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3

제144화

드르륵.

재이네 대장간 문을 연다.

네 명의 여자가 보인다.

그녀들은 각자 다른 감정이 깃든 얼굴로 날 바라봤다.

[세계수 어린나무는 여러 감정을 담긴 시선을 느꼈습니다.]

"…뭐야?"

그녀들을 돌아본다.

유재이는 놀란 얼굴이고,

홍수정은 감탄한 얼굴이었으며,

김지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

심윤진은 "후후후!"하며 뻗대는 얼굴이었다.

뭐야?

"뭐야?"

유재이가 나와 똑같은 소릴 했다.

깜짝이야.

"진짜 왔잖아?"

"거봐요, 도운 씨 맞잖아요."

"...."

유재이와 심윤진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뭐지, 이 분위기는?

"왜? 나 오면 안 돼?"

"아니. 잘 왔어."

"그럼 왜 그렇게 놀라?"

"그게-"

"방금 윤진이가 도운 씨 왔다고 했거든요."

홍수정이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윤진이?

여기 있는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되게 친해졌나 보네?

유재이는 아직도 두 사람과 데면데면해서 서로 존댓말을 쓰던데.

"재이는 연락이 도중에 안 되던 사람이 여기 왔다고 하니까 믿지 않았고요."

"읽고 답장이 없으니까, 당신이 일 때문에 바쁜 줄 알았지…."

"미안. 읽자마자 바로 오느라 답 못했어."

"아니, 미안할 일은 아니고…. 근데 당신 안 바빠?"

응, 안 바빠.

무료함 때문에 꾸벅꾸벅 졸기도 했어.

심지어 어떤 헌터 두 명은 이틀 동안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니까?

라는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콜라보라고 하니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

유재이가 홍수정을 돌아본다.

홍수정은 헤헤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수정이가 오바한 건데…."

"아니에요! 진짜, 정말, 완전! 엄청나게 대박이에요!"

"그렇다는데?"

나는 씩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러나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또 한숨을 내뱉었다.

"쓸데없이 기대치가 너무 높아지면 실망하는 법이라고…."

"뭐, 쓸데없이 높아진 건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볼게."

"끄응…."

"자, 자. 어서 보여줘. 개조된 걸 보기 위해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구?"

"…알았어. 꺼내올 테니까 기다려."

유재이는 아르카를 꺼내고자 뒷문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아, 홍수정. 너 괜히 쟤한테 더 바람 넣지 마."

홍수정에게 경고를 남기고 들어갔다.

물론, 홍수정은 그 경고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간 유재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 모양으로만 천천히 말했다.

"대 박 이 에 요."

하하.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러는 걸까.

유재이의 바람과는 달리 내 기대감은 점점 더 높아졌다.

나는 김지연과 심윤진을 돌아봤다.

혹시 두 사람도 아르카에 관해서 아나 싶어서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재이네 대장간 직원이 아니니까….

잠시 후, 유재이가 아르카를 둘러맨 채 나왔다.

"...?"

가늘고 긴 이파리 모양.

날 부분에 선을 따라 그려진 무늬.

개조를 맡기기 전과 외형이 똑같다.

개조한다고 해서 외형이 무조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기대감이 커졌던 탓일까?

외형에 아무 변화도 없으니 적잖은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부웅.

유재이가 아르카를 돌려 손잡이를 내 쪽으로 오게 했다.

"외형으로 실망하지 말아 줄래?"

"아, 미안."

후, 때리는 줄 알았네.

"막연하게 외형도 바뀌었을 줄 알았어."

"흥…."

작은 콧소리를 내는 유재이에게 아르카를 건네받는다.

그러자마자 손에서부터 세계수의 마나가 아르카로 흘러 들어간다.

아아.

이 따스하고 가벼운 감각….

나흘만이구만.

"자."

아르카가 내뿜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는데, 유재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거, 혹시….

"보증서야?"

"응."

"오. 나도 이거 받고 싶었는데."

"…그랬어?"

"어. 멘테 때 부러웠어."

"말을 하지. 그럼 만들어줬을 텐데."

"당신이 이런 거 귀찮아하는 것 같아서."

"...."

"헤헤. 제가 만들었어요."

홍수정이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이어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듯 두 손으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

뭐야, 이 여자 왜 저래?

유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휙휙 휘젓는다.

"그냥 넘어가. 편해서 그래."

"아…. 그런 타입이구나?"

"응."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아는 사람과 있을 때.

때에 따라 명백하게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홍수정도 그런 타입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지인과 있을 때 조금 더 자신을 드러내는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즉.

내 앞에서 감정하는 물건을 핥아대고 뺨을 비벼대던 모습들이 자중하려고 노력한 모습이라는 소리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보증서나 읽어야겠다."

"응. 그러는 게 좋겠어."

유재이에게 건네받은 품질 보증서를 읽는다.

보증서에는 아르카에 관한 설명이 길게 나열돼 있었다.

예전에 유재이가 포스트잇으로 남겼던 설명과 달랐다.

[품질보증서]

[본 보증서는 제품이 J.Y. 정품임을 보증]

[제품 이름 - 아르보르 카풀루스(Arbor cápŭlus), 줄여서 아르카.]

[제품 등급 - S등급]

[제품 설명 – 전대 세계수의 '가는 나뭇가지'(A등급)로 제작]

"가는 나뭇가지…."

"못 믿겠지? 나도. 수정이가 감정하더니 가는 나뭇가지라고 말하는데…."

유재이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어깨에 둘러멘 아르카를 쳐다본다.

내 키만 한 아르카는 누가 봐도 통나무로 만든 무기였다.

하지만….

내가 읽은 퀘스트 내용에 따르면,

또 홍수정의 감정에 따르면, 아르카는 세계수의 가는 나뭇가지로 만든 것이 맞았다.

전대 세계수 씨는 대체 얼마나 컸던 걸까.

[어린나무는 전대 세계수가 관리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상하는 것보다…?

내가 어느 정도 나무를 생각했을 줄 알고?

어라? 잠깐.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가 그렇게 크다면….

나뭇잎도 커야 하는 거 아닌가?

파라솔 같고 창 같았던 나뭇잎들.

그것들도 설마 '작은 나뭇잎'이었다는 소리?

에이, 아니지?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예상이 맞는다고 말합니다.]

진짜?

파라솔같이 컸던 그게 작은 나뭇잎이라고?

그럼 작지 않은 나뭇잎은 대체 얼마나 큰 건데.

전대 세계수….

실물로 꼭 한번 보고 싶은걸?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언젠가 보게 될 것이라고 전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커질 테니 기대하라고 전합니다.]

아, 그러네.

새싹이가 커지면 볼 수 있게 되겠구나?

지금은 어린나무 상태지만, 성장하게 된다면….

[어린나무는 엄청나게 어마어마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때가 되면 관리인을 나뭇가지 위에 태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어, 형 태워줄 거야?

진짜 손꼽아 기다린다?

[어린나무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도 좋다고 당차게 말합니다.]

아휴, 그럼.

기다려야지.

우리 새싹이는 누굴 닮아 이렇게 귀여울까.

"…뭐야."

"어?"

"아니, 방금 표정 뭐냐고."

"내 표정이 뭐 어땠는데?"

"정신 나간 사람 같았어."

"너무하네. 나 상처받아?"

"됐고. 다 읽었어?"

유재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대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걱정하는 것 같다.

아마 다 읽은 내가 깜짝 놀라길 바랐던 것이리라.

"아직."

"아…."

"금방 읽을게."

"응."

아쉬워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보증서를 읽어나간다.

중간 부분은 예전에도 읽었던 내용이었다.

딱 하나.

삭제된 내용이 있었다.

[공격력 A등급]

[내구도 S등급]

[마나 주입 시 공격력 상승]

[마나 칼날 사용 가능]

[마나 칼날 발동 시 1분에 마나 5만 소모]

[주변 독기 정화 가능]

"최대 마나 증가하는 거 사라졌네?"

"응. 대신 다른 게 생겼을 거야."

그녀의 말대로다.

보증서 아랫부분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다.

아마 수액으로 개조한 결과일 것이다.

홍수정이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이 부분 때문이겠지.

[속성 에너지 흡수 가능]

[속성 에너지 저장량 10만]

[흡수한 속성 에너지 사용 가능]

[흡수한 속성 에너지로 '칼날 강화' 가능]

[유의 사항 – 이 검은 착용자의 자격을 따짐]

[AS 기간은 구매일로부터 평생입니다.]

"마나 증가량이 에너지 저장 효과로 변한 건가?"

"맞아."

"그런데, 칼날 강화? 이건 뭐야?"

물으면서 유재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쓰게 웃었다.

아마 그녀가 바라던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일 거다.

옆에 있던 홍수정이 나를 흘겨본다.

어떻게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냐고 묻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억울했다.

뭘 알아야 놀라든지 호들갑을 떨든지 할 것 아니겠는가.

"수액이 속성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거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지."

"그 에너지로 마나 칼날을 강화하는 거야."

"그러니까, 공격력이 더 강해졌다는 소리지?"

그 정도로 신이라느니 종교를 만들어야 한다느니 한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유재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홍수정도 마찬가지다.

뭐지.

내가 뭘 잘못 이해했나?

칼날 강화라면서.

"칼날 강화는 단순히 위력을 올린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럼요?"

"흡수한 에너지로 칼날에 속성 부여하는 거야."

"속성 부여…?"

"그러니까-"

"아."

그 순간, 전부 이해가 됐다.

개조된 아르카는 주변 속성 에너지를 흡수한다.

불이 있다면 불을.

물이 있다면 물을.

그렇다면 흡수한 에너지로 강화한 칼날은 어떻게 될까?

물 속성을 띈 칼날.

불 속성을 띈 칼날이 된다.

어떻게 보면, 검기에 속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

…응?

"...."

"안 놀라워요?"

"네? 아, 놀랐어요.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이상한 기분이요?"

"아, 그게-"

"그, 그, 그거!"

심윤진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봤다.

나뿐만이 아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왜 이래?

"그거! 저희한테 팔았푸웁!"

"아이, 참. 얘가 왜 이럴까. 눈치 없이."

김지연이 재빠르게 심윤진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고는 우리를 보면서 아하하 웃었다.

어색한 웃음에 담긴 당황스러움은 천천히 우리에게 퍼졌다.

"...."

"...."

"자, 자. 계속, 계속하세요."

"읍! 어, 어거! 으리가! 아야 애!"

"자아, 그만하자? 자꾸 그러면 마스터한테 이른다?"

"으읍! 옴!"

심윤진은 입을 틀어막힌 채로도 계속 소리쳤다.

부릅뜬 눈에서는 아르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뭐,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다.

속성을 부여한 마나 칼날을 뿜어내는 검을 누가 탐내지 않을까.

어떤 멍청이는 마나 칼날을 뿜어내는 검을 탐내다 죽었는데.

"흠…."

유재이는 그런 심윤진을 보다가 나를 흘겨봤다.

마치 내게서 저런 반응이 나오길 바란 것 같았다.

후, 좀 억울한걸.

나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반응하려 했었다.

갑자기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이상한 기분이 들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지만.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어리석음에 나뭇가지를 가로젓습니다.]

아니, 어리석다니?

나뭇가지 가로젓는 거 멈춰.

난 억울해, 새싹아.

이건 심윤진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잖아.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타이밍을 놓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야, 나지.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어리석음에 또다시 나뭇가지를 가로젓습니다.]

…알겠어.

지금이라도 인사하면 되잖아.

"유재이."

"…왜."

나는 유재이를 불렀다.

볼멘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고마운 마음을 잔뜩 담은 채로.

"정말, 정말 고마워."

"...!"

"엄청 마음에 들어. 당신한테 맡기길 잘한 거 같아."

"흠, 흠! 뭐, 재료가 워낙 좋았으니까…."

그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답지 않게 겸손을 부리는 게 귀여워서였을까?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에이, 재료 좋다고 다 이런 걸 만드나? 다 당신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거지."

"음, 음…."

"정말로 고마워, 유재이. 잘 쓸게."

"그, 그러든지 말든지…."

웬일인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정말 귀엽게 왜 이래?

제145화

"그, 그러든지 말든지…."

그리 말하는 유재이의 얼굴은 붉었다.

평소답지 않게 상기됐기 때문일까?

귀여워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잠깐 날 바라봤다가 바로 시선을 피했다.

"뭐, 왜…."

그냥. 귀여워서.

방금 느낀 바를 털어놓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말했다간 손이 오그라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계수 어린나무가 설렘을 느낍니다.]

[어린나무는 달콤한 분위기가 보기 좋다고 전합니다.]

설렘….

새싹이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런 거 정말 좋아하는구나?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전합니다.]

최고의 가치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후후, 우리 새싹이.

사랑을 알긴 하나?

"왜, 왜 웃어?"

"어? 아…."

이런, 난 새싹이 때문에 웃은 거였는데.

그녀는 내가 그녀를 보고 웃은 줄 안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나와 그녀 사이에 있는 홀로그램 메시지창은 내게만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우웅.

"아…."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한 번 울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동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가 오고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도희였다.

음, 내가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어린나무는 방해를 받아 기분이 나쁘다고 전합니다.]

[이놈의 스마트폰을 없애든지 해야겠다고 주장합니다.]

없애긴 뭘 없애, 새싹아.

이 스마트폰 없어지면 너도 없어진다고.

그뿐인가?

이래 보여도 스마트폰은 관리인의 증표이기도 한 중요한 물건이었다.

파트리아는 성물을 건네받는 성직자처럼 소중히 다루기도 했었다.

"나 전화 좀 받을게."

"어, 응. 받아."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는다.

스마트폰 수화기 부분을 귀에 대자마자 도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오라버니? 지금 어디예요?

"아, 잠깐 나왔어. 왜?"

- ....

어라, 화났나?

한진환에게 허락을 받고 나오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지금 일하다가 빠져나와 농땡이 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금방 들어가…?"

- 후우….

도희는 한숨을 내뱉는다.

그러고는 내게 전화한 이유를 말했다.

사라진 나를 찾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황 장관이 왔어요.

"황 장관이? 왜?"

- 그걸 설명하고자 했는데, 오라버니가 여기 없네요?

"음…."

- 20분쯤 후에 회의 시작해요.

"회의?"

- 네. S급 헌터들도 전부 모이는 회의래요. 그러니까 어서 와요.

"응, 알았어. 빨리 갈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흘 동안 얼굴 한번 내밀지 않더니만….

그들도 다 모이는 회의라니.

대체 무슨 일이람?

"아무래도… 가봐야겠는데?"

"아, 응. 그래야지."

"그럼-"

"잠깐만요!"

홍수정이 나를 부른다.

바라보자 그녀는 마법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고 있었다.

웬 종이?

"왜 그래요?"

"도운 씨한테 보고할 게 있어서요."

"보고…요?"

그녀가 나한테 보고란 걸 할 게 있나?

내가 그녀의 상관인 것도 아닌데.

건네받은 종이엔 정말로 맨 위쪽에 '보고서'라고 쓰여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 보이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잊어버렸을 줄 알았어요."

"...?"

"포션이요."

"포션…? 아."

"기억났어요?"

"네, 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싹이 잎으로 포션 제작 맡겼었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며칠 밖에 안 지났는데 한 달은 된 것 같단 말이지.

"그거 벌써 완성됐어요?"

"네. 한 번 제작했었잖아요.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어서 금방 제작할 수 있었어요."

"헤에,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건네받은 보고서를 훑었다.

보고서에는 포션의 개수와 판매한 곳이 쓰여 있었다.

이번에 제작돼 판매된 포션은 총 25병이었다.

25병이면….

딱 절반의 절반이다.

역시, 파라솔처럼 큰 작은 전대 세계수 잎으로 만들었을 때하고는 수량에서 차이가 있다.

"저번보다 수가 적죠? 크기가 작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 괜찮아요."

"잎이 조금만 더 컸으면 효율 높게 제작할 수 있었을 텐데…."

[세계수 어린나무는 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전합니다.]

[어린나무는 자신의 이파리에는 귀여움이 담겨 있다고 강조합니다.]

나는 괜찮아도 새싹이는 안 괜찮은 거 같다.

아니, 이파리에 귀여움이 담겨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밉다고 전합니다.]

정말로?

나 미워?

우리 새싹이 토라질 거야?

근데 어째.

그 모습도 귀여운걸?

"...."

잠깐 반응을 기다렸지만, 새싹이는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정말 토라졌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려고 하는데, 홍수정이 말을 이었다.

나는 화면 대신 그녀를 봤다.

"판매처는 저번처럼 헌터 협회로 했어요."

그 말대로 보고서 가장 아래쪽에 판매한 곳과 금액이 간략하게 쓰여 있다.

[헙터 협회, 7억 5000만 원.]

25병에 7억 5000만 원.

저번에 판매했을 때랑 같은 금액으로 판매했군.

잘했는걸?

"도운 씨가 그걸 원할 것 같아서요."

"잘했어요. 고마워요."

"헤헤…."

그녀가 예상한 대로, 나는 포션을 비싸게 팔 생각이 없었다.

비싼 값에 파는 게 목적이었으면 애초에 도희를 찾아갔을 터.

도희라면 1병당 3000만 원이 아니라 5000만 원 정도에도 팔았을 거다.

그럴 만한 수완이 있는 아이니까.

"자, 그럼…."

홍수정이 마법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포션과 종이컵을 꺼냈다.

투명한 캔에 담긴 포션은 커피처럼 검은빛이 돌았다.

캔커피?

이번 포션에선 커피 맛이라도 나나?

"우리 시음식 해요!"

"오, 좋죠. 기대되는데요?"

"후후.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뭘 또 시음식까지…."

유재이가 중얼거리자 홍수정이 흘겨봤다.

오른손엔 투명한 캔을, 왼손엔 종이컵들을 든 채로.

"그래서 안 마실 거야?"

"누가 안 마신대?"

"그럼 컵 받으시고…."

홍수정이 나와 유재이에게 종이컵을 건넸다.

이어 김지연과 심윤진을 바라본다.

"두 사람도 마셔 볼래요?"

심윤진과 김지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특히, 심윤진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 그래도 되나요!"

굉장히 마셔 보고 싶었던 듯하다.

뭐, 이해한다.

대부분 포션은 비리거나 무미(無味)하다.

하지만 홍수정이 만든 것들은 솔잎 맛이 나고 민트초코 맛이 났다.

그런 만큼 이번 포션의 맛도 궁금했을 터.

"…괜찮을까요?"

김지연은 심윤진과 달리 조심스럽게 물었다.

홍수정은 괜찮다고 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손 엄지로는 나를 가리키면서.

"도운 씨가 허락한다면요."

홱! 홱.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날 본다.

얼굴에서 기대감과 호기심이 내비쳤다.

이번에 새로 제작된 힐링 포션이 무슨 맛을 낼지 진심으로 궁금한 눈치였다.

저런 얼굴이라면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뭐, 술은 다 같이 마시는 게 제일인 법이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다.

술이 아니라 포션이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좋아요. 같이 마셔요."

"앗싸!"

"오, 고마워요. 맛 정말 궁금했는데…."

허락하자마자 두 사람이 밝은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홍수정이 그녀들에게도 종이컵을 나눠주었다.

그런 후 투명한 캔 뚜껑을 땄다.

치익!

어, 치익?

이 소리는… 설마?

"자, 어서 마셔 봐요."

홍수정이 컵에 포션을 따르자마자 재촉했다.

나는 바람을 들어주고자 바로 포션을 마셨다.

단내가 나는 액체가 따끔하게 혀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뚜껑을 딸 때 났던 치익 소리의 정체는 탄산이었다.

"어때요? 톡톡 쏘죠?"

홍수정이 질문을 던졌다.

이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포션을 마시는 세 여자를 보며 말을 다다 쏟아낸다.

"이번엔 탄산을 주입해봤어요! 마셔봤는데 맛이 밍밍하더라고요.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달까?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재이를 보고 떠올랐죠!"

"어? 나?"

"응. 재이는 톡톡 쏘는 게 매력이잖아!"

"너 지금 나 싸가지 없다고 돌린 거지?"

"헤헤헤."

홍수정은 고개 돌리더니 웃기만 한다.

거기서 고개를 돌리고 웃으면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유재이는 "이게…!"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진짜로 마음먹고 휘두른 건 아니고, 장난으로 휘두른 거였다.

어깨를 얻어맞았는데도 홍수정은 까르르 웃어댔다.

