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동행 (2)
[그런 불경한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왕의 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옵니다.]
[만약 저 둘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제가 없애겠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세 망령.
잠시 후, 뾰족이의 말에 다른 두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응? 아니, 잠깐만.]
[왜 우리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내 티격태격하는 망령들을 바라보며 실반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이로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로나, 얘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망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그 말 또한 타당했다. 부정한 것들은 진실보단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러자 망령들이 다시 입을 한데 모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왕이시여.]
[충성을 증명할 방법을 마련하겠나이다.]
망령들은 심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고민하던 실반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르다는 어떻게 생각해?"
덩달아 이로나의 시선도 그에게 가 닿았다.
그러자 페르다는 희끄무레한 악령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악령이 술자의 몸을 삼키기 위해선, 이로나가 말했던 것처럼 분수가 맞지 않아야 한다. 즉 망령의 격이 실반보다 높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세 망령의 격은 영웅급. 실반과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추후 성장한 실반이 세 망령을 집어삼키면 모를까, 반대의 경우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릇의 크기부터가 달랐으니.
결론이 나왔다. 페르다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도 실반과 같은 생각이다. 정말 영혼이나 몸을 노렸다면 수상쩍은 계약부터 권하거나, 실반이 사령술사로 각성한 직후를 노렸겠지."
다른 의견이 나오자 이로나의 눈썹이 씰룩였다.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이로나."
실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뒤이어 왼쪽 손바닥을 펼쳤다.
"망령들이 그러는데 이러면 안심할 수 있을 거래."
손바닥에는 문양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세 개의 선이 황금색 동그라미를 가로지르는 단순한 문양.
이를 본 이로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복종의 각인······!"
저건 일종의 서약이다. 자아를 가진 사역마를 완전히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이긴 한데, 이게 영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역마보다 격이 한 단계는 높아야 하며, 서약하기 위해선 사역마의 동의까지 얻어야 했다. 그래서 합당한 대가나 제물을 바쳐가며 어르고 달래야 간신히 성사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사역마가 먼저 복종의 각인을 새기길 청했다고?
입이 떡하니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이걸로 충성을 증명할 수 있다면 백 번이든 하겠다는데?"
이제는 놀란 표정조차 지어지지 않는다.
저만한 급의 망령들이 뭐가 아쉬워서 저자세로 나오는지, 이로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어쨌든 복종의 각인은 진짜였다.
이걸로 망령들이 실반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걱정을 덜어낸 이로나는 이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또 요즘 숲에서 일어나는 거랑 관련이 있나 싶었는데."
그러자 이번엔 페르다의 눈썹이 씰룩였다.
숲에서 일어나는 것. 그 말에 떠오른 게 있었다. 원작에서도 세르네크 숲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기에.
하지만 원작과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시기가 너무 빨라.'
원작에서는 숲에 도착하고 약 일주일 뒤에나 '이변'이라 불릴만한 것이 일어난다. 날짜를 따지면 6월 중순쯤 되는 셈. 하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5월 중순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러던 중 돌연 실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다, 고기 다 익은 것 같지 않아?"
노릇하게 익은 오리고기를 보며 군침을 삼키는 실반.
그 모습에 페르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히히, 응."
신이 난 실반을 뒤로한 채, 이로나를 쳐다봤다. 숲에서 일어나는 일을 물어보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닫았다.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숲에 도착하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그런 생각과 함께 페르다는 오리고기를 집었다.
이후 조촐한 식사가 끝났다. 모닥불을 쬐고 있던 실반은 곧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꽤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피곤할 법도 하리라.
잠시 후, 실반은 곤히 잠들었다. 페르다는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실반의 몸을 덮었다. 곧이어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탁-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풀 벌레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으면 절로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이로나가 돌연 입을 열었다.
"네 목적은 뭐지?"
뜬금없는 질문. 이로나는 강한 경계가 묻어나는 눈으로 페르다를 봤다. 페르다 역시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야 경계할 만도 하리라. 잠깐 못 보던 사이, 웬 놈팡이가 스승이랍시고 조카의 곁에 붙어있으니. 페르다의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하겠지.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럴 땐 솔직히 대답하는 게 좋다.
"실반을 가르치고 성장을 지켜보는 것."
하지만 이로나의 경계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믿지 않아도 돼."
덩달아 페르다의 음성도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믿을 마음이 없는 자를 설득할 생각은 없어."
정곡이 찔렸기 때문일까? 이로나는 입을 닫았다.
둘 사이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그녀가 배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그마한 종이봉투였는데, 이를 펼치자 곱게 갈린 청록색 가루가 나왔다.
사아아-
모닥불 주변에 가루를 뿌린 이로나. 이내 입술을 달싹여 알 수 없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아마도 주문을 외는 것이리라. 그러자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에서 별안간 큼지막한 불똥이 툭 튀어나왔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꿈틀거리던 불똥이 형상을 갖춘 것. 배가 볼록 나온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손바닥만 한 몸뚱어리를 가진 불똥은 고개를 들어 이로나를 올려봤다.
[우잉? 왜 불러써여?]
"부탁할 게 있어."
[뭔데여?]
"저 사람의 말에 거짓이 있는지 봐줘. 대가로 이걸 줄게."
이로나가 꺼낸 건 부싯돌 두 개. 불똥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변했다.
[히히, 좋아여! 얼른 말해봐여!]
불똥은 신이 난 듯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페르다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정령의 일종인 것 같긴 한데, 저런 건 난생처음 본다. 원작에서도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 이로나가 불똥의 정체를 입 밖에 냈다.
"모닥불의 정령이다. 진위를 판별하는 힘을 가졌지. 물론 모닥불 근처에서만 유효하고, 시험받는 대상이 동의해야만, 판별이 가능하지만."
그런 게 있었구나. 신기하다는 듯이 모닥불의 정령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이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네 말이 진실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거짓이라면 모닥불은 꺼진다. 모닥불의 정령은 거짓말을 듣는 걸 싫어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로나가 모닥불의 정령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페르다는 다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지금 날 시험하겠다고?"
"그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지 않으면 동행을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돌아온 대답에 페르다는 얼굴을 살짝 구겼다.
"내 동행은 아크듀트 백작이 지시하고, 실반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네가 동행 여부를 왈가왈부할 수 있나?"
"난 세르네크의 사자다. 실반에게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검증되지 않은 인간을 숲에 들여놓을 수는 없어."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어느 한쪽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팽팽한 눈싸움이 이어지던 때, 돌연 페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다. 시험에 응하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인간이 아닌데?
이로나는 경계심이 깃든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장 말을 덧붙였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다."
"네가 조건을 걸만한 처지는······."
"만약 내 모든 말이 진실로 나올 경우, 향후 실반과 관련해선 날 의심하지 마라."
그 말에 이로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실만을 말한다면 그리하겠다. 단, 거짓이 하나라도 있다면 널 숲에 들여보낼 수는 없어."
조건이라고 해서 망설였지만, 저 정도면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모든 속내를 까발려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상황을 지켜보던 모닥불의 정령이 불쑥 말을 건넸다.
[이야기는 끝나써여?]
"응, 시험을 부탁할게."
이로나가 부싯돌을 건넸다. 행여나 마음이 변할라, 모닥불의 정령은 냉큼 부싯돌부터 챙겼다. 그러고는 앙증맞은 손가락을 전부 펼쳤다.
[진위 판별 여부는 최대 다섯 번까지 할 수 있어여!]
주의사항을 끝으로 모닥불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로나는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네가 실반에게 접근한 이유는 뭐지?"
"아크듀트 백작이 날 실반의 가정교사로 고용했으니까."
[진실이에여!]
모닥불의 정령이 방긋 웃었다. 어떤 방식으로 진위를 판별할지 궁금했는데, 거짓말 탐지기와 비슷해 보였다. 그때 또다시 이로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백작의 지시로 실반의 곁에 머무른다는 건가?"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다. 난 내 의지로 실반의 스승이 됐고, 이곳에 있는 것도 내가 결정한 일이야. 만약 백작이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더라도 난 이곳에 있었을 거다."
[이번에도 진실이에여!]
이로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대답을 주저하거나 망설일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시커먼 속내를 밝힐 생각이었건만 생각보다 페르다의 대처가 능숙했다.
"······하나 더 묻겠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꼬투리를 잡을 생각으로 그의 마지막 대답을 물고 늘어졌다.
"왜 그렇게까지 실반의 곁에 있고자 하는 거지?"
백작의 지시와는 무관하게 실반을 따라올 것이라는 대답. 잘만 하면 여기서 속내를 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로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페르다는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았으니.
"실반이 성장하는 걸 보고 싶어서다."
"성장?"
뜬금없는 대답. 이로나가 눈썹을 씰룩였다. 반면 페르다는 실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실반이 성장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기억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들었다. 실반이 정점에 다다른 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실반에게는 많은 고난과 시련이 주어질 거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겠지. 그럼에도 난 실반이 모든 한계를 넘어,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보고 싶다."
처음 목적은 소설 속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실반의 스승이 된 이상, 목표는 오직 하나.
제자의 성장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실반의 곁에 있어야 해. 오직 나만이 실반을 도울 수 있으니까."
오만한 대답이었다. 이로나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많은 고난과 시련이 주어진다고? 예언자도 아닌데 그런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걸로 거짓이 드러났으니, 어찌 보면 이득인 셈이다.
이로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어, 둘 다 진실인데여?]
"······뭐?"
[이제 한 번 남았어여.]
모닥불의 정령이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그러나 이로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페르다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탓이리라. 가늘게 떨리는 귀를 가만히 바라보며 페르다는 입술을 달싹였다.
"숲에 도착하면 말하려고 했는데 이참에 말해두지."
말문이 막힌 그녀를 대신해, 페르다가 말을 이었다.
"날 무시하는 건 상관없다. 세르네크 숲은 인간을 배척하기로 유명하니까. 어지간한 모욕이나 도발은 기꺼이 참을 수 있어."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페르다도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할 생각이었다. 세르네크 숲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실반의 고향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제자에게 그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싹-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싸늘한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목소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실반은 내 소중한 제자다."
그 말을 입에 담을 땐, 무척이나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이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기에 그 누가 됐든, 만약 실반을 무시하거나 핍박한다면 스승으로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무겁고 날카로운 기세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피부의 잔털이 삐쭉 솟는 걸 느끼며 이로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아니, 부탁하는 거지. 내 제자 좀 잘 챙겨달라고."
페르다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둘 모두 입을 닫았다. 그러자 모닥불의 정령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와! 전부 진실이에여.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간이네여!]
완벽한 패배다. 이로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저 대답이 모두 진실인 이상, 적어도 그가 실반을 생각하는 마음에 거짓은 없다는 소리였으니.
[이제 끝났으니 돌아갈 게여. 나중에 또 불러주세여!]
작별 인사를 끝으로 모닥불의 정령은 재로 변해 사라졌다. 대가로 건넨 부싯돌과 함께였다. 잠시 후, 페르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시험은 통과했나?"
"······그래, 약속대로 동행을 허가한다."
다소 힘없는 대답과 함께 이로나는 몸을 돌렸다. 딱 봐도 삐친 모양이다. 페르다는 말없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실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프 엘프라는 존재는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인간에게도, 엘프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니까. 실제로 세르네크 숲에서 실반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고작 세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이로나를 포함한 숫자다.
'원작에서는 상처를 많이 받았지.'
실반은 무수히 많은 눈물을 삼켰다. 그것도 무려 여덟 번이나.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왜냐면 지금 실반의 곁에는 페르다가 있으니까.
"응?"
그때 문득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일까? 실반이 몸을 뒤척거렸다. 혹여나 더위를 먹어 잠이 깰라, 그의 몸을 덮고 있던 모포를 조심스레 걷어냈다. 이러면 깨지 않겠지.
"좋은 꿈 꿔라."
나직한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 누웠다. 정령과 망령들이 있으니 불침번은 필요 없으리라. 이내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 탓에 페르다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모닥불에 비친 실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음을.
Chapter 17. 이건 이제 제 겁니다 (1)
Chapter. 17
이건 이제 제 겁니다.
성을 떠난 지 사흘째.
페르다 일행은 백작령 최남단에 있는 소도시 '코튼'에서 말을 반납했다. 이제부터는 인적이 드문 숲길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실반."
이로나가 배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누런색의 액체가 남긴 유리병. 그녀는 액체를 조금 덜어내어 실반의 목덜미에 발랐다. 코를 킁킁거리던 실반은 액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아, 니르겐 수액이구나. 오랜만에 보네."
"맞아. 숲에서 지낼 때 종종 발랐지."
고개를 끄덕인 이로나.
이어 그녀는 페르다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더니 말없이 유리병을 건넸다. 뭘 어쩌라는 거지? 실반에게 했던 것처럼 바르라는 소린가? 페르다가 멀뚱멀뚱 서 있자 실반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몬스터를 쫓는 약이야. 목덜미와 손목, 발목에만 바르면 돼."
그 설명에 페르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향하는 숲은 몬스터들이 곧잘 출몰하는 지역이었으니. 물론 이로나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쓸데없는 전투를 피하는 거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셋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꽤 고된 강행군이었다. 점심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쉬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간이 흘러 해가 뉘엿뉘엿 저물던 무렵, 실반은 끝내 한계에 도달했다.
"후우, 후우!"
장시간 말을 탔을 때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로나는 그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반면 실반의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졌다. 그러자 후미에 있던 페르다가 입을 열었다.
"세르네."
멈칫-
그 부름에 이로나가 자리에 멈췄다. 가면 사이로 쏟아지는 무감정한 눈빛을 받아내며 페르다는 말을 이었다.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좋겠다."
이로나의 시선이 페르다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의 실반이 있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동하지."
마침 주변 지형도 평평하니 하룻밤 묵기에 좋아 보인다. 그러던 중 별안간 실반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야. 좀 더 걸을 수 있어."
"실반······."
"원래 오늘은 숲 초입부까지 가는 게 목적이었잖아."
이어진 대답에 이로나는 대견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는 내려놓은 배낭을 다시 집어 들었다.
"좋아. 그럼 좀 더 이동해볼까?"
"응, 힘내볼게."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애써 참았다. 실반은 이를 악문 채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페르다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페르다?"
"힘들면 무리하지 마."
"하지만 목표가······."
"목표는 목표일 뿐이야. 꼭 지킬 필요 없어."
무책임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이로나는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좁혔다. 반면 페르다는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 이틀 늦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는 실반의 등을 격려하듯 토닥였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네 나이면 그래도 될 때야."
오히려 여기까지 걸어온 게 대견할 정도다.
잠시 망설이던 실반은 곧 배시시 웃었다.
"응, 그럼 조금만 쉴게."
그 말을 끝으로 실반이 자리에 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무르자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그 사이 이로나와 페르다는 야영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보던 중 실반은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어? 오늘은 불 없이 그냥 자는 거야?"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대답은 이로나에게서 돌아왔다. 어째서? 고개를 갸웃거린 실반이 그 이유를 물어보려던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큰 발자국 본 적 있지? 저 남자 머리만 한 거."
"······내 머리는 그렇게 크지 않아."
페르다가 억울한 듯이 항변했지만 이로나는 듣지 않았다.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발자국을 남긴 녀석은 취리흐라는 몬스터야. 근데 이 녀석이 눈이 안 좋거든. 거기에 야행성이라 한밤중에 밝은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습성이 있지."
"위험한 몬스터야?"
"위험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좀 귀찮기는 해. 평균적으로 열 마리씩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거든."
발자국이 크다면 덩치도 큼지막하다는 소리다. 게다가 그런 게 열 마리씩이나 몰려다닌다고? 아쉽지만 모닥불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오리고기가 좀 아쉽긴 하지만······."
실반이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때.
부스럭-
페르다가 배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고소한 고기의 냄새. 오리고기의 냄새다. 실반의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며 페르다는 씨익 웃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오리고기 육포를 좀 사 왔지."
"오, 오리 육포!?"
"훈연해서 말린 거다. 짭짤하니 괜찮더라고."
그 말에 실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육포를 건네자 야금야금 잘도 먹었다. 이어 페르다는 건너편에 있는 이로나에게도 육포를 건넸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육포를 가져가려는 기미도 없다.
"생각 없으면 말고."
먹기 싫다는데 억지로 권하기는 좀 그렇지. 어깨를 으쓱인 페르다는 육포를 다시 회수하려고 했다. 그보다 이로나의 손이 좀 더 빨랐다.
휙-
육포를 낚아챈 이로나.
이어 그녀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먹겠다."
설마 감사 인사가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페르다는 피식 웃으며 하나 남은 육포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실반은 모포를 몸에 둘렀다. 모닥불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체온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 게 있는데."
문득 실반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로나와 시선을 마주한 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숲을 떠나기 전에 무슨 중요한 시험을 치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실반이 아크듀트 백작령으로 향하기 직전.
이로나는 어떤 시험을 치른 뒤, 최대한 빨리 실반을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떠나는 날에도 그녀와 만나지 못했었다. 한편 실반의 질문에 이로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도 무사히 잘 끝냈다."
"정말? 어떤 시험이었는데?"
눈을 반짝이며 묻는 실반.
그 얼굴이 퍽 귀여웠던 걸까? 이로나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 녀석들과 계약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었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반의 눈에 불과 바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흘 전에 봤던 상위 정령이었다.
[이로나는 자격을 갖췄다. 그래서 계약한 것일 뿐.]
불의 상위 정령, 살라임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뒤이어 바람의 상위 정령이 깐족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로나의 실력이 뛰어났다기보단 그냥 운이 좋았지.]
"······시오르."
[왜? 사실이잖아. 만약 '그 일'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도 토굴 속에 처박혀 있었을걸? 네 조카는 다른 녀석이 데리러 갔을 거고.]
이로나는 입술을 깨물기만 할 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잠자코 있던 페르다가 돌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일이라는 게 뭐지?"
"알 거 없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일······."
이로나는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살라임과 시오르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걸 설명하려면 이로나가 치른 시험부터 말해야 한다.]
[말하면 되지. 어차피 숨길 정도로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
손발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이로나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상위 정령과 계약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녀가 시험을 치른 이유는 단순했다. 상위 정령과 계약을 맺어 강해지면 언젠가 실반이 숲에 돌아왔을 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으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만약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다른 녀석이 세르네크의 사자가 됐을 거다. 아마 하르민 젬버가 가장 유력했겠어."
그 말에 페르다는 눈을 반짝였다.
원작의 모든 시즌에서 세르네크의 사자는 '하르민 젬버'였다. 이는 즉, 원작에서는 이로나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정령들이 말했던 '그 일'이 원작과 다른 전개를 만들어낸 변수일 터. 페르다는 잠자코 정령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시험을 원활하게 치르려면 조건이 몇 개 필요해. 이로나는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대부분 조건을 충족했어. 딱 하나만 빼고.]
"아슬아슬하다는 말은 빼지?"
