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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7)

카르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고성(古城).

높이는 건물 4, 5층 정도, 흙벽돌과 나무를 쌓아 만들어진 자그마한 규모였지만, 그래도 성은 성이다.

만약 이곳을 공격하려 든다면, 수비하는 쪽보다 배나 되는 병력을 준비해 들이쳐야 겨우 성문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빨리!"

"야! 이 느림보 새끼들아! 빨리 뛰라고!"

바로 그 성의 성벽 위.

험상궂은 얼굴을 한 무리의 사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들의 정체는 바로 테오릭 베케르트를 따르던 '밤의 형제단' 소속의 조직원들이었다.

약 두 시간 전, 그들은 밤의 형제단을 이끄는 수장인 테오릭이 시청 정문에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매달아 높은 곳에 걸어두는 것)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대다수의 조직원은 그 소식을 믿지 않았고, 하여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두목이 도박장에 들어간 후 당했다고?"

"그러면... 범인은 뻔한 거 아닌가?"

"페드로... 감히 우리 뒤통수를 쳐?"

"내가 언젠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두목! 두모옥! 크흐윽...!"

"페드로 이 개새끼! 만나면 씹어먹어 버린다!!!"

"아니, 근데... 페드로가 어떻게 두목을 제꼈지? 그 새끼 칼도 못 쓰잖아?"

"그러게... 경호원들을 어떻게 처리한 거지? 최소한 기사급 실력자 두셋은 있어야 할 텐데?"

"뻔하지, 페드로 이 새끼가 시장을 꼬드겨서 같이 두목을 죽이자고 한 거야!"

"그럼, 시장 통해서 영지군이랑 경비대 병력을 빌렸다?"

"어, 그거 말 되네."

졸지에 수장을 잃은 밤의 형제단.

그들은 도박장의 관리인이자 조직 내 주요 간부 중 한 명이었던 페드로가 시장과 짜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개새끼들... 시발, 다 엎어버리자!"

"그래, 이번 기회에 시장 그 새끼도 제끼고 우리가 카르셀을 먹는 거야!"

격한 회의 끝에 도달한 결론.

밤의 형제단은, 도시를 점령하기로 마음먹는다.

"자, 준비 끝났냐?!"

"예!!!"

밤의 형제단 내에서 테오릭 다음가는 위치를 지닌 조직의 2인자, 스베토자르.

그는 왕국의 최북단, 겨울 장벽 너머에 사는 야만족 바인야르의 핏줄이 섞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덩치를 자랑하는 거한이었다.

그가 통나무처럼 두꺼운 목에 굵은 핏대를 세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오늘은 우리 밤의 형제단에게 있어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두목을 죽인 배신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고, 카르셀 시청 가장 높은 곳에 우리 형제단의 피로 물들인 깃발을 꽂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무려 오십여 명에 달하는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쏟아내자 낡은 고성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스베토자르의 표정엔 흥분과 기대가 가득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가슴 속에 쌓여왔던 그의 불만.

'어째서 테오릭은 충분한 힘이 있으면서도 도시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가?'

이미 오래전 카르셀을 지키는 영지군과 경비대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테오릭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허수아비 다름없는 시장을 몰아내고 도시를 손아귀에 쥘 수 있는 힘을 지녔던 그.

하지만 테오릭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않고 그저 수면 아래의 지배자로 남았다.

테오릭의 오른팔이자 밤의 형제단 제일의 무력을 지녔던 거한, 스베토자르는 그게 불만이었다.

'두목은 너무 소심했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꿈을 꿔야지!'

그리하여, 마침내 기회가 왔다.

조직의 일인자였던 테오릭의 죽음.

오랜 시간 그를 믿고 따랐던 최측근의 한 사람으로서 분명 슬픔을 느끼고 있지만, 동시에 기대감이 치솟았다.

나는 테오릭과 다르다, 라는 생각이 지금 스베토자르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카르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두에게 똑똑히 가르쳐주자! 자, 가자아아아아아!!!"

"가자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스베토자르의 명령을 받은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의 성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가는데...

"응?"

"저 새끼는 뭐야?"

활짝 열린 성문 밖, 카르셀 도심으로 향하는 길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

"어허, 문이 잠겼네."

아드리안에게 혼자 가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고 나온 길이었다.

그렇게 날 듯이 달려 밤의 형제단 놈들이 아지트로 쓰는 고성(古城) 앞에 도착했다.

한데 성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나의 신체 능력은 저런 자그마한 흙벽돌 성이 아니라 집채만 한 돌을 깎아서 쌓아 올린 대도시의 성벽이라도 해도 단번에 달려 올라갈 수 있었으니까.

근데,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끼이이이이-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과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

그 열린 문 너머에서 각자의 무기를 든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 나오다 나를 보고 멈칫거린다.

이상하겠지.

수상할 거다.

처음 보는 어린놈이 지네들이 가야 할 길 가운데 떡 하고 버티고 서 있는 걸 봤으니 말이다.

"야이 새끼야! 칼 맞아 뒈지기 싫으면 당장 꺼져!!!"

개중에 지위가 좀 있는 듯한 사내 하나가 날이 넓게 만들어진 투박한 펄션 한 자루를 휘두르며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누가 범죄자 놈들 모아 놓은 조직 아니랄까 봐 처음 본 사람한테 대뜸 칼 맞아 뒈지기 싫으면 꺼지라는 폭언을 해댄다.

"...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옛말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다.

일단 나는 고운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휘웅- 휘웅- 휘웅-

나 역시, 곱지 않은 대답으로 화답했다.

아, 말로 한 게 아니니 대답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콰직!!!

내 손을 떠난 도끼가 꺼지라며 협박했던 사내의 이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틀어박혔다.

쩍,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갈라진 놈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고, 그것을 신호로 하여 나는 검을 뽑았다.

촤아아앙-!

"흐이익!"

"뭐, 뭐야! 저 새끼 뭐냐고!"

"아잇, 시발! 미, 밀지마 이 새끼야!"

귀를 쨍하게 만드는 호쾌한 발검 소리에 깜짝 놀란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이 온갖 수선을 피우며 걸음 뒤로 물러선다.

우스운 광경이었다.

물경 오십에 달하는 병력의 우위를 지니고도 한 사람의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다니.

놈들이 잘 훈련된 정예 병력이 아닌, 그저 칼만 들고 있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너 이 개새끼야!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켁!!!"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녀석 하나가 또 손도끼의 제물이 되었다.

이번엔 이마가 아니고 턱에 도끼를 꽂았다.

즉사는 하지 않겠다만 어차피 입과 턱이 쪼개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남은 생 편히 살기는 글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밤의 형제단인지 유랑단인지, 너희들 별별 나쁜 짓들 다 하고 살았다며?"

"...!"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이니, 뒈져도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자, 잠깐!!!"

잠깐 같은 소리하네.

파아아앙-!!!

나는 있는 힘껏 바닥을 박차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날카로운 파공성을 터트리며 쏘아진 나의 몸.

열댓 걸음 이상 떨어져 있던 상대의 얼굴이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온다.

하나, 둘, 셋, 넷... 허이구, 많기도 하다.

휘우우웅- 푸화아아악!!!

한 칼질에 다섯 놈의 목숨을 거둔다.

머리통이 솟구치고, 잘린 팔다리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잘 익은 과육을 베어내는 것처럼 저항 없이 적들의 몸을 파고든 검이 살과 뼈를 한 번에 갈라낸다.

촤아악!!!

시뻘건 피가 튀어 오른다.

"아아악!!!"

"씨발! 내 팔, 내 팔이-!!!"

끔찍한 비명이 쉴 새 없이 터진다.

눈 깜짝할 사이 펼쳐지는 인세의 지옥.

하지만 그 지옥의 창조자인 나는 놈들에게서 일말의 측은함도 느끼지 않는다.

인과(因果)가 너무나 명확한 죽음이었다.

놈들은 지금껏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고, 이제 죽음으로서 그 죗값을 치르는 것일 뿐이었다.

놈들의 비참한 죽음을 동정할 찰나의 순간마저 아껴, 나는 부지런히 검을 휘둘렀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 아아악!!!"

"이런 씨발! 저 새끼 뭔데? 뭐냐고!!!"

양 떼 한가운데 뛰어든 배고픈 사자처럼 나는 마음껏 날뛰었고, 그 결과 기세 좋게 성문을 나섰던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의 숫자는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콰직!

"끄르륵...!"

내 검을 피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끝끝내 목에 일검을 허용한 조직원 하나가 조직원 하나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쓰러진다.

철퍽!

어느새 흙길 한가운데 만들어진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그가 움직임을 멈춘다.

"허으윽... 히익!"

"사, 살려... 살려줘...!"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질린 눈을 한 조직원 몇 명이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놈들이지만, 그렇다고 놈들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퍼억! 뻑!

바닥에 엎드리고, 주저앉아 목숨을 구걸하는 녀석들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통렬한 일격을 선사해주었다.

검의 동선 위에 있으면 목을 쳤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비어 있는 왼손으로, 그마저도 아니면 발로 걷어차 응징했다.

나의 손과 발에 담긴 힘은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지 오래.

주먹에 맞은 놈이나 발에 걷어차인 놈이나 머리통이 터지고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괴... 괴물!!!"

"미친, 살려줘! 살려달라고오오오!!!"

내 검에 베여 쓰러지고, 손과 발에 맞아 죽은 이들의 숫자가 서른을 넘어섰다.

서 있는 자보다 바닥에 쓰러진 자가 더 많아진 상황.

그제야 부하들의 뒤편에 숨어 있던 놈들의 수괴(首魁), 밤의 형제단의 새로운 두목 스베토자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 이 새끼!!! 어디서 온 거냐! 오토 벨스, 그 새끼가 보냈나? 아니면 페드로 그 배신자가?!"

어마어마한 거구에 어울리는 큼지막한 전투 망치를 손에 든 스베토자르가 나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나를 때려죽일 듯 소리를 지르는 것과 별개로 놈의 행동은 침착하기만 했다.

눈앞에 부하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린 것을 보았으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겠지.

그나저나, 어디서 왔냐고 물었으니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겠지.

"키르헨에서 왔다."

"... 뭐?"

내 대답을 들은 스베토자르가 되물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답이 아니어서 당황한 모양.

하지만, 진짜 당황할 일은 지금부터다.

터벅, 터벅-

나는 스베토자르를 바라보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예상 밖의 행동에 크게 당황한 스베토자르가 주춤거리는 게 보인다.

"이런 씨... 이 개새끼가!"

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나본데...

"나 할 일 많다. 바쁘니까 빨리 끝내자."

"으으, 시발! 뒈져라 이 새끼야!!!"

후우우우우웅-!!!

놈의 머리 위로 솟구쳤던 전투 망치가 음산한 파공성과 함께 나를 향해 떨어진다.

사람이 아니라 곰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체구와 대단한 힘을 지닌 스베토자르.

그런 놈이 전력을 다해 내리친 공격이었다.

바위를 깨부수고, 벽을 무너뜨리는 무시무시한 힘이 담긴 그 거대한 전투 망치를...

터억!!!

"!?"

"... 뭣?!"

"저, 저게 뭐야?"

나는, 비어 있던 왼손을 들어 가볍게 잡아버렸다.

"이, 이이이익!!!"

내 손에 붙들린 전투 망치를 다시 빼내기 위해 용을 쓰는 스베토자르.

믿기 힘든 순간을 맞이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다음 동작을 가져가려 한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자세였다.

하지만...

"읏차."

"허으으윽! 큭!!!"

망치의 머리 부분을 붙잡은 왼손에 한 차례 힘을 쓰자, 그대로 내 쪽을 향해 딸려오는 스베토자르.

나는 핏발 선 눈으로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흐읍-!!!"

쉬이잉- 푸화아아악!!!

그대로 검을 휘둘러, 놈의 몸을 두 조각으로 베어버렸다.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8)

키르헨에서 다닐렌츠 영지군 백오십에 용병 오십을 더해 총 이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온 기사 마틴 페르텔.

주군인 데미언과 약속했던 시간에 정확히 밤의 형제단의 아지트로 쓰이는 고성(古城) 앞에 당도한 그였으나, 기대했던 전투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 이게 정말, 공자님께서 혼자 해내신 일이란 말입니까?"

넋이 나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는 마틴.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 아드리안이었다.

"어... 예, 그렇습니다. 저도 뒤늦게 와서 여기 상황 확인하고 어이가 없었어요."

"세상에... 공자님의 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아예 상상을 초월한 수준입니다. 허어..."

위험하고 격렬한 전투를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채로 달려온 마틴과 그의 병사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수북이 쌓인 시체의 산.

오랫동안 카르셀의 공포로 군림했던 이들, '밤의 형제단'이 몰살(沒殺), 한 마디로 떼죽음을 당한 광경이었다.

"자자, 빨리빨리들 옮겨! 어이! 거 시체에서 나온 거 슬쩍하지 말라고! 에이씨, 추접스럽게 뭐 하는 짓이야! 니들 거지야?!"

마틴의 명령을 받아 현장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던 용병대 푸른 방패의 리더, 엔리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그의 능수능란한 지휘 아래 빠른 속도로 정리되는 전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틴이 문득 생각난 것을 묻는다.

"그나저나... 공자님은 어디 가셨는지?"

"아, 공자님께서는 지금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지하?"

"거기에 뭐 챙길 게 있다고 하시던데..."

"감옥에?"

"예."

"허참, 감옥에 뭐가 있다는 건지..."

아드리안의 대답을 들으며, 마틴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어린 주군이 향했을 고성의 지하 감옥 쪽을 바라보았다.

***

콰아앙-!!!

지하 감옥 제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

그곳의 단단한 돌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망치도, 곡괭이도 아닌 그저 맨주먹 한 방으로만 이뤄낸 결과였다.

"아니, 어떻게...?!"

눈앞에서 내가 맨주먹으로 벽을 때려 부수는 모습을 본 카르셀 도박장의 마스터, 페드로가 휘둥그레진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반면 나의 명령을 받아 카르셀 시내 모처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는 '늘 보던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거 말고 얌전하게 문을 여는 방법이 있을 텐데, 내가 그 얘기를 듣기 전에 테오릭 목을 쳐 버리는 바람에... 하하하!"

주먹질로 벽을 때려 부순 나를 무슨 괴물 보듯 쳐다보는 페드로에게 멋쩍은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은 후, 나는 겔베르트에게 손을 뻗었다.

"겔베르트, 횃불 좀."

"예, 여기 있습니다."

나의 요청에 들고 있던 횃불을 공손히 내어주는 겔베르트.

그에게 건네받은 횃불을 들어 내가 때려 부순 벽 안쪽의 공간을 비추었다.

"보자..."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 공간, 어둠이 물러선다.

"어? 문이 있습니다!"

"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벽 너머에 존재하는 작은 문을 발견한 페드로가 소리쳤고, 혹시 모를 위험을 걱정한 겔베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저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나는 그런 겔베르트의 팔을 잡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저 뒤에 뭐가 있는지 알거든. 위험한 건 아니..."

겔베르트를 안심시키려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생각해보니, 제일 위험한 걸 수도 있겠군."

"예?"

"테오릭 그 미친놈이 이거 때문에 한 짓들을 생각하면 말이야."

"아니, 대체 뭐길래..."

"직접 봐."

철컥, 끼이이익-

"헉!"

"이, 이게 대체...?!"

내가 열어젖힌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을 본 겔베르트와 페드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작은 문 뒤에 숨겨져 있던 커다란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황금의 물결.

손에 들린 횃불의 빛을 받아 찬란하게 번쩍이는 금은보화를 바라보며, 내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테오릭의 비밀 금고... 이젠, 우리 거야."

***

테오릭의 금고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의 가치는 어림잡아보아도 수천 골드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화 한 닢, 보석 한 조각 흘리지 않고 모조리 꺼내어 카르셀 시청 건물에 준비된 금고로 옮겼다.

그리고 그 후엔 카르셀의 신임 시장으로 '내정된' 겔베르트에게 금고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시장 일하다 보면 이래저래 돈 쓸 일 많을 거예요. 써야겠다 싶으면 아끼지 말고 쓰세요."

"어후우... 부담스러워 죽겠습니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인데요?"

"에이, 말은 그렇게 해야지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나에게서 금고 열쇠를 받아가는 겔베르트였다.

"그리고... 페스텔 경."

"예, 공자님."

다음으로 나의 부름에 응한 이는 다닐렌츠의 기사 마틴 페스텔.

그 어떤 어려운 싸움이라도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며 키르헨에서 병력을 이끌고 내려왔지만, 내가 홀로 썰어버린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의 시체 치우는 일만 하느라 조금은 김이 새버린 그였다.

그런 마틴에게 못다 한 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대를 임시 카르셀 영지군사령관 자리에 임명하겠습니다. 정식 임명장은 내가 키르헨에 돌아간 이후 인편을 통해 보내주겠습니다."

"...!"

"키르헨에서 데려온 병력을 이끌고 도시 주변의 몬스터와 도적들을 소탕하세요. 특히 키르헨과 이어지는 가도 근처의 숲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사 마틴 페르텔, 명령을 받듭니다!"

이제야 기사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그가 조금은 벅찬 표정으로 내게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은...

"엔리케."

자기는 기사도 아닌데 대체 왜 여기 불려온 건가 하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남자의 차례다.

"나? 아니... 그, 아니! 예! 공자님!!!"

자신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거리는 엔리케.

기사 서임을 받고 제법 귀족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겔베르트와 달리 여전히 나를 대하는 호칭이 오락가락하는 그였다.

"그대에겐 임시 카르셀 경비대장의 직책을 내립니다."

"겨... 경비대장 말입니까?"

"예, 임시 시장인 겔베르트 경을 도와 시내 곳곳에 숨어 있는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을 소탕하세요. 그 밖에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들,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이들도 예외 없이 체포해 처벌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앞서 보여준 마틴의 군례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며 내게 고개를 숙이는 엔리케.

다시 뭉친 겔베르트-엔리케 콤비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가 됐다.

"마지막으로... 페드로."

"예, 공자님."

앞서 내게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과 달리 페드로는 바짝 긴장한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다.

"테오릭의 목을 치고, 밤의 형제단을 완전히 무너뜨린 후에 너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말했던 것, 기억하고 있겠지?"

"...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테오릭이 너의 가문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밤의 형제단에 가입하였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네가 가담했던 모든 범죄 사실들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처분을 내린다 하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페드로였다.

"너의 지난 행적이 힘없는 일반인들을 괴롭히고, 갈취하는 등의 악랄한 범죄가 아닌 도박장 운영과 관리 쪽에 치중되었던 점, 그리고 이번 테오릭 제거에 큰 역할을 한 점을 참작하여 너에 대한 처분을 결정했다."

"..."

긴장으로 바짝 말라가는 페드로의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준비했던 그에 대한 처분을 발표했다.

"페드로 라폰테인, 너에게 향후 10년간 도시 카르셀을 위해 무급(無給)으로 일할 것을 명한다."

"...!"

"향후 10년간 너는 내가 지시한 임무 외에 다른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으며, 수익을 창출하는 다른 모든 행위 또한 금지한다."

"아..."

"또한, 업무와 관련된 공적인 사유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너는 10년간 도시 카르셀을 떠날 수 없다. 알겠느냐?"

"... 며, 명을 따릅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처분의 내용을 들은 페드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월급도 못 받고 10년간 일하며 도시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건 분명 무거운 형벌이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밤의 형제단 주요 간부들의 목이 죄다 날아갔다는 걸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분이기도 했다.

"단,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특별히 너의 가문인 라폰테인 가(家)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은 허락하겠다."

돈 한 푼 안 주고 계속 부려 먹다가 혹시라도 페드로가 굶어 죽을까 싶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아무리 미운 놈이어도 자식이 굶어 죽는 꼴은 볼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

이렇게 빠져나갈 구석을 하나 만들어 놨으니, 알아서 라폰테인 가주가 페드로를 챙겨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내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관대한 처분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페드로였다.

