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우."
철웅은 현재 심기가 불편했다.
벌써 일주일째 한 플레이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당연히 도장을 받으러 돌아다닐 거라 생각했는데."
몬스터들을 풀어 자신과 싸웠던 플레이어를 찾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파리에도 없는 것 같고...."
처음 생각났던 건 사파리에 있다는 도장 네 개를 받은 플레이어다.
하지만 창우를 통해 이야기해보니 인상착의가 달랐다.
하늘로 치솟은 건지, 아니면 땅으로 꺼진 건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철웅 님!"
거대한 곰 인형의 모습을 한 몬스터가 아장아장 뛰어 들어왔다.
말이 아장아장이지 덩치는 3미터가 넘는 괴물이었다.
"무슨 일이지. 카라스 님의 호출인가?"
"예, 옙!"
덜덜 떨며 이야기하는 몬스터의 말에 철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여간 귀찮은 일은 언제나 나에게 시키는군."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다.
만약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해도 오늘이나 내일 움직일 생각이었다.
'간만에 좀 놀 수 있겠군.'
마음 같아선 매일같이 사냥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 유원지에 있는 사람들이 금방 씨가 마를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카라스가 자신을 추궁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일정 구역을 순찰하는 것을 제외하면 지금처럼 카라스의 요청이 있을 때만 움직일 수 있었다.
철웅은 걸어 다니는 재해에 가까웠으니까.
"좋다. 그럼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예?! 하지만 다른 몬스터들을 준비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요...."
"상관없다. 나 혼자로 충분해."
쿵!
육중한 발을 구르자 지면에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몬스터는 그런 철웅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물론입죠."
"그럼 카라스 님에게는 바로 사람을 구해온다고 전하도록 해라. 저녁에 돌아오도록 하지."
"옙!"
무거운 몸을 움직여 철웅이 발걸음을 내딛자 연신 지면이 울렸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있는 장소로 홀로 향하는 철웅이었지만 몬스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감히 어떤 플레이어가 철웅 님에게 생채기나 낼 수 있겠어?'
일반적인 몬스터도 아닌 지역을 지배하는 센티넬.
만약 카라스가 없었다면 이곳의 왕이었을 몬스터다.
단순한 보스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존재를 일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몬스터는 알지 못했다.
지금 막, 철웅을 죽일 무기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 32
032. 파일 벙커(2)
"저, 정말로 오늘 오는 걸까요?"
"몰라요. 오빠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냥 대비하는 거죠."
덜덜 떨고 있는 형석에게 민아는 적당히 대답했다.
창우에게 들은 말이라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유원지를 돌아다니다가 다른 몬스터에게 우연히 들었다고 했을 뿐이다.
세한은 이미 며칠 전부터 철웅이 이곳을 습격할 거라 사람들에게 전했다.
창우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계속 경고를 보냈고, 오늘 아침에는 확답을 들었다.
바로 오늘, 철웅은 이곳에 올 것이다.
"빨리 빨리 움직여! 도주로를 확인해!"
"혹시 다른 몬스터도 올지 모른다! 확실히 대비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민아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처음에는 그냥 개무시했으면서.'
처음 이 말을 전했을 때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플레이어의 말을 뭘 믿고 신뢰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세한과 민아가 도장을 네 개나 받은 플레이어라는 걸 알자마자 그런 태도는 깔끔하게 바뀌었다.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철웅을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빠 말이 맞았네.'
설마 도장을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뀔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이곳에서는 도장의 개수가 플레이어의 신분증인 동시에, 발언권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간 이곳에서 플레이어들을 이끌던 플레이어가 도장 세 개를 받았던 사람인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세한 씨는 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글쎄요, 아마 시우와 있지 않을까요?"
"시우라면 그...."
"아마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거예요."
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먼 곳을 응시했다.
이 유원지에서 가장 큰 건물인 아일랜드 캐슬이 어렴풋이 보였다.
'예전에 친구랑 왔을 때는 참 즐거웠는데.'
즐거웠던 장소가 지옥으로 변해있다는 건 참 씁쓸한 일이다.
함께 놀러갔던 친구들의 생사도 불분명했다.
"어, 민아 씨."
"네?"
"뭔가,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지지 않아요?"
형석의 얼굴을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확실히 지면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더불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제가 보고 올게요."
민아는 곧바로 매로 변신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금 느낀 진동은 지진과 같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왔구나.'
매로 변한 민아의 시야에 거대한 거인이 보였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을 지닌 저 괴물이 분명 '철웅'이라고 불리는 불가사리인 게 분명했다.
"오고 있어요. 분명 철웅이에요."
"여, 역시! 저는 바로 사람들에게 알려 대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석은 발이 땀나게 뛰었다.
경계를 설 생각은 이미 잊은 모양이다.
하기야 형석이 이곳에 남아 있는다고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상보다 빠른데.'
정확히는 대피하는 사람들의 속도가 느렸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세한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믿지 않는 부류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 이들 때문에 현재 대피 속도가 더뎌지고 있었다.
'...이대로 튈까?'
매로 변해서 도망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철웅을 상대로 민아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끙."
하지만 그러면 세한에게 밉보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
여태 지켜본 거지만 세한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며 행동하려고 했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오면 장땡이라는 신조를 지닌 민아지만, 세한과 갈라서는 짓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진다고 해도 되도록 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여태 정이 든 것도 있었고, 세한은 확실히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존재였으니까.
"유인이라도 해봐야 되나."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우 오빠는 또 왜 여기 있어요?"
"제가 뻔뻔하게 도망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시간은 벌어야지요."
창우는 낮게 웃으며 검을 손에 쥐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그 덕에 다른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탓에 더더욱 철웅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심안으로 보내오는 정보가 창우의 입안을 바싹바싹 마르게 했다.
"설마 싸우려고요?"
"아뇨. 제 실력으로 철웅을 상대하는 건 무립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노력은 해야죠."
그렇게 말한 창우는 천천히 철웅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죽음을 각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빠는 언제 오는 거야?'
분명 아침 일찍 시우에게 갔으면서 보이지 않았다.
세한이라면 분명 철웅이 근처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어휴."
벌써 멀리 걸어간 창우를 보며 민아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대로 두기엔 찜찜했다.
***
"모두 도망쳐! 철웅이다!"
"일반인들부터 어서 대피시켜!"
형석의 보고에 아비규환이 된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귀가 예민한 창우는 그런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시간을 벌어야 해.'
여태 사람들을 감시하며 철웅의 눈과 귀가 되었던 만큼 책임을 져야했다.
창우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철웅의 앞에 당도했다.
"철웅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오, 부지런하구나."
"서둘러 쫒아야 도망치는 사람들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제가 바로 지름길로 안내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부복한 창우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철웅에게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선 다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검을 빼들고 싸워봤자 얼마 막지도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호오. 이전에 보고했던 길과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는 건가?"
"예."
"흐음."
철웅은 그런 창우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싫다."
"예?"
"굳이 시간을 벌려는 네놈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으니."
쿵.
커다란 발이 지면을 두드리자 창우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건 단순히 진동 때문이 아닌,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탓도 있었다.
"네놈은 나를 직접 돕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올 충성스런 성격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창우는 마지못해 철웅의 명령을 듣는 입장이었다.
창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젠장!"
이대로 뒤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 사람들의 대피는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시우도 아직 저곳에 있었다.
"이렇게 싸우는 건 오랜만이군. 부디 그때보다 실력이 늘었길 바란다."
"...!"
덤빌 테면 언제든 덤벼보라는 태도다.
"그렇다면!"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혹시 모른다. 기적적으로 철웅이 가진 약점에 검을 명중시켜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는 법이다. 일말의 희망. 그리고 어떻게든 녀석을 막아야한다는 필사의 각오로 창우는 검을 휘둘렀다.
눈이 보이던 때보다 빠르고, 날카로운 검이 철웅의 허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카앙!
"빠르군."
철웅은 그 공격을 막지 않았다.
왜냐면 굳이 막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좀 더 좋은 걸 썼어야지."
허리춤에 명중한 검은 단번에 부러졌다. 날카로운 칼날은 철웅의 외피에 작은 상처도 내지 못한 체 지면에 꽂혔다.
"어...."
"우선 그간의 일에 칭찬해 주지. 내게 정보를 보내느라 수고 많았다."
멍하니 서 있는 창우를 향해 철웅은 천천히 손을 치켜들었다.
피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발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시우야, 미안하다.'
민철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조금의 시간조차 벌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원통했다.
철웅의 손이 거센 파공음을 일으키며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것이 창우를 단번에 짓뭉개려는 순간.
콰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오...?"
순간, 철웅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폭음이 울렸고, 눈앞에서 금속 파편이 비산했다.
그것이 자신의 팔이라는 걸 눈치챈 건, 수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
콰앙!
팔꿈치부터 부서져 나간 철웅의 팔이 지면에 낙하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팔.
그 위로 한 명의 남자가 내려섰다.
"그러니까 좋은 금속 좀 먹지 그랬냐."
방금 전 철웅이 했던 말을 따라한 것 같은 말이다.
'이 목소리는....'
철웅은 어쩐지 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야 당연하다.
지난 일 주일간 자신이 줄곧 찾아다니던 녀석이었으니까.
어두운 인상에, 새까막 외투를 걸친 건방진 놈.
자신에게 공격하고 내뺐던 플레이어가 지금 바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네놈!! 이곳에 있었던 것이냐!"
"그래."
여유롭게 대답하는 세한의 모습에 철웅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분노로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철웅은 상당히 이성적인 성격이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내 팔을 부순 거지?'
철웅은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강한 건 맞다.
하지만 자신의 팔을 부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뭐로 네놈의 팔을 부쉈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세한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팔에는 상당한 크기의 쇳덩이가 들려있었다.
"이게 뭔지 아냐?"
녀석의 질문에 철웅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물건이다.
무기인가? 아니면 방어구인가.
거대한 건틀릿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팔에는 쇠기둥이 튀어나와 있었다.
상당한 무게일 것 같지만 세한은 태연히 그것을 들고 있었다.
"파일 벙커다."
이 바보 같은 몬스터에게 세한은 최대한 친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네 단단한 대가리를 쪼갤 무기지."
***
'분명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민아는 아까처럼 매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바로 시우를 찾기 위함이다.
'언제나 귀찮은 일은 내게 시키고 말이야.'
본래 민아는 창우를 돕기 위해 갈 생각이었다.
만약 그때 세한이 오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자신치고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그때는 그러고 싶었으니까.
'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민아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세한이 만들어준 공방에 덜덜 떨고 있는 시우의 모습이.
세한은 민아에게 두려워 떨고 있는 시우를 맡겼다.
굳이 도망칠 필요는 없으니 그저 같이 있어달라는 것이 세한의 부탁이었다.
'분명 트라우마 때문이겠지.'
부모님을 철우이라는 녀석에게 살해당했으니 겁을 먹은 것도 당연했다.
"무사하니?"
"아, 누, 누나."
지상으로 내려오며 인간으로 변한 민아가 묻자 시우는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도망치지 말고 여기에 있어, 여기가 차라리 안전하니까."
"네, 네. 그렇지 않아도 세한 형이 그렇게 말하고 가셨어요."
그렇겠지.
민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공간박리로 설정한 구역은 철웅이라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게 확실히 안전하긴 했지만, 아까 본 철웅의 위압감이 워낙 대단해서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덩치만 보자면 그 도마뱀보다 더 크던데.'
단단하기도 훨씬 단단해보였다.
도마뱀도 쌩고생하며 잡았는데 대체 그런 괴물을 어떻게 잡는다고 자신만만하게 간 건지 궁금했다.
콰아아앙!
"까, 깜짝이야."
폭탄이 폭발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민아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면을 주먹으로 연신 내리치고 있는 철웅이 보였다.
분명 입구에 있던 철웅이었지만, 격렬하게 날뛰던 끝에 어느덧 이 근처까지 오게 된 것이다.
"와, 미쳤네."
거대한 철웅의 몸체를 타고 움직이는 작은 인영이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건, 비단 민아만이 아니었다.
도망치던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철웅과 싸우는 한 명의 플레이어를.
"이놈, 이놈, 이놈!!"
단 한번, 단 한번만 공격이 명중한다면 죽일 수 있다.
철웅은 전력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한쪽 팔만 더 있었다면!'
녀석의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
자신이 더 빠르다!
하지만 한쪽 팔을 잃은 게 문제였다.
균형이 맞지 않아 중심을 맞추기 힘들었고, 그러니 제대로 속도와 힘을 내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건 세한이 노리던 바였다.
창우에게 모든 시선이 쏠린 순간을 노려 철웅을 공격한 거다.
아무리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정면에서 싸워선 승산이 없었으니까.
"원래 기습 한 방으로 보내고 싶었는데 말이야."
만약 그랬다면 창우가 죽었을 거다.
그러니 세한은 팔을 날리는데 그쳤다.
'그래도 바질리스크보단 불가사리가 낫지.'
석화의 사안을 가진 바질리스크 쪽이 불가사리보다 압도적으로 어려웠다.
불가사리는 순수하게 강인한 육체로 몰아붙이는 몬스터이기에, 한쪽 팔을 먼저 날린 상태라면 세한의 상대가 아니었다.
속도가 빠르지만 잡힐 정도는 아니다.
위력이 강하지만 맞지 않으면 하등 문제가 없었다.
"이게 한번 쏘고 나면 충전하는데 한참 걸려요."
세한은 오른팔에 찬 거대한 건틀릿 형상의 파일벙커를 보였다. 이 건틀릿 윗부분에는 거대한 쇠기둥이 있었는데, 그 쇠기둥은 바로 오리하르콘으로 코팅된 드릴이다.
던전을 파고 다닐 시절 애용했던 바로 그 드릴.
거기에 오리하르콘으로 코팅을 해서 특제 파일벙커를 만들었다.
모두 시우의 노력이 컸다.
"이제 1분 남았거든."
세한은 팔을 들고 철웅의 머리를 가리켰다. 충전이 되면 언제든 날려 버리겠다는 듯.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공격이 전혀 명중하지 않는 것이 증거였다.
"1분 동안 최대한 발버둥 쳐봐."
그 말은 마치, 방금 전 철웅 자신이 했던 말과 같았다.
최대한 발버둥 쳐서 자신을 즐겁게 해라. 세한은 그 말을 따라한 것이었다.
"젠자아아앙!"
센티넬인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자신은 센티넬이다!
고작 세 번째 퀘스트에서는 죽을 리가 없는 강력한 몬스터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콰앙! 콰앙!
"이놈, 이노오옴!! 건방진 벌레 자식이이이이!"
필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가 얕잡아보던 인간처럼.
"1분 됐다."
"기, 기다려! 인간을 더 이상 죽이지 않으마! 그러니...!"
철웅은 애걸했다. 죽이지 말아달라고. 자신은 이렇게 죽을 수 없다고.
세한은 씩 웃으며 답했다.
"싫어."
새까만 건틀릿이 철웅의 머리를 향했다. 굉음이 울리며 건틀릿의 상부에서 쇠기둥이 앞으로 쏘아졌다.
콰아아앙!!
전신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불가사리의 몸.
그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불가사리의 머리.
그것이 파일 벙커에 꿰뚫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 33
033. 까마귀 자리의 카라스(1)
[업적 '센티넬 사냥꾼'을 습득하셨습니다.]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여 보상이 주어집니다.]
[센티넬에게 30퍼센트 추가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센티넬 '철웅'을 죽인 보상이 지급됩니다.]
허공에 은색의 빛이 흩날렸다.
파일 벙커에 꿰뚫리며 부서진 철웅의 머리파편이다.
'고작 세 명 죽였는데 사냥꾼 칭호를 얻었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아슬아슬했다.
무기가 조금만 늦게 완성됐어도 여기 있는 사람 중 절반은 넘게 죽었으리라.
'내심 초조했다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떠들었지만, 역시 센티넬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되도록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많은 것이 바뀌어야만 한다.
내가 모르는 미래가 나타난다는 건, 다른 엔딩으로 가고 있다는 징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정말로 죽...은 겁니까?"
허공에 떠 있는 알림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창우가 다가왔다.
바로 옆에서 나와 철웅의 싸움을 지켜봤던 만큼 이곳저것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철웅이 좀 격하게 움직였어야지. 솔직히 무사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창우의 실력은 대단한 거다.
"예. 머리가 박살 났으니 불가사리라도 죽을 수밖에 없죠."
"정말로 죽은 거군요, 이 괴물이."
거대한 철웅의 시체가 반짝거리며 빛나며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음에도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죽이실 줄이야."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부 이 장비 덕이죠."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철웅의 머리를 꿰뚫었던 파일 벙커였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만들었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비밀이고요."
민아의 능력 덕에 옵저버에 들키지도 않았을 거다.
이것을 만든 자가 시우라는 것을 아는 자는 신을 포함에 다섯 명뿐이다.
나와 민아, 만든 당사자인 시우. 그리고 둘의 신인 어릿광대와 헤파이스토스.
어릿광대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해서 입막음해 둔 상태다.
헤파이스토스는... 이쪽은 어찌할 수 없으니 내버려둘 수밖에.
'부산스럽구만.'
그래서인지 허공에 돌아다니는 옵저버가 유독 거슬렸다.
숫자도 전보다 배는 늘어 족히 수십은 될 것 같았다.
"죽었어?"
"정말로 죽은 거야?"
사람들도 점차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괴물이 죽는 날이 오다니."
입구를 막아서던 몬스터들은 철웅이 죽기 무섭게 등을 돌려 도망쳤다.
보통이라면 이 기회를 노려 몬스터를 죽여야겠지만, 어떤 플레이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철웅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으로 올 뿐이었다.
"감, 사합니다.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할지."
그리 말하는 창우의 음성은 촉촉이 젖어있다.
바람에 실려서 부스러지는 빛 무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마치, 악몽은 끝났다는 것처럼.
"근데 얘 중간보스 아냐?"
단 한 명만 빼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쏘아졌다.
시선의 끝에는 급히 달려왔는지 땀으로 흠뻑 젖은 교복을 입은 민아가 서있었다.
"아, 미, 미안. 아니 죄송해요...."
대부분이 곱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분위기에 초를 친 당사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뭐, 우선 나머지는 천천히 이야기하죠."
그래도 덕분에 말을 꺼내기 쉬워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까."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야 놈을 죽일 차례였다.
***
신들의 커뮤니티.
한국 서울의 채팅방은 현재 난리였다.
그리스대장: 야, 쟤 뭐냐.
익명97: 와 너 오랜만이다. 다른 채널로 이동하지 않았었냐?
그리스대장: 아니 쟤 뭐냐고.
단 한 명의 플레이어가 센티넬을 죽였다. 이 소식은 커뮤니티에 일파만파로 퍼져 다른 서버에 있던 신들까지 채팅방으로 몰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번잡해진 채팅창은 온갖 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불금: 넌 봤으니까 알 텐데? 방금 센티넬 죽였잖아.
그리스대장: 와 씨벌. 이게 말이 되나. 저거 누구 아바타야?
불금: 몰라. 아바타 아닌 거 같은데. 우리는 플레이어 정보를 볼 수 없으니, 쩝.
익명 97: 야, 어릿광대.
어릿광대: ㅇ?
익명97: 니 아바타랑 같이 다니잖아, 뭐 아는 거 없어?
익명 97의 말에 어릿광대는 채팅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릿광대, 그 혹은 그녀가 보기에 현 상황은 썩 재밌었기 때문이다.
어릿광대: 몰라. 알아도 안 알려줘~!
익명97: 어휴, 그러시겠지.
한쪽눈미아: 아니 근데 말이 되냐? 센티넬을 어떻게 잡아? 능력치가 그게 돼? 아직 E랭크 이상 못 올리지 않았나?
그리스대장 : 심지어 저거 갑자기 나타난 센티넬이었다며? 원래 없어야 하는 놈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정직한삶: 내 아바타에게 하는 짓 보고 보통놈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아주 미친놈이었네.
채팅방은 시끌시끌했다.
어릿광대는 채팅방 너머로 느껴지는 신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저 세한이라는 플레이어가 아바타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재밌는 아이야.'
처음 자신의 아바타에게 했던 짓부터 재밌었지만 그 이후가 더 재밌었다.
