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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뭐…!"

"아, 깜짝이야."

한재임이 고개를 돌렸다.

아픈 척 귀를 슥 문지른다.

"놀랐잖아, 백도운. 이해는 한다만…."

"나무들이 자라났다고?"

"…놀라는 포인트가 거기냐?"

"나무, 그러니까, 숲이었어? 그위친이 숲을 자라나게 했다는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허어…."

숲을 자라나게 했다, 라….

그위친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드루이드다.

숲을 자라게 하는 것쯤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처럼 던전을 바꿀 수도 있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다.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할까.

두 번이라면 우연일 수 있다.

세 번이면 의심할 만하고.

네 번이라면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아직 세 번째 네 번째가 없어 확신할 수가 없다는 건데….

혹시 그위친이 또 다른 세계수 관리인인 건 아닐까.

나처럼 [세계수 키우기] 플레이어인 걸 수도….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을 부정합니다.]

[씨앗을 발아한 건 관리인이 유일하다고 설명합니다.]

아, 역시?

스스로 생각해놓고선 너무 나간 거 같긴 했어.

그럼 그위친은 왜 유사한 능력을 쓸 수 있는 걸까?

우연의 산물에 불과할까?

[어린나무는 접촉해 마나를 교류하면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마나 교류….

아쉽게 됐는걸?

그위친은 오늘 한국을 떠났다.

도희가 나 대신 마중 나갔다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으니….

아, 그래.

울릉도 게이트에 들어가서 숲을 확인해보면 되지 않을까?

그위친도 내가 만든 숲에서 마나를 느끼고 나인 걸 알았잖아.

[어린나무는 경악합니다.]

[관리인의 좋은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새싹아.

너 지금 나 먹이는 거지?

형 상처받게 이럴래?

"…모르겠냐?"

한재임이 대뜸 말했다.

녀석을 바라보자 눈을 찌푸리고 있다.

흔히 보던 얼굴이었다.

답답하다는 뜻이 담긴.

"갑자기 뭘 몰라?"

"방금 내가 한 얘기에서 깨닫는 게 없냐고."

"있지. 그위친 대단하다."

"...."

한재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이 반응은.

그걸 얘기하려던 아닌가?

"뭔데. 그거 말하려던 거 아니냐?"

"대단한 건 당연한 거잖냐."

"아."

맞는 말이다.

방금 들은 바에 따르면 그위친의 대단함은 당연한 거다.

S급 헌터 세 명을 혼자서 상대하며 싸우는데 전혀 밀리지 않는 점….

아니, 오히려 압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라는 건 말하기도 입 아픈 표현이다.

한재임의 대화는 그위친이 대단하다는 건 전제하에 시작된다.

그럼, 이 녀석이 얘기하려는 건….

"그위친은 스미르노프처럼 거인화를 쓸 수 있고, 리롄제와 비슷한 실력의 무투가이며, 동시에 밀러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였다는 거다. 그런데."

"그런데?"

"드루이드의 힘은 쓰지도 않았지."

"셰이프 시프팅 썼잖아."

"드루이드의 진면목이 변신이냐?"

"그건 아니지만…."

드루이드.

그들의 진면목은 길들인 야수나 몬스터들과 함께 싸우는 거다.

하지만 울릉도 게이트에서 그는 그중 무엇도 소환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드루이드의 힘을 쓴 건 길들인 몬스터로 변신한 것뿐이었다.

즉, 그위친은 S급 헌터 세 명과 싸울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위친은 세 명을 제압한 후 울릉도 게이트 바깥으로 쫓아냈지."

"아…."

"너의 부탁을 완벽하게 들어준 거다."

그리 말한 후 한재임은 주먹을 쥐었다.

부르르….

녀석의 주먹이 떨린다.

그 떨림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

그런 존재를 세상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리롄제였다면….

그래, 막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세상은 그위친을 존경과 존앙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위친은 너무 강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였던 리롄제가 전력을 끌어낼 수조차 없었을 정도로.

그러니 세상은 그를 존외와 경외과 외경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마치 '신'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눈앞의 한재임 같이 두려움을 가진 채.

"그래서…."

"...."

"세상은 이무기를 길들였는데도 불구하고 너한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지."

"…그렇군."

이걸 잘 됐다고 해야 할지.

큰일이 났다고 해야 할지….

"다음날 스미르노프는 러시아로 바로 돌아갔다."

"바로?"

"그래. 연구원들을 내버려 두고 자기 통역가랑 떠나버렸지."

"끝까지 제멋대로였구만."

"리롄제는 그위친과 시간을 보냈다는데…."

"그런데?"

"뭘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래도 웃으면서 헤어지긴 하던데."

화해…하진 않았을 거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런 척한 걸 테지.

리롄제, 그 영감탱이 아마 지금쯤 그위친을 찢어발기고 싶어서 속이 까맣게 타고 있으리라.

"밀러는?"

"이틀 전에 미국으로 먼저 돌아갔다."

"그위친은 오늘 떠났다며? 설마 두 사람-"

"아니, 사이가 틀어진 것 같지는 않았어. 그위친이 남기를 희망한 것 같았달까?"

그러면서 날 바라본다.

그위친이 남길 희망한 이유.

그게 나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는 듯했다.

너무 늦게 깨어나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됐지만….

"걱정인걸…."

"...."

그위친이 앞으로 고생할 일이 눈에 훤하다.

울릉도에 있는 이무기처럼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린나무는 이 은혜를 꼭 갚자고 조언합니다.]

[그위친을 위해서라면 나뭇가지도 꺾어줄 수 있다고 전합니다.]

그래, 새싹아.

다음에 그위친 찾아가서 꼭 그렇게 하자.

"…흠, 흠."

한재임은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생각에 빠진 내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

검지와 중지를 펼쳐 내게 내민다.

V?

이놈이 미쳤나.

갑자기 V는 왜 그리고 지랄이야?

"둘째."

"응?"

"유재이라고 했나? 너의 그녀는-"

"나의 그녀라니, 뭔 소릴 하는 거냐, 너."

딴죽을 걸었지만, 한재임은 무시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울릉도에 가 있다."

"뭐? 뭐라고?"

"울릉도에 가 있다고."

울릉도라니….

걔가 거기에 왜 가 있어?

***

서울에서 도운이 한재임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울릉도에선 유재이와 이무기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륵….

둘 중에 먼저 움직인 건 이무기였다.

이무기는 구불거리며 머리를 낮췄다.

그 행동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유재이의 경호원으로서 따라온 김지연과 심윤진은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은 손아귀에서 익숙한 감촉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스윽….

이태천이 팔을 들어 그런 두 사람을 제지했다.

김지연과 심윤진은 그를 바라봤다.

"...."

이태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후에야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무기를 바라봤다.

이무기가 머리를 낮춘 건 유재이와 시선을 맞추려던 거였다.

「그러니까.」

"...."

「이 인간이 관리인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사, 사, 사랑은 무슨…!"

유재이가 얼굴을 붉혔다.

부정하려는 듯 팔을 휘둘렀지만,

"네!"

홍수정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제173화

"걔가 거기에 왜 가 있어?"

"그녀가 왜 거기에 있는가…."

내 질문에 한재임이 검지와 중기를 거뒀다.

손깍지를 끼고는 꼰 무릎 위에 올린다.

"그 이유도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줘야 하나?"

"시답잖은 소린 됐고."

"흠…."

한재임은 오른손 엄지로 왼손 엄지를 두드렸다.

천천히 서너 번 두드렸을까.

생각의 정리가 끝난 듯 설명을 이어나간다.

"크라우드가 네놈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새삼? 거 더럽게 놀라운 정보네."

"…'전력을 다해'서 말이다."

"전력을 다해서?"

"정보원은 필사적이라고까지 표현했다더군."

"뭔 소리야."

"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크라우드라는 조직이 궤멸하는 것도 불사할 것이다. 그리 말했다고 하던데."

조직이 궤멸한다고 해도…?

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소리다.

"그놈들은 뭘 또 그렇게까지 한대?"

"이유는 모르겠다, 만. 태천이와 백도희는 듣고 나서 수긍하더군."

"두 사람이 수긍했다고?"

"그래."

"흐음…."

크라우드가 그렇게까지 하려는 걸 수긍했다, 라….

어째서지?

[세계수 어린나무가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고 전합니다.]

뭔데?

[어린나무는 마족의 권속들이 관리인의 정체를 알게 된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세계수 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조직이 궤멸한다고 해도 살해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고 전합니다.]

오, 그럴듯한데?

존재하는 것만으로 방해가 되는 세계수.

전대 세계수를 죽인 전적이 있는 마족.

세계수와 마족은 서로 천적 관계인 동시에 철천지원수 사이다.

그놈들이 세계수 관리인인 날 죽이고 싶은 건 당연하다.

"…너도 이해가 되나 보는군."

"어, 되네."

새싹이의 추측이 맞을 터.

두 사람이 수긍했다는 것도 내가 세계수 관리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한재임이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설명 안 할 거냐?"

녀석은 태천이에게 내 정체에 관해 듣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나에 관련된 것이니 말하지 않은 걸 테지.

도희하고는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은 아니니 당연히 못 들었을 테고.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을 넘어 나쁜 편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재임을 바라봤다.

"할 것 같냐?"

"후우. 그래. 기대도 안 했다."

내 대답에 한재임은 미간을 찌푸린다.

자기만 정보를 알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말해줄 놈은 아니었기에 녀석은 더 묻지 않는다.

"아무튼."

한숨을 내쉬고 눈썹을 찡그릴 뿐.

말하던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크라우드. 비열한 놈들이잖아."

"비열한 놈들이지. 비열함만으론 세계 제일일 거야?"

박쥐, 모기, 벌, 버섯, 뱀.

지금까지 만난 크라우드 놈들은 하나 같이 글러 먹은 놈들뿐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영혼까지 팔아 놓고 타인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무지렁이들.

"그래. 그런 놈들이니, 너의 그녀를 노릴 거라고 판단했다. 울릉도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아까부터 왜 자꾸 너의 그녀라고 하는 건데. 그 소리 좀 그만해."

"그러지."

한재임은 어깨를 으쓱였다.

반응을 보니 나한테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다.

정말로 유재이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인 줄 아는 듯했다.

아마 태천이가 그런 식으로 설명한 게 분명하다.

옆에서 도희가 태천이를 노려보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그런데 웬 울릉도? 지킬 거면 서울이 낫지 않아?"

"벌써 여러 번 말했듯이, 태천이와 이무기가 거기에 있으니까."

"아."

"현재 한국에서 그곳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다고 판단했다."

"하긴…."

한재임의 말대로였다.

울릉도엔 A+등급 몬스터인 이무기와 한국 최고의 탱커인 태천이가 있었다.

그 둘이 유재이를 지키고 있다면, 크라우드는 감히 그 섬으로 쳐들어갈 수 없으리라.

설령 크라우드가 생각보다 더 미친놈들이라서 쳐들어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예상외로 놈들 전력이 강력하다고 한들 문제는 없다.

이무기가 유재이를 데리고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버스트 모드를 쓰면 놈들은 쫓아갈 수조차 없을 터였다.

그럴 수 있는 놈들이었으면, 지금까지 한진환이 살아있을 수도 없었겠지.

"잘했네."

"음."

"근데 난 왜 여기 있는 거냐?"

"뭐?"

"그렇잖아. 크라우드는 날 노리는 건데. 울릉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

한재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견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놀라웠다.

나와 녀석은 매번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반목했는데….

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도 해서 멍청한 짓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면, 김정철 때 내가 관리소장을 칼로 찌르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은 일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널 울릉도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었다, 만."

"만?"

"울릉도에 서울만큼 좋은 병원이 없다는 이유로 백도희가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

그 말과 함께 도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동안 일어나지 않는 나를 보며 걱정하는 얼굴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입에선 아무 소리나 튀어나왔다.

"입원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건 네가 백도희한테 직접 따져."

"아니, 누가 따지고 싶대?"

"...."

"도희 마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야. 울릉도엔 병원이라고 해봐야 보건의료원이나 보건소가 다일 거잖아? 아하하."

"...."

한재임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날 봤다.

그러다간 고개를 가로젓는다.

누가 보면 자기는 도희 안 무서워하는 줄 알겠네.

지도 도희 무서워서 앞에 있을 땐 별말도 못 하는 주제에.

내가 울릉도가 아니라 이곳 서울에 입원해 있는 게 그 증거다.

"아, 정보는 어떻게 입수한 거야? 연후 씨가 알아냈나?"

"설명해줄 것 같냐?"

"어. 해줄 것 같은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녀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답지 않게 튕기고 지랄이야.

"버섯…? 이라는 놈이 재이네 대장간으로 찾아와 가르쳐줬다더군."

"뭐? 누가 어딜 찾아와?"

"버섯이 재이네 대장간에."

"허, 이놈 봐라?"

"자신을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던데. 듣기로는 너와 굉장히 친하다고?"

"친하기는 개뿔."

"다행이군."

"갑자기 뭐가?"

"너 같은 거랑 친하다기에 걱정하고 있었거든. 이상한 놈은 아닌 모양이야."

"아, 새끼. 아까부터 자꾸 실없는 소리 할래?"

"...."

한재임은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침묵의 힘이란 것일까.

마치 "실없는 소리 한 적 없다만"이라고 말하는 걸 넘어 온몸으로 주장하는 듯했다.

그래.

나를 진심으로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놈과 무슨 대화를 나누겠어.

고개를 돌려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톡, 톡톡….

조금 더 자란 어린나무가 된 새싹이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대체 버섯의 목적은 뭘까.

홍수정이 노려지고 있는 걸 경고해주고.

내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도 경고해주고.

마족에게 영혼까지 판 놈이니 조직을 배신하려는 건 아닐 텐데….

"흠…."

"뭐, 자세한 건 유재이에게 직접 듣도록 하고."

한재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 중지, 약지.

세 손가락을 펼친 채 말했다.

"마지막으로, 셋째."

"셋째? 설마…."

이놈 이거 설명할 생각이었던 건가?

내가 깨어나자마자 자기를 봐야 했던 이유를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먹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진짜.

"그만해."

"음?"

"진짜 세 가지 다 말하려고?"

"해달라며."

그리 말하는 한재임은 손가락을 접었다.

해달라고 해놓고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퉁명스러운 얼굴은 마치 그리 따지는 듯했다.

"아니, 그건 그냥 하는 소리지. 그걸 진짜로 일일이 다 설명하는 새끼가 어디 있어?"

"...."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손깍지를 낀 채 뻔뻔하게.

"…하, 진짜 이 새끼는 왜 농담이 안 통하지."

"농담이었냐?"

"뭐?"

"네가 나한테 농담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

생각해보면, 한재임 말이 또 틀린 건 아니다.

나랑 녀석은 농담할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보육원 때부터 만나면 으르렁대기 바빴던 터라 서로 농담을 건넨 적은 없었다.

분명 '너의 그녀'라고 말한 것도 농담이 1%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겠지.

"…야."

"왜?"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세 번째는 뭐였냐?"

"셋째는…."

한재임은 날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도 셋째에 관해 설명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 대리보다는 나와 연지가 있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성훈? 그놈이 갑자기 왜 나와? 아니. 그놈 얘긴 됐고. 연지가 있었어?"

주변을 돌아본다.

혹시 내가 못 봤던 건가 싶어서다.

연지는 안 보이고 사람들이 놓고 간 듯한 문병 선물꾸러미만 보였다.

과일주스, 고급 과일 세트, 중급 힐링 포션 등등.

요즘 같은 포션 부족 시국에 중급 힐링이라니….

아무래도 저건 우연후가 놓고 간 것 같다.

"둘이서 너를 지키고 있었거든. 공격받으면 바로 울릉도로 도망치는 게 계획이었지."

"근데 왜 너 혼자야?"

"10시 넘어서."

"아, 연지 미성년자지…."

"순간이동 마법은 나도 쓸 수 있으니…. 뭐, 그런 연유로, 너는 일어나자마자 나를 봐야 했던 거다."

"진짜 타당하고 논리적이네…. 반박할 수가 없는걸."

후, 인정할 수밖에.

한재임이 말한 대로 이성훈이 있는 것보단 나았다.

반박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한 순간.

딱!

한재임이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얇고 네모난 무언가를 꺼냈다.

"너 깨어나면 건네준다는 걸 깜빡했다."

"...?"

내가 이놈한테 받을 만한 게 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녀석이 내민 건 헌터 자격증이었다.

웬 헌터증?

"네 거다."

"내 거?"

"그래."

"갑자기 왜…. 아. A급 헌터 자격증이구나."

건네받은 자격증엔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보니, 난 계속 B급 헌터 자격증을 갖고 다녔었다.

한진환이 전화 한 통으로 등급을 올렸었던 탓이다.

무주 개미굴에 가기 위해서 워프 게이트를 사용했을 때도 B급 자격증을 제출했었다.

시스템상 등록은 A급으로 돼 있었지만….

나중에 발급받아야지 생각했던 게 그만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아…."

한숨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녀석을 바라보자, 오늘만 벌써 두 번은 본 것 같은 얼굴과 자세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뜻이다.

"뭔데, 그 한숨은."

"말하기도 귀찮다. 직접 확인해."

"...?"

한재임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건네받은 자격증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머리를 묶은 내가 씩 웃고 있다.

얘는 어쩜 이렇게 제 동생을 하나도 못 닮았을까.

내 사진 맞고.

[백도운]

내 이름도 맞고.

이어 옆의 등급을 확인했다.

"…응?"

등급엔 'A'라고 쓰여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A'만' 쓰여 있지 않았다.

[백도운, A+급 헌터]

"이거 뭐야? 왜 A+급이야?"

"네가 이무기를 길들였으니까."

"뭐?"

"A+등급 몬스터를 길들였으니, 당연히 너도 오른 거라고."

"아니. 나 이무기 길들인 거 아닌데?"

"태천이한테 들었다. 이무기와 친구가 됐다고?"

"뭐야, 들었으면서 왜 그렇게 말하냐?"

한재임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다.

"세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

"세상…?"

"그위친 때문에 묻히긴 했지만, 그래도 온 세상이 이무기의 실드를 없애는 널 보고 있었어."

"아…."

한진환….

그 양반 안 어울리게 열심히 촬영했었지.

쓸데없이 유능한 카메라맨 같으니라고….

"당연히 열에 한 번 정돈 네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무기의 주인'으로서."

"뭐? 뭔 주인?"

"이무기의 주인."

"...."

[어린나무가 분개합니다.]

[관리인은 세계수 관리인이라고 소리칩니다.]

[월광의 검사도 싫은데]

[이무기의 주인이라는 말은 더더욱 싫다고 토로합니다.]

[관리인에게 온 세상에 세계수 관리인이라고 주장하길 요청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토라질 거라고 경고합니다!]

그건 좀 참아주라….

세계수 관리인을 들키기 싫어서 그위친한테 그런 부탁도 한 건데.

그게 알려지면 귀찮아지는 것 정도로는 안 끝날 거라고.

아마 우리나라 정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전국 던전 소탕 계획을 수립할걸?

심하면 평양 던전을 건드릴 생각까지 할지도….

[ ]

공란이라니.

벌써 토라진 거야?

제174화

[ ]

새싹이는 삐졌다고 말하고 싶은 듯 공란을 보내왔다.

그 모습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진다는 걸 알까.

분명 모르겠지.

자격증을 옆으로 치우고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린다.

"백도운."

톡, 톡톡.

한재임이 화면을 두드리는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녀석은 난생처음 보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는 얼굴.

오로지 '나'를 향한 호기심만이 담긴 얼굴이었다.

"…왜?"

"하나만 묻자."

싫은데.

평소라면 그리 대답했을 거다.

그런데 한재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해서, 한발 뒤로 물러난 대답을 했다.

"들어보고."

"너, 대체 뭐냐…?"

역시 그 질문인가.

한재임으로서는 당연히 느낄 의문이었다.

백도운은 어떻게 이무기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증표가 된 따스한 손길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그위친에게 다른 이들을 모두 내쫓아달라는 부탁을 했을까.

그위친은 어째서 밀러를 저버리고 그 이상한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아마 녀석의 머릿속엔 이런 의문들이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의문들은 나의 정체로 답을 낼 수 있는 것들이다.

"흠…."

고민이 되는걸.

평소라면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대답하더라도 대충 넘겼겠지.

평범하디 평범한 헌터라느니, 잘난 동생을 둔 오빠라느니.

뭐, 한재임이니까 "나는 태천이의 가장 친한 친구 A지"라고 약을 올렸으리라.

하지만….

난생처음 녀석의 진지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자니 실없는 소리로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일까?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어린나무는 어서 세계수 관리인이라고 말하기를 요청합니다.]

새싹이가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왔다.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것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세계수 관리인]

중복 도배 그만해, 새싹아.

형 슬슬 무서워지려고 한다.

