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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말씀드렸듯, 알테라-쇼넴은 쓰레기를 땅속 양분으로 전환하는 마법이에요."

옆에서 걷고 있던 레지나가 말했다.

우린 지금 엘프들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세계수 관리인 백도운은 위그드라실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위그드라실로 진입하기에 현재 관리인은 너무 연약합니다.]

따위의 메시지를 보고 위그드라실 진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연약해서 진입할 수가 없다는데 별수 있나.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레지나가 검지만 펼친 오른손을 흔들어 댔다.

"그러려면 우선 선행돼야 하는 게 있어요."

"선행돼야 하는 거요?"

"네. 그게 뭘까요?"

"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빙긋 웃기만 한다.

말해주지 않을 테니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흠."

선행돼야 하는 거라….

나는 레디투스 숲의 엘프들이 알레타-쇼넴을 쓰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내가 사다 줬던 치킨을 먹고 남은 상자들을 한데 모아 땅에 파묻었었다.

쓰레기를 무식하게 파묻어 버리는 줄 알고 식겁했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그러려고 묻은 게 아니었다.

레지나가 그 앞에 앉아 마나를 모은 두 손을 바닥에 갖다 댔고, 그 결과 내 검지만 한 새싹이 자라났다.

쓰레기를 땅속 양분으로 전환한 거다.

"…아."

"아셨나요?"

"알 것 같습니다. 흙바닥에 파묻어야 하는 거죠? 그래야 땅속 양분으로 전환할 수 있을 테니까."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역시…."

"꼭 파묻으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전환된 에너지가 공기 중으로 그냥 흩어져 버리거든요."

"공기 중으로? 그럼 쓰레기는요?"

"에너지로 전환됐으니 사라지게 돼요."

오, 사라진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현재 지구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아주 많았다.

비닐이나 스티로폼 같이 썩지 않는 플라스틱 제품이 특히.

그걸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테라-쇼넴은 이용가치가 아주 컸다.

뭐, 새싹이를 키워야 하니 그냥 사라져 버리게 두지는 않을 거지만.

알테라-쇼넴은 꼭 땅에 파묻고 써야겠….

어라?

"잠깐만요. 질문 있습니다, 선생님."

"네? 선생님이요? 저요?"

레지나가 당황한 얼굴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당황한 걸 못 본 척하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알테라-쇼넴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땅에 파묻고 써야 했다.

그렇다면….

"새싹이에게 양분을 주려면 성역에 들어와야 하는 겁니까? 일일이?"

"...."

질문을 받은 레지나는 입을 다물었다.

귀찮아하는 태도에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쯤, 그녀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응? 웃어?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건가?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어요."

"같았다고요?"

"전대 관리인님도 그런 질문을 하셨다고 해요. 그분께서는 돌아다니는 걸 아주 좋아하셨거든요."

"헤, 그래요?"

"어머님은 그분께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레지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관리인님. 일일이 돌아오실 필요는 없답니다. 세계수 님과 관리인님은 연결돼 있으니."

"연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세계수님께 전달될 겁니다. 설령,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그 말을 들었을 때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려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말이 자꾸만 거슬렸다.

"흐음? 대체 뭐지…?"

***

저녁노을이 지는 개미굴 던전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총 네 명의 남자들.

두 명은 천칭 길드의 서지혁과 최기정, 다른 두 명은 도운에게 아양을 떨어댔던 관리소 직원들이다.

다만, 관리소 직원들 쪽은 의식이 없어 풀숲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최기정이 마법으로 재운 것이었다.

직원들에게 손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관리인 놈들에 의하면 두세 시쯤 들어갔답니다. 너무 이르게 온 것 아닐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서지혁의 질문에 최기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개미굴 던전이 E등급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백도운은 A급 헌터였다.

E등급 던전으로 4시간 전에 들어간 A급 헌터….

지금쯤이면 슬슬 나올 때가 되었다.

"…평범한 A급 헌터라면, 저도 동의했을 겁니다."

"음?"

서지혁이 던전 입구에서 고개를 돌려 최기정을 바라봤다.

'평범한 A급 헌터'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도운의 실력을 의심하는 걸까.

확실히, 현재 그는 A급으로 올라선 데에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

한진환의 추천에 의한 것이어서 실력 검증을 받지 않은 탓이다.

정부가 검증하지 않았으니 헌터로서 실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건데….

문제는 추천한 사람이 그 한진환이라는 것.

과연 다른 실력 검증이 필요할까?

적어도 서지혁은 도운이 A급 헌터의 수준이라는 데에 의심할 생각이 없었다.

"…평범한 A급 헌터는 E등급 던전 따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A등급 게이트 돌기에도 바쁘니까요."

"호오…."

서지혁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부하의 말이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A급 헌터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E등급 던전을 돌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지 않은 한 절대로 돌지 않을 터였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저곳으로 들어갔는데, 그 목적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군."

"그러니 관리소로 들어가셔서 편히 기다리심이-"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네?"

"저기 나오는군."

서지혁이 던전을 향해 턱짓했다.

개미굴 던전에서 도운이 나오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힘없이 걸으면서.

그 모습에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E등급 개미굴 던전 따위를 도는 거로 지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옳았다.

도운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발걸음에 힘이 없는 것은 다른 감정 때문이었다.

그의 몸을 휘감은 감정은 바로 실망감이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그가 불만스러워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도운은 고개는 가만히 둔 채 눈동자만 돌려 서지혁을 바라봤다.

"백…."

서지혁은 이름을 끝까지 부를 수 없었다.

도운이 오른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기다려."

"뭐?"

"저 새끼가…."

서지혁과 최기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운은 둘을 무시한 채 쓰러져 있는 관리소 직원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관리소였다.

딸랑.

문을 열자 방울 소리가 울려 댄다.

"설마…!"

최기정이 다급하게 지팡이를 꺼냈다.

관리소로 들어간 도운이 신고하려는 것으로 생각해서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모으는데, 서지혁이 팔을 들고는 단호하게 최기정을 말렸다.

"그만."

"왜 그러십니까?"

"신고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쓰레기통?"

"네?"

최기정은 반문했다.

서지혁의 입에서 쓰레기통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관리소로 들어간 도운을 바라본다.

그는 막 관리소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손에는 네모나고 파란 것이 쥐어진 채였다.

"쓰레기통…?"

최기정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쓰레기통을 꺼내 와?

그런 의문이 떠올랐을 때,

"아르카."

도운이 거대한 목검을 꺼냈다.

그 목검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에게 월광의 검사라는 이명을 붙여 준 것도 그 무기다.

이번에야말로 최기정은 백도운이 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검사가 검을 꺼내 들었다면 할 것은 베는 것뿐이었다.

최기정은 곧바로 지팡이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후! 후웁!"

"...."

도운은 아르카로 베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찌르는 동작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훕! 후훕!"

양손으로 쥔 아르카를 이용해 풀이 자라난 땅을 파 댔다.

그렇다.

2m가 넘는 검으로 삽질을 시작한 거다.

각이 잡힌 자세로 아주 빠르게.

그 꼴을 본 최기정은 공격하는 거로 착각해 지팡이에 마나를 모았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서지혁에게 물었다.

"대체… 저 자식 뭐 하는 거랍니까?"

"우문이군. 나라고 알 것 같나?"

"죄송합니다. 답답해서 그만…."

"괜찮아. 네 마음 이해한다."

나도 너처럼 저놈이 뭐 하는지 몰라서 답답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 서지혁은 가만히 도운이 하는 꼴을 지켜봤다.

도운은 이제 관리소에서 갖고 나온 파란 쓰레기통을 뒤집고 있었다.

아르카로 파낸 구덩이에 쓰레기를 부어 버린 것이다.

"허어…?"

"...?"

갸웃.

서지혁과 최기정은 동시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다.

구덩이를 열심히 파더니 거기에 쓰레기를 채워 넣어?

"…헉!"

최기정은 숨을 들이켰다.

도운의 기행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열심히 파냈던 구덩이에 쓰레기를 채워 넣더니 다시 흙으로 덮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최기정은 분리수거가 생활화돼 있는 한국의 국민으로서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꾹 참기로 했다.

도운이 하는 짓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했던 탓이다.

"...."

"...."

땅을 고르게 덮은 도운은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에 마나를 모았다.

푸른 마나가 금세 도운의 손을 덮는다.

최기정은 그 마나가 매우 청정하다고 생각했다.

울창한 숲의 피톤치드 향이 나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도운은 마나를 모은 두 손을 땅에 갖다 댔다.

그러자,

움푹!

땅이 꺼졌다.

그 대신 마나가 솟아올랐다.

"허억!"

최기정은 깜짝 놀라 숨을 토해 냈다.

쓰레기를 파묻은 곳에서 마나가 솟아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 더 놀랄 만한 일이 남아 있었다.

솟아난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도운에게로.

"설마…!"

마나는 도운에게로 들어갔다.

"말도 안 돼!"

그걸 본 최기정이 아연실색했다.

제110화

"말도 안 돼!"

최기정이 놀라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선 믿을 수 없는 걸 본 사람의 경악스러움이 느껴졌다.

후드에 가려 반쯤 가려진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낸 입술도 파르르 떨렸다.

말도 더듬더듬 내뱉었다.

"방금, 방금 쓰레기가! 대체 어떻게…?"

"최기정?"

서지혁이 바보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부하를 돌아봤다.

그 부하는 자신의 리더가 제 이름을 부른 것도 듣지 못한 채 나만 바라봤다.

입에서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굉장한… 굉장한 마법…!"

