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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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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부터 취기가 가시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내게 춤을 추자고 할 때만 술의 힘을 빌렸던 걸까. 다프네는 어느 순간부터 멀쩡하게 바뀐 모습으로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멀쩡하다고 하면 어폐가 있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눈동자가 이제 술에 취해 탁하게 바뀌어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술 깼지."

내 말에 다프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뭐, 혼내거나 따지는 건 아닌데.

"…네."

나는 그 이상으로 묻지 않았다. 다프네는 내게 매달리듯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고 있는 걸까? 다프네에게도 묻고 싶은 건 몇 가지나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세상이 끝나지 않은 뒤에 해도 충분한 말이었다.

"저 안 돌려보내시나요?"

다프네는 자신감이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춤을 멈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함께 밟았다. 그러자, 다프네도 표정을 바꾸고는 춤을 추었다.

"그러면 이번 곡까지만 춤춰요."

다프네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쏠리던 시선도 어느덧 옅어졌다. 나는 일부러 게오르그와 마리안느에게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도, 다프네에게도.

"?"

나는 문득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 위로 왜 그렇게 바라보냐는 듯이,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지내는 건 어때?"

다프네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걸 지금 새삼스럽게 물어본다고요?"

"미안합니다, 내가 말주변이 없는 데다가 분위기도 딱히 신경을 안 쓰거든."

다프네는 내 대답에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띠었다. 다프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흐르는 음악에 맞춰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세상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저는 그냥 이곳이 좋아요."

다프네는 담담하게, 흐릿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로이도, 게오르그도, 마리안느도. 제가 처음으로 소속된 곳인걸요. 여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는 정말 모든 걸 걸고 싸울 수 있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프네의 말은 마지막으로 가서 진지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가 무겁다. 그녀의 삶은 이곳에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흐트러뜨렸다.

"응.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다프네는 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녀는 내 대답이 싱겁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달리 뭐라 하지는 않았다.

곡이 끝났다. 사람들은 악단과 춤을 추던 이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다프네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나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며 한 발짝 물러섰다.

"돌아가죠. 저기 게오르그가 안 그래도 언제 오냐는 것처럼 우리 보고 있는데요."

내가 고개를 돌리자, 게오르그는 잔을 슬쩍 들어 보였다. 우리가 자리로 돌아오자, 게오르그는 잔을 비우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제일 눈에 띄었다, 너네. 사람들이 다 너희만 쳐다보고 있었어."

"…그렇게 볼 게 없었나 싶기도 한데 말이지."

게오르그는 내게 손가락질하며 능글맞은 웃음을 내비쳤다.

"너희들이 가장 눈에 띈 걸 어떡하라는 말이냐. 눈에 띈 자신들을 탓해야지, 안 그러냐?"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래서, 얘는 지금 어디 갔는데?"

나는 눈을 흘긋 돌려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자기는 모르겠다는 듯 잔을 흔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다. 갑자기 술 한 잔 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리던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화장실 간 건 아닐 거고. 너희끼리 놀고 있어서 삐진 걸지도 모르지. 안 그러냐."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고, 다프네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느, 술은 마셨던가. 여태 가졌던 술자리에서 얘가 한 모금이라도 마시는 꼴을 못 봤는데. 나는 마리안느가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 길쭉한 잔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찾으러 잠시 갔다 올게. 여기서 잠시 기다려줄 수 있어?"

게오르그는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가겠다는 말 안 했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거다, 일로이."

"퍽이나, 자식아."

나는 헛웃음을 짓고 다프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을 것도 없었나. 다프네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시선이 마리안느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빨리 갔다 와요."

나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왕궁은 넓었다. 수확제가 벌어지는 회장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마리안느에게는 뭔가 어디 튈지 모르는 구석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드레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 내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왔지만, 나는 그들의 인사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보이지 않았다. 마리안느의 은발은 어지간해서는 눈에 확 띌 건데.

"[테라스 쪽으로 한 번 가보거라.]"

성검이 툭 말을 내뱉었다. 썩 달갑지만은 않은 목소리였다.

"[이번만 도와주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파티 내부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마워."

나는 재빠르게 바깥,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달빛이 쏟아지는 테라스. 마리안느는 홀로 그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소음이 멀어졌다. 그녀는 꼭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달빛에 젖은 은빛 머리가 빛났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에서 조금씩 잔머리가 빠져나와 흐트러진다.

"마리안느."

내가 부르는 소리에 마리안느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일 줄 알았는데, 지금의 마리안느는 얼굴이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가웠던 평소의 금빛 눈은 무감정하지 않았고, 입매는 굳어있지 않았다.

"…용사니임."

마리안느는 망설이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말끝이 늘어지고 있었다. 마력을 돌려 취기를 몰아내지는 않으려는 것 같다. 나는 손을 올려 마리안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어깨가 흠칫하기에, 무의식적으로 나는 손을 떼었다가, 이내 마리안느의 손에 다시 붙들렸다.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 마리안느는 그녀의 머리를 내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조금만 더… 이 감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마리안느의 금빛 눈이 젖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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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는 처음으로 응석을 부렸다. 취기는 의식을, 판단을 흐리게 했다. 혼란스러웠다. 마리안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예전, 일로이가 면류관의 시험을 통과했을 때부터 느껴보았던 감각이었다. 어디로 저 사람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건 일로이가 받은 편지를 보았을 때도, 그리고 일로이와 다프네가 춤을 추는 장면을 바라보았을 때도 느껴보았던 것이었다.

연회장을 박차고 나간 건 충동이었다. 마리안느는 한 번도 충동에 진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마셔본 술은 그녀의 이성을 조금 앗아갔다.

"…조금만 더…."

그러니까, 마리안느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 사람이 여기 있다는 확신이. 어디론가 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 감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오늘 일로이가 입은 옷은 검은색이었다. 솔직히, 그 하얀 용사 제복보다 이 검은 정장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일로이가 다시 쓰다듬기를 계속하자, 마리안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감촉을 느꼈다. 머리를 감싸안는 온기를 느꼈다.

충족감과 동시에 불안감은 더 느껴진다. 마리안느는 아직 왜 일로이가 멍한 상태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번 수확제 때문은 아니었을 거다. 그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수확제를 지나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마리안느를 더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용사니임."

말이 조금씩 헛나오는 게 원망스러웠지만, 취기를 없앨 생각은 없었다. 분명히, 이 취기가 사라지고 나면 자신은 다시 무감정하고 냉정해질 테니까. 일로이에게 정직하게 어떤 일인지 묻지 않고, 그저 그의 말에 따를 뿐인 사람이 될 테니까.

"저는…."

마리안느가 일로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회색 머리 아래로 연회장의 화려한 불빛을 등진 눈이 있었다. 청록색으로 어둡게 도사리는, 깊은 숲과 같은 눈이었다. 알 수 없었다. 마리안느 그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일로이의 눈을 알 턱이 없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표정도 엉망이겠지, 지금은. 마리안느는 순간 그 사실이 신경이 쓰여 냅다 일로이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어째서일까. 그 말만 하면 될 뿐인데, 말이 갑자기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이상한 속도로 뛰고 있는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이유는, 취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아."

일로이는 멈추지 않고 마리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리안느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지금 말을 하지 않으면 무언가 놓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일로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마리안느의 응석을 받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들어갈까?"

마리안느가 진정된 듯하니, 일로이가 말을 꺼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로이가 피식, 하고 평소대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하지만.

일로이가 걷기 시작한다. 마리안느는 자신과 한 발짝 떨어진 용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충동적으로, 일로이의 소매를 살짝 붙들었다. 일로이는 그 작은 저항에도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 주었다.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깊고 푸른 청록색 눈. 지금만큼은 흔들리고, 반짝이는 토파즈와 같은 금안. 마리안느는 대답을 갈구하듯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마리안느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저 눈은 어떤 말도 돌려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들어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어."

일로이는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마리안느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이성이, 다시 많은 걸 억누르기 시작했다.

묻지 못했다.

마리안느의 머릿속에 어른어른 기억이 떠올랐다.

수확제에 초청하는 편지는,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뒷면은 마치 이면지로 쓴 것처럼, 너절한 낙서나 문구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 와중에 마리안느는 그 짧은 글을 보았다.

'할 수 있을까.'

그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일로이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것 때문에 그렇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 글을 적어나갈 때는 어떤 생각이었는지.

멀어지는 일로이의 뒷모습은, 마치 어디론가 떠나갈 사람 같았다. 마리안느는 그가 더 멀어지지 않도록, 잰걸음으로 일로이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Chapter 82 - 82. 계획과 계획 (1)

철퍽.

이걸로 다섯 명째. 아르옌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쳐다보며 혀를 쯧, 내찼다. 이번 놈들은 저항이 꽤 거세었다. 아르옌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저항하는 방식이 지독해도 너무 지독했다. 신도들로 앞을 막아서게 해서 고기 방패를 만들거나, 아예 그들에게 재앙의 파편을 이식해 괴물로 변하도록 했다.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하지만 그런 방법을 전부 동원해도 악신 숭배자들은 도망갈 수 없었다. 안드레 주교와 그의 직속 이단심문관들은 능숙하고 신속하게 그들을 잡아들였다. 괴물로 변할 기미가 보인다면 죽이고, 그렇지 않으면 팔다리를 자르고 구속했다.

"멍청한 새끼들…."

왼팔이 잘린 채 검은 피를 쏟아내는 악신 숭배자 하나가 끅끅거리며 피처럼 걸쭉한 웃음을 지었다. 두들겨 맞은 얼굴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안드레 주교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리를 젖혔다.

"이미 늦었다. 이미 늦었어…. 종말이 오는 데에도 다 순리가 있는 것이거늘. 그렇지 못한다면 억지로라도 일으키는 수밖에 없지."

"뭐가 늦은 건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참 좋을 거 같은데 말이죠."

주교는 단검을 성법기로 달구었다. 따뜻하고 섬뜩한 기운이 단검을 감싸고, 주교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팔의 절단면에 갖다 대었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악!!"

"소리만 지르지 말고요. 뭐라 말 좀 해보시죠. 말하는 게 늦어질수록 고통은 늘어납니다."

악신 숭배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주교는 혀를 쯧, 하고 내차며 숭배자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목이 잘린 숭배자의 시체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더니, 곤충의 그것과 같은 팔다리를 빼내었다. 안드레 주교는 시체를 걷어차 건물의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수틀리면 변하는 건 정말 짜증이 나는군요."

아르옌은 가만히 시체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어째서 안드레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그곳에 있다가는 자꾸 과거를 돌아보게 되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나는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아르옌은 자꾸만 자신을 잡아먹는 혼란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의뢰. 그저 임무일 뿐.

"그때처럼 편리한 놈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인간인 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중범죄자들의 소굴에서 뭘 바라나."

안드레 주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자, 아르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이 최후의 수단으로 재앙의 파편을 이식한 상태였다. 잡혀 심문당할 것 같으면 괴물로 변해버리는 방식. 바크틴스의 악신 숭배자가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수사망을 좁혀 나가고는 있었지만, 추가로 들어오는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일단 잠시 쉬고 건물을 한 번 수색해보도록 합시다. 놈들이 무언가를 여기서 자행하려 했음은 분명하니까요."

안드레 주교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입에 궐련을 문 안드레 주교는 문득 아르옌을 바라보더니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르옌은 거부하지 않고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주교는 단검을 달구어 불을 붙여주었다. 오랜만의 담배였다. 길게 담배를 빨아들이자, 목에서 연기가 걸리며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아르옌은 작게 기침을 한 번 내뱉으며 연기를 내보냈다.

"일은 좀 어떻습니까?"

"…일이 뭐 일이지. 다를 게 있나. 보수를 받고, 받은 만큼 일을 할 뿐이다."

"아이시스의 곁을 떠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르옌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

"아이시스에게 내가 붙어있어봤자. 부딪치게 될 뿐이었을 거다. 내가 아이시스의 말에 그냥 순종하면 끝날 일일 수도 있겠지만…."

아르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마음속에 피어난 혼란을 가라앉힐 수는 있어도, 답을 구할 수는 없다.

"뭐, 그렇군요."

안드레 주교는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재떨이를 꺼내 꽁초를 집어넣었다.

"그건 당신이 생각할 문제겠죠. 도움이 필요하다 하면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겠지만, 괜히 오지랖을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일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이라면 말이죠."

"내 일은 내가 잘 알아.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 애를 쓸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지."

아르옌이 한숨과 함께 꽁초를 땅바닥에 떨구자, 주교는 착실하게 그 꽁초를 수거하며 재떨이에 집어넣었다. 아르옌은 주교의 괴상한 습관에 코웃음을 쳤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썰어버리면서 담배꽁초는 재깍재깍 잘도 수거하는군."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다고 해서 아무 데나 담배꽁초를 버려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안드레 주교는 언제나처럼 '옳은 궤변'을 지껄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옌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따라 일어섰다.

"주교님."

그들에게로 이단심문관 하나가 다가왔다.

"저기,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와 같은 문이 발견됐습니다. 벽난로 앞의 깔개를 걷어보니, 열쇠 구멍이 보였습니다. 새어 나오는 기운이 상당히 강해요."

주교는 아르옌을 돌아보며 고갯짓했다.

"가보시죠. 어쩌면 괜찮은 단서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저마다 랜턴을 꺼내 불을 붙였다. 열쇠를 찾을 수 없자, 주교는 들어가는 입구를 아예 부숴버리고는 비수를 하나 꺼내 들었다.

"대놓고 사이한 기운이 풀풀 풍기는군요. 악취도 심하게 나고. 이 아래에 꽤 많이 죽어있겠군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단심문관들이 무기를 꺼내 쥐고 돌입하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냄새는 심해졌다. 악신 숭배자들이 풍기던 특유의 기운 또한 강해져서 아예 검은 안개의 형태로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무슨 지하실이 이렇게 깊은 거지."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서늘한 바람이 계단을 타고 올라올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랜턴의 빛에 계단과 벽이 비친다. 피로 보이는 얼룩이 번져있다. 한참을 내려가, 이단심문관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랜턴의 불빛이 보여주는 광경을 확인하고는 모두가 동시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회백색의 텅 비어버린 공간. 차라리 공동(空洞)이라 부르는 게 맞아 보일 정도로 컸다. 그리고 그 아래, 거대한 역오각성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만들어져 있었다.

"저건… 다 사람 아닌가요."

사람, 나체의 시체들이 역오각성을 구성하고 있었다. 모종의 주술을 시행하던 중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주술이 끝나버린 건지. 안드레 주교는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시체 더미들에 다가가 보았다. 방금 쓰러트렸던 놈이 생각났다.

'이미 늦었다… 이미 늦었어….'

대체 무엇이 늦었다는 말이었지. 설마 이걸 보고 말한 건가.

"의식과 같은 형태…."

안드레 주교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의식. 저들이 펼칠 의식이라고 하면, 숭배. 아니, 단순한 숭배 의식에서 이런 기운이 나올 수는 없다.

"…소환?"

설마. 주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르옌의 얼어붙은 눈과 안드레 주교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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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르옌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 손에 담긴 것조차 불안한 상황에서 남의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멀쩡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설령 그것이 용사라고 해도 말이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도 내 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내 손에 담기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무엇도 손에 담은 적이 없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기분 참 더럽구만."

나는 일어나며 그리 중얼거렸다. 날씨는 한껏 추위를 머금고 다가오고 있었다. 날이 추워진다는 건 곧 재앙이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발로 이불을 퍽퍽 걷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팍에서부터 다리, 발끝으로 번졌다. 당장 다시 이불을 덮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눈, 내렸네."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첫눈이 빨랐다. 12월의 초순, 함박눈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눈이 조금씩 내리며 지붕 위에 쌓이고 있었다.

"…."

나는 침대에 기대어놓은 성검을 흘긋 바라보고서 내 방의 책상에 앉았다. 최근 성검이 내 생각을 읽는 것이 힘들어졌다고는 해도, 무리하면 억지로 읽어낼 수 없는 것도 아닐 거다. 언젠가는 성검과 터놓고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어디 보자."

나는 공책을 펼쳤다. 이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기록하기 시작한 공책에는 기록들이 있었다. 이 세상에 관한 기록. 원작의 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재앙과 맞서 싸웠는지.

"이건 그런데, 너무 내가 하기에 달린 거 아닌가."

나는 다섯 번째 재앙, '안개'에 관한 기록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여태 모든 시련이 내가 하기에 따라 바뀌었고 진행되었지만, 이번 '안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나는 끙, 하고 입에서 침음성을 내뱉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금 생각해봤자 대책을 생각할 수는 없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장 좋은 대책은 물론 강해지는 거다. 혼자서 수련도 많이 하고, 마리안느와나 다프네, 게오르그와도 대련하고 있지만, 재앙을 상대하는 건 그런 표면적인 강함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겨야지."

나는 중얼거리며 공책을 덮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가 성검의 검자루를 쥐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일로이.]"

요새는 성검, 그녀도 아예 숙면을 취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많이 추워졌더라. 밖에는 눈도 내려."

"[눈이라. 올해는 빨리 내리는구나.]"

나는 성검의 옆에 기대어져 있던 너울을 집어 들었다. 잠깐 걸어야겠다. 마리안느는 아직 자는 것 같았다. 나는 코트를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두른 후, 문을 열고 나섰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거리의 등에 내리는 눈이 비친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은 없다.

"[최근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구나.]"

