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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 97화

내 앞에 있던 물건.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지팡이였다.

오래된 나무 재질의 지팡이.

머리 부분은 물음표 모양으로 꺾여 있었고, 중심 부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보석이 둥둥 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름거미]를 착용한 손으로 보석을 슬쩍 건드려 봤는데, 보석은 가볍게 흔들리더니 이내 제자리를 되찾아 갔다.

보아하니 보석과 지팡이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도 없는 듯했다.

'마법 지팡이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마법 지팡이.

당연하게도 마녀나 마법사들이 마법을 더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한 도구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마법이라는 게 아직도 과학적으로 완벽히 정복하지 못한 분야인지라,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녀라는 게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놈들은 아니지만, 이런 지팡이 하나쯤 연구실에 있다고 해서 별로 특별하게 여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마녀랑 싸우다가 입수한 지팡이 하나쯤 실험실에 놔둘 수도 있지, 뭐.

오히려 스팅레이 그룹의 비밀 실험실치고는 꽤 건전한 실험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사람 내장이 유리관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다만 내가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것이 마법지팡이라는 사실보다도.

이 '디자인'에 있었다.

'이거, 에반젤린 거 아닌가?'

마녀 에반젤린.

주인공에게 한눈에 반하여 동료가 된 마녀. 이곳에서는 아마도 아라야에게 살해당했을 비운의 캐릭터.

나는 이 마법지팡이가 에반젤린의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물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긴 하다.

아라야에게 죽었을 에반젤린의 지팡이가 왜 이런 곳에 있겠는가?

지금까지 스팅레이 그룹이 사냥해 왔을 수많은 마녀 중에서 딱 하필이면 에반젤린의 지팡이가, 우연하게도 내가 마침 찾아온 비밀 연구소에 딱 있다?

에이, 억지도 참.

소설도 그렇게 전개하면 욕먹는다.

'그냥 비슷하게 생긴 거겠지.'

게다가 난 에반젤린의 지팡이를 본 적이 없다. 원작은 소설이었으니 글로 된 묘사뿐이었고, 딱히 일러스트나 삽화로 공개되었던 것도 아니니.

그냥 소설에서 나왔던 묘사 중에 '지팡이의 보석이 동동 떠 있다'라는 문장이 묘하게 기억에 남아서 그렇지, 사실 재질도 이것처럼 나무로 되어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어쩌면 에반젤린의 지팡이는 쇠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미미의 요술지팡이마냥 플라스틱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머리 부분에 보석이 동동 떠 있다고 해서 다 에반젤린의 것은 아닐 테고, 그녀의 지팡이는 틀림없이 아라야의 수중에 들어갔을 터. 역시 말도 안 되는 의심이었던 걸로.

"마법 지팡이라...."

어디 쓸 만한 곳은 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히 그것을 손에 조심스레 쥐어 보았다. 무기로 쓰기에는 적당치 않아 보였다.

당연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나로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에반젤린을 죽인 아라야처럼 또 다른 마녀의 피를 빼앗지 않는 이상 내가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뭐, 써 봤자 의미도 없지만.'

구태여 강력한 모듈들을 놔두고 초보적인 수준의 마법을 익힐 이유도 없다. 물론 그것대로 낭만이 있기는 하지만, 신비모듈들의 힘도 충분히 비현실적인 힘이니까.

윙가르디움 레비오사.

지팡이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 실험실을 무너뜨릴 걸 생각했을 때 들고 나갈까도 싶었지만, 역시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걸 들고 어딜 돌아다니겠어.

'결국 쓸 만한 건 없었군.'

하기야 사기적인 Lv.5 신비모듈의 시제품 같은 게 있었다면, 스팅레이 그룹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비밀실험실을 지키려고 했었겠지.

어쩌면 비밀실험실인 주제에 예비전력도 끊기고 완전히 방치되어 있던 이유 역시 그다지 중요한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구름거미]의 장갑에서 실을 길게 뽑아낸다. 모든 것을 묻어 버릴 요량으로 손가락을 튕겨 수천 가닥의 실을 쏘아내려는 찰나.

"참으로 신기한 일로구나, 그대여."

갑작스레 뒤편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인기척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온몸의 긴장을 끌어 올렸다.

"누구냐."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로다. 그대는 누구인가?"

고개를 돌아보니 웬 꼬마 여자애가 그곳에 있었다. 몸이 반쯤 투명해서 비쳐 보이는 것이,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게 분명했다.

'지팡이에 담겨 있던 영혼이라도 되나?'

꽤 재밌네.

나 이런 상황 좋아해.

이 상황에 흥미를 느끼며 무릎을 꿇어 꼬맹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키가 내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아 나도 내려다보기 힘들었던 탓이다.

지팡이에서 새어 나온 빛이 공간을 비췄다. 덕분에 굳이 적외선 카메라 기능을 쓰지 않고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생김새는 상당히 귀여운 편이었는데, 단정하게 자른 백금발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에반젤린이랑 똑같군.

"아론 스팅레이다."

"아론... 아론 스팅레이...?"

정체불명의 꼬맹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생긴 건 10살도 안 된 꼬맹이인데, 몸짓과 말투는 영락없는 늙은이였다.

근데 그게 꽤 귀엽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이런 설정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괜히 이 꼬맹이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스팅레이라면 그 괴물 같은 놈들이 수두룩한 이상한 집단 아니더냐. 그대는 그곳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가?"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이 내 아버지다. 나는 그의 첫째 아들이고."

"그 수괴 놈들의 우두머리의 장남!?"

경악하는 꼬맹이.

뭔가 스팅레이 그룹하고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뭐,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은 아니다. 기업 놈들이 콜로니 세우겠답시고 [신비]들과 전쟁을 벌이던 게 하루 이틀이던가.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여야지.

"혹시 그대는 이 몸의 적인가?"

아니, 네가 물으면 어떡하냐.

"별로 널 적대하고 싶진 않군."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애초에 이렇게 어린 꼬맹이를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부터가 인간으로서 글러먹은 것 아닐까. 평범한 어린애가 아닌 걸 알아도 외관상 그런 걸 어떡해.

"다만 네가 나를 적대한다면, 나 역시 너를 적대하겠다. 반대로 네가 나를 존중할 용의가 있다면, 나 역시 너를 존중하지."

"용의? 어려운 말은 쓰지 마라!"

"...."

뭐지.

자기도 '수괴'니 뭐니 하는 어려운 한자어 써 놓고서는 왜 나한테만 그러니. 이 녀석이 말하는 '어렵다.'의 기준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대화는 이어 가야겠지.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소리다. 넌 날 어떻게 할 거지?"

"음...!"

고민에 빠진 유령 꼬맹이.

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했다! 그대는 이 몸의 은인이니라!"

"은인이라?"

"그래! 그대가 없었다면 이 몸도 현세로 돌아오지 못했겠지! 그러니 이 몸을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그대는 은인인 것이다!"

위화감.

이 녀석과 대화를 하면서 계속 위화감이 든다. 아니, '위화감'보다는 묘한 '기대감'이라고 해야 할까. 에반젤린과 닮은 탓에 쓸데없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 녀석은 이미 죽었을 텐데.

그리고 만약 이 꼬맹이가 정말로 에반젤린이었다면, 새롭게 업적을 달성하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떴을 테니까.

씁쓸한 감정을 추스르며 나는 꼬맹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넌 뭘 할 수 있지?"

"어...?"

"은인이라면 보답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말하면서도 조금 양심에 찔렸다.

이렇게 쬐깐한 여자애한테 뭔가 뜯어내려고 하는 세계관 최강자라니, 수준 실화냐? 진심으로 가슴이 옹졸해진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진짜로 뭔가 줄 수도 있으니 그냥 찔러보듯이 물어본 것뿐이었다.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이, 이 몸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

그렇다고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뭐, 마법지팡이의 정령으로서 축복 같은 걸 내려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건만. 아니, 생각해 보니 축복을 걸어 준다고 해도 안티레인 맞으면 지워지려나.

쩝. 욕심부리지 말자.

그냥 재밌는 경험 했다고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나쁘진 않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자, 잠깐! 그, 그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는지 다급하게 소리치는 꼬맹이.

"지, 지금 상태에서 못하는 것뿐이니라! 그대가 조금만 더 힘을 보태준다면 이 몸도 힘을 되찾아서 그대를...."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다."

"그, 그치만...."

나는 타이르듯 말했다.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딱히 난 아무것도 한 적이 없으니. 그저 저 지팡이를 만졌더니 네가 튀어나온 것뿐이니."

"그, 그럴 리가 없다. 그런 형편 좋은 일 따위가 벌어질 리가 없잖은가. 틀림없이 그대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기에,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느니라."

"...?"

뭐라고?

내가 이름을 불렀다고?

위화감이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꼬맹이."

"꼬맹이라 부르지 말거라."

"저건 네 지팡이인가?"

항의를 무시하고 묻자,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니라. 저건 내 것이 아니다."

"그럼 저건 너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저건 우연히 이 몸이 타고 올라온 '두레박'이니라."

"두레박?"

"저 지하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느니라. 세계의 모든 무의식과 영혼과 마나가 뒤엉켜 굽이쳐 흐르는 강이 말이다. 마법이라는 것은 의식을 통해 무의식에 흘러넘치는 힘을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인 게지."

"...."

무슨 소린지 반도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 마녀에게 있어 지팡이라는 것은 저 우물 아래, 깊은 지하에서 흐르는 강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니라."

소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몸은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육..., 육... 몸은 사라지고 영혼만이 남아 누군가 영혼을 길어 올려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말을 더듬거리는 게 아무래도 '육신'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영혼은 잘도 말하네. 아니, 그건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소녀의 말은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네 말대로라면, 네가 그 '강'이라는 곳에서 빠져 가라앉고 있을 때, 그 영혼을 끌어 올린 게...."

"그대이니라."

소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만."

"그건 상관없다. 그대는 내 이름을 부르며 지팡이를 만지는 것만으로 우물을 열어 두레박을 내려주었지. 나머지는 이 몸 스스로가 행한 일이다. 이 몸은 대단한 마녀'였'거든!"

엣헴! 하고 으름장을 피우듯이 허리에 손을 짚는 소녀.

무척이나 귀여운 몸짓이었지만 나는 차마 다른 감상을 품을 겨를이 없었다.

"어쨌건, 이 몸이야말로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 몸의 이름을 알고 있었느냐? 어떻게 이 몸의 존재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냐?"

내가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말에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질문했다.

"네 이름이 뭐지?"

"에잉? 정말로 이상하구나. 이름을 모른다면 불러낼 수 없을 터인데...? 뭐, 상관없으려나."

소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몸은 선혈의 마녀, 에반젤린 데 아르미디아(Evangeline de Armedia)이니라!"

아.

나는 짧은 탄식밖에 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98화

'정말로 희한한 구성의 팀이군.'

아론 스팅레이가 데려온 아이들을 향해, 조슈아 패튼은 그런 평가를 내렸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에서 아론이 직접 선발한 아이들.

그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진 녀석들이라고 생각하고서 잔뜩 기대를 품었건만, 멤버들의 면면들을 살펴보니 왠지 이상했다.

하나같이 나사가 빠졌다고 해야 할까?

우선 첫째로 은발의 리더 여자애.

아이리 앨리스밸.

괴물들을 상대하는 데에 '방패'라는 특이한 무기를 고른 건 둘째 치고, 기묘할 정도로 감지되는 에너지 양이 적었다.

스캐너로 확인한 종합모듈 레벨은 기껏해야 10 내외일까? 어쩌면 그보다도 더 아래일지 모르겠다. 저 정도의 대체율로 대체 어떻게 트롤들을 상대하겠다고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둘째로 갈색 피부의 여자애.

레이나 알톤.

이 녀석은 너무 평범했다. 감지되는 종합모듈 레벨도 평범한 편이고, 대체율이나 몸에 밴 움직임 같은 것들 전부 딱 아카데미 1학년 수준인 듯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아론이 왜 뽑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셋째로 팀의 청일점.

사일런스.

어째서인지 LED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지라 캐릭터 개성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대체율은 나름대로 높아 보이고 실력도 괜찮은 듯한데, 패튼이 보기엔 포지션이 문제였다.

'암살자 스타일로 모듈링을 받은 것 같은데... 괜찮나?'

개인의 실력이야 괜찮다고 하더라도, 팀의 시너지를 고려하면 별로 좋지 못한 포지션이었다.

