일반 '시체의 예술' 스킬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시체예술의 거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은 성력만 충분하면 한계가 없었다.

'다음 시련으로 언제 넘어가야한다는 시간제약은 없었으니.'

나는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했다.

단순히 뼈를 자르고 붙여서 단단하게 세운 게 전부인 벽.

끊임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이만한 걸작을 완성시켰다.

자신들의 뼈를 깎아 만든 벽에 해골병사들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시련의 지형이 같았다. 그래서 마땅한 곳을 찾으려고 한참 애를 썼지.'

여태껏 진행해온 모든 시련들은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마냥 지형지물이 똑같았다.

하여, 가장먼저 벽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했다.

적당한 장소에 1cm의 오차도 없이 제작해서 정확히 끼워넣어야 했으니까.

여기에 벽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대를 만들고, 바닥에 고정시키는 기둥도 아홉 개나 설치하였다.

이로써 해골병사의 진입은 막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정령이다.'

정령은 영체화 할 수 있다.

그러니 벽을 뚫고 들어와서 나를 노리기엔 충분하다.

"버티기만하면 나의 승리다, 까악!"

스으으.

스하아아아아-!

그런 내 예상대로 벽을 뚫고 온갖 종류의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령 역시 마력으로 소환되는 것.

무한정 소환시켜 둘 수는 없다.

마력을 소진하고 정령이 역소환되는 순간 해골병사들은 쓰러질 터.

저 정령들의 공격을 버텨내면 내 승리다.

그 전에 벽이 무너지거나 버텨내지 못하면 내 패배였고.

'살아남아야한다.'

그래도 해골병사와 정령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보단 낫다.

문득, 처음 판게니아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사막에 난데없이 떨어져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때와 지금의 마음이 같았다.

살아남아야한다. 삶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도전해야만 했다.

<'별 할퀴기(Lv.2)'를 사용합니다.>

<별의 기운이 전신을 76초간 맴돕니다.>

*

궁기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 네 개다."

"고리가 네 개가 됐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긴급상황이었다.

네 개의 고리라니!

백왕의 기록을 넘어선 업적이다.

이제는 외면할 수 없다.

결국 사주력 전원이 신비의 탑 앞에 모였다.

그들이 모이자, 신비의 탑 주변을 둘러싼 마물들은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주력이야말로 크람델 그 자체였기에.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건 오랜만인 것 같군."

대토룡.

대지의 용들 중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최강의 존재.

탑과 비견할만큼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갈색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2년하고도 87일만이지."

사왕.

죽은자들의 왕, 모든 죽음을 관장한다 전해지는 자.

해골의 형태에 로브를 둘렀으나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이 빼앗긴다. 실제로 반경 수십미터 안의 모든 꽃과 풀은 생기를 잃은 채 죽어있었다.

"······."

메두사는 눈을 가리고 양손이 포박된 상태로 나타났다.

멀리서 눈으로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으나, 네 개의 고리가 나타난 순간 직접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궁기여. 안에 있는 게 무엇이라 보는가?"

대토룡이 궁기에게 물었다.

가장 오래 지켜봤으니 알아낸 게 있느냐는 뜻이었다.

"··· 나도 모른다."

하지만, 궁기는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예상이 되질 않는다.

들어간 자들 중 초월종이라 판단되는 존재는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진혈족이지만, 그 피의 종족은 크람델과 사이가 좋지 않다.

진혈족의 그랜드 마스터쯤 되어야 눈곱만큼이라도 가능성이 있는데, 놈이 나타났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곧이어 사왕이 입을 열었다.

"네 개의 고리는 신화의 완성을 뜻한다. 무엇을 완성했을지 궁금하군."

"백왕께서도 완성하지 못하신 것이거늘······."

대토룡이 받았다.

이쯤되자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저 신화의 시련의 끝을 본 존재가 정말 나타날 줄이야.

-크람델에 위협이 된다고 간주되면 그 즉시 죽인다.

메두사가 염파를 통해 말했다.

사주력 모두가 동의했다.

이곳 크람델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마물들의 정점이 모여있는 제국이었다.

제국을 지배하는 사주력이 힘을 합쳐 죽이지 못할 것은 없다.

설령 상대가 그 '마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또한, 제국이 건재해야만 백왕을 떠받들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안 나오는 거지?"

"설마······ 다음 시련이 존재하는 건가?"

사주력 모두가 의아해했다.

신화의 시련은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4단계의 시련을 이겨내면 신화는 완성되고, 탑은 닫힌 문을 연다.

하지만 고리가 4개가 됐음에도 탑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궁기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백왕이 말한 게 틀릴 리는 없었다.

완성을 목전에 두고 실패했다는 절대적인 왕의 말이.

*

"······."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온 몸이 만신창이였다.

'핵이 안 깨져서 다행이군.'

마지막 정령까지 역소환되자 모든 해골병사들이 자멸했다.

결국 버텨냈으나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누운 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그때였다.

"'종의 벽(4)'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모든 종의 시련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신화를 완성한 당신을 향해 탑이 경외를 표합니다!"

모든 시련이 마무리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상인은?'

아직 천상인이 남았건만, 완성이란다.

설마, 진짜로 이게 끝이라고?

"탑이 신화를 완성한 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보상으로 유일급 신비 '란돌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아······.'

유일급.

······ 유일급이라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신비에도 유일급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으니까.

게다가 유일급 신비의 이름이 내 이름이다.

란돌프.

나 자신의 증명, 나 자신의 완성.

나만의 신화를 마침내 이룩했다는 뜻이었다.

유일급 이상의 아이템 등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일급 이상의 신비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탑도 이게 마지막 선물이라지 않나.

"백성전의 모든 성좌들의 당신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성좌들 역시 내 고생을 알아주고 있었다.

이제 이 신비를 받으면, 메인 퀘스트 5가 완료되며, 또 다른 보상과 이권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신화의 시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다. 얼마나 많은 성좌가 보상목록의 등급을 올려줄지 기대가 됐다.

또 다시 초월한 무기를 얻을지, 아니면 그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를 얻을지.

"유일급 신비 '란돌프'의 획득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완성을 거절했다.

'납득할 수가 없다.'

납득할 수가 없었으니까.

왜 멋대로 완성시키는가.

하나가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아직 끝을 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고로, 이러한 끝과 완성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 순간이었다.

"'종의 벽(5)'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경외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점점 더 많아지는데?'

'······.'

'우리끼리라도 튀어야 할 거 같지 않나?'

절레절레.

이자벨라가 고개를 젓자 아이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비의 탑이 변화하기 시작하자 크람델 전역에서 괴물들이 모여들었다.

뿐만인가.

궁기가 등장하더니, 이제는 크람델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사주력 전원이 함께하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 변신을 알아볼 수도······.'

아이작은 내심 불안했다.

이 많은 괴물 중에 자신이 인간임을 알아보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즉살이다. 절대로 살아서 나가지 못하리라.

하지만 위험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호되게 엮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

눈앞의 반룡인 여자와 시체 까마귀의 왕.

이 둘이 등장하며 아이작의 일상은 순식간에 변했다.

지난 1년간 아무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했건만.

유유자적한 크람델에서의 생활이 끝나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받은 게 있으니 무를 수도 없다.

하여, 아이작은 미치도록 묻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게 설마 시체 까마귀인가?'

반룡인 여자에게.

이자벨라. 그녀의 눈빛에 묘한 확신이 차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하더라도 저들은 잡아낼 테니.

주변에 모인 수만 마리 괴물들의 미묘한 움직임마저도 전부 읽고 있을 터.

수상한 낌새가 보이는 즉시 목이 잘릴 것이다.

아니면 돌이 되어 영원히 문에 걸릴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어떻게 빠져나가야할지 고민해봐야겠어.'

아이작은 턱을 쓸었다.

자칭 성각자. 시체 까마귀의 왕을 빼돌릴 수단을 고민했다.

탑이 열리는 순간 기존에 입장해있던 100마리의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들 중 성각자만을 빼돌릴 수.

사주력의 눈과 십만에 다다르는 괴물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시킬 방법······.

'그딴 게 있을 리가.'

내심 고개를 젓는다.

아이작이 아무리 도망에 능하다고 해도, 사주력을 피해 달아날 순 없다.

가진 모든 걸 쏟아부은들 10초 이내로 잡힐 것이다.

···솔직히 5초도 안 걸릴 것 같지만.

세상에서 제일 빠르다는 궁기와 달리기 시합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광역으로 퍼져나가는 메두사의 눈을 피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고, 대토룡이 숨결 한 번만 내뱉어도 모든 퇴로는 막힐 테다.

사왕에게 영혼을 붙잡히면 더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겠지.

도망칠 수단은 수천, 수만가지가 있지만 이곳에서 먹혀들만한 건 그중 하나도 없었다.

꿀꺽!

'그런데······.'

침을 삼킨 아이작이 사주력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사주력이 전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탑 앞에 모인 사주력들이 묘하게 긴장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

사주력(四主力)이 어떤 존재들이던가.

그 하나하나가 무소불위의 제왕들이다.

웬만한 도시 하나는 혼자서 쓸어버릴 수 있는 괴물들 말이다.

일례로 사왕은 현재 '네크로벨리'라 불리는 대도시를 한꺼번에 쓸어버린 적이 있다.

번성하던 왕국의 수도였던 그곳은 사왕에 의해 고작 하루만에 시쳇더미로 변했다.

그렇게 지금은 시체와 무덤만이 남아있는 죽은자들의 도시가 된 것이다.

이후, 인간들은 사주력이 있는 이곳 크람델에는 절대로 발을 뻗치지 않는다.

하물며 사왕과 같은 급의 존재들이 무려 넷이 모였다.

마왕조차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괴물들이, 긴장을 하고 있다고?

그것도 고작 탑의 변화 때문에?

'고리가 다섯 개가 되는 순간.'

분명한 건 고리가 네 개일땐 이만한 긴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리가 다섯 개가 되는 순간, 그들은 겉으로 보일 정도로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신화의 시련이라 할지라도 사주력이 긴장하게 할만큼 저 변화에 의미가 있는 걸까?

휘아아아아아!

그때였다.

탑의 정상에 걸린 다섯 개의 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다섯 개의 고리가 동시에 더 큰 빛을 내더니, 합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고리는 마치 왕관처럼 모습을 바꿨다.

······ 그런데 저 왕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성각자······ 시체 까마귀의 왕이 쓴 왕관이잖아.'

미치겠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시체 까마귀의 왕관이 분명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 변화를 자칭 성각자가 만들어냈단 말인가?

크람델의 모든 마물과 사주력의 관심을 고작 그 한 명이 이끌어냈다고?

"나온다!"

"탑이 열렸다!"

괴물들의 외침과 동시에, 탑에 입장했던 괴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탑을 나선 즉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사주력······!"

"여기 모여서 다 뭐하는 거지?"

사주력을 포함한 수많은 괴물들.

그러나 같은 괴물이 아니다.

특히 사주력과는 격 자체가 다르니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짓눌려질 수밖에.

감히 그들의 앞에서 떨지 않을 괴물은 이곳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무기를 포함한 신화종들과 피닉스와 같은 환상종들은 그나마 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사주력들이 탑에서 나와 굳어있는 괴물들을 살펴갔다.

저들 중 틀림없이 초월종이 있을 테니.

다섯 개의 고리를 이룬, 백왕의 업적을 훌쩍 뛰어넘은 진짜 괴물이!

"······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그때였다.

탑에서 나온 존재에게 모두가 시선을 주목했다.

그는 눈앞에 사주력이 있음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도리어 여유를 부리며 농담섞인 말마저 건네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괴물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이무기!"

"확실히 이무기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등장한 괴물은 신화종의 이무기였다.

그것도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

그를 증명하듯 가슴팍에 박힌 염원구슬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있었다.

'역시 사주력. 내 가능성을 알아차려버렸나보군.'

이무기는 가슴을 쫙 폈다.

사주력에 이만한 구경꾼들이라니.

이만한 장관이 펼쳐진 이유는 뻔하다.

필시 자신이 얻은 '신비'에 반응한 것이리라.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모셔가기 위해 모인 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내가 얻은 신비는 '왕의 증명'과도 같다. 이는 대토룡조차 뛰어넘을 자격 그 자체! 더 말해 무엇하랴. 전설급 신비 '환영용의 안개'다!"

이무기의 주변으로 안개가 드리운다.

안개 속에 마치 무지개가 피는 것처럼 일곱가지 빛깔이 쏟아졌다.

환영용의 안개!

전설 등급의 신비이자, 전설처럼 회자되는 환영용의 잔재다.

사주력 중 하나인 대토룡은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포부를 밝힌 것과 다름없다.

자신만만한 이무기를 보며 사주력은 차례대로 말했다.

"아니군."

"아니다."

"음. 확실하게 아니구나."

"······."

만장일치.

대토룡도, 궁기도, 사왕과 메두사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다.

저 이무기는 초월종이 아니다.

그 뒤를 이어 피의 종족인 진혈족이 나왔지만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전부 아니군."

대토룡의 말에 사주력이 동의했다.

99명의 입장자들이 차례대로 나왔으나 모두 기대이하다.

이들 전원, 초월종이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들에게 어떠한 감흥조차 주질 못했으니까.

종족의 값 자체가 다른 신화종이나 환상종들 역시 마찬가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게 초월종이겠군.'

마지막으로 나오는 자가 필시 초월종일 터.

이윽고.

툭.

탑의 마지막 입장자가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나온 마지막 입장자를 본 모든 사주력들은 실망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음······?"

"시체 까마귀······?"

시체 까마귀의 왕.

······ 모든 입장자들 중에서도 가장 볼품 없는 녀석이었으니까.

*

"'종의 벽(5)'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련을 클리어했다는 말.

그것도 다섯 번째 시련이었다.

시체 까마귀과 허무, 거인, 드루이드를 거쳐 천상인에 이르는 다섯 단계의 시련이 드디어 종결되었다는 뜻이다.

'천상인에 대한 시련이 설마 마지막 보상의 거절이었나?'

앞선 네 번의 시련은 모두 전투였다.

특성을 하나씩 추가해가며 해골병사들을 강화시켜온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힘이 없었으니, 무려 종족값 20에 다다르는 천상인의 특성은 도저히 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나타난 '마지막 보상'이라는 말.

'완성된 신화'라는 그 말.

유일급 신비라며 내 이름까지 달아주었다.

그야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백이면 백 모두가 보상을 받고 끝냈을 것이다.

어차피 더 이상의 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도전을 하겠는가. 지금껏 도전해온 모든 이유가 그저 보상의 격상을 위해서였을진대.

하지만 깨름칙한 기분에, 납득할 수 없는 마음에 나는 거절을 해버렸다.

'······설마 진짜 이게 정답이었다고?'