뭣보다 그렇게 메시지 보내면 형 오기 생겨서 안 돼.

[어린나무는 나뭇가지를 갸웃거립니다.]

[관리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전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강요받으면 따르고 싶지가 않달까.

그 반대로 행동하고 싶어진달까….

지금도 딱 그러네?

자꾸 세계수 관리인을 보내오니까 오기로라도 밝히고 싶지가 않아.

[어린나무는 순순히 인정합니다.]

[지금까지 관리인의 그런 점을 잘 봐왔다고 전합니다.]

[더는 강요하지 않겠다고 전합니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새싹아.

"...."

"...."

새싹이의 메시지에서 시선을 돌려 한재임을 바라본다.

이 녀석과 이렇게 마주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 속에 마주 보던 얼굴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있기는 한 듯하다.

대부분 표정이 좋지 못한 걸 보니,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뭐, 매번 만나면 투덕거리기만 했으니 당연한 걸 테지.

개인적인 호불호를 제외한다면.

한재임은 내가 세계수 관리인이라는 걸 말해도 괜찮은 놈이다.

태천이가 제 오른팔처럼 의지하는 점도 그렇고.

깐깐한 도희가 날 지킬 사람으로 믿고 맡겼다는 점도 그렇다.

좋아.

한재임, 아니, 백운천 사람들에겐 말하자.

앞으로 크라우드와 한탕 크게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다.

대답해주고자 천천히 입을 연다.

"나는…."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내 말을 끊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도희가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다.

기절한 놈 병실에 들어오는데 뭘 그리 조심하는 걸까.

도희가 마음 써주는 게 고맙지만, 한편으론 웃겼다.

그래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이."

"...!"

도희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다 말고 서서서는 날 빤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내가 깨어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많이 놀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이…라고요."

"방금 한재임한테 들었어. 나 대신 그위친 마중 나갔다 왔다며. 수고 많았어."

"하아…."

도희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내게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엔 힘이 없었다.

피곤함? 고단함?

그런 게 느껴졌다.

이해한다.

도희는 요 며칠 동안 내가 해야 했을 일들을 대신해주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근데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뭐? 하이?"

"그럼 뭐라고 해?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라도 할까."

도희가 눈을 부릅떴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하냐는 듯 따지는 듯하다.

이럴 때 보면 여타 여동생이랑 똑같은데 말이야.

곧 도희는 내 앞에 섰다.

"왜 전화 안 했어요."

"우문을 묻는구나."

"뭐라고요?"

"이무기 흉내 내봤어. 어때?"

"...."

"전화 안 한 이유는, 이거."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화면이 보이도록 들고는 좌우로 흔들었다.

"보시다시피 우리 새싹이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느라."

"...."

"…과도 빌려줄까?"

한재임이 과도를 가리키며 끼어들었다.

과도는 여전히 냉기를 내뿜으며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도희는 시선을 돌려 한재임이 뻗은 손끝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얼음으로 조형한 그릇과 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담긴 쟁반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쟁반 쪽을 빌리고 싶은데요."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녀석은 쟁반 위에 있는 것들을 치웠다.

그러고는 텅 빈 쟁반을 부드럽게 내밀었다.

도희는 한재임이 내민 쟁반을 빤히 쳐다봤다.

뭐랄까.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정말로 쟁반으로 나를 때리고 싶은 듯이 보였다.

스윽….

도희가 손을 들어 올렸다.

"...!"

와, 씨.

깜짝이야.

진짜 쟁반 집어 들고 나 때리는 줄 알았네.

각인된 공포 때문인지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후우…."

다행히 도희는 쟁반을 집지 않았다.

양손을 들어 올린 건 자기 얼굴을 덮기 위해서였다.

흰 얼굴을 덮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쥐어박고 싶어…!"

"음,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도희보다 옆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덧붙이는 한재임이 더 거슬렸다.

스윽….

도희는 손가락을 살짝 벌리고는 그 사이로 한재임을 노려봤다.

그래, 도희야. 그거야.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줘!

"뭘 잘했다고 떠들어요?"

"뭐…?"

"오빠는 왜 전화 안 했는데요? 오라버니가 일어났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서 알렸어야죠."

"너한테? 전화를?"

"네!"

"아직 태천이한테도 안 했는데?"

"아…, 그래요?"

도희는 눈에 힘을 풀었다.

녀석의 말에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한 것이다.

심지어 미안하다는 듯 고개까지 살짝 숙였다.

아니,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태천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게 용서하는 이유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도희에게 미안함까지 끌어낼 줄이야….

이게 한재임이 태천이에게 그만큼 미쳐있다는 방증이겠지.

미친놈.

"다시는…."

도희가 운을 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찰싹, 왼손을 뻗어 내 가슴 윗부분을 때린다.

"다시는 그거 하지 마요."

"그거? 가지치기 말하는 거야?"

"네. 그거요.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하하…."

놀랄 만도 했다.

오빠 몸이 터져 나가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또 그뿐인가?

가지치기는 말 그대로 온몸이 폭발한다.

내 머리까지 터져 나간다는 소리다.

"웃지 마요! 그날 오라버니 머리, 머리가…."

그날 모습이 떠오른 걸까?

부르르.

도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

입에 담기도 싫은 듯 보였다.

이럴 거 같아서 태천이에게 눈을 가려달라고 한 건데….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다.

뭐, 태천이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도희는 태천이의 손을 치우고자 무슨 짓이라도 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용서해줄 생각은 없지만.

"못 볼 꼴 보여 줘서 미안해."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그거 다신 하지 말아요. 알았죠?"

"나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이게 불가항력이라서…."

"아…, 그렇겠네요."

도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 쓸 수 있었다면, 오라버니가 게이트 안에서 그러지도 않았겠죠. 그위친한테 그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역시 우리 도희다.

설명을 따로 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나와는 달리 머리가 비상해.

"참. 그위친이 안부 전해달래요."

"오."

"만나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대요."

"미안하기는…. 미안한 건 오히려 내 쪽이구만."

"아쉽기는 해요. 그위친은 미국에서 빨리 돌아오라는 걸 오늘까지 버티다가 돌아간 거였거든요."

"어, 그랬어?"

"네. 반나절만 빨리 깨어났어도 만날 수 있었을 거예요."

"저런…. 그건 정말 아쉽게 됐는걸."

"그리고."

"응?"

"시간 될 때 미국에 한 번 들러달라고 했어요. 그날? 못했던 일을 마무리하자고 말하던데요."

그날? 못했던 일?

나와 그위친 사이에 마무리할 일이란 게 있었나?

생각하는데,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어린나무는 손을 맞잡는 일을 말하는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관리인에게 거인 때문에 그위친과 손을 맞잡지 못했었다고 설명합니다.]

아아.

그 일 말하는 거구나.

서로 마나를 교류하려고 했던 거.

"그러고 보니…."

"...."

도희는 날 빤히 바라봤다.

아마도 '그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리라.

가르쳐주고 싶긴 한데, 나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와 그위친이 유사한 점이 있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죠?"

"어, 괜찮은 것 같아."

"것, 같아?"

"몸살기가 있는 것처럼 조금 쑤신, 달까…. 음…."

눈 좀 희번득 뜨지 말아 주라, 좀.

무서워서 침이 절로 삼켜지잖아.

[어린나무는 이따금 관리인의 동생이 무섭다고 고백합니다.]

괜찮아, 새싹아.

지극히 정상이니까.

나랑 태천이는 매일 무서워하고 있어.

"대체 일어나서 몸 체크도 안 하고 뭘…!"

도희는 말을 하다 입을 다문다.

눈을 질끈 감고 화난 기색을 참으려는 듯 숨을 길게 내쉰다.

후유증이 아직 남은 나를 배려해주려는 것이리라.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기가 싫었는지 한재임이 끼어들었다.

"게임 하던데. 인사까지 하는 꼴이 정말 미친놈 같았다."

"…진짜 지금이라도 쟁반으로 후려쳐버릴까."

"건네줘?"

"...."

한재임이 아까처럼 네모난 쟁반을 내민다.

이번에야말로 도희가 쟁반을 집어 들고 후려칠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

피할 수 있는 고통은 피하고 봐야지.

"당장 확인할 테니 조금만 참아보는 게 어떨까? 응?"

"…서둘러요."

"응."

"서두르지 않으면-"

"알았어, 알았어. 서두르면 되잖아, 서두르면."

도희의 말을 끊으며,

"캐릭터 창."

캐릭터 창을 열었다.

내 스마트폰에 세계수가 자라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재임이 입을 쩍 벌렸다.

백도운,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딱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날 바라본다.

한 마디 내뱉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끝난 건 도희가 가만히 날 보고 있어서다.

도희가 두통이라도 느낀 듯 이마를 짚고 있지 않았더라면, 한재임은 분명 한소리 했으리라.

아니면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싶어 시선을 돌려 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캐릭터 창을 확인했다.

[캐릭터 창]

[백도운 – 세계수 관리인]

[타이틀 - 세계수의 동반자]

[HP – 95%(페널티)]

[MP – 2000만260]

[SP - ∞]

[상태 – 광합성 모드 후유증]

...응?

이게 뭐지?

버근가?

제175화

[캐릭터 창]

[백도운 – 세계수 관리인]

[타이틀 - 세계수의 동반자]

[HP – 95%(페널티)]

[MP – 2000만260]

[SP - ∞]

[상태 – 광합성 모드 후유증]

이게 뭐지, 버근가?

당황스러우니 눈이 자꾸만 껌뻑였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다.

또렷하게 뜬 눈으로 캐릭터 창을 들여다본다.

[MP – 2000만260]

그래도 표기된 마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나 수치가 왜 이 모양인 걸까.

이게 정말 맞는 건가.

그런 의심이 절로 피어오를 정도다.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의심을 부정합니다.]

[이어 오류나 버그가 아니라며 안심시켜 줍니다.]

그럼….

정말 내 마나를 뜻한다는 거야?

나한테 저만한 양의 마나가 있다고?

"…허!"

이러니까 가만히 서 있는데도 마나 회로가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갔지….

태천이가 툭 건드렸다고 어깻죽지가 터진 게 이해가 된다.

2000만 정도 된다면, 마나 순환이 제대로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가지치기 한 번으로 해결된 게 더 놀랍다.

"오라버니…?"

"응?"

"왜 그래요? 많이 안 좋아요?"

"어?"

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니 문제가 있는 줄 안 모양이다.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냐, 괜찮아."

"정말요? 진짜 괜찮은 거예요?"

"그렇대도."

"...."

"진짜야. 생각보다 더 괜찮아서 당황한 거야."

그리 말하며 캐릭터 창을 다시 훑었다.

마나 과다증은 가지치기를 통해 완벽하게 해결돼 있었다.

상태 칸에 광합성 모드에 의한 후유증이 떠 있긴 했지만….

페널티로 HP가 5% 줄어 있는 게 다였다.

회복력이 좋은 나로서는 페널티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걸 제외한다면, 몸살기가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가 쑤시는 것 정도다.

"후유증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한데."

"후유증이요?"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알았어요. 그럼, 지금 당장 일어나요."

"응? 일어나라고?"

쉴 시간을 주지 않는 도희를 바라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바로 일을 부려먹어도 괜찮다고는 안 했는데….

도희는 어서 일어나라는 듯 손바닥을 위로 흔든다.

"서둘러요. 울릉도 가야 하니까."

"울릉도? 지금?"

"네. 지금 바로요. 크라우드가-"

"나 노리고 있다며. 알아. 한재임한테 들었어."

"그리고."

도희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필사적으로 노리는 것 말고 또 뭐가 있나?

"놈들은 아마 오늘 밤 오라버니를 노릴 거예요."

"오늘 밤에…?"

"네. 그위친을 마지막으로 S급 헌터들이 전부 돌아갔으니까요."

"아…."

내가 세계수 관리인인 것을 알면서도.

의식을 잃은 상태여서 제대로 된 반격할 수 없는데도.

크라우드가 그동안 쳐들어오지 않았던 이유.

그건 그동안 S급 헌터들이 한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핵처럼 억지력(抑止力)이 되는 이들이었으니까.

특히, 그중에서도 그위친의 존재는 크라우드가 더더욱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터였다.

그런 억지력이 오늘 밤 떠났다는 걸 알게 된다면…?

크라우드가 어떻게 나올지는 당연지사였다.

이리저리 마구 휘둘린 콜라병처럼 폭발하는 것을 참지 못하리라.

"좋아."

한재임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사과가 담긴 쟁반을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토끼 모양으로 깎인 사과는 귀여웠다.

귀여워 보이기는 하는데….

왜 이렇게 꼴 보기가 싫담.

"퇴원 절차는 내가 밟고 오도록 하지. 둘은 출발 준비 하고 있어."

"아, 고마워요."

"고맙기는."

한재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날 바라봤다.

녀석의 눈빛에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 정체에 관해 꼭 듣겠다는 의지였다.

뭐, 본인 운 없는 걸 탓해야지 어쩌겠는가.

도희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난 분명 대답해 줬을 거다.

[어린나무는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새싹이 너도 이 일에 관해선 본인 운을 탓해야 할 거야.

아니면 도희한테 따져 보든가.

[어린나무는 아무 불만이 없다고 전합니다.]

[진실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아휴, 우리 새싹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거짓말을 잘할까?

[어린나무는 불쾌함을 토로합니다.]

[본인은 관리인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부정합니다.]

하하하.

그거 알아, 새싹아?

난 방금 나 닮았다고 말한 적 없다는 거.

[...!]

거기에서 날 떠올린 것부터 이미 늦은 거란다.

너는 훌륭하게 백 씨 집안 아이가 되어 가고 있어.

너도 모르는 사이에.

***

크라우드의 원탁엔 11명이 앉아 있었다.

원탁에 준비된 자리는 총 12개였으나, 한 자리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천칭의 서지혁에게 붙잡혀 도운에게 넘겨진 뱀의 자리는 아니었다.

현재 도운의 빌딩 지하실에서 나무와 풀숲의 엔진 신세가 된 뱀의 자리에는 새로운 이가 앉아 있었다.

며칠 사이에 다시 채워진 자리.

그 자리의 주인은 가슴께에 '편자' 모양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늑대가 말했다.

"스승님. 토끼를 제외한 모든 간부가 모였습니다."

"그래…."

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해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끼는 왜 오지 않은 거지?"

"곧 아이가이온의 마스터인 최동훈의 권속화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 그 작업을 담당한 게 토끼였나?"

"그렇습니다. 맡겨달라고 자원했었습니다."

"그렇군…."

늑대의 대답에 해골도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는 뱀과 달리 허락을 받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단죄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원이 홀로그램 영상을 띄우며 말했다.

"오늘 밤."

홀로그램 영상엔 그위친과 백도희가 떠 있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로 멈춰 있던 영상이 실행됐다.

그는 백도희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위친은 마치 어린 딸을 대하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홀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드디어 그위친이 이 나라를 떠났다."

"밀러가 떠날 때 같이 떠났으면 좋았을 것을…."

"크게 싸웠지 않나."

"아쉬워서 그러지. 그위친이 빨리 떠났다면 지금쯤 백도운을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음…."

원은 고개를 끄덕여 해골의 말에 동의했다.

해골의 말대로 그위친이 빨리 떠났다면.

백도운은 이미 죽이고도 남았을 터였다.

아무리 세계수 관리인이라고 해도 의식이 없는 자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럼, 주인이시여…."

풍뎅이가 공손하게 끼어들었다.

해골은 풍뎅이를 바라봤다.

"바로 출발합니까?"

"아니, 아직이다."

"아직이라 하심은…."

"그위친을 태운 비행기가 더 멀리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되돌아올 수 있으니…."

"...."

"호승심은 접어두거라. 그위친과 싸우는 것보다 우리의 대업이 더 중요하니." "송구합니다…."

풍뎅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해골은 그런 풍뎅이가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원을 바라봤다.

"한 시간 후쯤 출발하는 게 어떻겠나?"

"동의하네. 그 정도면 그위친의 '범위'에 닿지 않겠지."

"좋아. 다들 들었겠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후 세계수 관리인 사냥을 시작한다."

"네…!"

9명의 간부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해골은 그런 간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바라봤다.

마치 후드에 가려진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다들 단단히 준비하도록."

"...!"

해골이 부드럽게 말했다.

평소에 한 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에 간부들은 경악했다.

간부들은 놀란 감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냈다.

평소였다면.

그 꼴을 본 해골은 한숨을 내쉬고 혀를 차는 등 한심스럽게 여겼을 터였다.

해골은 그리 행동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밤을 함께 맞이하고 싶으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네!"

간부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마치 해골의 말에 감동한 듯했다.

그러나….

그건 모두 해골의 거짓말이었다.

해골은 현재 원탁에 있는 이들 중 일곱은 죽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여섯 정도만 죽고 끝이 나리라.

그 순간,

"음…?"

"이 마나는…."

원과 해골이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두 사람이 느낀 것을 느끼지 못한 간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를 바라보곤 무언가를 느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늑대와 풍뎅이만이 조용히 원과 해골을 바라봤다.

"과연…."

"즐거운 오산이로군."

"과소평가한 내 실수네. 그래도 한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길드의 마스터이거늘…."

"뭐, 뭐. 작은 나라이지 않나."

"음…."

간부들은 원과 해골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늑대와 풍뎅이는 이해한 듯했다.

자신들이 앉아 있는 회의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두 간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을 때, 건물이 흔들거렸다.

미세한 떨림이 점점 커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건물 전체가 요동쳤다.

간부들이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는 가운데, 원과 해골은 미소를 지었다.

실수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

입가에 미소가 빠르게 뒤틀렸다.

비틀린 미소는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짐작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설마…."

"실로 놀랍군."

"최동훈이 이 정도였는가…."

"피해라."

"분부대로, 주인이시여."

해골의 명령이 떨어지자 풍뎅이가 바로 움직였다.

이어 개미를 비롯한 다른 간부들이 따라 일어났다.

쾅!

바닥에서부터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 무언가는 원탁의 반을 파괴하고 천장에 처박혔다.

"...!"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자리를 피하는 게 늦었더라면.

간부들은 방금 천장에 처박힌 것에 휩쓸렸을 것이었다.

개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설마…."

천장에 박힌 그것은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애초에 서로 얼굴로 알아보지 않았다.

가슴께에 달린 브로치로 구분했으므로, 개미는 보이지 않는 얼굴과는 상관없이 단번에 정체를 알아차렸다.

"토끼…?"

토끼는 최동훈의 권속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는 건….

바로 최동훈의 권속화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놀랍도다…."

"아쉽구나, 아쉬워."

"그분의 권속도 아닌 주제에 이 정도 힘을 얻었단 말인가."

"이놈들이 아니라 저놈이 그분의 권속이 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과 해골이 토끼를 보며 감정을 드러냈다.

둘의 목소리에는 각각 감탄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간부들은 그 감정들에 불만을 토로하지도 입을 뻥긋하지도 못했다.

그저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간부들은 동시에 귀를 만졌다.

웬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렸다.

"텔레파시인가."

"그것도 다중 텔레파시로군."

최동훈의 목소리가 원과 해골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크라우드. 네놈들이 나를 세뇌하려고 들어?]

"오해다, 최동훈."

"그래, 우린 널 세뇌할 생각이 없어."

[없다고? 나 자신이 바로 그 증거인데, 지금 발뺌하려는 거냐?]

"흥분을 가라앉히고 느껴 보아라. 네가 원한 것을 우리가 주었음을 모르겠느냐?"

"그래, 직접 느껴 보면 알 일. 네 원대로 우리는-"

[개 짖는 소리!]

머릿속에 최동훈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울렸다.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분노에 원은 입술을 비틀었다.

반면 해골은 재미있는 듯 흐흐 웃었다.

"그래, 그래. 기만은 그 정도만 해주마, 최동훈. 너는 실험할 가치가 있는 놈이니…."

[후회하게 해주겠다, 크라우드.]

"흐흐. 그것참 기대가 되는군. 자…. 기다려 줄 테니 어서 해봐라. 날 어떻게 후회하게 해줄 것이냐?"

[이미 시작했다, 멍청아.]

"했다고?"

[그래. 세뇌는, 바로 내 전문이거든…!]

"흐응…?"

해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동훈의 이미 시작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순간,

"히, 히히! 히히히히히히!"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 처박힌 토끼가 온몸을 떨며 미친 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그러고는 제 몸을 자해하기 시작했다.

제176화

부화장에서는 토끼가 홀로 앉아 커다란 번데기를 바라봤다.

번데기는 심장이 박동하듯 커졌다 작아졌고, 그것에 맞춰 지글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지글… 지글… 지글….

토끼는 그 소리가 자장가라도 되는 듯 가만히 들었다.

"기대돼…."

번데기에 몸을 기댄다.

치이익….

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덮쳤다.

번데기에 기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 열기가 쾌락으로 다가온 걸까.