가뜩이나 전투원이 세 명밖에 없는 팀에서, 한 명이 은신 상태로 돌입해 버리면 나머지 두 명에게 부담이 쏠린다.

사실상 둘이서만 몰려드는 적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어째서 저런 식으로 팀 조합을 구성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네 번째는 긴 머리 여자애.

미유.

다행히도 이 여자애에 대한 소문은 좀 들어 봤다.

기술부 쪽에 조금 연이 있는지라, 그쪽을 통해 들은 소문으로는 엄청난 천재를 데려왔다나 뭐라나. 지금은 사라진 모듈 연구원장이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몸집은 왜소하고 외견도 다소 음침해 보이긴 하지만, 천재라고 하니까 뭐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마지막이 제일 큰 문제였다.

위자드용 전신 수트를 입은 젊은 여성.

시엘.

'저거,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생체 파츠를 많이 달고 있어서 처음에 스캔했을 때는 평범한 인간처럼 인식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묘한 위화감에 다시 제대로 확인해 보니, 그녀는 안드로이드가 분명했다. 심지어 비전투용.

'허. 찾아보니 보급형 가정부 안드로이드잖아?'

얼굴을 스캔해서 쇼핑몰에 검색해 보니 결과 수천 건이 판매가격 낮은 순으로 정렬되어 나왔다.

가격도 불과 이십만 크레딧 수준으로, 마음만 먹으면 자신도 당장 클릭 몇 번에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값쌌다. 배송비도 무료였고.

수천만 크레딧을 들여 위자드형 안드로이드를 데려왔다고 해도 놀랄 노 자인데, 메이드 안드로이드를 개조했다고? 과연 제대로 작동이나 할까?

'표정이나 언행이 풍부해 보이는 건 감정 확장팩을 설치한 걸까? 아니, 그보다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오류 개체.

지나치게 발달한 AI기술이 인간의 감정까지 흉내 내기 시작하여, 끝내는 본인이 인간이라고 믿기 시작한 이레귤러들이다.

'대체 왜 저런 걸...!?'

다른 팀원들은 그래도 사람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고 해도, 도저히 저 안드로이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 공장으로 보내서 폐기하고 새로운 물품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 요소에게, 대체 왜 위자드 기능까지 붙여 줘서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론 스팅레이, 죽다 살아와서 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뇌에 문제가 생겼던 걸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 패튼은 자신의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아론 스팅레이가 한 발짝 빠르게 생산 지역 탈환을 위해 혼자서 훌쩍 출발한 뒤, 그에 맞추어 스팅레이 특별반 멤버들도 서둘러 준비를 맞추고 출정했다.

전투원인 아이리와 사일런스, 레이나는 격벽이 열리자마자 빠른 속도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새, 생각보다 빠르잖아?'

사일런스와 레이나는 그렇다 치고, 대체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아이리가 상상 이상으로 빠른 몸놀림을 보였다.

원래는 느긋하게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구경할 생각이었건만, 예상치 못한 달음박질을 해야만 했다.

'대체율은 낮아도 퓨어스펙은 상당했던 모양이구나.'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관측되는 에너지량과 실제 능력이 저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과연 아론 이사장이 그녀를 뽑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내심 평가를 고치려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이 전투에 돌입하면서, 그는 한층 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무슨...!'

세 사람이 제일 처음 상대했던 [신비]는 '스파인 플로라'였다.

부들처럼 얇은 잎과 줄기 위에 축구공만 한 파충류 눈알이 달린 식물형 괴물이었는데, 제자리에서 아음속 탄환과 비슷한 속도로 가시를 쏘아내는 게 특징이었다.

세 사람은 포인트에 진입하자마자 갑자기 총알처럼 쏟아지는 가시 세례를 받아 내야만 했다. 돌입하기 전에 미리 내부 상황을 확인하지 않은 초보적인 실수 때문이었다.

다만 그 이후의 대처는 놀라웠다.

아이리는 가공할 만한 반사 신경으로 빠르게 방패를 펼쳤고, 나머지 두 사람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뒤로 몸을 숨겼다.

콰득, 콰드드드드득-!

방패를 뚫어 버릴 기세로 쏘아지는 수천 발의 가시들. 그럼에도 아이리가 든 방패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으며, 아이리 역시 그 힘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이리는 도리어 폭우처럼 쏟아지는 가시의 비를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쏟아지는 충격에 방패를 놓치거나 넘어질 만도 하건만, 특별한 모듈이라도 사용하는 것인지 그녀는 우직하게 전차처럼 공격을 받아 낼 뿐이었다.

그렇게 팀원들이 가시를 피할 만한 엄폐물까지 안전하게 옮겨 주는 데에 성공한 아이리는, 목청을 높여 지시했다.

"선배, 레이나!"

"[오케이.]"

사일런스는 곧장 모습을 숨겨 적진의 틈새로 파고들었고, 레이나 역시 모듈을 활성화했다.

"모듈 온라인, [미니건.]"

레이나의 몸 곳곳에서 금속으로 된 파츠들이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조립되어 한 자루의 개틀링식 기관총이 완성되었다.

이름과는 달리 20kg에 달하는 무게에 분당 4000발이라는 무식한 연사속도를 자랑하는 무기.

레이나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가방에서 촤르륵 탄띠를 뽑아내더니 미니건에 연결했다.

그 사이, 스파인 플로라들의 뒤편으로 파고든 사일런스는 손목에서 검을 뽑아 가장 후열에 있던 한 놈의 눈알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촤아아악!

체액을 흩뿌리며 한 놈이 쓰러지자, 아이리와 레이나를 향해 가시를 쏘아내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사일런스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다!]"

그때 사일런스는 일부러 은신을 풀었고, 괴식물들은 그를 향해 또다시 미친 듯이 가시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지지직!

식물들은 사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가시를 쏘아 댔기에, 같은 편이 쏜 가시에 죽는 놈들의 수도 상당했다.

"[지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리 높지는 않군.]"

그 사실을 알아낸 사일런스는 빠른 속도로 괴물들의 틈을 파고들어 괴식물들의 아군 사격을 유도했고, 중간 중간 칼을 휘둘러 추가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준비 완료! 벗어나세요!"

레이나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사일런스는 재빠르게 적들의 틈에서 벗어났다.

그가 사선에서 벗어나자마자, 레이나는 미니건의 총구를 괴물들에게 향했다.

"쏩니다!"

식물들의 눈알이 다시 레이나를 향하기 전, 그녀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분당 4000발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연사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촤르르르륵!

레이나는 천천히 총구의 방향을 돌렸고, 그에 따라 스파인 플로라들이 가루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몇 마리가 다시금 반격을 하려고 했으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손을 쓸 새도 없었다.

레이나는 마치 자동차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 내듯 공간에서 괴물들의 존재를 지워내 버렸다.

공장 내부를 잠식하고 있던 수백 그루의 괴식물들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그런 포화에도 운 좋게 살아남은 녀석들은 아이리와 사일런스가 각각 샷건과 권총을 이용하여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한 구역을 완전히 클리어한 다음, 아이리는 상황을 확인했다.

"레이나, 남은 탄약은?"

"절반 정도 썼어요. 한 번 정도는 더 싸울 수 있어요."

"그래도 보급을 받고 이동하자. 혹시 이번보다 강하고 많은 적을 만나면 탄약이 부족할 수 있으니까."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선배는 상태가 어때요?"

"[문제없어. 곧바로 전투 속행 가능하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동하죠. 시엘, 탄 보급이랑 뒷정리 부탁해. 이쪽 문도 좀 열어 주고."

아이리의 지시에 따라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는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윽고 시엘이 조종하는 수십 대의 드론들이 날아와 마나를 지우는 약물들을 구석구석 살포하고, 스파인 플로라들의 사체를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드론이 옮겨 온 여분 탄환을 가방에 다시금 정리해서 넣었고, 그동안 아이리와 사일런스는 주변을 경계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전부 끝나자 아이리는 팀원들을 이끌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슈아 패튼은 탄성을 내질렀다.

'허, 참. 대단한 녀석들이네.'

이래서 아카데미 아카데미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 진입하기 전에 충분히 내부 상황을 살피지 않은 것은 아쉬운 실수지만, 갑작스럽게 펼쳐진 전투에서는 말 그대로 깔끔했다.

아이리의 발 빠른 대처로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사일런스의 교란으로 적들의 시선을 끌고, 레이나의 넘쳐 나는 화력으로 싹 쓸어버리고.

이후는 미유가 만든 수십 대의 드론들을 시엘이 멋지게 조종하여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웬만한 팀들과 비교해도 그리 부족하지 않다는 느낌.

'...내가 생각을 잘못했던 걸지도.'

이 팀, 의외로 밸런스가 잘 맞다.

물론 여전히 한 자리가 더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선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르지.'

아직 적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스파인 플로라들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계화와 트롤 무리.

본격적인 싸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카데미 흑막 시점 99화

"...에반젤린이라고? 네가?"

"그러하니라!"

내 물음에 에반젤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녀는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 묻는 걸 보니, 역시 그대는 이 몸을 알고 있었구나. 다만 이 몸의 기억에는 그대가 없거늘, 그대는 어떻게 이 몸을 알게 되었는고?"

그야 소설에서 읽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고, 마땅히 생각나는 변명거리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감격스러움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다.

'에반젤린이 살아 있었다고!? 심지어 원작에서 나온 적 없는 어린 버전으로!?'

경사로세, 경사로세.

동네 사람들 다 불러다 놓고 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당장 해결하고 싶은 궁금증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알기로 에반젤린은 죽었을 텐데."

"마녀에게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뭐야.

나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네?

"음... 설명하긴 복잡하네만."

꼬마가 된 에반젤린은 열심히 손짓발짓을 더해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보는 '아라야'라는 남자에게 난데없이 습격당하여 목숨을 잃었던 것과, 심장과 마법을 빼앗긴 것.

흩어질 뻔했던 혼을 간신히 뭉쳐 '강'으로 뛰어들었던 것. 그 격류에 휩쓸려 소멸하지 않고 간신히 자신이라는 개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느니라. 물론 그곳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만."

깊은 저 아래에 있는 무의식의 흐름.

그 '강'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뒤섞여 형체도 없이 흐르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갖추고 뭉쳐져 태어나는 것이 [신비]라는 존재.

말하자면 한때 괴물이었거나, 괴물이 될 무언가가 뒤엉킨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그녀는 녹아 섞이길 거부하고 끝까지 버티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그대가 이 몸을 불러 주었기에 이 몸은 '에반젤린'이라는 자아를 오롯이 유지한 채 '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느니라."

"...."

"음? 그대여,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그야 제대로 이해 못 했으니까.

뭔가 이것저것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강이니 용광로니 하는 비유와 추상적인 개념만 잔뜩 늘어놓아서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

게다가 에반젤린 이 녀석은, 어려지면서 언어 능력과 기억력도 동시에 감퇴했는지 설명을 더럽게 못했다.

내가 아는 에반젤린은 굉장히 똑부러지는 멋진 여캐였는데.

"요컨대."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너는 에반젤린의 유령이란 거군."

"이이익! 그대는 내 말을 대체 뭘로 들었는가!"

화를 내기 시작하는 에반젤린.

"유령이란 혼과 백이 흩어지며 '백'만이 남아 나쁜 기운으로 뭉쳐진 악한 놈들이니라! 그런 저급한 것과 이 몸을 비교하지 말거라! 지금 이 몸은 그런 단순한 말로 설명을 끝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은 무척이나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섭... 섭...."

"섭섭?"

"아니, 그 뭐였더라? 아, 섭리! 섭리이니라! 이 몸이 어떻게든 부활하기 위해 남은 마력으로 얼마나 복잡하고도 세심한 마법을 사용하였는지 그대가 반이라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니!"

"딱히 너 역시 이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싶은 건 아니지 않나? 살아 있던 시절의 힘과 모습과 말투를 되찾고 싶은 게 아닌가?"

"헉. 서, 설마 이 몸의 말투가 이상한가...?"

에반젤린은 어째서인가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대고 차마 '그래'라고 대답할 정도로 내 마음은 튼튼하지 않았다.

"...아니."

"그,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어째서인가 안심하는 에반젤린.

내가 아는 에반젤린은 조금 더 정상적인 말투를 사용했었는데. 어려진 거야 마법적인 힘을 빼앗겨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왜 말투는 더 애늙은이 같아졌을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쨌건, 이 몸이 돌아갈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대의 운명을 이 몸에게 조금만 빌려 주면 된다."

"운명을 빌려준다?"

