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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영지를 빼앗긴, 아니, 헌납하고 골방에 유폐된 카일에 대한 처분은 아이작에게 맡겨졌다.

채무에 관한 문제는 모두 불만족스럽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선 안에서 해결되었다. 가장 많이 얻은 것은 아이작이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은 바로 카일 헨드락이었다.

골방 앞에서 아이작과 르하르트는 카일에 대한 처분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카일 헨드락에 관한 처분은 어떻게 됩니까?"

"제국법으로는 어느 정도 처벌 된 셈이긴 합니다만... ."

아이작의 질문을 받은 르하르트는 고심했다.

카일에 대한 이단 혐의점은 이단심문관이 조사해 본바 희박한 것으로 밝혀졌고, 영주로서의 책임은 영지와 작위를 모두 상실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선에서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제국법에서 귀족은 영지를 소유하거나, 황제에게 직접 작위를 수여받은 명예 귀족만으로 한정한다. 작위 역시 영지에 따라붙어 오는 형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카일 헨드락은 이제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르하르트 입장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죽인 원수 같은 놈이지만, 다른 존재도 아니고 천사에게 조종당했다고 하니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묻죠. 죄를 지어 작위와 영지를 박탈당한 귀족은 보통 어떻게 됩니까?"

"처벌을 받았다면 관습적으로 성은 유지하되, 외진 곳에 유폐합니다. 다만 이단이나 반역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공을 세워 작위를 다시 획득할 기회를 주지요."

아무래도 귀족에 대해서는 관대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심심하면 전쟁과 싸움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나름 영향력과 무력을 가진 귀족은 유사시 끌어다 쓸 수 있는 전력이기 때문이다. 아이작 입장에서도 이사크레아 영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헨드락의 이름이 필요하긴 했다.

'카일은 쓰레기라지만 그 전대 영주는 나름 명망 높았다고 하니.'

아이작은 원하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카일 헨드락은 이곳, 이사크레아 수도원에 유폐하는 것으로 하죠. 이곳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죄 사함을 받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카일에게는 제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르하르트 백작님은 영지 행정구조 재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도원 영지라고는 해도 행정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요."

"예."

르하르트는 일이 끝난 뒤에도 본인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소수의 호위기사들만 대동한 채 남았다. 나머지 병력들은 르하르트 영지로 돌려보내고 파종기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리곤 마치 아이작의 충실한 추종자라도 된 것처럼 열심히 일을 보조했다.

아이작은 그것을 낯설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겼다. 이미 그의 상태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더 강하게 물들어가고 있군.'

쇠르에서 바르바리들과 헤사벨이 그랬던 것처럼, 르하르트와 그의 기사들은 아이작을 신봉하고 있었다.

아니, 숭배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들에게 어떤 전도나 설득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이작이 하는 말과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이 아이작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작이 교리를 전도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은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직 그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 아무리 빛의 법전의 교리인 척 꾸민 것이긴 해도 이단심문관 코앞에서 일을 벌일 배짱은 없었다.

아이작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솔데마저도 물들이는 것이었다.

'그러기엔 좀 더 많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지....'

이솔데가 아무리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 해도 개인적인 호감과 교리의 이질성은 별개의 문제다. 확실하게 물들이려면 그 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만 했다.

아이작은 르하르트가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골방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이번에 아이작이 영지를 차지하는 데 사실상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카일 헨드락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카일은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작은 카일과 마주 앉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카일."

"어렵지 않았습니다."

카일의 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대답했다.

***

헨드락 성채 공성전 당시.

지힐렛이 맡은 임무는 단순하면서도 어려웠다.

성 안에 먼저 잠입하여 동태를 파악하고 내부 구조를 전달할 것.

그리고 카일 헨드락을 발견 시 포획할 것.

아이작이 라엘라를 상대할 때 목격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입막음을 해도 되지만 카일은 살려두는 편이 이로웠다. 다행히 오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일을 비롯한 사용인들을 전부 가둬 두었기 때문에 목격자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지힐렛은 카일을 발견한 뒤 보호를 겸한 구속 조치를 해 두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때문에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카일이 지힐렛을 본 순간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단순히 말해, 백치가 되어 버렸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고 돌아온 아이작은 난감해했다. 지힐렛이 실수한 것도 아니고 단지 카일의 정신이 나약했을 뿐이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촉수나 하수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신적인 상처를 입을 정도로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솔직히 아이작은 산 채로 사람을 씹어먹고 정신을 조종하는 천사가 날뛰는 세계인데, 촉수 괴물 정도로 그렇게 정신적 상처를 받을 것까지 있나 싶었다. 이런 과도한 반응에는 약간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 또한 이름 없는 혼돈 특유의 권능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카일을 이대로 바보로 둘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영지를 차지한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기생충을 심어 그 내부를 차지하게 지시했다.

지힐렛이 카일의 가죽을 입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이단심문관이 그를 심문할 것을 생각하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기생충은 들키기에 작고 미약한 데다, 설령 들키더라도 버림패로 써도 괜찮았다.

다행히 기생충은 들키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뇌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 기능을 복구시켜, 정상적으로 말도 하고 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게 '카일'은 아니었지만.

멍청하게 군 죄의 대가치고는 가혹하긴 했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서 벌을 받았으면 길고 느린 파멸만 남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아이작은 이 땅을 차지할 생각이었으니까.

여튼 카일은 이제 아이작의 충실하고 가치 있는 하인이었다.

'한동안은 계속 내 신앙을 빨아먹긴 하겠지만, 영지를 비운 사이 다스릴 사람으로선 이보다 나을 수 없겠지....'

무능하든 어리석든, 어쨌든 간에 영지민들에게 익숙한 지도자는 중요하다. 선대 영주는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영지민들이 동요하지 않게 만들려면 익숙한 얼굴이 필요했다.

아이작은 카일에게 혼돈의 눈을 발동해 보았다.

[카일 헨드락(C)]

[직업: 무직]

[능력: 혼돈의 손길]

등급은 하찮았지만 어차피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파수견이다.

쓸데없이 똘똘할 필요도 없다.

아이작은 이제부터 이 영지를 이름 없는 혼돈의 본거지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카일."

"예, 말씀하십시오."

"너는 이제 이사크레아 수도원의 집사(執事)가 된다."

아이작은 과거 이 땅의 영주였던 카일에게 말을 이었다.

"이 영지를 최선을 다해 보존하고 다스리면서, 내 가르침을 퍼뜨린다. 앞으로 이곳을 찾아올 수도사든, 사제든, 성기사에게든, 모두."

"예. 알겠습니다."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이 될 것이다. 아직은 아이작의 세력이 미약하니까.

"그건 그렇고, 선대 영주인 리스헨 헨드락에 대해서는 뭔가 기억을 떠올린 게 있나?"

카일로서 능숙하게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기생충은 당연히 카일의 기억도 흡수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완전하지는 못해서 오래된 기억일수록 전후관계가 중구난방이거나 흐린 편이었다. 카일이 원래부터 멍청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었지만, 아이작은 선대 영주가 숨긴 비밀이 궁금했다.

"너무 오래전 기억은 필요 없어. 광산 폐쇄 이후 기억이면 된다."

"여전히 완전하지는 못합니다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일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 있긴 했습니다."

"뭐지?"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보여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눈을 이상하게 굴렸다. 눈알이 따로 노는 기괴한 모습에 아이작은 눈살을 찡그렸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눈꺼풀 아래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면서 작은 촉수 하나가 기어 나왔다. 카일의 뇌를 장악한 기생충이었다.

아이작은 그 촉수에 왼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왼손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순간, 플래시백 되듯 아이작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겪은 적 없는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리고 말았다. 적지 않은 분량의 기억이었지만 실제로는 순식간에 불과한, 말 그대로 아이작 스스로가 겪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체험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 아이작은 카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새로 얻은 기억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칼센 밀터? 이놈은 또 여기 왜 나와?'

81화. 탁란 (2)

아이작은 젊은 시절 카일의 시점으로 기억을 훑어봤다.

그는 선대 영주인 리스헨 헨드락과 칼센 밀터가 만나는 모습을 동경하는 감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칼센 밀터는 배교자가 아닌 영웅이자 성자였기 때문에 카일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칼센은 리스헨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카일은 스스로의 감정에 너무 몰입된 탓인지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기억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다만 바싹 긴장한 표정의 리스헨 헨드락이 새하얀 석판 비슷한 것을 들고 있는 것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칼센은 그 석판을 살펴보다가, 다시 리스헨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무슨 내용이지? 그리고 그 석판은....'

리스헨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니 석판은 아직 이 영지 안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이작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칼센이 신이 되려는 계획은 제법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으니, 당연히 귀족이나 권력자 중에서도 협력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스헨도 그중 하나였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뭐가 잘못돼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에게 정리당한 것일 수도 있겠군.'

아이작은 그 흰 석판에 대한 기억에서 생각을 뗄 수 없었다.

그게 뭔가 중요한 실마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

카일의 처분은 '빛의 법전에 귀의하여 평생 독신과 청빈을 선언'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영지를 소유했던 귀족이 수도원의 잡부가 되는 셈이니, 귀족에게 내려지는 처벌치고는 가혹한 편이어서 귀족들도 은연중에 꺼림칙함을 내비칠 정도였다.

하지만 어쨌든 교단은 만족했다.

어쨌든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는 것은 기정사실이니, 영지를 책임질 얼굴과 머리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일의 행동은 아주 모범적이었다.

"무지로 신도들을 괴롭혀 왔으니, 깨달음의 대가로 평생을 신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의 말에 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건방진 귀족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는 모범적인 처사지."

폐광 안.

후안 주교와 아이작은 폐광의 타천사를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타천사 주변에는 이단심문관과 사제들이 둘러놓은 봉인구와 금줄이 달려 있었다. 교단의 규율상 타천사에 함부로 손대거나 그 일부를 뜯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정 타거나 사악한 기운에 물들까 봐 그런 것이지만, 사실 유사시 뽑아서 교단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비밀리에 만들어진 교단의 성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타천사 일부는 이미 훼손된 흔적이 있었다.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인위적으로 캐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봉인 작업을 진행하는 사제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발견한 광부들이 있었으니 몰래 빼돌렸을지도 모르지요. 늘 교단이 먼저 타천사를 발견할 수는 없으니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차피 이제 나머지는 빼돌리지 못할 테니까요."

봉인 작업을 진행하는 사제는 직접 그 자리에서 타천사 일부를 캐내 봉인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봉인구는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 그건 타천사의 사악한 기운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이작의 질문을 받은 사제는 아이작의 질문이 기쁜 듯 대답했다. 마치 아이작의 말 한마디조차도 영광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손이 많이 가는 것 같지는 않군요?"

"하하, 대충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지요? 사실 보신 그대로입니다. 정말 제대로 작업하려면 세상의 화로 장인을 데려와야죠."

세상의 화로 장인은 북쪽 섬에 근거지를 둔 세상의 화로 교단의 사제들이다. 유능한 전사인 동시에 대장장이인 그들은 금속을 찰흙처럼 주무르며 온갖 것을 만들어 내기로 유명했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제의 태도를 이용해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며 타천사를 둘러싼 도구들의 효능을 알아보았다. 그러면서 타천사의 소재와 질감을 확인하다가 문득 지나가듯 물었다.

"혹시 이 정도 크기의... 타천사 조각으로 만들어진 석판이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이작이 말하는 것은 카일의 기억 속에서 본 선대 영주의 석판이었다. 아이작은 그 석판이 타천사로 만들어졌다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타천사는 성구를 만드는 중요한 소재고, 칼센이 그걸 이용해 뭔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손 모양을 본 사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글쎄요? 저는 봉인구 작업만 해봐서 잘 모르겠군요. 실제로 보면 용도 정도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사제는 이렇게 모호하게 말을 끝맺고 싶지 않았는지 머리를 쥐어 짜내 나름의 추측을 내놓았다.

"그래도 그런 모양에 타천사 조각으로 만들어진 석판이라면... 여명 석판 말씀하시는 걸까요?"

'여명 석판?'

아이작은 불현듯 가장 유명하면서도 기억 속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한 성물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 터무니없게 유명한 것이라서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던 것이다.

여명 석판은 빛의 법전의 선지자인 루앗딘이 화형대의 화염 속에서 들고나왔다는 석판이었다. 불타는 화염 속에서 빛의 법전의 전언을 옮겨 적었다는 석판에는 빛나는 글자들이 아로새겨져 있으며, 이 석판의 전언을 근거로 빛의 법전이 제대로 된 교단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아이작은 이 유명한 석판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아니, 그래도 여명 석판은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을 텐데, 진본일 리가 없어. 그렇다면 리스헨이 만들려고 했던 건....'

사본, 혹은 가본이다.

칼센은 신이 되기 위해 루앗딘이 보여 주었던 기적을 되풀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

아이작은 복잡한 기분 속에 봉인 작업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죽은 타천사지만, 한 번 더 봉인하는 절차를 거친 뒤 사제들은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봉인 절차는 끝났네. 성을 수도원으로 개조하기로 했으니 이제 이곳에 부정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은 막을 수 있겠군. 자네가 큰일을 했네. 붉은 살점의 선지자도 타천사에 이끌려서 온 것이 분명하니 같은 일을 막을 수 있겠지."

후안은 아이작을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천사를 물리친 성배기사가 지키는 수도원을 감히 누가 침탈하겠는가. 자네 어깨에 무거운 짐을 맡기게 되었네."

사실 아이작이 이제 할 일은 별거 없다. 후안은 아이작이 허울뿐인 수도원의 책임자가 될 것이며, 앞으로 계속 성배기사로서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하는 말은 그저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했다.

후안의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 땅에서 손을 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존경하는 주교님. 외람되지만 제가 짊어진 짐에 관해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카일에 대해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으나, 교단에서는 이번 일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일'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카일에 대한 처벌, 영지 처분, 귀족들과의 기싸움, 아이작을 성인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상징으로 만드는 것... 그 모든 것이 교단 입장에서는 애매모호한 형태로 끝이 났다.

특히 아이작이 델리아에게 자작 작위를 받아 황제파의 일원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불안 요인으로 남았다.

물론 아이작은 신실한 성배기사로서의 모습만을 보여 주었지만, 의심의 여지가 남은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해보게."

"이 땅에 교단을 위한 터를 잡기 위해 받아들인 선택이었으나, 삿된 자들과 타협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죄를 청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신이 지운 임무를 위해 떠나야 할 몸입니다."

아이작이 여정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것은 후안을 만족시켰다. 아이작이 위업을 세우면 세울수록 이름을 높이는 것은 빛의 법전이었다.