***

며칠 후, 나는 키르헨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페드로에게 따로 명령을 내렸다.

"페드로, 테오릭과 밤의 형제단이 머물던 카르셀 외곽의 고성을 도박장으로 꾸며라."

"... 예?"

뭘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페드로.

테오릭이 자신의 거처로 쓰던 성이 협소한 규모이긴 했지만, 그걸 통째로 도박장으로 쓰겠다는 발상은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기가 막힌 사업의 밑그림을 그려놓은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재차 명령을 내렸다.

"뭘 그렇게 놀라나?"

"아니, 너무 갑작스러우신 명령이라... 죄송합니다."

"뭐, 듣도 보도 못한 일이긴 하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해볼 만한 사업이란 거다."

"...!"

"성 외부는 딱히 손댈 필요 없고, 내부만 신경 쓰도록. 고급스러운 장식과 가구들로 안을 채우란 얘기다. 라폰테인 가문에서 자랐으니, 그런 것들을 알아볼 안목은 있겠지?"

"아, 예. 아무래도 보고 자란 것이 있으니... 필요하면, 가문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좋아. 거기에 솜씨 좋은 요리사를 고용해 성안에서 훌륭한 요리들을 맛볼 수 있게 해라. 비싸고 좋은 술도 들여다 놓고... 아, 실력 좋은 악사들도 여럿 데려다 연주를 시켜라. 도박장 내에 음악이 끊기지 않도록 말이야."

"어, 말씀만 들으면 거의 귀족들의 연회장 같은데..."

"바로 그거다."

내가 생각하는 사업의 콘셉트를 정확히 이해한 페드로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연회장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도박장...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그런 도박장을 만드는 것, 그게 내 목표다."

"아...!"

내 말을 들은 페드로가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 듯,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공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래, 감탄이 절로 나오겠지.

잘 듣고 배워라, 이게 바로 다른 차원에서 온 문명인의 고급화 브랜딩이라는 거다.

"대신 성안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겐 거액의 입장료를 받아라. 어설픈 도박꾼이나 뜨내기 용병들 따위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정도의 금액이어야 할 거다. 한... 5골드 정도면 적당하겠지."

오백만 원을 입장료로 태워야 한다면, 어지간히 도박에 미친 놈이거나 능히 그 정도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의 부자일 것이다.

"아, 이해했습니다. 돈 많은 소수의 부자를 상대로 영업을 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래, 바로 그거다. 대신... 성 주변에 그보다 작은 규모를 지닌 보통의 도박장을 지어 평범한 손님들도 받아라. 부자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며 본인의 특별함에 우쭐할 것이고, 평범한 도박쟁이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겠지. 그리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만들 것이다."

"나도 돈을 모아서 저 성에 들어가겠다, 라는...?"

"그래, 바로 그거다."

알아서 척척 내 말을 알아들으니,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3개월을 주겠다. 3개월 후에, 내가 직접 카르셀로 내려와 결과를 살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겔베르트에게 이 계획에 대해 말해두었다. 작업에 필요한 돈은 그가 내어줄 것이다. 눈치 보지 말고 가져다 쓰도록. 단, 어디에 그 돈을 썼는지 정확한 내역을 준비해둬야 할 것이다."

"믿고 맡겨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페드로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카르셀을 떠났다.

그리고 몇 주 만에 돌아온 키르헨에서,

"다닐렌츠의 새로운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께 모두 예를 표하시오!!!"

나는 마침내, 남작령 다닐렌츠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

탄탄대로 (1)

다닐렌츠 남부 최대의 도시, 카르셀을 배후에서 지배하던 조직 '밤의 형제단'.

놈들은 영주가 직접 임명해 내려보낸 카르셀의 시장과 도시 방위군 사령관, 경비대장 등 주요 수뇌부들을 돈으로 부리며 도시를 자신들의 발아래 두었다.

그렇게 수년간, 세상이 자신들의 것이라도 된다는 듯 함부로 설쳐대던 놈들.

그랬던 그들이, 단 하루 만에 카르셀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닐렌츠 영주로서의 정식 취임을 앞두고 영지 남부 지역 평정에 나선 내 손에 의해 조직의 수장인 테오릭을 포함한 조직원 대다수가 몰살당했기 때문이었다.

기사급 실력자를 여럿 보유했던 그들이지만, '고작' 그 정도 전력으로 내 검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나는 그동안 놈들에게 뒷돈을 받아먹으며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았던 썩어빠진 자들을 모조리 쓸어냈다.

성질 같아선 그 자리에서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오랜 세월 나보다 더한 분노를 참아온 카르셀 주민들을 위해서였다.

"죄인은 도시의 시장이라는 직분을 망각하고 범죄 조직들과 결탁하였으며..."

나는 그들을 며칠 동안 감옥에 가둬두었다가 도시 광장에 마련된 재판대 위로 올렸다.

재판의 결과는?

"... 하여, 죄인 오토 벨스 외 8명을 참수형(斬首刑)에 처한다!"

"와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시장이었던 오토 벨스를 포함해 밤의 형제단과 결탁했던 도시 수뇌부 전원이 카르셀의 모든 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목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의 목을 치는 잔혹한 광경.

하지만 정치적으로 봤을 땐 분명 의미 있는 조치였다.

"데미언 공자님 봤어? 히야, 사람이 어찌 그렇게 생겼냐?"

"어어, 아주 금발에다가 피부도 새하얗고... 근데 또 몸은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것이, 아주 멋지시더구만!"

"근데 공자님이 혼자 밤의 형제단 놈들 싹 쓸어 버린 게 진짜야?"

"아잇, 그렇다니까? 내 친구가 시청에서 일하는데, 정말로 공자님께서 혼자 검 한 자루 들고 가서 싹 베어버렸대!"

"으와, 그게 가능한가?"

"어허이, 이 사람들. 지금 그게 중요한가? 공자님이 우리 카르셀을 좀 먹던 쓰레기들을 싹 쓸어버리셨다는 거, 그게 중요한 거지!"

"암, 맞지! 내가 얼마 전에 일이 있어서 키르헨 다녀온 사람한테 들었는데, 공자님께서 오신 이후 영지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대!"

"이제 우리 다닐렌츠도 볕 들 날이 온 건가?"

"그렇지, 그 날이 온 거지!"

"어찌 되었건 데미언 공자님 만세다!!!"

"공자님 아니고, 이제 사실상 영주님 아니신가? 영주님이라고 불러!"

"그래, 영주님! 데미언 영주님 만세다!!!"

효과는 확실했다.

눈앞에서 '나쁜 놈'들의 목을 뎅겅뎅겅 날려버리는 광경은 그간 쌓여왔던 카르셀 주민들의 분노를 빠르게 가라앉혀 주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밤의 형제단을 홀로 쓸어버린 눈부신 무용담까지 더해지자 카르셀 주민들의 나에 대한 지지도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마어마한 예산과 노력을 투입한 나의 비장의 프로젝트, 카르셀 도박장이 개장했다.

***

신성력(神聖歷) 785년 10월,

남작령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_

"영주님, 이번 달 카르셀 도박장의 매출이 올라왔습니다."

넉 달 전, 공석이었던 영지 재무관 자리에 앉은 파스칼이 내가 사준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음, 표정이 좋은데?"

"하하, 그렇습니까?"

내가 툭 던진 말에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파스칼.

그 반응이 나로 하여금 기대감을 품게 만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보자..."

파스칼에게 건네받은 서류의 내용을 살폈다.

눈에 확 뜨여질 만한 수준의 액수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 9월 순수익이, 2천 골드? 이거 맞아? 매출 아니고, 이런저런 비용 제하고 남은 돈이 이만큼이라는 거지?"

"하하, 예! 맞습니다!"

정확히는 2068골드 하고도 74실버.

순수익이 1천 골드를 살짝 넘은 수준이었던 개장 첫 달에 비해 무려 두 배가 증가한 수치였다.

"음, 좋네. 열심히 떠들고 다닌 효과가 확실히 보이는 거 같아."

"예, 맞습니다. 홍보의 덕이 확실합니다. "

파스칼이 말하는 홍보.

그 홍보를 위해, 나는 다닐렌츠 상단을 이용했다.

파스칼의 뒤를 이어 새로이 다닐렌츠 상단의 수장으로 취임한 이자벨.

그녀와 그녀가 이끌던 보크 상단의 합류로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규모는 훨씬 더 커졌다.

다닐렌츠와 루테니아, 동쪽의 바렌부르크, 남쪽의 케른하임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방대한 영역을 무대로 활동하게 된 다닐렌츠 상단.

나는 그런 상단의 영향력을 십분 이용하여 새로 개장한 카르셀 도박장의 홍보에 이용했다.

"아, 혹시 그거 아세요? 카르셀에 이번에 아주 기가 막힌 도박장이 생긴 거?"

"아예 성을 통째로 도박장으로 꾸몄다고 하더라고요. 안에 들어가 있는 가구 장식들 가격만 해도 수백 골드는 된다죠?"

"거기 가면 음식에 술에... 그거 다 공짜로 준대요. 옆에서 악사들이 계속 음악도 연주하고, 직원들도 다 미인들만 있어서 아주 눈과 귀가 즐겁다던데?"

"다음에 시간 되시면 한 번... 아, 맞다. 근데 거기 입장료가 어마어마하대요. 진짜 부자들만 갈 수 있다나 봐."

"거긴 한 판에 오가든 판돈 크기가 다르다던데요? 수십 골드는 예사고 한 번에 수백 골드가 오가는 큰 판도 있대요!"

나의 지시를 받은 다닐렌츠 상단의 직원들은 다른 영지 이곳저곳을 오가며 카르셀 도박장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다.

도박장이란 그저 음침하고 어둑한 분위기에 깡패와 거친 용병, 눈이 풀린 술주정뱅이와 도박쟁이들이 가득한 곳이라는 이 세상의 편견을 깨트려 버린, 완벽히 새로운 공간.

그 상상을 실체화한 것이 바로 내가 만든 카르셀의 고급 도박장 '다스 슐로스(das Schloss, 성)였고, 그 공간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영주님의 혜안에는 늘 놀랐지만, 이번에는 정말이지 소름이 돋는군요. 이 정도의 성공을 예상하셨습니까?"

"뭘 또 소름까지야..."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파스칼의 말에 괜히 민망해져서 코끝을 긁었다.

하지만 민망한 와중에도 할 말은 잊지 않고 전했다.

"페드로에게 전해. 슐로스에 한번 왔던 손님들, 신상 파악해서 직원들에게 얼굴과 이름 정확하게 외울 수 있도록 하라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도박에 그렇게 큰돈 턱턱 낼 만큼 사는 게 여유 있는 놈들이야. 그런 놈들, 자기 알아봐 주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놈들의 취향, 그러니까 음식 뭘 좋아하고 무슨 술을 마시는지까지 파악하라고 전해."

"예, 방금 말씀하신 내용까지 잊지 않고 전달하겠습니다."

대답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페드로에게 전하려고 한 말을 들고 있던 작은 수첩에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파스칼이었다.

"최대한 빨리 보내. 돈 아낀다고 전서구 쓰지 말고, 전서응으로 쏴."

"하하, 굳이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이미 영주님의 명령 하달에는 늘 전서응을 쓰고 있었습니다."

"좋네. 그럼, 전할 내용은 이게 다 인가?"

"아, 하나가 더 있습니다. 여기..."

파스칼이 자신의 품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내 집무실 책상에 살포치 내려놓는다.

"아휴, 서류 두꺼운 거 봐. 이건 또 뭔데?"

"지난번 월례 회의 때 말씀하셨던, 나움가르트 인구 증감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세르지오 서기관이 성당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저에게 대신 좀 영주님께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 그거. 어디 보자..."

나움가르트(Naumgart).

본디 다닐렌츠 영지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나움'이라 불리었던 곳.

그러나 지금은 마을 근처에서 잇달아 발견된 광물 자원들로 인해 다닐렌츠 전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도시가 되었다.

처음엔 소금이 발견되었고, 그다음엔 철광석이 나왔다.

하나만 있어도 영지의 살림살이를 피게 해줄 어마어마한 가치의 자원이 둘씩이나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한 결과.

광부들과 상단 직원들, 또 그들의 가족들이 가장 먼저 작은 마을 나움에 발을 들였다.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자원의 보호를 위해 주도 키르헨에서 파견한 병사들과 용병들이 뒤이어 나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몰리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식당이 생기고, 술집이 생기고, 여관이 생겼다.

무기와 갑옷, 각종 도구를 파는 대장간, 과일을 파는 청과상, 여러 곡물을 파는 방앗간, 고기를 파는 정육점, 옷감을 파는 포목점과 만들어진 옷을 파는 의류점도 생겨났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상업 시설들 덕분에 생활의 수준은 더욱 윤택해졌고,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며 유입되는 인구수를 더욱 늘렸다.

그 결과...

"... 나움가르트 인구가 벌써 8천 명이 넘었어?"

"예, 이제는 카르셀보다도 더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습니다. 인구만 따진다면 얼마 전 2만 명을 돌파한 키르헨에 이은 다닐렌츠 제2의 도시입니다."

"흐음, 인구가 늘어난 건 좋긴한데... 치안 관리가 걱정이군."

"안 그래도 그 부분 관련해서 군무관이 관련 조치를 준비해서 따로 보고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좋군. 알겠어. 뭐 다른 건 없나?"

"예, 상단 수익 관련 보고는 이자벨이 직접 드릴 겁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이 들어와도 될 것을... 알겠어. 이만 나가봐."

"예, 영주님. 그럼..."

천천히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재무관 파스칼.

곧, 집무실을 밖으로 나간 그를 대신해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한 흑발에 조금은 까무잡잡한 피부,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인.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닐렌츠 상단의 수장 자리에 오른 이자벨이었다.

"어, 이자벨. 어떻게 볼 때마다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네?"

"호호, 진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걸요?"

"그럴 리가 있나. 이보다 더 진심일 수가 없는데? 하하!"

빈말이 아니었다.

4개월 전 처음 다닐렌츠에 왔을 때와 비교해 점점 미모에 물이 오르고 있는 이자벨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해서겠지.

콜티츠 상단과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며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았던 보크 상단 시절과 비교해 지금의 환경은 그야말로 천국일 테니까 말이다.

"영주님께서 잘 챙겨주신 덕분에 요즘 개인적으로도, 다닐렌츠 상단의 상단장으로서도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이제 내 사람인데, 당연히 챙겨줘야지."

"저를 따라 다닐렌츠로 온 보크 상단의 직원들도 모두 영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럴 테지.

상단장인 이자벨을 포함해 다닐렌츠 상단 소속의 직원들이 받고 있는 대우는 그야말로 업계 최고 수준.

장담컨대 왕국 전체, 아니 대륙 전체를 뒤져보아도 우리 다닐렌츠 상단보다 직원들의 급료를 더 많이 챙겨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뿐인가, 나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선진화된 직원 복지 개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주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예컨대 식사 비용 지원,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질병 휴가와 조퇴 제도, 야근 수당 지급 정도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아르닌 교단의 '성자(聖者)'처럼 대우했다.

'... 안식년이나 안식월 제도 같은 것까지 도입하면 아주 신흥 종교 하나 생기겠네.'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홀로 미소를 짓다가, 눈앞에 이자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 상단의 매출 상황은 어떤가?"

"예, 영주님. 가져온 자료를 보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음, 그래."

앞서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이자벨 역시 들고 있던 한 무더기의 서류를 내게 보여주었다.

서류 위에 적혀 있는 무수히 많은 숫자들.

예전 같으면 눈이 핑핑 도는 광경이었겠으나, 이것도 계속 쳐다보니 익숙해진 것인지 이제는 어렵지 않게 내가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게 됐다.

"매출이... 올랐군."

"예, 영주님. 전달 대비해 2할 정도 성장했습니다."

"케른하임 쪽으로 거래를 튼 덕분인가?"

내 질문을 들은 이자벨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영주님께서 열심히 노력해주신 덕분입니다."

이자벨이 나에게 '덕분'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

다닐렌츠 남부에 접한 영지, 남작령 케른하임과의 소금 거래 협상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 바로 영주인 나였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늘 그러했듯, 소금은 관(官)의 영향력 아래에서만 유통되는 귀한 물품이었다.

하여 소금 거래에는 사는 쪽과 파는 쪽의 모두 해당 영지의 주인인 영주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아무래도 귀족들이 끼어 있는 일인지라 이런저런 복잡한 절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일련의 쓸데없는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케른하임의 영주에게 서신을 보내 소금 거래 협상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직접 협상장 자리에 나가 열과 성을 다한 영업으로 우리 쪽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냈다.

귀족 신분으로 직접 '천한' 장사치들의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는 뒷말이 나오긴 했지만, 내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다닐렌츠를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소금처럼 중요한 물품의 거래 자리에 빠지면 쓰나."

"호호, 역시 영주님께선 다른 고리타분한 귀족들과 달리 깨어있으신 분입니다."

"깨어있긴 뭘. 그냥 돈 귀신이 붙은 거지. 자, 그래서...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지난달 총 수익금은 얼마지?"

앞서 파스칼이 가져다준 카르셀 도박장의 지난달 순수익은 약 2천 골드였다.

다른 영지에서 들었다면 군침을 삼키며 부러워했을 막대한 수익.

하지만, 우리 다닐렌츠 영지 살림살이의 가장 큰 기둥인 상단의 수익금에 비하면, 그건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상단 운영에 필요한 여러 부대 비용을 제하고, 영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상단 시설 및 각 영지 지점 설치 비용 등의 투자 비용까지 뺀 우리 상단의 순수익은..."

새까만 흑발만큼이나 진한 검은색의 눈동자를 지닌 이자벨이, 나를 보며 미소짓는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 총, 1만8293골드입니다. 이번 한 달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주님!"

탄탄대로 (2)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국 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가난했던 다닐렌츠 영지.

영지 자체는 무척이나 넓었지만, 사방에서 창궐한 몬스터와 흉악한 도적들이 들끓어 농업이건 상업이건 도무지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던 땅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옛일이 되었다.

지금의 다닐렌츠는 과거의 궁핍했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부유한 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땅의 중심인 주도(主都) 키르헨.

마차 두 대가 한 번에 지나도 될 만큼 널찍한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양쪽으로 수없이 많은 신축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주거용 건물도 있고, 상업용 건물도 즐비했는데 어느 곳 하나 비어있는 곳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 오늘 아침에 멀리 튀링헨에서 넘어온 싱싱한 생선입니다! 다 팔리기 전에 얼른 들여가세요!"

"쫀득한 반죽을 뜨끈한 화덕에 넣어 갓 구워낸 맛있는 빵입니다! 안에 땅콩잼이 들어있어서 아주 고소해요!"

"에이, 이 골목 다 뒤져봐요! 이거보다 깔끔하게 만든 오크 가죽 갑옷 없다니까? 속고만 사셨어?"

"나움가르트 산 분홍 소금! 귀족들도 이거 쉽게 못 구해요! 오늘 특별히 싼 값에 팝니다! 귀한 분에게 드릴 선물용으로도 좋아요!"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

파는 사람도 많고,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은 더 많았다.

다닐렌츠 영지의 경제 사정이 얼마나 좋은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다닐렌츠 영지군에 지원하십시오! 명예와 영광, 그리고 왕국 최고 수준의 보수가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 광장의 한구석, 나무로 만들어진 높은 연단에서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한 사람.

바로 다닐렌츠 영지군에서 나온 모병관이었다.

그의 뒤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옷을 입힌 사람 모형 몇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모형의 옷차림이 광장을 지나는 청년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와, 저기 입혀 놓은 옷 뭐야? 엄청 멋있는데?"

"저거? 영지군 외출복이래."

"외출복? 외출보-옥? 그게 뭔 소리야? 군인이 웬 외출복?"

"나도 저기 모병관한테 물어봐서 안 건데, 영지군한테 보급품으로 나오는 거래. 휴가 나갈 때 군복 대신 입는 옷이라나? 봄가을, 여름, 겨울까지 계절별로 세 벌씩 준다더라."

