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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1.

스킬 사용에는 각종 편의 기능이 있다.

궁수는 자동 조준, 마법사는 자동 연산, 검사는 자동 타격으로 손쉽게 사냥했다.

그런데 양궁 선수 출신의 게이머가 외쳤다.

- 자동 기능은 실력을 갉아먹는 독이다!

- 스킬에 의존하지 말고 진짜를 갈고 닦아야 한다!

현실의 실력을 키워야 게임을 잘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 편리한 기능을 놔두고 굳이?

- 게임에 너무 과몰입한 듯. 쯧쯧.

처음에는 다들 비웃었지만, 그는 결과로 증명했다.

활 하나로 수많은 네임드 몬스터를 잡고, 개인전에서 승리하며 전설이 되었다.

'왜냐하면 유니티는 현실 그 자체니까.'

태도의 차이는 나중에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로, 신분의 차이로 돌아왔다.

검술 관장 트레디의 말을 한마디도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한 번에 강해지는 방법은 없네. 오직 피와 땀, 그리고 시간만이 강자를 만들지."

그곳에는 꼬장꼬장한 노인이 아닌 단련된 검사가 서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에 모든 것을 뛰어넘기를 선택한다면···. 이곳뿐일세."

트레디는 진중한 태도로 검을 들어 수련실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여기서 쓰러지고, 여기서 울부짖고, 여기서 일어서게."

"···!"

그의 말을 증명하듯, 수련실 바닥에는 검붉은 얼룩과 칼자국으로 가득했다.

트레디는 천천히 검술 동작 시범을 보였다.

"내가 가르쳐줄 것은 고리타분한 기본기, 그중에서도 찌르기일세. 이 동작이야말로 내 검술의 시작이고 끝이지."

- 팟!

무언가 번쩍했다. 제대로 인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 퍼어어엉!

"···!"

뒤늦게 울려 퍼지는 파공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공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꿀꺽. 이게 단순한 기본기라고?'

공간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공간을 갈라버린다.

공간을 관통한다.

눈앞에서 느끼는 강자의 품격에 식은땀이 났다.

'과연 쾌속의 마에스트로!'

그가 근육으로 꽉 찬 거한이기에 다들 그가 대검으로, 힘으로 압살하는 중검술을 쓸 거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그가 즐기고 자신 있는 분야는 오히려 속도를 중시하는 쾌검술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주특기를 보여준 셈이었다.

"천천히 할 테니 잘 보게."

허공을 가르는 단 한 번의 칼질은 단정하고, 깔끔하고, 우아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더 손댈 곳이 없는 완전한 조각과 같았다.

나도 그를 따라 허공을 찔렀다.

-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대략 비슷한 듯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위력은 둘째치고, 미묘하게 균형, 속도, 위치가 맞지 않았다.

"차이를 알겠나? 자네의 동작끼리도 매번 조금씩 달라지고 있네."

"제 몸조차 정확하게 움직이기가 힘들군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일세. 몸에 새겨 넣어야지."

"···"

"이곳에서 증명하게. 육체가 아닌 자네의 정신을!"

"어떻게 증명해야 합니까?"

"정확한 자세로, 정확한 속도로 만 번을 휘두르게."

"···!"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해내겠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네.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닐세. 여기서는 더욱. 무슨 말인지는··· 해보면 알 걸세."

트레디는 살짝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최소 몇 달. 어쩌면 몇 년은 실패할 걸세.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 여기 벨을 누르게."

"···!"

"하지만 자네가 자격을 증명해낸다면, 이 수련실이 스스로 문을 열 것일세.

수련실 사방에는 사방에 각종 마법 구슬이 달려있었다.

'파란 건··· 관찰 구슬이군.'

움직임을 스캔해서 정확했는지 판별하는 역할을 했다.

마법 감독관이 항시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몇 종류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들도 있었다.

트레디가 나간 후, 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영민해진 감각 덕분에 트레디의 다리 근육의 떨림부터 팔을 움직이는 각도까지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이를 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팟. 팟. 팟.

나름 정확하게 동작을 반복했지만, 마법 구슬에는 반응이 없었다.

'정확한 속도가 아니었다는 거군.'

트레디의 최고 속도가 아닌 표준 속도가 목표였다.

- 1

모든 것을 제대로 구현했을 때만 붉은 불이 들어오면서, 옆에 조그맣게 숫자가 표시되었다.

- 열 번, 백 번, 이백 번, 삼백 번.

한 번의 동작마다 모든 힘을 다했다.

- 팟!

어쩌다 한 번 불이 들어왔지만.

- 2

- ···

또다시 오랜 시간 침묵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막대한 심력과 체력을 소모하면서, 계속 이어갔다.

'얼마나 지난 거지?'

폐쇄된 수련실에서는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뿌연 조명 속에서 칼만 휘두르니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어쩐지 칼이 더 무거운걸.'

마치 물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기분이었다.

점점 더 힘겨워졌다. 귀찮았다.

'잠깐만 나가서 쉴까?'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 만나서 소주 먹으며 노가리를 까도 좋고.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 감자 칩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지.

시간이 지나자 과거의 환락까지 떠올랐다.

미녀들의 살냄새, 약이 주는 극한의 쾌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쳐졌다.

'···이건 아닌데. 뭔가 정상이 아니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련실 곳곳에서 붉고 푸른 구슬들이 요사롭게 빛나고 있었다.

'과연, 그런 거였군.'

중력을 가하는 그래비티 마법.

감정을 자극하는 이모션 마법.

환상을 보여주는 일루젼 마법.

가만있어도 쓰러질 판에 짐 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리는 꼴이다.

방해물을 인식하니 더욱 힘들었다.

- 3

제대로 된 동작 만 번을 성공시키려면 몇 번을 휘둘러야 할까.

십만 번? 백만 번? 천만번? 숨이 턱 막혀왔다.

- 5

불가능하다.

너무나 힘들었다.

쉬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천 번 넘게 휘두르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도 숫자는 고작

- 17

'더!'

칼을 들려고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육체가 그의 지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정신력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이런 의미군.'

본래 사람의 육체에는 리미트가 걸려있다.

육체를 손상할 정도가 되면, 무의식 수준에서 브레이크가 걸려버린다.

스스로 숨을 참아서 자살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와 같다.

'단순한 검술 수련이 아니었어.'

무의식을 극복하는 수련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수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트레디의 말이 맞아.'

결국은 정석.

오랜 시간에 걸쳐서 육체를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다.

걸어서 지구를 한 바퀴 돌듯 천천히.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나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노려보았다.

인간의 상식 수준으로 성장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그렇게 해서는 다가올 '세계'라는 괴물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으니까.

2.

- 위기를 통해 인류애를 확인하다!

- 새로운 황금기의 시작!

대격변을 극복하고, 모두가 해피엔딩을 확신했다.

인류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함께 싸웠고, 승리했다.

인구는 줄었지만, 문명은 새로운 에너지와 함께 활짝 꽃피웠다.

'하지만 현실은 히어로 영화가 아니었지.'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자 차이는 고작 2%.

하지만 원숭이는 우리에 갇혀 인간의 조련을 받는다.

각성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이보다도 훨씬 컸다.

'힘은 남을 위해서만 쓰고, 나는 월급쟁이로 살라고? 병신이냐?'

마인이 아닌 평범한 각성자조차 그렇게 생각했고.

''더 좋은', '더 올바른' 세상으로 바꿀 좋은 기회입니다.'

'신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어리석은 자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영웅들은 각자 자신만의 선을 주장했다.

'왜 돈을 주고 물건을 사? 이해가 안 되네. 쯧쯧.'

'몬스터 피해서 도망치던 짭새 새끼가 나를 잡겠다고? 풋.'

마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구질서와 신질서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개인과 단체, 개인과 국가가 싸웠다.

그리고 결과는··· 개인의 승리.

기나긴 투쟁과 사회 변화를 거쳐 세계는 재편되었다.

전란을 끝낸 영웅에 대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속에서···

신세계의 왕이 탄생했다.

그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지.'

가혹한 1인 독재국가, 힘에 의한 신분제 사회.

귀족은 위협이 된다며 어린 아들을 죽이고 그 피를 마셨으며.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왕의 궁전에서는 비명이 끊일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인류 자체의 힘은 더 커졌고, 역설적으로 번영했다.

'하지만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시험은 결코 끝난 게 아니었다.

대격변은 그저 막과 막 사이, 잠깐 쉬어가는 시간에 불과했다.

시험은 이전보다 더욱 악랄한 형태로 등장했다.

하지만 신세계의 초인들은 강했다.

귀족들은, 왕들은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하지만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이겨냈다.

다시 시험이 온다.

기사들이 쓰러졌다.

···이겨낸다.

···다시 시험이 온다.

귀족과 추기경이 도망쳤다.

······이겨낸다.

······다시 시험이 온다.

마침내 초월종이 등장했을 때.

그 왕들조차 무릎을 꿇었고.

진정한 종말이 찾아왔다.

3.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몸이 땅으로 꺼질 듯 무거웠다.

'그런 미쳐버린 세상에서 부모님이 살아가셔야 한다고?'

헬 조선에서 아들 하나 키워보겠다고 평생을 바치신 분들이다.

그런 그분들에게 그런 지옥 같은 미래만 기다리고 있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미칠 듯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한계에 달했다고? 죽을 거 같다고? 멈추라고?'

내 몸뚱이에게, 내 무의식에게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목걸이, 계약의 증표를 부여잡고 말했다.

[해내라!]

나는 노력이라는 재능, 의지라는 재능, 돌파해 수 있는 재능을 소환했다.

나의 명령이 나에게 내려졌다.

- 파지지직!

척추에서부터 팔까지 막대한 전기가 흘렀다.

신경을 헤집는 미칠듯한 고통 속에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기 싫으면 움직여라.'

몸뚱이는 곧 '몸을 보호'하라는 명령보다 '한계를 돌파하라'라는 명령이 더 우선임을 깨닫게 되었다.

- 쿠오오오!

무의식 깊은 곳 심연에서 사악한 악마들이 요동쳤다.

- 움직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의식을 통째로 집어삼키리라!

정신을 보호하겠다는, 쉬어야 한다는 무의식의 요청 따위는 생존이라는 대명제 앞에 바스라 졌다.

그렇게.

- 파앗.

하나씩 숫자가 올라갔다.

- 18

- 19

- 20

'으아아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영혼까지 분쇄될 듯한 공포가 나를 집어삼킨다.

세포 하나가 바스러질 때까지 쥐어 짜내진다.

광기.

파괴.

피.

'우두둑.'

근육은 괴사한 지 오래였으며 뼈까지 바스러지고 있었다.

한계에 이른 몸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 솨아아.

감각이 한계까지 확장했고 재생이 시작되었다.

모든 권능과 스킬과 효과가 나를 살리고자 했다.

재생과 파괴가 반복되었다.

맨정신 따위는 날아간 지 오래.

무의식조차 부서진 지 오래.

오직 하나의 의지만 남았다.

'찌른다.'

오직 하나의 검만이 남았다.

- 30

- 40

- 50

노력이 재능이라면.

의지가 재능이라면.

나의 재능이야말로 인류 최고다.

- 100

- 200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 해낸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못 해낸다.

- 1,000

할 수 있다. 해낸다. 무조건 한다.

오직 하나의 의지만 남았다.

···

..

.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그리고 마침내.

- 10,000

기적과 같은 숫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삐빗!

수련실의 구슬에 메시지가 새겨졌다.

- 1만 회 달성

- 소요 시간 : 23시간 59분

믿기지 않게도 단 하루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이럴 수가, 이건 불가능해!"

트레디가 혼란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몇 달이었다면, 감탄을 했을 테고.

몇 주였다면, 경악을 했을 테지만.

단 하루였다.

- [업적:한계 돌파]를 달성하였습니다.

- [플래티넘 박스]가 지급됩니다.

- 스탯 '정신력'을 획득하였습니다.

- 스탯 '저항력'을 획득하였습니다.

귀하디 귀한 특수 스탯.

하지만 시스템의 메시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찔한 성취감과 고양감!

강력한 마약을 잔뜩 들이켰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쾌감이 온몸을 감쌌다.

'해냈다!'

결국 내 의지를 관철한 것은 나.

악마의 계약은 더 이상 '노예 계약'이 아니었다.

불가능조차 뛰어넘게 해주는 '초월 계약'이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 인류 최초로, 종의 한계를 초월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 [권능 : 불굴]을 획득하였습니다.

'말도 안 돼, 여기서 권능이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권능 : 불굴(성장형)]

1) 영혼 단련

- 영혼의 격이 높아집니다.

- 정신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향상됩니다.

- 정신과 관련된 스탯의 증가율이 상승합니다.

2) 고통 치환

- 누적된 고통을 일시적으로 스탯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쿨타임 1달).

입이 떡 벌어졌다.

'정신력, 아니 무려 '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거기에 일시적이라도 스탯을 추가하는 능력이라니.

성장 한계에 달한 귀족이나 왕들이 알면 눈에 불을 켤 미친 능력이었다.

'고통만 버틴다면, 궁극기를 얻을 수 있다는 소리!'

거기다 새로운 왕급 권능, 무려 전투형 권능이었다.

[미다스의 손] 같은 비전투 형 권능을 여러 개 가진 경우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리얼모드], [불굴]처럼 전투형 권능을 두 개나 가진 왕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이건 조커다!'

시작부터 어떤 카드도 될 수 있는 무적의 카드를 손에 넣었다.

9화

1.

"자네의 재능이 노, 놀랍지만. 매우 대단하지만! 겨우 한 가지를 해냈다고 자만하면 안 되네!"

트레디는 엄격한 검사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찌르기가 쾌검술의 기본이라면, 휘두르기는 중검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

- 후우웅···!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허공을 가른다.

바위를 가루로 만들만한 위력.

풍압만으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다음으로 베기. 이는 다양한 변화를 구사하는 데 유리해서, 환검술로 이어진다네."

미처 느끼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칼질.

칼질과 칼질이 이어져서 곡선이 되고, 원이되 눈을 현혹했다.

"검으로 공격하는 모든 방법은 결국 이 세 가지의 변형일뿐이야. 이 세 번의 칼질에 모든 것이 담겨있지."

찌르기.

휘두르기.

베기.

공격 검술의 세 가지 뿌리였다.

"이곳만은! 결코 쉽지 않을 걸세."

트레디가 또 다른 수련실의 문 앞에서 말했다. 어쩐지 살짝 자신이 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몇 시간 후.

- 덜컹.

문이 열렸고.

나는 그 옆의 수련실에 스스로 들어갔다.

- 덜컹.

그리고 다시 문이 열렸다.

- '찌르기'를 이해하였습니다.

- '휘두르기'를 이해하였습니다.

- '베기'를 이해하였습니다.

- 검에 대한 깊은 이해로 '소드 러너'가 되었습니다.

- 직업 '검사'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 직업 스킬 : [초급 쾌검술], [초급 중검술], [초급 환검술]을 획득하였습니다!

'됐다!'

시스템이 검사의 자격을 인정했다.

남은 조건은 트레디의 인정뿐.

혼이 나간 표정을 보니 반쯤, 아니,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검사의 등급 중 최하위인 '소드 러너'만 해도 예전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어, 어떻게?"

"기본기, 정석! 역시 꾸준한 노력이 답이었습니다."

나는 뜨거운 열혈 검사를 연기하며 대답했다.

정석··· 이라고 하기엔 양심에 살짝 찔렸지만 말이다.

"기본만으로 끝난 게 아닐세!"

어쩐지 불타오른 트레디의 가르침이 이어졌다.

"바닥을 단단하게 다졌으면, 그 위에 건물을 지어야지. 그 셋을 통해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네."

아래로 베기, 가운데 베기, 올려서 베기 등 각종 응용 검술이 이어졌다. 야구로 치면 변화구.

거기에 막기, 흘리기, 피하기 등 방어술도 이어졌다.

"빠, 빨리 배우는군. 하지만 정석적인 검술만 믿다가 실전에서 쓰러진 검사들이 한둘이 아니야!"

밀치기, 고간 차기, 검로 방해하기, 시선 돌리기 등 온갖 잡기술도 있었다.

'의외군.'

명성 높은 검사가 추잡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조차 가르친다.

그 바닥에는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있었다.

'적어도 검술에서만큼은 고리타분하지 않군.'

경탄하며 다음 강의를 들었다.

"너, 너무 진도가 빠른데."

꿀꺽.

트레디가 본인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후 흠칫했다.

"이제 기본을 다졌을 뿐! 진짜 검사의 기술은 이제부터일세."

"'고유 기술''이군요."

나는 눈을 빛내며 강의를 들었다.

검사 고유기, 배쉬

- 쾅!

순수한 강타! 철제 수련 인형이 우그러진다.

'타격도 타격이지만, 상대가 잠시 움직이지 못하는 게 크지.'

- 퍼어어억!

- 데구르르.

검사 고유기, 스매시.

갑옷 입은 기사 인형이 대련실 벽까지 날아 가버렸다.

'충격파라 막아내기가 극히 어렵겠어. 불리할 때 밀쳐내는 용도로도 좋겠군.'

그 외에도 스턴, 러쉬 등 근접 계열들의 공용 기술도 배웠다.

미친 일주일이 지나고.

- 기초 검술을 깊게 이해하였습니다.

- 관련 스킬이 <소드 마스터리(C)>로 통합됩니다.

- 몸 쓰는 법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졌습니다.

- 관련 스킬이 <체술(C)>로 통합됩니다.

"대단하군. 엄청난 재능이야."

트레디의 얼굴에 체념이 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탄과 기쁨이 엿보였다.

일주일간 피와 땀을 흘리는 순간을 같이 하였으니,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내가 틀렸어. 내 인생 처음으로 패배를 인···"

마침내 인정이 떨어지려는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막았다.

"아, 제 재능이 일천하여 아쉽습니다."

"···?"

트레디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작 일주일 만에 남들 몇 년 걸려도 못할 것을 해냈으니.

"검에 마나를 싣는 법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할 줄이야."

"그건···"

트레디는 황당하다는 듯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검을 제대로 다루는 자, '소드 러너'만 되어도 능숙한 검사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자 '소드 유저'는 차원이 달랐다.

그 정도면 작은 용병대를 이끌고도 남을 강자로, '마을'이 아니라 '성' 단위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에 마나를 실어야 하지.'

이곳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아니야, 자네 정도면 충···"

"제 수련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내기는 내가 졌···"

"가문에서 제대로 된 검사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터무니없네. 이미 자네는 훌륭한···"

"마나도 싣지 못하는 수준으로는 제가 돈을 돌려받을 염치가 없습니다."

"도, 돈··· 그랬지. 돈이 있었지."

트레디는 흠칫 놀라더니 중얼거렸다.

"그 이상의 경지는 마나가 필요한데. 그건 아무리 자네라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자네의 육체와 정신은 충분히 인정하네. 하지만 마나만은 달라. 타고난 감응력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네."

"전통 있는 검술 길드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에 트레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도전해 볼 만 한 곳이 있긴 한데. 아직 길드원도 아닌 자에게."

트레디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안되는 거니, 보여주기나 하지."

트레디가 발걸음을 옮겼다.

'검술만으로는 부족하지.'

소드 러너와 소드 유저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것은 바로 마나였다.

소드 러너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른 강자라면, 소드 유저부터는 판타지의 영역이었다.

강철을 가르고, 바위를 가르는 마나를 두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드 러너가 아무리 검을 잘 다루어도, 소드 유저의 마나 소드 앞에서 무력한 이유였다.

2.

"이곳은 우리 길드의 자랑인 마나 수련실일세."

트레디는 자부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래, 여기지.'

눈을 번쩍였다.

무협지라면 영험한 기운을 모으는 절진 같은 것이 설치된 공간이었다.

길드에서 마법과 비전을 쏟아부어서 마나 집적 효율을 극대화한 곳.

정상적이라면 정식 길드원만이 이용할 수 있는 히든 플레이스였다.

"검사에게 마나를 깨닫고 늘리는 데 이곳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네."

엄청난 효율 자랑하는 그야말로 꿀 같은 장소. 하지만 트레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게도 이 시설을 당장 사용할 수는 없네."

"···!"

"이곳을 운영하는 데는 마나석이 필요하다네."

세상에 공짜가 어딨는가.

말하자면 유료 서비스라는 소리다.

"마나석이라."

"소모되는 마나석은 수련자가 부담해야 하네. 아무리 길드라도 감당하기 힘들지. 어마어마한 가격이거든."

트레디는 마나가 다 소모된 폐 마나석을 손에 들고 기운 빠진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왜 입가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돌고 있을까.

거 노인네 뒤끝 있네. 그렇다면.

"설마 마나석이란 게 이런 겁니까?"

나는 순진한 얼굴로 물으며 품에서 하나를 꺼냈다.

화수분 같은 크무로의 선물 중 하나였다.

"허, 전 재산 다 썼다더니?"

"그냥 예쁜 돌멩이인 줄 알고. 재산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개도 안 믿을 소리지만 나는 연기에 혼을 담았다.

외딴 산속에서 홀로 수련 만해서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는 청년처럼.

그리고 트레디는 검술 외에는 빈틈이 많은 남자였다.

"다행이구만. 하나 가지고는 출력이 다소 부족하겠군. 아쉽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가동은 가능하지."

"마침 운이 좋게도."

와르르르.

나는 땅바닥에 마나석을 쏟아냈다.

"허억, 어떻게 이렇게 많은···?"

"조상님께서 수석 수집이 취미시라. 예쁜 돌멩이라고 모으신 듯합니다."

"그, 그런···!"

그는 입만 뻥긋뻥긋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순진해서 너무 잘 속으시는데.'

그 덕에.

- 띠링, 띠링

- 기만(F)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나는 마나 집적실의 중심부에 마나석을 박아넣기 시작했다.

아낌없이 계속, 계속 끼웠다.

"너, 너무 많네. 비싼 마나석을 그렇게···!"

"제가 재능이 부족하여."

재능이냐 돈이냐 하나 고르라면.

'역시 돈이지.'

그리고 돈이냐, 시간이냐 고르라면.

'물론 시간이고.'

