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내 어머니는 용병이었다.

그것도 제법 명망있는 용병, 여자에 평민 출신임에도 유명 귀족에게도 자주 불려가는 용병이었다.

하지만 용병인 만큼 죽는 것도 빠르셨다.

대략 내가 10살 정도 먹었을 때 돌아가셨으니까.

딱히 슬프지도 않았고, 그저 난 내 할 일을 찾아나섰다.

어머니를 닮은 것인지, 결국 나도 용병으로 살게 되었다.

적성은 잘 맞는 편이었고, 나도 제법 알아주는 용병으로 불리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배우는 것도 빨랐고, 실전에 적용시키는 것도 능숙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13살이 되었을 때,

"너, 약해."

진짜 '천재'를 만났다.

귀족 가문의, 그것도 용사 가문의 영애.

혈통부터 재능까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용병을 시작할 나이에 오크를 베고, 나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땐 와이번을 죽였다.

격의 차이.

그녀에겐 그게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질투를 느꼈다.

내가 손톱이 뜯어지는 노력으로 이룬 걸, 그녀는 마치 호흡하듯 해낸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그게 기본인 것처럼.

너무나도 태연히 해냈다.

이기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녀와 동등하게 마주보고 싶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종자가 되겠나?'

라이벌의 가문 종자가 되는 굴욕을 참아가면서까지 난 나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내가 이겼어.'

'또 이겼네.'

'이번에도.'

전부 졌다. 200전 200패. 완전무결한 패배였다.

그 패배에서 배운 건 하나였다.

이대로는 평생 가도 그녀를 못 이긴다는 것.

그 뒤로는 난 라인하르트 가문을 나갔다.

대륙을 발로 뛰어다니며 각종 무술을 익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선을 뛰어넘겼다.

그렇게 25세에 만족하고 다시 그녀에게 갔을 땐.

'아리아스필은 이미 죽었단다.'

그녀는 세상을 뜬 지 오래였다.

***

"...이해할 수가 없군."

"뭐가...씨발..."

현자의 동굴, 그곳의 수호자는 눈을 끔벅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그렇게 강하면서 왜 더 강해지려고 하는 거지?"

"지랄하네... 강하면 왜 너한테 뒤지겠냐?"

이미 마나 코어는 박살났다. 뼈는 마디마다 금이 갔다. 패배자인 나답게 난 이미 진 것이다.

"나도 만만치 않게 당했다만."

그건 사실이었다. 골렘 수호자의 오른팔은 완전히 잘려나갔고, 가슴팍에는 단검이 잔뜩 꽂혀있었다.

"그래서...? 꼽냐...?"

"나에겐 그런 감정이 없다. 단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그니까 뭐가...? 사람 죽기 전에 말 돌리지 말고 말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호자는 다시 질문을 수정했다.

"넌 어째서 현자의 돌을 노리지?"

"강해지고 싶어서..."

눈가가 아른거린다.

"그럼 왜 강해지고 싶지?"

머리가 흐려지니 입을 멋대로 움직인다.

"그냥... 이기지 못한 새끼가 있어서..."

"지금 너라면 이길 것 같다만."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못 이겨. 어차피 그 녀석 먼저 갔거든."

이제 눈이 완전히 감긴다.

"...주인님?"

이제는 저 살아있는 목석놈이 하는 헛소리밖에 안 들린다.

"...이 남자에게 현자의 돌을 넘깁니까?"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주인님은 괜찮으십니까?"

뭔소리야? 여기에 주인님이 어딨는데? 그보다 현자의 돌은 넘긴다는 게...

"알겠습니다. 이식을 시작하죠."

아까부터 무슨 개소...

팍!!

"끄아아아악!!"

가슴에, 심장에 무언가가 꽂혔다.

몸이, 뇌가 타는 것 같다.

눈이 번뜩이며 갑자기 떠지게 된다.

"이 개자식아!! 이젠 시체 능욕까지 하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정말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눈앞은 정말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언제 죽었다는 거야?"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내가 그토록 넘어서고 싶었던 라이벌이 있었다.

<+--|-|--+>

EP.1 회귀-1

레오나르도, 레오에겐 모든 게 익숙하고도 어색했다.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곳의 풍경과 상황 전부 똑똑히 기억난다.

'...처음으로 아리아스필하고 싸웠을 때...였지.'

그녀와 처음 만나고, 대련을 걸었을 때의 상황.

그리고 첫 패배를 겪은 장소인 만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뭐냐고 이게..."

죽은 건가? 죽을 때 능욕까지 당해서 미친 건가? 아니면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 뭐 그 비스무리한 건가?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앞에 있는 아리아스필은 단검을 든 채로 한심하게 날 노려봤다.

"...하...망할..."

저 눈빛, 죽어서까지도 내려다보는 저 눈빛.

"그래, 좋아."

까짓것 미친 거나, 환상이면 어때.

"아까부터 혼자 뭐하는 건데? 이제와서 무서워진 거야?"

레오가 혼자 말이 많자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주변 구경꾼들도 그 기행에 웅성거리며 비웃고 있었다.

근데 이 자식은 사람 한 번 뒈졌는데 말본새하곤.

"아니, 혼자 꿍얼거려서 미안하다. 얼른 덤비기나 해."

"그러지."

단검을 든 그녀는 레오에게 돌진했다. 한 뼘의 짧은 검임에도 쾌검이 난무했다.

"근데 말이야."

하지만 저런 검 따위 몇 년 동안 죽도록 봐왔다. 이미 죽긴 했지만.

"그딴 과일칼로 싸우면 너 진다."

레오는 쾌검을 피해 그녀의 뒤에 서며 말했다.

"...?!"

그녀도 놀라고,

"어떻게...?!"

주변 사람들도 경악했다.

그러건 말건 레오는 칼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마나 코어가 없는만큼 검기를 쓰는 건 불가능했지만.

'핸디캡으론 충분해.'

어린애 상대론 이거면 충분했다.

캉! 카앙!!

검이 부딪친다. 그녀가 장검을 뽑을 시간이 없도록 난격을 퍼붓는다.

"윽...!"

그녀의 검에 마나가 실린다. 검사에게 있어 무기에 검기가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다. 지금도 점점 기세가 레오 쪽으로 밀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전에...!'

레오도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단검을 뽑는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그녀의 단검이 공중으로 튕겨 올라간다.

"...하...하..."

레오는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눴다.

이겼다. 애새끼지만, 처음으로.

천재에게, 그녀에게, 아리아스필에게 이겼다.

"하..."

그래서?

그 질문에 레오의 웃음이 가라앉았다.

웃음이 가라앉자 들뜬 기분도 가라앉았다.

'이렇게 이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허무하다.

미친 거든 환상이든 허무했다.

여태까지 바라왔던 건 이딴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이기는 건...

"내가... 져..."

그녀가 패배를 인정하려는 순간,

"내가 졌어."

레오가 먼저 패배를 인정했다.

"...뭐?"

이런 식의 승리는 납득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니가 방심만 안 했으면 승부는 몰랐을 거야."

"하지만... 단검을 쓴 건 내 선택이었어...! 그러니까..."

"어쩌라고."

그 말에 다들 어안이 없는 눈치로 그를 바라보았다.

"니가 선택했든 말든 상관없어. 내가 내 승리에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그게 레오에겐 알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내가 진 게 싫으면 비긴 걸로 쳐. 됐지?"

그녀에게 겨눈 칼을 다시 칼집에 넣는다.

"그럼 간다. 갑자기 시비 털어서 미안하고."

그렇게 레오는 자리를 벗어났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리아는 그런 레오를 멍하니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죽다가 이게 뭔 꼴이냐..."

기껏 얻은 승리는 허무하기 그지없고, 이건 꿈일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텐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도..."

'아리아스필...'

그 재수없는 녀석 상판이라도 보고 죽으니 됐나.

이제 여기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꿈에서 깨겠지.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덜었으니 만족해야지.

[예끼! 이놈아! 기껏 살려줬더니 그걸로 만족하냐?!]

왠 늙은이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지? 죽을 때가 되니까 환청이...

[환청 아니다!! 꼬맹아!!]

눈 앞에서, 정확히는 내 심장 속에서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뭐야 씨발

"뭐야?! 씨발?!"

진짜 뭐야 씨발이었다.

***

[흠흠...]

눈 앞에 있는 영감, 정확히는 영감탱이 유령이 목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귀신인데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는 것이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난...]

"혹시 예전에 같이 놀았던 할아버진가요?"

[...아니다.]

"그럼 내가 삥땅쳤던 여관주인인가요?"

[...아니야.]

"아니면 내가 살려준 용병 노인이었나?"

[아니라고. 사람 말하면 아가리 싸물고 좀 들어!]

레오가 계속 말을 덧붙이자, 노인은 갑자기 역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 저래. 나름대로 기억해볼려고 한 건데.

[크흠, 난 마법의 정수이자 모든 마법의 시초, 현대의 마법을 정립한...]

"정답, 현자."

[야이...!!]

말을 자르자 현자가 다리를 동동 구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애초에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틀렸어요?"

[하... 됐다 됐어. 맞았다. 꼬맹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갑자기 과거로 오지 않나, 현자님이 귀신으로 있지 않나."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면 너와 내가 하나가 된 거지.]

"...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우읍...! 망할...!"

헛구역질이 연발로 나온다. 이럴려고 현자의 동굴로 간 건 아닌데.

[왜 토악질부터 하고 지랄이야! 영광인 줄 알라고!!]

"아니!! 처음 보는 노인네하고 키메라마냥 합체했는데 뭐가 영광이야?!"

[뭐...뭐?! 키메라?! 야!! 내가 너 목숨의 은인인 건 알아?! 기껏 현자의 돌로 살려줬더니!]

현자의 돌로 살렸다고?

"현자의 돌을 썼다고요? 저한테요?"

[그래 이 새끼야! 내 혼을 갈아서 만든 보물을 말이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레오가 그 동굴에 가고 수호자와 싸우다 죽은 건...

"전 현자의 돌을 얻을려다가 죽은 건데요?"

[알아. 나도 봤어.]

"근데 사람 죽여놓고 돌을 준다고요?"

[원랜 안 줄 생각이었어. 난 원래 도둑놈들을 싫어하거든.]

현자의 동굴.

비밀리에 숨겨져 있는 그 동굴에는 현자의 숨겨져 있는 보물이 있다고 전해져왔다.

현자의 모든 마력이 담겨 있는 돌이 있다고 말이다.

정보 자체도 얻기 힘들었고, 있더라도 헛소문인 경우가 태반이여서 다들 무시했는데.

하지만 운이 좋게도 레오는 진짜 현자의 동굴을 찾았고,

돌을 얻기 위해 동굴의 수호자하고 단신으로 싸우다가 죽어버렸다.

"근데 왜 저한테 줍니까?"

[아니 넌 왜 줘도 지랄이니.]

"그렇잖아요. 따지고 보면 전 현자님이 싫어하는 도둑놈이고, 딱히 싸가지있게 한 것 같지도 않은데요."

[새끼, 자기가 어떤지는 아는구만.]

레오의 말에 현자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별거 없어. 그냥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이건 곤란한데.

"...전 동년배의 이성을 좋아합니다만..."

[그런 의미 말고! 새꺄! 내 후계자로서 말이야!]

후계자?

"네? 후계자라고요?"

[원래는 그 수호자를 부수고 현자의 돌을 얻으면, 내 모든 마력과 마법을 전수해줄 생각이었어. 마법사로서 가치가 있는 녀석일테니까.]

"전 마법사가 아닌데요?"

[어른이 말하면 끝까지 들어. 진짜 다시 죽여버릴까.]

소름이 조금 돋긴 했다. 마냥 허세는 아닌 것 같았다.

[원래 그 수호자는 마법으로만 부술 수 있게 설계했어. 물리저항력만큼은 최상이라 할 아다만티움으로 제작했거든.]

어쩐지 아무리 베어도 날만 상하더니...

[근데 이게 웬걸. 마법사도 아닌 자식이 혼자서 아다만티움 골렘을 부숴놨잖아. 그러니까 조금은 흥미가 생겼지.]

"그러면 뭐합니까? 그때 저도 죽기 직전이었는데."

[그래도 대단한 건 맞아.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골렘을 때려잡을 줄은 몰랐거든.]

그건 그랬다. 지능적으로 싸우는 것도 특기이긴 했으나, 그때는 전략도, 장비도, 상성마저도 불리했다.

[그래서 골렘한테 시켜서 물어봤지. 왜 이렇게까지 힘을 탐하는지, 현자의 돌을 탐하는지를 말이야.]

"그런 것치곤 애가 말하는 게 좀 이상하던데요."

[원래 그래. 지능 설계를 대충해서.]

이런 놈이 현자?

[...어쨌든 싸운 이유가 마음에는 들었으니까. 당장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싹수는 보였거든.]

"싹수요? 펜은커녕 평생 칼만 잡고 살았는데요."

[상관없어. 집념이 있는 녀석은 천재가 아니더라도, 때가 늦어도 중박은 치거든.]

천재가 아니더라도, 중박은 친다라...

"하하... 그럼 전 현자님께 마법을 배워도 중박만 칠 수 있는 거네요."

그래, 그게 재능의 한계.

사람으로서의 벽이겠...

[...너 진짜 바보냐?]

"...네?"

[니가 천재가 아니라고? 진심이냐? 너 스스로를 그 정도라고 생각해?]

현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천재라는 건, 단지 재능을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야.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천재지.]

"제게 그런 게 있습니까?"

[그래. 있어.]

잠시 뜸을 들이던 현자는 말했다.

[넌 포기하지 않아. 그건 내가 아는 것 중엔 가장 강한 재능이야.]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목표가 있으면 달려간다.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을.

저 현인은 마치 위대한 업적인 것마냥 얘기한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 당연한 것도 못하는 녀석들은 세계 각국에 넘치도록 많아.]

"저보다 굉장한 사람들도 많을 걸요."

[그래서 넌 포기했냐? 넌 네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아 그래요? 그럼 그만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자신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건 그거였고, 레오는 레오였다.

[그러면 하나만 묻자.]

"...뭡니까?"

[넌 골렘한테 죽을 때, 뭔 생각했냐?]

"...이 새끼가 시체까지 능욕하네?"

[농담은 집어넣고 제대로 말해봐.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

얼굴에 웃음기가 가신다.

그리고 짧은 한마디가 나온다.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를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 앤 이미 죽었잖아.]

"그래도 이기고 싶었습니다. 죽었다고 해도 마음으로나마 이기고 싶었어요."

[크핫...! 크하하하하하!!]

현자는 웃었다. 마치 미쳤다고 봐도 상관없을 만큼 강한 광소가 방 안의 채웠다.

웃음으로 귀가 먹먹해지자 현자는 웃음을 멈췄다.

[이러고도 니가 재능이 없다고? 이미 죽었던 사람까지도 이기고 싶다고 하는 녀석이?]

"..."

[인정해. 넌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야.]

"...인정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요?"

현자는 마치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내가 도와주마. 내가 쌓아올린 모든 마법을 너한테 전수시켜주지.]

현자는 손을 내밀었다.

[내 제자가 되어라. 레오나르도.]

"...네. 저도..."

근데 악수를 하려는데 손이 안 잡힌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아, 맞다. 나 유령이지 참.]

"이런 게 현자?"

[뒤질래?]

조금 모자라지만 최고의 스승이 생긴 순간이었다.

<+--|-|--+>

EP.2 회귀-2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뭔데?]

여관방을 이리저리 날아다는 현자는 되물었다.

"전 왜 과거로 돌아온 겁니까?"

사실 그걸 제일 먼저 물을 필요가 있었다.

현자가 스승이 된 것과 과거로 돌아온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그건 아마도 현자의 돌에 있는 마력이 반응해서 그런 걸걸.]

"마력이 반응했다고요?"

[순수한 마법과 마력의 집합체에 너의 정신이 반응하니까 일종의 기적이 일어난 거지.]

"...그게 가능한가요?"

솔직히 잘 믿기지는 않는다. 아무리 기적이라고 해도 시간여행은 그리 간단한 마법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정신력이 그냥 마법하고 마력에 씹히고 미쳐.]

"...예?"

이 양반이....?

[야, 작은 풍선에 거대한 공기 덩어리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해봐. 아무리 질겨도 1초도 안 돼서 펑하고 터지지.]

"그러니까 그 미친 짓을 저한테 한 거라고요?"

[그런 셈이야. 물론 내 사념으로 조정 정도는 해줄 생각이었지. 미치진 않고 매일 악몽을 꿀 정도로의 트라우마 정도로.]

이 정도면 현자인지, 악마인지 모르겠네.

[근데 넌 그럴 필요가 없더라.]

"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니 정신력은 이미 내 현자의 돌을 버텨냈거든.]

그래서 아까 포기를 모른다고 한 거였군.

"그럼 과거에 온 건..."

[말했잖아. 버티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그게 이 회귀라고요?"

[그렇지. 아마 죽기 전에 있는 강렬한 집념이 기적의 형태로서 발현된 걸 거야.]

집념... 그건...

"아리아스필하고 싸우는 것..."

[참 한결같은 꼬맹이야. 아까 여자애 못 이긴 게 그렇게 분통 터졌냐?]

"...그렇죠.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던 상대였으니까요."

아리아스필은 말하기 그렇지만 레오의 목표이자 염원이었다. 그녀를 꺾기 위해 스스로를 칼로서 벼려내었다.

[근데 결국은 이겼잖냐.]

이긴 건 맞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긴 건 싫어요."

[그래?]

"지금 이긴 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아리아스필이잖아요. 그에 비해 전 정신만큼은 성인 때와 같고요."

[그렇긴 하지. 이겼다고 자존심 세우기도 그렇네.]

"그리고 방심도 했으니까 아무래도 완전한 승리라고 하긴 힘들죠."

단순한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상황은 반칙, 레오 자신이 편법을 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리아스필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보다 포텐셜이 높아요. 제가 간신히 오러를 깨쳤을 때, 걘 이미 오러를 연속으로 날리는 수준이었거든요."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그녀를 이기는 것, 그건 레오 자신이 바라는 소원과는 방향이 달랐다.

[그럼 어떡하게?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게? 10년은 족히 기다려야할 걸.]

"그럼 까짓것 기다리죠 뭐."

[...뭐?]

10년, 태연히 대답할 만한 시간의 무게는 아니었다.

10년 뿐일까, 레오가 기대할 만한 경지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너 진심이냐? 그렇게 고집할 일이야?]

그래도 기다릴 수 있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그 대답에 현자의 영혼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다시 현자는 말했다.

[...너 혹시 걔한테 마음 있냐?]

"네? 아뇨."

[왜 즉답이야.]

"없으니까요. 5년을 넘게 걔 가문 종자로 살아왔는데, 그런 생각은 딱히 안 들던데요."

