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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대리석으로 만든 옥좌.

옥좌에 새겨진 검은색의 용은 다르칸의 상징이다.

그곳에 앉은 검은머리와 흑요석 같은 눈을 지닌 다르칸 영주는 피로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미치겠군.'

바로 앞에 있는 자들 때문이다.

수호기사 파멜을 보냈는데 그사이에 이런 사달이 나리라곤 그 역시 예측하지 못했으니.

한 명은 다르칸 영지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데르시안 가문의 독녀, 이자벨라.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백왕의 비호를 받는 미궁도시의 실세. 그것도 말이 통하는 인간이지.'

아르카나에 심어둔 시의원에게서 허드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백왕이 언급한 미궁도시. 크람델에 이은 두 번째 '영역 선포'였다.

주도권은 오주력에게 있었고, 그럼 그곳은 괴물들의 도시라는 말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미궁에서 구제국의 물건을 떼어다가 파는 인간이 있었다.

더 자세히 알아보자, 허드슨은 실제로 미궁도시를 관리하는 관리자였다.

오주력의 신임을 받고 직접 일을 처리하는 실세 중의 실세!

그간 백왕과 제국은 전혀 접점이 없었다.

애초에 그 괴물들은 인간의 말을 전혀 들어 먹질 않는다.

인간?

보이면 죽이고, 가까이 다가오면 몰살시킨다.

다른 사주력 역시 마찬가지.

'오주력은 인간과도 말이 통하는 괴물이다.'

유일하게 오주력만이 인간 허드슨을 보좌로 두고 있다.

하여, 허드슨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다.

'카지노 허드슨의 전 주인이자, 황금도시 아르카나에서 시의원을 노리기까지 하던 자.'

놀랍게도 수상한 이력이 없는 온전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오주력과 접점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이건 기회였다.

구제국의 보물?

필요 없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었으니.

'······ 북부와의 접점을 만들 기회다.'

북부는 백왕의 땅이다.

크람델을 포함한 넓은 영역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북부의 가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제국조차 눈독 들일 수밖에 없는 가치를 가졌다.

하지만 북부에서의 백왕은 무적이다.

그 많은 괴물과 전면전을 벌이려면 피해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제국도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상태.

이건 기회였다. 북부와, 백왕과 연결점을 만들 수 있는.

그리하여 초대했건만, 오자마자 사고를 쳤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지?'

과정은 필요 없다.

진짜 누구의 잘잘못인지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이곳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자리였다.

데르시안 영애를 택하면, 허드슨에게 벌을 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북부와의 접점은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오주력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허드슨을 택하면, 데르시안 가문과의 사이에 금이 간다.

"······ 데르시안 영애. 그대가 먼저 공격했다고 들었다. 주변의 모든 자가 같은 증언을 했다는군."

다르칸 영주는 결정을 내렸다.

허드슨에게 벌을 줄 경우 뒷일이 어디까지 커질지 알 수 없다.

반면, 데르시안 가문의 일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여, 영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데르시안 가문이 아니라 저 정체모를 외지인을 두둔하겠다는 건가요?"

데르시안 영애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다르칸 영주는 이미 결심을 내린 뒤였다.

"데르시안 영애······ 아니, 이자벨라. 그는 정체모를 외지인이 아니다. '미궁도시'의 관계자로써 내가 직접 초대한 자이지. 그런 자에게 결례를 끼쳤으니, 나에게 결례를 끼친 것과 같지 않겠나?"

"······!"

"데르시안 가문에 내가 직접 따질 것이다. 아무리 그대가 데르시안 가문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 왔다고 한들, 내 손님까지 좌지우지할 권한 따윈 없을 터."

"미궁······ 혹시 심연 미궁······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다르칸 영주가 시원하게 인정하자, 데르시안 영애의 볼살이 떨렸다.

'거인족을 호위로 둔 것도 그럼?'

이제야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돌연히 떠오른 심연 미궁.

그 심연 미궁을 탐색하고자 제국도 강자들을 파견했으니까.

제국의 전신과도 같은 '육각의 검성 라일리'가 그곳에 가라앉아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결국 심연 미궁은 백왕 휘하의 오주력에게 빼앗겼다.

'오주력의 대리인······!'

다르칸 영주에 말에 의하면, 저 재수없게 생긴 허여멀건 놈이 오주력의 대리인이라는 것이다.

빠득!

데르시안 영애가 이를 갈았다.

"저 바바리안 같은 놈이 제 호위를 죽였습니다. 데르시안 가문의 광전사를!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적어도 저 바바리안 같은 놈은 처벌해야합니다."

가문과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호위에게라도 벌을 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이 문제는 깔끔하게 덮고 가겠다고 말한 셈이다.

"······ 허드슨 대리인. 어찌 생각하는가?"

작게 고개를 흔든 다르칸 영주의 말에, 허드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다르칸 영주님. 이분은 단순히 제 호위가 아닙니다."

"호위가 아니라면?"

"오주력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분입니다."

"············."

"만에 하나, 이분을 건드린다면, 오주력께선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 라. 이곳 다르칸 영지를 공격이라도 할 것이라는 말인가?"

"예."

"······ 광오하군."

다르칸 영주가 이맛살을 구겼다.

예상을 하는 것과, 상대에게서 말로 듣는 것에는 차이가 많다.

하물며 저 바바리안 같은 사내가 오주력이 총애하는 자라니.

그나마 백왕이나 사주력들에 관해선 정보가 있지만, 오주력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

그 백왕이 직접 두둔할 정도로 애정하는 존재임은 분명할 터.

다르칸 영주는 고개를 돌려, 수호기사 파멜을 쳐다봤다.

그러자 수호기사 파멜 역시도 작게 고개를 저었다.

'파멜조차 가늠할 수 없다. 저 사내가 범상찮은 자임은 분명하군.'

뿐만인가.

'데르시안 가문의 광전사를 압살했다고 했지.'

전해들은 보고는 쉬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인족 최고전사의 증표인 골통파괴자를 들고 검강을 흩날리는 강자!

무기의 이름처럼 광전사를 파괴시켜버렸다고.

오주력은 최강의 종족인 거인족까지 포섭하고 있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허드슨이 자신의 앞에서 자신있게 내뱉는 게 이해는 됐다.

그때 허드슨이 첨언했다.

"··· 물론, 오주력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처벌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분을 해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허세인가?

하지만 분명히 저 사내는 오주력이 총애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런 오주력 또한 저 사내를 해할 수 없다는 뜻.

즉.

'설마······ 저 사내가 오주력이란 말인가?'

······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당장 판단하여 건드리면 귀찮아질 것임은 틀림없었다.

"흠. 어차피 처벌할 명분도 없다. 먼저 공격을 한 것이 데르시안 영애가 확실하니."

"여, 영주님!!"

"데르시안 영애. 이곳은 그대가 저지른 실수를 덮어주는 곳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이 죄를 저지르고 그를 덮고자 나를 찾아왔으니, 내 명예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닌가?"

"그,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아직도 억울한가보군. 정 그렇다면 공개재판을 열어주마."

"······!!!"

"다르칸의 영주인 나를 얼마나 쉽게 보았으면 감히 너 따위가 이딴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명예로운 내게 고짓을 고하라? 오냐, 이는 곧 데르시안 가문의 의지로 알겠다."

"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저는 단지······!"

공개재판.

재판을 열면 모든 영지민들과 데르시안 가문의 어른들이 직관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다르칸 영주가 데르시안 가문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전혀 몰랐기에 데르시안 영애는 경악한 채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또한, 재판이 열릴 때까지 이자벨라, 너를 구금할 것이다. 너희 가문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고지할 터."

이제는 가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에 데르시안 영애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여, 영주님!"

"당장 데려가거라."

"제, 제발!!"

병사들에 의해 데르시안의 영애가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데르시안 영애는 억울하다는 듯 외쳐댔지만 영주는 가볍게 무시

해버렸다.

"······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소?"

다르칸 영주가 허드슨이 아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영주 나름대로 우리를 위해 초강수를 둔 것이다.

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 외엔 받아들이지 않겠다."

"······ 좋소. 그리하게 하리다."

머지않아 끌려갔던 데르시안 영애가 내 앞에 처참한 몰골로 세워졌다.

당황하여 울었는지 화장기가 지워져 너저분한 모습.

하기야 설마 다르칸 영주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겠지.

더욱이 미궁도시에서 나온 자들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우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다르칸 영주가 돌아선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데르시안 영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뚝뚝.

바닥에 눈물을 떨어트리며 데르시안 영애가 마저 이야기했다.

"제가 잠시 눈이 돌았었나 봅니다. 부디······ 부디, 용서를······."

*

사죄를 받기는 했지만, 그렇게 사죄만 받고 모든 것을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다.

진정한 참교육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특급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거대한 돔 형태의 경매장.

그곳에서, 마침내 특급경매가 시작되었다.

사흉 토벌

굴욕이다.

치욕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모욕, 모멸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특급 경매'를 반드시 성황리에 성사시켜야만 했기에.

-이자벨라. 데르시안 가문의 대표로 다르칸 영주와 협력하여 '특급 경매'를 성사시키거라. 너의 능력을 보여다오.

가문에 자신의 능력을 보일 절호의 기회.

이번 특급경매의 결과에 따라, 데르시안 가에서 자신의 위치가 정해질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매에만 집중하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해.'

보름간 진행되는 특급 경매는 제국 사교계의 연장선이었다.

넘쳐나는 금은보화를 주체 못하는 '제국의 귀족'과, 외부에서 인정받은 '도시의 주인'들이 서로 돈을 걸고 경쟁을 하는 장이다.

더불어 보름간 경쟁상대와 연을 잇고 더 큰 도약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한 마디로, 주인공이 되어 '내 편'을 만들어 오라는 것이다.

후계구도에서 온전하게 승리하고 싶거든 외부의 세력도 필수였으니까.

뛰어난 안목으로 특별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역시도 같은 맥락이었다.

'······ 지금 다르칸 영주를 거스를 순 없어.'

데르시안 가문과 다르칸 가문은 깊은 사이다.

그러나 다르칸 영주는 이번에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데르시안 가문의 주인도 아닌, 그저 대표로 들렀을 뿐인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노라고.

공개적으로 재판에서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꿇으라고 말이다.

만약 꿇지 않았다면 그녀는 데르시안 가로 강제송환되었을 터다.

경매의 진행은 가문의 다른 후계자가 책임지게 됐을 것이고, 그녀는 뒷방에 갇힌 채 허송세월이나 보내게 될 것이었다.

그럴 순 없었다.

절대로,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여 무릎을 꿇었다. 빌었다.

'미궁의 대리자라고? 그래봤자 괴물들이지. 괴물들이 돈이 어디 있겠어?'

경매의 시작을 보며 데르시안 영애가 여유를 되찾았다.

마침내 막이 오른 특급 경매의 시작.

돈이 없는 자는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만 해야된다.

미궁에서 찾아온 괴물들이 돈이 어디있겠는가.

하물며 첫날은 가장 중요한 날이다.

서로가 서로를 파악하고 가늠하는 자리.

이곳에서 진정한 '돈질'이 뭔지 보여주리라.

데르시안 가문의 위엄을,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두 눈에 새겨주겠다.

*

돔형태의 경매장엔 족히 오백은 되어보이는 자들이 앉아있었다.

돔의 왼쪽엔 가면을 쓴 제국의 귀족들과 호위가 있었다.

그 반대인 오른쪽엔 외부에서 초청받은 자들이 모여있는 상태였다.

정확하게 반반.

같은 자리를 쓰는 것조차도 싫다는 듯, 나누어 놓았다.

허드슨과 발테, 그리고 나는 정확히 오른쪽에 있었다. 외지인들의 자리에.

영주가 직접 초청을 했더라도 자리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도시의 지배자. 혹은 거대 세력의 주인들.'

나는 천천히 '외부인'들을 살폈다.

호위를 제외하면 대략 백여명.

그들 모두가 도시의 지배자거나, 그에 준하는 자리에 위치한 자들이었다.

'다르칸의 오후'에서 스치듯 본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초면이다.

'이들 중에 플레이어도 섞여 있다.'

허나, 나는 확신했다.

이들 중에는 필시 플레이어들도 섞여있으리라고.

플레이어가 아닌척, 연기를 하고 있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터.

누굴까?

어떤 플레이어가, 판게니아인인 척 연기를 하고 있을까.

'제국은 플레이어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

알다뿐인가.

제국은 노골적으로 플레이어를 배척하고 있었다.

빌헬름으로 플레이할 때 제국과 연을 잇지 못한 건 그 때문이다.

심지어 대원정을 일으킬 때도 제국은 참가하지 않았다. 여신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력에서 작고 큰 지원을 보냈음에도, 정말 코빼기도 안 비췄다.

왜겠나.

빌헬름이 일으킨 대원정.

빌헬름을 판게니아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겠나.

단순히 빌헬름이 판게니아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국은 마계를 공략하는 대원정에서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독할 정도로 플레이어를 배척하고 있는 셈.

그런데 플레이어가 제국 내부로 들어왔다?

'죽이려고 들겠지.'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으리라.

사신교를 이용하거나, 아예 죽이려 할 가능성이 컸다.

제국 내부에 사신교의 본단이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테니.

어쩌면.

'플레이어를 판별하는 자들도 어딘가에 있을 터. 아예 이곳에 섞여있을 수도 있다.'

외부인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이는 자리.

섞어내려는 자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초청할 때 이미 조사를 거쳤겠지만, 제국의 철두철미함은 유명했다.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플레이어에겐 쥐약과도 같은 장소.

다만, 그럼에도 이들 중에 플레이어가 섞여있으리라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허드슨이 가져온 정보가 확실하다면 이곳에 마스터가 있다.'

최소 한 명.

아니, 두 명 이상.

마스터를 포함한 플레이어가, 이곳에 있다.

허드슨은 마스터의 도시 '유적도시'에서 판매되는 유적들의 판매경로를 조사했다.

물론, 그 대부분이 황금도시 아르카나에서 소비되었으니 사실 조사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그리고 마스터가 노골적으로 골드를 모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적의 가격을 깎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대금의 지급 기일을 대놓고 '특급 경매'가 이루어지기 직전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저놈들.'

그리고 마스터의 얼굴은 이미 여러번 공개가 된 상태였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7영웅들의 '강림체'는 모두.

비록 가면을 쓰고 있어 자세한 파악은 힘들지만, 그래도 가릴 수 없는 게 있다.

[★★]

바로 레벨.

2성의 초월자!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자 역시도.

[★]

1성의 초월자였다.

정식으로 여신의 별을 먹은 진성 초월자들.

저 두 명 모두 플레이어다.

'마스터는 아직 나를 파악하지 못했다.'

반면 나는 마스터를 특정해냈다.

먼저 아는 것과, 나중에 아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내가 선수를 칠 수 있다는 뜻이므로.

스피커 중 하나인 마스터가 특급 경매에 참가했다.

마스터.

저놈을 어찌해야할까.

'세렝게티만 있었어도······.'

세렝게티가 있었으면, 각개격파와 기습으로 충분히 암살을 기도할 수 있었을 텐데.

나와 세렝게티가 힘을 합치면 2성 초월자도 해볼 만은 했다.

허나 이 자리엔 세렝게티가 없었다.

나 혼자 마스터를 죽이는 건 쉽지 않은 일.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재료를 먹여서 찬란한 빛의 옥좌를 만들면 되긴 하지.'

수는 많다.

마침 이곳은 특급의 물건을 판매하는 경매장이고, 재료가 될 것들을 구매할만한 돈적인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간에.

'마스터가 있다는 건, 다른 플레이어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저 둘이 전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히 더있다.

플레이어들도 모르는 플레이어가.

완벽하게 판게니아인처럼 둔갑한 자가 숨어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스터를 족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파악하고 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고귀하신 분들에게 첫 번째 경매 물품부터 소개드리겠습니다! '차가운 불의 종족'! 옛 북구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던 전설적인 종족의 아이입니다!"

정작을 입은 경매사가 고개를 숙이며 소개하자, 사람들이 유리관 하나를 가져왔다.

유리관 안에는 머리가 푸른 불로 타오르는 중성적인 외모의 아이가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매질을 당한 듯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아이.

머리에선 피가 줄줄 흐른다.

상품으로 내놨음에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슬며시, 허드슨의 등을 아무도 모르게 살짝 쳤다.

-절대로 반응하지 마라.

이곳은 제국이고, 모인 자들 역시 노예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류들뿐이다.

판게니아에서 노예는 생각보다 흔하니까.

그럼에도 노예를 불쌍히 여기는 자들은, 플레이어밖에 없다.

지구인 말이다.

처음부터 심하게 다친 노예를 내다놓은 저의가 무엇일까.

경매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살핀다.

특히, '외부인'이 있는 자리를.

그럼 경매사가 '플레이어 판별자'인 건가?

"시작가는 백만 골드! 백만 골드로 시작하겠습니다. 입찰가는 50만 골드 단위. 입찰을 희망하시는 고귀하신 분은 사전에 드린 '부채'를 펼쳐주십시오!"

좌중이 조용해졌다.

첫 경매물품으로 노예라.

아무리 전설적인 종족의 노예라고는 하지만, 상태가 나쁘다.

먹이고, 재우고, 키워야하는데 그만한 가치를 할 지도 확신할 수 없다.

"차가운 불의 종족?"

"저게 무슨 전설적인 종족이야, 그냥 쓰레기지."

"몸도 약하고, 벙어리 아닌가?"

"구매하고 1년 이상 생존한 놈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 '돈질'을 하더라도 '안목'이 없다면 무시당하는 법.

경매사의 소개와 달리 저 '차가운 불의 종족'에 대한 인식은 최악이었다.

그때, 허드슨이 처음으로 부채를 펼쳤다.

"55번 손님! 100만 골드 입찰했습니다!"

55번은 허드슨에게 부여된 숫자다.

불쌍해서 구매하려는 걸까?

그런 건 아니었다.

"히든종족 '자연의 노래를 부르는 자'입니다."

"'자연의 노래'는 숲을 따사롭게 감싸주는 힘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식물'의 성장속도를 높여주며, 더욱 강인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노래를 부르는 자'는 오직 '자연종족'의 품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장할 경우 다른 '자연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이를 보자 떠오르는 글귀들.

히든 특성 '대현자'에 의한 값진 정보였다.

미리 정해둔 신호로 허드슨에게 경매에 입찰할 것을 명한 것이다.

'신록의 숲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겠군.'

드루이드들이 강해지는 건 내가 강해지는 것과 같다.

게다가 저 비슷하게 생긴 아이가 '엘프'들과 함께 있는 걸 분명히 본 적이 있다.

'엘프들과도 교류할 수 있다면 천만금이 아깝지 않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데려오는 게 아깝지 않을 터.

엘프는 백왕과 사주력보다도 더 인간을 꺼리는 종족이다.

당연히 그들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과 신화, 퀘스트와 보물은 아직 플레이어에게도 닿은 적이 없었다.

'뭐 이딴 걸 사느냐는 눈빛들이로군.'

제국 귀족들의 눈빛이 너무 뻔했다.

특히 데르시안 영애의 눈빛은 대놓고 비웃음을 달고 있었다.

아직 교육이 덜 된 모양.

저러한 제국 귀족들의 토로 덕분에, 입찰자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더 없으십니까? 더이상 입찰자가 안 계시면 100만 골드에 55번 고객님께 낙찰됩니다!"

좌중은 여전히 조용했다.

귀족들의 말소리를 들은 외부자들도, 입찰을 희망하는 자가 없었다.

"55번 고객님, 낙찰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과연 안목이 없는 게 누군지.

작게 미소를 지었다.

*

그 뒤로도 경매는 계속됐다.

데르시안 영애는 내심 혀를 찼다.

'물건 보는 안목이 저렇게도 없어서야.'

생각보다 골드는 많은 것 같지만, 처음의 경매물건들 대부분은 '개미털기'다. 안목 없는 자들을 유혹하는 그럴싸한 물건들.

그에 현혹된 개미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라붙어 골드를 허비하는 시간!

"55번 고객님, 낙찰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55번 고객님, 낙찰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55번 고객님, 낙찰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연이어 들리는 낙찰음.

55번, 허드슨이라고 했던가.

'다섯 번째 물건까지 모조리 싹쓸이?'

허드슨은 물 만난 고기마냥 경매물건을 쓸어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사용한 금액이 대략 천만골드.

