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전더리 파밍은 계속 이어졌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지나 충청도까지 레전더리가 잠든 던전을 휩쓸었다.
대부분 숨겨진 A급 던전이거나, 그 내부의 이중 던전이었다.
"또 레전더리······. 대체 무슨 능력이에요? 나도 알려주면 안 돼요?"
미래의 네가 알려 준 거라, 무슨 수로 알아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은 순조로웠다.
아니, 날로 먹는거나 다름 없었다.
레전더리 아이템을 착용하고 더 빨라진 윤서현의 공간이동.
"공간이동 스킬의 레벨이 올랐어요."
대기 시간이 줄어든만큼 더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건 빠른 경험치의 축적으로 이어진다.
"오오, 성공했어요!"
거기에 더해 진세아의 '절대 강탈'이 합쳐지니 그야말로 치트나 다름 없다. 레전더리 아이템을 착용해 강화된 능력치만큼 진세아가 훔칠 수 있는 폭도 늘어난다.
계속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레전더리 투어 3일차.
"이번 던전은 둘이서 공략해주세요. 위치는 알려드리겠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경기도 근처의 던전.
나는 내부의 아이템 위치를 알려주고서 따로 빠져나왔다.
'레전더리 아이템은 훌륭하지만······. 아이템만으로 모든 게 해결 될 거였으면 환세의 도둑 진세아는 진작에 세계 최강이 되었겠지.'
마족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써서 상대해야 한다.
숲 속에 위치한 폐건물.
쓰러져가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벽 뒤편으로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이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잘 지내기는요. 불안해서 한숨도 못 잤습니다. 대체 2주 동안 어디계셨던 겁니까?"
"왜, 내가 사라져서 좋았던 거 아닌가?"
내 말에 김상욱이 한숨을 쏟아냈다.
"그럴리가요. 오히려 버려진 줄 알았습니다. 제가 말씀 안드렸나요. 지난 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고요. 지한님을 도와 마족을 처치하는 게 제 사명······."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하는구만."
"아니, 답답하네. 진짜라니까요."
김상욱이 이중 스파이로 활약해 준 덕분에 수월하게 마족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나는 억울해 하는 김상욱을 잠시 바라봤다. 나와 김상욱을 이은 검은 끈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영혼 계약은 그대로다.'
미래에서 확인한 김상욱은 마족의 편에 서 있었다. 최후의 5인 중 하나였던 김민수와 같이.
'정말 다시 배신한 건가? 아니라면 내가 숨겨 둔 조커 카드였던걸까.'
미래의 나와 대화한 적이 없으니 그 진상은 알 수 없지만.
멸망한 세계에서 만났던 그에겐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내가 안배해 둔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진짜 위협은 김상욱이 아니다.'
마족의 목적이 인류의 절멸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다시 인간의 편에 섰으니까. 진짜 배신자. 인류의 마지막 희망까지 앗아간 존재는 따로 있다.
'대마법사 김민수. 최후의 5인이면서도 마족과 교류한 그가 진짜 배신자다.'
본래 천성호가 했어야 할 회귀를 내가 하게 된 원인.
김민수를 견제해야 한다.
"휴가 기간이었다고 생각해라. 이제 쉴 틈 없을 거야."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뭘하면 됩니까?"
"오성 길드에 들어가라."
"오성이요······?"
대한민국 3위 길드인 오성.
대마법사 김민수는 그곳의 수장으로 있다.
"그곳에서 마기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길드장의 신임을 얻어라."
마족과 관련있는 자라면 김상욱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오성이면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잖습니까."
"자신 없나?"
내 말에 김상욱이 씩 웃었다.
"아뇨, 섭섭하게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저 그 지독한 마족 놈들 아래에서도 구른 놈입니다. 너무 쉽다 이거죠."
자신감이랑 능청스러움만큼은 일류구만.
"김민수도 너처럼 마족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자의 최측근이 되어 그 목적을 알아내라."
"맡겨만 주십쇼."
김상욱이 운영하고 있던 빌런 길드는 대리인을 세우면 되는 일이다.
"아주 확실하게 해내겠습니다."
비릿한 미소를 짓는 김상욱.
인류의 배신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탓일까.
이런 방면에선 믿음직스러움마저 느껴진다.
* * *
3일차에 우리는 총 여섯개의 레전더리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건 이거였다.
『 에이나시아 영웅검(레전더리) 』
- 공격력 : 160
- 효과 : 검기의 순도가 높을수록 절삭력이 강화됩니다.
푸른 기운이 서린 한 자루의 검. 다른 레전더리 무기와 비교해서 공격력이 높음은 물론이고, 절삭력 강화 효과까지 붙어 있다.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신태양한테는 딱이겠어.'
내가 가진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의 공격력은 200이다. 등급은 무성(無星).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단위다.
선공권이라는 말도 안되는 특수 기능까지 생각하면 무기를 바꿀 이유는 없다.
'물론 그냥 줄 수는 없지.'
미래의 신태양은 분명 자신을 굴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약속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면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윤서현 헌터도 레전더리 아이템을 파밍하는데 맛이 들린 모양이다. 아이템을 획득할 때의 그 희열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긴 하다.
"우선은 레전더리 아이템을 착용하죠."
나머지는 팔목 보호대와 장갑, 팔찌, 반지다.
레전더리 아이템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으니 비현실적이긴 하다.
"지한씨는 아무것도 안 쓰나요?"
"이제부터 가는 곳이 제 아이템 구하러 가는 겁니다."
내 갑옷은 유니크 등급이지만, 레전더리급에 필적한다. 김건이 만들어 준 아이템은 성장형이니까.
"그리고 지금부터는 사냥도 할거고요."
『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합니다. 』
『 대상 '진세아'의 재능 절대은밀기동의 개화 난이도는 S입니다. 』
『 대상 '윤서현'의 재능 절대공간창조의 개화 난이도는 SS입니다. 』
두 사람의 재능을 빠르게 개화 시키는 것도 전력 증강의 일종이다. 더불어 이건 내가 능력을 획득하는 길이기도 하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시동 전까지 최선을 다해 기반을 닦아 놔야 한다.'
상위 마족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마족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어중간한 태도로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뿐이다.
그리하여 시작 된 사냥과 던전 공략.
S급 게이트는 현재 그 출현 빈도도 적고 공략한다는 사실만으로 큰 주목을 끌게 된다. 노리는 건 A급 게이트다.
"으아악, 서현 언니 도와줘요!"
"잠깐만 기다려! ······지금이야!"
수 백 마리의 정령들이 그녀들을 쫓아 달려들었다. 윤서현이 차분하게 공간을 가르고, 진세아가 단검을 들고 종횡무진 그 속을 누빈다.
타재간파의 영향을 받은 두 사람.
『 동료 진세아의 레벨이 오릅니다. 』
『 동료 진세아의 레벨이 오릅니다. 』
『 동료 진세아의 레벨이 오릅니다. 』
윤서현도 마찬가지로 어마무시한 레벨업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성장세구만.'
나는 뒤쪽의 바위에 앉아 그 광경을 구경했다. 괜히 경험치를 빼앗을 필요는 없다. 오르티마의 레벨도 전부 만렙이었기도 하고.
목룡 몰테인의 레벨도 120, 마공학 드래곤의 레벨도 120이다.
'슬슬 새로운 마수를 흡수할 때가 됐다.'
한마디로 내 성장은 최대치다.
S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그게 있었지.'
이계 규율의 상점에 있던 이계규율 1★ 부여권.
현재 무성 등급인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에 사용할 때가 되었다.
10만 포인트라는 어마무시한 가격에 사용을 미루고 있었지만······.
지금쯤 되면 포인트도 충분히 쌓였겠지.
그리 생각하며 이계 규율 상점을 불러오는 순간이었다.
파직, 파지직!
강렬한 스파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도 모르게 팔로 앞을 가릴 정도였다. 스파크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큭. 이번에는 또 뭐가······.'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깨달았다.
미래에서 휩쓸었던 수 만의 군세.
마도파괴광선에 의해 녹아내린 수 없이 많은 마물들.
그 포인트를 잊고 있었다.
『 대상 이지한이 획득한 포인트가 해당 시간선의 인과 한계치를 아득히 초월합니다. 』
『 시스템이 해당 인과 타당성을 검토합니다. 』
『 이계 규율이 시스템에 간섭합니다. 』
붉은 스파크와 금빛 스파크가 난립하는 가운데.
촤르르륵!
포인트가 끝없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10만대였던 포인트가 20만, 50만을 넘어······. 100만대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상승한다.
상승하는 숫자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 순간.
새하얀 빛이 터져나왔다.
115화 레전더리 투어(3)
짤랑.
빛과 함께 허공에서 동전 세 개가 떨어졌다. 나는 단번에 동전들을 낚아챘다.
'이건······?'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새하얀 순백의 동전.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파지직!
시스템 메시지는 기능을 정지한 듯 간헐적인 방전을 일으킬 뿐이었다.
'따지고보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지.'
멸망 직전의 미래에 갔던 것부터가 이계 규율의 영향 아래 일어난 일. 더군다나 거기에서 벌인 일도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나.'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대부분 기다리면 해결 되었고.
코인을 주머니에 집어 넣고, 신경을 끄려던 그때였다.
스스스······.
내가 팔목에서 금색의 빛이 흩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초월의 팔찌에서 나온 일이었다.
허공으로 스며든 빛.
그것이 효과가 있었던걸까.
곧바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 시스템이 해당 기능을 정상화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
이어지는 설명.
『 인과 한계치를 뛰어 넘은 활약에 대한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
『 다량의 포인트가 '초월의 코인'으로 변환됩니다. 』
'포인트를 대신해서 코인을 지급한 거라고······?'
나는 소지한 포인트를 확인했다.
『 보유 포인트 : 2,362,540 Point 』
자그마치 236만 포인트.
'그래도 장난 아니게 많은데.'
초월의 코인으로 변환된 포인트를 제외 하고도 이만큼이 남았단 건가. 만 단위의 적을 처치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더 많은 포인트가 있어야 했지만.
'그 포인트가 초월의 코인으로 변환 되었단 거군.'
당분간 이계 규율의 상점이나 타재간파를 사용하면서 포인트가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어디에 쓸 수 있는 거지?'
나는 다시 코인을 꺼내 들어 살폈다. 이름은 거창하다만 중요한 건 사용처다.
반짝.
그런 내 의문에 답하듯 코인과 팔찌가 동시에 반짝였다.
『 초월의 코인 』
- 최상위 존재들과의 거래에서 통용되는 화폐
최상위 존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멸망한 세계의 검성이 자랑스레 늘어놓던 영웅담 중 하나.
- 사신과 만난 적이 있었다니까, 그때 내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알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최상위 존재들.
- 거래를 했지. 내 운명을 담보로. 나는 살아 돌아 왔어. 그것 말고는 거래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이것 말고도 어떤 영웅이 정령계의 왕을 만났다거나, 잊혀진 세계의 초월자를 만났다거나 하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때는 그냥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었을 확률이 크다. 나는 코인을 고히 인벤토리 속에 넣어놨다.
여기만큼 안전한 장소는 없으니까.
'쓸모가 있겠어.'
어쨌든 포인트는 236만 포인트만큼 늘었다.
'그러면 사려던 건 마저 사야지.'
본래 목적이었던 1성 부여권을 구매했다.
『 '이계규율 1★ 부여권'을 구매하셨습니다. 』
『 100,000 Point를 소모합니다. 』
이러고도 226만 포인트가 남는다.
『 해당 부여권은 '무성(無星)'등급 아이템에만 사용 가능합니다. 』
『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무성)'에 부여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나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메시지의 확인 버튼을 눌렀다.
"물론이지."
『 역전의 검에 별의 힘이 깃듭니다. 』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린 한줄기 빛이 역전의 검을 감쌌다.
『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1★)를 획득합니다. 』
새하얀 도신 위로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온다.
"보스, 보스가 나왔어요!"
"세아야, 뒤로 물러나!"
격력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진세아와 윤서현.
'그러면 테스트를 한 번 해볼까.'
나는 검을 쥔 채로 그곳을 향해 뛰어 들었다.
* * *
서걱—!
테스트라고 할 것도 없었다. A급 게이트의 보스인 바람 정령이 단칼에 반으로 나뉘었다.
키에에에—!
가공할 절삭력 앞에 보스의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일자베기를 사용하지 않은 위력이었다.
『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1★) 』
- 공격력 : 300
- 특수 효과 : 역전의 기회(활성화)
'······.'
검을 바라보는 나도 기가 찰 정도다.
레전더리급과는 비교가 안되는 성능이다. 무성에서 1성으로 등급이 상승하며 200이었던 공격력이 300이 되었으니.
'정신 나간 성능이네.'
그걸 느낀 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세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오빠, 대체 2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어디서 특훈이라도 하고 온 거에요?"
고생고생하며 싸우던 보스를 한 방에 보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특훈을 하기는 했지."
"아무리 봐도 훈련한다고 될 수준이 아닌데."
"너도 열심히 하면 될 걸."
농담이 아니라, 이 둘에게는 그만한 재능이 있다.
나는 보스가 떨어뜨린 마정석을 주워들었다.
A급 보스의 마정석.
정령의 마정석은 순도가 높다. 아이템 제작자 김건에게 가져다주면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이 정령의 둥지 근처로 다가간 윤서현이 무지개빛의 아이템을 들어 올렸다.
"레전더리 또 찾았네요. 이제는 무서울 정도라니까요."
순간이동으로 단번에 내 쪽으로 다가온 윤서현이 아이템을 내게 건넸다. 어깨 보호대였다. 탱커 역할을 할 신아람에게 주면 딱이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요. 저희 엄청난 불법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거든요?"
"서류상으로는 문제 없을 겁니다."
협회의 규정을 많이 어기고 있기는 하다.
A급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은 A급 6명이다. 게이트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론 그렇다.
"그쵸, 레전더리 아이템이잖아요.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처음부터 윤서현은 협회 직원임에도 규정에 깐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했으면 더했지.
그런 점에서는 결이 맞는다. 진세아가 어디 남은 아이템이 없나 탐색을 나선 사이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협회에서 나올 생각은 없습니까?"
"협회에서요······?"
미래의 윤서현은 그녀의 자매인 윤지은을 잃고 절망했었다. 내가 아는 미래와는 반대로 된 상황이다.
- 협회에서 나와 은빛의 날개에 진작에 합류했더라면.
그리 중얼거리는 윤서현의 씁쓸한 표정을 기억한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했나.'
그래도 나름 협회에서 오래 지냈을텐데.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윤서현은 주먹을 쥐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지한씨도 이 지긋지긋한 협회. 때려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고보니 언니 때문에 억지로 다니는 거랬던 것 같기도 하다. 길드보다 협회가 안전하다는 이유에서.
변칙 게이트가 난무하게 된 지금. 협회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 언제 사고에 휘말릴 지 모르는 건 똑같다.
윤서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흐응, 지한씨가 그런 의견이라면 언니도 이해해주겠죠?"
"······."
당장이라도 때려치려는 기세다.
뭐, 나쁠 거 없겠지.
그녀의 재능은 협회에서 썩기엔 아깝다. 협회와 관련된 업무는 백묵의 부하인 마성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고.
레전더리를 획득하기 위한 게이트 및 던전 공략은 계속 됐다.
물론 항상 레전더리를 획득할 순 없었다.
"허억, 나 좀 데려가요······."
너덜너덜해진 진세아가 벼랑 끝을 타고 올라왔다. 미리 올라 온 윤서현과 내 앞에는 텅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도 꽝이네요."
"그럴 수도 있죠. 쉽게 얻을 수 있으면 레전더리가 아니니까요."
애초에 대한민국에 있는 레전더리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다음 게이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개고생은 다했는데 또 아이템이 없는데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레전더리가 없는 게이트 뺑뺑이를 시킨 건 미래의 진세아다.
- 그래, 오빠 말대로 지금의 내가 생각한 훈련 방식을 과거의 내가 따를 리가 없지. 그래도 방법은 있어. 바로 내 성장에 최적화 된 던전을 도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진세아 네가 원해서 온 거다 이말이지.
"으아아! 사, 살려줘요!"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여 있지만 쏟아지는 온갖 함정들을 확실하게 회피하고 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단 의미였다.
떨어지는 바닥과 날아오는 마법 구체들.
"구경만 하지 말고 살려달라니까요오!"
"괜찮겠죠?"
"네, 괜찮을 겁니다."
미래의 진세아가 짜준 코스의 난이도는 절묘했다. 진세아 본인에게는 죽을 맛인듯 보여도 아슬아슬하게 그 선을 넘지 않고 있다.
"허억, 허억. 둘 다, 당분간 나한테 말 걸지마요······."
땀 범벅이 된 채로 함정을 빠져나온 진세아가 나를 흘겨 봤다.
"그래도 스킬은 얻었지?"
"그야, 이제는 함정은 안 밟겠지만······."
여기서 얻게 되는 스킬이 절대 함정 간파랬나. 하여간, 이걸 전부 짚어준 미래의 진세아도 대단하다.
두 사람의 성장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통찰 스킬로 확인한 진세아의 레벨은 91.
윤서현은 86이다.
둘 다 A급 헌터 중위까지 올라왔다. 두 사람의 재능과 타재간파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마지막 레전더리는 신발이었다. 진세아에게 주는 걸로 공략은 마무리다.
"바, 받아도 돼요?"
"물론이지."
"와, 와아······."
이번에는 특히 고생해서 그런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 진세아의 머리를 윤서현이 쓰다듬어줬다.
"세아, 잘 됐네."
1주일째 되는 날.
우리는 총 11 피스의 레전더리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정말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레전더리를 싹 다 쓸어왔다.
'슬슬 S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가 됐다.'
시간은 맞췄다.
마족들도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타이밍이다.
S급부터는 단독 공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때가 되었다.'
* * *
은빛의 날개.
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S급 게이트가 다수 출현. 전조도 없이? 뭐가 이래? 정말로 마족 놈들이 수작을 부린거야 뭐야?"
은날 길드장 천상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부길드장인 윤지은의 표정도 심각했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둬야겠죠."
"얼마전에 S급 게이트 공략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S급 게이트를 두 개나 동시 공략하라니."
그 말대로 현재 은빛의 날개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S급 게이트 공략을 마친 게 바로 어제였다.
자리에 있던 헌터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번 공략에서 빠지면, 은날이 입는 불이익이 너무 큽니다. 정부와 협회에서도 압력이 계속 들어올 거고요. 대외적인 이미지도······."
"수호 길드에선 아예 자기들한테 맡기라는데요? 산하 길드에서 커버할 수 있다고."
"허.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다 이거지?"
길드장 천상혁이 이를 악물었다.
S급 헌터를 보유한 상위 길드는 S급 게이트 공략을 강요 받는다. 강한 힘을 지닌만큼 그에 걸맞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번에 새로 키우고 있던 헌터들은 어떻게 됐어. 신아람, 천성호."
"아직은 너무 일러요. S급 게이트는······."
부길드장인 윤지은의 말을 들은 천상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호 길드 신태양은 이번 S급 게이트 공략에 참여한다잖아. 우리라고 못할 거 뭐 있어? 팀 두 개로 나눠서 동시 공략 진행해."
회의는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났다. 윤지은이 필사적으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난 헌터 채용 시험 사건의 이후로 길드 전체가 조급해하고 있었다.
'너무 위험해······.'
심지어 동시에 두 개의 S급 게이트를 공략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쪽이라도 실패했다간 감당하기 힘든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
윤지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어떻게 해야······.'
최소한 용병을 고용해서라도 전력을 맞춰야했다.
은빛의 날개 건물 로비까지 내려 온 윤지은.
그런 그녀의 앞에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언니, 우리 돌아왔어."
"지은 언니! 우리가 뭐하고 왔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걸요?"
그들의 손에는 아이템으로 보이는 무구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게이트를 돌 거라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왠 아이템?
그런데 그 아이템들이 심상치 않다.
"뭐야······?"
윤지은의 눈이 점차 커졌다. 시선은 자연스레 중심에 있는 이지한에게로 향했다.
"뭔가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네요."
이지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뭐,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116화 휘몰아치는 냉기(1)
"그러니까······. 레전더리 아이템을 이만큼이나 모아 온 거라고요······?"
은빛의 날개 부길드장실.
탁상 위에 놓인 아이템들을 바라보는 윤지은의 입이 벌어졌다. 우리들과 아이템을 번갈아 보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다.
"지난 2주 동안, 지한씨가 레전더리 아이템의 위치를 알아낸 모양이야. 우리는 거기에 살짝 숟가락 좀 얹었을 뿐이고."