확실히 아리아스필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만 줄 세워도 왕국 대장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에게 있어 그녀는 라이벌이었다.

그녀를 사랑할 시간에는 차라리 그녀를 이길 무술을 연구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느껴졌다.

[...나 참... 요상한 쪽으로 미쳤구만.]

"이기고 싶으니까요.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고민이었다.

"이제 뭘하지?"

역사가 바뀌었으니 그에 대한 행동을 생각할 시간이었다.

***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그녀는 용사 가문 아래에 가장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다고 칭송받은 전사.

10세에 초보 모험가의 살육자인 오크를 잡고, 13세엔 새끼지만 와이번마저 토벌한 천재였다.

그녀의 검 아래에는 어떤 전사들도 무력했다.

하지만

"...졌어. 처음으로."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어째서지...?"

분명 그녀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은 평범한 용병이었다.

'니가 그렇게 대단한 기사라며? 길게 끌 것도 없어. 한번 붙어보자.'

예의도, 격식도 없는 결투 제안이었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런 족속의 싸움꾼들은 한번 지면 제풀에 꺾이기 때문이었다.

아예 완전한 포기를 주기 위해 장검도 아닌 단검으로 그 소년을 상대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근데 말이야. 그딴 과일칼로 싸우면 너 진다.'

단 몇 초 사이에 소년의 기류가 뒤바뀌었다.

그리고 이어진 건 자신의 패배.

...아니, 그것마저 아니었다.

'내가 졌어. 니가 방심만 안 했으면 승부는 몰랐을 거야.'

타오르는 호승심과는 달리 이상한 논리, 그러고는 멋대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이런 식의 승리는 그녀 본인도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어쩌라고. 니가 선택했든 말든 상관없어. 내가 내 승리에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 소년은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더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 유유히 말이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호위와 지도를 맡고 있는 기사, 제하드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무표정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음영이 져있었다.

"아가씨, 너무 개의치 마세요. 정식 결투도 아닌 비겁한..."

"비겁하지 않아. 그리고 그 애도 자기 승리를 인정 안 하겠대.

당시 제하드는 숙박할 여관을 찾느라 아리아스필을 잠시 혼자 두었다. 호위 기사이긴 하지만, 애초에 아리아스필은 제하드와 비견될 정도로 힘을 지닌 기사였다.

'...그래서 잠깐 혼자 둔 거였는데... 그 사이에...'

그 사이에 아리아스필이 결투를 받고 패배했다. 정식 결투가 아닐지언정 이건 그녀와 가문에 큰 수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제하드."

"네, 아가씨."

"그 애 찾아와."

"...네?"

갑작스러운 부탁에 제하드는 되물었다.

"그 애 찾아오라고."

아리아스필,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굴욕와 승부욕을 느꼈다.

***

[야, 꼬맹아.]

"..."

[야, 레오나르도.]

"..."

[야, 귀 먹었냐?]

"아 좀 닥쳐요."

마나 모으려고 명상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말을 걸고 있어.

[4시간째 옷 벗고 가만히 앉아있는 남자 새끼만 봐야하는 내 시신경도 생각해줄래?]

"그럼 밖에 나갔다와요. 하늘도 날 수 있는 분이."

[못 해. 니 심장에 현자의 돌이 있어서 먼 곳까지 가질 못하거든.]

잠깐만.

"그럼 전 평생 현자님이랑 같이 살아야해요?"

[그럼 셈이지. 어지간해선 같이 다녀야해.]

"으아...최악이네요."

[뭐 임마?]

"그럼 화장실 갈 때도, 샤워할 때도 같이 있어야하잖아요...!"

[우읍...생각만 해도 토가...]

피해자는 레오 자신인데 왜 본인이 헛구역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유령이여서 먹은 것도 없을 텐데.

"알았어요, 30분만 더 하다가 나갈게요."

[그 나이 먹도록 마나 코어도 안 만들고 뭐했냐? 나 때는 말이야. 밥 먹을때마다 만든게 마나 코어...]

"어머니 돌아가시고 고아 돼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요. 방법도 몰랐고."

[...아...음...그래.]

너무 가불기로 대답한 건지, 현자는 할 말 없이 싱겁게 훈계를 끝냈다.

[그럼 차라리 더 나은 방법을 알려줄까?]

"나은 방법이요? 그게 있어요?"

레오가 쓰고 있는 마나 호흡법은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개발한 제국 최고의 연마 기술이었다.

어지간한 호흡법으론 뛰어넘을 수 없는 기술인데.

'근데 그걸 뛰어넘는 게 있다고?'

[레오나르도, 나 현자다.]

"예."

[나 현자라고.]

"예."

[나 현자라니까!]

"아! 그니까! 예!"

뭔 대답을 원하는 거야? 진짜 유령 돼서 노망났나?

[현자니까 새로운 마나수련법은 이미 개발했다고! 알겠냐?]

"그럼 그렇게 말해요!"

무슨 다 늙은 노인이 빙빙 돌리면서 말해.

[그럼 알려주지 말까?]

"하... 알려주세요."

[제대로, 정중하게.]

그래, 저렇게 노망났어도 목숨은 살려줬으니까.

"아이고, 대단하신 현자님, 부디 이 미천한 용병에게 지고한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오냐. 미천하디 미친 용병아. 내 친히 알려주마.]

그냥 스승이고 뭐고 심장에 있는 돌부터 빼낼까.

[흡...!]

갑자기 주변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

레오 주변의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호흡기와 피부에 천천히 달라붙어 갔다.

[후... 영체 상태로는 힘들단 말이지.]

"...뭘...뭘 하신 겁니까?"

[맞춰봐. 스승으로서 내는 시험이다.]

일반적인 마나수련법은 코와 입으로 숨을 들이마셔 공기 중의 마나 입자를 몸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폐의 마나를 활성화해 자석처럼 마나 입자를 몸에 끌어온다.

"하지만 이건..."

이 마나 입자 자체를 몸에, 피부에 흡수하게 만든다. 본래라면 피부에 어설프게 달라붙다가 떨어질 텐데, 이 마나 입자는 마치 고운 화장품 가루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뭔지 감이 오지?]

"마나 입자를 더 쪼개서 제 몸에 흡수시킨 건가요?"

[내가 개발한 초고효율 마나 수련법이야. 니가 4시간 동안 고생한 거 1시간으로 압축시킬 수 있지.]

이 발상은 솔직히... 엄청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론만으로도 경이로웠고, 실제로 실행시키는 것마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인간이 폐로 호흡하지 않고, 피부만으로 호흡하는 원리와 다를 바 없었다.

"가능할까요?"

[난 가능한 거만 시켜.]

시도할 가치는 충분했다.

다시 가부좌를 틀며 새로운 마나호흡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입자를 피부에 붙이는데 집중하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마나 입자를 흡수시킬 만큼 곱게 가는 것.

"...안 되겠네."

대략 30분 정도가 흐르자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벌써 포기야?]

"아뇨."

레오는 바닥에 놓은 검을 들었다.

[검은 왜 드냐? 뭐하게?]

"제 방식대로 하게요."

그렇게 말하곤 그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참고로 칼로 마나 입자를 자를 수는...]

"없는 거 압니다. 저도 알아요."

[거 말하는 싸가지하곤.]

웃통을 벗곤 레오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음?]

어설프게 달라붙던 마나 입자가 이번엔 제대로 피부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나 입자가 더 쪼개진 건가?]

다시 봐도 그건 아니었다. 마나 입자 자체는 쪼개졌어도 많이 굵은 편이었다.

[그렇군...!]

세 번 바라보자 방식의 원리가 이해되었다.

지금 레오가 하고 있는 건, 마나 입자의 단위를 줄이는 것이 아닌.

[피부의 기공을 확장시키고 있었어. 검술로 말이야.]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몸을 활성화시켜 좁은 기공을 확장하는 것, 마법사인 현자는 이용하지 못한 새로운 응용법이었다.

[...새끼, 이러고 천재가 아니라고?]

경악한 건 현자 뿐만이 아니었다.

"...저게... 저게 뭐죠? 아가씨?"

"...?"

레오를 찾아온 라인하르트의 두 기사도 경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EP.3 회귀-3

"...저게...저게 뭐죠...? 아가씨?"

그 말에 아리아스필은 답답한 마음까지 들었다.

호위기사이자 지도기사인 제하드가 모른다면, 아리아스필 자신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저런 마나수련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원리는...'

그렇지만 그녀는 침착히 저 소년의 검술과 마나를 살폈다. 차례로 침착히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뜯어보기 시작했다.

"...마나 입자를 쪼개고 있어."

"네?"

"자기 주변의 마나 입자를 쪼개서... 자기 몸에 흡수시키고 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그 시원치 않은 소리에 아리아스필은 자신의 목구멍에 깊은 앙금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 우선 내가 말을 걸어볼게."

"아닙니다. 아가씨!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허락을 받기도 전에 제하드는 레오가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저 조급한 행동이 자신의 무능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는 건, 어린 아리아스필마저 눈치챌 수 있었다.

***

달려간 제하드는 훈련하고 있는 레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보게."

"...흡...!"

그러나 레오는 검만을 휘둘렀다.

"이보게!"

"핫...!"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이봐!!"

"...하...참..."

세 번 연속으로 자신을 부르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레오는 수련을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를 찾고 있는 귀한 손님이 있다. 얼른 따라와."

"싫습니다."

"...뭐?!"

거절과 동시에 레오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안 가도 되냐?]

옆에 있는 현자는 수염을 긁적이며 물었다.

레오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진짜 귀한 손님이면 직접 찾아오겠죠."

[그건 그렇다만.]

"그보다 현자님은 안 숨어도 돼요?"

[괜찮아. 난 현자의 돌을 지닌 녀석만 볼 수 있거든.]

어쩐지 너무 당당히 있다 했더니 그런 것 때문이었나? 편리는 하겠네.

[근데 저 자식, 모양새로 봐선 평범한 기사 나부랭이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 말대로 제하드의 옷차림은 상류 귀족을 방불케했다. 깔끔하고 청결한 갑옷부터 장식까지 있는 검은 그가 소속된 가문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하드, 예전에 아리아스필의 호위기사였지.'

레오 또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변변치 않은 실력과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가문에서 해고된 기사였지.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보통 귀하든 천하든 손님이라면 본인이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입니다. 본인이 직접 오라고 하세요."

가문의 종자가 되었을 때, 그가 저지른 텃세를 생각하면 상당히 신사적인 거절이었다.

"네놈 따위가 상상도 못할 만큼 귀한 분이시다. 얼른 오지 못할까?!"

제하드는 레오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다. 아마 힘을 써서 위압을 주려는 수작이었겠지.

팍!

"끄아아악!!"

"손 치워."

그 팔을 역으로 잡아쥐며 레오는 그를 노려보았다.

[팔을 잡아 조르는데 손을 치우라고 하는 건 어느 나라 방식이냐?]

아, 그건 인정.

레오는 현자의 조언을 받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 이...! 애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굴욕을 참지 못한 제하드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만해. 제하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리아스필은 그를 멈춰 세웠다.

"아...아가씨?"

"검 집어넣어."

"하...하지만..."

"검 집어넣으라고."

그 말에 제하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호위기사가 무례했어. 사과할게."

저 사과에 제하드는 입을 벌렸다. 여태까지 아리아스필을 모시며 그녀의 사과를 본 것은 손을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알면 됐다. 애초에 바로 안 간 내 잘못도 있고."

"이 자식...! 아가씨가 사과하면...!"

아리아스필은 제하드의 고함에 날카롭게 노려봤다.

"끼어들지 마. 제하드."

"...아...알겠습니다. 아가씨."

[저 새낀 왜 아까부터 지 혼자 열폭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지.

"그래서 온 이유가 뭐야? 시간도 늦었는데."

"다시 한 번 나랑 결투해. 제대로."

그녀는 검집에 있는 장검을 잡았다. 필히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방심은 안 한다는 다짐이리라.

"...미안하지만 당장은 거절할게."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움직인다.

"...왜 거절하는데?"

"새로운 훈련법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거든. 그걸 완성할 때까지는 대련하고 싶진 않아."

그 말에 그녀의 관심은 대련에서 레오의 훈련법으로 돌려졌다.

"아까 그 마나수련법?"

"그래, 그거."

"신기한 수련법이던데. 마나 입자를 쪼개서 피부에 흡수시킨 거야?"

즉답으로 나온 정답에 자연스레 입이 벌려졌다.

[확실히 질투가 날만 하네. 저걸 바로 알아냈어.]

그러니까, 저런 게 진퉁 천재지.

"마나수련법은 한 지 얼마 안 돼서 익숙지 않아. 몸엔 코어도 안 만들어졌고."

"...뭐? 코어가... 없다고?"

아리아스필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쾌속으로 움직였으면서 마나 코어조차 없다고?

"어쩌다보니. 이 훈련법을 만든 것도 너랑 싸운 뒤였고."

[어째 훌륭한 스승이 가르쳤다는 건 빼먹은 것 같다?]

이미 죽은 사람 얘기 꺼내면 분위기 갑지기 싸늘해져요.

"...그러니까 당장은 못 싸워. 너 입장에서도 제대로 된 녀석하고 싸우는 게 낫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확히 언제 싸울 수 있는데?"

거절을 표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직 어린애긴 어린애구만.

"넌 언제 가는데?"

"...늦어도 일주일 뒤에는 돌아가야 해."

"그럼 그때 싸우자. 마지막 날에. 그거라면 불만은 없겠지?"

레오의 제안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그때 올게."

"그래. 이제 늦었으니까 가라."

"아니, 그전에."

아리아스필은 가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어? 몰라?"

"갑자기 와서 대련하자고 말했잖아. 자기소개도 없이."

그 말에 옆쪽에 있는 유령의 눈빛이 어이없게 식는 건 기분 탓일까.

[꼬맹아, 넌 어째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남의 집 수호자 때려 부술 때도 그랬지]

아니네. 기분 탓 아니네

"으흠...! 내 이름은 레오나르도야."

"건방 떨지 말고 성도 말해. 어디서 감히."

저 양반은 왜 또 발광이야?

[저 정도면 호위기사가 아니 건달 끄나풀 아니냐?]

저 유령 건달 말을 저 호위 건달도 들어봐야하는데.

아, 아깝네.

"없는 성을 어떻게 말합니까?"

"성이 없어?"

"애비가 없어. 그러니까 성도 없고."

[어머니 쪽은?]

어머니 쪽은 성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리 당당히 치켜들 성은 아니라나 뭐라나.

"그러니까 난 그냥 레오나르도다. 없는 애비 만들어줄 거 아니면 토 달지 말고요."

"...그래, 알았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여관 터를 걸어나갔다.

"...내 소개를 안 했네. 난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야."

뒤를 잠깐 돌아보며 그녀는 말했다.

"아...! 아가씨! 여기서 성을 대시는 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하드는 슬쩍 레오나르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건방 떨던 꼬맹이가 용사 가문 앞에서 얼마나 비굴하게 굴지도 궁금해 참을 수 없었으니까.

"어, 그래. 라인하르트, 밤길 조심해서 가라."

근데 그건 애저녁에 놀랐다. 10년도 더 전에.

그 말에 어안이고 어이마저 쓸개 빠지듯 빠진 제하드였다. 아리아스필은 개의치 않고 갈 길을 갔다.

[갔구만. 근데 라인하르트? 그 용사 가문이냐?]

"예, 그 용사 가문 맞습니다."

[어쩐지 루벤 그 꼬맹이랑 닮았다 싶었는데, 후손이었구먼.]

"예?"

루벤 라인하르트, 300년 전, 초대 용사의 이름이었다.

설마 저 말은...

[아, 말 안 했나? 루벤 그 꼬맹이도 나한테 마법 배웠거든. 제법 똑소리는 났지.]

"...아..."

레오가 모시게 된 스승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제야 이 현자님께 존경심이 생기냐? 그렇겠지! 난 존재 자체가 천연기념물이자 전설인...!]

"...사람이 어떻게 300년 동안 고자로 살 수 있지?"

어떻게 인간에게 그게 가능할 수가.

정말 대단했다.

[진짜 죽여버린다.]

안타깝게도 못 죽였다카더라.

***

이상했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그런 용병이었다.

못하면 삼류, 괜찮으면 이류 정도의 재능밖에 없는 그런 용병.

하지만 한 순간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전에도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

그녀의 조부.

마르켄 라인하르트의 눈과 비슷했다.

평소에는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운 기운만이 흘러나왔지만, 검을 잡을 때만큼은 수라를 연상케했다.

수라의 눈,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저 아이는 그 경지에 도달했다.

'...분명 마나 코어도, 성이 없다고 했지...'

분명 그는 가문조차 이름없는 용병일 것이다. 관심이 가는 건 출신과 혈통에 상관없이 뛰어난 실력이었다.

아무 재산도 없이, 아무 환경도 없이,

어떤 가족도 없이, 어떤 스승도 없이,

레오나르도는 그 경지에 올랐다.

재능만 놓고 보자면 천재라고 불리는 자신보다도 뛰어날 것이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왜지...?"

그 소년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 여태까지의 모든 인생이 권태롭다고 느낄 정도로 뜨겁고 가슴 뛰는 감정이 흘러넘쳤다.

'...제하드한테 물어볼까...'

그 생각은 바로 접었다. 늘 느꼈던 거지만 제하드는 자신이 아는 기사 중 가장 믿음직하지 못한 기사였다.

'그럼 어떡하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마나로 발소리를 지우면서까지 조심히 여관을 나섰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런 행동도, 일탈을 부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가슴이 뛰고 있어...!'

그 소년에게로, 그 소년이 있는 장소로 갈수록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부웅!

가까이 갈수록 바람 소리가 거세진다.

분명 레오나르도 본인이 검을 휘두르는 소리일 것이다.

"야이! 영감탱이야!!"

그 뒤로 레오나르도의 목소리도 들렸다.

부웅!! 파앙!!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든다고!!"

레오나르도는 마치 미친 것처럼 허공을 검으로 휘둘러대었다.

"할 짓이 없어서 밥 먹을 때 사람 내장 구경시켜주냐?!"

알아먹지 못할 소리를 연발하며 레오는 검으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왜 당신 몸속을 봐야하는데?! 없는 돈으로 산 고기 다 토했잖아!!"

저렇게 노발대발하면서도 대단한 것은, 저러는 와중에도 마나수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장기자랑하고 싶으면 아예 반으로 갈라주랴!? 스승님아!?"

외침과 동시에 레오나르도의 검에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마나가 극한으로 압축된 검은 횡으로 베여졌다.

콰아아앙!!

눈앞에 있는 거목이 단숨에 베였다.

"...어?"

그 거목이 베이자 나무는 아리아스필 쪽으로 떨어졌다.

'빨리...!'

그녀는 옆에 찬 검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검이 없어?!'

급히 나오느라 검조차 챙기지 않았다.

쿠웅!!

