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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제15편 비상하는 불새 (3)

지하에서는 오래 걸었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땅 위로 걸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온 지 1시간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버려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저번 삶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무너지고, 숲과 동화되어 가는 집들과 흔적도 남지 않은 텃밭들.

우물도 마찬가지였다.

저번 삶에서 아드리아와 내가 탈출했던 우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반쯤 무너진 채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 사람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준비한 줄을 우물 옆 나무에 묶은 뒤 후안에게 말했다.

"오기 전에도 말했지만, 후안은 여기 남아서 지켜 주었으면 좋겠어."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았다.

역시 후안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네. 알겠습니다."

짧은 그의 대답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오늘도 이곳에 왜 온 것인지, 내가 불새 사냥꾼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나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치료비를 준 은인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입이 무거운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자신이 기다려야 할 마지노선을 알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해가 질 때까지."

"알겠습니다.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저택에 알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의 지하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출구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후안과 나는 묶어 놓았던 줄에 내 검을 묶어서 우물 아래로 내려보냈다.

철썩.

잠시 뒤, 마른 우물 바닥에 검이 닿는 소리가 들려왔고.

휙.

내가 먼저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줄을 안 잡고 가시면...."

위에서 후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계속 벽을 박차며 아래로 떨어졌다.

어차피 저번 삶에도 아드리아와 나는 아무런 보조 장비 없이 이 우물을 올라왔었다.

그때보다 실력이 더 좋아지고 몸 상태도 좋은데 내려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예상대로 내 뒤를 따라 불새 사냥꾼이 뛰어내렸다.

그녀는 벽에 발을 대고 속도를 줄인 나와 달리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슈우욱!

그녀는 내 옆을 지나 먼지 바닥에 내려섰다.

쾅! 츄악!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려 있던 물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턱!

뒤이어 나도 바닥에 내려섰다.

물이 튀어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우물과 연결된 동굴은 저번 삶과 다르지 않은 곳에 그대로 있었다.

"저리로 가면 되는 거지?"

"네."

그녀는 품에서 꺼낸 등에 불을 붙인 뒤, 한 손에 들고 동굴로 들어섰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흥분한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말수가 줄고, 지금처럼 서둘러 움직였다.

거기다 내가 어떻게 이곳을 찾았는지 궁금할 텐데, 그녀는 묻지 않았다.

나는 흠뻑 젖은 검을 줄에서 푼 뒤에 검을 끌고 그녀를 쫓았다.

동굴을 지나가면서 저번 삶과 같이 동굴의 생명체를 여럿 만났다.

마물은 아니었지만, 지상의 생명체와는 꽤나 모습이 다른 생명체들이었다.

곤충이나 눈이 퇴화한 동물 중 많은 수가 그녀가 들고 있는 등의 불빛을 보고 몸을 피했지만, 일부는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못하게 했다.

앞장선 그녀가 열심히 검을 휘둘러 준 덕분에 나는 품속에 넣어 둔 단검을 뺄 필요도 없이 큰 검을 질질 끌고 그녀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뒤, 우리는 동굴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에도 커다란 문양, 비상하는 새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 저번에는 반대로 나와 못 본 거였구나.'

불새 사냥꾼은 철문에 그려진 문양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저번에는 반대로 왔기에 쉽게 문을 열었지만, 이쪽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같은 문양의 검을 가지고 있으니 들어가는 법도 알고 있겠지.'

못 들어갈 수도 있지만, 나 혼자 요새 지하 쪽 샛길로 들어가 문을 열어 주면 되니,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다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철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문에 마나를 흘리는 건가?'

그녀는 그냥 문양을 쓰다듬는 것이 아니었다.

마나가 흘러나오는 손이 일정한 형식으로 문양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발로 시작해서 활짝 펼쳐진 날개에 이어 머리와 두 눈으로.

양손으로 두 눈을 누르는 순간, 문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그녀가 힘을 주어 문을 밀자.

끼이익.

철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나도 다가가 그녀의 옆에서 같이 문을 밀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퀴퀴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있었어...."

내 옆의 여성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오래된 묘실을 바라보았다.

묘실은 예상대로 저번 삶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각형으로 이어 붙인 석벽과 텅 빈 묘실 중앙 제단 위에 놓인 커다란 관.

불새 사냥꾼이 관으로 다가가는 동안, 나는 벽 한쪽 구석에 보이는 갈라진 틈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 정도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틈.

하지만, 저 틈이 이어진 동굴은 갈수록 좁아져 나나 아드리아같이 어리고 몸이 작은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 삶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묘실 중앙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아...."

어느새 불새 사냥꾼이 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텅 빈 관을 보고 신음을 흘린 것이다.

텅 빈 관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무덤을 찾았을 때 아무것도 없었어? 아니, 어떻게 이 무덤에 대해 안 거지? 누구한테 들은 거야?"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제야 미뤄 두었던 의문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거기다 무덤이 비어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확신한 모양이었고.

역시 그녀는 오래전 이 무덤을 털었던 도굴꾼의 후예였다.

그래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법도 알고 있었고, 문양이 새겨진 검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딴생각을 너무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에 의심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가 계약을 깨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아무한테도 듣지 않았어요. 단지 마요르카 요새 지하를 구경하다가 이곳과 이어진 좁은 통로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나는 손을 들어 갈라진 벽을 가리켰다.

"아.... 틈이 있었어? 저런 건 듣지 못했는데...."

전승이 제대로 안 되었던가 아니면 일부러 숨겼을지도.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지금과 똑같았었어요. 그냥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후작가 영지에서 이곳에 새겨진 문양과 같은 당신의 칼을 봤을 뿐이에요."

물론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저번 삶 때였으니, 우리가 지나온 길이나 요새와 이어진 동굴에는 내가 지나온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세히 살핀다면 내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그렇게까지 확인할 리 없었다.

"그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가...."

저것 보라고. 지금도 내 말만 믿고 바로 시무룩해지잖아.

그녀는 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 용병이 맞는 걸까? 실력은 확실했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때가 묻은 용병답지 않았다.

재미있는 모습이긴 했지만, 일을 진행하려면 저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제가 전에는 제대로 못 봤는데, 관 안에 정말 아무것도 없나요?"

"없어. 옷가지 일부하고 뼛조각, 뼛가루. 전부 묘 주인의 흔적뿐이야."

"그래요?"

나도 관 앞으로 다가갔다.

관 내부는 그녀 말대로, 그리고 저번 삶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는 아드리아가 먼저 찾았는데....'

아드리아와 달리 불새 사냥꾼은 함부로 관 내부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뼛가루가 덮인 관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쓱쓱.

"아, 그렇게 함부로 만지면...."

내가 뼛가루를 쓸자, 그녀는 급하게 소리를 쳤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쓸어 낸 관 바닥에 비상하는 새의 문양과 열쇠 구멍이 드러난 것이다.

"어라? 이게 뭐지?"

나는 처음 본 것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조금 어색했나?'

아쉬운 연기였지만, 놀란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문양과 구멍을 보고, 자신의 검을 보았다.

아드리아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가 따로 유도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스르르릉.

그녀는 검을 뽑아 들었다.

반대쪽 손에 들린 등의 불빛 덕분에 검날에 새겨진 새 문양이 환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을 들고 구멍을 노려보았다.

그냥 놔두면 바로 구멍에 검을 밀어 넣을 것 같았다.

그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했는데, 그 검을 밀어 넣기 전에 적어도 이 무덤에 얽힌 이야기는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내 말에 그녀는 놀란 신음을 흘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 미안. 내가 정신이 없었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을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원래 이곳은 우리 가문의 선조가 힘을 얻은 곳이었어. 용사분들 중 한 분이었는데, 아쉽게도 대전쟁 중에 돌아가셔서 전승된 것이 얼마 남지 않았지. 이 무덤에 관한 이야기도 구전으로 일부만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것들도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어."

그녀는 애잔한 눈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전해 내려온 것은 이 검뿐이려나."

그녀는 다시 검을 꽉 쥐었다.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포기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어. 내게도 맡겨진 일들이 있었지만, 소실된 전승을 찾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지.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는데 이렇게 찾게 되다니...."

역시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다. 용사의 후계 가문이라니.... 아무리 전승이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용사의 후계라면 귀족일 게 분명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동안, 다시 흥분한 모양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슬쩍 초를 쳐 봤다.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뭔가 남아 있을 거야. 전승에는 검으로 여는 문에 대한 것도 있었어."

그렇다면 꽝은 아니라는 이야기였고, 나에게도 무척 좋은 소식이었다.

"그럼, 열어 봐도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나는 비밀 문이 나와도 바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아직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메시지를 듣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검을 치켜들었고.

구멍 속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쑤욱. 철컥.

무언가 기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단이 통째로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광!

제단 중앙에 있던 그녀도, 한 걸음 물러섰던 나도, 무너지는 제단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기껏 물러섰는데 다시 휘말려 버리다니.

문이 열리는 것하고 제단이 무너지는 것은 천지 차이잖아!

제대로 전승이 이어져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왜 지금 들어맞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피의 법칙은 이쪽 세상에 와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젠장! 예비 형수 아드리아와 같이 죽었던 그 시점이 지금인 모양이었다. 

이쪽 세계의 신은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41화

제16편 던전 공략 (1)

알렉스와 여자 용병이 떠난 뒤, 후안은 우물 턱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비고 버려져서 숲에 먹혀 버린 마을. 대전쟁과 그 뒤에 남은 마물들 덕분에 이런 마을은 흔하디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전쟁 이후에 더 모여 살게 되었고, 모이는 와중에도 힘없는 평민들은 귀족과 기사들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뭐, 대전쟁 전의 귀족들은 아무런 힘도 없이 평민들을 지배했다고 하니까. 그때보다는 좋은 거려나."

고생하는 평민과 빈민들이 들으면 멱살을 잡힐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후안은 지금 시스템에 별로 불만이 없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님도 훌륭하신 분이시고, 후계자인 시몬 님도 아직 어리지만 나쁜 소문 없이 잘 크시는 중이었다.

영지도 공작님 덕분에 다른 영지들보다 안전하고 평안했고, 병사 수입도 먹고살기에 충분했다.

근래는 갑자기 아프신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지기도 했지만, 알렉스 공자님 덕분에 이제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주변에서 걱정이 많아졌다.

그가 서자인 알렉스 공자의 지시를 받고 같이 다니게 되자, 동료와 친구들은 그가 잘못된 줄을 잡았다고 걱정을 해 주었다.

실력이 있어도, 사람이 좋아도, 귀족가의 서자는 끝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건강해지신 어머니도 그를 걱정하셨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 게 사람이 할 일이다.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되었을 때까지는 도와주거라."

그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처럼 서자에게 줄을 대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알렉스 공자는 나이답지 않게 똑똑하고 어른스러웠고 곁눈질로 본 실력도 웬만한 기사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소년에게 줄을 대서 출세를 노리는 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단지 어머니의 말처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돕고 있을 뿐이었다.

"몸을 의탁하는 것은 좀 더 큰 다음에 생각해 볼까?"

물론, 그전에 알렉스에게 문제가 생겨 자신도 휘말릴 수 있었지만, 그 정도 위험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도 죽을 수 있겠지만.

'목숨값은 목숨으로였나?'

그는 기사들이 술집에서 호기롭게 떠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도중.

스아아아아.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숲 한쪽을 노려보았다.

요새가 있는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철컥. 철컥.

쇠붙이로 만든 발이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숲에서 판금 갑옷을 뒤집어쓴 기사가 나타났다.

온몸 전체를 판금 갑옷으로 두른, 중장비 기사.

그의 등에는 긴 창과 대검이, 허리에는 전투 도끼, 워해머가 매달려 있었다.

이런 숲속으로 저런 갑옷을 입고 들어오다니, 제대로 된 기사가 아니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후안은 기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기사가 입고 있는 갑옷은 무척이나 섬세하게 잘 만들어졌지만, 영지 기사들이 입는 갑옷과는 전혀 달랐다.

거기다 갑옷 어디에도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문양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소속을 감추는 기사라니. 그런 자가 좋은 일로 찾아올 리가 없었다!

철컥. 철컥. 척.

기사는 후안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앞에 서자, 후안은 몸이 딱딱하게 굳고 목 뒤에서 식은땀이 마구 쏟아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기사의 살기인가?'

마나를 내뿜어 사람을 굳게 만든다는 기사와 귀족들의 수법에 후안은 바로 질려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입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병사인 후안입니다. 공작의 숲에 무슨 볼일이십니까?"

고개는 숙일 수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자신이 공작의 병사고, 이곳이 공작의 땅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 영지의 병사는 강단이 있군."

묵직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갑옷 안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제대로 된 기사였다. 그것도 경력이 오래된 기사.

다행히 검부터 쓸 것 같지 않아 후안은 살짝 안도했다.

"여기로 내가 찾는 용병이 온 것 같은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나?"

하지만, 그 안도는 그가 다음 말을 꺼낸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용병이요? 제가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긴 저 혼자입니다."

기사는 후안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바로 우물을 쳐다보았다.

"흠. 우물 안으로 들어간 거군. 아쉽지만 여러 번 놓치는 바람에 자네의 거짓말에 놀아 줄 시간이 없어."

기사의 말에 후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걸 일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예상치 못했다.

이건 나뭇가지로 쇠몽둥이를 상대하는 꼴인데.

그렇다고, 이대로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목숨값으로 충분하려나?'

아쉽게도 그리 도움이 안 되는 발악이라 아쉬울 뿐이었다.

"흐웁!"

후안은 그게 숨을 들이켠 뒤에 기합을 내질렀다.

기사들에게 주워들은 살기를 푸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강하게 걸린 게 아닌지 몸이 움직였다.

후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사도 허리에 찬 망치를 잡았다.

"그냥 굳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아쉬워하는 기사의 말을 들으며 후안은 앞으로 달려갔다.

부웅.

그가 기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그 검은 갑옷에 감싸인 기사의 손에 막혔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망치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부우우우웅!

후안은 눈을 감았다.

* * *

첨벙. 첨벙.

짧은 충격이 몸을 훑고 지나간 뒤, 나는 물속 깊이 잠긴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떨어진 바위 조각들로 아래에 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떨어졌지만, 예상보다 물이 깊은 것 같았다.

우물 밑 무덤 아래에 물웅덩이라니.

직접 경험하고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이놈의 검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열심히 손발을 저었지만, 몸은 도무지 위로 올라갈 생각을 안 했다.

검을 버리고 올라가면 되겠지만, 이런 곳에서 검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크지 않은 손이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여자 용병, 불새 사냥꾼이었다.

그녀는 내 뒷덜미를 잡고 위로 헤엄을 쳤다. 그녀가 힘을 쓰자, 그녀와 나는 쑥쑥 위로 올라갔다.

푸악.

물 위로 올라온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웅덩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쳐서 헐떡이는 내 눈에 밝은 빛이 보였다.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등에서 나는 빛이었다.

그녀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등을 챙긴 것이다.

등은 물속에 들어갔다 왔는데도 아직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물속에서 나를 찾은 것도 저 등 덕분이었다.

"헉, 헉, 신기한 등이네요. 방수되는 등이라니."

내 말에 그녀는 허리에 찬 등을 툭툭 두드렸다.

"휴, 용병 일을 하려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까 연금술사에게 큰돈을 주고 구했어."

벌써 10년을 살았는데도 이 세상의 기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세에서 빌빌대는 세상인데 방수가 되는 등이라니.

완전 오버테크놀로지잖아!

거기다 용병 일 때문에 구했다는 그녀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그게 아니라 조상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겠지.

어쨌거나 멀쩡한 등의 빛으로 보게 된 웅덩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적어도 작은 저수지 정도의 크기.