"세, 세 벌? 외출복만 세 벌을 챙겨준다고?"

"와아... 옷감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

"쓰읍... 나도 지원서 한 장 받아가 볼까?"

"엥? 너 영지군 지원하려고?"

"아니 뭐... 한 번 생각은 해본다고."

"야, 근데 영지군 들어가면... 돈 거의 못 받지 않아? 완전 박봉 아닌가?"

과거, 다닐렌츠 영지군의 월봉은 직책이 없는 일반 병사를 기준으로 한 달 75실버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끔찍한 수준의 박봉이었지만, 사실 이 시대의 일반 병사들이 받는 봉급이라는 것이 거의 다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급료가 적은 대신 식사과 주거지를 제공한다는 장점을 내세웠지만, 식사랍시고 병사들에게 내어주는 음식의 수준은 멀건 스프에 야채가 조금 들어있는 수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고기가 나왔지만, 양이 워낙 적어서 개인 당 고기 한두 점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병사들이 머무는 숙소의 사정은 또 어떠한가?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오래된 막사엔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고, 이불로 사용하는 모포와 베갯잇에 배인 냄새와 묵은 때는 세탁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지붕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곳엔 군데군데 구멍이 나 바람이 숭숭 들어왔는데, 여름엔 비가 새고 겨울이면 눈보라가 들이쳐 동상에 걸리는 이가 속출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영지군에 입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인생의 막장에 몰린, 더는 피할 곳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지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다닐렌츠의 새로운 영주가 된 사나이,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군의 명예와 긍지, 전투력은 지휘관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병사들이 평소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받는지에 달렸다'

취임 첫날, 영지의 군무관인 발터 브라운을 불러 전했다는 그 말에 군(軍)을 바라보는 영주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지군의 급료 체계 개선이었다.

지휘관과 병사의 구분 없이 모두 큰 폭으로 월봉이 올랐는데, 특히 병사들의 경우엔 2배 이상이 오르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맞이했다.

"야, 예전에나 박봉이었지, 요즘은 아니래."

"그래? 그건 어디서 들은 얘긴데?"

"우리 옆집 살던 형이 여름 끝날 즈음에 입대해서 얼마 전에 훈련 끝나고 휴가 나왔거든? 그 형한테 들어보니까 월봉이 180실버래."

"뭐? 180실버?"

"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주네?"

"그니까 말야. 원래 75실버였는데, 이번에 새로 취임하신 영주님이 다 갈아엎으라고 하셨다더라."

"대박이네. 이제 막 훈련소에서 나온 신병한테 주는 월봉이 그 정도인데, 그럼 베테랑들은 훨씬 더 받을 거 아냐?"

"쓰읍, 나도 장사하는 거 때려치우고 영지군 입대할까?"

"야, 아서라. 넌 몸이 비리비리해서 군인 못해."

"에이씨, 몸이야 훈련받다 보면 알아서 만들어지겠지!"

병사들에게 챙겨주는 월봉의 액수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먼저, 식사의 변화.

다닐렌츠 영지군 장병들의 식탁엔 더는 죽인지 물인 알 수 없는 멀건 수프따윈 나오지 않았다.

푹 고아낸 닭 육수에 곡식과 야채를 양껏 때려 넣어, 한 그릇만 먹어도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양질의 수프가 나왔다.

뿐인가, 지난 3년간 무자비하게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확보한 키르헨 주변의 광대한 토지에서 생산된 밀과 보리로 만든 빵이 끼니마다 먹고 싶은 만큼 제공되었다.

고기 요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 번 나왔지만, 그 양과 질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닭, 돼지, 소, 오리 고기가 번갈아 제공되었는데, 예전처럼 개인 당 한두 점 겨우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한 끼 식사를 고기만으로도 때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 나왔다.

예전의 고기 요리 메뉴가 구색 맞추기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진정한 '특식(特食)'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

그밖에도 신선한 과일과 우유, 각종 견과류 등을 간식으로 아낌없이 제공하니, 다닐렌츠 영지군 장병들의 몸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군 보급품의 구성 역시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과거 영지군에 입대한 이는 갬비슨(천으로 만든 옷에 솜을 채워 만든 누비 갑옷) 한 벌과 싸구려 가죽으로 만든 투구, 아무 나무나 깎아 만든 기다란 봉에 잡철을 두드려 만든 날을 꽂은 허름한 장창 한 자루를 보급품으로 받았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 예컨대 장갑, 각반, 신발 등의 장비는 필요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알아서 구매해야 했다.

쥐꼬리만 한 병사들의 급료 수준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

하지만 매번 전장에 나설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병사의 입장에선 그 없는 돈이라도 아끼고 아껴서 추가 장비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영주의 명령으로 영지군에 대한 보급 체계가 개선되며 더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선, 병사들에겐 칼과 화살은커녕 멀리서 던진 돌멩이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던 기존의 얇디얇은 싸구려 갬비슨 대신 아마포와 솜, 헝겊을 충실히 채워 넣고 군데군데 고블린 가죽을 덧댄 고급의 갬비슨이 한 벌씩 주어졌다.

싸구려 가죽 대신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투구가 주어진다는 것 역시 눈에 띄는 변화.

여기에 역시 고블린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과 전투화, 각반, 팔목 보호대가 추가로 보급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앞서 도시 광장에서 청년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멋진 디자인의 계절별 외출복도 세 벌씩이나 주어졌다.

복식만 달라진 게 아니다.

병사들이 드는 무기의 품질도 훨씬 좋아졌다.

기존의 싸구려 장창 대신 나움가르트 광산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철광석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창날을 물푸레나무로 만든 단단한 자루에 꽂아 만든, 질 좋은 장창이 주어졌다.

과거에 비해 훨씬 좋은 갑옷과 장비, 무기를 든 병사들의 사기가 월등하게 치솟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의 환경도 완전히 바뀌었다.

솜씨 좋은 목수를 붙여 튼튼하고 깔끔하게 만들어진 막사엔 더 이상 냄새도 나지 않았고, 비가 새지도 않았다.

의식주(衣食住), 입는 것과 먹는 것과 머무는 곳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다닐렌츠 영지군.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더 빨리 못 뛰나!!! 뒤처지는 놈은 발가벗겨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 뛰어! 뛰라고 이 새끼들아!!!"

이전과 비교해 '악랄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강해진, 훈련의 강도였다.

***

"... 이번 차수에 들어온 훈련병 128명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숫자는 61명입니다."

"61명? 꽤 남았네?"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느낌의 방,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서류를 뒤적이며 업무에 몰두 중인 한 사내가 부하의 보고에 제법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처음 들어온 숫자와 비교해 남아 있는 사람의 숫자가 반 토막이 났건만, 꽤 남았다는 표현을 할 만큼 훈련의 강도는 엄청났다.

"보자... 지금이 3주 차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직 2주 남았으니까... 그중에서 다시 열댓 명은 떨어져 나갈 테지. 뭐, 그래도 준수하긴 하네. 한 50명 정도는 건지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 있던 서류 한쪽 끄트머리에 '50'이라는 숫자를 적어넣는 한 사나이.

메이슨 아르히펠트(Mason Archfeld).

그는 다닐렌츠의 영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용맹한 전사이자 베테랑 용병이었고, 현재는 영지 동북부에 자리한 군 훈련소의 수장이었다.

메이슨은 기존에 주먹구구식으로 대강대강 진행되던 다닐렌츠 영지군의 신병 훈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고쳐 지금의 5주 훈련 체제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얼마 전 새로이 다닐렌츠의 기사로 서임 되어 아르히펠트라는 성(姓)을 수여 받고 준 귀족의 신분이 되었다.

"영주님께서 애들 정훈 교육 좀 더 강화하라는 지침을 내리셨다. 영지군에 대한 처우가 훨씬 개선된 만큼, 그에 맞는 품위를 지닐 수 있도록 제대로 교육하라는 말씀이셨지."

"예, 소장님. 그럼... 정훈 담당 교관 불러들일까요?"

"어, 그래. 지금 바로 나한테 오라고 해. 관련 교재도 들고 오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부하가 빠져나간 방에 홀로 남아 업무를 계속하던 메이슨.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지난 기억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아르히펠트 경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도록 서로 노력해 보죠.'

'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아... 메이슨한테 그렇게 불리는 것도 엄청 어색한데, 그것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볼게요. 하하하!'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 준 것도 모자라 아르히펠트라는 멋진 성까지 내려준 주군, 데미언.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는 깡마른 몸에 독기 어린 눈빛을 지닌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한데 그랬던 그가 어느새 자신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큰 키과 너른 어깨, 감히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힘들 정도의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가 되었다.

"그쯤만 해도 짝을 찾기 힘든 어마어마한 사연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보다 더 앞을 향해 나아간 데미언은 왕국에서 가장 가난했던 이곳 다닐렌츠에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기적을 일으키고, 끝내는 영주의 자리에 올라 귀족이 되었다.

그다음은 또 어떤 기적이 기다리고 있을지, 부푼 기대감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메이슨이었다.

"크흠, 이러다 나중에 나도 귀족 작위 하나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닌가? 그건 너무 간 건가? 하하하!"

기사 서임식 준비를 위해 짧게 잘랐던 머리를 긁적이며, 메이슨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탄탄대로 (3)

"... 하여, 지난달에도 확인된 것만 일흔 명이 넘는 영지민들이 다닐렌츠 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이런 제기랄!!!"

콰앙-!!!

영지 서기관의 보고를 듣던 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으로 앉아 있던 책상을 후려친다.

바렌부르크 영주, 폴커 야닝스(Volker Jannings) 남작.

올해 나이 쉰여섯, 반백의 머리칼을 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중년의 사내인 그는 최근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영지민 탈주 현상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다.

"대체 다닐렌츠 그 거지 같은 촌구석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넘어가는 거야?"

폴커 남작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 몇 년간 빠르게 발전했다고는 하나 다닐렌츠는 수십 년간 왕국에서 가장 볼품없던 영지로 불렸던 곳.

'몬스터를 토벌해서 활용 가능한 농지를 대폭 늘렸다고는 하지만...'

당장 경작되고 있는 농지의 크기만 따진다면 바렌부르크도 다닐렌츠에 못지않았다.

즉, 인구 부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농업 생산량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 대체 왜?

"제가 파악한 바로는, 다닐렌츠의 세율은 5할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 점 때문에 영지민들이 다닐렌츠로 도망치는 게 아닌지..."

"뭐? 세율이 5할? 버러지 같은 놈들한테 절반이나 퍼준다는 얘기야?"

다닐렌츠 영지의 세율이 5할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고 기함하는 폴커 남작이었다.

"돈 버는 족족 술이나 처먹는 놈들한테 받을 돈의 절반이나 내어준다는 게 말이 되나? 돈을 그냥 땅바닥에 버리는 짓거리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다닐렌츠 영주 이 새끼, 원래 용병 출신이라고 했지? 근본 없는 새끼라 그런지 확실히 개념이 없구만."

눈앞에 상대가 있다면 잘근잘근 씹어먹기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다닐렌츠 영주를 욕하는 폴커 남작.

바렌부르크의 서기관은 그런 주군의 말에 냉큼 동조해 얼굴도 모르는 다닐렌츠의 영주를 헐뜯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심지어 올해 겨우 나이 스물이 되었다고 하니...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멍청한 짓을 한 셈입니다. 당장 세율이 절반이라는 말에 혹한 놈들이 많이 몰려들겠지만, 세금을 절반만 걷어서는 별 재미를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 당장은 몰라도 멀리 보면 멍청한 짓거리를 한 거지."

"예. 나중에 세수가 부족해져 뒤늦게 세율을 올리려고 하면 영지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일반적인 이 시대의 영지 세율을 보통이 8할, 심한 곳은 9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다닐렌츠가 적용 중인 5할의 세율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던 것.

시대의 보편적인 상식을 그야말로 깡그리 무시하는 정책이었기에, 폴커 남작과 서기관 모두 다닐렌츠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 어찌됐건, 내 밭을 갈아줄 노예들을 뺏어간 건 용서할 수 없다."

"예, 영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영지에서 넘어간 줄 뻔히 알면서도 영지민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합니다."

"흠..."

서기관의 입바른 말을 흡족한 표정으로 들으며, 하얗게 센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던 폴커 남작이 선언한다.

"... 군무관을 불러라. 건방진 다닐렌츠의 애송이를 혼내줄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에서 약 두 시간 정도 말을 달려 닿을 수 있는 곳.

다각, 다각, 다각...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녹음을 잃어가는 들판의 한 가운데를 한 떼의 인마(人馬)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기... 저 언덕으로 올라가 봅시다."

"예, 영주님."

일행의 선두에 선 나의 말에, 바로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군무관, 발터 브라운(Walter Braun).

행정과 실무를 포함한 다닐렌츠의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자, 영지가 자랑하는 베테랑 기사였다.

일행 모두가 내가 가리킨 언덕 쪽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데, 한발 앞서 언덕 위로 말을 달렸던 나의 호위 기사 아드리안이 양손을 들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위험 요소가 없다는 신호.

그게 아니어도 어지간한 위험 요소는 일신의 실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미리 확인해 나쁠 것은 없다.

"흠... 멀리서 보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군요. 올라와 보길 잘 했네요."

"예, 그렇습니다."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

주도 키르헨으로 향하는 가도에 가까운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브라운 경."

"예, 영주님."

"여기, 어떻습니까?"

앞뒤를 뚝 잘라먹은 불친절한 질문이었으나, 발터는 내 말이 뭘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감제고지(瞰制高地: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에 적당한 높은 지대)로 삼기에 아주 적당해 보입니다."

"역시, 경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베테랑 기사의 연륜이 나를 즐겁게 했다.

"이곳에 오십 명의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막사 시설을 갖춘 요새를 세우도록 하세요. 영지 순찰대의 전진 기지로 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매번 말하는 내용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병사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잠자리와 취사 시설에 공을 들이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시설이 완공되면, 경께서 직접 와서 확인하세요. 영지의 수뇌부들이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예, 영주님. 그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기대하죠."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발터에게 싱긋 미소를 보여준 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다."

***

"아, 오라버니! 이제 돌아오셨어요?"

키르헨으로 돌아온 나를 아름다운 미소로 맞이해주는 한 사람.

예상치 못한 삶의 전개로, 나와 남매지간이 된 소녀, 니나였다.

"영주님, 다녀오셨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파스칼. 우리 니나 잘 가르쳐주고 있었나?"

니나와 함께 있던 금테 안경의 사내, 파스칼 긴터가 내가 깊이 허리를 숙인다.

니나와 파스칼이 함께 앉아 있던 책상 위엔 수많은 종이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영지의 재무(財務)와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그 문서들은 다닐렌츠의 재무관인 파스칼이 니나에게 영지의 재무와 관련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가져온 일종의 '교재'로, 갖가지 복잡한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그래, 니나.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니?"

비단처럼 부드러운 니나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곤란한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니나.

참, 우리 니나는 저런 표정을 지어도 예쁘다.

가히 사기적인 미모라 할 수준이었다.

"어...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요..."

"근데?"

"... 너무 어려워요. 제가 좀 멍청한가 봐요."

"뭐? 하하하하!"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말하며 울상을 짓는 니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을 터트렸다.

몇 달 전, 나는 파스칼을 비롯한 영지의 수뇌부들을 불러 니나에게 영지 운영과 관련된 지식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주인 내가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하여 영지 운영을 담당해줄 니나를 위한 지시였다.

하여 영지의 수뇌부들은 한 달씩 돌아가며 니나에게 자신들의 전문 분야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지난달엔 서기관 세르지오에게 행정 서무 지식을 배웠고 이번 달은 파스칼의 차례였다.

"아무래도 재무 관련 지식이 어려운 편이지. 그래도 멍청하다는 얘기는 하지 마라. 듣는 선생님 속상하시겠다. 안 그래, 파스칼?"

"하하하, 맞습니다. 가르치는 학생의 좌절만큼 선생님께 가슴 아픈 일은 없지요."

"앗... 죄, 죄송해요, 재무관님."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는 니나였다.

"아닙니다. 제가 더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재무관님. 저도 더 열심히 배울게요."

"그럼... 영주님도 오셨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아가씨,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아, 네! 재무관님,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부스럭거리며 책상 위의 문서들을 쓸어 담는 파스칼에게 인사하는 니나.

허리를 마주 깊이 굽히는 것으로 니나의 인사를 받은 파스칼이 내게도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고생했어 파스칼, 가서 푹 쉬어."

"예, 영주님."

그렇게 파스칼이 떠나간 뒤, 나는 니나와 함께 책상 앞에 앉았다.

함께 오늘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인지 니나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오라버니.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전엔 나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썼던 니나.

하지만 내가 영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엔 예를 차려야 한다며 오라버니라는 달라진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쩝, 나는 오빠라는 소리가 더 좋은데...'

하지만 나의 위치가 달라진 만큼 작은 것에서부터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니나의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없었기에, 얌전히 달라진 상황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뭐가 궁금하니?"

"음, 세율이요."

"세율?"

"예."

"흐음... 세율이 궁금하다라, 정확히 어떤 게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우리 영지의 세율이요, 5할이잖아요?"

"음, 그렇지? 근데 그게 왜?"

"너무... 낮은 것 같아서요."

"너무 낮다고?"

"예. 오라버니께서 영지민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세금을 적게 거둬서 그만큼 영지의 살림이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차라리 예전만큼 세를 거두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우리가 영지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는 게 영지 발전을 위해 낫지 않을까요?"

예쁜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답하는 니나.

그런 니나의 눈을 한동안 미소로 바라보다,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음, 그래. 그런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영지민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기회를 주고 싶었단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기회요? 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좀 더 친절한 설명을 해주기로 한다.

"자, 생각해봐. 예전엔 세율이 8할이었기 때문에, 밀 농사를 지어서 밀 10포대가 나오면 8포대를 영주에게 바치고 2포대만을 농사지은 영지민이 가져갈 수 있었지."

"네, 알고 있어요."

"2포대의 밀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양이지.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도 없는 그런 양... 하지만, 지금은 어떠니? 예전과 달리 5할의 세를 거두니까, 곡식이 남는 사람들이 생겼겠지?"

"예."

"이제 다닐렌츠의 영지민들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남은 곡식을 아껴두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냥 당장에 배부르게 먹으려는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그 남은 곡식을 다른 이에게 팔아 돈을 마련하려는 사람도 나올 거야."

"아..."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며 뭔가를 깨달은 것일까?

니나의 눈동자에 별빛 같은 반짝임이 어린다.

"과거에 그저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사람들이 심리적인 여유가 생기고, 그로 인해 다른 소비 활동을 시작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게 되는 거야. 생존에 급급하지 않은 삶, 단순히 먹고 사는 것 이상을 원하는 마음... 나는 우리 다닐렌츠에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거든."

"그게... 가능할까요?"

"다행히 지금까진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구나. 너도 파스칼에게 이것저것 들어서 알겠지만, 키르헨 시장만 해도 1년 만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규모가 커졌거든."

내 말을 들은 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아, 네. 아까 들었어요. 상인들의 숫자가 배로 늘었다면서요?"

"그래. 만약 영주인 내가 무조건 이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면 이렇게까지 빠른 발전을 이루진 못했을 거야. 단순히 시장의 덩치는 키울 수 있겠지. 하지만 물건 파는 사람도, 사려는 사람도 없었을걸?"

무릇, 시장(市場)이란 위정자 개인의 의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파는 물건과 사려는 돈이 모두 존재해야 성립이 가능한 사회적 공간이었으니까.

나는 이곳 다닐렌츠의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를 선사하고, 그 여유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사회 발전의 선순환(善循環).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영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뭔가... 어려운데,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요."

"지금 당장 모든 걸 다 이해하려고 하진 마라. 시간은 많으니까."

"네, 오라버니. 열심히 배우고 공부해서 저도 다닐렌츠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될 게요!"

"그래, 말만 들어도 아주 든든하구나. 하하하!"

