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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대순국(大舜國)의 태자와 공자들이 수학하던 아름다운 무애해각.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인 그곳에서 옥형선생(玉衡先生)의 손녀이자 대순국 최고의 재녀였던 옥종화는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무애해각이 아닌, 지금은 가세가 기울어진 지씨 가문의 저택이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모두가 그녀를 지씨 가문의 적장녀 지온 소저라고 부른다는 것! 숙부의 농간으로 인하여 혼약자를 빼앗겼다는 연유로 자진을 시도하고, 끝내 실성하고야 만 어리석은 계집. 친부모가 죽고 가산을 전부 숙부에게 빼앗기게 된 불쌍한 아가씨. 이러한 평판에 휩싸인 지온의 몸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알고 보니 세상 사람들은 무애해각이 불길에 휩싸였던 연유가 해구(海寇)의 침입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니? ‘아니야! 내 조부님을 활로 쏘아 죽이고 태자 전하를 시해한 이들은 해구가 아니었다!’ 천운으로 인해 지온으로 새롭게 태어나 복수를 다짐하는 옥종화! 그러나 그러려면 그 전에 이 지씨 가문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만 한다! 이전과 다르게 갑자기 기품 있고 재치 있게 구는 조카의 모습에 욕심 많은 숙부네 가족은 허둥지둥하고, 슬기로워 보이는 지온의 모습에 유씨 가문의 대공자 유신지는 끌리고야 마는데! 그리고 그런 지온에게서 그리워하던 여인의 모습을 겹쳐보는 북양왕가의 공자 루안. ‘왜 저 여자를 보면 그 여자가 생각이 나는 걸까?’ 원제: 天芳(천방)

윈지 · ファンタジ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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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흉수를 잡았네

20화. 흉수를 잡았네

대희가 친우의 등을 차분히 두드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놀라?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지장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저 사람은…….’

“태사부의 둘째 공자잖아!”

구석에 있던 지온이 유 공자라는 말에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서아가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지온은 입가의 물기를 닦고는 고개를 들어 유공자를 보았다.

유 공자는 분명 협의(俠義)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큰 자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본래의 지온’이 도성으로 돌아올 때 누군가 훔쳐갈 뻔한 주머니를 직접 나서서 막아주어, 그녀의 방심을 흔들지는 않았을 터였다.

지온은 많은 이들 앞에 나선 공자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출중한 소년이네.’

고개를 든 루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유 공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유 공자의 얼굴엔 불쾌함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유 공자는 충분한 예를 갖추며 공수한 뒤에 말했다.

“유모지(俞慕之)가 루 낭중을 뵙습니다.”

고 대인이 다가와 무어라 귀엣말을 전하자 루안이 그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태사부의 유 공자셨군. 하실 말이라도 있으신가?”

유 공자가 처음이라 무척 자제하며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 사건을 처리하시는 일에 본래라면 제가 끼어드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만, 취태평 같은 공공장소에서 이리 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곤 눈앞에 굴비처럼 엮인 일꾼들을 가리키는 유 공자의 음성에 잔잔한 분노가 실렸다.

“사건의 심리에는 근거와 증거와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일부러 저들을 선동하여 서로를 헐뜯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장궤가 이렇게까지 간청하니, 대인께선 이만 적당히 하시고 그만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람이 적당히 선을 지키고 그만둘 줄도 알아야지! 돈도 좋고, 위신도 좋지만, 적당한 선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도성이 어디 구석에 있는 작은 마을도 아니고, 5품 낭중 나부랭이가 하자는 대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유모지의 말을 들은 루안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루안의 음성이 천천히 울렸다.

“공자가 아직 임관 전이니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네. 본관이 사건을 조사하는 중이니 더는 공무(公務)를 방해하지 말고 가보시게.”

노기를 북돋는 루안의 대답에 유모지의 음성이 커졌다.

“공무라니요? 세상에 이런 공무가 어디 있습니까? 대인께서 일부러 꼬투리를 잡아 위협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까?”