나무 몸통이 떨어지며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어...어어?"

아리아스필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천재라 할지라도 무기도, 자세도 없이 대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괜찮냐?"

레오가 그녀를 두 팔로 안은 채로 피했으니까.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빨라진다.

<+--|-|--+>

EP.4 회귀-4

"...괜찮냐?"

갑자기 아리아스필이 나무 뒤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설마 아까했던 미친 짓도 다 봤나?

[그러게 누가 고자라고 하래?]

"알겠으니까 닥치세요! 좀!!"

고자여서 그런가? 무슨 현자라는 놈이 이해심이 지 손톱만도 못해?!

"...어어...? 미안..."

레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사과를 했다. 아리아스필 눈에는 '괜찮냐'라고 묻고 바로 닥치라고 한 꼴이겠지.

"아, 미안. 너한테 한 말 아니야."

"뭐...?"

"몸은 어때? 안 다쳤어?"

미친 행동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태연히 물었다.

"어, 괜찮아."

아리아스필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손목 너머로는 그녀의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저렇게 말해도 이렇게 강해도, 그녀는 13살 겨우 먹은 어린애였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오는 그녀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미안, 너무 수련에 집중하느라."

"수련...? 그게...?"

아련하게 아까 했던 행동이 떠오른다.

굳이 회상할 것도 없이 난장판이 된 주변만 돌아봐도 그 광기를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미친 놈이었지. 그건.]

누구 때문인데, 저 늙은이가

레오가 너무 과하게 흥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늙은이 귀신이 자신의 몸을 본인 얼굴에다가 겹쳐놓은다고 생각해봐라.

그것도 통짜 형태가 아닌, 내부의 오밀조밀한 장기까지 완벽히 구현됐다면?

밥 먹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토는 쏠릴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으윽, 특히 콩팥이...'

그땐 하필 고기 콩 볶음을 먹고 있었다. 단백질 보충하려다가 오히려 다 토해버렸지.

"...그렇게 화를 내는 수련법은 처음 봤어."

레오도 처음 해봤다. 다신 해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게... 그러니까 이건 사정이 있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지가 존엄하지도 않으면서.]

진짜 죽여버릴까. 이미 죽은 놈인데.

"...어! 어쨌든 이럴 생각은 진짜 없었어! 정말 미안해!"

늙은이에게 받은 화를 삭이며 레오는 아리아스필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그녀였으니까.

"...괜찮아. 안 다쳤고, 멋대로 온 것 나니까."

"근데... 왜 온 거냐?"

대련 날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약속한 지 하루밖에 안 지났을 텐데, 그녀는 지금 찾아왔다.

"...그건..."

아리아스필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왜 왔지...?'

그녀 본인도 이유를 몰랐으니까.

심장의 고동에 이끌려 와보니 이곳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하면 분명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 네가 한 특이한 수련법이 궁금해서..."

"...수련법? 설마 아까 그거?!"

레오는 아까의 광기를 떠올렸다. 그런 미친 짓에 관심을 두는 건 정신건강에 심히 위독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한 아리아스필은 고속으로 고개 저었다.

"그거 말고! 마나수련법!"

"아... 마나체련술 말하는 거였어?"

그 이름에 현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나체련술? 그렇게 이름 지었어?]

레오는 입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명센스는 구리지만... 대충이라도 이름은 있으면 좋잖아요."

[아니, 그런 것치곤 괜찮은데. 내가 가르친 거엔 체련은 없지만.]

"혼자서 뭐라고 하는 거야?"

그래도 중얼거린 만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지, 이대로 가면 진짜 미친놈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 그냥. 난 혼잣말이 많아서."

"그렇구나. 특이하네."

다행히 그렇게 넘어가줬다.

"...그런 수련은 처음 봤어. 우리 가문에서도 그런 수련법은 없었어."

그 말에 현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역시 루벤의 후손이구만! 기껏 기회를 준 어떤 멍청이랑은 달라!]

기분 탓 아니네. 입꼬리가 올라가다 못해 수직으로 꺾여 상승하고 있었다.

"인성은 조금 모자라지만, 좋은 스승님을 뒀거든."

[응, 아니야.]

아, 정말 아니네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모자라시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아리아스필은 레오가 든 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 레오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기왕 온 김에 같이 수련이나 할래?"

"...수련?"

수련이라는 말에 무표정한 아리아스필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검이 없는데..."

"그럼 이거라도 받아."

검이 없다는 말에 레오는 반대쪽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내밀었다.

"싸구려긴 하지만 쓸만해."

평생 유명 대장장이가 만든 검만 써온 용사 가문의 영애님께는 시원치 않은 검일 테지만, 레오에게 있어서는 나름 괜찮은 축에 속하는 무기였다.

"...고마워."

"뭐?"

이상한 기분이었다.

레오는 그녀 가문의 종자로 살면서 감사 인사를 그리 많이 듣지 않았다. 아마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합산하면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지.

"...왜?"

하지만 감사 인사를 하는데,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실례였다.

"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잘 못 들었나 해서."

레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며 검을 들었다.

"그럼 시작한다."

"어. 알겠어."

그녀도 낡은 검을 들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저 애 뭐냐?]

그녀의 훈련법부터 보자마자 현자는 턱을 찢어져라 벌렸다.

"천재죠. 진짜 천재."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그녀는 레오의 수련을 보자마자 똑같이 마나 입자를 쪼개고 있었다.

아니, 똑같지도 않았다.

'나보다 곱게 마나 입자를 쪼개고 있어.'

저 정도면 쪼개는 게 아닌, 입자를 갈아내는 수준이었다. 굳이 체련 방식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마나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하지만 그녀가 체련을 시작하자 위화감을 느꼈다.

"...뭐야..."

[뭐가? 왜? 잘하는 거 아닌가?]

잘하는 건 맞았다.

"일반인 수준에선요."

천재의, 아리아스필의 재능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고작 '잘한다'는 수준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싸울 때도 그랬지.'

처음 싸울 때는 어릴 때니까 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검술을 지켜보니 문제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잠깐 스톱."

"...왜?"

"그게 아니야."

그 말에 아리아스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자는 잘 쪼갰는데."

"그거 말고. 검술 쪽 말이야."

레오는 그녀의 검을 잡았다.

"검술 쪽이 잘못됐어."

그 지적에 아리아스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평소 자신의 검술에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가문의 기사들도, 지도기사인 제하드도, 가주인 아버지마저 인정한 검술이었다.

"뭐가 잘못됐는데? 가르쳐준대로 한 거야."

그런 자신의 검술에 지적하는 것에 화가 났다.

"누가? 그 호위기사가?"

"어, 제하드가 가르쳐준대로."

인성은 그렇지만, 제하드는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인정한 기사였다. 실력과 공적만큼은 다른 가문의 기사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럼 그게 문제네."

"...뭐?"

[...뭐?]

현자와 아리아스필은 똑같은 높낮이, 발성으로 물었다.

"...그게 문제라고?"

"어, 문제야."

레오 눈엔 그건 의심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게 왜 문제인데?"

"그럼 물어보겠는데, 그 제하드라는 양반하고 너하고 같은 점이 뭔데?"

그 질문에 아리아스필은 잠시 대답하는 걸 망설였다.

"같은....점?"

"그래, 신체적으로 같은 점이 있어?"

그녀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건...'

아예 없었으니까.

제하드와 아리아스필은 성별, 체격, 신장, 유연성, 근육량, 그리고 재능마저도 달랐다.

"없지?"

"...어."

"그런 면상부터 발톱 때까지 다른 자식 검술을 똑같이 베낀들 뭐가 의미가 있어? 전혀 다른 케이스의 검술인데."

스승의 검술을 따라 하는 것, 그건 검술을 처음 배울 때 당연하게 거쳐야 하는 수업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술에 막 시작한 초보일 경우고.'

검술에 익숙해졌다면 본인만의 요령을, 형태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게 재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말이다.

'하지만 아리아스필은 그러지 않았지.'

그건 아리아스필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지.

'융통성 없는 건 여전하다니까.'

아리아스필은 너무 우직했다. 늘 규칙이나 규율을 우선시하는 녀석이었지.

그러니까 자신이 배운 지식도 늘 그대로 사용한다. 가르친 방향대로는 누구보다 높게 발전할 수는 있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틀어서 사용하지는 못하는.

[성장력은 미쳤는데, 응용력은 떨어지는구먼.]

절묘한 요약이었다.

'회귀 전에는 분명 그 등신 새끼 잘리고, 더 승승장구했지.'

하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자세 잡아봐."

그 말에 아리아스필은 검을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대강..."

레오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다리를 잡아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쯤인가?"

"...?!"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며 얼굴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다리와 몸만 보고 있는 레오는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막 만져도 돼?]

<괜찮아요. 몇 년 동안 싸우면서 이 녀석 근육이나 뼈 구조 정도는 다 파악해뒀거든요.>

그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레오가 탑이었다.

[그런 말이 아니고...좀 많이 변태 같은데.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쩌라는 건지. 어차피 이게 흑심을 채우려고 한 거면 그녀 쪽에서 검을 휘두르든, 따귀를 날리든 할 것이다.

[잠깐, 근데 어떻게 입을 안 열었는데 말이 통하지?]

<아, 그거 지금 오러로 말하고 있거든요.>

[뭐? 오러로?]

<마나 보충도 되고, 코어도 어느정도 형성돼서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정도 오러는 뿜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텔레파시가 돼? 오러에는 그런 기능이 없을 텐데?]

<텔레파시는 아니에요. 오러로 진동을 줘서 심장 부근에 작은 소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현자의 돌에 울림이 생겨서 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반신반의였는데 진짜 성공할 줄은 몰랐네.

[...야, 이러고도 천재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뭐냐? 떨거지? 폐기물? 뭐 그런 거야?]

<지금 앞에 있는 녀석이나 보세요.>

레오는 자세 교정을 끝내고, 손을 뗐다.

"자, 이제 휘둘러봐."

"...어?! 어어!"

왜 저리 당황해하지? 갑자기 너무 만져서 그런 건가? 근데 그런 거 신경 쓸 녀석이 아닐 텐데.

휘익!

당황해하던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짧고도 날카로운 음색.

그 일격에 이어지는 길고도 굵은 풍압.

[미친...]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뭐야...]

여름철 나뭇잎이 늦가을처럼 낙엽이 되어간다.

그 광경은 폭풍의 등장과 소멸 같았다.

이게 진짜 천재니까.

내가 평생 꺾지 못한

진정한 천재의 모습이었다.

<+--|-|--+>

EP.5 회귀-5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그녀는 소위 엘리트, 즉 천재의 대표적인 주자였다.

이론이라는 기본적인 큰 틀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존재, 그게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규격을 넘어선 천재였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큰 틀일 뿐, 만약 재능이 부풀어 오른다면 그 이론 따위는 성장을 억압하는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본디 그렇기에 천재들은 이론을 깨부수고 본인만의 유파를 만든다. 이론으로 인한 더딘 성장에 불만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아스필은 달랐다.

그녀는 배운 이론을 깨부수지 않았다.

이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규격을 넘어선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강해... 어떻게 이런 나이에...'

'아가씨는 천재입니다!! 벌써 이런 성장이라니...!'

이론이 아무리 억압해도 그녀는 다른 천재들보다 성장이 빨랐다. 격이 다른 재능으로 급이 맞지 않는 이론을 뛰어넘겼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녀가 재능이 억압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앞서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진 게 싫으면 비긴 걸로 쳐. 됐지?'

자신보다 앞서 있는 인간이 있었다.

'그럼 그게 문제네.'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집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에게 맞는 틀을 만들어줄,

'자, 이제 휘둘러봐.'

스승,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을 존재를 만난 것이다.

쏴아아아...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

"...어...?"

자신의 검이 만든 바람에 낙엽이 차례 떨어진다.

'가슴이... 두근거려...'

저 소년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 이건 말하자면.

'성취감.'

자신이 한 일에 처음으로 보람을 느꼈다.

단순히 쉽게 따라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워서 '학습'했다.

'...왜지?'

두근거림을 가라앉히려고 소년을 만나러 왔는데,

'왜 더 두근거리지...?'

오히려 더 두근거리고 있다.

***

[...왜 이러냐? 요즘 시대가 이런 거냐? 어?! 지금은 천재만 나오는 황금기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런 녀석이 어디서 온 건지.>

[너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저걸 바로 발전시키는데!?]

왜 화를 내고 난리인 건지. 저 녀석이 천재 중에 천재인 건 나도 분통 터지는데.

<별거 없어요. 전생에 아리아스필이 썼던 자세를 가져온 거죠.>

대강 지금 성장 상태에 맞는 적절한 자세를 알려줬다.

아마 그녀라면 바로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예상대로 오히려 충격이었다.

"어때? 나쁘지 않지?"

"...어?! 어어... 괜찮아!"

그녀는 놀란 눈치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고, 눈에 생기가 비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놀랄 만도 하지.'

저 실력은 본디 제하드가 잘리고 반년 뒤 쯤에나 얻는 기량이다.

1성 마나 코어론 아직 부족해서 완전히 따라잡진 못했지만, 아까 한 마나체련을 보면 그건 시간 문제도 아니겠지.

"그럼 가봐. 호위 기사 양반 걱정할라."

이미 달은 중천에 떴다. 너무 오랜 시간 나가 있으면 그 호위 건달이 어떤 난리를 피울지 몰랐다.

"그렇겠네..."

아리아스필의 무표정한 얼굴에 음영이 졌다. 변화가 심하지 않아도 그녀가 실망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련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쉽나?'

하긴 본인 같아도 그럴 것이다. 하루만에 한계를 뚫고 괄목이 성장했는데, 그게 바로 끝나면 얼마나 실망스럽겠나?

"내일도 올래?"

"...어?"

"시간은 대충 이때가 좋겠네. 그 호위 기사 양반이 뭐라 하는 것도 듣긴 그러니까."

"...그...그래도 돼?"

"돼. 나도 혼자 수련하는 건 심심하고, 일주일 동안 마냥 기다리는 것도 막막할 것 같아서."

이건 레오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동시에 늘 자신의 호승심을 자극했던 라이벌에 대한 경애이기도 했다.

"싫어?"

"...아니. 좋아."

그녀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갔다. 저런어설픈 미소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럼 얼른 가. 라인하르트, 시간 늦었으니까 조심하고."

"알았어. 늦지 않을게."

아리아스필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갔다.

"...아."

그 때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리아스필이라고 불러도 돼. 레오나르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가버렸다.

[...새끼, 선수네.]

<네, 다음 고자.>

[이번엔 위장 내부까지 보여주랴?]

아리아스필하곤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하여간 고자들이란.

***

"...자고 있지?"

오늘도 그녀는 잠을 자는 제하드를 살폈다. 제하드는 아리아스필의 목소리에도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에게 시킨 훈련은 제하드의 역량에선 지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야겠다.'

하지만 이젠 그런 수업 따위 그녀에게 성이 차지 않았다.

아리아스필은 들뜬 기색으로 여관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뭘 배울까? 오늘도 배우는 것도 재밌겠지?'

뛰어가면서 수업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떠오른다. 그 소년, 레오나르도를 생각하면 항상 머리와 가슴이 들뜬다.

"...왔냐?"

오늘도 그 소년은 숲에서 검을 휘두른다.

"레오나르도!"

"오냐, 그럼 하던 대로 한다?"

"알았어."

그녀도, 레오도 검을 들었다.

"흡...!"

그러곤 각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마나를 쪼개가며 체련을 이어갔다.

[꼬맹아.]

<무슨 일이십니까?>

[근데 이게 의미가 있냐?]

<뭐가요?>

현자는 레오와 아리아스필을 번갈아 바라보앗다.

[같이 훈련한다고 해도 실상은 따로 체련하는 것일 뿐이잖아.]

보기에는 그랬다. 서로 신경쓰지 않고 각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의미야 있죠.>

[그런가? 그러고 보니 주변 마나 입자가 더 고와진 것 같네.]

그 말대로, 두 명이서 마나 입자를 쪼개니 입자 크기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만큼 흡수량도 늘었지.

[근데 애초에 한 명이 먹을 마나, 둘이서 나눠 먹는 거여서 의미 없지 않아?]

그것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긴 했다. 사실 이것까지 계산하면 흡수하는 마나량은 대략 비슷하지.

<...사실은...>

[...역시...]

현자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현자의 지혜라면 이미 눈치채고도 남을테지.

[저 녀석한테 마음이...!]

<잘 키워서 이기고 싶습니다.>

...현자의 눈이 끔벅인다.

[마음이 있는 거... 아니었냐?]

<마음? 있죠. 이기고 싶은 마음. 호승심.>

끔벅이는 눈이 기가 막히게 식는다.

[...고자 새끼.]

"누가 고자야?!"

"어?"

짜증이 난 나머지 목청이 올라갔다. 고함에 검을 휘두르던 아리아스필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고자?"

"아하하하... 말이 헛나왔네. 하던 거마저 하자."

"괜찮아. 근데 고자가 뭐야?"

...설명할 수 있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얼굴 앞에 고자계의 위상, 고자들의 우상이 있으니 더더욱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하자."

[아무것도 아니긴. '누우가~ 고오자아야아~?!'라며.]

아. 진짜 비음 짜증나네.유령 새끼만 아니면 코뼈를 부러뜨리는 건데.

[그래서 뭐라고? 키워서 이긴다는 게 뭔소리야?]

<처음 싸웠을 때, 만족하지는 못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이유 자체는 확실히 있었다. 다만 그걸 구체화시키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뭔데?]

<전성기가 아니잖아요.>

지극히 당연한 이유이자 원인이었다.

레오가 원했던 건, 동등하게 강해진 천재와의 결투였다.

이런 압도적인 편법을 가진 채 결투에서 이긴다 한들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겠는가?

<이거에 자존심 세우면 오히려 수치죠.>

[당연하지. 열 살배기 꼬마한테 뭘 바래. 니가 그랬으면 나도 너 가르치는 거 때려치울 거야.]

<그렇죠. 그게 당연한 거죠.>

그녀가 천재라 한들, 아직은 어린애.

거목이 될 인재라도 자라는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요.>

그날, 아리아스필의 검술을 손봐줬을 때, 레오는 확신했다.

<아리아스필은 더 강해질 수 있어요. 회귀 전보다 빠르게요.>

아리아스필의 성장력은 아직 완전히 개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향성만 잘 잡아준다면, 회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걸 네가 해주겠다고?]

<네, 그러면 전성기도 훨씬 빠르게 찾아오겠죠.>

전성기 뿐일까, 그 이상을 노리는 것도 가능할 거다. 그러면...

<전성기 땐, 정말 만족스러운 결투를...>

[키잡이잖아.]

내 귀가, 청력이 의심되는 단어였다.

"네?"

[잘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거잖아. 그걸 뭘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어.]

이 양반은 진짜...

