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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012. 파티원을 육성하는 법(3)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로메월드 타워는 이쪽 방향이 아니잖아요."

준비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나온 우리는, 로메 타워가 있는 방향이 아닌 정 반대쪽으로 향했다.

당연히 지수는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에 꽤나 의아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봐야 일주일 정도예요. 저희가 가기 전에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어쩌려고요?"

"아니, 절대로 그럴 리는 없어."

"...왜요?"

왜냐고 물으면 마땅히 답해줄 말이 없다. 그냥 알고 있는 거니까.

"다 아는 법이 있지."

"그러니까 어떻게요."

"비밀이야."

"...."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눈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기로 했다.

"흠, 흠흠. 아무튼 이것도 다 두 번째 퀘스트와 관련된 일이야."

"네."

계속 물어도 어차피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인식했는지, 지수는 적당히 긍정했다.

'그나저나.'

나는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옵저버가 거의 보이지 않아.'

그 이야기는 이 근방의 스테이지에서 살아남은 플레이어수가 극히 적다는 이야기다.

'이게 정상이긴 하지.'

오히려 우리 쪽 스테이지는 너무 많이 살았다.

아마 그 소문을 들은 옵저버들도 지금 로메월드 타워 쪽으로 몰려갔으리라.

"거리가 엉망진창이에요. 몬스터의 짓일까요?"

거리는 쓰레기의 온상이었다.

방치된 체 썩어가는 시체들도 몇 구나 보였고, 가게들은 약탈이라도 당한 듯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아니, 이건 인간의 짓이지. 몬스터였으면 쓸데없이 돈을 훔치지 않아."

"그렇겠죠. 이미 법은 제 구실을 못하는 것 같고. 경찰도 거의 보이지 않으니."

툭.

지수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몬스터의 시체를 건드리며 말했다.

고블린이다.

세계가 게임으로 변한 이후, 몬스터는 온갖 스테이지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그건 플레이어로 선정되지 않은,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스테이지도 포함되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 주로 스테이지가 생성된 구역 위주. 아닌 곳도 있으니까."

"하긴, TV도 멀쩡히 나오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다만, 정부와 같은 조직은 사실상 와해됐겠지. GM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현 지구를 통제하려고 하는 이들을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

"하긴, 그러고 보니 정부의 발표는 전혀 나오지 않았었죠."

TV방송은 계속해서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정부와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GM이 통제하고 있다는 거겠지.

"옆."

"아, 네."

내가 손가락을 가리키기 무섭게 지수의 오른팔이 번뜩였다.

촤악!

"캬아악!"

쓰레기 더미에 숨어 있던 고블린이 단말마를 지르며 절명했다.

단 한 방에 죽였지만, 지수는 손에 들린 녹슨 칼을 응시하며 투덜거렸다.

"무기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날이 다 나가버려서 곧 부러질 것 같거든요."

"그런 것치고는 한 방에 죽이던데."

"아무래도 전 인간형 적에겐 추가 피해가 들어가니까요."

하긴 고블린도 인간형이지. 내가 30퍼센트 추가 데미지이니, 지수는 100퍼센트 추가 데미지인가.

오지게 쎄겠군.

'전생에 내가 이때 어땠더라.'

고블린 정도는 분명 잡긴 했지만, 저렇게 피라미 잡듯 죽이지는 못했다.

"어차피 지금 가는 곳 들렀다가 무기도 구할 거야."

"얼마나 남았는데요."

"거의 다 왔어. 저기야."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대략 5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은행?"

"어."

"은행은 왜요? 돈 찾게요?"

"설마. 이 근방은 다 스테이지라 돈이 있어도 물건을 구매할 수 없을걸. 포인트로 거래한다면 모를까."

그리 말하자 지수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럼?"

"찾는 사람이 거기 있거든."

어릿광대와 대화하며 위치와 현재 외모를 보기는 했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게 분명했다.

내가 서둘러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제가 막고 있을 동안 어서 도망치세요!"

"아, 아저씨는 어쩌고요!"

"전 이 녀석들을 막을 테니, 어서 가세요!"

건물에 가까이 비명 소리와 고함이 들렸다.

상황을 보니 경찰관 한 명이 강도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틈에 도망가고 있는 양상이었다.

"시발! 대체 이 새끼는 뭐야?!"

"뭐가 이렇게 쎄?!"

날카로운 식칼을 들고 경찰관과 대치하는 남성들은 경찰관을 경계하며 둘러싸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은행 강도인가요?"

"뭐, 그렇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치안이 개판이 됐으니 그 틈을 노리는 쓰레기들이 없을 수가 없지.

"혹시 도와주실 거예요?"

"아니. 내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할 녀석이 있거든."

그걸 보고서 이곳으로 온 거니까.

"커억!"

"이런 씨, 뭐가 이렇게 쎄? 난 플레이어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치는 강도의 주변엔 족히 열이 넘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단 한 명에게 당했다기엔 상당한 숫자였다.

경찰관의 실력이 강도들보다 아득히 강하다는 증거였다.

"이제 사람들도 모두 도망쳤으니, 너희들에게 볼일은 없다."

"뭐?"

경찰관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강도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녀석들을 모두 기절시키는 데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단하네요.... 저 강도들도 다 플레이어죠?"

"맞아."

"그런데 저렇게 압도할 수 있다니 특수한 스킬이라도 가진 걸까요?"

"그런 것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스킬이야 당연히 좋은 걸 가지고 있을 거다.

허나, 저 녀석이 강도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스킬 때문이 아니라 녀석이 신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후우. 이제야 끝났네."

한숨을 내쉰 녀석은 주변을 살피며 사람이 없나 확인하다 우리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어?"

순간 당황한 얼굴을 하던 그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은행이다 보니 계속 강도들이 몰려오거든요. 빨리 다른 곳으로 피하시길 바랍니다."

매우 믿음직한 어조이며 얼굴이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경찰관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뇨, 죄송하지만 전 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거든요."

"예? 아, 하긴 그렇죠. 하긴 상황이 이러니 은행 업무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죠. 그럼 몸을 피하러 온 건가요?"

"아뇨,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그에게 나는 씩 웃었다.

"뭐긴 널 만나러 왔지. 이민아."

"...?!"

경찰관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아까와 같은 믿음직한 경찰관의 미소를 지었다.

"이민아라니,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제 이름은 남경철입니다."

당당히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지수가 갑자기 경찰관의 손목을 잡아챘다.

"헉?!"

갑작스러운 행동에 얼어붙은 경찰관을 유심히 바라보던 지수는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맥박이 빨라졌네요. 뭔가 당황스러운 모양이에요."

"응?"

"거기다 동공이 확장된 걸보면 방금 오빠의 말에 크게 놀란 게 분명해요. 별말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반응하는 걸보니 수상하네요."

"...그래?"

"네. 세한 오빠도 알고 있었죠?"

아니, 몰랐는데.

뭐야, 그거 무서워.

"너, 너희는 누구야?"

경찰관도 당황했는지 얼굴이 창백했다.

솔직히 나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기왕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이용하도록 하자.

"네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너 말투 달라졌다?"

"큭?!"

역시 아직 연기가 완전하지는 못하군.

나는 아랫입술을 깨무는 그를 보며 주변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관찰하는 옵저버가 하나 보였다.

아마 저것이 '어릿광대'의 옵저버겠지.

저 녀석은 걱정할 필요 없다.

재밌는 상황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강하니까.

거기다 은행만 털러 다니는 자신의 아바타에게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테니 이런 상황 자체가 흥미진진하겠지.

"...어떻게 안 거야?"

"그런 걸 너 같으면 알려주겠냐?"

"이런 씨."

더 이상 정의로운 인상의 경찰관은 없었다. 옅은 빛이 난다고 생각한 순간, 단발머리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새치름한 인상의 소녀가 서 있었다.

신장은 지수보다 작아서, 나와 비교하면 머리 두 개쯤 작았다.

"그래, 나를 왜 찾아왔는데? 나 바쁘거든?"

"은행 터느라?"

"그, 그런 거 아니야!"

아마 이민아의 나이는 이때 19살이었을 거다. 외모만 보면 그보다 두세 살은 어려보이지만, 분명 19살이 맞다.

"세한 오빠, 이건?"

"아마 이 녀석의 스킬이겠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

물론,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몬스터도 가능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알면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이미 수상하고 생각하고 있긴 하겠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은행을 턴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아까 보기론 사람들을 돕는 것 같던데."

"맞아, 나는 사람들을 도왔던 거라고. 경찰관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면 신뢰감도 있으니까."

뻔뻔하게 말하는 민아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애초에 강도를 몰고 온 건 너잖아?"

"...뭐?"

"아마 사람들이 은행에서 몸을 사리고 있으니, 금고를 털기 좀 그랬겠지. 그래서 강도들을 선동해서 몰고 온 거 아냐?"

"아, 아니야! 그럼 내가 왜 강도들을 쓰러트려!"

"그야 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잖아? 강도들을 이용해서 이곳으로 몇 번 몰고 오면, 사람들이 이곳은 위험하다 생각하고 도망치겠지. 아까 우리가 본 모습처럼."

"윽."

아무래도 정곡이었던 모양인지, 민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전생에 네가 자주 이용했던 수법이니 모를 리가 있나.'

사람들을 선동하는 건 서울에선 박동권과 이 녀석을 따라올 자가 없다.

아마 지속적으로 강도들을 선동해서 은행으로 몰고 왔으리라.

'어릿광대의 말을 생각하면 몇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했던 모양이고.'

강도가 습격해 와도 결국 본인이 다 처리해 버리니 다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거다.

그렇다 해도 도둑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그래서 뭐야? 경찰에라도 넘기겠다고?"

"아니. 어차피 지금 상황이면 제대로 된 경찰이나 교도소도 없겠지. 거기다 너라면 금방 빠져나올 테고."

"...그럼?"

"잠시 동행 좀 해줘야겠어."

"얼마나?"

"우리가 두 번째 퀘스트를 완벽히 클리어할 때까지."

그 말에 민아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고작 두 번째? 나는 벌써 세 번째 퀘스트인데. 어디 스테이지 출신이야?"

"그건 안 궁금하고. 그래서 따라올 건지 말 건지 결정해."

"바보야? 내가 왜 가?"

절대로 안 따라간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는 민아에게 나 역시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동행해 주면 포인트를 주지."

"하! 아직 두 번째 퀘스트도 못깬 플레이어 주제에 포인트가 얼마나 있다고. 주제에 허세는."

말투가 아주 사람의 신경을 건드는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전생에 워낙 험한 말을 많이 들어서 이 정도는 별 신경도 안 쓰이긴 하지만.'

후일을 생각하면 조금 교육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빡!

"악!"

손가락으로 이마를 후려치자 녀석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뭐, 뭐야? 대체 뭐가 내 머리를 때린 건데?"

단순한 딱밤이었지만, 현재 내 힘은 메인 퀘스트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딱밤이라도 주먹으로 두들겨 맞은 충격이겠지.

더군다나 민첩도 상당히 투자한 터라 이제 막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 중인 민아로선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네가 때렸지? 내가 맞고서 네 말대로 할 줄 알아?"

민아는 그렇게 말하곤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저기, 놔주지 않을래?"

"싫어요."

민아의 손목은 아까부터 계속 지수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녀석은 떨쳐내기 위해 팔을 흔들어보려 했지만, 지수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그런다고 내가 못 빠져나갈 거 같아?"

민아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렀다.

변신의 징조다.

우직!

"꺄아악?! 부러져! 내 팔 부러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지수가 손목을 꽉 움켜쥐자 비명과 함께 풀렸다.

"통증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변신이 안 되는 모양이네요."

"으윽."

무미건조한 지수의 말에 민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민아가 아파서 몸부림치건 말건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사람의 팔 같은 건 과자 부수듯 으깨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나이도 어리신 거 같은데 조금 더 예의를 차려줬으면 좋겠네요. 그쵸? 사람은 짐승이 아니잖아요?"

"아, 알았어. 알겠다니까."

민아는 지수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슬그머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지수를 좀 떨어트려달라는 듯 애처로운 시선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 시선에 싱긋, 부드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동행하면 풀어주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포인트 준다고 할 때 얌전히 따라왔으면 좋잖아.