외곽에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헤엄치다가 지쳐 검을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제단이 무너지는 거였으면 미리 알려 주셨어야죠."

내 말에 그녀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나도 몰랐어. 그냥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열린다고 들었었어."

그녀와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천장 가운데 난 큰 구멍. 폭이 10m는 넘어 보이는 구멍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끝에 우리가 떨어져 내린 무덤이 있겠지만, 등의 빛은 그곳까지 닿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구멍은 원래 막혀 있었을 터였다.

'너무 오래된 건가.'

벽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생긴 것처럼 제단 아래의 통로도 시간의 흐름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저길 다시 올라가야 하는 건가요?"

말을 하면서도 내심 고개를 저었다.

올라가야 할 곳은 저수지 위. 천장에 난 구멍이었다.

저수지가 있는 이 공간은 저수지 외에는 그리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매달려 구멍까지 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거기다 구멍 속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상황.

등산 도구도 없이 올라가기는 무리였다.

어이없는 상황에 자살을 떠올렸지만.

"젠장, 그럼 또 떨어질 뿐이잖아!"

눈앞에는 아직도 메시지가 보이는 중이었다.

맙소사. 이젠 죽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이 지하에서 영원히 시간을 반복할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었다. 죽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그때, 갑자기 소리를 지른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벽에 동굴이 여러 군데 뚫려 있는 것을 봤어. 우리가 떨어진 구멍도 그 동굴들이 원인이겠지."

그녀는 등 덕분에 떨어지면서도 주변을 볼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기 보이는 동굴들과 똑같은 모양이었어. 아마 저 동굴들이 천장에 난 구멍 속 동굴들과 이어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주변의 벽을 가리켰다.

저수지가 있는 이 지하 광장의 벽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작은 동굴에서 두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지나갈 큰 동굴까지.

그녀의 말을 들으니, 겨우 안심이 되었다.

역시,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움직여야 했다.

나는 우선 겉옷을 벗어 물기를 털었다. 움직이려면 몸이 가벼워야 했다.

내 모습을 보고, 그녀도 망토를 벗었다.

망토 안에는 몸에 딱 맞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그녀의 몸매는 중성적인 얼굴과 달랐다. 거친 용병들이 보면 휘파람을 불며 쫓아다녔을 것 같았다.

그제야 그녀가 망토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마나를 흘려 넣으며 망토를 털자, 망토에 있던 물기가 금방 말라 버렸다.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나도 그녀를 따라 겉옷에 마나를 흘려 넣어 보았다.

역시, 쉽지 않았다.

"이리 줘. 그게 쉬운 기술이 아니야."

내가 삽질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직접 내 겉옷도 말려 주었다.

꽤나 유용한 마나 활용법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꼭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그녀 덕분에 뽀송뽀송해진 겉옷을 다시 걸치고 검을 들었다.

"그럼 어느 동굴로 갈까요?"

"글쎄."

내 말에 그녀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움직이기 편해야 할 테니 제일 큰 곳으로 가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내 검을 보고 동굴을 결정했다.

검이 없었으면 작은 몸 덕분에 아무리 작은 동굴도 지나다닐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잘못 가져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제일 큰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 동굴들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겠죠? 여기가 석회암 지대나 화산 지대도 아닌 것 같고...."

"아.... 설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 아니라면 무언가 동굴을 만든 놈이 있을 게 분명했다.

운이 좋다면 이미 오래전에 다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촤르르르르르.

동굴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보니 운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동굴의 어둠 속에서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보다 커 보이는 붉은 눈을 한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옆에서 그녀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깊은 곳에 마물들이 남아 있다니...."

혹시나 했지만, 역시 마물이었다.

제42화

제17편 던전 공략 (2)

나타난 것은 쥐를 닮은 커다란 마물이었다.

붉은 눈에 긴 수염, 날카로운 이빨까지. 얼굴을 보면 거대화한 쥐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 아래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긴 털이 덥수룩한 마물의 몸에는 네 쌍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마치 곤충의 다리처럼 보이는 세 쌍의 다리와 제일 위에 달린 다른 다리보다 배는 크고 길쭉한 한 쌍의 다리.

털로 뒤덮인 머리와 몸통, 그리고 다리를 보면 마물은 쥐를 곤충의 형태로 변형시켜서 거대화한 것처럼 보였다.

"레드 마우스가 왜 여기에...."

옆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니, 레드 마우스라고 불리는 마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드 마우스라는 이름치고 피부색이 붉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색은 회색에 가까웠다.

레드 마우스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검을 치켜들고, 불새 사냥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죠?"

그녀는 나를 보고 다시 다가오는 마물들의 수를 세었다.

다가오는 마물은 총 세 마리.

"땅속에서 레드 마우스를 따돌리는 것은 무리이니까 싸워야지."

숫자를 확인한 그녀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날에 새겨진 날아오르는 새가 환하게 빛을 발했다.

"약점 같은 건 없나요?"

"대전쟁 이후에 거의 보이지 않던 마물이라서. 움직임이 빨라서 상대하기 귀찮다는 말만 들었어."

저택에 있는 책에도 레드 마우스라는 이름의 마물은 나와 있지 않았다.

결국, 몸으로 부딪쳐 봐야 했다.

다가오는 마물은 우리를 보더니 낮게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

그 으르렁거림은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더러운 바람 소리 같았다.

조금 떨어진 채로 마물들은 우리를 보고 으르렁거렸고, 나와 용병은 검을 치켜 든 채로 마물들을 노려보았다.

나도 숨겨 왔던 모든 마나를 풀어내고 있었다.

마나를 끌어올리자, 끌고 다녔던 검은 이제 양손으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고, 커다란 검날에는 희미한 빛이 어려 있었다.

빛나는 내 검을 보고 그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생각보다 강할 것 같기는 했지만, 이건 나이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마나인데? 설마 공작가에 '마나 감응력'이 남아 있었나?"

마나 감응력? 그거 왕가에서 내려오는 상속 능력일 텐데? 내 마나하고 왕실의 능력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리고 댁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눈을 외면했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함께 싸우기에 좋은 동료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뭔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도 달려오는 마물과 싸울 준비를 했다.

다행히 셋 중 둘은 달려드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머지 한 놈만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달려오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각도도 맞았고, 타이밍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설마 피했어?'

젠장 빠르다더니, 그냥 빠르기만 한 것만이 아니었다!

놈이 어디로 피했는지 보지도 못했지만, 급하게 검을 몸에 붙이고 뒤로 뛰었다.

텅!

검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지며 몸이 뒤로 확 밀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을 땅에 붙이고 있었다.

땅에 박아 넣은 마나 덕분에 얼마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검에 부딪힌 것을 보게 되었다.

마물 앞발에서 솟아 나온 네 개의 발톱이 검을 밀치고 있었다.

끼기기긱.

검과 발톱이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검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뚜둑.

검과 힘겨루기를 하던 발톱 두 개가 부러지고, 쥐를 닮은 얼굴이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선 마물의 맨 앞 두 다리는 위로 들린 채로 각각 네 개의 발톱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전생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제쳐 두고 마물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첫 공격이 실패해서인지 놈도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움직임을 놓칠 정도의 속도. 그리고 그 속도를 이용한 예상보다 강한 공격.

거기다 공격했다가 바로 빠지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지능도 높아 보였다.

마치 속도가 빠른 기사를 상대하는 느낌.

아무래도 마물을 너무 얕잡아 보았던 것 같았다.

후작가로 여행하는 도중에 만났던 마물들은 처음 마물 말고는 전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고, 처음 만났던 놈도 이 검의 전 주인이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그래서인지 마음 깊숙한 곳에 마물들을 과소평가하는 마음에 생겨 버린 것이다.

"미안. 내가 너무 자만심에 빠졌던 모양이야."

나는 검을 늘어뜨리며 앞에 있는 마물에게 사과를 했다.

그르르릉.

아쉽게도 마물은 내 사과를 안 받아 주었다.

말로 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역시 사과는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법.

나는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점점 속도를 늦추었다.

검이 몸 앞을 지나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검으로 가렸던 몸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마물은 몸을 움찔거렸다.

넘어오지 않네. 역시 상당한 지능이 있는 마물이었다.

하지만, 넘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행동은 이어지는 검술의 기수식일 뿐이었다.

그동안 실전 중에는 배웠던 검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단검술에 가까운 근접 전투를 벌이고, 일격으로 승부를 가린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이 검을 쓴 뒤로는 몸에 맞지 않게 힘으로 밀어붙인 일도 있었고.

모두 제대로 된 검술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런 전투에서도 과거에 배웠던 검술이 묻어나와 큰 도움이 되었고, 원래 실전은 그런 법이라는 이야기도 들었기에 아쉽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계속되니 적이 나타날 때마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번 적은 그렇게 싸울 수 없었다. 실력 차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편법을 사용하는 적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배운 검술은 대전쟁 때부터 내려오던 검술이었다.

인간과 싸우기 위한 검술이기도 했지만, 처음 만들 때는 마물과의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검술.

숨을 가다듬고 정신을 모으자, 눈에 마물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조금씩 떨리는 눈과 움찔거리는 손톱, 입김에 흔들리는 털들.

마물의 호흡과 내 호흡을 맞추고, 내 움직임에 내 마나를 일치시켰다.

우우우웅.

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실전에서 마나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제대로 느껴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마나는 내 몸속을 크게 휘돌았다. 그리고 검으로 뻗어 나간 마나는 검을 뚫고 마물을 향해 나가려 했다.

몸 밖을 빠져나가려는 마나라니.

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가?

전날 암살자가 마나로 공간을 장악하던 수법의 실마리를 본 것 같았다.

아쉽게도 지금 마나는 검에 묶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그렇지만, 마물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마나의 기세에 눌려 덤빌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덤벼 줄 차례였다.

몸을 땅에 묶어 주던 마나를 반대로 돌려 반발력을 만들었다.

쿵.

동시에 땅을 박찼다.

빠르게 다가오는 마물의 모습.

움찔하던 마물이 어느 순간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 전이었으면 모습을 놓쳤을 뻔한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흐린 모습이나마 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도망친다면 따라가기 벅찬 속도. 하지만 놈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쿵!

나아가던 발을 땅에 박아 넣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은 마나로 풀어 버렸다.

마치 달리던 말이 중간에 딱 멈춘 것 같은 모습.

그리고 남은 관성으로 팔을 움직였다.

부우우웅.

측면으로 붙어 덤벼드는 마물을 향해 크게 휘도는 검. 내 힘과 관성이 더해서 검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왕실과 공작가 기사들의 기본 검술 중 하나인 '용사 카를로스' 검술 제3장.

'크게 휘젓기!'

너무 싼 티 나는 이름이라 왕실에서도 몇 번이나 이름을 바꾸려 했지만, 차마 왕실의 선조가 지은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 없었다나.

어쨌거나 옆에서 날아오는 검에 놀란 마물이 앞발을 들어 올렸지만.

콰직!

검은 마물의 손톱을 모두 부수고, 앞발도 날려 버렸다.

크르르르릉!

쥐를 닮은 입에서 이상한 괴성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한 걸음 더 다가가, 이번에는 검을 계속 휘둘렀다.

마나의 힘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검을 마음대로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나는 배운 검술에 따라 검의 방향만 제어할 뿐이었다.

강한 폭발력이나 의외의 공격은 불가능했지만,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검은 마물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만 입으며 검을 피한 마물이었지만, 이어지는 공격에 다리 두세 개가 날아간 뒤, 마물의 폭발적인 움직임도 멈추고 말았다.

그 뒤는 쉬웠다. 마물의 발톱은 내 검을 막지 못했다.

반대편 앞발도 발톱들과 함께 날아가 버렸고, 이어서 쥐를 닮은 목이 내 검에 잘려 나갔다.

쿵.

목이 잘려 나간 마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약점은 알 수 없었지만, 목이 잘리면 죽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마물의 몸에 검을 찔러 넣어 죽은 것을 확인하자, 겨우 같이 싸우던 동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집중했다는 이야기였지만, 또 그만큼 주위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나는 많이 부족했다.

다행히도, 불새 사냥꾼은 잘 싸우고 있었다.

마물 하나는 다리가 대부분 잘린 채로 죽어 가고 있었고, 남은 마물도 다리 두 개가 잘려 나간 채로 싸우고 있었다.

불새 사냥꾼은 땀범벅이었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고.

저 정도 실력이면 말을 걸어도 방해는 안 될 듯했다.

"도와줄까요?"

역시 내 말에 반응하는 것은 마물뿐이었다.

마물은 내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고, 몸에 큰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났다.

"와! 벌써 끝냈어? 안 도와줘도 돼!"

보는 것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훨씬 여유로웠다.

전력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그녀의 검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마물의 몸에서 솟구치는 핏줄기.

어라? 검이 닿은 건가? 검 길이하고 안 맞는데?

그녀의 검은 무척이나 빨리 움직였지만,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저 검은 마물의 몸에 닿지 않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그녀의 검을 지켜보는 사이에 마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 가득한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마물.

저건 분명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것이었다.

"흠, 약점이랄 부분이 없네. 다리를 잘라서 움직임을 봉쇄하는 게 최선이려나."

역시 전력이 아니었다. 약점을 찾기 위해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와, 실전도 대단하네. 왕국 검술도 제대로 배웠는걸. 일대일이면 웬만한 기사는 이길 수 있겠어."

아니, 댁이 더 대단한 것 같은데. 싸우는 와중에도 내가 싸우는 것을 다 봤다는 말이잖아.

거기다 용병이 내 검술을 어떻게 아는지.

따로 정체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같이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자, 그럼 가 볼까? 이런 놈들이 더 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탈출하자고."

그녀는 마물들이 나온 동굴을 제외하고 제일 큰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격렬한 전투를 했지만, 그동안의 훈련 덕분인지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가 들어간 동굴은 위로 뚫려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불새 사냥꾼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게 무슨 말이야?"

쩝, 이 속담은 이쪽 세계에서는 안 통하나.

아무튼 그녀의 말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마물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동굴 중간에 나타난 공터에는 열 마리가 넘는 쥐새끼 마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가 걸어온 동굴은 다른 마물들이 어느새 동굴을 몸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앞뒤가 다 막힌 상황.

옆에서 불새 사냥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력을 숨기는 건 바보짓이겠지?"

그녀의 검이 환하게 빛나고, 검의 끝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게 그녀의 상속 능력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검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아쉽게도 이번 마물들은 간을 보지 않았다.

크르르릉!

수많은 마물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일렁거리는 검에 사방으로 날아가는 마물들의 다리와 몸통이 보였지만, 그 모습은 금방 다른 마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마물이 가득했다.

검을 휘둘러 마물을 베어도, 마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리를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해도 손톱으로 나를 공격했고, 다른 마물은 내 뒤에서 양발을 휘둘렀다.

열심히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냈지만, 수십 개의 발톱을 검 하나로 막기는 어려웠다.

발톱이 하나둘 몸에 박히고, 손이 잘려 나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제길!"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마물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손톱들이 더 밀고 들어왔고, 이어 쥐를 닮은 마물의 입이 크게 벌어져 내 머리를 물었다.

냄새가 지독하잖아.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콰직.

세상이 어두워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제43화

제18편 던전 탈출 (1)

"우앗!"

어두웠던 시야가 다시 밝아지고, 메시지가 내 눈앞을 가리는 순간, 나는 다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죽기 전의 고통이 환상통으로 남아서 정신을 어지럽히고, 메시지가 주변을 살피지 못하게 했지만, 난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휘이이잉!

빠르게 떨어지는 몸.

귀에 마나를 불어넣으니 수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다음 해야 할 게 뭐지? 아! 맞다.'

물속에서 검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떠올랐다.

팔 쪽으로 급하게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물에 빠지기 전에 힘껏 팔을 휘둘러 검을 던졌다.

