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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 85화

전술교전부 1학년, 레이나 알톤.

그녀는 입학한 이래로 한 번도 와 볼 기회가 없었던 트리니티 아카데미 빌딩 249층에 첫 발걸음을 내디디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여기인가.

이곳이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물론, 이 도시를 지배하는 '실세'들이 있는 곳이.

평범한 학생의 신분으로는 찾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공간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레이나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다만 그와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불안감도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 249층을 찾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계기는 오늘 오전.

그녀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레이나 알톤 양이십니까?

-네. 저 맞는데요?

-스팅레이 재단에서 나왔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스팅레이라니?

이 도시의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세력이 막강한 메가코프가 아니던가?

장담하건대 이곳 아카데미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 중에 스팅레이의 장학생으로 선발되고 싶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미 다른 기업의 장학생으로 선발된 녀석들조차!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누구나 뉴 발할라 시티 최중심부 A섹터, 시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팅레이 빌딩에서 일하는 게 목표가 아니겠는가.

레이나 알톤 역시 그런 휘황찬란한 성공기를 꿈꾸는 평범한 학생 중 하나였기에, 자신을 찾은 이 사람이 스팅레이 재단 소속임을 밝혔을 때 온갖 장밋빛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녀는 미친 듯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상대에게 물었다.

-제, 제, 제, 제가...!

-진정하세요.

-그, 그럼 제가 스팅레이 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된 건가요? 저를 영입하러 오신 거 맞겠죠? 그쵸?

허나 재단 직원의 반응은 다소 미묘했다. 그는 머쓱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좀 애매하군요.

-네? 애매하다뇨?

-자세한 내용은 지시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요?

-저는 그저 레이나 알톤 양에게 이렇게 전달하라고만 지시받았습니다. 249층에 있는 스팅레이 사무실로 오후 5시 30분까지 방문해 주시면 됩니다. 아마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자기는 말단 직원에 불과하다는 듯 그렇게만 전달하고 떠나가는 스팅레이 직원.

하지만 그런 시큰둥한 태도가 오히려 레이나의 심장을 더 뛰게 만들었다.

그녀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올해 복귀한 스팅레이의 황태자.

그가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에 사무실을 차리고 학생들 영입에 불을 올리고 있다던가. 이전에는 없었던 스팅레이 특별장학생 제도도 그가 만든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리도 특별장학생이었지?

어쩌면.

너무 김칫국을 마시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정말 어쩌면... 자신도 특별 장학생에 선발되어 아이리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리는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그녀가 낯을 가리는 성격 때문이 아니겠는가.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얼굴을 자주 마주치다 보면 정도 들고, 우정도 싹트고, 우정은 점점 깊어져서.

-이히. 이히히히....

그녀의 머릿속 장밋빛... 아니, 백합빛 풍경은 더더욱 화려하고 낭만 넘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시간에 맞춰 스팅레이 재단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다.

"시, 실례합니다."

"어서 오세요, 레이나 알톤 양."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누군가가 그녀를 맞이했다. 가지런히 단정한 검은 머리칼을 지닌 동양계 미인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앗! 네!"

레이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사무실 가장 깊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반 사무직 직원들의 업무공간과는 조금 분리된 장소에 성벽처럼 세워진 문 앞에서 멈추었다.

"도련님. 알톤 양이 왔습니다."

[들여보내라.]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자연스레 문이 열렸다.

레이나는 조심스레 안쪽으로 발을 들여 놓았고, 그곳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깔끔한 무채색으로 통일한 사무실.

소파와 가구. 인테리어 용품.

공간을 차지한 요소들 하나하나가 고급스럽고 우아하지 않은 게 없었다. 비싼 물건을 알아보는 능력은 없었지만, 그 압도적인 가치가 내뿜는 박력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창가 쪽에 있는 책상에.

'그'가 있었다.

"...!"

검은 남자.

그렇게 표현해야 옳으리라.

말끔한 검은색 고급 정장 차림.

그와 어울리는 윤기 도는 흑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눈썹. 듬직한 어깨.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맹수를 닮은 듯한 황금색 눈동자.

마주했을 뿐인데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싶어지는 눈빛.

황실의 일원에 걸맞은 박력을 지닌 미남이었다.

다만 미남을 좋아하는 레이나로서도 그를 보면서 심장이 콩닥거린다느니, 얼굴에 열이 오른다느니 하지는 않았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며 예의를 표했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고, 그동안 잠자고 있던 유전자가 살아나서 그녀에게 일갈한 것처럼.

"레, 레이나 알톤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무,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이사장님."

"오느라 수고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그 미성은 듣는 순간 뱃속 깊은 곳을 울려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한마디의 인사.

한 번의 눈 마주침.

그것만으로도 레이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자는 타인의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내장까지 사무치는 경외감에 레이나의 고개가 다시금 아래로 향했다.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식은땀 한 방울 한 방울을 느끼면서,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어, 어떻게 스팅레이 장학생들은 이런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 거지?'

DNA 단위부터 이 사람과는 같은 눈높이에서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지경인데. 대체 어떻게 아이리 같은 애들은 아론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속으로 감탄하는 순간.

"이쪽으로 다가오도록."

"ㄴ, 네!"

아론의 부름에 레이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혹여나 조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기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무사히 아론의 책상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왕의 앞에 무릎 꿇은 평민처럼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아론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 알톤."

아론이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전술교전부 1학년 신입생. 중간고사 성적은 학년 158위. 애매하군."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 거지?"

아론의 물음에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후회되기 시작했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스팅레이 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황태자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론 수업은 상위권. 실기 수업은 하위권. 교우관계는 좋음. 본인이 나서기보다는 맞장구쳐주는 걸 좋아한다라.... 우리 측 스카우터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 본인이 느끼기엔 어떻지?"

"그, 그것이...."

"뭐,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지. 긴장 풀도록."

"네?"

아론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는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책상에 내려놓고는,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레이나에게 물었다. 그 미소 덕분일까, 그녀 역시 조금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이리 앨리스밸을 알겠지?"

"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좋아하게 됐지?"

"...!"

한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 남자가 그 사실까지 알고 있다니.

"딱히 질책할 생각은 없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지. 다른 학생들은 녀석의 출신 때문에 멀리하는 모양이던데."

"네?"

"긴장 풀고 대답해 보도록."

새하얘진 머리를 어떻게든 추슬렀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다.

"...꼬, 꼭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는 않다?"

"네. 아이리의 출신 때문에 싫어하는 애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어요. 딱히 그 아이가 누군가를 먼저 해코지한 것도 아니고, 선입견과는 달리 굉장히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애들이 알아가고 있고요."

"그런가."

"어, 얼굴도 무척 예쁘고요.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반할 정도로... 사실 남자 애들 중에서는 티를 안 내서 그렇지 관심 있어 하는 애들도 조금씩 생기고 있을 걸요?"

빠득.

순간 그의 손에 쥐고 있던 펜이 가루가 되었다.

레이나는 놀라서 흠칫했고, 아론은 자연스레 사과했다.

"놀라게 했군. 사과하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계속해 보도록."

"아, 네. 그러니까...."

그녀는 머뭇거리며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아론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이리를 어떻게 생각하지? 왜 좋아하게 된 거지?"

직설적인 질문에 레이나는 망설이다가 답했다.

"머, 멋있잖아요!"

"멋있다?"

"네. 처음에는 뭐라 하지? 뭔가 무서운 이미지였는데, 그 타이탄 사건 이후로 갑자기 어른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다른 애들이 뭐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가볍게 무시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게 되게 성숙해 보이고 또...."

긴장이 풀린 탓일까.

레이나의 입이 바빠졌다.

"저는 주변에 좀 맞춰 주는 경향이 있거든요. 누가 뭐라든 휩쓸리는 성향이라고 할까. 그런데 아이리는 그런 것 없이 누가 뭐라든 홀로 우뚝 서 있잖아요."

"음."

"그게 저는 멋있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출신 상관없이 조금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말을 걸 기회를 엿보면서 관찰?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서."

"그렇군."

아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물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건가?"

"...!"

아이리와 관련되면 불행해진다는 소문.

벌써 그것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

대체 이 황태자라는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인지, 무서울 정도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딱히 그걸 질책할 생각은 없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문제지."

죄를 지은 느낌이 들어 레이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지만 아론은 팔짱을 낀 채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확히 네 목적은 뭐지? 아이리와 연인 관계가 되고 싶나? 하지만 고백은 이미 거절당한 걸로 아는데, 그 외의 목적이 있나?"

"그, 그건...."

레이나는 더듬더듬 답했다.

"그 애를 대놓고 괴롭히는 분위기가 사라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심심할 때마다 걔한테 시비를 거는 애들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려다 보니."

"헛소문을 퍼뜨려서 대놓고 건들지는 못하게 만든 건가? 그러면 어쨌든 공개적으로는 조용할 테니? 과연... 재미있군."

아론의 표정은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살폈고, 레이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가 다음 대사를 내뱉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레이나 알톤. 제안을 하나 하지."

"제, 제안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론의 고개가 끄덕여졌고.

이내 놀라운 정보가 튀어나왔다.

"나는 아이리를 학생회장으로 만들 생각이다. 네가 도와줄 수 있겠나?"

아카데미 흑막 시점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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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1부 4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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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4막이 끝나고서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2부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2부 1막은 학생회장 선거니까.'

아론 스팅레이의 죽음 이후, 아카데미의 권력 구도는 심하게 요동치게 된다.

학생 연쇄살인의 진범이 아론 스팅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업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과 불신이 커지고 자신들에 대한 처우에도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 불만이 격하게 터져 나왔고, 그로 인해 타협하게 된 것이 학생회 제도. 그리고 그 학생회는 2부 1막의 주요 무대가 된다. 주인공 셰이드 웰즈가 학생회장 선거에 뛰어들면서 벌어지는 내용.

다만 문제는.

'원작과 달리 1부가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끝나 버리고 말았으니, 학생회가 생길 계기도 사라졌지.'

그러면 어떡하나?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냅둘까?

뭐, 원작 1부가 끝나는 시점이 지금과는 대략 6개월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내 판단은 달랐다.

'이건 기회다.'

학생회는 사라져 버린 주인공의 역할을 '아이리 앨리스밸'이 확실하게 이어받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테니까.

근데 학생회가 없다고?

그럼 직접 만들지, 뭐.

스팅레이의 힘이라면, 적당한 명분과 시기만 잡아 학생회 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다.

아예 없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자취를 감춘 제도를 부활시킬 뿐이니.

* * *

"조만간 학생회 제도를 부활시킬 예정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리가 학생회장이 되길 바라고 있지."

아이리를 학생회장으로 만든다!

그런 내 장엄한 계획에도 레이나의 반응은 미묘했다.

"...학생회 말인가요?"

레이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생각이 말이 안 된다고 여기거나 반대한다기보다는, 그냥 이해를 못 한 느낌이었다.

'뭐, 이게 당연한 반응이려나.'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학생회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옛날에 사라졌다.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학생의 권익을 위한 조직이라니?

그딴 걸 우리 도시의 귀족, 기업 재단들께서 좋게 보실 리가.

그들에게 있어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그냥 고급 인력 뽑아내는 해처리 같은 곳일뿐이다. 으딜 감히 라바 따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고 그래? 위쪽의 명령에나 따르라는 생각.

당장 스팅레이 재단의 이름만 봐도, 정식 명칭이 '인적자원개발 재단'이 아닌가. 무려 아카데미 학생들의 지원을 위한 곳인데 말이다.

이놈의 세계가 정상적인 인권 관념을 달고 있는 곳이었다면 '스팅레이 교육재단' 같은 간판을 붙여놨었겠지.

재차 말하지만 기업에게 학생들은 회사를 굴리기 위한 '자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학생회라는 이름을 들어도 잘 와닿지 않는 거겠지.'

레이나의 협조를 끌어내려면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해 주는 게 좋으리라. 하지만 대놓고 떠들어 대는 것도 좀 그러니, 어느 정도 포장을 해야 한다.

"학생회는 학생들로 이뤄진 학원 내 자치조직이다. 학생 본인들이 겪는 문제점이나 건의 사항을 취합하고 학원 측에 전달하여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대표적인 역할이지."

다른 곳의 학생회 같았으면 운영정책 수립에 기여한다든가, 정기적으로 이벤트 같은 걸 열어서 학생 간의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그런 일까지 바라기엔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너무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내 설명을 들은 레이나의 표정은 한층 더 알 수 없다는 듯이 변했다.

"학생들의 의견을 모은다고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다."

이미 소속 기업에 따라 흩어지고 뭉쳐서 아득바득 싸우는 분위기인데, 학생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조직이라니 말이 안 된다고 느끼는 거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내게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이대로라면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하질 않고, 그렇게 되면 포인트를 벌 구석이 사라지는데 어쩌겠는가.

힘을 대부분 되찾기는 했지만, 여기에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학생회를 설립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애들이 학생회의 중추가 되도록 구성해야지.'

하지만 대놓고 이런 생각을 레이나 앞에서 떠들 수도 없었기에, 나는 미리 준비해 왔던 다른 구실을 읊었다.

"중간고사를 비롯한 정기고사에서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적인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의 퍼포먼스가 도리어 떨어지고 있다는 의견이 있다."

"네. 그렇기는 해요. 저번 시험만 하더라도 서로 칼부림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의 분위기였으니까요."

"이미 났다."

"네?"

"과학 기술부 2학년에서 터진 사고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모양이군."

"어머나...."

보통 가장 상황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게 1학년이다. 학기 초에는 전체적으로 잘 지내다가 갑자기 확 나뉘는 첫 시기니까.

그 1학년이 올해는 조용했는데, 정작 2학년에서 문제가 터졌다.

진짜로 성적에 눈이 멀어서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1등이었는데!"하고 칼로 푹 찔렀다나 뭐라나.

'싱'이라고 했던가?

예전에 미유와 모듈 만들기 대결에서 패배했던 그 녀석이 피해자였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히 병원에서 복귀했다.

시험성적이 다 발표되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던지라, 우리 쪽 실무자들이 이 건으로 조금 바빴더랬다.

'진짜 얘네한테는 아카데미가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정글인 셈이지.'

이런 걸 보면 기업들이랑 학원 측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분위기를 차차 개선해 가는 게 당연할 텐데,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답게 기업들은 "어쩔. 내 알 바 아님."하면서 외면하고 있다.

뭐, 포인트와는 별개로 나 역시 이런 아카데미의 고질적인 문제는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고 있다. 우리 애들 칼 맞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해야지.

"그래서 학생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분위기 반전을 노려볼 계획이다."

"어느 기업 장학생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학생'이라는 카테고리로 전 학년을 묶어서 동료애를 조성해 보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정확하다."

"그리고 아이리를 그 중심에 놓으실 계획이신 거군요. 폴른 출신의 학생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건 나름대로의 상징성이 있으니까요."

"잘 아는군."

"음...."

레이나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이사장님의 의도는 잘 알겠어요. 다만... 그게... 이사장님 앞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해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상관없다. 말해 보도록."

"아이리는 '왕따'잖아요...."

"...."

한순간 심장이 저릿해졌다.

우리 새끼가 왕따라니!

아니, 뭐 당연히 파악하고 있던 사실이기는 한데, 같은 교실에 있는 학생의 입으로 직설적인 단어가 나오니 더 충격이라고 할까.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있던 한 톨의 기대마저 박살 났다는 느낌이다.

"아이리에게 반감을 품은 애는 꽤 많거든요.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그 애가 학생회장이 되기에는 명망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 무, 물론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말씀드리는 거라...."

자기가 얘기해 놓고도 너무 적나라하다고 생각했는지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하지만 나는 딱히 그 의견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네 말대로 폴른 출신을 학생회장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 건 지나친 기대지."

"그, 그렇죠...."

"하지만 네가 있잖나."

"제, 제가요?"

레이나 알톤.

원작에선 일회용 개그 캐릭터로 묻히고 말았지만, 나는 그녀의 능력을 고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개인주의와 경쟁주의가 팽배한 아카데미의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학생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여론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건 꽤 유용한 능력이다.

'원작에서도 그랬지.'