'그래봤자 이제 슬슬 한계겠지.'

천만 골드면 그래도 괴물치곤 많이 모아왔다.

그래봤자, 경쟁상대가 될 리 만무하지만.

그리고 마침 나온 여섯 번째 물건은 그녀도 눈독을 들이는 것이었다.

"다음 물건은 무려! '버서커 세트'입니다! 모든 고귀하신 분들이 보셨다시피 초청장에 적혀있는, 이미 입증된 물건이지요. 이곳 영지의 주인 '다르칸 영주'께서 직접 보증하는, 보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또 떨리는 보물 중의 보물!"

곧이어 드러난 물건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붉은색의 전신 갑주와 투구, 버서커 세트!

이 물건을 내놓은 자가 다르칸 영주라니.

직접 판매자를 언급했다는 건 그 정도로 자신있는 물건이라는 뜻 아니겠나.

모두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특히 데르시안 영애는 주먹까지 움켜쥐었다.

'버서커 세트! 예상대로 가문에 필요한 물건이야.'

이름을 듣고 예상은 했으나 실체를 보며 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가문 자체에 도움이 되는 물건.

자신의 안목과 통찰력에 의하면 저것은 반드시 구매해야 된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었다.

함께 데려온 '감정사' 역시도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건 내 거다. 경매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데르시안 영애가 두눈에 불을 켰다.

"시작가는 천만골드! 입찰가는 500만 골드 단위, 시작하겠습니다!"

*

그 시각.

중립도시 '델피아'엔 수많은 병사가 모여있었다.

각기 다른 도시에서 파병된 자들만 무려 3,000명가량.

개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자들도 많았다.

이들 모두가 오직 저 '붉은 워프'를 대비하고자 이렇게 모인 것이었다.

쿠우우우우우웅!

도시를 삼킬 듯이 팽창한 붉은색의 워프가 지직거리자, 곧이어 그 안에서 거대한 동체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흉 바알······!"

"대기! 대기하라!"

"긴장하지 마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테니!"

워프를 넘어 침략해온 바알을 막고자 그들은 단결하였다.

여기서의 패배는 수많은 도시의, 고향의 몰락을 얘기했으므로.

마침내 사흉 바알의 토벌이 시작된 것이다.

그대로 멈춰라

중립도시 델피아에서의 '사흉 토벌' 소식은 플레이어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였다.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다섯 도시 중 한 곳이며, '대장장이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 바로 델피아였기 때문이다.

-사흉 토벌에 참가하면 레벨에 따라선 서사급 장비도 준다며? 참가한 사람 있음?

플레이어 톡 역시 관련된 내용으로 시끄러웠다.

델피아는 토벌에 참가한 이들 전원에게 '무장 공급'을 약속했다. 델피아산 장비면 부르는 게 값인만큼 제법 유혹적인 조건.

-10레벨부터 서사급, 초월자가 참가하면 전설급 장비도 준다더라

-전설급 그거 델피아 영주가 자기 장비 벗어서 주는 거라는 썰이 있던데

-그럼 그라시아가 참가하면 신화급 주냐?

-플레이어 중엔 참가한 사람 없을 듯?

-있기야 하겠지. 나름 다른 도시들도 많이 참가한 거 같던데

-3천명이나 모였으면 할만하지 않을까?

중립도시 다섯곳과 주변 도시에서 긁어모은 삼천 명의 전사들.

최근 대원정을 제외하면, 이만한 숫자의 병력이 모인 건 이례적이었다.

-음. 생각보다 할만할지도?

-사흉 바알이 강하단 것도 옛말이지, 설마 백왕급 괴물들보다 강하겠냐

-하긴. 수련자의 산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다 중, 저레벨들이니까 사흉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긴 하지

-그래도 정규도시 다수가 힘을 모았는데 아직 모른다

-다크스타 참전하겠다고 공식선포함

-다크스타? ㅋㅋㅋㅋ저번 심연 미궁에서 사왕보고 런치지 않았음?

-이번에도 런치면 플톡 공식 런크스타로 임명한다

-지금 비공식으로 랭커들 다수 토벌대 참가한 상태임 숫자는 진짜 삼천명 넘고 생각보다 분위기도 좋다

-뭐야 토벌대 참가한 사람이 진짜 있었냐?

-ㅇㅇ 많다니까 토벌대 대장으로 임명된 게 누군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

-다크스타나 도시 주인들 아님?

-아님 제국인임

-제국인? 제국이 참전했다고? 개구라치고 있네

다크스타와 수많은 랭커들, 거기에 제국까지.

하지만 대원정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제국이 사흉 토벌에 참전했다는 말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그러자 제국인을 언급한 사람이 구체적인 숫자를 늘어놓았다.

-동색 여우가면 쓴 검사 다섯명

-아. 설마 심연 미궁에서 본 그 은색 여우가면 동생들이냐?

-미친;; 악몽이 떠오르네

-전부 초월자급임?

-동색도 있고 은색도 있으면 황금색도 있냐?

-황금색은 없는데, 하여간 다섯명 전부 초월자급임 데르시안 가문이라는 곳에서 나온 사람이 현재 대장으로 있음

-제국에서 나왔으면 진짜로 할만한 거 아님?

-오... 대박

-제국에서 귀족가문이 나섰다는 건 그만큼 자신있다는 거 아니겠음?

-그나저나 저 말이 사실이면 미쳤네. 초월자급 검사 다섯명을 고작 한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별을 먹은 건 아닐 테고, 인외종 키워서 레벨을 올린건가? 어떻게 한 거지?

-와우...

-끝났네, 이건

*

"천만 골드! 고귀하신 3번 손님께서 첫 입찰을 떼셨습니다."

3번.

데르시안 영애가 부채를 펼쳐들자 진행자가 운을 띄웠다.

지난 경매에서도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던 데르시안 영애다.

버서커 세트만큼은, 반드시 자신이 갖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자신있으면 베팅해보라는 여유이기도 하였다.

펄럭!

"91번 손님! 1,500만 골드 입찰하셨습니다!"

91번. 마스터 역시 참전했다.

그는 제국의 귀족들과 달리, 눈치를 안 봐도 됐으니까.

'숫자가 앞쪽에 있을수록 이번 경매에서 중요한 위치다.'

2번이 다르칸 영주고, 3번이 데르시안 가문의 영애다.

둘다 이번 경매의 주최자들.

참가자의 숫자에 따른 중요도 같은 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보다 앞에 있는, 1번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르칸 영주가 선보이고 데르시안 영애가 입찰했다면 이 물건, 심상치 않다.

또한, 그들의 눈에 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 고귀하신 6번 손님께서 참전하셨습니다! 2,000만 골드!"

"질 수 없다! 소중하신 3번 손님께서 입찰가를 올립니다. 벌써 2,500만 골드입니다!!"

"새로운 입찰자가 등장하셨습니다. 78번 손님께서 3,000만 골드!"

경쟁이 붙은 입찰자는 네 명.

순식간에 가격은 삼천을 넘어, 오천만 골드까지 도달했다.

'······ 아직도 여유롭군. 제국 귀족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거지?'

마스터는 자연스럽게 이맛살을 구겼다.

자신이 준비한 골드는 도합 2억 골드가량.

그것도 흑요에게 회수하고, 유적을 전부 억지로 판매해서 영혼까지 끌어모은 돈이다.

아무리 세트라지만, 경매건 하나에 오천만 골드면 상당히 뼈아픈 지출이다.

그런데 아직 참가자들은 여유로워보였다.

"버서커 세트의 입찰가가 5천만 골드에 도달하여 입찰 금액을 천만 골드 단위로 올리겠습니다. 6천만 골드, 없으십니까?"

펄럭!

"영예로우신 3번 손님! 경매가 뜨겁습니다!"

"91번 손님! 벌써 입찰가가 7천만 골드를 넘어섰습니다!"

"아아, 곧바로 3번 손님께서······!"

"91번 손님께서 무려 9천만 골드에 입찰하셨습니다!"

마스터는 마지막 베팅을 던졌다.

9천만 골드가 한계다.

첫날부터 1억 골드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더이상 팔 물건도 없다. 내 장비를 파는 게 아닌 이상.'

아무리 제국 귀족이라도 1억 골드를 사용하긴 쉽지 않을 터.

이미 다른 입찰자는 모두 나가떨어진 상태다.

남은 건 3번, 데르시안 영애뿐.

마스터가 데르시안 영애에게 시선을 던졌다.

"3번 손님께서 1억 골드에 입찰 1위로 올라섭니다! 엄청납니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감히 확신합니다!"

마스터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경매 참가자는 모두 사전에 등록하여 확인된 금액만 사용할 수 있다.

그것도 모두 현물로 갖고 있어야 했다.

그 이상의 입찰을 시도할시, 자체적으로 배제된다.

말인 즉, 데르시안 영애는 적어도 수억골드를 현물로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눈에 띄는 것.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다.

이 이상 무리하게 베팅하다가 만에 하나 낙찰이라도 되면 골치가 아프겠지만, 적어도 1억 골드 가까이를 화끈하게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를 증명하듯, 제국 귀족들의 좌석에서 몇몇 귀족이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게 느껴졌다.

"더이상 안 계십니까? 입찰 희망자가 안 계신다면 '버서커 세트'는 고귀하신 3번 손님께 넘어갑니다. 3초를 세겠습니다. 3, 2······."

저 마르지 않는 샘물을 상대할 자는 이곳에 없었다.

이제 경매 첫날.

버서커 세트가 엄청난 물건이라 한들, 아직 경매는 한참 남았으니.

펄럭!

그 순간, 부채 하나가 활짝 펴졌다.

"55번 손님! 새롭게 부상합니다! 1억 1천만 골드!"

모두의 시선이 55번에게로 향한다.

갑자기 나타난 입찰희망자.

하물며 55번이면, 이미 도시에서 한차례 소동을 벌인 자다.

그것도 3번, 데르시안 영애와 다툼이 있었던 자였다.

'괴물 따위가 1억 골드가 넘게 있다고······?'

데르시안 영애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행자가 정상적으로 진행을 한 것을 보면 이미 현물로 확인된 상태라는 뜻.

경매를 함께 주최했다지만 사실 '경매' 자체는 다르칸 영주의 몫이었다. 경매가 끝나고 있을 '연회'가 바로 자신의 영역이었고.

데르시안 영애가 재차 부채를 펼쳤다.

무리해서 따라오려거든, 어디 한 번 따라와보라는 자신감.

"고귀하신 3번 손님께서 다시 한 번 입찰하셨습니다. 1억 2천만 골드입니다!"

진행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외쳐댔다.

"55번 손님, 다시 한 번 따라붙습니다!"

"아아, 내어주지 않겠다! 3번 손님께서 1억 4천만 골드를 지르십니다. 1억 5천만골드까지 갑니까?"

"······ 갔습니다! 55번 손님께서 1억 5천만 골드!"

하지만 입찰금이 1억 5천만 골드를 돌파하자 그녀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돈이 썩어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1억 5천만 골드면, 상위귀족도 함부로 사용하기 어려운 액수다.

하물며 이제 경매는 시작이지 않나.

과연 버서커 세트가 1억 5천만 골드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영애님. 이 이상은······."

데려온 감정사가 작게 귀뜸했다.

그는 1억 1천만 골드가 넘어선 순간부터 작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뭐냐고! 저놈은 뭔데 계속 나를 방해하는 거야!'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고싶지 않다.

하지만, 멀리봐야 한다.

정말 갖고 싶었지만, 이 이상은 낭비다.

만에 하나 55번이 더 입찰하지 않는다면 손해가 크다.

'진정하자. 더 이상 입찰가를 높이는건 멍청한 짓이야. 앞으로 남은 경매가 얼마나 많은데.'

1억 5천만 골드를 썼다. 남아있는 골드는 얼마 없을 것이다.

"1억 5천만 골드에 55번 손님께서 '버서커 세트'를 낙찰하셨습니다! 워후후!! 대단하십니다!"

······ 단발성으로 시선은 끌었지만, 과연 그게 계속 갈 수 있을까?

이 관심은 빠르게 수그러들고 경매가 끝날 때즘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있을 것이다.

데르시안 영애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

*

'나쁘지 않군.'

첫날의 경매가 끝난 뒤, 모든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된 연회장으로 인도되었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준비된 술을 마시며 낙찰받은 물건들을 떠올려보았다.

자연의 노래를 부르는 자, 버서커 세트가 메인이지만 그 외에도 가격대비 가치가 높은 것들 위주로 사들였다.

빛의 옥좌에 재료로 써도 되고, 동료를 강화시키는데 써도 나쁘지 않은 물건들.

'탐욕의 눈. 이걸로 경매물품의 가치를 볼 수 있었지.'

경매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관찰'류의 스킬이나 도구, 혹은 아예 '감정사'를 데려왔다.

경매물건의 확실한 가치를 판단하고 이득을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이것만 있으면 된다.

탐욕의 눈!

황금 고블린의 왕, 탐욕에게서 받아온 '복제된 인공 눈'이다.

더 빠른 미궁의 탐색을 위해 직접 제조한 것이라나.

탐욕은 심연 미궁에 남아있던 황금 고블린들을 모아, 현재 미궁에 숨겨진 구제국의 보물들을 착실하게 모으고 있었다.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일꾼 부대가 자원을 캐고 있었다.

그리고 탐욕이 그 황금 고블린들에게 뿌린 '인공 눈' 중 하나를 내가 가져온 것이다.

방울토마토 크기의 작은 황금안이지만 무려 탐욕의 눈을 복제한 것이니, 이보다 확실하게 '가치'를 볼 수 있는 건 이곳에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뛰어난 감정사? 등급 높은 관찰류 스킬?

그것들이 과연 억겁의 시간 동안 심연에서 보물을 모아온 탐욕에 비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노래를 부르는 자는 1억 골드의 가치를, 버서커 세트는 2억 골드의 가치를 지닌 진짜배기다.'

경매가가 높기는 했지만 덕분에 손해는 안 봤다.

다만, 복제품이라 그런지 여전히 나의 가치는 확인이 안 된다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대단하십니다. 첫날 경매에 4억 골드를 쓰시다니!"

"1등 아닙니까?"

"처음 뵙는 분인데, 어느 도시에서 나오셨습니까?"

허드슨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경매의 참가자들이다.

첫날 경매에서 혼자 4억 골드를 썼으니, 소란이 되는건 당여지사.

오른쪽에 앉았던, 외부인들의 중심에는 허드슨이 섰다.

그리고 제국 귀족들의 틈에는 다르칸 영주와 데르시안 영애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슬쩍슬쩍 허드슨을 염탐하는 중이었다.

"첫날부터 4억 골드라······."

"저만한 돈을 어디서 구한거지?"

"괜스레 무리한 것 아니겠나."

말은 비웃고 있지만, 그조차도 관심이다.

제국의 귀족들은 관심 없는 자는 눈길도 주지 않으므로.

과연 계속해서 이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절로 궁금증이 들었던 탓이다.

무엇보다, 그가 어느 도시에서 초청된 자인지도.

이곳 연회는 경매가 끝난 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사교의 장. 당연히 경매에서 눈에 띈 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놈 뭐야?'

데르시안 영애 역시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내심은 구겨질대로 구겨진 상태였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저만한 금액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건만.

대체 어디서 저만한 돈을 끌어온 걸까?

그것도 괴물의 도시, 미궁에서 온 자가.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되는데, 어느덧 모든 관심을 저놈이 받고 있었다.

'1번은 안 보이는군.'

그 시선을 아랑곳않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1번을 찾고 있었다.

다르칸 영주나 데르시안 영애보다 앞번호에 있던 자.

다른 자들보다도 1번이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내일 경매는 뭐가 나올지 진심으로 궁금하군요."

"이것 참. 내일이라도 경매물건을 등록해야 조금이라도 경매에 참가할 수 있겠습니다."

"55번께서도 경매물건을 등록하셨겠지요?"

"오오, 어떤 물건을 등록하셨는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허드슨이 관심을 끌며 이야기를 선도해나갔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쯤.

"도시 '델피안'이 함락되었습니다."

"'사흉 바알'이 '델피안'을 심연에 가라앉힙니다."

······ 느닷없이 메시지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으음!"

그 순간, 침음성을 내뱉은 남자 한 명.

큰 반응은 아니지만 델피안의 함락 소식을 보자마자 소리를 내뱉었다.

'68번.'

절묘한 타이밍.

우연이 아니라면, 68번은 플레이어다.

다행히 허드슨은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면 68번의 반응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 그나저나.

'델피안 함락이라.'

바알이 델피안을 함락시켰다니.

3천 명의 전사가 델피안에 모였다는 이야기가 퍼진 게 불과 어제 일이었다.

그게 고작 하루만에?

쿵!

곧이어 연회장이 열리며, 몇몇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의 귓가에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델피안의 함락 소식을 전하는 것이겠지.

"······ 뭐? 그 말이 정말 사실이냐?"

"예. 영애님."

동시에 데르시안 영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차마 감추지 못하는 기쁨 절반과, 당황스러움 절반의 얼굴.

이야기를 전해들은 귀족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당황의 비중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제국과는 상관없는 도시들.

"하하하!"

연회장은 금새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

다음날, 두 번째 특급 경매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날과 달라진 게 있었다.

바로 번호.

'2번.'

55번에서 2번으로 급등했다.

왼쪽 제국 귀족들의 자리로 이동한 것이다.

'전날 돈을 쓴 순서대로 위치가 재배열되나보군.'

나름의 특혜라면 특혜일까.

3번 자리엔 데르시안 영애가 앉았다.

'어제자 68번은······ 없다.'

모든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어제 반응한 68번만 없었다.

플레이어임을 눈치채고 제거한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 검은 염소라."

그때였다.

1번의 자리에 앉은 남자가,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드슨이 아닌 나를 정확히 바라보면서.

1번에 앉은 남자는 어제 경매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제일 돈을 많이 쓴 게 나임에도, 여전히 1번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턱시도와 흰색의 가면으로 전신을 가린 자.

그가 나를 향해,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어제의 68번은 플레이어였다. 그대도 알고 있었겠지?

광역 도발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음성.

마치 머리 안에서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귓속말은 아니다. '전음(傳音)' 부류의 스킬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 식의 스킬이었다면 내가 먼저 눈치챘을 터.

'황금률의 선.'

그와 나 사이에 연결된 황금색의 실선.

오직 연결된 자들만이 말하고 들을 수 있는 '황금률'을 이용한 대화였다.

황금률의 조각을 이용해서 이런 것도 가능했단 말인가?

허드슨이 알려준 '자동번역'의 기능에서 한발 더 나아간 기술이다.

하기야, 성에만 틀어박혀 있던 허드슨이 황금률에 숨겨진 대화의 기능을 알 수 있을 리가 없긴 했지만.

'전할 말을 실에 담아서 보낼 수 있나 보군.'

무심결에 떠올린 생각을 즉시 전달하진 않았다.

눈앞에 내가 생각한 내용이 글자로 떠올랐고, 그중 원하는 것을 실에 담아 보낼 수 있는 형식이었다.

실 전화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

'······ 플레이어를 알고 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상대는 분명하게 플레이어를 언급했다.

뿐만인가.

68번, 그가 사라진 이유 역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물며 '너 역시 알고 있었느냐'며 내게 묻고 있었다.

무슨 연유일까.

왜 나한테 묻는 거지?

'확실한 건, 다르칸 영주보다도 윗선에 있는 자라는 것.'

경매를 주최하여 자신의 영지에 내세운 다르칸 영주는, 당연히 특급 경매 1순위다.

그런 다르칸 영주보다도 앞에 있으며 제국 귀족들 역시 별반 의구심을 갖지 않는 남자라.

어제 경매를 진행하며 본 제국 귀족들의 성향은, 대부분 자신보다 못난 자가 앞에 있는 걸 절대로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장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네 가지.

최고위귀족, 황실, 사신교······ 혹은 특별한 플레이어.

'황금률을 다루는 건 플레이어만이 아니다. 심연 미궁에도 판게니아인들이 속속들이 들어왔었으니. 그러나 가능성의 한 가지로는 충분해.'

심지어 괴물들도 다루는 게 황금률의 조각이었다.

황금률을 다룬다고 플레이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68번이 누구냐?

하여, 능청을 떨었다.

1번은 여전히 경매장을 보고 있다.

그는 내게 전혀 관심 없는 척을 하며 답을 보냈다.