"그래, 본래 그대가 갖고 있던 천명. 이 몸이 그것을 뒤틀어 늘릴 테니, 그 늘어난 5할을 이 몸에게 넘겨주면 된다. 그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은행 계좌에 잠자고 있는 돈을 대신 투자해서 발생한 이익의 50%를 자신에게 수수료로 넘기라는 것인가?

나쁘지 않네.

아니, 저 말대로 되기만 하면 오히려 이득이지.

"그래, 승낙하지."

"거래 성립이다! 손금을 보여 주거라!"

내가 승낙하자마자, 에반젤린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유령인 줄 알았는데 물리력이 느껴져서 조금 놀랐다.

그녀는 마치 지도를 읽듯이 심혈을 기울여 손금을 살폈고,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어라...?"

"왜 그러지?"

"뭐, 뭔가 이상하구나. 그대는 이미 스스로 운명을 뒤틀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좋은 건가?"

"알 수 없다. 원래라면 그대는 몇 달 후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두 번이나 운명이 뒤틀렸고, 그대는 죽음의 손아귀를 비켜나갔다."

"...."

아마 원작대로라면 주인공과 싸우다가 죽었을 운명의 아론 스팅레이.

내가 그것을 거부하여 병을 고치고, 또 1부 4막에서 내게 부여된 역할을 거부하면서 운명이 바뀐 모양이다.

아마 그 덕에 수명이 늘어난 것 같으니 참으로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렇지 않은 듯 난감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떡하지? 이 몸이 이 이상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태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있기는 한데, 그게-."

"그럼 해라."

"-아픈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이 이상 그대에게 폐를 끼치기도. 엥?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해라. 신경 쓰지 않으니."

"그게 어떠한 방법인지도 이 몸은 아직 설명하지 아니하였다만?"

"상관없다. 그냥 해."

"어, 어째서?"

어째서는 무슨 어째서야.

그야 우선은 네가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꼬여 버린 스토리를 원래대로 돌려서 그나마 내가 풀어 나가기 쉽도록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포인트.

어째서인가 에반젤린을 만나고서도 업적 포인트가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내 추측으론 지금 에반젤린이 반쯤 '죽어 있는' 상태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 녀석이 진짜 에반젤린이 아닌데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생김새도 그렇고, 아까 제 입으로 먼저 '아라야'라는 이름을 내뱉은 것도 그렇고, 확률이 매우 낮을 것 같다.

애초에 정말로 속일 생각이었으면 원래의 에반젤린과 이렇게 동떨어진 행동거지와 말투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그런 논리적인 이유 따위는 전부 집어치우고,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죽어 버린 최애캐를 되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든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아마 전 세계의 오타쿠들에게 만국공통으로 다 통하는 얘기일 거다. 만약 자기의 와이푸(Waifu)를 살려내서 곁에 둘 수 있다고 하면, 어지간한 건 다 내달라고 해도 오케이 할걸.

그런고로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유는 알 필요 없다. 내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도록."

"...!"

내 말에 에반젤린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자, 잠깐만!"하고 뒤로 돌아선 자기의 볼을 찰싹찰싹 때린다.

이 녀석이 무슨 착각을 했는지는 그 표정만 보아도 뻔하다.

"그대여."

어떻게든 표정을 추스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에반젤린.

다만 이런 어두운 곳에서도 나는 그녀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는 것을 안구 카메라로 전부 관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몸은 마법과 함께 기억을 상당수 잃은 듯하구나. 아마 이 몸이 그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인 듯하다."

응, 아니란다.

그냥 만난 적이 없을 뿐.

하지만 딱히 정정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러는데, 호, 혹시 이전의 이 몸과 그대는 어떤 관계였는지 알려 줄 수 있는가? 어, 어쩌면 연인... 이었다든가."

"...."

그래, 라고 대답하면 참 일이 쉬울 텐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눈앞의 상대는 10살도 안 된 꼬맹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30대를 앞둔 남정네가 이런 애랑 전생의 연인 어쩌고 하면 인간으로서 어떨까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소꿉장난에 어울려 주고 있는 느낌인지라 전혀 진지하게 답을 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거짓말하다가 중간에 헛웃음 터질 거 같아.

"...말하고 싶지 않다만."

어떻게 답하는 게 좋을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아서 그렇게 답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에반젤린은 또다시 홀로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더니 이내 서글프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아아." 하고 탄식했다.

"그, 그래. 이 몸이 괜한 질문을 했구나. 상처를 헤집어서 미안하다."

"...."

아니, 잠깐. 상처?

뭐지? 왜 내가 전생의 에반젤린한테 차였던 것 같은 느낌이 됐지? 이 꼬맹이 녀석, 나를 짝사랑하던 여자가 죽어 슬퍼하던 남자라고 착각하는 게 분명하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는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꽁.

"아야! 왜 때리느냐! 좋아하는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어디에 있느냐!"

"계속 이상한 소리 할 때마다 한 대씩 때려 주마."

꽁.

"으아앙! 때리고 나서 말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

"알았다! 알았느니라! 입도 안 떼겠노라! 그냥 할 일만 하면 되지 않느냐!"

두 번의 체벌을 받고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에반젤린은 서둘러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왜 전생의 이 몸이 저 남자를 고르지 않았는지 알겠구나. 얼굴은 무척이나 잘생겼는데 너무 폭력적...."

"...."

"알겠다! 알겠으니까!"

조용히 노려보자, 헐레벌떡 마법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하는 에반젤린.

그녀는 짜리몽당한 팔을 뻗어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다른 팔은 자신의 가슴에 놓고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마법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점점 더 강해졌고, 나와 에반젤린을 중심으로 돌풍이 몰아쳤다.

내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이내 에반젤린의 심장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과정이 지속되기를 몇 분.

이윽고 바람이 가라앉고, 마법지팡이가 연기처럼 공기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에반젤린은 감았던 눈을 뜨고, 내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이제 되었다. 이것으로... 헉. 아, 아무것도 안 보인다!"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사라지며 실험샘플 창고는 다시금 컴컴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모듈이 있는 나와는 달리 에반젤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아론. 어디에 있느냐?"

어느 새인가 내 호칭이 바뀌었다.

뭐, 별로 중요하진 않겠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채 비밀실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나가는 길에 실험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아앙! 뭐, 뭐냐! 뭔가 무너졌다!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빨리! 빨리 뛰어야 한단 말이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실험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자니 겁이 났던 모양.

에반젤린은 내 품을 파고들었고, 나는 그걸 내버려 둔 채 실험실 폐쇄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실험실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구로 빠져나왔다. 빛이 비치자, 그제야 시력을 회복한 에반젤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대, 대체 뭐였던 거냐...?"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우리가 나온 실험실 입구를 두리번거린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금 불렀다.

"에반젤린."

"응? 왜 그러느냐?"

"아까 정확히 뭘 한 거지?"

"아까 말인가? 아론의 혼과 내 혼을 마법 지팡이의 힘을 빌려...."

"간단하게."

"가, 간단하게?"

내 요구에 에반젤린은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요컨대, 이 몸은 완전히 살아났다."

"아직 어린 모습이다만."

"그야 그게 아론한테 부담이 가장 적은 방법이었으니까! 전생의 모습을 완전히 찾으려면 그대의 목숨을 완전히 빼앗아도 모자라느니라!"

"과연."

죽이지 않은 건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에반젤린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또 있다!"

"또?"

"후후, 놀라지 말거라."

에반젤린은 대뜸 내 몸에 매달려 등 뒤로 넘어가더니, 이내 양어깨에 다리를 걸쳤다. 이른바 '목마'라는 자세를 취한 채, 내 머리를 통통 두드리며 외치기를.

"그대도 이제 마법을 쓸 수 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0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다름 아닌 내가?

맙소사.

이제 알로호모라(물리) 같은 야매 마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아무 자물쇠나 다 따고 다닐 수 있다는 거 아니냐. 좋아, 이제 앞으로 나는 락픽의 제왕이 되겠어.

그런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에반젤린은 재미있다는 듯이 내 머리 위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로구나! 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해도 이 몸이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마법이지?"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나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다만 아무리 사소한 카드라고 하더라도 손패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천지차이가 될 것이다.

어떻게 쓰는 것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체인 아바다 케다브라를 쓸 수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다. 게임에서 써 보니 아주 좋더만. 매직 히틀러가 되는 게 내 오랜 꿈이었어.

"하하, 벌써 몸이 근질거리나 모양이구나. 하지만 아직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달리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지. 일단 아론, 그대가 할 수 있는 걸 이 몸이 시험 삼아 보여 주... 려고 했는데 여긴 어디더냐?"

"우리 그룹 소유 콜로니다."

"콜로니? 주변에서 상당한 양의 마력이 느껴지는데, 혹시 [신비]를 키우는 장소인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지저분한...."

"아니, 괴물들이 멋대로 침공해 들어왔을 뿐이지. 나는 놈을 이 구역에서 몰아내고 있는 도중이었고."

"아하, 불처... 불... 뭐였지?"

"불청객."

"그래, 그거다! 불청객이라는 소리렸다! 그러면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상대로구나."

이윽고 에반젤린은 휘휘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장착한 묘듈이 그녀가 내뿜은 마나를 감지하고선 위기 신호를 울려댔다.

곧 에반젤린의 마나를 느끼고서 수많은 [신비]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숲고블린, 덩굴 플로라, 숲늑대, 나무그림자, 나무정령, 숲임프 등등 잡몹들이 대거로 출현했고, 에반젤린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표적들이 나타났구나."

"넌 마녀지 않나. 저런 것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 몸뚱이의 반 정도는 그대의 피와 영혼을 빌려서 만든 것이니라. 그러니 반쯤 인간이고, [신비]를 죽이는 것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게 당연하잖느냐."

"궤변이로군. 그냥 네가 괴물들을 싫어하는 것뿐 아닌가."

"후후, 들켰구나."

원래부터 에반젤린은 다른 마녀들에 비해 인간들을 좋아하고 괴물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캐릭터였다.

그러니 인간인 주인공하고도 거리낌 없이 동료 관계를 맺었지.

"뭐, 어쨌거나 잘 보고 있거라."

그렇게 말한 에반젤린은 괴물들이 달려들기도 전에 순식간에 술식을 구성하고 영창을 완료했다. 방대한 마력이 그녀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아론! 손을 뻗어라!"

다급하게 외치는 에반젤린.

그녀의 요구에 맞추어 내가 앞으로 손을 뻗는 순간.

화르르르르르륵-!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거대한 화염이 몰려드는 적들을 휩쓸어 버렸다.

불길에 휩싸인 괴물들은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주변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 버렸다.

"오...."

내, 내가 마법을 쓰다니...!

이 몸에 빙의한 이후로 어지간해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모듈을 사용하는 감각과는 전혀 달랐다. 에반젤린이 구축한 술식이 내 근육과 혈관 따위를 통과하며 나만의 색깔을 머금고, 마지막에 내 의지에 맞추어 발현하는 그 느낌은 상당히 신선했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에반젤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 머리를 통통 두드려댔다.

"어떠냐? 굉장하지? 멋지지? 역시 계약하기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얼른 이 몸을 칭찬해라!"

"그래, 잘 했다."

"으익! 좀 더 제대로 칭찬하거라!"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길 바라나?"

"바란다!"

"그럼 일단 내 어깨에서 내려오도록. 손이 안 닿는다."

"싫다! 이 상태로 칭찬해라!"

"...."

뭐지. 공을 돌려주기는 싫고 던져 주기는 바라는 강아지 같은 마인드인가.

하여간 바라는 것도 많아요.

지금의 대화로 확실하게 느꼈는데,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에반젤린과는 다소 동떨어진 존재인 듯했다.

분명 백금발에 적안이라는 외형적 특징이나, 마녀로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이나 행동거지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포인트가 안 들어오는 건가?'

단순히 어린아이가 되었다고만 하기에는 괴리감이 상당히 심했다.

원작의 에반젤린은 지금처럼 말괄량이 고양이 같은 느낌보다는 조금 더 우아한 공주님 같은 이미지의 캐릭터였었으니까.

'게다가 냉정하게 따져서 마법의 위력 자체는 대충 Lv.3에서 Lv.4의 통상모듈 수준이려나.'

냉정하게 효율만을 따지면 어린애 한 명 목에 둘러맨 채 다니는 것보다야, 그냥 화염방사기 모듈 하나 끼고 다니는 게 화력이나 효율적인 면에서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을 살려낸 것을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다.

그야 마법이잖아.