"나한테 일이 들어오지 않는 게 좋은 거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성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경비병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밖으로 나섰다. 숲속으로 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눈이 내린 숲은 평소와 다르다. 눈은 기척을 감추고 세상의 눈을 가린다. 내 발아래에서 눈이 뽀드득거리며 뭉쳐 바스러졌다.

크워어어어어!!

잿빛곰. 오랜만에 들어보는 포효였다. 어딘가 그리운 느낌마저 나는 소리. 나는 내게로 단두대처럼 떨어지는 곰의 앞발을 보았다.

퉁.

주변의 눈이 싹 사라졌다. 이 정도였나? 나는 곰과 하이파이브를 하듯 손을 쳐들고 있었다. 곰은 당황한 듯 입에서 작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툭, 뒤로 밀었고, 잿빛곰은 앞발을 내려놓고는 경계하듯 나를 보며 그르렁댔다.

크워어어어!

곰은 전법을 바꾸어, 앞으로 돌진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나는 돌진하는 잿빛곰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가장 단순한 걸음.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딛고는 주먹을 쳐올렸다.

쩌어억-!!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곰이 앞으로 쓰러졌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게, 즉사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잿빛곰의 몸을 발로 툭툭 쳐서 밀어내고는 시체 앞의 나무에 앉았다. 강해진 건가? 정말? 나는 눈을 흐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김이 되어 흩어진다.

"[일취월장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조금 사기를 친 거 같긴 하지만."

나는 곰을 흘긋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렇게 강해졌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성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심심해서 잠시 들러본 거일 뿐이야."

"[…내게까지 숨길 이유는 없지 않느냐.]"

성검은 불만인 듯 말했지만, 나는 쓴웃음으로 넘겼다. 나는 곰 한 마리만을 쓰러트린 후 다시 성벽 안으로 돌아왔다. 내리던 눈은 어느새 그친 채였다.

"…음?"

그리고 나는 집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산만하게 기웃거리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복장을 보아 하니 청교회 쪽의 사람인 것 같은데…, 새벽부터 무슨 일이지?

"우리 본부에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건지?"

"용사님."

사제로 보이는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성국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국이요? 무슨 일이…."

설마. 내가 말하다가 얼굴이 굳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왕 폐하께도 말씀드리겠지만, 현재 성국에 재앙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Chapter 83 - 83. 계획과 계획 (2)

"끄으으으으윽!"

성국, 이단심문관의 본부 지하.

안드레 주교는 그 어느 때보다 냉혹한 표정으로 악신 숭배자의 살을 떠내고 있었다. 얇게 저며진 숭배자의 피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주교가 단검으로 잘라내는 동시에 성법기의 열로 지져 출혈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의식은 도대체 뭐지? 무엇을 소환하고자 하던 것이었지?"

한계까지 다다른 통증에 숭배자는 퀭해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방의 구석에는 아르옌이 팔짱을 낀 채로 악신 숭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숭배자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환은…아니다. 그건, 강제로 그분들의 잔재와 맞닿는 의식. 재앙이 헐거워진 고삐를 풀고, 우리의 부름에 응하게 할 뿐."

악신의 잔재. 재앙. 주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번에 다섯 번째 재앙을 움직이게 하는 건 좀 어려운 일이었어. 가장 중요했던 네 번째 재앙의 효과가 영 신통치가 못했지. 그 용사라는 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재앙의 역할 따위 알 턱이 있겠나."

악신 숭배자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토해냈다.

"봉인은 무너지고 있다. 종말은 막을 수 없어…. 크흐흐흐. 그리고 사람들이 그분의 존재를 더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그분들은 가까워질 거다. 그분들은 죽음과 혼돈의 주인…. 너희들이 무슨 수를 써도, 그걸 막을 수는 없을 거다."

가만히 두어도 세상은 계속 혼란스러워질 뿐이니까. 숭배자는 그리 말하며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앙의 앞날에 은총 있으라."

퍽-.

악신 숭배자의 머리가 폭탄처럼 터졌다. 안드레 주교는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핀 거무죽죽한 피를 닦았다. 자살. 온몸이 묶인 상태에서도 제 머리를 터뜨릴 방법이 있었나.

"어떻게 된 거지."

"저게 모종의 주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정보를 다 캐내기도 전에 제 머리를 터뜨려 죽어버렸군요. 정보를 부는 척하며 헛소리만 나불거리다가 뒤지다니."

다음부터는 그냥 정보를 불든 말든 포만 떠야겠군요. 안드레 주교는 투덜거리며 머리가 터진 시신을 등지고 지하실의 계단으로 나갔다. 아르옌은 시신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카이로스 왕국을 벗어나 성국까지 가는 길은 에버노드로 향하는 길처럼 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물들은 지형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돌아다녔다. 험한 지형이라 해서 마물이 적은 건 아니었고, 험난하지 않은 지형이라고 해서 마물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었다. 뭐, 중요한 건, 마물은 어디서든 나타난다는 점이었지만.

"나타났어요. 꽤 강해 보이는데."

야영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다프네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고개를 들었다.

"귀찮은 놈들."

게오르그가 모닝스타를 들어 올리며 인상을 썼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쥐고 일어났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너울을 뽑아 들었다.

"내가 갔다 올게."

뒤에서 게오르그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하며 뛰쳐나갔다. 이번에 나타난 건 거대한 전갈 두 마리. 독침을 내게 세우며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까지 급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느냐?]"

"빨리 처리할수록 좋으니까."

전갈이 달려든다. 나는 내게 쏘아지는 독침을 향해 그대로 너울을 휘둘렀다. 검날은 놈들의 단단한 외골격을 무시하고는 두부처럼 베어버렸다. 나는 몸을 얼마 움직이지도 않고 전갈 두 마리를 모두 처리했다. 잘려버린 놈들의 몸뚱아리에서 남은 다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온 게오르그와 마리안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자, 게오르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모닝스타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가 그리 급해서 뛰쳐나간 거냐?"

"미안. 몸을 움직이지를 못해서 안달이 난 거 같아."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게오르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재앙과 전투하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잖냐. 힘을 아껴둬라."

"참고할게."

게오르그는 토막이 나버린 전갈의 사체를 흘겨보고는, 내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안느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마리안느."

나는 마리안느에게 손짓했고,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지가 점차 가까워지고, 날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

새벽이 한참 지난 시간, 나는 문득 눈을 떴다. 옆자리에서는 게오르그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텐트를 걷고 나와 모닥불가에 앉았다. 내가 알지 못한 싸움과 마주해서 그런 걸까, 최근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안개."

나는 재앙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모닥불 위로 이따금 솟아오르는 하얀 연기가 그 모습인가 싶었다.

원작의 일로이가 안개 속에서 무엇을 마주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르옌이 무엇을 마주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만 알 뿐이다. 최근 그 불안감이 자꾸 겉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재앙을 상대할 때는 잡생각은 사치잖아.

손가락 사이로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그리고, 불길의 너머에 서 있는 누군가의 윤곽까지도.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가 어깨 위로 걸친 담요가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불의 온기보다, 옆에 앉은 마리안느의 체온이 더 가깝고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으신가요."

마리안느는 평소 같은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아니, 그냥 자다가 깼어. 다시 잠들기는 좀 싫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하늘을 촘촘하게 별이 수놓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별빛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크틴스의 밤하늘에는 항상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유성이 뚝 떨어졌다.

"너는 그냥 잠이 안 왔던 거야?"

마리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자다가 방금 깨어났습니다. 인기척을 느껴서."

이런, 나 때문에 잠에서 깬 건가. 어쩐지 어딘가 졸린 표정이더라. 마리안느는 눈 밑을 약하게 비비며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들어가서 자. 내일이면 도착하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지."

"…그건, 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안느는 억지를 부리듯 말했다. 마나로 피로는 일시적으로 씻어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쌓이는 피로는 마나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잠을 푹 자는 수밖에. 뭐, 나는 항시 성검의 신체 회복을 받고 있기에 숙면이 그렇게까지 절실하지는 않지만.

"난 별로 피곤하지는 않은데, 너는 좀 자야 할 거 같은데."

마리안느는 그렇지 않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억지로 자지 않고 버티려는 듯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선을 모닥불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에버노드에서도 이렇게 밤에 만났었지."

"…예. 그때는 제가 가르치는 쪽이었지만."

지금은 제가 더 배워야 할 거 같군요.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고는 담요를 여미었다. 나는 문득 허리에 차고 있던 너울을 뽑아 날아오는 낙엽을 향해 휘둘렀다.

픽.

너울의 검끝은 정확히 낙엽의 잎맥을 짚어냈다. 낙엽은 잘리지도, 뚫리지도 않고 온전했다. 이 과정이, 몇 달 전만 해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용사님의 성장은 몇 번을 보아도 경이롭습니다."

마리안느는 너울의 끝에 박힌 낙엽을 빼 손에 쥐었다.

"이렇게 용사가 되지 않으셨어도, 올바른 스승만 있었다면 굉장한 검사가 되었을 겁니다."

뭐,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된 건 아니고, 성검이라는 사기적인 스승이 하나 있긴 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너울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글쎄. 그렇다면 내가 절실하게 노력하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하고."

나는 그리 말하며 마리안느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모닥불의 온기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내 어깨에 푹 고개를 기대었다. 미약한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그대로 자세를 고정하고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꽃에서 난 거울처럼 내 모습을 찾으려 했다.

==

도시국가, 성국은 왕국의 동쪽에 붙어있다. 면적은 왕도의 두세 배 정도. 대륙의 중간에 떡하니 자리한 성국에는 산이 없고, 바다, 호수, 강도 없다. 인위적으로 꾸며놓은 거대한 숲과 같은 정원이 있을 뿐, 그 외의 자연경관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안드레 주교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마차 안에서, 나는 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을 이단심문관이라고 밝힌 사람치고는 대범하거나 냉철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악신 숭배자들의 흔적을 따라 추적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종말 숭배가 나타나는 땅을 모조리 훑고 계시는데…. 이번에 꺼림칙한 현장을 발견했죠. 저도 그곳에 있었고요,"

"꺼림칙한 현장이라고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의 시체로 만들어진 역오각성이었습니다. 그들의 피로 원과 문양을 그려 넣고, 그 문양에 따라 사람을 배열한, 끔찍하고도 잔학한 의식이었지요."

사제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는 사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그걸 소환 의식의 일종이리라 생각했었죠. 재앙이 과연 소환 의식을 한다고 해서 불러낼 수 있는 것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해서, 이번 다섯 번째 재앙을 불러내려 한다는 말씀인가요."

"예. 도대체 무슨, 어떤 방법을 써서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려 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의식이 실제로 먹힐 것 같다는 게 문제죠."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새하얀 보도블록으로 도배된 거리를 마차가 지나갔다.

"악신 숭배자들이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까요?"

"겨우 의식 하나로 재앙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었다면, 진작에 저들도 그렇게 했겠죠. 아마 악신 숭배자들에게 있어도 무시하지 못할 대가를 치렀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마차가 멈춰 섰다. 성국의 하늘은 아침인데도 어둑어둑했다. 꼭 거인이 눈앞에 당도했을 때의 에버노드처럼. 나는 그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파티 멤버들 또한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느낌…. 꼭 그때 같네요. 마물이 출현하거나 할까요."

다프네가 팔을 문지르며 물었다.

"아니. 안개는 좀 특별한 경우. 크라켄이나 거인 때처럼 마물이 몰려오지는 않겠지만…."

나는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안개의 특징을 떠올려보았다.

"안개 속에 들어서게 되면, 그 밖으로 다시는 나갈 수 없을 거야. 꿈과 환각의 세상에서, 영원히 헤매게 되겠지. 목숨을 다할 때까지 말이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일로이?"

문득 다프네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빨리 이번 재앙에 대비한 대책을 구상해야 했다.

"일단 교황 성하를 뵈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Chapter 84 - 84. 계획과 계획 (3)

"불안하지만, 우리는 떨지 않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어요."

교황을 보러 가는 길까지 우리를 안내해주는 사제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나는 한 귀로는 그 말을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걸었다. 고위 성직자로 보이는 흰옷의 사제들이 내 옆으로 지나가며 가볍게 목례했다. 저들 중 몇몇은 원작에서 쓰레기 같은 놈들이었지.

"신께서 우리를 보살펴주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태 세상을 덮쳐왔던 모든 재앙에서, 인류는 굳건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않습니까."

과연, 바크틴스의 사람들에게 그 말을 들려주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하긴 한데. 나는 코웃음을 치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마 저것도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혼잣말에 가까울 거다.

"물론, 그 모든 건 세 번째 재앙과 네 번째 재앙을 훌륭하게 막아주신 용사님 덕분이긴 하겠지만요. 그게 바로 신의 보살핌이 함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네가 잘한 거지, 무슨 신 타령이냐. 기분 나빠해도 된다, 일로이.]"

성검이 내 머릿속에서 비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제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비단 성국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움직임이니. 가끔은 마리안느님이 부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흘긋 시선을 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제는 제 말이 무시당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안내했다.

"자, 이곳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접견실로 향하는 문은 성가셔보이는 갑옷을 착용한 두 성기사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조각상인가 싶었다.

"용사님, 부디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사제는 끝까지 그리 말하고는 물러갔다. 문지기들이 움직일 기색이 없자, 나는 문가에 다가갔다. 문은 언제 그렇게 닫혀있었냐는 듯 활짝 열렸고, 나는 문지기들을 지나쳐 새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접견실로 들어갔다.

교황은 방의 끝에 앉아있었다. 온화한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고약한 인상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다 희게 새버린 머리카락. 옅은 눈썹 아래에 도사리는 눈은 날카로웠고, 그 아래로 짙게 다크서클이 드리웠다. 다크서클 옆의 날카롭게 휜 매부리코가 표독스러웠다. 어지간히도 할 일이 많나 보다.

"반갑습니다, 용사님."

교황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나는 예를 갖춰 인사하면서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우선 이곳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교황은 파티 멤버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네고 나서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와 앉았다. 일국의 군주라기에는 위엄이 넘치지는 않았으나, 교황이 풍기는 기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성국이 요새 꽤나 바빠서요, 이렇게 추레한 모습으로 마주하는 걸 용서해주시지요."

"추레하다뇨,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교황은 방금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뭇내 그것이 신경 쓰인다는 듯 눈을 흘긋거리던 교황은 이내 미련을 버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국의 본토에 재앙이 출현하고, 악신 숭배자 놈들은 무슨 짓을 꾸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죠.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용사께서도 굉장히 바쁠 때겠지요."

뭐, 난 교황의 이 심드렁한 태도가 싫지는 않았다. 적어도 저기, 북쪽의 누구처럼 나를 시험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으니까.

"이전까지 안드레 주교가 귀찮게 굴지는 않던가요? 마리안느를 용사 파티에 넣자고 한 것도 그 또라이 새…, 아니, 주교가 독단적으로 시행하고 내게 보고한 거니까요. 혹시 그 이후로 용사께 폐를 끼치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리안느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부디, 그 사람이 사고를 치면 제게 꼭 일러주십쇼. 지금은 또 눈 뒤집혀서 악신 숭배자들을 잡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 있으니."

음. 대충 안드레 주교가 성국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대강 알겠다. 교황의 저 다크서클 지분의 1할 정도는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허례허식은 여기까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씀드리는 게 좋겠죠? 하루라도 빨리 대처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교황은 성격도, 의외로 빠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그것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안개'는 지금 성국의 절반을 삼킨 채 가만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물려놓긴 했지만, 언제 어떻게 그것이 접근해올지 모르니, 감시 인원을 붙여두었습니다. 현재는 전진하지 않고 아예 잠잠한 상태인 것 같더군요."

교황은 창문을 흘겨보았다.

"안개와 접촉은 엄금했습니다. 저 안개가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는 모르고, 얼마나 넓어질지도 모릅니다. 특징도,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우리는 모르지요. 안개에게 잡아먹힌 절반의 땅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교황은 그리 말하고는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갑자기 저 안개가 덮쳐오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마물이 없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대처를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안개를 상대할 방법? 벽을 친다고 해서 안개가 넘어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쏘아 보낸다고 해서 흐트러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재앙을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안개를 유지하는 마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하는 것. 안개는 힘을 다하면 스스로 흩어져 사라질 거다.

"용사님께서 생각해보신 방법은 있습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나는 말을 떼었다. 하지만 이것도 말이 마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 안개가 사람들과 접촉하면 그들의 마력을 앗아가며 연료로 사용할 거다. 그러니까, 안개 속의 사람들은 천천히 죽어가는 상태, 아직은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방법을 말씀드리기 전에, 일단 상황을 보러 가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교황은 내 말이 달갑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빛낸다기보다는, 부라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걸까.

"함께 보러 가시지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더 나을 듯하니."

교황은 앞서 접견실을 나섰다. 교황의 뒤로는 곧장 호위 기사가 하나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교황 성하?"

"안개의 상태를 확인하러 갑니다. 용사님께서도 보셔야 할 테니."

방법이 있다는 말에 고양된 걸까, 아니면 단순히 격무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올 수 있어서 기쁜 걸까. 교황의 발걸음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

"교황청의 뒤편… 우리의 눈이 미처 닿지 않는 곳. 교회의 등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교황이 말할 때마다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휑하니 하얀 보도블록만이 남겨진 곳에 다다랐다. 그 너머로, 너무나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끔찍할 정도로 불길하고, 강력한 마력. 나는 나도 모르게 성검의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저 너머로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주로 성직자들이 기거하는 골목이었죠. 성직자 외에도, 일반 신도들도 몇 살고 있었습니다. 작은 농경지나 목축지가 있는 땅이기도 했고요."

