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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일 후.

강혁은 자룡천겁기로 둘러싸인 자룡비경 밖으로 걸어나왔다.

3일 동안 영력의 샘에 있는 영초들 중 연기장생단 재료는 충분히 뽑아 놓았다.

이제 남은 재료들은 게이트에서 구해야 했다.

저물 주머니에는 영초들과 조화역천정을 비롯한 법기들, 연기강체부, 연기섭물부, 그리고 3일 사이 영력이 완충된 화탄구도 들어 있었다.

완충되려면 한참 시간이 더 필요한 연기봉인부는 영력의 샘 근처에 그냥 남겨놨다.

또한 영력의 샘 근처에서 반짝이고 있던 중급 영석들을 저물 주머니에 넣는 대신 루한에게서 얻은 하급 영석들을 대신 깔아놨다.

아무래도 저물 주머니의 용량에 한계가 있어서였다.

'잡템들을 가져가 팔려면 공간이 많이 필요해.'

각성자 좀비들이 남겨둔 각성장비들.

그중에서 부피가 적은 것들만 골라 저물 주머니에 넣었다.

밖에 나가서 활동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당장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이런 것들이라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리라.

허접한 것들이지만 그래도 다 팔면 대충 몇천 만원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물 주머니에 넣으니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편했다.

지하 절벽을 타고 가볍게 동굴 위로 올라온 강혁은 다시 비좁은 틈을 통해 동굴 밖으로 나가려 했다.

"루한을 죽인 것이 네놈이더냐?"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음성.

'······?'

강혁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분명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백영은 아니었다.

방금 전 들려온 소리는 무뚝뚝한 남성의 음성이었으니까.

예상대로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 흐릿한 형체 하나가 보였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형체를 중심으로 파동처럼 피어나고 있는 가공스러운 기운.

그 앞에서 강혁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저 기운은 설마?'

통령안이 알려주는 믿을 수 없는 정보.

'축기경!'

강혁의 표정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현대수선전 16화

축기경(築基境)은 연기12성에 이른 이들 중 극소수만 통과한다는 다음 단계의 경지.

그것도 축기1성도 아닌 무려 7성이었다.

통령안을 통해 흐릿한 형체를 가진 남자의 경지를 파악한 강혁은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연기8성의 루한과는 차원 자체가 다른 넘사벽의 존재.

설령 연기봉인부를 쓸 수 있다고 해도 축기경의 상대에게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을 터.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래도 강혁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남성은 더욱 싸늘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내가 묻는 것부터 대답하거라. 루한을 죽인 것이 네놈이더냐?"

"그렇습니다."

상대는 이미 알고 묻는 눈치였기에 강혁은 순순히 시인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 혼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연기6성의 백발 미소녀 백영이 놈을 끝장낸 것이지만.

이 상황에 굳이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어차피 지금 나타난 존재가 도깨비 루한의 동료 혹은 상위 도깨비의 하나라면 강혁이 루한의 죽음에 관여되었다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배후에 축기경의 도깨비도 있었나?'

그렇다면 이제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허망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수명을 늘릴 방법을 알았는데 그것을 실현해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는 건가?

차라리 그런 걸 모른 채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렇게 강혁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짓자 흐릿한 형체의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어찌 그리 자포자기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냐? 내가 네게 그 일을 묻는 건 사실 확인을 하려는 것일 뿐 너를 징벌코자하는 것이 아니니라."

"정말입니까?"

"물론이다. 수선계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죽는 것은 흔히 벌어지는 일. 다른 수선자가 딱히 관여할 바는 아니니라. 다만 너의 경지가 고작 연기2성에 불과하여 누군가의 도움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인데."

그는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유불문! 너는 현무패에 너의 영력을 불어넣었고, 그것은 네 스스로 현무문(玄武門)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릴 수 없는 일임을 잊지마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현무문이라니?

혹시 이것 때문인가?

강혁은 저물 주머니에 있는 현무5급 목패를 꺼내보였다.

"현무패라면 혹시 이걸 말하는 겁니까?"

"잘 알고 있구나."

남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가 손을 휘젓자 강혁의 손에 있던 목패가 빨려들 듯 그의 손으로 이동했다.

"이 현무5급패는 본 현무문의 수선자 중 연기5성부터 연기8성의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신패이지. 그러나 너는 고작 연기2성에 불과하니 현무6급패를 받아야 한다."

그 말과 함께 남자로부터 뭔가가 날아와 강혁의 손에 쥐어졌다.

[현무6급]이라 적힌 목패였다.

연기경 1성에서 연기경 4성까지의 현무문 수선자에게 주어지는 신분패.

"너의 경지가 연기5성에 이를 때까지 이 신패는 내가 보관하겠다. 그때까지는 지금 받은 신패가 너의 신분을 증명할 터. 그것에 영력을 주입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잃어버려서는 아니될 것이다."

순간 누군가 남자의 뒤쪽에서 외쳤다.

"어찌 그런 관대한 조치를 내리시는 겁니까? 저 녀석이 현무5급패를 강탈한 이상 그에 상당하는 실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죽여없애는 것이 본문의 율법이 아니옵니까?"

또 한 명의 흐릿한 형체.

축기7성 남자의 뒤에 누군가 또 있었던 것이다.

'연기12성?'

축기경은 아니지만 연기경에서는 가장 강한 경지인 12성.

그런데 놈의 형체는 선명하게 드러났다.

악귀같이 험악한 얼굴에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내고 아래로는 고대의 하갑을 장착한 괴물.

'도깨비!'

굳이 통령안이 아니어도 생김새만 봐도 루한과 같은 도깨비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루한보다 월등한 경지인 연기12성이라는 것.

또한 강혁을 노려보는 놈의 시퍼런 시선에는 원한이 가득했다.

'루한 그놈과 친한 사이였나 보군.'

놈의 살벌한 분위기를 보니 만약 이 자리에 축기경의 남자가 없었다면 강혁을 처참히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본문의 율법대로 하시옵소서. 놈이 비록 본문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 어찌 연기2성이 연기8성을 대체할 수 있겠사옵니까? 최소 현무5급 즉, 연기5성의 수선자임과 동시에 충성심을 증명 하지 않으면 처참히 찢어죽여야 마땅하옵니다."

그렇게 도깨비가 율법을 강조하자 축기경의 남자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혈월(血月)이 뜬 위중한 시기인 만큼 단 한 명의 수선자라도 아쉬운 상황이다. 하여 예외를 둔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여라."

"그럼 루한의 죽음을 이대로 넘기시겠다는 말이옵니까?"

도깨비는 그냥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축기경 남자가 탄식했다.

"네 일족의 죽음이 애통한 것은 이해하나 루한은 그간 적지않은 악업을 쌓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여 천겁을 피해 이 산에 숨어있었던 것도 그렇고. 이 일이 아니어도 조만간 내가 손을 보려 했었음을 모르느냐?"

"하오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그보다 더한 자들도 본문에 넘치도록 있지 않사옵니까? 설마 그들 모두를 손 보실 작정이옵니까?"

도깨비는 축기경 남자의 조치에 계속 항의하며 강혁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과 함께 수시로 강혁을 힐끔거리는 시선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꿈에 볼까 두려운 악귀의 눈빛.

"혹여 저 녀석이 장로님과 같은 인족 수선자라서 특별히 관용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시옵니까?"

그러자 축기경 남자가 진노한 표정을 지었다.

"흑운! 진정 네가 나의 뜻을 거스르려느냐?"

그러자 도깨비 흑운은 움찔 몸을 떨더니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방자함을 범하겠사옵니까? 장로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하오나 저 녀석의 실력이 미치지 못한다면 충성심의 증명을 위해 중급 영석 5개 정도는 바쳐야하는 것이 본문의 율법이옵니다."

그러자 축기경 남자가 고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록 율법에는 그리 되어 있긴 하다만 중급 영석 5개가 어디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더냐? 그 정도면 무려 하급 영석 300개가 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정도 정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저놈이 어떤 의중으로 루한을 죽였는지 정도는 심문해야 할 것이옵니다. 또한 저놈의 저물 주머니를 강탈해서라도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압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부디 그 일은 저에게 맡겨주옵소서."

"으음...!"

순간 장로라 불리는 축기경 남자는 다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무리 현무문의 장로라 해도 율법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는 일.

흑운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터라 어쩔 수 없이 그러라며 승낙하려는 찰나.

"이거면 현무문에 대한 저의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강혁이 뭔가를 손에 들고 외쳤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섞인 다섯 개의 보석. 모두 신비롭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 그것은?"

"아니! 그것들은 중급 영석이 아니냐?"

축기경 남자 장로뿐 아니라 도깨비 흑운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우연히 딱 다섯 개를 얻은 게 있는데 이걸로 저의 충성심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강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축기경 남자 장로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자세히 살피더니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중급 영석이 틀림없구나. 네 말대로 이것들이면 비록 너의 실력은 부족해도 본문에 대한 너의 충성심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강혁은 가슴을 쓸었다.

여차하면 저물 주머니를 강탈당할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이걸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 몰라 자룡비경에서 중급 영석들을 챙겨오길 잘했다.'

중급 영석은 아직 많았다.

5개를 방금 전 축기경 남자에게 건네고도 128개가 남아 있으니까.

중급 하나당 하급 60개라 했으니 중급 영석 128개면 하급 영석 7,680개와 교환이 가능하다는 뜻.

'중급 영석의 가치가 생각보다 높군.'

왠지 뿌듯했다.

돈이 많아서 나쁠 것 없듯 영석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때 축기경 남자가 도깨비 흑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되었느냐, 흑운?"

"예, 장로님. 물론이옵니다."

흑운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족 놈에게 중급 영석 5개가 있었다니 뜻밖이구나.'

그는 감히 루한을 죽인 죄과로 강혁을 잡아다 단단히 고통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강혁을 뭐라할 명분이 없었다.

여기서 더 따지고 들었다간 축기경 장로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으득! 네놈 어디 두고보자!'

두고 보면 언제고 기회가 있을 터.

그는 계속해서 강혁을 향해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때 축기경 장로가 강혁을 향해 물었다.

여전히 흐릿한 형체였지만 강혁은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강혁입니다."

"차강혁! 이제 너는 현무문의 정식 6급 문도임을 잊지 말 것이다."

"예, 장로님."

"너도 들었을 테지. 보다시피 나는 지금 아주 특별한 예외를 두어 너를 살려두는 것이다. 혈월의 겁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만큼 이후에도 오늘처럼 현무문을 위해 너의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강혁은 다시 가슴을 쓸며 대답했다.

"한 가지 더 명심하거라. 이제 혈월이 뜬 이상 본문 수선자들 간의 전투는 금지다. 겁이 종식될 때까지 본 현무문 수선자들은 힘을 합쳐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수선자들간 전투 금지라고?

이유는 모르지만 강혁으로서는 쾌재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분간 적어도 저 도깨비 흑운과 같은 강력한 수선자들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투금지는 나야 환영이지. 그보다 대체 혈월의 겁이 뭔데 그러는 거야?'

물어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그 사이 축기경 남자 장로와 도깨비 흑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말 꿈을 꾸는 기분이군.'

얼마나 홀연히 사라졌는지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과의 영력 격차가 크다는 걸 의미했다.

축기경은 고사하고 언제쯤 연기12성에나 도달할 수 있을까?

대체 현무문은 어떤 조직인 걸까?

그리고 혈월의 겁은 또 뭐고?

혹시 현무문과 다른 어떤 조직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건?

'공연히 쓸데없는 전쟁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각성자들의 단체인 길드 전쟁만 해도 그 살벌함이 장난이 아니다.

하물며 그와 비할 수 없는 전투력을 지닌 수선자들의 전쟁은 오죽할까?

하지만 그가 아무리 휘말리기 싫어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쉽지 않아 보였다.

'신경쓰지 말고 연기장생단이나 만들자.'

강혁은 서둘러 동굴 밖을 빠져나갔다.

밖은 어두운 밤이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음산한 붉은 색 달이 떠 있었다.

'왜 달이 붉은 색이지?'

처음에는 잘 못 본 줄 알았다.

붉은 달이라니!

그러나 아니었다.

개기월식이나 간혹 대기현상에 의해 붉게 보이는 현상이 아닌, 선명한 핏빛의 붉은 달.

마치 금세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듯했다.

괴상하고도 음산한 달.

세상에 종말이라도 오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축기경 남자 장로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혈월이라는 게 바로 저걸 말하는 건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전에 없던 이변이 벌어지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그렇다 해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로서는 연기장생단의 제조가 무엇보다 시급한 일.

'일단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 관리국 지부로 가자.'

어두컴컴한 산속을 걷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각성자이자 수선자인 그에게는 어둠이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했을까?

드디어 마을을 발견했다.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에 위치한 한 마을.

본래는 거주민이 많지 않아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근처에 게이트가 생겨남으로 인해 각성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러다 보니 기반 시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기 지부 건물이 보이는군.'

마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

국가수호원 게이트 관리국 상동읍 지부였다.

"실례지만 이곳은 각성자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입니다."

강혁이 건물 앞으로 가자 경비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저 각성자 맞습니다."

"그럼 각성자증을 보여주십시오."

현재 강혁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떡이 진 데다 옷은 지저분했고 여기저기 찢겨있었다.

경비원들이 수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리라.

'일단 숙소에 가서 좀 씻어야겠구나.'

그나마 멀쩡한 상태로 남아있는 각성자증이 없었다면 꽤 곤란했을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강혁이 각성자증을 건네자 경비원은 손에 쥐고 있던 장비로 그것을 스캔했다.

스캔 스크린에는 최근 A급으로 갱신된 강혁의 정보가 나왔다.

경비원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오! A급!"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강혁을 쳐다봤다.

"아! A급 헌터 차강혁 님이시군요."

"차강혁 헌터님! 어서오십시오! 상동 지부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숙자를 보듯하던 그들의 표정이 더없이 정중하게 변했다.

"혹시 각성자 숙소 이용이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이곳 상동 지부에는 각성자들을 위한 숙소뿐 아니라 식당, 카페 등 편의시설도 준비되어 있지요."

"차강혁 헌터님은 이용 자격이 되시니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부탁합니다."

현대수선전 17화

강혁은 경비원이 알려준 건물로 들어갔다.