몸이 터질까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그간 쌓아온 스탯과 권능을 믿었다.

'인생 한방! 그리고 빨리, 빨리!'

나 역시 성질 급한 한국인이었다.

민속놀이에서 치트키를 연타하곤 했다.

- Show me the money!

- Show me the money!

- Show me the money!

돈지랄이든 속임수든 다 써서 빨리빨리 커야 한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머니까.

고, 고(Go,Go)! 허리, 허리(Hurry, Hurry)!

빨리, 빨리 넘어가자!

10화

1.

소드 유저가 드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드 러너가 마나를 느끼는 데만 해도 보통 수년이 걸렸다.

그나마 재능있는 자의 경우였고, 그렇지 못한 자는 평생 못 느끼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래서야 못 느끼려야 못 느낄 수가 없군.'

공기가 아니라 마나로 가득한 공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쯧쯧. 이래서 금수저들이란···

타고난 출발이 다른 자들을 욕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뜨거운 기운이 배꼽 밑에서 올라와서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 마나의 기운을 느끼는 데 성공했습니다.

- 초급 마나 운용(C)을 배웠습니다.

- 마나 소드(C)를 깨달았습니다.

검 위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 휘익

- 쩌억!

살짝 휘두른 검에 철제 인형의 갑옷에 커다란 금이 갔다.

"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힘을 쓴다니.

초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수련을 이어갔다.

'욕심이 난다. 더 할 수 있어!'

뭔가 더 있을 거 같은 확신.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무언가 알 것 같은데.'

내가 마주쳤던 가장 강한 힘을 떠올렸다.

최고위 악마, 벨페고르의 마기.

우주 공간에 가득했던 그 기운을 떠올렸다.

영혼을 울렸던 거대한 격과 힘.

그것과 마나가 뭐가 다른 거지?

참오하고 참오했다.

세계의 모든 힘의 근원은 하나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신관의 신성력.

마법사의 마나.

마스터 급 검사의 오러.

악마의 마기.

모두가 같은 미지의 에너지, 가칭 에테르에서 나왔다는 연구다.

만약 그렇다면, 근원적인 힘을 느낄 수만 있다면···!

영혼이 우주 공간, 그 두려운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혼이 심해로 빠져든다.

시간을 잊는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

무의식 속의 무의식을 헤엄쳤다.

- 정신력이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 영혼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인간이 결코 닿아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있다는 예감이, 아니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권능 : 불굴]이 정신 공격에 저항합니다.

- [권능 : 불굴]이 영혼을 보호합니다.

시간을, 공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영혼이 기억하는 태초의 순간을 마주했다.

나의 죽음과 시간이 역전되었던 그때.

나는 보았다.

그것은 미처 인지하거나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세상 전체를 뒤흔드는 광포한 소용돌이가 포효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의 태초의 모습이라는 에테르가 보였다.

'아아아!'

뭐라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희열 속에서.

영적인 깨달음, 영혼의 확장이 이어졌다.

그리고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에 접속하였습니다.

- 초월적 감각을 경험하였습니다.

- '영능'이 '마나'를 자극합니다.

- 오러(A)를 깨닫습니다!

관조에서 깨어난 나는 신음했다.

'맙소사.'

단전에서 시작한 기운을 검으로 쏟아냈다.

찬란한 빛이 검에 어렸다.

- 오러!

소드 익스퍼트 중에서도 소수만 사용 가능하다는 오러였다.

- 쉬이이익!

단 한 번의 칼질에 철제 인형이 종이처럼 갈라졌다.

그 순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탈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거라면!"

아직 검술이나 깨달음이 부족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익스퍼트가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익스퍼트.

어디 가나 준 귀족이 될 수 있는 강자.

'마을 밖, 필드에도 나갈 수 있다는 소리지.'

던전.

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곳.

힘이 없어서 감히 찾으러 갈 엄두도 못 냈다.

이제 탐색에 나설 힘을 갖게 되었다.

2.

"이건 불가능해! 어떻게!"

선명한 오러를 본 트레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제가 약발, 아니 마나석이 잘 받는 체질인가 봅니다."

되지도 않는 소리인데도 결과가 있으니 반박을 못 했다.

"이렇게 빨리? 그럼 내 40년 세월은?"

트레디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내기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끄윽. 자네는 육체, 의지, 재능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검사일세. 자네의 승리일세!"

'내가 봐도 미쳤네.'

무직, 언랭크가 일주일 만에 소드 러너도 아닌 소드 유저가 되었다. 그것도 잠시지만 익스퍼트를 능가할만한 힘을 갖춘.

"승부는 승부. 내 돈은 모두 돌려줌세."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트레디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나는 그 주머니를 받고서는 물약 하나를 내밀었다.

"이, 이것은!"

"잔느 아주머니에게 들었습니다. 손녀분이 많이 아프시다고요?"

[최상급 치유 물약]

어지간한 질병을 완치하는 귀한 약.

또 하나의 목숨이라 불릴 정도로 귀한 물건이라 크무로도 손을 벌벌 떨면서 넘겼었다.

"자네."

트레디는 울컥 눈시울을 붉혔다.

돈보다 귀한, 진정으로 가장 원했던 것을 얻었으니.

비싸다고? 아깝다고?

'아니, 사람에게 투자하는 게 제일 남는 거지.'

이 마을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네임드 NPC여서만은 아니다.

앞으로 세상의 운명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자네가 검술 길드의 정식 길드원이 되었음을 선언하네!"

수습 길드원도 아니고 바로 정식으로?

- 검술 길드의 정식 길드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 길드의 수련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수련에 필요한 도구를 자유롭게 대여할 수 있습니다.

- 길드 퀘스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합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길드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전문 직업 길드는 강력한 이익 집단이자 권력 집단이었다.

그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은 길드의 의무였다.

든든한 형님이 생긴 기분이었다.

"또한 자네를 완전한 자격을 갖춘 검사로 인정하네!"

- [업적 : 직업 획득]

- 인류 최초로 주 직업(검사)을 획득하였습니다.

- 플래티넘 박스를 지급합니다.

- 근력이 2 상승합니다.

- 체력이 2 상승합니다.

- 민첩이 4 상승합니다.

- 마나가 4 상승합니다.

시스템의 보상도 넘쳤다.

"자네, 내 직전 제자가 되게!"

트레디가 뜨거운 눈으로 날 보며 외쳤다.

완전히 마음이 내게 돌아선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제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문의 숙원이 있는가 보군. 복수? 혹은 명예! 그렇지. 그것만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지."

트레디는 아쉬운 표정으로 혼자 내 사연을 상상하는 듯했다.

"관장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저도 이제 길드원입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스킬은 거의 배웠지만, 경험은 또 다르다.

마스터 급 검사에게 직접 배우다 보면, 오러를 완전한 오러 블레이드로 만들 날도 올 것이다.

"꼭! 와야 하게. 자네는 이미 내 제자와 같네."

트레디는 내 말에 감동한 듯, 나에게 책자를 건넸다.

'마스터 급 스킬북!'

가장 아쉬웠던 민첩을 키워줄 보물이었다.

일단 품에 넣는척하며 바로 흡수했다.

- [고유 스킬 : 질풍 쾌검술(S)]를 획득했습니다.

단지 등록만 되었을 뿐, 아직 제대로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제대로 숙련도를 쌓는다면, 마스터를 탄생시킬 수 있는 스킬이었다.

- [칭호 : 질풍]을 획득하였습니다.

- 민첩이 3 상승합니다.

- 인류 최초로 특수 직업(질풍 검사)을 획득하였습니다.

- [골드 박스]를 지급합니다.

- 근력이 1 상승합니다.

- 체력이 1 상승합니다.

- 민첩이 2 상승합니다.

- 마나가 2 상승합니다.

"이제 어디로 가는가?"

"제 고향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모든 은원이 시작되었나 보군!"

"제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암,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지!"

트레디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흥분하고 있었다.

'꼭 필요하지요.'

사람이 조여만 주면 고장이 난다.

몇 주째 스튜랑 양고기랑 빵만 먹었다.

그런 느끼한 것 말고 한식이 먹고 싶었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얼큰한 된장찌개에.

삼겹살, 마늘과 상추까지.

소주도 살짝.

캬.

꿀꺽.

향기만 생각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꼬르륵.

너무, 당장 먹고 싶었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내가 로그아웃을 외칠 때였다.

- 시스템에 등록할 이름을 입력하여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떴다.

'설마···?'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근두근.

본명은 숨겨야 하니, 별명을 정해야겠지.

나의 정체성이자, 목표가 될 이름이었다.

깊게 고민하고 결정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게임 네임을 입력했다.

"리버스."

영어로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Rebirth. 부활, 다시 살아나다.

Reverse. 역(逆), 반대. 운명을 거스르다.

나의 이름이자 내가 세울 클랜, 내가 세울 성채의 이름이 되리라.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로그아웃을 했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 유저 '리버스'가 서버 최초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유저 '리버스'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 '업적 시스템'의 오픈이 앞당겨집니다.

- 유저 '리버스'가 서버 최초로 '주 직업'을 획득하였습니다!

- '직업 시스템'의 오픈이 앞당겨집니다.

우르르 이어지는 메시지.

도시 단위의 서버도 아니고.

한국 국가 서버도 아니고.

세계의 모든 서버에 나의 이름이 떴다.

"야, 이 미치이이인!!!!!"

"대에에에에에에박!!!!!"

그리고 인터넷이 폭발했다.

11화

1.

- 게임의 역사는 유니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게임 잡지도 아닌 유력지 US타임즈가 특집 기사를 냈다.

- 이전 동시 접속자 최고 기록은 포트 그라운드의 1천만 명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래퍼 불독과 팝스타 라헬라를 동원한 이벤트 덕이었다.

- 반면 유니티는 어떤가? 어떠한 이벤트도 없이 동접자 1억 명을 돌파했고, 그 추세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 믿기지 않겠지만 숫자로는 독일, 영국, 프랑스 등 G7의 인구를 넘어섰다.

- 유니티가 심상치 않다, 미래가 밝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틀렸다. 유니티는 이미 세계이자 미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이슈를 게임 방송 'G-TV'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아, 유니티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특유의 저렁저렁한 목소리로 사회자 정기훈이 오프닝을 시작했다.

"네, 요즘 어딜 가도 유니티 이야기죠?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캡슐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미녀 오타쿠'로 커뮤니티에서 인기 높은 아나운서 유가연이 말을 받았다.

"저도 직업상 온갖 게임을 다 해봤지만, 유니티는 정말 특별합니다. 진짜··· 진짜 현실 같거든요. 그러니까 유저들이 이렇게 아우성치겠죠?"

방송 하단에 동시 송출 중인 동영상 플랫폼들의 채팅이 다다닥 올라왔다.

- 유니티! 유니티! 유니티! 유니티는 신이다!

- 당연한 얘기하지 말고 빨리 본방으로 고고!

- 아직도 유니티 안 해본 '체리'있누?

- 형 지갑 준비해 놨다, 유니티는 얼른 캐시템을 내놓아라!

- 먼저 시작한 놈들만 꿀 빠는 거 억울하다. 얼른 내 돈 가져가!

'오프닝부터 시청률 대박이에요! 바로 본방 들어갑니다.'

PD가 인이어를 통해 사회자에게 속삭였다.

TV는 물론 유튜브, 트위치 등 모든 플랫폼에서 역대급 시청률이 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기대하고 계실 텐데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의 메인 게스트!"

정기훈이 입 모양으로 두두두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유명한 블랙 라이온 클랜의 리더, '라이온하트 박수혁'씨를 모셨습니다."

"와~! 실물이 훨씬 멋있으세요, 팬이에요."

스튜디오 뒤편에서 잘생긴 젊은 청년이 등장했다.

정기훈이 띄워주고 유가연이 한껏 리액션을 해줬다.

- 드디어 고인물 중 씹고인물 등장 ㅋㅋㅋ

- 저 쉑 잘생겼네. 세상 불공평하네, ㅅㅂ

- MMORPG, FPS 2관왕 실화냐.

'유니티'에 대한 각종 썰을 푸는 특집 방송.

유니티 이전, 유사 가상현실 게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게이머 박수혁이 게스트로 나왔다.

감사 인사 및 근황 토크가 지나가고, 메인 주제가 시작되었다.

"유니티의 경제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희는 클랜을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유저들을 육성하고, 보호하고 있습니다."

멋진 정장을 입은 박수혁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니, 믿을 수 있는 젊은 정치인처럼 보였다.

- 우리도 받아주나, 클랜?

- 박수혁이 총 맞았냐? 전직 프로게이머, 운동선수, 박사급 인재만 까다롭게 뽑는다더라.

- ㅅㅂ 벌써부터 지들끼리만 해 먹는구먼.

- 누가 우리 형님을 까? 우리 형 게임 제패 업적 모르냐?

- 벌써부터 빠들이 설치네. ㅉㅉ

정기훈은 시청자들의 싸움을 한 눈으로 훑으면서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유니티는 어떤 게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광고처럼 용이 날아다니는 판타지 세상일까요?"

그러자 박수혁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광고가 거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만···"

뜻밖의 부정에 시청자들이 시끌시끌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레벨도, 직업도 없는 로우파워 세계관입니다. 즉 극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박수혁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스킬'이라는 힘이 있긴 합니다만. F급 스킬은 고작 운동선수 수준의 기술을 구사하게 해주는 정도지요."

박수혁은 자신들이 찾아낸 특별한 스킬들에 대해서는 숨겼다.

'E급, D급이 나왔다는 것은 대외비. 알려지더라도 최대한 늦도록 해야 해.'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ㅇㄱㄹㅇ

- 나도 F급 근접 스킬 본 적 있는데 크게 대단하진 않았어. 걍 좀 치는 복서 수준?

- 이거 마따.

- 아는 형이 무려 마법도 봤다더라. 근데 폭죽놀이 불꽃 수준이라는데?

- 애게~! 하늘 날아다니는 거, 완전 과장 광고네?

- 아직 초기잖아. 당장은 기술적으로 어려울지도?

"의외입니다. 다른 프로게이머들의 의견은 어떤지요?"

"네, 다 비슷합니다. 해외 클랜도 마찬가지고요."

"유니티가 뜻밖인 점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점이죠?"

정기훈이 준비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맞아요. 다른 게임은 보통 직업도 주고, 무슨 포인트 같은 것으로 등수를 매기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유가연이 말을 받으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미녀의 눈짓에 박수혁이 한층 더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저희도 그런 의심을 하였지만, 포인트 같은 것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박수혁은 바로 얼마 전 찾은 업적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공격대 3개를 동원한 대규모 사냥을 통해서 간신히 이룩한 '소소한 업적'!

무려 '브론즈 박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는 최대한 늦게 알려질수록 좋았다.

"특히 직업은··· 있다면 저희 같은 대형 클랜이 못 찾았을 리가 없지요."

사회자와 아나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콘텐츠가 다 소모된 이후, 상당히 오랜 시간 뒤에 풀릴 것으로 보이고···"

박수혁이 말을 할 때 갑자기 스태프들이 수군거렸다.

'내가 말하는 중인데, 감히.'

그의 왼쪽 눈썹이 꿈틀하며 치솟았다.

'클랜원이나 아버지 회사의 직원이었다면 엄벌을 했을 것을.'

박수혁이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고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였다.

- 긴급, 긴급 뉴스입니다. 대형 폭탄이에요!

- 채팅, 채팅! 그리고 실시간 플레이 화면 확인해요!

담당 PD가 인이어로 소리쳤다.

"그러니 지금은 저희 클랜을 믿고···"

"잠시만요."

정기훈이 박수혁의 말을 끊고 채팅창과 게임사의 공지 화면, 플레이 중인 유저들의 게임창을 동시에 띄웠다.

그 순간, 화면은 사람들의 비명과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 으아아아! 이거 실화냐? 진짜야?

- 미친, 미친, 미친!

- 대박! 전 서버 메시지, 개간지다!

세 사람 모두 유니티 서버에 뜬 공지 사항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 유저 '리버스'가 서버 최초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유저 '리버스'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 '업적 시스템'의 오픈이 앞당겨집니다.

생전 처음 보는 유저의 이름이 모든 유저들의 플레이 화면에 떠 있었다.

"리버스? 리버스가 누구지요?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유가연이 궁금한 듯 말했지만, 정기훈과 박수혁은 달랐다.

게임판에서 훨씬 더 오래 구른 이들은 보는 순간 의미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업적 시스템! 오, 개인이 이룬 성과를 평가한다는 건가요? 더군다나 명예의 전당이라니! 이거 엄청 재미난 콘텐츠가 되겠는데요?"

좋은 쪽으로 흥분한 정기훈과는 달리 박수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경쟁 시스템이 도입되었다는 소리군. 더군다나 앞선 게 우리가 아니라 생판 처음 보는 놈이고. 대체 누가?'

내가, 우리 블랙 라이온이, 사자 그룹이 진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메시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 유저 '리버스'가 서버 최초로 '주 직업'을 획득하였습니다!

- '직업 시스템'의 오픈이 앞당겨집니다.

"직업 시스템! 제대로 판타지 가나요!"

"와, 재밌겠어요. 그럼 마법도 팡팡 쓸 수 있겠네요."

정기훈과 유가연은 신나서 멘트를 이어갔다.

- 대박, 대박, 대박!

- 개 재밌겠다!

- 운 좋은 놈이 숨겨진 업적 그런 거 찾은 듯. 로또 당첨됐네.

- 뭐 그럼 하꼬도 운이 좋으면 대마법사 돼서 방송하고 스타 되는 거냐?

즐겁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도 있었고.

- 박수혁 ㅂㅅ 새끼 ㅋㅋㅋㅋㅋㅋ

- 1분 컷 ㅋㅋㅋ 말 끝나자마자 바보 되죠?

- 근데 박수혁도 억울하겠어. 누가 예측했겠어? 불쌍···

- 아닌데? 평소 지들 클랜만 잘난 줄 알고, 무시하는데? 꼴 좋다.

박수혁은 이미지와는 달리 뒷소문은 좋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 그런데 리버스가 누구지?

- 그러게. 업적 시스템··· 오 열린다!

1위 리버스, 1450점 <명예의 전당>

2위 론리 워리어, 90점

3위 록산나 더 위치, 85점

···

..

.

10위 블랙 라이온 마스터, 15점

- 와, 압도적이다. 리버스가 압살하는데?

- 대체 누구지? 진짜 첨 들어보는데.

- 딴 애들은 대부분 아는 애들. 워리어는 미국, 록산나는 유럽 초 고인물임.

- ㅅㅂ 박수혁 업적 점수 있네. 알고도 방송에서 거짓말한 거야?

박수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필사적으로 말했다.

"저희도 분석 중인 정보라 정확히 말씀 못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아, 리버스는 누구일까요? 엄청난 점수 차로 1등인데요?"

정기훈은 능숙하게 불편한 부분을 넘기며 포커스를 리버스로 옮겼다.

"분명··· 미국 클랜들이 힘을 합쳤을 겁니다. 일개인이 가능한 점수가 아닙니다. 어쩌면 클랜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 차원에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 뭐만 하면 미국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ㅂㅅ ㅎㅎ

- 빠가에로!

- 유 머론!

채팅창은 'ㅋㅋㅋ'로 가득했다.

"아, 그렇게 보기에는···"

정기훈 아나운서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화면을 가리켰다.

"한국인임이 명확해 보입니다."

'리버스'라는 이름 위에 마우스를 갖다 대니, 소속 지역이 표시되었다.

KC-5 서버, 그 외 정보 비공개.

유니티의 서버 네이밍은 단순했다.

K는 Korea, 즉 한국 서버.

C는 Chungcheong-do, 즉 충청도 서버.

5는 5번째 서버. 10번까지는 첫날 오픈한 서버에 붙는 넘버였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충청도, 한국!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설마 그 '충남의 아들'이냐ㅋㅋㅋㅋㅋㅋ

- 세계 최고 업적, 최초 직업 다 한국 ㅋㅋㅋㅋㅋㅋㅋ

- 키아, 주모! Kia! kia! Kia!

- ㅅㅂ 이게 한국이지 ㅋㅋㅋㅋㅋ

'ㅋㅋㅋ'로 도배된 글이 너무 많았다.

채팅방의 글이 너무 빨리 올라와서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박수혁은 표정 관리도 못 하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정기훈과 유가연은 프로답게 텐션을 최고로 높여서 중계를 이어갔다.

"대박, 대박입니다!"

"와, 리버스라는 분은 한국인이라는 게 확실한 거네요."

"그렇습니다, 세계 최고의 게임에 K-게이머가 입성하였습니다."

정기훈이 특기인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리버스! 리버스! 리버스!"

"리버스 화이팅!"

유가연도 작은 손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 리버스 걔 플레이 영상 없냐?

- 동영상 없나? 걔 유튜브나 트위치 안 해? 왜 안 켜?

- 없다, 영상은커녕 정보 하나도 없다.

- 안돼, 안돼! 그럴 리가 없어!

- 방송 켜, 방송 켜!

- 트수들아, 정신 차려라. 저게 한 개인일 리가 있냐?

- 맞아. 유니티 시장 규모를 봐라. 박수혁 말이 조금은 맞다.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

- 지금쯤 자기에게 점수 밀어준 클랜들이랑 파티하고 있을걸?

- 아니면 중동 재벌들이랑 사업 계획이라도 짜고 있을지도 몰라.

모두가 리버스를 외치고 있는 그 순간.

리버스는 중요한 일을 해결 중이었다.

2.

보글보글···

시골 된장을 풀고, 두부를 송송 썰어 넣고, 양파와 감자, 호박에 대파, 마지막으로 청양고추까지.

나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참지 못하고 하얀 쌀밥을 입에 우겨 넣고, 찌개를 한 숟가락 펐다.

우걱우걱.

"진짜 맛있어요, 어머니."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구, 내 새끼. 그간 너무 안 먹어서 걱정했는데. 많이 먹으렴."

어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엉덩이를 톡 두들겼다.

오전에는 가게 일을 돕고, 오후랑 저녁 내내 캡슐방에 있었다.