"훌륭한 뜻일세."

"하지만 제가 영지를 비운 사이 다시 삿된 자들이 교단을 위한 터를 넘볼까 우려됩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세워 기운을 억누르고...."

"외람되지만, 존경하는 주교님. 삿된 자들은 이교도나 배교자, 불신자만이 아니라 같은 신도들 안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이 영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탐욕스러운 갈등을 상기하여 보십시오."

귀족들을 암시하는 말에 후안은 입을 다물었다. 태연하게 델리아의 세력권에 들어가 그녀의 후원을 얻기로 했던 아이작은 이제 귀족들의 영향력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다시 이 영지를 노릴 것이라는 건가? 델리아 후작은 자신이 내건 조건을 만족시켰고, 채무는 모두 해소됐다. 그럴 명분이 없을 텐데."

"델리아 후작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후작의 힘으로 찍어눌렀을 뿐, 이번 원정으로 손해만 입고 돌아갔습니다."

솔직히 아이작은 자기들이 투자 실패를 해놓고 돈 내놓으라며 쳐들어오는 게 깡패랑 뭐가 다른 건가 싶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시대였다.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있으리라 예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시 또 채무를 요구하리라는 건가?"

"어찌 교단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손해를 갈음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이사크레아령은 가난한 땅입니다. 반역과 착취, 그릇된 통치로 피폐해진 상태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숭고한 여정을 지속하게 된다면...."

아이작은 모호하게 말을 흐리면서 슬며시 후안의 위기감을 조장했다. 후안은 뒷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영지 일부를 다시 처분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거군."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기껏 교단이 확보한 영토를, 혹은 타천사를 귀족들이 넘기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는 말에 후안은 눈살을 찡그렸다. 제국법상 교단은 기부받는 것 외에는 영토를 확보할 방법이 없다. 영지를 쥐어짜는 방법이야 잔뜩 있지만, 지금 아이작에게는 그럴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면 뭘 부탁이 뭔가? 자금 지원인가? 이미 적지 않은 돈을 수도원 건설에 보탰네만."

후안은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이작은 후안 뱃속에 그득한 욕심을 느꼈다. 애당초 후안 주교가 이번 사건에 개입한 것도 카일에게 로어커스 투자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돈 욕심에 달려온 귀족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다만 오던 도중 이교의 천사 등장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선순위가 달라졌을 뿐.

이번에 수도원 건설을 돕는 것도, 장기적으로 아이작이 이 영지를 다스리게 되면 훨씬 더 많은 기부금을 뜯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렇다면 아이작은 후안의 욕심을 살살 긁어서 필요한 것을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럴 리가요. 교단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교단의 영향력입니다."

"영향력?"

"돈은 괜찮습니다. 사제와 성기사들을 파견해주십시오. 그들의 가르침이 이 땅에 뿌리 내려 빈곤한 자들에게도 말씀이 전파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비록 삶은 가난할지언정 마음은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후안은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아이작의 말에 주름진 턱살을 긁었다. 사제 몇 명, 성기사 몇 명쯤이야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사크레아 영지가 회색 지대에 서게 되었으니, 사제들을 파견해서 영향력을 분명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괜찮은 생각이군. 그렇게 하겠네."

"감사합니다."

"내가 자네를 이 땅의 등대지기로 만들었는데 그 정도를 못 돕겠나. 교단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네."

후안은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생색을 냈다. 나중에 톡톡히 대가를 지불하라는 후안의 말에 아이작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후안은 대화를 끝내고 다시 폐광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는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것이다.

***

후안이 떠난 뒤 아이작은 그가 떠난 자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겸손하게 미소 짓던 표정은 찾을 수 없었다.

'좋아. 사제들과 성기사를 확보했군. 이들을 길들이는 것은 차근차근하고....'

아이작은 후안의 구상과 완전히 정반대의 구상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자신만의 기반이자 성역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자신이 성인으로 추대되기 직전이었다는 것까지 확인했고, 사제들과 성기사들 사이에서 자신이 얼마나 찬사의 대상인지도 보았다.

아이작은 후안이 보낼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자신을 따르도록 길들일 생각이었다.

종교적 광기에 찬 사람들이 역으로 어떻게 세뇌하기 쉬운지 아이작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익을 따르는 귀족이나 기사들이 조종하게 힘들었다.

'빛의 법전은 지금 자체적인 모순과 오류에 차 있지. 백제국 영향력 안에 있는 쇠르에 바르바리들이 출몰하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바르바리는 종교적 신념을 버린 사람들이다.

즉, 백제국에 바르바리들이 출몰한다는 것은 빛의 법전의 교리를 거부하고 살기로 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인 식용작물이 아니라 상품작물인 로어커스를 대거 키우는 광풍이 불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대거 늘어났다.

그 상황에서 교단조차도 투기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교단 상황이 난잡할지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이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흐름이 될 생각이었다.

새로운 교리 해석과 가르침을 내세우면서 이름 없는 혼돈을 빛의 법전 안에 침투시키고, 그 돈과 인재를 쪽쪽 빨아먹어 성장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내부 개혁, 나쁘게 말하자면... 기생충이 되는 계획이지.'

실제 종교의 역사 속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한때 개혁의 상징이었던 종교도 교세가 충분히 커지고 강성해지면 보수화된다. 그러면 다시 그 안에서 새로운 교리 해석과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분파가 태어나고 독립하게 된다.

로마 카톨릭이 그런 식으로 수많은 분파가 태어나고 교리 해석이 바뀌었다가 새로운 형태로 나뉘었다.

이쪽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엘릴은 과거 빛의 법전을 섬기던 대제국의 건국공신이었지만 분파해서 갈라졌고, 무희는 엘릴의 딸이었지만 그의 심장을 뽑아낸 뒤 달아나서 붉은 성배 클럽을 만들었다. 심지어 불사 교단조차 빛의 법전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혁 속에서 각 신앙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내부를 다지고 개혁을 진행했다.

물론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완전히 다른 신을 들여올 것이므로, 사실상 진짜 이단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하지만 모든 신앙들이 강건하게 자리 잡은 이 세계에서 아이작이 승리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더 강대한 신앙에게 빨대를 꽂아 힘을 흡수하는 것.

후안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 안에 꽂은 첫 빨대였다.

후안은 자신이 아이작에게 빨대를 꽂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빨리는 것은 그가 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아이작은 사제들이 봉인해 놓은 타천사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 기능과 약점, 위력까지 모두 파악해 버린 금줄은 아이작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할 것이다.

아이작은 석화된 타천사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것부터 처리해야겠군.'

82화. 탁란 (3)

아이작은 델리아에게도 접근해서 후안 때와 비슷한 논리로 이야기했다.

"후안 주교가 이곳에 사제 3명과 성기사 5명을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슬슬 이사크레아령을 떠날 준비를 하던 델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실제로 기적을 쓸 수 있는 사제들은 그 위상과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중에서도 후안 주교가 보내는 사제라면 정말 제대로 된 기적을 쓸 수 있는 사제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로 했으니 사제나 성기사를 보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보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거의 쇠르 정도 되는 대도시에나 파견할 법한 숫자인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많이? 여기 또 천사가 찾아온답디까?"

"이곳이 수도원 영지임을 확고히 해두고 싶은 것이겠지요."

델리아는 인상을 팍 쓰고 속으로 후안에 대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빛의 법전에 대한 신앙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게 곧 사제 계급에 대한 경의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델리아에게 후안이 벌이는 짓은 빤해 보였다.

'성배기사는 곧 숭고한 여정을 떠날 테니 그사이에 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해두겠다? 아이작을 따돌리고? 그 탐욕스러운 노인네가 할만한 짓이군.'

델리아는 상황을 이대로 두고 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작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당장 황제 파벌에 들어올지 어떨지는 몰라도, 나중이라도 황제의 세력에 들어온다면 그에게 영지가 있고 없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이사크레아 경, 혹시 영지에 필요한 게 있소? 신생 영지에는 필요한 것들이 많을 텐데."

델리아는 물론 신생 영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충분한 융자를 지원해줄 수 있소. 아주 좋은 조건으로."

황제의 그늘 아래서, 델리아는 많은 부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그냥 돈을 쥐여 줄 생각은 없었다. 돈을 주면 그냥 끝나 버리지만, 빚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걸 명목으로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델리아는 설령 아이작이 돈을 갚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그늘 아래에만 두면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갚지 못하기를 기대했다.

"융자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잘 아는 아이작은 일찌감치 거절했다. 수도원을 재건할 돈 외에는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델리아는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능숙한 상인처럼 말했다.

"그보다는 이사크레아 령이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당분간 세금을 면제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영지의 힘으로 자생할 수 있습니다."

제국의 모든 영토는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 세금이라는 것은 세리가 주민들을 통해 거두어 영주에게 넘기면, 영주는 다시 또 자신의 상급자에게로 일정 몫을 떼서 넘기고, 그 상급자도 다시 자신의 상급자에게 넘기는 식이었다. 영지마다 세율도 제멋대로고 규칙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작은 현재 델리아 리옹 후작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은 셈이므로, 세금을 거둘 권한은 델리아에게 있었다. 세금을 면제해 달라는 아이작의 말에 델리아는 한 방 맞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성배기사에게서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한 말이군.'

아이작이 신선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니다. 세금 내려 달라, 면제해 달라 징징대는 소리는 대영주인 델리아도 자주 듣는 소리였으니까. 다만 그 발언을 한 장본인이 소영주나 상인이 아니라 성배기사였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었다.

보통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빛의 법전 교단은 황실 못지않은 부를 누리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들어가는 필수적인 지출이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니 교단이 원하는 것은 보통 돈 그 자체지, 낼 일도 없는 세금에는 관심이 없었다.

델리아는 아이작이 세금 운운하는 것에서 그가 이미 준비된 영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사크레아령은 입지가 애매하니 일반적인 세율 규정을 적용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세금을 완전히 면해주는 것은 불가능하오. 이건 제국 신민의 의무니까."

"수도원 영지인데도 그렇습니까?"

"통치 주체가 수도원일 뿐, 엄연히 황제 폐하의 대리인인 내게서 받은 영지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광물세와 교역세라도 당분간 면제해주십시오. 이것들은 이사크레아 령의 주 수입원이니 이것만 면제해주셔도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타협안을 꺼내 들었다.

델리아는 다시 한번 아이작이 준비된 통치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이작에게 사제와 성기사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양보해 주긴 해야 했다. 하지만 세금을 아예 면제해 버리면 이 땅이 교단 영토임을 명시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지의 주 수입원은 탄광업이니, 그에 대한 광물세와 교역세만 면제해 주면 이 땅이 제국의 소유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었다.

아이작은 자연스럽게 델리아에게 명분을 챙겨 주면서 자기 몫의 실리도 찾아간 셈이었다.

"그 정도라면 괜찮소. 어디 보자, 향후 3년간 관련 세금을 면제해주는 걸로 하겠소. 나머지 조건은 추후 조정하는 것으로 합시다."

어차피 2년 뒤에 여명군이 결성된다. 그때면 종교적 광기가 기승을 부릴 테니 아이작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거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내 서기를 보내 내용을 문서로 정리하도록 하겠소.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지."

양쪽이 모두 만족스러운 거래를 하고, 델리아는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델리아는 말 고삐를 쥐고 출발하려던 중, 문득 아이작에게 물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19살입니다."

아이작은 일부러 나이를 높여서 말했다.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허, 보기보다 나이가 많군. 혹시 만나는 사람 있소?"

아이작은 델리아의 말에 잠시 얼어붙었다. 그의 표정에 델리아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엉뚱한 생각을 하는 표정이군. 경이 아무리 잘생겼다 한들 애인 삼을 생각은 없소. 나이 먹고 주책 부릴 필요 있겠소? 하지만 내 딸들은 그대 얼굴을 보면 좋아라 할 것 같군."

그녀는 찡긋 눈인사를 하면서 말을 출발시켰다.

"나중에 중앙으로 한번 오시오! 날 닮아 귀여운 딸들이 혼기가 꽉 찬 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뒤따르는 기사들 속에서도 덩치가 밀리지 않는 델리아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갔다.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할 뿐이었다.

***

'좋아. 생각 이상으로 순조롭게 허락받았다.'

아이작이 델리아에게서 광물세와 교역세를 면제받은 것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함도 있지만, 추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이작은 탄광을 재개발하면서 타천사의 일부를 빼돌려 팔 생각이었다. 타천사 조각이라면 기적의 힘을 담는 귀한 장비를 만들 수 있으니 눈 뒤집혀 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영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세금 장부는 그런 면에서 추측하고 들여다보기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FBI가 마약 조직을 수사할 때 괜히 세금 장부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지....'

아직 이 세계에 그 정도의 수사 테크닉은 없을 것 같지만, 영지 밖으로 나가는 물건의 유동량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상하게 여길 여지는 충분했다.

이걸로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에 베일을 두를 기초적인 준비를 마쳤다.

그다음 할 일은 쇠르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걸 왜 제가 해야 하는 거죠?"

이단심문관, 이솔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저를 감시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럼 여기 남아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야지, 편지 심부름이나 할 이유가 있나요?"

아이작은 씩 웃으며 두 통의 편지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먼저 설명하자면, 이 편지는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황금우상 상단이 비록 빛의 법전에 우호적이고 충실한 기부자이기는 하지만, 다른 신앙의 숭배자들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죠. 그런 자들에게 제가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이나 상대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신경 쓰이네요."

이솔데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이작에게 이단 혐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체류하는 것이므로, 그가 이교와 접촉한다면 확인하는 게 옳았다. 아이작은 두 번째 편지를 손으로 두드렸다.

"이건 쇠르에서 만난 망나니, 자클렛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바르바리 깡패집단 우두머리에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예?"

"...지금은 갱생해서 바른 생활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녀가 배교자였던 바르바리 출신에, 지금도 다른 바르바리들을 이끄는 집단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한테 편지를 보내는 거죠. 신경 쓰이지 않나요?"

"크윽... 신경 쓰여요."

"자, 그러면 제 옆에서 별 볼 일 없는 행정업무나 하는 걸 지켜보겠습니까, 아니면 의심스러운 성기사의 의심스러운 행보를 감시하고 확인하겠습니까?"

아이작의 논리가 완벽했기 때문에, 이솔데는 고분고분 편지 심부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야 당장 검열하더라도 결국 쇠르에 가서 상대들을 확인하고 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솔데는 떠나기 전 아이작에게 물었다.

"편지를 제가 읽어봐도 되나요?"

"이단심문관이 편지를 검열하겠다는데 빛의 법전의 하인인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다만 예의를 아신다면, 편지를 받는 당사자의 허락을 받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읽어도 상관없지만, 수치스러운 행동임을 알라는 말로 선택권을 맡겼다.

