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화. 임신 7개월

1화. 임신 7개월

온 몸이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일하게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눈앞의 남자뿐이라는 듯, 그녀는 대리석처럼 싸늘한 그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살고 싶다는 본능이, 결국 마지막 거부감마저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통증과 함께 쾌감도 조금씩 치솟아 올랐다. 머릿속엔 불꽃이 쉴 새 없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작열하는 불바다 속을 홀로 나아가는 조각배가 된 것 같았다. 물결에 따라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치기를 반복하나, 스스로를 구제할 수는 없는…….

“환자분, 얼른 일어나세요. 여기 너무 추워서 이대로 잠들었다가 감기 걸려요.”

어깨로부터 전해지는 압력에 영서가 퍼뜩 깨어났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간호사의 친절한 눈동자가 보였다. 난처해진 그녀는 순간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했다.

벌써 한참 전의 일인데도 술에 진탕 취해 소연호와 함께 보냈던 그 뜨거운 밤은 여태 그녀의 꿈속에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의식이 거의 없을 지경까지 취해 있던 건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연호를 어떤 낯으로 봐야할 지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간호사는 영서가 깨어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산전검사 결과지 가져가는 것 깜빡하셨네요. 원장님께서 다음 주에 한 번 더 내원하시랍니다.”

영서는 살짝 웃으며 종이를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연호는 현지 조사를 하러 외국에 나갔다가 오늘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다. 오늘 저녁 그를 보게 될 것을 생각하자, 영서는 순식간에 마음이 긴장으로 젖어들었다.

연호가 있는 곳은 상당히 폐쇄적인 지역이라 뱃속의 아이가 일곱 달 넘게 자랄 동안 그와 한 번도 연락이 닿은 적이 없었다. 만약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연호는 충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자꾸만 번져가는 긴장감이 영서를 메마르게 하고 있었다.

임신 중이라 더 예민해진 걸까? 영서는 연호가 이 소식을 자신만큼 기뻐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절 위로한답시고 남자는 첫 아이가 생기면 심적으로 큰 변화가 생긴다고 했지만⋯⋯. 그가 과연 결혼이란 말을 쉽게 입에 올릴까.

* * *

병원에서 나오자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힘겹게 손으로 허리를 지탱한 영서가 손을 뻗어 택시를 잡으려던 그때, 눈이 아플 만큼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영서가 몇 걸음 뒤로 얼른 물러서자,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브레이크 마찰음과 함께 붉은 스포츠카가 영서의 코앞에 멈춰 섰다.

고작 옷자락에 거의 닿을 만큼의 공간만을 남겨둔 채였다.

놀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끼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준 영서가, 곧 차에서 내리는 새론을 발견했다.

파도가 치는 듯 구불거리는 머리에, 몸의 굴곡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새론이 자신을 향해 도도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새론, 너 미쳤어?”

높은 힐을 신어 평소보다 키가 더 커진 새론은 마치 도도한 고양이 같았다. 불룩하게 부푼 영서의 배를 고고하게 내려다보던 새론이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네 뱃속에 있는 그 아일 쳐서, 죽여 버리기라도 할까 무서워?”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안고 한 걸음 물러선 영서가 경계심 어린 눈을 빛냈다.

“한새론, 선 넘지 마!”

언제나 자신에게 못되게 굴어온 새론이었지만, 이런 심한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선은 네가 넘었지! 술에 진탕 취해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랑 나뒹굴어 임신한 주제에 연호 오빠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쯧쯧⋯⋯. 넌 낯도 없니?”

영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라고?”

“야, 너 진짜 그날 밤 너랑 잤던 사람이 연호 오빠라고 생각하는 거야?”

새론은 몸이 앞뒤로 흔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소연호랑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소꿉친구니, 죽마고우니 그러면서 정작 그 사람 몸이 어떤지도 몰라?”

영서의 얼굴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서 있는데도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그럴 리가, 그날 밤 그 남자는⋯⋯.’

어른이 된 이후로 조금 더 건장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새론의 날카로운 말이 잠든 그 날을 거세게 불러 일으켰다.

그날 밤 그 남자는 체격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부분에서도 소연호와는 달랐다는 선명한 기억을.

* * *

“솔직히 말해줄게! 그날 밤, 넌 내가 약을 탄 술을 마셨고, 난 좋은 뜻에서 욕구불만이었던 너를 두 남자에게 보냈지. 네가 천지 분간도 못하고 누군지도 모를 그 남자 방으로 들어가 그렇게 헤프게 굴 줄 누가 알았겠니? 착한 연호 오빠는 네가 충격을 받을까봐, 그날 밤 함께 했던 게 오빠라고 말해준 것뿐이야!”