예의가 없긴 했지만, 관리들을 보고 있는 구경꾼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누가 사건을 저리 처리한단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루안에게 향했다. 시선 속엔 공공의 적을 향한 적개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루안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고 대인이 이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유 공자, 아무리 태사부의 공자라 해도 조정의 명을 받은 관리를 이렇게 모욕해선 안 되네! 태평사가 하는 일에는 자연히 태평사만의 규율이 있는 법일세.”

“무슨 규율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단 말입니까?”

당연히 그 말 한마디에 물러갈 유모지가 아니었다. 그가 일꾼들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심문할 것이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물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서로의 비밀을 들추게 만들고, 거기다 발고하지 않으면 곤장을 때리겠다니, 일부러 인간의 악한 마음을 끌어내는 것밖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교화가 기본이라 하였습니다! 대인의 이러한 행동이, 어찌 군주를 횡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유모지의 말이 떨어지자 누군가 ‘옳소’를 외치며 그에게 호응했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루안의 행동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악한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억제하고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루안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생각들을 일부러 드러내게 했다. 평소에 그저 스치듯 지나간 찰나의 악한 생각조차 놓치지 않고 끌어내어 모두 앞에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린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일꾼들의 모습은, 그들을 보던 사람들 모두가 투영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평소 누군가를 싫어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으로 이러한 충동을 자제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게 옳다고 알려 준다면 어찌 되겠는가?

일꾼들의 행동은 보는 이들을 당황하게 했다. 사람들이 당황한 이유는, 만약 자신들 역시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저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군자’라는 가면이 찢어지는 것과 같았다.

모든 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돈이나 털어갈 것이지, 잘 쓰는 가면은 왜 찢고 난리야?’

“옳소!”

처음 외친 ‘옳소’ 뒤로, 다른 ‘옳소’들이 이어졌다.

취태평에 구경하러 온 이들 중 귀족은 아니어도 돈이 많은 이들은, 5품의 낭중 나부랭이인 루안에게 입도 벙긋하지 못할 만큼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대희가 작게 말했다.

“네 전 매부(妹夫), 사람 참 괜찮아 보이는데 인연이 안 되어서 아쉽네.”

지장이 대답했다.

“공자가 정의로운 사람인 걸 누가 몰라?”

그러면서 으르렁대며 경고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매부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혼약도 다 파기된 마당에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지온의 명성에 흠이 난다고!”

대희가 빙글빙글 웃었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나저나, 너희 집 큰아가씨는 어떤 사람이냐? 전에는 거만하고 횡포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유씨 가문에서 나오는 이야기론 그래도 이치를 아는 사람인 것 같던데?”

지장은 입꼬리를 씰룩거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치를 안다? 전과 달리 확실히 알게 됐지. 하필 이치를 따지고 드는 바람에 뜬금없이 분가까지 하게 되는 상황이 됐지만…….’

한편, 서아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유 공자는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그러다 지온을 보곤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말이 많았어요.”

지온은 고개를 저었다. 면사 안에 감춰진 지온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러다 창피라도 당할까 걱정이네.”

지온의 말에 멈칫한 서아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가씨, 지금 유 공자님 이야기하신 거예요?”

지온이 응, 하고 대답했다.

루안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었다. 보기엔 조용하고 정적인 사람처럼 보여도, 논리를 다투는 변론에서 져본 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큰 도리 하나 내세운다고 해서 그를 누르는 게 어디 쉽겠는가? 지온은 루안이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구경꾼들이 연이어 환호해대자, 낯빛을 굳힌 고 대인이 고함을 치려 하려는 그때였다.

루안이 손을 들어 고 대인을 제지했다.

“대인?”

시선을 들어 유모지를 바라보는 루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자, 루안의 청수한 외모가 더욱 빛을 발했다.

외모를 가꾸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도성의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내심 탄식을 흘렸다.

‘저리 잘생긴 사내가 이리 잔혹한 성정이라니.’