[이로나. 정령은 거짓말을 못 해.]
시오르의 대답에 이로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약하긴 했는데, 어째 좀 어정쩡하게 한 모양이다. 정령들이 주인을 저렇게 가지고 노는 걸 보면.
그때 실반이 질문을 던졌다.
"그 하나라는 건 뭐야?"
[음, 일종의 천재지변이었어.]
[이로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
시오르와 살라만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실반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자 시오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에 이 일대를 지배했던 괴물이 하나 있었어. 아주 고약한 녀석이었지. 왜냐면 그 녀석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이 땅에 흐르는 마력의 맥과 정령의 맥이 대부분 막혀 버렸거든.]
흡사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시오르는 재차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정령의 맥은 그렇다 쳐도 마력의 맥이 막힌 건 타격이 컸어. 숲이고 산이고 전부 말라 비틀어져 죽어갔으니까. 그래서 참다못한 인간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 괴물과 싸웠고, 마침내 봉인에 성공했지.]
실반이 흥미로운 눈으로 시오르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때.
페르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지? 이 이야기,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근데 봉인을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마력의 맥은 뚫렸는데 정령의 맥은 뚫리지 않았어. 하지만 정령의 맥을 뚫자고 봉인을 풀 수는 없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백 년간 그냥 내버려 뒀고, 그동안 정령의 맥은 계속 막혀있었던 거야.]
[그런데 최근, 괴물이 돌연 사라졌다. 그리고 정령의 맥이 뚫렸지. 덕분에 상위 정령이 이 땅을 찾을 수 있게 됐고, 이로나도 우리와 계약할 수 있었던 거다.]
두 정령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러자 페르다는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잠깐, 그 괴물이라는 게 혹시······."
[늪지대의 왕, '아르케인'이라는 마수다.]
[흉흉한 녀석이었지. 숨결만으로 바위를 녹이는 괴물이었거든.]
봉인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설마 진짜 아르케인일 줄이야. 괴물의 정체가 드러나자 비로소 흩어졌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내 행동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소린가?'
페르다가 던전에 들어가 아르케인을 처치함으로써 정령의 맥이 뚫렸다. 그 덕에 이로나는 상위 정령의 계약에 성공했고, 세르네크의 사자가 되어 실반을 데리러 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페르다의 행동이 원작에 없던 전개를 만들어냈다. 의문은 풀렸지만, 꽤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결과였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벌떡-
별안간 이로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넝쿨이 우거진 덤불. 곧이어 살라만이 딱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로나, 적이다.]
"알아. 나도 방금 느꼈다."
적이라는 말에 실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말했던 취리흐라는 녀석이야?"
"아니, 이 꺼림칙한 기운은······."
이로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려던 그때.
덜그럭-
덤불을 비집고 뭔가가 튀어나왔다.
달빛에 비친 것은 백골(白骨)이었다. 허나 평범한 백골은 아니었다. 도끼와 사각방패, 갑옷으로 무장한 채,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스켈레톤 워리어······."
이로나는 눈을 스산하게 빛냈다.
실력 있는 전사에게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녀석들은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하지만 구울이나 스켈레톤 워리어처럼, 등급이 한 단계 높은 이들은 꽤 골치 아픈 적이다.
살아생전의 전투경험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여기서도 출몰하는 건가."
이로나가 자그맣게 중얼거리던 그때.
허공을 배회하던 시오르가 날카롭게 경고했다.
[조심해! 이쪽으로 다가온다!]
꽈악-!
그 말에 창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어림잡아도 서른 마리가 넘어 보인다. 좀 벅찰 수는 있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용병으로 활동할 때는 이보다 더한 상황에도 처해본 적이 있으니.
비장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잡는 이로나와는 달리, 페르다와 실반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실반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선두에 있는 적은 내가 맡겠다.]
살라만이 불꽃으로 휘감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고개를 끄덕인 이로나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지면을 박차고 돌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그때,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운이 좋네. 수업 재료가 제 발로 걸어올 줄이야."
"······뭐라고?"
페르다의 말에 이로나는 일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실반은 한술 더 떠,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 지하수도에선 저런 게 없었잖아."
실반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곧이어 그는 페르다를 쳐다봤다. 페르다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위험할 것 같으면 도와주마."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스켈레톤 워리어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세 망령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실반은 멍하니 서있는 이로나의 곁을 스쳐 지나며 속삭였다.
"뒤로 물러나, 이로나."
"뭐, 뭐?"
"잠깐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
실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Chapter 17. 이건 이제 제 겁니다 (2)
"······실험이라고?"
이로나는 당황한 듯이 되물었다. 허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실반의 팔을 낚아챌 생각으로 황급히 팔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잠깐, 근데 쟤네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정령들이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흉흉한 살의를 내비치던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돌연 자리에 그대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당황한 이로나와 달리, 페르다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왜냐면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사령술사의 격.'
신화급 사령술사의 격에는 이런 효과가 있다. 세계급 이하의 언데드는 실반에게 선공을 가하지 못한다는 것. 위인의 격조차 가지지 못한 스켈레톤 워리어 따위는 감히 실반의 눈도 쳐다볼 수 없으리라.
저벅저벅-
그 사이 실반은 스켈레톤 워리어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동시에 페르다는 아르케인의 비수를 반쯤 뽑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실반이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뛰쳐나가기 위해서.
[감히 왕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배력을 빼앗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는 것이······.]
한편 세 망령은 입을 모아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알기로 실반은 언데드의 지배력을 빼앗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스켈레톤 워리어들은 제일 먼저 실반을 공격할 테니.
그러나 실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우뚝-
이내 걸음을 멈춘 실반. 뻥 뚫린 안구를 바라보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왠지 될 것 같으니까 해보려는 거야."
미믹을 만들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미소.
이어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스켈레톤 워리어를 주의 깊게 쳐다봤다. 잠시 후, 실반은 손을 뻗어 허공을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마에스트로처럼.
세 망령은 불안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반면 페르다는 달랐다. 그는 흐뭇한 시선으로 실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실반이 뭘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집중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집중할 때면 언제나 귀에 힘이 들어가니까.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페르다가 피식 웃었다.
반면 이로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그녀는 실반의 진짜 능력을 본 적이 없으니. 그래서일까? 잠자코 있던 이로나가 실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실반, 지금 뭐 하는 거······."
하지만 그녀는 실반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페르다가 이로나의 앞을 막아선 탓이었다.
"제자의 실험을 방해하지 마라."
"······지금은 괜찮지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그땐 내가 구하면 그만이니."
자신감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러던 중 실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동시에 스켈레톤 워리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던 가운데, 돌연 페르다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
[알림]
*'실반 아크듀트'가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능력명: [강탈(强奪)]
=====
역시 천재란 녀석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페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스켈레톤 워리어의 안구에서 솟구치는 황금색의 안광이. 이를 본 이로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실반! 뒤로 물러나!"
금방이라도 도끼가 실반의 머리를 쪼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면을 박차고 있는 힘껏 달렸다. 하지만 그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철컥-
도끼와 갑옷으로 무장한 스켈레톤 워리어 서른세 마리.
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도끼와 방패를 내려둔 뒤, 양손을 곱게 포개어 절을 했다.
쿵쿵-!
곧이어 메마른 땅에 두개골이 처박혔다.
모든 부정한 것들의 왕에게 올리는 경배였다.
완벽한 복종의 자세에 이로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 이게 무슨······."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볼 테니까.
돌처럼 굳어버린 이로나를 뒤로 한 채, 페르다는 실반이 새롭게 얻은 스킬을 살펴봤다.
=====
[능력]: 강탈(强奪)
[등급]: 영웅
[단계]: 1/10
[효과]: 타자의 휘하에 있는 언데드의 지배력을 강제로 빼앗는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마력 소모량이 줄어든다. 단, 타자의 격이 술자보다 두 단계 아래여야만 정상적으로 발동한다.
*소모 마력:
[5/90/250/1,000]
[일반/위인/영웅/전설]
=====
강탈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언데드의 격에 따라 소모되는 마력량이 달라진다는 것.
스켈레톤 워리어의 경우, 격이 존재하지 않는 일반 언데드였기에 개체당 5의 마력만 소모된다. 즉, 서른셋의 스켈레톤 워리어를 강탈하는데 드는 마력은 고작 165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일일이 사자소생으로 되살리는 것에 비하면 훨씬 이득이네.'
페르다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한편 이 광경을 보고 경악한 건 이로나 뿐만이 아니었다. 실반의 곁을 맴돌던 망령들도 저마다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대, 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리도 쉽게 지배력을 빼앗으실 줄은······.]
"별로 어려운 건 아니야."
실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스켈레톤 워리어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유심히 지켜보니까 얘네를 구성하고 있는 음차원의 마나 배열이 전부 똑같더라고. 그러니 그걸 내 방식대로 재배열하면 내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해본 것뿐이야."
마치 틀린 문제를 수정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실반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로나의 곁에 있던 두 정령이 강하게 반발했다.
[말도 안 된다. 마력의 배열을 어찌 마음대로 움직인단 말인가!]
[맞아. 마력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본디 마나란 세계를 구성하는 에너지.
바람을 눈으로 볼 수 없듯이 마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이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로나는 알지 못했다.
실반은 이미 상식을 아득히 벗어났다는 걸.
"응? 보이는데?"
"······뭐?"
"마나의 형태와 흐름, 색깔이랑 농도까지 전부 다 보여."
너무 놀란 탓인지 이젠 반응조차 나오지 않는다.
돌처럼 굳은 이로나를 보며 실반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령술사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왔어.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안 했는데, 하는 편이 좋았으려나?"
그러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왜냐면 페르다도 처음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로나와 함께 놀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페르다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 있잖아."
그때 실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나를 재배열하다가 알게 됐는데, 얘네들 저쪽 어딘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왔어."
"갑자기?"
"응. 허공에서 뿅 하고 나타난 것처럼."
그 대답을 듣자,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페르다는 실반이 가리킨 방향을 지그시 응시했다.
"한 번 살펴보고 올게."
"나도 같이 갈래."
실반이 냉큼 따라붙었다.
세 망령은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부정한 힘이 느껴집니다.]
[예전에 지하수로에서 봤던 것과 비슷하군요.]
[그보다는 격이 낮아, 경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망령들의 보고를 들으며 실반은 페르다의 뒤를 따랐다.
부스럭-
수풀을 비집고 들어가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안정하며 찝찝한 마력의 냄새. 일전에 지하수로에서 던전을 발견했을 때와 같았다. 페르다는 설마 하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익숙한 걸 찾았다.
=====
[알림]
*숨겨진 던전 [??????]를 발견했습니다.
*탐사 전까지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
'역시 던전이었나.'
일순간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한발 늦게 따라온 이로나도 이를 봤는지 자리에 멈춰섰다.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건······."
딱 봐도 뭔가 아는 눈치다.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령들이 알아서 대답을 해줬다.
[숲에서 봤던 것과 똑같군.]
[그러네. 소름 끼치는 마력까지 아주 판박이야.]
정령들의 대화에 실반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숲에도 이런 게 있었어?"
"······."
이로나는 입을 꾹 닫았다. 숨기고 싶던 걸 들킨 표정. 하지만 이미 다 밝혀진 이상, 계속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보름 전부터 간혹 이런 게 생겨났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이로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세르네크 숲에 생겨난 던전만 벌써 다섯 개.
처음엔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꺼림칙한 마력이 느껴진 탓이었다. 거리를 두고 조금씩 조사할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 안에서 언데드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대비하지 못했지. 그 결과, 수십 명의 동족이 죽었다."
간신히 언데드를 물리친 후.
일족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가족을 잃은 전사들은 분노하며 무기를 들었다. 며칠 뒤, 백여 명이 넘는 토벌대가 꾸려졌다.
"두 자릿수 서열의 전사 스물, 세 자릿수 서열의 전사 일백이 토벌에 지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어. 백스물의 전사 중에서 살아온 건 고작 십여 명에 불과했으니."
이로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미미한 분노가 흘러나왔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저 안은 온갖 종류의 언데드가 득실거리는 지옥이라고. 건드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이야."
설명을 마친 이로나가 고개를 들었다.
"여긴 위험해.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아."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평소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반면 실반은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난 괜찮을 것 같은데."
"실반! 말했잖아. 토벌대의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그치만 내버려 두면 언데드가 쏟아진다면서?"
"그, 그건······."
이로나가 이를 꽉 물었다.
실제로 스켈레톤 워리어가 튀어나왔으니까. 뭐라고 대답을 할지 망설이던 때, 실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데드만 득실거린다고 했지? 그럼 괜찮아."
그의 입가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여유로움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별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
자신만만한 대답에 페르다는 피식 웃었다.
언데드만 득실거린다고? 실반에게 있어선 최적의 조건이다. 마력만 충분하다면 던전 안의 모든 언데드를 휘하에 둘 수도 있을 테니.
'어쩌면 격을 가진 언데드가 있을지도 몰라.'
신화급 사령술사에게 있어, 언데드 던전은 최고의 보물.
페르다의 입가에 기대 어린 미소가 맺혔다.
"나도 실반의 의견에 찬성한다."
"하지만······!"
"아까 봤잖아? 실반이 언데드를 어떻게 했는지."
이어진 대답에 이로나의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녀도 봤다. 서른 마리가 넘는 스켈레톤 워리어가 실반에게 무릎을 꿇는 광경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무리 실반이 강한 사령술사라고 해도 던전은 일족의 전사가 떼죽음을 당한 곳. 그런 곳에 조카를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로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실반이 말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만약 위험한 게 나오면 얘들이 지켜준다니까."
영웅의 격을 가진 세 망령.
그나마 좀 안심이 됐다. 하지만 선뜻 결정하기는 여전히 망설여졌다. 그러던 중 이로나의 시선이 실반의 눈동자에 가 닿았다.
강한 고집이 깃든 눈동자. 이를 보자 문득 떠오른 이가 있었다.
'이리나······.'
평소에는 한없이 착하지만, 고집을 부릴 땐 누구보다 강했던 아이.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이런 부분까지 똑같았다. 잠시 고뇌하던 이로나는 이내 백기를 들었다.
"······알겠어. 한번 들어가 보자."
"정말?"
"단, 출구의 위치부터 확보해야 해. 토벌대의 말에 따르면 출구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있다고 하니까."
"응, 좋아! 그렇게 할게."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자 실반은 배시시 웃었다.
잠시 후, 셋은 던전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Chapter 18. 라디나의 묘지 (1)
Chapter. 18
라디나의 묘지
던전에 들어온 지도 벌써 세 시간째.
출구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의외로 이로나는 얌전했다. 빨리 출구를 찾아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걸 초탈한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
이유는 간단했다.
딱히 위기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덜그럭, 덜그럭-
그때 등 뒤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비친 것은 황금색 안광(眼光). 무려 수백여 쌍에 달하는 숫자였다.
삼백아흔두 마리.
실반이 휘하에 둔 언데드의 숫자다. 좀비나 스켈레톤부터 구울, 스컬 울프에, 하위 망령들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마주친 모든 언데드를 강탈했으니까. 야금야금 빼앗을 땐 몰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럴수록 페르다의 고민도 깊어져만 갔다.
'······뒤처리를 어떻게 한다?'
이만한 숫자의 언데드를 데리고 던전 밖을 나서면 무조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성국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던전에서 나가기 전에 전부 처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다른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던 중,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뒤따라오던 이로나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뼈가 맞부딪치는 소리. 스켈레톤이다. 귀를 쫑긋 세운 실반이 걸어 나오자, 페르다는 자연스레 옆으로 비켜섰다.
"에휴, 대체 얼마나 더 나올 생각인 거야?"
지겨운 듯이 한숨을 내쉬는 실반.
이제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허공에 손부터 내민다. 처음에 스켈레톤 워리어를 강탈했을 때와는 달리, 손놀림이 훨씬 간결해졌고 거리 문제도 다소 해결됐다.
=====
[알림]
*실반 아크듀트가 스켈레톤 (12)구를 강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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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보폭으로 마흔 걸음.
이제 이 정도 거리에서도 강탈이 가능하다. 속도 역시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처음엔 5분 남짓 걸리던 시간이 이제는 1분도 걸리지 않게 됐으니.
제자의 경이로운 성장 속도에 페르다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반면 실반은 따분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들어왔나."
지겨울 만도 할 거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려워 보일지 몰라도, 실반은 그저 세 시간 동안 똑같은 일만 반복한 것에 불과하니.
새로 늘어난 열두 구의 종이 무리에 합류하자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페르다는 스킬창 하나를 눈앞에 띄웠다. 이그드라실 시스템의 엑스트라 스킬, [등가교환]이었다.
간섭률이 백 퍼센트에 도달한 던전에 한해, 페르다의 손에 죽은 몬스터는 사체의 값어치에 맞는 아이템으로 바뀌는 능력. 좋은 스킬이긴 하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
몬스터의 사체가 반짝이다가 아이템으로 변한다. 누구나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게 뭐냐고 질문할 게 뻔했다.
그래서 던전에 들어온 직후부터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달았다. 괜한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왜냐면 장장 세 시간 동안, 전투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전부 언데드만 나오길······.'
그가 나설 일이 생기지 않기를. 페르다는 간절히 바랐다.
우뚝-
그때 허공에서 바람의 상위 정령, 시오르가 나타났다. 매의 모습을 한 채, 날개를 퍼덕이던 그는 이내 이로나의 어깨에 앉았다.
[앞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져.]
"바람?"
이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방이 막힌 던전에서 바람이 분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순간, 그녀는 혹시나 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출구가 나타난 건가?"
"출구?!"
실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묘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을 보니 어지간히도 지겨웠나 보다.
"얼른 가보자!"
실반의 재촉에 일행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나아갔다.
얼마 후,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는······."
잿빛 연기로 가득 찬 하늘. 뒤이어 바싹 마른 잡초가 보였다. 어스름한 안개가 발밑에 깔렸고 여기저기 부서진 돌조각이 널려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풍경.
페르다는 단번에 이곳의 정체를 파악했다.
'묘지.'
돌조각이라고 생각했던 건 부서진 비석 조각이었다. 어스름한 안개에서 음차원의 마나가 느껴졌으며 저 멀리, 잡초 사이로는 썩은 살점이 달라붙은 뼈다귀가 보였다.
으드드득-!
그러던 중 기묘한 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렸다. 몇몇 스켈레톤들이 땅에서 솟구치는 광경이 보였다. 이제 막 탄생한 것처럼, 시퍼런 안광을 줄기차게 뿜어대고 있었다.
"내가 할게."
실반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푸른 안광이 황금색으로 물드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여 초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스켈레톤 무리를 강탈한 실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빨리 나가고 싶은 모양이다. 페르다는 투덜거리는 실반의 어깨를 다독인 뒤, 좀 더 걸음을 옮겼다. 묘지는 광활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드넓었기에.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 돌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알림]: 분석률이 일정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분석률: [35 / 100]
*분석 결과: [던전명: 라디나의 묘지]
=====
일단 지구에 있던 던전은 아니었다.