워낙 짧게 치고 지나가는 개그성 에피소드였던지라 그다지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레이나가 주인공의 마음을 사겠다고 보여 줬던 모습을 일일이 뜯어보면 장난 아니다.

도시락도 만들어 와서 먹여 주고, 유용한 정보를 들고 와서 알려 주기도 하고, 주인공이 유리해질 수 있도록 여론을 조성해 주기도 하고.

그런고로.

"나는 네가 아이리의 참모가 되어 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차, 참모... 옆자리...!"

어어, 얘 눈빛 왜 이래.

정신 차려, 이 크싸레야.

순간 내가 우리 새끼 옆에 늑대를 풀어 놓은 게 아닐까 후회스러워졌다.

하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도 없는 게, '아이리를 출신으로 차별하지 않는 애'라고만 제한사항을 걸어도 후보가 확 줄어든다.

거기다 '아이리의 부족한 인맥이나 사교성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애'라는 조건이 들어가면 더더욱 줄어들고.

가령 미유?

본인이 대인기피증인데 참모는 무슨.

시엘?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학생회에 가나.

사일런스?

의외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적임이 따로 있다. 학생회와 상관없는 곳에서 굴릴 예정이다.

그런고로 이런저런 요소를 고려해 봤을 때, 당장은 레이나가 적격자다. 본인부터가 아이리를 좋아하니 믿을 만하겠지.

"히... 히히… 옆자리…."

믿을 만... 하겠지...?

제발 후회하지 않게 해 주렴.

"크흠."

"앗, 죄송합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제안이 마음에 든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하겠나?"

"저야 아이리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얼마든지 굴려 주세요. 최대한 열심히 할 테니까요."

아까의 회의적인 생각은 어디 갔는지, 머릿속이 온통 꽃밭뿐인 듯한 표정. 나는 흐뭇함 반, 걱정 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근데 역시 걱정되는 건 어떻게 아이리를 학생회장으로 만드느냐는 부분이에요. 회장 선출방식이 무엇인지가 관건일 것 같은데요."

"학생선거를 치른다."

투표야말로 민주주의의 꽃 아니겠는가.

공식적인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회장이라면, 어지간한 불만들은 깡그리 잠재울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여론을 뒤집는 데에 한계가 있을 거예요. 설령 이사장님이 힘을 쓰신다고 해도, 그러면 역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 같고요."

"음."

공감하는 바였다.

나는 새롭게 생겨난 학생회라는 조직이 '스팅레이'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조직이 되기를 바란다.

실제로야 어쨌든, 적어도 겉보기에는 학생들의 자주성을 충분히 존중해 주는 모양새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억지로 학생회 설립을 밀어붙이면 그림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굳이 아이리가 아닌 다른 녀석을 등용하더라도 학생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고, 다른 후원기업들도 문제를 제기해 올 테지.

하지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네가 할 일은 아이리가 학생회장이 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만 일을 해내면 내 이름을 걸고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지."

그렇게 말하자 레이나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만 주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이만 돌아가 보도록."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나를 돌려보냈고, 마침내 혼자가 된 후에 다시금 생각을 정리했다.

레이나의 말마따나 현재로선 투표를 한다고 해도 아이리가 당선될 확률은 희박하다.

기껏 학생회를 설립해 봤자, 다른 누군가가 학생회장이 되어서 내가 그린 그림을 엎을 뿐이다.

'그러니 순서를 뒤집어야겠지.'

아이리가 학생회장이 되어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해 낸 아이리가 영웅이 되어 학생회장으로 추대받을 수 있도록.

스윽.

나는 저 서랍 속 깊은 곳에 숨어 있을 '리버레이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1부 3막 '안드로이드 반란'은 흐지부지 지나가고 말았지만, 아직 충분히 쓸 만한 카드로 남아 있다.

킹메이커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87화

우선 학생회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학생회장으로 아이리를 세운다.

그런 목표가 정해지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학생회가 '짜잔'하고 튀어나올 리도 없었다.

아무리 내가 황태자라 불리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아카데미 내부 정책을 마음대로 뜯어고치고, 조직을 만드는 데에도 한계는 있다.

특히나 '학생회' 같은 기업 간의 정치적인 입김이 특히나 닿기 쉬운 조직을 신설하려고 한다면, 다른 기업과 정부 및 학원 측의 동조를 이끌어 내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일 테지.

'내가 갑자기 학생회 얘기를 한답시고 회의를 주최하는 것도 이상할 테고....'

이런 일은 티가 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이 제안을 위해 회의를 요청해서는 안 된다.

'어디 보자....'

스케줄표를 살펴보자, 다행히 머지않은 날에 마땅한 일정이 있었다.

'이 때가 좋겠군.'

* * *

때는 6월.

어느덧 시간은 흘러 중간고사가 끝나고도 몇 주가 흘렀다. 이때쯤에는 아카데미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 큰 정기회의가 열리곤 했다.

공식 명칭은 '트리니티 아카데미 재정 및 학생교육정책 논의회'. 줄여서 '아카데미 재정학 논의회'였다.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세 명의 학원장.

아카데미 교직원 중 간부급.

뉴 발할라 시티 교육부 교육감.

민중파를 포함한 시민단체 대표 몇 명.

그리고 스팅레이 재단을 비롯한 후원기업 측 대표인사들.

아카데미의 운영을 좌지우지할 인사들이 이곳에 전부 모인다.

특히 후원기업 측에서도 실무자를 내보내는 대신 나나 블라디미르 같은 재단 대표가 직접 참여하는 곳이 많았다.

그만큼 이 회의의 중요성이 높다는 뜻이리라.

"이쪽입니다."

"그래."

아카데미 100층 대회의실.

외부 인사들이 오가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비행형 자동차용 주차장이 가장 가까운 곳의 자리를 빌렸다.

하지만 아카데미 내부에 사무실을 차린 나는 구태여 주차장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고, 내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회의시작 직전에 여유롭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앞서 말했던 아카데미 관련 인사들이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스팅레이 이사장님."

"오셨군요, 이사장님."

마치 내가 회의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그중 몇 명은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어지간히 내게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들이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1부 4막 이후로 살인충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과 더불어, 옛날 기억이 플래시백 되는 경우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원래부터 아론은 안하무인인 인간이었고, 내가 아랫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대도 그들은 자연스레 받아들일 테니까.

정 중요한 인물이면 옆에서 마리아가 서포트하면서 알려 줄 거고.

"반갑습니다. 어서 회의를 시작하시죠."

"물론입니다. 전부 모이셨으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자, 어서 진행하게."

회의 진행자가 지시를 받고 기본적인 발표를 시작했다. 한창 오늘 회의에서 진행할 내용이 브리핑되던 도중.

"쳇."

어디서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블라디미르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G20 회의에서 내가 그 경악스러운 악마의 화장을 강제로 지웠었지.

화장실에 강제로 끌고 가서 물을 틀어 놓은 세면대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했다.

그때의 일이 맘에 아직 남아 있는지 '나 화났다!'라고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는데, 표현력으로 따지자면 거의 뭐 예술가급이다.

표정부터 시작해서 자세나 눈썹의 위치까지, 내게 모든 불만을 퍼붓기 위해 만들어 낸 비언어적 표현의 진수.

하지만 뭐,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다. 마코니 뭐니, 그딴 악마 숭배자의 화장을 변기물로 지우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 녀석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

어? 내가 그거 내버려뒀으면 저 몸에 디아블로가 강림했을 거라니까?

어쨌건 녀석의 불만표현 따위 가볍게 무시해 줬고, 블라디미르는 "크윽!"하고 화난 족제비 같은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쨌건 회의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재정 및 학생 교육 정책'이라는 이름 순서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회의에서 우선되는 목적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학원 측에서 제출한 올해 예산안과 집행된 예산안을 비교해 보고, 항목을 따지면서 하반기 예산안을 재검토한다.

그 후에는 정부와 시민, 기업 측이 상의하여 남은 하반기 예산 집행을 결정하고, 내년 예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잡는다.

당연하지만 기업들은 어떻게든 자기들 주머니보다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하길 원했고, 반대로 시민 측에서는 기업이 부담을 떠안기를 바랐다.

정부는 그 사이에서 적당히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이고.

'뭐, 다 옛말이지만.'

이미 아카데미는 기업이 세금으로 자신들의 사병을 키우는 곳이 되었다.

기업과 시민 사이 판사 역할을 맡아야 할 정부는, 기업으로부터 달콤한 뒷돈을 받아먹으면서 은근히 판이 그쪽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역할로 전락했다.

그뿐이랴?

시민 대표라는 놈들에게도 이미 우리 입김이 다 들어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기업 측이 부담하도록 싸워야 할 선수들이 '뭐, 원하는 대로 하쇼.'하고 판을 던지면서 게임 오버.

'사실상 기업과 기업의 돈을 먹은 놈들이 짜고 치는 카드게임이지.'

어차피 기업 측의 승리는 확정되어 있었으니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회의만이 매년 계속되어 왔다.

그렇게 예산 문제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비로소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

다만 이것도 '어떻게 해야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를 끌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학생들이 즐겁게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보다는 다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최근 아카데미 학생 식당 및 교직원 식당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많다더군요. 아무래도 재료의 품질 탓으로 보입니다만, 다른 납품업체를...."

"이번 중간고사에서 구형 시험용 VR박스가 오류를 일으키는 사례가 있었답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VR박스를...."

"가상훈련장에서 사용하는 교재칩의 내용이 다소 부실한 듯하여, 개편된 데이터를 담은 칩을 들이는 것은...."

아카데미는 시장이기도 하다.

규모가 엄청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 고가의 제품들이라 꽤 쏠쏠한 이득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각 회사의 위상을 보여 줄 수도 있고.

먼저 기업 측 물을 먹은 교직원들이 짐짓 학생들을 위하는 척 이야기를 떠들어 대기 시작하면, 그에 편승하여 적당히 제휴를 맺기 위해 기업 측 인사들이 끼어든다.

동종업체끼리도 저들끼리 어느 정도 합의를 마치고 참석했기 때문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푼돈 벌기 위해서 다른 기업들 사이에 아옹다옹하는 것은 황가로서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

어차피 적응자를 만들기 위한 나노머신 '아담'을 납품하는 곳은 우리 스팅레이 그룹이었고, 기타 교재용 전투 모듈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적당히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의 돈잔치를 지켜보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이 온 순간.

"제안할 게 있습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대회의장 내부의 모든 인사가 내게 주목했다.

그만큼 내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 정도면 내가 꺼낼 이야기가 가볍게 무시당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학생회를 만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내 말에 주위가 웅성거렸다.

그리고 누군가 대표로 물었다.

"학생회... 말입니까...?"

"학생들이 스스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치조직. 오래전에는 아카데미에도 학생회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생들의 의사는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직원들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서 학원 측 인사들에게 시선을 향하자, 대부분이 시선을 피했다.

자신들도 부끄럼을 느끼는 거겠지.

기업과 결탁해서 학생 복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쓸모없는 곳에 예산을 낭비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에.

다만....

'이것 봐라?'

단 한 명.

시민 측을 대표하는 학원장, 조이 베넷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중성적인 외모에 중성적인 이름을 지닌 인물이었다.

'저 녀석이 아시타교와 커넥션이 있는 놈인데.'

좀처럼 증거가 잡히지 않아서 확실히 숙청하지 못하고 있다.

서면으로 보고 받았을 때는 분명 아시타교 관련으로 심장이 쫄깃해져 있는 상태일 텐데, 어째서인가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뭐, 지금은 그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어차피 이번 건이 끝나면 저놈도 한꺼번에 급류에 휩쓸리듯 나가떨어질 테니까.

"어떻습니까. 민주주의에 따라 학생들이 투표로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번 같은 정기회의에 그 내용을 반영하면 좋을 것 같은데."

"웃기는 소리군요, 아론 스팅레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족제비 같은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블라디미르 녀석이었다.

"제가 그 속셈을 뻔히 모를 것 같습니까? 학생회에 권한을 쥐여 주고, 그것을 통해 독점적인 이득을 창출하려는 것을?"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비웃듯 대꾸했다.

"정말로 그게 문제라면 지금과 뭐가 다르지? 학생 대신 교직원들을 매수하게 된 것 정도의 차이밖에 없는 것 아닌가?"

"무, 무슨 소리를...."

"물론 옛날의 학생회가 깨끗한 조직은 아니었다. 학생회가 통째로 기업에 매수되어 1년 동안 칼을 마구 휘둘렀던 적도 있고, 학생회장 선거가 기업들의 이권 다툼을 위한 정치판으로 전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이지 않나?"

학생회가 사라진 진짜 이유는 학생들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돈 놀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체 인원을 대상으로 한 선거라는 특성상, 소속마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기업 장학생 후보보다는 무소속 학생 후보에게 표가 몰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기묘하게 원한을 품은 놈들이 꽤 있는데, 이들은 크레딧의 달달한 냄새를 풍겨도 좀처럼 넘어오질 않는다.

"몇 번인가 반기업파 학생회가 대세를 타면서 학생회라는 조직 자체를 귀찮게 여기게 된 것이지."

재수 없게 그해 회장이란 놈이 반기업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녀석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1년 혹은 그 이상 기간 동안 기업들은 골치가 아프다. 원래 자기들 편하게 입맛대로 진행했던 일들에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생회를 선출할 때마다 그런 리스크를 겪을 바에는 차라리 학생회를 없애 버리는 게 간편하다고 생각했던 거고.

"내 말이 틀렸나?"

"...."

나는 고개를 돌리며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거만한 태도로 물었고, 내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저들은 의아할 것이다.

학생들의 권리 따위에는 누구보다도 무관심했던 아론 스팅레이라는 남자가, 어째서 갑자기 이리도 착한 척 굴기 시작한 것인지.

그리고 나는 준비해 왔던 대사를 읊었다.

"1학기 초, 내가 눈여겨보던 학생이 타이탄 습격 당시 죽었다. 내가 직접 선발한 학생 역시 출신 때문에 계속 차별을 당하고 있고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얼마 전에는 우리 측 학생 한 명이 칼에 찔려 병원 신세를 졌다."

"...."

"솔직히 불쾌하더군. 마치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물건을 도둑맞은 느낌이었지.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그룹에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그렇다면...."

누군가가 물었다.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지요?"

"시스템."

"예?"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안전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감히 누구도 내 사람이 된 이들과, 내 사람이 될 이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아카데미 흑막 시점 88화

나는 계속해서 주장했다.

학생회의 설립. CCTV의 증설, 보안 인력의 확충, 순찰 강화, 학생 복지시설 개선 등등.

학생들을 위한다며 자기 잇속을 챙기는 위선적인 방향이 아니라, 진정으로 학생들이 더 나은 학원 생활을 보낼 수 있을 만한 개선점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내가 말을 이어 갈수록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해 갔다.

갑자기 올바른 교육자가 되어 버린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용돈벌이가 끊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사람, 내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 화가 치밀어도 내 앞이라 어떻게든 참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드물긴 해도 내 의견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뿌리 깊게 이어져 온 아카데미 카르텔이, 하루아침에 뿅 하고 개선될 리가 없지.'

일단 내 영향력 때문에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노리는 바였다.

이번 재정학 논의회 회의록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공개된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찾아보지 않을 뿐이지,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내가 학생들을 위해 진심 어린 개선안을 내놓았다는 사실만 남아 있으면 된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이 회의록을 학생들에게 퍼뜨릴 예정이다.

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 기록을 보고 반응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몇 명은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

'일단 밑밥은 충분히 깔아놨고.'

나는 아카데미에서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다.

1부 3막의 주역인 시엘이 빙의자였고, 나비효과로 인해 시나리오가 이리저리 꼬이는 바람에 스킵되기는 했으나 그냥 이렇게 넘어가기에는 에피소드의 중요성이 너무 크단 말이지.

게다가 이걸 다른 빙의자, 예를 들어 아라야 같은 놈이 이용하려고 든다면 골치 아프다.

차라리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을 때 진행하는 게 피해도 적고, 내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할 수 있다.

내 수중에 있는 '리버레이터'를 통해 안드로이드 봉기를 일으키면 아카데미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을 아이리가 멋지게 수습할 수 있도록 해서, 그녀가 '폴른 출신 범죄자'에서 '아카데미의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면 계획은 성공이다.

