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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기다리던 사람의 등장



16화. 기다리던 사람의 등장

이운은 뒤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진옥경 역시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고대 사람들은 모두 흥미로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내 곧 상념에서 벗어난 이운은 황궁만을 생각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운천월, 거기 서!”

순간 앞쪽에서 큰 소리가 들리자 이운은 깜짝 놀랐다. 앞쪽에서 두 대의 화려한 마차가 달려왔고, 두 마차의 휘장이 동시에 걷혔다.

두 대의 마차에는 각각 분홍색과 녹색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이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에 눈살을 찌푸린 이운은 황궁으로 가는 길이 참 쉽지 않다 생각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분홍색 옷차림을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인의 이름은 영 왕가의 둘째 아가씨 용영란이었다.

“운천월, 잘난 척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우리 오라버니와 염 소왕야가 이번 한 번 널 비호해 줬다 해서, 네가 계속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태자전하 역시 사낸지 여인인지 분간도 안 되는 너 따위 영원히 좋아하실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내 오라버니와 염 소왕야가 진심으로 너한테 잘해준다고 착각 하지 마. 그 두 사람도 그냥 운왕전하와 운 왕가와의 관계 때문에 널 구해준 거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고!”

이운이 차가운 시선을 용영란에게 던졌다. 용경이 그녀의 오라버니라 했으니, 이 여인이 바로 채련이 언급한 그 영 왕가의 둘째 아가씨인가?

“뭘 보는 거야? 내 말이 틀렸어? 넌 거울도 안 보니? 네 얼굴을 보고도 사내들이 진심으로 발 벗고 널 구해줄 것 같아? 네가 운 왕가 정실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넌 이미 수천 번 죽고도 남았어.”

용영란이 가시 돋친 말투로 신랄하게 이운을 공격했다. 그에 이운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예의상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착하게 물었다.

“말 다 끝났어?”

용영란은 이운의 차가운 시선에 몸이 떨렸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말 다 안 끝났으면 어쩔 건데?”

이운은 더는 이 교활하고 포악한 여인과 상대하기 싫어 채찍을 휘둘렀다.

“망할 계집애, 거기 안 서!”

용영란이 이운의 뒷모습에 대고 눈을 부라리며 외쳤지만, 이운은 이미 순식간에 먼 곳까지 가 버린 상태였다. 그러자 용영란이 거칠게 휘장을 내리고 마부에게 소리쳤다.

“어서 출발해! 조부님께 오라버니가 왜 그런 오만무도한 계집애를 구해 준 것인지 여쭤봐야겠어!

마부가 지시에 따라 마차를 빠르게 몰았다. 뒤편, 효친 왕가의 마차 안에 있던 영소리 역시 휘장을 내렸다. 오늘 태자전하의 결연한 눈빛을 봐선 운천월에게 한 행동은 진심인 듯 보였다. 이를 미루어 봤을 때, 운천월이 태자비 자리에 오르는 날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 * *

황궁으로 가는 나머지 길은 다행히 평탄했다. 자신들의 본가로 돌아가는 마차들과 잇달아 마주쳤지만, 모두 휘장을 걷고 힐끔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운은 멈추지 않고 달려 마침내 황궁 입구에 다다랐다.

황궁 입구 앞에 화려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던 마차들은 이미 모두 떠났고, 검은색 마차만이 남아 있었다. 마차 앞을 지키던 검은색 복장의 남자 시위는 여전히 차갑게 굳은 얼굴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운 왕가에 갔다 다시 돌아온 지금까지 단 하나의 변화도 없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남자, 설마 목석이 되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가씨, 어떻게 다시 돌아오신 거예요?”

황궁 입구에 서 있던 채련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운을 향해 걸어왔다.

“아까 염 소왕야와 함께 본가로 돌아가시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근데 조부께서 경 세자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돌아왔다며 다시 모시고 오라고 날 이곳으로 보내셨어. 아! 그리고 내가 아까 염 소왕야와 경주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널 데려가는 걸 깜빡했지 뭐야. 한데 넌 왜 아직 돌아오지 않고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소인, 아가씨가 염 소왕야와 돌아가시는 걸 보았어요. 허나, 경 세자께서 나오셨을 때 아가씨가 안 계신 걸 알면 크게 노하실까 걱정이 돼서요. 그리하여 제가 기다렸다 같이 모시고 가려고 남아있었어요.”

‘정말 사려 깊은 아이구나……!’

처음 막 깨어났을 땐 왜 채련이 시끄럽게 화내는 중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지금 보니 아마도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해코지 당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아가씨가 별안간 어떤 무리에게 봉변을 당하자, 화가 나 그런 것이라 생각됐다. 만일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 아이를 잘 교육하면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어.”

“아가씨, 그렇게 말하지 마셔요. 응당 소인이 해야 할 일인걸요.”

채련은 이운의 칭찬에 재차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를 본 이운은 이 몸의 주인이 자신을 돌보던 시비에게 정말 못 되게 했을 거라 추측했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말 한마디에 채련이 저렇게 안절부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이운이 황궁 입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경 세자께선 아직도 궁 밖으로 나오지 않으신 거야?”

“네, 아가씨. 경 세자께선 아직 출궁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기다리자!”