반면.

"말도 안 돼…."

"이건…."

심윤진과 김지연은 당황의 늪에 빠져 있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로 종이컵을 노려본다.

"이, 이거… 그거지?"

"네. 그거네요."

"어떻게 포션이 콜라맛…."

"그것도 라임맛이 첨가된 콜라맛이에요."

"라임맛 콜라…. 꼭 살 안 찔 것 같네…."

김지연이 중얼거린다.

홍수정이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검지에 찔린 사람처럼 김지연은 살짝 고개를 뒤로 당겼다.

갑자기 검지를 내뻗자 당황한 듯했다.

"그거예요! 살 안 찌는 콜라. 그게 딱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라임향을 추가했죠. 제로 슈가 하면 펩x잖아요?"

"에에, 그래도 난 좀 아쉽네요. 나는 코x콜라가 더 좋은데."

"뭐? 콜라 하면 펩x지!"

"뭐라고요? 언니 실망이에요. 콜라는 코x콜라죠! 아, 나 펩x랑은 겸상도 안 하는데…."

"어쭈, 이게?"

당황의 늪에서 빠져나온 그녀들은 다투기 시작했다.

코x콜라가 최고라느니 펩x가 최고라느니.

어린애도 아니고 뭐 그런 거로 싸우나 싶다.

유재이도 그리 생각했는지 고개 절레절레 젓고는 남은 포션을 털어 마셨다.

그녀도 코x콜라나 펩x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듯하다.

"도운 씨는요?"

"그래요. 둘 중에 뭐가 더 좋아요?"

그녀들은 내게 질문했다.

뭐가 더 좋냐고?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심지어 대형 마트에서 파는 1000원짜리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딱히…? 콜라는 그냥 콜라죠."

"네?"

"뭐라고요?"

"개인적으로는 같이 먹을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치킨이라거나 피자라거나."

"...."

"...."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두 사람은 빤히 날 쳐다보기만 했다.

한 명은 입을 떡 벌린 채로, 다른 한 명은 입을 다문 채로.

포션을 마신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던 홍수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래?

"불쌍해…."

"네?"

"도운 씨 혀가 불쌍해요! 그러니까 솔x눈을 맛있게 먹지!"

"아니, 솔x눈은 맛있잖아요."

"민초가 맛이 없으면서요? 혀가 멀쩡하면 그럴 리 없어요."

"그게 무슨 해괴한 논리예요?"

"당신 민초 싫어해?"

유재이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청천벽력.

그 단어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무슨 겨우 민초 싫어한다고 그런 얼굴을 해…?

"…안 싫어해."

"정말?"

"그럼. 즐겨 먹지 않을 뿐이야. 가끔 먹으면 치약 같고 좋…-"

"...!"

아, 실수했다.

방금 한 말, 민초 좋아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이다.

민초에서 치약 맛이 나는 게 아니라 치약이 민트 맛인 거야!

그런 반박이 바로 들어오곤 하던 말이었다.

"...."

"...."

하지만… 그녀는 내게 반박하지 않았다.

가만히 날 쳐다보기만 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침묵 때문이었을까.

그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반박을 해줬으면 싶었다.

어휴, 백도운 이 멍청한 놈아.

치약 이야기는 왜 해서….

제146화

유재이는 날 바라봤다.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지 지금 상황을 잘 피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고 있는데,

"유, 유통!"

홍수정이 갑자기 소리쳤다.

나와 유재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 유재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 얼굴 때문이었을까?

통, 통.

유재이가 주먹으로 자기 이마를 두드렸다.

민초 때문에 분위기를 가라앉게 한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진 것일 터다.

내 탓이다.

치약 이야기만 거론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으리라.

"그러니까, 그게, 포션이요. 포션 유통이 막힌 이유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아…."

"알아보려고 해봤는데요…. 자꾸 상급 포션 재료 어디서 구했는지만 가르쳐달라고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더 알아보지 않아도 돼요."

"네? 왜요?"

"내가 알아냈으니까요."

"도운… 씨가요?"

홍수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련 종사자인 그녀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를 문외한인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한 듯했다.

물론,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포션 유통이 막힌 이유.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대체 뭐 때문이었어요?"

"크라우드 놈들 짓이었습니다."

"네?"

"크라우드?"

홍수정과 유재이가 각각 고개를 갸웃거리고 눈을 찌푸렸다.

유재이의 경호를 하게 된 이유인 크라우드가 나와서일까.

김지연과 심윤진도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그놈들이야?"

"그들이 대체 왜… 아!"

짝!

홍수정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스파크가 튀듯 깨달은 것이다.

크라우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유통되는 힐링 포션의 양이 줄어들면 헌터들은 자연히 버프 포션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전부 브이피와 바바를 퍼뜨리기 위해서였군요…."

"네."

"절 노리는 이유가 포션 때문이라더니… 그런 거였군요."

어라?

왜 이제 아는 눈치지?

아.

생각해보니, 홍수정에게 크라우드가 노리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포션 때문에 노린다고만 했었지.

이런….

그동안 많이 궁금했겠는걸?

"그런 거라면 포션을 더 만들어야 하지 않아요? 도운 씨, 또 구할 수 있어요?"

"음…."

[세계수 어린나무는 가능하다고 전합니다.]

[다만, 그럴수록 성장이 더뎌진다고 조언합니다.]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선택에 따르겠다고 전합니다.]

"안 될 것 같은데요."

"...?"

내 대답에 네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구할 것 같다'가 아니라 '안 될 것 같다'라고 말해서다.

구해 올 수 있으면서 갖고 오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그걸 갖고 오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왜 그러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녀들 중 유일하게 유재이만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이유가 있는 거지?"

"응."

"그럼 됐어."

"됐다니…. 재이야."

"됐대도."

유재이는 홍수정의 입을 막았다.

귀찮게 엉기는 사람을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보여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김지연과 심윤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지만, '이유가 있다'라고 말하니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우연후에게 따로 보고는 하겠지만.

자, 그럼.

이만 경기장으로 돌아가 볼까, 아. 그전에.

"유재이."

"응?"

"취향…은 원래 다 다르잖아."

"갑자기 웬 취향?"

"그러니까, 존중한다고."

"아…."

"치약이라고 말한 건…."

유재이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동한 듯한 얼굴을 해놓고선….

어쩜 저렇게 부지불식간에 변할 수가 있는 거지.

"미안해."

"...."

"...."

"...됐어. 애도 아니고 이런 거로 사과는…."

거짓말하지 마.

됐다는 사람이 눈을 그렇게 떠?

말하기 전 그 긴 침묵은 또 뭐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켰다.

이럴 땐 그냥 미소나 짓고 있는 게 낫다.

그동안 살면서 괜스레 한마디 덧붙였다가 분위기를 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님을 안다.

도희에게 혼나는 것도 잘못을 저질렀을 때보다 한마디 붙였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럼, 진짜 가볼게."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서 가봐."

"다시 한번, 아르카 고마워. 잘 쓸게."

"아냐, 나야말로 고맙지. 그 귀한 걸 재료로 다룰 수 있게 해줬는데."

유재이가 밝게 웃었다.

후, 기분은 완전히 풀린 듯하다.

"또 봐."

"응."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대장간을 나섰다.

대장간 문을 닫고,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민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치약 얘길 꺼낸 것치곤 잘 넘긴 듯하다.

옆에서 태천이가 봤다면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휴우…, 응?"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앞에 푸르스름한 메시지창 떠올랐다.

새싹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경기장을 향해 걸어가며 메시지를 읽었다.

[어린나무가 콜라에 관해 관심을 보입니다.]

[마셔보고 싶다고 전합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어떻게 마시려고…?"

성역으로 들어가서 콜라 부어주면 되려나?

그렇게 부어준다고 해도, 나무에 콜라라니….

아무리 봐도 쓰레기 투기 내지는 학대가 아닌가 싶다.

알테라-쇼넴으로 준다고 해도 땅속 양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보니 맛이 남지 않을 거고.

그전에 새싹이 너 맛을 느끼긴 하니?

[어린나무는 엘프들도 콜라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고 전합니다.]

[엘프들은 콜라라는 것을 제조해볼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전합니다.]

"엘프들이 콜라를…?"

콜라를 어떻게 알고?

아. 참.

치킨 먹을 때 콜라랑 먹었었지.

심지어 맛있게 먹었었어.

처음엔 뚜껑 열 때 넘쳐 흐르는 꼴을 보고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한 번 마시고 나니 푹 빠졌었다.

톡톡 터지는 탄산의 청량감을 마법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마치 입안에서 폭발 마법이 연달아 터진 듯하다나 뭐라나.

"사달라고 하면 될 것을…."

사달라고 하지 않고 제조할 생각을 하다니.

아마 내 힘을 빌리는 게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그 마음이 기껍기는 한데….

콜라를 제조하는 게 가능하려나?

코카잎 필요할 텐데.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흔듭니다.]

"응?"

[관리인은 가끔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할 때가 있다고 전합니다.]

[어린나무는 백도운에게 세계수의 관리인으로서 그 점을 꼭 고쳐주었으면 한다고 요구합니다.]

[정당한 요구라고 주장합니다.]

뭔 소리니, 새싹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게 가능하긴 해?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점을 걱정합니다.]

새싹이는 대답하지 않고 걱정을 보내왔다.

또 한 번 말함으로써 강조하면서.

너무하네.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방금 마신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뭐긴.

네 잎으로 만든 포션을 마시고….

"…아."

새싹이의 말대로였다.

나는 정말로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하고 있었다.

새싹이 잎으로 만든 포션은 콜라 맛이 났다.

탄산이 부족하긴 했지만, 단맛이 났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엘프들은 콜라를 만들 때 굳이 코카잎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코카잎이 아니라 탄산을 주입할 기술이다.

탄산 자체를 처음 경험했었으니, 그들에게 그런 기술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중에 모르는 척 탄산 주입 기계라도 사가야 하나…?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깨달은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깨달았으니 다음부터는 생각이란 걸 하면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전합니다.]

"알았으니까 그 말 좀 그만하면 안 될까?"

[어린나무가 관리인에게 토라질 거냐고 묻습니다.]

"...."

뭐지, 이건.

아까의 복순가?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본다.

새싹이의 나뭇가지들이 승리의 V자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리라.

새싹이는 지금 승리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누가 백 새싹 아니랄까 봐.

나를 똑 닮았다니까.

하필 나를 닮다니.

뭔가 싱숭생숭한걸….

***

"…해서,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함께 게이트 원정을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회의실 앞에 다다르니 안쪽에서 황 장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조금 늦었나.

뭐, S등급 헌터들이 모두 모이는 회의다.

이런 회의가 나 한 명 없다고 늦춰진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S급 헌터 네 분이 같은 목적으로 함께 싸우는 모습을 세상에 실시간으로 보여줌으로써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황 장관의 목소리는 제법 진중했다.

하긴,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니 어쩌니 하는데 평소처럼 경박한 어투로 말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몸을 살짝 낮춘 후 안으로 들어갔다.

"화합…. 취지는 좋습니다만."

리우이호가 입을 열었다.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닿지 않았다.

물론 시선이 닿지 않았을 뿐, 다들 내가 몰래 들어오고 있다는 걸 기척으로 알아차렸을 거다.

이곳에 이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없었다.

"스승님이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싸울 만한 게이트가 있겠습니까?"

리우이호는 첫날과 달리 한국말을 유려하게 말했다.

마치 10년은 넘게 한국에서 산 사람처럼 보였다.

그 사이 한국말이 늘었을 리는 없고….

아마 밀러가 회의가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동시통역 마법을 써준 것 같다.

그 증거로 그녀는 모든 사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몰래 들어오는 나도 보이는 곳에.

그녀는 나를 보고는 눈을 찡긋했다.

어라?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걸.

왜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지?

밀러가 내게 윙크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난 그녀에게 눈으로 인사를 한 후 도희와 태천이에게 다가갔다.

도희와 태천이는 둘 사이에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빈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둘 사이에 앉자 도희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반면 태천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실실 웃어댔다.

그러다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야, 고등학생 때 생각나지 않냐. 우리 지각 밥 먹듯이 해서 몰래 들어가곤 했잖아."

"고등…? 아, 어쩐지 밀러 눈이 익숙하더라니…."

"뭐? 밀러?"

"아무것도 아니야."

"...?"

고개를 갸웃거리는 태천이를 뒤로 한 채 황 장관을 바라본다.

계속 말했다간 도희의 눈총을 받게 될까 봐서다.

당연히 속으로는 황 장관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듣는 척하면서 고등학생 때를 떠올렸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밀러의 윙크는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지각해서 서두르던 내게 원장 아줌마가 보냈던 윙크와 똑 닮아 있었다.

아줌마는 한 번도 나를, 아니, 우리를 깨워준 적이 없었다.

"네, 리우이호 씨의 말대로 네 분이 함께 싸운다면 웬만한 게이트는 소꿉놀이에 불과하겠습니다."

"그럼…."

"하지만 있습니다. 네 분이 함께 싸워도 괜찮은 곳이."

"그런 곳이 있다는 겁니까? 한국에?"

리우이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를 포함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엔 S등급 판정을 받은 게이트가 없었다.

가장 높은 등급은 A+등급이 다다.

그런 만큼 S급 헌터 네 명이 힘을 합칠 만한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황 장관은 자신만만하게 있다고 말했다.

있으니까 자신이 만만한 거겠지.

"후보지로 두 군데를 추려왔습니다."

"어디 어디입니까?"

리우이호가 묻자 황 장관이 옆을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배수현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놓인 빔프로젝터를 작동시켰다.

흰 스크린에 곧바로 내용이 떠올랐다.

"얼씨구…?"

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이 튀어나왔네?

저긴 한국이 아니잖아.

제147화

스크린에 후보로 지정된 장소가 떠올랐다.

그걸 본 사람들이 한마디씩 툭 내뱉었다.

"헐…. 저곳은…."

"그래. 저곳이라면 충분하겠어…."

"충분하다마다요!"

대부분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조주현도 그런 사람들에 해당했다.

물론,

"헤, 재미있겠는데."

태천이처럼 흥미를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스미르노프도 그런 쪽이었다.

러시아 놈이 자세를 고쳐앉고는 스크린을 빤히 쳐다봤다.

밀러와 그위친은 서로 대화를 나눴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고 있었으므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화면이 떠오르자마자 대화를 나눴으므로 저 장소에 관해 얘기하고 있을 거라는 것만은 추측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리롄제와 리우이호는… 조금 이상했다.

리우이호는 전자의 사람들처럼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조금 성질이 다르게 느껴졌다.

불안함?

그런 감정을 담아낸 눈으로 옆에 앉은 제 스승을 바라봤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리우이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

제자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롄제는 차분했다.

입을 다문 채 스크린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뭐랄까….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에서 그가 여러 생각에 빠진 걸 알 수 있었다.

저곳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리롄제는 저곳에 간 적이 없을 텐데?

"저기라면 확실히 가능하겠는데."

귓가로 한진환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돌아보자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피곤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또 이런 회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껄렁껄렁한 자세였지만, 황 장관은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황 장관도 현재 한진환이 경기장 전체에 결계를 펼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진환의 껄렁한 자세는 결계를 펼치는데 가장 편한 자세였고, 그걸 나무라는 건 괜한 일이었다.

"흠, 흠!"

황 장관이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곧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잠잠해졌고,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관심이 전무한 문외한이라면 모를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관련 종사자들이었다.

활동하다 보면 등급이 높게 책정된 게이트나 던전은 한 번쯤 들어보게 된다.

설령 다른 대륙에 있다고 해도.

그게 S등급이라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S등급 판정을 받은 게이트. 너무 강력해서 브레이크를 막을 수조차 없었던 게이트. 그 때문에,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게이트…."

황 장관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스크린에 떠오른 장소를 바라봤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 스크린을 바라봤다.

스크린 아래쪽에는 그 장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S등급 평양 던전."

평양 던전.

그렇다.

황 장관이 후보지라며 찾아온 곳은 한국에 있지 않았다.

북한에 있었다.

아니, 아니다.

이젠 북한이라고 지칭하면 안 되겠구나.

평양 게이트가 터져 던전이 되는 여파로 멸망해버렸으니까.

현재 북한은 거대한 던전에 불과했다.

살아남은 북한 사람들은 던전으로 변하지 않는 몇몇 땅에만 살아가고 있었다.

"여러분께서 협동해 이곳을 공략한다면, 화합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세계 최초로 S등급 던전을 공략한 헌터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 되겠지요."

세계 최초로 S등급 던전을 공략한 헌터.

그 타이틀은 여러 사람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세 명의 S급 헌터는 침묵을 지켰다.

유일하게 스미르노프만이 호승심을 느낀 듯 콧바람을 내뿜었다.

이 반응 차이는 뭐람…?

"분명 전 세계가 환희에 차게 될 순간-"

"…아니. 안 되네."

리롄제가 조용히 황 장관의 설명을 끊어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게감이 느껴졌고, 들뜨려던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세를 얻어가며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황 장관이 얼빠진 얼굴로 리롄제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에게 모였다.

여러 시선 중 스미르노프의 눈빛이 가장 고까웠다.

안 되다고 말한 리롄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왜 안 된다는 거냐."

"...."

스미르노프가 물었으나 리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아마 겉모습만 그런 걸 거다.

리우이호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반말 찍찍 해대는 스미르노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왜… 안 되신다는 겁니까?"

황 장관이 그답지 않게 굉장히 공손한 태도로 질문했다.

무척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는 리롄제에게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리롄제는 황 장관과 동년배인 한 장관이 오랜 팬일 정도로 경력이 긴 헌터였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헌터 생활을 오래 한 사람 중 하나일 거다.

그런 사람에게 불손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스미르노프는 예의라는 걸 찾아볼 수 없는 안하무인이었으니 예외다.

괜히 폭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겠는가.

리롄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스, 스승님…!"

리우이호가 말을 끊어내기 위해 스승을 불렀다.

리롄제는 감히 자신의 말을 끊은 제자를 바라봤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얼씨구.

저런 미소도 지을 줄 알아?

제자 사랑 끔찍한 거 보소.

주변에 사람 없었으면 머리라도 쓰다듬어줬겠네.

"괜찮다."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

리롄제는 5초 정도 제자를 쳐다본 후 황 장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는 평양 던전에 간 적이 있네."

"네?"

황 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롄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는 리롄제가 평양 던전에 간 적이 있었음을 몰랐던 듯하다.

"잠,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없이 다급하게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를 빠르게 훑은 그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배수현을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젓는다.

한국 헌터관리부 장관과 직속 부하가 전혀 몰랐다?

그렇다는 건….

리롄제가 평양 던전을 비밀리에 찾아갔다는 소리였다.

리우이호가 리롄제의 말을 한번 끊었던 이유를 알겠군.

한국이 실효 지배하는 땅에 중국인인 리롄제가 찾아갔다….

그건 대외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 따져댈 만한 문제는 아니다.

'화합의 장'이란 것을 위해 모인 자리였으니까 따져봐야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그걸 잘 알기에 황 장관은 차분한 목소리로 리롄제를 대했다.

그곳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 궁금하기도 하겠지.

"말씀, 계속 이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전부 숨기지는 못했다.

평소였다면 완벽하게 숨겼을 테지만….

지금은 전혀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어 당황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떠올라 있다는 사실도 모를 테지.

"그곳엔… 딱 하나의 존재만이 있었네."

"레드 드래곤…."

"그래, 맞네."

"너무나도 강해서… 북한은 모든 헌터를 투입했지만 쓰러뜨릴 수 없었죠."

"그렇지. A급 헌터들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황 장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레드 드래곤은 S등급으로 판정받은 몬스터였다.

리롄제의 말마따나 A급 헌터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막을 수 없었다.

최소한 한진환 같은 A+급 헌터가 있어야 쓰러뜨릴 가능성이 1%라도 생겼으리라.

그마저도 실낱같은 희망에 불과했지만.

그때, 새싹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경악합니다.]

[지구에 흉포하기로 유명한 레드 드래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아, 그러네.

새싹이 앞에서 S등급 게이트에 관해 말한 적이 없었네.

우리 세상엔 S등급 판정을 받은 몬스터가 세 마리 정도 있어.

태평양에 한 마리, 유럽에 한 마리, 아시아에 한 마리.

아시아에 있는 게 바로 레드 드래곤이 서식하는 평양 던전.