이런 식으로라도 마법을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들은 갖지 못하는 능력을 얻었다는 점에서 만족감 100%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 어어? 아론, 저길 봐라...."

어째서인가 갑자기 당황하는 소리를 내는 에반젤린.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트롤이군."

워낙에 가죽도 두껍고 재생력도 뛰어난 괴물이다 보니, 다른 [신비]들이 화염에 불타 죽을 때 혼자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뻣뻣한 털은 여전히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고, 새까맣게 그슬려 떨어져 나간 가죽 아래로 타오르다가 말았던 근육과 뼈가 보였다.

놈에게 상당히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단번에 목숨을 끊지 못한 탓에, 놈의 몸은 조금씩 재생하고 있었다.

새로이 자라난 새빨간 근육들이 불타 비어 버린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 말도 안 된다! 보통 트롤들은 이 정도의 마법까진 버티지 못한다! 주변에 이계화된 지점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 주변에 이계화된 것으로 의심되는 지점이 세 곳이 있다더군. 이곳의 환경도 영향을 받은 걸 보면 아마 이 근처에 중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만."

"어? 워, 원래 이런 인테리어가 아니었던 것이더냐."

아무래도 에반젤린은 공장 곳곳에 피어난 풀떼기나 곰팡이, 이끼 따위가 원래부터 이랬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이, 일단 물러나도록 하거라!"

"조금 전의 마법을 한 번 더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무, 무리다. 다시 한번 사용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느니라. 게다가 이계화가 시작됐다는 것은, 저놈만 처리한다고 된다는 게 아니라... 앗!"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짙은 갈색의 두꺼운 털가죽을 지닌 트롤들이 몇 마리 더 나타났다. 아무래도 동료들의 위험을 감지하고 나타난 듯했다.

"이, 이 숫자는 위험하다. 일단은 물러나서 작전을 다시 짜서 와야... 어어? 왜 앞으로 가는 것이냐!"

"잠자코 지켜봐라."

다시 한번 마법을 써서 처리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 한다니 아쉽긴 하다. 하지만 뭐, 비밀연구소도 찾았고, 에반젤린도 만났고, 마법도 써 봤으니 놀만큼 놀았다고 할 수 있겠지.

슬슬 다시 본업에 집중할 때였다.

"모듈 온라인, [구름거미]"

모듈을 활성화하고.

손가락을 튕기기까지.

단 1초면 충분했다.

따악.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트롤들을 향해 실을 쏘아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디얇은 수천 가닥의 실들은 순식간에 적들의 몸을 작은 고기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촤아아아아악-!

놈들의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던 것들은 내 손가락질 한 번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붉은 곤죽이 되어 버렸고, 나는 놈들이 만들어 낸 피 웅덩이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슬슬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에반젤린?"

"...."

"에반젤린."

"어? 네, 네?!"

갑자기 웬 존댓말.

"왜 대답이 없지."

"...아, 아무것도 아니느이에요."

뭐라는 거야.

"지금부터 더 위험한 곳으로 향할 생각이다. 별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

내 말에 따라 에반젤린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머리를 불끈 껴안았다. 솔직히 조금 귀찮아서 내려오라고 할까도 싶었지만, 옆에서 잘 따라오나 일일이 신경 쓰는 것도 귀찮으니.

예전 같았으면 아론의 에고 때문에 이런 상황을 절대 용납하지 못했겠지. 1부 4막을 클리어하고서 여러모로 제약이 사라진 덕분에 확실히 편해진 느낌이다.

나는 에반젤린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반젤린이 문득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아론...."

"왜 그러지?"

어딘가 묘하게 겁을 먹은 듯한 목소리.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대서 죄송해요...."

아무래도 나는 예절 주입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 * *

사이버 스페이스(Cyberspace).

가상의 전자공간.

시엘은 본래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였기에 자신이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딥다이브 포트'를 통해 의식을 완전히 사이버스페이스에 집어넣자,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와아아....'

시엘의 앞에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보안벽.

실제로는 물리적인 형질이 전혀 없는 코딩 뭉치. 거기에 벽이라는 이름과 개념을 붙인 것은 어디까지나 이용자들의 편의성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무척이나 높고 거대한 성채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엘. 이쪽 보안을 해제해 줘.]

아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시엘의 머릿속에 말을 거는 아이리의 모습이 그대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지시에 따라 보안벽의 허점을 찾기 시작했다.

벽을 뚫고 넘어가기 위해 이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녀는 곧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자연스레 자물쇠가 생겨났다.

'이래서 위자드가 필요한 거구나.'

이 '자물쇠'의 이미지는 그녀가 쌓아 온 해킹 관련 지식과 그것을 돕는 각종 모듈과 장치들이 결합되어 생겨난 것.

본래 해킹과 보안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허점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나 위자드는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기계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원래라면 코딩 덩어리와 눈싸움을 하면서 자판을 두드려서 풀어내야 할 문제를, 다른 감각으로 치환시켜 해결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시엘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던 빛나는 열쇠뭉치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갖고 있던 해킹모듈이 가상공간에서 이미지화된 것이었다.

그녀가 보안벽의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찾아내어 꽂아 넣고 돌리자, 그녀의 앞을 가로막던 거대한 성채가 사라지고 평범한 문이 생겨났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활기차게 돌아가던 연산장치가 해(解)를 구하고는 다시금 잠에 빠져든다.

복잡한 과정 탓에 피곤했지만, 그 이상으로 드는 묘한 만족감.

'저 어쩌면 정말로 재능이 있을지도요.'

왠지 중독될 것만 같은 감각에 저도 모르게 위로 솟구치는 뺨을 간신히 억누른다. 정말로, 억지로 끌려 들어와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계였지만, 이 작업만큼은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론 님에게 감사해야겠어요~'

만약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원작의 시엘 그대로 평범한 메이드로봇으로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테지.

그것을 초월하여 이런 능력을 얻게 된 것은 틀림없이 그의 지분이 크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엘은 즐거운 마음으로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혔다. 이런 식으로만 하면 분명 자신도 이 팀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그러던 그때.

"어, 어라...?"

시엘은 이변을 감지했다.

그녀가 열어젖힌 문 너머에.

알 수 없는 것이 숨 쉬고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1화

"잠깐! 더 들어가면 안 돼요!"

시엘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의 눈에는 검은 무언가가 방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 있는 존재가 아니며, 가상 공간 속에서 그녀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위, 위험해요...!'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 위자드로서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열어젖힌 문 안쪽으로 현실에 있는 동료들이 들어가게 된다면.

'틀림없이 안 좋은 일이 생겨요...!'

시엘은 안쪽에 있는 그 '무언가'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다시금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완전히 열어젖혀진 문은 그녀의 힘으로는 다시 닫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크르르르르르-!

안쪽에 있던 검은 형체가 조금 전의 그 동작으로 시엘의 존재를 눈치채고 말았다. 그것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시엘이 있는 방향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송이 끝난 후 TV 화면과 비슷한 형체를 갖고 있었다.

치직거리는 노이즈에게 물리적인 성질을 부여하여 뭉친 다음 붉은 전구 두 개를 눈처럼 박아 넣으면 저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

확실한 것은 그것이 시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새하얀 이를 번득이며 녹아내린 슬라임과 같은 움직임으로 시엘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간 당할 거예요...!'

시엘은 그것과 거리를 벌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까 전 문을 열 때와 같은 동작. 그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열쇠꾸러미가 이내 기다란 지팡이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 이길 수 있을까요...?'

문득 몰려오는 두려움.

자신은 프로가 아니다.

아직 위자드로서 초보자 단계를 막 밟아 나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반면 저것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이곳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저리도 무서운 모습으로 발현된 것은, 저 프로그램이 이쪽이 갖고 있는 지식과 연산 능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도망칠까?

딥다이브 포트 연결을 해제하고 일단은 밖으로 탈출하는 게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으리라.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고는 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 내에서의 자아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나 '뇌'라는 유기체 CPU를 가진 평범한 인간과 달리, 그녀의 전산코어는 이런 딥다이브 중에 입은 피해에 훨씬 더 취약하다.

물론 그만큼 일반적인 위자드보다 더 깊숙하게 연결되어, 할 수 있는 일의 다양성도 늘어나는 일종의 양날의 검 같은 조건이긴 했지만.

여하튼 그런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지금 싸우는 것은 너무나도 리스크가 컸다.

상대는 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데다가, 패배했다가는 자신의 AI코어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엘은 섣불리 도주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괴물 프로그램에게서 왠지 모를 '악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저걸 내버려두면 틀림없이 현실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킬 거예요.'

하다못해 저 프로그램의 제작자라든가, 목적이라든가, 능력이라든가, 현실 쪽에 있는 동료들이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정보라도 뜯어 나가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믿는 구석도 있었다. 그녀 본인은 허접한 초보 위자드일지라도, 그녀의 무기를 만들어 준 것은 세계관 최고의 기술자라는 점이었다.

'이거면 통할지도 몰라요.'

지팡이로 바뀐 열쇠 꾸러미.

그녀가 가진 각종 보조 연산장치와 해킹 모듈의 조합... 전문용어로 '덱(Deck)'을 시각화한 그것의 제작자는 다름 아닌 미유였다.

사이버스페이스 내에서 테크노 위자드가 가진 능력의 절반 정도는 '덱'의 구성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적응자들이 어떠한 모듈을 장착했느냐에 따라 전투 능력이 갈리는 것과 마찬가지.

'미유 님이 만들어 주신 이 덱이라면....'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리지는 못할지라도 저 괴물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고 필요한 정보를 뜯어내는 것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 싸우자.

도망치는 일은 간단하다. 현실에 있는 동료들에게 오롯이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한 발 물러선 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죠.'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무력이 되었든, 아니면 지식이 되었든.

자신은 그중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강제로 끌려왔고, 남들의 도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 전장에 직접 나서 '승리할' 기회를 얻었다.

이대로 겁쟁이처럼 첫 출정에서부터 도망친다면, 자신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수습생' 수준의 위자드에 머물며 남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지.

그건 싫다.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살아남으려면.

그 권리를 쟁취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최선을 다해 보죠.'

그렇게 마음먹음에 따라, 그녀의 보조 연산장치가 힘차게 가동을 시작한다.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가 다시 한번 변형하며 그녀에게 방어구를 입혔다.

커다란 고깔모자와 로브.

한쪽 어깨에 타고 있는 부엉이.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혹은 저기 [신비]들의 영역에서 괴물들과 거닐며 살아갈 법한 '마법사'의 복장. 어쩌면 그녀가 되기를 바랐던 '에반젤린'의 복장.

치지지지지직-!

그녀의 적의를 감지함에 따라 '괴물'의 노이즈가 심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고, 그 끝에서 빛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앗!"

혼신을 담은 기합과 함께, 그녀는 위자드로서의 첫 싸움을 시작했다.

* * *

"이 방에 들어가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시엘? 시엘!"

"[응답이 없군.]"

"신호가 약해진 걸까요?"

시엘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싸움을 시작한 것과 같은 시각, 특별반의 현장 전투원들은 다음 장소로 진입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엘이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그녀의 옆에 있을 미유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미유, 시엘이 답이 없는데 무슨 일이야?"

[아, 아무래도 적대적인 프로그램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오... 제가 외부에서 보조를 하고 있는데, 이건 좀... 만만치 않아요오....]

천하의 미유가 만만치 않다고 할 정도라면 대체 어떤 프로그램이란 말인가?

동료들은 경악하는 한편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죠? 우리 위자드가 이쪽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요."

"[하지만 작전 일정에 맞추려면 계속 나아가긴 해야 한다.]"

"이건 사실 스팅레이 이사장님이 저희를 훈련시키기 위해 마련한 자리잖아요. 괜히 무리하는 것보다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은 그분께 맡기는 게...."

"[이사장 놈한테 떠넘기자고? 난 싫다. 그 인간한테 가급적이면 빚을 늘리고 싶지 않아. 이런 것도 우리끼리 처리하지 못하면 대체 우릴 얼마나 만만하게 여길까.]"

"그건 결국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잖아요. 이건 실전이에요. 그런 치기로 위험에 발을 담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애초에 마스크 선배는 왜 그렇게 스팅레이 이사장님을 경계하시는 거예요?"

"[넌 몰라도 돼.]"

"둘 다 그만해."

레이나와 사일런스의 의견 충돌이 말다툼으로 번지기 전에 아이리가 그들을 제지했다.

어쨌거나 이 팀의 리더는 아이리였고, 그녀의 결정에 따라 팀은 움직일 것이다.