토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서 빨리 권속화가 끝났으면 좋겠어. 최동훈…. 당신은 어떤 모습이 될까? 그게, 너무 기대돼."

그녀는 손바닥을 번데기에 갖다 댄다.

또다시 치익 소리가 울렸고, 손바닥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열기를 갖고 놀고 싶기라도 한 듯 잠깐 떼었다가 다시 갖다 댔다.

스윽….

그러고는 엄지로 사랑하는 이의 입술을 닦듯 문질렀다.

꿈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하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 되든 상관없어….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가질 거니까. 아무에게도 넘기지 않아."

쿵!

그녀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번데기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박동하던 것과는 달랐다.

방금 있었던 현상은 엄마 배 속에 있는 태아가 발로 차서 부푼 것과 더 비슷했다.

"뭐야?"

토끼의 입에서 당황스러움이 튀어나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마음은 곧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변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이 말이 되어 입으로 자꾸 새어 나온다.

"이건, 이건 권속화하고는 상관이 없는 현상인데…? 당신, 방금 대체 뭘 할 거야?"

쿵!

번데기가 한 번 더 커졌다가 작아졌다.

이번엔 아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에 튕겨 나가듯 토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번데기를 향해 두 팔을 뻗는다.

"아니야,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치이익!

두 손이 뜨거운 번데기에 닿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손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넘어 부르트기 시작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번데기의 이상 현상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빛깔이 산뜻하지 못한 마나가 두 팔을 통해 빠르게 번데기에게 옮겨졌고,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것을 억압했다.

"당신은 권속이 돼야 해! 나의, 나만의 권속이 되어야 한다고!"

쿵!

그러나 소용은 없었다.

번데기는 부풀어 오르고 작아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현상이 반복될수록 부풀어 오르는 부피가 점점 커져만 갔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단 말이야…!"

토끼는 애원하기까지 했으나 이상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쿵!

더 빨라져 갈 뿐.

***

번데기 속에는 최동훈이 있었다.

그는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로 있었다.

그 모습은 편하게 잠을 자는 듯이 보였으나, 사실 지금 그의 정신은 마족의 권속의 세포에 잠식되어 갉아 먹히는 중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최동훈이 사라지고 마족의 권속의 권속으로서 새로 태어나고 있는 거다.

그 때문에 그의 머릿속은 여러 기억으로 혼잡했다.

최동훈이라는 인간의 기억들.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이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기억들은 시간과 때가 달라 혼잡했으나 일관성을 지녔다.

바로 삶의 방향을 바꿨을 만큼 큰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

"저를, 저를 버리는 건가요!"

한 여자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최동훈의 혼잡한 의식이 그 비명을 붙잡았다.

다른 기억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대신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에 눈물이 맺힌 여자의 얼굴은 애처로워 보였다.

"버린다? 굉장히 모순된 말을 하는데."

"네…?"

"내가 널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버리지?"

"...!"

여자가 몸을 휘청였다.

최동훈의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탓이다.

그 모습을 비웃으며 최동훈을 말을 이어 나갔다.

"옆에 계속 붙어 있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감히 김무연을 데려오는 것을 방해하지는 마라. 그 녀석은 내게 꼭 필요한 놈이니."

"필요한…."

"그래. 너와는 달리 말이야."

"...."

털썩….

여자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버티고 서 있을 만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꽈악, 부르르…!

마음에서부터 올라오는 수치와 분노를 붙잡으려는 듯 주먹을 쥔다.

"…그럼, 나는…! 나는 대체 당신한테 뭐지?"

"쓰다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말."

"...!"

"이라고 한다면, 내 부하들에게 실례가 되겠지."

"뭐? 당신, 방금 뭐라고…!"

"이해하지 못하겠나? 역시 멍청하군."

"최동훈…!"

"민서희. 너는 그냥…."

최동훈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 무릎을 꿇고 있던 여자가 까만 지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신 탄탄한 근육이 돋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떠올랐다.

최동훈이 마스터로 있는 길드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던 남자, 김무연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김무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질문을 던졌다.

"형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크라우드와 손을 잡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어."

"반대입니다!"

타앙!

김무연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간단히 부서졌다.

위에 놓여 있던 커피잔이 쓰러지며 내용물을 쏟아 냈다.

최동훈의 앞에 있던 커피잔은 무사했는데, 그가 마나로 커피잔을 들어 올린 덕분이었다.

그는 다크서클이 짙은 두 눈으로 김무연을 바라봤다.

"반대라고?"

"당연히 반대죠!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놈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놈들이 변태(變態)라고 부르는 힘. 그걸 가져볼까 해서."

"형님은 그런 것 없이도 강하시지 않습니까!"

최동훈은 손을 뻗어 마나로 들어 올렸던 커피잔 손잡이를 집었다.

그러고는 코앞으로 가져와 커피의 향기를 맡았다.

커피에서는 볶지 않은 땅콩 같은 견과류 냄새가 났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차분하게 말했다.

"무연아. 난 더 강해지고 싶다."

"더 강해지고 싶다고요?"

"아니, 강해져야만 해. 우리 아이가이온을 위해서."

"동훈 형님! 형님 랭킹이 21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형님보다 강한 헌터가 20명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랭킹은 강함의 척도가 되지 못하니까."

"네에…?"

"이태천이 그 증거거든."

"이태천? 그 미터기 놈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옵니까?"

김무연은 눈을 찌푸리며 최동훈을 바라봤다.

최동훈은 그 시선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땅콩을 머금은 듯해 빈 입을 몇 번 씹었다.

"울릉도 게이트."

아니, 아니다.

그가 입을 몇 번 씹은 건 땅콩 냄새가 나는 커피 때문이 아니다.

1년 전에 있었던 일.

A등급 길드의 연합으로 이뤄진 원정이 실패로 끝난 일로 속이 쓰려서였다.

"그곳에서 원정대가 전멸하지 않은 건, 네가 말한 그 미터기 놈 덕분이었어."

"예?"

"랭킹에서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그놈이 원정대를 살렸다는 소리야."

"그건 그냥 이무기의 실드 마법을 깰 수 없어서 돌아온 것이었잖습니까?"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졌지. 하지만 그 말은 정부와 협회가 멋대로 지어낸 말일뿐."

"정부와 협회…? 진실을 숨긴 겁니까?"

"실상은 이렇지. 원정대는 이무기에게 전멸할 뻔했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태천이 혼자 원정대 전원을 구원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김무연이 질문하던 모습 그대로 멈췄다.

천천히 까만 지면 아래로 가라앉아 모습을 감춘다.

은빛의 갑옷을 입은 사내, 이태천이 대신 떠올랐다.

콰앙, 콰앙…!

이어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A+등급 몬스터, 이무기가 이태천과 싸움을 즐겼다.

이태천은 방패만 든 채 이무기의 공격을 연거푸 막아냈다.

무기는 들지 않은 상태로 공격을 막아내는 모습은 사실 싸우고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최동훈에게 이태천은 이무기와 대등하게 싸우는 것으로 보였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이무기가 날아오르지 못한 채 지면에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동훈은 도저히 이태천이 어떤 조화를 부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콰득, 콰드득…!

처음 보는 마법.

그것은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최동훈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딱 하나였다.

이태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A+등급 몬스터의 움직임을 억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는 것.

"이태천…."

또한, 그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도 딱 하나뿐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이태천과 이무기의 싸움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최동훈은 인생 최대의 굴욕과 무력감을 느꼈다.

"...."

이태천과 이무기가 까만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풍경도 울릉도 게이트에서 고급 술집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이네요, 최동훈 님."

혼자 술을 마시는 그에게 검은 로브를 두른 여성이 찾아왔다.

여성의 가슴께엔 벌 모양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그 브로치 때문이었을까.

최동훈은 그녀에게서 달콤한 꿀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크라우드…."

"어머. 10년 만에 찾아뵙는데도 기억하시는군요? 기뻐라…."

벌이 아양을 떨며 최동훈의 옆에 앉았다.

후욱….

그녀의 몸에서 퍼진 꿀 냄새가 최동훈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러자 코에서 잿빛 연기가 뿜어졌다.

마치 담배 연기를 내뿜은 듯이 보였다.

"악취미는 여전하군."

"동훈 님도 여전히 대단하세요."

"날 왜 찾아왔지?"

"뵙고 싶어서 찾아왔죠?"

"...."

최동훈은 물끄러미 벌을 바라봤다.

다크서클이 짙은 눈은 마치 검은 후드에 가려진 눈을 직시하는 듯했다.

벌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농담도 여전히 안 통하시고요."

"할 얘기하고 꺼져. 협회에 넘겨 버리기 전에."

"흐음…. 한진환?"

"...!"

"그는 정말 괴물이죠. 그야말로, 따라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재능(才能)의 괴물."

"자살을 자원하려고 찾아온 거였나…."

"네?"

"원한다면 죽여주지."

벌이 쿡쿡 웃었다.

웃음을 흘리는 것과 달리 최동훈은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꺼냈다.

방금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벌은 곧바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이태천…!"

"...."

"이태천은 어떤가요?"

"갑자기 그놈 얘기를 왜 하는 거냐?"

"보셨잖아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힘. A+등급 몬스터인 이무기마저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압도적인 힘…."

"네가 그걸 어떻게…. 설마 원정대에 있었나?"

벌은 어깨를 으쓱였다.

후드에 가려져 반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는 아니지만요. 우리 크라우드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거든요."

"...."

"본론으로 되돌아와서. 최동훈 님. 당신은 당신보다 나이도 어린 그놈에게 따라잡히는 걸 용납할 수 있나요?"

"…너희의 그 힘엔 관심 없다."

"그래요? 정말로 그런가요?"

"원한다면 확인시켜 주지."

최동훈은 쥐고 있던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벌은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성급하시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네요. 아니. 완전히 같진 않으려나?"

"기회는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을 텐데."

스태프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A등급 공격 마법에 필요한 마나가 모였다.

벌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너무하셔라. 물러나면 되잖아요, 물러나면."

그 말을 끝으로 벌이 사라졌다.

고급 술집에는 최동훈과 벌의 달콤한 잔향만이 남았다.

제177화

최동훈은 고급 술집에서 신문을 읽었다.

신문에는 꽁지머리를 한 백도운의 사진이 '백운천 해체업자 피습…다행히 미수에 그쳐'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려 있었다.

"백도운…."

그는 신문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탕….

사진 속 도운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바닥으로 내리친다.

내리친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른다.

다크써클이 눌릴 때마다 더 짙어졌다.

"이놈도 이태천처럼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중얼거리는 그의 옆으로 탁한 색의 빛이 뿜어졌다.

까만 지면 위로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이 나타났다.

가슴께에는 토끼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어느새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꺼낸 최동훈이 눈앞에 선 사람을 째려봤다.

"크라우드…."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동훈 님."

"…처음 보는 놈이로군."

"네. 선배는 지금 다른 일을 하러 가셨거든요."

"다른 일?"

"네."

"중요한 일인가 보군?"

날 만나러 오는데 직접 오지 않고 부하를 보낸 걸 보면.

최동훈은 입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토끼는 그가 하려던 말을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중요하고 말고요. 이태천. 그놈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거니까."

"...!"

"후후. 그래요. 최동훈 님도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이태천에게 연인이 있었나?"

"아, 그쪽이 궁금한 거였나요…."

"사귀는 사람 없었을 텐데?"

"맞아요. 제가 말한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어요."

"…방주 보육원인가."

"아하.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리 말하며 토끼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검은 로브에 가려져 있었으나 어디로 향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최동훈은 신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토끼가 조금 더 빨랐다.

껑충, 뛰어오르듯이 달려들어서는 신문을 낚아챘다.

"...."

"저희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최동훈은 심기가 불편해진 눈으로 토끼를 바라봤다.

토끼는 그러나 그의 심기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신문을 흔들어댔다.

"이런 짓까지 벌이시고…. 정말 이태천이 눈엣가시인가 봐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발뺌하시기는."

"...."

팔랑….

토끼는 신문을 펼쳤다.

그러고는 1면에 실린 기사를 읊어 나갔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겪은 백운천의 한 길드원은 피습 사건이 미수로 끝난 것은 전부 '백도운'(26) 팀장 덕분이라고 전했다. 길드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백 팀장은 암살자들의 침입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계속 읽을 거냐?"

"아,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나요?"

"...."

토끼는 신문을 반으로 접은 후 내려놓았다.

최동훈도 스태프를 내려놓았다.

그가 공격 의지를 거두는 모습을 본 후에야 토끼는 입을 열었다.

"최동훈 님도 알아차렸겠죠. 백도운이 이태천처럼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

"이제 어쩌실 건지 고견을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대답해줄 거로 생각하고 묻는 거냐?"

"백운천은 이 일을 벌인 '놈'을 찾아낼 거예요."

토끼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일을 벌인 놈'을 최동훈이라고 생각했다.

"찾아낸 후 칼날을 들이밀겠죠. 잘 아시잖아요? 백운천. 그 가족 놀이하는 놈들은 제 동료를 건드린 적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거."

"...."

"그때… 당신은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이태천, 백도희. 그리고 백도운을?"

"그래서?"

"저희는 당신이 그들을 막을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어요."

최동훈은 자신에게 내민 손을 바라봤다.

그는 그러나 붙잡으라는 제안이 담긴 손을 붙잡지 않았다.

멀뚱히 서 있는 토끼는 곧 까만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그의 앞에 김무연이 떠올랐다.

김무연은 숨을 푹 내쉬었다.

"왜 또 크라우드 얘기를 하는 겁니까."

"백도운."

"예? 누구요? 아, 혹시 미터기 놈 친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요즘 TV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그놈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그래서요…?"

김무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도운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뭐가 문제가 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최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코끝에 닿은 커피에서는 탄내가 났다.

커피 원두를 진하게 로스트한 탓이었다.

"…백운천을 만든 게 이태천, 백도희, 백도운, 이 세 명이라는 걸 아냐?"

"아뇨, 몰랐습니다."

김무연은 갑자기 시작된 백운천 이야기가 떨떠름했다.

하지만 일단 최동훈에게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얘기를 꺼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재임 아니었습니까?"

"그놈은 길드가 창립된 이후 들어왔다. 시기적으로 그다지 차이가 없어 뭉뚱그려 창립 멤버라고 하는 것 같다만…. 정확히 순서를 따지면 네 번째라고 볼 수 있지. 다음으로 보육원 놈들이 가입했고."

"그랬습니까?"

김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에는 영혼이 없었다.

맞장구를 치기 위한 것뿐이었으니 당연했다.

최동훈을 말을 이었다.

"내가 뭘 얘기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냐, 무연아."

"네. 모르겠습니다."

"그 세 명 중 두 명이 '한국 최고'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는 거야."

한국 최고의 탱커, 이태천.

한국 최고의 힐러, 백도희.

그런 두 사람과 함께 길드를 만든 백도운.

김무연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최동훈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백도운 또한 다른 두 사람처럼 '한국 최고'라는 별명이 붙을 만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

김무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그 행동은 최동훈의 말을 부정하는 동시에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과한 걱정입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럴 리 없다…."

"네, 그럴 리 없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 거지."

"...."

"반대로 백도운이 두 사람처럼 대단할 거라는 말에 뒷받침할 근거는 수두룩한데 말이야."

"예…?"

달그락.

최동훈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공간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김무연에게 내밀었다.

김무연은 종이를 공손히 받아들였다.

"이건…?"

"백운천 길드 설립 신청서다."

"이걸 왜 형님이…."

"됐으니 마스터 기입란을 봐라."

"…으음?"

[길드 이름 – 백운천(白雲天)]

[마스터 – 백도운]

[길드원 – 백도희, 이태천]

"백도운?"

"그래. 백운천의 마스터는 이태천이 아니라 백도운이었어."

김무연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신청서를 흔든다.

그의 손에서 신청서가 팔랑거렸다.

"흔한 일입니다."

"흔한 일?"

"친분 있는 치들끼리 길드를 만들 때 흔히 그러지 않습니까. 최연장자나 분위기 메이커가 맡는 거."

"그런데 놈은 최연장자도, 분위기 메이커도 아니지. 오히려 너처럼 길드원 대부분이 싫어하는 놈이란 말이야."

"네?"

최동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김무연은 당황했다.

아까까지 진지한 얼굴을 하던 이가 농담을 건넸기 때문이다.

"백도운. 그놈은 넌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더군."

"갑자기 제 얘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비교 대상이 있으면 공감을 끌어내기 쉽잖아."

"흠, 흠!"

"나는 널 친동생처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너한테 길드 마스터 자리를 물려줄 생각은 없다. 망할 게 뻔하니까."

김무연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물려받을 생각도 없고, 물려받고 싶지도 않은데 괜한 소리를 한다는 꿍얼거림이었다.

최동훈은 슬쩍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마스터였지."

"...."

"길드원의 불평불만 속에서 다친 척하고 물러나기 전까지. 2년 동안 마스터로서 활동한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뭐, 일을 잘했나 보죠…."

"단순히 일을 잘해서라면 백도희 한재임이 더 제격이지. 백도운이 마스터가 된 이유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였습니까?"

"그 당시 백운천 놈 중 백도운이 가장 잘 싸우는 놈이었다는 거."

"...!"

후룩.

말하고 나서 최동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는 탄내가 너무 심해 입에 머금고 있을 수 없었다.

꿀꺽.

커피를 마시는 최동훈의 얼굴은 어두웠다.

백운천에는 이미 한국 최고의 탱커와 힐러라고 평을 받는 이들이 있었다.

두 사람보다 더 잘 싸웠다던 백도운이 복귀하는 건 지금도 눈엣가시인 백운천의 전력이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최동훈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 최동훈에게 김무연이 소리쳤다.

"씨발, 동훈이 형!"

"…이 쌍놈이.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최동훈은 눈을 부라리며 김무연을 쏘아봤다.

팡!

김무연은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답지 않게 왜 이렇게 궁상을 떨어?"

"뭐?"

"나 김무연이야! 세상 모든 칼의 사랑을 받는 김무연! 그런 나를 오른팔로 두고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겁이 나?"

A등급 스킬, 칼의 노래.

김무연은 그것 하나만으로 A급 헌터가 됐다.

최동훈에게 발탁된 이후로는 길드 차원의 도움을 받아 헌터 랭킹 47위에 올랐다.

자신을 향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김무연은 거침없이 소리쳤다.

"백도운? 그놈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해도, 나한텐 안 돼…!"

"...."

"어어? 못 믿어? 지금 당장 보여드려?"

"후우,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입 좀 닫아. 시끄러우니까."

최동훈의 말에 김무연이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그러나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김무연이 까만 지면 아래로 가라앉고, 다시 토끼가 떠올랐다.

장소도 두 사람이 만났던 고급 술집으로 바뀌었다.

최동훈은 술을 털어 마셨다.

"실패했더군."

"네에, 뭐….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이 끼어들었거든요."

"흥…. 그래서? 그건 어떻게 됐지? 죽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아. 선배요? 네에. 죽지는 않았어요."

"죽지는?"

"죽는 게 더 나은 상태가 되기는 했지만요."

"...?"

"윗분의 실험체가 됐거든요."

"미친것들. 실패했다는 이유로 동료를 실험체로 삼은 거냐?"

"어머. 최동훈 님께서 하실 말씀인가요?"

"뭐?"

"쓰고 버리기 좋은 말…을 부하로 쓰고 계신 분이?"

토끼의 말에 최동훈이 피식 웃었다.

술을 새로 따라 마시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군."

"그날."

"...?"

"당신이 우리 손을 붙잡았다면, 김무연은…!"

최동훈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졌다.

술잔이 아래로 떨어져 파열음을 내기도 전에 그의 손은 토끼의 멱살을 붙잡았다.

쨍그랑….

뒤늦게 파열음이 울렸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켁, 켁…!"

"지금 내 기분이 썩 좋지 않으니까."

"그는, 켁…! 죽지 않았을 거예요…!"

"감히…."

꽈악….

최동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은 그리 굵지 않았지만, 손아귀에 붙들린 목은 그보다 더 가느다랬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목뼈가 부러질 것처럼 보였다.

"힘…!"

"...."

"힘을 얻고! 케켁! 다시 태어난 당신이 백운천을 먼저 휩쓸어버렸을, 테니까!"

그 순간 최동훈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토끼는 목에서 느껴지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말을 바로 이었다.

"그러니까."

손을 뻗는다.

토끼의 구부러진 손은 무언가를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잡으세요. 우리의 손을…."

최동훈은 토끼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바라보는 것이 이어질수록 목덜미를 붙든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곧 목덜미를 놓은 손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빈손이 되었다.

"좋아. 넘어가 주지."

그 말을 끝으로 시간이 멈췄다.

최동훈이 까만 지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기억의 소용돌이가 멈춘 것이었다.

혼잡했던 기억들이 전부 가라앉고 까만 어둠만이 찾아왔다.