학습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니나를 보며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 후, 내가 영지를 떠나 전장에 나설 때가 오면 나를 대신해 영지를 다스려야 할 니나였기에, 그녀의 발전은 나에게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보자...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천천히, 머릿속으로 남은 시간을 헤아려본다.

'1, 2... 그래, 이제 4년 남았구나.'

<로스트 킹덤>의 가장 뜨거운 무대가 될 '그 사건'이, 이제 4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영지전 발발 (1)

해가 지나 신성력(神聖歷) 786년 3월.

겨우내 불던 찬 바람이 잦아들고 따뜻한 봄 햇살이 조금씩 내리쬐던 어느 날.

"그, 급보입니다!!!"

평화로웠던 다닐렌츠 전역을 강타한 소식.

전쟁이 시작되었다.

***

"...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라엔슈타인 요새로 진격해온 바렌부르크의 병력은 약 2천가량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영주 저택에서 급하게 소집된 영지 수뇌부 회의.

전반적인 회의 진행을 맡은 군무관 발터 브라운과,

서기관 세르지오,

재무관 파스칼 긴터,

마지막으로 다닐렌츠의 영주인 나, 데미언 카릴베르크까지.

다닐렌츠 영지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네 사람이 모두 모였다.

무거운 회의실의 분위기.

당연했다.

자정이 넘은 깊은 새벽, 피를 토할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달려온 전령이 전한 단 한 줄의 소식.

[바렌부르크, 다닐렌츠 침공.]

그 충격적인 내용 앞에 심각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 바렌부르크 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것은 바로, 내가 바렌부르크의 침공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겠지.

'원래 바렌부르크가 전쟁을 일으키는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는데...'

내 기억 속, 그러니까 <로스트 킹덤> 원작 소설에서 바렌부르크가 다닐렌츠를 침공하는 시기는 신성력(神聖歷) 787년 봄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꾼 역사의 흐름 때문일까?

현실에선 그보다 1년이나 일찍 바렌부르크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하긴... 전쟁의 원인이 된 바렌부르크 영지민의 이탈이 소설 속 시점보다도 더 빨리 진행되었으니, 바렌부르크 측의 인내심도 더 빨리 떨어진 것이겠지.'

소설 속에 묘사된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은 성격이 급하고 매우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왕국 북서부 지역을 기반으로 광산업을 운영하는 야닝스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여러모로 좋지 못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상인의 피는 부모에게 제대로 물려받았는지, 젊은 시절부터 돈 냄새를 맡는 감각만큼은 기가 막힌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가업인 광산업 외에도 여러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대었고,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마흔 살이 되던 해, 왕국 북서부 지역의 대귀족 중 하나인 안할트 백작을 찾아가 그때까지 모은 거의 모든 재산을 바쳤고, 그 대가로 바렌부르크 남작의 작위를 얻었다.

'대체 돈을 얼마나 많이 갖다 바쳤길래 귀족 작위를 살 수 있는 거지?'

나이 마흔에 귀족 작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가져다 바칠 만큼 귀족 신분에 대한 열망이 높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그저 돈이 최고였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내가 신분제가 뿌리 깊게 자리잡힌 이곳 세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이겠지.

바로 그때,

"저... 영주님?"

"음? 어?"

상념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회의에 참석했던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침공을 시작한 바렌부르크 측의 병력이 2천 명 정도 될 것이란 얘기까지 했습니다."

"2천이라..."

백작 이상의 대귀족들이 엮인 전쟁도 아니고, 그저 고만고만한 남작령끼리 얽힌 전쟁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양측의 병력을 모두 합쳐 2, 3천 정도면 꽤 많은 축에 속했다.

즉 바렌부르크가 동원한 2천이라는 숫자는 꽤 대단한 수준의 병력이라고 봐야 했다.

"적은 라엔슈타인 요새를 노리고 있는 거겠죠?"

나의 질문을 들은 군무관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예, 맞습니다. 영주님. 바렌부르크 방면에서 우리 영지를 침공한다면 라엔슈타인을 두고 돌아갈 길은 없으니까요."

"흠, 라엔슈타인에 2천이라... 날 풀리자마자 바로 움직인 걸 보니 겨울 내내 준비를 했군요. 용병들 사느라 돈을 꽤 많이 썼나 봅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렌부르크가 동원한 이천이라는 병력이 모두 정규군은 아닐 것이다.

많이 잡아봐야 전체 병력의 2할가량, 즉 4백 명 정도가 바렌부르크의 정규군일 것이고 나머지는 죄다 돈으로 끌어모은 용병들일 터.

"라엔슈타인에 지금 병력이 얼마나 있습니까?"

"현재 라엔슈타인 요새에는 5백 명의 정규군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5백이라..."

발터의 대답을 듣고 나니 한결 걱정이 가라앉는다.

단단한 요새에 들어앉아 수성(守城)하는 우리 측 5백 명의 병력.

한데 그 5백 명은 그냥 5백 명이 아니다.

무려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렸던 사나이, 백전노장 데론 베르켈이 지휘하는 5백 명이었다.

그들은 바렌부르크 측에서 돈으로 급하게 긁어모은 어중이떠중이 용병 5천 명과도 바꾸지 않을 정예 중의 정예.

고작 2천 명의 허술한 병력으로는 단기간에 라엔슈타인 요새의 성벽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데론에게 알아서 버티라고 손 놓고 있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군무관, 지금 즉시 라엔슈타인으로 지원군을 보내겠습니다. 병력은... 영지군 5백에 용병은 천 명."

"도합 천오백이군요."

"지금 즉시 키르헨 용병 길드를 통해 전투에 파견할 용병을 동원하세요. 즉시 출발 가능한 5백을 추려 라엔슈타인 요새로 보내고, 추가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키르헨 내에서 대기시키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파스칼."

"예, 영주님."

나름 부름에 즉각 응답하는 재무관 파스칼이었다.

"다닐렌츠 상단을 통해 라엔슈타인 요새로 군수물자를 보낸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군수물자의 수량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요새에 있는 5백에 여기서 지원으로 보내는 천오백, 도합 이천 명의 병력이 한 달간 농성(籠城)한다는 가정하에 보급 계획을 세운다. 자세한 계획은 군무관과 상의해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파스칼에게 지시를 내린 뒤, 내가 마지막으로 시선을 향한 이는...

"세르지오."

"예, 영주님."

영지의 서기관, 세르지오였다.

"이 회의가 끝나는 즉시 카르셀에 있는 아르미엔토 경에게 상황을 전하고 키르헨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세요.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아르미엔토(Armiento)'란, 얼마 전 새로이 작위를 받아 다닐렌츠의 기사가 된 엔리케에게 내가 친히 내려준 성(姓)이었다.

어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아르미엔토라는 성은, 펠리노어 왕국이 아닌 멀리 대륙 남서부 에이다르 왕국 식의 작명법을 따른 결과였다.

엔리케의 부모가 에이다르 왕국 출신의 이민자 출신이었기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지은 성이었다.

"영주님, 아르미엔토 경을 라엔슈타인으로 보낼 생각이십니까?"

내가 세르지오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을 들은 군무관 발터가 질문을 던졌다.

엔리케의 귀신 같은 활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발터였기에,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르미엔토 경은 저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갑니다."

"다른 곳? 아니, 어디를 가신다는 건지...?"

이유를 묻는 그의 눈빛에, 나는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장담컨대, 루테니아 역시 이번 전쟁에 참전할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신경이 라엔슈타인 요새 쪽으로 쏠린 틈을 타 남쪽에서 치고 들어올 테죠. 아르미엔토 경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루, 루테니아가 말입니까?! 하지만 루테니아와 바렌부르크는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큰 이익 앞에선 적과도 손을 잡는 법 아니겠습니까? 분명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는 모종의 합의를 했을 겁니다. 우리 다닐렌츠가 가진, 여러 이권을 나눠 먹자는 식의 논의가 두 영주 간에 이루어졌을 테죠. 최근 몇 년간 우리 영지의 발전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들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두 영지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과한 걱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렌부르크라면 모를까, 루테니아는 저희 측과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은..."

"아니요, 루테니아는 반드시 쳐들어옵니다."

"허어..."

마치 바렌부르크 영주와 루테니아 영주가 만나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오기라도 한 듯 확신에 찬 나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군무관 발터.

잠깐의 침묵 후,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나에게 묻는다.

"...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하신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영주님 말씀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용 자체가 너무 엄청나서..."

"그게... 흠, 설명하자면 깁니다. 복잡하기도 하고요. 지금 제 말이 너무 무책임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저를 믿고 이 위기 상황에 대처해주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군무관."

"... 알겠습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발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미안합니다, 군무관. 나로서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이거 다, 제가 책에서 봤던 내용이거든요.

***

며칠 후, 영지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 직접 가려 뽑은 영지군 정예 병력 5백에 용병 천을 더한 도합 천오백 명의 지원 병력이 키르헨 도시 외곽에 집결했다.

지원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은 데론 베르켈의 취임 이전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이었던 베테랑 기사 에르발트 베링(Erwald Behring)이었다.

그는 머리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철 투구를 쓰고, 단단한 오크 가죽 갑옷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가린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커다란 전마(戰馬) 위에 올라타 늠름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는 베링에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것을 신호로 하여,

"... 다닐렌츠, 진군(進軍)."

베링의 입에서 진군을 알리는 명령이 떨어졌다.

"진구우우우우우우운!!!"

뿌우우우우우우우-

뒤이어 일선 장교들의 날이 선 외침과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고,

"움직여! 움직이라고 이 새끼들아!!!"

"어떤 새끼가 출발부터 얼어있어?! 지금 말해, 지금 말하면 멀리 안가고 여기서 죽여준다!!!"

"영주님이 보고 계신다! 발 똑바로 맞춰 이 새끼야!!!"

"힘차게 걸어라!!! 창 똑바로 들어 이 새끼야!!!"

병력 사이사이에 배치된 베테랑 고참 병사들의 살벌한 욕설도 들렸다.

"드디어 출병(出兵)이군요."

조금씩 멀어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꺼낸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군무관 발터가 입을 열었다.

"예, 영주님께서 빈틈없이 지시를 내려주신 덕분에 아주 빠르게 지원 병력을 모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하, 저는 그저 군무관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지시했을 뿐입니다."

"부족한 저의 의견을 믿고 따라주시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가 전한 치하의 말에 겸손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발터였다.

"남부 전선으로 갈 추가 병력도 되도록 빨리 준비해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

"라엔슈타인으로 보낸 용병의 숫자가 천명에 달했던지라, 남쪽으로 보낼 병력 수급은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 모인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나의 질문을 받은 발터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 이제 겨우 백 명을 채웠습니다."

"백 명이라..."

확실히, 적다.

용병을 제외하고 키르헨에 남은 정규군 병력은 이제 삼백 명 남짓.

전과 비교해 몰라보게 커진 키르헨의 규모를 생각하면, 사실상 그 정규군 병력은 도시 방위를 위해 손댈 수 없다고 봐야 했다.

즉, 루테니아가 침공해올 남쪽 방면으로 보낼 수 있는 지원 병력은 돈으로 고용한 용병이 전부라는 것.

그것을 알고 있는 발터이기에 저토록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이겠지.

하지만...

"백 명이라, 적당하군요."

그 백 명의 병력을 이끄는 사람이 다름아닌 '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 하지만 영주님! 병력이 너무 적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군무관. 카르셀에서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발터 역시 카르셀에서 내가 해낸 일을 들었을 것이다.

홀로 도시를 지배하던 '밤의 형제단' 병력을 모조리 도륙해버린, 그 날의 일을 말이다.

"... 혼자서도 오십이 넘는 병력을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린 접니다. 심지어 이번엔 백 명의 병력에, 귀신 같은 활 솜씨로 저를 도와줄 아르미엔토 경도 함께 싸울 텐데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그렇지만... 아, 아닙니다. 뜻대로 하시길."

더 이상의 걱정은 영주인 나를 모욕하는 것임을 깨달은 발터가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나는 서서히 멀어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도시 카르셀이 있을 남쪽을 바라보았다.

"... 엔리케 이 양반, 언제 오는 거야?"

106. 영지전 발발 (2)

"쏴라아아아아-!!!"

투투투투투투투퉁!!!

전장 지휘를 책임지는 선임 장교의 외침과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된다.

본격적인 공성(攻城)을 시작하기 전, 수성(守城) 측의 기세를 꺾는 중요한 사전 공격 작업이었다.

쐐에에에에에엑!!!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살들.

목표는 눈앞에 보이는 성벽 위, 굳은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는 적의 병사들이다.

그러나...

"저, 저, 저게 뭐야?!"

그런 공격 측의 의도가 무색하게도, 요새를 지키는 수비군 측은 화살 공격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벽 위의 병사들이 꺼내든 방패가 그 공격을 깔끔하게 막아냈기 때문이다.

텅! 터터텅! 텅! 터텅! 텅! 터터텅!

병사 한 명의 몸을 넉넉하게 가릴 수 있는, 널찍한 크기의 방패에 화살이 쉴 새 없이 내리꽂힌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방패 아래 병사들에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화살 공격.

그 모습을 본 공격 측 지휘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이런 씨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성벽으로 날리는 화살 한 발 한 발이 모두 돈이었다.

일개 병사라면 모를까, 부대의 지휘관쯤 되면 단순히 전투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과 '비용'까지도 세세히 따지게 되는 법.

화살을 쏘는 족족 방패에 틀어박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돈 지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썅! 사격 중지시켜!"

지휘관의 성난 목소리를 들은 일선 장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궁수들의 사격을 중지시킨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이이이이!!!"

"그만! 그만 쏘라고 이 병신 새끼들아!!!"

"너 이 새끼야! 활 안 내려놔? 뒤질래?"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진 이후로도 미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병사들에 의해 화살 수십 발이 더 성벽을 향해 날아갔지만, 역시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짧은 순간 쏟아부은 수백 발의 화살만 아깝게 된 셈이다.

"사령관님, 어떡할까요?"

성벽을 지키는 적들의 기를 죽이려 기세 좋게 화살 비를 퍼부었건만, 되레 아군의 사기만 꺾여버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씹어 삼킨 공격 측의 지휘관, 바렌부르크의 기사 켈 슈펭글러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부하 장교의 물음에 답한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새끼야? 용병 놈들 앞으로 돌격시켜! 쪽수로 밀어붙이라고!!!"

"알겠습니다!"

상관의 윽박지름에 쭈그러든 자라목이 된 부하 장교가 명령 전달을 위해 달려나가고, 켈은 이글거리는 시선을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후우... 이거 어째 시작부터 꼬이는 기분인데? 좆 같네, 씨발."

***

"흔들리지 마라!!! 놈들은 결코 이 성벽을 넘을 수 없다!!!"

바렌부르크 군이 쏟아낸 화살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낸 수비 측 지휘관,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 데론 베르켈이 위엄 어린 목소리로 성벽 위의 병사들을 독려한다.

몇 달 전, 영주의 명령으로 라엔슈타인의 모든 병사에게 일괄적으로 보급된 방패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 덕에 아군의 사기가 치솟고 있었다.

"사령관님! 놈들이 사격을 멈췄습니다!"

"계속 쏴봤자 화살 낭비라는 걸 깨달았을 테지. 곧 성벽으로 돌격해올 테니, 대응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턱-!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 윗부분에 강하게 부딪히며 사령관 데론에게 군례를 올린 장교가 빠른 걸음으로 명령 수행을 위해 달려나간다.

"흠..."

성벽 아래 저 멀리,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적병의 움직임을 살피던 데론이 긴장으로 바짝 말라붙은 입술을 손으로 쓸어낸다.

올해로 나이 60이 된 자신이다.

이제는 일선에서 은퇴하여 남은 생을 편안히 보낼 궁리를 하는 게 더 어울릴 나이.

하여 데론은 은퇴 계획을 밝히고, 자신을 대신해 라엔슈타인 요새의 지휘를 맡아줄 사람을 보내 달라 청했다.

그러나...

'어휴, 은퇴라니요? 아직 한창이신데요!'

새로이 다닐렌츠의 주인이 된 손주 뻘의 어린 영주는 몇 달 전 어마어마한 양의 군수품과 함께 직접 라엔슈타인 요새까지 찾아와 자신의 은퇴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됩니다, 은퇴는 안 돼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니, 흙이 들어가도 아직은 안 됩니다!'

'허허허, 영주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이라니요! 베르켈 경, 저 태어나서 지금처럼 진지했던 적이 없습니다.'

'허허, 이제는 늙어서 눈도 어두워지고, 손발 쓰는 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뒷방 늙은이에게 미련 버리시고, 젊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이 자리에 앉히시지요.'

'하하하! 세상 다 찾아봐도 방금 베르켈 경께서 제게 하신 이야기만 한 엄살은 없을 겁니다. 늙다뇨, 대체 누가 그런 말을 베르켈 경에게 한답니까? 여전히 제 눈엔 세상 둘도 없을 실력과 풍부한 경험을 두루 갖춘 기사 중의 기사로 보이십니다!'

'영주님...'

자신의 늙고 주름진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어가며 연신 찬사를 늘어놓던 다닐렌츠의 새로운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

결국 그 진심 어린 간절함에 발목이 잡힌 데론은 은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 은퇴를 미루길 잘했군.'

오늘의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영주님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온 거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인연이었다.

백작령 바덴하임의 침공을 받아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의 고향 리트베르크.

도시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던 그 혼란의 밤,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은 데론과 그의 어린 주인이었던 니나, 제자인 아드리안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 뒤로 버니언 산맥으로부터 이 머나먼 왕국의 변방에 자리한 다닐렌츠 영지에 이르기까지, 말로 전한다면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적과,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그 거듭된 위기 속에서 나이와 경력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강했던 데미언의 검은 언제나 빛났다.

그 빛이, 모두를 구했다.

"... 이렇게, 군신(君臣)의 관계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처음 리트베르크에선 영지 군무관과 일개 용병의 사이로 만났던 두 사람.

허나, 지금은 그 상하 관계가 역전되어 영지의 절대자인 영주와 그의 명령을 받는 봉신(封臣)의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인생이란 게 참 재밌는 거지."

남아 있는 날보다 지나온 날이 훨씬 더 많은, 지금의 이 나이가 되어도 인생이란 늘 알 수 없는 것.

새삼스러운 삶의 진리를 곱씹으며, 데론은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촤앙!!!

"오늘,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내일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간악한 적들 앞에, 다닐렌츠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백전불굴(白戰不屈)의 노장, 기사 데론 베르켈의 우렁찬 외침.

그리고 그런 상관의 외침에 응답하는 병사들의 천둥 같은 함성과 함께,

"가자, 오늘 성을 떨어뜨린다!!!"

"싹 다 죽여! 죽여 버려어어어!!!"

"와봐, 이 씨발 놈들아아아!!!"

"드루와, 드루오라고 이 새끼들아!!!"

훗날, 다닐렌츠의 소금 광산을 노리고 시작됐다 하여 '소금 전쟁'이라 이름 붙여진 왕국 북서부 3개 영지의 거대한 혈투(血鬪)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바인호프(Bainhof) 요새는 루테니아에서 다닐렌츠로 들어오는 남부 접경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바인호프 요새를 통과하면 다닐렌츠의 최남단 도시 린츠브론(Linzbronn)이 나오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하루 거리에 남부 최대의 도시인 카르셀이 있다.

'동부에 라엔슈타인이 있다면 남부엔 바인호프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닐렌츠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요충지(要衝地)에 존재하는 군사 요새였는데, 그 전략적 가치에 비해 규모는 그다지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요새 사령관인 데론 베르켈의 부임 이후 거듭된 확장 공사를 거쳐 현재 1천여 명까지 동시 주둔 가능한 수준의 규모로 성장한 동부 라엔슈타인 요새와 달리 바인호프 요새는 200명이 수용 가능한 병력의 한계였다.

심지어 요새에 실제로 주둔하는 병력의 수는 고작 10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내가 영주에 취임한 이후 늘린 것이었다.

