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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드드드드!

방어막이 연신 위태롭게 흔들렸다.

직접 타격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쾅-

두 사람의 주먹이 부딪치면서 나는 충격파만으로 피해를 받은 것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믿을 수가 없군."

협회 이사 8인.

두 번의 대격변을 거치면서 온갖 수라장을 버텨내고 협회를 안정화시 킨 이들이다.

모두 각성을 한 헌터 출신은 아니 지만.

공통적으로 실력자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 보통이 아니다."

"전민철이라고 했나요. 서류에는 분명 각성한 지 1년도 채 안 되었 다고 했는데."

이사들은 연신 미리 준비된 자료와 대련장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

S급 심사의 최종 단계.

현직 S급 헌터와의 대련.

보통은 협회에서 나오는 S급 헌터 가 신입을 '지도'해주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수십 합을 주고받은 두 사람.

누가 승기를 쥐고 있는지는 명확했 다.

전민철.

막 s급에 발을 디디려는 후배가 알파 세대 헌터를 압도했다.

퍼어엉!

한껏 압축된 공기가 터지면서 굉음 이 울려 퍼졌다.

순간 이명이 감돌면서 몸의 중심이 흔들렸지만, 김보성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벼랑 끝에 몰린 싸움.

후배와 주먹을 맞댄다는 무른 감정 은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이거 참 재밌네요."

전민철.

괴물 같은 헌터 후배는 웃음을 입 에 걸었다.

싸움 자체를 즐기는 모습.

김보성이 3수를 앞서서 생각하면, 그보다 2수를 더 내다보았다.

그의 특성, 전신 흉기.

팔을 쭉 뻗으면 창의 효과를.

주먹으로 후려치면 망치를 휘두르 는 것처럼 힘으로 짓누른다.

김보성은 수많은 실전을 통해 특성 의 효과를 120% 발휘할 수 있게끔 전투 스타일을 갈고닦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저와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실 줄 이야."

"동감입니다. 후배님."

민철과 김보성은 서로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웃고 있다.

격렬한 싸움 속에서.

몸뚱이에 수많은 상흔이 새겨졌음 에도, 눈동자가 반달로 휘어졌다.

[다크 스타 - 일각수의 뿔창]

기다란 창이 민철의 손에 나타났 다.

검, 도, 창, 쇠사슬 등.

민철의 무기는 쉴 새 없이 여러 형태로 변했다.

더 놀라운 건 민철이 수십 개나 되는 무기를 모두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다.

민철은 연환창식을 펼쳤다.

패애행-!

강기가 일각수의 뿔창과 만나 회전 에 회전을 거듭하여 위력을 빠르게 상승시켰다.

김보성은 양팔을 쭉 뻗었다.

유형화된 오러가 팔 전체를 푸르게 물들였다.

길이가 짧은 단창을 양손에 쥔 형 태.

따다다다다당!

프라이팬으로 콩을 볶듯, 요란한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핏방울이 허공에 솟구친다.

뿔창 끝에 달린 날카로운 촉이 김 보성의 피부를 조금씩 찢어내면서 상처를 냈다.

붉은 실선이 팔뚝에 쭉 그어졌다.

상흔이 크게 벌어졌다.

대신 김보성은 창의 거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당랑권을 떠올리게 하는 각진 손.

창을 내지르면서 훤히 비어있는 민

철의 가슴팍을 향해 빠르게 내질렀 다.

[일각수의 뿔창 一 제왕의 검]

상처를 감수하면서 접근했어도. 능숙하게 무기를 바꾸면서 김보성

의 공격을 받아쳤다.

민철은 반격할 뿐 아니라 한 발

더 내디뎠다.

'간격'의 확장.

동시에 걸음에 힘을 주면서 천마군

림보를 펼쳤다.

다시금 붉은 기운이 김보성의 전신 을 옥죄였고, 움직임도 둔해졌다.

"하아압!"

김보성은 기합을 지르면서 지면을 걷어찼다.

대련장 일부가 깨어지고 바윗덩어 리가 정면을 가득 채웠다.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제왕검 형.

남궁세가의 절전 무공은 큼지막한 바위를 순식간에 수십 조각으로 잘 라냈다.

김보성은 뒤로 물러나면서 기껏 좁

혔던 거리를 다시 벌렸다.

"이런 상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 습니다."

"저도 덕분에 즐기는걸요."

두 사람은 진심이었다.

다크 스타.

그리고 전신 흉기.

둘 다 '여러 형태'의 공격을 상황 에 따라 전개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상대의 수를 읽어내고 그 뒤를 예 측해야 하는 '수 싸움'이 부각되었

다.

한 이사가 중얼거렸다.

"이 승부. 얼마 남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대등하게 공방을 주 고받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민철이 김보성을 완 전히 압도했다.

"이 정도라면 바로 영웅의 반열에 도전장을 내밀어도 되지 않을까."

다른 이사가 그 말에 대꾸했다.

S급의 위.

투장 데이모스와의 싸움에서 동귀 어진을 한 인류의 용사를 제외하면 모든 헌터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12명의 영웅.

각성 1년 차인 헌터와 12영웅을 같은 선에 놓는 날이 올 줄이야.

흥분과 경악.

이사들은 두 가지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대련장을 주시했다.

* * *

재밌었다.

과연 S급 헌터는 달랐다.

탑에서도 이만큼 재밌는 싸움을 겪 어본 적은 없었다.

'다들 전공이 다르잖아.'

김보성의 전투 능력은 그렇게 대단 하지는 않았다.

지구의 헌터들을 기준으로 하면 충 분히 강자였지만, 탑에 비교하면 조 금 센 정도다.

7층에서 마주했던 존재, 레지갈만 해도 김보성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레지갈도 이렇게까지 나를 달아오

르게 하지는 못했다.

'이게 싸움이지.'

피가 튀고 살이 맞부딪치는 전투.

서로의 수를 읽어내려고 머리를 굴 리고, 반면에 육신은 극한까지 반응 속도를 올린다.

이렇게 싸워본 적이 얼마던가.

히죽.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저쪽은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것 같지만 말이야.'

국내 S급 헌터 랭킹 2위.

걸어 다니는 흉기라고 불리는 헌 터, 김보성의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치명상만 피한 채로 수십 합을 나 누었다.

전신에 새겨진 찰과상.

쭉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서 빈혈이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군요."

김보성은 흐트러짐 없이 말했다.

정신력 하나 만큼은 발군이다.

"이쪽이야말로. 역시 s급 헌터는 다른 것 같습니다."

"곧 S급 헌터가 되실 분인데요. 겸 손하실 것 없습니다."

나는 김보성과 덕담을 주고받았다.

대련 중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

특히, 한쪽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 었다.

평범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가 싸움의 '끝'을 내심 짐작하 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고.'

완벽하게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긴지천쇄공을 운용하면 거리를 벌 린 채로 중거리 공격 위주로 공략해 서 쉽게 제압할 수 있었고.

겁화의 권능이나 불사의 군세를 불 러내면 더욱 간단하게 이겼을 것이 다.

하지만.

모든 수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이미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고, 심사위원으로 나선 이사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마무리만 화려하게 하면 된다는

거지.'

평범한 대련이라면 이미 종료 판정 이 나왔을 상황.

하지만 대련을 지켜보는 그 누구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다크 스타를 문신 형태로 되 돌렸다.

"이게 최후의 공격이 될 겁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과연 내가 버텨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보성은 양쪽 다리를 크게 벌리면 서 땅바닥에 몸을 고정시켰다.

손을 X자로 교차하면서 신체를 방

어 형태로 만들고, 마나를 불어넣어 서 반원 형태로 몸을 보호했다.

흡사 거북이 같은 모습이다.

[다크 스타 - 칠성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

사용 가능한 무공 중 가장 강력한 것을 펼쳐서 대련을 끝내는 것이다.

파츠츠츠!

시커먼 검강이 정면을 검게 물들였 다.

165 화

10m까지 뻗어 나온 흑색 검강이 김보성의 목덜미에서 멈춰 섰다.

살의를 담지 않은 공격.

김보성도 전혀 방어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

나는 검을 거두었다.

"이 정도면 대련으로는 충분한 것 같은데요."

대련의 끝을 정하는 건 심사위원의 재량.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이, 이것으로 S급 심사 대련을 마 치 겠습니 다.

인사부 김다솜 부장의 목소리가 시 험장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김보성이 다가왔다.

상처투성이가 된 전신.

대부분 얕은 찰과상이지만, 피가 새어 나와서 피칠갑을 한 혈인이 되

어 있었다.

하얀 무복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 다.

' 아쉽군.'

김보성이 조금 더 강했더라면.

진짜 '전력'을 다해서 부딪쳤을지 도 모른다.

'여기서 조금 더 흥을 올렸다가는 흉한 꼴을 보였겠지.'

내가 아니라, 김보성이 말이다.

떨리고 있는 팔과 다리.

체력적으로나 지닌 마력이나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다.

대련을 멈춘 것은 선배에 대한 예 의, 그리고 현생에서 두 번째로 무 인의 싸움을 겪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첫 번째는 정성희였다.

"전민철 헌터. 고맙습니다."

김보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협회 이사이자 S급 헌터인 존재가 허리를 굽힌 것이다.

' 어?'

대련 내내 김보성의 수를 읽어냈지 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이렇게 나오면 기껏 배려한 의미 가 없어지잖아.'

무대로 올라오고 나서 처음으로 당 황했다.

"선배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오늘 후배님 덕에 더 높은 경지를 엿보았습니다."

이 아저씨도 어지간히 투쟁을 좋아 하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이런 싸움은 헌터들끼리의 대련에 서 흔하지 않거든.'

헌터들은 각성하면서 생긴 이능력

을 활용하면서 괴물들과 싸운다.

더 효율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

상대의 의도를 읽어내기보다는 자 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주도권을 가 져오는 데 익숙했다.

수를 읽는 싸움은 무인, 혹은 [귀 족] 급 이상인 고위 악마들의 싸움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둘 수는 없 지.'

나는 김보성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면 제가 난감합니다. 선배님."

"아, 그렇군요. 후배님을 난감하게 하면 곤란하지요."

김보성은 내 말에 담긴 뜻을 이해 하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대련 고마웠습니다."

손을 내밀었다.

격전 중에 입은 부상이 그대로 남 은 손.

여기저기에 딱지가 지고 피가 묻어 서 얼룩져 있었다.

"저야말로 즐거웠습니다."

그 손을 보면서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김보성의 손을 마주 잡았다.

米 #: 氷

S급 심사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 다.

나는 요원의 안내를 받아 시험장 옆 별관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세미나실.

무대 맞은편에는 좌석 수백 개가 비치되었는데, 각종 언론사에서 나

온 기자들로 가득 차버렸다.

요원은 별관 대기실까지 안내한 뒤 몸을 슬쩍 뺐다.

"S급 임명식은 30분 뒤에 진행됩 니다."

"벌써 심사가 끝난 건가요?"

"결과는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생 각합니다."

요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물러났 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엘리가 나 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평소랑 좀 다른데. 진심이야?"

"빨리 옷 갈아입어야 해요. 메이크 업에 30분이면 촉박하단 말이에요."

엘리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 른 말을 했다.

장난 좀 치려고 했더니 안 넘어오 네.

"메이크업을 꼭 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죠. 국내 7번째 S급 헌터이 자 우리 용산지부의 간판스타를 맨 얼굴로 내보낼 수는 없답니다."

"메이크업해줄 사람도 없잖아."

"호호, 간단한 거는 제가 다 할 줄

알아요."

하여간 일 처리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빠져나갈 구멍 하나를 안 주 는구먼.

"민철 헌터."

"응?"

"이번 S급 심사. 기회가 될지도 모 른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시나 요?"

"물론이지."

S급 헌터가 받는 수많은 혜택과 명성.

그런 건 관심사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원 정대를 언급해서 협회의 지지를 이 끌어 내는 것이 목표였다.

"관심사를 끌어낼 준비가 되었나 해서요."

"나름대로."

침식된 땅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 는 [가이아 포메.

아직까지는 그 패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제품이라고 하니 100% 효과가 있다고 볼 수도 없고 말이야.'

불완전한 패에 모든 걸 맡기기보다 는 확실한 걸 준비해야 한다.

S급 임명식은 미리 준비한 패가 정답인지 확인하는 무대였다.

엘리한테 몸을 맡긴 채 임명식을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 갔다.

똑똑-.

"전민철 헌터. 모시러 왔습니다."

문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간이 됐나 보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 났다.

30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던가.

엘리는 볼터치, 립스틱 같은 도구 로 내 얼굴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줬다.

"힝. 아직 좀 모자라는데."

"사람들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민철 헌터가 받기 싫은 건 아니고 요?"

"아, 하하하. 설마 네가 해주는 게 싫을 리 있겠어."

정곡을 찔려서 빠르게 변명했다.

엘리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쭉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드리는 척할게요."

입술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못 미더워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들 었나 보다.

대기실을 나와 별관 옆문으로 들어 갔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좌측은 단상 이, 오른쪽으로는 수많은 기자들이 보였다.

'협회 이사들이 다 있군.'

심사를 지켜봤던 협회 이사들은 하 나도 빠지지 않고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헌터 협회 이사.

하나하나가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들이다.

'UN으로 치면 상임이사국 대표들 이 모여 있는 거니까.'

이곳이 협회 본부가 있는 한국이라 서 모인 걸까.

아니면 S급 심사가 그만큼 중요한 것인가.

어느 쪽이든 대단한 인물들이 한자 리에 모인 것은 사실이다.

-이제부터 협회 공인 S급 헌터 임

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는 전과 마찬가지로 김다솜 부장이었다.

단상 아래에는 보안부 부장 이원택 이 팔짱을 낀 채로 주위를 살펴보는 중이다.

협회에서 구면인 사람들을 여기서 다 보는구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전민철 헌터. 단상 앞으로.

내 차례가 금방 왔다.

발에 힘을 주어 단상 위로 올라갔 다.

찰칵! 찰칵!

연속적으로 터지는 셔터 소리.

압도의 권능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등 뒤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촬영을 할 때 번쩍이는 플래시.

사진기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등 돌아 있는데도 눈이 어지러울 만큼 마구 번쩍였다.

'높이 올라갈수록 남들의 이목을 끄는 법이지.'

귀찮을 뿐.

부담되지는 않았다.

나는 태연하게 임명식이 진행되는

단상 중앙까지 걸어갔다.

임명식 담당 이사는 아까 주먹을 맞댔던 김보성이었다.

"국내에서 7번째 S급 헌터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김보성은 표창장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협회 문장이 새겨진 표창장을 받아 서 옆구리에 끼웠다.

S급 헌터라.

머릿속으로는 분명 '대단하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크게 와닿 지 않았다.

내 정신은 현생과 전생이 혼재된 상태.

지구인 '전민철'에게는 엄청난 위 업이지만, 투장 데이모스에게는 큰 가치가 없는 훈장이었다.

"특종이야."

"설마 했는데 정말로 S급 심사를 통과하다니!"

"국내에서는 5년 만인가?"

"전 세계로 놓고 봐도 6개월 만이 지."

"어서 한 장이라도 더 찍어!"

기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

에 아른거린다.

딴에는 숨죽여서 말하는 거겠지만, 그 소리가 수백이 되면 작지 않았 다.

"S급 심사를 통과하셨는데도 담담 하시군요."

"할 수 있었으니까요."

"향후 민철 헌터의 헌터 활동 목표 는 무엇입니까?"

짧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순간.

장내에 있는 모든 협회 관련자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내 말을 기다리

고 있다.

"세계평화요."

으에에엑!

말하고도 부끄러워서 온몸에 두드 러기가 났다.

'참아야 한다.'

닭살 돋는 말에 구역질이 날 것 같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 다.

어린애들이나 생각할 만한 꿈.

모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오오. 역시 숭고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김보성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정말로 내 말을 믿는 기색으 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로 납득하지 마!

관심을 끌려고 내뱉은 말에 진지하 게 반응하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김보성의 호응은 시기적절했다.

장난 같은 말인데도, 사람들이 진 지하게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 다.

등 뒤에는 무수한 언론이 내 목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앞에는 협회의 방향성을 쥐고 있는 이사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그럼 세계평화를 위해 생각해둔 활동 계획이 있으십니까?"

마침 김보성이 가려운 곳을 빠르게 긁어줬다.

후욱.

속으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옛 북한의 영토. 로스트 랜드를 복원할 겁니다."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잠시 고요해 졌다.

기자들은 물론, 협회 이사들도 두 눈을 깜빡이며 조금 전 발언을 되뇌 었다.

잠시 후.

"로스트 랜드 복원?!"

"원정대를 꾸린다는 거야?"

"전민철 헌터의 로스트 랜드 행에 대해 알아봐!"

"성간 연합에도 어서 연락해!"

장내가 전보다 두 배 이상 떠들썩 해졌다.

* *

S급 임명식은 소란스러운 가운데 마무리되 었다.

임명식 후, 기자들이 끈덕지게 따 라붙었지만 엘리 덕분에 별일 없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휴. 덕분에 살았어."

"그러게 누가 거기서 폭탄 발언을 하래요?!"

"미안."

요즘 엘리한테 자주 사과하는 것

같다.

느낌이 묘한데.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잘 들었어요. 세계평화."

푸훗.

엘리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주 즐거워 보인다?"