『권속의 권속이 되어라.』

노옹(老翁)의 것인지 청년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권속의 권속이 되어라.』

여자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이어 노파의 것인지 처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으나….

『권속의 권속이 되-』

"씨발, 동훈이 형!"

웬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까만 지면이 요동쳤다.

『권속의 권속이-』

"답지 않게 왜 이렇게 궁상을 떨어?"

지면에서 오른손이 튀어나오고 이어 왼손이 튀어나온다.

두 손의 주인은 지면 위로 올라오기 위해 힘을 주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권속-』

"나를 오른팔로 두고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겁이 나?"

새로운 오른팔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지면을 붙잡은 오른손과 달리 두꺼웠다.

두 개의 오른손과 하나의 왼손이 지면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최동훈이 까만 지면 위로 올라왔다.

"이 쌍놈의 새끼가 형한테 욕을 해?"

***

"안 돼, 안-"

토끼의 애원에도 번데기는 찢어졌다.

오른손과 왼손이 튀어나오더니, 이어 또 하나의 오른손이 튀어나와 반으로 갈라버렸다.

최동훈이 토끼를 바라봤다.

"민서희…."

"...!"

"오랜만이로군. 네가 토끼였나?"

"나를, 나를 기억해?"

"버린 지 뭐 얼마나 됐다고 이름 하나 기억 못 할까?"

"이익…!"

"내게 버림받고 찾은 곳이 크라우드였나? 너도 참 기구하군."

"닥쳐! 당신이, 당신이 김무연이 아니라 나를 선택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당신은 날 선택했어야 해! 혼자 깝죽거리다 죽어버린 김무연 그 멍청이가 아니라!"

"그래, 그런 생각도 잠깐이나마 한 적이 있었지."

최동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의 인정에 토끼는 당황했다.

"이젠 아니다만."

"...!"

"김무연…. 놈은 이제 오른팔로서 나와 함께 한다."

콰악…!

최동훈의 오른 어깨에 달린 두 번째 팔이 민서희를 붙잡았다.

목덜미를 붙잡힌 민서희는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커억…!"

"우린 인간이기를 선택했다. 네년과는 달리."

"최동, 최동후…컥!"

"그러니 방해하지 마라."

근육으로 두꺼운 오른팔이 민서희를 끌어당겼다.

곧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민서희는 당황해서 몸을 버둥거렸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나를 끌어 올리려고 해도 최동훈이 자꾸 방해해 끌어올릴 수도 없었다.

우뚝…!

곧 버둥거림이 멈췄다.

그가 입을 떼고 입술을 핥았다.

"그래. 내 세뇌를 제법 버티는 걸 보니, 힘이란 걸 얻기는 했나 보군."

"...."

짧은 칭찬을 던진 후 고개를 쳐들었다.

위에서 총 열 한 개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진창처럼 끈적끈적했다.

느낀 것만으로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더러운 느낌이었다.

최동훈은 자신도 저런 마나를 가지게 될 뻔한 것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구토감을 없애기 위해서 그는 목을 붙들고 있던 민서희를 천장으로 집어 던졌다.

"감히…. 네놈들이 나를 세뇌하려고 들어?"

제178화

퇴원 후 서울 월드컵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워프 게이트를 타고 울릉도로 건너가기 위해서다.

경기장 가운데에 있는 워프 게이트 앞에는 협회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워프 게이트를 관리하는 직원들일 거다.

직원들은 나를 발견하자 곧바로 살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십니까, 백도운 헌터!"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게 의아했다.

도희와 한재임이 같이 있는데 나한테 먼저 인사를?

이런 적은 처음이다.

원래 이럴 때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곤 했다.

뒤에 덩그러니 남겨져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게 내 일이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며 인사에 답했다.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하하, 동료분께서 요청하신 대로 전부 준비해 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울릉도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직원들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에 늦은 밤까지 일하게 된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모습이기는 했다.

내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흔히 짓던 미소였으니까.

다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가식적인 모습을 하는 게 도희나 한재임에게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 때문이라는 거다.

도희와 한재임을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하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워프 게이트 위로 올라섰을 때 도희가 물었다.

"놀랐어요?"

"어, 조금?"

"역시…. 예상 못 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예상?"

"오라버니는 이제 평범한 헌터가 아니에요. A+등급 몬스터인 이무기를 길들인, A+급 헌터라구요."

"아…."

"한진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죠. 아마, 이제 온 세상이 오라버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거예요."

"...."

당황스러운걸.

아직 나 자신도 A+급 헌터가 됐다는 사실이 실감이 들지 않는데, 온 세상이 나를 살필 거라고?

그것도 일거수일투족?

"왜 하필 네가 A+급 헌터가 된 건지…."

한재임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놈이?

"내가 뭐 어때서? 인마."

"그래요. 우리 오라버니가 어때서요?"

"백도운이잖아."

"뭐래.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냐, 넌?"

"...."

내 생각과 달리 도희는 입을 다물었다.

한재임의 "백도운이잖아"라는 말에 반박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도희야. 거기서 입을 다물면 어떡해?"

"으, 으음. 그, 그게요…."

"너 설마 저 말 인정하는 거야?"

"설마요. 저게 이유가 될 리가 없잖아요."

라고 말하면서, 도희는 입술을 비틀었다.

거짓말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도대체 "백도운이잖아"라는 말이 왜 이유가 되는 거지.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 동생의 반응을 이해합니다.]

새싹이 너까지?

대체 주변 사람들에게 내 이미지는 어떻게 돼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중얼거릴 때, 워프 게이트에 빛을 뿜어냈다.

그 위에 올라탄 우리 세 사람을 울릉도로 이동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빛이 강렬해지고,

"...응?"

시야가 바뀌었다.

월드컵경기장에서 울릉도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울릉도는 저번에 왔을 때와 크게 달랐다.

높이 솟아있던 울릉도 게이트가 없었던 거다.

"뭐야. 게이트 왜 사라졌어?"

"네?"

"어?"

"네?"

"…계속할 거냐?"

워프 게이트에서 내려가던 한재임이 눈을 찌푸렸다.

"네?", "어?"만 뱉어 대는 우릴 한심스럽게 쳐다본다.

우린 귓속말로 속삭이며 한재임을 따라 걸었다.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가 그런 거잖아요?"

"엥? 아닌데?"

"네?"

"왜 그런 생각을?"

"가지치기 부효과가 던전 없애는 거 아니에요? 그걸로 게이트도 없앤 건 줄 알았는데요?"

"으잉? 가지치기로 던전을 없앤 건 맞는데, 게이트는 못 없애."

"어라, 그래요?"

도희는 놀란 듯이 날 쳐다봤다.

던전을 없앴기 때문에 게이트도 없앨 수 있다.

그리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지치기 효과를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으니 그리 오해할 만하다.

"그러니까, 가지치기는 내 몸의 마나로 새로운 몸을 재구성하는 거야. 몸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거지."

"재구성…? 아, 그래서 몸이 폭발…. 윽…."

도희는 비위가 상한 듯 입을 가렸다.

사람 몸 터져 나가는 것쯤 한두 번 본 것도 아닐 텐데.

아마 내 몸이라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며 질문했다.

"그럼 오라버니의 떨어져 나간 신체에서 숲이 자라나기 시작한 건 뭐예요?"

"신체에 담겨 있던 내 마나가 자연으로 퍼져서 생긴 부작용."

"부작용…이라고요, 그게?"

"본래의 작용 이외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거잖아. 그게 부작용이지, 뭐야."

"…하!"

도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기가 찬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던전을 없앤 일이 부작용이었다는 걸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들었어도 도희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이해했어요."

"이해했다고?"

"네. 세계수의 마나가 퍼져 나가서 오염된 지역을 정화한 거잖아요. 게이트는 오염된 지역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지역'이라서 되돌리지 못하는 거고."

"…맞아."

"그나마 다행이네요."

"뭐가?"

"오라버니가 덜 바빠질 테니까요."

"바빠질…? 나 바빠지는 건 확실해진 거야?"

"그럼요? 백운천 돌아왔으면서 놀고먹으려고 했어요? 어림없는 소릴."

"...."

지금이라도 다시 백운천 탈퇴할까….

아니, 그랬다간 아마 도희랑 태천이에게 평생 눈총을 받게 될 테지.

"그럼…."

도희가 시선을 돌렸다.

울릉도 게이트가 있던 곳이다.

"게이트는 왜 사라진 거죠?"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단언하건대 가지치기의 효과는 절대 아니다.

가지치기에 따른 것이었다면, 월드컵경기장처럼 세계수의 마나가 뿜어나는 숲으로 자랐어야 했다.

흐음, 게이트….

대체 왜 사라진 거지?

[그럼 그렇지]

[어린나무는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갑자기 왜 아쉬움을?

'그럼 그렇지'라는 메시지는 또 뭐고.

왠지 기분 나쁘다, 새싹아?

[어린나무는 게이트가 사라진 탓에 그위친의 마나를 확인할 수 없게 됐다고 전합니다.]

[그것이 아쉬움을 토로한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새싹이 말대로다.

게이트가 사라졌으니 그위친이 자라나게 한 숲도 사라졌다.

그의 마나를 확인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왜 그런 유사한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그위친을 직접 만나러 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잠깐.

그건 그거고.

'그럼 그렇지'는 뭐였어?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전합니다.]

뭐? 모르겠다고?

새싹아, 거짓말을 하려면 성의를 좀 보여 주지 않겠니?

[그럼 그렇지]

라고 쓰인 메시지창이 아직 떡하니 남아 있는데?

[어린나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관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전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귀여우니까 봐준다, 진짜.

***

우리가 간 곳은 '태하 갤러리'라는 곳이었다.

푸른 벽으로 둘러싸인 곳, 인 줄 알았는데 그건 벽이 아니었다.

이무기의 몸이 벽을 휘감고 있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이무기가 크긴 크다.

이무기의 몸통 뒤로 대문이 보였고, 그것을 보자마자 한재임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흠, 흠" 목을 다듬는다.

뭐지?

"울릉도 '태하 갤러리'."

"응?"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한 작품들을 자생수목과 함께 전시하는 곳으로, 지난 2006년 개원해 울릉도의 대표적인 갤러리로 자리 잡았다."

"...."

"…쓸데없이 친절한 설명 고맙다?"

"흠, 흠!"

얼굴을 붉히며 앞을 바라본다.

자기가 무슨 울릉도 가이드야, 뭐야?

갑자기 왜 장소 설명을 하고 지랄이야?

한재임은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건지 변명해댔다.

"째려보지들 마라. 이곳 갤러리의 주인인 박 대표님이 장소 빌려주시면서 길드원들한테 꼭 홍보해달라고 했단 말이다. 특히 백도운 너한테는 빼먹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셨지."

"...."

"...."

"…대신 장소 대여는 무료로 해주셨다."

"그 말을 먼저 했어야죠."

한재임을 째려보던 도희의 얼굴이 풀어졌다.

싱긋 웃는 게 마치 녀석을 칭찬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한재임을 더 민망하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이무기의 몸통을 뛰어넘고 갤러리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아니, 이무기도 포함돼 있으니 사람들이라고 하기는 뭐한가?

사람들은 네 무리로 이뤄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백운천 길드원, 처음 보는 사람들, 유재이 일행, 이무기의 머리 순으로 모여 있었다.

한 장소에 모여 있을 뿐인 그들은 친한 사이는커녕 아는 사이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도희야."

"안 돼요."

"아직 말도 안 했다."

"뻔하죠. 저 대장장이 만나러 가려는 거잖아요? 크라우드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 그런 여유는-"

"아닌데."

"아니라고요?"

"응. 유재이만 만나려는 건 아니고, 이무기도 만나려는 거야."

"...."

"…잠깐이면 되는데?"

"쯧…."

움찔.

와, 도희 나한테 혀 찬 거 얼마 만이지.

가끔 장난으로 찬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온 진심을 담아 찬 건 오랜만이다.

변명하듯 덧붙였다.

"이무기랑 할 얘기가 있어."

"백도희. 얘기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한재임이 끼어들었다.

얘가 웬일로 내 편을 들어주지?

싶었던 생각은 이어진 말을 듣고 나서 '그럼 그렇지'로 바뀌었다.

녀석은 내 편이 아니라 태천이 편을 든 거였다.

"태천이가 말했었어. '무기 씨가 도운이 많이 기다려'라고."

"무기 씨?"

"이무기 말이다."

"아니, 누굴 부르는지는 알아. 왜 무기 씨라고 부르냐고."

"나야 모르지. 난 태천이가 그렇게 불러서 따라 부른 것뿐이니."

태천이가 그렇게 불렀다고?

대체 내가 자는 동안 둘이 얼마나 친해진 거야?

"후우, 좋아요. 갔다 와요."

"오."

도희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좋다고 말했다.

이무기를 만난다고 하니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방 와야 해요.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요."

"알았어, 서두를게."

"...."

도희는 날 바라보다 백운천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재임은 당연히 도희를 따라갔다.

홀로 남은 나는 바로 유재이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유재이는 홍수정과 김지연, 심윤진,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 세 명과 함께 있었다.

걸을 때마다 이무기의 고개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머리가 언덕처럼 커서 자꾸만 눈에 띄었다.

더군다나….

[어린나무는 이무기의 기분이 나빠 보인다고 전합니다.]

아, 역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왠지 날 물어뜯고 싶은 듯 보이더라니.

이유는 아마도….

[어린나무는 혼자 울릉도에 남겨졌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일주일 동안 혼자 내버려 뒀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유재이와는 인사만 나누고 이무기에게 가야겠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인사를 건네왔다.

"왔어? 몸은 좀 어때…?"

"조금 쑤시는 것만 빼면 괜찮아."

"다행이다…. 다들 당신 걱정 많이 했어. 병문안 못 가서 미안해."

"나 때문에 못 온 거였는데 뭘. 이런 데까지 오게 해서 내가 미안하지."

"아니, 그렇게 따지면 난 처음부터 크라우드한테 노려지고 있었는걸?"

"아. 그러고 보니…."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난 당신한테 고마운 마음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김지연과 심윤진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유재이와 달리 관련자가 아니다.

이곳 울릉도까지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다.

"미안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죠?"

"아하하, 괜찮아요. 일인걸요."

"제발 미안해 해주세요…."

"윤진아."

"내가 뭘! 언니도 무서웠잖아!"

그리 말하는 심윤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서웠다고…?

의문이 담긴 얼굴로 보자, 그녀는 봇물이 터지듯 말을 쏟아 냈다.

"그럼 안 무서워요? 이무기 앞에 서게 됐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A+등급 몬스터 앞에 선 거 처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아무래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무기가 쳐다보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이 정도 거리면 다 들릴 거다.

"엄청 무서웠다고요! 마치 나 자신을 먹이로 갖다 바치는 기분…."

"걱정도 팔자네. 우리 무기 사람 안 먹어요."

"...!"

심윤진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아우성을 조용히 치는 것도 참 재주다.

"둘이 친구긴 친군가 봐요."

"네?"

"말하는 게 똑같잖아요…!"

"음…."

태천이도 나랑 똑같은 말을 했나 보다.

우리의 말은 그녀를 더 화나게 한 것 같지만.

"근데, 그거 알아요?"

"뭐가요?"

"방금 말한 거 이무기가 다 듣고 있을 거라는 거."

"...…네?"

우뚝.

심윤진이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무기를 바라봤다.

"...."

홱!

시선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심윤진은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천천히 손을 뻗는 게 내 손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사, 살려주세요…."

"괜찮다니까요."

"제발 살려줘요…."

"...."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뭐,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이무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웃는 얼굴을 한 채 빤히.

제179화

"후우…."

병원에서 한재임이 말했던 대로다.

이무기의 표정이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A급 헌터인 심윤진조차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물론, 무엇이든 간에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이무기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일반인도 있긴 했다.

그것도 바로 내 눈앞에.

"흐응…."

홍수정은 이무기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저 열렬한 시선을 해석해보자면….

이무기를 끌어안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끌어안고 싶다'라는 말은 순화한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였던 행적을 떠올려보자.

전대 세계수 나뭇잎의 경우.

그녀는 코를 처박은 채 냄새를 킁킁 맡고 혀를 내밀어 핥아댔다.

전대 세계수 솔방울의 경우.

냄새 맡고 핥는 건 기본이고 두 팔 벌려 껴안더니 자기 뺨을 쓱쓱 문질러 댔다.

그리고 홍수정은 그 행위들은 이무기에게도 능히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지금 그러지 않고 참고만 있는 건, 실행했다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응?"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아, 응. 괜찮아. 우리도 다 들었어. 다들 이해할 거야. 저분들도. 그렇죠?"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 옆을 바라봤다.

조금 떨어져 서 있던 세 사람이 시선이 닿자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미소도 지어 보였다.

그들의 미소에는 워프 게이트를 관리하던 직원들과는 달리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한테 잘 보이려는 가식적인 미소 따위가 아니었다.

세 사람 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저흰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요."

첫인상이 참 좋은 사람이다.

미소가 참 잘 어울린달까?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그에게서 여유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일 거다.

이곳에 있는 걸 보면 협회 사람이거나 갤러리 사람 같은데….

왜 낯이 익은지 모르겠다.

「벌써 오는 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이무기가 말했다.

이무기의 목소리는 무척 심드렁했다.

부러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기다려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고는 입을 핥는다.

마치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하려는 듯이.

"…웃기시네."

「....」

"나 저기 서 있을 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모르겠다만.」

"빨리 앞으로 오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흠…. 혹시 그건 관리인의 자격 같은 건가?」

"뭐?"

「관리인들은 눈치가 참 빠르군. 디싱도 그랬었는데 말이지.」

"...."

서둘러 와서 천만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날 물어버렸을 생각이었다니….

「후우….」

이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탄을 이어 나갔다.

「그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돌아왔더니 관리인은 없지, 나보다 강한 인간들은 저들끼리 싸우고 있지….」

"아…."

「마치 작은 뱀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지….」

이무기가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작은 뱀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라….

아마도 그위친과 스미르노프 때문일 거다.

그 두 사람은 이무기보다도 큰 거인이 돼서 싸웠으니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친구 하자더니, 아무 말도 없이 떠나는 게 친구인가?」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변명하려는 건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농담이다.」

"응? 뭐라고?"

「문지기에게 전해 들었다. 힘을 쓴 부작용 때문에 기절했었다지?」

"어, 어. 그랬어."

「몸은 괜찮은 건가?」

"응, 걱정해준 덕분에. 다 나았어."

「다행이로군.」

"하하…."

나야말로 다행이다.

이렇게 쉽게 용서해줄 줄은 몰랐다.

혼자 남겨졌었는데 화를 내기는커녕 걱정부터 해주다니….

앞으로 이무기에게 잘해 줘야겠다.

"…참, 나 없는 동안 태천이랑 친해졌나 보던데."

「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널 무기 씨라고 불러서?"

「....」

이무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뭐지?

내가 한 말 중에서 기분 상할 게 있나?

"왜 그래? 애칭 같은 거 아니었어?"

「아니다….」

"응? 그런데 왜 그렇게 불러? 이름 안 부르고."

「…없기 때문이다.」

"뭐라고?"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

「내 이름은 파기됐다.」

이게 대체 뭔 소리지?

이름이 없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파기가 됐다고?

이름이란 게 파기되는 종류의 것이었던가?

"파기됐다니…? 대체 언제 파기됐는데?"

「위그가 날 이곳에 보낼 때. 그때, 내 이름을 파기했다.」

"아니, 왜 그런 짓을…?"

「아마도 이름에 힘이 깃들기 때문일 것이다.」

"응…?"

「이름을 가진 나를 이곳에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란 소리다.」

"뭐…?"

이게 뭔 개소리야?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네.

"즉, 전대 세계수가 널 이곳으로 보내려고 이름을 파기했다는 거?"

「그런 셈이 되겠군.」

"아니, 뭐 이런 제멋대로인 나무가 다 있어?"

「나무라니. 위그는 그곳을 관리하는-」

"그래. 관리하는 나무."

「....」

후우, 이제야 알겠다.

전대 세계수가 디싱 나 토르를 관리인으로 삼은 이유.

그 양반과 유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인격파탄자 같은 양반과.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새싹아."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새싹이가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넌 저렇게 제멋대로 자라면 안 된다. 저런 못난 나무가 돼서는 안 돼."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어 관리인에게 걱정을 내비칩니다.]

"걱정? 무슨 걱정?"

[관리인 주변에 반면교사로 삼을 인물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본받기에 모자람이 많은 인물뿐이라고 전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있잖아, 나."

[관리인 동생, 백도희]

[그녀는 너무 광적이고 신경질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여보세요? 새싹아?"

[관리인 친구, 이태천]

[그는 너무 태평하다고 지적합니다.]

"아니, 그 두 사람 말고. 나 말이야, 나."

[!]