-정말로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마치 알아야 할 것을 모르냐는 듯한 말투다.

나는 내심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68번은 죽었다고.

어딘가로 사라진 것도, 영지에서 도망친 것도 아니라, 죽은 것이다.

-없는 자를 두둔할 필요가 없을 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굳이 두둔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윽고 1번의 목소리가 재차 머릿속에 퍼져나갔다.

-나는 플레이어일세.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 뭐라는 거야, 이놈?

갑자기 플레이어라고?

설마 내 반응을 떠보려는 건가?

68번이 플레이어인 것을 알고 있었느냐며 떠보더니, 이제는 아예 자신이 플레이어라며 막 던지고 보고 있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던지면 내가 반응을 보이리라고 생각하는지.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하마터면 진심으로 움찔할 뻔했다.

-아.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겠군. 나는 '민트초코맛있어요' 일세. 만나서 반갑네.

*

델피안 함락!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3천 명이 넘는 인원.

게다가 다수의 초월자가 참가했음에도 고작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니!

-다크스타 공식 입장 없음?

-잠잠함

-다크스타가 런을 못했다고?

-런크스트가 런을 못 칠 정도면 몰살당한 거냐 설마?

-미친... 어떻게 단 하루 만에 도시 하나가 사라질 수가 있냐?

-델피안이면 나름 건실한 중립도시 아니던가

-대장장이 삼대 도시 중 하나인데 당연히 건실하지... 그리고 토벌하려고 공성 무기도 엄청나게 제작해놓은 거로 아는데

플레이어 톡의 플레이어들 역시도 충격의 도가니였다.

사흉 토벌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이 자신감을 표출하던 게 고작 어제의 일.

그 규모와 참가자들을 보았을 때, 패배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건만.

게다가 무려 델피안이다.

대장장이의 도시로 가장 유명한 세 곳 중 한 곳!

참가자를 모집하고자 고등급의 장비를 내세웠지만, 도시 자체를 '공성 도시'로 탈바꿈시킬 만큼 엄청난 준비를 해온 장소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참가자들 다 죽은 거야? 아무나 제발 말 좀 해봐. 내 친구 참가했는데 소식이 끊겼다고

-말

-개새끼야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이나 죽을래?

-ㅇㅇ죽여보셈

-너 어디 사냐?

그중에는 흥분하여 싸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

-이상하긴 하네. 보통 이때쯤이면 누군가가 살아있다고 해야 할 타이밍 아님?

-심연에 전부 가라앉은 듯

-누가 확인 좀 해봐

-심연으로 꺼졌는데 어떻게 확인을 해 이 자식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어...

-잠깐만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그때였다.

동시다발적으로 당황한 듯한 게시글이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지사항 뜬 거 맞지 지금?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도시 다섯 곳이 전부 심연에 가라앉으면 사흉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된다는데?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뭐임?

-공지 내용이 저게 전부가 아니잖아

-아 ㅅㅂ 누가 공지로 장난쳐놓은 거냐?

-이게 말이 돼?

-지구...로 온다는데...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온다고?

-지구 어디로?

-그건 안 적혀있음

-초월자급 다수가 포함된 3천명이 못 막았는데 지구로 넘어오면 막을 수 있나?

-넘어오자마자 핵 쏴야할 듯

-워프 넘어온 괴물들은 황금률로 변신한 상태의 공격만 통하는데 핵이 소용이 있겠냐

느닷없이 떠오른 공지사항으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

판게니아에서도 막지 못한 괴물이 지구로 넘어오면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무엇보다 어디로 공격해올지 예측을 할 수 없는 상황.

-이건 좀 많이 큰일인데?

-지금 안 그래도 침식률 20% 다가오지 않았나

-첫 침략이 망자왕 아흐람이었고, 두 번째 침략은 그보다 강한 놈일 테니까...

-아흐람은 란돌프가 막았다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잖아

-사흉이랑 마계 침공이 겹치면 진짜 지구 멸망 각 잡힐 수도 있겠네;;

-그라시아랑 마스터는 뭐하냐? 다른 영웅놈들은?

-둘 다 잠수중이다

-런크스타 이번에는 런친거 인정해줄 테니까 좀 나타나서 말좀해봐 제발

-판게니아에서도 별 말 없음? 델피안에 지원한 도시들 있을 거 아니야?

-다들 혼란 상태임 일단 내가 알기로는 생존자 없음

-도시 전부 함락되기 전에 플레이어들이 모여야 할 거 같은데...

-총대를 누가 맴

-그라시아 나타났다!!

-뭐? 어디?

-유튜브 라이브! 지금 막 켰음

그라시아가 자신의 채널에서 라이브 방송을 켰다는 소식에, 너나 할 것 없이 입장하여 그라시아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라시아를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상태가 좀 안 좋아보이네

-그러게... 왜 갑자기 백발이 됐지?

-거기서 뭐래?

-'히드라곤의 혼'을 가져오면 자기가 토벌하겠다는데?

*

······ 민트초코맛있어요?

오직 플레이어들만이 알고 있는 닉네임.

판게니아인이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름을 1번이 언급했다.

게다가 그것을 자신이라며 소개하는 모습까지.

'민트초코맛있어요가 제국의 관계자다?'

제국은 플레이어를 대놓고 멸시한다.

그럼 몰래 잠입이라도 해있는 건가?

어쩌면 이조차도 낚시일 수도 있었다.

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히든 특성 '영원군주의 심장' 덕이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공지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떠오른 메시지.

마침 잘 됐다.

진짜 플레이어라면, 이 공지사항에 대해서도 언급할 테니.

-···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군. 이걸 어찌 막는다.

놀랍게도, 1번은 공지사항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방금 떠오른 공지사항을 사전에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1번이 플레이어라는 의미인가? 이놈이 진짜 민트초코라고?

하지만 언제까지고 대답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천천히, 결론내린 바를 전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못알아듣겠군. 계속 개소리를 지껄일거면 말 걸지 마라.

진짜든, 아니든, 반응을 해선 안 된다고.

이후 나는 곧장 황금률의 선을 끊었다.

정보에 우위를 가진 놈과 길게 대화하면 밑바닥만 보이게 되는 법이다.

하물며 '황금률의 선'을 이용한 대화도 처음이지 않나.

여기선 한 발 물러나는 게 맞다.

내가 황금률의 선을 끊자, 1번은 어깨를 으쓱했다.

'위험한 놈이다.'

속을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놈과는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하여, 아예 신경을 접었다.

당장은 경매에 집중해야할 때.

"다음 경매 물품은 신화등급의 물건입니다! 현재의 고귀하신 3번 손님께서 직접 내놓으신 상품 '천옥의 도자기'! 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이 아름다운 이 도자기의 입찰 시작가는 100억 골드입니다!"

3번, 데르시안 영애가 특별한 물건을 내놨다.

허나 가격이 말도 안 된다.

100억 골드.

당연히, 입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것을 데르시안 영애도 노리고 있었다.

과시.

이처럼 아무도 입찰하지 못할 금액을 설정해, '과시'하는 것이다.

보아라. 데르시안 가문에는 이런 물건이 있노라!

"허어."

"저게 그 유명한 천옥의 도자기인가?"

"저 도자기를 데르시안 가문이 갖고 있었다니."

"이름처럼 아름답구나."

제국의 귀족들은 순수히 감탄했다.

동시에 데르시안 영애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당연히 입찰자는 아무도 없었다.

"입찰자가 안 계시면 다음 물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자, 다음 물건은 이보다도 훨씬 아름답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천옥의 도자기보다?"

"그런게 세상에 있나?"

천옥의 도자기는 비추는 면에 따라 천 가지 아름다움을 내는 물건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로 손꼽히는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물건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곧이어 경매의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다음 경매 물품은 무려! 유일급 물건입니다! 제가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보십시오! 오늘 2번으로 오른 고귀한 손님께서 등록하신 '빛의 옥좌'입니다!! 시작가는 1,000억 골드! 아아······ 이건 이 세상에서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한분말곤 안계시겠군요."

"-?"

"!!!"

경매에 참가한 모두가 경악하며 시선을 던졌다.

잠시 후 빛으로 이루어진 옥좌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 유일급?"

그중에는, 당연히 1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은 경매에 집중해야할 때였다.

어차피 너도 집중해야 할테니까.

*

경매 입찰로 쓸 수 있는 돈은, 사전에 확인시킨 금액뿐이다.

천억골드는커녕 백억골드도 등록한 사람이 없을 테니, 당연히 입찰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만한 돈을 갖고 있는 곳은 황실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황제가 아니라면 살 수 없는 물건.

"저건······."

"말도 안 되게 아름답군."

모두가 넋을 잃고 빛의 옥좌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설정하여 빛의 옥좌를 등록한 건 이를 위함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갖지 못할 물건을, 나는 갖고 있노라고.

"가, 감정이 안 됩니다."

"스킬로도 확인을 할 수가······."

동시에, 감정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유일급의 물건은 소유자가 아니면 그 상세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저 옥좌가 유일급의 물건인지 어떻게 확신하지?"

"고귀하신 손님들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전 겨우 확인이 되긴 했습니다만, 등급만큼은 저희가 보증하겠습니다."

확인했다.

등급만.

진행자의 발언에 모두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천억 골드나 되는 금액을 입찰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대신 모두의 시선이 나와 허드슨에게로 향했다.

3번, 데르시안 영애는 아예 두 눈을 부릅뜬 채 떨리는 동공으로 물건과 우리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입찰자가 안 계신 관계로 다음 물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입찰이 없이 유찰되면 물건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이후 다시 입찰가를 설정해 경매에 등록하는 건 물건의 주인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나는 광역 도발을 하게 된 셈이다.

이곳 다르칸 영지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바알 갑옷을 찾으려면 이게 제일 빠르다.'

제국 어딘가에 있을 바알 갑옷을 찾기 위해선 이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갈 가능성이 생긴 이상 최대한 빠르게 찾아야 했으므로.

"잠깐."

"······ 이, 일번 손님?"

다음 경매로 넘어가려는 찰나.

1번의 남자가 손을 들자 진행자가 경기를 일으키며 반응했다.

그가 경매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바알 갑옷

경매 진행자의 반응.

그리고 제국 귀족들의 태도.

마치 어려운 주인을 대하는 행동이다.

아예 눈을 피하거나 낮추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칸 영지였다.

제국의 뛰어난 검술 명가이자, 수많은 귀족의 질서를 주도하는 존재.

그런 다르칸의 영주가 2순위를 자처하며, '특급'이라 이름 붙은 경매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는······.

'황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실밖에 없다.

그러나 황실이라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절대로 제국 황실에 소속될 수 없으니까.

그들의 병적인 폐쇄성.

그 안에서 정체를 숨긴 채 생활을 영위하는 건 불가능하다.

1번. 여유롭게 손을 든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진행자여. 사전에 등록된 금액만 입찰에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예, 그것이 경매의 규칙입니다. 고귀하신 1번 손님."

경매가 시작하기 전에 사전 확인된 현물.

오직 그 현물을 기준으로 입찰할 수 있다.

1번의 남자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당연히 1천억 골드를 현물로 확인시켰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묘하게 저 여유가 걸린다.

'1천억 골드의 규모를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

아무리 제국 황실이라 한들, 그만한 금액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힐 것이다.

진행자의 말마따나 황제가 아니라면 쉽지 않을 터.

황실의 관계자라면 강제로 규칙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만에 하나의 경우, 나와 허드슨을 '플레이어'로 지목하여 물건을 강탈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다.

물론 백왕을 적대한다는 리스크를 안기는 하지만 '빛의 옥좌'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

빛의 옥좌가 가진 진정한 가치를 알아봤다면 도박을 걸 수도 있을 테지.

"규칙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규칙은 존중해야 하니."

······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천억 골드로 입찰 시작가를 정해놨는데, 입찰하려는 정신 나간 놈이 있을 줄은 나도 예상 못 했으니.

천억 골드면 왕국을 살 수도 있는 금액.

설령 제국의 황제라도 그만한 금액을 선뜻 내진 못하리라 생각했다.

'안일했군.'

제국에 대한 평가를 격상시켜야겠다.

구제국의 땅을 전부 수복하지 못한 제국이라면, 천억 골드는 쉽지 않으리라 여겼거늘.

안일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는 두 번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1번의 남자는 '규칙'을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저건 진행자가 아니라 내게 말한 것이다.

강제로 진행할 수 있지만, 강제로 진행하진 않겠다고.

······ 뭐 하는 놈일까.

황실의 관계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민트초코맛있어요'라고 밝힌 남자.

절대로 공생할 수 없는 두 이름이 함께하고 있었다.

놈의 정체를 알 수가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Lv. ??]

레벨이, 보이지 않는다.

여태껏 레벨이 물음표로 뜬 경우는 딱 두 번뿐이었다.

'지고룡 라일리와 사흉 바알.'

그 둘만 물음표로 보였다.

앞선 둘은 거대의 괴수이며 레벨을 확정하기 모호한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저놈은 인간이다.

아니······ 인간인가?

이제는 인간인지 아닌지도 확신이 안 선다.

10을 넘는 레벨인 건 분명할진대.

'레벨이 물음표로 뜨는 기준이 있을 거다.'

그 기준을 아직 내가 모를 뿐이다.

셋의 공통점이 뭘까.

지고룡 라일리와 사흉 바알, 그리고 1번의 남자.

셋 다 너무나 강력해서?

내심 고개를 젓는다.

'백왕의 레벨도 확인했다. 강함은 기준이 아니야.'

대현자를 이용하여 보이는 지식.

15레벨의 그 괴물, 백왕마저 확정할 수 있지 않았나.

사흉은 몰라도 지고룡 라일리는 백왕보다 강하진 않았다.

지고룡 라일리와 검성 라일리가 합쳐진 뒤라면 모르겠지만, 지고룡만 보았을 땐 분명히 그랬다.

강함이 아닌 다른 기준.

히든 특성 '대현자'를 피해 레벨을 감추는 효과······.

'히든 특성을 막을 수 있는 건, 히든 특성뿐이다.'

물론 히든 특성도 무적은 아니다.

예컨대 '거인의 항마력'은 '마력 관통' 효과에 뚫리므로.

하지만, 완벽하게 히든 특성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관통 100%가 존재할 리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대현자'의 관찰 기능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건 '관찰 방해', 혹은 '관찰 방어'의 효과를 지닌 아이템이나 스킬뿐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순 없다.

아예 '물음표'로 만들 수 있는 건 같은 히든 특성밖엔 없을 터.

'아마도······ 철혈군주의 심장. 혹은 대현자.'

지고룡 라일리, 사흉 바알 역시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라일리는 수많은 재능이 찍힌 검성. 거기에 지고룡의 특성까지 더해져 상상을 초월하는 격을 지닌 자였다.

사흉 바알?

숙련도 경험치를 그만큼이나 봉인해둘 정도로 온갖 것의 '격'을 높인 괴물이었다. 히든 특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도리어 이상할 지경.

나와 같이 14개나 지니진 못했겠지만, 겹치는 게 있을 수는 있었다.

아마도 철혈군주의 심장이나 대현자.

철혈군주는 영원군주로 진화하긴 했지만, 대현자는 그대로니.

마찬가지로 1번의 남자 역시 둘 중 하나를, 혹은 둘 다를 지녔을 것이다. 말마따나 민트초코맛있어요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황실 역시도 히든 특성의 존재는 알고 있을 테니, 이 또한 부정하긴 어렵다.

'누구냐, 넌.'

이만한 혼란을 주는 인간은 나도 처음이었다.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쯤 되자 궁금해진다.

저 가면 너머의 얼굴이.

진정한 녀석의 정체가.

*

"어떠셨습니까, 오늘의 경매는?"

너른 방.

영주성에 따로 준비된 특실에서, 다르칸 영주가 말했다.

그러자 창밖을 보며 앉아있던, 여전히 가면을 쓴 1번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재밌더군."

실로 재미있었다.

그는 오랜시간 무료했던 찰나, 이러한 흥미를 느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역시 '빛의 옥좌'가 눈에 띄셨는지요?"

"음. 확실히, 괜찮은 물건이더군."

"···죄송합니다. 총력을 다해 관찰자들이 달려들었습니다만, 유일급의 등급 외에 '빛의 옥좌'의 상세내용을 파악할 순 없었습니다."

"괜찮다. 나도 그랬으니."

1번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급의 물건을 전부 파악하는 건 소유자 외엔 불가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능력으로 기본적인 골자는 파악할 수 있었다.

"허나··· 먼 옛날, 태양을 떠받든 신이 앉았던 옥좌라는군. 당연히 내가 가져가야하지 않겠나?"

딱 한줄.

그마저도 저 한줄만 파악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만한 설명이면 충분하다.

다르칸 영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거기까지 파악하셨군요. 역시······!"

"쉿."

1번의 남자가 검지를 들어 코에 가져갔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다.

그를 보며 다르칸 영주가 몸을 떨었다.

"아······."

"나에 대한 어떠한 것도 언급을 금한다. 그것이 제국의 규칙이다."

"죄, 죄송합니다. 1번님."

다르칸 영주가 당황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1번의 남자. 그는 다르칸 영주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였기에.

그가 작정한다면 다르칸 영지는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었다.

겁에 질린 다르칸 영주를 보며 그가 씽긋 웃었다.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경매 역시 마찬가지."

"경매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와 직접 거래를 하시면."

"아니, 그는 경매를 위해 이곳에 왔다. 당연히 경매로 풀어야하지 않겠느냐?"

"하오나······ 허드슨이라면 말이 통할 겁니다. 미궁에서 왔다지만 그는 인간이니까요. 빛의 옥좌도 미궁에서 나왔을 겁니다."

미궁의 대리인으로 나온 허드슨.

그는 이미 황금도시 아르카나에 구제국의 보물을 판 경력이 있다.

모두 미궁에서 나온 보물들을.

빛의 옥좌도 미궁에서 발견했을 가능성이 컸다.

당연히 충분한 골드만 쥐어주면 거래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허드슨? 아아, 나는 그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허드슨이 아니라니.

경매를 진행하는 건 미궁의 대리자인 허드슨 아니었던가.

"그럼 뒤에 있는 바바리안 말씀입니까?"

"그래. 그자야말로 내게 진한 여운과 재미를 가져다준 자이니."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빛의 옥좌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욱 훌륭한 것은 바로 검은 염소의 탈을 쓴 남자였다.

허드슨은 그 남자의 꼭두각시일뿐이다.

다르칸 영주는 그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그가 이 정도로 다른 자에게 관심을 주며 '여운과 재미'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

하여, 언제나 누군가를 평가할 때 무료하고 따분한 감상만을 늘어놓았다.

'내가 볼 수 없다. 그는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재밌었다.

자신의 히든 특성으로도 볼 수 없는 자.

필시 자신과 같은 '관찰 방해'의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플레이어인 줄 알고, 떠봤다.

한데, 반응이 없다.

68번을 언급하고, 플레이어라면 반드시 알고 있을 터인 닉네임까지 말했음에도, 미묘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너는.'

누구일까.

미궁에서 나왔으며 오주력의 신임을 받는 자라고?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숨겨둔 게 더욱 많다.

그리고.

'그만한 물건을 꺼냈다는 것은, 원하는 물건이 있다는 의미일 터.'

그 자신감.

유일급의 매물을 모두에게 선보였다.

태양신이 앉았다는 빛의 옥좌를.

미궁에서 나온 것인지, 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자신감이다.

그것도 자신의 땅도 아닌 제국 내에서.

수많은 귀족들의 앞에서 말이다.

단순히 과시하고자, 혹은 천억골드를 정말 원해서 등장시킨 건 아닐 것이다.

어디 한 번 이 정도로 떨릴만한 물건을 내놓아 보라는 뜻이었다.

이게 전부냐고. 실망스럽다고.

좋다. 아주 재밌었다.

그만한 매물을 보였다면, 자신 역시도 그가 눈독들일 매물을 보여야겠지.

무엇을 보여야할까.

어떤 물건을 내놔야 그를 흔들 수 있을까?

"아. 그리고 새롭게 '죄인'으로 판명된 자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르칸 영주가 물었다.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태도로, 1번의 남자가 말했다.

"'죄인'은 모두 죽인다. 그게 규칙이다."

죄인. 플레이어.

그들은 모두 죽여야 하는 게 규칙이었으므로.