"S급 헌터인 전민철 헌터님의 고귀 한 목표를 들었는데 왜 즐겁겠어 요?"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짠 건데!

"웃음이나 지우고 그런 이야기 해

라."

"어머나."

엘리는 뒤늦게 손으로 입을 가렸 다.

지극히 작위적인 움직임. 일부러 약 올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말씀은 잘하셨어요."

"세계평화 이야기 말하는 거야?"

"덕분에 원정대를 꾸릴 수 있는 명 분이 주어졌답니다."

"판 잘 깔아놨으니까 준비나 꼼꼼 하게 해줘."

"물론이죠. 세계평화가 꿈인 S급

헌터님의 말■씀인데."

으이구.

계속 놀려대니 머리가 아팠다.

"가이아 포머 대여 문제는 어떻게 됐어?"

로스트 랜드 복구의 명분은 가이아 포머다.

영국 로젠버그 가문에서 개발한 침 식 분리 기계.

나는 심사를 준비하는 동안 모든 권한을 엘리에게 주고 제라드 아저 씨와 조율하는 부분을 맡겼다.

"호호. 2주 뒤에는 한국에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빠르기도 하네."

"제라드라는 분이 가문 내에서 영 향력이 꽤 크신 것 같더라고요."

마냥 사람만 좋아 보이는 아저씨였 는데.

생각보다 거물이었구나.

"내가 나서야 될 일이 있으면 말해 줘."

"맡겨만 주세요."

엘리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166 화

S급 임명식에서 내뱉은 말은 일파 만파 퍼져나갔다.

로스트 랜드 원정.

연례행사처럼 매년 진행되는 괴물 소탕 작전이다.

침식된 땅이 더 늘지 않게끔 유지

하는 행위, 제초 작업하고 똑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내 이름으로 추진 중인 원 정은 조금 달랐다.

"침식된 땅을 되돌릴 가능성이 있 다는 거죠!"

성간 연합 용산 지부.

맨 위층, 지부장 사무실에서 마르 탄이 열변을 토했다.

"원정대를 꾸려달라고 요청한 건 나인데, 어째 네가 더 의욕적인 것 같다?"

"당연한 일이죠. 상인은 절대로 기

회를 놓치지 않는 법입니다."

"기회... 인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 리에 앉았다.

제2차 로스트 랜드 원정대.

한 해에 두 번이나 로스트 랜드 원정이 이루어지는 적은 거의 없었 다.

아무리 잘해도 현상 유지가 최대.

한 번 진행하면 엄청난 물자와 자 금이 소모되었다.

반면에 원정대를 꾸린 효과는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이니, 자

주 진행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지부장.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거 아닌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소모비용은 크고 위험도 있지. 반

면에 돌아오는 이득은 적어."

가이아 포머는 시제품이다.

게이트와 융합된 땅을 원래대로 돌 릴 수 있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당연히 알고 있습죠. 제가 누구라 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땅딸보 드워프."

"크흠. 전 성간 연합의 지부장입니 다."

"아. 그래. 돈에 미친 귀신들."

"...그러지 마시고요. 하여간 이 번 일은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 한 겁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성간 연합.

손해 볼 짓은 절대로 보지 않는 다중차원 우주 최고의 상인 집단이 다.

'얘도 호구처럼 보여도 사실은 대 단한 녀석이었지.'

잊고 있었다.

탑이 있는 용산지부의 지부장.

용담호혈, 여러 차원의 시선이 집 중된 뜨거운 자리다.

성간 연합의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 치고 용산지부에 눌러앉았다는 건,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 다.

"투자의 근거나 들어보자."

"먼저는 우리의 자유 용병님입니 다."

마르탄은 뭉툭한 엄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 나?"

"저번에 벌이신 기행 덕에 정의 덕 후 이미지가 붙으셨거든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이군."

쳇.

나는 혀를 찼다.

전생은 마왕님인 내가 환생 후에는 정의 덕후?

...말도 안 되는 농담이군.

"농담 아닙니다? 이번에 민철 헌터 의 이름으로 각 단체에서 후원도 들 어왔고요."

"웬 후원."

"목성이나 두강, 그 외에도 여러 대기업들이 이번 원정 물품들을 지 원해주기로 했습니다."

"기업들이 언제부터 자선사업을 벌 였나?"

"민철 헌터라는 브랜드가 그만큼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마르탄은 광고 기획서를 내밀었다.

의류, 음료, 제약 등.

여러 분야에서 내가 광고 모델로 나서주기를 희망했다.

"본인의 가치를 좀 아시겠습니까?"

"어, 응"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터넷 기사가 나와서 유명해진 줄 은 알았지만, 기업들까지 적극적으 로 나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일단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이유 도 들어보자."

"당연히 가이아 포머죠."

"시제품이라서 성공을 안 할 수도 있다니깐."

"성공하면 더 좋은 거죠."

땅과 게이트의 융합 상태를 원래대 로 돌릴 수 있는 기계.

가이아 포머는 이미 상층부 내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몇 개 국가들이 A급 이상 헌터들을 동원 했으니, 이상 징후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이번 원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 습니다."

"그럼 가이아 포머가 있든 말든 상 관없잖아."

"아니죠. 거기서 고토 복원까지 성 공하면 시너지가 팍! 터지는 겁니 다."

원정대의 규모가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커졌다.

마르탄이 뒤에서 언론 매체를 동원 하고 재계 임원들과 접촉해서 만든 결과물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군벌과 접촉할 기회도 늘어난다.'

개성 인근.

그리고 황해도를 주름잡고 있는 북 한 군벌.

대규모 헌터 집단이 군벌의 영역 근처에서 움직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을 할 것이다.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겠 어.'

흐흐흐.

입 끝부분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이게 민철 헌터께서 원하시는 그 림 아니었습니까?"

"너도 콩고물 좀 먹고 말이지."

"상인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

는 법이죠."

부정은 안 하네.

마르탄이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에 일이 한결 수월하게 풀려나갔다.

역시 성간 연합의 지부장이라고 해 야 할까.

'나하고는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전생, 투장 데이모스 때도 명령을 내리는 '왕'의 입장이었다.

멀리 바라보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그 아래에 유능한 수하들이 있어야 가리킨 방향으로 원활하게 나아갈 수 있다.

마르탄과 엘리.

늘 느끼지만 모두 유능한 수하들이 다.

그때.

부우웅-

휴대전화가 울렸다.

낯설지 않은 번호다.

"잠깐 전화 좀 받을게."

"편하실 대로 하시죠."

-세계평화를 사랑하시는 s급 헌터 님. 통화 가능하세요?

국내 재계 1위.

신성 그룹의 막내딸, 천지연이었다.

"끙. 꽤 수식어가 긴데요."

-워낙 화려하게 일을 벌이셨어야 죠.

"제 안부 물으려고 전화 주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호호. 한번 뵙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계신 곳으로 가 죠."

통화를 끊고 맞은편에 있는 마르탄 을 바라봤다.

"후원은 많을수록 좋겠지?"

"물론이죠."

"좋아. 그럼 나도 힘을 써보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박찼 다.

米 米 米

신성 길드 빌딩.

두 번째로 들를 때는 정식 안내를 받아서 들어갔다.

'처음은 경황이 없었지.'

동생이 테스트실 일부를 박살 냈다 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뛰어왔던 기 억이 떠올랐다.

건물에서 가장 높은 곳.

서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 라운지에서 천지연을 독대했다.

천지연은 대형 길드의 마스터라고

는 보이지 않는 편한 차림으로 나왔 다.

헐렁한 티셔츠와 살짝 찢어진 청바 지.

허리까지 닿는 붉은 머리카락은 고 무줄로 묶고, 손에는 은색 징을 박 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다.

"꽤 파격적인 의상으로 출근하시는 군요."

"그러는 민철 헌터는 생각보다 보 수적 이시고요."

"제가 생각하는 대기업 사장님의 이미지하고는 많이 달라서요."

나는 볼을 긁었다.

신성 길드는 하나의 기업이나 다름 없다.

빌딩에서 근무하는 사람만 수백, 그중에는 헌터가 아닌 일반인도 많 다.

"저희 아버지는 싫어하세요."

나라도 내 딸이 저러고 돌아다니면 싫어할 것 같다.

처음으로 대기업 회장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동생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 민정 헌터에 대한 이야기는 못 들으셨나 보네요."

"탑에 들어갔다 오느라."

"그녀는 2주 전에 치러진 헌터 시 험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를 달 성했습니다."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민정이의 잠재능력은 S급 헌터를 상회했다.

'무공도 알려줬으니깐.'

역근경.

소림사의 절전 무공이다.

동생이 보유한 마나와 합이 잘 맞 아서 상승효과도 있었다.

"훌륭한 자질을 지닌 동생분을 믿

고 맡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사고뭉치가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죠."

"호호, 빈말이 아니랍니다. 이대로 라면 국내 8번째 S급 헌터가 저희 길드에서 나올지도 몰라요."

신성 길드.

국내 3대 길드장의 칭찬이다.

괜히 광대뼈가 조금 위로 올라갔 다.

웃음이 실실 나오려는 것을 꾹 참 았다.

'신성이 사람 보는 눈은 있네.'

내 칭찬도 아닌데 가슴이 근질근질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민정이의 평가 가 길드 내에서 제법 뛰어난 모양이 다.

하긴.

인류의 용사를 떠올리게 하는 재능 을 가졌다.

내가 직접 기운을 불어넣어서 무공 을 알려주긴 했지만, 단기간에 역근 경의 심득을 일부 이해했다.

'걱정할 건 없겠어.'

동생의 성격이 좀 더럽긴 하지만

아직 사고는 안 친 것 같다.

"혹시라도 사고 치면 꼭 말씀해주 십쇼."

"제가 잘 부탁드려야 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다."

나는 민정이의 더러운 성격을 떠올 리며 연신 '사고'를 강조했다.

잡담을 나누는 동안 음료가 준비되 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지연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과 다르

게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이제부터 본론이라는 겁니까?"

"호호. 이미 다 알고 오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솔직히 신성에서 욕심을 낼 줄은 몰랐죠."

화랑, 금산, 그리고 신성.

국내 3대 길드로 불리는 곳 중 이 번 원정대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건 신성뿐이다.

"그거 아세요? 원정대는 금전적으 로 손해가 막심하다는 걸."

로스트 랜드 원정은 위험부담이 크

지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지 않 았다.

장기간 보급을 유지하면서 괴물들 의 사체에서 부산물을 채집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신성에서는 왜 참여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영국에서 재밌는 물건을 빌려오신 다고 들었어요."

"이제 시제품인걸요."

"만약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이슈겠 죠."

"실패한다면?"

"민철 헌터한테 점수를 딸 수 있으 니 손해는 아니고요."

"본인 앞인데도 꽤 거침이 없으시 네."

내용은 장난스러웠지만, 말을 하는 내내 천지연의 태도에서 비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저는 이번 원정이 기회라고 생각 하거든요."

"기회... 입니까?"

"신성이 화랑과 금산을 제치고 국 내 1위 길드로 우뚝 설 동아줄이 죠."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 데."

"로스트 랜드 복원과 국내 8번째 S급 헌터 보유 길드. 이 정도면 충 분하지 않을까요?"

대기업 오너의 직계라서 그런 걸 까.

마르탄도 그랬지만, 천지연도 대국 을 넓게 봤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신성 길드에서 어 느 정도까지 동원해주실 수 있을지 들을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공격대 3개.

전투 인원은 150명.

원정에 참여하는 헌터들은 B급 이 상, 최소 5년 이상 경력을 베테랑이 다.

식량 보급.

부산물 채집.

그 외에도 여러 물자 제공.

신성이 국내 3대 길드로 불리지만, 상당한 출혈을 각오하고 투자를 했 다.

"박민수, 신성 길드의 S급 헌터 아

닙니까?"

"네. 그분도 이번 원정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신성 길드의 자랑.

국내 S급 헌터 중 하나인 박민수 도 원정대 명단에 포함되었다.

'국내 1위로 우뚝 서겠다는 건 빈 말이 아니구나.'

엄청난 투자였다.

신성 길드의 적극적인 참전.

이 소식이 알려지면 명성을 드높이 고 싶은 여러 길드에서도 원정대에 참여할 의향을 밝힐 것이다.

"이거 엄청난 빚을 지는 느낌이군 요."

"호호. 전에 민철 헌터가 고생해주 신 걸 생각하면 빚도 아니죠."

천지연은 은근슬쩍 문수산 게이트 사건 때 일을 언급했다.

변이를 일으킨 게이트.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많은 사상자 가 발생했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 황이었다.

새삼 빚 언급을 하니 감회가 새로 웠다.

"자세한 부분은 마르탄 지부장과

상의해주세요."

"알겠어요. 실무자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게 빠르겠죠."

이야기는 잘 풀렸다.

신성 길드가 투자할 것을 예상하고 온 자리였지만.

천지연의 투자는 기대이상이었다.

그때.

-길드장님. 말씀하신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인터폰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지연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떼었 다.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누가 또 오기로 했습니까?"

"호호. 아시는 분일걸요."

설마.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 가슴 한쪽이 차게 식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 묘령의 여인이 스카이라운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 오빠가 여긴 웬일이야?"

용사의 자질을 타고 난 녀석.

내 동생이었다.

167 화

민정이를 챙겨서 건물 밖으로 나왔 다.

"우와. 오빠, 진짜 S급이 된 거 야?"

"오냐."

최대한 쿨한 척,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누르면서 헌터 라이선스를 꺼 냈다.

S급이 되면서 라이선스를 새로 발 급받았다.

검은색 카드.

테두리와 글자는 금으로 새겨놓았 고 상단 우측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가 협회 문양으로 조각되어있다.

상단 좌측에는 내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다.

"우, 우와."

민정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후후.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S급 헌터는 전 세계에 200명 정도 밖에 없다.

걸어 다니는 전술 병기.

전 세계 어느 국가를 가도 국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다.

그래서인지, S급 라이선스는 '아메 리칸 엑스프레스'사에서 극히 일부 에게만 발급한다는 블랙 카드를 겸 했다.

"어떠냐. 이 오라비가 이 정도다."

"진짜 대단해. 이 카드로는 어느

백화점에서든 VIP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뭔가 놀라는 포인트가 묘하게 이상 한데.

"암암. 더 우러러보라고."

"이러니까 S급 헌터가 아니고 우리 오빠 같네."

민정이의 눈동자에 감돌던 존경의 감정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대신 남매가 서로를 바라볼 때 자 주 보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돌 아왔다.

"어쭈. 그 불순한 눈빛은 뭔데?"

"사람은 안 변하는 것 같아서."

"그럼. 나는 나지."

"막 봤을 때만 해도 뒤에서 후광이 번쩍이는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오 빠 맞네."

피식.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민정이 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야! 누가 머리 만지래!"

"이래야 내 동생이지."

동생이 나한테 느끼는 안도감.

묘하게도.

나 또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용사의 후예든 뭐든, 민정이는 내 동생이다.'

20년 동안 줄기차게 싸워 온(?) 원 수

그와 동시에, 혈육이라는 동질감이 들었다.

동생이 용사와 같은 재능을 타고났 다는 것이 내내 마음에 밟혔는데, 그 불편한 감정이 누그러졌다.

"기분이다. 오빠가 선물 줄게."

"S급 된 기념으로 한 턱 쏘는 거 야?"

"뭐, 그렇다 치자."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米 米 米

동생을 데리고 성간 연합 빌딩으로 돌아왔다.

곧장 마르탄이 있는 사무실로 직 행.

"얘한테 맞는 장비를 맞춰줘."

다짜고짜 아이템 제작을 의뢰했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시기에 갑자

기 부탁을 하십니까요."

"내 동생."

"동생분이면... 아, 그 헌터 시험 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던!"

"헤헤. 알아봐 주시니 고맙네요."

민정이는 수줍게 웃었다.

우욱, 왜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냐.

"갑자기 속이라도 불편하십니까?"

"크흠. 어쨌든 내 동생이니까 부탁 좀 할게."

"요새 원정대를 준비하느라 많이 바쁩니다요."

마르탄은 난색을 표했다.

하필 원정대 이야기를 하니 더 강 하게 말하기가 난감했다.

'동생한테 큰소리를 쳤는데 그냥 물러나긴 그렇잖아.'

나는 미안한 마음을 꾹 누르고 재 차 입을 뗐다.

"바쁜 거 알아. 그래도 내 동생인 데 부탁 좀 하자."

"후, 알겠습니다. 민철 헌터님의 부 탁인데 제가 힘을 좀 써봅죠."

바쁘다고 하면서도 부탁하는 건 다 해준다.

사람 좋은 녀석 같으니라고.

"오빠. 헌터 관련 무장은 신성 길 드에서 다 해주는데?"

"이 녀석은 마이스터급 장인이다."

마이스터급은 지구에서 활동하는 장인들 중 최고 수준의 실력자다.

신성 길드가 복지나 장비 지원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난 건 맞았다.

하지만 개인 무장 커스텀 면에서는 마르탄이 직접 손을 써주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었다.

"이왕이면 국내에서 몇 없는 실력 자가 커스텀해주는 게 좋지."

"우와! 마이스터의 칭호를 받은 장 인이라니! 정말 대단해요!"

민정이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허허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 다요."

"마이스터급 장인이 직접 아이템을 제작해주시다니."