[어린나무가 놀라워합니다.]

[레드 드래곤만큼 강력한 존재가 있는데 어째서 지구가 멀쩡한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에이, 멀쩡한 건 아니지.

그게 나타난 바람에 북한이 멸망했는걸.

우리나라를 포함해 바로 옆에 있던 나라들이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멀쩡하다는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음. 그러니까….

유럽에 있는 게이트는 브레이크 하지 않았고, 평양이랑 태평양에 있는 다른 두 마리는 자고 있어.

[어린나무는 자고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관리인에게 설명을 요구합니다.]

어, 뭐라더라?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게이트 안과 비교하면 지구는 마나가 부족하다나?

그래서 드래곤처럼 거대한 존재들이 충분히 활동할 수가 없댔어.

불행 중 다행인 거지.

안 그랬으면 지구는 옛날에 멸망했을걸.

[어린나무는 의문을 느낍니다.]

[지구는 그 정도로 마나가 희박하지 않다고 전합니다.]

희박하지가 않다고?

[어린나무는 자신이 바로 그 증거라고 전합니다.]

[그만큼 마나가 희박했더라면 발아(發芽)하지 못했을 거라고 밝힙니다.]

[아무리 관리인이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져주었어도 불가능했을 거라고 전합니다.]

어라?

그게 정말이야?

[어린나무는 정말로 정말이며, 진짜로 진짜라고 전합니다.]

그럼 왜 드래곤들이 제 레어에만 있는 건데?

얼마든지 떠돌아다닐 수가 있을 텐데.

[어린나무는 그래서 의문을 느낀 것이라고 전합니다.]

흐음….

나도 새싹이처럼 의문을 느꼈다.

새싹이의 말대로 지구에 드래곤이 활동할 수 있을 만큼 마나가 충분하다면….

그것들은 왜 활동하지 않는 걸까.

또 전문가들은 어째서 그 진실을 밝히지 않은 걸까.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킬까 봐?

아니면, 단순하게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막지 못할 건 당연한 순리였습니다."

답이 떠오르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 장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새싹이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리롄제와 평양 게이트에 대해 떠들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뭐라고 했는지까지는 듣지 못했다.

핵이 어쩌고저쩌고했던 것 같긴 한데….

"처음부터 오기를 부리지 않고 다른 나라에 도움을 구해 원정대를 꾸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소용없었을 거네."

"네?"

"말했지 않나. A급 헌터들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물론 그렇습니다만, 여기 있는 S급 헌터분들께 도움을 구했더라면 쓰러뜨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

"리롄제님…?"

"그리, 생각하나?"

"네?"

"그랬다면, S급 헌터 전원이 모이는 이번 일은 없었을 거네."

"...네?"

황 장관이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도, 다른 이들도, 리롄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이는 일이 없었을 거라니.

그게 뭔 소리래?

"그날 우리가 모여서 그에게 갔다면…, 우린 전부 죽은 목숨이었을 거란 소리네."

"...!"

리롄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무덤덤했으나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고?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레드 드래곤.

이곳에서 그것을 유일하게 두 눈으로 목도한 사람의 목소리는 여러 상념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제148화

평양은 황폐했다.

초록의 생명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작고 거대한 두 존재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작은 하나는 인간이었고, 거대한 하나는 드래곤이었다.

레드 드래곤은 거대한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리롄제를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

리롄제는 당황했다.

사실, 그는 드래곤이 깨어 있을 줄 몰랐다.

당국의 전문가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게이트 밖은 안과 비교하면 마나가 부족하므로 활동할 수 없다고 했었다.

해서 리롄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용'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찾아온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두 눈을 마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그렇다.』

"한데 어찌하여 그 눈빛이 무료(無聊)한고?"

감히.

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마주하자마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레드 드래곤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임을.

『....』

레드 드래곤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리롄제도 대답을 원하지 않았기에 다른 말을 뇌까렸다.

"당국 전문가 놈은 분명히 자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아니. 그 인간은 여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를 속였다는 소린가?"

『그런 셈이 되겠지.』

"그렇다면…."

죽여야겠군.

리롄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레드 드래곤은 커다란 눈을 한번 깜빡였다.

황당함을 느낀 것이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다혈질이로군 그래.』

"호? 지금 내 마음을 읽은 게냐?"

『그 인간을 탓하지 말라. 여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니. 아니, 협박이라고 하는 쪽이 더 옳겠군.』

"협박이라…?"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지도에서 그대의 나라를 없애버리겠다고 했으니 협박이지.』

"과연 그렇군."

리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던 다짐을 철회했다.

1명의 목숨과 14억 명의 목숨.

그것을 추로 저울질한다면, 그도 당국 전문가와 같은 판단을 했으리라.

『…걱정하지 말라. 여는 그대를 죽일 생각이 없으니.』

"그러한가?"

『그대를 만나고 싶었다. 이 대륙에서 그대가 가장 강하기에.』

"가장 강한…."

리롄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아니지."

『훌륭하다. 느껴지는가?』

레드 드래곤이 리롄제를 치하했다.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 태도에 리롄제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만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횟수로 치자면,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그러나 한 번.

과거에 딱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생각보다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리롄제는 눈을 떴다.

"듣겠다. 말하라."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

"…그는 내게 인사를 건넸네."

얼씨구?

레드 드래곤이 인사를 건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새싹이가 나뭇가지를 흔들어댔다.

마치 "거 봐,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새싹이 말대로 레드 드래곤은 정말로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인사를 건넸다고요? 그것이 일어나 있었다는 겁니까?"

"그래."

"말도 안 됩니다! 드래곤은 게이트 안과 달리 마나가 부족해-"

"그래, 그래. 전문가들은 그렇게 말했지…."

리롄제는 황 장관을 바라봤다.

더는 말을 잇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전문가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은 달랐으니까.

그 진실을 직접 보고 온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 그럼… 태평양 던전도…?"

"그렇겠지."

"허어…."

황 장관의 몸이 휘청거렸다.

쓰러질 듯이 보였으나 그는 두 발로 제 몸을 버텨냈다.

몸을 반쯤 일으켰던 배수현이 다시 자리에 앉는다.

리롄제가 말을 이어나갔다.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드래곤이 자고 있을 거라고 말했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는 깨어나 있었고 인사를 건넸네."

"그렇다면, 드래곤들은 대체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언제든 활동할 수 있으면서 줄곧 자기들 레어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뭐랍니까?"

그러게.

그건 나도 몹시 궁금한 걸?

[세계수 어린나무도 궁금하다고 전합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리 중얼거리더니 리롄제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이 보였다.

황 장관을 포함해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기다렸다.

1분 정도 흘렀을까?

리롄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진의(眞意)는 나도 모르네. 다만… 나와 그는 약속을 하나 했지."

"예? 약속이요?"

"그래."

리롄제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드래곤과 했다는 약속에 관해서.

"그 약속이란…."

***

『여는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

참으로 중의적인 표현이로군.

리롄제는 그리 생각했다.

레드 드래곤의 말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이곳 평양을 자신의 레어로 삼겠다는 뜻이었고.

다른 하나는 레어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의문이 떠오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의문이었다.

몬스터란 자고로 인간을 해하려는 본능을 지닌 존재를 뜻한다.

드래곤 또한 그 범주에 속하고 있는 존재였다.

"세상에 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소린가?"

『그렇다.』

"어째서지?"

『...?』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기울였을 뿐인데도, 머리가 거대해 마치 언덕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을 발아래 둘 수 있을 터."

『그렇겠지. 동쪽 바다에 있는 놈만 죽인다면.』

동쪽 바다에 있는 놈.

그건 태평양에 있는 '그린 드래곤'을 의미했다.

드래곤끼리 서로 인지하고 있다.

또 "놈"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리롄제는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쾌재를 부르지 말라. 인간들보다는 그놈과 사이가 더 좋은 편이니.』

"마음 좀 안 읽으면 안 되겠나?"

『하하, 미안하구나. 여의 통찰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어쩔 수 없느니.』

"끄응…."

『잠깐 엇나갔군. 그대의 질문에 답을 해줘야겠지. 그러니까, 여가 왜 세상을 발아래 두지 않는가, 였지?』

"그렇다만."

『아마 동쪽 바다에 있는 놈도 여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

『여는, 우리는, 원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원해서 온 것이 아니다?

리롄제는 레드 드래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이트란 몇백 년 전 갑자기 나타난 것이며, 그 안에 살아가는 몬스터들은 인간을 해하고 세상을 정복하고 싶은 듯했다.

그것만이 목적이라는 듯이.

레드 드래곤이 말했다.

『여의 세상은 위그드라실. 이곳이 아니란 말이다.』

***

"…뭐? 뭔그드라실?"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아차차, 이런.

놀란 나머지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날 바라본 이들이 각각 여러 반응을 취한다.

도희는 재빠르게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고, 태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며, 한진환은 킥킥 웃어댔다.

나를 좋게 보는 이들의 반응만 설명한 거다.

그렇지 않은 이들의 반응도 더할 수 없이 심하게 각양각색이었다.

배수현은 주둥이를 때리고 싶은 것처럼 눈을 부라렸으며, 리우이호는 욕을 내뱉고 싶은 듯 입술을 비틀어댔고, 스미르노프는 한심한 걸 본 사람처럼 '쯧쯧' 혀를 차댔다.

다른 이들의 반응은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겠는데….

스미르노프가 혀를 차니까 못 참겠다.

단전에서부터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퍽이나 아무것도 아니겠군.

리롄제의 눈빛은 그리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위그드라실을 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대충 무마하기로 했다.

티가 나버리긴 했지만, 의심이 확신으로 번지지는 않을 거다.

A급 헌터에 불과한 내가 드래곤이 말했다는 위그드라실이란 곳을 알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끊어 죄송합니다."

"후우…."

고개를 숙이며 또다시 사과했다.

리롄제는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 향했던 관심을 거뒀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겠네…."

"네, 부탁합니다."

진심으로.

영감 입에서 위그드라실이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

『여의 세상은 위그드라실. 이곳이 아니란 말이다.』

리롄제는 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직시했다.

레드 드래곤은 그를 보고 있었으나 동시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

분명, 그가 말한 위그드라실이란 곳이리라.

『인간이여.』

드래곤이 리롄제를 부른다.

리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말을 이어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여가 여의 세상이 아닌 곳을 발아래 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건…."

리롄제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사실, 그는 드래곤의 심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이 속한 세상이 아니기에 잠자코 있겠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허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의미를 찾지 못해 잠자코 있어 주겠다면… 리롄제로서는, 아니, 인간들로서는 무척 잘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레드 드래곤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똑같은 말이었으나 리롄제는 아까 들었을 때와는 달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드래곤은 이방인이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한.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는, 여가 그대에게 하는 약속이다.』

"약속…?"

『그대는 이곳으로 인간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진저.』

"약속이라고 해봐야 말뿐이지 않은가. 그런 건-"

『말뿐이 아니다. 여의 언약은 곧 마법이나 다름없으니.』

"...?"

『인간, 그대는 약속을 꼭 지켜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뼛속 깊이 후회하게 될 터이니.』

"...."

그제야 리롄제는 알게 되었다.

레드 드래곤이 자신을 기다린 이유.

그것은 이곳으로 진입하려는 인간들을 막기 위한 문지기가 필요해서였다.

세상에 4명밖에 없는 S급 헌터이며,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었던 그를 한낱 문지기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감히.

"…거부한다."

『아니. 거부는 거부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엔 죽음만이 있을 뿐."

『죽는 건 그대 하나다. 여는 이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강한 인간을 불러오면 그만이니.』

"바라던 바다."

『....』

레드 드래곤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눈앞의 인간을 죽이고 두 번째로 강한 인간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리롄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방도가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지."

『...?』

"나와 친구가 되지 않겠나?"

『...뭐라?』

드래곤의 눈이 커졌다.

거대한 호박석 같은 눈에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발톱으로 귓구멍을 후비고 싶은 듯이 보였다.

리롄제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나이에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 말이네만,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네. 용과 친구가 되는 것이…."

『....』

"신선이란 자고로 용과 하늘을 거니는 법이거든."

『....』

"또한, 친구의 부탁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하!』

드래곤이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숨은 곧 호쾌한 웃음이 되었다.

『재미있구나! 인간이여. 지금 그대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른단 말인가!』

"모르긴? 용이지 않은가. 외형이 서양 쪽 용인 게 조금 아쉽긴 하나…. 용은 용이지."

리롄제는 끌끌 웃었다.

10살 소년처럼 해맑게.

***

"그러니 평양 던전은 포기하게."

리롄제는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마치 어린 소년과 같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의 얼굴에서 순수함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거고, 자네들이 그곳으로 가겠다면 전력을 다해 막을 것이니."

"...."

회의실엔 침묵이 깔렸다.

리롄제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할 멍청이는 없었다.

자기 잘난 맛으로 막살아가는 스미르노프조차도 입을 다문 채였다.

뭐, 사람 된 도리가 있지.

친구와의 약속은 지킬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나저나 레드 드래곤과 친구가 되다니….

S급 헌터 정도 되니 친구의 레벨이 엄청난걸?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바보 같은 소리를 참지 못합니다.]

[관리인은 자신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합니다.]

응?

내가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했어?

[어린나무는 백도운은 세계수가 친구라고 전합니다.]

[드래곤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코웃음을 칩니다.]

앗, 그러네.

그 말이 맞는걸?

확실히 드래곤보다는 우리 새싹이가 100배 1000배 낫지.

특히 귀여운 면에서 상대가 안 되니까.

제149화

"친구분과 약속을 하셨다면…."

침묵을 깬 것은 황 장관이었다.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평양 던전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군요."

"잘 생각했네."

리롄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황 장관의 결정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럼-"

"잠깐만요."

한진환이 황 장관의 말을 끊는다.

손을 들어 올린 모습은 마치 수업 시간에 선생에게 질문하려는 학생 같았다.

껄렁한 자세 때문에 불량한 학생으로 보이긴 했지만.

"...?"

황 장관이 한진환을 돌아봤다.

그는 황 장관이 아니라 리롄제를 보고 있었다.

한진환이 리롄제에게 물었다.

"레드 드래곤 씨가 활동하지 않는 이유는 잘 알겠어. 그럼 그린 드래곤은?"

"음?"

"그것도 레드 드래곤 씨와 같은 이유로 활동하지 않는 거요?"

"글쎄."

"글쎄, 라니.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일이요."

"흠…."

리롄제는 생각에 빠졌다.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레드 드래곤은 그린 드래곤도 자신과 생각이 비슷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레드 드래곤 혼자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린 드래곤이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어떤 이유로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는 그린 드래곤 본인만 알 것이다.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하지."

"그게 누군데?"

"...."

리롄제는 밀러를 쳐다봤다.

그녀는 노인의 시선이 닿자 일순 당황한 눈빛을 내비쳤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엔 충분했다.

밀러가 그린 드래곤의 의중을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자네. 녹색 용을 만났지?"

"…어떻게 알았죠?"

밀러는 순순히 시인했다.

숨기려고 한다면 숨길 수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밝히길 선택했다.

"그가 말해줬네. 다른 대륙에 있는 강한 인간 마법사가 녹색 용을 만나러 동쪽 바닷속으로 들어갔노라고."

"그렇군요…."

"자네도 친구가 됐나?"

"아쉽게도 친구가 되진 못했어요.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요."

"...?"

리롄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가 될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영감탱이 같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드래곤이랑 친구가 될 생각을 누가 하겠냐고.

밀러는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당시의 나는 어리석었어요."

"허, 설마 싸우러 간 겐가?"

"아뇨.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자서 사냥할 생각이었죠.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저런…."

리롄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멍청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나무라는 듯한 태도였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밀러는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리롄제의 태도를 인정한다는 듯 엷게 미소 지었다.

회한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심해에서 그것을 봤을 때…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어요."

밀러가 몸을 떨었다.

두려움?

그때의 일이 떠올라 두려워하는 건가?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희열을 느꼈다.

그 증거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눈빛도 몽롱해져서 꼭 약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왜 저러나 싶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리롄제는 그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여 댔다.

뭐람.

같은 S급 헌터는 이해하는 건가.

"그 길고 거대한 몸이 팔뚝만 한 작은 크기로 보이는 거리였지만, 난 알 수 있었죠. 혼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그래서 돌아가려 했는데-"

"잠깐."

"네?"

"사족을 붙여 미안하네만, 길고 거대하다고 했나? 혹시 생김새가…."

"아, 네. 동양의 드래곤 같은 모습이었어요."

"태평양…."

"...?"

리롄제가 꿈에 취한 듯 중얼거린다.

태평양이라니.

설마, 저 영감….

"태평양 던전에 가봐야겠구나…."

"...."

이야, 이 영감….

첫인상과 굉장히 달라지네.

엄금진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는걸?

수제자 얼굴을 좀 보라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얼굴이잖아.

리우이호가 그를 힘없이 불렀다.

"스승님…."

"음? 아, 흐음, 흠!"

리롄제는 민망함을 느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러고는 밀러에게 오른손 바닥을 내보였다.

말을 이어가 달라는 제스쳐였다.

"미안하네, 계속하게."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린 드래곤이 날 불렀어요."

"그럼 밀러 너도 약속한 거야?"

"아니. 아쉽게도, 나는 약속을 하지 않았어, 한."

"그러면?"

"우리는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대화 내용은…."

밀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입가의 미소와 달리 눈은 전혀 웃지 않았지만.

대화 내용을 말할 생각이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한진환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기, 방금 나는 약속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죠?"

"네, 맞아요, 미스…."

"배수현입니다."

"아, 미안해요. 미스 배.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다른 누군가가 약속을 했다는 소리다.

리롄제와 레드 드래곤처럼.

"나보다 앞서 그린 드래곤을 만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약속했고요?"

"맞아요. 레드 드래곤과의 약속과 비슷한 약속이었죠."

"그게 누구였는데? 그린 드래곤이 말해줬어?"

진환이 묻는다.

밀러는 그를 잠깐 바라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본 것은 도희였다.

마치 그린 드래곤을 만난 사람이 누구였냐는 질문에 도희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자연히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도희를 향했다.

왜 도희를 쳐다보고 지랄이야?

도희는 2년 동안 태평양 쪽으로는 간 적이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상공을 날아다닌 것을 제외하면.

밀러 때문에 갑자기 사람들 시선을 받게 된 도희는,

"...??"

왜 날 쳐다보고 지랄이야?

지금 타이밍에 나를 보면 꼭 그린 드래곤 만난 사람이 나 같잖아.

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어린나무가 크게 감탄합니다.]

[방금 관리인과 동생의 얼굴이 완벽하게 일치했다고 전합니다.]

당연한 거 아니니?

도희는 내 동생인걸.

나보다 머리가 좋고, 인성도 더 좋아서 티는 잘 나지 않지만.

어엿하게 우리 백 씨 집안의 인간이라고.

[어린나무는 백 씨 집안의 인간이란 게 그리 좋은 것 같지 않다고 전합니다.]

아하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새싹아.

너도 훌륭한 백 씨 집안의 아이란다?

내가 괜히 너를 '백 새싹'이라고 부르겠니?

[어린나무는 나뭇가지를 흔듭니다.]

[관리인의 말을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히히, 부정해도 이미 늦었어.

"그린 드래곤과 약속한 건 프랑스인이었어."

밀러가 도희에게서 시선을 뗀다.

그러고는 한진환의 질문에 대답했다.

"...프랑스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방금 도희를 쳐다본 건 뭐였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나도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왜 도희를 본 걸까.

"알아보니 물을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였지."

"아. 태평양 던전은 심해에 있으니까…."

"맞아. 심해에 들어가려면 그 정돈돼야 하니까."

"흠. 그렇군…."

한진환이 감탄할 때,

"물을 다루는…?"

도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쳐다보니 도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처럼 아랫입술도 살짝 깨물었다.

혹시 도희는 그 물을 다루는 마법사와 아는 사이인 걸까?

그런 거라면 밀러가 도희를 잠깐 쳐다봤던 것도 말이 된다.

"이봐."

스미르노프가 끼어들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놈은 지금의 대화가 지루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린 드래곤도 약속이란 걸 했다는 것 아닌가?"

"맞아."

"지금 당장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고."

"그렇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을 이리 장황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그러고는 스미르노프는 세차게 혀를 찼다.

놈의 무례한 행동에 밀러는 당황한 듯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이해한다.