[어린나무는 한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에디탓 그위친]

[어린나무는 그가 좋을 것 같다고 전합니다.]

"...."

「…관리인?」

"…왜."

「괜찮은 건가?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새싹이가 나 무시해…."

「음?」

"아니, 아무것도 아냐."

됐다, 그만 말하자.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봐야 나만 상처받는다.

두고 보자, 백 새싹.

관리인은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보다."

「...?」

"그럼 어떡해?"

「뭘 말인가?」

"너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글쎄….」

"...."

이무기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이지, 아까부터 감정 표현이 아주 풍부하다.

풀 죽고 의기소침하고….

바꿔주고 싶게시리.

"…잘됐네."

「잘되었다…?」

"이름이 없다는 거…. 그거에 장점이 하나 있거든."

「장점이… 있나?」

"있지. 아주 좋은 장점이."

「그게 무엇이지?」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거?"

「...!」

"어때? 무슨 이름이 좋아?"

「관리인. 그대는 참 디싱과는 다르군….」

"그래서 싫어?"

질문에도 이무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날 바라보기만 했다.

몇 초, 몇십 초.

뭐라도 말 좀 해봐.

그리 따지려고 했을 때,

「참고하기 위해 묻는 것이다만.」

이무기는 입을 열었다.

「이번 세계수의 이름은 무엇이지?」

"새싹. 내 성인 백 씨를 붙여서 백 새싹."

「...괜찮은 것이냐?」

"뭐가?"

「세계수는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느냔 말이다.」

"당연히 만족해하지. 그치, 새싹아?"

[어린나무는 마음에 든다고 전합니다.]

[멋지지는 않지만.]

[관리인의 애정이 느껴지는 좋은 이름이라고 평가합니다.]

[멋지지는 않지만.]

"...."

꼭 그 말을 덧붙여야 했니, 새싹아.

아까부터 왜 그러는…!

설마….

새싹이 너 사춘기야?

그래, 조금 더 자란 어린나무가 됐으니까….

사춘기 올 때가 됐네.

[ ]

이거 봐, 이거 봐.

공란 보내는 거 보니 사춘기 맞지.

"…어, 마음에 들고, 좋은 이름이라고 평가한대."

「…정말인가?」

"정말이야. 이런 거로 거짓말해서 뭐해?"

「그렇다기엔 관리인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새싹이가 사족을 붙이긴 했는데, 아무튼 마음에는 든대."

「그런가….」

음, 그러고 보니….

이무기 앞에서 사족(蛇足)이라고 말하는 건 좀 그런가?

말실수한 거 아닌지 몰라.

「그렇다면, 나도 세 글자로 해볼까.」

"응?"

「이곳에서는 이름을 세 글자로 짓더군.」

"아, 우리나라만 그래. 꼭 세 글자로 할 필요는-"

「세 글자로 하겠다.」

"그래, 그럼."

이무기는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무슨 이름이 좋을지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천천히 짓게 놔두고 이만 도희한테-

「결정했다.」

"벌써?"

「'무기'로 하겠다. 세계수와 마찬가지로 백 씨를 성을 붙여서.」

"그럼, 백 무기? 진심이야?"

「진심이다만.」

"아니,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보고 짓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 날 부를 때 무기 씨라고 지칭하더군. 그게 듣기에 좋았다.」

"...."

「이상한가?」

"아니, 뭐…. 자기 마음에 들면 되는 거지."

「그럼 결정됐군. 나는 백 무기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주길 바란다.」

백 무기.

백 무기라.

이거 진짜 괜찮나?

다른 사람들한테 "제정신이냐?"고 한 소리 들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응?"

「음?」

이름을 결정했을 때, 내 가슴에서 실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무기한테서도 나왔다.

빠져나온 두 실은 뻗어 나가 서로 연결됐다.

그리고….

[세계수 관리인 백도운 님이 이무기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무기의 이름을 '백 무기'로 지으시겠습니까?]

[두 친구가 동의할 경우 바로 결정됩니다.]

[YES / NO (0/2)]

[주의!]

[이름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지급해야 합니다.]

[지급한 마나는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익숙하지만 내용은 낯선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지급한 건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이건 최대 마나가 떨어진다는 소리 같은데….

아니, 지금 장난해?

무슨 이름 하나 바꾸는데 최대 마나가 줄어들어?

고개를 들어 이무기를 바라봤다.

이무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눈앞에 있는 메시지창과 똑같은 것을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메시지창 같은 걸 처음 볼 테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정말 백 무기로 괜찮은 거지?"

「방금 동의했다.」

"응? 아…."

[YES / NO (1/2)]

정말이네.

흐음….

뭐, 본인이 마음에 든다니 괜찮겠지.

바꾸고 싶어지면 그때 가서 바꾸면 그만이고.

얼마나 지급해야 할지 모르지만, 내 최대 마나는 무려 2000만이다.

어느 정도는 티도 안 난다.

설마 이름 바꾸는데 1000만 정도 들진 않겠지.

검지로 YES를 눌렀다.

[YES / NO (2/2)]

1/2이었던 숫자가 바뀐다.

그러자마자,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업적 달성!]

[백도운 님은 이무기의 친구가 되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업적을 인정받아 보상으로 '이무기의 친구'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타이틀 – 이무기의 친구]

[보유 효과]

[친구와 마나를 공유합니다.]

[번개 속성 데미지가 반감됩니다.]

[친구와의 호감도에 따라 데미지 반감 효과가 달라집니다.]

[호감도가 높아지면 친구에게서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호감도라니.

꼭 미연시 게임 같은걸?

호감도를 올릴 대상이 이무기이긴 하지만.

제180화

「음, 이게 관리인의 마나인가…. 훌륭하군.」

무기가 몽롱하게 말했다.

마나를 공유한다더니….

내 마나가 이무기에게 전달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난 왜 아무 느낌도 안 들지?

무기의 마나가 전달되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캐릭터 창."

이유를 확인하고자 캐릭터 창을 열었다.

MP 칸에 변경 점이 생겼으리라 생각해서다.

[캐릭터 창]

[백도운 – 세계수 관리인]

[타이틀 - 세계수의 동반자]

[HP – 95%(페널티)]

[MP – 1000만130/2000만260(50% 상시 공유 중)]

[SP - ∞]

[상태 – 광합성 모드 후유증]

[호감도 – 이무기(보통)]

"...?"

이게 뭐람.

공유(共有)라며?

공유한다면서 정확히 절반인 1000만130 깎여 있는 거 뭔데.

이건 그냥 내가 퍼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니, 이럴 거면 공유한다고 말이나 하지 말던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천하일미(天下一味)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일미? 혹시 지금 마나를 먹고 있는 거야?"

「그렇다만.」

"그 많은 걸 다?"

「설마. 그랬다면 내 배는 터져버렸을 테지.」

"아, 그렇지?"

1000만130이나 되는 양이다.

그걸 다 먹고 있는 거라면….

무기가 말한 대로 배가 터지는 게 당연하다.

"맛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음? 왜 그러나, 관리인. 심통이 난 것 같군?」

"그럴 수밖에. 공유한다면서 나만 주고 있잖아."

「대신 관리인은 내 스킬을 배울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처지를 표현하듯이.

"스킬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군.」

이무기는 그런 내 손을 쳐다보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마음이 들지 않는다니.

호감도가 '보통' 상태라서 그런가?

"마나를 절반이나 가져 가놓고선?"

「쓸데도 없이 남아도는 마나를 주었을 뿐이잖나.」

"응? 그걸 어떻게…."

「오히려 쓸데를 만들어주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얼씨구. 뻔뻔한 것 좀 보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그리 말하면서 무기는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이 모습은 예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울릉도 게이트에서 내 공격을 다 피하고 비웃을 때였다.

정말이지….

아주 뻔뻔한 친구가 생긴 것 같은걸.

"후우…."

뭐, 무기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내게 있어 2000만이나 되는 마나는 쓸데없이 남아도는 것이었다.

말마따나 마나는 지금까지 백만 단위로도 충분했으니까.

무엇보다 새싹이가 성장할수록 마나는 자연스레 늘어나게 돼 있다.

아직 조금 더 자란 나무 상태인데도 2000만에 달한 걸 보면….

지금 상태에서 더 성장했을 때를 가정하면 1000만쯤은 그리 많은 것도 아닐 것이 분명하다.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됐어."

「어디 가는가, 관리인?」

"준비할 게 있어서. 사실 지금-"

「사랑하는 여인을 보러 가나?」

"갑자기 유재이 얘기가 왜 나와?"

무기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미소는 태천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도 나를 놀릴 때의 태천이 얼굴을.

「나는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만.」

"...!"

아뿔싸.

그러고 보니, 무기는 "사랑하는 여인"이라고만 말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농을 던졌을 뿐인데 반응이 참 재밌군.」

"흠, 흠…!"

「크라우드라고 했던가. 마족의 부하 놈들이 설친다지?」

"알고 있었어?"

「재이가 말해주었다.」

"재이? 지금 유재이를 이름으로만 부른 거야?"

「관리인이 없는 동안 얘기를 가장 많이 나눈 인간 중 한 명이지.」

"...."

대체 얼마만큼 친해진 거야?

나도 아직 유재이한테 성을 못 뗐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유재이"라고는 부를 수 있는데, "재이야"라고는 도저히 못 부르겠다.

부르려고 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간지러웠다.

"…싸우는 거 도와줄래?"

「물론.」

무기는 즉시 대답했다.

찰나의 고민도 없었다.

「마족 놈들은 원래 있던 곳에서도 적이었다. 관리인의 친구가 된 지금으로서는 더더욱 싸워야겠지.」

"고마워. 네가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거야."

「그럼 난 여기에서 대기할 테니, 다녀오도록.」

"어? 같이 안 가?"

「인간들이 날 무서워하더군.」

"아…."

머릿속에 심윤진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기가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물을 글썽였었다.

백운천 애들이야 도희와 태천이가 설명해뒀을 테니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진 않겠지만….

긴장해서 마음을 졸이기는 할 거다.

「그러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

선뜻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를 혼자 놔둬야 하나.

마음 같아선 다른 놈들 따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긴장하든 말든.

어차피 친한 놈들도 아니니까.

「괜찮다, 관리인.」

"응…?"

「익숙한 일이니.」

"익숙하다, 고…."

「다녀오도록.」

익숙하다.

익숙한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

"오. 무기 씨. 같이 왔네?"

내가 할 일.

그건, 당연히 무기와 함께 오는 것이었다.

다른 놈들을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함.

-을 평소처럼 있는 그대로 뽐낸 것은 아니다.

그럴 생각으로 무기와 함께 온 것이 아니었다.

다들 긴장할 것을 잘 알았음에도 데리고 온 것은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할 사이였기 때문이다.

불편하다고 서로 피하기만 한다면, 무기는 백운천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다.

지금껏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돼도 상관없었지만, 무기가 그렇게 되는 건 보고 싶지 않다.

"잘 왔어. 이쪽으로 와."

태천이가 바로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원래는 한재임의 자리였지만, 녀석은 회의의 진행자로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무기와 함께 걸으면서 백운천 간부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

"...."

여전하군.

날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은 건.

뭐, 지금은 나에 관한 감정보다도 무기에 대한 긴장과 불안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녀석들은 아무래도 내가 무기와 함께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흠, 잘 왔어…요?"

도희는 반갑게 대하는 태천이와 사뭇 다르게 행동했다.

무기를 달갑게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갑게 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무기를 데리고 온 이유를 파악한 게 분명하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지 반말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예전에도 말했지만, 편하게 대해도 된다, 관리인의 동생이여.」

"천천히 그럴게, 요."

「기다리지.」

"음, 음."

도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둘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자연히 침묵이 깔렸다.

한 사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사람만 더 무기에게 말을 걸어준다면 좋을 것 같은데….

여기에 연지가 없다는 게 아쉽다.

그 아이가 있었다면 분명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걸어줬을 거다.

내 의중을 파악했을 한재임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태천이처럼 반기지도 않고, 도희처럼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무관심한 태도로만 일관했다.

회의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하다.

정말이지, 한결같이 재수 없는 놈이다.

그 순간,

"반가워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가 태천이만큼 큰 남자가 무기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일까.

남자의 미소는 마치 봄 햇살 같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네요. 전 '박건영'이라고 합니다."

"아, 건영 오빠는 내 파티 원이에요. 탱커를 맡고 있죠."

도희가 곧바로 덧붙였다.

그러고는 날 힐끔 바라본다.

한 마디 더하라는 뜻이다.

"박건영…, 형은 29살이야."

"...!"

"백운천 현역 헌터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지."

"…도운아. 그거 꼭 말했어야 했니?"

"음…. 미안합니다?"

"...!"

박건영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눈에서는 경악과 의문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나한테 사과를 해?

딱 그렇게 중얼거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기는 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다. 나는 백무기다.」

"네?"

「음?」

"아, 미안해요. 잘못 들었어요.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어요?"

「얼마든지. 내 이름은 백무기라고 한다.」

"...."

박건영이 나를 바라본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운천 전체가 나를 쳐다봤다.

역시….

왠지 이럴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니.

"가여워…."

"제정신 맞아?"

"백무기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무기에 자기 성을 붙인 것뿐이잖아?"

"이름을 그렇게 성의 없이…."

"게임에 정신 팔려서 그런 거지, 뭐."

녀석들은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긴 한데….

저 녀석들한테 들으니 왜 이리 고깝지?

그리고 무기 이름 얘기하는데 게임 얘기는 왜 나와.

「음? 이 이름이 그렇게나 이상한가?」

무기는 태천이에게 물었다.

태천이는 무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하달까…. 평범하지는 않지. 성의도 없어 보이고."

「그런가. 난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든다고?"

「스스로 지은 이름이었다만….」

"뭐야, 그런 거였어?"

태천이 날 바라본다.

아무래도 내가 지은 줄 알았나 보다.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 모습을 보고 태천이는 낄낄 웃었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는 이제 끝났나…?"

한재임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라니….

말을 해도 어쩜 저렇게 재수 없이 할 수 있을까.

"이럴 시간에 회의를 진행하고 싶다만."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군.」

"아니, 그쪽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정신 못 차리는 건 다들 매한가지니."

그리 말하면서 다른 이들을 훑는다.

녀석의 태천이를 향한 팬심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한재임은 지금 무기를 대화가 통하는 한 존재로서 대등하게 대하고 있었다.

태천이랑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거다.

태도는 전혀 달랐지만.

"본론을 얘기하자면, 크라우드가 백도운을 노리고 있다. 그것도 필사적으로. 백도희의 예상으로는 오늘 쳐들어올 거라더군."

"...."

한재임을 제외한 10명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그 시선들엔 의문이 담겨 있다.

크라우드가 왜 나를 필사적으로 노리는가.

그리고.

우리가 왜 백도운을 위해 싸워줘야 하는가.

"참고로 말하자면."

"...?"

"태천이와 백도희는 백도운이 노려지기 전에 크라우드와 싸우고 있었다. 놈들이 마족이라는 몬스터의 권속이라는 걸 알 테니, 싸우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겠지."

"...."

"즉, 크라우드는 백도운과는 상관없이 애초에 우리 적이었다는 소리다."

이놈이 웬일이래?

저 첨언은 날 위해 덧붙인 거다.

크라우드와 싸우게 된 일에 대해 내 탓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몰랐을 뿐, 백운천은 애초부터 크라우드와 싸우고 있었으니까.

주근깨가 코를 덮은 여자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 하나 있어."

최혜주….

아니, 최희주였던가?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걸.

"우리가 크라우드와 싸우는 건 납득했어. 백도운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희를 위해서 싸우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희 파티원들은 도희를 위해서.

태천이 파티원들은 태천이를 위해서.

크라우드와 목숨을 걸고 싸우리라.

"...."

뭐, 당연한 거다.

이놈들이 날 위해서 싸워주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같은 곳에서 자랐고, 지금도 같은 곳에 있지만.

이놈들과 난 한 번도 함께한 적이 없다.

도희와 태천이가 없다면 언제든 이곳에서 떠날 거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냐."

"놈들이 왜 백도운을 노리는지."

"흠…."

"우린 들을 자격 있는 거 같은데."

"그래, 최희주."

아, 최혜주가 아니라 최희주구나.

"그 말에 심히 동감하는 바다."

그러고는 한재임은 날 바라봤다.

병원에서 날 볼 때와 같았다.

백도운은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그런 의문만이 담긴 얼굴이었다.

"뭐, 좋아. 어차피 말하려고 했었으니."

어깨를 으쓱인 후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녀석들은 말하려고 했다던 놈이 스마트폰을 그것도 게임을 실행한 채 들어 올리니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보이냐?"

"...."

"이 귀여운 나무가-"

"도운아. 지금 왜 게임 얘기를 하는 거야?"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박건영…이 형."

"어, 음. 그래…."

박건영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몇 명쯤 눈을 찌푸리는 등 불편하게 날 바라봤다.

그렇게 불편하면 자세나 고쳐 앉을 것이지.

"이 귀여우면서 늠름한 아이가 세계수야."

"...?"

"나는 세계수 관리인이고."

"...??"

[세계수 어린나무가 환희합니다.]

[드디어 관리인이 세계수 관리인이라는 걸 밝혔다고 전합니다.]

[어린나무는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새싹이가 기쁜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인사를 건네지만,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메시지창을 확인할 수 없으니 인사에 화답할 수가 없는 거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도 멍했다.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새겨진 것 같달까…?

"뭐하냐, 새싹이가 인사하잖아. 너희도 인사해."

"...."

그들의 얼굴이 동시에 바뀌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바라본다.

이 미친놈을 어떡하면 좋지?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은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을 가리면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어린나무는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관리인에게 자기 주변의 흙을 전송합니다!]

응? 흙?

잠깐, 흙이라면….

안, 안 돼!

[어린나무는 된다고 전합니다!]

[완전히 된다고 강조합니다!]

제181화

톡, 톡톡.

톡톡, 톡톡톡….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린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더라?

제법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거 같은데….

화면 상단의 시계를 확인했다.

[AM 5:06]

5시 6분…?

어쩐지 세상이 좀 밝아졌다 싶더라.

화면을 두드리고 있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어 있었다.

「하아품….」

등 뒤에서 무기의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무기는 하품한 입을 쩝쩝거리고 있었다.

졸린 것보다는 지루한 것 같다.

하긴….

나야 새싹이라도 두드리고 있었지만, 무기는 피해가 갈까 봐 똬리를 튼 몸을 뒤척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관리인.」

"응?"

「마족의 부하 놈들. 오기는 하는 건가?」

"어…. 아무래도 튼 것 같은데? 해 떴잖아. 게네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제 올 리가 없지?"

「관리인….」

"그래, 안 그래도 그만하려고 했어."

그리 말하고는 옆을 돌아봤다.

백운천의 중심에 서 있는 도희가 보였다.

그녀는 크라우드가 오지 않으리란 걸 인지한 듯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도희야."

"...네."

동쪽을 가리켰다.

얼핏 보이는 독도와 함께 태양이 떠올랐다.

"동 텄다."

"...."

딱 세 글자만 말했지만, 도희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읽었다.

해 떴으니 크라우드 안 올 거 같은데?

그러니까 이만 해산하자.

"쯧…."

도희가 혀를 찼다.

이어 손에 쥔 스태프로 거칠게 땅을 찍었다.

그럴 때마다 스태프 끝에서 흰빛이 뿜어졌다.

"왜 안 쳐들어오지? 바본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회가 사라진다는 걸 모르나?"

도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구시렁댔다.

누가 들으면 크라우드 편인 줄 알겠네.

안 쳐들어오면 좋은 거지.

뭘 또 저렇게 답답해하는 걸까.

좋은 게 좋은 건데 말이다.

그치, 새싹아?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다만, 마족의 권속이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고 지적합니다.]

[관리인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고 싶을 텐데.]

[그러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전합니다.]

그야 어떤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렇다면]

이유야 있겠지만.

[...?]

그건 크라우드 사정이야.

지금 우리가 생각해봐야 알 수 없는 일이란 거지.

고민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없는 일이라면, 생각하지 않는 게 더 낫고.

[....]

[....]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전합니다.]

그럴듯한 게 아니라, 그런 거야.

굳이 쳐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고 싶다면, 정보를 수집하는 게 맞지.

지금 이곳에서 고민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도 동의합니다.]

[더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좋아, 잘 생각했어.

화면을 살살 문지르며 도희를 바라봤다.

도희는 이제 크라우드를 욕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들이라느니 멍청한 놈들이라느니.

그 욕에 동의하는 바였다.

"도희야. 이만 해산하자."

"...."

"다들 쉬어야지. 언제까지고 계속 이럴 수는 없어."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만."

한재임이 끼어들었다.

태천이 옆에 있던 녀석이 어느새 도희 앞까지 걸어왔다.