"이 정도면 선물로 충분하지?"

"생각도 못 한 선물이야. 진짜 고 마워, 오빠!"

격렬한 애정 표현을 하려고 하는 동생을 한 손으로 밀어냈다.

얘도 흥분했다고 선 엄청 넘네.

"그럼 일단 체형 파악을 좀 하겠습 니다요."

마르탄은 민정이의 치수를 체크했 다.

체형, 근육의 밀도, 그리고 마력의 성질 등 꼼꼼하면서도 느리지 않았 다.

"흐음. 근력이 상당하지만 아무래 도 몸무게 자체가 적다 보니 속도감 을 살릴 수 있는 걸로...

"아니. 중장갑으로 해줘."

풀 플레이트 아머.

나는 전생 때 최후의 적수였던 용

사의 무장을 떠올렸다.

'전형적인 탱커 스타일.'

인류의 용사는 우락부락하지 않았 다.

가녀린 체구를 압도적인 마력 출력 으로 극복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를 돌려준다.

마력과 반응하는 중갑을 착용해서 방어를 두텁게 했다.

느리더라도 치명적인 한 방을 날리 는 식으로 싸웠다.

"얘는 마력을 유형화하는 특성이 있거든."

인류의 용사를 떠올리면서 민정이 의 전투 스타일을 설명했다.

마르탄은 이야기를 듣는 도중 고개 를 반복적으로 끄덕였다.

"그럼 동생분의 오러 아머와 연동 하여 방어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는 회로를 새겨야겠군요."

"역시 말이 잘 통해."

오러 아머를 증폭시키는 풀 플레이 트 아머.

마력을 방출하면서 돌진하면 부딪 치기만 해도 상대를 으깨버릴 수 있 다.

자잘한 공격은 무시하면서 접근, 적에게 치명타를 날린다.

기억 속에 있는 용사의 전투 방법 이다.

"흐흐흐. 이번 작업은 꽤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결과물은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 까?"

"일단 재료 수급부터 해야 하니 빨 라도 3주 정도 걸립니다."

"꽤 걸리네. 그리고 저번에 제작했 던 단도도 10개 다시 만들어줄 수 있을까?"

"그건 또 왜요."

"해 먹었어."

"그것도 같이 준비해둡죠. 재료값 포함하면 150억 정도 들 겁니다."

"...

"150억이요. 인건비 빼고 재료값만 해서 그 정도입니다요."

왠지 탑에서도 똑같은 일을 겪은 것 같은데.

거기서는 포인트라도 있었지.

순수 재료값만 150억이라고 하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예전에 미스릴이랑 오리하르콘 낙

찰받은 게 200억쯤 하지 않았던가?'

잠깐 고민했다.

동생이 보고 있는데 가격이 비싸다 고 물러설 수는 없다.

나는 S급 라이선스를 꺼냈다.

"일단 이걸로 긁어주고 진행해."

"오. 이게 이번에 발급받으셨다고 한 라이선스입니까?"

"어. 블랙 카드도 겸하니깐 결제는 될 거야."

"돈도 충분한 분이 왜 굳이 카드 를... 카드 긁으면 순수 재료값 말 고 제 공임비도 넣어야 합니다요."

"금액이 커서 그렇지."

"그냥 이체해주십쇼. 그게 제 쪽에 서 처리하기도 편합니다."

이 시키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마!

민정이 앞에서 체면 구기게 하네.

나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통장 금액 을 확인했다.

[IC 은행]

[전민철 님]

[계좌번호

7XXXXX-XX-XXXXXX]

[남은 금액 : 43,812,619,350]

이게 얼마야.

일, 십, 백... 4백억?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숫자가 달라지지 않았 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잠깐. 잠깐만. 이거 어플 오류 난 거 같은데."

"신성 길드에서 저번에 협조한 부

분에 대해서 입금이 되었을 겁니다 요."

"그건 아는데. 그렇다고 금액이 이 렇게나 뻥튀기되었다고?"

내 입이 쩍 벌어졌다.

438억.

그 아래는 세는 게 일이라고 느껴 질 만큼 엄청난 숫자가 찍혀져 있었 다.

"오빠. 얼마가 들어 있길래... 오 마.] 갓."

화면 액정을 힐끗 본 민정이도 눈 을 휘둥그레 떴다.

"값을 지불할 정도는 있으시지요?" 마르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로또를 맞으면 어떤 느낌일까.

지금 나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싶 다.

통장에 찍힌 액수.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커다 란 금액이다.

동생의 장비값으로 150억을 입금

했는데도 여전히 엄청난 돈이 남아 있다.

'최근 일이 많아서 돈 들어오는 데 신경을 쓸 수가 없었지.'

문수산 게이트 공략.

혼돈의 파편 탈취.

그 뒤로는 로스트 랜드에 넘어가서 판데모니엄의 계획을 무너트렸다.

그뿐 만일까.

탑에 들어가서 6층과 7층을 연달 아 공략했다.

-게이트 공략 정산금.

-로스트 랜드행 관련 협회 보상금.

-린스우드 사 대주주 배당금.

-각종 광고료.

내가 탑을 오르고 있는 동안에도 엄청난 액수가 차곡차곡 통장에 꽂 혔다.

"오라버니. 오늘따라 유별나게 멋 져 보이시네요."

"우욱, 징그러우니 저리 떨어져."

"야. 이렇게 불러줄 때 감사하다고 받아야 하는 거야."

"제발 평소대로 좀 해라."

나는 민정이의 오버 액션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로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건 덤이다.

"오빠. 그 돈 어떻게 할 거야?"

"남는 건 투자라도 해야지."

통장에는 아직도 200억이 넘게 남 았다.

나한테는 이만한 거금을 딱히 쓸 데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내 집(?) 마련도 했 고, 장비도 대부분 갖추었다.

전에는 좋은 아이템을 얻으려고 돈 에 욕심을 냈었다.

탑에 들어가면서 지구에서보다 양

질의 장비를 쉽게 얻게 된 탓에 금 전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졌다.

'린스우드 건설사에 투자해놓는 게 제일이지.'

린스우드 사에 투자하는 건 일종의 안전자산 개념이다.

하린의 능력.

그리고 내가 전수해준 진법.

그녀가 사장으로 있는 한, 린스우 드 사의 성공은 확정적이었다.

그때.

"어머.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 요?"

엘리가 막 사무실에 들어가려다가, 앞에 있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 다.

"지부장한테 물건 좀 의뢰하러."

"저 보러 오신 건 아니고요?"

"우리는 자주 보잖아."

"쳇. 농담도 안 받아주고 섭섭하네 요. 옆에 계신 분 소개나 시켜줘요."

엘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민정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저는 전민정이라고 해요."

"이분이 민철 헌터의 동생분?"

"맞아."

"두 분 많이 닮았네요."

"아니에요!"

"아니거든!"

나랑 민정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꾸했다.

이 녀석이랑 내가 어딜 닮았다는 건가!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이건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해도 법원에서 이 해해줄 만큼 큰 범죄(?)였다.

"봐요. 두 분 말씀하시는 게 똑같 잖아요."

"에휴... 일이나 보러 가라."

"호호,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봬 요."

손을 휘휘 젓자, 엘리가 눈웃음을 치면서 지나쳤다.

민정이가 엘리의 등을 묘한 눈빛으 로 바라봤다.

"오빠랑 친한 사이?"

"뭐, 그럭저럭."

친하다면 친하겠지.

업무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몇 번 만났고.

엘리가 나를 친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 그 돈을 어디에 쓸지 떠올랐 어."

"내 돈을 왜 네가 고민하냐?"

"오빠가 통장에 400억이나 넣어두 고 생각도 안하니까 그렇지."

팩트로 치니까 대꾸할 말이 없다.

엘리도 그렇고, 동생 놈도 그렇고 왜 이렇게 팩트를 좋아하는지 모르 겠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나 들어보자."

"선물 사러 가자."

민정이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감돌 았다.

168 화

나는 전생을 각성한 후 한 번도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적이 없었 다.

어떤 적을 만나도 꺾이지 않는 투 지.

육신은 지치고 힘들지언정.

적이 아무리 강대해도.

두려움을 품지 않고 무기를 휘둘러 서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저 '적'에게 백기를 흔 들고 싶었다.

'독한 것.'

평생의 숙적.

너무나도 강한 존재, 동생은 뒤를 돌더니 나를 보면서 씩 웃었다.

"오빠.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어떻게 흉악한 게이트보다도 더 넓 고 무서운 백화점 안을 쉬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걸까.

사건의 발단은 선물 준비였다.

나는 동생의 손에 이끌려서 마지못 해 아래로 향했다.

"흐흥, 흐흥."

민정이는 신이 난 듯, 콧노래까지 불렀다.

"갑자기 웬 선물 타령이냐."

"그렇게 벌었으면 아빠랑 엄마한테 도 선물 챙겨드려야지."

아. 맞네.

생각도 못 한 부분을 짚었다.

마침 마르탄에게 장비 제작 의뢰를 맡기려고 성간 연합 빌딩에 왔다.

'여긴 마법이 깃든 아이템들을 판 매하는 백화점이기도 하지.'

매직에서 레어 등급.

내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접하기 힘든 아이템 들을 판매했다.

"분명 좋아하실 거야!"

환하게 웃는 동생.

그 웃음 속에 천사처럼 교활하고 악독한 악의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 을 눈치채야 했다.

성간 연합 백화점을 돌아다닌 지 3시간째.

민정이는 조금도 쉬지 않고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확인했 다.

"이 부적은 효과가 뭔가요?"

"반지를 끼고 있으면 자동으로 발 동되나요?"

"우와. 이거 엄청 신기하네요."

...종류 불문.

옷가지나 부적, 장신구, 건강식품 등 온갖 매장들을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나름 즐거웠다.

성간 연합에는 지구의 과학과 마도 공학을 결합한 제품들도 있었다.

판데모니엄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 발한 물건들.

특히 생활면에서는 과학을 기반으 로 만든 신기한 제품이 많았다.

근데 신기한 건 딱 30분까지더라.

민정이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조 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수십 시간 검을 휘둘러도 안 지쳤 는데.'

개미 공주 셰셰를 탈출시키는 미션 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괴물이랑 드잡이하는 게 낫 지.

"이 옷도 좋아 보이지 않아?"

"좋아 보여. 그러니까 일단 좀 사 자."

"아! 또 성의 없는 대답. 싫어! 더 볼 거야!"

민정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혹시라도 전생(?)을 기억해내고 나 를 쓰러트리려는 계략이 아닐까, 그 런 의심마저 들었다.

1시간을 더 쇼핑한 끝에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골랐다.

"이거 두 개가 제일 좋은 것 같 아."

민정이가 고른 건 시계와 반지였 다.

시계에는 화염 내성 Lv 5가, 반지 는 큐어 Lv 3이 옵션으로 내장되었 다.

"이건 왜?"

"아빠는 기름이 가끔 튈 때도 있으 니까 화상 내성. 엄마는 요새 무릎 이 안 좋으시거든."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가격은 둘 다 해서 1억.

매직 등급 아이템치고는 꽤 비쌌 다.

기능도 기능이지만, 명품 브랜드와

디자인 값이 붙은 탓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카드를 내밀려는

찰나.

"잠깐."

동생이 손을 뻗어서 라이선스 겸용

카드를 중간에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아직 안 끝났어."

이 녀석.

정말로 용사의 환생은 아닐까.

내 암살을 시도하는 거라면 성공적 이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오빠 친구 있잖아."

"응? 기태 말하는 건가."

갑자기 여기서 대학교 친구를 왜 물어보는 건지.

동생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술친구 말고. 아까 그 위에서 만 났던 사람."

"친구라는 게 설마 엘리를 말하는 거냐."

"응. 이왕 온 김에 친구 선물도 좀 챙겨주고 해야 하지 않겠어?"

선물이라.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엘리하고는 친분도 있지만 이제껏 많은 신세를 졌다.

게이트 섭외.

일정 조율.

그 외에도 여러 업무를 엘리가 도 맡아준 덕에 사냥에만 집중할 수 있 었다.

'그간 애써준 게 있지.'

선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좋

을 것 같다.

얘가 웬일로 기특한 생각을 했지?

"그 부분은 생각을 못 했네."

"그치, 그치?"

"챙겨줘서 고맙다."

"히히. 내가 그럴 줄 알고 선물도 미리 골라놨지."

민정이는 옆에 진열된 팔찌를 가리 켰다.

화이트골드 색을 띤 금속 팔찌.

몸을 청결하게 해주는 클린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

"이거 어때?"

가격은 500만 원.

간단한 선물로 주기에는 부담 가는 가격이지만, 여태 선물로 쓴 돈을 생각하니 작게 느껴졌다.

"사이즈는 재봐야 하지 않을까?"

"아까 그 언니 손목 봤는데 이 정 도 길이면 적당할 거야."

눈썰미도 좋군.

"사장님. 이것도 계산해주세요."

나는 멀찍이 있는 직원에게 손짓하 면서 팔찌를 가리켰다.

* 米 米

한바탕 쇼핑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 러 갔다.

동생은 걸신이 들린 것 마냥 밥을 흡입하듯 입에 집어넣었다.

"신성 길드에서 밥 안 챙겨주냐?"

"우물우물, 잘 나오기는 하는데."

"...하는데?"

"기숙사 급식이랑 밖에서 먹는 건 다르잖아."

빠르게 납득이 되었다.

아니.

그렇다 쳐도 전보다 먹는 양이 엄 청나게 늘어난 것 같은데.

식당에 앉자마자 메뉴를 3개 시키 는데, 놀랍게도 모두 동생의 뱃속으 로 사라졌다.

'각성 전에는 안 이랬는데.'

활동량이 늘어나서일까.

도무지 적웅이 안 되는 모습이다.

저녁까지 먹은 뒤, 동생과 헤어지 고 집으로 돌아왔다.

"흐아아. 지친다."

쇼핑이 라니.

내가 다시는 동생이랑 선물 고르러 가나 보자.

부모님 선물은 택배로 발송했고, 엘리한테 줄 건 포장만 해뒀다.

엘리도 이번 원정대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따로 불러내기가 어려웠다.

'다음에 줘야지.'

포장지로 감싼 팔찌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수련장으로 왔다.

늦은 밤.

수많은 별빛이 투명 유리로 해놓은 천장 위로 쏟아진다.

'대격변이 일어나면서 공기가 맑아

졌다고 하니, 아이러니지.'

자조적으로 웃고는 마루로 된 바닥 에 엉덩이를 붙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성천조계공을 수련하기에는 딱 좋 은 날이다.

'세계석 태양 때문에 굳이 별빛을 흡수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야.'

수많은 격전.

절전 무공들을 펼치면서 신체가 혼 돈기의 운용에 빠르게 적응했다.

일반적인 무인은 문제를 풀어가며 해답을 찾아가지만.

나는 해답을 안 상태로 그에 맞는 문제 풀이를 내놓는다.

전생의 기억과 업을 신체에 적용시 키는 과정.

그게 내 '무공'을 익히는 방법이다.

'깨달음은 진즉에 얻었지.'

남은 건 육신이 무공에 익숙해지는 숙련도 차이.

성 천조계 공도 마찬가지 였다.

세계석 태양의 기운을 녹여낼 때마 다 소우주에 자리를 잡은 성운의 힘 도 증대되었다.

최근 여러 싸움을 거듭하면서 성천

조계공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 를 마쳤다.

'오늘은 진득하게 집중을 해보자.'

6성의 절정.

성천조계공의 경지가 7성에 도달하 면 별자리를 더 새길 수 있다.

무한 고리 별자리 덕에 심법이 자 동으로 활성화되었지만.

집중하는 것에 비해 효율성이 당연 히 떨어졌다.

'신살의 업을 써먹어야지.'

6층에서 얻은 기연(?).

일부러 최상위 신격의 아바타를 불

러내게 하고 쓰러트렸다.

이왕 얻어낸 업.

빨리 써먹을수록 좋지 않겠어?

나는 눈을 감고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성천조계공의 구결을 외우면서 심 법에 집중했다.

의식이 심층 속으로 가라앉는다.

상단전, 혹은 심상 세계.

상위 차원의 존재로 올라설 수 있 는 정신의 영역이다.

내 정신은 심상 세계 깊숙한 곳까 지 내려갔다.

'심법에 집중하는 것도 오래간만이 네.'

넓게 펼쳐진 우주.

중심에는 세계석 태양이 자리하고 있으며, 빛의 성운과 암흑성운이 태 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성운들이 내뿜는 빛은 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공간 전체가 강한 힘에 뒤덮였다.

곧 한계를 넘어서 7성으로 도달할 준비가 된 것이다.

'원래는 깨달음이 있어야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전생의 나는 성천조계공 7성을 도 달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머리를 싸맸었다.

성천조계공을 기록한 고대의 문헌.

겨우 해독했더니 뜬구름 잡는 문자 들의 연속이었다.

해독하는 것도 일이었고, 문헌에 숨겨진 심득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다.

'지금은 다르지.'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우주에 감돌고 있는 강대한 기운을

의지대로 끌었다.

각 성운들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 다.

성력과 암흑 마나.

두 기운을 이끌어 내어 심상 세계 속 소우주를 확장시켰다.

'이제는 그릇을 늘려야 할 때다.'

우주.

수많은 별들이 있는 무한한 세계.