이솔데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 평범한 수사 과정이라면 허락 따위는 받지 않고 그냥 훔쳐서 읽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아이작이 숨기거나 빼돌린 게 아니라, 이솔데에게 직접 맡긴 것이다.

이 점이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만날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에게 묻지요. 하지만 거절해도 읽어볼 겁니다."

이솔데의 말에도 아이작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솔데가 가는 길에 편지를 뜯어봐도 상관없었다. 내용을 들키면 위험한 편지라면 애초에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라도 빨리 갔다 오겠지. 일주일 정도 걸리려나?'

아이작은 쇠르에서 이사크레아 영지까지 오기까지 열흘 가까이 걸렸다. 여러 명이 움직이기도 했고, 도중에 트롤 습격 같은 방해도 받았다. 하지만 이솔데는 단신이고 서두를 이유도 있으니,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들켜도 상관없는 내용이라면, 괜히 지힐렛이나 헤사벨을 시켜서 의심받는 것보다 그냥 맘 놓고 검열할 수 있게 던져 주는 편이 나았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으니 그사이에 일이 터지겠지?'

이솔데를 보낸 마지막 이유.

아이작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 본인은 그녀의 눈을 피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지만, 기다리는 누군가는 그렇지 못할 확률이 컸다. 분명 이단심문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릴 것이다.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어떻게 굴릴지 고민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

밤.

한 사내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의 흔적을 보고 흠칫했지만, 잔해를 넘어 동굴로 향했다.

동굴은 그대로 폐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는 빛의 법전 사제들이 봉인한 타천사 앞에 섰다.

하지만 수많은 봉인구와 금줄이 쳐진 모습에 사내는 한탄하듯 신음을 흘렸다. 벽 속에 박제된 타천사의 모습은, 마치 금줄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줄에 접근해 보려 해도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흠칫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중앙 귀족들 무리에 끼어서 온 사람 중 이교도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때 동굴 어둠 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화들짝 놀라 검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엉성하게 잡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허겁지겁 검을 줍는 사내의 머리 위로 비웃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에이단 베어베크라고 했나? 북부 상단 상인이라던."

회색 머리카락에 수염을 가진 사내, 에이단 베어베크는 초조한 눈빛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델리아와 후안이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그대로 마을에 체류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후안이 남기고 간 사제와 성기사들, 이솔데, 에이단이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교단과 황제의 권력 다툼보다 돈, 아니 영지를 받아 내야 한다고 가장 목소리 높이던 남자였다.

그러나 상인이라기엔 학자 같은 분위기가 풍겼으며,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학식과 깊이가 느껴졌었다. 몇몇 날카로운 발언들을 남겨 아이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여긴 왜 온 거지? 빌려준 돈을 다 받지 못해서 타천사라도 떼어 가기로 한 건가?"

아이작은 그의 목적을 짐짓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에이단은 그 미끼를 덥썩 물었다.

"...타천사 조각이라면 손해를 충분히 메울 수 있으니까...."

"아니지, 아니야."

아이작은 바로 부정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미소가 하얗게 두드러졌다.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에이단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이작이 꺼낸 것은 리스헨 헨드락이 만들고 칼센 밀터가 검토했던 바로 그 하얀 석판이었다.

"네가 찾고 있는 게 혹시 이건가?"

83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1)

리스헨이 숨긴 석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리스헨은 예상치 못하게 급사했고, 석판을 제대로 숨길 시간이 없었다. 석판은 은근히 찾기 쉬운 곳에 있었는데, 아이작은 석판을 책상 아래쪽에서 찾아냈다.

석판은 미완성 상태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런 힘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거 미완성 상태인 거 같은데, 여명 석판을 따라서 만든 거 맞지?"

에이단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이작이 석판을 움직이자 바로 눈동자가 쫓아가는 모습이 노골적일 만큼 속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왜 이 석판을 탐내는 건지 궁금했다.

'신이 될 만한 그릇은 아닌 거 같은데.'

칼센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신이 되려는 시도를 하기에 충분한 업적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신들의 도움까지 얻는다면 못 할 것도 없어 보였고.

하지만 눈앞의 남자, 에이단은 정말 평범한 상인처럼 보였다.

"이걸 가져다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말해봐."

"...."

역시나 에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작은 대답을 채근하는 대신 석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당장 내동댕이쳐 깨뜨리려는 듯한 모습에 에이단이 다급히 말했다.

"무명 성서! 그건 무명 성서입니다! 저희 의회에 필요해서 찾고 있었습니다!"

"의회?"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입을 열었다.

"너 소금 의회 신도냐?"

아홉 신앙 중 하나인 소금 의회.

한때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지금은 망국의 길을 걷고 끊임없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뱃사람들의 신앙이었다. 그들이 아홉 신앙 중 하나임에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작은 석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게 너희의 성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

에이단은 애타는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소금 의회에는 성서와 성물은 물론, 신전조차 거의 없다. 당연히 사제도 적고, 쓸 수 있는 기적도 한정적이다.

한때 잘나가던 그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자업자득인 역사가 있지만, 그래도 영광을 되찾고자 노력 중이라는 설정을 아이작은 떠올릴 수 있었다.

'무명 성서라....'

아이작은 석판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듣고 나자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있었다. 여명 석판이 빛의 법전의 전언을 기록했듯이, 여기에도 어떤 신의 전언이든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새기거나.

성서와 성물을 분실한 소금 의회는 잃어버린 신의 전언을 다시 적기 위해 무명 성서를 찾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칼센은 여기에 자기가 직접 경전을 적어서 신이 되려 한 거고. 그럴듯하군.'

국가의 시작은 법률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시작은 경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성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고 있겠지? 누가 리스헨 헨드락에게 협력했는지 말해봐. 아니, 누군지는 사실 알고 있어. 인위적으로 무명 성서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자들은 세상의 화로 장인뿐이지."

타천사를 흙 주무르듯 주물러서 원하는 것을 만들려면 신이 개입하거나, 아니면 세상의 화로 장인들이 개입해야 한다. 물론 무명 성서를 만든 다음 거기에 전언을 옮겨적는 것은 신이 할 일이지만.

에이단은 이제 어딘가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작은 시간 끌지 말라는 듯 턱짓했다.

"소금 의회 놈들은 어차피 거짓말 못 하잖아. 빨리 말해. 어차피 네가 아니라 세상의 화로 장인에게 용건이 있으니까."

소금 의회 신도들에게는 한 가지 유명한 특징이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이 역시도 성서를 잃어버린 그들의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

사실 아이작은 소금 의회가 성물을 찾건 성서를 찾건 관심 없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만능 대장장이인 세상의 화로 장인이었다.

그래도 에이단의 대답이 늦어지자 아이작은 모범적인 성기사인 척, 손에 든 루앗딘 열쇠에 열기를 피워 올렸다. 어둠 속에서 검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루앗딘 열쇠가 무명 성서 근처로 다가가자 에이단은 얕게 신음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작은 이제 당근을 던져 줄 때라고 생각하고 살살 타일렀다.

"화로 장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렇다. 내 목적은 성유물 회수와 괴물 퇴치라, 화로 장인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 비록 이교도라지만 화로 장인들은 존경받을만한 이들이지."

"부탁이 뭡니까?"

"네가 화로 장인이 아니라면 알 필요 없다."

"...세상의 화로 장인이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역시.'

이게 바로 아이작의 목적이었다.

세상에서 은둔한 화로 장인은, 그 본거지인 북쪽의 스반바르 군도까지 가지 않는 이상 찾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그 북쪽에서 독수공방하는 히키코모리들이 대륙에 들어와 있다면 반드시 붙잡아 둬야 했다. 타천사의 유해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로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의 열기를 꺼뜨렸다. 하지만 달궈진 검은 쉽게 식지 않고 은은한 주홍빛으로 남아 있었다.

에이단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발견했다. 루앗딘 열쇠에 비하면 가느다란 바늘이나 다름없는 검이었기에, 그는 고분고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화로 장인은 어디에 있지?"

"그게... 부탁이 뭔지 먼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작은 대답 대신 검이 반짝거리게끔 흔들어 보았다.

에이단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화로 장인은 함부로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가면 도망칠 겁니다."

"쉽게는 도망 못 칠걸."

"하지만 모르는 일이죠. 도망치게 되면 저도 다시는 못 만납니다. 그렇게 되느니 그냥 제게 의뢰를 하시죠."

"의뢰?"

소금 의회 신도들은 상인이자 뱃사람으로도 유명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특징 때문에 각광받는 중개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중립적인 위치에서 사람들을 연결해 주며 정직한 중개인으로서 나름의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화로 장인께서는 본인이 직접 의뢰인을 만나는 대신 저를 부려서 필요한 재료를 모으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합니다. 만약 의뢰를 받을 필요가 있다면 제가 대신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의뢰라는 건 대가를 받겠다는 거겠지?"

솔직히 목숨만 살려줘도 어디냐 싶겠지만, 소금 의회 신도들은 필사적이다. 그들이 이 '무명 석판'에 품는 기대는 보통의 것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에이단은 갈증 나는 눈으로 아이작이 든 석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아무리 작아도 교단 하나가 죽자고 달려드는 꼴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미리 선수를 치기로 했다.

"중개 하나 해주고 무명 성서를 달라고 하는 도둑놈 심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차근차근 신뢰와 대가를 쌓아가도록 하지."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힐긋 타천사에게로 눈을 돌렸다.

"원하는 게 타천사 아니었나?"

"...예, 사실 그것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무명 성서는 타천사로 만들어졌다.

물론 타천사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테고, 온갖 신들의 손길과 신성력, 재료들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베이스가 타천사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에이단도 이 봉인된 폐광에 숨어들어왔을 테고.

"좋아. 너희에게 타천사를 팔겠다."

"예?"

"적당한 가격에 타천사 유해의 일부를 팔 테니, 직접 만나자고 전해라. 하지만 내가 필요한 물건도 만들어줘야 해. 그러니까 내가 직접 화로 장인을 만나야 한다."

타천사를 팔겠다는 말에 에이단은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타천사를 발굴하는 것도 불경하다 여겨지는데 그걸 누구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팔아?

아이작은 에이단의 얼굴에 불신이 감도는 것을 보고 성큼성큼 걸어가 금줄을 손에 움켜쥐었다.

"아...!"

에이단의 경악성이 터진 순간 아이작은 금줄과 봉인구를 뚝뚝 끊어 버렸다. 이미 금줄의 약점을 모조리 파악한 데다 '신앙의 증명'이나 '심판의 검'조차 아이작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으니, 아무런 타격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금줄을 모조리 뜯어 버린 아이작은 타천사 날개 일부를 뚝 떼어내 에이단에게 던졌다.

"선불금이다."

들고 도망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금 의회 신도에게 계약은 신성한 것이다. 아니, 신성함을 넘어서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거래하려는 황금 우상과 달리, 소금 의회는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면 함부로 약속이나 계약을 하지 않았다.

에이단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타천사 조각을 쥐었다.

"만남을 주선해 보겠습니다."

에이단이 계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타천사를 구해오는 일이 그에게 목숨이 걸린 것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면 목숨이 걸릴 만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줄 생각이지만.'

다행히 거기까지 상황이 험악해지지는 않았다.

에이단은 타천사 조각을 소중하게 보자기에 감싸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동굴 밖으로 달려갔다.

***

에이단이 아무것도 뛰쳐나간 동굴의 어둠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던 헤사벨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쫓아갈까요?"

"아니."

괜히 추적자를 붙였다가 화로 장인이 도망치면 그게 더 곤란했다. 화로 장인은 그 능력이 출중한 만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극도로 폐쇄적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에이단이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놈 소금 의회의 신도잖아. 약속을 어길 리가 없지."

"소금 의회...."

헤사벨은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내륙국인 왈라이카에서는 뱃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적었다.

헤사벨 역시 이번에 아이작을 추적하기 전까지만 해도 왈라이카 안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소금 의회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본 수준이었다.

"그런데 소금 의회 신도랑 약속을 안 어기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아이작은 게임 속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헤사벨이 자신에게 '설정'을 묻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아이작에게 있어 소금 의회 신도라는 점은 '당연히'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왜냐면 게임 설정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소금 의회의 탄생 설화를 아우르는 서사시를 얘기해야 하는데?"

"많이 긴가요?"

아이작은 궁금하다는 헤사벨의 표정에 혀를 찼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입을 열었다.

갑자기 소금 의회가 세상의 화로와 무슨 관계인지 의아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금 의회는 원래 다른 이름의 신앙이었다. 일단 뱃사람들이라고 부르지. 뱃사람들은 바다 밑에 있는 도시의 어떤 고대신을 섬기는 집단이었다. 옛날에는 남쪽 바다를 지배할 정도로 강성했다더군."

아이작은 이 세계가 유럽 지도와 대략적으로나마 비슷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과거 소금 의회는 아프리카 북부와 섬들을 지배했던 카르타고 정도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뱃사람들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전해지는 종교가 되었다.

"저는 왜 들어본 적이 없죠?"

"아주 옛날이니까. 빛의 법전 교단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이다. 심지어 불사 교단은 물론이고 엘릴이나 붉은 성배 클럽, 세상의 화로 교단조차 없던 시절이군."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아홉 신앙은 전부 빛의 법전이 새롭게 규칙을 쓰기 시작한 뒤 나타난 신앙이다. 그 외에 있던 자잘한 고대신들은 전부 죽거나 사멸했고, 빛의 법전에 협력하거나 분파된, 혹은 발아래 엎드린 신앙만 살아남았다.

"여튼 그때 뱃사람들은 사실상 전성기를 누리는 세계의 패자나 다름없었지. 하지만 그 강대함 때문에 교만해진 뱃사람들 앞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변화요?"

"루앗딘이 나타났지."

화형대 속의 화염 속에서 '여명 석판', 이른바 빛의 법전을 들고 나타난 첫 번째 선지자. 그저 토속 신앙에 불과했던 빛의 법전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신앙으로 만들고, 마침내 승천해 첫 번째 천사가 된 으뜸 천사.

고대신들의 종말이 된 자가 나타난 것이다.

신들의 시대는 루앗딘의 등장 전후로 분류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때 루앗딘은 다른 고대신을 섬기는 제국에게 쫓기고 있었다. 화형대에 올라 불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세력은 미약했지. 결국 루앗딘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성지를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이 신화에서 언급되는 '성지'가 백제국이 그토록 수복하고 싶어하는 그 성지다.

지금은 흑제국의 치하에 점령당한 상태인.