"백도운 말이 맞아. 계속 이러고 있는 건 시간 낭비고 인력 낭비다, 백도희."

"알아요. 아는데…."

"주변을 돌아봐라."

"...."

도희는 주변을 돌아봤다.

나도 그녀를 따라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피로감이 묻어난 얼굴들이 우릴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정신적인 것이었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을 대비하고 경계하고 있었기에 느끼는 피로다.

몇 시간 전과 똑같은 얼굴인 건 태천이뿐이다.

태천이는 정신적인 피로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한 따분함이 더 버거워 보였다.

지루함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선 무기와 같아 보였다.

새삼 느끼는 건데, 둘이 참 잘 맞는 듯하다.

"…그러네요. 이만 쉬는 게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 다들 쉬면서도 경계는 꾸준히 할 거다."

"네, 그렇겠죠…."

도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후 한재임은 주변에서 경계하고 있던 이들에게 소리쳤다.

크라우드는 오지 않을 테니 쉬어도 좋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퍼지자마자 백운천은 하나같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태천이도 장비를 집어넣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은 마치 지루함을 떨쳐내려는 듯했다.

"좋아. 그럼 이제 파티를 열어볼까?"

"파티? 뭔 파티?"

"아, 너한테 말 안 했나?"

"...?"

"다 끝나면 파티할 예정이었어. 미노타우로스 고기 잔뜩 사서 왔거든."

그리 말하면서 태천이는 오른손을 뻗었다.

고기 사서 왔다면서 손은 왜 뻗어?

라는 내 의문에 대답한 건 태천이 아니라 한재임이다.

도희에게서 다시 태천이 앞으로 간 녀석이 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내고는 내민 손에 올려놓았다.

분명 저 마법 주머니에 미노타우로스 고기가 담겨 있을 테지….

태천이 빙긋 웃는다.

"자, 어서 제수씨랑 친구분 모시고 와."

"아니, 무슨 이 시간에 고기를 굽, 우왓!"

「미노타우로스라. 문지기가 먹을 줄 아는군.」

무기가 구불거리며 태천이 앞으로 날아갔다.

자연스럽게 무기의 몸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도 그쪽으로 가게 됐다.

근데 내가 지금 올라타게 된 곳이 목이야, 등이야?

"오, 무기 씨도 이거 좋아해?"

「좋아한다. 한입에 서너 마리쯤 삼키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지.」

"엇, 서너 마리?"

「부족한가…?」

"한두 마리 정도는 되긴 할 텐데…."

한두 마리 정도는 될 거라니.

무슨 미노타우로스가 닭도 아니고….

대체 어느 정도를 사 온 거야?

돈이 썩어 남아도나.

"너흰 뭐하냐…?"

"...."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무기의 목인지 등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내려오는 동안 녀석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힐끔 바라볼 뿐, 제 할 일을 해나갔다.

박건영만이 유일하게 일을 잠깐 멈추고 대답해주었다.

"도운아. 네가 더 잘 알면서 왜 그래."

"뭐를…요?"

"우리가 태천이를 말릴 수 있을 것 같아?"

"아."

이런 바보 같은.

왜 그런 간단한 생각을 못 했지?

박건영의 말이 옳다.

이곳에서 태천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다.

나, 도희, 한재임.

태천이가 고기 파티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기절해 있었고 도희는 그위친을 만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말릴 수 있는 건 한재임인데….

녀석은 태천이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웬만해선 의견에 따라주는 놈이었다.

"흐…."

박건영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 떨림에서 그가 태천이를 말리고 싶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생…이 많았네, 박건영, 이 형…."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러고는 박건영은 되돌아갔다.

고기 파티를 하기 위해서….

한 남자를 말리지 못해 아침부터 고기 파티를 하게 된 이들을 향해 동정심이 피어오를 때였다.

"도운아."

그 범인이 나를 불렀다.

범인의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너 뭐해?"

"뭘?"

"제수씨 안 데려오고 뭐 하고 서 있냐고."

"...."

"얼른 데리고 와, 얼른."

"후우…."

"제발, 정신 좀-"

「음, 음. 기대되는군.」

차려라.

라고, 말하려던 입을 다문다.

무기의 목소리가 기대에 차 있어서다.

본인이 말한 대로 미노타우로스 고기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지금 다녀올게."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

혼자서 갤러리로 되돌아왔다.

무기는 태천이가 미노타우로스를 굽는 모습을 지켜보겠다고 남았다.

이쪽 인간들이 어떻게 조리해 먹는지 궁금하다나?

뭐, 고기 구워 먹는 게 어디든 다 똑같지.

세상 다르다고 고기를 다르게 굽나….

엘프들도 불판이랑 스텐 석쇠에 잘 구워 먹더구만.

"쩝…."

입맛을 다시며 갤러리 문을 열었다.

전등이 꺼져 있어 최대한 조심하며 들어갔다.

차분한 숨소리들만이 나를 반겼다.

이제 해가 뜨기 시작한 새벽이었으니, 사람들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유재이와 김지연만이 뜬 눈이었다.

"...!"

팔 자로 내려가 있던 유재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걱정돼서 잠을 청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지연은 그녀의 경호를 위해서 자지 않은 거겠지.

두 여자 앞으로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걸어갔다.

톡, 톡톡….

물론, 내 오른손은 멈추지 않았다.

"...."

김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재이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몸을 뒤척이는 심윤진에게로 떠났다.

나와 유재이가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거다.

시선이 닿았을 때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전했다.

"이무기 씨, 흠냐…."

홍수정을 지나칠 때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마도 꿈속에서 꿈에 그리던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허공에 두 팔을 뻗어 둥글게 말고는 뺨을 비비적거려댄다.

그나마 혀는 안 내밀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는?"

앞에 서자 유재이가 조용히 속삭였다.

잠에서 자는 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지연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몰라. 안 쳐들어올 건가 봐."

"왜?"

"나한테 왜라고 물어봐도…."

"이상하네. 지금 당장 쳐들어올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뭐, 예상해보자면 크라우드라서 그런 걸 테지."

"응?"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놈들이잖아. 나 말고도 적들 많지 않겠어?"

"아…. 다른 적한테 공격당했을 거라는…?"

"그냥 추측 같은 거긴 하지만."

"추측으로 치부하기엔 그럴듯한-"

"으응! 주세요, 비늘…! 제발 한 조각만…."

그녀의 말을 뚫고 홍수정의 잠꼬대가 들려왔다.

달라고 사정하는 비늘 한 조각은 분명 무기의 것을 뜻하리라.

꿈에서도 무기의 비늘을 탐하다니, 정말 잠꼬대도 참 본인답게 하는구만.

유재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가자."

"응?"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 여기에서 하긴 좀 그래…."

이무기를 향한 지나친 관심으로 꿈을 꾸고 있는 홍수정.

반대로 이무기를 향한 두려움으로 자꾸 "한 번만 봐줘요, 이무기님…! 뒤에서 욕 안 할게요!"라고 중얼거리는 심윤진.

자는 척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는 김지연.

아직 소개받지 못한 세 남녀까지.

확실히 밖에 나가서 대화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응?"

팔짱을 낀 채로 자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 봤을 땐 부드러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무표정인 걸 보니 그리 부드럽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입이 굳게 다물어져 있어서 그런가?

오히려 험상궂게 보일 정도다.

아. 그래서 계속 미소를 지은 채로 있었던 건가?

"케이오스 사람들이야."

카디건을 대충 걸치며 유재이가 설명했다.

이제 7월이었지만, 울릉도의 새벽은 그리 따듯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오히려 서늘하기까지 하다.

"무기 씨 때문에 협회가 보냈대."

"케이오스?"

"몰라?"

"아니, 거길 모를 리가."

"하긴…."

케이오스는 우리나라 10대 길드 중 하나다.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다 하는 거로 유명하지, 아마.

개중에는 왓쳐 캐스트에서 방송을 하는 헌터들도 있는 거로….

"…어라?"

"떠올랐어?"

"저 사람, 혹시…?"

"맞아, 그 사람이야. '곽형원'."

곽형원….

무기 때문에 보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테이머다.

왓쳐 캐스트에서 방송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제목이 아마 '세상에 나쁜 몬스터는 없다'였던가.

반려 몬스터의 문제행동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송이다.

"유명인을 보게 되니 엄청 반가운데. 내적 친밀감이 막 끌어올라."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할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난 별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어."

"귀찮아지니까?"

"정답."

"후후…."

유재이는 짧게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햇볕이 내려앉은 덕분에 안보다 밝았다.

바닷바람 탓에 따뜻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

"...?"

유재이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한 채로.

그래서일까?

[어린나무가 두근거리며 지켜봅니다!]

새싹이가 주책을 떨었다.

김칫국 마시지 말아 줄래.

네가 바라는 종류의 말을 꺼내려는 거 아닐 테니까.

그런 거면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아니라 상기한 얼굴이었겠지.

"아빠…."

"아빠?"

"우리 아빠 말이야."

"아, 응."

"…죽었대."

"...."

화면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내가 알기로, 유재이의 아빠는 그녀가 어릴 적 실종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지금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유재이는 방금 "죽었대"라고 확신했다.

'대'라고 말하는 걸 보면, 누구한테 전해 들은 것이 분명했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그녀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버섯.

즉.

유재이의 아빠를 죽인 건….

"크라우드…."

"응…. 크라우드가, 그 사람을 죽였대."

"...."

제182화

[저들을 모두 이곳 울릉도 게이트에서 내쫓아 주십시오.]

도운이 그위친에게 말했다.

카메라 속 도운의 얼굴엔 피가 묻어나 있다.

붉은 피는 본인의 것이었다.

오른 어깨가 폭발하면서 피를 뿜어낸 거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도운은 그위친만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쟤가… 대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유재이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운이 지칭한 '저들'은 S급 헌터들이었다.

세상에 어떤 누가 감히 그들을 내쫓을 수 있을까.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그위친은 그러나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쉽지 않을 뿐이니.]

그위친은 세계수의 뿌리에서 내려와서는 S급 헌터들을 바라봤다.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촬영했다.

그걸 보면서 유재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도운. 백도운은?"

그녀의 바람과 달리 카메라는 이후 도운을 보여주지 않았다.

S급 헌터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유재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S급 헌터들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백도운이나 보여줄-"

"잠깐만요!"

심윤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들 TV에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입술 앞에 갖다 댄 채였다.

"…누가 찾아왔어요."

"...!"

그녀의 말에 시선과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오늘은 S급 헌터들이 A+등급인 울릉도 게이트를 공략하는 날이었다.

모든 이들이 TV를 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아 강남의 8차선대로조차 텅텅 비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날에 대장간을 찾아오는 사람은 절대로 식칼 따위를 사러 오는 사람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왜 그래?"

"혼자예요."

"혼자?"

"네. 주변에 다른 마나는 느껴지지 않아요."

"...."

김지연이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의 일원이라고 하더라도, 유재이는 A급 헌터 두 명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혼자서 찾아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먼저 확인부터 할게요."

그러고는 심윤진은 스태프에 마나를 모았다.

스태프에 박힌 붉은 보석이 빛나자마자 가로로 휘두른다.

우웅, 우웅…!

허공에 대장간 바깥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이 홀로 서 있었다.

세 여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듯 둥글게 떠오른 그것을 바라봤다.

"어…?"

"왜 그래?"

"나, 이 사람 알아."

"안다고?"

세 여자가 홍수정을 바라봤다.

시선이 모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크라우드야."

"...!"

"예전에 우리 공방에 도운 씨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찾아왔던 사람이야."

"확실해?"

"확실해. 예전에 찾아왔을 때도 저 브로치를 달고 있었어."

"그럼 결정 났네요. 도망치죠."

김지연이 결정을 내렸다.

유재이와 홍수정은 바로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심윤진은 이동 마법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윤진아?"

"잠깐, 잠깐만요."

"왜 그래?"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

"저 사람, 싸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심윤진이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두 손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윤진이 말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렇죠? 수정 언니도 그렇게 보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문 열고 환영해줄 수도 없잖아."

김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으므로 두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 저기요?

관찰 마법 속의 사람이 주의를 끌었다.

- 저 보고 있는 거 알고 있거든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만족할까요? 저 지금 꼭 벌서고 있는 것 같은데.

이 태평한 놈은 뭐야?

네 여자의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태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뭐, 듣기만 하셔도 상관은 없지만요. 전 어차피 경고하러 온 거거든요.

경고?

그녀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들에게 크라우드는 비겁하고 비열한 조직이었다.

그런 크라우드가 경고를 하러 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이를테면, 크라우드가 도운 씨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할 거라는 거?

그 말에 세 여자가 한 여자를 바라봤다.

도운과 긴밀한 사이인 유재이라면 크라우드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유재이의 굳은 얼굴은 그녀들의 생각이 옳았음을 인정해주는 듯했다.

유재이가 심윤진을 불렀다.

"윤진 씨."

"네."

"문 열어도 안전하죠?"

"물론이죠. 내 실드는 스미르노프가 짓밟아도 버틸 거예요."

심윤진은 진지하게 허풍을 떨었다.

스미르노프가 전력을 다해 짓밟는다면, 그녀가 친 실드 따위는 버텨내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도 버틸 거라고 말한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걸 알기에 유재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드르륵.

동시에 검은 후드에 가려진 입이 문처럼 활짝 열렸다.

"오! 안녕하세요. 재이 씨. 처음 뵙겠습니다. 전 버섯이라고 합니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아, 물론 버섯이 본명은 아니죠. 가명이에요."

"누가 그딴 거 물은 줄 알아?"

"네? 그럼 뭐를…. 아, 알았다. 재이 씨라고 부른 거 때문이죠? 처음 봤으면서 너무 친근하게 굴었나요?"

유재이는 눈을 찌푸렸다.

최선을 다해 찡그리며 버섯을 노려보았다.

버섯은 그러든 말든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하하. 두 사람 참 닮았네요. 도운 씨나 재이 씨나 농담이 안 통해."

"계속 그렇게 헛소리만 해댈 거야?"

"그럼 진짜 말해요?"

"뭐?"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도운 씨가 세계수-"

"그만."

"거봐요. 말 못 하게 할 거면서. 그럴 줄 알고 일부러 말을 돌린 거였는데."

"...."

유재이는 미간을 짚었다.

이어 천(川)자가 그려진 미간을 피려는 듯 문질렀다.

사실, 그녀는 도운에게 그의 정체를 듣지 못했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매번 세계수 재료를 갖고 오는 남자니, 그와 관련된 능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그렇게 판단한 것이었다.

"…알겠으니까, 할 얘기나 하고 꺼져줄래?"

"그러죠, 뭐. 크라우드가 도운 씨를 노리고 있어요."

"새삼 놀라운 정보 정말 고마워."

"이런. 아무래도 와닿지 않았나 보네요."

"뭐?"

"크라우드는 도운 씨를 '전력으로' 노리고 있습니다."

"전력…?"

"필사적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도운 씨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크라우드라는 조직을 궤멸시키는 것도 불사할 정도예요."

"...."

"이제 좀 사태의 심각성을 알겠나요?"

"…너는 이걸 왜 경고해주는 거지?"

"도운 씨가 마음에 들어서요."

"마음에…?"

"네. 도운 씨는 내게 영감을 줬거든요."

그리 말하고는 버섯은 "우히히" 웃었다.

시종일관 웃는 낯을 하는 모습이 멍청하게 보였었다.

원숭이 같은 소릴 내며 웃음을 흘리는 지금은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더 바보 같아 보였다.

그 때문일까.

유재이는 버섯이 도운에게 느꼈다는 '영감(靈感)'이란 것도 제대로 된 것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물어볼 게 있어."

"하세요. 가르쳐줄 수 있는 거면 가르쳐 드릴게요. 솔직하게."

"너, '유지성'이라고 알지."

"유지성…. 당연히 알죠. 재이 씨 아버님이잖아요."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하나.

그것을 고민하는 듯했다.

"혹시… 크라우드였어?"

"네?"

"그 사람. 크라우드였냐고."

"재이야…."

홍수정이 유재이를 불렀다.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으나 유재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버섯만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침묵 끝에,

"푸하하…!"

버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크라우드였냐고요? 재이 씨.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

"걱정하지 말아요. 재이 씨 아버님은 크라우드가 아니었어요."

"그래…."

그녀는 안도감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자신의 아빠가 크라우드의 일원인 것은 아닐까.

그 걱정이 해갈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깐 함께 일하긴 했지만요."

버섯은 그 한마디로 간단히 그녀의 안도감을 없앴다.

유재이가 자신도 모르게 발을 한 발자국 내디뎠다.

대장간을 보호하고 있는 실드 안이었으므로 문제는 없었으나 심윤진은 혹시 몰라 스태프를 들어 마나를 모았다.

"그 사람이 너희와 함께 일했다고?"

"네. 재이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8년 전 그한테도 스카우트를 제안했거든요. 재이 씨랑 다르게, 아버님은 그걸 받아들였고요."

"...!"

"재이야!"

유재이의 몸이 휘청였다.

홍수정이 빠르게 달려가 그녀를 붙들었다.

덕분에 쓰러지지 않은 그녀는 버섯을 노려보았다.

부릅뜬 눈은 마음 같아선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고 싶은 듯했다.

"그 사람….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요?"

"그래! 어서 말해, 지금 당장 봐야겠으니까!"

"흐음…."

버섯이 입을 마구 비틀었다.

이어 항복을 표하듯 위로 올라가 있던 팔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긁적긁적….

얼굴을 가린 후드의 정수리 부분을 긁는다.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거예요? 멍청한 거예요?"

"뭐?"

"에이, 뻔하잖아요. 어떻게 됐을지. 이쪽 세계 말로가 다 그런 건데."

"말, 말로(末路)…?"

"당연히 죽였죠.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너…!"

"재이야!"

유재이는 한 발자국 더 내디디려다 멈췄다.

따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귓가에 닿은 목소리.

허리를 감은 팔의 체온.

그 따스함에 유재이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 머리끝까지 솟구쳤던 분노는 차갑게 식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것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질문(質問).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묻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만든 건 대체 뭐지?"

"흐음?"

"그게 데려간 이유잖아. 무언가를 만들게 하려고."

"네, 뭐. 그렇죠?"

"그게 뭐였냐고."

"무엇이냐…."

히죽….

버섯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는 현재 상황을 제삼자로서 구경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숙원이에요."

"뭐?"

"우리 크라우드가 수백 년 동안 꿈에 그리던 숙원. 재이 씨 아버님은 그걸 만들어 줬어요."

"숙원…. 그게 뭔데?"

버섯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해 주겠냐?

그 행동은 그리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뭐…?"

"제가 예의가 없었네요."

버섯은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았다.

그러고는 장난기 없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이 개새끼-"

뚝.

유재이의 목소리는 끊겼다.

재이네 대장간에서 그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머지 세 여자도 함께 사라졌다.

버섯만이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아무튼, 요즘 사람들 정이 없다니까. 어떻게 인사도 안 하고 가?"

중얼거림이 허공에 퍼지는 것과 동시에 버섯은 사라졌다.

***

"미안…."

유재이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며 대뜸 사과를 해왔다.

"…뭐가?"

진심으로,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방금 해준 얘기에서 그녀가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담?

놈의 주둥아리를 후려갈기지 못한 거?

정강이를 걷어차지 못했던 거?

"그 사람이 뭘 만들었는지 알아냈어야 했는데. 내가 화를 내는 바람에…."

"엥?"

뭘 그런 걸 사과하지?

나였으면 죽였다고 했을 때 이미 면상을 후려쳤을 텐데.

홍수정도 착한 성격이라 그녀를 말렸지만, 거기에 도희나 태천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도희는 자기가 쓸 수 있는 모든 디버프를 걸며 놈을 저주했을 거다.

태천이는 이무기마저 떨어뜨린 그 힘을 사용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로잡았겠지.

질문은 그다음에 했을 터.

"괜찮아. 네가 무사하면 됐어."

"하지만-"

"뭣보다 그놈들 그 숙원이라는 거, 사실 못 만들었을 거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널 찾아왔잖아."

"으응?"

유재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왜 숙원이란 걸 만들지 못한 게 되는 건지 모르겠는 듯하다.

"놈들은 굳이 너를 찾았어. 그 이유가 뭘까. 네가 대단한 대장장이라서?"

"...."

"그치. 맞지."

유재이는 물론 대단한 대장장이다.

세계수 관련 재료들을 다룰 수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다른 대장장이가 그것들을 다뤘다면….

나뭇가지는 아르카가 될 수 있었을까.

솔방울은 멘테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못 됐을 거라는 거에 얼마 없는 전 재산을 걸 수 있다.

하지만.

"근데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는 또 아니잖아?"

"…언제는 내가 최고라더니?"

"단언컨대, 그 말에 거짓은 없었어."

"뭐?"

"너는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대장장이가 맞으니까. 너 말고 아는 대장장이가 없거든."

"...."