밤 늦은 시간이라 일단 숙소에 들어가 몸부터 좀 씻고 옷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대부분 각성자 숙소에는 간단한 트레이닝복 정도는 구비되어 있을 테니까.

잠시 후.

로비에서 지정해준 숙소로 들어온 강혁은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개운해.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샤워를 한 것이다.

'일단 몇 가지 좀 알아보자.'

갑자기 뜬 핏빛 달.

시골 마을이라 그런지 이곳은 조용하지만 도시는 난리가 났을 텐데.

강혁은 핏빛 달을 필두로 혈월의 겁, 영력, 현무문, 수선자, 도깨비, 자룡비경과 같은 단어들도 모두 검색해봤다.

'없어. 하긴 있을 리가 없지.'

유사한 용어들이 웹소설이나 게임 카페 등에만 잔뜩 올라와 있을 뿐.

영화나 소설 속에나 보던 수선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나와 비할 수 없이 강력한 상위의 힘인 영력이라는 것이 존재할 뿐 아니라 영력의 경지를 돌파하면 수명을 늘릴 수도 있다는 것!

강혁이 생각해도 너무 황당무계하고 허무맹랑한 얘기였다.

'나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다.'

그는 수선자들을 만난 정도가 아니라 이미 그 자신이 연기2성의 수선자였다. 또한 현무문이라는 정체불명의 수선자 조직의 문도가 되었다.

그래봤자 최말단이라 할 수 있는 현무6급 신분.

연기2성으로는 수선자 세계에서 명함도 내밀기 힘들었다.

그냥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며 경지를 높이는 것이 최선.

'어떻게 보면 내가 현무문의 문도가 된 게 정말 천만다행일 수도 있겠군.'

수선계에서는 약육강식이 흔하다고 했으니까.

즉, 수선자 세계의 최약체에 불과한 강혁이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노출되면 다른 강한 수선자들의 먹잇감이 되어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언젠가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질 때까지는 현무문의 보호 아래 있는 게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

솔직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도깨비 루한도 처음에는 조화역천정을 10년이나 빌려준다는 말로 그를 속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루한을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을 보이는 도깨비 흑운뿐 아니라 축기경 남자 장로도 마찬가지.

어떤 꿍꿍이가 있을지 어찌 아는가?

말 그대로 눈 뜨고 코 베일 수도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가능한 빨리 연기장생단을 만들어 수명을 늘리고 최대한 영력 수련에 집중해 경지를 높이는 게 최선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왜 붉은 달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 거냐?'

강혁은 상념의 와중에도 계속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뉴스는 물론이고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 어디에도 붉은 달 얘기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창밖을 통해 멀리 보이는 달은 여전히 섬뜩한 핏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말이다.

잠시 뚫어져라 붉은 달을 바라보던 강혁은 로비로 내려가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기요.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네! 차강혁 헌터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숙소에 불편하신 점이라도?"

"그게 아니라 혹시 저 달이 좀 이상하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강혁이 멀리 산 위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며 묻자 여성 안내원은 웬 뜬금없는 질문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긴요. 오늘 달빛이 특히 밝고 예쁜 것 같은데요."

"밝고 예뻐요? 피처럼 붉고 음산하지 않나요?"

"네? 달이 왜 피처럼 붉어요? 각성자님 눈에는 저 달이 그리 보이시나요?"

"아니오. 그냥 해본 말입니다. 달이 정말 예쁘네요."

강혁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하고는 실소를 지었다.

혈월(血月)!

그것은 수선자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달이었다.

'그래서 조용한 거였군. 안 그랬으면 종말이 왔다며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야.'

그 역시 수선자가 아니었다면 저 섬뜩한 핏빛 달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혈월의 겁은 수선자들간의 전쟁이니 어쩌면 이곳 평범한 현실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지도 몰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말로 그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무문 장로가 혈월의 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뻘건 달이 떠 있으니 찜찜해서 잠이 안 오네.'

어차피 수명이 하루씩 줄어들 때마다 피가 마르는 심정인 터라 굳이 혈월이 아니어도 그는 속편히 잠을 잘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려 했지만 혈월이 밤의 창밖을 붉게 물들이고 있으니 음산하면서도 불길했다.

결국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날이 밝자마자 바로 게이트로 향했다.

대부분의 게이트는 아침 6시에 개방한다. 담당 공무원들도 이미 출근해 있을 것이다.

* * *

게이트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것이 9급이고, 최악의 난이도는 특급.

즉, 게이트 등급은 9급부터 특급까지 총 10단계가 존재한다.

강혁이 방문한 영월군 상동읍 지부 인근에 위치한 게이트의 등급은 그중 7급이었다.

'이 게이트는 산의 형태로 되어 있지.'

산 형태의 게이트는 등산을 하듯 산을 오르며 괴물들을 처치해야 하고, 보통은 산 정상에 보스 괴물이 위치해 있었다.

'보스 괴물이 3성 흡혈목인데다 흡혈충들이 득실거려 귀찮기는 해도 별로 어려운 곳은 아니야.'

강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게이트 정보를 확인했다.

그는 마정석이나 각성무기와 같은 보스 드롭 아이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굳이 산 정상의 보스까지 갈 필요는 없고, 가장 험난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는 깔딱고개 근처의 나무를 조금만 잘라오면 되니까.

연기장생단의 재료 중 하나인 흡혈가시오가피!

일반 오가피 나무와 달리 흡혈가시오가피는 괴물의 일종이었다.

움직이며 공격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뾰족한 가시같은 촉수들로 각성자들의 피를 빨아먹기도 하지만.

피부를 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강체화 특성을 지닌 강혁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모기와 같은 흡혈충들도 마찬가지다. 공연히 강혁의 피를 빨겠다고 붙었다가 녀석들의 흡혈침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바로 게이트 진입 가능합니까?"

빠르게 게이트 앞에 도착한 강혁이 담당 공무원 김석기에게 물었다.

그는 뿔테 안경에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죄송합니다, 차강혁 헌터님. 이곳 게이트는 이미 예약이 차 있습니다."

"벌써 예약이 찼다고요?"

"예. 태백 길드에서 오늘 뿐 아니라 앞으로 6주 동안 모두 예약을 해둔 상태입니다. 지금 예약하시면 7주 후에 가능하십니다."

이곳 게이트는 1주일에 한 번 리셋되는 식이었다.

오늘 못 들어가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도 6주까지 예약이 차 있는 터라 이대로면 두 달 가까이 기다려야 할 판.

'여기서 그럴 시간이 없는데.'

7주가 아니라 1주도 그에게는 아까웠다.

물론 예약해두고 다른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방법도 있지만.

기왕에 왔으니 오늘 해치우는 게 나을 것이다.

'태백 길드 사람들과 얘기를 해봐야겠군.'

이런 경우에는 담당 공무원에게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오늘 예약된 팀과 만나서 결정을 봐야 한다.

그때 게이트를 향해 1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곧바로 강혁이 그중의 리더인 최지훈에게 다가가 말해봤지만 일거에 거절당했다.

"오늘 공략은 저희 태백 길드원들만 가능합니다. 외부인은 받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것 필요없고 흡혈가시오가피 괴물 하나만 잡으면 됩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흥!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 뒤통수치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게 저희들은 항상 길드원들로만 팀을 구성하고 있죠."

"그런가요? 실례했습니다."

강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지훈의 반응이 쌀쌀맞았지만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게이트 공략 시에 특정한 괴물 하나만 잡게 해달라고 팀에 들어온 후 민폐를 끼치거나 혹은 뒤통수를 치는 빌런 각성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지훈은 A급 헌터인 강혁이 빌런 짓을 하면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흡혈가시오가피 재료가 필요하시면 저희가 구해다 줄 수는 있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세요?"

"아, 번거롭지만 그건 제가 직접 채취해야 합니다."

연기장생단의 재료는 반드시 영력을 가진 수선자가 직접 채취해야 한다.

각성자들이 채취한 재료도 가능했다면 굳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흡혈가시오가피 같은 재료는 각성자 협회 거래소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로 술을 담가먹는 사람들도 있는 터라 나름 인기도 많았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저희 길드 방침 상 외부인은 팀에 받지 않습니다."

최지훈은 단호히 선을 긋고는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강혁은 잠시 고심하다가 공무원 김석기에게 스마트폰을 빌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식으로 신세지는 건 싫지만 내가 지금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지.'

그는 오늘 무슨 수를 써도 흡혈가시오가피를 구해야 했다.

연기장생단의 모든 재료를 구한 후 단약까지 제조하는데 72일이라는 시간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으니까.

"접니다. 차강혁!"

-와! 누구라고요? 정말 차강혁 씨?

"아, 네... 스마트폰이 박살나서 다른 분께 잠깐 빌렸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된 거죠? 그동안 전화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요? 아무리 연락해도 전화도 안 받고. 실종 신고를 하려다 참았다고요. 몸은 어때요? 괜찮으신가요?

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여명 길드의 인사담당자인 김은아였다.

A급 헌터임과 동시에 방대한 인맥을 가지고 있어 여명 길드의 막강한 실세 중 하나.

"예. 저는 아직 잘 살아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보다 부탁 하나만 할게요. 다름이 아니라..."

강혁이 사정을 얘기하자 김은아는 별 일도 아니라는 듯 호호 웃었다.

-네. 그런 일이라면 금방 해결해드릴 테니 걱정 말아요. 게이트에서 볼 일 마치면 다시 전화주세요. 알았죠?

김은아는 그 즉시 담당 공무원 김석기는 물론 태백 길드 팀의 리더 최지훈에게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최지훈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여명 소속이셨습니까?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그쪽 소속이었죠."

"그러셨군요. 여명 길드에서 당신을 보증한다고 했으니 특별히 예외 규정을 적용하려 합니다. 정말 흡혈가시오가피만 구하면 되는 건가요?"

김은아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최지훈의 태도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물론입니다. 저는 다른 건 일절 관심없고 딱 그것 하나만 채취하고 나오면 됩니다."

"그럼 부담갖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흡혈가시오가피는 차강혁 씨에게 양보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뭘요? 각성자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아, 목 마르실 텐데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잔 하세요."

최지훈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캔음료 하나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랐던 강혁은 그것을 받아 마시며 미소 지었다.

"오! 아주 시원하네요?"

"한 캔 더 드릴까요?"

"아니오. 이걸로 충분합니다."

"언제든 또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중간에 식사도 함께 하시는 게 어때요?"

"정말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저희 태백 길드는 게이트 공략시 모든 보급품을 아주 넉넉히 준비해놓고 있거든요."

강혁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피어났다. 아깐 무조건 안 된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세상에 더없이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공무원 김석기도 강혁에게 다가와 이곳 게이트 내부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를 내밀기도 했다.

"이건 원래 유료로 파는 거지만 그냥 드리겠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차강혁 헌터님."

"감사합니다."

강혁은 이미 게이트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도를 보며 다시 확인했다.

'역시 대형 길드 인맥이 있으니 편하긴 하군.'

꼭두새벽부터 잠을 깨워 한 부탁이었는데 김은아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준 것이다.

'고맙다고 다시 전화해줘야겠는 걸.'

스마트폰이 없으니 답답했다.

'여기서 볼일을 마치면 가장 먼저 스마트폰부터 사야겠다.'

신용카드도 재발급받아야 하고.

계좌에 잔액이 얼마 남았는지도 확인해봐야 한다.

'잔액이 거의 없을 텐데.'

물론 저물 주머니에 있는 각성장비 잡템들을 팔아 현금을 마련하면 되니 그거야 걱정할 건 없다.

"모두 게이트에 들어갑시다! 차강혁 씨도 어서 오세요."

그때 최지훈이 팀원들을 불러모았다. 담담한 표정의 강혁과는 달리 대부분 C급 이하로 구성된 최지훈의 팀원들은 긴장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저는 신경쓰지 말고 앞서들 가시면 알아서 뒤따라 가겠습니다."

강혁은 맨 뒤쪽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게이트 안에 진입했다.

현대수선전 18화

짙푸른 물결과 같은 게이트의 빛을 통과하는 건 잠깐이었지만 마치 아득한 공간을 이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부신 광채와 함께 잠시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가 이내 시야가 확보되는 순간 강혁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게이트도 정말 오랜만이네.'

반 년 전까지만 해도 각종 게이트에서 살다시피했던 그였다.

그러나 수명이 반년 정도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에는 게이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불과 반 년 정도인데 몇 년은 지난 기분.

아련하면서도 뭔가 고향에 온 듯 편안한 느낌까지.

두 번 다시 게이트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게이트가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비록 7급 게이트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보니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긴장감이 결코 싫지 않았다.

오히려 투지가 불타 올랐다.

'역시 나는 게이트 체질인가?'

강혁은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저 사람들 차분히 잘 움직이고 있군.'

강혁보다 앞서 게이트에 들어온 태백 길드의 각성자들.

이곳 게이트 내부가 대략 5백여 미터 고지의 산 형태로 되어 있다보니 그들은 마치 등산이라도 온 듯 양손에 스틱을 쥐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등산 스틱이 아니라 각성무기들.

나름 장비들도 잘 갖추었다.

'A급 한 명, B급 두 명.'

이곳은 7급 게이트 중에서도 난이도가 상당히 쉬운 편에 속한다.

'저들 정도면 게이트를 통과하는데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군.'

그렇다 해도 나머지 팀원들이 C급 이하이다 보니 희생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차강혁 씨는 멀리서 따라오세요. 깔딱고개에 도착하면 그때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예."

강혁은 그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그의 관심은 오직 연기장생단의 재료인 흡혈가시오가피 나무일 뿐.

마음 같아서는 앞서 가서 재빨리 재료를 채취해 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행동은 태백 길드의 게이트 공략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라? 저건 마정석 같은데?'

최지훈 일행은 나무 형태의 괴물들과 침착하게 전투를 벌이며 전진 중이었다.

당연히 나무 괴물들이 드롭한 잡템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착실히 챙겨갔지만.

바위 밑에 마정석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모르고 지나간 것이다.

정확히는 바위 밑이라기 보다는 그 아래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상위 탐색 능력을 가진 이가 아니면 그곳에 마정석이 있다는 걸 알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최지훈 팀에게 강혁이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으리라.