*

셋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경매 물건의 '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설 등급 이상의 무구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심지어는 신화 등급의 것들도 심심치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지는 보물들에 경매의 참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하나.

"다음 경매의 물건은 '바알 갑옷'입니다! 최근 델피안을 함락시킨 '사흉 바알'과도 관계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갑옷! 온갖 저주가 서려있는 것만 같은 흉악한 이 자태를 보십시오! 정말 경악스럽습니다!"

······ 바알 갑옷이 경매의 물건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신교

검선일기를 통해 확인한 바알 갑옷의 위치는 제국의 어딘가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 다르칸 영지는 아니었다.

없던 게 생겼다.

누군가가 경매에 내놓고자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1번.'

최소 전설 등급의 물건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 자.

제국의 창고라도 털지 않는 이상에야 쉬이 볼 수 없는 것들을 꺼내어 경매에 부칠 수 있는 능력자는 1번뿐이었다.

'빛의 옥좌를 보고 반응을 한 거다.'

그러나 갑자기 고품격의 매물을 내놓을 리가 없다.

모두 소화하지도 못할 가격대의 보물을 보여주는 건 경각심만 살 따름이므로.

어제 내가 내놓은 빛의 옥좌를 보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입찰하려고 기회를 엿봤지만, 경매장의 '규칙'에 따라 그러질 못했으니, 나 역시도 어디 '구경'만 해보라는 건지.

'내가 무슨 물건에 반응하는지 알아내려는 거로군.'

이만한 물건들을 본다면 그중 하나는 끌릴 수밖에 없다.

특히 바알 갑옷은 '바알 세트'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응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고귀하신 손님 여러분! '바알 갑옷'은 단순히 불길하기만 한 물건은 아닙니다. 저희 경매단이 책정한 등급은 '궁극신화' 등급! 오늘 나온 물건 중에서도 감히 최고라 자부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며, 현재 수련자의 산과 델피안을 몰락시킨 고대 전설의 존재 '사흉 바알'과 관계된 것이니만큼 그 희소성은 두말하지 않으셔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궁극신화.

그리고 사흉 바알과 관계된 갑옷!

제아무리 강렬한 불길함을 품었다고 해도, 이만한 물건을 경매장에서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극신화면 유일급에 가까운 등급 아닌가?"

"사흉은 구제국을 몰락시키는데 일조한 흉물들······."

"허. 그 사흉의 보물이라."

제국의 귀족들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타난 바알 갑옷은, 일반적인 갑옷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은색의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모습.

처음에는 꺼림칙했으나 경매 진행자의 설명을 듣자 그마저도 특별해 보인다.

"경매 입찰 시작가는 5억 골드! 입찰 단위는 일억 골드! 절대 후회하지 않을 보물.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시작가가 5억 골드.

당연히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일 터.

펄럭!

누군가가 부채를 펼쳤다.

"영예로우신 3번 손님! 역시 안목이 예사롭지 않으시군요!"

데르시안 영애가 다시 한번 참전했다.

이틀 연속 나는 2번의 자리에, 데르시안 영애는 3번의 자리에 고정된 상태였다.

의도한 건 아니다.

입찰가 대비 가치있는 물건을 죄다 사들이다보니 2번에 자리했을 뿐.

'낙찰되어도 1번은 방관만 하고 있다. 물건이 팔리는데 개의치 않아.'

앞선 경매에서 1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중이었다.

낙찰 돼도 상관이 없다는 듯이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더 안계십니까? 바알 갑옷은 충분히 10억 골드 이상의 가치가 있는 보물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오랜기간 살펴본 기록에 따르면 '사흉의 무장'은 '사흉의 근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알고싶지 않으싶니까?"

궁금하다. 알고싶다.

하지만, 6억 골드는 제국 귀족들도 많이 부담되는 액수다.

그만한 금액을 경매에 쓰고자 가져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기껏해야 다섯이 넘지 않으리라.

··· 그중 한 명이 나고.

"아아······!!!"

그때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기겁했다.

병이라도 걸린 듯 안색이 창백하고 미칠 듯이 땀을 흘려대는 남자.

그는 처음 오른쪽에 앉아있던, 외부에서 초청된 자였다.

모두의 시선이 쏠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외쳤다.

"사, 사신! 살려줘! 말할게! 말할테니까 제발 나는 살려달라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신?

곧이어 남자가 좌석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53번, 저새끼! 저놈도 '플레이어'야! 가면으로 가렸지만 확실해! 그러니까 제발······!"

툭!

떼구르르.

순간 잘려나간 남자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내심 이맛살을 구겼다.

무엇에 잘려나간 건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아무런 기색도,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가 공격의 의도를 갖고 움직이지조차 않았다.

돌연 듯 잘려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신이 낫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사람들은 당황했다.

특히 '초청된 사람들'이.

반면, 제국의 귀족들과 경매의 진행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다.

사람이 죽었는데 쳐다도 보지 않는다.

더러운 오물이라도 되는양 아예 외면해버렸다.

그리고.

'······ 웃고 있다?'

············ 그들은,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이 익숙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기대라도 된다는 듯이.

띠링!

띠리링!

머지않아 검은 후드를 쓴 존재들이 경매장에 난입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와 '동색의 여우가면'을 쓴 채로.

그들은 허리춤에 '검은 종'을 달고 있었다.

일전에 심연 미궁에서 만난 '은여우가면의 검사'가 달고 있던 종과 같은 것이다.

시체를 둘러싼 그들이 검은 종을 들고 합장을 하였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링!

쉴 새 없이 종을 흔들며 흰색의 알 수 없는 가루를 뿌렸다.

동시에.

"헛······!"

"모, 모습이 변한다!"

······ 목이 잘린 남자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도, 육신도, 입고 있는 옷마저도 전부 다르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

이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허드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은, 분명히 지구인었기 때문이다.

금발의 머리칼을 가진 외국인.

흰색의 티셔츠 위엔 'I'm Champion'이란 영어와 함께 그의 얼굴이 프린트되어있었다.

누가 봐도 자기애가 강한 지구인이다.

그 또한 목이 잘린 채 죽어있었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

"'죄인'이다."

"'죄인'이다."

"'죄인'이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자들 모두가 같은 말을 쏟아냈다.

그러자.

띠링!

은색의 여우가면을 쓴 또 다른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찰나.

치직! 치지지직!

그의 손에서 번개가 소용돌이 쳤고, 이내 그 번개의 소용돌이는 사나운 짐승의 입처럼 변하며 시체를 삼켜버렸다.

그렇게 시체의 '소각'을 끝낸 그들은 다시 경매장 바깥으로 물러났다.

"······ 잠시 경매를 중단하겠습니다."

"잠깐,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할 것이다. 아니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을 테니!"

"그럴 순 없습니다, 손님."

초청된 사람들 중 한 명이 항의하자, 진행자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다니?"

"'죄인'이 영지에서 나타난 이상, 아무도 영지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소독을 해야하니까요. 초청된 분들이 모두 '정상'의 판정을 받으면 그땐 가능합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예. 하지만 이게 '규칙'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개같은 소리! 그런 규칙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거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쯤이면 영지의 모든 워프가 '정지' 되었을 테니."

"······ 뭐?"

모든 워프를 정지시켰다?

심연에 가라앉고 싶어서 작정하지 않는 이상 벌일 수 없는 짓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죄인을 색출하고, '소독'을 끝내면 풀어주겠단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했다.

죽은 남자가 죽기 전에 외친 말.

플레이어가, 죄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소리.

53번.

········· 마스터.

진행자가 말했다.

"경매가 재개될 때까지, 손님들께선 연회장에서 대기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53번을 멀리했다.

당연한 일이다.

죄인으로 지목된 자와 괜히 같이 있다간 불똥이 튈 것이 자명했으므로.

마스터는 굳어있었다.

워프가 모두 정지된 걸 확인한 탓이다.

도망칠 장소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2성의 초월자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다르칸 영지다. 수호기사 파멜을 비롯하여 온갖 강자들이 모여있는 곳.

'검은후드를 눌러쓴 채 동색의 여우가면을 쓴 자들. 검은 종을 지녔다면 틀림없이 사신교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스터도 안중에 없었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경매장에 난입한 사신교.

그들은 모두 초월자였다.

'클로버(♣) 표식의 초월자들이었지.'

데르시안 영애가 데리고 있던 광전사는 스페이드(♠) 표식이었다.

같은 초월자라도 표식이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트럼프 카드의 순서대로 작용하고 있는 듯싶었다.

클로버(♣) 하트(♥) 다이아(◆) 스페이드(♠)의 순서대로 강함과 약함이 결정되는 건지.

'트럼프 카드 표식의 초월자들이 동색의 여우가면을 쓰는 건가?'

여우가면을 쓰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의아한 건 또 있었다.

'이후에 나타난 은여우가면.'

시체를 '소각'시킨 은여우가면.

그는 2성의 초월자였다.

심연 미궁에서 만난 자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동일인은 아니었다.

'별과 함께 스페이드 표식을 지닌 초월자라.'

그건 나 역시도 난생 처음보는 경우였다.

[Lv.★♠]

별로 초월한 자가, 스페이드 표식으로 2차 초월을 했다.

제국은 별이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게 확실해졌다.

하지만 강하게 걸린다.

내가 보았던 그것.

소각시킬 때 보인 '번개 스킬'이 말이다.

'그 스킬은 분명히······.'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고유스킬'을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스킬, 번개의 대마법사가 초월하여 마침내 갖게 된 '천둥 사자' 스킬을!

'천둥 사자는 뇌신강림의 고유 스킬일진대.'

······ 내 부캐, 뇌신강림.

초월한, 번개류 스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마법사.

그러나 이게 가능한 일인가?

1성의 초월자가 2성의 초월자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별이 아닌 다른 초월의 표식과 함께, 사신교의 집행자가 된 상태였다.

이것만 보면 다른 사람이겠지만, '고유 스킬'이란 두 개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뿐이기에 고유다.

이미 누군가가 가졌다면, 다른 자는 절대로 같은 스킬을 가질 수 없다.

"이봐! 나는 초청받아서 온 것 뿐이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다!"

"제국의 횡포가 아니면 이게 뭐란 말이냐!"

사람들은 울분을 토했다.

이 경매는 처음부터 순수한 의도의 경매가 아니었다.

어쩌면, '플레이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초청한 건 아닐는지.

그렇다면 허드슨 역시도 그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죄인'이 아니라면 어디 증명해봐라."

"더러운 죄인들이 같은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는군."

제국의 귀족들은 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다.

혐오하는 표정과 함께.

헌데, 증명하라니.

플레이어가 아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제멋대로 '판별'당할 터.

무슨 기준으로 판별을 하고, 확정을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다면.

툭.

-······ 어디가십니까?

그리 말하는 듯한 허드슨의 눈을 무시하며, 나는 중심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오지 마라."

"'의심자'가 어딜 옆으로 오려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제국인들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관심있는 건 단 한 명.

-오호라. 멋대로 끊어낸 것을 다시 연결한 이유가 무엇이지?

1번의 남자.

정면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와 '황금률의 선'을 연결하자, 흥미롭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앞에서 '그것'을 꺼냈다.

-제국패? 제국패를 내게 보여서 뭐 어쩌자는 거지?

심연 미궁에서 은여우가면에게 받았던 제국패.

이걸 보여서 뭐 어쩌냐며 반문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제국패가 아니다.

그를 증명하듯, 다시 한 번 제국패를 살피던 1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음? 잠깐. 이 표식은 분명······!

마지막으로 묻겠다

'빌어먹을 새끼.'

마스터는 가면의 사이로 인상을 찌푸렸다.

입이 바짝 말랐다. 의식하지 않으면 숨도 막힐 것만 같았다.

-53번, 저새끼! 저놈도 '플레이어'야! 가면으로 가렸지만 확실해! 그러니까 제발······!

사신에게 목이 잘려 죽은 남자.

이후 '플레이어'임이 드러나며 소각된 그놈이 자신을 또 다른 '플레이어'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가시밭길 위에 맨발로 서있는 기분이 이러할까.

연회장의 모든 사람이 수군대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흑요, 그년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접근하는 게 아니었는데.'

보름간 진행되는 경매. '내 편'을 만들고자 안면을 틀 생각으로 접근한 게 패착이었다.

같은 플레이어라고 생각해 풀었던 몇 가지 정보가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입안이 쓰다.

'모든 워프는 중단됐다. 달아날 곳도, 몸을 숨길 장소도 없다.'

절망적인 상황.

일시적으로 워프를 동결시켰다.

넘어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몸을 숨길 장소?

다르칸 영지 전체가 이미 봉쇄되어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더욱이 어이가 없는 건.

'시민도 없다. 처음부터 이 경매는 플레이어를 찾기 위한 낚시였던 거다.'

도시에 다른 시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워프를 동결시키기 전에, 모두가 경매에 집중하고 있을 그 시간에 미리 탈출시킨 것이다.

당연히, 오늘 경매장에서 죽은 남자가 플레이어임을 알고 나서 취한 조치치고는 너무 빠르다.

이미 플레이어가 다르칸 영지에 더 있음을 알고 조치한 것이다.

어쩌면 '특급 경매' 자체가 플레이어를 찾기 위한 덫일 수도 있었다.

덫에 걸린 가련한 짐승.

혹은 어항에 갇힌 물고기.

자신의 신세가 그와 다를 게 없었다.

'밀고? 사신을 이용해서 알아내는 건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내가 플레이어임을 입증한다는 거지?'

자신에게 몰린 이 시선부터 해소해야만 된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을 플레이어로 지목할까?

사신교의 방식을 모르니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아무 행동이라도 해야 할 때.

툭.

그때, 누군가가 연회장에서 발길을 옮겼다.

골통파괴자의 주인.

초월자를 압살한 2번의 호위.

그가 천천히 1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조용히 무언가를 내밀고, 확인하더니 1번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자는 '죄인'이 아니다."

죄인이 아니다.

그가 말하자, 곧 '확정'되었다.

귀족들의 태도가 180도 변한 것이다.

"그에겐 '죄인'의 흉물스러운 냄새가 풍기지 않는군."

"음. '골통파괴자'를 휘두른다면 거인족일 터. 거인족이 '죄인'인 경우는 없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또 있었다.

······ 1번이 대체 누구기에?

귀족들은 마치 1번의 남자를 존재하지 않는 듯이 취급했다.

정면으로 보아선 안 되고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은 척을 해서도 안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분명히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저 남자가 이름을 불러선 안 되는 볼드모트라도 된다는 말인가?

'뭘 보인 거지?'

마스터는 눈이 빠지도록 남자를 바라봤다.

무엇을 보이고 죄인이 아님을 증명한 건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띠링.

띠링.

띠리링.

그 순간 들려오는 종소리.

연회장의 커다란 문이 열리며, 검은 후드를 눌러쓴 '사신교'의 집행자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 은색의 여우가면을 쓴 자.

경매장에서 마지막에 '소각'시킨 그가 앞장서서 말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소독'할 것이다. 번호의 순서대로 내 앞에 나오도록."

번호의 순서라니.

뭔가 이상하다.

귀족 중 한 명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잠깐. 설마 제국의 귀족인 우리도 그 대상이란 뜻인가?"

"당연하다."

"······ 우리를 '죄인' 취급한다는 것이냐?"

동시에 제국의 귀족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항변하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감히 우리를 의심한다고?"

"괘씸하기 그지없군···!!"

"다르칸 영주!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소?"

외부에서 초청된 초청자들만 '의심'의 대상일 줄 알았건만.

제국의 귀족들까지 소독한다는 건 도를 넘은 행위였다.

그러나 은여우가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르칸 영주 역시도 팔짱만 낀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의미다.

'저 하얀 가루는······.'

다만, 마스터의 시선을 계속해서 뺏는 건 사신교의 집행자들이 들고 있는 가루다.

저 가루는 분명히 지구와 판게니아의 몸을 바꾸었다.

만약 저 정체 모를 가루가 차원을 넘어 작용한다면, 위험하다.

"거부할 경우 '죄인'으로 낙인찍겠다. 2번."

2번.

그의 호위는 죄인이 아니라고 확정됐으나 2번은 아니었다.

곧이어 호명된 2번이 은여우가면의 앞으로 나섰다.

"······."

둘 사이엔 침묵이 오갔다.

그러나 시시각각 미묘하게 2번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분명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들리지 않게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마스터의 입이 바짝 탔다. 궁금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오른쪽으로 가도록. 다음, 3번."

잠시 후 2번은 은여우가면의 오른쪽에 위치했다.

결과는 말해주지 않는다.

호위로 보였던 자가 의심의 목록에서 지워졌다면 2번 역시도 '정상'의 판정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이조차도 확신할 순 없다.

탐문을 했다는 건 어쨌든 의심자의 태를 벗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내 왼쪽으로 가도록. 다음, 4번."

한 명씩 '소독'은 계속해서 진행됐다.

무슨 기준으로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는 숫자는 20번이 넘어갈 때까지 비슷했다.

'젠장할.'

반반이라니.

이건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가 무려 절반이라는 뜻 아닌가.

특급 경매는 처음부터 플레이어를 잡기 위한 '덫'이었다.

판게니아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플레이어는 많았으니, 설령 제국에 침투해 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덫에 좋다고 걸려든 자신의 선택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후회는 늦었다.

마스터는 다시 1번을 바라봤다.

'저 둘. 왜 계속 같이 있는 거지?'

1번은 독자적인 위치의 존재였다.

그런 그가, 계속해서 2번의 호위와 함께 있었다.

단순히 '죄인'이 아니라는 확답을 넘어 무언가가 더 있다는 의미리라.

제국의 귀족들조차도, 다르칸 영지의 영주마저도 함께 서지 못했던 1번의 근처에, 계속해서 있다는 것은······.

'저 둘이 판별하고 있구나!'

사신교의 여우가면들은 들러리다.

진짜로 '죄인'을, '플레이어'를 판별하는 건 1번의 남자와 저 호위가 분명했다.

"다음, 53번."

마스터는 내심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느덧 자신의 차례.

'······ 개 같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저 둘의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지······.'

판별자가 두 명인 이상, 약간의 희망이 있을지도 몰랐으니.

*

-후계자의 표식을 새겨놓았군. 이 패를 전해준 '집행자'가.

집행자가 제국패에 은밀하게 새겨놓은 표식.

그것은 '후계자'를 찾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그럼 '후계자'는 어디있지?

헬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최대한 의연하게 행동했다.

-지금 보여줘야하나?

-아니, 정통은 아무데서나 모습을 보여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나와 함께 '본교'에서 확인하면 될 일. 그런데 왜 '검은 염소의 탈'을 쓰고 온 것이냐?

본교.

사신교의 본단!

그를 직접 언급했다는 건, 1번의 남자는 역시 '사신교'의 관계자라는 뜻이다. 그것도 그냥 관계자가 아니라 제법 직급이 높은 자가 분명했다.

제국패를 보인 건 어느 쪽이든 어떻게든 결론이 나리라고 생각해서였다.

황실의 관계자라면 제국패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사신교의 관계자라면 제국패를 알아본 뒤 반응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

'검은 염소탈이라.'

심연 미궁에서 헬을 보고, 내게 제국패를 넘긴 은여우가면의 검사는 제국에 들를 때 분명히 황금색의 염소탈을 쓰고 가라고 말했다.

-황금색 탈이 없어서.

-······ 음.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어찌됐든 그대가 진정 '정통의 후견자'라면······ 플레이어는 아닐 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번에 떠본 일은 미안하게 됐다는 태도로.

그럼 '민트초코맛있어요'가 자신이라는 말은 단순한 낚시였나?

내가 플레이어임을 확인해보기 위한?

-그대는 나와 같은 권한을 지닌 '정통의 후견자'다. 적어도 그대에게 패를 전한 '집행자'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을 믿도록하지.

제국삼검. 은여우가면의 확신이 나를 살렸다.

일단 어떻게든 넘어간 듯싶었다.

게다가 그가 나를 보는 눈빛마저도 묘하게 변했다.

-새로운 '후견자'는 무척이나 오랜만이다. 그것도 '바알'의 상징인 염소의 탈이라······, 어떠한 후계자의 후견자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군. 좋다, 황금빛 정통의 후견자여.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소독'을 함께할 것이다.

후견자들마다 '상징'이 다른 건가?

내가 염소의 탈을 쓴 걸 그는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사신교의 교도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을 보며 그가 말했다.

