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543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무력의 마족이 쓰러지고 다음 내 앞으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타재간파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습니다. 』
『 새로운 장(章)이 추가됩니다. 』
『 타재간파의 서(書) : 제 1장 』
- 1일 1회 포인트 소모 없이 각 능력을 활성화 할 수 있습니다.
- 이후 사용시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오.'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약 3만 포인트가 소모됐었다. 지속적으로 포인트가 보충되고 있다고는 하나, 부담이 되는 양이었다.
'그걸 하루에 한 번 공짜로 쓸 수 있다니.'
심지어 지금이 제 1장이라는 건 이 능력이 더욱 진화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이건 큰데.'
앞으로의 내 성장을 더욱 빠르게 해줄 무기나 다름 없다.
'매일 한 번씩 쓰면 그게 대체 얼마냐. 게이트를 하루에 하나 공략하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헌터들이었다.
"후우, 이게 마족의 무서움인 건가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네요."
"너무 무력했습니다. 제약이란 게 진짜 말도 안되네요."
그들 모두 지친 표정이었다.
나를 포함한 은빛의 날개가 무력의 마족과 전투하는 동안, 그들도 뒤쪽에서 나타나는 골렘들을 처리했다.
"스승님."
신태양이 내쪽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 이런 놈들하고 싸워 오신 겁니까. 강하신 줄은 알았지만······."
"야, 너도 할 수 있어."
왠지 기죽으려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해줬다. 신태양의 손에 들린 부러진 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모양이다.
말재주가 없어 더 해줄 말은 없지만.
잘했다.
"네, 스승님. 더 열심히 정진해야겠네요."
신태양은 더 강해져야 한다.상대가 나빴을 뿐이다라고 말하기엔 앞으로 나올 마족들의 제약은 더욱 가차 없다.
헌터들이 쌓아 온 노력과 경험을 일순에 부정하는 제약.
미래의 많은 영웅들도 그 앞에 좌절하며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더더욱 철저히 대비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거, 위험한데요? 저 멀리 언데드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수색을 하러 나갔던 눈 좋은 헌터가 돌아왔다. 내게도 보인다. 바글바글한 검은 무리가.
'지시의 마족의 권속들인가.'
놈은 수 백 마리의 권속을 거느린 마족. 지시 하에 놓인 권속들의 전투력은 A급 헌터와 맞먹을 거다.
'소모전이 되면 승산은 희박하다.'
여기에 있는 인원 전부를 부딪혀도 부족하다. 대부분이 A급 헌터다.
S급 헌터인 천성호가 하나 끼어 있다지만 몇 백의 A급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물량전, 앞에서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지는 게 당연하다.'
평소였다면 빠르게 지시의 마족을 쓰러뜨리는 작전으로 갔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다른 돌파구가 있다.
"오르티마, 목룡 몰테인으로 변해."
나는 오르티마를 불러왔다. 새끼용의 모습이었던 녀석이 액체처럼 꿀렁이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목룡으로 불어났다.
"뭐, 뭐야?"
"저거 뭡니까?"
"이런 곳에서 용이······?"
헌터들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크기에 사람들이 압도되는 게 보였다.
나는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제가 임시로 소환한 녀석입니다."
그대로 목룡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대부분은 제가 처리할테니, 여기까지 빠져나오는 놈들을 처리해주세요. 어떤 제약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나는 무리를 둘러 보는 척을 했다.
"혹시 모르니 한 사람 정도 따라왔으면 하는데······."
내 말에 천성호와 진세아가 손을 들었다.
"내가 갈래요!"
"형, 저랑 가요!"
나는 그 둘을 무시하고 영광 길드의 뒤편에 있는 김상욱을 골랐다.
"저랑 같이 가시죠."
내 말에 김상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몰테인의 머리 위로 올라섰다.
"엥, 저 어디서 아저씨는 봤던 것 같은데······?"
진세아나 다른 이들이 알아보기 전에 김상욱을 태우고 언데드 무리를 향해 오르티마를 출발 시켰다. 땅을 분쇄하며 시원하게 나아가는 목룡.
쿠구구구······!
김상욱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제 작전이 어떻게 됩니까?"
"언데드들을 쓸어버리고, 지시의 마족을 처리한다. 네가 나를 설득해서 놈의 앞으로 데려간 걸로 하자고."
"그거 좋네요."
지시의 마족은 아직도 김상욱이 배신자인 걸로 알고 있다. 그 허점을 노리면 쉽게 이길지도 모른다.
'문제는 전투의 마족인데.'
아직까지 놈이 출현한 기색은 없다. 결국 쓰러뜨려야 하는 건 변함이 없지만.
우선은 언데드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부터다.
타악.
나는 목룡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뒤이어 김상욱도 착지했다.
"가라, 오르티마."
검은 세계수의 수호자였던, 목룡 몰테인. 내 데미지가 10배가 되어서도 고전하던 상대다.
쿠구구구—!
그런 녀석을 병사들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열 안쪽으로 파고든 오르티마의 돌진.
콰아앙!
언데드 병사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크아악!"
"괴물이다!"
"진형을 갖춰라!"
진형이 붕괴되고, 놈들이 들고 있던 무기들이 바닥을 구른다. 언데드들이 검을 들어 저항하지만, 압도적인 크기 차이 앞에서는 사소한 일이었다.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 Lv.105 → 108 』
"죽여버려! 쏟아부어라!"
"마족이시여!"
권속들인만큼 지성을 가지고 대항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선 지성이 쓸모가 없는 법.
콰앙!
꼬리치기 한 번에 엄청난 양의 경험치가 오르티마에게로 흘러들어간다.
"으아아!"
엄청난 속도의 레벨업이다.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 Lv.108 → 110 』
권속 하나 하나의 힘이 강력하다는 의미는, 그 하나 하나에 담긴 경험치가 막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르티마는 마음껏 날뛰며 전장을 누볐다.
콰과과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파괴력 앞에서 언데드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몸에 달라 붙어 검을 휘두르는 녀석도 있었지만, 몰테인은 목룡(木龍)이다.
조금 잘라낸다고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르티마를 분노하게 할 뿐.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마구자비로 날뛰는 녀석의 레벨은 순식간에 최대치에 도달했다.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가 Lv.120에 도달하였습니다. 』
『 목룡이 한단계 진화합니다. 』
101화 마족 학살자(3)
승리를 자신하던 지시의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뭣?"
병사들을 향해 달려든 거대한 목룡(木龍).
자신이 자랑하는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목룡 몰테인.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환상계에 존재하는 세계수를 수호하는 존재. 마족의 도구로 삼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게 왜 저 인간의 손에 들어가 있는 건지.
콰득, 콰드드득!
놈이 몸을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수십의 병사가 전투불능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땅을 파헤치며 돌진하는 놈의 공격을 막아낼 수단이 없었다.
콰아앙!
심지어 목룡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가 날렵해지고, 공격에 더 큰 힘이 실린다.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저런 말도 안되는 놈이······.'
압도적인 병기 앞에서 병사들의 전술이나 작전은 무의미했다. 가지고 있는 병사들은 A급. 약한 수준은 아니지만, 저런 괴물에게 대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부름에 응하라, 내 권속들이여."
지시의 마족은 마기를 쏟아내 숨겨두고 있던 병력을 꺼내들었다. 안개처럼 퍼져나간 마기 속에서 권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놈들까지 꺼내게 될 줄이야.'
이들은 마법을 쓸 수 있는 특수한 권속들.
진형을 잡고 파괴적인 마법을 사용한다면 전황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목룡을 향해 모든 마법을 들이부어라."
지시의 마족이 내린 명령에 백 명 가량의 권속들이 후열에서 마법을 시전했다. 아니, 시전하려고 했다.
갑작스레 목룡의 입에서 브레스가 뿜어져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콰아아아——!
용의 숨결, 브레스.
대지를 녹이고 지형을 바꾸는 최상위 기술.
그것을 정면에서 견뎌내는 것은 마족이라고 해도 쉽지 않다.
그런 공격에 권속들이 버텨낼 리가 없었다.
비록 눈 앞의 목룡은 용의 형상을 빌어 만들어진 위조품에 불과하다 해도.
브레스의 위력만큼은 훌륭했다.
전열의 언데드 병사와 마법 시전을 시도하던 특수 병사들 모두 일격에 녹아내렸다.
멈출 줄 모르고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불길.
새하얀 대지가 브레스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살아남은 병사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
그것을 바라보던 지시의 마족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감에 차있던 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뭐냐, 대체, 뭐냐.'
무력의 마족을 처치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군대까지 몰살 시킨 놈의 정체는 도저히 인간이라 믿기 힘들었다.
브레스를 뿜는 목룡을 다스리고, 마족들을 척살할 힘을 가진 존재.
'하.'
지시의 마족은 떨리는 손을 바라봤다. 모든 생물의 정점에 서야 할 마족이 두려움을 느낀다니. 치욕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마족들이 이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었다.
놈은 마족의 위대한 계획을 저지하려는 방해물이자, 불순물.
없애지 않으면 후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지시의 마족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김상욱, 이 놈은 대체 뭘하고 있는거지?'
분명 계속해서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을텐데. 어느샌가 연락두절이었다.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콰아앙!
마족이 있던 탑. 방 안의 문이 부숴지며 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 이지한과 김상욱.
그 둘을 확인한 지시의 마족이 이를 드러냈다.
"제 발로 여기까지 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군."
지시의 마족에게 있어선, 위기를 뒤집을 마지막 찬스였다.
권속들의 죽음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놈들은 어디선가 구하면 된다.
'진짜 목적은······. 저 놈이다.'
대인전에는 그리 자신이 없는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무력의 마족에 비하면 그렇다는 이야기.
'김상욱을 활용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지시의 마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놈이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 알고 있는거냐? 마족의 계획을 방해하는 넌 무사할 수 없을 거다."
이지한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내 손에 죽은 모든 마족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
"건방진 놈······."
마족의 붉은 눈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양 손에서 뻗어나온 마기의 탄환이 이지한을 향해 쏘아졌다.
『 스킬 '요격 Lv.11'을 발휘합니다. 』
카앙, 카앙!
이지한이 역전의 검으로 탄환을 튕겨내자, 궤도가 비틀린 탄환이 탑의 방에 쳐박히며 폭발했다.
"나를 죽인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전투의 마족께서 이곳을 향해 오고 계시지. 그 분의 힘은 우리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 놈이 살아날 방도는 없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포기해라, 포기하고 항복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지."
지시의 마족은 뒤쪽에 있는 김상욱에게 신호를 보냈다. 뒤로 다가간 김상욱이 몸에서 마기를 방출해냈다.
그렇게 뻗어나간 마기는 이지한의 발목과 손목을 묶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당황하는 남자의 표정. 동료라고 생각했던 인간이 갑작스레 배신하다는 걸 생각하긴 어려운 일이다.
"크하하!"
지시의 마족은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다, 김상욱! 네 놈에게는 이 일이 끝나면 특별히 치하하도록 하마."
"그거 정말 감사합니다."
마족은 품 안에서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꺼내들었다. 남자는 마기의 속박에 단단히 묶인 상태. 힘을 주어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불가능했다.
마기를 받아들인 김상욱은 S급 헌터에 필적하니.
"항복하지 않았으니 쉽게 죽여주지 않겠다. 어떻게 마족의 계획을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목룡에 대한 것도 차근차근 들어야겠지.'
지시의 마족이 쇠꼬챙이를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겠지."
그 꼬챙이가 이지한의 팔을 향해 찔러지려는 순간.
촤아악!
속박에서 벗어난 이지한의 검이 지시의 마족을 베었다. 검붉은 피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가슴팍을 부여 잡은 지시의 마족이 비틀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마기의 사용이 아직 익숙치 않아서!"
김상욱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 하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 됐으니 다시 저 놈을 붙잡아라!"
"아, 알겠습니다!"
지시의 마족의 발밑에서 솟아난 마기가 이지한을 노리고 쏘아졌다. 동시에 김상욱이 만들어낸 마기도 이지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두 개의 마기가 허공에서 만나며 서로를 향해 간섭했다. 그 결과 마기가 바닥에 엉켜 붙었다.
가볍게 점프해 공격을 피한 이지한은 그대로 마족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커헉!"
쿠웅!
뒤쪽의 벽에 쳐박힌 지시의 마족의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김상욱은 크게 분노하며 이지한을 노려봤다.
"지, 진짜 죄송합니다! 이 새끼가!"
맹렬한 분노가 느껴지는 김상욱의 표정. 그에게서 발산된 마기가 촉수처럼 뻗어나가 이지한을 노렸다.
타앗!
이지한은 잔상을 남기며 마기의 촉수를 피해냈다. 그러나 김상욱의 마기는 그 한 번 더 갈라지더니 더욱 빠르게 이지한을 추적했다.
"그래, 그거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지시의 마족이 씩 웃었다. 그 빨라진 마기의 촉수가 자신을 속박하기 전까지만 말이다.
"뭣?! 이 멍청한 자식······! 빨리 이거 풀······."
거기까지 말하고나서야 깨달았다.
어디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신. 왜 이제서야 떠올렸는지 모를 정도다.
지력의 마족이 죽음을 맞이한 것도, 기록의 마족이 실패한 것도.
전부 이 놈이 배신 탓이었다면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너 배신한 거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빠, 빨리 풀겠습니다!"
"이 새끼가 아직도 연기를······. 연기가 아니라면 빨리 풀어라!"
김상욱이 펼치는 혼신의 연기. 그것은 지시의 마족을 끝까지 혼란스럽게 했다. 상황이 막바지에 치다른 지금 마족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단 것도 한 몫했다.
끝까지 속박은 풀리지 않았다.
"크윽, 이······!"
지시의 마족이 마기를 방출해 속박을 풀려는 찰나.
이지한이 달려 들며 말했다.
"그러게 사람을 골라가며 믿어야지."
이지한의 검이 놈의 목을 베었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가 마족의 목에 선명히 새겨졌다.
투욱.
경악한 표정 그대로 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 * *
『 435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나는 역전의 검에 기대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몰려오는 탈력감. 13레벨 일자베기의 후유증 때문에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고생하셨습니다. 후우, 어땠습니까 제 연기? 이 자식 비위 맞추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좋네. 잘했다."
김상욱 덕분에 간단하게 끝났다. 동시에 체력을 온존할 수 있었다.
일단 지시의 마족이 죽었으니 김상욱이 배신자라는 사실은 아는 마족은 이제 없다.
'잘하면 스파이로 한 번 더 써먹을 수 있을 것 같긴한데.'
한가지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하다만,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전투의 마족.'
놈은 높은 확률로 여기에 올 거다.
나는 탑 바깥을 내다봤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따금씩 하늘이 밝아지며 벼락이 터져나온다.
나는 통신석을 꺼내 말했다.
"게이트의 보스로 보이는 존재를 처리했습니다."
- 게이트 출구가 열렸나요? 입구 자리에는 게이트가 없습니다.
"여기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보스가 남아 있는 것 같네요."
게이트가 보스로 인지하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렇기에 출구가 열리지 않은 거다.
나는 다시 어두운 하늘을 바라봤다. 원형을 그리며 모여들기 시작하는 구름. 그 원형을 따라 새빨간 붉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지독하게 불길한 연기를 흩뿌리며 땅으로 내려간다.
검은 마기를 이끌고 바닥에 도달한 존재.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상욱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나, 나타났군요."
- 지금 출현한 마수,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통신석에서 넘어오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 여지껏 느껴본 적 없는 생물로서의 격의 차이.
반대편에 있을 헌터들도 모두 동요하고 있을 거다.
중위 전투의 마족.
놈의 주변으로 검은 마기가 일대를 잠식해 나갔다. 새하얀 바닥이 어둠으로 들끓기 시작한다.
쿠구구구······!
날카로운 기둥들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아예 이 근처의 지형 자체가 뒤바뀌고 있었다.
"저, 저거 다 뭡니까?!"
김상욱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노란빛의 빛줄기가 수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별똥별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그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피면 감탄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것은 무기의 비.
검, 칼, 창, 화살······.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무수한 병장기들.
빠르게 낙하한 무기들은 내가 있는 탑을 두드렸다.
콰과과과—!
금이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탑. 김상욱이 급하게 마기를 펼쳐 보호막을 형성했다. 무기들은 끊임 없이 떨어져 우리를 탑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콰아아앙!
"크으윽, 미친 거 아닙니까?!"
김상욱은 모든 마기를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다. 무기의 비는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떨어지며 일대를 뒤덮는다.
떨어진 무기는 땅에 박혀 흙먼지를 일으키고, 바위를 부순다. 혹은 바닥에 그대로 꽂혀 나아갈 진로를 방해했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내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전투의 마족. 그는 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족들과 많이 마주쳤지만 이만큼 섬뜩한 느낌이 든 적은 처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강해보이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과거에도 몇 번 있었지. 마족에게 저항하고, 자신의 종족을 위해 검을 들던 얼간이들. 우리는 그들을 마족 학살자라고 불렀다."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주워드는 전투의 마족.
"인간아, 네가 그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내가 여기까지 직접 행차해 온 보람이 있을테니."
피부가 아려오는 살기.
마수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
도저히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벽.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게 내가 물러설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역전의 검을 들어 올렸다.
『 타재간파의 서에 존재하는 모든 목록을 활성화 합니다. 』
『 '마도 : 마력 증폭 제어 장치'에 의해 마력을 증폭 시킵니다. 』
미래의 군단장이자, 수 십의 영웅을 집어 삼키는 괴물.
전투의 마족 '류크엘'.
나는 놈을 잡고 다음 랭크로 넘어갈 것이므로.
102화 전투의 마족(1)
대지를 뒤덮는 검은 기운.
휘몰아치는 광풍.
비처럼 쏟아내리는 무기들의 향연.
콰과과—!
"크윽, 더 이상 못 버텨요."
이지한을 제외한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 수호 길드의 이수연이 펼친 마력의 황금 방패 위에는 실금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여기 포션 있습니다, 버프 전부 걸어드릴게요."
뒤쪽에 포진한 영광 길드가 소리쳤다.
신태양은 방패가 사라질 것을 대비해 검을 쥔 채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저 멀리에 있는 마족을 향해 있었다.
"저게 마족······."
놈이 내보내는 기운은 흉흉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불길하다 못해 절망을 불러 일으키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어떤 적보다도 강했다.
놈은 손하나 까닥하지 않았는데도, 길드 전체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이수연의 황금 방패가 사라지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올지 몰랐다.
그러니까.
콰아아앙!
그 마족과 정면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스승 이지한 또한 보통의 인간은 아니었다.
검은 빛과 푸른 마력이 격돌하며 눈부신 섬광이 수차례 일어난다. 마족을 상대로도 밀리는 기색 없이 검을 맞대고 있었다.
"저건 S급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런 사람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나온 거야?"
영광 길드의 헌터들이 감탄하며 그 싸움을 지켜봤다. 저 강력한 마족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지한의 행동은 특출났다.
무기가 제한 된 상황에서 단검으로 마족을 압도하는가 하면, 거대한 목룡을 소환해 언데드 병사를 쓸어버렸다.
수호 길드의 선배 이영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신태양에게 말했다.
"저 사람 진짜로 뭐하던 사람이냐. 정말로 저 사람이 네 스승이라고?"
"예, 맞습니다. 뭐하시던 분인지는······. 저도 모르죠."
콰앙! 콰아앙!
검은 대지의 중간에서 끊임 없는 폭발과 섬광이 터져나왔다. 마족과 이지한이 만들어내는 전투의 여파.
신태양은 당장이라도 스승을 향해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무기들을 뚫고 나아가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기다려야 했다.
"막아냈어요! 무기의 비가 멈췄어요!"
이윽고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던 무기들이 멎었다. 마법으로 방패를 만들어 모두를 보호하던 이수연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러면 빨리 도우러 가죠. 형 혼자 싸우게 놔둘 순 없잖아요."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은빛의 날개 천성호가 양손검을 꺼내들었다. 그런 천성호를 붙잡은 것은 신아람이었다.