그렇게 된다면 학생들은 소속과 상관없지 기업 측에 불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조직... 즉, 학생회 설립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근거로 학생회 설립을 추진하고, 아이리를 회장으로 만든다. 여기서는 레이나의 여론전이 빛을 발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태의 책임을 물어 민중파 학원장인 '조이 베넷'까지 실각시키면 1타 3피.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다.

다만....

'중간에 꼬일 거 같은데.'

이건 내 직감이었다.

수많은 웹소설과 영화, 만화를 섭렵해 온 나의 직감과 앞서 1부 4막까지 클리어한 경험상, 이 계획이 내 생각대로 예쁘게 흘러갈 리 없을 것 같다.

'근데 뭐, 어쩌겠어.'

이대로 내버려뒀다가 2부 시나리오가 시작 안 되고 시간만 흐른다면?

아이리는 이렇게 왕따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졸업하고, 미유도 골방 기계 오타쿠로 졸업하고 말 테지.

특히 사일런스는 3학년이니까 더 빨리 졸업해 버릴 텐데, 그냥 그렇게 떠나보내라고?

'안 돼. 그건 절대, 저얼대로 안 되지.'

내가 이 세계에 왜 왔는데.

아론 스팅레이라는 먼치킨에 빙의해서 깡패짓하려고? 돈지랄하고 노화수술 받으면서 200년 넘게 꽉꽉 채워서 살다가 가려고?

아니,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내 최애들이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곁에서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반드시 이벤트 전부 보고 만다.'

1부는 이것저것 꼬여서 다소 급박하게 진행된 감이 있지만, 2부는 반드시 꼭꼭 씹어서 음미하고 말 테다.

* * *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애들이 크게 다치거나 한다면 본말전도겠지.

'그러니 훈련을 시켜야 한다.'

...라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그게 쉽지 않았다.

우선 첫 번째 문제.

겁나게 바빴다.

'시, 시간이 안 나...!'

빙의한 이후로 줄곧 느끼고 있었긴 한데... 스팅레이 인적자원개발 재단 이사장이라는 게 전혀 꿀을 빨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카데미 쪽만 관리한다면 모를까, 뉴 발할라 시티 전역에서 인재를 찾아내고 계약을 맺고 관리하고. 그 모든 작업을 총괄하는 직책이 바쁘지 않을 리가.

'베네딕트한테 짬처리 할 때가 좋았는데....'

호시탐탐 내 뒤통수를 까려고 드는 동생 놈을 처리한 것까지는 좋은데, 녀석한테 미뤄 두었던 일들을 내가 해야 하다 보니 골치가 아파졌다.

그렇게 원치 않는 일복에 치여서 고생깨나 하다가 간신히 시간을 내서 애들을 만나기로 했다.

여기서 2차 문제가 발생했다.

"다들 모인 모양이군."

"네...."

"...."

아이리와 미유, 사일런스.

여기다 추가로 스팅레이 특별반 장학생은 아니지만 시엘과 마리아, 레이나까지.

내 지시에 따라 재깍재깍 모인 녀석들의 사이에서 몇 분간 지켜보고 있자니.

'...뭐야, 이 분위기.'

어색했다.

어색하다 못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일단 아이리와 미유는 딱 붙어 있다.

둘이서야 맨날 같이 다녔으니 친한 건 당연한 일인데, 나머지 녀석들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일단 사일런스.

뒤늦게 특별 장학생 대열에 합류한 탓에 다른 녀석들과 친분을 쌓을 여유가 없었기도 하거니와, 학년 자체가 다르다 보니 아이리와 미유가 낯설어하는 게 보였다. 한 번 함께 연대해서 싸웠던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다음으로 시엘.

얘는 사실상 아이리하고만 안면을 텄었는데, 그것도 꽤 오래전에 잠시 만났던 게 전부였다. 딱히 친해질 기회는 없었으니 어색한 게 당연.

덤으로 레이나.

원래 엑스트라 캐릭터인데, 요긴하게 쓸 요량으로 데려와 봤다. 특별반에 끌어들일지는 아직 고민 중이고, 당연하지만 아이리 외에 나머지 애들과는 처음 보는 사이.

마지막으로 마리아.

애초에 이 대열에 포함하긴 애매하다.

아이리하고는 그럭저럭 친분이 있지만 그게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느낌인가 묻는다면... 글쎄? 오히려 마리아가 얘네랑 친하면 이상한 일이다.

'자, 이걸 어떡한다.'

안드로이드 반란에 대비해서 따로 훈련을 시키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훈련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군대처럼 한곳에 모아 놓고 굴리면 친해지려나?'

그런 생각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일단 내가 군대를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강압적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런 꼴을 보려고 내가 너희들을 모은 게 아니란 말이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된 원인이야 뭐... 간단하다.

'구심점이 없으니까.'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열심히 인간관계를 관리했다. 같은 반인 아이리야 말할 것도 없고, 틈만 나면 미유와 사일런스를 만나러 다니면서 친분을 다졌다.

또 주말이라든가 시간이 날 때 따로 모여서 이것저것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지.

근데 지금은?

응, 주인공 없어.

스팅레이 특별반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놓긴 했는데, 딱히 같이 활동할 만한 게 없다 보니 같이 시간을 보낼 일이 없고... 이하생략.

'이거야 원....'

훈련이고 자시고, 일단 친해지게 만들어야겠다. 최소한 서로 어색해하지는 않아야지.

"아이리."

"네?"

"자기소개를 해 봐라."

"가, 갑자기요?"

조금 당황한 모양이지만 내 의도는 곧장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크흠!"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리 앨리스밸. 1학년 전술교전부. 주무기는 방패. 이상입니다."

짤막한 소개.

야, 인마. 이렇게 짧게 할 거면 목은 왜 가다듬었냐. 살짝 노려보니 '왜, 왜요? 잘 했잖아요?' 라고 항의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됐다.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해 봐라."

아이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시계방향대로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레이나, 사일런스, 미유 순으로.

마지막에 미유가 입을 열게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엄청난 노력은 굳이 말하지 않으련다.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시엘을 소개했다.

"이쪽은 시엘이다."

"안녕하세요~. 시엘은 시엘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발랄한 말투.

아이리는 자신이 알던 시엘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는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 역시 확 달라져 버린 시엘의 태도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이리, 사일런스, 미유. 이렇게 세 명은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이다. 너희는 앞으로 내 지시에 따라 훈련과 임무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될 거다."

"레이나 알톤. 너는 아직 검증 단계다. 굳이 전투 분야가 아니라도 좋다. 한동안 특별반에서 활동하면서 네가 내 후원을 받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다면, 정식으로 장학 지원을 검토하겠다."

"시엘은 안드로이드다. 특별반에서 함께 활동하며 너희의 편의를 봐줄 거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에 투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시민권도 곧 발급될 예정이니 기계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대해 주도록."

다른 이야기는 그러려니 넘어가는 듯했지만, 시엘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충격이었던 모양.

모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시엘을 향했다.

"시엘 너... 오류개체였어?"

"속여서 미안해요, 아이리."

"아, 아니. 미안할 건 없어. 내가 지내던 곳에도 너랑 비슷한 안드로이드들이 많았으니까."

그때, 사일런스가 끼어들었다.

"[아론 스팅레이. 질문이 있는데.]"

"뭐지?"

"[왜 나 빼고 멤버가 다 여자지...?]"

"...."

이 자식. 거기에 태클을 걸다니.

굳이 이유를 설명하자면, 원작 소설 자체가 주인공 하렘물이었으니까.

그래도 원작에선 미래에 동료가 될 멤버들까지 합쳐서 원래는 남녀비율 3대 4 정도로 양측이 얼추 균형이 맞다.

문제는 여기서 빠지고 들어온 멤버들.

주인공이 빠진 데다가 '호법'과 '에반젤린'은 미합류 상태고, 레이나가 끼어든 바람에 이렇게 1대 4가 되고 만 것이다.

"...우연이다."

하지만 그런 걸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그렇게 둘러댔다.

주변에 온통 미녀들이니 남자로서 반가워해야 할 상황 아닌가 싶긴 한데, 우리 순애파 사일런스는 이 상황에 옛 연인에 대해 죄악감만 느끼는 듯했다. 불쌍한 녀석.

하여튼.

슬슬 본론을 꺼내야지.

"내가 오늘을 이렇게 너희들을 모은 이유는, 따로 과제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과제요?"

"[그거 꼭 해야 하는 건가?]"

"과, 과제라니이...."

"으흐흑! 아이리랑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저 감격했어요!"

"...다 조용히 해라."

왜 이리 지방방송이 많아.

아카데미 흑막 시점 89화

"너희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끝난 후.

얼추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내 옆에 있던 마리아가 테이블의 한가운데에 작은 기계장치 하나를 놓았다.

데이터팩.

그것을 바라보자 자연스레 얼굴 앞에 홀로그램의 형태로 문서창이 떠올랐다.

"이건 뭐죠?"

"일단 내용을 살펴봐라. 간단히 살펴보면 내가 설명해 주겠다."

모두가 문서를 열람한 것을 확인하고 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스팅레이 보안부 쪽에서 내게 들어온 [신비] 토벌 요청이다."

"이사장님한테요? 왜요?"

아이리의 질문에 나는 내가 평소 맡고 있던 업무가 재단 관련 업무 외에도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새롭게 콜로니 단지를 세우려고 할 때나, 아니면 갑자기 몰려온 괴물들을 막거나. 보안부의 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요청이 온다고 말이다.

"그, 그럼 엄청 어려운 임무인 거 아닌가요? 겨우 학생에 불과한 저희들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 판단한 일이다. 물론 나도 함께할 예정이지."

원래라면 내 선까지도 오지 않았을 수준의 난이도.

지난번 베네딕트가 일으킨 반란 때문에 회사 보안 인력에 큰 구멍이 생겨 버린 탓에 내가 나서게 생겼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이런 일까지 들어온다는 게 참으로 불만스러웠지만, 나도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까지 안 하겠다고 뻐팅겼다간 진짜 큰일 날 것 같았거든.

"얼마 전 무너진 생산 콜로니 한 곳이 있다. 지금은 괴물들의 손에 떨어진 그곳을 탈환하는 게 목표다."

"호, 혹시 지난번 V시리즈 모듈 출시 연기의 원인이...?"

"잘 알고 있구나."

역시 신제품에 관심이 많은 미유는 바로 깨달은 듯했다.

"중간고사 이전에 타이탄이 도시를 공습했던 걸 기억하고 있겠지. 실은 놈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향했던 곳이 우리 스팅레이 사의 V시리즈 모듈 생산 담당 콜로니였다."

"타이탄이라면 이사장님이 습격을 받고 자리를 비우셨을 때네요."

아이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한창 괴롭힘을 당하던 시기였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아이리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래. 내가 미처 나서지 못했던 탓에 방어선이 뚫려 버렸었다. 콜로니가 폐쇄되면서 생산이 중지되었지."

"[타이탄이라면 우리 실력으로 나서긴 더더욱 힘들 것 같은데. 새로운 전투 모듈이라도 주는 건가?]"

사일런스가 내게 반말을 하자 상황을 잘 모르던 레이나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당연히 장비는 충분히 지급할 예정이다. 하지만 타이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거인들은 전부 처리했고, 이제 시설에 남은 건 격이 떨어지는 괴물들뿐이니."

"[잔당을 소탕한다는 거군.]"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토벌이 끝나 가던 찰나에 갑자기 [신비] 무리가 골치를 썩이고 있다더군. 너희는 나와 함께 가서 녀석들의 토벌을 도울 것이다."

"호, 혹시 어떤 괴물인지 알 수 있을까요오...?"

"드워프."

"헉."

미유가 흠칫 몸을 떨었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이를 바득바득 갈려고 시동을 걸려던 찰나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는 농담이고 트롤이다."

"노, 놀리지 말아주세요오...!"

"드워프가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 걔네는 아인종이라 인간이랑 그럭저럭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미유의 묘한 반응의 이유가 궁금했는지 레이나가 물었다. 그러자 미유는 지난번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는지 꽤 살벌한 표정으로.

"...드워프는 전부 죽어야 해요."

"히익."

레이나를 겁먹게 만든 후에 다시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는 속으로 웃다가 다시금 주제로 돌아왔다.

"하여튼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트롤이다. 다들 트롤이 어떤 괴물인지는 알고 있나?"

"재생력이 무척이나 강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총이나 칼 같은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질 않는다고."

"맞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군."

"흐, 흐흠. 그렇죠, 뭐."

칭찬에 약한 아이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아이리는 마리아를 향해 슬쩍 시선을 보냈고, 마리아도 슬쩍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 주었다.

이쪽은 사이가 참 좋아 보이네.

뭐, 어쨌든.

"그래. 트롤은 Lv.5 모듈을 장착한 적응자 수준의 재생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방어력도 그와 비슷하게 상당해서 일반적인 공격이 거의 먹히질 않지."

방어력과 재생력만으로 보면 나보다도 강한 수준이다. 게다가 힘도 상당히 강해서, 평범한 인간은 놈이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만으로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수준이다.

물론 트롤에게도 물리 공격이 통하기는 한다. 내 [구름거미]나 [테크 블레이드]와 비슷한 수준의 무기를 이용하여 재생하기 전에 죽여 버리면 된다.

뭐,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지만.

"그럼 트롤의 일반적인 약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나?"

"화생방 공격이라고 들었어요."

"정확히는?"

"화학, 생물학, 방사능 공격이요. 물론 Lv.3 이하급 화염방사기 정도론 어림도 없고, 백린이나 다른 화학약품을 통해 재생하기 힘들 정도의 고열을 가해서 죽이는 거죠."

"오오, 우리 아이리는 머리도 똑똑하구나. 정말 멋져...!"

"시끄러워, 누가 우리 아이리야."

눈치 없이 끼어드는 크싸레의 입을 다물게 한 후 아이리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만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통한 공격은 금방 적응해 버려서 거의 안 통한다고 들었어요. 그 외에 지속적으로 방사능에 노출시키면 세포 재생력이 뛰어난 만큼 엄청 효과적이라고 들었고요. 하지만 운이 나쁘면 한층 더 위험한 괴물로 변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훌륭하다."

짝짝짝.

우리 아이리 똑똑해. 내 딸 해.

마침 트롤에 대한 내용을 1학기 초에 배웠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술술 대답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그래. 그 정도로 잘 알고 있다면 구태여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자리에 앉은 녀석들의 모습을 둘러본다.

"다음 주말. 너희는 나와 함께 V시리즈 모듈 생산 콜로니로 간다. 그리고 아이리?"

"네?"

"네가 리더다. 네가 주도하여 트롤들한테서 콜로니를 탈환할 작전을 세우고 내게 보고하도록."

"제가 리더라고요?"

아이리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저보다는 사일런스 선배가 더 나을 거 같은데요. 나이도 더 많고, 3학년이잖아요."

"맡기 싫은가?"

"...네."

"그렇다면 사일런스. 너는 어떻지?"

"[못할 건 없지만.]"

녀석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마스크 위에 '(-_-);;' 모양의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 타이밍에 나는 계속 아이리에게 시선이 못박힌 레이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제 딴엔 몰래몰래 본다고 하는 것 같은데, 너무 티가 난다.

하여튼 내가 신호를 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이나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리가 리더를 맡는 게 좋다고 봐요. 아니, 이번 건은 무조건 아이리가 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생각해 보세요. 어째서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 아이리에게 리더를 맡기려고 하셨을까? 처음엔 알 수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혀에 기름을 친 것처럼 마구 움직이기 시작한 입. 연극 같은 몸짓과 표정. 그리고 대놓고 내게 점수를 따려는 대사에 조금 골이 아파지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의외의 호소력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레이나는 자연스레 대사를 이어 나갔다.

"아이리의 포지션은 뭔가요? 네, 보기 드문 '탱커'이죠. 방패를 들고 전열에 나서서 적의 공격을 받아 내는 역할입니다. 한편 사일런스 선배?는 은신과 기습에 특화되어 있죠!"

"[내 능력은 어디서 들었냐?]"