그 방대한 영역을 인간의 정신에 담아두는 건 무리다.

성천조계공으로 구현해낸 심상 세 계는 원본이 되는 우주를 온전히 담

아낼 수 없다.

'7성부터는 진짜 우주의 형상을 닮 게 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소이,)우주에서 기존의 틀을 부수 고 진정한 우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요령을 알면 쉽지만, 그 틀을 부수 는 과정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7 성에 도달할 수 없다.

심상 세계에 감도는 강대한 에너지 를 움직여서 우주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쩌적, 쩌저적!

소우주의 끝.

성운의 빛이 희미해지는 먼 공간에 서 하나둘 균열이 일어났다.

기다란 틈이 벌어지고, 그 옆으로 자잘한 균열들이 생기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이윽고.

콰아아앙-!

나만 들을 수 있는 커다란 폭발음 과 함께 심상 세계의 영역이 배로 확대되었다.

[성천조계공의 경지가 7성에 도달 했습니다.]

[성천조계공의 영향을 받아서 신체 가 강화됩니다.]

[근력이 20 증가합니다.]

[민첩이 20 증가합니다.]

[맷집이 15 증가합니다.]

[체력이 15 증가합니다.]

[혼돈력이 80 증가합니다.]

[세계석의 기운을 녹여내서 혼돈력

80이 추가로 증가합니다.]

*7성 특전

-혼돈기 추가 100%

-혼돈기 초당 회복 100 추가.

-우주의 흐름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별자리를 5개 더 추가로 각인할 수 있습니다.

심상 세계의 확장.

별들의 기운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한껏 넓혀진 우주의 공간에 맞춰서 성운의 힘도 늘어난 것이다.

혼돈기 100% 상승.

그리고 회복되는 양도 기하급수적 으로 늘어났다.

'이게 바로 7성의 힘이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내력을 모 두 소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주의 흐름]

분류 : 기공

등급 : SS

제한 : 성천조계공 7성에 도달한

존재.

심상 세계에 구현한 우주를 세계의 흐름과 연동시켜서 감각을 확대합니 다. 우주 내부의 흐름을 가속하면 신체 능력과 내력의 힘을 2배로 늘 릴 수 있습니다.

경지 : 1성

우선 패시브 효과로는 감각이 비약 적으로 향상된다.

주위의 기운에 극도로 민감해지며 인지영역의 범위가 300m까지 넓어 졌다.

[초감각]까지 합해지면 나를 기습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도 무방했 다.

'초감각과 우주의 흐름을 결합시키 면 초인의 영역에 가까워진다.'

상위 차원의 존재.

드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둘의 유기적인 활용이 필수였다.

액티브 효과는 마교의 역혈대법과 비슷했다.

역혈대법.

내공의 흐름을 반대로 돌려서 막대 한 힘을 얻는 대신, 엄청난 후유증

을 겪는 마공의 일종이다.

필살.

죽음을 각오하고 사용해야 하는 만 큼, 마인이라고 해도 쉽게 사용할 엄두를 못 냈다.

'그만큼 흉악한 건 아니지.'

우주의 흐름은 마공처럼 후유증을 걱정해도 되는 기술이 아니다.

우주의 흐름을 가속해서 능력을 증 대시키는 것.

대신 내력 소모도 배 이상 빨라지 고 지속시간도 정해져 있다.

'1성이면 끽해야 1분 정도 유지되

겠네.'

싸움은 한순간의 움직임으로 승부 가 종종 있다.

우주의 흐름은 그런 상황에서 전세 를 뒤엎을 수 있는 비장의 카드다.

그리고.

'별자리를 추가로 새길 수 있다.'

탑 6층에서 쌓아 올린 위업.

신살의 업을 별자리에 새길 차례 다.

169 화

심상 세계에 자리를 잡은 광활한 우주.

성천조계공의 경지가 7성에 다다르 면서 영역이 더욱 방대해졌다.

'각인 가능한 건 다섯 개다.'

-신화 사냥꾼 자리.

-죽음 자리.

-빛의 군주 자리.

원래 각인이 가능했던 두 별자리에 이어, 천둥의 신을 쓰러트리면서 신 화 사냥꾼 자리가 추가되었다.

'이번 기회에 모두 각인시켜야겠 어.'

죽음 자리와 빛의 군주 별자리.

전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서 각 인을 하지 않았다.

'이번 원정은 꽤 격렬할 거다.'

로스트 랜드 원정.

어느 정도 진격한 뒤에는 곧바로

북한 군벌과도 싸워야 한다.

김문권 군벌.

황해도 인근과 개성 주변을 장악하 고 있는 북한의 거대 군벌 중 하나 다.

인외의 영역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 축 중인 군대 집단.

'이왕 준비하는 거, 철저하게 해야 지.'

혼돈기 일부를 분리, 성력을 끈처 럼 길게 늘여서 별들을 연결시켰다.

빛의 성운 7개를 연결해서 왕관 모양을 만들었다.

[빛의 군주 자리가 성천조계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빛의 군주 자리]

빛의 군세를 이끄는 위대한 군주를 기리는 별자리다.

*성력(혼돈력) 15 증가.

*에인헤야르의 성장률 100% 증가.

* 에인헤야르 숫자 2기 증가.

별자리가 안정화되자,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7성이 된 덕에 추가 별자리를 새 길만 한 혼돈기가 넉넉했다.

'이제는 실패해도 혼돈기 걱정을 할 일은 없겠어.'

무한 고리 별자리를 새길 때는 보 유 혼돈기가 바닥 직전까지 떨어졌 다.

7성이 되면서 보유량과 회복 속도 가 배 이상 불어났고, 덕분에 기운 이 소모되는 것보다 회복 속도가 더 빨랐다.

나는 느긋하게 죽음 자리도 새겼 다.

기다란 낫 형태.

암흑 성운 여섯 개를 연결시켰더니 음울한 빛을 발산했다.

[죽음 자리가 성천조계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죽음 자리]

형태가 없는 죽음을 형상화한 별자 리다.

* 암흑 마나(혼돈력) 15 증가

*암흑 저주 Lv 10 활성화

* 전투 속행 특성 추가

[전투 속행]

심각한 부상을 당해도 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출혈, 독 등 위험한 상황에서도 정신을 유지합니다.

암흑 저주는 상대의 몸에 암흑 마 나를 불어넣어서 신체 능력을 좀먹 게 하는 마력 독이다.

'나한테는 쓸모가 없지.'

암흑 저주가 발동하려면 암흑 마나 를 활용해서 공격해야 한다.

내 경우에는 무공을 펼칠 때 혼돈 기를 사용하니 암흑 저주가 발동되 지 않았다.

전투 속행 특성도 나쁘지는 않지 만, 조금 애매했다.

불굴의 투지.

어느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몸 을 움직일 수 있는 건 꽤 유용한 능력이지만

'그런 상황을 안 만드는 게 좋지.'

전투 속행이 발동되는 조건은 제한 적이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

위기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겠지 만, 반대로 말하면 저 특성의 덕을 볼 상황을 피해 가는 게 제일이었 다.

'보험이라고 생각해 두자고.'

앞으로 닥칠 큰 전쟁에 대비한 보 험.

그 정도였다.

[[불멸의 군세] 특성이 죽음 별 자리에 반응합니다.]

[죽음의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불멸 포인트 : 500 - 1,00이

응?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불사의 파라오, 제린의 권능이 성 천조계공에 새겨놓은 죽음 별자리에 반응했다.

온갖 '죽음'을 이해하며 불멸자들 의 군대를 구축하는 권능.

방금 전에 새긴 죽음 별자리 또한 '죽음'의 형태라서 그런 걸까.

불멸 포인트가 2배나 늘어났다.

'직접적인 별자리가 아니어도 권능

과 연관이 있으면 효과가 있다는 건 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전생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현상.

하긴, 애초에 죄악의 권능 여럿을 한 명이 사용하는 것부터가 상식에 서 벗어난 일이었다.

'앞으로는 별자리를 새길 때 권능 과의 연동 가능성도 생각해둬야겠 어.'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기분 좋게 웃고는 다시 정신을 집 중했다.

'그럼 메인 음식을 먹어볼까.'

신화 사냥꾼.

최고위 신격을 지닌 존재를 쓰러트 려야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업적이 다.

전생에서도 이미 새겨봤던 별자리.

별 16개를 쭉 이어서 기다란 활 모양을 만들었다.

활은 신화시대 때부터 '사냥'을 상 징하는 도구, 신을 떨어트리는 표식 으로 삼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게 없 다.

마지막 별을 혼돈기로 잇는 순간.

흑색 선으로 이어진 별들이 강렬한 파동을 흩뿌리면서 별자리로 정착했 다.

[신화 사냥꾼]

신화적인 격을 지닌 존재를 사냥한 별자리다.

* 암흑 마나(혼돈력) 50 상승.

*사냥한 존재의 신격을 강탈할 수 있다.

*상위 영격과 싸울 경우, 위압감으 로 간섭하여 마력 운용을 20% 감 소시킵니다.

신화 사냥꾼.

쓰러트린 적의 신격을 빼앗는 옵션 은 당장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격을 지닌 존재는 흔치 않다.

여러 생물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영 혼의 업을 쌓아 올려야 도달할 수 있는 드높은 격이다.

'이 옵션은 나중에 도움이 될 거 다.'

지금 필요한 건 마력 운용에 간섭 하는 효과였다.

판데모니엄과 선을 두고 있는 군부

세력.

흑사회에서는 악마의 혼을 인간의 육신에 덮어씌우는 기술을 개발했 다.

이번 전쟁에서는 흑사회의 '마인' 을 마주칠 가능성도 있다.

'신화 사냥꾼의 옵션은 악마들한테 도 유용하거든.'

악마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위 차원 의 생물보다 강건한 혼을 품는다.

강인한 육신과 탁월한 마력 운용 능력.

그리고 높은 혼의 격까지.

판데모니엄이 괜히 다중차원 우주 의 패권을 다투는 거대 세력으로 성 장한 게 아니었다.

'마인들한테도 꽤 효과를 볼 수 있 을 거다.'

후욱.

심상 세계 관조를 끝내고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상태창.'

반투명한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름 : 전민철

레벨 : 56(32.2%)

근력 : 273 _ 323 [A+]

민첩 : 272 _ 312[A+]

맷집 : 220 _ 235 [A+]

체력 : 220 _ 235 [A+]

혼돈력 : 840 - 108()[남색]

[혼돈기 - 35,640]

힘이 솟구친다.

성천조계공이 7성에 도달하면서 신 체 능력도 한 단계 더 올라갔고, 추 가로 각인한 별자리들 덕에 혼돈기 도 더 증대되었다.

'근데 등급이 바뀌었잖아?'

혼돈력 수치가 천을 넘어서일까.

헌터 협회나 탑 안에서 사용하던 등급표 대신 '색'.] 매겨졌다.

지구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등급이 다.

나중에 탑에 가면 알아봐야지.

'이제 내력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 다.'

무의식적으로 레인보우 링을 만지 작거렸다.

혼돈력은 3만을 넘어섰고 초당 혼 돈기 회복 수치도 120이나 되었다.

S급 무공을 마음껏 펼쳐도 내력이 떨어질 일이 전혀 없었다.

'이제야 초월의 시작점에 섰다.'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성천조계공 7성.

초감각.

그리고 신격을 강탈할 수 있는 신 화 사냥꾼 별자리까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인'의 영역 에 발을 딛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충족시켰다.

* *

별자리를 각인한 뒤, 특별한 일 없 이 며칠 동안 집에 머물렀다.

마르탄과 엘리, 두 사람 모두 업무 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특히 엘리는 얼굴 한 번 볼 시간 이 없었다.

-전달사항은 당분간 문자로 드릴 게요.

전화할 여유도 없는지, 목소리 듣 기도 어려웠다.

원정대 관련해서 준비할 게 많은 모양이다.

-내가 도와줄 건 없냐.

미안한 마음에 한 번 물어봤다.

-서류 작성이나 협력업체들 미팅 같은 건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냐. 애써줘.

빠르게 손절했다.

업무 관련 문제는 두 사람에게 완 전히 위임했다.

'나는 그런 건 질색이거든.'

전생에도 행정 관련 업무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부하들한테 맡겼었 다.

나는 탁자 위를 흘겨봤다.

백화점 쇼핑 때 산 선물은 아직 주지 못했다.

저걸 주러 갔다가는 사무실에 붙잡 혀서 서류를 정리하거나 미팅에 참 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나중에 봤을 때 주지 뭐.'

마음 한쪽이 찝찝했지만 고개를 좌 우로 돌리면서 생각을 털어냈다.

선물 주러 간답시고 엘리를 보면 얄짤없이 붙잡힐 것 같단 말이야.

집에 있는 동안에도 마냥 쉬고 있 지는 않았다.

『주군의 부름에 응하였나이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빛의 군주 별자리를 새기면서 에인 헤야르 2기를 추가로 소환할 수 있 게 되었다.

에르렌과 제임스.

처음 불러냈던 에인헤야르 4기사와 비슷한 성향이다.

좋게 말하면 기사의 표본이요.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었다.

"피네스."

『부르셨습니까, 주군.』

"네가 책임지고 애들 교육시켜라."

『Yes. My Lord!j

에인헤야르 기사들의 맡이.

처음으로 불러낸 에인헤야르, 피네 스한테 교육을 일임했다.

피네스는 여태 나한테 배운 대로 전투 때 호흡을 맞추거나 상대의 빈 틈을 노리는 등, 요령을 가르쳐주었 다.

두 기사는 즉시 반발했다.

『저는 주군의 기사입니다. 기사는 전투에서 비겁한 짓을 하지 않습니 다.』

『선임 기사님. 에인헤야르의 명예

에 먹칠을 할 셈입니까?』

피네스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후 임 기사들을 노려봤다.

『예로부터 매가 약이라고 했다. 주군의 가르침이지.』

평소에 사용하는 무기 대신 수련장 에 비치된 연습 무기를 들었다.

후배 에인헤야르 둘한테도 무기를 던져줬다.

『지금 대련을 하자는 것입니까?』

『저희는 둘입니다. 선임 기사께서 저희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어려우실 텐데요.』

에인헤야르 두 기는 능력치가 초기 상태였다.

무공을 수련하고 실전을 겪으면서 발전을 이룩한 피네스에 비하면 부 족했다.

그럼에도, 2대1이라는 숫자 차이는 꽤 큰 벽이었다.

『내가 직접 몸으로 알려주마.』

퍼억! 퍼퍽!

피네스의 손에 들린 목검이 화려하 게 춤을 추었다.

매화검법의 묘리를 담은 검.

성광기를 싣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

했다.

대련을 빙자한 구타는 수 시간 동 안 이어졌다.

『왜 검이 맞지 않지?J

『선임 기사님. 잘못했습니다!』

후임 기사 둘은 반격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았다.

둘의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직 선배들에 대한 예의 가 부족한 것 같구나.』

피네스는 입가에 웃음을 걸고는 폭 행... 아니, 대련을 이어갔다.

나는 피네스의 독한 교육(?)에 혀

를 내둘렀다.

"아주 눈에 독기가 있어."

-주인님도 저랬다. 멍!

"에이. 난 저렇게까지는 안 팼잖 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볼 땐 너한테도 교육이 필요 한 것 같다."

-주인님 최고다. 멍!

펜리르는 곧장 몸을 뒤집더니 배를 까고는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항복의 표시다.

나는 펜리르의 배를 간질이면서 대 련을 지켜봤다.

그때.

띵동-!

현관문 쪽에서 벨소리가 났다.

'누구지?'

나를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련장 겸 집을 새로 신축한 뒤에 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주소를 거의 알려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엘리나 마르탄, 하린, 그 리고 동생 정도나 집 주소를 알았 다.

'비밀번호야 다 알려줬으니까.'

벨을 누를 것도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펭구야. 가서 좀 보고 와라."

-멍! 알겠어.

펜리르는 다시 몸을 뒤집고는 현관 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저 멀리서 펜리르의 의념이 들렸 다.

-부하 1호가 주인님을 만나고 싶 다고 찾아왔어. 멍!

부하 호?

그런 녀석이 있었던가.

"어떻게 생겼는데?"

-머리는 올백이고 잘 생기긴 했는 데 조금 느끼한 악마 녀석이야.

펜리르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데모닉 길드의 마스터, 장용수.

정확히는 장용수라는 이름으로 정 체를 숨긴 요마 일족의 악마, 베르 데였다.

170 화

"너희들. 훈련은 이따 해라."

손을 휘젓자, 에인헤야르 3기가 사 라졌다.

명색이 악마 군주인데 누가 봐도 천사 비슷한 녀석들과 같은 방을 쓰 는 건 이상하잖아.

덜컹-

현관 앞으로 가서 문을 열어줬다.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군주님!"

베르데는 기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왔는데, 바퀴 소리가 묵직한 게 제법 무게가 있어 보였다.

녀석은 양팔을 벌리고 안기려는 듯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오른손으로 베르데의 어깨를 잡아서 격렬한 환영 인사를 저지했 다.

"오냐. 근데 붙지는 마라."

-부하 호 왔냐. 멍

펜리르가 꼬리를 흔들면서 반겼다.

"선배님께서도 그간 강녕하셨습니 까!"

-멍! 주인이 매번 집만 지키라고 해서 심심하긴 한데 괜찮다.