"안 돼. 오고 있어."
"온다고요?"
광화 상태의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불길한 감각.
"모두 조심해요!"
이어서 진세아가 모두에게 경고했다.
다음 순간.
콰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마수 한 마리가 지면에 착지했다. 산산조각난 땅이 튀어오르고 강력한 충격파가 헌터들을 밀어냈다.
"뭐야, 저 놈은······."
천성호는 가까스로 자세를 잡으며 미간을 좁혔다. 지독한 마기가 전신을 찌르듯 밀려왔다.
영광 길드의 헌터들이 술렁였다.
"미노타우로스잖아······!"
"S급 게이트에서나 나오는 놈 아니었어?"
녹색의 갑주를 걸친 반인반수의 존재.
미노타우로스.
놈은 거대한 도끼를 등 뒤에 얹은 채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전투의 마족님의 권속, 미노타우로스 루헨더."
"마, 말을 하잖아."
"유언으로써 썩 좋은 선택은 아니군."
그리 말한 놈은 천성호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가벼운 도끼질 한 번에 땅이 순차적으로 솟아오르며 주변을 헤짚는다.
콰과과과—!
지형자체를 바꿔버리는 강력한 공격.
이에 휘말린 영광 헌터들이 바닥을 굴렀다.
땅에 꽂혀 있던 무기들 또한 한데 뒤엎이며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크아악!"
"이게 무슨······!"
그러나 그 공격을 읽고 피한 헌터들도 있었다.
"이 놈을 치우고, 형 쪽으로 붙죠!"
"스승님, 제가 갑니다!"
천성호와 신태양이 양쪽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꿈이 크구나."
파직, 파지직!
미노타우로스의 도끼 위에 검은 스파크가 솟아올랐다. 미노타우로스 루헨더는 도끼를 땅에 내리쳤다.
대지를 뒤덮은 무기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루헨더의 도끼를 향해 날아왔다.
콰과과과!
수 백 자루의 무기가 천성호와 신태양을 덮쳤다.
* * *
중위 전투의 마족.
"크하하! 그래, 나쁘지 않구나!"
놈의 등장과 함께 대지에 쏟아진 수많은 무기들. 놈은 땅에 떨어진 무기를 주워서 휘두르고, 찌르고,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투를 즐긴다는 표정으로 끊임 없이 공격을 던져 온다.
'크윽.'
정면에서 쏟아지는 공격이 끝이 아니었다. 땅에 박혀 있던 무기들이 허공을 비행하며 끊임 없이 나를 노리고 떨어졌다.
『 스킬 '초공간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윤서현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대응조차 불가능했을 공격.
나는 그것들을 전부 베어내고, 막아냈다.
『 스킬 '신속 Lv.10'의 효과가 최대로 발휘됩니다. 』
『 더 이상 속도가 증가하지 않습니다. 』
전투가 거듭될 수록 스피드가 증가하는 스킬 신속.
그 증가치가 최대에 달했다.
콰아앙!
"더 빨라지지는 않는건가? 그게 네 한계냐?"
그것을 눈치챈 전투의 마족이 속도를 한단계 끌어 올린다. 막아내는 걸로 고작이었던 놈의 공격이 한층 빠르고 정교해졌다.
'큭, 젠장'
나는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공격은 꿈 꿀 수도 없다. 미친듯이 쏟아지는 무기 세례 속에서 방어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게 중위 마족이라는 건가.'
하위 마족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압감이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불굴의 정신이나 정신력 스킬로도 커버가 안되는 생물 자체가 가지는 격의 차이.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치명상이 되는 공격들 앞에서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여지껏 그래왔다.
목숨을 건 사투.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전투.
그건 의도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 스스로를 벼랑 끝에 몰아 붙어야지만 나오는 목숨을 건 도전.
내가 얻는 경험은 한층 더 진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20만배가 되어.
『 스킬 '신속 Lv.11'을 획득합니다. 』
『 상승 가능한 최대 속도가 330%까지 증가합니다. 』
『 추가효과 : 적의 속도가 자신보다 빠를 경우 1.5배의 추가 효과를 받습니다. 』
나를 강하게 한다.
콰과과과—!
공격을 받아치고 막아내는 데서 그치던 검이 점차 전투의 마족을 향해 다가선다. 빗발치는 무기 세례 속에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하, 이 시점에서 성장이라니! 인간이 맞는가? 의심스러울 정도구나!"
전투의 마족은 오히려 환한 미소를 띄우며 무기를 휘둘러왔다. 내 검과 놈의 무기가 부딪힐 때마다 강렬한 파동이 일며 일대를 뒤엎는다.
땅에 박혀 있던 무기들이 뽑혀져 나가기 시작한다. 나를 향해 날아들던 무기들의 기세도 점차 약해졌다.
"다만, 고작 속도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
콰앙!
전투의 마족이 발을 내리찍었다. 주변의 땅에서 검은 기둥이 솟아오르며 나와 전투의 마족을 감쌌다.
"그래도 인간치고는 강하구나. 그것만큼은 인정하마."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전투 지대 : 방어와 회피를 할 수 없습니다. 』
강력한 제약이 몸과 정신을 뚫고 들어 온다.
무시할 수 없는 세계의 법칙이 지금 이 자리에 세워졌다.
전투의 마족이 군단장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놈이 펼치는 전투 제약.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싸움터.'
여기서부터는 무조건적인 공격이 있을 뿐이다.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덤벼라, 인간아. 네가 도망칠 길은 없다!"
검을 든 전투의 마족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놈을 죽일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에 의해 푸른 빛을 내뿜는 역전의 검.
그 칼날이 놈의 목을 향해 쇄도한다.
마찬가지로 놈의 칼날 또한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속도는 동일하지만, 놈이 가진 힘과 마기의 농도가 더욱 짙다.
동시에 닿더라도, 여기서 목숨을 잃는 건 나뿐이다.
절대적인 불리.
나는 그것을 알고 뛰어 들었다. 손에 쥔 새하얀 검 위로 빛이 미친듯이 치솟기 시작했다.
『 아이템 특수효과 '역전의 기회'를 활성화합니다. 』
완전히 불리하기에, 패배할 수밖에 없기에.
나는 한차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고요한 적막이 세계를 뒤덮었다. 주위의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내게로 다가오는 마족의 칼날조차 한없이 느릿하게 보였다.
검을 재차 들어올린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다.'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담아야 했다. 실수나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단 한 번으로 중위의 마족을 처리해야 했다.
땅과 하늘을 잇는 푸른 선 한줄기.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푸른 선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 새겨진 붉은 원을 가로질렀다. 본질조차 베어 가르는 필살의 일격이 전투의 마족을 덮쳤다.
콰아아아—!
맹렬한 폭풍이 주위를 가로막고 있던 검은 기둥들을 박살내고, 주변의 대지를 뒤엎었다. 기술을 시전한 나조차 그 폭풍에 휘말려 허공으로 떠밀렸다.
"크으윽"
탈력감과 마력 고갈, 체력 부족이 한꺼번에 몰려 온다. 지금 내 체력은 10%미만. 잘못 추락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다.
그러나 괜찮다.
카오!
내게 붙어 있던 오르티마가 새끼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녀석은 나를 잡아 당겨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게 해줬다.
"고맙다."
나는 재빨리 포션을 찾아 들이켰다. 입가를 닦아낸 뒤, 아직도 기술의 여파가 남아 있는 대지를 바라봤다.
난장판이 된 대지 위로 솟아오르는 연기.
푸른 선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중심으로 하늘의 어둠이 거둬지고, 붉은 원 또한 반으로 깨져 사라져간다.
"하아, 하아······."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전투의 마족.
놈은 죽지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잘려나간 팔을 붙들고 섬뜩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놈은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네 놈 같은 이종족이 있었어. 마족 학살자. 그 중에서도 분명히······."
이미 놈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길 뿐.
'크윽. 이걸 맞고 살아 있단 말이야?'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이 살아 있는 한 나도 쓰러질 수 없다.
"아아, 너무 위험해. 네 놈의 힘은 위험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상태로 중얼 거리던 놈은 하나 남은 팔로 검을 들어올렸다. 곧이어 막대한 마기가 검을 뒤덮었다.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었다.
오르티마가 내 앞을 막아섰지만 역부족이다. 저걸 막아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 승부는 이 마지막 한 번으로 결정된다.
나는 검을 잡고 오러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전신을 타고 오르는 맹렬한 힘이 나를 억지로 일으킨다.
『 스킬 '광화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광화 상태에서 피해 흡혈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오러블레이드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위력 30% 증가 』
'다시 한 번 각성 일자베기를 쓰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선공권이 없다.
제약 때문에 공격을 상쇄할 수도 없다.
오로지 적을 죽이기 위해 발휘하는 필살의 일격.
내가 먼저 죽이지 못하면 죽을 뿐이다.
"언젠가 마족의 재앙이 될 너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그것이 공멸의 길일지라도!"
전투의 마족이 외치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마기를 듬뿍 머금은 놈의 검이 앞으로 내질러졌다.
이제 뒤는 없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그 찰나의 순간.
내 앞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나는 분명히 보았다.
『 레전더리 스킬 '절대 일격'을 획득합니다. 』
103화 전투의 마족(2)
이지한과 전투의 마족, 둘의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카아앙!
뒤쪽에선 권속 미노타우로스와 길드 연합의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다.
"이게 끝이냐?"
날아온 무기를 전부 쳐낸 천성호가 이죽였다.
전투의 마족이 출현하며 게이트 내부에 쏟아진 무기들. 미노타우로스는 그 무기들을 움직여 천성호와 신태양을 공격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없어보이는데."
신태양 또한 어렵지않게 무기들을 쳐냈다.
그들을 바라보는 미노타우로스가 크게 웃었다.
"하하, 자신의 무지함을 실력이라고 착각하는 꼴이라니. 재밌구나."
도끼를 들어올린 미노타우로스의 주변으로 검은 형체 두 개가 떨어졌다.
쿠웅! 쿠웅!
또 다른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 놈들의 등장에 뒤쪽에 있던 헌터들이 술렁였다.
"저런 괴물이 둘이나 더 늘었다고······?"
"그래도 다같이 덤비면······."
"아까 도끼질 한 방에 다 나가떨어지는 거 못 봤어?"
영광 길드의 헌터들은 주춤대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 실력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반면 수호 길드는 그 상황에서도 태연히 무기를 잡았다.
"태양군도 저리 열심히 하는데, 우리라고 뒤에 있을 순 없지."
"이제 무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움츠려 있을 필요도 없고."
은빛의 날개도 마찬가지였다. 광화 모드에 들어간 신아람이 전신에서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 진세아도 단검을 들어 올렸다.
"내가 먼저 갈게."
"네, 언니. 보조할게요."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미노타우로스 세 마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그런 발악하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덤벼라! 인간들아!"
이어서 양측의 무기가 격돌했다. 붉은 섬광과 푸른 섬광이 교차하며 검은 대지를 물들였다.
"크하하! 꽤 하는구나! 어디 더 날 뛰어봐라!"
가장 큰 뿔을 가진 미노타우로스가 흡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제대로 된 전투는 간만이었다.
줄곧 주인의 곁에서 힘을 숨기고 있었기에 몸이 근질거렸다.
서로의 목숨을 걸고 펼쳐지는 전투.
미노타우로스는 전사의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상대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놈은 연신 웃어대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런 권속의 공격을 막아내는 천성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새끼, 지금 누굴 얕보고 있어······."
전투 자체만 놓고 본다면 호각이었다. 아니, 이 딴 놈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서 귀찮게 끼어드는 사람만 없었어도 진작 끝났을 거다.
카앙! 카앙!
계속해서 신태양이 나아갈 방향을 방해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반대로 신태양은 천성호 때문에 답답해하고 있었다. 보법을 제대로 발휘하려다가도 천성호 때문에 길이 막힌다.
결국 신태양이 소리쳤다.
"야, 중딩. 저 놈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비켜!"
"뭐, 뭣? 중딩?"
천성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신태양의 검 위로 짙은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다. 폭발적인 힘이 미노타우로스의 도끼와 맞부딪혔다.
굉음과 함께 미노타우로스가 휘청였다. 예상 외의 힘에 놀란 듯 했다. 천성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 꼰대가, 지금 누구보고 중딩이라는 거야!"
새빨간 마력이 담긴 검날이 미노타우로스의 팔을 베어냈다. 붉은 피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크으윽!"
"꼬, 꼰대?"
경쟁하듯 치고 들어오는 신태양의 검. 미노타우로스는 급하게 마기를 사용해 공격을 막아냈다.
"이 놈들······. 날 앞에 두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전투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보다 자신이 안중에도 없단 사실이 치욕적이었다.
"내 이름은 천성호. 앞으로 그쪽보다 유명해질 거니까, 앞이나 막지 마쇼."
"······요즘 꼬맹이들은 하나 같이 예의를 밥 말아 먹었나. 너 지한 스승님하고 무슨 사이야?"
"그쪽이 알 거 없잖아."
뿌드득!
"이 새끼들이······!"
이를 꽉 다문 미노타우로스가 도끼를 들어올렸다. 팔뚝 위로 힘줄이 돋아나고, 근육이 한계까지 팽창했다.
일격에 끝장 낼 생각이었지만.
"야, 중딩. 비켜!"
콰아아—!
한 발 앞서 오러를 두른 신태양의 검이 도끼를 막아냈다. 오러와 마기의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싸움.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천성호의 검에서 새빨간 오러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콰아아—!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구만."
"?!"
그것을 바라보는 신태양의 눈에 경악이 일었다. 누가봐도 천성호가 방금 오러를 터득했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크윽!"
어쨌든 신태양과 미노타우로스는 무기를 맞대고 있는 고착 상태. 위기를 느낀 미노타우로스가 물러서려고 했지만.
푸욱!
천성호가 미노타우로스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게 빨랐다. 검은 피가 울컥 쏟아지며 미노타우로스가 무릎을 꿇었다.
왼편의 수호 길드, 오른편의 은빛의 날개도 각각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렸다.
"너 그 오러 뭐야······. "
상황이 정리된 것을 확인한 신태양이 천성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그게 오러라고 하는 거에요? 그쪽 따라하니까 금방 되던데요?"
천성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신태양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은빛의 날개······. 괴물을 데리고 있었잖아.'
들리는 이야기엔 천성호도 스승님이 찾아낸 인재라던데.
'스승님은 대체······?'
신태양의 손을 떼어낸 천성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보다, 빨리 형한테 가야 되거든요······? 지금 그쪽하고 실랑이 할 때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앞쪽에선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다. 이지한과 전투의 마족이 만들어내는 충격파. 그 울림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크흐흐······."
"뭐야, 이 새끼 왜 웃어?"
천성호가 쓰러진 미노타우로스의 목에 검을 가져다댔다.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네 놈들의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전투의 마족께서 승자가 되실테니. 직접 보아라.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린 모두가 앞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전투.
콰아앙!
돌연 검은 기둥이 솟아오르며 이지한과 전투의 마족을 가뒀다. 동시에 불길하게 솟아오르는 메시지.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전투 지대 : 방어와 회피를 할 수 없습니다. 』
미노타우로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봐라. 전투의 마족께서 자랑하는 전투 지대! 네 놈들은 전부 죽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푸른 선 하나가 하늘 위로 치솟은 것은.
검은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뒤엎는 단 하나의 직선. 뒤이어 몰려오는 충격파에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눈 앞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크으윽!"
"스승님!"
"형!"
솟아오른 흙먼지와 폭풍에 앞쪽의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의 요란한 웃음소리조차 묻힐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푸른 선이 대지를 가르는 순간.
폭풍이 걷어지고 고요한 정적이 일대를 뒤덮었다. 전투의 마족이 내뿜던 불길한 마기 또한 일시에 사라졌다.
푸른 하늘 아래 살아남은 것은 이지한이었다.
"어······."
벙찐 표정의 미노타우로스. 그런 놈의 머리를 천성호가 짓밟으며 이죽였다.
"전투의 마족이 뭐 어쨌다고?"
* * *
전투의 마족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결과는 승리였다. 놈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살아남았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각성 스킬을 연달아 사용했으니 남아 있는 내 체력과 마력은 1% 미만. 체력과 마력이 동시에 고갈되었으니, 죽기 직전이라는 표현이 딱이다.
『 스킬 정보 』
- 이름 : 절대 일격 Lv.1
- 등급 : 레전더리
- 설명 : 혼신의 일격의 절대 명중, 속도 증가(100%), 데미지 증가(300%)
마지막 순간에 얻은 스킬이 아니었다면 졌을거다. 전투의 마족과 놈의 공격을 동시에 집어 삼켰다.
'으윽······.'
손 하나가 까딱일 힘조차 없다.
"아아······. 분하다."
"!"
그런 내게 전투의 마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검은 먼지 덩어리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 인간아. 놀랄 필요는 없다. 두말 할 것 없이 네 승리다. 내 힘의 잔재가 잠시 내 의식을 붙잡고 있을 뿐."
"······."
"하여, 이 몸의 완전한 패배다. 이렇게 즐거운 싸움은 실로 간만이었다."
죽이겠다느니, 공멸이라느니 온갖 소리는 다 해놓고 이제와서 쿨한 척 해도 별 감흥이 안 생긴다.
"예언의 마족은 분명 내가 군단장이 될 거라고 했다만, 예언이라는 것도 별 거 없구나. 뭐,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니 잊어라."
먼지 덩어리는 내 쪽으로 스르르 다가왔다. 거기엔 어떤 불길한 느낌도 없다.
"인간아, 하나만 묻자. 진심으로 네 손으로 마족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가오는 미래를 고작 인간 하나에 불과한 네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입가가 비리다. 울컥하고 넘어온 피 맛이 느껴졌다. 고작 중위 마족 하나를 잡고 이 꼴이다.
앞으로 상대할 괴물 같은 놈들을 생각하면······.
내가 세계를 구한다는 말 같은 건 농담처럼 들릴 정도다. 놈의 비아냥 섞인 질문도 이해가 간다.
그래도 대답은 하나다.
"뭐, 시도는 해봐야지."
고개를 조금 돌려 뒤를 보니 승리한 동료들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권속들을 전부 쓰러뜨린 모양이다.
나는 안도하며 바닥에 몸을 기대었다. 내 말을 들은 전투의 마족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기사, 이 몸을 이긴 인간이라면 응당······."
다만, 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덥썩.
뒤쪽으로 다가온 오르티마가 먼지 덩어리를 삼켰기 때문이다.
우물우물.
몸 안에서 열심히 소화를 시킨 오르티마가 검은 파편 하나를 뱉어냈다.
툭.
『 특이한 재능의 파편 』
"······."
중위 마족 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집어 넣을 힘도 없어서, 오르티마가 대신 내 주머니에 넣어줬다.
'이걸로 특이한 재능의 파편은 두 개째인가.'
이번에 레전더리급 스킬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보면 이런 파편들이 쌓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가장 먼저 다가온 건 근처에 땅을 파고 숨어 있던 김상욱이었다. 온 몸이 흙이랑 상처 투성이였다.
쏟아지는 무기의 비 속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칭찬해 줄만한 일이긴 했다.
"하, 진짜로 이기실 줄이야."
녀석은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내 내게 뿌렸다. 위급 상황에선 이런 식으로 한다.
주변의 초토화 된 땅을 한 번 둘러 본 김상욱이 중얼거렸다.
"진짜 미쳤네요. 중위 마족을 이기다니. 이게 진짜로 되네."
김상욱은 마족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했기에 그 강함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겁니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것 같다만. 어쩌긴 마족 잡아야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보는 수밖에 없다.
뒤이어 동료들이 몰려왔다.
신태양, 천성호, 신아람 그리고 진세아까지.
다른 길드의 사람들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빨리, 힐! 응급처치 부탁해요!"
"형! 형! 정신 차려요!"
체력은 얼추 회복한 것 같은데. 어째 정신이 흐려진다.
『 중위 전투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이계 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눈 앞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들.