정답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럼 천상의 특성은 뭐지?'

내가 궁극적으로 보고자 했던 건 천상인에 대한 특성이었다.

도대체 천상인이 무엇이기에 다른 히든 특성의 두 배에 달하는 점수로 책정이 된 것인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아니면 이 선택 자체가 '천상'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 순간이었다.

"자신이 정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불굴의 도전자여."

"오롯이 완성되고자 했던 당신의 선택에 탑이 경외감을 느낍니다."

"업적 '신화 그 자체가 된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명예가 500상승합니다."

"탑이 약속합니다. 당신의 도전은 신비의 관에 영원토록 기록될 것입니다."

"보상으로 규격외 등급 신비 '영원의 란돌프'를 획득했습니다."

규격외.

이것이야말로 생전 처음보는 등급이었다.

유일급 이상의 등급은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규격 외(外)였다.

더 이상의 도전과 선택은 무의미 하다는 듯 획득된 것이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자신의 눈을 의심합니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게 만든 당신의 완성에!"

"궁극의 신비를 마주한 성좌들이 전율하기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5 : 신비 얻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아주 큰 조각' 300h(200+100)을 획득했습니다."

드디어, 크람델에 온 목적을 이뤘다.

바로 메인 퀘스트 5를 압도적인 성적으로 이루는 것!

성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도리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나는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으니.

"내용을 정산합니다."

"규격외 등급은 정산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정산이 안 된단다.

존재하지 않는 규격을 점수로 환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상을 찌푸리자, 또 다른 내용이 떠올랐다.

"만장일치로 최고점수를 부여합니다."

"총점 500점"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됩니다."

"'행운의 성좌'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듭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 됩니다."

"'모험의 성좌'가 당신의 이름을 연신 외쳐댑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 됩니다."

"'시계태엽의 성좌'가 당신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 됩니다."

"'영월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

"'이름 없는 성좌'가 조용히 한 손을 보탭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압도

동시에.

전세계의 모든 플레이어는 경악했다.

"내 눈이 잘못된건가?"

"이런 점수 혹시 봐본사람?"

"왓더?"

"아니······ 이게 가능해?"

"난 250점이 끝인줄 알았는데?"

메인 퀘스트 5의 순위가 바뀌었다는 말과 함께 명예의 전당을 살핀 이들은, 믿을 수 없는 점수를 목격하게 됐으니까.

"500점? 물음표도 아니고 500점?"

메인 퀘스트 5.

신비 얻기.

이 단순하기 짝이없는 퀘스트에 목숨을 거는 플레이어는 없다.

도시에 널린 신비술사에게서 아무런 신비만 구매해도 클리어되는 퀘스트였으니.

게다가 판게니아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신비는 원래부터 보잘것이 없다.

왕국을 건설한 왕, 웬만한 도시의 지배자급 신비가 아닌 이상 별다른 옵션조차 붙어있지 않은 게 바로 신비였다.

"······마스터."

그리고 메인 퀘스트 5의 1위는 본래 '마스터'였다.

240점.

2위와 50점 이상의 차이를 벌리며 1위를 굳건히하던 인간계 최강의 괴물!

그는 유적도시 룬델라의 주인이자, 가장 많은 플레이어를 수하로 부려 이미 왕국을 세운 것과 다름이 없는 왕이었다.

이 기록은 절대로 깨질 리 없다고 자신했거늘.

그라시아마저 포기했으니,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의 업적을 넘보겠는가.

하지만, 넘봤다. 넘어섰다.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로.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두 배가 넘는 격차.

어떻게 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감조차 안 잡히는 신비를 거머쥐었다.

'팬텀.'

팬텀······.

판게니아의 정점이라 불렸으나 몰락한 그 왕이.

모든 것을 잃고 떨어진 뒤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월스트릿의 가장 높은 건물.

조금 전에 그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뉘어있다.'

차근차근, 마스터는 진정한 왕이 되어가고있었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타차원의 힘. 그 정점에 있는 자가 이 세상의 정점에 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나는 군림하는 자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은 능력이 있는 자들만이 지배하게 되겠지.'

앞으로 세상은 변할 것이다.

이전의 변화와는 완전히 다른 격동의 방식으로.

판게니아의 괴물을 처리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이 지구의 주인이 될 것이었다.

그 시작.

모든 게 완벽했어야할 지금, 마스터는 최악의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 5의 이권이 한 단계 밀린 건 제법 치명적이었다.

'어찌해야할까.'

그러나 팬텀은 이미 몰락한 왕이다.

마계의 절반을 때려부순 그 공로는 인정하지만, 마스터를 비롯한 최상위의 플레이어들은 마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계와 마왕을 이용해 판게니아에 자리를 잡고, 지구의 왕이 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팬텀은 죽었다.

죽어서 플레이어가 됐다면 강해지는데 한계가 있다.

하물며 팬텀은 세력이 없기로도 유명했으니, 자신들과의 격차를 어찌 따라잡을까.

'산 채로 잡아서 정보를 뜯어내려 했다만.'

마스터는 몰락한 왕을 산 채로 잡아서 그만 알고 있는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몇 년간 찾았음에도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마스터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

"······ '원탁 회의'를 소집해야겠군."

"8영웅들에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마스터."

그림자가 사라졌다.

마스터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슬리기 시작하는군.'

슬슬, 거슬린다.

그 몰락한 왕의 행보가.

그러니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

"더이상 탑에서 획득할 수 있는 보상이 없습니다."

"탑의 보상목록이 백성전 성좌들의 보상목록으로 대체됩니다."

"100개의 목록 중 한 가지 보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은 탑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신비를 획득했으니, 그를 대체할 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상의 대체?'

하지만 그 다음의 내용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성좌들의 보상목록으로 대체됐다니?

허나 이윽고 떠오른 목록을 보자 절로 이해가 됐다.

"시계태엽의 성좌의 모레시계"

"모험의 성좌의 반지"

"행운의 성좌의 네잎클로버"

"전투의 성좌의 창"

"영월의 성좌의 갑옷"

"연금술의 성좌의 발명품"

"이름 없는 성좌의 머리카락"

"대장장이 성좌의 무기도면"

······.

성좌의 이름이 붙은 100개의 보상목록이 떠올랐다.

'정확한 보상이 뭔지 알 수가 없군.'

그런데 관련된 능력이나 옵션이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성좌의 이름만을 보고 골라야하는 셈.

'이건 당장 고를 필요는 없겠지.'

고민을 해봐야할 문제다.

성좌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민 보상.

필시 그 하나하나가 경천동지의 보물일 터.

섣불리 고를 수는 없었다.

'그보다.'

이미 얻은 건 많았다.

일단,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300시간을 확정적으로 얻었다.

명성도 500이나 올랐다. 명예 관련 퀘스트를 깨봐야 10에서 30사이로 주는 걸 감안하면 500은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수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영원의 란돌프.'

규격 외 등급 신비, 영원의 란돌프!

유일급이었을 땐 내 이름만 붙어있었으나, 규격 외로 격상하자 '영원'이란 접두사가 붙었다.

영원이란 이름의 접두사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절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무색, 무취, 무형의 신비.

하지만 나는 분명하게 내게 주어진 신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원의 란돌프(규격외)]

★ 모든 규격을 넘어선 자에게 주어진 신비.

★ '영원의 란돌프' 이하 등급의 신비 영구파괴가능(발현중인 신비를 파괴. 대상당 1회 한정)

★ 파괴불가(파괴신의 망치로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 간섭불가(신비에 간섭할 수 있는 모든 영향을 차단합니다.)

★ 영구지속(모든 상황에서 지속됩니다.)

★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 추가

신비치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문구들.

'······미쳤군.'

하지만 그 내용만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채, 심장 박동이 얼굴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상대의 신비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심지어 영원의 란돌프 이하 등급을 파괴할 수 있다는 건, 유일급의 신비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영구히 없애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유일급 아이템의 3대장 옵션이라고 칭해지는 '파괴불가, 간섭불가, 영구지속'이 모두 붙어있었다.

'히든 특성까지 추가됐다.'

13개였던 히든 특성이 14개가 되는 순간이었다.

재능에 따라 추가되던 히든 특성이 신비에 의해 하나 더 생긴 건 나도 처음 보는 것이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는 옵션들.

기사왕 빌헬름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최강의 신비!

말 그대로 최강이었다.

이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만큼.

나는 한참동안 감동의 여운을 맛보고 즐겼다.

이런 건 정말 본 적이 없으니까.

게임을 플레이하며 여덟 개의 유일급 아이템을 모아봤지만, 그때 느낀 감격보다도 훨씬 여운이 길었다.

'이제 나갈 때가 됐다.'

십여분 가량을 음미한 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레벨업을 하며 체력을 비롯한 모든 상태가 회복되었다.

신비의 관을 모조리 섭렵했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생성된 워프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사주력?'

탑 앞에 모여있는 사주력과 마주하게 되었다.

*

마지막 입장자가 고작 시체 까마귀의 왕이라니.

입장자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놈이다.

사주력은 내심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100명의 입장자가 모두 나왔으나 초월종이라 여겨지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

"모르겠군."

저 시체 까마귀의 왕을 향해 확신을 내릴 수가 없다.

사주력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강한건지, 약한건지, 무엇 하나 제대로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확실한 것은 자신들을 의뭉스럽게 할 정도의 무언가를 저 시체 까마귀의 왕이 지녔다는 것.

"저, 저 왕관은······."

"고리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왕관 아닌가?"

"아."

괴물들의 중얼거림 속에 답이 있었다.

시체 까마귀가 쓴 왕관은 분명히 탑의 다섯 고리가 합쳐지며 만들어낸 것과 똑같았으므로.

"고작 저딴 시체 까마귀 따위가 내 신비를 넘어섰다는 말이냐?"

허나 모두가 납득한 것은 아니다.

이무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현상과 상황을 빚어낸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무기가 위협적으로 전설 등급의 신비 '환영용의 안개'를 펼쳤다.

"보아라! 나의 위용을! 시체 까마귀 따위는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신비의 주인이 나일지니!"

위풍당당, 기세가 흘러넘친다.

시체 까마귀의 앞까지 당도하여 확실한 격의 차이를 몸소 보여주었다.

"비켜라, 까악."

그 순간.

이무기의 신비, 환영용의 안개가 사라졌다.

"뭣······?!"

이무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비가 비활성화가 된 게 아니다.

······ 신비가 파괴됐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비란, 남이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괴물들에게 있어서 신비는 존재의 증명과도 같다.

단순히 능력치를 올려주고 옵션을 부여해주는 것을 넘어선 영역. 불변하는 존재력.

그런데 한순간에 신비가 파괴되었다.

마땅히 다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시체 까마귀의 왕이 눈에 담자, 신비가 영원히 사라졌다.

"음······!"

그것을 본 사주력은 경직됐다.

그들 역시도 신비가 파괴되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상식이 깨졌다. 단 한순간에 균형의 추가 무너져내렸다.

"어, 어떻게 내 신비를······!"

이무기는 여전히 당황한 채였다.

허나 그 당황은 이내 분노로 뒤바뀌었다.

신비의 관에서 얻을 수 있는 신비는 단 하나.

사력을 다해 괴물들은 신비의 관에 도전한다.

얼마나 어렵게 얻은 신비였건만.

"죽여버리겠······!"

쩌적!

이무기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돌로 변해버린 탓이다.

그것을 보며 시체 까마귀의 왕이 말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있나보구나, 까악."

오만하게.

감히 사주력을 앞에 두고서도, 한 치의 밀림 없이.

마치, 가만히 안 뒀으면 이 주변의 모든 영역을 없애버리기라도 하려 했다는 듯이 말을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오만하게 들리질 않는다.

'위엄.'

시체 까마귀의 왕이 말을 하자, 그만한 위엄이 서렸다.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 되는.

백왕을 마주하고서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각이었다.

사주력 전원이 느꼈다면 이는 결코 착각이 아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군인 것도 아니었다.

뭘까.

대체 저 시체 까마귀가 무엇이기에?

하지만 이윽고 이어진 시체 까마귀의 말은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백왕을 데려와라, 까악. 너희와는 격이 맞질 않는다, 까악."

*

신비의 관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사주력들.

그리고 수많은 괴물들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놈들이 이곳에 모인 게 나 때문이라는 걸.

아마도 탑 자체가 내 도전을 알린 것이리라.

처음 도시에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

[Lv.12]

사주력의 레벨이 11인줄 알았는데 12였다.

지난 시간 동안 레벨을 올린 모양.

문제는 사주력 전원이 일반적인 괴물과는 궤가 다르다는 것이다.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

레벨 1의 차이는 1성의 차이 이상이었다.

'부딪히면 순살당하겠군.'

아마 내가 죽는데 1초도 안 걸릴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첫인상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을 볼 수밖에.

마침 운도 좋았다.

이무기의 신비를 파괴하여 경각심을 심어줬으니.

게다가 사주력은 절대로 나를 파악할 수 없다.

14개의 히든 특성.

그중 '영원의 란돌프'가 가지는 효과 중 하나가 무엇인지 감이 잡힌 덕이었다.

'종의 위엄.'

말에 위엄을 심어준다.

그 효과는 웬만한 규격의 괴물로는 거스를 수 없을 정도였다.

감히 사주력조차도 말이다.

'······절대로 안 만나려고 했다만.'

그리하여 현재.

나는 사주력과 함께 백왕전에 있었다.

절대로 다시는 안 만나려고 했던 백왕이건만.

"백왕께서 나오신다."

대토룡의 말과 함께, 높디 높은 왕좌를 바라보며.

반인반마의 형태로 변한 사주력들이 차례대로 무릎을 꿇는다.

······ 이제는 진짜 돌이킬 수가 없었다.

백왕(수정)

기호지세.

나는 이미 호랑이의 등에 올랐다.

기세를 탔으니 내릴 수 없고, 한 번 뱉었으니 주워 담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건 하나.

죽기 살기로 해볼 수밖에.

'최종보스로군.'

······아무리 의연한 척하려고 해도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속을 게워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압박감.

사주력을 속여넘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백왕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래도 놈들이 나를 백왕의 앞까지 데려온 걸 보면 나에 대한 경각심을 느꼈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들 수준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문제는 백왕이었다.

북부의 수호신.

빌헬름으로 죽이지 못한 유일한 괴물이니까.

'할만해.'

생각을 바꾼다.

생각을 바꾸면 몸이 반응하게 되고, 몸이 반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주력을 속였다. 백왕이라고 속이지 못할까.

위축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감정을 잡아준다면, '영원의 란돌프'는 내 행동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리게 만들어주었다.

거기다가 언제든지 신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도 나름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무기의 신비를 파괴한 뒤 사주력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답이 나온다.