'버리고 간 거니까 내가 줍자.'

일반 등급 소형 마정석.

팔면 대략 10만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터.

저기도 또 하나.

뒷짐진 채로 느긋하게 걸어가며 소형 마정석만 벌써 2개 째 챙겼다.

도합 20만원 수입.

'이거 짭짤하네.'

말 그대로 개꿀!

그런데 어떻게 이리 숨겨진 마정석들이 눈에 잘 띄는 것일까?

물론 통령안 때문이었다.

신비한 영술인 통령안은 숨겨진 보물을 찾는데 탁월한 탐지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게이트에서 랜덤으로 등장하는 약초나 아이템들을 찾는데 최고의 스킬!

반짝!

'오호! 저기 중형도 하나.'

소형이 아닌 중형 마정석.

성급(星級)이 아닌 일반 등급이다 보니 중형이라 해도 30만원에 불과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마정석만 아니라 각종 약초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캐다 팔아도 별로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잡다한 것들까지 담을 만큼 저물 주머니의 용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마정석만 줍자.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통령안을 번뜩이며 곳곳을 살피다보니 어느새 쌓인 소형 마정석이 무려 8개, 중형 마정석 1개.

도합 110만원.

게이트에 들어온지 불과 1시간도 안 되어 얻은 소득이었다.

'잠깐! 저 바위 아래 버섯들은 혹시?'

머리가 흑색 보석처럼 번쩍이는 자그만 버섯 두 송이!

커다란 바위 틈 안쪽이었다.

그것들을 발견한 강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맙소사! 흑수정버섯이야. 저 귀한 버섯을 여기서 발견하다니!'

보통은 5급 이상의 상급 게이트에서 발견되는 버섯으로 최고급 해독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다.

대박!

흑수정버섯은 방금 주운 일반 등급 마정석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 송이에 최소 6,000만원.

2성급 마정석 2개와 맞먹는 가치인 것이다.

그런 버섯이 두 송이니 도합 1억 2천.

처음에는 잘못봤나 싶었다.

각종 게이트 내부에는 흑수정버섯과 비슷한 형상의 별볼일 없는 버섯들이 널려있으니까.

'틀림없어. 저건 분명 흑수정버섯이다.'

예전에 게이트를 그토록 돌았어도 단 한 번 눈에 띈 적이 없었는데.

가슴이 벅찼다.

마음 같아서는 '심봤다!' 라고 크게 외치고 싶을 정도랄까?

'1억 2천 벌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도 받을 수 있으리라.

최고급 해독제는 상급 게이트를 돌 때 필요한 약 중 하나라서 그것의 필수재료인 흑수정버섯은 때로 부르는 게 값일 때도 있으니까.

그러나 강혁은 절대 팔 생각이 없었다.

개당 6천이 아니라 6억을 줘도 말이다.

연기장생단 한 알 제조할 때마다 흑수정버섯 한 송이가 들어간다.

강혁의 입장에서 보면 연기장생단의 재료들 중에서 괴수 내단을 제외하면 가장 구하기 까다로운 것이 바로 흑수정버섯인 것이다.

물론 본래는 영력이 깃든 영초들이 훨씬 더 귀한 것이 맞지만, 그것들은 영력의 샘 근처에서 이미 충분히 구해둔 상태였다.

'덕분에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게 됐군.'

강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흑수정버섯들을 조심스레 채취해 저물 주머니에 넣었다.

'이걸 찾으려고 5급 게이트들을 뒤질 생각에 골치가 아팠는데.'

사실 흑수정버섯은 5급 이상의 게이트들 중에서도 아주 희박하게 나타나는 터라 정말 운이 좋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었다.

'통령안 덕분이긴 하지만 운빨도 정말 좋았다.'

...라는 건 착각이었나?

왠지 싸한 기분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피, 피해라!"

"크아아악!"

"으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들.

으적으적 뭔가를 씹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지 이건?'

강혁은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노려봤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산 중턱 저편에서 벌어진 일.

강혁이 흑수정버섯을 채취하는 사이 멀어져가던 최지훈 팀에게 뭔가 참변이 발생한 것이다.

'느낌이 좋지 않아.'

강혁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산 중턱 음영이 짙은 곳을 살폈다.

영력으로 확장된 감각을 최대한 동원하자 그쪽에서 숨 막힐 듯 싸늘한 기운이 폭사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최소 4성급 괴물이 숲에 숨어 있다.'

4성급 괴물은 6급 게이트 이상에서만 출몰한다.

7급 게이트에 나타나는 괴물은 최대 3성급, 그것도 보스급으로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 만큼 4성 괴물은 적어도 1명 이상의 S급 각성자가 없이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매우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착!

그의 오른손에 장병기로 변환된 백룡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저물 주머니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 몸에 부착했다.

[연기강체부]와 [연기섭물부].

강체부는 이미 한 번 사용해봤지만 섭물부(攝物符)는 이번이 처음.

그래도 통령안을 통해 얻은 정보로 사용법은 충분히 숙지해두었다.

'으... 끔찍하군!'

비명이 들렸던 근처로 접근하자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며 나뭇가지들 곳곳에 찢긴 채 걸려있는 시체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오지 마세요! 지금 이 꼴이 안 보입니까? 어서 도망가요!"

누군가가 다급히 외쳤다.

거대 나무 괴물의 촉수같은 넝쿨에 칭칭 휘감긴 채 20미터 공중에 떠있는 남자.

다름아닌 최지훈이었다.

그는 엉망인 상태였는데 놀랍게도 상처를 입을 때마다 스스로를 치료하며 그 와중에도 용케 살아있었다.

'저 사람 힐러였나?'

넝쿨 촉수의 날카로운 가시들에 피부가 찢겨나자마자 그 즉시 복원되는 사기적인 회복력!

결박된 상태에서도 회복 스킬을 펼칠 수 있는데다 시전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전투 힐러로서 아주 이상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기적인 회복력도 마나가 고갈되면 무의미한 일.

두 눈에서 눈물을 끝없이 쏟아내던 최지훈은 이미 삶을 포기했는지 완전히 체념하는 표정이었다.

"흐흑... 어서 도망치세요, 차강혁 씨! 당신이라도 살아야합니다! 저는 팀원들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어서 가서 태백 길드에 꼭 이 상황을 보고해주십시오."

최지훈은 아까 게이트 입구에서 보여주던 단정하면서도 차분한 모습과는 달리 정신이 완전 나가 있었다.

공포심보다는 리더로서 팀원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강혁은 4성급 괴물을 만나고도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 생각했다.

"쿠우오오오오!"

그때 귀를 찢을 듯 커다란 포효와 함께 나무 괴물의 날카로운 촉수 가지들이 날아들었다.

쾅! 콰앙!

일대가 촉수들로 뒤덮이며 폐허로 변했지만 강혁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는 나무 괴물을 중심으로 길게 원형을 그리며 빠르게 달렸고 피하기 힘든 촉수들은 백룡대도를 휘둘러 쳐냈다.

"잘 들어요, 최지훈 씨! 포기하지 말고 계속 치료 스킬을 펼쳐요! 그럼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볼게요."

강혁이 4성 괴물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최지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빨리 도망치세요! 그러다 당신도 죽어요!"

"잠깐이면 됩니다. 조금만 더 버텨봐요!"

사실 이렇게 외치고는 있지만 강혁 또한 지금 상황에서 최지훈을 살리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냥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라 일단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길어야 1분... 그 안에 저 넝쿨들을 모두 끊어내지 않으면 저 사람은 죽는다.'

강혁의 어두운 표정을 보며 최지훈 또한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씁쓸히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이제 틀렸습니다. 길드원들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누나에게 좀 전해주세요."

"누나요?"

"태백 길드 마스터인 최서영 헌터가 제 누나입니다. 저로 인해 길드원들이 모두 흐흑..."

최서영이라면?

매우 익숙한 이름이었다.

"설마 당신이 말한 누나가 S급 헌터 최서영 씨를 말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우리 누나가 좀 유명하긴 하죠."

강혁의 두 눈이 커졌다.

그에게 있어 몇 안 되는 비교적 친했던 각성자 중 하나가 최서영이었던 것이다.

다만 무엇때문인지 그녀는 약 2년 전 여명 길드를 떠났고 그 이후의 일은 알지 못했는데.

설마 태백 길드의 마스터가 되어 있을 줄이야.

'예전에 그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

그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있던 강혁이었다.

그런 그녀의 동생이 위기에 처했는데 못본 척할 수는 없는 일.

무조건 살려야 한다!

강혁의 두 눈이 더욱 필사적으로 나무괴물의 움직임을 훑었다.

'저곳이군. 저 나뭇가지만 자르면?'

그러나 최지훈은 그런 강혁의 모습이 무모해 보여 다시 소리쳤다.

"저는 틀렸으니 어서 도망치세요! 마지막으로 누나에게 이 못난 동생이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서걱!

백색 도광이 번쩍이는 순간 최지훈의 몸을 휘감고 있던 넝쿨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넝쿨과 이어져있던 거대 나무 괴물의 가지를 강혁이 정확히 찾아내 백룡대도를 휘둘러 단번에 잘라버린 것이다.

"으아아아!"

20미터 공중에 떠 있던 최지훈의 몸이 바닥에 추락 직전 강혁의 백룡대도가 번개처럼 그의 몸을 받아 세웠다.

동시에 백룡대도를 땅에 꽂은 강혁은 최지훈의 몸을 감고 있던 넝쿨을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아 끊었다.

우득! 우드드득!

쇠사슬처럼 견고하던 넝쿨을 그저 양손의 힘만으로 끊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력!

이는 연기강체부가 주는 효과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최지훈은 믿기지 않는 듯 입을 찢어져라 벌렸다.

"어떻게 그런 힘을...! 정말 대단하십니다!"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던 최지훈은 이 상황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순간 강혁이 그를 떠밀며 외쳤다.

"정신차리고 어서 입구 쪽으로 뛰어요! 여기 있으면 저도 더 이상 못 도와줍니다!"

"앗,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최지훈은 게이트 입구 쪽을 향해 죽어라 뛰었다.

"쿠우오오오오!"

먹잇감이 살아서 나가자 크게 격분한 나무 괴물이 다른 넝쿨들을 촉수처럼 휘날려 최지훈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강혁이 백룡대도를 휘둘러 넝쿨들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그 사이 최지훈은 멀리 사라졌고 강혁은 본격적으로 4성 나무 괴물의 본체를 향해 돌진했다.

현대수선전 19화

빨리 도망치라는 강혁의 닦달에 최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뛰었다.

혼자 살겠다며 도주하는 것이 좀 걸렸지만 지금은 그가 남아있는 게 오히려 강혁에게 방해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 4성 괴물의 촉수를 맨손으로 끊어버리다니 정말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구나.'

S급 각성장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혁은 최지훈이 다치지 않도록 무기가 아닌 맨손으로 촉수 넝쿨을 끊어버린 것이다.

최지훈은 그 장면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A급이 어떻게 저런 가공스러운 괴력을?'

심지어 S급 각성자 중에서도 저 정도의 괴력을 가진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나가 여명 길드에는 괴물들이 많다고 했는데 저 사람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가?'

그는 잠시 멈춰서며 뒤쪽을 힐끔거렸다.

"크우어어어어!"

그때 강혁은 거대 나무 괴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0여 개의 나뭇가지 넝쿨들이 제각각 살아있는 뱀처럼 그를 포위하며 날아들었지만.

백룡대도가 바람처럼 공간을 휘저을 때마다 그것들은 무력하게 잘려나갔다.

3성도 아닌 4성급 괴물을 단신으로 이토록 수월하게 요리할 수 있을 줄이야.

강혁 스스로도 가슴이 벅찼다.

'이제 4성급 정도는 별거 아니구나.'

이전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연기강체부의 위력이 그로 하여금 웬만한 S급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게 해준 것이다.

"이제 그만 죽어라! 괴물 놈!"

강혁은 거대 나무 괴물의 가지들을 모조리 잘라 놈을 무력화시킨 후 몸체 나무 기둥을 난자했다.

그러자 놈의 거대한 몸체에 균열이 생기며 금세라도 부서질 듯 흔들렸다.

"크우우우! 쿠어어어어!"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더니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거기 서라!"

다 죽여놨는데 놓칠 수는 없는 일.

강혁은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섭물부의 기운을 발동시켰다.

염력처럼 대상을 제어해 끌어올 수 있는 능력!

그러나 대상의 중량이 강혁보다 월등하면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강혁이 오히려 그쪽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또한 섭물부의 주요 활용법 중 하나.

휘익!

순간 마치 전자석처럼 강혁의 몸이 공간을 주파해 거대 나무 괴물의 지척으로 다가섰다.

놈이 아무리 기를 쓰고 달아나도 소용없었다.

섭물부를 통해 강혁은 아주 손쉽게 놈을 따라잡으며 백룡대도를 마구 휘둘렀다.

"그우오오오오오!"

"크카카카카캇!"

그때 산 위쪽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들.

'또 다른 4성급 괴물들!'

그 사이 거대 나무 괴물을 끝장내고 정상을 향해 돌진하던 강혁이 급히 멈춰섰다.

놀랍게도 4성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7급 게이트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해. 정말 여기가 7급 게이트가 맞는 거야?'

그러고 보면 아무리 운빨이 크게 작용했다고 해도 상위 게이트에서나 나올 흑수정버섯을 7급 게이트에서 채취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게다가 4성급 괴물들이 산 정상도 아닌 중턱에서 떼로 나타날 줄이야.

그 말은 곧 정상에는 더 강력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하리라.

'설마 게이트 이상 현상?'

드물지만 간혹 하위 게이트가 폭주하며 상위 게이트로 진화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여긴 이미 7급이 아니라 6급 이상의 게이트로 진화된 상태라 보는 게 맞았다.

'흡혈가시오가피는 다른 곳에서 찾는 게 좋겠다.'

지금은 조속히 이곳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게 최선.

아무리 영력을 활용해도 6급 이상 게이트를 그 혼자서 도는 건 쉽지 않으니까.

'일단 게이트에서 나간다.'

판단이 선 순간 강혁은 전력을 다해 게이트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최지훈이 울상을 지으며 서 있었다.

"최지훈 씨? 왜 아직 안 나갔나요?"