-번호대로 호명되는 자들이 죄인인지 아닌지, 1차 선별을 우리 둘이 함께 진행하게 된다. 후견자는 높은 확률로 플레이어를 판별할 수 있는 바, 그대와 나의 뜻이 합치하면 강력한 '죄인 후보자'로 판명될 것이다.

-합치하지 않으면?

-일단은 오명을 벗겠지.

일단은, 오명을 벗는다.

의심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말 그럴까?

정말로 이놈이 나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린 걸까?

'이건 테스트다.'

1번은 내심 플레이어로 확정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통의 후견자'라면, 어느정도 플레이어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안목을, 정말로 내가 정통의 후견자인지를 확인하는 테스트가 분명하다.

문제는 허드슨이었다.

2번, 곧바로 호출된 허드슨.

나는 플레이어임을 알고 있지만, 1번은 어떨지.

-플레이어로군.

머지않아 1번은 확정지었다.

··· 어쩌면 처음부터, 허드슨을 플레이어라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았을지.

어떻게 해야 되지?

만약 이게 내 의도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라면?

이 또한 '덫'이라면······.

-플레이어가 아니다.

-호오.

내 대답을 듣자 묘한 웃음기를 내뱉는다.

잠시 후 허드슨은 오른쪽 자리로 옮겨갔다.

의견 불일치.

오른쪽 자리가 '의심 회피자'의 위치인 듯싶었다.

다음 3번.

-데르시안 영애. 그대와 다툼이 잦았던 인물이지. 그러니, 그대부터 답해보아라. 그녀가 죄인으로 보이나?

이자벨라와 같은 이름을 지닌 여자, 데르시안 가문의 영애.

그녀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앞에 나섰다.

그녀의 생사여탈권을 내게 쥐어준다는 말인지. 묘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한다.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자 데르시안 영애가 왼쪽으로 이동했다.

······ 오른쪽이 '의심 회피자'의 자리 아니었나?

이후 계속해서 '소독'이 진행됐다.

왼쪽과 오른쪽이 거의 반반.

아무래도 왼쪽이 회피자의 자리인 것 같았다.

그리고 허드슨은 여전히 오른쪽 자리에 있었다.

"다음, 53번."

53번.

마스터가 호명되었다.

일전 경매장에서 지목되어, 모두가 확신하고 있는 자.

-플레이어.

-······ 플레이어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스터.

그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허드슨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모든 경매의 참가자들에 대한 '소독'이 끝나자.

왼쪽에도 48명이, 오른쪽엔 48명이 위치하게 되었다.

정확히 5:5의 비율.

이윽고, 그가 재차 내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아직도 허드슨이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밝혀진 진실

한국, 영웅연합.

침식률이 높아지며 워프를 통해 빈번하게 괴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이후, 그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연합으로 우뚝 섰다.

-영웅연합! 한국의 빛!

-영웅연합이 부산의 대참사를 막아내다.

-영웅연합의 연합장 박태우 희망의 목소리를 내다!

날이 갈수록 쏟아지는 기사의 양은 더욱 많아지고 있었다.

어느덧 그들을 한국의 희망으로, 세계적인 영웅으로 보는 시선들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러한 찬양의 가운데에 있는 남자, 영웅연합의 연합장 박태우.

탁!

펼쳐 읽던 신문을 책상 위에 던진 박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 하, 염병할."

"왜 그러십니까, 연합장님?"

옆에서 힐끔 신문의 내용을 살핀 연합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신문의 메인에 뜬 기사도 연합을 칭찬하는 글이었던 탓이다.

'왜 그러냐고?'

박태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들 태평한 소리만 해대고 있으니 답답해서 그렇다."

"지금은 태평하지 않습니까? 모두 계약도 완료했고······."

말마따나 태평성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금률의 조각'이 부족해 허덕이던 연합.

결국, 연합원들 전원이 특정 성좌들과 '계약'을 체결하며 부족한 조각을 수급했다. 거기에 성좌의 특별한 스킬까지 얹자 전투력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이후 한국에 열린 워프를 통해 넘어오는 괴물들을 모조리 토벌하고,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표면적으로는 걱정할 게 전혀 없는 상황.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하지만 연합장 박태우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우뚝 섰지만,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재난.

항거 불가능한 '재해'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그 '워프'가 한국에만 생성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워프.

최근 생성되고 확인된 붉은색의 워프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델피안에서 사흉의 침략을 받기 직전에 나타난 워프와 같았다.

'지난주에 제주도에서 발견한 붉은 침략형의 워프. 겨우 숨기긴 했지만 만에 하나 저게 사흉의 침략 전조라면······.'

델피안 함락 이후 제주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워프.

만약 그것이 사흉 침략의 전조라면 도저히 답이 없었다.

허나 붉은색의 워프가 한국에만 나타난 건 아니다.

현재 비밀리에 확인된 것은 한국을 포함한 세 곳.

문제는.

'······ 팽창하고 있는 워프는 제주도 워프뿐이다.'

숨겨놓은 그 워프가 팽창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게 침략의 전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절망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왜 하필! 왜 하필 제주도냐. 넓디넓은 지구에서 왜 하필······!'

영웅 연합이 한국에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

이제 판게니아에서 도시만 점령하면 모든 게 완벽했다.

거점을 구축하고 날아오를 일만이, 황금빛의 미래만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제주도로 사흉이 쳐들어온다면 희망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리라.

공지사항에 적힌 대로 남은 4곳의 중립도시가 함락되면, 이후 사흉은 지구로 향한다.

아마도 한국으로. 제주도로 올 가능성이 흘러넘쳤다.

연합에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연합장은 핸드폰을 열어, 다시 한번 저장해놓은 영상을 확인했다.

-존경하는 전사들이여. 내게 '히드라곤의 혼'을 가져와라. 그럼 내가 직접 주도하여 사흉을 토벌하겠다. ······ 시간이 많지 않다.

그라시아가 남겨둔 이 짧은 영상이 벌써 천만뷰를 넘긴 상태였다.

댓글 창에는 사흉에 대해서, 그리고 그라시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

건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해탈한 것만 같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사흉이 침략해온다면 희망은 그라시아 뿐이라는 것이다.

결정을 내린 연합장 박태우가 입을 열었다.

"연합원 전부 소집하도록."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전원 소집은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지금 같을 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은평구를 샅샅이 뒤져서 '히드라곤의 혼'을 소유한 플레이어를 찾을 것이다."

괴물들의 침략이 시작된 초창기.

은평구에서 히드라곤을 소환하여 자이언트 맨티스를 사냥한 플레이어가 있다. 지구에서 소환했다면 '혼'을 이용한 게 분명할 터.

그러나 상대는 미등록 플레이어다. 은둔자 말이다.

은둔자들은 자신의 신상이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게 숨이었다.

"찾아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무릎을 꿇고서라도 빌어야겠지."

"············ 전원 긴급 소집명을 내리겠습니다."

연합장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은둔자를 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연합원 전부가 투입된다면 찾지 못할 수가 없으니까.

*

-그럼, 내기하지.

마지막으로 묻겠다는 1번의 말.

허드슨을 플레이어가 아니냐고 묻는 그의 말을 나는 가볍게 받아쳤다.

-······내기를 하자? 2번 허드슨이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를 두고서 말이냐?

-당연하다. 내가 본 것과 네가 본 것이 다르다면 내기를 할 수밖에. 왜, 자신 없나?

나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첫 만남 때부터 1번에게 묘하게 말렸다. 지금까지 만난 강자들과는 달리, 제대로된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모든 건 쇼다.'

쇼(Show)다.

오로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꽤 많았다.

우선.

'첫 날 68번이 사라졌다.'

델피안이 함락되었다는 말에 반응한 68번은 다음날 쥐도새도모르게 사라졌다.

플레이어임을 확신하여 죽였거나, 어딘가에 감금시켜 두었겠지.

여기까진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이틑날이다.

'이틑날 경매장에서 76번이 사신에게 목이 잘렸다.'

목이 잘린 남자는 76번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왜?

굳이 경매장에서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68번처럼 조용히 처리하면 됐을텐데.

플레이어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는 게 낫다. 경각심을 주고 혼란을 유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죽은 뒤 흰색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지구인의 모습이 나타났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악스러운 장면이다.

아무리 죽은 시체라지만 로그인과 로그아웃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또한 의아한 일이었다.

'진짜 그 플레이어의 모습이 맞나? 단순히 외형만 변경시킨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제국은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다.

오랜시간 플레이어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지구에 대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차피 죽은 시체. 그저 '외형'만 변경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설혹 진짜 지구에서의 몸이라 할지라도, 왜 하필 죽은 상태에서 가루를 뿌린걸까?

'···크람델로 향하기 전. 시체 까마귀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던전에 갇힌 두 아이.

소년과 소녀는 시체 까마귀가 만든, 플레이어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하지만 그 외형은 틀림없이 지구인의 것이었다.

플레이어로 소환되었을 두 아이가 어째서 지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겠는가.

'그때, 시체 까마귀는 두 아이의 기억을 읽고 재현해냈다. 그 결과 플레이어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지구의 어린아이로 나타났지.'

나 역시도 속을 뻔했다.

하지만 시체 까마귀가 소환된 두 아이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억을 훑는 방법뿐이다.

죽은 자의 기억을 토대로 외형을 변경시키는 수법은 이미 한 차례 겪었다.

만약 흰색의 가루가 그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걸리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왜 그 자리에서 바로 소각했을까.'

단순히 위협을 주고자 그런 것은 아닐 테다.

오래 볼 수 없게끔, '쇼'가 드러날까봐 그런 것이 아닐는지.

단순히 기억을 토대로 재현한 것이라면 묘한 이질감이 발견될 수 있으므로.

내가 두 아이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시체 까마귀를 역으로 유인한 것처럼 말이다.

'내 가정이 맞다면······ 확실하게 플레이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지금은 내 가정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곧 1번의 남자가 말했다.

-좋다. 무엇을 걸고 내기할까? 그대가 내건 빛의 옥좌?

-글세, 옥좌에 걸맞은 물건이 준비되어 있나?

바알 갑옷이 경매물건으로 나왔을 때 나는 입찰하지 않았다.

고로, 그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흠. 유일급의 물건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만······ 경매에서 내가 보였던 물건들 중 두 개 정도라면 어떤가? 얼추 가치는 비슷할 거 같은데.

-세 개.

-······ 욕심이 많군.

타협은 없다.

이조차 응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본 게 잘못되었음을 시인해라.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진행하지. 대신 확실하게 선별해야겠군.

1번의 입가에 미소가 띠었다.

······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하지만 허드슨이 플레이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확인할 방법 또한 있다는 듯이 늘어놓았다.

"지금부터 오른쪽에 위치한 자들은 이 '진실의 가루'에 손을 담근다."

은여우가면이 말하자, 검은 후드를 눌러쓴 교도들이 오크통 하나를 가져왔다.

'안 보이는군.'

확실하게 볼 수만 있다면 저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있는 위치에선, 보이지 않는다.

손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만 작게 뚫린 통.

오크통 자체도 겉에 온갖 것을 발라둔 상태였다.

내부를 살필 수 없도록.

'강력한 관찰류의 스킬, 혹은 대현자를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확인할 수 없게끔 해놨다.

나 역시 알 수 없지만, 대신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기억을 토대로 외형을 변형시키는 무언가······.'

죽은 자만이 아니라, 산 자까지 통용되는 그런 게 있었던가?

설령 가루가 아니어도 좋다.

저들이 쇼를 하고 있다면 저 가루 역시도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찰나지간 시체를 소각시켜버린 것도 같은 맥락 아니겠나.

머지않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

······ 있기는 있었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

아이작이 그토록 찾아헤메던 보물.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주며, 완벽하게 '외형 변경'을 해주는 전설의 물약이다.

그게 맞다면 '원하는 모습'이란 역시 기억에 기준할 터.

가장 강렬한 기억, 모습.

그것을 '진실의 가루'라 속여서, 지구에서의 모습으로 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닐까.

"가루에 손을 담그면 진정한 자신의 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죄인만이 변하겠지."

말이 길다.

직접 설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그냥 마음대로 진행하면 될 것을.

그야말로 플레이어만 반응하게 할 속셈이다.

"2번. 통 안에 손을 담구도록."

동시에 허드슨의 눈이 작게 떨렸다.

그러나 내 생각이 맞다면, 저 통 안에 든 건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이다.

강제로 강렬한 기억에 맞춰 외형을 변경하게끔하는 물건은 그 외엔 없으니까.

그럼 '올리버'의 모습을 떠올리지 말라고 해야할까?

'떠올리지 말라 하면 더 떠올리는 게 사람이지.'

안 그래도 지금 허드슨은 지구에서의 자신을, 올리버의 모습만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예 생각 자체를 돌려야만 한다.

-허드슨. 이번에 돌아가면, 세렝게티를 완전하게 깨울 수 있을 것이다.

-······.

황금률의 선을 연결하여 말하자, 허드슨은 답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쪽을 쳐다도 안 보고 있었다.

내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고자.

그저 혼자 감수하는 중이었다.

-생각해봐라. 세렝게티와 완전히 재회하는 모습을. 세렝게티와 식을 올린다면 주례는 내가 서주마.

-······.

-세렝게티가 드레스를 입고서 너와 함께 식장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봐라. 물론 상상만이 아니다. 곧 현실이 될 테니.

허드슨을 여기서 잃을 수는 없다.

만약 들통난다면, 함께 빠져나가야만 했다.

단순히 워프를 중지시켜둔 것이라면 헬로 다시 작동시킬 수도 있을 터.

쑥!

허드슨이 오크통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화아아아악!

허드슨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벼, 변했다!"

"그런데 저 모습은······."

"······ 순백의 기사?"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의 모습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기사왕 빌헬름의 최측근.

그것도 늠름하게 순백의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 그럴 리가."

1번의 남자가 처음으로 이맛살을 구겼다.

시작하자

'······.'

허드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실의 가루.

경매장에서 보았던, 신체를 지구의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독이다.

적어도 플레이어라면 절대로 손에 닿아선 안 되는 강력한 독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회장을 가로막은 다르칸 영지의 기사들. 그들 하나하나의 무력 자체도 이미 자신을 넘어선 상태였으니.

'절대로 란돌프님과 결부시켜선 안 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란돌프와 엮이면 안 된다.

란돌프에겐 목숨을 바쳐도 부족하지 않을 은혜를 몇 번이나 입었다.

진심으로 따르며 충성을 다 바치리라 맹세하지 않았던가.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줘선 더욱 아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세렝게티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한테 현실은 의미가 없어.'

허드슨에게 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세렝게티를 구할 수만 있다면, 의미 없는 자신의 목숨도 가치가 생기리라.

지구에서 올리버로서의 허드슨은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반면, 판게니아에서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나.

모험과 사랑, 함께할 동료를 얻었다.

몇 번이나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했다.

불가능한 일을 넘어서며 더욱 높게 달성하는 자와 함께 숨을 쉬었다.

그 기적의 존재는 자신과 세렝게티를 재회하게 했으며, 직접 대화를 나누게까지 해주었다. 심지어 모두가 포기한 심장까지 고쳤다.

어두운 삶에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희망을 맛본 것만으로도, 충만했다.

-허드슨. 이번에 돌아가면, 세렝게티를 완전하게 깨울 수 있을 것이다.

······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지만, 주군께선 더욱 높게 나시길.

팬텀, 나의 희망이시여.

유일무이한 빛이시여.

부디··· 판게니아를 부탁합니다.

현실에서의 삶에 지쳐있던 제게 모든 걸 가능케 했던 이 땅을.

마음껏 걷고, 뛰며, 사랑하게 해주었던 이곳을.

'다른 이들은 판게니아를 그저 게임으로, 가상의 공간으로만 여기더군요.'

플레이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의 죽음이 현실의 죽음과 같다고 해도, 결국 그들의 근본은 지구에 있었다.

하여,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플레이어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허드슨이 홀로 정착했던 이유다.

자신과 다른 이들의 차이.

판게니아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달랐으므로.

이곳을 가상의 공간이나 게임쯤으로 여겨 패악질을 부리고, 희롱하며, 파괴를 일삼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 이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 자체가 허드슨에겐 불가한 일이다.

반면, 란돌프는 어땠던가.

'······ 처음으로 저와 같은, 동류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기사의 정원.

와이저 후작의 영지 중심에 위치한 비석.

그곳엔 대원정에서 희생당한 기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란돌프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맹세했다.

-나는 기사왕의 후계자로서 그들의 영광스런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다시 없을 영웅들의 영면을 위하여, 그들을 가슴 속에 영원히 묻을 것이다.

순간 허드슨의 눈에 란돌프가 '기사왕 빌헬름'으로 비쳤다.

진심을 가득 담아,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

설혹 하더라도 입에 발린 말만 늘어놓았겠지.

하지만 그는 판게니아인들의 죽음을 온 마음을 다해 애도하였다.

플레이어 중엔 처음으로, 판게니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를 만났다.

그 순간 얼마나 벅찼던가.

이후에도 다른 기적 같은 일들을 많이 겪었으나, 허드슨에겐 오직 그 장면만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었다.

정말 영원토록 잊지 못할 기억.

그러니, 판게니아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란돌프뿐이다.

판게니아를 구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생각해봐라. 세렝게티와 완전히 재회하는 모습을. 세렝게티와 식을 올린다면 주례는 내가 서주마.

-······.

-세렝게티가 드레스를 입고서 너와 함께 식장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봐라. 물론 상상만이 아니다. 곧 현실이 될 테니.

······ 예쁘겠다.

진심으로.

식장의 상상하자, 머릿속에서 세렝게티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란돌프는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전하는 건가.

희망을 놓지 말라고?

아니다. 여기서 그의 걱정을 사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더이상 시간을 끌면, 란돌프와 관계되어 있다는 의심만 더 사게 될 것이다.

허드슨은 구멍이 뚫린 오크통에 있는 힘껏, 깊숙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이후 오한과 함께 전신의 근육과 골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떴을 때.

'········· 뭐야 이거.'

허드슨은 여자가 되어있었다.

*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보통 식장에서의 모습을 떠올리라 하면, 정장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기 마련 아니던가?

아니, 신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떠올리지 않나?

그런데 왜 허드슨은 갑옷을 입고 있는 걸까.

순백의 기사.

허드슨은 그 이름처럼 새하얀 갑옷을 입은 세렝게티의 모습이 됐다.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라.

1번의 남자 역시 그녀를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세렝게티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녀가 판게니아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세렝게티는 플레이어일 수가 없다는 사실 역시도.

-허드슨. 그가 사랑하는 자로군.

이 대목에서는 살짝 놀랐다.

제국은 세렝게티와 허드슨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세렝게티의 짝이 허드슨인 건 대원정 마지막에 이르러서 겨우 알았는데.

그것도 세렝게티에게 직접 듣지 않았나.

역시 허드슨을 '죄인'이라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전에 이미 허드슨에 대한 정보를 제국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빌헬름의 후계자라 떠들었던 나도 알고 있겠군.'

허드슨과 세렝게티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주력에 대해선 아직 모르겠지만, 빌헬름의 후계자 란돌프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을 해놨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폐쇄적이지만, 제국은 더욱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냥 폐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제국은 많은 걸 알고 있다.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잡아먹히리라.

곧이어.

-솔직히, 놀랐다. 나는 진정으로 허드슨이 '죄인'이라 생각했거늘.

1번의 남자는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언제나 여유롭던 그의 태도에 마침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으음. 플레이어가, 판게니아의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는······ '죄인'이 아니로구나.

1번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

그것을 이용한 외형의 변형을 시도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플레이어라면 보통 지구의 본체를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세렝게티를 생각한 허드슨의 진심을 1번의 남자도 알게 된 것이다.

거짓이나, 희롱이 아닌, 진정한 허드슨의 마음을.

-내기는 내가 이겼다.

-······ 궁금하지 않나? 허드슨이 왜 저런 모습이 됐고,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야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을 썼으니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모른다.

나도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겨우 추론해낸 것이었으니.

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론이 틀렸으면 진짜 큰일날 뻔했다.

살아서 빠져나갔을 확률은 2% 미만. 그것도 나 혼자서의 일이다. 허드슨과 함께 도망쳤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계속 단순 무식한 바바리안 행세나 해야겠다.

-그는 죄인이 아니다.