새론은 마치 구역질이 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너⋯⋯.”

그 말에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난 영서가 새론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여태까지 괴롭힌 거로는 모자라?”

새론은 예쁜 눈썹을 치켜세우며 영서를 밀쳐내려다가, 돌연 목소리를 녹이고 가련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영서 뒤쪽에 나타난 연호를 알아챈 것이었다.

“영서야, 내가 잘못했어. 날 원망하고 욕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 절대 연호 오빠를 탓하지는 말고⋯⋯.”

갑작스레 바뀐 새론의 태도에 영서는 흠칫 놀랐다. 거기에 더해 새론은 별안간 뒤쪽으로 나자빠지기까지 했다. 마치 영서가 그녀를 밀치기라도 한 것처럼.

“한영서! 지금 뭐 하는 거야.”

뒤쪽에서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영서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연호의 냉랭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영서를 홱 지나치더니 새론을 부축해 일으켰다.

“새론아, 괜찮아?”

새론은 거의 연호에게 파묻히다시피 몸을 기댔다.

“오빠, 난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어. 난 그게 잘못된 건 줄 몰랐어. 그냥 난 내가 했던 짓의 대가를 치르는 거야. 영서한테 미안할 뿐이지⋯⋯.”

“미안하긴, 내가 다 해결할게. 내가 영서한테 똑똑히 말할게.”

연호는 새론의 어깨를 두드린 뒤, 그녀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 영서는 자신에게로 걸어와 말을 잇는 연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호의 말이 꼭 꿈처럼 아득히 느껴졌다.

어린 시절부터 셋이 오랜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자신은 새론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 새론이 영서에게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화도 나고, 영서의 임신에 충격과 죄책감마저 느꼈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새론의 사죄를 받아들였다는 것⋯⋯. 연호의 진심이 마침내 긴 종착역에 닿았다.

“영서야, 미안해. 난 너와 결혼할 수 없어. 그 날 밤 있었던 일과 그 날 생긴 그 아이 때문이 아니라, 새론이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새론이에 대한 내 감정도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고.”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한새론과 함께 외국에 있었고,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내며 더욱 깊은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영서가 받은 충격과 상처를 생각해 그날 밤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것이 자신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연호의 마음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던 이는 새론이라는 고백이 영서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그래서 영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영서와 새론의 부모님, 그리고 영서에게도 이 모든 상황을 사실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한새론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를 이런 상황에 끌어다 놓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런데도 한새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날 밤 나랑 함께했던 것이 너라고 말한 거고?”

이제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영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연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가 내뿜고 있는 서늘한 냉기에 영서의 마음이 조각처럼 잘게 부서져 내렸다.

“영서야, 새론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래. 아직 어린 애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럼 나는?”

영서는 절망감에 젖어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렸다.

“나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생각해봤어?”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연호가 영서에게로 손을 뻗었다.

“햇볕이 너무 강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건드리지 마.”

영서는 연호의 손을 쳐낸 뒤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 전체가 보잘것없는 농담으로 치부되는 기분이었다.

소연호가 사는 도시에 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공부한 끝에 겨우 B대에 입학했었다. 그리고 연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마저 내던져버렸다.

그의 집안 형편에 맞추기 위해 양부모님을 버리고, 한씨 성을 가진 친부모님에게 돌아왔건만. 겨우겨우 어색하게나마 부잣집 딸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을 갖췄던 건 오로지 그 하나만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세월들이 한순간 허무하게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 새론이를 저버릴 수 없어.’ 겨우 이런 말을 듣기 위해 그 많은 길을 달렸던가.

고작 이 말을 듣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을. 그 많은 마음을.

한새론은 자신의 자리를 강점하고, 친부모를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의 사랑마저 앗아가 버렸다.

‘나이가 어리니 잘못도 용서할 수 있다고? 그럼 나는? 난 심지어, 그날 밤 나랑 함께했던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영서는 얼굴을 움켜쥐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이내 영서는 정신을 잃은 채 도로 쪽으로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연호가 얼른 영서를 따라잡으려 했지만 새론의 저지에 가로막혔다.

“오빠, 어디 가려고?”

연호가 머뭇거리던 그 순간, 쾅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영서의 몸이 붕 날아오르다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임산부가 차에 치였잖아!”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영서는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구역질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배에서 끔찍한 고통이 전해지면서 영서의 의식이 흐릿하게 내려앉았다.

이마에서부터 거세게 흐르는 피가 영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영서는 이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