이내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시야가 고정됐다. 이어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오십 보 정도의 거리에 홀로 솟은 봉분(封墳).
평평한 대지에 홀로 솟아있으니, 눈에 띌 만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분은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또 언데드인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비켜섰다. 실반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돌연 네 개의 쇠꼬챙이가 불쑥 솟아났다.
그와 함께 봉분을 덮고 있던 적갈색의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도 날아왔으나, 실반의 몸에 닿은 건 하나도 없었다.
페르다와 이로나가 사전에 전부 쳐낸 덕분이었다.
콰득! 뿌드득!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봉문은 와르르 무너졌다. 뒤이어 거대한 몸집을 가진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덩치가 무척이나 컸다. 얼핏 보면 2층짜리 건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또 생김새는 어찌나 흉측한지, 머리엔 여섯 개의 눈알이, 비대한 몸통에는 네 개의 팔이 달렸다.
그러던 중 돌연 괴물이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그어어어어!"
칼로 철판을 긁으면 저런 소리가 날까?
실반과 이로나가 얼굴을 구긴 채 귀를 틀어막았다. 포효를 끝마친 괴물은 곧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는 쇠꼬챙이의 정체도 함께 드러났다.
"······그물?"
이로나의 말처럼 쇠꼬챙이에는 촘촘한 그물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아마 저 쇠꼬챙이를 모두 펼치면 거대한 그물이 될 거다.
얼마 후, 괴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이로나는 페르다와 마찬가지로 살며시 비켜섰다.
"실반, 그럼 부탁할게."
어차피 이번에도 강탈을 사용해 빼앗겠지. 이로나는 격려하듯 실반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실반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이로나를 올려봤다.
"저건 언데드가 아닌데?"
"뭐라고?"
"마력이 이것저것 뒤섞였어. 저건 못 뺏을 거 같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 실반.
이로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괴물이 네 개의 팔을 사방으로 벌렸다.
촤르르르륵-!
덩달아 넓게 펼쳐진 그물. 괴물이 팔을 휘두르자, 그물은 셋을 덮치듯이 날아들었다. 허나 허탕이었다. 그물이 펼쳐진 직후, 페르다가 실반을 챙겨 자리에서 이탈했으니까.
이로나 역시 제 몸 하나 빼낼 능력은 충분했다.
쾅! 콰앙!
그물이 땅에 박혔다. 거대한 면적을 집어삼킨 그물 안에는 애꿎은 언데드 무리만 들어있었다. 몇몇 언데드가 그물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그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며 페르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그물을 무기로 사용할 땐······.'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할 목적이 가장 컸다. 일단 그물로 상대를 붙든 뒤, 검이나 창으로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투법. 하지만 괴물이 들고 있는 건 오직 그물뿐이었다. 다른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잡기만 해서 뭘 어쩔 생각이지?"
이로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의문을 던졌다.
그때 실반과 이로나의 귀가 쫑긋거렸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페르다도 덩달아 잿빛 하늘을 응시했다. 멀리서부터 뭔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저건······."
새는 아니고 벌레는 더더욱 아니다. 가늘고 긴 무언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다는 그게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살라만! 불의 장벽을 펼쳐!"
이로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곧 시뻘건 화염이 셋의 머리 위를 감쌌다. 뒤이어 하늘에서 거센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퍽! 파바바바박!
하나하나가 화살로 이루어진 폭우였다.
화살의 비는 정확히 그물 위로 쏟아졌고, 안에 갇힌 수십의 언데드는 변변찮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고슴도치로 변했다. 단순히 화살에 박혀 쓰러지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몇몇 좀비는 아예 갈가리 찢어졌으니까.
툭- 털썩!
화살에 맞은 언데드들이 실 풀린 인형처럼 쓰러졌다. 신체가 손상되며 음차원의 마나가 모두 새어나간 탓이다. 그저 단순한 시체가 되어버린 언데드의 모습에 이로나는 즉각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뿌연 흙먼지가 떠다니는 탓에 적의 정체나 숫자를 알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구긴 채,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시오르. 저거 다 날려버려!"
[알겠어!]
시오르가 몸을 부풀렸다. 금세 거대해진 날개. 잠시 후, 날갯짓을 시작하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후우우우웅-!
목표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 흙먼지를 깔끔하게 날려버리자, 적의 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백여 구에 달하는 스켈레톤 아처였다.
"이번엔 언데드라서 다행이네."
이로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반이 있는 이상, 언데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으니.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쩌지? 이 거리에서 강탈하긴 힘들 것 같은데······."
실반이 곤란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강탈에 필요한 최소한의 유효거리는 마흔 걸음. 그러나 스켈레톤 아처와의 거리는 어림잡아도 백 보는 훨씬 넘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위치가 발각된 걸 깨달은 탓인지, 스켈레톤 아처들이 거리까지 벌렸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페르다는 눈을 빛냈다.
실반을 안고 빠르게 접근하면 적을 모조리 강탈할 수 있으리라. 세계급 이하의 언데드는 실반에게 선공을 가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괜찮아."
페르다는 안심하라는 듯이 실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수많은 언데드 무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쟤들더러 부수라고 하면 되니까."
어차피 던전을 벗어나기 전에 모조리 처리해야 한다. 그럼 차라리 이렇게라도 써먹는 게 이득일 터. 실반도 페르다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나! 화살 또 날아온다!]
머리 위에서 시오르의 경고가 들려왔다. 저 멀리, 스켈레톤 아처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실반은 수백여 구에 달하는 언데드를 향해 명령했다.
"공격해!"
짧고 간단한 명령.
황금색 안광이 번뜩이며 빛났다.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언데드의 군세는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두두두두두두-!
묘지를 강타하는 거친 진동. 그물을 든 괴물이 포효했다. 녀석은 네 개의 팔을 다시 사방으로 벌렸다. 다시 그물을 펼칠 요량이었으리라. 하지만 괴물은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좀비와 구울들이 개미 떼처럼 괴물에게 달라붙은 탓이었다. 그들은 걸신들린 아귀처럼 게걸스럽게 괴물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콰득! 우드득! 쩝쩝!
거대한 괴물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수천 조각이 넘는 육편(肉片)을 뒤로 한 채, 다시 진군이 시작됐다.
파바바바밧-
그 무렵, 다시 쏟아진 화살의 비. 하위 언데드들은 화살받이가 되어 쓰러졌지만, 급이 높은 언데드들은 화살을 쳐내거나 방패로 막으며 진격했다.
실반의 군세는 이윽고 적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퇴로를 차단했다. 그러고는 아처 하나에 스켈레톤 워리어 서너 구가 달라붙어 도끼를 휘둘러댔다.
퍽! 퍽퍽퍽!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졌다. 그들은 아처의 뼛조각 하나하나를 가루로 만든 뒤에야, 다음 사냥감을 찾아 몸을 돌렸다.
얼핏 본다면 난전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실반의 군세가 우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숫자만 따져도 세 배 이상 차이가 났으니. 전장을 압도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정령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우리가 나설 기회는 없어 보이는군.]
[그러게 말이야. 와, 진짜 엄청난데?]
이로나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백에 달하는 숫자다 보니 그 위용이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별안간 실반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전투 불능이 된 언데드들. 곧이어 그에게서 흘러나간 음차원의 마력이 그들의 몸뚱어리에 깃들었다.
"너희도 다시 일어나서 싸워."
나직한 한 마디와 함께 언데드들이 몸을 꿈틀거렸다. 잠시 후, 그들은 서서히 일어났다. 신체가 아예 가루로 변해버린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데드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아? 저걸 되살린다고?]
정령들이 경악에 가까운 외침을 내뱉었다. 이로나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멍한 눈으로 실반과 언데드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언데드의 주 동력원은 음차원의 마력.
신체가 부서지면 음차원의 마력은 빠르게 소실된다. 그리고 신체에 깃든 마력이 전부 사라졌을 때, 언데드는 전투 불능이 된다.
이 경우, 쓰러진 언데드를 다시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부서진 신체에 음차원의 마력을 집어넣어도 재차 새어 나올 뿐이니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령술사들은 전투 불능이 된 언데드를 한데 뭉쳐 누더기 골렘을 만들거나, 혹은 다른 언데드를 만드는 재료로 쓰곤 했다.
하지만 실반은 달랐다. 그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담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르고 간단하게. 대체 뭘 어떻게 한 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테니,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그때 이로나의 눈빛을 본 걸까?
실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Chapter 18. 라디나의 묘지 (2)
"응? 왜 그렇게 봐?"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나는 아직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도 못했으니. 반면 페르다는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저것이 '사자소생'의 진짜 능력이었으니까.
=====
[능력]: 사자소생(死者甦生)
[등급]: 영웅
[단계]: 3/10
[효과]: 죽은 자를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다. 추가로 전투 불능이 된 언데드를 한 번 더 되살리는 게 가능하다. 단, 대상의 육체가 소멸하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면 스킬은 발동하지 않는다.
*소모 마력:
[3/25/135/450]
[일반/위인/영웅/전설]
=====
지하수도에서 쥐 떼를 되살리던 당시.
실반은 망자 소환 대신, 사자소생이라는 스킬을 얻었다.
'처음엔 그냥 망자 소환이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죽은 자를 언데드로 되살린다는 점은 똑같았다. 다만 추가 능력이 하나 붙어있었다. 방금 본 광경처럼, 전투 불능이 된 언데드를 다시 일으키는 것.
'여긴 걱정할 필요 없겠어.'
이미 전장은 실반의 군세가 압도하고 있다. 아처들의 숫자도 많이 줄었으니 이제 곧 전투가 끝나리라.
상황을 지켜보던 페르다가 몸을 돌렸다. 뒤로 슬쩍 빠진 그는 이로나의 곁을 스쳐 지나며 작게 속삭였다.
"잠시 자리를 비우마."
"뭐?"
"실반을 부탁한다."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페르다는 없었다. 아니, 아예 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곁에 없던 것처럼.
***
페르다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장을 지나, 어스름한 안개 너머로 향했다. 도중에 몇몇 언데드가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은 페르다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은신 스킬, '하이드 워커'를 사용 중이었으니까. 페르다보다 격이 높지 않은 이상,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일행과 떨어져 홀로 행동하는 이유는 찾는 게 있어서였다.
'이제 슬슬 보스가 나타날 때도 됐어.'
던전의 몬스터들은 슬슬 바닥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직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던전 보스가 나타날 차례. 그러니 일단 던전 보스가 누군지 낯짝부터 볼 생각이었다.
'만약 격이 있는 언데드라면······.'
말 그대로 목숨만 붙여둔 다음, 실반에게 가져가면 된다. 그럼 나머진 실반이 알아서 할 테니까.
문제는 보스가 언데드가 아닐 경우다. 그물을 다루던 괴물처럼 정체불명의 몬스터라면 그냥 처치하는 게 나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로나가 숨통을 끊게 한 다음, 언데드로 되살리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리스크가 컸다. 만약 자칫 잘못해서 페르다가 숨통을 끊으면, 보스는 등가교환에 의해 아이템으로 변할 테니까. 그럼 또 이를 설명하기가 애매모호 해진다.
'그럴 바엔 몰래 숨통을 끊고, 아이템으로 받는 게 낫지.'
일단 독식한 뒤, 필요한 게 있으면 나중에 이유를 붙여 건네주자.
그리고 만에 하나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면, 숨통만 붙여둔 채 끌고 가면 된다.
어찌 됐든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홀로 행동하는 게 편했다.
우뚝-
그러던 중 페르다의 걸음이 멈췄다. 안개 너머로 벽이 하나 보였다. 짙은 회색의 돌로 이루어진 벽. 그리고 그 옆으로 커다란 석문(石門)이 하나 보였다. 손을 대보니 금세 석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던전의 출구.'
저 밖으로 나가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실반이 알면 좋아하겠네. 페르다는 풀썩 웃음을 터뜨리고는 몸을 돌렸다. 출구를 찾았으니 이제 던전 보스를 찾을 차례.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홀로 행동한 지 십여 분 후.
'찾았다.'
마침내 보스의 거처로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페르다는 숨을 들이마신 뒤, 이내 호흡을 멈췄다. 동시에 기척도 지웠다. 하이드 워커의 지속시간이 끝났으니, 쿨타임이 걸렸을 동안엔 이렇게 접근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늘 사이로 몸을 숨긴 채, 은밀히 걸음을 옮겼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구겨졌다.
주변에서 아무런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즉, 던전 보스가 이곳에 없다는 소리였다.
'어디로 갔지?'
차분한 눈으로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뭔가에 발이 걸렸다. 아마 돌부리겠지.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찰나, 그의 시야에 반짝이는 뭔가가 들어왔다.
"이건······."
자세히 보니 돌부리가 아니라 오래된 비석이었다. 비석 표면에는 누군가 문장을 새겨놨는데,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글자가 반짝였다. 엘프어로 적힌 문장. 살며시 고개를 숙여 비석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사랑하는 딸, 라디나 위그더스에게.
"라디나?"
페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냐면 그가 있는 이 던전의 이름이 '라디나의 묘지'였으니까. 그럼 혹시 이 묘지 근처에 보스가 묻혀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페르다는 비석 주변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러던 차에 묘지 뒤에도 문장이 적힌 걸 발견했다.
-못난 아비, 헤르온이.
그 순간, 페르다의 얼굴이 굳었다.
헤르온. 원작에 나왔던 이름이다.
그것도 단순한 엑스트라나 조연이 아닌, 실반의 목숨을 위협했던 강적. 페르다는 가만히 입을 닫은 채,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세르네크 숲이 불탔다. 재앙의 군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실반은 눈물을 집어삼키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실반! 위험해!'
그 순간. 갑자기 이로나가 실반을 끌어안았다. 곧 그녀의 등에 화살이 연달아 박혔다. 짧은 비명과 함께 불타는 숲 너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잿빛 로브를 뒤집어쓴 자. 그를 본 실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왜냐면 그야말로 숲을 불태운 장본인이었으니.
한때 누구보다 숲을 사랑했으나, 이젠 누구보다 숲을 증오하는 자. 고결한 하이엘프였지만, 이제는 추악한 언데드가 된 자.
숲지기 헤르온 위그더스였다.」
원작 <구원자>의 첫 번째 시즌.
첫 번째 대재앙을 막지 못했을 때 나왔던 장면이다.
"여기에 이런 게 있다는 소리는······."
이 던전의 보스가 헤르온이라는 뜻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냐면 소설 속에 나왔던 숲지기 헤르온은 '격이 있는 언데드'였기 때문이었다. 또 살아생전 신궁(神弓)이라 불렸을 정도로 강자이기도 했으니.
그때 돌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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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분석률이 일정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분석률: [55 / 100]
*분석 결과: [던전 보스: 헤르온 위그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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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적중했다. 던전 보스의 정체를 확인한 페르다는 입가를 살며시 끌어올렸다.
'만약 헤르온을 휘하에 둘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초반부터 강한 아군을 손에 넣는 셈이니.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페르다는 온몸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비석 근처나 혹은 아래에 뭔가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수상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상자. 단단히 봉인되어 있어, 강제로 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뭔가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페르다는 마력을 살짝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그드라실 시스템이 분석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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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영혼의 조각이 담긴 상자
[등급]: 영웅
[종류]: 봉인구
-영혼의 조각이 봉인되어 있다.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주인의 허락이 필요하다. 상자에 갇힌 영혼을 분석한 결과, '라디나 위그더스'로 확인된다. 단, 기간이 만료되면 봉인이 풀리니 주의할 것.
[주인]: 헤르온 위그더스
[기간]: 198일 14시간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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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온의 딸, 라디나의 영혼이 담긴 상자.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이걸 가지고 있으면 추후 쓸모가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상자를 인벤토리 안에 넣던 그때.
쿠우우우웅-
멀리서 굉음과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방향을 가늠해보니 실반이 있던 곳이다. 뭐지? 지금쯤이면 전투가 끝났을 텐데. 불현듯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설마."
페르다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곧이어 그는 즉각 몸을 돌렸다.
***
페르다가 사라지고 얼마 후.
전투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수적으로 가뿐히 압도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더 이상 해치울 적이 없자 흉포하던 실반의 군세는 금세 얌전해졌다. 묘지 한가운데 서서 주인의 명령을 기다릴 뿐.
이 광경에 살라만은 솔직한 감탄을 내뱉었다.
[놀랍군. 이런 전투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게 말이야.]
시오르 역시 놀란 얼굴로 날개를 맞부딪쳤다.
[저 아이만 있으면 숲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에 이로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백여 명의 전사가 목숨을 잃은 곳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던전에 들어와서 실반의 활약을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반년 만에······.'
엄청난 능력을 손에 넣었다. 비록 하프 엘프이긴 하나, 이 정도 능력이라면 일족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감과 함께 이로나가 눈을 빛냈다.
한편 실반은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페르다는?"
"응? 아, 좀 전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정확히 어디로 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자리를 비우는 이유를 묻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으니까.
"그렇구나. 알겠어."
반면 실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에 이로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어디 갔는지 알고 있어?"
"응? 아니, 모르는데?"
"그런데 왜······."
"이유가 있으니 자리를 비웠겠지."
실반의 목소리에서 강한 믿음이 묻어났다. 고작 반년 남짓 있었을 뿐인 사이인데 저리도 강한 신뢰를 보낼 줄이야.
이로나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이로나!]
살라만이 다급히 소리쳤다. 곧이어 뭔가가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노리는 것은 실반. 이로나는 반사적으로 창을 고쳐잡고는 그대로 휘둘렀다.
퍼엉-!
강한 충격과 함께 허공에서 강렬한 폭발음이 들렸다.
폭발 직전, 이로나는 그것의 정체를 보았다. 음차원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색 화살.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위협 사격.'
화살이 날아온 궤적으로 짐작했을 때, 가만히 놔두었으면 아마 실반의 발아래에 박혔을 터다. 기습이라는 이점을 버리고 왜 위협 사격을 한 거지? 그런 생각을 했으나 답은 알 수 없었다.
또 다시 정령들의 경고가 이어진 탓이었다.
[또 온다! 이번엔 마법이야!]
그 말에 바로 고개를 들었다. 화살보단 느리지만, 무시할 수 없는 속도. 강력한 흑마법의 일종인 본 스피어(Bone spear)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반이 아닌, 이로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살라만! 불의 숨결을······."
저걸 쳐낸다면 뼛조각이 사방으로 튈 거다. 그럼 실반에게 피해가 갈 터. 그러면 차라리 태워버리는 게 낫다.
하지만 살라만보다 먼저 앞을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일곱 죄악의 악령. 흐물이였다.