예전엔 병사 50명이 배치된 인력의 전부였다지 아마?

"... 저, 영주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바로 그 바인호프 요새로 향하는 길.

나와 함께 키르헨에서 급하게 고용한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동 중이던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가 조심스럽게 일행의 선두에 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엔리케. 뭔데요?"

용병에서 기사로 신분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내겐 '친한 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엔리케.

그런 만큼 그를 대하는 내 말투엔 편안함이 묻어났다.

반면 엔리케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아니 많이 불편해진 것 같지만...

'... 어쩔 수 없지. 명색이 귀족인데, 예전 용병대 막내 대하듯 함부로 반말을 깔 수는 없는 거니까.'

겔베르트도 꽤 고생하다가 요즘은 내게 존댓말 쓰는 것에 익숙해졌으니, 엔리케도 알아서 잘 적응하겠지.

그나저나, 뭐가 궁금하길래?

"뭐요, 불렀으면 얘길 해봐요."

"아, 저, 그... 바인호프 요새 말입니다."

"예."

"'동부에 라엔슈타인이 있다면 남부에는 바인호프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라는데... 거긴 왜 그렇게 규모가 협소한 겁니까? 라엔슈타인 요새는 꾸준히 확장해서 지금은 굉장히 커졌는데..."

"아, 그건 또 말 못 할 이유가 있죠."

"... 말 못 할 이유, 말입니까?"

"예, 그래서 못 알려 드려요."

"아니, 그..."

"왜요, 억울합니까? 그럼 영주하시던가."

"크흠...!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왜요? 예전처럼 막 때리고 싶어요? '건방진 막내 시키야!' 막 이러면서?"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불경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커흐음!"

예전 같았으면 냅다 오른손을 뻗어 나의 뒤통수를 노렸을 엔리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후배 용병이 아닌 영지 내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쥔 영주이자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었다.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엔리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미안해요, 엔리케. 이건 정말로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거든.'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루테니아가 바렌부르크와 손잡고 다닐렌츠로 쳐들어올 것이란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하여 바렌부르크 방면의 침공을 저지할 라엔슈타인 요새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퍼부어 규모를 키우고, 시설을 개선했다.

하지만 루테니아 방면의 방어를 담당하는 바인호프 요새 쪽에는 주둔 병력만 조금 늘렸을 뿐, 시설 투자는 거의 지시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루테니아 영지와 우리 영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아 전쟁의 위협이 거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속내는 달랐다.

'라엔슈타인 요새처럼 제대로 보강했다가 루테니아 영주 그 쫄보 새끼가 안 쳐들어오면 낭패니까...'

그랬다.

루테니아의 영주인 라르스 제르펠트(Lars Zehrfeld) 남작은 탐욕이 철철 흘러넘치는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과 달리 보신(保身)의 성향이 강한 사람.

만약 바인호프 요새의 규모를 라엔슈타인 요새처럼 키우고 주둔 병력의 수도 수백 단위로 늘렸다면 언감생심 쳐들어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루테니아 쪽으로 진출할 수가 없게 된다.'

라엔슈타인 요새가 바렌부르크의 공격을 버텨주는 동안 루테니아 방면으로 치고 나간다는 대전략을 준비한 내 입장에선 무조건 루테니아가 우리 쪽으로 쳐들어와야 했다.

'루테니아의 선제공격을 유도해 정복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는 거지.'

나의 이런 생각을 곧이곧대로 영지의 수뇌부들에게 늘어놓았다간 미친놈 소리를 듣기 딱 좋았다.

앞서 군무관인 발터만 하더라도 내가 엔리케와 함께 남쪽으로 가겠다는 얘길 했을 때 '루테니아가 바렌부르크와 손을 잡을 리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여, 나는 그 설마 하는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서 바인호프 요새를 '먹기 좋은 상태' 그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님, 전방에 루테니아 군으로 추정되는 병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척후 임무를 담당했던 병사의 보고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유지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 소심하고 겁 많은 루테니아의 영주가 내가 준비한 미끼를 문 것이다.

영지전 발발 (3)

"저긴가? 바인호프 요새가?"

호화찬란한 은빛의 플레이트 메일을 차려입은 기사 하나가 큼직한 군마 위에 올라타 전방을 바라본다.

"예, 기사님. 맞습니다."

기사의 곁에 있던 큼직한 덩치의 사내 하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한다.

통일감 없이 제멋대로 챙겨입은 갑옷과 허리춤에 주렁주렁 달린 각종 무기의 모습을 보건대 용병인 듯싶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용병의 대답을 들은 기사의 반응이었다.

"이 새끼가!"

퍽!

"커흐윽!!!"

말 위에 올라탄 자세에서 그대로 발을 뻗어 용병의 등판을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으으..."

그 예상치 못한 일격에 바닥에 엎어진 용병이 신음을 흘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굴 가득 불쾌한 감정을 담은 기사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용병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기사님이 아니라 사령관님이라고 똑바로 불러라.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목을 베겠다."

"어, 예! 제가 실수했습니다, 사령관님! 부디 용서를..."

"멍청한 놈!"

말을 섞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기사가 다시 시선을 돌려 정면에 보이는 요새를 바라본다.

"... 반나절이면 떨어뜨릴 수 있겠군."

요새라고는 하나 끓는 기름을 쏟아낼 웅장한 성벽이나 화살비를 퍼부을 높은 망루 따윈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건장한 사내의 키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나무 장벽을 둘러치고, 그보다 조금 더 높게 세운 감시탑 몇 개가 존재할 뿐이다.

"멍청한 놈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저 지랄들인지."

멀리서 본 바인호프 요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다.

감시탑 위로 병사들이 오르내리고, 텅텅 비어 있던 나무 장벽 위를 다닐렌츠의 깃발을 든 병사들이 다급하게 채운다.

그들도 본 것이다.

루테니아의 깃발을 휘날리며 요새로 접근 중인 자신들의 병력을 말이다.

"저기 주둔하고 있는 놈들, 백 명 정도가 다라고?"

"예,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직전에 기사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을 굴렀던 용병이 이번엔 유독 '사령관님'이라는 호칭에 힘을 주어 대답한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인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기사가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저녁은 저곳에서 먹는다. 공성(攻城)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

"젠장! 루테니아 놈들이 쳐들어올 줄이야..."

바인호프 주둔군의 지휘관, 다닐렌츠 영지군 소속의 장교 하랄트가 긴장으로 하얗게 뜬 얼굴을 거듭 쓸어내리며 말했다.

동부 라엔슈타인 요새로 바렌부르크 놈들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는 들었다.

바렌부르크는 그 전부터 호시탐탐 다닐렌츠 침공의 기미를 보인 놈들이기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전쟁 발발 사실 자체에 놀라긴 했어도 아예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반면, 루테니아의 침공은 달랐다.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다닐렌츠와 루테니아는 군사적 충돌을 벌인 사례 자체가 드물었다.

하여 두 영지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바인호프 요새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외적(外敵)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위군이라기보다 루테니아로 향하는 가도 주변의 몬스터와 도적들을 처리하는 순찰 경비대 정도로 생각했다.

애초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의 수도 백 명밖에 되지 않으니, 조금 규모 있는 경비대 정도라고 생각한 게 틀린 것도 아니리라.

"...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륙백 명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

멀리, 다닐렌츠와 루테니아를 잇는 가도를 따라 접근 중인 적병의 수를 가늠해본 부하 한 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랄트에게 말했다.

"영지군에 용병에... 하, 시발. 많이도 몰려왔네."

눈앞이 아찔하다.

어쩌면 오늘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다행인 것은 요새 내에 주둔 중인 백 명의 병력이 군기 빠지고 전투력이 볼품없는 초짜들은 아니라는 것.

현 다닐렌츠 영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이 다닐렌츠 상단주로 일하던 시절부터 대대적으로 시행해온 몬스터-도적 토벌 작전의 영향으로 현재 다닐렌츠 영지군 소속 병사들의 실전 경험은 충분히 쌓여 있었다.

적어도 전투 상황이 벌어졌을 때 긴장하고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 할 바보들은 아니란 얘기다.

'... 하지만, 적이 너무 많아.'

병력의 '질'은 아군이 높지만, 그걸 상쇄할 정도의 '양'을 보유한 적군이었다.

아무리 실전경험이 많은 병사라도 눈먼 칼 서너 개가 동시에 찔러오면 속절없이 당한다.

그걸 극복하고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일개 병사가 아니라 기사라 불리고 있을 것이다.

"후우우..."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에 하랄트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던 그때,

"대, 대장님!!!"

"... 뭐야?"

뒤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와 그를 부르는 한 병사의 목소리.

그런 병사를 하랄트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는데,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 소리가 돌아온다.

"여,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

"다행히 딱 맞춰서 도착했군."

병사들이 열어준 바인호프 요새의 후문으로 들어서며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바, 바인호프 주둔군 지휘관, 다닐렌츠 영지군 소령 하랄트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요새 정문 근처 감시탑에서 다급하게 뛰쳐 내려온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바닥에 황급히 엎드리며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낯이 익은 얼굴,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소령 하랄트."

너무 친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목소리로 바닥에 엎드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영주님!"

"일어나게. 지금은 전시(戰時)이니, 그렇게까지 과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벌떡!

엎드리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몸을 일으키는 하랄트.

덩치만 큰 줄 알았는데 몸도 날랜 것이,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하랄트,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다.

"감시탑으로 올라가 직접 적을 살피겠다. 앞장서라."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랄트의 안내를 받으며 엔리케와 함께 감시탑에 올랐다.

멀리 공성 준비에 한창인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봐도 우리 측 병력의 몇 배나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적의 규모는? 파악되었나?"

"7백에서 8백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용병이 대부분이고, 루테니아 영지군은 전체 병력의 2할에서 3할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2백 명 정도는 보냈나 보군. 루테니아의 '겁쟁이' 놈이 꽤 무리를 했어."

내가 언급한 '겁쟁이'란 다름아닌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지간해선 다른 영지로의 군사적, 외교적 도발을 하지 않고 그저 루테니아 내정만 신경 쓰는 것으로 유명한 그였다.

좋게 말하면 평화주의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 성향의 군주이겠지.

그런 이가 영지군 병력을 무려 이백 명이나 보내어 우릴 공격한 것을 보면 바렌부르크 영지 측에서 제안한 내용이 상당히 달콤했던 모양이다.

'... 그래, 나움가르트의 소금 광산이 어지간히 탐났겠지.'

원작 소설의 내용을 꿰고 있는 나는 바렌부르크가 루테니아 측에 전쟁의 참여 대가로 제안한 조건을 알고 있다.

바로, 나움가르트에 있는 소금 광산의 소유권을 반씩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소금 광산이 지닌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면 제르펠트 남작이 군사를 움직인 것도 이해가 됐다.

'새끼들, 나움가르트에 소금 광산 말고 철광석 광산도 있다는 걸 알면 놀라서 기절하겠네.'

나움가르트에 소금 광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왕국 북서부에 널리 알려졌지만, 철광석 광산의 존재는 아직까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나는 철저한 보안 유지를 위해 철광석 광산에서 근무하는 광부들과 상단 직원들의 숙소를 나움가르트 외곽 지역에 따로 건설하고, 그곳에서만 생활하게 했다.

그리고 해당 숙소엔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이들로 가려 뽑은 영지군 병사들을 여럿 배치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지켰다.

당연히 철광석 광산 근무자들은 휴가도 제한 되었고, 밖에 나가 술을 사 마실 수도 없었다.

가족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철광석 광산의 존재를 발설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만약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당사자는 참수형을 당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 역시 가혹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거듭 강조했다.

다소 가혹한 처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이런 나의 조치에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곳은 영주가 영지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이었으니까.

'이전에 살던 세상이었으면 권력에 미친 독재자나 할 짓인데...'

이럴 때마다 새삼 내가 중세 판타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런저런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그들에겐 일반 광부, 일반 상단 직원들의 서너 배나 되는 급료를 챙겨주었다.

무릇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은, '충분한 양의 돈'이 개연성으로 작용하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바인호프 요새의 감시탑으로 돌아온다.

"... 전투를 준비해라. 곧, 공성이 시작될 것이다."

"예, 영주님!"

"혹시, 요새 내에 기병이 있나?"

"기병... 말입니까? 중장기병은 없고, 척후 임무를 띠고 배치된 경기병이 8기 있습니다."

"8기... 있으나 마나 한 숫자군."

돌아온 대답을 들으며 쓰게 웃자, 나의 반응을 접한 하랄트가 크게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친다.

"죄, 죄송합니다!"

"무얼.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거지. 루테니아 놈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병력을 충원해두는 건데... 뭐, 지난 얘기는 됐고."

고개를 돌려 엔리케를 바라본 내가 말했다.

"기병이 없으니, 그냥 나 혼자 나가야겠군. 엔리케, 엄호 사격 확실히 해주고."

"예, 영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족족 머리통에 바람 구멍을 내주겠습니다."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하자고. 그럼..."

"자, 잠깐! 영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중간에서 나와 엔리케의 대화를 듣던 하랄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에게, 무심한 표정을 답했다.

"공성이 시작되면, 나는 밖으로 나가 적을 요격할 거다. 이해가 됐나?"

"요, 요격? 영주님 혼자서 말씀이십니까?"

뭔가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재차 질문하는 하랄트.

툭툭-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대답했다.

"그래. 왜? 안 될 게 있나?"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온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

끼이이이이-

"무, 문이 열립니다!!!"

바인호프 요새의 정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본 병사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공성 준비를 마친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하려던 루테니아 군의 사령관, 기사 카딤 베르덴의 눈에 의아함이 깃든다.

"뭔... 이 새끼들, 바로 항복하려는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바인호프 요새의 문이 열린다면, 항복 의사를 전달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고작 백 명 남짓한 병력을 가지고 성 밖으로 기어 나와서 회전(會戰)을 벌이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으니까.

한데, 이어진 상황은 루테니아 군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 뭐야 저거?"

열린 문을 통해 나온 것은, 단 한 기의 기병이었다.

커다란 전마(戰馬)에 올라타고,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사슬 갑옷에 서코트를 걸친 채 오른손에 커다란 장창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인물.

차림새로 보아 기사 같은데...

"저 새끼, 뭐야? 우리랑 혼자 싸우기라도 하려고 나온 거야? 푸흣!"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용병 하나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풋!"

"미친 새끼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푸하하하하!"

"야, 네가 왕국제일검도 아니고 혼자서 뭘 하겠다고 나오냐? 푸흐흣!"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전염되는 것이 웃음이라고 하던가?

최초의 웃음이 터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루테니아 군 전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쐐에에에에에엑-!!!

그 모두의 웃음을 삼켜버릴 정도로 크고 날카롭게 울려 퍼진 의문의 파공성.

그리고,

퍼어어억!!!

어디선가 날아온 큼지막한 철시(鐵矢) 한 발이 가장 먼저 배를 잡고 웃었던 용병의 머리통을 꿰어버렸다.

스르륵, 철퍼덕!!!

철시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용병의 머리통은 철퇴로 후려친 듯 으깨졌고, 그는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즉사였다.

"뭐, 뭐야!?"

"시발, 어디야?! 어디서 쏜 거야!?!"

황망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루테니아 군.

그리고 이내 모두는 그 무자비한 화살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영주님, 제가 '선빵' 날렸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하하하하!!!"

바인호프 요새의 나무 장벽 위, 어지간한 사람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장궁을 들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사나이.

엔리케 아르미엔토.

귀신도 울고 갈 기가 막힌 활 솜씨로 기사의 작위까지 받아낸 그 사내가 성벽 아래 외로이 서 있던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곧, 담담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온다.

"눈 똑바로 뜨고 엄호 사격 잘해. 괜히 내 등판에 맞추지 말고."

"아이고, 제 실력 모르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지. 알아서 그러는 거야. 나인 거 알고 일부러 맞출까 봐."

그렇게, 짓궂은 농담으로 팽팽했던 전장의 긴장감을 조금 덜어낸 그가 열려 있던 강철 면갑을 손으로 끌어내린다.

끼긱- 철컹!

그 음산한 쇳소리와 함께,

"... 가자."

이히이이이이잉!!!

8백 명의 적을 향한, 단 한 사람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영지전 발발 (4)

그것은, 실로 경이롭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광경이었다.

단기필마(單騎匹馬)로 8백 명의 적을 향해 달려든 정체불명의 사내.

콰콰콰콱!!!

힘차게 대지를 박차는 군마의 발끝에 걸린 흙덩이들이 장쾌하게 튀어 오른다.

쿠구궁! 쿠구궁! 쿠구궁!

발끝으로 전해지는 대지의 진동.

"허윽!"

그 떨림을 가장 먼저 느낀 전방의 병사 몇 명이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결과가 뻔해 보이는 1 대 800의 격돌.

그러나, 기세 싸움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절대다수의 후자였다.

"하아아아아아아!!!"

어찌 사람이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듣는 이의 고막을 저릿하게 만들고, 절로 다리 힘이 풀리게 만드는 천둥 같은 함성.

곧, 인간의 몸으로 하늘의 진노(震怒)를 표현해낸 사내가 루테니아 군의 정면으로 돌입한다.

휭! 촤악!!! 휘잉! 푸화아아악!!!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기다란 장창이 한 줄기 폭풍이 되어 사방을 찢고 할퀸다.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사내의 무기는 단순한 창이 아니라 자루 끝에 큼지막한 칼날을 매단 글레이브(Glaive, 언월도)였다.

시커먼 묵빛의 자루 끝에 달린 시퍼런 칼날이 사내의 앞을 가로막는 적병의 심장을 꿰뚫고, 목을 벤다.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막을 수도 없었다.

"끄아악!"

"케헥!"

"아아아악!!!"

콰콰콰콰콰!!! 콰직! 으지직!!!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하는 흑빛의 군마가 창날이 쓸고 간 자리에 쓰러진 병사들의 몸을 무참히 짓밟는다.

인간의 나약한 육신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짐승의 완력.

말발굽에 밟힌 병사들의 내장이 터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사방으로 시뻘건 피와 살점을 흩날린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파괴적인 광경의 연속.

평범한 인간, 아니 나름 전장의 죽음과 친숙한 용병과 병사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와 그들의 숨통을 죄었다.

"야, 튀어! 빨리 튀어, 씨발!!!"

"마, 막아! 막으라고!!!"

"이런 썅! 저걸 어떻게 막냐?!"

"할 수 있으면 네가 막아봐 이 개새끼야!!!"

"난 못해! 차라리 그냥 죽고 말지 씨발!!!"

"가, 같이 가 이 새끼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눈앞에서 치솟는 피 분수에 질겁한 병사들이 너도나도 무기를 거꾸로 쥐고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루테니아 군의 전열(戰列).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의 훤한 등판과 목덜미를 새까만 흑마 위에 올라탄 금빛 머리칼의 사신(死神)이 마음껏 찍고 베어낸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뒤돌아서 싸워라!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는 자는 즉결 처형이다! 맞서 싸워라! 싸우라고 이 개새끼들아! 명령이다!!!"

"자리 지켜! 움직이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아아!!!"

엉망진창이 된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루테니아 영지군의 일선 장교들과 동원된 용병대의 고참들이 악을 썼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의지로 몰려드는 폭풍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카악- 퉷! 이 씨발 놈들이!!! 내 손에 뒤지고 싶냐?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

푸화아악!!!

도망치는 부하들에게 분노 섞인 침을 내뱉으며 전투를 독려하던 용병대장의 머리통이 쪼개진다.

아니, 머리통만 쪼개진 것이 아니라 몸통 자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의 정수리에 떨어진 큼지막한 창날이 가슴을 지나 명치까지 깊게 파고들었던 탓이다.

"으아아아아! 대장이 죽었다!!!"

"이런 니미, 저런 괴물이랑 어떻게 싸워?!"

"야, 빨리 튀자! 이미 글러먹었어!"

"야잇, 밀지 마! 이 씨발 놈아!!!"