장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센티넬을 죽일 줄이야!
거기다 여태 세한이 진행해온 일들을 보면 딱 어릿광대의 취향이었다.
불리한 상황임에도 그것을 티내지 않고, 계획을 세워 끝내 쟁취하는.
솔직히 자신의 아바타로 삼고 싶었지만 아직 부캐를 키우기엔 애매한 시기였고, 세한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1망치왕1: 흠흠.
불금: 뭐야 이 짝퉁티 나는 아이디는.
1망치왕1: 그냥 망치왕은 이미 누가 했더라고.
불금: 망치 쓰는 애가 한둘인가. 혹시 너 토르니?
1망치왕1: 아닌데요.
불금: 찐따같이 망치에 미련을 못 버리는 거 보면 맞는 거 같은데
1망치왕1: 아니라니까. 그리고 신명 언급하는 거 공지 위반임.
망치왕**: 뭐 시발. 누가 찐따라고?
불금: 뭔데 뜬금없이 튀어나오네. 심지어 아이디는 더 찐따같자너.
1망치왕1: 그만큼 이번 일이 이슈였던 거겠지. 그리고 저거 무기 내 아바타가 만든 거다. 위력이 개오지지그냥~!
한쪽눈미아: 아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좀 말해봐.
1망치왕1: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나오지 않았냐. 좀 보채지 말아봐.
1망치왕1이 썰을 풀기시작하자 신들은 저마다 집중했다.
그만큼 세한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특히 무기 관련은 민아가 옵저버 자체를 차단해 버린 탓에 목격자가 어릿광대 외에는 없었다.
맨 처음 미노타우르스 때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바질리스크를 죽일 때는 솔직히 떨어트려 죽인 거니 조금 놀라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건 무기는 쓰긴 했지만 사실상 정면 대결이었으니까.'
어릿광대는 이런 상황 자체가 무척 재밌었다.
그리고 분명 앞으로는 더 재밌어지리라 생각했다.
왜냐면 아직 '까마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하건데 세한은 다른 이들과 다른 퀘스트를 받은 게 분명했다.
'여태 해왔던 행적을 보면 시스템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센티넬을 세 번이나 잡았고, 앞선 두 번의 퀘스트에서 백금 등급을 모조리 달성한 플레이어.
그런 플레이어를 시스템이 가만히 두고 볼 턱이 없었다.
난이도를 조종하기 위해 세한에게 계속 시련을 부여할 게 분명했다.
'그 멍청한 까마귀, 잘못하면....'
어릿광대는 뒷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녀라도 솔직히 그것까지는 힘들 거라는 생각과, 세한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선은 자신의 퀘스트를 빠르게 끝내고 유원지를 뜨는 거였다.
굳이 남아서 별자리인 카라스와 적대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거 같지 않단 말이지.'
어릿광대는 화면 너머로 보이는 세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분명 이 플레이어는 앞으로도 자신을 즐겁게 해주리라.
***
철웅이 죽었다.
사파리의 사람들은 그 사실이 꿈만 같았다.
감히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던 철의 거인이 죽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보니 내가 걸어 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하기 바빴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계속 받다보니 이거 좀 부담스럽다.
내 일평생 이렇게 감사받은 적이 있었던가.
차라리 원망을 받는 건 익숙한데 말이야.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네."
민아가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와, 근데 오빠 대단하다. 이번엔 정말 놀랐어, 어떻게 그리 쉽게 잡은 거야?"
한 번 센티넬과 싸워봤던 민아기에 더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는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설명했다.
"철웅이나 바질리스크나 사실상 기본 능력치는 같고 분배만 달라. 퀘스트로 능력치를 제한받는 건 플레이어만이 아니거든."
힘은 철웅이 더 강하지만, 민첩은 바질리스크가 훨씬 높다. 그래서 내가 바질리스크를 상대할 때는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피할 수 있었고, 철웅은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는 거다.
어차피 어느 쪽이나 한 대만 맞으면 죽는 건 같으니 속도가 빠른 쪽이 상대하기 더 힘들다는 거지.
"맷집도 철웅이 훨씬 좋지만, 그건 장비로 극복했고. 그러니 간단히 잡을 수밖에."
덕분에 잘 쓰던 드릴을 분해했다만, 드릴이야 또 사면 된다. 넘치는 게 포인트니까.
"근데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나왔어? 바질리스크 때는 그냥 종합 보상에 가산됐잖아."
"이번에는 따로 나왔다."
"어, 정말? 뭔데?"
본래라면 세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는 센티넬을 잡는다고 해도 따로 보상이 없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보상이 나왔다는 건 본래 존재하지 않았을 센티넬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이거."
"...뭐야 이건. 돌덩이?"
민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겨우 이런 게 보상이야? 에이, 실망."
"겨우 이런 거라니.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
"그럼 돌덩이가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다고."
정말로 실망했는지 민아가 툴툴 거렸다. 자기가 잡고 나온 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 아쉬워해?
"이건 그리모어다."
"그리모어?"
"불가사리의 기운이 담긴 돌덩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런 건 DLC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불가사리의 그리모어
사용하면 고유 스킬 '불가사리(A)'를 습득할 수 있다.
==
고유 아이템치고는 설명도 심플했다.
설마 이런 게 나올 줄은 나도 몰랐다.
그리모어는 무척 희귀한 물건이니까.
참고로 이 고유스킬은 불가사리가 사용하던 능력이다.
즉, 금속을 먹고, 그곳을 몸의 일부로 전환하는 것.
말할 것도 없이 우수한 스킬이다.
A랭크 스킬이니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헐."
설명을 들은 민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이걸로 오리하르콘 먹으면 몸 일부를 오리하르콘으로 바꿀 수 있는 거야?"
"그래, 스킬을 사용하면."
사용하기만 하면 바로 본인의 스킬로 변해 저장된다.
"씁."
그제야 민아의 얼굴도 숟가락에 고정되었다. 탐이 난다는 얼굴이었지만 차마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난 평생 그런 거 못 가지겠네. 센티넬 같은 거 잡아야 나오는 거잖아?"
"꼭 그런 건 아닌데, 운이 좋았던 거지."
확실히 현재 받을 수 있는 보상 중 이것보다 좋은 건 없다.
불가사리의 그리모어는 전생에 나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물건이다.
하지만....
"너 가져라."
"어?"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그리모어를 민아에게 던졌다.
던져진 그리모어를 반사적으로 받은 민아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걸 왜 나한테 줘?"
"나보단 너에게 쓸 만할 거 같으니까."
"나한테?"
"너 변신능력 있잖아. 손을 갈퀴 같은 걸로 변신시킨 다음 금속화시키면 무기로 쓸 수 있지 않겠어?"
"와, 그런 게 돼?"
"왜 네가 놀라? 그런 건 네가 직접 해봐야지."
피식 웃으며 말하자 민아는 고운 아미를 살풋 찌푸리며 손에 들린 그리모어를 보았다.
"이거 사용하면 사라지는 거지? 그런데 오빠는 정말 나한테 줘도 괜찮아? 이거 엄청 귀한 거 같은데."
"엄청 귀한 건 아니고 제법 희귀한 거지."
민아는 답지 않게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센티넬을 본인이 잡은 것도 아닌데다 아이템이 워낙 귀해 보이니 섣불리 가질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곳에선 또 소심하다니까.
"그동안 도와준 보상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 주는 뇌물이기도 했다.
"...그거야 뭐."
"나보단 네가 효율이 좋으니, 그냥 받아."
내 말에 민아는 으,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알았어. 대신 나중에 이걸로 뭐라 말하기 없기야? 난 준대서 받은 거다? 나도 양심 없는 애는 아니라고!"
"안 해, 임마."
은행을 털려했던 놈이 뭔 양심을 찾고 있어.
어쨌든 전투센스는 있으면서 마땅한 공격수단이 없는 민아에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다.
그리모어를 민아에게 사용하자 연한 빛을 뿜으며 민아에게 흡수됐다.
아마 이제부터 민아는 불가사리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민아가 신의 아바타만 아니었다면 스킬 공유를 했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애초에 민아가 변신 스킬을 들고 있지 않았겠지.
불가사리의 스킬이 좋은 건 맞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스킬인 '변신'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진다.
거기다 저 변신스킬도 나중에는 더욱 발전하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민아는 확실히 우량주였다.
# 34
034. 까마귀 자리의 카라스(2)
대체로 상황이 수습된 이후, 나는 형석을 통해 현재 플레이어들을 통솔하는 대장이라는 자를 만났다. 명칭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지금 바로 유원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대답한 건 대략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플레이어였다.
이름은 신명원. 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실력 있는 플레이어로 평가받던 자였다.
그 역시 방금 전의 광경을 봐서인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한다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군."
"카라스는 대부분의 일을 철웅에게 맡겨뒀을 겁니다. 철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본인이 직접 움직일 터. 철웅이 죽었다는 소식이 카라스에게 들어가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확실히... 그렇군."
이미 오랜 시간 유원지에 있었던 플레이어인지라 이해가 빨랐다.
철웅과 카라스의 관계에 대해선 잘 알고 있을 테지.
나로선 굳이 이런저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 편했다.
"알겠네. 그러면 바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지. 따로 뭔가 도와줄 일이 있나?"
"우선 다른 플레이어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사람들도 구해야 하니까요."
"확실히 그렇군. 우리만 빠져나가서는 안 될 노릇이지. 하지만 그럼 몬스터가 방해할 텐데...."
"철웅이 사라졌으니 대다수는 오합지졸일 겁니다."
이것만큼은 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유원지 각지에 퍼져있는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플레이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명원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설득이 필요하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예상보다 시원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명원은 더 들을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곧바로 전하기 위함이다.
그런 명원의 모습에 괜히 옆에 있던 형석이 실실거리고 웃었다.
"우리 대장 좋은 분이죠?"
"확실히 그러네요."
전생부터 느낀 거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이란 귀중하다.
사람이라고 꼭 말이 통하는 게 아니더라고.
목숨이 달린 상황에도 눈앞에 이득을 챙기기 위해 악을 쓰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럼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겁니까? 하지만 그럼 저희의 퀘스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형석은 도장이 한 개밖에 찍히지 않은 자신의 팔을 들었다.
도망치는 와중에 도장 네 개를 더 받는 건 사실상 무리나 마찬가지였다.
"걱정 마세요. 도장이라는 게 꼭 어트럭션을 클리어한 이후에 받으라는 말은 없잖습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죠?"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겁니다."
하나하나 말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카라스가 언제 움직이기 시작할지 모르는 이상,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을 구하고 움직여야 했다.
'우선 민아에게 감시를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시지, 민아가 카라스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서두르죠."
"예, 옙!"
***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명원의 명령에 50명에 이르는 유원지 각지로 흩어져 몬스터들을 상대하여 사람들을 구출했다.
물론, 몬스터들이 그런 플레이어들을 막았지만 철웅이라는 명령체계가 사라진 몬스터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간혹 몬스터의 퍼레이드나 네임드 몬스터가 등장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는 주로 창우가 나섰다.
"여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이런 일이라도 하는 게 당연하죠."
창우는 옅게 웃으며 그리 말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설마 창우가 이정도의 검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지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심안'이라는 스킬을 모르면 당연한 반응이다.
"자, 다음 분 오세요."
"저, 정말 안전한 거죠?"
"예."
'족쇄'를 차고 있는 일반인들의 경우엔,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관계로 내가 나서서 우선적으로 그것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도 한두 명이지.
이것도 계속 하다 보니 결코 쉬운 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퀘스트에 표시된 일반인의 숫자는 대략 700명.
그중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은 절반도 안 될 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적었다.
기념품 상점에서 싸게 팔고 있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됐는데.
"자, 됐습니다."
"와...."
폭탄부위만 가변형 오리하르콘으로 감싸고 폭파시키자 족쇄는 자연스럽게 분리됐다.
처음에는 이것을 시도할 때 거부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몇 명을 안전하게 분리하자 서로 자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어려운 것도 아니고."
슬슬 어깨도 뻐근했다.
차라리 철웅과 싸우는 게 마음이 편하지.
대략 두 시간동안 이 짓만 하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와, 표정 장난 아니네."
막 다른 사람의 족쇄에 오리하르콘을 코팅하고 있으니 민아가 말을 걸었다.
얘는 하라는 감시는 안 하고 왜 여기있어?
"카라스가 움직이기라도 했냐?"
"응?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게 생각나서."
"뭔데."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까마귀 녀석을 감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민아의 눈가가 쭈뼛 치켜 올라갔다.
"도장 말이야 도장! 이대로 도망치면 우리 퀘스트는 어쩌려고! 우리 도장 네 개인데 이대로 둘 거야?"
"그거 네 개도 너 혼자 깬 것도 아니잖아."
"그, 그건 그런데...."
기세 좋게 말하던 민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이대로 사람들을 모두 구출하면 도장을 찍어줄 사람도 없어지잖아. 아니 애초에 이런 경우에는 퀘스트를 어떻게 수행해야 해?"
"그거야 뭐... 저기요."
"네, 네?!"
내가 말을 건 사람은 족쇄를 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여성이었다.
복장을 보면 어트럭션을 관리하던 직원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놀라실 거 없고, 남는 도장 있죠?"
"도, 도장이요?"
"가진 거 있지 않아요?"
"네, 있긴 있는데...."
그럼 됐네.
나는 고개를 돌려 민아를 보았다.
"야. 팔 내밀어봐."
"으응? 팔?"
"그래, 퀘스트 깨고 싶다며."
민아는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나와 여성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어물쩍 팔을 내밀었다.
"이, 이러면 돼?"
"어, 가만히 있어봐."
나는 민아의 팔을 가리키며 여성에게 말했다.
"그럼 찍어주세요."
"...이렇게 찍어도 되요?"
"해보면 알겠죠."
퀘스트 클리어 조건은 도장 다섯 개를 받는 거다.
거기에 굳이 놀이기구를 반드시 타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
퀘스트 내용은 '놀이기구를 즐기고'라고 되어 있을 뿐이니까.
"그, 그럼."
여성은 여태 가지고 있던 도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민아의 팔에 찍었다.
그러자 민아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헉."
저 표정을 보니 퀘스트가 깨진 모양이군.
'나도 제때 퀘스트가 깨져야 할 텐데.'
카라스를 상대하기 위해선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이후 해금되는 1회차 계승 패키지가 필요했다.
현재 상황에서 빠르게 퀘스트를 깨려면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데리고 도망쳐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하기 전까진 클리어 되지 않을 테니까.
도장 다섯 개가 찍힌 팔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퀘스트 깨졌어."
"그렇겠지."
"이게 뭐야...."
민아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렇게 깰 수 있는 거면 우리는 대체 왜 그 개고생을 하며 도장 네 개를 찍은 건데?"
"솔직히 개고생은 나 혼자 했지."
"그...건 그렇긴 하지만."
사기를 잘 치는 민아지만, 또 이런 건 솔직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면 왜 굳이 힘들게 도장 네 개를 받은 거야? 완전 헛수고였잖아!"
"분명 유령의 집만 빼면 놀이공원 고수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
민아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뭐라 말하고 싶은데 그래도 내가 한 게 있어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다.
그런 민아를 보며 나는 픽 웃었다.
"장난이다. 도장 네 개를 받은 이유는 간단하지. 이것보다 명확한 신분은 없기 때문이야."
"...아. 그러네."
도장 네 개가 있었기에 우리는 사파리에 들어올 수 있었고, 강하게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카라스만 아니었으면 여기 메인 퀘스트는 진짜 쉬운 편이지. 그러니 달성도 보상도 없잖아."
"으, 으으."
"애초에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일정 조건이나, 특정지역 방문 시 발동하는 거라 지역마다 다를 게 당연해."
민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민아는 도장 네 개를 따는데 몇 번이나 목숨이 간당간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내가 계속 살려주긴 했지만.
"저기...."
그런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성이 다가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플레이어인 게 분명했다.
"예?"
"방금 그것만으로 퀘스트가 카운팅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남성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민아가 지었던 표정과 무척 흡사했다.
"난 저 마음 이해해."
민아는 촉촉한 시선으로 그런 남성에게 공감했다.
아무튼 이걸로 플레이어들의 퀘스트도 해결된 것 같았다.
나만 빼고.
***
"뭔가 이상한데."
카라스는 커다란 부리를 쩍 벌리며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몬스터를 향해 말했다.
"야! 철웅 어디 갔어? 오늘은 왜 코빼기도 안보이냐? 아주 빠졌지 그냥!"
카라스의 말에 네임드 몬스터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 철웅 님 말입니까? 그게...."
"뭐냐. 뜸들이지 말고 얼른 말 안 해?"
"예, 옙!"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까마귀의 모습에 네임드 몬스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도 지금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만...."
"아, 뭐야.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 안 해?"
"...죽은 것 같습니다."
"그래, 죽었겠지. 플레이어들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아침에 갔으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지금이라면 이미 돌아와 있어야 했다.
'설마 아직까지 놀고 있나?'
철웅의 힘을 알고 있는 카라스로선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거의 반나절이 지날 동안 철웅이 날뛰었으면 유원지의 절반은 사라졌을 거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철웅 님이 죽었습니다."
"뭐라고?"
이게 뭔 개소리지.
카라스는 지금 눈앞의 몬스터가 자신에게 장난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몬스터의 얼굴은 어디로 봐도 진심으로 보였다.
"진짜냐?"
"예, 예."
"어떻게?"
"그건 저도 잘...."
애초에 철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방금이다.
갑자기 플레이어들이 유원지 각지에서 몬스터들을 습격하기 시작했기에 그것을 수습하느라 바빴으니까.
"그게 말이 돼?! 대체 어떤 놈이 센티넬을 죽일 수 있다고!"
"하, 하지만 철웅 님의 행적은 사파리에서 끊기셨다고 합니다."
몬스터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이 스테이지를 벗어나 먼 여행을 떠났다는 게 현실감이 있었다.
센티넬을 죽인다?
플레이어들은 현재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센티넬은 현재 퀘스트를 수행하는 플레이어가 결코 죽일 수 없는 수준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네놈들은 그럼 뭐했어?"
"저, 저희들은 갑자기 플레이어들이 덤벼들어서 맞대응하고 있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덤벼?"
"아마 다른 인간들을 구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참 어리석지요. 어차피 족쇄를 건드리는 것만으로 모조리 죽는 인간들인데."
몬스터는 카라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물론, 아무리 조곤조곤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였다.
"까악, 깍!"
흥분한 카라스의 입에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이놈들이 날 농락해?'
그제야 카라스는 상황을 이해했다.
철웅도 철웅이지만, 카라스는 오늘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몬스터의 말에 따르면 이미 한참 전부터 플레이어들은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라스가 플레이 중인 게임은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의 숫자에 민감하다.
그럼에도 자신이 몰랐다는 건 최대한 숨을 죽이고 행동해 왔다는 것.
이미 그 근방 어트럭션은 잘 이용되지 않아 카라스가 관심을 끄고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만약 녀석들이 철웅을 죽이고, 유원지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면 카라스도 바로 눈치챘을 거다.
혹은, 일반인들이 모여 있는 상단 어트럭션 지구에 와서 사람들을 구출하려 했다거나.
하지만 녀석들은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을 피해 움직여 시선을 피했다.
분명 자신에 대해 잘 아는 놈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야."
"예, 옙!"
"당장 퍼레이드 끌고 가서 다 죽여. 있는 몬스터 다 끌고 가서 사파리 쪽에 있는 놈들 다 쓸어버리란 말이야."
"철웅 님을 죽인 녀석들인데 저희만 가서는...."
"그래서 안 한다고?"
카라스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별자리인 자신은 행동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여기서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거라면 몰라도 직접 나선다면 상당한 패널티를 감수해야만 했다.
어째서인지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발동한 이후 그 패널티가 좀 옅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바, 바로 몬스터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철웅이 죽은 건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플레이어들이 센티넬을 잡는다는 건 말이 안 돼."
카라스는 한 가지 가정을 생각했다.
신이 직접 나선 경우.
간단히 말해 단순히 '아바타'로 취급하는 게 아닌 본인의 대리인.
즉, 화신으로 선택한 경우다.