교황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전부 죽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싫습니다. 안개가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도 짐작할 수가 없어요. 성국 너머의 왕국이나 공국은 전부 어떻게 되었을지."

안개는 벽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마치 한층 강화된 '한계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하얀, 앞을 내다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깊고 흐린 연기. 소용돌이처럼 안개는 제자리에서 계속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우리는 안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안개."

다프네는 두려운 표정으로 안개를 바라보다가, 손을 안개에 슬쩍 내밀어보려 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리며 신형을 날렸다.

"만지면 안 돼!!"

다프네가 내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안개와 접촉하기 전에 다프네를 구해낼 수 있었다. 나는 다프네를 안개로부터 뒤로 질질 끌고 나오며 말했다.

"접촉하는 순간, 넌 안개 속으로 사라질 거야. 안개가 너를 바로 인식해 잡아먹어 버릴 거라고. 그렇게 되면 너를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어."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경고했다.

"절대 안개에 한 걸음 이상 가까워지지 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고."

다프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프네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너무 강하게 잡았던 걸까. 다프네는 손목을 티 나지 않게 문지르고 있었다.

"…미안해. 네가 거기 닿는 걸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일로이…."

교황은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용사님."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교황께서도 저걸 보셨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다프네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력의 흐름을 아예 읽을 수가 없었어요. 안개가 제 마력의 투과를 거부하고 있었거든요. 이 밖에서는,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예 알 수가 없어요. 안개 속은 밖과는 아예 별개의 세상인 거 같아요."

교황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실에 사람을 묶어 들여보내는 건 안 되겠습니까? 긴급한 상황이라면 바로 실이나 줄을 당겨 빼낼 수 있도록."

다프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줄이랑 연결된 모든 게 함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예요. 고립된 세상은 그런 꼼수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저걸 어찌할 방법은 없어요."

"…신이시여."

교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개는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다가올 것만 같았다.

"정말 저걸 어찌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교황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고갯짓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걸 쓰러트릴 방법이 있는 건 맞으니까.

"예. 할 수 있을 겁니다."

교황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면류관 사건 이후로 뭔가 말씀드리기 꺼려졌지만, 성유물 창고로 한 번 함께 가보도록 하지요. 어쩌면 용사께서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도 있는 성유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황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고, 내 주위의 파티원들도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뒤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난 이미 성유물로 강해질 선을 넘어섰다. 성검도 있고, 면류관도 있고, 너울까지 있다. 몸은 거인의 주먹을 맞아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강건해졌다. 내게 도움이 될 성유물은 있어도 이번 안개 공략전에서 내게 큰 도움이 될 성유물은 아마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저 대신 동료들에게 성유물을 하나씩 대여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일로이."

게오르그와 다프네가 놀랐다는 듯이 나를 불렀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너희들도 확실히 전력 강화가 필요할 때쯤이지.

"안개와의 싸움에서 대공처럼 우리를 확실하게 도와주리라 생각되는 전력은 없어. 우리가 강해져야만 해. 그렇지 않아?"

내 말에, 게오르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강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큰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준 후 다시 교황을 보았다.

"괜찮겠습니까, 교황 성하."

교황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세 개를 빌려드리나 네 개를 빌려드리나, 별 차이는 없을 테니 용사님께서도 사양하지 마시고 한 번 둘러보시죠."

다시 눈을 뜨고 날 바라보는 교황의 눈은 나를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했고, 교황은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십시오. 바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Chapter 85 - 85. 계획과 계획 (4)

"…정말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다프네는 창고에 즐비한 성유물들을 바라보며 감탄 아닌 감탄을 흘렸다. 창고라고 해야 할까. 교황청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창고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물건이 많군. 비단 성유물만이 있는 게 아닌 거 같기도 한데."

게오르그는 차마 손을 가져다 대지는 못하고 탐난다는 듯한 눈을 하고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한 위대한 왕이 썼던 왕관, 어떤 성인의 묵주, 방랑 기사의 방패와 검. 황금색 보주. 청교회의 전승과 관련이 깊지 않은 물건이라도 보관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성국에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제정신이 박힌 군주라면 성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려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위험한 성유물들이 새어나가지 않게 보관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저 가진 것만으로 위험한 물건들이 몇 보입니다만."

게오르그가 교황의 변명 아닌 변명에 조심스럽게 반발했지만, 교황은 어깨를 으쓱이지도 않았다. 이미 수 차례나 항명을 받은 적이 있을 거다.

"위협이 될지는 몰라도, 저것들이 사람과 사람의 싸움에서 실제로 이용될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성유물들의 끝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특별히 내가 쓸만한 성유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가지고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하나 정도는 빌리는 게 어떻겠느냐. 이곳의 성유물들은 면류관처럼 사용 조건이 까다롭지도 않을 거다.]"

나는 성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더 찾아보고. 없어도 아쉽지는 않으니까.

마리안느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아마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테니, 당황스럽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묵주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시지요. 각자의 마음에 드는 성유물이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다프네는 물건보다는 고서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교황은 마도서를 숙소 밖으로는 가지고 가지 말라는 조항을 걸고서 다프네에게 마도서 중 하나를 대여해도 괜찮다고 했다. 마도서의 내용이 유출될 시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는 무서운 말과 함께.

"네, 감사합니다!"

다프네는, 뭐, 그런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원하는 걸 얻었다는 듯, 다프네의 보랏빛 눈은 오랜만에 강렬한 열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다프네도 6서클에 다다랐던가. 다른 곳 같았으면 마탑에 모셔가겠다고 난리를 칠 텐데.

"난 이 투구로 하지."

게오르그는 투구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낡고, 흠집이 잔뜩 난 투구였다. 교황은 별말 없이 그 사용을 허가했다. 행운의 투구. 전승에 따르면 몇 번이나 운 좋게 주인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대체로 성유물들이 그 전승에 따라 힘을 부여받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게오르그는 투구를 한 번 착용해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마리안느는 묵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묵주 옆에 놓인 나침반 같은 것을 포착하고는 집어 들었다. 그를 지켜보던 교황이 마리안느에게 다가가 말했다.

"묵주는 네 성법기를 한층 강화할 거고, 바늘이 한쪽으로만 난 나침반은… 옛날, 한 해적이 쓰던 물건이다. 어쩌다가 성국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지."

교황은 그리 말하며 나침반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 바늘이 가리키는 곳이 네가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이다. 제법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냐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겠지."

마리안느는 묵주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고민의 흔적이 얼굴에 스치고 지나가더니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손에 꾹 쥐고는 교황을 바라보았다.

"저는 나침반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래. 마리안느,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교황은 고개를 끄덕거려주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성유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용사께서는 아직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뭔가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 그런 걸까.

"원하신다면 한 번은 다시 개방해드리겠습니다. 당장이 아니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고의 안을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투구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고,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프네는 당장 마도서를 들고 나가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주 찬찬히 그들의 모습,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대신, 어려운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한에서는 얼마든지."

교황이 눈썹을 치켜들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고, 교황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는 그 말에 반대합니다만.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나는 내 말을 절대 굽히지 않겠다며 교황을 바라보았고, 교황은 내 표정을 바라보고는 코웃음을 치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실패한다면 어떡합니까. 뒤가 없습니다. 잘 생각해주세요, 용사님."

"실패했을 때의 대안은 있습니다."

물론, 그 대안을 교황에게 덥석 알려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교황이라고 한들, 그 지위나 명성과 내가 이 사람을 믿느냐는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용사로서 실패한다는 말은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저는 성공해야만 합니다."

"…하아."

교황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제가 그 부탁을 들어드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교황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교황은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용사님께서는 진심이시군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제 눈에는 위험한 방법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공 가능성의 문제에서, 용사님은 정말로 이 방법이 가능성이 가장 높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교황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나는 이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예.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은 계속, 한동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이 대화에서 내가 감춰야 할 건 없었다.

"제가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계획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물론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감당하셔야 할 테지만요."

교황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강하게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교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묵주를 만지작거리다가, 창고를 보았다.

"용사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용사님의 부탁이 지켜지리라는 약속을 하지는 못하겠군요."

"그거면 됐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은 머리를 문지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 안드레 주교는 은근히 닮은 것 같습니다. 생각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요."

"제가 그분보다는 그래도 정상적이지 않을까요."

나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먼저 창고를 나서기 위해 계단에 발을 올리다가, 교황이 부르는 소리에 뒤로 돌아보았다.

"…부디 용사님의 선택에 후회가 없길 바랍니다."

후회라.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더 후회하겠죠."

나는 그리 말하고 창고를 빠져나갔다.

==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 장소? 마리안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처럼, 나침반의 바늘은 멈추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독특한 물건을 골랐네요."

다프네는 마리안느의 나침반을 바라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전 아직 성창의 능력조차 완전하게 개방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다른 무언가를 더 얻어가는 건 되려 퇴보하는 길이 되리라 생각해서…."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들어보며 대답했다.

"그게 성장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그걸 고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니냐? 자기가 원하는 게 있는 곳이라. 너답지 않게 낭만적이군."

게오르그는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오며 물었다. 자신이 얻어낸 성유물에 아주 만족하는 모양새였다. 마리안느는 반면, 게오르그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침반이 도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바늘의 끝은 한 방향으로만 돌지 않고,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 방향. 마리안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침반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일로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은 일로이의 소매 끝자락을 잡았다. 그녀가 원하던 건….

그때, 빙글빙글 돌던 나침반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나침반을 함께 바라보고 있던 게오르그와 다프네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일로이가 서 있던, 창고의 출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바늘은 어딘가를 가리키며 째깍째깍 움찔거렸다.

"…어디를 가리키는 거지?"

게오르그가 그리 묻는 순간, 마리안느는 재빠르게 나침반을 감추었다. 다프네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못한 듯, 어째서 나침반을 감추냐는 듯한 표정으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뭐냐, 저것도 개인적인 일이니까, 너무 캐묻지는 않는 게 좋겠군."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지 눈치를 챈 게오르그가 수습에 나섰고, 다프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의 말이 괜히 일을 키운 것 같았다. 그러다가, 다프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도서를 툭툭 두드렸다.

"알겠어요. 나도 지금 얻어낸 이걸 조금이라도 많이 습득해야 하니까요."

다프네는 그리고 재빨리 마도서를 들고 창고를 나섰다. 게오르그는 우물쭈물하는 마리안느를 보다가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나갔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바라보다가 겉옷의 주머니에 넣었다. 나침반의 바늘이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레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다."

창고의 문가에 서 있던 교황이 마리안느를 보며 말했다.

"교황 성하."

"이단심문관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라. 안드레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교황은 쯧, 하고 혀를 내찼다.

"뭐, 지금의 너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런 소리를 하겠지만 말이다."

교황은 그리 말하며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가만히 느끼며, 마리안느는 발걸음을 옮겼다.

.

.

그날 밤, 마리안느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녀의 베개 옆으로 놓인 해적의 나침반은 고정된 채 가만히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그곳이 일로이가 잠들어있는 침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한동안 나침반의 바늘을 바라보다가, 성창을 집어 들었다.

"더."

마리안느는 중얼거렸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훙.

성창이 방에서 휘둘러지며 바람을 갈랐다. 성법기와 오러는 성질이 달랐으니, 성창 위로 성법기를 덧씌울 수는 있었지만, 아직 성창을 개방하지는 못했다.

그를 따라잡으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일로이는 너무 빠르게, 너무 멀리 간 것 같았다.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용사니까. 그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그를 따라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

마리안느는 성창을 내리고는 앉았다. 성창은 물론 대답이 없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감으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 이상으로 괜한 생각이 자신을 잡아먹게 둘 수는 없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꾹 감고는 나침반을 뒤집었다. 저걸 보고 있다가는 괜히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 때,

나침반의 바늘이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Chapter 86 - 86. 과거에 두고 온 것 (1)

"저는 이번 재앙을 홀로 공략할 생각입니다."

그때, 창고의 끝에서, 동료들이 일부러 듣지 못하게 마력까지 조금씩 섞어가면서 나는 교황에게 말했다. 당연히 내 말을 들은 교황의 표정은, 결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용사님…, 그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십니까."

"다섯 번째 재앙, 안개는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람을 연료로 하여 살아 움직인다고 말씀드렸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교황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만, 그게 용사님께서 단독으로 토벌에 나선다는 것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들어가는 사람의 마력이 강할수록, 안개의 생명력도 강해집니다. 그 사람이 안개의 마력 흡수 시도를 저지할 수 없다면 말이죠. 그리고, 그건 제가 어떻게 저지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사실상 안개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두 안개와 일대일로 싸우는 겁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흘긋 파티원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파티원들은 자신이 고른 성유물을 들고 열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저게 성장에 모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 녀석들은 강합니다. 하지만 재앙과 일대일로 대면해도 좋냐고 물어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 짓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아르옌이랑 퀘노어 대공 둘뿐일 거다. 그중에 한 명만 안개에 집어넣으라고 하면 아르옌이겠지.

"그렇게 될 바에는, 저 혼자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쪽이 훨씬 나을 겁니다."

"대체 안개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악몽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겁니까?"

교황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더 심하죠.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아예 실현될 겁니다. 실체를 갖추고서요."

교황은 얼굴의 찡그림을 지우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교황의 표정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황은 그렇게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짤막하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대충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나올 부탁이 이것 말고 있을 리가.

"오늘 밤 제가 안개에 들어가고 나서, 아무도 안개에 들어올 수 없도록 통제해주세요. 특히, 제 동료들 말입니다. 함께 재앙을 공략하러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시고, 그러니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무책임한 말. 나는 그리 말하고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교황에게 해준 말은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잃고 싶지 않다. 지키고 싶다. 손에 담은 것조차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은 그만큼 무거웠다. 나는 그 욕심과 결심 사이에서 헤매었다.

==

"[바보 같은 놈.]"

새벽 두 시경. 모든 준비를 마치고 책상 위에 앉아있던 내 머릿속으로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검과는 물론 이번 계획을 공유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재앙을 쓰러트리러 가는 것이니까.

"[네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난 일로이, 너를 욕할 수밖에 없겠구나. 저들을 두고 가면, 그 원망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 거냐.]"

"안개는 달라. 단순히 내가 강하다고 해서 상대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란 말이야. 거인 같은 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재앙이지만, 안개는 그렇지 않잖아."

성검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작성하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건 게오르그에게 전하는 편지다.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한, 여러 가지 안배를 적어놓았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물론. 무조건 돌아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리 말하며 문득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안개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는다면 아마 아르옌이 성검을 회수해 사용하게 되겠지.

"[난 그런 놈에게 내 힘을 빌려줄 생각 없다. 다시는 날 누군가에게 넘긴다는 생각 하지 말거라, 일로이. 나는 네 검이다.]"

성검은 힘주어 말했다. 나는 검자루를 지그시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너를 지킬 거다. 알겠느냐.]"

성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너무나 단호하고, 굳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 안개와 맞서거라.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말고. 평소처럼 재앙을 쓰러트리고, 그 안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가거라.]"

"응. 알겠어."

나는 성검에게 대답을 들려주고는 기감을 펼쳤다. 성국이 제공해준 숙소는 고요했다. 나는 다른 파티원의 기척을 확인했다. 게오르그는 일찌감치 잠든 것 같았고, 다프네는 새로 얻은 마도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기척만이 뒤척거리고 있었다. 마리안느가 잠들 때를 기다렸다가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가자."

마리안느가 잠들었다. 나는 미리 열어놓은 창문에 발을 걸치며 일어났다. 밤공기가 차다. 나는 창틀을 쥐고 숙소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꼭 좀도둑 같구나.]"

"세상에 어떤 좀도둑이 저기서 뛰어내리냐?"

나는 기척을 감추고 교황청으로 걸어갔다. 재앙의 존재감은 겨울의 한기보다 선명했다. 나는 교황청의 뒤편에서 성기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교황을 마주했다.

"제가 교황 성하를 기다리게 해버렸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용사께서 안개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통제를 시작해야 하니까요."

밤의 안개는 더욱 두려웠다. 교황청의 뒤에서 세상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버린 안개. 마치 세상의 끝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뒤로 넘어가면 끝없이 추락하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안개는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환영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밖에서 알 수가 없으니까요. 설령 용사님께서 이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불안감이 증가하면 구조 인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일주일은 기다려주시면 좋겠군요."

최악의 경우는, 놈을 거의 쓰러트렸는데 사람이 투입되어 놈에게 추가적인 힘을 주는 것이겠군. 나는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용사님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나는 교황의 말을 뒤로하고 안개의 앞에 다가가 섰다. 차갑고, 추웠다. 나는 다시금 목적을 되뇌었다. 안개를 쓰러트리고, 안개 속에 억류된 사람들을 구해낸다.

"[안개 속으로 가게 되면, 내가 네게 말을 걸기 힘들어질 거다. 마력 작용이 이상한 곳이니까. 네 정신력으로 온전하게 버텨내는 방법밖에는 없어.]"

안개는 악몽을 구현해낸다. 가장 마주하기 싫은 과거가 될 수도 있고, 가장 그리운 기억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도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불러낼 수도 있고, 싫어하는 대상을 마주하게 할 수도 있다.

안개는 그렇게 누군가의 악몽을 구현해내는 데에 마력을 사용한다. 안개 속의 사람이 악몽에 굴복하면, 안개는 그때부터 굴복시킨 사람의 마력을 빨아먹기 시작한다.