의자에 기대 앉은 윤서현이 윤지은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살짝 거만한 자세다. 언니 앞이라 그런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레전더리가 일반 아이템도 아니고······."
거듭해서 확인해보는 윤지은. 그러나 명백한 레전더리 아이템이다. 시스템이 증명하고 있다.
진세아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지은 언니. 심지어 나는 A급에 레벨에 91이 됐어요. 서현 언니도 이제 A급 헌터고요. 어때요? 대박이죠."
"어······. 어? 벌써?"
큰 눈을 깜빡이는 윤지은.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 거 아닙니다. 우연한 기회에 레전더리 템이 위치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두 사람하고 전국을 돌면서 아이템을 회수해 온 거죠. 겸사겸사 사냥도 하고요."
"······."
윤지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 피스도 구하기 어려운 레전더리급 아이템을 11개나 가져왔다. 그러나 그녀가 동요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전국에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S급 게이트. 은빛의 날개도 공략에 참여하는 거 맞죠? 그렇다면 이 아이템들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번 S급 게이트 공략.
미래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은빛의 날개는 공략을 대차게 말아먹는다.
'길드장이 지시한 무리한 공략이 문제가 된다.'
두 개의 팀으로 나뉜 은빛의 날개는 이전과 같은 힘을 내지 못한다. 공략은 수호 길드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끝난다.
그 결과 윤지은이 은날의 길드장이 된다지만······.
'이번 공략은 실패하면 안된다.'
다량 발생한 S급 게이트들이 마족들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발생한 S급 게이트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진짜는 따로 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그걸 막으려면······. 지체 없이 게이트를 클리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 또한 S급 게이트 공략에 참여할 예정이다.
내 말을 들은 윤지은이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러면 이 레전더리급 아이템들을 대여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신건가요?"
"맞습니다."
진세아와 윤서현에게 레전더리 아이템을 지급하는 대신, 다른 아이템의 소유권은 내가 가지기로 했다.
사실상 내가 아니었으면 구할 수도 없는 아이템이었으니. 두 사람도 흔쾌히 동의했다.
'돈을 주고서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
그 가치와 효용은 어마어마하다. 잘 준비된 장비는 공략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니까.
공략을 앞둔 은빛의 날개에는 꼭 필요할 거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역시 그렇겠죠."
윤지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굉장한 각오를 다지는 것 같은데.
어차피 공략이 끝나면, 은날의 영웅들에게 나눠 줄 아이템이었다. 각자의 쓰임새에 맞는 아이템 분배가 중요하니까.
그래도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 했다.
"이번 S급 게이트 공략에서 나온 아이템 중 딱 하나. 제가 가져갈 수 있게 해주세요."
"예?"
그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윤지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요?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저 나름 각오하고 있어요. 길드 예산을 총 동원해서라도······."
"그거면 충분합니다. 지은씨한테는 천성호때도 그렇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 하나의 아이템이 레전더리 중에서도 최상위 아이템이란 걸 생각하면······.
나에게는 남는 장사다.
아, 가장 중요한 걸 까먹을 뻔 했네.
"이번 공략에 저를 고용해주시는 건 당연하고요."
* * *
마계의 틈새.
마도(魔道) 회의장.
'프로젝트 : 아포칼립스'의 준비를 위해, 마족들의 회의 공간이 되었어야 할 그곳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원탁의 한가운데,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적발의 미녀가 불평했다. 그 주변에는 마족들의 시체가 한가득이었다.
"아아, 벌레 같은 것들. 시킨 일하나 똑바로 못하는 꼴이라니."
상위 선혈의 마족.
그녀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회의장의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어디선가 정보가 새나간게 틀림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 하나가 그렇게 활개칠 수 있을 리가 없지."
한쪽 구석에서 미소를 띄우는 남자 아이. 외형은 어린 소년이나 그 눈에서 발하는 악의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상위 나약의 마족.
"전투의 마족까지 죽은 건 의외였어. 그 놈은 내가 눈여겨보고 있던 녀석인데. 아쉽게 됐어. 군단장이 될만한 재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눈이 어지간히 옹이구멍인가보네. 인간한테 당하는 수준의 마족이 군단장?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지."
선혈의 마족이 손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대한민국을 담당하던 하위 및 중위 마족을 모조리 죽였다. 이른바 숙청이었다.
"무능한 놈들은 전부 죽여야 해. 위대하신 마계왕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뭐, 너무 열 내지마. 계획이 조금 더 빨라졌을 뿐이니까."
잔인한 성정의 선혈의 마족. 그리고 느긋한 성격의 나약의 마족. 두 상위 마족이 페어로 활동하게 된 것은 위쪽의 지시 때문이었다.
외관은 어리지만, 나약의 마족은 선혈의 마족보다 몇 백 년을 더 살아온 괴물이었다.
'상황이 그리 간단하진 않아. 마족의 계획을 앞질러 방해하고 차례차례 부수는 존재. 마족의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던가?'
몇 종족들이 반기를 들어 일어난 사건은 있었다.
'치욕의 밤'이라고 명명된 마족의 실패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지금 제대로 손 쓰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번 계획인 '프로젝트:아포칼립스'.
이것이 한 번 더 저지 당한다면 침략 계획 자체가 어그러질 확률이 크다.
'위쪽에서 상위 마족인 우리에게 직접 맡겼다는 건, 이번 일이 중요하단 의미겠지.'
그런 나약의 마족의 눈 앞으로 선혈의 마족을 얼굴을 들이밀었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이지만.
"아앙? 듣고 있어? 전부 죽여버리자니까."
하는 짓은 선머슴이나 다름 없다.
"안돼. 마계에서 인원을 보충해서,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진행 시켜야 해."
"그 인간 놈을 찾아서 모가지를 따버리면 되는 일이잖아."
"위쪽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우리가 거역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쯧."
나약의 마족은 회의장의 테이블에 마기를 흘려보냈다. 연기는 이윽고 형체를 이뤄 대한민국의 지도를 표시했다.
붉은 점으로 표시된 장소가 S급 게이트의 발생 장소.
"우리가 나서는 건 모든 게 확실해졌을 때 뿐이야."
현재 대한민국의 길드들은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나약의 마족의 허공에 떠오른 마기를 움켜쥐고서 지도를 향해 흩뿌렸다.
그의 명령을 받은 권속들이 각 게이트에 도착해 길드들을 막아설 거다.
이걸로 시간은 충분히 생겼다.
"적을 얕봐서는 곤란해. 마계에서 넘어 오느라 마기의 손실도 크고. 상위 마족이라는 게 패널티가 되다니. 메이저 게이트만 완벽히 작동 했으면 진작에 끝났을 일을."
상위 마족부터는 마계를 넘어 올 때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지니고 있는 힘의 양이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쩌자는 건데?"
"예언의 마족으로부터 받은 지도가 있어."
안개처럼 흩어져 있던 마기가 뭉쳐지며 지도로 변화했다.
"대한민국의 던전과 게이트를 돌면서 레전더리 아이템부터 회수하자고. 놈들이 일어설 기반 자체를 없애고, 우리의 힘은 강화한다. 어때?"
그리 말하는 나약의 마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린 아이의 얼굴에 맞지 않는 사악한 미소였다.
* * *
'레전더리는 전부 먹어놨으니까. 놈들이 삽질 하는 동안 게이트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겠어.'
게이트로 혼란스런 와중 상위 마족은 아이템 파밍을 진행할 거다. 그래봤자 녀석들이 획득할 레전더리는 4개 정도였다.
미래에서 얻은 정보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
그마저도 확실하게 방어했다.
모두 미래의 진세아 덕분이다. SSS급이 된 진세아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이템이 거쳐온 역사를 파악하는 사이코메트리는 기본이고, 어디에 좋은 아이템이 위치하는지까지 알아내는 '황금향' 같은 스킬도 가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도둑에 걸맞았다.
"다들 이번 공략은 특히 조심해야 해."
S급 게이트 공략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은빛의 날개는 총 두 팀으로 나뉘어졌다. 길드장이 위치한 기존의 1군으로 구성된 팀. 다른 하나는 부길드장이 이끄는 신인들로 이뤄진 팀.
"2팀이 공략할 S급 게이트의 난이도는 상대적으로 낮다지만 주의해야 해. 이전까지 있었던 공략은 전부 잊어. S급부터는 차원이 다르니까."
윤지은의 브리핑을 듣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아람, 진세아, 천성호.
거기에 더해 은빛의 날개 5인까지.
아직은 협회 사람인 윤서현은 참가하지 않는다.
"형하고 같이 게이트 공략을 하게 될 줄이야."
천성호는 들뜬 얼굴이었다. 신아람은 초조한지 검을 매만지고 있었고, 진세아는 레전더리 아이템을 매만지고 있다.
원래 미래대로라면 진세아는 성장 속도가 느려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내가 진세아의 성장을 앞당겼다.'
변수가 하나 추가 된 셈이니 기대해 볼만하다. 나머지 5인의 은날 길드원들도 다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니.
나는 스마트폰을 살폈다.
- 전국에 S급 게이트 다수 발생, 대형 길드 모두 공략 나서······.
- 수호자의 검 '신태양' 첫 S급 게이트 데뷔전
- 은빛의 날개 '신아람, 천성호' 출격
- 오성 '히든카드 존재한다.' 깔끔한 공략 목표로
각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라기보단, 하나의 행사처럼 여겨지는 수준이었다.
- 은날이 고용한 용병은 누구? 베일에 감춰진 정체
'나에 대한 기사도 있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누가 가장 빨리 공략을 끝내는가 같은 관심이 대부분이었다. 인류가 멸망으로 접어들거라 생각하는 이는 없다.
괜히 불안을 조장할 필요는 없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려나.
"그럼 이제 돌입하겠습니다."
브리핑이 끝나고, 윤지은이 활을 들어 올렸다. 천막 바깥으로 나오자 환호성과 플래쉬 세례가 터져나왔다.
도시 근처의 S급 게이트인지라 주변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몰려 있었다.
"와아! 지은 누나! 이쪽 한 번만 봐줘요!"
"은빛의 날개 파이팅!"
"신아람이다! 신아람!"
2팀이니 기자들의 관심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엔 주목 받는 신인들이 두 명이나 있었다.
신아람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환호성이 몰아친다.
"그래, 이거지!"
천성호도 의기양양해져선 가슴을 펴고 나아간다. 진세아는 오히려 후드를 푹 눌러쓰고선 내 옆에 붙었다.
"윽, 왤케 사진을 찍어대는 거야."
S급 게이트 공략대 10인이 게이트 내부로 발을 들였다. 공간이 일렁이며 주변의 경치가 한순간에 바뀐다.
나도 조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S급 게이트라······.'
현시점 존재하는 가장 높은 등급의 게이트. F급이었던 내가 드디어 이곳에 왔다. 그것만으로 감격스러울 지경이었으나.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와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세상, 그 끝에 고독히 솟아 있는 설산.
끝내주게 멋진 경치지만 감상할 틈은 없다.
후우웅——!
혹한의 냉기가 공략대를 덮쳐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차가운 기운에 뼈까지 시려온다.
『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
『 냉기지대 - 혹한의 설원 』
『 공략 조건 : 보스처치 ( 0 / 1 ) 』
아이템 없이는 절대 버틸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이다. S급부터는 공략 난이도가 달라지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 지독한 추위가 당신을 덮칩니다. 』
- 지속적으로 체력이 소모됩니다.
- 이동속도 및 모든 능력치가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헌터들이 미리 준비해 온 방한 아이템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오, 오빠 아, 아 안추허요오?"
아이템인 털모자와 벙어리 장갑을 착용하고도 덜덜 떠는 진세아가 내게 물었다. 핫팩을 꺼내서 내 두 볼에 가져다대려고 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주, 주거요. 그러다······.'
양 팔을 붙잡고 오들오들 떠는 진세아.
춥기는 무지 추운데.
챙길 건 챙겨야 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히지만 나는 괜찮은 척 버텼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원하는 결과가 떠오른다.
촤르르륵!
『 레어 스킬 '냉기 내성 Lv.1'을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냉기 내성 Lv.2'을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냉기 내성 Lv.3'을 획득합니다. 』
···
..
.
『 레어 스킬 '냉기 내성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위 저항 + 50%, 냉기 속성 저항 30% 』
그제서야 나는 방한 방어구를 걸쳤다. 입가에서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온다. 추워 죽는 줄 알았지만 스킬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이다.
날 죽이지 못하는 극악의 환경은 오히려 날 강하게 할 뿐이니.
"그러면 가볼까."
"대, 대체 뭐에혀······?"
나는 진세아와 공략대의 마지막 행렬에 따라 붙었다.
117화 휘몰아치는 냉기(2)
모든 S급 헌터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사실이 있다.
S급 게이트부터는 이전에 했던 게이트 공략을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이 다른가?
던전의 구조와 규모, 마수의 강함, 혹독한 지형과 환경 등등······. 다양한 대답이 나오지만 종합하자면 이거였다.
'모든 게 다르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서린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 든다. 헌터의 능력치를 깎아내는 디버프나 다름 없다.
"에취! 으으······."
앞서가던 진세아는 재채기를 했다. 많이 추운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우와, 진짜 이거 얼어 죽겠는데······."
"핫팩 더 없어?"
"아껴써야 돼. 우리 방금 들어왔어. 여기서 며칠이나 있어야 할지 모른다고."
"젠장······."
앞서가는 헌터들도 몸을 부둥켜 안은채 천천히 전진한다. 공격대 전체의 속도가 느려지는 건 당연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물론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지.'
『 스킬 '냉기 저항 Lv.10'을 발휘합니다. 』
방어구를 착용하니 오히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질 정도다. 경험치 10만배라는 무재조정의 특성이 나를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셈.
나는 목도리를 벗어서 진세아의 목에 걸어줬다. 방한 스킬이 붙은 아이템이라 도움이 될 거다.
"오, 오빠······."
감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세아.
목도리를 빼니까 내게도 냉기가 스며든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아이템으로 지급된 핫팩도 진세아의 외투에 넣어준다.
"너, 너무 추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니지······?"
"······."
"고마어······. 사, 살아서 돌아가면 보답할게······."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살만해졌나보구만. 그래도 고마운 건 진짜인지 눈물까지 글썽이려고 한다.
뭐,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건 없다.
'어디보자.'
『 스킬 '냉기 저항 Lv.10'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한기가 스며들수록 냉기 저항 스킬의 경험치가 쌓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도하던 알림이 떠올랐다.
『 레어 스킬 '냉기 저항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추위 면역 』
'오. 추가 효과로 좋은 게 붙었잖아.'
간단하지만 확실한 효과였다. 추위 디버프를 받지 않는 것만해도 활동성이 크게 늘어난다.
"많이 추울텐데 잘 버티시네요?"
공략대를 따라가던 헌터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방한 장비를 착용하고도 추위에 떠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은······.'
은빛의 날개에 속한 S급 헌터 김선우다.
멸망한 세계 중반까지도 활동을 하던 영웅 중 하나다. 신아람과 천성호에 가려졌지만 이 사람도 천재다.
화염 정령을 다루는 정령술사.
그의 재킷 너머로 불그스름한 정령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저도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 녀석이 있거든요. 용병으로 오셨다던데 이번 공략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잘도 말한다.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신아람이나 천성호에 밀리고 있지만······. 저도 한때는 유망주 소리 들었으니까요."
김선우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내가 신아람과 천성호를 추천하지 않았다면 지금 잘 나가야하는 건 김선우였을 거다.
모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빛난다는 건 그 그림자에 가려진 인물도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이번 공략은 제 능력을 보여줄 절호의 찬스라 이거죠."
화염과 얼음.
속성의 우위는 명확했다. 은빛의 날개에서도 그걸 고려해 공략대를 편성한 거겠지.
김선우는 재킷 속의 불꽃 정령을 자랑스레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타앗!
어깨보호대로 변해 있던 오르티마가 김선우의 불꽃 정령을 향해 뛰어든 것은.
"으앗!"
갑작스런 오르티마의 습격에 김선우가 눈밭을 굴렀다. 한바탕 난리를 친 오르티마는 내 어깨 위로 뛰어 올라왔다.
이 녀석 갑자기 뭔······.
"괜찮으세요?"
쓰러진 김선우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나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허망한 표정으로 눈 밭을 샅샅히 뒤질 뿐이었다.
"제, 제임스······! 제임스 어디에 있어?!"
애타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설마······.
나는 재빨리 어깨에 올라탄 오르티마를 확인했다.
아니 확인할 것도 없었다.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불꽃의 정령을 흡수했습니다. 』
『 오르티마(火) 형태로 변화합니다. 』
"······."
은광택을 내던 슬라임 녀석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주변의 공기를 따스하게 덥히면서. 무(無) 속성의 오르티마는 불 속성으로 변해 있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혹한의 바람 아래.
"제임스!!!"
정령사 김선우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 * *
은날 공략대가 목표로 하는 설산의 정상.
푸른 비늘을 가진 용인족(龍人族) 하나가 공략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재까지는 별다른 특이 사항 없음."
상당한 거리가 눈안개로 가려져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는 아이스 드래곤의 혈통을 이어 받은 존재.
눈안개 너머를 꿰뚫어보는 건 간단했다.
높은 빙(氷)속성 친화력 덕이었다.
'선혈의 마족께서는 인간들 중에서도 특이한 자를 구별해내라고 하셨다.'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고, 마족을 살해할 정도로 강한 자.
이번에 발생한 S급 게이트들은 그에 해당 되는 인물을 찾아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마족에게 대항하는 대적자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놈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겠지.'
용인족 하렐은 얼음의 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선 한달음에 설산의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촤아악—!
설산에 쌓인 눈을 흩뿌리며 내려오는 하렐. 단순히 활강만하는 게 아니었다.
쿠구구구······!
활강하는 그의 뒤로 방출된 마력이 눈사태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미하던 눈의 파도가 점차 커지며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이 정도면 되겠군.'
하렐은 빠르게 방향을 틀어 눈사태의 방향에서 벗어났다.
이제 눈사태는 헌터들을 향해 쏟아질 거다.
공략대가 대부분 S급 헌터라는 것은 하렐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정도 눈사태에 굴할 레벨이 아니다.
이것이 평범한 눈사태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후우우······.
안전한 장소에 자리를 잡은 용인족 하렐.
그의 손에서 검은 마기가 요란스럽게 퍼져나갔다.
마기는 눈사태를 더욱 맹렬하고 거대하게 만들었다.
'어디 한 번 살아 남아 봐라.'
그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춤추듯 눈사태가 헌터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선배?"
"이거 받아요."
나는 불속성이 된 오르티마를 공략대 중간으로 가져갔다.
여기도 추위에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내색은 안하지만 입술이 파래진 신아람에게 오르티마를 건네줬다.
"어머, 귀여워라. 게다가 따뜻하네요?"
신아람이 오르티마를 꼭 껴안았다.
"갑자기 좀 괜찮아졌는데? 거의 난로가 따로 없네."
"지한씨라고 했죠? 고마워요."
"와, 진짜 따뜻하다."
오르티마를 중심으로 따스한 기운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령을 먹어 치운만큼 그 효과는 톡톡히 했다.
추위가 가시자 공략대의 속도도 빨라졌다.
모두가 만족하는 오르티마의 효과였다. 물론 한 사람을 빼고.
"······."
김선우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오르티마가 그렇게 급발진을 할 줄은 몰랐다.
"미안합니다."
내가 사과하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김선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길드원들도 전부 좋아하고요. 공략도 빨라 질 것 같으니까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이 사람 좋은 사람이다.
"오르티마라고 했던가요? 아까는 당황해서 몰랐지만, 제임스가 그 안에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니 괜찮습니다. 정령이야 다시 소환하면 되니까요."
그는 손을 펼쳐 다시 정령을 소환했다. 그의 품 안에서 아까와 같은 불꽃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쵸?"
추위를 극복해내자 길드의 분위기도 한층 풀어졌다. 선두에서 나아가던 윤지은이 손을 흔들며 내게 소리쳤다.
고마워요.
바람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리 말한 것 같았다.
"근데, 마수가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평온한 적이 있었나."
게이트 진입한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말이 방아쇠가 되었던 걸까.
갑자기 진세아가 우뚝 멈춰섰다.
"위, 위험해요······. 지은 언니! 위험해요!"
새하얗게 질린 진세아가 소리쳤다. 진세아 특유의 위험 감지 스킬이 발동한 것 같다.
진세아에게 이유를 물어보려는 찰나.
콰아아아—!
"크윽."