만약 그렇다면 철웅을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 세계를 '게임'으로서 즐기고 있는 신들이 설마 그런 선택을 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이딴 똥겜 안 한다고 홧김에 본인이 강림해서 엎어버렸다는 쪽이 신빙성이 있었다.
카라스는 거지같은 신들의 성격을 떠올리며 그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만약, 화신이 된 거라면 대체 어떤 놈이지?'
현재 이 유원지에 아바타로 선택된 플레이어는 거의 없다.
있었어도 철웅에게 명령해 다 죽였다.
'대체 누구야?'
도무지 철웅을 죽인 놈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낸 몬스터들의 보고를 들으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신이 깽판을 친 건지.
혹은 화신이 나타난 건지.
하지만 카라스가 보낸 몬스터들은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왜냐면 이미 사파리는 텅 비어 있었으니까.
# 35
035. 까마귀 자리의 카라스(3)
플레이어들은 일반인들을 이끌고 로메월드의 입구를 향해가고 있었다.
지금의 자유가 거품처럼 사라질 거봐 저마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제 악몽 같은 장소를 벗어나는 거다!"
선두에서는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명원이 앞서가며 주위를 독려했다.
그의 말처럼 이제 조금만 있으면 유원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상자가 좀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마지막 직원의 족쇄를 해제한 후,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파리 인원과, 구출한 인원이 합쳐져 수백 명에 이르는 인파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새롭게 구출한 사람들 중에 직원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단부 어트럭션은 몬스터들이 관리하는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족쇄를 푸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형, 이제 정말 끝난 거예요?"
"거의."
시우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자체가 마치 꿈결처럼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끝날 거다."
"정말요?"
"그래. 네가 철웅을 잡는데 도와준 덕분이지."
"헤헤."
시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자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양심이 찔렸다.
'...어린애를 너무 부려먹은 감이 없잖아 있으니.'
철웅을 죽이기 위한 무기를 만들 때, 거의 일주일간 혹사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제때 무기를 만들 수 없었으니까.
그 보답은 이곳을 벗어나는 걸로 갚아주자.
나는 시우를 데리고 민아와 창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창우는 내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일이 쉽게 풀려서 무서울 정도군요.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끝이라니...."
목소리에선 긴장과 흥분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대로 밖으로 나간다면야 그렇겠죠."
"까마귀 때문입니까?"
"예."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다.
이미 게임판 자체가 엎어졌으니 언제 하늘에서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녀석은 반드시 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윽?!"
무거운 바람이 몸을 스쳤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까마귀 새끼, 이제야 결심했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이군.'
이제야 입구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려면 족히 30분은 시간이 걸릴 거다.
"일반인들을 먼저 내보네! 플레이어들은 우선 혹시 있을지 모를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한다!"
명원의 외침에 귓가에 들렸다.
혹시 흥분해서 열이 무너질지 몰랐기에, 철저하게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나마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지.'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확실히 통솔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실력도 제법 있는 것 같던데 신의 아바타가 되지 않은 걸 보면, 아마 나이 때문이 아닐까.
보통 신들은 젊은 사람을 자신의 아바타로 두길 선호하거든.
간혹 실력보다 외모를 더 보는 신도 있을 정도다.
"그럼...."
나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태 녀석이 둥지를 틀고 있었을 거대한 건물.
아일랜드 캐슬이라 불리던 거대한 장난감 성에서 점차 흉악한 기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빠,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
감이 예민한 민아 역시 뭔가를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확해. 이제 녀석이 올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녀석이라면 오빠가 말했던 그 까마귀라는 녀석?"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응시했다.
굳이 입으로 설명해 줄 필요도 없었다.
왜냐면 녀석이 이제 모습을 드러낼 테니.
"오는구나."
온몸이 저릿했다.
철웅과는 다르다. 단순한 몬스터는 지닐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콰콰콰쾅!!
대기가 울리며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폭음이 울렸다,
아마 녀석이 머물던 아일랜드 캐슬이 부서지는 소리였겠지.
"꺄악!"
거친 광풍이 몰아치며 몸을 뒤흔들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전신이 휘청거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래, 아무리 약해도 별자리는 별자리는 거지."
센티넬도, 몬스터도 사실 아무래도 좋다. 진짜는 이 녀석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자기 뜻대로 가지고 놀던 녀석.
쉬이이익!
쿠웅!
대기가 갈라지며 새까만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지면에 격돌했다.
보도블록이 부서지며 날아가고, 휘날리는 깃털과 바람에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칭찬해 주마."
새까만 머리가 길쭉한 머리를 들어올렸다.
철웅보다도 거대한 덩치를 지닌 거대한 까마귀.
얼핏 들으면 우습게 느껴질지 모른다. 사납고 살벌한 인상을 지닌 몬스터에 비하면 귀여운 게 아니냐고.
하지만 아니다.
진정한 공포는 외모가 아닌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설마 나를 움직이게 할 줄이야."
새까만 털과 달리 번쩍이는 금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녀석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얼어붙었다.
'이렇게 긴장되는 건 간만이네.'
오르가 때도 조금 긴장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조금이다.
철웅의 경우엔 갑작스러운 사태에 초조하긴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난 지금까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싸웠다.
전생에도 그랬고, 현생도 그렇다.
하지만 솔직히 이번엔 진심으로 긴장됐다
그것은 카라스가 두려워서 생기는 긴장이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싸운다는 긴장이다.
'예전이라면 사람들을 노리고 있는 틈을 노려 기습하던지, 도망을 쳤을 텐데.'
그런 상황을 직접 유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난 죄책감 없이 남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
적어도 전생에는 그랬다.
"모두 서둘러 도망치세요!"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덜덜 떨었다.
"이곳은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도망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민아에게 눈짓했다.
민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등을 돌렸다.
"서둘러요! 지금 놀고 있을 시간 없다고요!"
"어어억!"
앞에 서있는 사람의 등을 꾹꾹 누르며 민아가 외치자 그제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소녀라고 할 수 있는 민아가 외치니 사람들도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마치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그런 우리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카라스가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날개를 펼치자, 검은 깃털이 탄환처럼 사람들에게 날아들었다.
'결전의 시간.'
스킬을 사용하자, 날아들던 깃털들의 속도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합!"
캉캉캉!
인벤토리에서 꺼낸 창을 들어 그 깃털들을 하나하나 튕겨냈다.
스킬의 랭크가 낮아 그리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없다보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날아들던 깃털들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지자 조소를 하던 카라스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걸 다 튕겨냈다고?"
그 많은 깃털을 설마 다 튕겨낼 줄은 몰랐는지 카라스는 내심 놀란 눈치였다.
'뭔 냅다 광역기부터 갈겨?'
물론 내 입장에선 내심 식겁한 일이었다.
이러다가 녀석이 작정하고 깃털만 날리면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했다.
나는 전혀 상관없어도 지금 도망치는 사람들은 대다수 죽을 게 분명했으니까.
"야."
"뭐? 지금 야라고 했냐?"
"그래."
우선 녀석의 시선을 끄는 게 먼저였다.
나쁜 쪽으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긴 했지만 결국 새대가리다.
전승만 보더라도 먼 일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놈은 아니었다.
"하, 진짜 내가 별꼴을 다보네. 고작 인간 놈들에게 무시받을 줄이야."
"무시받을 만하지. 지금 네 꼴을 봐라. 고작 인간 놈들 잡으려고 여기까지 나왔잖냐."
"인간 주제에 잘도 떠드는 구나."
별자리인 녀석이 게임에 직접 관여하는 건 리스크가 크다.
능력치도 전체적으로 내려갔을 테고, 이 일이 끝난다 해도 한동안은 이 게임에 조금도 관여할 수 없을 거다.
"꼬우면 덤비던가."
"...네놈이 실력이 있다는 건 알겠다만 참으로 오만하군. 그런 녀석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알려줘야겠어."
드득.
녀석이 몸을 돌려 내 쪽을 응시했다.
좋아, 녀석의 시선이 내게 고정됐으니 이 상태로 시간을 벌면 된다.
'아직 3분의 1도 빠져나가지 못했어.'
적어도 30분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다. 여태 준비한 것도 이 순간을 위해서였으니.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죽여 달라고 애원해도 결코 쉽게 죽여주지 않겠다!"
녀석은 양 날개를 넓게 펼쳤다.
날개를 펼치며 발생한 풍압이 칼날이 되어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콰콰콰쾅!!
특별한 스킬은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날갯짓.
그럼에도 평범한 플레이어는 그 바람에 닿는 것만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위력이었다.
'그림자 질주.'
스르륵.
카라스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공격을 확실히 회피할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암야의 사수를 잡고 얻은 외투에 붙어있는 스킬.
==
그림자 질주(B+) : 반경 10미터 내에 있는 그림자로 이동할 수 있다. 5분에 1회 충전되며 최대 3회까지 충전된다.
==
철웅과 달리 카라스는 나보다 미세하게 민첩이 높다.
한마디로 철웅처럼 내가 녀석의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내가 녀석보다 힘이 강하냐?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격이 낮아도, 능력치가 센티넬급으로 떨어졌어도 카라스는 엄연히 까마귀 자리에 속한 존재.
고작 모든 능력치가 E에도 못 미치는 플레이어가 상대하기엔 무리인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능력치에 영향을 받지 않고 피할 수 있는 생존기와, 명중에 보정을 해주는 스킬을 준비했던 거다.
콰콰콰쾅!!
녀석의 발톱이 지면을 긁고 지나갔다.
나는 최대한 입구에서 멀어진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뒤,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꺼낸 무기는 길쭉한 창이다.
그것도 그냥 창이 아닌 투창.
"흡!"
나는 팔에 힘을 넣고 카라스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창은 매섭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정확히 녀석의 후두부에 명중했다.
"아야!"
정확히 명중했음에도 창은 수수깡처럼 튕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녀석의 가죽도, 깃털도 어느 것 하나 뚫을 수 없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녀석의 시선을 끄는 거니 전혀 문제가 되진 않았다.
"쫄래쫄래 잘도 피하는 놈이네. 성가신 스킬을 가지고 있구나!"
녀석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나는 최대한 몸을 빼며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가 내 몸을 몇 번이나 스쳤지만 제대로 명중하지는 못했다.
콰콰쾅!!
나는 녀석의 공격으로 부서져나가는 잔해들을 이용해 최대한 은신하며 몸을 움직였다.
스킬 '소음차단'으로 움직이는 소리를 줄일 수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녀석이 나를 찾지 못했을 때는 간간히 공격을 가해 지속적으로 어그로를 끌었다.
"와, 뭐 이딴 놈이 있지? 적당히 죽이려고 했더니 진짜 뚜껑 열리게 하네!"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녀석의 공격에 나는 최대한 몸을 사렸음에도 몸의 이곳저곳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림자 질주가 5분당 1회 충전 되다보니 간혹 충전되는 속도보다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좀 죽어라 좀! 왜 이렇게 안 죽어?!"
그렇지만 나는 쉬이 당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처를 입을수록 더욱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바로 지수와 공유한 스킬인 천살성 덕이다.
상처를 입을수록 도리어 능력치를 올려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는 꿀 스킬.
거기에 재생도 있기 때문에 나는 지구전에 자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만 시간을 벌면....'
사람들도 거의 다 빠져나간 것 같았기에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생각할 때였다.
"감히──!"
분노에 가득 찬 녀석의 외침이 들리자, 점차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의 빛이 가려질수록, 카라스의 검은 깃털이 조금씩 은색으로 빛났다.
"뭐야."
어떻게 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영광으로 생각해라. 별자리(星座)의 힘을 보여주마."
검은빛이 점차 옅어질수록 하늘은 어두워졌고, 녀석은 더욱 뚜렷하게 빛났다.
지금 하늘에서 날개 짓을 하는 건 까마귀가 아닌, 태양신의 전령이었다.
"이런 미친."
설마 녀석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수치까지 상향되어 있었을 줄이야.
어느 정도는 예상하긴 했지만 그 정도가 컸다.
"좆 됐네."
아무리 나라도 저것을 상대로 버틸 자신은 없었다.
# 36
036. 까마귀 자리의 카라스(4)
"보아하니 여기서 벗어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카라스는 내가 시간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깍깍 거리며 검게 변한 하늘에서 비소했다.
"내가 이곳에서 퇴장당하기 전까지 모두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지금의 나는 고작 스테이지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이거 솔직히 위험한데.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녀석이 저 스킬을 사용한 이상 현재의 나로선 버거웠다.
'아니, 이건 반칙이지. 왜 전승 스킬을 사용해?'
카라스의 전승 스킬은 빛을 모조리 차단하며,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올라가는 부스트 스킬이다.
뭐, 은색의 새였던 본래의 자신을 찾는 것이니 부스트이긴 뭣하다.
까마귀라는 모습자체가 영락한 모습인 거니.
'그나마 하위 별자리의 전승 스킬이라는 점이 위안이군.'
거기다 완벽히 모든 시야를 차단하지 않았다는 점에 온전한 상태로 발현된 건 아니다.
분명 스킬도 능력치도 원전에는 한참 못 미칠 터.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라."
콰아아앙!!
지상으로 활강한 카라스가 지면에 격돌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꽂힌 번개처럼.
그림자 질주가 없었다면 결코 피하지 못할 속도였다.
"젠장!"
이 속도면 그림자 질주의 횟수가 회복되기 전까지 도망 다닐 수 없다.
전신에 상처가 늘어날수록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아직 멀었나?'
입구가 어떤지 볼 여력도 없었다.
녀석의 공격을 피하기도 바빴으니까.
"후우, 후우...."
나는 소음차단을 사용하여 몸을 숨겼다.
새까만 장비를 걸치고 있으니 카라스도 나를 쉬이 찾지는 못할 거다.
'녀석이 전승 스킬을 사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정말 쓸 줄은 몰랐다.
아마 전체적인 난이도 상승에 의한 보정이겠지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다니. 솔직히 감탄했다."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으니, 짜증이 섞인 카라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적어도 평범한 놈은 아니군. 시스템 보정이 들어온 것도 그 탓인가?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렇게 말한 카라스는 지상에 가깝게 낙하하며 날개를 거세게 퍼덕였다.
그 간단한 날개 짓에 주변의 잔해들이 쓸려 날아갔다.
내가 몸을 숨기고 있던 장소도 마찬가지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카라스와 나만이 공터가 되어버린 공간에 남았다.
"참 신기한 놈이야."
녀석은 지상에 내려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처음에는 좀 짜증나긴 했다만 칭찬해주지. 이 카라스님의 칭찬이다,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해라."
"마치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대단한 위치에 있고말고. 하찮은 필멸자와는 격이 다른 몸이잖나."
여유를 되찾았는지 녀석은 비꼬는 말에도 유연하게 넘어갔다.
전승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자신이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튼 너도 이제 알았겠지? 더 이상 너는 시간벌이도 안 돼. 슬슬 끝내자고. 저기 밖에 있는 인간 놈들도 어서 죽여야 하거든. 저기서 쓸데없이 도망치면 골치 아파."
"그러냐?"
"그래. 그러니까 이제 얌전히 죽어라. 그럼 특별히 아까 말했던 고통스런 죽음을 취소해주지."
카라스는 관용을 베푼다는 태도로 길쭉한 머리를 내게 가까이 가져다댔다.
섬뜩한 금안이 초승달처럼 휘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나 역시 마주보며 웃었다.
"그거 고맙네."
"그렇지?"
"그럼 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마."
가슴팍까지 다가온 녀석의 부리를 보며 나는 씩 웃었다.
"앞으로는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쓸데없이 여유부리지 마라."
[유원지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탈출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3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이번 퀘스트는 퀘스트 달성도에 따른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잠시 후,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1회차 계승 패키지를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미리 열어두었던 DLC 상점에서 1회차 계승 패키지를 구매했다.
패키지에 대한 설명이 나타났지만 나는 빠르게 스킵했다.
이미 읽어뒀던 내용이었으니까.
[1회차 계승 패키지를 구매하셨습니다.]
[1회차 계승 패키지는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1회차에 습득하셨던 스킬이나 아이템을 계승받을 수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의 단계에 따라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이나 장비가 달라지며, 패키지 구매 시 한 가지 스킬이나 아이템에 한에 등급 제한 없이 지급받으실 수 있습니다.]
패키지 구매 시 처음 계승받는 장비나 스킬은 등급에 상관없이 지급받는다.
나는 이 말을 봤을 때부터 무엇을 받을지 생각해두고 있었다.
"「초월의 증명」."
그것은 내가 1회차에서 진행했던 마지막 퀘스트의 이름.
동시에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주어진 한 가지 스킬이었다.
***
초월의 증명은 내가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이후, 최종 보상으로 지급받은 스킬이다.
하지만 나는 그 스킬을 단 한 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왜냐면 스킬 사용조건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초월의 증명(S)(성장형)
30분간 별자리(星座)를 상대 시 모든 능력치가 100퍼센트 증가.
30분간 별자리(星座)에게 공격 시 치명적 피해.
??????
??????
*특정한 존재의 하수인일 경우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사용 후, 30일 후에 다시 사용가능.
==
여기서 특정한 존재의 하수인이란 신의 아바타나 악마의 계약자와 같은 걸 말한다.
초상의 존재에게 자신을 내어준 이들은 이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지.
'전생의 나 역시 그래서 사용할 수 없었고.'
무려 S등급 스킬에다 '성장형'.
전생에 나는 이것을 사용할 수도 없었고, 설령 사용할 수 있었어도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배드엔딩으로 끝이나 버렸으니까.
"뭣...!"
역시 이런데서 감이 좋은 카라스는 황급히 몸을 빼려했지만 그보다 내가 빨랐다.
푸욱!
"컥!"
방금 전까지 녀석이 깃털 한장 꿰뚫지 못했던 창이 카라스의 몸에 꽂혔다.
'쳇, 얇아.'
조금만 더 내가 힘이 강했다면 심장까지 꿰뚫을 위치였는데.
나는 창에 조금 더 힘을 넣어보려 했지만 녀석이 날개를 활짝 펼치며 공중으로 떠오른 탓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 정체가 뭐냐? 아바타도 아닌 플레이어가 이런 힘을 발휘한다고?"
그리 말하는 녀석의 주변에 점차 은빛의 깃털이 나선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범위를 넓이며 지면을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벌레면 벌레답게 얌전히 죽어라!"
은색의 깃털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그것을 굴러서 피한 후, 하늘에서 비행하는 녀석을 향해 던졌다.
"미친놈! 그깟 창을 던진다고 내가 맞을 것 같으냐?"
"응."
내가 괜히 '필중' 스킬을 가지고 온 게 아니거든.
슈아아악!!
"이런 말도 안 되는...!"
분명 녀석은 인간의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필중 스킬이 존재했다.
'초월의 증명'으로 인해 상승한 능력치와 '필중' 스킬로 인해 나는 녀석의 오른쪽 날개를 정확히 창으로 꿰뚫었다.
'몸을 노린 건데 피할 줄이야.'
나는 짧게 혀를 차며 떨어지는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자식!"
하늘을 가득 채우던 어둠이 부스러졌다.
그리고 부스러기는 깃털들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콰콰콰콰!
나는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하늘에서 떨어지는 깃털들을 방어했다.
물론 평범한 상점표 방패이기에 가변형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하는 건 잊지 않았다.
"큭!"
그렇다 해도 전신을 완전히 방어하지는 못했다.
나는 팔과 다리를 찢으며 지나가는 깃털 속에서 이를 악물며 전진했다.
깃털을 뚫고 나오자, 지면에 처박혔던 몸을 애써 일으키는 카라스가 보였다.
"어딜."
인벤토리에서 투창을 꺼내 녀석의 양다리를 꿰뚫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섰던 몸이 재차 기우뚱 기울어졌다.
"이 벌레 새끼가아아아!"
녀석이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번쩍이던 금안은 붉게 물들어 흉흉한 흉광을 내뿜었다.
그 눈에는 굴욕감과 분노, 그리고 혼란과 공포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격이 낮아도 별자리다.
능력치가 떨어졌다 해도 이제 걸음마 단계인 플레이어에게 죽을 존재는 아니었다.
실제로 별자리들과 인류의 대립이 시작되는 건 한참 후니까.
하지만 난 전생과 똑같은 속도로 이야기를 진행할 생각이 없었다.