"…악몽을 더 깊이 보여줄수록 안개 본신의 힘을 이용해야 하지. 그러니까,"

악몽과 계속 싸우고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안개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일렁이는 안개의 표면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르옌은 그때, 자신의 과거와 마주했었지. 아르옌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람, 칼라의 이야기도 그때 나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르옌이 보았던 건 가정이었다. 그때 자신이 칼라를 구했더라면, 마을이 이상하다며 보고하러 가지 않고 칼라와 함께 남았더라면.

그리고 아르옌이 본 건 미래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질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어 용병 일을 그만두고 칼라와 함께 살아가는 미래.

아르옌이 안개를 부정하는 데는 안개 속의 시간으로 한 달. 안개 밖의 시간으로는 일주일이 걸렸다. 아르옌은 그리고 결국 칼라를 살해하면서 안개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런 기분 더러운 짓은 그리 당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로이, 기억해라.]"

문득,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너다. 너를 잃지 마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보았다. 안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개는 내 손바닥에 닿았고, 손끝이 차가운 감각에 휘감겼다. 나는 안개가 손에서부터 천천히 날 먹어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증기로 만들어진 옷감처럼, 안개는 내 몸을 감싸고 나는 안개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기분이군."

나는 눈을 깜박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뿌연 연기 속에 있었다. 감각이 희미하지는 않았다 마력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몸의 감각도 선명했다. 마치 이건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나빴다.

"이런 감각에서 나쁜 기억을 마주하게 되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겠네."

혹은 굴복하거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검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너울과 성검의 감각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면류관의 훈륜이 떠오른다. 나는 만전의 상태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나는 어느새 왕도 외곽의 숲에 와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왼손에 쥐고 있던 너울은 어느새 사라졌다. 겨울이 아닌, 여름의 후덥지근한 숲의 공기. 면류관을 발동했을 때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에 성검을 든 채로, 덩그러니 숲속에 떨어져 있었다.

"약하네."

체내의 마력도 3분의 1 정도는 될 정도로 준 것 같았고, 근력도 약해진 것 같았다. 마력 한 번 빨아먹겠다고 참 지극정성이었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나저나, 무슨 기억을 보여주려는 건지."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안개가 무엇을 보여주려는 지 알아차렸다.

"…대체 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냐?"

내 앞을 막아선 건, 무식하게 커다란 잿빛곰 한 마리였다. 평소에 숲에서 마주하던 것보다 더 커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곰은 흰자위만이 보이는 눈을 내게로 향하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성검을 가볍게 휙휙 돌리며 곰을 마주했다.

그래, 그랬지.

이 세상에 처음으로 떨어지고 나서, 마물을 마주했을 때의 공포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원초적인 피식자로서의 공포. 지금의 나는 그때와 같은 몸이었다. 성검도 개방하지 않고, 면류관도 없다. 가진 거라고는 오로지 일로이라는 사람의 몸에 밴 습관.

"…뭐, 지금은 조금 다르려나."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다. 곰은 그때 기억하는 것보다 흉포하고 강대했지만, 놈을 상대하는 나 또한 그때보다 강해졌으니까.

곰이 앞발을 내밀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것이 달려들게 내버려 두었다. 눈은 앞발을 포착하고 있었다. 몸은 저것에 맞으면 죽는다고, 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성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피하지 않는다.

성검이 말했듯, 지금의 나로, 부딪치며 나아간다.

검끝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곰의 활짝 열린 어깨를 포착하고 그대로 성검을 끌어내렸고, 내가 만들어낸 검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깔끔한 현월의 궤적을 그리며 잿빛곰의 몸을 반으로 베어 갈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검 자체의 성능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곰의 시체 아래로는 피로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찝찝하게도, 몸에 묻은 피까지 감각이 선명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대체 무엇까지 보여주려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안개가 보여주는 광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어둑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깊은 숲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반대편으로 걸어가봤자 왕도는 나오지 않고 같은 숲만이 계속 나올 뿐이겠지.

좋아.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Chapter 87 - 87. 과거에 두고 온 것 (2)

열두 살.

마리안느가 이단심문관이 된 나이였다. 마리안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성법기를 개화했다. 이단심문관을 길러내는 과정은 꽤 혹독하다. 여느 군인, 기사를 길러내는 것보다도 훨씬. 그 모든 가혹한 훈련을, 마리안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견뎠다. 애초에, 그녀는 가혹하다는 말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한 아이입니다."

마리안느를 지켜보던 다른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이단심문관의 총괄자, 안드레 자빈은 몰살당한 이단들의 앞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그들이 찾아낸 이단은 사실상 무장 독립단체였다. 사람을 죽이고, 지역을 무단 점거하며 새로운 신앙,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겠다며 떠들어대는 사이비에 가까운 집단.

"독한 건지,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드레 주교의 옆을 마리안느가 스치고 지나갔다. 소녀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옷은 다 찢어진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데려온 아이라고 했었죠? 마리안느 말입니다."

"옛날에 그 일 기억나나? 성국의 고아원에서 애들 서른 명을 한꺼번에 어디론가 팔아넘기려고 하다가 덜미를 잡혔던 사건 말이야. 아마 네가 이단심문관이 되기 전의 일이었을 거야."

주교는 그리 말하며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늘 그렇듯 불을 밝혀 담뱃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예, 기억합니다. 그게 한 오 년 전의 일이었나요? 그때 구출된 아이입니까?"

"현장에 내가 있었지. 다른 아이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울거나 떨고 있었을 때, 마리안느, 저 아이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었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마리안느도 물론 알고 있었을 건데 말이야."

안드레 주교의 눈에 띈 마리안느는 그날부로 성국의 특수한 교육기관에 맡겨지게 된다. 오직 성국만을 위해 일하고, 성국의 그림자에서 청교회를 지키기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모임. 이단심문관을 길러내는 교육기관.

"…저 아이같은 경우로 들어오게 된 이단심문관들이 꽤 있죠?"

"연고 없는 아이들. 뒷골목에서 희망 없이 좀도둑질이나 하며 살아가는 아이들. 삶에 더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집단이다."

주교는 입에서 담배를 떼어내며 연기를 뿜어냈다.

"이상할 것도 없잖나."

안드레 주교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걸어오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가장 간단한 응급처치만을 받고, 옷을 갈아입은 후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전혀, 열두 살짜리 소녀가 지을 표정도 아니었고 모습도 아니었다. 마리안느는 무감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 끝났습니다, 주교님."

"그래, 수고가 많았다, 마리안느. 뒷정리는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이만 퇴근하지."

안드레 주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안느는 바로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오늘 마리안느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무장한 이단 다섯을 죽였다. 다섯. 마리안느는 그 수를 헤아려보았다. 수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그건 일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네가 저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저들은 오늘 죽은 이들의 열 배가 넘는 사람들을 죽였을 거다. 그러면서 청교도에 감히 반기를 들고 대들었겠지."

주교는 그렇게 말했었다. 위로였을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자신은 청교회에서 명령하는 대로 사람을 죽였을 거다. 마리안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녀의 뜻이라는 걸 가진 적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깊은 신앙심도, 이단에 대한 증오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목숨에 갖던 애착도 그리 크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그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리안느는 계속 속으로 자신을 죽여갔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칼끝이 그녀의 목을 찔러 죽일 날만을 기다리면서.

==

새벽이 밝았다. 마리안느는 어둑어둑한 침실에 홀로 앉아있었다. 푸르게 변한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는 묵주를 집으려다가, 이내 손을 내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잠들기 전에 뒤집어놓은 나침반이 있었다. 마리안느는 망설임 가득한 손짓으로 나침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집어 들고는 뒤집어보았다. 바늘은 째깍, 째깍 진자운동을 계속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바늘의 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침반은 자꾸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감을 펼쳤다.

"…밖에 나가 있는 겁니까."

일로이는 방에 없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자꾸 바늘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아침 운동이라도 하는 걸까. 마리안느는 한동안 바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 나침반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이상이 없지 않은 이상, 용사 파티는 일로이의 방에 아침마다 모였다. 마리안느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일로이의 방문 앞에 섰다. 일로이의 기척은 여전히 방에 없었다. 머뭇거리는 마리안느의 뒤로, 다프네가 걸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마리안느? 일로이가 문을 아직 안 열어주고 있나요?"

마리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방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리안느의 대답에, 다프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일로이가?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올려 돌렸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로이의 방에 들어갔다.

"뭐야, 다들 일찍 왔군."

곧이어 문가에서 게오르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와 다프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게오르그 또한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일로이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엥? 일로이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 아침에 급하게 교황청에 가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언질 하나 없이 갑자기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데."

다프네의 말에, 마리안느는 품속의 나침반을 꾹 쥐어보았다.

"일단 앉아서 기다려보든가 할까. 파티장이 회의에 늦은 건 제대로 추궁해보자고."

게오르그가 농담과 함께 팔짱을 끼었다. 그들은 어딘가 불안함이 깃든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일로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일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중간중간 말을 꺼내던 다프네는 잠잠해졌고, 게오르그마저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늦군."

게오르그의 표정이 무거웠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꺼내 쥐었다. 바늘은 여전히 고정되지 않고 진자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교황청 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수는 없을 거 같아."

게오르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따라 마리안느와 다프네가 일어났다.

성국의 거리는 평소와 같았다. 마리안느는 수런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억누르며 게오르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교황청의 앞에서,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대면하게 되었다.

"교황 성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떻게…."

"용사께서는 현재 재앙…. 안개와 싸우고 계십니다."

교황이 내뱉은 말에, 일행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건… 어째서…."

게오르그가 힘겹게 말을 뱉어내자, 교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님은 이번 재앙을 공략할 때 혼자 가는 편이 좋을 거라 판단했었죠. 여러분들이 함께 안개 안으로 들어간다면 공략할 때 오히려 더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게오르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 녀석이…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용사님을 말릴 수도 없었고요. 용사님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재앙과는 대면한 적도 없는 제가 어떻게 말씀드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게오르그는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뒤에서, 다프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저대로 일로이가 홀로 재앙과 싸우게 둘 수는 없어요."

"안 됩니다."

교황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다프네가 이어 말을 꺼내기도 전, 교황이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용사님의 부탁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파티장의 명령이 되겠군요. 용사님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안개에 들이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교황의 옆으로 성기사단이 정렬했다. 마치 이 뒤로는 갈 수 없다고 말하는 벽처럼.

"전 용사님의 부탁을 존중했습니다. 용사님께서도 저라는 사람을 믿고 이리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일 테니까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 성실한 녀석이, 언질 하나 남기지 않고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게오르그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사님꼐서는 자세한 사정까지 일일이 제게 말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분과 함께 공략에 나설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셨을 뿐이죠."

부디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마리안느의 귓가에 교황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바스락. 바닥에 깔린 풀이 발에 밟히며 바스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성검의 끝을 매만지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참신한 새끼들일세, 이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로 깊숙하게 이어지던 숲은 어느덧 익숙한 지형으로 바뀌었다. 이 지형,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바라보았다. 이 숲, 드리운 그늘,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만이야."

내 눈앞에 떡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 나는 동굴로 다가가지 않고 멍하니 그 입구를 바라보았다. 개미굴은 마치 들어오라며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들어가야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내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혔다.

"형씨,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나는 뒤로 돌아보았다. 개미굴에 함께 들어갔었던 세 모험가. 나는 내게 다가오는 모험가 대장, 레아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용사님 아닌가요? 이렇게 가까이서 뵈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내 손을 잡고는 열심히 악수하는 모험가들을 바라보았다. 감각이 생경했다. 꼭, 정말 그때로 돌아가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을 쥐는 레아의 손, 마력의 흐름, 내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 그 모든 것이 전부, 현실이었다.

어느덧, 나는 개미굴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자, 더 나아가 보죠. 짧은 시간이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용사님!"

모험가들이 앞장섰다. 나는 랜턴으로 밝혀지는 개미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생하다. 기분이 다 나쁠 정도로. 나는 개미굴의 벽을 손으로 매만져보고, 그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공기를 느꼈다. 내가 펼치는 기감에는 개미굴을 돌아다니는 온갖 마물이 느껴졌다. 그떄처럼 모험가들은 나를 능숙하게 인도했다. 나는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나타나는 마물들을 쓰러트렸고, 그때처럼 모험가들은 내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그게, 우리 리더가 사실 용사님의 팬이거든요. 용사님께서 이번 일에 한 번만 동행해주면 리더가 정말 좋아할 거 같아서…."

"야, 입 다물어. 그만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칵."

모험가들의 만담도, 그때와 같다. 나는 모험가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그리운 감상에 젖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내가 산란기라서 말이야, 먹이가 좀 많이 필요하거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는 인간의 상반신을 단 거대한 거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거미의 발아래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세 모험가가 있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 모험가, 하비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올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용사님… 어서 도망…."

콰직.

그리고 거미의 발이 하비의 머리를 찍어 터뜨려버렸다. 내 옷에 하비의 피가 튀었다.

"많이 다르지?"

거미, 아라그리드의 목소리가 비웃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발아래의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이건 환상이다. 안개가 내게 보여주는 비현실이다. 저 사람들은 멀쩡하게 아직 살아서 왕도의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을 거다.

"내가 그때 배가 고팠더라면, 먹이가 필요했더라면, 너는 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아라그리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이 아니다. 나는 그리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나는 무릎을 꿇고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

레아가 고개를 들며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서 묻는 피의 감각도, 온기도 너무나 선명하다. 레아의 손을 잡는 내 손이 떨렸다. 아냐. 현실이 아니다. 그녀는 내가 그때 구할 수 있었다.

"네가 운이 좋았을 뿐이 아니었을까? 그때, 마침 나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으니까. 먹이가 많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던 것이었으니까."

아라그리드가 키득거렸다.

"아니면 네가 나를 쓰러트리는 게 늦어서 그들이 새끼 거미에게 붙잡혀, 천천히 녹아버리게 두었을 수도 있지."

현실이 아니다. 이건, 안개가 내 정신을 흐트러뜨리게 두는 환상일 뿐이다. 나는 그리 머릿속으로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정신을 조금 흐트러뜨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칭찬해주는 수밖에 없겠군. 넌 성공했다.

"과거에 가정을 자꾸 붙이는 걸 뭐라고 하는 줄 아냐, 안개?"

"뭔데?"

아라그리드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서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승리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나는 신형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자위라고도 하지."

Chapter 88 - 88. 과거에 두고 온 것 (3)

게오르그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용사라면, 일로이라면, 결코 동료들을 두고 그런 독단적인 행동을 저지를 녀석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러면서 어느 정도는 교황의 말을 납득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들이 함께 가겠다고 설득했으면, 일로이는 마지못해 그들의 말을 들어줬을 테지. 일로이가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빌어먹을."

게오르그가 혀를 찼다. 세 번째 재앙, 크라켄을 상대할 때 일로이는 자신이 생각해낸 최적의 방안을 동료들과 공유하러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게오르그는 머리를 짚었다.

"어리석은 새끼."

게오르그는 교황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로이가 안개와 홀로 맞서려 들어갔을 때, 교황이 자신에게 냉정하게 들려주던 충고를.

'그 녀석이, 우리를 믿지 못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아니, 여러분을 믿지 못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게오르그는 교황의 태연한 말에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동료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믿고 등을 맡겨야 할 동료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일로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용사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듯 말하는군요.'

게오르그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은 그가 처음으로 용사가 되었을 때, 얼마나 그를 신뢰하고 있었습니까?'

용사를 믿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에 따라도 될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놈팽이가, 고작 검 하나를 뽑았다고 용사라니.

"…그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겠지. 일로이 그조차도."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게오르그나 다른 파티원이 용사를 신뢰할 수 없었던 만큼, 용사도 동료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겠지. 이건 그 업보였다. 용사, 일로이는 자신에게 쌓인 의문부호와 불신을 해결하는 모습들을 여러 번이나 보여줬지만, 과연 동료들은 일로이가 갖게 된 의문을 얼마나 해소해줬을까.

나는, 용사의 곁에 있으면서 그에게 얼마나 믿음을 주었나.

게오르그는 이를 악물고 일로이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자, 다프네와 마리안느가 고개를 숙이고 방 안에 앉아있었다. 게오르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프네가 그때 고개를 계속 숙인 채로 책상을 가리켰다. 일로이의 책상 위에는 한 편지 봉투가 놓여있었다. 게오르그는 다가가 그 봉투의 겉면을 보았다.

게오르그에게.

그 말을 보고는 게오르그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일로이의 정갈한 글씨체로, 편지는 오목조목 필요한 말만이 적혀있었다.

이 편지를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 난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너희와 함께 가지 않는 게 너희를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하지만 재앙과의 싸움은 언제나 불확실해. 결국 내가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에 대비한 몇 가지 계책을 말해주려고 한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었던 거냐."

게오르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계책을 알고 있어야 하니 안개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로 일로이는 편지를 끝맺었다. 게오르그는 한숨과 함께 편지를 접었다.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일로이를 찾겠다고 무작정 안개로 들어간다면 그의 신뢰를 배반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교활하기는."

게오르그는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돌아오면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나는 일로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거다."

게오르그의 말에, 다프네와 마리안느가 고개를 들었다. 게오르그는 편지를 품에 넣으며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설령 들어간다고 해도 말이야. 나는 그 녀석을 믿고 성공하기를 기다릴 거다."

다프네는 차갑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일로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그 생각으로 여태 강해지고 있었던 건데, 정작 지금처럼 중요한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네요."

다프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말이에요."

마리안느는 조용했다. 손에 쥔 나침반이 돌아가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게오르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나섰고, 다프네와 마리안느만이 일로이의 방에 남았다. 마리안느가 나침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째깍. 째깍.