『 < B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목표 : 전투의 마족 처치( 1 / 1 )
『 축하합니다. A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 클리어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레벨업 능력치 증가량 2배
- 재능 획득의 물약(레전더리)
- 스킬 향상의 반지(레전더리)
그야말로 미친 보상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형, 괜찮아요?"
"오빠, 정신 좀 차려봐요!"
천성호와 진세아가 나를 번갈아 흔들었다. 그만해라, 기절하기 일보직전이다. 물론 그게 입으로 잘 나오진 않았다.
"아파······."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104화 오지 않은 미래(1)
수호 길드 회의실.
"하. 이거 대박이군."
심각한 표정으로 게이트 공략 영상을 보던 사최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영상에는 이지한이 마족과 싸우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멀리서 찍은 영상이었지만 그 능력을 가늠하기엔 충분했다.
사최헌은 살짝 들뜬 목소리로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대박 정도가 아니야, 상상 이상이라고. 신태양의 스승이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 자리에 있는 다른 길드원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요.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S급 헌터와 비교해도 손색 없네요."
"이것만보고 완전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만한 능력은 되는 인물이야.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한 거지."
그리 대답한 사최헌의 눈이 구석에 있는 신태양을 향했다.
"그래서 이만한 헌터를 혼자서만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건 완전히 오해거든요."
신태양은 볼을 긁적이며 길드장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나도 몰랐다. 스승님이 그만한 힘을 숨기고 계실 줄은.'
이번 마족 공략에서 보여줬던 힘.
그건 이미 자신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 넘어 있었다. 판단하거나 분석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으니.
"스승님께서는 길드에 소속 될 생각이 없어보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파고드는 거지. 길드 차원에서 이지한 헌터에 대해 조사 해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사최헌의 말에 옆에 있던 비서가 자료를 건넸다.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사최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이 말도 안되는 성장 속도. 대형 길드 없이 이런 성장세라니. 믿기지가 않는구만. 어이, 신태양."
"예에?"
"책임지고 이 스승이란 사람 우리 길드로 끌어와. 우리쪽에서 할 수 있는 지원은 전부 넣어준다. 너도 좋을 거 아니야?"
스승님과 함께 같은 길드에서 공략을 한다. 일순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신태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은 은빛의 날개 쪽에 더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이번에 용병으로 참여한 것도 그렇고요."
"아니, 그랬으면 용병이 아니라 진작 길드에 가입했겠지. 우리 쪽에도 기회가 있단 소리야. 한 번 설득해봐."
손에 든 서류를 툭툭 두드리던 사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안되면 내가 직접 나선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1위 헌터 사최헌. 그가 직접 나선다면 거절할 헌터가 어디에 있을까. 사최헌에겐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마족에 대해서 말인데······. 백묵의 정보대로라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겠어."
일반 마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함.
그런 놈들이 한꺼번에 몰려 오기라도 한다면, 과거에 있었던 대규모 게이트 브레이크와 같은 재앙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더더욱 인재를 영입해야한다는 거지만."
사최헌의 부담스런 시선이 신태양에게 꽂혔다. 돌고돌아 이지한이었다. 신태양은 어깨를 으쓱였다.
"······시도는 해보죠."
결과가 뻔한 일이었지만 물어는 볼 수 있으니까. 자신이 아는 스승이라면, 왠만한 조건으로는 턱도 없을 거다.
* * *
내가 다시 눈을 뜬 장소는 병원이었다.
고급스런 VIP룸 병실.
'중위 마족을 처치하고 정신을 잃었던 건가.'
각성 기술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사용했으니 쓰러진 게 당연하다. 심지어 13레벨 일자베기였다.
몸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그건 극심한 탈력감을 불러온다. 그 상태에서 전투를 지속한 게 기적이었다.
드르륵.
병실의 문이 열리더니 긴 생머리를 한 여성 하나가 들어왔다. 은빛의 날개 부길드장 윤지은이었다.
"일어나셨네요. 이거 자꾸 병원에서 보게 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습니까?"
"하루 정도에요."
레어 기본 스킬들을 완성해서 그런지, 회복 속도도 확실히 빨라진 느낌이다. 잠시 병실의 창에 다가서서 바깥을 내다본 윤지은이 말했다.
"이번 공략으로 지한씨 꽤 유명인이 됐어요."
"제가 말입니까?"
"길드 내에서만요.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길드 사이에선 소문이 무성해요. 숨겨진 S급 헌터가 나타났다고. 재밌죠?"
하긴, 그만큼 날뛰었는데 조용한 게 이상할 거다. 중위 마족을 처치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력을 쏟아부어서 간신히 이겼으니까.
"지한씨의 실력을 알아 본 길드에서 러브콜이 쇄도할 거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입술을 살짝 깨문 윤지은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은빛의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은 정말 없으신가요? 세아나 성호, 신아람양도 좋아할 거에요."
"글쎄요, 당장은 들어갈 생각 없습니다."
"그런가요······."
윤지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한 이들은 깨달을 거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그걸 알면 내가 앞으로 얼마나 강력한 헌터가 될지는 그들도 예상할 수 있을 거다.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각 길드에서 나를 원할수록, 용병 신분으로 활동하는 내 행동과 발언에 무게가 실리는 게 당연하다.
'중위 마족을 죽였으니, 마족 놈들의 활동 범위도 늘어날 거다.'
길드에 속해 있으면 게이트 공략의 의무가 생기는데, 그건 지금의 내 목표와는 맞지 않는다.
'S급 게이트부터는 공략에 며칠씩 소모되는 게 기본이니까.'
나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운 듯 서있는 윤지은에게 말을 건넸다.
"애들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멀쩡하니까요."
"네, 물론이죠. 다들 오고 싶어했는데 공략 스케쥴 때문에 못 왔어요."
"다음에 볼 일이 있겠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확실한 건 과거 최후의 11인들이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거다.
'미래는 이미 바뀌고 있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아······."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떨궜다.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담에 봬요."
나는 윤지은에게 손을 흔들고선 복도를 빠져나왔다.
"응?"
병원 밖으로 나오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하고 보는데 갑자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중 하나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영광 길드 에이전트 주성진입니다.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이번에 같이 공략을 했던 영광 길드였다. 대한민국 4위의 대형 길드. 병원 내부에서 기다리지 않은 건 은빛의 날개를 의식해서인가?
나는 잠시 명함과 주성진을 번갈아봤다.
내 입에서 나올 답은 뻔했다.
"당장은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서요. 그래도 명함은 받아두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야기 한 번 나눠보시죠······. 현재 길드도 없지 않으십니까?"
피해서 가려는데 나를 졸졸 따라왔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편의점에서 라면 사가려는데 따라들어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다섯명 가량 되는 검은 양복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니 시선을 너무 끈다.
"저기요."
"어떻게 잠시만 안됩니까?"
이 사람들을 어떻게 떼어내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길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를 향해 반갑다는 듯 달려드는 사람.
"아, 스승님!"
신태양이었다. 그의 등장에 뒤에 있던 검은 양복들이 술렁였다. 신태양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왔다.
"저기 그쪽들 뭡니까? 뭔데 스승님 근처에서 얼쩡 거리는 거에요?"
슬금슬금 물러나는 검은 양복들.
그 중에서 한 명 주성진이 앞으로 나섰다. 안경을 올려 쓴 주성진은 신태양을 향해 명함을 내밀었다.
"영광 길드 주성진입니다. 길드 영입 제안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 그렇구나."
명함을 확인한 신태양이 자신의 품 안에서 명함을 꺼내들었다.
"난 수호 길드 신태양입니다. 저도 우리 스승님께 영입 제안을 할 건데,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어이, 우리가 먼저······."
그때였다. 신태양의 얼굴을 알아 본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이기 시작했다.
"신태양이잖아?!"
"신태양이다!"
"대박, 사진 찍어도 돼요?"
최근 상향 주가를 달리는 인기 헌터라는 게 새삼 실감이 된다. 순식간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어졌다.
"큭······."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주성진이 자기 부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얘들아, 돌아가자.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 와중에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사라지는 영광 길드원들. 그래도 신태양 덕에 간단하게 떼어냈으니 고맙다고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신태양은 인파와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아, 싸인 해드려야죠. 사진 좋죠. 이리 오세요. 스, 스승님? 어디 계세요?"
"······."
일단 집에 가야겠다.
* * *
나는 단칸방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게 기쁜지 오르티마가 바닥을 굴러다닌다.
백묵으로부터의 연락은 아직 없다.
'이제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중위 마족의 죽음.
이게 일으킬 파장은 적지 않다. 일개 인간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일 거다. 이쯤되면 상위 마족들도 움직임을 보일 거다.
'슬슬 이사를 가야겠는데.'
보다 안전한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 그건 백묵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고. 우선은 보상의 정산이다.
『 이계 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 중에 있습니다. 』
중위 마족을 잡은 보상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한계 돌파 퀘스트를 클리어 하며 얻은 아이템은 내 손에 있다.
『 스킬 향상의 반지(레전더리) 』
- 선택 스킬의 효과 50% 증가, 레벨 1 증가 (11레벨 이하의 스킬에만 적용 가능)
- 모든 스킬의 경험치 1.25배 습득
'와, 미쳤네.'
반지를 바라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13레벨이 된 일자베기에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훌륭한 점 밖에 없다.
나는 반지를 바로 착용했다. 선택할 스킬은 하나였다.
『 레전더리 스킬 '절대 일격'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 스킬 '절대 일격 Lv.2'를 습득하셨습니다. 』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스펙업이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 남았다.
『 재능 획득의 물약(레전더리) 』
황금빛 유리병에 담긴 물약.
두근두근.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대가 된다. 유니크를 뛰어 넘어, 레전더리급에 도달한 재능 획득의 물약.
그 효과는 무엇일지.
'앞으로 대적해야 할 적은 상위 마족.'
그들은 S급 헌터도 쉽게 이겨내지 못하는 강대한 적.
그들을 상대하기엔 아직 한참 부족하다.
현재 내 레벨은 80.
딱 A등급의 초입이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들은 대부분이 레어다. 진정한 S급이 되기 위해선 이 벽을 넘어야 했다.
'최소한 유니크 스킬들은 전부 갖춰야. 상위 마족을 상대할 여력이 생긴다.'
퐁.
나는 물약의 마개를 제거한 뒤, 그대로 들이켰다. 황금빛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달콤하고, 시원한 액체는 순식간에 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내 주변을 이루고 있던 공간 자체가 변화해 간다. 퍼즐의 조각처럼 떨어져나간 공간을 새하얀 배경이 차지한다.
『 재능 획득의 물약(레전더리)를 사용하셨습니다. 』
파직, 파지직!
『 이계 규율이 해당 시퀀스에 간섭합니다. 』
『 시스템이 이계 규율의 인과 타당성을 검토합니다. 』
'?!'
두 개의 시스템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은 모양새.
『 대상 이지한이 재능을 획득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이동합니다. 』
『 이계규율이 해당 장소의 인과적 타당성을 무시합니다. 』
검은 스파크가 허공에서 튀어 오르더니,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끌어 당겼다. 굉장히 길고 난잡한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는 느낌이다.
화악!
한순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덜컹거리는 느낌은 사라졌다. 이내 주변이 안정되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기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소다. 어딘가의 기지 같은데.
천장은 유리로 되어 있어 하늘이 훤히 보였다. 붉은 하늘과 그곳을 흘러가는 검은 구름들. 멸망한 세계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내 앞에 서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천성호······?'
중학생 천성호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 단호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최후의 5인 중 한 명.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리더.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리, 리더?"
형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
리더.
성인이 된 천성호는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105화 오지 않은 미래(2)
나는 캡슐형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라.'
몸이 어째 이상하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삐걱인다. 천성호가 급히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잠시만요, 아연이 불러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연? 설마 성녀 채아연을 말하는 건가?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천성호는 빠르게 복도 한 켠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김에 침대에 앉아서 주위를 살폈다.
미래적인 디자인의 건물 내부. 성장한 천성호.
'여기는 미래가 확실하다.'
레전더리급 재능 획득의 물약의 효과에 의해 또다시 미래에 오게 된 거다.
'내가 리더라······.'
헛웃음이 났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미래도 있을 수 있는건가 싶다.
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붉고, 어둡다.
『 마계 필드에 진입하셨습니다. 』
『 칭호 '마계의 재앙'의 효과로 데미지가 1,000% 증가합니다. 』
이 세계는 여전히 마계나 다름 없는 상태. 마족의 침공을 제대로 막아내는 데는 실패한 미래인가.
나는 홀로그램창을 넘겨 다른 메시지를 찾아냈다.
'귀환 조건은······.'
『 귀환 목표 』
- 유니크급 기본 스킬 습득 ( 0 / 2 )
- 웨펀 마스터 Lv.10 달성
여기서 의미하는 기본 스킬이란 체력, 지력, 민첩, 힘과 같은 스킬을 의미한다. 거기에 더해 웨펀 마스터 Lv.10이라.
'쉽지는 않겠어.'
유니크 스킬의 경험치 상승은 상당히 더디다. 20만배의 경험치가 무색하게 레벨업이 이전처럼 시원시원하지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재능의 부재겠지.'
지극히 재능 없던 내가 우연히 손에 넣게 된 것일 뿐, 그것을 연마하고 성장 시킬 능력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욘 없다.'
레전더리급 재능 획득의 물약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즉, 분명 여기에 해답이 있다는 말이었다.
"지한 오빠!"
높은 미성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채아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선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그렁그렁했다.
"야, 리더라고 부르라니까."
옆에 있던 천성호가 핀잔을 줬지만, 채아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양 손을 붙잡았다.
"아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오빠."
"······."
성녀 채아연.
내가 아는 채아연은 최후의 5인 중 하나였던 채아연밖에 없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이 시점에서 나는 그녀와 꽤 친한 사이가 된 것 같은데.
"으음, 잠깐."
그녀는 나를 살피더니 연신 마법을 걸어댔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전신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됐어. 이제 활동하기에 편할거야? 어때?"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내 대답을 기다리는 채아연. 왠지 어색하다.
"잠깐."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선 고개를 들었다. 괜히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미리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응? 왜 그래? 혹시 어디 불편해?"
"리더, 괜찮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에 천성호와 채아연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어쩐지 그들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아는 이지한이 아니야."
잠깐의 침묵이 내려 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천성호였다.
"맙소사, 머리를 다쳤을 줄이야."
* * *
나는 내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내 입장에선 과거에서 미래로 온 상황이다.
"그러니까, 전투의 마족을 처치한 이후로 기억이 없으신거라는 거죠."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은 거라니까."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천성호는 이해 못하는 눈치였다. 옆에 있던 채아연이 천성호의 머리를 쳤다.
"바보야, 지한 오빠가 말하는 것 좀 들어. 그 시점이면, 내가 지한 오빠랑 관련이 없었을 때인데······. 이 바보는 도움이 안될 것 같고."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는 채아연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간과 관련한 문제라면 잘 알만한 사람이 있어요. 내가 찾아올테니까, 천성호 너는 지한 오빠한테 여기 상황이랑 기지 구조 좀 알려드려."
"그래, 그래."
채아연이 급하게 사라졌다.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성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쨌든 리더, 아니 형이 깨어났다는 게 중요한 거겠죠. 따라오세요."
나와 천성호는 방에 연결된 여러 복도 중 하나를 골라 움직였다. 우리가 발을 들이자, 어두운 통로에 LED 조명이 켜지며 밝아졌다.
"이 기지는 만능제작자 김건 아저씨가 만든 장소에요.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기지. 기능이 여러가지 있다고는 하는데, 김건 아저씨가 죽는 바람에······."
"김건이 죽었어?"
"아······. 군단장 나약의 마족과의 전투에서 죽었어요. 재료를 얻는다고 무리하게 싸우다가요."
확실히 김건 다운 최후다. 내가 아는 미래와는 많은 게 바뀐 모양이다.
천성호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통로에 놓인 승강기에 올랐다. 나도 따라 올라가자, 순식간에 기지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의 풍경이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였다.
언덕 아래로 모여 있는 건물들이 보인다. 그 수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고, 온전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도시를 내려다보며 천성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지만······. 고작 이 정도에요. 마족의 침공으로부터 온전한 땅은 여기가 전부에요. 이마저도 몰려오는 마족들에게서 지켜낼 수 있을지는 모르는 거구요."
아니, 굉장하다. 본래의 멸망한 세계를 알고 있었던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고작 1천 명이 살아남았던 과거와 비교하면, 굉장한 발전이지 않은가.
하지만 천성호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래, 이걸론 부족하다.'
마족들로부터 미래를 완전히 거머쥐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형, 저 멀리 마족들의 주둔지가 보이죠?"
천성호가 가리킨 방향에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모여있다. 지평선 위로 넓게 퍼져 있을 정도로 많은 수다.
"상황은 좋지 못해요. 마족들의 침공으로 대한민국은 완전한 위기. 저희는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영웅이죠. 사람들은 저희를 일컬어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난간에 기댄 천성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최후의 10인."
경외감을 담아 불렀던 그 이름.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SSS급 헌터들에게 주어지는 칭호.
그러나, 그 칭호에 담긴 의미는 부정적이다.
사람들이 '최후'를 직감했다는 뜻.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유일무이한 리더가···."
천성호는 손가락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바로 당신 이지한입니다."
그리 말한 천성호는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선 다시 난간에 기댔다.
"그래도 할만큼은 했어요. 12군단장 중 절반을 쓰러뜨리는데 성공 했으니까요. 뭐, 반대로 말하면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는거지만."
나는 천성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했네."
미래는 크게 바뀌었다. 인간의 완전한 승리는 아닐지라도, 겨우 군단장 둘을 쓰러뜨렸던 기존의 미래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다.
"혀엉······."
내 말에 감동한 천성호가 울먹이려는 찰나,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 스승님······!"
감격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태양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신태양. 검성보단 비교적 내가 아는 모습에 가깝다.
조금 고생한 티가 나기는 하지만.
"진짜 다행입니다! 스승님!"
녀석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커헉."
SSS급 헌터가 나한테 달려드니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다.
"리더는 지금 환자라고, 붙지마."
"스승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진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야, 사람 말을 좀 들어. 리더는 기억 상실이야."
"뭐?"
"잠깐, 천성호. 기다려. 내가 설명한다."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 앉힌 신태양이 난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 그런 거였군요. 그러면 기억 상실은 아니네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미 채아연이 찾으러 갔어."
"그러면 문제 없겠네요."
대체 누굴 찾으러 간 걸까. 이런 문제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설마 백묵은 아닐테고.
"스승님이 쓰러지신지 약 한 달이 지났어요. 그 동안 나름대로 방어 전선을 구축했지만 슬슬 놈들의 총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그 전까지는 편하게 지내셔도 됩니다."
웃는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하는 신태양. 그 전까지 방법을 귀환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죽는거나 마찬가지.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됐어?"
"간신히 상황을 공유하는 정도죠. 지원이나 협력은 꿈도 못꾸는 수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절망적인 상태에요. 그래도······."
신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이 깨어나셨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나에 대한 신뢰가 무서울 정도로 두텁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도, 지금의 나는 멸망한 세계의 마족을 상대할만큼 강하지 않다.
"너무 부담 가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대한 편히 지낼 수 있게 해드릴게요. 아뇨, 만약 못 돌아간다고 해도 죽기 전까지 보필하겠습니다."
"······."
어쩌면 내가 빨리 목표를 달성하고, 귀환하는 게 이 녀석들을 위한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돌아가면 이 시점의 이지한이 의식을 각성할 지도 모르니까.
그 뒤로는 또 다른 내가 알아서 하겠지.
'유니크 스킬 두 개와 웨펀마스터 레벨 10.'
최대한 빨리 목표를 달성해서 본래의 세계로 귀환한다. 의지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위이잉—!
기지 외벽에 달려 있는 붉은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신태양이 손목에 달린 시계를 확인하고선 검을 꺼내들었다.
"기지 주변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은데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한달음에 뛰어 전망대를 벗어났다. 가벼운 돌풍이 일었다. 천성호가 나를 전망대 아래쪽으로 안내했다.