"그게 어떻게 키잡입니까!? 같이 성장한다는 희망찬 이야기지!"

[응, 아니야. 고자승부충아.]

다 크다 못해 삭은 노인네는 마무리로 썩은 혓바닥을 내밀었다. 저 세 치 혀를 뜯어서 귀싸대기에 꽂든 해야지

"뭐라고?"

아차 싶었다. 이번에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키잡이 뭐야?"

... 이번에도 설명할 수 있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이 단어의 뜻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이젠 수치로 느껴졌다.

"'키'가 크는 '잡'기술의 준말입니다. 불량배들 은어이니 절대 쓰지 마세요."

"어어... 알겠어."

존댓말을 하자 그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납득했다.

그래, 아직은 순수하게 있어라.

[크하하하하하하하학학!! '키'가..!! 크는 '잡'기술~!! 오~! 그런 뜻이었어요~? 이 현자님이 모르는 것도 있었네요~?]

자신이나 나이만 처먹다 사레들린 저 늙은이처럼 되지 말고.

제발 예전처럼만 커 줘라.

"레오나르도, 혼잣말하는데 미안한데 아까 한 자세 좀 봐줄 수 있어?"

"그래. 얼른! 얼른 보자!"

빨리 화제를 돌려야했다. 저 어린 소녀가 고자니 키잡이니 같은 시궁창 단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

"여기가 문제인 것 같은데... 연격이 너처럼 빠르면 좋겠어."

"그건 나처럼 할 필요없어. 넌 유연성이 좋으니 근력보다는 근육의 탄성을 이용해서..."

이렇게 훈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리아스필은 밤마다 제하드 몰래 밖으로 나와, 레오나르도를 만났다.

기본적으론 마나체련술을 하고, 자세가 별로다 싶으면 레오가 그녀에게 적절한 조언해주는.

그런 수련이 일주일 동안 지속됐다.

레오는 7일 동안 완벽히 마나 코어를 완성했고, 아리아스필은 1년 동안 배워야 할 검술을 압축해서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날이 찾아왔다.

***

"...준비됐냐?"

"응. 오늘은 꼭..."

마지막날, 아리아스필의 눈엔 각오가 있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이길 거야."

그녀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았다.

[꼬맹아, '그건' 가급적이면 쓰지 마라.]

<압니다. 저도 양심이 있죠.>

현자에게 배운 그 '기술'을 쓰는 건, 당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기면 더한 굴욕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레오나르도도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자, 시합."

제하드는 둘의 중심에서 심판으로 섰다.

"시작!"

카앙!!

외침과 동시에 검격이 맞부딪쳤다.

<+--|-|--+>

EP.6 라인하르트-1

검격이 난무한다.

"...뭐야... 저건..."

그에 비례한 풍압이 울린다.

그 광경을 본 제하드는 입만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가 언제 저 정도까지...!'

눈 앞의 아리아스필은 자신이 알던 일주일 동안의 '아가씨'가 아니었다.

검술의 경지, 마나의 순도, 그리고 그에 임하는 자세마저도 여태까지와는 격이 달랐다.

'...그리고 저 꼬맹이는 어떻게...'

그런 아리아스필의 검을 전부 받아내는 저 소년의 정체는 뭐냔 말이다.

고작 용병 따위가... 어떻게...!?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제하드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 두 가지나 있었다.

첫 번째는 제하드 자신이 둘의 움직임을 눈으로도 완전히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역시 강해. 힘을 아끼면 안 되겠어.'

'생각보다 빨라. 가볍게 가면... 밀리겠는데.'

저 두 소년·소녀는 아직 전력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카아앙!!

검이 부딪치며 둘은 잠시 거리를 벌리게 되었다.

"후...!"

숨을 한번에 내쉰 아리아스필은 마나를 완전히 전개했다.

주변의 바람이 몰아치며 마나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온다. 꼬맹아.]

"알고 있어요."

검격이 몰아친다.

일격이 전력인 난격, 그런 검술이 난무해왔다.

'단순히 힘이나 자세만 좋은 게 아니야.'

그녀는 정확히 레오의 궤적을 예상해 그에 적합한 최선의 검술로 대응했다.

이미 일주일 사이의 훈련으로 아리아스필은 레오의 대응법을 짜놓은 것이었다.

[진짜 천재긴 하구만. 무슨 재능이 잡초마냥 끝없이 자라.]

<그거 칭찬 맞죠?>

칭찬을 욕처럼 하는 기막힌 재주일세.

하지만

<확실히 강해지긴 했네. 이대로 가면...>

간발의 차로 질 수도 있다.

그 사실이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가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되간다는 것은 레오에게는 크나큰 희열이었다.

"오늘은...! 이길 거야...!!"

그녀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마나를 최대로 전개했다. 이젠 제하드 따위의 수준으로 따라볼 수도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

상대는 늘 그녀를 위협해왔던 2인자였다.

[오...!]

그녀의 검을 튕겨낸 것은 한 자루의 검이 아니었다.

"확실히 빨라. 한 자루로는 반격하기 어렵겠어."

레오는 두 자루의 검으로 반격을 했으니까.

"...레오나르도 너, 이도류였어...?"

"뭐 경우에 따라선. 딱히 어느 쪽을 택한 건 아니고."

레오나르도는 무기술에 재능은 있을지언정, 아리아스필처럼 정점의 성장력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무기술을 익히는 것, 그게 제가 택한 방도입니다.>

[그냥 한 우물만 파는 게 낫지 않냐?]

<그러는 사람도 있지만, 저에겐 이게 낫습니다.>

한 가지 기술만으로는 아리아스필을 꺾을 수 없다. 한 가지 방식에서는 그녀는 의심할 것 없는 일류니까.

[그러니 차라리 다구리 화수분 물량전으로 간다는 거지?]

<제 평생의 노력을 그렇게 하찮게 요약할 수도 있군요.>

폄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나르도는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간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아까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의 속격, 단순히 두 배로 빨라진 것이 아닌 연개의 이어짐도 변칙적으로 합쳐졌다.

'강해...! 그리고 빨라...!'

그 검을 간신히 쳐내고 있는 아리아스필은 경악하고 경악했다.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레오나르도에겐 그 이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그 이상의 재능이 있었다.

'아까만큼 세진 않아.'

양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만큼, 공격의 근력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깨닫는 건 쉽지 않은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늘 2인자를 꺾어왔던 1인자의 재목이었다.

카앙!! 캉!!

확연히 달라진 격돌음, 그걸 보고 들은 레오의 표정이 바뀌었다.

'벌써 파훼법을 찾은 건가? 역시 무섭다니까.'

연속적으로 검이 부딪친다. 그리고 그 검의 울림은 결말에 접어들었다.

"헉...하..."

"...후..."

서로의 검에 마나가 깊이 농축된다. 아마 저 검이 결투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길 거야...!'

'아직 질 수는 없지.'

자세는 준비됐다. 남은 건 검이 닿는 것일 뿐.

둘이 돌진하며 검이 닿는다.

콰아아아앙!!

귓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음.

그러나 검이 부딪친 소리는 아니었다.

[뭐여! 시발!! 여기가 제일 재밌는 부분인데!]

둘은 검무를 멈추고 폭음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죠!? 아가씨?!"

[마물이야.]

"마물이야."

이 짙고 더러운 마기, 체련을 통한 예민한 감각으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마물이라고?"

"미안. 결투는 나중으로 미루자!"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폭음이 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레오나르도!"

레오는 대답하지 않은 채, 폭음이 난 마을 쪽으로 뛰어갔다.

"갑자기 마물이라니...!"

[게이트가 갑자기 열린 건가?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

회귀 전에는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 본래라면 레오는 아리아스필에게 패배하고, 그녀는 마을을 일찍 떠나게 된다.

레오도 마찬가지로 굴욕을 느끼고 그녀를 쫓아가 마을을 떠났다.

"그 전에 마을에 게이트가 났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정도로 짙은 마기는..."

[그래, 고블린 정도나 스켈레톤 무리 같은 게 아니야.]

마을로 뛰어가자 사람들의 비명도 울린다. 마을 주변은 이미 폐허가 되기 직전이었고, 사람들의 사체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워어어어어!!"

저 맹렬한 포효, 예전에도 저 괴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발록...!"

[...새끼지만 확실해. 발록이야.]

업화의 괴수, 발록이었다.

"우워어어어!!"

화염을 내뿜으며 발록은 마을 사람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도와줘...!! 아빠아아아...!! 엄마아아아...!!"

발록 근처에 있는 어린 아이가 울고 있었다. 부모를 찾는 아이에게 발록은 기꺼이 아이를 죽은 아버지 곁으로 보내주려고 했다.

카아앙!!

"우워...?"

발록의 주먹은 레오의 검에 멈춰졌다.

"...어...?"

눈을 질끈 감은 아이는 슬며시 눈을 떴다.

"꼬마야...! 형이 지금 버티기 힘들거든...!"

발록의 주먹은 서서히 레오의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얼른 도망치지 않아주련...?"

"아...아아...! 네!!"

아이는 레오의 말에 급히 뛰기 시작했다.

[...자, 이제 너도 도망...]

"안 돼요."

주먹을 흘리치며 레오는 대답했다

[뭐? 도망 안 치겠다고?]

발록 간의 거리를 재며 레오는 다시 검을 잡았다.

"...네."

[너 미쳤어? 새끼여도 상대는 발록이라고.]

발록은 2서클의 마법사도, 3성의 기사도 간신히 이기는 상대였다.

물론 저 앞에 있는 건 새끼였지만, 종족간의 격차는 이미 충분히 불리했다.

"...그러면 어떡합니까? 여기선 싸울 놈은 저밖에 없어요."

그 말대로였다. 이 마을의 경비 수준으론 발록을 이길 수 없을테고, 제하드는 물론이고 아리아스필이더라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영웅이 되고 싶은 거냐?]

"그럴 리가요."

레오가 되고 싶은 건 영웅같이 허울뿐인 게 아니었다.

"도망치면 쪽팔리잖아요. 현자 제자로도, 그 녀석 경쟁자로도."

[...으휴, 뭐가 다른 건지.]

한숨을 쉬면서도 현자는 피식 웃었다. 레오도 발록을 앞에 두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온다.]

발록은 입가에 불길을 뿜어내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우워어어어!!"

불길에만 닿아도, 주먹에만 스쳐도 치명상, 아직 코어의 개수가 1성인 레오로는 즉사할 것이다.

'그러니까 전부 피한다.'

발록의 공격은 전부 레오에게 닿지 않았다. 간발의 차로 전부 공격을 회피해내고 있었다.

['...일부러 약점을 보여주고, 공격의 궤적을 단조롭게 만들고 있어.']

레오에겐 발록을 뛰어넘길 신체능력이 없었다. 힘도, 속도도 발록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오는 일부러 자신의 빈틈을 만들었다.

그 방식으로 발록의 공격을 맞으면 일격사지만, 확실히 피할 수 있는 공격으로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기만자 새끼.]

"죽기 직전인데 좀 닥치시죠?"

그리고 이 방식의 또 다른 장점은 방어와 회피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워?!"

발록이 주먹을 날리던 도중, 레오의 검이 휘둘러졌다. 기습적인 참격에 발록의 주먹이 조금 베였다.

[...카운터까지 되잖아. 이러고도 천재가 아니라고? 기만충아?]

회피와 동시에 이어지는 역습, 상대가 공격을 실패했을 때가 공격을 퍼붓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아 좀 닥쳐요! 한번 맞으면 뒈진다고!"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레오는 반대쪽 검을 휘둘렀다.

파창!

주먹에 금속이 깨지는 소리, 값싼 검인 만큼 비싼 능력을 기대할 순 없었다.

'...이거면 충분해.'

하지만 상관없었다. 검이 깨짐과 동시에 울리는 충격, 그건 발록의 움직임에 정체를 줄 것이다.

"우워...?!"

그리고 그 정체를 레오는 놓치지 않았다.

"우워어어어!!"

발록의 손목을 반대쪽 검으로 내리꽂으며 역방향으로 꺾는다.

콰직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이 힘을 잃었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이길 수 있어...!'

"우워어어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르르륵!!

상대는 정정당당한 기사가 아닌, 업화의 괴수였다.

'브레스...!'

[...네 방향이 아니야.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시선이 그쪽으로 가는 순간, 그 생각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아아아...! 일어나봐...!"

아까 그 아이였다.

"루이스...! 엄마는 두고... 도망가...!!"

팔이 건물 잔해에 깔린 어머니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이였다.

"씨발...! 씨발...!"

입으로 연발 욕을 하며 레오는 그 모자에게로, 날아가는 화염구에게로 돌진했다.

그러곤 오러를 두른 검으로 그 화염구를 받아쳐냈다.

"빨리 가라고!! 모자 같이 천국 가고 싶냐!?"

"하지만 팔이...!"

"아!! 씨발!!"

욕과 동시에 레오는 팔을 깔아뭉갠 잔해를 걷어찼다.

"얼른!!"

어머니는 다친 팔을 부여잡으며 아이와 함께 도망쳤다.

"이제...!"

"우워!!"

이미 주먹은 날아왔다.

'씨발.'

[씨발.]

충격으로 레오는 나가떨어졌다.

"쿠허억...!"

충격으로 건물 벽에 부딪치며 몸이 넝마가 된다.

뼈가 탈골되고 으스러지며, 입가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다.

[너 괜찮냐?]

<...괜찮아 보여요?>

[아니.]

알면서 왜 묻는지.

[...설 수 있겠어?]

<10초만 있으면요. 오러로 대충 탈골된 부위만 맞추면...>

"우워어어어...!"

10초라는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지금 1초마다 발록이 100m씩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야, 너 죽겠다.]

"...안 죽을 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한 손으로 마나를 끄집어낸다. 강철과 같은 오러의 형태가 아닌 부드러운 연철의 마나.

[쓸 거냐? 가능하겠어?]

현자의 기술, 마법이었다.

<그럼 그냥 죽습니까?>

죽더라도 눈깔은 조져버리고 뒈져야지.

"우워어어어어!!"

술식은 완성되기 직전, 주먹도 날아오기 직전, 종이 한 장 차이로 목숨 한 장이 날아간다.

콰앙!!

발록이 더 빨랐다. 주먹은 이미 부딪쳤다.

"...?"

하지만 레오는 다치지 않았다.

"...괜찮아?"

부딪친 건 그녀의 검이었으니까.

"...아리아스필?"

공격을 막은 건 아리아스필이었다.

<+--|-|--+>

EP.7 라인하르트-2

아리아스필은 주먹을 맞받아치며 말했다.

"일어날 수 있어?"

"...뭐?"

"언제 일어날 수 있냐고?!"

외침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리며 말했다.

"8초만 더 있으면 돼!"

오러는 거의 다 모이고 있었다. 8초만 더 있다면 일어서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알았어."

"우워어어어!!"

하지만 가능할까.

그녀의 실력으로, 발록을?

[지금은 믿어봐.]

"네...?"

[네가 목표로 한 여자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8초의 찰나, 현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네요.>

아리아스필, 자신이 목표로 했던 정점.

정점이 여기서 꺾일 리가 없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정점인 그녀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헉...헉...!"

하지만 버티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발록이 내뿜는 열기만으로도 숨쉬는 것조차 벅찼다.

"크뤄어어어어!!"

접전이 이어지던 와중 주먹이 다시 날아왔다.

'레오나르도에 비하면...!'

검을 옆으로 비끼며 주먹을 흘려내었다. 하지만 그건 당장의 방어밖에 되지 않았다.

부웅!

이어지는 꼬리의 공격은 막지 못했다.

'...이건 못 피해...!'

아직 8초까지 되지 않았다.

닿는다. 스친다. 맞는다.

죽는다.

서걱!!

"...빚은 갚았다."

통보와 함께 소년은 꼬리를 검으로 잘라내었다. 그 참격에 발록은 당황해하며 뒤로 조금 뛰었다.

"...레오나르도...?"

"그러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레오나르도는 이미 일어났다. 4초 만에.

"나랑 저 괴물 목 좀 따자. 나 혼자선 무리야."

"...발록을...?"

발록을 이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와이번을 이긴 것도 해츨링도 아닌, 갓 깨어난 새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으니까.

'...왜지?'

하지만 이번에도 가슴이 뛰었다.

"무리냐? 그럼..."

죽음의 무서움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큼 두근거렸다.

"...아니."

아리아스필은 웃으며 검을 들었다.

"할 수 있어."

"...고맙다."

레오나르도도 어째서인지 웃고 있었다.

"작전은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발록이 돌진했다. 대응을 위해 아리아스필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식 오른 손목은 내가 분질러놨어. 꼬리도 마찬가지고. 시선은 내가 끌테니까..."

"왼손을 잘라달라는 거지?"

천재답게 이해가 빨랐다.

"그럼 나머지는 내가 할게."

"...알겠어."

발록은 이미 100m 이내로 접근했다.

"이기자."

"응."

두 마디를 시작으로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두 기사는 각자 맡은 역할 따라 양방향으로 갈라졌다.

"크루어어어어!!"

발록은 두 기사를 쳐부수기 위해 포효했다. 남은 왼손으로 주먹을 내리치며 발록은 분노를 표출했다.

"이쪽이다. 타다 만 오크야."

평소와 다른 공격적인 돌입, 그 테세의 전환에 발록의 주의는 레오나르도에게 향했다.

"어디 쳐봐! 새꺄! 찌그러진 면상 완전히 분질러놓을 테니까!"

[근데 발록이 도발을 알아듣냐? 보통은 그 정도 지능이 없을텐데.]

거 분위기 파악 못하시네.

이럴 땐 아무 말이냐 씨부려야 용기가 나는 법...

"우워어어어어!!"

왠지 도발을 알아들은 건 기분 탓일까?

[아, 알아들었네.]

알아들었구나. 망했네.

쿠웅!! 콰앙!!

연속적으로 공격이 일어나며 바닥에 구덩이가 패였다. 아마 한 대라도 맞으면 저 모양대로 찌그러지겠지.

하지만

'하던대로. 공격의 궤적을 유도시킨다.'

레오는 이런 격전의 전문가였다. 한 팔과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적에게 싸워 승리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

왼팔의 움직임이 커진 순간, 레오는 외쳤다.

스릉

발도와 함께 그녀의 검이 휘둘러졌다. 왼팔이 발도의 시작으로 베여나갔다.

"우워어어어어!!"

고통으로 나오는 포효, 입가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늦었어...! 브레스가...!'

"우어어어!!"

발록과 같은 포효, 하지만 이 소리는 레오가 낸 것이었다.

목청을 감싼 돌진이 시작되었다. 검을 내민 채로 레오는 발록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만둬!! 그거론 못 죽여!!]

그 말대로, 저런 찌르기로는 발록을 즉사시키는 못한다.

이대로 브레스가 나온다면 레오는 바로 재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레오의 검에서 마나가 뿜어졌다.