으드득.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회복력이 좋은 어린 몸을 믿었다.

흐린 빛 위로 검이 날아가는 것이 보이고.

풍덩!

나는 바로 물에 빠졌다.

짧은 충격이 몸을 훑고 지나간 뒤,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저번 삶에서 보았던 것처럼 작은 저수지에 가까운 이 웅덩이는 무척 깊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웅덩이의 깊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라앉는 것이 멈춘 순간, 나는 바로 물 위를 향해 헤엄쳤다.

"푸아!"

역시 무게가 가벼워서인지 그리 깊게 가라앉진 않았다. 나는 금방 물 위로 올라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깜깜한 지하 저수지에 빛 하나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빛이 수면에 가까워졌고, 이어 불새 사냥꾼이 물 위로 올라왔다.

푸아!

"알렉스?"

물 위로 올라온 그녀는 나부터 찾았다.

"여기예요."

"아,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내가 무사한 것을 알자, 그녀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먼저 검을 날린 방향으로 헤엄을 치니, 그녀도 뒤를 따랐다.

다행히 검을 반대편으로 날리지 않아 금방 마른땅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검은 어디 있어? 물속에 버린 거야?"

"아뇨. 저기 있어요."

다행히 검은 물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땅에 꽂혀 있었다.

나는 검을 향해 걸어갔다.

"검이 왜 거기 있어?"

불새 사냥꾼은 내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물에 빠지기 전에 공중에서 던졌어요. 물에 빠지면 검 때문에 수영하기 어렵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음. 솔직히 전부 다 그 시간에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검을 챙기자,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허리에 찬 등 덕분에 천장에 난 검은 구멍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제단이 무너질지는 몰랐어.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열린다고 했었는데...."

저번 삶에서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미안해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구멍들처럼 위에도 구멍이 난 게 맞죠?"

내가 공터 벽에 숭숭 뚫려 있는 동굴들을 가리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봤어? 맞아. 우리가 떨어지던 구멍에 동굴들이 많이 뚫려 있었어."

자, 여기까지는 저번 삶과 비슷한 진행이었다. 어차피 마물을 처음 만났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 나는 그때와 같이 움직였다.

나는 물에 젖은 겉옷을 벗은 뒤, 불새 사냥꾼에게 부탁했다.

"망토를 말린 뒤에 제 옷도 부탁드릴게요."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근데 내가 그 기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망토를 벗은 뒤, 마나를 밀어 넣어 옷을 말렸다.

이어 내 겉옷도 말려 주었고, 나는 감사를 표한 뒤 옷을 다시 입었다.

"저 동굴들이 천장 구멍에 난 동굴들과 이어져 있을 거야. 동굴 하나를 정해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으면 될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저 동굴들을 만든 장본인도 죽지 않았다면 아직 이 지하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상당했으니, 만약 살아 있다면 우리를 찾으러 올 테고요."

내 말에 그녀도 급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저번 삶에서 들었던 발소리가 들려왔다.

촤르르르르르.

수많은 다리가 땅을 끄는 소리.

바로 레드 마우스라는 마물들의 발소리였다.

"레드 마우스가 남아 있었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쥐와 곤충을 섞어 놓은 듯한 회색 마물들.

저번 삶과 마찬가지로 나타난 마물들은 세 마리였다.

아니, 세 마리 맞나?

어쨌거나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세 마리.

나는 온몸에 마나를 불어넣고, 남은 마나를 검에 밀어 넣었다.

또다시 마나가 몸과 검에서 튀어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처박혀서 이 감각을 계속 되새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마나를 가득 끌어올리는 내 모습을 보고, 불새 사냥꾼이 입을 열었다.

"역시 땅속에서 레드 마우스를 따돌리는 것은 무리겠지?"

그녀가 든 검날에 새겨진 문양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보다 나이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마나인데? 설마 공작가에 '마나 감응력'이 남아 있었나?"

이어서 저번과 똑같은 말을 하는 그녀. 동시에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말을 돌리고.

"어쨌거나 생각보다 함께 싸우기에 좋은 동료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우리가 달려가자, 마주 달려오는 마물들.

똑같은 행동 덕분인지, 저번과 마찬가지로 끝에 있는 마물만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오는 마물을 보며 숨을 낮게 들이마셨다. 감각을 일깨우고 마물과 호흡을 일치시켰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일깨운 상태에서 다가오는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정확한 타이밍에 내지른 검.

하지만, 나는 이 검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마물은 검이 날아오는 순간,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위로 튀어 올랐다.

한순간에 수 미터를 솟구친 마물.

이랬으니 저번에는 모습을 놓칠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놓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몸이 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휘둘러지고 있는 검의 힘을 이용해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계속 회전하며 위로 점프했다!

'용사 카를로스' 검술 외전 4장.

'비룡 날아오르기!'

젠장 저번에도 그렇지만, 얼굴이 붉어질 것 같은 기술명이었다.

앞으로도 절대 기술명을 소리 내서 말하지 말아야지.

마음속으로 기술명을 되뇌며 떨어지는 마물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서걱.

쿵!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공격을 당하니 머리 좋은 마물도 어쩔 수 없었다.

마물은 한쪽 다리 두 개가 잘린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잘린 다리들은 팔처럼 사용하는 두 앞발이 아니라 몸을 지탱하는 다리였다.

자, 이제 저 무지막지한 속도는 봉인되었고.

나는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땅에 내려선 뒤에 다시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전생이었으면 어지러워서 제대로 착지도 못 했겠지만, 마나로 귀를 보호하고 있는 지금, 내 평행 감각은 피겨스케이팅 선수 이상이었다!

나는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마물에게 달려가 계속 검을 휘둘렀다.

마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리 하나가 더 날아가 버렸고, 겨우 발톱으로 내 검을 막았을 때는 반대쪽 앞발이 잘려 나간 뒤였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다.

나는 흥분하지 않고, 착실하게 마무리를 했다.

남은 발톱들을 검으로 잘라 버리고, 앞발을 자르고, 등 위로 올라가 검을 등에 꽂아 넣었다.

크르르릉!

하지만, 마물은 등 깊이 검이 꼽힌 채로 마구 날뛰었다.

"심장이 있을 만한 곳이었는데.... 구조가 다른가?"

좀 더 테스트해 볼까 했지만, 어떤 변수가 나올지 몰라 나는 검을 뽑아 마물의 목을 날려 버렸다.

쿵.

목이 잘리면 죽는 것은 저번과 다르지 않았다.

'다리를 자르면 고속 이동을 봉쇄할 수 있고, 목을 자르면 확실히 죽고, 예상한 곳에 심장이 없다라....'

쓰러진 마물에게 생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동료의 싸움을 확인했다.

그녀는 아직 마물 둘과 싸우고 있었다. 저번에는 내가 싸움을 끝냈을 때 마물 하나만 남았었는데.

내가 저번보다 빨리 마물을 처리한 건가?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물 하나는 다리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고, 상처투성이라 금방 죽을 것 같았다.

다른 마물도 멀쩡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있었다.

저번처럼 검 끝에 일렁이는 기운이 마물을 베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 관해 신경을 끄고, 쓰러진 마물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죽은 뒤라 마나를 씌우지 않은 검으로도 잘 잘려 나갔다.

배를 갈라 내부를 확인하고, 잘려 나간 다리도 갈라 근육도 살펴보았다.

"젠장, 내부가 뭐 이래?"

마물의 몸속을 확인하고는 나는 질린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물은 식용으로 거의 못 쓰는 거잖아. 연금술사나 대장장이 같은 사람들에게 주면 여러 가지 재료로 사용하지만, 아무튼 먹는 건 무리야."

내가 해체를 하는 사이에 싸움을 끝낸 모양이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해체된 마물의 사체를 보고 말을 꺼냈다.

물론 언데드형 마물은 썩어 들어가는 몸 때문에 먹는 게 불가능했지만, 이 마물들은 분명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전생에 생물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소화기관은 큰 위장 하나밖에 없고 심장처럼 보이는 것도 없었다.

위장을 감싼 핏줄이 온몸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고, 근육도 처음 보는 형태로 꼬여 있었다.

곤충 형태도 아니고, 동물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 세계에 온 뒤에도 생명체들은 전생과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눈앞의 마물은 판타지, 아니 호러, SF영화에나 나올 만한 내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쩝, 마물들 대부분은 마족과 함께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더니. 겉보기와는 다르게 에일리언 같은 거였나."

결국, 미천한 내 생물학 지식으로는 마물을 해체한다고 해도 약점을 찾는 건 무리였다.

"그보다 정말 잘 싸우던데? 웬만한 기사는 순식간에 때려눕히겠어!"

저번보다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더 빨리 잡았기 때문이겠지.

물론 한 번 경험해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칭찬은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움직여도 되지? 이런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어. 빨리 탈출하자고."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그녀는 저번과 다르게 내 의견을 물었다.

'자, 어떻게 할까?'

저번 삶에서는 아무 동굴이나 들어갔다가 앞뒤로 포위를 당해 죽고 말았다.

그때 보았던 마물들의 숫자는 족히 10여 마리 이상.

한꺼번에 싸워서는 절대 이기기 어려운 숫자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벽에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커다란 지하 광장.

중앙에 작지 않은 저수지가 있고, 나머지는 평평한 바닥이었다.

'동굴에 들어가 각개격파를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물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는 게 나을까?'

하지만, 동굴 구조는 마물들이 우리보다 수백 배는 더 잘 알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 각개격파를 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저수지를 보았다가, 해체된 마물을 다시 살폈다.

물갈퀴도 보이지 않았고, 무게도 적게 나가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불새 사냥꾼에게 물었다.

"이 마물, 수영할 수 있을까요?"

제44화

제19편 던전 탈출 (2)

나는 마물이 수영을 못 한다는 가정하에 저수지를 뒤에 둔 채로 마물들을 상대하는 '배수진'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의견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무턱대고 동굴로 들어가면 포위 공격을 당할 수도 있어요."

조금 전 동굴에서 죽었을 때의 일을 넌지시 꺼내 보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물을 뒤에 두면 겨우 포위망 한 곳이 줄어들 뿐이야. 더 쉽게 포위당할 수도 있고, 물로 피한다고 해도 결국 따라잡힐 뿐이야."

그녀의 말에 저수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지하 광장 중앙에 있는 저수지는 다른 곳으로 연결된 곳도 보이지 않았고, 어느 방향으로도 벽과 가깝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수영으로는 마물의 발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생에 들었던 병법은 이런 실전에서는 그리 쓸모가 없었다.

아니, 병법의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한 내 탓이었다.

전생에 소설과 인터넷 글로 대충 알고 있었던 병법이었다.

실제로 싸움을 해 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된 공부도 하지 않은 채 꺼내 놓은 의견이 제대로 된 것일 리 만무했다.

"그래도 동굴에서의 포위와, 마물들이 수영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참고해 볼 만한 의견인 것 같아."

그녀는 내 의견을 듣고 새로운 작전을 짰다.

내가 꺼낸 '배수진'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작전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일개 용병이 생각할 만한 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재미있게도 죽기 전과 같은 동굴로 들어갔다.

다른 동굴로 가자고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괜히 다른 동굴로 바꾸었다가 길이 막히는 등 의외의 상황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결국 마물들을 죽이고, 같은 동굴로 걸어가는.

죽기 전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전과 달랐다.

걷는 속도는 그때의 반밖에 되지 않았고, 일정 시간마다 멈춰 서서 사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녀나 나도 몇 배나 주의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스르르르.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마나를 집중한 귀를 대니 겨우 들리는 소리. 바로 마물의 발소리였다.

마물들의 발소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고,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마물들이 몰래 따라오는 건가?"

발소리를 들은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 같은데요? 앞쪽에는 다른 마물들이 기다리고 있겠죠."

내 말에 그녀는 어둠에 잠겨 있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맙소사. 결국 우리가 몰이사냥을 당하는 중이라는 거잖아? 이놈들이 이렇게 머리가 좋았나?"

그녀는 작게 푸념을 내뱉은 뒤에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하네. 어떻게 안 거야? 조금 전까지도 솔직히 믿기 어려웠는데...."

경험해 봤기에 아는 거였지만, 그걸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제가 감이 좋은 편이에요."

"감이라니.... 머리만 좋은 게 아니었어."

그녀의 표정을 보니, 이곳을 나가게 되면 천재라는 소문 말고 다른 소문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 그럼 계획대로 해야겠지?"

"네."

그녀와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올라왔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다리에 가득 밀어 넣어 달려가는 길.

동굴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고 뒤쪽, 아니 우리가 달려가는 앞쪽에서 허둥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스, 스슥.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뒤를 따라오던 마물들을 보게 되었다.

이런 일자형 동굴 속에서 앞뒤로 포위되면 정말 위험하지만, 그건 포위망이 완성된 뒤의 이야기였다.

완성되기 전의 포위망은 각개격파의 먹이일 뿐이었다.

"후딱 해치워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달려 나가는 그녀의 검 끝이 일렁거렸고, 내 손에 쥔 검도 희미하게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는 동굴을 가득 채우며 다가오는 마물들이 있었다.

마물들의 숫자는 총 네 마리.

좀 전에 죽인 마물들보다 한 마리가 더 많았지만, 상대할 마물은 전보다 줄어 있었다.

마물들의 크기가 커서 두 마리가 겨우 나란히 설 수 있었다.

동굴 높이도 높지 않아 뒤쪽의 마물이 넘어올 수도 없는 상황.

우리는 각각 한 마리씩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다리와 손에 마나를 불어넣고, 힘껏 검을 내질렀다.

"피할 수 있으면 어디 피해 봐!"

동굴이 좁아 큰 검을 마음껏 휘두르긴 힘들었지만, 마물 쪽은 더 피하기 어려웠다.

옆과 뒤에 있는 마물과 벽이랑 천장에 막혀 특유의 빠른 속도를 내기는커녕 움직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검을 내밀고 힘껏 몸통 박치기를 펼쳤고.

푸우우욱.

검은 앞을 막아선 앞다리를 꿰뚫고, 쥐를 닮은 마물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르르륵."

역시 이런 동굴 속에서는 현란한 검술이 필요 없었다.

나는 마물을 걷어차 검을 빼내고,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다음 마물도 금방 처치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불새 사냥꾼은 나보다 빨리 마물들을 쓰러뜨렸다.

그녀는 내가 마물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10살 맞아?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실력이 가능한 거야?"

"능력 덕분이죠."

"10살에 기사급 이상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 상속 능력이 있다고?"

쩝, 너무 실력을 드러낸 건가. 하지만, 실력을 숨겨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다행히 그녀의 의문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르르릉.

우리가 가려던 동굴 깊숙한 곳에서 마물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던 마물들이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내 말대로 일이 벌어진 덕분인지 그녀는 나에게 의견을 구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웬만한 의견을 들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계획은 세워져 있었고, 나도 더 좋은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계획대로 물러서죠. 최대한 숫자를 줄여 보죠."

"좋았어!"

그녀와 나는 처음 출발한 저수지가 있는 지하 광장으로 빠르게 물러섰다.

우리는 동굴을 달리다가 처음 보는 구멍을 발견했다.

"아까 저 구멍은 없었잖아?"

"네. 우리를 쫓았던 마물들이 만든 구멍인가 보네요."

"굴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뚫을 수 있는 거였어?"

아니, 댁이 모르는데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어쨌거나 그녀와 내가 쉽게 포위당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기다 마물의 날카로운 발톱들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땅을 파기 위한 것들이었다.

발톱치고는 엄청 단단하더니 그런 이유였나.

우리는 벽에 뚫려 있는 구멍을 지나 동굴을 계속 달려 나갔다.

다행히 마물들은 빠른 움직임에 비해 지구력은 그리 높지는 않았다.