"마수 침입. 흔히 있는 일이에요. 저희는 안전한 장소에 대피해 있죠."
붉은 빛이 점멸하는 기지 내부를 빠르게 이동했다. 맨처음 내가 있었던 로비에 도착했다.
유리벽 너머로 푸른 섬광이 치솟는 게 보인다. 분명 신태양의 검술일 거다.
"아, 그러고보니 궁금하시겠네요. 나머지 최후의 10인은 각자 방어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어요. 연락은 해뒀으니까 교대로 이쪽으로 올 거에요."
궁금하기는 하다. 변화된 미래인만큼 내가 아는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각자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지금의 미래도 충분히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내 본래의 세계를 바꿔야 한다.
쿠웅, 콰앙!
바깥에서는 굉음과 섬광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천성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으음······. 일단 저도 도와줘야겠어요. 형, 여기 있으면 아연이가 올 거에요."
그 말을 남기고 천성호가 사라졌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홀로남아 상태창을 확인했다.
현재 내 레벨은 80.
S급 초입인 100까지 20레벨이 남아 있다.
거기에 하나 더.
『 이계 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 중입니다······. 』
아직 전투의 마족을 토벌한 업적이 계산되지 않았다. 보상에 따라 이곳에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복도의 통로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건 한 명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
금발의 소녀.
영락 없는 외국인의 모습.
내가 아는 멸망한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국의 S급 헌터였으니까.
그녀는 유창한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사부의 마지막 제자 엘리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나도 모르는 미래의 제자가 있었을 줄이야.
106화 오지 않은 미래(3)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앞으로 다가올 시기.
그러니 내가 모르는 미래가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막상 엘리스를 마주하고 나니 꽤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녀와 접촉할 생각이 없었다.
"······. 너는 미국의 헌터 아니었나?"
심지어 엘리스는 S급 헌터였다. 멸망 이전의 세계에서 S급 헌터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만큼 엘리스가 내 제자로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네, 그랬죠. 사부를 만나서 대한민국에 오게 됐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엘리스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흐음, 흐음. 정말로······. 시간을 뛰어넘어서 오신거군요. 역시 사부. 인과를 뒤집는 일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요."
채아연이 엘리스를 불러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능력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고도 독보적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능력은 시간 조작."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서 큰 유명세를 떨쳤었다. 물론 회귀만큼 직접적인 수준은 아니다. 그녀가 조작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는 SSS급 헌터가 되었을테니.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런 그녀가 내 제자라니. 아니, 애초에 제자라는 걸 두겠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황당할 따름이다.
"사부님의 시공 도약 지점을 살펴보자면."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카메라를 만드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나를 살피더니 흠흠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전투의 마족 처치 직후군요."
"그래. 그게 전부야?"
"네? 네. 제가 알아낼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에요. 거듭 느끼지만 사부를 둘러싼 인과의 사슬은 제가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복잡하고, 난해하게 얽혀 있어요. 으으······."
엘리스가 손사래를 쳤다. 내 능력에 대해서나, 내가 회귀를 해왔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눈치다.
"저랑 만나는 건 그것보다 훨씬 뒤의 일이 되겠네요. 시공 도약이라니. 사부의 능력은 정말 미스테리하다니까요. 잠시만요."
엘리스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로비 한구석에 놓인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약과와 한과 봉지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잠시후, 따뜻한 커피와 함께 한과를 가져왔다. 독특한 조합이다.
"손님 대접이 늦었네요. 마시면서 들어주세요."
엘리스는 창밖의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족의 침투를 막는 신태양과 천성호의 섬광이 이따금씩 하늘을 뒤덮었다.
"사부가 보시기에 이 세계는 어떤가요?"
"······."
인류는 사실상 패배했다. 본래 맞이 했어야 할 미래에 비하면 희망적이나, 그마저도 멸망을 앞두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좀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는 없었던 걸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엘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아쉽죠. 최선을 다한 결과지만 너무 아쉬워요. 저도 그렇게 느껴요.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면 사부는 또다시 이런 미래를 맞이하게 되겠죠······. 그건 너무 슬퍼요."
엘리스의 푸른 눈 위로 씁쓸한 감정이 내비쳐졌다.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가 다짐하듯 내게 말했다.
"사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게요. 과거로 돌아가서도 미래를 바꿀 수 있도록요. 단 하나의 미래라도 바꿀 수 있도록."
이 아이도 신태양과 천성호와 마찬가지다.
내게는 처음만난거나 다름 없는 상대지만, 엘리스에게선 나를 향한 깊은 신뢰와 믿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혹시 몸은 괜찮으신가요?"
나를 유심히 보던 엘리스가 말했다.
"몸? 몸은 괜찮은데."
"그렇다면 다행인데······. 아마······."
그녀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 전.
콰아앙!
강한 폭발이 기지 바깥에서 터졌다. 유리창이 검은 연기로 뒤덮이고, 가벼운 진동이 기지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이어지는 푸른 섬광과 붉은 빛살이 어지러이 솟아오른다. 바깥에서의 전투가 격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쉽게 정리 될 것 같지 않다.
엘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도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사부의 능력은 전투의 마족을 쓰러뜨렸을 시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충분하네요."
멸망이 코앞까지 치달은 지금 시점, SSS급 헌터들만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에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 칭호 '마계의 재앙'의 효과를 받고 있습니다. 』
『 데미지 1,000% 상승 』
이계규율의 칭호가 있으니, 전투를 보조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다.
"여기에요 사부!"
엘리스를 따라 기지의 바깥으로 나왔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엘리스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후방으로 침입한 상대는 중위 재생의 마족."
세계가 마계화 된 지금, 중위 마족이라고 해도 그 강력함은 내가 가늠할 정도가 아니다. 당장 SSS급 헌터들이 애를 먹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붉은 암석 지대의 매캐한 연기 사이로 신태양과 천성호의 모습이 보였다.
신태양의 호쾌한 푸른 선이 곳곳에서 돋아나는 촉수들을 계속해서 잘라냈다. 허공에 발을 디딘 천성호가 검을 내려치자, 수십 붉은 운석이 떨어지며 대지를 강타했다.
그야말로 전쟁터다.
신태양이 베어내는 촉수의 수보다, 새롭게 돋아나는 수가 많다. 전투 자체는 우위였지만, 적을 없애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큭, 베어내도 베어내도 끝이 없네. 천성호 똑바로 좀 해봐!"
"야, 누구한테 명령질이야!"
이 시점에서 둘은 아예 친구를 먹은 모양. 그런 둘을 뒤쪽의 성녀 채아연이 말렸다. 그녀의 뒤로 강렬한 후광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둘 다 정신차려. 여기서 뚫리면 끝이야."
그녀의 손 끝에서 뻗어나간 빛이 신태양과 천성호의 몸을 감싸자, 둘의 움직임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이내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가 되어 촉수들을 베어내고, 파괴해나간다.
이것이 SSS급의 전투.
그러나 상대인 재생의 마족도 물러서지 않고 촉수들을 소환해 왔다. 저 멀리 보이는 본체의 입이 열렸다.
[ 가련한 인간들이여. 네 놈들의 멸망이 머지 않았다. 예정된 운명을 맞이해라. ]
그 목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다. 개인의 존재와 정신 자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마성(魔聲).
피부가 찢어지는 것처럼 따갑고, 몸 전체가 후들거릴 정도다. 생물 본연의 본능이 직감적인 경고를 나타내고 있는 거다.
격의 차이.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만한 능력과 힘을 소유해야 한다.
'크윽, 장난이 아니네.'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을 발휘합니다. 』
고작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정신이 아찔하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사부, 괜찮으세요?"
"그래."
마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태양과 천성호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유성과 푸른 선들.
재생의 마족이 다시금 분노를 쏟아냈다.
[ 너희들로는 나를 가로막지 못한다. 네 놈들의 지도자를 불러와라! ]
전신을 덮치는 강렬한 충격. 내장을 다쳤는지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사, 사부?! 아연양, 여기 좀 봐줘요!"
"괜찮아."
나는 입가를 쓱 닦아냈다. 아무 생각 없이 놈의 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건 아니다.
『 유니크 스킬 '지고의 정신 Lv.1'을 획득합니다. 』
『 상위 격에 대한 대항력이 증가합니다. 각종 정신계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좋았어.'
20만배의 경험치가 단번에 내게로 쌓이며 스킬로서 변화했다. 앞으로 상대할 상위 마족이 가진 '격'에 대항하려면 이 작업은 필수적이었다.
이른바 예방접종.
앞쪽의 상황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신태양과 천성호가 촉수들을 베어내고 있지만, 재생 속도가 너무 빠르다.
"큭, 상대가 너무 안좋아. 이럴 때 스승님이 계셨더라면······."
네가 원하는 스승 여기에 있다. 뭐, 진짜 이 시대의 나에 비하면 못 미칠지 모르지만.
재생의 마족을 상대로 내 일자베기는 꽤 통할 것 같거든.
『 타재간파의 서의 모든 항목을 활성화합니다. 』
『 광화, 신속, 오러블레이드, 초공간인지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콰아아—!
내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뻗어나왔다. 그 기척을 눈치챈 신태양과 천성호가 뒤를 돌아봤다.
"진짜로 스승님이 오셨잖아?!"
"리더! 여기는 너무 위험······!"
그런 걱정을 일축하듯 엘리스가 소리쳤다.
"어차피 사부가 아니면 저 마족은 못 쓰러뜨려요! 사부를 엄호해주세요!"
엘리스의 눈 위로 푸른 이채가 맴돌기 시작했다. 권총을 손에 든 엘리스는 내 옆으로 딱 달라 붙었다.
『 동료 엘리스가 스킬 '절대 미래 예지 Lv.8'을 발휘합니다. 』
그 순간,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잔상처럼 표시되었다. 마족을 처치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정확한 루트가 내 눈에도 보인다.
"지한 오빠, 버프 받아요!"
『 동료 채아연이 스킬 '초(超) 신성 축복 Lv.9'를 발휘합니다. 』
눈부신 빛이 내 몸을 휘감자, 모든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는 몸이 전에 없이 가볍다.
촤아악—!
땅 속에 숨어 있던 촉수들이 날 막기 위해 솟아났다. 그 빠르기와 힘은 내가 반응조차할 수 없을 정도.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신태양과 천성호가 우글거리는 촉수들을 단번에 베어내며 내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냈다.
"가세요, 스승님! 길은 저희가 뚫겠습니다!"
"리더! 저 개 같은 놈한테 한 방 먹여줘!"
잘려나간 촉수들이 어지러이 하늘위로 날아 올랐다. 나는 그것들을 헤치고 거침없이 마족을 향해 달려나갔다.
손에 쥔 역전의 검의 칼날이 새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크하하! 이지한! 드디어 나왔구나! 덤벼라, 네 놈을 죽이고 나는 상위 마족의 좌에 오르도록 하겠다! ]
마족이 내 이름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내가 얼마나 유명인이 됐는지 새삼 느껴진다.
『 유니크 스킬 '지고의 정신 Lv.1'을 발휘합니다. 』
이제 격에 대한 저항력은 충분하다. 스킬에 더해 타재간파의 서까지 모두 발휘했으니 목소리만으로 주춤되는 일은 없다.
[ 죽어라! ]
촤르륵—!
놈이 뻗은 손에서 보랏빛 촉수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솔직히 말해 보이지도 않는다. 놈과 나 사이에는 그만큼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
멸망한 세계라는 압도적인 격차.
그러나 내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놈의 공격을 피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엘리스의 절대 미래 예지.
예지가 보여주는 잔상을 따라 몸을 움직일 뿐.
콰아앙!
[ 뭣이? ]
간발의 차이로 빗겨나간 촉수가 애꿎은 바닥을 부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놈과의 거리를 코앞까지 좁힐 수 있었다.
놈에게도 최후의 수단은 있었다. 마족의 입에서 솟아난 촉수가 나를 노리고 쏘아지는 찰나.
나는 역전의 검을 틀어쥐었다.
『 아이템 특수 효과 '역전의 기회'가 발휘됩니다. 』
『 절대적인 선공권을 1회 가지게 됩니다. 』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 시간, 이 공간 속에서 오로지 나만이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망설일 건 없다.
나는 모든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 레전더리 스킬 '절대 일격 Lv.2'를 발휘합니다. 』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마족을 양단하는 푸른 광선이 하늘 높이 치솟는다. 끝을 모르고 올라간 빛은 붉은 하늘을 가르고, 검은 먹구름마저 몰아냈다.
본질을 베어내는 레벨 13의 일자베기가 재생의 마족을 갈라냈다. 압도적인 상성의 우위다.
더 이상의 재생은 불가능할 터.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 어쩐지······. 약하구나······. 그렇구나······. 부상을 입었던 거구나. 그때의 전투에서······! ]
촤르르륵!
마기와 함께 돋아난 수 천 가닥의 촉수가 재생의 마족을 뒤덮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시 자신의 몸을 재생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크윽!"
각성 스킬로 인해 90%의 체력과 마력을 잃었다. 온갖 탈력감이 밀려온다. 이대로 쏟아지는 마기와 촉수를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젠장, 물러나는 수밖에 없나.'
그리 생각하는 찰나였다.
내 뒤에 있던 엘리스가 속삭였다.
"제 능력은 시간 조작. 사부를 보조할게요. 마음껏 휘둘러주세요."
그녀의 손이 가볍게 내 등을 밀자. 가벼운 빛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 동료 엘리스가 스킬 '시간 조작 Lv.9'를 발휘합니다. 』
소모했던 체력과 마력이 거짓말처럼 되돌아왔다. 온 몸을 지배하던 탈력감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내 몸 상태는 각성 스킬을 사용하기 이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거 좋은데."
나는 다시 한 번 검을 들어올렸다.
시간을 되돌려 주기만 한다면,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일자베기 삼연타.
콰아아아—!
세 개의 푸른 줄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칭호 덕에 10배로 증가한 데미지가 지축을 울리고 대지를 갈랐다. 전례없던 규모의 공격이 재생의 마족을 덮쳤다.
무수히 솟아오른 촉수들이 재가 되어 허공으로 사그라들었다. 본질을 잃고 흩어진 재생의 마족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했다.
"하, 이게······. 형이지."
천성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신태양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붉었던 하늘의 틈새로 푸른 하늘이 얼핏 보였다. 멸망하기 전 푸르렀던 그 하늘이 잠시나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내가 했다고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동료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털썩.
나는 검을 바닥에 놓고 주저앉았다.
'윽, 죽을 것 같다······."
엘리스의 시간조작을 받았음에도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완벽히 시간을 되돌려주는 건 아닌가? 하여튼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오빠, 지금 당장 치료할게!"
"사부, 괜찮으세요?!"
당황한 채아연과 엘리스가 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괜찮으니까 그만 흔들어줬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레벨업 알림과 포인트 획득 메시지창.
그 사이로 생각치도 못한 메시지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 이계규율의 정산이 끝났습니다. 』
'응?'
파직, 파지직!
그런 내 시야 한켠으로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 중위 전투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중위 재생의 마족(미래)을 처치하셨습니다. 』
『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
『 해당 업적의 실현 가능성은 0% 입니다. 』
'뭐······?'
『 아카식 레코드에 해당 업적이 영원불멸 기록 됩니다. 』
『 소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의 업적에 감탄합니다. 』
전투의 마족을 처치한 일과 재생의 마족을 처치한 업적이 동시에 계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 이계 규율이 보상을 지급합니다. 』
전에 없던 검은 빛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107화 미래의 스킬(1)
허공에서 솟아난 검은빛은 내 손목을 감쌌다. 빛은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팔찌로 변화했다.
동시에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처음보는 검은 상태창 위에 떠오른 금색 글자들.
나는 조용히 메시지를 읽어나갔다.
『 이계 규율 : 초월의 길 』
『 초월의 좌를 향한 시련이 시작됩니다. 』
'초월의 길······?'
그 두 개의 메시지가 전부였다.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시련이 시작된다고는 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건 내 손목에 생겨난 검은 팔찌 뿐.
『 초월의 팔찌 』
- 등급 : 흑(黑)
- 착용자의 격이 상승합니다.
- 아이템 본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소유자의 능력이 현저히 낮습니다.
이것마저도 설명은 길지 않다. 퀘스트를 위한 도구인 것 같기는 한데.
이계의 규율의 보상인만큼, 그 등급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흑색. 어딘가 다른 세계의 등급 체계인 것 같다.
'초월의 좌······.'
어느 정도 예측은 간다. 멸망한 세계의 영웅들이 나눈 이야기 중 일부가 소문처럼 퍼져 있었기에.
'마계왕은 초월자라는 소문이었지.'
군단장조차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서, 마계왕이란 존재는 넘볼 수 없는 장벽이었을 거다.
SSS급을 뛰어 넘은 최상위 격의 존재.
그것을 초월자라고 부른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내 동료들도 초월자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물어보면 되겠지.'
떠오른 메시지창은 여기서 끝인가 싶었는데. 검은색 홀로그램 뒤에 황금빛 메시지창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응?'
『 1★ 칭호 '마(魔)의 대적자'를 획득합니다 』
- 필드 마계에서 모든 능력치 3배 상승
- 제약 무시 3%
'와······.'
지금까지 사용하던 칭호 '마계의 재앙'이 별이 없는 무성(無星)등급 칭호였다면, 이번에 얻은 칭호는 무려 별 하나짜리 1성급 칭호다.
이것 또한 우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등급이지만, 그 효과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능력치 3배 상승······. 이건 장난 아닌데.'
단순히 데미지가 올라가는 것보다 뛰어나다. 전투는 여러가지 능력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니까.
기존의 데미지 증가와 합쳐지면 그 강력함은 상상 이상이 될 거다.
SSS급 헌터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겠어.'
물론 지금 당장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일자베기를 연달아 날렸더니,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
『 레벨업! Lv.81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82가 되었습니다. 』
···
..
.
『 레벨업! Lv.100이 되었습니다. 』
고개를 돌려서 메시지창을 확인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도 재생의 마족을 잡고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다.
이걸로 내 레벨은 100.
등급은 여전히 A지만, 원래대로라면 S급이 되는 레벨이다.
'드디어 이만큼······.'
내 쪽으로 가장 먼저 달려온 신태양이 날 부축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아니."
뒤이어 달려온 천성호와 채아연, 엘리스가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포션을 뿌리고, 버프를 걸고 난리다.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는 못 끝냈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어요."
"기억상실에 걸려도 리더는 리더라니까."
천성호는 아직도 기억상실 타령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던 인류의 리더였는데, 어쩌다 저런 허당이 된 거냐.
한차례 치료가 끝나자, 나는 몸을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신태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몸? 왜?"
"일자베기 13레벨, 그러니까 본질베기는······."
엘리스도 그렇고 신태양도 내 몸 상태를 묻는다. 별 다른 느낌은 없는데. 그런데 그 다음 신태양의 입에서 나온 말이 충격적이었다.
"수명을 사용하잖아요."
* * *
전투의 마족을 처치하고, 기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왠만한 호텔 저리가라 할 기지의 시설에 감탄했다.
자고 일어나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요리사가 따로 있어 식사를 준비해주기까지 한단다.
"이지한님, 어서오세요.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특별히 맛있는 음식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된장찌개에 밥과 수육, 쌈채소가 나왔다. 멸망한 세계라는 게 믿기지 않는 수준의 퀄리티다. 반대편에서 음식을 받던 엘리스가 손을 들었다.
"사부!"
엘리스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로부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족이 총공세를 펼치기 직전이지만, 도시 내부의 사람들은 비교적 온건한 생활을 하고 있단다.
문명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나 또한 이번 미래에서 많은 것을 알아갈 필요가 있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마족의 손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설명해주던 엘리스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아, 그리고 여기에 있는 동안 수명에 관한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있으니까요."
13레벨 일자베기. 신태양의 말에 따르면 그건 본질베기라고 불리는 상위의 기술이란다. 수명을 소모하는 대신 상대의 본질을 훼손하는 극의.
'그 탈력감의 정체는 수명이었던건가.'