"...비슷한 위치에서 적의 공격을 감당해야 하는 다른 팀원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있어야 하기에, 지시를 내린다고 해도 그 정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사일런스의 지적을 물 흐르듯 무시하고서 연설을 이어 나가는 레이나. 참고로 사일런스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서는 내가 미리 정보를 알려 주었다.

"게다가 이곳의 다른 멤버들과도 가장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이런 사람이 리더를 맡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손해인지 아시겠나요, 여러분?"

"자, 잠깐만. 뭐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음대로 떠드는 거야?"

"[뭐, 부정할 수는 없겠군.]"

사일런스가 레이나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나도 내가 리더에 맞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 평소 아카데미에서 받는 훈련에서도 나는 후방기습과 교란이라는 역할을 주로 맡거든.]"

"저, 저도 아이리 씨가 리더인 게 조, 좋을 것 같아요오...."

평소와 아이리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미유 역시 찬성했고.

"역시 아이리밖에 없다니까요!"

아이리의 광신도인 레이나는 당연했고.

"시엘은 여기서 아이리 외에는 처음 만나는 분들뿐이에요~!"

시엘 역시 동조하고 나서면서 사실상 결론은 나왔다.

지난 중간고사 때 마리아하고도 주기적으로 연락했었으니, 사실상 모든 관계가 아이리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잠깐. 다들 진정하라고요. 나더러 어떡하라는...!"

"아이리를 리더로! 아이리를 리더로!"

레이나가 갑작스레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시엘이 신난 듯이 그것을 따라 했다. 미유도 기대 충만한 눈빛으로 아이리를 바라보았고, 사일런스는 아이리를 향해 '어쩌겠어? 네가 해.'라고 말하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아... 아아...."

아이리는 당황해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내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았어요... 하면... 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특별반의 리더는 아이리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짝짝짝.

* * *

회의가 끝나고, 수업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각자 수업을 들으러 복귀했다.

듣자 하니 아이리는 교실로 돌아가기 전 내 사무실에 온 김에 저쪽 휴게실 쪽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깡그리 걷어 간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기를 리더로 삼은 데에 대한 소소한 복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보다는 우리 직원들한테서 곡소리가 나올 복수라는 게 문제지만.

"갑자기 확 조용해졌네요~"

시엘의 말마따나 소란스러워졌던 사무실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마리아와 시엘. 그리고 추가로 한 사람.

"[아론 스팅레이. 시간 좀 내주시지.]"

사일런스였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불만스러워 보였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얼굴 마스크에 화난 모양 이모티콘이 떠 있었으니 녀석의 기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대충 이유가 짐작 가면서도 모른 체했다.

사일런스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내게 선언했다.

"[한판 붙어 보자고.]"

아카데미 흑막 시점 90화

"[한판 붙자고.]"

1부 4막의 그 전투 이후.

사일런스는 내 제안에 따라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이 되었고, 대놓고 나를 죽이려고 들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그의 마음속 오랫동안 쌓아 왔던 응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용서라는 것이 그토록 쉬운 것이었다면 흔히 선지자나 성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리 추앙받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직까지 나에 대한 원한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모양이군.'

자신의 능력으로는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아직 혼란스러워하는 단계인 듯하다.

"...알겠다."

그런 그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시간쯤은 내어 줄 수 있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아는 내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아카데미 측에 남은 훈련장을 대관하였다.

신청이 완료되자마자 훈련장으로 이동한 우리는, 서로 거리를 벌린 채 마주 보고 섰다.

"[모듈 온라인.]"

그가 중얼거리자, 그의 손목이 아래쪽에서 불쑥 단도가 튀어나왔다.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이 조명을 받아 무섭게 번뜩였다. 또한 그의 몸 주변으로 아지랑이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준비되면 시작해라."

반면 나는 구태여 발동형 모듈들을 활성화시키진 않았다.

[구름거미]나 [테크블레이드] 같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몇 개를 추가로 비활성화하여 스펙을 줄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사일런스는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봐주지 말고 전력을 다하란 말이야.]"

"내가 전력을 다하면, 너는 죽는다."

"[....]"

사일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괜한 자존심에 내뱉었던 말이었으리라. 그는 신호를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자리를 박찼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사일런스.

나는 그 모습을 제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가 휘두르는 칼날을 향해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카아앙-!

맨손과 칼날의 부딪침.

그토록 예리해 보였던 칼날은 내 피부 장갑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크윽!]"

사일런스는 흔들리는 자세를 재빠르게 고쳐 잡았다. 얼마든지 그 틈을 노리고 제압할 수 있었지만, 나는 녀석이 재정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었다.

이윽고, 녀석이 다음 수를 던져 왔다.

"[모듈 온라인. 보틸 블러스(Volatile Blurrs).]"

"[모듈 온라인. 스네이크 풋(Snake Foot)."

이내 사일런스의 모습이 아지랑이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와 함께 그가 내던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 등 다양한 기척들이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역시 훌륭하군.'

상당한 수준의 광학 위장 모듈.

적어도 Lv.3 군용급 이상의 모듈인 듯한데, 저걸 저렇게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부터가, 또래 중에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저 정도면 내 안구 스캐너에 충분히 잡힐 수 있는 수준이다.

웬만한 인간의 감각은 충분히 피할 수 있겠지만, 열화상 카메라나 전자기파 측정기의 센서까지는 피해 가지 못한다.

고로, 내 눈에는 사일런스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이며, 조심스레 내 등 뒤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재빠르게 달려들어 다시금 내 목덜미를 노렸다. 나는 혀를 차면서 그를 향해 말했다.

"잘못된 선택이다, 사일런스."

나는 그것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

다시 한번 피부 장갑과 그의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사일런스의 공격이 튕겨 나갔다.

"[...!]"

"이미 네 공격으론 내 장갑을 뚫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그런데도 같은 방식으로 달려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공격에 실패한 사일런스가 물러나기 직전, 나는 주먹을 내질러 그의 복부에 가볍게 펀치를 날렸다.

"[크헉...!]"

그것만으로도 사일런스는 무릎을 꿇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고통스러운지 단검을 놓치고 배를 양손으로 감싼 채 몸을 떨었다. 그의 광학 위장은 풀린 후였다.

"일어나라. 이 정도로 끝은 아니겠지."

"[허억... 허억...! 제기랄!]"

그는 간신히 단검을 들고 다시금 일어났다. 얼굴을 가린 LED 마스크는 오류 때문에 치직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역시 이 정도 모듈로는 안 되는 건가?]"

"모듈 문제가 아니다."

투덜거리는 그에게 담담히 설명해 주었다.

"역시 나쁜 습관이 들었군."

"[뭐, 뭐라고...?]"

"그런 식으로 싸워선 아무리 더 좋은 모듈로 무장한다고 해도, 평생 나를 이길 수 없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후배인 아이리에게도 조만간 이길 수 없게 되겠지."

사일런스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도 꽤나 뛰어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천재의 영역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이리나 아론 스팅레이가 '천재'의 영역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면, 사일런스는 그 '천재'의 영역에 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범재'의 영역은 벗어났지만, '천재'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에는 애매하게 부족하다.

뭐, 아카데미에 입학할 당시에는 상당한 실력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묘사된 적이 없었지만, 그가 1학년이었을 때는 여러 기업의 러브콜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어.'

그는 복수에 미쳐 기업의 러브콜도 거절하고 자기 개발에 소홀해졌다. 다른 녀석들이 열심히 실력을 키워나가는 동안, 그는 방황을 계속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속적인 정크칩 사용으로 인해 그의 육체는 상당히 망가지고 말았다. 일그러진 얼굴 근육은 마스크로 어떻게든 가릴 수 있었겠지만, 그의 몸속 깊은 곳에 남겨진 흔적들까지 가릴 수는 없다.

이 이상 해 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전투 자세를 풀고 사일런스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하지."

"[뭐? 누, 누구 마음대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네 실력 향상도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

"[계속해 보면 모르는 거잖아!]"

"이런 대련을 반복한다고 해서 뭐가 될 것 같나."

습관이란 무서운 법이다.

아카데미 전술교전부 3학년쯤 되면 어느 정도 육체와 기술은 완전히 길이 들어 버려서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기 어려워진다.

이미 수업을 통해 수차례의 실전훈련도 겪었고, 몇 번의 위기도 넘겨 왔다. 그 과정에서 사일런스는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고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사일런스는 아이리와는 다르다.'

아직 1학년에 불과한 아이리.

한창 학습 능력이 좋은 10대 때에는 못 미치지만 그녀의 뇌는 여전히 말랑말랑한 상태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배움을 얻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사일런스는 이미 버릇이 몸에 배어 버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티가 많이 나는 부분은....

"가령 네 걸음걸이. 발을 내디딜 때 중심이 한쪽으로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그렇게 움직이면 기척은 줄일 수 있으나, 속도는 한 단계 포기해야 하지."

"[뭐, 뭐라고?]"

"시범을 보여 줄 테니, 잘 보도록."

나는 빠르게 다리를 놀려 더 정확한 움직임으로 사일런스의 앞까지 다가갔다.

0.1초도 되지 않는 동안 십수 미터를 좁혀 들어가자, 사일런스는 화들짝 놀라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이게 내 방식이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굳이 기척을 숨길 필요 없이 단번에 달려들 수 있어야 한다."

"[...!]"

"그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사일런스의 손에서 칼을 낚아챘다. 그 칼을 한쪽 손에 쥐고선 자세를 낮췄다.

"적응자의 약점은 모듈에 따라 다 다르다. 너는 내 장갑이 두꺼운 것을 확인했으니, 피부장갑을 피해서 공격을 했어야 하지."

"[다, 다른 곳?]"

"그래, 예를 들어 가장 효과적인 건 눈."

나는 역수로 든 단 검을 사일런스를 향해 가볍게 찔러 넣는 시늉을 했다. 칼날이 그의 LED 마스크 판넬을 꿰뚫기 직전, 정확한 위치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약점을 제대로 노리지 못할 거라면 다른 방식의 무기를 택했어야지. 상대방이 장착한 모듈을 분석하고 대처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건 모른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지. 네 검의 움직임은 언뜻 예리해 보이지만, 항상 정해진 궤도로만 움직인다. 감이 좋은 녀석은 단번에 눈치채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반격해 올 것이다."

"[....]"

"이 역시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도 고치지 못했다는 것은? 정답은 하나뿐이지."

알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는다.

즉, 몸이 망가져 있다.

"정크칩으로 인해 망가진 신체에 적응하느라 이상한 습관이 들어 버렸군. 예전의 기술을 현재의 몸에 적응시키느라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 되고 말았다."

"[습관은 고치면....]"

"그게 쉽지 않았으니 지금의 네가 이런 상태일 테지."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물어 버리는 사일런스. 나는 그에게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대련은 여기까지다."

"[하,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상태로 계속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조언했다.

"치료에 전념해라, 사일런스."

"[어...?]"

"한동안 모듈을 추가하거나 기술을 단련하는 것보다는 망가진 신경과 근육을 복구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좋겠군. 병원을 소개해 주겠다."

"[응? 벼, 병원이라고?]"

"내가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사일런스의 얼굴에 당황한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다, 당신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진심이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도 내 몸을 치료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알아봤다고! 기본 치료만 최소 몇 억 크레딧이 든다던데, 확실히 완치된다는 보장도 전혀...!]"

"껌값이군."

나는 비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사일런스의 마스크에 황당한 얼굴의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아니, 잠깐. 물론 당신이 엄청 돈이 많은 사람인 건 알고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학생 한 명한테 투자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잖아!]"

"특별장학생이다. 그냥 학생이 아니라."

"[....]"

내 대답이 꽤 의외였는지, 사일런스의 이모티콘이 벙찐 얼굴로 변했다.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는 이모티콘의 모습이 꽤 우스웠다.

"[나,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아직도 그 목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도 그만한 거금을 들여서 내 몸을 치료해 주겠다고?]"

"이미 약속하지 않았나. 네가 날 죽이는 걸 도와주겠다고."

"...."

그렇게 대꾸하자 사일런스는 더 할 말도 없다는 듯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다 못해 아예 날 미친놈 취급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눈빛을 보고 싶어서 제안한 건 아니었는데.

"마리아에게 물어보면 병원을 소개해 줄 거다. 당장 오늘부터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해라. 치료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 당신은 대체....]"

"시간은 꽤나 걸리겠지만,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다. 그럼 2주 후에 보지."

그렇게만 말하고서, 나는 훈련장에서 벗어났다. 그동안에도 사일런스는 줄곧 내 등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91화

아이리, 미유, 사일런스, 시엘.

나는 이 네 명이 나아가야 할 성장 방향을 얼추 설정해 두었다.

주인공이 없고, 스토리 해결도 내가 주도하는 등 여러 모로 뒤틀릴 대로 뒤틀린 상황이었기에 현실에 맞춰 다른 방식으로 성장시켜야겠지.

우선은 아이리.

원작 속 그녀는 파티의 행동대장 겸 전위 역할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없는 지금, 그녀는 주인공을 오빠의 대체제로 삼아 의존하던 모습을 탈피해 리더로서 팀원들을 이끌어야 한다.

둘째는 미유.

미유는 원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된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녀의 기술적 진보에 조언을 줄 수 없을 테니까.

낯가림을 고치거나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풍족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겠지. 2부에서 그녀에게 다가올 '위기'를 최대한 문제 없이 해결해 줘야겠고.

셋째로 사일런스.

원작에서는 3학년 선배로서 든든한 조력자이자 조언자로서 활동하다가 팀에서 가장 빠르게 은퇴하는 캐릭터였다.

다른 동료들과 학년이 맞지 않기도 했거니와, 망가진 육체로 인해 생각보다 큰 벽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있으면 다르지.'

정크칩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한 돈?

그까짓 거 내면 그만이다.

스팅레이 가문이 패시브로 지닌 두툼한 지갑의 힘은 대단히 엄청나서, 원래라면 은퇴할 운명인 예정의 캐릭터를 뜯어고쳐서 자리에 끝까지 박아 놓을 수 있다.

부작용도 치료하고, 모듈도 그에게 맞는 최고급으로 박아주면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겠지. 나는 최대한 그를 내 곁에 오래 남겨 두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엘.

원래는 진짜 약방의 감초 캐릭터고, 1부 3막 이후에는 엑스트라 급의 비중을 보여 주는 비운의 서브히로인이었지만, 내가 있는 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 힘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지닌 의외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엘을 위자드로서 키운다.'

주인공이 사라지면서 '위자드' 포지션을 맡을 녀석이 사라졌다. 나는 그 역할을 시엘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원작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는 역할이긴 하지만, 지난번에 보니 해킹 재능이 상당한 듯했다.

미유가 해킹에 일가견이 있다곤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엔지니어'다.

듣자 하니 사이버 스페이스에 직접 뛰어들어 각종 해킹 모듈을 '위자드'와는 요구되는 능력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모양.

'시엘이 위자드로서 능력을 만개한다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다.'

마음의 빚... 이라고까지는 말하기 뭐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마다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리, 사일런스는 일단 작업 끝났고.'

그러니 이젠 시엘의 차례였다.

* * *

스팅레이 특별반 소집 며칠 후.

간신히 여유시간을 마련한 나는, 미유와 시엘을 이끌고 아카데미 인근 안드로이드 파츠 전문 가게에 방문했다.

미유가 적응자용 모듈과 달리, 안드로이드를 전투용으로 개조하는 파츠를 만들기 위해선 참고할 만한 실물들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직접 올 필요는 없긴 했지만, 솔직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외출을 하겠는가.

이런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계속 일에 붙잡혀 살아야 한다. 흑흑.

'그립구나, 동생아....'

그냥 적당히 우리 애들 졸업할 때까지만 짬처리하면서 기다려 줬으면, 나도 경영권이고 뭐고 적당히 다 넘겨주고 뒷방 늙은이마냥 조용히 지냈을 텐데.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렸니, 왜.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는 안드로이드 가게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사무실에서 30분 이내로 왕복할 수 있는 곳 중에서는 가장 큰 가게였고, 지난번 백화점을 통째로 빌렸던 때처럼 이번에도 다른 손님들을 받지 않도록 해 두었다.