그간 일 돕는 거 외에는 현실의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식사도, 수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얼 모드]가 아니었으면, 게임상에서 먹은 게 반영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해골 상태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녀석, 네가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냐?"

아버지는 묵묵히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지셨다.

아들이 휴가가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일이 있다고 사라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기다리셨다.

속으로는 걱정이 많으셨을 텐데.

역시 엄마 말대로 '무뚝뚝이'가 맞았다.

"생각보다는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회사는?"

"당분간 휴직했어요."

"잘했다, 얘야. 네가 첫날 온 거 보고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래, 오죽하면 그랬겠느냐. 네 뜻대로 하거라."

어머니도 아버지도 한 마디 반대도 안 하시고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가슴이 먹먹했다.

남들은 대기업 다녀서 연봉이 얼마다, 차를 뭐 뽑았다, 아파트가 20평이다 30평이다로 자랑하는데.

자식이란 놈이 변변치 않은 직장조차 못 지켰는데, 단 한마디의 타박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부모님께. 이 개··· 아니 나쁜 새끼.'

내 얼굴에 침을 뱉을지언정, 부모님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으니.

그러고 보니 어머니 얼굴이 부쩍 늙어보였다.

나는 어렸을 때 상당히 모난 성격이었다.

같이 가지고 놀던 물건은 무조건 내 거라고 우기고, 또래 친구들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고집 세고, 외골수라 오해도 많이 샀고, 싸움도 잦았다.

어릴 적 고왔던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웃으시지만 나 때문에 속을 곯으셨던 거다.

"잘 되면 효도해. 한 오 년 정도는 기다려주마."

아버지가 헛기침하면서 말했다.

'말만 그렇게 하시고, 죽을 때까지 나에게 퍼주시기만 하셔놓고선.'

지글지글.

솥뚜껑에서는 삼겹살이랑 마늘이 익고 있었다.

나는 잘 익은 놈들을 골라서 상추와 함께 싸서 먼저 어머니께 드렸다.

"얘가 생전 안 하던 짓을. 그래도 아들 덕에 기분은 좋네."

어머니는 활짝 웃으시며 한입 가득 베어 무셨다.

쪼르륵.

아버지께는 고기 한 점과 함께 소주 한잔을 따라드렸다.

두 분 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셨다.

"허허허.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

"그러게요. 얘가 정말 철이 들었네요."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효도, 빨리할게요."

"원 녀석, 그건 농담이지. 부담 갖지 말아라."

"그럼, 네 애미가 이 동네서 몇십 년을 장사했는데. 단골들 있는 한 장사는 안 망하니 걱정 말고."

"그거야 잘 알죠. 다만···"

나는 핸드폰 화면을 살짝 확인한 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가 벌인 사업이 생각보다 잘 될 것 같아서요."

생각보다 많이, 아니 훨씬 더 많이.

나는 뒷말을 삼키며 유니티 거래 사이트를 열었다.

문자 그대로 시세가 요동치고 있었다.

골드, 아이템, 스킬북 구분할 것 없이 모든 물품의 가격이 일제히 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IT버블 당시 기업들의 주가 차트가 떠오르는 모양새로.

빠꾸없이 하늘만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아오른 차트.

'이걸 주식하는 아저씨들이 뭐라고 하더라? 아··· 맞다, 그거.'

쉽게 말해··· 로케트 발사였다.

12화

1.

- 쾅!

"이런 제기랄. 또 죽었어!"

대머리 중년 아저씨가 씩씩거리며 캡슐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초보 존에서 놀 군번이야? 캐시템은 대체 왜 안 파는 거야!"

비슷한 또래의 양복 입은 아저씨도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제작사 놈들이 사업할 줄을 몰라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셔츠를 풀어 재끼며 욕하는 모양이 딱 봐도 헤비 과금러, 즉 '고래'였다.

"감질나서 못하겠네. 거래소 함 켜봐라."

"쯧. 작업장 놈들이 1골드를 10만 원에 올려놨네. 일주일 전에는 만원도 않던 거를."

업적, 직업 시스템이 오픈되면서 경쟁에 불이 붙었다.

골드와 아이템을 찾는 이는 많은데 물건이 없었다.

'한번 창고 정리도 할 타이밍이 되긴 했지.'

인벤토리가 제공하는 공간은 대략 자신의 몸 크기 정도.

나는 핸드폰을 켜서 남는 물건들을 거래소에 올렸다.

줘도 안 쓸 하품 위주로만.

"어? 누가 하급 치유 물약 올렸는데?"

"그럴 리가. 고블린 동굴에서 최하급만 간신히 드랍되지 않아?"

"자 봐, 여기 있잖아."

"체력 7% 즉시 회복···! 이거는 사야지."

"그렇지. 역시 사냥은 물약빨이지!"

- 띠링, 띠링!

- [하급 치유물약]이 판매되었습니다.

- 원화 5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 아저씨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뭐 쓸만한 무기 없냐? F급은 데미지가 영 안 먹어."

"E급 매물이 나와야 말이지."

아저씨들은 거래소 곳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떡밥을 던져볼까.'

나는 핸드폰을 조작한 후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이거 뭐지? 박스는 원래 하얀 거 아니었어?"

"브론즈 박스?"

거래소에 처음 보는 아이템이 올라왔다.

판매는커녕, 이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거 모르세요? 요즘 엄청 핫한데."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서 핸드폰 화면을 꺼냈다.

화면 속에서는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브론즈 박스를 열고 있었다.

그러자 환한 빛과 함께 커다란 검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날카로운 강철 대검(C)]

- 매우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군용 대검.

- 근력 +2, 체력 +1

- 공격력 +10%, 치명타 확률 +5%

"미, 미친!!! 스탯을 3개나?"

"공이랑 치까지. 미쳤다, 대박이다!"

근처에 있던 아저씨들이 단번에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런 거 처음 봐, 대체 누구지?"

"누군지는 잘. 저도 받은 영상이라."

어디에도 올리지 않은 내 개인 영상 녹화본이었다.

"저게 브론즈 박스를 까면 나온다고?"

"네, 랜덤하게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이긴 한데, 살짝 양심에 찔렸다.

그들에게는 안 들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있었으니까.

- [권능:미다스의 손]이 작용합니다.

- '재운', '확률 보정'이 중복 적용됩니다. 최상급의 운이 깃듭니다.

- [날카로운 강철 대검(C)] 획득!

- '별 볼일 없는 기회'를 통해 '최고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재운(財運). 재물과 관련된 행운이 대폭 증가하고.

확률 보정. 무작위 확률이 적용될 때, 가장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

쉽게 말해 이런 결과는 나 외에는 나올 확률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와,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야, 저 정도면 서버 지존검 아니냐?"

꿀꺽.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저씨들은 슬슬 서로 눈치를 보았다.

당장 올라온 물건은 하나!

양복 아저씨가 슬쩍 주머니 속에서 손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몰래 뒤 돌더니 뭔가를 했다.

- '넌내게목욕값을줬어'님이 입찰하셨습니다.

- 최저 입찰가 5,000,000원.

- 입찰 마감 기한 : 하루.

용기 있는 자에게 보상을!

나는 씽긋 웃으며 몰래 핸드폰을 조작했다.

- 띠링, 띠링!

- 마감 기한을 '즉시'로 변경합니다.

"어라, 낙찰이네."

낙찰자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인마, 그새를 못 참고?"

"함 까보기나 해봐."

한국인답게 바로바로 진행한다.

"떴다! '쓸만한 강철검(D)'!"

"이 정도만 해도 엄청 쎈거 아니야?"

"미친! 대박이지, 인마. 이거 클랜 녀석들도 몇 개 없는 거야. "

'아저씨, 운이 좋네.'

나도 감탄했다.

저 아저씨는 나와는 달리 그냥 쌩으로 저걸 뽑아낸 거다.

보통은 E급도 잘 안 나온다.

옆에 있던 대머리 아저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나중 가면 더 좋은 게 나올 텐데."

"어느 세월에. 아, 몰라, 지른다."

한국식 과금 게임에 익숙한 아저씨들에게, 내 아바타가 약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일!

대머리 아저씨는 생긴 대로 빠구가 없었다.

- 띠링, 띠링!

- '마지막씹새'님이 즉시 구매를 선택하셨습니다.

- [브론즈 박스]가 판매되었습니다.

- 원화 1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까봐, 까봐."

[조잡한 녹슨 검(F)].

"···"

역시. 운을 운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뿌드득. 열···받네."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에서 스팀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씨바, 내가 집행검에 3억 지른 놈이야. 까짓 천만 원? 흥!"

- 띠링, 띠링!

- '마지막씹새'님이 즉시 구매를 선택하셨습니다.

- [브론즈 박스]가 판매되었습니다.

- 원화 1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조잡한···]

"씨바아아!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

- 띠링, 띠링!

- [브론즈 박스]가 판매되었습니다.

- 원화 1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조잡한···]

"씨이이이이이바아아아!"

- 띠링, 띠링!

[조잡한···]

- 띠링, 띠링!

[조잡한···]

- 띠링, 띠링!

[조잡한···]

- 띠링, 띠링!

[조잡한···]

- 띠링, 띠링!

[조잡한···]

모두가 숨을 멈추고 광란의 질주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순간.

- 띠링, 띠링!

"떴다!"

"와, 또 나오네!"

"미친!"

[용감한 매의 활(C)]!

대머리 아저씨의 기합이 통했나 보다.

함박웃음을 짓는 아저씨를 보니 나까지 흐뭇해졌다.

'호, 몇 개 까지도 않았는데.'

아저씨들의 운수가 대통한 날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다른 아저씨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물꼬가 트이자, 다음은 금방이었다.

- 띠링, 띠링!

- [브론즈 박스]가 판매되었습니다.

- 원화 1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야발놈아, 즉구는 반칙이지."

말하는 아저씨도 최저가 입찰 따위는 안 했다.

모두 화끈하게 다 즉시 구매였다.

- 띠링, 띠링!

"내가 서버 지존 먹는다."

"누가 할 소릴. 울 회사 지분 팔아서라도 내 캐릭터는 최고로 맞춰준다."

친구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다.

- 띠링, 띠링!

- [쓸모없는 한 손 검(F)]이···

"서버 지존검 나올 때까지 깐다."

원수를 만난 듯 이를 악문 아저씨도 있었다.

- 띠링, 띠링!

- [꽝!]

어느새 그들은 돈으로 싸우고 있었다.

도박이 이렇게 무섭다.

'역시 역전의 용사들!'

N 모사의 횡포에 단련된 그들에게 있어서 돈질은 당연한 일!

거르고 거른 고래들답게 일단 시작하자 돈을 물 붓듯 쏟아 넣었다.

- 띠링, 띠링!

- 띠링, 띠링!

- 띠링, 띠링!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핸드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릴 정도였다.

'아재요, 화이팅이요!'

그들의 싸움 구경은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선량한 아재들을 털어먹으려니 약간 양심에 걸렸다.

'이러다 사탄이 선생님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모 회사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존경합니다, 사탄 형님.

열심히 배울게요, 털어먹는 법.

"화이팅!"

나는 진심 어린 응원을 날리고 유니티에 로그인했다.

2.

캡슐 안 세상도 난리였다.

옷도, 장비도 없는 뉴비들에게 사냥은 꿈같은 이야기.

당장 돈부터 벌어야 했다.

하다못해 단검이라도 있어야 토끼라도 잡을 테니.

술집 알바, 상점 직원이 된 사람은 수완이 좋은 축에 속했다.

마을 주민의 심부름 퀘스트조차 경쟁이 치열했다.

초보 지역임에도 물가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고소득 전문직을 노리는 고인물들도 있었다.

대장장이, 재봉사, 상인 등 전통의 생산직이 있으니.

하지만 게임이라고 만만하게 생각한 이들은 문턱도 넘지 못했다.

대부분의 직업 길드는 소수만을 도제로 뽑아서 오랜 시간 가르치는 방법을 선호했으니까.

그 결과, 대부분의 유저들이 아무런 직업이 없는 '언랭크'로 남았다.

"젠장, 게임 속에서도 백수라니!

"땀 흘려 일 좀 해보겠다는데, 기회를 안 줘. 어떻게 현실보다 구직이 더 어렵냐."

나는 한탄하는 유저들을 뒤로 한 채, 길드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짤랑짤랑.

인벤토리가 꽉 차서 주머니에 넣어놓은 금화 소리였다.

'든든하네.'

인벤토리도 각종 물품으로 가득했다.

[소지금 : 5,215골드]

[물품 : 플래티넘 박스*3, 골드박스*5, 최상급 치유물약*5, 상급 치유물약*30, 중급 저항 물약*30···]

[무구 : 검술 길드의 제식 검(B), 날카로운 강철 대검(C), 잘 손질된 가죽 갑옷(C), 경쾌한 가죽 신발(C)···]

골드 등급 이상 박스와 골드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거기에 바깥에서도 원화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고.

'인생은 한방이지!'

나는 소소한 보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일타 쌍피, 일타 삼피!

10배, 100배, 1,000배!

나는 도박중독자 같은 말을 내뱉으며 길드 거리로 행했다.

돈 길을 걷기 위해서는 꼭 얻어야 할 물건이 있었으니까.

3.

나는 길드 거리에서 '나침반과 지도' 간판이 걸린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모험가 길드가 텅 빈 건 또 처음 보네.'

비전투직업으로서는 최고 인기 직업이었다.

'왜냐하면 일확천금을 노리는데 최적화된 직업이었으니까.'

이곳은 초보 마을이면서 동시에 개척자의 전초기지였다.

사방이 미개척지였고, 성취할 수 있는 업적, 숨겨진 보상이 가득했다.

내가 사무실을 둘러보던 때였다.

"못 나가네. 자네들은 아직 안돼. 적어도 몇 달은."

안경 쓴 금발의 중년인이 보던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디를요?"

"자네, 여행자 아닌가? 설명하기도 입 아프군. 지도나 보게나."

길드 가입 희망자에 지쳤는지, 중년인이 턱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지도 정중앙에는 시작 마을 '다섯 번째 손가락'이 있었다.

근처에는 들판, 즉 필드 존이 있고 더 나아가면 사방은 높다란 산맥으로 막혀있었다.

거기에는 각종 몬스터 그림이 표시되어 있었으며, 녹색 독 구름 표시까지 있었다.

'유저들의 현재 수준으로는 턱도 없겠군.'

산맥에는 들판 고블린 따위는 간식으로도 삼지 않을 맹수와 고위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특히나 어려운 것은 지속형, 즉 도트 데미지를 주는 독 구름.

현재 유저들의 체력이나 저항력으로는 산맥 초입에서 다 죽을 판이었다.

그리고 그 산맥 바깥 어딘가에 나의 던전이 잠자고 있었다.

"저는 정식으로 모험가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모험가가 보조 직업 중 가장 효율적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나중에 나오는 '전직 시스템'까지 고려하면 무조건 얻어야 했다.

"다른 길드처럼 도제라도 들여줄 줄 아나 본데. 꿈 깨게."

중년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모험가라는 족속들은 다들 방랑벽이 있어서 누굴 키울 인내심이 없거든."

"제가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호기롭게 나서다가 죽는 꼴 많이 봤네. 자살하려면 다른 데 가보···"

- 채앵.

호통치려던 중년인은 멈칫했다.

내가 빛나는 롱소드를 뽑아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뭐 하는 짓인가! 감히···!"

"진정하시고 여기를 보시죠."

화를 내려던 중년인은 멈칫했다.

폼멜 부분에 새겨진 문양을 꼼꼼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것은··· 검술 길드의 문양이군. 진품이 맞아."

지금껏 날파리 대하듯 하던 사람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검술 길드의 제식 검(B)]

- 검술 길드에서 드워프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상급자용 검입니다.

- 굉장히 날카롭고, 파괴될 가능성이 작습니다.

- 근력 +4, 민첩 +4

- 절삭력 +20%, 치명타 확률 +10%

검술 길드에서 형식상 빌려온 검.

하지만 길드원 자격만 있으면 무한 대여 가능하니 사실상 내 거다.

신분을 증명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수습도 아니고 정식 길드원이라. 그냥 애송이가 아니었군. 내가 사과함세."

중년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의자를 가까이 당겼다.

"사과 대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흐음··· 트레디, 그 꼬장꼬장한 양반이 인정했으면 어느 곳에 가나 제 몫 이상을 하겠지만···"

"저에게는 꼭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부디!"

나는 뜨거운 목소리로, 연기에 혼을 담아 말했다.

- [스킬:기만(F)]이 활성화됩니다.

- 설득력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가문의 슬픈 사연은 나도 그 양반에게 들었지."

나도 모르는 사연이?

"부모님의 평생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100%의 진심으로 말했다.

'파리, 로마, 런던 찍고 바르셀로나까지!'

부모님의 편안하고 행복한 은퇴 여행을 이루고 말리라!

"사실 내 안경에는 약하지만, 진실을 판별하는 마법이 걸려있네. 자네의 마지막 말은 순수한 진실이군!"

가문의 숙원을 이루는 것은 어떤 남자든 명예롭다고 말하는 임무였다.

"좋아, 내 허락하지."

"···!"

"그리고 자네의 진심을 보았으니."

그는 금고를 열더니 작은 갈색 양피지를 건넸다.

"이걸 받게. 빌려주는 것일세."

[탐험 지도(C)]

- 모험가 길드가 제작한 마법 지도입니다.

- 탐험할 가치가 있는 물건을 표시합니다(반경 5미터).

- 탐험 지형과 내역을 자동으로 기록합니다.

'이거지!'

아이템 등급이 문제가 아니다.

지도 자체가 돈으로도 못사는 모험가의 비전.

미개척 지역을 돌아다니면, 맵이 밝아지는 미니맵 기능을 했다.

"좋네. 모험가 길드는 교육이나 한 번의 시험으로 길드원을 뽑지 않지. 진정한 모험가라면, 스스로 개척해야지!"

[직업 퀘스트]

조건 : 탐험 업적 점수 획득 (0/100)

성공 시 : 직업 '모험가' 전직, '탐험 지도' 획득

실패 시 : 모험가 길드 장 '코르버'의 호감도 하락, 마을 평판도 하락.

바로 직업 퀘스트가 떴다.

"초보 모험가에게 이걸 건넨 걸 알면 사무장에게 혼나겠군. 대신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네. 죽더라도 가지고 오게!"

코르버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웃긴다고 생각했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왠지 부장님이 떠오르네.'

회사 생활 잘하려면 이럴 때, 같이 웃어야 한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길고 힘들었던 준비가 끝났다.

딱 기다려라, 내 던전아. 형이 간다!

13화

1.

"잠깐!"

길드를 나서는데 코르버가 나를 붙잡았다.

"이대로 보내면 트레디를 볼 낯이 없지."

"···?"

"자네의 복장은 검사로서는 손색이 없네만···"

트레디는 내 모습을 한번 쭉 훑고는 혀를 살짝 찼다.

"결코 모험가라고는 할 수 없네. "

"···!"

"내 인심 쓰지. 우리 길드의 '모험가 용품'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네. 무려 정식 길드원 특가로!"

"할인! 일 년에 한 번도 안 한다는 그 할인!"

눈앞에 반짝이는 말 구름이 뜬 기분이었다.

전문 직업 길드에서는 전용 물품도 판다.

일반 상점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좋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군침만 흘리곤 했는데.

"특별 할인, 감사합니다."

씨익 웃는 모습이 살짝 얄밉기도 했지만.

전문 기능에, 옵션까지 붙은 명품을 싸게 사면 나도 이득이다.

이거야말로 서로 도움이 되는 거래, 상부상조.

"검사답게 결단이 빠르군. 이리 오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 뒤편의 창고로 나를 이끌었다.

사야 할 물건은 많았다.

야전 천막, 조리도구, 부싯돌, 수통, 배낭, 식량 같은 캠핑용품은 기본.

못, 망치, 삽은 물론 곡괭이까지 챙겼다.

"이런 것은 왜?"

"끌끌. 모험가라고 땅 파먹고 사나. 좋은 날 오기 전까지 먹고는 살아야지."

"그렇군요."

한 방 터지길 기다리다 굶어 죽기 십상.

의외로 모험가의 주 수입원은 광물, 약초 따위의 재료템이었다.

약초를 캘 수 있는 호미와 약병 등 각종 채집 도구도 받았다.

"오며 가며 하나도 놓치지 말고 쓸어 담게!"

"꼭 그러겠습니다!"

하이에나와 같이 눈을 빛내는 코르버에 진심으로 맞장구쳤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들, 모두 다 내가 먹어야지.

전투보다는 야외 활동에 용이한 전용 의복, 신발, 망토, 두건 등도 받아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나침반, 측량 도구, 망원경 등 정밀성이 요구되는 전문용품도 당연히 챙겼고.

마지막으로 코르버는 이상하게 생긴 고기를 넘겼다.

"으윽. 비린내. 이것은 무엇인지요?"

딱 봐도 사람이 먹을 건 아니고. 아직 펫도 없는데?

"어허. 이건 귀한 것일세. 오서독스의 고기로, 몬스터와 맹수들이 아주 환장을 한다네."

오서독스는 스컹크와 비슷한 초식동물이었지만 잡기가 매우 힘들기로 유명했다.

냄새는 지독하지만 의외로 맛이 좋고, 마나의 향기까지 풍긴다나.

"몬스터들이 많이 몰렸을 때,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걸세. 좀 비싸지만··· 자네 살코기보다는 이놈의 살코기를 먹이는 게 훨씬 낫지 않겠나?"

코르버의 말에 나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몸은 소중하니까요."

꽤 비워냈던 인벤토리가 거의 다 찼다.

모두 챙기니 지출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든든했다.

"하나 크게 터트려보게. 빵!"

풍선 터지는 액션을 열심히 하는 코르버.

이 동네에서 많이 쓰는 밈인가, 코르버 혼자만의 아재 개그인가.

후자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나는 본능을 따랐다.

"빵!(대박 터트리고 오겠습니다!)"

"빵!(할 수 있네. 큰 건 하고 금의환향하게!)"

두 손으로 팡 터트리는 리액션을 하며 자괴감이 들었지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니 기분이 풀렸다.

나는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필드로 향했다.