-············ 그래. 그대가 제대로 보았다는 말이다. '저것'은 진심을, 진실을 다해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만드는 물건이지. '죄인'은 저 가루에 닿으면 모두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아예 타인이 될 수는 없으니.

허드슨은, 자신의 몸보다 세렝게티를 우선으로 여겼다.

그런 허드슨이 세렝게티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저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허드슨은 여전히 당황한 채였다.

자신의 몸을 훑고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1번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얼마나 손을 담갔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래도 완전한 변신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풀릴 것이다.

-그건 다행이군.

-아무튼, 이번 내기는 내가 졌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3개의 경매 물품을 넘겨주지. 나중에.

-······ 나중에?

-당장 준다고는 안 하지 않았나?

이런 약아빠진 놈을 보았나.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기약 없이 기다리란 말은 아니다. 내가 그 정도로 경위 없는 사람은 아니니. 그대가 나와 함께 '본교'로 간다면 그곳에서 즉시 주도록 하마.

-본교? 사신교의 본교 말이냐?

-그러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온 것 아니었나? '황금빛 정통의 후견자'는 모두 얼마 뒤에 있을 '만찬회'에 참석해야만 되니.

사신의 만찬회.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심연 미궁의 은여우가면에게서.

'87일 후에 사신교에서 만찬회가 있을 거라고 했지.'

문제는 사신교가 어디 있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1번이 안내해주겠다는 말이다.

'그곳에 헬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1번 또한 자신을 정통의 후견자라고 말했다.

아마도 헬과 같이 '자신의 영역'에 숨겨두고 있으리라.

워프를 마음껏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의 헬은, 반대로 공간 이면에 숨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러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바알 갑옷을 얻어야 세트가 완성되고 놈을 제어할 수 있다.

준다는데 당장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이 촉박하지만, 그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당기려다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으므로.

'사신교. 사신교라.'

게다가, 사신교를 제대로 알 기회다.

이들은 제국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심지어 제국의 귀족들보다도 위에 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들!

'예전에 제국 황실에 몇 번이나 침투했다가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지. 이번에는 꼭 성공하고 만다.'

몇 번이나 제국에 침투하려고 캐릭터를 생성해봤다.

딱 한 번 성공한 적이 있는데, 황실까지 닿기 전에 발각되어 죽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난이도.

제국 중심에 침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포기했다.

반면 사신교를 통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헬이 있고, 1번조차도 나를 '정통의 후견자'라 여기는 이상.

-53번. 그도 기대되는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53번, 마스터.

그는 과연 눈치를 챘을까?

오크통 앞에 선 53번은 이윽고 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화아아악!

이윽고 마스터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호라!

그 모습을 본 1번의 남자가 경탄을 늘어놓았다.

*

일차적인 '소독'이 끝나고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미 바알 갑옷을 골드의 소모 없이 획득한 이상, 남은 건 '가치 높은 물건'을 싹쓸이하는 것뿐.

갖고 있던 15억 골드로 대략 40억 어치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을 사들였다.

이렇게 '가성비'로 사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빛의 옥좌를 업그레이드한다.'

최소한 '찬란한' 어미를.

혹은 '그 너머'의 어미를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찬란한 빛의 옥좌는 그 자체로도 '무적'의 효과를 갖고 있다.

사신교에 가게 되거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정통이라는 게 헬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쉽게 도망칠 수도 없겠지.'

텔레포트 북을 열어서 도망치려 해봤자, 정지시키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생존을 위한 물건 하나쯤은 챙겨야 하지 않겠나.

경매의 물품을 모두 전달받은 뒤,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빛의 옥좌'에 해당하는 장비를 제물로 바치시겠습니까?"

일전 '찬란한 빛의 옥좌'를 띄울 땐 대략 20억 골드의 가치를 사용했다.

반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을 모두 사용하면 그 두 배의 가치다.

예상대로라면 '찬란한' 옥좌의 다음을 볼 수 있으리라.

'시작하자.'

황실

'어, 어떡해야 하지?'

데르시안 영애.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서 퀭한 눈, 움푹 팬 볼살, 바짝 마른 입술.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 것만 같았다.

'벌써 스무 명이 넘게 사라졌어.'

둘째 날의 '소독'이 끝난 뒤, 경매는 재개되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경매의 참석자는 줄어들었다.

100명으로 시작한 경매는 막판에 이르러 77명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는 초청자들뿐만이 아니라 '제국 귀족' 역시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귀족이 죄인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처음부터 계획된 거야. 죄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만 경매에 참석한 거라고!'

데르시안 영애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더 뜯을 손톱조차 없었다.

피부가 터져 핏물이 입가를 적셔도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이 경매는 애초에 사신교가 주최하여 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만을 모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과연 사신교만 알았을까?

'설마, 가문에서도······ 가문에서도 나를 죄인으로 생각해서? 그래서 이곳에 보낸 거야?'

-이자벨라. 데르시안 가문의 대표로 다르칸 영주와 협력하여 '특급 경매'를 성사시키거라. 너의 능력을 보여다오.

떠나기 전, 가문의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

특급 경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능력을 보이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경매에 왜 자신을 보낸 것인지.

데르시안 가문은 현재 후계자들의 경쟁 구도로 내환을 겪고 있었다. 온갖 권모술수와 피가 낭자했으나 가문은 이를 용인했다.

하지만 이곳에 자신을 보낸 자는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이미 포섭된 걸까?

무엇보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놓고, '그놈'은 델피안으로 보냈다.

엄청난 전력을 포함해 사흉의 토벌에 앞장서게 한 것이다.

무려 광전사 다섯을.

반면 자신에겐 고작 한 명만 호위로 붙였다.

'······ 그놈은 사흉을 토벌한 영웅으로 만들고, 나는 이곳에서 죄인 취급되어 죽게 만들려고? 정말 그런 거야?'

확신이 섰다.

단순히 후계자들끼리 향한 장소가 달라서만은 아니었다.

다르칸과 데르시안이 공동주최하였으나, 다르칸의 영주는 사전에 '사신교'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할지도 말이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말만 '공동 주최자'이지, 그들의 방문 예정도, '소독'이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나.

소독.

사신교가 '죄인'을 찾아낼 때 사용하는 은어다.

소독이 진행되면 아무리 고위귀족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도시 전체를 폐쇄한 뒤 죄인을 모조리 찾을 때까지 소독은 멈추지 않는다.

길어지면 도시 자체가 폐사하는 때도 있다. 더욱 심할 경우 심연에 가라앉거나.

하여, 자신의 도시가 '소독'의 대상이 되는 걸 귀족들은 두려워한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소독'이 진행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 모두가 모를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다.

'죄인으로 지목당할 수는 없어.'

데르시안 영애가 방의 구석에서 깍지를 끼고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죄인으로 특정되어 사신에게 처단당하면 제국은 그 사람의 모든 걸 '삭제'한다.

기록을, 심하면 기억까지도 말살시킨다.

그렇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만든다.

제국 내의 귀족이 죄인으로 특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아예 없진 않았다.

영주가 죄인이 된 일도 있었는데 그 영지 자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제국 내에서 '그 가문'을 언급하는 건 금기시되었다.

자신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을 선정하는 기준은 아무도 모르므로.

'살아야··· 살아서 나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하루에도 몇 명씩 사라져간다.

귀족과 외지인을 가리지 않았다.

이 도시 어디에도 안전한 장소는 없다.

워프 전체가 중단되어 빠져나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두렵다. 무섭다. 숨도 못 쉴 만큼. 질식해 죽을 것만 같다.

'그, 그 바바리안.'

자신의 호위를 때려죽인 그 흉악한 전사.

처음에는 단순한 호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1번. 사신교에서 나온 고위 간부. 그와 계속해서 함께하고 있는 탓이다.

'누가 죄인인지 선정하는 건 1번이야. 그리고 그 바바리안도 마찬가지고.'

흠칫!

그런 생각이 들자, 데르시안 영애의 안색은 더욱 굳어버렸다.

만약 그 '바바리안'이 '1번'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라면,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할 건 물 보듯 뻔한 일.

토끼를 사냥하듯 자신을 몰아넣고, 가죽을 벗겨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죄인으로 선정하여 기록조차 남지 않게끔.

데르시안 가문의 불명예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지겠지.

'사과하긴 했잖아.'

사과는 했다는 안도.

그러나 그러한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음식점, 다르칸의 오후에서 먼저 공격한 일.

결국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영주성까지 갔다.

한데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확신했던 다르칸 영주는 그녀에게 사과를 종용했고, 그녀는 반강제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을 당시만 하더라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억지 사과'를 그는 과연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였겠나.

"아······."

정신이 번쩍 든 데르시안 영애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우당탕!

바짝 마른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몇 번이나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귀족의 품위와는 맞지 않는 행동이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

"사, 살려주세요. 제발."

앞에 바짝 조아린 데르시안 영애를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피폐하기 그지없는 모습.

하루가 다르게 퀭해지는 얼굴.

'소독'에 겁을 먹고 결국 나에게까지 닿았으리라.

언제 죽일지 모르는 공포감이 그녀를 무릎 꿇린 게다.

'자신이 죄인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있다.'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당당하게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공포로 다가온 것인지.

아니면 찔리는 게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는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 살려달라?"

생각을 정리한 뒤, 무겁게 읊조리자 데르시안 영애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턱을 쓸었다.

그녀는 '죄인'의 목록에 처음부터 없었다.

허나 그 사실을 데르시안 영애는 모를 테니.

굳이 알려줄 필요 또한 없으리라.

'데르시안 영애는 나를 사신교의 관계자로 여기고 있다. 그것도 1번과 같은 권한을 지닌 간부로서.'

틀린 것은 아니다.

1번 역시도 나를 그와 같은 '황금빛 정통의 후견자'라 칭했으니.

나는 영애의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상체를 숙인 채, 그녀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어 두 눈을 정면에서 마주하자 데르시안 영애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진심으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든지?"

"사, 살려만 주신다면······."

살려만 주면 그게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이 제멋대로 착각한 것이지만, 이 오해를 더 키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너는 네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고 있나?"

"제, 제가······ '의심자'의 목록에 올라서 아닙니까······?"

"왜 그 목록에 올랐는지, 알고 있나?"

"그건······."

모른다.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백 명의 '경매 참가자'들은 모두 '죄인 의심 대상'의 목록에 올라있는 자들이다.

모두 죄인으로 추정되는 이유가 있다.

데르시안 영애 역시 마찬가지일 터.

"너는 정말 이자벨라인가?"

"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나는 질문을 바꿨다.

"너는 '언제부터' 이자벨라였지?"

"그거야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거짓이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이자벨라'라고 여기고 있다.

나는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짜임을 인지하고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쯤 사막도시 파이살메르에서 여왕의 자리를 계승 중일 이자벨라가 가짜라는 건가?

'그 기억만은 진짜다.'

그럴 리가.

이자벨라는 사막에서 기억이 지워진 채로 깨어났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오직 자신의 풀네임 뿐.

허나 그 이름이 거짓될 리 없었다.

내가 키운 캐릭터지만 닉네임이 아니라 '진명(眞名)' 자체가 이미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이었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생성할 때 짓는 이름은 닉네임이다. 일종의 별명 같은 것.

하여, 캐릭터가 가진 '진명'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 사막에 있을 그녀가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임은 확실하다.

"몇 살 때부터 기억하지?"

"··· 첫 기억은 3살 때부터입니다."

"그때도 '데르시안 가'에 있었나?"

"트, 틀림 없습니다.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묻는 말에만 답해라. 쌍둥이거나, '이자벨라'가 둘은 아니었겠지?"

"예······. 아!"

무언가 기억난 듯 데르시안 영애의 눈이 커졌다.

"저, 저와 닮은 아이를 보았던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때문입니까?"

"계속 말해보도록."

"'신병(神病)'에 걸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쌍둥이는 아니지만 저와 묘하게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어서 기억이 납니다. 하,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신병(神病)?

신의 병. 그런 이름이 붙은 병이 있던가?

"신의 병이라."

"그게······ 저도 가문의 어르신들이 언급하여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만 납니다. 그게 무슨 병인지는 잘······."

살짝 떠보자, 모른다는 반응이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무래도 이자벨라와 저 '신의 병'이라는 게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묘하게 닮긴 했군.'

눈앞의 이자벨라와 사막의 이자벨라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커가면서 달라졌겠지만, 어렸을 땐 쌍둥이처럼 닮았을 수도 있을 듯싶다.

"제, 제가 아닐 겁니다. 분명히 그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죄인입니다!"

데르시안 영애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내 물음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나저나.

'가문의 어른들은 알고 있다. 만약 그 신병에 걸린 아이가 사막의 이자벨라라면, 데르시안 가문 자체가 그녀를 버린 것일 수도 있겠군.'

더 자세히 알아봐야할 문제지만 과연 자신의 근원을 찾는 게 사막의 이자벨라, 그녀에게 구원일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살려주마."

"아아············!"

"허나, 조건이 있다."

"무, 무엇입니까?"

"가문으로 돌아가 '신병'에 걸린 아이에 대해 '조용히' 조사하도록. 이후 아르카나에서 허드슨을 통해 나를 찾아와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참작해주마. 허나 내가 주문한 것 외에 쓸데없는 언행을 한다면 다시 '소독'의 대상에 올릴 것이다."

"네,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데르시안 영애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표정과 함께.

하지만 두 눈은 의지로 불탔다.

자신과 그 '신병' 걸린 아이가 착각되어 이곳에 오게되었다고 철썩같이 믿는 모양새였다.

그 오해가, 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웠다.

그래서 말했다.

"또, 내가 알아야할 게 있느냐?"

알아서 불어보라고.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이내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 데르시안은 모든 사흉을 사로잡아 '전쟁무기'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델피안에서 한 번 실패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바알을 잡으면 남은 사흉도 모두 깨울 수 있다고······."

계속되는 이야기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허.'

자신이 살기 위해, 가문을 팔았다.

······ 아주 훌륭한 자세다.

*

'소독'과 '경매'가 모두 끝난 뒤.

남아있는 참가자는 75명이었다. 참가자 25명과 그들을 보좌한 자들 모두가 사신교에 의해 납치, 살해된 것이다.

'운도 좋은 놈이로군.'

53번, 마스터는 용케 이 덫을 빠져나갔다.

둘째날 이후로도 테스트는 계속 되었지만 전부 피해간 것이었다.

운도 좋지만 눈치도 기가 막힌 셈.

"여기가 사신교의 본단이다."

······ 그리고 소독이 끝난 이후 나는 1번을 따라, 사신교의 본단까지 단번에 도착하게 되었다.

몇 개의 워프를 넘어서자 그 즉시 거대하고 호화로운 궁전이 나타난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영토는 분명히.

'황실.'

분명히, 제국 황실의 것이었다.

내가 판게니아를 플레이하며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말이다.

흉신(凶神)

빠드득.

지구에서, 마스터는 이를 갈았다.

제국에서 살아 나왔으나 도저히 굴욕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놈들이 나를 낚아?'

얼마나 기대하던 특급 경매인가.

경매를 위해 급하게 팔았던 유적들.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허나, 단순히 금전적인 손해만 보았다면 복구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복구할 수 없는 자존심.

그들은 자신을 덫에 잡힌 사냥감처럼 여겼다.

제왕으로 군림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나약한 사냥감이 되어 하루하루를 불쌍하게 연명해나갔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감히······!'

떠오른다.

진실의 가루에 손을 넣은 그 순간이.

제국에서의 모든 순간 중 가장 굴욕적이었으며,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다른 모든 것은 참고 넘어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네년. 살고싶으면 변명이라도 해야할 것이다."

마스터는 살기를 드러내며 흑요를 노려봤다.

흑요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몸을 떨었다.

"왜, 왜 그래?"

"제국과 내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더군."

"무,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납치당해 있었다고!"

"개소리."

"진짜야. 납치당해서 네 정보를 불라고 했다니까? 난 한 마디도 안 했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올 수······."

콰득!

마스터 주먹을 뻗었다.

콰지지직!

동시에, 흑요 주변의 공간이 그럼처럼 깨졌다.

공간 부수기. 마스터의 고유능력 중 하나.

"네가 납치당해서 내 정보를 안 불었다고? 누가 그딴 소리를 믿지?"

연회장에 흑요는 없었다.

혼자 몰래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상식적인 선에선 납치당했다고 봐야하나, 상대는 흑요다.

납치를 당했다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자기 혼자 살고자 마스터에 대해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서 바칠 여자가 바로 흑요였다.

납치당한 게 아니라면, 남은 수는 하나.

처음부터 제국의 끄나풀이었다는 것.

"허나 이건 믿어도 좋다. 지금부터 전부 불지 않으면 모조리 으깨주마. 시작은 얼굴부터. 그 다음은 머리칼을 뜯어내고, 이빨을 전부 뽑고, 지져서, 잇몸과 상처 전부에 녹인 소금을 부은 뒤 천천히 박살내주겠다."

"아······ 으······."

흑요가 몸서리쳤다.

진심이다.

마스터는 진심으로 자신을 부숴버릴 셈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만 오해하지마. 나도 진짜로 그런 자리인 줄 몰랐으니까. 나, 난 그냥 '플레이어'들의 정보를 조금씩 짭짤한 가격에 판거 뿐이라구······!"

"내 정보도 팔았나?"

"전혀! 내가 아무리 돈에 미쳤어도 그런 짓까지 할까봐? 그럼 나도 위험해지는데? 게다가 그 가면쓴 놈이 그런 놈인 줄 알았으면 가까이 가지도 않았을 거야. 젠장, 나도 속은 거라고!"

"언제부터?"

"저, 접근해온 건 얼마 안 됐어. 이제 반년? 제발 날 믿어줘!"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간 플레이어의 정보를 팔아넘기며 장사수단으로 이용한 모양.

흑요 혼자라곤 생각 안한다.

그녀와 같이 정보를 파는 '정보상인'들이 꽤 있었을 터.

그렇게 종합하여 모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경매에 불러모은 듯싶었다.

흑요가 마른 입을 훑으며 말했다.

"그래도 살아돌아왔잖아? 이제 우리를 플레이어라고 전혀 생각 못할 거 아니야? 그 악랄한 사신교라면 플레이어인 걸 알고 살려보내 줄 리가 없으니까."

"아니. 적어도 네년은 일부러 살려보내준 거다."

마스터는 확신했다.

그들은 흑요가 플레이어인 걸 안다.

알면서도 내보내준 건 다시 이용하기 위함이다.

배신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니까.

하물며 처음부터 돈을 받고 정보를 판 인간임에야.

흑요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플레이어인 걸 알고 있다고? 일부러 진짜 정보랑 가짜 정보를 섞어줬는데도?"

"그래. 그리고 그들이 접근해오면 너는 거절할 수 없다. 양쪽에 배신자로 낙인 찍히면 무조건 죽음뿐이니."

"······ 여태까지 사신교의 움직임이랑은 너무 다른데?"

사신교는 죄인과 절대 접촉하지 않았다.

죄인이라 판단되면 사신을 붙이거나 죽였다.

사신교가 죄인과 거래한다?

그간의 행보로는 있을 수 없는 일.

"방식을 바꾼거겠지. 상황이 달라졌지 않나."

"무슨 상황이 달라져?"

"빌헬름이 죽었다."

"······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심어린 흑요의 의문에, 마스터는 혀를 차고 말았다.

"사신교가 게이머의 아바타인 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유일한 인간. 아예 접근조차 못한 인간. 그게 빌헬름이니까."

"잠깐. 알고 있었다고?"

굳이 더 설명하진 않았다.

다만, 마스터는 흑요와 달리 대원정과 관련된 더 깊은 상황을 알고 있다.

사신교는 빌헬름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접근할 수 없었다.

사신을 붙이지조차도, 죄인의 오명을 씌우지도 못했다.

'빌헬름이 사신교의 준동에 일종의 억제기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정확한 이유는 마스터도 모른다.

제국이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가 빌헬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확신했다. 더불어 그 이유에는 사신교도 엮여있을 것이다.

다만, 이 정도 규모의 '플레이어 숙청'은 이전에도 없던 일.

있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갑자기 사신교가 방식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빌헬름이 죽어서, 더 눈치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게다가 반년이면 빌헬름이 죽은 시기와 겹친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사신교가 흑요에게 접근한 때가, 대원정이 실패한 시기와도 겹쳤다,

이게 단순히 우연일 리는 없다.

그리고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사신교. 네놈들은 판게니아에서 플레이어를 전부 소독이라도 할 셈이냐?'