부르르.

유재이의 주먹이 떨렸다.

음. 한 마디 덧붙였다간 한 대 맞겠는걸.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야겠다.

"그런데, 놈들은 너를 고집했지. 너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그게 뭘까?"

"…유지성?"

"아마도."

하난 알게 됐군.

크라우드가 대장장이로 유재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 유지성 때문이라는 것.

이것도 버섯이 한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야겠지만….

"그리고."

"응?"

"크라우드가 한 말이잖아. 그딴 놈이 한 말을 마냥 믿을 수 있어?"

"...!"

아뿔싸.

유재이는 그런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귀여워라.

"아."

귀여운 걸 봤더니 깜빡했던 게 떠올랐다.

"맞다."

"응?"

"나 원래 너랑 수정 씨 데리러 온 거였는데."

"우리를? 왜?"

"태천이가 밥 먹재. 미노타우로스 고기 사 왔다네."

"이 새벽에? 소고기를?"

"태천이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재이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게 이유가 돼?"

"태천이니까."

"되는구나."

"먹을 거야?"

"미쳤어?"

"아, 역시. 아침부터 소고기는 좀-"

"당연히 먹어야지."

"...음."

그래, 먹는구나.

이 새벽에 소고기를.

어딘가의 엘프들이 굉장히 좋아할 식단이네, 그려.

아, 맞다.

엘프들 만나러 가야 하는데.

고기 먹고 성역에 좀 다녀와야겠는걸.

제183화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허공에 울린다.

그 주위로 백운천 간부들이 앉아 있다.

마스터인 이태천과 부마스터인 백도희는 그들과 떨어져 있었다.

이태천은 이무기와 함께 미노타우로스 고기를 구웠고, 백도희는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허공을 의자 삼아 앉아 있었다.

타닥, 타닥…!

간부들은 상념에 빠진 듯 불꽃이 튀는 모닥불만을 바라봤다.

그 침묵을 최희주가 깨뜨렸다.

"1년 동안 [세계수 키우기]라는 게임을 했는데, 그 게임에서 자라난 세계수가 진짜 세계수였다…."

슬쩍.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간부들은 그녀를 바라봤다.

"이 말 믿을 수 있는 사람, 손."

"...."

"...."

손을 들어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중 덩치가 가장 큰 남자, 박건영이 고민이 되는 듯 손을 몇 번 올렸다가 내렸다.

끝내 그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세계수가 자라났다.

-라던 도운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짧은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목소리가 중후했다.

"안 믿을 수가 없지 않나."

"무슨 소리야, '이현욱'?"

"기억 안 나? 어젯밤에 그놈 스마트폰에서…."

이현욱은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도운이 그들에게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을 때의 일이었다.

***

도운이 스마트폰을 내밀며 말했다.

"이 귀여우면서 늠름한 아이가 세계수야."

귀여우면서 늠름한 아이.

화면엔 그 표현과 어울리는 어린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어린나무는 세계수라는 설명처럼 푸르스름한 기운을 뿜어냈다.

또 주변에 귀여운 캐릭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귀가 긴 것을 보니, 캐릭터들은 엘프가 분명했다.

왜인지 엘프들의 얼굴은 침울해 보였다.

"나는 세계수 관리인이고."

"...??"

그들은 멍하니 도운을 바라봤다.

게임 화면을 보여주더니 나무를 세계수라고 하고 자신을 그 관리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몇몇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태천과 백도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답할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뭐하냐, 새싹이가 인사하잖아. 너희도 인사해."

"...."

그 순간, 그들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들의 머릿속엔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미친놈을 어떡하면 좋지?

그들이 그 말을 머릿속에서 중얼거렸을 때,

"안, 안 돼!"

도운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느닷없이 뭐가 안 된다는 걸까.

그들의 머릿속에 또 다른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도운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위로 높이 올렸다.

위로 올려진 스마트폰은 가로로 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푸하악!

스마트폰 화면에서 흙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흙은 이내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흙으로 만든 무지개처럼 보였다.

***

"그래. 그거 때문에 지금…."

믿을 수 있냐고 물어본 거야.

최희주는 말끝을 흐렸지만, 다들 그녀의 뒷말을 알 수 있었다.

본인들이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였다면 그들은 도운이 한 말을 믿지 않았을 거다.

사실대로 말하기 싫어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하는 거라고 치부해버렸을 거다.

지금 그러지 못하는 건, 도운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듯 스마트폰에서 흙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지개처럼 뿜어진 흙은 평범한 흙이 아니었다.

바티칸에서 축성한 성수(聖水)처럼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몸으로 튄 흙은 짜증을 일으키긴커녕 안도감을 피어오르게 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흙을 모아 마법 주머니에 담을 땐 어처구니가 없었지…."

최희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흙을 조심스럽게 모으는 도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이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이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보통 흙 아니었잖아, 그거."

"응. 스켈레톤은 뼈도 못 추릴 듯."

테일컷을 한 남자가 긍정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최희주와 이현욱에게서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시선을 받은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귀에 매달린 십자가 모양의 귀걸이가 흔들거렸다.

최희주는 냉랭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서인철'.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진짜 그렇게 느껴서 말한 거였는데."

"...."

"뭐야, 나만 그렇게 느낀 거야?"

서인철은 주변을 돌아봤다.

몇몇은 천천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을 가리키며 최희주를 바라봤다.

"봐봐. 얘네들도 그러잖아."

"후우. 뭐. 나도 그렇게 느끼긴 했는데…."

"지도 그렇게 느꼈으면서 왜 뭐라고 한 거야."

"그럼."

이현욱이 끼어들었다.

그의 중후한 목소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백도운이 한 말…. 믿어야 하나?"

"일단은 믿어야 하지 않을까?"

박건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선이 모이자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해봐. 애초에 도운이가 허무맹랑한 말을 한 거면, 도희가 가만히 있었을까?"

"하긴…."

"한숨 쉬거나 혼냈겠지."

"그래, 맞아. 태천이도 실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러네.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었네."

"그리고 그 말을 믿는다면, 납득되는 게 많아."

긴 머리를 한데 묶은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박건영의 말에 힘을 실으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최희주가 그녀를 바라봤다.

"'수아' 언니? 뭐가 납득되는데요?"

"심장."

"아…."

"백도운 심장이 나았잖아. 세계수 열매를 먹었다면, 하트 브레이크 후유증이 나았다는 것도 말이 돼."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 마디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떠들었다.

"난 도희가 고친 줄 알았는데…."

"나도."

"혜화 게이트 독점권 따낸 것도 그런 이유였잖아."

"맞아. 김무연 때 순순히 내놓기에 고쳐선 줄 알았는데."

"단순히 필요가 없어져서였구나."

"근데 백도운 좀 바뀐 거 같지 않냐?"

서인철이 이어지던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다들 쉽게 그 주제로 넘어갔다.

그들도 백도운의 변화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가장 먼저 동의의 뜻을 내비친 건 박건영이었다.

"나한테도 형이라고 부르고."

"맞아. 그거 왜 오빠한테 형이라고 불러?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었는데."

"없었어?"

"응. 개미굴 앞에서 잠깐 본 뒤로 어제 처음 본 거야."

"웃기네, 그거. 지가 언제부터 오빠를 형이라고 불렀다고…. 맨날 이름으로 불렀으면서."

"하하…."

최희주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는 박건영을 뒤로했다.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무튼. 다들 백도운이 바뀐 것 같다는 건 인정하는 거지."

끄덕끄덕.

모닥불에 둘러앉은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갯짓을 보며 최희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어떡해?"

"뭐를?"

"백도운이 우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니 우리도 달라져야 해?"

"아."

"으음…."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선뜻 어떻게 하자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들 몇 명이 박건영을 바라본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의 의견이 어떤지 궁금한 거다.

박건영은 맏형으로서 부드럽게 말했다.

"난 예전에도 말했지만,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해."

"흐음."

"형님은 그리 말할 줄 알았지."

쳐다보던 남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최희주가 손을 휘저었다.

"오빠. 오빤 자존심도 없어? 백도운이 그동안 오빠한테 얼마나 지랄을 했는데."

"굳이 따지자면, 난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더-"

"...."

"알았어, 알았으니까 째려보지 좀 마."

"변한 건 인정하는데 말이야."

서인철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바라던 대로 시선이 모이자 바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잘 대해주는 것도 좀 그렇지 않아?"

"응? 왜?"

"이제 와서 그러면 걔가 A+급 헌터가 돼서 그런 거 같잖아."

"아. 정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그건 숙이고 들어가는 거 같아서 싫지 않아?"

"아, 짜증 나! 백도운 갑자기 왜 바뀌어서는…!"

"그만."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던 한재임이 최희주를 말렸다.

그녀는 자신을 말리는 한재임을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저기."

"아."

한재임이 자신이 바라보던 곳을 턱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보자, 그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오는 도운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유재이와 홍수정이 함께였다.

홍수정은 완전히 깬 것은 아닌지 유재이를 붙잡은 채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둘 중에 어느 쪽이 유재이야?"

"긴 머리 쪽."

"저런 미인이 어쩌다 백도운이랑 사귀게 됐대?"

"글쎄. 약점 잡혔나?"

서인철과 최희주가 빠르게 질답을 나눴다.

박건영이 두 사람을 말렸다.

"에이, 도운이가 못됐어도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야."

"그래도 백도운이 못된 놈이란 건 인정하는 거네요, 형?"

"아, 음…."

서인철의 말에 박건영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 실수를 주워 담고 싶은 듯 입을 가린다.

그 모습을 보며 서인철과 최희주는 킥킥 웃었다.

"...."

그런 시답잖은 대화 속에서, 한재임은 도운을 바라봤다.

도운은 걸어올 때마다 점점 어려졌다.

곧 그의 키가 허리 높이까지 작아졌는데도, 한재임은 백도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어린 한재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처음 보는 소년과 어깨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바로 고개를 쳐들고 소년을 노려봤다.

부딪친 소년은 주저앉은 자신과 달리 멀쩡히 서 있었다.

힘에 밀린 것 같아 창피했던 어린 한재임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씨ㅂ…."

내뱉으려던 욕이 끝까지 맺어지지 않았다.

뒷머리가 길게 자란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말문이 절로 막혔다.

소년의 얼굴 때문이었다.

작고 흰 얼굴엔 표정이 전혀 없었다.

보육원에서 봐 왔던 여타 어른들처럼 가면을 쓰고 감정을 숨긴 표정이 아니었다.

그냥, 없었다.

무표정한 가면을 얼굴에 박아 넣은 것처럼 표정이 아예 없었다.

당연히 어린 한재임을 향한 감정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오빠…!"

소녀의 부름에 소년의 얼굴이 바뀌었다.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맑은 미소는 소년에게 달려오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포옥!

곧 소녀가 소년의 품에 안겼다.

"빨리 와. 예쁜 언니가 기다려."

"도희야."

"응?"

"언니가 아니라 아줌마라고 해야지."

"왜?"

"아줌마한테 언니라고 하는 건 굉장히 버릇없는-"

"싫어! 예쁜 언니는 예쁜 언니야!"

"…그래. 우리 도희 마음대로 하자."

소년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에 안긴 소녀는 "헤헤" 웃고는 소년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소녀가 품에서 빠져나왔다.

"깜빡했다! 언니 기다린다니까!"

"그래, 이만 갈까?"

"응!"

소년과 소녀가 손을 맞잡고 떠났다.

어린 한재임 홀로 남게 되었으나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표정 없는 가면을 박은 것만 같은 얼굴.

그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욱…!"

그날, 어린 한재임은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다.

***

"야."

도운의 목소리가 한재임의 회상을 끝냈다.

한재임은 눈꺼풀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허리 높이까지 작아졌던 도운의 키는 다시 자라나 있었다.

"한재임!"

"…나 불렀냐?"

"나 불렀냐? 이러고 있네, 이거. 나 왜 자꾸 쳐다보냐니까?"

"내가 널 보고 있었다고?"

"이게 정신이 나갔나. 지금 나랑 네가 서로 보고 있는 거 보면 모르냐?"

"…그게, 네 착각인 거다."

"뭐?"

"난 널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보는 곳에 네가 기어들어 온 거니까."

한재임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도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넌 진짜 나랑 안 맞는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 같은 거랑 잘 맞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걱정, 하…. 됐다. 말을 말자. 가자, 유재이. 가요, 수정 씨."

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재임 앞을 떠났다.

옆에 있던 유재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친구의 손목을 끌고 도운을 뒤따랐다.

그 모습을 한재임은 조용히 지켜봤다.

"...."

제184화

"앗!"

"관리인 님?"

"관리인 님!"

성역으로 들어오자, 엘프들이 하던 일을 만사 제쳐두고 내 앞으로 모였다.

살다 살다 엘프들이 가축들에게 사료를 주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웃음이 나온다.

다음에 올 때 밀짚모자라도 가지고 와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냈죠?"

"...."

"...."

인사를 건네지만, 엘프들은 인사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나 같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날 유심히 훑어보기만 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찾아보려는 게 분명했다.

새싹이에게 내가 쓰러졌다는 걸 전해 들었을 테니….

더군다나 엘프들은 거주 중인 차원이 다른 탓에 찾아올 수도 없었다.

날 향한 걱정은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해갈(解渴)되지 않고 더욱더 커지기만 했으리라.

레지나와 파트리아가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파트리아는 두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의 손에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엘프 체온도 인간이랑 비슷한가 보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더 날 향한 걱정이 엿보인다.

그런 엘프 앞에서 체온이 어쩌고저쩌고나 생각하고 있었다니….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내 손을 붙잡은 파트리아의 두 손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정말 괜찮으신 거지요?"

"네, 정말 괜찮습니다. 다 나았어요."

"다행입니다…."

파트리아가 안심하자 뒤에 서 있던 엘프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 엘프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풀지 않았다.

레지나도 그런 엘프들 쪽이었다.

"레지나."

"잠, 잠시만요…!"

"네?"

레지나가 홱 몸을 돌렸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우나?

그런 생각이 들어 손을 뻗었지만, 손에 쥐어진 건 허공이다.

그녀가 빠르게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음, 당황스러운걸.

설마 지금 울러 간 건 아니겠지?

"어, 음…."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셔도…."

레지나가 떠난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는 막 커다란 나무 안으로 들어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나무 안으로 들어가는 엘프라니….

그럴듯해 보이는걸?

아니, 아니. 이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닌데.

파트리아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레지나는 지금 울러 간 것이 아닙니다."

"아, 그래요?"

"선물을 가지러 간 겁니다."

"선물이요?"

"네. 저희가 관리인 님께 드리려고 그동안 준비한 것입니다."

"아니, 뭘 그런 걸 다…."

지금도 걱정 끼쳐서 미안한데, 여기에서 선물을 주겠다니.

더 미안해지게시리….

내 얼굴에서 생각을 읽은 걸까?

파트리아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큰 선물은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갖지 말라고 해도 절로 생기는데요."

걱정 끼친 마당에 선물까지 받는데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질 수 있을까.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조차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파트리아는 "후후" 웃었다.

잠시 후, 레지나가 나무에서 빠져나왔다.

"오크통…?"

막 나무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커다란 오크통 2개를 옆구리에 하나씩 낀 채였다.

그것들은 예전에 한 번 본 것이기도 했다.

태천이가 눌렀을 때 타이밍 나쁘게 터졌던 것이 분명하다.

까만 액체가 담겨 있던 통이다.

그나저나 액체가 담긴 오크통이면 무거울 텐데 참 간단히도 들고 온다.

레지나는 겉보기와는 달리 힘이 엄청 세구나.

엘프라서 그런가?

탁, 타악….

내 앞까지 온 레지나는 바로 오크통을 내려놓았다.

통 안에 담긴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 받아주세요!"

"이게 뭔가요?"

"힐링 포션이에요!"

"힐링 포션이요?"

오크통에 담긴 액체가 포션이었어?

근데 이거 저번에 폭발하지 않았던가?

포션이란 게 제작하다가 폭발하기도 하나.

제작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마셔도 되는 거 맞긴 하나 몰라.

"세계수 님께 들었어요."

"뭘요?"

"그동안 세계수 님 잎으로 만든 포션을 전부 다른 분들께 나눠주셨다면서요."

"네? 나눠…?"

말문이 절로 막힌다.

나눠주긴 뭘 나눠줘.

힐링 포션, 병당 3000만 원.

마나 포션, 병당 1500만 원.

원래 적정가보다 각각 1000만 500만 더 얹어서 팔았는데.

우리 새싹이, 이제 거짓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구나?

그리 중얼거리며 새싹이를 바라봤다.

새싹이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나뭇가지를 올렸다가 내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깨를 으쓱이는 듯 보였다.

돈 벌려고 모조리 팔아 치웠다.

-고 말할 수는 없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사실대로 말했다간 엘프들이 내게 실망했을지도….

"이건…!"

레지나가 큰 목소리로 주의를 끌었다.

탕!

오크통 윗부분을 힘주어 두드리기도 했다.

"이건 다른 분들 주지 말고 꼭 관리인 님께서 써주세요!"

"내가요?"

"네!"

"어, 괜찮은데. 나 힐링 포션 없어도-"

"제발요! 부탁드려요…!"

"...."

레지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얼굴로 나를 올려다봐서일까.

도저히 "필요 없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 말했다간 커다란 눈에 맺혀있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말이라도 그러겠노라고 말해야겠다.

"알겠어요."

"꼭! 꼭이에요…!"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죠. 이렇게 선물까지 챙겨 줬는데. 고마워요. 포션 먹을 일 없도록 조심할게요."

"헤헤…."

레지나가 해맑게 웃었다.

그래, 역시 사람은 웃는 게 더 낫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엘프긴 하지만.

"그, 그럼 저는 이만…."

"...?"

갑자기 레지나는 다른 엘프들 뒤로 물러났다.

뭐지, 웃다가 왜 저래?

대신 옆에 있던 파트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전대 관리인 님이 생각나서 그럴 겁니다."

"아…."

"레지나 님은 그분과 아주 친했습니다."

"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자기 송곳니를 뽑아서 줬을 정도니까.

그런 걸 준 사이인데 친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일 거다.

왜 하필 송곳니를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송곳니가 성역의 열쇠로서 작용하는 것도 좀 웃긴다.

무슨 몬스터 송곳니도 아니고….

새싹이가 더 성장하게 되면 나도 어금니 같은 거로 그럴 수 있게 되려나?

"그분도… 힐링 포션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셨었습니다."

"아…."

"저희도 그분 말씀에 동의했죠. 그분께 힐링 포션 같은 건 필요치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허나…."

파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일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시 디싱이 힐링 포션을 지니고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터였다.

내게 준 이 힐링 포션도 분명 그런 생각을 하며 만든 것이겠지.

"사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했다.

오크통에 담긴 포션에 관해서였다.

"이 통에 담긴 포션의 품질은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그런가요?"

"성역에서 자라난 잎들로 만든 포션인 만큼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진 않을 것입니다만…."

"다만?"

"세계수 님의 잎으로 만든 포션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겠지요."

"아, 그렇겠네요."

주변을 돌아본다.

성역엔 숲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었다.

새싹이의 마나를 계속 받은 숲이니, 웬만한 포션 제작에 쓰이는 재료보다 좋은 재료인 건 분명할 거다.

하지만 전대 세계수나 새싹이의 나뭇잎에 비할 바는 못 되리라.

굳이 비교하자면, 가지치기로 생긴 숲보다 나은 정도로….

…어라?

그러고 보니, 가지치기로 생긴 숲도 적게나마 세계수의 마나를 품고 있으니, 포션 재료로 쓸 수 있지 않나?

다음에 나뭇잎 좀 떼가서 홍수정에게 감정받아봐야겠는걸.

"그러니, 관리인 님 편하신 대로 사용해주십시오."

"괜찮습니까?"

"그럼요. 어차피 '그런 상황'이라면, 이런 포션으로는 바꿀 수도 없을 겁니다…."

"...."

파트리아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상황….

그건 아마 디싱이 마족에게 당한 상황을 의미하리라.

파트리아의 말이 옳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세계수 잎으로 만든 포션보다 품질이 낮은 포션으로는 당장 뭐가 바뀌지 않을 거다.

"이리 말씀드리는 저도 관리인 님께서 사용해주시길 바라긴 합니다만…."

"제가 쓸 분량은 꼭 따로 빼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파트리아가 고개를 숙여온다.

나도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

나와 파트리아가 대화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려는 걸까.

살짝 떨어져서 있는 엘프들을 돌아봤다.

날 걱정해서 포션을 만들어준 이들이 보였다.

어떡하지, 나 이런 거에 엄청 약한데.

"…아, 참."

"왜 그러십니까?"

"그 포션 말입니다."

"네."

"마시고 나서 맛 좀 평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맛을요?"

"이번에 만든 포션은 평소 만든 것과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열심히 만들었습니다만….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다음에 만들 때 참고할 수 있게 드셔보시고 꼭 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뭣보다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다.