# 13

013. 파티원을 육성하는 법(4)

"그런데 오빠랑 언니도 아바타야, 가 아니라... 예요?"

지수에게 한바탕 깨진 이후 묵묵히 걸어가던 민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수에게 된통 당한 게 상당히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다.

"아니. 그리고 어색하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라."

"아, 땡큐. 그럼 왜 그렇게 쎈 건데?"

"아바타는 분명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요건일지는 몰라도 반드시 플레이어보다 강한 것만은 아니야."

아바타가 되어서 얻는 이득은 많지만, 일반적인 플레이어도 강해질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도 있었다.

'같은 노력을 할 때 아바타가 더 유리한 건 분명히 맞지만.'

그렇다 해도 난 신의 아바타가 될 생각이 없었다.

아바타에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으니까.

"...그래?"

내 말이 납득하기 힘들었는지, 민아는 아리송한 얼굴로 힐끗 위를 보았다.

그 방향에는 옵저버 하나가 우리를 쫒아오고 있었다.

보나마나 어릿광대의 옵저버겠지.

'대략 7일 남았나.'

아직도 시간이 꽤나 남아있었다.

바로 로메 타워에 가도 괜찮겠지만....

"장비."

"네?"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지수가 시선을 돌렸다.

"로메 타워에 가기 전에 장비도 구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근방에서 장비라고 해봐야 고블린들이 들고 다니는 녹슨 철검이 전부가 아닌가요?"

"그래, 드랍템만 따지자면 그렇지."

아직 거리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대다수가 하급 몬스터다.

그중 무기를 들고 다니는 몬스터는 고블린 정도.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질이 떨어져서 오래 쓸 것이 못 된다.

"그냥 슈퍼에서 식칼 같은 거라도 쓰면 되잖아?"

"도움말을 보면 나올 텐데? 몬스터들은 개체마다 마력장을 가지고 있어서 이쪽 세계의 물건으론 제대로 피하를 입히기 힘들어."

"그, 그래? 식칼로도 잘만 죽던데...."

"하급 몬스터들은 체내에 보유한 마력양이 극히 적기 때문이지. 조금만 강한 몬스터가 나와도 식칼이 아니라 총도 먹히지 않을 거다."

민아는 내말에 입을 꾹 다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무기를 어디서 구하면 되는데요?"

"그야 간단하지. 사면 돼."

나는 손가락으로 길가의 편의점을 가리켰다.

"식칼 같은 건 안 된다며. 애초에 편의점에선 식칼도 팔지 않거든?"

뒤에서 민아가 종알거렸지만, 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지수는 이런 내 행동이 익숙한 듯 조금 의아한 시선을 보내긴 했어도 묵묵히 따라왔다.

그리고 편의점에 발을 들이자, 예상한 것처럼 알림이 들려왔다.

[안전지대에 진입하셨습니다.]

"이런 곳에 안전지대가?"

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안전지대인지는 어떻게 안거야?"

"가게 상태를 보면 감이 오잖아."

"아."

내 말에 지수가 작게 감탄하며 편의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냥 대충 보면 다른 가게처럼 엉망진창이었지만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몬스터가 침입한 흔적이 없어요."

"이렇게 어질러져 있는데?"

"이건 사람들이 훔쳐간 거예요. 몬스터들은 이런 음식을 먹지 않으니까요."

역시 지수는 이해하는 게 빨랐다.

'이민아도 내 기억으론 분명 머리가 좋은 편이었던 것 같은데....'

하기야 내가 이민아를 만난 건 한참 후이긴 하지.

적어도 5년 후인가.

그때는 좀 더 냉정하고 성격도 깊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근데 여기서 무기를 어떻게 사는데?"

"포인트 상점 오픈."

쿠구궁!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면에서 거대한 자판기와도 같은 물건이 솟아났다.

"뭐, 뭐야 이게?"

"보고도 몰라? 포인트 상점이다."

메인 퀘스트가 진행되는 주요 스테이지를 제외한 일반 스테이지에서 생성된 안전지대에서는 포인트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

DLC 상점의 경우에는 주로 소모품이나 일반적으로 얻기 힘든 촉매나 재료를 구해할 수 있는데 반면.

포인트 상점의 경우엔 주로 무기나 기본적인 포션만 구매가 가능하다.

"이런 게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멍하니 중얼거리는 민아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역시 신이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

어릿광대의 성격을 생각하면 알고도 알려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왜냐면 녀석이 사디스트이기 때문이다.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허탈해하는 저런 모습을 보는 걸 즐기는 거다.

'최상위 신이라 능력만큼은 확실하지만, 성격 참 더러운 녀석이야.'

그런 신의 아바타가 된 민아에게 나는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거니, 너무 자책하지 마."

"어떻게 우연히 알았는데요?"

"도움말에 '기타'란을 보면 있어."

"안 보이는데요?"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 메모를 잘 살펴봐."

참고로 무척 찾기 힘들게 되어 있어서 도움말을 정독한 지수가 못 찾은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플레이어들을 최대한 힘들게 하려는 GM의 악의가 느껴지는 위치다.

'역시 대부분은 기본 무기나 장비뿐이군.'

포션도 팔지 않는다.

아마 초기 스테이지에 포션을 팔면 생존 확률이 크게 상승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도 현재는 장비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

조금만 지나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플레이어들도 나올 것이며,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다니는 네임드 몬스터도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사용할 무기가 필요했다.

나는 단검 세 자루와, 적당한 길이의 숏소드 한 자루. 그리고 적당한 방어구를 구매했다.

가격은... 좀 나가긴 했지만 내가 보유한 포인트가 워낙 많아서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한지수."

"네?"

"이거 방어구. 넌 포인트가 능력치 올리느라 빠듯할 테니 지금은 내가 사줄게. 나중에 갚아."

"아, 네. 감사합니다. 꼭 갚을게요."

원래 지수는 남에게 빚을 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꽤나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마 포인트를 다 쓴 거겠지.'

이곳에 오면서 몬스터를 잡던 모습을 생각하면 능력치에 포인트를 다수 투자한 것 같았다.

분명 장비를 살 포인트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거다.

"무기는 뭐로 할래? 역시 검?"

"종류가 어떤 게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무기 종류라면 그럭저럭 다양했다.

검과 창, 그리고 둔기와 활도 있었다.

"그럼 둔기로."

설명을 들은 지수는 둔기를 요구했다. 솔직히 예상외였다. 보통은 처음에 검을 다루기 마련이니까.

'초심자가 다루기엔 둔기 쪽이 낫긴 하다만.'

검을 다루는 게 서툰 초기에는 피가 엉겨 붙거나 경직된 근육을 제대로 베지 못해 검을 놓치기 일쑤다.

지수가 여태 그런 실수를 한 적은 없지만, 둔기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혈천수라공은 무기도 가리지 않고.

"자."

"감사해요."

나는 한 손으로 사용할 만한 둔기를 구매해 지수에게 쥐어줬다.

흔히 메이스라 불리는 무기다.

허공에 붕붕 돌리며 무게를 가늠하는 지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니, 혹시 나도 사주나 해서."

내가 지수에게 물건을 사주는 걸 지켜보고 있던 민아는 조금 들뜬 어조로 물었다.

이쪽은 사줄 생각도 없는데 아주 김칫국을 사발 째 들이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줄 생각 없는데? 애초에 포인트 준다고 할 때 거절한 건 네 쪽이었잖아?"

"...으으."

민아가 원망 어린 눈으로 지수 쪽을 흘겼지만 메이스를 붕붕 휘두르는 지수의 모습에 금방 시선을 원위치 시켰다.

"어차피 장비 가격은 하나당 최소 200포인트야. 너 포인트도 없잖아."

"2, 200포인트? 너... 아니 오빠는 어디서 그런 포인트가 난 건데!"

"지성이면 감천이라. 너도 은행 같은 걸 터는 헛짓은 그만하고 포인트나 모아라."

민아의 어깨가 툭 떨궈졌다.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다 본인의 업보인 것을.

***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로메 타워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대략 네 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니까.

'어디 보자....'

그다지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장비도 얻었겠다, 한 가지 실험해 볼 것이 있었다.

'백금 등급 보상 중에 사용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지.'

보상으로 받았던 건 스킬과 포인트.

그리고 하나의 물건이었다.

[가변형 오리하르콘: 주인의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장비. 원하는 장비에 오리하르콘 코팅을 할 수 있다. 코팅을 해제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흐음."

나는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금색으로 찰랑이는 액체가 존재했다.

오리하르콘은 본디 옅은 금빛을 내는 금속이다.

마법 저항은 없지만 강도만큼은 모든 금속 중에 가장 단단하며 무척 가볍다.

'...1회용은 아니겠지?'

구분이 '장비'로 되어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병에 쓰여 있는 작은 글씨도 확실히 회수가 가능하다고 적혀 있으니까.

퐁.

병뚜껑을 열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무기에 뿌리는 게 좋겠지?'

나는 숏소드를 꺼내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뿌렸다. 그러자 병에서 빠져나온 액체가 마치 슬라임처럼 검을 순식간에 감쌌다.

"오."

방금 전까지 평범한 외형을 지니고 있던 숏소드가 칼날부분이 전체적으로 오리하르콘의 색깔인 금빛으로 변했다.

'무게는 그대로지만.'

만약 설명 그대로 오리하르콘 코팅이 됐다면, 강도나 절삭력은 훨씬 상승했을 것이다.

"여기에 병을 가까이대면...."

코팅이 벗겨지며 액체로 변해 병에 담겼다.

생각보다 굉장히 유용한 물건이었다.

오리하르콘 코팅이 되면 평범한 검도 몇 배는 우수한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무기를 가리지 않는 내게는 최적의 장비였다.

"다 온 거 같아요."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여러 장비에 실험하고 있자, 옆에서 걷던 지수가 손가락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로메월드 타워다.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웃기지만, 두 번째 퀘스트가 뭔데?"

"기간 안에 보스 몬스터를 잡는 거."

"보스 몬스터? 그런 것도 있구나."

"너희는 뭐였는데."

"우리는 그냥 서바이벌."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민아였지만 눈은 묘하게 풀려 있었다.

아마 좋은 기억은 아닌 모양이다.

'두 번째 퀘스트가 빨리 끝난 것도 이해가 가는군.'

민아가 속해 있던 스테이지는 꽤나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서바이벌은 플레이어의 숫자가 일정 이하가 될 때까지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퀘스트다.

아마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테고, 민아 역시 여러 사람을 죽였겠지.

그에 비하면 우리는 꽤나 평화롭게 넘어간 편이다.

'내가 없었다면 센티넬에게 죄다 몰살당했겠지만.'

아니, 애초에 전생과 같이 센티넬이 나올 것도 없이 홉고블린이 이끄는 고블린 무리에 쓸렸을 것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GM 아카터스는 그런 놈이니까.

"호오...."

로메 월드 타워에 다가가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전생에 내가 이곳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저 사람들은...."

살벌한 분위기를 내보이며 돌아다니는 사내들의 모습에 지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죠?"

"경계를 서는 거지."

"경계요? 이 근방에는 몬스터들이 없잖아요?"

"몬스터가 아니야. 사람들을 경계하는 거다."

퀘스트라는 게 꼭 모든 플레이어가 클리어할 수 있도록 맞춰져 있는 건 아니다.

아까 민아의 서바이벌 퀘스트처럼 플레이어들끼리 경쟁을 부추기는 구도도 분명히 존재했다.

"물론 자세한 이유는 아는 사람에게 들어봐야겠지만."

나는 민아에게 눈짓했다.

저 녀석들이 왜 경계를 서고 있는지는 대략 짐작이 갔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나쁠 건 없었다.

"나보고 저 녀석들에게서 왜 경계를 서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그 편이 빠르거든. 그래서 싫어?"

나는 싱긋 웃으며 옆을 보았다. 민아 역시 그런 내 시선을 따라 옆을 보았다.

지수가 메이스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처리한 몬스터의 피다.

지수는 내 생각보다 메이스가 손이 맞았는지 이곳에오며 굳이 잡지 않아도 될 몬스터들의 머리를 깨고 다녔다.