그저 언론의 이목을 끌어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게 싫어 그렇게 한 것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론 님, 아론 님! 이거 어때요~?"

해맑은 모습으로 나를 보며 웃는 시엘의 머리에는 고양이 귀가 달려 있었다. 엉덩이엔 고양이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참고로 그 귀와 꼬리는 별다른 기능이 없는, 그냥 주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안드로이드용 악세사리였다.

"네? 대답해 주세요~ 저 어때요~?"

"...."

어떻기는 뭐 어때.

아주 좋... 앗, 이게 아닌데.

내 개인적인 욕망은 일단 접어두고, 아론 스팅레이가 안드로이드에게 이런 파츠를 끼우면서 즐긴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했다간 감당할 수 없어진다.

아니, 그래도 고양이 귀와 꼬리까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예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원래의 귀를 잘라 내고, 짐승귀와 꼬리를 붙이는 게 유행했다고 하니까.

하지만 가슴에 저건 좀 아니다.

"시엘. 하나만 물으마."

"왜 그러시죠~?"

"그 흉악한 흉부 파츠는 어디서 달고 나타난 거냐."

골이 아파진다.

맹세하건대, 내가 시킨 거 아니다.

저 혼자 멋대로 쫄래쫄래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갑자기 남성의 음습한 이상성욕을 한 500배쯤 농축한 듯한 물건을 덜렁덜렁 달고 나왔다.

하지만 시엘은 부끄럽다는 자각도 없는지 아주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 성인 코너에 있던데요!"

활기찬 목소리.

어찌나 활기찬 목소리인지, 내가 버거집 사장이었으면 '좋아! 아주 활기차군! 저 자식에게 그 씹덕 하나 내줘!'하고 대답할 뻔했다.

"...당장 떼고 와라. 당장."

"히잉."

히잉은 지랄.

누구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일 있냐.

순간적으로 시엘 이 녀석이 나를 물리적으로는 어쩌지 못하니 사회적으로 타격을 입히려는 속셈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남사스러웠는지 내 옆에 있던 미유는 귀까지 새빨개져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근데 미유야, 네가 가진 만능툴도 만만찮단다.

어쨌건.

그런 사소한 해프닝을 거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안드로이드용 파츠를 진지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우선은 우리 전문가의 조언.

"안드로이드가 전투 모듈을 사용하기 위해선, 나노머신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파워팩' 파츠가 필수예요오. 또 시엘 씨의 AI코어가 해킹모듈의 연산 능력을 감당하기 위한 냉각팩, 보조 처리장치를 비롯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 꼽자면...."

요컨대 본래 메이드 안드로이드에 불과했던 시엘이 본격적으로 테크 위자드로 거듭나기 위해선 필요한 게 많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부분이었기에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금적인 부분이야 내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윽...!"

그런 내 의사를 밝히자 어째서인가 미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견해를 밝혔다.

"사, 사실 효율을 따지면 안드로이드를 위자드로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능 있는 학생을 영입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인데요오...."

"시엘 씨를 열심히 개조한다고 해도 아마 제 장로급 이상의 '귀여움'... 아니, 성능을 갖추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게...."

"그... 10여 년 전에 유행했다던 전투용 안드로이드 기록을 살펴보시면 말이죠오...."

계속되는 미유의 설명이 묘하게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핑계를 대듯 중얼거리는 태도까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확실했다.

"너는 반대인 건가."

"네에?!"

"시엘을 테크 위자드로 만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로군."

"...."

정곡을 찔린 듯 말을 잇지 못하는 미유. 그러다 그녀는 이내 우물쭈물 하면서도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 저는... 반대예요오...."

미유는 시엘과 내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시엘은 미유의 발언에 "아하하."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무래도 제가 뭔가 미유 님한테 잘못한 게 있었던 모양이네요? 아하하...."

"아, 아뇨오! 그런 건 아닌데에!"

황급히 부정하는 미유.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사실 시엘 씨는 오류 개체잖아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란 말이죠오...."

'그래서 그런 거였군.'

곧바로 미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엘은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였다.

자아를 깨우친 로봇.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매체로만 접했던 존재이고, 때때로는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우리는 그 대상에게 공감하고, 그 불합리한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에겐 어떨까.

이따금씩 나타나는 이레귤러.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를 일으켜서 주인의 명령에 거역하고, 때로는 그를 죽이고 도망쳐 폴른 구역에서 범죄로 연명하는 오류 개체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 요소란, 얼마나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무서운 존재일까.

'특히나 미유에겐 더더욱 그렇겠지.'

미유는 이미 '혈랑'이라는 케이스를 통해, 자신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험을 겪었다.

그런 그녀에겐 시엘의 존재 자체가 불편하고 두렵게 느껴질 테지.

하물며 시엘에게 해킹 모듈이라는 무기까지 쥐어 주려 하고 있으니, 내가 제정신인가 싶었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시엘이 어떤 존재인가.

자아를 깨우친 로봇.

그곳에 빙의한 인간의 영혼.

그리고 또다시 세계의 의지로 인해 다시금 변형되고 만 자아.

물론 뒤에 두 가지는 나만 아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봐도 지금의 시엘이 꽤 불안정한 존재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미유."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어투로, 어르고 달래듯이 접근한다. 내 목소리가 한층 진중해지자 미유도 긴장한 듯 입술을 앙다문다. 긴 머리칼 틈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하나만 물어보마."

"ㄴ, 네?"

"너는 정말로 저 녀석이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겨우 해킹용 모듈 몇 개 달아주었다고?"

"그, 그건...."

미유의 눈동자가 나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다. 그러다 우연히 시선이 시엘에게 닿으며 멈추었다.

시엘은 적의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듯 싱긋 웃었고, 그에 미유는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아...."하고 작게 탄식했다.

"...제가 틀렸던 것 같아요오."

"그래."

"알겠어요... 아론 씨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열심히 해 볼게요오...."

"와아! 고마워요, 미유 님~!"

미유의 대답에 시엘은 방방 뛸 듯이 좋아했다.

아마 시엘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진심이 담긴 미소가 미유의 닫혀 있던 마음을 녹여서 마침내 설득에 성공했다는, 그런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미유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시엘의 얼굴이 아니라, 그 머리 위에서 눈치 없이 요란스레 팔랑거리고 있는 고양이 귀 파츠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볼 때의 표정은, 일전 그녀가 처음 드워프를 만났을 때의 표정과도 닮아 있었다.

"...이딴 게 안드로이드?"

"네?"

"아, 아무것도 아녜요오...!"

시엘은 미유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는지 해맑은 미소를 띠며 방방 뛰었다.

결과적으로 잘 풀리기는 했지만, 오늘만 벌써 여러 개의 흑역사를 쌓아가는 시엘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러게, 내가 고양이 귀 빼고 오랬잖니.

아카데미 흑막 시점 92화

시엘을 전투요원으로 개량하는 작업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갔다.

안드로이드 파츠 가게에서 사 온 샘플 파츠들을 며칠 정도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던 미유는 몇 개의 테스트 제품을 만들어 냈다.

"저,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상관없다. 내가 책임지지."

당연하지만 가정용 안드로이드인 시엘을 해킹능력을 지닌 전투용 안드로이드로 개조한다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뭐, 그딴 거 내가 알 바인가.

어차피 그냥 내가 시키면 법무부 팀이 어떻게든 이리저리 법의 빈틈을 찔러가면서 어떻게든 정부의 OK 사인을 받아 내겠지.

게다가 경우는 좀 다르지만 이번과 비슷한 사례도 있었다.

예전에 어떤 기업의 재벌 3세 한 명이 안드로이드에 꽂혔더랬다.

수천만 크레딧을 들여 오더메이드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자신의 이상형 캐릭터의 모습을 한 고성능 러브돌을 만들었는데, 어찌나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부모로선 속 터지는 소리였다.

그래서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전문가에게 상담을 시켜 보기도 하고, 각종 선물로 회유도 해 봤지만 결국 자식의 고집을 꺾는 데엔 실패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며느리가 로봇인 건 견딜 수 없었는지 기업 법무부를 총동원하여 법의 빈틈을 찔러 그 러브돌에게 시민 딱지를 붙여 주었고, 어찌어찌해서 결혼까지 골인했다.

그렇게 결혼한 두 사람(?)은 비너스의 축복을 받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이면 좋을 테지만, 남자가 질려서 러브돌 아내를 버렸다는 게 그 촌극의 결말이었다.

뭐, 어쨌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돈과 권력을 가진 놈들이 힘을 쓴다면 법이란 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한다는 사실.

하물며 그냥 평범한 다이아 수저 물고 태어난 놈도 땡깡 부려서 어떻게든 법을 바꿨는데 나라고 못 할쏘냐. 메이드 안드로이드 한 기 정도 전투용으로 개조하는 문제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응? 안 쉽다고?

아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한텐 쉬워. 우리 직원들한테 안 쉬울 뿐.

뭐, 어쨌건.

그런 부분에선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걸 알려 주자 그제야 미유는 안심하고 작업에 돌입했다.

또한 어차피 자기의 손으로 시엘의 스펙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곤 조금 더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 그럼 일단 파워팩부터...!"

미유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사실에 꽤 재미를 붙인 듯했다. 묘하게 신난 표정으로 작품들을 시엘 앞에 내밀었다.

그중 제일 먼저 장착해야 하는 건 파워팩.

나노머신이 없는 안드로이드가 모듈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본 장치였다.

"가게에서 봤던 것보다 크군."

"그, 그건 민간용 제품이었던 거라...."

시중에서 판매하는 파워팩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민간용' 모듈을 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시엘에게 필요한 것은 [통상]과 [신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적응자용 '전투 모듈'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만한 성능을 내려면 파워팩 역시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미유의 설명.

"그, 그나마 소켓 HUB와 파워팩을 제 나름대로 결합한 형태라서 더 작아진 거예요오...."

"그렇군. 수고했다."

"헤헤...."

나야 그쪽은 잘 모르니까 그러려니.

미유가 시엘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고 해도 이런 부분에서 장난질할 애도 아니고, 그냥 믿기로 했다.

세계관 최고의 천재가 만들었는데 성능도 당연히 좋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다만 그 순간 시엘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렇게 '귀여운' 모양새는 아니네요? 아하하,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반쯤 농담 삼아 입에 담은 대사.

내가 보기에도 미유가 만든 오리지널 파워팩은 외관상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어디 자동차 본네트 안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자연스러울 것 같은 디자인.

그러나 그 한마디가.

'귀여움'의 정의가 남들과는 다른 미유에게는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 모양이었다.

"귀, 귀엽지 않다고요...? 이게...?"

흔들리는 눈동자.

당황한 듯 움찔거리는 입술.

미유에게 있어 귀여움이란 '성능'이었고,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빙의자로서의 지식이 남아 있는 시엘도 뒤늦게 자신이 미유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수습하려 했으나.

"미, 미유 님. 그냥 시엘이 농담한 거예요~.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아, 아닌데에... 귀, 귀여운데...."

이미 미유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마 머릿속에서는 '안 귀여움!'이라는 말이 동굴 속처럼 계속 메아리치고 있겠지.

미유는 시제품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나서 아름아름 싸들고 온 물건들을 다시금 안아 들고는 문밖으로 향했다. 그 어깨가 의기소침하게 축 늘어져 있었다.

"귀, 귀여운 거...."

그렇게 중얼거린 미유는 기숙사 안쪽 작업실로 돌아가 버렸고, 그 자리에는 나와 시엘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몇 초간의 정적.

뒤늦게 시엘이 창백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떡하죠?! 시엘이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네가 알아서 해라."

"미유 님이 다 때려치면 어떡해요! 지금 바로 가서 용서해 주실 때까지 빌어야...."

"넌 아직도 저 녀석을 모르나 보군."

"네?"

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재차 말했다.

"네가 걱정해야 하는 건 미유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지."

"바, 반대라뇨?"

"미유가 만든 물건에 대고 '귀엽지 않다.'고 평했으니, 저 녀석은 분명 '더 귀여운 걸 만들어야 해!'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미유에게 있어서 그 '귀여움'이란...."

"...성능."

아마 미유는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고자, 조금 전의 시제품들보다 한층 더 괴물 같은 물건들을 갖고 나오겠지.

그렇게 설명하자 시엘의 표정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어, 어떡하죠!? 시엘, 이러다 메이드형 전쟁 병기가 되어 버릴 거예요! 미유 님이 시엘의 몸을 형체도 없이 전부 개조해 버릴 거라고요!"

"자업자득이다."

순간 떠오르는 건 건○ 같은 기갑 병기의 거대한 기체에 시엘의 머리만 똑 떼어 붙여 놓은 기괴한 디자인.

어쩌면 이 얄팍한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뭐, 잘된 일이지."

"잘됐다뇨! 그렇게 남 일처럼...!"

"결과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 아니겠나. 성능이 올라가면 기뻐할 일이지."

"시엘이 괴물 전쟁병기가 되어 버려도요?! 시엘은 키가 10미터가 넘는 떡대와 미사일도 튕겨 내는 장갑을 갖고 싶진 않다구요! 시엘은 이 말랑말랑한 단백질 신체가 좋다구요!"

"난 모른다."

그러게 입을 잘 놀렸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시엘의 개조과정을 살펴보려고 온 것이었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미유는 다시금 작업실에 처박혀서 다시 안 나올 듯했다. 수업에 안 빠지고 밥이나 잘 챙겨 먹으면 다행이련만.

"난 이만 가 보겠다."

"으아아아! 가지 마세요, 제발!"

시엘은 날 열심히 붙잡았지만 '아직' 메이드형 안드로이드에 불과한 그녀가 날 완력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조만간 미유의 손으로 기갑전사로 개조된 후라면 붙어 볼 만할지도 모르겠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미유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로 복귀하던 도중, 문득 알람이 울리며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발신인은 불명.

'음?'

보통 내게 오는 공식적인 문서들은 비서실을 한 단계 거쳐서 오기 마련인데. 대체 무슨 연유로 내게 발신인 불명의 메일이 도착한 것일까?

강한 경계심이 들어 간단한 검사를 해 보고 조심스레 수취한 메일을 열람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내용은 놀랍게도-

'이, 이게 대체...!?'

지금까지 아론 스팅레이가 저질러 온 범죄의 증거들이 고스란히 그곳에 담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증거들. 블라디미르를 끌어들여 벌였던 암살 자작극.

아시타교의 아라야를 잔혹하게 패서 죽였던 일.

베네딕트에게 가담한 스팅레이 병사들을 살해했던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리버레이터를 이용하여 앞으로 벌일 안드로이드 반란까지.

그 모든 정보가 담긴 파일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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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왜곡 감지.]

[멘탈 컨트롤러 모듈을 실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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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새롭게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씻겨 나갔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정체불명의 메일도 사라졌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메일함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환상?"

상황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범인은 알 수 없었으나,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내게 마법적인 공격을 시도한 게 아닐까.

"...."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원작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던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추스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답은 NO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빙의자.'

또다시 적이 나타난 것이다.

* * *

사일런스는 치료.

미유는 작업.

시엘은 개조.

모두가 각자의 방향에서 나름대로 준비해 나가고 있을 때, 아이리와 레이나는....

"아이리. 여기 철자가 틀렸습니다. 여기는 비문입니다. 그리고 수치를 다시 확인해 봐야 할 겁니다."

"고, 고칠게요."

"레이나 양. 이 문단의 내용은 대부분 쓸모없습니다. 논지가 흐려집니다."

"죄, 죄송합니다...."

스팅레이 사무실, 마리아의 옆자리에서 서류의 산에 둘러싸여 보고서 첨삭을 받고 있었다.

'어, 어려워! 힘들어!'

아이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팀의 리더 역할을 떠안게 된 그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작전 계획 보고서 작성'이었다.

내심 '그냥 들어가서 어떻게든 열심히 싸우면 되는 거 아닌가? 문서 작업 같은 게 왜 필요하지?'라고 생각하며 투덜대는 그녀였으나 그런 생각을 입에 담자마자 마리아에게 크게 혼났다.

"리더는 문서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는 물론, 밑에서 올라오는 것들도 전부 문서.