"그러고 싶은데 입구가 사라졌습니다."

"이런!"

그러고 보니 당연히 있어야 할 푸른 빛 게이트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는 게이트가 봉쇄됐다는 뜻.

이러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최종 보스를 처치해야 한다.

강혁은 굳은 표정으로 멀리 산 정상을 살폈다.

'여긴 최소 6급으로 추정되는데 골치 아프게 됐군.'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최종 보스를 죽여야 한다.

"각오 단단히 해요, 최지훈 씨!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게이트를 돌파해야 합니다."

"대체 왜 갑자기 7급 게이트에 4성 괴물이 나타난 걸까요?"

"게이트 진화라고 들어보셨나요?"

"들어보긴 했지만 그럼 설마 이게?"

"맞습니다. 아마도 6급 게이트로 진화한 것 같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근데 제가 초보 힐러라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A급 힐러가 뒤에 있어 든든하네요."

"무늬만 A급 힐러일 뿐 저는 정말 쓸모없는 놈입니다."

최지훈은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도움은커녕 민폐가 될까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특히나 자신을 뺀 나머지 팀원들이 전멸한 것으로 인해 실의에 빠져 있었다.

"기운을 내요, 최지훈 씨! 오늘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이죠."

"제가 당신만큼 강했다면 팀원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제 잘못이죠."

"지금처럼 갑자기 게이트가 폭주한 상황에서는 S급 헌터라고 해도 팀원들을 살려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죄책감 가지지 말고 나와 힘을 합쳐 어떻게든 이 게이트를 빠져나갑시다."

"아니에요. 저는 더 이상 민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고 당신 혼자 가세요."

최지훈은 삶을 포기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혁이 뭐라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한심한 녀석이군.'

스스로 죽겠다는데 본래라면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혁은 기왕 최지훈을 살리기로 작정한 터라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최지훈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의 누나인 최서영에게 입은 신세를 갚기 위해서 말이다.

'최서영의 동생치곤 너무 나약한 성격이야. 어쨌든 정신을 좀 차리게 해줘야겠어.'

결국 강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최지훈을 노려봤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

"예?"

강혁의 태도가 갑자기 위압적으로 변하자 최지훈은 움찔 놀랐다.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이 바로 민폐다."

"그게 아니라 저는..."

"닥치고 들어! 다시 말하지만 게이트가 폭주하면 A급 헌터들도 꽤나 많이 죽어나간다. 게이트 폭주에 상위 각성자들이 전멸했다는 뉴스도 못 본 거냐?"

강혁은 최지훈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그만 민폐 짓하고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을 해라. 그렇게 질질 짜고 있으면 죽은 사람들이 살아올 것 같아?"

"흐흑! 이...이거 놓으십시오."

최지훈은 사력을 다해 강혁의 손을 풀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 무슨 힘이!'

지금 강혁은 오우거와 팔씨름을 해도 이길 만한 괴력의 상태이니 당연한 일.

"으윽! 알았으니 제발 이것 좀... 민폐 짓 안하겠습니다. 이러다 숨막혀 죽을...크윽... 제발!"

그러자 강혁이 최지훈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앞으로 게이트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딴 나약한 태도는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알았나?"

"예...옛! 알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공손히 대답을 한 최지훈이 돌연 인상을 구기고 강혁을 노려봤다.

"근데 왜 갑자기 반말입니까?"

"난 네 누나와 친구다. 친구 동생이니까 반말 정도는 해도 되겠지?"

"당신이 누나 남자 친구라고요?"

강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나이가 비슷해서 친구처럼 말을 트고 지냈을 뿐이야."

"흠, 역시 누나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알기로 누나와 말을 트고 지내는 사람들은 죄다 S급들 뿐입니다. 당신도 그중의 하나란 뜻이죠."

강혁의 입가에 실소가 피어났다.

'최서영이 꽤 거친 성격이긴 했지.'

성별을 따지지 않고 S급이 아니면 대놓고 무시할 만큼 오만무도한 성격.

그러나 그런 그녀가 강혁을 인정했다.

독종이라는 이유로!

당시 강혁은 B급 수준이었는데도 말이다.

"아까 봤지만 당신은 아직 S급 인정만 받지 않았을 뿐 실제 전투력은 S급이 분명합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런 게 지금 중요하나? 저기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어서 싸울 준비해라. 또 민폐 짓하면 죽든 말든 내버려두고 나 혼자 간다."

강혁이 눈알을 부라리며 말하자 최지훈은 움찔했다.

그냥 버리고 간다고 말하자 겁이 더럭 난 것이다.

"제가 뭘하면 됩니까, 형님?"

"형님?"

"누나의 친구이면 저에게는 형님이죠. 형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 보조해보겠습니다. 뭘하면 되는지 알려주십시오."

"별거 없어. 때맞춰 버프와 힐만 주면 된다. 일단 버프부터 시작해."

"제 버프는 좀 특이합니다."

"특이하다니 뭐가?"

"각성자의 특성능력을 일정 시간 강화시키는 식입니다."

강혁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말이 A급이지 사실상 S급에 준하는 최상위 버프!

생각보다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힐러였다.

"나쁘지 않네. 어서 펼쳐봐라."

"예, 형님. 잠시만요."

최지훈은 재빨리 강혁에게 버프를 펼쳤다.

[일시적으로 당신의 괴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일시적으로 당신의 강체화 능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지속 시간 30분]

각성자 스킬이다보니 시스템이 반응해 어떤 효과인지 알림을 통해 바로 알려줬다.

"오오!"

강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본래 그의 괴력과 강체술 특성에 연기강체부의 강화 효과가 더해진 상황인데, 거기에 추가로 괴력과 강체술이 더 강해진 것이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강철보다 더 단단해진 몸체!

전신에 기운이 넘친다.

이 상태라면 4성뿐 아니라 5성급 이상 괴물의 공격에도 웬만큼 버틸 수 있으리라.

더구나 A급 힐러가 뒤에 있으니 그가 상처를 입는 순간 즉각 회복시켜줄 것이다.

"잘 들어. 이제부터 지훈이 너는 최대한 뒤쪽 멀리에 있다가 내가 말하면 달려와서 버프나 힐을 주면 된다."

"예, 형님."

"그럼 시작한다."

그 사이 거대 나무 괴물들 뿐 아니라 흑색 갑주로 무장한 고블린 수십 마리까지 시커멓게 몰려오고 있었다.

"암흑 고블린?"

일반 고블린은 별거 아니지만 암흑 고블린은 최하 1성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정예병들.

뿐만 아니라 부대장은 4성의 보스급 괴물이다.

그것도 4성 상위종 홉고블린!

그런데도 강혁은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선봉으로 달려오는 홉고블린을 향해 서슴없이 돌진했다.

"키이아하하핫!"

1미터 남짓의 신장을 가진 다른 암흑 고블린들과 달리 2미터가 넘는 거대 홉고블린(★★★★).

놈은 자신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오는 강혁을 보며 코웃음을 날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집어던졌다.

쒸이이익―!

붉은 빛의 오러로 휩싸인 도끼가 엄청난 파공음을 내며 날아왔다.

4성 상위종 괴물인 만큼 투척 병기에 마나의 기운을 가득 실어 집어던진 것이다.

예전같으면 강혁도 기겁하며 피해야겠지만 수선자의 힘을 쓸 수 있는 지금의 그에게는 우스울 뿐이었다.

까아아앙!

백룡대도를 휘둘러 도끼를 쳐냈는데도 그의 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튕겨나간 도끼를 섭물부의 힘으로 끌어당겨 손에 쥔 후 홉고블린을 향해 힘껏 던졌다.

쒸이이이익―!

강화된 괴력의 힘으로 던진 도끼는 아까 홉고블린이 던진 것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공간을 갈랐다.

"키악!"

이에 놀란 홉고블린은 감히 그것을 맞받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뒤에 있는 암흑 고블린들은 도끼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팍!

도끼가 스치고 지나간 순간 암흑 고블린 하나의 머리가 두쪽이 났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팍! 팍! 파팍!

도끼는 후열에 있던 네 마리의 암흑 고블린들을 무참히 쪼개고도 멀리 날아가 거대한 나무 기둥에 박혔다.

"끄, 끄아아악!"

"카아아악!"

암흑 고블린들이 기겁하며 흩어졌고 홉고블린 또한 강혁의 무시무시한 괴력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강혁 또한 내심 놀랐다.

일반 등급도 아닌 1성급 암흑 고블린 다섯 마리를 도끼 한 번 던져서 잡았으니까.

"쿠카아아아악!"

그때 격분한 홉고블린이 등 뒤에 묶어 놓았던 또 다른 도끼를 풀어 쥐고는 뭐라 소리쳤다.

그러자 암흑 고블린들이 일제히 등에 매고 있던 단창을 풀더니 강혁을 향해 던졌다.

휘익!

휙!

휘휘휙!

새까맣게 날아드는 단창들을 보며 강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최지훈의 버프로 강체화 특성이 강화된 데다 추가로 강체부까지 부착한 상태라 맞아도 딱히 부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적의 공격에 맞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백룡대도를 풍차처럼 휘돌려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단창들을 쳐냈다.

'그러고 보니 귀찮게 일일이 막아낼 필요가 없지.'

스윽.

그가 한 손을 휘젓자 섭물부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순간 몰려오던 단창들이 하나 둘 공중에서 선회하더니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슈슉! 슈슈슈슉―!

단창이 무슨 부메랑도 아니고 갑자기 방향을 틀 줄이야.

그 속도도 무려 두 배는 더 빨라진 상태.

푹! 푸푹! 푸화확!

"키, 키아악!"

"끄아아악!"

단창에 꿰뚫린 암흑 고블린들이 무참히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단번에 고블린 다섯 마리를 해치운 강혁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섭물부가 여러모로 유용하긴 한데 조종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네.'

방금 전 그는 단창들이 날아오는 순간 연기섭물부를 활용해 그것들을 되날려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정확도가 낮았다.

40여 마리의 고블린들 중 고작 5마리를 해치우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섭물부를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련이 필요했다.

"키이이하하핫!"

그 사이 그를 향해 암흑 고블린 부대장인 홉고블린이 접근해 미친 듯 도끼를 휘둘렀다.

"건방진 인족 놈! 용서하지 않겠다!"

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자 강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통령안 때문인가?'

각종 요수들이나 이족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키하하하! 심장을 꺼내 씹어먹을 테다, 인족 놈!"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봐라."

"키악? 내가 알아듣게 말을 하다니 아주 재밌는 녀석이구나."

통령안의 영술을 통해 강혁은 자신의 말을 괴물에게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홉고블린에게도 그것이 신기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머리부터 쪼개줄 테니 각오해라, 인족!"

휘이잉!

오러가 피어나 있는 붉은 도끼!

거기다 4성 상위종 홉고블린의 괴력은 어지간한 오우거나 미노타우루스를 월등히 능가하는 만큼 본래라면 정면으로 맞붙지 말고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러나 아까도 그랬지만 괴력으로 따지면 강혁이 한 수 위였다. 그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전진하며 백룡대도를 휘둘러 놈의 도끼를 밀어냈다.

카아앙!

뒤로 밀려난 홉고블린이 콧김을 내뿜으며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키키키! 인족 따위가 무식하게 힘만 세구나! 하지만 나는 너같은 녀석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이번에는 힘이 아닌 기교로 강혁을 이기겠다는 듯 좌우로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강혁의 시선을 교란시켰다.

거대한 덩치와 달리 엄청난 속도여서 놈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카캉! 캉!

그 사이 계속해서 도끼와 백룡대도가 격돌했고 그때마다 홉고블린은 번개처럼 위치를 변경해 강혁의 후면을 노렸다.

그러나 강혁 또한 근접전으로 밥먹고 살아왔던 터라 이런 식의 공격은 가소로울 뿐이었다.

이미 놈의 움직이는 패턴을 파악한 강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그만 끝내자.'

그는 돌연 몸을 7시 방향으로 틀며 백룡대도를 내리쳤다. 홉고블린이 막 이동하려던 지점을 미리 선점한 것이다.

이에 흠칫 놀란 홉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도끼로 막았지만 그 또한 강혁은 예상했다는 듯 옆으로 이동하며 백룡대도를 놈의 목에 꽂아넣었다.

백색의 빛이 섬광처럼 홉고블린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서걱!

"꾸윽...!!!"

홉고블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툭!

동시에 그것의 몸체에서 머리가 잘린 채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현대수선전 20화

"키아아! 대...대장이 죽었다!"

"피, 피해라!"

강혁이 백룡대도로 부대장의 목을 잘라버리자 암흑 고블린들은 패닉 상태로 변해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그것들과 달리 거대 나무 괴물들은 일제히 촉수들을 뻗어 강혁을 덮쳐왔다.

'잠시도 쉴 틈이 없군.'

강혁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놈들의 공격을 피했다.

푸른 색 대나무 잎사귀로 무성한 넝쿨 촉수들을 가진 거대 청혈죽(★★★★), 잎사귀가 없이 거무튀튀한 빛으로 뒤덮인 거대 흑혈목(★★★★), 마지막으로 전신이 핏빛의 가시로 뒤덮인 거대 나무 괴물(★★★★).

그중 핏빛 가시 나무 괴물을 발견한 강혁은 깜짝 놀랐다.

아까는 경황 중이라 괴물의 정체까지 미처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저놈 4성 흡혈가시오가피 괴물이었군.'

그의 두 눈이 희열로 번뜩였다.

연기장생단의 재료 중 하나인 흡혈가시오가피를 얻는 것이야 말로 그가 이곳 게이트에 온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찾던 흡혈가시오가피는 일반 등급의 평범한 나무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연기장생단의 재료 중 하나로 부족하지 않은데.

무려 4성 흡혈가시오가피 괴물이라면 그 품질이 일반 등급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재료들의 품질이 좋을수록 연기장생단의 제조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4성이면 최상급 재료라 할 수 있어.'

사실 강혁은 4성 흡혈가시오가피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세계 각성자 협회에서 작성한 괴물 목록에서 흡혈가시오가피는 일반 등급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려 4성급이 존재할 줄이야.

추아아아!

촤르륵!