나야 실전 감각은 익히면 익힐수록 좋다는 파였지만, 아무래도 민아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녀올게요."

"그래."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 민아에게 어깨를 두드려 줬다.

민아는 잠시 몸을 푼 뒤에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타탁!

"으헉?!"

잠깐 전봇대 뒤에 숨는다 싶더니, 지나가는 검은 옷의 남자를 습격해 단번에 기절시켰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다.

'역시 이민아는 이민아군.'

지수에게는 뱀 앞의 개구리마냥 떨지만 전생의 네임드 플레이어는 떡잎부터 다르다.

특히 민아의 경우 몬스터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분명 두 번째 퀘스트의 영향이겠지.

민아는 기절시킨 남자를 어딘가에 치워둔 뒤, 그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곤 방금 전에 남자가 걷던 방향으로 태연히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걸이는 방금 전 습격당한 남자와 꼭 닮아 있었다.

# 14

014. 양보의 미덕(1)

"뭐래?"

민아가 정보를 얻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체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변신을 풀며 옅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꺼냈다.

"아무래도 다른 세력과 퀘스트가 겹친 모양이야. 로메 타워 정상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데, 다른 세력이 잡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것 같아."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은 이유였다.

"다른 세력이라면...."

"아마 우리 대학에서 온 사람들을 말하는 거겠지."

참고로 이건 전생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전생에서는 이렇게 경계를 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대학 스테이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니까.

"로메월드 타워는 그럼 저들이 점거하고 있다는 거군요."

"그래, 대학에서 온 사람들도 아마 저들을 피해 따로 모여 있을 확률이 높아."

"근데 이 근처에는 큰 건물이 워낙 많아서 찾으려면 힘들겠네요."

지수의 말처럼 근처에는 백화점도 있고, 큼지막한 빌딩들이 많았다.

일일이 찾는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아. 아마 저기에 있을 테니까."

"저기라면, 지하철?"

내가 가리킨 곳은 지하철역의 입구였다.

"지하철이라니 왜죠?"

"만약의 사태 때 지하철도로 도망갈 수도 있고, 습격에 대비하기 쉬우니까."

"맞아, 지하에 있는 지하철역은 입구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곳만 지키면 습격당할 위험이 적어."

내 말에 민아 역시 말을 덧붙였다.

건물에 숨으면 굳이 정문이 아니더라도 창문을 깨고 들어올 수도 있고, 포위당하면 고립당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하철역은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정해져 있다 보니 섣불리 습격할 수도 없고, 만약의 사태에는 지하철이 다니던 길로 도망칠 수 있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도움이 됐어요."

학생회장인 현균은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으니 분명 지하철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역의 입구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몇몇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헉?!"

덤으로 그중 한명은 내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녀석은 우리를 발견하자 경악하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너, 너 죽은 거 아니었냐?"

"너도 용케 아직까지 살았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종현.

뺀질거리게 생겨가지곤 묘하게 굳은 일이라곤 다하는 이상한 놈이다.

"그, 그렇지 뭐. 어쩌다보니 운이 좋았다."

종현은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묘하게 태도가 고분고분했다.

뭐야, 왜 그래?

"세한 오빠가 미노타우르스와 싸우는 걸 봤으니 그럴 수밖에요."

심드렁하게 말하는 지수의 말에 종현의 몸이 움찔했다.

아, 과연. 나야 별생각이 없었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싸우던 용맹한 용자로 보였을 것이다.

"마침 잘됐네. 학생회장을 좀 만나게 해주라."

"현균 형을?"

"어."

종현이라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녀석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흘깃 눈빛을 보낸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이쪽이야."

잠시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민아에게 시선이 머물렀지만, 별 의심 없이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고등학생인 민아는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 녀석이 우리 중에 가장 경계할 녀석인데 말이야.'

이 세계는 겉모습으로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허나 아직 그런 가치관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어? 저 사람은 혹시...."

"미노타우르스랑 싸우던 그 사람 아냐?"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자 나를 발견한 몇몇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이런.'

관심을 가진 건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역 내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던 옵저버들도 내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나뿐이 아니다.

내 옆에 있는 지수에게도 많은 옵저버들이 따라붙었다.

"...."

그래서인지 지수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옵저버가 계속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이런 상황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따라붙는 시선과 옵저버들을 애써 외면하며 걸어가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을 멈췄다.

"여기서 기다려. 현균 형은 불렀으니까 곧 여기로 올 거야."

"너는?"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니라서 가봐야지."

종현은 그렇게 말한 후, 지수를 흘깃 본 후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에 봤을 때랑은 좀 다른데?"

"그러게요."

그때는 좀 더 투덜거리고 신경질적이지 않았던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이전 스테이지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인 거지?"

종현이 나가자 여태 잠자코 있었던 민아가 궁금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전 스테이지에서 뭔가 했어? 분위기가 왜 이래?"

"별거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도망치는 동안 몬스터랑 좀 싸웠을 뿐이지."

"어떤 몬스터인데?"

"미노타우르스."

민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 게 벌써 나왔다고?"

"나왔더라."

"에이, 무슨 뻥을 쳐도...."

처음에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픽 웃었지만, 주변에 몰려든 옵저버들의 모습에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이렇게 옵저버들이 내게 몰려들었다는 것 자체가 내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슨 수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내가 적당히 대답하자 민아의 입이 대번에 삐쭉 나왔다.

"아니, 좀 제대로 설명을...."

"세한 씨!"

그리곤 재차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쪽으로 누군가의 외침에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목소리의 주인은 종현이 방금 연락했던 현균이었다.

나로선 딱 좋은 등장이었다.

"허억, 헉."

"일주일 만이네요."

"아, 예. 예."

종현에게 듣자마자 달려왔는지, 숨을 연신 거칠게 내쉬었다.

"그보다 살아계셨군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예. 전 괜찮습니다."

얼굴을 확 들이밀며 말하는 탓에 순간 움찔했다. 내가 어지간히도 반가웠던 모양인지 현균은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뜨거운 시선에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습니까?"

"예. 이게 전부 세한 씨가 그때 미노타우르스를 막아주신 덕이죠."

현균의 눈에는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아니, 내가 대체 뭘 했다고.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지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의 시선에는 세한 오빠가 자기를 희생하며 사람들을 도망치게 한 것 같을 테니까요."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전생과 달리 남을 도울 수 있는 건 돕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고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계속 이런 대화를 해봐야 부담스럽기도 했기에 나는 말을 돌렸다.

"예. 어떤 거죠?"

"오면서 보아하니 로메 타워를 점거한 이들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그렇습니다. 저희보다 먼저 도착해서 로메 타워에 있더군요."

현균은 어두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덕분에 지금 난감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저희와 같은 퀘스트를 받은 모양이더군요. 세한 씨도 같죠?"

"네, 아무래도 같은 스테이지 출신은 대부분 같은 퀘스트를 공유하는 것 같으니까요."

일정 구간이 넘어가면 제각각 퀘스트가 달라지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런 시기가 아니었다.

"처음에 저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퀘스트 내용이 같다면 같이 힘을 합쳐서 클리어하면 되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현균은 상대가 든든한 아군으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더군다나 그쪽은 보스 몬스터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었으니 금방 클리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예."

현균의 머리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로메 월드 타워는 따로 스테이지가 구분되어 있더군요. 그곳에 입장할 수 있는 건,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같은 스테이지에 있었던 이들만 가능했습니다."

그 후는 어찌됐을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먼저 보스 스테이지에 도전할 건지 정해야 되겠지.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만약 먼저 들어간 자가 보스 몬스터를 잡게 되면 같은 퀘스트를 공유하던 다른 파벌은 어찌 될 것인가.

"한쪽이 보스 몬스터를 죽이게 되면 어찌 될지 미지수니까요. 다시 새로운 보스몬스터가 나타나면 다행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퀘스트를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며 GM의 벌칙을 받게 될 것이다.

초기 GM의 벌칙은 매우 간단하다.

모두 죽는 것.

아마 현균도 알겠지.

학교 강당에 남은 이들이 많지는 않아도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니까.

특히 교수들이나 직원들은 대부분 남아 구조를 기다리자는 파였다.

현균은 그들에게 연락을 지속적으로 보냈을 테니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도 저희가 습격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섣불리 보스 몬스터에 도전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무리하게 싸움을 거는 방법도 있었지만, 현균은 아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글쎄요, 우선은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시간낭비다. 서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먼저 보스를 잡겠다고 할 테니 이야기는 평행선을 이룰 테니까.

현균도 아마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몰라 묻겠는데, 그들은 보스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했죠."

"예, 처음에 소수의 정찰인원을 보내 확인했다고 들었습니다. 전부 죽은 모양이지만요."

"그렇다면 묻겠는데, 보스 몬스터의 위치는 타워의 정상이었습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먼저 잡으라고 하세요."

"예?"

현균은 대번에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예, 진심입니다. 옥상에 있는 몬스터라면 얼마든지 먼저 잡으라고 하세요."

물론, 잡을 수 있다면.

"그럼 저희 퀘스트는 어쩌고요? 보스 몬스터를 잡지 못하면 저희는 끝입니다!"

"그건 옥상에 있는 게 보스 몬스터일 때죠."

격앙된 얼굴로 소리치던 현균이 그대로 석상처럼 굳었다.

"...그럼 그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이야기인가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어째서 옥상에 있는 몬스터를 보스 몬스터라고 판단한 거죠?"

"일반 몬스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대한 몬스터 하나가 옥상에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서 의견을 교환할 때 영상으로 확인했으니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현균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로메월드 타워에 들어가면 보스 스테이지에 입장했다고 알림창이 뜨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그게 GM의 트릭이니까.

사실 트릭이라기도 뭐하다. 그냥 GM의 '가벼운' 장난일 뿐이다.

"강한 몬스터라고 모두 보스 몬스터는 아니죠."

"하지만 다른 층에는 다른 몬스터가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습니다."

"다른 층? 전부요?"

"예. 그들과 대립하기 전, 잠시 타워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죠. 그때 확인했습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왜냐면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

"지하도 확인했다는 말이죠."

"...지하요?"

"예, 로메월드 타워 지하."

현균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건 내 말에 긍정하는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분명 확인하지 않았을 거다.

왜냐면 섣불리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니까.

"한 가지 정보를 드리자면."

나는 씩 웃으며 검지를 피며 현균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보스 몬스터는 다른 몬스터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딱 보기만 해도 저것이 보스 몬스터라는 걸 알 수 있는 특징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해, 주변에 둔다는 거죠."

바로 첫 번째 메인 퀘스트의 홉고블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15

015. 양보의 미덕(2)

사람의 심리란 간사하다.

아래보다는 위를 보게 되며, 어려운 길은 피하려 한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는 그런 사람의 심리를 파고든 조잡한 함정이다.

"만약 지하 5층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입니다. 다수의 몬스터들이 매 층마다 포진해 있으니까요."

"혹시 엘리베이터는 작동해?"

"전기가 끊겨 있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회의가 시작된 지도 대략 몇 시간이 흘렀다.

타워 정상의 몬스터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그 틈에 이쪽은 지하를 공략하자고 현균이 말했지만, 아무래도 쉽사리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찬성파와 반대파는 대략 반반정도,

의외인 점이라면 찬성파에 박동권이 있다는 점이다.

"설마 살아 있었을 줄이야...."

나를 본 녀석은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내 말을 믿나 보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

이젠 존댓말도 아니라 아예 반말이다. 더 이상 얌전한 부회장 연기를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동권은 팔짱을 낀 채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설령 타워 정상에 있는 게 진짜라고 해도 그들과 싸워 우리가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상황에서 보스 몬스터를 잡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겠지."

"호오."

"거기다 타워 지하라면 지하철역에 있는 연결 통로를 통해 이동할 수 있지. 녀석들은 1층, 지하에서 올라오는 통로만 지키고 있을 테니 내려가는 걸 들킬 일은 없다."

역시 마인드는 쓰레기지만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다.

분명 이해력도 빠르고 어떤 것이 중요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녀석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거지만.

'대충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가네.'

전생에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면 참 알기 쉬운 놈이다.

"...뭐냐?"

'널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다.'