강렬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눈의 폭풍이 시야를 완벽히 차단했다. 바로 앞에 있던 헌터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기가 느껴진다. 단순한 폭풍이 아니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를 뚫고, 진세아가 내게로 다가왔다.
"눈사태! 눈사태에요!"
"방향은 어디야?"
"저쪽이에요! 왼편!"
진세아가 가리키는 방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다.
"오르티마!"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회수의 창'으로 변합니다. 』
처억.
중간에 있던 오르티마가 한 자루의 창이 되어 내 손에 들어왔다. 내 의지에 따라 녀석은 단숨에 드래곤으로 변했다.
『 오르티마가 '마공학 드래곤'으로 변화합니다. 』
『 화(火)속성 정령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고오오—!
오르티마의 입가로 고온의 열기가 모여들었다. 주변의 온도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의 고열이 대기를 달궜다.
다음 순간.
콰아아—!
오르티마의 강렬한 화염 브레스가 쏘아졌다.
초고온의 화염이 순식간에 눈을 기화 시키며 대량의 증기를 만들어냈다. 오르티마의 브레스는 그런 증기조차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화아악!
눈폭풍에 의해 막혀 있던 시야가 뻥 뚫리며 주위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어서 오르티마의 화염이 눈사태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자, 잠깐 저거 뭐야!"
"눈사태다! 다들 대비해!"
"방어막부터 펼쳐!"
시야가 열리자 공격대 전체가 술렁였다.
진세아의 말대로 거대한 눈사태였다. 군데군데 마기가 뒤섞여 일반적인 자연재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형, 나이스!"
시야가 걷히자마자 천성호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녀석의 검에 불길처럼 피어오른 오러가 산사태를 향해 휘둘러졌다.
채찍처럼 늘어난 오러가 땅을 갈라 산사태를 지연시켰다.
"저도 돕겠습니다!"
화염 정령사 김선우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가 소환한 화염 정령이 일순 거대해지더니 불길을 내뿜었다.
"조금만 더······!"
콰아아—!
오르티마 또한 화염을 끝없이 쏟아냈다. 녀석의 검은 비늘 사이로 붉은 열기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그런 내 앞으로 다량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레어 스킬 '정령술(火)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정령술(火)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정령술(火)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정령술(火) Lv.10'을 획득합니다. 』
『 해당 정령술의 숙련도,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
오르티마의 브레스가 정령을 토대로 발휘되는 기술이라 그런가? 생각치도 못했던 정령술의 레벨이 올라갔다.
모든 것을 휩쓸 것처럼 다가오던 눈사태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화염 정령의 위력이 특히 굉장했다. 일반적인 마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양의 화염을 정령의 힘을 빌어 사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좋았어.'
마지막으로 마기가 진하게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 화염을 집중했다.
김선우의 정령도 내가 노리는 부분에 정확히 화염을 날렸다. 나는 내심 감탄했다.
'센스가 굉장한데. 마족을 상대한 경험이 별로 없을텐데. 잘도 알아챘군.'
역시 미래의 영웅이 될 인물이라 이건가. 최후의 10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유능한 영웅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 어라? 왜······. 거기가 아니야!"
옆에 있던 김선우가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급기야는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내 팔을 붙잡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무슨······."
그제서야 나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부분을 김선우가 정확히 노린 게 아니었다.
'설마.'
김선우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내 정령 돌려줘요!"
정령술사 사이에서 간혹 벌어지는 사고 중 하나.
더 높은 정령술을 가진자가 정령의 주인으로 인정 받는······.
『 레어 스킬 '정령술(火) Lv.11'을 획득합니다. 』
정령 간섭이었다.
118화 휘몰아치는 냉기(3)
촤아아—!
눈 덮인 설원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용인족 하렐.
그는 눈사태를 막아낸 공략대의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인간들이군. 의외로 빈틈이 없어.'
하렐이 위치한 장소는 S급 게이트인 혹한의 설원.
이곳은 S급 게이트 중에서도 비교적 난이도가 쉬운 편에 속했다. 바깥에서 측정했을 때의 마력 농도가 옅은 장소다.
'약한 헌터들이 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군.'
폭풍을 걷어내고 눈사태를 막아낸 대규모의 화염 마법. 그 솜씨는 정령을 다루는 자의 것이었다. 그것도 최소 둘.
'눈사태를 그리 간단히 막아낼 줄이야.'
하렐이 혀를 찼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헌터 몇은 쓰러뜨릴 기회라고 여겼건만.
그럴 가능성 자체를 깔끔하게 차단했다.
'정령술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지만 활용도는 뛰어났다······. 상황 판단 자체도 칭찬할 만해.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인간들도 무시할 수 없겠어.'
쏟아지는 눈의 세례를 막아낸 다른 이들.
어린 남자와 여자가 휘두르는 검. 거기에 더해 강력하게 압축된 마력 화살을 쏘아대는 활잡이까지.
'주의해야 할 대상은 총 다섯.'
그 다섯 명 중 하나가 마족에게 대항하는 대적자일 수 있었다.
'그들만 죽인다면 내 할 일은 끝이겠군.'
선혈의 마족께선 살육을 권장하셨지만, 위쪽 돌아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건 권속인 하렐도 알고 있었다.
마족의 정체가 인간들에게 점차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도 좋지 않다.
위쪽의 존재들은 그러한 상황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주인이되는 선혈의 마족도 그런 분위기를 읽어주면 좋으련만.
'원체 그런 것을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니시니.'
어쨌든 위협이 되는 놈들만 걷어내면 충분했다.
촤아악!
눈밭을 고속으로 이동한 하렐은 어느 장소에서 멈춰섰다. 거대한 얼음으로 이뤄진 산 아래의 동굴이었다.
어두운 동굴 너머로 강력한 마력이 느껴진다.
'보스 수준은 나쁘지 않다. 마기를 줘서 이용하면 쓸만 하겠어.'
아무리 상위 마족의 권속이라지만 다섯 명이나 되는 S급 헌터를 전부 상대하는 건 어렵다.
보스와 그 부하인 엘리트 마수들을 효율적으로 부릴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해서······.'
만전을 기하는 게 하렐의 성격이었다. 그는 마족이나 여타 권속들과 달리 인간들을 약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스으으···..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검은 마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얼음을 주관하는 정령계의 존재들이여, 용의 피를 가진 자의 부름에 응하라."
용인족 중에서도 푸른 피부를 가진 하렐은 아이스 드래곤의 후손. 얼음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여타 종족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푸른 얼음으로 이뤄진 정령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사와도 같다.
청빙(淸氷)의 기사.
인간 진영에 불의 정령을 다루는 자가 있다 한들 문제가 안된다. 일반 정령과 상급 정령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으므로.
"만년빙을 만들어라."
하렐의 명령에 따라 두 정령이 검을 휘둘렀다.
스으으······!
그 검 끝에서 발하는 지독한 냉기가 동굴 입구를 막아가기 시작했다. 만년의 한기가 담긴 두껍고 단단한 얼음의 벽이 생성 되고 있었다.
하렐은 흡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아.'
헌터들은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한 채 체력만 소모하게 될 것이다. 녀석들을 쓰러뜨리는 건 그 뒤가 될 것이다.
* * *
눈사태는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후우, 다행이네요. 갑작스런 산사태라 당황했을텐데. 모두 잘 대처 했어요. 특히 지한씨. 좋았어요."
윤지은이 팀원들을 다독이고서 선두로 향했다. 얼굴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보인다. 이번 공격대의 리더를 맡고 있는만큼 그녀도 필사적이었다.
'본래라면 실패했을 공략이다.'
미래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2팀은 이번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한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2군의 무리한 공략을 진행한 탓이겠지.
물론 내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다.
"형 마법은 언제 배운 거에요? 크, 하늘이 뻥 뚫릴 땐 내가 다 시원하더라니까요. 다음에 나도 알려줘요."
천성호도 한마디를 하고선 자신의 위치로 갔다. 신아람도 멀리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맨처음 시야를 뚫어낸 게 유효했다. 그리고 그건 진세아의 위기 감지 덕분이기도 했고.
"잘했다."
"뭘요?"
"아까 그거."
"아, 별 거 아니죠. 그것보다 얘 내가 키워도 돼요?"
진세아가 슬라임으로 변한 오르티마를 품에 안고선 마구 쓰다듬었다. 오르티마도 싫지 않은지 가만히 있는다.
"당연히 안되지."
"쳇, 그래도 이 녀석 완전 쓸모 있네요. 따뜻하기도 하고, 드래곤으로 변해서 화염도 쏘고."
나는 설산 쪽을 바라봤다.
눈사태의 원인은 짐작이 간다. 이 게이트에 있을 권속의 짓이겠지.
그래도 잘 대처했다.
정령의 제어권을 빼앗긴 김선우를 제외하면 피해를 입은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김선우의 시선이 굉장히 따가웠다.
'······빨리 니 주인한테 돌아가라.'
나는 곧바로 불꽃 정령의 제어권을 바로 돌려줬다. 조그마해진 불꽃 정령이 쪼르르 김선우에게로 날아갔다.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모자란 탓이죠. 감사합니다······."
가뜩이나 오르티마가 정령을 먹어서 눈치가 보이는데.
이런 사고가 날 줄이야.
'그나저나 오히려 대단한데.'
정령술에도 등급이 있다.
일반 정령술 위로 고급, 최고급 정령술이 존재한다. 각각 상급, 최상급 정령을 다룬다.
'내 일반 정령술 레벨이 올라가니 정령 간섭이 발생했다.'
즉, 김선우가 사용하는 스킬은 일반 정령술이란 말이었다. 고급 정령술이었다면 간섭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테니.
그가 당연히 고급 정령술을 익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발생한 사고였다.
'김선우는 일반 정령술만 가지고 S급을 달성했단 거잖아.'
일반 정령술로 그만큼의 화력을 발휘해 온 거다.
부족한 출력을 기술과 실력으로 메꾼 셈.
신아람, 천성호에 밀렸다고는 하나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그 천재성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게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정령의 출력이 올라간다면 더 높은 경지도 바라보실 수 있으시겠는데요."
"지한씨한테 정령을 빼앗길 정도면 별 것도 아닌데요······."
김선우가 저 멀리 설산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처량하다.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닙니다. 정령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은 차원이 다르던데요."
"그, 그런가요? 알아봐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닌 진심이었다.
덕분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모양.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다시 공략대의 행렬을 따라갔다. 참 착한 사람이다.
덕분에 정령술을 배우기도 했으니 그냥 넘어가긴 미안한데.
'보답이 될만한 건······.'
일단은 이것 정도인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타재간파의 능력을 발휘했다.
팅!
『 '무재조정 : 타재간파'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대상 김선우에 대한 정보가 충분합니다. 』
- SS급 영웅, 거점 수호자, 화염의 정령사, 은빛의 날개 길드원······.
그는 멸망한 세계에서도 인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보기 드물게 정의롭고 선한 인물이었단다.
『 대상 김선우의 개화 가능한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고급 정령술 : A
- 최고급 정령술 : S
- 최상급 정령 감화 : S
'나쁘지 않은데.'
타재간파의 서가 보여주는 재능들은 향후 김선우가 개화할 여지가 있는 재능들이다. 그에게 숨겨진 재능이다.
최후의 11인만큼은 아니었지만 발전의 여지는 충분하다.
『 재능 '고급 정령술'을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조건을 확인한 내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라면 충분히 해볼만한데.'
나는 앞서가던 김선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품 안에 든 정령을 숨겼다.
"무, 무슨 일인가요?"
나는 그를 향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김선우씨가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서요."
* * *
3일이 지났다.
설산을 지난 뒤로부터 마수들이 지속적으로 출현했다. 공격대는 계속해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마수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아이스 골렘부터 설인, 얼음 마법을 쓰는 펭귄까지.
전투의 결과는 뻔했다.
콰아앙!
"좋았어, 이거 효과 장난 아닌데? 형 고마워요!"
"······. 좋다."
신아람과 천성호가 전열에서 크게 활약했다. 레전더리 아이템을 지급한 보람이 있었다.
천성호가 낀 팔목 보호대는 힘을 증폭 시켜줬고, 신아람의 어깨 보호구는 광화 상태에서의 돌진 능력을 크게 향상 시켰다.
윤지은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둘의 활약이 커질수록 윤지은의 얼굴에 묻어 있던 걱정과 피로가 날아가고 있었다.
"좋아, 그거야! 둘 다 잘 했어."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땅이 휑해졌다. 그 많던 눈이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나 있을 정도.
그리고 전투 마무리는 정령술사 김선우다.
콰아아아—!
그의 등 뒤에서 발사된 화염의 기둥에 남아있던 얼음 속성의 적들이 녹아내렸다.
키에엑! 키엑!
마수들의 비명소리가 설원에 울려 퍼졌다. 얼음 속성 적에게 화염 속성 공격은 약 2배의 데미지를 준다. 불길이 만들어내는 섬광 속에서 살아남은 마수는 없었다.
화염 정령을 다루는 그의 활약은 말그대로 눈부셨다. 은빛의 날개에서도 그걸 알고 김선우를 공략대에 넣은 거겠지.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
"그, 그렇네요."
"자신감을 가져요."
나는 김선우의 기운을 북돋았다.
그가 재능 개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다름 아닌 자신감.
『 대상 '김선우'의 자신감이 98%에 도달합니다. 』
어찌되었건 내 일반 정령술의 레벨은 그보다 높아졌다. 20만배의 경험치가 그의 정령술을 앞지른 것이다.
말로 설명하는 재주는 없었지만, 정령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김선우는 금세 요령을 익혔다.
'이 사람도 굉장한 재능이군.'
최후의 10인만큼은 아니지만, 업계 2위의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지한씨 말대로하니까 정말로 늘고 있어요.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더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공략이 거듭될수록 김선우의 기량은 빠르게 향상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략대의 공략은 순조로웠다. 공략대 내에서의 내 입지도 올라가고 있었다.
"엣취, 으으······. 오빠가 만들어 준 라면을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지도······."
"헌터가 감기에 걸리던가?"
진세아는 공략 내내 골골대고 있었다. 오르티마가 있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유독 추위에 약한 모양이었다.
"디버프에 걸리면 그럴 수도 있다네요. 그보다 그······. 라면은 언제 돼요?"
"아, 금방 됩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윤지은이 슬쩍 내민 그릇에 국자로 라면을 담아줬다. 그 뒤에 줄을 선 공략대원들. 확실히 내 입지가 올라간다.
······요리사로서이긴 하지만.
"이 시간만 기다렸어요."
"라면 맛이 미쳤다니까요."
"부길드장님, 이지한님을 요리 용병으로 고용하는 건 어때요?"
"······비싸서 안돼요."
"큭······. 어떻게 안됩니까?"
"네. 은빛의 날개 거덜나요."
11레벨의 요리 스킬은 어딜가나 호평이다. 추운 설원에서 먹는 라면의 맛은 내가 먹어도 기가 막히다.
내심 레어 등급의 요리 스킬을 얻을 수 있지 않나 기대했지만, 라면을 끓이는 것만으론 뭔가 부족한 모양이다.
'요리에 추가 스탯을 붙이는 스킬이 존재 한다고 들었는데. 아쉽군.'
그렇게 3일이었다.
보스가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얼음의 산이 가까워졌다. 올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얼음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좋다, 예정 되어 있던 것보다 훨씬 빨라.'
공략대에 지급된 레전더리가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단 의미였다. 본래대로였다면 1주일은 넘게 걸렸을 일정을 절반으로 줄였다.
공략대에 여유와 에너지가 넘치기까지하니 보스까지도 문제 없을 거다.
우리는 금세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우와, 이거 뭡니까? 얼음벽?"
"웬 얼음이 동굴 안을 가로막고 있는데요?"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볼 때, 보스가 있을 장소이기는한데······."
공략대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얼음벽.
그것도 일반 얼음이 아니었다.
『 혹한의 설원 : 만년빙 』
- 특수한 마법으로 강화된 얼음입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천성호였다. 팔을 걷어 붙힌 천성호가 양손검 위로 오러를 끌어모았다.
"이 따위 얼음 깨부수면 그만이지!"
콰아앙!
강력한 검격이 얼음벽을 강타했다. 일대에 잔잔한 진동이 일어날 정도. 그러나 얼음벽은 건재했다.
"쳇, 이거 뭐야? 꿈쩍도 않는데."
"그거 정령술로 만들어진 얼음 벽인 것 같은데요······."
조용히 지켜보던 김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선우야, 네가 화염 정령으로 녹이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어려운 게······. 내가 다룰 수 있는 화염 정령은 일반 등급까지라 상급 정령의 마법은 파훼할 수가······."
그 순간이었다.
드드드드······!
눈 밑에 숨어 있던 아이스 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대를 둘러싸듯 나타난 마수들에겐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기에 의한 강화인가.'
권속이 만들어 낸 함정이었다.
"골렘들은 저희가 맡을게요, 얼음 벽은 부탁 좀 할게요!"
"부탁해요!"
천성호와 신아람이 먼저 뛰쳐나갔다. 그 뒤를 윤지은이 따라간다.
얼음벽을 바라보는 김선우의 눈이 불안한듯 흔들리고 있었다. 상급 정령이 만든 얼음의 벽은, 일반 정령으론 녹일 수 없다.
'원래대로라면 얼음벽을 녹이지 못한 공략대는 공략을 포기하고 후퇴한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가 있었음은 당연하고.
각성 일자베기를 사용한다면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권속을 생각하면 좋은 방법은 아니다.
나는 김선우의 등 뒤로 다가갔다. 가벼운 응원의 말을 던졌다.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부딪혀 봐야죠.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요."
정령술의 레벨은 내가 높다지만, 다른 기술들과 정령을 활용하는 방법은 당연히 김선우가 뛰어나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조금의 자신감이다.
나는 그의 등을 슬쩍 밀어줬다.
꿀꺽.
침을 삼킨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얼음벽을 바라봤다.
"그래, 김선우 할 수 있어!"
"보여줘라! 가자!"
"보여주세요!"
마침 뒤에 있던 공략대원들도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있었다.
'나이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보여준 김선우의 활약은 진짜였으니까.
"해볼게요."
그의 눈가에 선홍빛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 대상 '김선우'의 자신감이 100%에 도달합니다. 』
『 타재간파의 발동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
『 김선우의 재능 '고급 정령술'이 개화합니다. 』
화아악—!
『 동료 김선우가 스킬 '정령 소환술'을 발휘합니다. 』
김선우의 뒤쪽으로 붉은 화염이 치솟아오른다. 이전의 자그마한 불씨가 아닌, 훨씬 크고 화려한 불길이었다.
그러한 불길은 여인의 모습을 취했다.
김선우 본인조차 모르게 소환한 상급 정령이었다.
"갑니다."
이윽고 김선우가 손을 들어 올리자, 상급 정령 또한 그에 맞춰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올곧게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전에 없던 강렬한 불길이 차가운 대기를 가르고 얼음의 벽을 꿰뚫었다.
콰아아아아——!
그 단단하던 만년빙을 단번에 부숴낸 것이다.
가운데에 뚫린 구멍 하나.
그 균열을 시작으로 극고온의 화염이 얼음의 벽 전체로 퍼져나간다. 미친듯이 치솟는 증기.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뒤덮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헌터들은 그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쿠구구궁······!
본래대로라면 공략대가 넘어서지 못했을 벽이.
김선우의 손에 의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해, 해냈다."
감격한 듯 중얼거리는 김선우.
"좋았어! 역시 김선우야!"
"일 낼 줄 알았다니까!"
"이 자식!"
전투를 하던 헌터들도 뒤를 돌아보며 환호했다. 그 중 하나는 달려와서 김선우의 머리를 헤짚어 놓기까지 했다.
눈물을 글썽이는 김선우.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 지한씨 덕분이에요. 흐윽,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뇨, 절대 안됩니다."
"그, 그러면 선생님?"
"······."
성공을 축하하기엔 아직 이르다. 아직 뒤쪽에선 전투가 한창이었고, 보스도 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완벽하게 무너진 빙벽 너머, 불길한 마기를 내뿜는 존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선혈의 마족의 권속.
용인족 하렐.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놈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인데."
그의 양쪽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얼음 기사.
'호오.'
그 정체가 정령이란 것을 나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3일 내내 정령만 보고 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내 차례다.
『 김선우의 재능 개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 특수 스킬 '고급 정령술 Lv.1'을 획득합니다. 』
『 타재간파의 서의 모든 항목을 활성화 합니다. 』
나는 역전의 검을 틀어쥐며 말했다.
"오르티마. 먹어라."
승기는 우리 쪽에 있었다.
119화 휘몰아치는 냉기(4)
'이럴 수가······.'