아이리는 출입문 너머를 자세히 살폈다.

시엘이 해킹을 통해 열어 준 통로는 전기가 끊겨 마치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시력 관련 모듈을 장착하지 않은 아이리에게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햇빛이 비쳤으나, 저 안쪽은 드론이 실시간으로 따라다니며 불을 밝혀 주지 않으면 싸우기도 어려울 것이다.

"레이나. 스캐너에 잡히는 건?"

"일단은 드론으로 확인해 봤을 때 마나 반응이 조금 있기는 한데, 그리 위협적인 수치는 아니에요. 당장 육안으로 보이는 건 없고요."

"선배. 혹시 은신 켜고 먼저 들어가서 상황 확인하고 돌아와 줄 수 있나요?"

"[상관은 없긴 한데, 그러면 한동안 클로킹 모듈은 못 쓰게 돼. 이 앞쪽만 지나면 마지막 지점이 나올 텐데, 괜찮겠어?]"

아이리는 고민에 빠졌다.

드론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무언가'를 경계하며 사일런스를 보내는 대가로, 그의 은신 능력을 봉인한 채로 마지막 전투를 펼쳐야 한다.

사실상 강력한 조커 카드 하나를 버리고 싸워야 하는 일이었기에, 선뜻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음...."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예감이 안 좋아서요."

현재 테크노 위자드인 시엘은 정체 모를 프로그램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곳은 스팅레이 소유 시설이니 아직 비활성화된 방어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 어쩌면 미유의 도움을 받고서도 처리하는 데에 애를 먹는 이유가 그것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사실 [신비]들과 싸우는 데에 있어 위자드의 역할은 크지 않다.

그들이 힘을 발하는 때는 '인간'을 상대로 싸울 때였고, 지금처럼 괴물 토벌이 목적인 작전에서는 길잡이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고로 보안 시스템 때문에 길이 완전히 막히거나 하지 않는 한, 시엘의 부재가 전황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아이리의 직감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위험하다.

뭔가 위험하다고.

"...아이리?"

"일단 수동으로 문을 닫죠. 위자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타이밍에 다시 움직일 거예요."

"[알겠다.]"

사일런스는 아이리의 결정이 영 못마땅한 듯했지만 일단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2년이나 후배일지라도 지금은 팀의 리더였기에.

그들은 다음 지점으로 향하는 문을 완력으로 다시 닫은 후, 시엘이 복귀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1시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그런 계산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던 찰나-

"...방금 느꼈어?"

"[뭔가 오고 있군.]"

"스캐너에도 반응이 있어요."

닫힌 문 너머로 느껴지는 강렬한 인기척. 그 수는 한둘이 아니었고, 세 사람은 황급히 문에서 거리를 벌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적의 종류는?]"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신호예요."

"다들 제 뒤로."

여차할 상황을 대비하여 아이리가 방패를 전개했고, 두 사람은 그녀의 뒤에 숨어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다음 순간-

쿠웅! 콰아앙! 콰지지직!

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가로막힌 벽을 내리쳤다. 미닫이문인지라 그냥 옆으로 밀면 열릴 텐데, 그 상대는 구태여 문을 날려 버렸다.

다만 몇 차례의 타격만으로 그 두꺼운 방호벽을 날려 버린 것을 보아 상당한 근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두운 복도 너머.

붉은색 빛들이 일렁인다.

"[여러 마리로군.]"

"트롤... 은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형태의 그림자.

이윽고 그것들이 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인간과 닮은 신체.

그러나 이질적인 질감을 갖고 있는 그것은 보안용 안드로이드 그룹이었다. 아무래도 보관소에 잠들어 있다가, 콜로니가 무너지면서 세 사람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깨어난 것 같았다.

...라는 시나리오였다면 좋으련만.

"대, 대체 저게 뭐야...?!"

그 안드로이드들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여기저기 팔과 다리를 비롯한 부품이 빠져 있다는 점이나, 비틀거리며 괴기스러운 동작을 취하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저들의 등에 붙어 있는 무언가.

거대한 검은색 살덩어리 같은 것들이 종양처럼 붙어서 꿈틀대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에 아이리가 긴장하며 방패를 몸에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면서 물었다.

"서, 선배. 저게 뭔지 알겠어요?"

"[저건....]"

평범한 [신비]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 장치를 최대한으로 가동하여 뇌에 담긴 데이터들을 빠르게 훑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사소한 데이터가 보조기억장치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되살아났다.

그래, 기억났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저런 비슷한 사례에 대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데이터에 따르면 저것은 틀림없이-

"[...마법이다.]"

"예...?"

"[마녀나 마법사가 있는 거야.]"

이 콜로니 어딘가에 말이야.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2화

"이제 좀 내려오는 게 어떤가?"

"싫다!"

에반젤린은 목마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좀처럼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한테 겁먹고 벌벌 떨었던 주제에,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적응한 듯했다.

하기야 [신비]들이 나타나고, 내가 손짓 한 번으로 쓸어버리는 과정이 대략 한 시간쯤 무의미하게 반복되었으니 슬슬 익숙해질 만도 했다.

아마 내가 자기를 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선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거겠지.

조금 전까지는 어색한 존댓말을 계속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아예 내 어깨 위가 자기 자리라도 되는 양, 그 위에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 댔다.

"아론, 아론, 아론!"

뭐가 그리 신난 건지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를 통통 두드리며 이름을 불러 대는 게 영락없는 이 나이대의 어린애였다.

"...."

"아론!"

"...또 뭐가 궁금한 거지."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예 양손으로 내 눈을 가려 버린다.

관심을 좀 달라는 거겠지. 나는 한숨과 함께 그 손을 치워 내며 물었고, 그녀는 키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

"또 쓸데없는 질문을 하려는구나."

"쓸데없는 질문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참으로 묘한 것이, 왠지 나로서도 이런 대화가 썩 싫지만은 않았다.

아마 도시에서 만난 인연들 대부분 나를 무서워하거나, 적대하거나, 존경하거나, 전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아론의 에고가 약해지면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외로움을 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걸까.

"또 무엇이 궁금한가."

"아론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 강한 것인가? 인간 중에서도 강자들은 많다지만 그대는 유달리 말도 안 되게 강하구나!"

그러면서 꺄르르 웃는 에반젤린.

역시 이 녀석의 웃음 포인트를 전혀 못 잡겠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거울 나이라서 그런가. 똥 얘기를 하면 틀림없이 자지러질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 이미지에 너무 맞지 않아 그만뒀다.

뭐, 그래도 분명한 건 우리 선혈의 마녀님께서는 계약 상대로 나를 고른 게 상당히 마음에 드신 듯했다.

아까 대충 설명을 듣자 하니 자기는 이제 계약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나 뭐라나.

안 그래도 약해진 상태인데 내가 약해서 본인이 지켜 주기까지 해야 한다면 그도 걱정스러웠겠지.

아마 지금 즐거워하는 이유 역시 그런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음? 그대는 골렘처럼 다른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그런 셈이다."

"오호라."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에반젤린. 그 이후로도 그녀는 쉴 새 없이 질문을 해 왔다.

내 이름의 뜻이라든가, 가족관계라든가, 집안이라든가, 그런 개인신상에 관련된 것들뿐만이 아니라, 폐쇄된 공장 지역에서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을 해 왔다.

'...어린애 상대가 이렇게 힘들 수가.'

계속되는 에반젤린의 질문 세례.

듣자 하니 부모들은 어린 자식의 '왜?'라는 질문에 PTSD가 생길 지경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 비슷한 무언가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슬슬 그에 지쳐 가려는 찰나, 문득 꾀를 하나 떠올렸다.

"너무 일방적인 대화로군. 앞으로 한 가지씩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는 게 어떤가?"

너무 일방적으로 내 정보를 넘겨주는 것도 그랬고, 에반젤린에게 궁금한 점도 많았다.

지금의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떤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또 그걸 내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뭐, 어린애 상대로 너무 까탈스럽게 군다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런 세상이니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다.

"음. 좋다! 무엇이 궁금하느냐?"

나이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곤 이때다 싶어서 원작 소설만 봐서는 알 수 없었던 설정들에 대해 물었다.

가령 '마녀의 기원'이라든가, '강'에 대해서. 혹은 아라야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그리고 에반젤린은 내 질문들에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아까 스스로 밝혔다시피 그녀의 기억은 군데군데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아서 내 의문들을 완벽하게 채워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떠드는 데에 열중해서 내게 질문할 차례도 잊고 열심히 손짓 발짓까지 섞어가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까 그리 질문을 던져 왔던 것도 궁금한 게 많다기보다는 그냥 재잘거리는 걸 좋아하기 때문인 듯했다. 수다쟁이구나.

그리하여 내가 에반젤린으로부터 새롭게 알아낸 유용한 정보 몇 가지.

그 첫 번째로는.

'아라야에게 기습을 당했던 것은 아카데미가 개강하기 이전 시점.'

어디서 어떻게 만났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인공 일행에 합류하기 이전 시점의 에반젤린의 취미는 인간세계와 괴물들의 영역을 몰래 오가는 것.

그 정도야 원작 소설을 읽어 본 녀석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E섹터에서 발품을 좀 팔면 그녀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정확한 시기였다.

정확히 언제쯤 에반젤린을 죽이고 힘을 빼앗아 '네크로맨싱'이라는 주인공의 기술을 습득했느냐. 그것을 알아내야 지금도 열심히 추적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녀석을 확실하게 덫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테니까.

'아라야는 내 추측보다도 조금 더 이른 시점에 마법을 손에 넣었다. 아마 그때 내게는 일부러 약한 수준의 기술만을 보여 줬던 거겠지.'

예상컨대 아마 지금쯤 아라야가 가진 '네크로맨싱'의 수준은 최대 2부 후반쯤의 주인공과 비견될 수준이 아닐까?

물론 이건 최악에 가까운 가정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금 경찰과 협력하여 벌이고 있는 아시타교 박멸 작전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작전을 재고해 봐야겠군.'

그리고 아라야에 대한 내 평가는 한층 더 낮아졌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했던 주제에, 알고 보니 빙의하자마자 에반젤린을 죽였다는 것 아닌가? 역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알아낸 사실.

'역시 얼마 전 아카데미에서 벌어졌던 환각 사건은 마법적인 공격이었다.'

아마 범인은 99% 확률로 아라야.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에반젤린의 추측으로는 아마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아카데미? 라는 곳에 있는 인간들을 죽일 셈이었다면 넓은 범위에 환각 마법을 흩뿌리는 게 아니라 저주를 걸었겠지."

들키지 않도록 시간을 들여 독기를 풀고, 어느 순간 확 터뜨려 버리면 학생 중 절반 이상은 죽일 수 있었으리라는 게 에반젤린의 의견.

"그대같이 강한 인간은 몰라도, 어중간한 녀석들은 전부 혼백이 분리될 것이다. 그러니 그자가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게야."

"그 다른 의도로 짐작 가는 것은?"

"글쎄. 잘 모르겠구나. 자기 능력이 통하나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건 아니겠지. 겨우 그것을 위해 내 시선을 끌 만한 짓을 했다? 나 여기 있으니 죽여 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역시 마법 전문가에게 물어도 그 정신 나간 녀석의 생각까지 읽어 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녀석의 부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에반젤린이 '강'에서 살아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마법사가 된 아라야를 죽이더라도 되살아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답은 NO였다.

"'강'으로 떨어진 자가 자신의 혼을 휩쓸리지 않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라. 몇 개월 만에 터득할 수 있는 술식이 아니지."

그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죽일 때마다 살아난다고 하면 그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

콧수염 배관공이 지닌 가장 무서운 능력 중 하나가 버섯만 먹으면 목숨이 무제한으로 늘어난다는 것 아닌가.

다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녀석은 네 마법을 빼앗아 간 게 아닌가?"

"아니다. 정확히는 이 몸이 지닌 권능을 빼앗아 간 것이지."

에반젤린은 비유하기를, 마녀들은 '강'에서 물을 긷는 자들이라고 했다.

마녀와 마법사들에겐 제각기 길을 수 있도록 허락된 물의 양이 정해져 있고, 아라야는 에반젤린의 권한을 빼앗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이 몸이 지녔던 지식과 기술을 완전히 빼앗지는 못한 게지. 스스로 터득할 수는 있겠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라."

"과연. 안심해도 된다는 건가."

"물론이니라. 다만 이 몸의 권한을 훔쳐 간 만큼, 그저 그런 수준의 숙... 숙... 뭐였더라?"