마물들의 소리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우리는 저수지가 있는 지하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동굴로 들어갔다.

우리는 최대한 저수지가 있는 지하 광장과 멀어지지 않게 동굴들을 들락거리며 마물들을 처리했다.

최대한 귀를 기울여 수가 작은 마물들이 다가오면 먼저 처리하고, 많은 숫자면 다시 지하 광장으로 후퇴해서 다른 동굴로 들어갔다.

숫자 파악이 잘못되어 위험한 적도 있었고, 너무 깊이 들어가 포위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결국 마무리는 여기서 하게 되네요."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저수지의 물을 떠먹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처음 떨어진 지하 광장. 주변에는 죽은 마물들이 널려 있었다.

우리가 이 지하 광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자, 마물들은 결국 이 저수지가 있는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포위당했고, 결국 처음 내가 이야기한 대로 '배수의 진'을 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이야기할 때와 달리 우리를 포위한 마물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동안 각개격파로 숫자를 왕창 줄였기 때문이었다.

총 여섯 마리.

그동안의 싸움으로, 놈들의 사냥법에 익숙해진 우리 두 사람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숫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격돌.

그녀와 나는 마물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물을 마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수지 쪽으로는 안 오려고 하는 것 같죠?"

"확실히 그런 것 같아. 수영을 못 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으로 물을 떠서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나는 물을 마시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수지로 시선을 돌렸다.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는 평범한 지하 저수지였다.

하긴, 먹을 수 있는 물이 있는 지하 저수지가 평범한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마물들의 지하 생태를 연구할 때는 아니겠죠."

나는 몸에 힘이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기다려도 더 이상 나타나는 마물이 없었다. 이제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벗어 놓은 망토까지 다시 걸친 뒤 나에게 물었다.

"그럼 출발할까?"

"네. 돌아가죠."

우리는 다시 동굴로 향했다.

"저 마물들도 돈 좀 되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가지고 나갈 방법도 마땅찮고, 가지고 나가는 것도 곤란하지."

보물 창고가 멀쩡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지금, 마물이라도 팔아서 돈을 버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 지하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나도 저택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웠고, 그녀도 이 무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물도 다 잡았으니 영지에 문제는 생기지 않을 테지.'

내가 영주나 후계자도 아닌데, 괜한 일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을 누르며 나는 계속 걸어갔다.

마물들과 싸우면서 확인한 바로는 이 동굴들은 모두 위로 향해 있었고 중간마다 서로 만나게 되어 있었다.

전에 내가 죽었던 광장이 동굴들이 만나는 곳이었고, 그렇게 모인 동굴들은 위로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우리는 동굴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동굴은 마물들이 판 동굴이 아니라, 돌벽과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동굴.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지하 통로였다.

"설마... 아직 남아 있는 걸까?"

비밀 창고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기력해 보이던 그녀의 눈에서 다시 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등을 손으로 들어 올리고, 뛸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검을 끌며 열심히 그녀를 따라갔다.

통로를 나아가는 동안, 옆으로 작은 방들이 보였다.

아쉽게도 방들은 오래되어 부서진 탁자와 의자 정도만 남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방들을 대충 살피며 계속 걸어갔고, 통로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통로 끝에는 철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칼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문.

분명 그녀가 찾던 비밀 창고의 문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었다.

끼이익.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은 거친 소리를 내며 조금씩 열렸다.

제45화

제20편 유산을 찾았습니다 (1)

끼이이익.

보물 창고의 문이 열리자, 우리는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뻥 뚫린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으악!"

창고처럼 보이는 커다란 석실 중앙에 위아래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떨어질 뻔한 구멍 끝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둠에 잠겨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보였다.

'설마?'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에도 같은 구멍이 보였다. 다만 위쪽 구멍은 끝이 보였다.

석실의 천장.

바로 우리가 떨어진 그 석실의 천장이었다.

"말도 안 돼. 이 구멍이 우리가 떨어진 구멍인 거야?"

불새 사냥꾼은 구멍에 매달린 나를 도와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이 심한 것 같았다.

"끄응."

어쩔 수 없이 혼자 힘으로 올라왔다.

위로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가 한껏 충격을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창고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혹시 다른 문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우리가 들어온 문 이외에 다른 문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온 문 말고, 밖으로 통하는 곳은 위아래 뚫린 두 개의 큰 구멍밖에 없었다.

한참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남은 석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먼지가 묻은 쇠붙이 조각들과 금화 몇 개밖에 찾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결국, 그녀는 절망에 빠진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무척이나 이성적으로 행동한 그녀였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그녀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꽝으로 끝나는 모험도 있는 법이었다.

더구나 이 기회에 나름 마나 검술을 가다듬을 수 있어서 나는 그리 손해를 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나를 모으자, 멀리 흐린 빛 사이로 희미하게 천장이 보였다.

한 50m 이상은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무척이나 높았지만, 저수지가 있는 지하 광장에서 올라오는 것보다는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전생이라면 무리인 암벽등반이었지만, 마나를 쓰면 어찌어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 볼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천장에 매달릴 곳을 찾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잠깐? 이곳에 보물들이 있었고, 그곳에 구멍이 뚫렸다면?'

그럼 보물은 어디로 갔을까?

물론 도중에 흙에 파묻힐 수도 있겠고, 땅을 파던 마물들이 치워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둘 다 아니라면?

나는 다시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외치는 순간.

"잠깐 보물은...."

크아아아아아!

내 외침은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다.

마물들의 괴성이 내 목소리를 집어삼킨 것이다.

"아직 마물들이 남았나?"

놀라서 열린 문을 바라보자, 그녀가 분노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남아 있었어? 잘됐어!"

아이고, 잘되었을 리가 없잖아!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검을 쥐었다.

마물들을 다 없애도 사망 지점 통과 메시지가 안 나와서 의아해했는데, 역시 남은 놈들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물들이 나타났다.

쾅!

큰 철문을 몸으로 부수듯이 열어젖히며 커다란 붉은 마물이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좀 더 큰 마물이 뒤를 이었다.

마물들은 몸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물들은 쥐를 닮은 얼굴을 한 네 쌍의 다리를 가진 마물.

아래에서 본 마물들과 생긴 것은 비슷했지만, 회색의 마물들보다 훨씬 더 큰 마물들이었다.

'다른 종류인가?'

크기도 달랐지만, 털의 색도 달랐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털. 저 붉은색 털들을 보니 저 마물이 왜 '레드 마우스'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저 마물들이 다른 마물들의 부모인 건가? 원래 털의 색은 붉은색인데, 이곳 지하에 있다 보니 회색으로 바뀐 거고?

그런 생각을 하는 차에, 옆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놈들이지? 유산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크르르르르.

화가 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붉은 털의 마물들도 괴성을 토하며 달려들었다.

캉! 카앙!

순식간에 맞붙는 사람과 마물들.

마물들은 전의 회색 마물들과 다르게 그녀의 공격에 한 치도 밀려나지 않았다.

일렁이는 검과 발톱이 부딪쳤는데도 발톱이 멀쩡했고, 겨우 몸에 칼질을 해도 붉은 털들이 막아 주어서 상처만 조금 났을 뿐이었다.

"네놈들에게 밀릴 능력이 아니야! 이런 능력이 아니란 말이야! 제대로 배울 수 있기만 했어도!"

싸울수록 더욱 분에 겨운지 그녀는 흥분한 채로 마구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물들은 전과 달랐다. 그녀가 흥분해서는 결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싸우는 도중, 그녀의 검은 어이없게도 허공을 갈랐고 마물의 발톱이 그녀의 피부에 상처를 입혔다.

점점 뒤로 밀리는 불새 사냥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떠올린 생각이 맞는다면 그녀가 죽으면 보물은 내 차지가 될 텐데....

이제는 혼자서도 올라갈 수 있었고, 그녀가 잘만 싸워 주면 내가 마물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고.

하지만.

"마물들이 너무 강해! 내가 막고 있을 때 도망쳐!"

피를 뿌리며 마물들과 싸우는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상에는 악당도 많지만 착한 사람, 바보 같은 호구도 꽤 있었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그 사람의 본성을 볼 수 있는데, 그 본성이 착할 경우에는 외면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검을 들었다.

'죽으면 다음번에는 이길 수 있는 놈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가담하기 전에 불새 사냥꾼은 쓰러져 버렸고, 나는 두 마리 마물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커억, 안, 안 돼!"

끊어질 듯한 그녀의 비명이 들려왔고, 나는 눈앞을 가득 채우는 발톱들을 보게 되었다.

눈을 감았다.

서걱.

격렬한 통증.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 세상.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와 휘날리는 옷.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글자.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눈을 떴다.

빠르게 지나가는 동굴 벽.

같이 떨어지는 불새 사냥꾼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흐리게나마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아마 저 위쪽에 조금 전 내가 죽은 보물 창고도 있었을 테지.

이제 곧 수면에 부딪힐 시간.

나는 검을 던지는 대신 꽉 붙잡았다. 그리고 마나를 가득 일으켜서 곧 있을 충격에 대비했다.

풍덩!

바로 다음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물에 빠졌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때렸다.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무거운 검 때문이었다.

처음 떨어졌을 때, 열심히 발버둥을 쳐서 겨우 속도를 늦추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검을 가슴에 품고 움직이지 않았다.

몸에 마나를 돌리니 호흡은 걱정이 없었다.

전생에 다이버들 중에는 10분 넘게 숨을 참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나도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에서 빛이 일렁거렸다. 그녀가 물속에서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처음 떨어졌을 때는 지금쯤 그녀에게 잡혀 수면으로 올라갔을 터였다.

이번에는 너무 깊게 내려와서 그녀가 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고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깊은 저수지였다.

빛도 점점 줄어들었고, 어둠에 잠기자 조금씩 걱정이 되었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이 저수지가 다른 곳과 연결된 것은 아닌지.

그렇게 괜히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

턱.

발이 바닥에 닿았다. 울퉁불퉁한 바닥.

다행히 늦지 않게 바닥에 닿은 것이다.

'이런,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또 실수한 모양이었다.

보물 창고에 구멍이 났다면, 보물들은 아래로 떨어져 이 저수지에 모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두워서야 뭘 찾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그냥 올라갈 수는 없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덕분에 이렇게 빠르게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었다.

또 죽어서 떨어질 것이 아닌 이상 이번에 뭔가 찾아야 했다.

혹시나 해서 눈과 귀에 마나를 더 밀어 넣으려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나를 몸 밖에 뿌리면 어떨까.

공기 중이 아니지만, 물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마나로 공간을 장악해서 다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 영역으로 느끼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검에 마나를 밀어 넣으면 검이 수족처럼 움직이니, 물에 마나를 밀어 넣으면 마나가 퍼진 공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막힌 숨을 몸속으로 되돌리며, 대신 마나를 몸 밖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공기로 퍼트리는 것과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찐득한 젤리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것 같은 느낌.

불편하고 느렸지만, 결국 물속에서도 마나를 퍼트릴 수 있었다.

사방 2m. 마나가 퍼져 나간 공간이었다.

'이건 흙바닥이고, 저건 바위....'

다행히 마나의 움직임을 통해 사물을 느낄 수 있었다.

젤리 속에 들어 있는 이물질을 느끼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처음 느끼는 감각이라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그래도 주변에 있는 물건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웠지만, 바닥에 엎드려서 하나하나 만져 볼 필요가 없으니 충분히 보탬이 되었다.

나는 천천히 저수지 바닥을 걸었다.

저수지 바닥은 내 생각대로 무척이나 엉망이었다.

부서진 바위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사람이 자른 것 같은 돌들도 느껴졌다.

촛대 같은 것도 있었고, 찢어져서 흔들리는 천 조각도 느껴졌다.

그렇게 주변을 수색하고 있으니 조금씩 숨이 가빠졌다.

숨이 가빠진 것을 보니,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아, 맞다. 마물들이 나올 텐데....'

저수지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들과 싸웠었다.

총 세 마리. 그중에 두 마리는 불새 사냥꾼이 처리했었다.

'세 마리도 괜찮으려나?'

이거 괜한 짐을 떠맡긴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쩝, 올라갈 생각을 하니 검이 또 문제였다. 이 검을 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번에는 이 중검을 바닥에 버리기로 하고.

'뭔가 대충 쓸 만한 가벼운 검이 없을까?'

바닥에 쌓인 잡동사니를 훑어보았다.

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넓적한 널빤지 같은 것은 느껴졌다.

'어? 방패인가?'

내가 찾은 것은 크지 않은 원형 방패였다.

'이거 재질이 뭐지?'

무거울까 봐 걱정했지만, 방패는 의외로 무겁지 않았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으니, 우선 이 방패를 가지고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검을 땅에 박아 넣고, 방패를 잡고 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꽤 좋은 방패인 것 같았다. 석실에 있었던 거라면 무척이나 오래된 물건이고 물속에서도 오래 있었을 텐데, 내 마나를 무척이나 잘 받아들였다.

더구나 마나를 밀어 넣으니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는 방패를 양손으로 잡고 위로 올라갔다.

제46화

제21편 유산을 찾았습니다 (2)

푸하!

물 위로 올라오자, 저수지 밖에 쓰러진 마물들과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보였다.

무척이나 지친 모습.

물소리를 들었는지,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살아 있었어?"

내가 죽긴 왜 죽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물들은 하나, 둘, 셋. 총 세 마리.

처음 상대한 마물들이 맞았다.

모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역시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 숫자였다.

하지만, 그녀도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역시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숨을 크게 들이켜 허파에 공기를 넣어 주었다. 마나 덕분에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지만, 역시 숨을 참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힘들게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이상하게 가벼운 방패를 양손으로 붙잡고 물 밖으로 헤엄쳐 나갔다.

잠시 뒤, 바닥에 발이 닿자 방패에 기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잠수병 같은 것도 걸리지 않은 것 같고. 역시 마나가 최고였다.

내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가 다가와 내 몸을 마구 더듬었다.

"괜찮아? 엄청나게 오래 물속에 있었잖아? 미안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먼저 물 밖으로 나오고 말았어. 이렇게 무사할 줄 알았으면 더 찾는 건데. 정말 미안해!"

그녀는 내 몸을 살피며 말을 쏟아 냈다.

쏟아지는 말에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태 보아 왔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이 그녀 속에 있는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그보다 웬 마물이죠?"

"아, 물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나타났어. '레드 마우스'처럼 보이는데, 세 마리가 한꺼번에 덤비니까 속도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었어. 그리고...."

나는 질문을 던진 뒤, 슬쩍 가지고 나온 방패를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크지 않은 방패였다. 어린 내가 가지고 다녀도 될 만한 크기의 방패. 성인 남자라면 겨우 가슴을 가릴 만한 작은 방패였다.

물속에 오래 있었는데도 전혀 녹슬지 않은 방패. 방패의 전면에는 날아오르는 새가 새겨져 있었다.

'어라, 지금은 꽤 무거운데.'

물 밖으로 나와서 그런가. 아니면 마나를 싣지 않아서일까.

나는 방패에 살짝 마나를 밀어 넣어 보았다.

우웅.

방패가 작게 떨렸다. 그리고 무척이나 가벼워졌다. 무게는 마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나를 밀어 넣으면 가벼워지는 방패라니. 이런 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뭐, 마나부터 이해가 안 되는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방패를 살펴보았다.

'마나를 넣으니 문양이 조금 흐려진 것 같은데....'

"검은 어디 가고 방패를 들고 있어?"

"아, 검이 무거워서 저수지 바닥에 내려놓았어요."

"그런데 그 방패를 들고 왔다고?"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거워서 검을 놓고 왔는데, 다른 걸 들고 오다니.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왜 그 방패를.... 잠깐만!"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금방 바뀌었다.