'경계하고 있다.'

나를.

단순히 경각심을 세우는 정도가 아니라, 나 자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신비를 파괴한다는 건 그들에게도 생소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런 게 가능한 초월종이라면 더 대단한 일도 서슴없이 해내리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자신들을 죽이는 것조차 말이다.

'강력한 괴물일수록 신비가 가지는 영향 또한 크다.'

물론, 이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과 괴물의 신비는 아예 쓰임새가 다르다.

인간은 이름을 자신의 증명으로 사용하듯, 괴물은 신비를 자신의 증명으로 사용한다.

인간에게 신비는 단순한 위치의 증명이지만 괴물에게 신비는 모든 것이었다.

일반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 따위를 가르는 것도 신비의 유무다.

게임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생긴 괴물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똑같이 생긴 괴물이더라도, 이펙트에 따라 더욱 강력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단순히 이펙트만이 아니라 보스 특유의 추가 효과를 가져다주는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신비가 없다면 구분이 안 되는 괴물이 태반일 테니.

'손을 하나 자르고 시작하는 것과 같지.'

괴물에게 신비를 없앤다는 건 그런 뜻이다.

손 하나 없이 싸우는 것과 진배없다.

격이 높은, 강력한 괴물일수록 신비가 가지는 영향 또한 크다.

만약 사주력이나 백왕 정도의 괴물이 지닌 가장 급 높은 신비를 파괴한다면, 그 자체로 레벨다운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시체 까마귀로군."

······ 그 순간이었다.

찰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느덧 백왕이 내 앞에 나타났다.

백호의 가면을 쓴 2m의 체구에 달하는 반인반마.

건장한 몸과 하얀 털, 꼬리와 귀를 보건대 이놈은 백왕이 맞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리는 안 지른 것 같다.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지만, 다행히 착각이었다.

확실히 여기는 사지(死地)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목이 잘리는 것도 모른 채 죽으리라.

그도 그럴 게.

[Lv. 15]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으니까.

'···원래 이렇게 레벨이 높았던가?'

심지어 백왕은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도 아니다.

그보다 위다.

마왕과 비슷한 격의, 마땅히 정해진 이름조차 없는.

그리하여 게이머들이 '끝판왕', 혹은 '네임드 보스'라고 불렀던 존재.

백왕의 레벨은 나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에도 관련된 정보가 없었으므로.

애당초 빌헬름으로 제압하는 것도 실패했지 않나.

허나, 뻣뻣하게 고개를 든 채 나는 모습을 드러낸 백왕과 눈을 마주했다.

'먹힌다.'

놈과 마주한 순간 확신했기 때문이다.

'히든 특성이 통한다.'

생각보다, 떨리지 않는다.

본래라면 모조리 간파당한 뒤 목이 잘려야 했음에도.

히든 특성으로 인한 효과가 백왕에게도 통한다는 말이다.

백왕은 나를 간파하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것은 히든 특성으로 인한 '철면피' 역시 가능하다는 뜻이다.

<'거인의 항마력'이 '백왕의 눈'을 상쇄합니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백왕의 기세'를 상쇄합니다.>

"······ 예의가 없군, 까악."

단순히 떠보는 걸 넘어 스킬을 사용했다.

나를 간파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히든 특성은 백왕의 스킬조차도 무력화시켰다.

인상을 구기며, 명백하게 기분이 나쁨을 표현하자, 백왕의 눈에 이채가 떴다.

동시에 사주력의 동공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백왕의 앞에서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시체 까마귀 따위가 거침없이 '예의'를 운운하는 게 많이 아니꼬운 듯싶은데.

"음. 확실히 이상한 녀석이다."

백왕은 솔직하게 나에 대한 평을 내놓았다.

이상한 녀석이라.

'충분하다.'

그 정도 평이면 아주 양호하다.

백왕은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다. 그야말로 예측 불가. 한 달 동안 쫓았던 이유가 있다.

그런 놈이 '이상한 녀석이다'라고 평했다면, 이는 놈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화의 관을 통과했다고?"

"별거 아니더군, 까악."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정말 별거였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굳이 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의 시련이 있었단 말인가?"

백왕이 턱을 쓸었다.

혼잣말이다.

혼자서 되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백왕. 그가 도전을 포기한 네 번째는 완성의 관이었다.

신화가 완성되는 단계. 헌데, 그 이상의 시련이 더 있었음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 그걸 대체 어떻게 깬 거지?"

백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도전한 신화의 관은, 깨라고 만들어놓은 게 아닌 괴이한 난이도였다.

세 단계의 시련을 마쳤으나 백왕은 확신했다. 네 번째의 '완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탑이 그렇게 안배해 놓은 것이라고.

그런데 눈앞의 시체 까마귀는 '완성'을 넘었다.

다섯 번째. 초월,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이룩해냈다.

"마지막 시련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

"맨입으로 알려달라, 까악?"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백왕이 나를 만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놈은 철저하게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놈일진대.

'신화의 관에 대해 미친 듯이 궁금해하고 있다.'

자신이 넘지 못한, 아예 있는지조차 몰랐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그를 이곳에 나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걸 3단계까지 간 백왕이 솔직히 더 대단하다.

나는 꼼수아닌 꼼수로 가능했다지만, 백왕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시련을 받았을테니.

'진짜 괴물이지.'

동레벨에 달하는 만 마리의 적과 싸우며, 단계를 올릴 때마다 엄청난 특성이 하나씩 추가된다. 그걸 세 단계나 클리어한 건 그나마 백왕이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을 바라나?"

"하나 남은 송곳니를 바란다면, 까악?"

내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부르르르르!

사주력 전원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순수한 분노다.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강하게 나갔나?

"음. 그건 곤란하군. 그런데 내 송곳니가 하나뿐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백왕은 실로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가면을 쓴 건 하나남은 송곳니를 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기사왕 빌헬름에게 뜯긴 송곳니를.

그러나 빌헬름과 사주력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절대로 내가 빌헬름인 걸 알게해선 안된다.'

나는 란돌프다. 철저히 란돌프여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백왕과 사주력은 이번에야말로 사력을 다해서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

"그걸 모를 수도 있나, 까악?"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말.

어정쩡하게 설명하는 것보단 차라리 강하게 나가는 게 낫다.

상상의 영역에 맡기면 제알아서 살을 붙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더 위험하고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게 되리라.

"흐음. 사주력이 내게 데려올만 하구나."

백왕은 가만히 시선을 겨눴다.

사주력들이 재단하지 못한 존재.

자신의 눈으로도 파악이 안 된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전혀 놀란 기색도, 흔들리는 눈치도, 그렇다고 여유가 없는 것조차 아니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빛.

자신의 송곳니 하나가 없는 것마저 맞췄다.

그의 가면 너머를 간파하는 건 메두사도 불가능한 일이건만.

'꿰뚫어보는자······.'

신화의 시련에서 끝을 본 자.

과연, 사주력 전원이 이해를 포기한 존재답다.

만약 처음 자신이 나타났을 때 놀라거나 반응을 보였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시체 까마귀는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었다.

심장의 박동은 평온하고 고요했으며, 동공이나 피부의 떨림도 있지 않았다.

'더 깊숙하게 들어가려면 본체로 변해야만 한다.'

백왕은 잠시 고민했다.

본체로 변신해서 스킬을 사용하면 더 깊은 심연까지 내다볼 수 있다.

그리하면 자신의 마력을 막고 있는 게 저 종의 격 자체인지, 또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의를 운운했다는 건 자신이 은연중 스킬을 사용한 것마저 읽었다는 뜻.

저 시체 까마귀는 스킬의 발동을 파악하는 재주를 지녔다.

게다가.

'신비를 파괴했다. 신비의 관에서 아예 신비를 파괴할 권능을 준 게다.'

시체 까마귀가 이무기의 신비를 파괴한 걸 백왕은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시 신비의 관에서 얻을 것일 터.

그것은 탑이 저 시체 까마귀를 '신비의 제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이겠나.

'종의 규격 자체가 나보다도 높다는 말이겠지.'

신비는 종의 규격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저 시체 까마귀의 종족값이 자신보다도, 누구보다도 높다는 의미다.

종족값이 높다는 게 강하다는 말과 같은 건 아니지만, 마지막 신화의 시련까지 완성했다면 결코 만만히 볼 놈은 아니다.

백왕은 지극히 강렬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

'······호승심이라.'

그건 바로 호승심이었다.

자신이 얻지 못한, 달성하지 못한 시련.

그것을 깨고 멀쩡히 자신의 앞에서 패기를 흩뿌리는 자.

몸이 달아오른다.

하지만, 느껴진 건 호승심만이 아니었으니.

'내가 지닌 신비 또한 두려워하고 있군.'

백왕은 자신의 신비와 완벽하게 합일 되어있다.

다른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연결성.

그것은 마치 피부처럼, 피부의 조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지니고 있는 신비가 저 시체 까마귀를 보자 경직된 채 경고를 보내는 중이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의 출현에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이런 적은 처음이다.

'실로 흥미롭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눈앞의 시체 까마귀가 확실하게 무언가를 지닌 존재라는 걸.

"이름이 무엇이냐?"

백왕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묻는 저의를 깨닫고, 나는 내심 주먹을 움켜쥐곤 말했다.

"란돌프다, 까악."

"나를 찾았다고 들었다. 왜지?"

"네가 이곳에 있는 이유와 같다, 까악."

"내가 크람델에 있는 이유 말이냐?"

"그래, 까악."

확신했다.

백왕은 크람델에 관심이 없다.

아니, 세상사 자체에 초탈해있다.

크람델이 무너지든 말든,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믿고 따르는 사주력에 때문에 신경 쓰는 척을 해줄 뿐.

그런 그가 지금 크람델에 있었다.

이윽고 백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 33번째 별, 너도 그걸 알아보려는 거였군."

"맞다, 까악."

"하지만 별에 대한 권한은 '별 수호자'들에게만 존재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별 수호자들에게 관여할 권한은 없다."

별 수호자.

그것은 별을 수호하는 강력한 괴물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백왕이라 할지라도 별 수호자들과는 아예 선이 그어진 모양이었다. 크람델에서도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크람델의 입구에서 보았듯, 일반적인 괴물들과 아예 취급이 다른 것 같긴 했다.

백왕이 다시 말했다.

"별 수호자들이 정확히 무엇을 찾고 있는 건지 너는 알 수 있단 건가?"

"알 수 있다, 까악."

오직 나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드라무트.

놈도 여기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빌헬름이 가졌던 다섯 개의 별. 그 별의 수호자들도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곳은 유일 등급의 신비로 막혀있다. 그런데도?"

"쉬운 일이다, 까악."

신비에 의해 막혀있다니.

백왕도 찾아보려다가 포기한 게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잘됐다.

"······ 좋다. 그럼 임시로 다섯 번째 주력의 자리를 내어주마. 크람델에서 활동하기 보다 편해질 것이다."

"백왕이시여······!"

사주력들이 깜짝 놀라서 들고 일어났다.

이에 백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내 자리를 내어줄 순 없지 않나?"

"아,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놈에게 오주력의 자리라니, 안 될 말씀입니다!"

대토룡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역시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 밑에 들어가야하는 거지, 까악?"

"너같이 위험한 존재를 그냥 내보낼 순 없으니 말이다."

오해하지 말라는 듯 백왕이 이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주력은 내 밑의 자리가 아니라 나와 대등한 자격이다. 저들은 그저 나를 존중하는 것일 뿐, 실질적으로 크람델을 이끄는 건 내가 아니라 주력이니."

동등한 자격이라는 것.

하지만 그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나 같은 자를.

싸우지 않으려면 감투라도 씌워야한다는 의미일 터.

여기엔 내가 거부하면 전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쐐기를 박는 것뿐.

"확실히. 너와 내가 싸우면 크람델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겠지, 까악."

내가 말하자, 모든 사주력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왕

미치도록 오만하다.

감히 백왕의 앞에서 저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사지를 찢어죽여도 모자란 놈이었다.

제아무리 신화의 관을 통과했다고는 하나, 고작 그러한 업적 하나로 백왕과 대등해질 수는 없는 노릇.

백왕이 이룩한 신화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승부수는 던졌다.'

이제는 진짜 돌이킬 수 없다.

손과 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허세지만 백왕 역시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이미 한 번 무시했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으니까.

사주력도, 그리고 백왕도, 모두 빌헬름에게 죽기보다 더한 수모를 겪었으므로.

백왕이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작게 미소지었다.

두 시선이 허공에 부딪히고 격렬하게 튀며 스파크를 내는 듯했다.

"재밌군.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겠지."

이윽고 백왕이 수긍하자 사주력들의 시선이 다시 바뀌었다.

고작 시체 까마귀에게 백왕이 저런 말을 내뱉다니!

백왕은 절대로 허언하지 않는 절대자다.

그가 그렇게 보았다면, 그게 맞을 터였다.

말인 즉.

'백왕은 시체 까마귀를 자신과 동격으로 보고 있다······.'

사주력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생각이 들이찼다.

동격.

단순한 시체 까마귀가 아닌, 진짜 초월종이라고.

"나도 소란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까악."

······여기선 한 발 물러설 때다.

백왕이 양보했다.

아마도 최대치의 양보를.

만약 한 발 더 나아가면,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면 아마 시작된 줄도 모르고 죽는 건 나일 터.

이만한 공방이면 충분하다.

더 딛는 건 연기에 잠식되어 늪에 빠지는 길이었다.

"대신 '별 수호자'들이 찾고 있는 것, 저 궁극의 신비 너머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그게 무엇인지 내게 알려줄 수 있나?"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 까악?"

"그 이상은 나도 욕심부리지 않는다. 다만, 궁금할 뿐이다. 또 다른 별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단순히 그뿐이었다.

궁금증.

그 하나로 그는 내게 감투를 씌워주었다.

사소한 분란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깔끔하게 해결된 편이었다.

"란돌프가 오주력이 되는데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백왕이 사주력을 둘러보았다.

"반대합니다."

"저 역시."

대토룡과 궁기가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가 두표.

"그럼 찬성하는자는?"

"아무래도 같은 계열이다보니."

"······."

사왕과 메두사는 찬성하고 나섰다.

같은 계열.

시체를 다루는 자라는 의미일 터였다.

그리고 메두사는, 가까이서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찬성한 것이겠고.

"찬성 둘에 반대 둘이라."

백왕은 재밌다는 듯 한차례 크게 웃었다.

하기야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일급 신비까지 파괴할 수 있는 존재라면, 적으로 돌리기엔 아쉽지.'

솔직히 반신반의였다.

정말 저 시체 까마귀가 유일 등급의 신비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유일이라 이름 붙은 모든 건 백왕도 쉬이 여길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실패하거든 딱 거기까지다.