싸움을 독려하던 자신들의 대장이 참혹하게 두 조각나 죽는 것을 목격한 용병들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 도망쳤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살고 싶으면 지금 도망쳐야 한다!'

몇 푼 안 되는 돈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귀히 여기는 용병들의 생존 본능이, 지금 이 순간 강하게 발현되었다.

***

루테니아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은 이번 전쟁을 준비하며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값싼 용병대를 여럿 고용해 다닐렌츠 침공군에 포함 시킨 것이었다.

제대로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없으니 전장에서 값싼 용병대 여럿보다 값비싼 용병대 하나가 제 값을 한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그였다.

어차피 쪽수만 채우면 되는 것 아니냐며 싼값으로 후려쳐 사방에서 긁어모은 싸구려 용병들.

겉보기엔 여느 정예병 못지않게 든든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서 다닐렌츠로 출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제르펠트 남작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소모품으로 한 번 쓰고 버릴 놈들인데, 굳이 비싼 놈들을 데려다 쓸 필요가 있나?'

남작이 품었던 그 의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바로 지금 이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야이, 씨발! 똥 밟았다! 빨리 튀어!!!"

"야야, 같이 가 이 새끼야아!!!"

"에이 썅! 어쩐지 어제 꿈자리가 사납다 싶었다!"

"그쪽 아니야 병신아!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으으, 시발! 내가 앞으로 다닐렌츠 쪽으론 오줌도 안 싼다! 으아아!"

800명에 달하는 루테니아 측 병력의 대다수를 이루던 용병들.

전투 시작 전까지만 해도 개선장군처럼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눈앞에 당도한 거대한 재앙 앞에 겁먹은 아이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사방으로 도망친다.

전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용병의 미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추태였다.

용병의 몸값이란 그들이 손에 쥔 무기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제르펠트 남작.

만약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용병계의 유명한 격언인 '가장 비싼 용병이 가장 싼 용병이다'라는 말의 진의(眞意)를 깨달을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는 지금 여기 없었다.

아니, 어쩌면...

여기 없는 게 다행일 수도 있다.

허약한 양 떼 틈에서 마음껏 날뛰는 저 금빛 사자의 용맹을 직접 목격했다면, 안 그래도 콩알만 한 그의 심장이 더욱 쪼그라들었을 테니까.

***

다가닥! 다가닥! 다각, 다각, 다각...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폭풍이 서서히 잦아든다.

"푸르릉! 푸흥!!!"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흑마.

말의 체력이 다한 것일까?

아니면, 말을 이끄는 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허약한 양 떼', 루테니아 측엔 아쉽게도 나의 돌진이 멈춘 이유는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내가 멈춘 이유.

그건, 나의 눈앞에 더는 짓밟을 적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예상은 했지만, 진짜 개판이네."

앞서 바인호프 요새의 지휘관, 하랄트의 안내를 받아 감시탑 위에 올랐을 때.

꽤 먼 거리에 떨어진 적들이었지만, 나는 내게 허락된 초인적인 시야로 그들의 면면을 세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바인호프 요새를 점령하겠다며 기세등등하게 몰려온 이놈들이, 실은 돈 몇 푼에 불려온 싸구려 용병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 모를 수가 있나. 내가 그동안 먹은 짬밥이 있는데.'

과거 수년간 용병 업계에서 직접 뛰고 구르며 열심히 활동했던 나였다.

심지어 내가 속했던 용병대 '푸른 방패'는 실력이나 그 신용 면에서 모두 한 영지를 대표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곳.

그런 곳에서 '진짜배기'들과 몇 년을 함께하다 보니, 이제 싸구려 용병과 진짜 한 가락 하는 용병들은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이따위 허접한 놈들 따위, 몇백 명이 아니라 몇천 명이 몰려와도 혼자 쓸어버릴 수 있다고.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흠, 어디 보자... 이제 한 2백 명 정도 남았나?"

처음과 달리 휑해진 요새 앞의 들판.

저 멀리 숲속으로, 언덕 너머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용병과 영지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군기가 개판이면 단 한 사람의 돌격에 이렇게 박살이 날 수가 있을까?

"... 라기엔, 내가 좀 많이 쓸어버리긴 했네."

바인호프 요새로부터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길게 그어진 핏빛의 지옥이 보인다.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들.

주인 잃은 머리과 반 토막이 난 몸통들, 잘려나간 팔다리.

차 한잔 마시기에도 부족한 짧은 시간이었으나, 족히 백여 명의 적들을 베어냈다.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광경이라기엔 지나치게 잔혹한 그림이요, 믿기 힘든 결과였다.

"푸릉! 푸르르!!!"

"워워, 착하지. 그래그래."

적들을 짓밟으며 느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인지, 연신 바닥을 긁으며 투레질을 하는 흑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얼핏 보면 자신의 말과 교감하는 다정한 주인의 훈훈한 모습일 터.

그 행동만 보면 무척 훈훈한 광경이겠으나, 말과 사람 모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들의 피로 시뻘겋게 물든 모습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자, 블리츠. 한 번 더 해보자."

'번개(Blitz)'라는 의미를 지닌 흑마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나는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직 남아있는 적들을 향해, 다시 한번 죽음의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서.

***

"저런 미친...!"

다닐렌츠 침공군 사령관,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의 두 눈동자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잘게 떨린다.

그는 방금 가을날 농부의 낫에 걸린 밀알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병사들의 머리통을 보았다.

곡식 자루를 노리다 걸린 쥐새끼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용병들의 모습도 보았다.

무엇보다 단숨에 루테니아 군의 전열을 돌파하여 하나로 뭉쳐 있던 병력을 두 동강 내버린 정체불명의 사내를 보았다.

같은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무용(武勇).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망토 자락으로 애써 감춘 베르덴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저, 저게 누구냐? 바인호프... 아니, 다닐렌츠에 저런 기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죄다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떡합니까, 사령관님?!"

"남은 병력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사령관님, 퇴각을! 퇴각을 해야합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머저리 같은 답변으로 일관하는 부하들.

물론, 루테니아 영지군 장교들이 능력적으로 크게 뛰어나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들이 유달리 멍청하고 모자라서 빚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가 문제였다.

상대가, 너무 강한 게 문제였다.

"젠장,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게 튀어 나와서...!"

말 그대로 바인호프 요새의 문을 열고 홀로 '튀어나온' 존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아니 애초에 자신들처럼 이름이 붙은 인간이 맞나 싶은 압도적 강함을 보여준 정체불명의 기사.

그 기사가, 말머리를 돌렸다.

목표는 아마도...

"어, 어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흐어어!"

루테니아 군의 사령관인, 베르덴 자신.

"마, 막아라! 어서 막아! 저놈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해!"

기사로서의 체면도, 사령관으로서의 위엄도 모두 내던진 베르덴이 비명을 지르듯 명령했다.

"흐아아아아!!!"

휘우웅- 카캉! 푸화악!!!

군인으로서의 한 가닥 의무감이 남아있던 것인지, 베르덴의 명령을 받고 용감히 달려나갔던 기병 장교 한 명이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낙마했다.

그가 처절한 심정을 담아 휘둘렀던 검 역시 상대의 묵빛 창 자루에 부딪혀 무참하게 깨어졌다.

말라 비틀어진 우물 바닥에 남은 몇 방울의 물처럼 간신히 남아있던 희망마저 날려버리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저, 저런!"

"시발, 도망쳐! 도망치라고!"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상대가 전하는 무자비한 공포의 전염.

"으으으으!!!"

콰콰콰콰콰콰콱!!!

금빛 사신의 말발굽 소리가, 베르덴의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루테니아 (1)

"나, 나는! 루테니아 제일의 명문, 베르덴 가(家)의 적자이자 영주이신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님께 기사의 작위를 받은 몸이다! 그에 맞는 예를 갖춰 대하라!!!"

루테니아의 다닐렌츠 침공군 사령관, 카딤 베르덴이 성난 목소리로 연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주변 그 어떤 사람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치 '너는 짖어라, 우린 할 일을 하겠다'라는 식의 분위기.

그 철저한 무시가 카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이이...! 내 말이 안 들리는 것이냐! 요새의 지휘관을 불러라! 나와 대화를 나눌 격을 갖춘 이를 데려오란 말이다!"

그의 현 상황은 실로 비참했다.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은빛의 풀 플레이트 메일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그저 안쪽에 받쳐 입었던 누런 빛의 갬비슨만 입고 있었다.

뿐인가, 손목과 발목, 허벅지까지 모두 밧줄로 꽁꽁 묶여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자신을 보좌하던 루테니아 군 장교 몇 명이 카딤 자신과 비슷한 꼴로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악을 쓰는 카딤과 달리 현재 상황에 체념한 듯, 멍하니 땅바닥만 바라보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없이 일으킨 침략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힌 그들의 끝이 그다지 좋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하들과 달리 카딤은 기사 작위를 받은 준 귀족의 신분.

적의 손에 포로로 잡혔다고 한들,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그였다.

'씨발, 어쩌다가 내가 이 꼴이 돼서... 하!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전투의 마지막 순간, 그는 상대의 공격에 당해 말에서 떨어진 후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그리고 눈 떠보니 이 지경이었다.

'이런 미친놈들! 기사인 나를 일개 병사들처럼 대우해?!'

그는 자신이 이렇게 일개 병사처럼 밧줄에 묶여 흙바닥에 방치되고 있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그가, 손발이 묶인 볼품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신 입을 놀렸다.

"다닐렌츠는 왕국의 법도조차 따르지 않는 무례한 이들이란 말인가? 항복한 기사에게는 응당 그 격에 맞는 대우를 해야 옳다! 어서 이 밧줄을 풀고 내가 머물 방으로 안내해라!"

어지간히 감정이 올라온 것인지, 얼굴이 붉게 변하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하지만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다닐렌츠 군 장병들은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해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음? 어... 저기! 이보게! 다닐렌츠의 기사여!"

"...?"

근처를 지나던 낯익은 인상의 기사를 발견한 카딤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발걸음을 멈추고 카딤을 바라보는 기사.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빈틈없이 갑옷을 차려입고 있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전신의 탄탄한 근육.

그리고, 그 장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은 미소년 풍의 얼굴까지.

틀림없었다.

홀로 800명에 달하는 루테니아 군을 궤멸시킨, 바로 그 괴물 같은 실력의 기사가 분명했다.

"... 뭐지? 할 말이 있나?"

"어, 그게..."

막상 불러놓고 보니, 본능적인 두려움에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으, 뭐야 이거?'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손발이 잘게 떨리기 시작한다.

마치 열병에 걸린 듯, 전신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오한.

눈앞의 저 기사가, 홀로 800명이나 되는 자신의 병력을 깨부수던 그 무시무시한 광경이 기억난 탓이다.

'...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수준의 미친 실력자다.'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보여준 힘 자체가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체 뭐로 만든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시커먼 묵빛의 창을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쪼개지고 부서졌다.

사람한테 '부서진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 표현 말고는 딱히 갖다 댈 것이 없었다.

"이, 이름 모를 다닐렌츠의 기사여, 그대의 초절(超絶)한 무용을 존경하오!"

"...?"

두려움으로 달달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첫 마디를 뗀 카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상대는 서 있는 자세에서 천천히 팔짱을 끼며 어디 더 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 오랫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으나 그대와 같은 이는 처음이오!"

"..."

"오늘 보여준 그대의 놀라운 활약은 그 옛날 왕국 모든 적들을 발아래 두었던 '사자심왕(獅子心王)' 카델린 아치 국왕 폐하의 재림을 보는 듯했소! 이 루테니아의 카딤이 힘을 다해 그대와 겨뤄보았으나, 이미 인외(人外)의 경지에 도달한 이의 실력엔 당할 재간이 없구료! 내 사내이자 기사로서 오늘의 결과에 속이 쓰리나, 그대 같은 영웅에게 패배한 것을 다행이자 영광으로 생각하겠소! 그런 의미에서..."

"... 칭찬 고맙군."

휙-

"...?!"

상대를 한껏 칭찬하여 분위기를 좋게 만든 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을 풀어달라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한데 상대는 정작 중요한 얘기는 듣지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저, 저, 저기! 이보시오! 다닐렌츠의 기사여! 내 말을 끝까지... 에잇! 이보시오! 야! 야아아!"

듣기 좋은 말만 받아먹고 사라져 버리는 상대의 모습에 결국 울컥한 카딤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런 무도한... 다닐렌츠의 기사는 왕국의 법도조차 무시한단 말인가! 기사란 작자가 어찌 제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이토록 상대를 무시하고 핍박하...!"

퍼억-! 철퍼덕!!!

바인호프 요새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치던 카딤이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으로 얻어진다.

"커흑! 으윽...!"

손발이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카딤은 속절없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아, 되게 시끄럽네. 왜 이렇게 손을 쓰게 만드나? 나도 교양있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읏차!"

"아흑! 으아아아!"

거친 흙바닥에 부딪혀 입술이 터지고, 코와 볼이 상해 엉망이 된 카딤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키는 한 사람.

짧게 자른 흑갈색 머리 아래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내.

바로,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였다.

"어, 반갑네. 우리가 만난 상황이 좀 좆 같지만, 반가운 건 진심이라고."

"누, 누구냐?"

"나? 아, 나는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 성(姓)이 좀 특이하지? 하하하!"

"허억, 허억! 기사? 용병이 아니고?"

한눈에 봐도 기사보단 용병 쪽에 가까워 보이는 엔리케의 모습에, 카딤의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엔리케는 그 같은 말을 듣고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뭐, 얼마 전까지는 용병이긴 했지"

"하, 꽤 실력이 좋은 용병이었나 보군. 기사 작위를 받았을 정도이니..."

"음, 나쁘진 않은 편이지."

넉살 좋게 카딤의 말에 대답한 엔리케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얻는다.

"그나저나... 자네 말이야, 너무 시끄러운 거 아냐? 포로면 포로답게, 조용하고 얌전히 있어야지."

"나는 기사다. 기사는 왕국 어디서든 귀족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지금이 설령 전쟁 포로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어, 뭐... 그 말이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아냐. 그 모가지가 어깨 위에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

"... 뭐?"

쓰읍, 하며 쓴 입맛을 다신 엔리케가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카딤과 눈을 맞춘다.

"그, 이름이 카딤이라고 했나?"

"... 카딤 베르덴이다. 루테니아 제일의 명문가인 베르덴 가문의 적자이며..."

"아이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긴 하지 말고. 그래, 루테니아의 카딤 베르덴 씨. 당신이 '감히' 검을 들이댔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응?"

"... 저 기사를 말하는 건가?"

"어, 맞아."

저 멀리, 바인호프 요새의 지휘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체 모를 기사의 모습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본 카딤이 고개를 젓는다.

"모른다. 내게 이름도 말해주지 않더군. 그 실력은 대단하나, 기사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우리 영주님이시다."

"... ?!"

엔리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카딤의 표정이 멍해진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라는 얼굴.

그의 얼빠진 표정을 본 엔리케가 유쾌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저분이 바로 나의 주군이시자 다닐렌츠의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님이시다. 그런 분께 감히 욕을 내뱉고 검을 들이밀었으니, 모가지가 뎅겅 썰려도 할 말이 없는 거지. 안 그래?"

"저, 저, 정말이냐? 저자가, 그러니까 홀로 요새를 뛰쳐나와 우리 루테니아 군을 괴멸시킨 저 기사가 다닐렌츠의 영주라고?"

"아, 이 양반. 속고만 살았나? 딱 보면 몰라? 봐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인사하고, 어려워하는 분위기인 거, 안 보여? 보이지?"

"어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무려 영주씩이나 된 자가, 그런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아니, 기본적으로 영주가 전쟁터에 직접 나온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영주, 아니 귀족들이란 제 몸 아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들이다.

단순히 그들이 몸을 사려서, 혹은 비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영주란 모름지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지에 대한 통치력을 상징하는 존재.

죽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대로 다쳐서도 안 된다.

영주가 한 끼라도 밥을 거르면 가신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난리를 치는 것도, 다 영주의 건강이 영지 통치의 정당성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하여,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괜히 위험한 전쟁터를 어슬렁거리다가 눈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 기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들이 영주에 취임한 이후 죄다 점잖게 영주성이나 영주 저택에 처박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근데, 영주란 작자가 800명이나 되는 적군에게 혼자서 돌격을 해?'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떠올린 카딤이 헛웃음을 지으며 엔리케에게 말했다.

"다닐렌츠의 가신들은 죄다 미쳤군. 영주가 전쟁터에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데 말리지도 않..."

그러다 문득, 싱글싱글 웃고 있는 엔리케의 표정을 보고 깨닫는다.

"... 미친, 너희들은 알았던 거군?"

"응? 뭘?"

"영주가, 800명을 상대로 돌격하고도 무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아, 그거야 뭐..."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충격을 받아 식은땀까지 흘리며 말하는 카딤을 바라보며, 엔리케가 피식 웃는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오우거도 혼자 때려잡는 분이 너희 같은 오합지졸 몇백 상대로 털끝 하나 다치겠어? 하하하!"

***

내가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을 베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가 검을 뽑아 나에게 달려들며 외친 가문의 이름 때문이었다.

"나, 나는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이다! 무슨 간악한 술수를 부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저, 정체를 밝혀라아!"

두려움에 덜덜 떨며 간신히 내뱉은 가문의 이름.

'베르덴 가문의 자식이군?'

영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 상단 업무를 위해 여러 번 루테니아에 방문한 나였다.

그래서 알았다.

베르덴 가문이 루테니아 제일의 명문가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뜯어낼 돈은 많은 집구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살려서 돈이나 뜯어야겠군.'

하여, 나는 들고 있던 창의 방향을 살짝 돌려 날이 아닌 면으로 달려드는 카딤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터어어어어엉-!!!

"크에엑!!!"

마치 철판으로 무언갈 후려치는 듯한 큰소리가 났고, 동시에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은 타고 있던 말 등에서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며 정신을 잃었다.

혹시나 머리부터 잘못 떨어져서 뒈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름 기사랍시고 운동신경이 없지는 않았는지 떨어지는 와중에 어설프게나마 낙법을 쳐서 즉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카딤과 항복한 루테니아의 병사들을 밧줄로 줄줄히 묶어 바인호프 요새 안으로 데려왔던 거다.

"... 너희 가문이 나와 다닐렌츠에 보여주는 성의를 확인한 후, 너의 처분을 결정하겠다."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베르딘 가문이 남작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엔리케를 통해 나의 정체를 들은 카딤은 몰라보게 비굴해진 모습으로 내게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내가 내어준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는데, 자신의 가문에 보내는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에 대한 찬양이 대부분이었고 결론적으로는 다닐렌츠 측이 달라는 대로 자신의 몸값을 내어달라는 거였다.

"자, 대충 여기 상황은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소금 광산을 노린 루테니아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의 명분은 챙겼다.

이제, 우리 쪽에서 나아갈 차례다.

"엔리케."

"예, 영주님."

이제는 제법 기사로서의 태가 나는 엔리케에게,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내일 새벽 동이 트자마자 루테니아 방면으로 출병한다. 그전까지 병사와 용병들의 아침 식사를 끝내놓도록."

"예, 알겠습니다!"

루테니아 (2)

"이런 씨발!"

와장창!!!

지휘관 막사 구석에 놓여 있던 다탁(茶卓)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간다.

막사의 주인인 바렌부르크의 기사, 켈 슈펭글러(Khel Spengler)가 힘껏 발로 걷어찬 탓이다.

"으으, 제기랄! 젠자아아아아아앙!!!"

콰쾅! 쾅! 와장창!!!

다탁을 발로 차 부숴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켈은 막사 안의 집기들을 때려 부수며 계속해서 악을 썼다.

라엔슈타인 요새를 지키는 다닐렌츠 군을 상대로 무려 열흘 동안 진행된 공성전(攻城戰).

허나 그 열흘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켈이 이끄는 바렌부르크 군은 단 한 발짝도 요새 안으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4백 명... 4백 명! 으아아아아!!!"

와장창!!!