김선우의 상급 정령은 만년빙을 확실하게 녹여냈다.
무너져내린 만년빙을 바라보는 용인족 하렐.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다.'
애초에 공격대의 공략 속도가 예측 이상이었다.
3일 동안 하렐이라고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굴 내부와 주변의 마수들을 마기에 감화시키고, 적절히 배치한 뒤 마지막으로 보스를 정신 지배 했다.
공략대가 다가온 것을 알아채고서 급히 동굴 입구로 달려왔건만.
그 잠깐 사이에 이 꼴이 나 있었다.
'하, 일반 정령으론 만년빙을 녹일 수 없었을텐데······. 상급 정령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전력 파악은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마기의 눈사태가 덮쳐오는 상황에 굳이 일반 정령을 사용해가며 전력을 숨긴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큭, 내 불찰이다.'
그러나 결과만은 명확했다.
완벽히 녹아 방어벽의 의미를 상실한 만년빙.
공략대의 시선이 하렐을 향해 매섭게 꽂히고 있었다. 아직 동굴 외부의 마수들의 처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직 상황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좋지 않다. 여기서는 일단 후퇴를······.'
아무리 상위 마족의 권속이라 한들, 열 명의 공략대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렐이 뒤를 돌아서려는 찰나.
콰앙!
하렐의 앞에 창 하나가 꽂히며 얼음 바닥을 깨부쉈다. 산산조각난 파편이 진로를 방해했다.
"어딜 가시나."
동시에 얼음 바닥을 박차고 맹렬히 돌진해 오는 남자. 이지한.
그는 타재간파의 서를 개방해 광화, 신속, 오러블레이드를 동시에 펼치는 중이었다.
'무슨 기세가······!'
하렐은 얼음창을 급하게 들어 올렸다.
콰아앙—!
이지한의 검과 하렐의 얼음창이 맞부딪혔다. 동굴 내부를 울릴 정도의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크윽, 이 녀석은 뭐지?'
카각—!
무기를 맞대고 있을 뿐이지만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바닥에 고정시킨 그의 발바닥이 얼음을 부수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심지어 얼음의 창이 남자의 칼날에 파먹히고 있다. 단순 힘에서도, 무기 자체의 성능에서도 지고 있었다.
"청빙의 기사들이여, 움직여라!"
하렐의 외침에 좌우에 있던 얼음 기사들이 남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려 상급 정령의 검격.
두 개의 새하얀 냉기의 검기가 이지한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앙!
새하얀 냉기의 안개가 퍼져나간다. 직격했다면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결빙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하렐은 그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그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이 남자는 정령술사 아니었나?'
산사태를 막을 때 주요했던 인물 중 하나였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는 분명히 조그만한 드래곤 같은 걸······.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쿠구구구······!
하렐의 뒤쪽에 꽂혀 있던 창이 급작스럽게 부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무로 이뤄진 용의 형태가 된 오르티마.
"큭! 뭐, 이런······."
거대한 동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크기였다. 3일 전 보았던 드래곤과는 비교도 안될 수준.
몸을 들어올린 목룡 오르티마가 육중한 몸체를 이끌고 하렐을 향해 돌진해왔다.
'피했다.'
하렐은 순간적으로 뛰어올라 목룡의 돌진을 피해냈다. 그러나 오르티마의 목적은 하렐이 아니었다.
덥썩!
목룡은 그대로 청빙의 기사를 집어 삼켰다. 새하얀 기운이 목룡의 목구멍을 타고 쏙 넘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하렐이 조소했다.
"하, 어리석군. 정령을 삼키다니! 내부에서부터 얼려주마!"
그는 마력을 운용해 얼음 정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청빙의 기사는 적을 내부에서부터 냉기로 잠식해 나갈 것이었다.
그랬어야 할 터인데.
"?"
정령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명령이 닿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았다.
목룡은 정령을 삼킨채로 줄어들어 슬라임의 형태를 취했다.
뀨!
한없이 차갑고 푸르른 색을 띈 슬라임으로.
'뭐······?'
하렐이 눈이 커졌다.
이래선 마치 정령을 소화 시킨 것 같지 않은가. 정령을 삼킬 수 있다는 생명체가 있단 건 듣도보도 못했다.
범상치 않은 검과 소환수.
순간적으로 생각 하나가 하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설마 저 남자가 대적자인가?'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고 막으려하는 대적자일지도 모른다. 하렐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헌터들은 여전히 뒤쪽에 있다.
만년빙이 있던 자리를 넘어 온 것은 이 남자가 유일했다.
콰아아아—!
슬라임은 어느새 드래곤으로 변해 냉기의 브레스를 쏘아내고 있었다. 꽤 거센 브레스였지만 얼음 속성 친화력이 높은 그에겐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중요한 건 눈 앞의 남자가 대적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뿐.
'그렇다면······.'
하렐은 몸 안의 마기를 방출시켰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마기가 정령계에 존재하는 정령들을 불러 왔다.
'이 자리에서 죽인다.'
그렇게 소환한 상급 정령이 무려 네 마리. 남아 있던 한마리도 근처로 다가왔다. 그들이 뿜어내는 한기가 드래곤의 아이스 브레스를 몰아냈다.
"각오해라. 인간."
아이스 드래곤의 피를 이은 용인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처억, 처억!
다섯 마리의 청빙의 기사가 그의 앞에 도열했다. 혹한의 검을 든 기사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렐은 얼음의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라!"
동시에 기사들이 냉기를 흩뿌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니, 달려나갔어야 했다.
우뚝.
기사들은 몇 걸음을 걸어나가다 멈춰섰다. 하렐의 눈에 당혹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뭐냐, 왜 멈추는 거냐?"
그러나 묵묵부답.
오히려 기사들은 천천히 하렐을 향해 돌아서기 시작했다. 얼음의 칼날을 하렐의 목을 향해 드리운다.
당황한 그의 시선이 남자를 향해 고정됐다.
"설마······."
그것을 바라보는 이지한.
그의 입가에는 흡족스런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 *
오르티마가 얼음 정령을 삼킨 직후.
곧바로 아이스 브레스를 발사하게 했다.
권속 하렐은 빙하룡(氷河龍)의 피를 이어받은 용인족.
얼음 속성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 특수 스킬 '고급 정령술 Lv.1'을 획득합니다. 』
『 특수 스킬 '고급 정령술 Lv.2'를 획득합니다. 』
『 특수 스킬 '고급 정령술 Lv.3'을 획득합니다. 』
···
..
.
『 특수 스킬 '고급 정령술 Lv.11'을 획득합니다. 』
경험치는 확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타재간파의 서를 개방하며 습득한 고급 정령술의 레벨이 빠르게 올라갔다.
'좋군.'
『 유니크 스킬 '초마력회로 Lv.11'을 발휘합니다. 』
『 사용 마나가 79% 감소합니다. 마력 효율이 증가합니다. 』
고급 정령술에는 다량의 마나가 소모되지만, 미래에서 배운 초마력회로가 톡톡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정령술 스킬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정령 소환을 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란거지.'
정령술은 정령을 잘 다루고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에 불과하다. 정령계에 있는 정령들을 소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아무리 뛰어난 조련사가 있어도 동물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처럼.
'고맙게도 다섯 마리나 상급 정령을 소환해주다니.'
녀석은 다섯 마리나 소환해줬다.
『 특수 스킬 '고급 정령술 Lv.11'을 발휘합니다. 』
다섯 정령의 통제권이 고스란히 내쪽으로 넘어왔다.
'재능의 조각을 두 개나 만들어서인가, 순식간에 11레벨을 찍을 줄이야.'
본래 스킬의 최대 레벨은 10.
무재조정의 효과로 11레벨이 된 내 고급 정령술이 우세인 게 당연했다.
정령의 간섭은 확실하게 성공했다.
처억, 처억!
놈이 소환한 정령 기사들이 반대로 돌아섰다. 하렐의 표정이 볼만하다.
"싸워라."
내 한마디에 다섯 마리의 정령들이 일제히 검을 들고 도약했다.
카강! 카앙!
쏟아지는 검격을 막아내는 하렐의 창이 바쁘게 움직였다.
"크윽, 이 비겁한 인간 놈!"
얼음 속성에 강한지라 냉기는 통하지 않지만 정령들이 휘두르는 검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실제로 하렐은 검을 막아내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소환사나 정령사들은 이런 기분인건가.'
직접 싸우지 않고 지휘를 통해 전투를 지배하는 느낌.
카앙! 캉!
"정정당당히 싸워라, 인간! 너 따위는······."
"······."
하렐의 말에 나는 귀를 긁적였다. 정령 다섯 마리로 공격하려던 놈이 누군데.
사방에서 날아오는 정령들의 공격은 하렐의 발을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결정타가 부족하다.
'상급 정령 다섯 마리를 동시에 운용하는 건 마력 소모가 극심하긴 하군.'
마력 회로를 사용해도 마나가 쭉쭉 줄어드는 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좀 더 기다린다.'
뒤쪽에선 아직 전투가 한창이었다.
일자베기나 김선우의 상급 정령을 활용하면, 한 방에 정리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저벅, 저벅.
나는 하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위협이 되고 있단 사실을 충분히 알리면서 놈을 압박했다.
"크윽, 좋다. 후회하게 해주마!"
정령들의 공격을 막기만 하던 하렐이 소리쳤다.
콰아아앙!
놈을 중심으로 강렬한 마기가 터져나왔다. 보랏빛 마기가 아닌 검붉은 마기가 하렐을 집어 삼켰다.
얼음의 정령들이 산산조각이나며 동굴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팔을 들어 올려 날아오는 얼음 파편들을 막아냈다.
"이제 확신했다. 네 놈이야말로 마족의 대적자.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겠다."
그의 눈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늘의 틈새에서도 붉은 피가 차오른다. 은은하게 빛나는 선혈.
혈귀(血鬼).
선혈의 마족의 권속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주술이다. 온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 출혈 상태가 되는 대신 강한 힘을 손에 넣는다.
그 기세는 흉흉했으나 내 입가엔 오히려 미소가 지어진다.
기이잉—.
하렐의 입가에 푸른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동굴 내부에서 흐르는 차가운 기류가 심상치 않다. 모든 냉기가 하렐의 입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빙하룡의 피를 이은 용인족.
그가 뿜어내는 진정한 아이스 브레스가 동굴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
'좋아. 예상대로야.'
『 스킬 '체인지 웨펀 Lv.11'을 발휘합니다. 』
『 유니크 아이템 '빛나는 강철 방패'를 꺼내듭니다. 』
나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미래에서 레벨 100을 달성했을 때 받은 한계돌파 보상이었다.
이 순간만큼을 기다리고 있었다. 놈이 아이스 브레스를 날리기를.
"이리와, 오르티마!"
내 의도를 알아채린 녀석이 내 등 뒤에 착 달라붙었다. 오르티마의 몸 안 불꽃 정령이 따스한 열기를 방출해낸다.
그럼에도 혹한의 냉기가 전신을 뒤덮는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듯한 추위가 정신을 뒤흔들 정도. 물론 내 정신은 그 정도에 굴하지 않는다.
『 유니크 스킬 '지고의 정신 Lv.1'을 발휘합니다. 』
꿋꿋이 방패를 들어 올린다.
쩍! 쩌저적!
방패와 팔이 얼어붙고 새하얀 서리가 전신을 뒤덮었다.
새하얀 브레스로 뒤덮인 시야 속에서 극한의 냉기만을 느끼며 꿋꿋이 서 있는다. 몸이 찢어질 듯한 추위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후우······.'
순식간에 체력이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놈이 혈귀가 되기 전에 죽이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1'을 획득합니다. 』
미래를 봐야했다.
다가올 시련과 상위 마족들.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2'를 획득합니다. 』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3'을 획득합니다. 』
단순히 눈 앞의 적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4'를 획득합니다. 』
스킬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조금씩 추위가 가시고 오르티마의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방패를 든 채로 천천히 전진했다.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5'를 획득합니다. 』
한걸음. 한걸음.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6'을 획득합니다. 』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7'을 획득합니다. 』
폭풍을 뚫고 나아가는 등산가처럼.
휘몰아치는 냉기를 견뎌내며 나아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브레스의 농도와 냉기는 진해져만 간다.
그래도 괜찮다.
내 경험치는 20만배니까.
『 유니크 스킬 '냉기 면역 Lv.10'을 획득합니다. 』
『 빙속성 저항력 300% 상승, 냉기 및 추위 100% 면역 』
놈의 앞에 도달한 순간.
콰앙!
나는 크게 뛰어 올랐다.
"······!"
브레스를 발사하던 하렐의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피로 물든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스를 도중에 끊어내는 건 불가능.
나는 역전의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끝이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콰아아아—!
시리도록 푸른 한줄기의 선이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뒤쪽에 있던 공략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굉음과 섬광 뿐이었다.
더 이상 권속 따위로는 날 막지 못한다.
네 놈들의 주인을 데려와라.
『 상위 권속 '용인족 하렐'을 처치하셨습니다. 』
『 이계 규율이 업적을 정산합니다. 』
120화 휘몰아치는 냉기(5)
『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상위 권속 '용인족 하렐' 처치
- 기록 : 성장력 SSS, 냉기 저항 SSS, 데미지 S+, 정령술 S······.
- 종합평가 : SS
이계 규율이 정산하는 업적.
성장력에 한해서는 과평가 되었지만, 나머지는 이제 납득할만한 수준이다.
'그만큼 내 수준이 올라왔다는 거겠지.'
『 칭호 '혹한의 지배자'를 획득합니다. 』
- 빙(氷)속성 저항력 + 300%
- 얼음 속성의 존재들이 당신에게 경외감을 느낍니다.
'오······.'
업적을 확인하는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스킬 냉기저항과 냉기면역에 이은 칭호 혹한의 지배자. 이걸로 내 얼음 속성 저항력은 700%가 넘는다.
'사실상 얼음 속성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게이트 전체에 감도는 추위 디버프가 내게는 통하지 않게 된 거다.
흔적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하렐.
놈이 사라진 자리에는 영혼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네임드 마수 중에서도 특출난 녀석이 남기는 영혼석.
토옹.
등에 매달려 있던 오르티마가 튀어 올랐다.
먹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
'그렇게까지 먹고 싶은건가?'
여태까지 오르티마가 뭔가를 섭취 했을 때 나빴던 적은 없다. 정령처럼 곤란한 적은 있었어도, 결과는 항상 좋았단 말이지.
'신기한 녀석.'
나는 하렐의 영혼석을 던져줬다.
덥썩!
허공에서 영혼석을 낚아챈 오르티마는 기쁜 듯 통통 뛰어다녔다. 이내 몸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스으으······.
증기처럼 솟아나는 붉은 빛의 기운. 불꽃의 정령이 아니었다, 이전에 먹었던 재능 획득의 물약이 내는 색이었다.
이윽고, 무언가를 뱉어냈다.
투욱.
은은한 청색의 빛을 내는 조각이 내 발치에 떨어졌다.
'이건······.'
『 신기한 재능의 파편 』
미약한 재능, 특이한 재능에 이은 세번째 파편이었다. 나머지 두 개는 조각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훌륭한데.'
이 재능들은 내가 스킬의 경험치를 쌓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유니크에 이어 레전더리 스킬까지 마스터하기 위해선 뭐가 됐든 간에 재능이 필수적이다.
"그래, 앞으로 많이 찾아서 많이 먹여주마."
나는 오르티마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마무리를 하고 있는 사이, 진세아가 슬쩍 다가왔다.
"에취, 훌쩍."
여전히 감기를 앓고 있는 녀석은 털모자와 털장갑을 낀 채로 오르티마를 주워들었다. 오르티마가 진세아의 의도를 알아채고 붉게 달아올랐다.
"휴우, 좀 낫네."
오르티마를 꼭 껴앉은 진세아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빠,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장난 아니네요. 멋졌어요. 끼어들 틈이 없던데요."
뭔가 했더니 권속을 쓰러뜨린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진세아는 부숴진 얼음 조각 사이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
진세아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선배, 괜찮나요?!"
"형, 뒤쪽은 완전히 처리 끝났어."
신아람과 천성호, 윤지은이 선두에 있었다. 동굴 입구에서의 전투도 간단하진 않았을 거다. 마기를 받은 S급 마수들은 기존보다 훨씬 강하니.
윤지은의 얼굴에는 조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 능력으로 보고는 있었어요. 돕지는 못했지만······. 보통 적이 아니었던 것 같던데요."
"마족의 권속이었습니다. 입구를 막고 있던 만년빙도 그 녀석의 짓이었고요. 일단은 처리했지만 동굴 내부의 마수들도 여전히 마기로 강화 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마족에 대해선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지은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공략이 시작되고 줄곧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피어난 미소였다.
"지한씨와 함께 오길 잘 했네요. 저 혼자였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어요. 김선우씨를 봐준 것도 지한씨죠?"
더불어 윤지은은 공략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역시 은빛의 날개에 꼭 필요한 인재······."
그리 중얼거리는 윤지은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 해요, 알겠죠?"
그리 말하고서 선두로 나아가는 윤지은.
왠지 중얼거리는 것도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한 것 같은데.
공략대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이제 동굴 내부의 보스만 처리하면 끝이었다. 동굴 내부로 들어선 헌터들이 감탄을 쏟아냈다.
"오오, 멋지네요."
"마수만 아니었으면 관광 명소였다고 해도 믿겠네."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얼음들로 이뤄진 동굴 내부. 어디선가 흘러든 빛이 은하수처럼 반짝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걸 감상할만큼 공략대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야말로 순조로운 공략이다.
'레전더리 아이템 덕분에 원래 일정보다 빠르게 공략이 진행됐다. 만년빙을 빠르게 돌파한 것도 좋았고.'
얼음 동굴은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우왓, 여기 얼음 안에 뭐가 있는데요?"
"이게 다 뭐냐······."
"설마 얼음을 부수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고대의 기계 장치 같은 것들이 얼음 속에 잠들어 있었다. 깨뜨리면 살아날지도 모른다.
워낙에 별별 현상이 일어나는 게 게이트니까.
"잠깐, 이건 아이템 같은데요······?"
얼음을 유심히 살피던 진세아가 눈을 반짝였다. 잘 찾아냈다.
얼음에 담겨 있는 보물.
그게 이 S급 게이트의 진면목이다.
은빛의 날개 2팀이 공략에 실패하고, 수호 길드는 해당 게이트를 공략하며 다수의 아이템을 챙기는 게 본래의 미래.
'이번에는 은빛의 날개가 전부 가져간다.'
수호 길드의 마스터 사최헌.
그는 막판에 가서 마족의 위험성을 간과한다. 현명하게 멸망한 세계를 대비한 것은 은빛의 날개 윤지은이다.
'어차피 수호 길드는 지금 전력으로도 충분하다. 이후에 신태양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는 있지만 지금은 은날의 전력 보충이 필요해.'
현 시점에서 나를 전력으로 지지해 줄 수 있는 단체는 은빛의 날개다. 정확히는 윤지은이지만.
이번 공략에서의 수확이 그녀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해줄 터.
"오, 여기에도 보물 상자 같은 게 있는데? 완전 노다지야."
"그러면 일단 여기서 아이템을 파밍하고 지나갈까요?"
"역시 부길드장님, 완전 좋습니다!"
신난 길드원들이 각자 인벤토리에서 헌터용 곡괭이를 꺼내들고선 얼음으로 달려간다.
"조심해, 괜히 잘못했다가 얼음 속에 잠든 마수들 깨우지 말고."
"에이, 설마 저 놈들이 움직이겠어?"
"꼭 그런 말을 하면 움직이던데······."
다행히 그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빛의 날개는 안전하게 얼음을 부숴 아이템을 회수했다.
한창 파밍이 이어지는 도중.
"김선우씨, 저기 한 번 녹여보세요."
"흐, 흐어. 유, 유니크 아이템······!"
"축하드립니다."
장신구를 확인한 김선우가 눈을 꿈뻑였다.
레전더리 아이템을 사용하는 내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아이템이다. 미래의 진세아로부터 알아놓은 정보가 톡톡히 제 역할을 했다.
"지, 지한씨는 괜찮으세요?"
김선우의 말에 나는 동굴 너머를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여기서 나오는 아이템 중 하나를 받기로 했다. 진짜로 쓸만한 아이템은 보스의 방에 있다.
크르르······.
동굴의 안쪽에서 서슬퍼런 안광을 번뜩이는 마수들. 몸에서 시퍼런 냉기를 뿜어내는 서리 늑대들이다.
"슬슬 전투 준비해야겠는데요."