신비의 끝을 보고서도 그게 불가능하다면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정말로 시체 까마귀가 유일등급의 신비까지 파괴할 수 있는 게 확실시 된다면, 백왕으로선 그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크람델이 사라질 거라는 그가 내뱉은 말이 허언은 아니라는 증거일 테니까.

거기에 꽉막힌 별 수호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자를 가까이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지켜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결정났군."

백왕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로써 찬성 셋, 반대 둘.

"란돌프. 그대는 지금부터 오주력이다."

······그렇게.

정말 뜬금없이, 나는 오주력이 되었다.

크람델의 실질적인 지배자들 중 하나.

괴물들의 정점에 선, 시체 까마귀가.

*

백왕이 떠나간 자리.

사주력들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오주력이여. 한동안은 내 성에서 같이 지내도록하지. 그대를 위한 성은 따로 건축해야할 듯싶으니."

그때 사왕이 다가왔다.

죽은자들의 왕.

네크로벨리의 주인이자,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놈.

거대한 해골로 이루어진 거체. 거인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순도높은 마력이 느껴진다.

검은색의 로브는 척 보기에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그는 내가 오주력이 되는데 찬성표를 던졌다.

적어도 당장은 '적'이 아니라는 증거.

"사양하지 않겠다, 까악."

"음. 내일 아침에 새로운 주력의 탄생을 발표할 거다. 그때까지 그대는 손님의 신분이니, 내가 수행하도록 하겠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나?"

사왕의 에스코트라니.

이건 좀 귀했다.

'마침 잘됐군.'

처음부터 나는 사왕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왕이 친근한 척 굴어준다면 더 깊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죽은 자들의 왕이라면 그에 준하는 '실험'도 하고 있겠지, 까악?"

"당연하다. 시체의 실험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의미니까."

"그럼 그대의 '실험실'을 한 번 보고싶군, 까악."

"······ 환영한다."

사왕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을 다루는 자. 그에 준하는 실험은 다른 주력들도 혀를 내두를만큼 '악취미'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감해줄 수 있는 같은 계열의 강자는 없었다.

너무 약한 놈들은 이해하는 척을 할 뿐이고, 강한 놈들도 자신의 예술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놈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과연 이 시체까마귀는 어떨지.

"그럼, 같이 가지. 나의 안식처에."

*

백왕전 앞에서 아이작과 이자벨라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친······ 백왕이라니.'

특히 아이작은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마 백왕을 직접 알현하러 갈 줄이야!

이곳 크람델에 있는 괴물 대다수가 평생 백왕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는다. 크람델에 1년간 있었지만 아이작 역시 백왕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고작 이 짧은 시간만에, 성각자는 백왕을 직접 보러 들어갔다.

'꿈이겠지?'

뺨을 잡아당기자 알싸한 고통이 전해진다.

이 아픔이 꿈일 리는 없으니 현실일 것이다.

온천에서 성각자를 만나, 사주력과 함께 백왕전까지 오게 된 이 모든 게.

'······지금이라도 튀어야 한다. 백왕을 만나고 살아 돌아올 리가 없어.'

현실이라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주력은 몰라도 백왕은 냉정한 괴물이다.

넘을 수 없는 벽.

심연의 지배자들도 피하는 게 백왕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하지만 진짜 미친 일은 이 다음에 일어났다.

"······!"

아이작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백왕전을 나서는 두 인영이 보인 탓이다.

'사, 사왕!'

사왕!

사주력 중 하나이나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며 무서운 자다.

영혼과 시체를 모두 빼앗아 종으로 부리는 괴물 중의 괴물.

한 번 잡히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 전해지는 그 괴물이, 성각자와 함께 있었다.

"내 안식처를 보면 그대도 만족할 것이다."

"기대되는군, 까악."

"기대해도 좋다."

······ 그것도 왠지 모르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 느낌으로.

역시 꿈이다.

현실이라면 저 둘이 저렇게 친근하게 길을 걸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성각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둘도 따라와라, 까악."

······ 빌어먹을.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대격변 탈리스만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얌전히 크람델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것도 문득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자신은 폭풍의 눈에 들어와 버렸다. 대격변 탈리스만을 받는 순간, 자신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여, 아이작은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내일 뜨는 태양을 볼 수 있기를.

*

사왕의 실험실.

그의 성 지하에 존재하는 비밀구역.

그곳에 들어선 아이작은 그 즉시 코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웁······!"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냄새도 냄새지만.

'살아생전 처음 보는 악질적인 취미다.'

온갖 시체가 온갖 형태로 모여있었다.

천장에 걸려도 있고, 벽에 꿰여도 있고, 바닥에 널려있기도 했다.

감정표현이 없는 이자벨라도 은은하게 이맛살을 구길 정도였다.

끔찍한 수준을 넘어섰다.

"멋지군, 까악."

······ 저게 멋지다니?

그런데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성각자의 말투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 보이나?"

"예술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까악."

"하하! 역시 같은 계열이라 그런지 볼 줄 아는군. 특별히 원하는 작품이 있다면 하나 내어주지."

작품?

'이게 작품이라고?'

이 시체들이?

아이작은 도저히 저 둘의 예술 감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에 공감하며 웃고 떠드는 건지도.

그윽.

그으으윽.

게다가 시체인 줄 알았던 것들은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

살아있는 것이다.

'언데드 소굴이군.'

아이작이 살면서 본 끔찍한 장면 중 단연코 첫 번째였다.

대체 성각자는 이곳을 왜 온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서 이자벨라를 쳐다보자, 이자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얌전히 따르라는 것이다.

그때, 성각자가 실험실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것도 줄 수 있나, 까악?"

순간, 사왕이 멈춰섰다.

여태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마치 삭제되다시피 증발했다.

란돌프가 가리킨 것.

시체 까마귀가 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은.

사왕이 가장 아끼는 보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그대는 진짜로 볼 줄 아는 모양이로군."

사왕의 말투가 사뭇 진지해졌다.

여태까지는 떠보는 연기였다는 듯이 진중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시체의 예술가들도 자신의 예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는 척을 하거나, 두려움에 억지로 맞출 뿐.

그리고 그런 자들은 즉시 눈을 도려냈다.

눈앞에 환상적인 예술을 두고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죄악이다.

제대로 예술을 볼 수도 없는 놈들이 눈을 달아서 어디에다가 쓰겠는가.

시체 까마귀도 당연히 그런 부류 중 하나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백왕에게 인정됐다고 해도, 예술은 아예 다른 영역이었으니까.

'설마 단번에 저걸 골라낼 줄이야.'

처음부터 다른 건 관심도 없었다.

란돌프는 그가 가장 아끼는 예술 작품을 골라냈다.

볼 수 있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시체 까마귀는 정말로 자신의 예술을 알아본 것이다. 예술을 아는 것이었다.

벽에 묶여있는 시체.

인간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목 위에 얼굴이 없었다.

허나 저건 자신이 만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실험체였다.

외관은 평범하나 사왕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저것은 내가 만든 최고의 예술이다. 한때 엘드 리치였던 인간을 잡아서 만들어냈지. 그 가공할 저주를 품은 육신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재료였으니."

사왕의 자랑스럽기 그지 없는 말투.

쿵! 쿵! 쿵!

그때였다.

진동과 함께 시체의 주변으로 갑옷이 입혀진다.

엄청난 저주와 마력을 발산하며 그 존재는 봉인구를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크흐흐. 역시 내 최고의 걸작이다. 군마의 봉인구마저 깨트리려 할 줄이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한발 늦었군.'

앤드류 사제의 딸.

저 봉인구에 묶인 시체가 바로 안다사르다.

······ 안다사르는 이미 목 잘린 언데드, 듀라한이 되어있었다.

불가침

2년 전, 백왕 사냥을 나섰을 때.

그때 이미 나는 사왕이 안다사르를 실험체로 잡아들인 걸 알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특수한 이벤트 같은 것인 줄 알았지.'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의해 엘드 리치가 된 안다사르가, 사왕의 실험체가 되어 특별한 이벤트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사주력을 무릎 꿇리고 백왕을 유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온 정신은 백왕에게 향해 있었고 앤드류 사제도 딸을 찾아달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얼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이 없다.

듀라한. 목 잘린 기사라고 불리는 언데드. 사왕에 의해 강화되었으니 그 강력함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문제는 목 위의 부위였다.

쿵! 쿵! 쿵!

봉인구를 부수고 속박을 풀려는 듯 안다사르의 육체가 몸부림을 쳤다.

"보다시피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았다. 나 역시 내뱉은 말이 있으나, 미완성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왕은 기꺼이 선물을 주려고 했다.

안목이 있는 같은 예술가끼리의 인사 선물로써.

하지만 이 듀라한은 미완성품이었다.

"머리는 어디 갔지, 까악?"

"나도 모른다."

"누가 몰래 가져가기라도 했다는 건가, 까악?"

"가능성은 있겠군. 정확히 1년 전에 사라졌으니."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려 사왕의 실험실이다.

그의 성 아래에 위치한.

침입자를 죽이는 수많은 도구와 마법구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이런 곳을 감히 누가 들어와서, 그것도 안다사르의 얼굴을 훔쳐간다는 것인가.

"듀라한의 몸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찾지 않나, 까악?"

"시도해봤다만 번번히 폭주할 뿐이었다."

"내가 저 몸을 안정화 시킬 수 있다면, 까악?"

"그럼 기꺼이 내어주지."

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냥 내어주는 건 아니다.

자신도 해내지 못한 몸체의 안정화를 내가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이걸 시체 예술가의 대결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왕의 저 해골눈에서 왠지모를 흥미진진함이 느껴진다.

"내 예술은 혼자 행해야 한다, 까악."

"혼자 하는 타입인가?"

"그렇다, 까악."

"아쉽군. 지켜보고 싶었는데."

사왕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저 몸체를 안정화시키는 걸 사왕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내 가짜 예술을 진짜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은 얼마나 주면 되나? 내일 발표까지는 당연히 힘들테고, 한 1년쯤······."

"10분, 까악."

즉답하자 사왕의 멈칫했다.

"······ 10분? 장난이 심하군."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1년간 안정화 작업을 펼쳤으나 실패하였다. 그것을 시체 까마귀가 고작 10분안에 해결을 보겠다고 말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10분이면 충분하다, 까악."

"흠······ 그 자신감이 맞기를 바라지."

오만이 도를 넘어섰다.

10분 뒤에 실패한 시체 까마귀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리라.

사왕은 어깨를 으쓱하며 실험실을 나섰다.

*

정확히 10분 뒤.

"······ 어떻게 한 거냐, 대체······."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사왕이 안정화 된 안다사르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왕은 눈이 없는데도 당황한 게 느껴질 정도다.

그럴 수밖에.

미칠 듯이 발광하던 신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기 그지없다.

봉인구를 해제한 뒤에도 멀쩡히 서있었다.

자신이 1년이 걸려서 실패한 일.

그걸 고작 10분만에 해냈다.

말이 10분이지, 사실상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알려다오."

"예술의 기법을 묻는 건 예술가 사이의 금기다, 까악."

"믿을 수가 없다······!"

인정하기도, 믿기도 어려웠다.

시체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사왕 역시 시체로 예술을 행하는 자.

하지만 자신의 기술이 더 뛰어나다고 자신했다.

아무리 초월종이라고 해도, 예술의 영역까지 자신을 넘어설 수는 없으리라 여겼다.

이 분야에 있어서 최고의 실력가가 바로 사왕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못한 걸 시체 까마귀가 보란 듯이 해냈다. 그것도 고작 10분 만에.

지난 1년이란 시간이 주마등처럼 사왕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쓰려고 했다만.'

사왕이 경악하고 있을 때, 나는 내심 아쉬워했다.

안다사르의 육체가 불안정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카오 상태였다.'

정확한 명칭은 카오틱(Chaotic).

게이머들은 일정수준으로 악업을 쌓으면 카오 상태가 된다.

워프를 이용할 수 없거나, 경비대에게 쫓기거나, npc들이 혐오하며 퀘스트를 주지 않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외적인 반응 말고도, 카오 상태가 되면 캐릭터 자체에도 디버프가 걸린다.

'카오 상태에 빠지면 광란에 걸리지.'

광란(狂亂).

한 마디로 미치는 것이다.

게임상에선 특정 능력치가 소폭 떨어지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다. 진짜로 광란에 걸려 폭주하고 있었다.

이 카오 상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선행으로 명성을 쌓는 것.

그리고 면죄부.

전자는 오래걸리지만, 후자는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앤드류 사제가 준 면죄부는 내가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계획은 언제든 바뀌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한 장 더 있으니까.'

앤드류 사제의 면죄부는 아직 한 장이 남았다.

그걸 내가 가지면 그만.

딸을 구하는데 썼으니 달라고 하면 거절은 못할 것이다.

'인간과 달리 괴물들은 카오 상태에 무지한 모양이군.'

하기야 괴물들이 악업을 쌓는다고 카오 상태가 되는 것도 이상했다.

오히려 명성이 올라가면 모를까.

게다가 안다사르는 본래 인간이었으니 그 구조가 아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의아한 건 왜 카오 상태야 빠졌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죽었는데 왜 카오가 된 거지?'

이미 안다사르는 엘드리치가 되었을 때 죽어서 언데드가 됐다.

정화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시체인 건 변함이 없었다.

언데드가 악업을 쌓는다고 카오 상태가 되는 건 여러모로 이상한 일.

이건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약속대로 이 예술품은 내가 받아가겠다, 까악."

"······ 정말로 무슨 수를 썼는지 알려줄 순 없는 건가?"

"생각해보겠다, 까악."

"······! 부디 긍정적인 방향이면 좋겠군!"

사왕은 시체 예술에 진심인 놈이었다.

그래도 꼴에 통하는 게 있다고 여긴 모양.

이 악취미와 친하게 지내기는 싫지만, 사주력 중에 그나마 우호적인 것 같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적으로 돌리면 가장 피곤할 스타일이다.

겉으로라도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나는 듀라한 안다사르의 몸에 말했다.

"네 얼굴이 있는 곳으로 향하거라, 까악."

*

듀라한의 몸은 계속해서 자신의 얼굴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얼굴을 찾지는 못했다.

"저곳은 별 수호자들이 모여있는 온천이다."

별 수호자들이 모여있는 온천.

크람델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큰 장소.

그곳으로 계속 듀라한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 수호자들은 온천을 조사하고 있다. 아마도 여신의 눈물이 섞이기 시작한 1년 전의 일 때문이겠지."

1년 전.

크람델의 본격적인 변화의 바람이 분 시기.

온천이 번화하고 괴물들이 안정화한 게 그때부터였다.

"오주력이여. 별 수호자들과 우리는 불가침의 관계다. 괜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왜냐, 까악?"