"그렇게 무작정 서쪽으로 향하던 루앗딘은 바다를 맞닥뜨렸지. 그리고 그 당시의 바다의 지배자, 뱃사람들을 만났다. 루앗딘은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기로 했다. 하지만 소금 의회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소금 의회가 협조하지 않은 이유는 설정에서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돈을 더 받아 내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루앗딘을 잡으려는 세력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루앗딘이 불타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배가 상할까 봐서일 수도 있다.

루앗딘의 불꽃이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앗딘은 사흘을 기다렸지만, 뱃사람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구에 서 있는 루앗딘을 조롱하고 모욕했지. 그러자 루앗딘은 빛의 법전께 청원해 뱃사람들의 교만을 징벌했다."

"징벌요?"

"사흘 동안 해가 지지 않았다. 그러자 바다가 맹렬하게 뜨거워졌다. 끓어오르는 바다에 뱃사람들은 뒤늦게 후회하고 비명 지르고 애원했지만, 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작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침묵했다.

이 징벌이 정말 실현 가능한 기적일까? 그런 힘이 있다면 그냥 쫓는 세력과 맞서면 되지 않나?

뭐, 신화의 내용이란 게 모두 합리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때, 바다가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말라붙은 거대한 소금 사막뿐이었다. 강대했던 뱃사람들의 거대한 함대와 소금 사제들, 성유물, 바다 밑 도시들은 모조리 수백 미터 두께의 소금 사막 아래에 갇혀버렸지."

헤사벨은 듣기만 해도 몸의 피가 메마르는 기분을 느끼는 듯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루앗딘과 추종자들은 말라버린 소금 사막 위로 걸어갔다. 이후 살아남아 빛의 법전 교단을 세웠지. 하지만 뱃사람들은...."

아이작은 그 찬란했던 신앙이 어떻게 한순간에 몰락했는지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제국이 몰락한 이유는 약속을 단 한 번 어긴 것,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명맥이 끊기고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이후로 그들은 소금 의회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바꾸고, 망국(亡國)의 유산을 찾아 헤매고 있지. 잃어버린 경전을 되찾기 위해."

"그래서 약속을 못 어긴다는 거군요."

"교단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됐으니까. 사실을 숨길지언정, 입 밖에 냈으면 거짓말은 안 할 거다."

이건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다. 게임 내에서는 아예 거짓말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페널티로 적용되어 있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가지고 있었다.

'몰락해 가는 신앙의 후계자라는 우울한 설정이 좋았지... 그나저나 소금 의회와 세상의 화로 교단, 둘이 동시에 나타나다니. 이 동네는 무슨 마가 낀 건가?'

따지고 보면 이 영지에 빛의 법전과 붉은 성배, 소금 의회, 세상의 화로, 네 신앙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까지 포함하면 이름 없는 혼돈,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불사 교단까지 여섯.

아홉 신앙 중 여섯이나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머지 엘릴과 황금우상, 율칸은 중립이거나 고립주의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실상 모일 수 있는 신앙은 다 모인 거군. 역시 비밀이 드러나진 않았어도 암암리에 눈치채고 있던 건가? 아니면 새로운 신앙의 탄생을 이때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건가?'

84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2)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는 표면적으로 메이저한 플레이어 교단을 '아홉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고, 작중 NPC들도 아홉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이 고대의 야만이 물러나고,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된 이래, 세상을 지배하는 아홉 가지 규율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덟 신앙이다.

왜냐면 아홉 번째 신앙이었던 무언가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 신도들을 전부 죽여 버리는 역병을 퍼뜨리고는 스스로 자멸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름 없는 혼돈, 내 몸에 기생해 있는 그것 말이지....'

전 세계인의 1/3이 죽은 이 끔찍한 역병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번졌고, 그 토양에서 아홉 신앙 가운데 가장 어린 신앙인 불사 교단이 태어났다.

그렇게 이름 없는 혼돈은 오직 지성 없는 괴물만이 섬기는 몬스터 신앙이 되었다.

칼센은 아마도 그 이름뿐인 아홉 번째 신앙을 자신이 차지하려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신이 되는 데 실패했고, 13차 여명군의 계기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아이작은 불현듯 다시 '고대신 경험치설'을 떠올렸다.

'어라? 혹시 고대신을 떠먹여 주려던 게... 칼센인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칼센은 이미 배교한 상황이지만 단독으로 돌아다니면 헤사벨이나 아이작이 그런 것처럼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일일이 감지하기 어렵다. 고대신을 적극적으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 칼센의 협력자인 붉은 성배와 불사 교단이니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이러면 내가 칼센의 행보를 따라가고 있는 셈인데?'

아이작은 당혹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칼센도 혹시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았던 것일까?

하지만 게임의 내용을 떠올려 봐도 칼센은 촉수를 쓰거나 혼돈의 힘을 다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사 교단의 최종 보스가 된 칼센은 데스나이트에 가까웠다.

물론 신으로 승천하는 데 실패한 뒤 선택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칼센이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아이작이 이 몸에 빙의했을 때 촉수가 칼센을 집어삼키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칼센이 이 영지에서 새로운 신앙을 탄생시키려고 했다면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 다른 신앙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있을 테고. 화로 장인을 만나면 물어볼 게 더 생겼군.'

아이작은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큰 판을 벌여 보기로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미 그는 다른 신앙들을 이 판에 끼워 넣고 있었다.

판이 복잡하고 커질수록 조커의 힘은 강해진다.

아직 누구도 이름 없는 혼돈의 개입을 모르는 상황이니, 아이작은 조커 패가 되어 가장 큰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은 편지를 받아 들고 당황했다.

편지 배달인이 다름 아닌 이솔데였기 때문이었다.

이단심문관이 자신에게 전해 줄 편지가 있다고 했을 때에는 바싹 긴장해 얼어붙었다.

아무리 중립 신앙이라 해도 이교도인 그녀에게 이단심문관은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단심문관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만난 이솔데는 산뜻하고 발랄한 스무 살 미녀였다.

하지만 안심하던 것도 잠시, 편지를 본 그녀는 다시 얼어붙었다.

"아이작 성배기사님이 편지를요?"

"이제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이 되셨습니다. 헨드락 영지를 승계하셨거든요."

"허, 그새 그렇게까지...."

캐틀린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그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린 성배기사가 갑자기 영주가 되었다는데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음? 아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하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습니다. 헨드락 영지를 새로 승계받은 사람은 멍청이로 이미 소문났는데, 실례. 혹시 귀족 모욕이 기분 나쁘셨다면...."

"저는 이단심문관입니다. 귀족 모독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어쨌든 듣기로는 그 귀족 나으리 덕분에 영지 경영상태가 오락가락한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천사 퇴치라는 사건과 제가 아는 성배기사님의 수완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군요."

캐틀린은 천사 퇴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그에 대해선 이미 쇠르의 온 도시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의 도시에서 준엄한 꾸짖음으로 타락을 징벌하고 상인들을 구제한 바로 그 성배기사가 이젠 천사까지 물리치다니.

아이작의 명성은 이제 성인에 버금갈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교단에서 괜히 성인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캐틀린은 이미 거기서 놀랄 만큼 놀랐기 때문에 아이작이 영주가 되었다는 것 정도로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작이 세운 업적에 비하면 귀족이 되는 것 정도는 소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별 볼 일 없는 능력을 가지고도 귀족이 된 사람은 차고 넘치지만, 아이작은 오직 아이작만이 할 수 있는 업적을 세웠으니까.

'다만 이렇게 빠른 성공이라면... 순수한 신앙심과 운만으로는 이룬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로어커스 사태 당시 그녀가 볼 뻔했던 끔찍한 손해가 떠오른 것이다. 그때 아이작이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황금우상 상단 쇠르 지부의 기둥뿌리가 뽑힐 뻔했다.

'역시 그때 일은 우연이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이제 와서 억울하다거나 손해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작에게 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아이작은 크게 될 사람이었다.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야망과 운, 교활함까지 갖추고 있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어떤 위치까지 올라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장으로서, 채무관계로라도 인연을 터놓는 것이 좋았다.

돈으로 묶인 이상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편지는 안 읽어보십니까?"

"응? 아아, 예. 읽어봐야지요."

캐틀린의 생각이 길어지자 이솔데가 채근했다. 캐틀린은 편지를 읽기 전에 이솔데를 배웅하려다가 여전히 앉아 있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 닿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캐틀린은 뒤늦게서야 이솔데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 제가 편지 읽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그보다는 편지 내용이 궁금하군요."

이솔데는 당당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편지 내용을 알려 달라고 하는 말에 캐틀린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솔데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애당초 이단심문관은 개인의 사생활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허락을 구할 게 아니라 진작에 뜯어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틀린은 그런 이솔데의 모습이 제법 신선하게 느껴졌다.

'요즘 젊은 애들은 옛날처럼 음험하지 않은 모양이군.'

"음... 그럼 제가 읽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읽으신 뒤 원문도 보고 싶군요."

캐틀린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작도 이단심문관을 편지 배달부로 부려 먹은 시점에서 그 정도는 예상했겠지 싶었다.

캐틀린은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편지 내용은 별 수사 없이 담백했고 명료했기 때문에 읽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소 사무적이고 숫자가 잔뜩 적혀 있었지만, 캐틀린에게는 그런 숫자들이 더 익숙했다. 성배기사가 썼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건조한 내용이었다.

"벌써 다 읽으셨습니까?"

"음. 별 내용 없습니다. 저희 상단에 아이작 님의 계좌가 트여 있는데, 몇몇 물건을 구입해 보낼 것. 또 금화를 조금 인출해서 보내야 하고, 그 외는 몇 가지 사업을 제안하시는 내용이군요."

"사업이요?"

"예. 전임자와는 다르게 제대로 영주 노릇을 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캐틀린은 이솔데에게 편지를 넘겨주면서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이솔데는 설명을 듣고 편지도 봤지만 정말 말 그대로 건조한 사업 제안뿐이었다.

비밀을 숨기거나 의미심장한 암시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 그러면 저는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캐틀린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서둘러 일어났다. 이솔데는 어딘가 서두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약속이 있으십니까?"

"아뇨."

캐틀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상인에게는 약속보다 사업이 더 중요하지요. 역대급 제안을 받았으니 좀 서두르고 싶군요."

***

이솔데가 다음 만난 사람은 자클렛이었다.

하지만 근방 바르바리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자클렛은 이단심문관이 찾는다는 것을 알자마자 기겁해서 달아나 버렸다. 잡으러 온 게 아니라고 전해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빛의 법전의 교리를 위협하는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단심문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바르바리들은 어차피 구심점도 없고, 기적도 쓰고 천사를 부리는 신앙끼리의 대립이 훨씬 더 위협적이니까.

결국 이솔데는 점잖은 자리에서 만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새벽, 은신처에 숨어 쪽잠을 자던 자클렛은 깼을 때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이솔데를 발견했다. 애당초 일개 갱단 두목에 불과한 자클렛이 진심을 다하는 이단심문관을 따돌리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편지 내용을 전달했지만, 자클렛이 받은 내용은 캐틀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비대원으로 고용하고 싶다고?"

"예. 재주가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용도 책임지겠다고 하시는군요."

자클렛은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무릎 꿇으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편지 내용을 낱낱이 설명했다. 너무 자세하고 적극적으로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딱히 뭔가를 숨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한데.'

캐틀린은 황금우상 신앙을 믿고 있지만, 그래도 중립적인 위치에서 금과 물류로 도움을 준다. 하지만 바르바리는? 신앙인인 이솔데 눈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도의적인 입장에서 사람 취급은 해주지만, 솔직한 말로는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진 않은 사람들이었다.

신분이 천해서라거나 위험해서라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신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신앙이 없는 자들은,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이라고 믿는 미치광이, 오래전에 몰락한 고대신을 포기 못 한 야만인, 듣도 보도 못한 잡신을 섬기는 사교도, 혹은 어느 신앙에서도 안 받아줄 대죄를 저지르고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 평생 사후세계를 포기한 범죄자....

바르바리 태반이 이런 사람들이니 신앙인들이 바르바리를 멀리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아이작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바르바리들은 더 그런 쪽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겠지만, 이솔데의 생각이 이 시대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굳이 바르바리들을 끌어들인다는 건 무슨 의미지?'

아이작이 정말로 건전하고 숭고한 성배기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버림받고 방치된 바르바리들을 모아 참된 가르침을 주고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부족한 영지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솔데는 자신조차도 그 가정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이작은 그렇게 단순하고 순박한 사람이 아니다.

정말 전도가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수가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솔데는 자클렛에게 물었다.

"그러면 갈 건가?"

"예? 어, 음. 당연하죠. 바르바리들이야 용병 아니면 강도질로 떠도는 게 일상인데 어디 한군데 눌러앉아 먹고 살 방법만 마련해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요."

이솔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아이작이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뭔가를 하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누가 보채지 않아도 아이작은 그 해답을 보이겠지.

이솔데는 아이작이 어떤 기적을 보여 주려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이솔데에게 어떤 식으로 약을 팔아야 하려나....'

솔직히 이솔데에게 기적을 보여 주겠다고 한 것은 시간 벌기였다.

어떻게 약을 팔지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촉수를 보여 줄 수는 없다. 촉수에 후광을 두르고 리본을 감아 주고 예쁜 곰인형을 안겨 줘도, 촉수는... 촉수다.

촉수를 본 이솔데가 어떤 표정을 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솔데가 거슬리니까 죽여 버리자! 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이건 넘어야 할 관문이다. 교단 안에서 갑자기 부각되는 존재가 있다면 당연히 이단심문관이 내사에 들어간다. 더군다나 그게 성자 후보라면.

이 관문을 넘어서더라도 의심의 눈이 떨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 될 것이다.

'다행히 이솔데는 좋은 사람이라는 거지.'

물론 지금의 이단심문관들은 광신도라기보다 냉철한 수사조직에 가깝지만, 교조적인 분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정의를 믿어야 이단심문관이라는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솔데는 브란트 공작가라는 배경 덕분인지 광신적인 분위기에 물들지 않았다. 교단도 쉽게 압박하긴 힘든 듯했고, 아직도 순진한 걸 보아하니 정신적으로 힘든 수사는 맡기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그 점이 아이작이 공략할 포인트였다.

85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3)

이솔데도 이솔데지만, 소금 의회가 다시 접근하기 전까지 아이작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솔데, 소금 의회, 영지 경영. 어느 것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복잡한 문제처럼 보였지만 사실 하나로 묶여 있었다.

가장 많이 드러난 문제이자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영지가 황폐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황폐라 함은, 굉장히 다각적으로 발생해 있었다.