꿀꺽-
흐물이는 본 스피어를 그대로 삼켰다. 곧이어 들려오는 오독거리는 소리. 마치 닭 뼈를 씹어먹듯 맛있게도 먹었다. 뒤이어 단단이와 뾰족이가 실반의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으응, 난 괜찮은데. 너야말로 괜찮아?"
실반의 시선이 흐물이에게로 향했다. 마법을 삼켜도 되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흐물이는 이런 걸 잘 먹습니다.]
[맞습니다. 아마 없어서 못 먹을 겁니다.]
단단이와 뾰족이가 대신 답했다. 곧이어 돌아온 흐물이도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안심한 실반은 갑작스레 공격이 날아든 방향을 쳐다봤다.
저벅저벅-
그 순간, 안개 너머로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잿빛 로브를 뒤집어쓴 자. 장궁(長弓)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그가 화살을 쏜 장본인이리라.
뒤이어 마법사 로브를 걸친 스켈레톤도 보였다. 손에 들린 지팡이를 보아하니, 아마도 리치(Lich)인 모양이다. 그때 리치의 이빨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쳤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침입자로다."
검으로 대리석을 긁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썩은 이빨 사이를 비집고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뻥 뚫린 안구에서 시퍼런 안광이 분노하듯 타올랐다.
"알량한 사령술을 믿고, 감히 왕에게 반기를 들다니!"
그 일갈에 이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다. 말을 한다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격이 있다는 소리니까. 그녀의 낯빛에 긴장한 기색이 깃들던 그때.
희뿌연 뭔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세 망령이었다. 몸을 부르르 떨던 그들은 이내 분노가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Chapter 18. 라디나의 묘지 (3)
[왕? 지금 누구를 왕이라고 부른 거지?]
[고작 위인의 격을 가진 해골 따위가.]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서릿발처럼 매서운 호통. 허나 리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실로 우둔하도다. 모든 죽음께서 우릴 지켜보는데, 격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곧이어 리치의 지팡이가 실반을 가리켰다.
그는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알량한 사령술을 펼치는 자야. 모든 죽음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도록 해라. 그리하면 모든 육체의 족쇄에서 벗어나, 위대한 사령술사가 될 길이 열리리니."
입에 담지 못할 망발에 세 망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반이 누군가? 그들이 복종을 맹세한 모든 부정한 것의 왕이다. 그런 이에게 감히 무릎을 꿇으라고?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왕이시여. 부디 제게 명령해주십시오.]
[저 건방진 죄인의 죄를 묻고 오겠나이다.]
[흐물이는 리치도 잘 잡습니다.]
망령들의 목소리에서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실반이 명령만 하면, 당장이라도 리치를 갈가리 찢을 기세였다.
"잠깐 조용히 해봐."
실반에게서 나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세 망령은 즉각 입을 다물었다. 이어 실반은 리치가 있는 방향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실험재료를 보듯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이로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다시 실반이 입술이 달싹였다.
갑작스런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실반은 손가락으로 리치와 잿빛 로브의 활잡이를 가리켰다.
"저 둘, 언데드 맞지?"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는 당연히 언데드였고, 저 옆에 있는 활잡이도 필시 그러하리라. 왜냐면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지독한 사기가 느껴졌으니.
그 순간 이로나는 실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혹시 빼앗을 수 있는 거야?"
"음, 마나 배열이 좀 다르긴 한데 시도해볼 가치는 있어 보여."
희미한 미소와 함께 실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세 망령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미안한데 시간 좀 벌어줄래?"
실반의 부탁에 망령들은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맡겨주십시오.]
[저 건방진 놈은 저 혼자라도 충분합니다.]
[뼛조각 하나까지 씹어먹겠습니다!]
"아니, 권속으로 만들 거니까 없애지는 말고."
실반이 어색하게 웃었다.
곧이어 표정을 지운 그는 두 언데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리가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것 같다. 실반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이해할 수 없다."
그때 이로나의 귀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쇠로 쇠를 긁는 기분 나쁜 음색에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리치가 있는 방향. 허나 리치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 순간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살을 겨눌 수 없다. 공격이 불가하다."
이제야 알았다. 리치의 옆에 있는 잿빛 로브 활잡이의 음성이다. 그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실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리치가 대답했다.
"그럼 다른 잡것들부터 배제하면 그만이니라."
리치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 마법진이 지면에 새겨졌다. 이로나는 실반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정령들도 불러두었다.
"너희에게 볼일은 없다. 사라져라."
뼈만 남은 앙상한 손가락이 이로나에게 향했다. 음차원의 마력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실반의 세 망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리치 따위가 우리를 잡것 취급하다니.]
[네 마법, 내 간식으로 대체되었다.]
흐물이가 배처럼 보이는 부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 광경에 심기가 불편해진 걸까? 리치의 푸른 안광이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그러던 차에 다시 활잡이의 음성이 들렸다.
"······셋 모두 영웅의 격을 가졌다."
무감정한 말투에 곤란한 음색이 깃들었다.
허나 리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을 터인데? 이제 격은 의미가 없음을."
리치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다시 새겨진 보라색 마법진. 곧이어 그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저 애송이는 망령을 다루는 법조차 모른다. 저만한 망령을 가지고도 저따위 소꿉장난을 치고 있는 걸 보면."
리치가 가리킨 곳엔 수백에 달하는 언데드들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격을 가진 권속을 셋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저런 저급한 부하를 부리는 것을.
그러던 그때였다.
[왕께서 명령하셨다. 시간을 벌라고.]
[없애지 말라는 당부 또한 하셨다.]
[허나, 죽을 때까지 짓밟으란 말은 하지 않으셨지.]
어느새 리치의 지척까지 접근한 세 망령.
이를 본 활잡이는 황급히 리치와 거리를 벌렸다. 반면 리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망령을 쳐다봤다.
"고작 그따위 협박을 지껄이려고······."
하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단단이가 돌연 앞으로 튀어나갔기에.
영웅의 격을 가진 타락한 망령 기사. 그는 방패를 앞세운 채, 리치를 거칠게 짓눌렀다.
콰득!
[첫 번째 죄는 왕께 무례한 말을 한 죄.]
무릎뼈가 으스러졌다. 리치의 몸이 앞으로 기울자 거대한 랜스(Lance)가 그의 몸을 사정없이 깨부쉈다. 가루가 될 때까지, 리치는 변변찮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사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곧이어 리치는 다시 형상을 갖추었다. 영혼이 담긴 구슬, 라이프 베슬(Life vessel)이 부서지지 않는 이상, 리치는 죽지 않는다. 음차원의 마력을 소모해, 육체를 재구성할 뿐.
그러나 망령들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두 번째 죄는 왕께 무례한 태도를 보인 죄.]
뾰족이, 썩은 가시나무 정령이 리치의 머리에 몸을 박았다.
수천, 수만 개의 가시가 솟구쳐 리치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이후 리치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육체를 재구성했다.
"크흐으! 한낱 망령 따위가!"
두 번이나 육체가 소멸했다. 굴욕감을 느낀 건지, 리치는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막대한 마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마법은 발동하지 못했다. 리치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기에.
[세 번째 죄는 왕의 앞에서 다른 버러지를 왕이라 부른 죄다.]
우적우적!
일곱 죄악의 악령, 흐물이가 리치와 함께 인근 묘지를 통째로 씹어 삼켰다. 만약 근처에 라이프 베슬이 있었다면 존재가 소멸했으리라.
그로부터 얼마 후, 리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재구성되는 속도가 느려진 것으로 보아하니, 마력이 바닥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게냐! 반격해!"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활잡이가 얄미웠던 탓일까?
리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격의 차이가 크다. 이대로라면 승산이 낮다."
"그래서 앉아서 당하겠다고?"
"재검토 결과, 여전히 승산은 낮다."
승산이 낮다는 말만 반복하는 활잡이.
그 말이 듣기 싫었음일까? 리치는 지팡이로 바닥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활잡이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승산을 높일 방법을 찾았다."
"그래, 뭐든 좋으니 빨리 저 망령들부터······."
그 순간, 활잡이가 지면에 왼팔을 쑤셔 박았다. 묘지 전체에 가느다란 진동이 일었다. 잠시 후, 활잡이는 다시 팔을 꺼냈다. 그 손에 들린 건 피처럼 새빨간 구슬.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이를 본 리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냐면 저게 바로 리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프 베슬이었기에. 리치의 푸른 안광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안 돼! 멈춰!"
"너를 먹어, 승산을 높이겠다."
콰득-!
비명을 질렀지만 부질없었다. 곧 유리구슬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색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안에 담겨 있던 리치의 격과 마력이 활잡이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한 조각도 남김없이 전부.
리치의 육체는 까슬한 모래로 변해 바닥에 쌓였다. 실로 허무한 최후였다. 이를 지켜보던 이로나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었다.
"뭐야? 갑자기 왜 자기들끼리······."
이로나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었다. 당황한 건 세 망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명 더. 실반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왜 이러지?"
실반은 오랜 시간을 들여 활잡이와 리치의 마나 배열을 분석했다. 그리고 재배치를 어떻게 할지도 확인을 마쳤다. 이후 세 번이나 검토했고, 이상이 없음을 확신했다.
"제대로 했는데······."
그런데 막상 음차원의 마나를 집어넣으려니, 그냥 튕겨 나왔다. 라이프 베슬이 부서져 소멸한 리치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럼 활잡이만이라도 강탈에 성공해야만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겪는 실패에 실반이 당황하던 그때, 멀리 활잡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까진 널 공격할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중얼거림이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이유는 모른다. 공격하려고 하면 거부감이 들었으니."
그가 장궁을 들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시위를 서서히 뒤로 잡아당겼다. 잿빛 후드 너머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파앙-!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진 화살. 마치 사나운 늑대가 달려드는 것처럼, 화살은 실반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왕이시여. 제가 먹겠습니다!]
바로 흐물이였다. 그는 리치를 삼켰던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이번엔 먹을 수 없었다.
콰아아앙!
"흐물아!"
실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흐물이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 탓이다.
워낙에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지라 화살을 낚아챈 건지, 아니면 화살에 꿰뚫린 건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왕이시여. 외람된 말씀이오나.]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단단이와 뾰족이. 둘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비록 일시적인 변화로 보이긴 합니다만.]
[녀석의 격이 높아졌습니다.]
긴장한 목소리를 들으니, 필시 영웅의 격보다 높아진 것처럼 보였다. 격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올릴 수 있는 거였나? 실반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맺히던 그때.
파바바바바박-!
시커먼 화살 비가 내렸다.
목표는 실반의 군세. 아까 전, 스켈레톤 아처가 쐈을 때와 비교하면 격이 달랐다. 왜냐면 화살 비가 그친 직후, 자리에 서 있는 언데드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폭발하면서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았다. 수백에 달하는 언데드가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지자 이로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뭐가 대체 어떻게 된······."
뒤이어 재차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두 대. 망령들은 황급히 실반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나 이번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이로나의 양옆에 있던 두 정령이었다.
퍽! 퍼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두 정령은 변변찮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두 정령은 정령계로 역소환됐다. 그 여파 때문일까? 돌연 이로나의 입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쿨럭!"
"이로나!"
실반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체격이 다른 탓에, 둘은 한데 엉켜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이로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어난 피를 닦아내며 가만히 속삭였다.
"······도망가, 실반. 난 괜찮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창을 움켜쥐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 바로 코앞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갈 수 없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활잡이. 망령들이 다급히 따라붙었으나, 둘 다 화살을 한 대씩 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이제껏 보지 못한 압도적인 강함.
이로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실반의 스승을 자처하던 얄미운 인간. 이로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역시 인간은 다 똑같아.'
아마 그 남자도 이런 강대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도망친 것이리라. 아주 잠시나마 인간을 믿었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계약에 따라 침입자는 모두 말살한다."
활잡이가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역시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어.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소용없었다. 이로나는 실반을 꽉 끌어안은 채, 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그때 이로나의 눈에 실반의 얼굴이 들어왔다.
"······!"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이다. 그런데도 실반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지?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던 그때,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저런 미소를 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그래, 용병 생활을 끝내고 수년 만에 숲에 돌아왔을 때. 입구에서 기다리던 이리나와 재회했을 때다. 당시 그 아이가 저런 미소를 지었지.
저 미소에 담긴 의미는······.
보고 싶었던 사람을 봤을 때.
서걱-
그 순간, 뭔가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활잡이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그가 이 사실을 인지했을 땐, 왼팔은 물론이거니와 발목, 무릎, 허벅지, 골반까지 모조리 부서져 내린 뒤였다.
쿠웅!
하반신을 잃은 활잡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곧이어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지금 누구한테 화살을 들이미는 거냐."
익숙한 음성과 함께 이로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낯익은 얼굴이다.. 동시에 실반은 참았던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
"페르다!"
Chapter 18. 라디나의 묘지 (4)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중.
페르다는 돌연 자세를 낮췄다. 안개 너머에서 심상찮은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자리에 멈춘 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다가 이내 호흡을 멈췄다.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조용히 아르케인의 비수를 뽑았다. 틈을 찾는다면 언제든 달려들 수 있게.
그로부터 얼마 후.
기척의 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리치.'
화려한 마법사 로브와 지팡이를 든 해골. 격이 느껴지긴 했지만 대단치는 않아 보였다. 때마침 그의 추측을 지지하듯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흠, 이제 막 위인의 격을 가진 녀석이네.]
프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페르다의 시선이 조금 옆으로 향했다. 리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우두커니 서 있는 잿빛 로브의 활잡이가 보였다.
존재감은 옅으나 리치보다 격이 높은 이.
그를 본 순간, 페르다는 확신했다.
'저 녀석이······.'
숲지기 헤르온이라는 것을.
그때 프랑도 그를 발견했는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오, 저건 좀 강해 보인다. 영웅급이긴 한데, 거의 경계를 넘기 직전이야. 언데드만 아니었어도 진즉 전설의 격까지 도달했겠어.]
혼자서 세르네크 숲을 불태웠던 강적이다. 당연히 그 정도 격은 가지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페르다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미안한데 하나만 물어볼게.]
그때 돌연 프랑이 말을 걸어왔다. 사뭇 진지한 말투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프랑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혹시 시체 애호가라거나 그런 부류야? 아니, 어떻게 계약한 이후부터 맨날 언데드만 찾아다닐 수가 있어?!]
프랑은 불평을 내뱉듯 외쳤다. 이후로도 뭐라고 투덜대긴 했는데,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어차피 시답잖은 소리일 테니까.
그러던 중 별안간 전투가 시작됐다.
콰아아앙-!
사실 전투라고 하긴 다소 민망했다.
세 망령이 리치를 가루로 만들기를 반복할 뿐이었으니. 물론 페르다의 눈에는 망령의 형체가 보이지 않아, 리치가 혼자 원맨쇼를 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근데 쟤는 왜 보고만 있는 거지?]
프랑의 말 대로 헤르온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지원 사격을 하거나,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
뭔가 꿍꿍이가 있음을 직감한 페르다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리치가 세 번째로 신체를 재구성했을 무렵, 헤르온이 행동을 개시했다. 별안간 지면에 팔을 박아넣은 헤르온. 그 팔이 왼팔이라는 걸 발견하자마자 페르다는 그 즉시 스킬을 발동했다.
'하이드 워커.'
곧 페르다의 기척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뒤이어 지면에 미약한 진동이 일었다. 모래알이 가늘게 떨리는 걸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늦게 스킬을 썼다면 발각될 뻔했다.
[저거 뭐야? 수색? 아니, 감지 능력인가?]
지면의 진동을 발견한 프랑이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다.
저건 그가 가진 위협적인 능력 중 하나였으니.
「헤르온이 왼팔을 땅에 박아넣자 그의 손이 나무뿌리로 변했다. 곧이어 수십 가닥의 잔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전신의 감각이 극대화되며 숨어있는 모든 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살아생전, 왼팔이 있던 자리에 세계수의 가지를 이식하면서 얻게 된 특별한 능력이다.
'······스물일곱 명.'
기습을 준비하던 다크엘프들의 위치가 일제히 발각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삐걱거리던 그의 머리가 서쪽 평원 너머의 숲으로 향했다.
'찾았다.'
싸늘하게 빛나는 헤르온의 안광.
사냥감, 실반 아크듀트가 저곳에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오백 미터 안의 생명체를 감지하는 능력. 동시에 마력 흐름을 탐지해 특정한 대상이나 물건을 찾아내는 능력. 원작에서도 워낙 밥 먹듯이 자주 사용해서 기억에 남았다.
그 무렵, 헤르온이 팔을 거두었다. 곧이어 그의 손에 붉은색 구슬 하나가 들렸다.
이를 본 프랑이 황당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엥? 저거 라이프 베슬이잖아? 뜬금없이 왜 아군의 약점을······.]
허나 프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돌연 헤르온이 라이프 베슬을 부숴버린 탓이었다. 리치는 모래처럼 변해 사라졌고, 그가 가졌던 모든 힘은 헤르온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뭐, 뭐야? 갑자기 격이 올라갔는데?!]
그 광경을 보던 프랑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 반면 페르다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저것도 헤르온이 가진 특별한 능력 중 하나였으니.
'포식.'
존재를 흡수해서 힘을 끌어올리는 능력.
만약 격을 가진 존재를 흡수한다면, 본인의 격 또한 상승한다. 물론 일시적인 효과이긴 하지만.
그때 페르다의 눈동자에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리는 실반. 아마 헤르온의 지배력을 강탈하려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왜냐면 강탈의 효능은 술자보다 격이 두 단계 낮은 '타자'에게만 유효하니까. 여기서 타자란, 헤르온이 아니라 그를 언데드로 만든 이를 뜻한다. 리치가 언급한, '왕'이라는 존재다.
'첫 번째 재앙.'
일명 모든 죽음이라고 불리는 대재앙.
원작에서 그는 최소 세계급 이상의 격을 가졌다고 묘사된다. 그럼 실반과 고작 한 단계만 차이나는 셈이니, 당연히 강탈은 실패할 수밖에.
그때 헤르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를 본 페르다는 두 눈을 차갑게 물들였다.
강탈에 실패함으로써, 실반의 행동은 헤르온에게 있어 선공(先攻)으로 인식됐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제부터는 사령술사의 격이 가진 효과에 상관없이, 실반을 공격할 수 있게 됐다는 소리다.
파앙-!
아니나 다를까, 헤르온은 곧장 화살을 쐈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영웅급의 망령 하나가 그대로 지면에 처박힐 정도였으니.
그 광경을 보며 아르케인의 비수를 고쳐잡았다.
이제 나서야 할 때다.
[조심해. 저 녀석, 지금 전설의 격을 가진 상태야.]
프랑의 경고와 함께.
페르다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곧이어 걸음을 옮겼다. 발이 땅에 닿았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기척이 점점 사라져갔다. 발끝부터 무릎, 배, 팔, 손가락, 가슴, 얼굴에 이르기까지.
이윽고 그는 주변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파바바바바박-!