나는 역전의 검을 쥐고 일어섰다.
* * *
은빛의 날개 2팀.
천성호와 신아람을 필두로 한 혹한의 설원 공략은 애초부터 순조로웠다.
'괜히 은날에서 두 사람을 푸쉬하는 게 아니었구만.'
'S급 게이트에서도 완전히 날아다니잖아.'
'진짜 천재 맞네.'
레전더리 아이템을 장착한 두 사람의 활약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은날의 공략대 대부분은 그리 생각했다.
'이지한이라는 사람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저 두 사람만큼은 아닌데?'
'그래도 라면 요리 하나는 끝내주더라.'
눈사태를 막아낸 용병 이지한.
사실 그에 대한 소문은 이전부터 돌고 있었다. 은날에 신아람과 천성호를 추천한 인물이며, 이전 게이트에서 큰 활약을 했었다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공략대의 헌터들은 이지한을 의식하고 있었다.
'소문만큼 대단하지는 않은데.'
'실제 전투에서는 별 활약은 없네.'
'뭐, 하늘을 갈랐다더니 그 정도는 아닌데.'
'라면이 장난 아니야. 미쳤어.'
동굴에 들어오기 전까지만해도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동굴 앞에서의 전투가 바빠, 권속과의 대결을 직접 보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동굴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러한 평가는 반전되었다.
'잠깐만······. 무슨······.'
촤악, 촤아악—!
냉기로 가득한 서리 늑대 사이를 질주하는 이지한. 그의 검이 사정 없이 늑대들의 목을 베어냈다.
"으윽, 추워 죽겠네.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아."
"후우······."
신아람과 천성호가 추위에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에이스 두 사람이 그럴진데 나머지 헌터들은 어떻겠는가.
'점점 더 추워지잖아. 몸이 덜덜 떨린다.'
'방한 방어구가 소용이 없을 정도야······.'
'얼어 붙겠어.'
동굴 내부로 들어갈수록 마수들이 흩뿌리는 한기가 진해지며 온도가 내려간다. 오르티마의 온기도 점차 효과를 잃어갔다.
서걱——!
그럼에도 이지한은 변함 없는 속도로 마수들을 처리해 나갔다. 깔끔하고 정확한 그의 검술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춥지도 않나? 이 냉기가 안 느껴지는건가?'
심지어는 보스와 마주했을 때도.
"서리 폭풍이다! 다들 대비해요!"
"바, 발이 얼어 붙었어!"
"뭐, 이런 무지막지한 놈이······!"
거대 설인이 만들어내는 서리 폭풍 앞에 공략대가 멈춰섰다.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얼음 결정이 몸을 뒤덮는다.
"이거 일단은 후퇴 해야겠는데요!"
다시 재정비하고 붙지 않는 이상 공략대에 승산은 없어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저벅, 저벅.
그런 서리 폭풍을 아무렇지 않은 듯 뚫고 걸어가는 이지한. 경악한 헌터들이 소리쳤다.
"자, 잠깐 위험해요!"
"서,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형!"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한은 앞으로 나아갔다. 헌터들을 옭아매던 얼음 결정이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생겨나지 않았다.
타앗.
보스의 코 앞까지 도달한 그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크르르······.
설인이 이지한을 쳐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투두두두——!
뒤쪽에서 윤지은이 쏜 수십 발의 화살에 행동이 차단 당했다.
다음 순간.
서리 폭풍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났다.
설인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양분하는 선 하나.
쿠웅!
반토막이 난 설인이 얼음 바닥에 몸을 뉘였다. 이지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
"······."
그 광경을 바라보던 헌터들의 입이 벌어졌다.
서리 폭풍을 뚫고 간 건 특수한 스킬의 영향이라고 쳐도 보스가 한 번에 쓰러졌다. 설인의 질긴 가죽을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보스 공략이 어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소문이 진짜였네."
"라면만 잘 끓이는 게 아니었구나."
"거 참, 우리 형 세다니까요."
반쯤 얼어붙은 헌터들이 수군대는 동안,
윤지은이 흡족한 표정으로 이지한에게 다가갔다.
"지한씨, 고생했어요.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레전더리의 대여부터 보스 공략까지.
이지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마족의 권속까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지한씨는 거기까지 꿰뚫어 본 건가?'
위태위태할 거라 생각했던 공략을 성공적으로 만든 장본인. 보면 볼수록 신기한 남자였다. 불과 얼마전까지 F급 헌터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은빛의 날개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한데.'
이미 거절을 두 번이나 당했기에 섣불리 말도 못 꺼낸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할 수 있는 한 보상을 두둑하게 줘야겠어.'
지금의 은빛의 날개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제 보상 말인데요."
"아, 게이트에서 나오는 아이템 중 하나를 달라고 하셨었죠. 물론 그거 말고도 금전적인 보상도 같이 해드릴 겁니다."
"저야 좋죠. 그래서 말인데요. 그 아이템은······."
이지한은 설인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다른 얼음들과 달리 붉은 기운을 띄고 있는 얼음 결정.
그 내부에는 장갑이 잠들어 있었다.
이지한은 인벤토리에서 곡괭이를 꺼낸 뒤, 얼음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 스킬 '중급 채굴 Lv.11'을 발휘합니다. 』
카앙!
시원한 소리와 함께 내부에 들어 있던 장갑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레전더리를 의미하는 무지개빛이 터져나왔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 이미테이션 글러브(레전더리)를 획득합니다. 』
- 유니크 이하의 스킬을 복사합니다. (대기시간 1주일)
- 방어력 + 75
상대를 따라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이템.
'드디어 손에 넣었다.'
나는 이런 류의 아이템을 미래에서 몇 번 경험했다.
그렇기에 그 성능 또한 잘 알고 있다.
일반적인 헌터가 사용했을 때는 단순히 스킬 하나를 복사하는 아이템이지만.
'이걸 내가 사용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건 스킬을 베껴올 수 있게 되는 사기템이다.
121화 운명의 사람(1)
은빛의 날개 2팀이 공략중인 S급 게이트.
그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의 1군이 모인 1팀에 비해 관심은 덜하지 않았다.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신아람, 천성호.
그 둘에 더해 부마스터인 윤지은까지.
대중의 관심은 오히려 2팀에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기는 해도 그들의 첫 S급 게이트 데뷔전이었다.
"스읍, 언제 나오려나."
"꽤 걸리지 않을까요. 아직 수호 길드도 공략 안 끝났는걸요."
호일에 쌓여 있던 김밥을 한 입 떼어먹은 기자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야 그렇네."
1위인 수호 길드 공략 소식도 아직이었다. 이제 3일 지난 시점에서 게이트 공략이 끝날 리가 없었다.
"기사는 미리 작성해놨지? 우리가 제일 먼저 올려야 돼."
"예, '수호 길드에 이은 두번째 공략', '은빛의 날개 최초 공략 성공', '은날 신예들의 화려한 데뷔전'. 여러가지 버전으로 준비해뒀죠."
"뒤에는 지워. 수호 길드보다 빠를 수가 없어."
"하하, 그거야 그렇네요. 근데 저희야 그렇다고 쳐도 쟤들도 대단하네요."
게이트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건 기자들 뿐이 아니었다. 은빛의 날개의 극성 팬들도 함께였다.
후배 기자의 말에 선배가 피식 웃었다.
"오죽하면 우리보다 쟤네 소식이 빠르다는 소리가 나오겠냐. 야, 잘 보고 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오면 연락하고."
"어디가세요?"
"담배, 임마. 요즘은 보는 눈이 많아서 담배도 함부로 못 핀다니까······."
선배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흡연구역으로 이동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뭐야."
후배였다.
"왜."
전화를 받자 그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왔다.
- 서, 선배. 나왔어요. 공략 끝났어요!
"그게 뭔 개소리야. 상식적으로 벌써 공략이 끝났겠냐."
선배 기자는 미간을 좁혔다.
S급 게이트의 공략의 절대적인 기준은 수호 길드였다.
동시에 발생한 S급 게 이트가 있다면 대한민국 1위 길드인 수호 길드가 가장 먼저 끝나는 게 당연. 업계의 상식이었다.
혀를 찬 선배 기자는 담배에 마저 불을 붙였다.
"잘 들어, 게이트 공략은 변수가 많아. 공략 도주에 부상을 입은 헌터가 먼저 빠져나오는 경우도 있고, 아예 공략이 실패한 경우도 있고. 그걸 공략 성공이라고 단언하는 게 맞냐?"
- 아니, 선배 진짜에요.
"그러니까······."
스마트폰에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는 찰나였다.
와아아—!
게이트 근처에서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 그제서야 선배 기자는 담배를 밟아 끄고선 현장으로 달려갔다.
'뭐야, 진짜 성공이라고?'
환호성까지 쏟아질 정도라면 공략 성공이 명확하단 뜻이었다. 사람들도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헌터들의 얼굴이나 상태 정도는 확인할테니까.
"크윽, 좀······."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 들어서 인파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자리로 돌아온 선배 기자가 후배에게 물었다.
이미 공략대는 빠져나간 직후였다.
게이트도 사라져 있었다.
'이럴 수가.'
다급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수호 길드 공략 성공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뭐야, 어떻게 된거야. 기사 올렸어?"
"아, 아뇨······. 아까 선배가 지우라고 하셔서······."
"이 새끼야, 그걸 지우란다고 진짜 지우냐!"
국내에 동시 생성된 다수의 S급 게이트.
아무도 은빛의 날개 2팀의 최초 공략을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어떠한 길드도 공략을 끝내지 못한 지금.
메인 포털 사이트가 온통 은빛의 날개에 대한 소식으로 도배 되었다.
- 은빛의 날개 2팀, 가장 먼저 S급 게이트 공략해······.
- '은날' 이번 게이트 성공 요인은 무엇?
- 국내 최단기 S급 게이트 공략!
2팀의 최초 공략은 국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우와, 기사가 엄청나네요. 와, 나도 있잖아."
은빛의 날개 휴게 시설.
수건을 목에 건 채 스마트폰을 살피던 진세아가 말했다.
은빛의 날개 길드 건물에 도착한 공략대.
성공적인 공략이었지만 아직 축하의 샴페인을 터트리기엔 일렀다.
1팀의 공략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오빠, 어디가요?"
"윤지은 헌터한테 너 레전더리 아이템 좀 빌려줘."
"네?"
이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빛의 날개 1팀.
길드장이 있는 1군으로 구성된 팀이지만, 공략 성공 여부는 확실치 않다. 아니, 예상대로라면 분명히 지원 요청을 보내 올 거다.
이전의 미래에서 2팀이 실패한 이유.
그건 내가 1팀의 공략에 참가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2팀으로 자리를 옮긴 지금 커다란 공백이 생겼을 거다.
'은빛의 날개는 바로 전에 S급 게이트 공략을 마친 상태였다. 컨디션이 좋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그 기회를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 * *
그런 이지한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빌어먹을! 다들 똑바로 정신차려! 이런데서 쓰러지면 어쩌자는 거야!"
S급 중위 게이트.
은빛의 날개 길드장 천상혁이 미간을 좁힌 채 윽박 질렀다.
"길드장, 아무래도 지원 요청을······."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다들 상태가 안좋아요."
"이쯤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기로 가득한 늪지대.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상혁은 막무가내였다.
"정신차려, 공략 시작된지 3일 밖에 안 지났어. 지원 요청 한다고 도와줄 길드도 없어."
"그러면 일단 물러나서 재정비를······."
"뒤를 봐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이 지나 온 길은 갖가지 독과 마수들로 득실 거리고 있었다. 지금 돌아간다고해도 손해가 막심했다.
그럴 바에는 공략을 완수하자는 게 길드장의 주장이었다.
"내가 전부 책임진다. 다들 내 뒤로 와."
"길드장이 그렇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길드장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기도 했고. 그들은 전진 을 선택했다.
쿠구구구······.
그러나 그들은 후퇴했어야 했다.
늪지대에 숨어 있던 거인이 몸을 들어올렸을 때 공략대 전부가 숨을 삼켰다. 천상혁 또한 비로소 뭔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다.
'이, 이건······.'
거인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쏟아지는 독액의 비.
도망가려는 그들을 막아서는 독의 장막.
풀 컨디션이 아닌 은빛의 날개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차피 도망갈 수 없다면······.'
선택지는 하나였다.
"모든 공격을 쏟아부어!"
"젠장! 다들 집중해!"
천상혁이 망치를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을 뚫고 쏟아진 빛이 검이 거인의 몸체를 강타했다.
각종 마법이 하늘을 수 놓으며 거인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화력이 부족했다.
잠시 기우뚱 했던 거인이 자세를 다시 잡았다. 놈의 상처에서 울컥 울컥 솟아나는 독 안개가 놈을 재생 시키고 있었다.
길드원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마력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들 사이로 침묵이 내려 앉았다. 망연자실한 채 거인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였다.
투두두두두······!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이 어두운 하늘을 뒤덮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대량의 화살이 거인을 향해 쏟아졌다.
부족한 화력이 메꿔지고 있었다.
"이 화살은······!"
"설마 지원이······?"
뒤쪽에서 윤지은의 당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원 왔습니다! 다들 포기하지 마세요!"
온 몸을 레전더리 아이템으로 도배한 윤지은. 그녀의 몸 전체에서 은은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콰아앙! 콰앙!
그런 그녀의 양 옆에서 무지막지한 검기를 흩뿌리며 나타나는 2인.
신아람과 천성호였다.
"지원이 왔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다들 뒤로 물러서!"
은빛의 날개의 사기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윤지은의 입가에 감탄의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지한씨 말대로네요······."
"보험을 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뒤쪽에서 천천히 올라온 이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앞서 나간 공략대를 따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지한 덕분이었다.
"독 안개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괜찮아요?"
윤지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이지한이 전면에 나서며 독 안개와 독 마수들을 제거해 준 덕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해독제도 제대로 섭취 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괜찮은 건지.
어쨌든 이지한의 혈색은 멀쩡했다. 나중엔 앞에 나가서 독을 들이 마시기까지 하는 기행을 선보였다.
"오히려 더 강한 독을 못 찾아서 아쉬운데요."
"네?"
"거인이 다시 일어나려하네요. 일단 저 놈부터 해치우죠."
볼 때마다 신기한 사람이다.
그러나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자세를 되찾은 거인이 입에서 독무를 뱉어내려 하고 있었다.
우선은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부터였다.
"그래요, 계속 갑니다!"
윤지은이 활을 들어 올렸다.
막대한 양의 녹빛 마력 화살이 다시금 밤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달려나가는 이지한.
'13레벨 일자베기를 남용할 수 없는 게 아쉽군.'
본질베기는 강력하지만 수명을 소모한다. 그것도 꽤 많은 수명을. 엘리스를 찾기 이전까지 활동의 폭이 좁아지는 게 단점.
'그래도 준비할 건 많다.'
이미테이션 글러브를 활용한다면 마족에게 대항하는 스킬을 습득하기 수월해질 거다.
촤아악—!
독 안개나 독 늪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공략대의 앞으로 달려나간 이지한의 검이 거인의 왼손을 시원하게 베어냈다.
'이곳을 빠르게 정리하는대로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러 움직인다.'
* * *
인천 국제 공항.
드르륵.
선글라스를 쓴 금발 소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입구를 빠져나왔다. 가디건과 손에 쥔 캐리어, 여권을 손에 든 모습은 영락 없는 관광객이었다.
"후후······."
공항 건물에서 바깥으로 나온 엘리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여기가 K-POP의 본고장, 동방예의지국, 선비의 나라! 드디어 왔다구요."
유창한 한국말로 주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그리 말한 엘리스. 스마트폰을 들고선 이곳저곳의 사진을 마구 찍었다.
뭐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본래부터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헌터가 되기 전부터 이곳에 오는 걸 줄곧 꿈꿔오고 있었다.
그 관심의 시작은 아이돌이었지만 나중에는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가 좋아졌다. 한국어를 직접 공부할 정도로 열성이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여기 어딘가에 내 인생을 바꿔줄 사람이 있단 말이죠."
엘리스는 시간을 다루는 헌터였다. 그런 그녀는 며칠 전 꿈에서 강렬한 계시를 받았다.
'대한민국. 운명의 사람 있음.'
시간을 다루는 헌터인 그녀에게, 꿈은 다양한 시간대에 존재하는 자신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수많은 가능성을 뚫고 도달한 하나의 강렬한 예언.
'운명의 사람을 찾을 것.'
엘리스는 그날로 짐을 싸서 대한민국으로 왔다.
아직 부족한 능력 탓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뭘하는지조차 모른다.
얼굴을 알아낸 게 고작이었다.
허나 꿈의 예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여태껏 그래왔으니까.
"후후후······."
오고 싶었던 나라인만큼 그녀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기사를 확인하는 손길은 능숙했다.
엘리스는 한글로 된 기사의 헤드라인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현재 한국은 전국에서 발생한 S급 게이트로 난리였다.
'오, 은빛의 날개가 제일 먼저 공략을? 그것도 3일만에······.'
평소의 습관대로 확인하던 기사.
거기엔 공략대의 사진도 있었다. 신아람, 천성호와 같이 재능 있는 헌터들은 엘리스도 알고 있었다.
'한국의 수준도 굉장히 올라간 것 같······.'
그런데 사진의 구석에 찍힌 한 사람의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다.
'이 사람은······?'
엘리스의 눈이 커졌다.
'와우.'
자신이 찾던 운명의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 기억과 대조해 봤지만 확실했다. 그 사람이었다.
'이런 행운이.'
엘리스는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역시 한국으로 가라는 예언을 틀리지 않았다.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줄이야.
어느새 엘리스의 숨이 가빠져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로 가주세요."
엘리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이지 않은가.
122화 운명의 사람(2)
태백산맥.
어느 산의 정상.
"없어······. 레전더리 아이템이 하나도 없어. 이럴 수는 없는데."
어린 소년이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정체는 상위 나약의 마족.
"뭔가 잘못 된 거 아니야? 예언의 마족 그 새끼······. 처음부터 우리를 엿 먹이려고 했던 거 아니야?"
붉은 장발을 늘어뜨린 미모의 여성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정체는 상위 선혈의 마족.
두 상위 마족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레전더리 아이템을 파밍하기 위해 전국을 돌고 있었다.
손실된 마기를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만 무산되지 않았어도 이런 귀찮은 짓은 안해도 됐는데······. 이거 곤란하게 됐어."
마계에서 이곳 문명계로 넘어 오기 위해 상위 마족은 마기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 부족한 아이템으로 메꿀 셈이었는데.
문제는 레전더리 아이템이 하나도 없다는 것.
보상으로 존재해야 할 레전더리가 쏙 빠져 있는가 하면 던전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선혈의 마족은 들고 있던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종이 조각에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예언? 웃기고 있네. 정보랍시고 건네 준 게 이딴 수준이면 놈의 능력도 안봐도 뻔해. 개 같은 새끼."
"흐음······. 그 녀석이 음흉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거짓 정보를 쥐어줬을 리는 없는데."
나약의 마족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예언의 마족.
그는 마계왕의 참모진 중 하나였다. 미래를 예언하고, 다차원의 정보에 접근 할 수 있는 능력자.
현 시점 문명계의 인간들 수준으로는 예지력에 대한 대항력이 있을 리가 만무.
'하지만 있어야 할 레전더리가 없단 말이지······.'
나약의 마족의 미간이 좁혀졌다.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답은 하나였다.
'예언의 마족보다 한 발 앞서서 레전더리 아이템을 회수 했다는 건가.'
앞서 저지 당한 두 개의 계획. 프로젝트 마기와 메이저 게이트. 단순히 정보가 새어나간 게 아닐 수 있다.
'인과를 뒤흔드는 대적자의 출현이라······.'
이레귤러인가 예언을 뛰어넘는 힘의 작용인가.
'윗분들께서 걱정하시던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어.'
아직은 알 수 없다.
뭐가 되었든 결론은 하나.
그 대적자를 찾아 한시라도 빨리 제거 해야 했다.
"허위 정보를 뿌린 예언의 마족부터 찢어죽여야겠어! 안 그래?"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는 선혈의 마족. 분노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 다만, 그걸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어쨌든 놈이 무능해서 괜한 헛걸음을 한 건 맞으니까.
"프로젝트 아포칼립스가 우선이야. 슬슬 부하 놈들이 마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왔을 거야. 예언의 마족과 한 판 벌이는 건 나중에 하라고."
"쯧."
S급 게이트가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지금. 대량의 마족들이 이곳으로 넘어 오기에는 최적의 시기였다.
나약의 마족이 몸 안의 마기를 끌어냈다.