2.

- 파밧

토끼들이 뛰노는 마을 외곽에 초보자들이 바글거렸다.

흐뭇한 마음으로 응원하고서 조금 더 걸었다.

- 마을을 벗어납니다.

- 필드 존 '평화로운 들판(★)'에 들어섭니다.

"가운데로 몰아!"

"한 마리만 꼬셔, 더는 안돼!"

"오케이!"

서너 명의 유저들이 대오를 이뤄서 사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굶주린 늑대(E)는 초보에게는 쉽지 않은 사냥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젠장, 애드 조심하라고 했잖아!"

"정신 안 차릴래?"

"망했다!"

늑대는 혼자 다니지 않으니까. 늑대 네 마리가 유저들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도망치면서도 내게 경고했다.

"거기, 도망쳐요, 애드 붙었음."

"튀튀튀!"

개매너가 판치는 곳임을 감안하면, 최소한의 인성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 팟!

갈고 닦은 트레디의 찌르기.

허리춤에 있던 검이 빛을 뿜었다.

- 크리티컬 히트!

- 굶주린 늑대를 해치웠습니다.

한칼에 늑대가 캐캥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팟!

- 팟!

- 팟!

한 줄기 빛이 어릴 때마다 한 마리씩.

마나를 실을 필요도 없었다.

순수 근력과 민첩만 해도 18, 17이 넘은 상황.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는 소리다.

"미, 미친···!"

"한 방에?"

"와, 씹고인물이네."

그들은 감탄하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애드 튀어서 다 죽을뻔했는데."

"별말씀을."

내가 인사하고 떠나려 하자 그들이 나를 붙잡았다.

"저기, 이거 갖고 가셔야죠."

- 굶주린 늑대의 가죽(F)

- 굶주린 늑대의 살코기(F)

진짜 줘도 안 먹을··· 인벤토리에 넣는 게 손해인 잡템이었다.

"괜찮습니다. 님들 가지세요."

"헉··· 역시 고인물. 감사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운이 좋네'를 연발하며 기뻐했다.

"상점에 팔면 실버 몇 개는 만지겠네."

"장비 조금이라도 업글할 수 있겠다."

돌아서서 가려는데 다시 말을 건넸다.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

"그쪽은 블랙 도그 클랜 구역이에요."

"구역이라니요?"

"어? 모르세요? 며칠 전부터 걔네들이 거기 통제하기 시작했어요.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어요."

아, 그렇지, 올 게 왔네.

'통제'.

대한민국 MMORPG의 유구한 전통 아니겠는가.

"뭐가 있길래요?"

"들판 서쪽에 '외로운 고블린 둥지'라는 던전이 있는데요."

"클랜원이나 입장권 산 사람들만 사냥하게 해요."

"나쁜 새끼들. 지들만 꿀 빨아. 거기 E급 템도 자주 뜬다는데."

"놈들 때문에 우리는 평생 초보 마을 못 벗어나겠어."

묻지도 않았는데 블랙 도그 클랜에 대한 불만을 막 쏟아냈다.

"그냥 지나만 갈 겁니다."

내 목적지는 들판을 벗어난 곳부터 시작이니까.

"그것도 용납 안 할걸요? 흘러나온 몬스터도 다 자기들 거라고, 근처도 못 가게 함."

"걸리면 무한 척살!

"님도 실력에 자신 있는 고인물이신 것 같은데. 꼬와도 그냥 돈 내시던지 딴 데 가셔야 할 거예요."

클랜원 숫자도 상당하고, 블랙 라이온이라는 거대 길드와 연맹이라고 했다.

사실상 산하 세력인 셈.

돌아가려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진짜 개새끼들이죠."

"맞아. 누가 확 쓸어버렸으면··· 어라?"

이야기를 하는 사이, 고인물이 사라졌다.

3.

- 필드 던전 '외로운 고블린의 둥지(★)'에 들어섭니다.

보이지 않는 막을 통과하는 느낌과 함께 던전 외부가 보였다.

낮은 둔덕을 중심으로 천막들이 쳐져 있고, 유저들이 곳곳에 뚫린 동굴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니오?"

"꼬우면 딴 던전 찾아내 보던가."

"쳇, 독점이면 단가."

불만을 토하면서도 다들 클랜의 지침에 순응했다.

"어이, 거기. 입장권 제시."

검은 개가 그려진 가죽옷에 해골 문신을 한 클랜원이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귀가 막혔냐, 새끼야?"

손가락을 까닥하며 말하는 꼴이 일진이 셔틀을 부르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어그로를 끌면 후회할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엄숙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꼴통 새끼. 보면 몰라? 통행료···어라?"

불량한 태도로 침을 뱉던 녀석이 내 모습을 훑더니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와, 복장이··· 혹시?"

나는 모험가의 옷이 아닌, 검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잘 손질된 가죽 갑옷(C), 경쾌한 가죽 신발(C), 위엄있는 망토(C), 검술가의 벨트(C), 검술 길드의 휘장(C).

유니티가 A급 이하 아이템을 공개한 덕에, 어지간한 아이템은 알려졌다.

길드 휘장에서 침을 삼키더니, 검에서 숨을 멈췄다.

"저건··· 헉!"

녀석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검술 길드의 제식 검(B)]

현재 서버 지존검으로 소문난 것이 C급이다.

그런데 무려 B급 검.

거기다 온몸에 호화로운 아이템으로 도배했고, 전문 길드의 정식 문양까지 둘렀다.

수습도 아닌 정식 길드원이라는 소리.

유저일 리 없다, NPC다, 그것도 고위 NPC!

라는 판단이 설 수밖에 없다.

"시, 실례했습니다."

"감히 내 앞길을 막다니. 검술 길드에 대적한다는 뜻인가?"

내 질문에 녀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똘마니 하나 때문에 전문 길드와 싸운다? 그것도 길드 중 최강을 다투는 검술 길드와?

상상하기도 힘든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서조차.

"꿀꺽. 아, 아닙니다. 단지 저희 여행자들끼리 작은 훈련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훈련이라. 고작 이런 데서?"

최대한 티꺼운 표정으로, 흥 소리만 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여행자를 무시하는 오만한 중견 검사 흉내를 내야 했으니까.

"그쪽은 위험한··· 아."

녀석은 산맥 쪽으로 향하던 나를 말리려다가 손을 내렸다.

"NPC니까. 뭐 몬스터도 NPC는 안 건드리겠지."

4.

- 필드 존 '광기의 산맥(★★★★)'에 진입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합니다. (1/100)

산맥의 초입인데도 사나운 마나가 넘실거렸다.

'역시 최초 발견 메시지가 없군.'

여기까지는 탐사했겠지. 그런데 왜 더 들어가지 않았을까?

더 좋은 게 많을 것이 뻔한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꼴보고 그냥은 못 지나치지.'

클랜에 직접적인 원한은 없었다.

다만 '통제'라는 명목으로 군림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평민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귀족'들이 연상되었으니까.

좋은 사냥터를 독점하고, 고위 지역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리면, 통제가 성행하면···

유저 전체의 성장이 지연된다.

'인류 전체의 손해지.'

정의 구현한다고 내 시간을 다 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치워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아니꼽지.'

내 맘대로 하는 게 좋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심보가 뒤틀려서 들이 받아버리곤 했다.

'부모님이 많이 불려가셨지.'

그래도 누를수록 튀는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난 원래 쓰레기였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왕으로 불리웠다.

그 왕 말고 다른 왕.

···인성왕!

그래, 내가 한 인성질하지.

나는 씨익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고기를 꺼냈다.

"애들아, 먹을 거다!"

좀 더 힘차게, 그 아나운서처럼.

"트롤짓을··· 시작~ 합니다!"

고기를 잘라서 점점이 늘어놓으며 뒷걸음질 쳤다.

- 아우우울!

- 크오오오!

피 냄새와 짙은 마나 향에 멀리서 몬스터들과 맹수들이 요동쳤다.

나는 그렇게 쭉 그들의 매표소까지 고기를 뿌렸다.

- 푹, 푹, 푹.

검으로 고기에 깊은 칼집까지 내서 던전 곳곳에 뿌렸다.

감시하는 클랜원들의 눈을 피해서 열심히.

내가 빨리 움직이기도 했지만, 모험가 길드에서 산 은신의 망토(C) 덕이 가장 컸다.

"둥글게, 둥글게~짝!"

둥지 주변을 고기들로 에워쌌다.

인간의 후각 범위는 짧지만, 몬스터와 야수들은 다르다.

- 쿠오오오오!

- 크와와앙!

먼지구름이 일었다.

'흉포한 붉은 늑대, 미쳐버린 곰에··· 미친!'

저 멀리에는 오우거까지 보였다.

먹이에 끌린 야수와 야수를 먹으려는 몬스터의 집단 이동이 시작되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끄아아악!"

"초, 초대형 애드다! 사고야!"

"본부에 연락··· 으악!"

갑작스러운 몬스터 웨이브에 클랜의 사냥터는 난리가 났다.

"아아악!"

싸가지 없던 그 클랜원은 곰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죽었다.

아무리 동화율 낮아도 저렇게 죽으면 꽤 아플 거다.

"주, 죽는다."

"미친 블랙 도그 놈들아, 관리도 못 하냐?"

"이게 뭐야, 내 돈 물어내! 부활해서 보자!"

고객들은 블랙 도그를 욕하며 죽었다.

'보기 좋구나.'

나는 씨익 웃었다.

죽은 고객들에게는 살짝 미안했지만··· 블랙 도그 클랜의 타격은 이보다 훨씬 더 클 터였다.

오면서 몬스터들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친절하게 길까지 터줬으니까.

'흠, 오늘은 여기까지.'

나중에 AS도 해줘야지.

쑥대밭이 된 고블린 둥지를 뒤로 하고, 즐겁게 산맥으로 향했다.

5.

- 필드 존 '광기의 산맥(★★★★)'에 진입합니다.

- 입구를 지났습니다, 위험도가 상승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합니다. (2/100)

조금 더 걷자, 무언가를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숲은 어두컴컴했고, 소름끼치도록 조용했다.

어느덧 뿌연 초록빛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 산맥 초입을 지나쳤습니다.

- 위험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꿀꺽.

긴장과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이제 시작인데···

"으으윽!"

- 산성 안개 지대(★★★★)에 진입합니다.

- 독기가 지속적으로 침투합니다. [상태 이상 : 중독]에 걸립니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아아악!"

- 미쳐버린 말벌(B)에 쏘였습니다.

- 근육조직이 괴사합니다. [상태 이상 : 마비]에 걸립니다.

- 말벌 침으로 근력이 0.1 떨어집니다!

- 말벌 침으로 근력이 0.1 떨어집니다!

- 말벌 침으로 근력이 0.1 떨어집니다!

"으어어!"

- 웨어울프(A)의 하울링에 [상태 이상 : 혼란]에 빠졌습니다.

- 하피(A)의 비명에 [상태 이상: 환각]에 빠졌습니다.

- 정신력이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

..

.

그래. 예상은 했어, 젠장···

'개빡세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정신은 혼란스럽다.

어지간한 사람은 숨만 쉬어도 죽을 수준의 난이도.

그러니.

'너무 좋아, 완전 좋아!'

나는 기쁘게 웃었다.

다른 유저들은 절대 못 뚫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분간, 아니 오랫동안 나만 드나들 수 있다는 뜻!

미개척 지대도, 이후의 던전도 모두 다.

"무야호~!"

환성을 지르며 크게 웃었다.

안다, 이게 바로 놀부심보다.

나 혼자만 다 먹겠다는 거.

하지만 내 본성이 그러한 걸 어떡하나.

'내가 너희들 몫까지, 나 혼자 열심히 클게!'

다 함께 외쳐보자.

나 혼자만 레벨업!

14화

1. 사냥

꿀꺽꿀꺽.

일단 마시고 시작하자.

- 중급 해독 물약을 마셨습니다.

- [상태 이상 : 중독]이 해소되었습니다.

- 중급 저항 물약을 마셨습니다.

- [상태 이상 : 마비]에 저항하였습니다.

- 상급 치유 물약을 마셨습니다.

- 체력이 20% 회복됩니다.

먼저 물약 도핑부터.

중급 신속 회복, 성장 가속, 민첩 물약도 빼먹으면 섭섭하지.

- [권능 : 불굴]이 정신 공격에 저항합니다.

- [상태 이상 : 혼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 [상태 이상 : 환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 정신력이 1 상승합니다.

옷도 갈아입고.

- 모험가의 가죽 갑옷(C)이 마비침을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 모험가의 두건(C)이 독기를 일부 차단하였습니다.

역시 '템빨'은 위대하다.

독기는 임시로 해결했고, 문제는 당장 달려드는 미쳐버린 말벌(B)들.

- 파밧!

- 휘익!

'진짜 미쳐버리겠네.'

벌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컸다. 작은놈이 팔뚝만 했다.

최약체 종이라고는 해도 무려 B급이다.

무엇보다 숫자가 많고, 빨랐다.

- 휘익!

탈 인간급의 검격을 뿌려대도 맞는 놈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스친 놈들도 끄떡도 안 했다.

그 와중에 독침을 쏘거나 몸통 박치기를 해왔다.

아찔한 순간이 여러 번 나왔다.

'시작부터 밑천을 다 까야 하는군.'

일반 평타 공격으로는 속도도, 데미지도 부족했다.

[스킬 : 초급 마나 운용(C), 11/100]

몸에 마나를 실으니 검이 훨씬 더 가볍고 빨랐다.

- 팡!

[스킬 : 마나 소드(C), 10/100]

검에 마나를 실으니 스친 녀석이 터져버렸다.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독침을 피하고, 나비처럼 쐈다.

- 휘익··· 팡!

- 휘익··· 팡!

"헉헉헉···"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풀 라운드를 뛴 복서처럼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이겼다···헉헉."

이십여 마리의 벌 사체가 주변에 늘어져 있었다.

- 근력이 0.5 상승합니다.

- 체력이 0.5 상승합니다.

- 마나가 1 상승합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살짝 정체되었던 스탯이 확 뛰었다.

[리얼 모드]와 도핑의 도움도 컸고.

'이놈들이 제일 약한 놈들이라고 했지.'

먹이사슬에서 제일 밑에 자리한 녀석들을 처치하는데, 내 카드의 상당수를 썼다.

쉴 틈도 없었다.

- 크르르르···

다수의 [미쳐버린 대형 늑대(B)]들.

'늑대야 곰이야. 왜 이렇게 커.'

눈에 광기와 살기가 번들거리면서도 진형을 이루는 것을 보니 지능도 높아 보였다.

도핑도, 템도 없는 순정상태였다면 1대1로도 못 이길 상대가 무려 십여 마리였다.

'미치겠네. 쉴 틈은 줘야지!'

불만을 토할 틈도 없이,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 팟!

한 마리가 몸을 던져서 나와 부딪히려고 했으나, 재빨리 피해냈다.

'미친··· 몬스터가 전술까지 쓴다고?'

한 놈을 희생해서 나를 붙잡아두려는 시도였다.

- 크르르!

또 다른 놈이 내 팔에 시커먼 이빨을 들이댔다.

- 팅!

- 푹.

빛살 같은 속도로 입안에 검을 밀어 넣었다지만, 녀석은 피를 흘리며 후퇴했다.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야?'

어떻게 약점에 마나 소드를 맞고도 안 죽어? 제대로 된 B급 몬스터는 다 이정도야?

개체 한 마리, 한 마리가 황당하게 강했다.

- 크앙!

이번에는 네 마리가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마치 인간의 합격술을 보는 듯 정교한 타이밍이었다.

'벌써 이걸 써야 한다니.'

나의 검에 찬란한 빛이 어렸다.

[스킬 : 오러(A), 1/100]

미숙한 숙련도에 보잘것없는 양이었지만, 위력은 확실했다.

- 파바바밧!

나는 풍차처럼 돌면서 네 군데를 타격했다.

정확하게 늑대의 미간만을 노렸다.

- 털썩.

늑대들은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분노한 늑대들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 파바바밧!

순간 세상이 느려진 기분이었다.

나의 사고속도, 반응 속도가 빨라진 덕이었다.

몬스터의 마나 저항력도, 강철같은 갈기도 오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 쿠우우웅.

마지막 커다란 늑대가 쓰러졌고, 나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체력이 0.5 상승합니다.

- 근력이 0.5 상승합니다.

- 마나가 1 상승합니다.

- 초급 마나 운용의 숙련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 마나 소드의 숙련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 오러의 숙련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축하 메시지 비슷한 것이 떴지만,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개, 개빡세네···헉헉."

가진 카드 대부분을 써서 물리친 거다.

당장 멀리서 울음소리만으로도 나를 흔들었던 녀석들을 만나면?

반인반수 웨어울프나 마녀급 하피 등 상위종들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할 터였다.

'산 넘어 산이네.'

역시 다른 유저들을 크게 제쳤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결국 내가 물리쳐야 할 것은 이런 괴물들이었으니.

무엇보다 가장 큰 난관이 있었다.

- 독기가 지속적으로 침투합니다. [상태 이상 : 중독]에 걸립니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산성 안개.

독 저항도, 해독도 가능하다.

'그런데 안 될 때도 많지.'

지속적으로, 항상, 24시간 공격이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 조금씩 체력이 깎였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가장 무서운 게 이런 도트 데미지였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일반 마법사보다 흑마법사가 더 무서운 이유 중 하나였고.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이 광기의 산맥에서 시작부터 좌절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물약이 아무리 많아도, 영원할 수는 없다.

결국 소모전으로 가면···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배드 엔딩, 즉 중독사다.

2.

모험가의 야전 텐트(C)

- 온도 유지, 공기 정화, 편안한 숙면에 도움이 됩니다.

- 해로운 효과를 차단할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약간이나마 안전한 텐트 안에서 고민했다.

'역시 지금이야.'

흔히들 쓰는 말, '운이 좋다'는 어떤 뜻일까?

마법사가 박스에서 '뇌전폭풍의 전투망치'를 뽑으면 기뻐할까?

'쌍욕을 오지게 박겠지.'

기사나 궁수도 마찬가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운이 좋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눈앞에 플래티넘 박스 3개를 놓고 두 손을 모았다.

'현명한 제갈공명 님, 용맹한 조자룡 님 부디 도와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자세로.

공교롭게도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큰 위기를 맞아 출진하는 조자룡에게 제갈공명이 세 개의 비단 주머니를 건넨다.

조자룡은 위기 때마다 주머니를 열었고, 거기서 '뿅!'하고 상황에 딱 맞는 해결법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내 생각이 맞다면, 분명히 박스는 이 문제에 가장 적합한 해결법을 내려줄 것이다.

'나올 거야. 나오겠지?'

나는 박스를 깔 준비를 하며 발을 떨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SSS급 풀 플레이트 아머 이딴 거 나와도 소용없다.

내 생각이 맞다면··· 맞다면···

- 파아앙!

- [플래티넘 박스]를 개봉하였습니다.

- [권능:미다스의 손]이 작용합니다.

- '재운', '확률 보정'이 중복 적용됩니다. 최상급의 운이 깃듭니다.

- [저주받은 흡혈검(S)]를 획득하였습니다!

"대박, 대박, 대박!!!"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환호했다.

[저주받은 흡혈검(S)]

- 고대 마법으로 제련된 신검이었으나 타락한 영혼에 의해 오염되었다.

- 체력 -1, 근력 -1, 정신력 -1

- 흡혈 : 상대를 죽일 경우, 상대 체력의 10%를 흡수한다 (강화 가능)

S급도, 오염도, 마이너스 스탯도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려 '체력 흡수' 옵션이라니!'

흡혈. 죽여서 상대의 체력을 빼앗는다!

옵션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치는 옵션이었다.

무엇보다 왕 중 하나인 흡혈군주, 뱀파이어 로드의 핵심 권능이었다.

대도시에 나타난 그는 불사(不死)의 악몽이었다.

'그렇다면···'

주변에 적들이 많다면,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대량살상에 가장 최적화된 스킬이었다.

'당연히 왕의 권능보단 약하지만··· 된다는 것이 중요하지!'

뱀파이어 로드의 핵심 스킬과 근본적으로 같은 종류다.

거기다 강화 가능하니, 더 나아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흐흐흐···'

내 웃음소리가 너무 악당 같았다.

'생각해보니 사람들 앞에서는 못 쓰겠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 이 대륙에서는 안 된다.

대놓고 쓰면 '마검'이라고 선언하고 척살 당한다.

실제로 오래 쓰면 정신이 무너지는 마검이 맞기도 하다.

'선언' 당하면 교단의 성직자나 기사들은 물론 현상금을 노린 유저들에게도 쫓긴다.

'사람들 앞만 아니면 되잖아?'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나는 피식 웃었다.

3.

- 미쳐버린 대형 늑대를 쓰러뜨렸습니다.

- 적의 체력 10%를 흡수합니다.

- 체력이 2 회복되었습니다.

- 미쳐버린 대형 늑대를 쓰러뜨렸습니다.

- 적의 체력 10%를 흡수합니다.

- 체력이 2 회복되었습니다.

사냥은 힘들었지만, 사냥 끝나고 나면 다시 풀 체력이 되었다.

'이거 개 사기잖아!'

나는 끝없이 사냥을 이어가며 웃었다.

반드시 센 놈만 죽일 필요는 없다.

아무리 상위 지역이라도 약한 몬스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 휘익··· 퍽!

- 식인 식물(C)을 해치웠습니다.

- 적의 체력 10%를 흡수합니다.

- 체력이 0.8 회복되었습니다.

벌레, 식물같이 상대적으로 약한 놈들은 숫자도 많았다.

아무리 사냥하고 돌아다녀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거기다 그동안 안 썼던 [질풍 쾌검술(S)]까지 곁들였다.

'검술 유파 중에 쾌검을 고른 이유가 있지.'

중검술은 거대한 몬스터에게 한 방을 먹이는 데 효과적이고, 환검술은 인간끼리 1대1 대전을 할 때 유리하다.

쾌검술은? 약한 다수의 적을 죽일 때, 즉 솔로잉에 최적화되어있다.

'폭풍 사냥의 시간이군!'