화살 비와 함께 수백의 언데드가 전멸했다. 그 여파로 거세게 흔들리는 묘지. 그러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뒤이어 피를 토한 이로나가 실반과 엉켜 쓰러졌다. 여전히 페르다는 걸었다.
퍽! 퍼억!
두 망령이 당하고, 헤르온은 실반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이제 남은 거리는 다섯 걸음.
활시위가 서서히 뒤로 늘어났다.
세 걸음.
음차원의 마나가 응축되면서 시커먼 화살이 생성됐다.
한 걸음.
그 순간, 실반과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뒤이어 앳된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반가움의 감정이 듬뿍 담긴 웃음. 동시에 헤르온의 화살이 실반의 미간을 겨눴다.
이제 남은 걸음은 없다.
그렇다면 그저 비수를 휘두를 뿐.
서걱-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훤히 보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그다음은 왼팔. 양팔을 잘랐다고 해서 방심하진 않았다. 페르다는 확실한 걸 좋아했으니까.
푹! 콰득!
하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게다가 음차원의 마력이 모여있는 심장 부근에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성질이 맞지 않는 마력이 서로 충돌하자 즉시 과부하가 걸렸다. 그다음부터는 간단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 박살 낸 다음,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이 모든 게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 세계급 재능을 가진 암살자에게 등을 보인 대가였다. 헤르온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뒤에야 참았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지금 누구한테 화살을 들이미는 거냐."
쿵-!
몇 번이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짓이겼다. 하체에 이어 상체까지 너덜너덜하게 변할 때쯤,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페르다!"
그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이성을 되찾자 시야가 점점 넓어졌다. 잠시 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실반이 보였다. 환히 웃는 얼굴과 마주하며 페르다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다친 곳은 없어? 속이 울렁거리진 않고?"
"으응, 난 괜찮은데 이로나가······."
뭐라고 얘기한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지금 시야에 비친 건 오직 실반 뿐이었으니. 그로부터 얼마 후, 별다른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먼저 이로나가 보였다. 입가에 맺힌 핏자국을 보니 정령이 역소환된 충격으로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한편 이로나는 귀신에 홀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더듬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야 당연히 느낄 수 없겠지.
일시적이지만 전설의 격을 가졌던 헤르온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아무런 격도 없는 이로나가 알아차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받아라."
품속에 손을 넣는 척하며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으로 헤르온의 상태를 살폈다. 신체가 심하게 훼손된 탓인지 음차원의 마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오, 이제 격이 원래대로 돌아왔네.]
포식의 유지시간이 끝난 건지, 아니면 신체가 박살 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르온의 격은 다시 영웅급으로 떨어졌다.
이후 헤르온을 꽁꽁 속박한 뒤, 실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리를 비운 이유와 출구를 찾았다는 것, 그리고 헤르온의 지배력을 강탈할 수 없는 이유까지 전부.
그로부터 얼마 후.
"아, 그랬구나! 그러면 당연히 지배력을 뺏을 수 없겠지."
실반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탈이란 스킬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리치와 헤르온을 지배한 자의 격이 매우 높을 거라고만 둘러댔다. 다행히 실반은 그 설명만으로도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페르다야. 내가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어."
황금색 눈동자에 짙은 존경심이 맺혔다. 그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니, 양심이 조금 찔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얼마 후, 실반은 바닥에 처박힌 헤르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그럼 얘는 내 편으로 만들 수 없겠구나."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는 실반. 이에 페르다가 대답을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그보다 한발 먼저 끼어든 이들이 있었다. 실반의 마력으로 간신히 회복한 세 망령이었다.
[그야 당연합니다!]
[감히 왕께 화살을 겨눈 놈이니까요.]
[여기서 숨통을 끊어야 마땅합니다.]
헤르온의 공격에 맞아 땅에 처박힌 게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정말로 실반이 위협을 받아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망령들은 안 된다는 뜻을 한데 모았다.
"알겠어. 어차피 못한다고 하니까."
그러니 진정하라는 듯, 실반이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때 페르다가 돌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할 수 있어."
"뭐?"
실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덩달아 망령들도 놀란 듯 몸을 꿈틀거렸다. 잠시 후, 실반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방금······."
"그건 지배력을 빼앗을 때의 얘기고."
헤르온에게 강탈은 사용할 수 없다. 그를 언데드로 되살린 자의 격이 상당히 높았기에. 하지만 부하를 만드는데 꼭 강탈만 사용하라는 법은 없었다.
"음차원의 마력을 전부 빼낸 다음, 되살리면 그만이지. 안 그래?"
"되살린다는 소리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된 언데드를 되살리는 걸 말하는 거야. 아까 했던 것처럼."
마력을 빼내는 이유는 첫 번째 재앙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다음, 사자소생을 이용해 되살려내면 그만이다. 그 말에 실반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이제야 페르다의 의도를 이해한 모양이다.
"음, 한번 시험해볼 가치는 있겠네."
게다가 사자소생엔 엑스트라 스킬, 절대복종도 함께 붙어있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강탈하는 것보다 훨씬 좋으리라.
"그럼 일단 마력을 빼내야 하는데······."
실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난관에 봉착한 기분이겠지. 페르다 역시, 시스템의 도움 없이는 마력을 남김없이 빼내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그때, 망령 하나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왕이시여. 그건 부디 제게 맡겨 주십시오.]
흐물이였다.
그러고 보니 흐물이는 뭔가 먹는데 재능이 있었다. 리치의 마법도 그대로 삼켜버리지 않았던가? 잠시 고민하던 실반은 흐물이를 향해 당부의 말을 전했다.
"부수지 말고 마력만 빼내야 해. 할 수 있겠어?"
[예, 물론입니다.]
흐물이가 히죽 웃었다.
[뼈만 남기고 발라먹는 건 자신 있으니까요.]
자신만만한 대답에 실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흐물이는 몸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헤르온을 집어삼켰다. 간혹 뼈를 씹는 것처럼 불안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마력이 쏙 빠진 시체 한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한번 시작해볼까."
소매를 걷어붙인 실반.
이내 황금색 눈동자에 강한 의욕이 타올랐다.
Chapter 19. 숲지기 헤르온 (1)
Chapter. 19
숲지기 헤르온
숲에서 태어나, 숲과 함께 살고 숲을 위해 죽는다.
그것이야말로 고결한 하이엘프의 숙명.
세르네크 숲을 지키는 숲지기의 사명이었다.
***
거창하게 숙명이라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숲지기가 하는 일은 별 것 없었다. 간혹 숲을 찾는 침입자들을 쫓아내거나 숲에 거주하는 이종족들의 분란을 조율하는 정도가 전부였으니.
물론 간단하다고 해서 임무에 소홀한 건 아니었다. 하이엘프의 숙명이라는 건 그리 가벼운 게 아니었기에. 그간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라곤 전투 중에 왼팔을 잃어, 세계수의 가지로 대체한 게 전부다.
그렇게 백여 년 동안 숲을 지켰다. 그 무렵, 바깥세상에서 인간 하나가 숲을 찾았다. 솔라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솔라는 신비한 아이였다. 호기심이 많았고 새로운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어찌나 명석한지 불과 석 달 만에 엘프어를 완벽히 익혔다.
무엇보다 모든 걸 다 떠나, 솔라에게는 늘 시선이 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솔라가 찾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부터 그것이 사랑임을 알았다.
봄비가 그친 날. 서로 사랑을 했고, 이듬해 딸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라디나'라고 지었다. 하이엘프의 언어로 '숲'이라는 뜻이었다. 숲지기에게 딱 어울린다며 솔라는 웃었다.
라디나는 솔라가 키우기로 했다. 숲은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4년 동안 꿀보다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뇌리에 선명히 새겨질 정도로.
그리고 5년 차의 여름. 비극이 시작됐다.
우기가 시작되던 날, 돌연 인간들이 숲을 침공했다. 숲지기로서 전투에 참전해, 모조리 물리쳤다. 이후 둥지로 돌아오니 솔라가 죽어가고 있었다. 살려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썼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때 솔라가 말했다. 사막에서 온 이들이 라디나를 데려갔다고. 딸을 구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솔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숲을 떠났다.
***
온 사막을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심장에 비수가 꽂혀 죽어가는 라디나와 그 영혼을 상자에 담고 있는 주술사였다.
하프엘프의 영혼이 영생을 불러온다는 미신을 믿고 저지른 일. 분노에 휩싸여 관련된 모든 인간을 죽였다. 이후 라디나의 영혼이 깃든 상자를 소중히 안고 숲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한 명의 숲지기가 숲의 대소사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에 앙심을 품은 묘인족들이 일을 꾸민 것. 숲에 하프엘프가 있다는 걸 사막의 인간들에게 알린 것도, 숲지기의 둥지를 알려준 것도 전부 묘인족의 수작이었다.
분노가 이성을 집어삼켰다. 모든 비극의 원흉인 묘인족도, 이를 알면서 묵인하고 방관한 다른 일족들도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숲지기는 숲을 버렸다. 그리고 복수가 시작됐다.
첫 번째 대상은 묘인족. 장장 일주일 동안, 단 한 명의 묘인족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다음부터는 이를 알면서도 방관한 일족을 처단했다. 하지만 복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분노에 미쳐버린 숲지기를 토벌하고자, 모든 숲의 일족이 힘을 모았으니.
결국 숲지기는 둥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누구보다 숲을 사랑했지만, 죽어갈 때는 누구보다 숲을 저주했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복수를 위해 살 것을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 있던 것은 거대한 어둠. 죽은 자들에게 '모든 죽음'이라 경배받는 것. 그것은 돌연 계약을 제안했다.
'널 심연에서 꺼내주마. 대신, 내 지시에 따라 망자의 군세를 키우고 이 숲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을 내려라.'
복수심에 불타며 죽었기에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계약대로 망자의 군세를 키웠다. 그리고 두 번째 복수의 서막을 알리려던 찰나.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했다.
'허무하다.'
언데드로서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 썩어가는 육신은 모래처럼 부서질 것이며 영혼은 재처럼 불타리라. 언젠가 모든 죽음이 그리 말했던 것 같다.
이제 진짜 끝이라고 생각하니, 최초의 죽음보다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라디나.'
남겨둔 이가 떠올랐던 탓이다. 그의 사랑스러운 딸, 라디나. 그 아이의 영혼이 담긴 상자가 이 묘지의 끝에 묻혀있다. 홀로 남겨질 딸 아이를 생각하자 가장 먼저 비통한 심정이 들었다.
복수보다는 차라리 딸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법을 찾을걸. 아니면 신전에 딸의 영혼을 가져가 넋만이라도 달래줄걸. 그러지 못한 과거의 자신에게, 어리석음에 후회했다.
'만약 다시 살아난다면······.'
그땐 모든 걸 내려놓고 딸을 위해서 살 텐데.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 걸 안다. 명색이 모든 죽음이라는 녀석이 했던 말이다. 그에게 남은 건, 그저 후회하며 덧없이 스러지는 것뿐이겠지.
그런데 그 순간.
'······!'
돌연 새카맣던 어둠이 걷혔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더 큰 어둠. 아니, 밤하늘이라는 표현이 옳겠다.
'뭐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하던 그때.
어둠을 비집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앳된 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밤하늘이 걷히자 제일 먼저 희뿌연 하늘이 보였다. 뒤이어 자욱한 안개, 메마른 잡초,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망자의 군세를 키우던 곳이다. 멍하니 있던 중, 문득 몸을 움직여봤다.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기 전, 잘렸던 팔과 다리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었지?
언데드로서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던가?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중 다시 이어진 목소리.
"난 실반 아크듀트라고 해. 우린 구면이지?"
구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은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보였다. 이제야 기억났다. 이곳에 들어왔던 침입자. 저 아이에게 화살을 겨누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지.
또 본능적으로 느껴진 게 하나 더 있었다.
두 번째로 주어진 삶. 그 은총을 내린 것이 다름아닌 저 아이라는 것. 그 사실에 수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질문이 먼저다. 과거, 언데드로서 눈을 떴을 때 모든 죽음에게도 던졌던 질문이었다.
"······날 왜 되살린 거지?"
모든 죽음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되살렸다.
그렇다면 실반이라는 아이도 응당 목적이 있을 터.
과연 저 아이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복수? 아니면 사령술사로서의 격을 과시하고 싶어서? 온갖 추측이 들던 그때, 실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응? 그냥."
그냥 살렸다고?
저만큼 기운 빠지는 대답도 없을 거다. 황당한 기분이 들어 그를 보던 차에 실반은 연신 말을 이었다.
"원래는 지배력을 빼앗고 싶었는데, 그건 안 된다고 해서 이렇게 해볼까 했는데 진짜 된 거야. 아, 물론 그 과정에서······."
난데없이 그를 되살렸던 방법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한 실반. 관심 없는 이야기라 모조리 무시했다. 그러던 중 실반은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냉큼 화제를 돌렸다.
"아 참, 그 전에 너는 이름이 뭐야?"
"그런 건 예전에 잊었다."
애초에 숲지기의 숙명과 함께 부여된 이름이다.
허나 그는 이제 숲지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름도 없는 셈. 그래서 입을 꾹 닫으려던 찰나, 누군가 그의 이름이었던 것을 입 밖에 냈다.
"헤르온 위그더스."
갑작스러운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군청색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은 남자가 보였다.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그래서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말은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라디나를 되살리고 싶지 않나?"
"······!"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몸이 절로 반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양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남자의 멱살을 대번에 움켜쥐었다.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낯짝.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았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었기에.
"인간, 어디서 그 이름을······."
"그 손, 당장 치워."
그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이를 듣자마자 절로 힘이 빠졌다. 멱을 움켜쥔 손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서 들린 목소리지? 그보다 왜 이런 거지? 그런 생각이 들던 무렵, 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릎 꿇고 머리 박아."
쿵-
몸이 저 말에 따라 저절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그를 되살린 장본인, 실반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처음 봤던 순둥한 얼굴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다가온 실반이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차게 속삭였다.
"······경고하건대, 두 번 다시 페르다를 건드리지 마. 도로 시체가 되고 싶지 않거든."
실반의 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데드라서 추위를 느낄 수 없는 줄 알았는데. 또 저 말에 감히 반박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위압감에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일 뿐.
얼마 후, 실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페르다. 이제 멱살 잡히는 일은 없을 거야."
어색한 듯이 웃는 실반을 보며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하기도 하지.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아까 묘지를 누비다가 이런 걸 얻었다."
익숙한 모양의 검은색 상자. 그걸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다시 뛰쳐나갈 뻔했다. 하지만 돌연 들려온 실반의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어? 그게 뭐야?"
"라디나의 영혼이 들은 상자."
"라디나?"
"저 녀석의 딸. 비석에 그리 적혀있더라고."
페르다는 당시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설명했다. 잠시 후, 실반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실반."
"응?"
"여기 있는 영혼말인데, 강령술로 물체에 깃들게 할 수 있어?"
실반은 페르다가 건네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음, 가능할 것 같아."
저 둘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딸의 영혼을 물체에 깃들게 한다고? 헛소리다. 그런 게 될 리가 없다. 부정한 망령을 물건에 온전히 깃들게 하는 것조차 고난이도의 술법이다. 하물며 살아있는 영혼을 물건에 깃들게 한다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그때 페르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내 제자는 아주 유능한 사령술사다. 언데드로서 확정된 죽음을 맞이했던 너를 또다시 되살릴 정도로."
그건 인정한다. 실반은 확실히 실력이 있다.
하지만 사령술과 강령술은 다른 문제다. '모든 죽음'조차 사령술에선 정점에 올랐지만, 강령술은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묻지. 헤르온 위그더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마음이 동했다. 너무도 당당한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이 지나 지쳤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굳건하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동시에 그가 물었다.
"딸과 재회하고 싶지 않나?"
"······만약."
굳게 닫았던 입을 열자 쇠를 긁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실반을 바라봤다. 고요히 타오르는 황금색 안광. 잠시 후, 헤르온은 실반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간청했다.
"만약 정말로 라디나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당신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꿈조차 꾸지 못했던 걸 이루어준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충성뿐 아니라, 영혼까지 바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죽음 앞에서도 고고했던 태도를 버렸다. 그러자 얼마 후,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려면 일단 영혼과 파장이 잘 맞아야 해."
"파장이라면······?"
"살아생전에 함께 지냈던 물건 같은 걸 말하는 거야. 혹시 가지고 있는 거 있어?"
그 말과 함께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라디나에게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렸을 때, 그가 만들어 선물했던 것.
"예, 물론입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를 떠올리자마자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곧장 안개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Chapter 19. 숲지기 헤르온 (2)
백작성 동쪽의 대저택.
이른 오전부터 이곳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성자의 호위이자 제 2성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 더셀 미샤어스였다. 그는 말없이 하녀가 가져온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진하게 우린 홍차를 반 모금 정도 마셨을 무렵.
벌컥-
별안간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뒤이어 보인 것은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기사.
"더셀!"
기사가 반갑게 소리쳤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며 더셀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오랜만이군, 아르커."
아르커 쉬리드. 이 대저택의 주인인 리안느 네이샤드의 기사. 더셀과 악수를 마친 그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왔다고 해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게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당연하지! 그것도 기사단을 왕창 끌고 왔으니, 난 또 백작령에서 사악한 무리라도 발견한 줄 알았지 뭔가?"
"하하, 그럴 리가 없잖나."
더셀이 피식 웃었다.
기사 아카데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르커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20년도 넘었다. 비록 서로 몸을 담은 곳이 달라, 연락은 자주 하지 못했지만. 그런데도 살갑게 대해 주는 아르커를 보며 더셀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맺혔다.
"축하하네. 그새 상급의 경지를 이루었군."
"뭘. 이제 막 초입에 다다랐을 뿐이야."
아르커가 쑥스럽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두 남자는 그간의 회포를 풀 듯 담소를 나누었다. 옛 추억부터 최근에 있었던 일까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더셀의 얼굴에 조금씩 그늘이 졌다.
'아무래도 백작의 약점을 캐는 건 조금 어려워 보이는군.'
오랜 벗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성자가 지시한 임무, 아크듀트 백작의 약점을 캐기 위함이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면 아르커와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백작가에 충성심이 깊은지 알게 됐으니.
'그렇다면······.'
방향을 틀어서 약점을 만들만한 부분을 찾아보자.
더셀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던 중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쉬리드 경?"
밝고 청아한 음성.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금발을 가진 여성이었다.
'리안느 네이샤드.'
이곳에 오기 전, 백작과 관계된 인물들을 모조리 조사했다. 그래서 여인을 보자마자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응접실에 발을 들인 리안느는 더셀을 향해 물었다.
"그쪽에 계신 분은······?"
"세러하임의 성기사, 더셀 미샤어스라고 합니다. 성자님의 호위 임무를 맡아 며칠 전, 이곳을 찾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더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소개가 끝나자 리안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샤어스 경이라면······."