S급 헌터인 그녀는 자기 앞에서 저렇게 함부로 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러시아 놈은 살아가는 목적이 사방에 적을 만드는 건가?

저러다 큰코다치지.

아니, 제발 좀 다쳤으면.

"흠, 흠!"

황 장관이 주의를 끌었다.

시선이 모이자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동시에 배수현을 쳐다보며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럼…. 다음 후보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달칵.

빔프로젝터 버튼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넘어갔다.

화면에 떠오른 사진은 섬이었다.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큰 섬.

바로 동해에 있는 울릉도다.

"오…."

나는 곧바로 태천이를 돌아봤다.

태천이는 내 시선을 느끼곤 입술을 비틀었다.

"뭘 봐."

"울릉도 게이트잖아."

"그래서."

"기분이 어때?"

"…엿 같다. 됐냐?"

그러고는 태천이는 입술을 삐죽 내민다.

어휴, 저 튀어나온 입술 좀 봐.

물에 빠지면 저거만 동동 뜨겠는걸.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친구가 왜 저러느냐고 묻습니다.]

태천이가 공략에 실패한 곳이야.

A등급 길드들이 연합해 원정대를 꾸렸는데, 태천이가 탱커로 뽑혀 참가했었지.

원정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활약하긴 했나 봐.

원정대 소속 헌터들이 원정 이후 태천이를 한국 최고의 탱커로 인정했거든.

감사 인사도 전해왔고.

태천이 덕분에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들도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마 정부나 협회에 의해 발언을 제한당한 듯했다.

길드 연합 원정이 실패한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린나무는 나뭇가지를 휘젓습니다.]

[친구를 위로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관리인에게 실망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방금 위로해줬잖아.

못 봤어?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그런 점이 참 걱정이라고 전합니다.]

"울릉도 게이트."

황 장관이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A+등급으로 책정된 게이트로서, 우리나라가 아직 개척하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

"개척하지 못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밀러님."

"한이 있는데요?"

밀러가 한진환을 돌아본다.

다른 S급 헌터들도 그를 쳐다봤다.

적잖이 놀란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그가 공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퍽 놀라운 듯했다.

"그게…."

황 장관은 한진환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실패를 이야기해야 하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어린나무가 나뭇가지를 위아래로 휘두릅니다.]

[바로 저 모습이 관리인이 보였어야 할 행동이라고 전합니다.]

[친구의 실패를 함부로 떠드는 건 좋지 못한 일이라고 조언합니다.]

잔소리 멈춰…!

백 씨 집안에 도희 같은 똑바른 아이는 한 명으로 충분해.

"후우…."

한진환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고는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뭔 일 있었나?

"그곳의 보스 몬스터는 '이무기'였어, 밀러."

"이무기…?"

밀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무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다.

하긴.

이무기는 한국 신화에 나오는 동물이니 미국인인 그녀는 모를 법했다.

오히려,

"한국에서 이무기란 용이 되기 이전의 동물을 뜻하네."

중국인인 리롄제가 아는 게 더 이상한 것이었다.

대체 이 영감은 왜 아는 거지.

용 범주에 속하는 것 같으면 다 좋아하는 건가?

"용이 되기 이전…? 아! 들은 적 있어요. 1000년 동안 수행한 뱀은 용이 된다죠?"

"어허.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이무기에게 뱀이라고 했다간 사달이 날 수도 있네."

"네?"

"모르나? 이무기의 재미있는 점은 수행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스승님."

"처음 만나는 사람이 '용이다!'라고 하면-"

"스승님!"

"흠…."

수제자의 부름에 리롄제가 입을 다물었다.

아쉬운 마음이 남은 듯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음, 설명 고마워요. 그러니까… 드래곤 정도는 아니지만 강력한 몬스터…란 거죠?"

"그렇지. 하지만, 자네가 쓰러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닐 터."

"그게 말이지…."

한진환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본인 실패를 직접 말해야 한다는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 구렁이 새끼 번개 속성이더라고."

"아…."

사람들이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번개 속성인 이무기.

한진환이 공략하지 못한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 같은 속성이면 데미지가 반감되는 법이니까.

제150화

"난 '버스트 모드'로 그놈을 공격했거든?"

한진환이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스트 모드란 온몸에서 푸른 번개를 내뿜던 것을 의미한다.

나의 광합성 모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킬이다.

광합성 모드는 그동안 모았던 햇빛 에너지를 사용한 버프 스킬이지만, 그의 버스트 모드는 전력을 내기 위한 전제 조건 같은 것이었다.

그걸 쓰지 않으면 한진환은 전력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구렁이 새끼 다치기는커녕 더 강해지더라니까?"

"더 강해졌다고?"

"어."

"놀랍네. 한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니…. 역시, 속성은 무시할 수 없네."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밀러?"

"뭔데?"

"그놈이 하는 공격도 내게 통하지 않았다는 거야."

"아."

"그래. 그놈이 날 공격하면 할수록 내 컨디션이 좋아지더라고."

"하, 하하…."

밀러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엔 한진환과 이무기가 서로 공격하고 컨디션이 좋아져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떠올랐을 거다.

어떻게 아느냐고?

내 머릿속에서도 그 모습이 연상됐으니 알 수밖에.

아마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의 머릿속도 비슷할 터.

"과연, 한 혼자서는 공략할 수 없겠네."

"다 수련이 부족한 게지. 자기 능력만 믿고 설치니 그리되는 게다."

"영감탱이 제자들인 거 자랑해? 왜 이렇게 잔소리가 늘었어?"

"쯧쯧. 말본새하곤."

리롄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모습을 보던 한진환이 태천이를 돌아봤다.

"이태천, 넌 나 이해하지?"

"...?"

"너도 이무기 사냥 실패했잖아."

"...."

태천이는 어이가 없는지 한진환을 바라봤다.

남의 실패를 함부로 말한 게 당황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실패한 사람끼리 동병상련을 느끼는 것일까?

한진환에게 무슨 그럴 소릴 하냐고 따지진 않았다.

"흥."

그때,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미르노프였다.

태천이를 바라보는 놈의 얼굴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저 새끼가?

나는 스미르노프를 노려봤다.

도희도 놈을 째려본다.

그렇다.

우리 3남매는 사이좋은 남매답게 같은 마음이 되어 스미르노프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언젠가 꼭 저 새끼 오른 발목을 자르고 말리라.

"…이태천 헌터는 그래도 한진환 헌터와는 달리 활약했습니다."

빔프로젝터 버튼만 누르던 배수현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한진환 헌터가 공략에 실패한 후, 우리나라는 A급 헌터들로 원정대를 꾸렸습니다."

"공략한 적이 없다고 말했으니, 실패했겠군."

"맞습니다, 리롄제 님. 이무기의 힘은 A급 헌터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공격도 전혀 통하지 않았죠."

"으음? 어떤 공격도, 라고 그랬나?"

"그렇습니다. 기록된 영상에 따르면 투명한 실드가 공격들을 전부 막아냈습니다."

"잠깐만요."

밀러가 끼어들었다.

"어떤 공격이라는 건, 그러니까, 모든 속성을 방어했다는 건가요?"

"네."

"모든 속성을 방어하는 마법? 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영상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울릉도 게이트로 결정이 될 경우, 바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배수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밀러는 잠깐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미국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게이트 정보를 함부로 열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투명한 막…?"

한진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공격할 땐 그런 거 없었는데?"

"위력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군."

"위력? 그게 무슨 말이요?"

"모든 속성을 방어하는 실드 마법. 듣기엔 좋아 보이지만 그런 건 약점이 많아."

리롄제의 말에 한진환이 바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한 건 밀러다.

마법에 관한 한 이곳에서 그녀만 한 전문가가 없었으므로 리롄제는 발언권을 넘겨주었다.

"조금만 더 강한 공격에도 쉽게 깨진다거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마나 소비가 엄청나다거나."

"아하."

밀러는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가며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한진환이 "아하" 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이무기의 방어 마법에도 분명 약점이 있었을 거야. 한의 공격을 막지 못한 걸 보면… 아마 실드보다 더 강한 위력을 담은 공격은 막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

"네, 우리나라 마법 연구가들도 밀러 님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배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밀러의 말에 긍정했다.

한진환은 '오, 역시 밀러.'하고 칭찬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밀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보며 배수현이 안타까운 투로 덧붙였다.

"문제는 A+등급의 이무기가 펼친 실드 마법이라는 거였죠…."

"아, 그렇네요. 최소한 공격력이 A+등급은 돼야 통하겠어요."

"등급이 깡패란 소리네."

"속된 말로 하면, 한의 말이 맞아."

생각해 보니, 참으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실드 마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무기를 공격할 수 있는 헌터는 한진환이 유일했다.

운명의 장난인 건지.

하필 같은 속성이라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게 문제였고.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실드 마법을 뚫는 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무기에게 성공적으로 데미지를 주기 위해선 뚫어야 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이무기의 비늘이었다.

방어력이 드래곤 비늘에 비견되는 그것을 뚫어야만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원정에서 우리나라 두 손가락 안에 드는 탱커인 이태천 헌터가 없었다면 많은 사상자가 났을 것입니다."

그리 말하고는 배수현은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하겠다는 듯 태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태천이는 극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쑥스러워했다.

정말, 팔불출이 되고 싶진 않은데 그렇게 된단 말이지.

나와 도희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배수현을 바라봤다.

언젠가 꼭 맛있는 간식을 사다 주리라.

"...."

우리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녀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면, 그곳이 적당할 거 같군."

리롄제가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그의 뒤로 밀러와 그위친 그리고 스미르노프도 찬성표를 던졌다.

일사천리로 정해졌기 때문일까?

황 장관이 밝게 웃었다.

"그럼 울릉도 게이트로 픽스하겠습니다. 다음은 일정 문제로 넘어가겠-"

"이봐."

"…네, 스미르노프 님."

황 장관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차분한 태도와 달리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나이가 있는데 반말을 받았으니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스미르노프 옆에 있던 통역사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참 고생이 많은 인간이다.

"멤버는 어떻게 할 거지?"

"...?"

"우리 S급 헌터 네 명, 이렇게 끝인 건가."

"네. 그럴 계획입니다."

황 장관은 한진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진환 헌터는 울릉도 게이트에선 무능하니까요. 아무튼, 도움이 안 되는 친구라니까."

"…허, 듣는 사람 상처받게 말씀 신랄하게 하는 거 보소?"

한진환의 대응에 황 장관이 짧게 웃었다.

다른 이들도 살포시 웃어댔다.

스미르노프의 반말로 인해 조금 굳었던 분위기가 풀렸다.

아마 두 사람은 일부러 그리 말한 것일 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미르노프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사람을 더 추가하는 게 어떻겠나?"

"네? 추가?"

황 장관이 반문했지만, 스미르노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서는 태천이를 바라본다.

설마….

저놈 태천이 꼬드기는 거 아직도 포기 안 했나?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걸.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밀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녀는 도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도희는 아하하 웃었다.

저 웃음을 안다.

속으로는 귀찮아 죽겠다고 중얼거리는 얼굴이었다.

학창시절 나 대신 도희에게 잔소리하던 선생을 바라보던 얼굴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해요?"

"음…."

밀러가 리롄제에게 질문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수염을 쓸어넘겼다.

생각에 잠긴 듯한 스승을 리우이호가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함께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 제자를 흘깃 본 리롄제는 껄껄 웃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군."

정말이지, 제자 사랑이 끔찍한 스승이다.

오늘 참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용에 환장한 모습을 보여주질 않나.

물론,

[경고!]

[어린나무가 관리인에게….]

똑같은 모습도 꾸준하게 보여줬다.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주라….

밀러가 옆에 있는 그위친에게 물었다.

"그위친. 당신도 괜찮죠?"

"그럼, 괜찮고말고."

팔짱을 낀 그가 싱긋 웃는다.

둘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는걸?

같은 나라의 S급 헌터니까 사이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친구나 동료에게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알콩달콩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새싹이가 두근거린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다.

가족…?

그런 느낌이 든달까?

마치 사이좋은 삼촌과 조카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하긴, 둘의 나이 차이가 딱 그 정도기는 하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인원을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장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가?

결정이 빠르다.

그가 아니라 김태석이었다면….

'상부에 보고해야 하니…' 따위의 말로 회의를 지지부진하게 만들었으리라.

"인원은-"

"이태천. 나는 저놈을 참가시키고 싶다."

"놈? 이게 어디서 놈이래?"

태천이 눈을 찌푸리며 스미르노프를 째려봤다.

마음이 잘 맞는 우리 남매도 태천이를 도와 스미르노프를 째려봤다.

스미르노프는 그런 우리가 가소로운지 비웃었다.

저 새끼가?

[어린나무는 거인의 웃음이 싫다고 전합니다.]

[따라서 관리인 남매의 행동에 동참합니다.]

좋아.

그래야 우리 백 씨 집안 아이지!

"...."

우리가 그러고 있을 때, 황 장관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빡쳤군.

저건 빡친 사람의 한숨이다.

황 장관은 그러나 어른이었다.

참을성이 굉장히 굉장한.

"…다른 분들도 참가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미스 백을 참가시켜도 될까요?"

"싫…."

도희는 말을 하다 말았다.

싫다고 말하려고 했지, 지금.

부정하려던 모습은 금세 지우고는 싱긋 웃어 보인다.

와, '싫…'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밀러에게 고마워하는 줄 알았을 듯하다.

황 장관은 다음으로 리롄제와 그위친을 바라봤다.

리롄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어 뭐하겠나. 내 제자를 데리고 가도록 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위친 님은…?"

"음…. 나는-"

"잠깐. 미국에서 둘을 추천한다면 형평성에서 어긋나지 않나."

리롄제가 말을 끊었다.

영감의 말마따나 그위친도 추천한다면 미국에선 둘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위친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영감탱이.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따져대긴."

"뭐라?"

"그럼 중국이랑 러시아도 1명씩 더 데려가면 되잖아."

"음…."

오. 솔깃한가 본데.

리롄제는 황 장관을 쳐다봤다.

황 장관은 파르르 떨리는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계획과 달리 갑자기 인원이 늘어나게 됐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제멋대로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서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는 마인 길드의 조주현 군의 참가를 원하네."

"예? 저 말씀입니까?"

조주현이 당황해서는 되물었다.

리롄제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다.

"싫은가? 그럼 거부해도 되네."

"아, 아닙니다! 참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껄껄. 그렇다는군. 조주현 군으로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스미르노프 님, 그위친 님,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더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꼭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관심이 생기질 않는군."

"...."

아, 저 새끼 진짜.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미국이랑 중국에서 두 명씩 하는데, 러시아만 한 명 추천하면 어떡하자고.

황 장관은 그리 말하고 싶은 얼굴을 하다가,

"…내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그위친의 말에 싱긋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네, 그위친 님."

"도운을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도운…. 백도운 헌터를 말하는 겁니까?"

"네."

황 장관이 나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 담겼다.

그위친이 나를 추천한 데에 따른 호기심이다.

어느 사이에 그렇게 친해졌냐는 듯 묻는 것만 같다.

이어 떠오른 얼굴은 탐욕이었다.

기회를 잡은 사람의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위친을 본다.

날 보는 그위친의 눈빛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듯 반가운 눈이다.

"...."

미친 건가.

그런 눈으로 왜 A+등급 게이트에 데려가려고 하는 걸까.

도희나 태천이는 몰라도, 나는 아직 그런 곳에 들어갈 정도가 아닌데.

후우….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

그위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남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눈이 탐욕으로 이글거리던 황 장관은 날 죽일 듯이 노려보기까지 했다.

저 양반 아까부터 왜 저래?

제151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

그위친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난 그보다 황 장관의 얼굴이 더 눈에 들어왔다.

황 장관은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람.

꼭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도운, 왜 거절하는 겁니까?"

"...."

상처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 뭔데.

살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그위친은 누가 봐도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불쌍하게 보였다.

나이상으로 아버지뻘인 중년 남자라는 건 잠시 차치해두자….

"나도 가고 싶긴 한데요."

S급 헌터들만 들어가는 거라면?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거다.

허나 도희와 태천이 간다고 하면?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럼 가면 되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자격이 안 되거든요."

"자격…?"

"네. 우리나라는 A+등급 게이트엔 랭커들만 들어갈 수 있어요. 최소 150위 정도는 돼야 하죠. 그것도 한 선배 정도가 아니면 6인 이상의 파티를 맺었을 때만 가능하고요."

"아, 그렇군요."

그위친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도 똑같은 제도가 있을 테니까.

세상 어디에든 바보들이 한둘쯤은 있는 법이다.

명성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자기 실력은 생각하지 않은 채 더 높은 등급의 게이트에 들어가는 멍청이들이.

등급이란 시스템이 안전선이란 걸 생각하지 못하는 거다.

그런 바보들의 말로는 죽음이다.

혹은 하트 브레이크를 쓴 후유증으로 반병신이 되거나.

"평범한 A급 헌터인 저로서는 들어갈 수가-"

"하하,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도운 헌터."

황 장관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얼씨구, 왜 이래.

바로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아. 그렇군.

웃고 있지만, 얼굴 전체를 보면 즐거운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 입 다물라고 말하는 듯한 단호함만이 느껴진다.

황 장관이 방긋 웃으면서 그위친에게 말했다.

"도운 헌터를 데리고 가고 싶으시다고요? 그렇게 하십시오."

"네? 하지만 도운은…."

"하하하! 괜찮습니다! S급 헌터 네 분이 함께 들어가는 데 문제가 생기기나 하겠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S급 헌터 네 명이랑 함께 있으면, 그곳이 설령 A+등급 게이트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될 거다.

"더군다나, 그위친 님이 바라시는 일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배려'해 드려야지요!"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아휴,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참….

솔직한 건지, 노골적인 건지.

어떻게 해서든 그위친에게 '배려'해줬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해는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도 장관이라는 양반이 제도를 저렇게 쉽게 어겨서야, 원….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할 말은 아니라고 전합니다.]

응? 내가 뭘?

[흰색 가면을 쓰고 A등급 게이트에 들어갔던 걸 떠올리라고 조언합니다.]

아….

그랬던 적이 있었지, 참.

새싹이의 말대로다.

난 불과 얼마 전에 아르카를 제작하기 위한 재료인 왓쳐의 눈알을 구하고자 A등급 게이트에 들어갔었다.

위조 자격증을 써서.

훌륭하게 제도를 어긴 것이다.

"그럼 이제… 흠…."

황 장관이 스미르노프를 돌아봤다.

스미르노프는 앞서 말한 대로 데리고 갈 사람을 추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팔짱을 낀 두 팔은 한번 결정한 것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냥 아무나 한 명 더 데려가면 될 일을….

"어, 잠깐만."

그때, 한진환이 이상함을 느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시선이 전부 모이자 그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나 왜 쏙 빼놓은 거야?"

그러고 보니….

S급 헌터들은 아무도 한진환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와 가장 사이가 좋아 보였던 밀러는 도희를 참가시켰다.

그 때문일까.

밀러가 슬쩍 시선을 피한다.

허, 한진환이 제외되다니.

저래 보여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인간인데….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고.

"지금 여기 있는 헌터들 중에서 나만 제외됐는데? 이거 맞아?"

"…생각 좀 하십시오, 한진환 헌터."

배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나무라는 투로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제외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 왜?"

"들어가 봐야 방해만 될 테니까요."

"와…, 말이 심하다?"

한진환이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마치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말이 심하긴 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한진환은 스스로 말한 대로 이무기와 승부를 낼 수가 없었다.

서로 공격했다간 서로의 컨디션이 좋아지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니까.

뭐, 공격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따돌림은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갑자기 사회 문제 얘기가 왜 나와요. 상관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한진환 헌터가 함께 하길 바란다."

"본인이 본인 데려가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정말 이럴 거야? 확 지금 들어가 버린다?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좀…. 하아…."

배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

나도 딱 그러고 싶었으니까.

한진환이 저러는 모습을 시민들이 보지 못한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저 떼쓰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를 향한 환상이 전부 깨져버릴 것이었다.

정말이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낯부끄럽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인지, 이 자리에 있는 한국인들은 전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한진환의 찐팬인 조주현조차도 그랬다.

[어린나무는 어이가 없음을 느낍니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백 씨 성을 가진 새싹이조차도.

뭐, 한국인인 내가 키워냈고 한국에서 제조한 스마트폰 속에 자라났으니 국산이긴 한가?