오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부드럽고, 복잡한 형태의 진이 마나로 그려졌다.

[그건 안돼!! 지금 냉기 마법으론!!]

레오는 아직 마법의 재능이 개화되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에 간신히 1서클 마법 정도는 쓸 수 있게 됐지만, 그 수준으로는 화재에서 물컵을 붓는 것과 다름없었다.

[붉은색...?]

하지만 레오는 냉기 마법을 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와 상반되는 마법, 화염계통의 마법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발록은 새끼 한정으로 약점이 하나 있지'

비집은 검날 틈으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새끼 발록의 약점, 그건...

'어린 발록은 아직 전신에 화염 내성이 없어. 새끼 때 불꽃이 나오는 건, 호흡기, 목구멍 뿐이니까.'

성체 발록이라면 전신의 구멍으로 불을 뿜어내는 것도 가능했지만, 눈앞의 발록은 그게 불가능했다.

그 증거로 여태까지 발록은 입으로만 불을 내뿜었다.

'그러니까 가슴팍에 있는 화염 주머니를 강제로 불을 대면...!'

설명의 답은 바로 나왔다. 폐 부위에 있는 발화 주머니에 불이 붙자 발록 전신에 불이 뿜어져 나왔다.

'특제 폭탄이 되지...!!'

발록의 입가에서 피와 함께 검은 연기가 토해져 나왔다.

"우웍!?"

"더럽게 뜨겁지? 터지도록 뜨거울 거다."

마법이 완전히 전개되었다.

[파이어 볼]

화염구가 체내의 화염 주머니를 집어삼켰다. 그건 마치 화약통에 집어던져진 횃불이나 다름없었다.

"워...?!"

퍼어어어엉!!

성대한 폭발이었다. 발록의 살점이 전방향으로 튀며 폭발이 일었다.

"끄악!!"

폭발의 충격으로 레오도 함께 나가떨어졌다.

발록의 몸이 폭발을 감쌌기에 화염에 맞진 않았지만, 지금 레오는 충격을 완벽히 견딜 만큼 몸 상태가 건강하지는 않았다.

"레오나르도...!!"

그 폭발을 눈 앞에서 지켜본 아리아스필은 떨어진 레오에게로 뛰어갔다.

"괜찮아?! 안 죽었어!?"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두근거렸던 가슴이 가라앉는다.

소년이 아무 말도 없이 누워있자 가슴이 떨린다. 권태로움도, 두근거림도 없었다.

단지 불안했을 뿐.

"제발...! 제발 죽지 마!! 정신 차려!!"

소녀는 소년을 깨우기 손바닥을 날렸다.

짜악!!

"우아악!!"

근데 레오는 안 죽었다. 그러니까 비명을 지르지.

"괜찮아!?"

"넌...사람... 면상에다가 싸다구 날리고 괜찮냐고 묻냐!?"

"다행이다... 괜찮았구나..."

"아니, 안 괜찮다고! 난 아까부터 안 죽었어! 기절하지도 않았고!"

단지 피로감 때문에 대답이 늦어졌을 뿐이었다.

[오해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에잉~ 쯧쯧!]

"당신은 좀 닥쳐!! 이것들이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못하는 게 없어!"

"...미...미안. 닥칠게."

윽박에 죄책감을 느낀 건지 아리아스필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아니...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고..."

[걱정해준 여자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먼. 나때는 말이야. 여자한테...!]

<닥쳐. 책으로 여자 배운 양반아.>

[뭐 임마?!]

이젠 오러로도 말할 수도 없었다. 아까 쓴 화염 마법과 폭발을 방어하는 쓴 오러로 이미 마나는 동이 나버렸다.

"...미안하고, 고맙다."

그래도 이 말은 하고 쓰러져야 했다.

"...어?"

"...너 덕분에 이길 수 있었어. 그러니까 안 미안해도 돼."

"나도... 고마워."

훈훈한 건 좋은데, 가슴이 훈훈하다 못해 타죽을 것 같네.

"...고마우면 의사 좀 불러주라. 지금 간신히 참고 있는데 갈비뼈 3개는 나간 것 같거든."

"아, 알았어!"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의사를 찾으려고 했다.

그때,

'...뭐지? 이 마나는...'

깊고도 농밀한 마나가 공기를 통해 폐부로 전해졌다. 예전에도 이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설마..."

그 여자가 온 건가? 이곳에?

'근데 왔으면 상식적으로는 도와줄 텐데.'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인간이라면 안 도와줄 만도 하다. 워낙 상식이라는 게 없는 인간이여서.

"...고모?"

아, 왜 불길한 예상은...

"...고모라고 부르지 말라 했을텐데, 호칭에 대한 정리가 부족했나보군."

빗나가질 않을까...

눈 앞에는 상복을 넘어서 그림자로 의심될 만큼 검은 옷으로 몸을 두른 여성이 걸어왔다.

[누구냐? 저 저승사자는?]

오러가 안 나오니 최대한 작게 입으로 대답한다.

"아리아스필 고모요. 그리고... 아 됐다. 직접 듣는 게 나을 겁니다."

안 그래도 손가락에 골절 오기 직전인데, 그딴 말을 씨부리면 반대 방향으로 오그라들며 완전히 꺾여버릴 거다.

"훌륭한 전투였다. 소년. 같은 전사로서 경의를 표하지."

그냥 '꼬마' 정도로 말하면 될 걸, 굳이 '소년'이라고 호칭을 정하는 여자는 한 사람밖에 못 봤다.

"..."

"내 소개가 늦었군. 난 라인하르트의 그림자 속에서 가문을 지탱하는 기사, 크리스 라인하르트다. 이명은 '흑암'이지."

안 그래도 출혈로 멀미가 나는데, 이젠 멀쩡한 정신마저 어질거리기 시작했다.

현자의 표정도 뒤통수를 방망이로 난타한 듯, 골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의 이름은 뭐지? 이명이 있다면 같은 전사로서 듣고 싶군."

아, 대답은 해야되는데 진짜 대답하기 싫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니가 미쳐서 환각을 보는 거냐? 아니면 그냥 쟤가 미친 거냐?]

...아 몰라요. 그냥 싸대기 맞고 기절하래.

그대로 레오는 바닥에 널부러졌다.

가급적이면 정신에 혼란이 와서 착각한 거이길 바랬다.

***

[야...]

[레오나르도...]

[일어나... 제발...]

애 없는 늙은 홀아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오늘따라 너무 애절해서 차마 무시하기 미안하다.

"...무슨 일인데요..."

[저 여자, 3시간째야. 3시간째.]

현자는 손가락질로 크리스에게 가리켰다.

<대체 뭐가 세 시간째인데요?>

대강 감은 잡혔지만,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물었다.

[너에 대해서 니 라이벌한테 계속 물어보고 있는데, 질문 내용이 저세상 출신이여.]

이미 저세상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건 이상했지만, 왠지 모르게 크리스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뭐라고 물었는데요?>

[처음에는 이름이니, 나이니 그런 걸 묻다가 운명을 느낀 건지 이명은 있는 건지 그딴 지랄 맞은 걸 묻잖아.]

"하..."

깨어나자마자 개꿈 같은 소리를 들었다. 입 밖으로 무겁고 짙은 한숨이 튀어나온다.

"일어난 건가? 소년?"

거추장스러운 검은 망토를 굳이 실내를 휘두르며 크리스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네, 일어났습니다."

가급적이면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강한 몸을 지녔군. 업화의 괴수를 상대로 치명상을 입었으면서 당일날 일어나다니."

그냥 발록이라고 해줘요. 제발.

"...단련을 열심히 했으니까요."

"음, 기본에 충실했군. 거대한 비석도 단단한 초석을 기초로 쌓아올리는 법이지."

맞는 말인데 왜 맞장구가 치기 싫을까.

"...절 치료해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우선 도와주긴 했으니까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우리 가문의 혈육을 도왔으니까. 당연한 대우다. 그 이상으로 훌륭한 전사에게 경의를 표한 것도 크지만."

어... 집은 없지만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어.

병실을 돌아보니 옆에는 크리스 말고도 아리아스필도 있었다. 아리아스필은 손에 물수건을 쥔 채로 침대 위에 곤히 자고 있었다.

"아리아는 지금까지 널 간호해줬다. 의사와 사제가 직접 하겠다고도 말했지만, 직접 해주고 싶다더군."

그건 솔직히 감동이었다. 발록과 싸우다 쓰러진 게 그렇게 미안했나?

"...으음...? 레오나르도...?"

감긴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떠졌다.

"잘 잤냐? 몸은 어때?"

"레오나르도!"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운이 좋았던 거지. 새끼여서 다행이었어."

그런 그녀와 안심의 회포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하드였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다 온 건진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감이 왔지만, 레오 본인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제하드로군."

"...흐...흑! 흑암님!"

용케 저 호칭을 입에 담는군.

직접 하려고 하면 혀에 경련이 나던데.

"많이 늦었군. 안 그런가? '호위기사'?"

"죄...죄송합니다! 민간인 대피 때문에...!"

퍽!!

제하드의 얼굴에 정권이 날아갔다. 정권을 맞은 제하드도 날아갔다.

주먹을 날린 사람은 라인하르트를 지키는 어둠의 기사였다.

"닥쳐라. 넌 이제 라인하르트의 기사가 아니다. 우리 가문을 입에 올리기엔 너의 격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으니까."

"그게... 그게...! 무슨...!"

너무 말뜻이 어렵죠? 간단히 해석해볼까요?

"해고됐네요."

[그래도 나름 복지는 좋네. 저렇게 고급스럽게 해고 통보도 해주고.]

그래서 레오가 5년을 넘게 종자로 일했던 것이었다.

아님말고.

<+--|-|--+>

EP.8 라인하르트-3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제하드는 벌벌 떨며 말했다.

"어...! 어째서입니까?!"

잘못한 주제에 왜 언성이 높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걸 모른다는 점에서 이미 넌 자격이 없다."

"...무슨...?!"

부어오른 얼굴을 부여잡으며 제하드는 눈을 부라렸다. 이젠 진짜 뵈는게 없나보다.

[저 새낀 뻔뻔한 거냐? 아님 진짜 대가리가 안 돌아가는 거냐?]

<제 생각엔 둘 다인 것 같습니다.>

[그래. 하나만으로 사람이 저렇게 등신일 수가 없어.]

처음으로 현자와 생각이 통했다. 이래서 다들 뒷담화를 즐기는 것이리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앞에서 하곤 있으니까 앞담환가?

"민간인을 대피시켰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기사로서...!!"

"네놈은 촌락의 경비병인가? 아니면 라인하르트의 영애를 지키는 호위기사인가?"

"그건..."

기사라면 약자를 지킨다.

그건 당연한 기사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할 일을 한 뒤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 네가 민간인을 지키려고 했다고 생각해보지. 그렇게 생각해도 넌 호위기사 실격이지만 말이야."

가문의 호위기사는 당연히 가문의 인물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했다. 상식이 있다면 말이다.

"난 확실히 봤다. 저 소년이 발록을 해치울 수 있음에도 두 모자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리는 것을. 그동안 넌 뭘했지?"

그 일침에 제하드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민간인을 대피시킨다는 것도 핑계였으니까.

발록의 모습을 본 순간, 제하드는 직감했다. 저곳에 있으면 자신은 분명 죽는다는 것을.

두려웠다. 그렇기에 도망쳤다.

그게 기사로서 얼마나 큰 수치인지, 제하드의 긍지로는 알 턱이 없었다.

"나가. 다신 돌아오지 마라. 너의 존재는 라인하르트의 실밖에 되지 않는다."

"...하...! 하지만 그럼 아가씨는 누가 가르칩니까?!"

이때까지 제하드는 수도 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그 질문은 그가 하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이리라.

"가르친다고? 뭔가 단단히 착각했군."

"...네?"

"그럼 지금 네가 아리아보다 수준이 높다는 건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그는 더욱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미 레오나르도의 대련에서 아리아스필의 실력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성장은 이미 빠르다는 개념을 넘어섰다는 것마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가르쳤기 때문에...!"

그 주장을 빙자한 헛소리에 레오도, 흑암도, 현자도, 아리아스필 본인마저 어이가 빠졌다.

[그래도 뻔뻔한 것보단 지능이 딸리는 게 큰 것 같네.]

<지능이 딸리니까 뻔뻔해지는 거 아닐까요?>

[오, 그럴 수도.]

서로의 죽이 이렇게 잘 맞았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뒷담화가 만든 경이로운 유대성엔 정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리아스필과 대련해라."

"...네?"

크리스는 아리아스필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능하겠지?"

"네? 네."

아리아스필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오, 선생이라 말하는 작자가 고작 제자와 대련하는 걸 두려워한다라. 농담이었다면 아마 궁전 광대도 울고 갈 거다."

제하드는 아리아스필을 바라보며 잠깐의 간과 눈치를 보았다. 레오와 싸울 때는 분명 경이로운 검술을 내보였던 그녀였다.

재능 뿐만 아닌, 실력에서도 제하드는 확실하게 밀렸다.

하지만

'지금은 발록과의 전투로 지쳤을테지. 지금이라면...'

상처는 치료술로 나았지만, 떨어진 마나와 체력은 완전히 보충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지금 싸운다면...

"...하겠습니다!"

"좋다. 둘 다 따라나오도록."

나가는 크리스를 뒤따라 제하드와 아리아스필이 밖으로 나갔다.

침대에 앉은 레오나르도는 그저 나가는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휴식을 취했다.

[괜찮겠냐?]

"뭐가요?"

[그... 아리아스필이 센 건 맞지만, 지금 쟨 발록과의 전투로 지쳤잖아. 그에 비해 저 등신은 지 몸보신 잘해서 쌩쌩하고.]

"그쵸."

[뭐가 그쵸냐? 그럼 빨리 말리고 다음으로...!]

콰아아아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현자의 말이 끊겼다.

끝났구나. 생각보다 늦게 끝났네.

[...음?]

파열음이 서서히 사라지자, 두 백발의 기사가 걸어들어왔다.

"잘 끝났어?"

"응."

소년과 소녀는 너무 태연히 승리를 확인하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긴 거냐?]

<그럼 졌겠습니까?>

물론 조건만 놓고 보자면 아리아스필이 불리한 건 맞았다. 경험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말이다.

근데 그걸 다 씹어먹는 게 천재란다.

"훌륭한 솜씨더군. 아리아. 마나 코어 자체도 질이 많이 올랐고, 검술의 묘리가 한 층 더 깊어졌어."

"레오나르도 덕분이에요."

갑자기 아리아스필한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늘 하는 말이 재수가 없어서, 그냥 레오 자신의 종자 인생이 재수 없는 거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역시. 이 또한 무인의 이끌림, 운명이로군."

"하하..."

어색한 웃음만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저런 말을 너무 태연히 하니 오히려 말이 안 나온다.

"아, 그러고 보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이런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오는 아까의 전투에 느낀 의문을 물었다.

"왜 저희를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따지는 듯한 말일 순 있으나, 이는 꼭 질문해야 마땅했다.

해석에 따라선 13살의 아이들이 죽는 걸 방관했다는 의미도 될테니까.

"훗, 좋은 질문이다."

[난 300년 넘게 살면서, 누가 직접 '훗'이라고 말한 건 처음 들어본다. 내가 이상한 건가?]

그건 레오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목이 칼칼해서 숨소리가 헛나왔다고 생각합시다. 그게 정신건강에 편해요.>

그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종자로 살아오면서 얻은 눈치였다.

"이유가 있습니까?"

"사자는 자식을 절벽에 떨군 뒤 기어오르는 새끼만 키우는 법이지. 아직 어린 전사들의 성장을 위해선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과정치곤 부러진 갈비뼈가 몹시 욱신거리긴 했지만, 굳이 화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신사적으로, 교양있게 말을 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고맙군. 너와 같은 전사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근데 한 가지 지적하자면 사자는 본인의 새끼를 절벽에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그 말에 무게를 잡던 크리스의 낯빛이 변했다.

"...뭐라고?"

"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맹수들은 자신의 자식을 절벽에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식자에 위치한 동물일수록 모성애가 깊은 편이죠."

라인하르트에서 훈련을 못 할 때마다 읽었던 것이 책이었다.

가주님께서 허락해주시기도 했고, 명문가의 종자로서 최소한의 지식은 쌓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다지 독서를 즐기진 않았지만, 이런 내용은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지.'

크리스 라인하르트, 나중에 그녀가 한 헛소리에 일일이 반박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속담으로서 하는 말일 뿐이다. 나...나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런 것치곤 말투가 세상에 산타가 없다는 걸 안 꼬맹이 같은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요즘 애들도 산타클로스는 안 믿는데.

"아, 그러고 보니 떨어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말에 동심을 잃어가던 크리스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그런가?! 역시 그렇군! 고귀한 사자답게...!"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기 위해 수사자들은 가끔 새끼 사자를 절벽에다가 던진다더군요. 그 소문이 와전돼서 그런 속담이 되어버리긴 했지만요."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법이다.

"...그게...정...정말인가?"

"예."

이젠 동심을 잃는 수준이 아닌, 없던 동심마저 가슴에서 끄집어내서 망치로 난타해 가루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넌 왜 순수한 애의 꿈을 부숴버리고 난리니?]

<저보다 20살은 넘게 많은데 무슨 앱니까?>

[내 눈엔 백 살도 애야.]

하긴 그건 맞는 말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나이 먹도록 연애 한번 안 했다니... 역시...'

[싸물어.]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마음속으로 나 고자라고 생각했잖아. 망할 놈아.]

이걸 아네. 어쨌든 지금 말할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저기 크리스 님?"

"......"

아까 말한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그녀는 말없이 허공만을 내다보았다.

"크리스 님?"

"...아아, 미안하군.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수사자가 절벽에..."

[그만해라. 저 여자 동심은 이미 가루야.]

그건 맞는 지적이었다. 저러다가 저 사람 이불이 찢어져라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그건 됐고, 어째서 크리스 님께서 이 마을에 오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좌절과 절망을 곱씹고 있었지만, 질문에 답하지 못할 만큼 유약하진 않았다.

다만 동심이 지나치게 순수했을 뿐.

"...내가 이곳에 온 건, 아리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저를요?"

아리아스필은 고개를 돌려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근처 지역에 임무가 있기도 했고, 아리아 네가 수행 삼아 나왔다고 들었을 때 어느정도 성장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지."

그러고 보니 아리아스필은 본가로 돌아갈 때, 거쳤던 마을에서 크리스와 만났었다.

'...그때 발록은 크리스 님이 잡은 거였군. 그럼 아귀는 맞아.'

전생과 현생의 사건을 퍼즐처럼 맞춰져 갔다. 그렇게 추리하던 와중 크리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의 성장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조언과 수련법 덕분에 그녀는 전생1년분의 성과를 단축해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함께 발록을 잡는 소년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네가 아리아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준 존재라고 말이야."