카일 헨드락은 그동안 로어커스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영지를 경영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로어커스 거래 수익이 훨씬 더 크니 영지 경영에 관심이 있었을 리가 없다. 알아보니 적당히 돈을 더 크게 벌면 아예 영지를 비워 두고 수도로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영지는 황폐해지고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 일어난 일들로 분위기가 뒤숭숭해 얼마 안 되는 밭뙈기도 파종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식량이 곧 바닥난다고?"

"예, 예에... 영주님."

마을 촌장인 촌로는 아이작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이작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지만, 계급으로든 신앙 때문이든 그는 감히 아이작과 눈을 맞출 수 없었다.

특히나 그는 아이작이 성벽 위에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는 것을 보기까지 했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아이작을 신의 화신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굶주림은 일개 촌부가 감히 신의 화신에게 말을 걸게 만들었다.

"봄철이 주릴 시기이기는 하지.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나?"

"원래 이 영지는 먹을 것이 많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하거나 가공품을 영주성에 납품하고, 대신 전 영주께서 식량을 풀어 주셨는데 이제 사냥도 잘되지 않아서...."

아이작은 무슨 상황인지 알았다. 이 영지가 식량을 수급할 방법은 외부에서 사들이는 것뿐이다. 작은 농지와 산에서 나는 작물과 동물이 있긴 했지만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로어커스 사태, 카일의 방만한 경영, 전쟁, 심지어 천사의 등장까지 합쳐져 상인들이 기피하는 곳이 된 것이다.

황금우상 상단의 캐틀린이 오면 해결될 문제지만 당장 주민들의 식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앞으로 늘어날 인구까지 고려하면 심각한 문제였다.

'어떤 형태로든 윗대가리들끼리 난리가 나면 제일 먼저 죽어 나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지.'

아이작은 일단 영주성에 남아 있는 식량을 풀어 주민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식솔이 대폭 줄었기 때문에 식량에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한 해를 버티기에는 부족했다.

다행히 이웃에 아이작의 충실한 신도가 되어 버린, 비옥한 영지를 가진 르하르트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기꺼이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르하르트의 신뢰는 아이작이 빛의 법전 성기사라고 믿는 데에서 나왔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의 숭배는 아이작 개인을 향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이작은 현재 이름 없는 혼돈 그 자체나 다름없으므로 서서히 르하르트의 신앙도 이름 없는 혼돈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

급한 불은 르하르트의 도움으로 끌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영지에서 생길 잡스러운 일들은 두고두고 아이작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문제가 식량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입에 넣을 것을 구하고 나니, 행정과 사법의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의 행정, 사법 체계는 아이작의 상식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가끔 보이는 오버테크놀러지 수준의 기술이야 신에 의한 기적이라고 친다면, 이 세계의 기술 수준은 중세와 비슷하다.

하지만 행정은 그 이하였다.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건가 싶은 수준에 의문을 품을 때면, 당연하다는 듯 '그 말'이 등장한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기도하라.'

모든 빈틈을 메꿔 주는 만능의 언어였다.

결국 문제가 생겨도 사제들이 파견되어 기적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니 더 발달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헨드락 영지도 관료들의 임기응변과 땜빵식 대처로 얼레벌레 굴러가고 있었다.

중세 영지에 다짜고짜 21세기식 행정을 쑤셔 넣지 않을 정도로는 상식인인 아이작은 일단 이 세상에 매뉴얼이라는 게 있는지부터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매뉴얼은 존재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영주의 목표는 농지를 넓히고, 인구를 늘리고, 외적을 방어하며, 법을 공평하게 이행하고, 빛의 법전 이름 아래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니라.'

원론적인 이야기뿐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일단 아이작은 지도부터 펼쳤다. 영지에 사는 주민들은 산에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야 고작 500여 명 정도로 영지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카일이 돈놀이에 집중하느라 주민 관리에 무관심했던 탓이다.

한 사람의 노동력도 귀중한 시기였다. 아이작은 먼저 호구 조사를 지시하고 지도를 새롭게 고쳤다. 성역의 효과 덕분에 지도의 어디가 맞고 틀린 지는 성안에서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영지 남동쪽에 커다란 수원지가 있는데, 거기서 내려온 물이 계곡을 만들고, 영지를 지나 북쪽 바다까지 흘러갔다. 북쪽에는 타천사가 매장된 폐광이 있었고, 서쪽에는 중앙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산사태로 붕괴한 이후 방치되고 있었다.

영지 자체는 풍경이 아름답지만 최근의 사태들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황폐해진 농지들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시급한 문제였다. 지금은 부양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많은 사람을 들일 예정이었다.

적어도 자급자족할 수준까지 만들지 않으면 곤란했다.

다만 영지 자체가 수량은 풍부하지만 평지가 많지 않아 작물을 키우기에는 불리했다.

아이작은 이런 지형에서 키우기 적당한 작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쪽 지방에서는 감자를 아직 안 먹던가.'

아이작이 수도원에서 지내던 당시 감자는 끼니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었다. 그런데 정작 게르토니아 제국에서 감자는 식용으로 잘 쓰이지 않는 편이었다. 어두운 땅 밑에서 자라는 뿌리 식물인 감자가 빛의 법전이 보기에는 불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작 아이작이 지내던 수도원에선 잘만 먹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괴한 논리였다. 하지만 변방의 수도원은 너무 궁핍하다. 그거라도 먹지 않았으면 수도사 절반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지내는 사제 놈들은 끼니때마다 식탁에 꼬박꼬박 흰 빵과 치즈, 고기가 올라오니 굳이 감자를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겠지....'

하지만 척박한 산간지방에서 감자만큼 키우기 좋은 작물은 없었다. 아이작은 주변에 감자가 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산 너머 밀렵꾼과 화전민들이 감자를 키우고 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보내 감자를 사 오고, 화전민들을 꼬드겨 영지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감자를 낯설어하는 주민들도 성배기사가 직접 키우고 먹는 것을 보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다.

'클리셰긴 하지만, 있는데 안 써먹을 이유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지 안에는 주민들이 떠난 덕분에 빈 땅이 많았다.

아이작은 그 빈 땅에 모조리 감자를 심을 수 있었다.

***

그다음은 파손된 성과 성벽을 보수하고 망가진 길들을 고치는 작업이었다.

산사태로 완전히 막힌 서쪽 길은 하루 이틀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포기했지만, 성만큼은 고쳐야 했다. 당장 먹고살 일이 급한 와중에, 그것도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영주성을 고쳐야 한다는 말에 주민들 사이에 두려움과 분노가 번졌다.

아이작이 저주를 퇴치했다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물론 감히 천사도 때려잡은 성배기사에게 대드는 주민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농사일만큼이나 성벽 보수도 중요하게 여겼다. 붉은 성배든, 불사 교단이든, 혹시 모르지만 빛의 법전이든, 여기서 음모에 개입했다면 언제고 다시 관여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때 아이작은 아슬아슬한 성벽 위에서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카일 헨드락이었다.

"저주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성을 보수해야 합니다. 만약 저주에 이끌린 몬스터가 쳐들어온다면 여러분들은 그 알량한 집 담벼락 뒤에 숨어 있을 겁니까? 성배기사님께서 다 무너져 가는 성안에서 지내도록 내버려 두다가 여러분이 필요할 때만 도와달라고 부를 겁니까?"

바로 그 무너져 가는 성을 만든 원인이 네 놈 아니냐고 카일에게 따지면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카일은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뇌를 세척당한 카일은 이후로 수수하기 이를 데 없는 포대자루 같은 옷만 입고, 아이작이 배포하기 시작한 '감자'만을 먹으며, 성안의 기도실에서만 잠을 청했다. 오만방자하고 멍청하다고 소문났던 '영주님'이 그렇게 돌변한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그가 정말 정신을 차렸다고, 성배기사님의 인도를 받아 성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길 정도였다.

"당장 먹고살 것은 성배기사님이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어려운 시기지만 사악한 이단의 신들이 우리의 삶을 계속 뒤흔들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성배기사님의 뜻을 따라 모두 이단 신앙에 맞섭시다!"

카일은 뻔뻔하게 그들을 선동하며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카일이 이런 처지가 된 것도, 영지가 피폐해진 것도 모두 '이단의 신' 때문이다.

책임은 붉은 성배에게 모두 돌리면서 '우리'라는 결속력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아이작'이라는 거인의 그늘 아래 의지하도록 만드는 목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영주였던 카일이 손수 돌을 나르며 복구 작업에 나서자, 사람들도 그의 말이 틀린 데가 없다고 여겨 작업에 동참했다. 영지 곳곳에 망가지고 방치됐던 임도(林道)들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카일이 기도를 올리는 대상은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인 아이작을 향한 것이며, 뇌 안에 거대한 벌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아이작은 순조롭게 공사와 농지 개척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법이군.'

당연히 카일의 행동은 아이작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까지는 일일이 지시할 수가 없었는데, 카일은 놀라울 정도로 잘 해냈다. 벌레의 지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원래 카일의 재능이 빛을 발할 기회가 없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사크레아 영지는 빠르게 황폐한 누더기를 벗고 있었다. 하지만 복구라 부르기에는 아직 한참 먼 상태였다. 문제는 계속 터질 테고 결국 세부 지침에 아이작이 손대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하나하나 신경 쓸 수는 없어.'

아이작은 이 영지를 먹기로 했을 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중요한 사건의 시발점이 될 이 땅을 무방비하게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칼센을 자신이 흡수한 시점에서 아이작이 아는 미래는 빗나가고 있었다.

'결국 여명군의 흐름 자체가 다르게 진행되겠지... 그때까지 힘을 키워야 하는데 영지에 계속 발목을 잡힐 수는 없지.'

다행히 대략적인 구도는 잡아 둔 상태였다. 카일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캐틀린의 황금우상 상단이 보급을, 자클렛의 바르바리 용병들이 치안을 담당하면 어느 정도 안정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사 교단은 반드시 뭔가 일을 저지를 테고, 빛의 법전은 계속 경계해야 하는 데다, 붉은 성배 또한 충분히 믿을 만한지 알 수 없으니까.

'뒷배가 필요해.'

오직 아이작만을 위한 뒷배.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수도원 깊은 지하실.

거대한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에서 아이작은 무명 석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칼센 밀터가 신이 되기 위한 방아쇠로 삼았으며, 대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제작에 개입했을지 모를 물건.

하지만 그것은 이제 주인과 방향성을 잃은 채 아이작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실 아이작은 무명 석판을 만지작거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내버려 두고만 있었다.

'함부로 쓰기에는... 너무 위험해.'

칼센 밀터가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무명 성서를 사용해 자신이 신의 반열에 오른다거나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주 티끌만큼.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져서 떠오르자마자 기각한 아이디어였다.

칼센 밀터가 실패한 길을 자신이 굳이 갈 필요는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건 둘째 문제였다.

아이작은 위협받지 않으면서 평안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신이 되어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든가 복수를 꿈꾼다든가 하는 생각을 했다면 애초에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목표는 아이작의 꿈과 거리가 멀다.

크고 위대한 존재일수록 책임질 것도 많아진다는 꺼림칙함도 있었다.

'다만....'

아이작은 무명 성서를 더듬으며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86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4)

이미 아이작은 촉수만 쳐도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아이작은 촉수로 고대신을 먹어 치우고 천사를 물리치고 성기사들과 뱀파이어들을 쓰러뜨렸다. 아이작이 스스로 단련한 것도 있지만 이름 없는 혼돈을 통해 얻은 밑바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더 강하게 끌어낼 수 있다면?

다른 교단처럼 의식을 치르고, 신도들을 모아 성가를 합창하고, 성물로 무장한 군대를 꾸리기 시작한다면? 그러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지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도.

'그래.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

아이작은 순간 '우리'라는 단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리'라니?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만한 사람이 있던가?

헤사벨이나 자클렛 같은 자들을 신도로 들이긴 했지만, 고용인과 피고용인에 가깝지 '우리'라고 할 만한 존재는 아니다.

아이작은 섬찟한 기분에 무명 석판에서 손을 뗐다. 순간 머리가 개이듯 석판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뭐야, 제기랄."

아이작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 냈다.

무명 석판은 사용하기 전까지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명 석판은 '사용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석판이라는 아주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밖으로 뛰쳐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건가? 아니야. 그건 내가 하는 생각이 아니었어.'

무명 성서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누군가 저 너머에서 아이작이 꺼내 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무명 성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작적으로 촉수를 꺼내 내리꽂았다.

같은 두께의 철판도 관통할 만한 일격이었지만 무명 성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패로 써도 될 정도의 강도였다.

그리고 촉수와 접촉한 순간 일련의 속삭임들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발 다시....'

순간 아이작의 눈에 이상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벌거벗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무리들, 아기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그 상처에서 촉수 괴물을 탄생시키는 남자... 섬뜩하고 구역질 나는 장면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뭐?'

아이작은 맥락을 알 수 없는 경고에 의아해하는 사이, 섬뜩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하고 역한 냄새가 성역 안을 메웠다. 생전 맡아 본 적 없는 기이한 냄새였다. 아이작은 냄새가 무명 성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무명 성서에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회색 구더기였다.

구더기는 무명 성서를 갉아먹은 것처럼 파고 나와 촉수 위로 올라탔다. 이내 무명 성서 위로 무수한 구더기 떼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구더기는 순식간에 고치를 틀고, 변태하고, 우화했다.

"이게 무슨...."

그와 동시에, 성역의 모퉁이 자리가 이상하게 일그러지면서 부풀기 시작했다.

'환각? 아니야. 진짜 공간이 일그러지는 건가?'

그 울렁거리는 공간 속에 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벌레가 지구는 물론 세상 어디서도 존재한 적 없는 기이한 형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아이작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 속에서.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는 괴물들 중에서 나이트 스토커라고 불리는 괴물이었다.

성역의 크기는 불과 20평방미터 남짓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 킬로미터 너머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듯 놈들의 모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촉수를 회수해서 놈들과 맞서려 했다.

쩌어억.

하지만 촉수는 회수되는 대신 날카로운 이빨과 가시를 드러내어 단숨에 무명 성서에 박아넣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촉수를 보면서 당황했지만 곧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무명 성서는 들썩이면서 마치 종이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촉수는 무명 성서가 '펼쳐지지 않도록' 봉쇄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석판이나 다름없던 성서가 종이처럼 팔랑거린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런 사실에 놀랄 틈 따위는 없었다. 아이작은 한 손이 봉인된 상태로 검을 뽑아 들었다.

부우우우웅!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오면서 나이트 스토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3m에 이르는 나이트 스토커가 셋이나 나타나자 숲에 둘러싸인 기분마저 들었다.