물론 지금은 그것에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그 사이 세 마리 거대 4성 나무 괴물들 모두가 그를 향해 넝쿨 촉수들을 날려보냈다.

추악! 추아아아악!

사방을 뒤덮은 수백 개의 넝쿨 촉수들!

그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어 보였지만 강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베어낸다.'

서걱! 서거걱!

백룡대도가 번쩍일 때마다 넝쿨 촉수들이 맥없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그 즉시 또 다른 넝쿨 촉수들이 움직여 그 자리를 채웠다.

게다가 잘려나간 촉수들도 금세 다시 복원되어 강혁을 포위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겠군.'

혼자서 4성 나무 괴물 세 마리를 상대하는 건 S급 각성자라 해도 무모한 짓.

그러나 강혁은 이미 영력의 사기적인 위력을 체감한 터라 포기하지 않았다.

'잘라도 금방 복원되는 촉수들이라면 베어내는 걸로는 답이 없어.'

죽어라 백룡대도를 휘둘러봤자 결국 마나 고갈로 위기에 처하고 말 것이다.

'영력으로 승부해주지.'

순간 그의 몸에 부착된 연기섭물부에서 신비한 빛이 일어났다.

화악!

섭물부의 힘을 빌어 그가 손을 휘젓자 날아들던 촉수들 중 일부가 반응을 했다.

암흑 고블린들이 날린 단창들은 비교적 쉽게 통제가 가능했던 반면 4성 괴물들의 촉수들에게는 섭물부의 위력이 잘 미치지 않았다.

'섭물부의 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나의 수련이 부족해서다.'

통령안이 알려주는 지식!

그의 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연기2성으로서의 영력을 연기섭물부를 통해 제대로 발휘할 수만 있다면 날아드는 넝쿨 촉수들로 놈들의 본체를 공격하게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테니까.

아쉽게도 수백여 개의 촉수들 중에서 강혁이 섭물부로 통제가 가능한 건 간신히 세 개 정도 뿐.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단 하나라도 통제할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

'이런 류의 괴물들은 촉수가 엉켜버리면 제대로된 힘을 쓸 수가 없지.'

강혁은 자신의 지척으로 접근하는 촉수들은 백룡대도로 차분하게 베어냈고, 통제가 가능한 촉수들을 조종해 다른 촉수들을 휘감게 했다.

하나의 촉수로 서너 개의 촉수들을 휘감아 엉켜버리게 만든 후 다시 다른 촉수를 조종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잠시가 지나자 대부분의 촉수들이 강하게 뒤엉켜 4성 괴물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지금이다.'

나무 괴물들의 손발과 같은 넝쿨 촉수들을 묶어놓는데 성공한 강혁은 지체없이 돌진해 놈들의 본체를 공격했다.

"꼴들 좋구나! 뒈질 준비해라!"

이제부터는 죽어라 패기만 하면 되는 시간!

놈들은 이제 덩치 큰 허수아비들에 불과했다.

서걱! 푸확! 촤가가가각!

강혁이 근접해서 백룡대도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데도 나무괴물들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가공스런 괴력이 실린 강혁의 백룡대도가 번쩍일 때마다 마치 초대형 도끼로 나무를 패듯 나무괴물들의 몸체가 움푹 파이거나 무더기로 베여 나갔다.

촉수 가지들은 내버려두고 집요하게 놈들의 몸체만 노리는 강혁의 공격 앞에 결국 거대한 4성 나무괴물들도 공포에 떨어 비명을 질러댔다.

"쿠어어어어억―! 로...로드께서 오고 있다. 그분께서 결코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쿠아아아아아아―! 무도한 인족 놈! 로드께서 반드시 너를...!"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분노의 포효를 지르며 강혁을 협박하는 것 뿐.

그 사이 또 통령안이 놈들의 언어를 통역했는지 강혁의 귀에 놈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훤히 들어왔다.

'로드? 이곳 게이트의 보스를 말하는 건가?'

놈들이 불렀는지 이 게이트의 최종 보스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전에 이놈들을 해치워야 한다.'

전력을 다해 S급 장병기를 휘두르는데도 워낙 덩치들이 큰 데다 부서진 부위가 복원되기도 하는 터라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혁은 놈들의 몸체에서 부서져도 복원되지 않는 부위들을 발견했고, 그 부위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어떤 괴물이든 약점이 존재하지.'

인간으로 치면 급소와 같은 부위!

"쿠아아아아아아―!"

"끄우어어어어―!"

그렇게 강혁이 급소만 골라 패자 괴물들이 발악을 했다.

그러나 발악을 하면 할 수록 촉수 가지들은 더 심하게 얽혀들었다.

용케 촉수들을 몇 가닥 끊어낸 후 복원해 공격을 펼치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강혁에게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했다.

쩌저저저적!

콰지지직―!

결국 거대 푸른 대나무 형상의 괴물인 청혈죽(★★★★)의 몸체에 거미줄같은 균열이 일더니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흑혈목(★★★★)이 산산조각난채로 널브러졌고, 마지막으로 흡혈가시오가피(★★★★) 또한 강혁의 백룡대도 아래 처참히 부서진 채 무너져내렸다.

'내가 하고도 믿기지 않네.'

강혁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화탄구를 쓰지 않고도 4성 괴물 3마리와 동시에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게이트의 괴물은 죽은 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연기장생단의 재료를 얻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는 즉시 부서진 4성 흡혈가시오가피 괴물의 잔해에 영력의 기운을 뿌렸다.

순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조각들 중 4개에서 반응이 왔다.

'이 많은 나무 조각들 중 영단의 재료로 쓸 수 있는 건 고작 4개뿐인가?'

그래도 4개가 어디인가?

일단 빠르게 흡혈가시오가피 조각 4개를 챙긴 후 그 옆에 쌓여있는 다른 청혈죽과 흑혈목의 잔해에도 영력을 뿌려봤다.

그러자 청혈죽 조각 4개와 흑혈목 조각 3개에서 반응이 왔다.

'저것들도 챙기자.'

4성급인 만큼 나무들은 거대했지만 아쉽게도 한 번에 영력으로 채취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었다.

각 나무들마다 극소량의 재료를 채취할 수 있을 뿐.

'청혈죽 조각과 흑혈목 조각은 어디에 쓸 재료인지 모르겠군.'

이것들도 4성급이 존재하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런 만큼 매우 희귀한 재료들이니 언제가 귀하게 쓰지 않을까 생각해 일단 챙겨둔 것이다.

그를 가장 기쁘게 한 건 핏빛으로 번쩍이는 흡혈가시오가피 조각 4개.

연기장생단 한 알에 이 조각 하나씩이 필요하니 도합 4알을 제조할 수 있는 재료였다.

'이제 내단을 비롯해 몇 가지만 더 구하면 된다.'

예상치 못한 귀한 재료를 얻어 매우 뿌듯했지만 가장 난해한 재료 중 하나인 5성 괴수의 내단을 얻지 못한터라 강혁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여기 보스가 5성급 같은데?'

그 사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초대형 괴물의 기운!

진화된 게이트의 최종 보스답게 5성급 포스가 느껴졌다.

혹시 놈에게서 내단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으리라.

'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놈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는 걸 감지한 강혁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물론 두려울 건 없었다.

그에게는 강력한 화(火) 속성 법기인 화탄구가 있으니까.

물론 내단을 얻으려면 화탄구 사용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자칫 가공스러운 열기에 내단까지 타버릴 수도 있으니까.

[괴력 증가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강체화 능력 증가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벌써 버프가 사라졌네.'

그 사이 30분이 지난 모양이다.

강혁은 힐끗 고개를 돌려 최지훈 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는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 뭐하는 거냐?"

"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로 S급이셨군요. 우리 누나가 왜 형님을 인정했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강혁을 바라보는 최지훈의 표정에는 경외심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너 설마 내가 싸우는 장면 찍고 있던 거냐?"

"예, 형님!"

"그거 올려서 조회수 얻으려는 목적인가 본데 좋게 말할 때 당장 지워라."

각성자들 중에는 자신의 전투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으로 돈을 버는 이들도 있긴 했다.

그러나 강혁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잠깐만요. 절대 그런 목적이 아닙니다."

"아니면 뭐지?"

"형님 실력은 S급이지만 아직 국가수호원에서 인정을 못받으신 것 아닙니까? 이거면 형님이 S급이란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

그러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각성자 등급을 증명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가장 흔한 방법은 국가수호원 소속 각성자 관리국에서 인정하는 특별한 장치를 통해 마나의 양과 보유한 특성의 등급을 감별하는 것이다.

장치가 대체로 정확하지만 간혹 특성 등급을 뛰어넘는 이변이 발생하는 경우가 존재해 한 가지 방법이 추가됐다.

특성 등급과 상관없이 전투력을 증명하는 것!

이를 테면 지금처럼 게이트에 있는 괴물들과 실제로 싸워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된다.

"이 영상 정말 초대박입니다, 형님! 이 정도면 충분히 S급 아니, 어쩌면 SS급도 가능할 겁니다."

"S급은 몰라도 SS급은 무리야."

"무슨 소리입니까? S급인 우리 누나도 혼자서 4성 괴물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천만에! 최서영 씨는 이미 2년 전에 그런 수준이었다."

"예? 누나가요?"

최지훈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설마 자신의 누나가 그런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누나가 그런 실력이었으면 벌써 SS급 인정을 받았겠죠."

"네 누나의 성격 상 자신의 실력을 다 내보이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야."

"하하...! 설마 누나가 동생인 저에게도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믿건 말건 네 자유다. 궁금하면 네 누나에게 직접 물어봐라."

순간 최지훈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설마 이거 실화? 누나가 정말 SS급이라고?'

그는 오늘 강혁을 처음 봤지만 그가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그렇다 해도 정말 믿기지 않았다.

"뭐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칩시다. 누나가 동생에게도 숨기고 있는 비밀을 형님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4성 괴물 정도가 아니라 5성 괴물과도 단신으로 싸우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 하는 말이지."

"네? 언제요? 혹시 누나와 단둘이 데이트 아니, 게이트에 간 적 있습니까?"

역시나 둘이 뭔가 친밀한 사이가 아닌지 무척 의심스러워하는 눈빛.

강혁은 어이가 없었다.

왜 계속 그쪽으로 몰고가는 건지.

"됐고.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야. 곧 5성급 괴물이 도착할 테니 딴데 정신 팔지 말고 타이밍 맞춰 버프나 펼쳐라."

"옙! 그건 걱정 마십시오, 형님!"

그 사이 마나가 좀 회복된 터라 최지훈은 강혁에게 강화 버프를 펼쳐줬다.

번쩍! 확! 화악!

다시 괴력과 강체술 강화 효과를 받은 강혁은 전신에서 용암처럼 솟구치는 강력한 힘을 느끼며 투지를 불태웠다.

"저기 잡몹들이 먼저 오는군."

그는 백룡대도를 번쩍 쳐들고 전방을 노려봤다.

"키악!"

"키아아아!"

5성 괴물이 오기 전 마치 전조처럼 앞에서 몰려오는 자그만 괴물들!

그것들은 아까 강혁의 위세에 놀라 달아났던 암흑 고블린들이었다.

"킥! 키히히힛!"

"크캬캬캬...!"

그런데 놈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신에서 아까보다 더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입은 귀밑까지 찢어진 채 헤벌쭉 벌리고 있었다.

최지훈이 몸을 떨며 외쳤다.

"저...저놈들 왠지 미친 것 같은데요, 형님?"

"미친 게 아니라 죽었다. 딱 보니 혈귀충에 물려 좀비로 변한 것 같다. 고블린 좀비 말이야."

강혁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최지훈은 기겁했다.

"고블린 좀비? 설마 이곳 게이트에 혈귀충들이 있다는 겁니까?"

"틀림없어. 저놈들의 눈알을 봐라."

"눈알이 아니라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데요?"

"그게 바로 혈귀충이야."

"으으!"

최지훈도 혈귀충이 뭔지 알고 있었다.

맹독을 가진 벌레지만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형 괴물들.

문제는 그냥 피만 빨아먹는 게 아니라 뇌로 파고들어 죽은 시체를 조종하기까지 한다.

즉, 그것들에게 물리면 그 독에 의해 사망함과 동시에 좀비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흡혈귀와 같은 벌레!

그래서 혈귀충(血鬼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으! 혈귀충은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벌레인데...'

성체의 크기는 최고 10센티미터 정도인데 딱딱한 껍질에 날개까지 있어 언뜻 보면 대형 바퀴벌레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퀴벌레와 비할 수 없이 빠른데다 강도 높은 검이나 총 등에 제대로 맞지않는한 껍질이 부서지지도 않아 죽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나 각성 이전부터 벌레 공포증이 있던 최지훈에게는 더욱 꺼림칙한 괴물이었다.

현대수선전 21화

"으으...! 혈귀충이라니! 최악이군요!"

"어차피 내 선에서 해결하니 네가 물릴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해."

"그래도 물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니 몸 전체를 두르는 실드 관련 아이템이 있으면 즉각 발동시켜. 미세한 틈이라도 있으면 저놈들은 무조건 파고 든다."

강혁은 서늘한 눈빛으로 최지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부하는데 절대 혈귀충에게 물리지 마라. 혹시라도 물리면..."

그러자 최지훈이 움찔하더니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혹시라도 제가 물리면 좀비가 되기 전에 죽여주세요.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죽고 싶습니다."

혈귀충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

그냥 사망 후 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럴 바엔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으리라.

강혁이 끄덕였다.

"알았다. 그땐 이 대도로 목을 잘라주지. 목이 잘리면 좀비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근데 잘릴 때 많이 아플까요?"

"목이 생으로 잘리는데 안 아플리가 있겠냐? 그래도 어쩌면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라."

"으..."

대도에 목이 잘린다? 듣는 입장에서는 살 떨리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게 바로 혈귀충! 무엇보다 좀비가 되면 더욱 민폐일 터.

그는 강혁의 말대로 실드 아이템을 발동시켰지만 그래도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움은 못 줘도 방해는 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까처럼 일단 피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죄송해요, 형님!"

"뭐야? 너 지금 도망치는 거냐?"

"예, 형님! 제가 근처에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아무리 봐도 이게 형님을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 도망을...?

'여러모로 최서영과는 완전 딴판인 녀석이군.'