크리스 라인하르트는 그 소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렇기에 제안 하나를 하지."

어째서일까, 이 제안이 무엇인지 레오나르도는 듣지도 않고 알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가문, 용사의 피와 영혼이 흐르는 유서깊은 가문의 종자가 되어주지 않겠나?"

"고모!"

그 말에 아리아스필은 큰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침에 크리스는 당황했다.

고모라는 격 없는 호칭을 사용해서가 아니었다.

'아리아가 저렇게 큰 소리로 흥분한다고?'

자신의 조카지만 늘 냉혈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소녀였다. 그랬던 아이가 흥분한 눈동자로 본인을 바라보고 있다.

"왜... 부르지?"

"레오나르도는... 종자로 있기엔 아까운 사람이에요! 지금... 아, 그래! 제하드가 그만뒀으니...!"

"할게요."

...침묵이 잠깐 흘렀다.

"...뭐?"

"...뭐?"

[...뭐?]

삼연속으로 같은 단어가 울려퍼졌다.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듯 레오나르도는 덤덤히 대답했다.

"종자 좋네요. 하겠습니다."

망설일 건 없었다.

왜냐하면

「너의 눈은 의지와 열정으로 차있군. 당장 승리를 잡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아리아에겐 큰 도움이 될 테지.」

「우리 가문의 종자가 되지 않겠나?」

저런 사람이더라도 크리스는 자신의 인생에 기회를 준 은인이니까.

그런 가문과 기사를 모실 수만 있다면 종자더라도 괜찮았다.

<+--|-|--+>

EP.9 라인하르트-4

"...흠... 이정도면 되겠지."

레오나르도는 싸놓은 짐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별거 없네. 뭔 옷이 상의 하의로 3벌밖에 없어.]

레오의 짐은 조촐하다 못해 황량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간단한 건조식량, 세 벌의 상하의와 사슬갑옷과 가죽갑옷 하나, 그리고 몇푼의 돈 뿐이었다.

<이때는 그냥 방랑 용병이니까요. 짐이 많아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하죠.>

[근데 어째 돈도 너무 없다.]

"영양 보충으로 고기 샀다가, 어떤 미친놈이 다 토하게 만들어서요. 식비 지출이 컸죠."

그 이름이 뭐였더라... 현자였나? 고자였나? 같은 '자'라는 단어로 끝나서 헷갈리네. 아, 어차피 같은 사람이지.

[급하게 먹으면 체하니까. 깊은 마음으로 배려해준 거지.]

입술에 침 하나 바르지 않은 채, 궤변을 늘어놓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딴 마음도 받기 싫으니까 고이 접어서 가슴팍에 쑤셔 넣으세요."

[그게 스승한테 할 말이냐?]

"그럼 내장은 제자한테 보여줄 겁니까?"

서로 훈훈한 독설이 오고 가던 와중, 짐이 완전히 싸졌다. 가방을 몸에 메며 레오는 문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무슨 일 있나? 레오나르도 소년? 아까부터 말소리가 들리더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혼잣말이 길어졌는지, 크리스가 의아한 듯 레오를 불렀다. 현자의 헛소리를 무시한 채, 레오는 짐을 든 채 여관 밖으로 나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저 혼자 말이 많길래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을 뿐이지."

"괜찮습니다. 원체 말이 많은 성격인지라... 하하..."

가급적이면 현자의 존재는 숨길 생각이었다. 말한다고 해서 득이 될 상황을 적을 테고, 오히려 현자의 돌이나 현자를 노리고 습격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절대 크리스 님께는 들키면 안 돼요.>

[왜?]

왜인지는 현자도 알고 있을 거다. 다만 그 이유가 너무 아득하고 순수한 나머지 직관적으로 집지 못하는 것일 뿐.

<저 사람 은근히 그런 거에 동경하거든요.>

크리스 라인하르트, 그녀는 30대가 넘도록 「흑염룡, 마안, 오른팔의 저주」와 같은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미지의 힘에 동경하는 안타까운 인간이었다.

<거기에는 배후령도 포함돼 있거든요.>

자신의 배후에 영혼으로서 보필하는 설정, 전생에 그녀와 함께 임무에 나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근데 만약에 그 사람이 현자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현자님의 팬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거군. 흐흐...]

상황의 무게를 파악하지 못하고 현자는 가볍다 못해 경박하게 대답했다.

<저딴 소리 숨쉬듯이 읊는 팬도 괜찮다면 말할게요.>

레오는 망설임 없이 목에 힘을 주었다.

"크리스 님!"

[죄송합니다. 다신 그딴 소리 안 하겠습니다.]

역시 태세 전환에는 공포만 한 것이 없다.

그게 태생적이고도 이성적인 거부감을 자극하는 거라면 더더욱.

"무슨 일이지?"

사실 현자에 대해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부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호위 기사분은 어디 갔죠?"

"'전' 호위기사 제하드 말인가?"

확실히 잘린 건 맞은 것 같았다.

"...예, 이젠 '전' 기사가 되셨군요."

"...제하드에 대해선 사과해야겠지.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레오의 말이 멈췄다. 나온 사과의 맥락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에게 그가 한 모욕은 들었다. 권위적이고 모욕적인 태도에 검까지 뽑았다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너무 별 볼 일 없는 일이었기 이미 잊은 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괜찮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리아스필에게 싸움을 건 건 저기도 하고요."

"이해해준다니 고맙군."

그렇게 말이 오가던 와중, 레오는 기묘하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근데 아리아스필이 보이지 않네요. 어디 갔지?"

정작 이 대화의 중심에 있어야할 아리아스필은 주변에 없었다.

"아리아는 지금 여관에서 자고 있다. 아무래도 발록과 제하드, 두 녀석을 상대하느라 체력이 다한 거겠지."

아리아스필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지금은 당연히 체력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발록을 상대하자마자 탈진해 앓아누웠겠지.

"우선 푹 쉬라는 의미에서 깨우지 않았다. 그 나이 때에는 자는 것도 단련일테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이유도 있다."

크리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허세나 폼을 잡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게의 눈매였다.

"...무슨 이유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리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리아를요?"

아리아스필을 부탁한다라, 처음 크리스를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 부탁이었다.

"그 앤, 아리아는 혈육인 내가 말하기도 그렇지만 고금을 불문할 천재다."

그건 누구보다 레오가 잘 깨닫고 있었다. 고금이라는 과거와 현재뿐만 아닌, 10년이 넘는미래 이후에도 아리아스필 이상의 천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애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어. 뛰어난 자의 숙명처럼, 고고한 늑대의 외로움을 곱씹어야만 했지."

"...그렇군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뛰어나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너와 만난 뒤로 아리아는 변했다."

"..."

"나조차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줄은 몰랐거든. 실력이 발전하고를 떠나서 그 감정은 아마 인간으로서 큰 성장일테지."

생각해보면 전생의 아리아스필은 항상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마치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는 듯, 권태로움만을 지닌 채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난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부디 그 외로운 늑대를 홀로 두지 말라고 말이다."

조금 손가락이 오그라들긴 했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는 대화였다.

"알겠습니다. 부탁이 없었다 할지라도 전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너도 마찬가지로 고독한 늑대일테니까. 호적수이자 동류를 만난 것만큼 반가운 일은 없겠지."

마지막 말에 손가락이 완전히 오그라들었다. 잔인한 청각 고문에 레오의 입술과 혀가 꿈틀거렸다.

"...근데 한가지 정정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내가 실언을 한 게 있었나?"

말의 비수는 이미 장전되었다.

"늑대는 무리 동물입니다. 개와 같은 생물들은 대부분 무리가 있죠. 그러니 고독한 늑대는..."

그 사실에 크리스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훗, 그건 네가 견문이 좁기에 모른 것일 뿐이지. 난 보았다. 홀로 다니는 늑대의 모습을..."

"아, 그건 무리에서 쫓겨난 늑대입니다."

"...뭐?"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었다.

"고독한 늑대는 대부분 두 부류입니다.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따로 나온 청년 늑대와 늙어서 무리에서 퇴출당한 노년 늑대죠."

그녀의 눈썹이 진동이라도 하듯 거하게 떨린다. 눈썹뿐이었을까 근엄하던 표정마저 크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그건...! 내가 말한 건 젊은 늑대였다! 그래!! 젊은 늑대!!"

"근데 젊은 늑대가 고독하다면, 그건 실패한 늑대입니다. 힘이 없어서 무리를 만들지 못한 거고, 들어가지도 못한 거거든요."

늘 얘기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그건..."

크리스는 또다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고귀한 사자, 고독한 늑대, 그에 대한 항상 이상을 품던 그녀였으니까.

'고귀한 사자...는 그렇더라도... 늑대만큼은 안된다... 고독한 늑대만큼은...!!'

근데 자연엔 그딴 거 없단다.

[넌 어째 동심을 토막내지 못해 안달난 것 같다.]

<저 사람이 동심을 갖기엔 너무 늙지 않았습니까?>

[매정한 놈.]

<대자연이란 늘 매정한 법이죠.>

이 무슨 대자연인가.

"레오나르도?"

한 여성이 동심의 파괴로 깊은 상실에 빠져있을 때, 다른 소녀는 밝은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리아스필?"

뒤에는 아리아스필이 있었다.

휴식으로 피로는 완전히 풀린 건지,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맑은 벽안에는 생기가 흘렀고, 긴 백색 생머리에는 윤택으로 잠들어있었다.

피부도 마치 새하얀 눈처럼 곱고 촉촉해 보였다.

[애가 안 본 새에 더 예뻐졌네. 화장이라도 했나?]

<얜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자연 미인이죠. 자연 미인.>

아리아스필은 아름다운 화장이나 옷가지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잘 드는 검이나 잘 막는 방어구에 관심을 보였지.

그럼에도 그녀는 외모만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제 생각엔 외모보단 재능 때문에 나라가 기운 것 같지만 말이에요.>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하거나 하나만 해. 뭐라 말하기가 어렵잖아.]

딱히 칭찬이나 욕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깨는 게 늦어서..."

"괜찮아. 그런 일 겪고 일찍 깨는 게 더 이상하지."

그녀는 레오와 인사를 나누던 중, 깊은 고통을 곱씹고 있는 자신의 고모를 바라보았다.

"사자도... 아니, 늑대...가... 늑대만큼은..."

동경해왔던 이상이 무너진 나머지 정신도 마찬가지로 붕괴하고 있었다.

"...고모, 아니 크리스 님은 왜 저러시는 거야?"

그건 이 문장으로 압축해 말할 수 있었다.

"어른이 돼가시는 중이야."

***

라인하르트 본가로 가는 길은 멀다면 멀고 길다면 길었다. 하루 내내 말을 타고 도시로 가야했고, 그 뒤에는 대금을 내고 워프게이트를 사용해야했다.

"워프 게이트 비용은 내가 내도록 하마."

"그래도 괜찮습니까? 만만치 않을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다. 그 정도 액수에 흔들릴만큼 라인하르트는 약하지 않아."

[동심 파괴에는 많이 약한 것 같던데.]

<그건 크리스 님 한정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오나르도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액수 이상으로 부응하도록 하죠."

"기대하지."

레오 일행은 그대로 워프 게이트에 탑승해 이동하게 되었다.

그렇게 게이트를 타고 이동한 곳이 바로

"라인하르트 본가에 온 걸 환영한다. 소년."

라인하르트가의 대저택이었다.

'여긴 봐도 봐도 놀랍단 말이지.'

놀랄만한 구석은 수도 없이 많았다. 먼저 웅장한 저택의 크기부터 해서, 소도시가 간신히 설치하는 워프 게이트가 사유지 내에 존재했으며, 정원의 넓이는 작은 숲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루벤, 그 녀석 돈 좀 벌었나본데?]

<용사마저 돈 못 벌면, 다들 살맛 안 나겠죠.>

[...그건 그렇지.]

왜인지 현자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보였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 그걸 물어볼 새도 없이 정문 쪽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리더니, 저택 밖으로 시종들이 모여 입구의 줄을 만들었다.

[완전히 임금님 납시오구만.]

<그런 셈이죠. 아리아스필에 크리스 님까지니까요.>

가문의 직계인 두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정도 대우를 안 하면 어떤 불똥이 튈지 몰랐다.

"소란스럽네요. 크리스 님."

"그러게나 말이다. 아리아. 이래서 일부러 오는 걸 말 안 했는데, 의미가 없었나보군."

정작 둘은 이런 환영식을 내키지 않아 하지만 말이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그 중심에 있는 노년의 집사, 알프레드 세바스찬은 라인하르트의 두 영애에게로 걸어왔다.

"오랜만이군. 알프레드."

"오랜만일 것도 없죠. 저번에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난 모험을 생각하면 굉장히 짧은 시간..."

라인하르트를 지탱하는 그림자는 자신의 검은 역사를 숨기기 위해 노신사의 입을 다물게 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실언을 했군요."

"손님이 없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자제해라. 알프레드."

알프레드는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 품격과 예절에 순간적으로 레오는 라인하르트의 격을 되새길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라인하르트 가문의 집사를 맡고 있는 알프레드 세바스찬이라고 합니다."

기사, 귀족 간의 예법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알프레드 집사장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긴 위해선 그 정도로 끝내선 안된다.

"안녕하십니까, 집사님. 전 방랑 용병인 레오나르도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성은 말씀해드릴 수가 없군요."

예법을 지킨 인사와 동시에 레오는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절도 있는예절에도 제법 신경쓰이기도 했지만, 알프레드의 의문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째선가요? 레오나르도 님?"

"성주인이 아니니까요."

싸늘해진 공기, 짜게 식은 시선.

장난을 친 레오마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신이 나갔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니. 그랬으면 현자의 돌은 안 주는 건데.]

"브루룹우하하하하하!!"

그때 갑자기 호탕한 광소가 들렸다.

"아학!! 아히히히히...! 이히히히히...!!"

그 자리에는 노집사도, 노신사도 없었다.

단지 말장난에 몸부림치는 늙은이만이 있었을 뿐.

"죄송...! 죄송...합니다...! 으흐흐...!"

"왜 그러나?! 알프레드!"

알프레드는 몇 번의 심호흡과 헛기침 끝에 웃음 잠재웠다.

"으흠, 음... 죄송합니다. 제가 추태를..."

"괜찮습니다. 근데 혹시 다과 중에 오렌지가 있습니까? 오랜만에 오렌지가 먹고 싶군요."

"푸아칵하하하하하...!! 아히!! 아히! 이히힉!!"

[뭐야? 쟤 왜 저래? 지랄을 들으면 웃는 병이라도 있냐?]

<있어요.>

알프레드 세바스찬

그는 라인하르트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집사이자 가장 명망 있는 집사장이며.

또한 기품 있는 분위기와 언행, 예절 덕에 남자에게는 존경을, 여자에게는 애정을 받는 인격자였다.

레오 또한 그를 남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경애하고 존경해왔다.

하지만 어느날,

'무슨 일입니까? 레오 씨?'

'아 그게, 물건을 좀 찾고 있습니다. 해골기사랑 싸워서 얻은 전리품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렇습니까? 마침 여유가 있으니 같이 찾아보도록 하죠.'

'아! 감사합니다. 해골기사 때문에 골 때리던 참이었거든요.'

웃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용병 출신인지라 말에 격이 없었을 뿐, 웃길 의도는 눈털만큼도 없었다.

'푸웃!'

그리고 레오는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신생아도 듣다가 정색할 개그를 저 영감은 웃어준다고?]

<웃어주는 게 아니고, 좋아하니까 웃는 겁니다. 오히려 그때 이후로 많이 친해졌죠.>

그 이후로 알프레드와는 단지 사무적인 관계가 아닌, 가끔 농담을 주고받는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커하하하하하!!"

[근데...]

"크핫하하하하하하하!!"

[너무 웃는 거 아니냐? 웃다가 죽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아무리 웃는다고 해도 알프레드 씨가 고작 그런 거에...

풀썩

알프레드가 쓰러졌다. 거품을 문 채로.

"...알프레드!!!"

레오나르도, 나이 13세.

"알프레드 씨!!"

가문에 온 지 13분

"집사장님!!"

집사장 실신시키다.

<+--|-|--+>

EP.10 라인하르트-5

[...]

"..."

[...]

"..."

[...]

현자와 레오는 아무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봤다는 표현도 쓰지 못했다.

레오는 아예 현자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하...]

깊은 한숨, 목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깊은 숨이었다.

[넌...하...]

"..."

[생각이... 하...]

말 반, 한숨 반이었다. 그보다 더 굴욕적이었던 건 저 태도가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이었다.

"저기 현자님..."

[싸물어. 그 셋바닥으로 나도 죽일 생각이냐?]

죽은 건 아니라고! 죽인 것도 아니고!

졸지에 살인마로 모함당한 레오였다.

아직 집사장 알프레드은 죽지 않았다. 다만 실신해서 급하게 실려갔을 뿐.

너무 어이없는 광경에 모두가 얼에 탄 나머지 얼어버렸다.

그 어안이고 어이고 증발할 것 같은 광경을 보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후에 온 사람이었다.

집사장이 쓰러졌고, 그 앞에는 처음 보는 용병이 있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체포부터 하고 볼 것이다.

[넌 농담으로 체포되냐? 어떻게 체포 사유가 농담이야?!]

<아니! 저도 이렇게 체포될 줄 알았겠어요?!>

고작 농담 두어번, 그것도 모욕적인 언행이 아닌 간단한 언어유희일 뿐이었다.

그걸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기사들은 도저히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농담을 친 레오도 믿기지 않으니까.

'이때 알프레드 씨는 농담에 면역이 없었던 거겠지.'

처음 농담을 들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과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웃길 의도 자체가 없었으니 위력이 약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마 지금은 진심으로 웃기려고 했기에 웃음의 강도가 임계점을 넘긴 거겠죠.>

게다가 지금은 레오의 말장난에 대한 면역도 없을 테고 말이다.

[차라리 목사탕 먹다가 목에 걸려 뒤지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그건 레오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이대로 감방에 썩어야해?]

<감방은 아니죠. 정확히는 심문실이라고요.>

지금 레오가 있는 방은 라인하르트 가문의 저택 지하, 심문실이었다.

아직 경위도 애매했고, 아리아스필과 크리스의 간곡한 변호 덕분에 콩밥을 먹는 것일 만큼은 면하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심문실이면... 뻔하죠.>

심문실에 왔으면...

벌컥

굳게 잠겨있는 철문이 열렸다.

"일어나."

심문을, 그 이상으로 고문을 할 수밖에...

"석방이다."

아니네?

***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우선 지하실에 가둔 레오를 뒤로 하고, 다들 집사장인 알프레드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그리고

'아무 이상 없습니다.'