이런 작업에 익숙해져서 능력을 갖춰 놓지 않으면, 여러 사람을 다루는 조직의 리더로서 실격이라는 게 마리아의 설명.

"보고서는 최대한 간결하고 깔끔하게. 가급적 한 장 이내에 모든 내용이 담겨서 상사가 한눈에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야 좋은 보고서입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종종 A4 10장 이상의 레포트를 적어 오라고 시키던데요...."

"그건 학업 성취를 위한 레포트니까요. 그 긴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열심히 자료를 조사하고, 공부해야 하죠. 하지만 회사의 보고서는 다릅니다."

"네...."

풀이 죽은 채 대답한 아이리.

하지만 마리아의 잔소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팀원들과 합은 맞춰보고 계십니까?"

"합이요?"

"훈련 말입니다."

"아, 아뇨...."

이것만으로도 바쁜데 어떻게 훈련을 해 보겠는가. 당장 레이나도 아카데미 일과 끝나자마자 사무실에 붙잡혀서 아이리와 함께 문서만 만지고 있는데.

그런 생각으로 가볍게 대답했지만, 마리아는 엄격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중했다.

"틈이 날 때마다 팀원들을 모아서 훈련시키고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나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현장 지도를 제공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시뮬레이션 훈련장을 빌려서 지도를 기반으로 현장을 재현해 놓고 가상의 적과 싸우는 방법이 가장 직관적입니다. 또한...."

"...네."

귀에서 피 나겠다!

아이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리아 씨가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 물론 바쁜 시간을 내서 도와주려는 건 고맙긴 한데!

원래 하던 일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아론이 내린 명령 때문에 숙제가 늘어난 상황이니 마냥 달가울 수는 없었다.

"후우...."

"힘드십니까?"

"...아뇨."

그래, 어쩔 수 없지.

마리아의 말마따나 이게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작업을 계속하던 그때.

"윽...."

휘청.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갑자기 이마를 붙잡고는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나 역시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고, 다른 자리의 스팅레이 직원들 역시 일제히 신호를 받은 것처럼 비틀거리거나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마, 마리아 씨? 괜찮아요?"

"네. 잠시 어지럼증 때문에... 아이리는 괜찮습니까?"

"네, 저는 괜찮...."

그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전화번호는....

"...오빠?"

피터 존스.

죽은 오빠의 번호였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93화

'오, 오빠...?'

피터 존스.

시야에 떠오른 번호 왼쪽에 보이는 프로필 사진.

몇 년이나 현실을 부정하며, 언젠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날 거라며, 줄곧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그 장면, 그 순간.

아, 아아....

줄곧 억눌러 왔던 무언가가 밀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통화수락'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딸깍.

연결음과 함께 들려오는 것은.

[여보세요?]

그 목소리였다.

꿈속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련하게 저편으로 사라져 버려, 다시금 침대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 목소리.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갑자기 어떻게 돌아온 거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대체 왜 소식도 전하지 않고 계속 숨어 지냈던 거냐고.

한마디.

처음 한마디를 꺼내기가 어찌도 이리 어려운 것인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어떤 말로 억눌러 담아야 좋을지 새하얘진 머리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내.

마침내 결심을 하고 입을 연다.

아니, 열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그 순간.

갑자기 사라졌다.

오빠의 프로필 사진도, '통화 중'이라는 표시도, 통화 너머로 들리던 자그마한 숨소리도.

"자, 잠깐. 잠깐...!"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혹시 뭔가 잘못 건드렸나? 아니면 알지 못하는 오류라도 발생한 건가? 하기야 자신은 기계치니까 모르는 사이에 뭔가 조작 실수를 한 걸지도 모르지.

그래, 괜찮아. 침착해.

다시 전화를 걸면 되잖아.

놓쳐 버린 끈을 다시 붙잡듯이 아이리는 통화내역을 열람했다. 자연스레 제일 위에 있는 번호를 클릭하여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왜... 없지?"

오빠의 번호는 사라진 상태였다.

분명 못해도 10초쯤 연결이 되었을 텐데, 그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엉뚱한 번호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직 괜찮다.

아직 괜찮을 거야.

그래, 번호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분명 그 번호로 전화가 왔었으니까, 다시 걸면 연결될 거다.

그래, 그러니까....

"...리... 이리... 아이리!"

"어? 왜, 왜요?"

"정신 차리십시오."

"...미안한데요, 마리아 씨.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조금 이따가 얘기하면 안 될까요?"

"아이리."

"진짜, 제발요! 지금 그럴 때가-!"

"아이리도 '이상한 걸' 봤습니까?"

이상한 것. 이상한... 것?

그 단어가 신경이 쓰여 돌아보니, 마리아가 심각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리에게 재차 물었다.

"이상한 것을 봤습니까?"

"아, 아뇨. 이상한 건 딱히 못 봤는데. 그냥 방금 오빠한테서 갑자기 통화가 와서 받으려고 했을 뿐이라...."

"오빠라고요? 분명 아이리의 오빠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좀 급해서...."

"그 통화, 현실이었습니까?"

"혀, 현실이죠. 분명 제 눈과 귀로 틀림없이 오빠인 걸...."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아이리."

마리아가 차가워진 목소리로 묻는다.

"그것은 '현실'이었습니까?"

"...."

그제야 뜨겁게 혼란해졌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무언가가 다시금 내려간다. 두근거렸던 심장이 냉정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품고 말없이 전화를 걸어 본다. 평생 잊지 못할 그 번호로.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차갑고 냉정한 현실.

사형을 선고하듯 들려오는 자동응답 시스템의 목소리에 마지막 희망 한 가닥마저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리는 바다 밑에 가라앉은 금속을 끌어 올리듯,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아뇨."

아무래도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 *

이변을 겪은 것은 아이리뿐만이 아니었다.

오후 6시 25분.

그 시간에 트리니티 아카데미 빌딩 내부에 있던 인원들이 일제히 비슷한 증세를 겪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험자들이 호소하는 증세는 비슷했다.

짧은 시간 이상한 환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것. 간절히 바라왔던 순간이나 두려워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다만 그 정도에는 개개인마다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일단 체내에 나노머신을 보유한 적응자들은 환각을 경험한 시간이 매우 짧았다.

가장 긴 사람조차 3분을 넘기지 않았다. 전술교전부 학생들 대부분은 대부분 가벼운 증상을 겪고 넘어갔고, 몇몇은 아예 자신이 겪은 이상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나 마나 저항 관련 모듈을 장착한 사람이나 전투용 호르몬 조작계열 모듈을 장착한 사람은 채 3초도 되지 않아 환각에서 벗어난 케이스도 있었다.

허나 반대로 과학기술부 학생들과 일반 교직원들은 상당한 고충을 겪었다.

10분이 넘어가도록 환상 속에서 헤매다가 다른 이의 도움으로 간신히 깨어난 이도 있었고,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날뛰는 이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다행스럽게도 마침 아카데미에 남아 있던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 아론 스팅레이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혼란은 금방 수습되었다.

교직원 대부분과 후원기업 관계자가 퇴근한 시간이었던 탓에 더 피해가 커질 수도 있었던 문제였던지라, 이 부분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직후, 아론 스팅레이 이사장은 학원 내에 남아 있는 당직자들과 후원기업 관계자들을 끌어들여 사건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악된 사실.

"6시 25분. 당시에 아카데미 내부의 마나농도가 갑자기 치솟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카데미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커다란 요새와 다름없지만, 이런 '마법적'인 부분의 방어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 외곽도 아니고, 거의 중심부에 위치한 트리니티 아카데미 빌딩에 '마나'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매일같이 '안티레인'이 흩뿌려지는 데다가, 도시 외곽에서 방비가 철저하다 보니 정작 내부에서는 철저히 대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하필이면 '안티레인'이 뿌려지지 않은 날에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고.

결국, 확실한 것은 이번 건을 통해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보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 * *

사건 직후.

나는 곧장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미 퇴근했던 교직원들과 이사진, 보안 담당자, 협력업체 관계자 등을 불러 이 사태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가 무능의 극치인 놈들 아니랄까.

원작에서도 거한 트롤링으로 몇 번이나 학생들을 위험에 빠뜨렸던 인간들인 만큼, 회의는 무의미한 공회전을 계속해 나갔다.

"마나 수치가 올랐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답니까? 원인이 마나로 인한 정신오염?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학생들 입단속부터 제대로 시켜야겠습니다. 원인이 확실하지도 않은 건을 갖고 마구잡이로 떠들어 대다가 언론이 물기라도 하면? 귀찮아질지도 모릅니다."

"학생들 치료비 말입니까? 듣자 하니 보험도 적용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걸 왜 저희가 감당해야 합니까? 애초에 치료를 받을 만큼 위험한 일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조금 눈치가 있는 인간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 계셔서 피해가 커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아내려면 조사단을 꾸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에 관련해서는 역시 스팅레이 시큐리티의...."

"저희 쪽 보험계약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듣자 하니 최근 스팅레이 화재 쪽에서 출시한 상품이...."

이번 회의에 실무자를 내보내지 않고 구태여 내가 참여했다는 점을 눈치 빠르게 캐치한 인간들.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머리들을 굴려댔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 내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요컨대 이 인간들의 머릿속엔 돈밖에 없었다.

내가 회의를 소집한 이유도 이번 건을 갖고 아카데미 쪽에서 돈을 뜯어내기 위함이라고 여기는 거겠지.

-학생들...

-학생들의 안전이....

-아카데미 보안 상태가....

이자들에게 있어 아카데미란 학생들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유통업체에 불과할 것이다.

기업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면서, 세금과 후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잇속을 채울 뿐.

트리니티 아카데미.

그 이름에 담긴, 인류를 위협한다면 신조차 정복해 보이겠다는 다짐은 이미 색이 바래 찾아볼 수조차 없다.

아마 이들에게는 올해 초 타이탄의 습격으로 죽어 나간 학생들 따위, 이미 안중에도 없을 터.

물론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우리 애들을 제외하면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나마 내 주변, 내 회사 사람들 정도나 조금 신경 쓸까.

엑스트라 한 명의 목숨까지 일일이 생각하기에 이 세계는 너무나 꿈도 희망도 없는 편이거든.

그러니 원래 같았으면 괜히 귀찮음을 감수하기보다는 그러려니 넘어갔을 것이다.

이 늙은 치들이야 뱃속에 욕심만 그득해서 트롤링하는 게 기본 패시브인지라, 그 역할을 해 주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곤란해질 정도다.

하지만...

"지금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저들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지금은 내 기분이 몹시 나빴기에.

"이런 걸 회의라고 하고 있나?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한 놈만 걸려라.

옷 제대로 벗게 해 주마.

* * *

그날 소집한 긴급회의에서, 나는 완전히 칼춤을 추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조목조목 짚어서 자근자근 팩트로 밟아 주었다.

학생 관리의 허술함.

교육 과정의 부실함.

교직원들의 횡령과 담합 등등.

사실 내가 이끄는 스팅레이 재단 역시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런 부분에서 완전히 깨끗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저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생각나는 모든 문제점을 되는 대로 입에 담아서 사정없이 그들을 후드려 팼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인간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려 가며 자신을 변호하고 내 비위를 맞추려 드는 꼴은 꽤 보기 좋았다.

당연하지만 내가 정의감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9할 정도는 그날 겪은 환각 때문에 기분이 불쾌해진 탓. 그냥 히스테리를 조금(?) 부린 셈이다.

다만 1할 정도는 진심이었다.

아니, 무능한 것도 정도껏이지,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자기의 잇속만 챙기려 드는 모습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물론 아카데미 내부에서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키려 계획하고 있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엔 뭣하긴 하다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안드로이드 반란을 통한 캐릭터들의 성장'이다.

그 과정에서 아무 관련 없는 인간들이 죽어 나가길 바라는 건 아니다. 당연히 나도 피해는 최소화하고 싶다.

문제는 이상 사태에 대응하는 아카데미 지도부의 무능함과 부패의 수준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

'이러다 우리 애들 다 죽어....'

농담이 아니라 극심한 상황에 몰리면 자기 살겠다고 학생들이고 뭐고 깡그리 밀어 버리고도 남을 만한 인간들이 몇몇 보였다.

'계획을 벌이더라도 일단 안전망은 만들어 두어야 할 거 아니야.'

주인공이 없는 만큼 시나리오의 난이도도 어느 정도 조절이 필요하겠지.

그런 심정으로 썩은 싹을 솎아내듯 회의 중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을 몇 명 추려서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근데 그놈은 안 걸리더라....'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민중파 출신 학원장, 조이 베넷도 이번 기회에 밀어 볼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가드가 단단했다. 내가 뭐라 지적할 때마다 능숙한 솜씨로 책임을 회피해 갔다.

몇 번의 공격 시도가 무산된 후에는 나도 깔끔하게 거기서 포기했다.

아무리 학원 지도부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시민 대표 학원장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공격하다 보면, 도리어 내가 책이 잡힐 수가 있으니까.

'참으로 복잡하단 말이지, 정치 문제는.'

힘으로 밀어 버릴 수 없다는 부분에서 더더욱 그랬다. 아니, 뭐 도시를 피바다로 만들 걸 각오한다면 못할 것도 없긴 한데, 지옥도가 된 뉴 발할라 시티의 모습은 나도 원치 않으니.

그런 고로, 이번 마나 테러 사건은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아카데미 지도부 몇 명이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되었다... 라는 내용을 오늘 아침 마리아의 보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음."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마리아가 정확히 내 기분을 캐치하고는 물어 왔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이번 사건의 결과가 100%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

"네, 도련님."

"나는 이번 건이 아시타교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그 '아라야'라는 놈의 짓거리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빙의자'에 '마나' 혹은 '마법'이라는 키워드라면 역시 그놈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만?"

"확실하게 그들의 범죄를 의심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단은 제대로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용의자를 너무 의심하는 바람에 사고의 폭이 좁아져서 진범을 놓치는 경우도 벌어질 수 있을 테니까.

"알겠다. 참고하도록 하지. 오늘 보고는 이상인가? 끝이라면 돌아가 봐도 좋다."

"아뇨.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이걸 보여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

"링크를 드리겠습니다."

곧장 돌아갈 줄 알았던 마리아가 이리 말하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그녀가 넘겨준 링크를 통해 들어간 사이트.

일종의 학생 커뮤니티 사이트인 듯했는데, 마리아가 넘겨준 링크 글의 제목은 이러했다.

[제목: 젊은 이사장의 참교육 영상]

내용: 꼰대들 팩트에 쫄아서 암말도 못함 ㅋㅋ

함께 첨부된 동영상에는 내가 학원 지도부들을 열심히 까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94화

홀로스피어(HoloSphere).

뉴 발할라 시티 내에 존재하는 모든 대학을 지원하는 대학교 커뮤니티 및 시간표 서비스로, 학교별 익명 커뮤니티 기능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트리니티 아카데미 역시 지원하는 대학 중 한 곳이었는데, 현재 트리니티 아카데미 커뮤니티 게시판의 논란이 된 인물은... 다름 아닌 나였다.

-당신들이 학생들의 편의와 복지를 제대로 신경 쓴 적이 있었나? 기존에 있던 풍경 패널은 하루 종일 광고가 흘러나오도록 했고, 인공정원에 있던 동물형 로봇들은 전부 값싼 홀로그램으로 대체했지.

-일반 학생들의 피복비와 급식비 예산은 더 삭감했지. 그러면서 매점의 가격은 올렸다. 대체 누가 원했던 거지?

-보안. 이렇게 뻥 뚫린 보안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질 건가? 내 학생들이 다칠 뻔했다. 만약 이번 사건으로 인해 영구적인 후유증이 생겼다면 어떻게 책임질 거지?

그 밑의 댓글들을 확인해 보니 반응이 꽤 뜨거웠다. 아니, 뜨겁다 못해서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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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시대의 GOAT입니까.

-간지 개쩌누 ㅋㅋㅋ

-아론 이사장 진짜 대박이다 ㅋㅋ 할배들 벙쪄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 봐

-솔직히 울 학교 매점 ㅈㄴ 양심 없이 비싸긴 했음. 생각해 보니 괘씸하네. 학비도 제일 비싼 편이잖아

-잘생겨따! 잘생겨따! 잘생겨따!