둘이 꽤 친한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 한 번 본 게 전부인데,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후후후. 그럴 줄 알고 선물을 챙 겨왔습니다."

베르데는 가방을 바닥에 눕혔다.

지퍼를 내리니 포장된 루비 고기와 최신형 게임기가 들어 있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물론입니다. 게임기는 이 몸이 직 접 TV에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멍! 역시 부하 1호는 다 르다!

"하하핫!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1 호라면 선배님이 원하시는 걸 다 알 고 챙기는 법 아니겠습니까!"

펜리르와 베르데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베르데야."

"예. 군주님!"

"이게 다 뭔지 5초 내로 설명해주

지 않을래?"

"선배님께서 제가 올린 게임 사진 에 좋아요를 누르시기에, 필요하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야. 너 sns도 하냐?"

-멍! 저번에 누님이 사주신 걸로 시작했다.

펜리르는 태블릿 pc를 보여줬다.

수련장 안 사진.

셀카로 보이는 검은색 푸들 사진까 지.

나름 올릴 수 있는 사진들을 게재 해놓은 것도 모자라서 베르데와 친

구추가까지 해 놨다.

하아.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집 지키라니까 별짓을 다 했구먼.'

아주 인싸네. 인싸여.

sns를 하는 신화시대의 괴수라니,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근데 내 건 없냐?"

"군주님 건 따로 준비 못 했는데 요."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농담입니다. 군주님 것도 따로 준 비해두었습니다."

새끼.

진즉에 그랬어야지.

베르데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 냈다.

버튼 여러 개, 그리고 붉은색 가죽 으로 띠를 두른 전자 열쇠였다.

"이건 뭐냐'?"

"스포츠카 키입니다."

"어. 차 키인 건 알겠어."

"군주님 드리려고 챙겨온 겁니다."

베르데가 현관을 살짝 열었다.

문틈 사이로 잘 빠진 붉은색 스포 츠카가 살짝 보였다.

"어떠십니까?"

"나 운전면허 없어."

"위대하신 군주님께서는 그런 인간 의 교육 같은 건 안 받으셔도 충분 히 차를 모실 수 있을 겁니다."

"경찰한테 걸린다고, 이 아저씨야."

"그, 그럼 반납할까요?"

베르데가 차 키를 주머니에 넣으려 는 찰나.

빠르게 손을 뻗어서 키를 낚아챘

다.

"면허야 따면 되지."

남자의 로망!

스포츠카!

통장에 들어 있는 돈만 수백억인 데, 마음만 먹으면 당연히 살 수 있 다.

'선물로 받는 건 다르잖아.'

암암.

면허가 없어도 이만큼 성의를 표현 하면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

참된 군주는 부하의 충성 가득한 물질을 거절하지 않는 법이다.

"밖에서 너무 오래 세웠네. 안으로 들어와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목마를 텐데. 마시고 싶은 건 없 고?"

"하핫, 군주님의 호의만으로도 충 분합니다."

스포츠카라는 귀한 선물 챙겨오셨 는데, 당연히 챙겨드려야죠.

자본주의식 미소를 지으며 베르데 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수련장 한쪽에 마련된 휴식 공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베르데와 마주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온 거야?"

"군주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 다."

"일단 말해봐. 내 선에서 되는 일 이라면 돕지."

"저희 데모닉 길드도 이번 원정대 에 참가하게 힘을 써주실 수 있겠습 니까?"

베르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 다.

"아스모데우스의 지령인가?"

"아닙니다. 제게는 새 지령이 내려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굳이 참가할 필요가 없잖 아."

"그게... 저는 이번 원정대를 기 회의 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회라고?"

베르데는 고개를 추켜세웠다.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

베르데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망으 로 번들거렸다.

"윗선에서는 제게 명령을 내리지 않고, 기존의 지시를 반복해서 내리

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세력을 키우 라, 였던가."

"예. 사실상 방치 상태입니다."

그건 조금 곤란한데.

베르데의 역할은 내부 첩자.

판데모니엄의 동향을 파악해줄 유 일한 끈이다.

"주어진 미션이라도 충실히 점수를 따겠다는 거야?"

"제가 길드를 키워내는 건 오롯이 군주님께 세력을 바치기 위해서입니 다."

"나한테?"

"예. 판데모니엄의 지원을 받아서 세력을 최대한 키워내서 길드를 지 구 정복의 발판으로 헌상하겠습니 다."

맞다.

이 녀석, 중2병 녀석이었지.

베르데는 내가 분신(?)으로 지구에 머무는 이유를 지구 정복 때문이라 고 알고 있었다.

'뉴스 좀 보지 그러냐.'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공식 석상에서 세계평화를 외

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판데모니엄이 일군 걸 내가 가져 가면 되는 거잖아?'

베르데 녀석.

웬일로 기특한 생각을 했다.

"성간 연합에 말해두지."

"군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걸맞은 친위대로 일구어 내겠습니다."

"그, 그래."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중2병스러

운 대사만 좀 빼주지 않을래?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참. 판데모니엄에서 다른 움직임 은 없고?"

"아직은 없습니다. 흑사회도 한국 에서는 잠잠합니다."

"네가 흑사회의 흔적을 수습했다고 했지."

"후후후, 덕분에 길드의 세를 불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흑사회.

그리고 박사.

어느 차원에서도 없었던 신개념 기 술, '마인화'를 만든 녀석이다.

그뿐이랴.

탑의 기운을 응축시켜서 혼돈의 파 편을 만들 생각을 했다.

'그걸 사용해서 악마들을 페널티 없이 하위 차원으로 내려보냈다.'

검은 세례는 정황상 일정 수준 이 상 되는 악마들한테는 사용할 수 없 는 것 같다.

마인은 달랐다.

혼돈의 파편을 사용하면 중급 악마 도 하위 차원에서 억제력을 피해

100%의 힘을 낼 수 있다.

'같은 수단은 더 쓸 수 없겠지만.'

혼돈의 파편은 모두 빼앗았다.

100%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마 인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방 먹이려다가 역으로 당하면 안 된다.'

판데모니엄과 박사가 어떤 술수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흑사회의 움직임을 주시 해라."

"모든 것은 군주님의 뜻대로."

베르데는 가슴팍에 주먹을 맞대면 서 경례를 했다.

도대체 저런 중2병스러운 자세는 또 어디서 배워온 거야?

* 米 *

원정대를 꾸리기까지는 2주가 걸렸 다.

나는 성간 연합 빌딩으로 가서 편 성을 끝마친 원정대 조직도를 살펴 봤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규모가 크고 분류할 게 많아서 오 래 걸렸답니다."

엘리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구박하는 것 같잖아.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호호, 농담이니까 천천히 살펴보 고 궁금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 요."

엘리를 곁눈질로 살짝 째려본 뒤 다시 자료를 보는 데 집중했다.

[로스트 랜드 원정]

주최 - 전민철 헌테s급]

주관 - 성간 연합, 신성 길드

참여 - 지평선 길드, 데모닉 길

후원에 참여한 길드 리스트가 생각 보다 길었다.

중견 길드 10개, 그리고 소규모 길 드 30개에서 이번 원정대에 참여했 다.

S급 헌터 2명.

A급 헌터 60명.

B급 헌터 500명.

그 이하 등급은 1,000명.

원정대 참여 길드가 많다 보니 총 인원도 1,500명을 넘어갔다.

"뭐가 이렇게 많아?"

"그것도 추려낸 거랍니다."

"일이 생각보다 너무 커져 버린 거 같은데."

"예상 못 하셨어요? 세계평화를 꿈 꾸는...

"아, 그만 좀 약 올리고. 이게 다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야?"

"전투 인원만 그 정도예요. 지원팀 장인들 500은 안 넣었거든요."

" 엄청나네."

혀를 내둘렀다.

2천을 넘어가는 원정대 규모.

여러 길드에서 참여를 희망한다고 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급로는 협회에서 확보해주기로 했어요."

"아. 보급도 필요하지."

로스트 랜드는 게이트 공략과 달리 그때그때 보급을 받을 수 없다.

게이트와 현실이 뒤섞여버린 위험 지대.

원정이 시작되면 최소 한 달 정도 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

임진강 너머로 올라가면 식량이나 소모형 무장을 공급받을 수 없으니 시시때때로 국내에서 보급을 받아야 한다.

"이러니까 전쟁을 치르는 것 같잖 아."

"전쟁 맞죠. 북한 군벌, 아니 그 뒤에 있는 판데모니엄하고 싸우시려 는 거잖아요."

"너무 유능해도 문제라니깐."

나는 피식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기분이 나쁘지 는 않았다.

"참. 데모닉 길드를 포함시키는 건 괜찮은 거야?"

요마 일족 악마, 베르데.

녀석은 한국에서 '장용수'라는 이 름으로 데모닉 길드를 창설했다.

전에 들어보니 엘리가 데모닉 길드 를 원정 참여 목록에서 배제한 모양 인데.

베르데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엘리 한테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참여 리스트에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보니 내심 엘리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데모닉 길드요?"

"어. 기준에 못 미치는데 괜히 부 탁한 것 같아서."

"이번 참여 길드 중에서는 신성 다 음으로 적극적이고 파견 규모도 커 요."

엘리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파견 규모가 크고 헌터들의 실력도 뛰어났다.

그럼 참전을 거부할 이유가 없잖 아.

"거절한 이유가 있는 거야?"

"예전에 게이트 공략 때 민철 헌터 를 무시했으니까요."

어?

생각해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전주 게이트.

국내 처음으로 열린 대형 게이트를 공략할 때, 베르데와 처음으로 마주 했다.

그때 녀석은 엘리 앞에서 상당히 깐족댔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

"당연하죠. 우리 민철 헌터를 대놓

고 도발했는데 어떻게 잊어버려요!"

엘리는 발끈했다.

와, 내가 무시당했다고 대신 화도 내주는구나.

이 자리에 없는 베르데한테는 미안 했지만, 엘리가 나를 위해 화를 내 주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원정에 참여하면 당분간 엘리를 보 기 힘들었다.

전에 동생과 같이 골랐던 선물을 꺼냈다.

"엘리야. 줄 게 있어."

"그건 뭔가요?"

"열어보면 알아."

엘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포장지를 뜯으니 아크릴로 만든 투 명 케이스와 그 안에 있는 팔찌가 보였다.

"어머."

엘리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 다.

오. 제법 반응이 좋잖아.

동생 녀석. 나중에 만나면 선물 고 르는 안목을 칭찬해줘야겠다.

"나를 위해 늘 애써주니까 고마워 서 준비한 거야."

엘리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잠깐의 침묵.

"고마워요. 근데 차보는 건 나중에 할게요."

"잘 어울리는지 보려면 지금 껴보 는 게 낫지 않겠어?"

"아뇨. 이건...

엘리는 말끝을 흐리더니 팔찌를 담 은 보관함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듯, 입 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로스트 랜드에서 무사히 다녀오시 면 그때 직접 채워주세요."

뭐야.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 데, 별거 아니었다.

"부탁을 들어주려면 무사히 돌아와 야겠네."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1 기화

파주 통일대교.

이곳에 오는 건 두 번째다.

'흑사회의 잔당을 쫓으려고 다리를 건넜지.'

꽤 오래전에 벌어진 일 같은데.

불과 2개월밖에 안 지났다.

다리 아래에 있는 강물은 꽁꽁 얼 어붙었고, 그 위로는 눈이 쌓여 있 다.

완연한 겨울.

2개월 만에 다시 찾으니,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로스트 랜드 행은 저번과 많 이 다르다.'

통일대교 뒤에 펼쳐진 논밭.

버려진 지 오래되어 갈색으로 물든 밭 위로, 헌터 1,500명이 대기하는 중이다.

"민철 헌터!"

저 멀리.

마르탄이 짧은 두 다리를 움직이면 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출발 전 마지막 점검을 가질 겁니 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는 마르탄의 안내를 받아 임시로 세운 본부 지휘통제실로 들어갔다.

2단 트레일러를 개조해서 만든 커 다란 공간.

지휘통제실에는 원정대의 주축을 맡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흠흠. 원정대 운영 계획을 브리핑 하겠습니다."

마르탄은 자연스럽게 브리핑을 맡 았다.

지휘통제실 가운데에는 통일대교를 비롯하여 주변 지형을 표기한 지도 가 놓여 있었다.

"원정대는 로스트 랜드 진입 후 일 차적으로 포인트 A로 진격합니다."

포인트 A.

흑사회를 추격하던 중에 발견했던 괴물 집단의 군락이 있는 곳이다.

당시에는 흑사회의 흔적을 밟느라

군락과 정면충돌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거길 공략하게 될 줄은 몰랐네.'

마르탄은 기다란 막대기로 괴물 군 락을 가리켰다.

"포인트 A를 공략하면 그곳에 주 둔지를 세우고 본격적인 원정을 시 작합니다."

지도에는 삼각형 세 개.

그리고 동그라미 하나가 올려졌다.

"부대를 3개로 나누고 가이아 포머 를 1개씩 배정하겠습니다."

1 부대 - 박민수 대장[S급]

신성 길드 이하 14개 길드.

2부대 - 장용수 대장[A급]

데모닉 길드 이하 13개 길드.

3부대 - 이영우 대장[A급]

다크문 길드 이하 11개 길드.

1부대는 국내 7명 중 하나인 S급 헌터, 박민수가 통솔했다.

진격 방향은 개성으로 향하는 대 로.

도로가 넓어서 대규모 인원이 움직

이기 편했지만, 괴물 군락이 줄지어 자리를 잡은 위험한 지역이다.

2부대는 데모닉 길드의 마스터, 장 용수를 책임자로 내정했다.

박민수가 통솔하는 1부대의 우측으 로 돌아서 우회로를 소탕, 동시에 1 부대의 백업을 맡았다.

3부대는 다크문 길드의 마스터, 이 영준이 지휘를 담당했다.

주둔지 서쪽으로 진군해서 해안가 를 돌며 위로 우회할 계획이다.

나는 어느 부대에 속해있냐고?

저기 맨 뒤.

홀로 떨어져 있는 동그라미다.

"저는 별동대를 조직해서 따로 움 직이겠습니다."

말이 좋아야 별동대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고 단독 행동 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다 상의가 된 부분이지만, S 급 헌터라고 해도 위험하지 않겠습 니까?"

3부대 대장, 이영준이 손을 들었 다.

다크문 길드는 국내 3대 길드에는 못 들어가지만 10위권 안에 들어가

는 저력 있는 곳이다.

신성 길드를 제외하면 가장 관록 있는 길드이기에, 우회 루트를 도맡 고 있는 3부대 통솔을 맡았다.

나는 짧게 대꾸했다.

"원 맨 아미."

길드장들의 눈동자에서 의구심이

일제히 떠올랐다.

한번 말해서는 못 알아듣는군. 검지를 곧게 펴면서 위로 뻗었다. "단 한 명의 군대라는 말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지휘통제실 내부에 내려앉았다.

수십 쌍의 눈동자들이 나를 향했 다.

흥미.

기대감.

질투.

혹은 걱정.

여러 감정으로 범벅이 된 눈빛을 훑어보면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틀린 소리 한 것도 아니고.'

단독으로는 S급 헌터인 김보성을 압도했고.

A급 헌터들을 넘어서는 소환수를 수십 마리나 부릴 수 있다.

홀로 돌아다니면서 전장을 넓게 활 용할 수 있는 인재.

그게 바로 나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그 용 기가 만용 같은 게 아니기를 바랍니 다."

이영준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 했다.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다.

"실전에서 확인하시면 되죠."

나는 느긋하게 이영준의 말을 받아 쳤다.

米 米 米

전투 인원은 약 1,500명.

지원팀 500명 정도로 구성된 원정 대가 통일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두는 각 길드들의 정예들을 차출 해서 구성했다.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 헌터들.

개중에는 로스트 랜드 원정에 여러

번 참여한 경험자들도 상당수 포함

되었다.

"흐흐. 여길 두 번째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요."

마르탄은 내 옆에 섰다.

입술을 히죽거리는 것이, 꽤 기분 좋아 보였다.

전투 골렘 20기가 마르탄의 뒤를 따라왔다.

"넌 왜 따라오냐."

"이렇게 판을 벌였는데 당연히 보 좌를 해드려야죠."

"안 바빠? 동생 거 갑주도 만들어 줘야지."

"갑주는 재료 조달에 차질이 생겨 서 기다려야 합니다."

"지부 관리도 해야 하잖아."

"그건 엘리한테 맡기고 왔습죠."

빈틈 하나 없구먼.

말 한번 안 지고 받아치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엘리나 마르탄이나 점점 능글맞아 지는 건 착각이겠지?

"그렇게 싫은 티 내지 마십쇼. 제 가 따라가는 게 민철 헌터한테도 도 움일 겁니다."

"왜?"

"여러 길드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 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다.

40개가 넘는 길드가 연합을 이루 어서 원정에 나섰다.

각 길드는 지휘 체계나 전투 스타 일 모두 제각각이다.

오케스트라로 치면 악기 조율을 하 지 않은 채 중구난방으로 음을 내는 격이다.

불협화음.

전투 도중에는 작은 틈이나 실수 하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먼저 나서서 귀찮은 일을 덜어준 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마르탄 을 흘겨봤다.

"무슨 꿍꿍이야?"

"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네가 무료봉사를 할 리가 없잖 아."