마나와 오러를 적절하게 배분만 한다면, 무한한 사냥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날.

광기의 산맥에는 몬스터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가 나타났다.

4.

며칠에 걸쳐 산맥을 돌파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할 수 있겠지?'

과거의 내가 던전을 손에 넣은 것은 정말로 '운'이 좋아서였다.

모든 것을 잃었고, 현실에서 못하는 자살을 체험하자는 기분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가··· 게임 중후반 즈음이었지.'

유니티 런칭 수년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대륙 전체에 큰 혼란이 있었다.

특히 광기의 산맥 중심부에서 거대한 충돌과 폭발이 있었고.

그 결과 산맥 내부에 있던 던전이 노출되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채로, 부서진 던전 코어가 드러난 채로.

코어의 파면에 손만 댔는데 주인이 되었다.

물론 제대로 된 던전이 아니었다.

던전의 기능을 거의 다 잃었고, 출입할 수 있는 지역은 극히 적었다.

온전한 던전이 커다란 쌀 창고라면···

태풍에 쓸려나가고 남은 쌀 부스러기를 주워 먹은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문제는 지금이 그 대충돌 전이라는 거지.'

나중에 다가올 충돌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치가 달라졌다는 점.

당시 산맥 대부분이 사라질 정도로 엄청난 지진이 있었다.

'아니, 이건 기회야.'

문제를 위기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온전한 던전'을 얻을 기회다. 그것도 엄청 빠른 시기에.

나는 의지를 북돋우며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 디디디릭.

탐험 지도가 핸드폰 진동처럼 울렸다.

'거참 쓸데없이 최신식이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지도를 확인했다.

꽤 넓어진 미니맵 속, 내 위치 바로 옆에 반짝이는 돌멩이 표시가 있었다. 그것도 여러 개가.

'철광맥이다!'

나는 급히 인벤토리에서 곡괭이를 꺼냈다.

'녀석··· 오랜만이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나의 친구였다.

십수 년 이상 온종일 광물을 캤다.

전심전력, 혼신의 힘으로. 물론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광물 캐는 실력만큼은 장인을 넘어선다고 자신했다.

더군다나 그때와 다르게 체력과 근력도 넘쳤다.

낭떠러지의 아랫부분에 유독 검은 돌덩이가 보였다.

'블랙 아이언!'

대장장이들이 선호하는, 굉장히 질 좋은 철광석이었다.

캐서 팔면 상당한 돈이 될 것이고, 평판도 좋아질 터였다.

나는 오랜만에 그리운 친구를 손에 들었다.

- 퍼억!

한 번의 괭이질에.

- 괭이질에 대한 경험이 매우 많습니다.

- 스킬 [괭이질(F)를 획득하였습니다.]

'딱 한 번에 스킬이 뜬다고?'

[권능 : 리얼 모드]와 내 오랜 노가다의 합작품이었다.

어쩐지 지난 세월을 인정받은 기분이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번의 괭이질에.

- 괭이질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 [괭이질(F)]이 유사 스킬 [삽질(F)]과 결합하여 채광[F]으로 진화합니다.

'오, 전문 직업 스킬이잖아?'

직업 없어도 직업 스킬 사용은 가능하다.

요리사 자격증 없다고 한식 못 만들고, 라면 못 끓이는 거 아니니까.

다만 전문 직업을 갖추면 더 빨리, 잘 배울 수 있고, 길드에서 공인도 해준다.

최고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길드의 도움 받는 게 맞다.

하지만 괭이질만은! 혼자서도 자신 있었다.

세 번의 괭이질에.

- 채광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 스킬 등급이 올라갑니다. 채광 [F] -> 채광 [D]

- '블랙 아이언 원석(B)'을 획득하였습니다!

'오, 이렇게 빨리.'

윤기 나는 검은 철광석이 나왔다.

기세를 타고 바로 옆의 광물에도 도전했다.

네 번의 괭이질에.

- [권능 : 미다스의 손]이 작용합니다.

- 행운이 깃든 괭이질로, 단 한 번에 채광에 성공합니다.

- 스킬 등급이 올라갑니다. 채광 [D] -> 채광 [C]

'이건 진짜 운이 좋았네.'

하나 캐려면 몇 시간 걸리는 걸 이렇게 순식간에.

전투에 비하자면 크리티컬 히트에 해당했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열 번.

- '블랙 아이언 원석(B)'을 획득하였습니다!

- 스킬 등급이 올라갑니다. 채광 [C] -> 채광 [B]

'진짜 역대급 상승이네.'

스스로 감탄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내가 재능충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굴착기가 되어 광물을 미친 듯이 뽑아냈다.

그때였다.

"커헉! 어떻게 저렇게 빨리, 정확하게, 많이!"

누군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니?

그것도 처음부터 본 뉘앙스인데.

"거기다 스킬도 안 배운 상태로, 스킬북도 안 쓰고서, 스스로 각성하다니!"

그게 사실이긴 한데.

돌아보니 작달막한 키에 근육으로 터질듯한 몸체가 보였다.

'드워프!'

깊은 산속에 숨어서 만나기 힘들다는 대장장이 일족이었다.

참 쓸모가 많은데 배타적이라 만나보기는 정말 어렵다.

그야말로 전설의 생물이었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재능이로다. 내츄럴 본 광부, 슈퍼 그레이트 광부!"

전설적인 재능이라니, 낯 간지럽다.

그런데 드워프가 어떻게 영어를? 말이 되나?

"전설의 광부!"

"전설의 대장장이!"

둘은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악했다.

15화

1.

- 콸콸콸.

내 야전 텐트 안.

드워프 '아인델프'가 등에 멘 맥주통에서 내 잔에 맥주를 따랐다.

"크···!"

"오, 시원한 맛!"

얼음에 재운 생맥주처럼 차갑고 상쾌했다.

"여기서 이야기로만 들었던 '전설의 광부'를 볼 줄이야. 기쁘기 짝이 없네."

"전설의 광부라는 게 무엇인지요?"

"대장장이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채광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 릴 자. 드워프가 캐야 할 광맥을 점지하는 자일세."

신전에서 신탁받은 영웅 같은 존재인가.

"저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닐세, 나는 내 두 눈으로 보았네. 사막에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나서 숲이 되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

감동적인 드라마를 본 한류 팬 같은 얼굴로 봐주니 상당히 부담스럽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하기까지 하군. 과연 신이 예비하신 자일세."

"저야말로 '불타는 대장장이' 일족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첫눈에 반한 남녀처럼, 우리는 말이 술술 통했다.

"내 비록 목표했던 블랙 아이언은 놓쳤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네."

"본의 아니게··· 하지만 다른 광맥을 금방 발견하실 겁니다."

이곳은 광기의 산맥.

철 자체가 탄성이 강한데다가 마나까지 함유하고 있어서 질 좋은 철광석이 넘치는 곳이었다.

"생각보다는 쉽지 않네. 우리 일족이 워낙 많이 캐냈어야 말이지."

"하긴···"

드워프 일족은 광적으로 철과 무구에 집착한다.

메뚜기 떼가 밀밭을 집어삼키듯, 드워프는 광맥을 집어삼키기 일쑤였다.

"하지만 산맥은 넓지. 어딘가에 또 쓸만한 광맥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아인델프를 응원하며 건배를 했다.

짠.

거대한 맥주통과 작은 잔이 살짝 부딪쳤다.

술을 마시며 가벼운 신변잡기를 늘어놓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그런데 어떻게 여행자의 언어를 알게 되셨습니까?"

게임상에서 기본 통역 기능이 제공되긴 하지만, 분명 아인델프가 쓴 말은 영어였다.

'아니, 영어를 닮은 구수한 콩글리쉬였지.'

호기심에 찬 내 말에 아인델프가 자부심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내가 원래 학구열이 높네. 여행자들이 왔다는 이(異)세계에 대해서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아인델프는 껄껄 웃으며 책을 하나 꺼냈다.

하얀 백지 몇 장을 엮은 평범한 상점제 노트였다.

그런데 제목이···

- 이세계 평정기.

'···'

- 저자 유재민.

'···'

살짝 들춰보았다.

- 이세계 진입 3일차. 내 안의 뜨거운 영혼이 외친다. 세계를 구하라! 히어로 오브 히어로, 글로리우스 나이트여!

- 나 재민 더 매지션은, 화이어 스톰을 뿌리는 대마도사가 되기 위한 트래벌을 시작한다!

···바로 덮었다.

뭔가 있어 보이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는.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혼돈 그 자체.

흑화한 중2··· 아니 요즘 중2도 이렇게 안 쓴다.

'재, 잼민이···!'

초딩이 쓴 일기장이었다.

"이세계의 현자는 신기한 말을 많이 쓰더군. 이 책에서 멋진 말들을 참 많이 배웠네."

흡족한 표정으로 배를 두들기는 아인델프에게 차마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새로운 문물을 빨리 익히는··· 신세대 드워프시군요."

"자네, 알아보는군! 세상이 변한만큼 신문물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나, 껄껄껄."

좋은 말로 하면 얼리 어댑터, 나름 트랜디한 드워프였다.

"이 책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분명히 유저가 이곳에서 쓴 책일 텐데.

"샀네."

"누구에게?"

"이 미친 산맥에 들어올 자들이 누가 있겠는가? 당연히 모험 상인 아니겠는가."

"···!"

모험가가 전직했을 때 나오는 상위 직종 중 하나였다.

"혹시··· 그 상인이 금발에 안경을 쓰지는 않았는지요?

"오, 자네도 아는가?"

"코르버!"

"맞네, 자신을 모험 길드장이라고 소개하더군."

"맞습니다."

"그와의 거래는 참 흡족했네. 귀하디 귀한 이계의 책을 파격적으로 싼 가격으로 팔더군."

"얼마에···?"

"겨우 50골드였네. 우리 마을의 싸구려 검보다도 못한 가격이었지.

"···!"

유저들은 겨우 노트 하나를 1 실버에 판다고 욕을 바가지로 하는데.

"이 귀한 지식의 보고를 그리 싸게. 정말 만족스러운 거래였다네."

코르버, 이 양반, 정말···

'장사 잘하네!'

이 깊은 곳까지 와서 쓰레기를 이렇게 비싸게 팔아먹다니. 순진한 드워프를 등쳐먹다니.

'역시 모험가 길드장답군.'

그렇게 봤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모험가에게 길드원이나 인정받은 자 말고는 다 거래의 대상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저 검, 어딘지 익숙한데. 잠시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드워프가 홀린 듯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검술 길드의 제식 검으로 다가갔다.

드워프 앞에서 차마 흡혈검을 꺼낼 수 없어서 꺼냈던 것인데.

"맞군, 이거 우리 마을에서 제작한 거야."

"오, 이거 인연입니다!"

납품하는 거래처 과장이랑 작은 인연이라도 있으면 뻥튀기해서 친해지고는 했다.

드워프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니, VIP 거래처 라 할 수 있다.

"예전 모험가를 통해 검술 길드에 공급한 적이 있는데."

"맞습니다, 검술 길드에서 이 검의 품질에 대해서 극찬을 하더군요."

"뭘 당연한 걸 가지고."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게 칭찬이다.

껄껄 웃으며 맥주통을 드는 폼이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드워프 마을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섣불리 초를 치지 않았다.

'낚시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여기서 섣불리 욕심부리면 안 된다.

마을의 위치는 최고 기밀 중의 하나일 터였다.

천천히 신뢰를 쌓아야 한다.

모험가 길드에, 검술 길드 이야기까지 곁들여지니 서로 간의 신뢰도는 계속 올라갔다.

- 드워프 '아인델프'의 신뢰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 드워프 '아인델프'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아인델프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현대의 삶을 적당히 가공해서 알려주었다.

"자네 세상의 기술은 들을수록 놀랍군."

"감히 대장장이 일족을 따라갈 수준은 되지 못합니다."

칭찬과 겸손은 사회인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었다.

"가문의 숙원을 짊어졌으니 어깨가 무겁겠군."

"부모님을 생각하면, 한시도 쉴 수 없습니다."

진심 100% 담긴 내 말에 드워프는 뜨겁게 격려해주었다.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걸세, 그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회귀한 이후, 부모님 외에 이렇게 내 미래를 긍정적으로 얘기해주는 이가 없었다.

서로가 기분 좋은 상태에서 나는 말을 끊었다.

"이만 자리를 파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벌써?"

아인델프는 이제 시작이라는 듯 맥주통을 부여잡았다.

'역시 여기서는 밀당이지.'

아쉬움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네. 푹 쉬고 가게."

나는 눈 딱 감고 '멋진 말'을 날렸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지요."

내 말을 들은 아인델프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어찌 그런 지혜로운 말을···!"

아인델프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 못 박혔다.

"저희 세계의 현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깊은 뜻이 담겨있지요."

아인델프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괴테 형님, 감사합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세계가 바뀌어도.

아인델프는 큰 감명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귀한 깨달음을··· 감사하네."

"아쉽습니다."

"···?"

"제가 다음에 아인델프님을 뵐 수 있다면, 현자님의 훌륭한 말씀을 더 전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

"그분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많은데."

"···!"

"이 넓은 산맥에서, 다시 뵙기는 힘들겠지요."

가르침에, 진리에 목마른 자에게 현인의 명언은 오아시스와 같다.

"일을 끝내고, 꼭 우리 마을에 들려주게!"

"드워프도 아닌 제가 어찌···"

"자네는 전설의 광부가 아닌가. 어찌 남이겠는가! 모두가 환영할걸세."

아인델프가 서둘러 내 손을 꽉 잡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도 현자의 지혜를 꼭 준비해 가겠습니다."

아인델프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부서질 듯 잡았다.

간신히 그 손을 털어낸 후 서로 번호를 교환, 아니 마을 위치를 교환했다.

아인델프의 설명이 어렵긴 했지만, 대략 어디쯤인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겠네."

뜨거운 눈빛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지만.

"혹시 근처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못 보셨는지요?"

"이상한 일이라. 그런 게 있긴 하지."

"···!"

"최근 '보이지 않는 협곡' 쪽에 마나가 요동친다더군. 심상치 않은 조짐이라 어린 드워프들은 절대 못 가게 했다네."

"그곳이 어디인지요?"

"상당히 머네만. 여기서 북쪽으로···"

아인델프에게 단서를 얻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 역시. 자네라면 우리 마을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일세."

길게 끌면 질척거린다.

첫인상도 끝인상도 끝내줬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다.

- 아인델프, 독서광 드워프.

- 괴테 명언집 사놓을 것.

나는 멀어져가면서 머릿속에 메모했다.

- 드워프 '아인델프'의 신뢰도가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 드워프 '아인델프'가 당신을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 '불타는 대장장이' 일족의 마을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합니다. [15/100]

- '알 수 없는 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합니다. [17/100]

오늘 얻은 것이 많아서 나도 흡족한 하루였다.

2.

"헉헉헉."

등산은 힘들다.

체력이 대폭 늘었지만, 산맥 역시 너무나 넓고 높았으니까.

'이래서는 한도 끝도 없겠어.'

이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숲이 너무 울창해서 길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다시 한번 룰렛을 돌릴 때야.'

플래티넘 박스는 목숨이 걸릴 때를 위해서 아껴두고.

골드 박스 두 개를 꺼내서, 동시에 열어젖혔다.

'제발 이동에 도움 되는 스킬을···!'

지금 간절한 것은 검술도 마법도 아닌 모험가 계열의 스킬이었다.

그리고.

- 띠링, 띠링!

- [권능:미다스의 손]이 작용합니다.

- '재운', '확률 보정'이 중복 적용됩니다. 최상급의 운이 깃듭니다.

- [스킬 : 정찰병의 시야(C)]를 획득했습니다.

- [스킬 : 산악 이동(C)]을 획득했습니다.

"미다스 만세!"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정확하게 원하던 것이 나왔다.

[스킬 : 정찰병의 시야(C)]

- 평지에서 시야가 20% 넓어집니다.

- 고지대에 오를 시, 훨씬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스킬 : 산악 이동(C)]

- 언덕, 산 이동 시 체력 소모가 20% 감소합니다.

- 언덕, 산 이동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모험가 길드 지망생이 가장 원하는, 정찰병 계통의 스킬이었다.

마나를 소모하는 일회성 스킬이 아니라 지속형이라 더 좋았다.

'숲과 산에서 이만큼 좋은 이동기는 없지!'

숙련도가 쌓이면 더 높은 스킬로 진화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 정도면 달릴 만하네.'

나는 다리를 한 번씩 털어주며, 목을 풀었다.

'목적지까지··· 한번 달려보자.'

가속 물약, 회복 물약 도핑도 좀 하고 난 후.

나는 달렸다.

- 최초로 미개척 지역에 접어들었습니다.

- [업적:탐험]을 달성하였습니다.

- [브론즈 박스]를 지급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하였습니다. [18/100]

뛰고 또 뛴다.

한 구역을 넘어서면 다시 또 미개척 구역.

- 최초로 미개척 지역에 접어들었습니다.

- [업적:탐험]을 달성하였습니다.

- [브론즈 박스]를 지급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하였습니다. [19/100]

···

..

.

뛰기만 해도 점수 쏟아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

지칠 때면 몬스터를 잡아서 체력을 채웠고, 쿨타임마다 물약을 들이켜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3.

그렇게 달린 지 만 하루.

까마득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와 음산한 숲.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지형이었다.

'···!'

겉보기에는 평범한 협곡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나가 격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여기다.'

나는 강렬한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곡괭이로 바위 절벽을 두드리며 걸었다.

- 띠링, 띠링!

- 텅! 텅! 텅!

탐험 지도는 나에게 철광맥이 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 퍽! 퍽! 퍽!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미 없이 바위나 부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부서지는 바위의 색깔이 조금씩 누렇게 변했다.

"킁킁."

냄새를 맡고 살짝 맛도 보았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그리운 고향의 맛!

확신이 드는 순간, 절벽을 내리쳤다.

- 퍽, 퍽, 퍽, 퍽!

미친 듯이 절벽을 파고들었고, 어느새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절벽의 한 면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콜록, 콜록."

간신히 벗어나서 먼지를 막으며 앞을 주시했다.

긴장된 순간.

- 최초로 히든 던전 '무명 광산(???)'을 발견하였습니다!

- [업적:탐험]을 달성하였습니다.

- 던전 등급을 판정할 수 없습니다.

- 놀라운 업적을 세웠습니다.

- [골드 박스]를 지급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하였습니다. [35/100]

'마침내···!'

미국인이 911테러로 무너지기 전의 세계무역센터를 보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신비한 룬 문양이 새겨진 문과, 장엄한 어둠을 품고 있는 동굴이 보였다.

완전한 던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고향, 내 집!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둔 입주민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형 왔다!'

나는 이산가족을 만난 듯 뜨겁게 외쳤다.

마음속으로만. 절대 소리 안 내고.

그러자 던전이 뜨겁게 화답했다.

- 쇄애애액!

- 퍼버버벅!

'이럴까 봐 속으로만 외쳤는데!'

시작부터 반칙이냐!

16화

1.

유니티에도 나름 설정이란 게 있다.

같은 몬스터라도 시작 마을 근처일수록 약하다.

'굶주린', '외로운', '허약한', '소형' 따위의 수식어가 붙는다.

마을에서 먼, 특히 광기가 지배하는 산맥에서 나오는 놈들은 다르다.

'미쳐버린', '오염된', '광포한', '대형'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재수 없으면 두 개, 세 개가 겹쳐서.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미친놈아!'

- '광기에 미쳐버린 육식 고블린(B)' 다수의 공격을 받습니다!

어떻게 고블린이라는 허약한 종 앞에 '광기에', '미쳐버린', '육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지?

나는 쏟아지는 화살비를 피하며 욕을 내뱉었다.

- 퍼퍼퍼벅!

"악!"

아무리 민첩을 올려도 모두 피하지는 못했다.

한 발이 내 팔뚝 상박에 박혔다.

- 녹슨 독화살에 맞았습니다.

- 체력이 3 감소합니다.

- [상태이상 : 중독]에 걸렸습니다.

"시이이이이발!"

아팠다. 너무 아팠다.

정신적 고통 따위 육체적 고통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팔을 불로 지진 것만 같았다.

욕을 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십여 마리의 '광기에 미쳐버린 육식 고블린'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 크르르르!

- 크아아앙!

'놈들 눈깔이···!'

토 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놈들을 보니 섬뜩했다.

눈에 핏발이 서다 못해 새빨개서 흰자가 없었다.

온몸은 오크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가득했고.

손에는 철제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 파밧!

- 끄르르륵.

내가 섬전같은 칼질로 한 놈의 목젖을 찔러서 죽였지만.

놈들은 광전사처럼 두려움 없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아니지!'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애들아.

너희는 유약하고, 쪼잔하고, 비열한 종족이잖아.

그렇게 몽둥이 들고 설치는 전투 종족 아니라고!

이건 설정 붕괴 아니니?

'종족의 정체성을 지키라고!'

간절히 외쳤지만 미친 좀비 같은 녀석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 쾅!

간신히 피한 몽둥이에 바닥이 폭발하듯 깨져나갔다.

'저건 또 뭔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유난히 근육이 큰 녀석이 침을 뚝뚝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같은 B등급 안에서도 차이가 있다.

동네 형한테 맞으면? 당연히 아프다.

그런데 그 형이 헬창인데다, 맛까지 간 미친 형이면?

- 쾅! 쾅! 쾅!

살벌한 폭발음과 함께 바닥이 부서져 나갔다.

나 역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반격했다.

- 푹, 푹, 푹!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속도로 쾌검을 뿌렸다.

강한 놈을 피해서, 그나마 만만한 놈부터 죽여갔다.

오러가 어린 검은 녀석들도 막지 못했다.

- '광기에 미쳐버린 육식 고블린(B)'을 쓰러뜨렸습니다.

- 적의 체력 10%를 흡수합니다.

- 체력이 1.5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친놈들은 자기 편이 있는데도 화살을 쐈다.

- 휘익

- 퍼억!

"아악!"

쏟아지는 몽둥이찜질을 피하다가 또 한 대를 맞았다.

미치도록 아팠다.