이놈은 가만히 둬서 갱생할 놈이 아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타락한 놈도 아니며 내버려 두면 분명 전생과 같은 짓을 몇 번이든 벌일 거다.

'이번 기회에 처리해야겠어.'

몰래 보내 버리는 건 간단하지만, 그건 너무 자비롭다.

나름 능력도 있는 놈이니 굴릴 수 있다면 굴리는 게 좋겠지.

"후우, 죽겠다."

막 회의가 끝난 듯,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현균이 다가왔다.

"세한아, 어찌어찌 된 것 같다."

현균은 한결 친근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왜냐면 내가 편하게 말을 놓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묘하게 어색한 거리감을 좁히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젠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네.'

첫 번째 메인 퀘스트의 일 때문인지, 현균은 무척이나 나를 어려워했다.

잠깐 만나고 말 인연이라면 전혀 상관없었지만, 나는 현균과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싶었다.

'이런 인재는 쉽게 찾을 수 없거든.'

물론, 편하게 말하라고 해도 현균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완강히 반대했지만 내 설득에 결국 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가 있긴 했지만, 지하를 내려가는 쪽으로 결정했어."

"그렇다면 남은 건, 로메 타워를 점거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밝히는 일만 남았군요."

"대충 그렇지. 걱정 마, 그건 내가 따로 전하도록 할 테니까."

현균의 얼굴은 제법 비장했다. 그야 만날 녀석들을 생각하면 저렇게 될 수밖에.

"괜찮다면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아, 정말?! 아니... 흠흠."

반색하며 활짝 웃던 현균은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반응했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네가 같이 온다면야 나야 고맙지."

"그럼 저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나는 힐끗 동권을 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관심이 없긴 개뿔.'

쳐다만 안 보고 있다 뿐이지 온 신경을 이쪽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게 그냥 대놓고 엿듣는 거랑 뭐가 달라?

나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슬슬 민아를 만나봐야겠군.'

전생에도 느꼈지만,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

전생에 한국에는 한 길드가 있었다.

범죄자 집단이 모여서 만든 최악의 길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고, 무엇이든 하는 집단.

더 씬.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지칭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지?"

반백발에 날카로운 눈을 지닌 남자가 말했다.

"왜? 한판 붙자고?"

"카악! 퉤! 해봐, 언제든 상대해 줄 테니."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대다수는 우리를 비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 거 같네요."

지수가 눈을 살며시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는 현재 로메 타워의 입구에 서 있었다.

상대 파벌을 이끄는 리더와 대화를 하기 위함이다.

우리 일행은 현균을 비롯한 열 명의 인원과 나와 지수.

상대는 족히 서른은 넘은 인원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같이 흉악한 인상이다.

"그거야 이 사람들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이니까."

"...구치소요?"

"어.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풀려난 거겠지."

구치소 부근도 스테이지가 되었다면 당연한 일이다.

대부분이 이런 놈들뿐이니, 그 구역은 어느 곳보다 치열하고 잔인한 놈들만 살아남았으리라.

괜히 현균과 그 무리들이 지하철역에서 몸을 사리고 있던 게 아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저희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현균은 제법 의연한 얼굴로 리더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김주원'

날카로운 눈매에 탄탄한 근육질 몸.

후에 길드 '더 씬'을 만들게 되는 남자.

"호오, 의견이라."

주원은 피식 웃었다.

"이미 협력은 물 건너간 것 아니었나?"

"저희도 협력을 제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면?"

"로메 타워 정상에 있는 보스를 양보하겠다는 의견을 전달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음?"

이 말은 예상외였는지 주원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그렇다면 그냥 죽겠다고?"

"아닙니다.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입니다. 어차피 저희가 당신들을 이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그쪽이 먼저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 새로운 보스 몬스터가 나올지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걸 노려볼 생각입니다."

말 잘하네.

정직한 사람의 표본 같은 얼굴을 하곤 거짓말을 태연하게 내뱉다니.

오히려 박동권보다 사기꾼 기질이 있는지도 몰라.

"진심인가?"

"그렇다면 저희에게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만약 허튼 생각을 하고 있다면 너희는 모두 죽는다."

"예 진심으로 당신들이 로메 타워 정상에 있는 몬스터를 잡을 때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주원의 눈에 새빨갛게 변하며 번들거렸다.

여태 여유로운 안색을 내비치긴 했지만 저자는 근본적으로 살인마다.

"헉!"

"히, 히익."

날카로운 살기가 스멀스멀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언제 느껴도 정말 불쾌한 살기야.'

주원도 신의 아바타다.

주원을 플레이하는 신은 하데스.

최상위 신 중 하나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쓰레기들의 왕이 될 수 있었고, 훗날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길드의 지배자가 된다.

"큭큭, 좋다."

창백해진 안색의 현균을 본 주원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자신의 뒤에 서있던 이들에게 묻자, 무리가 술렁였다.

"나쁘지 않다고 보는뎁쇼? 제까짓 놈들이 어쩌겠습니까? 오면 다 뒤지는 거지."

"그래, 그래! 허튼 생각하면 다 죽이는 겨."

"하지만 그래도 혹시...."

"뭐여, 너 혹시 쫄았냐?"

"무, 무슨 소리야 시발. 그냥 말해본 거지!"

어차피 이들은 현균과 그 무리가 자신들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흘러갔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현균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도 무작정 그쪽 말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걸 알겠지?"

"예, 그렇다면 제가 공략하는 동안 이곳에 남아...."

"회장."

그때, 동권이 끼어들며 말했다.

"회장은 저희들의 리더이니 그래선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남겠습니다."

'얼씨구.'

겉만 보면 현균을 대신해 희생을 하는 모습이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동권이?

"너...."

현균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알겠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고."

"예."

대충 결정이 되자, 현균은 주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 주원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고작 한 명으로?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 전원은 남아라."

"예?"

"특히...."

가늘게 휘어진 주원의 눈이 천천히 움직여, 이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내 뒤에 서 있는 지수에게.

"옆에 있는 놈이 거슬리는군."

카앙!!

주원이 말을 끝냄과 동시에 불꽃이 튀며 쇠가 마찰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허공에 은빛 사슬이 출렁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음?"

설마 막힐 줄은 몰랐는지, 주원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내 앞에는 방금 전 날아온 주원의 사슬낫이 지면에 박혀 있었다.

이 녀석은 방금 나를 죽이려고 했다.

거기에 별 의미는 없겠지.

그냥 지수를 보는데 내가 앞에 서 있어서 치우려고 했을 뿐이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현균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윽박질렀다.

물론, 그런 현균의 말 따위는 주원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제법 한 가닥 하는 모양이구나."

"어."

적어도 널 한 가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는 하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녀석을 여기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거기다 내가 죽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니까.

"이 새끼가 지금 형님 앞에서 뭐하는 짓거리야?!"

"그만."

주원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나를 보았다.

붉게 물드는 적색 눈동자.

아까보다 명백히 붉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색 눈동자에 담긴 살기에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는 가소로울 뿐이다.

"...보통 놈이 아니군."

주원은 그렇게 말한 후,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니까 한판 붙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옆으로 몸을 옮겼다.

지수와 제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

"어때? 이래도 우리가 남기를 바라나?"

"...."

"형님?"

묘하게 굳어버린 주원의 모습에 녀석의 부하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대충 이유를 알았기에 녀석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만."

"아.... 죄송해요, 순간 욱해서."

지수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것만 봐선 그저 귀엽기만 했지만, 주원의 눈에는 마치 식인꽃처럼 보였으리라.

'그래, 천살성치고는 너무 얌전했지.'

주원은 분명 잔혹한 살인마이며 사이코 같은 놈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천살성이라는 존재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니까.

"헉, 허억."

주원은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떠듬떠듬 말했다.

"그, 그래. 좋다. 의견을 받아들이지. 남는 놈은 그 녀석 하나로 좋다."

녀석의 시선은 이미 우리 쪽에 닿지 않았다.

명백히 지수를 피하는 눈치였다.

"그럼 그런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가라. 당장 꺼져!"

녀석은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주원은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현균은 그런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하아, 마지막에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그래도 무사히 끝났네. 혼자 남아 있을 동권이가 걱정이야."

"녀석은... 걱정할 것 없을 겁니다."

애초에 남고 싶어서 남은 놈을 뭐하러 걱정해?

"그보다 저희도 바로 준비하죠."

"다들 포인트로 무기를 구매하러 갔으니, 준비되는 대로 바로 가자."

안전지대에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지대로 향했다.

그들이 돌아오고 지하로 내려갈 준비를 끝내려면 족히 이틀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녀석들이 얌전히 보스 몬스터만 잡을 거 같아?"

"아뇨."

"역시 그렇지?

"예, 근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가볍게 답하는 내 말에 현균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게 있거든요."

애초에 현균이 그들을 만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왜냐면, 그들에게 다음은 없으니까.

# 16

016. 양보의 미덕(3)

"어, 그럼 그쪽은 부탁한다."

삑.

전화를 끊고 등을 돌리자 지수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하세요?"

"잠깐 통화할 곳이 좀 있어서."

태연하게 답하긴 했지만 솔직히 깜짝 놀랐다.

'얘는 가끔가다 이렇게 뒤에 조용히 서 있어서 놀라게 한단 말이야.'

설마 일부로 그러는 건가?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말해봤자 고쳐지진 않겠지.

"근데 이건 뭐에요?"

지수는 내 앞에 놓여있는 물건들을 보며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길쭉한 창 한 자루와, 둥근 링 다섯 개가 바닥에 늘어져있었다.

"이번 공략에서 쓸 물건들."

"창이나 다른 장비들은 그렇다 쳐도 이거랑 이건 뭐예요?"

"아, 이거?"

나는 은색으로 빛나는 링을 들어올렸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악세사리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건 훈련용 팔찌야."

"훈련용?"

능력치는 포인트만이 아니라, 훈련과 같은 행동을 통해서도 오른다.

단지 포인트에 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뿐.

"어. 이 보석으로 팔찌의 무게를 조절할 수 있거든."

나는 손바닥을 펼쳐 새빨간 보석을 보여주었다. 이 보석의 색깔은 무지개처럼 일곱 단계로 변하는데, 보라색으로 바꾸면 힘 A는 되어야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로 변한다.

이게 어디서 났냐면 답은 간단하다.

'캐쉬템은 언제나 옳지.'

DLC 상점 패키지란 가장 위쪽에 있던 성장 부스트 패키지에 들어있던 물건이다.

가격은 단돈 500포인트.

성장 부스트 패키지 하나에 팔찌는 하나만 들어있으니 총 2500포인트가 나간 셈이다.

"이걸 팔이나 다리에 착용하고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능력치가 올라가."

"아하."

지수는 그것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건 왜요? 훈련하시려고요?"

"아니."

"그럼?"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에게 사용하려고."

지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다섯 개나요?"

"아니 하나는 따로."

다른 팔찌를 조종하는 보석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너는 준비 다 끝냈어?"

"애초에 전 기본적인 방어구랑 이 무기뿐이니까요."

싱긋 웃으며 말한 지수는 양팔을 들어 한 바퀴 돌았다.

이미 다 준비를 끝낸 모양이다.

"그럼 슬슬 가보자."

"회장에게요?"

"그래."

현균에게 전해줄 물건도 있었다.

나는 금색으로 빛나는 창을 들어올렸다.

'코팅도 잘 된 것 같고.'

숏소드에 사용했던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회수한 뒤, 이 창에다 코팅했다.

현균과 일행이 준비하는 동안, 나 역시 다양한 장비를 공수해 왔다.

이 창도 그중 하나고.

"창도 쓸 줄 아시나 보네요."

"쓸 수 있긴 하지."

"흐음."

지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무기들을 다루는 법을 내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할 법하기도 했다.

'알려줄 수는 없지만.'

전생에 배웠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지금 뭐하고 계시려나.'

어련히 잘 살아계시긴 하겠지만, 조금 그리운 기분도 들었다.

"그럼 제일 잘 쓰는 무기는 뭐에요? 역시 검?"

"오늘은 왜 그리 질문이 많아?"

"그냥 생각난 김에 묻는 거예요."

지수는 뻔뻔하게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전의 지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없어."

"네?"