본체 자체는 성역에 있으니 국산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려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 해줘!"

한진환은 여전히 떼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인간이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A+급 헌터다.

몹시 안타깝게도.

"쯧…."

스미르노프가 혀를 찼다.

녀석은 눈을 찌푸린 채 한진환을 노려봤다.

"언제까지 그 광대 짓을 계속할 셈이냐? 천둥왕."

"뭐?"

"내가 네놈을 데리고 가겠다. 그럼 되겠나?"

"…정말? 이야,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한진환이 씩 웃는다.

얼씨구.

일부러 그런 거였어?

방금까지 부렸던 생떼가 전부 연기였다고?

이 인간 헌터가 아니라 배우가 돼야 했었네….

"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황 장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진입 날짜와 시간, 이동 방법 등등.

회의는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사흘 후 아침 이곳 한국 베이스캠프에서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기로 했고, 관련 사안에 관해서는 황 장관이 오늘 밤 9시쯤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회의 내용이 전 세계에 간략하게 브리핑 될 예정이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벌떡.

회의가 끝났다는 말을 알리자 스미르노프가 일어났다.

그러고는 인사말도 없이 휑하니 떠나버렸다.

옆에 있던 통역가가 다급하게 뒤쫓았다.

"…진환. 주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 장관이 두 사람을 불렀다.

이어서 나도 부르려는 건지 날 쳐다본다.

하지만,

"도-"

"태천 오라버니. 들쳐메요."

"응."

내 귓속으로는 도희의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태천이의 목소리와 함께.

들쳐메라니, 뭐를?

"읏차."

"...?"

의문의 답은 내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발이 지면에서 떼어진 것이다.

도희가 들쳐메라고 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태천이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어졌다.

김무연과 싸우고 쓰러졌을 때와 같이.

"뭐 하는 거야?"

"뭐하긴요. 오라버니 들쳐메라고 시켰죠."

"나는 그 말을 착한 아이처럼 따랐고."

"...."

착한 아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킨다고 무조건 따르면 생각 없는 아이인 거지.

하긴, 뭐….

나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도희가 나한테 시켰다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태천이를 들쳐멨을 거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에 따랐을 터.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고 익숙하게 들어 올리지는 못했으리라.

"…능숙하다? 너희 나 몰래 이런 거 연습하냐?"

"하하. 바보냐?"

"바보는 너고."

"실없는 소리 그만들 해요."

도희가 팔을 쭉 뻗는다.

흰 오른손이 바깥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앞으로 걸어나간다.

"자, 가요!"

"응!"

"어디를 가는쿠엑!"

"잠, 잠깐-"

뒤에서 황 장관의 황망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태천이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도희가 멈추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일하러 왔으면 그래도 돈 주는 사람 말은 들어야-

"쿠헥! 야, 너 지금 일부러 배 쳤지!"

"응?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쿠헉!"

도희를 따르는 태천이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의 다부진 어깨 근육이 내 배를 때렸다.

아니, 다리도 더 길면서 어떻게 도희 보폭에 맞추며 성큼성큼 걸을 수가 있는 건데….

이게 가능한-

"쿠헉!"

아, 좀!

***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5분쯤 걸었을까?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도희가 말했다.

"됐어요. 내려요."

"오케이."

태천이는 바로 나를 내려놓았다.

날 생각하는 마음을 한가득 담아서.

철푸덕!

"아야야…."

땅바닥으로 내리꽂듯 던져버렸다는 소리다.

어휴, 이 무식한 놈.

"오라버니."

도희가 무릎에 손을 올리고 쪼그려 앉는다.

태천이도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았다.

덩치 차이 때문인가?

두 사람은 마치 옆으로 쓰러진 눈사람 같아 보였다.

뭐, 온통 새하얀 도희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이기는 했다.

"왜 그래?"

"위그드라실 알죠."

어라.

저걸 물어보려고 날 데려온 건가?

도희가 이렇게 의심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날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응? 위그드라실?"

"말 돌리지 말고요."

"몰라."

"..."

"모른다니까?"

내 대답을 들은 도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태천이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이라곤 1%도 없는 눈들이었다.

아니, 너무하네?

[어린나무는 거짓말을 한 사람이 할 말이냐고 질문합니다.]

그래.

물론 내가 거짓말을 하긴 했어.

그래도 오빠가 한 말이잖아.

그럼 믿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다고 전합니다.]

딱콩!

새싹이의 바람이 컸던 걸까.

정말로 내 이마에 꿀밤이 때려졌다.

도희가 작고 흰 손으로 내 이마에 꿀밤을 때린 것이다.

"…도희야?"

"거짓말하면 꿀밤 때릴 거예요. 2배수로…!"

[어린나무가 관리인 동생의 행동에 공감합니다.]

[관리인은 꿀밤을 먹이고 싶을 때가 가끔….]

[아니, 아주 자주 있다고 전합니다.]

[하여 어린나무는 관리인 동생의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가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나를 향한 두 동생의 마음이 이렇다니.

내가 그렇게 인생을 잘못 살았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위그드라실 알죠?"

"…몰라."

딱콩, 딱콩.

도희는 정말로 꿀밤을 때렸다.

그것도,

"정말이야! 정말로 몰라!"

딱콩, 딱콩, 딱콩, 딱콩.

2배수로.

"...."

"...."

우리 도희.

진짜 2배수로 늘려갈 셈인 걸까?

도희는 주먹을 쥔 채로 물었다.

"계속 거짓말할 거예요?"

"믿지도 않을 거면 뭐하러 묻는 거야?"

"오라버니의 입으로 진실을 듣고 싶어서요."

"...."

보자.

방금 네 대 맞았으니까.

이번에 거짓말하면 여덟 대인가?

16대, 32대, 64대, 128대….

흠. 더 늘어나게 되면 때리는 시간 때문에라도 포기하지 않으려나?

[어린나무는 진실을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두 사람에게라면 밝혀도 괜찮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야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그러면 방금까지 맞은 게 억울하잖아.

처음부터 안 맞았으면 모를까.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 새싹아.

넌 아직 어려서 모를 거야.

이게 바로 어른의 삐뚤어진 오기란 거야.

"오라버니."

"응."

"방금 끝까지 모른 척하면 시간 때문에라도 내가 포기할 거로 생각했죠?"

"어? 아, 아니?"

"걱정하지 말아요. 다음부터는 태천 오라버니에게 부탁할 거니까."

"…어?"

뚜둑. 뚜두둑.

불길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태천이가 손가락들의 관절을 꺾어대는 소리였다.

저 해맑은 얼굴을 보라.

얼마든지 내 이마를 때릴 준비가 된 얼굴을.

"…압니다. 알아요. 잘 알고 말고요."

나는 진실을 말했다.

시치미 떼기에는 너무나도 큰 주먹이었다.

저걸로 128대 이상을 맞았다간 머리통이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어린나무는 삐뚤어진 어른의 오기는 어딜 갔느냐고 질문합니다.]

오기 부리던 건 도희한테였잖아.

태천이에겐 아직 안 맞았잖고.

그러니까 세이프.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궤변에 실망을 금치 못합니다.]

하하하하하.

제152화

"안다고요."

도희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태천이도 도희처럼 퍽 당황한 듯하다.

손가락 관절 소릴 내던 자세 그대로 날 쳐다본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걸까.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면서 뭐 그렇게 놀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놀라운걸요."

"그러니까."

하긴….

예상하는 것과 확실한 건 다른 거니까.

태천이 질문을 던졌다.

"거기 대체 어디야? 뭐 하는 곳이기에 드래곤들이 그렇게 많이 살아?"

"음, 그건…."

"왜?"

"여기서 말하기 좀 곤란해서…."

"뭐?"

태천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마 한진환의 결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의 결계는 안쪽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 우리 대화도 그의 귀로 들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른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위그드라실에 관해 떠드는 건 피하고 싶다.

이런저런 정보를 다 털어놓아야 하는 귀찮은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위그드라실을 안다는 정보까지는 괜찮다.

리롄제가 그 말을 꺼냈을 때 나도 모르게 "뭐? 뭔그드라실?"이라면서 아는 척을 해버렸으니까.

아마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몇몇은 내가 그곳에 관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할 거다.

도희와 태천이처럼.

"오라버니 말씀이 맞네요."

역시….

도희는 이곳 상황을 알고 있나 보다.

잘됐는걸?

다음에 얘기하자고 상황을 넘길 수 있겠어.

"이 얘기는 다음에 백운천 이사한 다음 천천히…."

"잠시만요."

"응?"

도희가 마법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애용하는 흰 지팡이를 꺼내자마자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30초?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쯤 도희에게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흰빛은 반경 5m 정도의 작은 막으로 변했다.

이거, 설마….

"결계 펼친 거야?"

"맞아요."

"결계 속에서 다른 결계를 펼쳤어?"

"별거 아니에요. 대화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니까."

"...."

그래, 결계 자체는 별것 아니네.

대화가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결계는 흔한 것이었으니까.

내가 놀란 건, 결계 속에서 다른 결계를 펼쳤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본인의 결계가 아니라 타인의 결계 속에서.

나는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한지조차 몰랐다.

"저번에 밀러를 만났을 때 그녀가 쓰더라고요. 한진환이 훔쳐 듣고 있을 거라나?"

도희도 도희지만, 역시 밀러다.

한진환이 친 결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조차 파악하고 있었다니….

"오라버니 행동을 보니 그 말이 맞았나 보네요. 전에는 수고스럽게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밀러가 안다면…. 미국에선 별다른 정보를 얻어내지 못하겠네."

"중국 쪽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렇겠지."

리롄제는 마법사가 아니니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으리라.

하지만 원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니….

'한진환이 펼친 결계이니, 엿듣는 기능이 있을지 모르겠군.'

이라고, 유추해서 말을 가려가며 하고 있을 터.

"한 선배 불쌍하게 됐네. 쓸데없이 고생만 하고 있어."

"…그래도 스미르노프는 모르는 것 같던데."

태천이 턱을 긁어 대며 말했다.

"원래 멍청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죠."

"으음…."

도희의 말에 태천이 입을 다문다.

살짝 풀이 죽은 모습이다.

도희는 스미르노프가 싫어서 신랄하게 말한 것이었지만, 태천이에게까지 스플래시 데미지가 들어가 버렸다.

스미르노프가 모르는 것 같다는 말에 본인도 포함돼 있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요. 이제 괜찮으니 말해 봐요."

도희는 본론을 듣길 원했다.

가끔 보면 얘도 눈치가 없다니까.

머리는 좋은데.

"레드 드래곤이 살았다는 위그드라실…."

"...."

"그곳은 대체 어디예요? 뭐 하는 곳이죠? 그리고 대체 왜…."

붕붕.

도희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갑자기 왜 저런담?

"대답…해 주세요, 오라버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그녀의 얼굴은 보육원에서 살 때 냉동실에 넣어둔 아이스크림을 훔쳐 먹은 사람을 찾을 때보다도 진지했다.

"…나도 잘은 몰라."

"모른다고?"

태천이 주먹을 들어 올린다.

꿀밤을 때리려는 것이다.

아직도 도희의 명령이 유효했을 줄이야….

태천이가 때리면 '딱콩'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아, 진짜야! 미친놈아! 내가 아는 거라곤 전대 세계수와 전 관리인이 살던 곳이라는 것뿐이라고!"

"전대 세계수? 관리인?"

"그래. 새싹이 이전에도 세계수가 있었을 거 아니야."

"그야 그렇지?"

"나처럼 세계수를 관리하는 인간도 있었을 거고."

"아, 그렇겠네. 응? 잠깐만…. 그럼 전대 세계수랑 전 관리인은…."

"죽었대. 그쪽 세상에 있는 마족이라는 놈과 싸우다가."

"어, 마족이라면…."

"맞아. 크라우드 놈들이 숭배하는 놈."

"...."

태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참아내기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로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고인을 기리고자 묵념을 하는 것이었다.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언젠가 다 자라면 관리인처럼 나뭇가지에 태워줘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태천이도 좋아할 거야.

"...."

그런데….

아까부터 도희가 조용하다.

태천이처럼 질문을 던져 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하다.

바라보니, 도희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이 보였다.

아까부터 조금 이상한걸…?

뭐, 이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가 떠오른 것을 잊어버리게 할지도 모른다.

묵념을 끝낸 태천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새싹이라고 부르는 거야?"

"어?"

"나무잖아."

태천이 검지로 화면을 가리킨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엔 새싹이가 작게 떠 있었다.

어린나무의 모습으로.

녀석 말대로 어린나무를 새싹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계속 새싹이로 부르다 보니 굳어져 버렸어."

이제 와서 새싹이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건 입에 붙지를 않는다.

묘목이, 애목이, 유목이, 치목이 등등.

여러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역시 새싹이 만큼 입에 착착 붙는 건 없었다.

"하하, 너답다."

태천이는 잠깐 웃어 보이더니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어린 동생을 대하듯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걸. 안녕, 새싹아."

[어린나무도 관리인의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새싹이도 반갑대."

"뭐야, 의사도 전달해?"

"응."

"아하. 그래서 너 요새 혼자 중얼거렸던 거구만?"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랬었다고?

"나 혼자 중얼거렸었어?"

"몰랐냐? 너 요즘 혼잣말 엄청 늘었어."

"...."

"진짜 몰랐나 보네. 뭐, 걱정하지 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서 사람들이 듣지는 못했을 거야."

"넌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뭐?"

"그런 이상한 짓을 하면 말해 줬어야지!"

"뭐래. 네가 이상한 짓 하는 게 하루 이틀이야? 그러려니 했지."

하아아….

속에서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만찬장에서도 그렇고 대체 저 이상한 믿음은 뭐냐고.

"태천아."

"응?"

"그, 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좀 고쳐야 할 것 같다."

"네가 할 말이야?"

태천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건….

스미르노프 때를 이야기하는 게 분명하다.

이 자식, 멘테 줘서 다 풀렸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좀생이처럼 여태 삐져 있었다.

"그치, 새싹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태천이는 검지로 화면을 살살 두드렸다.

[어린나무는 관리인 친구의 말에 긍정합니다.]

어쭈.

둘이 쿵 짝이 참 잘 맞는걸….

"그런데 옆에 이 애들은 뭐냐?"

새싹이를 만지던 태천이 물었다.

옆에 애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화면 속엔 새싹이 혼자만 있지 않았다.

12명의 엘프가 함께였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SD 캐릭터로 표현된 엘프들이 3명씩 4개의 무리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무리의 중심에 둔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크통 같은 데에 검은 액체가 담겨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저게 대체 뭐람?

밤쯤에 성역에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 하나?

"귀엽구만? 귀가 긴 것을 보니… 설마 엘프냐?"

"맞아."

"헤에…. 세계수가 자라나더니 이젠 엘프가 찾아왔어?"

태천이 화면을 두드린다.

각도가 조금 달라진 것을 보니 새싹이가 아니라 엘프들을 터치한 듯하다.

뭐, 화면 어딜 두드리든 새싹이에게 마나가 전달되므로 어딜 터치하든 상관없었다.

"어…?"

태천이가 당황한 목소릴 냈다.

스마트폰 화면을 마구 두드리던 손도 멈췄다.

"왜 그래?"

"바, 방금… 엘프들이 보던 걸 터치했거든?"

"그런데?"

"그게 갑자기 폭발했어…!"

"뭐, 인마?"

그게 왜 폭발해?

나는 황급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

아까 봤을 때 오크통은 총 네 개였다.

그게 이젠 하나가 줄어 세 개가 되었다.

태천이의 말대로 폭발한 듯 잔해물이 사방팔방 퍼져 있다.

또 엘프들의 몸은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모습이다.

터진 오크통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엘프는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레지나였다.

설마 다쳤나?

[어린나무는 다친 엘프는 없다고 전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전합니다.]

[이어 제조하던 것이 실패해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니, 대체 뭘 만들길래 폭발을 해?

이상한 거 만드는 거 아냐?

[어린나무는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전합니다.]

[다만, 위그드라실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중이라고 설명합니다.]

"…새싹이가 아무도 안 다쳤대."

"정말? 정말 아무도 안 다쳤어?"

"어. 다들 괜찮아. 새로 만들던 게 실패했다나 봐."

"하아, 다행이다…."

태천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뒤로 풀썩 드러누웠다.

뭐 얼마나 봤다고 이렇게 걱정을 해?

"와, 씨…. 나 때문에 큰일 난 줄 알고 깜짝 놀랐어."

"너 때문…? 아."

왜 이렇게 안심하나 했더니….

타이밍 때문에 착각한 모양이다.

손으로 터치하자 오크통이 터졌으니 자기 때문에 사달이 난 거로 착각할 만도 하다.

"너 때문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후…, 진짜 다행이다. 근데 뭘 만드는 데 폭발을 하는 거야?"

"글쎄…?"

태천이와 같은 의문을 느끼며 화면을 바라본다.

화면 속 엘프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즐거워하는 걸 보니 폭탄 같은 건 아닌 듯한데.

흐으음.

폭발하는 검은 액체….

"...."

왜 뭐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안 떠오르지?

***

도운이 떠오를 듯 안 떠오르는 무언가를 연상하려고 할 때.

푸른 모닥불이 타오르는 방에 두 사람이 있었다.

A등급 테러 조직, 크라우드의 핵심 멤버인 원과 해골이었다.

그들은 푸른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정좌한 채 고요했다.

얕은 호흡에 따른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허억…!"

"쿨럭, 쿨럭!"

격렬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들의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끼이익…!

조용하고 잠잠하던 방이 소란스러워지자 문이 열린다.

늑대 브로치와 풍뎅이 브로치를 달고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스승님!"

"주인이시여!"

"오지 마라!"

원이 노성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분노가 묻어났다.

또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이 느껴지기도 했다.

늑대와 풍뎅이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됐, 끄으…으니, 오지 말거라…!"

원은 힘겹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간부들을… 소집해라. 당장…!"

"예, 알겠습니다!"

늑대는 바로 대답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반면 풍뎅이는 잠시 멈춰 서서 해골을 돌아봤다.

해골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후에야 풍뎅이는 몸을 넙죽 숙였다.

"따르겠나이다."

그러고는 늑대처럼 곧바로 방을 빠져나간다.

다시 푸른 모닥불이 타오르는 방에는 원과 해골만이 남게 되었다.

스윽.

해골이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았다.

"친우여. 세상사 쉽게 되는 일이 없군그래."

"후우우…."

"설마 백도운이 세계수 관리인이었을 줄이야…."

"이것도 운명인 게지."

"운명이라…. 끅끅."

해골이 힘겹게 웃었다.

닦아 낸 것도 무색하게 웃을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몇 번 더 닦다가, 그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피에 무슨 소용인가 싶었는지 이내 그만두었다.

"자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다니, 감회가 새롭군…."

"...."

"노려보지 말게. 놀리는 거 아니니."

"후우…."

"그래, 이제 어떡할 건가?"

"답지 않게 우문(愚問)이로군."

해골은 또다시 끅끅 웃었다.

입에서는 피가 더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 죽을 수가 없는 거지…. 세계수 관리인을 죽일 수 있다니…."

그의 목소리는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했다.

제153화

크라우드는 평소처럼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둥근 원탁에 담긴 의미는 '누구든 평등하다'였으나, 평등이라는 단어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발언권을 가진 이들과 가지지 못한 이들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이 모임에서 마음대로 발언할 수 있는 건 단 두 사람.

원과 해골뿐이었다.

따라서 평소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도 그들이었다.

하지만.

"...."

"...."

지금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의자에 축 늘어진 몸은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후드에 가려진 눈은 감겨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

"...."

"...."

원탁엔 침묵만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5분 정도가 더 지난 후에야 깨졌다.

"…그놈은 왜 오지 않은 것이냐?"

원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준비된 자리는 총 12자리였으나 현재 원탁에 앉아 있는 인원은 11명이었다.

1명이 부족한 것이었다.

빈자리의 주인은 뱀이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이유로 마족의 권속이 된 이로, 지금은 도운의 빌딩에서 에너지를 생성해 식물에 제공하는 엔진 같은 신세가 됐다.

그가 바라던 삶은 아니었지만, 그가 원했던 불멸의 존재가 되기는 한 것이다.

당연히 크라우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므로,

"그게,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한 사람은 가슴팍에 늑대 머리 모양 브로치를 단 사람이었다.

원이 바로 늑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

"…죄송합니다."

"하…. 쓸모 있는 놈일 줄 알았더니…."