"예,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그 기사입니다."
그때 아르커가 말을 덧붙였다.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지? 궁금하긴 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리안느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쨍그랑! 와장창-!
건너편 방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가! 이딴 거 필요 없으니까."
이어 들려온 거친 괴성.
더셀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하녀 하나가 복도 쪽으로 밀려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하, 하지만 도련님······. 꺄악!"
강한 힘에 밀린 탓인지, 하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세게 닫혔다. 이를 본 리안느는 고운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더셀에게 고개를 숙인 리안느.
다소 붉어 보이는 얼굴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렸다.
"부디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 나누시길 바라요."
리안느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응접실은 조용한 적막감에 휩싸였다. 잠시 후, 더셀은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보다 아르커가 좀 더 빨랐다.
"후우, 둘째 공자님일세. 불과 몇 달 전까진 활기찬 분이셨는데······."
오랜 친구를 앞에 뒀기 때문일까?
아르커는 숨겨왔던 고민을 술술 털어놨다. 검술의 천재라 불리던 커셔 아크듀트가 저렇게 된 내막에 대해서. 한편, 더셀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젯밤, 성자와 나눴던 대화였다.
'만약에 말이야. 약점을 찾는 것도, 만드는 것도 힘들다면 이렇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묘안이 있으십니까?'
'그래. 백작의 핏줄을 볼모로 잡는 거지.'
'볼모라면······.'
더셀이 의아한 듯 묻자 성자는 대뜸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백작가의 둘째 공자, 커셔 아크듀트. 딱 올해부터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침 우리도 아카데미 신입생을 모집해.'
우리 아카데미?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게 있었다.
'······설마 엘루스 아카데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거기에 커셔 아크듀트를 입학시키는 거야.'
성자가 씨익 웃었다. 반면 더셀의 얼굴은 굳은 상태였다.
'하지만 엘루스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건······.'
성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아카데미, 엘루스.
대륙에 있는 수많은 아카데미 중 두 번째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그만큼 들어가는 것 또한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우선 신앙심이 깊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검술이면 검술, 지식이면 지식에 재능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부단장급 이상의 성기사나 고위 사제의 추천장도 필요했다.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셀은 솔직한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성자가 곧장 말을 이었다.
'성기사 서른 명의 추천. 거기에 성자가 직접 쓴 장문의 추천장까지.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더셀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자가 직접 추천장을 써준다고?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동시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그야 아크듀트 백작의 순조로운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지. 이곳에 성국의 깃발을 꽂지 못하면, 왕국 전역으로 진출하는 것도 힘들 테니까.'
성자는 더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만큼 네 임무는 막중하다. 부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길 바라마.'
그 말을 끝으로 더셀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백작의 약점을 찾지 못하면 커셔 아크듀트를 엘루스 아카데미로 입학시켜라. 목적을 바꾼 더셀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아르커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내 듣기로 둘째 공자님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맞네. 하지만 그럼 뭐 하는가? 지금 저런 상태이신데."
"안타깝군. 재능을 썩히는 건 아까운 일인데."
"맞는 말일세. 그래서 마님께서도 걱정이 크시다네. 아카데미 입학시험까지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건만."
일주일이면 이제부터 준비해도 빠듯한 시간이다.
더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생각 정리를 끝마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아카데미는 어디로 생각하고 있나?"
"그야 당연히 왕립 아카데미지. 사실 재능만 본다면 더 좋은 곳도 가능하겠지만, 말했다시피 지금 도련님의 상태가 좋지 못한 터라······."
필요한 정보는 모두 모였다.
더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면 아르커."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르커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더셀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엘루스 아카데미는 어떤가?"
***
헤르온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출구 근처의 아담한 묘지.
비석을 앞에 둔 채, 헤르온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지면에 왼팔을 박아넣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꽤 깊숙한 곳에서 궤짝 하나를 꺼냈다.
덜컹-
안에서 나온 건 아담한 크기의 토끼 인형.
곧 헤르온이 입을 열었다.
"딸 아이가 잘 때마다 안고 잤던 인형입니다."
그가 만들어서 선물했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한편 인형을 보던 이로나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헤르온을 힐끗거린 뒤, 실반에게 작게 속삭였다.
"실반, 미안한데 잠깐 살펴봐도 될까?"
"응? 그래. 자."
조심스럽게 인형을 받아든 이로나.
잠시 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인형, 대체 뭐로 만든 거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반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자세히 한 번 봐봐. 재질 자체가······."
이로나가 인형을 들이밀던 그때.
헤르온이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세계수의 뿌리로 골격을 잡았습니다."
"뭐?"
지금 잘못 들었나? 실반과 이로나가 멍하니 되물었다. 하지만 헤르온은 호들갑 떨 일은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설명을 이었다.
"세계수의 잎사귀와 줄기로 살을 붙였고, 안감은 세계수의 꽃과 말린 열매로 채웠습니다. 바깥쪽은 죽은 유니콘의 가죽, 마감은 아크네스의 족장에게서 받은 실타래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 말에 가만히 있던 페르다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부산물은 황금보다 귀하며, 죽은 유니콘의 가죽은 같은 무게의 보석과 거래될 정도로 비쌌으니. 또 거미종족인 아크네스는 요즘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종족 중 하나였다.
실반은 황당한 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인형을 그렇게까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보니, 뭐든 해주고 싶었습니다."
무심하게 중얼거린 헤르온.
이어 그는 황금색 안광에 희망을 담아 실반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담긴 갈망을 눈치챈 걸까? 실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는 모두 준비됐다. 실반은 라디나의 영혼이 깃든 상자와 인형을 겹쳐 놓았다.
"그럼 시작할게."
묘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헤르온은 실반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했다. 이로나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페르다는 신뢰가 담긴 시선으로 실반을 지켜봤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실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상자가 저절로 툭- 하고 열렸다.
잠시 후, 가만히 있던 인형이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그때, 인형에게서 멍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움, 졸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
이어 토끼 인형이 눈을 비볐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인형은 곧 헤르온이 있는 곳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웅? 아빠?]
익숙한 음성. 익숙한 행동.
저 몸짓 하나하나가 선명히 떠오른다. 헤르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아아."
실반의 위압감에 짓눌렸을 때와는 달랐다.
감격을 이기지 못해 저절로 몸이 떨리는 거다. 곧이어 그의 입을 비집고 꽉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 으어, 아으아아······!"
언데드였기에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허나 실반에게는 느껴졌다. 헤르온은 지금 울고 있었다. 그의 영혼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으니.
"라, 라디나······."
서서히 다가가 인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다가 이내 감췄다. 지금 그의 육신은 언데드. 흉측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애써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그때 인형이 깜짝 놀란 듯 외쳤다.
[우와! 아빠 엄청 커졌다. 진짜 커!]
양팔을 높이 든 채, 헤르온의 주변을 빙글거리며 도는 인형. 라디나가 엄청 놀랐을 때, 종종 이런 행동을 보이곤 했다. 이를 본 황금색 안광이 촛불처럼 일렁거렸다.
"정말, 정말 너야? 라디나, 정말······."
감격에 찬 건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던 중 토끼 인형, 라디나가 뭉툭한 팔로 눈을 비볐다.
[우웅, 근데 잠이 와요.]
하품하는 것처럼 입 부분이 살며시 벌어졌다가 닫혔다.
[죄성해요, 아빠. 좀만 자깨.]
그 말은 끝으로 라디나는 헤르온의 무릎에 툭 기댔다. 헤르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디나를 안아 들었다. 행여나 잠에서 깰라,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음, 파장은 잘 맞는 거 같아. 다행이네."
라디나를 살펴본 실반이 씨익 웃었다.
이어 그는 라디나가 잠든 이유를 설명했다.
"영혼이 잠들어있던 시간이 오래돼서 정착할 시간이 필요해.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이렇게 자주 잠들 것 같아. 어쨌든 잘 됐다.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그 말을 끝으로 실반은 씨익 웃었다.
헤르온은 안아 든 라디나를 옆에다 살며시 내려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이내 실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응?"
워낙에 작은 음성이라 듣지 못했던 걸까? 실반이 되물었다. 그런데 동시에 헤르온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말을 이었다.
"오직 당신만이 저의 왕이십니다. 제 영혼이 불에 타서 재가 될 때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쿵쿵!
그의 머리가 지면을 거세게 두드렸다.
황금색 안광이 촛불처럼 또렷하게 타올랐다.
"헤르온 위그너스가 모든 부정한 것의 왕을 뵙습니다."
왕께 바치는 경배와 함께.
신궁(神弓), 숲지기 헤르온이 실반의 휘하에 들어왔다.
Chapter 20. 퀘스트 (1)----무료 편은 여기까지였습니다.
Chapter. 20
퀘스트
텅 빈 던전을 뒤로 한 채.
일행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노을이 질 무렵이 되자 세르네크 숲의 초입부에 다다랐다. 이 속도라면 오늘 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목적지가 코앞이라 여유가 생긴 걸까?
실반은 헤르온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주로 언데드가 되기 전에 뭘 했는지, 혹은 라디나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헤르온은 쇠를 긁는 목소리로 성실히 대답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이야기를 끝마친 그는 실반 주변을 맴도는 세 망령을 힐끗거렸다. 그러고는 불쑥 말을 걸었다.
"그런데 왕이시여."
"응?"
"저 망령들 말입니다."
"단단이랑 흐물이?"
헤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단이와 흐물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막 권속이 된 놈이 무례하다!]
[감히 왕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모욕하는 건가!]
망령들은 이내 노성을 터뜨렸다.
허나 헤르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시한 채, 그저 실반의 대답을 기다릴 뿐. 그러자 곧 실반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본명으로 부르려고 했는데, 안 보여서 내가 지어줬어."
"본명이라 하심은?"
"대화가 가능한 언데드를 자세히 보면 본명이 보이거든."
잠시 입을 닫은 실반이 헤르온을 쳐다봤다.
"너도 좀 흐릿하긴 해도 지금 이름이랑 비슷하게 보이긴 했어. 호로이라고 적혀있었으니까."
"······전혀 비슷하지 않아 보입니다."
한숨과 함께 헤르온은 작게 중얼거렸다.
실반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얘네들은 아예 이름 자체가 안 보였거든. 그래서 어떻게 부를까 고민하다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상해?"
뺨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실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 망령에게서 무시무시한 눈빛이 쏟아졌다. 헤르온 역시 눈치라는 게 있었기에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래? 그럼 너도 비슷한 거로 하나······."
"저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듭니다."
헤르온이 딱 잘라 대답했다.
이후로도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
문득 실반의 귀가 쫑긋거렸다. 낯선 소리를 듣거나, 혹은 잊고 있던 걸 떠올렸을 때 저런 반응을 보인다.
"아, 맞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번에는 후자인 모양이다.
실반은 헤르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모든 죽음이라는 게 뭐야?"
움찔-
그 질문이 끝나자 앞서 걷던 이로나는 물론이고 페르다까지 반응을 보였다. 헤르온 역시 잠잠하던 안광을 환히 빛냈다. 얼마 후, 헤르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왕이라 부르는 자입니다."
사령술사의 정점(頂點).
모든 죽음은 자신을 그리 정의했다. 이는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손짓 하나만으로 수백의 시체를 되살리고, 격을 가진 언데드 수십을 휘하에 두었으니까.
또 하이엘프였던 헤르온을 되살리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알고 있는 정보를 담담히 입 밖으로 꺼내던 찰나.
돌연 실반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러면 모든 죽음의 목적이 뭘까?"
"목적 말입니까?"
"응. 목적이 있으니, 네게 군대를 키우라고 했겠지."
일리가 있었다. 헤르온은 잠시 입을 닫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떠오른 게 하나 있었다.
"아, 일단 본체를 되찾는 게 목표라고 했습니다."
"본체?"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요."
확신이 깃든 대답에 실반은 본체라는 말을 연신 곱씹었다.
"그럼 본체를 되찾은 다음엔?"
재차 이어진 질문에 헤르온은 별안간 입을 닫았다.
황금색 안광이 고요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마치 '이걸 말해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상을 죽음으로 뒤덮는 것. 그것이 모든 죽음의 목적입니다."
"······!"
이로나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듣고 있던 세 망령과 실반의 얼굴에도 놀람의 빛이 맺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창하고 위협적인 목적에 놀란 탓이리라.
반면 페르다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왜냐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세상을 위협하는 네 개의 대재앙을 막는 것. 이것이 원작 <구원자>의 메인 스토리이자, 주인공 실반 아크듀트의 목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재앙이 바로 세르네크 숲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재앙.
'······죽음의 재앙.'
페르다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언젠가 소설 속에서 본 적이 있다. 한때 이 세상을 위협했던 위대한 사령술사가 있었음을.
그는 죽은 자들의 왕국을 만들어 영생을 꿈꿨으나 그러지 못했다. 세상이 한데 뭉쳐 그에게 맞선 탓이었다. 결국,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몸이 갈가리 찢겨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격이 높아도 너무 높았던 탓에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던 것.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조각난 육신과 함께 썩어갔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 이제는 존재의 격조차 희미해질 무렵.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가 다시 눈을 떴다.
죽음의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시즌에선 막지 못했지.'
그땐 실반의 재능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또 세상을 위협하는 재앙이 얼마나 있는지, 재앙의 종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 결과, 세르네크 숲이 불타고 수많은 이들이 망자로 변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성국이 지원군을 보냈으나, 죽음의 물결은 이미 왕국 전역으로 퍼진 뒤였다.
결국, 실반은 첫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첫 번째 시즌도 함께 끝났다.
꿈도 희망도 없던 끔찍한 배드엔딩. 그래서일까? 당시 수많은 독자가 등을 돌렸던 거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실반을 사령술사로 각성시켰다. 이는 모든 시즌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강적 헤르온까지 아군으로 만들었고, 원작에는 없던 세 망령도 휘하에 두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페르다의 눈동자에 결의가 깃들었다.
'무조건 막는다.'
꽈악-!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던 중 그의 귓가로 실반과 헤르온의 대화가 들려왔다.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말은, 약속의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의 날?"
"세상을 죽음으로 뒤덮는 시작을 뜻합니다."
실반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만약 약속의 날이란 것만 언제인지 안다면, 최소한의 대비는 할 수 있을 테니. 실반은 기대감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그날이 언제인데?"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들은 바가 없는 터라······."
허나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반면 페르다는 약속의 날이 언제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재앙이 시작되고 죽음의 군세가 밀려들 때마다, 각 시즌에서는 늘 똑같은 문장이 적혔으니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여름이 끝나는 날, 모든 죽음의 물결이 밀려왔다.」
시기상으로 보면 대체로 8월 말에서 9월 초.
그런데 이번엔 문제가 있었다.
'변한 게 너무 많아.'
세르네크의 사자가 바뀌었으며 원작에는 없던 던전이 출현했다. 권속도 훨씬 늘었고, 이외에도 다양한 변화가 많았다. 그러니 소설 속 정보를 맹신하는 건 위험할 수밖에.
'마을에 도착하면 따로 알아봐야겠어.'
다크엘프의 성년식은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치른다. 그렇다면 혼자 움직일 시간은 충분할 터. 페르다는 일의 경중을 따져 우선순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
[알림]
-세르네크의 숲에 도착했습니다.
=====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이를 발견한 페르다의 낯빛에 의아한 기색이 맺혔다.
뭐지? 여태껏 새로운 지역을 방문해도 이런 메시지는 뜬 적이 없었는데?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렵.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알림]
*월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OK]
=====
우뚝-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메시지의 내용만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실반도 덩달아 자리에 멈춰섰다.
"페르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을 차린 페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곧이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시스템 창에 고정된 채였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과 함께, 페르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퀘스트라니, 이게 무슨······.'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임무. 이게 대부분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퀘스트다. 하지만 이그드라실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는 차원이 달랐다.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가 태반이었고, 실패 시의 페널티도 만만찮았다. 물론 보상은 두둑한 편이나 거기에 혹하는 헌터는 썩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사망률이 무려 50퍼센트가 넘어가니까.
그래서 헌터들은 퀘스트가 발생한 지역이나 시기, 현재 컨디션을 충분히 고려하고 수락 여부를 결정한다. 페르다 역시 그랬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퀘스트에 한해서다.
월드 퀘스트는 격이 달랐다.
'설마 이런 것까지 구현될 줄이야.'
선택창만 봐도 알겠지만 일단 거절하는 게 불가능했다. 또 월드라는 단어가 붙은 만큼 스케일이 엄청나게 컸다. 즉, 난이도가 높고 보상도 끝내준다는 소리였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뿐. 두려워하는 건 시간 낭비다. 페르다는 망설임 없이 [YES]버튼을 눌렀다.
=====
[월드 퀘스트: 구원자]
*진행도: (1/4)
[완료 조건]
-제한 시간 이내에 죽음의 재앙을 막는 것
-실반 아크듀트의 생존
(하나라도 미달성 시, 퀘스트는 실패한다.)
(퀘스트 실패시, 막대한 페널티가 발생하니 주의할 것.)
[보상]
-S급 헌터 강태민의 스킬 1개(선택)
-S급 헌터 강태민의 장비 1개(선택)
-업적 점수 [+5,000]
-보너스 스탯 [+300]
[제한 시간]
-69일 15시간 47분
=====
월드 퀘스트의 명칭은 '구원자.'
공교롭게도 원작의 제목과 동일했다. 게다가 진행도와 완료 조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네 개의 대재앙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의외로 괜찮은데?'
두 눈에 이채가 맺혔다.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재앙을 막아내는 건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모든 죽음을 내버려두면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게 뻔했으니. 페르다는 신중한 눈빛으로 차근차근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가 문득 보상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스킬을 선택할 수 있다고?'
거기에 장비까지? 파격적인 보상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처음 월드 퀘스트라는 단어를 본 순간, 조금 꺼림칙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용과 보상을 보고 난 뒤, 확신했다.
이건 기연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리고······.'
페르다의 시선이 최하단에 가 닿았다.
재앙을 막아내라는 조건과 함께 붙은 제한 시간. 이게 의미하는 건 뻔했다. 모든 죽음이 말했던 약속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어차피 막아야 할 재앙을 막으면, 엄청난 보상까지 주어진다.
게다가 재앙이 시작되는 정확한 날짜도 알았다. 이건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페르다는 의욕이 넘치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선두에 있던 이로나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일행도 덩달아 자리에 정지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대뜸 손가락 하나를 뻗더니 허공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문에 노크를 하듯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없을 터인 허공에 잔잔한 물결이 일더니 이내 주변 일대의 풍경이 급변한 것이다.
사아아아아-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녹색 잎사귀가 자색(紫色)으로 물들어갔다. 대지는 회백색으로 변했고, 평범했던 나무는 거목으로 뒤바뀌었다. 별이 반짝이던 하늘이 완벽하게 가려지자 숲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화륵!