"숙련도."

"그래, 그저 그런 수준의 숙련도를 가진 다른 마법쟁이들에 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할 터. 너무 만만하게 보지는 말거라."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던 주제에 왜 그렇게 쉽게 녀석에게 당한 거냐.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기본적으로 순진한 천성 탓에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작정하고 속이려 드는 아라야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분명했다.

뭐, 어쨌건.

그렇게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맡은 구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괴물들을 처치했고, 이계화된 지점 두 곳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어지간한 중소도시 뺨치는 곳이라, 콜로니 전체에 남아 있는 [신비] 한 마리까지 샅샅이 찾아내어 없애려고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원래 문제가 되었던 트롤 무리들만 적당히 치워 주면 나머지는 이곳 보안팀이 알아서 작업을 넘겨받을 것이다.

천하의 수다쟁이 에반젤린일지라도 몇 시간을 연속해서 떠들다 보니 지쳤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조잘대는 게 끊겼다 싶었더니 내 머리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에반젤린이라는 생물형 마나 탐지기가 휴식에 돌입한 이상, 나는 다시 내 스캐너 모듈들을 이용하여 괴물들을 찾아내 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괴물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비명횡사하는 와중에도 에반젤린은 깨어날 기미도 없이 잘도 잤다.

'부디 머리에 침만 흘리지 마라.'

그렇게 얼추 공장 지역 청소작업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쉘터 쪽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그래, 나다."

[도련님. 급하게 보고드려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뭐지?"

[아카데미 쪽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

"...."

엊그제부터 아카데미 지도부에 대한 학생들의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냥 부글부글 끓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오늘 새로이 올라온 글 때문에 아예 불이 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카데미를 보이콧하자는 것이 그 글의 취지였습니다.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그 뜻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학원 측이랑 기업 측 반응은?"

[일단 글을 강제로 내리게 했지만, 오히려 그게 역효과가 난 듯합니다.]

오랜 기간 쌓여 왔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쉽게 잠재울 수는 없겠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 대기한다."

이런 분위기 자체는 내게 있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타이밍이 영 껄끄럽다. 아직 '안드로이드 반란'이라는 계획을 실행하기엔 준비가 다소 미흡한데, 지나치게 여론 쪽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폭발해 버리면 아이리를 영웅으로 만든다는 내 계획도 어긋나게 된다.'

일단은 애들을 데리고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현장에 진입한 세 사람과 통신이 끊겼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지점 근처에 있던 아이리, 사일런스, 레이나의 신호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공격을 받은 모양인데,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알겠다. 내가 가 보지."

또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연락하라는 지시를 남긴 후, 나는 그들이 있는 방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 좋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에 따라 내 발걸음 역시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던 그때.

"...아론."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에반젤린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부터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쪽이 아니다. 저쪽이다."

"무슨 의미지?"

"저쪽에 '우리'의 적이 있느니라."

에반젤린이 가리킨 방향은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일일이 돌아서 가기엔 다소 마음이 급했기에, 그냥 벽을 통째로 베어 버렸다.

서걱-!

[구름거미]를 이용하여 내 앞을 가로막던 벽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고, 단숨에 사무실 몇 개가 사라지며 길이 생겨났다.

"꽉 붙잡아라."

나는 에반젤린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 과정에서 나를 가로막는 벽들은 죄다 부숴 버렸고, 몇 초 만에 수백 미터를 주파하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런. 들켜 버리고 말았군요."

얼굴, 몸집, 옷차림.

전부 이전에 봤을 때와는 달랐지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라야였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3화

어째서 이곳에 아라야가 있는가.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얘기였다.

'그 망할 정크칩.'

아라야에게는 정크칩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사용한 사람을 자신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과 과학을 합쳐서 만들어 낸 아티팩트.

아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라야 역시, 원래는 이곳 V7 콜로니에서 근무하던 직원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

네크로맨싱과 정크칩의 융합.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무서운 발상이다.

정크칩은 사이버마약답게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퍼져 나가는 특성이 있었다. E섹터를 누비며 범죄로 연명하는 뒷골목 하류 인생부터, 엘리시움에서 살아가는 최상류 계급 특권층까지.

지난번 G20이라는 이벤트에서 운 좋게 그 존재를 눈치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갔더라면, 이미 이 도시는 아라야의 손아귀에 완전히 떨어졌을 것이다.

상상해 보라.

뒷골목의 양아치부터 기업의 간부는 물론, 정치계의 거물까지 제 입맛대로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그야말로 세상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아무리 사기적인 신체 능력과 재력을 갖진 아론 스팅레이라 할지라도, 뉴 발할라 시티 전부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을 테니까.

"또 튀어나왔군, 아라야."

"이런 모습임에도 곧장 소승을 알아보시다니? 역시 놀랍군요."

모습이 바뀌었음에도 아라야의 스님 같은 말투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말투나 사용하는 어휘는 조금 더 스님 같아졌다.

어쩌면 1부 4막 때의 나처럼 빙의한 캐릭터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에반젤린이 내게 속삭였다.

"아론, 저것은 꼭두각시이니라."

"안다."

이전에도 싸워 본 적이 있으니까.

"그보다 저걸 통해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할 수 없는가?"

"불가능하진 않으니라."

"정확히 대답하도록."

"...할 수는 있으나 어렵다."

"어렵더라도 해라."

"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녀석의 힘은 이 몸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말하던 중간에 에반젤린은 내 얼굴을 머리 위쪽에서 슬쩍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괜한 소릴 했구나. 한번 해 보겠다."

그때, 아라야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소승을 가엽게 여겨 이곳에서 물러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만 하지?"

"소승의 계획이 완성되기 직전이니까요. 정말이지, 아론 스팅레이. 당신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서 소승의 계획을 방해하는군요."

"계획, 계획이라."

생각해 보자.

놈의 계획은 대체 뭘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이 타이밍을 노려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단순히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아니, 그럴 리가.

저 녀석은 그만큼 멍청한 인간이 아니다. 도시 이곳저곳에 눈과 귀를 흩뿌려놓은 녀석이니만큼, 정보력만큼은 어쩌면 나보다 위일지도 모른다.

스팅레이 그룹의 추적을 피하는 와중에도 나름대로 힘을 키운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를 정면 대결로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추측할 수 있는 단서들을 머릿속에서 최대한 조합해 본다.

콜로니와 이계화.

특별반 학생들과의 통신 두절.

아카데미, 조이 베넷 이사장, 학생회.

수많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좀처럼 놈의 목적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녀석의 모습을 살폈다. 지금 그는 평범한 스팅레이 보안요원을 인형으로 쓰고 있었고, 별다른 특별한 요소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서 있는 공간은 이계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듯했다.

본래는 완성된 제품을 출하하기 전에 모아 놓는 창고였으나, 지금은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바짝 메말라 갈라진 흙바닥과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먼지. 곳곳에 서 있는 황갈색의 바위들.

'어쩌면....'

그 광경에 그럴듯한 가설이 떠오름과 동시에, 내 모듈이 [마나이상 감지]라는 경고 사인을 보냈다.

나는 [구름거미]를 활성화하여 놈의 공격에 대비하려 했으나, 그 순간 에반젤린이 난데없이 팔을 휘둘렀다.

콰드드드드드득-!

나를 둘러싼 공간이 깨지며 유리처럼 무너져 내렸다. 에반젤린은 날 선 목소리로 아라야를 향해 뇌까렸다.

"네놈. 어딜 되지도 않는 수작질이냐!"

아라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잘은 몰라도 나름 비장의 한 수였는데, 에반젤린의 손에 허무하게 막힌 것이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그는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에반젤린은 내게 다시 속삭였다.

"아론, 조심하거라. 놈은 조금 전에 우릴 이곳에 가두려고 했다."

"정확히."

"강제로 마나를 끌어모아 이쪽과 저편의 결속을 강하게 만들려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간단히 말해 1단계에 불과했던 이계화 단계를 의도적으로 끌어 올리려는 것이라는 게 에반젤린의 설명.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 것은 알았으나, 그런 방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원작 작가놈.

그런 게 가능하단 설정이었으면 왜 원작에서 그런 내용을 안 넣은 거냐. 틀림없이 개꿀잼 에피소드가 탄생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라야의 입가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귀찮은 애완동물을 얻으셨군요."

"누, 누구더러 애완동물이라는 것이냐! 이 몸의 힘을 빼앗아 간 도적놈 주제에 어딜 그것을 자신의 물건인 것마냥 다루며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

"그 어리석은 머리로는 이 몸이 누구인지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더냐!"

"서, 설마...!"

계속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아라야의 표정이 마침내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선 다시금 인자한 웃음을 머금었다.

"...살다 보니 이런 연이 다 있군요. 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녀를 되살리신 건지요?"

"열심히 상상해 보도록."

"역시 그리 대답하시는군요."

아라야의 목소리에 불만이 묻어 나왔다.

"다소 너무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뭐가 말이지?"

"당신 말입니다. 모든 것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그 욕심 말입니다. 욕망이란 번뇌의 불길로 일렁거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정크칩을 유통해서 도시를 삼키려고 했던 녀석이 할 말인가?"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제가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당신과 달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시작한 제가, 삶을 보전하기 위해 벌였던 사투의 결과물인 셈이죠."

아라야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에반젤린은 내게 아라야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놈의 본체를 찾는 일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반면 당신은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주제에 또 모든 것을 제 손아귀 안에만 두려고 하고 있죠. 저라고 이런 과격한 방법이 좋아서 택하진 않았습니다."

"과연. 아시타교에서는 궤변론을 열심히 가르치는 모양이로군."

"그리 뒤틀린 시선으로는 모든 것이 뒤틀려 보이기 마련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부디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욕심이라."

나는 그 말을 비웃었다.

"아무래도 너는 내가 아이리를 비롯한 녀석들을 독차지했던 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로군. 공헌도를 벌어야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아 안달이 났던 건가?"

공헌도.

그 말을 읊는 순간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저 녀석도 빙의자이니 나와 마찬가지로 공헌도를 벌어야 특전을 활용할 수가 있다.

"아아, 과연. 이제야 알겠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공헌도가 바로 네 목적이었군."

아라야 역시 2부가 시작되려면 학생회 설립이라는 이벤트가 필수요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자인 그로서는 학생회 설립과정에 기여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조이 베넷 학원장을 하수인으로 부릴 수는 있으나, 아카데미의 학원장은 어디까지나 바지사장.

기업들의 반대를 뚫고 학생회 설립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능했다.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

황태자, 아론 스팅레이라면.

"그래서 나를 이용하려 했던 거겠지."

나 역시 학생회 설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아라야는 일시적으로 아군 역할을 자처했다.

조이 베넷을 이용하여 내 영상을 퍼뜨리고, 커뮤니티를 통해 불만 여론을 부추겨서 학생회 설립 요구의 목소리가 커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충분한 공헌도를 쌓지 못할 테고, 내게 대부분의 공헌도를 빼앗길 거라 여겼겠지."

고로 그는 타이밍을 어긋나게 할 계획이었다.

본래 내가 아카데미 내부에서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학생회를 설립하고 아이리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그는 조금 더 이른 타이밍에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의 불만 여론을 터뜨려 학생회 설립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를 위한 가장 좋은 타이밍.

그것은 내가 이곳 V7 콜로니 탈환을 위해 아카데미를 비웠을 때였다.

"너는 내가 혼자가 되는 타이밍을 이용하여 특별반 아이들을 감염시키려 했던 걸 테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콜로니 탈환 임무에만 집중할 동안, 그는 학생회 설립과 공헌도를 빼앗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참으로 재미있군."

"...아론 스팅레이."

"그런 표정 짓지 말도록. 나 역시 알고 있다. 너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것을."

내가 우연히 G20에서 불량 청소년들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들이 우연히 정크칩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우연히 이곳에서 에반젤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곳에 숨어서 몰래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아라야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마도 나의 패배였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나와 같은 시간에, 같은 세계로 와 버렸는데."

"오만은 죄악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그건 기독교 쪽 죄악 아니었던가? 네놈은 승려이지 않나. 뭐, 아무래도 좋을 문제지만."

나는 놈을 향해 한껏 비웃어 주었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녀석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득도라도 한 인간처럼, 편안한 얼굴로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왜 세상 만물을 자신의 손 안에만 담으려 하십니까. 왜 자신만이 절대적인 강자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왜 자신의 어리석은 시선으로만 세상을 판별하려 하십니까."

그러면서 양손을 펼쳤다.