이전 회차의 배드엔딩.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작을 분명 보았다.
초월의 증명이 바로 그 증거.
콰앙!
나는 다리를 창에 꿰뚫려 제대로 거동도 하지 못하는 카라스를 향해 달렸다.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했음에도 망가진 방패를 내버리고, 검을 꺼내 날아드는 깃털을 튕겨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깃털을 튕겨낼수록 검의 이가 빠졌다. 가변형 오리하르콘으로 코팅을 하지 않았다면 한 개의 깃털조차 막을 수 없었겠지.
"버그다. 분명 버그가 분명해. 이게 말이 돼? 어디서 네놈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거냐!"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회수한 뒤, 부러진 칼을 내버렸다.
전신을 향해 날아드는 깃털 속을 내달린다. 재생과, 천살성으로 육체의 내구를 한계가지 몰아붙이며 마지막으로 파일 벙커를 꺼냈다.
이제 녀석과 나의 거리는 불과 5미터.
그렇게 내가 팔을 앞으로 뻗으며 다가간 순간, 녀석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죽어어어!!"
여태까지 날렸던 깃털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구의 형태로 둘러싸며 쏘아졌다.
아마 내가 접근한 순간을 노린 필사의 함정.
방패를 들어도, 칼을 휘둘러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숫자의 깃털이 날아들었다.
"그림자 질주."
콰콰콱!
녀석의 그림자를 타고 이동해 옆으로 이동했다.
그것을 인지한 카라스도 황급히 깃털을 모아 벽을 만들었다.
녀석과의 거리는 불과 1미터.
콰아앙!
격발된 벙커가 깃털의 벽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파일 벙커도 깃털에 찢겨 부서졌다.
카라스는 그런 나를 보며 흉소했다.
"이제 맨손이구나!"
인벤토리에 있던 투창은 다 썼고, 검은 부러졌으며 파일 벙커는 부서졌다.
카라스의 말대로 현재 내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몸을 갈갈이 찢는 깃털속을 파고들며, 나는 손을 뻗었다.
맨 처음, 내가 녀석의 가슴팍에 꽂아두었던 창의 자루를 향해.
"무기라면 여기 있다."
"...!"
카라스의 동공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자신의 가슴팍에 꽂혀있는 창을 뒤늦게 깨달은 거다.
카라스의 부리가 벌어지며 나를 향해 뭐라 외치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우드득!
녀석의 가슴팍에 박힌 창을 손에 쥐고, 남은 힘을 모두 짜내 그것을 밀어 넣었다.
마치 말뚝처럼.
창은 까마귀의 심장을 꿰뚫었고.
초월의 증명은 꿰뚫은 심장을 완벽히 파괴시켰다.
그건 어떤 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변이었으리라.
***
초상계(超上界).
우주의 섭리. 흔히 '시스템'이라 불리는 심핵(深核)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장소.
각 차원에 유희를 관리하는 퍼블리셔들도 이곳에 있었다.
"아씨, 이걸 보고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한 남자가 거대한 문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아카터스.
이번에 새롭게 런칭한 게임에 참여한 게임 마스터였다.
아카터스가 관리하는 건 지구,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서버를 관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뭔 서비스 초기부터 사고가 터지냐.'
관자놀이에 자라난 길쭉한 뿔을 손가락으로 연신 긁적여 봐도 지끈거리는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까마귀 자리 새끼는 왜 플레이어한테 죽어가지고.'
아직 대규모 패치도 진행되지 않았고, 메인 퀘스트도 고작 세 번째쯤일 거다.
그래서 아카터스도 게임 운영에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현재 플레이어들이 할 수 있는 건 일자식 진행뿐이라 엇나갈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별자리가 하나 죽을 줄이야.
'아오, 그 까마귀 놈이 5만 포인트를 줄 때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기도 좀 참여하고 싶다고 때를 쓰던 카라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약하기는 해도 나름 까마귀자리에 속해 있는 녀석이니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병신이다.
"끙."
거기다 카라스를 죽이는 것을 본 신 몇몇이 계속 문의도 해오는 상황이다.
대체적으로 '버그냐 아니냐.'라는 추궁이 절반이 넘었고, 어째서 별자리가 저렇게 힘을 발휘할 수 있냐는 게임 밸런싱에 대한 문의도 있었다.
아니, 버그가 있을 수가 있나. 이게 게임이기는 해도 우주의 섭리로 돌아가는 건데.
그리고 카라스가 전승 스킬을 사용한 이유도 의문이다.
분명 아직 별자리는 게임에서 별 힘을 쓰지 못할 텐데....
'그러고 보면 시스템이 관여한 흔적이 있던 게 그것 때문인가?'
시스템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카터스는 머리에 이어 위까지 시큰 거리는 것 같았다.
GM 인생에 이렇게 골치 아픈 경우는 처음이다.
이해를 할 수 없으니 상사에게 제대로 설명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보고하지 말까?'
잘 생각해 보면 카라스는 지구, 그곳에서도 그리 인지도가 없는 별자리다.
신위도 보잘 것 없으니 없어진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 녀석이 대체 어떻게 카라스를 죽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라도 유의해서 살피면 되겠지.
자신이 관리하는 서버가 가장 인구가 적은 서버라 눈에도 안 띌 거다.
'그래, 우선은 조용히 넘어가자.'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아카터스는 거대한 문을 한번 올려다본 후,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이번 일은 전조에 불과했다는 걸.
# 37
037. 1차 대규모 업데이트 (1)
[1차 대규모 업데이트가 시작됩니다.]
카라스를 죽인 지 일주일 정도 흘렀을 무렵.
전 세계에 처음으로 '공지'가 떴다.
여태 여러 가지 알림이나 메시지가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었던 적은 많았지만 '공지'는 처음이었다.
==
1차 대규모 업데이트.
*이제부터 메인 퀘스트가 본격적으로 오픈월드 형태로 진행됩니다.
기차나 지하철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 스테이지로 이동이 가능해지며, 여러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서브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길드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길드 생성은 새롭게 추가된 인터페이스를 통해 간단히 생성이 가능합니다. 생성 시 대량의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
....
*이제부터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다음 퀘스트는 대규모 레이드입니다.
각 지역에 레이드 보스가 나타나며, 해당 보스와 교전 시 기여도가 상승합니다.
레이드 보스를 처치 시 특별한 소재나 장비를 얻을 수 있으며, 추가적으로 달성한 기여도에 따라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
등등 다양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체로 새롭게 추가된 시스템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나는 맨 첫줄에 있는 '오픈월드'라는 말에 집중했다.
'오픈월드라.'
오픈월드가 시작되었다는 건, 이제부터 새로운 사회에 돌입했다는 거다.
여태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느라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쓸 수 없던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이 머물던 국가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인지할 수 있으리라.
"뭐야 길드라는 거는 또. 거기다 레이드 보스는 또 뭐고. 기간도 한참 남았네."
새롭게 추가된 인터페이스에는 전국 지도를 맵 형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 레이드 보스가 등장하는 구역과 등장 타이머가 표시되어 있었다.
대다수 15일이 넘게 표기되어 있으니 민아가 투덜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아직 세 번째 퀘스트를 끝내지 못한 사람도 많을 테니까. 오히려 우리가 빨리 클리어한 편일 거다."
"으음, 하긴. 우린 거의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깼으니."
우리가 세 번째 퀘스트를 클리어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이틀이었다.
지금은 거기서 일주일이 지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아직 한창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 중이다. 애초에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직접 찾아서 진행해야 하는 만큼 사람에 따라 편차가 컸다.
"형, 몸은 좀 괜찮아요?"
"응? 아, 물론. 이미 다 나은 지 오래야."
"휴, 다행이네요. 장비도 수리가 다 끝났어요."
언제 왔는지 시우가 내 검은 외투를 내밀며 말했다.
카라스와 싸우며 깃털에 난자당한 탓에 장비가 죄다 완파 직전까지 갔었다.
정말 시우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이 아까운 장비들을 버릴 뻔했다.
"이제 일어나도 괜찮은 건가요?"
시우와 함께 온 창우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카라스를 죽인 직후, 쓰러진 나를 옮긴 사람이 창우였으니 누구보다 당시 내가 입었던 상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다.
"일주일 사이에 그 상처들이 다 낫다니 정말 굉장하네요."
"다 스킬빨이죠, 뭐."
재생에 천살성이면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다.
그래도 상처가 좀 심하긴 했는지 재생 랭크가 F에서 E로 올라갔다.
"이민아."
"응?"
"난 이제부터 대전에 갈 건데, 넌 어쩔래?"
"엥? 갑자기 웬 대전?"
내 말이 상당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갑자기 대전에 간다고 하면 그럴 만도 하지.
"레이드 보스는 어쩌고? 잘 봐, 서울은 네 마리나 나오는데 굳이 대전까지 가?"
"성심당 가려고."
"헛소리 할래?"
아무래도 농담이 먹히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대전의 대표명물이라고 하면 성심당인데 너무 무시하네.
"볼 일이 있어."
설명하려고 해도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내 답변이 만족스러울 리 없는 민아의 눈썹이 높이 치켜 올라갔다.
"...에휴. 오빠의 행동이 언제 납득된 적이 있었나. 내가 그러려니 해야지."
"그래서?"
"나는 이번엔 패스."
퉁!
민아가 그리 말하는 순간, 근처에 있는 창문에 뭐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자, 옵저버 하나가 연신 창문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어릿광대의 옵저버구나.'
이젠 몰래 지켜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카라스를 죽인 이후에는 이제 그냥 대놓고 우리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있었다.
민아 역시 그걸 봤는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많은 옵저버들이 대전으로 이동하면 서울은 좀 한적해지려나."
"그럴 리가. 서울에 가장 많은 아바타가 몰려있으니 그렇진 않을 거다. 뭣보다 저기 있는 옵저버들은 나만이 아니라 네 지분도 상당해."
"설마, 이렇게 몰려들기 시작한 건 오빠가 까마귀를 죽여서인데?"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지금 몰려든 대다수의 옵저버는 그냥 나를 한 번쯤 구경하러 온 것들이 태반일 거다.
별자리를 죽인 건 놀라운 일이지만 카라스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별자리다.
능력치가 크게 너프 먹은 상태였다고 치면 기적적으로 잡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론 아주 약간 너프 먹은 상태라서 아주 뒤지는 줄 알았지만.
'카라스가 시야를 차단하는 기술을 써서 다행이지.'
멀리서 지켜보던 옵저버들로선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을 거다.
마지막에 내가 카라스의 심장에 창을 꽂는 거나 제대로 봤겠지.
"네 신은 나랑 같이 가길 원하는 모양인데?"
"됐어. 굳이 대전까지 가고 싶지는 않아."
민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창문을 두드리던 어릿광대의 옵저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신 내가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응?"
"나중에 내가 길드를 만들 거야. 그때 내가 만든 길드에 들어오는 건 어때?"
"길드? 그거 포인트 엄청 든다며?"
"나 포인트 많은 거 잊었냐?"
길드를 만드는데 드는 포인트는 1만 포인트.
현재의 플레이어들로선 벅찬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내게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 물론 시우와 창우 씨에게도 제안하고 싶습니다."
"저희에게요? 저희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왜 그래 형. 난 세한 형이랑 같은 길드 들어가고 싶어!"
"네, 시우 말대로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쓸모라면 넘치도록 있다.
우선 시우는 최고의 장인이 될 테고, 창우도 신의 아바타에 꿀리지 않는 강력한 플레이어다.
더불어 심안이라는 희소스킬을 지니고 있으니 포텐셜도 충분했다.
'파티를 맺을까 고민도 했지만.'
우선 당장 급한 건 아니니 미뤄두기로 했다.
같은 길드원으로 두면 언제든 파티원 계약을 맺을 수 있으니까.
거기다 파티원이 늘어나면 지수에게 몰빵되던 포인트가 분산된다. 우선은 지수가 일정 기준이 넘을 때까지는 집중해서 육성해야 했다.
"흐음. 난 상관없어. 사실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빠라면 괜찮을 것 같아."
"저희는 세한 씨만 괜찮다면야...."
다행히 세 명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만든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중에 길드를 만들게 되면, 이라는 거다.
그래도 미리 확답을 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다들 나중에 다른 말하면 안 됩니다?"
"걱정 마세요! 세한 형이 만든 길드에 꼭 들어갈 테니까요!"
"하하하...."
시우의 힘찬 말에 창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릿광대의 아바타도 길드라는 말이 나온 시점에서 기운을 회복했는지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럼 오빠는 대전에 언제 가는 거야?"
"지금 당장."
"응?"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껌벅이는 민아에게 나는 재차 친절히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갈 거야."
정확히는 서둘러 가야만 했다.
대전에서 깜박이는 두 개의 마커.
조금 지나면 둘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될 테니까.
***
서울역이 오랜만에 사람으로 북적였다.
기차가 다시 운행하기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일반인도 있었고, 플레이어도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기차 시간표를 보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형님, 이거 진짜로 운행은 하는 거요?"
"운행한다면 대체 누가 하는겨? 역무원도 없잖여."
민승원은 시끄럽게 떠드는 자신의 부하를 노려봤다.
없어보이게 뭘 그렇게 떠들고 있단 말인가.
"그 GM인지 뭔지가 어떻게 했겠지. 지금 TV도 나오기 시작한 거 모르냐? 지금 생활권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
"그, 그렇구만유."
승원의 말처럼 몬스터들의 등장으로 얼어붙었던 사회가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TV에서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나와 현 상황에 대한 말을 하고 있었고, 각종 뉴스보다가 TV를 장식하고 있었다.
현대의 사회구조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또한 '오픈월드'가 되며 일어난 효과였다.
다만, 기차나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게임'의 시스템을 따르게 변했다.
당연히 역무원이나 기차를 운전하는 차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갈 기차는 어디요?"
"어디보자.... 무궁화호 1317번이다. 딱 30분 남았으니 후딱 준비해라."
승원은 열댓 명의 수하들을 훑었다. 여전히 수가 조금 부족하기는 했지만 이것도 간신히 모은 숫자였다.
'그래도 그믐달에 들어가기엔 충분하겠지.'
그믐달이란 현재 서울에 존재하는 가장 큰 뒷세계의 조직이다.
아직 길드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무서운 속도로 세가 불어나고 있었다.
잔혹한 플레이어들이 모여 조금씩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승원은 그 시류에 합승하고자 했다.
"우리는 5호차다. 5호차를 점거하고, 이어서 4호차까지 점거하는 게 우리의 목적인 거 알고 있지?"
"예, 형님."
"좋아. 그럼 가자."
그믐달은 이번 '대이동'을 노렸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플레이어들은 분명 대단할 것 없는 플레이어라 판단하고, 그들을 노리기로 생각한 것이다
.
겸사겸사 일반인들에게 금품도 갈취하고 잘하면 기차 자체를 자신들이 계속 점거하고 포인트를 뜯어낼 요량이었다.
승원을 비롯한 조직원들은 그중 무궁화호 1317호에 투입된 조직들 중 하나였다.
승원과 그 조직원들은 우선 자신들이 맡은 5호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기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지금부터 이 열차는 우리 '그믐달'이 점거하도록 하겠다!"
"뭔, 그믐달? 이건 또 뭔 미친...커억!"
푸욱!
"어휴, 아재요. 좀 조용히 하쇼."
호기롭게 외치는 승원의 말에 5호차에 탔던 몇몇 플레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지만 스무 명에 가까운 조직원들이 덮치니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다.
망설임 없이 사람의 몸에 무기를 쑤셔 넣는 모습에 5호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저마다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치열하게 퀘스트를 클리어해 온 플레이어들일지라도 같은 사람을 망설임 없이 죽이는 이들을 보고는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그래 이거지."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된 모습에 승원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5호차에 플레이어의 숫자도 많지 않았던 터라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깔끔하게 점거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4호차까지 점거하고 보고를 해보실까.'
분명 이 속도라면 자신이 가장 먼저 간부에게 보고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그럼 간부들도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승원이 실실 웃고 있자, 갑자기 기차가 크게 흔들렸다.
쿠웅!
"어이쿠!"
뭔가에 부딪치기라도 한 건가?
승원은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창밖을 둘러보았다.
혹시 몬스터라도 부딪친 건가 싶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뭐야, 이런 씹...."
드드드득! 쿵!
짜증이 치밀어 올라 욕설을 내뱉는 동시에 호차와 호차를 연결하는 사이에서 이질적인 굉음이 들렸다.
'뭐야?'
분명 기차의 뭔가가 뜯겨져 나가는 소리였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혀, 형님. 저쪽에서 뭔가 발소리가 들리는뎁쇼."
"나도 들었어, 새끼야."
뭔가 있다.
승원은 긴장한 눈으로 5호차의 뒷문을 응시했다.
분명 저곳에서 무언가가 기차의 문을 뜯고 들어왔다.
끼익──.
"하아, 살았다. 죄송해요. 기차를 실수로 놓쳐서 쫒아 오다보니...."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당사자의 얼굴을 보자 승원은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20대가 조금 넘은 것 같은 계집애가 들어오지 않은가?
'내가 뭔가를 착각했나 보다.'
아무래도 기차의 문이 조금 헐거웠던 모양이다.
저런 계집애가 그 두터운 철로 된 문을 뜯어낼 수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승원의 옆에 있던 조직원도 한숨을 돌렸는지 안색이 밝았다.
도리어 여성의 외모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걸 확인하자 입이 귀에 걸렸다.
"어이, 아가씨."
"네?"
건들거리며 다가가는 조직원을 승원은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갑자기 긴장했던 탓인지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겨우 저런 계집애에게 긴장했다니. 어이구, 이런 쪽이야.'
승원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당황하며 물러서는 계집애를 보았다.
분명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여자인데, 볼수록 뭔가 섬뜩했다.
"이 오빠 말을 안 들으면 끽, 이에요. 끽. 그러니 얌전히 이쪽으로 와봐. 응?"
"저기...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알 필요 없고, 일로 와보라니까? 저기 보이지? 말 안 들으면 죽어."
그제야 여성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플레이어의 시체로 향했다.
"봤지? 이제 이해했으면 귀찮게 하지 말어."
"아, 이해했어요."
여성은 여상하게 답하며 조직원을 빤히 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새하얀 왼손을 들어, 조직원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어이쿠! 꽤나 적극적...."
퍼걱!
어깨에 올린 왼손으로 조직원의 몸을 꽉 움켜잡아 고정시킨 뒤, 오른손으로 조직원의 턱을 후려쳤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조직원의 머리가 뽑혀 천장에 부딪쳤다.
쿵! 툭, 데굴데굴.
"...?"
털썩.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여성이 손이 떨어지자, 머리가 사라진 조직원의 몸이 스르르 무너지며 쓰러졌다.
여성은 천장에 부딪쳐 떨어진 조직원 남성의 머리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승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미건조한 여성의 시선이 승원의 몸을 훑었다.
'...좆됐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승원은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 38
038. 1차 대규모 업데이트 (2)
1317 열차 1호차 안.
난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이번에 받은 보상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번엔 보상이 좀 애매하네."
계속 백금 등급 보상을 받다가 평범한 보상을 받으니 도리어 신선했다.
보통은 이게 정상인데 말이야.
==
사냥꾼의 감(E)
몬스터의 흔적이나 유실물을 통해 위치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
차마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스킬이다.
몬스터의 위치를 추적하는데 그럭저럭 쓸 만하긴 하지만 '어렴풋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성능은 썩 좋지 못하다.
"됐다. 어차피 이번 퀘스트 보상은 까마귀를 잡고 얻은 걸로 충분하지."
퀘스트 보상은 허접하지만 내게는 까마귀를 잡고 얻은 보상이 있었다.
일반적인 보스 몬스터도 아니고, 심지어 센티넬도 아닌 '별자리'.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보상이 주어졌다.
==
까마귀자리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스킬 '까마귀의 눈'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흑의 장막'을 습득하셨습니다.
????
????
신격이 부족하여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신격이 상승할시 스킬이 해금됩니다.
최하급 신격을 습득하셨습니다.
==
당시 나는 카라스를 잡고 곧바로 기절한 터라 이 문구를 못 봤다.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 로그를 올려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건 두 개의 스킬이다.