그녀는 급하게 달려와 방패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패 표면의 문양을 살피고, 재질을 확인하면서 그녀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저수지 아래에서 찾았다고? 저, 잠깐 내가 써 봐도 될까?"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장난을 쳐 볼까 하다가, 곱게 방패를 넘겨주었다.

"받아요."

보물 창고의 물건들이 쏟아진 저수지에서 찾은 방패였고, 방패의 문양은 그의 검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았다.

물속에서 방패에 마나를 집어넣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이 방패는 그녀가 찾던 물건이었다.

내가 망설임 없이 건네주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패를 받았다.

그녀는 방패를 반대편 팔에 끼웠다.

내가 들었을 때는 그래도 꽤 몸을 가렸던 방패였는데, 그녀의 팔에 걸쳐 있으니 많이 작아 보였다.

전생에 보았던 캡틴 어쩌고의 방패 정도의 크기로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한쪽 팔에 방패를 차고, 반대편 손에는 검을 들었다.

'방패 검사였나?'

방패와 검을 든 그녀의 모습은 검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어울렸다.

자세를 잡은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우우웅.

그녀의 몸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검이 울기 시작하고, 검날의 문양이 밝은 빛을 뿌렸다.

동시에 방패의 문양도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바닥에 놓은 등의 빛을 배경으로 마치 날개를 활짝 편 새 두 마리가 밤하늘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우웅. 우웅.

검과 방패의 울림이 더 커지고, 검 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패 주변도 칼끝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방패 주변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만들어진 것 같은 일렁거림.

예상대로 방패는 검과 한 쌍이었다.

역시 주인은 따로 있었다.

내가 마나를 주입했을 때는 문양 앞만 조금 일렁거렸는데, 제대로 된 마나를 주입하니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감격한 표정으로 일렁거리는 방패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꿈꿔 왔던 물건을 찾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냥 놔두면 온종일 방패만 쳐다볼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배가 아파서라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저기요? 여보세요?"

"...어?"

내가 여러 번 부르니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일렁거리는 방패를 가리켰다.

"찾던 물건이 이게 맞나요?"

"으응. 맞아."

내 물음에 그녀는 퍼뜩 놀란 얼굴로 방패를 낀 팔을 몸 뒤로 숨겼다.

그런다고 숨겨질 리도 없는데....

아직도 가출한 정신이 다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았다.

"잘되었네요. 찾던 게 그 방패라면 우리가 한 계약대로 방패는 용병님 것이에요."

내 말을 듣고 그녀의 표정은 환하게 변했다가 다시 미안하고 난처한 얼굴로 변했다.

"물속에 들어가서 방패를 찾은 것도 너고, 가져온 것도 넌데. 그냥 내가 갖기가...."

순진한 건지, 호구인지, 아니면 공명정대한 사람인 건지.

어쨌거나 사람이 언제나 일관성이 있었다.

"마물들이 사방으로 굴을 파 놓은 바람에 우리가 이곳에 떨어진 모양이에요."

나는 죽은 마물들의 시체와 벽에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방패는...."

"마물이 판 굴 때문에 보물 창고도 무너져 내려서 창고에 있던 물건도 이 저수지에 쏟아진 모양이에요."

나는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검을 바닥에 놓는 와중에 운 좋게도 방패를 발견했어요. 문제는 내가 바닥에 놓아 둔 검인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내 말에 그녀가 방패를 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거기다 검집에 꽂아 넣은 검까지.

"검도 저수지 바닥에 있고, 보물 창고에 있는 다른 물건들도 같이 있을 거라는 거지?"

"네? 아, 검은 바닥에 꽂아 놓았는데, 잡동사니 말고 다른 물건들은 보지 못했어요."

"뭐, 다른 물건들이 없어도 검을 꺼내 와야 하니까...."

그녀는 갑옷을 훌러덩 벗은 뒤, 겉옷과 신발도 벗어 버렸다.

그 뒤에 속옷 차림으로 허리띠를 하고 그 허리띠에 등을 걸었다.

그리고 저수지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져올게."

첨벙!

"아.... 잠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물속으로 잠수해 버렸다.

황당하리만큼 빠른 행동력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에서 나는 사방에 흩어진 옷가지를 모았다.

그 뒤에 그녀의 방패와 검을 들고, 옷가지 앞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마물이 나타날 확률은 높지 않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편이 좋았다.

무척이나 합리적인 생각이었지만, 나는 검과 방패를 들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를 대든, 지금 내 모습은 물에 들어간 여자 옷을 지키는 어린 소년이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방패와 검에 마나를 주입해 보았다.

아쉽게도 내가 마나를 주입했을 때는 그녀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다.

무기와 방패는 마나를 잘 받아들였지만, 칼끝도, 방패와 주변에도 일렁거림이 보이지 않았고 문양만 조금 일렁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하나, 둘, 셋.... 이백, 이백 일."

일 초에 한 번 숫자를 세며 그녀를 기다렸고,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걱정하는 순간, 소리가 들려왔다.

저수지 쪽이 아닌, 반대편 동굴 쪽에서.

그르르르르.

"역시 쉽게 되는 일이 없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셋. 넷.

총 네 마리.

내가 상대하기 불가능한 숫자였고, 마물 셋과 싸워 겨우 이긴 그녀도 이기기 쉽지 않은 숫자였다.

"빨간 놈들이 없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역시 헛된 위로일 뿐이었다.

마물들은 바닥에 쓰러진 사체들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마물들을 보니, 조금 전에 뜯겨 나갔던 목이 다시 아파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벌써 몇 번이나 죽은 것인지.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이 죽어서 그런지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다.

한계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맛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어이, 조금만 더 빨리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마물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것 같은 움직임.

나는 급하게 방패를 치켜들었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물이 치솟는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익!

동시에 등 뒤에서 바람을 가르며 대검이 쏘아져 들어왔다.

검은 내 얼굴 옆을 지나 정면에서 쇄도하는 마물의 몸에 박혔다.

꽤액!

정면에서 덤벼들던 마물은 검에 맞아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다른 마물들은 멈추지 않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마물들이 내 몸을 덮치려는 순간,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물건들을 찾느라 늦었어."

말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방패를 들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마나가 흘러들어 왔다.

내 마나와 조금 다른 마나가 내 손을 지나 방패로 흘러들어 갔다.

우우우웅!

방패 주변에서 일어난 일렁임이 내 몸을 뒤덮었다.

동시에 마물들이 나와 그녀를 뒤덮었다.

콰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키이이익!

일렁임과 충돌한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지켜 줘서 고마워. 검하고 방패는 내가 쓸게."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던 검과 방패를 가져갔다.

그리고 속옷 차림으로 튕겨 나간 마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발밑에서 마물의 소리를 들었다.

그르르릉.

내 검에 박힌 채로 쓰러진 마물이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마물에 박힌 검을 손에 쥐고, 힘껏 내리그었다.

서걱!

피가 뿜어져 나오며 마물의 상체가 갈라졌다.

솟구치는 피 가운데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멀쩡했다.

그리고 나는 검에 기대어 속옷 차림으로 싸우는 불새 사냥꾼을 구경했다.

속옷에 달린 레이스가 휘날리고, 검과 방패가 사방을 휘저었다.

공간이 일렁거리고, 마물들의 몸이 잘려 나가고 부서졌다.

세 마리의 마물에 헐떡이던 그녀가 더 많은 숫자의 마물을 지금 박살 내는 중이었다.

제47화

제22편 유산을 찾았습니다 (3)

잠시 뒤, 마물들은 모두 쓰러졌고, 불새 사냥꾼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는 힘껏 나를 껴안았고, 나는 그녀의 배에 파묻혀 버렸다.

이런, 키 차이가 나 버리니 영 모습이 우스워졌다.

더구나 그녀의 팔 힘은 무척이나 강했다.

"잠, 잠깐! 숨이 막혀요!"

나는 양팔을 여러 번 허우적거린 뒤에야 겨우 그녀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뒤로 물러선 그녀도 자신이 속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하게 겉옷과 갑옷을 걸쳤다.

나는 물기가 가득 묻은 얼굴을 대충 닦은 후, 그녀에게 말했다.

"우와! 방패 하나 더 든 것뿐인데 전하고 엄청 차이가 나는데요?"

"전하고?"

아차, 그건 나만 겪은 일이었지?

"아니, 후작가에서 검 하나만 들고 싸웠을 때하고 달라져서요. 그동안 실력이 느신 거였나요?"

"아, 그때 봤었지. 실력이 는 게 아니야. 네 말대로 방패 때문이야."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방패를 쓰다듬었다.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았다.

말조심해야지. 여러 번 삶을 반복하니 하나둘 실수가 나왔다. 몸은 멀쩡해도 계속된 죽음과 고통으로 주의력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 맞다. 이거 봐 봐."

방패를 쓰다듬던 그녀가 급하게 저수지 쪽으로 걸어갔다.

물가에는 상당한 크기의 쇠 상자 하나가 반쯤 걸쳐져 있었다.

설마?

나도 그녀를 따라 쇠 상자 앞으로 갔다.

이 쇠 상자는 그녀가 들고 있는 방패와 달리 평범한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서 녹슬고 삭아 있었다.

두꺼운 철로 만들지 않았으면 오래전에 망가져 버렸을 터였다.

"바닥에 이런 게 있었어요?"

저 물속에서도 안 꺼지는 등 덕분이었을까? 내가 찾아보았을 때는 없었던 상자였다.

"원래는 더 많았을 텐데. 물속에 오래 잠겨 있어서인지 이 상자 하나밖에 찾지 못했어."

그녀는 검에 마나를 밀어 넣은 뒤, 망가진 자물쇠가 달린 상자 옆을 내려쳤다.

서걱.

자물쇠는 쉽게 잘려 나갔고.

"그럼 뭐가 있는지 볼까?"

그녀는 낡은 상자를 열어젖혔다.

화악!

상자를 열자, 환한 빛이 앞을 가렸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비비자, 겨우 상자 안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우선 눈을 부시게 만든 것은 상자 바닥에 두껍게 깔린 금화였다.

그것도, 시가의 몇 배를 쳐준다는 옛 제국의 금화.

"금화를 바닥 깔개로 사용한 건가?"

하지만, 불새 사냥꾼은 바닥에 깔린 금화를 보고도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니, 용병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긴장이 풀린 덕분인지 불새 사냥꾼은 자신의 본성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모른 척해 주었다.

금화 위에는 금화에 반쯤 파묻힌 다른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단검처럼 보이는 작은 검과 낡은 책자.

그녀는 기쁜 얼굴로 낡은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검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라, 단검에도 날아오르는 새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도 문양이 그려져 있어요."

문양이 그려진 유물들과 책 한 권이 그녀가 원하던 물건이었다. 나는 그 외에 다른 물건들을 가지는 것으로 계약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손해 보는 계약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물건들이 물속에 빠지는 바람에 내게 너무 유리한 계약이 되어 버렸어. 방패와 책만 있어도 내게는 충분히 넘치는 보상이야."

뭐, 조금 전 싸움만 봐도 저 방패가 검과 한 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은 책은 아마 잃어버렸다는 상속 능력에 대해 적혀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게 준 단검에도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 책과 같이 있었다는 건 분명 저 검과 방패와 같은 세트인 것 같은데....

"그 단검은 이 검이랑 방패와 함께 유산으로 알려진 물건이야."

그것 봐. 맞잖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잘 썰리는 검일 뿐이지만, 나, 아니 우리 일가가 네게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검이야. 나중에 그 검을 돌려주면 우리 가문이 은혜를 갚을게."

음, 역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분명 가문이라 하면 귀족을 뜻하는 것일 텐데, 귀족으로 보기에도 너무 고지식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나중에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건가요?"

내 말에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됐다. 보상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그녀의 정체가 제일 궁금했다.

더구나, 저 상자 바닥에 깔린 금화들은 모두 내 몫이었고, 아직 찾지 못한 물건들이 저수지 바닥에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저수지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시간을 들여 찾으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찾아올 곳은...."

그녀는 입을 열었고, 나는 마나를 귀에 밀어 넣을 정도로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가 막 이야기를 하는 순간!

쿠구구구궁.

저수지 쪽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콰과과과!

천장을 넘어 천장에 난 구멍까지 치솟는 물줄기였다.

촤아아아악!

우리 두 사람은 바로 흠뻑 젖어 버렸다.

"이게 도대체...."

어이가 없어진 나는 황당한 얼굴로 불새 사냥꾼을 쳐다보았다.

"저수지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내 말에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상자가 바위 사이에 껴 있어서 바위를 부수긴 했는데...."

"설마, 지하 수맥을 건드린 건 아니겠죠?"

"그랬나? 검하고 철 상자를 양손에 들고도 올라오는 게 그리 어렵지 않긴 했는데...."

저건 건드린 거다!

그녀가 부순 바위는 천장이 무너지면서 저수지의 물길을 막았던 바위였을 것이다.

바위가 부서진 덕분에 몇백 년간 막혀 있던 물길이 열린 것이었다.

콰콰콰콰!

분수처럼 솟구치던 물이 바닥으로 쏟아내 내렸다.

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저수지가 점점 넓어졌다.

아니, 저수지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불새 사냥꾼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달아나야겠지?"

"그 수밖에 없잖아요!"

마물들을 끌어들여 각개격파를 하는 것도, 기회를 엿봐서 큰 마물들을 처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은 전보다 강해진 불새 사냥꾼만 믿고, 솟구치는 물에서 달아나야만 했다.

나는 되는 대로 금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녀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불새 사냥꾼이 먼저 가까운 동굴로 뛰어들었고, 나는 단검을 허리춤에 쑤셔 넣고,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콰콰콰콰!

달리는 우리 뒤에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진동과 물소리 때문인지, 우리를 막는 마물들의 모습도 전과 달랐다.

포위하고, 함정에 빠뜨리기는커녕 우리와 마주치자, 우리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전과 달라졌어도 그녀는 알 리가 없었고, 봐줄 리도 없었다.

방패와 검이 움직이자, 앞을 막아서던 마물들이 잘려 나가고 튕겨 나갔다.

그녀와 나는 튕겨 나간 마물들을 마무리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상처를 입은 마물들은 뒤따라오는 급류가 해결해 줄 터였다.

그렇게 마물들을 처리하고 지나치며 우리는 계속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나는 검을 휘둘러 볼 겨를도 없었다.

주머니와 품에 가득 넣어 둔 금화가 거치적거리고, 대검의 무게 때문에 발걸음이 느려지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방패를 든 뒤로 그녀는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싸우면서 점점 방패와 검을 같이 쓰는 게 익숙해지고, 마나의 움직임도 원활해져 간 것이다.

동굴을 빠져나갈 때쯤이면 방패를 들기 전보다 배는 강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뒤만 쫓아가는 것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녀와 달리 나는 이미 마물들과 지겹게 싸워 봤기 때문이었다.

그녀처럼 싸우면서 강해진다면 모를까, 괜히 멈춰 섰다가는 물에 휩쓸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또 죽음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 우리는 전혀 다른 동굴에 도착했다.

"잠깐, 여기는 사람 손이 닿은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이곳부터는 사람이 만든 지하 통로였다.

바로 보물 창고가 있는 통로였다.

"아.... 여기가 보물 창고하고 연결된 통로인 건가?"

그녀도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저번과 다르게 무척이나 차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물 창고가 박살이 났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막아섰다.

"잠시만요. 여기부터는 좀 더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아직 마물들이 다 나온 것 같지도 않고...."

크고 빨간 두 마물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회색 놈들도 아직 다 죽인 것 같지도 않고.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면 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설명이 부실한데....

내 비밀을 말하지 못하는 이상,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감은 꽤 좋은 것 같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방패와 검을 세운 채로 마나를 퍼트렸고, 나도 중간에 잡은 마물 가죽으로 만든 금화 허리띠를 다시 묶었다.