한 놈을 죽이고, 한 발을 맞고.

두 놈을 죽이고, 한 발을 맞고.

세 놈을 죽이고, 한 발을 맞고.

온몸의 곳곳에 구멍이 났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물약을 빨 틈이 없었다.

오직 흡혈검의 체력 회복만이 나의 살길이었다.

- 지속적인 출혈로 인해 체력이 2 감소합니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감소합니다.

- 체력이 1.5 회복됩니다.

- 체력이 1.5 회복됩니다.

다른 게임은 보통 약한 놈부터 순서대로 덤빈다.

그런데 이 미친 던전은 그런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시작부터 모두가 달려들었다.

'다구리는 반···칙. 커헉.'

쏟아지는 화살비 속에 놈들을 하나씩 해치워갔다.

이렇게 한칼, 한칼에 집중해본 적이 있을까?

- 쉬이익!

"끄르르..."

- 크리티컬 히트! 일격에 강대한 적을 물리쳤습니다.

- [질풍 쾌검술(S)] 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2/100]

유난히 덩치 큰 놈을 물리쳤다.

피튀기는 전투 속에서, 녀석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고, 승기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헉헉헉."

하지만 나는 일부러 살았다, 해치웠다 이딴 말을 참고 참았다.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제발, 안돼, 그것만은!'

싸한 느낌과 함께 동굴에서 나타나는 키 큰 고블린 두 마리가 보였다.

- 정예 몬스터 '고블린 주술사(B+)', '고블린 대전사(B+)'가 나타났습니다.

수식어는 없지만.

무려 정예다.

'이건 아니잖아!'

체력도 미친 듯이 높고, 고유 공격 기술도 갖고 있다.

애초에 동일 등급 5인 이상의 파티 플레이로만 잡을 수 있는, 준 보스급의 몬스터였다.

'미친 밸런스!'

동네 형 뒤에서 갑자기 효도르, 은가누가 나타나는 게 말이 돼?

- 화르르르!

주술사의 커다란 화염구를 보니, 안 좋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록 크기는 과거에 훨씬 못 미쳤지만, 그 공격력은···

"아아아악!"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는 중이라 피할 공간이 없었다.

살이 타는, 끔찍한 고통이 이어졌다.

- 쾅!

나는 고블린 대전사의 몽둥이까지 맞고 벽에 처박혔다.

쿨럭.

꺼멓게 죽은 피를 토해냈다.

- '화염구'에 체력이 3 감소하였습니다.

- '강타'에 체력이 5 감소하였습니다.

- [상태이상 : 화상]을 입었습니다.

- 치료하지 않을 경우, 추가 데미지를 입습니다.

"아아아···"

가장 아픈 것은 화살도, 몽둥이도 아닌 불이었다.

제일 큰 고통이 불타 죽는 거라는데, 그 말이 맞았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더 안 나왔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지?'

잘 살고 있었는데, 아니 좀 병신같이 살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보겠다는데.

왜 이리 죽을 고생을 해야 하는데?

다 미웠다.

유니티라는 미친 게임도.

맨날 죽이려 드는 몬스터도.

해야 할 일만 가득한 암울한 미래도.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나 좀 살아보겠다는데 왜 괴롭혀, 미친 새끼들아!"

욕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 파바바밧!

"개@49XH=897!"

"육#%)(*!&!"

"찢)@#%(&f!!"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방언이 터진다.

내 안의 모든 울화가 폭발했다.

- '산맥의 광기'가 침습합니다.

- 저항에 성공합니다.

- '흡혈검의 마기'가 침습합니다.

- 일부 저항에 성공합니다.

- '산맥의 광기'가 침습합니다.

-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나는 미친놈처럼 욕으로 랩을 하며 돌진했다.

- 러쉬!

순간적으로 다리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서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 스턴!

먼저 체력이 강한 고블린 대전사에게 잠시 경직을 선사한 후.

- 배쉬!

고블린 주술사에게 강타를 날렸다.

- 퍼엉!

보이지 않는 마나의 막에 타격이 일부 막혔지만, 잠깐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사이 경직을 풀어내고 덤벼드는 대전사에게 전력을 다한 칼질을 날렸다.

- 스매시!

- 쾅!

녀석은 전사답게 막아내긴 했지만, 무려 오, 육 미터나 밀려났다.

'지금뿐이다!'

내 모든 오러가 모여서 단 하나의 점이 되었다.

- 파앙!

- 끄르륵···

주술사의 목젖이 뚫리자, 대전사가 광분하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크허허헝!"

"제기랄, 내가 더 화난다, 새끼야!"

- 쾅!

- 쾅!

미친 듯이 대전사와 검격을 주고받으며, 간간이 주변 몹들을 잡았다.

싸울수록 화가 풀리는 게 아니라, 더욱 화가 났다.

- 지나친 고통과 분노로 광기에 잠식되고 있습니다.

- [상태 이상 : 광란]에 걸립니다.

- 고통을 느낄 수 없습니다.

- 속도와 파괴력이 증가합니다.

- 체력이 감소합니다.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빠져서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 질풍 쾌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합니다.

한쪽에서는 내 상태가 어떤지 인식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게 뭐 어쨌다고? 다 죽인다!'

광전사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 파바바바바!

트레디가 보면 경악할 법한 칼날 폭풍이 펼쳐졌고.

마침내 정예 대전사가 쓰러졌다.

- [질풍 쾌검술(S)] 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3/100]

그 이후의 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친놈과 미친 몬스터들이 광란을 벌였고.

결국 승리자는···!

- '무명 광산(???)의 입구'에 진입하였습니다.

- 최초로 정예 몬스터(B+)를 쓰러뜨렸습니다.

- 최초로 몬스터 무리(B)를 전멸시켰습니다.

- 믿을 수 없는 성과!

- [업적 : 분투], [업적 : 대학살]을 세웠습니다.

- [골드 박스]를 지급합니다.

- [골드 박스]를 지급합니다.

- [실버 박스]를 지급합니다.

- 근력, 민첩, 체력이 5 상승합니다.

- 마나, 정신력, 저항력이 2 상승합니다.

- 오러, 영능이 1 상승합니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끝났다!"

라고 외치고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꼼꼼히, 빠짐없이.

한 오 분 동안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진짜 해냈구나. 하하하···"

힘 빠진 웃음을 내뱉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2.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보상을 확인했다.

'화려하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기쁘기 짝이 없었다.

고블린들이 남긴 아이템도 잊지 않았다.

실버 박스 2개, 주술사의 마목 지팡이, 대전사의 철혈 몽둥이, 철제 몽둥이, 활, 화살, 독약병 다수, 그 외 금화 약간.

상태창은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졌다.

놀라운 성장이었지만, 어째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겼구나.'

나는 검을 집어 들었다.

[저주받은 흡혈검(S)]

이번에 마검이 왜 마검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오래 쓰면 내가 맛이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나는 검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 덕이야.'

흡혈이 왜 사기 옵션인지, 옵션 중 최고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이 녀석이 없었으면 절대로 죽었다.

곳곳에 무수한 전투의 흔적들이 보였다.

녀석은 내가 죽을만하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생명수를 쏟아부어 주었다.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사랑한다!'

나는 격하게 검을 껴안았다.

- 산맥의 광기에 저항합니다.

- [상태이상 : 광란]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 아직 정신력이 낮습니다.

아직 내가 정상이 아닌 거 알지만.

그래도 네가 너무 좋은 걸 어떡하니.

뜨겁게 사랑을 고백했다.

'예쁘장한 SS급 단검이 꼬드겨도, 섹시한 SSS급 브로드 소드가 안긴대도, 내 진심은 너뿐이야.'

'···!'

'항상 너만 바라볼게.'

내 귀에 익숙한 BGM이 흘렀다.

널 사랑한단 말이야~

너만 보인단 말이야~아아~

- 아직 정신력이 낮습니다.

괜찮아, 그런 것 따위는.

나는 부드러운 살결에 머리를 묻었다.

- 아직 정신력이 낮습니다.

누구도 우리 사랑을 막을 수 없어.

나는 감미로운 키스를 했다.

- 정신력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

- 텡.

나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음. 그래. 음.'

'···'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

'오해하지는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갑게 뒤돌아서 걸었다.

빨리.

조금씩 더 빨리.

3.

정신을 차린 후, 동굴을 눈으로 훑었다.

제일 중요한 거부터 해결해야 했으니까.

'있을 텐데··· 찾았다!'

던전 정중앙 기둥에, 은은하게 빛나는 구슬이 보였다.

예전에 봤던 부스러기 코어와는 다른, 온전한 던전 코어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 '무명 광산(???) 지상 광장'의 소유권을 획득하였습니다.

- 굉장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 [업적 : 던전 탐험]'을 달성합니다.

- [골드 박스]를 지급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합니다. [50/100]

히든 던전에서는 모든 탐험 점수가 확확 뛰어오른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애프터 서비스도 중요하지.'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던전을 탐색했다.

던전 내부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문 바로 안쪽에 커다란 광장이 있고 사이사이 굴이 있었다.

'새 아파트 분양받은 기분이네.'

나는 입주민이 하자 검사를 하듯이 꼼꼼하게 살폈다.

'여차하면 피난처로 삼으면 된다.'

···그런데 굳이 피난처로만 한정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던 때였다.

- 쿠오오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던전 제일 안쪽으로 향했다.

바닥에 깊고 검은 구멍이 보였다.

'설마, 부실 공사?'

마른하늘에 날벼락!

내 집 마련의 꿈이 와장창 무너지는 그때.

- '무명 광산(???) 지하 1층'을 발견했습니다.

- 훌륭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 [실버 박스]를 획득했습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합니다. [60/100]

'···!'

나는 자리에 멈춰서서 메시지를 곰곰이 분석했다.

'처음부터 업적이 좀 이상했어.'

생각해보니 왜 [던전 탐험]일까? [던전 소유]가 아니라.

내가 소유한 부분도 '지상 광장'이었다.

'전체가 아니라, 지상 층만?'

그리고 여기에 지하 1층이 있다.

자동으로 해석이 이어진다.

'땅속 깊이 무언가 더 있다!'

'지하 미궁형' 던전으로도 부른다.

거꾸로 선 탑과 같은 모양이다.

지하 1층, 2층 형태로 계속 깊어지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내 집이 1층짜리 창고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대형 빌딩이라는 소리네?

'···!'

그것도 층마다 보물이 가득 쌓여있는?

"심 봤다!"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다 내 꺼라는 뜻이다.

17화

1.

로또 아파트에 당첨됐어! 하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일단 건물이 거꾸로 박혀있고.

'괜찮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야.'

···입지가 다소, 꽤, 많이 험난하고.

'불청객 못 오니 오히려 좋지.'

···상당히, 매우, 굉장히 사나운 원주민이 있다.

'젠장.'

조금 전의 전투는···

내 입으로 이런 말 할 줄은 몰랐지만···

정말 미친 소리 같지만···

'솔직히 생각보단 쉬웠지.'

무려 히든 던전이다.

그런데 보스조차 없다?

불타 죽을 뻔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싫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맛보기 수준이었다.

나는 시커먼 구멍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는 햄릿처럼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했다.

약 5초 후.

'이 이상은 뇌절이지.'

픽 웃으며 돌아섰다.

내가 강해졌다지만 상대의 급이 다르다.

보스는커녕 정예 무리만 만나도 죽는다.

완전한 준비 후 들어가야 한다.

'일단 입구는 내 거니까.'

나는 인벤토리에 수납된 던전 코어를 꺼내서 손에 들었다.

- 던전 내부에 '미약한' 조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진행하시겠습니까?

오케이.

나는 바로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바위로 덮어버렸다.

'헉헉. 내 마나를 거의 다 빨아먹네.'

코어로 내부를 많이 변형시키는 것은 무리일 듯 했다.

'그럼 이제는···.'

내가 먹은 게 뭔지 부터 확실히 파악할 시간이었다.

2.

나는 공간을 가늠하며 눈대중으로 측량을 했다.

서당개만 삼년, 아니 십 수 년.

머릿속에서 광산의 설계도를 그려갔다.

'무게를 받아주는 버팀목이랑 지보부터 시작해야지.'

돌을 파고 옮기는 갱도에, 광석을 골라내는 선광장, 유사시를 위한 차단벽도 필요하다.

'신선한 공기를 위해서는 환기도 중요하고.'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입기갱, 배기갱.

인공 환기를 위해서 선풍기 비슷한 것도 필요하다.

수송 수레가 지나갈 레일도 놓고.

기중기나 권양기 같은 운반 설비도 설치하고.

'장기간 작업하니 살 곳도 있어야지.'

맨바닥에 웅크리고 처박혀서 자던 때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광장 안쪽에 거주 시설을 짓고, 던전 입구에 방어벽까지 새우면.

'꽤 그럴싸한 요새가 되겠는데?'

생각보다 환경이 괜찮았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대격변은 단순한 이(異)세계의 침공이 아니다.

유니티(Unity). 통합, 통일, 하나.

게임이 암시하듯,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기적이었다.

더 커진 세계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진다.

'게임으로 치면 멀티 태스킹하느라 정신이 없지.'

이쪽을 밀면 저쪽이 밀리고.

상대 본진 치다가 내 본진이 털리고.

'그럴수록 등잔 밑이 어둡잖아?'

어차피 불리한 상황이다.

'어차피 우리 본진 다 밀릴 거 아는데.'

아예 배 째고 상대 본진 옆에 몰래 멀티를 먹으면 어떨까?

꿀꺽.

'가능할까?'

벙커 수준의 피난처가 아니라.

아예 이곳을 본진으로 만든다?

'들키면 끝장이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버리겠지.

'하지만 못 찾는다면? 조금이라도 늦게 찾는다면?'

정말 운이 좋으면, 상대가 게임 끝날 때까지 못 찾는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도박수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 아, 저만한 병력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물량이 폭발합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등줄기에 전율이 흐른다.

몰래 멀티에서 힘을 길러 역전하는 시나리오!

'쉽지 않아, 아니 불가능해.'

일반적으로는 가능할 리가 없다.

많은 역경과 고난에.

운과 운이 겹쳐야 가능하다.

거기다 '본진'을 만드는 데 어디 한두 푼 드는가?

현실이든 게임이든 거액이 든다.

매우, 매우 큰돈이 드는데.

'흐흐흐!'

내 입에서 음흉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 위이잉!

- 위이잉!

- 위이잉!

탐험 지도는 아까부터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형은 돈이 많다구!'

미니맵 전체가 노란 금괴 아이콘으로 가득했다.

겹치고 겹치고 또 겹쳐서 다 표현이 안 될 정도.

'미이이이친! 하하하!'

말 그대로 노다지였다.

나만의 치트키는 확보한 셈이다.

나는 신나게 곡괭이를 들었다.

'한 번 달려보자!'

- 텅, 텅, 텅.

미친 듯이 휘둘렀다.

-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가장 귀한 금속답게 수십 번의 미스가 났다.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하하하하!"

-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우하하하!"

-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크하하하!"

- 채광에 실패하였습니다.

미친놈처럼 웃으며 내리치고 또 내리친다.

···

..

.

- 채광에 성공하였습니다!

- [진금(True Gold) 원석(S)]을 획득하였습니다.

- 자기 수준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광물을 채굴하였습니다!

- 스킬 등급이 올라갑니다. 채광 [B] -> 채광 [A]

'마침내!'

황금빛을 품은 원석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 '산맥의 광기'가 침습합니다.

- 일부 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너무 좋은 나머지 다시 광기 상태에 빠질 뻔 했다.

- 쾅, 쾅, 쾅!

광기어린 곡괭이질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 [진금(True Gold) 원석(S)]을 획득하였습니다.

- 인벤토리가 가득 찼습니다.

"헉헉헉."

공간이 부족해져서 고블린 아이템 대부분을 버리고 광물로 다시 채웠다.

- 쾅, 쾅, 쾅!

- [진금(True Gold) 원석(S)]을 획득하였습니다.

배낭은 물론 텐트까지 접어서 터지기 직전까지 채워 넣었다.

더 이상 공간이 없어진 후에야 광기가 멈추었다.

'아름답구나!'

꽉 찬 원석들을 보니 가만히 있어도 배가 불렀다.

'수고했어, 땡큐!'

나는 곡괭이를 들고, 살짝 입맞춤을 했다.

그러다 땅에 떨어져있는 흡혈검을 보고는 흠칫했다.

'···!'

나는 살짝 자리를 옮겼다.

살며시, 조용하게.

3.

- '무명 광산(???) 지상 광장'의 내부 탐사에 성공하였습니다.

- '무명 광산(???) 지상 광장'의 지도 작성에 성공합니다.

- [업적 : 정밀 조사]를 달성하였습니다.

- 탐험 점수를 대량으로 획득합니다. [100/100]

던전 입구를 나서자, 환송하듯 메시지가 떴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

몸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벼웠다.

- 독기가 지속적으로 침투합니다.

- 독 데미지로 체력이 0.1 떨어집니다!

'이거 톡 쏘는 맛이 일품일세.'

나는 껄껄 웃으며 산성 안개의 마사지를 즐겼다.

- 흉포한 붉은 늑대(C)가 달려듭니다.

- 체력이 1 떨어집니다.

'허허허, 녀석들 아가리 힘도 참 좋구나.'

나는 자비로운 부처님이 되었다.

'애들아, 우리 집 가는 길 잘 지켜야해?'

흉악한 몬스터들도 다 이뻐보였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나는 동네 마실 나가듯 산맥 곳곳을 탐색했다.

흡혈검과 함께라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최초로 미개척 지역에 접어들었습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하였습니다. [101/100]

···

..

.

- 최초로 미개척 지역에 접어들었습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하였습니다. [120/100]!

몬스터 중에서도 특히 힘이 넘치는 녀석들도 있었다.

"같이 산책 좀 해볼까, 얘들아?"

운동 삼아 녀석들을 산맥 바깥으로 이끌었다.

내가 얼마나 좋은지, 나를 열심히들 따라왔다.

- 흉포한 붉은 늑대(C) 무리가 습격합니다!

- 미쳐버린 곰(B)이 분노를 터트립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매표소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통제' 지역은 다시 한 번 쑥대밭이 되었다.

"으아악, 또야?"

"블랙 도그 새끼들, 두고 봐라!"

"소송 건다, 죽어도 소송 걸 거야!"

내가 애프터 서비스하기로 했잖아.

'형이 약속은 잘 지키거든.'

나는 비명을 BGM 삼으며 마을로 들어갔다.

4.

마침내 황야의 두 무법자가 마주쳤다.

모험 길드장 코르버와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 꽉 진 주먹만을 주시했다.

"빠···앙? (설마···? 벌써 한 건 했나?)

손을 펼 것인가, 말 것인가, 긴장된 순간.

나는 풍선이 터지듯 열 손가락을 활짝 펴며 웃었다.

"빵, 빵, 빵! (대박, 대박, 대박을 쳤습니다!)"

나는 코르버에게 탐험 지도를 내밀었다.

코르버는 지도 상단의 점수를 확인하며 입을 쩍 벌렸다.

"이럴 수가, 정말 해낼 줄이야!"

코르버의 격렬한 박수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 모험가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 탐험 점수를 초과 달성하였습니다. [120/100]

- [직업 : 모험가]를 획득하였습니다!

- [업적 : 직업 획득]을 달성하였습니다!

- 최초로 '보조 직업'을 획득하였습니다!

- 경탄할만한 업적으로 보상이 추가됩니다.

- '탐험 지도'를 획득하였습니다.

- [골드 박스]가 지급됩니다.

- [골드 박스]가 지급됩니다.

- [골드 박스]가 지급됩니다.

- [실버 박스]가 지급됩니다.

- [실버 박스]가 지급됩니다.

- [실버 박스]가 지급됩니다.

..

.

.

'와, 많은데?'

그래서 싫다고?

그럴 리가.

받아도 받아도 질리지 않는 게 선물이다.

- 근력이 2 상승합니다.

- 체력이 2 상승합니다.

- 민첩이 4 상승합니다.

- 정신력이 4 상승합니다.

- 길드 평판이 크게 증가합니다.

- 길드장 '코르버'의 호감도가 굉장히 상승합니다.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목표 초과달성까지? 대단하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은 기본일세. 실력이 뒷받침이 된 거지."

흡족하게 웃은 코르버가 선언했다.

"수습 모험가 따위로는 턱없이 부족하지. 자네를 정식 길드원으로 인정하네!"

그러자 듣기 좋은 메시지가 이어졌다.

- 모험가 길드의 정식 길드원이 되었습니다.

- 길드 용품을 '길드원 특가'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 대륙의 최신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길드원과 합동 탐사가 가능해집니다.

- 탐사 요청, 유적 찾기 등 필요한 의뢰를 할 수 있습니다.

'와, 내가 고용주가 될 수 있다고?'

말하자면 퀘스트조차 줄 수 있다는 뜻.

'신분 상승했네.'

진짜 NPC로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정말 역대급 기록이라 할 수 있네. 대모험가 발탄 이후로 처음이야."

"지도 내용은 안 보시는 지요?"

나는 짐작하는 바는 있었지만 확인 차 물었다.

코르버는 지도를 다 펼치지 않고, 상단의 점수만 확인했으니까.

"내가 어찌 감히. 모험가에게는 지도 자체가 보물일세. 목숨을 건 결과물이 아닌가?"

"···!"

"스스로 보여주기 전까지는 절대 요구할 수 없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일세."

물론 길드원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일 테고.

"또한 발굴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리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지."

초보 모험자가 멋모르고 성공을 자랑할까봐 염려해주었다.

"충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한 식구가 아닌가?"

코르버는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같은 편이 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이게 겨우 시작이지. 모험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다양하거든."

모험가 전용 스킬을 살펴보았다.

[모험가의 직관(B)]

- 자연경관, 유적, 던전 등을 탐지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 보물을 탐지할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모험가의 명성(B)]

- 놀라운 발견을 이야기로 만들어 전파할 수 있습니다.

- 훨씬 더 빠르게 명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모험가의 체력(C)]

- 체력 회복 속도가 25% 증가합니다.

- 체력 +3

[모험가의 시야(C)]

- 숲, 안개 등 장애물에 의한 패널티가 감소합니다.