사주력과 백왕.

하늘 무서울 줄 몰라도 되는 격의 괴물들이, 별 수호자들에게 쩔쩔매는 이유를 모르겠다.

"서로 엮여봤자 절대로 좋은 꼴을 못 보니, 당연한 것이다."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은 듯 보인다.

별 수호자와 크람델은 불가침의 불문율이 있다.

하기야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별 수호자라는, 결국 별의 주인인 인간과 엮일 수밖에 없다.

설령 그들이 인간을 돕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주력의 입장에선 별 수호자는 배신자 같은 느낌일 수도 있겠다.

허나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있었다.

"불가침이라면서 크람델에 별 수호자들이 들어오는 건 괜찮은 건가, 까악?"

"별과 여신에 관련된 것은 그들에게 절대적이다. 우리도 그 두 가지는 양보할 수밖에 없다."

양보라.

사왕이 그 단어를 꺼내니 여간 안 어울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직 나는 공식적으로 오주력이 아니지 않느냐, 까악."

오주력이 아닌 나에겐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걸.

공식발표가 있기 전까지 나는 오주력이 아니라 크람델에 들른 손님일 뿐이었다.

사왕이 난감해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아니 될 일이다. 별 수호자들과 엮여서 문제가 생겨도 그저 '방문자'라면 우리는 도와줄 수 없다."

오주력이라면 도와주겠으나, 오주력이 아니라면 돕지 못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도움은 필요 없다, 까악."

말마따나 정말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

나한테는 비장의 수가 있으니까.

여전히 의아해하는 사왕을 뒤로한 채 나는 크람델의 가장 큰 여관으로 발을 옮겼다.

*

별 수호자.

그들은 대부분 신화종, 혹은 환상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이상의 취급을 받는다.

별을 수호하는 수호자는 그 이상의 힘과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으므로, 일반적인 괴물들과는 궤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래라면 그들은 별의 수호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모이는 건 수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

그리고 현재, 열이 넘는 별 수호자들이 크람델의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33번 째 별이 확실하군."

"여신 '레아'의 몸은 아니다. 그녀의 몸은 32조각으로 흩어졌어. 그럼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피나······."

"쌍둥이 여신인 그녀가?"

"가능성은 높겠지."

"확실히 확인하려면 저 '너머'를 봐야할진대."

"유일 등급의 신비로 막혀있다. 저만한 신비를 사용해 누군가가 고의로 막아둔 것인진 아직 알아볼 일이야."

"시간이 걸리겠군."

별 수호자들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드라무트는 슬쩍 온천을 나왔다.

옛 왕이라고 불리는 드라무트지만, 이곳에 모인 별 수호자들은 그에게 있어서도 '벽'같은 존재들이었으니.

드라무트는 이중 가장 약하고, 어린 막내여서 대화에 쉽게 낄 수가 없다.

끼고 싶어도 아는 게 있어야 끼는데 아는 것도 없다.

보아라.

자신이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지 않은가.

저들 별 수호자들이 드라무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증거였다.

한숨을 내쉰 드라무트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 뭐냐, 넌? 시체 까마귀?"

방에 들어선 순간 드라무트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웬 시체 까마귀가 자신의 방에 있었다.

별 수호자들의 방은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할 텐데도.

어디서 잘못 들어온 걸까?

"오랜만이다 드라무트, 까악."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냉큼 꺼지거라. 장난칠 기분이 아니니."

캬아아아!

입을 벌려, 먹는 시늉을 했다.

처음 보는 시체 까마귀.

저딴 것과 자신이 구면일 리가 없지 않은가.

기분은 안 좋지만, 사고를 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크람델에서 문제를 일으켰다간 괜히 혼나기만 할 테니까.

그러니 도망가라.

오줌을 지리며 도망간다면 살려는 주겠다.

그러다가 문득 드라무트가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시체 까마귀 따위가, 지고한 별 수호자인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쩌어어억!

시체 까마귀가 가슴팍의 핵을 스스로 빼자, 전신이 울퉁불퉁 뭉개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신비 파괴

쩌어어억!

시체 까마귀가 가슴팍의 핵을 스스로 빼자, 전신이 울퉁불퉁 뭉개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녹아내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겁을 너무 먹어서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인가?'

이 일련의 행동을 드라무트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물이 스스로 핵을 떼어내다니.

핵을 잃은 마물은 죽는다.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였다.

하기야 제정신이었다면 별 수호자의 침실에 발을 들였겠나.

"음?"

그러나 의아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날개가 빠지고, 살과 뼈가 녹아내리자, 그 안에서 웬 인간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어딘가 굉장히 낯이 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넌······!"

"모습이 조금 변했기로서니 주인을 몰라보다니, 그러고도 네가 나의 충실한 종이라고 할 수 있나?"

"네, 네가 여길 어찌······!"

경악을 넘어선 불신.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인간은 분명 현실이었다.

드라무트의 전신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사막의 성지.

그곳의 가장 깊은 영역에 존재하는 별이 잠든 산.

그 산과 별을 수호하는 게 드라무트의 역할이다.

본래 별의 주인은 빌헬름이었으나, 빌헬름은 죽고 별은 다시 산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영역에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바로 란돌프였다.

자격이 한참 부족함에도 별의 주인이 된 정체불명의 인간!

"게다가 방금 그 모습은 분명······ 시체 까마귀였을 텐데."

분명히, 시체 까마귀였다.

외관도, 냄새도, 그 존재력조차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체 까마귀가 란돌프로 변했다.

아니, 란돌프가 시체 까마귀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체 까마귀일 때는 분명히 별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헌데 란돌프로 변하자, 자신이 수호하는 별의 자취가 느껴졌다.

단순히 가죽을 뒤집어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외에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또한, 녹은 깃털과 살덩이들은 꺼낸 핵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원래대로 돌아오면 시체 까마귀 왕의 스킬은 사용하질 못하는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핵을 떼어내는 것만으로 완전무결하게 '스위칭' 되었다.

시체 까마귀의 왕으로 있으면 장비를 착용하지 못하는 대신 관련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반대로 란돌프로 돌아오면 시체 까마귀의 스킬을 사용 못 하는 대신 장비를 착용할 수 있었다.

게임으로 치면 변신, 아바타, 혹은 코스튬 같은 느낌.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으니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지금은 그보다 드라무트가 더 중요했다.

"드라무트. 네가 여기 있는 이유는 33번째 별 때문이겠지?"

"······ 인간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조금 전에 보았던 내 모습이 인간 같던가?"

드라무트가 입을 닫았다.

누가 봐도 마물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견이 있을 수가 없는 완벽한.

"······ 지금은 인간이지 않느냐."

"까다로운 놈이로군."

꿀꺽!

다시 핵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전신에 뼈와 살이 입혀지고 깃털이 돋아났다.

순식간에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된 나를 보며 드라무트가 움찔거렸다.

"어, 어떻게? 인간이 어떻게 마물의 모습을?"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다, 까악."

"인간도 마물도 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고······!"

단순한 변장 수준이 아니라, 그냥 마물 그 자체가 됐다.

고룡이 폴리모프를 해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순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위대한 마법사라도 완벽한 마물이 될 순 없었다.

그저 흉내를 낼 뿐이지.

처음부터 모르고 보면 착각할 수도 있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변한다면 그 미묘한 이질감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별이 안 된다. 한 치의 이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의 법칙과도 같은 것을 눈앞의 남자가 깨트린 것이다.

"드라무트, 까악. 알고 있는 걸 전부 불거라, 까악."

"······ 까악거리면서 명령하지 마라."

차라리 인간인 게 낫다.

시체 까마귀가 까악대며 명령하는 꼴을 보느니, 재수는 없어도 인간의 모습으로 말을 하는 게 모멸감은 덜했으니까.

*

드라무트는 알고 있는 걸 전부 토해냈다.

별 수호자들이 크람델에 모인 이유.

그 이유는 33번째 별 때문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크람델의 변화는 1년 전부터 존재했고, 별 수호자들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곳을 찾은 건 아예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곳에 있는 별은 기존 대륙에 존재했던 32개의 별과는 완전히 다른 별이다."

"여신의 시체가 별이 된 것 아닌가? 아예 다른 별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을 텐데?"

당연한 의문이었다.

애초에 죽은 여신의 시체를 별이라고 돌려 부른 것뿐.

그렇다면 여신의 신체가 아닌 것은 별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32개의 별이 된 여신은 여신 레아다. 하지만 그녀에겐 쌍둥이 동생 피나가 있었다."

"어디서 본 설정 같군."

"설정?"

"아니다. 계속 말해봐라."

판게니아의 태초에 관련된 설정엔 별 흥미가 없었다.

대충 흘겨 넘기긴 했지만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기는 했다.

드라무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여신 레아는 땅을 만들고 여신 피나는 하늘을 만들었다. 그러나 태초의 '멸망'과의 전쟁에서 레아는 죽었지. 하지만 여신 레아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몸을 32개로 나누어 대륙에 흩뿌려놓았다."

그게 바로 32개의 별이다.

인간이 초월하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것.

게이머들, 플레이어들은 그 32개의 별을 두고 경쟁해왔다.

자격을 갖춰도 별을 찾지 못하거나, 남은 별이 없다면 초월할 수 없다.

하지만 별을 가지고 초월한 자가 죽으면 별은 다시 대륙으로 떨어진다.

실제로 '초월자 사냥'이 심심찮게 이루어지는 이유였다. 빌헬름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 어중간한 초월자는 거대세력의 먹이가 되곤 했으니까.

'그래서 랭커일수록 세력이 중요했지.'

게이머들이 연합하고 뭉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게임을 진행한 나는 그런 연합들과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몇몇 초월했던 캐릭터들이 그들에 의해 죽기도 했고.

드라무트가 계속 말했다.

"대륙 전체가 심연에 먹히기 전에 피나는 남아있는 대륙을 떠올렸다. 잠식되지 않은 땅은 서로 끊어졌으나, '워프'에 의해 연결될 수 있었지. 모두 여신 피나의 덕분이다."

대륙이 끊겨져있는 이유.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워프를 타야만 하는 세계관의 설정이었다.

실제로 지금 대륙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모두 하늘에 떠 있다.

본래의 지상에는 심연이 자리하고 있고.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그곳이 마로 '마계'였다.

쌍둥이여신 피나가 아니었다면 멸망에 의해 모든 대륙이 멸망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종합해보면 그 고마운 여신 피나가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

"······ 모르겠다. 그래서 별 수호자들이 급히 모인 거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거지?"

"별의 주변으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장막의 '신비'가 펼쳐져 있다."

백왕도 이야기했다.

유일 등급의 신비가 펼쳐져 있다고.

그래서 자신이 안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고.

"그 신비를 없애기만 하면 되나?"

"신비를 어떻게 없앤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없앨 수 있더라도 신중해야 한다. 신비를 펼쳐놓았다는 건 어떤 존재가 별의 근처에 있다는 뜻이니까."

신비란 증명이다.

길가에 치이는 돌멩이가 신비를 가질 순 없다.

살아있는 것.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에게만 신비가 부여된다.

유일 등급의 신비가 펼쳐져 있다면, 그만큼 강력한 존재가 그 안에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별의 근처에서 그만한 신비를 펼쳐놓았다면, 별 수호자일 수도 있겠군."

"······ 가능성은 적다."

대강 알아들었다.

별의 근처를 가로막은 유일 등급의 신비에 가로막혀 별 수호자들도 전전긍긍하고 있다는걸.

더불어 안에 어떤 존재가 자리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도.

'아는 게 없군.'

이래서야 나랑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내가 별 수호자들보다 나은 건 분명히 있었다.

"드라무트. 나는 그 '신비'를 파괴할 수 있다."

"하하! 신비는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걸 어찌 파괴한다는 것이냐?"

농담도 적당히 하라는 듯 드라무트가 껄껄 웃어댔다.

명백한 무시다.

"하물며 유일 등급의 신비다. 이곳 크람델의 주인인 백왕도, 가장 강한 별 수호자도 포기한 일을, 네가?"

"신비의 관 앞에서 내가 이무기의 신비를 없앴다는 말은 못 들었나?"

"제법 시끌벅쩍하긴 했지. ······잠깐. 그게 너라고?"

일순간 드라무트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아무리 크람델의 일에 관심없는 별 수호자들이라고 해도, 한참이나 시끄러웠던 신비의 관에 대한 이야기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웬 시체까마귀 하나가 이무기를 무릎 꿇리고 사주력과 함께 백왕을 만나러 갔다는 게······."

"나다."

"······."

드라무트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소란의 주인공이 시체 까마귀였다.

이무기의 전설 등급 신비를 파괴했다는 이야기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별 수호자들 모두가 우스갯소리로 치부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당사자가 지금 눈앞에 있다.

자신이 수호하는 별의 주인, 란돌프.

놈은 시체 까마귀인 척 신비의 관에 들어가 크람델을 뒤집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33번 째 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 진짜로 없앨 수 있나?"

"당연."

즉답.

드라무트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정체를 모를 이상한 놈이었다. 이상한 놈이지만 생각해보면 처음 별을 가져갈 때도 아무런 시련없이 여신에게 선택되지 않았던가.

자격 없는 자가 별에 손을 대면 전신이 타버리기 마련인데, 란돌프는 그저 손을 대자 별의 주인이 됐다.

만에 하나 정말로 란돌프가 저 장막을 없앨 수 있다면, 이건 대사건이다.

'내 위상 또한 높아지겠지.'

별 수호자들 사이에서 찬밥신세인 자신의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할 건 당연지사.

가장 강한 별 수호자도 해내지 못한 일을, 드라무트가 주도하며 끝내는 것이다.

문제는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였다.

"장막의 근처에 다가가면 별 수호자들이 알아차릴 것이다. 몰래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모든 별수호자가 보든 앞에서 행해야한다. 다만······ 실패하는 순간 죽을 각오를 해야할 거다."

별 수호자들은 여신과 별에 관련된 모든 것에 진심이다.

허락받지 않은 이가 별의 근처에 다가가는 걸 결코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만에 하나 허락한다고 해도, 실패할 경우 목숨을 담보로 잡을 것이었다.

"별 일 아니군."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드라무트는 더욱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장막 앞에 데려다놓는 일뿐이다. 네 목숨까지 지켜줄 순 없다."

"그거면 충분하다."

역시 드라무트를 찾아오는 게 정답이었다.

멋대로 갔다간 몰려드는 별 수호자들에게 그대로 죽을 뻔했다.

백왕이 다녀간 것도 아는 걸 보면, 별의 근처로 몰래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듯 보였으니.

"좋다. 기다려라."

드라무트가 방을 나섰다.

다른 별수호자들을 설득하러 나간 것이다.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놔야겠다.

'백성전의 성좌들. 그들이 직접 내건 보상.'