'다행히 대적자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어.'
소년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협회에서 헌터 행세를 하고 있는 마족이 여럿있다. 그들은 문명계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부터 자리를 잡아 온 이들.
'어쨌든 놈들은 게이트를 공략했다. 흔적을 남는 건 당연하겠지. 그것만 조사하면 대적자가 누군지 알아내는 건 금방이다.'
대적자를 처리하고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실행한다.
그리하면 전국의 게이트가 동시에 붕괴하며 대한민국은 지옥으로 변하게 될 거다.
* * *
콰아아앙!
천성호의 일격을 마지막으로.
S급 게이트의 보스 포이즈닉 드레이크가 쓰러졌다.
은빛의 날개 길드원들이 주저 앉았다.
"이겼다······. 살았어······."
"지원이 안 왔으면 우린 그대로 죽었을 거야."
"감사합니다. 부길드장님!"
길드장 천상혁의 독단으로 엉망이 될 뻔했던 공략은 부길드장 윤지은의 지원으로 수월하게 진행 되었다.
"이번 신입들 실력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는데."
"둘 다 괴물이라는 말밖에는 안 나와.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부길드장님이 다른 게이트를 3일만에 공략하고 지원을 온 거라니······."
이번 일로 인해 부길드장인 윤지은의 발언권도 강해질 거다.
『 스킬 '독 저항 Lv.1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독 면역 Lv.11'을 획득합니다. 』
나도 스킬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공략이었다.
'이 정도면 완전 면역까지는 아니어도, 왠만한 독에는 끄덕 없겠어.'
S급 게이트 특유의 환경은 나를 강하게 준다. 환경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건 큰 메리트가 있다.
메시지 창을 보며 만족하고 있는데, 은날의 길드장인 천상혁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껏 미간을 좁힌 상태였다.
"당신······. 이지한이라고 했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길드원들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고, 반대로 부길드장인 윤지은의 입지는 올라갔으니 불만스러울 법도 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천상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고맙다. 지은이에게 들었다. 자네 덕분에 빠르게 지원을 올 수 있었다고 하더군."
의외의 발언이었다.
은날의 길드장 천상혁.
그는 마족의 침공이 본격화 되기 전에 죽었다. 그의 호전적인 성격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인간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까지는 모른다.
"인재들을 추천 해주고 레전더리를 빌려주기까지.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해야할지 모르겠군······."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는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지쳐 있지만 그들 모두 멀쩡히 살아 있었다.
"내 욕심이 과했어."
그런 그의 뒤로 윤지은이 다가왔다.
"기운부터 내시죠. 길드장이 흔들리면 괜히 길드원들 마음만 흔들려요. 이번 일에 대한 건 돌아가면 문책할테니까요."
"그래······. 이번 건은 내 잘못이 맞아. 이제 돌아가자고."
결과만 놓고보자면 은빛의 날개는 공략에 성공했다.
밖으로 나가자 뜨거운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가 이어졌다.
수호 길드를 제치고 가장 먼저 S급 게이트를 공략한 은빛의 날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수호 길드가 공략을 마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다중 발생한 S급 게이트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시기를 틈타 다수의 마족들이 이곳으로 넘어 오고 있을 거다.
그러나 나는 놈들을 막지 않을 예정이다.
'상위 마족을 제외하면 인류도 그리 약하지 않다.'
마족의 위험성과 그 중요도를 대중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가 개시 되기 이전, 최후의 10인의 힘을 최대한 키워 놓는다.'
대한민국 내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
그들이 날개를 활짝 핀 채로 마족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공략 성공 축하합니다!"
"수호 길드를 제친 최단 공략 축하드립니다!"
은빛의 날개에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길드원들이 폭죽을 터트렸다. 위험했던 것과 별개로 어쨌든 공략 성공이니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천상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좋은 길드원들을 뒀구만.
머리에 꼬깔 모자를 쓴 진세아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오빠, 어떤 외국인 여자애가 오빠를 찾던데요?"
"외국인?"
외국인 중에 날 알만한 사람은 없지만, 짐작 가는 사람은 있었다.
"엄청 귀여운 애였는데······. 이름이 엘리스라던가? 한국말 완전 잘하던데."
멸망한 세계에서도, 회귀를 한 시점에서도 나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미래에서 나는 분명히 만났다.
내 마지막 제자를 자처하는 인물을.
그게 엘리스였다.
'미래에서 엘리스가 알려준대로라면, 내가 엘리스를 만나는 건 한참 뒤일텐데.'
다만, 엘리스는 시간을 다루는 능력자.
나와 더 빨리 접촉할 방법을 알아낸 걸지도 모른다.
자세한 건 만나봐야 알겠지만.
'이거 계획이 크게 바뀌겠는데.'
그녀의 시간 조작이 있다면, 나는 13레벨의 일자베기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 애, 지금 어디에 있어?"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된장찌개 먹으러 간다고 그랬는데. 다시 올 거래요."
된장찌개······?
현 시점에서 엘리스의 얼굴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의 A급 헌터이기는 하나, 미국은 A급 헌터가 차고 넘치기에.
온 김에 관광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다시 오면 내 번호를 알려줘."
"근데 하나만 물을게요."
"뭔데?"
진세아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걔가 오빠 보고 운명의 상대라던데. 둘이 무슨 관계에요?"
"······."
대체 진세아한테 무슨 말을 하고 사라진 거냐. 엘리스.
* * *
수호 길드가 공략을 마치기 전 해야 할 일.
그 중 하나는 미래의 성녀 채아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거다.
'나 혼자서 모든 마족에게 대항할 수는 없다.'
대마법사 김민수를 제외한 최후의 10인.
그들의 성장을 앞당기는 것.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해선 필수적인 일이었다.
이전에 만났던 하루 길드의 마스터 채하루.
그의 소개로 나는 그녀의 동생 채아연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심의 카페.
"진심으로 하는 말인거죠?"
검은 단발을 한 채아연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그녀가 의심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옆에 있던 그녀의 오빠 채하루가 뜨악한 표정으로 채아연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선 빠르게 속삭인다.
"야, 이 분이 우리 길드 망할 뻔 한 거 구해주셨다니까. 똑바로 대답해······."
이를 악물고 말하는 채하루.
그런 오빠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채아연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수상하잖아. 은빛의 날개에 나를 추천한다니. 내 뭘 보고······? 얼굴?"
"뭔 개소리야······. 너 진짜 뒤질래?"
남매가 아주 사이가 좋아 보여 다행이다.
현재 채아연은 소형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멸망 전까지 두각을 드러내지 않다가, 그 이후에 빛을 본 케이스다.
그럼에도 최후의 5인까지 살아 남은 천재.
나는 씩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물론 내 명함은 아니고, 윤지은의 명함이다.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은 받았다.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연락해보셔도 됩니다."
멸망한 세계에선 인류를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그녀였지만, 아직 세계는 멀쩡하다.
그런 대의나 사명을 요구할 순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건 뭐겠는가.
돈이다.
그리고 은빛의 날개는 대한민국 2위.
"으음······."
명함을 바라보는 채아연이 꿀꺽 침을 삼켰다.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게 해준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우다.
단순히 돈이 전부가 아니다. 은빛의 날개에서 쌓을 수 있는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최근 들어 방송에서도 연일 은빛의 날개 공략 소식에 대해서만 떠들어 대고 있다. 은날의 주가는 현재 최고조.
명함을 빤히 바라보던 채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할래요. 은빛의 날개."
하여 채아연을 포섭하는 일은 빠르게 끝이났다. 이제 은빛의 날개는 다른 길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력을 가진 길드로 거듭났다.
채아연, 채하루 남매와 헤어지고 난 뒤.
띠리링.
백묵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슬슬 전화가 올 때가 됐지.'
지난번 중위 전투의 마족 공략 때 백묵도 상당한 이득을 봤을 거다. 그곳으로 헌터들을 불러 모아준 게 그였으니까.
- 지한씨, 은빛의 날개 공략 축하드립니다. 두 개의 게이트에 참여하다니. 기가 막히네요.
정보 길드 호라이즌을 운영하는 그.
- 만년 2위 길드를 단번에 1위와 다툴 정도의 기량을 뽐내게 하다니. 정말 놀랍다니까요, 지한씨의 행보에는 매번 감탄합니다.
새롭게 확인한 미래에서 그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멸망한 세계의 혼란을 틈타 그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꽤 오래 버텼다곤 하는데, 결국 마족에게 무너진 뒤 살아남은 자들은 최후의 도시에 합류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 그래서 말인데 제가 좋은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정보 말인가요?"
잠시 침묵하던 백묵은 말을 이어갔다.
- 최근 협회에서 지한씨가 다녀간 게이트와 던전의 정보를 알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네요.
협회와 상위권 길드에 숨어 있는 마족들.
그들이 나를 찾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도 전부 막아낼 순 없다.
어쩔 수 없이 감수하려 하고 있었는데.
- 지한씨에 대한 정보는 제 부하가 차단했습니다. 지한씨에 대해선 꼬투리도 못 잡을 거에요.
백묵이 막아냈단다. 생각치도 못한 서비스다.
- 거기에 더해서 알아냈습니다. 협회에 숨어 있던 마족.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랑 같이 일 하나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역으로 협회에 존재하는 마족의 정체까지 알아냈다 이말이지.
"좋네요."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 멀리 하늘 위로 검은 마기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대한민국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어슴푸레한 검은 연기.
과거에는 놈들이 우리를 노리고 침략해 왔다면.
이번에는 다를 거다.
우리 쪽에서 네 놈들을 사냥하겠다.
123화 운명의 사람(3)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마족들이 노리는 건 하나였다.
'전국에 존재하는 게이트의 브레이크.'
그리하여 얻게 되는 결과는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국가 기능을 마비 시키고 그 틈을 타 권력을 손에 넣는 것. 외부에는 일련의 과정이 그저 재해라고 여겨진다.
'아직 세계는 마족의 존재와 그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갑작스런 붕괴에 각국의 이권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세계는 혼돈의 양상을 띈다.
진상을 알리려는 시도는 차단 당하고, 마땅히 향해야 할 칼날은 인류 스스로를 향해 들이 밀어지는 셈이다.
'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나는 하늘에 모여들기 시작한 검은 마기를 응시했다. 마계에서 직접 흘러들어오는 마(魔)의 기운.
당장은 저기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 저 기운이 응축되어 게이트로 변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반대로말하면 그 전까지는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거다.'
- 그러면 판이 깔리는데로 다시 연락 드리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 S급 게이트 공략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백묵과의 통화가 끝이 났다.
만족스런 통화내용이었다.
협회에 숨어 있는 마족을 찾아낸 것도 모자라 내 정보를 감춰주기까지.
'백묵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유능하군.'
그는 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만한 투자를 해줄 리가 없으니.
이러한 상황은 내게 유리하다.
'협회에 존재하는 마족은 상위 마족.'
그것도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에 숨어들어 힘을 온존한 존재다. 일반 마족들과 달리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다.
그 정체는 협회의 부회장.
높은 직분인지라 사회에 가져 올 파장 또한 만만치 않을 터. 뭐, 그 부분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백묵에게 맡기는 게 낫다.
나는 내 일을 해야 한다.
정체가 들키지 않은 지금 좀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할 일은 많다. 우선은 신태양부터 만나야겠어. 레전더리 아이템도 아직 전해주지 않았고.'
나는 택시를 잡아 타고, 수호 길드가 공략 중인 게이트로 향했다.
국립 공원 한가운데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게이트 공략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이들 큰 사고로 이어질텐데.
멸망한 미래를 아는 나로서는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고 보이지만, 세간의 인식은 더 이상 게이트를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하여간에 엄청난 인기구만.'
나는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헌터의 이름이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팬들.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게 헌터다.
대한민국 1위 길드니 당연하다만.
은빛의 날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파다.
슥.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은빛의 날개와 달리 수호 길드는 안정적으로 공략에 성공한다.
슬슬 게이트 공략이 끝날 시간이다.
"나왔다! 나왔어!"
"꺄아! 여기 좀 봐줘요! 신태양!"
"고생하셨습니다!"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가 쉴틈 없이 터져나왔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익숙하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는 길드장 사최헌.
지친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안정적으로 S급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자신감.
1위 길드로서 활약했다는 자긍심.
그런 그들의 옆으로 수호 길드의 관계자가 접근했다. 사최헌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사최헌의 표정이 굳어진다.
"은빛의 날개가 최초 공략이라고······?"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 사최헌. 그러나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미소를 유지한 채 유유히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공략대는 인파를 지나 수호 길드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가려져 있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다.
'게이트는 안정적으로 닫혔다. 공략은 예정대로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천막 앞에서 보안 요원이 나를 막아섰지만.
"어, 스승님?! 무슨 일이세요?"
담요를 걸친 채 차를 받아먹던 신태양이 나를 먼저 알아봤다.
"널 좀 데려가려고."
"저를요? 잠시만요, 눈물 좀 닦겠습니다. 스승님께서 먼저 저를 불러주시다니, 이렇게 감격스러운 날이 올 줄이야."
과장 되게 눈물을 쓱쓱 닦아내는 신태양. 녀석은 천막 안을 가리켰다.
"잠시만요, 말씀 드리고 올게요."
"괜찮겠어? 공략이 끝난지 얼마 안 됐는데."
"물론이죠. 전 별로 한 것도 없어요. 그리고 스승님이 부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모른 척하겠습니까."
어차피 싫다고 해도 데려갈 거긴 했다.
"지금 분위기가 별로기는 한데, 잠시만요."
신태양은 공략대가 모인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안 좋은 이유는 뻔했다. 은빛의 날개에게 뒤쳐진 일 때문이겠지.
확고부동한 1위에 안주하고 있던 수호 길드에는 좋은 자극이 되겠지.
'멸망한 세계에서 수호 길드는 살아남지 못했다. 검성 신태양은 길드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3분 정도 지났을까, 천막을 열고 신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곤란한 표정이었다.
'허락을 못 받은 건가?'
그런데로 아이템이라도 전해주고 끝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머리를 긁적인 신태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 저희 길드장께서 스승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 * *
천막 안.
대한민국 1위 길드답게 넓고 쾌적했다. 각종 편의시설은 물론 에어컨까지 달려있다.
'장난 아니네.'
천막 자체가 공간 마법이 적용되어 있는 아이템인 모양. 이런 걸 보면 은빛의 날개가 갈 길이 멀다.
"이거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되네요. 어서 오시죠. 편하신 의자에 앉으세요."
별로라던 분위기라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이지한 헌터님 맞으시죠? 신태양 녀석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사최헌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신태양이 황급히 변명했다.
"많이는 안했어요. 조금 했어요. 조금."
"······."
"어쩌다보니 조금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이제와서는 상관 없어진 일이다. S급에 다다른 지금 내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건 오히려 독이다.
신태양의 스승이라는 이야기는 언론에 퍼졌다간 큰 화제가 되겠지만, 길드 내에서 도는 소문 정도라면 상관 없다.
사최헌.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 대한민국 1위의 헌터.
남자다운 호쾌한 인상이 매력적인 인물이다.
'대단한 사람이였지.'
F급 헌터인 내가 땜빵으로 게이트를 전전하던 당시 우상처럼 여겼던 인물.
'멸망한 세계의 영웅이 천성호였다면, 본래 대한민국의 영웅은 사최헌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영웅 협회가 아닌 길드에 속해 있으면서도 평판과 인지도 모두 1위를 달리던 명실공히 최강의 헌터.
그런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본론부터 말하죠. 이지한씨, 수호 길드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오오, 말했다. 역시 길드장."
"지한씨! 저희 길드에 오세요. 저희 되게 좋아요."
사최헌의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길드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둘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모였다.
"은빛의 날개가 이번 S급 게이트 최초 공략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지한씨가 계셨던 것도 방금 알았고요. 이전에 게이트 공략에서 큰 활약을 하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최헌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지한씨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을 드리는 거고요."
어쩐지 거절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저희 수호 길드 어떠십니까? 최고의 대우를 약속 드리죠."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아니, 그러고보니 신태양 녀석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기는 하다.
"······."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은빛의 날개의 윤지은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도 물론 기뻤지만.
대한민국 1위 길드에게 입단 제안을 받을 줄이야.
'정말로 이런 순간이 올 줄이야.'
나는 이런 날을 분명히 고대하고 기다렸다. 내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헌터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꿈 꿔보니까.
대한민국 1위 수호 길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헌터만이 발 딛을 수 있는 장소.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사최헌이 내게 직접 제안하고 있었다.
수호 길드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뻔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의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멸망한 세계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진심이십니까······? 그렇다면 은빛의 날개에 마음이 있으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게이트 공략은 용병으로 고용되었을 뿐입니다. 아직은 용병 신분이 편한지라 어디에 소속하고 싶단 생각은 안 드네요."
내가 하려는 일은 길드에 속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용병으로 고용해주시면 흔쾌히 오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흔쾌히 오겠다는 건 예의상 하는 말이다만.
수호 길드와는 언젠가 공략을 해보고 싶단 마음이 있는 것은 진심이다.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나를 붙잡진 않았다. 용병인 내가 언젠가는 길드에 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 수호 길드에서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신태양이 나에 대해서 굉장히 좋게 말해둔 게 작용한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길드원의 시선이 전부 호의적이다.
"이 녀석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온거죠? 데려 가시죠."
사최헌은 신태양을 집어 던지듯 넘겨줬다.
그리하여 신태양과 함께 천막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몰려드는 팬들을 뚫고 나오느라 굉장히 고생했다.
신태양의 스포츠카는 너무 눈에 띄어서 안 되고.
그냥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요? 기대 되네요."
"가보면 알아. 근데 괜찮겠어?"
나는 거듭 녀석의 의사를 확인했다.
"스승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런 각오 아주 좋다.
* * *
S급에 준하는 헌터 두 명이 훈련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
그거야 게이트 밖에는 없다.
대형 길드의 트레이닝 룸도 나쁘지 않지만 전력을 다하긴 어렵다.
나는 신태양과 함께 A급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백묵을 통해 미리 확인하고 잡아둔 게이트였다.
드넓은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 장소였다.
"스승님과 둘이서 게이트를 공략하는 건 또 처음이군요. 기대가 됩니다."
그리 말하며 검을 꺼내드는 신태양.
근데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공략을 왜 해."
"네?"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신태양.
나는 미리 구매해 둔 죽도를 두 자루 꺼내 들었다. 아이템으로 특수 제작된 무기라 부숴질 염려는 없다.
"게이트 공략을 하는 게 아닌가요?"
그 중 한 자루를 신태양에게 던져줬다. 영문을 모른 채 죽도를 받아든 신태양이 나를 바라봤다.
"응, 말했잖아. 훈련을 할 거라고."
"그런 말 없으셨는데요······. 그런데 훈련이라면 어떤 건가요?"
말을 안했던가.
큰 상관은 없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땅에 박았다.
『 에이나시아 영웅검(레전더리) 』
"훈련을 잘 마친다면 이걸 주마."
레전더리 아이템을 바라보는 신태양의 눈빛이 변했다. 못 믿겠다는 투였다.
"레, 레전더리잖아요. 저걸 주신다고요······?"
나는 죽도를 들고 신태양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살기를 느낀 신태양이 저도 모르게 죽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디까지나 훈련을 잘 마친다면."
신태양과의 훈련은 단순히 그의 전력을 증강 시키는데서 끝이 아니다.
내 능력의 강화도 포함 되어 있다.
'내가 소유한 유니크 심화 스킬은 총 두 개.'
힘, 체력, 민첩, 지력.
힘과 지력은 각각 영웅의 힘과 마력회로를 손에 넣었다. 남은 건 민첩과 체력.
그 중 민첩에 해당하는 스킬을 신태양이 가지고 있다.
'전수가 안되는 스킬이지만······.'
나는 이미테이션 장갑을 고쳐 꼈다.
스킬을 복사해주는 레전더리급 아이템이다.
이게 있으면 전수가 불가능한 스킬도 복사해 낼 수 있다.
『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합니다. 』
『 모든 항목을 활성화 합니다. 』
나는 죽도를 들어 올렸다. 검에 맺힌 오러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스, 스승님?"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두들겨 패기.
이건 미래의 네가 제시한 가장 효율 좋은 훈련법이니까.
124화 운명의 사람(4)
나는 신태양을 향해 죽도를 휘둘렀다.
악의는 없다.
미래에서 검성에게 많이 맞기는 했지만, 교육의 일환이었고.
또 다른 미래에서 신태양에게 후드려 맞기는 했지만 훈련의 일부였으니까.
콰앙!