"이거다 싶은 무기가 없더라."

이것저것 익혀보긴 했지만 내 재능은 뭘 익히든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나마 재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라고 할까.

'별로 상관없지만.'

이기는 것과 살아남는데 재능은 필수 요소가 아니다.

더 유리한 조건일 뿐이지.

전생에도 난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만났다.

하지만 결국 최후에 살아남은 건 나였다.

인류 최강의 플레이어도 아니고.

인류 최고의 재능을 가진 천재도 아닌.

바로 내가.

'거기다 이번에는 그래도 전생과는 다르니.'

재능은 그대로지만, 내면이 다르다.

과거와 달리 나는 강해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최강'의 타이틀을 손에 쥐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지만 말이야.

"아, 여기 있었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현균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장비도 다 맞추셨군요."

"어쩌다보니 모인 포인트가 꽤 되거든."

그야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금 등급으로 클리어했을 테니 포인트가 꽤 되겠지.

'응?'

그렇게 말하는 현균의 뒤에 옵저버 하나가 빙빙 돌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다른 옵저버들과 이질적인 움직임이었다.

아마 GM이 아닌 신이 직접 조종하는 옵저버일 것이다.

'이쪽도 아바타가 된 모양이군.'

어떤 신을 선택했으려나.

현균의 성격상 악한 신은 아닐 거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어떤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지만 알면 어떤 신의 아바타인지 아는 건 간단하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도 준비가 다 끝난 건가요?"

"응, 그래서 슬슬 출발하자고 이야기하러 왔지."

씩 웃으며 말하는 현균은 겉은 태연해도 눈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저랑 지수는 아마 도중에 따로 움직일 수도 있어요."

"따로 움직인다고?"

"네, 할 일이 있거든요."

"으음."

현균은 조금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내게 의지하는 감이 없잖아 있는 그에게는 반가운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거."

그런 현균에게 옆에 놓아두었던 오리하르콘이 코팅된 창을 내밀었다.

"이건 왜?"

"보스와 만나게 되시면 이걸 건물 중앙에 꽂아주세요. 아마 바닥에 찍으면 쑥 들어갈 겁니다. 날은 위로 향하게 해주시고요."

오리하르콘으로 된 창인데다, 포인트로 능력치를 올렸을 현균이라면 대리석이나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라도 충분히 창을 박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래."

"그리고 만약 보스를 잡기 힘드시면, 제가 신호를 보낼 때 꽂아둔 창 근처로 유인해 주세요."

현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받은 창을 보았다.

"그럼 신호가 있어야...."

"그건 폰으로 연락드리죠."

이런 사태가 일어났지만 웃기게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이용이 가능했다.

GM이 그렇게 유도한데다, 아직은 스테이지로 변하지 않은 구역도 꽤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으음, 그래. 근데 하나만 묻자,"

"예."

"근데,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현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이다.

'단지, 설명하기 힘들다는 게 문제지.'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꽂아보면 알 겁니다."

***

"후우. 이제 시작인가."

동권은 방금 전 핸드폰을 통해 현균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제 막 준비를 끝내고 지하로 내려간다는 소식이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대체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무슨 준비를 일주일이나 해?"

그동안 이쪽은 세 번이나 도전했다.

문제는 세 번 다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다는 것.

'역시 녀석의 말대로일 확률이 높아.'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자신을 방해했던 망할 녀석, 김세한.

미노타우르스를 상대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있는 놈이라는 건 분명했다.

자신의 신도 녀석을 주의하라고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번이라면 녀석도 어찌할 수 없을 테지.'

김주원의 실력은 진짜다.

만약 동권 자신이 신의 아바타가 아니었다면 그의 부하가 되는 걸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에 보인 행동이 조금 걸리는데....'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물러서던 모습이 걸리지만 아마 자신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저기."

동권은 자신이 있는 방을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그쪽 대장에게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쪽에선 주원을 '대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전달하고 싶은 말이라니?"

"이번 퀘스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뭔데, 이야기해 봐."

"여기서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그쪽 대장과 만나게 해주시죠."

요 며칠 살펴본 결과 이 녀석은 귀가 무척이나 얇은 놈이다.

굳이 자신의 '스킬'을 쓸 필요도 없이 몇 마디만 하면 금방 넘어올 것이다.

"어차피 지금 공략은 무척이나 더디게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으음."

"적어도 이쪽에 해가 될 일은 아닙니다. 도리어 이쪽의 퀘스트에 큰 도움이 될 일이죠."

남자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만약 별것 아닌 말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대장은 곧 돌아올 테니, 그때 말을 해보도록 하지."

"예."

동권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원과 말할 기회만 얻는다면 설득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주원은 머리가 좋았고, 만약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해도 '스킬'을 사용하면 분명 설득할 수 있으리라.

'이번에야말로....'

보상을 독점하여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르게 앞서나갈 것이다.

'나는 선택받은 자니까.'

자신은 첫 번째 메인 퀘스트부터 신의 아바타가 된 존재였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랐다.

"...."

하지만 동권은 몰랐으리라.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

로메월드 타워의 지하는 마치 던전과 같은 구성이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매장. 그리고 어지러이 널려 있는 잡기들 틈에서 습격하는 몬스터들.

단순히 거리에서 습격하는 몬스터들만 봐왔던 사람들로선 쉽게 대응하기 힘들었다.

"역시 적당히 인원을 추려오길 잘했어."

현균은 손전등으로 주변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현재 일행의 숫자는 나와 지수를 제외하고 열 명 정도.

다른 인원들은 지하철역에서 대기 중이다.

"끼익!"

손전등에 비친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굳었다.

거대한 쥐의 모습을 한 몬스터였다.

"어딜!"

현균은 그 틈을 노려 검으로 몬스터의 등을 쑤셨다.

"끼에엑!"

"저쪽에도 있다!"

몬스터는 저마다 사방에서 급습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손전등의 불빛에 몸을 굳히고 무방비하게 공격을 얻어맞아야 했다.

"네 말대로 사람들마다 손전등을 챙겨 오길 잘했네."

"이런 어두운 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빛에 취약한 법이죠."

나는 발로 죽은 몬스터를 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이 거대한 쥐의 모습을 몬스터의 이름은 '검은 시궁쥐'로, 그 이름처럼 검은 털색을 가진 몬스터다.

고블린처럼 약해 빠진 몬스터였지만, 털이 검은데다 보통 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나타나다 보니 우습게 보면 큰 상처를 입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 몬스터의 약점은 바로 불빛.

빛을 직접적으로 눈에 쐬면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흡."

촤악!

나는 좌우에서 달려드는 검은 들쥐를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러 아랫배를 긁어냈다.

나는 굳이 손전등을 비추는 편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어서, 그냥 대충 죄다 검으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쓸데없이 쪽수만 많아가지곤... 응?'

두더지 잡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족족 죽이고 있자니 묘하게 주변이 조용했다.

어쩐지 나를 쳐다보는 기분이라,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근처에 있는 현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아니, 무슨 몬스터를 그렇게 쥐 잡듯이 죽여?"

"그럼 이게 쥐지 고양이입니까?"

"아니, 그냥 쥐가 아니잖아."

현균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잘 보면 보통 쥐랑 별다를 것도 없습니다. 조금 크고 털이 시커먼 것만 빼면."

"끙. 내가 말을 말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얼마쯤 왔죠?"

"아마 대충 절반쯤 왔을 거다. 지하가 총 6층인데 지금 3층까지 왔으니까."

그럼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나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 내가 받지 못한 연락이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우우웅.

"오우."

이런 완벽한 타이밍이 있을 수가.

설마 핸드폰을 꺼내기 무섭게 핸드폰이 울리다니.

'어디 보자....'

화면을 확인하자 문자 한통이 와 있었다.

발신자는 이민아.

문자의 내용은 무척이나 간략했다.

[우리 내려가용.]

# 17

017. 격의 차이(1)

주원은 현재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지난 일주일간 정상에 있는 보스를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략? 아니, 그건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체 그 괴물을 무슨 수로 잡는다는 말인가.

'바질리스크.'

로메 타워 정상을 차지한 괴물.

눈을 감고, 거대한 거체를 지면에 누운 채 자신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오만한 존재.

'도마뱀 주제에.'

녀석이 눈을 뜨면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빛을 쐰 존재는 돌이 되어버린다.

흔히 석화의 사안이라고 하지.

거기다 문제는 눈만이 아니다. 이쪽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강인한 비늘과,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공격은 주원에게 절망감을 심어줬다.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로 네놈 말이 맞는 거겠지?"

"예, 지금쯤이면 지하에 있는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였을까, 이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의 말을 따른 것은.

이미 주원의 무리는 일주일간 큰 피해를 봤기에 섣불리 옥상의 바질리스크에게 도전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지금 지하에서 싸우고 있다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습격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옥상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미끼. 진짜 보스는 지하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살근거리듯 이야기하는 동권의 말에 주원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옥상에 있는 괴물을 우리가 잡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돼.'

이미 이 게임이 얼마나 악질인지는 첫 번째 퀘스트에서 경험하지 않았던가.

인간들의 심리를 이용해 단순한 함정을 설치해 뒀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바질리스크는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동권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다른 패거리들의 의견도 대략 비슷했다. 처음에는 함정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금방 묻혔다.

"형님, 고것들이 옥상의 몬스터를 흔쾌히 내어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어쩐지 옥상의 몬스터를 흔쾌히 넘겨주더라니."

주원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게 다 자신의 오만이다. 그 송사리들이든, 옥상의 몬스터든 자신이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옥상의 몬스터는 너무 강했고, 송사리들은 자신을 속이고 지하로 내려갔다.

'가만두지 않겠다.'

주원은 한층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그의 뒤를 쫒아가던 동권은 속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멍청한 것들끼리 열심히 싸워봐라.'

일은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다.

"다 네 덕이다. 고맙다. 만약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 썩을 놈들에게 속고 있었겠지."

"아뇨. 오히려 저를 믿고 대장님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권의 옆에서 묵묵히 걸어가던 남자가 동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본래 동권이 머물던 방을 지키던 남자였다.

그가 별 의심 없이 주원에게 안내해 준 덕에 일이 막힘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거기다 제 편을 들어주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편이라고 할 것까지야. 내가 의견을 들어보자고 한 것이니 책임을 졌을 뿐이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지만, 워낙 험악한 인상인지라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았다.

'뭘 좋다고 웃어.'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고생이다.

동권에게는 행운이었던 점이지만.

"저기 있군."

주원이 손을 들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멍청한 놈들, 입구를 지키는 놈도 없다니."

"우리가 이곳에 올 걸 생각도 못한 모양이야?"

킬킬 거리며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장 내려가서 그 개놈들의 멱을 따주마."

주원의 눈이 붉게 빛났다.

"혹시 주변에 숨어 있는 놈이 있는지 봐라."

"아까부터 찾아봤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형님."

"그래?"

계단의 입구를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다니, 주원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령 자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했어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뒀어야 했다.

거기다 이상함을 느낀 건 주원뿐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없지?'

동권 역시 최소한 몇 명 정도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니.

"형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저희가 오면 다 죽을 텐데 보초를 세워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잡기 위해 모두 내려간 게 분명합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서있는 주원에게 한 남성이 말했다. 방금 전에 동권과 대화를 하던 자다.

"맞습니다, 행님. 어서 갑시다!"

"죽은 형제들을 생각하면 아주 열통이 터지는구만요."

그 남자의 말에 다른 이들의 움직임도 들끓었다.

이래서야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래, 확실히 그럴 수도 있어.'

주원이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어차피 현균과 그 무리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지하라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 보스 몬스터를 한시라도 빨리 잡는 거다.

주원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선 들어간다.

"좋아, 가자. 녀석들은 모조리 죽이는 거다!"

"오오!"

주원의 외침에 큰 소리로 환호하며 우르르 계단으로 몰려 들어갔다.

동권 역시 무리에 껴서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럴싸한 의견인 것 같기는 한데.'

동권은 힐끗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멍청한 줄로만 알았더니 생각도 조금 하는 건가?

'그리고....'

아까부터 가슴팍에 맴도는 묘한 불안감. 자신의 뒤에 따라오는 옵저버도 평온한 걸로 보아 자신의 신도 이 상황을 위기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묘하게 불안했다.