바아아아아! 네 장의 벌레 날개 아래로 말미잘 같은 몸뚱이가 돋아나 있었다. 그 아래로는 아이작의 촉수와 같은 이빨과 눈알이 돋은 촉수들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촉수들은 아이작의 촉수와 정확히 같은 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개...."

휘리리릭! 촉수 수십 가닥이 아이작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적의를 가진 그 움직임에 아이작은 급히 검을 휘둘렀다. 루앗딘 열쇠가 적의에 반응하듯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불타는 검이 촉수 몇 가닥을 손쉽게 베었다. 다행히 나이트 스토커의 촉수는 아이작의 촉수만큼 질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트 스토커들은 흘러나온 보랏빛 선혈에 분노하듯 더 거칠게 날갯짓했다.

비좁았던 성역은 어느새 광활한 황무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일종의 주술적 공간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나이트 스토커들은 원래 한밤중에 지나가는 먹잇감을 낚아채 허공에서 자기 뱃속으로 구겨 넣는 식으로 사냥한다. 이렇게 탁 트인 광활한 공간은 나이트 스토커에게 유리한 사냥터였다.

대신 아이작은 이 괴물들을 상대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즉시 그의 손에서 저 너머의 색채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먹물 같은, 어딘가는 악몽 같은 어둠이 번져갔지만, 그 어둠이 허공을 채울 때까지 기다릴 시간 따윈 없었다. 아이작은 제 팔을 감쌀 만큼의 색채가 번져 나가기 무섭게, 심연의 손아귀를 발동시켰다.

콰두두두두! 저 너머의 색채 속에서 튀어나온 몸통만 한 굵기의 촉수가 즉시 나이트 스토커 하나를 짓이겨 박살 냈다. 급히 불러낸 것이라 더 큰 것을 부를 수는 없었다.

놈들은 입인지 배인지 모를 부위로 뭐라고 소리쳤다.

"■■■ ■!"

난생 처음 듣는 기이한 언어였지만, 아이작은 이상하게도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배신자라고? 무슨 소리야?'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은 사실상의 대리인이었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는 이 괴물들이 반역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별로 부하로 들이고 싶은 외형은 아니었지만.

[이름 없는 혼돈이 이 벌레들을 즉시 없애길 원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 역시 동조하듯 같은 의지를 표명했다.

아이작은 어딘가 복잡한 사정에 얽힌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백여 가닥 가까운 촉수들이 자신의 살점을 노리고 날아드는 상황에선 복잡한 고민을 하기 힘들었다. 나이트 스토커들은 아이작을 필사적으로 공격했지만, 거대한 심연의 손아귀 아래 붙잡힌 놈들은 순식간에 짓이겨지고 뭉개졌다.

바아아아아!

나이트 스토커가 기묘한 날갯짓 소리를 냈다. 아이작은 그 날갯짓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주변에 내는 경고음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들은 정찰병에 불과했다.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지평선 너머에서, 하늘에서, 공간의 틈바귀에서, 모서리에서 섬뜩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바다가 넘치는 듯한 기세로 무언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저 황무지에 불과했던 공간 속에서 자갈이, 마른 풀잎이, 흘러가는 구름조차 기괴하게 비틀리고 있었다.

아이작의 눈이 무명 성서로 향했다.

'어쩔 수 없군.'

아이작은 무명 성서를 움켜쥐고 있는 촉수를 향해 강한 의지를 보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마치 동의를 구하듯 아이작에게 알림을 한번 보내고는, 촉수 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이때까지 주섬주섬 끌어모았던 막대한 신성력이 촉수 끝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무명 성서에 아이작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무명 성서를 사용하긴 했지만 아이작은 칼센 밀터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신이 된다거나 실패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자신에게는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신이 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빛의 법전에게서 여명 석판을 받아온 등대지기 루앗딘과 같은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이미 대리인이나 다름없으니... 사실상 나는 혼돈 촉수 버전 루앗딘이지.'

콰드드득, 콰드득.

촉수가 거칠게 상흔을 남길 때마다 무명 성서가 거칠게 요동치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그 대신, 아이작은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대해졌던 공간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명 성서는 이미 어떤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게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이작과 접촉한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신이 되는 것과 관계있는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무명 성서에는 아무런 주인도 없기 때문에 활짝 열려있는 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제 아이작이 열쇠지기가 되기로 한 것이다.

"■■■ ■■ ■■!"

달려오는 짐승 무리에게서 기괴한 방언이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에 아이작은 구역질을 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조금 특이한 괴물들이 달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였다. 기괴하고 악의적인 취향을 가진 무언가가 뒤틀린 형상들을 쥐어 짜내어 만든 생태계가 파도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것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명 성서에 아이작의 서명이 완성되었다.

쩌어어억.

촉수가 마침내 풀린 순간, 무명 성서가 펄럭이면서 그 첫 장을 드러냈다.

무명 성서로 인해 열린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이제 아이작 마음대로였다.

아이작의 코앞까지 괴물들이 들이닥친 순간, 그는 첫 장에 적힐 신의 말씀을 옮겨 담았다.

"닫혀라."

부풀어 올랐던 공간이 순식간에 줄어들면서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까드드드드득! 마치 광활한 지평선이 순식간에 좁아지고 벽이라도 세워진 것처럼 원래의 성역이 돌아왔다. 하지만 괴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괴물들은 좁아진 세계의 벽 안에서 압착되고 짓이겨지면서 소멸했다.

몇몇 성역 안에 뛰어드는 데 성공한 놈들도 벽에 겹치면서 토막 나 흩어졌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은 날개가 한 장만 잘린 나이트 스토커가 전부였다.

아이작은 빠르게 촉수를 휘둘러 나이트 스토커의 심장을 찔렀다. 날지도 못하고 비좁은 공간에 갇힌 나이트 스토커를 처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놈은 마지막까지 버둥거리면서 아이작을 향해 촉수를 허우적거렸다.

한밤중의 나이트 스토커 한 마리가 얼마나 악몽 같은지 알고 있는 아이작으로선 싱거운 결과였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미개발 지역으로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키퍼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의 괴물이었으니까.

'장소 탓도 있긴 하지만... 진짜 이름 없는 혼돈이 강하긴 하군.'

힘숨찐만 안 한다면 아이작은 성기사단 한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작은 마지막 남은 나이트 스토커가 촉수에 의해 착즙되어 바스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이트 스토커는 몸의 형체를 거의 잃은 와중에서 뭔가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 ■■■ ■...."

괴물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외치던 말이었다. 세세한 어휘는 다르고 비난이거나 애원, 격정적인 포효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 의미는 다 같았다.

아이작은 이번에도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발 다시 돌아와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87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5)

아이작은 이 괴물들이 말 비슷한 것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자신에게 애원하는, 혹은 원망하는 듯한 말을 했다는 것이.

'이름 없는 혼돈은 몬스터 신앙이라고 할 정도로 지금은 괴물들만 믿는 신앙인데... 그 괴물들에게 적대 받고 있다고?'

나이트 스토커가 하던 말과 반응을 볼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이름 없는 혼돈은 자기 신도뿐만 아니라 자기 신수와 권속들마저 버렸다. 그리고는 아이작에게 모든 힘을 몰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은 자기 이름을 아는 신도들을 전부 죽여 버렸지. 그래서 세상에서 잊히고 죽은 신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이름 없는 혼돈이라 불리게 된 거고....'

일종의 신화적인 자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름 없는 혼돈은 왜 자살했는가.

왜 백사병이라는 재앙을 퍼뜨려 전 세계 인구의 1/3을 지워 버린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가.

권속에 속한 괴물들마저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을 보면, 이름 없는 혼돈은 과거와 지금의 행적을 연결할 생각 따윈 전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아이작에게 다행인 동시에 아쉬운 점이었다.

엄연히 현대인인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 따위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좋든 싫든 그는 빛의 법전이 주도하는 질서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사시 촉수 괴물들이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흠, 어쩔 수 없지.'

아이작은 성역에 흩뿌려진 괴물들의 잔해를 살펴보았다. 성역 곳곳에 뻗은 혈관과 근육 가닥들은 바닥에 뿌려진 잔해를 모두 흡수했다. 하지만 놈들의 몸에서 나온 잔해 중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충만한 신성력.

이름 없는 혼돈에 속한 힘이었다.

아이작은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에 빠졌다. 당장 흡수할 수도, 내버려 두기에도 꺼림칙한 힘이었다. 어떻게든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때 아이작은 무명 성서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던 모습을 떠올렸다.

'벌레... 벌레라. 벌레라는 게 써먹기 나름이지.'

아이작은 어떻게 힘을 사용할지 결정하고는 무명 성서에 다시 손을 짚었다.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지만, 이전만큼 선명하지도 않고, 그를 장악하려는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수인(囚人)에 불과했다.

[이 의식을 발동하려면 경전의 이름을 정해야 합니다.]

[이 경전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아이작은 무명 성서가 경전이 된 계기와, 그리고 이름 없는 혼돈으로서 발휘하는 '의식'의 기원을 담아 이름을 정했다.

"이름 없는 벌레의 책."

[미완성 이름 없는 벌레의 책(EX+)가 제작되었습니다.]

'미완성?'

그러고 보니 이제 막 이름과 제목만 적은 상태다. 미완성인 게 당연했다.

이내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중심으로 성역에 가득 차 있던 신성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뭔가 형태를 갖추고 응어리지는가 싶더니, 이내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이작은 성역을 가득 채우던 신성력이 상당히 줄어든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성역의 감각을 통해 이사크레아 영지 전체에 벌어지는 일을 느낄 수 있었다.

***

기적의 징조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워낙에 넓은 지역에 걸쳐서, 느리게, 땅 아래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나이트 크롤러의 잔해에서 나온 신성력이 땅거죽 한 꺼풀 아래를 자극했다. 자극받은 지렁이와 구더기, 땅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정하고 삿되다 취급받는 벌레들이었다.

신의 기적을 입은 벌레들은 마치 단세포동물처럼 분열하고 창궐하며 땅 아래에서 무성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벌레들은 끊임없이 땅을 먹고 배설하며 이사크레아 영지의 얼마 안 되는 농토를 전에 없이 비옥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해충들도 있었다. 놈들은 기꺼이 지면으로 기어 올라왔다. 농장의 닭과 오리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강에 몸을 던지는 놈들도 있었다. 계곡의 물고기들이 전에 없이 굵어졌다.

아이작이 심었던 감자의 씨알도 더 굵어지고 들끓는 벌레들을 먹기 위해 새와 짐승들이 모였으며, 숲은 더 소란스러워졌다.

이사크레아 영지에 전보다 더 일찍, 그리고 풍성한 봄이 찾아들었다.

이 모든 과정은 유해조수가 창궐하거나 생태계가 붕괴하지 않도록, 섬세한 조율을 거쳐 이루어졌다. 가장 밑바닥 아래에 있는 것들을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땅 하나를 비옥하게 만드는 것은 충분했다.

변화가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극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전보다 살 만해졌다 정도로 느낄 뿐.

하지만 일주일 만에 돌아온 이솔데는 영지에 들어서자마자 바뀐 분위기에 당황했다.

'뭐지? 아무리 봄이라지만....'

봄에는 큰 변화가 시작되는 때지만 어느 마을을 가나 일관된 분위기가 있다. 봄철은 어느 마을이건 춘궁기를 앓기 마련이다. 전쟁과 가난을 겪은 이사크레아 영지는 올해 봄이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솔데가 마주치는 어떤 이사크레아 영지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없었다.

'길도 닦고, 성벽도 고쳤군. 그럴 여유까지 있었나?'

"허, 이 동네가 원래 이런 데였나?"

이솔데의 동행자로 온 자클렛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여기 와본 적 있나?"

"어, 음. 저희야 여기저기 방랑하는 몸이니 이 근처는 둘러본 적 있지요. 다만 영 뜯어먹을 게 없어 보이길래 그냥 지나쳐갔던 기억은 있습니다. 그때랑은 영 분위기가 다르군요."

이솔데는 자신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늘진 계곡 탓에 이른 봄까지도 녹지 않았던 눈은 자취를 감췄고, 계곡에는 물이 풍성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르고 빈약했던 나무는 어느새 모두 새파란 잎이 우거진 가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파종기에 불과한데도 적어도 굶주리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걱정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 정도면 성기사님을 믿어도 되겠군요. 와서 사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자클렛은 뒤에 따라올 바르바리들을 대신해서 출발한 선봉대 격이었다. 그녀가 이끄는 바르바리라고 해 봐야 백여 명 남짓하지만, 작은 영지에는 제법 큰 규모였다. 먹을 것 걱정이 없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캐틀린은 준비할 것이 많아 다소 늦게 출발하고 있었다. 쇠르 지부장인 그녀가 쇠르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권한을 이사크레아 영지에 부여할 생각인 듯했다.

이솔데는 이 두 사람이 이사크레아 영지에 자리 잡고 나면 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싶었다.

***

변화를 실시간으로 느끼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아이작이었다.

아직 기적의 행사는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고, 지금까지 일어난 변화보다 앞으로 일어날 변화가 컸다. 아이작은 성역에서 영지 전체를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만큼, 이름 없는 혼돈이 일으킨 기적이 일대의 생태계를 바꿀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반대의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었다.

'황폐한 계곡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반대도 가능하겠지....'

만약 아이작이 이 기적을 악한 의도로 사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면에서 온갖 독충과 해충이 끓어올라 메뚜기 떼 같이 휩쓸어버렸을 것이다. 살점 있는 것은 모두 잡아먹도록 명령하여 황무지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작은 어디에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아이작이 보기에 '무가치'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뭐 하러 황무지를 늘린단 말인가. 거길 자신이 먹는다면 모를까.

아이작은 문득 이름 없는 혼돈이 악신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전 세계 인구 1/3을 죽여버린 죄를 감히 변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촉수 괴물도 부리고,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며, 겸사겸사 잡아먹기도 하고...

아이작은 과거에도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들이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자기 신도들을 다 죽여버린 거지?'

떠오른 의문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잡생각에 빠지기에는 그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영지에 일어난 변화를 모두가 실감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아이작은 여전히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었고, 영지에 관행적으로 벌어지던 부조리도 일소했다. 몬스터가 출몰하면 직접 나가 사냥 혹은 포식을 하고, 사건이 벌어지면 혼돈의 눈으로 범인을 찾아냈다.