까마귀의 눈과 흑의 장막.
까마귀의 눈의 효과는 간단하다.
허공에 새까만 까마귀를 생성해 정찰을 보낼 수 있는 능력.
숫자에 제한은 없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컨트롤이 힘들어진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들이 사용하는 옵저버의 까마귀 버전이다.
'흑의 장막은 카라스가 그때 사용했던 스킬이네.'
카라스의 전승 스킬이 내게 맞게 변환된 모양이다.
녀석이 사용했던 흑의 장막은 광역으로 어둠을 내리깔아 시야를 가리는 스킬이었지만, 내가 받은 어둠의 장막은 내가 어둠에 녹아드는 스킬이다.
주로 숨어서 기습을 선호하는 내게는 딱 맞는 스킬이라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스킬이 아니지.'
다음에 적혀있는 내용은 스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였다.
바로 '신격'에 관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최하급 신격을 바로 습득하다니.'
상태창을 보면 새로운 '신격'이라는 것이 칭호란 아래에 추가되어 있었다.
별자리를 죽인 탓이겠지만, 난생처음 보는 거였다.
전생에도 별자리를 죽인 적이 있었지만 '신격'이 생긴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아바타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초월의 증명 때문인가. 둘 중에 어떤 것이 이유인지 고민했지만 아마 내가 아바타가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왜냐면 스킬 설명에 신격을 얻을 수 있다는 문구와 같은 게 없었으니까.
최하급 신격이라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그 이상을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내가 그런 엔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건 '문'을 열 자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상의 세계에 발을 내딛지 못한, 초월자의 꼭두각시였기에.
'그러고 보니....'
아마 잘하면 대전에서 그 마녀의 옵저버를 볼 수도 있겠는데.
내가 알기로 이 시기에 녀석은 대전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하겠지.
녀석을 생각하니 머리가 절로 아파왔다.
「오, 나의 수족이여. 훌륭하구나 훌륭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역시 너로구나.」
귓가에 마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인류를 사랑하였으면서도, 나를 위해 모든 인류가 죽기를 바랐고.
또한 살아남기를 바랐던 마녀.
나는 녀석을 꺼려했지만, 감사하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녀석이 있었기에 내가 마지막 퀘스트까지 살아남은 건 분명하니까.
"하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더니 괜히 피곤했다.
나는 하품을 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대전에 도착해있겠지.
***
'시발, 이런 시발!'
승원은 발에 땀나게 도망쳤다.
그 여자의 시선이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도망쳐야겠다고 깨달았다.
'분명해, 그 소문으로 들었던 그 여자야!'
처음 소문이 시작된 건 로메월드 타워가 있는 송파구였다.
당시 그 지역에 이름을 날리던 세력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궤멸되었다던가.
처음에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강남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여자 한 명을 조직원이 건드렸다가 조직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당시 사건에서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고.
괴물이라고.
'새까만 원피스에 흑발. 그리고 점차 붉어지는 눈동자.'
인상착의가 똑같았다.
소문으론 둔기를 사용한다고 했지만 좁은 열차 안이라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맨손으로도 충분한 것 같지만.
"커억!"
도망치던 승원의 뒤통수에 뭔가가 날아와 부딪쳤다.
갑작스런 충격에 승원의 다리가 꼬이며 그대로 넘어졌다.
"끄으응."
다리에 힘을 넣어 일어나려고 해도 가벼운 뇌진탕인지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질질 몸을 끌며 고개를 돌리자, 새빨간 열차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몇 호차더라?'
아마 3호차까지는 도망 온 것 같다.
이곳까지 오며 다른 그믐달의 조직원들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데굴데굴.
"히, 히익!"
방금 전, 자신의 머리를 강타했던 게 뭔가 했더니 사람의 머리였다.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쫒아 다니던 부하의 머리.
승원은 바지에 오줌을 축축하게 지리며 몸을 벽에 기댔다.
비단 승원만 그런 건 아니다.
열차 안에 있는 다른 승객들도 저마다 겁에 질려 있었다.
갑자기 그믐달이라는 조직이 열차를 점거하나 했더니 여자 한 명이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나마 평범한 승객들에겐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에 적어도 승원보단 나은 입장이었다.
철퍽.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밟는 앵클 구드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원피스를 입은 탓에 피를 덮어썼음에도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사, 살려줘! 이제 안 그럴게! 얌, 얌전히 살 테니 제발 살려줘!"
승원은 천천히 걸어오는 여성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빌었다.
3호차까지 수십에 이르는 조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이 제대로 저항 한번 못 해보고 차가운 고깃덩이가 되어 사방에 널려 있었다.
툭.
여성은 손에 들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의 팔을 내버리며 느릿하게 승원에게 다가왔다.
새빨간 눈동자가 승원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살기 같은 건 없었다.
도리어 지독히도 무심한 눈이었다.
"아저씨,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저, 정말이야. 아니, 정말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사람들도 돕고 봉사활동도 하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승원의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걸렸다.
마치 꽃과 같은 미소다.
"재밌으신 분이네요."
붉게 물든 지수의 손이 승원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것이 승원이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
서울 신림.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투덜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신림은 현재 몬스터가 다량 출몰하고 있는 위험지역이었다.
따라서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그녀는 단연 시선을 모으고 있었지만 소녀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뭔 옵저버가 저리 많이 따라다녀?"
"평범한 플레이어는 아닌 것 같은데? 괜히 건들이면 좆될 것 같으니 피하자."
옵저버의 수는 플레이어의 화제성을 가리킨다.
화제성은 단순히 외모가 멋지다거나 예뻐서 생기지 않는다.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웬만한 인간의 미모로는 성이 차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저 교복을 입고 있는 소녀는 실력이 대단하거나, 그에 준하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림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교복을 입은 소녀, 민아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민아의 입에는 쇠로 된 숟가락이 물려져 있었는데, 고개를 흔들 때마다 연신 덜그럭 거렸다.
"어디 있다는 거야. 진짜."
어디로 봐도 세한이 부탁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금발머리의 외국인 부녀라."
대전으로 가기 전, 세한은 민아에게 사람을 찾아 달라 부탁했다.
덩치가 큰 미국인 남성과, 혼혈 여자아이.
둘은 부녀 사이이며, 딸의 나이는 13살이라든가.
대체 그런 사람을 신림에서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는 사망자도 꽤 많았던 것 같은걸."
아직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시체들이 길가에 간혹 가다 보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오픈월드가 된 이후, 플레이어들이 엉망진창으로 변한 서울을 조금씩 수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신림은 아직 아니었다.
덜컹!
"캬아아!"
길을 걷던 민아의 옆에서, 잔해에 숨어 있는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늑대의 머리를 한 라이칸슬로프 계열의 몬스터.
'이 녀석들은 한 방에 못 죽이면 재생 때문에 귀찮은데.'
인상을 살며시 찡그리며 손을 움직였다.
민아의 손에 옅은 빛 무리가 일며 변화하려는 찰나, 라이칸슬로프가 무언가에 맞고 튕겨져 날아갔다.
"엉?"
갑자기 날아온 커다란 콘크리트 덩이에 깔린 몬스터의 모습에 민아가 눈을 치켜떴다.
"학생!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외국인 특유의 구부러지는 어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근육질의 외국인이 민아에게 과장된 재스쳐로 손짓하고 있었다.
'...어라?'
외국인 남성의 옆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런 남성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인상착의가 비슷한데?'
중년 외국인 남성에 작은 혼혈 소녀.
민아는 흘깃 라이칸슬로프에 시선을 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고마워요. 도와주신 거죠?"
"하하, 서로 돕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제 기술이! 이름하여, 암석 떨구기입니다."
"예? 암... 뭐라고요? 스킬 이름인가요?"
과장된 얼굴로 웃으며 떠드는 남자의 말에 민아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뜬금없이 이상한 기술명을 말한 탓에 순간 스킬을 말하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아빠!"
그런 민아의 반응을 본 혼혈 소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붉히며 남성의 옷자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부끄러우니까 그만해! 이 언니는 도와줄 필요 없다고 했잖아."
"마이 도터여. 그러면 안 된다. 설령 도와줄 필요 없다고 해도 아직 어린 학생의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돼."
"이 언니가 더 쎌 거 같은데? 봐! 옵저버만 봐도 알 수 있잖아!"
혼혈 소녀는 흘깃 민아를 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지나치게 많은 옵저버가 몰려있었다.
"재밌는 아버지시네."
"좀... 이런 거에 로망이 있는 분이라."
혼혈소녀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민아는 그런 소녀가 제법 의젓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안목도 있어보였고.
'이 사람들인 것 같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한이 말했던 사람들과 인상착의나 행동이 가장 비슷했다.
껄껄 웃고 있는 중년의 남성에게 민아는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이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이름말입니까? 하하! 그럼요. 제 이름은 루크 테일러. 그리고 이 아이는 제 딸인...."
"...린, 린 테일러에요."
혹여나 자신의 아버지가 이상한 말로 소개할까 두려웠는지 린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서 민아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빙고.'
두 명의 이름은 분명 세한이 말했던 것과 같은 이름이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외국인 부녀가 신림에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잖아?'
세한이 꼭 찾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 터라 어떤 대단한 사람인가 했는데 특별할 점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 남성의 기도가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플레이어치고는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분명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는 대단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플레이어로서의 실력은 그냥 그런 것 같았다.
'이 여자애도 아마 플레이어인가?'
여자애 쪽은 확실치 않다.
남성은 아까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졌으니 플레이어가 확실했지만 여자애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오빠가 되도록 같이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뭔가 있긴 하겠지.'
어차피 레이드까지는 시간도 좀 남아 있었다.
민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두 외국인 부녀를 쫒아 다니기로 결정했다.
물론, 민아는 알지 못했다.
이 두 명이 인류를 희망으로 이끌 열쇠라는 걸.
# 39
039. 파멸의 첨병(1)
레이드 보스는 단순한 보스나, 센티넬과는 다르다.
일반 보스처럼 세력을 구성하지 않지만, 훨씬 강하다.
센티넬보다는 약하지만, 피해 규모는 센티넬보다 크고 활동범위도 넓었다.
대충 보통 보스가 스무 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덤벼서 잡을 수 있다면, 레이드 보스는 백 명에 가까운 숫자가 필요했다.
뭣보다 레이드 보스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센티넬로 진화하게 된다.
무서운 점은 일정구역 내에서 못 움직이는 센티넬과 달리 제한이 없다는 것.
사실상 퇴치하지 못한 레이드 보스는 '재해'나 마찬가지다.
전생에 센티넬 못지않게 인류를 죽인 몬스터가 레이드 보스들이었으니 말 다했지.
"332시간 27분...."
맵에 표시된 시간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었지만 그럴 수 없다.
대전에 있는 레이드 보스는 둘이지만 며칠 내에 한 마리가 죽게 되니까.
플레이어가 아닌, 같은 레이드 보스에 의해서.
'녀석들의 본거지가 아마 둔산이었나.'
아직 맵에 표시된 시간은 한참 남아 있었지만, 늘 그렇듯 페이크다.
이미 레이드 보스들은 각 지역에 등장한 지 오래이며 숨을 죽이고 있다.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데 남은 시간이 332시간이라는 거지.
애초에 알림이 떴을 때도 '이제부터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된다.'라고 언급했으니 당연하잖아.
"오빠!"
역에서 나오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역 2층에서 빠른 속도로 뛰어내려오는 여성이 보였다.
새까만 원피스와 그에 어울리는 까만 앵클부츠를 신은 지수다.
"어, 뭐야. 너 언제 왔냐?"
"너무하네요. 같은 기차타고 왔거든요?"
지수는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째려보았다.
같은 기차라고? 왜 난 몰랐지.
그보다 내가 그 기차에 탄 건 어떻게 안 거야.
"같은 파티원의 위치는 알 수 있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맞아, 그런 기능이 있었지."
하도 안 써서 까먹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맵' 덕에 파티원의 위치까지 표시되고 있었다.
여태 지수가 근처에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근데 너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부모님을 만날 생각이었거든요."
담담한 지수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오빠가 생각하시는 거랑 달라요.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살아계시거든요."
"...그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위로를 해줘야 되나 고민이 됐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만나주시지 않았어요."
"왜?"
"저도 몰라요. 위치를 물어도 알려주시지 않더라고요."
지수는 연신 툴툴 거리며 바닥의 돌을 툭, 발로 건드렸다.
"아무튼."
지수는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왜 대전에 온 거예요? 갑자기 오빠가 대전행 기차를 타서 놓칠 뻔했다고요."
"계속 확인하고 있었어?"
"네. 계속."
"그럼 좀 빨리 오지 그랬어? 그럼 나도 한결 편했을 텐데."
지수가 있었다면 까마귀랑 싸울 때도 한결 쉬웠을 거다.
"원래는 바로 오고 싶었는데, 오는 도중에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해서, 그거 서둘러 끝내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어디서?"
"강서구에 갔는데 갑자기 퀘스트가 발생했어요."
그쪽이면 아마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걸 막는 디펜스 퀘스트였을 거다.
플레이어간의 협동이 필요한 퀘스트지만....
"거기 이상한 놈들 많지 않았냐?"
"네. 있었어요. 지금은 없지만."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다.
내 시선을 받은 지수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강서구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파벌과 세력이 여럿 존재했다.
전생에는 그 세력들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하려다 문제가 생겨 대량의 사망자가 나왔다.
'지수가 엮이며 뭔가가 달라진 건가?'
아무래도 나중에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뭐, 내가 대전에 온 건 알다시피 대전에 있는 레이드 보스를 잡기 위해서야."
"역시 그랬군요."
지수는 납득한 얼굴로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더 묻지는 않냐? 예를 들어 서울은 네 마리인데 왜 두 마리밖에 없는 대전에 왔다거나."
"오빠가 언제 이해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확실히 할 말이 없다.
"성심당 때문에 왔다고 해도 별말 안 했을 거예요."
얘는 나를 좋게 생각하는 건지 나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면 되요?"
"둔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 금방이었다.
버스는 아직 운행하지 않지만, 지하철과 기차는 게임의 요소로서 받아들여진 상태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동하면서 이야기해 줄게."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다는 눈치였다.
***
대전 둔산.
본래면 상당한 번화가였을 거리였지만, 지금은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몬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군인과 경찰들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사회가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더니 정말이네요."
"아무래도 오픈월드가 되었으니 무작정 퀘스트만 진행할 수는 없겠지."
메인 퀘스트는 계속해서 주어지겠지만 이제 어느 정도는 텀을 둘 것이다.
각종 서브 퀘스트나 이벤트도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게임을 재밌게 하려면 들러리들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들도 생존할 만한 여건을 갖춰야했다.
"혹시 두 분은 플레이어이십니까?"
어느 쪽으로 가야되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군인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예. 맞습니다."
"...! 아, 역시 그렇군요. 그럼 성함과 주민등록번호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현재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을 조사하라는 말이 나와서."
경찰은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아마 윗선에서 이야기가 나온 거겠지.
겨우 한숨을 돌리자마자 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할 준비를 하는 거다.
'멍청하긴.'
일반적인 플레이어야 순순히 응하겠지만, 꼭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다 억지로 통제할수록 플레이어들의 반발도 커질 거다.
그럼 그런 플레이어들을 누가 막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
이미 공권력은 플레이어들에게 무의미하다.
그걸 이번 레이드 보스에서 똑똑히 알게 될 거다.
연합한 플레이어들의 힘을.
"저, 저기요. 그냥 가지 마시고 성함과 주민등록 번호를...!"
나는 경찰을 가볍게 무시하며 걸었다.
어차피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가야 되기에 거침이 없었다.
"정지! 이곳은 통제구역입니다! 플레이어분들이라고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 서십시오!"
총구가 일제히 나를 향해 겨눠졌다.
총화기는 현재의 플레이어들에겐 꽤 유의미한 억지력이다.
현대의 병기다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과 달리, 플레이어들의 몸은 총알을 막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E(100)만 되더라도 총알은 플레이어들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의 나는 총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저기 보이는 건물로 뛰어."
"네."
나는 지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한 뒤, 천천히 다리에 힘을 넣었다.
무릎을 굽히고 용수철처럼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쿵!
옅은 진동이 울리며 내 몸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족히 수 미터를 공중으로 뛰어올라, 근처의 전봇대를 밟은 다음, 건물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허."
총구를 겨누고 있던 군인들을 닭 쫓던 개처럼 도망가는 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포음은 들리지 않았다.
건물을 타고 도망치는 나와 지수에게 총격을 가해봐야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할 뿐이었으니까.
탁.
건물의 옥상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군인이나 경찰들의 수가 상당히 많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 보자....'
일일이 찾아보기엔 길도 복잡하고 건물의 수도 많았다.
"여기 어디에 레이드 보스가 있다는 거예요?"
"기다려 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인지라 제대로 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까마귀의 눈."
내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새까만 깃털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깃털들은 허공에서 뭉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우와. 이런 스킬은 또 언제 익혔어요?"
"얼마 안 됐어."
솔직히 숫자를 더 늘리고 싶었지만,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섯 마리 정도가 한계였다.
우선 두 마리는 저쪽으로 보내고 나머지 세 마리는 남쪽과 동족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까마귀들은 내 통제에 따라 흩어졌다.
마치 손가락을 움직이는 감각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까마귀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목표로 한 흔적만 찾는다면 충분했으니까.
"나도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오빠는 다르네요."
"아직 멀었지."
아직 까마귀 자리의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터라 내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간만에 지수의 능력치나 확인해 볼까?'
어차피 시간도 비는 터라 상관없을 것 같았다.
지수에게 그리 이야기하자, 지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거절이라는 말을 모르나.'
편하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럴 까봐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지수의 능력치를 보는 순간 싹 사라졌다.
"허."
무심코 감탄이 흘러 나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왜요? 혹시 오빠 기준에 못 미치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지수가 슬쩍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놀란 건 기준에 못 미치는 게 아니라, 기준치를 너무 초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여태 뭘 한 거야?'
능력치가 나 정도는 아니어도 전체적으로 고르게 높았다. 대부분이 E랭크 50을 넘었고.
힘이나 민첩의 경우엔 E랭크 90이 넘었다.
한계치가 올라간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적이었다.
스킬도 어떠냐고 하면 하나같이 흉흉한 스킬이 즐비했다.
'돌겠네. 혈천수라공이 왜 3성이야?'
이정도면 마성(魔性)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혈천수라공을 3성까지 익히게 되면 뭔가 전조가 보여야 할 텐데 지수의 얼굴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인체이해에, 급소타격을 익혔고, 거기에 재생은 C까지 올렸어?'
까마귀의 공격에 갈가리 찢겼던 내가 이제 E랭크가 됐는데 지수는 C랭크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뭐. 내가 재생 랭크를 못 올린 건 크게 다칠 일이 없어서라지만.'
그렇다 해도 C랭크까지 올린 건 심하게 빨랐다.
"야, 너."
"왜요?"
평범하게 몬스터를 잡고, 메인 퀘스트를 깨는 것만으론 이렇게 강해지지 못한다.
재생을 C랭크까지 올렸다는 건 보통 몸을 억세게 굴렸다는 거나 마찬가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따끔.
"아야."
까마귀에서 신호가 왔는지 목 뒤가 따끔거렸다.
"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지수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하기도 좀 그랬다.
...어쩔 수 없지.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신호가 왔어. 저쪽이야."
"아하. 저는 또 뭔가 상처라도 입은 줄 알았잖아요."
신호가 온 방향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기서 대략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골목의 뒤편.
주택가에 연결된 장소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하얀 깃털이랑 발톱자국이네요. 이 크기는 보통 몬스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레이드 보스의 흔적이지."
"네? 레이드 보스가 벌써요? 타이머에 표시된 시간은 아직 멀었잖아요."
"언제부터 타이머를 믿었다고 그래? 대부분은 눈속임이야, 그거."
"그건 그렇긴 한데...."
지수는 떨어진 깃털을 들어올렸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깃털 한 장이 지수의 몸통보다 컸다.
"커다란 날개와 발톱자국, 그럼 조류형과 야수형 몬스터겠네요."
"아니, 이건 한 마리에서 나온 흔적이야."
"네? 아무리 봐도 이건 새의 발톱 자국은 아닌데... 응?"