[모험가의 다리(C)]

- 험난한 지형 이동시 패널티가 감소합니다.

무엇보다 대박인 것은 따로 있었다.

[모험가의 주머니(A)]

- 추가 인벤토리 공간을 제공합니다.

- 특수조건 만족 시 강화 가능.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이 바로 더 큰 인벤토리였다.

남은 원석을 놓고 떠날 때는 폭포수처럼 눈물이 흐를 정도였으니까.

"너무나 기쁜 날일세. 껄껄. 자, 같이 한 잔 하지 않겠나?"

코르버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벽장에서 샴페인을 꺼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나 역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장 여기서 마무리할 일도 많다.

유사한 스킬들을 정리해주고.

공사를 위한 물건들도 발주하고.

전투 보급도 해야 하고.

하지만 바깥에도 중요한 일이 있었다.

눈가 한쪽에 주황빛이 깜빡거렸다.

미리 맞춰둔 현실 알람이었다.

"선약이 있는가?

"네."

"자네의 설레는 표정을 보니. 오호라, 여자로구만."

코르버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 여자··· 이긴 합니다."

누님과의 뜨거운 데이트 약속이 있긴 했다.

"암, 중요하지. 아무리 바빠도 가문의 대를 잇는 일을 미룰 순 없지."

코르버는 대견해하면서도 살짝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레 껄떡대는 동작을 하려는 순간,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 아저씨 안되겠구만.

"잠깐!"

여기까지.

스톱!

더 이상 하면 나 잡혀간다.

"그 분은 고귀하신 분입니다. 농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귀족가의 영애시구만. 내 실례했네.

코르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귀족은 맞는데···'

영애라기에는 나이가 좀 많으십니다.

"존귀하고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신성함까지 느껴지는 내 목소리에 코르버도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고귀한 레이디이신가보군. 나도 만나 뵙고 싶을 정도야."

안될 말씀, 나만 볼 거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한창때야. 뜨겁구만, 뜨거워."

코르버는 껄껄 웃었다.

인정한다.

오죽하면 그분의 초상화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까?

보아도, 보아도 또 보고 싶고.

만나도, 만나도 또 만나고 싶은 그 분.

'신사임당 누님!'

감춰왔던 사랑이 터져 나왔다.

크게 목 놓아 외쳤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특별한 선물과 함께.

18화

1.

- 요즘 K-클랜 수준. ㅉㅉㅉ

일주일 전부터 한 스크린샷이 화제였다.

- 저거 블랙 도그 놈들 구역 아니야?

- 쑥대밭 됐네! ㅋㅋㅋㅋ

- 지 앞마당도 못 지키면서 통제는 무슨.

폐허.

블랙 도그의 '통제' 구역이 몬스터 브레이크로 날아가 버렸다.

녀석들이 이를 박박 갈면서 복구한 게 얼마 전이었다.

'업데이트 좀 해줄까.'

나는 방금 찍은 따끈따끈한 스크린샷을 올렸다.

- 와 태풍이 쓸고 갔냐?

- 또, 또 브레이크?

- 얘들 무슨 악운을 불러들이는 저주라도 받았냐 ㅋㅋㅋ

'이걸로는 부족하지. 하나 더.'

- 최고의 보호 서비스!

- 편안하고 안전한 스탯 업 보장!

- 믿고 타는 버스!

땅바닥에는 검은 맹견 마크가 새겨진 플래카드가 보였다.

누가 마구 밟았는지 온통 흙투성이였다.

- 보호해주기는커녕, 보호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 버스 두 번 타서 두 번 다 죽은 거 실화냐? ㅋㅋㅋㅋ

살짝 양념 쳐서 댓글도 좀 달아주니.

- 누가 이딴 거 올렸어? 죽인다!

바로 반응이 왔다.

- ㅋㅋㅋㅋ 블랙 도그 녀석인가?

- 올린 놈, 댓글 단 놈 목숨이 두 개냐? 신상 밝혀서 죽여버린다!

- ㅂㅅ 너네 같은 좆소 클랜이 무슨 수로.

- 국가가 요청해도 끄떡도 없는 게 유니티 본사인데.

- ㅇㄱㄹㅇ '리버스' 정보 요청도 다 씹는다더라.

수많은 잼민이들의 공격에 공격자는 주춤했다.

- 아이디가 흑견왕 ㅋㅋㅋ 완전 내가 블랙 도그 클랜장이요 광고하는 수준인데.

- 설마 찐이냐? 찐이야?

- 이 새끼들, 적당히 해라.

댓글에서 으르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왕은커녕 기사도 못될 놈이.'

나는 피식 웃으며 한 줄 덧붙였다.

- 혹시 클랜장 본인임? 왜 이리 급발진?

최대한 잼민이스럽게. 그러자 다른 녀석들이 공격을 도왔다.

- ㅂㅅ도 아니고 설마. ㅋㅋㅋ

- 2000년대 게임 소설에서도 그딴 아이디는 안 쓴다 ㅋㅋㅋ

- 틀내가 진동하네.

- 으아아아아아아! 죽인다!

- 근돼냐? 웬 괴성?

- 할 말 없으니까 소리 지르죠?

녀석은 순식간에 말로 탈탈 털렸다.

'지금이 좋겠군.'

일찍이 잡스 형님께서 말씀하셨다.

고객은 보여주기 전까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그러니 고객이 원하게 만들어내야지 않겠는가?

나는 [날카로운 강철 대검(C)]을 거래소에 올리고, 재빨리 캡처 화면을 옮겼다.

- 서버 지존검 거래소 등장!

- 오, 이건 찐이네? 옵션 쩐다.

한참 동안 멈춰있던 댓글이 마지막에 나타났다.

- 으아아, 이 새끼들, 클랜의 힘을 보여주마!

그 말을 끝으로 흑견왕은 사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 [날카로운 강철 대검(C)]에 신규 입찰자가 참여하였습니다.

- 현재 최고가는 '흑견왕'님 50,000,000원입니다.

'이렇게 쉬운 남자는 재미없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아는 형 아이디로 거래소에 로그인했다.

가상기기가 아닌 거래소에서는 생체 인증까지는 필요 없었다.

- '인성왕'님이 70,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바로 반응이 왔다.

- 어떤 놈이야, 이거 우리 클랜 거다. 침 바르면 죽는다.

다짜고짜 협박성 댓글이 달렸다.

- '흑견왕'님이 71,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쪼잔하기는. 쯧쯧.'

- '인성왕'님이 100,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무지성 양아치 상대로는 양심에 걸릴 것이 없다.

- 어떤 십X새끼야! 걸리면 죽는다! Xxxx!

필터링 된 욕설이 잔뜩 달리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극찬 시작인가?'

이 집의 장사가 잘된다는 뜻이다.

- '흑견왕'님이 101,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아, 귀찮네.'

- '인성왕'님이 150,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 으아아! 너 이 새Xxx!!

동방예의지국에서 그러면 후회할 텐데.

- '흑견왕'님이 151,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 '인성왕'님이 181,818,18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나도 욕할 줄 알아, 인마.

- 으아아아아!!! ㅅㅂ 놈이!

- '흑견왕'님이 300,000,000원에 입찰하셨습니다.

- 와, 겨우 C급 검에 이렇게 지르시다니. 옵션 개 구린데. 님 가지셈.

- 으아아아아! 너···

- 거래 마감 기한이 즉시로 변경되었습니다.

나는 잼민이 스타일로 화를 돋우고 재빨리 창을 닫아버렸다.

'너의 승리를 인정하마, 하하하.'

상쾌한 마음으로 축하를 건네고, 거래 내역창으로 갔다.

<판매자 : 리버스(익명 처리)>

- 모든 물품의 입찰이 종료되었습니다.

- 판매 물품 : 날카로운 강철 대검*1, 브론즈 박스*27, 쓸만한 가죽 신발*2, 무두질한 가죽 갑옷*1, 견습 전사의 방패*1, 하급 치유 물약*10 ···.

- 현재 잔고 : 611,500,000원

거래소에 맡겨두었던 잡템이 미인으로 변신했다.

잔고를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고갱님,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큰 트롤짓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없는 수요는 창출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K-거래. 인성-거래.

내가 키득거리며 핸드폰을 닫을 때였다.

2.

"은호, 이 자식. 게임은 잘 되냐?"

내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순간 음매~ 하는 환청과 함께 소를 닮은 머리가 등장했다.

190센티를 넘는 장신에 산만 한 덩치, 역삼각형 얼굴을 가진 남자.

"중우 형, 왔어?"

불알친구 겸 형인 김중우였다.

부모님께서 죽은 친구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같이 키우셨다.

"캡슐은 어때? 계속 잘 돼?"

"어. 덕분에 쾌적하게 게임하고 있어."

첫날부터 예약도 잘 잡히고, 고급형 캡슐까지 배정된 것은 운만이 아니었던 거다.

"이럴 때 아니면 캡슐방 주인이 언제 생색내겠냐, 하하하."

속없이 웃는 소머리 뒤로 과거의 환영이 겹쳐 보였다.

'야 인마, 사방이 시체야. 너희 부모님도 지금 겁에 질리셔서···'

'서울에서 대체 어떻게 하라고. 끊어. 나 도망쳐야 해.'

부모도 내팽개치고 자기 살길만 찾던 쓰레기와.

평생 보살펴주신 남의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바보가.

"···진짜 고마워."

"자식, 별것도 아닌 거로."

지금이 아닌 과거에 대한 감사였다.

그때였다.

- 쾅!

40대 남자가 캡슐 문을 부서지라 차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개xx 같은 게임을 봤나."

그는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뭐야 저 자식은."

불쾌해진 내가 몸을 일으키자, 중우 형이 말렸다.

"내버려 둬, 나름 불쌍한 아저씨야."

"뭔데?"

"무슨 코인인가 한다고 창고 빌려서 사업했는데."

"비트코인? 채굴장 말이야? "

"아, 맞다. 그거 운영하다가 망했대."

아, 그게 이맘때쯤이었나 보다.

각종 규제와 과도한 거품으로 시세가 폭락했던 시기였다.

"그게 뭐가 불쌍해. 다 자기 판단인 건데."

사람이 저리 물러터져서야. 쯧쯧.

K-웹소설에서 자기 가게에서 행패 부리는 사람 내버려 둔다?

독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속이 얼마나 상했겠어. 내버려 두면 저러다 말아."

"어휴."

나도 부모님이 식당 하셔서 잘 안다.

가게에는 온갖 진상들이 찾아온다.

다 먹고 나서 본인 머리카락을 들고 환불을 외치지 않나.

맛집 유튜버라며 공짜 식사를 요구하고, 거부하면 비난 영상을 올리겠다는 놈도 있었고.

술 안 파는데 술 달라고 깽판 부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때마다 손님과 싸우면 가게는 망한다.

"이거 다 조작이야, 조작. 돈 많은 놈들이 활질하면 죄다 맞고, 나 같은 가난뱅이가 쏘면 하나도 안 맞고."

그는 유니티의 스킬 자체가 사기라며 화를 냈다.

'나 같은 실력자가 뜨지 못했으니, 시스템이 공정하지 않다 그거지?'

비겁하지만 한때 나도 가졌던 생각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꼬맹이가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거 아닌데요. 저 돈 안 썼는데 잘 맞던데. 그거 조준만 잘하면 돼요."

"시팔, 좆만한 어린놈이 뭘 안다고."

남자는 벌컥 화를 내며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반응을 못 하던 때.

- 탁.

내가 그의 팔목을 잡고 멈춰 세웠다.

"뭐, 뭐야, 넌. 아악!"

욕설하려던 그는 팔목을 두 손으로 잡고 비명을 질렀다.

온몸을 뒤로 빼며 양손으로 잡아당겼지만, 가볍게 쥔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리얼 모드] 현실 구현.

내 신체 능력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으니까.

"선을 넘으면 안 되지."

나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는 악마와 마주하고, 광기와 싸워왔던 검사가 있다.

내 안에 잠들어있는 광기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고통과 후회와 자책이 뒤엉킨 괴물이.

남자는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시, 씨팔.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안 하면."

눈도 못 마주치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허억, 허억."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그는 점점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헐떡거렸다.

쌓아온 살기와 격의 차이가 그를 압박했다.

"꺼억, 꺼억."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 살짝 팔을 놓아주었다.

"으으으!"

그 남자는 귀신을 본 듯 겁에 질려 자리를 떴다.

그때서야 멈췄던 시간이 돌아간다.

"으아앙!"

아이는 겁에 질려서 울먹거렸고.

"당장 나가! 앞으로 우리 가게 이용 금지야!"

중우 형이 애를 달래고는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이 형도 화낼 줄은 아네.'

분노한 모습이 흡사 미노타우로스 같았다.

'아··· 이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살짝 났던 화가 가라앉으면서 딴생각이 들었다.

3.

우리 부모님은 POS기도 간신히 다루는 기계치시다.

또래들은 유튜브나 카톡도 잘하는데, 그도 잘 못 하신다.

'그런 부모님이 가상현실게임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중에는 아들이 리무진으로 알아서 모시겠지만.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니 조금 불안했다.

'누군가 백업 요원이 있으면 좋겠는데.'

운전기사 겸 경호원 겸 필요시 몸빵도 할 수 있는 인재가.

'딱이긴 해.'

나는 중우 형의 덩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각 나오네. 각 나와.'

전신 판금 갑옷을 입히면 완전히 표준 방패 전사였다.

'와꾸는···!'

나는 보자마자 합격을 외쳤다.

순해 보이는 부분은 오직 소를 닮은 눈망울뿐.

한번 찌푸리면 양아치들도 숨을 멈출 정도로 험한 인상이었다.

'인성은···'

나는 픽 웃었다.

'최상이지.'

부모님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오래전에 증명했다. 자신의 목숨으로.

단점 있다면 귀가 얇아서 나 같은 녀석에게 잘 휘둘린다는 점 정도?

여러모로 최적!

문제는 양심이 조금, 아니 많이 찔렸다.

'나란 놈. 진짜 인성 터졌네.'

감동은 5초, 이용은 평생!

이 정도면 역대급 변심이다.

한숨 쉬며 인정하니 편했다.

형의 행복에도 큰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그래, 형으로 당첨이다.'

나는 은혜도 갚을 겸 귀한 조언을 했다.

"형, 건강을 위해 운동··· 아니 게임 좀 해."

"···?"

중우 형은 뭔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많이 남았다.

'돈이라도 좀 벌게 해줘야지.'

가게서 버는 푼돈 말고, 떵떵거릴만한 큰돈을.

"그리고 아까 그 아저씨의 망한 채굴장, 형이 인수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런 허황된 사업에 돈을 쓰라고?"

중우 형은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형, 이것 봐봐."

나는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낙서까지 된 허름한 소변기였다.

"이거 천만 원에 판다고 하면 살래?"

"미쳤어? 누가 그 돈 주고 사? 만원에도 안 팔릴 고물 같은데."

"그런데 이걸 사는 사람이 있네? 그것도 36억에?"

"···뭐?"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었다.

"야, 이건 반칙이지. 예술품이잖아."

"예술품이 뭐 별거야? 결국 변기에 싸인 하나 한 거뿐인데."

"그래도···"

"형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나는 투자의 대가에게 들었던 말을 옮겨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값어치가 중요한 거지."

시장은 변덕스러운 요괴와 같다.

어떨 때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팔면서 콧대를 세우고.

어떨 때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사달라고 애원한다.

"채굴장 사서 몇 년만 운영하고 팔아."

나는 골드가 있으니 다른 재테크 따위는 할 필요가 없고.

형에게는 복잡한 매매보다는 단순한 채굴이 더 잘 어울렸다.

"그래? 코인이 유망한가?"

솔깃한 표정으로 슬슬 다가온다.

비판적이다가 내 말 몇 마디에 혹하다니.

이러니 내가 맨날 흑우라고 놀리지.

"채굴이 정확히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구글링해."

"···"

"설명하기 귀찮아."

"···"

말했나?

나란 사람, 원래부터 인성왕.

중우 형도 그걸 잘 안다.

'놀려 먹는 재미가 있네.'

나는 픽 웃으며 설명했다.

"쉽게 말해 컴퓨터가 계산을 반복하면 보상으로 코인을 주는 거야. 광산에서 채굴하듯. 코인을 캐낸다고 표현하지."

"어려운데. 힘든 거 아니야?"

"별로 힘들지도 않아. 채굴기 켜놓으면 그 녀석이 알아서 코인을 캐와."

"그렇게 쉽다고?"

그럴 리가. 가격이 폭등하면 천국이고, 폭락하면 지옥인데.

그런데 이 형이 그 말을 알아먹을 리 없으니.

"그래, 쉬워. 그냥 알아서 돈이 복사가 돼."

간단하게 대답했다.

몇 년 후에는 또 말도 안 되게 폭등하니까.

역설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와중에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꿀 빨면 돼."

"굉장히 편하게 들리는데."

"맞아, 굉장히 쉬워. 형은 놀기만 하면 채굴기가 알아서 채굴을···"

그 아이디어는 참 부러웠다.

'나도 누가 골드 좀 대신 캐줬으면.'

채굴기가 윙 돌아가고 나는 놀고.

얼마나 좋을까, 하하하.

"···?"

"놀면 누군가 알아서 채굴을···"

"···?"

누가 대신 캐주고, 나는 놀고.

누가 대신 캐주고, 나는 놀고?

환청이 들려온다. 사방에 메아리친다.

'놀면 알아서? 응.'

'놀면 알아서? 응!'

100만 볼트 전구가 켜진 듯,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채굴기. 어.'

'채굴기? 어?'

'채굴기! 어!'

모두의 상식을 뛰어넘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획이.

19화

1.

"길드에서 건축 자재도 취급하는지요?"

나는 유니티에 돌아오자마자 모험 길드부터 찾았다.

"오호. 확실히 유적을 발견했나 보군."

"···!"

길드장 코르버는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물론일세. 모험가의 비밀은 소중하니까."

모험 길드장만큼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아는 자가 있을까?

그런데도 한 번도 신뢰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나는 인사하면서 약간의 길드비를 냈다.

길드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길드가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의무를 행하다니, 훌륭한 자세일세."

코르버는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드물게 인성 바른 젊은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돈 문제는 정확해야 하니까요."

"맞는 말일세. 그런 의미에서, 길드원 특가 역시 투명하고 정확하다는 점을 내가 보증하지."

나는 발굴 및 건축에 필요한 각종 자재를 주문했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만.

'코르버는 믿지만, 그의 손발들까지 믿을 수는 없지.

보물의 진실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다.

"발주 규모를 보니, 상당한 규모군."

"그렇습니다."

"인력도 필요할 텐데. 내가 알선해 줄 수 있네. 물론 입이 무거운 자들로."

"호의에 감사합니다만, 따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코르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세부 일정을 조율한 후 인사를 나눴다.

"자재 도착하는 날 다시 뵙겠습니다."

"좋네. 세상에 유적이 공개되길 기대하고 있겠네!"

코르버와 나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이후 나는 필요한 자재를 여러 곳에 나눠서 주문했다.

건축가 길드, 목공 길드, 대장장이 길드, 상인 길드 등.

언젠가 알려질 수밖에 없겠지만, 늦게 알려질수록 좋으니까.

'입주 준비는 얼추 끝났고.'

소모품 보급을 할 차례.

아낌없이 주는 나무, 황금 고블린을 찾을 시간이었다.

2.

'예전보다는 찾기 쉽네.'

땅 밑에 파묻혀 있던 만물상점에 은밀한 지하 통로가 생겼다.

통로 벽면에는 화려한 황금 주머니가 새겨져 있었다.

'와, 감히 저걸 걸어놔?'

녀석은 저 주머니를 들고 다니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곤 했다.

아픈 아이의 엄마에게.

엄마를 잃은 아이에게.

사서는 안 되는 것을 샀고.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을 팔았다.

'···아직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역시 먼지 한 톨까지 털어줘야 속이 풀릴 듯하다.

"크륵. 이, 인간님?"

오랜만에 본 크무로는 배가 더 나오고, 장신구도 더 늘어나 있었다.

"장사는 잘되지? 돈 좀 많이 벌었나 봐?"

처음부터 동네 깡패 대사가 나왔다.

"벼, 별말씀을."

크무로는 잔뜩 주눅 든 채로 우물거렸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빈 병들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크륵, 이게 뭡니까?

"예전에 네가 '자발적으로' 준 물약들 말인데. 그게 글쎄, 물건에 하자가 있더라고!"

"크륵. 저희 상점은 완벽한 품질을 자랑···"

"어딘가에 구멍이 났나 봐, 액체가 다 새버렸더라고."

병 입구에는 내 입술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모든 병에.

"···"

"···"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지.

'뭐 어쩌라고?'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자 더욱 눈을 부릅떴다.

침묵이 길어졌다.

"···"

- 살다 살다 이렇게 뻔뻔한 놈은 처음 본다!

어쩐지 그런 말 구름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애프터 서비스는 해줘야지. 아직 품질 보증 기간이 남았을 거 아니야."

"하, 하지만."

"반품까진 안 할게. 리필 정도면 될 것 같아. 단, 가득!"

크무로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크으으으르륵."

온몸의 살들도 분노로 출렁거렸다.

- 그만큼 털어갔으면 되었지, 또 털라고?

그렇게 소리 지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빨리. 시간 없어. 나 바빠."

원래 진상 부릴 때는 당당해야 한다.

진상 중에는 힘이 세고, 미친놈이 많다.

안 건드리는 게 이득이다.

"제, 제품에 하자가 있었군요. 다, 당연히 채, 채워드려야죠."

어딘가 뿌드득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 맛에 진상 부리는구나.'

당하기만 하다가 해보니까 재밌었다.

"그래, 서비스 좋네. 그럼 다른 데서 악담까지 할 필요는 없겠네."

크무로가 휘청하면서 순간 병을 놓칠 뻔했다.

"병까지 새 걸로 주려고? 넣어둬, 넣어둬."

인심 썼다. 병값은 봐준다.

"크으···르르륵."

애가 경기 들린 거 같으니 약간의 당근도 제시했다.