아이작이 영주로서 하는 행동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사제와 성기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나 사제들은 어린 성배기사인 아이작이 '마치 귀족처럼' 읽고 쓰기는 물론, 숫자 계산까지 능숙하게 한다는 것에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아이작의 영지 경영을 돕기 위해 파견된 사제는 자신보다도 빠르게 계산하는 아이작을 보고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간단한 수식을 계산했을 뿐이지만, 성기사들 중에서도 읽고 쓰기조차 잘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내심 이를 갈면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미개인들 같으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죄다 기도로 해결하기 때문인지 이 시대의 행정 시스템이란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적응해서 잘살고 있다지만 현대인인 아이작 보기에는 비효율, 비합리, 비이성 그 자체였다.

툭 건드리면 아이작이 애써 얻은 이 영지가 어린아이가 만든 모래성마냥 무너질 것처럼 보이니 함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아이작이 바쁜 이유도 대부분 이 때문이었다. 자신이 없어도 영지가 그럭저럭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서. 이것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정말, 지독하게 바빴다.

아이작이 전혀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맡기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자신이 없는 사이 영지가 어떻게 될지 뻔했다.

바로 그 중요한 예가 영지의 사법 체계였다.

"성배기사님."

아이작은 영주 겸 수도원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호칭은 성배기사였다. 그만큼 그의 정체성을 많이 차지하기도 했고, 그 권위가 영주나 수도원장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성배기사가 천사를 물리쳤다면.

"...또 재판입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기사 베르너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작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면서 업무를 보조하는 베르너는 후안 주교와 함께 찾아왔다가 이사크레아 영지에 남게 된 성기사 중 하나였다. 아이작과 함께 저주를 쫓다가 블러드 나이트에게 기습당해 중상을 입었던 바로 그 성기사이기도 했다.

후안이 직접 치료해 준 덕분에 몸은 금방 나았지만 옛날만큼 거동이 편하지는 않았다. 기적이라고는 해도 뼈를 붙게 하고 살을 아물게 할 뿐, 부상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 주진 않으니까.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가죽상들이 거래 때문에 들렀는데, 숙소에 머무는 사이 금전이 든 주머니가 사라졌다고 여관주인을 고발했습니다. 원래 여관주인이 사냥꾼들의 가죽을 맡아주고 중개해주는 식으로 거래해왔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맹세 서약은 했을 테고."

"예. 양쪽 다 자신의 결백을 증언했습니다."

아이작을 열받게 하는 바로 그 사법 시스템의 골 때리는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시기, 우습지만 재판이란 사제 앞에 가서 자신의 결백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사소한 선행으로 천국에 가지 않듯, 사소한 죄악으로 지옥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맹세는 다르다. 신앙을 걸고 맹세한 만큼 맹세 내용이 어떻든 간에, 어기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원님 재판이 따로 없지.'

88화. 시체들의 밤 (1)

교단의 권위는 바로 이 맹세 재판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제들도 사소한 일로 신의 이름을 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로는 재판을 받아 주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맹세를 하고도 양측이 전부 결백을 주장할 때다.

당연히 맹세를 어겼다고 그 자리에서 즉시 벼락이 떨어져 거짓말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사후세계가 매우 불안해질 뿐.

이 재판에서 분위기 때문에, 혹은 강압 때문에 맹세를 어겨서 바르바리가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사후세계보다 당장 현실의 안전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경우야 허다하니까.'

죽어서 갈 지옥이 무서워서 다들 착하게 살았다면 세상에 신앙이 아홉 개씩이나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제들 역시 둘 다 결백을 주장하면 난감해했다. 책 좀 읽고 논파 좀 잘한다고 추리까지 잘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분실된 액수가 큰 모양이군요."

"예. 이번에 가죽값으로 치를 돈 전부였다고...."

"맹세 서약 내용은?"

"가죽상 쪽은 분명히 돈을 가져왔다고 하고, 여관주인은 결단코 훔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 제삼자가 끼어있어서 양쪽 다 결백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천사를 물리친 대단한 성배기사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가봅시다."

아이작은 작성하던 서류를 덮어 두고 회랑으로 향했다.

***

홀에 도착하자 가죽상과 여관주인이 넙죽 엎드려 아이작에게 인사했다.

"일어나십시오."

사람들은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들은 뭔가 어쭙잖게 미사여구와 예의를 갖춰 아이작을 찬양하고 상대방을 비난하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이런 일로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아이작은 일부러 그늘진 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잠시 뒤 아이작이 한 사람을 지목하며 입을 열었다.

가죽상들 중 한 명이었다.

"거기 너, 이름이 뭐지?"

"하, 한스입니다."

아이작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떠올렸지만 제국에서 제일 흔한 이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한스가 여관 주인에게 가죽값을 치렀군. 여관 주인은 원래 주기로 한 가죽의 절반만 주기로 했고.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면, 나중에 한스만 다시 돌아와서 절반의 가죽을 독점하기로 한 거다. 한스와 여관주인, 양쪽 모두 체포해라."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한 결론이었다. 어쨌든 한스와 여관 주인, 양쪽 다 거래를 한 셈이니 도둑질은 아니라는 식으로 맹세 서약을 피한 것이다. 신용할 수 없는 동업자를 두고 있으면 가장 벌어지기 쉬운 사기 형태 중 하나였다. 동업자가 공금을 멋대로 유용해서 자신의 사재를 불리는 경우는 허다했으니까.

"그, 그런 저는 억울...."

"마, 말도 안 돼! 저는 그런 적 없...."

빡. 한스가 뭐라고 떠들기 무섭게 베르너가 성큼 다가가 무릎을 걷어찼다.

베르너는 무거운 중갑을 입고도 산을 뛰어 올라갈 수 있는 성기사다. 단숨에 한스의 무릎이 역방향으로 꺾였다.

한스가 무릎을 꿇자마자 베르너는 칼을 뽑아 그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칼끝은 목구멍에 간질간질하게 닿기 전에 멈춰 섰다.

"버러지 같은 놈. 맹세를 기만하려 한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성배기사님의 귀까지 더럽히려고 해? 죽여주마."

베르너가 칼을 멈춘 것은 단지 죄목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는 듯, 그는 정말로 칼을 꽂으려 했다. 아이작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만두십시오."

"하지만...."

"나머지는 제국법으로 처리할 일입니다. 기망으로 맹세를 회피하려 한 일은 교단이 처벌할 일이 아닙니다."

아이작의 말에 영지 경영을 위해 고용된 관료들과 참관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은 표정으로 아이작을 보았다. 사실 맹세 재판에서 맹세를 어겼다는 이유로 끔찍한 처벌을 당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특히 뒷배가 없는 하층민일수록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화풀이하는 칼이라도 어쨌든 눈 달린 사람이 휘두르는 거니까. 하지만 교단의 세력 우위 때문에 제국은 그런 일에 대해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다. 덕분에 제국민들이 마치 법 위에서 행동하는 듯한 교단에 가진 불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원님 재판 같은 것도 통하고 말이야.'

아이작이 보기에는 이 재판조차도 다 한심한 일이었다. 자신은 증인도 증언도 증거도 없이 판결을 내렸다. 혼돈의 눈을 통해 내막을 다 파악해서 내린 결론이니 정답이긴 했지만, 만약 아이작이 그냥 아무나 찍어서 범인이라고 몰아붙였다면 그렇게 결론이 났을 것이다.

베르너는 아이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거두었다. 한스는 비명도 못 지르고 끅끅거리며 역으로 꺾인 무릎만 감싸 쥐다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갔다. 원래 한스에게 화를 내야 할 가죽상들은 그러지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여관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없습니다. 제 죄를 전부 인정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쪽은 거래를 제안받은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가죽값은 전부 치른 걸로 해두지. 가죽은 계약대로 전부 넘기도록 하고, 받은 금액 또한 위로금 몫으로 전부를 돌려주도록 하겠다."

이건 아이작이 알기로 제국법에 없는 규정이었다.

제국법상 여관주인은 한스가 동업자를 상대로 사기 치려는 의도를 알았지만 모르는 척 거래에 응한 것뿐이기에 처벌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맹세 재판을 염두에 두고 눈속임을 하려 든 것은 분명했기에 교단 차원에서 벌해야 했다.

여관주인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렁설렁 정한 처벌 규정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사제들 중에서는 탄복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얼마나 현명하고 자비로우신가...."

"과연 빛의 법전께서 내리신 통찰력이시로다...."

'정신들 나갔군.'

아이작은 그 속삭임을 듣고 감탄하면서도 안도했다.

'슬슬 사제들 사이에 탄 독이 퍼지고 있나 보지?'

아이작이 생각에 빠진 사이 베르너가 다가왔다.

"이번 재판도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성배기사님. 과연 빛의 법전께서 내리신 성자다우셨습니다."

아이작은 아직 성자로 봉해지지도, 성자직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베르너는 그를 성자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르하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베르너 역시도 아이작의 열렬한 팬이었다. 르하르트처럼 아이작이 신화적인 위업을 세우는 것을 눈앞에서 보진 않았어도, 아이작은 이미 많은 성기사들의 귀감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이작은 그의 목숨을 구해 주기까지 했으니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아이작은 겸손하고 누구에게든 정중하게 대했으며, 귀족이 되었다고 갑작스레 콧대가 높아지지도 않았다. 모든 성기사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그걸 지키는 성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나, 신앙심이 깊은 성기사일수록 되려 교만함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베르너.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음. 별일은 아니지만 서부 산등성이에서 신원미상의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밀렵꾼들입니까?"

사실 아이작이 최근에 가장 많을 트러블을 빚고 있는 상대는 밀렵꾼들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은 기적을 벌일 때 유해조수가 꼬이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인간까지 배제할 수는 없었다. 사냥감들이 죄다 영지 근처로 몰려오자 밀렵꾼들이 마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하진 않다고 하는데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 혼쭐내는 걸로는 말을 들을 놈들이 아니니까요. 이번에는 아예 붙잡아 끌고 오겠습니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쫓아내기 전에 한번 물어나 봐주십시오. 바르바리여도 상관없으니 사냥을 하고 싶거든 영지에 와서 직접 신고를 하고 사냥을 하라고."

화전민이나 사냥꾼은 대부분 무신론자인 바르바리다. 대부분의 산지나 숲은 영주나 수도원 소유의 사냥터니, 거기서 사냥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범죄자가 되기 때문이다. 베르너는 아이작의 말에 당황한 듯했지만, 아이작의 '관대한' 처분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이 영지 경영 다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사상적 독'을 타는 일이었다.

***

'이분이시야말로 진짜 성자로다!'

아이작이 사제와 성기사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이 시기, 빛의 법전 사제들은 나태와 구태에 젖어 있었다.

당연히 처음 성직자가 될 때는 세상에 빛의 법전의 뜻을 전파하고 어둠을 걷어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제로서 부유한 삶을 누리고, 귀족들조차 굽신거리는 대우를 받다 보면 어느새 교만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과연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다른 사제들 모두 그렇게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단 고위층이 훨씬 더 타락한 모습을 보일 때면 저절로 눈을 감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로어커스 폭등으로 식량난이 벌어지든, 국경 분쟁으로 난민이 발생하든,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백성들이 납치당하든, 가뭄으로 여러 농경지가 초토화되든, 그들은 거들먹거리며 뒷수습만 하면 된다.

어쨌든 이 혼란한 세상에 구원을 베풀 수 있는 것은 기적의 매개체가 되는 자신들뿐이니까.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도' 기적은 허락되고 천국의 문은 열려있다. 그들이 바뀔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이름 높은 성배기사는 달랐다.

'어떻게 신의 이름으로 경고하지 않고 설득하는 자상함을 갖출 수 있지?'

'어째서 기적으로 몸을 강화하지 않고 스스로 체력을 단련하지?'

'어떻게 농경과 상거래, 행정 같은 천박한 문제에 해박하지?'

'어떻게 배교한 자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지?'

솔직히 아이작이 듣기에는 정신 나간 생각들이지만, 그들에게는 진지한 문제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가끔 듣는 사제들의 질문을 들을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리엣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대화할 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곳의 사제들은 이상할 정도로 평신도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후안 주교 문제일지도 모르겠군.'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니까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수도원 자체가 권력을 멀리하고 은거하는 수도승들만 모인 곳이라 그런 걸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런 그들에게 아이작이라는 존재는 신선하고 초심을 일깨워 주는 존재였다.

마치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본을 보이는 듯한 존재였다.

'미치겠군.'

사실, 아이작은 크게 노력한 것도 없었다.

그냥 현대인 기준에 맞춰서 말도 안 되는 짓을 안 하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편적 도덕 기준을 맞추며 자란 사람은 이 시대에선 성자에 가까운 듯했다.

물론 가끔 상대를 잡아먹는다는 버그 걸린 윤리 관념이 있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왼손에 버그 걸린 거니까 괜찮다... 라고 아이작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네필림의 타고난 매력은 여기서도 강하게 효과를 발휘하며 매혹하는 데 기간을 훨씬 단축시켰다. 물론 여기서 사로잡았다는 것은 꽤 강한 호감을 샀다는 정도이지, 르하르트나 헤사벨처럼 신도로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깊은 감정을 이끌어 내려면 좀 더 전통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바로 설교와 전도였다.

"오늘 아침 예배도 아이작 성배기사님께서 한 말씀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침 예배 시간, 한 사제가 아이작에게 부탁했다.

엄연히 예배의 절차와 규율이 정해져 있음에도 사제가 성기사에게 설교를 부탁한다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아이작의 권위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미소 지으며 설교를 시작했다.

89화. 시체들의 밤 (2)

"...그러니 빛께서 아무리 우리에게 든다 한들, 우리가 외면하고 고개 돌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장 빛과 가까운 자리에서 빛의 따뜻함을 느끼고 있지만, 그 빛은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죄인들은 누가 있습니까?"

"빛의 법전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눈을 뜨고 등불을 높이 들어 올리십시오! 빛의 법전께서 당신의 앞길을 비추고 있음에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열정적인 분위기 아래 아이작이 설교를 끝마쳤다.

예배를 들으러 온 것은 사제와 성기사들만이 아니었다. 성배기사가 하는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일반 주민들도 끼어 있었다. 심지어는 자클렛과 함께 온 바르바리도 일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작의 설교를 듣고 가장 열정적으로 반응한 청중이었다.

아이작은 너무 열정을 다해 연설한 나머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 와서 누굴 때려죽이고 포식하는 게 아니라 설교하고 전도하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군....'

다행히 아이작은 잘 해낼 수 있었다. 아니, 잘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포식하고 얻은 효과인 '붉은 예배' 특전 때문이었다.

[붉은 예배(A+)]

[대중으로부터의 호감도와 매력이 상승합니다. 호감도가 일정량 상승하면, 당신과 감정적 동조가 일어납니다.]