"굉장하다니, 저게?"

"그렇습니다! 저 마법은, 세계의 흐름을 바꿀 마법입니다!"

"뭐?"

서지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그래도 그는 제 부하를 무시하는 녀석은 아닌 듯하다.

세계의 흐름을 바꿀 마법이라고 말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 나를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것이다.

옆에 있던 최기정이 천천히 설명했다.

"쓰레기를 파묻은 곳에서… 마나가 솟아 나왔습니다. 그렇다는 건, 쓰레기를 마나로 바꿀 수 있다는… 아니, 아니. 평범한 마나가 아니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순수한 마나…. 즉. 백도운은 쓰레기를 아주 깨끗한 마나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최기정은 말하던 도중 가끔 입을 다물었다.

금방 말을 이어 나가긴 했지만, 그 속도는 아주 느릿느릿했다.

그 모습은 마치 머릿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쓰레기를 마나로 바꿀 수 있다…. 대단하긴 하다만,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일인가?"

"사물의 성질을 바꾼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흠…?"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마나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그건…."

부하의 말에 서지혁은 입을 다문다.

다시 나를 쳐다본다.

그리 만들어진 마나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떠올린 것이다.

그렇다.

청정한 마나는 나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스마트폰으로 들어온 거였다.

나와 연결돼 있다는 새싹이에게로 가기 위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최기정은 조금 다르게 오해했다.

"백도운에게로 향했습니다. 몸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건, 저놈은 쓰레기로 자신의 마나를 늘릴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알테라-쇼넴은 내 마나를 늘리는 행위가 아니라 새싹이를 성장시키기 위한 행위였다.

뭐…. 길게 보면 그렇게 또 틀린 말이 아니긴 하다.

그런 식으로 새싹이가 성장하고 나면, 성장한 새싹이가 나를 성장시켜 주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 나올 쓰레기가 얼마나 많을지!"

"아."

"즉, 백도운은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나도…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최기정처럼 순수하게 감탄했었다.

쓰레기가 깨끗한 마나가 되어 내게 날아오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다시 땅을 파니 사라져 버린 쓰레기도 신기했고.

그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알테라-쇼넴을 썼었다.

그리고….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896/1000)]

많은 횟수를 채울 수 있었다.

물론, 퀘스트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000번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

아쉽게도, 안타깝게도.

방금 관리소 쓰레기통에 있던 쓰레기로 알테라-쇼넴을 쓴 후에야 총 896회가 되었다.

아직 104회를 더 써야 했다.

쩝.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최기정이 말을 이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그리고? 또 있나?"

그러게.

"저 마법을 이태천과 백도희가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호오…."

처음으로, 서지혁의 눈이 커졌다.

내가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얻을 수 있다고 했을 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도희와 태천이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눈빛이 변했다.

비단 녀석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 두 사람만이 아닐 거다.

한진환이나 최희석 같은 이들이 알테라-쇼넴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을 터.

마나가 무한한 한진환….

나도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소름이 살짝 돋으려고 했다.

뭐, 그 양반에게 가르쳐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르쳐 준다고 한다면… 도희 정도일 거다.

태천이는 마나가 그렇게까지 많이 필요하진 않았으니까.

[세계수 어린나무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합니다.]

어라, 불가능하다고? 왜?

[어린나무는 자신과 마나의 성질과 파장이 맞아야 한다고 전합니다.]

[현재 그것이 맞는 존재는 관리인과 엘프들뿐이라고 말합니다.]

나와 엘프들뿐이라면….

세계수의 마나를 가진 존재만이 가능하단 소리일 거다.

나는 세계수의 관리인으로서 세계수의 마나를 지니고 있고, 엘프들은 세계수의 아이로서 세계수의 마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도희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겠는걸….

아쉽게 됐다.

"세계의 흐름을 바꿀 마법이라…."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기정의 말에 동의했다.

방금 내가 알게 된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말이 맞군."

"그러니까-"

"그만."

서지혁이 최기정의 말을 막아 세웠다.

자신을 향해 들어 올린 손을 보며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백도운을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날 바라보던 녀석에게서 따갑고 아니꼬운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더군다나,

[어린나무가 눈앞의 상대에게서 살기를 느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새싹이도 느꼈다.

역시, 새싹이가 살기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정말로 날 죽이자고 말하려고 했나 보다.

천칭 길드 측면에서 보면 나는 적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나와 서지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공정한 합의를 한 계약자였으니까.

짜증이 난다고 내가 먼저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그런 이유로 나와 서지혁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 것이다.

시간으로 치면 1분 정도 흘렀을까?

"…그래, 너희 여기까진 왜 찾아왔어?"

내가 질문을 던져 침묵을 깨뜨렸다.

이렇게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게 더 곤혹스럽게 느껴져서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얼굴 보고 있어서 뭐하겠는가.

서로 할 일 하고 헤어지는 게 최선이다.

협의를 깨뜨리고 싸울 수는 없었으니까.

날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니.

"선물을 주기 위해서."

서지혁도 곧바로 대답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리라.

"선물이라니, 그쪽이 나한테?"

"그래."

"…거, 무지하게 뜬금없네."

"뜬금없다, 라…."

딱.

서지혁이 중얼거리더니 두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그러자 최기정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는다.

마법…이었지만, 공격 마법은 아니었다.

그건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최기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순식간에 나타났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런데… 되돌아왔을 땐 왼손에 무언가의 목덜미를 붙든 채였다.

그것은 반은 뱀이고 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그건…."

[어린나무가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새싹이가 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혐오스러운 기운.

그렇다면 저것이 무엇인지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

"권속이잖아?"

"바로 알아보는군. 그래. 크라우드다."

"그걸 왜… 아."

선물이라더니….

아무래도 예전에 내가 했던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웬만하면 놈들을 죽이지 말아주겠어?"라고 했던 말과 "정 죽일 거면 나한테 데려와"라고 했던 말을….

서지혁이 두 팔을 으쓱였다.

"이제 기억이 나나?"

"아니, 진짜로 데려올 줄은 몰랐지."

"최대한 선처해 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정말 고맙다…."

"최기정."

"네."

최기정이 너무 고마워서 한숨이 다 나오려고 하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왼손에 붙들고 있는 뱀 인간을 질질 끌고 와 내 앞에 내려놓는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그것은 꼭 죽은 것 같았다.

몸통이 미세하게 커지고 작아지는 걸 반복하지 않았다면 정말 죽은 줄 알았을 거다.

"선물이 마음에 드나?"

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이다.

그때 데려오라고 했던 건 결실을 위한 에너지를 마족의 권속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굳이 권속 놈들에게서 빼앗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거절하지 말고 챙겨 가야겠다. 아까우니까.

새끼손가락 하나만 나무뿌리로 바꾼 다음 뱀 인간을 포박했다.

"호오."

"...!"

다시 스킬을 풀어 손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뱀 인간을 포박한 나무뿌리는 그대로였다.

흥미로운 걸 본 듯 웃던 서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안 죽이는 건가?"

"죽일 거야."

"그럼-"

"여기서 말고."

일부러 한 건 아니었지만, 알테라-쇼넴을 쓰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것만으로도 최기정은 나를 죽이고 싶어했으니, 세계수의 뿌리로 힘을 빼앗는 모습까지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서지혁과는 다른 생각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부하들은 곧잘 멍청한 짓을 하는 법.

"어디서 죽이든 그건 내 마음이잖아."

"…그렇긴 하다만."

서지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뱀 인간을 내려놓고 다시 서지혁의 뒤로 물러났던 최기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 어?

아니, 아니다.

자세히 보니 최기정의 턱 끝이 내 쪽이 아니라 서지혁에게 향해 있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내가 아니었다.

"자, 네게 선물까지 갖다 바쳤다. 이제 동맹을 맺을 마음이 좀 들었나?"

"...."

오?

최기정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최기정은 지금 서지혁에게 따지고 싶은 거다.

아마도,

'백도운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

문제는 그 이유를 당사자인 나도 모른다는 거다.

내게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이유가 뭘까.

유재이에 따르면 서지혁은 A급 헌터 세 명과 동시에 싸워 이겼다.

그 말은 A급 헌터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란 거다.

남산 게이트에서 만났을 때의 나 같은 건 순식간에 죽이고 돌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아마 나는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서지혁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가? 아쉽군. 그걸 산 채로 잡는데 제법 고생했는데 말이야."

계속해서 동맹을 맺자며 저자세로 나왔다.

대체 왜?

내가 도희의 오빠고, 이태천의 친구라서?

글쎄, 그게 이유가 될까?

순간이동 마법에 출중한 최기정을 부하로 두고 있는데?

대비만 잘해 놓으면 서지혁은 한진환에게서도 도망칠 수 있을 거다.

"...."

그런 녀석이 내게 잘 보이고 싶어한다….

흠. 생각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잘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다.

그렇다면….

써먹으면 될 일이다.

"부탁 좀 하자."

"부탁? 뭐지?"

대뜸 무슨 부탁인지를 물어온다.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인 거다.

"...."

최기정은 그 꼴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었지만.

"그쪽 부하 말이야. 순간이동 잘하지?"

"한국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 말에 최기정의 비틀렸던 입술이 살짝 풀어졌다.

한국 최고라는 칭찬에 고까웠던 마음이 풀린 듯했다.

"나 좀 서울로 옮겨 줘."

"서울?"

"되도록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아니면, 쓰레기가 많은 곳이라거나."

"쓰레기가 많은 곳이라니…."