"허허. 다 민철 헌터를 생각하고 옆에 붙은 거죠."

"솔직히 말해라. 아니면 너 떼어놓 고 엘리 데려간다."

성간 연합이 어떤 놈들인가.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 지 않는 집단이다.

지부장이 순수한 호의로 전투 골렘 들까지 동원했다고 하면 퍽이나 믿 겠다.

"끙, 윗선에서 이번 원정대를 주목 하고 있습니다요."

" 윗선?"

"예. 한국의 동향은 성간 연합 상 층부에서도 꽤 관심 있게 지켜보거 든요."

의외의 이야기였다.

"탑 말고는 크게 관심을 안 둘 줄

알았는데."

"뭐... 한국의 동향도 그렇고, 민 철 헌터에 대해서도 꽤 신경을 쓰시 는 것 같습니다."

"그 윗선은 누군데?"

"저 좀 살려주십쇼. 거기까지는 말 못 합니다."

마르탄은 울상이 되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번에는 모 르는 척 넘어가야겠다.

짐짓 화제를 돌리려고 주위를 살피 던 중, 신기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 다.

바퀴 8개가 달린 장갑차였다.

"저건 뭐야?"

"아. 신성 그룹에서 만든 수륙양용 수송 차량입니다."

구동 에너지로 마나 스톤을 사용해 서 게이트 안에서도 굴릴 수 있는 차량이다.

빠른 속도와 뛰어난 방어력을 겸비 해서 대형 길드들 사이에서는 사냥 필수품으로 사용했다.

"꽤 요란하게도 준비했네."

"대 몬스터 전용 장비들을 실었다 고 합니다."

전용 장비라고 하니 문수산 게이트 때가 떠올랐다.

괴물 유형과 크기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전용 병기들.

신성 길드에서는 이번 원정대의 성 공을 위해 많은 것을 투자했다.

"참.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마르탄은 발꿈치를 들고 내 귓가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신장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큰 의미는 없었다.

모르는 척 몸을 살짝 숙이면서 귀 를 마르탄의 머리에 가까이 대었다.

-첫 전투에서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십쇼.

•-왜?

-별동대 운영에 의혹을 품은 이들 이 꽤 있습니다.

-그거야 누가 봐도 알 것 같다만.

-중견 길드 쪽에서는 이번 원정대 배치에 대해서 불만이 조금씩 나오 는 모양입니다.

길드 수십 개가 모였다.

잡음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나야 세계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원정대를 조직했지만, 모두 그 뜻에

감화돼서 참석한 건 아니었다.

당장 신성과 데모닉 길드만 해도 이번 원정에서 주가를 올릴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마르탄이 잡음을 내뱉는 중견 길드 들을 배제하지 않은 건....

'내가 기선제압을 할 수 있을 거라 고 계산했다는 거지.'

깜찍한 짓을 했다.

내 기량까지 넣어서 짠 포진.

개전에서 중견 길드들의 기를 죽이 는 것도 마르탄의 계획에 포함되었

다.

"머리를 꽤 썼어."

"눈치채셨습니까?"

"당연하지. 다음에도 이런 상황이 나오면 귀띔이나 해줘라."

마르탄은 멋쩍게 웃었다.

내 무력을 믿기에 짠 작전.

땅딸보 녀석이 우수하기에 내릴 수 있는 냉정한 판단이었다.

'이번에는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 보실까.'

통일대교를 지나자 저번에 봤던 이 국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열매 들.

겨울이라 그런지, 그 위에 눈이 쌓 여서 더 몽환적인 느낌을 냈다.

사박- 사박-

바닥에 쌓인 눈을 밟으면서 5분 정도 나아갔다.

그때.

"잠깐 정지."

다크문의 길드장, 이영준이 손을 위로 올렸다.

백색으로 물든 눈동자.

탑에서 마주했던 꼬맹이, 노데스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천리안]이었다.

"다크문, 아니 선두에 있는 헌터들 은 모두 전투 준비를 취해주십시 오."

"적입니까?"

"예. 적은 숲트롤, 숫자는 100마리 입니다."

트롤.

B등급 괴물 중에서 상대하기가 까 다로운 대형 종으로 악명이 자자한 놈이다.

"처음부터 너무 열렬하게 환영해주 는데."

"역시 로스트 랜드는 다르군."

"트롤이라. 까다로운 적을 만났어."

선두에 선 헌터들은 혀를 찼다.

트롤은 특유의 재생능력과 엄청난 체력으로 유명했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지 않으면 상처 를 금세 재생해버려서 사냥하기가 까다로웠다.

헌터들이 전투 준비를 갖출 무렵.

"저 정도로 힘 뺄 거 없죠. 모두 쉬고 계시죠."

두 발로 지면을 박차면서 선두 헌 터 그룹을 벗어났다.

돌발적인 행동.

모든 헌터들의 이목이 나한테 집중 되었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십쇼.

마르탄의 부탁이 귓가에 맴돌았다.

압도적인 힘.

그건 나한테 가장 자신 있는 분야 였다.

혼돈기를 일부 분리해서 성력으로 치환, 빛의 군세를 불러냈다.

[빛의 군세를 사용합니다.]

[성력 1,200을 소모합니다.]

강렬한 빛이 지상에 강림했다.

순백의 갑주를 입은 기사들.

에인헤야르 6기사가 모습을 드러냈 다.

'베르데가 보고 있긴 한데, 아이템 이라고 둘러대야지.'

지금은 연출이 더 중요했다.

광희의 기사들은 그만큼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손을 휘저어서 불멸 권능으로 보관 중인 임모탈 워리어들을 모두 불러 냈다.

도합 50기.

흑색 갑주로 무장한 거인들이 반쯤 부서진 도로를 점령했다.

하늘 위에는 빛을 흩뿌리는 광휘의 기사들.

지상에는 죽음의 기운을 휘감고 있 는 불멸의 전사들이 들어섰다.

[다크 스타 - 대지의 사슬]

양손에는 20m 길이의 흑색 사슬을 쥐었다.

'누가 위인지 확실히 보여주마.'

각본은 마르탄.

주연은 나.

엑스트라들 역할로는 트롤 무리.

급작스럽게 편성된 액션 영화가 개 봉하려는 순간이다.

172 화

5년 전, 민철 이전에 S급 심사를 통과한 헌터가 있었다.

박민수.

국내 6번째 S급 심사 통과자이자 신성 길드 부길드장을 역임하고 있 는 헌터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얼굴.

신장은 190cm.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질 몸매, 상체는 갈색 머플러를 두르고 허리춤에는 마력 보주 여럿을 챙겨 뒀다.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실은 마법 특기를 지녔다.

그가 이번 원정대에 참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5년 만에 나온 S급 후 배에게 흥미가 생겼고.

두 번째 이유는 길드장인 천지연의

부탁 때문이었다.

-부길드장님. 이번 원정대는 기회 가 될 겁니다.

천지연의 빛나는 눈빛.

그녀는 타인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꿰뚫어 보는 신비한 눈동자를 지녔 다.

'그 눈동자는 오래간만이었지.'

과거, 천지연을 처음 만났을 때 자 신을 바라보던 눈빛과 같았다.

박민수는 그녀의 눈가에 감도는 광 채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때문에 S급 헌터가 된 뒤에도

독자적인 길드를 만들지 않고 신성 길드에 머물렀다.

'길드장을 놀라게 할 만한 사람이 라.'

7번째 S급 헌터에 대한 기대감.

한편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박민수의 마음을 물들 였다.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은 민철의 전 투를 보는 순간.

"허허."

한 줄기 탄성으로 배출되었다.

감탄을 내뱉은 건 무의식의 발로였

다.

대단했다.

아니, 대단하다는 한마디로 감정을 압축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다.

『주군을 위하여!』

공중에서는 천사를 닮은 백색 기사 들이 지상으로 쇄도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화려한 꽃이 피어났다.

성광기로 빚어낸 꽃잎이 트롤의 몸 뚱이를 스칠 때마다 상처가 쩍쩍 벌 어졌다.

"돌보다도 단단한 가죽을 저렇게

쉽게 잘라낸다고?"

헌터 한 명이 중얼거렸다.

괴물 등급은 보유 마력과 신체 능 력으로 정해진다.

트롤은 B급으로 분류되었지만 특 유의 재생능력과 방어능력, 그리고 뛰어난 체력 때문에 사냥 난이도가 A급에 준했다.

'물론 S급 정도라면 트롤을 상대하 는 것쯤은...

박민수는 허리춤에 매어둔 보주를 만지작거렸다.

원거리 조작이 가능한 마력 보주.

자신의 마력을 적당히 실어서 돌진 시키기만 해도 트롤의 몸뚱이에 구 멍을 낼 수 있다.

'저게 소환수라는 게 문제다.'

에인헤야르.

한기 한기가 A급 헌터를 상회하는 능력을 지녔다.

공중 부유와 성력을 다룬다는 특이 성까지 감안하면 저들만으로도 S급 헌터와 겨뤄볼 만했다.

'저 흑색 거인들은 또 어떤가.'

임모탈 워리어.

짙은 사기(死氣)를 두르고 있는 언

데드 괴물들은 트롤들을 그야말로 짓뭉갰다.

어마어마한 완력과 맷집.

덩치와 힘, 모두 트롤을 압도했다.

그뿐이랴.

죽음의 기운으로 트롤의 생명력을 갈취했다.

특유의 재생능력이 도리어 해가 되 었다.

'저런 괴물들을 손짓 한 번으로 50 마리나 불러냈다.'

박민수도 강력한 소환수를 불러내 는 스킬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서먼 아이스 드래곤]

실제 용을 불러내는 건 아니고 마 력으로 조형한 대형 아이스 골렘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자신과 버금가는 힘을 지닌 소환 수

대신 불러내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 여서 의식을 치러야 하고 소모되는 재료도 꽤 비쌌다.

한 번 불러내는데 20억.

그렇기에.

민철이 손짓 한 번 해서 불러낸 괴물들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소환수를 특성을 지닌 헌터도 이 만한 소환수들은 다루지 못해.'

박민수의 시선이 전장 한가운데를 향했다.

트롤 무리의 중심부.

전민철은 전투 직후 적 군집을 향 해 돌진했다.

쇠사슬이 한 번 춤을 추면 트롤 서너 마리가 튕겨 나갔다.

사슬에 맞은 부위는 살덩이가 파이

고 뼈가 드러날 만큼 커다란 상처가 새겨졌다.

흑색 사슬을 연신 휘두르면서 트롤 무리를 무너트리더니.

"아. 손맛이 부족하네."

...라는 말을 태연하게 하면서 무 기를 바꿨다.

손에 쥐고 있던 쇠사슬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 흑색 건틀렛을 양손에 착용하 더니.

"역시 트롤은 손맛이지."

트롤들을 패기 시작했다.

민철의 행동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 월했다.

S급 심사를 통과한 뒤로 무너진 없었던 평정심이 처음으로 흔들렸 다.

'저게 갓 S급 심사를 통과한 헌터 라니?!'

그야말로 괴물이다.

S급 심사 영상도 살펴봤다.

같은 S급 헌터인 김보성과의 대련.

박민수는 그때만 해도 준비만 갖추 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싸우면 내 필패다.'

강력한 소환수도 문제지만.

민철의 엄청난 돌파력을 저지할 방 법이 없었다.

'길드장이 왜 열광했는지 이해가 가.'

한편으로는 납득했다.

천지연이 그렇게나 많은 인적 • 물 적 자원을 이번 로스트 랜드 원정에 투자했는지.

민철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갔다.

비단, 그런 생각은 박민수만 한 게

아니었다.

원정대 선두.

여러 격전을 겪은 베테랑 헌터들도 박민수와 같은 생각을 품었다.

특히 민철의 별동대 활동에 이의를 제기했던 이영준의 경우, 쩍 벌어진 입을 닫을 줄 몰랐다.

'저게 개인의 힘이란 말인가!'

이영준은 민철의 S급 심사를 직접 지켜봤다.

심사위원인 김보성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인 실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개인'의 무력은 원정대 같은 대규 모 전투에서 빛을 발하기가 어렵다.

'원정대 대장이 부상을 입으면 원 정대 사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다크문 길드에서는 신성 길드와 마 찬가지로 이번 원정에 많은 것을 걸 었다.

5년 만에 탄생한 7번째 S급 헌터.

그리고 은밀하게 알려진 [가이아 포메의 존재.

이영준은 다크문 길드의 명운을 걸 고 원정대에 참여했다.

'그런 입장도 모르고 홀로 움직이

겠다고 하다니.'

민철의 단독행동은 원정대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중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트롤 무리를 유린하고 있는 민철을 보니, 그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깨 달았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꼴이군.'

씁쓸한 웃음이 입안에 감돌았다.

한편으로는 기뻤다.

괴물을 사냥할 때 강한 헌터가 아 군으로 있는 것만큼 든든한 것은 없

다.

원 맨 아미.

그 장난 같은 말은 과장 하나 없 이 모두 진실이었다.

마르탄이 올린 무대.

민철은 무대 위에서 지닌 힘을 여 지없이 보여주며 원정대 헌터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 #:

"크오오...

트롤 한 마리가 신음을 흘리더니 지면에 고꾸라졌다.

전투 개시 후 5분.

100마리 중 서 있는 놈은 4마리에 불과했다.

"크으으으 "

트롤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감 돌았다.

나를 살짝 흘겨보더니 등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도망치고 있어!"

"저 괴물이 적을 두고 등을 돌리는 건 처음 보는 일인데."

"저 정도 힘의 차이다. 당연한 일 이지."

원정대 헌터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첫 무대는 성공한 건가.

'그렇다고 해서 적을 놓아줄 필요 는 없잖아.'

따악-!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Yes. My Lord!j

에인헤야르 6기사는 내 뜻을 읽었 다.

여기는 게이트가 아니다.

게이트와 현실이 섞여버린 새로운 세계.

트롤들을 살려두면 동료들을 불러 올지도 모른다.

광휘의 기사들은 빠르게 비상, 직 후에 쏜살같이 강하해서 도주 중인 트롤들의 등을 노렸다.

"크오오!"

트롤들은 발악적으로 팔을 휘둘렀 다.

『그렇게 무른 공격으로 어딜!』

에인헤야르는 매화검법을 펼쳐서 트롤의 팔을 잘라내고, 연속으로 검

을 휘둘러서 심장을 찔렀다.

최후의 트롤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100마리 중 살아서 돌아간 놈은 없었다.

"피를 채집하고 이동합니다."

나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트롤의 피는 치유능력에 탁월해서 치유 포션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 다.

뒤에 있던 지원팀 장인들은 트롤 사체에서 피를 추출했다.

'무리가 커서 그런가, 어그로도 잘 끌리네.'

흑사회 잔당을 쫓았을 때는 대규모 괴물들의 습격을 받은 적이 거의 없 었다.

로스트 랜드 초입.

통일대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데, 괴물들이 떼로 몰려들 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나는 원정 초기부터 근처에 있는 괴물들은 씨를 말릴 생각을 하고 있 었다.

짧게는 보급로 확보.

길게 보면 [가이아 포메로 정상으

로 돌린 국토의 안전을 다지기 위해 서는 필요한 작업이었다.

'먼저 찾아와준다는데 거절할 이유 가 없다.'

통일대교 인근의 괴물 숫자를 미리 줄여두면 원정대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트롤 무리의 습격을 긍정적으로 생 각하며 선두 그룹으로 돌아왔다.

원정대 선두에 있는 헌터들이 모두 나를 바라봤다.

선망.

동경.

그리고 안도감.

트레일러에서 본 것과는 다른 눈빛 이다.

나는 마르탄을 흘겨봤다.

-잘하셨습니다.

녀석은 입을 뻥끗 거리면서 엄지를 척 들었다.

각본가가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 다.

돌연 갈색 머플러를 휘감은 거한이 다가왔다.

같은 S급 헌터인 박민수였다.

"민철 헌터."

"예. 무슨 볼일이라도?"

안색을 굳힌 채 나를 내려다보는 거한.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상대 의 신장이 190cm이다보니 절로 고 개를 들어서 올려보게 되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저랑... 나중에 대련 한번 하지 않으시 겠습니까?"

뭐야.

무슨 말을 하려고 인상을 팍 쓰고 있었나 했더니.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참아내는 표 정이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곰처럼 큰 거한이 귀여워 보이는 건 처음이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지요."

"아, 고맙습...

"단. 원정대가 끝나고 붙어봅시다."

"암요. 지금은 로스트 랜드 원정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박민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구먼.

다크문 길드의 마스터이자 아까 나 한테 태클을 걸었던 사내, 이영준도 다가와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뭐가요?"

"이번 원정대장인 민철 헌터의 능 력을 의심하는 발언을 한 것 말입니 다."

의외였다.

나이도 진득하게 먹은 아저씨.

다크 문 길드의 명성은 국내 3대 길드에는 못 미치지만, 전국적으로 알려진 10대 길드에 들어갔다.

그 길드의 총책임자가 여러 사람 앞에서 사과를 한 것이다.

'뒤에서 마르탄이 뭐라고 했나?'

나는 다시 한번 마르탄을 흘겨봤 다.

추궁하는 눈빛을 보내니, 마르탄은 고개를 좌우로 격하게 저으며 모르 는 일이라고 어필했다.

'이거 무력시위 효과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나는 이영준의 어깨를 잡으면서 숙 였던 허리를 펴게 했다.