이 특전 효과 덕분에 아이작은 대충 그럴듯하게만 말해도 대중들의 호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연설해야 할지는 온전히 아이작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었지만, 쉽게 호응해 주는 청중을 상대한다면 초보 연설가라도 능숙하게 연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가진 의외의 재능에 놀라고 있었다.

'사이비 교주로서의 재능이라는 게 문제지만.'

솔직히 말해, 아이작이 하는 설교는 빛의 법전에 대한 설교가 아니었다.

교묘하게 아이작이 만든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가 담긴 설교였다.

당연히 사제나 성기사들이 듣기에는 다소 파격적이거나 도발적인 말이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막바지에 울거나 환호하는 등,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원래의 엄격한 설교 분위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 교회를 다닌 게 설마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사이비 성격이 짙은 교회였지만 열정적인 연설과 방언을 터뜨리는 신도들, 열광하는 분위기 같은 것을 끌어내는 데 참고할 수 있었다.

문제 삼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작이 사제가 아닌 성기사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바르바리조차 끼어 있는 '누구든' 들을 수 있는 예배 자리라는 특성 때문에 그냥저냥 넘어가는 듯했다.

그 사이,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귀에도 아이작만의 '사상적 독'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직 그들은 완전히 아이작의 편이라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교단으로 돌아가서 전통적인 예배와 전통적인 설교를 듣고 나면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저들이 아이작의 편이 되는 것은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

***

다만, 한 사람에게만큼은 이 독이 통했을지 아이작도 확신할 수 없었다.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성배기사님."

이솔데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이솔데는 지난 시간 동안 아이작이 하는 일에 참견하거나 훈수를 두는 대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작이 한 달 안에 기적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을 충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 한 달의 기안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단심문관님."

"그런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말씀 말이시죠?"

아이작은 뭘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알면서도 시침을 떼며 말했다.

"가장 빛과 가까운 자리에서 빛의 따뜻함을 느끼고 있지만, 그 빛은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죄인이라... 성도의 교황 성하와 주교들에 대한 은유로 들리는군요."

"등하맹인 말씀이시군요."

아이작이 대놓고 말하자 이솔데는 당황한 듯했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그렇게 부르는 분들이 있곤 하지요."

"혹시 그것 때문에 제가 심문을 받게 될까요?"

아이작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이솔데는 어째선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고 대답했다.

"교황 성하나 주교님에 대한 멸칭이 얼마나 풍부한지 알면 놀라실 겁니다, 성배기사님. 등하맹인정도는 예의 바른 편이죠. 제가 그들을 다 잡으려 한다면 저는 이교도나 배교자들을 잡을 시간이 부족해지겠죠."

하지만 그녀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공개적으로, 가르치듯 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작은 그녀의 의도를 깨닫고 조금 놀랐다. 이솔데에게도 붉은 예배의 효과가 통하나?

"걱정되시나 보군요?"

"...솔직히 조금 통쾌했다고밖에 말씀 못 드리겠군요. 하지만 누군가 문제 삼을지도 모릅니다. 사제와 성기사들은 후안 주교가 보낸 사람들인데, 그 뉘앙스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혹여 지원이라도 끊는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단심문관님."

사제와 성기사들은 아이작에게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고, 설령 후안 주교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그는 아이작을 잘라 낼 수 없었다. 아이작의 영향력을 부정하고 별일 아닌 양 취급하겠지.

전통적으로 성배기사란 누굴 죽이는 사람이지, 누굴 이끄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아이작은 전통적인 성배기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한 달이 되어가는군요."

아이작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솔데는 그가 말을 돌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성배기사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이 이솔데에게 기적을 보여 주고 증명받기로 한 시한이 한 달이었다. 물론 이솔데는 아이작이 한 달을 넘기더라도 재촉하지 않고 얼마든지 기다릴 예정이었다.

"그렇군요. 이 영지에 일어난 일만으로도 충분히 기적 같습니다만."

이솔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당신이 보고 싶었던 기적은 바로 이 마을에 피어난 사람들의 미소입니다' 같은 진부한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농담도."

이솔데는 아이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동안 아이작의 공개적인 행보를 거의 놓치지 않고 지켜봐 왔다. 확실히 이단심문관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아이작은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사제들조차 촛불을 밝히는 기적 정도는 발휘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였다.

"대단한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성배기사님. 그저 주변을 밝히는 정도여도 충분합니다. 권능을 허락받았다는 표식은 되니까요."

"그럼 만약 제가 기적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건 제가 신으로부터 권능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뜻이 될까요?"

"그건...."

이솔데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기적은 아이작이 이룬 업적 그 자체가 기적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작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촛불을 붙이거나 주변을 밝히는 기적 따위는 그저 요식에 불과하다.

이솔데는 타락하고 방탕한 사제조차도 어렵지 않게 초를 밝히는 기적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작이 촛불 하나 밝히지 못한다고, 그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걸까?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지만 그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기적 없이 천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믿기지 않는 일이니까요. 만약 성배기사님이 기적을 못 쓰신다고 해도 그게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남을 뿐이겠지요."

이단심문관은 의심병자 같은 집단이지만, 원래 내사 조직이란 의심병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더군다나 칼센 밀터 같은 정신 나간 배교자가 최근에 발생했었다면 더더욱.

아이작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저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지요. 당연히 기적을 사용했습니다."

"과연...."

이솔데는 환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는 신께서 허락하신 권능을 겨우 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삿되게 쓰고 싶진 않군요."

"아, 물론입니다."

신실한 성직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책 읽기 불편하다고 기적을 남용하는 사제들과는 다른 신실한 마음가짐에 이솔데는 솔직히 탄복했다.

"조만간 이단심문관님께도 제 기적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

아이작은 높은 피라미드 위에 있었다.

그는 노란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했으며, 구불구불한 제사용 단검을 쥐고 있었다. 눈앞의 제단 위에는 약에 취한 남자가 몽롱한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하늘이 기이하고 얼룩진 굴곡을 만들어 내며 울렁이고 있었다. 그 구름 속에서 형상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물체가 희끄무레하게 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단검을 높이 들어 남자의 가슴에 내리꽂았다. 남자의 찢어진 가슴에서 선혈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선혈은 바닥으로 흐르는 대신 칼날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칼을 그어 남자의 배를 크게 갈랐다. 이제 노출된 내장과 장기가 피와 함께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어 뼈가, 살이, 근육이, 핏줄이 올올이 풀려나가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마침내 완전히 뒤집혀 껍데기만 남은 가죽만이 펄럭거렸다.

아이작은 그 가죽을 움켜쥐고 크게 흔들었다.

뒤집힌 가죽 안에서 어린아이의 손가락이 기어 나왔다. 텅 빈 살거죽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피라미드 아래쪽에서 무언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군의 전사가 군중을 뚫고 피라미드 위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군중 속에 숨어있던 칼을 든 무리들은 순식간에 성기사들을 제압하고 치고 올라왔다.

아이작은 뒤집힌 가죽을 더욱 세차게 흔들어 가죽 속에서 태어나려는 존재를 부추겼지만, 그것의 움직임은 느리기 그지없었다.

의식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무리가 아이작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아이작은 한기를 느꼈다. 그는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싸늘하게 얼어붙는 한기에 손끝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내 날카로운 칼끝이 아이작의 복부를 후벼팠다. 아이작은 자신을 찌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새파란 안광을 불태우는 백골의 기사였으니까.

***

아이작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아이작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노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헤사벨이 입을 열었다.

"또 악몽을 꾸셨나요?"

"음."

아이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헤사벨에게 야간 호위를 부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밤잠이 없는 그녀가 뭔가를 하기에 이 영지는 너무 평화로웠다.

'자꾸 같은 악몽을 꾸는군.'

이 세계에 넘어온 뒤로 악몽을 꾼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촉수 때문이든, 쥐 사체를 먹던 기억 때문이든, 처참한 사람 시체 때문이든, 정신적으로 건강할 리가 없는 환경이었기에 아이작이 악몽을 꾸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 꿈은 달랐다.

거의 항상 같은 배경에 같은 인물이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지만, 손끝에는 아린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꿈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 순간 늘 그를 찌르는 것은 백골의 기사였다.

아이작은 한기를 다루는 백골 기사들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불사 교단의 데스나이트들....'

90화. 시체들의 밤 (3)

아이작은 왜 불사 교단이 왜 자꾸 자신을 죽이는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왜 그 노란 옷을 입은 노인이 되어있는지도.

'이제 와서 이름 없는 혼돈이 나를 엿 먹이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아이작은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떠올렸다. 그것을 만든 순간 아이작은 뭔가 다른 세계와 한순간이나마 이어졌고, 그 여파가 아이작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나이트 스토커가 그랬던 것처럼 쳐들어오면 베든가 먹어 치우든가 할 수 있을 텐데, 악몽만 꾸니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맘 편하게 상담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기에 속에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은 아직 검푸른 새벽이었다.

아이작은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갔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이사크레아 영지는 조용했다. 변화하기 시작한 영지의 모습이 아이작의 마음을 그나마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한가로운 새벽 산책을 방해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도와줄까?"

아이작은 성벽 끝에 매달려 있는 에이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배기사님. 반갑습니다."

에이단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작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을 붙잡아 힘껏 끌어올렸다. 모처럼 온 소금 의회의 사절을 추락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째서 이 새벽에 성벽을 기어오르던 거지? 내가 필요한 건 화로 장인과의 연결이지 소금 의회의 시체가 아닌데."

"이 정도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이작 님과 갑자기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했을 뿐이지. 그리고 이 시간대에는 경비가 느슨해서... 사실 아이작 님을 다시 은밀하게 찾아뵈려 했을 뿐입니다."

"은밀하게?"

"화로 장인께서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으시다더군요."

"조건이라니?"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영지에 머무는 동안 화로 장인님을 보호해달라는 것이죠."

아이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단 말대로 당연한 요구였다.

화로 장인의 엄청난 능력 때문에 노리는 사람이나 세력은 수없이 많다. 특히 대륙으로 들어온 화로 장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작도 기껏 손안에 들어온 화로 장인을 놓아줄 생각은 없으니 당연히 보호할 생각이었지만, 과연 누가 화로 장인을 노리느냐에 따라 값싼 조건일 수도, 값비싼 조건이 될 수도 있었다.

"누가 화로 장인을 쫓고 있지?"

"조건을 듣고 거절할 생각이시라면 곤란합니다. 저도 쫓기는 입장이라 편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에이단의 얼굴에는 피곤이 드리워져 있었다. 새벽부터 성벽을 기어오르더라니, 아무래도 그를 추적하는 사람을 피해 움직이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화로 장인과 에이단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금은 센 척하지만 당장 아이작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곤란한 처지라는 것도.

"빛의 법전과 대적해야 하는 거라면 곤란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아이작에게도 곤란한 일이었다. 백제국에서 빛의 법전을 적으로 돌리고 살아갈 순 없으니까. 에이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의 법전은 아닙니다."

"흠, 화로 장인이라면 보호를 부탁할 사람들이 많을 텐데 왜 나지?"

"아이작 님의 명성과 신망을 믿어서... 아닐까요?"

에이단은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작은 에이단의 내심을 읽어 냈다.

소금 의회 신도답게 아이작의 명성과 신망을 믿어서, 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일부였을 뿐이다. 그보다는 아이작이 보여 준 열린 태도와 숭고한 성배기사에 대한 소문, 그리고 천사와도 맞서 싸웠던 실력을 높이 친 것이라고 보았다.

'천사와 맞서 싸울 정도의 힘이 필요한 건가? 대체 누구에게 쫓기고 있길래?'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발동시켜 에이단의 내심을 들여다보려 했다. 하지만 소금 의회 신도는 거짓말을 못 하는 대신 깊은 내심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다른 이들은 속아 넘어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만은 그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백골, 한기.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찾아온 한기에 손끝이 아려왔다.

돌변한 아이작의 기세에 에이단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작은 화로 장인을 추적하는 자들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대체 게르토니아 제국까지 놈들이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보았다.

"좋아. 화로 장인을 모셔와라."

아이작의 관심은 화로 장인에서 그를 노리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진득한 살기를 곁들여서.

***

'오늘로 약속했던 한 달째인가.'

저녁 무렵, 이솔데는 아이작을 찾아 중앙홀로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말은 '왜 약속한 대로 기적을 안 보여 주냐'가 아니라 기간을 늘려도 좋다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은 무제한으로 둘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솔데는 아이작이 영지를 운영하는 것도 기적의 일종처럼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현상 유지만 해도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아이작에게 영주의 그릇을 기대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지, 행정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지는 날이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아이작이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이 엄청나다는 뜻이 아니다.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 자체만을 두고 보자면 농지에 관해서는 르하르트가 낫고, 상업이나 물류에 관해서라면 캐틀린이 더 나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압도하는 것은 아이작의 안목과 사람을 선동하는 능력, 그리고 교단 같은 상류층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보적인 태도였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솔데는 한 발짝 물러서서 영지의 변화를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지만, 영지 안의 모든 사람들은 거의 홀린 듯이 아이작을 추종하며 따르고 있었다. 영지가 극적인 변화를 겪는 것은 이 압도적인 카리스마 때문이기도 했다.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과 성기사들조차도 아이작을 추종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사를 퇴치할 정도의 실력자라지만 그들의 깊은 믿음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이작이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

이성적인 매력이나 외모와는 다르다.

그의 말투, 어휘, 태도, 모든 것에서 믿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흘러나왔다.

갓 성인이 된 성기사에게 어떻게 이런 면모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어 보였고, 불가사의한 능력과 매력이 그 신념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솔데조차 그를 추종하고 싶은 충동에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 충동으로부터 그녀를 붙들어두는 것은 이단심문관이라는 자신의 직책과 아이작이 가끔 내뱉는 반 교단적인 언행들이었다.

'아이작이 교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하지만 교단이 곧 빛의 법전은 아니니... 아직 이단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아이작은 가끔 색다른 교리 해석을 내놓기도 해서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교리 해석이란 게 자칫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쉬운 일이라 걱정이 적지 않았지만, 그 해석에 선의와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는 애써 악의적인 해석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온전한 이단심문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를 이단심문관으로 만드신 걸까?'

이솔데는 자신의 부친을 떠올렸다. 자상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냉혈한도 아닌 아버지.

그는 이솔데를 이단심문관 자리에 반쯤 강제로 밀어 넣으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유지하도록 가르쳤다.

덕분에 이솔데는 광신에 물들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출세와는 거리가 먼 행보였지만, 이솔데는 어렴풋이 아버지의 의도를 읽어냈다.

역설적이게도 부패한 교단의 늙은이들에게 대들만한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이단심문관일 확률이 높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