그의 주변에서 음산한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에반젤린이 소리쳤다.

"됐다! 놈의 본체를 찾아냈느니라!"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 늦장을 부린 듯하지만, 그것이 제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아, 아론!"

"이제 죽여도 되는 건가?"

"서, 서둘러라! 놈이 뭔가 위험한 걸 사용하려고 한다!"

에반젤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허나 아라야는 소용없다는 듯 웃었다.

"늦었습니다, 아론 스팅레이."

그를 감싸고 있던 기운이 단숨에 폭발한다. 공기가 울부짖듯 요동치고, 지면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의 형상도 괴기하게 뒤틀리며-

"뭐라는 거냐."

"컥!?"

다음 순간.

나는 제자리에서 검을 뽑아 가볍게 휘둘렀다.

Lv.5 신비모듈 [테크블레이드]의 본모습. 이른바 '테크블레이드 진(眞)'. 부정형의 칼날로 전방의 모든 것을 베어 낸 후, 나는 다시 모듈을 비활성화했다.

치이이이이익-!

내 몸의 냉각장치 모듈이 활성화되며 급격히 치솟았던 체온을 낮추기 시작했다.

스르륵.

몇 초 동안의 정적 후.

내 앞의 모든 것이 반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라야의 상반신 역시 반으로 잘려 쓰러졌다.

"이, 이런 바보 같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라야의 꼭두각시는 목숨을 잃었고, 에반젤린은 그 광경을 반쯤 입을 벌리고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

"왜 그러지."

"...…."

"무슨 말이라도 해 보도록."

그제야 에반젤린이 입을 연다.

"사...."

"사?"

"사, 살려 주시옵소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에반젤린.

아무래도 나는 우리 꼬마 마녀를 또 겁먹게 만든 모양이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4화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에반젤린을 완전히 울려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저 멀리 도망쳤다.

내가 근처에 다가가려고만 해도 울음을 더 크게 터뜨리는 통에, 나는 주변 뒷정리는 고사하고 그녀를 쫓아가서 달래는 데에만 대충 5분 정도의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만 울어라."

"히이이잉...."

"뚝."

"...뚝."

간신히 에반젤린을 진정시키고 나서 한숨을 쉬고 있자니, 그녀가 갑자기 양팔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했으나,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내 어깨 쪽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너 방금 나 무섭다고 도망쳤잖아.

하여간 애들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녀를 다시금 내 어깨 위에 앉혔고, 그 뒤에야 제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아까 놈은 소환마법을 쓰려 했다."

"소환마법이라."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신비]란 모두 '강'에서 형태가 없이 뒤엉켜 흐르고 있다가, 의식 혹은 의지라 불리는 것에 따라 형태를 갖추어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딱히 그런 설명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굳이 열심히 설명해 주는 애를 무안하게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조용히 경청했다.

"아무래도 아라야, 그놈은 이 몸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큰 힘과 지식을 얻은 듯하였다. 놈이 전개했던 술식은 틀림없이 상위종... 그 비슷한 것을 불러내는 문양이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마녀인 에반젤린에겐 뭔가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리 좋은 안구 스캐너를 끼고 있어도 평범한 인간은 볼 수 없는 게 있나 보군.

"상위종이라 함은?"

"술식이 도중에 끊기는 바람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느니라. 다만 일반적으로 마녀들이 애용하는 소환대상은 악마나 정령 쪽이지."

"그럼 상위정령이나 상위악마를 소환하려던 것을 내가 막았다는 거로군."

"그래, 그대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되느니라."

에반젤린은 나름대로 최고의 칭찬을 한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지금보다도 약할 때 타이탄을 쓰러뜨린 몸이거든. 그보다는 고작 상위 악마나 정령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고, '그 아라야'가 생각했다는 게 다소 의심스럽다.

과연 정말로 그것뿐이었을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은데.

조금 고민하고 있자니 에반젤린이 추가설명을 해 주었다.

"다만 그대가 쓰러뜨린 것은 어디까지나 '인형'에 불과한 존재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인형으로 부린다는 것부터 놀라 자빠질 지경인데, 인형으로 그 정도 수준의 마법을 구현하려 했다니...."

글쎄. 그게 대단한 건가?

뭐, 절대적인 기준으로야 대단한 기술이긴 하겠지만, 원작에서 주인공이 습득했던 능력들을 알고 있는 입장으로선 역시나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녀석의 본체는 조금 전에 그대가 쓰러뜨린 인형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와 싸울 때는 더 조심해야 하느니라."

"알겠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말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과연 아라야가 정말로 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원작의 주인공은 '네크로맨서'라는 컨셉에 맞추어 소환마법보다는 특별한 칩을 이용하여 죽인 괴물들을 되살리는 식의 마법을 주로 구사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 정도로는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나를 위협할 수 없다.

아라야의 그 자신감을 보자면, 아마 원작 소설을 읽은 자들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 특별한 무기를 찾은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게 추론을 이어 나가던 도중.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나는 마리아에게 연락을 넣어 다시 한번 상황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리아는 내 연락을 받자마자 조금 다급해진 목소리로 내게 보고했다.

[지금 막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아카데미 쪽에 무슨 일이 터졌나?"

[예? 아, 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설명하기를, 갑작스레 아카데미 내부에 나타난 괴물들 때문에 학원 전체가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어찌 된 일인지 보안시스템이 에러를 일으켜 아카데미 외부로의 출입이 봉쇄되었으며, 학생들은 내부에 갇힌 상태.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식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 버렸고, 현재 아카데미 지도부와 후원기업들은 학생들을 구해 낼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라고.

"아직 아무런 대책도 없는 건가?"

[네, 외부 방어시스템 때문에 구호 인력들이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변명이로군."

[네, 그렇습니다.]

그 정도 방어시스템 따위야 장로급 위자드를 몇 명 고용하거나 아니면 미사일 몇 방 먹여서 통째로 날려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돈' 문제 때문이겠지.

외부 방어시스템이 망가지면 그만큼 손해라고 생각하는 학원 지도부나, 그와 결탁한 후원 기업들이 개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과감하게 돌파하질 못하고 있는 거다.

후원하는 학생들의 목숨과 방어시스템을 새로 설치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 두 가치를 같은 선상에 놓고 저울질하는 것이 뉴 발할라 시티에서는 미덕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련님?]

"이쪽 상황 정리는 얼추 끝났다. 30분 내로 특별반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는 끊겼다.

아마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라는 것은 아라야가 풀어 놓은 것들일 테지. 보아하니 녀석도 내 '안드로이드 반란'과 비슷한 시나리오를 저 나름대로 구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은 내 발을 이곳에 묶어 놓은 채로 사건을 일으키고, 어떤 식으로든 학생회 설립 공헌도를 빨아먹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내버려 둘까 보냐.'

빙의자 아라야.

녀석이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만큼.

이번에는 내가 그 계획을 빼앗아 줄 차례였다.

* * *

"하아... 하아...!"

시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빛의 지팡이는 서서히 색이 바래고 있었다.

반면 그녀가 맞서고 있는 검은 괴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넘치는 탐욕으로 공간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시엘은 지팡이를 휘둘러 코드로 이루어진 마법 주문을 쏘아냈다. 순식간에 날아간 불덩이가 괴물의 안면을 강타했고, 괴물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뿐.

일순 노이즈로 이루어진 괴물의 몸체가 큼지막하게 깎여 나가는 듯했으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자라난다.

시엘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강력한 번개가 그녀의 지팡이로부터 흘러나와 괴물의 몸을 관통했다.

괴물의 보안 취약점에 적중한 전류는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내며 괴물의 몸체를 녹였다. 허나 이번에도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듯 다시금 자라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실시간으로 코드를 수정하고 있어요!"

프로그램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실시간으로 진화하며 약점을 보완해 나가는 모습은, 그녀가 지금까지 연습 상대로 삼아왔던 그 어떤 프로그램과도 달랐다.

한 번 통하지 않은 공격은 다시 써 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 이상 같은 방법은 연산능력의 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코어를 최대출력으로 가동하여 새로운 공격수단을 생성해 냈다.

그 신호를 알아챈 미유는 그녀가 구상한 코드를 기반으로 수정하여 더욱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내어 전달한다.

[이, 이걸 써 보세요오!]

현실의 미유가 키보드의 엔터키를 누름과 동시에 시엘의 손에 새로운 무기가 생겨났다.

이번에는 소총 모양.

분명 강력한 것은 맞지만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무기였다. 시엘은 상대에게 총구를 겨누어 보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생각대로 공격이 실행되질 않았다.

그 사이.

치이이익! 치이이이이이이익-!

괴물이 일렁거리는 촉수를 휘둘렀다.

시엘이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할 때마다, 놈의 촉수는 데이터로 이루어진 바닥을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지면은 산산이 깨지고 부서져 1비트짜리 쓰레기 데이터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튀어댔다.

지면을 구성하던 정보 곳곳이 괴수의 공격으로 망가지자, 이내 전장의 공간정보 자체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윽...!"

붕괴의 조짐.

기둥과 천장이 흔들리고 굉음이 반복되었다. 마치 지옥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었다.

'여, 여기서 빠져나가야...!'

시엘은 데이터 공간이 완전히 붕괴하기 전에 서둘러서 문을 열고 다른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뒤늦게 무기를 구성한 코드 내용을 확인하곤 사용법을 깨달았다.

개머리판에 어깨를 견착.

노리쇠 후퇴, 전진, 조정간 연발.

가늠쇠와 가늠좌와 눈의 위치를 일직선으로 맞추고 일순 숨을 참는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타다다다다다다-!

쏘아진 것은 탄환의 형태와도 같은 컴퓨터 바이러스.

탄환의 내용물과 효과가 조금씩 다른 것은 코드를 즉석에서 손본 미유의 천재성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리라.

순식간에 날아간 탄환들은, 열려 있던 문을 통해 뒤따라오던 프로그램의 몸체를 강타했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착탄과 동시에 괴물의 형체가 크게 일그러진다. 마치 소이탄에 맞은 것처럼, 총에 맞은 부위 곳곳이 불이 붙었다.

놈이 내지르는 괴성으로 미루어 보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해요오!]

"그럼 어쩌죠?"

[놈은 평범한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정확한 건 데이터를 더 분석해 봐야 알겠지만, 무언가 '일반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낸 놈이 아니에요오!]

"그렇다면...."

[더 새롭고 강한 게 필요해요!]

그래, 이 정도만으로 놈을 쓰러뜨릴 수 있었으면 진즉에 이겼을 것이다.

시엘은 놈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새로운 무기(코드)를 구상했다.

그 구상안을 확인한 미유의 손을 거쳐, 다시 한번 무기가 강화된다. 이윽고 시엘이 처음에 구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물이 그녀의 손에 구현된다.

"요, 요술봉?!"

알라의 요술봉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요술봉이었다. 대충 30cm 정도 되는 플라스틱 손잡이에 양쪽에는 천사 날개, 머리 부분에는 왕관과 하트가 매달려 있었다.

'대체 코드를 어떤 식으로 구성했기에 이딴 이미지로 구현되는 건가요?!'

미유의 센스가 심히 의심되는 디자인이었다. 이걸 들고 주문을 외우면 당장이라도 마법소녀로 변신할 것만 같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분해해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코드를 일일이 뜯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조금 전에 괴물에게 먹인 바이러스 탄환들이 효과를 잃으면, 지금 이것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놈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한 방 먹여 주어야 했다.

물론 대체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엘은 요술봉을 일단 익숙한 방식으로 휘두르고 보았다.

그러자 요술봉의 끝부분 하트가 열리더니 손바닥만 한 새빨간 하트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흘러나왔다.

"...."

이걸로 저걸 쓰러뜨리라고?

제정신인가? 아니면 장난치는 건가?

지금이라도 딥다이브에서 빠져나가 미유의 멱살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그사이에 발사된 하트는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며 날다가 이내 괴물의 근처까지 도착했다.

괴물 역시 그 공격이 같잖게 느껴졌는지 붉은 두 개의 눈동자로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 삼켰네요...."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러고선 움직임을 멈춘 채 요술봉을 든 시엘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라고는 없는 얼굴에서 '이딴 것도 공격이라고 하냐?'라는 생각이 읽힌다면 착각일까?

"가, 갑자기 싸우기 싫어지는데요...."

[시엘! 정신 차려요오!]

전의가 팍팍 깎이기 시작하던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괴물의 몸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TNT를 잔뜩 모은 듯 강렬한 폭발이었고, 그 충격으로 괴물의 일렁거리던 몸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꺄아아아악!"