무엇을 해야 하나. 마리안느는 가만히 나침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다프네가 옆에서 지쳐 잠에 들 때까지, 마리안느는 멍하니 나침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이는 안개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어떤 적과 싸우고 있을까. 마리안느는 나침반의 유리를 쓸었다.

"…용사님."

아니, 일로이. 마리안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일로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안개 안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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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새끼, 그러니까, 아라그리드는 내가 알고 있던 그 거미 마물보다 훨씬 강했다. 내 반응은 빨랐지만, 이따금 내 강화되지 않은 몸을 믿고 설치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콰과광-!!

저놈의 전력을 다한 돌진을 막아낸 지금처럼 말이다.

"진짜 어리석구나. 정말 그걸 지금 그 몸 상태에서 정면으로 받아낼 생각이었다니."

나는 함몰된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흙먼지가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찢어진 이마를 따라 피가 주륵 흘러내렸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거칠었다. 거미는 눈을 도르륵, 도르륵 굴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물렀다.

"어때, 아프지? 진짜 같지? 너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도 진짜고, 네가 겪는 고통도 진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아라그리드가 앞발 하나를 하비의 시체 위로 올려놓았다.

"여기서 이 녀석들이 느끼는 고통도, 진짜라는 말이야. 비록 네게는 거짓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 모험가들은 아니라는 말이지."

나는 눈을 들어 거미를 바라보았다. 숨을 내쉰다. 거미는 내 달라진 반응에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달각, 달각. 거미는 다리를 움직이며 나를 조롱하듯 움직였다.

"사람을 지키겠다는 용사가 되어서 말이지. 우습구나."

나는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숨을 내쉬었다. 자꾸 내 눈에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레아가 들어왔지만, 나는 애써 그를 못 본 체했다. 사람의 기억에서 너무 동떨어진 일을 불러낸다면, 누구나 그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안개는 머릿속에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 혹은 두려워했던 일을 끄집어낸다. 언젠가 그 사람이 무너질 때까지.

"너는 우습지 않니?"

나는 아라그리드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거미는 얼굴에 섬뜩한 미소를 띤 채로 달려드는 나를 반겼다. 내가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고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거미가 날리는 공격을 피하면서 동굴의 벽을 차고 뛰어올랐다.

"성검이 각성해주지 않으니 이렇게 힘들게 나를 상대해야 하지?"

검을 그대로 떨어트린다. 아라그리드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세웠다. 파고들 틈이 생겼다. 나는 땅을 박차고 아라그리드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라그리드는 거미줄을 뽑아내며 내 움직임을 제한하려 하고, 앞발을 휘둘렀다.

"네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고작 몸뚱아리 하나 강화하는 게 끝인가 보군."

나는 그리 말하며 아라그리드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하고, 막아내고 흘려냈다. 반격은 시도하기도 전에 무산되었고, 억지로 힘으로 누르려 다가오면 물러섰다. 그리고, 아라그리드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내 칼이 마침내 놈의 다리 하나를 잘라내자, 아라그리드는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제법이네, 용사."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리 느꼈다. 내가 입는 상처는 이제 없었고, 피는 아라그리드만이 흘리고 있었다. 뭐,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영 찝찝하긴 했다. 아라그리드는 다시 다리를 딸각거리며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자, 그러니까, 이런 건 어떠니?"

거미는 다리로 레아를 쿡 찌르더니 손으로 집어 들었다. 레아는 힘없이 축 처졌다. 거미는 딸각거리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거미를 올려다보았다.

"불리해지니 추해지네. 적어도 거인은 묵직한 맛이라도 있었지. 말이 많으면 위엄이 없어."

내가 헛웃음과 함께 말하자, 거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내 손에 들린 이 여자를 베어라. 그럼 나도 군말 없이 널 보내주도록 하지."

나는 성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오랜만에 두 손으로 잡아보는 성검이었다. 무너지지 않을 거다.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을 거다. 나는 거미를 향해 검끝을 세우며 피식, 웃음을 뱉어냈다. 아라그리드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기도 전, 나는 그 팔다리와 몸통을 모조르 베어내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레아를, 나는 두 손으로 받아냈다.

"…용사님."

레아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내게 손을 올렸고, 나는 그 손을 잡아주었다. 내게 온몸이 베인 아라그리드는 바닥에 널브러져 기괴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거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안개가 내게 바라는 건, 결국 그 말에 따라 레아를 베어버리는 것이었겠지.

"군말 없이 보내줄 거면,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뒤져서 사라지지 그래."

"그래. 그렇군. 역시 네놈은, 뼛속까지 약았지만 무른 놈이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냐. 나는 웃었다. 방금까지 한순간만을 노리고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다른 동료들은…."

내 품의 레아는 그리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구현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안개가 아니다. 내 기억 속의 인물을, 가장 실제와 가까운 모습으로 조형해놓은 것에 가깝다.

그러니, 실제가 아니다. 지금 저 죽어버린 모험가들도, 이 상처투성이의 레아도.

나는 레아를 내려놓았다. 레아는 이미 죽어버린 동료들을 향해 걸어가 무릎을 꿇고 울었다. 나는 그녀가 울음을 전부 토해낼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렸다. 나는 레아와 함께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레아가 사라지고 없다. 나는 한동안 비어버린 내 옆자리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거미는 질렸다."

빛이 동굴의 끝자락을 잠식했다.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거 내와라, 이제."

다음으로는 대체 뭐가 나올까? 청문회? 아니면, 내 첫 출정식?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바람이 훅, 좁은 개미굴의 입구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은 소금기와 물비린내를 머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지금 안개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자신만만하게 다른 거 내오라 하지 말걸.

나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내려오며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치 대규모 해상전이라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움직임들이었다. 병사들은 각자 무기나 물자를 짊어지고 바삐 움직였고, 폭약과 포탄이 수레에 실려 날라지고 있었다.

"야! 저거 거기 싣지 마!"

"밧줄 더 가져와! 배 안에 있는 거 다 묶어놔야 해!"

나는 저 대화를 모른다. 이건, 아마도 이 몸의 주인, 일로이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기억의 파편.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우중충했고, 날씨는 봄의 한중간이라 따뜻했다. 나는 그리고,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항구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폐허가 아닌 바크틴스.

생선의 비린내가 가득하고, 거친 얼굴의 뱃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곳. 나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내가 나타난 이유는 아마 하나.

"어서 가요. 계속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얼굴들이 또 있었다.

냉랭한 얼굴의 성녀, 아이시스. 무표정한 용병, 아르옌,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 넬라, 그리고 커다란 방패를 등에 매고 있는 게오르그까지. 나는 일로이의 옛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시스가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시가 급해요. 크라켄은 지금도 이곳, 바크틴스로 다가오고 있을 거니까요."

Chapter 89 - 89. 과거에 두고 온 것 (4)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출항을 앞둔 배들이 홋줄과 닻을 올렸다. 바크틴스라는 항구 도시는 이미 요새화 되어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카이로스 왕국 전력의 반. 사실상 국경, 변경 지대, 그리고 왕궁을 지키는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사를 쏟아부은 거다.

크라켄 하나를 막아내기 위해서.

작전 회의는 무겁다고는 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재앙을 직접 접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이렇게까지 많은 군사를 동원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애초에 그리 긴장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질투심, 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지휘봉을 잡은 제독을 노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이 재앙이라는 놈을 상대할 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놈들이 어디 있는지는 제깍제깍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해군의 제독, 그러니까, 총사령관이 그리 말했다. 사령관은 해도를 펼쳐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휘봉으로 해협의 지리를 짚어주었다.

"이 해로는 빙하에 침식된 지형이다. 바로 이 복잡하고 좁은 해로를 지나 본토로 들어오는 입구가 바크틴스가 시작되는 곳이지."

수십 개의 작은 섬, 그리고 연안치고는 깊은 수심. 승부처가 될 수도 있고, 제 무덤을 파버리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지형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며 주장한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정찰 정보에 따르면, 크라켄은 아직 먼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듯하다. 마물의 군세를 모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더 봐야 알 수 있겠지."

총사령관은 지휘봉으로 해도를 탁탁 두드렸다.

"놈은 거대하다. 바다에 비치는 그림자는 작은 섬보다도 훨씬 크다고 하더군. 아마 아슬아슬하게 해로에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다른 높은 사람들. 의구심이 깃든 눈초리로 바라보는 기사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분위기는 개판 일보 직전이었다. 게오르그는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고, 아르옌은 증오심이 깃든 눈으로 협조성이 떨어지는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다. 그와 관련해서 의견을 수렴해보고자 하는데, 발언할 사람은 손을 들고 말하도록."

총사령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까지 대규모의 작전을 준비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래봤자 그냥 크기만 무식하게 큰 마물일 뿐이지 않나."

총사령관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늙은이 하나가 말했다. 아마 육군 사령관급 정도 되는 사람. 총기사단장 정도 되겠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괜히 규모를 크게 보이게 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거겠지. 정치적으로 밀어주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자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면 그냥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총사령관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아니면 저 '용사님'이 해결하게 두면 되지 않겠나? 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놈이, 우리와 동등한 발언 권한을 가지고 여기 떡하니 있다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중늙은이의 말을 무시했다. 저기 심력을 쏟아봤자 좋을 일은 없다. 아마 원작의 일로이는 대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총사령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민들은 모두 대피했습니까?"

안개는 내게 어떤 좌절감을 안겨주려는 걸까. 내가 무력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싶어서일까? 지금의 내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걸까.

"최대한 늦게 피난을 시작하려고 생각한다. 주민들에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다른 곳으로 말이 퍼져나가게 할 수도 있고 말이지."

총사령관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민들을 내보낼 필요가 있어요. 최대한 이 도시에서 멀리."

"허, 우리 용사님은 용사님답게 사람부터 챙기시는군."

늙은이들이 비웃는 소리. 사람을 죽이는 싸움에 익숙해져, 사람을 지키는 싸움에 무감각해진 이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비꼬며 바라보는 이들은 크라켄과의 전투에서 대부분 죽는다. 안타까워해야 할지.

"지금 피난을 시작해도 늦습니다. 크라켄이 만에 하나 바크틴스에 상륙하기라도 하면 막심한 피해를 감당해야 할 겁니다. 재앙이 어떤 존재인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잖아요."

"그럼 용사님께서 크라켄이 육지로 오지 못하게 막아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보시게, 제독, 아니, 총사령관님. 용사는 저렇게 주장하는데?"

발언권도, 일로이에게는 사실상 허울 좋은 껍데기인 듯했다. 권한과 상징성만을 잔뜩 떠안은 채 떠밀려 내려온 외부인. 제독과 사령관들의 눈에는 내가 그리 비쳤을 거다. 총사령관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용사님의 의견을 수렴하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상황보다야 그게 나을 테니."

"참, 웃기는군. 둘이 짝짜꿍이 아주 잘 맞아?"

총기사단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 크라켄을 무찌르기 위한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대응책은 의논하지도 못하고, 번번이 의견 충돌로 이어지며 끝나버렸다.

정말 답도 없는 형국이었군.

원작의 용사 파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거 같았다. 일로이가 왜 독선적이고 날카롭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 것 같았고. 나는 개판이 되어버린 회의장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숨이 대놓고 새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웃기네, 그 총기사단장이라는 늙다리."

용사 파티에게 마련된 막사로 돌아가는 길, 넬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 특유의 새빨간 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하는 말마다 토 달고, 비웃고. 꼴 보기 싫은 놈이었어. 안 그래, 용사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주민들의 피난이 성사된 것만으로 다행인 회의였으니까. 알맹이라고는 없이 뒷방 늙은이들의 토론만이 이어졌었다. 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솟아오르는 울화를 억눌렀어야 했다.

"그 아저씨들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 아직 용사로서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넬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옌을 흘겨보았다.

"회의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었던 게. 뒤에서는 갑자기 말을 잘도 하네? 용사가 공격당할 때는 변호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면서."

넬라가 입술을 뒤틀었다. 아르옌은 코웃음을 치며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파티 대표가 있는데 내가 뭐라고 나서서 말하겠어? 파티원들까지 싸잡아서 욕 먹힐 일 있나. 네가 중간에 나서서 싸움판으로 만들어놓지만 않았어도 회의는 더 진행됐을 거다."

아이시스까지 붙어 셋이 으르렁거리고, 게오르그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만. 우리들끼리 싸워봤자 재앙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르옌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에야 와서 갑자기 좋은 파티 리더 행세라도 해 보이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 환상 속에서 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안개는 대체 날 어떻게 굴복시키려는 걸까.

"정신 차려. 지금 재앙을 눈앞에 두고 뭐하자는 거야, 이게. 평소에야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싸울 수는 있겠지만, 우리끼리 다투다가 저 주민들. 저 사람들이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건데."

조금 신경질이 난 걸까. 나는 공격적인 어투로 아르옌에게 따지고 들었다.

"적당히 좀 해.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나는 내뱉듯이 그리 말하고서는 앞서 걸어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지난 거미 때만큼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거 같다. 나는 아르옌의 눈을 노려보았고, 아르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났다. 이 상태에서 크라켄을 물리칠 수 있기는 할까.

"…잘했다."

막사로 돌아가는 길, 뒤에서 조용히 게오르그가 내게 말했다. 안개 속에서도 게오르그는 게오르그인 듯하다. 믿을 건 이 녀석 하나뿐인가. 나는 피식, 작은 웃음을 지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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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회의장에 도착한 우리를 반겨준 건 의외의 소식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회의장이 꽤 썰렁해진 것이다. 용사 파티를 바라보던 총사령관은 지휘봉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총기사단장은 내 권한으로 이번 작전에서 뺐다. 오늘 아침에는 자기 기사단을 데리고 돌아갔더군. 왕궁에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자리를 유지하기도 힘들겠지."

총사령관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진즉 알고 있었는데."

총사령관은 팔짱을 끼며 우리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나는 알고 있다. 크라켄이 얼마나 끔찍한지. 정찰을 위해 나간 군함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그걸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이나 저렇게 웃고 떠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대책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모양인 것 같군."

총사령관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주민들의 피난을 늦춘 이유가 뭡니까."

"…내게는 의무가 있어. 비단 재앙을 막을 의무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왕국에 초래할 혼란을 최소화할 의무 말이야."

그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자기 밥그릇은 챙기려 하는군.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던 총사령관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만사가 다 그런 거다, 용사.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지."

"…예. 알겠습니다. 회의나 시작하시죠."

나는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려 하는 혐오감을 참아내며 말했다. 총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봉을 다시 해도 위로 올려놓았다.

"크라켄은 서서히 바크틴스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며칠 이내로 상륙할 것 같더군. 감시하는 함선은 현재 철수 중이고, 방어전에 총력을 쏟아붓기로 했다."

총사령관이 지휘봉을 손바닥 위로 탁, 소리가 나게 올렸다.

"여기까지 질문은?"

"질문은 아니고, 건의 사항이 있습니다."

나는 해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건의 사항?"

총사령관이 옆으로 슬쩍 물러섰고, 나는 해도를 짚어보며 말했다. 무슨 이유로 안개가 내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방어전은 이곳에서 해야 합니다."

환상 속에서라도, 사람을 지키는 것. 나는 바크틴스로 들어오는 좁다란 해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라면 크라켄이 상륙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바다 위에서? 그 괴물을 말인가?"

"피난을 일찍 실시했더라면 그러지 않았어도 됐겠죠."

나는 사납게 덧붙였다. 총사령관은 내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당신의 선택이었고, 대가를 치러야죠. 피난 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지켜야 하고, 크라켄이 육지에 상륙하게 내버려 두면 사람이 다 죽을 테니까요."

총사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물의 군세도 함께 몰려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들이 더더욱 개활지로 올라오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 않습니까."

나는 총사령관을 압박하려 얼굴을 들이밀었고, 총사령관은 내 눈을 바라보며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사이에서 줄다리기와 같은 눈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나를 바라보는 아르옌과 눈을 마주쳤다.

"크라켄을 바다에서 상대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Chapter 90 - 90. 과거에 두고 온 것 (5)

예정되어 있던 분열. 혹은 이 세상 그 자체의 농간.

나는 나와 총사령관의 사이로 끼어든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총사령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르옌은 그런 총사령관을 싸늘하게 한 번 노려본 후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아르옌은 그 덥수룩하게 긴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르옌의 뒤통수에 대고, 총사령관이 물었다. 아르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바다 위에 띄워놓았던 군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르옌은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놈과 맞서 싸울 발판도 없는데, 어떻게 바다 위에서 크라켄과 싸우라는 말입니까. 그건 그냥 자살행위라고 봐야 하겠죠. 물고기 밥이 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서 아르옌은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 무슨 생각이냐. 바다 위에서 크라켄과 맞서 싸우겠다고? 지금 주민들의 피난이 늦어졌으니, 목숨이라도 바쳐서 사과하라고 시위라도 하는 거야, 뭐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주민들이 아니지. 애초에 말이다, 모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어졌어. 그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우리잖아. 저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침착하게 아르옌에게 대꾸했다. 그래, 원작에서의 다툼도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이어졌지. 결국 둘 다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의 소신을, 이상을 증명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로이는 아르옌보다 약했다. 그리고 아르옌은 기어코 크라켄을 잡아냄으로써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였다.

"다시 천천히 생각해봐라. 총사령관이 상황 판단을 그릇되게 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책임을 우리가 굳이 떠안을 필요는 없어. 그냥 한발 물러나 있으면 된다고. 최종 지시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도 아니잖냐."

아르옌이 목소리를 침착하게 바꾸었다. 아르옌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주민들의 피난을 늦게 실시한 총사령관에게 있으니까.