메인 퀘스트 5를 클리어하며 얻은 보상목록.

나는 아직 보상을 선택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성좌들. 그들을 위주로 살펴봐야겠다.'

우호적이었던 만큼 쓸모있는 보상을 내걸었을 확률도 높을 테니.

500점이라는 압도적인 점수를 이룩하며 나온 보상이다.

그 하나하나가 하늘과 땅을 울릴 보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내가 쓸 수 없으면 쓰레기와 같았다.

아무런 생각없이 골랐다간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시계태엽의 성좌의 모래시계"

"모험의 성좌의 반지"

"행운의 성좌의 네잎클로버"

"전투의 성좌의 창"

"영월의 성좌의 갑옷"

"연금술의 성좌의 발명품"

"이름 없는 성좌의 머리카락"

"대장장이 성좌의 무기도면"

······.

보상 목록을 띄운 이후, 나는 신중하게 성좌들이 내건 목록 중 하나를 선택했다.

*

온천의 지하.

온천수가 흐르는 지하 땅굴에, 광범위한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저 시체 까마귀가 정말 '신비'를 없앨 수 있다는 건가?"

"허언이라면 드라무트, 너에게도 책임이 따를 것이다."

열에 달하는 별 수호자들도 모여있었다.

그들이 못마땅해하며 바라보는 인영은 단 하나.

시체 까마귀의 왕.

장막 앞에 선 시체 까마귀의 왕이 정말로 '유일 등급'의 신비를 없앨 수 있는 것인지 모두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별 수호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 백왕과 사주력."

"네놈들이 이곳에는 왜?"

별 수호자들이 더욱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왕과 사주력이 모두 자리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백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땅에 내가 발을 딛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한 번은 봐줬다만, '별'의 근처에 다시 얼씬거리면 전쟁이라고 했을텐데?"

가장 강한 별 수호자 '멸악의 거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거인족이며, 거인족은 여신의 수호를 자처하는 지상 최강의 종족이었다.

"그냥 구경이 하고싶을 뿐이다. 이조차 마음에 안 든다면 피를 볼 수밖에."

허나 백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 시체 까마귀가, 정말로 '유일 등급'의 신비를 파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오주력의 발표를 하기도 전에 처리하려 들 줄은 몰랐다만.'

그 행동력 하나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별 수호자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역시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역시 신비의 파괴다.

유일 등급.

백왕도, 다른 별 수호자들도 저 신비에 막혀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흠."

······그리고 그들의 시선 앞에서, 나는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 펼쳐진건 확실히 신비가 맞았다.

문제는 신비가 내게 보여주는 문구였다.

[제 1의 벽(유일 등급 신비)]

[판게니아 붕괴까지 9.96%]

[첫 번째 '차원 균열' 시작까지 0.04%]

[붕괴가 10%에 다다르면 '제 1의 벽'이 소멸됩니다.]

['제 1의 벽' 소멸 시 지구와 이어지는 '첫 번째 차원 균열'이 생성됩니다.]

['메인 퀘스트 ???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가 곧 시작됩니다.]

동시에, 장막 안의 무언가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별이었다.

검게 물든 별을 손에 쥔 차원 균열의 왕!

그리고 차원 균열의 왕이 이끄는 수많은 악몽들이 장막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 ???

다른 놈들은 저게 안 보이는 건가?

신비에 대한 설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장막 안에 있는 악몽들의 숫자는 이곳 크람델에 모인 괴물들의 숫자보다 많았다.

하물며 검은 별을 든 '차원 균열의 왕'은 확연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나만 보이는 모양이군.'

봤다면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나를 구경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내가 플레이어여서인지는 몰라도 저 내용과 신비 안의 괴물은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제 1의 벽.

'저게 첫 번째 차원균열.'

붕괴율이 10%를 달성하면 제 1의 벽이 소멸되고, 차원균열이 열리며 지구로 향한다는 말.

처음 판게니아에 소환되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강조하던 '균열'이 바로 저것인가 싶었다.

본격적인 침략과 침식의 시작.

'왜 크람델 지하에 있는 거지?'

저많은 악몽들이 왜 하필 크람델에 있는 걸까.

지하온천수에 여신의 눈물이 흐르게 만든 건 틀림없이 별이다.

검게 물든 저 별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온천수를 적셔 크람델을 부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저 별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아이작을 만나면서 온천수에 들어갔을 때.

<'눈 먼 여신의 손'이 당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눈 먼 여신의 손이 나를 찾는다며 온천수를 폭발시켰다.

의아한 일이다.

여신과 딱히 친하게 지낸 기억은 없었다.

5성급으로 초월한 빌헬름이야 별을 다섯 개나 가졌으니 '여신의 기사'라고 불렸을뿐이지 따로 접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되자 묘하게 여신이 나한테 집착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면 저 별은 나와 관계된 것인가?

확실한 건 신비를 지우는 순간 수많은 악몽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리란 것이었다.

'······ 어차피 0.04%남았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실행은 된다.

붕괴율이 올라가는 기준을 모르니 막을 방도도 없었다.

지금 속도로 보건대 아무리 늦어도 1주일 안쪽으로 10%를 달성하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겠군.'

생각을 달리한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차원 균열을 기다리는 것보단, 원하는 타이밍에 열어서 공략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니, 그게 무조건 낫다.

무엇보다 현재 내 뒤에 있는 괴물들이 어떤 괴물들이던가.

절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세계관 최정상급의 존재들이 아니던가!

특히 백왕과 저 멸악의 거인은 진짜배기 괴물이다.

'멸악의 거인도 있다. 충분히 가능해.'

멸악의 거인은 빌헬름의 마지막 별을 담당했던 수호자였다.

그래서 잘 안다.

더불어 가장 사이가 안 좋은 별 수호자이기도 했다.

드라무트처럼 온화한 놈이 결코 아니니, 조금이라도 아는 척을 했다간 그대로 내 머리를 터트릴 것이다.

하지만 놈의 무력은 별 수호자들 중 최강이었다.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수는 없을만큼.

'최강의 패가 두 장이나 잡혔다.'

사고의 전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 이용할 수가 없겠다.

오히려 이용하지 않으면 멍청한 짓이다.

저 안에 든게 뭔지는 나만 알고 있지 않나.

"뭐 하는 거지?"

"뜸을 들이더니 뒤로 물러난다?"

"역시 유일 등급의 신비를 깨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군."

별 수호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 말처럼 나는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괜히 신비 앞에서 얼쩡거리다간 그대로 저 악몽들에 살해당할 테니까.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나서야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손을 들 필요는 없지만, 이 정도 페이크는 줘도 괜찮겠지.'

신비를 파괴하고자 한다면 눈에 담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손동작을 추가함으로써 이 괴물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또한, 후에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면 이 동작이 0.1초의 시간이라도 벌어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장막의 신비를 바라보았다.

'사라져라.'

*

'뭐 하는 거냐?'

드라무트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란돌프가 한참이나 신비 앞에서 멈춰있었기 때문이다.

"시간낭비로군."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낫겠어."

"고작 시체 까마귀 따위가, 유일 등급의 신비를 없앤다는 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별 수호자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 시간낭비를 지금이라도 멈추자며.

동시에 그들의 눈이 드라무트를 바라봤다.

시체 까마귀를 추천하고, 데려온 건 모두 드라무트였다.

이곳에 모인 별 수호자들 중 가장 어리며 약한 신화종의 뱀.

"보는 눈을 더 길러야겠구나, 요르문간드의 후손이여."

"패기는 좋았다만······."

별 수호자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드라무트를 흘기곤 혀를 찼다.

본래 저주계열의 시체 까마귀를 신성한 별의 근처에 다가가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드라무트의 자신감은 쓸데없는 패기에 지나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기까지?"

"쯧쯧. 포기할 생각인가보군."

이제는 확실해졌다.

저 시체 까마귀는 유일 등급의 신비를 파괴할 수 없다.

물론, 신비를 파괴한다는 것 자체가 경악할 능력이지만, 모든 신비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면 기대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벅찬가보군.'

백왕 역시 물러서는 란돌프를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야, 유일 등급은 절대적이다. 모든 것의 시초이자 기준이 되는 게 '유일'이라는 등급이 가지는 의미였다.

그것을 파괴한다는 건 세계의 규칙을 비튼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신화의 관을 모조리 돌파했대도 규칙을 비틀 힘을 탑이 부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괜한 기대였나?'

찰나지만 백왕은 분명히 느꼈다.

자신의 신비가 저 시체 까마귀를 두려워하는 것을.

백왕이 지닌 신비 역시 유일 등급이었다. 수많은 신비들을 합쳐서 오롯이 자신에게 입혔으니, 감히 신비로써 그를 뛰어넘을 존재는 없다시피 하였다.

존재의 규격이자 권능.

단순히 착각이었을까?

저 시체 까마귀가 내뱉은 말들은 허언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때였다.

"음?"

모두의 초조함과, 기대와, 실망 속에서 시체 까마귀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쩌적-!

유일 등급의 신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신비에 균열이······!"

신비에 균열이 생기며 갈라지자 순식간에 분열되며 장막이 깨졌다.

순식간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못했다.

정말로 신비를 깨트릴 줄이야.

그것도 유일 등급의 신비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놀라움은 훨씬 컸다.

하지만 신비가 사라진 이후에 안에 있던 것들에 그들은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심연의 망자들?"

"아니다. '멸망'의 하수인들이다."

"놈들이 별을 오염시키고 있었구나!"

별 수호자들은 신비의 안에 있던 존재들을 그 즉시 파악해냈다.

판게니아를 지옥으로 바꾼 멸망.

그 멸망을 따르던 하수인들이 신비의 안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 워프는 멸망이 대륙을 침략할 때 사용한 '차원 균열'이다."

"'묵시록'의 내용 그대로군."

"······ 다 쓸어버려야한다."

놈들의 앞에 나타난 거대하기 짝이 없는 워프.

저게 차원 균열이라는 걸 그들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묵시록'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니까.

<'제 1의 벽'이 소멸되었습니다.>

<'차원 균열'이 생성되었습니다.>

<주변의 필드가 '망자의 늪'상태로 변형됩니다.>

주변의 필드가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크람델의 지하는 순식간에 '망자의 늪'으로 연결되었다.

그 주변에 있었던 이들 역시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초대받지 않은 자.

차원 균열의 왕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색 갑주와 투구.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철갑을 두른 거대한 말을 탄 거인!

그런데 그 모습이 내게는 왜인지 익숙하다.

'첫 번째 지옥의 왕, 마계의 수문장 아흐람.'

미친.

마계를 관통하는 여덟 개의 지옥.

그중 첫 번째 지옥인 '망자의 늪'을 관리하는 수문장이자 망자왕 아흐람이 분명했다.

마계에는 총 여덟 개의 지옥이 존재했으며 그 하나하나가 정말 지옥이라 불릴만큼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망자의 늪에서만 대원정에 참가했던 절반의 병사가 죽어나갔으니까.

'분명히 죽였을텐데?'

하지만 아흐람은 역시 내가 죽였다.

죽인 놈이 살아있다.

하물며 놈의 수하들도 버젓이 살아있었다.

―기······ 사··············· 왕!

아흐람의 눈을 오직 내게만 향해있었다.

별 수호자들도, 백왕조차도 아흐람의 눈에 담겨있지 않았다.

놈이 나를 알아봤다.

기사왕 빌헬름이었던 나를.

자신을 죽였던, 나의 존재를.

'별에 의해 더 강해졌다.'

심지어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아흐람이 검게 물든 별을 들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망자들이 격동하며 거대한 혼의 구를 만들었다.

수많은 시체와 망자들로 합쳐진 끔찍한 혼종들.

그리고 그 사이에 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안다사르의 얼굴은 왜 또 저기있는거지?'

어디 갔나 했더니.

이제는 살갗 혼종의 핵이 되어버린 안다사르의 얼굴.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표정도 악귀가 따로없지만 안다사르가 분명했다.

대환장 파티가 따로없었다.

*

그 시각.

동시에,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뭐야······?"

"다른 세상?"

"하, 하늘에 왜······."

하늘에 판게니아 대륙이 비추고 있었다.

마치 충돌이라도 할 것처럼.

"설마 저게 그 타차원?"

"아······! 이 상황 '타차원 커뮤니티'에서 봤어!"

"그럼 본격적으로 침략이 시작되는 거야?"

모두가 경악하며 공포에 떨었다.

이미 두 차례 타차원의 괴물들이 침략을 해왔다.

그 가공할 괴물들이 파괴한 건물과 죽인 인간의 숫자는 수십만에 다다랐다.

그마저도 디맨션 워리어들이 아니었다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이후 '타차원 커뮤니티'에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다.

지금까지의 침략은 타차원의 척후병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차원 균열이 열리면 본격적인 대침략이 시작된다.'

······ 마스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건물의 옥상 위에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십에 달하는 전사들과 함께.

"판게니아 붕괴율이 10%를 달성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30일간 차원 균열의 왕을 제거하지 못하면 모든 차원 균열이 열리며 '멸망'이 출현합니다."

"이후 판게니아와 지구의 완전 침식이 진행됩니다."

"보상 : 기여도 순위에 따라 차등지급"

"실패시 : 지구에 '멸망' 출현"

첫 번째 차원 균열이 열리며 대대적인 침략이 시작됐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다.

'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를 비롯한 수많은 랭커들이 이 날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세상은 완벽하게 변하리라.

플레이어들이 군림하는 세상으로 뒤바뀔 것이다.

마스터는 이 날을 위해 3년간 준비했다.

물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차원 균열의 왕을 제거하고 그라시아를 넘어선다.'

그라시아.

명실상부 최강의 인간.

하지만 마스터는 이번 기회를 발판삼아 놈을 뛰어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그라시아라도 자신만큼이나 세력을 일구진 못했을 테니.

그리고 차원 균열의 공략이야 말로 세력 싸움이다.

그라시아가 최강의 인간이라고는 하나, 동시다발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여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스터는 3년 동안 세력을 쌓고 기반을 다져왔다.

이 싸움, 질 수가 없다.

그런데.

"······ 왜 안 나타나는 거지?"

마스터의 표정이 점차 구겨져갔다.

차원 균열은 분명하게 열렸다.

세계 각지에 동시다발적으로.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것도 나타나지가 않았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차원 균열의 왕'의 공략이 진행 중입니다."

"진행도 1.3%"

"진행도 2.5%"

"진행도 7.8%"

"······ 뭐냐, 이건."

성좌의 보물

차원 균열이 열리고, 퀘스트가 시작되며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정작 하늘에 보이는 건 잔상처럼 비춰지는 판게니아 대륙과 곳곳에 열린 검은색의 '차원 균열'뿐이었다.