누나와 동생이 저리 다를 수도 있을까?

강혁도 이전에 최서영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최지훈이 죽든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잘 됐다.'

사실 좀비 고블린들의 몸에는 혈귀충들이 대거 파고든 상태다.

잠시 후 강혁이 고블린들을 학살하면 혈귀충들이 튀어나올 것이고, 최지훈은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일단 표적을 정하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는 게 혈귀충들의 본능!

최지훈이 실드를 둘렀다 하지만 그걸로 혈귀충들의 공격을 완벽히 막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직감한 것일까?

최지훈은 정말 죽어라 달렸고 순식간에 강혁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힐러인데 달리는 속도는 전사 뺨치는군.'

곧바로 강혁은 백룡대도를 휘둘러 고블린 좀비들을 공격했다.

휘휭! 서걱! 서거걱!

백금 빛 대도의 날이 번쩍일 때마다 고블린 좀비들은 목이 날아가거나 혹은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두 쪽이 난 채로 쓰러졌다.

"끄아아악!"

"끼아악!"

그렇게 죽어 쓰러진 고블린 좀비의 몸체들마다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벌레가 10여 마리씩 튀어나왔는데 그게 바로 혈귀충들이었다.

촤륵! 촤르륵!

웽! 웨엥!

그 즉시 혈귀충들은 강혁을 타겟으로 잡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접근해 강혁의 팔뚝을 물기도 했지만 놈들의 침과 이빨은 연기강체부로 인해 강철처럼 변한 피부에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서걱! 촤가각!

당연히 강혁은 혈귀충들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고블린 좀비들을 도륙하는데만 집중했다.

웨엥! 웽! 웨에엥~

그렇게 고블린들이 모조리 죽었을 때는 무려 수백 마리도 넘는 혈귀충들이 강혁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제 이놈들 차례인가? 벌레들은 몰살이 답이지."

혈귀충들을 한 마리씩 백룡대도로 베어 죽이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짓이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바로 연기섭물부!

순간 혈귀충들이 한 지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이다.

'생각보다 이놈들은 쉽게 통제가 되는군.'

섭물부의 위력이 4성 나무 괴물들의 촉수들에게는 제약이 많았던 반면 자그만 곤충형 괴물들에게는 아주 잘 통했다.

웨엥! 웽! 웨에엥~

혈귀충들이 계속 모여들어 뭉치다 보니 마치 거대한 구형체 하나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만 끝내자.'

활!

곧바로 라이터를 켜듯 강혁의 왼손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났다.

화르르륵!

그 불꽃은 순식간에 시뻘건 화염으로 변해 혈귀충의 구형체를 뒤덮었다.

타닥! 타다다닥!

혈귀충들은 불에 휩싸여 몸부림치면서도 섭물부의 위력으로 인해 도망치지 못했다.

'그냥은 죽이기 힘든 녀석들인데 섭물부와 화탄구를 쓰니 아주 간단하군.'

화탄구에 영력도 아닌 미량의 마나만 살짝 주입했을 뿐이다.

즉, 화력도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혈귀충들에게 불은 천겁과 같은 재앙이었다.

놈들이 불에 타 죽는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무렵.

쿠우우우웅!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전방의 지면이 세차게 진동하더니 땅속에서 거대한 해골 형상의 괴물이 솟구쳐 올랐다.

신장이 무려 30미터나 되는 초대형 스켈레톤!

설마 6성 재앙종의 하나인 스켈레톤 로드인 것인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스켈레톤이 아니야.'

각각의 뼈가 짙은 갈색빛의 나뭇가지들로 이루어졌다.

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뭇가지들이 실처럼 꼬여 뼈의 형상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모여 기괴한 스켈레톤 형태가 된 것이었다.

'뭔지 알 것 같군. 저건 언데드가 아닌 살아있는 나무 괴물이다.'

이블 스컬 트리(evil skull tree).

이른바 마골목(魔骨木)이라 불리는 보스급 괴물로 5성 재앙종 중에서 상급에 속했다.

'혈귀충이 나타나서 설마 했더니 5성 마골목이었어.'

거대한 몸체를 지닌 만큼 가공스러운 괴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각 부위의 복원력이 뛰어나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녀석이다.

또한 혈귀충들을 몰고 다니며 적들을 좀비로 만들어 부리기도 했다.

'저놈에 대해 들어는 봤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본래라면 A급 각성자인 강혁으로서는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낼 수 없을 터.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강체부와 섭물부가 있었다.

'영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비장하게 번뜩이는 강혁의 두 눈.

그의 시선이 일순 한 곳에 고정되었다.

갈비뼈 형태를 이루고 있는 마골목의 가슴 안쪽에서 휘돌고 있는 자그만 붉은 빛 구형체 하나.

'틀림없어. 내단이야.'

굳어있던 강혁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5성 재앙종 괴물들 중에도 내단이 없는 녀석들도 많은데 다행히 놈에게는 내단이 있었다.

'저 내단을 반드시 얻어야 한다.'

그가 한손을 휘젓자 근처의 바위 하나가 떠오르더니 마골목을 향해 날아갔다.

쒸잉!

바위가 대포알처럼 날아가 마골목의 몸체에 적중했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애초부터 그 정도로 타격을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섭물부를 이용해 바위를 날린 것은 놈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위한 것일 뿐.

강혁은 그 사이 놈의 오른쪽 다리에 접근해 백룡대도를 힘껏 휘둘렀다.

서걱!

대도의 날이 마골목의 나무 뼈를 파고들어 일정 부분을 베어냈다.

강체술에 연기강체부의 괴력이 깃든 만큼 S급 각성무기의 위력은 5성 괴물에게도 타격을 주기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베어낸 부위는 금세 다른 가지들이 생겨나 멀쩡히 복원되어버렸다.

몇 번을 베어내도 소용없었다.

마치 수면 위로 칼질을 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행동일 뿐.

그 사이 마골목 괴물의 두 팔이 강혁을 노리고 공격을 펼쳐왔다.

놈의 두 팔은 거대한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것은 물론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도 해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카캉! 카앙!

거대한 몸체에서 나오는 가공스러운 괴력은 제 아무리 강체술로 무장한 강혁이라 해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어 한 번씩 백룡대도로 놈의 손들을 쳐낼 때마다 강혁의 몸이 뒤로 튕겨나듯 날려갔다.

'으윽!'

몸체가 부서지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무식한 힘이군. 계속 격돌하면 위험해.'

역시나 마골목(★★★★★)은 4성 괴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5성급으로 추정되는 삼두귀각혈사보다 비할 수 없이 강한 괴력!

놈이 왜 5성 재앙종 중에서도 상급에 속한다 했는지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영력이 과도하게 소모되고 있다.'

몸에 부착된 연기강체부가 찢어질 듯 펄럭이며 강혁의 영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덕분에 마골목과의 격돌에 밀리면서도 상처를 입지 않고 있지만 만약 영력이 고갈되기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물론 강혁도 그냥 밀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처음에 몇 번만 튕겨났을 뿐 그후부터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위치를 이동하며 놈과의 격돌을 피했다.

'특정 지점을 향해 섭물부의 인력을 발동시키면 그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지.'

대략 20미터 정도로 거리 제한은 존재하지만 그 이내에서는 가히 순간이동과 같은 속도라 실전에서 매우 유용하다.

처음에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데 몇 번 해보자 금세 요령이 생겨났다.

'이런 식으로 섭물부를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

그렇게 강혁이 번개처럼 위치를 변동시켜 공격을 피해버리자 마골목이 돌연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그대로 땅을 박찼다.

콰아아앙!

놈이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에서 성인 남성 두께의 가시 넝쿨들이 솟아올라와 강혁을 향해 뻗쳐왔다.

'무식한 공격이군.'

5성 상급 재앙종다운 살벌한 광역기! 휘감기는 순간 송곳과 같은 가시들에 짓이겨질 것이다.

그러나 강혁은 가볍게 넝쿨들을 피하며 그것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동시에 고정되어 있는 마골목의 몸체로 접근해 무자비한 연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놈은 복원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부서지면 복원되고 부서지면 복원되고.

사기적인 복원력에 강혁은 혀를 내둘렀다.

'이걸 그냥 불에 태워?'

화탄구만 던지면 해결될 일.

그러나 그러자니 놈의 가슴 중앙에서 휘돌고 있는 내단이 너무 아쉬웠다.

'조금만 더.'

아직은 영력도 제법 남아있고 마나와 체력도 충분한 상황.

화탄구에 의지하지 않고도 5성 마골목을 잡아보는 거다.

그런데 강혁이 투지를 불태우며 계속 마골목의 몸체에 타격을 가하자 놈도 뭔가 위기를 느꼈는지 입에서 시커먼 먼지 같은 것들을 토해냈다.

촤르! 촤르르르...!

웨엥~! 웨에엥!

'저것들은?'

먼지가 아니었다.

먼지들이 뭉치더니 손가락만한 벌레들로 변해 날아들었다.

다름아닌 혈귀충!

입에서 혈귀충들을 토해내는 괴물이라니!

정말 꿈에 볼까 두려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혈귀충들이 아무리 몰려온들 강혁에게는 그다지 신경쓸 건 없었지만 그래도 시야를 가려대며 달려드니 무척 피곤했다.

"저리들 꺼져라."

강혁은 아까처럼 섭물부의 힘을 이용해 혈귀충들을 양 옆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그렇게 밀어낸 공간 사이로 또 다른 혈귀충들이 금세 몰려와 틈을 메웠다.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고 강혁의 주위를 시커멓게 포위하고 있는 녀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바로 그 찰나.

콰앙!

마골목의 거대한 손이 혈귀충의 구름 사이로 파고들며 강혁을 후려쳤다.

반사적으로 백령대도를 들어 막았지만 강혁은 상당한 충격을 입은 채 뒤로 멀리 날려갔다.

"으윽―!"

강혁은 넘어진 즉시 훌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입가로 붉은 피가 새나왔다.

백룡대도를 쥔 양손이 찢겨지고 어깨가 탈골된 것처럼 아팠다.

'젠장! 제대로 맞았네.'

시야를 가렸던 혈귀충들 때문에 마골목의 공격이 날아오는 걸 보지 못했다.

'저놈이 혈귀충들을 토해낸 건 내 시야를 가리기 위한 목적이었군.'

마골목이 의식으로 혈귀충들을 조종하고 있는 터라 강혁이 섭물부를 사용해도 쉽게 통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놈이 키득거리는 순간 혈귀충들이 대거 강혁을 향해 몰려왔다.

촤르르! 촤르르르!

웨에엥! 웨엥...!

'이런!'

강혁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무리 강체부가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다 해도 방금 전 찢겨진 피부 틈으로 혈귀충들이 파고드는 것까지는 막아줄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것 모조리 화탄구로 태워버리자.'

저 빌어먹을 5성 마골목까지 말이다!

화악!

그때 돌연 푸른 색의 광채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치유의 빛이 당신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치유의 빛?

최지훈이 비장한 표정으로 달려와 그를 향해 잽싸게 힐을 펼친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형님!"

"너 도망간 거 아니었냐?"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너무 쪽팔려서 말입니다. 형님 혼자 목숨걸고 싸우는데 저 혼자 살자고 피할 수는 없죠. 죽더라도 힐은 펼치겠습니다. 버프도 받으십쇼!"

계속해서 최지훈의 손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나와 강혁의 몸을 휘감았다.

"저는 이제 혈귀충에게 물려 죽겠지만 누나에게 꼭 전해주십시오. 이 동생은 매우 용감했다고..."

강혁은 어이가 없었다.

'웃기는 녀석이네.'

확실히 최지훈은 겁쟁이 같았다가도 어떤 때는 정말 용감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

목숨 걸고 강혁에게 힐과 버프를 펼쳐준 후 자신은 혈귀충에게 물려 장렬히 전사하겠다는 듯 비장한 태도였다.

현대수선전 22화

'어쨌든 덕분에 상처는 모두 치료됐군.'

A급 힐러답게 최지훈은 단 한 번의 시전으로 강혁의 부상을 완치시켜버린 것이다.

그것이 상당한 성취감을 줬는지 최지훈은 혈귀충들이 떼로 몰려드는 와중에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 정도면 버프 뿐 아니라 힐도 꽤 쓸만하지 않습니까?"

"그래. 방금 전 힐은 제법 좋았다."

"예, 형님! 앞으로도 훌륭한 버프와 힐을 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알았다. 근데 이제부터는 진짜 위험하니 저쪽으로 피해 있어."

강혁이 손을 휘젓자 최지훈이 20여 미터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그 사이 최지훈을 타겟으로 잡고 접근하던 혈귀충들은 강혁 쪽으로 끌려왔다.

'아무리 내단이 중요해도.'

끌려온 혈귀충들의 몸에 화염 불꽃이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해 흩어졌다.

'내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지.'

혈귀충들은 죽었지만 화염 불꽃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거대해졌다.

화르! 화르르르!

일순간 강혁의 몸 전체가 화탄구에서 일어난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5성 마골목을 노려봤다.

'일단은 저놈을 죽이고 내단은 다른 곳에서 얻는다.'

다른 방법으로 별 수를 다 써봤지만 마골목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러다 영력이 고갈되면 오히려 놈에게 당하고 말 터.

화아아! 화르르륵!

그렇게 강혁이 비장한 눈빛을 발산하며 돌진해오자 마골목은 당황한 듯 움찔 놀라더니 잽싸게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딜 도망가는 거냐?"

강혁은 섭물부의 힘으로 놈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그 사이 막 무릎까지 땅 속에 파고들던 마골목의 몸체에 화탄구의 화염이 옮겨붙었다.

화르! 화르르르...!

그런데 놈이 화기(火氣)에 저항하는지 화탄구의 화염이 삼두귀각혈사 때처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나만으로는 안 되겠군.'

혹시 몰라 영력은 아껴둔 채 마나를 최대한 주입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지금 이놈을 놓치면 게이트에서 나가지 못한다.'

쌀 주머니와 물 주머니, 조화역천정이 있으니 굶어죽지야 않겠지만 이제 잔여 수명이 70일도 안 되는 강혁으로서는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서 그는 영력을 아낌없이 화탄구에 주입했다.

화아아아! 화르르...!

화르르르르륵!