"물 위에서 싸우면, 웬만한 함선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부서지고 가라앉을 거다. 우리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다. 결국 바다는 크라켄이 제힘을 발휘하기 가장 좋은 곳이야. 적의 전력을 약화할 생각은 안 하고, 정정당당하게 맞서겠다는 거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로는 좁고 사이사이에 돌출된 섬도 많아. 우리가 발판 삼아 싸울 공간은 충분하다. 총사령관도 크라켄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폭이라고 했잖아. 그럼 해로로 진입할 수 있는 마물의 수도 적을 거야. 우리의 전력을 오로지 재앙 하나만 바라보고 쏟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서 놈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 거다. 재앙이 고작 작은 섬 하나 부수지 못할 것 같나?"

설전은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르옌을 잠시 제쳐두고 총사령관에게 말을 걸려 했으나, 사령관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나를 멈춰 세웠다.

"그만. 파티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용사 자네만의 독선으로 내게 권고할 수는 없네. 파티의 의견이 통합될 때까지 이 건은 미뤄두도록 하지. 의견을 조율한 후 내게 다시 오게."

"하지만, 총사령관님, 시간이…."

"그쪽의 용병도 자네보다는 전장에서 많이 굴렀을 테니까. 잘 이야기해보게. 나도 다시 중구난방으로 자기 할 말만 하는 회의장을 만들기는 싫어."

이 망할 총사령관아. 여태까지의 경험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게 재앙과의 전쟁이라고. 당신이 그 괴물을 직접 봤다면서 그걸 모르냐?

나는 이곳이 안개가 보여주는 환상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작의 일로이는 도대체 여기서 무슨 생각으로 있었던 걸까?

"물론 여태 자네들이 나눈 의견은 잘 듣고 있었네. 잘 수렴해서 작전을 설계해보도록 하지."

총사령관은 우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우리는 막사 밖으로 나와 잠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시계(視界)가 나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우우우웅.

고래가 우는 소리 같았다. 나는 수평선 너머로 뚜렷하게 가까워지고 있는 존재감을 느꼈다. 나만이 그것을 느낀 건 아닐 테지. 나는 표정이 굳어가는 용사 파티의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가까워지고 있어."

넬라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내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안개속에서 이것이 뚜렷하게 구현된다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아이시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게오르그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평소에 늘상 무표정이던 아르옌마저, 딱딱하게 그 표정이 굳은 채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저래도 저걸 바다에서 상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아르옌은 그러며 날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상대해야 한다는 거야."

나는 아르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옌은 내 멀쩡해 보이는 표정에 혼란스러운 듯한 모습이었다. 이 녀석이 정말 저게 뭔지 알고나 있을까? 라고 의문스러워하는 듯하기도 했고, 어째서 이렇게까지 멀쩡한 모습인지도 궁금한 듯했다.

"저게 육상에 상륙하면, 그날부로 바크틴스는 끝장이니까."

"저거랑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어. 해군은 한주먹거리도 안 될 거다."

아르옌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우리가 나가서 맞선다고 해도, 저걸 간신히 붙들어둘 수 있을까말까다. 더군다나 바다 위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나는 아르옌의 표정을 보았다. 냉정함을 가장한 얼굴 뒤로 보이는 미약한 두려움.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을 거다. 어쩌면 너까지 포함해서 전멸할 수도 있어."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가장 선두에는 나와 네가 설 거고, 게오르그가 언제나처럼 아이시스를 지킨다. 그리고 넬라가 보조해준다면…."

"해주면? 저걸 쓰러트릴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리고는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그때 가서도 다시 말을 걸어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약하고, 동료들은 나를 믿지 못한다.

"쓰러트릴 수는 없겠지."

나는 솔직하게 그리 말했다. 아르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도대체 왜…."

"그리고 육지에서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바다에서, 맞서 싸워야만 한다. 사람들을 지키려면.

"네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면 모르겠다. 그런데 넌 나보다도 약하면서, 내가 저 재앙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왜 계속 바다에서 싸우자며 죽음을 재촉하는 거냐.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냐는 말이다."

아르옌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럼 네 의견이나 한번 들어보지."

나는 낮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말대로 육지까지 크라켄을 유인해서 쓰러트린다고 하자. 그럼 일단 바크틴스의 주민들을 지키지 못하는 건 확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지 멀쩡하게 크라켄을 쓰러트리라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 어쩌면 바다에서 싸우는 것과 결과가 별반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놈을 쓰러트릴 가능성이 커지고, 우리 희생을 줄일 가능성도 커지지.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라. 죽을 거면 혼자 가서 죽어."

나는, 그때 이곳이 안개인지도 까먹은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희생을 강요하는 게 어느 쪽인데!"

아르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나는 아르옌을 노려보았다. 안다. 저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지만, 그렇다고 아르옌의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안개 속의 환상일지라도, 안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좋아."

아르옌의 손이 검자루 위로 올라갔다. 나는 저 녀석이 먼저 검을 빼들기 전, 재빠르게 성검을 뽑아 들며 대응했다.

쾅-!!

아르옌과 맞부딪힌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얽히고, 다시 풀린다. 나는 지난번 아르옌과의 대련을 떠올리며 검을 내질렀다. 그때 아르옌이 보여주었던 습관, 호흡, 움직임. 아르옌은 환상 속에서도 강했고, 나는 여전히 그와 비교해 부족했다.

"자만하는군. 겨우 이 정도면서."

그러니 정확히 한순간만을 포착한다. 나는 버텼다. 아르옌이 밀고 들어올 때까지 버텼다. 여태 내가 싸워왔던 이들 중 나보다 약한 이는 없었다. 처음 잿빛곰을 상대했을 때도, 아라그리드를 상대했을 때도, 거인을 상대로 싸웠을 때도. 난 언제나 나보다 강한 놈들을 상대했고, 이젠 그놈들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파고 들어간다.

아르옌이 가장 간결한 동작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옆구리가 베인다. 열상을 입은 듯 뜨거운 감각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옌의 팔을 붙들고 앞으로 메쳤다. 아르옌은 당황하며 내가 보내는 힘에 저항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아르엔이 저항하는 힘을 지지대 삼아 몸을 돌려 다리를 걸었다.

"-!!"

쓰러진다. 그리고, 아르옌의 목 위로는 성검이 자리했다.

"넌 뭘 하려 했던 거냐?"

나는 아르옌에게 검을 들이대며 물었다. 아르옌은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네게 가르쳐주려 했지. 어째서 네 말에 따라 싸우러 나가면 안 되는지를."

나는 아르옌을 잡아 일으켰다. 아르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도망가지 마라. 넌 이번 재앙 공략전에서 꼭 필요한 존재니까."

"…도망은 무슨. 의뢰비는 받아야지. 왕국에서는 선불로 3할만 줬다고."

아르옌은 내 손을 밀어내며 쓰디쓴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옌, 그치고는 포기가 빨랐다. 나는 멀어지려 하다 나를 돌아보는 아르옌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저 검은 눈동자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네 파멸이다, 일로이. 이번 선택을 넌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짐할 수 있을까?"

저게 아르옌이 할 법한 말이었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고, 어느덧 아르옌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나서서 중재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군."

게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게오르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네 의견에 군말 없이 따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중립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녀석 아니었나. 나는 게오르그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전투에서 아이시스를 잘 지켜줘, 부탁이다. 전열은 나와 아르옌, 저 녀석과 둘이서 어떻게든 맡을 테니까 말이야."

"널 한 번 믿어보마. 어쨌든 이번 전투는 밑져야 본전인 것 같으니."

게오르그는 내게 그렇게 피식 웃어주고는 멀어졌다. 진작에 일로이가 조금 더 유한 태도로 나왔더라면 게오르그는 일로이의 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일로이가 아르옌과 싸워 이겼더라면…. 아니, 그랬더라면 애초에 원작,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가 성립될 수 없나.

"…비록 여기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그 이후를 볼 수 있을까.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일로이라는 용사가 원했던 것. 그가 바란 풍경. 여기서라도 대신 이룰 수 있는 걸까. 나는 새로이 결심하고 눈을 떴다. 성검은 나는 나라고 했다. 여기서도, 계속 나는 나대로. 안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돌파해주리라고.

나는 그리 결심하고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총사령관에게 파티의 통일된 의견을 들려주고 전투에 나선다. 그리고, 크라켄을 쓰러트리고 안개가 보여줄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로의 끝이 어디든, 따라가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나의 성대한 착각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로.

다음날, 나는 총사령관에게 작전 개요를 보고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 회의가 열리던 막사를 찾아갔다. 조금은 희망에 부푼 채,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막사를 열어젖히고, 나는 총사령관을 마주했다.

그리고, 막사 안에 펼쳐진 풍경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여, 일로이. 늦었군."

게오르그. 나에게 아주 친숙한 듯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게오르그의 옆에는 아르옌이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대의 시선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도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로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님, 오셨습니까."

어?

"이제 곧 재앙을 잡으러 출발하는 거 맞죠? 어제 일로이가 작전을 브리핑해준 대로 총사령관님께 전달했어요. 총사령관께서도 알겠다고 승인했고요."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탑승할 배로 이동하면 될 겁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있었다.

"믿어주세요. 이번에는 꼭 잘 싸울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다프네의 해사한 미소를 마주했다.

"용사님의 옆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마리안느의 굳센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아르옌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르옌은 언제나 그렇듯,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아, 일로이."

아르옌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게 네 파멸이 될 거라고."

Chapter 91 - 91. 과거에 두고 온 것 (6)

파도가 뱃전과 부두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가 탑승할 기함 앞에서 펼쳐지는 총사령관의 설명을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용사의 말대로, 바크틴스의 피난이 늦어졌으니 주민들의 보호를 우선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바다에서 크라켄을 상대한다. 해도에서 보았듯, 항구로 들어오는 해로는 좁다. 크라켄의 행동 반경도 제한되고, 크라켄이 그러모아 데려올 마물들의 출입도 불가하니, 우리도 최소한의 함대를 동원해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겠지."

총사령관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함께하는 기사, 함장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용사가 전열의 가장 앞에서 크라켄을 막아낼 것이다. 우리가 그 뒤에서 화력 지원을 맡을 거고, 행여 함께 들어오는 마물이 있다면 함께 처리한다."

총사령관은 그러고서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간단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결단이기도 하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일이니 말이야."

목숨을, 내놓고. 총사령관은 그 말에 유달리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정렬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 말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출항 한 시간 전. 모두 준비할 수 있도록."

나를 지나치며 사람들이 각자 군함으로 달려갔다. 내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혔다. 해전을 치르기 위해 비교적 가벼운 장비로 가라입은 게오르그였다.

"준비는 끝났다, 일로이. 재앙과 또 싸울 준비는 된 거겠지?"

나는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서둘러 탑승하지. 놈이 어떻게 밀려 들어올지는 모르는 거 아닌가. 마물을 앞세워 들어올 수도 있고, 아니면 크라켄 본신이 홀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마물이 먼저 들어온다면 다프네의 역할이 중요해지겠군."

게오르그는 그리 말하며 옆으로 돌아보았다. 다프네는 굳은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그녀의 결심에 찬 눈을 바라보았다. 안돼. 그런 눈으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

"다른 마법사들도 우리를 지원해주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뒤에서 크라켄 본체를 공략하는 데에 집중할 거예요. 일로이가 말해줬듯, 내 역할이 정말 중요하겠죠."

나는 어떻게든 이 다프네와 안개 바깥에 있을 다프네와 다른 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말투 하나, 눈짓 하나조차도 다프네는 그대로였다.

"맡겨줘요, 일로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일로이는 크라켄을 상대하는 데에만 집중해요. 마리안느도 있고, 게오르그도 있으니."

마리안느가 말없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성창이 쥐여 있었다.

"서둘러 가자. 어떻게 싸울 작정인지 함장에게 전달해줘야지."

게오르그가 선두에 서고, 마리안느와 다프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잰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쫓으려다 내 옆으로 다가온 인기척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참, 사람이란 간사한 존재야, 그렇지 않나, 용사."

아르옌이 한쪽 입꼬리만을 올린 채로 걸어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 일처럼 그 상황을 바라보다가, 막상 그것이 제 일이 되면, 태도가 싹 바뀌더라고. 마치 딱…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너라고 예외일 성싶더냐? 네가 언제까지 성자처럼 검을 거머쥐고 눌러앉아 사람을 구하느니, 하는 태평한 소리를 내뱉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나는 아르옌을, 아니, 아르옌의 탈을 쓴 안개를 노려보았다. 성검을 거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운이 좋은 편이었지. 여태 그 역경을 거쳐오며 제대로 된 상실도 한 번 겪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안개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얹고 내 몸을 돌려 걸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게 했다.

"그 행운이 언제까지 너를 따라줄까? 행운의 공평하면서도 잔인한 면은, 언제나 네 편인 척하다가 언제든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

"여기서 너를 꺾기만 하면, 그 입도 다물게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나."

안개는 히스테릭하게 웃음을 토해냈다. 배를 앞으로 접으며, 낄낄거리며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먼 웃음을 한참이고 토해내던 안개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르옌이라면 절대 짓지 않을 법한 표정. 입이 찢어질 것만 같은 섬뜩한 미소가 그곳에 자리했다.

"그래, 꺾을 수 있다면 말이지. 네가 아무리 스스로 날 무시해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도 실은 깨닫고 있을 거야."

아르옌의 모습을 한 안개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귀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이미 빠져나가기는 글렀다는 사실 말이야. 너,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전혀 모르잖아. 안 그래?"

나는 성검을 뽑아 안개의 목에 겨누었다. 안개는 다시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크라켄을 쓰러트리면 되리라고 생각하나? 만약 네가 크라켄을 쓰러트리는 데 실패한다면? 네가 이 '환상' 속에서 그 괴물의 촉수에 짓눌려 죽으면 어떻게 될까? 뭐, 만약 그렇게 죽지 않는다고 해도, 네가 크라켄을 쓰러트리면?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안개는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르옌의 목이 검에 꿰뚫린다. 피가 베어 나와 검을 타고 흘렀다. 안개는 목이 꿰뚫린 채로 내게 계속 걸어왔다.

"그건 한 번 직접 확인해봐라. 백 번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네가 보는 게 훨씬 낫겠지. 안 그러냐, 일로이? 그리고 다시 상기하는 거지. 네 마음속의 모순을. 언젠가 올 선택의 순간에서, 너는 정말 네 소신대로 걸어갈 수 있을지를."

뽑아 든 칼끝의 아르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흔들리는 성검의 검끝을 바라보다가, 검을 내렸다. 안다. 지금 이곳에서 안개가 내게 보여주는 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내가 이곳에서 버텨서, 안개의 마력을 소모하게 하고, 다음으로,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안개가 내게 해주는 말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다.

"출하아아아앙-!!!"

바람은 강하지 않았다. 바다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나는 갑판으로 나와 천천히 함수로 걸어갔다. 낮게 넘실거리는 너울에 갑판의 판자들이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부에 와닿는 크라켄의 존재감을 느끼며 이를 꾹 깨물었다.

"게오르그는 뱃멀미 때문에 저기 있어요."

내 옆으로 다프네와 마리안느가 다가왔다. 다프네는 우현 측의 난간을 가리키며 쿡쿡 웃었다. 게오르그는 빨아서 널어놓은 옷감처럼 축 처진 채로 난간에 걸려있었다.

"제일 뱃멀미 안 할 거 같은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까 웃기지 않아요? 나중에 어떻게 싸우려고 저러고 있는 건지."

나는 최대한 대꾸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들로 바라보는 것조차 너무 현실의 그들과 닮아있어, 불안감이 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아까부터 표정이 영 좋지 않아서."

"그다지."

나는 그리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말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검자루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성검이 무어라 말이라도 걸어줬더라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건데. 느껴지는 건 1단계가 개방되었다는 단서뿐, 그밖의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건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너희는, 진짜가 아니다.

"모순."

나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그 말을 읊조려보았다. 사람을 지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그 신념을 위해 날 희생할 수는 있지만, 이 녀석들은.

"다가옵니다."

마리안느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뱃머리에 섰다. 빙하가 깎아낸 거친 지형 사이사이로 작은 집만한 섬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올라탄 배는 속력을 서서히 늦췄고, 나는 훌쩍 가까워진 재앙의 기척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아무래도 마물을 먼저 보내고 들어오려는 모양이군.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야."

멀쩡한 척하는 게오르그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눈이나 좀 게슴츠레하게 안 뜨고 말했으면 좋을 텐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게오르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런 광경은 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나는 그리 중얼거렸다.

마물.

말 그대로 바다를 메워버릴 정도의 수가 쏟아지듯 밀려오고 있었다. 배를 멈추라며 패닉에 빠져 소리지르는 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는 즉시 마력을 끌어올리며 대응할 준비를 마쳤다. 배는 급하게 정지했고, 포를 쏘는 포수들이 기울어지는 배에서 낑낑거리며 포탄을 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포 장전!!"

포술장의 외침에 포수들이 대포알을 집어넣었다. 우리 배의 뒤에 따라 정지한 배 역시 포를 장전하기 시작했다.

"겨냥할 필요 없다! 그냥 장전하는 대로 쏴버려! 내 신호를 기다리지 마라! 몰려오는 마물을 저지한다는 생각으로 쏴!! 나머지는 마법사들이 해줄 거다!"

키이이잉.

마력이 피어올랐다. 다프네의 몸에서 마력의 기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아는 6서클의 마법사. 다프네의 마력 그대로였다.

"대규모 마법을 사용할 거예요! 모두 충격에 대비하세요!"