공성이 진행되는 동안 죽거나 크게 다쳐 더는 전투에 투입할 수 없게 된 바렌부르크 측의 병력이 무려 4백여 명.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병력이 2천이었으니, 무려 5분지 1에 해당하는 전력이 깎여나간 셈이다.

황당한 것은, 그 열흘의 공성 기간 중 처음 엿새 동안은 요새를 지키는 병력의 수가 불과 5백에 불과했다는 점.

처음엔 전력의 차이가 확연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성을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켈이 이끄는 바렌부르크 군을 상대한 다닐렌츠 군의 지휘관은 바렌부르크 군의 반(半)의 반(半) 밖에 안 되는 그 병력을 가지고도 흔들림 없이 라엔슈타인 요새를 지켜냈다.

그 후 공성 이레째가 되던 날,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에서 출발한 지원 병력이 라엔슈타인 요새에 도착하면서, 안 그래도 답답했던 전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니, 이제는 거의 이기기 어려워졌다고 봐야겠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 시발! 으아아아아!!!"

와장창!!!

한편,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는 켈의 지휘관 막사 앞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을 한 사내 몇 명이 서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렌부르크 군을 이끄는 장교들이었는데, 전혀 진전이 없는 전황에 군을 물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막사 안에서 전해지는 흉험한 각종 소음을 듣고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 다들 돌아가자. 지금은 안 되겠다."

"예, 알겠습니다."

가장 선임인 이의 말에 나머지 장교들이 힘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성력(神聖歷) 786년,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

"사령관님, 나움가르트에서 군수물자를 실은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음, 아마 석궁용 볼트일 거다. 무기고로 안내해서 담당자에게 인계하도록."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장교가 물러간 뒤,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 데론 베르켈.

저 멀리, 불어오는 봄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침략자' 바렌부르크 군의 깃발이 보였다.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는 그 깃발의 모습이, 전에 없이 풀죽은 기색이다.

"보아하니 꽤 급한 성격인 것 같던데... 지금쯤이면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을 테지."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적장이건만, 데론은 상대의 성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의 전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요새를 들이쳤던 바렌부르크 군.

오백 대 이천이라는, 수적 우위를 살리려 속전속결을 추구한 것은 알겠으나 그저 기세만 드높았을 뿐 세부적인 전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사다리 외엔 제대로 된 공성 장비 하나 없었고, 그저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막무가내 지시만이 바렌부르크 군이 보여준 전술을 전부였다.

'... 짐작하건대 너른 들판에서의 회전(會戰)만 치러보았을 뿐, 공성(攻城)의 경험이 없는 지휘관일 것이다.'

데론의 판단은 정확했다.

바렌부르크 군을 이끄는 사령관 켈 슈펭글러는 분명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강한 기사였으나,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부족한 자였다.

특히나 군을 이끄는 지휘관의 자리에서 공성전을 치러본 경험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회전과 공성의 양상은 완전히 다르지... 그 차이를 모르는 지휘관이 이끄는 군은, 절대 이 데론이 지키는 성벽을 넘을 수 없다.'

피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데론의 한쪽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던 그때...

"하하,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리 미소를 보이고 계십니까?"

옆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

데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이를 돌아보았다.

"음, 베링 경."

"예, 사령관님. 바렌부르크 놈들을 살피고 계셨습니까?"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Erwald Behring).

그는 데론이 부임하기 이전까지 수년간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직을 수행했던 사내였다.

그는 기사치고 키가 작은 편인 데론보다도 살짝 더 작은 체구를 지닌 사내였지만, 용감하고 대담한 성품 탓에 많은 휘하 장병들의 흠모를 받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뭐, 곧 죽을 놈들 보면서 바람이나 쐬고 있었지."

"곧 죽을 놈들이라... 사령관님이 말씀하시니, 꼭 그리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허허, 자네가 마냥 단단한 사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러운 구석도 있군. 다 늙은 노인네 어르는 말솜씨가 아주 제법이야."

"아니, 다 늙은 노인네라니요? 여기 어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오른쪽 눈 위에 손을 가져다 댄 에르발트가 과장된 동작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다른 이들 앞에선 그저 근엄한 모습만을 유지하는 에르발트였지만, 거의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대선배 데론 앞에선 종종 이런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평소에 부하들한테도 그런 모습 좀 보여주지 그러나?"

"그건 좀... 사령관님이야 저보다 경험이며 연배며 훨씬 윗줄이시니 상관없지만, 부하 놈들에겐 어설픈 모습 보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나한테는 어설퍼도 된다 이건가?"

"어설퍼도 된다기보단... 제가 뭘 해도 어차피 사령관님 눈엔 어설퍼 보일 테니 차라리 마음 편하게 굴겠다, 이런 마음가짐에 가깝습니다."

"허허, 거참..."

나이 마흔을 넘긴 후배의 재롱 아닌 재롱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데론.

지난 열흘 내내 유지하던 팽팽한 긴장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후배와의 대화였다.

"그래, 지난 회의 때 지시했던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예, 안 그래도 그걸 말씀드리려 찾아왔습니다."

"벌써? 쉽지 않았을 텐데... 말해보게."

데론의 말에 다소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한 에르발트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보고를 올린다.

"라엔슈타인 요새 주둔군 소속 인원을 제외하고, 제가 키르헨에서 이끌고 온 지원 병력 중 지원자를 받아 마상 전투가 가능한 일백 명의 병력을 추렸습니다. 전원이 출병 대기 상태에 들어갔고, 오늘 밤이라도 당장 작전 투입이 가능합니다."

"흠, 좋군. 수고했네."

에르발트의 보고를 듣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데론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렌부르크 군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명령이 내려왔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마(人馬)의 흐름이 보였다.

"... 슬슬 또 움직이려나 보군. 이만 내려가지.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

"예, 사령관님!"

***

"저긴가? 올베른 요새가?"

"예, 영주님. 맞습니다."

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하랄트.

그는 현재 자신의 원 소속지였던 바인호프 요새를 떠나 루테니아로 향하는 나의 병력에 합류해 있었다.

"우리 측 접경지대에 지어진 바인호프 요새에 대응하기 위해 루테니아 측에서 세운 요새입니다. 주둔 병력은 약 2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군."

"맞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루테니아 측도 상호 간의 군사적 갈등 발생 방지를 위해 굳이 접경지대에 많은 군사력을 투입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 크흡!"

내게 보고를 하던 하랄트의 목소리가 마지막 순간 잦아들었다.

'상호 간의 군사적 갈등 발생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던 놈들이, 무려 800명이나 되는 병력을 투입해 우리 영지를 침공한 것이 불과 이틀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 이 시발 것들이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하랄트 소령, 안 그런가?"

혹시라도 자신의 설명이 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을 아닐까 눈치를 보는 하랄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일부러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농담처럼 물었다.

하지만...

"어, 읏!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뭔가 내가 생각하던 의도와 반대로 받아들인 것 같은 하랄트의 반응.

민망한 기분에 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슬며시 치우고 다시 정면에 보이는 올베른 요새를 바라보았다.

"바인호프 요새보단 낫군요. 일단 요새 장벽의 높이 자체가 바인호프보다 훨씬 높습니다. 규모 자체도 더 크고요."

"음..."

날카로운 눈썰미로 올베른 요새의 상태를 파악한 엔리케의 말이었다.

그의 말처럼 올베른 요새를 둘러싼 나무 장벽의 높이는 바인호프보다 훨씬 높았다.

적어도 3층짜리 건물 정도는 되는 느낌?

뭐, 그래 봤자 내가 작정하고 뛰어오르면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 다른 사람들에겐 충분히 부담스러운 높이지.'

지금 내가 이끄는 병력의 숫자는 총 백오십.

키르헨에서 고용한 용병 백 명에 바인호프 요새에서 하랄트와 함께 데려온 영지군 병력이 오십이었다.

이 병력으로 다른 영지를 먹겠다며 쳐들어가는 게 제정신인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나를 따르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모두가 이틀 전 내가 홀로 800명의 루테니아 군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도 수백 명의 적을 도륙하는 초인적인 무력의 지휘관을 수장으로 두고 있는 그들의 눈엔 저까짓 나무 장벽을 두른 작은 요새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허나, 나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내용이었다.

"올베른 요새를 우회하여 계속 전진한다."

"... 예?!"

"여, 영주님?"

하랄트를 포함해 나의 명령에 놀란 몇몇 지휘관들의 눈이 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작은 규모라고는 하나 명색이 요새라 불리는 군사적 거점을 내버려 두고 그냥 지나친다는 게 너무나 위험한 판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주님, 죄송하지만... 어찌하여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인지, 연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연유라?"

"예, 올베른 요새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저를 일깨워 주소서."

질문을 던진 이는 하랄트였다.

말투 자체는 조심스러웠으나, 결론적으로는 내 의견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꽤 놀라움을 느꼈다.

'이 새끼, 깡 좋은데?'

기사도 아니고 일개 영지군 장교의 신분으로 영주의 의견에 반기를 든다?

성질 더러운 영주였다면 명령불복종으로 그냥 목을 쳐버려도 무방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하랄트의 모습이 기껍게 느껴졌다.

무릇 군 지휘관이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밑에 딸린 부하들의 목숨까지 함께 어깨 위에 지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해할 수 없는 상부의 명령에 의문을 품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태도였다.

물론,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는 윗사람이 어떤 인간인지가 중요하겠지만...

'... 이번 전쟁 끝나면 계급 올려줘야겠다. 싹수가 보이네.'

앞뒤 꽉 막힌 이 시대의 꼰대... 아니, 귀족들과는 다른 문화, 문명권에서 자란 나는 이런 하랄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하랄트 소령."

"예, 영주님."

"자네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올베른 요새를 지나쳤다가 추후 놈들에게 뒤를 찔릴까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일세."

"... 예?"

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랄트.

그런 그에게, 옆에 있던 엔리케가 툭 던지듯 말을 꺼내놓았다.

"굴속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너구리를 밖으로 꾀어내려면, 맛있어 보이는 미끼를 흔들어야 하는 법이지."

"...!"

***

.... 그로부터 하루 뒤.

루테니아의 주도 엘스터로 향하는 가도 위에서,

"영주님! 적입니다! 앞뒤에서 우리 군을 압박하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루테니아 (3)

"후방에 올베른 요새에서 추격해온 적병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수는 3백 정도로 추산! 약 20분 거리에서 접근 중입니다!

"전방에도 적입니다! 숫자는 약 2백여 명! 30분이면 우리 군과 조우합니다!"

우리 군의 전후방 척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내게로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적의 출현을 알린다.

올베른 요새를 함락시키지 않고 그냥 지나친 순간부터 이리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가 전한 말 속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뭐? 올베른에서 따라온 병력이 3백이나 된다고? 그게 무슨... 대가리 수가 갑자기 왜 늘어난 건데?"

척후병의 보고를 들은 우리 쪽 용병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기보단, 답답함에 내뱉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이해는 간다.

분명 올베른 요새의 주둔군은 많아 봐야 2백 명 정도라고 했는데, 우리를 추격해온 병력은 그보다 많은 3백이라 하니 나온 반응이겠지.

웅성거리는 주변의 분위기 속, 용병의 질문을 들은 하랄트가 그럴듯한 추측을 내어놓는다.

"혹시 바인호프 전투에서 도망친 루테니아 군 일부가 올베른으로 향한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을 들은 주변 몇몇 이들이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하랄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인호프 요새 전투에서 홀로 돌진한 나에게 박살 나 사방으로 흩어졌던 8백 명의 루테니아 군.

어림잡아 백 명 정도는 그 자리에서 내 손에 목이 떨어졌고, 그 비슷한 수가 사령관이었던 케딤 베르덴과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

나머지 6백의 병력 중 대다수는 뿔뿔이 흩어져 멀리 도망쳤을 테지만, 일부는 아군이 있는 올베른 요새로 향했을 터.

"... 그러다, 올베른 요새의 지휘관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우리 뒤를 따라붙은 거겠지."

우릴 추격해온 병력의 정체를 확정 짓는 듯한 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조금은 밝게 변한다.

3백이라는 숫자에 적잖이 긴장했는데, 놈들의 대다수가 나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냅다 도망쳤던 패잔병들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탓이다.

"영주님, 그럼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부터 들이치실 겁니까?"

곧 펼쳐질 상황에서의 대응책을 묻는 엔리케에게, 나는 영주다운 위엄이 서린 목소리와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 올베른에서 따라온 놈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

뒤쪽에서 접근하는 적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질문했던 엔리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오랜 전우(戰友)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 그리고 그와 비슷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부하들의 궁금함을 해소해주기 위해 나는 지체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뒤쪽에서 접근하는 놈들 대다수가 바인호프에서 내게 호되게 당한 놈들이다. 8백 명이나 되는 전력을 가지고도 내게 박살이 났는데, 그 절반도 안 되는 병력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아..."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엔리케였다.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뒤쪽에서 따라온 새끼들, 영주님이 휘두르는 창에 맞아 뒈질까 봐 무서워서 못 덤벼들 거라는 뜻이죠?"

"... 뭔가 느낌이 많이 달라졌긴 한데, 의미 자체는 정확하다."

다소 품격은 떨어지지만, 내가 한 설명을 더욱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내는 엔리케였다.

"크, 그럼 일이 간단해졌군요. 앞쪽에서 몰려오는 놈들만 시원하게 때려잡으면 뒤쪽에서 살살 눈치 보면서 따라오던 놈들은 알아서 꼬랑지 내리고 도망갈 거다, 뭐 이런 얘기 아닙니까? 흐흐흐..."

뚜두둑-

말을 마친 엔리케가 굳어있던 손가락을 이리저리 꺾으며 소리를 낸다.

곧 다가올 전투에서의 매서운 활약을 예고하는 듯한 그의 모습이었다.

***

투우우우웅-!!!

나움가르트 산(産) 강철을 수십, 수백 번 망치로 때려 만든 철시(鐵矢) 한 발이 대기를 가른다.

쐐에에에에에엑!!!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

그 소리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보통의 화살과는 근본부터 다른 위력이 느껴진다.

퍼어억!!!

"크히이이이잉!!!"

철시에 적중당한 군마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터져나간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붉은 피와 허연 뇌수.

화살을 맞은 군마는 물론이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 역시 낙마와 동시에 목이 부러져 즉사하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하! 이 좆밥 새끼들! 다 드루와! 드루와 봐!"

단 한 발의 화살로 적 인마(人馬) 일체를 동시에 제거해버린 사나이.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

평상시 행동거지는 제법 기사다워졌지만, 전투 상황에서만큼은 용병 시절의 천박함(?)만큼은 아직 버리지 못한 그가 거친 목소리를 토해낸다.

동시에 빠르게 등 뒤로 넘어갔던 오른손엔 예의 그 잿빛 강철 화살이 쥐어져 있다.

으지지지직!!!

엔리케의 손에 들린 활이 시위에 화살을 문 채로 힘껏 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활은 다닐렌츠 북부 지역에 서식하는 몬스터 오록스(Aurochs)의 뿔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재료를 더해 만들어진 특수한 무기였는데, 보통 사람들은 시위를 잡아당기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탄성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엔리케는 그 어마어마한 물건의 시위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투우우우우우웅!!!

전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힘차게 또 하나의 화살을 쏘아낸다.

퍼어어어억!!!

결과는?

이번에도 여지없다.

엔리케의 시선에 잡혔던 기마병 하나가 머리통을 잃고 달리는 말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쏘는 족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물에 맞아들어가는 엔리케의 화살.

정확성도 대단했지만 그 속도도 엄청난 수준이어서, 벌써 아홉 번째 기마병이 그가 쏘아낸 화살의 제물이 되었다.

"허어어..."

엔리케의 곁에 서서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던 하랄트가 무지막지한 화살의 위력에 전율한다.

사람의 머리에 틀어박히는 수준이 아니고 아예 뼈째로 깨부수는 화살이라니?

엔리케가 활시위에 걸어 날려 보낸 것이 화살이 아니라 돌멩이나 쇳덩어리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화살이 사람 몸을 관통하질 않고 때려 부수는 건지?!

엔리케와 알고 지낸 기간이 불과 며칠에 불과한 하랄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물론, 그와 달리 나는 엔리케의 화살이 보여주는 무자비한 위력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 몬스터의 뿔을 써서 무식하리만큼 위력을 높인 활에 특수제작한 화살을 썼으니, 저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

거기에 더해, 엔리케가 쓰는 강철 화살엔 끝부분을 망치로 때려 의도적으로 뭉툭하게 만든 무거운 납 화살촉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관통력과 비거리는 다소 떨어지지만, 저지력 하나만큼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현대 문명의 슬러그(Slug) 탄 같은 거랄까?

"이런 씨발! 이게 무슨 화살이야?!"

"바, 방패! 방패로 막아!!!"

"또 날아온다! 으아아아아아!!!"

엔리케의 화살이 보여준 끔찍한 위력을 코앞에서 목격한 루테니아 군 병사들이 허둥거린다.

득달같이 달려가 건방진 다닐렌츠 놈들을 단숨에 짓밟아 주리라 생각했던 기마병들이 차례로 머리 없는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구르는 꼴을 본 직후였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으하하! 이번엔 여러 발이다!!!"

투웅! 투웅! 투웅!

엔리케가 자랑하는 필살기, 세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내는 기술이 나왔다.

물론 한 발을 쏘아내기에도 엄청난 힘이 필요한 철시는 아니었고, 나무와 새의 깃털로 만든 평범한 화살 세 발이었다.

쐐에에에에에에엑!!!

퍽! 퍼억! 퍽!

"커흑!"

"켁!"

"으아악!"

하지만 그 평범한 화살도 누가 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

엔리케의 화살에 적중당한 루테니아의 병사 셋이 각각 눈과 목, 가슴팍을 움켜쥐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원거리 사격만으로 열 명이 넘는 적의 병력을 깎아낸 것이다.

"다닐렌츠! 전원 전투 준비이이이이이!!!"

또 다른 화살 한 발을 자신의 활에 재며, 엔리케가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린다.

사격과 병력 통제를 동시에 해내는 것은 용병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그의 놀라운 장기 중 하나였다.

멍한 얼굴로 신기에 가까운 엔리케의 활 솜씨를 지켜보던 우리 측 병사들과 용병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 엔리케의 화살 공격에 한 움큼 물어뜯긴 루테니아 군과의 격돌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자, 시발! 젖내나는 루테니아의 어린놈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뭔지 보여주자! 다닐렌츠, 돌겨어어어어억!!!"

"와아아아아아아아!!!"

***

한편, 엔리케가 이끄는 백오십의 우리 군 병력이 도시 메프하임(Mepheim)에서 달려온 이백여 루테니아 군과 전투를 시작하던 그 시각.

"..."

나는 이틀 전 바인호프 요새에서 그러했듯, 말에 올라탄 채 우리 군의 뒤쪽에서 접근 중인 올베른 요새의 추격자들을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 저것들, 뭐 하는 거야?"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한 시력을 지닌 덕분에, 나는 저 멀리 진군을 멈추고 한데 모여 쑥덕거리는 적 지휘관 서너 명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씩씩거리는 표정과 정신없이 움직이는 양손.

뭔가 격렬하게 대화를 하는 모습이다.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강 구분할 수 있는 그들의 입 모양으로 보건대 아마도 저 대화 내용은...

"... '이쯤에서 상황을 지켜보자', '더 접근하지 말자' 뭐, 이런 대충 이런 얘긴가?"

그랬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올베른 요새부터 우리의 뒤를 밟아 추격해온 저 병력의 대다수는 바인호프 공성전에 참전했다가 내게 박살 나 도망쳤던 패잔병들이었다.

생전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거대한 무력 앞에 처절한 공포를 맛봐야 했던 이들.

비록 까라면 까야 하는 군대의 법을 어기지 못해 나의 뒤를 따라왔으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그들의 앞을 막아선 내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발길을 멈춘 것이다.

말하고 보니 지금 내 모습이 마치 <삼국지연의> 속 조조의 대군을 장판교에서 홀로 막아선 장비 같기도 하다.