"바로 단죄하겠습니다."

원은 탐탁지 않게 빈자리를 바라봤다.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고 싶은 듯 혀까지 찼다.

늑대는 원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께서는, 그분을 뵙고 오신 겁니까?"

"그래. 뵙고 왔다."

원이 대답하자 원탁의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

아무 말도 없이 잠잠하던 분위기에서 들뜬 분위기가 됐다.

해골이 그 분위기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백도운의 정체에 관해서도 듣고 왔지."

"무엇…이었습니까?"

백도운의 정체.

그것은 원탁에 모인 이들이 모두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늑대가 기다리지 못하고 질문을 던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해골은 원을 돌아봤다.

대답해 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원이 고개를 끄덕였고, 해골은 늑대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세계수 관리인."

"네…?"

"백도운은 세계수 관리인이었다."

"세계수라니…. 그 세계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세계수를 말한 게다."

해골이 대답해 주는 걸 들은 원이 이마를 짚었다.

세계수.

그것은 현존하는 것만으로 크라우드의 적이었다.

존재할 때 발산하는 에너지만으로 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그러니 그것과 그것의 관리인이 지구에 있는 것을 알게 된 원은 떠올린 것만으로 심기가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늑대가 공손하게 질문했다.

"그런데…. 관리인이라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입니까?"

"으응? 관리인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송구합니다."

해골의 말에 늑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크라우드 간부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세계수 관리인.

무엇인지 아느냐고 무언으로 질문하고 대답한 것이다.

모든 이들의 고개가 미세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골. 이 녀석들은 우리처럼 그분을 영접하러 가본 적이 없다."

"아!"

원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해골은 제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네 말이 옳군."

"...."

"그래. 네놈들은 당연히 모르겠어."

"...."

원탁에 불편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시하는 태도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내비치지 못했다.

두 사람을 향해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등의 만용을 부릴 바보는 없었다.

그랬다간 좋지 못한 일을 겪게 되리라는 걸 그동안의 일들로 잘 알았다.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단죄받게 된 이가 있지 않았던가.

"세계수 관리인은…."

해골은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10초 정도 흘렀을까?

머릿속 생각이 정리된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세계수를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존재다."

"주로 하는 건 지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긴 하지. 세계수는 한 존재가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니까."

해골이 설명하자 원이 덧붙였다.

그 설명을 듣고 나서 늑대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백도운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한 존재겠군요?"

"음."

원이 늑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분께 그 사실을 듣고 나서 깨달았지."

"무엇을 말입니까…?"

늑대는 자신이 질문하는 기계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질문했다.

다른 이들도 궁금했던 것이었으나 그처럼 질문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원탁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세 명뿐인 듯 느껴졌다.

총 11명이 앉아 있었는데도.

"포션 재료의 유통을 막았는데, 백도운은 어떻게 A등급 힐링 포션 재료를 구할 수 있었을까."

"아…."

"그 이상한 맛이 나는 포션들…."

"솔잎 맛과 민트초코 맛입니다."

"그래. 그것들…. 그것들의 재료는 분명 세계수 나뭇잎이었을 게다."

"그러니."

해골이 원의 말을 받았다.

원탁의 시선들이 원의 반대편에 앉은 해골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유통을 막아봤자 포션은 꾸준히 생산되겠지."

"아…!"

"바이올렛 바이올런스의 판매량도 줄어들 것이고."

"아쉬운 일이지. 만족스러울 만큼 뿌리지 못했거늘."

"그래. 괴물화를 진행하기엔 조금 부족하지."

해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탁엔 또다시 침묵이 무겁게 눌러앉았다.

그들의 과업이 실패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에 의해서.

원은 내려앉은 침묵을 치워버리고자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목적은 하나다."

원탁의 시선들이 원에게로 모여들었다.

모인 시선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백도운을 죽이고 세계수를 죽이는 것."

"...!"

실망감을 없애는 가장 좋은 특효약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운 과업을 제시하는 것이다.

원은 그것을 알았다.

또 새로운 과업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로운 과업이 제시되자 간부들은 저마다 손을 들어 올렸다.

너나 할 것 없이 거수하며 시켜달라고 열망했다.

개미, 거미, 말, 토끼 등등….

그들은 원과 해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정적이었다.

단 두 사람.

원과 해골 바로 옆에 앉은 늑대와 풍뎅이만 그러지 않았다.

"후우…."

열정적으로 손을 들어 올린 이들을 보며 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골은 '쯧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내 분명 우리의 목적이라고 했을 텐데. 그 말을 이해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나?"

"...?"

"백도운. 그놈은 우리 크라우드가 전력을 다해야만 죽일 수 있다."

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이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크라우드가 전력을 다해야만 죽일 수 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도운 따위를요?"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태도로 되물었다.

로브 밑에는 얼빠진 얼굴들이 있으리라.

백도운.

이제 갓 A급으로 올라온 헌터.

협회에서 파악한 수준으로는 A급 헌터 수준에도 해당하지 못했다.

분명 한진환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B급 헌터였으리라.

세계수 관리인라는 특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간부들은 원의 크라우드가 전력을 다해야만 죽일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수와 관리인은 마법으로 계약돼있다."

"마법…입니까?"

"그래. 이른바 '명제 마법'."

"명제 마법…?"

늑대는 처음 듣는 말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탁의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세계수 관리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처럼 서로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하고 대답했다.

무언으로 이어진 질문과 답변은 방금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고대 마법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새로운 논리를 창조하는 마법'이지."

"죄송합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후우…."

늑대가 고개를 숙였다.

원은 한숨을 내쉬었고, 해골은 킥킥 웃었다.

늑대처럼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간부들은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원은 설명을 계속했다.

"이를테면…. '세계수 관리인을 죽이기 전까지 세계수를 공격할 수 없다'. 그런 절대적인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네?"

"세계수 관리인이 존재하는 한 세계수는 나무껍질 하나 건드릴 수 없는 무적의 존재란 것이다."

"그게 무슨…."

"자.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킥킥 웃던 해골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세계수 관리인을 죽이려고 할 때, 세계수는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

"세계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관리인을 지키고자 애쓸 것이다."

"그럼, 그 말씀은…."

"이제야 깨달았구나. 그래. 우리는 백도운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백도운과 세계수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지."

"과연…. 어려운 일이겠군요…. 두 분의 말씀대로, 우리 크라우드가 전력을 다해야 할 일이 분명합니다."

늑대가 참담함을 느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간부들도 그처럼 할 말을 잃은 듯 보였으나, 사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늑대와는 달랐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계수와 관리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한 것이 창피했던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골은 입을 비틀며 원을 쳐다봤다.

"우린 그분의 권속이다. 역대 최강의 세계수 관리인으로 평가받던 디싱 나 토르를 죽인 분의 권속."

"아…."

"그분의 권속인 만큼 우리도 해낼 수 있을 터."

"그 말씀이 옳습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함께한다면 못해낼 리 없습니다!"

원탁에 깔렸던 침묵이 치워졌다.

대신 들뜬 분위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좋아. 우린 지금 당장 백도운을 죽이는 일에 착수한다."

"죄송하지만, 당장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뭐라?"

"허?"

늑대의 말에 원과 해골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아무래도 늑대에게서 부정적인 의견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송구합니다. 허나,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시기가 좋지 않다…?"

"그렇습니다."

늑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S급 헌터들이 한국에 와 있습니다."

"뭣…?"

"S급 헌터들?"

"네."

"설마, 에디탓 그위친도 와 있나?"

"그렇습니다."

"호오."

해골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면 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놈까지 와 있다면 시기가 좋지 않군."

시기가 좋지 않다.

원이 그 말을 중얼거린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S급 헌터 네 명이 있는 지금 전면에 나서는 것은 그저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아무리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힘을 받은 그들이라고 해도, S급 헌터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특히, 세계 최강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에디탓 그위친이 있다면 더더욱.

"이 나라에 온 것도 전부 그놈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거늘…."

"그런데 그놈들이 왜 이런 작은 나라에 온 거지?"

"서울 월드컵 경기장 때문입니다."

"아하. 올 만하군. 던전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해골이 재미있는 듯 웃었다.

까드득.

원이 웃는 해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웃지 마라, 해골."

"음? 내가 웃었나? 이거, 미안한데그래."

킥킥.

해골은 끝까지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옛날 일이 떠올랐거든."

제154화

"웃지 마라, 해골."

"음? 내가 웃었나? 이거, 미안한데그래. 옛날 일이 떠올랐거든…."

옛날 일.

그 말이 나오자 원이 이를 갈며 해골을 바라본다.

마치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턱을 날리고 싶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해골은 원의 사나운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짧은 웃음까지 흘려 댔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원은 한동안 해골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연히 원탁의 분위기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싸늘함만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자 원탁에 앉은 이들의 고개도 점점 내려갔다.

그러다,

"후우…. 정말이지, 못 말리겠군."

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골을 향했던 사나운 기세도 사그라들었다.

싸늘하기만 했던 원탁의 분위기도 조금 나아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원탁의 간부들을 바라봤다.

"…늑대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간부들은 고개를 들고 원을 바라봤다.

원은 그에게로 시선이 모인 것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S급 헌터 놈들이 전부 떠났을 때. 그때 백도운을 죽인다."

"네!"

"세계수의 관리인을 죽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태천 백도희도 상대해야 할 테니 각오 단단히 하도록.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저…."

개미가 대답은 하지 않고 손을 들며 원을 불렀다.

원탁에 앉은 이들은 깜짝 놀라서 개미를 바라봤다.

하나 같이 입이 떡 벌린 채였다.

발언권을 받지 못한 이가 함부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뭐냐?"

쯧!

원은 물으면서 혀를 찼다.

그 탓에 개미는 몸을 움츠러뜨렸다.

벌을 받게 될까.

그런 두려움 때문에 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그, 그게…."

"뭐냐니까."

원이 다시 물었다.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어조는 조금 달랐다.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따듯함이 느껴졌다.

힘을 얻은 개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도운을 죽일 때 말입니다."

"음?"

"한, 한진환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개미의 말에 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골도 입꼬리를 내리고 질문을 던졌다.

"한진환? 그놈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두 분께서는 그분을 뵙고 오느라 모르셨겠지만…. 요즘 한진환과 백도운이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뭐라?"

"그게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개미는 바로 대답했다.

원과 해골이 자신에게 집중하자 들뜬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둘은 같이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제법 친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백도운을 공격한다면 한진환도 나설 것이 분명합니다."

"허…."

"한진환이 최희석이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가졌다, 라…. 백도운, 그놈이 세계수 관리인이라는 것을 밝힌 건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개미가 고개를 숙였다.

해골은 "괜찮다"라고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떠들어 댔을 뿐이었다.

"둘은 정부와 협회가 의뢰한 퀘스트를 깨기도 했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늑대가 끼어들었다.

"뭐라?"

"협회 퀘스트?"

자연히 원과 해골의 시선이 늑대에게로 옮겨갔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개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물론, 그 불만스러움은 금세 사라졌다.

원과 해골 앞에서 불만이란 감정을 오랫동안 내비칠 수는 없었다.

"바이올렛 바이올런스와 바이올렛 파우더의 유통을 막는 내용의 퀘스트였습니다. 이름은… 두 손가락 프로젝트…? 그런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두 손가락…. 미국이건 한국이건 정부 놈들 이름 짓는 것 하곤…."

"그 퀘스트를 진행한 것이 바로 한진환과 백도운이었습니다."

늑대의 대답에 원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는 불쾌한 듯 뇌까렸다.

"이거 원…. 세상 도움 안 되는 놈들끼리 쌍으로…."

"뭐, 뭐. 잘 됐지 않나."

"잘 되긴 뭐가 잘 됐단 말인가. 한진환 놈이 끼어들면 여기에 있는 삼분지 이가 죽어 나갈 텐데."

"...!"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대부분이 숨을 들이켰다.

삼분지 이가 죽을 수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럴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원은 입을 꾹 닫았다.

"...."

한진환을 상대하는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놈들을 보자 속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넘쳐흐르는 힘에 의한 자만과 오만.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않는 멍청이들.

그분의 힘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머저리들.

원은 원탁에 앉은 이들을 보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음에 피어난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였으나, 안타깝게도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사사건건 방해하던 놈들을 한꺼번에 치워버릴 수 있게 됐으니 잘된 것이지."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원은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개미가 공손히 손을 들었다.

"저… 질문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해라."

"세계수를…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음?"

"허?"

원과 해골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개미는 당황했다.

당황스러움은 '질문에 잘못이 있었나?'하고 돌이켜 보게 했다.

"백도운을 죽이기 전에 물어보면 될 일이다, 개미."

늑대가 개미를 나무랐다.

개미는 그 나무람에 동의했다.

물론, 100%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지만…. 말하지 않고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 어느 산에 있다고만 말할 경우도 있을 테고요."

"아."

늑대는 그제야 개미의 말을 이해했다.

백도운이 세계수의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않을 경우.

그때 그들은 산에 수두룩하게 자라난 나무들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리라.

산에 자라난 나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관리인을 죽이면 자연히 세계수의 위치가 드러날 테니까."

"앗…. 그렇군요. 괜한 걸 여쭈어서 죄송합니다."

"됐다. 혹시 또 질문이 있는 사람 있나?"

원이 원탁을 돌아봤다.

로브를 둘러쓴 이들은 아무도 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더는 질문이 없었다.

"없다면 이번 모임은 이만-"

원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맞은편에 앉은 해골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띄었다.

"...뭔가?"

"최동훈은?"

"누구?"

"아이가이온 마스터 말이다. 그 후로 어떻게 됐지?"

"아! 그러고 보니…."

원은 대답하는 대신 늑대 옆에 앉아 있던 이를 바라봤다.

가슴께에는 '토끼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시선이 닿자 토끼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직 변태 중이에요. 며칠 전 '완전한 번데기 상태'가 된 것을 확인했거든요. 또…."

토끼는 손목을 들어 전자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것에는 현재 시각 대신 'D+14'라는 글자만 떠 있었다.

"네. 지금쯤이면 한창 몸이 녹아내리고 있겠어요."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으음…. 신체 분해는 곧 끝날 테고…. 재구성은 대개 5일 정도…. 세뇌 작업이 진행돼야 하니까…."

"...."

"얼추… 일주일 정도? 네. 그 정도는 더 걸릴 것으로 보여요."

해골의 질문을 받은 토끼는 중얼거리며 시간을 계산했다.

계산을 들은 원과 해골은 빙긋 웃었다.

"딱 적절하군."

"그래. 써먹을 수 있겠어."

"좋아."

원이 원탁을 돌아봤다.

"아까 말한 대로다. S급 헌터들이 돌아가는 날, 백도운을 죽이기로 한다."

"네!"

우렁찬 대답이 나왔다.

그 대답을 듣고, 해골이 말했다.

"아, 그래. 개미 말대로라면, 한진환 그놈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이 있으면 꼭 하고 오도록."

"네…?"

"죽기 전에 못해본 일이 떠오르면 속상하잖아? 갈 땐 가더라도 아쉬움 없이 가야지."

"...."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해골이 킥킥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불이 꺼진 방에는 커다란 번데기만 놓여 있었다.

번데기는 심장이 박동하듯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것에 맞춰 지글거리는 소리도 울려댔다.

지글… 지글… 지글….

끼이익.

지글거리는 소리 사이에 녹슨 철 소리가 끼어든다.

방의 녹슨 철문이 열린 것이다.

"...."

가슴께에 토끼 브로치를 단 사람이 들어왔다.

일명 '토끼'라고 불리는 크라우드의 간부였다.

토끼는 머리를 푹 눌러 썼던 후드를 뒤로 벗었다.

긴 머리카락이 그림자처럼 내려앉는다.

그녀는 지글거리는 번데기 앞에 가 앉았다.

"최동훈…."

천천히 손을 내밀어 번데기에 갖다 댄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으나, 그녀의 입가엔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신은 모르겠지?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연하게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지글거리는 소리만 꾸준하게 울렸다.

인간의 몸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가르쳐주는 소리만이.

"이렇게 당신이 내 앞에 있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감히 말하건대, 신조차 몰랐을 거야."

그녀는 번데기를 쓰다듬었다.

손은 갓난아기의 뺨을 어루만지는 듯 조심스럽다.

바라보는 눈길은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듯하다.

"아쉬워라….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당신이 느꼈어야 했는데. 나는…."

토끼는 갑자기 몸을 떨어댔다.

그 떨림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경험한 데 따른 공포이리라.

그녀는 천천히 번데기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은 뜨거운 것과 접촉해 데인 것처럼 벌게져 있었다.

꼬옥….

그녀는 열기를 붙잡고 싶은 듯이 주먹을 쥐었다.

"정말 안타까워…. 당신이 그분을 직접 느꼈더라면 좋았을 텐데…."

또다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아까처럼 화사한 미소는 아니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웃음을 실실 흘려 댔다.

눈빛 또한 몽롱해 제정신인 사람 같지 않았다.

"몸이 전부 녹아내리고 나면… 그분의 에너지가 고깃덩어리가 된 몸을 감싸지. 그분의 에너지가 녹아내린 몸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거야. 그건…."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희열에 의한 떨림이었다.

살면서 가져본 적이 없는 충만한 힘을 얻은 데 따른 것이었다.

"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었어…. 쾌락이었어…. 그래.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극치감…!"

중얼거림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희열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무표정으로 번데기를 바라봤다.

주먹을 쥐었던 손을 다시 펴고 번데기에 갖다 댄다.

꾸욱….

그녀는 아까처럼 어루만지는 대신 힘을 주어 누르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힘 때문일까?

번데기는 보호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마구 꿈틀거렸다.

지글거리던 소리도 꿈틀거릴 때마다 큰 소리로 울려댔다.

"후, 후후후…."

그것을 보고,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있는 것을 업신여기는 미소….

완연한 비웃음이었다.

"당신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정말 딱해…. 하지만… 할 수 없지. 당신은 우리처럼 그분의 권속이 되는 게 아니니까."

힘을 주어 누르던 손을 뗀다.

잠시 후 보호 반응으로 인해 꿈틀거리던 번데기는 평온을 되찾았다.

다시 반복적으로 지글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녀는 열기를 지우려는 듯 손을 휘휘 털어댄다.

"정말… 변태가 끝났을 때가 기대돼. 우리의 권속이 된 당신은 과연 어떤 눈으로 날 쳐다볼까?"

우후후….

그녀의 조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순간,

쿵!

번데기가 아주 조금 커졌다가 작아졌다.

토끼는 그러나 웃느라 원래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그 현상을 보지 못했다.

제155화

울릉도 게이트 앞은 분주했다.

각자 떨어져 있는 S급 헌터들.

그들을 보좌하는 각국의 스태프들.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가 어지럽게 이곳저곳을 나돌아다녔다.

아마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1년 6개월 전 이후 처음일 것이다.

A등급 길드 연합 원정.

그날 백운천에서는 태천이만 참여했었다.

원정대 수준에 해당할 실력자가 녀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얀 성녀라고 불리는 지금이라면 도희도 참가했겠으나….

당시 도희는 아직 이름을 알리기 전이었다.

태천이가 참가했던 것도 협회가 기회를 준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실력보다 사람들에게 기사라고 불릴 정도로 정직한 인성의 힘이 컸다.

그런 곳에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오게 됐다니….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했다.

"...."

물론, 잘 안다.

오늘 주인공이 우리 백운천이 아니라는 건.

S급 헌터들.

그들이 이곳의 주인공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시청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안다.

주인공인 4명을 제외한 다른 6명의 헌터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걸.

하지만.

그래도.

그게 뭐 어쨌는가.

백도희, 이태천.

난 두 사람과 함께 게이트에 진입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2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설렘을 느꼈다.

"왜 그래요?"

시선을 마주친 도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스르륵 늘어졌다.

절로 단발머리였던 때의 도희가 떠오른다.

그땐 머리 색깔도 흰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는데….

"머리."

"네?"

"머리 많이 자랐다 싶어서."

"…갑자기요?"

도희가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하얀 머리카락을 만지는 흰 손에 굳은살이 배겨 있다.

2년 전엔 없었던 거다.

"...."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아냐, 멀쩡해."

"그런데 왜-"

"긴장돼서 그러냐?"

옆에서 장비를 정비하던 태천이 대뜸 질문을 던져온다.

돌아보니, 태천이는 씩 웃고 있었다.