6서클부터는 마법의 규모 자체가 달라진다더니, 지금 다프네가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마력의 가동만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 완성되어가는 마법은 몰려오는 마물의 대군을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 누구를 향해 그 더러운 입을 벌리고 오는 건지-"

냉기가 느껴졌다. 다음으로 구현될 마법은,

"깨닫게 해주지."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백 자루의 얼음 창. 고작 6서클에서 머무르지 않을 대마법사의 마력은 대규모 마법의 위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콰과과과광-!!!

쏟아지는 창이 내는 굉음은 대포알이 쏘아지는 소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마물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파도가 피거품이 되어 새빨갛게 물들었다.

"…역시 대단하군."

게오르그가 작게 감탄했다. 다프네에 이어, 4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긁어모아 놓은 포격 부대가 마력 포격을 시작했다. 함대고 뭐가 다 먹어 치워버릴 기세로 밀려오는 마물들이 전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륙이 났다.

"…할 수 있어."

"이 정도면 되겠는데?"

갑판 위, 사람들의 표정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항상, 재앙은 사람들이 가장 안심한 순간에 나타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나는 기감을 넓혔다. 마력의 발산과 순환에 기감이 흐트러졌다.

"-온다!!"

내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걸까. 나는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배에서 휘청거리는 파티원들을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게오르그에게 팔을 붙들렸고, 마리안느는 한 손으로 창을 붙들고 당황한 표정으로 휘청거렸다.

천천히 재생해놓은 영상처럼, 군함이 파괴되는 과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용골이 반으로 쪼개지고, 우지끈, 하며 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배가 반으로 부서진다. 단단한 목재로 만든 갑판은 종잇장처럼 반으로 찢어졌다.

"-큭!"

나는 마리안느에게로 신형을 날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기울어진 갑판을 발판 삼아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크라켄의 촉수는 솟아올랐다. 나는 성검의 1단계를 개방하며 솟아오르는 촉수를 향해 검을 그었다.

서걱-!

촉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쉽게 잘려 나갔다. 나는 마리안느가 평정을 되찾고 내 옆으로 붙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응축시켰던 마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네놈을 쓰러트리고 생각하겠다.

나는 섬 하나를 무너뜨리며 솟아나는 크라켄의 몸통을 바라보았다.

"따라올 수 있겠어?"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크라켄의 몸뚱아리 위에서 난도질을 시작하며 냅다 달려 나갔다. 촉수가 잘린다. 크라켄이 포효하며 나를 떨쳐내려 하면, 어느새 준비된 마법이 또 날아와 크라켄을 타격했다.

베어라.

베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안개를 쓰러트린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그를 무시하며 크라켄을 쓰러트리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촉수가 날아들면 검으로 잘라냈다. 마물이 뛰어 달려들면 떨쳐냈다. 귓가에 그 빌어먹을 안개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저 눈을 감고 검을 휘둘렀다.

베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용사님…."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눈을 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크라켄은, 아직 살아있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세 번째 재앙은 이미 거대한 섬이 되어 해로를 가로막은 채 죽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괴물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언제, 어떻게 이걸 쓰러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고작 성검의 일 단계만을 개방하고 이길 수 있었다니.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를 싣고 있던 함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멀쩡하게 남아있는 배가 없었다. 나는 작게 헛웃음을 지으며 크라켄의 사체에서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용사님."

그리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덜 떨리는 고개를 내려 마주한 건, 오른쪽 다리가 잘린 채 창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마리안느였다.

뭘 지킨다고? 뭐, 일단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 몇 명은 무사했군.

비웃는 듯한 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나는 휘청거리며 마리안느를 향해 다가갔다. 다리만 잘린 게 아니었다. 마리안느의 왼쪽 허리는 무언가가 뜯어 먹어버린 듯 끔찍한 모양으로 도려내져 있었다.

"용사님."

나는 마리안느를 부축해 들었다. 이미 금빛 눈동자에 서린 생명력은 꺼져가고 있었다.

가짜라며?

그래. 가짜다. 이건. 진짜 마리안느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벌벌 떨고 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제 크라켄을 쓰러트렸으니,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올 거다. 안개가 보여줄 다음 환상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거다.

원하는대로 해주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 손안에 들린 마리안느가 사라진다. 시체가 되어버린 크라켄도, 부서진 군함의 잔해도 사라졌다.

아직도 이걸 네가 통과해야 할 시련이라고 착각하고 있네, 용사.

재앙은 절망을 바란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 내가 절망 속에 갇혀 모든 걸 놓아버리기 전에는 말이다.

이래도, 너는 재앙을 무찌르고 사람을 구한다는 헛소리를 계속할지 궁금하군.

안개의 잔혹한 말이 떨어졌다.

"여, 일로이. 늦었군."

나는 다시 회의장의 천막 안에 서 있었다.

"일로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님, 오셨습니까."

그리고 다시 내게 말을 걸어오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Chapter 92 - 92. 당신이 있는 곳 (1)

사람을 죽이는 삶.

마리안느의 삶에서는 항상 피비린내가 났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창끝이 누군가의 폐부를 찌를 때마다 끊어지는 생명의 흔적을 느꼈다. 안드레 주교는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기에, 마리안느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주교의, 청교회의 명을 따르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으니까.

"부르셨습니까, 주교님."

풀벌레 우는 소리가 시끄러운 여름의 밤, 마리안느는 호출을 받고서 안드레 주교의 뒤편에 섰다. 주교는 교회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근 몇 년간은 이단심문관들이 대거 나서야 할 정도의 대규모 이단이 발생하지 않았다. 간만에 대규모 이단이라도 발견한 걸까.

"저기 잠깐 앉아봐라."

주교는 건너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마리안느가 얌전히 의자에 앉자, 주교는 담배를 끄고 재떨이에 집어넣으며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게 새로운 임무를 하달할까, 생각하는 중이다."

"예, 무엇이든 받겠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무슨 임무인지 궁금하지는 않나?"

"그저 임무를 내리면 시행할 뿐입니다. 의문은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더냐. 주교는 작게 웃음을 내뱉고는 등을 의자에 푹 기대었다. 마리안느의 태도가 기껍다기보다는 덧없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웃음에 가까웠다.

"이번 임무는 이단 사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다. 당연히, 장기 임무가 될 테고,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임무다. 네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어."

마리안느는 목석처럼 주교의 말을 들었다. 하긴, 언제는 이단심문관의 임무가 안전한 적이 있었나. 안드레 주교가 중얼거리며 무릎을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 파티에 너를 보낼 생각이다. 아이시스가…, 성녀가 모종의 사정으로 용사 파티에서 탈퇴하게 되었거든. 그 빈자리를 일단 너를 보내 메우려 한다."

마리안느는 아주 희미하게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물어보고 싶은 점은 없나?"

"없습니다."

그저, 말하면 말하는 대로 따르고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마리안느에게는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안드레 주교는 뒷짐을 지고는 교회의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게 새로이 빌려줄 무기가 있다."

주교는 교회의 구석 탁자 위에 놓여있던, 천에 감싸인 창을 들어 마리안느에게 건네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무기. 마리안느의 표정에 처음으로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마리안느의 반응을 보며 안드레 주교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성창이다. 한동안 쓸 적임자가 없어서 누구에게 줘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계속 창고에서 썩히는 것도 아까우니 이번 기회에 네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마리안느는 성창에 감긴 천을 풀며 대답했다. 천이 풀리면서 성창의 성스러운 마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무감정한 눈으로 성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영감님에게는 적당히 일러뒀다. 나중에 알게 되면 또 노발대발 할테니, 나는 당분간 카이로스 왕국에서 몸이나 사리고 있어야겠군."

그 영감님이라 하면, 안드레 주교가 교황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안드레 주교는 성창을 든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용사 파티에 있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할 거다. 네가 여태 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싸움을 하게 될 테니까. 조만간 용사님과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다."

다른 싸움. 마리안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주교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바라보며,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일로이가 안개 안으로 들어간 지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방이 아닌 일로이의 방에 들어앉았다. 싸늘하게 식은 침대의 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마리안느는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식사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왔다 어둠이 찾아왔다 하기를 반복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발치에 놓인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은 계속 비슷한 곳을 맴돌며 진자 운동을 계속하다가, 며칠째 같은 곳을 가리키며 멈춰있었다. 그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 모습이, 마리안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째깍.

이렇게, 한 시간에 한 번 바늘이 조금씩 움찔거릴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일로이는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마리안느는 나침반 위로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성국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침체되어있었다. 모두가 용사의 소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상황. 교황청의 뒤편, 안개가 있는 곳에는 이제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잊고 있는 편이 훨씬 편한 것이겠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이 열리고 마리안느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게오르그가 한 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서 문가에 있었다.

"너도 그런 꼴로 앉아있었나."

게오르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방 안에 들어와 책상 위로 접시를 놓아두었다. 마리안느는 김이 피어오르는 접시를 흘긋 보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나침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는 며칠 내내 그 창고에서 가져온 마도서를 읽고 있더라. 눈이 완전히 새빨개진 채로 말이야. 저러다가 나중에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더니 너도 비슷한 모습이었군."

달칵. 수저가 책상 위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걸 일로이도 바라지는 않을 거다."

게오르그는 물잔을 접시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기를 바라겠지. 우리가 언제나 그를 믿어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가 퀘노어 대공을 구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갔을 때를 생각하면 돼."

게오르그는 자조하면서 말했다.

"…그때는 일로이가 우리에게 뒤를 맡겼지만 말이야."

게오르그는 품속에서 일로이의 편지를 꺼내 흔들었다.

"내 최선은 지금 일로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게 일로이가 내게 보여준 성의에 보답하는 일이고, 세상을 구하려는 용사를 도울 유일한 방법이잖아."

게오르그는 일로이의 의자를 툭툭 두드리고는 다시 문가로 걸어갔다.

"…밥은 먹으면서 기다려라. 자기가 부재한 동안 너나 다프네가 쫄쫄 굶고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일로이도 영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게오르그의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마리안느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

"…마리안느 언니도, 우리 성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마리안느는 처음으로 다른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카린이 부끄러운 듯한 홍조와 함께 용사 파티의 파티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넬 때였다.

사람을 죽이지 않은 싸움이었다. 마리안느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묻어있는 건 사람의 피가 아니었다. 들려오는 건 증오와 멸시에 찬 신음이 아니었다.

"그래, 우리가 함께 지켜낸 거야."

마리안느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일로이가 있었다. 그런 미소는 마리안느가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떨떠름하거나, 어색한 쓴웃음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감정이 배제된 가장 순수한 기쁨에서 오는 뿌듯한 미소.

"그렇습니까."

마리안느의 입에서 나온 '그렇습니까'라는 대답도, 평소와는 다른 울림을 담고 있었다. 이 감각을 마리안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이 뿌듯해하는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크게 다가온 건지, 마리안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곳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지 않다면….

'다녀올게.'

그때,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의 눈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빛과 온기를 보여주면서, 자신은 그 빛과 함께 사라져버릴 장작처럼.

"왜 그래?"

마리안느는 일로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몸조심하십시오."

일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휠체어 신세의 몸을 내려다보며 큭큭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

.

또 다른 풍경이 마리안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리안느의 실력을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녀는 아주 강한 이단심문관 중 한 명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큰 전력이며, 이단들을 검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다시 사람을 죽이는 삶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마리안느는 그 말에 따라야 했다. 자신의 목숨은 새로 얻은 것. 청교회가 구해준 것이기에, 그들의 것으로 살아가야 했으니까.

일로이는 달랐다.

누군가를 구해주고는, 그냥 떠나버린다. 그 목숨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값을 계산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답을 들려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가 누군가를 구할 때 담보로 내거는 건, 항상 자기 자신이었다. 마리안느는 그 숨겨진 위태로움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 희생이, 마리안느는 싫었다. 마리안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싫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잡으며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명령을 부정했다.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그를 찾아서, 어떻게든 붙잡고 말할 거다. 가지 말라고. 스스로 희생할 거라면 적어도 함께 하자고.

"…읏."

마리안느는 벽에 기대놓은 성창을 집었다. 몸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기운을 되찾았다. 나침반을 품에 넣고, 마리안느는 건물을 나섰다. 완전한 암흑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높이 솟은 교황청의 건물을 향해 마리안느는 걸었다. 안개의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마리안느는 걸어갔다.

"당신이 왜 거기 있는 거죠."

그리고, 교황청의 뒤편. 마리안느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혹여 어떤 바보가 일로이의 당부를 어기고 안개로 들어가려 시도할까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당신의 기척이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잘 느껴지더라고요."

다프네는 교황청의 성기사들과 함께 마리안느를 가로막으며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혼자 방에 앉아 계속 울고 있던 것의 여파인 것 같았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얼굴은 마리안느와 똑같이 잘 먹고 자지 못해 초췌했다.

"바보가 여기 하나 있었군요. 돌아가세요, 마리안느. 아직 일로이가 약속한 기한이 되지도 않았어요. 지금 저기 들어가면 오히려 방해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마리안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용사님이 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전 일로이를 믿고 있어요."

마리안느가 성창을 내리며 쥐었다.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지금의 용사님에게는."

"저라고,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다프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그녀의 보랏빛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가 가서 그에게 괜한 방해가 될까 봐. 일로이에게 도움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폐만 끼칠까 봐. 그게 두려운 거죠."

다프네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각오를 다잡은 눈으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들여보낼 수는 없어요, 마리안느. 나를 겁쟁이라 매도해도 돼요. 하지만 일로이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어요. 나도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그를 도와줄 수 있을 방법을."

마리안느는 성창을 두 손으로 강하게 붙들었다. 금빛 마력이, 마리안느의 몸을 타고 흐르며 발치에서 회오리쳤다.

"…말을 듣지 않네요, 당신은."

눈물에 젖은 다프네의 눈동자가 마력의 빛에 반사되어 더 반짝였다. 마리안느는 훨씬 강대해진 그 압박을 느끼며 창을 겨누었다.

"…저는 용사님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안느는, 처음으로 만든 다짐을 위태롭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다프네는 그런 마리안느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Chapter 93 - 93. 당신이 있는 곳 (2)

"…저는 용사님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프네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두 사람의 힘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마리안느는 성법기 너머로 짓눌러 오는 순수한 마력의 창을 느꼈다. 다프네의 마력 운용과 규모는 고작 며칠 사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 마리안느를 어렵지 않게 압도할 정도로 말이다.

"그건 나도…!"

뿌드득. 균형의 추가 기울어지는 소리가 났다. 얼음 위로 생기는 금처럼, 균열이 파고들어 마리안느의 성법기를 짓눌렀다. 다프네는 한층 더 무거운 마나를 쏟아내며 마리안느를 밀어내려 했다. 힘이 모이고 모이자, 폭발하려는 것처럼 밝게 빛나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예요!!"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마력이 폭발했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붙든 채, 태풍 앞의 짚 더미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다. 다프네는 허공에 붕 뜬 마리안느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마력의 사슬이 다프네의 발치에서부터 뻗어 나와 마리안느를 포획하려는 듯 똬리를 틀며 쏘아졌다.

"저도 일로이가 잘하고 있을지 불안해요.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마리안느는 공중에서도 마력의 발판을 만들어 날아드는 사슬을 유려하게 피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다프네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손을 아래로 밀어 내렸다. 마력 사슬이 마리안느의 머리 위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그보다 그를 더 믿으니까. 나 때문에 그가 잘못되는 게 싫으니까!"

마리안느는 성창을 휘두르며 오는 사슬을 막아냈다. 수십 갈래로 나뉘어 날아드는 사슬을 쳐내는 건 수십 명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비슷했지만, 마리안느에게는 이미 이골이 난 일이었다. 쳐내고, 흘리고, 피한다. 다프네의 사슬은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마리안느를 사방에서 엄습해오고 있었다.

"그러니 거기서 멈춰요, 마리안느. 난 당신을 보내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마리안느는 자신을 둘러싼 막대한 마력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다프네는 살상용 마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6서클 마법사의 전력은 살상용 마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뚫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내게 뒤를 맡길 수는 있어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 뒤라도 내가 지켜줄 거예요."

다프네의 의지는 굳건했다. 마리안느는 평소의 유하던 그녀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강직한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지. 마리안느가 평생 가져본 적이 없는 것. 마리안느에게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그건 다프네가 내비치는 것과 비교해서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빛나는 태양 아래에 있는 작은 불씨와 같다고 할까. 마리안느가 성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지 않을 거다.

마리안느는 창을 다시 겨누었다. 의지 없이 끝까지 싸우는 건 익숙했으니까.

"정말, 당신도 끝까지 고집스럽네요."

그렇게 말하는 다프네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고집스럽다는 말. 억척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사람. 그게 일로이와 어쩐지 조금은 닮아있는 것 같아서.

"…이러면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도 되겠죠."

다프네는 애써 떠오르는 생각을 무시하며 마리안느에게 사슬을 날렸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감싸는 성법기를 위로 쳐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슬이 끊긴다. 다프네는 다가오는 마리안느를 저지하기 위해 다른 마법을 쏟아붓기 시작했지만, 마리안느가 대처하는 방법만 더 능숙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살상 계열 마법을 사용하시지 않겠다면, 절 막는 건 힘들 겁니다."

다프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리안느는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프네가 사용하는 마법의 위력 또한 점점 강해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마리안느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게 두 사람 사이의 균형의 추를 다시 돌려놓았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상처투성이로 제압할 수야 있겠지만, 전 당신을 상처입힐 생각은 없어요. 물러나요, 마리안느. 그렇게 하기 싫으니까."