루안이 입을 열었다.

“유 공자, 자네는 본관이 일부러 저들을 위협한다고 확신하는군. 이러한 방법으로 하는 심문은 소용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맞는가?”

“당연합니다!”

유모지가 단언했다.

“여기 일꾼들이 자인한 일들이라 해봐야 사소한 일들뿐인데, 그 안에 얼마나 쓸모 있는 정보가 있겠습니까? 제가 아직 무능하여 임관은 못 했지만, 관아에서 일을 도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진술을 걸러내는 일은 번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닙니까? 반나절 물어봐야 정작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대인께서 벌이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구경꾼들이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내 말이! 일꾼들이 전한 말이라곤 누가 속곳을 훔쳤네, 누가 측간에 오래 앉았네 하는 것들인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그러나 지온은 유모지의 그 말에 작게 탄식했다.

“안타깝게 됐어.”

서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안타깝게 된 거예요, 아가씨?”

“공자가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 게 안타깝다는 거야.”

“네?”

루안은 탁자를 톡톡 때리며 웃음을 지었다.

“소용이 있다면 어쩌겠는가?”

유모지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공자가 믿지를 못하니, 본관이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군.”

루안은 대당 앞을 슥 훑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들 이리 흥분을 하였는데, 본관이 못 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루안은 곧바로 고 대인을 불러 귀엣말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고개를 끄덕인 고 대인이 아전 몇을 데리고 곧장 후원으로 달려가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한 채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대희는 일꾼들이 진술한 내용을 떠올리며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장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넌 알겠냐?”

지장이 고개를 저었다.

일꾼들이 발고한 내용은 두서없이 혼란스러웠다. 너나 할 것 없이 쏟아낸 조리 없는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그 안에서 필요한 정보까지 뽑아내라니?

하지만 당당하게 등을 곧추세운 루안의 모습만 보면, 진짜 자신들이 무언가를 놓친 것 같지 않은가?

이윽고, 고 대인이 아전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대인, 찾았습니다!”

고 대인이 큰소리로 보고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발견된 것은 옷이었다.

사내가 입는 상의 저고리였는데, 색깔은 청회색으로 하인들이 자주 입는 평범한 재질의 옷이었다. 저고리 끝에는 검은 점처럼 보이는 흔적들이 남아있었는데 보기엔 실수로 불똥에 탄 듯 보였다.

‘저 옷이 뭐가 잘못된 건가?’

루안의 시선이 일꾼들을 훑었다. 루안은 그 중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를 보곤,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을 잡아라!”

지축을 울리는 대답 소리와 함께, 날듯이 달려간 아전들이 그 사내를 잡아 붙들었다.

사실 붙들지 않아도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일꾼들은 굴비 엮듯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도망치려 해도 다른 이들이 방해될 터였다.

유모지도 당황했고, 구경꾼들 역시 당황했다.

“뭐, 뭐 하는 것입니까?”

“흉수를 잡았네.”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본관이 증명하길 원했던 건 유 공자가 아니었나?”

“아니…….”

상황이 이쯤 되니 유모지 역시 루안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해 놓은 말들이 너무 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반박하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대인께서 흉수라 하시면 저자가 흉수인 것입니까? 증거는 무엇입니까?”

“조금 전 했던 이야기들이 증거네.”

루안이 진술을 기록하는 서기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좌측에서 세 번째 일꾼. 그가 한 다섯 번째 진술을 읽어보게.”

“네, 대인.”

서기 중 하나가 기록한 책자를 뒤적여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상한 사람을 꼽으라면, 주창이지요. 사실 그곳에 있는 여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어디 있답니까? 그런데 혼자 어찌나 유난을 떠는지 모릅니다. 간밤에 난리가 난 것을 구경하다 실수로 향로에 부딪혔는데, 그게 그렇게 싫다고 돌아와 향냄새가 벤 옷을 버리지 뭡니까? 그걸 마음에 품고 있다, 기녀도 죽여 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