과도하게 힘이 빠진다 싶기는 했다. 엘리스는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사부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을 때가 문제인데······. 저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자베기를 주의해서 사용하셔야 할 거에요."
엘리스의 능력을 활용하면 본질베기로 줄어든 수명을 되돌릴 수 있단다. 리스크가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었다.
"제가 처음 사부를 만났을 때, 사부의 수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엘리스의 시선이 내가 끼고 있는 팔찌로 향했다. 어제 얻었던 초월의 팔찌다.
문양이 새겨진 흑색의 팔찌.
무슨 짓을 해도 빼는 게 불가능해서 포기하고 끼고 다니기로 했다.
"사부, 근데 그건 뭔가요?"
처음본다는 듯한 엘리스의 말투. 그녀는 심각한 눈으로 내 팔찌를 바라봤다.
"미래의 나한테는 이게 없었나?"
"네, 처음봐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아이템이네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아이템······. 이게 뭔가요?"
내친김에 초월의 팔찌와 초월자에 대해 말했다. 아쉽게도 내가 아는 정보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어쩌면 사부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요. 저희랑은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양 손을 꽉 쥔 채 그리 말하는 엘리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엘리스는 트레이닝 룸으로 이동했다. 기지의 수많은 시설 중 하나였다.
이동하는 도중, 기지에 없는 다른 인원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각 영웅들은 동, 서, 남, 북 각 방위를 담당하고 있어요. 서현 언니는 동쪽에 있구요, 세아는 서쪽에 있죠. 전방에 보이는 마족들과 대치하고 있는 인원도 있고 여러모로 복잡해요. 아, 오르티마는 남쪽에 있어요."
그러고보니 오르티마가 없었다. 능력치나 인벤토리, 착용한 아이템 등은 내 것이 그대로 넘어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래도 내 오르티마는 집에 남겨두고 온 모양.
'뭐, 알아서 잘 있겠지.'
만약 그곳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알아서 찬장에 있는 라면을 꺼내 먹고 있을 거다. 그 정도 지능은 되니까.
"어쨌든 수련이네요. 마족의 총공세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사부를 최강의 헌터로 만들어 드릴게요."
엘리스는 열의를 불태우며 트레이닝 룸의 인식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위잉—.
기계화 된 문이 열리며 운동장 크기의 넓은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지 안에 이런 시설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멋지죠? 서현 언니의 공간 마법이 만들어낸 기적이죠."
벽면은 새하얀 타일로 뒤덮여 있다. 트레이닝 룸의 가운데에는 신태양과 천성호가 있었다.
"스승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유니크 스킬을 전수 받고 싶으시다구요. 최선을 다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인벤토리에서 죽도를 꺼내드는 신태양.
"후후······."
심상치 않은 미소다.
어쩐지 지난 날의 악몽을 떠오르는데. 검성한테 후드려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파앙!
그런 신태양에게 달려드는 천성호. 녀석도 죽도를 들고 있었다.
"비켜, 리더한테는 내가 알려줄거니까."
"이 자식이······."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서로가 나를 가르치겠다고 싸우는 모양이다.
"예전부터 저랬어요?"
엘리스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이 스킬은 세계가 멸망하고 나서 발견 된 스킬로, 영웅들 사이에서 공유된 필수 스킬이다.
"스승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죠. 실전에서 배우는 게 최고라고."
반반씩 나눠서 수업을 받기로 결론이 났다. 먼저 신태양이다. 어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다.
녀석은 죽도를 들어올리더니, 회상에 잠긴 듯 말했다.
"스승님한테 참 많이 맞았었죠. 그것도 다 추억이네요. 저도 진심으로 갑니다."
"잠깐, 내가 널 때렸다고······?"
"예, 그게 가장 배우기 쉬운 방식이더라고요. 저도 동의합니다."
신태양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로선 억울한 부분이다. 검성한테 쳐맞았으면 맞았지, 난 아직 한 대도 때린 적이 없는데.
젠장.
그러거나 말거나 신태양은 전속력으로 나를 향해 돌진했다. 가공할 파공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신태양이 나를 향해 죽도를 휘둘렀다.
파아앙—!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이 녀석의 죽도를 막아냈다. 수 차례 검격이 쏟아졌지만 나는 차분하게 받아냈다.
'새로 얻은 칭호 덕분인가본데.'
모든 능력치 세 배 증가. 그 효과는 뛰어났다. 반응속도부터 공격을 막아내는 힘의 조절 및 마력의 운용까지.
신태양은 놀란 기색이었다.
"어······. 그러면 더 강도를 올리겠습니다."
이어서 쏟아지는 검격은 한차원 위의 것이었다. 한 번 막아낼 때마다 크게 밀린다. 신태양의 눈은 어느때보다 진지했다.
"제가 흘리는 마력을 느끼면서, 받아치려고 시도하면 될 겁니다."
그 눈빛에선 옅은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
콰앙! 콰아앙!
'크윽.'
아무리 능력치가 올라갔다지만, SSS급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온 몸이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한다.
실제로 몇 군데 부러졌을 거다. 그러나 괜찮다. 오히려 좋다.
"스, 스승님!"
"야, 힘 조절을 그 따위로 하면······."
놀란 신태양과 천성호가 달려온다. 나는 걱정말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내 경험치는 빠르게 쌓이니까.
나는 무릎을 붙잡고 일어났다. 엘리스는 차분했다.
"엘리스, 치료 부탁해."
"네. 물론이죠."
내 몸의 시계가 이전으로 되돌아가며, 부상을 입은 부위가 씻은 듯이 회복되었다.
나는 다시 죽도를 들어 올렸다.
"다시."
스킬을 얻어서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온 몸이 부러져도 몇 번이고 다시할 의향이 있다.
나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신태양이 죽도를 바로 잡았다.
"알겠습니다."
천성호와 신태양이 교대로 나를 상대하며 스킬을 익히도록 도왔다.
약 반나절이 걸린 사투 끝에.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Lv.1'을 획득합니다. 』
『 힘 능력치 200% 상승, 영웅의 격을 일부 발현합니다. 』
나는 목표로 했던 스킬을 습득할 수 있었다. 몸 위로 솟아난 붉은 기운이 전신을 도포하듯 퍼져나갔다.
콰아앙!
나와 죽도를 맞댄 신태양이 뒤로 밀려났다. 그 발자취를 따라 운동장의 흙먼지가 흩어졌다.
신태양은 못 믿겠다는 혀를 내둘렀다.
"이걸 반나절만에······. 역시 스승님이시네요. 천성호는 1주일이나 걸렸거든요."
"거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와? 그러는 너는 2주일이었잖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스킬은 아닌 모양이다. 그 천성호나 신태양이 익히는데 오래 걸렸다는 것만 봐도.
아무리 20만배의 경험치라지만, 내 재능으로 익혔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다.
"이러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겠는데요."
앞으로 필요한 유니크 스킬은 하나.
거기에 더해 웨펀 마스터의 레벨을 10까지 찍어야 한다.
"이 다음 스킬은······. 서현 언니가 가장 잘 알려줄 수 있을 거에요. 구조적으로 서현 언니 말고는 쉽게 알려줄 수 없기도 하고요."
훈련을 지켜보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지금 서현 언니는 동쪽의 전장에 있다는 거에요. 괜찮으시겠어요?"
괜찮고말고.
스킬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108화 미래의 스킬(2)
"동쪽 거점을 방어하고 있는 서현 언니. 만나러 가실 거죠?"
기지가 위치한 도시. 그러니까 최후의 도시라고 명명 된 이곳은 다방면에서 마족의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적의 공격도 더 거세질 가능성이 있고요."
신태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실제로 어제 싸웠던 재생의 마족은 나를 보자마자 태도가 돌변했었으니.
멸망한 세계 말기.
바깥을 돌아다니는 마수들의 수준도 최소 SS급 이상일 확률이 크다.
칭호와 스킬로 능력치를 크게 올렸다고는 하나, 위험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신태양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
꽈악.
그런 신태양에게 천성호가 헤드락을 걸며 이죽였다.
"지금 리더를 상대로 걱정하는 거야? 참나, 댁이나 잘하슈."
"윽, 이 자식이······. 그래, 오늘 결판을 내자."
투닥대던 둘을 보고선 피식한 엘리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쩌시겠어요? 현상황에서 다른 인원들은 기지를 지켜야하기에 저와 사부만 움직일 수 있어요. 서현 언니가 직접 올 수도 없는 상황이구요. 위험할 수도 있어요."
거기에 대한 답은 뻔하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가야지."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마족의 총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빠르게 스킬을 습득하고 귀환해야 한다.
내가 귀환한다면 이 시간대의 내가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사부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럼 주저할 것 없이 바로 준비해서 출발하죠."
그대로 트레이닝룸을 나가려던 엘리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혹시 사부의 방에 가보셨나요?"
"내 방이 따로 있었어?"
잠은 다른 방에서 잤다. 로비에 놓여 있는 캡슐형 침대가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
"윽, 제 불찰이네요. 한 번 들렸다가 가죠. 도움이 될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엘리스의 안내에 따라 기지의 복도 한 켠으로 이동했다. 다른 방들과 구분되는 고급스런 명패가 걸려있었다.
내 단칸방을 떠올리게 하는 가구의 배치다. 실제로 내가 사용하던 배게가 그대로 있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여기서 쓸만한 건······.'
방을 둘러보는 내 시선이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향하는 찰나였다.
"아앗!"
덥썩!
엘리스가 달려들더니 사진이 담긴 액자를 온 몸으로 사수했다.
"모, 못 봤죠?"
너무 순식간이라 못 봤다. 나 혼자는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던 것 같은데. 여자였던 것 같다.
괜히 숨기니까 더 궁금하잖아.
"휴우."
가슴을 쓸어내린 엘리스는 사진을 서랍 속에 집어 넣었다.
"사부의 미래는 사부가 만들어가는 거니까요."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선 진지하게 말한다.
"어떤 미래가 있을지는 사부가 결정하는 거에요. 지금 경험하고 계신 미래도 사부에게는 그저 가능성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
"그보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텐데. 지금의 사부한테는 굉장히 유용한 아이템이······."
침대 밑을 뒤적이던 엘리스가 자그마한 귀걸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녀의 금발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찾았어요!"
『 아이템 설명』
- 이름 : 마력 복사의 귀걸이 Lv.100
- 등급 : 레전더리
- 효과 : 마력과 관련된 기술을 복사하여 구현합니다. ( 재사용 대기시간 : 1개월 )
- 특성 '무재조정'의 소유자만이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의 능력이 보이시나요?"
"굉장한데."
이러한 사기적인 능력으로 보건데, 미래의 내가 무재조정의 보상으로 받았던 게 틀림 없다.
"그게 사부가 다음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도와줄 거에요. 물론 그게 있다고 쉽게 배울지는 몰라요. 전적으로 사부한테 달린 일이죠."
"대체 무슨 기술이길래?"
엘리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초마력회로(超魔力回路).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할게요. 일단 출발하죠!"
* * *
채아연과 천성호, 신태양의 배웅을 받으며 기지를 빠져나왔다. 동쪽 거점은 기지로부터 10km 가량 떨어져 있다.
촤아악!
그 사이에 드문드문 존재하는 마수들을 처리하며 전진했다. 이 놈들은 마계의 기운이 짙어지며 자연 발생하는 놈들이다.
마족과는 관련 없지만, 인간을 습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투두두두!
엘리스의 쌍권총이 섬광을 내뿜자, 눈앞의 마수 무리가 녹아내렸다. 현대 무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이템이란다.
마력을 탄환으로 바꿔 발사하는 일종의 마도구.
엘리스의 탄환이 한차례 마수들을 훑고 지나갔지만, 끈질기게 살아 있는 놈들이 있다.
"부탁드릴게요, 사부!"
촤아악! 촤악!
내 손에 들린 역전의 검이 마수의 피륙을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공격력 200이라는 무기 고유의 수치와 칭호 '마의 대적자'가 합쳐지니 멸망한 세계의 마수도 가볍게 압살한다.
'문제는 이 놈들은 잡몹 수준도 안된다는 거지.'
진짜는 저 앞에 대치하고 있을 마족과 그들의 권속들이다.
촤아악!
마수의 검은 피가 길바닥을 적셨다. 그래도 멸망한 세계에서 전투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희망적인 일이다.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우. 역시 사부라는 말밖에는 안나오네요. 분명 전투의 마족을 쓰러뜨린 시점에서 오셨을텐데, 이런 전투라니."
여기에 오고나서 곧장 칭호도 얻고 스킬도 얻었으니 대폭 강해지기는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동쪽 거점에 도착이에요. 잠시만요."
엘리스가 매고 있던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녀석은 검은 로브를 내게 내밀었다.
고급스런 검정 원단 위에 금색의 자수가 놓인 그럴싸한 로브. 등짝에는 슬라임이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거 받아주세요. 지금부터는 이걸 입고 가야 할 거에요."
엘리스도 로브를 몸에 걸쳤다. 나는 로브를 유심히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뭔가 디자인이 영······."
"윽, 그렇게 말씀하셔도 곤란해요. 사부가 직접 디자인한 옷이니까요."
"다시보니 꽤 괜찮네. 감각이 있어."
"······."
아무튼 몸에 걸쳤다. 활동성도 좋고, 움직임에 도움이 되는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엘리스가 로브를 걸치라고 한 진짜 이유는 거점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어?"
"잠깐만, 저 로브는······."
거점에 모여 있던 헌터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옅은 소란은 순식간에 환호성이 되었다.
"리더가 깨어나셨다."
"정말로 리더가 오셨다!"
"와, 진짜냐?!"
수십 명의 헌터들이 나와 엘리스를 바라보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위로 들어 올리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리더! 리더!"
"이지한 리더, 어서와요!"
"빨리 윤서현 영웅님 모셔와!"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엘리스가 내게 속삭였다.
"도망치지 않고, 마족과 싸우기 위해 끝까지 함께하는 헌터들도 꽤 있어요. 직접적인 전투는 최후의 10인이 맡아서 하지만요."
열광적인 환호.
정말 익숙치 않은 광경이다.
미래에서 천성호나 받던 대우를 내가 받을 줄이야.
다만, 이들이 원하는 이지한은 내가 아니다. 미래의 나다.
과열된 열기 속에서 엘리스가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리더는 현재 회복 중에 있습니다. 큰 전력은 못 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분명 바뀔 겁니다. 희망은 저희에게 있어요."
엘리스의 말에 헌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오오!"
"끝까지 싸우자고!"
"리더가 일어났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깨어났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모여 있던 헌터들 사이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켓을 걸친 윤서현 헌터가 허공을 부유해 날아왔다.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어서와요, 지한씨. 사정은 전부 들었어요. 스킬을 전수 받고 싶은거죠?"
SSS급 헌터가 된 윤서현.
본래 네임드 고블린에게 죽었어야 했을 그녀의 미래는 나에 의해 바뀌었다.
그 결과 그녀는 최후의 10인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 * *
키에엑! 크르르······!
거점의 건너편에는 마수들이 들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넘어올 듯 붉은 눈을 번뜩이는 광폭화 마수들.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놈들은 무언가 벽에 가로막힌 듯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동쪽 전선은 서현 언니의 대규모 공간 마법으로 유지 되고 있어요. 서현 언니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붕괴되었을 장소죠."
"어머, 엘리스가 칭찬을 다 하네. 고마워."
이만한 대규모 마법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윤서현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그녀는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스킬을 전수하기 전에······. 마침 한 번 정리를 할 때가 되었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일정 고도에 다다른 윤서현이 은빛의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조각난 것처럼 어긋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솟아난 균열.
쿠구구구——!
그 속에서 강렬한 화염과 냉기가 미친듯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어서 돌연 허공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운석 하나.
키에엑! 키르륵! 캬아악!
그것을 목격한 마수들이 도망치고자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위치한 장소는 이미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고유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도망치지 못한다.
콰과과과—!
그들의 위로 쏟아지는 마법들은 그야말로 재해나 다름 없었다. 빽빽하게 몰려 있던 마수의 군세가 전멸 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와우,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니까요."
엘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이것이 SSS급 헌터가 된 윤서현.
차원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최후의 10인 중 하나였던 무한의 궁사 윤지은의 동생이 윤서현이었다. 천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멸망한 세계의 천성호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다.
'미쳤네.'
윤서현 혼자서 대군을 막아내고 있단 게 이해가 간다.
타앗.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윤서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그녀가 내 앞에 섰다.
"이러면 당장은 안심할 수 있겠네요."
"제 상상 이상이네요."
"와, 지한씨가 놀라는 일이 다 있네요."
신기하다는 듯이 쿡쿡 웃는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요. 마족을 몰아내려면 한참 부족해요."
"······제약 때문인겁니까."
"네, 맞아요. 그 놈의 제약."
영웅이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세계를 뒤엎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벽.
제약.
"동쪽의 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마족은 '제한의 마족'. 놈이 가진 제한이 제 힘의 출력을 막아내거든요. SSS급 이상의 공격이 제한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불합리함의 극치······. 아, 흠흠."
불만을 토해내던 윤서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여유로운 목소리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뭐, 지한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그보다 스킬을 알려드리는 게 먼저죠."
우리는 거점 근방의 공터로 향했다.
"지금부터 배울 건 초마력회로라는 스킬이에요. 제가 직접 개발한 스킬이에요. 마력 효율을 증폭시켜주죠. 최소 2배부터 5배까지."
사실상 과거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스킬이다.
"배우는 과정이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요. 양해해주세요."
고통스럽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윤서현이 설명을 이어갔다.
"온 몸에 존재 하지 않던 마력 회로를 그려 넣는 거거든요. 영혼에 문신을 새기는 것과 동일해요. 그러니까 그에 따른 고통은 당연한 거죠······."
윤서현이 내 손을 마주잡았다.
"동시에 제 마력의 흐름에 따라 지한씨도 같은 마력을 흘려보내야해요. S급 수준의 마력 제어가 필요한 일인데 괜찮겠죠?"
"아, 그건 귀걸이를 사용하면 될거에요."
엘리스가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고통스럽다고 하니까 괜히 긴장된다. 잠깐 고통스러워서 스킬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일쯤이야 몇 번이고도 참을 수 있다.
엘리스가 못 보겠다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츠즈즈—.
윤서현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보랏빛의 마력이 내 손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강렬한 고통이 찾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어라?"
윤서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109화 미래의 스킬(3)
윤서현의 마력이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고통은 커녕 오히려 답답하게 막혀 있던 부분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윤서현은 못 믿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이럴 수도 있나······?"
윤서현에 의해 생성된 마력회로가 전신에 자리 잡는 게 느껴졌다.
『 유니크 스킬 '초마력회로 Lv.1'을 전수 받습니다. 』
눈을 가리고 서 있던 엘리스가 손을 내렸다.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이런 일이 있었던가요? 원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사흘 밤낮을 끙끙 앓아 눕는 게 일반적인데······. 사부가 처음 스킬을 습득할 때도 그랬고요."
"······."
그 정도였단 말이야?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 첫번째 귀환 목표 '유니크 스킬 습득( 2/2 )'를 달성하셨습니다. 』
『 특이한 재능의 파편을 획득합니다. 인벤토리에 귀속됩니다. 』
기분 좋은 알림도 같이 떠올랐다. 이걸로 특이한 재능의 파편은 세 개째다. 특수한 조건 하에 조각으로 합성할 수 있을 거다.
"일단은 끝이에요. 시스템의 메시지가 떴다면 어쨌든 성공이니까요."
윤서현이 내 손을 놔주었다.
나는 팔을 빙빙 돌려봤다. 이어서 검을 쥐고서 마력을 부여해봤다.
스스스—.
푸르게 일렁이는 마력이 전에 없이 상쾌하다.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 자체가 크게 개선 됐다.'
예전에는 무작정 물을 쏟아붓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몸 안의 마력 회로를 통해 세세한 부분까지 출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일자베기를 연속으로 사용해봤다. 사용한 일자베기의 레벨은 12. 본래대로라면 상당한 마력을 소모해야 했지만.