홍수정이 포션을 제작할 때마다 시음회를 하고 있었으니까.

성역에 나가서 포션 맛을 확인해 봐야겠다.

엘프들이 만든 포션은 무슨 맛일지 기대되는걸?

***

성역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우왓…!"

무언가가 내 다리를 휘감았다.

두 손으로도 다 붙잡기 어려운 두꺼운 것.

그것에 다리가 붙들리자 세상이 뒤집혔다.

"안 돼, 우리 새싹이!"

놓쳐버린 스마트폰을 붙잡고자 손을 내뻗는다.

아깝게 닿지 않았을 때, 손가락이 갈색으로 변했다.

세계수의 뿌리가 써진 거다.

휘릭…!

덕분에 스마트폰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휘감긴 스마트폰 꼴이 된 나는 고개를 돌려서 날 이렇게 만든 녀석을 쳐다봤다.

무기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

「....」

"…뭐 하는 거야?"

「관리인이야말로 어딜 갔다 온 거지?」

"나? 난 성역에 좀 다녀왔는데."

「성역?」

"새싹이랑 엘프들이 사는 곳이야."

「...!」

무기의 눈이 커진다.

세계수와 엘프들이 있는 곳이라고 하니 가고 싶은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반대의 경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성역에서 이곳으론 올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성역으로 가는 건 될지도 모르겠다.

바로 시도해봐야지.

"가만히 있어 봐."

「...?」

화면 속 성역 들어가기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바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관리인 곁에 다른 존재가 확인됩니다.]

[성역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안 되네."

「음?」

"너랑 같이 성역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안 돼."

「아…. 그런가. 그건 참 아쉬운 일이군….」

무기가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다.

아쉬움을 내비치는 무기를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위로 해줘야-

"우왁…!"

무기가 몸을 구불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꼬리에 거꾸로 휘감겨 있던 나는 이리저리 휘둘렸다.

이동할 거면 좀 제대로 태워주지….

휘둘릴 때마다 한 단어씩 힘겹게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관리인 동생이 찾고 있다.」

"도희? 난 왜?"

「걱정돼서인 게 당연하지 않나. 마족의 부하 놈들이 노리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사라졌는데.」

"아…."

「어딜 갈 땐 사전에 알리고 가는 것이 좋다, 관리인.」

"동의하는데, 잠깐 갔다 오면 모를 줄 알았지."

「....」

무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이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 알았나, 뭐.

[세계수 어린나무는 나뭇가지를 휘젓습니다.]

[이 또한 관리인이 고쳐야 할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고칠 생각 없지롱.

제185화

"다녀오세요."

"다녀와."

도희와 태천이가 내게 인사를 건넨다.

두 사람이 날 찾은 건 오로지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님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케이오스에서 찾아온 곽형원 일행.

그들은 백운천 간부들이 모인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저희끼리 모여 고기를 먹고 있었다.

아까 갤러리에 갔을 때만 해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마도 미노타우로스 고기 냄새 때문에 깬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이 근방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으니까.

갤러리에도 닿아 그들의 코를 간질였으리라.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려 유재이와 홍수정을 바라봤다.

그녀들은 고기를 집어 먹으며 날 올려다봤다.

"다녀오물오물."

"…맛있어?"

"오물오물."

"그래, 그럼 됐어."

두 사람은 대답 대신 열심히 고기를 오물거렸다.

먹는 거 방해하지 말아야겠다.

네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려 무기를 돌아봤다.

곽형원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무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기의 꼬리에 매달린 채였으니까.

그들이 이곳까지 온 것도 무기 때문이었으니 어차피 같이 가야 했고.

"무기야."

「음?」

"저기로 좀 데려다줘."

「알았다.」

무기는 그들에게로 나를 옮겨 주었다.

기다란 몸은 나를 금방 그들 앞에 서게 했다.

아니, 거꾸로 매달린 채니까 선 건 아닌가?

아무튼.

그들 앞에 다다르게 되자 곽형원 일행은 먹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곽형원 옆에 앉아 있던 남녀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네온다.

"안녕하세요, 백도운 씨. 저흰 케이오스에서 나왔습니다. 전 A급 헌터 '김규현'."

"같은 A급 헌터 '이규리'입니다."

"이쪽 분은-"

"알아요, 곽형원 씨죠?"

"오, 우리 형님을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나쁜 몬스터는 없다. 그 채널 주인이잖아요. 나도 그거 봐요."

"그렇군요, 영광입니다."

김규현과 이규리가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선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내가 안다고 해서인 것 같긴 한데….

A+급 헌터 정도가 되니 사람들 반응이 참 다르다.

저런 얼굴은 도희와 태천이에게나 향하던 얼굴이었는데.

예전 같았으면 '어쩌라고?'라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을 테지.

"...."

"...."

곽형원은 조용했다.

미노타우로스 고기가 담긴 일회용 그릇을 집어 든 채 가만히 나를 올려다봤다.

날 보고 있긴 한데….

정신이 딴 데 팔린 모습이다.

툭, 툭.

그의 양편에 선 김규현과 이규리가 그의 발목을 발로 차댔다.

두 사람은 마치 복화술이라도 하듯 그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형님, 형님…!"

"오빠, 뭐해요?"

"...."

하지만 그의 정신을 깨우는 데엔 역부족이었다.

곽형원은 멀뚱멀뚱 날 보기만 했다.

이 양반 왜 이래?

"...."

"...."

설마.

지금 나보고 먼저 인사하라고 하는 건가?

기 싸움, 뭐 그런 거?

인생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일세.

"형님…!"

"오빠, 대체 뭐 하는-"

"…나도."

"네?"

"나도요?"

"나도 매달려 보고 싶다…."

"...."

"...."

두 남녀는 말문이 막힌 듯 곽형원을 바라봤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두 사람을 이해한다.

나도 방금 곽형원이 한 말에 생각이 잠깐 멈췄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지금 기 싸움을 위해서 날 올려다보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나처럼 무기의 꼬리에 휘감겨 매달리고 싶어서 바라보던 것이었다.

이 양반도 제정신은 아니군.

"안녕하세요."

그는 손을 뻗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방금 자기 속마음을 내뱉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이 참 해맑다.

반대로 김규현과 이규리는 당황스러워 보인다.

하긴, 그들의 자부심의 근원인 인간이 애처럼 매달려 보고 싶다는 말을 해댔으니….

내게 내뻗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늦었지만 A+급 헌터가 되신 걸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우리 무기 때문에 찾아왔다고요?"

"네, 협회에서 요청을 해왔거든요."

"흠…."

무기를 돌아본다.

시선이 닿자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강아지가 날 보곤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어뜨리는 듯했다.

아마 나에게만 그리 보이는 것이겠지만.

무기는 A+등급 몬스터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서 무기는 전혀 귀여워 보이지 않으리라.

"…말씀하시죠."

"우선."

곽형원은 무기를 바라봤다.

무기도 내게서 시선을 돌려 그를 마주 봤다.

"지금 상태로는 무기 씨는 이곳 울릉도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

역시.

그의 입에선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나갈 수 없다고?」

"네."

「어째서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습군. 내가 인간들을 공격하기라도 할 것 같나?」

"물론, 나는 무기 씨가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옆에 서 있는 두 남녀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무기가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러나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무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확신이었으니까.

「날 막을 수 있기는 하나?」

"네?"

「그동안 내가 이곳에 가만히 있던 게, 너희가 날 막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냔 말이다.」

"...."

「단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내 자유를 네놈들이 빼앗을 수 있을 것 같나?」

무기는 사납게 말했다.

김규현과 이규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무기를 앞에 두고 긴장하긴 해도 무서워하거나 불안해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불안함을 조금 느끼는 듯했다.

유일하게 곽형원만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자신만만한 태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자유를 빼앗지는 못하겠지만. 네, 막을 수는 있습니다."

「막을 수 있다…?」

"무기 씨도 느꼈을 텐데요? 우리나라가 울릉도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했던 건 실드 때문이었다는 걸."

「....」

"그리고 그 실드는…. 이제 못 쓰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곽형원은 나를 돌아봤다.

무기의 실드가 사라진 이유가 나이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해서 실드가 사라지는 모습을 전부 봤을 테니….

그의 시선은 날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톡, 톡톡. 톡, 톡.

화면을 두드리는 오른손 검지로 향했다.

내가 '증표를 지닌 자'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그 증표란 게 내 '검지'라는 것도.

"그 실드가 없는 지금이라면…. 네, 막을 수 있습니다."

「....」

"설령, 버스트 모드를 쓴다고 해도요."

「버스트 모드?」

"몸을 번개처럼 변화하던 것 말입니다."

「그걸 이 세상에선 버스트 모드라고 부르나? 유치하군.」

무기의 말에 곽형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나라에서 그걸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렇게 불러서요."

「아. 알 것 같군.」

"우린 그를 15년 동안 봐 왔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자 노력을 해왔죠."

「....」

혹시 모를 사태.

그건 한진환의 폭주를 의미했다.

한 국가에서 가장 강한 존재.

정부는 그러한 존재를 과연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을까?

그럴 리 없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대비해뒀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대비는 같은 속성의 마나를 지닌 무기에게도 통하리라.

"...."

그런 이유로, 난 그위친도 걱정됐다.

나머지 S급 헌터 세 명으로도 상대하는 게 역부족이었던 그다.

미국은 그를 어떻게 할까….

그가 나 때문에 고립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밀러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기를.

「그래.」

"...?"

「이곳의 인간 또한 비슷하구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는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입을 다문다.

그를 직시하던 곽형원은 나를 바라봤다.

아마 무기가 말한 인간은 위그드라실에서 살던 인간들을 의미할 것이다.

나도 아무 말도 안 하자, 곽형원이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

"우린 무기 씨가 이곳에만 있는 걸 원치 않습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는 무기 씨가 우리랑 더불어 살았으면 좋겠어요."

두 남녀가 곽형원의 말에 덧붙였다.

곽형원은 미소를 지은 채 마법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곧 그가 마법 주머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하나는 팔뚝만 한 크기의 스크롤이었고, 다른 하나는 팔찌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스크롤을 흔들어 댔다.

"'스킬 스크롤'입니다."

"스킬 스크롤이요?"

"네. 이걸 열람하면 '레이독치온(Reduktion)'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레이…?"

"레이독치온. 몸을 축소화하는 A등급 스킬입니다."

"축소화…. 무기의 몸을 작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연히 원래 크기로 되돌아올 수도 있고요."

"헤에…."

즉, 스미르노프의 거인화와 반대되는 스킬이다.

크기가 작아지는 만큼 무게도 줄어들고, 물리적인 공격력도 줄어들 거다.

마법은 신체 크기와 상관없으니 관련 없겠지만.

"하나에 13억짜리죠."

"얼마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13억짜리를요?"

"도운 씨와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아."

즉, 선물이라는 이름의 뇌물인 거다.

A+급 헌터가 되고 나니 이런 걸 다 받게 되네.

"선물로 받기 싫으시면 구매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곽형원은 씩 웃었다.

구매해도 좋고, 선물로 받아도 좋고.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다.

우선, 무기에게 물어보고 결정해야겠다.

"배울래?"

「…배우겠다.」

"오케이."

그럼, 나도 아무래도 좋을 수 있겠군.

"받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곽형원은 웃는 얼굴로 스크롤을 건넸다.

웃는 얼굴과 태도 때문일까?

정말로 뇌물을 주는 게 아니라 선물을 건네는 것 같았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걱정합니다.]

[후에 무언가를 요구하면 어떡할지 질문합니다.]

걱정도 많다, 새싹아.

이제 날 알 때도 되지 않았니?

[어린나무가 의문을 표합니다.]

요구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

뭐든 상관없으니까.

그걸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거든.

[!]

뇌물 받았다고 해서 내가 들어줄 보장은 없는 거라구.

그래 주고 싶지도 않고.

"아, 그거 도운 씨가 아니라 무기 씨가 익혀야 합니다."

"무기가요?"

"네."

"그렇대."

「음. 펼쳐주면 바로 배우도록 하지.」

스크롤을 펼쳐 무기에게 내밀었다.

스륵….

무기는 펼친 스크롤을 읽기 위해 머리를 180도로 돌렸다.

그냥 내 몸을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곽형원을 바라봤다.

"그건 뭡니까? 팔찌처럼 보이는데."

"반려 몬스터 인식표입니다."

"인식표요?"

"네, 우리나라는 '몬스터 보호 관리'의 일환으로 '반려 몬스터 등록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인식표는 반려 몬스터를 등록할 경우 제공하는 겁니다."

아, '나쁜 몬스터는 없다'에서 본 적 있다.

테이머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지, 아마?

인식표를 통해 실시간으로 몬스터의 현 상태를 공유받아 테이머가 학대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실시간 공유인 만큼 위치도 전달되는데, 그게 싫어서 등록하지 않는 이들도 제법 많다고 들었다.

당연히 등록하지 않는 건 불법이므로 과태료를 내야 했지만.

그나저나, 내가 본 영상에서 인식표는 팔찌 형태가 아니라 보석 목걸이 형태였는데….

여러 종류가 있나 보지?

"아울러 인식표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전한 몬스터'라는 것을 국가가 보증한다는 거죠."

"맞습니다. 아시는군요?"

"영상 본 적 있다니까요."

"구독과 좋아요, 늘 감사합니다. 알림 설정은 해두셨나요?"

"...."

당연히 알림 설정 안 해뒀다.

구독한 적도 없으니까.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영상을 봤을 뿐, 좋아요를 눌러본 적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했다간 분위기만 싸해지겠지?

"…그래서 등록할 때 여러 테스트를 치르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무기는 아무 테스트도 안 치렀는데요?"

"그위친 님 덕분입니다."

"그위친이요?"

"그분께서 이무기의 안전을 보장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선을 넘지 않는 한 절대로 먼저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셨죠."

"그렇군요…."

세계 최고의 드루이드가 한 말이다.

그가 안전을 보장해줬는데도 부정한다면, 그건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거다.

믿고 싶지 않아서 꼬장 부리는 거나 다름없다.

"어라? 잠깐만요. 그위친이 보장했다면, 무기는 여기에서 그냥 나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응? 그럼 아까는 왜 나갈 수 없다고…?"

찡긋.

곽형원이 윙크를 해왔다.

그 윙크를 보고, 그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무기에게 '경고'해주기 위해서였으리라.

방금 무기는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거라며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어?"

내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다리를 붙들고 있던 꼬리가 사라진 거다.

타악…!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몸을 돌려 땅에 착지했다.

"무기…."

「....」

"얼씨구?"

눈을 끔뻑끔뻑 뜨며 무기를 바라봤다.

무기는 작아져 있었다.

파란색 바디필로우가 생각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렇다.

꼭 끌어안고 싶다는 소리다.

"무기야, 너 지금 좀 귀엽-"

"꺄아아아아아악!"

귓가에 비명이 들려왔다.

홍수정이 질러댄 것이었다.

제186화

"꺄아아아아아악!"

홍수정의 비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 비명은 곧바로 마나를 끌어 올리게 했다.

또 자연스럽게 손에 무기를 쥐게 했다.

설마 크라우드가 나타난 건가.

그러한 생각이 행동보다 늦게 뒤따라왔을 때,

"...."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나를 포함해 이 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홍수정이 비명을 지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비명은 적이 나타나서 질러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엔 놀라움이 담겨 있지만, 두려움은 담기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설렘이 담겨 있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얼굴은 당연히 바디필로우처럼 작아진 무기를 향했다.

"귀여워…!"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듯 가렸다.

주변을 좀 돌아봤으면 좋겠다.

백운천 간부 11명이 미친 여자 보듯 보고 있는 걸 알아야 할 텐데.

유재이도 친구가 저러면 말릴 생각도 좀 했으면 좋겠고.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고 소고기만 먹고 있는 게 맞나.

"너무 귀여워요오!"

홍수정이 감탄하면서 우리 앞까지 달려온다.

11명의 시선은 그녀를 뒤따랐다.

그러는 동안 무기를 다시 내려놓고, 끌어올렸던 마나를 가라앉힌다.

서민철이었나?

녀석을 포함한 몇몇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앉아 고기를 집어 먹거나 술을 마셨다.

최혜주, 아니 최희주는 홍수정을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잘 들리진 않지만, 아마도 불만을 구시렁거리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노려보면서 혼잣말 중얼거리는 건 똑같군.

나한테도 자주 저랬었는데.

"축소화 스킬이네요! 레이독치온? 맞나요?"

"네, 맞습니다. 아십니까?"

"이름만요."

홍수정은 곽형원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무기를 바라봤다.

무기는 열렬한 시선이 닿자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현명하기도 하지.

그녀의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무기 님…! 저 홍수정. 평생의 부탁이 있습니다!"

「...?」

"한 번만 안아보자."

「...??」

"한 번만, 안아보자…!"

「...!」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는 무기에게로 달려들었다.

꽉 끌어안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무기는 구불거리며 피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달려들고 회피하는 게 몇 번이고 반복됐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제발요! 평생의 부탁이에요!"

「평생의 부탁이 뭐 이리 가벼운 거냐….」

"피하지 마세요. 제가 꽉 껴안아 드릴게요!"

「관리인! 좀 말려 봐라…!」

무기가 내 뒤로 도망쳤다.

자연스럽게 무기를 덮치려던 홍수정이 내 앞에 서게 됐다.

일단, 무기의 편을 들어주어야겠다.

팔을 뻗어 홍수정을 가로막았다.

"진정해요, 수정 씨."

"그럴 순 없어요! 이 순간을 놓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거예요!"

"뭘 또 천추의 한까지…."

"자, 비켜주세요!"

홍수정이 소리쳤다.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내겐 그저 둘째가라면 서러울 변태처럼 보였다.

실례되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비키시지 않겠다면, 할 수 없죠!"

"...?"

"제발 부탁드립니다아아!"

털썩!

홍수정은 소리치며 강렬하게 무릎을 꿇었다.

흙바닥이라서 다행이다.

아스팔트 바닥이었으면 방금 무릎이 다 까졌을 거다.

뭘 또 저렇게까지 온 마음을 다해 무릎을 꿇는담.

"...."

"...."

"…머리도 박을까요?"

"박는다고 내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요?"

"아뇨…. 도운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죠."

"알면서 무릎만 아프게 왜 그랬어요."

"혹시나 했죠. 역시나네요…."

홍수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콰득.

커다란 손이 홍수정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홍수정은 화들짝 놀라 짧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

"누, 누구…. 형원 씨?"

오른손의 주인은 곽형원이었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홍수정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홍수정 씨."

미소와는 달리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화가 난 목소리였기에, 홍수정은 침을 꿀꺽 한 번 삼키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

"상대가 바라지 않는 신체접촉은 폭력입니다."

암, 암.

지당하신 말씀.

당연히, 그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 것도 폭력이다.

곽형원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제가 하는 것처럼요. 불쾌하죠?"

"…네."

"이 경험을 꼭 기억하시고, 다시는 반려 몬스터에게 포옹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끄덕끄덕….

홍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탐탁지 않다는 듯 곽형원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대답해야죠?"

"...칫."

"...."

이야, 홍수정….

무서워서 고개만 끄덕인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대답하지 않은 거였다.

곽형원은 그걸 알아차리고 대답하기를 요구했고.

홍수정도 홍수정이지만, 곽형원도 곽형원이다.

그녀가 입을 댓 발 내밀고 대답했다.

"아, 알겠어요! 안 그러면 될 거 아니에요!"

"좋아요. 잘 생각했습니다."

톡, 톡.

곽형원은 홍수정의 머리를 살살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는데, 아까와는 달리 따스함이 느껴졌다.

유치원 선생님 같은 미소랄까?

'참 잘했어요~'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머리 움켜쥐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내가 잘못한 건데요, 뭐."

으응? 뭐지.

왠지 저 두 사람 잘 어울리는걸?

「관리인.」

"응?"

「저 인간은 대체 왜 저런 거지?」

"귀여워서."

「...?」

"작아진 네가 귀여워서 그런 거라고."

「....」

무기는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마치 사고가 정지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귀엽다니…. 살면서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보는군.」

"어, 그래? 어릴 때도?"

「관리인. 난 이무기다.」

"그걸 누가 몰라?"

「어릴 때도 미노타우로스보다 컸다는 소리다.」

"아…."

귀여움이란 보통 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 크기가 미노타우로스보다 컸다면….

귀여움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게 된다.

"그럼 이번 기회에 많이 들어."

「음…?」

"너 귀여워. 엄청 귀여워. 완전 귀-"

타악!

무기는 꼬리로 내 입을 후려쳤다.

흐흐, 부끄러워하기는.

[세계수 어린나무는 나뭇가지를 늘어뜨립니다.]

[현재 관리인이 변태처럼 보인다고 전합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변태처럼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너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