그리고 대검을 등 뒤에 메고, 단검을 손에 쥐었다.

통로가 넓지 않아 대검으로는 그녀의 싸움을 방해할 것 같았다.

지금은 뒤에서 그녀를 보조하는 편이 싸움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내가 단검을 드는 것을 보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전에 보았던 철문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철문 앞에는 예상대로 마물들이 모여 있었다.

여태 죽여 왔던 회색의 마물들과 그 뒤에 배는 더 커 보이는 두 붉은 마물들.

이름값을 하는 '레드 마우스'들이 보물 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우리를 막으려고 그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웃기게도 저 마물들도 차오르는 물을 피해서 이곳에 모여 있었다.

겸사겸사 우리를 처리할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피할 이유도 없었고.

"어째 레드 마우스가 붉지 않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나머지 놈들은 저 두 놈들이 낳은 돌연변이들이었나?"

저번 삶에서 나보고 도망치라고 한 것과 달리, 그녀는 두 마물을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뒤를 부탁해! 물이 올라오기 전에 빨리 끝내자고."

그녀는 활기차게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시간, 머릿속에서 들리는 환상과 환청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단검을 들고 마나를 밀어 넣으면서 시작된 환상이었다.

허공에 조금씩 불길이 일어나고, 그 불길이 새 모양으로 바뀌었다.

반투명하게 주변 사물을 통과하는 것을 보니 환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불새 사냥꾼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렇게 환상이 커지다가, 지금은 환청까지 들리고 있었다.

날개를 펄럭이는 불새 환상이 입을 뻐끔거리는 순간, 머릿속으로 이런 말이 들려왔다.

-힘을 원하는가!

제48화

제23편 선물이 뭔가 이상하다 (1)

마물들은 몰려오는 와중에 들려오는 환상과 환청이라니.

거기다 허세가 가득한 환청은 할 말을 잃게 할 정도였다.

'힘을 원하는가'라니.

이래서야 대답은커녕, 전투도 벌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나를 끊어도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단검을 허리에 꽂아 놓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주인지, 아니면 반복되는 죽음 때문에 일어난 후유증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필 이런 때에 일어나다니.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나에게 불새 사냥꾼의 외침이 들려왔다.

"붉은 놈들을 잡을 테니까 나머지 놈들을 부탁해! 시간만 벌어 주면 돼! 후딱 잡고 도와줄게."

그녀의 지시는 무척이나 이치에 맞았다.

달려오는 회색 놈들은 하나, 둘, 세 마리.

처음 만났을 때라면 도망도 어려웠을 거고, 여러 차례 반복한 지금도 겨우 도망을 치며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의 지시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내가 멀쩡하다면....

하지만, 환상이 시야를 가리고 환청이 귀를 때리는 상황에서 도망을 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저주이건 후유증이건 상관이 없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뭐가 되었건 눈에서 안 보이면 그만이었다.

"좋아!"

카랑카랑한 어린 목소리가 석실 통로에 울려 퍼졌다.

달려오던 마물들이 움찔거릴 정도였고, 불새 사냥꾼도 놀란 눈치였다.

"오, 시원시원한데, 그럼 부탁해!"

문제는 그녀가 오해해 버리고 말았다.

댁에게 한 말이 아닌데....

화끈하게 오해를 한 불새 사냥꾼이 붉은 마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회색 마물들이 나에게 덮쳤다.

마물들이 나를 향해 두 발톱을 휘두르는데도 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불타는 새의 환영이 온몸을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불이 붙고, 살이 타들어 갔다. 뼈가 익고 피가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도 주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종의 환상통인가? 거기다 덤벼들던 마물들은 왜 멈춰 있는 거지?'

정말 대단한 고통이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고통은 아니었다.

이미 죽음을 여러 번 겪은 나로서는 이 정도 고통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일종의 적응인가, 아니면 포기일지도....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그런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몸이 불타고 고통이 느껴졌지만, 불길 아래의 피부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이건 환상과 환청에 이은 환상통이었다.

환상통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더 통증이 견디기 쉬워졌다.

거기다 내 몸과 주변 사물이 움직임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마물들이 휘두른 발톱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슬로우 카메라를 극도로 느리게 돌린 것 같은 움직임.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마물만이 아니었다.

마물에게 달려가는 용병도, 바람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모두 느리게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모두 느려진 게 아니었다. 이건 내 정신이 수십 배, 수백 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을 이겨 내며 낯선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몸 밖에서가 아닌, 내 몸속에서 생기는 변화였다.

꿈틀.

나를 태우던 불길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불길은 내 몸속에 있는 마나를 불태웠다.

잔잔하던 마나가 마구 끓어올랐고, 점점 변해 갔다.

특별한 색이 없이 반투명하던 마나가 붉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부 아래에서 몸 깊은 곳까지. 팔다리에서 가슴과 머리까지. 모든 마나가 끓어오르고 변해 갔다.

모든 마나가 끓어오르는 순간.

파악!

몸속의 마나가 단검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불타는 듯한 마나가 팔과 손을 지나 단검에 밀려들었고, 단검은 맛있는 먹이를 먹는 것처럼 마나를 받아들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쭈욱.

마나가 밀려들수록 검의 길이가 점점 길어졌다.

아니, 검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밀어 넣은 마나가 검 끝에서 검의 형태로 계속 길어졌다.

유명한 SF영화의 광선 검 같은 모습. 하지만, 길어진 마나 검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내 마나가 늘어났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눈으로는 조금 공간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환상이 사라졌다. 환청도 느껴지지 않았다.

들끓던 열기도 느껴지지 않고, 고통이 사라졌다.

달라진 마나만이 내 몸과 단검으로 흐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캬아아악.

눈앞에서 굼벵이처럼 움직이던 마물의 발톱이 다시 움직였다.

바람이 피부를 가르고, 마물의 입김이 얼굴을 달궜다.

동시에 나도 검을 휘둘렀다.

짧은 단검이라 발톱들을 전부 막지 못하겠지만, 전혀 걱정이 들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예상대로였다.

마물이 휘두른 발톱은 다음 순간 잘려 나간 앞다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무엇을 잘라 낸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고, 단검에는 피도 묻지 않았다.

당연했다. 마물의 앞다리를 자른 것은 단검이 아니라 단검에 덧씌워진 마나 검이었다.

단검 길이의 세 배 정도 되는 마나로 이루어진 날이 단단한 마물의 앞다리를 순식간에 잘라 낸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힘이 생겼는데,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 필요는 없었다.

이유나 여타 문제는 닥친 일을 해결하고 난 뒤에 생각할 문제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검날로 앞다리가 잘려 나간 마물의 목을 잘라 버린 뒤.

뒤이어 달려드는 회색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검날이 보이지 않는 검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무기였다.

허공에 단검을 휘두른다고 생각한 마물은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바로 마나로 이루어진 검에 쓸려 나갔다.

순식간에 마물 두 마리를 쓰러뜨렸다.

마지막 마물은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덤비지 않으면 내가 가면 그만이었다.

역시 머리가 좋은 마물이었다.

단검이 다른 검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른 마물들과 다르게 열심히 몸을 피했지만, 보이지 않는 검을 모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물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처음 불새 사냥꾼과 싸우던 마물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벌써 마나가 딸리는데....'

마나가 달라져서인지, 잠깐 싸웠다고 마나가 부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마냥 좋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바로 마물에게 달라붙었고,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쓰면서 마물에게 검을 휘둘렀다.

크으으으응!

다행히 마나가 떨어지기 전에 마물을 쓰러뜨렸다.

아직도 몸속을 질주하는 붉은 마나.

나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단검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단검 위로 거친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설마, 이대로 마나가 전부 변해 버린 건가?

좋은 무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 본래 마나가 바뀌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상속 능력까지 바뀌어 버린다면 큰일이었다.

나는 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스스스스스스.

아, 다행스럽게도 마나가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 마나가 물러나고, 다시 투명한 내 마나가 점점 돌아왔다.

빠르게 원래의 마나로 돌아왔고, 다시 마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단검을 잡아 보았다.

다시 붉게 변하는 마나. 그리고 차오르던 마나는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검에서 손을 떼고, 다시 쥐어 보는 것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몸속의 마나가 바뀌었다.

"마나 말고, 몸 상태도 좀 바뀌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표현은 못 하겠지만, 몸의 근육과 신경 같은 것도 마나의 움직임에 걸맞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이 검을 잡으면 능력이 바뀌는 걸까?"

아니면, 전생의 게임 같은 직업 체인지 아이템 같은 걸지도.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환상을 떠올렸다. 불타는 새와 그가 외친 질문.

-힘을 원하는가!

닭살이 돋는 말이었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내가 보았던 환상을 평범한 환상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었지만, 내 옆에는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단검을 허리춤에 매달고, 아직도 싸우는 중인 불새 사냥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외친 말과 달리, 꽤 팽팽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전에도 보았지만, 저 붉은 마물들은 회색 마물들과 차원이 달랐다.

살쾡이와 표범의 차이랄까.

더 강한 피부, 덩치에 걸맞지 않은 더 빠른 움직임, 그리고 그녀의 보이지 않는 검을 피해서 움직이는 지능까지.

여행 중에 보았던 마물들과 전혀 달랐다.

여행 중 들었던 나이 든 기사의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런 곳에 있는 마물들은 대전쟁 때 낙오된 놈들과 그 자식들이야. 제대로 된 놈들은 대전쟁 때 마계로 돌아갔거나 봉인지로 모여들었지. 이런 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과연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을 마물이 동굴을 벗어나지 못해 남아 있게 된 것일까?

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자신보다 훨씬 약해진 자식들을 키우면서?

그래서 저렇게 화가 난 것일까?

크앙!

내 주변의 마물들이 모두 쓰러진 뒤, 붉은 마물들은 더 무섭게 날뛰고 있었다.

뭔가 나름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이 된 이상 그런 사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불새 사냥꾼을 도와야 할 듯했다.

마물들은 분노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그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피투성이 되면서도 그녀의 보이지 않는 검의 간격을 확인한 것 같았다.

한 마리가 앞에서 그녀를 상대하고, 다른 한 마리는 옆에서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미 몇 차례 자리를 바뀐 모양.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역시 마나가 부족한 것 같았다.

"젠장! 젠장! 잘난 척하다가 이게 뭐야!"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내가 들릴 정도로 자책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뒤에서 소리가 멈추자, 내가 도망쳤거나 죽었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너무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는 중이려나?

나는 그녀를 향해 걸어가며 다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화아아악!

단번에 바뀌는 마나. 붉게 변한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열심히 싸우는 그녀의 뒤쪽에 서서 나는 입을 열었다.

"도와드려요?"

갑작스러운 음성에 그녀가 급하게 몸을 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엑? 살아 있었어?"

적과 싸우는 도중에 고개를 돌리다니, 내 목소리가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마물들과 멀쩡한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녀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소리 없이 달려드는 마물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위험해!"

그녀는 내 고함에 겨우 정신을 차렸고, 검을 휘둘러 정면에서 달려오는 마물의 발톱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던 다른 마물을 놓치고 말았다.

빠르게 들어오는 발톱.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발톱 옆을 지나가는 일렁거림을 보게 되었다.

까아앙!

발톱이 튕겨 나갔고, 그녀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휴, 늦지 않았네요. 싸우는 중에 뭐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내 고함에도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와 똑같은 마나가 일렁이는 내 손에 든 단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49화

제24편 선물이 뭔가 이상하다 (2)

다시 공격을 당하기 바로 전.

단검을 바라보던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건지 이따 알려 줘야 해!"

그런 말을 남기고, 거친 숨과 함께 밀려 나간 붉은 마물을 향해 달려 나갔고, 나는 남은 마물 앞을 가로막았다.

마물이 으르렁거렸지만, 나는 단검을 들고 마물 앞을 얼쩡거릴 뿐이었다.

솔직히 이길 자신도 별로 없을뿐더러 어린 몸은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다.

이미 내 몫 이상을 했다. 여기서는 마물 하나만 잡아 두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마물을 피투성이로 만든 그녀 덕분에 붉은 마물의 행동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나는 싸움 없이 마물을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잠시 뒤, 그녀와 싸우던 마물이 쓰러졌다.

역시 상대가 둘이라서 고생을 한 거지, 일대일은 금방 끝이 났다.

"수고했어!"

마물을 쓰러뜨린 그녀는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바로 내 쪽으로 달려왔다.

이제는 숨을 헐떡이는 것 이상으로 마나가 부족해, 검에서 피어오르는 일렁거림도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남은 마물 하나 정도는 상대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마나가 다 사라지기 전에 남은 마물을 쓰러뜨렸다.

마물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내가 옆에서 가세한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많은 틈이 만들어졌다.

잠시 뒤 마지막 마물이 쓰러졌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물을 모두 쓰러뜨린 기쁨도, 힘든 마나 부족도 그녀의 질문을 막지 못했다.

그녀는 온몸으로 숨을 헐떡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아는 게 있어야지 대답을 할 텐데.

"모르겠어요. 단검을 들고 싸우려고 하는데, 문양에 그려진 새의 환영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결국, 나는 조금 전 경험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고 환청에 대답하자, 마나가 바뀐 것.

마나가 뒤바뀐 뒤에는 정신을 잃고 눈을 뜨자, 마물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던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이렇게 검을 들고 마나를 움직이면 마나의 성질이 바뀌어 버려요."

나는 일렁이는 단검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다시금 멍하니 단검을 바라보았다.

"환상에 환청? 말도 안 돼. 이미 상속은 이어졌는데, 상속자가 또 나왔다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왔다. 상속 능력은 유전으로 받는 게 아니었나?

내가 아는 상속하고는 상당히 달랐다.

뜻밖의 소리에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고, 서로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쿠르르르르.

우리가 올라온 동굴에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네요. 우선 밖으로 나가야 해요."

내 말에 그녀도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괴상한 존재를 목격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행히 그녀도 마나와 체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나는 쓰러진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레드 마우스가 이렇게 강한가요? 대전쟁 때는 흔해 빠진 하위 마물이었다면서요. 이런 마물들이 바글거렸으면 어떻게 이긴 거죠?"

내 말에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 마물들은 평범한 레드 마우스가 아닌 것 같아. 레드 마우스가 이렇게 강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거든. 레드 마우스가 회색인 것도 처음 보았고. 이 안에서 뭔가 달라진 건가?"

다행히 그녀는 내 말에 잘 대답해 주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누워 있는 마물들의 과거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대전쟁 때 지하 동굴에서 낙오하고, 이 지하에 갇혀서 수백 년간 마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려나.

자식을 낳아 수를 늘리고, 오랜 시간 힘을 키우며 자신들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걸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립된 수백 년의 삶이라....

죽어 있는 마물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나는 잠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괜히 마물 때문에 감상에 젖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쉽네요. 대전쟁 때 마물이면 상인들이 잘 쳐줄 텐데."

내 말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 마물을 못 가져가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긴 물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긴 했다.

"네 상속 능력을 생각하면 마물 사체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아니, 돈이 아까우면 꺼낼 수도 있는 거지 뭐.

오히려 용병인 그녀가 돈 이야기를 무시하는 게 더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상속 능력을 중복으로 얻을 수 있다니.... 이건 그녀의 말처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려지면 피곤한 일이 벌어질 거고, 나 때문에 그녀의 상황도 골치 아파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담담했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지금 벌어진 일에 무척이나 겁을 먹었겠지만, 여러 번 죽어 봐서 그런지, 앞으로 벌어질 일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 말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가벼워졌다.

우리 두 사람은 저번 삶과 같이 철문을 열고, 창고 내부를 확인했다.