『 '초마력회로 Lv.1'의 효과로 사용 마나가 68% 감소합니다. 』
실제로 사용되는 마나는 30% 정도. 일자베기를 일반 스킬처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수준이다.
'말도 안되는 효과잖아.'
기존의 고유 서클이 보유한 마력의 양을 대폭 늘려주는 스킬이었다면, 초 마력회로는 사용되는 마력의 양을 효과적으로 줄여준다.
그야말로 미래에만 존재하는 사기적인 스킬.
『 스킬 '초마력회로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초마력회로 Lv.3'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초마력회로 Lv.4'를 획득합니다. 』
새로 얻은 파편 덕분인지, 유니크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치가 순식간에 오른다. 스킬의 전수자인 윤서현이 옆에 있단 것도 한몫할 거다.
"아, 알 것 같아요. 사부의 중첩 상태 때문이에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엘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중첩상태?"
"사부의 몸에는 마력회로가 이미 개척된 상태였다는 거죠. 그래서 고통 없이 빠르게 스킬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아하, 그렇게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네."
윤서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고생하며 익혀야 할 기술을 쉽게 익혔으니 좋은 일이었다. 스킬을 익히는데 별 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잠깐, 그러면 마력 복사의 귀걸이는 아직 사용할 수 있단 뜻이잖아.'
본래 초마력회로를 익히는데 사용하기로 했던 귀걸이. 이 아이템은 마력 관련 기술을 하나 복사할 수 있다.
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러면 다른 스킬을 하나 더 배워갈 수 있겠는데.'
내 본래의 시간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스킬을 미리 습득할 수 있단 것은 큰 이점이다.
같은 유니크나 레어 등급이어도 멸망한 세계의 스킬들은 효율이나 효과가 더욱 크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들어낸 귀중한 기술이니까.
'그러면 무슨 스킬을 배우는 게 좋을까.'
복사할 수 있는 건 마력 관련된 스킬로 한정되지만, 이계규율에 의해 마법사 클래스를 습득한 상태다.
마법을 배워도 나쁠 건 없다.
그리 생각하며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드드드드······.
땅 위로 거센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저 너머로 들끓는 마수의 군세가 보인다.
윤서현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공간 장벽 너머, 마족의 군세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 * *
마계왕 산하 제 4군단 전진기지.
군단장 제한의 마족.
호화스런 붉은 의자에 몸을 걸친 그는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이지한이 깨어났단말이지? 심지어 이쪽에 와 있는 상황이고."
"예, 그렇습니다. 감시하던 권속들의 말에 따르면 틀림 없습니다."
"나쁘지 않은데."
현재 동부 전선은 초공간술사 윤서현 한 명에 의해 완벽히 저지되고 있는 중이었다. 제한의 마족으로서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너무 성가셔. 그 계집의 공간 마법 하나를 돌파 못해서 이 모양 이 꼴이라니. 그래서 준비하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지?"
제한의 마족은 그러한 교착 상태를 해소할 방법을 계속해서 간구해왔다.
"마침 준비되었습니다. 녀석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공간 마법을 파훼하고 인간 놈들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거 발전의 마족이 이지한에게 살해 당한 뒤로 제대로 된 마도 병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인간 놈들의 저항 따위 단숨에 돌파했을텐데.
"안내해라. 한 번 살펴는 봐야겠지."
제한의 마족은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부하를 따라 이동한 장소에는 쇠사슬에 묶인 마족 하나가 있었다.
크르르······.
지성이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군단장인 제한의 마족이 보기에도 지독한 마기가 놈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을 봉인해두기 위해 많은 자원이 투입되었다.
"과거 마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생체 병기 '유르스나템'이라는 녀석입니다. 이미 대부분의 마기를 소진한 상태라, 딱 한 번 정도 더 사용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한 번만 물꼬를 트면 우리의 승리나 다름 없지."
유르스나템의 몸에 새겨진 문자들. 그것을 해독하는 제한의 마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좋아. 공간 마법의 파훼도 어렵지 않겠어. 놈들의 지도자인 이지한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야.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더 없이 좋은 타이밍과 기회였다. 이지한을 처리하고, 인간들의 거점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면 차후 그가 거머쥘 공훈은 어마어마했다.
"바로 준비해라. 속전속결로 가지."
그리 말하는 제한의 마족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 * *
콰과과과—!
마수들은 미친듯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시야의 대부분을 마수들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키르륵! 키에엑!
그러나 윤서현이 만들어낸 공간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놈들은 허공에 무기를 두드려댈 뿐이었다.
"으음, 심상치 않네요."
윤서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죠. 그럼 다녀올테니, 안전한 장소에 있어주세요."
윤서현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주변의 공간이 유리 결정처럼 변화하며 공중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
솔직한 마음으론 돕고 싶었으나, 이 시간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전개되는 전투의 규모가 차원이 다르다.
내가 있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 최선은 이 세계를 바꾸는 게 아니다, 빠르게 목적을 달성하고 미래를 바꾸는 것이지.
"전투 준비해! 마력 전이 장치 점검 다시하고!"
"포션부터 옮겨놔!"
적들이 진군해 오는 것을 확인한 헌터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전투는 윤서현이 도맡아서 하지만, 그 보조 역할 또한 중요했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출력 제한 : SSS급 이상의 존재가 발휘하는 출력이 저하 됩니다. 』
광범위한 제약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물량으로 밀어 붙이겠다는거군.'
저 앞에 포진하고 있는 마수들의 힘은 SSS급 헌터인 윤서현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다.
사실상 윤서현이 마족의 군세를 몰아내고 거점을 넓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것을 억제하고 있는 게 제약이었다.
콰아앙!
윤서현이 만들어낸 공간 속에서 대규모 마법이 연달아 떨어지며 마수들을 폭격했다.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이만큼의 힘이라니.'
윤서현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에 대해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사부, 저희는 기지로 돌아가죠. 서현 언니는 괜찮다고 이야기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아요. 마족 측에서 사부의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일단 내가 살아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미래의 내가 깨어났을 때 상황을 바꿀 수 있을테니.
"그래. 돌아가자."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거울처럼 분리된 공간을 향해 쏟아지듯 달려드는 마수의 군세. 엄청난 범위를 윤서현 혼자서 커버하고 있었다.
"최대한 마력을 넘겨드려! 마력 부족한 사람들은 뒤쪽에서 포션 챙기고!"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복잡하게 설계된 마법진 위. 헌터들이 윤서현에게 마력을 보내고 있었다.
상자째로 쌓여 있는 포션들은 끊임 없이 운반 되고 있었고, 윤서현의 상황을 체크하는 헌터들도 있었다.
필사적인 와중에도 여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동쪽 거점을 지켜온 이들이기에 노련함이 묻어나는 전투였다.
엘리스를 따라 기지로 복귀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귀가 찢어질 듯한 파열음이 거점 전체를 뒤흔들었다. 강렬한 충격파가 헌터들을 훑고 지나갔다.
"······!"
그 충격에 땅이 뒤엎어지고, 거점을 구성하던 천막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대비하지 못한 헌터들이 무차별적으로 튕겨져 나갔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단 하나의 빛줄기였다.
비틀린 공간을 가르듯이 날아온 마광선.
그것은 윤서현이 자랑하던 공간이 단숨에 꿰뚫었다. 광선이 직접 닿지도 않았건만 그 충격만으로 거점 자체가 붕괴되는 지경이었다.
"크아아악!"
"다들 버텨!"
영원 같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고. 헌터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나는 윤서현이 있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사, 사부!"
엘리스가 당황하며 내 뒤를 쫓았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스킬을 익히고 돌아가면 무언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확하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패가 내 손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른척 벗어나고 싶진 않다.
타악.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땅을 밟고 뛰어 올랐다. 바닥에 추락한 윤서현이 보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보다 내가 왔다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지, 지한씨?! 왜 여기에 있어요? 빨리 도망······."
"도망가야 할 정도로 안좋은 상황 맞습니까?"
내 말에 윤서현이 쓰게 웃었다.
"네. 아까 그 공격 한 번에 공간 방벽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몰려드는 마수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방벽의 재구성은 불가능해요······."
공간 방벽이 사라지자 마수의 군세가 쉴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저 놈들의 수만 줄이면 되는 거죠?"
"설마 저기로 들어가려는 건 아니죠?"
"미쳤다고 저기에 들어갑니까."
가장 큰 문제는 제한의 마족 때문에 윤서현의 출력이 제한되고 있다는 것. 그녀가 SSS급 헌터이기 때문이다.
'제약은 마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럼에도 저 검은 광선은 윤서현의 공간마법을 파괴했다. 즉, 광선을 쏜 녀석은 SSS급 헌터가 아니란 거다.
스킬 자체가 매우 강력하단 의미겠지.
그렇다면 할 일은 간단하다.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 귀에 달린 귀걸이가 미친듯이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마력 복사의 귀걸이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레전더리 스킬 '초마도파괴광선 Lv.1'을 복사합니다. 』
허공으로 발산하는 녀석의 스킬을 나는 분명히 복사했다. 내 뒤의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부! 그 기술은······!"
이내 마법진이 강대한 빛을 발한다. 동시에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 모든 것을 뒤덮는다.
그 파괴력은 마법을 시전하는 나조차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 칭호 '마계의 재앙' 을 발휘합니다. 데미지 1000% 추가 』
『 칭호 '마의 대적자' 를 발휘합니다. 모든 능력치 3배 증가 』
휘몰아치는 마력의 바람 속에서 무수한 양의 메시지가 내 앞으로 떠올랐다.
『 스킬 '초마력회로'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스킬 '초마도파괴광선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초마도파괴광선 Lv.3'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초마도파괴광선 Lv.4'를 획득합니다. 』
20만배의 경험치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스킬의 레벨업.
마족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을 거다. 자신들이 쏘아낸 마법이 몇 배나 강해져서 되돌아 올 줄은.
극한으로 응축된 마력의 광선.
그것은 마수들을 집어삼키며 동쪽을 향해 끝없이 뻗어나갔다. 언덕이나 산과 같은 지형을 산산조각 내며 매섭게 전진했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녹아내린 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을 무렵.
"······."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마수들조차 두려움에 전진을 멈춰선 것이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내가 있는 쪽을 응시했다.
나는 말했다.
"엘리스, 다시."
한 번 쏘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놈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몇 번이고 쏴주마.
110화 미래 탈환 계획(1)
마족 진영.
콰아아아—!
생체 병기 '유르스나템'에 의해 발사된 초마도파괴광선이 인간들이 위치한 동쪽 거점을 뒤흔들었다.
"굉장하군, 아주 좋아! 기대 이상이야."
제한의 마족은 휘몰아치는 후폭풍을 한 손으로 막으며 크게 웃었다.
공간 마법 자체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위력. 윤서현이 구성한 공간의 격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주술을 발휘한 생체 병기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녹아내렸다.
"한 번이라는 게 아쉽지만, 뭐 충분하다."
이제 군단의 마수들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수들의 검은 물결이 인간의 거점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군단장 제한의 마족은 승리를 확신했다.
"마계대전때 사용되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구나. 크하하! 잘했다."
"감사합니다. 구해오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부하의 공을 치하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남은 건 자신의 군대가 인간의 거점을 휩쓰는 걸 바라볼 뿐이다.
"아무리 이지한이라고 해도, 내 제약을 벗어날 순 없다."
SSS급 이상의 출력을 제한하는 제약. 저만한 대군 앞에서는 아무리 이지한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그리 생각하며 팔짱을 끼는 그 순간이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방금 전 공간 격벽을 파괴하기 위해 발사 되었던 파괴광선이.
인간 진영에서 마족을 향해 날아 온 것이다.
콰아아아—!
검은 광선은 천 마리가 넘는 마수를 단번에 집어 삼켰다. 옆에 있던 충직한 부하 또한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뭐, 뭣이······?"
제한의 마족이 허망한 눈으로 부하가 증발한 자리를 바라봤다. 새까맣게 탄 피부는 마기로 수복했지만, 얼얼함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한 발로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파괴 광선이 연달아 날아오기 시작했다.
콰아아—! 콰아아—!
"뭐, 뭐 이런······?!"
침착하던 그의 눈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만 단위에 육박하는 자신의 군대가 말그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광선이 닿는 곳마다 쑥대밭이 되어 복구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뒤쪽에서 급하게 달려 온 부하들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한의 마족이시여, 이지한이 무슨 수를 쓴 게 틀림 없습니다."
"지금 당장 후퇴 해야 합니다!"
그런 보고를 들으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냐, 이럴 리가 없는데······."
이쪽에서도 단 한 발 밖에 사용하지 못한 비장의 무기가, 어째서 저쪽에 그대로 넘어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지한이 능력을 복사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제한의 마족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 환영이나 어줍잖은 술수겠지. 이지한의 기술이 아니다. 놈은 SSS급이 넘어. 기술을 그대로 구현한다고해도, 저만한 위력이 나올 리가 없다."
콰아아아—!
그런 제한의 마족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검은 광선이 바로 옆의 막사를 꿰뚫었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부, 부디 후퇴 명령을······."
몸의 절반이 날아간 마족이 바닥에서 간청했다. 제한의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대의 80% 이상이 전멸했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다.
돌아갔을 때 받게 될 문책. 군단장의 지위를 박탈 당해도 할 말 없는 실수였다.
'젠장, 젠장!'
그러나 여기서 인간들을 죽이겠다고 전진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었다. 이미 인간들의 손에 당한 군단장의 수가 적지 않다.
"크아아악!"
성에 못이긴 제한의 마족의 옆에 서 있던 부하 하나를 찢어 발겼다. 검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다른 부하들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의 판단을 기다렸다.
이를 악문 제한의 마족의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군, 후퇴한다."
그것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마족들이 물러가고 있어요······!"
엘리스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말했다. 시간조작으로 많은 체력과 마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자기 자신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사실상의 완전 승리였다. 적의 대군을 사부님 혼자서 쓸어 버렸다. 거기에 더해 군단장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기나긴 고착 상태에 빠져있던 동쪽 전선이 드디어 움직인다. 그것도 인간의 승리로.
'사부는 역시 사부라는 건가요······.'
지금의 사부는 과거에서 온 사부일텐데. 그가 불러 온 기적은 말로 다 표현이 되지 않는다.
비틀.
쓰러지려는 엘리스를 이지한이 끌어당겼다.
"괜찮아?"
"예······. 조금 쉬면 괜찮아질······."
엘리스는 비몽사몽 간에 정신을 잃었다. 시간 조작을 너무 남용한 탓이었다. 이지한도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았다.
'서 있는 게 고작이다.'
엘리스의 시간 조작이 100% 완벽한 건 아닌 모양. 사실 그만한 대규모 마법을 뻥뻥 쏴댔으니 멀쩡한 게 이상한 거였다.
"고생했어요, 지한씨. 여기서부터는 맡겨줘요."
앞으로 나선 윤서현 헌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지한씨가 만들어 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그녀의 앞으로 보랏빛의 투명한 벽이 생겨났다.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벽이 공간을 분리하고 있었다.
"리더! 괜찮으십니까?!"
"지한님 저희가 갑니다!"
뒤쪽에서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공격에 휘말렸다가 어찌어찌 회복하고 달려 온 모양새였다.
손에 포션과 각종 약초를 쥐고선 울퉁불퉁한 땅을 뛰어왔다.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표정만큼은 밝았다.
"한순간 전부 끝장인가 싶었는데, 역시 지한님이십니다. 크윽······."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치료해 드려."
"어, 저기 보세요!"
윤서현이 지나간 허공 위로 강렬한 보랏빛이 일었다. 그 빛 속에서 뛰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최후의 10인 중 두 명.
"리더, 제가 왔습니다! 미쳤네요, 진짜!"
"스승님, 이제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신태양, 천성호.
두 명의 영웅이 하늘을 가르며 나타났다. 잠시 이지한에 의해 초토화 된 땅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둘.
"그럼 갑니다!"
그들은 빛살처럼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슈우우—!
적(赤)과 청(靑) 두 개의 직선이 엇갈리듯 쏘아져 후퇴하는 군단장을 뒤쫓았다. 유성우처럼 그들이 떨어져내린 자리에서 눈이 멀듯한 섬광이 일었다.
이어지는 전투는 이지한의 눈으로도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전투였다. SSS급 세 명이 군단장을 노리고 벌어지는 전투.
쏟아지는 충격파와 파열음이 그 전투의 치열함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으우······. 지원이 왔네요······."
정신을 차린 엘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스는 이지한에게 안긴 채로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부, 진짜 대박."
그러고선 다시 축 늘어졌다. 그 말하려고 일어난 건가.
"······."
옆에 있던 헌터들이 큰일났다면서 달려들었지만, 그냥 잠든 거였다.
"제발······. 좋은 소식이 있기를."
"윤서현 영웅님에 검성하고 혜성까지 붙었는데. 무조건 우리가 이기겠지."
마족을 몰아내긴 했지만, 이어진 추격의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 제4군단장 제한의 마족 사살 완료. 리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을 해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으로 승리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이겼다!"
"으아아! 리더!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겼어!"
헌터들이 기쁨에 젖어 소리쳤다. 그걸 바라보는 이지한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군단장 제한의 마족은 처치되었다.
이번만큼은 인간 측의 완벽한 승리였다.
안도해서일까. 과하게 마력을 사용한 탓일까. 나 또한 엘리스처럼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거기서 사부가 마족의 스킬을 복사하더니, 단번에 콰과광! 알겠죠?"
"오오, 장난 아니네. 그래서, 그래서?"
정신을 차리니 엘리스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신태양과 천성호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뒤쪽에 채아연이 팔짱을 낀 채 경청한다.
"스승님이 마족의 기술을 사용하셨다고? 그건 마기 위주의 기술이잖아."
"마침 초마력회로를 배우셨거든요. 마기와 마력의 전환. 간단한 원리죠."
"하루도 안 지났는데······. 그게 그렇게 빨리 배울 수 있는 거였나?"
"야, 리더잖아. 당연한 거 아니야?"
근데 그걸 왜 내 방에 모여서 하는거냐. 방이 넓어서 괜찮기는 한데.
"응?"
내가 뒤척이는 걸 느낀 엘리스가 뒤를 돌아봤다.
"아, 사부! 일어나셨네요. 저도 막 회복을 마친 참이었어요."
"몸을 너무 혹사 시키는 거 아니야? 둘 다 너무 무리했어."
채아연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듣자하니 그녀의 정성 어린 간호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몸은 상쾌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역시 성녀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채아연은 고운 미간을 좁히더니 내게 경고했다.
"마도 기술은 최대한 사용을 자제해. 특히 과거로 돌아가면 여기와 달리 마기의 농도가 다른데다가, 그건 시전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쓰레기 같은 기술이란 말이야. 알았지?"
"······."
갑작스레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내 입장에선 아직 채아연을 만난 적도 없지만.
"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엘리스가 분위기를 바꿀 겸 손짓했다. 간략한 지도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미래의 기술인가.
"동쪽의 거점을 확장시키면서 저희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어요. 총공세를 대비하기 한결 수월해졌죠. 전부 사부 덕이에요."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사부가 스킬을 수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력이 늘었다는 거죠. 서현 언니의 활동 범위를 늘리고, 다른 영웅을······."
벌컥.
엘리스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방 안의 문이 열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오빠! 진짜 일어났네!"
진세아였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운 녀석은 단발을 휘날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SSS급의 돌진.
피하기엔 너무 빠르고, 그대로 있자니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으아앗, 안돼요! 위험해요!"
"리더!"
"스승님!"
우당탕.
엘리스와 신태양, 천성호가 진세아와 한데 뒤엉켜 넘어졌다. 난데없는 촌극을 바라보고 있던 채아연이 진세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지금 지한 오빠는 과거에서 왔다고 했잖아. 오빠 죽일 일 있어?"
"아야야······."
머리를 부여 잡은 진세아가 나를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네."
"넌 여전하구나."
"그거야 당연하지. 음, 그거 칭찬이지?"
조금 걱정했다. 내가 아는 멸망한 세계의 진세아는 조금의 감정도 없이 도둑질을 일삼는 기인이었으니까.