그렇게 말하던 지수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몸을 긴장으로 굳히며 몸을 옆으로 미끄러트렸다.
콰아앙!
측면에 있던 건물을 부수며 거대한 동물의 앞발이 날아왔다.
발톱 하나하나가 성인의 남성보다 거대해서, 스치기라도 하면 몸이 갈기갈기 찢길 비주얼이었다.
쿠쿵. 쿠웅.
"...정말로, 한 마리였네요."
무너져 내린 건물의 파편을 피하며 지수가 중얼거렸다.
정면에서 저런 걸 봐버리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녀석의 이름은 궁기[窮奇]."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를 가진 거대한 호랑이를 본다면.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사흉(四凶)이라 불리는 마물이다."
「그르르.」
고요한 숨을 내쉬는 궁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40
040. 파멸의 첨병 (2)
「...」
궁기는 우리를 살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길게 찢어진 청색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
머리의 크기만 족히 5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검은 호랑이.
놀라운 점은 이게 아직 성체가 아니라는 거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걸.'
좀 더 찾는데 고생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설마 친히 마중을 나올 줄이야.
'저쪽이로군.'
부서진 건물의 아래에 깊은 지하가 보였다.
이렇게 거대한 호랑이가 숨어 있을 정도면, 아래에는 던전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단순한 건물의 지하로는 이 거대한 괴수가 몸을 숨길 수 없을 테니까.
==
메인 퀘스트 4 : 파멸의 첨병
혼자서는 감히 대항할 수 있는 재해가 당신의 앞에 다가왔다.
모두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아야만 한다.
난이도 C 제한시간 도시가 모두 파괴되기 전.
==
마침 퀘스트 내용도 떴다.
여태까지 본 퀘스트명 중에 가장 심플하고 비장하다.
레이드 보스가 그만큼 강한 존재라는 거지.
센티넬을 계속 상대했던 내 입장에서야 솔직히 김이 좀 빠지지만 말이다.
"네 번째 퀘스트가 떴는데요? 이거 우리 둘이 잡아야 되는 거예요?"
"설마, 아직 다른 사람들은 안 떴을 거다. 우리가 예상보다 녀석을 빨리 발견해 버린 탓에 우리에게만 먼저 퀘스트가 주어진 거야."
"말하자면 선행학습 같은 거네요."
"비슷하지."
아무튼 이제 어쩐다.
녀석과 직접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마땅한 무기도 없다. 오면서 안전지대에서 구매한 창이나 검 정도가 전부다.
녀석이 별자리였다면 초월의 증명이라도 사용했겠지만, 녀석은 레이드 보스지 별자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쿨타임도 안 돌았지만.
'파일 벙커라도 있었으면 한 방 먹여줬을 텐데.'
아쉬워해도 부서진 물건이 돌아오진 않는다.
나중에 시우에게 수리를 맡겨 둬야지.
"기회를 봐서 도망치자. 아니면 한번 싸워볼래?"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우선 정찰해서 녀석의 행동반경을 측정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르르르.」
우스운 점은 녀석도 우리를 가만히 보고만 있다는 점이다.
사흉이라는 겁나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길길이 날뛰며 덤벼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심히 얌전했다.
"어쩌면 한번 싸워 봐도 괜찮을지 몰라."
"진심이에요?"
"저 녀석도 우리를 쉽게 봤으면 이미 덮쳤겠지. 아무리 활동시간이 안 됐다고 해도 공격을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아, 잠깐. 피 냄새가 나요."
지수가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럴수록 눈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쟤 지금 다쳤어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당한 부상을 입은 게 분명해요."
피 냄새가 난다는 말에 나도 숨을 깊이 들이쉬어 봤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얘는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단 말이야.
이것도 다 천살성의 효과인가? 하지만 천살성은 보급형이긴 해도 나도 얻었는데.
「크아아아앙!」
속닥속닥 잡담을 나누는 우리가 거슬렸는지 궁기가 포효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포효소리에 우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피해!"
궁기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앞발이 지면을 내리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변의 건물이 흔들렸다.
내가 있던 자리에 궁기의 발톱이 파고들었다.
단단한 아스팔트가 두부처럼 찢겨졌다.
'상처가 난 곳이 허리구나.'
지수의 말이 옳았다.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빠지자, 무언가에 깊이 찔린 것 같은 상처가 들어났다.
마치 길다린 뿔에 찔린 것 같은....
"뭐, 뿔?"
설마 이 녀석 벌써 마주친 건가?
「──!」
녀석은 우리가 공격을 피하자, 그대로 미련 없이 달려갔다.
건물을 몇 체나 무너트리며 달려가는 모습에 절로 기가 질릴 정도였다.
"가버렸네요."
바짝 긴장하고 있던 지수로선 어이가 없는지 황당한 얼굴이었다.
만약 녀석의 상처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다.
'분명, 뿔. 뿔에 찔린 상처였어.'
설마 아니겠지.
분명 내가 들은 정보는 좀 더 이후였다.
'아니, 애초에 전생에 들은 정보가 오류였을지도 몰라.'
정확한 정보는 '레이드 보스 타이머'가 돌기도 전에 둘 중 하나가 죽었다는 말뿐이다.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솔직히 불확실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세 번째 퀘스트를 끝내자마자 바로 온 거고.
"젠장."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달렸다.
방금 전, 궁기가 튀어나왔던 건물의 지하다.
"세한 오빠?"
갑자기 내가 달려가자, 지수가 급히 따라왔다.
의문이 가득담긴 눈에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궁기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던전인 건 분명했다.
레이드 보스는 이곳에서 던전을 형성하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고 있었던 거다.
다만, 그 레이드 보스는 궁기가 아니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가 그 증거였다.
궁기의 흉험한 분위기와 달리, 이곳의 몬스터들은 맑고 깨끗했다.
분명 이곳에 있는 레이드 보스의 영향을 받은 걸 거다.
우리는 아래로, 아래로 달려갔다.
던전의 최심부, 그곳에 도달한 순간 욕설이 치밀어 올라왔다.
"염병...."
거대한 시체가 있었다.
아까 보았던 궁기와 엇비슷할 정도로 커다란 존재.
검은 털을 가지고, 말과 비슷한 형상을 하였으나 머리에 길쭉한 뿔을 지닌.
길조를 상징하는 일각(一角)의 성수(聖獸)
기린[麒麟]의 시체였다.
***
기린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숭상을 받았던 성수다.
본래 기린은 어떤 존재라도 감히 해하지 않기에 레이드 보스로는 도저히 써먹을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건 아마, 타락한 기린이었겠지.
오염됐고 노쇠한, 그럼에도 본래의 신성함을 간직한 마수.
"기린이라면 하얀 털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나요?"
"본래는 하얀 털이었을 거야."
검은 털이라는 것 자체가 올바른 기린이 아니라는 증거다.
천천히 기린의 시체로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궁기에게 당한 흔적이 전신에 여실이 남겨져 있었다.
'뿔도 없어.'
정확히는 반으로 뚝 부러져있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잠깐, 설마...."
아까 보았던 궁기의 상처.
그곳에 부러진 뿔이 박혀있었던 건가?
뿔은 기린이 가진 힘의 근원이다. 노쇠하고 타락한 기린이라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게 궁기의 몸에 박혀 있는 상태라면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단순히 상처를 헤집는 걸로 끝난다면 좋겠지만, 만약에 궁기가 뿔의 힘을 흡수한다면 끔찍한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전생에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번엔 내가 대전에 있다.
즉 시스템이나 운영자가 관여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는 거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궁기의 행적을 찾아, 기린을 죽이는 걸 막을 생각이었는데.
"하, 이거 망했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답한 한숨을 토하자, 지수가 슬며시 물었다.
"오빠는 기린이 목적이었어요?"
"맞아, 정확히는 기린의 뿔이 필요했지."
상서로운 힘을 간직한 기린의 뿔이 필요했다.
만약 이것을 지금 구하지 못하면 '그곳'에 한참이나 지나야 들어갈 수 있다.
영물이나 성수가 있는 장소에 갈 수 있는 건 몇 개의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 해야 되니까.
'이제 어쩐다냐.'
만약을 위한 보험으로 그것은 반드시 빠르게 얻어둬야만 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기린의 뿔이 없다면, '그것'을 얻기 위한 장소로 갈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 여기 안을 둘러보는 게 좋지 않아요? 던전이라면 뭔가 보상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별로 급이 높은 던전이 아니야. 기린의 뿔을 대체할 만한 게 나올 리 없잖아."
"그래도, 혹시 라는 게 있으니...."
그런 형편 좋은 물건이 던전 보상으로 나올 리가 있나.
'후우, 그래. 보상이라도 챙겨가자.'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레이드 보스가 보금자리로 삼던 던전이니 뭔가 특별한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역시나 그럼 그렇지."
당연히 특별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얻은 물건은 상당량의 미스릴 광석뿐.
오리하르콘을 제외하면 가장 단단하고 뛰어난 금속이긴 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애매하게 좋아서 짜증만 치밀어 오를 뿐이다.
"오빠."
"왜."
지수도 뭔가를 챙겨왔는지 품에 뭔가를 안고 있었다.
"저 알 같은 거 주웠는데요."
"알?"
"네."
"던전에 무슨 알이 있다고."
"있잖아요, 여기."
지수는 안고 있던 알을 내 앞에 쭉 내밀었다.
정말로 알이었다.
옅은 금빛이 흘러나오는 신비한 알.
가느다란 고동이 알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
뭐야, 이거.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지나치게 놀란 탓에, 전신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이, 이거 어디서 났어?"
"저쪽에 있었어요."
지수가 가리킨 곳은 쓰러진 기린이 시체였다.
"시체 아래에 옅은 맥박이 들렸어요. 그래서 파보니까 이런 게 나오더라고요."
"와."
죽은 기린의 시체 아래를 볼 생각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아래 묻혀 있는 알의 맥박을 느꼈다는 게 더 놀랍다.
뭐,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이것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고맙다."
"네?"
"정말로 고마워."
"아, 아니요, 뭘요. 오빠가 이렇게 저한테 고마워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지수가 배시시 웃었다.
지금만큼은 천사의 미소가 따로 없었다.
왜냐면 지수가 들고 있는 알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바로 기린의 알.
오히려 기린의 뿔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
기린의 알, 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열매다.
이곳을 어미 기린이 오랫동안 품으면 그 안에서 새로운 기린이 태어나게 된다.
수컷이면 기(麒), 암컷이면 린(麟).
그것을 총칭하는 이름인 기린.
"그럼 몬스터의 알이라는 거잖아요."
"기린은 본래 몬스터가 아니야. 성수지."
인간에게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적은 아니었다.
"그럼 이걸 이제 어떡하려고요? 부화시키려면 결국 어미 기린이 필요한 거잖아요. 이거 맥박도 점점 약해지는데요."
"알아."
전생에는 아마 새로운 기린이 탄생하지 못했을 거다.
그 땅속에 묻혀 조용히 생을 마감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게는 DLC 상점이 있었으니까.
'이것도 구매하고. 저것도 구매하고.... 아, 이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조금이라도 필요해 보이는 것이라면 바로 구매버튼을 눌렀다.
포인트는 넘치도록 있었다.
그토록 많이 썼지만, 얻은 것도 많아서 처음이랑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이 정도면 됐나."
"이런 건 또 어디서 났데요."
"그야 샀... 이 아니라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지."
"이런 걸요?"
지수가 들어 올린 건 팻용 기저귀였다.
"원래 퀘스트 보상은 뭐가 나올지 모르는 법이지."
"저는 이런 퀘스트 보상을 받으면 죽고 싶을 텐데, 오빠는 용케 살아 있네요."
지수는 심히 감탄한 것 같았다.
'음, 조금 많이 사긴 한 것 같군.'
기린의 알을 얻었다는 생각에 조금 충동구매를 해버렸다.
[성수를 깨워보자! 최고급 부화기]
[건강한 팻을 위한 최고급 영양 드링크]
[팻을 위한 최고급 기저귀.]
[멋진 성수를 위한 최고급...]
등등, 대략 열 가지가 넘는 물건들이 내 앞에 널려 있었다.
여기가 밀폐된 방이라 다행이지,
옵저버들이 이 물건들을 봤다면 확실히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이걸로 기린의 알을 부활시키는 거예요?"
"당연하지."
커다란 구멍 안에 기린의 알을 넣고 뚜껑을 닿았다.
그러자 부화기에서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촉매제로 플레이어의 피를 넣어주세요. 촉매가 된 피는 부화한 성수나, 영물 등 각종 팻의 재능과 능력치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상치 못한 알림이다.
이거 피를 넣은 사람이 팻의 주인이 되는 건가?
설명서를 급히 읽어보자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능력치나 재능에만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이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나는 별생각 없이 내 피를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내 피를 넣기엔 좀 아깝지 않나?
내 재능은 나쁘지는 않지만 솔직히 크게 대단할 건 없었다.
'차라리 지수의 피가 나을지도 몰라.'
지수의 재능은 진짜다.
능력치가 올라가는 속도고 그렇고, 스킬을 익히는 속도도 평범한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분명 천재인 건 확실했다.
'그렇지. 시작부터 스킬도 천살성을....'
아, 천살성이 걸리네.
기린이 천살성 가지고 태어나는 건 조금.
'그럼 따로 누가 있나.'
부화기에 넣어두긴 했지만 알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대략 이틀 정도? 그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를 찾기는 힘들었다.
'민아? 음, 민아가 괜찮을 것 같네.'
재능도 있고 능력치도 우수했다.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건 양육으로 어떻게든 될 거다. 그렇게 결정하며 쪽지함을 열었다.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 된 기능 중 하나였는데, 다른 플레이어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이다.
"어라."
쪽지함을 열자, 이미 온 쪽지가 하나 있었다.
마침 또 민아에게서 온 쪽지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는걸.'
쪽지를 열자 그곳에는 딱 네 글자만 적혀있었다.
「찾았어요.」
라는 간결한 말.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튀는 기분을 느꼈다.
# 41
041. 정점(頂點) (1)
"이 사람은 찾으면 연락 달라고 했으면서 왜 답변도 없어?"
민아는 쪽지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제 보낸 쪽지에 선명히 찍혀 있는 '읽음'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기껏 신림까지 가서 찾았는데 감사의 인사 한 줄이 없다니.
"언니, 왜 그래요?"
"별거 아냐."
옷깃을 잡아당기며 묻는 린의 말에 민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짜증난 대상은 세한이지 린이 아니었으니까.
"고민이야...."
"아저씨는 또 뭐가요?"
"뭔가 그럴싸한 기술명이 안 떠올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한없이 진지한 루크의 말에 민아는 그저 황당했다.
스킬을 쓸 때 스킬명을 말하는 것도 거부감이 들건만, 따로 기술명까지 정하려 들다니.
"아빠! 그만 좀 해! 대체 그런 걸 왜 하는 거야!"
"왜냐면, 멋있으니까."
"하나도 안 멋있어!"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는 민아의 말에 루크가 조금이지만 풀이 죽었다.
"여신님은 좋아하셨다만...."
"여신?"
이건 또 의외의 말인지라 민아가 황급히 되물었다.
"아, 네. 놀랍게도 아빠는 신의 아바타거든요. 여신님이랑 죽이 잘 맞는 거 같아요."
투덜거리는 린의 말에 민아는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놀란 건 루크가 신의 아바타라서가 아니다.
'여신'이라고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거다.
'신들은 자기 정체를 숨기지 않나?'
보통은 대화도 하지 않으며 만약 메시지를 보내도 자신의 게임 속 닉네임으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이 남신인지 여신인지. 혹은 어떤 계통의 신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민아는 자신 정도면 신과 꽤 친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간간히 옵저버를 통해 교류하기도 했고, 메시지를 통해 꽤 친근감을 표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걸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여신님이 말하셨다. '영웅'이라면 자신만의 심볼을 지녀야 한다고. 고로 멋진 기술명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예를 들어 슈퍼 히어로 영화를 봐라. 다들 멋진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그건 영화나 만화잖아."
루크는 미국에 있을 시절 슈퍼히어로 영화나 만화를 즐겨보고는 했다.
그들의 정의감에 공감했고, 그랬기에 군대에 입대하여 활동한 전적도 있었다.
한국에 오게 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린 테일러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부끄러운 아버지예요."
"재밌으니 괜찮잖아."
확실히 괴짜인 건 맞지만, 차라리 저런 건 긍정적이고 나쁘지 않다.
조금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적당히 흘려 넘기면 그만이다.
"그보다 신림에서 등장할 레이드 보스를 잡으려고?"
"네. 퀘스트는 깨야 되니까요, 솔직히 무섭지만...."
이제 겨우 13살이라고 했던가.
충분히 무서워할 만도 했다. 민아는 지금까지 많은 플레이어들을 보았지만, 가장 어린 건 단연 린이었다.
'나도 꽤 어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중3인 시우도 봤고, 이제는 초등학생인 린을 보니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대체 플레이어들을 정하는 기준이란 무엇일까.
민아는 문득 작은 의문이 들었다.
띠링!
"어, 쪽지 왔다."
비어 있던 쪽지함에 한 개의 쪽지가 날아왔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어디야.」
"뭐야, 이게."
기껏 온 쪽지라는 게 겨우 이거라니.
물론 민아도 간결하게 보내긴 했지만, 그거야 더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빠는 적어도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라도 덧붙여야 되는 거 아냐?'
입이 부루퉁 내밀며 민아는 답장을 보낼지 고민했다.
말하자면 조금 삐진 거다.
'에이, 여기서 안 보내봐야 괜히 속 좁은 사람 같잖아.'
괜히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애처럼 보일 수도 있고.
고민하던 민아는 결국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적어서 보냈다.
보낸 쪽지는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양심이 있으면 적어도 이번에는 제대로 답장을 하겠지."
팔짱을 끼고 쪽지함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기를 10분, 20분이 지났지만 쪽지함은 텅 빈 그대로였다.
"와, 진짜 너무해."
내가 무슨 자기 심부름꾼인가?
"뭐가 너무한데."
"쪽지 답장을 안 보내잖...아?"
언제 왔는지 세한이 서 있었다.
그것도 자기 바로 옆에.
"뭐, 뭐야? 대체 오빠 언제 왔어? 대전에 간다며."
"대전에서 방금 막 올라왔다."
세한의 전신은 땀투성이였다.
일반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치를 지닌 세한이 저렇게 땀을 흘릴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빨리 달려왔다는 말인가.
"안 본 사이 많이 친해졌네요?"
"어, 언니도 왔구나?"
"네. 간만이내요."
온 건 세한만이 아니었다.
지수 또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언니는 좀 어려운데.'
전에는 관심도 없다는 시선이었는데, 지금은 묘하게 자신을 관찰하고 있어 더 오싹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에 봤던 살벌한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점일까.
"근데 둘 다 검은 옷 진짜 좋아한다."
세한은 검은 외투에 검은 바지였고, 지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본다면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할 만한 복장이다.
"검은 옷은 때가 안 타잖아."
"맞아요. 검은 옷은 피가 튀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아서 편해요."
뭔가 비슷하면서 다른 이유였다.
어떠냐면 후자 쪽은 들었을 때 조금 오싹하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지수도 그 말을 하고 조금 아차 싶었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몬스터랑 싸우면 피가 많이 튀니까요."
"하긴 그렇지."
'좀 다른 거 같은데.'
진지한 얼굴로 납득하는 세한에게 민아는 한마디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둘 다 민아 양과 아는 사이입니까?"
세 명의 대화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루크가 끼어들었다.
세한은 갑자기 끼어들은 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아, 예. 루크 씨."
"오, 이름을 알고 계셨던 건가요?"
"네, 쪽지로 들었습니다. 전 김세한이라고 하고, 이쪽은 한지수입니다."
세한은 간단히 자신과 지수를 소개했다.
물론, 쪽지에 이름 따위를 적은 적 없던 민아는 또 이 사람 말을 지어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거 같은데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이름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근데 아무래도 루크는 세한을 만나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혹시 린과 아는 사이인가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한테 뭘 제대로 설명해 준 적이 있어야지.'
자신이 그렇게 못미더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민아."
"왜, 또 뭐 시킬 거라도 있으셔?"