그 차이가, 이 대결의 승패를 바꿔놓았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앞으로 뻗었다. 다프네의 마법이 흩어진다. 불과 얼음의 벽이 마리안느를 가로막았다. 불은 뚫었고, 얼음은 부쉈다. 마리안느의 옷자락이 마력의 불꽃에 그슬려 타버렸다.

"그러니 제발… 물러나."

파지직.

얼마 남지 않았다. 다프네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비살상 계열 마법을 쏟아부었지만, 마리안느는 개의치 않고 계속 전진했다. 날카로운 고드름에 팔이 긁히는 것도, 타오르는 불에 조금씩 화상을 입고 머리끝이 타는 것도.

다프네의 눈은 마리안느를 담고 있었지만, 마리안느는 다프네를 눈에 담고 있지 않았다. 째깍. 마리안느의 품속의 나침반이 다시 조금 움직였다.

마리안느는 창을 휘저었다. 다프네는 그녀의 마법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마력의 응집력은 다프네 자신이 정해둔 선에서 넘나들고 있었다. 다프네의 말 한마디면 이 마력이 불벼락이 되든, 얼음 창이 되든, 돌기둥이 되든 마리안느를 덮쳐 날려버릴 거다. 그리고 일로이가 방해받는 일도 없겠지.

그 주문 한 마디면.

콰과과광-!!

마력이 깨졌다. 발동 직전의 취소로 인한 마력 폭발과 굉음이었다. 다프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 앞에 선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다친 곳이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꼴이 엉망이었다. 다프네는 저 막무가내인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들어가면, 일로이를 찾아올 방법은 있는 건가요?"

마리안느는 말없이 품속에 넣어두었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지금도 나침반의 바늘은 안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로이가 홀로 안개 안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때부터, 쭉.

"…치사하네요."

다프네는 그리 중얼거리며 벌렁, 땅바닥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겨울. 새해를 고작 사흘 남겨둔 밤은 추웠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한기를 밀어 올렸다. 솨아아, 하고 바람이 땅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다른 물건이나 볼걸. 괜히 마도서에 눈이 뒤집혀서."

다프네는 자조하듯 웃었다. 쭉 뻗은 손에서 마력의 불길이 작게 솟아오르다 꺼졌다.

"나는 거기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지금도 바깥에서 안개 내부의 마력에 간섭할 수 있을 방법을 간절히 찾고 있으니까요. 서클이 한두 개 정도는 더 필요하겠지만, 뭐 그 정도도 할 수 없을까요? 홀몸으로 재앙을 상대하러 들어가는 무식한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다프네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마리안느는 가만히 그녀의 보랏빛 눈을 마주하며 다프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일로이만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마리안느, 당신도 우리 동료, 전우고, 파티원이잖아요. 일로이라면 정말 홀로 재앙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마리안느, 당신은 아니에요."

마리안느의 금빛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리안느는 희미한 목소리로 다프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설령 안개 속에서, 마력을 흡수당해 죽는다고 해도 겨우 저 한 명 더해지는 것뿐이고,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겁니다."

마리안느가 보유한 마력의 양 자체는 아주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의 힘은 순전히 몸과 창을 다루는 실력, 그리고 성법기로 전환한 마력의 질 때문이었다.

"일로이가 그랬잖아요, 실낱같아도 구할 가능성이 있는데, 왜 포기하냐고."

마리안느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발을 떼었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잘못된다면, 일로이가 어떻게 될지는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그때는 다프네, 당신에게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며 멀어졌다. 다프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멀어지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다프네는 남은 마력을 끌어올려 마리안느에게 전달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일로이에게 써준 마법이자, 가장 자신있어하는 마법, 방호마법이었다.

"이왕 들어간 거, 무사히 일로이를 데리고 돌아와줘요."

제 몸에 걸린 방호마법에 신기한 듯 눈을 깜박이는 마리안느에게, 다프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법이 적어도 이틀, 삼 일은 유지되도록, 가진 마나를 모조리 때려박는 건 덤이었다. 다프네는 그리고서 완전히 힘이 빠진 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 무사하게 나오면, 그때부터 잔소리 시작할 거라는 것도 알아두고."

"…알겠습니다."

마리안느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다가, 안개를 바라보았다. 대놓고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듯한 동굴과는 달리, 안개는 들어오든 말든 관심이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꿈틀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왼손에 쥐고 있던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나침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리안느의 정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

다시 나침반의 바늘이 움찔거렸을 때, 마리안느가 발걸음을 떼었다. 무관심한 척하던 안개는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나자 본색을 드러내었다. 마리안느의 손이 안개에 닿자, 안개는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마리안느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법으로 타고 남은 옷자락의 재가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

"제일 뱃멀미 안 할 거 같은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까 웃기지 않아요? 나중에 어떻게 싸우려고 저러고 있는 건지."

나는 다프네의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이번이 몇 번째지, 저 말을 듣는 게? 환상 속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매번 달라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먼저 걸어오는 말은 항상 같았다. 나를 반복 속에 가둬두고 있음을 강조하는 거다. 그렇다고 저들이 게임 속의 NPC처럼 느껴지지는 않도록, 나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다르게 하도록 한 거고.

"아침을 얼마나 먹었길래 계속 저러고 있는 거래."

"제가 적게 먹어두는 게 좋을 거 같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계속 저러네요."

내 무심한 대답에, 다프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바닷바람은 이번에도 많이 불지 않았다.

익숙해졌다. 이젠 육지에 서있어도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깥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옆으로 걸어오는 마리안느도 바라보았다. 이 빌어먹을 재앙은, 마리안느가 죽는 모습을 참 다양하게도 보여주었다. 다리가 잘리든, 목이 잘리든, 가슴이 뚫리든, 깔아뭉개져 죽든 말이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군요."

마리안느가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죽는 모습을 보아야 할까. 언제까지 이 반복을 계속해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안개는 언제까지 내게 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내가 다 포기하고 크라켄에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아니면,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환상 속에서, 내 동료들, 그리고 함께 싸울 사람들의 죽음에 무감각해질 때까지?

성검을 거머쥔 내 손이 벌벌 떨렸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남의 죽음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면? 나를 부정하고, 내가 내세운 결심을 부정하고, 주변인의 희생을 내세워 다수를 지키는 기계가 되어버릴 때까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철썩거리는 바다. 그 끝에 바크틴스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아르옌처럼 구원을 부정하고, 해안에 크라켄을 상륙시켜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짓거리도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을 거다. 언젠가는 안개도 내게 이 환상을 보여줄 만큼의 마력을 잃을 거다. 이 정도 규모의 환상이라면, 아마 엄청난 양의 마력을 계속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믿어야만, 내가 꺾이지 않고 계속 이 속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해로의 끝을 바라보았다. 파도는 다시 넘실거리고, 마물들이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울은 마물의 떼와 섞여 밀려온다. 나는 그 새카만 파도를 바라보며 포술장과 함장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포 장전!!"

뱃머리가 돌아갔다. 쏠리는 감각에 다프네와 게오르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검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지 않도록, 나는 단단히 오른팔을 주물렀다.

그리고 다시, 처절한 환상 속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Chapter 94 - 94. 당신이 있는 곳 (3)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성국 겨울의 추위와는 결이 다른 칼바람이 마리안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긴,

"내가 평소에 이걸 머리에 쓰는 걸 봐서 알겠지만, 아마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방이었다. 일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말. 마리안느는 또 익숙한 손이 목함을 열고 닫는 모습을 확인했다. 가시 면류관이 오랜만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면류관을 잡는 일로이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눈은 확신과 불확신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일로이는 그때,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될 거야. 그럼 그 즉시 어떻게든 나를 깨워서 리스에게로 데려다줘."

마리안느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일로이가 머리 위로 면류관을 썼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리더니, 일로이는 무릎을 꿇고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앞으로 고꾸라질 만도 한데, 기둥에 몸이라도 묶어놓은 것처럼 일로이는 뻣뻣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내가 왜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지?

마리안느는 멍하니 일로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로이는 거인을 격파하고 퀘노어 대공을 구해올 작정으로 면류관의 시련에 도전했고, 마리안느는 마음을 졸여가며 옆에서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작게 중얼거리며 다가갔다. 아픈 기억이었다. 어째서 그를 아프게 기억하는지. 마리안느는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일로이는 시련에 들어가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가까이 다가가며 일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자는 듯 감긴 눈. 그 너머로 길게 뻗은 속눈썹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깨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야."

일로이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마저 흘리기 시작했고, 축 늘어진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 손을 붙들었다. 일로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켰을까. 마리안느가 손을 붙잡자, 일로이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진 것 같았다.

"…아니야."

마리안느는 망설이듯 일로이의 손을 문질렀다. 마리안느는 그때 자신의 심정을 떠올렸다. 일로이가 면류관의 시험을 통과하고 눈을 뜬다면, 분명 일로이는 다시 성검을 집어 들고 싸움에 나설 거다. 마리안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목숨을 걸고서 말이다.

불안했다. 그저 그를 보내고서 지켜봐야만 하는 마음이 불안했다. 사실은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적어도 홀로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또 하지만. 마리안느의 생각은 반박과 반박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

그리고, 일로이의 머리 위에 올려진 면류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하면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늙고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의 조각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면류관이 모두 부서졌다. 마리안느는 면류관을 대신해 머리 위로 떠오르는 빛나는 고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일로이가 깨어날 거다.

"성공한 건가."

일로이는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마리안느의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불안감. 자신의 마음은 그것을 불안감이라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붙잡아라. 마리안느의 본능은 그리 말했다.

"다녀올게."

마리안느는 떠나가는 일로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로이가 퀘노어 대공을 구하기 위해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간다면 자신은 성벽을 마물로부터 막아내기 위해 싸우러 가야겠지.

째깍.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분주한 발소리가 뒤이어 들려왔고, 마리안느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마주했다.

"방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다시 마물들이 밀려오고 있어요."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성창이 쥐여 있었다.

"마물이, 몰려오고 있다고요."

마리안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채근하는 기사들의 눈이 보였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주무르다가, 내려놓았다. 기사들의 표정의 의문에 감싸였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들어왔는지, 마리안느는 아주 천천히 기억하려 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리가 뿌옇다.

"시간이 없습니다, 마리안느님. 게오르그 단장님과 다프네님도 지금 서둘러 성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반쯤 끌려가듯 기사들을 따라 성벽 위로 올라갔다. 마리안느의 기억을 스치는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병사들은 악을 쓰며 마물을 성벽 밖으로 밀어냈고, 기사들은 검을 휘두른다. 마리안느는 거의 습관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창을 휘둘러 날아드는 마물을 죽였다.

"마리안느!"

자신을 반기는 게오르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도 고개를 흘긋 돌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리안느는 성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한계선이 만들어놓은 뿌연 하늘이 지척에 있었다. 저 속에서, 일로이가 싸우고 있을 거다.

"저쪽 성벽이 부실해. 잘못하다가는 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방어벽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네가 가서 지원을 해줘야 할 거 같아."

일로이가 없을 때는 든든한 사령관 역할을 맡아주는 게오르그가 그리 말했다.

"부탁한다. 일로이가 맡기고 간 일이야. 한 사람이라도 덜 죽게 하는 게 우리 임무라고."

마리안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오르그는 그리고서 방패로 달려드는 마물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마물을 죽였다. 마리안느는 피를 쏟아내는 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소음이 점차 멀어져갔다. 마리안느의 기억을 감싼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눈앞으로 달려드는 흰늑대의 목을 쳤다. 그와 동시에 마리안느의 품속에서 둥그런 물건이 하나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침반.

마리안느는 멍하니 성벽으로 떨어진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지금도 어딘가를 가리키며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집어 들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마리안느는 그곳을 바라보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안느! 어디 가는 거야!"

등 뒤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들어 올렸다. 비명을 지르는 다프네가 달려드는 흰늑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게오르그가 잿빛곰 하나를 쓰러트리지 못해 몸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원망이 담긴 눈길, 도움을 요청하는 손.

아니. 마리안느의 동료들은 저렇게 당하지 않는다. 위급한 상황이 왔을 때 결코 그녀를 찾지도 않을 거고, 애초에 위급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을 거다. 마리안느는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은 세상을 돌아보았다. 허공에 흩날리는 핏방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안개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그녀가 잡아야 할 손은 저게 아니다.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서 구해줘야 할 사람은 한계선 너머에 있지도 않다.

이곳은,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자신이 구해야 하는 건 저런 허상 속의 존재들이 아닌, 저 허상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심장이 맥동하며 마력을 피워 올렸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다리를 감싸는 성법기의 힘을 느끼며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성벽이 무너진다. 겨울의 추위는 사그라들고 마물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마리안느는 어느새 에버노드의 단단하게 굳은 땅이 아닌, 건물의 바닥과도 같은 땅을 밟고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안개는 그녀를 이제 가로막지 못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째깍.

나침반이 움찔거렸다. 마리안느는 나침반만을 바라보며 달렸다. 지금, 일로이는 대체 무엇을 보면서 싸우고 있는 걸까?

==

"용사님…."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마리안느의 몸을 붙잡고 나는 미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바깥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미친 하루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절대 내가 내 선택을 번복하는 일이 없도록,

"마리안느."

나는 마리안느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환영은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 두 눈을 슬며시 감겨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살이 난 해로, 침몰한 배. 내가 여기서 눈을 감았다 뜨기만 하면, 난 다시 그 빌어먹을 천막 앞에 서 있을 거다.

"이제 깨달았나?"

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안개의 환상이 나를 보며 희미한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르옌의 얼굴.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얼마나 허황한 일인지, 너는 알겠지.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도,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면 네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흔들리는 건, 내 생각 때문이지 저 녀석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바크틴스의 주민들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면, 다음 환영은 무엇을 보여줄 생각이냐, 안개? 고통받는 바크틴스의 모습? 나를 질책하며 종말 숭배자로 변해버린 주민들?"

나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무너지지 않아. 대상을 잘못 골랐어. 네가 소지한 마력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상대해줄 의향도 있으니까. 얼마든지 계속해보라고."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죽음에 마모되어 감정이 닳아 없어지든, 안개의 마력이 고갈되든.

"뭐? 내가 소지한 마력?"

아르옌… 아니, 안개는 눈이 동그래진 채 되묻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겠다는 듯, 배를 부여잡는 시늉을 하며 허리를 꺾는다.

"용사 너, 지금 진짜 정신이 나갔군. 이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하나 건질 수도 있겠어. 내 예상 밖으로 잘 되고 있잖아."

"…그건 대체 무슨 말…."

그때, 아르옌의 얼굴이 다른 이의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였다.

추레한 행색을 하고, 옷은 너덜너덜해진 채로, 며칠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한 일로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너머로 아르옌의 모습이 나타났다.

"너, 네 몸 상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있었군. 정말로 내 세상을 실제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나는 손을 들어보았다. 들리는 팔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지금 보여주는 풍경, 정말 내 마력으로 보여주는 것 같나?"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혈액과 함께 맥동해야 할 거대한 마나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반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넌 이미 졌어, 용사.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건, 결코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는 건 알아둬라."

나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안개는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낄낄거리는 웃음을 다시 한 번 토해냈다.

"널 소화시키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을 집어삼킬 일만 남았군."

아르엔의 형상은 조금씩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의 숙원을 방해한 대가는 제대로 치러야 하지 않겠나."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거울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거울이 부서지며 나타난 풍경은 다시 익숙한 천막이었다.

"일로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님, 오셨습니까."

나는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다시 불어넣었다.

==

달렸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달렸다. 마치 같은 곳을 계속 맴돌기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침반은 언제부턴가 갑자기 휙, 제자리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일로이의 근처에 다다른 건 확실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저, 절박한 생각뿐이었다. 용사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마리안느는 간절하게 성창을 쥐었다. 여태 한 번도 답을 들려준 적이 없는 무기였다. 마리안느 역시 성창의 힘을 필요로 해본 적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안개를 걷어내고 용사가 있는 곳에 닿아야 했다.

마리안느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땅 위로 성창을 꽂았다. 이 성유물을 깨울 방법은 자신도 모른다. 일로이가 그랬듯, 자신도 무작정 들이받는 수밖에 없었다.

"…부탁합니다."

마리안느는 성창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는 자신의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박기 시작했다. 금빛의 아지랑이가 마리안느의 손 끝에 맺히며 성창으로 전달되었다. 성창은 성법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손에 쥔 자가 무슨 일을 하려는 지 알고 있기라도 하듯.

"크윽…!"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마력에, 마리안느는 아찔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춤거리기는커녕 창대를 더 강하게 부여잡고, 쏟아붓는 마력을 늘려갔다. 온몸이 탈력해 쓰러질 때까지, 그래도 부족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태워서라도-

그만하면 됐다.

마리안느는 반쯤 탈력한 상태가 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으로 마력이 조금씩 다시 흘러들어왔다.

투정 부린다고 들어주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그 정성이 갸륵하니.

그리고 그 정체 모를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성창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리안느는 솟구치는 거대한 힘을 감당하려 이를 악물었다.

쩌저적.

마치 알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는 서서히 갈라지는 공간, 그리고 그 너머로 드러나는 풍경을 마주했다.

바다의 냄새가 났다.

바다의 냄새를 덮어버릴 정도의 악취와 비린내도.

"…이건, 대체,"

그리고, 그 비린내의 끝에 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마리안느가 구하려 온 사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채 거대한 마물과 맞서는 일로이. 마리안느는 저도 모르게 품속의 나침반을 꺼내 들었고,

나침반은 틀림없이 저게 자신이 찾는 일로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