밝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미래의 나에겐 나를 바라봐주는 동료들이 있다. 나를 의지하고 따를 뿐 아니라 끝없는 응원을 보내준다.
'그러나 당장의 상황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도시 하나만을 남겨 놓은 지금의 상황.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내가 그리던 미래는 아니었다. 웃고 있지만 절망적인 상황이란 건 변함 없다. 그럼에도 이 녀석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
미래를 바꾼다.
그러기 위해선 미래의 지식을 다시 알아내고 계획을 새롭게 세울 필요가 있었다.
더 나은 미래, 인류가 승리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곳의 미래가 바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 되었다.
"내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겠어?"
알아야할 것은 많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멸망한 과정은 물론.
인류를 배신하고 마족의 편에 붙은 배신자의 정체까지.
샅샅히 알아내서 돌아가야 한다.
"오빠, 당연한 걸 묻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서 느껴지는 진심이 내게 도 전해진다.
"물론이죠, 사부."
"내가 아는 건 전부 알려줄게, 리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승님."
반드시 미래를 바꾸고 말겠다.
111화 미래 탈환 계획(2)
그 날부터 특훈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홀로그램 창을 띄운 엘리스가 내게 붙었다.
"기본적으로 제가 사부를 서포트 합니다. 저는 전투 인원이 아니거든요."
기지에 남아 있는 인원이 번갈아가며 내 성장을 돕기로 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아보이진 않아.'
도시 너머로 보이는 마족들의 군세가 심상치 않다. 동쪽 거점을 확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리한 상황이다.
마족의 총공세 이전까지 최대한 성장해야 했다.
본래 시간대로 귀환하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
1. 유니크 심화 스킬 두 개를 획득.
2. 스킬 '웨펀 마스터'의 레벨을 10 달성.
'첫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유니크 스킬인 '영웅의 힘'과 '초마력회로'를 전수 받았으니까.
둘 다 사기적인 성능을 가진 스킬이다. 내 본래 시간대로 돌아갔을 때의 성능이 기대 된다.
'남은 건 두 번째 조건인 웨펀 마스터 10레벨.'
웨펀 마스터의 현재 레벨은 3.
20만배라는 경험치가 무색하게 낮은 레벨이다. 다양한 무기를 다루지 않아서인 것도 있겠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뻔했다.
'재능의 부족.'
유니크 스킬부터 경험치가 쌓이는 속도가 느려진 게 체감이 된다. 경험의 질 자체가 높아지면 경험치 상승폭도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매번 목숨을 건 전투에 나를 던져 넣을 수도 없는 일.
'만년 F급 헌터였던 내 재능이 이만큼 올라간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거면 시작도 안했다.
"스승님, 좋습니다. 그 기세에요."
콰앙! 콰아앙!
폭격처럼 쏟아지는 신태양의 검격을 아슬아슬 하게 받아쳐냈다. 기지에 놓인 무기를 바꿔가며 신태양의 공격에 대응했다.
『 스킬 '웨펀 마스터 Lv.4'를 획득합니다. 』
"후우······."
반나절의 훈련이 끝나니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훈련 강도가 장난 아니다.
그래도 무작정 검으로 두드려 패던 검성 시절에 비하면 친절함이 느껴진다. 스승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달까.
뻐어억!
아닌가. 착각이었나. 인정사정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 대 스쳤을 뿐인데, 몇 십미터를 나동그라졌다.
"으윽······."
"아이고, 실수로 손에 힘이 들어갔네요. 잠깐 휴식할까요."
신태양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역시 SSS급이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신태양이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과거로 돌아가면······. 전 무조건 빡세게 굴려주세요. 전 굴러야 되는 놈입니다."
"너······. 후회 안 할 자신있어?"
과거의 자신이라고 막말하는 거 아니냐.
"지금의 강해진 스승님이라면 과거의 저도 뛰어 넘으신 상태겠죠. 부디 마구 굴려주세요. 전 그럴수록 강해지는 놈이니까요. 그보다 저한테 잘 맞는 훈련법은 없을 겁니다."
진지하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의견 잘 수용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저도 스승님께서 절 두드려 패고 싶으실 마음이 들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
지금부터 전력으로 나를 패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뭐, 바라던바다.
옆에서 데이터를 확인하던 엘리스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사부, 여기 물이랑 수건이에요."
"고마워. 그럼 다시 부탁할게."
"파이팅이에요!"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켠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체력이 다하고 몸이 부러져도 문제 없다. 엘리스의 시간 조작 한 번이면 원래 상태가 되니까.
낭비되는 시간 없이 훈련은 계속 된다.
저녁에는 기지의 인원들과 함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토론한다.
홀로그램 보드 앞에 선 천성호가 열성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니까, 제한의 마족을 미리 처치하고 이 순서대로 마족들을 격파하다 보면······."
"안 돼, 가장 먼저 죽여야하는 건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마족부터야."
그것을 성녀 채아연이 반박하듯 이야기한다.
"가장 큰 문제는 군단장을 미리 처치한다고 해도, 그 자리를 메꿀 마족이 차례차례 등장한다는 거야."
"그래도 전력을 줄이는 건 틀림 없잖아. 이어서 나타난 놈들은 본래 군단장이 될 놈들에 비하면 형편 없는 게 분명하고."
"결국 선택은 사부가 하는거죠."
엘리스가 끼어들며 열띈 토론이 이어진다. 그 안에 담긴 정보들 하나 하나가 매우 귀중하다.
"배신자들에 대한 것도 잊으면 안돼요. 두 명의 배신자 '김상욱'과 '김민수'. 그 두 사람은 현재 마족의 편에 서 있어요. 그 둘이 입힌 피해를 생각하면······. 반드시 미리 손을 써놔야 할거에요."
마족의 편에 선 자가 누군지 확실히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대마법사 김민수.
회귀의 마지막 순간, 김민수가 보였던 불길한 기운은 마기가 맞았던 거다.
'그런데 김상욱도 배신자라고······?'
영혼 계약으로 맺어져 날 배신할 수는 없을텐데. 아직까지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다.
어쨌든 마족들의 신상과 약점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기억하고, 확인하려고 애썼다. 일단 머리에 넣기만 한다면 '기억 탐색' 스킬로 언제든지 다시 확인할 수 있으니까.
* * *
훈련이 이어지면서 기지 내부의 시설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오네. 김건 혼자서 이걸 다 만들었단 말이야?'
각종 부대시설 및 오락거리는 당연하고,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한 설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기지라기보단 요새다.
재능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그러고보니 사부가 자주 사용하던 시설이 있어요. 훈련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안내해드릴게요."
엘리스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장소에는 신기한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여기를 내가 자주 이용했었다고?'
방의 중앙에 놓인 장치를 향해 다가가자, 나를 인식한 건지 녹색 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이 불쑥 튀어나왔다.
세 조각의 검은색 파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 특이한 재능의 파편이 세 개 모였습니다. 합성하시겠습니까? 』
허공으로 떠오르는 메시지창.
'이것도 김건이 만들어 놓은 장치인건가.'
재능의 파편을 합성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 미래에는 별 게 다 있구나 싶다. 내가 자주 왔다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맞아, 이거였어요!"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홀로그램 창을 클릭해 세 개의 파편을 합쳤다. 장치 위에 놓인 파편은 빛과 함께 하나의 조각으로 변했다.
『 특이한 재능의 조각을 획득합니다. 』
『 소유한 재능의 조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미약한 재능의 조각
- 특이한 재능의 조각
파편을 모아 조각으로 만든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이어지는 진세아와의 훈련.
『 스킬 '웨펀 마스터 Lv.5'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웨펀 마스터 Lv.6'를 획득합니다. 』
눈에 띄게 경험치 상승폭이 올랐다.
"우왓, 갑자기 공격이 날카로워졌는데?"
나를 향해 연습용 단검을 휘두르던 진세아가 감탄을 내뱉었다. 고작 연습용 단검인데도 강렬한 풍압이 몰아친다.
"내 공격을 막으려면 좀 더 무기를 다양하게 사용해야 할 거야. 마족들의 제약은 치사하고 더러우니까. 미리미리 대비해야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방위에서 날아오는 단검과 투척류 무기의 세례.
『 스킬 '체인지 웨펀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미리 준비 해둔 커다란 방패를 꺼내들었다. 동시에 몸을 크게 움직였다.
파아앙!
수 십 자루의 무기들을 일제히 튕겨내는데 성공했다.
『 레어 스킬 '방패 : 전방위 방어 Lv.1'을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방패 : 전방위 방어 Lv.2'을 획득합니다. 』
···
..
.
『 레어 스킬 '방패 : 전방위 방어 Lv.10'을 획득합니다. 』
순식간에 떠오르는 레어 스킬들. 특이한 재능의 조각 완성 이후로 스킬을 습득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심지어 웨펀 마스터의 효과 덕에 어떤 무기든지 가리지 않고 쓸 수 있으니, 그 시너지는 상상 이상.
진세아가 환호했다.
"오오! 그거야! 그러면 다음 간다!"
"잠깐······!"
말릴 새도 없었다. 마력이 잔뜩 담긴 무기의 폭풍이 나를 덮쳐왔다.
콰아앙! 콰앙!
신태양은 그래도 사람 봐가면서 힘조절을 했다지만, 진세아 이 녀석은 그런 것도 없다. 진짜로 생명의 위협이 느껴진다.
"으와앗, 세아 언니! 멈춰요! 사부가 죽겠어요!"
엘리스가 옆에 붙어 있어서 다행이다.
"자, 훈련은 이쯤하고······. 내가 엄청난 걸 준비해 왔단 말이지."
훈련 이외에도 진세아는 손수 작성한 세계 지도를 들고 와서 내게 설명했다. 색연필과 형광펜으로 군데군데 표시되어 있다.
"이거 만드느라 어제 잠을 한숨도 못잤다니까."
진세아는 펜으로 토끼 마크가 그려진 장소를 가리켰다. 여기에는 레전더리 아이템이 잠들어 있단다.
"이것만 확인하면 전 세계의 아이템과 게이트는 오빠의 손에 있는거나 마찬가지! 어때 장난 아니지? 물론 과거에 있는 내 협력이 필수적이겠지만 말이야."
"오오, 확실히 굉장한 걸."
"잠깐만요, 여기는 북한 아닌가요?"
"······몰래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어쨌든 유용한 정보가 한가득이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게이트와 던전에 대한 정보, 거기에 더해 보상까지.
"후훗, 그리고 과거의 나를 위한 훈련법도 미리 짜놨지롱. 이대로만 하면 내가 무적이 되는 건 시간 문제란 말씀."
여러가지 안내사항이 빽빽하게 적힌 노트였다. 되게 열심히 정리한 게 보인다.
"근데 니가 이걸 하려고 할까······?"
"······."
잠시 고민하던 진세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스읍, 그걸 생각 못했네."
어쨌든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웨펀 마스터의 스킬은 착실하게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었고, 각 영웅들로부터 과거의 자신에게 필요한 일까지 모두 기억했다.
어느덧 웨펀 마스터의 레벨은 9.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기까지 하루 남았다.
마지막 훈련은 윤서현과 함께였다. 그녀의 공간 마법을 통한 훈련은 지금까지 중 가장 체계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윤서현의 부탁은 간결했다.
"저는 언니를 꼭 살리고 싶어요. 부탁할게요."
그리 말하는 윤서현의 눈에는 쓸쓸함이 감돌았다.
최후의 10인 모두가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윤서현의 자매이자, 길드 은빛의 날개의 부마스터였던 그녀. 이 시점에서 윤지은은 죽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은 충분히 모였다. 다가올 미래 또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에서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기지의 넓은 유리창 바깥으로 마족의 군세가 보인다. 그들이 내뿜는 마기는 붉었던 하늘마저 어둡게 물들일 정도였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내색하지 않는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모두의 얼굴에 불안이나 긴장감 따위는 없어보였다.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사부님, 안녕히 가세요."
"오빠, 거기서는 마족 놈들 진짜 다 죽여 버려!"
"과거의 나한테 안부 전해줘, 리더."
내 앞에 선 신태양은 옅은 미소와 함께 검을 쥐었다.
"스승님, 준비 되셨으면 가겠습니다."
"그래."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파앙! 기지의 바닥을 박차고 쏘아지듯 날아오는 신태양.
보이지도 않던 검격이었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눈으로 따라갈 수 있다. 나는 거기에 맞서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새파란 불꽃이 터져나왔다. 두 쌍의 검기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맑고 청아한 빛.
이로써 마지막 경험치가 모두 채워졌다.
"스승님, 저희들의 과거를 잘 부탁하겠습니다."
『 스킬 '웨펀 마스터 Lv.10'을 획득합니다. 』
『 귀환 조건을 모두 달성하셨습니다. 』
『 본래의 시간대로 귀환합니다. 』
순간 의식이 아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 하다.
유체이탈을 하듯 내 의식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영혼을 잃은 내 신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리에 모인 모두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인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 해줄 수 없다는 게 미안하게만 느껴진다. 받은 건 많은데. 애초에 내가 귀환한다고 미래의 이지한이 의식을 되찾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저 하나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어쩌면 그는 군단장과의 전투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쉬움과 함께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끼던 그 순간이었다.
샤아아—!
내가 차고 있던 초월의 팔찌에서 금빛 기류가 형성 되었다. 흘러나온 빛은 시야 저편에 있는 미래의 내게 닿았다.
"······!"
힘없이 쓰러져있던 내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모두의 얼굴에 비친 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내 시야는 암전되었다.
미래의 내가 깨어난다고 세계를 구할 거란 보장은 없다.
멸망한 세계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죽은 사람들은 다시 살려낼 수 없으니까.
그래도 거기엔 분명한 희망이 있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그들의 세상을 구하기 위한 노력과 경험은 내가 이어 받았다. 반드시 미래를 바꾸고 말겠다.
어느새 몸을 감싸던 부유감이 사라지고, 기존의 중력이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이 안된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끓어오르는 듯한 고양감과 함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 본래의 시간대로 귀환합니다.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타오르는 불길과 어두운 성 안.
내 발치에는 마족의 머리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분명 자취방에서 재능 획득의 물약을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
여기는 대체 어디냐.
112화 미래 탈환 계획(3)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천천히 파악해야 했다. 시스템창은 분명 내가 본래의 시간대로 회귀했다고 했다.
시스템이 고장난 적은 있어도, 거짓을 표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녀석은······.'
나는 발치에 쓰러진 마족의 얼굴을 살폈다.
'중위 마족 중 하나다. 성채의 마족. 내가 쓰러뜨리려고 했던 놈인데.'
그때였다.
스르륵.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액체처럼 변하며 땅으로 떨어져 나왔다. 이윽고 은회색 광택의 슬라임으로 변했다.
오르티마였다.
덜덜덜······.
녀석은 뭐가 무섭기라도 한 것마냥 몸을 떨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이 녀석의 정보를 살피니 확실히 알겠다.
여기는 내가 있을 시간대가 맞다.
"왜 그래?"
내가 묻자 오르티마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몸에 그렁그렁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눈물 같은데.
뀨우······!
녀석은 뭐가 그리 반가운지 통통 튀어다니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자세히보니까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
뭐라는걸까. 굉장히 기뻐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아예 의사소통이 안되는 건 아니었다. 오르티마의 지능은 인간 못지 않았으므로.
뀨, 뀨우!
오르티마는 나와 죽은 마족 사이를 왔다갔다 움직였다. 즉, 내가 이 녀석을 죽였다는 거다.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건가······.'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뒤바뀌었던거군.'
현재의 나는 미래로, 미래의 나는 현재로. 둘의 몸이 바뀌었었던 것 같다.
즉, 미래의 영혼이 내 몸에 깃들어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내 눈 앞에 죽어 있는 마족도 이해가 간다. 미래의 내가 벌여 놓은 일이겠지.
'그건 그렇고 굉장한 솜씨네.'
놈의 목이 잘려나간 절단면은 소름끼칠 정도로 깔끔하다. 다른 상처는 하나도 없는 걸로 보아, 단칼에 죽인 모양.
'자세한 일은 나가서 확인하도록 할까.'
저 앞에 보랏빛의 게이트가 보였다. 바깥으로 향하는 출구일 거다. 나는 오르티마를 옆구리에 끼고서, 걸음을 옮겼다.
뀨우!
간만에 만난 거긴 하다만 유독 기뻐하는 것 같다. 미래의 나한테 혹사라도 당했던 걸까?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맞나본데.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오르티마가 나를 그렇게 반겼던 이유를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띠링.
게이트를 나오니 스마트폰으로 입금 알림이 도착했다. 들어온 금액은 약 3천만원. 거기까지도 그러려니 했지만.
잔고를 확인하는 내 미간이 좁혀졌다.
'잠깐······.'
일십백천만······. 연거푸 숫자를 다시 세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닌거냐."
104억 원.
내 통장 잔고에 찍힌 숫자였다.
* * *
내역을 보니 104억은 백묵과의 거래를 통해서 이뤄진 모양이었다. 내가 어디를 돌아다녔는지는 백묵에게 물어보면 답이 어느 정도 나올 듯 싶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우두커니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싱크대에는 각종 냄비와 마수의 소재로 보이는 것들이 가득했고, 바닥에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급하게 뭔가를 만들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 내 시야의 한 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잠깐, 저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약 네 병.
쪽지와 함께 놓여진 병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척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약이다.
나는 잡동사니와 마수 소재들을 헤치고 테이블에 다가갔다.
- 마셔라.
쪽지에는 내 글씨체로 간결하게 쓰여 있었다. 미래의 내가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묘한 기분이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약들이었다.
빨강, 초록, 노랑, 파랑.
물약들의 정보를 살피는 내 눈이 커졌다.
『 체력 강화의 영약 』
- 체력의 기초 포인트를 1.2배 올려줍니다.
'······미쳤구만.'
이 네 개가 전부 영약이었다. 헌터의 능력치는 물론, 앞으로 얻을 능력치까지 올려주는 사기적인 성능을 가진 영약.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아이템들이다.
'이걸 직접 제조했단 말이지.'
제조법 자체가 없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영약 S급 던전에서 보상으로 간혹 나오는 게 전부다.
그걸 직접 만들었으니, 방 안이 개판이 된 것도 이해가 간다.
영약은 총 네 개.
각각 힘, 체력, 민첩, 지력의 기초 능력치를 올려준다.
미래의 내가 돈도 벌어 놓고, 마족도 잡고, 영약까지 만들어놨다. 미래에서 수련하는 동안 이런 이득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 정도까지 해놓을 줄이야.'
방이 좀 더러워진 걸 빼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미래의 나도 분명 고민 끝에 내게 도움이 될 일을 해준 거겠지.
나는 고민하지 않고 영약을 바로 들이켰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 흘러들었다. 각별하게 맛있다.
『 스킬 '포션 체질 Lv.11'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포션(영약)의 효과가 33% 증가합니다. 』
『 체력이 1.596배 증가합니다. 』
포션 체질의 효과 덕분에 1.2배였던 영약의 효과가 약 1.6배 가량 증가했다. 이어서 힘, 민첩, 지력의 영약도 전부 마셨다.
온 몸에서 힘이 끓어 오르는 기분이다.
'강해진 게 체감이 된다.'
무재조정의 능력치 증가 효과와 합쳐지니 압도적인 시너지가 발휘된다. 실제로 늘어난 능력치의 양은 훨씬 많을 거다.
"보통 센스가 아니군. 역시 미래의 나인가."
"······."
오르티마가 빤히 나를 바라본다. 해본 소리다.
집에 놓인 물건들을 적당히 치우고, 나는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2주 동안 샤워도 안하고 돌아다닌 모양이다. 그만큼 미래의 내가 필사적이었단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조각처럼 갈라진 근육들이 탄탄하게 내 몸을 채우고 있었다.
"······."
원래 몸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영화 배우와 비교해도 손색 없는 근육이 내 몸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와."
감탄이 나올 정도다.
헌터의 체형은 능력치와는 별개다. 상위 헌터들 중에는 살찐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작아도 강함과는 별개다.