"그럼... 저기 혼자 꽥꽥 소리 지르면서 화를 내는 녀석은 바인호프 요새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놈이겠군."

그러니 3백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도 내 앞에 달려들기를 주저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토록 화를 내는 것이겠지.

"... 이해가 안 된다면, 이해가 되도록 도움을 주어야겠지."

터어엉-!

말에서 내린 나는 이틀 전 바인호프 요새 앞 들판에서 수없이 많은 적의 목숨을 거두었던 예의 그 묵빛 글레이브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저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꽂아 넣었을 뿐인데, 나를 바라보는 적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보기만 해도 무서울 것이다.

생각만 해도 두려울 것이고.

이해는 간다.

듣도 보도 못한 크기와 무게를 지닌 이 무식한 검은 색 창에 찔리고, 베이고, 찢겨 날아간 목숨이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그렇게, 창을 땅에 꽂아 넣으며 자유로워진 나의 두 손.

스륵-

허리춤에 꽂혀 있던 손도끼 한 자루가 내 오른손에 들려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의 손도끼보다 살짝 크고, 무게도 조금 더 나가는 나의 손도끼.

바로 그 손도끼가,

"흐으읍...!"

탁, 탁, 탁, 탁, 타아악!

몇 번의 도움닫기를 마친 나의 손으로부터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휘우웅! 휘우웅! 휘우웅!

내 손을 떠난 손도끼는 한줄기 폭풍이 되어 단숨에 먼 거리를 날아갔고,

"피, 피해!!!"

"이런 씨발...!?"

퍼석!!!

앞서 나를 왜 공격하지 않는 거냐며 홀로 화를 내던 그 지휘관의 이마 한가운데 보기 좋게 틀어박혔다.

루테니아 (4)

그걸로 끝이었다.

내가 던진 손도끼에 전투를 주장하던 올베른 요새의 지휘관이 이마가 쪼개져 죽던 그 순간, 안 그래도 도망칠 구실만 찾고 있던 나머지 놈들이 부리나케 퇴각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퇴, 퇴각! 어서 물러서라! 어서!!!"

"저놈의 공격 범위 밖으로 물러서야 한다! 에잇, 빨리 안 움직이고 무엇하느냐!!!"

"시발, 내 살다살다... 활을 쏜 것도 아니고, 이 거리에서 손도끼를 던져서 사람을 맞춰? 이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되니까 아까 그 양반이 뒈졌지! 잔말 말고 뛰라고 새끼야!"

"으흐흑! 시발, 내가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을 치던지,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고 몸만 빼서 튀는 놈도 보이고 옆 사람이 넘어졌는데 그 몸을 짓밟고 뛰는 놈도 보였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상대의 표정이 겨우 보일락 말락한 먼 거리에서 도끼를 던져 사람 머리통을 쪼개는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공포일 것인가?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내가 다음에 던지는 손도끼의 목표가 자신이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아아악! 나 밟았잖아!"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빨리 뛰라고 새끼야!"

"커흑! 대장님! 대장님! 저도 데려가십쇼!!!"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대열을 무너뜨리며 도망치는 추격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후욱, 후욱... 끝났습니다, 영주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굳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고생했어, 엔리케 경."

이제는 제법 그럴듯해진 하대(下待).

"아닙니다, 영주님."

그리고, 역시 자연스러워진 엔리케의 존대(尊待)가 뒤따른다.

"병력은 얼마나 상했지?"

"서른 명 남짓이 죽고, 비슷한 수가 다쳤습니다. 사상자 대부분이 용병들이고, 영지군 병력 중엔 죽은 자가 없습니다."

"병사를 다 살렸다니, 잘했네."

전투 상황에서 돈 주고 부리는 용병들의 피해가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해당 영지가 보유한 일종의 '자산' 개념인 영지군과 달리 용병은 돈을 지불해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전투력.

고용 기간이 끝나면 잃게 될 그 용병들의 전투력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은 지휘관이 갖춰야 할 당연한 덕목이었다.

"포로는? 얼마나 잡았지?"

"약 70여 명을 사로잡았고, 비슷한 수를 격살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백오십 명으로 이백 명을 쳐서, 30을 잃고 70을 죽였다... 선방했군. 잘했어, 훌륭하네."

"혼자서 삼백 명이나 되는 적을 쫓아버린 영주님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민망합니다! 하하하하!"

내 칭찬을 듣고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엔리케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저, 근데... 영주님."

"음?"

"영주님께서 쫓아낸 놈들 말입니다, 저기 가는 저 등신들."

"어, 그래."

"저놈들, 올베른 요새로 다시 기어들어 가면 괜히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지금 추격해서..."

"아니, 놔둬.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놈들이야."

"갈 곳.... 이 없다?"

나의 말을 듣고 의아한 얼굴이 된 엔리케.

한껏 쳐 죽인 적들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무시무시한 모습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웃거리는 그 표정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하, 뭔 소린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얼굴인데?"

"어,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음, 단서를 하나 주지."

"예, 듣겠습니다."

"이번 루테니아 원정, 내 옆에 늘 붙어 다니던 녀석 하나가 안 보이지 않아?"

"어... 아드리안 말씀이십니까?"

아드리안.

영주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니며 곁을 지킨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내.

이제는 다닐렌츠의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Adrian Schirach)'로 불리며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맞아, 아드리안 얘기야."

"그 녀석, 영주님께서 따로 맡길 일이 있다고... 그래서 키르헨에 남겨두고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따로 맡긴 일이, 내가 아까 한 말과 연관이 되어 있지."

"어, 그럼 혹시..."

뭔가를 눈치챈 듯 놀란 표정을 짓는 엔리케.

그런 그에게,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생각하는 혹시가 맞을 거야. 아마 지금쯤이면... 내가 시킨 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

먼 거리에서 손도끼를 날려 적을 격살한 나의 놀라운 무용에 놀라 허겁지겁 머리를 싸쥐고 왔던 길을 따라 도망친 올베른 요새의 추격자들.

처음 도망칠 땐 3백에 가까웠던 병력이 눈앞에 올베른 요새가 보일 즈음이 되자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오는 길에 운 없는 고블린 무리를 하나 만나 한 차례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그게 병력의 숫자가 이 정도로 급격히 줄어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들의 병력이 반 토막 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탈영(脫營)'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행군 중에 도망을 쳐?"

"충성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씨발 놈들!"

"어디 숲속에서 고블린한테 뜯겨 고깃덩어리나 되라!"

"에이, 퉷! 난 진즉에 그 새끼 도망칠 줄 알았다니까?"

남은 이들은 도망친 이들에게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실은, 진작에 그들처럼 도망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이 전쟁에서 루테니아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다닐렌츠의 기사가 그들에게 준 충격은 그토록 거대했다.

그렇게, 등 떠밀려 나간 추격전에서 극도의 피로감과 마음의 상처만 가득 안고 돌아오는데...

"으응? 저... 저게 뭐야?"

"왜, 뭔데?"

"집에 다 와놓고 뭐 때문에 호들갑을... 흐억!"

요새 성문 아래 도착한 루테니아 군 병사들이 뒤늦게 발견한 무언가.

어느새 올베른 요새 장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깃발들.

한데 그 깃발에 찍힌 문양이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저 문양이 찍힌 깃발은, 절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저, 저, 저거... 다닐렌츠 영지 문장이잖아?!"

그랬다.

몸과 마음 모두 넝마가 되어 돌아온 루테니아 군을 맞이한 것은, 올베른 요새를 점령한 다닐렌츠 군이었던 것이다.

"집 버리고 튀어나갔던 비루한 개새끼들이 돌아왔구나! 그래, 가서 뭐라도 좀 얻어먹고 왔느냐?"

"...?!"

올베른 요새 장벽의 한 가운데에 서서 루테니아 군을 내려다보며 비꼬듯 말하는 한 사나이.

그는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훤칠한 키의 젊은 청년이었다.

전반적으로 마른 듯해 보이지만, 탄탄한 근육이 빈틈없이 전신을 감싸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탄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 청년이 바로 삼백에 달하는 전력이 빠져나간 틈을 타 올베른 요새를 점령한 다닐렌츠 군의 지휘관.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였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에게 내어줄 방은 없다! 썩 꺼지든, 아니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해라!"

스르릉- 촤아앙!

뒤이어, 장벽 위의 아드리안은 자신의 검을 뽑아 크게 당황한 루테니아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내가 직접 내려가서 이 검으로 손님맞이를 하길 바라는 건가? 그렇게 해줄까?"

촤라라라라라라라락!!!

아드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숨어있던 다닐렌츠 군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장벽 아래의 루테니아 군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얼핏 보아도 족히 오륙십 명 가까이 되어 보이는 숫자.

저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화살 세례를 맞는다면, 안 그래도 지친 루테니아의 병사들은 버텨낼 재간이 없으리라.

결국,

챙강- 챙강- 땡그렁-!!!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다닐렌츠의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무위(武威)에 짓눌려 패주했던 루테니아의 병사들이 기사 아드리안의 계략에 걸려 손에 쥔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영주님,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루테니아의 도시 메프하임(Mepheim)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언덕의 위에서, 나는 아드리안을 다시 만났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올베른 요새 정리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아닙니다, 영주님. 어차피 텅 비어있던 거나 마찬가지였던 요새인걸요."

나의 칭찬에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이다.

"그래도 놈들이 병력을 빼낸 시점에 정확하게 도착해서 요새를 점령하는 건 쉬운 게 아니지. 잘했다."

"감사합니다."

"여어, 올베른 요새를 깔끔하게 점령하고 행차하신 잘생기고 용감한 기사 아드리안 아니신가! 하하하!"

아드리안과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던 또 다른 한 사람, 엔리케가 호탕하게 웃는다.

아드리안도 아드리안이었지만, 그가 데려온 6백 명의 병력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그였다.

덕분에 앞선 전투의 사상자를 제외하고 약 백여 명 정도의 병력이 남았던 우리의 전력이 단숨에 7백 명 수준으로 뛰어오르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지원 병력을 마련하느라 군무관님께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아, 우리 훌륭하신 브라운 경! 흰머리가 더 늘어나셨겠군. 하하하! 키르헨으로 돌아가면 술 한잔 사드려야겠어!"

"예, 안 그래도 그걸 많이 기대하고 계십니다."

"좋아, 이 사나이 엔리케!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드려야지. 그나저나 네가 데려온 병력, 구성이 어떻게 되지?"

"예, 영지군 2백에 용병 4백입니다. 용병은 아시다시피 죄다 보병 전력이고... 영지군 2백은 궁수가 80명, 기병 20명에 나머지는 보병입니다."

"궁수가 80명이나? 좋네!"

누가 활잡이 아니랄까 봐 궁수가 80명이나 왔다는 소리에 함박웃음을 짓는 엔리케였다.

한편, 나는 아드리안과 엔리케의 대화를 들으며 저 멀리 언덕 아래 자리한 도시 메프하임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봄날의 햇살 아래 훤히 드러나 보이는 도시의 내부.

보다시피 메프하임은 도심을 보호하는 외부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왕도 카를리온이나 쾨니히슈타인 같은 이름난 대도시들이야 위엄이 철철 흘러넘치는 성벽으로 도시 전체를 두르고 있었지만, 보통의 도시는 잘해봐야 나무 장벽이었고 대부분의 도시는 그마저도 없었다.

도시 전체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어마어마한 예산이 필요한 일이다.

가뜩이나 루테니아의 영주가 군 관련 예산을 투자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기 보이는 메프하임이 저토록 외적의 침입에 허술한 모습을 지닌 이유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싸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주제에, 어째서 이따위 무리한 전쟁을 벌인 것인지... 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쏟아낸 아드리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굳이 그걸 이해할 필요가 있나?"

"?"

"우리 입장에서야 감사한 일 아닌가. 우리 병사들이 덜 다치고, 손쉽게 도시를 먹을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그거 그렇지만..."

"아드리안, 지금은 그저 전투에서 이기는 것에만 집중해라. 그런 '평화로운' 고민은, 집에 돌아간 이후에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나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두 시간 후 도시로 진군한다. 오늘 저녁은 저기 보이는 메프하임의 시청 건물에서 먹으면 되겠군."

루테니아 (5)

'메프하임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전한 그 소식에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다닐렌츠 군이 메프하임을 점령했다는데?"

"아니... 영지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보다 우리가 먼저 시작했던 전쟁 아닌가?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제대로 된 전쟁 한번 못 치러봤던 새끼들이 먼저 쳐들어간다 어쩐다 설칠 때부터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사령관이었던 카딤 베르덴 경은 생사조차 모른다던데... 다닐렌츠 놈들한테 벌써 죽었겠지?"

"모, 목이 잘렸나? 아니면 교수형?"

"뭔 소리야? 지금 베르덴 가문에서 그 둘째 아들 살리려고 몸값 준비하느라 난리야, 난리!"

"아, 그래?"

"참나, 기사나 귀족 가문 자식놈들은 이래서 좋은 거지. 전쟁에 져서 적한테 사로잡혀도 죽을 일이 없잖아!"

"우리 옆집 사는 한스 씨 아들은 이번에 병사로 끌려갔다는데..."

"죽었대?"

"아이, 나야 모르지! 근데 뭐 다닐렌츠 군이 이렇게 코앞까지 쳐들어온 거 보면..."

프롤린 시내 곳곳에서 두 사람 이상만 모였다 하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전쟁은 모름지기 인류 문명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화마(火魔)와 같은 것.

모든 것을 파괴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끔찍한 비극 앞에 다른 모든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목전에 밀어닥친 전쟁의 불길에 활기 넘쳐야 할 도시의 분위기가 죽을 날 받아놓은 중환자의 모임처럼 우울해지자 루테니아 영지의 위정자들은 점점 더 다급해졌고, 결국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다.

"어이 거기! 모여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 다들 집으로 들어가, 어서!"

"작업 등 정당한 사유 없이 다섯 이상이 모이면 불순분자로 여기고 경비대에서 체포하겠다!"

"영지를 노리는 적군의 위협이 그칠 때까지 당분간 술집 영업은 금지한다! 명을 어길 시 처형까지도 가능하다!!!"

사람들이 모여 불안한 소리를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 루테니아의 위정자들은 아예 모임을 금지하는 방침을 내어놓는다.

뒤이어 앞선 전황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다닐렌츠 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시 내에 징집령을 발동했다.

"영주님의 명령이다! 도시의 사내들은 영지 수호를 위한 신성한 부름에 응하라!!!"

"이 집에도 아들 있지 않았나? 그 머리색 빨간... 그 자식 어딨어? 숨길 생각하지 마, 십오 세 이상이면 무조건 징집 대상이야!!!"

"거기 너! 어딜 도망가! 이 새끼야, 죽고 싶어?!"

프롤린 영지군과 경비대 소속의 병력이 모두 동원되어 도시 내부를 이 잡듯이 뒤졌다.

병사로 동원 가능한 신체 건강한 남성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우리 애가 몇 살인데 잡아가?! 이제 겨우 열다섯인 애를...!"

"우리 아버지, 나이 먹고 오늘내일하시는 양반인데도 잡아갔어요. 경비대 새끼들, 제 정신이 아니야!"

"무능한 영주 같으니! 그러게 감당도 안 되는 전쟁을 왜 벌여서 이 사달을 만들어?!"

앳된 티가 역력한 어린 소년에서부터 나이 들어 쇠약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내라면 무조건 끌고 가는 영지군, 경비대 소속 병사들의 가혹한 행태에 프롤린 주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시한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의 신념은 굳건했다.

'불만? 그 불만도 발 디딜 곳이 있어야 하는 거다! 나라를 잃고 나면 그 불만조차 사치였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하, 됐다! 멍청한 아랫것들의 목소리까지 일일이 들어가며 어떻게 대국을 운영하겠나? 무시해라!'

자신과 가문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 프롤린을 사수하려는 남작의 의지는 철벽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생각하는 '발 디딜 곳'과 저 아래 평범한 영지민들이 생각하는 '발 디딜 곳'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서 약 반나절 거리에 자리한 다닐렌츠 원정군 주둔지.

그곳의 한 가운데 자리한 지휘관 막사에서, 나는 방금 올라온 척후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병신 같은 놈. 제프펠트 남작 이 새끼는 끝까지 멍청한 티를 내는구나. 어휴..."

프롤린 도시 내에 징집령이 내려졌다는 보고서 내용을 읽고 난 뒤 내뱉은 나의 감상이었다.

영주의 위엄에 손상이 갈만한 노골적인 욕설이었으나, 지금 내 곁엔 내가 가장 믿는 오른팔 아드리안뿐이었기에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적이 코앞으로 육박하였으니 징집령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내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원칙적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틀렸다.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평범한 일반인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은 들, 전투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 같나?"

"하지만... 눈먼 칼에 맞아도 사람은 죽습니다."

"그건 손에 제대로 된 칼이 들려 있을 때 얘기지."

"...?!"

내 대답을 듣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아드리안의 표정.

그런 그의 생각에 확신을 주는 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올베른 요새 접수할 때 너도 봤지? 걔네 상태가 어땠어? 보급 상황 말이야."

"어... 개판이었습니다. 식량이나 무기나 뭐, 제대로 준비된 게 없더군요."

"그렇겠지. 애초에 루테니아는 군무 쪽 예산을 거의 배정하지 않는 곳이야. 전쟁을 남의 일로 생각하는 놈들뿐이거든. 죄다 대가리가 꽃밭인 놈들 투성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다 아는 방법이 있다.

내가 누군가? 수년 전 영지의 이름을 딴 '다닐렌츠 상단'을 세워 왕국 북서부 상권의 절대 '갑' 위치에 올려놓은 경영의 천재 아닌가?

'천재라기엔 순전히 미래를 알고 있어서 거저 먹은 수준이지만...'

뭐, 남들 눈엔 천재로 보일 테니 넘어가자.

아무튼, 나는 상단을 이끌며 본거지인 다닐렌츠 영지는 물론 지금 쳐들어온 루테니아 영지의 상공업 흐름에도 아주 깊숙이 관련 지식을 쌓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루테니아의 영주, 제르펠트 남작이 얼마나 군무(軍務)에 관심이 없는지를 말이다.

"루테니아는 평시에 군량이나 무기 구매에 전혀 돈을 쓰지 않아. 그렇다 보니, 전쟁에 대한 보급 체계 같은 게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지."

"개판이군요."

"개판이지. 뭐, 한마디로 얘네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전쟁 나면, 그냥 '돈 써서 해결하면 된다'라고 말이야. 루테니아가 돈 없는 영지가 아니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닌데... 너도 잘 알겠지만, 전쟁이란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

"맞습니다."

제르펠트 남작이 간과하고 있는 것.

전쟁 준비가 그렇게 시장에서 물건 사는 것처럼 돈만 있다고 뚝딱 되는 게 아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용병도 써본 놈이 잘 쓰는 법!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바인호프 요새 앞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숫자만 많았을 뿐, 전투엔 하등 도움 안 되는 싸구려 용병들만 즐비하게 끌고 왔던 루테니아 군.

놈들이 맞닥뜨린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였다는 게 좀 많이 불운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루테니아 군의 상태는 너무나 형편없었다.

뿐인가, 잡아놓고 확인해보니 용병들은 물론 영지군 병사들의 무장상태도 개판이고 군량조차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루테니아 군을 이끌었던 사령관, 카딤 베르덴을 족쳐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바인호프 요새를 점령한 후 요새에 비축되어 있던 다닐렌츠 군의 군수품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 이것만 봐도 루테니아 새끼들이 얼마나 전쟁에 대해 모르는 저능아들인지 알 수 있지."

"영주님 말씀에, 완벽히 공감합니다."

"그래. 이런 새끼들이 전투 임박을 앞두고 급히 일반인들을 징병해서 병력을 늘린다고 한들 그게 도움이 될까?"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단언했다.

"절대 도움 안 되지. 이건 그냥... 제르펠트 남작, 그 병신 같은 놈이 벌이는 최후의 발악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