균열이 열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먼지 한톨 나오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진행도는 계속해서 제멋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 다른 곳도 같은 상황인가?"

"예, 마스터. 지금 전부 균열만 열려있을뿐 침략해오는 괴물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변에 모인 모든 전사들이 세계 곳곳으로 연락을 취하는 중이었다.

결론은 '침략은 없다'였다.

"그럼 이건 누가 진행하고 있는 거지?"

마스터는 이맛살을 구겼다.

침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진행도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아무도 공략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니까.

"진행도 11.3%"

······ 하지만 진행도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되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상태창과 붕괴율이다.

붕괴율이 10%에 다다르면 첫 균열이 지구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플레이어의 뇌리에 때려박는다.

그 정도로 중요하고, 그 정도로 위험한 일.

당연히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몇 년을 준비한 것이고.

'육안으로 보이는 차원 균열만 다섯 개.'

육안으로만 다섯 개다.

세계 전체에 열린 차원 균열의 숫자는 수만개가 넘을 것이다.

그 차원균열 전체로 괴물이 침략해온다면 못해도 수십만 마리는 되어야 한다.

시시각각 파괴가 진행되고 비명이 들려오며 세계는 폭발해야만 했다.

플레이어들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 강림한 뒤, 그 위용을 만천하에 알리며 최종적으로 차원 균열의 왕을 자신이 잡는 그림.

"그라시아는?"

"아직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그라시아가 아직도 한국에 있다.

왜?

그 작은 땅떵이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길게 표류한단 말인가.

균열이 일어날 징조가 보였으면 미국으로 되돌아와야 정상 아닌가?

'반나절이면 미국에 올 수 있을 텐데.'

검성 그라시아. 그는 수천 자루의 검을 동시에 다룬다.

심지어 그 한 자루, 한 자루가 보물이 아닌 게 없었다. 하늘을 날고 공간을 접는 검 쯤이야 차고 넘쳤다.

그런데 놈은 균열이 열렸음에도 한국에 있다.

그 작은 땅에서 열리는 균열이라고 해봐야 몇 개 없을 터.

'다른 노림수가 있나?'

진행도가 가파르게 올라갈 때 가장 먼저 의심한 게 그라시아다.

놈이 혼자 차원 균열의 괴물들을 독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다면, 적어도 그라시아에게 차원 균열의 공략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놈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한국에 있다는 뜻이다.

그게 뭘까.

"랭커들의 움직임은 모두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보고하도록."

"예, 마스터."

"'차원 균열의 왕'이 나온 곳을 우리가 가장 먼저 특정해내야 한다. 자잘한 균열의 괴물을 죽이는 것보단 왕 하나를 죽이는 게 나을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마스터."

전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마스터는 여전히 펴지지 않는 미간을 애써 문질렀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공략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각지에 퍼트린 세력은 전사들만이 아니다.

그에게 협력하는 수많은 집단들.

미국의 정부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실시간으로 세계 각지의 정보가 눈과 귀로 보고되는 중이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차원 균열을 통해 괴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없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공략을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반드시 찾아내야한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몇 년간 갈고 닦아 자신이 주인공이 될 절호의 이 기회를.

*

그라시아는 잠실 롯데타워의 옥상 난간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분명히 하늘에 균열이 열렸다.

지상에선 한국의 군인들과 플레이어들이 침략을 대비하고 있었다.

충돌만이 남은 상황에서 정작 적들이 침략해오지 않았다.

'진행도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 누군가가 공략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일텐데.'

대체 누가?

순간 팬텀이 스쳐지나갔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팬텀이 아무리 대단한 재간을 지녔다고 해도 플레이어가 된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고작 그 시간만에 강해지는 건 아무리 팬텀일지라도 한계가 있다.

'침략이 시작되면 히드라곤의 주인도 나타날 줄 알았다만.'

그라시아가 아직도 한국에 있는 이유.

히드라곤의 혼을 지닌 플레이어를 찾기 위함이다.

앞선 두 차례의 침략에서 그가 나타났으니, 균열이 열릴 때 역시 모습을 보이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균열은 열렸지만 문제는 침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우우우웅!

그라시아의 주변으로 검들이 늘어섰다.

"건드려보면 반응이 나오겠지."

작게 중얼거린 그라시아가 검들을 차례대로 균열을 향해 쏘아댔다.

쿵! 쿵! 쿵! 쿠르르릉!

하지만 검들은 균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균열에 닿자 튕기며 되돌아온 것이다.

검들을 뭉쳐서 쏘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파괴불가의 워프라. 공략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안 없어지나보군.'

이만한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는다면 파괴불가의 옵션이 붙어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파괴불가 옵션도 '파괴신의 망치' 같은 게 있으면 부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저 워프 하나 부수는데 쓰자고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차원 균열의 왕'이 죽었습니다."

"······ 뭐?"

순간 그라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 안 하는 그라시아라고 해도, 이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원 균열의 왕이 갑자기 죽었단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죽은 건지 알 겨를이 없다.

"'망자의 왕 아흐람'이 부활합니다."

"2페이즈로 돌입합니다."

"진행도 20.5%"

"······."

······ 부활 패턴이었나.

후. 숨을 돌렸다. 갑자기 공략이 완료되었다면 끔찍한 기분이었을 테니까.

그 사이에 진행도가 20%를 넘어섰다.

'아흐람?'

그런데, 아흐람이라.

한 번 죽어야 본색을 드러내는 보스 몬스터인 모양이다.

아흐람이라는 이름은 어딘가 익숙했다.

'분명히 마계의 첫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이 아흐람이었지.'

대원정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원정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차원 균열의 왕이 아흐람이라니.

그때 제대로 공략하지 않았던 걸까?

'기사왕 빌헬름이 병사들을 희생시켜 진행했다. 제대로 공략하지 않고 욕심을 내어 마왕을 잡으려다가 모든 걸 망쳤다.'

그리고 이제는 마계의 수문장이 살아서 지구를 침략하려고 한다.

그 말인 즉슨, 빌헬름이 제대로 아흐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국 대원정은 실패했고, 마계와 마왕은 지구를 노리고 있다.

'쯧, 역시 내가 마왕을 죽여야 했던가.'

그라시아가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 별을 먹어야 했으니.'

당시의 그는 초월 중이었다.

결국 초월에 성공했고 더욱 강력한 힘을 가졌다.

지금이라면, 빌헬름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빌헬름이 죽이지 못한 마왕도 죽일 수 있을 터였다.

'히드라곤의 혼만 찾으면 유일등급 검을 완성시킬 수 있다.'

여기에 히드라곤의 혼만 찾으면 모든 게 완성된다.

유일 등급의 검은 이미 한 자루 있지만, 그것과 짝이 되는 나머지 한 자루를 구하면 무적이 될 테니까.

더 이상 자신을 적대할 수 있는 존재는 판게니아에도, 지구에도 없을 것이다.

설령 빌헬름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마찬가지.

다만.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진행도 24.1%"

"······ 버그인가?"

*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는 기분이 이러할까.

흔히들 팀게임에서 동료가 게임을 끝까지 이끌어 나갈 때, 우리는 '버스 탔다'는 말을 쓰곤 한다.

그 말대로였다.

나는 지금 확실하게 고속 버스······ 아니, 안정적인 제트기를 타고 있었다.

구아아아아아아!

아흐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멸악의 거인이 전장을 휘저으며 달려가 순식간에 뭉개버렸기 때문이다.

허무하게 죽었지만, 아흐람은 부활했다.

'2페이즈.'

부활 패턴의 2페이즈.

손에 쥔 검은 별의 힘을 흡수한 아흐람은 되살아난 뒤 더 강해졌다.

―나는······ 불사신······ 이다············!

쿠아아아아앙!

아흐람이 소리를 내지르자 검은 파장이 일며 멸악의 거인이 밀려났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불길을 쏟아내며 대검을 들자 별 수호자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어찌됐든 메인 퀘스트다.

'기여도 순위에 따라서 보상을 지급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는 나밖에 없다.

기여도가 낮아도, 여기서 공략을 끝내면 내가 1등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작은 기여도라도 얻기 위해선 약간이라도 힘을 보태야하는 거고.

나는 기세등등한 아흐람을 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콰칭!

불길하기 짝이 없던 검은 불길의 '신비'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 멸망께서 내려주신············ 나의 힘을············!

아흐람이 당황했다.

접근을 막던 검은 불길이 사라지자, 멸악의 거인이 다시 미쳐 날뛰었다.

멸악의 몽둥이를 들고 휘두를 때마다 지형이 붕괴되며 아흐람이 납작해졌다.

"'망자의 왕 아흐람'이 죽었습니다."

"'혼종 융합체 아흐람'이 부활합니다."

"3페이즈로 돌입합니다."

두 번 부활한 아흐람은 혼종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수만에 달하는 혼종들이 아흐람에게 빨려들어가더니 몸을 수복하며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다.

쾅!

그리고 그 방패는, 멸악의 거인이 휘두르는 몽둥이마저도 막아냈다.

―크하하! 다······ 심연에······ 가라 앉아라!

멸악의 거인이 방패를 미친 듯이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별 수호자들과 사주력들 역시 늪의 혼종들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르고 있었다.

가히 장관이지만, 백왕은 팔짱을 껸 채 지켜만 보는 중이다.

"왜 지켜만 보는 거냐, 까악?"

"'나'는 어디까지나 구경만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참 대단한 녀석이다.

이 상황에서도 정말 구경만 할 줄은 몰랐다.

반대로 사주력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크람델의 지하에 나타난 아흐람과 혼종들을 제거하고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중이었다.

백왕이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개입하면 훨씬 쉽게 끝날 텐데?"

"나도 신비만 파괴하겠다고 말했다, 까악."

"······ 그래서 신비만 파괴중이었나."

백왕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제 1의 벽'을 파괴한 순간, 백왕은 어느정도 나의 허세를 '진실'로 믿기 시작했다.

유일 등급의 신비.

그것을 파괴했다는 건, 내가 규칙을 비틀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슬슬 끝나가는군."

백왕이 멸악의 거인과 아흐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종을 흡수해 절대적인 방어력을 지닌 방패를 만들었지만, 멸악의 거인 앞에선 시간을 버는 용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괴물 같은 놈······!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몽둥이로 끊임없이 내려 찍어대자 방패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지켜보는게 불쌍할 지경이었다.

"'혼종 융합체 아흐람'이 죽었습니다."

"'검은 별 아흐람'이 부활합니다."

"4페이즈로 돌입합니다."

벌써 4페이즈.

그 순간 진행도가 60%를 넘어갔다.

4페이즈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검은 별의 힘이 아흐람을 잠식해나갔다.

"음······."

백왕이 침음을 흘렸다.

쥐고있던 검은 별을 흡수한 순간, 아흐람의 전신에서 마력이 폭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험하군."

백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위험을 감지했다.

아흐람의 마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윽고 백왕이 주저없이 등을 돌렸다. 손톱을 꺼내어 공간을 가르자, '망자의 늪'으로 변한 필드에 구멍이 생겼다.

백왕의 손톱은 그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벨 수 있었다.

곧이어 백왕의 주변으로 사주력들이 모두 모였다.

아흐람의 근처까지 들어가있는 건 멸악의 거인뿐.

"그대도 같이 가지."

백왕이 넌지시 내게 말했다.

이제부턴 같은 식구이니, 함께 가자는 것이다.

나는 저 멀리 있는 별 수호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별수호자들과 멸악의 거인은 두고 가는 거냐, 까악?"

"어쩔 수 없다. 곧 놈이 폭발하면 이 공간 자체가 허물어질 것이다."

벗어나지 않으면 위험하다.

백왕조차도 위협을 느낄 정도로 위험한 대폭발이 일어날 징조였다.

헌데 별 수호자들과 멸악의 거인은 이미 너무 멀리 있다.

그리고 백왕이 자리를 뜰 정도라면, 미처 벗어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소멸할 것이었다.

'위험을 탐지하는 능력 하나는 신적이었지.'

백왕의 위험탐지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마치 미래를 보듯이 백왕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물러날 정도라면 별 수호자들은과 멸악의 거인의 소멸은 확정이라고 봐야된다.

'드라무트, 안다사르······.'

문제는 저 사이에 드라무트와 안다사르의 머리도 있다는 것이었다.

드라무트는 그나마 인간에게 호의적인 별 수호자다.

아니었다면 별의 주인이 내가 되었다고 한들, 내 말을 그렇게까지 따르진 않았으리라.

강제성이 있다고는 할지라도 드라무트 역시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다사르의 머리 역시, 앤드류 사제를 생각하면 반드시 가져가야만 했다.

"여기 남아있을 생각인가? 그다지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군."

"저 폭발 정도는 막아주겠다, 까악."

"······ 별의 폭발을?"

검은 별의 폭발을 어떻게 막겠냐는 듯.

약간의 불신이 섞인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저 검은 별의 폭발은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천천히, 품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름 없는 성좌의 머리카락'을 사용합니다."

메인 퀘스트 5, 신비 얻기를 클리어하자 성좌들이 직접 내민 백 개의 보상.

그중 내가 고른 목록은 이것 '머리카락'이었다.

'자신의 신체부위를 내어준 유일한 성좌.'

도구가 아닌 신체부위다.

설령 머리카락이라고 할지라도,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내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긴고아

'용납할 수 없다.'

멸악의 거인은 별을 검게 물들인 저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멸악의 거인 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별 수호자'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저 별 자체가 여신의 상징이다.

감히 여신의 상징을 악으로 물들이며 사용하는 저 '악' 그 자체를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멸해야 한다.'

가루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멸악의 거인은 기꺼이 나서서 아흐람과 맞섰다.

감히 멸망의 하수인 따위가 별을 물들여 사용하는 걸 내버려둘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흐람은 계속해서 부활했다.

마침내 세 번의 부활을 끝으로 검은 별의 힘마저 흡수해버렸다.

"감히······!"

멸악의 거인은 자신의 모든 걸 쏟아냈다.

하지만 검은 별을 흡수한 아흐람은 적대자들을 모조리 소멸시킬 생각뿐이었다.

―다······ 죽어라······!

자폭이다.

별과 함께 폭사시켜 영원히 없애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가공할 마력이 아흐람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걸 빨아들이며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멸악의 거인도, 다른 별 수호자들도 아흐람의 자폭은 예상하지 못한 수였다.

그것도 검은 별과 함께 터진다면 이 공간 전체가 사라질 것이다.

도망치기엔 늦었다. 빨아들이는 힘이 강력해 벗어날 수 없다.

이대로는 열에 달하는 별 수호자가 한꺼번에 죽는다. 그리하면 남은 별들조차도 위태로워질 건 자명한 일.

"그렇게 놔두진 않는다!"

멸악의 거인이 아흐람을 끌어안았다.