서지혁은 중얼거리며 얼빠진 얼굴을 했다.

물론, 그 얼굴은 금세 사라졌다.

쓰레기가 많은 곳의 의미를 알아차린 거다.

방금 내가 알테라-쇼넴을 쓴 모습을 봤으니까.

"…적당한 곳을 하나 알지."

"오. 그래?"

"기정. 백도운을 그곳으로 보내라."

"그곳이라 하시면…?"

"청담에 있는 곳 말이다."

"아."

청담?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긴 한데… 쓰레기도 많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최기정이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곧 내 발밑에 순간이동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백도운."

"글쎄다. 나는 웬만해선 보기-"

탁.

내 말을 끊듯 땅을 짚는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라?"

워프 게이트를 탔을 때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개미굴 던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빌딩이 한 채 보였다.

눈에 익은 빌딩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오늘 점심때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

녀석들이 보낸 곳은 헌터 협회 인근 유료 주차장이었다.

"...."

음.

내가 말한 쓰레기가 이런 쓰레기를 뜻한 게 아니었는데….

제111화

방 안에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다.

거울은 그러나 단순한 거울이 아니다.

내 모습을 비추지만, 옆방에서는 이 방을 들여다볼 창이다.

한쪽에서만 보이는 매직미러다.

즉, 나는 지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취조실에 들어와 있었다.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흥미로웠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그런 내게 한 남성이 질문을 던진다.

[헌터 협회 헌터 관리 4팀 팀장 최기우]

나를 만나고자 집까지 찾아왔던 협회 사람이다.

개미굴 독점권을 판매했고, 병원에 병문안을 오기도 했었다.

의식을 차리지 못했을 때 찾아왔기에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흠…."

나는 그가 한 질문을 머릿속에 되뇌었다.

왜 그랬느냐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정확히는, 눈앞에 있는 최기우에게 대답하기 곤란했다.

내 스킬에 대해 말해줘야 할 테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해줘도 괜찮겠지만….

그걸 확신할 수가 없어 묵비권을 행사했다.

최기우는 묵묵부답인 날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묵비권을 행사하시려는 겁니까? 이럴수록 곤란해지는 건 도운 씨예요."

글쎄, 과연 내가 곤란해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오해로 비롯해 취조실까지 오게 됐지만,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오해만 풀리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갈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오면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해줄 생각이다.

최희석이나 한진환 같은.

"도운 씨."

"네."

"우리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도운 씨가 이상한 짓 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압니다."

"음…."

"그러니 쉽게 갑시다, 네? 왜 그랬는지만 말해주세요. 그럼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도돌이표도 아니고.

최기우는 또다시 왜 그랬는지 물어왔다.

나는 그에게 이유를 말해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자 차분한 태도로 나를 대하던 최기우가 감정을 드러냈다.

그 감정은,

[세계수 어린나무가 관리인을 향한 불만을 느꼈습니다.]

불만이었다.

쾅!

최기우가 책상을 거칠게 치며 날 부른다.

"도운 씨!"

그가 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이 방에 없는 이들도 감정을 드러냈다.

[어린나무는 아니꼬운 시선들도 느꼈다고 전합니다.]

새싹이가 매직미러를 통해 이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느꼈다.

"지금 선배님께서 내일 있을 일로 얼마나 바쁜지 압니까!"

"압니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가 얼마나 바쁜지는 전화 통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협회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선배님을 불러달라고 해요?"

"그래야 제가 입을 열 거니까요."

"아니, 그냥 말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대체 왜 쓰레기를 땅에 파묻은 겁니까!"

왜 쓰레기를 땅에 파묻었냐고?

그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쓰레기를 파묻은 일을 떠올렸다.

***

퀘스트를 깨기 위해 철제 쓰레기통을 뒤집었다.

사람 한 명쯤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큰 쓰레기통에서 각종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

안타깝게도 쓰레기통 크기와 비교하면 내용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꼴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보지 마, 정신 이상한 사람 같은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됐어. 그러다 괜히 귀찮아질라."

따위의 말들도 해댔다.

그 말들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아르카로 땅을 팠다.

금세 파낸 구덩이에 쓰레기를 파묻고, 다시 흙과 벽돌을 덮는다.

그러는 동안 내게 뭐라고 하던 사람들은 떠나가 버렸다.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 자리를 피한 것이 분명했다.

"…잘 됐군."

덕분에 나는 조용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알테라-쇼넴을 쓸 수 있었다.

두 손에 마나를 모으고 땅에 갖다 댔다.

땅이 꺼지며 마나가 솟아올랐다.

마나는 그대로 내 바지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을 향해 날아들었다.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초급)]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929/1000)]

쓰레기통 하나를 전부 비워내자 33회가 채워졌다.

남은 건 71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좋아. 다음 쓰레기통을 찾아 헤매볼… 아."

다른 쓰레기통을 찾아 헤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서지혁과 최기정이 갖고 온 선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 뱀 인간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에너지를 뺏을 수도 없고…."

이런 데서 에너지를 뺏었다간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에너지를 뺏을 수도 없고….

"흐음. 가장 좋은 건 어디엔가 처박아두는 건데…."

문제는 이곳 유료 주차장에는 처박아둘 만한 곳이 없다는 점이다.

내 차는 지금 협회 지하 주차장에 있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지하 주차장까지 가기는 쉽지 않을 거다.

헌터 협회 앞이었으니까.

밤낮이 없고 시간 개념도 부족한 헌터들은 늦은 시간에도 협회 앞을 어슬렁거리는 법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지금 그러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중얼거리며 뱀 인간을 내려다봤다.

놈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축 늘어져 널브러진 꼴이 꼭 쓰레기 같….

"…아?"

놈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눈앞의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온다.

은빛의 철제 쓰레기통.

그것은 둘레가 컸다.

폭의 길이도 길다.

마치, 사람 한 명쯤은 거뜬히 들어갈 듯이.

"이거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뱀 인간을 들어 쓰레기통에 처넣은 것이다.

그놈은 쓰레기통에 쏙 들어갔다.

마치 놈을 위해 맞춤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 법이다.

"좋아, 완벽해."

짧게 자찬을 한 후 다른 쓰레기통을 찾아 떠났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밤길을 헤맸다.

얼마나 쓰레기통을 찾고 땅을 파고 알테라-쇼넴을 썼을까….

나는 어느새 빛이 닿지 않는 뒷골목까지 오게 됐다.

뒷골목엔 쓰레기통이 없었지만, 나뒹구는 쓰레기들은 많았다.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캔 따위들을 땅에 파묻고 스킬을 썼다.

그때, 시야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1000/1000)]

[관리인의 길 퀘스트의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 조건이 달성됐습니다]

"드디어…!"

지금껏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지였다.

알테라-쇼넴 쓰기 조건을 모두 달성했다.

이는 관리인의 길 퀘스트의 조건이 전부 달성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퀘스트 알림!]

[세계수 관리인이 B등급 전대 세계수 퀘스트 관리인의 길 조건을 전부 달성했습니다.]

[따스한 손길 10000번 쓰기(10000/10000)]

[A등급 이상의 비료 1번 주기(1/1)]

[알테라-쇼넴 1000번 쓰기(1000/1000)]

[세계수의 뿌리 1000번 쓰기(1000/1000)]

[성공 보상 - 전대 세계수의 수액]

[퀘스트 보상받기를 클릭하면 보상이 우편함으로 보내집니다.]

[보상받기를 클릭하시겠습니까? (YES/NO)]

바로 퀘스트 성공 보상을 받았다.

전대 세계수의 수액은 곧바로 우편함으로 옮겨졌다.

화면 속 우편함에 New! 표시가 떠올랐다.

"수액이라…."

수액은 세계수의 마나를 최대 5만까지 저장할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아르카가 마나 칼날을 뿜어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런 만큼 좋은 재료 아이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제 와서 수액은 좀…."

아르카를 한 자루 더 만들 것도 아닌데 수액이 필요할까.

복용하기에도 조금 그렇다.

현재 마나가 260만이나 되니까.

겨우 5만 정도 더 늘어난다고 해봤자 기쁘지도 않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긴 하다.

낫긴 한데….

"계륵이구만…."

큰 쓸모는 없으면서 버리기에는 아깝다.

적당한 가격으로 파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우편함을 열었다.

열자마자 주황빛의 수액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주황빛…?

이상하다.

아르카를 제작할 때 쓰였던 수액은 주황빛이 아니었다.

재이네 대장간에서 주르르 구르다 포스기에 막혔던 모습을 기억한다.

확실히, 그때 수액은 초록빛이었다.

"...."

화면 속 새싹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런 경우가 예전에도 있었다.

바로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이다.

활엽수와 침엽수.

두 종류였었다.

둘 다 전대 세계수의 나뭇잎이었지만 성질은 달랐다.

포션으로 만들었을 때 활엽수는 마나를 더 채워줬고, 침엽수는 체력을 더 채워줬다.

새싹이의 나뭇잎은 그 반대인 것 같지만.

아마… 수액도 그렇겠지.

세계수의 마나를 저장하는 성질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저장하는 성질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선 홍수정에게 갖고 가 감정을 받아봐야겠다.

"음? 도운 씨?"

감정을 받아보기로 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 같아 보였다.

"…아!"

분명 헌터 협회 소속의 사람이었다.

개미굴 던전 일로 집까지 날 찾아왔던.

무슨 팀인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팀장급이었던 건 기억한다.

이름이 아마….

"최…기우 팀장님?"

"오, 맞습니다. 절 기억하십니까?"

최기우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다가왔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았다.