방금 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렬한 화염의 폭풍이 생성되어 마골목의 몸체를 뒤덮었다.

"꾸으으으윽―!"

마골목이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쳤다.

'됐다.'

강혁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마골목이 땅속으로 기어들어간다고 해도 저 화염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놈이 완전히 타서 재로 변할 때까지 말이다.

'내단이 아쉬울 뿐이지.'

강혁은 마골목의 갈비뼈 안쪽에서 휘돌고 있는 자그만 붉은 빛 구형체를 아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아직 내단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화탄구의 화염이 마골목의 몸체를 아작내듯 태우고 있는데도 내단은 용케 그것에 저항하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화탄구의 열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니 과연 5성 재앙종 괴물의 내단다웠다.

'그래봤자 위태해 보인다. 앞으로 1분을 견디지 못할 거야.'

그래도 아직 1분을 버틸 수 있다면?

'모험을 해봐야겠군.'

강혁은 불타는 거대한 마골목의 나무 뼈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화탄구의 화염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터라 불바다 속에서도 그는 멀쩡했다.

그가 내단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지만 화염에 녹아내리고 있는 뼈들은 그를 막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엄청나게 크네.'

거대한 마골목의 몸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던 것일 뿐 놈의 내단은 지름 1미터가 넘는 거대 구형체였다.

'이런! 녹아내리고 있어.'

화탄구가 발현하는 가공스러운 화염의 중심에 있는 강혁이 근처에 접근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

내단도 더 이상 그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다.'

슥.

강혁은 통령안이 주는 지식을 참고해 내단을 향해 손을 뻗음과 동시에 영력을 주입했다.

그가 손을 대고 영력을 주입하는 순간 내단으로부터 환한 빛이 폭발하듯 발산되었다.

화아아악!

강혁의 몸도 내단에서 뿜어져나오는 눈부신 광채로 뒤덮혔다.

잠시 후 내단의 광채가 사라졌을 때는 신기하게도 그것의 크기는 야구공만 하게 줄어 있었다.

"성공이군!"

강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했다.

모험이 통한 것이다.

강혁이 내단에 영력을 주입해 그것의 주인이 된 순간 화탄구의 열기는 더 이상 내단을 공격하지 않았다.

[게이트의 최종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게이트 소멸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승리의 알림!

그런데 게이트 소멸이라니?

'소멸이라고?'

강혁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번 한 번으로 이 게이트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인가?

폭주나 진화보다 소멸은 더욱 흔치 않은 일.

'오늘 정말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는군.'

어쨌든 소멸이라 해도 걱정할 건 없다.

굳이 입구를 찾아 이동하지 않아도 게이트가 소멸되면 자동으로 밖에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10분 후 자동 퇴장!

이제는 게이트에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는 상황.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실소가 흘러 나왔다.

'그나저나 이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화탄구를 써도 됐겠군.'

그랬으면 마골목의 공격을 피하느라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아온 기분이랄까?

그 사이 무섭도록 불타오르던 화탄구의 화염도 모두 사라졌다.

마골목뿐 아니라 혈귀충들이 모두 죽었다는 뜻. 남아있는 건 산더미같은 잿가루 뿐이었다.

"형님! 우리 살았습니다! 흐흑! 정말 대단합니다, 형님!"

최지훈이 멀리서 스마트폰을 든 채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울면서 웃고 있는 괴상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죽다 살았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오늘 희생된 길드원들을 떠올리자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하리라.

그런데.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번쩍이는 걸 보니 최지훈은 그 와중에도 강혁이 싸우는 장면을 녹화한 모양이었다.

"설마 모두 찍은 거냐?"

"예, 형님! 이 영상 보여주면 형님은 무조건 SS급입니다! 나가면 국가수호원 게이트 관리국에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SS급이라!

이전 같았으면 정말 초대박이라 생각하며 환호했으리라.

그러나 이미 그보다 더 상위의 경지인 수선자들의 세계를 알게 된 강혁으로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뭐 그래도 SS급으로 인정해준다면 나쁠 건 없지.'

그만큼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단번에 SS급은 오버다.

더구나 법기인 화탄구를 사용하는 장면은 외부에 알려져 좋을 게 없다.

솔직히 국가수호원의 인물들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강혁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도깨비들보다 더 탐욕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까.

"마지막 보스와의 전투 장면은 지워라."

"예? 그게 있어야 형님이 SS급을..."

"내가 직접 지울까?"

"아닙니다. 제가 지우겠습니다."

강혁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최지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지막 강혁과 마골목의 전투 장면 동영상을 즉각 삭제했다.

"그럼 이 영상은 국가수호원에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최지훈은 강혁이 4성 괴물 세 마리와 동시에 싸우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가리켰다.

강혁은 동영상을 살펴봤다.

강체부와 섭물부의 힘을 쓴 것이지만 다행히 동영상 어디에도 그가 부적을 사용하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그냥 각성자로서 그가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그냥 놔둘까 잠시 고민하던 강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수선자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솔직히 말하면 각성자들이 걱정되는 게 아니다.

그가 신경쓰는 건 수선자들이었다.

세상에는 그로서는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선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동영상으로 인해 공연히 수선자들에게 주목받거나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지워라."

"이것까지 지우면 SS급은..."

"계속 두 번 말하게 하는군."

강혁의 눈이 차갑게 번뜩이자 최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영상도 삭제했다.

"그럼 이것은요?"

최지훈은 마지막 동영상을 가리켰다.

강혁이 암흑 고블린들과 전투를 벌이다 놈들의 보스인 4성 홉고블린의 목을 베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었다.

강혁은 잠시 고민하다 끄덕였다.

앞으로를 위해 기왕이면 S급 정도는 받아두는 게 편하긴 하리라.

이 영상은 딱히 수선자들을 자극할만한 대단한 전투 장면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건 놔둬도 상관없어. 그보다 나와 약속 하나만 하자."

"무슨 약속 말입니까?"

"방금 전 동영상에서 지운 장면들은 너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라. 이곳 게이트의 최종 보스는 거기 남아있는 4성 홉고블린이었다."

이에 최지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형님은 자신의 숨겨진 실력이 외부에 드러나는 걸 별로 원하지 않는 것이군요."

"약속 지킬 수 있겠지?"

"예, 형님. 제가 생긴 건 좀 가벼워 보여도 입은 상당히 무겁습니다."

"좋아! 어쨌든 동영상 촬영하느라 수고 많았다. 네 덕분에 조만간 S급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 같군."

"하핫, 4성 홉고블린을 단신으로 처치한 영상이니 충분히 S급으로 인정받으실 겁니다. 제가 이렇게라도 형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최지훈은 마치 자신이 S급 각성자가 된 듯 들떠 있었지만 강혁은 더 이상 관심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마골목의 재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재를 챙겨야겠다.'

5성 마골목의 재.

연기장생단의 재료는 아니지만 영력으로 채취해두면 쓸모가 있을 거라고 통령안이 알려주었다.

'곧 게이트에서 강제 추방될 테니 그전에 빨리 해야겠군.'

그는 내단을 저물 주머니에 넣고 바로 재 채취작업에 들어갔다.

'아쉽게도 영력으로 채취하는 건 아주 소량만 가능하지.'

영력으로는 고작 재 한줌을 얻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영기가 깃든 것이라 수선자만 이 재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따로 재를 담을 용기가 없어도 저물 주머니 내부는 강혁의 의지에 따라 분리보관이 가능했다.

[게이트 소멸까지 4분 남았습니다.]

4분이 지나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

강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마골목의 재를 살펴봤다.

재는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수선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아무 쓸모없는 재료일 뿐이었다.

이제 영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관련 재료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성 재료는 얻을 수 있지.'

그는 수선자이기 이전에 각성자이기도 하다.

당연히 영단의 재료 못지않게 각성 재료도 필요하다.

'상급 회복제의 재료.'

이 또한 통령안이 알려주는 정보였다.

그냥 재 자체를 상처에 발라도 상처 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할 정도인 것이다.

'잘됐어. 최대한 챙겨보자. 시간도 얼마 안남아서 많은 양은 얻을 수 없겠지만.'

약초는 물론이고 게이트 내부에서의 괴물 잔해는 그냥 줍는다고 다 쓸만한 재료가 되는 게 아니다.

마나를 소모해서 채취해야 재료의 각종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높은 숙련도도 요구된다.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닌 터라 강혁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게이트가 소멸되었습니다.]

'드디어 나가는군.'

이 순간 강혁의 마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가장 어려운 재료인 내단을 얻었으니 이제 연기장생단을 만드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현대수선전 23화

한편 그 순간 게이트 관리국 상동읍 지부는 잔뜩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지부에서 관리하던 게이트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담당 공무원은 황급히 이에 관한 내용을 상급 부서에 보고하는 것은 물론 태백 길드에도 연락을 취했다.

이에 가장 먼저 지부에 도착한 이는 태백 길드의 마스터 최서영이었다.

"게이트 상태는요?"

"여전히 진입불가 상태입니다. 현재로서는 게이트가 폭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게이트가 폭주해 진화한다 해도 이런 식으로 입구가 봉쇄되는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현재로서는 안에 들어간 팀원들이 무사히 생환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금처럼 게이트 입구가 봉쇄되어 버리면 밖에서 조치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S급이 아니라 SS급, SSS급이 와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최서영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녀의 동생 최지훈을 비롯한 길드원 10여 명의 생사가 불명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녀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차강혁! 그 괴물이 함께 들어갔으니 어쩌면...'

2년여 전 그녀는 차강혁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 역시 차강혁으로 인해 살아났다.

'그때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어.'

강혁이 등급을 뛰어넘는 사기적인 전투 센스로 보조해주지 않았다면 절대 그녀는 5성 괴물을 상대해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강혁은 두 팔과 왼쪽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할 만큼 극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남은 오른 쪽 다리만으로 움직이며 괴물의 주의를 끌었고 결국 빈틈을 만들어냈다.

살면서 최서영이 자신보다 더 독종이라 인정한 최초이자 마지막 인물.

'그런 독종은 처음 봤다. 그라면 어떻게든 살아돌아올 거야.'

물론 어디까지나 그녀의 막연한 희망이었다.

바로 그때.

"아앗! 게이트가!"

"이럴 수가! 게이트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최서영이 고개를 돌렸다.

"저기 누군가 나타났습니다."

"생환자가 두 명 있습니다!"

게이트가 사라진 곳에 나타난 두 명의 사람.

다름아닌 강혁과 최지훈이었다.

* * *

최지훈은 누나 최서영에게 달려가 게이트 안에서의 일을 보고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최서영은 동생 최지훈이 무사히 생환했는데도 적지 않은 길드원들이 죽은 상황이라 표정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과 달리 강혁은 상당한 쾌거를 달성한 상황.

'흡혈가시오가피 나무 하나 얻으러 갔다가 흑수정버섯과 5성 괴물의 내단까지 얻어왔군.'

흑수정버섯과 5성 괴수의 내단은 아무리 게이트를 돌아도 운빨이 좋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귀한 재료들.

이제 남은 재료들은 그가 알고 있는 게이트들에서 고정적으로 나오는 무난한 것들 뿐이다.

'작정하고 움직이면 금방 구할 수 있어.'

갑자기 게이트가 폭주해 진화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이다.

'남은 재료들 중 하나인 블러디 오우거의 담낭은 춘천에서, 삼목백사의 독액은 홍천 쪽 게이트에 가서 구하면 된다.'

블러디 오우거는 머리에 붉은 털이 나있는 3성급 괴물인데 춘천 북부에 위치한 7급 게이트에서 고정적으로 출현한다.

또한 홍천 쪽에 있는 게이트에서만 출몰하는 삼목백사(三目白蛇)는 눈이 세 개 달린 하얀 뱀으로 2성급 괴물이라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춘천과 홍천은 가까운 거리.

잘하면 오늘 안에 두 가지 재료를 모두 채취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마지막에 화탄구를 쓰느라 영력이 거의 소모된 상태야.'

영력 뿐 아니라 마나도 고갈 직전이었다.

마나야 어디서든 회복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영력.

종일 심법에 집중한다 해도 무려 3일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영력의 샘이 있는 자룡비경 내에서라면 한두 시간 안에 모두 채울 수 있지.'

따라서 무조건 영력의 샘이 있는 자룡비경에 다녀오는 것이 최선!

남은 재료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또 게이트가 폭주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으니까.

'그나저나 카드가 없으니 너무 불편하군. 당장 숙박비도 결제해야 하는데.'

그가 아무리 A급 각성자라고 해도 각성자 숙소를 무료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그때 최지훈이 강혁을 향해 다가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형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은혜는 무슨. 고생했으니 가서 잘 쉬어라."

강혁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고마워! 차강혁 당신 덕분에 내 동생이 무사히 살아 돌아왔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네."

어느새 흑색의 머리를 뒤로 묶은 날씬한 몸매의 여성이 다가와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최서영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상당한 수준의 미인이었지만 분위기는 강혁 못지 않게 싸늘했다.

누구라도 섣불리 가서 쉽게 말을 걸기 힘들 만큼 차가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순간 강혁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우 따스하고 호의적이었다.

"은혜랄 것까지야. 이걸로 지난 번에 당신에게 졌던 신세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천만에! 신세라면 오히려 내가 갚아야지. 오늘 일도 그렇고."

최서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뭐든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부담없이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들어주도록 할게."

"그럼 염치불구하고 부탁 하나만 하자. 혹시 백만원만 빌려줄 수 있나? 현금으로."

"웬 백만원?"

"어쩌다 보니 신용카드가 불에 타버렸거든. 이곳 숙박비도 결제해야 해서 당장 쓸 현금이 필요한데 빌려주면 다음에 꼭 갚을게."

"당신은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내 동생의 생명을 구해줬는데 고작 백만원? 그것도 빌려달라고?"

"그럼 안 되는 건가?"

"흥! 당연하지."

최서영은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강혁에게 내밀었다.

"받아. 이 카드면 굳이 현금이 필요없을 거야. 한 달 한도는 1억인데 다 써도 상관없어."

"1억을 진짜 다 써도 돼?"

강혁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묻자 최서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그리고 이곳 숙박비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마."

상당한 부자지만 남에게는 인색한 그녀가 강혁에게 자신의 신용카드를 내준다는 것은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다.