거인의 항마력과 그가 가진 스킬들로 말미암아 자폭의 피해를 최소화할 생각이었다.

"멸악의 거인!"

"희생을 자처할 셈인가?"

"멍청한 짓을!"

별 수호자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즈아아아아아!

그 순간에도 아흐람과 검은 별의 마력은 이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늦었다.

멸악의 거인은 아차싶었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건만.

"여신이시여!"

멸악의 거인은 별을 향해 말했다.

검게 물든 여신에게 빌었다.

제발 진정하라고.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 여신 피나의 눈.'

멸악의 거인은 블랙홀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눈을 보았다.

쌍둥이 여신, 레아의 동생 피나.

천공의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눈이 왜 이곳에 떨어져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악에 물든 채, 어찌하여 악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말인가!

―크······ 하하하!

아흐람이 멸악의 거인을 조소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폭발은 막을 수 없다.

별 수호자들을 모조리 데려가주마.

―뭣············?

하지만 아흐람의 조롱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꼈으니까.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무언가'를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걸.

무섭다. 두렵다.

지옥의 왕인 자신에게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놔라······!

그것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험도만큼이나 빠르지 않은 덕에 피하는 건 쉬울테지만, 문제는 멸악의 거인이 아흐람을 붙잡아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흐람은 발버둥쳤다.

저 '무언가'에 당하면 끝장이 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폭해서 소멸하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피해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멸악의 거인은 아흐람을 움쩍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자폭을 하고자 벌인 짓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촤악!

이윽고, 아흐람은 알았다.

자신의 이마에 닿은 무언가를.

그 '무언가'에 의해 자신이 '봉인'당하고 있음을.

아흐람이 조심히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머리에 차여진 이것은 봉인구였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감히 지옥의 왕조차도 묶어둘 수 있는.

하지만 이런 봉인구가 흔할 리 없다.

그리고 아흐람은 이러한 봉인구를 본 적이 있었다.

옛 적.

먼 고대에서.

신에 가장 가까웠던 존재를 봉인했던 물건.

―기, 긴고아······?

바로 전설 속의 봉인구, 긴고아(緊箍兒)라는 걸.

힘을 쓸 수가 없다.

마력이 동하지 않는다.

마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비켜라, 까악."

몸이 절로 움직였다.

아흐람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시체 까마귀.

그것은, 단순한 시체 까마귀가 아니었으니까.

별에서 읽은 기억과, 자신의 영혼이 저 까마귀를 알고 있었다.

죽여야 하고, 죽이고 싶은 그 이름.

'기사왕 빌헬름······!'

······ 마계의 천적 빌헬름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묶어도 별의 폭주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흐람은 비웃었다.

멍청한 놈.

아무리 긴고아로 자신을 속박해도 검게 물든 별은 돌아오지 않는다.

별의 폭주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거슬린다, 까악."

"······ 뭐냐, 네놈은."

멸악의 거인.

그 역시 당황했다.

갑자기 아흐람이 봉인됐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시체 까마귀가 나타났다.

유일 등급의 신비를 없애고, 아흐람까지 봉인한 정체불명의 시체 까마귀.

"살 좀 빼라, 까악. 몸이 그게 뭐냐, 까악."

"나보고 살을, 빼라······?"

멸악의 거인에게 살을 빼라고 말하는 겁대가리 없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다 죽었으니까.

자신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간 있어도 없어질 테니까.

"이게 여신의 별이냐, 까악?"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시체 까마귀가 말했다.

아흐람이 봉인되자 놈의 몸에서 폭주하는 검은 별이 분리되었다.

멸악의 거인이 혀를 찼다.

"죽으러 들어왔구나, 멍청한 놈. 백왕과 함께 피했으면 됐을 것을."

"이 별을 진정시키면 되는 것 아니냐, 까악?"

"별 수호자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네깟 저주받은 까마귀가 성스러운 별을 건드렸다간 그대로 활활 불탈 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다.

처음 드라무트를 만나고 떨어진 빌헬름의 별을 챙길 때, 녀석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비키라고 했다, 까악."

"······."

멸악의 거인이 살짝 몸을 들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멸악의 거인이 비키자 블랙홀 같은 검은 구역이 드러났다.

손을 대면 빨려들어가거나 거인의 말마따나 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떠오르며 폭주하는 검은 별을 향해 주저없이 손을 뻗었다.

'네가 나를 찾고 있었구나.'

그리고 별에 손을 댄 순간,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나를 찾고 있던 별은 이것이 맞았다.

온천에서부터.

아니, 훨씬 전부터.

여신 피나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음······!"

이윽고 여신 피나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기사왕 빌헬름.

그가 마왕에게 붙잡혔다.

그는 진정으로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였기에.

여신의 도움 없이 홀로 저 자리까지 선 대영웅이었으나, 마왕은 여신의 이권 없이는 멸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

"괴물같은 놈. 아무런 여신의 '이권'도 없이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이야."

마왕이 진절머리를 치며 말했다.

자신을 이 정도로 몰아붙인 상대는 처음이었으니.

완전히 넝마가 됐다.

몇 번이고 부활할 수 있는 '파괴불가'의 신체를 짖이겨놨다.

불사신의 권능마저도 넘어서는 격을 놈이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너의 패착이다."

허나 괜찮다.

육체는 죽었으나, 마왕의 본질은 죽지 않으니까.

여신의 권능 없이는 자신을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니까.

차라리 잘됐다.

이 괴물 같은 놈의 육신을 차지하면, 마왕은 지금보다도 더 강해지리라.

마왕의 본질이 빌헬름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안 돼!

천공의 여신 피나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빌헬름이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다면 이 세상은 끝난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연결된 모든 차원들이 저 멸망 앞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설마 빌헬름이 마왕까지 위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신의 이권 없이 저 정도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이건 빌헬름이 대단한 게 아니다.

빌헬름을 움직이는 존재.

저 세상과 연결 된 '그'가 빌헬름이 한계를 넘어 움직일 수 있게끔하고 있었다.

이토록 빌헬름을 완성시킨 것 역시 '그'였다.

-미안해요.

결국, 피나는 빌헬름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마왕에게 모든 별과 함께 살아있는 육신을 빼앗겼다간 영영 기회를 잃을 것이다.

저 너머에 있는 '그' 역시 기회를 박탈당하리라.

하지만, 완성된 존재인 빌헬름을 죽이는 건 그녀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여신이라 할지라도 빌헬름은 멸망과 맞서서 이긴 존재.

피나는 빌헬름의 생명을 빼앗는 대신 자신의 육신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지고하며 위대한 존재이시여, 부탁드립니다.

여신 피나의 육체가 부서지고 별이 되어 떨어진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마지막 '기회'는 생겼으니까.

여신 피나 역시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여신 피나는 부디 빌헬름을 움직인 '그'가 판게니아를 사랑하는 자이기를 바랐다.

'그'보다 명예롭고 위대한 존재는 없었기에.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 높이 뛰어넘어주기를.

모든 세상을 이끌어줄 존재이기를 염원하고 또 염원했다.

*

기억의 회상.

여신 피나의 몸이 흩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염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결국 모든 시작과 끝은 빌헬름이었다.

기사왕 빌헬름의 죽음으로부터 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빌헬름의 생명을 빼앗으며 여신 피나 역시 부서졌다.'

그저 블루스크린 끝에 게임을 다시 시작한 게 전부가 아니었던 게다.

그게 가능했던 건, 피나 덕분이었다.

만약 여신 피나가 자신을 희생하며 빌헬름을 죽이지 않았다면 내게 재도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문제는 피나가 희생하며 남긴 별이다.

'마왕이 피나의 별을 취했나보군.'

빌헬름의 온전한 몸과 다섯 개의 별대신, 피나의 육체를 취하고 부쉈다.

그리하여 마계를 재건한 뒤 지구를 침략하려 하고 있다.

본래 마계는 절반이 부서진 상태였으나, 피나의 별에 의해 수복 속도에 탄력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별의 폭주가 사그러듭니다."

"'메인 퀘스트 ???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메인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긴고아로 봉인만 했음에도 '제거'로 쳐주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의아한 건 주변의 시선이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까악?"

모든 별 수호자들이.

심지어 백왕과 사주력들마저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놀란 것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별 수호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별 수호자?"

"시체 까마귀가 별 수호자라고?"

뭐? 별 수호자?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하지만 별 수호자란 늠름한 신화종이나 강력한 환상종밖에 없었다.

그 외에 별 수호자는 본 적조차 없었다.

쿠릉!

그 순간 멸악의 거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멸악의 거인은 나를 내려다보며,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곤 말했다.

"······ 새로운 별 수호자가 탄생했다."

고유 스킬 강탈

디맨션 워리어.

타차원에서 지구를 지키고자 건너온 위대한 전사들.

그들은 이번 침략에 대해 몇 번이고 경고해왔다.

-머지않아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될 겁니다.

-앞으로 한 달 안으로 시작됩니다. 오직 우리 디맨션 워리어만이 여러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부는 협력하십시오. 멸망에 대비해야 합니다!

타차원의 침략에 의해 세계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협력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

앞선 두 차례의 침략이 가져다준 여파의 탓일까. 디맨션 워리어들이 경고한 '본격적인 침략'에 하나, 둘 그들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미지의 공포가 실질적인 위협을 해오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됐다.

하늘에 떠오른 타차원의 세상.

전세계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현상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거 나만 보임?

-세계 멸망각ㅋㅋㅋ

-누가 제발 CG라고 해줘!

-와········· 미쳤네.

-신께서 노하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세상은 난리가 났다.

이윽고 하늘에 거대한 검은색의 차원 균열이 열리자 '타차원 커뮤니티' 역시 문의가 폭주하고 있었다.

-하늘에 떠오른 검은색의 원형들이 뭐죠?

-이제 저기서 괴물들이 쳐들어오는 건가요?

-제발 저희를 지켜주세요!

-마스터! 마스터는 어디 계시나요?

-다른 8영웅들은요?

마스터를 비롯한 '8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나서자 수많은 방송국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차원 균열이 열린 순간 8영웅들은 솔선수범하여 '강림'한 뒤 이제 곧 쳐들어올 적들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타차원의 침략으로부터 여러분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있는 한, 세상은 안전합니다!"

방송국에 비춰지는 다수의 영웅들은 스스로 구원자를 자처했다.

강림하자 황금빛이 감돌며 변신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신화나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전사들 같았다.

늠름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무기를 든 채 대비하는 모습.

그들은 그저 겉모습만 치장한 가짜가 아니다.

혼자서 산을 옮기고 부수는 괴물들조차 두려워하는 진짜배기 괴물이었다.

슈퍼 히어로가 실제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믿습니다!

-멋지다!

-막심! 날 가져요!

이제 침략이 실제로 진행만 된다면 그들의 위상은 하늘을 뚫어버릴 터였다.

8영웅들은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넘쳐흘렀다.

'고작해야 첫 번째 침략이다. 별 거 없겠지.'

'최대한 멋있게 처리해야돼.'

'차원 균열의 왕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하급 심연의 지배자 수준일 거다.'

모두 낙관하고 있었다.

공략할 방법은 커녕 침략해온 괴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더 멋있게 카메라에 담길지를 고민는 중이었다.

고작 10%.

그 정도 급에서 쳐들어오는 괴물이라고 해봤자 별 거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만만하던 영웅들의 태도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잠깐, 뭐······?"

"공략······ 누가······?"

동시에 그들은 동시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원 균열의 왕'의 공략이 진행 중입니다."

"'차원 균열의 왕'이 죽었습니다."

순식간에 죽었으니까.

그야말로 압살이다.

하지만 어느 차원 균열에서도 괴물이 관측되지 않았다.

대체 누가?

누가 공략중이란 말인가?

심지어 죽였다니?

"'망자의 왕 아흐람'이 부활합니다."

"2페이즈로 돌입합니다."

"아흐람······!"

몇몇 영웅들은 부활한 왕의 이름을 보곤 기겁했다.

설마 차원 균열의 왕이라는 게 망자의 왕 아흐람일 줄이야!

마계의 첫 번째 지옥, '망자의 늪'을 관장하던 수문장.

대원정에 참가한 자들이라면 그 공포를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무려 대원정의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 놈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아흐람 정도의 괴물이라면 몰래 공략할 수가 없을 텐데?'

놈이 다루는 망자와 혼종들은 그 크기만 수미터에서 수십미터에 다다른다.

게다가 아흐람 자체가 최상위계의 언데드 데스나이트였다. 혼자서 지형을 바꿔버릴 수준의 강자가 나타났는데 몰래 공략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망자의 왕 아흐람'이 죽었습니다."

······ 모든 플레이어는 도저히 떠오른 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3분도 안 걸려서 아흐람을 공략했다고?'

'그게 가능해?'

'그라시아나 마스터 정도의 강자가 아니고서야!'

아흐람이 부활한지 3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라시아도, 마스터도 모두 공략을 진행하고 있지 않았다.

제 3자.

8영웅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공략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진행 중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혼종 융합체 아흐람'이 부활합니다."

혼종 융합체!

아흐람은 끝없이 부활하고 있었다.

부활할 때마다 강해지며, 공략의 시간도 길어지는 중이다.

혼종의 융합체라니.

이름만 들어도 공포 그 자체였다.

앞서 공략한 시간과 달리 5분이 넘어서자, 플레이어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실패했나보군.'

'몰래 공략하려다가 힘에 부치기 시작했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 차례다.'

이대로 멍하니 서서 끝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심을 부리다가 죽었다면 어차피 순위에는 반영되지 않을 테니.

도리어 자신들만 도와준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기대는 순식간에 박살났다.

"'혼종 융합체 아흐람'이 죽었습니다."

"'검은 별 아흐람'이 부활합니다."

"······."

"'검은 별 아흐람'이 죽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뭐라는 거야?"

"······ 뭐 이런 좆같은 경우가 다있어?"

플레이어들은 자연스럽게 거친 속내를 입밖에 내놨다.

그 정도로 어이가 없었으니까.

공략은커녕, 침략도 해오지 않았다.

괴물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뭐?

공략 완료?

메인퀘스트가 끝났다고?

이윽고 하늘에 떠오른 '판게니아'가 서서히 지워져간다.

그쯤되자 사람들도 하나, 둘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괴물들 안 나타남?

-뭐야, 사라지는데?

-하늘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설마 이게 끝?

세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침략해온다는 괴물들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단순히 위협만 주고 물러난 꼴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런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도리어 흔들리는 동공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보았으니까.

"'메인 퀘스트 ???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의 기여도를 판별합니다."

"기여도 순위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1위 – 란돌프"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됩니다."

"······!"

"······!!!"

기여도 1위.

순위 명단에 존재하는 단 한 명.

···란돌프의 이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