그때 은은한 불덩이가 여러 개 나타났다. 불의 하위 정령이었다. 불씨가 주변을 환히 밝히자 이로나는 가만히 몸을 돌렸다.
"실반."
다소 들뜬 음성과 함께.
가면 너머의 황금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세르네크 숲에 돌아온 걸 환영해."
< Chapter 20. 퀘스트 (1) > 끝
-----------------------------------(무료편은 여기까지)------------------------------------
< Chapter 20. 퀘스트 (2)----(유료편은 여기부터) >
나무뿌리로 이루어진 길목.
다크엘프들의 도시, '르샨테'로 향하는 길이다.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일행은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도착하면 우선 족장님부터 뵙자."
이로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머물던 곳도 깨끗하게 치워놨어. 그리고······."
말투나 눈빛에서도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일족의 영역에 들어온 게 꽤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실반이 없던 사이, 숲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세세하게 설명을 이어나가던 그때.
문득 그녀의 시선이 페르다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가 합류한 걸 아는 건 이로나 뿐이었다. 숲에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이대로 말없이 들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터.
"들어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어."
그래서 이로나는 입을 열었다.
숲에 관련한 주의사항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가다 보면 중간에 수호자가 나올 거야."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이로나.
그녀를 보며 페르다는 따분한 듯 하품을 했다.
수호자가 뭔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또 침입자를 발견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화살부터 날리는 미친놈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밝히면 귀찮아질 테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문지기 같은 건가?"
"비슷해. 몸을 수색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협조 부탁할게."
그 정도야 뭐. 페르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그 순간,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익! 콰직!
화살이었다. 이미 날아올 걸 알고 있었기에 곧장 비수를 휘둘러 박살 냈다. 부서진 화살 파편이 바닥에 떨어졌다. 덩달아 적의를 감지한 걸까? 헤르온이 빠르게 활을 꺼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황금색 안광이 번뜩이는 걸 신호로, 헤르온은 시위를 당겼다. 순식간에 음차원의 마나가 응집된 화살이 생겨났다. 눈 깜박할 사이에 전투 준비를 마친 그가 시위를 놓으려던 찰나.
"멈춰, 헤르온!"
매서운 일갈이 들려왔다.
헤르온은 몸을 움찔거린 채 고개를 돌렸다. 실반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짧게 경고했다.
"여기선 함부로 행동하지 마. 내 고향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인 헤르온.
활을 거두자 화살은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척 봐도 수백의 언데드를 몰살시켰을 때의 위력이다. 만약 저걸 쐈다면 수호자 몇이 사라지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하나 더."
실반이 말을 덧붙였다.
그가 봤을 때, 헤르온은 상식 밖의 존재였다. 게다가 망령들처럼 과한 충성심까지 가졌다. 매번 이렇게 제지할 수도 없는 노릇. 따라서 그의 행동에 제동을 가할 이가 필요했다.
"만약 내가 없으면 페르다의 지시를 최우선으로 따르도록 해."
일행 중에서 헤르온을 저지할 수 있는 건 실반이 알기로 오직 한 명. 그의 스승인 페르다 뿐이었다. 또 페르다는 헤르온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적도 있었으니 실력도 믿을만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분고분한 대답이 돌아오자 마음이 놓였다.
실반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헤르온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사아아아아-
그러던 중 숲의 중심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물기를 머금은 듯이 눅눅한 바람. 그 속에 깃든 낯선 음성이 일행의 귓가를 두드렸다.
-침입자에게 경고한다.
-이곳은 다크엘프의 영역.
-속히 숲을 떠나라.
이로나가 말했던 수호자들이었다.
곧이어 이로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은 뒤, 품속에서 맹약의 증표를 꺼내 들었다.
"숲의 두 번째 전사, 이로나 세르네크!"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숲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불의 정령이 어둠을 환히 밝혔다. 수호자들이 이로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용무를 밝힌 이로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메아리치는 걸 끝으로 숲은 고요하게 물들었다. 얼마 후, 다시 수호자들이 말을 걸었다.
-이로나 세르네크. 확인했다.
-그럼 뒤에 있는 녀석들은?
"이쪽은······."
실반을 시작으로 하나씩 짧게 소개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가지 않았는지,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실반 아크듀트는 확인했다.
-다른 이들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해.
"알겠다. 협조하지."
이로나의 말이 끝나자 몇몇 다크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줏빛 로브를 걸친 전사들. 그중에서 선두에 있던 이가 후드를 벗었다.
"숲의 여섯 번째 전사, 칸젤 임페일이다. 수호자들의 장을 맡고 있지."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근육질 남자.
소개를 끝마친 그는 제일 먼저 페르다에게로 향했다.
"우선 무기부터 확인······."
"없다."
페르다는 양손을 살짝 들며 대답했다.
그 반응에 칸젤은 눈썹을 씰룩거렸다. 왜냐면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탓이다. 페르다가 화살을 부수는걸.
"발뺌은 소용없다. 순순히 내놔."
"그럼 한번 찾아보던가."
뻔뻔한 대꾸가 돌아오자 칸젤은 얼굴을 구겼다. 이어 그는 수하를 시켜 곧장 페르다의 몸을 수색했다. 하지만 무기는커녕, 무기로 삼을만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수호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비수를 칼집째로 인벤토리에 던져넣었으니. 한편 무기를 찾지 못하자, 칸젤은 심기가 불편한 듯 대답했다.
"······지나가도 좋다."
뒤이어 칸젤이 향한 곳은 헤르온이 있는 곳.
마찬가지로 입을 열려던 그때, 돌연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로나 세르네크."
잠시 후, 이로나를 쳐다본 칸젤이 이를 꽉 깨물었다.
새하얀 이빨 사이로 사나운 추궁이 흘러나왔다.
"왜 언데드가 이곳에 있지?"
필시 헤르온에게서 흘러나오는 사기(死氣)를 감지한 것이리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호자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던 그때, 이로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실반의 하수인이야."
"뭐라고?"
"바깥에서 사령술사가 됐다고 해.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하수인이고."
칸젤의 얼굴에 강한 의심이 깃들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실반이 나섰다. 몇 가지 지시를 하자, 헤르온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잠시 후, 헤르온이 바닥에 머리를 박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야 어느 정도 의심이 걷혔다.
"으음, 이해했다."
고개를 끄덕인 칸젤. 이어 그의 시선이 다시 헤르온에게 향했다.
"그래도 무기를 들고 돌아다니게 둘 수는······."
"내게 무기는 없다."
그때 헤르온이 그의 말을 끊었다. 칸젤의 눈이 가늘게 좁아지는 걸 보며, 그는 페르다와 똑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원한다면 찾아봐도 좋아."
그 광경에 페르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헤르온의 활은 얼마든지 왼팔에 수납이 가능하니. 아니나 다를까, 칸젤은 이번에도 무기를 찾지 못했다.
"끄응, 출입을 허가하겠다. 들어와도 좋아."
낮은 신음과 함께 허가가 떨어졌다.
일행은 칸젤의 안내를 받으며 중심부로 향했다.
***
길목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오래된 동굴 하나가 보였다.
바깥세상과 르샨테를 잇는 관문이자, 다섯 통로 중 하나. 길의 폭이 좁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까지 있어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일행은 모두 입을 꾹 닫았다.
앞서 있던 칸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페르다는 눈을 반짝이며 발아래를 쳐다봤다.
무저갱처럼 시커먼 낭떠러지. 저 끝에 그가 찾고자 하는 게 있었다.
'그림자의 돌.'
페르다가 세르네크 숲에 온 근본적인 이유는 실반의 성년식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실반의 목적일 뿐, 그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재앙을 막는 것과 숲에 잠자고 있는 보물을 손에 넣는 것. 이 두 가지였다. 그리고 아까 말한 보물이 바로 그림자의 돌을 의미했다.
'실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해.'
그림자의 돌은 근접전에 취약한 사령술사에게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보물. 실제로 지난 회차의 실반은 그림자의 돌 덕분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다.
'조만간 찾으러 온다.'
페르다가 굳은 결의를 품을 무렵.
일행은 어느덧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협소했던 길이 끝나자 저 멀리 밝은 불빛이 가득한 도시가 보였다.
다크엘프의 도시, 르샨테였다.
"내 안내는 여기까지다."
선두에 있던 칸젤이 입을 열었다.
실반을 쳐다본 그는 이내 무뚝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시험에서 부디 좋은 성적을 거두길 기대하마."
그 말에 이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년식은 일종의 통과의례일 뿐, 보통 시험이라 부르지 않으니까.
그때 몸을 돌리던 칸젤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멸시와 비웃음. 이를 알아차린 페르다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뭐지?'
일순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멀어져 가는 칸젤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반면 다른 일행은 칸젤의 비웃음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별안간 이로나가 헤르온을 불렀다.
"도착하기 전에 이걸 써라."
그녀가 건넨 것은 가면.
헤르온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곧 대답이 돌아왔다.
"만날 때마다 일일이 설명할 순 없으니."
이로나가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헤르온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후드를 쓰고 있다고는 하나, 조금만 가까이서 보면 언데드라는 게 들킬 테니까.
헤르온이 가면을 받아 쓰고 난 뒤, 일행은 르샨테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크고 작은 나무집. 형태는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나무뿌리를 엮어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뒤이어 밤의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는 발광석(發光石)이 보였다. 바깥세상에선 흔치 않은 광물이나, 이곳에서는 길가에 널린 돌멩이만큼이나 많았다. 뒤이어 도시 주변을 배회하는 몇몇 다크엘프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낯선 손님을 발견한 건 다크엘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어째서 인간이 숲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도시 중심부로 갈수록 다크엘프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중 대부분의 시선은 페르다에게 고정된 채였다.
호기심, 적의, 흥미 등등. 다양한 감정이 깃든 눈빛을 한몸에 받으며 페르다는 묵묵히 걸었다. 그때 이로나가 말을 걸어왔다.
"무시해. 족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면 잦아들 거다."
페르다가 사고라도 칠까 걱정된 모양이다. 허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럴 거라는 예상은 했었으니까.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하지만 차마 흘려넘길 수 없는 대화가 들려왔다.
"잠깐, 저 아이 좀 봐."
"혹시 걔 아니야? 그 잡종."
우뚝-
잡종이라는 말과 함께 페르다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몇몇 다크엘프가 보였다. 그들은 실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달아 대화를 주고받았다.
"맞네. 근데 왜 돌아온 거지?"
"완전히 떠난 줄 알았는데."
"성년식 때문이 아닐까? 슬슬 할 시기도 됐잖아."
"근데 잡종이 성년식을 왜 해?"
"맞아. 저런 게 어딜 봐서 동족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말투.
그 순간, 페르다는 비수를 꺼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이로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예전에 모닥불에서 했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으니.
이윽고 몸을 움직이려던 그때.
꽉-
돌연 누군가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로나인가 싶어서 뿌리치려 했으나, 그녀치고는 악력이 약했다.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엔 다름 아닌 실반이 있었다.
"난 괜찮아."
꽉 잡은 손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실반은 애써 지은 것처럼 보이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와서 익숙한걸."
알고 있다. 이름 대신 반쪽이, 혹은 잡종으로 불렸다는 걸.
그런데도 실반이 그를 제지한 이유는 이곳이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곳만이 그가 돌아올 수 있는 장소여서.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페르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안 괜찮다."
"······뭐?"
실반이 멍하니 되물었다. 동시에 페르다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모욕을 받았다. 스승으로서 가만히 넘어갈 수 없었다.
한편 실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페르다를 쳐다봤다. 잠시 후, 실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살포시 웃은 실반.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
진심이 담긴 대답과 함께, 실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망령들과 헤르온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본 실반은 다시 페르다와 마주하며 배시시 웃었다.
"왜냐면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팔에 깃든 떨림이 멎었다.
동시에 희끄무레한 연기가 파르르 떨렸다. 망령들이었다. 그들은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시퍼런 살기를 뿜어대며 소리쳤다.
[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왕이시여, 제발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당장 죄인들의 사지를 찢고 오겠나이다.]
거센 노성을 터뜨리는 망령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헤르온 역시, 황금색 안광을 무시무시하게 번뜩였다. 이어 그는 실반의 험담을 한 다크엘프 무리를 정확히 가리키며 물었다.
"쏴도 됩니까?"
"안 돼."
이로나가 대신 대답했다. 헤르온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한편 그들의 모습을 보던 실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어렸을 적에는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만 했다. 조롱도, 경멸도 전부. 그러나 이젠 아니다. 곁에 있는 이가 늘어났고, 모욕을 받으면 함께 화내주는 이도 생겼다.
그 사실만으로도 실반은 만족했다.
"또 지금은 족장님 먼저 뵙고 싶어. 이번만 그냥 넘어가자."
그렇게까지 말하니 페르다도 별수 없었다. 비수를 거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반은 부드럽게 웃었다. 곧이어 일행은 다시 발을 옮겼다.
그 사이, 페르다의 시선이 빠르게 다크엘프 무리를 훑었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눈에 담은 뒤에야 몸을 돌렸다.
'비록 지금은 넘어가지만······.'
조만간 제자를 건드린 대가를 받아내겠다.
뒤끝 있는 다짐을 끝으로 페르다는 걸음을 옮겼다.
< Chapter 20. 퀘스트 (2)----(유료편은 여기부터) > 끝
< Chapter 21. 시험 (1) >
Chapter. 21
시험
"이로나 세르네크가 귀환을 보고드립니다."
커다란 방 안. 이름 모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 위로 이로나가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양옆으로는 십여 명의 장로들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이가 보였다.
다크엘프의 족장, 이레아 세르네크.
고개를 숙인 이로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보고했다.
"······이상입니다."
얼마 후, 보고를 마친 그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장로들이 저마다 질문을 던졌다.
"아크듀트 백작은 어떻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숲과 관련해서 별말은 없었나?"
"예, 딱히 없었습니다."
상투적인 질문이 이어지던 가운데.
입구 부근에 있던 페르다는 나지막이 하품을 내뱉었다.
벌써 스무 번째 질문이다. 대체 언제까지 하려는지. 지루한 기색이 역력한 그와 달리, 실반은 힘이 바싹 들어간 표정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한가.'
이곳은 족장의 방. 그리고 지금 실반의 곁에 있는 이는 페르다 뿐이다. 헤르온을 비롯한 망령들은 언데드라서 입장을 거부당했으니.
톡톡-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실반이 고개를 들었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 그와 시선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일부러 웃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실반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풋! 지, 지금 뭐 하는 거······."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페르다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 실반은 갑작스레 터진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지 심호흡을 시작했다. 잠시 후, 뒤틀렸던 입가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자 경직된 표정이 풀어지고 긴장한 기색도 옅어졌다.
그래, 이제 좀 낫네.
목표를 이룬 페르다가 싱긋 미소를 짓던 그때.
"페르다."
실반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고개를 살짝 든 채, 입구 바깥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밖에 있는 애들은 괜찮겠지?"
"걱정하지 마. 어디 가서 맞을 녀석들은 아니잖아."
"그게 아니라, 사고 치지 않을까 걱정돼서······."
일리 있는 추측이다.
원래 격을 가진 망령들 중 정상은 없으니까. 그나마 실반이 옆에 있으니 얌전했던 거지, 따로 놔두면 뭔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보고가 끝나면 나가서 살펴보고 와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멀리서 낯선 음성이 들렸다. 족장, 이레아의 목소리.
축객령이 떨어지자 장로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 안은 개미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때 이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반."
"······예, 족장님."
갑작스러운 부름 때문일까? 실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를 발견한 페르다가 등을 두드리자, 조금 펴지긴 했지만.
동시에 이레아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 딱딱하게 부르지 않아도 된단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보고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사근사근한 어조에 실반은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이레아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맺혔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우리 손자."
"네, 할머니."
손자라는 말에 그제야 실반도 미소를 지었다.
한결 나아진 분위기와는 달리, 이로나의 표정은 수척하기 그지없었다. 삼십여 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질문에 시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페르다가 조용히 웃던 중, 이레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가 많았구먼."
자리에서 일어난 이레아가 면사포를 걷었다.
곧이어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 주름진 얼굴의 노파는 호의가 담긴 웃음과 함께 자신을 밝혔다.
"세르네크 일족의 족장, 이레아 위 세르네크라네.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페르다 이노시드입니다. 실반의 가정교사를 맡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곧 이레아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맺혔다.
"가정교사?"
"네, 선생님께는 많은 걸 배웠어요. 사령술도 알게 됐고······."
질문에 대답하려 입을 열었는데 그보다 실반의 말이 빨랐다. 실반은 웃음 띤 얼굴로 그간 무엇을 배웠는지, 또 어떤 훈련을 했는지 재잘거렸다.
얼마 후, 이레아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기운이 달라졌구나. 미약하지만 음차원의 마나가 느껴지는 걸 보니."
미약하다는 말에 페르다는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실반은 달의 눈동자로 음차원의 마나와 사령술사의 격을 가리고 있으니.
또 지금은 실반의 칼과 방패라고 할 수 있는 헤르온과 망령들도 없다. 그러니까 저런 말을 해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후후, 이리나가 있었으면 기뻐했겠어."
이어진 이레아의 중얼거림에 실반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나 세르네크. 세상을 떠난 실반의 어머니. 물론 이제는 슬픔이 많이 희석됐지만, 이렇게 가끔 이름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이를 깨달은 걸까? 이레아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손자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페르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실반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그간 함께 지냈던 일, 그리고 사령술사로 각성했을 때 등등.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밖에서 누가 들어왔다.
"······족장님."
문 앞을 지키던 전사였다.
다소 경직된 얼굴로 이레아에게 다가온 그는 뭔가를 작게 속삭였다. 잠시 후, 이레아의 얼굴도 점차 돌처럼 딱딱하게 변해갔다.
"내일 회의 때 찾아오라고 하여라. 지금은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니."
"급한 일이라 찾아온 겁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나타난 이는 훤칠한 체구를 가진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 특이한 건 남자의 한쪽 눈이 안대로 가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저 녀석은······.'
페르다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쿠르드 아르간다.
젊은 전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차기 족장 후보. 마찬가지로 후보 중 하나인 이로나의 라이벌이자, 뛰어난 실력의 검술과 사령술을 익힌 전사였다.
하지만 페르다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실반한테 사령술의 재능이 없다고 말했던 놈.'
실반의 재능을 질투해, 감히 훼방을 놨던 녀석이다.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페르다는 차갑게 웃었다. 지금은 좀 그렇고, 조만간 명분을 만들어 흠씬 두들겨줘야겠다.
페르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르드는 미소를 띤 얼굴로 족장의 앞에 섰다. 급속도로 얼어붙은 방 안의 분위기. 이레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말해보게나. 무슨 급한 일이길래 이런 늦은 시각에 날 찾아왔는지."
"요즘 젊은 전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습니다."
"불만?"