갑작스레 휘두른 검이었지만, 신태양은 반사적으로 죽도를 들어 막아냈다.
"크윽."
『 동료 신태양이 스킬 '초(超)가속 Lv.7'을 발휘합니다. 』
이어서 몰아치는 연격도 전부 막아낼 정도의 스피드. 과연 미래의 검성이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타재간파의 신속(神速)은 전투가 거듭 될수록 빨라지는 스킬. 초반 속도는 초가속이 우세하다.
'확실히 빠르네.'
내가 미래에 있는 동안 신태양 또한 수호 길드에서 꾸준히 성장해왔다. 타재간파의 영향을 받았으니 획득하는 경험치도 4배.
신태양은 검을 바로 잡았다.
"이런 훈련이란 말이죠. 이해 했습니다. 스승님과 겨뤄볼 수 있다니······. 이거 좋네요. 계속해서 궁금했거든요. 스승님과 저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투지를 불태우는 녀석.
"그래? 잘 됐네."
나는 이미테이션 장갑의 효과를 발동했다. 양 손에서 희미한 빛이 솟아 오른다. 내가 복사할 스킬은 신태양이 가지고 있는 유니크 스킬 '초가속'.
『 스킬 '초가속'을 복사합니다. 』
『 해당 스킬을 1회 구현합니다. 』
한순간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몸이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
신태양이 급하게 검을 들어 방어했다.
"빨라지셨네요. 그래도 아직은 막을만 합니다."
여유롭다는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이미테이션 장갑은 스킬을 1회 복사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다. 그것도 유니크 이하의 스킬만.
'일반적으로 그리 좋은 능력은 아니다.'
복사한 스킬의 레벨은 1이 된다. 그야말로 짝퉁, 이미테이션인 거다.
하지만 그 효과가 20만배의 경험치와 합쳐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 한 번 따라한 것으로도 20만배의 경험을 하게 되니까.
촤륵!
『 유니크 스킬 '초가속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초가속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초가속 Lv.3'를 획득합니다. 』
순식간에 3레벨에 달하는 경험치가 내게로 흘러 들어왔다. 전수 스킬이 아닌 고유 유니크 스킬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속도다.
파앙!
신속과 겹쳐지는 내 죽도가 신태양을 향해 휘둘러졌다. 죽도를 막아내는 신태양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스킬 '초가속 Lv.4'를 획득합니다. 』
이윽고 신태양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이 날아든다. 여유롭던 녀석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녀석과 나의 격차는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Lv.10'을 발휘합니다. 』
『 레어 스킬 '태양류 검술 Lv.11'을 발휘합니다. 』
힘과 검술 모두 미래에서 배워 왔다. 미래의 신태양이 도달할 경지를 내가 앞질러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녀석이 나를 앞지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퍼버벅!
"커헉!"
연격을 맞고 바닥을 서너차례 굴러 간 신태양. 풀투성이가 된 채로 바위에 쳐박혔다.
"후우, 역시 쉽지 않네요."
그러나 기죽는 기색은 없다. 이전의 신태양이라면 충격에 빠져 못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부분은 성장했다는 건가.
녀석은 다시 일어나 검을 쥐었다.
나는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죽도를 들어 올렸다.
"그래, 그래야 패는 맛이 있······. 훈련이 되는거지."
"예?"
퍼버벅! 퍼버벅!
사정 없이 두드려 팼다. 녀석은 맞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게 덤벼들었다.
"크허억!"
아무리 생각해도 검성의 검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이다. 거기선 정말로 살기를 느낄 정도였으니.
"스, 스승님. 이제 더 이상은······."
퍼벅, 퍼버벅!
어쨌든 이 단순 무식한 방법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 타재간파 : 재능 개화의 가능성을 간파합니다. 』
『 신태양의 재능 '리미트 해제'의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불합리한 폭거에 대한 저항 - 3% 』
사전에 확인한 해당 재능의 개화 난이도는 SS.
그래서 그런지 개화 조건도 추상적이다.
"크아악! 스승님, 제가 정말 진심을 내면······."
퍼버벅!
"······."
미래의 본인이 한 말이라 그런지 효과는 확실하다.
몇 시간 동안 두들겨 패고 나니 7%가 더 올랐다. 상당히 빠른 속도다.
레벨 100이 되며 상승한 능력치와 자연 회복 스킬 덕분에 나도 지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으으으······."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신태양.
녀석이 날 올려다봤다. 나는 죽도를 내리고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신태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 드디어 끝인가요······?"
나는 녀석을 발로 뒤짚어 엎은 다음에 품에서 포션을 꺼내 들었다. 신태양의 입에 포션을 물려줬다.
꼴깍꼴깍.
"가, 감사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신태양.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다 끝나서 포션을 먹인 게 아니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나, 훈련 계속해야지."
뜨악한 표정의 신태양이 나를 쳐다본다.
"노, 농담이시죠?"
"내가 너한테 농담을 한 적이 있던가."
"······."
훈련은 계속 된다.
네가 강해질 때까지.
* * *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신태양을 데리고 장인 거리로 향했다.
'김건에게 새로운 장비의 제작을 부탁해야겠어.'
아무리 그래도 하루 종일 게이트에서 훈련만 할 수는 없었다. 상위 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타이밍이니.
"스승님과 제 격차는 하늘과 땅. 스승님은 신 나는 벌레······."
"······."
신태양 녀석은 넋이 나간 채로 내 뒤를 따라왔다. 조금 불쌍할 지경이다.
"정신차려. 여기야. 내가 말했던 아이템 제작자가 있다는 곳이."
"아, 그렇군요."
공방 근처에 오자, 아이템 제작자 김건이 마중을 나왔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져 있다.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이지한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래 멸망한 세계에선 또라이라고 불렸던 그였지만.
다시 확인한 미래에선 마족에 대항하기 위한 기지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설비가 대단했지.'
그가 가지게 될 기술력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제안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금방 내부로 안내 받았다. 이전에 봤던 공방 직원이 커피를 내왔다.
"그래서 제안이란 건······?"
"김건씨의 빛나는 재능을 그냥 놔두기는 아깝다고 생각해서요. 은빛의 날개와 전속 계약을 맺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네? 저, 전속 계약이요?"
성녀 채아람을 영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은빛의 날개의 윤지은과는 미리 얘기가 끝난 사항.
김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초대형 길드와 전속 계약을 맺는 건 장인에게도 꿈이나 마찬가지니까.'
어쩌다보니 은빛의 날개를 추천해주는 헤드 헌터가 된 기분이다. 어쨌든 중요한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는 것도 중요하다.
마족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한 장소론 거기만한 곳이 없다.
"관심이 있으시면 여기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나는 은빛의 날개의 명함을 김건에게 내밀었다. 옆에 있던 직원이 김건을 붙잡고서 마구 흔들었다.
"사, 사장님. 그러면 제 월급도 인상 되나요······?"
"무, 물론이죠. 최소 두 배? 아니 세 배로 하죠. 이,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지한씨 정말 감사합니다."
기뻐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제 아이템도 하나 만들어주시면 좋겠는데요."
나는 각종 마수들의 소재와 네임드 마수를 잡고 나온 영혼석을 늘어놨다. 여기에는 미래의 내가 잡아서 배낭에 보관해둔 소재들도 있었다.
그것을 보는 김건의 눈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 재료가 지금까지하고는 차원이 다르네요."
그야 A급 게이트에서 나온 최상급 재료니까.
은빛의 날개와 계약을 맺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아이템 제작하는데 쓰는 비용으로 50억을 드리겠습니다. 좋은 방어구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김건이 만든 아이템은 성장형이 된다. 따라서 지금 내가 착용한 방어구는 유니크 등급이지만, 능력치는 레전더리에 뒤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레전더리급을 기대해봐도 좋겠어.'
김건의 표정이 어느때보다 열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만들겠습니다!"
* * *
"특이한 사람이었네요. 스승님께서 직접 의뢰를 맡기실 정도라면 굉장한 실력이 있다는 건데······."
특이한 사람 수준이 아니다. 멸망한 세계의 기인 중 하나로 또라이라고 불렸으니까.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겠지.'
김건은 그 자리에서 재료를 들고 공방으로 뛰어갔다.
우리는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장인 거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면 이제 저희는 어디로 가나요?"
신태양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S급 게이트를 공략한 헌터에겐 보통 휴식 기간이 주어진다.
최소 일주일.
신태양을 그만큼 더 데리고 있을 수 있단 소리였다.
"알면서 왜 물어."
"······."
"그래도 저녁은 먹고 해야지."
하루 종일 게이트에서 수련을 해서 그런지 배가 고프다. 근처의 식당 골목으로 들어서니 음식 냄새가 좋기도 하고.
"최후의 만찬이라는 거군요."
침을 꿀꺽 삼킨 신태양.
메뉴는 이 녀석에게 고르게 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신태양이 고깃집을 바라봤다.
"혼자 먹는 건가요? 신기하네요. 저희도 저기서 먹을까요?"
그야 이목을 끌만도 했다. 아니, 끌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고깃집에 앉아 야무지게 쌈을 싸먹는 금발의 소녀.
'엘리스잖아.'
은빛의 날개에 왔다가 사라졌다길래 어디갔나 했는데.
이런 데에 있을 줄이야.
"스승님, 스마트폰으로 확인해봤는데 여기가 맛집이랍니다. 가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잠깐."
나는 가게 내부로 들어가 엘리스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쌈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는 엘리스.
"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런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내쪽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쌈을 삼킨 뒤, 된장국을 한 번 퍼먹은 엘리스.
먹을 건 끝까지 다 먹는구나.
녀석은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운명의 사람!"
"······운명의 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드디어 찾았어요!"
그렇게 말하고선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이제 어떻게 해요?"
"······."
나를 만난다는 목적은 있어도, 그 뒤까지는 그녀의 계획에 없었던 모양.
"스승님, 이 여자애랑 아는 사이셨나요?"
뒤늦게 나를 따라 온 신태양이 내 옆에 섰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선글라스랑 모자를 끼고 있다.
그래도 엘리스는 알아본 모양.
"한국의 수퍼 루키 신태양! 맞죠?"
"크흠, 들켰네. 사인이라도 해드려요? 그래서 스승님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죠?"
신태양의 모양새를 보니 아직 덜 굴렀나보다.
예상보다 엘리스를 더 빨리 만날 줄이야. 이거 신태양의 훈련에 큰 변화가 생기겠는데.
나는 엘리스의 앞 자리에 앉았다.
"일단 밥부터 먹자."
* * *
엘리스는 미래의 자신에게 예언을 받고 무작정 한국으로 왔단다. 분명 미래에서 만났던 엘리스가 손을 쓴 거겠지.
그러나 딱 거기까지.
'그 다음은 내게 맡긴다는 건가.'
신태양과 엘리스.
이 둘이 갖춰졌다면 망설일 건 없었다.
"앞으로 5일 뒤, 우리 셋이서 S급 게이트를 공략한다."
상위 마족 '선혈의 마족'을 잡기 위한 드림팀.
그게 바로 이 세 명이 될 거다.
"저 A급 헌터인데요······? 그리고 공략이라니 대체······?"
엘리스가 입을 벌리고선 나를 바라봤다. 이 시점에서 엘리스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A급 헌터다.
S급과 달리 A급 헌터의 이적은 국가 간의 문제로 번질 일은 없다.
"그건 걱정 안해도 돼."
엘리스를 위한 특별 훈련법도 알아왔다.
둘 다 열심히 구르다보면 해결 될 거다. 그렇고 말고.
"부, 분명히 운명의 사람이랬는데······."
울상을 짓는 엘리스.
불만이 있거든 둘 다 미래의 자신에게 따져라.
치이익.
신태양을 보라, 최후의 만찬을 위한 고기를 열심히 굽고 있지 않은가.
상위 마족 공략까지 5일.
『 <A등급> 한계돌파 퀘스트 』
- 목표 :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저지
- 클리어 보상 : ???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첫 단추.
반드시 꿰어내겠다.
125화 붉은 피가 흐르는 세계(1)
5일 후.
나는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다. 뒤이어 너덜너덜해진 신태양과 엘리스가 어기적 어기적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하루 쉬고서 내일 내가 알려주는 장소에 다시 모인다."
"······."
"······."
두 사람 모두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는 거겠지.
그만큼 훈련은 힘들었다. 신태양은 죽을만큼 맞았고, 엘리스는 죽기 직전까지 마력을 사용했다.
이계 규율 상점에서 구매 가능한 포션들이 거의 무한정 제공 되었다. 남아도는 포인트 덕이었다.
'신태양에게는 영웅의 힘을, 엘리스에게는 초마력 회로를 전수했다.'
거기에 더해 신태양의 새로운 재능을 개화 시켰으니, 준비는 다 끝난 셈.
"······다녀오겠습니다."
신태양이 사라졌다. 훈련에서 가장 고생한 건 녀석이지만, 본인이 강해졌다는 건 본인이 잘 알 거다.
엘리스는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소매를 붙잡았다.
"약속대로 찜질방에 데려다 주세요······."
"그래."
"와아······."
힘 없이 양 손을 들어 올리는 엘리스.
훈련을 잘 끝마치면 데려다 주기로 했었다.
미래에서 차와 함께 한과를 내줬을 떄부터 예상은 했다만, 한국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솔직히 엘리스에게 이런 훈련을 납득 시키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잘 따라올 줄이야.'
운명의 사람이라는 예언.
지금의 엘리스와의 연결 고리는 그게 전부였지만 엘리스는 필사적으로 거기에 매달렸다.
"확실히 운명은 바뀌겠네요. 이런 훈련을 더 받았다간 오래 못 살게 분명해요. 수명이 10년은 줄었을 거에요······."
그리 중얼거리는 엘리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선 내게 말한다.
"사부님, 그래도 덕분에 매우 강해진 것 같아요. S급의 눈 앞에 성큼 다가왔어요. 감사합니다."
"사부님?"
호칭을 따로 정해준 건 아닌데도 이렇게 부른다.
"이렇게 부르면 안되나요?"
"맘대로 해."
"감사합니다!"
녀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작 5일.
무언가를 크게 바꾸긴 어려운 시간이다. 그러나 타재간파의 효과로 이들의 성장 속도는 4배에서 5배가 되었다.
약 한 달 가량의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렇게 보면 이번 5일은 의미가 크다.
"오늘 하루는 편하게 쉬자."
"네, 기대할게요!"
힘들었던 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어느새 싱글벙글이 된 엘리스였다.
* * *
수호 길드 본사.
트레이닝 룸에는 헌터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뭐야, 오늘도 다들 여기에 있는 거야? 공략도 끝났는데 어디 좀 놀러 나가라. 신태양 그 녀석 처럼."
문을 연 선배 길드원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수호 길드에서 부길드장 다음으로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이시온이였다.
"그러는 선배도 훈련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뭐, 나도 그렇기는 한데."
후배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와서는 덤벨을 뺏어 들었다. 이시온이 저도 모르게 휘청였다.
"윽, 뭐야. 엄청 무거운데?"
"이 정도는 해야 운동이 되죠. 다들 진지하거든요."
그 말에 이시온이 주변을 둘러봤다. 선배가 온 줄도 모르고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거 참, 다들 너무 열심히 한다니까."
굳이 입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수호 길드는 은빛의 날개에 뒤쳐졌다.
그것도 처음으로.
아득한 격차를 벌리고 있다고 생각한 상대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 충격은 길드 내부에도 생생히 전달 되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 이시온이 옆에 있던 마력 봉인구를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자동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신태양이었다.
이시온이 반갑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오, 신태양이잖아. 너 이 자식. 스승님하고 얼마나 재밌게 놀았으면 연락도 안······."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신태양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니, 분위기라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풍기는 아우라 자체가 변해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태양아······?"
트레이닝 룸에 있던 헌터들도 훈련을 멈추고 신태양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 사이를 뚜벅 뚜벅 걸어서 지나치는 신태양.
트레이닝 룸 전체가 침묵에 휩싸였다.
'원래 저런 느낌 아니지 않았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신태양의 눈빛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선하고 순수한 청년 같던 그의 눈가에 독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평소 장난스러운 태도를 이시온마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묻지 못할 정도였다.
철컥.
신태양은 보관함에 있던 가방 하나를 꺼내 어깨에 매더니 다시 트레이닝 룸 밖으로 향했다.
그가 빠져나갈 때까지 트레이닝 룸이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뭐, 뭐야? 5일 동안 뭔 일이······.. 누구 아는 사람 없어?"
"몰라요. 스승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근데 그 정도로 사람이 저렇게 변하나······."
여러가지 억측이 난무하던 가운데.
지이잉—.
트레이닝 룸의 자동문이 다시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길드장 사최헌이었다.
"······방금 여기에 있던 사람 누구였어?"
부스스한 머리를 한 그대로였다. 자다가 깨서 급하게 달려 온 모양새였다.
그런 사최헌의 모습에 이시온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신태양이지. 우리 길드장께서 애지중지하는 수퍼 루키 신태양."
"아니, 농담하지 말고. 나 진지하다."
"진짜로 신태양이라니까."
이시온의 말에 운동을 하던 헌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리가······."
사최헌은 못 믿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신태양이 사라진 복도 끝에 머물렀다.
그의 특기 중 하나는 타인의 기운을 살피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잠을 자던 그가 이곳까지 뛰쳐 나온 이유였다. 기운은 어느새 건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정말로 신태양이었단 말이야?'
길드원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최헌이 아는 신태양이라기엔 너무 섬뜩한 기운이었다. 침을 삼킨 사최헌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태양한테 당장 전화 해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 * *
다음날.
나와 엘리스는 산에 오르고 있었다.
"이게 한국의 산······! 풍경이 너무 멋져요. 우와, 천연기념물인 고라니잖아요! 사부님, 쓰다듬어 봐도 되나요?"
"잡을 수 있다면."
엘리스는 등 뒤에 큰 배낭을 맨 채로 산 여기저기를 뛰어 다녔다. 근데 한국의 산이나 외국 산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 이건 대한민국의 맥반석 계란! 식혜! 드라마에서만 보던 걸 진짜로 먹어 보게 되다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어제 찜질방에서부터 시작해서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다. 이 정도면 한국을 좋아하는 걸 넘었다.
목적지인 산 정상.
"야—호!"
"늦는군."
엘리스가 건네 준 김밥을 씹으며 신태양을 기다렸다.
우우우······.
하늘 위에는 붉은 마기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스산함을 넘어 불길함까지 느껴진다.
하늘과 가까운 이 장소가 아니면 확인할 수조차 없는 현상이다.
그 가운데에 선명한 붉은색의 게이트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번 게이트는 선혈의 마족이 독단으로 만들어낸 게이트다.'
상위 선혈의 마족.
후에 군단장 중 하나가 될 놈이다. 나약의 마족과 페어로 묶여다녀 처리하기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성격이 급하다고 그랬지.'
나약의 마족의 지시를 무시하고 뛰쳐나와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만들어낸 게이트다.
내가 그들에게 정말로 위협이 될 존재라면 이런 기습적인 게이트도 막아낼 거라는 미친 발상일 거다.
'실제로 막으러 가게 되었으니, 전략은 유효하다만.'
두 상위 마족이 서로 나뉘어진 지금이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다.
"어, 사부님! 왔어요!"
저 아래 보이던 신태양이 빠르게 정상까지 뛰어왔다. 산을 정신 없이 뛰어 왔는지 머리에 나뭇잎을 붙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길드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제가 진짜 신태양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나뭇잎을 떼어내는 신태양의 미간이 좁혀져 있었다.
'······너무 많이 팼나.'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기는했다.
5일 동안 두드려 맞으면 사람이 변하는 게 당연하기는 하다. 괜히 애 하나 버려 놓은 게 아닌가 걱정이다.
그래도 같은 훈련을 거쳤을 미래의 신태양은 멀쩡해 보였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리고 나도 그만큼은 쳐 맞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불굴의 정신과 지고의 정신 스킬이 있다는 차이 정도겠다.
"왔으니 괜찮아. 다 모였으니 들어가자."
"후우, 힘내봐요."
"스승님과 한 훈련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족에 대한 것은 이미 설명을 끝내 놨다.
신태양은 이미 마족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고, 엘리스는 그냥 무조건 날 믿기로 한 모양.
주변을 지키는 마족은 없었다.
'얼마든지 들어와 보라는 건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게이트 내부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며 으스스한 분위기의 검은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별 한 점 없는 검은 하늘 위에 떠오른 핏빛의 달.
그 아래로 보이는 귀족의 성.
흐르는 강물조차 새빨갛다.
분위기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붉은 피 : 모든 대상은 붉은 피를 가지게 됩니다. 』
"제약······?"