난 한 번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 못하다.

내가 그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그가 병문안을 한 번 왔었기 때문이다.

'최기우? 누군데 병문안을…. 아, 그 사람이다!'라면서 얼굴을 떠올렸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은 거다.

병문안을 오지 않았으면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기억합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네? 저야말로 묻고 싶은데요? 도운 씨가 이런 뒷골목에까지 웬일입니까?"

전대 세계수 퀘스트를 깨서 방금 보상을 얻었습니다.

그리 말하지 않고, 왼손에 들린 스마트폰만 흔들어 보였다.

그는 내가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 있다는 걸 안다.

스마트폰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아하."

내 짐작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최기우 팀장님은 여기까진 왜 온 겁니까?"

"그게…."

최기우는 자기 콧잔등을 긁적였다.

주변 눈치도 살펴댔다.

조심스러운 태도….

아무래도 협회 관련 일 때문에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협회 인근을 배회하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고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예? 이상한 남자요?"

"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아시죠? 이틀 후에 있는…."

"아, 네. 압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람 중에 그 일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온 방송 채널이 그에 대해 떠들고 있는데.

최기우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무지하게 바쁜데 말입니다. 웬 놈이 또 이렇게 귀찮게 해주는 건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상한 사람 본 적 없습니까?"

"이상한 사람이라…."

나도 쓰레기를 찾느라 협회 인근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신고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물고 빨고 하는 커플.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건을 교환하던 남자들 정도다.

"아뇨, 본 적 없는데요."

"후… 그러시군요."

"다른 인상착의는 없었나요?"

"인상착의요?"

"네. 혹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니까."

"아, 머리를 묶은 남자라고 합니다."

응? 머리를 묶어?

갑자기 불안함이 느껴지는걸….

"그리고 쓰레기통을 뒤집어대거나 쓰레기를 땅에 파묻었다고 하더군요."

"...."

…나네?

"그러면서 이상한 저주 같은 걸 했다고 합니다. 현재 협회는 테러범일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주? 테러?

이런…. 썩 좋지 못한 오해를 사버렸는걸.

"음…. 그놈 말인데요."

"본 적 있습니까?"

"아무래도…."

"아무래도?"

"나… 같은데요."

"아, 나 같으시다고요. 예?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최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썹은 위로 올라가고, 눈은 동그래졌다.

순진무구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슨…? 지금, 도운 씨가 쓰레기통을 헤집고, 쏟아부은 쓰레기를 땅에 파묻었다는 겁니까?"

"…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원래는 마른세수하려고 했지만, 한번 덮고 나니 다시 손을 떼기가 두려웠다.

손바닥에서 얼굴의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파묻은 쓰레기에 이상한 저주를 걸고요."

"그게, 저주는 아니었습니다. 마법이긴 한데…."

"그러니까 도운 씨가 그 테러범이라는 거잖습니까."

"아니! 절대로 테러를 계획한 건 아니고요…."

대답하면서, 손을 살짝 치웠다.

최기우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있기도 했다.

"...일단, 같이 가주시죠."

"넵."

쪽팔려 죽겠네, 진짜….

제112화

"후우…."

배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에서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내뿜어졌다.

옥상 난간에 기댄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며칠 동안 그녀는 일에 치여 너무나 바빴다.

바쁜 업무는 물론 현재진행형이다.

아주 잠깐.

5분도 채 안 되는 쉴 틈이 생겼을 뿐이다.

그마저도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있는 담배를 다 태우고 나면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후웁.

담배를 물고 깊게 빨아 마신다.

동시에,

"씨발…."

욕을 내뱉는다.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A급 헌터관리부 장재웅]

그녀의 부하 직원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그나마 다행이네…."

상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더라면 바로 담배를 끊었어야 했다.

그뿐인가?

지금 당장 옥상에서 내려가야 했으리라.

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전화를 받았다.

"왜?"

- 아, 국장님. 통화 괜찮으십니까?

"되니까 받았겠지. 말해."

- 백도운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백도운?"

배수현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실력을 확인하고자 했던 그와의 대련이 기억난 탓이다.

그날 대련에서 그녀는 도운의 실력을 확인하며 놀림을 당했었다.

"그 인간이 왜. 무슨 짓이라도 저질렀어?"

- 네.

"…저질렀다고?"

- 그렇습니다. 현재 협회에 붙잡혀 취조실에 있습니다.

"붙잡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인간이 뭘 저질렀는데?"

- 지금 영상 보내겠습니다.

우웅.

귀에 갖다 댄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린다.

배수현은 스마트폰을 귀에서 뗐다.

- 영상 보냈습니다.

"어, 왔네. 확인해볼 테니까 끊지 말고 기다려."

- 네.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영상을 실행했다.

CCTV로 찍은 영상은 화질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뒤로 묶은 꽁지머리 사내는 누가 봐도 도운이었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오른손도 그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영상에는 뒷골목을 헤매는 도운의 모습이 담겼다.

왼손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목검이 들려 있다.

"아르카…."

김무연이 얻고 싶어서 난리를 피워댔던 검이다.

A급 헌터가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데다가 아파트 3층 높이만 한 마나 칼날을 뿜어낸다.

마나로 된 칼날.

그것은 검기를 만들어낸 것과 마찬가지의 강도를 자랑했다.

마나만 있다면 누구나 손쉽게 검기를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배수현은 아르카를 보자마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아르카 같은 장비를 양산한다면…?

검기는 A급 헌터의 전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그걸 하위 등급의 헌터들도 쓸 수 있게 된다면,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뀔 터였다.

헌터 등급 체계 자체가 바뀌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한 건 배수현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의 높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해서 정부는 유재이에게 '아르카 같은 무기를 제작해달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재이는 그런 정부의 요구에 찬물을 뿌렸다.

"아르카 같은 건 또 못 만들어요."

단호하게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정부는 유재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보상은 충분히 해주겠다고 했고,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은 얼마가 들든 전부 자기들이 부담할 거라는 말도 했다.

물론, 유재이는 또 찬물을 끼얹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깐? 수천억을 가져와도 못 만들어요."

그 자리에서 있었던 배수현은 이내 깨달았다.

유재이의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깐?"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재료가 없는 거다.

무기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마나 칼날을 만들어내는 재료인 만큼, 분명 희귀하고 값비싼 아이템일 것이 분명하다.

유재이는 그런 귀중한 재료를 왜 백도운의 검을 제작하는 데 썼을까….

지금이야 A급 헌터도 되었고 한진환에게 인정도 받았다지만, 아르카를 만들어줬을 때만 해도 도운은 2년 만에 복귀한 D급 헌터에 불과했고 이렇다 할 명성도 없었다.

오히려 낙하산이나 등골 브레이커 같은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아르카 같은 엄청난 무기를 만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딱 한 가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를 백도운이 구해왔다는 것.

도운이 재료를 구해왔기 때문에 제작해주었다.

그리 생각한다면 말이 된다.

또 수현은 도운이 그 재료를 더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구했더라면 아르카 같은 장비를 또 만들었을 테니까.

즉, 아르카는 전 세계에 한 자루밖에 없는 검이며 다른 나라에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검이란 소리기도 했다.

희귀함만으로도 명검이라고 불릴 그 검이,

"이 새끼 대체 뭐 하는 거야!"

현재 삽 대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배수현이 생각에서 벗어나며 소리를 빽 질렀다.

- 으아…. 귀, 내 귀…!

수현은 통화 상대방이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기가 막혀서 상대방을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한 거다.

그녀는 지금 스마트폰에서 한 동작을 반복하는 도운을 보기 바빴다.

영상 속의 그는 아르카로 땅을 파고 있었다.

목검은 삽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골목 바닥을 아주 부드럽게 파낸 것이다.

이후 도운은 발치에 놓여 있던 쓰레기들을 땅에 묻었다.

"불, 불법 투기…?"

어처구니가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통화 상대방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말했다.

- 흠, 흠! 네. 다른 곳에서도 그 행동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도?"

- 네. 그래서 협회는 처음에 무슨 테러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

수현은 담배를 한 모금 빨며 화면을 클릭했다.

도운이 발로 파묻은 곳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멈췄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묻는다.

"그래서? 이 인간 왜 이런 거래?"

-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취조실에 있다면서?"

- 현재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뭐? 묵비권?"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최희석만 불러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수현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여졌다.

테러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고, 쓰레기를 파묻은 이유나 말할 것이지.

지금 그녀만큼이나 바쁜 최희석은 뭣 하러 부른단 말인가?

아니, 현재 사안에서 중요도만 따진다면 최희석은 수현보다도 높았다.

너무 바빠서 아마 그녀처럼 옥상으로 담배를 피우러 올라올 짬조차 없을 터였다.

"...."

- …정말로 정말입니다.

"후…. 일단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 예.

대답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담배를 검지로 탁탁 튕겨 끈 다음 휴대용 재떨이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화면 속의 도운을 바라봤다.

"확 내버려 둘까 보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도운은 내일 있을 세계적인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경호원으로서, 또 백도운이라는 A급 헌터로서.

S급 헌터들이 그에게 막대한 관심을 두고 있어서다.

정확하게는 그의 동생과 친구를 향한 관심이었지만….

"후우…."

손가락으로 영상 속 도운의 얼굴을 꾹 짓눌렀다.

하얗게 변한 손톱에서 짜증스러운 마음이 내비쳤다.

일시 정지돼있던 영상이 재생된다.

땅을 정리하던 모습으로 멈춰 있던 도운이 다시 움직였다.