치료 결과, 알프레드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사제도, 의사도, 혹여나 마법사까지 불러 확인했으나 알프레드 집사장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프레드의 발언.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웃음이 심하게 나온지라...'

그렇게 돼서 레오나르도는 무죄로 석방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자. 응? 이렇게 살면 집에 계신 어머니께서 얼마 슬퍼...]

<저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애인은 있잖아. 이것아.]

<뭔 말 같지도 않은...>

평생 연애를 거부하고 거절한 레오였다. 그런 그에게 애인이 있을 리가...

"레오나르도!!"

그런 생각을 할 찰나, 한 소녀가 레오나르도에게로 뛰어들었다.

"아, 아리아스필."

"다행이다...! 석방됐구나!"

근데 어째 다들 표현이 좀...

"훗, 난 믿고 있었다. 네가 그런 시간 따위는 가볍게 이겨내리라 말이지."

왜 범죄자에 형량 채우고 나온 놈이 같이 돼버렸지.

[실제로 죽일 뻔했잖아.]

<아니라니까요.>

[범죄는 부정해선 안 돼. 중요한 건 그 잘못에서 무엇을 깨닫고 반성했나지.]

<그럼 현자님 없애고 좀 깨닫고 반성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싸움이 오가던 와중,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레오나르도, 너에겐 또 사과해야할 것이 있구나."

"사과요?"

"왕국기사단이 직접 체포하는 걸 막느라 소란스러워졌어. 주변 기자들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간 것 같다."

그 말을 듣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설마 제가 살인마로..."

"괜찮다. 그거에 대해선 잘 해명했으니까."

크리스는 자신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말에 안심되긴커녕 조금 더 불안해졌다.

"...혹시... 해명을 누가 했나요?"

"내가 했다만."

아, 인생 망했네.

참고로 다음 날,

각종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은 이 문장으로 장식되었다.

[13살의 소년, 농담 살해자가 되다.]

「농담 살인술의 비기, 집사장 실신」

"용언을 뛰어넘는 농담 암살기법"

아직

첫날이었다.

***

"우선 방은 이곳을 쓰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오해가 풀린 뒤, 레오는 종자로서 저택에 살게 되었다. 본가가 아닌 구석에 있는 별채였으나, 종자에겐 개인방이 있다는 것 자체가 호화스러웠다.

"자세한 건 내일 알려주도록 하마. 오늘은 일도 많으니 쉬도록."

"감사히 쉬겠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져라 숙이며 레오는 크리스의 아량에 감사를 표했다. 크리스는 그런 인사를 받으며 가버렸다.

"...하...고단하다..."

오늘따라 하루가 너무 고단했다.

차라리 발록이랑 싸우다 쓰러지는 것이 몇 배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떡할 거냐?]

<지금은 가문에서 종자로서 인정받아야겠는 게 먼저겠죠.>

집사장님의 실신으로 계획이 조금 어그러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바뀌는 건 없었다.

실력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자리를 쟁취하는 것

늘 해오던 방식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아리아스필이 주는 자리를 받지 그랬어.]

<호위기사 자리요? 받는다고 누가 납득할까요?>

직위나 직책만 생각한다면 종자는 호위기사보다 아래의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도, 가문도, 직위도 없는 일개 용병 따위가 호위기사를 꿰차면 아무도 곱게보지 않을 것이다.

[하긴, 낙하산 꼴이군.]

<지금도 낙하산이긴 해요. 라인하르트는 종자마저도 귀족 출신이 태반이거든요. 지금도 아마...>

그 순간 울리는 발소리,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뛰어오는 소리였다.

"오는군."

집사장 실신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일만큼은 확실히 예상해두고 있었다.

콰앙

문을 열다보다 박차는 음성, 그 앞에는 고급 천옷을 입은 아이들이 있었다.

"니가 걔냐?"

맨 앞에 있는 소년이 말했다.

"글쎄요."

"뭐가 글쎄요야?!"

"그렇잖아요. 이름을 물은 것도 아니고."

"...아..."

그 말에 그 소년은 잠시 얼을 탔다. 어렸을 때 봤을 때는 조금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럴 것도 없었다.

"네가 평민 주제에 종자로 들어온 새끼냐?"

이번에는 다른 아이 쪽에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만. 문제라도 있으신지?"

"문제? 허, 있고말고."

레오는 그 아이들 앞에 서며 그들의 눈을 마주쳤다.

"넌 평민으로 들어온 주제에 선배 종자님들께 인사도 안 하냐!?"

"안녕하세요."

받아주는 의미에서 허리를 숙였다. 어른으로서 이정도 예절 쯤이야.

"...뭐하는 거냐?"

"인사했잖습니까."

"...장난쳐? 선배가 우습냐?!"

"딱히 우습진 않습니다. 그랬다면 경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겠죠."

아이들의 얼굴이 울그락푸그락하게 물든다. 트집을 잡아서 혼을 내고 싶지만, 정작 트집을 잡을 게 애매하니까 발만 구를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이 야심한 밤엔 무슨 일이십니까?"

"...긴말할 것 없다. 밖으로 나와라."

"안 됩니다."

그러고는 레오는 문을 닫았다.

[이래도 되냐?]

<어차피 다시 열어야 해요.>

말 끝나기 무섭게 다시 문이 두들겨졌다. 기다렸다는 듯 레오는 다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 갑자기 문을 왜...!!"

"나가는 건 안 됩니다. 크리스 님이 휴식을 명령하셨거든요."

그 말에 현자도, 종자들도 어이없는 시선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저런 시선이야 말로 레오가 원하는 것인 줄도 모른 채로,

"...하...별 미친 새끼를 다 보겠네."

"크리스 님이 데려온 녀석이잖아. 미친 놈인 게 당연하지."

상사와 자신마저 동시에 욕하는 기술은 정말 대단했다. 대단한 나머지 면상에다가 박수갈채를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나와. 넌 좀 쳐맞자."

"...어쩔 수 없군요."

못 이기는 척, 레오는 그들을 따라 별관을 나왔다. 별관을 나와, 종자들을 따라 걷자 넓은 연무장이 있었다.

연무장은 밤인지라 고요하고 조용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이 질문만 세 번째인데."

"니가 라인하르트에 들어와서 뵈는 게 없나본데, 여긴 선배를 하늘처럼 여기는 곳이야. 알아?!"

"아, 예. 낮은 곳에 계시지만 되도록 하늘처럼 모셔보도록 하죠."

"...아...이 새끼..."

어이가 상실한 건지, 그는 광소를 내며 허리춤에서 칼을 던졌다. 레오는 어렵지 않게 그 칼을 받아잡았다.

"...뭡니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덤벼."

레오는 바닥에다가 검을 집어던졌다.

"...뭐하는..."

퍼억!!

주먹과 함께, 앞에 있는 남자 종자가 나가떨어졌다.

"끄아아아악!! 뼈가...!! 뼈가...!!"

"거 엄살은. 하늘 같은 선배가 뼈가 부러질 리가 없잖아요."

"...이 비겁한...!"

다른 종자들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덤비는 비겁한 13세 소년을 잡기 위해 평균 16세인 그들은 정정당당하게 검을 휘둘렀다.

짜악!! 타악!! 파악!!

세 종류의 타격음, 그리고 널부러지는 종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명치, 턱, 인중에 주먹이 꽂혔다.

"끄아아악!!"

"얼굴이...! 얼굴이...!!"

"이...! 이...!! 비겁한 놈아...!!"

바닥에 쓰러진 종자들은 억울하고 분노한 표정으로 원망을 뿜어냈다.

"비겁?"

비겁이라는 말에 레오나르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와~ 제가 비겁했군요. 몰랐네요. 한 명을 상대로 네 명으로 덤비는데 제가 비겁했네요."

이번에는 그들이 든 검을 주으며 레오는 말했다.

"이렇게 비싼 칼 찬 상대로 전 맨손으로 덤볐네요. 어쩜 이리 비겁할 수가."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받았던 검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검집에서 칼날을 뽑았다.

"그리고 이 칼은..."

레오는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바닥에 살짝 부딪히자 칼이 부러졌다.

"이미 금이 간 칼이었는데, 제가 쓰지 않고 덤볐네요. 천하가 공노할 비겁함이다~ 그죠?"

"...이 개자식아...!! 너 이러고 멀쩡할 것 같아?!"

협박이라, 너무 전형적이여 이젠 웃기도 힘드네.

"아리아스필!! 그 가주님 딸 좀 꼬셨다고!! 뭐가 좀 되나 본데! 넌 평..."

한 문장, 단 한 문장에 공기가 뒤바뀐다. 어떤 욕에도 미소를 유지하던 레오였다.

하지만 그건,

"...야, 벡터, 헤럴드, 제이, 카시운."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한 욕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종자들의 표정색이 변했다. 모두 자신들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우리 이름을..."

미소가 지워지고, 안면의 모든 것이 살기로 채워진다. 레오은 발은 맨 앞에 있는 벡터의 손을 짓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난 너희들이 날 낙하산이라 뒷담을 까든, 입방아로 떡을 치든 상관없어. 알 바도 아니고."

아까의 태도와는 심히 상반되는 어투, 두려움이 엄습한다.

"근데 말이야."

그건 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선은 지키자? 언제, 어디서든 아리아스필 가지고 그딴 소리 하면..."

콰앙!!

레오의 주먹이 바닥이 꽂힌다. 얼굴에 조금 스쳤을 뿐인데 피부가 잘리듯 베이고, 충격으로 바닥이 파인다.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하지만 레오의 경고에 종자들은 전신이 축축해지는 걸 폐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공포를 확인한 뒤, 레오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레오나르도.]

<알아요. 애들인데 과했다는 거. 그래도 가주의 딸을 욕했는데, 버르장머리는 고쳐...>

[너 진짜 마음 없는 거냐? 아니면 마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거냐?]

뭔소리지? 주어가 없으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

EP.11 라인하르트-6

오늘은 머리가 복잡하다.

[레오나르도.]

그러니 머리가 비워질 때까지 훈련한다.

[이봐. 고자승부충.]

저딴 하찮은 욕이 안 들릴 정도로 집중한다. 머리가 비워질 때까지...

[...농담 살해자.]

"으아아아아아!!!"

검을 계속 내려치게 된다. 절규 같은 목청이 입 밖으로 계속으로 튀어나온다.

[농담 살인술의 비기...크큭...!]

얼굴이 붉어지며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진다.

"닥쳐!! 닥치라고!!"

[용언을 뛰어넘는 농담 암살기법...크큭...!]

모든 것에 분노가 생긴다. 기자도, 신문도, 농담도, 저 '크큭'이라는 추임새조차.

"죽여버리겠어!! 노친네가!!"

이 분노로 뒤덮인 흑역사의 전말은 5분 전으로 돌아간다.

***

['정말 죄송합니다. 알프레드 집사장님.']

오늘은 어제 못했던 사과를 하러, 아침 일찍 집사장실에 찾아가게 되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레오 본인에게도 책임은 있었으니 사과할 필요는 있었다.

너무 일찍 찾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알프레드는 언제나 새벽 정시에 일어나니 상관없을테지.

['대화 주제는 홍차나 과자 종류 같은 게 괜찮겠어. 농담은 절대 하면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하며 레오는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레오는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알프레드 집사장님.]

[오, 레오나르도 군이로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알프레드는 어제 실신했던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하게 신문을 읽고 있었다. 옆에 홍차까지 곁들이는 건 덤이었다.

[그 차는 다즐링이로군요. 상당히 고급인 것 같고요.]

[오오, 이걸 눈치채시다니... 다도에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은 견문이 많이 부족합니다. 정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냄새만으로 찻잎이 익은 개월 수까지 맞힐 수 있다죠.]

그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였다. 자신의 칭찬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상대를 높이는, 고도의 화술이었다.

[그래도 그 나이에 홍차의 종류를 아는 건 어렵죠. 유머 말고도 다른 교양 부분에서도 출중하시군요.]

그 말에 심장이 찔리는 것 같다. 역시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 건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용병으로 산 지라 교양있는 농에는 재능이 없었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농담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폭소했죠.]

심장이 찔리다 못해 해집어지고 있다. 사과하다 못해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신문을 읽고 계시는군요. 세 종류나 읽으면 피곤하시지 않으신가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레오는 주제를 눈앞의 신문으로 옮겼다. 특징적인 주제 전환이니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신문은 정말 재밌거든요. 특히 1면이 말이죠. 레오나르도 군도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네, 무슨 내용인지...]

레오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13살의 소년, 농담 살해자가 되다.]

때때로 충격적인 진실은

「농담 살인술의 비기, 집사장 실신」

사람의 언어능력을

"용언을 뛰어넘는 농담 암살기법"

마비시키니까.

[어떻습니까? 경제 불황이나 사고사보다야 훨씬 유쾌한 기사 아닙니까?]

***

그리고 현재

"으아아아아아아아!!"

마비된 언어 능력은 현재 분출해 폭발하고 있었다.

[용언을 뛰어넘는 농담 살해자...크큿...]

"닥쳐!! 아가리 닥치라고!! 미친 영감탱이야!!"

검을 미친듯이 휘두르며 레오는 외친다. 유령인 현자가 검에 맞을 리가 없지만,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했다.

[이봐이봐,내 농담을 듣지 말라고... 아직제어가 안 되니까...크큿...]

저 웃음이 인내심의 동아줄을 자른다.

"죽여버리겠어!! 다 죽여버릴 거야!!"

되려 흥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착각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리아, 레오나르도가 왜 저러지?"

새벽이 조금 지나고 연무장에 온 크리스는 미쳐 날뛰고 있는 레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건 레오나르도의 수련법이에요. 저번에도 마구 화내고 소리 지르면서 수련하더라고요."

"흠... 아무래도 감정의 분노를 이끌어내 몸의 힘을 이끌어내는 훈련법인 것 같군."

그런 거 아니다.

"어린 나이에 분노를 통제해 힘의 자양분으로 삼으려고 하다니... 대단한 걸 넘어서 무섭군."

"역시 레오나르도네요..."

전혀 아니다.

"하지만 위험할 수 있겠어. 저러다간 분노의 노예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냥 아니다. 아니라면 아닌 거다.

"레오나르도, 아침부터 훈련 중인가?"

아마도 분노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레오를 말리기 위해 크리스는 어른으로서 기꺼이 조언해주러 갔다.

"죽여...! 아? 크리스 님?"

크리스를 보자 흥분이 가라앉혀졌다. 상사 앞에서는 아무리 굴욕적인 사건이 있어도 마음을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크리스 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훈련을 하는 것은 좋다만, 조금은 냉정해져라. 이런 상황일수록 머리를 식혀야할 때지."

부끄럽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하게 대처해야 마땅했다.

"죄송합니다. 종자로서 못 미더운 꼴을 보였군요."

"아니, 그 격정에 맡기는 힘은 충분히 강했다. 아직 취하기엔 이른 힘이기에 말리는 것일 뿐이지."

...뭔가 말이 이상했지만, 크리스이니 이해하도록 했다.

"그러고 보니 아리아에게 들은 것인데, 너에겐 또다른 특수한 수련법이 있다고 들었다."

이 미친 짓은 수련법이 아니지만, 크리스이니 그러려니 했다.

"다른 수련법... 마나체련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나체련술, 음... 그런 이름인가?"

"예, 보여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만든 본인에게 시연시키는 것이 낫겠지."

마나체련술을 위해 자세를 잡으려던 순간,

그 순간

"너 이 자식...! 여기 있었구나!"

하늘과 같은 선배님들이 땅바닥을 통해 터벅거리며 달려왔다. 얼굴이 무척이나 붉은 것이 한 눈에 봐도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 선배님들. 절 찾으셨습니까?"

그 태연하고 능글한 한마디에 그들의 붉은 얼굴에 더욱이 타올랐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무슨 일이지?"

앞에 있는 크리스는 그 행동에 의문을 느낀 듯 종자들을 바라보았다.

"...크리스 님...!"

"너흰 아마... 로쉬아의 종자들이었지? 레오나르도에게는 무슨 일이지?"

크리스가 질문을 던진 순간, 또다른 발소리와 목소리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크리스 님, 이 녀석들! 이게 무슨 무례냐?!"

로쉬아였다. 로쉬아가 나타나 본인들의 종자를 붙잡기 시작했다. 직속 상관이 나타나자 그들 얼굴에 긴장이 돌았다.

"괜찮다. 종자들의 불만을 듣는 것또한 기사의 덕목이지."

그 아량에 긴장했던 종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리고 그 안심은,

"그래서 무슨 일이지?"

만용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저 레오나르도라는 후배가 무례가 지나쳐 그 건에 대해 문책하러 왔습니다."

이 종자 무리 중 제일 똑똑한 벡터가 나섰다. 이 무리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 중에서도 벡터는 화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무례가 지나치다?"

"예, 선배인 저희를 공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극상으로 저희를 공격하더군요."

그들은 증거로 옷을 들어 맞은 부위를 내보였다. 얼굴을 맞은 사람은 굳이 옷을 들지 않아도 멍이 훤히 보였다.

"...사실인가? 레오나르도?"

이렇게 나온다 이건가? 이건 너무...

<이득이네요.>

이득이었다.

"예, 저 부상은 제가 입힌 것이 맞습니다."

그 대답에 앞에 있는 종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극상은 기사단에서도 강하게 엄벌하는 죄목, 저 멍청한 평민이 어떤 처벌을 받을 정말 기대되었다.

"어째서지?"

"선배님들께서 크리스 님과 아리아스필 님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부르던 쾌재의 노래가 갑자기 불협화음으로 뒤바뀌었다.

"...날 모독했다고?"

"우리가 언제 그랬어?! 우리가 언제...!?"

"어제 분명 제 태도를 보고 미친 새끼라고 하셨죠?"

그 말에 떨떠름하긴 했지만 우선 종자들은 대답했다.

"그래! 했어! 하지만 그건 니가 하극상을...!"

"그리고 동시에 '크리스 님이 데리고 온 녀석이잖아. 미친 놈인 게 당연하지.'라고도 말씀하셨죠?"

그것도 사실이었다. 종자들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그들은 레오나르도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그건..."

"그 말은 절 종자로 고르신 크리스 님을 모독하는 발언이자 크리스 님의 안목을 신뢰하지 않는 불충한 언행이었습니다."

조금 과장한 것은 있었지만, 전부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말이었다. 그 증거로 저 종자들은 제대로 된 항변도 못 한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리아스필 님마저도 모욕하더군요."

"우리가 언제...!!"

"아리아스필 님을 존칭 없이 부른 것도 모자라, 제가 가문의 영애님을 유혹했고 넘어갔다고 말했습니다."

"..."

불현듯 그들이 얻어맞을 때,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아리아스필!! 그 가주님 딸 좀 꼬셨다고!! 뭐가 좀 되나 본데! 넌 평...]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제대로 사리분별도 못하고 나온 말이다. 하지만 언변의 싸움에선 그런 실언조차 패착이 될 수 있었다.