한 번의 무력시위가 이렇게 큰 효

과를 발휘할 줄이야.

출발할 때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던 원정대의 분위기.

첫 전투를 마친 뒤에는 축제를 온 것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피 채집을 끝내고 다시 전진을 시 작했다.

원정대는 통일대교 위에 쭉 이어졌 던 도로를 진군 루트로 삼았다.

소규모 괴물 무리가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주군! 7시 방향에서 하이 오크 100기가 접근하는 중입니다.』

『3시 방향에서 적 발견!』

에인헤야르를 정찰병으로 활용한 덕에 대비를 갖추어서 피해 없이 막 아냈다.

얼마쯤 전진했을까.

길가 옆에 선 나무 표면 위로, 기 다란 고랑이 파인 것을 발견했다.

A급으로 분류되는 괴물, 스라킹이 영역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괴물들의 군락이 대규모로 자리를 잡은 곳.

포인트 A가 눈앞에 보였다.

173 화

포인트 A 공략.

진형 선두에 나선 것은 신성 길드 와 데모닉 길드였다.

널찍한 도로 위에 세워진 거대한 군락.

괴물의 군락지가 훤히 보이는 자리

에서 전면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쪽에는 화염 포탑을 설치해야 해."

"이번 상대는 스라킹이다. 발목을 잡을 수 있게 잘하라고!"

신성 길드에서는 과거 데빌사우르 스 레이드 때 본 적 있는 마법 포 탑들을 설치했다.

마력 수정과 재료만 배치해두면 자 동으로 완성되는 포탑이다.

-화염 포탑 20문

-뇌전 포탑 20문

총 40개 마법 포탑이 배치됐다.

전선 앞에도 여러 색을 띤 수정을 지면에 묻어뒀다.

그중, 수정 몇 개가 눈에 들어왔 다.

'저 기운은 진법 같은데?'

마법진과 다른 에너지 파동.

마법이 자연의 힘을 사용자의 의지 대로 비틀어서 형상화하는 것이라 면.

진법은 기의 흐름을 유도해서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래서 사용에 제약도 따르지.'

풍수지리에 따라 전개 가능한 진법

의 종류가 달랐다.

조건만 맞추면 마법진보다 적은 에 너지로 더 뛰어난 효과를 낼 수 있 어서, 가성비가 뛰어났다.

'저것도 하린 작품인가?'

진법이 담긴 수정에 흥미가 생겼 다.

전투가 끝나면 물어봐야겠다.

데모닉 길드에서는 진형을 맞춰서 앞에 도열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데모닉의 이름 을 세상에 알리는 겁니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

베르데는 맨 앞에 서서 열성적인 목소리로 길드원들을 독려했다.

[현혹하는 검은 혀 특성이 발동됩 니다.]

[호감을 가진 이들의 잠재능력을

20% 향상시킵니다.]

[검은 혀에 현혹된 이들은 낮은 확 률로 광화(狂化) 상태가 됩니다.]

'저게 영업 비밀이었나.'

나는 혀를 내둘렀다.

현혹하는 검은 혀.

요마 군주 로잘린이 보유한 [잠식 하는 검은 혜의 하위 특성이다.

주문을 빠르게 완성시키는 언령.

그리고 호감 가진 상대의 이성을 둔하게 만들어서 전투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효과를 지녔다.

'어쩐지. 길드에 들어가면 애들이 싸움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더니.'

맛집의 국물 맛 비결이 조미료도 아니고.

데모닉 길드가 빠르게 성장한 배경 에는 베르데의 특수 능력이 숨겨져 있었다.

'준비는 끝나가는 것 같군.'

나는 선두 그룹에서 이탈했다.

대로변 옆에 난 샛길.

흑사회를 추격할 때 이용했던 곳이 다.

샛길 앞에는 일단의 무리가 전투태 세를 갖추고 나를 기다렸다.

다크문 길드였다.

이영준은 나를 보자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민철 헌터. 준비는 끝났습니다."

"어서 가죠."

나는 다크문 길드 소속 헌터 100 명과 함께 샛길로 이동했다.

어디.

국내 3대 길드의 전력.

제대로 구경 좀 해볼까?

* 米 米

펑, 퍼퍼펑!

포탑 40문이 일제히 마력을 해방 하면서 전투의 서막을 열었다.

화염과 벼락 다발이 하늘을 수놓았

다.

곡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마력탄 다 수는 엉성하게 세워진 군락 울타리 를 강타했다.

콰아앙-!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울타리를 지키던 괴물 몇 마리가 마력탄 세례에 휘말려서 시커멓게 타버렸다.

"크루루루!!"

뒤늦게 침입을 감지한 괴물들이 괴 성을 질렀다.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문이 양옆으

로 갈라지고, 군락을 이루던 괴물들 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라킹.

평균 신장은 6m 정도.

새하얀 털과 원숭이를 닮은 얼굴, 기다란 팔과 다리가 인상적인 A급 괴물이다.

"크루루!"

"루루!"

스라킹들은 열린 문 사이로 튀어나 왔다.

수십에서 수백.

숫자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쿠 쿵!

스라킹 군집은 짧게 도약하면서 빠 르게 전진했다.

기다란 다리를 오므렸다가 일거에 힘을 발산, 마치 용수철이 튕겨나듯 전신으로 힘을 받아서 연속적으로 뛰었다.

"선두와의 거리 200!"

"지금이다. 발사!"

신성 길드 부길드장.

박민수가 크게 외쳤다.

포탑 다수가 다시 한번 마력탄을 발사했고.

마법 계열 헌터들은 재배열을 마친 마법들을 일제히 해방했다.

하늘에서는 벼락의 비가.

정면으로는 화염 폭풍이 몰아쳤고.

대지는 들썩이면서 스라킹들의 움 직임을 방해했다.

마법 수십 개가 지면을 휘몰아쳤지 만, 놀랍게도 서로의 진로를 방해하 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정교하게 프로그램을 짠 것 마냥 마법연계에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 다.

"많기도 하군."

박민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스라킹 백 마리가량이 마법 세례에 휩쓸렸다.

그중 숨통을 끊은 것이 20.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 다.

뒤에서 몰려드는 스라킹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제 2사. 발사!"

각양각색의 마력탄이 접근 중인 스 라킹 무리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첫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백여 마 리가 포격에 휩쓸렸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A급 괴물답게 마법 저항력도 뛰어 나서 치명상을 입은 건 정면으로 마 력탄을 맞은 놈들뿐이었다.

헌터 한 명이 크게 외쳤다.

"거리. 100!"

"지금이다."

박민수는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딥 미스트 마법진이 발동됩니다.]

[팔괘진이 발동됩니다.]

[나이트메어....]

진형 앞에 설치했던 수정 다발이 일제히 발동되었다.

무수한 안개가 전방을 뒤덮었고.

딛고 있던 땅이 늪지대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변형된 지 형의 영향을 받아서 진법 중 하나인 팔괘진이 발동되었다.

린스우드 사에서 제작한 진법.

살상력은 낮지만 조건만 충족시키 면 어지간한 마법진보다 높은 효율 성을 자랑했다.

"이때를 기다렸다."

스라킹 군집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마법진으로 발을 묶는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무리 중 절반가량이 환술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크루루! 크루!"

후방에 있어서 함정에 빠지지 않은 스라킹들은 전방에 펼쳐진 안개 지 대를 우회했다.

베르데가 앞으로 나섰다.

"데모닉 길드. 우측의 적을 막아낸 다!"

양쪽으로 갈라진 스라킹 무리.

신성 길드는 좌측을, 데모닉 길드 는 우측을 담당하기로 이야기를 마 쳤다.

신성 길드의 사전 공작은 기대 이 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분단된 괴물 무리.

교전 때에는 군세의 숫자가 줄어드 는 만큼 돌파력도 급감했다.

"이놈들만 막아내면 우리의 승리 다."

베르데는 [현혹하는 검은 혜 특성 으로 길드원들의 능력치를 증폭시켰 다.

이성을 둔감하게 하고 야성의 감을 일깨우는 검은 혀.

데모닉 길드원들은 약간 붉어진 눈 동자를 번들거리면서 스라킹 집단을 막아섰다.

[다크 홀]

[블랙 텐티클]

[블랙 핸드]

베르데는 분심공을 사용, 정신을 셋으로 분리했다.

대외적으로도 암흑 마법 특기를 지

녔다고 알려져서 스킬을 사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대신 위력을 조절, 평범한 A급 헌 터 수준 정도의 힘으로 스라킹 집단 의 선두를 가로막았다.

쿠드드득!

검은 촉수가 지면에서 솟구치고, 커다란 손이 스라킹의 몸을 휘감았 다.

앞으로 날아간 흑색 구체는 스라킹 집단을 빨아들이면서 엉겨 붙게 만 들었다.

[철벽]

[혼신의 돌격]

[기사회생]

탱커들은 스라킹 집단의 발이 엉켜 있는 동안 제각각 스킬을 사용해서 달라붙었다.

스라킹은 도약 능력이 뛰어나다.

작은 틈 하나만 줘도 금세 진형 안으로 파고들 능력이 있기에, 탱커 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데모닉 길드는 스라킹 집단이 파고 드는 걸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꾸준 히 피해를 누적시켰다.

박민수는 데모닉 길드의 선전에 엄 지를 들어 올렸다.

"제법이잖아. 이쪽도 체면치레는 해야겠군."

허리춤에 달아놓은 보주 10개가 일제히 하늘 위로 솟구쳤다.

고유 마력으로 각인을 마친 보주.

보주 10개는 허공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바람, 화염, 번개, 얼음 등 여러 속성의 마탄을 발사했다.

박민수의 고유 특성인 [다중 지배] 와 염동력을 결합한 스킬이다.

"크루루루!"

스라킹 일부는 높이 도약해서 갈고 리발톱으로 보주를 낚아채려 했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공격이 들어오면 빠르게 알아채고 보주를 뒤로 물렸다.

"신성 길드의 저력을 보여주자!"

박민수는 보주들을 조종하며 스라 킹 무리를 농락했다.

포탑이 불을 뿜었다.

원정대 헌터들은 양쪽으로 갈라진 스라킹 집단과 맞서 싸웠다.

* *

나는 샛길로 우회해서 스라킹 군락 의 옆에 들어왔다.

다크문 길드 헌터 무리가 내 뒤를 따라 신속하게 진입했다.

'여기까지는 미리 입안해둔 작전대 로.'

포인트 A 공략전.

작전 개요는 간단했다.

망치와 모루.

고대로부터 쭉 내려오는 유서 깊은 전술이다.

'한쪽은 적의 공격을 버텨내는 모

루, 다른 쪽은 망치가 되어 뒤를 노 린다.'

모루 위에 철을 올려놓고 망치로 내려치듯.

적을 진형 안으로 파고들게 하고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통적인 포진이 다.

위력적인 전술이지만 많이 알려진 만큼 약점도 명확했다.

공격을 버텨내는 모루가 박살 나면 진형 자체가 붕괴되고 만다.

'생각 이상으로 잘 버텨주고 있잖 아.'

적 본대를 유인해서 마법진과 진법

으로 절반 정도를 묶는다.

정면을 막아서 반으로 줄어든 적의 전력을 다시 분리시키고 막아냈다.

군락 근처에 접근한 뒤, 이영준은 천리안을 사용했다.

"다크문 길드장님. 안쪽 상황은 어 떻습니까?"

"으음. 생각보다 숫자가 많습니다."

" 얼마나요?"

"500정도가 더 남아 있습니다."

사냥하면서 전력에 여유를 둘 줄이 야.

계획하고는 달랐다.

'스라킹의 공격적인 성향을 생각하 면 모두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군락에 남은 숫자가 상당히 많았 다.

잘못하면 전열과 후미, 양쪽에서 스라킹 집단의 공세를 받아내야 할 상황이다.

"방법이 있습니다."

혼돈기를 암흑 마나와 성력으로 분 리.

대량의 암흑 마나를 손에 집중, 지 옥의 겁화를 일으켰다.

[지옥의 겁화를 일으킵니다.]

[암흑 마나 10,000을 사용합니다.]

내력 중 1/3이 한 번에 빠져나갔 다.

살짝 현기증이 돌았지만 이를 악물 고 참아냈다.

'현생에서는 이만큼 마나를 다뤄본 게 처음이구나.'

강대한 힘이 손에서 꿈틀거렸다.

팔을 크게 휘두르니, 손을 휘감고 있던 검붉은 화염이 벽을 이루면서 군락 일부를 잠식했다.

겁화로 된 벽.

높이는 15m에 달해서 스라킹의 도 약 능력으로도 쉽게 넘기 어려웠다.

이영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민철 헌터는 계획이 다 있으셨군 요."

"임기응변이죠."

나는 짧게 대꾸했다.

군락에 남은 스라킹들이 당황한 기 색을 띠며 날뛰었다.

일부는 겁화에 정면으로 돌진했으 나 까맣게 타들더니 불꽃의 일부로 화했다.

불길을 넘을 수 있을까 가늠하는 놈도 있었고.

일부는 화염 벽을 우회하려고 부지 런히 달렸다.

"저놈들이 우리 뒤를 치려면 꽤 시 간이 걸릴 겁니다."

"그 전에 적 본대를 무너트리면 되 겠군요."

이영준은 주먹 쥔 손을 위로 들었 다.

다크문 길드 소속 헌터들은 완전 무장을 갖추었다.

전투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럼 괴물들의 뒤통수를 때려주러 갑시다."

나는 살짝 얼어붙은 땅을 박차면서 무리의 선두를 맡아 빠르게 전진했 다.

목표는 스라킹 군세의 본대.

신성 길드와 데모닉 길드가 분전하 고 있는 방향이었다.

174 화

임모탈 워리어 50기.

에인헤야르 6기.

그리고.

내 비장의 무기.

-멍. 드디어 내가 활약할 시간인 가!

펜리르는 고개를 위로 추켜세우며 나름 의젓한 자세를 잡았다.

무릎에도 안 닿는 푸들이 포즈를 잡아봐야 귀여운 느낌밖에 안 나서 문제다.

"너는 이 녀석들 데리고 후배 좀 도와주러 가라."

데모닉 길드.

베르데가 있는 방향을 맡겼다.

-맡겨줘라. 멍!

펜리르는 짜리몽땅한 네 다리를 움 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폴리모프 해제]

강렬한 빛이 작은 푸들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40cm 크기의 푸들은 온데간데없고 전고 10m에 달하는 커다란 늑대가 녹색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아우우우우!

늑대의 하울링.

존재감을 담은 울음소리가 대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히 이익!"

"저, 저 괴물은 어디서 나온 거

야!"

뒤따라오던 다크문 소속 헌터들이 연달아 걸음을 멈췄다.

길드장인 이영준마저 긴장한 기색 이 역력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제 펫입니다."

"저 엄청난 괴물이 민철 헌터를 따 른다고요?"

『나는 주인의 종. 주인의 동료는 내 전우이며, 적 또한 마찬가지다.』

펜리르는 푸들 때와 달리 위엄이 가득한 중저음으로 대꾸했다.

목소리에 존재의 '격'이 고스란히 실렸다.

명색이 신화시대의 괴물이다.

전성기 때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렸 지만, 그 격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허, 허허허."

이영준은 넋이 빠진 목소리로 힘없 이 웃음을 흘렸다.

『모두 나를 따라와라.』

펜리르가 먼저 돌진했다.

불멸의 군세와 에인헤야르 무리가 뒤를 따랐다.

'저쪽은 맡겨 두면 되겠지.'

후위는 지옥의 겁화를 광범위하게 전개.

분산시킨 스라킹 군집 일부가 있는 쪽으로는 펜리르를 보냈다.

'남은 무리를 빠르게 쳐야겠어.'

마법진과 진법의 효과도 영원하지 는 않다.

스라킹 군집의 전력 상당수가 묶인 동안 최대한 많은 피해를 줘야 한 다.

"먼저 갑니다."

경악에 빠진 다크문 길드를 뒤로하

고 운류보를 전개하면서 앞으로 나 아갔다.

"미, 민철 헌터의 뒤를 따라 돌 격!"

이영준이 한 템포 늦게 허둥지둥 반응했다.

별동대로 뽑힌 헌터들도 곧장 내 뒤를 따라 돌진했다.

전력이 분산된 스라킹 군집.

미리 세워둔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제법 많은 숫자가 남아 서 반씩 나눠 원정대를 공격했다.

'여기도 300마리 정도.'

거리를 좁히자, 스라킹 무리의 숫 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성 길드는 정면에서 스라킹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중이었다.

"프리즈매틱 월!"

박민수는 보주 4개를 마름모꼴로 배치했다.

불, 바람, 번개, 그리고 대지.

각 보주는 다른 속성 마나를 발산 하여 강력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크루루!"

스라킹 여러 마리가 형광색 방어막 에 돌진했다.

쩌엉-

무지갯빛 방어막은 강력한 반탄력 으로 스라킹들을 튕겨냈다.

"지금이다!"

콰앙- 쾅!

포탑이 연신 마력탄을 쏘아내고.

마법 계열 헌터들은 스라킹들이 진 형 안에 파고들지 못하게끔 견제했 다.

탱커, 그리고 근접 계열 헌터들은 대형 괴물 전용 장비를 착용해서 스 라킹의 몸뚱이에 상처를 하나둘 새 겼다.