시스템의 보조를 받기 때문이다. 때문에 체형을 바꾸려면 그에 맞는 훈련이 필요한 법인데······.
'2주일만에 이런 몸을 만들었다는 건가.'
나는 잠시 거울 속이 내 몸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감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솨아아—!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몸에 묻은 땀과 마수의 피가 시원하게 씻겨 나갔다.
'덕분에 계획을 더 빨리 진행할 수 있겠어.'
자본에 더불어 능력치의 상승까지.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을 정도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오며 한계돌파 퀘스트의 목표가 정해졌다. 당연하지만 이 목표에는 내 의지가 깃든다.
미래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가 목표로서 작용한다.
『 <A등급> 한계돌파 퀘스트 』
- 목표 :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저지
- 클리어 보상 : ???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프로젝트:마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세계 곳곳에 마(魔)의 기운이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최상위 마족들은 이곳으로 넘어 올 수 없지.'
발전의 마족이 주관하던 '프로젝트:메이저 게이트'를 내가 막았기 때문이다.
마족들의 움직임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상위 마족들은 세계 곳곳에 사용되는 게이트를 폭주시켜 세계에 혼란을 가져오려고 한다.
그리하여 마계와 이 세계를 강제로 융합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렇게는 못 놔둔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는 사전에 차단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에 의해.
* * *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이것을 주관하는 마족은 세 명의 상위 마족이다. 그들 모두를 죽여야 프로젝트의 완전 저지가 성공한다.
'문제는 놈들이 꽁꽁 숨어 있다는 거지.'
미래의 정보가 대단하긴 대단한지라, 위치는 전부 파악된다.
다만, 거기에 쳐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다.
'그 시작은 아이템 파밍부터다.'
나는 은빛의 날개로 향했다. 높이 세워진 빌딩 아래, 나는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이지한 헌터입니다. 은빛의 날개 진세아를 만나고 싶은데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나를 알아본 데스크의 안내 직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바로 안내해주는 걸 보니 은빛의 날개에 내 이름이 퍼져 있는 모양이다.
'일단 국내 던전부터 싹 훑어야지.'
목적은 진세아를 통한 던전과 게이트 속 아이템의 회수.
현 시점에서 유니크 아이템은 활발하게 거래 되고 있지만 레전더리 아이템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최상위 헌터라해도 전 부위를 레전더리로 맞춘 인간은 손에 꼽으니.
아이템을 통한 전력 증강을 목표로 한다.
"······."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진세아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샤샤샥.
진세아는 내게 선뜻 다가오지 않고 기둥 뒤에 숨었다.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기둥 너머로 날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뭐야, 왜 그래?"
"오빠 맞아요?"
"그럼 나지. 누구겠······."
그 순간 바로 깨달았다. 이건 미래의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게 분명하다.
미간을 좁힌 채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진세아.
"지난 2주간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최대한 안심 시켜보자.
"세상에, 말이 통하잖아."
"······."
놀란 눈을 한 진세아가 스마트폰을 들어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에서 몰려나온 천성호와 신아람이 기둥 뒤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진짜로? 이제 형이 괜찮아진거야?"
"말했잖아, 말이 통한다니까!"
"선배, 정말 선배에요······?"
다행히 오해를 푸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라고 말 몇 마디하니까 금세 풀어져서 다들 내쪽으로 다가왔다.
"이야, 아니 지난 2주간 형 진짜 이상했다니까요. 아무말도 안하고, 미친듯이 사냥만하고 다니고."
"맞아, 뭐에 홀린 사람 같았다니까!"
"다, 다행이에요. 돌아와서."
신아람은 훌쩍이기까지 한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한동안 이 오해를 달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마 나름의 배려였겠지.'
미래에서 온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 그것은 내 주변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을 하고 갈 뿐.
"다들 걱정끼쳐서 미안. 근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자세히 설명해도 혼란만 가중 시킬 뿐이다.
여긴 아직 평화롭다.
마족의 진짜 목적을 아는 건 내가 유일하다.
나는 진세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말인데, 진세아. 너는 나랑 어디 좀 가야겠다."
"어디요?"
"이곳저곳."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레전더리급 아이템들. 우선은 한국부터다. 위치는 미래의 진세아가 그린 지도에서 전부 확인했다.
전부 털어서 와야 한다.
이른바 레전더리 투어.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할 생각이다.
113화 레전더리 투어(1)
나는 스마트폰의 지도를 확인했다.
'미래의 나도 대단하구만. 미친듯이 사냥만하고 돌아다녔네.'
백묵으로부터 내가 공략한 게이트와 던전에 대한 정보가 표시된 지도였다.
지난 2주간, 미래의 나는 영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파밍하러 돌아다닌 모양이다. 더불어 마족 사냥까지.
'진짜 대단하네.'
가벼운 존경심마저들 정도.
흔적이 남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건 지금의 나도 신경 쓰는 부분이니, 미래의 나도 당연히 고려해서 동선을 짰겠지.
'슬슬, 마족들도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동족이 그렇게 살해 당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나에 대해서 조사하려 들겠지.'
그 결과 만들어진 놈들의 계획이 프로젝트 '아포칼립스'가 될 거다. 세계 곳곳의 게이트를 터트려 세상을 아비규환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시동 되기 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맛있어. 맛있는데, 괜찮을까요?"
부산의 한 휴게소.
소시지와 떡이 번갈아 꽂힌 소떡소떡을 먹던 진세아가 물었다.
그 옆에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는 윤서현 헌터가 있었다.
"그래요, 지난 2주 동안 지한씨가 정신이 나가 있었던 거. 이해할 수 있어요. 원래 하나에 꽂히면 보이는 게 없는 사람이니까. 근데 지금부터 할 일은 불법이잖아요."
그녀는 내가 사준 아메리카노의 빨대에 입을 가져다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공략 중인 A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거니까요."
우리의 목적지는 레전더리 아이템이 잠들어 있는 게이트다. 공교롭게도 부산의 길드가 해당 게이트를 공략 중에 있다.
우리는 거기에 끼어들 거다. 그들이 먼저 아이템을 손에 넣기 전에.
"그런데 그게 변칙 게이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협회가 개입할 이유도 충분하고요. 그 분들의 사냥을 방해할 생각도 없습니다."
"정말로 변칙 게이트를 알아내는 능력이 있는 거에요?"
"뭐, 그런 셈이죠."
따라서 법적인 문제는 하나도 없다.
"팀장님이 묘하게 적극적인 것도 이상하고······."
윤서현은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협회 내에서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상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다.
'당연히 적극적이겠지.'
협회의 팀장 마성철은 백묵의 부하니까.
"그러면 출발하죠."
"잠깐만요, 거의 다 먹었어요."
우물우물, 진세아가 빠르게 떡을 씹어 넘겼다. 대충 배도 채웠으니, 지금부터 게이트 공략의 시간이다.
이어지는 이동은 간단했다.
"자, 잠깐 쓰레기 못 버렸는데······."
진세아의 중얼거림을 동시에 윤서현이 스킬을 사용했다.
『 동료 윤서현이 '공간이동 Lv.7'을 발휘합니다. 』
주변의 공간이 일렁임과 동시에 나무들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산기슭에 위치한 A급 게이트.
그 주변으로 길드의 천막이 보인다. 길드의 대기 인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 게이트는 현재 저희 반석 길드가 공략 중에 있는데요."
"헌터 협회 소속 윤서현입니다. 변칙 게이트 관련 신고가 들어와서요."
자연스럽게 수첩을 내밀어 보이는 윤서현. 그녀의 말에 반석 길드원의 얼굴이 하얘졌다.
"벼, 변칙 게이트요? 저희 게이트가 맞나요? 이미 공략이 한참 진행 중인데······."
"일단은 확인차 온 거니까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에요. ······아마도요."
그리 말하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 윤서현 헌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우리가 있으니까.
"그러면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일행은 게이트에 대해 간단한 정보를 듣고서 입장할 수 있었다.
『 A급 게이트 '잊혀진 고원'에 입장합니다. 』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평야. 저 멀리 시선 같은 높이에 구름이 흘러가는 게 보인다.
'반석 길드 사람들은 안 보이는군. 벌써 지하로 내려간 건가.'
원래 운명대로라면 레전더리 아이템을 발견하는 건 그들이다. 그러나 길드장을 제외한 모두가 목숨을 잃는다.
지하의 최심부에 위치한 마지막 시련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을 거다.
"들어가죠."
『 스킬 '기억 탐색 Lv.11'을 발휘합니다. 』
미래의 진세아가 그려놨던 지도와 녀석이 말했던 정보를 조합하면, 아이템이 숨겨진 장소는 금방 찾을 수 있다.
폐허가 된 돌 건축물.
그 아래 지하로 향하는 철문이 있다. 스산한 기운이 물씬 풍겨오는 철문이다.
"이중 던전이네요."
주위로 이리저리 찍혀 있는 발자국이 보였다. 반석 길드가 이곳으로 진입 했단 증거였다. 윤서현이 재차 물었다.
"괜찮겠어요? 이중 던전의 난이도는 한 단계 높은 게 기본이잖아요. 여기가 A급 게이트니까, 이 내부는 최소 S급이라는 소리인데."
"괜찮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죠. 서현씨가 있잖아요."
"그거야 그런데······."
내 말에 윤서현이 볼을 긁적였다.
물론 도망칠 일은 없다.
공간이동이 가능한 윤서현과 모든 것을 훔칠 수 있는 진세아가 있으니까.
이 안의 아이템은 우리 거나 마찬가지다.
* * *
약 반나절 전.
"대박, 길드장! 여기 좀 와봐!"
"미친, 이중 던전이잖아."
게이트 공략을 이어나가던 도중, 이중 던전을 발견 반석 길드. 보통 길드였다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장소지만.
그들은 환호했다.
"이건 기회야. 바로 들어간다. 다들 준비하라고 그래."
반석 길드의 국내 순위는 9위.
최상위 길드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있다. 심지어 이번 공략대의 절반이 S급 헌터이니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이중 던전에 잠든 아이템은 특별히 효과가 좋은 게 대부분이었다.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지하로 뛰어들었다.
"뭐가 이리 복잡해?"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으흐흐, 대박의 냄새가 난다."
내부는 축축한 성채였다. 복잡하게 뻗은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방향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다소의 고생은 감수할 각오를 하고 들어 온 거니까.
대박을 향한 그들의 희망이 불안감보다 더 컸다.
"쭉쭉 가자고!"
"다 죽여버려."
그러한 자신감이 절망으로 바뀌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아악!"
"괜찮아?!"
독 화살과 창날로 구성된 치명적인 함정은 기본이고.
"데스 나이트다!"
"다들 전투 태세 갖춰!"
"크으윽, 정신 똑바로 차려!"
모퉁이를 돌 때 마다 위협적인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그 수준은 예상대로 S급 마물에 필적했다.
"허억, 허억······."
"휴식을 취하면서 천천히 가자."
"기, 길드장. 저기 벽이 점점 다가오는데······?"
"크윽, 다들 뛰어!"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피로는 누적되어만 갔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미궁 자체가 그런 방식으로 설계 되어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헌터들을 몰아 넣고 있었다.
노련한 헌터답게 패닉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방법이 없다. 최심부에 도달하는 수밖에."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돌아갈 순 없지."
"다들 힘내자고!"
게이트나 던전은 규칙성을 갖는다. 미궁의 경우에는 보스의 방에 도달하면 클리어로 취급되며 출구가 생겨난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13시간 경과.
반석 길드는 갖은 고생을 한 뒤, 미궁의 최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크흑, 고생했다. 얘들아."
"오오······."
지하 내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동공.
거대한 여신상 하나가 중앙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뭔가 바닥에 파편들이 엄청 많은데."
"조심해, 보스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아니,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길드장인 박현수는 여신상 아래로 천천히 다가갔다.
새하얀 보물 상자 하나가 그 아래에 놓여 있었다. 박현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는 것 자체가 시련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그만한 난이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박현수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 가벼운 빛과 함께 내부에 들어 있던 아이템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유니크? 어쩌면 레전더리?
기대와 함께 내부를 바라보는 박현수.
"응?"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뭐야?"
상자 내부에는 수상한 나무 꼬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
떡꼬치를 꿸 때 쓰는 그런 나무 꼬치였다.
* * *
어둠 속에서 윤서현의 눈 위로 푸른 이채가 흘러나왔다.
"내부는 전부 파악했어요. 최심부까지 바로 이동할까요?"
아무리 복잡하고 긴 미궁이라고 해도, 윤서현의 재능 '초공간인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순식간에 이중 던전 전체가 그녀의 머릿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부탁하겠습니다. 공간이동으로 한 번에 가죠."
"괜찮을까요? 공간이동은 연달아 쓸 수 없어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윤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하게 들리는데, 왜 믿음이 가는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윤서현은 피식 미소 짓더니 자신의 주먹을 들어 올렸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에요. 저도 그 사이 꽤 강해졌거든요."
"나두요."
내가 사라져 있던 2주 동안, 이 둘도 분명 성장했겠지. 타재간파의 영향을 받아 경험치 증가량도 올랐을테니.
샤아아—.
윤서현 근처에서 나타난 푸른 기운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단번에 최심부로 이동한다.
복잡하게 거쳐야 할 미로를 완벽히 무시한다. 이것이 공간술사의 능력.
누군가가 본다면 경악할 수준의 사기다.
"항상 느끼지만 언니 짱이네요."
"이 정도야 뭘. 그래도 조심해. 여긴 이중 던전이니까."
넓은 동공.
중앙의 거대한 여신상.
들었던 대로다.
우리가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동 내부에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이곳에 도달한 그대들에게는 시험의 자격이 있도다. 』
『 여신 라기나이의 이름으로 시련을 내리노라. 』
몸 전체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 그 수준은 낮지만 분명한 격이 담겨 있는 음성이었다.
"우아······."
진세아가 그런 조각상을 올려보는 것도 잠시, 주변의 땅에서 녹빛의 골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드드······.
기존의 골렘과 달리 날렵하고 얇상하게 생긴 놈들이다. 이들 하나 하나가 S급 마수에 필적한다는 말이지.
나는 역전검 오르티시아를 들어 올렸다.
"진세아, 여신상에게서 보상을 훔쳐와."
"벌 받아도 난 몰라요."
어딘지도 모를 세계의 신인데.
알게 뭐냐.
"갑니다!"
진세아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녀석이 지나가는 자리에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골렘들이 휘두르는 형광빛 칼날을 전부 회피하며 전진.
눈 깜짝할 사이에 여신상 앞에 도달했다.
내가 할 일은 진세아가 물건을 훔치는 동안, 마수들의 접근을 막는 것.
"저희는 막죠."
"쉽지는 않겠지만요."
파앙!
윤서현이 쏜 중력탄이 골렘 하나를 겨우 밀어내고 튕겨져 나갔다.
"윽, 역시 아직은 위력이······."
S급에 필적하는 마수라 이건가. 나도 조금은 고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세를 낮추고 마력을 끌어 모았다.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Lv.10'을 발휘합니다. 』
미래에서 10레벨까지 올려 놓은 영웅의 힘을 발휘할 때다.
콰가가각!
"!"
가볍게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눈 앞의골렘들이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일격에 다섯체의 골렘이 박살이 났다.
옆에 서 있던 윤서현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 뭐에요?"
미래에서 한 훈련의 성과는 대단했다. 나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다가오는 골렘들을 차례차례 부쉈다.
콰과과과—!
어느새 내 몸에서 빠져나간 오르티마의 활약도 대단했다. 미래의 내게 특훈이라도 받은 건지.
목룡의 모습을 한 오르티마가 수십 기의 골렘들을 휩쓸고 지나간다.
"됐어요!"
그러는 사이 진세아가 보상을 훔쳐냈다. 녀석의 양 손에 커다란 보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 ······시련의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
『 보상이 지급 됩니다. 』
고장난 듯 메시지를 내뱉는 여신상의 기능이 정지한다. 시련이 끝이나며 움직이던 골렘들이 파편화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진세아의 절대강탈.
다시봐도 사기적인 능력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세아의 능력이죠. 보상을 확인하러가죠."
달칵.
상자에서는 오색찬란한 빛이 쏟아져나왔다.
보상은 예상했던대로 레전더리다.
그러나 이걸 모르고 있던 두 사람의 반응이 대단했다.
"우, 우와아앗! 와, 대······. 대박! 레전더리잖아요!"
목소리까지 떨리는 진세아와.
"지, 진짜 레전더리에요?"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윤서현.
둘의 반응이 재밌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전더리 맞습니다."
반석 길드에겐 미안하지만, 목숨 값에 비하면 싼 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있는 마수들은 정리하고 떠날테니까.
그리고 벌써부터 놀라면 곤란하다.
"그러면 다음 게이트로 가죠."
레전더리 투어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114화 레전더리 투어(2)
이중던전에서 획득한 레전더리급 아이템.
붉은 보석이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 가속하는 흐름(레전더리) 』
- 효과 : 지력 40% 상승, 마력양 30% 증가
- 특수효과 : 모든 스킬의 쿨타임 35% 감소
레전더리 아이템다운 놀라운 효과다. 특히 특수효과인 쿨타임 35% 감소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귀중한 옵션이었다.
"그러면 이건······. 윤서현씨가 가지는 걸로 하죠."
내가 가진 스킬 중에는 쿨타임을 가지는 게 없다. 일자베기도 수명이나, 체력을 소모할지언정 대기시간은 없으니까.
"예?"
윤서현이 되물었다.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레전더리는 현시점에서 최강의 등급. S급 헌터들이나 착용할 수 있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다.
그걸 내밀었으니, 놀랄만도 하다.
"어서요. 팔 떨어지겠습니다."
"아, 아뇨. 그냥 받기에는······. 너무······. 지한씨가 아니었으면 여기에 아이템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요."
윤서현의 능력은 이미 미래에서 확인했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는 혼자서 수 만의 마수들을 막아내는 실력자였다.
투자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윤서현의 공간이동은 쿨타임이 존재한다. 그것부터 줄여야 빠르게 다른 던전의 아이템도 회수해 올 수 있다.
"꾸물거릴 시간 없습니다."
나는 망설이는 윤서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려했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그제서야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자, 잠깐만요. 제가 찰게요."
"레전더리는 더 많이 있습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요."
"더 있다고요······?"
"와우."
그 말을 들은 진세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면 나도 레전더리 아이템 가질 수 있는 거에요?"
"물론."
"미쳤다······.."
미래의 영웅들의 전력 보강이 주요 목적이다. 물론 내 아이템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겠지만, 각 레전더리 아이템은 쓰임새에 맞게 각자에게 돌아갈 거다.
목걸이를 목에 찬 윤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설마 2주 동안 이걸 조사하고 다녔던 거에요? 레전더리 아이템의 위치를?"
"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두 사람 다 뭔가 감동한 눈빛이었다.
"······."
뭐, 영 틀린 말도 아니다. 2주 동안 미래에서 레전더리 아이템의 위치를 알아오긴 했으니까.
다만 어디까지나 인류를 위해서다. 둘이 감동하는 것만큼 사적인 이유가 아니다.
레전더리 아이템의 회수의 이점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번째로, 영웅들의 전력 강화.
두번째가 마족의 견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템들은 마족들도 이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족을 약화시키고, 우리 전력을 증강 시키는 효과가 있다.
"아직 공략해야 할 던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고생할 각오해야 할 겁니다."
"이런 고생이라면 백 번도 더 하죠. 그리고 고생도 아닌데요."
"어서 다음으로 가요."
두 사람 다 의지를 활활 불태우니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러면 이제 밖으로 나갈까요?"
"잠깐만요. 쓰레기 좀 버리고요."
진세아가 한 손에 들고 있던 나무꼬치를 보물 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보니 게이트를 공략하던 반석 길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시련도 멈춰놨으니 문제는 없겠지.'
열심히 미궁을 공략한 보상이 진세아가 버린 나무꼬치라는 게 좀 허무하겠지만.
말했다시피 목숨값에 비하면 싼 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