"인간의 피는 원래 붉으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 그렇죠. 다행이네요, 외계인이 아니라."
푸른 피를 가진 외계인이었어도 디메리트는 없었을 거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제약이다.
어디까지나 제약은 그렇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려 성을 가리켰다.
"목적지는 저기."
이곳은 검은 숲의 한가운데다. 도중에 마주칠 마수들까지 생각하면 4일 정도는 걸리겠다.
내가 가장 앞장을 섰다. 중간이 엘리스, 마지막이 신태양이다.
'S급 게이트를 세 명이서 공략할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정답은 예스다.
오히려 세 명이 아니면 안된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마수들은 특별하기에.
찌지직! 찌지직!
검은 박쥐 떼가 숲에서 날아올랐다. 위협적으로 우리의 주변을 배회하는 수 백마리의 흡혈 박쥐들.
"여긴 제가 하겠습니다."
신태양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 손을 올렸다. 내가 건네 준 레전더리 '에이나시아 영웅검'이었다.
'검집은 아이템인 건가?'
길드에 들렀다더니 가져 온 모양. 원래는 검집이 없는 검이었다.
『 동료 신태양이 스킬 '태양류 발도술 Lv.7'을 발휘합니다. 』
번쩍!
신태양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밝은 빛이 점멸했다. 동시에 박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박쥐들은 죽지 않았다. 검은 기운을 내뿜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눈.
뱀파이어들이었다.
"크으윽. 네 놈들······. 조금은 하는구나."
엘리스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수가 말을 해요!"
"권속이니까."
뱀파이어의 숫자는 총 20. 발도술에 당한 데미지는 그리 크지 않아보였다. 그저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
놈은 바로 협박을 시작했다.
"네 놈들이 누굴 건드렸는지 알기는 하나?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평생을 노예처럼 부려주겠다."
"나는 저기 저 여자애가 좋겠어."
"나는 튼튼해 보이는 남자."
뱀파이어의 특징은 권속을 삼는다는 거다. 상위 뱀파이어에게 잘못 당하기라도 했다간 꼼짝 없이 헌터 하나를 빼앗기는 셈.
회복하려면 고위급 해주 스킬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지원이 오히려 독이 되는 이유였다.
'아쉽지만 성녀 채아람은 아직 준비가 덜 되서 어쩔 수 없다.'
스킬 습득은 단순 훈련으로 커버되는 게 아니니까.
"······가소롭네."
뒤에 있던 신태양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네 놈들이 스승님을 노예로 부린다고? 쯧."
잡몹처럼 보이는 뱀파이어들이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선혈의 마족의 권속이다.
S급 게이트의 마수인만큼 기본적인 강함도 무시 못할 정도.
하지만 신태양의 성장도 눈부시다.
"개소리가 따로 없군."
신태양의 검 위로 푸른 오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볍게 달려나가는 신태양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생겨났다.
"멍청하긴! 우리한테 달려 오다니! 수의 차이를 모르는 건가?"
"네 놈부터 노예로 삼아주마!"
그러나 다음 순간.
신태양의 형체가 사라졌다. 가벼운 잔상을 남긴 채 사라진 신태양은 뱀파이어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콰과과과과——!
푸른 섬광이 폭격처럼 떨어져내렸다. 자리에 서 있던 뱀파이어들은 무차별적인 폭격에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운 좋게 살아남은 뱀파이어 하나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이, 이게 무슨······?'
신태양의 새로운 재능 '리미트 해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쳐부순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모든 한계를 돌파하고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 신태양의 레벨이 일시적으로 30 상승합니다. 』
서걱—!
신태양이 뱀파이어의 목을 가볍게 잘라냈다.
"가시죠, 스승님."
믿음직한 제자가 그렇게 말했다.
126화 붉은 피가 흐르는 세계(2)
"크하핫!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붉은 루비가 잔뜩 박힌 핏빛의 왕좌.
선혈의 마족은 자신의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폭소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와 대적자까지 둘 다 처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여기에 있는데, 멍청하기는."
그녀는 나약의 마족 몰래 S급 게이트를 생성했다.
일반적인 게이트가 아니었다.
마계로부터 넘어 온 특수한 마기로 이뤄진 게이트.
충분한 양의 마기가 모이기만하면 기폭제가 되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게이트의 던전 브레이크를 촉발 시킬 것이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도화선.'
그녀는 일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쯧, 협회에 있는 마족과 협력한다더니. 결국 아무런 흔적도 못 찾고 말이야. 그럴 바에는 이쪽에서 끌어들이는 게 훨씬 낫지."
차원 간의 억지력.
그것은 마계에서 이곳 문명계로 넘어오는 상위 마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선혈의 마족에게는 인간 하나 쯤은 가뿐히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느릿하게 행동해 봤자 그 인간 놈에게 앞질러질 뿐이다 이거지. 어때, 내 말이 맞지 않아?"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녀의 발 앞에 조아린 세 명의 권속.
뱀파이어 군단의 수장 순혈 '드라구트'.
화염의 용인족 '화이아스'.
독의 용인족 '폴몬'.
그녀가 특히 아끼는 권속들이었다. 실력과 자질 면에서 가장 뛰어난 놈들이었다.
그런 권속을 살피던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응? 한 명이 없는데."
아이스 드래곤의 피를 이어 받은 용인족 '하렐'이 없었다.
그녀의 물음에 독 용인족 폴몬이 고개를 숙였다.
"하렐은 지난 S급 게이트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간에게 당한듯 합니다."
"그래? 쓸만한 놈이었는데, 아쉽네. 쩝."
선혈의 마족이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의 피를 이은 용인족은 뛰어난 속성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마족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권속인데.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힘의 논리에 의해 약자는 패배하는 게 당연하다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오히려 나약의 마족이 옆에 있었다면 대적자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얻어 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겠어. 마족을 위협하는 대적자가 정말로 유능한 놈이라면 이 게이트도 찾아 오겠지. 아니면 인간 놈들이라도 왕창 죽이던가."
실로 단순하다 못해 계획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작전.
그러나, 그녀의 권속들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다.
선혈의 마족이 가진 힘 자체를 동경하기 때문이었다.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대적자도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요."
그녀에겐 계획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래, 만약 여기까지 대적자가 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아. 대적자가 무능하다는 증거가 될테니까. 크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그 순간이었다.
콰과과과—!
성의 창 너머로 푸른 빛의 섬광이 번뜩였다. 멀리 떨어진 장소였으나, 이곳까지 바람이 불어 올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바라보는 선혈의 마족.
"뭐야, 이렇게 빨리 왔다고?"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반면 뱀파이어들의 수장인 드라구트의 얼굴은 굳어졌다. 부하 뱀파이어들 스물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아무리 적이 강하더라도, 방금 그 공격 한 번에 몰상 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드라구트가 창틀 위로 올라섰다. 그는 순식간에 검은 박쥐떼가 되어 흩어졌다.
"심심하던 찰나에 잘 됐다. 너희 둘도 가서 상황이나 살펴봐. 만약에라도 대적자라면 날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용인족 화이아스가 휘파람을 불자, 성의 창 위로 와이번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와이번의 위에 올라탄 폴몬과 화이아스가 빠르게 폭발이 일어난 장소로 향했다.
붉은 피가 흐르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권속인 뱀파이어는 무적이나 다름 없다. 인간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길 상대가 아닌 것이다.
"정말로 대적자라면 좋겠는데 말이야."
바깥을 바라보는 선혈의 마족의 눈이 붉게 빛났다.
하늘 위에 떠오른 핏빛의 달 또한 더욱 붉어져 가고 있었다.
* * *
재능 '리미트 해제'.
그 효과는 레벨 30의 증가.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지대하다.
20단위로 상승하던 등급은 100이 넘어가면 50 단위로 바뀐다.
레벨 100부터 149까지가 S급 헌터.
150부터 199까지가 SS급 헌터이다.
현 시점 SS급 헌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신태양의 레벨은 100 초반.'
리미트 해제가 가져오는 능력치 증가는 어마어마했다.
콰과과과—!
미친듯이 숲을 헤짚는 신태양의 검격. 뱀파이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크아악!"
"도, 도망쳐······!"
나타나는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휩쓸고 다니다보니 숲이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
"굉장하네요. 역시 대한민국의 신예! 괜히 수호 길드에서 자랑하는 게 아니었네요."
엘리스는 어디선가 카메라 비슷한 아이템을 꺼내 신태양을 찍기 시작했다. 한국 관련된 거라면 모조리 꿰고 있는 모양이다.
녀석의 카메라가 나를 향했다.
찰칵찰칵.
"왜 사부가 대한민국에서 알려지지 않았는지가 미스테리에요. 신태양군을 압도할 정도의 실력자인데······."
"스승님은 노출되는 걸 별로 좋아하시지 않거든. 은빛의 날개에 있는 헌터들도 스승님께서 찾아내신 거야."
뱀파이어들을 처리한 신태양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엑, 정말요? 그러면 사부님은 대한민국의 보이지 않는 큰 손······?"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엘리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창한 게 아니다. 숨겨져 있는 영웅들을 미리 발굴해냈을 뿐. 나를 드러내지 않은 건 그냥 내가 약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으니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고.
'한계 돌파 퀘스트를 착실하게 클리어한 덕분에 내 능력치는 다른 S급들보다 훨씬 높다.'
능력치의 배수 증가.
미래에서 배워 온 스킬의 덕도 있겠지만, 기초 능력의 증가는 무시할 게 못 된다. 그게 내가 신태양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잠깐만요, 저기······!"
엘리스가 하늘을 가리켰다. 달빛 아래 와이번의 한 마리의 그림자가 보였다.
뀨웃!
내 어깨보호구로 변해 있던 오르티마가 튀어나왔다.
"우왓, 얘는 뭔가요?"
"스승님의 펫. 이런 걸로 놀라다니, 아직 멀었구나."
"으윽."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신태양이 씩 웃었다. 별 의미도 없는 걸로 경쟁을 다 한다.
오르티마가 와이번을 바라보며 통통 튀어 올랐다.
'보아하니 흡수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S급 게이트에서도 몇 등장하지 않는 게 와이번이다. 드래곤의 하위종이지만 그 공격력과 마력 덕에 최상급 마수로 취급된다.
비행까지 할 수 있으니 엄청난 전력이 되는 건 덤이다.
기회가 된다면 잡아보고 싶은데.
"어, 다가오는데요?"
와이번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심상치 않은 기세로.
심지어 날아오는 와이번의 주둥이에는 붉은 빛이 맺혀 있었다. 다음 순간 놈의 입에서 붉은 브레스가 발사되었다.
콰아아—!
"제가 하겠습니다."
앞으로 뛰어나간 신태양의 일자베기가 브레스를 반으로 갈랐다. 좌우로 퍼져나가는 브레스.
검은 숲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불길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오, 꽤 하는 놈이 있구만. 그런데 뱀파이어 놈이 우리보다 늦을 줄이야."
"원래 생색만 내는 놈이니까."
와이번의 거센 날개짓이 만들어 낸 바람에 불길은 제압되었다. 와이번은 우리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와이번에 타고 있는 것은 두 명의 용인족이었다.
지난번에 쓰러뜨린 얼음 속성의 용인족과 같은 권속들. 각자 손에 창과 검을 들고 있었다.
"잠깐······. 네 녀석은······."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보랏빛 비늘을 가진 용인족이었다. 놈은 살기를 뿜어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지난번 S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 있었던 놈이군. 꽤 활약하던데. 설마 네가 대적자였나?"
저런 용인족은 본 적이 없었는데.
"아, 나는 S급 게이트 독의 늪지대에 있던 권속이다. 이거, 흥미가 돋는군. 그때하고는 멤버가다른 것 같은데."
그제서야 대강 파악이 됐다. 은빛의 날개 1팀과 공략했던 게이트에 숨어 있었나보군. 직접 본 것과 별개로 정보는 알고 있었다.
독 속성 용인족 폴몬이다.
"대적자인지 아닌지는 실력을 확인해보면 되겠지."
"인간 세 명으로 게이트에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우스운데."
와이번에서 내린 두 마리의 용인족은 각자 무기를 든 채 천천히 다가왔다.
"어떻게 할까요?"
신태양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들은 선혈의 마족이 가진 권속 중에서도 강한 자들이다.
"오르티마, 목룡으로 변해라."
쿠구구구······!
내 옆에 있던 오르티마가 몸을 부풀리며 거대한 크기의 목룡으로 변화했다.
"우왓?! 사, 사부님?"
나는 엘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양 손으로 들어서 목룡의 머리에 태웠다.
"이제부터 둘이 한 몸이라고 생각해. 둘이서 와이번을 노려."
"네, 넵."
인벤토리에서 쌍권총을 꺼내 손에 쥔 엘리스. 레벨이 꽤 올랐다지만, 엘리스는 A급 상위다. 오르티마와 페어를 맺는 게 낫다.
"저 빨강 놈은 신태양, 네가 상대하면 되겠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휘리릭.
레전더리급 검을 돌리며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신태양.
두 마리의 용인족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뱀파이어 몇 마리 쓰러뜨렸다고 자신만만해졌나본데."
"한 번 실력을 확인해 볼까."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드는 두 마리의 용인족. 와이번 또한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내 상대는 보랏빛의 폴몬이다.
빠른 속도로 치고 나온 녀석의 창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 유니크 스킬 '초가속 Lv.10'을 발휘합니다. 』
놈의 공격이 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한 순간.
푸쉬익!
폴몬의 몸에서 보랏빛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그 타이밍이 절묘해 흡입할 수 밖에 없었다. 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나는 포이즈닉 드래곤의 피를 이은 용인족 폴몬이다! 독을 흡입했으니, 네 녀석은 이제 끝이다!"
확실히 마시기는 했지만.
『 스킬 '독 면역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독에 대한 완전 면역 3초 』
이미 독 늪지대에서 면역력을 크게 키우고 왔다. 심지어 채우지 못한 11레벨까지 달성하며 얻은 독 면역 3초.
"고맙군."
"뭣?"
독이 통하지 않자, 놈이 잠시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서걱—!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데구르르···.
폴몬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상위 마족의 권속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다.
보아하니 신태양도 화염 속성 용인족을 압도하고 있었다. 검이 치열하게 부딪히지만, 신태양은 얼굴에 여유가 넘쳐 흐른다.
'오히려 가지고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대편의 엘리스도 목룡의 머리 위에서 열심히 권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타다당! 타당!
주춤하는 와이번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목룡 오르티마.
우리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이겼어요!"
"생각보다 별 거 없네요."
나는 쓰러져 있는 와이번에게로 다가갔다.
"오르티마, 녀석을 먹어라."
오르티마는 기쁘다는 듯 와이번에게로 뛰어들었다. 녀석도 마공학 드래곤과 목룡을 흡수한 뒤로 많이 강해졌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와이번을 흡수합니다. 』
『 와이번(오르티마) Lv.1 』
나는 그 위에 올라탔다. 엘리스와 신태양이 타기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크다. 와이번이 날개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러면 이제 성을 향해 가는 겁니까?"
"아니."
놈들이 말했듯이 아직 강한 권속 하나가 남아 있을 거다.
뱀파이어 군단의 수장 '드라구트'.
그가 이끄는 수 천의 뱀파이어들.
"자, 잠깐 저거 뭐에요······?!"
공중에서보니 명확하게 보인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새까만 물결.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전부 뱀파이어겠군. 태양아."
"네, 스승님."
"사냥의 시간이다."
퍼억.
나는 신태양을 발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예에?!"
얼빠진 표정을 한 채 땅으로 떨어지는 신태양. 내 행동을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마음이 아프지만······. 너는 굴러야 한다.
'방금 전투를 통해서 확실히 확인했다.'
타재간파의 첫번째 재능개화가 5배였다면.
두번째 재능을 개화한 너는.
적어도 수십 배, 아니 어쩌면 100배의 경험치를 획득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뱀파이어들은 막대한 경험치 덩어리나 다름 없다.
내게는 레벨 제한이 있어 무의미한 놈들이지만.
너한테는 다를 거다.
그래도 정 위험해지면 도와주마.
"힘내라."
"스, 스승님!!!!!"
소리치는 신태양을 뒤로하고.
와이번이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127화 붉은 피가 흐르는 세계(3)
순혈 뱀파이어 '드라구트'.
그는 선혈의 마족의 권속.
수 천의 뱀파이어들을 이끄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하게 행동했다.
뒤쪽으로 용인족 두 마리가 따라 붙었을 때 그는 일부러 속력을 줄였다.
'내 부하들 스물이 단칼에 당했다. 인간이라고 해도 얕볼 상대가 아니야.'
그런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서걱—!
두 용인족이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당했다. 드라구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혈귀로 변하지도 못하고 죽을 정도란 말인가. 아무리 방심했다고 한들······.'
선혈의 마족에게 받은 능력 '혈귀(血鬼)'.
그것을 사용하면 능력치를 단숨에 불릴 수 있었을 것을. 하사 받은 힘조차 활용하지 못하고 죽은 놈들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저래선 체력도 못 빼고 개죽음을 당한 꼴 아닌가.
끌끌.
혀를 찬 드라구트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자가 대적자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미리 준비해 뒀던 수 천의 군세의 진격을 명했다. 숲 속에 대기하고 있던 수 천의 군세가 수 만의 박쥐가 되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 행렬은 마치 검은 해일과도 같다.
핏빛의 달 아래 숲을 뒤덮으며 나아가는 무수한 박쥐떼.
드라구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내가 나설 것도 없다. 압도적인 수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니.'
그의 그런 생각은 얼마가지 않아 뒤짚어 졌다.
콰아아아—!
밤하늘을 뒤덮는 푸른 섬광.
"······뭣이?"
뱀파이어의 파도 앞에서 정면으로 저항하는 존재.
신태양이었다.
"으아아아아!"
스승에 의해 땅으로 떨어진 신태양은 죽어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푸른 오러에 휩싸인 검이 하늘과 땅을 끊임 없이 수 놓았다.
콰앙! 콰앙!
그의 주변에 안착한 뱀파이어들이 붉은 기운을 쏘아 보냈지만, 신태양의 검이 쏘아내는 마력의 광휘가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전장을 휩쓰는 한 명의 영웅.
뱀파이어들은 무력했다.
"크아아악!"
"저 인간 놈!"
"잡아!"
그들은 전 방위에서 달려들어도 신태양의 옷자락하나 스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격차는 뱀파이어가 죽어나갈 때마다 커져만 갔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태양의 이마로 한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보다 확신에 차있었다.
떨어지는 순간까지만해도 스승님을 조금 원망했다. 아니, 지난 5일 동안 원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훈련을 빙자한 압도적인 폭력.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서 신태양은 무력했다.
그럼에도 신태양은 스승을 여전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 뿐이겠는가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신태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지만 신태양은 전에 없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강해지고 있다.'
정말로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수호 길드에 있었던 어느 순간보다, 최근 일주일간의 훈련에서의 변화가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죽여라! 죽여서 권속으로 만들어!"
"목을 물어 뜯어!"
"이 버러지 같은 인간이 어디를······."
이를 악물며 달려드는 뱀파이어들.
촤아아악!
처음에는 버겁던 그들의 공세도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신태양의 검이 질풍처럼 그들을 베어내고 잘라냈다. 그럴 수록 몸은 가벼워지고, 검을 쥔 손의 힘은 강해져만 간다.
"무슨······. 무슨 이런 일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라구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군을 뚫어내는 것으로도 기겁할 노릇인데,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고작 인간 하나를 못 당해서 이 꼬락서니라니, 전부 달려들어라!"
밤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박쥐들이 신태양을 구처럼 감쌌다.
완벽한 포위를 했다고 생각한 순간.
푸른 섬광이 구를 꿰뚫고 터져나왔다.
숲을 미친듯이 가로지르는 푸른 빛줄기.
그곳을 가로막는 뱀파이어들은 낙엽처럼 쓸려나갈 뿐이었다.
실시간으로 부하들이 쓰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드라구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대적자······? 저것이 대적자란 말인가?'
드라구트는 부하들을 물렸다. 이미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더 이상의 진격은 무의미했다.
급하게 퇴각하는 뱀파이어들.
땅 위에 선 신태양의 시선이 밤하늘의 드라구트에게로 향했다.
"네가 이 녀석들의 대장인가?"
독기로 번들거리는 신태양의 눈빛.
그 앞에선 드라구트도 한순간 섬칫함을 느낄 정도였다.
이내, 드라구트는 웃음을 지었다.
"하하, 좋다. 대적자, 네 놈이라면 내 상대로 충분하겠지!"
그가 붉은 검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