"필요한 자재도 몇 개 있는데."

만물상점에서는 마법 전등, 선풍기, 안전장치 등도 구할 수 있다.

"친구끼리 치사하게 가격 할인은 좀 아니지?"

"가, 감사합니다. 정상 가격은···"

"나는 원가 아니면 안 받아."

"···크르으으윽. 네. 인간님."

살 때는 최저가 밑으로.

"팔 것도 조금 있는데."

잡템은 다 버렸지만, 실버 박스 몇 개와 주술사의 마목 지팡이(B), 대전사의 철혈 몽둥이(B) 같은 아이템은 남아있었다.

'아직 거래소에 풀기는 이르지.'

갖기는 애매하니, 다 골드로 바꾸면 될 일이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짝다리를 짚고, 티꺼운 표정으로 어슬렁거렸다.

"가격 잘 쳐줄 거지? 친구끼리."

팔 때는 최고가로.

"크륵, 알겠습니다, 인간님."

크무로는 포기하면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 내가 팔 땐 최고 비싼 가격으로, 내가 살 땐 최고 싼 가격으로!

- [업적 : 폭리]를 세웠습니다.

- 알찬 업적으로 브론즈 박스를 지급합니다.

'말 몇 마디에 업적이라니. 쏠쏠하네.'

- 좋은 주먹 두고 왜 말로 하는가!

- 새로운 '거래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 스킬 '강매(E)'를 획득합니다.

'오, 스킬 좋지!'

이름이 살짝 걸리지만, 어쨌든 좋다.

- '전직 힌트'가 주어집니다.

- [권능 : 미다스의 손], [스킬 :기만]과 연계 가능.

- 계속 발전시키면 [히든 직업 : 악덕 상인]으로 전직 가능.

웬일로 시스템이 힌트까지 준다.

'히든 직업, 악덕 상인이라'

솔직히 군침이 돌았다.

딱 봐도 부자가 될 법한 직업이니.

하지만 나는 수절하는 과부처럼 허벅지를 꼬집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직업적으로 저 짓을 하면 진짜로 악명이 쌓인다.

창창한 앞길을 스스로 막는 셈이 된다.

"봐준다, 봐줘."

나는 온 김에 자잘한 물품도 보충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거도 챙겨야지.'

아인델프에게 줄 명언집이 필요했다.

필사할 때 쓸 노트를 사야 했다.

"기분이다, 이건 제 가격 주고 살게."

- 땡그랑.

텅 빈 탁자 위에 1 실버가 덩그러니 놓였다.

"···"

"서비스로 펜은 공짜로 주기. 오케이?"

똥 씹은 표정은 종족 불문이네. 이번에 알았어.

'아, 잘 먹었다.'

만물상점을 나오면서 나는 배를 두들겼다.

스스로 권능 하나를 개발한 기분이 들었다.

- 왕급 권능, 인성!

'이러다 시스템이 진짜 인정해주는 거 아니야?'

이런 뻘소리가 나올 정도.

현재까지 사용자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3.

산맥으로 출발하기 전 상태창, 스킬창을 점검했다.

[상태창]

근력 : 27.5

민첩 : 26.1

체력 : 27.4

'이 정도면 맨손으로 차도 들 수 있겠는데?'

기본 스탯부터가 탈 인간급이었다.

영능 : 2

정신력 : 8

저항력 : 7

'정신력 8, 실화냐.'

뿌듯했다.

마법사들이 마나와 함께 가장 원하는 스탯이었지만, 다른 직업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상위 직종으로 전직하는데, 혹은 '격'을 결정하는 데 꼭 필요한 스탯이었다.

'그렇게 정신 고문을 했으니.'

잠시 나를 위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희귀 직업들도 갖길 원하는 신비한 스탯인 영능.

고통과 저주 등 버티도록 돕는 저항력까지.

마나 : 10

오러 : 2

'잘하면 익스퍼트까지 가능하겠어.'

마나량은 거의 소드 유저급을 탈출하기 직전이었다.

[권능]

리얼모드

불굴

미다스의 손

[기초 스킬]

강인한 체력(C)

영양의 뒷다리(D)

고양이의 균형감각(D)

원숭이의 탄력(D)

숫말의 스테미너(D)

[주직업 스킬]

소드 마스터리(C) 75/100

체술(C) 60/100

초급 마나운용(C) 45/100

오러(A) 5/100

질풍쾌검술(S) 3/100

A급 오러나 S급 쾌검술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평타가 제일 중요하지, 평타가.'

소드 마스터리(C).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몸통과 같은 스킬이다.

대부분의 승부는 회심의 일격이 아닌, 일반 타격으로 결정되니까.

'틈나면 트레디를 찾아서 다시 다듬어야겠어.'

숙련도가 거의 3/4쯤 찬 상황.

마스터의 조언이라면 벽을 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타 스킬]

채광(A)

기만(F)-> 스킬 통합 가능

강매(E)-> 스킬 통합 가능

악마가 날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는다.

[보조직업 스킬]

모험가의 직관(B)

모험가의 명성(B)

모험가의 체력(C)

모험가의 시야(C)->스킬 통합으로 승격(B)

모험가의 다리(C)->스킬 통합으로 승격(B)

모험가의 주머니(A)

이전에 갖고 있던 정찰병의 시야(C)와 모험가의 시야(C)가 합쳐져서 스킬 랭크가 올라갔다.

산악 이동(C)과 모험가의 다리(C) 역시 마찬가지.

덕분에 산을 오르는 데 몸이 아주 가뿐했다.

- 흉포한 붉은 늑대(C) 무리가 달려듭니다!

흡혈검이 한 바퀴 아름다운 춤을 추었고.

- 흉포한 붉은 늑대(C) 무리를 학살하였습니다.

- 체력이 근력이 0.1 상승합니다.

- 미쳐버린 곰(B)이 돌진합니다.

- 치명타! 적이 빈사 상태에 이릅니다.

- 파밧··· 퍽!

-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 체력이 0.1 상승합니다.

가볍게 산을 주파하고, 다가오는 늑대와 곰을 일격에 쓰러뜨린다.

광기의 산맥은 이제 친근한 동네 뒷산이 되었다.

- '산성 안개'의 독기가 침투합니다.

- 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침입자를 막는 울타리도 잘 작동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 없이 완벽한···

- '산맥의 광기'가 침습합니다.

- 일부 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이거만 빼고.'

아주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갑자기 미친다거나, 이중인격이 된다거나 하진 않겠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4.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산맥을 뒤졌다.

'이즈음일 텐데.'

반나절을 고생한 끝에야 아인델프가 말해준 지형을 찾았다.

모루를 닮은 커다란 붉은 바위 아래.

유저도, NPC도 모두 찾기를 원하는 드워프 마을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이게 어딜 봐서 마을이야!"

- 쿠오오오.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사이로.

장엄한 성채 도시 '악툼'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배틀 엑스가 교차하는 성문 앞으로 끝도 없이 대로가 펼쳐졌다.

양옆에는 드워프 전사의 석상이 칼과 방패를 들고 마주 섰다.

금방이라도 깨어나서 휘두를 듯 위엄 넘쳤다.

바닥의 벽돌은 꽉 맞물려서 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다.

산맥의 광기를 막기 위한 방어 마법도 설치되어 있었다.

'와, 이런 대형 결계가 가능했다니.'

성 전체를 투명한 장막이 보호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장난이 아니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워프는 모두 콧대 높은 장인이자, 사나운 전사다.

그에 반해 나는 굴러들어온 돌에 불과하다.

과연 내가 이들을 설득해서 '계약'을 맺을 수 있을까?

'귀족들조차 두려워하는 드워프 대전사들을 상대로 말이야.'

- 최초로 드워프의 성채 '악툼'을 발견하였습니다

- 놀라운 업적을 세웠습니다.

- [업적 : 탐험]을 달성합니다.

- [실버 박스]를 지급합니다.

- 탐험 지도에 발견이 기록됩니다. 가치 있는 이야기와 이어지면, 음유시인을 통하여 '명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붉은 색 메시지가 떴다.

- [경고] 유저 수준보다 해당 지역의 난이도가 너무 높습니다.

- [경고] 선택에 따라 메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아찔한 위기감과 함께 대박의 기운이 느껴졌다.

전 서버를 뒤흔들 거래를 시작할 차례였다.

그리고.

- 쿠웅!

'...!'

묵직한 병장기의 울림이 들려왔다.

20화

1.

'드워프 가디언!'

성문 앞에 서 있는 경비병이 보였다.

그가 위협하듯 워 해머의 자루로 바닥을 찍었다.

'접근 금지라고? 말로 해, 말로.'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살폈다.

'와, 피지컬이···!'

키는 내 가슴에도 못 미치는데, 몸집은 나의 2배가 넘는다.

온몸이 근육으로 터질듯했고 팔다리가 웬만한 남자 허벅지보다 굵었다.

세계 최강의 몸을 가졌다는 스트롱맨을 보는 기분이었다.

'폴 아저씨는 갖다 댈 게 아니네.'

마을 경비대원의 푸짐한 뱃살과는 천지 차이였다.

'둘이, 아니 단체로 붙으면?'

폴 아저씨 백 명 있어도 도저히 이기는 그림이 안 나왔다.

거기다 들고 있는 병기도 심상치 않았다.

내 검 중에서 두 번째로 좋은 게 검술 길드의 제식 검(B).

이게 현재 서버 최강검(C)보다 위인데.

'무슨 경비의 무구가···!'

폭풍의 워 해머(B)에 강화 철제 중갑주(B), 대지의 강철 부츠(B) 등.

'이게 기본 장비라고?'

마나 소드도 저 정도 갑주는 못 뚫는다.

초보라도 저 병기로 무장하면 익스퍼트랑 잠깐 대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딱 봐도 강력한 드워프가 들고 있으면?

트레디 말고 1대1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가디언들이 성벽 위로 쭉 늘어서 있었다.

'꿀꺽. 괜히 초고랩 존이 아니네.'

가디언이 천천히 해머를 들어 올렸다.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 쿵. 쿵. 쿵.

절도 있는 땅 울림.

가디언들이 무기를 찍으며 예를 표했다.

워 해머의 숲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이게 누군가? 리버스 군이 아닌가!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인델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델프 님, 반갑습니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양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누가 옷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고 했어?'

차림이 바뀌니 완전히 달라 보였다.

검붉은 경갑주에 망치와 모루가 그려진 망토를 두른 모습이 위엄 넘쳤다.

"성문을 열어라, 내가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다."

- 기기기긱.

절대 안 열릴 줄 알았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속 좋은 할배인줄만 알았는데.'

장로쯤 되나 보다.

고개 숙인 가디언들을 지나서 성안으로 들어섰다.

- 최초로 드워프의 성채 '악툼'에 입장하였습니다.

- 놀라운 업적을 세웠···

복잡한 메시지는 나중에.

지금은 VIP 접대에 집중할 시간이다.

2.

"바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여긴 어떻게?"

"날씨도 좋고, 입구 경비도 점검할 겸 나왔네. 운 좋게 마주쳤구먼."

산맥은 마나가 요동쳐서 항상 우울한 날씨인데?

얼굴에서 살짝 수심이 엿보였다.

'뭔가 있네.'

가벼운 덕담 후,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적적하실 때 보실만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품에서 필사해놓은 책들을 꺼내서 건넸다.

고풍스러운 표지에 멋들어진 제목이 적혀있었다.

- 현인록(賢人錄).

"이것은 설마 현자의 비밀을 기록한 책인가? 어찌 이런 귀한 책을!"

아인델프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쓰다듬었다.

"제본이나 두께도 지난번 사들였던 책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 딱 봐도 귀한 명가의 책이군!"

귀한 책은 맞다. 내 팔이 얼마나 아팠는지.

- 당신을 바꿀 세계 명언 100가지

사실은 잘 팔리는 자기개발서를 필사한 책이었지만.

'모르고 먹으면 해골 물도 꿀맛이지.'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은 얼마인가?"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히 저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비싼 책을 그냥 주겠다고?"

아인델프의 마음 한 조각을 얻을 수 있다면 그깟 책쯤이야.

- 아인델프의 호감도가 최고로 올라갔습니다.

- 더이상 올라갈 데가 없습니다.

분위기가 한층 더 화기애애해질 무렵.

나는 지나가듯 슬쩍 운을 띄웠다.

"드워프 마을은 처음인지라. 어떨지 참 궁금합니다."

남의 집 가면 왜 맨날 하는 행동 있지 않나.

방은 우리 집보다 큰지, 화장실은 깨끗한지 은근슬쩍 둘러보잖아.

"껄껄껄. 그렇겠어.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내 안 보여 줄 수가 없겠군."

그렇게 나는 아인델프 투어버스를 타고, 드워프 성채 관광을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재미없는 곳들만 생각이 나는군. 괜찮겠나?"

아인델프는 시청, 광장, 신전을 가리켰다.

공무원이 만들법한 평범한 관광 코스였다.

"천만에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가 100%의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아인델프는 은근히 기쁜 표정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코스는 평범해도 장소가 안 평범하니까!'

우리나라에선 박물관 지겹다고 안가지만.

파리 가면 루브르 박물관에 돈 내고 못 들어가서 안달이다.

하물며 여기는 구경도 힘든 초 고랩존.

돈 주고도 못 들어온다.

'바로 이거지!'

나는 속으로 외쳤다.

- 최초로 '드워프의 시청'에 진입하였습니다.

- 놀라운 업적을 세웠습니다.

- [업적 : 탐험]을 달성합니다.

- [실버 박스]를 지급합니다.

- 탐험 점수를 획득하였습니다.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업적이 생길 정도!

건물마다 퀘스트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

- 최초로 '드워프의 전망대'에 진입하였습니다.

- 놀라운 업적을···

그저 들어가서 둘러보는 것뿐인데.

점수가, 업적이 쌓였다.

'대박이다!'

걷는 걸음마다 이득이었다.

- 최초로 '드워프의 분수 광장'에 진입하였습니다.

- 최초로 '드워프의 신전'에 진입하였습니다.

- 최초로 '드워프의 시장'에 진입하였습니다.

···

..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꽃들이 너무 달콤하다.

"다음은 박물관이군. 꽤 지루할 텐데···"

'박물관!'

현실이었으면 1초도 버티기 힘든 지루한 장소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지식과 히든 피스의 보고 아닌가.

"꼭! 가보고 싶습니다!"

나는 신병처럼 씩씩하게 대답했다.

절대 놓칠 수 없지.

3.

- 최초로 '드워프의 박물관'에 진입하였습니다.

- 역사적인 유물 '생각하는 인간'을 발견하였습니다.

- 인체의 황금비율에 대한 신비를 깨닫습니다.

- 지혜가 0.1 상승합니다.

- 역사적인 유물 '드워프의 탄생'을 발견하였습니다.

- 고대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 지혜가 0.1 상승합니다.

- 역사적인 유물···

- 정신력이···

'너무 좋아, 완전 좋아!'

그저 산책만 해도 스탯이 오른다.

'이러다가 스탯 재벌이 되겠는걸?'

배가 불러 터질 지경이었다.

끄윽.

나는 보이지 않게 트림을 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커다란 그림 앞에 이르렀다.

"이 그림은 무엇인지요?"

나는 호기심에 차 물었다.

드워프는 태생이 불의 종족.

그만큼 물과는 안 어울리는 종족인데.

그림 속에서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 작은 범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몰아치는 폭풍우, 절박한 표정을 통해서 얼마나 큰 위기였는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역사일세."

아인델프는 다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설명이 없어도 그림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첫 그림.

드워프 시체와 부러진 무구가 가득한 전장.

비참한 몰골로 고개를 숙인 전사들이 보였다.

'···패배했군.'

나는 말을 삼갔다. 굳이 종족의 수치를 상기시킬 필요 없으니.

역사 그림은 쭉 이어졌다.

드워프들은 쫓기고 쫓겼고, 죽고 또 죽었다.

종족 자체가 말살되려는 대위기 속에서.

'우와.'

바다 한복판에 물보라와 함께 커다란 육지가 생겨났다.

기적과 같은 일!

살아남은 드워프들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고향 대륙을 떠나 커다란 섬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라 했더니.'

미국 메이플라워 호랑 비슷했다.

고향인 영국에서 쫓기듯 도망치고 신대륙으로 향했던 사람들과.

그 이후는 새로운 건설과 번영의 역사였다.

슬쩍 눈치를 보니 아인델프가 침울해 보였다.

"충분합니다. 다른 곳으로 가시죠."

"그럴까? 그러세."

아인델프는 어깨를 털고 그 자리를 떴다.

떠나는 순간, 마지막 작품이 보였다.

어떤 그림도 없이, 검은색으로 한 문장만 적혀있었다.

- [숲을 두려워하라]

'···!'

어쩐지 알 것만 같은 말.

살짝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 메인 에피소드의 비밀에 접촉하였습니다.

- 숨겨진 단서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4.

"마지막은 대장간일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드워프 마을의 꽃은 대장간 아니겠는가?

기대에 찬 내 말에 아인델프는 머뭇거리며 등을 돌렸다.

대장간 거리는 내 상상과는 매우 달랐다.

'왜 이렇게 조용해?'

힘찬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고, 뜨거운 열기와 증기로 가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숨이 막힐 듯 조용했다.

거리 곳곳에는 중년의 드워프들이 늘어져 있었다.

"맥주, 맥주 더 갖고 와!"

술에 만취해서 거리에 자빠져있는 드워프도 있었고.

"히, 힘들어. 괴로워."

드워프답지 않게 홀쭉하게 마른 드워프가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자네 생각과는 좀 다르지?"

"실례지만··· 네, 그렇습니다. 대체?"

"대단한 이유가 있겠나. 철이 다 마른 게지."

"아···"

드워프는 타고난 대장장이.

인간이 숲을 태워 농지를 만들듯, 드워프는 광맥을 캐내서 무구를 만든다.

오래 살수록 철맥의 씨가 마르게 되고.

결국 인간의 폐철광 마을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장로인 나조차 탐색을 나갔던 거네."

미국의 러스트 벨트(녹슨 공업 지대)가 떠올랐다.

한때 대량생산 산업을 대표하는 지역이었지만, 산업 쇠퇴와 함께 몰락한 지역이었다.

"젊은이들이 할만한 일거리가 없는 거군요."

"바로 맞췄네. 두드릴 철이 없다는 것보다 큰 문제가 어딨겠는가."

실업의 고통은 인간과 똑같았다.

'그래서 전설의 광부를 보고 그리 기뻐했었군.'

가난뱅이 일 때는 일거리가 참 간절하다.

그러니까 나도 병신 같은 회사에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을 썼지.

삶이란 그리 쉽지 않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이야기.

'이 정도면 상황 파악 다 한 것 같은데?'

시스템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인간을 들이다니,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드워프가 우리를 노려보았다.

내 허리에나 올까 말까 한 왜소한 체구였지만, 복장은 아인델프만큼 화려했다.

"블락, 전에 말했던 내 손님일세. 전설의···"

"그딴 미신이나 믿고서? 고작 그런 게 자네가 말한 희망인가?"

"어허. 말을 삼가게!"

블락이라는 드워프 장로는 내게는 아예 말도 걸지 않았다.

그 흔한 인간 어쩌고 하는 경고조차 없었다.

"외모만 보아도 추악한 것을···"

눈빛에 순도 100%의 경멸만 가득했다.

'와, 네 녀석이 외모를 말해?

잘생긴 애가 나한테 못생겼다 하면 그러려니 하는데.

누가 봐도 찐다인 새끼가 그러면?

'진심으로 열 받지.'

수염은 지저분하게 덥수룩하고, 배는 임산부처럼 나온데다, 입에서는 맥주 썩은 내가 나는 놈이.

외모 비하에, 인종 차별까지.

어그로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려 할 때.

"같은 공간에 있기도 싫군."

오히려 블락이 불결하다는 듯 망토를 털고는 사라졌다.

"불쾌했을 터인데,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아인델프 님 탓이 아닙니다. "

"원래 저런 친구는 아니었어. 너무 오랫동안 손맛을 못 보아서."

"네?"

"녀석은 원래 작은 칼 같은 것을 만드는 장도장(粧刀匠)일세."

저런 녀석이 장인이라고?

"쓸만한 철맥이 마른 후, 아예 작업을 못 하고 있네. 그래서 가슴 속에 울화가 쌓인 게야. 다른 녀석들처럼."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전율이 일었다.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했구나!'

철맥이 경제 문제이기만 했다면, 자존심 조금 굽히면 해결될 일이다.

만들어놓은 무구를 팔면 될 테니.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던거야.'

대장일이 종족의 정체성이자, 타고난 본능이기 때문이다.

본능을 억지로 막으면 어떻게 될까?

'좀이 쑤시고, 불안하고, 답답하지.'

그제야 다른 드워프들이 보였다.

- 쿵. 쿵.

어떤 드워프는 벽에 머리를 박는다.

마치 본인이 망치라도 된 양.

- 쾅. 쾅.

어떤 녀석은 주먹으로 바닥을 세게 두들긴다.

마치 철광석을 두들겨서 검면을 만들 듯.

'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이 자식들, 욕구 불만이구나!'

헬창을 헬스장에 못 가게 막으면?

'좀이 쑤셔서 미치려고 하지.'

보통 사람도 마찬가지.

외출 금지, 여행 금지, 모임 금지했던 그때.

나 같은 하꼬조차 답답해서 미칠뻔했다.

'드워프는 더 괴롭겠지.'

인간에게 운동은 선택이지만, 드워프에게 대장일은 본능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십 대 남자애가 야구 동영상을 못 보게 되었을 때.

그 정도의 강한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드워프 사회 전체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였어!'

바로 그게 정답이었다.

- 드워프 성채의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 [메인 퀘스트 : 드워프의 귀환]이 진행됩니다.

- 조건 : 드워프 도시에 활력을 되찾아 주기

- 성공 시 : 드워프 성채와의 우호도 상승, 드워프의 메인 에피소드 참여, 메인 에피소드 진척도 상승, 알 수 없는 보상.

실패 시 : 우호도 하락, 드워프 마을 폐쇄, 메인 에피소드 진척도 하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