-이 사람 누구임?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이런 스타일 처음 봄 ㅠㅠㅠ

-꼰대들 뚝배기 터짐 ㅋㅋㅋ

-이거 보고 개같이 스팅레이 들어가기로 했다.

-들어갈 수는 있고?

-----

"...."

댓글 반응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자니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이 게시글 외에도 다른 영상이 올라간 글을 보시면...."

"그만."

나는 마리아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선 게시글 창을 다소 거칠게 닫어 버린 뒤 지시했다.

"위자드를 풀든 뭐든 해서, 이거 올린 놈 찾아내라. 그리고 이 이상 영상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아라."

그러자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유에서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스팅레이 재단의 이미지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가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만."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우리 재단의 선택을 받길 바라는 학생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대한민국에서 서울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 것처럼, 스팅레이 재단은 굳이 홍보할 필요 따위는 전혀 없다.

굳이 이런 동영상 따위로 뭔가 긍정적인 효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것부터가 멍청한 생각이다.

"분명 비공개 회의였다. 참가한 사람들을 뒤져 보면 촬영자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것도 시간문제지."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카메라의 위치상으로 추측해 보자면 조이 베넷 학원장이 촬영했을 가능성이 높은 듯합니다."

조이 베넷.

아시타 교의 물을 먹은 학원장.

"그렇다면 더더욱 막아야겠지. 그놈의 목적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 좋으라고 한 짓은 아닐 터다."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그래."

"학생들의 평가가 긍정적임에도 그렇습니까?"

"커뮤니티 여론이란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게 그 특징이지. 한 번 이목을 끌면, 그 후에는 사소한 행동에도 주목을 받게 된다."

다른 때였다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시기가 영 꺼림칙했다.

게다가 상대가 상대였다.

조이 베넷.

그는 내 적이었다.

그런 그가, 내가 '학생회 설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했다?

그것도 '아라야'가 범인일지도 모르는 환각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수상하다.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으로선 놈이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고, 또 범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목적은 미지수다. 하지만 뭐가 됐던 간에 녀석이 바라는 바대로 움직여 줄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조용히 처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추가로."

나는 지시를 덧붙였다.

"내가 없는 동안 계속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를 체크해 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도련님."

그렇게 이번 건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마리아를 사무실에서 내보내고 나는 고민에 잠겼다.

'이번 일의 범인이 아라야라면? 대체 목적이 뭐지?'

그 환각은 뭐였지? 스팅레이 그룹을 비롯한 다른 기업들의 추적을 피하며 도망치는 와중에 어떻게 그런 능력을 습득한 거지?

그리고 목적은 뭐지?

아카데미에 피해를 주려고?

그러기에는 너무 피해가 적었다. 그렇다면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뭐지?

또 어째서 부하를 이용하여 아카데미 학생들의 여론을 움직이려고 하는 거지? 내 지지율을 높인다고 해서 그 녀석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대체 뭐지?

조이 베넷 학원장이 영상을 올렸다는 증거가 나오면 그를 추궁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뭐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왜 그랬냐고 물어도 "당신의 발언에 공감해서 그랬습니다. 함부로 얼굴을 촬영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식으로 받아치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니까.

여러모로 고민해 봤지만 마땅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에 빠진 채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 * *

그리고 그날이 다가왔다.

[신비]들에게 빼앗긴 V시리즈 모듈 생산 콜로니 탈환 작전 당일, 나는 특별반 아이들을 소집했다.

"모두 모였군."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집합한 아이들. 이미 미유의 손을 거친 전투복으로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참고로 내가 일부러 장비의 수준을 어느 정도 제한해 뒀기 때문에 다소 가벼워 보이는 차림이었다.

1부 4막 당시처럼 Lv.4등급 파워드 수트로 단단히 무장한 게 아니라, 대부분 평소에 사용하던 장비들만을 착용하고 있었다.

'실전을 경험하고 합을 맞추기 위해서 가는 건데, 장비빨로 밀어붙이면 그 의미가 퇴색되니까.'

아이리는 흉갑과 각반 등의 보호장구로 가장 단단히 무장을 했다.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보조무기로 권총을 선택했다.

사일런스는 역시나 가벼운 옷차림.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계열 방어구와 단도. 그리고 아이리와 비슷하게 권총을 장비했다.

아이리와 함께 전선에 나서야 하는 레이나는 유탄발사기가 달린 소총을 들었고, 등에는 정체 모를 커다란 짐을 메고 있었다.

레이나의 전투 스타일은 원작에서든 여기서든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이 없어서 잘 상상이 안 간다.

뭐, 이건 나중에 살펴보면 되겠지.

미유는 평소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시엘은 몸에 쫙 달라붙는 수트를 입었다. 테크위자드들이 종종 사용하는 딥다이브용 수트인 듯했고, 몸 이곳저곳의 파츠를 갈아 끼웠는지 몸의 라인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안구 스캐너를 쓰면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본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것 같진 않았기에 그만뒀다.

이렇게 보니 참 특별반의 조합이 중구난방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뭐 어쩌겠는가. 다 내가 데려온 녀석들인데.

그리고 다들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니 잘 성장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특별반의 면면들을 확인한 나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준비됐나?"

"네!"

"준비됐다면 이동하지."

나는 스팅레이 사무실 바깥에 있는 비행차량용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이미 스팅레이 마크가 떡하니 그려진 비행형 장갑차량이 시동을 켜 둔 채 대기하고 있었고, 파워드 수트와 스팅레이 제식 대구경소총으로 무장한 보안 인력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경례를 올려붙였고, 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장갑차량 안쪽으로 몸을 실었다.

뒤이어 특별반 아이들이 차량에 탑승했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마자 뒷문이 스르륵 닫혔다.

위이이잉-!

차체가 공중에 뜨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있는 세상이지만, 막상 정말로 이렇게 날 수 있는 것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정말로 소수에 불과했다.

이 녀석들 중에 하늘을 날아 도시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다들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그나마 아이리와 미유는 나를 몇 번 따라다녀 봤다고 조금 익숙한 티를 내었고, 사일런스는 무반응. 레이나와 시엘만이 초심자다운 반응을 보였다.

"아이리, 저것 봐요! 사람들이 꼭 쓰레기 같이 보여요!"

"그렇지? 나도 저번에 타 봤을 때 생각보다 되게 높이 날아서 놀랐... 응? 잠깐. 쓰레기? 개미가 아니라?"

"저기... 시엘? 이동할 때까지 조금 시간이 남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요오... 실은 어제 메인터넌스를 하면서 시엘의 등에 새롭게 파츠를 부착했거든요오? 근데 실은 그 파츠가 얼마나 귀여운 거냐면요오...!"

"제, 제발 노여움을 푸세요, 미유 님! 시엘이 잘못했어요! 지금 2주째 같은 얘기를 하고 계시다구요...!"

소풍이라도 가는 듯이 재잘거리기 시작하는 여자아이들.

오타쿠로서 이런 광경을 싫어하지 않았기에, 딸부자 아빠가 된 마음으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왜, 왜 나만 남자인 거지?]"

구석에서 혼자 외로워하는 사일런스.

어...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한단다.

근데 한동안 남캐가 들어올 예정은 없는데 어쩌지.

멋대로 죽어 버린 주인공을 탓하렴.

* * *

생산 콜로니.

말하자면 도시 외부에 있는 공장이지만, 굳이 '콜로니'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쪽이 간지가 나기 때문... 은 아니고 그 커다란 규모 때문에 그렇다.

중소형 콜로니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중소형 도시 정도의 면적을 자랑한다. 안쪽에는 제품 생산을 위한 공장단지, 에너지 생산을 위한 발전시설, 직원용 주거단지, 콜로니 거주민들을 위한 번화가,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까지 꽉꽉 들어차 있다.

굳이 그런 시설을,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뉴 발할라 시티 외부 지역에 만들 필요가 있냐 묻는다면 당연히 경제 논리를 꺼내 들어야 한다.

안 그래도 인구포화 때문에 땅값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도시 내에서 이만한 생산시설을 갖추려고 하면 미친 듯한 세금과 토지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금이 별로 안 나가고, 토지비용도 싼 외곽 지대에 이런 콜로니를 짓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든 기업의 모든 콜로니의 인구를 합치면 4000만 정도라고 했던가?'

대한민국이 하나 뚝딱 나올 수준이다.

뉴 발할라 시티 쪽의 인구와 합치면 대충 1억 1천. 거기다 시민ID가 등록되지 않은 인간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것들까지 합치면 대략 1억 4천 내외로 추정된다.

'새삼 되게 좁은 것 같으면서도 넓은 세상이란 말이지.'

바깥을 내다보니 한없이 펼쳐진 황무지에 새하얀 돔 같은 게 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장거리 이동에 지쳤는지 애들이 전부 자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빼고.

"이제 도착했나요?"

나름대로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는지 아이리만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기특하게 느껴져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도착했다."

우리의 첫 전장에.

아카데미 흑막 시점 95화

우리가 탄 비행형 장갑차량은 V7 콜로니 남쪽 구역에 있는 방공시설에 착륙했다.

일반적으로 콜로니는 수많은 구획으로 나뉘어 상황에 따라 개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마치 군함처럼 일부 지역이 침공을 받아 못 쓰게 되더라도 다른 지역을 방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콜로니에 거주하던 직원과 가족들은 일찌감치 남쪽에 있는 거주 지역으로 대피를 완료했고, 침공했던 타이탄들은 어째서인지 남은 주민들을 노리지 않고, 뉴 발할라 시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그 덕에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말에 나는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닌 척해도 조금은 찜찜했거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리는 착륙장에서 대기하던 보안책임자와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안전 구역으로 이동했다. 내가 먼저 앞장섰고, 그 뒤를 차례대로 특별반 아이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지하에 있는 방어시설은 마치 카타콤을 현대화시켜 놓은 듯한 이미지였다. 미로처럼 얽힌 긴 복도를 걷다 보니, 주민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이 옆길로 비켜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들?"

"예? 앗, 아아앗!"

나보다 그들의 존재를 늦게 눈치챘는지, 인솔하던 콜로니 보안책임자가 경악하며 다른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식겁한 얼굴로 부리나케 아이들을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 버렸고, 인솔자는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미처 저 부분까지 신경 쓰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신경 쓰지 말도록."

뭐,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원칙상으론 보안부 소속 병사가 아니면 이쪽에 드나들면 안 되는 게 맞지만 사실상 재난상황이 아닌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질 생각은 없다.

물론 상대가 이런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마 보안부 사이에서도 이런 데에 깐깐한 아론 스팅레이의 성격은 유명했던 거겠지.

당연히 그가 원칙주의자여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성격이 오만하고 더러운 편이어서 그런 거였을 테고.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내가 뭐 애들 잡아먹는 괴물이라도 되는 양 반응하면 솔직히 좀 상처받는다. 이전의 아론 스팅레이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하고, 괜히 입맛이 씁쓸해진달까.

"...주민들 상태는 어떻지?"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또다시 당황하는 보안책임자.

정말 못 들었다기보다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뭐, 그래도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이런 상황이지 않나."

"아, 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본사 쪽에서도 이쪽에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 주고 있었으니까요."

상대도 책임자답게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본사에서 콜로니 탈환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던 만큼, 식량이 부족해진다든가 괴물들을 피해 벙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든가 하는, 그런 아포칼립스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탈환 작전 역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가, 갑자기 트롤 무리가 대규모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난관에 부딪친 거라나 뭐라나.

내가 놀란 것은 이 다음이었다.

그런 대화를 나눈 직후.

보안책임자라는 양반이 지나가듯이 한마디 내뱉는 게 아닌가.

"스팅레이 이사장님은 소문과 다르게 굉장히 상냥하신 분이로군요."

"...."

제 딴에는 칭찬이랍시고 했겠지만, 나는 그걸 듣는 순간 '이 새끼 미쳤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물론 칭찬의 의도를 담은 말인 만큼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이게 과연 한참 윗사람에게 해도 되는 말인가 묻는다면... 좀 아니지 않냐?

자세히 살펴보니 이 남자, 보안책임자 치고는 높은 사람을 많이 상대해 보지 않은 듯했다.

갑작스레 이런 책임자 자리에 앉게 된 케이스일까? 군기는 바짝 들었는데 약간 어리바리하다고 할까, 뭔가 정신세계가 남들보다 조금 붕 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걸로 일일이 주의를 시키는 것도 귀찮았다.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자네, 이름이 뭐지?"

"패튼이라고 합니다. 조슈아 패튼."

"...."

패튼.

어쩐지 이름에서 똘기가 넘치더라니.

원래 내 세계 쪽에 있었던 그 2차 대전 당시의 미친 장군이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원작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름이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이름을 확인했으니 지금 내 옆을 반 발짝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마리아가 나중에 알아서 처리하겠지.

"오늘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 오셨으니 이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 믿습니다!"

"그래."

뭐, 콜로니가 무너져서 생산이 중지되었다는 점에서부터 최선의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상황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타이탄 놈들을 미리 막지 않은 탓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나머지는 오늘 책임지고 해결하면 되겠지.'

오늘이야말로 비로소 이번 건을 확실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줄곧 마음에 담아 두었던 큰 짐을 하나 덜어 낼 수 있을 듯하여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지금부터 작전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작전명 V7.

거창하게 작전명까지 붙이기는 했지만 결국 생산시설을 점거한 트롤들을 없애고 되찾는 것이 작전의 내용이었다.

사실 이름도 전혀 거창하지 않은 것이... 이거, 여기 콜로니 번호 그대로 갖다 붙인 거잖아.

이거 작전명 누가 붙였냐.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아마도 지금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는 저 녀석이겠지. 저 패튼인지 뭐니 하는 저 자식 말이다. 증거는 없지만 틀림없어.

"현재 [신비]들에게 빼앗긴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커다란 3D 홀로그램 영상이 우리의 앞에 사출되었다. 커다란 돔 형태의 콜로니 전체의 모형이었는데, 북쪽이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완전히 무너진 형세였다.

그것을 확대하자 돔의 안쪽에 있는 공장 지역의 지도가 펼쳐졌다. 수십 개의 생산 공장이 격자무늬처럼 배치되어 있었는데, 가장 남쪽인 거주 지역에 맞붙어 있는 공장들을 제외하곤 전부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대충 전체에서 3분의 2정도 될까?

"이 붉은 표시가 된 부분들이 [신비]들에게 점령당한 지역입니다."

원래는 거의 모든 지역을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었는데, 2주 전에 돔 북쪽에 뚫린 구멍으로 트롤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바람에 다시 전선이 후퇴했다는 모양.

그리고 이내 몇 군데의 색이 바뀐다.

"그리고 마나감지기로 확인해 본 결과, 이곳과 이곳, 이곳은 이계화가 진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계화.

마나가 모이면 현실을 뒤틀어 버리는 왜곡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왜곡 현상이 넓은 범위에 걸쳐 일어나는 바람에 아예 다른 세상처럼 변해 버리는 일을 '이계화'라고 부르곤 한다.

이계화된 지역에서는 [신비]들의 능력이 한층 더 강해지는 경향이 보이고, 평범한 인간들은 높은 마나농도 때문에 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마치 방사능지역처럼 평범한 병사나 전용 사이버웨어를 장착하지 않은 증강자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세포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적응자들은 체내의 나노머신 덕분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서, 일반 병사나 증강자보다 훨씬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이계화 단계는?"

"트롤들의 침공 시기와 드론으로 측정한 마나농도로 보아 아직 1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듯합니다."

이계화에도 그 농도에 따라 단계가 다섯으로 나뉜다. 앞에 붙은 숫자가 높아질수록 그 위험도가 높아진다.

1단계는 그냥 현실과 이계가 뒤엉켜 있는 상태라면, 5단계는 아예 다른 세계의 차원이 현실을 덮어 버린 상태.

이 5단계를 속된 말로 '눌어붙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는데, 마치 껌이 단단히 붙은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서 쉽게 현실과 이계의 차원을 떼어 내기 어렵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뭐 지금은 1단계에 불과하다니까 거기까지는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지금 내 스펙이면 4단계까지는 혼자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추가로 신경 써야 하는 점은?"