옆에 있던 최지훈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척 부럽다는 듯 강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곧장 최서영을 향해 항의했다.

"이야! 누나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난 한달 한도 30만원인데 강혁 형님은 1억? 나도 한도 올려줘."

최지훈은 A급 각성자이자 태백 길드의 팀장급 간부지만 그의 통장은 누나인 최서영이 관리하고 있었다.

즉, 그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한 달에 30만원 외에는 돈 쓸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이전에 그가 돈을 너무 방탕하게 사용하다 막대한 금액을 빚지고 통장을 압류당한 것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30만원은 너무 적잖아.'

이 기회에 용돈을 좀 올려보자는 생각에 최지훈은 따지듯 말했다.

"못 들었어, 누나? 나도 한도 좀 올려달라고! 1억까지는 바라지 않아. 100만원 정도만!"

"지금 뭐라고 했니?"

순간 최서영이 고개를 슥 돌려 서늘한 눈빛으로 최지훈을 노려봤다.

"하긴 네 녀석에게는 30만원이 너무 많긴 하지. 숙식비를 길드에서 다 내주는데 무슨 돈 쓸 일이 있겠니? 좀 깎아도 될 거야."

"하하, 안 올려줘도 돼. 그냥 지금으로 만족할게."

"흥! 무늬만 A급 힐러인 네게는 30만원도 과분해."

공연히 한도 올려달라고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판.

최지훈은 풀 죽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딱하게 지켜보던 강혁이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지훈이 말이야."

"지훈이가 왜?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최서영이 불안한 듯 강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후! 알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최서영은 무척이나 우울해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 나약한 녀석이 민폐 짓을 많이 했을 거야. 지훈이의 잘못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강혁이 만류했지만 최서영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표정이었다.

"사과라니 그럴 필요없다. 내가 볼 때 지훈이는 꽤 훌륭한 면이 많은데 너무 타박만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지훈이가 훌륭해? 뭐가?"

"저 녀석 적어도 무늬만 A급 힐러는 절대 아니야. A급 힐러 자격은 충분해. 그 이상도 가능하고."

강혁의 말에 최서영도 놀랐지만 최지훈이야말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혀, 형님!"

"그냥 듣기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마지막에 네가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와 힐과 버프를 펼쳐준 건 정말 대단한 용기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A급 힐러 자격이 있으니 자신감을 가져라."

사실 강혁은 최지훈이 가진 힐러로서의 특성과 잠재력이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장차 S급 힐러가 될 자질.

그런 최지훈에게 있어 중요한 건 자신감과 용기였다.

하지만 최서영이 동생을 너무 강하게 몰아붙이다 보니 최지훈은 항상 주눅이 들어 스스로를 겁쟁이라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말도 안 돼!"

역시나 최서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혁을 쳐다봤다.

그녀가 아는 동생 최지훈은 위급한 상황에 도망을 치면 쳤지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할 만한 용기가 없는 녀석이었으니까.

"저 겁쟁이 쫄보 녀석이 목숨을 걸고 당신에게 힐을 펼쳤다고?"

강혁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겁쟁이? 쫄보? 왜 동생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냐?"

"그야 저 녀석이 항상 그랬으니까."

"최서영 당신은 아직 동생에 대해 잘 모르는군. 다시 말하지만 지훈이는 혈귀충에게 물려 죽을 각오를 하고 내게 힐과 버프를 펼쳤다."

"혈귀충이라고?"

최서영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다른 괴물도 아닌 혈귀충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최지훈이 돌진했다니 정말 놀라운 일.

'지훈이는 벌레를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데...'

A급 각성자가 된 이후에도 집에 바퀴벌레가 보이면 기겁하며 누나를 찾는 겁쟁이인 것이다.

하물며 혈귀충은 바퀴벌레보다 100배 아니, 1000배는 끔찍한 괴물.

담력으로는 알아주는 최서영조차 혈귀충만은 마주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혈귀충들에게 물릴 각오를 하며 강혁을 향해 힐과 버프를 펼쳐줬다는 건 정말 죽을 각오를 했다는 뜻.

'지훈이가 제법이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혁에게 A급 힐러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건 사실 대단한 쾌거라 할 수 있었다.

동생 최지훈을 바라보는 최서영의 표정이 흐뭇하게 변했다.

"혹시 지훈이 녀석에게 무슨 특별 교육이라도 시킨 거야?"

"딱히 그런 건 없고. 그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A급 힐러에게 30만원은 좀 너무 박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좀 올려줄 생각이야."

최서영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최지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크흑!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설마 강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게 평가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혹시 형님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라."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부족하지만 제가 힘닿는 대로 준비해보겠습니다."

뭔가 충성스러워보이는 최지훈의 태도에 강혁은 실소를 지었다.

딱히 뭔가를 더 받으려고 해준 말은 아니었다만.

"그러고 보니 차를 한 대 구할 수 있겠냐? 급하게 어디를 가야하는데 여기서는 렌트할 곳도 마땅치 않고."

자룡비경이 위치한 그의 산 근처의 자그만 마을까지 도로가 나 있는 터라 차만 있으면 매우 빠르게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최지훈이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며 말했다.

"혹시 경차라도 괜찮으시다면 제 차를 쓰십시오."

강혁은 상관없다는 듯 반색했다.

한시가 급한 그로서는 차종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경차면 뭐 어때? 잘 쓰고 금방 돌려주마."

"하하...! 천천히 돌려주셔도 됩니다. 근데 이건 깡통이라서 사이드 미러도 전동이 아닌 수동입니다."

듣고 보니 진짜 왕깡통인 모양이군.

뭐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잘 굴러가기만 한다면.

그렇게 강혁이 경차 키를 받으려는 찰나.

탁.

누군가 최지훈의 손을 밀어냈다.

최서영이었다.

대신 그녀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뭔가를 강혁의 손에 쥐여줬다.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최고급 스포츠카의 키(key).

"급한 것 같으니 기왕이면 이 차를 써. 보험도 들어둘게."

"그럼 고맙지."

강혁은 흔쾌히 끄덕이며 스포츠카의 키를 받았다.

"기왕 신세를 진 것 이것도 좀 부탁한다."

떠나기 전 그는 저물 주머니에서 각종 각성장비들을 꺼내 최서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저물 주머니가 너무 꽉 차 있어서 여유 공간도 확보할겸.

"이건 뭐야?"

"이것들을 처분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한가하게 팔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그런 거라면 내게 맡겨."

최서영은 흔쾌히 끄덕였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강혁이 그리 급해하는 지는 묻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 않는다면 묻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럼 나는 이만. 다음에 보자."

곧바로 강혁은 붉은 색 스포츠카의 시동을 켠 후 자룡비경 인근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현대수선전 24화

강혁이 차와 함께 멀어지는 모습을 최서영은 팔짱을 낀 자세로 골똘히 쳐다봤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자야. 그때만 해도 B급이었는데 어떻게 2년 만에 S급이 된 거지?"

순간 최지훈이 놀랐다.

"강혁 형님이 원래 B급이었다고? 그게 정말이야?"

"아니, 본래는 E급이었다. 거기서 B급까지 스스로의 전투력을 높였지. 불과 8년 만에. 그가 달리 여명 길드의 괴물이라 불렸겠니?"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어. 여명의 3대 괴물! 그중 하나가 바로 누나잖아?"

순간 최서영이 힐끗 고개를 돌려 최지훈을 노려봤다.

"누나가 괴물이라고?"

"그건 내가 지어낸 소리가 아니야. 나도 이제야 생각났어. 인터넷 뒤져봐! 여명의 3대 괴물! 마스터 강동윤, 사이코 광녀 최서영, 마지막으로 수련 독종 차강혁! 아... 강혁 형님이 바로 그 차강혁인 줄 왜 이제야 기억난 걸까?"

"흥! 나보고 사이코 광녀라니 어떤 새끼가 그 딴 걸 써놓은 거냐?"

"그거 2년 전쯤 인터넷에 화제가 됐던 얘기라고! 누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그걸 처음 지어낸 녀석이 누굴까? 아무리 2년 전 일이라도 절대 용서 못해! 찾아서 진짜 사이코 광녀가 뭔지 보여줘야지."

순간 최지훈이 흠칫 몸을 떨었다.

사실 여명의 3대 괴물 별칭 중 마스터 강동윤과 수련 독종 차강혁은 2년도 훨씬 전부터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코 광녀는 사실 최지훈의 작품이었다.

사실상 최지훈에 의해 최서영이 여명 3대 괴물로 편입된 것이나 마찬가지.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흔적도 남아있었다.

'들키면 끝장이야. 게시글 싹 지워야겠군.'

최서영이 작정하면 얼마나 집요한지를 잘 알고 있는 최지훈이었다.

아마 분명 온갖 커뮤니티 게시글까지 싹 뒤질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진 그는 빨리 화제를 돌렸다.

"하하...! 그보다 강혁 형님은 정말 수련에 미친 사람이었어?"

그러자 최서영이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맞아. 미쳤다고 해야겠지. 그의 독하면서도 냉철한 기질은 정말 존경할만 하다. 지훈이 너도 그런 기질을 조금이나마 배우면 좋을 텐데."

E급에서 S급까지 오른 전설적인 존재!

"하지만 사람들이 만약 그 형님의 진짜 실력을 알면 모두 뒤집어질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실력이라니?"

순간 최지훈은 흠칫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그는 강혁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따라서 설령 누나에게라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까 동영상 봤잖아? 혼자서 4성 홉고블린과 암흑 고블린 부대를 가지고 노는 거. 그 정도면 S급을 넘어 SS급 아니야?"

"하긴 나도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 SS급으로 분류할 수는 없어. 물론 S급 중에서는 분명 상급에 속해."

"그렇군."

최지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은밀히 미소지었다.

'천만에! 그 형님은 최소 SS급 이상이야.'

강혁이 5성 마골목을 불태워 죽이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그였다.

아마도 어쩌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그런 멋진 장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동영상을 삭제한 게 너무 아깝네.'

남들이 아닌 그 혼자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다.

'가만! 그거 휴지통에 있으니 복원이 가능할 텐데?'

그 사실을 떠올린 최지훈은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강혁이 미처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고 나 혼자서만 보면 돼. 그럼 약속을 어긴 건 아니니까.'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최서영이 의아한 듯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왜 강혁 형님은 여명 길드에서 탈퇴한 거지? 그 정도 능력이면 여명에서 절대 놔주지 않았을 텐데."

"그건 나도 모르겠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럼 누나가 그 형님을 우리 길드로 모셔오면 안 될까? S급이 두 명이면 태백 길드도 대형 길드 못지 않은 위상을 갖게 될 거야."

"······!"

순간 최서영은 고민 깊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길드의 마스터인 만큼 강혁과 같은 존재를 탐내는 건 당연한 일.

"천천히 생각해보자. 지금은 그보다 유족들에 대한 애도가 먼저야. 바로 준비하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최지훈이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서둘러. 유족들께도 연락드리고. 우리 길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과 예우로 장례식을 치러야 해."

그 말을 하는 최서영의 표정은 한없이 비장하면서도 어두워보였다.

'게이트에서 누구도 희생되지 않게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대부분의 길드원들에게 항상 등급에 비해 과도한 장비를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게이트 이상현상이 벌어지자 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긴급! 의정부 북부 게이트 이상 현상 발생!」

「속보! 거제도 게이트 이상 현상 발생!」

그때 갑자기 그녀의 스마트폰에 긴급 문자들이 수신되기 시작했다.

'맙소사!'

의정북 북부와 거제도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수십 개의 게이트 이상 현상 관련 재난 문자들이 끝없이 수신되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해외 다른 국가들에도 연속적으로 게이트 이상 현상이 발생해 난리가 난 상태였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 *

국가 수호원 비상 상황실.

원장 이두성을 비롯한 국가수호원 최상위 간부들이 모여 속속들이 올라오는 긴급 보고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 게이트 이상 현상이 발생한 곳은 어디었나?"

이두성의 말에 게이트 관리국장 홍정식이 일어나 대답했다.

"처음 보고가 올라온 곳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상동 지부였지만, 이상 현상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거의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각 지부에서 게이트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걸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 한국에 있는 모든 게이트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건가?"

"예. 아직 보고되지 않은 곳들은 있지만 상황 파악 중인 걸 보면 틀림없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은 파악했나?"

"아직 모릅니다. 해외에서도 동일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게이트 관리 협회를 통해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는 중입니다."

그때 홍정식의 앞 탁자에 누군가 보고서를 하나 가져다 놨다.

그 내용을 확인한 홍정식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막 올라온 보고입니다. 이상 현상이 발생했던 영월 상동읍 게이트에 진입했던 각성자들 중 두 명이 무사히 생환했습니다. A급 차강혁, A급 최지훈입니다."

"A급 각성자들이 무사하다니 불행 중 정말 다행이로군."

"예. 덕분에 게이트 이상 현상이 일어났을 당시의 내부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홍정식은 7급 게이트가 6급 게이트로 진화하며 4성 괴물들이 나타났다는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최종 보스를 처치해 게이트가 소멸됐다고? A급 각성자들로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차강혁 헌터가 단신으로 4성 홉고블린을 해치웠다고 하는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4성 홉고블린은 S급이라 해도 쉬운 상대가 아니야. 그걸 A급 각성자가 했다는 걸 믿을 수 있나?"

"믿기지 않은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차강혁 헌터는 S급으로 등급이 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각성자 관리국 박소영 국장이 코웃음을 쳤다.

"가끔 각성자들이 작당해서 그럴 듯하게 얘기를 꾸며내곤 하죠. 말도 안 되는 아주 허무맹랑한 얘기일 뿐이에요."

"하지만 차강혁 헌터라면 그 여명 길드에서 유명한 독종 아니오? E급에서 A급으로 올라왔다는 말이 있던데?"

"그건 사실이지만 A급에서 S급은 차원이 달라요. 저희 관리국에서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근거없는 얘기이니 섣불리 단정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의견이 분분하자 수호원장 이두성이 손을 휘저었다.

"홍 국장!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 따위는 그만 두고 어서 다른 게이트의 상황에 대해 보고해보게. 희생자들은 몇 명이나 나왔는지도."

"예! 원장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