그는 쓰레기를 파묻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웬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상에 관심을 거둔 배수현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

"대체 왜 쓰레기를 땅에 파묻은 겁니까!"

그 질문을 받은 후 30분 정도 흘렀다.

최희석은 바쁜지 오지 않았다.

결국, 최기우가 질문을 던져대는 일만 반복됐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뭐, 유혹이라고 해봐야 "말해주면 바로 풀어준다니까요?" 따위의 말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최기우가 답답한지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오, 포기할 생각인가?

최기우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정말 말 안 할 겁니까?"

"네. 최 선배를 불러주십시오."

"하아…. 불러 달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분이 이곳에 오실 거란 보장이-"

끼익.

취조실 문 열리는 소리가 최기우의 말을 끊는다.

드디어 최희석이 온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최희석이 아니다.

배수현이다.

"배수현… 국장님?"

떠듬거리며 최기우가 일어났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배수현이 먼저 인사할 때까지 멀거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 안녕하십니까!"

정신을 차리고는 깍듯이 인사한다.

장관 직속이라는 게 과연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최기우도 헌터 협회의 관리팀장인데 바짝 졸았다.

그나저나, 저 여자가 여기엔 왜 온 걸까.

내가 부른 건 최희석이었는데.

"여기엔 어쩐 일로…?"

"백도운 씨는 제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되묻는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최기우도 지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자기가 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1분쯤 흘렀을까?

"…이 건으로 문제가 생겨도 저희 쪽에선 책임지지 않는 겁니다?"

최기우가 쉽게 꼬리를 내렸다.

꼬리를 내리는 게 그에게 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시간을 허비하고 싶다면 모를까.

그에겐 날 넘겨주는 게 더 나았다.

배수현은 싱긋 웃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원하신다면 공문서 보내드릴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위에 보고해야 해서…."

"네.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배수현은 나를 돌아봤다.

대련 전에 봤었던 눈빛이었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아니꼬운 시선을 느꼈습니다.]

새싹이도 느낀 모양이다.

그녀는 시선과 어울리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해요?"

"네?"

"계속 거기 앉아 있을 거예요?"

"아. 아뇨. 나가야죠."

누가 오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취조실에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나는 그녀를 따라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나갈 때 표정이 싱글벙글해진 최기우가 보였다.

어떻게 치워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찰나에 잘 됐다 싶었으리라.

"어떻게 된 거예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쓰레기는 대체 왜 파묻은 거죠?"

"...."

흐음.

나에 관해서 얼마나 퍼진 걸까.

그녀가 알았으니 황 장관도 알려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가 최기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내 얼굴에서 생각을 읽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좋아요."

응?

배수현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계속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게서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대신 그녀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범죄를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범죄는 무슨.

나는 새싹이에게 줄 에너지를 구하려고 한 거뿐이다.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지만.

"정말로요?"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너무하네?

"정말로요."

"그래요, 그럼. 믿을게요."

"…응?"

이렇게 쉽게?

거짓말이면 어떡하려고 이걸 믿어?

"...."

아. 그런 거군.

그녀는 말만 믿겠다고 한 거다.

표정엔 신뢰라고는 1도 없었다.

아마 뒤에서 내 뒷조사라도 하지 않을까.

아니, 오늘 취조실에까지 온 걸 보면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 늦지 말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이상한 짓은 그만하시고요."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배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더 뭐라고 하지는 않고 떠났다.

"이상한 짓이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보일 법한 행동이긴 하다.

서지혁과 최기정도 처음엔 이상한 놈 취급했었다.

뭐, 퀘스트도 깼겠다 더 할 생각은 없었다.

벌써 내일이면 그들이 한국에 온다.

하루 동안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쉬어야겠-

"…응?"

뭐지?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뭘… 깜빡한 거지?"

[어린나무가 관리인은 현재 마족의 권속을 깜빡했다고 가르쳐줍니다.]

앗.

그러고 보니 뱀 인간 놈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뒀었다.

이런, 어서 빨리 뱀 인간을 찾아야겠다.

제113화

뱀 인간을 트렁크에 넣은 후 차를 몰았다.

신논현에 있는 코인시던스 후 빌딩을 향해서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그곳이 딱 떠올랐다.

빈 곳인 만큼 무슨 짓을 해도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텅텅 빈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댔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혐오스러운 기운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조심하라고 조언합니다.]

차에서 내려 뒤쪽으로 걸어가는데 메시지가 떠올랐다.

트렁크에 넣어둔 뱀 인간이 깨어난 모양이다.

새싹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화면을 터치하며 트렁크를 열었다.

열리는 트렁크 문 아래로 날카로운 눈동자가 빛났다.

눈동자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뱀 대가리가 내 목을 물어뜯기 위해 아가리를 벌린 채 달려들었다.

새싹이 덕분에 대비하고 있었던 나는 오른손으로 목을 붙잡을 수 있었다.

비늘 때문에 살짝 미끄러지긴 했지만 완벽하게 붙들었다.

"켁, 케엑…!"

괴로운 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다.

목이 졸려서인지, 아가리에서 끝이 갈라진 혓바닥이 흘러나왔다.

그 혓바닥을 붙잡는다.

"…에? 서…!"

붙잡자마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뱀 인간의 몸이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트렁크에서 끌려 나온다.

철푸덕!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뱀 인간을 바라봤다.

나무뿌리가 두 팔과 두 다리를 묶고 있기 때문일까.

버둥거리는 모습이 정말 뱀 같았다.

힘도 없어 보였는데, 나무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세계수의 마나 때문인 듯하다.

"흠…."

일단 진정부터 시켜야겠는데.

이대로는 대화가 되지 않겠어.

나는 손에 쥔 혓바닥을 잡아당겼다.

"...!"

혓바닥을 잡아당기자 우뚝 멈춘다.

팔딱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나를 쳐다본다.

찡그려진 눈을 보고 아파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녕?"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첫인상은 중요하니까.

그런 나를 뱀 인간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올려다봤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날 아는지 모르겠네. 난 백도운이다."

"...!"

이름을 말하자 눈이 커진다.

듣고 나서 반응을 보였다….

나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은 들어본 모양이다.

"서지혁이 널 나한테 넘겼어."

"...!"

"잘 부탁한다?"

"...."

잘 부탁한다는 말에 뱀 인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할 거거든? 꼬박꼬박, 잘, 대답해 주기 바라."

"...."

"우선… 유재이. 너희 왜 유재이를 노리는 거냐?"

"...."

뱀 인간은 대답하지 않는다.

날 올려다볼 뿐이다.

흠. 곤란한걸?

이번엔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었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말 안 하면."

"...?"

"이거 잘라버린다?"

난 붙잡고 있는 혓바닥을 흔들면서 말했다.

붙잡힌 혓바닥이 좌우로 흔들리자 뱀 인간의 대가리도 양옆으로 흔들렸다.

뱀 인간은 당황한 듯 다급하게 입을 놀렸다.

"그어! 그얼 부자고 이짜아!"

"왜 말을 웅얼거리고 지랄… 아."

혓바닥을 붙잡고 있었지, 참.

놈은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미안."

솔직하게 사과하며 혓바닥을 놓아주었다.

뱀 인간은 혀를 다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혀가 공기 중에 나와 있어 말랐던 걸까?

연신 침을 삼켜댔다.

"다시 질문."

"...."

"대답 안 하냐? 혓바닥 잘라달라는 거야?"

"아니, 할게! 대답할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놈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처음부터 빠릿빠릿 대답하면 좀 좋아?

"잘 생각했어. 대답만 잘 하면 죽이진 않을 거야."

"고, 고마워!"

뭐, 심장 건드려서 다신 마나를 쓸 수 없는 몸으로 만들긴 할 거지만.

"너희 왜 유재이를 노리는 거냐?"

"유재이? 그게 누구…. 아. 대장장이? 여자 대장장이 말하는 거야?"

"그래."

"그 여자는… 열쇠를 만들기 위해서 노리고 있는 건데…?"

"...."

열쇠를 만들기 위해 유재이를 노렸다.

그 사실 자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싶은 정보는 다른 거였다.

"그거 꼭 유재이가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유재이를 노리는 거냐고."

열쇠 제작도를 본 유재이는 말했었다.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에 마나를 불어넣는 기술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그 기술을 쓸 줄 알면, 굳이 자기가 아니어도 만들 수 있다고.

그런데도 크라우드는 유재이를 노렸다.

왜?

그 이유가 뭘까.

"뭐?"

"'뭐?' 는 뭐가 '뭐?' 야."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열쇠는 꼭 유재이가 만들어야 한댔어."

뭐라는 거야?

대장장이인 유재이가 제작도를 보고 직접 말한 걸 옆에서 들었다.

틀렸을 리가 없다.

우연후도 다른 대장장이들에게서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진, 진짜야!"

뱀 인간이 크게 소리치듯 말했다.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까 걱정하는 듯했다.

얼굴이 뱀 대가리가 됐다고는 해도 절박한 감정이 담겨 있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대업을 위해 꼭 필요한 여자라면서,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붙잡아 오라고 했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그렇다니까! 분명히 기억한다고!"

진짜로 유재이가 필요하긴 하나 본데…?

아무래도 열쇠 제작도를 다시 살펴봐야겠다.

이 정도면 놓친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하다.

마법적인 처리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다음 질문."

"뭐, 뭐든 해. 대답할게!"

"그 열쇠는 대체 용도가 뭐냐? 뭘 열려는 거야?"

"으음…."

뱀 인간은 입을 다물었다.