"그게 아니라 고맙다는 의미에서 선물을 좀 주려고."
세한은 인벤토리에서 큼지막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미스릴 광석이다. 먹으면 도움이 좀 될 거다."
"미, 미스릴?"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거람.
민아는 냉큼 주머니를 받아들고 열어보았다.
시린 은빛을 발하는 금속이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딱 판타지에서나 나올 색감을 지닌 금속이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마력으로 현대의 금속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저번에 '불가사리' 스킬을 얻었던 민아로선 이거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고, 고마워."
"됐어. 오히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칭찬을 하는데다 귀한 미스릴까지 건네주니 가슴이 찡해졌다.
"...그보다 어서 알을 깨워야 하지 않아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지수가 들고 있던 부화기를 내밀었다.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알의 수명은 실시간으로 줄어가고 있었다.
"그래야지. 음, 저기 그러니까, 린 테일러 양?"
"네, 네?"
세한의 말에 루크의 뒤에 숨어 지켜보던 린이 크게 움찔했다.
"지금 이 부화기 안에는 성수의 알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우기 위해선 테일러 양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 도움이요?"
린은 세한과 부화기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알은 부화시키는 거랑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이 가득 담겨있는 눈을 보며 세한은 뭐라 설명할지 고민했다.
'다짜고짜 피를 달라고 하면 분명 의심하겠지.'
이곳에는 린만 있는 것도 아니라 루크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지만,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린의 피를 달라고 하면 분명 좋은 반응이 돌아오진 않을 거다.
세한은 적어도 테일러 부녀에게는 나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네, 별건 아니고 여기에 손을 올려주시면 됩니다."
"소, 손을 말인가요?"
"네."
상당히 뜬금없는 말에 린의 눈에 의심이 가득 담겼다.
하지만 세한의 얼굴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얼굴이었다.
...조금 인상이 나쁘긴 하지만.
"벼, 별일은 없는 거죠?"
"물론이죠."
그래도 역시 좀 불안한지 린의 눈이 흘깃 루크를 향했다.
"하하! 나쁜 청년 같지는 않으니 한번 해보렴, 린."
"네에."
린은 천천히 손을 뻗어 부화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것을 인식한 부화기에서 작은 바늘이 튀어나와 린의 손가락을 가볍게 찔렀다.
쿡!
"아, 따가!"
린은 황급히 손을 떼며 울상을 지었다.
"히잉, 피나."
"아마 부화기에 모난 부분에 긁힌 모양이네요."
"뭔가 나와서 찌른 거 같은데...."
"설마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세한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린의 핏방울을 흡수한 부화기는 조금 연한 금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미리 소리를 꺼둔 터라, 부화기에서 떠오르는 알림은 오직 세한만이 볼 수 있었다.
「촉매의 정보를 분석 중입니다.」
「촉매제를 성수 '기린의 열매'에 적용중입니다.」
「성공적으로 촉매제의 힘이 '기린의 열매'에 적용되었습니다.」
「부화에 필요한 영양분을 넣어주세요.」
성공이다.
세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영양제를 넣고 부화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며칠이나 걸리려나.'
다른 것도 아닌 기린이니 아무리 빨라도 열흘 이상은 걸린다.
그러니 세한은 그동안 네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오빠, 결국 이것 때문에 그리 급하게 온 거야?"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민아는 알기 힘들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민아는 슬쩍 린과 루크를 본 뒤에 작은 목소리로 세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수의 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것 때문에 이 두 사람을 찾으라고 한 거였어?"
"아, 그건 아니야."
린의 피가 필요해진 건, 기린의 알을 얻고 난 이후다.
"그럼?"
"그건...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어."
"뭐야, 궁금하게."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야. 그동안 되도록 이 두 사람과 함께 다녀줬으면 해."
진지한 얼굴로 세한이 부탁하자, 민아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어디에 얽매이는 건 질색이지만, 세한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만했다.
왜냐면 부탁하면 부탁한 만큼 보상을 두둑이 챙겨주니까.
"좋아. 알겠어. 대신 알지?"
"물론이지."
민아의 성격은 아주 잘 알았다.
적당히 보상만 잘 챙겨주면 이보다 쓸 만한 녀석도 없었다.
'그럼 이제 하나 남았군.'
세한은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이후, 보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시스템'이 관여할 시 자신만이 아닌 더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저번에는 센티넬이 하나 추가되고, 카라스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조금 더 강해진 정도였지만 다음번에는 더 심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예상보다 빨리 황도 12궁이 내려온다거나.
'만약을 대비해야지.'
세한은 울상인 얼굴로 손에 뭍은 피를 닦고 있는 린을 보았다.
저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얼굴에 비해선 많이 어렸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점들이 많이 보였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알아볼수록 가슴이 쓰렸다.
전생에 나는 왜 이 아이의 힘을 좀 더 빠르게 알아보지 못했을까.
'인류의 정점.'
신들조차도 경악한 최고, 최강의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
그것이 바로 린 테일러였다.
# 42
042. 정점(頂點) (2)
본래 내가 테일러 부녀를 만난 것도 이 시기였다.
신림에서 나올 레이드 보스를 잡기위해 홀로 돌아다니던 내게 루크가 말을 걸어줬다.
이 게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맺은 인연.
나는 그런 루크에게 많은 걸 배웠다.
전직 군인이었던 루크는 많은 전투기술과 생존기술을 알고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살아남는데 필요한 지식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신을 증오해요.」
나를 노려보던 새파란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배드 엔딩이 아닌 다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지.'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할 거다.
"와, 빛난다."
은은한 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한 부화기의 모습에 린이 눈을 반짝였다.
이런 걸보면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다.
"아저씨, 이제 알이 부화하는 거예요?"
...아저씨라니.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나?"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 얘랑 10살 차이 아냐? 그런데 오빠는 무슨 오빠. 그냥 아저씨지. 아,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나도 아저씨라고 부를까?"
"하지 마."
"왜~! 나랑도 네 살이나 차이 나잖아."
민아는 문득 등에서 시선이 느꼈다.
슬쩍 뒤를 보면 지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딱히 특별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언니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뭔가 무섭단 말이야.'
민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흠, 물론 장난이야. 아무튼 오늘 여기에 온 건 그 알 때문인 거 같은데 이제 바로 대전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
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해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 돌아가 봤자 레이드 보스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아무리 궁기가 다쳤다고 해도, 레이드 보스다.
특별한 준비 없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아직 시간도 안 됐는데."
"아니요. 저희는 이미 레이드 보스를 만나고 왔어요."
"뭐어?"
민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지수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대체 어떻게 만난 거야?"
"그건...."
나는 간단히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우연히 레이드 보스를 마주치게 되었고, 녀석이 튀어나온 장소에 들어가니 기린의 시체가 있었다. 이 알은 거기서 구한 물건이다, 라는 간결한 설명이었다.
기린의 뿔을 구하기 위해서 대전에 갔다거나 하는 내용은 어차피 설명해 봤자 긁어 부스럼만 만들뿐이었으니 생략했다.
"레이드 보스는 그렇게 크구나. 그냥 센티넬 정도로 생각했는데."
"센티넬이 쎄기는 더 쎄다. 다만 레이드 보스는 방어력과 체력이 강해서 쉽게 안 죽는다는 정도?"
전에 말했지만 센티넬은 '얘한테는 깝치지 말고 피해가세요'라면 레이드 보스는 '다 함께 힘을 합치면 잡을 수는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행동범위가 센티넬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피해는 센티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야."
"이해했어. 그럼 여기에도 어딘가에 레이드 보스가 숨어 있다는 거네?"
"그야 그렇겠지. 다만 굳이 먼저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왜? 서둘러 잡는 게 좋잖아?"
"플레이어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됐을 테니까."
아직 세 번째 메인 퀘스트도 클리어하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전생을 생각하면 시간을 기다려 녀석이 나왔을 때 잡는 게 최선이었다.
'반면 대전에 있는 레이드 보스는 변수가 있어.'
전생에도 궁기는 기린의 뿔에 찔렸던 것일까?
내가 대전으로 내려가는 시점에서 뭔가 변화가 있던 건 아닌가?
애초에 전생에 나는 대전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기습을 가했지. 지금 생각하면 흔적도 보란 듯이 있었다. 깃털과 발톱자국.
다른 곳에는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 그곳에만 나란히 있었다.
'생각해 보면 기린과 교전하게 된 시기도 지나치게 빨라.'
당시엔 당황하여 깊이 생각할 수 없었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드 보스에 관한 공지가 뜬지 3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궁기가 기린의 영역을 침범한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기린이 만만한 상대도 아니고 타락한 성수인데.
깊은 상처를 입은 것부터가 궁기가 무리한 싸움을 벌였다는 증거.
'역시 여러 가지 불확실한 점이 많아.'
그러니 무작정 내려가기보단 최대한 준비를 갖추고 가는 게 좋았다.
이번에도 시스템이 관여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또 다른 존재를 가정했다.
'GM 아카터스.'
대한민국 서버를 관리하는 GM이자, 성가신 일을 가장 싫어하는 게으르고 잔인한 괴물이다.
***
"역시 그놈 보통 놈이 아니야."
GM 아카터스는 서울로 가버린 두 명의 플레이어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레이드 보스가 냅다 기습을 가했는데 그걸 무사히 피할 줄이야.
그대로 전투를 유도해 볼까 싶었지만, 어쩐지 녀석의 여유로운 태도가 걸렸다.
궁기도 기린을 잡느라 만전의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보아하니 뭔가를 기린의 던전에서 얻어간 것 같은데.'
옵저버를 통해 본 영상을 떠올리면 분명 알이었다.
'기린의 열매인가.'
그 노쇠한 기린이 죽기 전 자신의 아이를 남겨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카터스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기린의 열매를 부화시킬 수는 없겠지."
성수의 열매를 무슨 수로 부화시킨다는 말인가?
열매가 부활하려면 대량의 에너지와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니 사실상 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며, 저 열매를 플레이어가 먹는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효능은 없었다.
그냥 빛 좋은 개살구지.
'녀석이 뭔가를 하려는 거 같긴 한데.'
도중부터 옵저버를 피해 다니며 움직인 탓에 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딱!
짜증이 치민 아카터스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궁기의 모습이 보였다.
"아, 이놈 왜 이렇게 허약해?"
옆구리에 뿔 좀 찔렸다고 골골 거리다니.
애초에 기린을 잡도록 시켰던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카터스는 뻔뻔했다.
"어차피 뿔을 흡수하려면 몸 안에 집어넣었어야 했으니 됐지 뭐."
몸에 박혀 있는 기린의 뿔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조금씩이지만 궁기의 몸에 흡수되고 있었다.
'아바타도 아닌 놈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야?'
대체 카라스를 어떻게 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오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슬리는 것도 사실.
그러니 아카터스는 이번 메인 퀘스트에 살짝 손을 써뒀다.
세한이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을 때부터 레이드 보스의 강화를 꾀한 것이다.
'마음 같아선 편하게 강화시키고 싶지만.'
센티넬이나 레이드 보스급이 되면 GM이라도 섣불리 강화를 시킬 수가 없다.
시스템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카터스는 궁기의 정신에 조금 손을 뎄다.
좀 더 포악하고 강함에 집착하도록.
원래부터 궁기는 흉포한 생물이기에 그 간단한 조작만으로 뜻대로 움직였다.
기린의 영토와 힘을 차지하기 위해 녀석의 보금자리로 쳐들어간 거다.
그동안 아카터스는 궁기의 깃털과 발톱자국을 적절히 배치한 후, 세한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첫 습격은 아쉽게도 실패했다.
기습도 실패한데다 궁기의 상처가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좀 더 도와줘야겠군."
다친 상처를 치유하고 기린의 힘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도록.
이 정도면 시스템의 눈을 피하며 레이드 보스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잘하면 터무니없는 괴물이 될지도 모르겠어.'
대전 지역의 플레이어들이 막지 못하고 전멸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자신의 아바타가 죽은 신들이 노발대발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궁기를 강화시켰다는 건 모를 테니까.
"그럼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어."
화면에 비친 궁기의 털색은 점차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타락한 기린의 털색과 같았다.
***
2주 후, 대전.
대전 시청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득실득실 모여 있었다.
레이드 보스 등장시간에 대비해서 플레이어들이 몰려든 것이다.
이미 근처는 인원이 통제되고 있었다.
"근데 군인과 경찰은 왜 온 거예요?"
이전에 왔을 때보다 확연히 많은 숫자의 군인과 경찰이 보였다.
심지어 탱크까지 보였다. 저건 어딜 봐도 레이드 보스를 상대로 싸우려는 태도다.
"저번에는 갑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지."
"몬스터는 총화기는 안 통하지 않아요?"
"아주 안 통하는 건 아니야. 지구에서 만든 무기들은 마력이 담겨져 있지 않아 피해가 미비할 뿐 충격은 어느 정도 들어가."
그렇다 해도 레이드 보스 정도가 되면 대부분의 병기는 무의미하다.
핵미사일과 같은 핵병기라면 타격을 주긴 하겠지만, 그런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죽이지도 못할뿐더러, 도시만 파괴할 뿐이니까.
"아마 거리에서 돌아다니던 몬스터들을 상대로 시험해 봤던 거겠지."
이전에 왔을 때 거리를 통제한 건 그런 연유였을 거다.
그 근방은 몬스터가 나타나는 장소였으니, 그곳에서 무기를 시험해 보고 이 정도면 먹힌다 싶었을 거다.
"그냥 플레이어들에게 맡겨두면 되지 않아요?"
"그럴수록 플레이어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니까."
권력의 근간이 되는 건 결국 무력이다.
슬슬 초인의 영역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을 거다.
"오픈 월드가 되며 간신히 되찾은 권력을 다시 잃기 싫은 거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군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비장했다.
플레이어들을 통해 오늘 레이드 보스가 등장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하아."
지수는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잘못돼서 피해를 보는 건 명령한 사람이 아닌, 이곳에 있는 군인들이었으니까.
"우선 플레이어들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자."
"네."
괜히 군인들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저번에 마주쳤던 사람이라도 있으면 상당히 난감해질 게 분명했다.
"레이드 보스 같이 잡으실 분 구합니다! 여기 힐러 있어요, 힐러!"
"상처를 치유하는 스킬을 지니신 분 급구요. 오시면 포인트도 드립니다!"
어느 게임이나 그렇듯 힐러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특히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스킬은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플레이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생각해 보니 성녀와 미리 인맥을 터두는 것도 좋겠는데?'
전생에 '성녀'라고 불리던 플레이어는 혼자서 수 백, 수 천 명의 사람을 한 번에 치유할 수 있었다. 그 압도적인 힘에 신의 기적이라 믿으며 종교까지 생겼을 정도다.
'아니, 아니다. 성녀는 조금....'
성녀라는 호칭만 들으면 굉장히 자애롭고 희생적인 이미지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을 돕는 걸 좋아하고 천상 간호인인 건 맞지만 조금 문제가 있었다.
아니, 상당한 문제가.
"하도 주변에서 떠받든 탓이지."
"네?"
"아무 것도 아냐."
어차피 지금쯤이면 아직 제주도에 갇혀 있을 시기인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도 없네.
"저기 형씨.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파티하지 않을래?"
길을 걷다보면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죄송합니다. 따로 파티할 생각은 없어서."
"하이고, 여자 앞에서 멋진 모습보이고 싶나본데. 그러다 죽어!"
파티라고 하지만 내가 지수와 맺고 있는 '파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이 말하는 파티란, 말 그대로 함께 사냥하는 그룹일 뿐이다.
그냥 게임 용어가 현실에 정착한 거라고 보면 된다.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하여간 저러다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몇몇 남자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냥 내가 아니라 지수에게 파티하자고 해라.'
대놓고 흑심이 담긴 눈으로 말하는데 누가 파티를 하고 싶겠냐?
나는 보지도 않고 지수에게 눈이 아주 박혀 있더만.
"정말 저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네요."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지수의 얼굴이 더더욱 싸늘해졌다.
언뜻 보면 눈동자에 붉은 기운까지 비치고 있었다.
'화났구나.'
가만히 두면 한바탕 싸움이라도 할 기세였다.
하긴 계속 그런 시선을 받았으니 기분이 나쁘겠지.
"어차피 레이드 보스가 나오면 저런 놈들이 먼저...."
적당히 지수를 달래주기 위해 입을 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굳은 얼굴선에, 믿음직함과 간사함이 동시에 나타나는 신비한 얼굴.
목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링이 있었다.
그 링은 바로 내가 선물해 준 물건이었다.
"어? 저거 박동권 아냐?"
현균과 함께 있어야 할 녀석이 뜬금없이 이곳에 있었다.
# 43
043. 궁기(窮奇) 토벌(1)
내가 저 얼굴을 몰라볼 리가 없지.
저 뻔뻔한 얼굴은 분명 박동권이었다. 녀석도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헉?! 어, 어째서 여기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 현균 형은 어쩌고 여기 있어?"
복장도 전에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장비에 무기를 보면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도 제법 활약을 했던 모양이다.
그럼 아마 민아처럼 새로운 스킬을 신으로부터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전승 스킬은... 아마 멀었겠지.'
민아가 받은 스킬도 충분히 사기적이었지만 전승 스킬급은 아니었다.
전생과 달리 큰 성과를 내지 못한 박동권이 벌써 전승 스킬을 얻었을 리가 없었다.
'현재 그 사람을 제외하면 전승 스킬에 가장 가까운 건 민아겠지.'
전승 스킬은 신이나 별자리가 가진 스킬 중에서도 특별한 기술이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건 카라스가 지니고 있던 전승 스킬에 파생된 것이며, 민아나 동권이 신에게 받는 스킬도 그런 전승 스킬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일반적으로는 절대 익힐 수 없고 오로지 신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스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기는 하지만, 전승 스킬은 그보다 더 파격적인 효과를 발휘하곤 했다.
'그만큼 신들도 쉽게 전승 스킬을 빌려주지 않으니.'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스킬이다.
설령 자신의 아바타라고 해도 웬만해서는 빌려주지 않는 게 보통이다.
단 한 명의 여신을 제외한다면.
"아, 회장... 아니. 현균 형은 청주에 갔습니다. 가족들이 걱정된다고 하셔서요."
목걸이 때문인지 동권의 말투는 지극히 공손했다.
그나저나 현균의 본가가 청주였구나.
대전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곳이다.
"그럼 너는 왜 여깄어?"
"저는, 그 뭐시냐. 여기로 가라는 연락을 받아서...."
누구에게 연락을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알 것 같았다.
현균이 아니라면 녀석의 신이겠지.
"잠깐."
"네?"
"아니, 뭐 좀 확인하게."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권을 무시하며, 나는 커뮤니티창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팅방에는 대전 레이드에 대한 정보가 들끓고 있었다.
대충 채팅방의 반응은 왜 내가 대전에 갔는지 궁금해하거나, 내 정체에 대한 추측이 오가고 있었다. 내 행동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보니 신들의 입장에선 상당한 여흥거리인 모양이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전생보다 많겠는걸.'
내가 대전에 가는 걸 보고 자신의 아바타를 보낸 신이 한둘이 아니었다.
서울 지역 채팅방은 물론, 다른 지역 채팅방에 가도 내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었다.
그간 커뮤니티에 신경을 쓰지 않아 몰랐지만, 설마 이 정도로 화제가 되어 있었을 줄이야.
어릿광대: 아, 아쉽다. 내 아바타도 내려가길 바랐는데, 안 따라가서~!
어릿광대의 채팅도 올라왔다.
아쉽다는 말과 달리, 채팅은 제법 여유로웠다.
어릿광대: 대신 그 아이가 신기한 걸 주고 갔지 뭐야.
익명 22: 신기한 거? 그게 뭔데?
어릿광대: 물론 비밀. 나중에 보면 깜짝 놀랄걸?
불금: 아나, 그럼 그냥 말을 할지 말던가, 궁금하게 만드네.
어릿광대가 말하는 신기한 것이란 기린의 열매가 들어있는 부화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다른 신이나 GM아카터스의 옵저버를 피하기 위해 민아의 능력으로 숨겨둔 상태였다.
그러니 신중에서 부화기의 위치를 아는 건 어릿광대와, 루크의 신인 '그녀'뿐이었다.