"음?"

어둑어둑한 지하계단을 내려온 주원은 주변을 살피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둡군. 손전등이라도 가져올걸 그랬어.'

서둘러 오다보니 미처 손전등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도 신의 아바타인 주원에게 이정도 어둠은 문제될 게 없었다.

어차피 몬스터들은 먼저 내려간 현균의 무리가 모조리 처치한 탓에 자신들은 걷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형님, 저거 사람 아닙니까?"

"...그런 것 같군."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 그곳에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보초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늦었어. 나는 좀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넌...."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사슬낫을 유유히 막아내던 녀석.

후에 동권에게 들은 바로는 이름은 김세한이라고 했다.

"미안한데, 이 아래로는 출입금지거든. 지금 얌전히 돌아간다면 못 본 척 해주지."

씩 웃으며 말하는 세한의 말에 주원의 인상이 찡그려졌고, 주변에서 옅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저거 미친놈 아냐?"

"뭐? 출입금지? 저게 지금 뒤지고 싶나."

그들의 반응도 당연하다.

옥상을 공략하며 꽤 많은 사람이 죽긴 했지만, 주원이 이끄는 무리는 족히 서른이 넘었다.

세한은 그런 그들 앞에서도 태연하게 떠들었다.

"너는 참 뻔하게 움직인다, 야."

"...실성한 거냐?"

거기다 명백히 배신한 동권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동권은 그런 세한의 모습에 입가를 꿈틀거렸다.

"뭘 믿고 나대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넌 이제 곧 죽는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애초에 난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뭐?"

"이민아."

나직한 세한의 목소리에 동권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움찔거렸다.

그리곤 옆은 빛이 흘러나오며 몸집이 단번에 줄어들었다.

스르륵.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전까지 자신의 곁에 있던 험악한 남성이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정말, 계속 시키기만 하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민아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냉큼 세한에게 돌아갔다.

물론, 그녀를 막는 자는 없었다.

작금의 상황을 쫒아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유도한 거거든. 기왕 하는 김에 다 한 번에 처리해 버리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그리고 이 녀석들도."

세한은 손가락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위에 있는 녀석까지."

동권은 술술 풀리던 일이 사실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순순히 자신을 주원에게 안내했던 것도, 여론이 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던 것도.

"저 계집애 때문이었나."

"그래. 내가 부탁 좀 했지."

자신의 배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일이었지만, 동권은 도리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로 유도해서 다 함께 죽자는 건가?"

"그러게, 이제 어떡할 거야?"

민아 역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세한에게 물었다.

사실 그다지 긴장한 기색은 없다.

민아의 변신 스킬을 사용하면 혼자 몸을 빼는 건 일도 아니다.

"뭘 어떡해? 그냥 싸우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만약 무슨 일 날 거 같으면 난 빠진다~."

"그러던가."

민아와 대화를 마친 세한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촉박한가.'

얼추 맞기는 했지만, 여유 시간이 좀 부족했다.

"가세요."

"응?"

일련의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서 못 내려가게 막고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굳이 두 명이 있을 필요는 없죠."

"...혼자서 한다고?"

"네."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지수의 모습에 세한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주변을 훑었다.

현재 주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술렁이고 있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덤벼올 거다.

'되려나?'

주원은 확실히 강자다.

지수와 거의 동등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으며 신에게 받은 강력한 스킬도 지니고 있으리라.

'좋아.'

세한은 결정했다.

"야, 우린 위로 올라간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꺅!"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민아를 세한은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아참, 저놈은 죽이지 마."

"저놈?"

"박동권."

"...노력할게요."

지수는 진심으로 싫은 티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어딜 가려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내줄 것 같으냐!"

갑자기 민아를 안아든 세한의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중에서 가장 빠른 건 단연 주원이었다.

쉬이익!!

어둠속에서 주원의 사슬낫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세한을 향해 날아왔다.

검을 들어 막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싸우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흡!"

순간적으로 허리를 낮추고 민아를 빙그르르 돌리며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세한은, 단번에 주원을 향해 접근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세한의 모습에 주원은 숨을 삼켰다.

'내가, 전혀 보지 못했다고?'

자신이 누군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닌 신의 아바타다. 그것도 하데스의 아바타다.

그런 자신이 지금 세한의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했다.

"지수가 혼자서 잘하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와주고 가는 게 좋겠지.

"하압!"

오른팔은 민아를 안고 있었기에 세한은 왼팔을 크게 뒤로 젖힌 후, 주원의 가슴팍을 강하게 후려쳤다.

퍼어억!

"크아아악!"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막은 주원이었지만, 세한의 주먹을 겨우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세한의 현재 능력치는 F랭크 올 카운터 스톱 상태.

현재 플레이어들의 능력치는 누구도 세한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부우웅!

"우와악!!"

주원의 거체가 뒤로 날아가며, 그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을 우르르 쓰러트렸다.

"헐."

그 어이없는 광경에 민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원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준인지는 몰랐다.

"저, 저거!"

"형님!"

경악한 건 민아뿐이 아니었다.

주원의 부하들 역시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돼."

신장만 2미터가 가까이 되는 주원을 장난감처럼 날려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부탁한다.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빼. 그리고 꼭 죽일 필요 없어,"

"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지수의 모습에 세한은 어쩐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의 지수와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착각인가?'

보통 때의 지수도 냉정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그때의 지수는 명백히 공포가 눈에 담겨 있었지만, 지금은....

세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어차피 차차 알게 되겠지.'

세한은 아마 그것이 지수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간다."

지수의 머리가 미약하게 끄덕여졌다.

아무튼 지금은 서둘러 옥상으로 향해야 했다. 현균은 지금쯤 한창 4층을 넘어 5층으로 진입 중일 거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켁!"

"으헉!"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들을 발로 꾹꾹 짓밟으며 세한은 빠르게 내달렸다.

옥상에 있는 괴물을 향해서.

# 18

018. 격의 차이(2)

동권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맨주먹으로 주원을 한방에 날려 버리다니.

"크으윽."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주원의 오른팔은 부러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도 신의 아바타인가?'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녀석에게선 '신의 아바타'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큭...."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거는 동권에게 주원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세상이 바뀌기 전에도, 바뀐 후에도 이런 적은 없었다.

"당장... 그 새끼를 잡아!"

아래로 내려가는 것보다 지금 위층으로 달려간 세한을 잡아 족치고 싶었다.

시뻘건 안광을 줄기줄기 뿌리며 소리치는 주원의 모습에 부하들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마, 맡겨주십시오. 형님!"

"그 건방진 놈을 당장...."

파각!

새빨간 피가 흩날렸다.

"어?"

덜그럭, 쿵. 쿵. 쿵.

인간의 살점이 붙어있는 쇳덩이가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러갔다.

세한을 향해 달려가던 이들의 발이 우뚝 멈췄다.

"...시발."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쓰러졌다. 머리가 사라진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무언가가 날아와 사람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이건 또 뭐야."

분노를 표출하며 소리치던 주원조차 얼굴을 굳히고 방금 전 날아온 쇳덩이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구르고 있는 쇳덩이는 다름아닌 철퇴였다. 그리고 그것을 한 여성이 천천히 집어 들고 있었다.

"저쪽이나."

허공에서 한번 휘둘러, 철퇴에 묻어있던 살점과 피를 털어낸 지수는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쪽이나. 어느 쪽이든 보낼 수 없어요."

보통 때라면 당장에 미친년이라고 욕하며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저건 인간인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자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흉악한 범죄자들이다.

개중에는 살인을 저지른 자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녀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전 사람을 죽이고 '불쾌함'을 표한다는 것이.

'저 눈이다.'

고요하고 불쾌함이 담긴 시선.

주원은 그 눈빛을 받는 순간 몸이 떨려오는 걸 느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저런 계집년 따위에게...!"

주원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멀쩡한 왼팔로 사슬낫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저년을 죽여!"

"으, 으아아아!"

자신들에 비하면 작디작은 여성.

그러나 그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주원의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서른이 넘는 남자들이 일제히 덤벼드니 지수도 역시 조금 곤란해졌다.

"이러면 피가 많이 튈 텐데."

지수는 자신의 옷을 힐끗 내려다봤다.

검은색 원피스라 다행이다.

콰지직!

"으아아아악!"

옆에서 달려드는 남성을 향해 지수가 철퇴를 휘둘렀다.

팔과 허리가 새우처럼 꺾이며 튕겨져 날아갔다.

"이년이!"

푸욱!

뒤에서 달려든 한 남성이 지수의 어깨에 칼을 쑤셨다.

'그럼 그렇지. 역시 착각일 뿐이야.'

어깨에 쑤신 칼을 손으로 비틀었다.

이걸로 이 계집애도 무력화될 게 분명했다.

그래, 그것이 남성의 착각이었다.

지수가 칼을 맞은 건, 굳이 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관절 부위만 맞지 않는다면.'

콰앙!

지수의 어깨에 칼을 꽂았던 남성의 머리가 터졌다. 지수의 무기는 둔기이기에, 어느 방향이건 상관없이 휘두를 수 있었다.

'좋아.'

푸슉.

어깨에 꽂힌 칼을 뽑자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칼에 상처 입은 자상은 몇 초가 지나기 전에 깔끔이 나았다.

'상황은 나에게 유리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매장 안이라 지수의 움직임을 쫒기 힘들며, 천살성 스킬의 특성상 다수와 싸울수록 힘이 강해진다.

거기에 가장 좋은 건 지금과 같은 난전이다.

많은 이들의 피를 뒤집어쓸수록 재생력이 올라가고 능력치에 보너스를 얻으니까.

적을 최대한 피가 많이 튀도록 상처 입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 살려, 쿠엑!"

철퇴를 검으로 막고 쓰러진 남성의 허리를 밟아서 부러트렸다.

우드득!

"아악! 팔이, 팔이!"

달려드는 남자의 팔을 비틀고 그대로 뽑아버렸다.

전신이 새빨간 피로 물들자, 지수의 신체 능력이 한층 상승했다.

'차라리 고블린 쪽이 어려울지도.'

오로지 악의만을 가진 체 덤벼드는 고블린과 달리, 인간은 너무나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 분노, 그리고 광기.

물론, 지수에겐 그다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이건, 악몽인가?"

동권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서른이나 되던 사람들이 벌써 반절이나 죽었다.

그 정도면 지칠 만도 한데, 지수의 행동은 오히려 쌩쌩했다

.

그건 지수가 천살성이기 때문이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죽어어어!!"

자신의 부하들이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가자 주원이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달려들었다.

마치 미친놈처럼 달려든 것 같지만 주원의 머릿속은 냉정했다.

'강하긴 하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야.'

아까 자신을 주먹 한 방으로 날려 보낸 세한과 달리, 지수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도리어 속도만 보자면 자신이 위였다.

'젠장, 오른팔만 멀쩡했어도.'

이렇게 빙빙 돌며 싸울 필요는 없었는데.

부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주원을 향해 지수는 반사적으로 철퇴를 휘둘렀다.

마치 조무래기를 상대하는 것 같은 행동이지만 주원이 노리던 바였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진 철퇴를 향해, 자신의 옆에서 달려들던 부하의 몸을 잡아끌었다.

"혀, 형님? 우아아악!"

퍼걱!

머리가 터져나가며 자욱한 피에 시선이 차단된 짧은 순간.

주원의 왼손은 허리에 메어둔 사슬낫을 붙잡았다.

"죽음의 선고."

하데스로부터 받은 필사의 스킬.

이 스킬에 명중하게 되면 1분 안에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

단지, 하루에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으며, 자신보다 격이 높은 존재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플레이어를 상대로는 무적의 능력이나 마찬가지.

'격의 차를 느끼며 죽어라.'

이 녀석은 신의 아바타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의 선고가 반드시 먹힐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신의 아바타인 자신에 비하면 그저 보잘 것 없는 존재다.

자신보다 분명히 격이 낮은 존재란 말이다.

그랬을 터인데.

우지직!

"?"

주원은 자신의 시야가 거꾸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런 병신 같은.'

깜박깜박 점멸하는 시선의 끝에 자신의 왼팔이 보였다. 사슬낫을 꽉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왼팔.