걱정돼서 물어본 게 아니라 날 놀리려고 물어본 것이었다.

자식.

꼭 좋아 죽겠는 티를 내요.

"그런 거예요? 긴장하지 마요, 오라버니."

"긴장 안 했어."

"정말요?"

"할 것도 없는데, 뭐. 우린 뒤에 서 있을 거잖아."

"그렇긴 하죠."

도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희도 아는 거다.

울릉도 게이트에 함께 진입하긴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없다는 걸.

S급 헌터들이 어련히 할 것이다.

우린 들러리로서 뒤에서 묵묵히….

"아."

그렇군.

그런 거였나.

스미르노프가 태천이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다.

격차를 보여 주려던 거다.

그와 우리 사이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미르노프를 찾는다.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니까.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릴 바라보고 있기도 했고.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다.

가소로움이 느껴지는 미소다.

비릿한 미소가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입증했다.

빌어먹을 러시아 놈….

"괜찮아요."

꼬옥.

속으로 욕을 내뱉는데, 도희가 손을 붙잡았다.

스마트폰을 들지 않은 왼손을.

도희의 손은 따스했다.

"괜찮아요."

같은 말을 되뇌며 태천의 손도 붙잡는다.

태천이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문을 모르겠는 듯 멍청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왜 그래? 나 긴장 안 했어."

"후후…."

"도희야? 진짠데?"

그러거나 말거나.

도희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내가 알아차린 사실을 우리 도희가 모를 리 없지.

그녀는 스미르노프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스미르노프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알아차렸을 거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딴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인다.

당연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2년 만에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

그게 훨씬 더 중요했다.

내가 설렘을 느꼈던 것처럼, 도희도 마음이 들떴으리라.

"...."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왼팔로 도희의 어깨를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태천의 뒷덜미를 붙잡는다.

작고 큰 두 사람을 안으려다 보니 자세가 영 불편했다.

완벽하게 포옹하는 자세가 되지 못했다.

아무튼, 이태천 이놈은 쓸데없이 덩치만 크다.

"오라버니?"

"…뭐하냐?"

"고맙다."

"네?"

"뭐?"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

"...."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

"...."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워낙 얼굴이 가까워 보이진 않았지만, 당황해서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럴 게 뻔한 얼굴들을 떠올리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만."

"…괜찮아요."

"아직 내가 바랐던 만큼 강해지진 못했지만."

"상관없어."

"그래도."

꽉.

두 사람을 한번 끌어안고선 뒤로 물러난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날 바라보는 둘은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포근한 미소….

"지금이 적당할 것 같다."

"응…!"

"음!"

"오늘부로, 나는 다시 백운천이야. 백운천의… 백도운."

"응!"

"좋았어!"

꽝!

태천이 이마를 부딪쳤다.

자기 이마를 내 이마에.

오랜만이네.

[세계수 어린나무가 당황합니다.]

[황당한 마음에 관리인의 친구를 바라봅니다.]

[분명 방금까지 훈훈한 상황이 아니었는지 의문을 던집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전합니다.]

주춤….

나는 뒤로 물러났다.

오랜만이라 받아들이지 못했다.

공격이라….

그래, 다른 사람이 보면 그리 보이겠지.

비단 공격했다고 생각한 건 새싹이 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왜 저러는지 묻고 싶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리롄제, 스미르노프, 밀러, 그위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희가 손을 뻗어 우리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

그녀는 기대에 찬 얼굴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옛날 일이 떠올라서다.

9살 때쯤이었나?

나랑 태천이가 이마를 맞부딪쳤을 때, 도희는 우리가 노는 줄 알고 자기도 끼어달라고 했었다.

재미있어 보인다나 뭐라나.

사실 우린 싸우려고 했었던 건데.

맥이 탁 풀려 흐지부지 넘어가게 됐지만.

그러므로 그 당시 우린 도희에게 단호하게 말했었다.

"안 돼."

"너 이마 깨져."

라고.

당연히 지금도 그렇게 말했다.

거부의 말을 들은 도희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치이…."

어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답지 않게 이런 걸 함께 하고 싶어 한다니까.

[어린나무는 생각하기를 포기합니다.]

[관리인의 주변에는 관리인 같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고 전합니다.]

하하.

우리 새싹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니까.

너도 내 주변에 있다구?

주변'인(人)'이 아니라 주변'목(木)'이지만.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을 부정하고 싶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서글픔을 느낍니다.]

서글픔을 느끼긴.

즐겨, 새싹아.

그럼 편해진단다.

[ ]

어허.

공란 보내는 거 아니야.

***

협회TV의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 헌터 투게더는 현재 유례없는 시청자들이 모여 있었다.

S급 헌터 전원이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모여 A+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짧은 머리의 공철이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헌터 투게더 시청자 여러분. 공철입니다!"

"안녕하세요! 정하설이에요."

옆에 앉아 있는 정하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요즘 한창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공철과의 케미가 좋아 사람들의 시선을 끈 덕분이었다.

- 공하!

- 정하!

- 공하 정하!

- ㄱㅎㅈㅎ

실시간으로 최다 시청자 수를 경신하고 있는 만큼 채팅창은 빠르게 올라갔다.

인사말이 대다수였으므로 공철은 채팅을 읽지 않고 그대로 방송을 진행했다.

"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23일 수요일 오늘! S급 헌터 분들이 울릉도 게이트에 진입합니다!"

- 드디어!

- 주님, 오늘 뱀 한 마리 하늘로 갑니다.

- 뱀 ㄴㄴ 이무기임

- 아, 제발. 설명충 aut!

- aut이 아니라 out.

-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 ㅋㅋㅋㅋㅋ

- 뭔 컨셉이야 저건 ㅋㅋㅋ

"…하하. 다들 아시네요. 그렇습니다. 오늘 실황 방송해드릴 울릉도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는 이무기입니다."

"네, 우리나라가 두 번이나 공략에 실패한 것도 다 그 이무기 때문이었어요."

"그렇죠."

공철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차례차례 펼친다.

"A등급 길드 연합 원정의 실패. 우리나라의 자랑, 한진환 헌터 님의 실패."

"정말… 한진환 선배님이 공략에 실패하셨을 땐 충격적이었죠."

- 엄청나게 충격적이었지 ㅋㅋㅋ

- 공격했는데 서로 에너지가 충전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건에 대하여 ㅋㅋㅋㅋ

- 아 포켓x 모르냐고 ㅋㅋ

- 같은 속성이면 데미지 반감되는 게 국룰이라고 ㅋㅋ

- ㄹㅇㅋㅋ

"한진환 헌터와 같은 번개 속성인 만큼… 이무기는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하죠?"

"네, 그런데 사실 이무기는 공격력보다는 방어력이 굉장히 대단한 몬스터예요."

"방어력이요?"

공철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정하설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색한 연기 톤은 뭐지?

- 방어력? 공격력이 아니라?

- 몰랐냐? A등급 길드 연합 원정 실패가 이무기의 실드 마법을 못 뚫어서잖아.

- 헐, ㄹㅇ? 영상 어디서 봄?

- ㄴㄴ 영상 없음

- 영상이 없어?

- 있겠냐. 실패한 영상이?

- 있어야지. 그래야 실패에서 배우지.

- 꼰대 AUT!

- aut 아니라고. out이라고.

- ㄹㅇㅋㅋ

"네. 실드 마법을 웃도는 위력의 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이무기는 쓰러뜨릴 수 없어요."

"과연 그렇군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위력을 낼 수 있는 건 한진환 선배님뿐이에요."

"아…. 유일한 건가요?"

"으음, 아마… 현재 저 자리에 나가 있는 조주현 헌터가 소속된 마인 길드의 마스터, 윤건 님이라면 데미지를 줄 수 있을지도요…?"

"그렇군요. 확실히 그렇겠습니다! 한진환 헌터의 유일한 라이벌이신 만큼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철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그는 울릉도 게이트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관련 방송을 진행해야 하니 정보를 숙지해야 했다.

또 마인 길드 마스터 윤건이 이무기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방송 진행 전 정하설과 이미 한번 대화를 나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하설의 설명을 들으며 놀라는 척을 한 건 방송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 연기 어색한 거 봐라 ㅋㅋ

- 우리 형 왜 연기가 안 늘까?

- 사람이 착해서 그래.

- ㅇㅈ 속이질 못하는 거지 ㅋㅋㅋ

시청자들은 아무도 속지 않았다.

말마따나 공철은 감탄하는 목소리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작도 모두 어색했다.

지금부터 연기를 시작하겠으니, 연기하는 걸 봐주세요.

딱 그리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공철은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 S급 헌터들은 평소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곧 게이트에 진입할 텐데 갈아입지 않는 건, 평상복이 곧 그들의 전용 장비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옷은 평범한 옷으로 제작한 옷이 아니었다.

"그래 봐야 S급 헌터분들에겐 안 되죠!"

"...."

정하설이 물끄러미 공철을 바라본다.

씩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그녀는 왠지 모를 민망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민망함을 지우고 싶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공철 씨가 잘난 척을 해요?"

- 그러게 ㅋㅋ

- 내 말이. 왜 형이 해?

- 누가 보면 형이 S급 헌터인 줄 ㅋㅋ

- 현실은 죽지 못해 돌아오는 공철일 뿐 ㅋㅋㅋ

"흠, 흠!"

공철이 헛기침을 해댔다.

살짝 뺨이 붉어져 있었다.

민망함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는 상황을 무마하고자 말을 돌렸다.

"참, 하설 씨. 새로운 상급 힐링 포션이 나왔다고요?"

"...."

- 갑자기?

- 실화야?

- 이렇게 포션 홍보를 한다고?

- 맥락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형 ㅋㅋㅋ

- 하설 누나 표정 좀 봐 ㅋㅋ

- 당황한 눈나도 ㄱㅇㅇ!

제156화

"...."

정하설은 공철을 쳐다봤다.

공철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사실, 힐링 포션 홍보는 지금 할 차례가 아니었다.

작가들이 준비한 대본상으로 홍보 타임은 S급 헌터들이 울릉도 게이트로 진입한 후 이무기에게 가는 동안 진행될 계획이었다.

그때가 딱 지루해질 때쯤이었으니까.

그러나 공철은 잘난 척한 상황을 무마하려고 때 이르게 공개를 하고 말았다.

진행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한 거다.

"…맞아요."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하설은 빙긋 웃었다.

황당한 얼굴로 계속 그를 바라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도 했다.

다시 퍼 담으려는 것보다는 닦아내는 게 올바른 수습이다.

"사흘 전, 수정 공방에서 신제품이 나왔어요."

"오…! 그렇군요."

공철이 두 눈에 감사의 뜻을 담으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선 상체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고 싶었다.

물론, 방송 진행 중에 그럴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공철은 대본에 쓰여 있던 문장을 읊어나갔다.

"이번에도 수정 공방은 제작한 포션 전량을 협회와 거래했죠?"

"맞아요. 덕분에 A급 헌터들은 포션을 구매할 수 있다는 공지를 받았어요. 저도 받았고요."

대답하면서 정하설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협회에서 온 공지사항이 떠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본 공철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그렇군요. 수정 공방은…."

- 수정 공방? 거기 어디임?

- 민초 포션 만든 브랜드.

- 민초 포션 ㅋㅋㅋ

- 브랜드는 무슨. 찾아보니 구멍가게던데 ㅋㅋ

- 1인 공방이긴 함. 수정이 주인 이름이더라.

- 수정? 그럼 여자임?

- 불경하게 어디 감히 여신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느냐.

- 여자라니까 바로 여신이라고 하는 거 보소 ㅋㅋ

- 문 색깔 민초색이더라 ㅋㅋ

- 아, 포션 만든 게 협회가 아니었어?

- 협회가 포션을 왜 만들어 ㅋㅋ

정하설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공지사항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제품이 출시됐다는 공지를 받자마자 사이트에 접속했었어요."

"구매하기 위해서였군요?"

"네. 그런데 많은 분이 기대하고 있었나 보더라구요. 사이트가 마비됐거든요."

"사이트 마비요?"

"완전 먹통이었어요. 동작이 아예 안 됐다니까요?"

"잠깐만요. 그렇다면, 하설 씨는 이번에 구매를…."

- 헐?

- 뭐임, 못 산 거임?

- 안 돼! 궁금하단 말이야!

- 무슨 맛일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 근데 맛 같은 거 아님?

- 그러게. 다르대?

- 그거 포함해서 궁금했다고!

- 당장 사와!

- 나 락!

- 기대하게 해놓고 이러는 게 어딨어!

말 그대로, 채팅창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반면 하설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공철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이어 채팅창을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들더니 V자를 그렸다.

"…샀지롱."

- ....

- ....

- 귀여워….

- 극 락!

- 이 눈나 요망해♡

- 여우야, 아주!

- 사람 들었다 놨다 할 줄 아네 ㅋㅋ

"헤헤헤…."

사실, 하설은 포션을 구매하지 못했다.

그녀가 앞서 말했던 대로 사이트가 마비되어 동작이 아예 안 되는 바람에 구매하기 버튼도 누르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법 주머니엔 포션이 담겨 있었다.

협회가 이번 방송을 위해 딱 한 병 빼놓은 덕분이었다.

빼놓은 건 단순히 방송을 통해서 이슈 몰이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한국을 휩쓴 포션 부족 사태.

그 상황에 정부와 협회가 힘쓰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에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 이번 포션은 무슨 맛이려나?

- 민초나 솔잎이겠지

- 계속 맛이 달라지겠어?

- 그러게

- 쉽게 떠들어대서 그렇지, 맛 추가한 거 엄청 어려운 거임

- ㅇㅈ

- 하긴, 지금까지 맛 추가한 브랜드들이 없다는 것만 봐도….

- 포션에 맛 추가한 것 자체가 혁명이긴 해

- 그래도 기대해볼 수는 있는 거잖아!

- 그 말도 맞지

"네, 여러분도 관심이 지대하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채팅을 읽은 공철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하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번 힐링 포션은 민트초코 맛과 솔x눈 맛이었죠. 이번에도 그런가요?"

"헤헤, 사실 모르겠어요."

"네? 모른다고요?"

"시음하는 거 여러분이랑 같이 하고 싶어서 안 마시고 왔거든요!"

그러면서 하설은 방긋 웃었다.

자신의 행동이 대견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시청자들이 빠르게 채팅을 쳤다.

- 하, 좋다.

- 이 누나 왜 점점 귀여워지지.

- 하설 눈나!!

- 공철은 돈 내고 일해라! 공철은 돈 내고 일해라! 공철은 돈 내고 일해라!

-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물론, 정하설의 행동은 모두 연기였다.

협회에서 이번 방송을 위해 빼놓은 포션인 만큼 혼자 마시고 올 수 없었다.

계약상 그녀가 포션을 마시는 건 카메라 앞에서만 가능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의 연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옆에 있는 공철과 달리 그녀는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냈다.

- 근데 맛 똑같지 않겠어? 재료 똑같을 텐데. 맛이 계속 달라지진 않을 거 아니야.

- ㄴㄴ 맛 다를 듯? 병 생긴 거 다르더라고.

- 오, 구매한 A급 헌터 등판?

- ㅇㅇ 아까워서 마셔 보진 않음

- 하긴 ㅋㅋ

- 한 병에 몇천만 원짜리인데 ㅋㅋ

- 힐링 포션을 맛 궁금해서 마시는 게 이상한 거긴 하지 ㅋㅋㅋ

- ㄹㅇ

- ㅇㅈ

"짜잔."

정하설이 마법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냈다.

톡.

투명한 병에 검은 액체가 담긴 포션은 곧 테이블 위에 놓였다.

"검은색…이네요?"

- 검은색?

- 뭐야, 색깔 께름칙한데?

- 그러게.

- 일단 겉으로 봐선 맛 졸라 없어 보이는데.

- ㄹㅇㅋㅋ

- 맛 돌아간 거 아니야?

- 그렇게 보이긴 하네 ㅋㅋㄹㅃㅃ

채팅을 읽은 공철이 고개를 끄덕인다.

입에서 시청자들이 한 것과 똑같은 걱정이 나왔다.

"맛…이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무슨 맛일지 짐작도 안 돼서요…."

"음. 좀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아하하."

말마따나 공철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몹시 맛이 없을 것 같아 마시기 싫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은 두 잔.

정하설과 함께 마시는 것이 대본에 쓰인 내용이었다.

공철이 선뜻 나서지 못할 때,

"으음. 제가 한 번 따볼게요!"

그녀가 용기 있게 나섰다.

캔 형태의 용기를 향해 손을 뻗는다.

거침없이 캔 뚜껑을 따는 모습에서 헌터로서의 배짱이 엿보였다.

치익!

촬영장에 탄산 빠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어?"

"칙?"

청량한 소리에 둘의 눈이 커졌다.

특히 아까까지만 해도 마시기 싫어하던 공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적어도 예전 포션들처럼 비리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탄산이 들어 있는 검은 액체라면….

그의 머릿속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료수가 떠올랐다.

- 콜라야?

- 콜라네?

- 포션이 어떻게 콜라 ㅋㅋㅋ

- 아니 ㅋㅋㅋㅋ

- 포션 메이커 양반 제정신이야?

- ㅋㅋㅋㅋ

- 어이없는 곳이네, 수정 공방….

- 만든 사람 얼굴 보고 싶다, 야 ㅋㅋㅋ

- 일단 제정신은 아닌 듯 ㅋㅋ

"검은 액체…. 그리고 탄산…."

정하설의 눈빛이 빛났다.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빛.

말 그대로 A급 헌터다운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하설은 컵에 포션을 조금 따랐다.

이어 공철의 컵에도 따라야 했지만, 그녀는 컵에 담긴 걸 마시는 데 정신이 팔렸다.

공철은 컵을 들어 올린 모습 그대로 멈춘 채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꼴깍, 꼴깍.

액체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캬아…!"

시원한 듯 감탄을 내뱉는다.

눈을 감은 채로 컵을 쥔 손을 부르르 떤다.

"꿀꺽…."

공철은 왠지 모를 갈증을 느꼈다.

그녀처럼 눈앞에 있는 포션을 통째로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아야만 했다.

포션은 협회의 것이지 그의 것이 아니었다.

허락된 양 이상을 마셔버리면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고소를 당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시말서는 작성해야 하리라.

단순히 갈증 때문에 들이켜도 괜찮은 음료수 따위가 아니라는 점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 와….

- ㅗㅜㅑ

- 나 방금 CF 본 줄.

- 확신한다, 우리 누나 곧 CF 찍는다. 이온 음료로.

- 마신 건 콜란데 왜 이온 음료야 ㅋㅋ

- 근데 이온 음료가 더 어울릴 것 같긴 해 ㅋㅋ

- 나만 맥주 생각났냐?

- 여기! 맥주 생각난 1人!

- 한 명 더 추가!

"으응! 엄청! 엄청 맛있어요! 특히, 이 라임 맛이 끝내주는데요?"

정하설은 감상을 말하며 캔을 바라봤다.

혀로 입술을 핥는 모습에서 캔에 남은 포션을 더 마시고 싶다는 의지가 내비쳤다.

- 라임?

- 펩x네! 제로 슈가 펩x!

- 안 돼! 펩x라니! 코x콜라가 아니라니!

- 회개해라! 우매한 이단들아! 여신님께서 선택한 콜라는 펩x이니라!

- 아, 혀 맛 간 ㄴ….

[SYSTEM : 이용자가 강제로 퇴장당했습니다.]

[SYSTEM : 채팅이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 협회 ㅋㅋ 일 잘하는 거 보소 ㅋㅋㅋ

- 네. 잠시 소란이 있었어요.

- 저런 멍청이들은 왜 자꾸 나오는 거야?

- 언급 ㄴㄴ 먹이 주면 계속 나타남

- 아, 인정. 쏘리.

- ㄱㅊㄱㅊ

채팅창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공철은 정하설에게서 캔을 살짝 떨어뜨렸다.

그녀의 시선이 투명한 캔을 뒤좇았다.

"하설 씨. 이거 힐링 포션이에요. 콜라 아니에요."

"알아요."

"지금 아는 사람 눈빛이 아닌데?"

"아하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공철의 말대로 그녀는 캔에 남은 포션을 다 마셔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 이곳에 치킨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자, 시음은 여기까지!"

공철이 포션 뚜껑을 닫는다.

달칵.