그 검은 노이즈 데이터 쪼가리는 시엘의 몸에도 튀었다. 피하려 했지만, 피하지 못하고 타르 같은 걸 폭삭 뒤집어쓴 시엘은 우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왜, 왜 시엘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미유가 데이터 클리너를 작동시켜 사방팔방으로 튄 괴물의 사체를 지워 주었다. 시엘의 몸도 단숨에 말끔하게 변했고,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히, 힘든 상대였어요...."

[시엘, 시엘. 이거 보세요오.]

"미유 님. 시엘,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그럴 때가 아니에요오.]

미유의 채근에 시엘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보고서 뭉치가 생겨났다.

"이건 뭐죠?"

[아까 그 프로그램을 처리하면서 흘러나온 데이터들을 짜집기한 거예요오. 꽤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더라구요오....]

그 많은 작업을 벌써 끝냈다니.

하여간 천재들이란.

시엘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보고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건...."

[이, 이제 어떻게 하죠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미유.

시엘은 그녀를 대신하여 답했다.

"어서 빨리 아론 님에게 알려야겠군요."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5화

시엘과 미유가 괴물과 한창 사투를 벌이던 그 시각.

작전 종료 포인트를 앞두고 새로운 종류의 적들과 조우한 특별반 전투원 세 사람은 힘겨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제길, 끝이 없잖아!]"

사일런스의 불평대로였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안드로이드들은, 어두컴컴한 복도 너머에서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본래 보안용으로 설계된 기체였던 탓인지, 보통의 안드로이드와 다르게 그 강도가 매우 튼튼했다.

동급생 중에서도 근력이 강한 축에 속하는 아이리와 사일런스의 힘으로도 단번에 부서뜨리지 못할 정도. 온 힘을 실어 무기를 휘둘러야 간신히 부서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부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머리를 부숴도 놈들은 머리 없는 귀신처럼 양팔을 앞으로 뻗고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팔을 자르면 발차기로, 다리를 망가뜨리면 팔로 가까이 기어 와선 손끝으로 할퀴어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것 좀 보세요!"

"저게 무슨...."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전신을 부숴놓자, 안드로이드의 등에 붙어 있던 검은 종양 덩어리 같은 게 꿈틀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그것은 망가지지 않은 자투리 부품들을 다른 기체들로부터 긁어모아 새로운 기체를 만들어 냈다.

분명 안드로이드 모델이 달라서 호환이 안 되는 파츠였음에도 움직일 수만 있으면 상관없는 듯했다.

그것은 호환되지 않는 팔과 몸체 부품을 잇기 위해, 스스로 접착제가 되어 달라붙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키메라형 안드로이드는 삐그덕삐그덕 엉성한 몸놀림으로 다시금 공격해 왔다.

물론 그런 기체는 멀쩡한 것들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약하긴 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찔러 들어오곤 했기에 큰 위협이 되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적들의 공세에 세 사람은 점점 지쳐 갔다.

레이나의 미니건은 나름 탄약을 아껴 썼지만 무기의 특성상 오래지 않아 둔기로 전락해 버렸다.

사일런스 역시 권총탄은 전부 소진해 버렸고, 남은 단검만으로 싸움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슬슬 날이 빠지면서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나마 세 사람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은 아이리였다.

그녀 역시 산탄총 탄환을 전부 써 버리긴 했으나, 적어도 그녀가 들고 있던 방패는 그 정도 휘두른다고 해서 망가질 정도로 약하진 않았으니까.

"흐아아앗!"

방패를 있는 힘껏 휘둘러 정면의 로봇을 부숴 버린 그녀는, 제자리에서 높이 도약하여 포위에서 벗어났다.

"모듈 온라인! [천근추]!"

그녀는 점프한 그대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발을 굴러 모듈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으으으으윽!"

무리를 한 탓일까.

체내 과부하율이 급격히 오른 듯, 몸이 뜨거워졌다. 피부가 안쪽에서 익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출력을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조금, 조금만 더...!'

지면에서 그들에게 다가오던 수많은 폭주 안드로이드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이리가 [천근추]를 통해 발생시킨 인력이, 그것들을 그녀가 있는 천장 쪽으로 띄우고 있는 것이었다.

"흐아아압!"

아이리는 한계까지 힘을 쏟아부어 안드로이드들을 뭉친 후, 순간적으로 인력의 방향을 조절하여 놈들을 강하게 밀쳐 버렸다.

로봇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공이 공장의 벽면과 부딪치며 와르르 깨진다. 그 충격으로 상당수의 녀석들이 망가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이스!]"

"와아아!"

다른 팀원 두 사람이 쾌재를 불렀다.

아이리는 인력을 해제하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힘이 빠져 버린 탓에 착지할 때 살짝 비틀거리긴 했으나 크게 문제는 없었다.

여전히 적들은 많이 남아 있었기에 아이리는 다시금 방패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레이나, 문은 아직이야?"

"거의 다 열렸어요!"

세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무리한 싸움을 이어 가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저 안드로이드들이 나타나자마자 어째서인가 그들이 지나쳐 온 전자식 출입구들이 닫혀 버렸기 때문.

그 탓에 레이나는 탄약을 소모한 뒤 둔기로 전락한 미니건을 이용해서 출입문을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것이 열릴 기미가 보였다.

이제 정말로 조금이었다.

"이 정도면 될 거 같아요! 다 같이 부숴요!"

문의 상태를 확인한 아이리는 작전을 바꾸어 셋이서 함께 문을 부수기로 했다.

안드로이드들이 다시금 정비하고 달려들기 전에 문을 열고 자신들이 들어왔던 지점으로 후퇴할 요량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세 사람이 합심하여 문을 있는 힘껏 두들기자, 이내 굳게 잠겼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젠장, 드디어!]"

"다들 어서 후ㅌ... 잠깐!"

간신히 열린 문 너머로 도망치려는 찰나, 그쪽에서 기묘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리는 재빠른 반사 신경으로 그것을 캐치해 냈고, 앞서 뛰어나가려는 레이나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콰아아앙-!

강렬한 충격이 그녀가 내민 방패를 덮쳤다.

"크으으윽...!"

이를 악문다.

저려오는 팔에 힘을 싣고, 어떻게든 방패를 불끈 잡아 쥐었다. 애써 충격을 흘려냈지만, 그 반동으로 5미터나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아...."

그 너머에서 다가오는 존재를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분명 후방을 클리어하고 이곳에 왔을 텐데, 어째서인가 트롤의 무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조금 전의 충격은 아마 트롤이 휘두른 주먹이리라.

운 좋게 놈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으나, 이걸로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탈출구가 막혀 버리고 만 것이다.

'어떡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탈출구는 막혔다.

후방 지원팀과 연락도 끊겼다.

적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고.

자신들은 이미 지쳤다.

막막한 상황 속.

아이리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독한 무력감이 몸을 지배하고, 시야가 어두워진다.

삐이이이이!

이명이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후회스러운 과거만을 곱씹으며 패배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경험이.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손의 이미지가 그녀를 덮친다. 허나 그 순간, 그 환상 옆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무어라 외치는 선배와 동급생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이야.'

다시는 그때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지 않겠다. 오빠는 죽었다.

목 놓아 그 이름만을 부르면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결말 따위는 사양이었다.

참으로 우습게도, 전혀 원치 않았던 '리더'라는 자리가 그녀의 전신에 미약하게나마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다시금 방패를 거머쥔 손에 힘을 싣는다.

'싸운다.'

싸워야만 한다.

'싸운다...!'

싸워 살아남아야만 한다.

방법은?

그딴 건 모른다.

싸운다고 한들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보람찼는지는 모르겠지만, 폴른에서의 악착같았던 삶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어 온 목숨줄을 순순히 포기하는 것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여기서 버팁니다!"

아론이 올 거다.

그녀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없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대를 걸어 볼 수 있는 것은 그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사내가 자신들을 구하러 와 주는 것뿐.

'데리고 왔으면 책임을 지라고요!'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녀의 자신감에 감화된 것인지, 사일런스와 레이나 역시 마지막 기운을 짜내듯 다시 한번 전투 자세를 다잡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이리 스스로 되찾은 희망에 화답하듯, 누군가가 세 사람의 곁으로 스르륵 다가왔다.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겠지요."

광학미채 위장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다름 아닌 V7 콜로니의 보안책임자, 조슈아 패튼.

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 아저씨가 여기 어떻게...?"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지요."

돼도 않는 변명이었다.

아마 계속 자신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솔직히 그 속내가 의심쩍기도 하고, 왜 이제야 나오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기도 했지만, 어쨌건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아저씨, 본부 쪽에 통신 되시나요?"

"안 됩니다. 저도 끊겼어요. 하지만 아마 저쪽에서도 저희한테 이상이 생긴 걸 감지했을 테니, 곧 지원이 올 겁니다."

"다행이다...!"

"그리고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소장님이라 부르십쇼."

그러면서 그는 모듈을 전개했다.

"모듈 온라인, [패스티스트 건]"

순식간에 그의 양쪽 허리춤에서 튀어나온 두 자루의 리볼버 권총.

그는 양손으로 그것을 가볍게 낚아채며 마치 서부극에 나오는 카우보이와 비슷한 사격자세를 취했다. 일명 '아킴보'.

"빠앙."

가벼운 추임새와 동시에 두 자루의 권총이 불을 뿜는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앙-!

그가 쏘아낸 총탄이 트롤들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어지간한 소총탄도 막아 내는 두꺼운 가죽과 뼈가, 그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뚫린 것이다.

아이리는 눈을 빛냈다.

'평범한 권총이 아니구나!'

아마도 신비모듈이겠지.

뇌에 타격을 입자 제아무리 튼튼한 트롤일지라도 휘청거리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뇌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 탓에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뒤쪽은 제가 맡을 테니 로봇들을!"

"알겠어요!"

아이리와 사일런스는 다시금 안드로이드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레이나 역시 미니건을 해머처럼 휘두르며 다가오는 적들을 분쇄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아이리는 하도 방패를 휘둘러 댄 탓에 팔에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일런스의 단검은 기어코 부러졌고, 레이나의 미니건 역시 하도 휘둘러서 아예 총열이 완전히 구부러져 버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싸움을 이어 나갔다. 다가오는 적들을 밀어내고, 부수고, 깨뜨리기를 하염없이 반복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고, 잘 묶어 두었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산발이 되었다. 흘러내린 땀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따가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싸운다.

싸우고, 또 싸운다.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그런 의문을 품는 것조차 사치스럽다.

뇌를 굴리는 데에 사용하는 한 줌의 에너지조차 몸을 움직이는 것에 사용한다.

시간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이윽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할 때.

"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결국 지원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털썩. 털썩. 털썩.

부수고 부숴도 끝없이 움직이던 로봇들이 어느 순간 작동을 멈추었다.

놈들의 몸에 붙어 있던 검은 종양이 회색빛 석회암처럼 변해 버렸고, 그에 따라 폭주하던 안드로이드들도 작동을 멈추었다.

또한 트롤들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결국 도망치기 시작했다. 원래 임무대로라면 저것들도 쫓아가서 없애 버려야 하겠지만, 그럴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 살았어요...!"

레이나가 오랫동안 참아 온 숨을 토해 내듯 외쳤고, 그제야 다른 이들도 실이 끊긴 인형처럼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지,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하아... 하아...."

"[우리 리더는 대답도 못할 정도로 힘든가 보네.]"

긴장이 풀렸는지 사일런스가 피식 웃었고, 조슈아 패튼 역시 껄껄거리며 대화에 참가했다.

"여러분은 대단한 학생들이었군요. 어째서 아론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 당신들을 뽑았는지 이해가 갑니다."

"[소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뇨. 전 마지막에 숟가락만 얹은 것뿐이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치켜세워 주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저 멀리 트롤이 도망갔던 통로 쪽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끼에에에엑! 끼에에에엑!

무언가가 썰려 나가는 소리와 비명.

그 직후 잠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구둣발 소리가 또각또각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발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론 스팅레이.

그를 보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타났다는 건 사실상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어째서인가 그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는 여자아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아하게만 여길 뿐,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스팅레이 이사장님!"

"[왜 이제 오는 거냐고...!]"

"너무 늦었잖아요...!"

기껏 구하러 왔는데 싸움은 끝나 있고 학생들은 자신을 향한 불만을 터뜨려댔다. 그 상황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아론은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늦은 것 같지만...."

그것도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말이다.

"다들 열심히 싸웠군. 수고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