지수의 공격은 부하의 머리를 부수는 것에 모자라, 사슬낫을 휘두르던 주원의 왼팔을 후려쳤다.

거기에 천살성의 스킬로 가중된 추가 데미지는 주원의 왼팔을 말 그대로 뜯어서 날려 버렸다.

주원의 신체 또한 그 충격으로 허공으로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응?"

지수의 시선이 그제야 주원에게로 향했다.

아마 자신을 급습한 존재가 주원인지도 몰랐다는 반응이다.

"언제 맞았지?"

지수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쓰러진 주원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주원에 대한 감상은 고작 그뿐이었다.

'나야말로 보잘 것 없는 존재였나.'

격의 차.

주원은 난생처음 그것을 느끼며, 그렇게 죽었다.

***

"정말 그대로 두고 와도 괜찮아?"

"아마."

"아마라니, 그러면 안 되잖아!"

민아가 큰 소리로 소리쳤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지수와 나는 '파티'라는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뭣보다 한쪽 팔이 망가진 주원만으론 지수를 막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처음에 '금'등급으로 얻은 포인트를 모조리 능력치에 투자한데다가 혈천수라공까지 익히고 있다.

혈천수라공은 천살성의 특성을 극대화시켜 주는 효능을 지녔으니, 많은 피를 뒤집어쓰게 되면 지수의 능력치는 사실상 카운터 스톱 상태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주원이라는 놈은 대단한 놈이 아니다."

"요 일주일간 보니까 엄청 쎄 보이던데?"

"지금은 별로야."

주원이 정말 강해지는 건 몇 개의 스킬을 더 얻고 나서다.

지금쯤이면 딸랑 죽음의 선고나 하나 가지고 있을 텐데. 이건 스킬 사용하는 시간도 있어서 지수가 맞아줄 턱이 없었다.

괜히 사용하다간 뒤지지.

'만약 주원이 죽게 되면 더 씬은 사라지게 되나.'

여태까지와 달리 꽤나 큰 변화다.

이걸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솔직히 나도 모른다.

"근데 정말로 옥상으로 가는 거야?"

민아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옥상에 있는 괴물들은 그 흉악한 아저씨들이 잔뜩 덤벼들고도 상처 하나 못 입혔는데?"

"그야 그렇겠지."

"오빠가 생각보다 조금 쎈 건 알지만 무리 아냐?"

"혼자서라면."

나는 그렇게 말한 후, 계단에서 뒤따라 올라오는 민아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잖아."

"...나? 내가 무슨 도움이 되나? 싸움은 좀 할 줄 알지만 스킬은 변신뿐인데."

현재는 변신뿐이지.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이 문을 열면 정상인가?"

"맞아."

"우선 들어가기 전에 묻겠는데, 부탁한 건 제대로 했지?"

만약 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만 좀 더 안정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했어. 덕분에 얼마나 눈치 보면서 움직였는지 알아? 제대로 보상 안 주기만 해봐라."

"걱정 마. 확실하게 해줄 테니. 최소 포인트만 2천 포인트치 물건을 사주지. 거기에 두 번째 퀘스트 보상에 따라 보너스까지 지급."

"...2천? 거짓말 아니지."

"그렇다니까."

민아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백금등급 보상으로 받는 포인트가 고작 천 포인트인 걸 생각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됐다.

'고작 2천 포인트 정도야 기별도 안 가지.'

옥상에 있는 '센티넬'을 잡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남는 장사다.

나는 정상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열기 전, 민아에게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변신해."

"변신? 뭐로?"

"족제비."

꽤나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민아가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머리 다쳤어?"

"멀쩡하다."

"근데 왜 족제비야?"

"저기 안에 있는 녀석의 기술을 피하려면 족제비가 좋아. 안에 있는 녀석은 바질리스크라며?"

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그게 족제비랑 무슨 상관이야?"

"전승상의 약점인 거지."

정확히는 닭과 족제비.

바질리스크에는 여러 설화가 있지만 이 두 가지가 대표적인 약점이다.

"...별로 도움 안 될 거 같은데."

"변해 보면 알아. 가자."

이 세계는 게임인 만큼 '공략'이 중요하다. 바질리스크 역시 충분히 공략할 수 있도록 약점이 존재하는 보스다.

'다만 지금은 그걸 알아도 결코 이길 수 없는 보스라는 거지.'

전체적인 능력치도 아마 최소 C랭크 정도는 될 거다.

F랭크 카운터 스톱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못 이기는 능력치.

첫 번째 메인 퀘스트의 센티넬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걸 꺼낸 거라 능력치에 제한이 걸렸지만 두 번째 메인 퀘스트부터는 그런 것도 없을 것이다.

"변신 끝났냐?"

"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어깨로 하얀 족제비가 타고 올라왔다.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는 '닭'으로 변신해."

"큐우."

족제비의 작은 머리가 끄덕여졌다.

솔직히 조금 귀엽다.

"좋아, 그럼...."

이번엔 나라도 실수하면 죽는다.

나는 긴장으로 마음을 다 잡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와우."

사방이 아주 석상 투성이었다.

바질리스크의 능력인 '석화의 사안'에 당한 거겠지.

조금 먼 곳에는 쥐포가 되어 있는 시체도 보였다.

"킹...."

하얀 족제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역시 괜히 따라온 건 아닌지 고민하는 얼굴이다.

'바질리스크는 어딨지?'

천천히, 녀석이 눈을 뜨더라도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며 움직였다.

"녀석의 위치가 어딘지 알려줘."

"?!"

"괜찮아. 넌 석화의 사안에 닿아도 돌이 되지 않으니까."

"...."

족제비가 몸을 비틀며 고민하다,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리가 작은 족제비의 몸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컁."

족제비 민아는 얼마 가지도 않아 황급히 돌아왔다.

그리곤 작은 앞발로 연신 대각선 앞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제야 내가 바보 같았음을 깨달았다.

'하, 그런가. 하긴 몸을 숨길 필요도 없지.'

내가 몸을 숨기고 움직인 것에 무색하게, 녀석은 조금 떨어진 곳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멋진 경치가 보이는 창밖을 보면서.

「또 어리석은 자가 왔구나.」

뱀이 쉭쉭 거리는 소리가 섞이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은 나도 처음 보는 거다.

전생에는 이곳에 바질리스크가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지나쳤으니까.

역시, 이게 진짜 센티넬.

이름도 없던 미노타우르스와 달리 이 녀석은 진짜 센티넬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네임드 몬스터라는 것.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인간이여.」

수 미터는 되는 거대한 도마뱀이 느릿하게 머리를 움직였다.

「나의 이름은 오르가. 이 땅을 지켜보는 자로다.」

바질리스크 오르가.

그것이 두 번째 스테이지를 지배하는 센티넬의 이름이었다.

# 19

019. 격의 차이(3)

첫 번째 메인 퀘스트의 미노타우르스와는 달리, 두 번째 메인 퀘스트의 센티넬인 바질리스크는 본인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이게 정상이다.

센티넬이라는 건 그 스테이지에 정점이며 메인 퀘스트를 받은 시점에는 절대 잡을 수 없게 설정된 몬스터다.

보통은 네임드가 되겠지.

센티넬이 된 미노타우르스는 어디까지나 갑자기 등장한데다 편법에 불과했기에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거다.

「물러선다면 목숨은 빼앗지 않으마.」

흔히 뱀의 왕이라 불리는 몬스터지만, 말투만 들으면 용 같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몬스터에게도 통하는 말인가?

"그럴 수야 없지. 내버려 두면 나중에 귀찮아질 것 같거든."

「호오,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하는 말이다."

각 스테이지를 지배하는 센티넬들은 일정 메인 퀘스트가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방된다.

아무리 초기 메인 퀘스트에 나왔던 센티넬이라고 해도 최하 C급 네임드 이상의 몬스터다.

나중에 혼자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물론 보상을 남김없이 먹으려는 게 본 목적이긴 하지만.'

우선 나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범위를 살폈다.

녀석이 눈을 뜨게 되면, 석화의 사안이 발동된다. 그렇게 되면 그 눈에 비친 모든 생물체는 돌이 되어버리지.

돌려 말해서 녀석의 시야에 닿지 않는 범위라면 무사할 수 있다.

'말은 쉽다만....'

도마뱀은 사실 눈이 굉장히 좋은 생물이다.

시야각도 굉장히 넓고, 종류에 따라선 눈동자가 제각각 360도로 회전하는 종류도 있다.

다행히 석화의 사안은 정면으로만 발동되니 큰 문제는 아니지만 성가신 건 변하지 않는다.

'DLC상점에서 상태이상 면역의 비약만 팔았어도.'

안타깝게도 게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DLC상점에서 판매하지 않는다.

'그래도 바질리스크 자체는 전생에 수도 없이 잡아봤으니....'

오르가를 만난 건 처음이지만, '바질리스크'라는 족속은 전생에 수도 없이 죽였다.

분명 경험으로 어떻게든 될 거다.

"야."

나는 족제비 민아의 작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우선 내가 눈을 뜨도록 유도할 테니 넌 그동안 녀석에게 최대한 접근해."

"큐우?"

"그리고 석화의 사안이 발동되는 순간 눈알을 물어뜯어."

"...!"

"그렇게 어려운 거 아냐. 상처만 내면 돼. 그것만으로 석화의 사안의 발동을 막을 수 있거든."

족제비의 눈동자가 큼지막하게 커졌다. 작은 머리는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절대로 못 한다는 표시다.

응, 안 돼. 해야 돼.

"아까 말했잖아. 바질리스크의 약점은 족제비라고. 석화의 사안이든 뭐든 안 통한다니까?"

"큐큐!"

도저히 못 믿겠다는 기색이다.

그럼 믿을 수 있게 도와줘야지.

"읏차."

휙!

나는 족제비의 허리를 잡고 바질리스크가 있는 방향으로 휙 던졌다.

"키엥?!"

「음?」

괴상한 소리를 내며 족제비가 날아가 오르가의 눈이 번쩍 떠졌다.

파앗!

잿빛 섬광이 일어나며 족제비가 바닥을 굴렀다. 역시 돌이 된 기색은 없다.

그리고 나 역시 석화의 사안이 발동이 끝나자마자 반대쪽으로 달려 몸을 가렸다.

석화의 사안은 연속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니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

더불어 챙겨온 단검을 오르가의 눈으로 던졌다.

카앙!

「오. 눈을 맞추다니.」

녀석의 안구에 정확히 명중한 단검은, 조금의 상처도 주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역시 현재 내 능력치로는 석화의 사안을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 녀석을 데려온 거지.

"...큐."

석화의 사안이 발동되고, 자신이 돌로 변했으리라 생각했던 족제비 민아는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빠르게 움직였다.

「족제비인가? 그래봐야 소용없다. 전승상 약점인건 분명하나, 평범한 동물 따위가 상대가 될 리 없지.」

오르가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족제비를 향해 내리찍었다.

콰앙

「오?」

평범한 족제비였다면 피하지도 못하고 압사 당했겠지만, 민아가 변한 족제비는 플레이어의 능력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탓에 매서운 속도로 바질리스의 공격을 회피했다.

뭣보다 바질리스크 상대로는 족제비에게 기이한 버프가 걸린다.

그야, 게임이니까.

「오오, 오? 아니, 무슨?」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오르가가 재차 눈을 뜨며 석화의 사안을 발동했지만, 당연히 족제비인 민아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하아!"

그 틈을 노려 나 역시 엄폐물에서 빠져나와 오르가의 좌측으로 달려들었다.

탑의 정상은 그다지 넓지 않은 탓에 거대한 동체를 지닌 오르가가 재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콰창창!

녀석의 꼬리가 전망대의 유리를 죄다 박살 내며 나를 향해 휘둘러졌지만 나는 허리를 숙이며 회피했다.

"물어뜯어!"

동시에 나는 녀석의 다리에 손을 뻗었다. 공격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아무리 내가 현재 플레이어가 올릴 수 있는 능력치의 최대치까지 올려뒀다지만 오르가는 겨우 그 정도로는 백날 공격해 봐야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

철컥.

'좋아.'