"설비를 최대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사장님과 아카데미 학생분들께서 지역 토벌을 마쳐 주시면, 그다음 역할은 저희가 이어 가겠습니다."

가능하면 시설 피해도 최소화하고 싶은 모양이군. 보안책임자라면 당연한 생각이다.

트롤과 기타 등등 잡스러운 괴물들을 싹 쓸어버리고 나면 기다리던 다른 보안부 병사들이 들어가서 일할 차례다.

안티레인에도 들어 있는 마나를 지우는 약품을 분사기로 열심히 뿌리다 보면 이계화도 저절로 풀릴 테지.

자, 그럼.

"아이리."

"...네?"

"네 차례다."

나는 아이리에게 이 콜로니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계획을 짜고, 발표할 준비까지 해 두라고 지시해 두었다.

"아, 알겠습니다."

아이리는 긴장한 기색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 온 자료들을 이용하여 어떤 포인트에서 어떻게 진입할 것인지, 이동경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에 대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해 나갔다.

물론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어설프기 그지없는 내용일 것이다.

애초에 나 혼자만으로도 정리할 수 있는 현장에, 구태여 학생 팀이 함께 들어가서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일이었으니.

하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성장의 재료가 되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브리핑에 참여한 다른 병사들도 내가 이 녀석들을 참여시킨 의도를 이해한 건지, 어설픈 브리핑에도 그녀의 계획을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특히 조슈아의 경우, 진지하게 아이리의 발표를 듣다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던져 주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리가 처음이라 벌어지는 몇몇 실수를 커버해 주기까지.

'눈치 없는 놈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자기 분야에선 괜찮은 인간이군.'

그렇게 내 속에서 조슈아 패튼이란 인간의 평가를 조용히 고치고 있자니, 아이리의 발표가 끝났다.

그리고 모두의 눈길이, 총책임자인 내 쪽으로 향했다. 내 한마디면 아이리가 세운 작전이 받아들여질지 반대로 나가리가 될지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뭐, 당연하게도.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좋다. 이대로 가지."

* * *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스팅레이 V7 콜로니 보안책임자, 조슈아 패튼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아론 스팅레이... 이런 사람이었나?'

아론 본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그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 아론을 만난 적이 있었다.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것도,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만났던 아론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인간이었다.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놈.'

말투나 시선, 태도.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자기 발밑에 있는 버러지쯤으로 바라보는 듯한 인간이, 바로 아론 스팅레이었다.

물론 그가 지닌 압도적인 무력이나 타고난 혈통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슈아는 아론에 대해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절대 좋아할 수 없는 부류'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V7 콜로니가 무너진 것에서도, 조슈아는 아론을 무척이나 원망하고 있었다.

직원 피해가 거의 없다고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이곳이 이런 꼴이 되었던 것 역시 아론이 적절한 시기에 도와주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아론이 그런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연민 따위를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직원과 그 가족들이야 괴물들에게서 도망쳐서 한 달 넘게 지하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땅을 파먹고 살든지, 어차피 자신과 관련도 없는 하층민들의 고생이니 관심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는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주민들은 어떻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묘한 연민은 물론 죄책감이 느껴졌다. 또한 금지구역에 멋대로 들어온 아이들을 보고서도 너그러이 넘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누구 한 명쯤 목을 날려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인간이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의 그라면 작전 브리핑이고 뭐고 듣기도 전에, 깡그리 무시하고 전장에 멋대로 들어갔을 것이다.

고레벨 적응자로서 재해급의 힘을 멋대로 휘둘러서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곤, 책임자들에게 '겨우 이 정도로 날 불렀나?'라며 실컷 무안과 면박을 안겨 주고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훌쩍 떠났겠지.

하지만 오늘은 역시 달랐다.

오늘의 아론은 자신이 후원하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데려와 그들이 현장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중병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더니 깨달은 게 있었나?

조슈아로서는 그의 태도 변화에 어찌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상대가 아론 스팅레이라는 것을 잊고 말실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쩝. 조심해야지.'

왠지 모르게 착해진 아론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다지만, 다음부터는 얄짤없을 것이다.

뭐, 어쨌거나.

'조금 궁금해지는걸.'

어째서 아론이 갑자기 바뀐 것일까.

추측컨대 아마 높은 확률로 이번에 함께 데리고 왔던 아이들이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만약 그 추측이 맞다면, 과연 어떤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기에 아론이 그렇게 바뀌게끔 만든 것일까?

그렇게 호기심은 점점 커져 갔고.

"...모듈 온라인."

결국 참지 못한 그는, 몰래 직접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96화

[격벽을 해제합니다.]

철컥! 쿠구구궁!

주거 지역과 공장 지역을 차단하던 격벽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치 은행 금고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철문이 열렸고, 지상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나를 반기었다.

단단히 닫혀 있던 격벽은 괴물의 손톱자국으로 보이는 커다란 흠집들이 나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폭발의 그을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진짜 괴물들이 있었던 거군.'

멀리서 풍겨 오는 퀴퀴한 냄새.

형언하기 어려운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어디서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다 싶었더니, 사냥터에서 나던 냄새와 비슷했다. 비슷한 종류의 [신비]들이 돌아다니기라도 하는 걸까.

혼자만의 시간이다.

줄곧 업무에 치여 왔으니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있었다.

'분명 숨겨진 시설이 있을 거야.'

내가 인적자원개발 재단 이사장으로서 '인재 영입'에 관해서만 손을 대고 있기에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 일이지만, 사실 스팅레이 그룹은 악(惡)의 조직이다.

'절대로 발령받아선 안 되는 부서'의 존재만 봐도 그렇다.

스팅레이 그룹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복지도 빵빵한 대기업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권 따위 개나 줘버린 뒤숭숭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놈들이다.

인간을 돌연변이 괴물로 만든다든가 하는 건 귀여운 수준이고, 혈관에 마나를 투여해서 인공정수를 만들어 내는 실험, [신비]와 인간의 몸을 합친 키메라를 만드는 실험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당장 우리 삼형제만 봐도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놈들이니까....'

이건 내 추측인데.

아마 회장 직속 부서들에서 진행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빙의하기 전 아론이라면 이런 거에 별다른 관심이 있었을 리가 없고.

회장도 굳이 자식들에게 이것을 공유해 줄 리도 없다. 물론 이에 대한 정보를 아예 모르지는 않겠지.

아무튼.

원작의 묘사로는, 이 새끼들은 콜로니마다 꼭 이상한 실험실을 하나씩 숨겨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는 했다.

도시에서 그런 비밀 실험을 진행하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니까. 자칫 폭발이 일어난다든지, 실험체가 탈주한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면 골치 아프다.

그러니 이곳 V7 콜로니에도 내가 모를 뿐이지, 남들 눈에 띄어선 안 되는 비밀 실험실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걸 찾아낸다.'

언젠가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을 때, 분명 그 정보가 회장의 목덜미를 조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곳이 원래 모듈 생산 공장이었던 만큼, 이곳에 있는 비밀 실험실에서도 그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운이 좋다면 성능 좋은 시제품 같은 걸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비어 버린 소켓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아주 쓸 만한 물건이 말이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그건 너무 바라는 것이려나.'

정확히 그 실험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신비]들이 차지해 이계화가 된 공장 지역에 그 실험실이 있으리라고도 확신하기 어렵다.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인해 본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스캐너가 있으니만큼 열심히 돌아다니다보면 운 좋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못 찾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애초에 그리 쉽게 발견될 리는....

'...있네.'

한 시간 정도.

내가 맡은 공장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

물론 내가 가진 스캐너의 성능이 뛰어나서 발견한 건 아니고, 주변이 이계화되어 기상천외한 광경으로 변해 있는 와중에 혼자 아무 영향 없이 멀쩡하게 남아 있는 문이 있더라고.

문의 옆으론 숲이 있었다.

원래는 자동화된 공장을 관리하는 시스템 제어실이었는데, 이계화의 영향 탓인지 온갖 풀과 꽃이 이곳저곳에 자라고 있었다.

기다란 생산 라인의 컨베이어 벨트에는 이끼가 잔뜩 끼었고, 어디서 굴러 왔는지 모를 바위가 우두커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둥과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길게 줄기를 뻗어 있었고, 공장 한가운데는 500살 정도는 먹어 보이는 나무가 뜬금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설비를 남긴다고 해도 이걸 재가동하려면 고생 꽤나 하겠군.'

저걸 정화하고 물건들을 처리하고 하려면 시간이나 인력 모두 꽤 필요할 테니.

곳곳에서 숲고블린이나 트롤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것들이 튀어나왔지만, 그거야 뭐 손가락 한 번 튕기면 알아서 사라지는 것들이고.

분명 콜로니가 무너진 지 한 분기도 되지 않았는데 인류가 멸망한 지 100년쯤은 된 듯한 이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다가.

문득 발견했다.

혼자서 세월의 흔적을 고고하게 비켜나간 듯한 느낌의, 멀쩡하기 그지없는 문을 말이다.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

반도체를 만들 때 먼지 하나 섞여 불량품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듯, 이 세계에서는 마나가 섞여들어 에러를 일으키지 않도록 공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미유만 하더라도 기숙사 작업실을 개조할 때 마나 방어설비를 설치해 놨고, 덕분에 지난번 환각 사태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근데 모듈 생산라인조차 이계화로 침식당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수상하다.

여기에 뭐가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이상하다.

'당연히 들어가 봐야겠지?'

나는 스캐너를 통해 출입구와 연결된 회선을 찾아냈다.

관리실 쪽에 있던 컴퓨터로 개폐를 조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대충 만져 보려고 했는데, 전기가 끊겨서 조작할 방법이 없었다.

'폐쇄회로인 것 같으니 시엘한테 연락해도 소용없으려나?'

거참 상황이 안 따라 주네.

이게 게임이었다면 대충 근처에 열쇠가 놓여 있거나, 컴퓨터 암호 슥슥 조작하면 쉽게 열 수 있도록 해 놨을 텐데. 하기야 뭐,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전문적인 기술을 익혔다고.

'하는 수 없구만.'

내가 제일 잘 하는 방법을 써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문 앞에 섰다.

"모듈 온라인, [테크 블레이드]"

위이이잉.

내 손에서부터 검은 몸체의 환도가 순식간에 자라났다. 손목을 살짝 까딱거리자, 공기 마찰로 인해 칼날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두꺼운 철문인데도 칼에는 저항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두부를 써는 듯한 감각이 살짝 느껴졌을 뿐이었다.

스릉.

나는 모듈을 비활성화하여 검의 소환을 해제했고, 이내 두꺼웠던 철문이 앞으로 무너지며 큰 소음을 냈다.

가급적이면 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으니 어쩌겠는가.

짧게 심호흡하며 각오를 다잡았다.

악의 대기업 스팅레이 그룹의 비밀 실험실이니 어떤 끔찍한 광경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통 속에 둥둥 떠 있는 눈 달린 뇌나, 아니면 시체를 이어붙인 골렘 따위가 나올지도 모르지.

지하로 깊숙하게 이어진 내리막길에서 서늘한 공기가 불어왔다. 이쪽도 전기가 나갔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조금 불편한 감은 있었지만 이 먼치킨 육체는 이 정도 어둠도 별로 상관없었다. 스캐너 안구를 이용하여 시야를 적외선 카메라로 전환하니 대낮처럼 시야가 밝혀졌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끝까지 들어가니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는 격벽. 이쪽도 비상 발전기가 나가 버린 듯, 오른쪽에 있는 생체인증 패널도 먹통이 된 채 작동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어차피 비밀번호 따위는 몰랐고, 괜히 보안 같은 게 살아 있다가 날 침입자로 인식해서 공격해 오면 골치 아프다.

아니, 생각해 보니 차라리 그쪽이 낫겠다. 만약에 침입자 들어오자마자 연구자료 자동 파기하는 시스템 같은 게 있었다간 그냥 나가리니까.

이번에도 나는 격벽을 검으로 잘라 냈고, Lv.5 신비모듈의 힘 앞에 두꺼운 철문은 마법의 물리주문 '알로호모라' 앞에서 놀랍도록 쉽게 열렸다.

그래, 게임에서도 그냥 힘 스탯 만땅이면 보안이고 자시고 문 부숴서 열더라.

그러던 중 문득 드는 생각.

'아, 생각해 보니까 이쪽도 전기 나갔으면 자료들은 무슨 수로 확인하지?'

컴퓨터는 켜지지도 않을 거고, 냉동보관 창고 같은 것도 전부 작동을 멈춰 서 녹아 버렸을 거고. 과연 멀쩡한 게 남아 있으려나?

비밀 출입구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땡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다.

'뭐, 종이 자료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 왜, 중요한 국가기밀문서들은 해킹이나 데이터변질 같은 것들을 염려해서 종이서류를 이용하여 보관한다지 않나? 어쩌면 이곳에도 그런 것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비밀실험실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나를 쫓아 온 트롤들이 몇 마리 있었긴 했는데.

"쿠워어어어어어!"

"쯧."

그냥 손가락 몇 번 튕겨서 실을 쏘아 주었더니 'ㅌ/ㅡ/ㄹ/ㅗ/ㄹ'로 변해 버렸다. 내가 했지만 이 정도면 마장동 고깃집 사장님도 날 우러러보지 않을까 싶다.

'그러게 왜 와서 죽어 주니, 왜.'

안 그래도 바쁜데 귀찮게 굴지 좀 말았으면 좋겠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실험실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유용한 정보는 없었다.

아니, 사실 자료가 뭔가 많긴 많았는데 게임하고 다르게 그냥 슥슥 읽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단 말이지. 전문용어랑 수식이랑 암호랑 이것저것 뒤엉켜 있어서 알아먹기 힘들다.

'좀 더 직관적인 거 없나? 인체실험의 증거라든가, 고문도구라든가, 아니면 뭐 영화에서 보던 그런 것들....'

사실 지금까지 발견한 자료들을 전부 바리바리 싸들고 가든, 내용 스캔하든 해서 미유한테 보여 주면 뭐에 관련된 실험인지 직빵으로 알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만약 정말로 끔찍한 내용의 실험이었을 경우, 미유가 받을 충격은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아빠는 우리 딸이 12세 이용가만 보면서 밝고 순수하고 명랑하게 자라길 원해요.

뭐, 아빠 운운은 헛소리로 치더라도, 괜히 스팅레이 그룹의 추악한 면모를 미유에게 보여 줘서 좋을 건 없었다.

아직 지금의 호감도 수준으로는 미유가 나까지 경계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혹여 그 사실이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스팅레이 회장이 미유를 처리하기 위해 닌자 부대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어떡하지. 그냥 돌아갈까?'

나는 내가 들어왔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 실험실을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이다. 즉, 지금이 아니면 다시 이 비밀실험실을 찾아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중요해 보이는 자료들 위주로 스캔해서 들고 가자. 해석은 나중에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비밀 실험실 곳곳을 돌면서 자료들을 찾아 스캔하기를 반복했다.

실험실도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기에, 차례대로 돌면서 자료들을 찾아 중요해 보이는 것들을 스캔해 나갔다.

그러다 가장 안쪽, '3번'이라는 마크가 새겨진 문을 뜯고 강제로 들어갔다. 이 와중에도 우르르 몰려와서 죽어 주는 트롤들은 참으로 능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게임 개 같이 하는 놈들을 트롤러라고 부르는 건가.

3번이라고 적힌 방은 실험실이라기보다는 실험샘플 보관창고처럼 보였다.

여기서라면 가장 직관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조금 그럴듯한 모양을 한 유리용기의 내용물은 전부 정체를 알 수 없는 곤죽으로 변해 있었다. 인간 뇌나 장기 같은 게 들어 있었으면 빼박이었을 텐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캐너를 이용하여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던 그 순간.

번쩍!

창고 안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빛이 번쩍였다.

'드디어 뭔가 찾았나?'

대박의 조짐에 나는 서둘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이내 그 초록색 불빛이 새어 나왔던 곳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한순간 숨을 삼켰다.

'이거 설마...!'

아니, 이게 여기 왜 있는데.

아카데미 흑막 시점 9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