'둘 다 입이 무거우니 괜찮겠지.'
물론 입이 무거운 이유는 다르다.
어릿광대는 꽁꽁 숨겨두고 자신만 알고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며, '그녀'의 경우에는 성격 자체가 입이 무거웠다. 아마 신들 중에서는 손에 꼽힐 만큼 진지한 성격이 아닐까.
"야. 박동권."
"예?"
"너 지금 스킬 뭐뭐 배웠어. 혹시 '선동'도 배웠냐?"
동권은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배웠습니다."
"배웠잖아, 새끼야. 거짓말하면 알지?"
"배, 배웠습니다."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선동'은 박동권의 대표적인 스킬 중 하나다.
스킬 이름 그대로 주변을 손쉽게 선동할 수 있는 능력.
대단치 않으면서도 대단한 스킬이다.
"그러면 너...."
──잠깐.
나는 말하던 걸 멈추고, 까마귀의 눈에 집중했다.
건물 아래로 내려다본 시야에서 이질적인 움직임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아스팔트가 움직이고 있어?'
마치 은은한 물결처럼, 아스팔트가 출렁이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잔잔한 파동 같았지만 그건 전조에 불과했다.
"그 스킬 써 당장."
나는 급히 숨을 들이키며 박동권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서, 선동 말입니까? 갑자기 왜?"
당연히 동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건 옆에 있던 지수도 마찬가지다.
"안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어."
까마귀의 시야에 잡힌 물결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원을 그리듯, 시청을 지나쳐 이쪽으로 향해오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을 습격할 셈인가?'
아니다.
플레이어들과 싸운다면 저렇게 빙 돌아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을 텐데요?"
나는 녀석의 말에 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00 : 12 : 46]
12분 46초. 녀석의 말처럼 확실히 레이드 보스가 등장하기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했다.
"배가 고픈 거야."
"배가 고프다니요?"
"싸우기 전에 식사를 할 생각인 거지."
마침 이곳에는 만찬(晩餐)이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니까.
"따라와."
"어, 어딜 갈 생각입니까?"
"어려운 거 안 시킬 테니 빨리 따라오기나 해."
녀석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 앞으로 대략 3분.
까마귀의 시야를 통해 계속 관측하며 달렸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군인들을 향해서.
"모두 피하세요! 레이드 보스가 옵니다!"
큰 소리로 외쳤지만 당연히 반응하는 사람이 적었다.
도리어 내 말을 들은 다른 플레이어 몇몇은 비웃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보스가 나타나려면 아직 10분은 넘게 남았다고. 혹시 시계도 볼 줄 모르는 거 아냐?"
"잠깐 서서 졸았나 보네. 낄낄!"
"그리고 보스가 나타나도 우리가 있는데 피하긴 뭘 피해. 거기서 박수나 치고 있으라고 하쇼!"
그나마 플레이어들은 이정도 반응이라도 보였지만, 군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어요! 어서 도망치세요!"
내가 계속해서 소리치자, 몇몇 군인들이 나를 보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전에 나와 마주쳤던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게 뭔가 추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반응조차 없었다.
'역시 그냥 말해선 안 되겠어.'
나는 옆에 있는 동권에게 눈빛을 보냈다.
방금 내가 했던 말대로 사람을 선동하라는 뜻이었다.
동권은 심히 난감하다는 듯,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아니, 그게 쓴다고 쉽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느 정도는 사람의 심리를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지, 다짜고짜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으면 선동이 아니라 최면이죠."
확실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최대한 소리를 쳐서 반응을 이끌어내려 했던 거고.
무의미한 행동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면....'
결국 이렇게 되면 타이밍이 늦을 수밖에 없다.
레이드 보스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육안으로도 바닥이 일렁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한지수 무기 꺼내."
"네."
지수가 인벤토리에서 둔기를 꺼냈다.
전에 내가 사줬던 것과는 다른 거지만, 여전히 상점표 장비다.
'나중에 얘한테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해 줘야겠군.'
언제까지 안전지대에서 판매하는 상점표 무기를 쓸 수는 없으니까.
소중한 파티원인데 최근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았다.
"내가 신호를 주면, 저기 소화전 보이지? 저 앞에 있는 도로를 온 힘을 다해 찍어. 나도 같이 공격할 테니까."
"알겠어요."
지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동권, 너는 레이드 보스가 튀어나와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면 선동 스킬을 사용해서 최대한 후퇴시켜. 그건 가능하겠지?"
"보스가 나타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사람들이 쉽게 패닉에 빠질 거 같지는 않은데요?"
주변에는 플레이어의 숫자도 많았고, 군대의 모습도 굉장히 든든해 보였다.
겉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실제로 주변의 분위기는 이미 이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첫 번째 메인 퀘스트와는 달리 두 번째, 세 번째 퀘스트는 비교적 할 만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젠 오픈월드가 되어 마비됐던 사회도 점차 복구되기 시작했으니 마치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마침 또 보스전이지 않은가.
나는 인벤토리에서 수리한 파일벙커를 착용했다.
선타를 날리는데 이것보다 좋은 무기는 없었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한 겁니까?"
"만들었지."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파일벙커의 쇠기둥에 코팅하며 가볍게 답했다.
나를 보며 비웃던 사람들도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파일벙커가 등장하자 웅성거림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저런 무기도 팔았나?"
"저런 커다란 무기를 팔에 달고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태연히 서있는 거보면 그다지 안 무거운 건지도...."
시선이 쏠리고 있었지만, 내 감각은 까마귀와 공유하고 있는 눈동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착까지 5초.'
드드드드.
땅에 미세한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감각이 예민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이변을 느꼈으리라.
"뭐야, 땅이 좀 흔들리는데?"
"지진인가?"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보스라는 걸 짐작하지 못했다.
타이머가 오히려 플레이어들의 눈을 가린 것이다.
나는 속으로 셋을 센 다음 소리쳤다.
"지금!"
콰아앙!!
녀석의 앞발이 지면에서 튀어나오는 동시에 파일벙커를 사출했다.
파일벙커는 궁기의 팔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크게 밀어냈고, 그 위로 지수의 둔기가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나와 불과 힘 능력치가 10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지수다.
그 위력도 단연 절륜했다.
쩌저적,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군인들을 습격하려던 궁기의 낮은 신음소리가 지하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게 날개를 단 녀석이 왜 지하에서 나오고 그러냐."
메인 퀘스트 시간이 되지 않은 탓이겠지만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아직 시간 안 됐는데?"
"아니, 그럼 저건 뭔데? 어디로 봐도 평범한 몬스터는 아니잖아!"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은 당황스런 상황 속에서도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었다.
어쨌든 세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 깬 눈칫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는 게 처음인 군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전군 사격! 공격하라!"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전에 대고 소리쳤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나는 지수에게 눈짓하여 빠르게 몸을 뺐다.
우선 기습적으로 가한 궁기의 기습을 막아냈으니, 군인들도 상황파악을 할 필요가 있었다.
탱크의 포탄과, 군인들이 든 k2 돌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구멍 밖으로 튀어나와있는 궁기의 앞발을 향해서.
투툭, 투툭.
"주, 죽었나?"
대략 1분간 이어진 포격에 사방이 뿌연 연기로 먼지로 가득 찼다.
부서진 잔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서, 설마."
군인들은 정면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쿵.
쿵.
쿵.
몸이 위로 튕겨질 것 같은 충격이 연신 바닥에서 울렸다.
그 충격만으로 녀석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군인들은 적의 건재함을 알았음에도 재차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아아...."
검은 그림자가 지상에 드리웠다.
족히 1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육신이 군인의 망막에 새겨졌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새까만 털에, 새하얀 날개를 지닌 거대한 괴수.
「크아아아아!!」
사흉(四凶). 궁기(窮奇)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 44
044. 궁기(窮奇) 토벌(2)
마치 파충류의 눈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과, 검치호마냥 튀어나온 길쭉한 이빨이 섬뜩하게 빛났다.
분명 2주 전에 보았을 때는 평범했던 털가죽도 지금은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가 몸을 뒤덮고 있었다.
녀석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문제는 그 변화가 실시간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고.
"설마, 성체로 진화하려는 건가?"
그럼 큰일이다. 성체로 진화하게 되면 궁기는 사실상 센티넬급이라고 봐도 좋다.
아니, 오히려 센티넬보다 상대하기 어렵다.
이동범위가 넓고 거대하기에 그 피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거기다 단순히 성체라기엔 녀석의 모습도 이상했다.
내가 전생에 봤던 궁기는 털이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긴 했지만 검은빛을 내진 않았다.
저건 분명 기린의 영향인 게 분명했다.
'뿔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여간다는 건... 역시 GM의 관여가 있었다는 건가.'
그렇게밖에 짐작할 수 없다.
아니라면 궁기가 이런 온전한 모습으로 힘을 흡수했을 리 없다.
쿵.
녀석이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아스팔트 도로가 뭉개졌다.
가뜩이나 커다란 덩치가, 등에 달린 날개 때문인지 더욱 거대해 보였다.
날개의 색도 전과 달리 잿빛이다.
"으, 으으으."
패닉에 빠진 군인들이 얼어붙었다.
탱크와 소총으로 그토록 공격했건만 적은 조금의 상처도 없이 건재했다.
아마 깨달은 것이리라. 자신들이 아무리 공격한다고 한들, 저 괴물에겐 어떠한 상처도 입힐 수 없다는 걸.
"박동권!"
나는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박동권에게 눈짓했다.
녀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얼굴을 와락 찡그리며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해야 됩니까?'
동권의 시선에는 그런 애처로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람들을 통제할 만한 스킬을 가진 건 박동권뿐이었다.
"에라이, 십헐."
동권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은빛 링을 손가락으로 긁다가 욕설을 내뱉으며 군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몬스터는 저들에게 맡기고 어서 피하십시오!"
"하, 하지만."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저놈은 현대 무기가 안 통하는 괴물이라고요!"
군인이 피해야 자기도 같이 피할 수 있기에 동권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였다.
그동안 나는 궁기의 몸을 최대한 플레이어들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플레이어들도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발동했을 거다.
"죽여!"
"덩치도 커서 때릴 곳도 많아 보이네!"
아니나 다를까 플레이어들은 호기롭게 외치며 궁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덩치가 크긴 했지만 여러 몬스터들을 마주쳐 온 플레이어들이라 그런지 회복도 군인들보다 빨랐다.
「크아아앙!」
날파리를 잡듯 궁기가 앞발을 휘둘렀다.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는 빠른 속도다.
"헉!"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을 몰랐는지 몇몇의 플레이어가 범위에서 채 피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궁기의 발톱이 플레이어들의 몸이 닿기 직전, 내가 먼저 플레이어들을 창대로 후려쳤다.
"으헉!"
콰콰쾅!
창대에 맞은 몸이 붕 날아간 플레이어들이 가까스로 궁기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창대에 얻어맞은 부위를 매만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 고맙습니다."
"신중하게 싸우세요. 저놈은 덩치만 큰 게 아닙니다."
"크윽, 과연. 너무 방심했던 것 같군요."
궁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플레이어들도 한층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 녀석을 상대론 어떤 무기가 유효하려나.'
우선 꺼내든 건 창이다.
근접 병기 중에선 우월한 리치를 지닌 데다, 가시 같은 털을 피해 찌르기 편하기 때문이다.
파일벙커는 인벤토리에 넣었다. 위력은 절륜하지만 공격 직선적이고 준비시간이 오래 걸리다보니 움직임이 빠른 궁기에겐 사실상 무용지물이니까.
"멍하니 보고 있지 마세요! 어서 빼라니까요!"
군인들의 대피도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완강히 거부하는 것 같았지만, 동권의 스킬 '선동'에 맥없이 설득되어 군대를 빠르게 물리고 있었다.
"젠장, 가시 같은 털 때문에 접근하기 힘들어!"
"원거리 공격도 마찬가지야. 가죽이 너무 질겨서 화살이 들어가질 않아!"
마력을 담은 화살은 단순한 총이나 대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력을 지닌다.
그럼에도 궁기의 가죽을 뚫는 건 역부족이었다.
"대체 이걸 잡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궁기의 움직임은 재빨랐고, 실수로 얻어맞기라도 했다간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
벌써 몇이나 되는 플레이어가 궁기의 발에 얻어맞고 쓰러져 있었다.
아직 사망자는 없었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시간이 없어.'
언제 성체로 진화할지 몰랐다.
아니, 진화하지 않더라도 플레이어들이 녀석을 쓰러트리긴 힘들어 보였다.
전생과 달리 궁기가 강해져 버린 탓이다.
「그르르릉.」
궁기의 날개가 넓게 펼치며 날아올랐다.
거센 돌풍이 지상에서 휘몰아쳤다.
"저 새끼, 하늘도 날 수 있는 거냐?!"
"젠장, 날아다니면 저걸 어떻게 잡으라고."
녀석은 날아오른 그대로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먹이를 찾는 매와 같은 모습이다.
"이, 이거 피해야 되는 거 아냐? 저게 하늘에서 떨어지며 팔을 휘둘렀다간 절반은 뒤질 거 같은데?"
그 말대로다. 도로는 꽤 넓었지만, 그만큼 궁기의 덩치가 컸다. 녀석이 지상으로 활강하며 저 커다란 앞발을 휘두른다면 끔찍한 참상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인벤토리를 열고 커다란 창을 여러 개 꺼냈다.
그건 카라스와 싸울 때 썼던 투창이었는데, 전과 달리 긴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고 크기도 배는 컸다.
거기에 창날의 모양도 특이했다.
'좋아.'
녀석이 지상을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녀석을 떨어트린다.
'카라스에 비하면, 이정도는 그냥 멈춰 있는 과녁일 뿐.'
꾹.
팔에 힘을 넣고, 녀석의 움직임을 쫒았다.
단순히 던진다면 빗나갈지도 몰랐으나 내게는 암야의 장갑에 붙은 '필중' 스킬이 존재했다.
팔을 뒤로 당기고, 전신의 탄력을 이용해 전력을 다해 던졌다.
피슝!
바람을 가르며 투창이 날아가 궁기의 날개를 꿰뚫었다.
「크앙?!」
원채 큰 날개라 창이 하나 관통한 정도로는 크게 영향도 없었다.
그저 연결된 사슬이 거슬렸는지, 허공에서 몸을 크게 비틀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꺼내둔 다른 투창을 연속해서 던졌다.
한 개, 두 개, 세 개.
녀석의 날개를 꿰뚫고 투창이 계속해서 박혔다.
「크아아아!」
궁기가 날아오는 투창을 피하기 위해 까다롭게 비행했지만, 필중 스킬을 가진 내게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내 모습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지금 여기서 저놈을 창을 던져 맞추고 있는 건가?"
"대체 능력치가 어떻게 되기에... 이게 가능해?"
나는 마지막 투창을 던지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 사슬을 당기세요! 녀석을 떨어트려야 합니다!"
내 외침에 역시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지수였다.
궁기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사슬을 공중에서 잡아챈 뒤, 땅으로 내려서며 힘차게 잡아당겼다. 현재 존재하는 플레이어들 중, 나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근력수치에, 혈천수라공까지 발휘되자, 궁기의 몸이 크게 꺾이는 게 눈에 보였다.
"이런 어린 아가씨에게 질 수 없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당겨! 저놈을 어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역시 겉모습만 보면 연약해 보이는 지수가 먼저 나선 덕인지,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런 지수를 따라 사슬을 당겼다.
궁기가 기존보다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숫자도 전생보다 많았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숫자의 플레이어가 일제히 사슬을 잡아당기자, 궁기의 몸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아아앙!
「크어어엉!」
떨어진 충격에 녀석은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금이야! 당장 죽여!"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플레이어들이 아니었다.
지면에 처박힌 몸을 바르작거리는 놈을 향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그르르르르」
그래도 녀석은 죽지 않았다.
튼튼한 거죽도 계속되는 공격에 점차 찢겨지고 있었지만 치명타는 되지 못했다.
「크아아아아!」
파직, 파지직!
녀석의 눈이 시커멓게 물들며 새까만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녀석이 성체가 되어버려.'
나는 재빨리 녀석의 몸을 타고 달렸다.
이미 내 오른손에는 파일 벙커가 장착되어 있었다.
속도가 빨라 명중시키기 힘들었지만, 지금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죽어라!"
콰아앙!
파일벙커가 사출되며 녀석의 두개골을 함몰시켰다.
녀석의 뼈를 부수고, 내부를 휘젓는 감각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갸아아아아!」
그럼에도 녀석은 죽지 않았다.
몸을 크게 널어내며,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을 일제히 날려 버렸다.
나 역시, 간신히 몸을 가누며 지상으로 착지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생각보다 생명력이 훨씬 질기잖아!'
아마 커다란 덩치도 하나의 이유이긴 할 거다.
두개골을 부수고 파일벙커가 파고들었음에도 녀석을 죽일 정도는 되지 못했다.
느릿하지만, 재생되고 있는 상처가 보였다.
전신에 찢긴 상처도, 부서진 머리도 뿌연 연기를 내며 회복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넣고, 재차 뛰어오르려고 했다.
목표는 당연히 내가 방금 꿰뚫은 머리의 상처다.
하지만 내가 뛰어오르는 것보다 빠르게,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제가 할게요. 이번 일은 제가 오빠보다 맞을 거 같거든요."
지수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지수의 몸은 녀석의 머리까지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평상시의 지수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다.
"...저 녀석."
나는 볼 수 있었다. 녀석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단도를.
누가 지수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저건 스스로 자신에게 검을 꽂은 것이다.
천살성은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강해지며, 치명상이라면 그 증폭값이 더 크다.
그러니 지수는 자신의 심장에 단도를 꽂은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즉사였겠지만, 천살성과, 재생 스킬로 인해 지수는 죽지 않았다.
도리어 심장에서 솟구치는 피에 부스트가 걸렸다.
뿌드득.
「갸악! 갸아아아!」
지수가 손을 들어 녀석의 부서진 두개골에 손을 댔다.
다른 손에 든 둔기로 상처를 후볐지만, 그래도 소용없었다.
녀석은 오히려 더욱 크게 날뛰며 주변 건물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최대한 녀석에게서 떨어져!"
혼비백산한 플레이어들은 궁기의 곁에서 멀어졌다.
궁기의 몸은 점점 더 검게 변하고, 더욱 커지고 있었다.
날뛰면 날뛸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걸 느낀 플레이어들의 눈에서 절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힘들었는데 더 강해진다면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지수는?'
머리 위에 붙어있어야 할 지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거칠게 날뛰는 탓에 떨어진 걸까?
'아니, 아니야.'
궁기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쿵, 쿠쿵.
「가악....」
거칠게 날뛰던 녀석의 몸이 돌연 멈췄다.
그 거대한 육신이 천천히 지상으로 쓰러졌다.
쓰러져 몇 번 움찔 거리던 궁기는 이내 숨소리하나 내지 않고 잠잠해졌다.
"뭐야, 왜, 왜 저래?"
"지쳤나?"
방금 전까지 포악하게 날뛰던 녀석이라 어떤 플레이어도 궁기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몇몇의 플레이어가 궁기에게 다가갔다.
녀석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악귀와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와, 와우, 겁나게 살벌하게 생겼구먼."
한 플레이어가 그런 궁기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녀석의 코에 손을 뻗었다.
녀석이 숨을 쉬는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투콱!
"엄마야 시발!"
그때, 궁기의 눈알이 튕겨져 나왔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눈알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 이게 뭐시여."
"왜 눈이 갑자기...."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방금 눈알이 튀어나온 궁기의 눈으로 향했다.
"헉."
시뻘건 시신경이 늘어진 곳에서, 전신에 피 칠을 한 여성이 기어 나왔다.
바로 지수다.
갑자기 궁기의 눈에서 튀어나온 지수의 모습에 플레이어들은 뭐라 말을 못하고 얼어붙었다.
"후우."
지수는 조금 피곤하다는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더니, 나를 보며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빠, 여기예요."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마 지수는 부서진 궁기의 두개골 안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그 안에서 날뛰었으리라.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죽었을 궁기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역시, 이런 몬스터라도 뇌를 찢어버리니까 죽네요."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지 마. 무섭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