꼴에 크라우드의 간부라고 침묵을 지키려는 걸까.

인원 채우기에 불과한 놈 주제에 대단한 충신 나셨네.

"여러 번 말했는데도 대답하지 않는 건 혀 잘라달라는 거지?"

"아니, 아니야! 몰라서 그래!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거라고!"

"모른다고?"

"그렇다니까! 나는 말단이라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아…."

"서지혁은 너 간부라고 했는데?"

"간부가 맞긴 맞는데… 이번에 생긴 빈자리를 채워 넣기 위해 아무렇게나 뽑힌 간부라고…."

아무렇게나 뽑힌 간부라….

하긴, 크라우드의 간부란 그런 거였다.

핵심 멤버는 4명이고 나머지 8명은 그 4명을 위한 팔다리라고 버섯 인간이 그랬지.

"그럼 유재이 아버지는?"

"어? 누구?"

"유재이 아버지 말이야. 너희 그 사람 정보 갖고 있잖아."

모기 놈이 유재이를 데려갈 때 그녀의 아버지 얘기를 꺼냈었다.

생전에 쓰던 망치를 가져와 보여주기까지 했었고.

그걸 가지고 있었다면, 무슨 관계인지까지는 몰라도 어떤 관계가 있긴 했었다는 소리다.

의뢰를 맡겼다거나 납치해갔다거나.

"나… 난 잘 몰라…."

"...."

"정말이야.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그래, 그래. 아무렇게나 뽑힌 간부."

"...."

뱀 인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모른다는 건 사실일 거다.

이번에 생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간부가 된 놈이니까.

다른 놈들도 팔다리에 불과할 테니 별반 다르지 않겠지.

아무래도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핵심 멤버를 노려야 할 듯하다.

"새로 뽑혔다고 했지."

"어? 어."

"넌 왜 크라우드가 된 거냐? 아니. 왜 마족의 권속이 된 거냐."

"살고 싶어서…."

"응?"

살고 싶어서?

설마, 권속이 되라고 협박이라도 당한 건가?

그런 거라면 도와줄 수도 있-

"권속이 되면,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

"응?"

"그래서 마족의 권속이 되기로 한 거야. 오래 살고 싶어서."

"...."

마족의 권속.

그게 되기 위해서는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야 했다.

이놈은 오래 살고 싶다는 이유로 제 영혼을 넘겼다는 거다.

[어린나무가 눈앞의 존재를 한심스러워합니다.]

[더불어 어리석음에 나뭇잎을 휘휘 젓습니다.]

새싹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숨을 내쉬었다.

"…크라우드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지."

"어…?"

"여자를 납치한다거나 아이들을 죽이고 세뇌한다거나 인간을 이성이 없는 괴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그래서?"

뱀 인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웃기는 일이다.

자기는 영원의 삶을 살고 싶어서 영혼을 판 주제에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수 있다니.

그래, 놈은 놈의 목적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크라우드처럼.

"너희는 늘 그렇지…."

보육원을 학살했던 벌 인간도 그랬었다.

죽은 아이들도 아팠을 거라고 말했을 때, 코웃음을 치며 말했었다.

"그딴 애새끼들이랑 나랑 같아?"라고.

어떻게 보면, 그래, 맞는 말이긴 하다.

생각하라고 달린 머리통을 장식처럼 어깨 위에 그저 짊어지고 있을 뿐인 놈들과 아이들을 비교하는 건 아주 큰 잘못이었으니까.

벌 인간….

덕분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기뻐해라."

"어, 어?"

"죽고 싶지 않은 네 마음을 생각해서 죽이지 않을게."

"정, 정말로…?"

"그래. 정말로."

"고마워, 고마워!"

놈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버둥거렸다.

절을 하고 싶은 듯한데, 팔과 다리가 묶여 있어 지상에 나온 물고기처럼 보일 뿐이다.

나는 놈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하긴 아직 일러."

"어?"

"네가 원하는 영원한 삶까지 줄 생각이거든."

"뭐? 그게 무슨-읍!"

멍하게 중얼거리는 놈의 입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혓바닥을 붙잡기 위해서다.

놈은 입으로 들어온 손에 당황해 읍읍 거리기 시작했다.

놈의 독니가 내 손을 찔러댔지만, 나무껍질이 발동되어 전혀 박히지 않았다.

나무껍질을 흘러내린 독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치이익….

독이 닿자 바닥이 녹아내렸다.

조심해야겠다.

바닥 상하면 나만 손해다.

입에서 혀를 끄집어낸 후 질질 끌고 갔다.

"으! 으마! 아파! 아흐다고!"

그만, 아파!

혓바닥을 꺼내놔서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리 말하는 게 분명했다.

아프든 말든 알게 뭔가.

놈을 끌고 1층 가장 구석에 있는 빈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는 제법 넓었다.

이놈을 위한 방으로는 아주 과분할 정도였다.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 뱀 인간을 던졌다.

쿵!

벽에 부딪히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끄윽….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뭐?"

"세계수의 뿌리."

스킬을 쓰자마자 오른손이 나무뿌리처럼 변했다.

곧바로 놈에게 내뻗는다.

"히익!"

세계수의 마나가 내뿜어져서일까.

놈이 진저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뒤가 벽이어서 더 물러날 수도 없었지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진정시키기 위해 어르면서 몸을 휘감았다.

이어 놈의 에너지를 전부 빼앗았다.

곧 끈적끈적한 것을 집어 든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다.

마족의 에너지를 모두 빼앗은 거다.

내 오른팔에서는 바로 더러운 에너지를 정화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내, 내 마나가…?

"…넌 운이 좋아."

"뭐, 뭐…?"

"심장은 건드리지 않았거든. 그걸 건드렸다면…."

말끝을 흐리고, 싱긋 웃어주었다.

놈은 침을 삼켰다.

방금 마나를 빼앗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계수의 뿌리를 또 썼다.

다시는 변태하지 못하도록 놈의 몸을 완전히 정화하기 위해서다.

"아, 죽이지 않는다고 하긴 했는데, 못 참고 죽으면 그건 순전히 네 잘못이다?"

"무슨 소리르으라아아악!"

나무뿌리가 된 왼손을 이마에 쑤셔 박고 마나를 주입했다.

뱀의 몸이 떨어져 나가고 인간의 몸이 다시 자라나게 될 때까지.

잠시 후 놈에게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야, 괜찮냐?"

"으… 아아…."

"괜찮아? 안 괜찮으면 대답 좀 해봐."

"아아…."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좀비 영화의 좀비처럼 앓는 소리만 낼 뿐이다.

"대답 안 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네."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나를 쳐다본다.

역시 괜찮은 거 맞네.

"그래야지. 이제 시작인데."

114화

[가지치기를 도중에 종료했습니다.]

다급하게 가지치기를 끊었다.

빠른 속도로 자라난 풀과 나무가 창고 바깥에까지 나가려 해서다.

온 바닥은 발목 높이까지 자란 잔디로 가득하다.

마치 축구 경기장 바닥 같은 모습이었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자라난 나무도 두 그루 있었다.

숲에 들어온 것 같은 상쾌함마저 느껴진다.

산림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크흠…."

창고를 돌아보다 신음을 살짝 흘렸다.

가지치기를 중간에 그만둔 부작용으로 팔꿈치 아랫부분이 터져 나간 탓이다.

뭐,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스킬이 원래 그런 스킬이었으니까.

계속했어도 어차피 팔은 터질 거였다.

아니, 온몸이 터져 나갔으리라.

머리통까지 합쳐서.

"고통은 익숙해지는 거라지만…."

가지치기는 익숙해질 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온몸이 터져 나가는 고통에서 익숙해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다시 자라나고 있는 왼팔에서 시선을 뗀다.

[퀘스트 알림!]

알림창이 떠올라서다.

동시에 나무뿌리로 변했던 오른손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되돌아온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메시지창을 읽는다.

마족의 권속의 에너지가 정화됨에 따라 퀘스트 조건이 1회 채워져 있었다.

[마족의 권속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8/10명)]

[현재 완료 보상 – 전대 세계수의 솔방울]

"오."

전대 세계수의 솔방울이라니….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현무 미사일처럼 솟아오르던 솔방울이 떠올랐다.

그것에 얻어맞아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던 김무연도 겸사겸사 기억났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모습도 함께.

솔방울은 하트 브레이크를 쓴 A급 헌터조차 죽일 수 있었던 무기다.

광합성 모드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가능했던 것이긴 했지만.

그런 위력을 내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것.

그게 솔방울의 진정한 대단함이었다.

"확실히, 8/10 정도 되니까 획득하고 싶은 게 나오는 걸?"

퀘스트 완료 버튼을 누르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아이템이 나왔다.

탐이 나긴 하지만 완료 버튼을 누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횟수를 채울수록 보상이 좋아지는 것을 보면 다음 보상은 솔방울보다 좋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솔방울이 좋다고 해도 퀘스트 조건을 완전하게 달성했을 시 얻게 될 보상을 포기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제 겨우 2번만 더 권속을 사냥하면 되기도 하고.

설마 더 나빠지진 않겠지.

[이번에 세계수의 뿌리로 얻게 된 마나는 총 55만 5084입니다.]

[첫 번째 결실은 앞으로 30% 남았습니다.]

퀘스트창을 끄자 다른 창이 떠올랐다.

결실을 위한 에너지가 얼마나 모였는지에 대해서였다.

"총 55만?"

한 번에 이만큼이나 오를 줄은 몰랐다.

마나 증폭 포션을 마신 공우재가 50만 정도였는데….