녀석의 다리를 조이며 장착된 건 은빛의 링. 바로 훈련용 팔찌다.

「크오오!」

민아의 이빨이 오르가의 눈가를 스치자 오르가가 비명을 질렀다.

족제비의 이빨은 확실하게 석화의 사안을 찢었다.

"잘했어! 한쪽이면 충분해, 이쪽으로 와!"

"컁~!"

석화의 사안이 한쪽이 사라진 것으로 반경은 극히 축소됐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은, 녀석의 공격을 버티며 지정된 위치로 이동시키는 것.

「보통 족제비가 아니었구나!」

"당연하지. 서울 한복판에서 족제비를 어디서 구해 와?"

콰가가각!

녀석의 앞발이 내 좌측을 긁었다.

힘도 속도도 녀석이 앞섰지만 바질리스크의 패턴을 익히 알고 있는 탓에 어렵지 않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위험한데.'

기본 능력 차이가 워낙 심해서 큰 공격을 해오면 피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두두두두!

「이놈!」

"이제야 본성이 나오는 구나. 도마뱀이면 도마뱀다워야지."

「네놈은 결코 보내주지 않겠다!」

오르가의 움직임이 한층 격해졌다.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으리라.

녀석 석화의 사안뿐이 아니라 녀석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었을 거다.

현재 능력치 한계가 고작 F에 그치는 플레이어에게 일격을 받다니, 누가 본다면 웃음거리지.

콰콰쾅!

나는 최대한 상처 입은 눈이 있는 방향에서 빙빙 돌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석화의 사안과 시야 범위에서 벗어나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이잉.

'이런.'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현균이 지하에서 준비를 끝냈다는 뜻이다.

'그러면... 좋아, 오르가도 점점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으니.'

이제 방법을 바꿔야 될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좋아.'

나는 허공을 두드려 하나의 창을 열었다.

'그것'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함이다.

"야."

"컁?"

내 어깨에 매달려 있던 족제비가 또 뭐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냐? 신호를 주면... 이라고 했던 거."

족제비의 머리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다행히 잊지 않은 것 같다.

"그럼 가. 좀 떨어진 곳에서 내가 왼팔을 들어 올리면 최대한 크게 소리 질러."

"컁."

족제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내 어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부우웅!

"이크."

방심하기 무섭게 머리 위로 오르가의 꼬리가 지나갔다.

「또 무슨 꾀를 부리려는 모양이구나.」

"잔꾀를 부리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으니까."

「우습구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오르가는 쿵, 하고 크게 앞발을 내디뎠다. 녀석은 나를 천천히 몰아넣고 있었다.

「그런 족제비를 준비한 건 칭찬해 주지. 네놈이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능력치를 쌓았다는 것도 안다. 대체 어떻게 벌써 그 정도로 자신을 강화시켰는지 궁금하지...만!」

쿵, 쿵. 콰앙!!

녀석은 좌측으로 회전하는 나를 향해 고개를 꺾어 입을 쩍 벌리며 물어뜯으려 했지만 나는 급히 몸을 굴려 피했다.

「나는 가장 낮은 능력치가 D랭크다. 네놈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다.」

냉정을 되찾은 오르가가 보다 매섭고 빠르게 몸을 비틀며 양팔로 나를 향해 공격해 왔다.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르게.

「그게 '격의 차이'라는 거다.」

촤아악!

이건, 피할 수 없다.

아무리 경험으로 때운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녀석의 민첩은 아마 C랭크쯤 되겠지. F랭크인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따라잡힐 수밖에 없다.

내가 여태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건, 정상의 플로어가 녀석이 움직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며, 한쪽 눈을 다쳐 시야가 제한되고 냉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채울 수 없는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하지만.

"거 말 더럽게 많네."

나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

동물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바로, 닭의 울음소리다.

「컥?!」

족제비와 더불어 닭은 바질리스크의 전승상 약점 중 하나다.

약점인 이상, 녀석은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다.

「으오오오!」

콰콰쾅!!

그 울음소리를 듣자 오르가의 몸이 크게 비틀리며 내 옆을 굴렀다.

"이게 네가 말하는 그 격의 차이냐?"

「이놈....」

오르가는 부서진 잔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녀석의 시야가 닿지 않도록 빙빙 돌며 숏소드로 녀석의 비늘을 찔렀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오르가는 그런 나를 비웃듯이 말했다.

「내 약점을 안다 해도 내 비늘을 뚫고 공격할 정도로 넌 강하지 않다. 결국 이렇게 빙빙 돌아봐야 지쳐서 죽을 뿐이지.」

"알아, 인마."

실제로 내 체력은 이제 한계다.

'이제 슬슬 끝내야지.'

겨우 이 위치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 빙빙 돌면서 이동한 탓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이번엔 옵저버들도 꽤 있군.'

대략 다섯 개 정도.

이번 일이 퍼지면 더 늘어날 것이다. 물론, 바라던 바였다.

이젠 굳이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초반에 숨기려고 했던 건, 첫 퀘스트에서 지나친 능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퀘스트를 넘어가면 그런 걸로 문제를 삼기는 힘들어지리라.

"읏차."

나는 몸을 날려 녀석에게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피했다.

「이제 와서 도망칠 셈인가? 이렇게 거리가 다시 벌어져버리면 네놈에게 승산은 없다는 걸 알 텐데?」

"아니. 잠시 연락할 게 있어서."

「음?」

녀석은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그건 나를 경계해서라기 보단 건물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 정도 되는 몬스터가 날뛰면 건물에 무리가 가는 게 정상이다.

괜히 무리해서 날뛰다가 바닥이 부서지면, 도리어 내가 도망갈 틈을 만들어 주리라 생각했을 거다.

삑.

"이걸로 됐나."

나는 미리 적어두었던 문자를 현균에게 보냈다.

혹시 몰라 알림창을 통해 재차 위치를 확인했다.

아마 현균도 핸드폰의 진동을 느꼈을 거다. 만약, 듣지 못했다 해도 아까 '기초'는 마련되어 있으니 이 녀석을 죽이는 건 문제될 게 없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이쪽을 경계하는 오르가를 흘깃 보았다.

조금만 더 앞으로 오면 될 것 같았다.

"확실히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지."

「이제야 깨달았나? 그렇다 해도 늦었다.」

"아니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널 죽일 방법을 고민했다."

내겐 익숙한 일이다.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상대를 꺾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건.

게임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뭔가.

압도적인 능력치인가?

아니면 강력한 스킬인가.

물론 두 개 다 중요하다. 하지만 전생의 난 그 두 가지가 다른 이들보다 미흡했다.

최강이라 불리던 남자도 있었다.

최고의 천재라 찬사 받던 이도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인류는 나였다.

"난 경험이 많거든, 그리고 인내심도. 그 두 가지면 뭐든 가능하지."

어떤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헛소리를. 네놈은 이미 독안에 든 쥐다.」

쿵. 쿵. 쿵.

오르가는 이미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느긋하게 앞발을 내디디며 앞으로 걸었다.

그걸 기다렸다.

콰콰콰쾅!!

플로어의 중앙. 녀석이 그곳에 도달한 순간.

로메 타워가 폭발에 휩싸였다.

# 20

020. 격의 차이(4)

쿠궁, 쿠구구궁.

내딛고 있는 지면이 흔들렸다.

연속되는 폭음으로 건물의 유리창이 깨어져 나갔다.

오르가가 흔들리는 바닥에서 균형을 잡으며 세한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폭탄이다. 각층마다 폭탄을 설치해 뒀거든."

정확히는 플로어 중앙 바닥에.

세한의 부탁으로 민아가 지난 일주일간 설치한 폭탄이다.

==

점착 폭탄

원격으로 조종해 폭파시킬 수 있는 폭탄. 몬스터나 플레이어에겐 통하지 않는다.

==

DLC 상점에서 구매한 물건.

간단한 장애물을 파괴할 때 쓰이는 폭탄이지만 건물의 바닥 정도는 폭파시킬 수 있다.

오르가가 내딛고 있는 바닥은 아직 폭발하지 않았지만, 곧 폭발하게 될 것이다.

점차 가까워지는 폭음을 들으며 오르가는 세한을 비웃었다.

「멍청한 놈! 폭탄 따위로 내가 죽으리라 생각하나? 아니면 바닥으로 떨어트릴 생각인가. 어느 쪽이든 소용없다!」

"알고 있어. 네놈들을 지구의 법칙으로 죽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말하자면 지구의 모든 건 게임 속 오브젝트다. 몬스터는 오브젝트로는 죽일 수 없다.

지구의 법칙을 따르는 주제에, 그것으론 죽일 수 없다.

참 어이가 없는 설정이다.

반드시 게임의 요소가 관여해야지, 몬스터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둔한 넌 몰랐겠지만, 내가 그냥 빙빙 돌면서 헛짓거리한 건 아니거든."

「그게 무슨... 잠깐, 이건 뭐냐?!」

"훈련용 팔찌다. 편리하게도 사이즈도 조절되지."

오르가의 다리에는 은색 팔찌가 둘러져 있었다. 네 개의 다리에 각각 하나씩.

「이걸 왜?」

"왜냐고? 그냥 떨어트리면 아무래도 불안하거든. 위치가 변할 위험도 있고. 떨어지다가 도중에 힘이 부족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세한은 오르가의 다리에 훈련용 팔찌를 채웠다.

혹여나 부족한 위력을 채울 수 있도록.

"그거, 최대 10톤까지 늘어난다."

네 개니까 총합 40톤.

"직접 체험해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지."

세한이 주먹을 피자, 새빨간 보석이 반짝 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주황색으로 변하고, 이윽고 노란색으로 변했다.

「으, 으오오오?!」

쩌적, 쩌적.

오르가의 발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격의 차이는 개뿔."

세한은 피식 웃으며 이젠 보라색으로 변한 보석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앙!!

「네노오오옴!」

오르가의 울음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녀석이 내딛고 있던 지면이 폭탄으로 파괴되며 오르가의 몸이 폭탄으로 파괴된 구멍으로 추락했다.

로메월드타워의 높이는 500미터가 넘는다.

폭탄을 지면에 설치한건 그중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높이에서 떨어진 바질리스크의 동체가 나머지 바닥을 사정없이 부수며 떨어져 내렸다.

쾅! 쾅! 쾅! 쾅!

콘크리트도, 대리석도, 철근도.

「우오오오오!」

40톤이 넘는 괴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죽을 거 같으냐!'

오르가는 떨어지며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훈련용 팔찌의 무게는 바질리스크의 근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다 해도 난 죽지 않는다. 하지만 팔찌는 부서지겠지.'

반드시 죽인다. 자신을 비웃던 건방진 인간 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팔찌의 무게 관여한 탓에 떨어지게 되면 분명 오르가도 피해를 입을 것이다.

죽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녀석을 죽이고 말리라.

「저건...?」

철골을 꺾고 폭탄으로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찢어발기며 떨어지던 오르가의 눈에 반짝이는 뭔가가 들어왔다.

금색으로 빛나는, 날카로운 창.

마치 자신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박혀있는 날카로운 창의 칼날이 보였다.

「어째서?」

의문이 들었다. 왜 저곳에 창이 거꾸로 박혀 있는가.

'메인 퀘스트2까지 얻을 수 있는 무기 중에 내 비늘을 뚫을 수 있는 무기는 없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통 창이라면 오르가의 생각이 옳았다.

일반적으로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구할 수 있는 무기라고 해봐야 고블린을 잡고 얻을 수 있는 녹슨 무구나,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장비가 끝이다.

그런 무기로는 바질리스크의 비늘에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꽂혀 있는 그런 평범한 창이 아니었다.

푸우욱!!

비늘이 종잇장처럼 찢기며 창의 칼날이 오르가의 몸을 꿰뚫었다.

「말도... 안…돼....」

오리하르콘으로 코팅된 창은 오르가의 몸을 꿰뚫었음에도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콰콰쾅!!

대신 지면이 부서지고, 마침 옆에 있던 몬스터 하나가 천장을 부수며 떨어진 바질리스크에 깔려 짓뭉개졌다.

이 스테이지에 존재하던 모든 플레이어에게 팡파레가 울려 퍼진 건, 바로 그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