포션의 용기는 캔 형태였지만, 다시 밀폐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탄산음료 맛이 난다고 해도 캔에 담긴 내용물은 평범한 음료수가 아니라 포션이었다.

한 병에 3000만 원이나 하는 상급 힐링 포션.

그런 것을 한 번 열었다고 전부 먹어치워야 한다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일 터였다.

제작자는 병 선택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것이고.

"여기요."

"아, 네…."

공철이 뚜껑을 굳게 닫은 캔을 하설에게 건넸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캔을 바라봤다.

1초, 2초, 3초….

이내 결심한 듯 캔을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와 동시에,

"앗…!"

공철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통해 방송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S급 헌터들이 울릉도 게이트에 진입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곧바로 진행을 이어나갔다.

"방금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아, 드디어 진입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자, 여러분. 다 함께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S급 헌터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여유로운 얼굴로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또 그들 뒤로는 한국의 A급 헌터들과 리우이호가 보였다.

하지만 딱 한 명.

- 잠깐. 한진환 왜 안 보임?

한진환이 보이지 않았다.

헌터들이 차례차례 들어가고, 가장 맨 뒤에 있던 도운이 진입하는 동안에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정말 없네…?

- 그러고 보니 아까도 없지 않았나?

- 뭐야, 한진환 참여 안 함?

- 이무기 번개 속성이라서 그런가? 아무 도움도 안 될 테니까.

- 그건 그러네.

- 아니, 방금 명단 보고 왔는데 참여한다고 나와 있어.

- ㅇㅇ 스미르노프가 함께하고 싶다고 했댔어

- ㄹㅇ?

- ㄹㅇ

- 그런데 왜 없음?

- 몰?루….

채팅창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카메라는 계속 헌터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울릉도 게이트에 진입하고자 모이는 모습.

차례차례 게이트에 진입하는 모습.

심지어 진입한 이후의 모습까지도.

다만….

카메라 무빙은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마치 초보자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것처럼.

제157화

울릉도 게이트에 진입했다.

들어오자마자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다.

"흐음…."

A+등급 게이트의 마나가 몸을 짓누른다.

그냥 걷는 것만큼은 상관없겠으나 힘껏 뛰거나 내달릴 수는 없을 듯하다.

주변을 돌아봤다.

부끄럽게도 10명의 헌터들 중에서 마나 압박을 느끼는 건 나뿐이었다.

S급 헌터들과 한진환은 당연하고.

도희, 태천이, 조주현, 리우이호도 멀쩡하다.

내 뒤에 있던 카메라가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앞으로 나아가 S급 헌터들을 촬영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혼자 게이트 마나에 압박을 느끼는 창피한 모습이 전 세계에 송출될 뻔했다.

옆에 서 있던 도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묻는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응, 괜찮아. 버틸만해."

태천이도 묻진 않았지만, 도희처럼 얼굴에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두 사람이 안심할 수 있게 일부러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

"...."

그런다고 날 보는 두 사람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실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격렬한 움직임만 취하지 않는다면 문제없을 터였다.

S급 헌터들이 네 명이나 있는 이곳에서 내가 세차게 움직일 일도 없을 테고.

더군다나, 스미로노프와 태천이가 다툴 때 느꼈던 마나 압박에 비한다면 더욱 버틸 만했다.

그땐 뛰는 게 아니라 걸을 수조차 없었다.

"…어라?"

갑자기 게이트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몸이 편해졌다.

몸을 짓누르던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뛸 수도 마음껏 내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짠."

태천이었다.

그의 왼손에 커다란 방패가 들려 있었다.

멘닥스 테스투토.

그게 A+등급 게이트의 마나를 밀어낸 것이었다.

스미르노프의 마나를 밀어냈었던 것처럼.

정말….

유재이와 홍수정이 좋은 걸 만들어줬다.

그녀들의 말처럼 전대 세계수의 솔방울로 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 테지만.

"고맙다."

"고맙긴. 애초에 네가 준 건데, 뭘."

"아. 그렇네. 인사할 놈이 잘못됐네."

"뭐?"

듣고 보니, 태천이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멘테는 내가 선물해준 방패였으니까.

재료도 내가 구했고, 제작한 대장장이도 내가 찾아냈다.

꽈악….

그러므로 내 몸을 꽉 끌어안는다.

"잘했어, 과거의 나."

"...."

그러는 나를 보며 태천이가 눈을 찌푸린다.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 같은 모습이다.

표정 살벌한 거 보소.

도희를 봐라, 좀.

너처럼 눈을 찌푸리긴 해도 오빠라고 참아주려고 하잖아.

저 모습이 얼마나 예쁘니?

"제발…. 부탁이니까, 이상한 짓은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해라, 좀."

"이상한 짓? 내가 언제?"

"방금 했잖아, 방금."

"...?"

"후우…."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자 태천이 한숨을 푹 내쉰다.

옆에 서 있던 도희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도희의 도리질에선 선이 느껴졌다.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선.

하하, 좋은걸.

둘 다 날 한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아까처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

10분쯤 걸었을까?

중간쯤에서 걷고 있던 밀러가 멈춰 섰다.

"멈춰요."

그러고는 팔을 뻗어 사람들을 불러 세운다.

자연히 모든 이들이 멈춰 섰다.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궁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가장 앞에서 걷던 리롄제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나?"

"오고 있어요."

"오고 있다…?"

"네."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울릉도 게이트에서 사는 몬스터는 딱 한 마리다.

이무기.

그것이 날아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리롄제가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허어, 한 마리뿐이라지만 보스 몬스터이거늘…."

"이상한 일이네요. 보스 몬스터는 자기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는 법인데…."

두 사람이 이무기의 돌발 행동에 대해 생각할 때,

퍼억!

스미르노프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흥. 귀찮았는데 마침 잘됐군."

"...."

"...."

두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놈을 바라봤다.

이무기의 행동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스미르노프는 그 이유를 파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놈은 평생 상대를 파악하지 않고서도 늘 이겨왔을 거다.

그동안 어떤 상대든 거인화 해서 패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게 설령 A+등급의 몬스터라고 할지라도.

태천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리롄제, 밀러."

"음?"

"왜 그래요?"

"이곳은 저번에 들어왔을 때보다 마나 농도가 짙어졌습니다."

"아, 그래. 자네는 이곳이 두 번째지?"

"네."

"짙어졌다…? 혹시, 게이트 브레이크를 염두에 둔 건가요?"

"맞습니다."

"흐음…. 좋지 않네요."

밀러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게이트 브레이크.

그것은 마나가 게이트의 허용치를 넘어설 만큼 차서 곧 폭발한다는 뜻이었다.

전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보스 몬스터가 진화하게 될 수도 있었다.

홍유릉 게이트의 스켈레톤 로드처럼.

A+등급으로 책정됐던 이무기가 진화한다면….

분명 S등급 몬스터가 되리라.

말 그대로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리롄제가 헐헐 웃으며 말했다.

"한번 보고 싶구나."

"스승님…."

"농담이다, 이놈아. 아무렴 내가 일부러 내버려 두겠느냐?"

"...."

글쎄?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리롄제는 이무기가 진화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리우이호도 나처럼 생각한 듯 의심의 눈초리로 제 스승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롄제는 전방을 바라봤다.

저 용덕후 영감탱이….

"자, 어찌할꼬?"

"스스로 오고 있다지 않소."

"음?"

응…?

조용히 있던 그위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투가 조금 이상했다.

나를 대할 때하고는 전혀 달랐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게 원래 그위친인 걸까.

내게서 그리움을 느꼈기에 나를 특별하게 대해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면 될 일이오. 어차피 이무기를 공략하는 것이 목적이니."

"흠…. 좋소. 그럼 기다리도록 하지."

리롄제가 그위친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고는 바로 밀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이 정도 속도라면…. 5분? 그 정도쯤 걸릴 것 같네요."

"딱 좋군. 그럼 다들 준비하게."

준비하라고 해도 말이지….

딱히 할 게 없는걸?

이번 이벤트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S급 헌터들이었으니까.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면 그만….

아, 그렇군.

구경할 준비를 해야 했었다.

주전부리나 좀 가져올걸….

내가 멍청했네.

[세계수 어린나무가 먼 곳에서부터 강력한 번개의 마나를 느꼈습니다.]

강력한 번개의 마나….

이무기다.

그것이 새싹이의 탐지 범위 안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이무기한테서 기시감이 느껴진다고 전합니다.]

[이무기를 확인할 때마다 묘한 기시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고 털어놓습니다.]

기시감이라니…?

우린 울릉도 게이트에 오늘 처음 진입했다.

이무기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새싹이가 이무기에게서 기시감을 느낄 리 없었다.

하지만.

새싹이는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헤어날 수 없다고 토로할 정도로.

대체 왜?

"...."

굳이 설명하려고 한다면….

딱 한 가지뿐이다.

새싹이와 이무기가 위그드라실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다, 는 것.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생각을 부정합니다.]

[위그드라실에서도 이무기를 만난 적이 없음을 밝힙니다.]

만난 적이 없어?

정말로?

[어린나무는 확실히 만난 적이 없다고 전합니다.]

흐으음….

그럼 정말로 왜 기시감을 느끼는 거니?

[어린나무도 그걸 모르겠다고 털어놓습니다.]

우르르… 꽈앙…!

"엇…."

멀리서부터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무기가 뿜어대는 번개가 틀림없다.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으니,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눈에 보일 터였다.

꽈앙, 꽈앙…!

천둥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잦아졌다.

또 두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커졌다.

"오…."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것은, 마치 푸른 뇌운(雷雲)처럼 보였다.

무수한 번개를 뿜어내 대지를 내리쳤다.

지그재그로 뻗어 내려오는 번개들은 마치 허공을 찢어내는 듯하다.

분노를 형상화한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 아닐까.

"절경(絕景)이로구나…!"

리롄제가 감탄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했다.

이무기는 그동안 그가 보고 싶어 한 '동양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입이나 앞발에 여의주를 물거나 쥐고 있었다면, 동양화에서 보던 완벽한 '용'의 모습이다.

그런데….

"...?"

이무기는 좀 이상했다.

자리를 박차고 여기까지 날아와 놓고서는 바로 공격해오지 않았다.

허공에 가만히 떠 있기만 했다.

번개를 뿜어내긴 했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 같은 것이었다.

또 한 가지.

그것은 S급 헌터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쳐 다른 곳만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도 시선의 방향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린다.

시선의 끝이 어디로 다다르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한 마리의 몬스터.

아홉 명의 인간.

"...."

그 시선을 모두 받은 남자는 평소와 같았다.

얼굴은 평온했고,

"으엉?"

목소리도 느긋했다.

이무기가 분노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모습이라면.

남자는 태평함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딱 저렇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이태천.

녀석이 목을 긁적이며 물었다.

"도운아, 도희야. 저거 나 보고 있는 거지?"

"어, 너 보고 있네."

"그렇네요."

나와 도희는 바로 대답해주었다.

이어 우리 세 사람의 질문과 답변이 빠르게 이어졌다.

"왜 날 보는 걸까?"

"글쎄다."

"내가 오라버니한테 묻고 싶은걸요."

"나도 모른단 말이야."

태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무기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확실히….

그 태도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친구에게서 진실함을 느꼈습니다.]

[저번과 같이 심정이 느껴진다고 전합니다.]

새싹이도 진심을 느꼈다.

이번엔 순순히 믿어줘야겠다.

태천이 또다시 질문을 던진다.

"물어보면 대답해주려나?"

"대답이라…."

"안 해주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지?"

"도희가 그렇다면 그런 거 아니겠어?"

"맞지. 그렇지."

"껄, 껄껄껄…!"

사담을 나누는 가운데,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리롄제가 고개까지 뒤로 넘기며 웃어젖혔다.

그는 이무기에게 무시를 당했음에도 전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답지 않게….

용 같은 외형 때문인가?

역시 외형이 중요한 건가?

"상황이 썩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이들도 리롄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천의 실력을 인정했던 리우이호와 조주현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밀러와 그위친도 흥미로운 듯 우리를 바라봤다.

유일하게 딱 한 사람.

스미르노프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야 그렇겠지.

우리에게 자신과의 격차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무기가 무시하고 있으니….

그때, 리롄제가 제안을 해왔다.

"자네, 저걸 한 번 상대해보지 않겠나?"

"예?"

"잠깐만요."

도희가 끼어들었다.

이 이벤트의 주인공은 태천이가 아니다.

여기에서 나선다면 전 세계적으로 '저 새끼 뭔데 나대?'라고 듣지 않아도 될 욕을 듣게 될 터였다.

설령 이무기가 태천이만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리롄제가 먼저 제안했다고 해도.

"저희가 이곳에 들어온 건-"

"이벤트를 위해서지."

리롄제가 도희의 말을 끊었다.

"화합의 장이지 않은가. 한국 최고의 탱커라는 실력. 부디 꼭 한번 보고 싶군."

"...."

부디, 꼭.

리롄제는 저자세로 부탁을 해왔다.

S급 헌터인 동시에 세계에서 헌터 생활을 가장 오래 한 그가.

여기에서 거절한다면, 전 세계적으로 '저 새끼 뭔데 리롄제의 부탁을 무시해?'라고 욕을 먹을 터였다.

그렇다.

나서도, 나서지 않아도, 욕을 먹는 상황이 된 거다.

그걸 알기에 도희는 입을 다물고 태천이를 바라봤다.

태천이는 그러나 아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무 걱정도 없이 편안한 얼굴이다.

"혼자가 싫다면…."

리롄제가 고개를 돌린다.

노인은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봤다.

[경고!]

[어린나무가 관리인에게 경고를-]

"자네 친구와 함께 하는 것도 좋을 듯하군."

이 능구렁이 영감탱이….

진짜 노림수는 나였구나?

제158화

"하…?"

TV를 보던 유재이가 입을 벌렸다.

그녀의 입에 반쯤 씹힌 오징어 다리가 대롱거리다가,

톡….

떨어졌다.

떨어지는 오징어 다리를 홍수정이 손바닥으로 받아낸다.

받아낸 것을 도로 유재이의 입에 넣는다.

질겅질겅….

유재이는 오징어 다리를 천천히 씹었다.

물론, 씹고 싶은 건 입속에 있는 오징어 다리가 아니었다.

"…저 영감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무기를 상대해보지 않겠냐고 했어. 친구랑 함께해도 좋을 것 같댔고."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혼잣말이나 다름없었으나 홍수정이 대답했다.

구운 오징어 몸통을 죽 찢으면서.

TV 화면에 이태천과 그의 옆에 서 있는 백 씨 남매가 잡혔다.

"친구…는 도운 씨랑 도희 님을 얘기하는 거겠지?"

"웃겨. 갑자기 왜 백도운한테 시켜?"

"재이야, 리롄제가 시킨 건 태천 님."

"이태천이나 백도운이나! 친구랑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다잖아."

"응, 응. 그렇게 말했지."

"사람들 보고 싶은 건 자기들이 싸우는 건데 말이야. 이무기도 왔겠다, 싸움이나 할 것이지. 왜 백도운한테 시키고 난리야?"

"그러게에."

"나만 그래?"

"응?"

"왠지 마음에 안 들어, 저 노친네!"

유재이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홍수정은 흐뭇한 얼굴로 보면서 찢어놓은 오징어 몸통 조각을 건넨다.

"고마워."

"응."

유재이는 오징어 몸통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녀는 화면에 리롄제가 나올 때마다 눈을 부라렸다.

반면, 리롄제는 웃고 있었다.

마치 옛 무협 영화에서 나올 법한 신선과 같은 얼굴로 이태천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서 이태천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고, 김지연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받아들이면 안 될 텐데…."

"에이, 받아들이겠어요?"

심윤진이 땅콩 한 알을 입에 던져 넣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지금 받아들이면 세계적인 눈새 되는 건데."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이태천이잖아."

"아, 맞다. 미터기…."

"미터기?"

"몰라요?"

홍수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재이도 모르는 눈치로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오징어 몸통을 질겅질겅 씹으며 심윤진을 바라봤다는 소리다.

"이태천 별명이에요."

"별명…? 천공의 기사잖아?"

"그건 이태천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요."

"으응…?"

천공의 기사.

심윤진의 말대로 그 별명은 그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붙인 말이다.

정직하고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를 순수하게 칭찬하기 위해서.

그러나.

좋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는 법.

올곧고 정직한 모습은 누군가에겐 어리석고 고지식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미터기는 이태천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에요."

"미터기…. 왜 미터기야?"

"택시 미터기에서 따온 거예요. 융통성 없는 모습이 꼭 탑승자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올라가는 미터기 같다나?"

"헤에, 전혀 몰랐어."

"그럴 거예요. 이태천 싫어하는 사람들보단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웬만해선 미터기라고 안 부르죠."

"그렇구나…."

설명을 듣고 난 홍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유재이가 외마디 감탄을 흘렸다.

"앗…."

TV 화면에 도운이 잡혔기 때문이다.

도운은 태천의 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대신 대답하려는 듯했다.

"백도운…."

그녀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화면 속 도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

"자네 친구와 함께 하는 것도 좋을 듯하군."

리롄제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신선처럼 보일 얼굴이었지만….

후우….

내게는 전혀 그리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만 그런 걸까.

어쩐지 이 영감 보면 볼수록 재수 없어지는 것 같은데.

아니, 이무기 잡는 건 S급 헌터들이 할 일인데 왜 우리한테 상대해보라고 하고 지랄이야?

"어…."

태천이는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듯했다.

당연했다.

받아들이면 눈치 없이 뭐 하는 거냐고 욕을 먹을 거고.

거절하면 감히 리롄제의 제안을 무시하는 거냐고 욕을 먹을 거다.

어떤 선택을 하든 욕을 듣게 될 상황이었다.

그의 고민은 그러나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을 터였다.

예전부터 내가 누누이 말했으니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으면 고민하지 말고 우선 행동해.

태천이는 고민해봐야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한다.

괜히 학창 시절 뒤에서 전교 1등을 독차지한 게 아니다.

뭐, 뒤에서 전교 2등을 독차지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실망합니다.]

[관리인 친구에게도 실망합니다.]

어허, 실망하지 마.

우린 관심사가 성적에 없었을 뿐이야.

그때 다른 노력을 했다고.

[어린나무는 호기심을 느낍니다.]

[관리인에게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습니다.]

....

[어린나무는 나뭇가지를 갸웃합니다.]

있어.

실버를 넘어,

골드를 지나,

플레로 가는 거.

[어린나무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관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전합니다.]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지만….

그곳에서 듀오로 챌린저 갔으면 된 거지.

암. 그렇고말고.

"음…."

태천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고민하지 않고 행동하기 위해서다.

아마 리롄제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할 거다.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모였는데 제안을 거부하면 보기 안 좋을 테니까.

"전 아무래도 상…."

역시.

손을 뻗어 태천의 어깨를 짚는다.

태천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응?"

"...."

"…알았어."

태천이는 순순히 발언권을 넘겨주었다.

내가 나서는 게 재미있었던 걸까?

리롄제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재수 없긴.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불렀다.

"리롄제 님."

"듣고 있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헐헐…."

리롄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는다.

뒤에서 도희와 태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내 이름을 중얼거렸는데,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각각 달랐다.

태천이 목소리에는 의문이, 도희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거절하겠다고?"

"네."

"나. 리롄제의 부탁인데도?"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라…."

노인은 같은 말을 되뇌며 날 빤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젊은 헌터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졌을까.

아니면 반대로 재미있어하고 있을까….

그의 생각을 읽어내길 포기했다.

고개를 돌려 이무기를 바라본다.

이무기.

「....」

그것은 가만히 태천이를 보고 있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허공에 떠 있기만 했다.

퍽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오자마자 바로 번개 속성의 공격을 퍼부어댈 줄 알았는데….

이무기는 왜 그냥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는 걸까.

생각해봐야 그것의 의중은 알아낼 수 없으리라.

아.

그위친은 드루이드니까 알지도 모르겠다.

"나섰다가…."

"음?"

"저걸 우리가 잡아버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리롄제의 눈이 커진다.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피어오른다.

내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이번 이벤트의 목적은 S급 헌터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저걸 우리가 잡아버리면, 여러분이 함께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허…."

"아. 함께 구경하는 모습은 보여줄 수 있겠네요."

"...."

리롄제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도 입을 열지 않았고, 완전한 침묵이 깔렸다.

우르르…!

들리는 것이라고는 이무기의 몸에서 튀어대는 천둥소리뿐이었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