이만한 악의(惡意)라니.

······ 그건 정말 벌레나 병균의 취급이 아닌가.

*

"사흉 바알에 의해 중립도시 '아이안'이 함락되었습니다."

"'아이안'이 심연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수련자의 산, 델피안, 파블린, 아이안, 총 네 곳이 지도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사흉 바알이 '흉신'의 칭호를 갖게 됩니다."

"사흉 바알이 본래의 힘을 되찾아갑니다."

"남은 중립도시는 두곳. '카르텔'과 '룬의 사원'입니다."

"사흉 바알이 '카르텔'과 '룬의 사원'을 함락하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완성됩니다. 이후 지구로 향하는 워프가 생성됩니다."

세 번째 중립도시 아이안의 함락 소식.

델피안이 함락된 이후 파블린과 아이안까지 우후죽순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첫 토벌대가 하루만에 소멸된 이후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탓이었다.

너무나도 빠르고, 너무나도 강력했으니.

예상하지 못한 속도에 모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대체 저 바알놈 얼마나 강한 거야? 침략했다 하면 하루를 못 버티네

-심지어 점점 강해지는 중인 거 같은데?

-흉신? 칭호에 따른 추가 효과도 있나?

-뭐? 본래의 힘을 되찾아가? 미친 거냐?

-사흉이 아니라 저새끼 마왕인 듯

추풍낙엽.

중립도시의 주인들은 더 이상 쥐어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멸망을 받아들일 수밖에.

사흉 중 하나인 바알이 아니라 흉신, 마왕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가장 큰 문제는 다섯 중립도시가 전부 멸망하면 사흉이 지구로 침략해온다는 대목이었다.

-히드라곤의 혼 갖고 있는 사람 없음?

-나 영상으로 봤어. 한국에서 누군가가 혼으로 히드라곤 소환한 영상

-그래서 한국에서 찾았음?

-연락 돌려보니까 샅샅이 뒤졌다고는 하는데 못 찾았다더라

-양심이 있으면 소유자는 알아서 나오자. 아니면 이대로 다 같이 죽자는 거냐?

-그라시아가 희망인가? 마스터는 대체 어디감?

-민초단이여 일어나라!

-팬텀신!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라시아가 찾는 히드라곤의 혼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소유자가 없다. 누가 갖고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플레이어 톡에 글을 올렸다.

-'히드라곤의 혼'을 누가 갖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거짓말이 나오냐? 이게 장난 같음?

-병먹금

-구라면 진짜 찾아가서 손모가지 잘라버리는 수가 있다.

플레이어들의 흥분 수위가 높아졌다.

당연한 일이다.

판게니아와 달리 지구로 직접 사흉이 침략해온다면, 답이 없음을 그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답이 없었다.

우선 판게니아에서 사흉을 죽일 때와 달리 지구에선 '황금률의 조각'이 따로 필요했다.

만약 나의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로 사흉이 침략해온다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그 소중한 조각을 원정을 가서까지 사용하려 하겠는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도시로 쪼개진 판게니아와 달리 지구는 쪼개지지 않았으므로.

-현재는 제국에 있다.

-그딴 소리는 나도 할 수 있다.

-진짜 제국에 있으면 뭐? 제국으로 쳐들어가기라도 해야되냐?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하지만, '마스터'라면 그가 누구인지 제법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 제국에 있었으니.

-마스터가 제국에 있었다고?

-잠수탄 거 아니었어?

-그럼 지금은 어디있는데?

제국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왔다면 행방이 알려져야하는 것 아닌가.

그라시아까지 나선 마당에 마스터만 침묵하는 상황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리시아보다도 훨씬 더한 관심종자가 마스터였으니.

-글쎄. 저주에 걸려서 판게니아의 육체가 '돼지'로 변했다. 저주가 풀리기 전까진 쉽게 나서지 못하겠지. 풀렸어도 창피해서 나서지 못하거나

-... 돼지? 대체 무슨 저주에 걸린거냐?

-저 새끼 아까부터 헛소리하고 있네.

-물론, 예상은 간다. 그 모습은 마스터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어릴 때 '돼지'라 불리며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이 증명된 순간이지

-아주 소설을 쓰고있네

-그런데 마스터가 어릴 때 왕따를 심하게 당했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 않았나?

-그 관련자들 지금 다 땅속에 있어서 펙트 체크가 불가능함

-근데 저새끼 말투 왜저럼?

결국 사람들은 그를 어그로꾼 취급했다.

하지만 관련된 소란은 길지 않았다.

"'룬의 사원'이 함락되었습니다."

"'룬의 사원'이 심연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도시 '카르텔'이 함락되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완성됩니다."

-...

-왜?

-뭐야?

아이안이 함락된 지 3시간만에.

···'룬의 사원' 역시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

사신교의 뿌리.

제국 황실.

그 중심부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헬름으로조차도 닿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그곳에 드디어 발을 들인 것까진 좋았지만.

'죄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로군.'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은 '짐승의 탈'을 쓰고 있었다.

대부분이 동색의 짐승탈을 쓰고 있었고, 그들의 관리자 급으로 보이는 소수만이 은색의 탈을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왜 1번만 짐승탈이 아니지?'

그런데 유일하게 1번만이 짐승의 탈을 쓰지 않았다.

그냥 황금색의 가면을 썼을 뿐.

의문을 접고 황궁 안을 걸어들어가자, 곧이어 끝없이 긴 탁자 위에 음식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장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옆에는 열 명의 각기 다른 황금빛 탈을 쓴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 모두가 1번과 나를 바라보았다.

"다르칸의 '소독'이 끝났나보군."

"몇 명이 '죄인'이었지? 맞춰볼까? 20명?"

"나는 50명. 저 흉악한 '황금 가면'이 진행했다면 최소한 50명은 죽었을 거다."

"오오, 내기하자고! 틀린놈은 노예 천 명씩 내놓는 걸로."

"그런데 옆에 있는 자는? 검은 염소?"

모두가 다르칸 영지에서 진행된 '소독'에 대해 알고 있다.

황금 가면.

1번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자는 열 두 번째 '정통'의 후견자다. 황금색 탈이 준비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검은 탈을 썼으니 양해를 바란다더군."

"뭐, 처음엔 그럴 수 있지."

황금의 고양이 가면을 쓴 자가 말했다.

실루엣을 보아 남자같지만 확신할 순 없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목소리조차 애매했다.

"그나저나 열 두 번째라. 어떠한 '정통'일지 심히 궁금하군."

"음. 우리말곤 더 없을 줄 알았는데. 열 두 번째라니, 기록에도 없지 않나?"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 어떤 '정통'인지를."

탈을 쓴 자들이 '헬'에 대해 궁금해하였다.

그러면서 1번이 중앙의 좌석으로 다가가 앉았다.

다른 자들도 자리에 앉은 채였다.

의자의 생김새는 모두 탈을 쓴 자들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당연히 남은 자리는 없다.

예정되지 않았던, 초대받지 않은 자.

"여긴 내 자리가 없나보군."

내 말에, 탈을 쓴 자들이 웃었다.

"아직 우리와 함께할 자격이 없지 않느냐."

"음. '정통'을 보이지도 않고 자리부터 찾다니."

"만찬회가 끝날 때까지 바닥에 앉아 있어라. 네 자리는 지금 여기 없으니."

1번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이다.

내가 어찌 반응할지 궁금하다는 듯이.

과연.

사신의 만찬회.

저 식탁의 근처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럼 나는 이곳에 앉도록하지."

방에 있는 유일한 창.

창살처럼 뾰족한 창의 중심.

빛이 쏟아지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황금빛 양의 탈을 쓴 자가 물었다.

"의자도 없이 말이냐?"

"의자가 없다니, 여기 있지 않느냐?"

"음······?"

그 순간.

화아아아악!

창가의 빛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쏟아지는 빛의 무리.

더없이 영롱하며 아름다운 자태로.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

한없이 격을 올린, 가장 찬란한 옥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앉을 자리는 스스로 만드는 법.

그리고 나는 옥좌에 앉아, 나른한 표정으로 앉은 채 턱을 괴곤 그들을 바라보았다.

관조자처럼.

혹은, 이 자리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진짜 '정통'은 누구인가?

"······."

"······ 재밌는 놈을 데려왔군."

"저놈, 설마 광대냐? 황금가면. 네놈이 우리를 놀리려고 고용한?"

"하기야 12번째 '정통'이 존재할 리 없으니."

황금탈의 주인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의견을 꺼냈다.

창가의 중심부, 빛이 쏟아지는 자리로 움직이더니 느닷없이 빛으로 이루어진 옥좌를 꺼내 든 것이다.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

척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빛의 옥좌.

'탐나는 옥좌로군.'

'유일급? 그것도 일반적인 유일등급의 물건이 아닐진대.'

'호오.'

그렇기에 옥좌의 가치를 눈여겨보는 자들도 있었다.

옥좌의 등급을 추정하곤 내심 감탄하거나, 옥좌 자체가 지닌 영롱함에 매료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격동도 오래가진 못했다.

놈이 내보인 옥좌는 분명히 대단하지만, 문제는 장소였다.

이곳이 어디던가.

황실. 그것도 모든 '정통'이 모여있는 장소다.

감히 누구도 그들의 앞에서 저따위 오만한 짓거리를 저지를 순 없다.

도시의 주인? 일국의 왕? 어림도 없는 소리.

그들을 제외한 세상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저자의 목숨은 이제 없는 것과 같다.

······ 저놈이 진짜 '정통의 후견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삼검(三劍)'은 자신의 혼과 생명을 걸고 서약했다. 그가 '열두 번째 정통'의 후견자임을."

그들의 의심을 가로질러, 황금가면이 첨언했다.

제국삼검.

그가 저 검은 염소탈을 쓴 자를 인정했노라고.

그러자 그들은 작게 놀랐다.

"삼검이?"

"삼검이라면 여우, 너의 제자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한다.

그곳엔 황금색의 여우가면을 쓴 자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 남색의 긴 머리칼을 뒤로 묶고 다리를 꼰 채 여유를 보이는 자.

매화가 그려진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곤 고양이나 강아지마냥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Lv. ??]

······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레벨이.

정보가.

이곳에 있는 모든 '황금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데.'

의아했다.

히든 특성 철혈군주의 심장, 혹은 대현자.

1번 황금가면이 둘 중 하나를 가졌다고 생각했으나 이들 모두가 같은 상태라면 단순한 히든 특성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있는 열한 명 모두가 같은 히든 특성을 갖고 있을 리 없으므로.

그러기 위해선 같은 재능의 테크 트리를 올려야만 하는데.

············ 그건 게이머나,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니까.

심지어 게이머나 플레이어도 대부분 모르는 게 '히든 특성'이다.

그걸 모두가 사이좋게 올렸다?

'재밌는 놈들이군.'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재밌었다.

나는 판게니아의 모든 것을 정복했다고 생각했다.

대원정에서 비록 패배하긴 하였으나, 그건 변수로 인한 것일 뿐 마왕과의 전투 자체는 승리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닿지 못한 미지의 장소에, 미지의 존재들이 이만큼이나 있다.

'내가 너희를 모르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알 수 없을 테지.'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정체를 숨기거나 바꾼 적은 많았으나, 그것들과도 맥이 다르다.

누가 먼저 파악하느냐의 싸움.

마치 눈치 게임 같았다.

그것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수준의 눈치게임.

"··· 삼검이 그랬다면 사실일 거다."

이윽고 황금 여우가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허스키한 여인의 목소리.

나른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그나저나.

'황금 여우가면이라.'

내가 여태껏 제국에서 만난 모든 초월자는 '여우가면'을 쓰고 있었다.

설마 모든 여우가면의 시초가 바로 저 여자란 말인가?

옛적 키운 부캐로 추정되는 '뇌신강림'도 마찬가지로 은여우가면을 쓴 채였다.

의아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10명은 각기 다른 짐승의 탈을, 오직 '황금가면'만은 그냥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의뭉스러운 부분이었다.

미치도록 궁금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먼저 궁금증을 내보이는 것은 패배를 자인하는 꼴.

"그렇다면 '정통'을 보이면 되겠군."

"음. 마지막 확인이다. 아무리 삼검이 확신한다지만, 우리가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를 터."

"보여봐라."

보아라. 알아서 궁금해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과 같은 정통의 후견자임을 밝히라고.

제국삼검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 서약, 그리고 황금가면의 의견조차 쉬이 믿지 않는다.

두 황금탈의 주인이 직접 인증했음에도.

말인즉슨.

'서로에게 믿음이 없다.'

이놈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냥 믿음이라는 게 없었다.

이로써 하나 더 알았다.

이들은 경쟁자다.

여기 모인 자들은 모두 언제 뒤통수를 때려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11명의 경쟁자가 12명이 된다는 것이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웃기는 놈들이군."

그리곤 피식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궁금증이라고는 1g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

저들의 저런 행태가 정말로 웃겨서 그렇다는 듯이 행동했다.

원래 궁금해하는 사람부터 패를 까는 게 순리이므로.

'정통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 섣불리 '헬'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정통'이라는 게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제국삼검이 확인했지만 그게 단순히 헬의 외견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다.

"······ 웃기는 놈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내가 말이냐?"

"허."

처음에는 재밌었지만, 이젠 더 재밌지 않다는 태도다.

한 마디로 선을 넘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하나, 둘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허나 상관없다.

그런 살기조차도 이 '빛의 벽'을 넘을 순 없다.

'무적. 모든 피해와 효과를 차단한다.'

찬란한 빛의 옥좌는 영역에 있는 한 무적이 되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지고룡 라일리로부터 한참을 버틴 것도 이 덕이었다.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 역시 마찬가지.

살기 어린 눈빛만이 아니라, 직접 살기를 담아 온갖 공격을 해와도 이곳에 앉아 있는 한 나는 무적이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나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았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내 행동만 봐도 자신이 넘친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어차피 '만찬회'를 진행하려면 모두가 '정통'을 보여야만 한다. 그러니, 나부터 하지."

황금가면이 입을 열었다.

이어 그가 손을 들어 원을 그리자.

치지지직!

손을 따라 푸른 선이 그려진다.

선은 정전기가 일 듯 스파크를 튀겼다.

이윽고 원이 완성되자.

-크크크크!

황금가면의 '정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

황금 가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 어찌 나올 테냐.'

처음, 허드슨의 호위로 등장한 남자.

허드슨을 내세워 정체를 숨기고 있음은 알았지만, '정통'의 후견자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사신교에 존재하는 정통은 모두 열하나.

오랫동안 '11'은 완벽한 숫자로 자리잡혀 있었건만, 편견을 깨고 12가 완성된 것이다.

그럼 가짜인가?

하지만, 제국삼검이 서약했다면 틀림없었다.

삼검의 칭호를 가진 자는 '집행자'이며 동시에 '충실한 종'이다.

본디 종은 주인을 알아보는 법.

12번째 정통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남은 것은 후견자뿐이었다.

하여, 황금 가면은 후견자의 그릇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평범한 자들은 이들의 영역에 갇혀 질식하고 말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장.

이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한데 얽히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아무리 강자라 할지라도 반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히든특성 '철혈군주의 심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백왕이나, 흑왕, 그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라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빛의 옥좌를 꺼내 들어 자리에 앉은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도리어 도발을 하면 했지.

'······ 정말 재밌는 놈이다.'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왔을까.

아니면, 저 옥좌의 능력인가?

하여간 예상을 뛰어넘는 놈임은 분명했다.

어디 '정통' 역시도 그럴 수 있을지.

"예전보다 날개가 하나 늘었군."

"하긴, '죄인의 혼'을 그렇게나 먹었으니 늘만하지."

"여섯 장. 세 쌍이라."

워프를 통해 나타난 황금가면의 정통.

모두가 눈여겨보았다.

몇몇은 감탄하고 놀랐으며, 몇몇은 침묵한 채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을 보였다.

-크크크크!

황금가면의 정통은 여섯 장의 검은 날개를 지녔으며, '낫'을 든 작은 사신의 모습이었다.

황금가면의 손 위에 앉은 그 작은 사신은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지 기분 나쁘게 웃곤 황금탈의 주인들을 바라보았다.

"흠, 이 만찬회의 주인공이 황금 가면이 되게 둘 수는 없지. 내 '정통'의 성장도 보여줘야겠군."

동시에 황금색 사자의 탈을 쓴 자가 똑같이 손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손가락을 따라 원은 스파크가 튀겼다.

그리고 워프가 열리자.

-커커커!

이번에는 우람하게 생긴 사신이 나타났다.

크기는 작지만 몸집이 컸으며, 다섯 장의 날개와 이마에 두꺼운 뿔이 나 있었다.

"···뿔이 하나 늘었군."

"몸도 커진 거 같은데."

"대체 뭘 먹기에 볼 때마다 커져 있지?"

후견자들은 우람한 정통의 모습을 보며 작게 놀랐다.

황금 가면의 정통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한 성장.

질 수 없다는 듯 그들은 한 명씩 정통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케케케케!

-키키키키키!

황금 늑대의 탈을 쓴 자가 소환한, 장난스럽게 웃는 홀쭉한 사신.

황금 양의 탈을 쓴 자가 소환한, 악동처럼 얄밉게 웃는 둥그런 사신.

각기 다른 모습의 '작은 사신'들이 나타났다.

정통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모두 사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날개의 숫자, 그리고 뿔이 나 있거나 공허한 눈동자에 별이 떠 있는 등 약간의 특색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날개 달린 '사신'의 형태다.

그리하여 열 한 명의 정통이 모두 모습을 보였다.

"자. 이제 그대의 차례다."

······ 황금 가면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헬'과 다른 정통들의 차이.

나와 그들의 차이를.

"왜 가만히 있지?"

"'선'을 그리지 못하는 건가?"

"설마. 정통의 후견자라면 '선'을 그릴 줄 아는 건 필수이거늘."

"역시 가짜로군."

선.

저들이 원을 그리자 워프가 형성됐다.

그리고 '정통'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저들이 말하는 '선'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쩌적!

공간이 찢겼다.

낫의 형태로.

치직! 치지지지직!

이후 찢긴 '선'에 스파크가 몰아쳤다.

손가락으로 그린 작은 원의 스파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면.

"음?"

"저건······!"

"정통이 워프를 직접 연다고?"

그들 역시도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들의 정통은 '후견자'가 공간을 열어줘야 나올 수 있지만, 헬은 '직접'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후견자. 이끌어주는 자. 그들은 그 이름처럼, 정통을 직접 소환하여 이끄는 자들이다.

이게 그들과 나의 첫 번째 차이다.

애초에 나는 선을 그릴 줄 몰라도 된다. 그릴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첫 번째 차이는 두 번째 차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과 나의 결정적인 두 번째 차이.

-캬캬캬캬컄!

호탕하기 짝이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헬이 공간을 격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판타스틱 베이비

남다른 웃음소리와 함께 워프를 찢고 등장한 헬.

다른 '정통'처럼 여러 쌍의 날개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지만.

단 한 쌍의 날개만으로도, 헬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

자신의 정통에 대해 한없이 자랑을 늘어놓던 이들도.

"······."

다른 정통을 보며 비아냥대고 눈살을 찌푸리던 자들도.

"······."

1번, 황금 가면의 남자 역시도.

-캬캬캬캬캬컄!

모두가 침묵한 채, 내 머리 위에 앉은 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들이 소환한 '정통'과 나의 '정통'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그 간극을 그들도 알고 있을 테니.

"날개가······."

"흰색?"

"저건··· 혼종인가?"

세상의 모든 걸 알듯이 굴었던, 세상을 좌시할 듯이 오만하게 굴던 그들조차도 헬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흰색의 날개 한 개와 검은색의 날개 한 개.

다른 정통의 날개는 모두 검은색인 데에 비하면 확실히 눈에 띈다.

그야말로 혼종. 섞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정령의 탑, 혼돈의 시련. 그 끝에 있었지.'

드라이어드의 숲에서 정령의 탑을 올랐을 때.

혼돈의 시련, 그 끝의 끝에서 겨우 발견한 게 바로 천상의 정령알이었다.

나는 당시 내가 본 정령알의 설명을 떠올렸다.

★ 빛과 어둠, 혼돈의 끝인 '천상계'에서 떨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알

★ 오직 '천상인'만이 알을 보고, 부화시킬 수 있다.

딱 두 문장.