뱀 인간은 5만이나 더 많았다.

그저 자리를 채우기 위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간부는 간부인 모양이다.

이만큼이나 많은 마나를 빼앗은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일까?

마나를 빼앗지 못했던 다른 간부 녀석들의 재수 없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박쥐, 모기, 벌….

세계수의 뿌리를 조금 더 빨리 배워 그 녀석들의 마나도 빼앗았더라면….

"…지금쯤 첫 번째 결실 얻었겠는데?"

정말로 그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현재 첫 번째 결실까지 남은 에너지는 30%였다.

이번에 20% 정도 올랐으니….

모기나 벌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았으면 결실을 얻었을 듯하다.

박쥐는… 다른 두 녀석과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약했었다.

그리 많은 에너지는 얻을 수 없었을 테지.

지상욱처럼 20만 정도 얻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나는 메시지창을 다시 바라봤다.

[첫 번째 결실은 앞으로 30% 남았습니다.]

개미굴에서는 50% 남았다던 메시지였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제 개미굴에서 예상했던 대로다.

결실에 관한 메시지창은 십의 자리 퍼센티지가 변할 때마다 뜨는 거다.

즉, 나는 지금까지 헛짓거리를 해왔다는 소리다.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벌써 첫 번째 결실을 이뤄냈을 터였다.

아무 B급 이상 게이트에 가서 세계수의 뿌리로 사냥을 했으면 될 일이니까.

그걸 몰라서 지금까지 몬스터를 사냥할 때 세계수의 뿌리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순 없지.

그리 생각하며 세계수의 뿌리를 쓰지 않았었다.

정말이지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세계수 어린나무가 관리인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관리인을 위로해주고자 아침이슬을 보냅니다.]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렸다.

새싹이가 개미굴에서처럼 나를 위로하고자 아침이슬을 보내온 거다.

"진짜 너밖에 없다…."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힘내라고 응원합니다.]

그래야겠지.

혼자 한심해서 땅 파고 들어가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이제라도 확실해졌으니 아무 게이트에 들어가 세계수의 뿌리를 써서 몬스터를 사냥하면 될 일이다.

그럼 순식간에 첫 번째 결실이라는 걸 얻을 수 있으리라.

뭐, 며칠 동안엔 게이트에 진입할 수 없겠지만.

내일이면 경호원으로서 S급 헌터들을 맞이하러 나가야 했다.

오늘은 이만 집에 가서 푹 쉬어야겠다.

그리 결정한 나는 고개를 돌려 문 맞은편 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담쟁이덩굴 같은 식물들이 잔뜩 자라나 있었다.

"죽…."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귓가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애처롭게 들리기도, 간절하게 들리기도 했다.

"...."

눈을 내리깔고 소리의 발원지를 봤다.

벽에 자란 담쟁이덩굴과 바닥에 자란 풀이 만난 곳이다.

두 종류의 식물이 만난 곳에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모로 누워 있다.

무성히 자라나서일까?

그것에서부터 식물들이 자라난 듯 보였다.

또 그것은 무엇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인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간으로 보자면 그것은 모든 정기가 빨린 듯 핼쑥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무로 보자면 마른 장작처럼 말라비틀어져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절규하는 인간을 조각한 것 같은 모습.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보기 좋네."

주관적으로는 보기에 아주 좋았다.

싱긋.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질 정도다.

뱀의 형태로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녀석이 눈동자를 굴린다.

날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저 눈을, 나는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벌 인간.

죽여달라고 사정하고 애원하던, 그것에게서도 봤던 눈빛이었다.

"죽여줘…."

내게 요구하는 것도 똑같았다.

무릎을 굽혀 놈을 내려다봤다.

"뭐라고? 안 들려, 자식아. 크게 말해."

다 들었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죽여달라고 내게 사정하는 꼴이 우스워서다.

오래 살고 싶어 마족의 권속 같은 게 됐으면서, 이제 죽여달라니 우습지 않은가.

"죽여줘. 죽여달라고…!"

"뭐래, 미친놈이. 죽고 싶지 않다며."

"그건…."

"영원히 살고 싶다며?"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

"그래서 그렇게 해줬는데, 뭐가 문제야?"

뭐, 문제가 있긴 하지.

오래 살고 싶다는 게 이런 식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놈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이렇게는-"

"아. 혹시 영원히 살 거라는 내 말이 믿기지 않아?"

못 알아들은 척하며 검지를 들었다.

그러고는 따스한 손길을 쓰며 놈의 팔 부분을 세게 짓눌렀다.

푸욱….

나무의 뿌리 같은 팔이 움푹 팼다.

놈은 고통을 각오한 듯 이를 악물었다.

손을 떼고 몇 초 후….

"짜잔."

놈의 팔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언제 패인 적이 있었냐고 묻듯 다시 깔끔하게 복원됐다.

나무뿌리 같은 팔을 보는 놈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왜 회복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그럴 거다.

내가 해놓은 짓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좀 믿어져?"

"팔, 팔이…? 대체 내 몸을 어떻게 한 거야!"

회복된 팔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알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것답게 두려움을 느끼는 듯하다.

어떻게 설명해줘야 이놈이 더 절망할까.

잠깐 고민의 시간을 가진 후 대답해주었다.

"…너는, 그래, 엔진이야."

"엔진이라고…?"

"그래. 이 창고 안에 있는 식물들을 유지하는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엔진."

"...!"

"당연히, 연소하는 에너지는 너의 마나고."

"대체 무슨 소리를-"

"아. 마나 고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다 떨어지기 전에 꾸준하게 채워질 테니까. 너의 바람대로, 네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놈은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올라올 것 같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진짜로 올라왔으니까.

"우, 우욱! 웩!"

하지만….

놈의 입에서 나온 건 먹은 음식물 같은 게 아니었다.

담쟁이덩굴 한 줄기다.

입에서 자라나온 덩굴은 그대로 벽에 달라붙는다.

"그래. 제대로 작동하네."

제 입에서 나온 걸 본 녀석은 갑자기 나를 노려봤다.

또 울부짖듯 소리를 질러댄다.

"…이 미친 새끼야! 넌 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는 거냐고! 개새끼야!"

이 미친 새끼야!

그리 시작한 놈의 욕은 몇 분 정도 이어졌다.

개새끼, 소새끼, 망할 새끼 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새끼들이 다 나왔을 때쯤 놈이 잠잠해졌다.

나는 그 욕을 들으며 놈이 할 말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냐고?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뭐 SF소설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을 식물을 키우기 위한 엔진 같은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막 나가는 미친놈이 아니다.

"당장 원래대로-"

"근데 너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렇다.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무슨 소릴…! 내가 사람이 아니면 뭔데!"

"몬스터."

단호하게 말했다.

종족명은 '크라우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전복시키는 것이 목적인 몬스터.

인간을 납치하고, 세뇌하고, 죽이고, 이성이 없는 괴물로 만드는 놈들이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놈들을 과연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몬스터라니! 나는-"

"마족의 권속이지. 오래 살고 싶다는 이유로 인간의 영혼을 판."

"...!"

"내 말이 틀리냐? 있으면 말해보든가. 정정해줄게."

크라우드는 마족이란 존재에게 영혼을 팔았다.

그야말로 인간의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비단 인간만의 적이 아니다.

레지나에 따르면 마족은 위그드라실의 대륙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엘프의 숲, 드워프의 광산, 인간들의 초원까지….

놈들은 모든 종족의 적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어떻게 봐도 너는 몬스터가 맞는 거 같은데. 안 그래?"

"...."

새싹이도 크라우드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끼고 나면 마족의 권속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 나는 헌터지."

"...?"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에 따른 부산물을 팔거나 아이템으로 제작해 살아가는."

"...!"

놈의 눈이 커진다.

내가 정말로 놈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몬스터로 취급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래서일까?

"…죽! 죽여줘! 제발, 제발 날 죽여줘!"

아까처럼 사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놈을 평생 이곳에 처박아둘 생각이 진정으로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나는 눈과 입을 슬며시 움직여 소리 없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자 놈이 기겁했다.

"히이익…. 괴, 괴물…."

"말이 심하네. 영원히 살고 싶다는 걸 들어줬는데. 너한테 나는 괴물이 아니라 신 아니냐?"

놈이 바라는 불멸의 삶은 아니었겠지만.

뭐,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제115화

배 사무관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쯤 헌터관리부 장관실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어젯밤 일로 문제가 생겼나 싶어 순간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장관실에는 황 장관과 배 사무관 그리고 한진환이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배 사무관이 말했다.

"두 사람은 경호원이 아니라 방문을 환영하는 환영단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다행이다.

날 부른 건 다른 이유였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날 보고 한진환과 황 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아는 배 사무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나를 향한 두 사람의 시선을 돌리고자 질문을 던졌다.

"왜 환영단으로 바뀐 겁니까?"

"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상황이요…?"

"네. 원래는 알레딩 밀러가 연구팀과 함께 비밀리에 입국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아하."

그녀의 말마따나 상황이 변했다.

전 세계의 S급 헌터가 모두 모이는 일이 됐다.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일이 되기도 했고.

"환영단이기는 하지만 두 분이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환영단. 하지만 주된 업무는 경호 일, 이라는 거지?"

"네. 바로 그겁니다."

"흐음…."

"후후."

황 장관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 충분했다.

갑자기 왜 웃어?

그는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날 향해 검지를 내민다.

"환영단으로 명명된 순간 도운을 제외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

"음? 뭐야, 도운이 제외된 겁니까?"