창고는 전에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창고 중앙에는 위아래로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남은 부분에는 멀쩡한 물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전에 보았고, 그녀도 예상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두툼한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다시 그녀를 재촉했다.

위로 뻥 뚫린 구멍.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등불을 들어 올렸다.

등불 빛에 의지한 채로 위를 올려다보니, 구멍 멀리 천장이 보였다.

그녀와 내가 떨어졌던 무덤의 천장이었다.

철썩.

하지만, 위를 올려다보는 사이.

아래쪽 구멍을 채운 물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열린 창고 문 쪽에서도 물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고.

물은 이미 신발을 적시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중이었다.

천장을 보고 감동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내 몸을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

"그동안 실력으로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올라갈 수 있겠어?"

"네."

그녀의 물음에 나는 등 뒤의 대검을 꺼내며 대답했다.

한 손에는 단검을 쥐고, 다른 손에는 대검을 들고.

그리고 대검에 정신을 집중하니.

스르르르.

거칠게 움직이던 마나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검 위에 일렁거리던 마나가 사라지니, 불새 사냥꾼이 다시금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차오르는 물을 헤치고 창고 벽으로 걸어갔다.

단단한 돌로 되어 있는 벽은 웬만한 망치질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지하에서 검을 이용한 암벽 등반이라니.

전생이었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나라는 치트키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단검에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바꾸고, 일렁거리는 대검을 벽에 박아 넣었다. 최대한 높이.

푹.

대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검날 형태로 구멍이 뚫리는 벽.

그 구멍 안으로 쉽게 대검을 밀어 넣었다.

내가 봐도 대단한 모습이었지만, 대신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나는 바로 마나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대검 위로 올라섰다.

마나를 되돌리자 빠르게 마나가 차올랐다.

이번에는 단검을 같은 방법으로 벽에 밀어 넣고, 단검에 매달린 후에 대검을 뽑아 들었다.

다시 단검 위로 올라선 뒤에 마나를 되돌리고.

다행히 예상대로 마나가 움직여 주어 올라가는 동안 마나가 부족해질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불새 사냥꾼은 괜찮으려나....'

나야 마나를 바꿔서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지만, 그녀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많이 쉬지도 못했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전생에 들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잘난 사람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원래는 '연예인 걱정 어쩌고'였던 것 같지만. 그녀를 걱정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천장을 지나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벽을 타는 중이었다.

검으로 열심히 발받침을 만드는 나와 달리, 그녀는 일렁이는 검으로 벽에 금을 쓱쓱 긋고서 금을 밟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훌륭한 마나 활용법이고, 제대로 된 암벽 등반이었다.

역시, 아직 잘난 척할 때는 아니었다.

뻘쭘한 마음에 나는 다시금 벽에 검을 박아 넣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처럼 하고 싶긴 했지만, 저 정도로 멀리, 그리고 빨리 마나 검을 쓸 수 없었다.

거기다 암벽 등반도 따로 배운 적도 없었고.

괜히 따라 하다가 물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대검에, 주머니 안 금화까지. 잘못하다가는 익사하기 딱 좋았다.

나는 차오르는 물을 피해 열심히 손발을 움직였다.

난이도가 높은 천장을 지나 구멍으로 들어간 뒤, 계속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수직 동굴 중간에 등을 걸어 두어서 올라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쫓아서 물은 계속 차올랐고.

"도대체 어디까지 차오르려는 거야."

출렁이는 물을 보며 투덜거리면서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나는 기어이 구멍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모서리에 손을 올리고, 발밑의 단검을 회수한 뒤.

마지막으로 위로 몸을 올리는 순간!

부웅!

커다란 대검이 내 머리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우왓!"

놀란 나는 급하게 몸을 피했고, 당연히 나는 공중에 붕 뜨게 되었다.

허공에서 나는 나를 공격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대검을 든 기사. 잘생긴 중년 기사였다.

기사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거기다 왜 나를 공격하는 건데.

기사 옆에는 먼저 올라간 불새 사냥꾼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어디도 다치지 않은 것 같았고, 무기도 가지고 있었다. 제압당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럼 저 기사와 그녀는 한패려나. 역시 그녀는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다.

그보다 설마 그녀에게 속은 걸까?

솔직히 이 유적과 그녀가 얻은 유산을 보면 사람을 죽여 비밀로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내가 그녀의 상속 능력을 얻은 것은 그녀나 그녀 가문에 있어서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번 죽으면서 봐 온 그녀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아니, 그보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보험을 들어 놨잖아.

분명 신전에서 계약했는데? 이거 계약에 구멍이 있는 거였어? 뭔가 편법이 있는 거였나?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마구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멈춰요! 그 아이는 동료예요!"

그녀의 말에 기사의 표정도 이상하게 변했고.

나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풍덩.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예상대로 물속에 빠진 나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끝나 버리면 어떻게 또 반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도 꼬이고, 동료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기사는 왜 나온 거고, 우물을 지키던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튼 겨우 끝에 도달했는데!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누군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풍덩!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가라앉은 사람이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물에 떠 있는 등 덕분에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속에서도 멋진 중년 모습의 기사가 갑옷을 입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50화

제25편 선물이 뭔가 이상하다 (3)

"쿨럭, 쿨럭."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나는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불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여자 용병.

'죽지 않은 건가?'

나는 겨우 돌아온 정신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에 머리를 긁적이는 중년 기사가 보였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본 모습이 환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내 물음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기사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안하군. 불새 문양이 그려진 검을 들고 있어서 착각했네. 영애.... 아, 아니, 아가씨의 물건을 빼앗고 뒤를 쫓는 건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낮은 듣기 좋은 목소리.

하지만, 그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감쌌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로 바꾸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기사에게 아가씨로 불리는 용병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의 말대로 어디 높은 가문의 영애일 테지.

아니, 나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가?

"네? 이런 꼬맹이가 가능할 거로 생각했어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그런 내 모습을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기사는 미안한 얼굴로 다시 사과했다.

"아니, 전에 어린 모습으로 달려든 암살자가 있었기도 했고.... 아무튼 미안하네. 다시 한번 기사로서 정식으로 사과하지."

"기사로서 사과요?"

내가 기절하는 동안에 불새 사냥꾼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찌 되었건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기사가 사과할 리 없었다.

하지만, 기사로서의 사과라니. 뜻밖의 행운인데?

기사로서의 사과는 거의 사라진 기사도의 예절이었다.

어느 정도 되는 기사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만큼 고지식했다.

쌍으로 고지식한 두 사람을 보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마나를 한 번 돌리자 바로 어지러운 것이 사라졌다. 마나 만세.

"그런데, 아는 분이신.... 아니, 이럴 때가 아니군요."

나는 허물어진 묘지의 석실에 누워 있었는데, 중앙에 생겨난 구멍에서 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물이 솟아나는 건지....

"우선 빨리 빠져나가죠."

나 때문에 계속 남아 있었는지, 내가 말하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그녀는 부서진 묘실을 떠나며 아쉬운 얼굴로 몇 번이나 돌아보았지만, 결국 방패를 쓰다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사도 육중한 갑옷을 다 갖춰 입고서 잘도 달렸다.

나도 잠깐 기절한 덕분에 마나가 충분했고, 우리는 빠르게 지하 동굴을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도망치는 지하 동물들과 함께 동굴을 달려 우리는 처음 내려왔던 버려진 우물 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라붙었던 우물 바닥이 젖어 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열심히 우물 벽을 올라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를 쫓아오던 물길은 다행히 우물을 반쯤 채우고 멈추었다.

지상에 나온 나는 후안을 찾았다.

다행히 후안은 무사했다.

눈에 커다란 멍을 달고, 입에는 천이 물린 채로 밧줄에 칭칭 감겨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은 멀쩡한 채로 우물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우물에서 나온 기사를 보고 몸을 흔들어 댔지만, 곧이어 우물에서 나온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기사는 먼저 후안에게 가서 그를 묶은 밧줄을 풀어 주었다.

후안은 입에 물려 있던 천을 빼내고, 먼저 내 안부를 물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의 말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가 있었어. 둘이 같은 동료였던 모양이야."

내 말에 기사는 사과 대신 나를 보고, 후안을 칭찬해 주었다.

"좋은 병사를 두셨군요."

제대로 된 사과는 아니었지만, 나름 기사로서 성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나는 어쨌거나 귀족이었으니까 사과한 거지, 기사가 평민에게 사과할 리가 없었다.

후안도 그 정도로 만족한 듯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등했던 전생을 경험한 나는 불만이었다.

이쪽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후안이 사과를 받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이쪽 세상의 신분제를 철폐하겠다고 설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분제 덕분에 죽기도 많이 죽었고 피해도 많이 보았지만, 이득도 적지 않게 보았다.

나는 신분제를 바꾸는 대신, 나나 내 주위의 사람들은 신분제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이득을 보게 만들고 싶었다.

음, 뭔가 처음 생각하고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일이 생겨서 바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예상했던 말이었다.

기사가 괜히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가기 위한 전령이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신기했지만, 숙소에 메모를 남겼으면 못 찾아올 것도 없었다.

그것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 말대로 무척이나 다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웬만한 기사단의 상급 기사로 보이는 기사를 전령으로 쓸 정도로 급한 일일 터이니.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기절한 사이에 나누었던 모양이었고, 당연하게도 내게는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녀는 다른 문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고...."

뭐, 보물만 찾아 계약대로 나누었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계약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 용병 느낌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전에도 용병답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높은 지위에 있는 귀족 티가 여실히 났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답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녀가 손뼉을 쳤다. 뭔가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네 나이라면, 몇 년 뒤에는 제대로 된 교육기관에 가야겠지?"

교육 기관이라. 수도원이나 수도에 있는 왕립 학원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둘째 형이... 슬슬 수도로 유학을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십 대 초중반에 유학을 떠나거나 학원 같은 교육 기관으로 가는 것 같기는 한데.

뭐, 아예 어릴 때 수도원으로 간 누나도 있고....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상속 능력은 얻었지만 반쪽짜리 귀족이니 밖으로 내돌릴 것 같지도 않고, 공작부인이 멀쩡하게 잘 계시니 난 이대로 저택 내에서 지내게 되겠지.

나는 그런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가문 이름으로 초청장을 보내면 공작께서도 마냥 거절하시지는 않으시겠지. 더구나, 너 같은 천재를 그냥 버려둘 리도 없고."

그녀의 말에 중년 기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시국에 정식 초청장은 조금 고민하시는 게 좋지 않을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습니다. 그는 외인이 아니게 돼 버렸으니까요. 확인해 봐야 할 것도 많고. 다들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절하였던 동안에 벌어진 일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비밀이라는 걸까?

그런데 설마 초청이라는 게 생체 실험실로 오라는 것은 아니겠지? 실험실 모르모트가 떠올라 등골이 잠깐 오싹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보다 공작도 고민해 봐야 할 초청장이라니.

그녀는 도대체 어떤 귀족인 걸까.

"저기,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니, 그보다 '불새 사냥꾼'으로 초청장을 보내는 건 아니겠죠?"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냥 불새 사냥꾼이라는 용병으로 헤어지려고 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이름을 알려 줘야겠지."

드디어 이름을 듣게 되는군.

기사가 눈짓을 주자, 후안은 멀찍이 자리를 피했다.

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둘째 딸이지."

이어서 카트린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백작가라니. 역시나 고위 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라니. 여자에다 둘째면 후계자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하는 행동이나 말을 보면 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다.

우리 공작 각하께서 백작가의 초청장에 휘둘린다고? 뭔가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면 쉽지 않을 텐데.

나는 앞뒤가 잘 안 맞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때 머릿속에서 백작가의 이름이 맴돌았다.

어라, 잠깐. 라텐하마르 백작가? 분명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

곧이어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 설마?

나는 급하게 물었다.

"잠깐만, 분명 세 번째 왕비님 성이 라텐하마르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맞아. 내 언니야."

그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우리 왕국의 세 번째 왕비이자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의 어머니가 그녀의 언니라니.

그렇다면, 공작가에 보내는 초청장은 왕비 가문에서 보낸다는 거였다.

당연히 공작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겠지. 확실히 이해했어.

아니, 아니, 정신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세 번째 왕비의 가문이라니. 말도 안 돼. 그냥 잘나가는 가문이 아니잖아. 왜 하필 외척인데.

이거 잘못하다가는 왕국 정치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잖아!

거기다 공작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어 그녀는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안에서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했으면 해. 계약에 있던 내용이고, 우리 가문에는 중요한 일이니까."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지만, 이렇게 되면 더 설명하기 어려워지잖아!

하지만, 그녀는 내 생각과 상관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한 뒤에 두 사람은 먼저 폐허가 된 마을을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후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도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사가 들이닥치지를 않나, 세 분 다 온통 젖은 채 나오고."

전에는 이런 질문을 안 하던 후안이었지만, 이번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정체를 알았으면 아예 묻지도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고.

그래도 나를 위해 기사를 막아선 후안이었으니 돌아가는 길에 몇 가지 비밀을 빼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기 전, 나는 숲에 먹혀 버린 마을을 돌아보았다. 우물이 마른 뒤, 사람들이 떠나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이제 말랐던 우물에 물이 채워졌으니, 이 마을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내 말에 후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일 겁니다. 전에 마을이었을 때는 숲이 이곳까지 밀고 오지 않았으니까요. 마을이 숲속에 묻혀 버렸으니 사람들이 돌아오긴 힘들 겁니다. 뭐, 땅속에 물길이 만들어졌으니 오히려 숲이 더 커질지도 모르고요."

그럴듯해 보이는 후안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잘못된 일을 되돌린다고 해도, 이미 지난 일들이 무조건 원래대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진짜 과거로 돌아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때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선택이라....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여러 가지 남은 것들이 있었고, 앞으로 또 다른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숲을 떠나 도시로 돌아오며, 과연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선택을 하는 중인지 계속 고민을 했다.

그 와중에도 허리에 찬 단검과 주머니에 가득 담긴 금화들은 큰 위안이 되었다.

제51화

제1편 추천서 (1)

여러 번 반복된 시간으로 말미암아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느껴졌지만, 따지고 보면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거기다 땅속에서 그 난리가 벌어졌지만, 영지는 숲속에 버려진 우물에 물이 다시 찼을 뿐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느지막이 돌아온 저택은 아침과 달라진 게 없었고, 사람들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거리를 두려고 했고, 병사들도 나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을 가기 전처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나는 이곳에서 외인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모습은 아침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아직 어린 몸이었지만, 새로운 무기에 새로운 능력까지.

그것도 전례가 없었던 두 가지 상속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방에 돌아온 나는 단검을 꺼내 보았다.

아마도 그녀가 가지고 간 방패와 검, 그리고 이 단검은 한 세트였을 터.

지금은 단검을 들고 있어도 환청이나 불새의 환상은커녕 병아리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잉.

단검의 끝에는 내 눈에만 보이는 마나가 길게 늘어났다.

마음속에서 스위치를 올리는 것처럼 마나를 바꾸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잔잔하던 마나가 불타오르고, 마나로 이루어진 검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 단검을 들었을 때만 가능했고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그 이유도 몰랐지만, 내게 도움이 되는 능력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생각도 조금 달라진 걸까?

카트리네 영애가 말한 추천장.

전 같았으면, 왠지 사건에 휘말릴 것 같아서 피했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부터 아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 능력이 중요한 것이라면 분명 초청장을 보낼 터.

초청장을 거절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초청장을 받아들이고 수도로 향하는 것이 옳을지.

수도에 가면 이곳 이상으로 반쪽 귀족인 내 처지가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괜히 고생만 하다가 정쟁에 잘못 휘말려 버릴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죽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 한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윽, 생각해 보니 정말 위험한데...."

대충 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왕국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뭐, 초청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을 테지만...."