'제법이잖아.'

신성 길드의 실력은 전에도 본 적 이 있었다.

놀라운 건 현직 s급인 박민수의 실력이었다.

여러 속성의 보주를 사용해서 자유 자재로 마력을 컨트롤했다.

'프리즈매틱 월은 속성을 중첩으로 할수록 강해지는 방어마법이다.'

다중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는 극소 수였다.

많아 봐야 3속성을 다루는 정도.

근데 박민수는 보주를 사용해서 4

속성을 다루어냈다.

'헌터의 마법 능력은 조금 다르단 말이야.'

굳이 따지면 마법과 이능 정도의 차이였다.

신성 길드는 박민수의 지휘에 호흡 을 맞춰 스라킹 군집의 공세를 맞받 아쳤다.

나는 스라킹 군집의 뒤를 밟았다.

"크루루?"

스라킹 한 마리가 놀란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말에 대꾸해주는 대신.

[다크 스타 - 백은의 신월도]

[다크 스타 - 제왕의 검]

양손에 검과 도를 한 자루씩 들고 휘둘렀다.

검강과 도강.

흑색 기운이 형상화된 두 강기가 스라킹의 몸을 찢어버렸다.

"크루루! 크루!"

스라킹들의 집중력이 양쪽으로 나 누어졌다.

나는 발을 크게 내디뎠다.

등 뒤에서는 강렬한 휘광이 쏟아졌 고.

족적이 새겨진 바닥에서는 붉은 파 문이 일렁였다.

천마군림보와 압도의 권능.

스라킹 무리가 당황한 기색을 파고 들면서 일순간이지만 호흡을 빼앗았 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곧장 바닥을 차면서 맹렬하게 돌 진.

제왕검형과 혼원벽력도를 펼치면서

스라킹들을 도륙했다.

"크루? 크루루!!"

스라킹 군집의 시선이 앞과 뒤를 오락가락했다.

정면에는 신성 길드가.

뒤로는 내가 맹공을 쏟아내면서 스 라킹 군집을 압박해왔다.

놈들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크문 길드에서도 그 기회를 놓치 지 않았다.

"민철 헌터의 뒤를 따라 돌격!"

앞뒤로 가해지는 공세.

스라킹들의 전열이 빠른 속도로 무 너 졌다.

다크문 길드는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스라킹 군집을 빠르게 몰아쳤다.

'국내 10대 길드라고 하더니 꽤 하 네.'

전열을 한 번 무너트렸다고는 해도 A급 괴물들 사이로 돌진하는 건 쉬 운 일이 아니다.

"유격대가 도착했다. 밀어붙여라!"

신성 길드에서도 내 움직임에 반응 했다.

방어 위주에서 처음으로 공세로 전 환, 정면으로 돌진했다.

특히 박민수는 보주 위에 올라타더 니 공중에서 마력을 마구 퍼부었다.

'나도 뒤처질 수는 없지.'

선두에 서서 전열을 무너트린 뒤.

[다크 스타 - 대지의 사슬]

무기 둘을 없애고 20m 길이 사슬 을 꽉 쥐고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렸 다.

"저한테서 떨어지십쇼."

긴지천쇄공에 휘말리면 어떻게 될 지 책임 못 진다고.

패애행-!

강기를 머금은 쇠사슬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 * *

스카링 군락 소탕은 성공적이었다.

앞뒤로 공격당한 스라킹 군집.

널찍한 도로는 마법과 진법 덕에 봉쇄되었다.

양 측면은 수풀이 가득해서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유격대의 공격으로 전 열이 붕괴했다.

전의가 꺾인 스라킹 소수가 무리를 이탈해서 도망쳤다.

"크루루!"

군락에 남은 스라킹 일부가 뒤늦게 겁화를 크게 돌아서 전장에 합류했 다.

『너네 동료 영혼 맛 쩔더라.』

펜리르의 눈동자가 흉성에 젖어 들 었다.

영혼 포식.

스라킹의 영혼을 잔뜩 먹고 흥이 달아오른 모습이다.

펜리르가 땅을 박차는 순간, 굉음 이 터졌다.

흑사회 추적 이후 오래간만에 날뛰 어서 그런 걸까, 스라킹 집단 사이 를 종횡무진하며 마구 날뛰었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스라킹 군집은 경험치 덩어리였다.

60레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4번째 권능을 일깨울 수 있기 에, 더 분발했다.

후위에 있는 스라킹 무리도 전멸.

마법진과 진법으로 발이 묶인 스라 킹 본대 일부를 포위해서 전장을 완 벽하게 정리했다.

"각 길드에서는 피해를 파악해주세 요."

중상자 9.

경상자 31.

놀랍게도 사망자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원정대장님 덕분입니다."

"저 소환수들. 특히 원정대장님과 펭구님의 활약상은 정말 대단했습니 다!"

첫 대규모 교전.

헌터들은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것 에 기뻐하면서도 내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S급 헌터인 박민수는 내 양 손을 마주 잡은 채 강하게 흔들면서 격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이래서야 내가 후배님이라고 부르 기도 민망합니다. 하하!"

말투는 이상했지만.

기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도 내 속도를 따라와 줄 수준 은 되는구나.'

나도 내심 놀랐다.

천 단위나 되는 A급 괴물 군집을 정면으로 상대했다.

망치와 모루.

모루 쪽을 담당하는 진형은 적의 공세를 일방적으로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다.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고는 해도 그렇지.'

스라킹은 도약 능력이 탁월해서 진 형을 붕괴시키고 난전으로 이끄는 게 특기인 괴물이다.

베테랑 헌터들도 스라킹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것을 까다롭게 여겼 다.

그런 적을 상대하고도 사망자가 하 나도 없다니.

놀라운 결과였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라는 거겠 지.'

원정대 헌터들이 실전에서 내 활약 상을 보고 놀랐듯이.

나 또한 원정대 수준을 보고 감탄 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로스트 랜드 원정.

북한 군부를 공격할 구실로 준비했 지만.

원정대의 수준을 감안하면 군부 토 벌 전에 후방을 안전하게 다져낼 정 도는 되어 보였다.

첫 대규모 교전.

서로가 지닌 능력을 확인할 수 있 는 값진 전투였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바로 움직입 시다."

포션과 치유 스킬.

숨만 붙어 있으면 얼마든지 원상태 로 복원시킬 수 있다.

부상자들은 후방으로 돌리고 군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락 주변에서는 적을 찾을 수 없 습니다."

이영준은 천리안으로 주위를 살펴 본 뒤에 보고했다.

"그럼 포인트 A에 주둔지를 마련 하죠."

스라킹 군락은 꽤 넓었다.

군락 주위를 감싼 울타리는 길이만 수 킬로미터였다.

평균 신장 6m인 괴물이 천 단위로 거주한 곳.

원정대 전원이 들어와서 거주해도 될 만한 공간이다.

"아니. 원정대장님. 이건 도대체 뭐 랍니까?"

"하, 하하. 그게 말이야."

나는 볼을 긁었다.

접전 중에 스카링들의 발을 묶으려 고 지옥의 겁화를 사용했다.

광범위하게 펼쳐진 검붉은 불꽃.

마력이 소진되지 않는 한, 무한하 게 증식하면서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이다.

군락 중 1/3 정도가 지옥의 겁화

에 타버렸고, 지면은 고열에 지속적 으로 노출된 탓에 용암으로 변해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있어 봐. 치우면 되잖아."

뒤늦게 겁화의 권능을 해제했다.

높이 솟구쳤던 불길이 손짓 한 번 에 자취를 감추었다.

군락 중심부를 쭉 가르면서 새겨진 상흔.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서 주둔지를 설치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태운 흔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원정대 전원이 들어올 공간 은 충분했다.

"1 부대장님."

"예. 원정대장님."

박민수가 재깍 대답했다.

대규모 교전을 하면서 호흡을 맞췄 더니, 이제는 원정대 내부 호칭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군락 터 주위로 포탑 설치를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법 포탑은 신성 길드의 전력이 다.

원정대는 군대처럼 명확한 상하 관 계가 아니라 협업 체제로 운영되기 에, 허가를 구해야 했다.

"물론입니다. 주둔지에 설치할 포 탑들은 미리 여분으로 준비해두었습 니다."

"원정이 끝나면 신성 길드장님께 감사드려야겠군요. "

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주둔지 설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어. 그건 이쪽에 설치!"

마르탄은 주둔지 설치를 진두지휘 했다.

성간 연합제 골렘들이 부지런히 움 직이면서 가건물을 설치했다.

"주둔지는 언제쯤 완성될 것 같

아?"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군대처럼 천막을 치는 게 아니라 상당 기간 머무를 수 있는 거주 구 간을 만드는 것이다.

반나절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하린이 힘써준 덕분입죠."

"아. 아까 진법도 혹시 하린 솜씨 였나?"

"진법이요? 린스우드 人}가 최근 신 성 길드하고 거래를 트고 있다는 이 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자세하게는 모르는 건가.

내 짐작대로, 신성 길드에서 사용 한 진법은 하린의 작품인 것 같다.

'서울로 돌아가면 물어봐야겠어.'

마법진과 진법의 융합.

전생의 나도 떠올리지 못했던 신박 한 응용 방식이었다.

"참. 민철 헌터. 보고드릴 게 있습 니다."

"응?"

"가이아 포머 있지 않습니까."

순간 심장 한구석이 철렁했다.

이번 원정의 핵심.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가이아 포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걸까.

"설마 고장 났다거나 파손 같은 이 야기는 아니지?"

"아. 그건 아닙니다요. 여기에 들어 온 뒤로 갑자기 반응을 보여서 말입 니다."

"잠깐. 그게 반응을 보였다는 건...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마르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여기가 게이트의 핵 이 있었던 장소, 라는 것이죠."

게이트가 침식한 땅을 원래대로 복 원하는 기계.

가이아 포머의 첫 실전.

그 성능을 확인해볼 시기가 생각보 다 빠르게 찾아왔다.

175 화

부우웅, 부웅!

휴대전화 크기의 초록색 정육면체 가 간헐적으로 진동음을 냈다.

가이아 포머의 부속품인 [정보 큐 브] 였다.

'이걸로 게이트의 핵을 찾는 게 먼

저라고 했지?'

정보 큐브는 다우징 머신이 수맥을 찾아주는 것처럼 현실과 융합한 게 이트의 핵 위치를 파악하는 역할을 했다.

군락 안쪽을 돌아다니니 큐브의 진 동이 더욱 격해졌다.

부웅! 부웅!

어느 지점에 서자, 정보 큐브가 연 신 흔들렸다.

"마르탄."

"예. 금방 갑니다요."

장갑차량이 근처에 오더니, 문을

열고 복잡하게 생긴 기계를 내렸다.

위는 우산처럼 생겼고, 지지대 3개 로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였다.

아래쪽에는 시추기 드릴과 비슷한 형태의 기다란 막대가 달려 있었다.

영국에서 개발한 기계, 가이아 포 머 였다.

"근데 이거 작동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원정은 개시하자마자 끝인 거지."

"저 투자한 거 많습니다.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마십쇼."

"이 아저씨 말하는 게 웃기네. 네

가 먼저 꺼낸 이야기거든?"

마르탄과 시시덕거리는 동안 가이 아 포머 작동 준비를 마쳤다.

위이잉!

기계 아래쪽에 달린 드릴이 맹렬하 게 회전하며 지면 아래로 파고들었 다.

땅을 파헤치던 드릴은 어느 순간에 회전을 멈췄다.

[게이트 핵 감지]

[현실과의 분리를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01:00:00]

"오... 이거 정말 되는 건가?"

"민철 헌터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빌려온 거잖아. 결과는 까봐야 아 는 거지."

게이트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버 린 침식의 땅.

그곳에 게이트의 핵만 적출해 원래 의 형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기계가 나타났다.

결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였다.

'이미 로스트 랜드 원정을 시작했

으니 목표는 달성했다.'

내가 노리는 것은 북한 군벌.

그 뒤에 암약하고 있는 판데모니엄 이다.

가이아 포머의 유효성은 어디까지 나 부수적인 요소.

성공하면 좋지만.

핵 적출에 실패해도 아쉬울 뿐이 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성공했으면 좋겠다.'

로스트 랜드 복원.

대격변이 일어난 후, 인류에게 남

겨진 커다란 숙제였다.

만약 로스트 랜드 복원에 성공하 면?

'세계의 판도가 바뀔지도 모르는 엄청난 일이다.'

작동 중인 가이아 포머를 쭉 바라 봤다.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렜다.

가이아 포머에 관심을 가진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길드에서는 주둔지를 세우는 도중 한 번씩 들러서 힐끗거렸다.

"훠이. 저쪽으로 가십쇼."

마르탄은 전투 골렘 일부를 가이아 포머 주위에 배치했다.

주둔지 설치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가이아 포머도 핵 분리 절차를 모 두 마쳤다.

위이잉-

땅 아래로 푹 들어갔던 드릴이 역 으로 회전하면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드릴 끝.

보라색 구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 다.

"핵이다!"

누군가가 구체를 가리키면서 큰소 리로 외쳤다.

땅에 침식해서 융합 작용을 일으킨 원흉.

게이트 핵이 현실과 분리된 채 원 형의 모습 그대로 지상으로 끌어 올 려졌다.

米 米 #:

가이아 포머의 첫 실전.

현실과 융합한 게이트의 핵을 분

리, 적출에 성공했다.

원정대의 사기는 최고조로 올랐다.

"이번 원정은 다른 때랑 달라."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뒤집어 질걸?"

로스트 랜드 복원.

전 세계에는 게이트와 현실의 융합 현상 때문에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 이 가득했다.

사회 질서가 무너진 북한처럼 로스 트 랜드 안에서 사는 이들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은 물론, 온 세계가 뒤집어질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장비를 영국에 서 어떻게 대여한 거지?"

"로스트 랜드 복원은 여러 나라들 의 숙원사업이잖아."

"원정대장님의 수완이 대단한 거겠 지."

로스트 랜드를 원래대로 되돌리려 는 시도는 과거에도 쭉 있었다.

강대국들은 마도 공학과 현대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서 기술을 발전시켰 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실효성을 거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이아 포머를 개발한 영국마저도, 유럽 각 나라와 연합을 맺고 원정대 를 추진하는 단계라서 실전 활용 단 계까지는 아니었다.

원정대 헌터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는 모두 마르탄을 통해 내 귀로 쏙 쏙 들어왔다.

"이 정도면 순조로운 출발이군."

"순조롭다고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

"너무 건조한 거 아닙니까. 순조로 운 수준이 아니라 대성공입죠!"

마르탄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얘는 어째 나보다도 더 기뻐하는 것 같네.

"핵을 적출했다고 해서 바로 복원 되는 건 아니니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현실과 게이트의 융합 상태.

그 원흉인 핵을 제거해도 곧장 원 래의 환경으로 회복되는 건 아니었 다.

이미 마력이 대지를 침식해서 환경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전처럼 괴물들이 튀어나올 일은 없는 게 다행이지.'

게이트의 핵을 제거하지 않았으면 주기적으로 괴물들이 재생성 되어서 원정대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포인트 A에 주둔지를 설치하고 하 루가 지났다.

원정에 참여한 헌터들은 휴식 시간 을 가진 뒤, 세 부대로 편성되었다.

신성, 데모닉, 그리고 다크문.

약 50개 길드는 각 길드를 중심으 로 재편성되었다.

"방어는 성간 연합에서 맡겠습니 다."

마르탄은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투 골렘 50기.

각 개체의 전투력은 A급 헌터와 맞먹었다.

거기에 성간 연합에서 가져온 온갖 강력한 무구들을 장착시킨 상태였 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신 호탄 발사해."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땅딸보 드워프를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크크.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처음 봤을 때만 해도 VIP네 어쩌 네 하면서 허리도 못 폈다.

요샌 엘리처럼 농담을 던질 만큼 꽤 편하게 말을 했다.

"내가 좀 편해졌나 보다?"

"저 따위가 어느 안전이라고 VIP 님의 심기를 거스르겠습니까."

자식.

원래 이렇게 능구렁이였나.

마르탄과 잡담을 나누는 동안 셋으 로 나뉜 원정대가 주둔지를 벗어났 다.

"어느 방향으로 가실 겁니까?"

"가장 힘들 것 같은 곳으로 가야 지."

"역시 세계평화를 위해 한 몸 불사 르시는...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세계평화의 '▲'자라도 꺼내 봐라."

우드득.

주먹을 말아 쥐면서 몸을 푸니, 뼈 가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났다.

세계평화가 목적은 아니지만.

가장 위험한 격전지를 노리는 것은 사실이다.

'곧 60레벨이다.'

스라킹 군락을 쓸어버리면서 레벨 을 하나 더 올렸다.

57 레벨.

네 번째 권능을 일깨우려면 앞으로 레벨을 3개만 더 올리면 된다.

'원정대에게 경험치를 양보할 수는 없지.'

북한 군벌과의 일전을 염두에 두는 중이다.

권능을 하나라도 더 일깨우면 앞으 로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 다.

"펜리르야."

- 멍?

"네가 이 땅딸보 좀 보호해줘라."

-알겠다. 멍!

전투 골렘 50기에 펜리르.

이 정도면 주둔지가 허무하게 함락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원정대가 3갈래로 갈라진 것 을 확인하고 별도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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