"어, 그건 좀 너무한데요."

진환과 내가 한 마디씩 던졌다.

황 장관이 바로 손을 휙휙 휘젓는다.

"아니, '나왔지'라고 말했잖아."

"나왔지…."

"과거형이네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채택되진 않았다는 거다.

흠. 이야길 꺼낸 황 장관의 얼굴이 의기양양한 걸 보니….

아무래도 그가 힘을 좀 썼나 보다.

나를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을 뭉개버리는데 말이다.

"회의에서 여러모로 검증된 게 부족하다는 이유로 도운을 제외하려고 했어."

"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아직 헌터로서 해낸 일들이 부족하다.

딱 하나 누구나 인정할만한 업적을 이뤄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했다고 떠들어댈 만한 일은 아니다.

전 세계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해 있었으니까.

그걸 제외하면…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업적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랭킹에 오른 다른 A급 헌터들과 비교하면 전혀 없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황 장관이 검지를 접고 엄지를 펼친다.

두꺼운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내가 밀고 나갔지."

"장관님이요?"

"그래. 자네를 제외하자는 의견을 열심히 무시했어."

퍽 자랑스러운 듯 떠들어댄다.

누가 보면 무용담이라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설득도 아니고 무시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뭐, 얘기를 꺼낸 본인이 우쭐해 하고 있으니 괜히 꼬집지는 말자.

"한 명씩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말이야."

"...."

으하하.

거나하게 웃기까지 하는 황 장관을 가만히 바라봤다.

황 장관은 왜 나를 밀고 나간 걸까.

배제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그냥 받아들였어도 문제는 없었을 거다.

여러모로 검증된 게 부족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적확하니까.

나도 기분은 나쁘지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을 거다.

이런 일은 사람이 변경되는 경우가 잦기도 하고.

"하하, 하…. 흠, 흠!"

빤히 쳐다봐서일까.

이내 황 장관이 호탕하게 웃던 웃음을 멈췄다.

내 시선에 담긴 뜻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후후 웃기만 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 양반 뭐지…?

"또 한 가지 변경된 점이 있습니다."

나와 황 장관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자 배 사무관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쉰 후 말을 이어나갔다.

"환영단 멤버가 늘어났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당연한 일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세 군데가 동시에 입국하기로 한 상황이었으니까.

나와 한진환만으로는 환영하러 나갈 인원수가 부족하다.

한진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

"누가 참여하기로 했어?"

"먼저, 백운천의 이태천과 백도희가 참여하게 됐습니다."

"어라?"

"이들은… 아, 따로 설명해 드릴 필요 없겠네요. 두 분 다 잘 아실 테니."

"그야 그렇죠."

세상에서 그 두 사람을 가장 잘 아는 건 다름 아닌 나다.

다른 사람에게서 둘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듣는다는 건 나에 대한 실례다.

하지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희랑 태천이가 이 일을 받아들였다고요?"

"네? 네."

"어떻게 받아들였지?"

"네?"

배 사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 고개도 절로 갸웃거려졌다.

백운천은 현재 굉장히 바쁜 상황이다.

아니, 현재라는 표현은 고쳐야겠다.

백운천은 늘 바쁜 상황에 부닥쳐 있다.

바쁘지 않은 경우가 더 적다.

"백운천은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가 않은데요."

"여유롭지가 않다고?"

"네. 적은 인원수로 A등급 길드로서의 일을 해야 하니까요. 두 사람을 제외하면 A급 헌터가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거든요."

"아…."

한진환이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수 정예로 이뤄진 길드.

그런 길드들은 'A등급 길드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진땀을 빼곤 한다.

해내지 못하면 등급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길드 건물 주변에 있는 게이트를 관리하고 정부와 협회가 의뢰하는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 정도니까.

문제는 백운천의 인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정확하게는 정부와 협회가 의뢰하는 퀘스트를 해결할 정도의 능력이 되는 인원이 부족하다.

"역시. A등급 길드가 되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진다니까?"

"그에 관해서 여러 번 얘기가 나오기는 했는데…."

"저는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도 못해내면 A등급 길드여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부와 협회가 주는 혜택이 얼만데요."

"그래. 이 말이 일리가 있어서 매번 기각되고 있지."

"인원이 부족하다면 채우면 될 일입니다. 백운천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길드 중 하나니, 실력 좋은 인재를 충분히 채용할 수 있을 거고요."

"뭐… 그렇기는 하죠."

순순히 수긍했다.

한진환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럼 채용하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안 해?"

"그게… 백운천은 우선순위로 보고 있는 게 있거든요."

"우선순위? 그게 뭔데?"

"실력…은 아닐 거고."

"인성도 아니겠죠."

"음?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인성이라면…."

배 사무관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날 힐긋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뭘 얘기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내 인성이 좋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었겠지.

뭐,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인정한다.

바로 어젯밤만 해도 협회에 붙잡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것도 쓰레기를 땅에 파묻은 행위로….

"보육원 출신을 우선순위로 뽑고 있습니다."

"뭐?"

"네?"

황 장관과 배 사무관이 반문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전혀 몰랐던 듯하다.

"도희가 그러고 싶다고 했거든요. 우리처럼 보육원 출신인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다고."

"허… 그랬나. 그래서 그런 이상한 인사가 있었군…."

"역시 하얀 성녀님이시군요…."

배 사무관이 도희의 호칭을 중얼거렸다.

살짝 멍해진 눈빛에서 진심으로 감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도희가 좀 착하긴 하지.

히히.

그런 이유로 도희와 태천이는 언제나 막대한 업무량에 치여 살고 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이 일을 받아들였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여유가 생겼거나 무리하고 있거나.

한진환이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

"동생이 그렇게 바쁜 걸 알면서 너는 길드를 탈퇴한 거냐?"

"하하. 착한 동생의 오빠는 나쁜 오빠라는 게 국룰 아닙니까?"

"뭐어?"

"역시 여동생 등골 브레이커…."

배 사무관이 이번엔 내 별명을 중얼거렸다.

찌푸린 눈살에서는 진심으로 날 경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한진환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채 날 쳐다본다.

내가 뭐 재미있는 소리를 했었나?

왜 저렇게 쳐다본담?

"그럼 나도 백운천에 가입 신청이나 해볼까?"

"네?"

"뭐?"

배 사무관과 황 장관이 반문했다.

깜짝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엔 나도 놀라서 그들처럼 눈을 크게 떴다.

백운천에 가입 신청을?

"진심입니까?"

"나도 보육원 출신이니까. 우선순위로 뽑힐 수 있을 거 같은데."

"...."

우선순위….

한진환이 오겠다면 무조건 영순위다.

어떤 미친 길드가 한진환이 오겠다는데 거절할까.

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인 걸 보면 농담일 거다.

황 장관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농담이라는 걸 알아차린 거다.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궁금해한 겁니다. 무리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요청한 것인 만큼 편의를 봐 드리려고 했으니까요."

"아, 정말입니까?"

"네."

"그럼 괜찮을 것 같네요."

"동생한테 팍팍 요청하라고 해. 팍팍."

한진환이 끼어들었다.

"팍팍 요청하라고요?"

"그래. 정부는 지금 네 동생이 꼭 필요하거든. 네 친구랑."

"뭔 소리예요?"

"이렇다는 소리."

그러면서 한진환은 스마트폰을 두드리고는 내밀었다.

화면엔 흑인 여자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은 채 말하고 있었다.

"밀러잖습니까?"

"그래. 오늘 KBC랑 화상 인터뷰한 영상이지."

"헤, 밀러랑 인터뷰라니…. 어떻게 했대요?"

"밀러가 자청했대."

"밀러가요? 왜요?"

"이유는 이거 때문이었어, 봐봐."

한진환이 턱짓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고개를 내려 다시 화면을 봤다.

인터뷰어가 밀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음 질문입니다. 혹시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다.

그리 생각했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당사자인 밀러는 해맑게 웃었다.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사전에 물어봐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까.

밀러가 바로 대답했다.

화면 아래쪽에 밀러가 한 말이 번역되어 떠오른다.

[하얀 성녀, 백도희와 만나고 싶어요.]

뭐야.

밀러가 도희를?

"크. 참 대단한 동생을 뒀어?"

"혹시 태천이가 참가하게 된 건…."

"그래, 네 예상이 맞아. 스미르노프 녀석이 SBC에서 이태천과 만나고 싶다는 인터뷰를 남겼어."

"일이 재미있게 돌아갔네요."

밀러가 도희를, 스미르노프가 태천이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한진환의 말처럼 정부는 지금 두 사람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인터뷰를 남겼는데 두 사람을 초대하지 않는다?

엄청난 빈축을 살 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런 거라면 괜찮을 듯하다.

정부와 협회가 A등급 길드의 업무를 해결해줄 테니까.

"…또 마인 길드가 참여하게 됐습니다. 직접 참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 말한 배 사무관이 내 눈치를 살핀다.

마인 길드라면….

"네. 백운천을, 아니. 도운 님을 암살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길드죠."

"...."

"정확한 건 아니지만요."

그녀의 말이 옳다.

'그랬을지도 모른다'라는 건 절대로 '그랬다'가 되지 못한다.

증거도 증인도 없으므로 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있었더라면 백운천이 마인이 한자리에 있게 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백운천이 빠지든가 마인이 빠졌겠지.

"그리고 마인 길드는…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하지만."

배 사무관은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길드이기도 합니다."

"...."

무시할 수 없다….

그래. 그럴 거다.

마인 길드는 한국 최강의 길드였으니까.

제1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