공작이 마음대로 결정할 게 분명했지만, 이대로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 *

"흠, 공자님께 그리 필요한 교육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며칠 뒤, 왕국 정치에 대해 자세히 알려 달라고 했을 때, 서기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나를 가르치는 교사였건만, 제대로 이야기를 듣기도 쉽지 않았다.

"저에게도 공작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공작님과 영지를 위해 꼭 필요한 공부입니다!"

"...뭐 그러시다면."

영지의 미래를 걱정하는 공작의 아들 연기를 필사적으로 펼친 덕분에 겨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에 나라가 두 왕자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지금은...."

전에도 느꼈지만, 그는 서기관치고 무척이나 왕국 사정에 밝았다.

"귀족파도 있긴 하지만, 왕께서 건강이 안 좋으신 탓에 근래는 각각의 왕자를 지지하는 두 파벌 간의 다툼도 치열해졌습니다. 영지 간의 분쟁도 심해졌고요."

나는 그 분쟁을 저번의 삶에서 직접 경험했었다. 덕분에 몇 년을 다시 살아야 했고, 이에로 후작령까지 다녀와야 했다.

물론, 우리 영지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없었던 일이 되었고,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도 후계자의 병사로 덮여 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파벌 싸움이 극심한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 왕자 진영의 분쟁을 막기 위해 시몬 공자님이 후작가 영애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봐선 수습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 제1 왕자께서 왕세자이시고, 왕께서 다음 대 왕으로 제1 왕자를 세우고 돌아가신다고 해도, 제2 왕자 쪽이 이를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겠죠."

후작가를 다녀오는 사이에 몇몇 영지가 이미 피를 본 모양이었다.

'설마, 후작가 일을 뒤에서 조종하던 자들이 다른 곳도 손을 본 걸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직 다른 정보가 없으니 그냥 머릿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서기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귀족파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저울추가 확 기울어지겠지만, 귀족파의 수장이 왕의 동생인 훌리안 공국왕이라 일이 무척 복잡해진 상황입니다. 공국왕이 되었으면 왕국 정계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모양새가 좋은데, 사정이 영 우스워진 꼴이죠."

그 말을 하면서 서기관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서기관도 무척이나 반골이었다.

왕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혀를 차다니.

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겠지만, 공작이나 다른 귀족 앞에서는 절대 해서 안 될 행동이었다.

아무튼 서기관의 말대로라면, 우리 왕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거기다 후계자를 결정하는 내전이라는 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국력 낭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을 왜 이렇게 자주 벌이는 건지. 차라리 둘 중 하나가 미리 암살이라도 당한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위험해. 정말 위험해.

나를 가르치는 서기관은 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인간이었다.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지금 꺼낸 말은 잘못하다간 목 날아가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지금 그는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저 미소는 나를 떠보는 것이 분명했다.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를 살피는 동안, 그도 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이 세상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얕본 것일까.

"하하, 농담입니다. 공자님이라면 이런 농담을 다른 곳에선 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그의 말대로 어디서도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반쪽인 나는.

그는 그렇게 화제를 돌렸고, 나는 눈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내 목 뒤에선 소름이 돋았다.

"뭐, 요즘 들리는 이야기는 다른 왕국으로 시집갈 줄 알았던 공주 쪽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삼자 구도가 형성되는 느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뭐, 그런데 솔직히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세상에 이렇게 되면 초청장을 받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 어제 본 기사가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였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평범하고 좋게좋게 끝나는 적이 없었다.

"...대충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일개 서기관으로서 이 이상을 알긴 힘들죠. 이런저런 가십들도 있기는 한데, 그런 건 뜬소문에 불과하니까요."

그는 그 뒤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아니, 이미 일개 서기관이 알 수 있는 내용을 한참 넘어선 것 같은데.

나는 말을 마치고 나를 쳐다보는 서기관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스승인 서기관인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름이 '이반'이고, 영지의 실무를 맡은 서기관들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는 서기관이라는 사실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스승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처럼 서기관의 수업 시간에도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수시로 그 가면이 벗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비밀은 절대 들키지 않았지만, 그가 오늘 꺼낸 이야기들은 그와 나만이 아는 또 다른 비밀이 되어야 할 판이었다.

무척이나 위험한 사람. 과연 그가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아니면 삶을 반복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될 사람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냉큼 선생을 바꿔서 그와 거리를 두었겠지만, 지금은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 해가 바뀐 어느 날. 

11살이 된 나는 숲으로 둘러싸인 연무장에서 미겔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본대에 복귀한 덕분에 오랜만에 나와 상대하게 된 미겔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검이 반으로 뚝 잘려 나가 있었다.

"검이 많이 낡았나 보네요."

내 말에 검을 보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조그만 단검에 잘려 나갈 검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검이 단검과 부딪치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만."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새로운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단검에 새로운 마나를 실었고, 그의 검은 내 단검에 닿기도 전에 그만 잘려 나가고 말았다.

그의 검은 마나가 제대로 실려 있지 않았고 제대로 된 승부도 아니었지만, 내 단검에 실린 마나가 미겔의 검을 잘라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순순히 수긍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이번에 구한 검이 좋은 것 같아요."

"하여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물어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어제 후안과 같이 나가서 구하신 검입니까? 어디서 구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봐도 훌륭한 단검이군요. 그래도 좀 아깝습니다. 지금 체형으로는 조금 짧은 검 정도겠지만, 더 크시게 되면 단검으로밖에 못 쓰실 것 같군요."

그의 말대로였지만, 나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나는 연무장 한쪽 나무에 기대어 놓은 대검을 가리켰다.

"어차피 성인이 되어서 쓸 검은 따로 있으니까요."

내 말에 미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검이 있었죠. 기교를 쓰기는 어려운 검이긴 하지만, 저 정도 튼튼한 검이라면 평생지기에 가깝겠죠."

그는 신기한 눈으로 나무에 기대어 놓은 대검과 내가 들고 있는 단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어디를 갔다가 오시면 무기를 하나씩 구해 오시고, 알 수 없는 기술에다가 실력도 한 단계 이상 올라 버리시니...."

그는 잘려 나간 검을 검집에 넣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후에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제 훈련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아뇨. 후작가로 가시기 전에도 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잖습니까. 그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검을 맞대고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공자님은 저보다 확실히 강해지셨습니다. 더 강해진 제자에게 제가 가르칠 것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적 차이가 컸지만, 내심 실전을 벌여도 그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누구한테 배워야 하나.... 기사단장님께 부탁해야 할까?"

하지만, 기사단장은 나를 가르칠 리 없었다. 그렇다고 공작에게 직접 부탁할 수도 없었고.

"차라리 몇 년 뒤에 둘째 공자님과 함께 수도로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 마누엘... 형의 유학이 결정되었나요?"

"네. 시몬 도련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보고 공작님이 결정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같이 가는 것을 마누엘이나 공작부인이 허락하실 것 같지 않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공자님의 실력을 공작님이 아시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공작께서 과연 그런 결정을 할까? 누구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반쪽인 나를 수도로 보낸다고?

아무리 봐도 무리한 이야기였다. 미겔도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가능한 방법이 있긴 했다.

제52화

제2편 추천서 (2)

뭔가 급하게 일이 벌어질 것 같았지만, 시간은 조용히 흘러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래 걸릴 거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둘째 형이 유학 갈 시간이 다가와도 초청장은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나는 초청장을 기억에서 지워버렸고, 혼자만의 훈련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키도 커지고, 몸도 자라게 된 14살이 된 어느 날.

다다다다.

저택으로 나 있는 길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내 전속 시녀 플로라였다.

그녀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달려오더니,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헉, 헉, 공작님이 알렉스 도련님을 찾으세요. 다른 일을 제쳐두고 빨리 오시라고 하셨어요. 뭔가 중요한 일인가 봐요."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바로 플로라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공작의 집무실에는 공작 홀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이름을 대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공작은 집무실에 들어온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평상시 이상으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못 본 척 책상 앞에 섰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겨우 얼굴만 책상 위로 나왔었는데, 이제는 가슴 아래에 책상이 걸쳐졌다.

책상 위에는 평상시처럼 문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가 앞에 서자, 공작은 서랍을 열고 편지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고급 재질의 봉투에 붉은 인장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던 편지 봉투.

딱 봐도 높으신 귀족이 보낸 편지였다.

봉투의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고, 공작은 열려 있던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는 꺼낸 편지를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편지를 내 쪽으로 내려놓았다.

"이 초청장이 왜 오게 되었는지 나에게 설명해 보도록."

앞뒤를 다 잘라먹은 질문에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동안 교육받은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귀족적인 수식어가 장황하게 적혀 있는 편지가 쉽게 읽혔다.

편지를 다 확인한 나는 공작이 눈살을 찌푸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초청장이었다. 이렇게 늦게 오다니.

복잡한 수식어를 빼놓고 보면, 편지 자체는 평범한 초청장이었다.

누구의 소개로 나를 알게 되어 수도로 불러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는 초청장.

하지만, 초청장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름이 문제였다.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동안 내 앞에서 용병 노릇을 했던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그녀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인 라텐하마르 백작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리아 데 카를로스.

결혼 전의 이름은 리아 드 라텐하마르였고.

국왕의 세 번째 아내이자 카트린의 언니, 즉 왕녀의 어머니가 직접 보낸 초청장이었다.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내 머릿속은 엉망이 되어 공작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공작은 그런 나를 계속 노려보았고, 나는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그게... 왜 이 초청장이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편지 안에 있는 사람은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초청장 안에 이 사달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 즉 카트린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내 예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내 추천을 해 버린 것이다.

"카트리네 영애와는 후작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용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한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과, 돌아온 뒤에 그녀와 함께 탐사를 벌인 일.

물론, 무덤 탐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녀와 비밀을 지키기로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신전에서 계약서를 쓴 건가."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공작은 바로 알아차렸다.

"네. 대신 공작가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 말에 공작은 앞에 놓인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이 추천장이 온 이상 피해가 가는 일이 없다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런, 공작가가 왕비의 초청장을 받아 버렸으니 이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공작은 조금 난감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려나?

아무래도 이건 모르는 척하는 편이 좋겠다.

"후작가 일을 돕는 도중에 용병 모습으로 암행을 하고 있던 라텐하마르 백작 영애와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그녀의 일을 도와주어 호감을 사게 되었다라....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언니에게 말해서 초청장을 보내게 했다는 소리인데...."

역시나 공작의 정확한 상황 설명이었다.

"하지만, 호의만 가지고 이런 초청장을 보낼 이유가 없을 텐데 무슨 이유지?"

나는 그의 말에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신전에서 행한 계약 덕분에 말하지 않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건 내가 따로 알아봐야겠군."

한참 나를 노려보던 공작이 초청장을 거둬들였다.

"잘못된 초청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남은 문제는 이걸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겠군."

그는 책상을 두들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예상대로 내 의견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공작 같은 귀족이 14살이 막 넘은 서자에게 의견 따위를 물을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 귀에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어떻게 하고 싶지?"

어라? 나한테 하는 질문인가?

놀라 쳐다본 공작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얼음처럼 무표정한 얼굴.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뜻밖의 말에 난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가고 싶습니다. 좀 더 배워 형님께서 영지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 쓸 만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 말을 들은 공작은 눈꼬리가 슬쩍 접혔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었던 것 같다.

영지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착한 서자가 딱 할 만한 말이었는데....

시몬보고 형님이라고 한 게 좀 무리수였나?

그래도 다행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공작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다음 날.

나는 공작의 결정을 들을 수 있었다.

아침부터 내 방으로 쳐들어온 우리 둘째 형님께서 나를 향해 열심히 쏟아 낸 말 덕분이었다.

"너도 수도에 같이 간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되잖아!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옆에서 차를 따르던 플로라는 놀란 새처럼 빠르게 뒤로 물러섰고, 그는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나를 노려보았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조금 까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족 예절은 착실히 지키던 마누엘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영 안하무인이었다.

"공작님이 벌써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뭐야, 정말 너 뭔가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 내 표정에 마누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뒤를 보고 외쳤다.

"형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해! 뭔가 이상하잖아!"

그가 들어온 입구에 첫째 형님께서 서 있었다. 시몬은 애매한 얼굴로 문 밖에 서 있었다.

우리 둘째 형님께서 내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난리를 치신 덕분에 미처 시몬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쯧, 집안이라고 너무 풀어진 건가.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겠다.

"아버님께서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어머니가 뵈러 가셨으니 금방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게다. 너도 귀족답게 열 내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리자."

어라? 시몬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동생 편을 들기 위해 같이 온 게 아니었나?

"형도 후작가에 다녀오고 나서 이상해졌어! 약혼하더니 괜히 무게만 더 잡고."

마누엘의 말에 시몬을 다시 살펴보니, 확실히 전처럼 가벼운 느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처럼 억지로 폼을 잡는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시몬을 보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가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우리 첫째 공자님께서 이제 어른이 된 모양이다.

형의 호응이 없자, 마누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잉! 아무리 뭐라 해도 난 인정할 수가 없어! 제대로 된 능력도 없는 반푼이가 나랑 같이 수도에 간다니. 이런 놈하고 같이 지내면 내가 어떻게 수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라고!"

오, 16살 치고는 제법 뼈를 때리는 불쾌한 말을 하네.

성질이 폭발해서 꺼낸 말일 테지만, 그래도 꽤 듣기 거북한데.

하기야 서자 출신하고 같이 수도로 유학을 왔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주변에서 쑥덕거림이 장난이 아니겠지.

공작가에 대한 온갖 가십이 쏟아져 나올 거고, 서자인 나와 비교하는 이야기도 나올 테고 온갖 귀찮은 일이 마구마구 벌어질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갈 만도 했지만.

역시, 기분이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나는 슬쩍 떡밥을 띄워 보았다.

"그렇다면 실력 검증을 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다른 사람을 써서 확인해 봐도 본인이 납득하기 어려울 거고, 음.... 가볍게 형님이 대련으로 제 실력을 직접 확인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꽤나 뻔한 꼬드김이었지만, 상대는 아직 파릇파릇한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다.

"하? 직접 대련? 좋아! 내 생각이 바로 그거야!"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던 마누엘은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했다.

"좋아! 기다려! 당장 허락을 받아 오지. 아버지께서 네 본 실력을 보시면 당장 계획을 취소하실 테니까. 어디 도망가지 말고 준비나 철저히 해 둬!"

그는 내 말이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신난 얼굴로 방을 뛰쳐나갔다.

달려 나가는 동생을 보며 한숨을 내쉰 시몬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수도로 가게 된 게 이해가 안 되지만,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뭐라 하지는 않겠어. 네 실력이면 어디서 꿀리지는 않을 테고."

후작가에 다녀오는 동안, 그도 내 훈련과 대련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이에 맞지 않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누엘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거다. 능력이나 실력이 된다고 해도 네 출신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닐 테니. 수도에 가서도 내 동생이나 공작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답지 않게 길게 말을 뱉은 뒤에 그는 몸을 돌려 동생을 따라갔다.

무척이나 차가운 말투였지만, 의외로 듣기에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어라? 설마 나에게 조언을 해 준 건가?'

정신없는 형님의 방문이 끝난 뒤, 금방 대련 시간이 잡혔다.

솔직히 대련이 잡힐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공작까지 이야기가 가지 않은 것일까?

어쨌거나 대련 장소는 저택 뒤 숲에 있는 가문의 연무장으로 결정되었다.

마누엘은 중앙 연무장을 대련 장소로 삼아 모두의 앞에서 나를 깔아뭉갤 생각이었지만, 위에서 반대한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일 테고, 나도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냐!"

그와의 대련 전에 내 유학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놀라 내 방으로 달려오셨다.

나는 공작에게 한 말을 어머니께 다시 말씀드려야 했다.

제53화

제3편 실력 확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