이운이 말에서 내리자 채련이 즉시 고삐를 넘겨받아 말을 붙들어 맸다. 그러고선 재빨리 돌아와 이운의 반걸음 정도 뒤에 선 다음, 몸을 곧게 펴고 손을 모은 채 단정히 서 있었다. 그러자 이운은 채련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으로는 내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채련에게서 운 왕가의 내부 정보를 알아낼지 고민했다. 이것도 꽤나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계속해서 기억상실인 척 마음을 떠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억상실인 척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잘못 했다간 들통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고민해 봐도 이운은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물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채련의 목소리가 고뇌의 늪에 빠진 이운을 건져 올렸다.

“아가씨, 저길 보세요. 황궁 입구에…….”

이운은 채련의 말을 따라 황궁 입구를 바라보았다. 황궁 안에서 육 공공과 함께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고작 한 번의 시선이었지만,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내에게 이운은 순식간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 * *

연옥색 도포를 입은 그는 티 없이 깨끗했다. 옷은 보기 좋은 하얀 옥패를 제외하곤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은 태양을 가리기 위해 쓴 유지산(油纸伞)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길어진 그늘에 반쯤은 가려진 모습이었지만, 그의 수려하고 우아한 자태는 숨김없이 빛났다. 마치 한가로운 정원을 산책하듯 유유히 걸어오는 그를 보고 있자니, 구천지상(九天之上)에 흐를 법한 청풍백운(清风白云)처럼 흐릿한 자태만으로도 기꺼이 그에게 마음을 빼앗길 것 같았다.

그가 걸어오자 황궁 앞에서 기다리던 시위와 이운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육 공공은 대화를 나누며 만면에 커다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운은 ‘세상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있으나, 그 중에서 군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라는 시구를 이제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니. 흐린 모습에도 그는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가 애써 말해주지 않아도 저 사람이 바로 용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다르구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이운은 정신을 가다듬고 머릿속의 불필요한 생각을 날려 버리고자 했지만, 자꾸만 그를 향해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용경은 이운의 시선을 느꼈는지 유지산에 가린 얼굴을 반 정도 드러내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이운의 안정됐던 마음이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내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지? 저 사람 앞에서 여인들이 감히 미모를 논할 수 있을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되겠지만, 이운은 이미 그에게 마음을 뺏겨버렸다. 4황자, 태자, 염 소왕야, 운천월의 오라버니인 운모한까지 모두 절세미남이었지만, 이 사람만큼 자신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자는 없었다.

조금 전 길에서 만난 승상궁의 진옥경 또한 놀랄 만큼 아름다운 용모였으나, 용경에 비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의 외모는 마치 사람의 영혼까지 끌어당겨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마력을 지닌 듯했다. 과연 그의 용모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을 마친 이운의 눈이 가는 선을 그렸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야경염이 했던 말은 전부 옳았다. 이 사람하고는 가능한 한 절대 부딪히지 말아야 한다. 양귀비처럼 아름다운 꽃일수록 강한 독을 지닌 법. 나는 절대 그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으리라.

“아가씨? 경 세자께서 출발하셨어요. 저희도 가요!”

채련은 무척 놀라왔다. 경 세자는 본래 사람 곁에 세 발짝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방금 전에는 아가씨에게 한 발자국 앞까지 다가왔었다. 경 세자가 왜 아가씨를 구해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 우리도 가자!”

채련이 얼른 말고삐를 잡아 이운에게 건넸다. 그러자 이운은 민첩하게 말 위로 올라 채련을 향해 말했다.

“같이 타고 갈래?”

“아가씨, 소인은 괜찮습니다. 소인, 아가씨 뒤에서 그냥 뛰어 가면 되어요.”

채련이 연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늘 아가씨는 깨어난 이후로,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채련은 이운의 배려에 당황한 듯 안절부절 못했다.

뛰어서 날 쫓아오겠다고? 이운은 황당했다. 황궁에서 운 왕가의 거리가 아무리 가깝다 해도 최소 5리(里)는 될 텐데! 물론 말 뒤를 따라 뛰어올 순 있기야 하겠지만, 많이 힘들 것이다. 이운은 채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올라와, 내가 태워줄게!”

“아가씨, 소인은 정말 괜찮습니다. 어찌 노비가 아가씨와 함께 말을 타고 갈 수 있겠어요? 소인, 뛰어가면…….”

채련은 오히려 한 발 뒷걸음질 쳤다.

“뭘 꾸물대는 거야? 내가 같이 가자는데, 어서 타!”

이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채련은 벌벌 떨며 더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채련이 울음기가 어린 눈으로 이운을 바라보자, 이에 이운이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시비와 같이 타고 가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거야? 어서 타! 빨리 운 왕가로 돌아가자.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너무 배고프다.”

사실 이운이 채련과 함께 돌아가려고 했던 것은, 채련이 없인 운 왕가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운의 말에 채련은 울음을 삼키며 사방을 살폈다. 다시 한 번 주저하는 얼굴로 이운을 바라봤지만, 이운의 확고한 기색에 겨우 용기를 내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이운은 채련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겨 순식간에 채련을 뒷자리에 앉혔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붉은색 말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채련은 깜짝 놀라 이운의 허리를 두 팔로 다급히 끌어안았다. 아가씨가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운은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은 작은 손을 보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왠지 모르게 이 아이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마도 이곳에 와서 본 첫 번째 사람이라 더욱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