하지만 그 두 문장만으로도 알의 가치를 설명하기엔 충분했다.

'천상계에서 떨어진 알. 천상인만이 보고, 부활시킬 수 있는 존재.'

그게 바로 헬이었다.

다만, 이 조건 자체가 다른 '정통'과의 차이를 설명하긴 살짝 아쉽다.

저들과 헬의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추측건대.

'오염된 명예.'

데미갓 특성 던전.

모두가 불가능이라 여긴, 빌헬름으로도 클리어하지 못했던 마의 구간!

그곳의 던전 마스터 데미갓에게 승리한 뒤, 놈에게서 흘러넘치던 '오염된 명예'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헬은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왔다.

그게 헬이 알에서 부화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물론 처음부터 헬이 다른 정통과는 차별되는 존재였을 수도 있지만, 헬의 발견과 부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한 차이들이 쌓여 지금의 헬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방식으로 깨어난 정통들과는 다를 수밖에.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다만······ 정말 열두 번째 '정통'이 맞나보군."

"하지만, 정통에게 흰색의 날개라니."

"그런데 '사신력'을 발휘하진 못하는 건가?"

"무리다. 저 정통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식사도 제대로 안 한 듯싶은데."

"음, 확실히. 정통의 진정한 가치는 세 개의 날개부터 시작하지."

황금 탈의 주인들이 헬을 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외견도 외견이지만 신경이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사신력?'

얼추 정통이 사용하는 힘의 이름을 칭하는 단어 같은데.

헬이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워프를 정지시키고 작동시키는 수준을 넘어, 또 다른 이적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키키?

-케케케케케!

-커커커!

······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헬이 나타나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용해진 정통들.

녀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끄러워지며 헬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뭐 하는 거냐?"

"저런 적은 한 번도······."

후견자들은 당황한 채 이맛살을 구기며 자신의 정통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통들은 어느새 헬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의식이라도 되듯이.

동족을 만나서 기뻐하는 건가?

아니면 새로운 정통의 출현을 축하해주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저들도, 나도.

'정통과 정통한 후계자.'

어쨌든 저들이 말하는 정통은 헬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감상의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정통이란 같은 계통, 혈통 따위를 뜻하는 단어다.

그리고 처음 헬이 깨어났을 때.

[천상의 정령]

[정통한 후계자]

분명히 정통한 후계자라 적혀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녀석의 머리 위에 번듯하게 떠오른 창이 증명했다.

'다른 정통들도 이처럼 적혀있었다면 후계자라 부르지 정통이라 부르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의아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 하필 '정통'이라 부르는가?

모두가 같은 '정통한 후계자'라면, 정통보단 그냥 후계자라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

누가 '정통한 후계자'를 보고 '정통'이라 부르겠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천상계에는 본래 열두 개의 알이 있었고, 그중 유일한 게 떨어진 것이 헬이라면.'

저들의 '12번째 정통이 있을 리 없다'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떨어진 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12번째가 있으리란 생각 또한 못할 법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부화의 조건이다.

헬을 깨울 수 있는 건 '천상인'뿐.

'그럼 이자들 모두가 천상을 갖고 있다고?'

모두가 나와 같은 천상의 히든 특성을 지녔다?

아니다.

내심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제국이 미지(未知)이며,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천상을 띄운 건 어마어마한 SP를 지불한 뒤였다.

어지간한 SP로는 엄두도 못 내는 히든 특성.

세상을 전부 지불하지 않는 이상에야 열한 명이 모두 그 특성을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히든 특성은 몰라도 천상은 특히.

그렇다고 이들 자체가 '천상인'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들은 모두 인간이다.'

인간이 확실하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인간은 천상인이 될 수 없다.

천상의 정령알은 빛과 어둠, 혼돈의 끝에서 분명히 '떨어졌다'고 했으므로.

천상을 갖지도 않았고, 천상인도 아니라면, 저들이 지닌 정통은 어떻게 깨어났을까?

'처음부터 저들의 정통은 천상인만 깨울 수 있다는 조건 자체가 없던 거다.'

아마도 헬과 달리 그런 조건이 없어서이진 않을는지.

"······ 이게 대체?"

"합창이라도 하는 것 같군."

-캬캬캬캬!

합창이라 한다면, 그 지휘는 분명히 헬이 맡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정통들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

"······."

모두가, 한참이나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자, 의심이 끝났다면 이제 '만찬회'를 시작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끝나지 않는 합창에, 황금의 가면을 쓴 남자가 말했다.

사신의 만찬회. 그 시작을 알린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우선 '소독'의 내용부터 확인하겠다. 이번 다르칸 영지의 '소독'에서 확인한 죄인은 스물다섯이다."

"그것밖에 안 된다고?"

"꽤 공들여서 모은 자들 아니던가?"

"최소한 50명은 될 줄 알았는데?"

모두가 의외라는 듯이 답했다.

황금 가면이 주도하는 소독치곤 죄인이 적다며.

그러자 황금 가면은 나를 쳐다보았다.

"저 검은 염소가 나와의 내기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본 모두가 정확하지는 않다는 걸 덕분에 깨닫게 됐지."

"'죄인'을 보는 안목으로 내기를 한 건가?"

"그렇다."

"······ 그런데, 네가 졌다고?"

"그래. 내가 졌다."

황금 가면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러자 다른 탈의 주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

헬이 등장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황금 가면과의 내기에서 이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는 듯이.

"어쨌든, 이번 다르칸 영지에서 잡아들인 죄인은 모두 만찬회에 제공할 것이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그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그러자 황금 가면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게 전부라면 만찬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지."

순간.

스르르르!

황금 가면의 뒤로, 검은 복장을 한 사신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장한 사신들은 모두 낫 위에 작은 불꽃을 이고 있었다.

그 불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갇힌 '죄인'의 모습이 보였다.

사신으로 거둬들인 영혼들.

모두의 시선은 그중 하나에 집중됐다.

다른 불꽃보다도 족히 세 배는 큰 불꽃.

"100위권 내의 '하이랭커'?"

"저자는··· '찹쌀콩떡'! 오호. 용케 찾아냈군."

······ 찹쌀콩떡?

'찹쌀콩떡'은 메인 퀘스트 명예의 전당 100위권에 자주 이름을 내비치던 닉네임이다.

설마 이놈들, 단순한 플레이어 말고도 랭커도 사냥하고 다니는 건가?

"하하하! 만찬회에서 선보이는 게 고작 그 수준이냐? 실망이로구나, 황금 가면이여."

황금색 사자탈을 쓴 자.

그의 뒤로도 사신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사신의 모습이 묘하게 다르다.

'정통'과 마찬가지로 사신에게도 뿔이 나 있었다.

"나는 그라시아를 잡았다! 나보다 확실한 '만찬'을 준비한 자는 또 없을 터!"

"오호. 그라시아를?"

"드디어 그 쥐새끼 같은 놈을 잡았나 보군."

··· 잠깐. 그라시아를 잡았다고?

내심 인상을 찌푸리며 3개의 뿔을 가진 사신의 낫 위로 걸린 커다란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정말로 그라시아가 있었다.

불꽃에 갇힌 그라시아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허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데, 왜 안 움직이지?"

"정말 그라시아가 맞는 건가?"

다른 불꽃에 갇힌 영혼들은 모두 발버둥치며 빠져나가려고 발악을 하였다.

그런데 그라시아는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겨 지적하자, 황금색 사자탈을 쓴 후견자가 말했다.

"··· 방해하는 놈이 있어서 놈의 '젊은'만 빼앗았다. 하지만, 덕분에 이제는 놈이 어디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지. 물론- 가만히 놔둬도 곧 죽기야 하겠다만."

"음, 그렇다면 머지않아 잡아들이겠군."

"대체 누가 방해를 한 거지?"

아쉽긴 하지만 잡는 건 확정 사안이었다.

이어 한 명이 묻자 황금 사자가 답했다.

"'성각자'다."

"성각자라······."

"어쨌든, 나보다 훌륭한 '만찬'을 준비한 자가 있는가?"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라시아의 '젊음'만을 빼앗았다고 해도, 가장 특출난 죄인을 잡은 것이니.

아무도 나서지 않자 황금 사자가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그럼 그렇지. 아무도 없겠지. 그 '란돌프'를 잡아들이는 게 아닌 이상에야!"

이들은 심지어 플레이어 란돌프,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말하는 투로 보건대, 내가 그라시아를 제치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실도 알고 있는 듯싶었다.

동시에 모두가 '란돌프'라는 이름에 반응한 것을 보면, 저들이 '최우선'으로 잡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가 나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로 들키면 안 되겠군.'

원래부터 밝힐 생각도 없었지만, 더더욱 들키면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11명 모두가 '사신'을 소환해 '만찬'을 선보인 뒤.

"······ 음, 검은 염소. 그대의 정통은 아직 '사신력'을 보유하지 못했으니, 만찬회에 보일 만찬 또한 없을 터."

황금 가면이 내게 말했다.

사신력이란, 사신을 소환할 힘을 뜻하는 것인 모양.

당연히 아직 어린 '헬'은 사신을 소환할 수 없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이번 만찬회에서 '만식'에 도전하여 '식사'를 하면, 그대의 정통 또한 '사신력'이 생길 테니."

"··· 아무런 만찬도 안 보인 놈에게 '만식'의 기회를 주자는 거냐?"

"황금 가면. 그건 너무 편의를 봐주는 거 아닌가?"

"그라시아를 잡은 내가 처음인 게 당연하거늘!"

다른 자들의 항의.

특히 황금 사자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선보인 만찬의 급에 따라 식사의 순번이 정해지는 듯했다.

황금 가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들 역시도 '첫 만찬회'는 다른 이들의 배려로 '만식'에 도전하지 않았느냐? 그게 관례고 규칙이다. 혹, 너무 오래돼서 까먹은 건가?"

"흐음."

"··· 좋다. 허나, 기회만 주는 거다."

마지못해 납득한 자들.

그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금 가면이 재차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염소여. 그대의 '정통'이 이번 '만찬'의 첫 도전자다. 이는 그대가 가진 '정통'이 가진 그릇을 확인할 기회이기도 하지."

"정확히 뭘 하라는 거지?"

"음. 우리가 내놓은 저 '죄인'들을 그대의 정통이 '식사'하는 것이다. 처음 도전하는 정통이 모든 '죄인'을 먹어치우는 걸 우리는 '만식'이라고 부르지만, 아직 '만식'에 도달한 정통은 없다. 그리고 만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음 순번의 정통이 식사를 하고, 이는 저 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반복되지."

헬에게 저 영혼들을 먹이라는 것이다.

정통들의 식사. 죄인들의 영혼이 '성장'의 주원료이므로.

하지만 여태껏 헬은 내 '명예'만을 먹어치웠다.

어쩌면 그래서 성장이 더딘 걸 수도 있었고.

-캬캬컄?

내 시선을 느낀 헬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식탁의 위에 놓인 '거대한 불'을 바라봤다.

모든 죄인의 불꽃이 합쳐져 만들어진 불.

그곳에 갇힌 수많은 영혼들!

"무엇보다도 이번 '죄인의 불'은 다른 만찬회 때보다도 크다. 그대는 운이 좋군."

황금 가면의 말에 모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황금 가면은 헬을 살피며 말했다.

"자, 시작하지. 상태를 보건대 그대의 정통으로선 '첫 식사'일 터이니, 배가 터지게 먹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만에 하나 '만식'에 도달하게 된다면 엄청난 '사신력'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

황금 가면의 말마따나 헬은 저 '불'에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캬캬캬캬!

불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헬.

정말로 '식사'가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허나,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저들 모두가 플레이어, 혹은 판게니아인이다.'

이는 내가 그간 걸어온 길에 위배된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사신교가 궁금해서?

'······ 사흉을 막아야한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사흉이 판게니아와 지구를 망치는 걸 막고자 나는 이곳에 발을 들였다.

나로 인해 방생된 바알이 벌써 중립도시 네곳을 심연에 가라앉혔다.

하여, 나는 확실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다만, '확신'없이 무작정 움직이면 유일한 기회마저 날려버릴 수 있기에, 이곳에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 내기에 이긴 즉시 바알 갑옷을 가져가려 들었다면, 황금 가면은 그것을 약점잡아 더욱 큰걸 요구할 놈이었으니까.

그러니, 판게니아인과 플레이어가 뒤섞인 저 불을 헬에게 먹으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캬캬캬컄!

그 찰나.

내 허락도 구하지 않고, 헬이 입을 크게 벌렸다.

휘이이이이이익!

바람과 함께 불꽃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뭣?!"

그리고 이윽고 나타난 결과를 보며, 나를 포함한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끝과 완성 (수정)

용병도시 카르텔.

사흉 바알의 퇴치를 위해, 마지막 중립도시인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재차 모여들었다.

'······ 히드라곤의 혼은 결국 찾지 못했군.'

그 중심지에, 그라시아가 있었다.

흰머리를 휘날리며 유일급의 검 '푸른 서광'을 쥔 채.

대대적인 광고를 했음에도 히드라곤의 혼을 끝끝내 찾지 못했다.

한국의 '영웅연합'역시도 총력을 기울였으나 별 소용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죽지는 않을 거다.'

사신에게 젊음을 빼앗긴 뒤 그라시아는 빠르게 노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사흉 바알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으니까.

'사흉 바알은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 놈을 죽이면 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사흉은 강력하다.

네 개의 도시가 단 하루도 안 되어 함락될 정도로.

그러나 그라시아가 자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것까지는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그라시아가 품에서 '병'하나를 꺼내, 병의 마개를 열고 '푸른 서광'에 부었다.

그러자 푸른 서광이 녹빛에 물들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체를 즉사시키는 독. 아무리 사흉이라 할지라도 이 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순 없다.'

이 독은 그라시아도 우연히, 그리고 힘겹게 구한 독이다.

생명을 지닌 이상 닿으면 무조건 죽이는 독.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이었으니까.

"푸른 서광이 '우로보로스의 독'을 완전하게 흡수했습니다."

*

사신의 만찬회.

모든 정통이 만찬을 위해 모이는 장.

그리고 정통들 사이에서 '첫 만찬회'가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신력이 없는 사신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으니.'

열두 번째 정통이 그간 한 번도 식사하지 못했으리라고 여기는 원인은 간단했다.

사신력이 없는 정통은 사신을 소환하지 못하고, 사신을 소환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신으로 잡아들인 죄인의 '불꽃'만이 정통의 진정한 식사가 될 수 있으므로.

하여, 모든 정통은 처음 겪는 만찬회에서 '만식'에 도전한 뒤 사신력을 갖춘다.

그게 규칙이고 규율이다.

하지만, 첫 만찬회에서 만식에 성공한 정통은 여태껏 없었다.

열한 명의 정통 모두.

'하물며 이번 죄인의 불은 다른 때보다 두 배는 더 크다.'

잡아들인 죄인의 격에 따라 불꽃은 크기를 키운다.

평균적인 불의 크기는 웬만한 성인 남성만 하였다.

지금은 무려 그 두 배.

그라시아의 젊음, 다수의 하이랭커를 잡아들인 것이 불의 크기를 키우는 데 크게 일조한 것이다.

'평균적으로 정통의 첫 식사는 40% 정도.'

오랫동안 허기진 정통은 첫 만찬회에서 상당한 양의 불을 먹어치운다.

평균 40% 안팎.

한꺼번에 많은 양을 흡수한 정통은 날개를 추가로 얻고, 사신력이 생기며 사신을 소환할 수 있게 된다.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다만, 궁금할 뿐.

'오랜 시간 존재하지 않았던 열두 번째 정통. 그리고 흰색의 날개라.'

모든 정통은 알의 상태로 사신교에 귀속되어있었다.

자격을 지닌 자들만이 '알'을 깰 수 있고, 후견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교단 바깥에서 정통이나 정통의 알이 발견된 사례는 여태껏 없었다.

저 흰색 날개 역시도 이질적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잡종'인 줄 알았다.

그래도 정통은 정통.

배척하기보단, 확인하는 게 먼저다.

저 정통과 자신들의 정통이 뭐가 다른지.

-캬캬캬컄!

머지않아 검은 염소의 정통이 죄인의 불을 보곤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식사'를 알아본 것이리라.

오래된 허기를 억누를 순 없을 터.

후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보고, 반응했다면, 먹어치우는 게 당연한 일.

'그래봤자 대략 10% 정도 먹어치우고 말겠지.'

물론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흰색이 섞인 잡종.

다른 정통들이 묘하게 따르는 모습도.

결국 '구경거리'가 아니겠나.

정통들 역시 신기하기에 어울려주는 것이다.

짐승 우리에 갇힌 짐승을 바라보듯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건 황금가면뿐만이 아니었다.

'반반이니까 5%?'

'흰색은 쉽게 물드는 색이다. 정통에겐 독과 같지.'

'어딜 잡종 따위가.'

'신기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일 거다.'

다른 정통의 후견자들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종, 혹은 잡종.

무언가 섞여 있다면 순혈(純血)이 아니다.

순혈의 정통도 아닌 놈이 만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소로울 수밖에.

이윽고, 열두 번째 정통이 입을 열었다.

"······!!!"

"······ 뭣?!"

가소로움에 코웃음을 치던 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어진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으므로.

거대한 죄인의 불이 휘청이며,

······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설마?"

"먹어··· 치웠다고?"

"만식······!"

죄인의 불이 증발할 리는 없었다.

갑자기 사라졌다면, 그것은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만식!

만찬에 준비된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는 행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포식을 해낸 것이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단순한 잡종이 아니었나?"

"우리의 정통을 넘어서는 정통이라는 거냐?"

"검은 염소··· 자신 넘치던 이유가 있었군."

"게다가 저 정도로 먹어치웠으면 '급성장'할 거다."

"으음, 첫식사부터 만식이라면 엄청난 사신을 소환할 수도."

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만식'했다면 어느 정도의 성장을 보일지 귀추가 궁금할 따름.

첫 식사에서 평소보다 두 배는 큰 만찬을 만식했다. 얼마나 성장하며 어느 정도의 사신력이 생길지 예상도 가지 않는 탓이다.

정통마다 소환하는 사신 역시도 특성에 차이가 있었으니.

모두의 시선이, 헬에게로 모였다.

-캬······ 캬?

갸우뚱.

순간 헬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먹은 '식사'로 성장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걸까?

이내 웃음소리마저 멈춘 헬은 재차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카악, 퉤!

······ 뱉어냈다.

그것을 보며, 후견자들이 비웃었다.

"욕심을 부렸나 보군."

"푸하하! 그러게 적당히 먹었어야지!"

그러면 그렇지.

만식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욕심을 부려서 토해낸 것 분명했다.

-퉤퉤퉤퉤!

하지만 그런 이유도 아니라는 게 곧 밝혀졌다.

입에 남은 잔재마저 털어내듯 헬은 연신 토악질을 해댔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 맛이 없어서.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맛이 없는 음식을 먹을 때나 보이는 행동이었다.

잠시간의 정적.

그 가운데 황금가면이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규칙은 규칙, 첫 식사는 실패했으니 다음 차례로 넘어가지."

만식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실패했다.

먹은 걸 토해냈으니 더이상 기회는 없다.

검은 염소는 아쉽겠지만 제알아서 식사를 찾는 노력을 해볼 수밖에.

"기껏 기회를 주었건만 줘도 못 먹을 줄이야. 쯧쯧."

황금 사자.

그가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커커커!

그라시아의 젊음을 강탈한, 머리에 뿔이 나고 몸집이 우람한 사신.

녀석이 다시 뱉어진 죄인의 불 가까이 다가갔다.

"먹어치워라. 이번에야말로 만식하여 더 강한 정통이 되는 거다!"

황금 사자가 외치자, 뿔난 정통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커커!

"뭐 하는 거냐? 어서 먹어치우래도?"

-커커!

명백한 거부의 의사.

이는 다른 정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예 낫으로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돌린 정통도 있었다.

그 행동은 마치.

"······ 지금 먹고 뱉어서 더럽다는 거냐?"

"이런 미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만찬을 눈앞에 두고, 모든 정통이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이미 한 번 먹고 뱉어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 이런 상황은 또 처음 겪는군."

황금가면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만찬회가 열린 이래로 단 한 번도 없던 집단 식사 거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 저 검은염소의 정통 때문이다.

'먹고 뱉다니···.'

못 먹겠으면 처음부터 먹질 말던가, 뭐 저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