"선배로서 공경하기 이전에, 제 은인을, 가문의 영애를 욕보인 죄가 무겁다고 생각해 손이 먼저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설명에 종자들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레오와 그들 간의 화술의 격은 이미 10년은 넘게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손속이 너무 과하지 않나? 저들은 너의 선배이자 귀족이시란..."

로쉬아의 발언을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레오는 타이밍에 맞춰 말을 끊었다.

"그 이전에 저의 선배님들은 저에게 대련을 요청했습니다."

"대련...?"

"일종의 신고식 형태더군요. 한 명인 저를 상대로 네 명이 동시에 돌진, 무기로 준 검은 이미 금이 간 지 오래였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제 방에 그 부러진 검이 있으니 직접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게다가 굳이 언변이 없어도 상황만 놓고 봤을 때, 과실이 어느 쪽에 있을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이에 대해 손속이 덜하다면 덜하다고 생각되지, 과하다고는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이 생각과 행동이 옳지 못하다면 부디 정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로쉬아마저 성대가 멀쩡한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이게 다 사실인가? 로쉬아?"

"그게 저도 잘..."

"모른다면 더 큰 문제로군. 라인하르트의 기사가 일개 종자조차 관리 못 한다니 말이야."

변명은 필요없었다. 아니, 하면 제하드와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시키겠습니다!"

"노력하게나. 라인하르트는 실수가 반복되면 실수라 생각하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로쉬아는 큰 목청과 함께 최대한 반성하는 의지를 보였다. 동시에 철없는 종자들을 노려보며 이글거리는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눈가의 열기에 레오를 제외한 종자들의 낯빛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무례를 범해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를 마치고 로쉬아와 그의 종자들은 연무장을 나갔다. 종자들의 얼굴빛은 이미 잿빛을 넘어 흙빛으로 타버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너에겐 라인하르트의 치부만 보이게 되는군. 면목 없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너무 완벽했으면 너무 아득한 나머지 종자를 그만뒀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요."

"재밌는 농담이로군. 역시 농담 살해자라는 이명이 어울려."

...

.....

.....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어이어이... 내 농담을 들으면 반으로 갈라져 죽지. 부디 내 장.난.기를 깨우지 말라고... 큭큭...]

아니, 죽고 싶었다.

농담으로 자살할까.

<+--|-|--+>

EP.12 친구-1

냉정해지자. 아직 농담 살해자라는 이명은 그리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봐라. 아리아스필도...

"혹시 그럼 그것도 새로 개발한 농담 암살술이야...? 레오나르도...?"

"..."

...어디 근처에 예쁜 다리 없나? 낙사나 추락사하기 좋은 다리면 좋을 텐데.

"...뭐가요?"

이젠 부정할 수 없는 농담 살해자가 된 레오는 우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하는 거..."

"지금 하는 거요?"

"나한테 존댓말하는 거... 말이야."

그 말에 레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존댓말은 당연히 해야죠. 전 종자잖아요."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반말했잖아."

그거야...

"그때 전 종자가 아니었잖아요. 지금은 종자니까 예의를 갖춰야죠."

"그래도..."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다리와 손을 꼬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전생에도 잘 보이지 않던 행동에 레오의 의문이 증폭되었다.

"그걸 정하기 이전에, 레오나르도, 내가 부탁한 걸 먼저 보여줬으면 한다만?"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크리스가 자신의 부탁을 먼저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마나체련술을 시연하기로 했었지.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이때 레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리아스필의 표정에는 음영이 지어 있었다. 크리스에게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럼 우선..."

레오나르도는 웃옷을 벗으며 맨살을 들어내었다.

"갑자기 옷은 왜 벗나?"

"체련술은 피부가 노출될수록 좋습니다. 옷을 입는다고 효과가 극단적으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겠죠."

[난 또 농담 암살술 비기 1장, 노출 코미디인줄...]

으아아아, 아무 말도 안 들린다.

늙디 늙은 노친네가 지랄하는 건 아마 내가 피곤해서 들리는 환청일 것이다. 그럴 것이며 그래야만 했다.

"훌륭한 몸이로군. 13살에 이 정도로 단련하다니..."

몸에 대한 칭찬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레오 자신도 육체에 있어서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몸에 있는 단단한 근육과 아물어있는 흉터들은 일면으로나마 저 소년의 수련들을 시각화시키고 있었다.

"...읏..."

어째서인지 아리아스필은 정면이 아닌, 눈으로 조금씩 힐끗거리며 레오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확실하고 명확히 근육과 속살을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건 말건 레오는 본인 주변의 마나에 감각을 집중시키는데 바빴지만 말이다.

"후..."

숨을 내쉼과 동시에 레오는 마나체련술을 시전했다.

[오, 실력 좋아졌는데. 이게 바로 농담 암살가의 비술, 마나체련술...]

<진짜 죽여버립니다.>

지랄과 농담과는 별개로 레오의 수련 실력은 한 층 더 성장해있었다.

쪼개진 마나 입자도 한 층 고와졌고, 체련을 통해 피부의 기공을 여는 것도 더 능숙해졌다.

"...이런...말도 안 되는..."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크리스는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턱에 힘을 주고 싶어도 턱근육은 마치 마비라도 된 채 중력에 이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간신히 근육의 마비를 풀고 크리스는 레오에게 달려가 물었다.

"예?"

너무나 흥분한 반응에, 시연했던 레오가 오히려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아까 그 기술 말이다!! 마나를 쪼개고 피부의 기공에 입자를 집어넣는 방식 말이야!!"

저렇게 과하게 흥분한 건, 붉은 눈의 검은색 와이번을 봤을 때와 오드아이인 마법사를 만났을 때뿐이었다.

"우선...! 우선... 진정하시고...!"

"진정?! 아직 견문이 좁은지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모르나보군!!"

속 알맹이는 20대 중반을 넘긴지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우선은 알겠다고 말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라고 말하기엔 눈앞의 흥분한 중년 여성이 너무나 무서웠다.

"크...크리스 님, 우선 진정하시고..."

"...미...미안하군. 으흠..."

아리아스필의 말에 간신히 이성의 줄을 붙잡은 크리스는 헛기침을 통해 자신을 진정시켰다.

"...레오나르도, 혹시 기본적인 마나호흡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예, 폐에 마나가 섞인 공기를 넣어 체내에 입자를 부착시키는 방식이죠."

라인하르트의 마나수련법도 호흡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라인하르트 가문의 호흡법은 가장 일품에 위치해있었지.

"그렇지. 우리는 마나를 단련시키는 데는 호흡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

좀 많이 과장적인 말투긴 했지만, 그에 대한 단점이 얼추 감이 잡혔다.

""마나호흡을 하는 시간에는 육체 단련을 할 수가 없죠.(없지.)""

동시에 같은 말, 같은 내용을 말하자 현자가 감탄했다.

[의외로 죽이 잘 맞는다. 이명을 가진 녀석들은 뭔가 통하는 게 있나봐.]

현명하다 정평 난 현자가 한 몰상식한 말은 무시한 채, 레오는 크리스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 마나 호흡을 하는 시간에는 육체 단련을 할 수가 없지. 동시에 하면 호흡도 어그러지고, 육체 단련도 어설퍼져."

호흡법과 육체 단련을 접목해보려는 연구는 뜨거운 감자로서, 레오가 태어나기 전부터 진행되던 연구였다.

하지만 섬세함이 중요시되는 마나호흡법에 육체 단련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마나 호흡법의 기본과 근육 사용의 호흡은 엄연히 형태와 박자가 달랐다.

숨을 들이쉬는 양부터 참는 시간까지 전부 미묘하게 다르며 자세에 따라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마나 호흡을 집중하면, 육체가 빠르게 지쳐 체력훈련의 의미가 없어지고.

체력훈련에 중점을 두면, 마나 호흡이 불규칙해져 마나 흡수량도 줄며,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효율성을 위해 마나호흡법과 육체 단련을 별도로 진행해왔다.

"하지만 그건 라인하르트 특유의 체질과 단련법으로 극복했잖습니까?"

라인하르트는 용사의 피와 영혼이 흐르는 체질, 마나를 흡수시키는 것만으로도 육체 단련 부럽지 않게 몸을 성장시킬 수 있었고, 300년 동안 이어진 전통 단련법은 통상 수련법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확실히 그렇지. 하지만... 잠깐."

그 순간, 잘 이어지던 흐름이 끊겼다.

"...무슨 문제..."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체질과 수련법에 관한 내용은 그리 쉽게 얻을 정보가 아닐 텐데."

아차 싶었다. 전생에 자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자신은 이 사실을 알 수도 없었고, 알아서도 안 됐다.

"그건... 저도 당연히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그러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만 짧은 용병 생활을 하면서 얻은 소문을 들었을 뿐이죠. 확신이 들었던 건 아리아스필 님이 제가 알려주신 수련법을 완벽히 소화해냈을 때죠."

말을 짜맞출 필요가 있었다.

"흠... 역시 이또한 무인의 운명이란 말인가."

자연스럽게 말은 나오지만, 저런 말을 들으니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는 것 같다. 참아야 한다.

"어쨌든 그런 라인하르트의 비전에도 그런 아쉬운 점이 있다는 거다. 총체적인 시간으로 육체 단련 시간과 마나 수련 시간이 나뉜다는 점이지."

이제야 전체적인 의미가 이해가 되었다.

"...마나체련법은 동시에 할 수 있죠."

"그게 경이로운 점이지! 결과적으로 시간 단축도 가능하고,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마나호흡법이나 육체단련법보다도 질 자체가 올라갈 것이다!"

확실히 혁명적이긴 했다.

레오 본인이 직접 만들어낸 거긴 했으나, 이 업적의 위상은 솔직히 당시에는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가르쳐서 그래. 알지?]

<압니다.>

[알면 마나체련법에 내 이름도 넣어. 스승 명령이다.]

<진심이십니까? 크리스 님도 계신데?>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 암살자가 거 센스하고는.]

농담으로 죽여버릴까.

"내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수련법은 가주님께 꼭 건의드리지. 아마 추진만 잘 된다면 마나수련법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거야! 흑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흑암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무게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 당장이라도 이 내용을 보고하겠네!!"

"아... 네..."

[온도 차가 너무 심한데.]

현자님,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는 암흑 속 그림자가 사라지듯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아...네...뭐...그렇게 됐네요."

덩그러니 남은 아리아스필에게 레오는 그렇게 말했다.

"옷..."

"네?"

"옷부터 입어줘..."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상의를 주워주며 내밀어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내밀어준 옷을 주섬주섬 받아입으며 레오는 감사를 표했다. 어리더라도 이성의 몸을, 그것도 흉터가 제법 있는 몸을 보는 건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해... 그거..."

"뭘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태연한 레오의 눈동자에 아리아스필의 얼굴이 비쳐졌다.

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슬퍼보였다.

***

처음 레오나르도가 가문으로 오겠다고 했을 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아스필은 펄쩍거리며 뛸 듯이 기뻤다.

'레오나르도가 우리 집에 온다고? 내일? 당장?'

생각만 해도 인형 같은 그녀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그려졌다.

'매일 이렇게 같이 수련할 수 있어. 매일 같이 얘기하고, 같이 대련하고, 같이 웃을 수 있어.'

그뿐이었을까, 원할 때면 언제든 레오나르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목소리도, 검술도, 그리고... 따뜻한 손길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헤헤..."

소녀 같은 웃음, 여태까지 한 번도 짓지 않은 웃음과 함께 소녀는 다음날을 고대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오렌지가 먹고 싶군요.

"푸아칵하하하하하...!! 아히!! 아히! 이히힉!! 꼬르륵..."

갑자기 레오나르도가 알프레드를 기절시킨 뒤로 무언가 꼬인 느낌이 들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쓰러진 알프레드도 걱정되었다.

아버지 나이의 두 배는 족히 넘는데도 항상 건강한 모습을 보여줬던 알프레드가 쓰러졌으니, 마음으론 걱정이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 이상으로 걱정된 것은...

"어떡하죠!? 레오나르도가...! 레오나르도가...!"

심문실에 들어간 레오나르도였다.

심문실에 들어가 안 나온 지 2시간이나 지났다.

만약 이상한 고문 같은 걸 받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문득 할아버지나 알프레드가 나쁜 짓을 하면 심문실의 괴물에게 잡아먹힌다는 이야기도 떠오른 참이었다.

레오나르도라면 그런 괴물쯤은 멋지게 해치우겠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나르도는 풀려났다.

그렇지만

'왜 본가가 아닌, 먼 별채로 가지?'

레오나르도와의 생활은 그리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같은 본가가 아닌 별채로 가는 것도 불만이었고,

레오나르도가 제하드 같은 호위기사가 아닌 단순한 종자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래선 매일매일 보고 싶어도 보기가 어렵지 않은가.

무엇보다.

"아리아스필 님."

"...존댓말은 당연히 해야죠. 전 종자잖아요."

저 존대는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왜 존댓말하지...?'

오자마자 심문실에 잡혀들어온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보상해줄 수 있었다.

아니면 다른 종자들이 괴롭힌 것 때문일까?

그런 거라면 그깟 종자 놈들 따위 자르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설마 내가?

내가 싫은 것일까?

"...왜 존댓말 하는 거야?"

정말 그거라면, 어떡해야지?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린 친구 아니였어...?"

처음 생긴 친구니까, 처음 생긴 친구이기에

제대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EP.13 친구-2

친구

흔히 가깝게 오래 지낸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 다른 말로는 '동무', '벗', '친우' 등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쟤가 왜 저래?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를 친구라고 말하는...>

아리아스필은 친구라는 단어를 쉽사리 꺼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몇 년을 같이 다닌 전생의 본인에게조차 말이다.

[...]

침묵, 1초의 찰나마다 침묵이 이어졌다. 현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노려보기만을 반복했다.

<현자님? 왜 그런 눈으로...?>

[......]

인간적인 혐오를 넘어선 무언가, 경멸과 배척의 눈빛이 현자의 눈동자엔 스며들어있었다.

[알아서 해.]

단호한 어조.

<예?>

그 어조에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워진다.

[알아서 하라고. 뒤지기 싫으면.]

짐승과 같은 미물에게 쓰는 명령, 그런 어투에 레오도 자연히 눈을 정면으로 돌리게 되었다.

"왜 존댓말 하냐고... 왜...?"

눈앞에 있는 소녀는 원래의 차가운 인형과 같은 기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평소 레오가 알던 아리아스필과는 괴리감까지 느껴져 인지하는 것마저 조화롭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내가 친구가..."

"아니! 아니! 잠시만요!"

"또 존댓말! 역시 내가 싫...!"

깊게 숨을 들이쉰다. 속사포보다는 느리게, 바람보다는 빠르게 말을 내보내야했으니까.

"싫은...!"

"잠깐 진정 좀 해봐! 아리아스필!"

일단 가장 급한 문제는 존댓말이었다. 존댓말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적으로는 존댓말부터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응."

갑자기 존댓말을 멈추자 그녀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뭐지? 라인하르트의 존대 체계가 심문실에 있는 사이 그렇게 역변했나?

"...우선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보자. 알았지?"

"...알았어."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이제부턴 차례로 설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우선 내가 너에게 존댓말하는 이유는 내 직급이 종자이기 때문이야."

"...종자면 반말하면 안 돼?"

"안 되지! 여태까지 네가 만났던 종자들을 봐봐. 반말이나 격 없는 태도로 굴었던 사람이 있어?"

대답은 들을 것도 없이 없을 것이다.

그런 미친 종자가 있다면 바로 직급에서 퇴출되거나 인생에서 퇴출될테니까.

이 정도 말이면 아리아스필도 납득할...

"그래서?"

"...어어?"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니...? 당연히 종자니까 반말은 하면..."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선언했다.

"넌 달라."

"...예? 아니, 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선언에 존댓말이 헛나와 버렸다. 급하게 정정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또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다.

"넌 다르다고."

"아니, 뭐가 그렇게 다른..."

"넌 그런 녀석들하고 달라. 너는 더 강해. 더 멋있어. 더 특별해."

그녀의 눈에는 맹목적인 확신이 있었다.

만약 전생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좀 감동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린 소녀가 저러니... 뭐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넌 반말해도 돼. 적어도 나한테만은 존댓말 쓰지 마."

결국, 대화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존대하면 오히려 좋아해야 맞는 거 아닌가?

<현자님...?>

현자는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저렇게 말하는 게 짜증스러워도 역시 도와주긴 하는...

주머니에서 나온 건 산을 표현한 수화였다.

왜 저런 인간이 지옥에 안 떨어진 걸까?

하긴 자신이 악마더라도 지옥에 저런 노인네를 받는 건 목숨 걸고 막을 거다.

적당히 나쁘게 산지옥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나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군.'

생각을 가다듬는다. 여기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것과 아리아스필이 원하는 것은 확실히 구분짓는다.

생각이 정리가 되자 레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네 의견은 존중할게."

우선 한발 물러나고,

"그럼...!"

"하지만 나도 내 입장을 존중받고 싶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너의 입장...?"

"나도 반말하는 건 편해. 동갑한테는 그게 익숙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종자로서 있을 수 없어."

"그건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그게 싫다는 거야."

이건 짜놓은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네가 말 한마디 하면... 그래, 종자보단 나은 직급을 꿰찰 수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래선 네 곁에 내가 있는 걸 누가 인정하겠어?"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회귀 후, 처음 아리아스필과의 결투에서 승기를 잡았을 때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그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너한테 반말해도 괜찮을 입장이 될 때까지."

"...어?"

하지만 이 정도 여지는 남겨줘도 되겠지.

"아직 난 종자야. 하지만 거기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

그게 여태까지의, 평생의 목표니까

"난 계속 올라갈 거야. 너랑 동등하게 마주볼 때까지."

의심할 것도 없는 진심이기에

"그러니까 부탁할게. 기다려줘."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그렇구나...!"

진심이 먹힌 건지, 아리아스필은 이해한 기색을 보였다.

"...근데...! 그러니까...! 그니까 레오나...!"

...이해한 거 맞지? 왜 이렇게 말을 못 하지? 얼굴빛은 왜 저렇게 붉어?

"읏...! 미...! 미안!! 일이 있어서 가볼게!"

"아... 네, 조심히 가세요. 아리아스필 님."

어쨌든 협상이 성사됐으니 상관없으려나. 레오는 급히 뛰어가는 아리아스필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보냈다.

"후... 그래도 잘 끝났네."

[...레오나르도.]

여태까지 돕지 않고 방관만 하던 늙은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양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넌 도대체 뭐가 문제냐? 대가리 쪽이 문제냐? 아니면 하반신 쪽이 문제냐? 어?! 어느 쪽이야?!]

<아 그건...>

주머니에 있을텐데, 너무 깊숙이 넣어서... 아, 여깄구나.

받은 건 돌려주는게 사제 간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