"네. 소수가 특혜를 보고 있다며 말이지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이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수라면 누굴 말하는 거지?"
"족장의 피를 이은 자를 말합니다."
이곳에서 이레아의 피를 이은 자는 둘 뿐이다. 그중에서 전사들이 불만을 가질만한 이는 오직 하나. 이레아는 언짢은 말투로 대답했다.
"내 딸을 말하는 거라면······."
"아닙니다. 이로나 세르네크는 정당한 시험을 통과한 대전사니까요."
쿠르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는 다른 인물입니다."
이로나를 제외하고 족장의 피를 이은 자.
이레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쿠르드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실반은······."
"엄연히 족장의 피를 이은 세르네크 일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음을 깨달은 탓이다. 만약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실반을 일족으로 인정치 않겠다는 소리니까.
그렇다고 동의하기도 뭐한 게, 그간 실반은 정당한 일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연히 특혜랄 것도 없었다. 인간의 피가 섞인 잡종이라 놀림 받으며 차별만 엄청나게 받았다.
그런데 뭐? 특혜를 보고 있어 불만이 많아?
이레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뻔뻔한 낯짝에 침을 내뱉어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때 쿠르드가 말을 이었다.
"또 실반은 일족 최고의 저주술사였던 이리나 세르네크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작 성년식만으로 전사의 자격을 부여하는 건, 다른 전사에 대한 차별입니다."
단순히 저것만 놓고 보면 쿠르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레아는 동의할 수 없었다. 실반이 그동안 받아온 고통과 상처를 알기에. 그녀는 이를 꽉 깨문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족장의 혈통을 타고 났으니, 거기에 마땅한 시험을 치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이건 제 의견이기도 하나, 다른 전사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시험이란 말에 이레아의 눈썹이 씰룩였다.
"설마 실반에게 대전사의 시험을 치르라고 하는 건······."
"하하, 설마요."
쿠르드가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곧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죠."
"뭐?"
"적어도 족장의 시험 정도는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자리에서 일어난 이레아가 의자를 걷어찼다. 회색빛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그녀는 노성을 내질렀다.
"지금 어디서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는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이레아.
쿠르드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이상 허튼소리를 지껄인다면 당장 안면을 후려갈길 기세였다.
"이제 막 성년을 앞둔 아이다. 그런데 족장의 시험이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안될 건 없지요. 족장님도 꽤 어린 나이에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셨습니까. 나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황금색 눈동자와 새파란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치열한 눈싸움이 이어졌으나 쉽사리 결판나지는 않았다. 이레아는 쿠르드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단호히 대답했다.
"불허한다. 실반은 예정대로 성년식 치를 터이니."
"그럼 저 또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뭐라?"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이레아는 기가 찬 듯이 그를 노려봤다. 반면 쿠르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을 이었다.
"저를 비롯한 천이백 명의 전사는 실반 아크듀트를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리입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툭-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쿠르드가 뭔가를 건넸다. 질긴 나뭇잎을 엮어 만든 책이었다. 이를 펼치기가 무섭게, 이레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이미 전사들의 절반 이상이 동의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동의서였다. 실반이 족장의 시험을 치르길 원한다는 내용의 동의서. 그중에는 일행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수호자, 칸젤의 서약도 보였다.
'그래서 아까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였나?'
이제야 칸젤의 비웃음이 이해가 갔다. 같잖은 수를 쓰는군. 페르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무렵, 쿠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로 헛소리는 아닌 셈이군요."
냉소를 머금은 그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비웃듯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족장님."
이레아는 얼굴을 구긴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저게 쿠르드 개인의 의견이었다면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허나 전사들의 절반 이상의 동의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편 페르다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조만간 족장이 바뀔 예정이긴 했지.'
원작에서는 실반의 성년식이 끝난 직후, 족장의 시험이 열렸다. 당시 족장의 시험을 치른 이들은 두 명. 이로나와 쿠르드였다. 실반은 여기에 끼지도 못했다.
그럼 이번엔 왜 이렇게 변한 걸까?
페르다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른 변화가 있었다.
'이로나 세르네크.'
눈이 번쩍 뜨였다. 원작에는 없던 것. 모든 변화의 중심에 이로나가 있었다. 세르네크의 사자로 온 것도 그렇고, 원작에선 통과하지 못했던 시험도 통과하지 않았는가.
'원작보다 성장 속도가 빨라.'
현재 쿠르드의 라이벌이라고 할만한 이는 이로나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상위 정령의 계약에 성공했다. 게다가 대전사의 시험도 통과했다면 응당 위기감을 느낄 게 분명할 터.
그럼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문제는 왜 실반을 노리느냐인데······.'
실반은 원래 족장 후보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를 공격한다 해서 이로나에게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물론 멘탈을 좀 흔들 수는 있겠지만.
허나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짓을 할 녀석은 아니다.
좀 더 커다란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야겠어.'
페르다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러던 중 시야로 문득 실반의 얼굴이 들어왔다. 고민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오랜만에 온 고향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긴 꼴이니.
하지만 그리 끙끙 앓을 필요는 없다. 손을 뻗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실반이 금세 고개를 들었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눈빛과 마주한 채,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괜찮아."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라고. 그 말처럼 살다 보면 무수한 선택의 기로가 찾아온다. 이때 갈림길에 선 제자에게 스승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언은 뭘까?
답은 간단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선택은 어디까지나 갈림길에 선 자의 몫이다. 스승으로서 할 일은 선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선택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 그렇기에 페르다는 말을 이었다.
"다만 이것만 기억해라."
흔들리는 실반의 눈빛을 보며 페르다는 웃었다.
푸근한 미소. 곧이어 진심이 담긴 한마디가 이어졌다.
"무슨 선택을 하든, 내가 네 옆에 있을 거라는 걸."
"······!"
실반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깃들었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실반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얼른 선택해주십시오. 전사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쿠르드의 건방진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이레아가 이를 부드득 갈며 노기가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쿠르드. 네놈이 정녕······."
"알겠습니다."
그때 실반이 이레아의 말을 잘랐다.
어느새 둘의 코앞까지 다가간 실반. 황금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실반은 짧게 대답했다.
"족장의 시험에 임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잠시 후, 쿠르드는 씨익 웃었고, 이레아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 Chapter 21. 시험 (1) > 끝
< Chapter 21. 시험 (2) >
"실반!"
이레아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다그쳤다.
허나 부질없는 짓이다.
실반은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
그 사이 페르다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레아가 다가오고 있던 탓도 있었지만, 돌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때문이었다.
=====
[알림]
-이전 기록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히든 퀘스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퀘스트명: [족장의 시험]
=====
'설마 또 퀘스트가 나올 줄이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메시지를 읽어내려갔다.
다만 이 정도 정보만으로는 위험한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허나 퀘스트명을 보니, 어쨌든 이번에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후, 퀘스트의 내용이 눈앞에 펼쳐졌다.
=====
[히든 퀘스트: 족장의 시험]
[완료 조건]
-응시자가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라.
-실반 아크듀트의 생존
(하나라도 미달성 시, 퀘스트는 실패한다.)
(퀘스트 실패시, 막대한 페널티가 발생하니 주의할 것.)
[보상]
-사령술사의 스킬북(랜덤)
-업적 점수 [+500]
-보너스 스탯 [+30]
=====
족장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라.
그 조건이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게 했다. 이번에도 거저먹기다.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퀘스트를 받은 페르다가 희희낙락하던 때, 멀리서 이레아의 일갈이 들려왔다.
"저딴 헛소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해결해줄 테니."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레아에게 있어 실반은 이제 막 성년식을 앞둔 어린 손자에 불과했으니. 만약 실반의 힘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저런 말은 하지 못할 텐데. 저기 구석에서 얌전히 있는 이로나처럼 말이다.
"모든 일족에게 의견을 묻고 결정하겠다. 뭐? 족장의 시험? 지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레아가 씩씩거리며 분을 토하던 그때.
별안간 실반이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결정한 일인걸요."
"뭐, 뭐라고?"
"그리고 왠지 통과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이레아를 뒤로한 채, 실반은 웃었다. 미믹을 만들었을 때, 그리고 강탈 스킬을 얻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반은 입가에 띤 미소를 깨끗하게 지웠다. 이어 쿠르드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단, 시험을 통과하면 이런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세요."
똑 부러지는 말에 쿠르드는 피식 웃었다. 같잖지도 않다는 듯이.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약속하지. 그땐 네가 우리의 족장이 되는 셈이니."
물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어진 그의 표정은 마치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쿠르드는 곧장 몸을 돌렸다. 실반이 시험에 응한다고 말한 이상, 이곳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럼 내일 당장 시험을 치를 수 있게 준비해두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방을 나섰다. 한편 이레아는 멍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이내 정신을 추슬렀다. 그러더니 대뜸 얌전히 있던 이로나를 향해 소리쳤다.
"넌 대체 왜 가만히 있던 게냐!"
난데없이 불똥이 튀자 이로나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 변화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 그 태평한 얼굴을 보자 더 열불이 터졌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족장의 시험을 치르게 생겼는데! 평소엔 실반과 관련된 일이라면 잘만 나서던 애가 이번에는 웬일로 얌전히······!"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뭐라?"
이레아의 은색 눈썹이 씰룩였다.
반면 이로나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실반은 반년 전의 실반이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더냐. 반년 사이에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졌겠어?"
"달라졌어요. 엄청나게."
이로나는 딱 잘라 말했다. 강한 신뢰가 깃든 목소리.
그러자 이레아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이로나가 어떤 아이인가? 평소 과보호에 가까울 정도로 실반을 아끼던 아이다. 그런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 이쯤 되면 황당함을 넘어 호기심이 생길 지경이다.
"그러니 그냥 지켜봐도 괜찮아요."
대답과 함께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웃는 얼굴로 페르다와 담소를 나누는 실반. 그 광경을 보자 이로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실반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테니까."
***
불청객의 방해로 회의는 금세 파했다.
또 뜬금없이 잡힌 족장의 시험을 준비해야 했기에 일찍 쉬는 편이 좋으리라. 거기까진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문제가 생겼다.
"왜 하필······."
페르다의 미간이 구겨졌다.
도시 외곽에 있는 그루터기 쉼터. 그가 당분간 머물 숙소다. 다크엘프 일족이 아닌 외부인은 모두 이곳에서 지낸다니, 여기서 지내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룸 메이트가 문제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넓군."
옆에서 들려온 쇠를 긁는 음성. 헤르온이었다.
언데드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헤르온은 페르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상대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방을 둘러보던 헤르온이 고개를 삐걱거리며 돌렸다.
대충 뭘 말하려는지는 알겠다. 왜냐면 페르다를 보기 전, 그의 시선이 천장과 벽, 창틀 일부분을 훑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페르다도 알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직후, 기묘한 마력이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대뜸 비수를 뽑아 창틀로 던졌다. 정확히 말하면 창틀의 틈새에 있는 조그마한 구슬에게로.
콰득-!
산산조각이 나는 구슬을 보며 페르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시자의 눈.'
술자에게 전방 범위의 풍경을 보여주는 마법 도구. 일종의 감시 카메라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누가 설치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리라. 필시 쿠르드의 짓이겠지.
'패도 될 이유가 늘었군.'
주먹을 꽉 움켜쥐며 페르다는 비수를 회수했다.
남은 건 천장에 세 개, 벽에 두 개. 참 많이도 설치해뒀다. 방 안의 풍경을 관찰해서 대체 무슨 정보를 얻겠다고. 그 행동을 지켜보던 헤르온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부숴도 되는 건가?"
"당연하지. 자는 모습을 누가 관찰한다고 생각해봐. 기분 나쁘지 않아?"
"난 상관없다만."
"그럼 네 딸을 관찰한다고 생각하면?"
침대에 놓인 토끼 인형, 라디나를 가리키자 헤르온의 안광이 일순간 번뜩였다. 곧이어 헤르온은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펑펑! 펑! 퍼엉!
마력의 화살이 일제히 주시자의 눈을 관통했다.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구슬 조각. 시끄러운 소리 때문일까? 귀를 쫑긋거린 라디나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웅, 아빠. 여긴 어디야?]
"다크엘프족이 사는 마을이란다."
[다크엘프?]
라디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헤르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침대에 앉아 라디나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줬다.
[그렇구나. 오늘도 일하러 온 거예요?]
"음, 일까진 아니지만 비슷하지."
헤르온의 대답과 함께, 페르다의 시선이 라디나에게 향했다.
라디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떴다. 그 와중에 알게 된 게 있는데, 바로 라디나가 가진 대부분의 기억이 깔끔하게 날아갔다는 사실이다.
그럴 만도 했다. 고작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의 영혼이 백여 년 넘게 상자에 갇혀 있던 셈이니. 아비를 기억하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오히려 다행이지.'
만약 죽기 전의 일을 모조리 기억했다면 진즉에 미쳤으리라. 눈앞에서 어미가 죽고, 사막까지 끌려가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니.
기억을 잃은 게 차라리 나았다.
'좀 기묘한 광경이긴 하지만······.'
가면을 쓴 언데드와 토끼 인형.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조합이다.
허나 대화만 듣고 보면 단란한 부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든 만족해하는 것 같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때 라디나가 돌연 눈을 비볐다.
[우움, 이상해. 또 졸려요. 왜 이러지?]
"괜찮아. 얼마든지 자도 돼."
[웅, 안녕히 주무세여······.]
인사를 끝으로 라디나는 침대 위로 픽 쓰러졌다.
이불을 살포시 덮어준 뒤, 헤르온은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찾는 듯이 부리부리한 눈빛이다.
"괜찮아. 이제 없으니까."
주시자의 눈을 찾는 거겠지. 비록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딸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처럼 보였다. 페르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잠깐 볼일 좀 보고 오마."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낮에 실반을 모욕했던 다크엘프 무리. 그들을 떠올리자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시는 잡종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줄 생각이었다.
이어 문을 열려던 찰나.
"왕을 모욕한 죄인을 벌하러 가는가?"
돌연 헤르론의 목소리가 발을 잡았다. 저 녀석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을 터.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진 말에 발이 멈췄다.
"그게 목적이라면 가지 않아도 된다."
"뭐?"
"이미 충분한 지옥을 맛보여주고 왔으니."
활활 타오르는 황금색 안광.
헤르온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이를 보자 역으로 불안감이 들었다. 페르다는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 방금 지옥을 맛보여줬다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
계속 추궁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저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답만이 돌아올 뿐. 결국 다시 문을 닫았다. 이미 뭔가 저지른 것처럼 보이니 괜히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겠지.
페르다는 침대에 누워 시스템창을 띄웠다. 내일 있을 족장이 시험도 그렇고, 또 세르네크 숲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바쁜 밤이 지나고.
다음날, 시험의 아침이 밝았다.
***
"동쪽 외곽에 언데드가 나타났었다고?"
마흔일곱 번째 전사, 위그 마리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올라온 뜬금없는 보고 탓이었다. 그러자 부관, 우르던이 설명을 보탰다.
"예, 간밤에 들린 보고에 의하면 그렇다고 합니다."
"이제야 소식이 들린 걸 보면 잘 막았나 보군. 피해는 얼마나 되지?"
"그게······."
돌연 머뭇거리는 우르던.
그 태도가 보기 싫었음일까? 위그는 눈썹을 씰룩였다.
"빨리 말해. 가뜩이나 약속에 늦었으니까."
오늘은 일정이 있었다. 바로 족장의 시험을 참관하는 것. 원래대로라면 무척이나 영예로운 일이다. 하지만 위그의 얼굴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왜냐면 이번 족장의 시험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후보자가 실반 아크듀트라고? 그 반쪽이?'
듣자마자 기가 찼다. 그리고 시험을 주최한 이가 쿠르드라는 걸 듣고 확신했다. 이번 시험은 정치적인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 자연스럽게 흥미가 식을 수밖에.
'좀 늦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첫 번째 시험에서 뻗을 테니까. 어쩌면 가지 않아도 무방할지 모른다. 그만큼 위그는 이번 족장의 시험에 흥미가 없었다.
그 무렵, 우르던의 보고가 이어졌다.
"다, 다섯 명입니다."
"뭐?"
"피해자는 총 다섯 명. 모두 네자릿수 이하의 하급 전사들입니다.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악령을 봤다거나, 최상위 언데드가 그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다고 합니다만······."
보고를 이어나가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동시에 위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후, 그는 기가 찬 얼굴로 물었다.
"······우르던. 이게 말이 된다고 보나?"
이제는 황당함을 넘어 실소까지 나왔다. 고작 '이깟 보고를 듣자고 시간을 허비했나?'라는 생각에 화가 치솟았다.
"최상위 언데드? 그런 게 나왔으면 족장의 시험이 대수겠어? 지금쯤 이 부근은 전장이 되고도 남았을 거다! 단체로 환각제라도 빤 거야, 뭐야?"
"아마도 헛것을 봤나 봅니다. 제가 알아서 조치하겠습니다."
우르던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허나 구겨진 얼굴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위그는 이내 딱딱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네자릿수의 전사면 이제 막 전사가 된 녀석들이겠군."
"마, 맞습니다."
"모두 견습으로 강등시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명색이 경비대란 녀석들이 그리 해이해서야 되겠나?"
"······예, 알겠습니다."
우르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섯 명의 전사들에게 비보(悲報)를 전해야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위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럼 다녀올 테니, 특별한 일이 있다면 부르도록."
수고하라는 듯이 어깨를 두드린 뒤, 위그는 방을 나섰다.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 시험 참관에 무려 한 시간이나 늦었으나 걱정은 없었다.
"쯧! 쿠르드도 괜한 수작을 부리는군.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이로나와 맞붙으면 되는 것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연신 구시렁거리는 위그.
그때 뒤에서 다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십여 명의 다크엘프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몇은 나무를 타고, 다른 몇몇은 숲길을 이용해 달렸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하나.
족장의 시험이 치러지는 중앙 광장이었다.
"뭐지?"
갑작스러운 광경에 위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던 중 그의 귀가 움찔거렸다. 어느 젊은 전사들의 대화가 들려온 탓이었다.
"반쪽이가 바르힘을 꺾었대!"
"뭐? 진짜?"
"어떻게 이긴 거야? 바르힘은 세 자릿수 전사잖아!"
그 소식에 위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들려온 말처럼 바르힘은 그루터기 일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다. 또 지금은 비록 세 자릿수에 드는 전사지만, 향후 3년 내로 두 자릿수 안에 들만한 실력자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그런 전사를 상대로 반쪽이, 실반 아크듀트가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차마 믿기 힘든 소식에 몸을 부르르 떨 무렵, 다시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듣기만 한 거라 잘 몰라."
"야, 잡담 그만하고 얼른 가자."
"소식 듣고 다들 구경하러 오고 있다니까!"
그 대화를 끝으로 전사들은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자 위그도 더 이상 느긋하게 걸을 수 없었다. 밀려드는 호기심에 광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